온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이 골고루 아팠다.
뺨의 부기는 그나마 가라앉아서 눈을 뜨는데 지장이 없었다.
억지로 치켜뜨고 주위를 살펴봐도 똑 같은 모습이다.
천장엔 백열등 하나가 대롱대롱 달려 있고 녹슨 쇠창살이 있는 작은 창은 천장과 맞닿은 곳에 옹색하게 붙어있다.
외부의 빛을 받아들이는 게 아닌 공기순환 역할인 듯싶었다.
이 방에 감금된 지 삼일이 지났지만 멀건 스프와 딱딱한 빵만 던져 놓고는 아무런 조치가 없다.
끌고 와서는 당장 죽일 듯이 때리고 난리치더니 다음날부터는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한국산 무인경비시스템을 팔겠다고 온 세일즈맨에 불과한데 끌려와서 얻어터진 이유를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영호를 권총으로 위협해서 다짜고짜 끌고 오더니 몽둥이질부터 해대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영어로 아무리 항변을 해도 먹히지가 않았다.
이들의 행동에서 자신이 단단히 오해 받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것인지 눈을 가리고 승용차에 태워 몇 시간을 끌고 다녔다.
처음에는 따귀를 때리며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더니 나중에는 굵은 고무 몽둥이로 허벅지며 어깨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없이 때리기부터 하는데 아픈 것은 고사하고 기가 질리게 만드는 매질이었다.
이들이 아르메니아 정규군이 아니란 건 매질할 때부터 알았다.
때리는 것이 일관성이 없기도 하지만, 겅중거리기만 했지 효과도 없는 매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엉성한 집단이라는 확신을 얻었지만 영호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자칫 저들의 존재를 아는 척했다가 자신들이 노출되었다고 오인하는 순간에는 영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저들이 두드려 팰 정도의 적대적 인물이 아니라는 신뢰를 주어야 하는데 도무지 대화가 안 통했다.
3-4명이 교대로 들락거렸지만 영어를 아는 놈은 한 명도 없는지 애초부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짧은 러시아 말도 안 통할 때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러시아 말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첫날의 요란함이 사라지고 난 다음날부터 영호는 저들의 행동에서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보름동안 체류하며 통상부서며 치안청을 들락거리는 영호를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로 막 넘어온 자신을 납치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선조 중에 서양인의 피가 섞여 있었는지는 몰라도 영호의 집안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서구적인 외모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제르바이잔 사람으로 오인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막상 납치하고 나서 여권을 확인해 봤을 터.
대한민국 국적인 27세의 이영호라는 게 밝혀지자 난감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들은 아제르바이잔과 분쟁 중인 아르메니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 쪽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다.
풀려날 것 같다는 일말의 기대를 하면서도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항의 받을 걸 염려한 나머지 이상한 짓을 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영호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친구와 작은 오퍼상을 하고 있다.
영문학과 출신이라 영어에는 자신도 있었고, 동유럽 쪽에 한국보안장비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시장을 뚫어보려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인 조상천은 한사코 분쟁지역이라 안된다고 말렸지만 영호는 그런 곳일수록 돈이 된다고 우겨서 떠나온 것이다.
서구적인 자신의 외모가 잘 먹힐 거라며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영문도 모르고 실컷 두드려 맞으며 감금되어 있는 웃기는 상황이 되었다.
말이 웃긴다는 것이지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르메니아어나 아제르바이잔어를 전혀 모르는 영호로서도 환장할 노릇이지만, 자신을 납치할 정도로 조직화된 사람들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도 이해 못할 노릇이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도 통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라면 러시아어가 통해야 정상인 것이다.
공포심을 조성하여 뭔가 자백 받으려는 계산인 것 같은데 뭘 알아야 자백하고 말고 할 게 아닌가.
입안이 터져서 빵을 먹을 때는 욱신거렸으나 억지로 우겨넣었다.
일단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허벅지 바깥쪽을 고무몽둥이로 맞아서 일어서서 걷기에는 불편했지만 억지로 걸음을 떼는 연습을 했다.
평소에 체력관리를 해둔 터라 탄탄한 체격이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어서 온몸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이 어이 없어서 입에서 욕설만 튀어 나왔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고 권총으로 위협해서 미처 대처를 못 했을 뿐, 영호는 해군 특수전부대 출신이라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렇게 어이없게 당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쩌랴, 이미 꼼짝도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
며칠째 깎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하다.
식사시간이 되자 스프와 빵을 들고 온 덩치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이봐. 담배 없어?”
덩치가 멀뚱히 쳐다보더니 바지주머니에서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든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던 놈이 영호의 말귀를 바로 알아듣는 게 묘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상황이 바뀌었다는 징조다.
막연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대범한 모습을 보일 때였다.
담배는 미국산이고 라이터는 한국산 불티나다.
짜증나게도 라이터는 영호 것이다.
흡연자들이 라이터에 얼마나 집착하는데 감히 그걸 손 대?
“.......후.”
며칠만의 담배라서 한 모금 빨았더니 머리가 흔들렸다.
필터까지 꼼꼼히 빨아대자 담배 한가치를 더 주는 아량을 베푼다.
맞을 때 눈을 가렸지만. 영호를 모질게 때린 놈이란 건 알고 있었다.
솥뚜껑 같은 크기의 손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나 러시아어 하는 사람 없냐?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설명해봐? 난 대한민국 국적자다.”
말을 뱉고 나니까 괜히 울컥했다.
울컥한 자신에게 화가 나서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야! 이 새끼야. 벙어리냐?”
“..........”
의자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자 한 발짝 물러나던 덩치가 손으로 영호를 제지한다.
영호의 키도 185cm인데 덩치는 머리 한통은 더 컸다.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
엄지를 치켜세우고 캡틴을 연발했다.
잠시 영호를 내려다보던 덩치는 방을 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기다려.”
"아니 이 새끼가 영어가 되면서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었네. 야! 이 자식아.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이제껏 무시한 거야?”
덩치는 대답도 않고 철문을 닫아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발음이 시원치 않지만 영어가 통한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건데 그게 더 찜찜했다.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파악하고도 풀어주지 않고 있다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살인멸구?’
영호는 자신이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에 빠져 들었다.
잘못된 정보로 납치해온 영호가 또 다른 말썽의 소지가 되는 것에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탈출하자. 이대로 있다가는 개죽음 당한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탈출도구를 찾으려는 거다.
의자와 책상과 천장의 백열등이 다였다.
아니다, 나무식판과 숟가락이 더 있었다.
탈출을 방지하려고 신발까지 벗겨가서 맨발인데 문을 나선다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한 상태이지만 나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하나 골똘히 생각했다.
덩치 한 명 정도는 어찌 처리하겠는데 문을 나서고 나면 대책이 없다.
몇 시간을 승용차에 구겨져서 실려 온 터라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이곳은 해발표고 1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인 나고르노-카라바흐다.
덜컥 나갔는데 만약 산속이라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조직이라면 이 나라에서 영호가 어디를 가던 따라붙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마냥 감금당하고 있으면서 이들이 우호적으로 바뀌길 기대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에 몸을 풀어보려고 했다.
체력을 회복하는 게 관건인데 멀건 야채스프와 딱딱한 빵만 먹어서인지 영 힘이 없다.
팔굽혀펴기를 해보았다.
잠시의 움직임에도 옆구리며 등짝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억지로 몇 회하다가 포기했다.
겨우 몸 좀 풀었다고 해서 이들을 어쩌지 못한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총과 칼이 있는 조직과 맨몸인 영호가 상대가 될 턱이 없기에.
자신을 곱게 보내주면 절대로 신고를 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부각시켜야 하는데 그 잘 돌아가던 머리가 멈춰버렸는지 아무 대책도 못 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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