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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밑엔 세계가 있다 1화

2016.11.16 조회 1,073 추천 19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땅은 아주 파랗고 제초 같은 훌륭한 시스템은 어딘가의 개나 줘 버린 건지. 애초에 여기가 잔디밭인지 공터인지 모르게 푹신한 초록색의 이곳. 게다가 난 여기 누워서 한다는 짓이 낮잠이다.
 
 “하아······.”
 
 나는 주인공이다.
 
 어디의 주인공이냐 하면 이 빌어먹을 게임팩의 주인공. 그것도 RPG 게임의, 불행히도 방구석 어딘가에서 처박혀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철 지난 그것이다.
 
 명작 게임인 것은 확실하다. 한때 ‘올해의 게임’ 분야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으며, 발매 직후 몇십만 장 이상이 팔렸다며 플레이어 형씨가 멀티 플레이 채팅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작이면 뭐 하나? 결국 올 클리어를 하고 나면 책꽂이의 책처럼 아주 가지런히 꽂혀 있거나 침대 밑이나 장롱 밑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대청소 날이나 이삿짐을 정리할 때 뿅! 하고 나오지. 그리고 플레이어 형씨는 아마 이렇게 말할 거다.
 
 ‘으잉? 장롱이 이걸? 여기에 게임팩이?’
 
 라고 하겠지. 나쁜 개자식.
 
 아무튼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이전에, 난 일개 게임 속 주인공에 불과하니까. 바깥세상의 정보라고는 멀티 플레이의 채팅에서 훔쳐들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이 RPG 게임 세상에서는 HP라던가. MP라던가. 세이브라던가. 그런 개념을 알고 있는 ‘데이터 덩어리’는 나와 몇몇 NPC들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용사로 설정되어 있는 나, 그리고 용사가 밟을 필수 코스에 있는, ‘루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NPC들 말이다.
 
 “저기 봐! 케인 형이다!”
 
 “또 잔디밭에 누워서 자고 있어!”
 
 시끄러운 꼬맹이들. 공터에서 노는 건 알겠지만 가끔씩 얼굴로 공이 날아온다. 내 레벨이 얼만데 저런 공에나 얻어맞고 있다니······ 진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레벨 0짜리 NPC들이니까. 이 게임엔 참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흘러간다. 예전 닌텐······ 쿨럭! 어디 모 회사에서 쓰던 시스템처럼.
 
 게임은 멈춰 있고 플레이 타임은 기록되지 않지만 게임 안의 시간은 흐른다. 농작물이 자라고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며 장로님이 돌아가시거나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등, 게임을 참 잘 만들었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벤트의 성격을 띠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서 멈춰 있는 건 뭐?
 
 그렇다. 바로 나다.
 
 케인이라는 인간. 나만 멈춰 있다. 내가 설정상 21세에 모험을 떠났고······ 기록된 시간 외로 흐른 시간이 꽤 된다. 아마 플레이어 형씨가 게임팩을 장롱 밑에 처박은 지 몇 년은 더 지난 것 같다. 파릇파릇한 소년이었던 플레이어 형씨도 이젠 공부 때문에 힘들 나이일 것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그 긴 시간이 지나서 게임 속의 코흘리개가 학교에서 반장이 될 나이가 되었는데도 수염 한 가닥조차 안 났다.
 
 빌어먹을! 난 안 늙는다. 나만 안 늙는다. 이게 참 좋아 보이겠지만 생각해 봐라. 이 게임팩이 수십 년 뒤에 발견되고, 게임 박물관 같은 엄한 곳에 전시라도 되었다가는······ 오 맙소사. 난 아마 평생 여기서 아무것도 못하고 21살짜리 용사 나부랭이로 있어야 하는 거다.
 
 
 <Data 2>
 Name: 케인
 PlayTime: 186. 21. 33
 
 
 그렇다. 플레이어 형씨는 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처음 플레이했었을 당시에는 내가 자주 나자빠졌고, 미숙한 컨트롤을 구사하는 어린아이 같은 플레이였지만 근성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마지막 11번째 엔딩은 스피드 런(Speed Run) 방식으로 엄청나게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공략해 나갔는데. 절대로 처음의 그 모습이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엔딩 11번.
 그중 진 엔딩 4번.
 업적 999개 모두 달성.
 용사 환생 4번.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186시간이나 했으니까 그럴 법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난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별다른 자극 없이 평범하게. 아침이 되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나가서 마을 어르신들께 문안 인사를 드린 뒤 꼬맹이들이 있는 공터에 가서 느긋하게 쭉 뻗어서 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먹고 잔다.
 
 아, 말 안 했나? 난 살 같은 거 안 찐다. 부럽지? 부러워 죽겠지? 엿 먹어라. 원래는 안 부러워야 정상이다. 반복, 그리고 반복적인 생활. 근데 공터가 진짜 좋은 게, 잔디가, 와우······ 정말 끝내준다. 아주 푹신하다. 누우면 침대보다 잠 잘 온다. 내 첫 마왕성 가던 숲길에서 노숙했던 그 두근거림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난 겨울이 싫다. 더럽게 추워서 공터에서 못 잔다. 오늘 같은 적당한 봄 날씨가 딱 좋을 때다.
 
 그래, 뭐. 내 일상이 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 말은 바로 그거다. 이럴 때 하면 딱 좋은 말. 잠에 빠져든다.
 
 “날씨 좋다.”
 
 원래 용사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 한다. 신들의 숭고한 의식을 거쳐 선택된 영혼이 지상에 다시 태어난 것. 그러니까 ‘혹시나 세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용사가 해결해 줄 거야.’라고 하는,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그런데 이걸 용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난 용사다. 그리고 용사의 영혼을 가졌으니 마왕이 좋은 일을 꾸미든 사악한 일을 꾸미든 가서 잡아 족쳐야 할 의무가 있다. 마왕의 가정이 무너지고 마계 사회가 무너지고 마계가 황폐화되게 만드는 최종 인간 병기가 바로 나란 말이다.
 
 오죽하면 용사는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태어난 것에 불과하다며, 만약 마왕이 없다면······ 그러니까, 용사가 마왕을 죽인 뒤엔 용사는 부와 명예를 얻고 한평생을 멋지게 살다가 죽는다고는 하지만 마왕을 죽임과 동시에 용사는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역설도 있다.
 
 나도 마왕을 죽여 봤다. 무려 열한 번이나. 시스템에 의해 각각 얼굴과 사용하는 스킬이 다른 마왕이었지만 11명을 죽이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운 마왕은 없다는 이유로 다시 첫 번째 마왕을 죽이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곳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형씨는 정확히 열한 번, 마왕을 쓰러뜨렸다.
 
 아무튼 뭐든지 간에, 용사란 그런 것이다.
 
 올해 스물 하나. 내년도 스물 하나. 정직하게 말하면 올해로 내 나이는 서른 가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21세라는 설정을 가진 케인이 4번의 환생을 거치며 11번 세상을 구하고 결과적으로 장롱에 처박힐 때까지 모두 합해 몇 년이고 지났을 테니까.
 
 “그런데 장롱인가?”
 
 가끔 의문이 든다. 왜 장롱일까. 어쩌면 게임팩이 침대 밑에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면 책장에 잘 정리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친구한테 빌려줬는데 이사를 가 버려서 친구 집 장롱 밑······ 이 아니라. 아무튼 꼭 플레이어 형씨 집안의 장롱 밑에 처박혀 있는지조차도 미지수라는 말이다.
 
 본래 장롱 밑이란 것이 도라X몽의 고차원 주머니와도 같은, 다른 예로는 모 게임의 리부트에서 한 번 나왔다던 용의 삼각지대와도 같은 그런 미지의 공간이라······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나 심심할 때 이 장롱이란 녀석을 살짝 밀어서 옮겨보면 엄청난 양의 먼지 덩어리들과 합체한 물건들이 잔뜩 나오게 된다.
 
 여담이지만 저번에 장롱 밑에서 3년 전에 잃어버렸던 속옷을 찾았는데 다시 입기엔 상태가 아주 별로인 데다 구멍도 나 있어서 뒷마당에 가서 묻어버렸다.
 
 “케인 형.”
 
 “응?”
 
 동네 꼬맹이가 내 여가 시간에 끼어든다. 여가라고 해 봤자 종일 공터 잔디에 누워서 멍이나 때리면서 잡생각을 하는 게 전부지만 말이다.
 
 “그······ 그그······ 있잖아! 얼음!”
 
 “아아, 마법 말이야? 근데 왜?”
 
 “우리가 얼음이 좀 필요한데······.”
 
 “내가 말했잖아. 아이스는 수준 높은! 마법이라서 너희들이 약초 같은 걸 캐 와야 형이 겨우겨우 써줄 수 있는 대단한 거라고.”
 
 사기 쳐서 미안. 그거 사실 내 기본 스킬이야. 적어도 레벨 1땐 자주 애용해서 썼다. 짜증나는 슬라임들이 꽁꽁 얼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얼마나 통쾌하던지! 그래. 그것도 참 먼 옛날 일이지. 지금은 맨손으로 마법만 써도 발록 대가리를 후려친다.
 
 “자, 약초.”
 
 “엉?”
 
 「평범한 약초를 손에 넣었다!」
 
 
 <평범한 약초>
 그냥 씹으면 엄청 쓰다.
 HP를 10 회복시켜 준다.
 
 
 뭐냐. 이 흔하디흔한 약초는? HP를 10 회복시켜주는 가장 기초적인 약초가 아닌가? 필드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씩 보이니까 보일 때마다 전부 끌어 모아서 나중에 고급 포션을 만들곤 했었던 그것이다.
 
 그나저나. 공터에도 저런 약초 같은 게 있었구나. 신기함 반 놀라움 반이다. 유감스럽게도 HP포션이긴 하지만, MP가 조금 빠져나간다고 뭐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 노력이면 얼음 하나 정도는 적선해줘도 좋지 않을까.
 
 “다친다. 멀리 떨어져.”
 
 나의 아이스로 말할 것 같으면. 스킬 레벨 10으로 최대치인 8에서 2씩이나 오버해서 숙련한 것이다. 이른바 사상 최강의 아이스란 말이다. 대형 몬스터들은 그렇다 쳐도 가고일까지는 이거 한 방에 깔끔하게 뻗는다.
 
 “근데 진짜 얼음은 어디다 쓰게?”
 
 “음······ 주스에 띄워 마시려고?”
 
 미친 녀석들. 그거 하나 때문에 이 공터를 이 잡듯 뒤져서 약초 아닌 약초를 찾아온 거냐? 진짜 기특한 녀석들일세. 나중에 크면 좋은 파티의 딜러가 될 만큼이나 인내심이 대단하고 근성 있는 녀석들이야. 내가 기특해서 한 번 해 준다.
 
 “아이스 필드.”
 
 오랜만에 MP가 빠지는 기분이 들며 손끝에서부터 마법이 발현된다. 그런데 뭐랄까······ 너무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보다 화력 조절하기가 어렵다. 진짜 잘 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 주변이 싹 다 날아갈 테니까.
 
 「아이스 필드」
 
 어? 화력 조절이 안 됐다.
 
 “아, 제기랄!”
 
 공터에 얼음이 좍 깔렸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공터 한가운데에 삐죽 생성된 거대한 빙하(?)에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 잔디가 모두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제 차가워서 못 눕게 되었다. 내 자리 남겨놓고 구석에나 조금 뿌리려고 했는데······ 마법도 연습이나 훈련을 꾸준히 하는 건가 보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
 
 동네 아줌마가 공터의 상황을 목격했다.
 
 “엄마, 엄마! 케인 형이 만들어줬어!”
 
 “응? 그건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란다. 맨날 놀고먹기만 하는 그 녀석이 어떻게 이런 걸 준비한대니? 분명 발견을 먼저 해 놓고 자기 작품이라고 우기는 거니까 믿지 마라. 그리고 그런 백수건달이랑 어울리지 마!”
 
 아 젠장, 갑자기 다시 세계를 구하고 싶어진다. 백수건달이라고 부르지 말란 말이다. 난 단지 플레이어 형씨가 없을 뿐이지 내가 진짜 찌질해서 이런 백수건달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용사가 아니라도 충분히 다른 부업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게 있잖아, 혹시나 플레이어 형씨가 심심해서 다시 게임을 켰는데 마지막 저장 지점이 아니라 어디 용병 길드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 봐봐. 그러면 형씨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어?
 
 “짜증 나.”
 
 난 집으로 돌아왔다.
 
 [헤이! 세이! 하아이잇!]
 
 책상의 실험관 안에서 호문쿨루스가 저 쇼를 하고 있다. 나보다 아는 건 많은데 좀 병이 있어서······ 그, 쉽게 말하면 틱 비슷한 게 있나 봐. 몸을 움직이진 않지만 습관적으로 소리를 꽤액꽤액 질러댄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공터까지 나가서 자는 거라고. 그렇지! 그런 셈이지. 암 그렇고말고.
 
 근데 오늘부로 공터는 그냥 망했다. 그러니까 집에서 자야 된다. 난 하루 20시간씩 잘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오늘도 잠으로 때우려고 한다.
 플레이어 형씨가 이 세계를 장롱 밑에 처박은 지도 어연 몇 년째다. 슬슬 기다리는 것도 지쳐 간다.
 
 처음 한두 해 정도는 나도 착실히 기다렸다. 매일 마법을 연습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난 숲 속에서 은거하길 포기했다.
 반복적인 훈련. 스킬 레벨도 최대인데다 신체 스펙도 최대. 모든 것이 마스터 레벨인 나에게 진전이란 없었다. 한계 돌파? 불가능하다. 그게 게임의 시스템상의 한계라면, 그 한계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글러먹은 케인이 만들어졌다. 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서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먹고, 낮잠 자고······ 그런 인생을 반복하고 있는. 아무런 발전도, 퇴보조차도 없는 연옥과 같은 세상에서 잠으로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잇! 케이잇! 바이이이잇!]
 
 “그래, 잘 자.”
 
 [카이잇! 케잇! 바이이이잇!]
 
 “아 좀······.”
 
 난 오늘도, 왠지 플레이어 형씨가 다시 컨트롤러를 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의 나는 언제나 전장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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