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
“드디어······!”
휘황찬란한 빛을 머금은 공간에 들어선 노인이 격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직 복수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상대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무력, 금력, 권력, 세력.
노인의 힘으로는 어느 하나 발끝을 바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직 이것 하나에만 매달렸다.
평생을.
이곳은 전설의 공간이었다.
비홍서고(秘虹書庫).
신의 힘이 깃들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전설의 서고였다.
이곳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또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름답게 사방에서 무지갯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곱 가지 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책들이 빽빽하게 채워진 책장이 좌우는 물론이고 위아래로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서고의 빛이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모조리 노인의 머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노인은 삼라만상이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걸 느끼고 경악했다.
이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라만상을 받아들이면 자아가 사라진다. 그건 곧 복수심조차 사라진다는 뜻이다.
삼라만상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이후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대로 기다리면 자연과 하나가 될 것이다. 육신이 연기처럼 흩어져 세상과 동화될 것이다.
다른 의미의 죽음이었다.
노인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지독한 복수심을 붙잡았다.
비홍서고는 그 복수심을 이뤄줄 수 있는 방법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노인의 눈에 잠든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 청년이 노인의 숙원을 이뤄줄 인재라는 건 확실했다.
순간, 청년이 눈을 떴다.
청년에게 이곳이 보일 리가 없지만 노인은 마치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노인은 청년을 향해 자신이 얻은 모든 걸 냅다 던졌다.
청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자신이 던진 것이 청년의 미간으로 쑥 들어간 것을 확인한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흩어졌다.
비홍서고의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 금검장의 둘째 공자
서서히 눈을 떴다. 항상 보던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꿈인가?”
분명히 어떤 노인이 자신에게 뭔가를 휙 던졌다. 노인의 눈에서 이글거리던 감정이 뇌리에 확 틀어박힌 듯했다.
그건 불같은 복수심이었다.
한유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어 남은 잠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번엔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기루에서 술을 마셨다. 지독한 숙취가 한유현을 괴롭혔다.
“끄응. 죽겠군.”
하지만 지금 이 집안에서 한유현이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유현은 이번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모든 걸 걸었다.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가문에서 지금처럼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짓밟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벌써 보름 째 기루를 들락거리며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렇게 애쓴 덕분에 슬슬 그들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며칠만 더 애쓰면 아마 황룡상단의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한유현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침상에서 벗어나려던 한유현의 눈앞에 갑자기 뭔가가 확 하고 떠올랐다.
한유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게 뭐지?”
투명한 얼음판처럼 생긴 것이 눈앞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은 한유현의 시선에 따라 움직였다. 시선이 어딜 향하든 무조건 볼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한유현은 자신이 뭘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러는 바람에 더 놀랐다. 눈을 비비고 있는데도 그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눈을 감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어설픈 존재가 아니었다. 마치 뇌리에 직접 그것을 새겨 넣은 것 같았다.
한유현은 멍하니 그 판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천뇌심법(天腦心法).]
이름만 읽어도 보통 심법이 아닐 것 같았다. 그 이름 아래에 심법의 구결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놀라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심법이든 무공이든 구결만으로 익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뛰어난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찾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한데 이 투명한 판에 적힌 구결은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뛰어난 스승이 옆에서 도와주는 것처럼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암기도 쉬웠다. 한유현이 그렇게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한 번 읽은 것만으로 모든 구결을 암기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한유현은 마치 천뇌심법을 몇 년 동안 꾸준히 익혀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즉시 구결에 따라 심법을 운용해 봤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더불어 숙취도 말끔히 사라졌다.
불안감을 비롯한 부정적 감정도 사라졌다. 마음이 안정되고 머리가 맑아져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이런 상쾌한 아침을 맞아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천뇌심법을 한 차례 운용하고 나자, 거짓말처럼 투명한 창이 사라져 버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하지만 한유현은 꿈에 나왔던 그 노인과 지금 이 현상이 관계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투명한 판이 다시 나타났다.
[천뇌심법-성취도 삼성(三成).]
“이건 또 뭐지? 설마 내가 익힌 천뇌심법의 성취도를 보여준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하지만 저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구결을 암기하고 이해한 다음 딱 한 번 심법을 운용했을 뿐인데 삼성이라니.
아무리 천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유현은 묘하게 저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이대로 다니기엔 너무 불편한데······.”
아무리 투명해서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눈앞에 저런 것이 둥둥 떠다니면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판이 사라져 버렸다.
한유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시 판을 불러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다시 판이 나타났다.
예전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제법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유현은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것 역시 천뇌심법의 영향이었다.
천뇌심법은 머리를 맑게 유지해주고 평정심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공능이 있었다.
또한 오래 익히면 익힐수록 머리는 물론이고 잠재력까지 성장하는 정말 굉장한 심법이었다.
“그럼······ 오랜만에 활기찬 하루를 시작해 볼까?”
한유현은 벌떡 일어나 침상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부신 햇살이 한유현의 몸을 비췄다.
한유현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한껏 고무되었다.
그 기분을 담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
그날의 시작은 한유현의 바람이나 기분과는 달리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거처에서 나가자마자 마주친 사람이 한유현의 형인 한세찬이었다.
한세찬은 한유현과 달리 가문의 기대를 한껏 받는 존재였다.
평소였다면 한유현은 한세찬을 발견하자마자 표정부터 굳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유현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천뇌심법의 영향인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한세찬을 비롯해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무사들과 수행원들을 슥 둘러봤다.
한세찬은 평소와 달라진 한유현의 태도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빙긋 웃으며 한유현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제법 일찍 일어났구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만 해라. 보는 눈도 많으니 말이다.”
“그러죠.”
한유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세찬이 한유현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 저렇게 훈계조로 말한다고 해서 발끈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요즘 쓸데없는 데 돈과 심력을 낭비한다는 얘기가 종종 들리더구나.”
한세찬은 한유현의 빈틈을 그렇게 쿡 찔렀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한유현을 도발하고 흔들어 그의 못난 모습을 부각시키곤 했다.
물론 거기에 곧잘 넘어가는 한유현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유현은 평소 한세찬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신중하게 고민해 보죠. 충고 고맙습니다.”
한유현의 의연하면서도 가벼운 대응에 한세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지? 설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가?’
한세찬의 입장에서도 만일 한유현이 황룡상단과의 계약을 따내면 좋을 게 없었다.
향후 금검장을 아무 잡음 없이 이어받는 데 문제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 그럼 일 보거라. 나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구나.”
한세찬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일단 황룡상단과의 계약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한유현은 한세찬이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가만치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그동안 대체 왜 그렇게 병신같이 행동한 거지?”
예전의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 어리고 유치한 반응부터 해서 그 뒤로 이어질 파급효과까지 생각하니 앞으로 자다가 발차기를 수백 번은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요동치던 마음도 금세 가라앉았다. 지난 일을 가지고 이러고 있어 봐야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자신의 목표인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긴 한데······.”
지난 보름 동안의 일이 뇌리에 새겨지듯 떠올랐다. 한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니 돈과 시간만 낭비한 꼴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야.”
그야말로 괜한 짓을 한 셈이었다.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이 고작 술 몇 번 대접했다고 가문의 중요한 일에 개입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유현은 황룡상단과의 계약을 성사시킬 방법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차분히 생각해보자.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부터는 무공에도 신경을 쓸 생각이었다.
어쨌든 자신은 무가의 자식이었다. 그리고 무인은 일단 무공으로 말해야 하는 법이다.
그 순간 눈앞에 다시 투명한 판이 떠올랐다.
[천뇌심법을 오성(五成) 이상 익혀라. - 오성은 천뇌심법의 첫 번째 벽. 그것을 넘어서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무완수보상 - 기초진법입문서]
한유현은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이건 또······ 뭐지?”
하지만 문득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뇌심법은 한유현이 보기에 정말 굉장한 수준의 심법이었다. 오늘만 해도 천뇌심법이 아니었다면 또 무슨 못난 꼴을 보였을지 모른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상당히 끌렸다.
그리고 보상으로 준다는 기초진법입문서도 흥미가 일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천뇌심법을 익히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했으니 진법 쪽 공부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해볼까?”
한유현은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천뇌심법을 차분히 익힐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거기였으니까.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곳이 바로 한유현의 거처였다.
그렇게 방에 틀어박힌 한유현은 밥을 먹을 때만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천뇌심법에 쏟아 부었다.
애당초 목표로 한 시간은 닷새였다.
그때부터 황룡상단이 계약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정보는 지난 보름 동안의 술자리를 통해 알아낸 거였다. 물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정보기에 술자리에서 그들이 떠든 거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헛짓거리 한 건 아닌 셈인가?’
한유현은 슬쩍 자신의 과거를 위로하며 방문을 굳게 닫았다.
***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가득 채워진 상 앞에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식사에만 집중했다.
그중에 한유현도 있었다.
‘아무리 천뇌심법을 익혀도 불편한 건 사라지지 않는군.’
한유현은 기어코 닷새 만에 천뇌심법의 오성(五成)을 돌파했다.
임무는 오성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한유현은 완벽한 오성을 이뤘다.
이제 육성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가족과의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한유현은 젓가락을 움직이며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사실 한유현은 금검장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요즘 아예 방에 틀어박혀서 통 나오질 않더구나.”
금검장주이자 한유현의 의붓아버지인 한추광이 지나가듯 말을 툭 던졌다.
“예. 생각을 좀 정리했습니다.”
한유현이 즉시 대답하자 한추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그 말을 받은 사람은 한추광 옆에 있던 여자였다.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을 상대하느라 애를 많이 쓰는 모양인데,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한유현은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추광의 세 번째 부인인 차화련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한세찬의 친모이기도 했다.
나머지 한 자리는 한추광의 친딸인 한예린이었다.
즉,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한유현과 핏줄로 이어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가문의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금검장에서 한유현을 쉽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서였다.
사실 한추광도 한유현의 어머니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아니, 그녀의 미모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들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당연히 차화련은 한유현의 어머니를 싫어했다. 또한 그녀를 쏙 빼닮은 한유현은 더 싫어했다.
“당신도 뭐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차화련이 한추광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자 한추광이 차가운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이런 눈빛에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한유현은 예전 생각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리하는 건 좋지만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한유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옳은 말이었다.
“황룡상단과 계약하지 못하면 가문에서 나가겠습니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란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모든 사람의 시선에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던진 한유현은 더없이 담담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다.”
차화련이 억지로 기쁜 표정을 참아내려 애쓰며 말했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한유현은 그걸 보며 마음이 더 싸늘하게 식었다. 과연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책임지겠습니다.”
다시 한 번 한유현이 단호히 말하자,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식당 안에는 음식 먹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그리고 한유현의 눈앞에 새로운 판이 훅 떠올랐다.
[황룡상단과 계약하라. - 황룡상단이 합비 진출계획을 함께할 새로운 호위무사들을 찾고 있다. 은검대를 황룡상단이 선택하게 만들어라.]
[세부임무]
[임무완수보상 - 층층무상신공(層層無上神功).]
한유현은 투명한 판 위에 쓰인 글을 빠르게 읽은 다음, 그것을 없애 버렸다.
투명한 판이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새로운 임무로 꽉 채워졌다.
‘이런 식의 임무도 주는 건가? 역시 예상대로 천뇌심법을 익히라는 임무는 다른 임무를 위한 준비 같은 거였군.’
한유현은 그렇게 새 임무를 생각하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제법 길었던 식사시간이 끝났다.
한추광이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자, 나머지 사람들도 분분히 일어났다.
차화련과 한세찬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한예린이 다가왔다.
한유현은 갑자기 다가온 한예린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한예린과는 별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세찬이나 차화련처럼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한예린이 어렸을 때는 제법 친했다. 하지만 한유현의 어머니가 죽고, 한추광이 차화련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다음부터 조금씩 거리가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세 달 전이었나?’
한예린은 한동안 말없이 한유현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고, 눈빛은 정신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요?”
한예린의 말에 한유현이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상의? 왜 한예린과 그런 일을 상의해야 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지금 걱정해주는 거 맞지?’
왠지 지금 한예린이 보여주는 모습이 그녀의 진심인 것 같았다.
한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한예린의 머리를 헝클었다.
“걱정 마라. 다 잘될 테니까.”
“누, 누가 걱정한대요? 그냥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이니까······!”
한유현은 빙긋 웃어주고는 돌아섰다.
한예린은 그런 한유현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다가 힘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한유현은 한예린의 표정 변화를 굳이 보지 않고도 다 알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오성의 천뇌심법이 내려준 선물 중 하나였다.
‘일단······ 임무부터.’
어쩌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투명한 판이 내려주는 임무를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다 보면 정말 굉장한 능력을 얻게 될 듯했다.
‘층층무상신공이라······.’
이름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신공일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들지 않은가.
한유현은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일단 차분히 임무를 분석하면서 어떻게 하면 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 궁리할 생각이었다.
물론 더 이상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과 기루에 들락거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야. 황룡상단쯤 되는 곳이 편법을 동원하는 가문과 계약을 할 리 없으니까.’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앉은 한유현은 다시 투명한 판을 불러냈다.
그리고 임무 바로 아래에 있는 세부임무라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자 투명한 판이 새로 열리며 세부임무가 나타났다.
[홍화루주를 만나라. - 홍화루주는 정보조직 암향루의 항주 지부장이다. 그녀를 만나 존재감을 알려라.]
[보상 - 암영보(暗影步).]
세부임무는 그거 하나였다. 하지만 세부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달랑 하나로 끝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세부임무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큰 임무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는 방식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로웠다.
‘대체 그 노인의 정체는 뭘까?’
그 노인은 휘황찬란한 일곱 가지 빛이 휘몰아치는 공간에 서 있었다.
‘그나저나 그 눈빛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네.’
노인의 눈에 서린 지독한 복수심은 여전히 한유현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아마 이런 힘을 준 이유가 자신의 복수를 도와달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물론 도의적으로 마음이 움직이면 도울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자신에게 너무 큰 손해가 나거나, 노인의 복수 자체가 도의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홍화루에 가야 한다 이거지?’
한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에게 술을 퍼먹이던 곳이 바로 홍화루였다.
다시 갈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고작 닷새 만에 또 가게 생겼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이번엔 다른 목적으로 가는 거지만, 어쨌든 가서 술은 마셔야 할 것이다. 홍화루주쯤 되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만나주진 않을 테니까.
“일단······ 밤이 될 때까지 책이나 볼까?”
한유현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임무 판이 사라지고 새로운 판이 훅 떠올랐다.
[기초진법입문서]
아직 받기만 하고 확인하지 않은 기초진법입문서였다.
내용이 워낙 길어서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는데 지금 읽으면 될 듯했다.
한유현은 눈앞에 떠오른 투명한 판에 쓰인 기초진법입문서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기 빠져들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한유현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한유현은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내용만 확인하려고 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읽기 시작한 순간 그대로 빨려들어 모든 지식을 섭렵한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기초진법입문서는 정확히 제목과 일치하는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말 그대로 진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자세히 풀어 놓았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방대한지 그저 한 번 읽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읽으면 읽는 족족 머릿속에 새겨져서 다시 읽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천뇌심법······ 정말 보통 심법이 아니야.’
천뇌심법이 오성에 이르면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거라는 말이 정확했다.
기초진법입문서를 익히면서 한유현은 그 말을 온몸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 아주 기본적인 진법 몇 가지는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엄청난 진법은 아니었지만, 고작 금검장 정도의 무가에서는 그 정도 진법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과연 그 책이 실존하는 책일까?’
제목과 내용은 알지만 그저 투명한 판을 통해 본 게 전부이기 때문에 진짜 서책으로 존재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진짜 책으로 존재한다면 아마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책이 분명했다.
이건 그저 단순히 진법의 기초를 다지는 책이 아니었다. 진법의 요체를 꿰뚫는 진법의 정수가 담긴 책이었다.
만일 이 다음 단계의 책이 더 존재하고 그걸 모조리 익힐 수 있다면 진법의 대가라는 만박자를 능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홍화루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녀들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보름이나 매일 와서 질펀하게 놀다 갔으니 몰라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혼자 오신 건가요?”
“뭐, 그렇게 됐다.”
한유현은 능숙하게 대꾸하곤 기녀의 안내를 받아 기루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항상 가던 방으로 들어선 한유현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낯익은 기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유현은 그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은 조용히 마시다 갈 생각이다.”
그 말에 기녀들은 살짝 실망했지만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들 밖으로 나가고 처음 한유현을 방으로 안내한 기녀만 남았다.
한유현은 일단 기녀가 따라준 술을 몇 잔 마셨다.
워낙 천천히 마셨기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조용히 마시겠다고 했기에 기녀는 그저 술만 따를 뿐 최대한 말도 걸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한 시진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한유현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기녀를 쳐다봤다. 기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루주를 만나고 싶다.”
“예? 루주님을 말인가요?”
“왜? 어려운 일인가?”
기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루주님은 손님과 만나지 않으세요.”
한유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일 이게 간단했다면 고작 루주를 만나면 끝나는 임무의 보상으로 암영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보법을 내줄 리 없으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조건을 말해봐라.”
기녀의 표정은 여전히 난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둑이요.”
“뭐?”
“바둑을 둬서 이기신 분이 아니면 루주님을 만나실 수 없어요.”
기녀는 말을 하면서 한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지금까지 루주를 만나고자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이면 백 이 말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대부분 행패를 부리거나 다시는 홍화루를 찾지 않았다.
기녀는 그 손님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라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차라리 자리에 없다고 하면 되지 바둑이라니.
물론 호기심에 바둑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루주가 보낸 사람을 바둑으로 꺾지 못했다.
기녀는 한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행패를 부릴 것 같지는 않구나.’
아니나 다를까, 한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바둑을 두마. 누구와 두면 되느냐? 설마 너는 아닐 테고.”
기녀가 자리에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한유현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방을 나서는 기녀의 모습을 보며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바둑이라······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사실 한유현은 바둑을 썩 잘 두지는 않았다. 그저 둘 줄 아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초진법입문서를 완벽하게 터득한 지금은 얘기가 좀 달랐다.
진법의 기초를 대부분 바둑에 빗대서 설명했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기력이 상승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웬만해선 질 것 같지가 않았다.
‘뭐······ 만박자 같은 사람이 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생각보다 금방 바둑 둘 사람이 왔다. 한유현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것도 복장이나 분위기를 보니 이곳에서 일하는 기녀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투명한 판이 불쑥 솟아났다.
[홍화루주를 만나라 - 임무완료.]
한유현은 멍하니 그것에 떠오른 글귀를 쳐다봤다. 그리고 슬그머니 시선을 옮겨 자신의 앞에 바둑판을 놓고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이 여자가 홍화루주였다.
설마 이렇게 싱겁게 임무가 끝날 줄은 몰랐다.
한유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임무판을 불러냈다.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관한 임무 아래에 세무임무 항목이 달라져 있었다.
[홍화루주를 만나라 - 임무완료]
[세부임무]
한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세부임무를 완료하면 원래 있던 세부임무가 완료로 변하고 새로운 세부임무가 생겨나는 모양이었다.
한유현은 두 번째 세부임무를 확인했다.
# 홍화루주
[홍화루주를 이겨라. - 홍화루주와의 바둑대결에서 승리해 그녀의 마음을 열어라.]
[임무완료보상 - 비화천극진(秘花千極陣).]
임무와 보상을 확인한 한유현은 잠시 고민했다.
어느새 한유현 앞에는 바둑판이 놓였고, 홍화루주와 마주앉았다. 물론 홍화루주는 아직 한유현이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는 흑색 바둑돌이 담긴 통을 한유현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두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홍화루주가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툭툭 놓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잠시 보고 있던 한유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거······ 진법의 향기가 솔솔 나는데?’
바둑판 위에 오십여 개의 바둑돌이 깔렸다. 흑백이 적절히 섞여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엄밀히 따져 진법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했다.
한유현은 눈을 빛내며 바둑판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돌을 이용한 진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지금 이 바둑판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냥 평범한 바둑판이 아니라 아주 특수하게 개조된 바둑판이었다.
‘어쨌든 굉장하군.’
그저 굉장하다고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런 간이 진법을 만들어낸다는 발상 자체가 뛰어나다.
또한 그 발상을 이렇게 현실로 만들어내는 능력도 엄청나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한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홍화루주를 쳐다봤다. 지금으로선 홍화루주가 그 인물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왠지 그건 아닌 듯했다.
‘그저······ 주어진 물건을 이용만 할 줄 아는 수준이야.’
한유현은 오성에 이른 천뇌심법의 도움으로 대번에 그걸 알아차렸다.
천뇌심법은 이런 식으로 표정을 감춘 사람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어내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다 끝났어요. 이 바둑을 이기시면 돼요. 별로 어렵진 않죠?”
홍화루주의 말에 한유현이 바둑판의 형세를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둑에 대해 큰 조예가 없는 그가 보기에도 그다지 흑이 불리한 형국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이면 흑이 제법 유리한가?’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만 그럴 뿐, 실제로는 이 안에 진법이 숨겨져 있었다.
한유현의 머릿속에서 기초진법입문서의 내용이 마구 휘몰아쳤다.
내심 그걸 미리 읽고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바둑 실력은 필요치 않았다. 순수한 진법의 영역이었다.
한유현은 이 문제를 낸 사람이 얼마나 진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고작 기초에 머무르는 한유현의 실력으로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바둑돌의 위치를 통해 바둑판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게 해뒀어.’
이건 순수하게 상대의 진법 실력을 시험하는, 그러니까 진법 문제였다.
“생각할 시간이 아직 더 필요하신가요?”
홍화루주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받은 모든 사람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흑돌을 놓았다.
그 정도로 흑이 유리한 형국이었고, 그 어떤 속임수도 없는 판이었다.
상대하는 백이 국수라 하더라도 결코 이겨내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한데 한유현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오랫동안 바둑판을 살폈다. 마치 이 안에 뭔가 다른 수가 숨겨져 있다는 걸 확신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한유현은 홍화루주의 말에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아니, 다 끝났소. 난······ 여기부터 두지.”
따악.
한유현이 놓은 자리는 정말 엉뚱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걸 본 홍화루주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우연이겠지?’
지금 한유현이 놓은 자리는 그녀가 놓기로 예정된 자리였다. 저 자리에 놓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저런 경우의 답도 미리 정해져 있었다.
사실 이 바둑 시험에 나서려면 엄청나게 많은 경우의 수를 암기해야만 했다.
한유현은 홍화루주가 돌을 내려놓자마자 다음 돌을 놓았다.
따악.
이번에도 홍화루주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또······!’
그녀가 놓아야 할 자리에 또 한유현이 놓았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기엔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 수도, 또 그 다음 수도 한유현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하듯 그녀가 놓아야 할 자리에 먼저 흑돌을 놓았다.
이내 길고 긴 바둑이 모두 끝났다.
홍화루주는 경이로운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결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마지막 경우의 수가 바둑판 위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흑의 승리였다.
***
“제가 홍화루주라는 걸 아셨다고요?”
홍화루주는 또 놀랐다. 그녀는 당연히 한유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정보조직인 암향루의 항주 지부장 자리에 있으려면 근방의 모든 정보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의 주요 정보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아예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정보들 간에도 묘한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고, 그걸 파악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지부장이 할 일이었으니까.
한유현은 항주에서 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무가, 금검장의 둘째 공자였다.
또한 금검장의 직계 중 누구와도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건 정말로 특이한 이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고, 일단 관심이 간 이상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꿰고 있는 건 홍화루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지금 그녀는 자신이 과연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파악한 것과는 전혀 달라.’
애초에 한유현은 능력 자체가 별로 없는 존재였다. 또한 앞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인물이었다.
한데 지금 보는 한유현은 어마어마한 능력을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있던 잠룡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거죠?”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녀가 홍화루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홍화루 내에도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저 루주의 방에 루주가 있다는 사실만 다들 알고 있었다. 실제로 루주를 만나본 사람은 홍화루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암향루의 부지부장뿐이었다.
한데 대체 그걸 어찌 알았단 말인가.
한유현은 임무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홍화루주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신비로웠다.
“후우. 제가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방금 질문은 잊어주세요.”
상대에게 아무 대가 없이 정보의 출처를 물을 수는 없었다. 또한 보아하니 한유현은 거기에 대해서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 굳이 밀어 붙이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절 만나고자 하신 이유는 들을 수 있겠죠?”
홍화루주의 물음에 한유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툭 던졌다.
“요즘 내가 알고 싶은 게 좀 많아서 말이오. 홍화루에 가면 아는 게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유현의 말에 홍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화루가 암향루의 의뢰창구로 쓰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황룡상단의 일 때문에 오신 거로군요?”
한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화루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저렇게 정보에 밝은 사람이 대체 왜 암향루에 정보를 의뢰하는 건지 순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정은 있는 법이고, 그녀는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아시겠지만······ 암향루에 의뢰하시려면 그 대가가 상당하답니다.”
홍화루주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유현은 충분히 그걸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작 금검장 정도의 재력으로는 결코 암향루를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을 말이다.
하지만 한유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대충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홍화루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속내를 다 들킨 것 같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식이면 암향루의 항주지부장으로서는 실격이나 다름없었다.
한유현은 그런 홍화루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툭 던졌다.
“비화천극진?”
홍화루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표정이 경악에서 경탄으로 바뀌었다.
***
홍화루주는 한유현을 직접 안내해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홍화루의 가장 은밀한 장소였다.
홍화루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딱 두 명뿐인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시지요. 혹 시중 들 아이들이 필요하시다면 넣어 드리겠습니다.”
한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대체 왜 여기로 데려와 자신을 방치하는 건지 의아했다.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치를 보아하니 그 이유를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비화천극진이랑 관계된 일이란 뜻이지.’
한유현은 홍화루주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투명한 판을 불러냈다.
어차피 시간이 생겼으니 보상부터 받아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비화천극진을 얼른 익히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일단 암영보부터 확인할까?’
간단한 보법이니 금방 끝날 것 같아서 우선 암영보부터 받기로 했다.
암영보는 예상했던 대로 보법이었다. 한데, 좀 특이한 보법이었다.
은밀함을 굉장히 강조한 보법이었다. 자객이나 쓸 법한 보법이었다.
‘암향루에서 일하는 사람도 익히면 제법 쓸 만하겠네.’
정보조직에서 일하려면 그 특성상, 은밀함이 생명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보법은 굉장히 유용할 것이다.
어쨌든 암영보를 익히는 건 예상대로 순식간이었다.
[암영보 - 이성(二成).]
그저 보상을 받아 머릿속에 구겨 넣었을 뿐인데 단숨에 이성이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 겪으면 겪을수록 저 투명한 판의 위력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한유현은 일단 암영보를 치우고 비화천극진을 불러냈다.
[비화천극진 - 암향루를 만든 초대 암향루주가 창안한 진법.]
그 아래로 진법의 내용이 쭉 적혀 있었다. 한유현은 거기에 또 한 번 푹 빠져들었다.
이번엔 기초진법입문서와는 달리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복잡하고 난해한 진법이었기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거······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네.”
한유현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이내 양손의 손가락을 다 세워서 온 머리를 꽉꽉 눌렀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사라질 두통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머리가 아팠다.
그 순간 천뇌심법이 떠올랐다. 한유현은 반사적으로 천뇌심법을 운용했다.
청량한 기운이 머리에 스며들더니 서서히 두통이 사그라졌다.
“후우.”
한유현은 숨을 고른 다음 비화천극진을 떠올려봤다. 다행히 제대로 익힌 모양이었다.
당장에라도 비화천극진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물론 비화천극진은 그저 단순한 진법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기관도 필요했기에 간단히 설치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비화천극진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한유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
한유현은 정신없이 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홍화루주가 대체 왜 여기로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아차렸다.
한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비화천극진
한유현이 비화천극진을 모두 익힌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때, 홍화루주가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홍화루주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한유현은 느긋한 표정과 자세로 홍화루주를 맞이했다.
홍화루주는 한유현 앞에 다소곳이 앉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유현이었다.
“이제 툭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정확히 뭐요?”
“비화천극진입니다.”
홍화루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한유현은 더 얘기해 보라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홍화루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암향루에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전설?”
“말이 전설이지 사실상 역대 모든 암향루주가 굳게 믿고 있는 진실이지요.”
홍화루주는 한유현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비화천극진을 완성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전설입니다.”
한유현은 그 말에 묘한 눈으로 홍화루주를 쳐다봤다.
“비화천극진을 초대 암향루주가 만든 거 아니었소?”
홍화루주가 질린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그것까지 알고 계셨나요?”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차라리 얘기하기가 더 편해서 다행이네요. 맞아요. 비화천극진을 창안하시고 만드신 분은 바로 초대 루주님이셨죠.”
초대 암향루주는 고금을 통틀어 몇 명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엄청난 천재였다.
그는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걸 통제하고 수집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암향루를 조직했다.
어마어마한 천재답게 암향루를 키워 자리 잡게 만들고 천하를 진동시키기까지 고작 이십칠 년 걸렸다.
그리고 그 뒤로 암향루의 운영을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맡긴 다음 비화천극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건 초대 암향루주의 꿈이었다.
거기까지 들은 한유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
그랬다. 초대 암향루주는 그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도 비화천극진을 결국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그 결과, 한유현이 익힌 비화천극진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멍이 숭숭 뚫린 불완전한 진법이었다.
임무완수보상을 통해 비화천극진을 익히면서 그 부분을 아주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한유현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도 홍화루주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분은 천기를 읽어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래서 후대에 나머지 일을 맡겼다 이거로군?”
“예. 맞습니다.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꼭 비화천극진을 완성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투명한 판이 한유현의 눈앞에 불쑥 떠올랐다.
[비화천극진을 완성하라. - 홍화루에는 미완성의 비화천극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것을 완벽하게 작동하도록 완성하라.]
[임무완수보상 - 암향루, 기초진법응용서.]
한유현은 일단 임무판을 치웠다. 그리고 홍화루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한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한유현이 이번 일을 맡아줄 것이며, 비화천극진을 완성시켜 줄 거라고 절대적인 믿음을 햇살처럼 뿌려주고 있었다.
한유현은 그 모습을 보니 의구심부터 들었다. 대체 그 시험이 뭐라고 이런 믿음을 준단 말인가.
‘그리고 이상한 점도 못 느꼈나? 내가 비화천극진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도 않아? 애초에 그것부터 확인해야 정상 아닌가?’
그런 한유현의 눈빛을 느꼈는지 홍화루주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에서 낡은 책자 하나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이게 뭐요?”
한유현은 그렇게 물으며 책자를 받았다. 굉장히 오래 되었는지 상당히 낡은 책이었다. 하지만 관리를 워낙 잘해서 보관 상태는 아주 훌륭했다.
제목도 없는 책자였기에 뭔지 알려면 펼쳐서 읽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초대 루주님께서 천기를 읽고 작성하신, 후대에 남기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저런 설명을 곁들이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유현은 책자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내용이 굉장히 길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까 한유현을 시험했던 바둑에 관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정말 짧았다.
바둑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말고 그저 부탁하라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한유현은 이 사람이 정말로 예지를 통해 이걸 쓴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사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또,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설명할 생각도 없고 말이다.
한유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홍화루주를 쳐다봤다.
솔직히 이런 유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걸 정확히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초대 루주께서 물려주신 책자는 그거 한 권이 아닙니다.”
천기를 읽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니 향후 암향루의 위기를 알려주는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다른 책자에 암향루가 향후 겪게 될 위기와 그걸 해결할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초대 암향루주의 유지를 엄격히 지킬 수 있었다.
모든 의문을 해소한 한유현은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보겠소. 하지만······ 시간이 제법 필요할지도 모르오.”
홍화루주는 빙긋 웃었다. 수백 년을 기다려온 일이었다. 시간이야 당연히 문제 되지 않는다.
또한 한유현이 무엇을 걱정해서 저 얘기를 했는지 알기에 명확한 답을 주었다.
“황룡상단의 일이라면 사실 계약하지 않는 것이 답입니다.”
한유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홍화루주를 쳐다봤다.
“그들이 새 호위무사들을 찾는 것이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좋은 의도가 아니라고? 황룡상단이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단 말이오?”
“더 정확한 건 저희도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정황으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한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번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가문에서 나가기로 했다. 한데 계약이 독이라니. 꼬여도 어찌 이렇게 꼬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여 계약 자체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도······ 금검장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금검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예. 아무래도······ 뒤탈이 날 염려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중간에 계획이 조금 삐걱거려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는 한유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항주에서 금검장이 가지는 위상은 딱 그 정도였으니까.
금검장은 항주의 중간 규모 무가들 중에서도 좀 처지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계약을 따내는 것보다는 그 이후의 일을 염두에 두시고 일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계약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홍화루주는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한유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솔직히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대체 왜 금검장 정도에 목을 매고 있는지 말이다.
‘차라리 가문에서 나오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어차피 피도 이어져 있지 않은데 말이야.’
그것이 홍화루주의 생각이었다.
“일단은 알았소. 그 부분은 당분간 내가 알아서 하겠소.”
한유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임무판을 불러냈다.
‘과연 비화천극진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정말로 구미가 당겼다. 자그마치 보상으로 암향루가 걸려 있다.
물론 암향루를 그냥 날로 삼킬 수는 없고, 그들의 정보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정도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힘이 될 것이다.
‘기초진법응용서라······.’
한유현은 이미 기초진법입문서를 익혔기에 기초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말이 기초지 그건 진법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를 망라해 놓은 굉장한 수준의 책이었다.
그러니 저 응용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러려면 비화천극진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유현이 보상으로 익힌 비화천극진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메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또 있어.’
비화천극진은 그저 진법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수준의 기관이 진법과 맞물려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니 기관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그 순간 또 임무판이 떠올랐다.
[천뇌심법을 수련하라. - 깨달음에 의해 천뇌심법이 오성에 이르렀다. 하지만 천뇌심법이 제대로 두뇌에 작용하려면 충분한 수련이 필요하다. 수련을 통해 뇌를 활성화 시켜라.]
[임무완수보상 - 기초기관입문서.]
한유현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새 임무가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이쯤 되니 대체 저 투명한 판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알아내야만 했다.
‘설마 나중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지금 할 일은 정해졌다. 천뇌심법을 수련해야만 한다.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한유현은 홍화루주를 빤히 쳐다보며 뻔뻔하게 빙긋 웃었다.
“남는 방 하나 내줄 수 있소?”
홍화루주가 환하게 웃었다.
“내 집이라 생각하고 얼마든지 머무르시지요. 기쁘게 모시겠습니다.”
아마 외부에는 기루에 빠져서 허우적댄다는 얘기가 돌겠지만 오히려 바라던 바다.
지금은 살짝 몸을 낮추고 있을 때니까.
한유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슬쩍 맺혔다.
***
금검장의 안주인이자, 한유현의 형인 한세찬의 모친이기도 한 차화련은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홍화루에 들어간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단 말이지?”
“예. 제가 매일 직접 확인하고 있으니 틀림없습니다.”
“들키지는 않았고?”
“들키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자는 제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말입니다.”
당연하다. 사내는 차화련의 가문인 만검장에서 은밀히 파견한 자였으니까.
“우리 가문에서도 황룡상단이랑 계약을 추진한다고 했지?”
“예. 이번에 큰 공자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밀어붙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차화련은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만검장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금검장이 황룡상단의 계약을 따내는 건, 더구나 한유현의 힘만으로 그걸 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지금까지 그놈의 입지를 흔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고작 이런 일로 다시 살아나면 곤란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차화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듯 손짓하자 사내가 공손히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차화련은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그놈 대체 무슨 생각이지? 혼자 기루에서 시간이나 때워서 될 일이 아닌데?”
차라리 지난번처럼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에게 접대라도 하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물론 한껏 비웃어줬겠지만 말이다.
한데 지금의 행보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포기한 건 아니겠지?”
포기했다고 보기엔 얼마 전 식사 때 보여준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건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당시의 한유현은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차화련이 이번 일에 자신의 가문인 만검장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절대 한유현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화련은 슬그머니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불안함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그 원인을 제공한 한유현은 임무 완수의 막바지에 돌입하고 있었다.
***
한유현은 방에 틀어박혀서 끊임없이 천뇌심법을 수련했다.
사실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면 육성의 경지에 발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육성의 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물론 천뇌심법을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머리가 점점 좋아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래서 앞으로도 절대 천뇌심법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련하겠다고 결심했다.
한유현은 애초부터 재능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 몸에 기대와 인정을 독차지해온 한세찬과는 많이 달랐다.
천뇌심법은 두뇌만 활성화 시키는 게 아니었다. 그건 몸 전체에 작용했다.
머리가 좋아지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의 재능이 조금씩 발전해갔다.
아마 이게 절정에 이르면 무공에 대한 재능도 남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한유현은 천뇌심법의 수련에 매진했다.
천뇌심법이 재능을 일깨우는 뛰어난 심법이라는 건 부차적인 이유였고, 거기에 매달린 진짜 이유는 임무완수보상 때문이었다.
기초기관입문서.
비화천극진을 완성하기 위한 두 개의 열쇠 중 하나를 얻어야 하니까.
그렇게 무려 닷새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천뇌심법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한유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은 아예 안 잤고, 밥도 하루에 한 끼만 대충 때우는 정도로 해결했다.
고작 닷새에 불과했지만 한유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후우.”
한유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천뇌심법은 여전히 오성의 끝자락에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노력한다면 반드시 육성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한유현은 시야를 꽉 채운 커다랗고 투명한 판을 쳐다봤다.
[기초기관입문서]
드디어 임무완수보상으로 기관의 힘을 얻어냈다.
한유현은 당장 그것부터 읽기 시작했다.
예전 진법입문서를 얻었을 때를 생각하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한유현은 순식간에 기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꼬박 하루가 지난 뒤였다.
“왜 천뇌심법을 수련하라고 했는지 알겠군.”
한유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초기관입문서는 기초진법입문서보다 훨씬 방대한 양과 다양한 지식이 망라되어 있었다.
진법은 말 그대로 진법에 관한 부분만 국한되어 있었지만, 기관은 그 특성상, 대장장이 기술이나 설계에서부터 건축에 관한 기술과 설계, 그 외에도 다양한, 그러니까 기관에 접목할 수 있을 만한 모든 분야의 지식들이 필요했다.
그 모든 걸 머릿속에 욱여넣으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니 두뇌를 최대한 활성화시켜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임무에 완성한 순간이 바로 최소한의 필요치였을 테고 말이다.
한유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머리가 뜨겁고 뇌가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럴 때는 천뇌심법을 수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는 건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유현은 다시 천뇌심법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
홍화루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한유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큼은 고요하고 깊었다.
“왠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사실 홍화루주도 한유현이 방에 틀어박혀서 뭘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닷새 사이에 뭔가가 있긴 분명히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사람이 달라 보일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의 한유현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황룡상단은 좀 어떻소?”
한유현의 물음에 홍화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겉으로는 평소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총 열 군데의 무가가 호위무사 신청을 했습니다.”
“금검장은?”
“아직입니다.”
당연했다. 거기에 관한 모든 일을 한유현이 일임하고 있었으니까.
“말씀만 하시면 저희가 신청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홍화루주는 살짝 불편한 기색이었다. 황룡상단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아는데 거기에 한유현이 발을 들이는 상황 자체가 불안했다.
“그래주면 고맙고.”
한유현은 빙긋 웃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다면 더 좋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할 때였으니까.
한유현이 지난 닷새, 아니, 엿새 동안 그저 단순히 천뇌심법만 수련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일을 고민하고 계획했다.
일단 금검장과의 관계부터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고, 또 황룡상단의 꿍꿍이를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다.
사실 금검장과 지금의 한유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다.
금검장주나 다른 가족들과의 사이에 정이나 관계가 깊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다들 한유현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차라리 관계를 단호히 끊고 나오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나올 땐 나오더라도 맡은 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마무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니, 거짓말처럼 가문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가문에서 제대로 자리 잡으려고 아등바등거리던 일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도 천뇌심법의 영향인가?’
한유현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접었다.
‘일단 마무리가 중요해.’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려면 마무리도 깔끔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황룡상단과의 계약이었다.
어차피 한유현이 나서지 않아도 잘될 계약이긴 했지만.
“황룡상단이나 황룡세가에 대한 관심을 좀 더 높여줬으면 하오.”
한유현이 홍화루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홍화루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정보가 황룡상단이나 황룡세가 안으로 꽁꽁 묶여 있다. 그걸 알아내려면 안으로 잠입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암향루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황룡세가를 상대로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한유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결국은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을 거요.”
“그야······.”
아무리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그걸 계획할 때와 직접 실행에 옮겼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진짜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황룡상단이라 하더라도 빈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외부에서 조금씩 포착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금검장이 황룡상단과 계약을 한 다음에도 일은 끝나지 않소. 정작 중요한 건 그때부터 아니겠소?”
“맞습니다.”
홍화루주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해줄 수 있었다.
암향루의 수백 년 숙원인 비화천극진을 완성시켜 줄 사람에게 고작 그 정도도 못해주겠는가.
‘그리고 이분이 비화천극진을 완성한다면······.’
홍화루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한유현은 어느새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뭔가를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모두가 사라진 방 안,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운치 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연못에 정자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게다가 뻥 뚫린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한결 운치를 더해주었다.
그 정자 위에 화려한 장포를 걸친 노인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노인의 눈에서는 형형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노인과는 반대로 더없이 부드러운 인상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년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노인과 달리 아주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밖에서 이러고 지나다니면 어딘가에 있는 작은 장원의 하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어떤가?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편안하게 말을 꺼낸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중년인이었다.
노인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차질 없이 준비 중입니다.”
“누굴 뽑기로 했나?”
“일단 예정대로 금검장을 뽑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만검장도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만검장? 거긴 규모가 좀 있는 곳 아니었나? 잘 다룰 수 있겠나?”
“우리 황룡상단의 입장에서 보면 만검장이나 금검장이나 고만고만합니다.”
“그야 그렇지.”
중년인의 부드럽던 눈빛이 한순간 강렬하게 변했다. 물론 그 강렬함은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하지만 노인에게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틀거렸다.
“자네를 믿네.”
중년인의 말에 노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반드시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공손한 자세를 버리고 다시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휘적휘적 물러났다.
중년인은 그런 노인에게 일말의 시선도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내 노인이 정원을 떠났다. 정적이 찾아왔다.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은하수가 여전히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제야 시작하는군. 참으로······ 길었어.”
중년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왠지 잔혹해 보였다.
***
“뭐라고? 뭐가 어떻게 돼?”
차화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정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됐어?”
차화련의 반응에도 사내는 여전히 차분했다.
“오히려 더 잘된 건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차화련이 입을 꾹 다물고 사내를 노려봤다. 더 잘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복안이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차화련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그놈을 밀어주십시오.”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왜 굳이 내쫓는 쪽으로만 생각하십니까? 아예 제거해 버리면 훨씬 편한 것을.”
차화련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득였다.
“지금 그 말······ 얼마나 위험한 건지는 알고 하는 거겠지?”
“위험하다니요. 아무도 모르는데 뭐가 위험하겠습니까? 그러니······ 밀어주십시오. 이번 계약의 책임자가 되도록 말입니다.”
“책임자? 그럼 방법이 생기나?”
사내가 빙긋 웃었다.
“잊으셨습니까? 황룡상단과 계약한 건 금검장만이 아닙니다.”
그제야 차화련의 표정이 환해졌다. 사내가 뭘 노리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럼······ 이번 기회에 거슬리는 것들을 싹 치워버려도 되겠네?”
사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첫째 공자님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질 아주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차화련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한유현은 황룡상단과의 계약이 마무리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홍화루를 나서서 금검장으로 향했다.
계약의 모든 부분을 암향루에서 나서서 해주었다. 물론 그들의 정체를 밝힌 게 아니라 그저 사람을 써서 도와준 것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별다른 문제없이 계약이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금검장은 서른 명 이상으로 구성된 무사대를 파견해 황룡상단의 호위를 돕는다는 것이 계약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 대가로 한 달에 금 백 냥을 받기로 했다. 특별한 일정이 추가될 때마다 성과급까지 받을 수 있기에 상당히 후한 계약이었다.
이래서 다들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목을 매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홍화루주로부터 계약에 대한 모든 것을 인계받은 후, 금검장으로 돌아온 한유현을 맞이한 소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번 황룡상단에 파견되는 무사대의 책임자로 한유현이 내정된 것이다.
한유현은 대번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이거······ 일이 좀 더 복잡하고 재미있어지는데?”
한유현의 입가에 정말로 즐거운 듯한 미소가 맺혔다.
# 비홍대
금검장에 돌아온 한유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금검장주인 한추광을 만나는 일이었다.
한유현은 한추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자신이 황룡상단으로 파견되는 호위단의 책임자로 내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말이다.
더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지시를 받으라는 말에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금검장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 긴장되고 두려웠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게 마음이 떠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천뇌심법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한유현은 걸음을 멈추고 안쪽으로 손을 가볍게 내미는 총관을 쳐다봤다.
총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자신의 눈빛까지 속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정보와 화류계에서 제법 굴렀다고 자부하는 홍화루주조차 완벽하게 눈빛을 조절하지 못했으니까.
총관의 눈빛에는 경멸과 무시, 조롱의 감정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한세찬과 차화련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유현은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장주의 집무실이 있는 전각으로 성큼 들어갔다.
순간 총관의 눈매가 꿈틀거렸지만, 한유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장주의 집무실은 전각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이 전각은 금검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장주의 집무실은 금검장 전역을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사방으로 창이 나 있었다.
한추광은 자리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유현은 방으로 들어서며 살짝 인기척을 내며 말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추광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만히 한유현을 쳐다보다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황룡상단과 계약을 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할 생각은 버려라.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한유현은 굳이 대답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나서지 않았어도 될 계약이었다.
한추광의 말이 맞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암향루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고 말이다.
“오면서 들었겠지만 네가 황룡상단으로 가야겠다.”
“그러겠습니다.”
“만검장도 황룡상단과 계약했다는 건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한유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 한유현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 바로 암향루의 항주지부장이었는데 그런 것도 모르겠는가.
심지어 그들이 왜 나섰고 어떤 식으로 계약을 성공시켰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애쓰도록 해라.”
한유현은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여기서 그놈들에 대해 성토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다시 보며 대화를 나눠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날 아들은커녕 가족으로도 여기지 않는군.’
한유현이 속으로 마음을 재차 정리하는 사이 한추광이 다시 돌아섰다.
“이리 와서 저들을 봐라.”
한유현은 한추광 옆으로 걸어가 창밖을 내다봤다.
바로 연무장이 보였다. 서른 명의 무사가 거기에 있었다. 자유롭게 흩어져서 각자의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한유현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저들을 데리고 가면 된다. 무사대의 이름은 네 마음대로 지어도 좋다.”
한추광은 선심이라도 쓰듯 그렇게 말했다.
사실 말이 파견이지 계약 기간 동안은 황룡상단에 소속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보수도 황룡상단이 지급하고 의식주도 모두 황룡상단이 내주는 식이었으니까.
“이제 가 봐도 됩니까?”
한유현이 어느새 창가에서 물러나 원래 자리로 돌아가 그렇게 물었다.
한추광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가면 한동안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
“가 봐라. 최대한 서둘러 황룡상단으로 갈 준비를 해라.”
한유현은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한추광은 그조차 못마땅했다.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명시된 기일은 나흘 후였다.
괜히 미리 가서 그들과의 관계에 실금이라도 가면 곤란했다.
한유현은 그런 한추광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황룡상단에는 약속된 날에 갈 겁니다. 그 사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한추광은 그런 한유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돈은 지원해주지 않을 테니 네가 할 수 있으면 알아서 해라.”
한유현이 빙긋 웃으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바쁘다, 바빠.”
정말로 바빴다.
비화천극진을 완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거기에 황룡상단과의 일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새 임무가 내려왔다.
[무사대의 이름을 지어라. - 무사대의 이름을 비홍대(秘虹隊)로 지어라.]
[임무완수보상 - 섬뢰검(閃雷劍), 섬전보(閃電步), 뇌전공(雷電功)]
‘이건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무사대의 이름을 비홍대라고 짓는 건 정말 별거 아니었다. 어차피 이름에 대한 권한을 받아 왔으니까.
한데 그것치고는 보상이 너무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자그마치 무공을 세 개나 주다니.
‘그나저나 비홍이라······.’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비밀스러운 무지개라는 뜻인데 그게 대체 뭘까?
한유현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어쨌든 이건 좋은 기회였다. 무공을 세 개나 얻을 기회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무공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유현은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가운데에도 묘하게 어지러운 느낌이 드는 모습에 한유현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할 건지 그냥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무럭무럭 분위기를 쏘아대고 있는데 모르면 둔탱이지.
한유현은 일단 서른 명의 무사들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비홍대다.”
그 순간 임무가 완수되었다.
한유현은 임무완수보상을 확인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여기서 나갈 때였으니까.
“출발은 이 각 후에 한다. 준비할 게 있으면 서둘러 준비하고 정문으로 모이도록. 늦는 사람은 두고 간다.”
한유현은 그 말을 남기고 휙 돌아서서 연무장을 나섰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런 한유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허어. 이게 뭐지?”
“그러게. 황룡상단으로 간다기에 이제야 뭔가 좀 해볼 수 있나 하던 참인데······.”
“흥.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릴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우린 첫째 공자 눈 밖에 난 그 시점에 이미 끝난 거라고.”
그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맞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세찬의 눈 밖에 난 사람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세찬을 열심히 따르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둘째 공자인 한유현을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금검장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조차 부질없다고 여기고 있는 중이었지만.
“자자,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서두르자고.”
고작 이 각 안에 떠날 준비를 하라니. 이건 횡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그 부분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금검장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무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러자 연무장에 한유현이 다시 등장했다. 한유현은 멀리 떠나지 않고 근처에 남아 그들의 대화와 분위기를 확인한 것이다.
“뭐······ 괜찮네.”
저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한유현 입장에서는 그랬다. 물론 금검장 쪽에서는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한유현은 씨익 웃으며 방금 확인한 보상을 떠올렸다.
[뇌전공 - 음기와 양기를 충돌시켜 나오는 뇌기를 모은다. 섬뢰검과 섬전보의 기본이 되는 신공.]
[섬뢰검 - 뇌기를 이용해 극단적인 속도와 파괴력을 추구하는 검법.]
[섬전보 - 뇌기를 이용해 공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도록 고안된 보법.]
당연히 한유현은 그것들을 모두 익혔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무공은 비홍대를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라고 말이다.
특히 뇌전공이 그랬다.
뇌전공은 층층무상신공에 귀속된 무공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가르치는 것도 일이네.”
한유현은 임무판과 천뇌심법의 도움을 받아 보상을 받음과 거의 동시에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역시 암영보와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익힘과 동시에 이성의 성취를 이뤄냈다.
아마 조금만 더 수련하면 삼성은 순식간일 것이다. 또한 꾸준히 수련하면 오성도 금방일 것이고.
하지만 그걸 남에게 가르치는 건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 단언하지 못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가 잘 익혀야 잘 가르칠 수 있겠지.’
당분간은 이 세 무공에 매달려야 할 듯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층층무상신공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층층무상신공을 떠올린 한유현은 한숨부터 나왔다.
이건 황룡상단과의 계약이 이뤄진 순간 임무가 완수되며 보상으로 얻은 무공이었다.
[층층무상신공 - 단계가 오를 때마다 큰 폭으로 내공이 증가하는 무공. 총 백팔 단계가 있다.]
당연히 층층무상신공을 익혔고, 그 순간 두 번째 단계로 올라섰다.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고작 한 계단 올랐을 뿐인데 뿌듯한 충만감과 함께 엄청나게 내공이 상승했다.
물론 애초에 내공이 바닥에 가까웠기에 그리 느꼈을 뿐이지 내공의 양 자체가 많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굉장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계단을 오르듯 내공이 상승한다면 나중에는 대체 얼마나 막대한 내공을 갖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까마득하네.”
층층무상신공은 그 대단한 공능만큼이나 수련 속도도 극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일단 얻은 내공을 효율적으로 쓰는 데에는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 뛰어났다.
또한 그 어떤 무공과도 융화가 잘 되고 조화를 이루는 내공심법이었다.
그렇기에 기존에 한유현이 익혔던 그 병아리 눈물만 한 내공을 비롯해서 뇌전공을 익히며 얻은 내공까지 모두 층층무한신공이 포용해 버렸다.
층층무한신공의 가장 큰 장점은 영약에 있었다.
보통 영약을 이용해 내공을 늘리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어설픈 영약을 여러 개 먹어봐야 약만 소모할 뿐 실제로 얻는 내공은 결국 미미해지지 마련이다.
처음 먹었을 때나 내공 증진에 효과가 높지, 그 뒤로는 점차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건 아무리 좋은 영약을 먹어도 그렇다.
하지만 층층무상신공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그 어떤 영약을 먹든 최상의 효율로 내공을 뽑아낼 수 있었다.
또한 아무리 많은 영약을 먹어도 마치 매번 처음 영약을 먹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평생 층층무한신공에만 매달려도 스무 단계를 올리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가히 고금제일의 신공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적어도 한유현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일단······ 지금은 그저 열심히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지.’
한유현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정문으로 향했다.
왠지 앞으로 영약 때문에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마음이 살짝 무거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천뇌심법을 운용했다. 천뇌심법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수련이 가능했다.
‘이거야말로 고금제일 심법인지도 모르겠네.’
한유현의 마음이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서 무사들이 우르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유현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서른 명 전원이 정문에 도착했다. 다들 별로 챙길 짐이 없는지 대부분 단출했다.
“다 모였으면 가지.”
한유현은 곧장 정문을 나섰다.
무사들이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내 다들 힘차게 따라갔다.
어쨌든 그들도 더 이상 뒤가 없는 자들이었다.
무사들은 처음엔 조용히 한유현을 따라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조금씩 긴장이 풀어져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황룡상단에서 모이는 날은 나흘 후 아니었나?”
“그냥 미리 가나보지.”
“황룡상단이 기분 나빠할 거 같은데? 상단 사람들, 약속 칼같이 지키는 걸 좋아하잖아.”
“하긴. 우리 장주님이 황룡상단 기분을 상하게 하실 리는 없지.”
모두의 시선이 앞에 걸어가고 있는 한유현의 등에 꽂혔다.
“설마······ 둘째 공자님, 독단적인 판단은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듣기로 둘째 공자님도 가문에서 입지가 간당간당하신 것 같던데?”
“또 모르지. 아예 이번 기회에 말을 갈아타시려는 건지도.”
다들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런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 휘말리면 될 것도 안 된다. 황룡상단의 호위 노릇을 하는 게 결코 쉬울 리 없다. 힘을 모아도 어려울 판에 이런 복잡한 문제까지 끼어들다니.
하지만 다들 체념과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걸음에 힘이 빠졌다.
***
“여, 여기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무사들 중 한 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유현과 입구의 현판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현판에는 화려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홍화루(紅花樓).
항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비싼 기루가 바로 홍화루였다. 웬만한 갑부가 아니면 안에 발을 들이기도 어렵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금검장의 둘째 공자가 무리를 해서 황룡세가의 후기지수들을 접대한 곳도 이곳이었다.
금검장에서 쉬쉬했지만 그런 일이 소문으로 안 돌아다닐 리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예 여기서 살았다고 하던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투자를 했으니 황룡상단과 거래를 틀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황룡상단이 뭐가 아쉬워 금검장과 계약을 하고 그곳의 무사들을 데려다 쓴단 말인가.
“안 들어갈 건가?”
한유현이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사들은 그 말에도 그저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 섣불리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망설이는 시간도 딱 거기까지였다.
홍화루 안에서 기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무사들은 어어하며 기녀들에게 한쪽 팔을 붙잡힌 채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힘으로 버틴다면야 끌려갈 리 없지만 기녀의 섬섬옥수가 무사들의 단단한 팔에 휘감긴 순간, 그들의 의지가 뚝 부러져 버렸다.
홍화루 안으로 들어가는 무사들의 표정이 헤벌쭉해졌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물론 그 기대감은 홍화루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순간 그대로 산산조각 났지만 말이다.
***
무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기녀들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계속 끌려오다보니 이곳에 도착했다.
한데 아무리 봐도 기녀들과 함께 음주가무를 즐길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은 청석이 깔린 넓은 공간이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연무장?”
서른 명의 무사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어느새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문이 굳게 닫혔다. 아주 두터운 철문이었기에 다시 여는 것도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았다.
한유현이 당황하는 무사들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그 순간 임무판이 훅 떠올랐다.
[비홍대주를 이겨라. - 비홍대를 은연중 장악한 진두익을 제압하라.]
[임무완수보상 - 망뢰검진(網雷劍陣).]
임무판은 친절하게도 진두익이 누구인지도 표시해 주었다. 진두익의 머리 위에 붉은 점이 찍혔다.
한유현은 진두익을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 생각 없이 봤을 때는 몰랐는데, 관심을 갖고 살피니 그가 이 무리의 중심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마 이대로 시간이 좀 더 지났다면 굳이 이렇게 찾지 않아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티가 났다.
“앞으로 네가 비홍대주다.”
한유현은 진두익에게 말했다. 그러자 다들 흠칫 놀라는 것이 눈에 확 보였다.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고작 이 정도 시간에 그걸 알아차렸다고?’
한유현은 이들을 오늘 처음 만났지만, 사실 이들이 이렇게 모인 지는 제법 시간이 되었다.
또한 이렇게 모이기 전에도 이런저런 교분을 나누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다들 비슷한 처지였기에 서로 마음을 트고 지내기가 좀 쉬운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진두익이 그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되도록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한데 함께 한 시간이라고는 처음 만나서 이곳 홍화루까지 온 것이 전부였는데, 어찌 이렇게 딱 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우연이겠지.’
진두익 역시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대주는 둘째 공자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투가 살짝 도발적이었다. 물론 한유현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도 순순히 지시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한유현은 그런 진두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씨익 웃었다.
“난 좀 바빠서.”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황룡상단과의 계약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한유현이다. 한데 계약이 성사된 지금에 와서 저따위 말이라니.
모두의 표정이 나빠졌지만, 한유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진두익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싫은가? 내가 보기엔 나보다 네가 더 적임자 같은데?”
한유현의 말에 다들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럼 정말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파악했단 말인가?’
진두익을 비롯한 비홍대 전원은 그동안 자신들이 한유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유현은 복잡한 표정의 진두익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한판 붙어볼까? 내기라도 걸고 말이야.”
순간 진두익의 눈에서 호승심이 번득였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금검장 안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무사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한 환경을 극복하려 독기를 품고 있었기에 웬만한 무사들보다 나은 실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진두익은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다.
괜히 이들을 은연중 이끌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인망도 인망이지만 무엇보다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무인,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실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진두익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꽉 쥐었다.
일단 대련을 시작하면 절대 인정사정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게 두려우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두익의 지론이었다.
분위기가 타오르기 시작하자, 나머지 비홍대원들이 뒤로 쭈욱 물러났다.
연무장 가장자리에 바짝 붙은 그들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진두익과 한유현을 바라봤다.
물론 이 중에서 한유현이 진두익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유현은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없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또한 한유현 역시 가문의 천덕꾸러기라서 제대로 된 가전무공을 사사하지 못했다는 약점도 있었고 말이다.
반면 진두익은 무수한 수련과 실전으로 다져진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세 살짜리 어린 아이가 봐도 이건 무조건 한유현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비홍대원들은 이렇게까지 하는 한유현을 이제 좀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서서히 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유현은 가볍게 목을 꺾고 팔다리를 흔들어 몸을 풀었다. 그리고 검을 슥 뽑았다.
스릉.
한유현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정확히 진두익에게 꽂혔다.
진두익은 그걸 보며 진지하게 검을 뽑았다.
챙.
두 사람 사이에 싸한 긴장감과 들끓는 투지가 뒤엉켰다.
팟!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채채채챙!
격렬하게 검과 검이 부딪히며 불꽃과 소리를 토해냈다.
진두익이 익힌 검법은 금검장의 무사들이라면 다들 익히고 있는 비격검이었다.
하지만 그냥 비격검이 아니라 수련과 실전을 통해 진두익에게 특화된 비격검이었다. 당연히 강했다.
한데 그런 진두익과 한유현이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대결을 구경하는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 뭐야. 둘째 공자님이 저렇게 강했어?”
“그러게. 원래 무공 못하시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뭔가······ 못 보던 검법 같지 않아?”
물론 이들의 수준으로는 한유현이 어떤 검법을 쓰는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유현의 검으로부터 나오는 이질감이 어렴풋이 느껴졌기에 다들 뭔가가 있다고 여겼다.
모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도 점점 더 격렬해졌다.
채채채채챙!
정신없이 움직이며 검과 검이 얽혔다.
진두익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보법 때문이야!’
진두익은 실전을 많이 겪은 무인답게 지금 자신이 한유현을 압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보법에 있다는 걸 금세 파악해냈다.
한유현의 보법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유현은 지금 암영보와 섬전보를 적절히 섞어서 쓰고 있었으니까.
물론 아직 그 무공들이 가진 진짜 공능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걸 꺼낼 순간이 되었다.
파지지직!
한유현의 발에서 뇌기가 일며 바닥에 미약한 뇌전이 흘렀다.
“헛!”
갑자기 발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에 진두익이 경악했다.
만일 진두익이 다른 비홍대원 정도의 실력이었다면 금세 균형을 잃고 파탄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그걸 버텨냈다.
일단 버텨내기만 하면 뇌기가 워낙 미약해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냥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유현의 검에서도 뇌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아주 미약했지만.
빠지직!
바닥의 뇌기와 검의 뇌기가 더해지며 그대로 진두익의 검을 타고 올라갔다.
“끄으윽!”
이번엔 제법 강렬했다. 그래서 아무리 진두익이라도 균형이 비틀릴 수밖에 없었다.
한유현은 암영보를 펼쳐 그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퍽!
한유현의 손바닥이 진두익의 가슴을 두드렸다.
진두익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한유현의 다음 수를 막으려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유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암영보의 귀신같은 움직임을 이용해 어느새 진두익의 뒤를 잡은 한유현은 진두익의 목에 검을 갖다 댔다.
일순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진두익의 목에서 가느다란 핏줄이 흘러내렸다.
한유현은 빙긋 웃고는 검을 거뒀다. 그리고 여유롭게 걸어 처음 그 자리에 가서 섰다.
진두익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거기에 멈춰 서 있을 생각인가?”
한유현의 말이 더없이 강렬하게 진두익의 가슴을 두드렸다.
진두익은 발끈해서 고개를 번쩍 들고 한유현을 바라봤다.
한유현의 담담한 표정을 보니 자신이 이렇게 열을 내고 실망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왠지 우습게 여겨졌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 누군 멈추고 싶어서 멈췄답니까?”
한유현이 씨익 웃었다.
“이리 와라.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진두익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하마터면 눈물이 고일 뻔했다. 그런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그날, 진짜 비홍대가 태어났다.
# 황룡상단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홍화루주의 말에 한유현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분들 때문인가요?”
“뭐······ 반쯤은?”
“그럼 나머지 반은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한유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건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을 진짜 비홍대로 엮으면서 추가 보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게 뭔지도 모를 사람한테 말이다.
‘그리고 평생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임무판이 나타나 임무를 내려주고, 그걸 완수하면 엄청난 보상을 내려준다는 얘기도 그렇고, 자신이 현재 익힌 무공이나 기술, 혹은 지식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면 아마 다들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지금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분들······ 금검장에서 눈 밖에 난 사람들인 건 알고 계시죠?”
홍화루주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한유현의 안전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 자체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금검장에서 따로 손을 쓸 수도 있어요. 사실 만검장은 이미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요.”
만검장도 황룡상단과 계약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다.
“잘 감시하고 있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자님께서 스스로 조심하시는 게 제일 중요하답니다.”
한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지금도 계속 고려 중이었다.
‘그리고······ 비홍대가 수련만 제대로 한다면 아마 만검장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거야.’
지금 비홍대는 섬뢰검, 섬전보, 뇌전공을 수련 중이었다.
일단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망뢰검진을 전수할 예정이었다.
망뢰검진은 뇌전공을 기반으로 해 섬뢰검과 섬전보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만일 망뢰검진만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만검장이 어떤 방식으로 덤비더라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나도 슬슬 시작해야겠소.”
한유현의 말에 홍화루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를 방해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지금 있는 곳은 홍화루주의 방이었다. 그러니 다른 적당한 방이 필요했다.
한유현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비화천극진.”
그 말에 홍화루주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비화천극진을 확인할 수 있는 방은 홍화루에 딱 한 군데뿐이었다.
즉, 한유현은 남는 시간 동안 비화천극진을 연구하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홍화루에서 딱 두 명뿐이었고,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함께 오지 않으면 방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홍화루주는 기쁘게 한유현은 그곳으로 안내했다.
한유현은 방으로 들어가 한가운데 앉았다. 홍화루주는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문을 닫고 물러갔다.
“일단······ 추가보상부터 확인해볼까?”
[추가보상 - 암향과(暗香果).]
“암향과? 이건 또 뭐지?”
무슨 과일인 모양인데, 이런 특이한 이름의 과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름에 암향이라는 것이 붙은 걸로 봐선 암향루와 관계된 무언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유현의 눈앞에 새로운 판이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 바닥의 애매한 부분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붉은 점에 손바닥을 대고 내공을 흘려보내라. 그리고 손을 비틀어 문을 열어라.]
‘모르면 위치를 찾는 것도 어렵겠군.’
그 정도로 애매한 위치였다. 한가운데도 아니고 방을 정확히 분할하는 위치도 아닌 정말로 애매해서 그곳을 지나치기도 어려울 것 같은 자리였다.
그러니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한유현은 붉은 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내공을 흘려 넣었다.
층층무상신공을 익혔기에 내공의 수발이나 조절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교하고 뛰어났다.
덜컹.
바닥의 일부가 빙글 돌아가며 위로 툭 튀어올랐다. 마치 바닥을 동그랗게 도려낸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열린 문 안으로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 안에 어른 주먹만 한 옥갑이 놓여 있었다.
한유현은 그것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후욱.
강렬한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옥갑 안에는 새까만 단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암향과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암향과라는 이름에 정말로 잘 어울리는 단약이었으니까.
방 안을 가득 채운 향은 정말로 특이했다. 향을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차분해지는 게 아니라 살짝 우울함에 더 가까웠다.
한유현은 과연 이걸 어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임무판이 떠올랐다.
[암향과를 복용하라. - 암향과를 먹고 그 기운을 이겨내라. 이겨내지 못하면 죽음을 맞으리라.]
[임무완수보상 - 천뇌심법의 발전.]
한유현은 대번에 이 임무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사람 우울하게 만드는 이 약을 먹고 버티면 천뇌심법에 도움이 된다 이거지?”
한데 실패하면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마 저 임무판이 말하는 죽음은 자결이리라.
한유현은 심호흡을 한 다음 암향과를 단숨에 입에 넣었다.
지독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그 향이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한유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우울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마구 휘몰아쳤다.
온갖 좋지 않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험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한유현의 머릿속에 죽음이 떠올랐다.
자결하면 이 모든 감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해지겠는가.
하지만 버텨냈다. 한유현을 버티게 한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임무판이었다.
임무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한유현의 눈앞에 둥둥 떠 있었다.
없애려고 해도 마치 한유현의 명령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멀쩡히 남아 한유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임무를 읽고 또 읽었다. 이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기운에 저항해 그것을 이겨내는 임무를 계속 상기하며 버텨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유현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하도 이를 악물어서 잇몸이 상한 것이다.
그리고 꽉 쥔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닥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결국 끝났다.
털썩.
한유현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흘린 피 때문에 질척질척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힘들었다.
암향과의 기운을 이겨내자, 그 모든 부정적 감정들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평범한 감정들이 착착 채워졌다.
한유현은 어마어마한 감정적 고양감을 느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천뇌심법 - 육성(六成).]
투명한 판이 천뇌심법의 발전을 알려주었다.
한유현은 갑자기 머리 한 부분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육성의 감각이구나.’
정말로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자신의 모자람이었다.
“아직 멀었네.”
한유현은 천뇌심법에 더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걸 확인했다. 천뇌심법의 깨달음에 비해 숙련도가 모자랐다.
즉, 수련이 너무 모자라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지만 여기서 천뇌심법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슬슬 위험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보아하니 단순한 수련만으로 천뇌심법이 칠성의 경지로 올라서는 일은 없을 듯했다.
뭔가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그 계기는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 한다.
어쨌든 추가보상으로 천뇌심법이 육성에 올라섰으니 이제 정리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유현은 드러낸 바닥을 다시 맞춘 다음 방 한가운데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층층무상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층층무상신공은 그저 내공을 쌓고 다루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몸의 회복에도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몸의 상처가 좀 큰 편이라 순식간에 고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회복력을 올려 빠르게 회복할 발판 정도는 놓을 수 있었다.
한유현은 층층무상신공을 운용한 다음, 천뇌심법으로 넘어갔다.
천뇌심법은 좀 더 오랫동안 공들여 수련했다.
원래는 비화천극진을 연구하려 했는데, 그건 좀 더 나중으로 미뤘다.
나흘 동안 천뇌심법에 매달린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비화천극진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한유현은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한유현은 나흘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천뇌심법에 심취해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홍화루를 떠나 황룡상단으로 갈 때가 되었다.
비화천극진은 결국 완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방향은 잡았다.
이젠 굳이 홍화루에서 그 비밀스러운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비화천극진을 이리저리 주무르고 조합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게 천뇌심법이 육성의 경지에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유현은 이제 진법이나 기관에 대해서 훨씬 폭넓고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홍화루를 나서니 형형한 눈빛으로 도열해 있는 비홍대가 보였다.
지난 나흘 동안 이들 역시 만만치 않은 수련의 시간을 보냈기에 눈빛과 기세가 살아 있었다.
한유현은 비홍대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진두익을 보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진두익이 알아서 비홍대에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황룡상단이다. 출발.”
비홍대가 일사불란하게 발걸음을 뗐다.
한유현은 비홍대의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홍화루에서 황룡상단까지는 반 시진 정도 빠르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진두익도 한유현도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정확히 반 시진 후, 그들은 황룡상단에 도착했다.
황룡상단은 항주에서 가장 큰 전각이었다. 무려 십오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각 전체를 황룡상단에서 쓰고 있었다.
비홍대가 황룡상단 입구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만검장에서 파견한 무사들이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다.
만검장에서도 서른 명의 무사를 파견했고, 그들을 통솔할 책임자도 함께 보냈다.
만검장의 책임자는 만조무라는 이름을 가진 무사였는데, 만검장주의 사촌이었다.
무공 실력이 상당해서 만검장 내에서도 제법 인정을 받는 자였다.
그는 한유현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번득였다.
만조무는 만검장이 왜 굳이 황룡상단과의 계약에 열을 올렸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저놈을 처리하면 된단 말이지?’
만조무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물론 대놓고 처리해선 안 된다. 지극히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처리해야 한다.
자신 있었다. 만조무는 이와 비슷한 일을 처리한 경험이 무수히 많으니까.
그가 만검장에서 인정받는 건,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런 음험한 임무에 상당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조무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서 한유현에게 다가갔다.
“세찬이의 동생이로군. 이름이······ 유현이라고 했던가?”
만조무는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정말 반갑네. 앞으로 같이 잘해보세.”
한유현은 만조무의 말을 들으며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려서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허허허. 겸손하군.”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황룡상단측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상단 안으로 안내했다.
한유현은 만조무와 나란히 걸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투명한 판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만조무의 내심을 파악하라. - 만검장은 한유현을 죽이기 위해 황룡상단과 계약했다. 하지만 그 책임자인 만조무는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다. 그의 속내를 파악하라.]
[임무완수보상 – 비홍검법(秘虹劍法).]
<『대박공자』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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