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창공의 학살자 [E]

창공의 학살자 1권 (상)

2017.01.02 조회 2,746 추천 21


 프롤로그
 
 
 
 
 
 세상이 바뀌었다.
 어른들이 내가 태어나기 삼 년 전 그때와 비교하며 항상 하는 말이다.
 이는 내 또래의 아이들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듣기론, 그때 세상은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의 위협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그것’을 배제한 채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의 말이 사실 와 닿지 않는다.
 겪은 적 없고, 상상한 적 없어서 사실 그렇게 크게 공감하지 못해 코웃음 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을 직접 겪은 적 없는 나로서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그런데 내가 꼭 어른이 된 것처럼 저 말이 가슴을 울리게 되었다.
 내 세상이 변했다.
 나에게는 듬직하고 성실한 아버지가 있었고, 다정다감하신 어머니가 있었으며, 말괄량이지만 성격 좋은 누나가 있었다.
 왜 과거형인지 궁금한 사람이 있으리라 본다.
 두 달 전, 누나는 멀쩡했다.
 문제의 그날, 한 대의 덤프트럭이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를 누나가 몸을 던져 대신 받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누나는 더 이상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로 인해 내 세상이 변한 것이다.
 중소기업의 만년 과장이신 아버지는 회사에서 일을 마치면 대리운전을, 전업주부셨던 어머니는 낮에는 계약직으로 건물 청소, 밤에는 야식집에서 동이 틀 때까지 주방 허드렛일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의식조차 알 수 없는 누나.
 너무나 당연히 여겨왔던 17년간 나를 보호해 주던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취객 앞에서 굽실거리시는 아버지, 젊은 여자의 폭언과 하대에도 항변조차 못하고 고개를 숙이시는 어머니의 눈물.
 부모님의 그 모습은 내 심장을 짓뭉개 버렸고,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내 세계를 되돌려 놓기 위해 나 또한 변하기로.
 어른들의 세계를 바꾼 ‘그것’, 창공의 학살자를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즉, 이건 나의 이야기다.
 1장 전장의 남과 여
 
 
 
 
 
 해왕은 자신의 몸뚱이가 마치 쇠말뚝이 박힌 바윗덩이처럼 느껴졌다.
 그는 근 한 달여를 일생 해보지 않던 빡빡한 일정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어 단련하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산속이 그의 수련장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맞을 것 같은 무기를 점찍은 뒤 프리 나이트 사이트에 오른 동영상을 통해서 무기의 사용법을 숙지한 뒤 수련했다.
 그가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무기는 한 손 검과 한 손 방패로, 검의 이름은 글라디우스, 방패의 이름은 라운드 쉴드였다.
 체계적으로 무술을 가르쳐 주는 검투사 학원 같은 곳에서 배우면 좋겠지만, 체계를 밟으며 배우다 보니 조급한 마음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싼 학원비도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초창기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어젯밤에도 언제나처럼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한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꿈을, 그에겐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꿈을 꾸었다.
 
 “야, 공해! 빨리 일어나! 어쭈구리, 또 문 잠갔네. 엄마! 아빠! 공해 이 녀석 또 밤에 야동 봤나 봐! 저 짐승을 어째! 엄마, 열쇠 어디 있어? 공해 이 자식 또 열쇠 어디 숨겼나 봐요.”
 ······.
 “짐승도 10년을 가르치면 정신 차릴 텐데, 저 짐승은 늘 저 모양 저 꼴이잖아요. 그러니 누나의 책임감 때문에라도 반드시 저 짐승을 성실하고 부지런한 인간으로 탈바꿈시켜야지. 엄마, 첫 번째 서랍장이지?”
 ······.
 “오케이~”
 
 불과 두 달 전 아침 풍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매일 아침마다 듣던 누나의 잔소리에 몸서리를 쳤었다.
 겨우 두 달 만에 누나의 잔소리를 꿈에서 듣곤 가슴 아파하는 해왕이었다.
 잠자리에 엎어져 있는 해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 꿈에서 그는 어떤 힘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
 스르륵.
 살짝 벌어진 그의 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베개를 하염없이 적신다.
 금세 축축해진 베개에서 해왕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허무함이 폐부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방문을 보았다.
 ‘······누나.’
 고요한 어둠이 잔인하게 그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그는 가볍게 몸서리치며 침대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텅 빈 거실을 바라본다.
 창밖의 어둠은 젊은 청년처럼 여전히 그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나직한 침음과 함께 해왕은 시계를 보았다.
 
 -04시 38분.
 
 ‘오늘도 여섯 시쯤에 오시겠지.’
 현재 이 집 안에 사람이라곤 해왕 그 하나뿐이다.
 그의 부모는 딸의 사고 이후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방을 나서 주방으로 걸어간 해왕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전과 달리 냉장고는 휑뎅그렁하다.
 마른 목을 매만지며 그는 결국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물로 얼굴까지 씻었다.
 수도꼭지를 내리는 그의 손은 공부하는 학생의 손이라기에는 굳은살로 촘촘했다.
 그가 해온 수련의 강도와 고됨을 이 손이 증명하고 있었다.
 제 방으로 발길을 옮긴 해왕이 붙박이장에서 옷을 꺼내어 갈아입고선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파이어.’
 화르르.
 놀랍게도 그가 바라본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스라이터의 가스양을 최대치로 올렸을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크기였다.
 초능력, 해왕은 놀랍게도 발화 능력자였다.
 그가 이 능력을 알게 된 건 7년 전, 태풍으로 인해 일대가 암흑 속에 파묻힌 깊은 밤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그는 집에 혼자 있었고,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그는 빛을 갈망했다.
 그때 나타나 준 것이 지금 그가 일으킨 바로 이 불꽃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불꽃은 여전히 이 모양 이 크기였다.
 한때, 남들과 다른 자신의 능력에 의기양양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도 모두 시들어 버렸다.
 자신의 불꽃은 500원짜리였기 때문이다.
 500원짜리 초능력자라니, 이 보다 더 슬픈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럼에도 해왕은 자신의 발화 능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꾸준히 성장할 방법을 모색했다.
 단전호흡, 명상, 운동 등이 그가 선택한 방법들이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자신이 성장하면 불꽃도 함께 성장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직까지 내세울만한 결실은 보지 못했지만 지난 7년간의 꾸준한 노력과 수련 덕분에 발화 능력을 배제한 부분에선 나름 큰 성장을 이루었다.
 불량배 서넛은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만한 싸움 실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에겐 너뿐이구나.”
 서기 2024년.
 그 전만 해도 지구 최강이었던 인류는 그날 그 왕좌를 잃어버렸다.
 창공의 학살자라 불리는 찬탈자에게.
 이후, 2044년 현재까지 찬탈자는 인류의 삶에 지대한 위협을 끼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발전한 분야도 있었지만, 인류가 이에 대해 긴장하며 살게 된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해왕은 달렸다.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속 공터를 향해서.
 해왕은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자신을 단련하며 묵묵히 때를 기다려 오던 해왕 앞에 드디어 바라던 기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검투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꼭 한 달하고 일주일째였다.
 오랜만에 가족과 모여 병원에 있던 해왕에게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창공의 학살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바라던 그 기회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로, 안성맞춤인 G-L1(녹색-레벨1) 창공의 학살자였다.
 기회라기보단 행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인류가 현재까지 맞닥뜨린 창공의 학살자는 하위 G-L1에서 시작하여 R-L9(빨강-레벨9)였다.
 학살자의 발생 빈도는 세계적으로 세 자리 숫자에 육박하였고, 국내의 발생 빈도는 당연히 그보다 적은 달에 평균 7, 8회였다.
 이러니 검투사들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L4까지만 인류는 정복했다, 희생자를 많이 냈지만.
 그 이상의 창공의 학살자를 정복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은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L5 이상은 정부, 그리고 강력한 검투사를 보유한 거대 길드조차 외면하는 실정이다.
 이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성과를 낸다면 만족할 만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전장 완료까지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해왕의 처지로는 바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몬스터를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다는 차크라에 한정했다.
 L1 차크라의 가격은 개당 이백만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몬스터의 부산물인 이 차크라를 왜 비싸게 살까?
 그 이유는 이 물질을 이용하여 인류에 유용한 에너지 및 의약품으로 재탄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해왕은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로 했다.
 멀리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지친 얼굴을 보았고, 기계 장치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누나를 끝으로 보았다.
 ‘꼭 돌아올 거야.’
 
 * * *
 
 병원을 나선 해왕은 시외버스를 타고 창공의 학살자가 출현한 현장으로 향했다.
 두려움과 떨림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부단히 노력했다.차창 밖 상공에서 창공의 학살자의 모습이 보인다.
 억눌렀던 두려움과 떨림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벌써부터 이럼 안 되잖아! 할 수 있어, 고작 L1 이잖아!’
 고작이라······ 자신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만한 단어가 아닐까.
 학살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의 기둥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가끔 해왕과 같은 목적, 혹은 다른 목적으로 창공의 학살자로 뛰어드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정부는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학살자가 출현한 현지로 군경을 파견하여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런다고 창공의 학살자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모두 다 막지는 못한다.
 빛의 기둥의 면적은 1제곱킬로미터.
 군경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해왕은 바로 그러한 곳을 발품을 팔아서 찾아냈다.
 그곳에서 해왕은 시간을 가늠했다.
 창공의 학살자에서 뿜어지는 저 빛의 기둥의 유지 시간은 여섯 시간이다.
 너무 일찍 들어가면 정부 소속 검투사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보호받는 처지가 된다.
 그건 해왕이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들어갈 타이밍을 지금처럼 차분히 가늠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감회와 함께 흘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재빨리 몸을 숨긴 해왕은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예의주시했다.
 ‘여자······ 아이?’
 해왕은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게 되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였는데, 그녀의 얼굴에선 그 또래의 소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활력과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녀 역시 해왕을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소녀의 눈동자에선 어째서인지 그를 알고 있는 듯한 의문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이 너무 빨리 스쳐지나갔기에 해왕은 이를 보지 못했다.
 다른 이가 더 있나 싶어서 주변을 경계하느라.
 안심한 해왕은 숨어 있던 장소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무표정의 소녀와 해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소녀는 해왕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상대가 연약한 소녀였기에 해왕은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해왕을 스쳐 지나갔다.
 해왕이 소녀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이에 얼굴을 찡그린 소녀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뭐지?”
 소녀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좀 전에 잠깐 드러낸 그 눈빛이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저게 뭔지는 너도 알 텐데?”
 “그런데?”
 소녀의 반문에 해왕은 일시 말문이 막혔다.
 곧 표정을 고친 해왕이 위협적인 어투로 말하였다.
 “죽고 싶어?”
 “이 손 치워.”
 소녀가 해왕의 손을 쳐다보며 말한다.
 해왕은 소녀의 어깨를 풀어주었다.
 “집에 가라. 부모님 걱정하신다.”
 “네 걱정이나 해.”
 소녀의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억양의 고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거친 소녀의 말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에게 해왕은 연장자로서 훈계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꼬맹이는 집에 가라.”
 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해왕의 위아래를 훑는다.
 사내 녀석이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봤다면 해왕은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바퀴벌레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시무룩한 소녀가 아닌가.
 그래서 남자의 넓은 마음을 발휘하여 그는 그녀의 태도를 용서한다.
 소녀는 이에 전혀 감동하지도, 감사해하지도 않았지만.
 “너나 돌아가.”
 “꼬맹이, 부모님 속 썩히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 저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
 해왕이 턱짓으로 빛의 기둥을 가리키며 근엄하게 충고한다.
 소녀가 피식 웃는다.
 그녀의 비웃음에 해왕은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저 녀석의 일에 간섭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못 본 척하면 될 일이다.
 세상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그 이상의 사람들이 힘든 일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고 동정하며 살다간 제 인생은 늘 뒷전이지 않겠는가.
 해왕의 마음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소녀의 시선도 피해 버린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빛이 기둥을 향해 걸어간다.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소녀가 돌아보지 않고 해왕에게 말하였다.
 아니, 그것은 충고였다.
 “돌아가라, 꼬맹이. 네 말대로 학살자의 전장은 장난이 아니니까.”
 해왕이 반응하기도 전에 소녀의 가녀린 육신은 빛의 기둥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뭐, 저딴 계집애가 다 있지?’
 똥 밟은 기분이다.
 
 웅성웅성.
 학살자의 안으로 들어선 해왕은 유명한 창공의 학살자를 관리하는 관리자 오르간을 두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창공의 학살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이었지만, 실제 창공의 학살자 내부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경우는 드물다.
 전 인류가 창공의 학살자를 레벨에 상관없이 경험했다면 지구의 인구는 지금보다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광장 한구석 외진 곳에 해왕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정부 소속 검투사들의 지도에 따라 납치된 민간인들은 성별과 나이대로 분류되어 그들과 팀을 만들었다.
 보통 검투사 1에 만간인 3의 비율이다.
 민간인보다 정부 소속 검투사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배치다.
 저 경우에는 전장 완료, 혹은 차크라가 목적이 아니다.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저처럼 조직된 팀은 전장으로 이동 뒤에는 꽁꽁 숨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광장에서 이곳이 가장 소란스럽다.
 그다음으로 소란스러운 곳은 검투사들이 모여 결성한 영리 법인인 길드의 생존 보험을 가입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선 길드에서 파견된 검투사들이 보험에 가입된 고객과 만나서 그들과 팀을 짠다.
 그 외 광장을 채운 사람들은 길드 소속이지만 전장 완료가 목적인 검투사 무리와 프리랜서 검투사로 불리는 자들이 광장 한곳에서 전장이 열리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 중에서 전장 완료 팀이 나오겠지.’
 해왕은 마지막 세 번째 무리를 눈여겨보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신도 저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날이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창공의 학살자는 납치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개인의 실력과 운에 맡긴다.
 그리고 실력과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최초 전장 완료 팀들에게는 해당 전장의 몬스터 한 마리가 주어지고, 그 외에도 몬스터를 해치우면 몬스터의 부산물인 차크라를 손에 쥐게 된다.
 전자의 몬스터를 사람들은 소환 몬스터, 줄여서 소몹이라 부른다.
 소몹은 일인 일 몹으로 만약 복수의 몬스터가 있다면 그 하나는 다른 이에게 판매도 가능하다.
 소몹은 L1에 불과하더라도 수억이다.
 해왕의 복장과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동일하다.
 군청색 상하의 긴팔, 긴 바지, 황색 부츠, 여기에 가죽 흉갑, 이 모두를 바슈크라운이라 부른다.
 바슈크라운은 창공의 학살자 방문 기념품 같은 것으로서, 지상에서도 자유롭게 소환하여 착용할 수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창공의 학살자는 모든 사람에게 바슈크라운과 같은 귀속 무기 역시 지급한다.
 방어구와 무기!
 이 두 가지 아이템이 없었다면 지상의 물건을 단 하나도 가져오지 못하는 창공의 학살자의 시스템 때문에 사람들의 생존율은 더더욱 희박했으리라.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두근두근.
 오르간이 형형한 안광을 토하며 눈을 뜨자 가공할 존재감이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광장 전체를 단숨에 채워 버렸다.
 꿀꺽.
 그 순간 모든 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침을 삼킨다.
 광장을 내려다보던 오르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네 명이 하나의 팀을 이룬다. 팀별로 각각의 전장이 주어질 것이다.]
 여기서 각각이란 동일한 환경의 전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각 팀은 무작위로 늪지, 산지, 평야, 시가지, 정글, 숲, 사막, 미로, 동굴, 빙하 지대······ 따위의 전장으로 가게 된다.
 전장의 면적은 10제곱킬로미터로 정해져 있다.
 [최초 전장 완료 팀에게는 해당 전장의 몬스터가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창공의 학살자의 규칙을 모르는 현대인은 거의 없다.
 해왕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막상 오르간의 입에서 설명을 듣게 되자 가슴에 와 닿는 느낌부터가 틀렸다.
 [지금부터 무기 선택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눈을 감으면 너희 앞에 무기고가 나타날 것이다. 너희의 생존에 무기는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해왕은 두 눈을 감았다.
 과연, 듣던 대로 그리고 오르간이 말한 내용처럼 눈앞에 무기고가 나타났다.
 무기고 안을 걸어 다닐 필요는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손바닥만 한 카드에 그려진 무기를 손으로 건드리면 된다.
 어렵지 않게 글라디우스와 라운드 쉴드가 그려진 카드를 발견한 해왕은 이를 건드렸다.
 무기의 선택 시간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었다.
 마음의 결정을 이미 내린 상태였기에 해왕은 다른 초보자들보다 일찍 눈을 떴다.
 [너희가 이미 착용 중인 바슈크라운은 ‘소환’, ‘해제’를 통해서 탈착의가 가능하다. 무기 역시 마찬가지다. 최초 전장 완료를 통해 얻게 될 소환 몬스터의 소환과 귀환 방법은 ‘수신호위 xx 현신’, 반대로 ‘수신호위 xx 귀환’의 방식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설명은 끝이다. 너희는 곧 전장에 투입될 것이다. 팀을 이룬 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으라.]
 드디어 시작이다.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의 치열한 사투가.
 ‘······기다려 줘.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게. 반드시!’
 내심 각오를 다지고 있던 그 순간 해왕은 누군가 자신의 손을 움켜잡는 것을 느꼈다.
 슈아아아아아아- 앙!
 ‘누, 누가 날?!’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해왕은 전장으로 빨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해왕은 연방 두 눈을 깜빡거리며 눈앞의 여자······ 아니, 소녀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넋 놓고 바라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해왕이 인상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 해왕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손을 붙잡은 이가 저 소녀였을 줄이야.
 골치 아픈 짐을 떠안게 되었다는 표정이 해왕의 얼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그와 반대로 소녀는 예의 그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스윽 둘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녀의 뻔뻔한 태도에 해왕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확 솟구쳤다.
 분노라기에는 값싼 감정이다.
 그것은 짜증이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시끄러워.”
 “뭐?”
 “주변에 몬스터가 있다면 너의 그 돼지 멱따는 소리에 몰려올 거야.”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해왕이 주변을 둘러본다.
 전장은 검투사들이 선호하는 시가지였다.
 그 이유는 생필품의 손쉬운 확보와 튼튼한 아지트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어서였다.
 몸도 마음도 약해 빠진 소녀와 엮인 건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전장 환경은 해왕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나 이도 잠시,
 “설명해 봐.”
 소녀가 해왕을 빤히 쳐다보다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해왕은 이를 비웃음이라 생각했다.
 꿈틀.
 “넌 동료도 없잖아? 하긴, 초짜인 널 누가 팀원으로 받아주겠어.”
 자신을 무시하는 소녀의 화끈한 말투에 해왕은 발끈했다.
 뭐,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나약한 녀석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계집애가, 보자보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네.”
 “계속 떠들래?”
 “뭐?”
 “내가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너 혼자 알아서 하든지.”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왕을 남겨두고 걸어간다.
 해왕은 순간 그녀를 내버려 둘까라는 비겁한 마음과 격돌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을 것이다.
 학살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범람하니 말이다.
 그 얄팍한 지식만으로는 결코 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성큼성큼 걸어간 해왕은 소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곤,
 “팀장은 나다. 불만 있어?”
 불만은 해왕의 표정에 가득했지, 소녀의 표정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소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쓸데없이 나대지 말고, 무섭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협조해라. 이 세 가지만 약속해.”
 해왕은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사람 하나 살리는 공덕이 산을 하나 옮기는 공덕보다 더 크다 하지 않던가.
 적선하는 셈 치자!
 소녀와 한 팀이 되기로 한 해왕의 결정 배경이었다.
 “원한다면.”
 “말버릇 하곤. 앞으로 말버릇 고쳐. 난 해왕이다, 공 해왕. 넌?”
 “유니.”
 “성은?”
 “알아서 뭐하게?”
 “끄응,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데 싹수없게 반말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소녀, 아니, 유니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해왕을 올려다보면서 특유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몇 살이지?”
 해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열일곱. 앞으로 말투와 호칭을 제대로 해. 알았어?”
 “난 스무 살이다.”
 “놀고 있네. 네가 스무 살이면 난 마흔이다. 어디서 나이 갖고 개수작이야.”
 “스무 살 맞아.”
 “넌 거울도 안 보냐?”
 “뭐?”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딱 봐도 열대여섯이구만. 어디서 구라치고 있어.”
 해왕의 말에 유니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자신의 사기가 들통 났기 때문에 무안해서 저러는 것이리라. 이렇게 짐작한 해왕이 유니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
 
 * * *
 
 학살자의 전장이 노을로 물들었다.
 해왕과 유니는 자신들의 아지트로 한 빌딩 17층에 위치한 사무실을 잡았다.
 단순한 사무실이라고 보기에는 내부 구조가 특이했는데, 침실, 칵테일 바, 화장실 겸 샤워실에 작은 회의실이 한 사무실에 다 갖추어져 있었다.
 문외한인 해왕이 보기에도 모든 게 최고급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짝 역시 강화 합금으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충격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침실은 유니, 네가 써. 이 오빠는 소파 쓸 테니까.”
 “그게 편하다면.”
 편한 대로 할 거였으면 해왕 자신이 침대를 쓰는 게 맞다.
 지금이라도 바꿔 버릴까.
 “말버릇 고쳐라. 어디서 꼬박꼬박 반말이야.”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고 했을 텐데.”
 해왕이 유니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곤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곤 훈계조로 말한다.
 “거울 잘 봐라. 저게 스무 살 얼굴이냐? 더 이상 통하지도 않는 구라 날리지 말고 지금부터 짐이나 옮기자. 건물 앞에 있던 편의점에서 식수랑 식료품 옮길 거야. 무거운 식수는 내가 들고 올 테니까, 넌 라면이랑 과자, 빵 같은 거 옮겨. 그건 할 수 있지?”
 유니는 해왕이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지 않자 슬슬 화가 치밀었다.
 입을 꾹 닫고 있는 유니의 머리카락을 해왕이 거칠게 흩뜨렸다.
 “정신 똑바로 챙겨. 너도 봤다시피 복도가 어둡다. 손전등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알았어?”
 “끄응, 네 걱정이나 해.”
 “또 반말.”
 해왕이 두 눈을 부릅뜬다.
 그러곤 유니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코를 잽싸게 꼬집는다.
 “아얏!”
 후다닥.
 뒤로 물러선 해왕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며,
 “피노키오 코가 되고 싶지 않으면 거짓말은 여기서 그만. 자, 가자.”
 제멋대로인 녀석보다는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고 따라주는 유니가 더 나을지 모른다.
 전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뭐해! 따라오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유니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스친다.
 ‘과격하고 거친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구석도 있네.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런 걸까?’
 짐작할 수조차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유니.
 “뭐해, 안 오고!”
 해왕이 소리쳐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유니가 그를 향해 걸어간다.
 
 인근 등산용품점에서 배낭을 가져온 해왕은 여기에다 식수를 꽉꽉 채웠다.
 들어보니 제법, 아니, 상당히 묵직했다. 이걸 메고 17층까지 걸어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안에서 단내가 솔솔 풍길 지경이다.
 ‘두 개는 무리겠어.’
 해왕은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유니는 과자와 라면, 빵 같은 가벼운 것으로 배낭을 가득 채웠다.
 부피는 그녀의 배낭이 더 컸지만 실제 무게는 해왕의 것이 훨씬 많이 나간다.
 가뿐하게 배낭을 짊어지는 유니를 보자 생수병 몇 개 더 넣어갖고 가라는 말이 해왕의 목구멍까지 치민다.
 “가자.”
 주변을 경계하며 편의점을 나선 해왕은 곧장 아지트로 삼고 있는 빌딩을 향해 들어갔다.
 그 뒤를 유니가 따랐다.
 둘은 곧 손전등에 의지하며 계단을 올랐다.
 이렇게 대여섯 차례 왕복하자 움직일 힘도 없는 해왕이다.
 ‘헉헉헉.’
 가쁜 숨을 마음껏 토해내고 싶었지만 유니가 보고 있어 꾹 눌러 내색하지 않았다.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니까.
 “피곤할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정찰하자.”
 소파에 드러누우며 해왕이 말하자 유니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체력이 형편없군.”
 이런다.
 “뭐?”
 “체력이 형편없다고 했어.”
 유니의 말에 해왕은 어이가 없었다.
 ‘과자 봉지 몇 개 들고 오른 거랑, 생수 가득 채워 들고 오른 거랑 같아? 개념 없는 계집애네.’
 두 눈이 있으니 자신이 무엇을 들고 왔는지 똑똑히 봤으리라.
 위로와 응원을 보내도 모자랄 판국에 도리어 비웃지 않는가.
 “좋아, 그럼 나랑 내기 한판 할까?”
 “말해.”
 “배낭에 생수를 가득 담아서 누가 더 빨리 오는지. 어때?”
 해왕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린다.
 하지만 웬걸.
 “그러지.”
 “뭐?”
 해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 하겠다는 거야?”
 “그래.”
 “괜한 오기 부리지 마라. 다친다.”
 “오긴지 아닌지 해보면 알잖아?”
 대체, 저 계집애는 뭘 믿고 저리 큰소리치는 걸까.
 주문 같은 걸 외우면 순식간에 슈퍼우먼으로 변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내기는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해왕이 보기에 이번 승부는 뻔하다.
 자신이 좀 지쳐 있긴 하지만.
 “후회하지 마라.”
 휙.
 유니가 비상계단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렇게 두 사람의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해왕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유니에게 실은 어마어마한 패가 있었음을.
 
 배낭에 열심히 생수를 담던 해왕이 동작을 멈춘 채 멍하니 한곳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몬스터였다.
 L1 창공의 학살자의 전장에 있어서는 안 될 몬스터, L3의 놀이었다.
 놀은 하이에나의 머리를 한 인간형 몬스터로 신장이 무려 삼 미터에, 인간처럼 무기까지 사용한다.
 툭.
 이를 본 해왕은 쥐고 있던 생수통을 바닥에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유니는 생수로 가득한 묵직한 배낭을 놀에게 들도록 명령했다.
 가뿐하게 배낭을 한 손에 든 놀이 유니를 따라 편의점을 나선다.
 그 모습에 기가 질린 해왕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자신이 백 퍼센트······.
 ‘······져, 졌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패배를.
 2장 든든한 동료를 얻다!
 
 
 
 
 
 해왕은 유니의 눈치를 살피는 입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L3의 놀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다행한 것은 유니가 자신의 소몹을 믿고 그 앞에서 생색내거나, 거들먹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투사는 아닐 거야. 아마 부모가 엄청난 부자겠지?’
 저 가녀린 체구를 보라, 그리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보드라운 저 손을 보라.
 육체를 단련한 흔적을 그녀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본이 곧 권력이요, 힘인 세상이다.
 그 힘은 강력한 만능열쇠처럼 모든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 어떤 것인지 서민인 해왕은 알지 못한다.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력이 지닌 힘은 짐작한다.
 유니의 놀은 바로 그 금력의 소산일 것이다.
 “뭘 보는 거지?”
 화들짝 놀란 해왕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꾸했다.
 “내가 뭘 봤다고 그래?”
 해는 한참 전에 저물었다.
 사방은 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10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빛과 인간은 여기에 다 모여 있다.
 “시가지는 검투사에게도 유리하지만 몬스터에게도 유리한 점이 많아. 그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유니에게 농락당한 기분을 뒤로하며 해왕이 진지하게 대답한다.
 어쨌든 상대에게는 든든한 L3의 소몹이 있다.
 이는 몬스터 사냥에도, 생존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차크라만 생각하자,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이든 내 알 바 아니잖아.’
 부담스러운 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든든한 팀원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쌍수를 들어 기뻐해야 마땅한 노릇이다.
 쪼개진 자존심이야······.
 ‘계속 볼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이렇게 무마시킨다.
 “일일이 다 뒤지고 다닐 수 없어, 그것도 알고 있지?”
 “유치원생 아니거든. 나도 공부할 만큼 했어.”
 후기를 통해서지만······.
 “우리가 놈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보단, 놈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게 더 쉬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해왕도 내심 그 같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단지, 구체적인 방법은 구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소란을 피워야지.”
 “소란?”
 “그래, 일단 그렇게만 알아둬. 피곤할 테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힘들고 긴장된 시간이 될 테니까.”
 주객이 전도된 분위기에 해왕은 그저 쓴웃음만 흘릴 뿐이다.
 내일이라, 과연 그녀는 어떤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줄까.
 ‘두고 보면 알겠지. 부잣집 딸내미의 만용인지 아닌지······.’
 
 * * *
 
 아침이 밝자 해왕과 유니는 컵라면과 빵으로 위장을 채워 넣었다.
 유니를 어려움 모르고 자란 부잣집 철부지 딸내미라고 내심 단정 지은 해왕이지만, 그녀의 서민적인 식성을 보자 혼란스러웠다.
 그렇다 보니 먹는 것도 잊고 유니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유니가 한마디 했다.
 “뭘 봐?”
 “보긴, 내가 뭘 봤다고 그래.”
 “사람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 아니다.”
 내심은 불만이 들끓었지만 주도권을 그녀에게 넘겨준 이상 이를 내색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해왕은 애써 속으로 삭혔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아지트가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해왕은 유니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기만 할 뿐, 간섭하진 않았다.
 언제 준비한 것일까. 망원경을 꺼내 든 유니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유니가 해왕에게로 걸어오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휙 던졌다.
 엉겁결에 이를 받아 든 해왕이 가방과 유니를 번갈아 보며 황당해했다.
 그를 스쳐 지나가며 유니가 명령조로,
 “따라와.”
 “이봐, 이건 왜 내게 주는 건데?”
 유니가 돌아서서 해왕을 본다.
 해왕도 이번엔 지지 않고 유니를 마주 쏘아본다.
 “너 학살자에 온 이유가 뭐지?”
 “네가 알아서 뭐하게?”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자, 결정해. 내 말을 따를 건지, 아니면 네 멋대로 할 건지.”
 유니의 요구에 해왕은 인상을 크게 찡그린다.
 그녀의 무표정과 퍼석한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저 태도에 비하면 처음에 본 그때가 양반도 상 양반이다.
 마음 같아서는 갈라서고 싶지만 어제 본 놀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차마 결별할 수 없었다.
 뭉개진 자존심은 자신을 죽일 수 없지만, 몬스터는 자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끄응. 좋아, 네 말을 따르지. 하지만 그 전에 차크라 분배는 어떻게 할 거지?”
 고개를 홱 돌리며 해왕이 말하자 유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반반.”
 그녀의 이 말이 해왕의 마음을 흔든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해왕은 유니의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러곤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이놈의 건물은 자가발전 시설도 없나?’
 내심 투덜거리며 말이다.
 건물을 나선 유니는 정찰은 하지 않고 길가에 세워진 차량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가지는 인간만 빼곤 그대로다.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던 유니는 빨간색 스포츠카 앞에서 그 걸음을 멈추었다.
 차종에 문외한인 해왕이었지만, 이런 그조차 이 차는 단숨에 알아보았다.
 ‘아우디다!’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에게 저 차는 그림의 떡이자, 손으로 쥘 수 없는 뭉게구름 같은 것이다.
 스포츠카의 시동을 건 유니가 그를 쳐다보며 말한다.
 창문 너머로 그녀의 자세를 보니 뭔가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보며 유니가 턱짓한다.
 “안 타?”
 “······너 면허는 있냐?”
 “나 스무 살이라고 말했을 텐데.”
 해왕은 좁쌀만큼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유니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차량 조작 능력은 결코 초보자의 포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조수석에 앉은 해왕은 좌석이 전하는 안전감과 쿠션감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화려한 계기판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내 평생에······ 아우디라니, 아우디를 다 타보다니······.’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앉으면 더 폼이 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런 설렘을 유니에게 들키기 싫은 해왕은 태연을 가장했지만 표정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상기된 해왕의 표정을 일별한 유니의 입가로 야릇한 미소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곧 스포츠카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흘끔흘끔.
 해왕의 시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집적이자 유니가 눈살을 찌푸린다.
 “할 말 있음 해.”
 “없어.”
 “운전하고 싶어?”
 순간적으로 해왕은 ‘예’라고 대답할 뻔했다.
 처음이야 서툴겠지만 이삼십 분만 운전하면 할 수 있을 듯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삼십 분이 내심 자신을 그녀에게 더 얕잡혀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오토바이라면 나도 한 자신 있는데.’
 겨우 마음을 추스른 해왕이 최대한 시크하게,
 “됐거든.”
 “하긴, 넌 미성년자였지.”
 유니의 말투에 해왕은 속으로 발끈했다.
 자신의 나이를 밝히는 게 아니었다.
 하필, 왜 본 나이를 밝혔을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배는 항구를 떠났고, 버스는 정류장을 일찌감치 떠났는데.
 해왕은 입을 꾹 닫는다.
 유니도 더 이상 해왕을 바라보지 않았다.
 부아아앙앙.
 갑자기 속도를 엄청 높이는 유니다.
 이에 당황한 해왕이 의자를 힘껏 움켜잡으며 당황하여 소리친다.
 “이, 이봐! 너무 빠르잖아!”
 “어젯밤에 내 얘기 벌써 까먹은 거야? 기억력이 나쁘군.”
 해왕의 시선은 전방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모른다.
 한마디로 얼어 있었다.
 “뭐, 뭐?”
 “몸에 힘 빼. 그리고 어제 분명하게 말했었잖아. 소란을 일으킬 거라고.”
 그녀의 대답에 해왕은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해왕도 나름 고심하여 생각해 둔 작전이 있었다. 오디오나 혹은 소리가 크게 나는 물건을 이용하여 몬스터를 유인하는 방법이었다.
 지금처럼 스스로 미끼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 * *
 
 텅 빈 도로 위로 두 사람을 태운 스포츠카는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질주한다.
 폭주족이 따로 없을 만큼 무지막지한 속도다.
 그렇게 한참을 도로 위의 무법자처럼 달리던 유니는 도로에 면한 대형 주유소 앞에 차를 세웠다.
 딸깍.
 주유구를 연 유니가 이번에도 능숙한 솜씨로 기름을 넣었다.
 해왕의 정신은 아직도 무시무시한 속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 녀석······ 절대! 제 정신이 아니야!’
 아무래도 여기서 저 여자와 작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행동했다가는 몬스터는커녕 그 전에 심장 마비로 죽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은 차량에서 벌써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들썩들썩.
 “음악이 마음에 드나 보지?”
 주유를 끝낸 유니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자판기를 부수고는 그 안에서 이온음료를 집어왔다.
 차량 밖으로 나가기 위해 움직이던 해왕의 모습은 확실히 음악에 몸을 맡긴 듯 보인다.
 휘익.
 캔 음료가 해왕의 허벅지 양쪽 중간에 툭 떨어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왕은 자신이 안전벨트를 하고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바, 바보같이 이게 뭐야!’
 그의 얼굴은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이쯤 되니, 쪽팔려서 이제는 차량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그놈의 오기와 자존심이 뭔지······.
 해왕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캔 음료를 땄다. 그런 그의 손끝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이를 본 유니가 피식 웃으며 차량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해왕은 그런 유니의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과속에 기물 파손이 몸에 밴 것 같다.
 혹시 그녀는 사회에서 억압받던 자아를 학살자의 전장에서 풀려는 것이 아닐까.
 가끔 이런 이유로 학살자의 전장을 제 발로 찾아들어오는 자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었다.
 하긴 맨몸뚱이로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타고 노는 자들도 있는데,
 “너······ 사회에 불만 있냐? 아니면 가정에 문제라도?”
 유니의 눈치를 살피며 해왕이 말을 던졌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해왕을 잠시 마주보던 유니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부아아아앙-!
 차는 총알처럼 주유소를 등지고 다시금 도로 위를 질주했다.
 차량이 일으키는 굉음과 음악 소리가 도심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소란은 또 다른 누군가도 깨웠다.
 그곳은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하철 운행이 정지된 지하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 그것은······ 파란 안광들이었다.
 
 * * *
 
 지하도 입구에서 위험한 생명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체구에 등이 굽은 추악한 외모를 가진 고블린이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놈들은 길고 굽은 매부리코를 연방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뾰족하고 큰 귀를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거리기도 했다.
 지하도에서 나온 고블린들로 인해 왕복 3차선 도로 하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강렬한 엔진음과 음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놈들의 작고 추악한 얼굴이 일제히 한곳으로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움직인다.
 “크르르르.”
 “고브브붑.”
 놈들의 술렁거림은 작은 파도에서 곧 큰 파도로 바뀌었다.
 끼이이익.
 지면과 강력한 마찰을 일으킨 타이에어서 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 연기를 엉덩이로 쳐낸 빨간 스포츠카는 곧장 180도 회전하여 달려온 곳으로 급히 머리를 돌렸다.
 차량의 급선회에 해왕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해왕이 조수석에서 상체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고블린의 영향도 있었고, 급선회의 영향도 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쿵쿵쿵쿵-!
 이때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몬스터 고블린을 목격하자 해왕의 심장은 고장 난 물레방아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는 해왕과 달리 유니는 차분한 신색으로 놈들을 바라보았다.
 이들과 고블린의 거리는 불과 30미터 남짓.
 발이 빠른 고블린의 경우 전력으로 달리면 불과 수 초 만에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
 인간과 몬스터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유니가 음악을 끄며 해왕에게 말한다.
 “꼭 잡아.”
 “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다.
 “고브브브브으으으!”
 “키에에에엑!”
 고블린 떼가 일제히 움직이자 거리 전체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 거대한 몬스터의 해일에 휩쓸렸다간 뼛조각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것도 놈들의 손에 붙잡혔을 때의 상황.
 ‘확실히 스포츠카가 속도는 짱짱하구나!’
 고블린이 적토마 뺨치게 빠르다 할지라도 어찌 이 스포츠카를 따르리오.
 이대로 달아난다면 틀림없이 놈들은 분명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 되리라.
 하지만 놈들에게서 도망치려 학살자의 전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놈들을 상대로 여기서 싸울 수도 없잖아.’
 해왕이 고개를 돌려 유니의 표정을 살폈다.
 ‘유인하고 있는 건가? 대체, 어디로!’
 앞서 경험한 스포츠카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어찌 해왕이 잊으랴.
 그때와 지금의 속도를 비교하면 이 속도는 굼벵이가 기어가는 수준이다.
 “유인하는 거야?”
 “학살자에 놀러왔어?”
 “뭐?”
 “저기 저 앞 좌측 일방통행로로 빠질 거야. 거기서 놈들과 싸운다.”
 유니의 태도는 단호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유니에게서 이 말을 듣자 해왕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지금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심기일전한 표정으로 해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을 위해서 피땀을 흘려가며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 노력이 이곳에서 성과를 낼까? 아직은 미지수다.
 두근두근두근.
 ‘지레 겁먹지 말자!’
 빌딩 사이의 일방통행로는 폭 3미터에 길이 25미터로, 이 길 끝에 유니는 차를 멈춘 뒤 후방을 주시했다.
 몇 분이 흐르자 고블린들이 무더기로 맞은편 도로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폭 3미터의 도로는 놈들로 인해 금세 빽빽해졌다.
 해왕은 놈들의 숫자와 흉측한 모습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반면 유니의 얼굴에선 당황한 기미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유니는 쇼트 보우를 소환했다.
 길이 100㎝, 무게 0.5~0.8㎏의 비교적 가벼운 원거리 무기였다.
 침착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시위를 당긴 유니를 보고 있노라니 해왕은 마음이 절로 든든해졌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퉁.
 화살이 꼬리를 흔들며 힘차게 고블린을 향해 날아갔다.
 매서운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간 화살이 고블린의 작은 머리통에 깊게 박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니는 침착했다.
 바퀴벌레 한 마리만 봐도 기겁하는 여자들(누나와 엄마)을 보고 자란 해왕은 그래서 이 장면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퉁.
 이번에도 유니가 날린 화살은 어김없이 고블린의 머리통에 틀어박힌다.
 앞서의 놈보다 좀 더 가까워서일까?
 파골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꿀꺽!
 “고부부부부!”
 “구블르르르!”
 제 동족이 죽임을 당하자 고블린들의 흥분과 분노와 살기가 산악처럼 일어선다.
 놈들의 마음은 유니를 덮쳐 갈가리 찢어 죽이고 있었으나 그 육신은 좁은 도로에 끼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지형지물의 중요함을 해왕은 새삼 실감한다.
 그러나 마냥 유니에게 의지한 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블린들이 지금은 부대껴 저리 버둥거리고 있지만 계속 저 상황이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해왕은 자신의 무기인 한 손 검 글라디우스와 한 손 방패인 라운드 쉴드를 움켜쥐고 유니 옆에 섰다.
 이런 그를 슬쩍 쳐다보던 유니는 별말 없이 두 번째 화살을 활시위에 장전하여 당겼다.
 투웅.
 또다시 날아간 화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블린을 없앴다.
 화살을 날리는 유니의 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차크라의 개수도 늘어났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해.’
 해왕은 유니 곁을 묵묵히 지켰다.
 지금은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었다.
 사람은 주제와 분수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다가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수렁에 빠뜨린다.
 그가 탐독한 후기에서도 머리와 몸뚱이가 경박한 자들로 인한 피해 사례가 적지 않았다.
 
 -침착한 허접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성격이 급한 허접은 용서할 수 없다!
 
 검투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로, 팀장의 경우 이를 머리에 각인처럼 새기고 팀원을 뽑는다.
 고블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앞으로 튀어나오는 고블린의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해왕은 드디어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전방에 없었다.
 유니가 자신의 몬스터를 소환하여 도로 중앙에 떡하니 세워 버렸기 때문이다.
 신장이 무려 3미터에 달하는 놀이 그곳에 서 있자 벽 하나가 세워진 느낌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놀은 가늘고 긴 포효를 터뜨리며 제 신장만 한 금쇄봉으로 바닥을 쿵 하고 내리찧었다.
 금쇄봉은 단단한 나무 봉을 육각 혹은 팔각으로 깎아서 각 면에 보강판과 가시를 박은 무기로 무시무시한 외형을 자랑했다.
 놀의 등장으로 인해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선두의 고블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카리스마 쩌네······.’
 만약 자신이 고블린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생각만으로도 해왕은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놀의 금쇄봉이 허공을 맹렬히 갈랐다.
 고블린은 호랑이를 만난 양 떼처럼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유니는 가끔 지원 사격만 한다.
 ‘L1은 저 여자 혼자서도 충분하겠네.’
 해왕은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유니가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뭐해?”
 “뭐?”
 “저기 저놈, 네가 상대해. 난 피곤하니까.”
 유니가 전방을 향해 턱짓한 끝에는 고블린 한 마리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너?”
 “그런 얼굴로 볼 필요 없어. 진짜,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가서 잡아.”
 몬스터를 선물한 그녀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하나.
 짧고 강렬하게 유니를 쳐다본 후 해왕은 고블린을 향해 마주 달려간다.
 이런 그의 얼굴에, 그리고 마음속에는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밥값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이겠노라는 절박감뿐이었다, 서글프게도.
 그러나 이도 잠시, 고블린의 무기는 민첩함과 갈고리 모양의 위험한 손톱이다.
 놈의 덩치가 작다고 무시했다가는 도리어 크게 당할 수 있었다.
 터엉!
 고블린이 선제공격에 나섰다.
 놈의 손톱을 라운드 쉴드로 막아낸 해왕은 글라디우스로 놈을 벴다.
 뒤로 훌쩍 물러선 놈은 낮게 으르렁 울면서 신중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고블린의 얼굴을 보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게 놈을 상대하자.’
 해왕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고블린을 공격했다.
 실전은 처음이다.
 그래서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고블린이 그의 공격을 피해 벽면을 디딤판 삼아서 몸을 날렸다.
 역시나 재빠르다.
 라운드 쉴드를 휘둘러 놈의 공격을 쳐낸 해왕은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놈이 허공에서 몸을 홱 틀었다.
 글라디우스의 날이 놈의 옆구리를 가볍게 스친다.
 바닥에 떨어진 몇 방울의 혈액과 놈의 분노성이 해왕의 정신을 후려친다.
 몸의 중심을 아래로 내린 해왕은 고블린의 착지 예상 지점을 향해 글라디우스를 크게 휘둘렀다.
 짧은 순간에 내린 그의 판단과 결정은 주효했다.
 서걱.
 고블린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이번엔 라운드 쉴드를 휘둘러 그 머리통을 후려쳐 버렸다.
 터엉!
 “끼에에엑!”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을 향해 이번엔 제대로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놈의 명치를 글라디우스가 관통하자, 재빨리 손목을 비틀어 옆으로 글라디우스를 움직인다.
 상체의 절반이 잘린 고블린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헉헉헉!’
 해왕으로선 이제 고작 L1의 몬스터 한 마리를 상대했을 뿐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사지가 떨려왔다.
 체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난생처음 생물을 죽인 데서 발생한 전율이었다.
 휙휙.
 해왕의 양어깨를 두 대의 화살이 시간 차를 두고 스쳐 지나갔다.
 “키에엑!”
 “켁!”
 이내 이마와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고블린 두 마리가 풀썩 쓰러졌다.
 “적은 하나가 아니다.”
 유니가 그를 향해 무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해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자신을 크게 자책했다.
 ‘정신 차리자. 공해왕, 정신!’
 자신의 방심과 실수에 그는 입안이 몹시 썼다.
 초보자들이 흔히 범하는 답답한 실수를 자기가 저질렀다는 데 대한 자책이었다.
 고블린들은 놀을 직접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녀석을 지나치는 녀석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놀 역시 놀고 있지 않았지만,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세 마리의 고블린이 한꺼번에 놀을 지나쳤다.
 해왕은 이를 악물고 길목을 막아섰다.
 뒷전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두 발의 화살이 해왕을 스쳐 지나갔고, 그 화살은 어김없이 고블린에게 명중한다.
 눈앞에서 쓰러지는 두 마리의 고블린을 보며 해왕이 움찔한다.
 유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대해.”
 엄격한 교관 같다.
 정신이 번쩍 든 해왕은 고블린을 향해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처음과 달리 그의 표정과 마음은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흡사 비 온 뒤의 땅처럼.
 
 * * *
 
 고블린이 후퇴하였다.
 놈들이 떠난 그 자리에 떨어진 차크라를 수거한 해왕과 유니는 아지트로 돌아왔다.
 유니는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해왕은 그런 유니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 차크라.”
 해왕이 유니에게 수거한 차크라를 내밀었다.
 “됐어.”
 “······?”
 “네가 갖고 있으라고. 수익은 반반이다.”
 과자 봉지를 뜯으며 유니가 말하였다.
 해왕의 마음은 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수익의 반반을 가지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손해였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확실한 이득이다.
 하지만 해왕은 그녀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알량한 사내의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헐값에 처분할 수 있다.
 “고, 고마워.”
 그래도 양심이 있기에 해왕은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기 싫었지만 가만히 있는 건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였다.
 처음으로 유니의 시선이 과자가 아닌 해왕에게로 움직였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유니의 시선이 해왕은 몹시 아프고 뜨거웠다.
 “싫든 좋든, 너와 난 동료지. 그러니······ 됐다, 그만 가서 자라.”
 이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처럼 과자를 먹기 시작한다.
 해왕은 그녀가 해준 ‘동료’라는 말이 귓속에서 한참이나 맴돌았다.
 한참 동안.
 ‘동료······ 동료라······.’
 이 말을 되새기는 해왕의 입가에 씁쓸하지만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 * *
 
 이른 아침부터 상점으로 달려간 해왕은 그곳에서 쌀과 밑반찬을 갖고 아지트로 올라왔다.
 밤새 생각해 보니 그녀는 자신에게 안정적인 상황에서 실전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은혜로 규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은인에게 아침상쯤이야.
 한참을 부산하게 움직인 끝에 해왕은 나쁘지 않은 아침상을 차릴 수 있었다.
 ‘이거······ 너무 속 보이는 짓이려나?’
 막상 아침상을 마련해 놓고 보니 상대가 이를 아부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은 어제부로 내다 버리긴 했지만 그녀에게 아첨꾼으로 찍히는 것만은 싫었다.
 그렇다고 준비한 상을 치울 수도 없으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해왕은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론 변명거리도 마련해 두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유니가 나온다.
 “왜?”
 “밥 먹으라고.”
 유니의 눈길을 피한 해왕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밥?”
 “그래.”
 여전히 해왕은 유니를 보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해왕의 태도가 이상할 텐데, 유니는 이를 묻지 않았다.
 “그러지.”
 식당으로 먼저 간 해왕은 유니를 기다렸다.
 앉아서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울까? 서서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울까? 그렇게 그는 고민했다.
 고심 끝에 해왕은 앉아서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하필, 그때 유니가 들어오면서 해왕은 앉은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맞이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네가 한 거야?”
 유니의 눈가에 야릇한 느낌의 이채가 스쳤다.
 해왕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저 그 자신의 당혹감을 다스리기에도 그는 급급했다.
 “어.”
 간신히 대답한 해왕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해왕의 행동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지만, 유니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애타는 건 해왕이었다.
 “안 물어봐, 내가 왜 상을 차렸는지?”
 “꼭 물어봐야 하는 건가?”
 담담하고 무심한 그녀의 표정 앞에서 해왕은 고심 끝에 생각해 놓았던 변명거리를 꺼내지 못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후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식사에만 열중했다.
 해왕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났다.
 유니가 빈 그릇을 모으자 해왕이 서둘러 말한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빈 그릇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의 손이 순간 겹쳐진다.
 찌릿.
 깜짝 놀란 해왕이 뒤로 손을 빼며 어색함을 드러낸다.
 반면 유니는 태연했다.
 “됐어.”
 “아, 아냐. 내가.”
 “어제도 말했지만, 너와 난 동료야.”
 수익을 정확히 반으로 분배했듯이 일도 분담하자는 의미일까? 해왕은 유니가 의외로 괜찮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잘 대해주자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앞설 뿐이다.
 해왕을 쳐다보던 유니가 시선을 거두고는 탕비실로 향했다.
 유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왕이 입술을 꼼질거리다가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너······ 흐음, 정말 스무 살이야?”
 “그래.”
 “으음, 그럼 앞으로 호칭을 누······ 누······.”
 그녀가 말한 나이가 사실이라면 친누나 진단과 그녀는 동갑이다.
 당연히 누나라고 불러줘야 한다.
 그 편이 좀 더 편하고 수월한 방향으로 관계가 쭉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계산을.
 ‘빈대 붙을 생각을 하는 건가? 나란 놈도······ 휴우.’
 이런 생각이 들자 누나라는 호칭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유니가 말하였다.
 “됐어, 그냥 유니라고 불러.”
 마음이 편해져야 정상이지만 도리어 더 불편하다.
 시원하게 앞으로 누나라고 부를게요. 이렇게 정리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해왕은 자신이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호칭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유니의 말이 더 빨랐다.
 “늙은 여자 취급 받는 거······ 싫어.”
 이 말을 끝으로 유니는 탕비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머엉.
 ‘무슨 뜻이지, 늙은 여자 취급 받기 싫다는 게?’
 해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해답이 보이지 않자 이 생각을 머리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생수랑 과자를 갖다놔야겠네.”
 아직 검투사로서의 역량이 떨어지는 해왕이다 보니, 유니에게 다른 방향으로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온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좀 전 유니의 말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늙은 여자 취급받기 싫다는 그녀의 말이.
 녹초가 되어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유니가 다가온다.
 “가자.”
 “어······ 흐음, 예.”
 “그냥 편하게 대해.”
 상대가 불편을 느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해왕은 두 눈 딱 감고 이전처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어제처럼 놈들을 낚을 건가?”
 지형의 불리한 점을 깨닫자 고블린들은 무모한 공격 대신 후퇴를 결정했다.
 달아나는 놈들을 추격했다가는 이쪽이 위험할 수 있기에 추격은 엄두조차 못했다.
 이제 놈들도 자신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유니를 두려워할 테니 보다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어제와 같은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몬스터니까 어쩜 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유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계획이 있어.”
 3장 깨지거나, 단단해지거나······ 괴물이 되거나
 
 
 
 
 
 해왕은 어느 지상 15층 건물 안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옮겨놓고 있었다.
 그의 파트너인 유니는 주변에 없었다.
 그 혼자만이 지금 아지트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이 건물에 있었다.
 그러길 벌써 세 시간째였다.
 “헉헉, 죽을 맛이네.”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긴다.
 해왕의 온몸은 근육통을 호소하며 고장 난 엔진처럼 곧 꺼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덜덜거린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그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앉자마자 그는 생수 한 통을 앉은 자리에서 두 개나 비운다.
 땀과 먼지와 피곤이 범벅이 되었던 그의 얼굴 위로 그제야 사람의 혈색이 감돌았다.
 “작전의 절반은 성공하긴 했는데······ 과연, 그녀의 작전대로 성공할까?”
 해왕은 이 건물의 입구와 각층의 출입구마다 기름통을 옮겨다 놓았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보니 매초, 매분이 그에겐 긴장의 연속······ 아니, 중첩이었다.
 이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곳으로 유니를 불러들일 때다.
 그러나 그 전에 점검할 곳이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해왕은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건물 옥상에 다다른 해왕이 이 건물과 와이어로 연결된 건물을 본다.
 탱탱.
 와이이의 장력을 확인한 해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저기까지 무사히 착지할 때까지 이 녀석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이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이 와이어가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면 작전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와이어를 매만지는 해왕의 손길에선 그의 간절한 마음이 여실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상념을 털어낸 해왕은 무전기로 유니에게 연락하였다.
 시가지는 인간들이 이용할 만한 물건들이 널리고 널렸다.
 역시 모든 검투사가 선호할 만한 전장이다.
 “유니, 나와라. 나와라, 오버.”
 치이이익.
 [어떻게 됐어?]
 “배치 완료.”
 [이십 분 내로 갈게.]
 “얼마나 따라붙었어?”
 [좀 돼.]
 “알았어. 지하주차장은 봉쇄했으니까. 일층 현관을 이용해서 들어와.”
 사전에 유니는 해왕과 이 건물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니 굳이 이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로비에서 봐.]
 “알았어.”
 드디어 시작이다.
 
 * * *
 
 엔진의 강력한 소리와 함께 유니가 몰던 스포츠카가 건물 앞에서 멈춘다.
 그녀를 쫓아온 한 무리의 고블린이 괴성을 내지르며 저만치서 달려온다.
 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유니는 놈들을 한번 스윽 쓸어본 뒤 여유로운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저건가?’
 천으로 덮은 물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해왕이 비상계단 문을 열고 유니를 향해 손짓한다.
 “왔어.”
 “어.”
 “놈들은?”
 “곧 들이닥칠 거야.”
 “좀 떨리네.”
 “수고했어.”
 유니의 손이 해왕의 어깨를 툭툭 친다.
 처음이다.
 그녀와의 스킨십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해왕을 유니가 스쳐갔다.
 해왕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자 유니가 멈춰 서서 그를 본다.
 “안 와?”
 “가, 갈게. 그런데 놈들이 따라올까? 여기서도 유인해야 하지 않아?”
 해왕이 다소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하자 유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선 우리보다 놈들이 유리해. 괜히 어물거렸다간 도리어 당해.”
 “하긴, 어둠은 놈들의 편일 테니.”
 이런 일에 유니는 경험이 많은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보다 불과 세 살 많은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해왕은 그제야 유니의 과거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한가롭게 개인사를 묻는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3층에 막 도착했을 때, 유니를 뒤쫓던 고블린들은 건물 현관을 때려 부수며 난입을 시작했다.
 비상계단 문을 활짝 열어놓았기에 놈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킁킁.
 익숙한 어둠과 적의 냄새.
 땀으로 번들거리는 놈들의 작고 추악한 얼굴에 박힌 두 눈이 적개심으로 반들거린다.
 “고브르.”
 “고브르르!”
 저희끼리 통하는 언어로 사기를 북돋은 놈들이 날듯이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놈들의 괴성과 발소리를 들은 해왕과 유니는 걸음을 서둘렀다.
 옥상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간 해왕과 유니는 미리 설치해 두었던 와이어를 타고 맞은편 건물로 쭉 미끄러졌다.
 해왕이 걱정한 것과 달리 와이어는 잘 버텨주었다.
 해왕은 글라디우스로 와이어를 잘랐다.
 팽팽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매서운 회초리 소리를 낸다.
 “스위치는?”
 유니가 해왕을 보며 말한다.
 해왕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더듬더듬.
 해왕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품속에 잘 챙겨둔 발화 스위치 장치가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어, 없어!”
 다 차려놓은 밥상이었다, 가볍게 숟가락 하나만 올리면 작전 대성공이다.
 한데 자신의 실수로 그만 진수성찬을 엎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자책감에 짓눌린 채 신음하는 해왕에게 유니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맥 빠진 표정은 그만해.”
 “미, 미안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불을 붙이면 될 거야. 그건 내가 할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청하는 해왕이었다.
 “됐어.”
 “하지만 불을 붙여야 작전이······.”
 “내가 알아서 해.”
 “뭐?”
 “기다려.”
 유니는 거리 위로 자신의 소환 몬스터인 놀을 소환했다.
 곧이어 화살 끝을 천으로 둘둘 감은 뒤 여기에 불을 붙여 놀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불화살은 정확하게 놀의 어깨에 박혀서 활활 타올랐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작전 장소인 건물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해왕은 당황한 표정으로 유니를 쳐다보았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유니의 포커페이스에 해왕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몹이라 잿더미가 되어도 다시 소환을 하게 되면 멀쩡하겠지만, 지금 저 녀석이 받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도, 독한 여자다!’
 그녀의 표정에서 어떤 종류라도 좋으니 감정의 실오라기라도 드러났다면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니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계획은 세우기 쉽지만 그 계획을 완벽하게 끝내기는 쉽지 않아. 그래서 변수를 늘 생각해 둬야 해.”
 해왕은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유니의 소환 몬스터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실수가 아닌가.
 자신만 실수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소환 몬스터는 저처럼 고통 받지 않았을 터다.
 내심 유니를 욕한 자신이 오히려 더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똥 묻은 놈이 오히려 겨 묻은 놈 나무라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해왕이 자책감에 빠져 시무룩한 사이 놀은 기름통이 쌓여진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름통을 덮은 천은 불에 잘 타는 소재였기에 거기선 금세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빠른 속도로 주변으로 퍼져 나가서 현관을 막아버렸다.
 사납게 날름거리는 그 빨간 불길에 해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현관은 막았지만 각 층에 설치한 기름통에 불을 붙일 수단이 없······?!’
 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니가 불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불화살을 날리는 곳은 다름 아닌, 유니의 지시로 해왕이 앞서 창문을 열어둔 곳이다.
 이마저도 계산한 그녀가 자신에게 창문을 열어놓으라 했지 싶다.
 매캐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건물을 달군다.
 “고브브브붑!”
 “고브르르르릅!”
 유니를 쫓아 옥상으로 올라왔던 고블린들은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연기와 열기에 놀라 허둥거리며 한꺼번에 출입구로 달려간다.
 맞은편 건물 옥상 난간에 다리 하나를 척 올린 유니는 무심한 표정으로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탁.
 유니가 상념에 빠진 해왕의 어깨를 친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해왕이 유니를 바라보았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유니가 말한다.
 “안 가?”
 “어, 어디?”
 해왕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자신은 어리바리한 바보멍청이로 보일 것이다.
 해왕이 재빨리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가.”
 두 사람은 옥상에서 한달음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와장창!
 휙.
 철퍼덕.
 공포에 질린 고블린들이 불길을 피해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거리는 놈들이 지르는 비명과 신음과 단발마로 가득했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고, 팔이 부러진 놈들이 불길에 휩싸인 건물에서 멀어지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들의 몸뚱이 위로 몸을 날린 고블린들이 떨어져서 충돌한다.
 물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그곳에서 난다.
 휙휙휙.
 “고브브브ㅡ!”
 “켁!”
 “끄에에에에엑!”
 목불인견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놈들이 느끼고 있을 공포와 고통이 세찬 파도처럼 몰려와 해왕을 휘감는다.
 부르르.
 해왕은 저놈들을 죽였다.
 하지만 당시나 그 후에도 놈들에 대한 연민은 그의 마음에 없었다.
 한데, 지금은 감회가 좀 달랐다.
 감성에 빠져 흔들리는 해왕을 보았지만, 유니는 그를 위로하거나 격려하지 않았다.
 그 옆에 서서 그녀는 부상당한 고블린들을 향해 냉정하게 화살을 날렸다.
 그녀의 활 솜씨는 날아가는 새도 맞출 만큼 대단하다.
 그런 그녀가 버둥거리는 놈들을 못 맞출 리 만무하다.
 혼란한 거리에서 놈들의 신음 소리가 하나둘 그렇게 줄어들어 갔다.
 그러나 줄어드는 신음보다 유입되는 신음 소리가 아직은 더 많았다.
 유니는 가만있는 해왕을 재촉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퉁퉁퉁퉁-!
 그저 묵묵히 그의 옆에서 말없이 화살을 날릴 뿐이다.
 바람을 가르는 단호한 그 파공성이 해왕의 엉킨 감정을 잘라주었다.
 연민의 감정을 그렇게 끊은 해왕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몬스터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유약한 자의 연민의 망설임보단 차라리 모질고 독한 자의 칼이 저 고통 받는 괴물들에게 축복이리라.
 잠시 걸음을 멈춘 해왕이 유니를 돌아본다.
 그녀의 무표정과 기계적인 움직임이 해왕은 따뜻한 격려 같았다.
 훗날 자신도 저 여자처럼 두꺼운 포커페이스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머리가 반쯤 깨진 고블린이 그를 향해 기어왔다.
 가늘고 작은 팔을 파들파들 떨며 그에게 무언가를 갈구한다.
 녀석은 해왕을 자신의 동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희가 바라는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가길 기도하마.’
 푸욱.
 “끄에에에엑!”
 살육을 시작했다.
 첫 살해 때와는 다른 좀 더 단호하고 굳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간의 수련의 결과가 드러나고 있었고, 단호함이 곁들어지자 생각 이상으로 해왕은 몬스터들을 잘 상대하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사신이 되어 몬스터의 몸을 찌르고 베고 다시 찌르고 벴다.
 날이 저물 때까지 그는 이 행동을 반복했다.
 뫼비우스의 띠를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끼에에에에에-!”
 철푸덕, 철푸덕······ 철푸덕.
 화르륵!
 적어도 이 거리에서, 아니 이 전장에서의 해왕과 유니는 학살자였다.
 
 * * *
 
 끝나지 않는 역사란 없다. 마찬가지로 끝없는 고통 또한 없다.
 건물을 뒤덮은 불길도 잦아들었다.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에서 올라온 연기는 달빛을 타고 밤하늘로 올라간다.
 거리를 채웠던 몬스터의 사체, 놈들의 체액과 내장으로 범람하던 거리는 마른 흔적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뿐이다.
 메마르고 딱딱한 묘지 위에서 이 세계의 작은 이방인이 서 있었다.
 “먹어.”
 유니가 인근 편의점에서 생수와 빵을 가져왔다.
 해왕은 묵묵히 이를 받아들었을 뿐,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빵 한 봉지를 다 먹은 유니가 이번엔 대용량의 과자 봉지를 뜯었다.
 와삭와삭.
 이 소리가 해왕의 귀에 거슬렸나 보다.
 보일 듯 말 듯 인상을 구긴 해왕은 난 눈으로 유니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의 성난 눈은 곧 허무를 담고 풀렸으며, 빳빳한 고개는 태산을 이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아래로 움직였다.
 하아.
 한숨이 꾹 다문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한숨 소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유니가 입을 열었다.
 “전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치료를 받게 되지. 뭘 모르는 녀석들은 그들이 심약한 자들이라고 말들 하지만 직접 겪게 되면 멀쩡한 사람도 변하지 않을 수 없어.”
 “어떻게 변하지?”
 해왕을 잠시 쳐다보던 유니가 시선을 전방으로 던지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깨지거나, 단단해지거나 혹은······.”
 “······혹은?”
 “괴물이 되지.”
 꿈틀.
 해왕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다.
 “마그네슘 부족이군.”
 “뭐?”
 “얼굴 경련. 마그네슘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티브이에서 그러더군.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맞을 거야.”
 고차원의 유머일까? 여기서 웃어줘야 할까? 아니면, 진지한 조언? 짧은 순간 해왕은 많은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 생각은 곧 공허에 파묻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는 너는 뭐지?”
 진지한 태도로 해왕이 유니에게 되물었다.
 유니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이전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서 해왕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매력적인 여성의 기품이랄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되어 해왕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머엉.
 유니의 시선이 와 닿자 해왕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흠칫 떨었다.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한 해왕은 고개를 푹 숙였다.
 “괴물.”
 해왕은 유니의 대답을 한참 후에나 들을 수 있었다.
 괴물이라······ 세상이 저런 괴물로 넘쳐난다면 그 세상은 꽃들의 향연장이지 않을까 싶다.
 남자라면 누구나 환영해 마지않을.
 ‘뭐, 뭐야? 내가 지금 저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거야?’
 자신의 내심을 강력하게 부정한 해왕이 의도적으로 인상을 확 찌푸렸다.
 “자기 비하가 심하군.”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유니의 시선이 다시 해왕에게로 향했다.
 모닥불이 담긴 유니의 연갈색 눈동자가 마치 깊고 어두운 동굴 속 괴물의 눈처럼 보였다.
 ‘불빛 때문이겠지.’
 해왕은 유니의 눈동자에서 스쳐본 그것을 부정했다.
 한 손 가득 과자를 집어 든 유니가 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와삭, 오물오물.
 무표정으로 과자를 먹는 여자, 거기에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바람이 모닥불을 흔들어 주변의 그림자를 춤추게 한다.
 자신의 그림자였지만, 그 그림자가 섬뜩하고 두렵다.
 “다음에도 올 거지? 전장으로.”
 “뭐?”
 “올 거냐고.”
 “어딜?”
 “학살자의 전장.”
 낮은 침음과 함께 해왕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다.
 이 손으로 살고자 하는 것들의 살을 가르고, 찢고, 뼈를 자르고, 부수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 여운은 이 손에서, 아니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고이 잠들기 힘들 것 같았다.
 몬스턴데, 없어져야 할 몬스터인데, 혐오스러운 그 생물을 죽였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다니.
 ‘제길.’
 유니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쉽지 않아.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고 그 속에서 발악하며 뭔가를 끊임없이 죽이고, 죽일 궁리를 하는 거.”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약해빠졌다는 소리를 돌려서 하는 거야?”
 자신은 약할지 모른다, 몸도 마음도.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버릴 것 같았다.
 망할, 격려나 해주지.
 “아니.”
 “뭐?”
 “처음치곤 잘했어, 지나치게.”
 대체 유니는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래도 이렇게라도 수다를 떨고 있으니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가시고 가벼워진다.
 혼자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발광을 했으리라.
 “고맙군.”
 당황한 그를 향해 유니가 과자 봉지를 흔든다.
 그런 유니의 무심한 얼굴엔 나른한 표정이 덧입혀졌을 뿐이다.
 “돼, 됐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니를 여자로 보았다.
 그러자 황당하게도 수컷의 본능이 갑자기 꿈틀거린다.
 ‘피곤해서 그럴 거야, 피곤해서. 아지트로 돌아가서 자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낀 해왕이 물을 들이켰다.
 급하게 마셔서 그만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컥, 콜록콜록.”
 친절하게도 유니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고마워야 할 상황인데도 그녀의 손이 스친 등이 마치 인두로 지진 듯 뜨겁고······ 짜릿하다.
 깜짝 놀란 해왕이 유니의 손을 툭 쳐내더니 성난 스프링처럼 발딱 일어섰다.
 그러고선 약간의 짜증과 무뚝뚝함을 섞어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가자.”
 멋쩍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유니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해왕을 따라 일어선 유니가 그를 스쳐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원한다면.”
 쿵쿵쿵쿵쿵-!
 순간 온몸의 세포가 발작처럼 일어섰고, 손발의 가락들이 모조리 오그라들었다.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네. 흐음.’
 별거 아닌 말인데도.
 
 까맣게 탄 건물 곳곳을 해왕은 두 눈에 불을 밝히고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렇게 몇 차례 오르내리며 꼼꼼히 수색한 결과 그는 꽤 많은 숫자의 차크라를 수확할 수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선 그를 향해 유니가 생수병을 던진다.
 이를 가볍게 낚아채서 마시니 칼칼했던 목이 그제야 풀린다.
 “수확은?”
 “제법 되던걸. 밖으로 몸을 던진 녀석들의 숫자에 비하면 적긴 했지만. 그런데 전장 완료가 안 된 걸 보면 고블린들이 어딘가에 더 있단 의미겠지?”
 몬스터를 향한 인간적인 연민을 해왕은 날려 버리기로 하였다.
 칼처럼 잘라낼 수 없는 게 사람의 감정이고, 마음이라지만 이미 지난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에게는 놈들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수확물이 절실했다.
 “암컷과 새끼가 있을 거야.”
 “암컷과 새끼? 으음, 그럼 저 지하도 아래에 있겠네.”
 아무리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저항할 힘도 없는 녀석들을 굳이 찾아다니면서 죽이는 일은 썩 내키지 않다.
 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오르자 유니가 이를 정리해 준다.
 “전장 완료가 목적이 아니라면 찾아가서 죽일 필요는 없겠지.”
 녀석들은 분명 손쉬운 먹잇감이다.
 꽤 많은 차크라를 얻었지만 여전히 해왕은 목이 마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젊은 취객 앞에 굽실거리는 아버지, 인간적인 무시를 받으면서도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시고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이 감정은 주제넘은 사치다.
 “할 수 있다면 전장 완료해 보고 싶어.”
 이를 악문 해왕이 유니를 직시하며 애써 다부진 태도로 말한다.
 “원한다면.”
 “넌 싫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착각일 수도 있고.”
 “내키진 않아.”
 유니의 대답이 해왕은 의외였다.
 저 여자 실은 표정만 저리 차갑고 무심할 뿐 그 속은 상냥하고 여리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해왕의 착각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활을 소환한 유니가 서슴없이 시위를 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화살이 날아간 방향으로 해왕은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어린 고블린 하나가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고 있었다.
 이 고블린 외에도 서너 마리의 작은 고블린이 더 있었는데, 유니는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모조리 화살 밥으로 만들었다.
 ‘하아, 난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보네.’
 내심 고개를 내저은 해왕은 유니가 처치한 어린 고블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몬스터를 보자 녀석들이 안되어 보인다.
 어린 몬스터의 사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짝이는 차크라만 남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차크라를 손에 쥔다.
 유니의 기척을 느낀 해왕이 천천히 몸을 세워서 그녀를 돌아본다.
 “어린 녀석들이네.”
 “응.”
 어린 고블린들은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다.
 자신들을 보자마자 녀석들은 곧장 달아나려고 했다.
 저 여자는 동정심이 태어날 때부터 없던 걸까? 사이코패스처럼.
 그게 아니면 자신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변해 버린 걸까? 그게 아니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이상해져 버린 것일까.
 이젠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그마저도 해왕은 헷갈렸다.
 “아깐 사냥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래.”
 “그럼······.”
 왜 달아나는 녀석들을 죽였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자신의 인간성을 과시하려는 비겁하고 치졸한 짓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창공의 학살자에 납치된 것도 아니면서 연민을 운운하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래서 해왕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지하도는 녀석들에게 유리한 지형이야. 일단 어둠도 무시 못할 장애 요소지. 우린 야행성 동물이 아니니까.”
 내키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의 의미가 실은 전술적인 측면이었음을 해왕은 유니의 대답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암컷과 새끼라도 녀석들은 태생이 인간과 다른 몬스터가 아닌가.
 이제 와서 생명존중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어쩜 자신은 육체의 단련 이전에 정신적인 부분의 단련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위험 부담이 크네. 그럼 밖으로 나오는 놈들만 사냥하도록 하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백 개의 창고를 가진 자가 99개의 창고를 채웠다고 해서 나머지 하나를 채우려 99개의 창고를 방치하지 않는다.
 무리한 욕심은 언제나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옳은 결정이다.”
 “고맙군.”
 그녀는 자신을 시험한 게 아닐까? 무모한 성격의 녀석인지 아닌지, 인간성이 어떤지,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냉정한 태도로.
 ‘하아, 저 여자는 상대로 하여금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드네.’
 감정에 휘둘려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그래도 이편이 더 낫지 싶기도 했다.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데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그러지.”
 유니에게선 상냥한 여자의 말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하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랴 인연이 더 이어진다면 또 모를까.
 그녀와의 인연을 해왕은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전장을 누비는 동료라도 좋고, 연인.
 화들짝 놀란 해왕이 유니의 시선을 회피한다.
 그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유니를 상대로 연애 감정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는 이 감정을 곧 강하게 부정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 작은 세계가 자신의 판단력과 눈을 흐리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단정했다.
 이렇게 결론지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한 유니는 가장 강력한 검투사다.
 자신은 그녀의 강함에 취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이리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저기, 유니.”
 “응.”
 “유니는 다음에도 전장에 올 거야?”
 “내키면.”
 “아, 내키면······. 저기 말이야, 혹시······ 으음, 아니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 보니까 근처에 공원이 있던데 거기서 라면 끓여 먹을래?”
 보통은 상대가 여운을 남기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먼저 캐묻게 마련인데, 유니는 절대 그런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인근 가게에서 버너와 라면과 냄비를 챙겨 들고 시냇물이 흐르는 공원으로 향했다.
 햇살은 밝고 따뜻했다.
 그 온기를 받은 주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그래서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아버지의 꿈이 퇴직 후 전원생활이셨지. 엄마는 싫어하셨지만······.’
 아버지의 꿈, 어머니의 꿈, 누나의 꿈이 모두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해왕은 다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더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라면 졸아.”
 “앗! 미안. 아뜨뜨!”
 급하게 서둘다 보니 달궈진 냄비 뚜껑에 그만 손을 데여 뚜껑은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옆에 있던 물병은 쓰러뜨려 버너의 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물병을 치우려다 그만 냄비를 치는 바람에 내용물의 반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중요한 제안을 하려고 마음먹은 상황에서 발생한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의 행진에 해왕은 크게 당황했다.
 “다시 끓일게.”
 죄인처럼 유니의 눈치를 보는 해왕이다.
 나무젓가락을 일찌감치 떼어내고 먹을 준비만 하고 있던 유니는 눈앞에 벌어진 대참사에 기분이 상한 듯 젓가락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일로 자신에게 삐지진 않겠지.
 진 죄가 있기에 유니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전전긍긍하는 해왕이다.
 턱턱턱.
 점화 장치에 문제가 생겼는지 버너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너를 새로 갖고 와야 할 듯싶다.
 “저기, 유니.”
 뚝.
 너덜너덜해진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며 유니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버너가 고장 나버렸네. 역시, 일제는 신통치가 않네. 내가 국산 버너로 가져올게.”
 해왕이 태어나기 이전, 일제 물건은 어른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연이은 자연 재앙으로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받은 이후 일본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은 빈민이나 이용하는 싸구려 물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제조국명 보고 가져올걸.’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떠난 버스다.
 해왕은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공원을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환했던 햇살이 서서히 점점 노을빛으로 물들어간다.
 큰 도로에 나온 해왕은 공원으로 오면서 보았던 상점을 발견하곤 반색했다.
 상점 안으로 막 뛰어들 때였다.
 전장 완료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
 4장 사람을 찾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가뭄의 단비가 되어줄 재물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학살자의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해왕은 밤낮없이 자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개당 2백만 원 선에서 거래되는 차크라가 무려 백 개가 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억이 넘는다.
 유니와 반타작을 해도 무려 1억이란 큰돈이다.
 타닥타닥.
 해왕은 프리 나이트 사이트 게시판에 사람을 찾는 광고를 열흘째 꾸준히 올리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댓글을 살피고, 쪽지함을 열어보았다.
 하루하루가 그에겐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없어.’
 이젠 이해심도 막연한 기대심도 바닥났다.
 메마르고 갈라진 그 속에서 마그마처럼 뜨거운 분노가 미친 듯이 끓어오른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몹쓸 인간이다.
 그의 자책감은 이제 유니를 향한 원망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쾅.
 두 주먹에 분노를 가득 담아 해왕은 책상을 내려친다.
 잡히기만 해봐라, 잡히기만 해봐라.
 이를 부득부득 갈아붙인다.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이름 하나 갖고 상대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경찰서에도 들렀고, 인상착의까지 고스란히 적어 프리 나이트 사이트에 수배까지 했다.
 특이한 성격과 표정은 누구라도 그녀를 한번 본 사람은 기억할 수밖에 없다.
 한데도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댓글을 보면 하나같이.
 포기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하였다.
 겉으로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 막상 일이 마무리되면 뒤통수치는 사기꾼들이.
 위로와 악의적인 비웃음의 댓글이 간혹 달렸다.
 어떤 녀석은 자작 냄새가 난다는 댓글로 불난 집에 기름을 드럼통으로 쏟아붓는 녀석도 있었다.
 그놈들을 잡아다가 자작나무로 뼈까지 태워 버리고 싶었다.
 띡띡띡, 띠리리릭, 철컥.
 또 밤샘했나 보다.
 퀭한 눈을 겨우 비벼 누르며 해왕은 피곤에 지친 어머니를 맞이했다.
 “밥은 먹었어?”
 “응, 피곤하지 가서 씻고 자.”
 “아냐, 병원 들렀다가 일 가야지.”
 어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보드랍고 곱던 어머니의 손은 하루 종일 구정물통에 들락날락하느라 몰라보게 거칠어져 있었다.
 “좀 쉬어, 얼굴 말이 아니잖아. 병원은 내가 갈게.”
 “네가 누나 목욕시킬 수 있어?”
 “으음······.”
 “해왕아.”
 “왜.”
 “가출 같은 거 하지 마라. 엄마 더 힘들어져. 알았지?”
 해왕은 가출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아들이 목숨을 담보로 전장에 나갔다고 말하면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검투가사 되겠다는 말은 이래저래 할 수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엄마, 귀 안 먹었어. 참, 아빠는?”
 “바로 출근하신대.”
 “그 양반도······. 에휴. 참, 너 돈 용돈 필요하지. 여기 있다.”
 “필요 없어.”
 “필요 없긴. 받아둬.”
 해왕의 손에 억지로 오천 원짜리 두 장을 쥐어준 박혜미 역사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어머니가 쥐어준 돈을 보자 유니를 향한 분노가 더욱더 커진다.
 잡히기만 해봐라, 잡히면.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그 순간 왜 하필 전장 완료가 됐을까.
 그리고 왜 차크라를 자신이 챙긴 채 움직이지 않았을까.
 거듭되는 후회가 그를 미치게 만든다.
 “엄마, 운동 좀 하고 올게.”
 무작정 새벽 거리로 나온다.
 이른 아침부터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이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건 일상에 찌든 자들의 피로뿐이다.
 반대편에선 고급 트레이닝복을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산보와 조깅으로 건강을 돌보고 있다.
 한때 자신의 어머니도 저들 무리에 속했었는데.
 걸음을 멈춘 해왕의 시선이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산 그림자로 향한다.
 ‘그년을 찾아야 해.’
 빵빵!
 “야, 이 새끼야 죽고 싶어!”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해왕은 신호를 미처 보지 못하고 도로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해왕은 운전사를 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운전자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해왕의 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시선을 회피했다.
 “쯧쯧, 말세야, 말세. 어린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니.”
 “쉿, 듣겠어. 저런 애들 건드려 봐야 골치만 아파.”
 “그렇지. 가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내 제 갈 길로 가버린다.
 저들에게 해왕은 더러워서 피하는 똥이었다.
 해왕은 이곳이 차라리 학살자의 전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저 사람들이 몽땅 몬스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다 미쳐 버리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무작정 걸어가던 해왕은 불량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놀이터까지 오게 됐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병과 담배꽁초와 쓰레기는 간밤의 난장판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이곳에서 난데없는 신음이 들린다.
 풀숲을 양옆으로 걷어낸 해왕은 그곳에서 주먹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나체의 소녀를 발견했다.
 잔인한 흔적이 소녀의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곳은 소녀의 음부였다.
 그곳엔 피를 양껏 빨아먹은 시뻘건 말뚝이 꽂혀 있었다.
 부르르!
 
 * * *
 
 XX경찰서.
 놀이터 풀숲에서 우연히 발견한 소녀로 인해 해왕은 어이없게도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었다.
 사회 경험이 없는 데다 이러한 경험 역시 처음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항변하지 않았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형사의 태도에서 자신을 범인처럼 몰고 간다는 느낌이 들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학교는 왜 그만뒀지?”
 박노식 형사를 대하는 해왕의 태도와 눈빛이 싹 달라진다.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죠?”
 해왕의 몰골은 집착과 원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이 모습이 박노식 형사의 눈에는 뻔뻔한 범죄자의 모습으로 비쳤다.
 가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신고자로 자신을 둔갑시켜서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영악한 녀석들이 더러 있었다.
 “상관있으니까 묻는 거잖아”
 탕.
 상대의 기세를 꺾을 요량으로 박노식 형사가 책상을 내려쳤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듯 이 소란에도 놀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저 민원인들만 놀라서 흘끔거릴 뿐이다.
 “그게 왜 이번 사건과 상관있는 건데요?”
 해왕은 자신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한 박노식 형사의 행동에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박노식 형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사납고 격렬한 그의 태도는 경력 10년차 형사마저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설쳐. 새끼 하는 꼬라지 보니까 자퇴가 아니라 퇴학이겠군.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불어. 너 퇴학당했지?”
 “자퇴를 하든, 퇴학을 당했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당신? 이냐고?”
 박노식 형사는 그 자리에서 서류철을 집어 들곤 해왕의 머리통을 겨냥해서 휘둘렀다.
 그러나 굳이 맞아줄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해왕은 이를 간단히 피해 버렸다.
 박노식 형상의 얼굴이 대번에 험상궂게 변했다.
 “피해?!”
 “맞을 이유 없잖아.”
 “이 새끼가 말끝마다 반말이네.”
 “반말 안 하게 대우하면 되잖아.”
 똑같은 말을 벌써 한 시간여를 반복하였고, 따가운 의심의 눈총과 강압에 짓눌렸다.
 혹여 이번 사건과 자신이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은 마당에 이런 대접은 분명 잘못이다.
 서류철이 다시 그의 머리를 향했다.
 앞서와 달리 이번엔 사전 동작 없이 곧장 날아왔다.
 그럼에도 서류철은 해왕의 머리를 맞추지 못했다.
 두 번씩이나 실패를 경험한 박노식 형사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위에 있던 여경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 그 머리통 반드시 갈겨주고 말겠다!’
 단단히 벼른 박노식 형사는 의자를 앞쪽으로 당겼다.
 해왕의 머리통을 맞추지 못한 이유가 거리상의 문제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몇몇 여경과 형사들이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다시 말해봐.”
 “이미 다 말했잖아······. 휴우, 요.”
 홧김에 반말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존대로 말투를 바꾸었다.
 “이 새끼가 어른 갖고 노네.”
 해왕은 이미 밉보일 대로 밉보인 상태였다.
 “형사님이 제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해왕은 순간적으로 폭력 충동을 느꼈다.
 저 뻔뻔한 면상에 주먹 한 방 꽂아버리고 곧장 유치장으로 걸어 들어가 버릴까 싶다.
 그랬다간 부모님이 더 힘들어지실 것이다.
 “할 만큼 다 했습니다. 더 이상 할 말도 아는 내용도 없습니다.”
 “난 아직 멀었어. 누가 이기나 한 번 본격적으로 해보자. 거긴 왜 갔지?”
 박노식 형사의 의심은 바로 여기서 기인했다.
 한낮에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우범 지대를 이른 아침부터 해왕이 그곳을 찾아간 이유가 불분명했다.
 이유라고 말한다는 게 고작 걷다 보니 거기던데요라니······.
 자신이 세 살배기 아이도 아니고 누가 그 말을 믿는단 말인가.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네 말씀을 듣고도 못 알아먹은 내가 이상한 놈이네. 좋아, 그럼 직접 써봐.”
 펜과 종이를 내민 박노식 형사.
 자필 진술서의 작성을 끝으로 노코멘트를 결심한 해왕은 필기구를 집었다.
 그때였다, 박노식 형사가 그를 향해 서류철을 휘두른 것이.
 홱.
 하지만 이번에도 해왕은 박노식 형상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버렸다.
 펜을 쥔 해왕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뿌지직, 뚝.
 펜을 부러뜨린 해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차마 주먹은 들어 올리지 못하고 아래에서 부르르 떠는 해왕이다.
 ‘저 녀석 정수리에도 눈깔이 박혔나?’
 세 번이나 공격에 실패하자 이젠 화도 나지 않는 박노식 형사였다.
 오히려 놀랍기까지 했다.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쏟아지자 박노식 형사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 연방 헛기침만 해댈 뿐이었다.
 “앉아.”
 “······.”
 “앉으라고.”
 “······.”
 “하아, 이 새끼 노코멘트로 나온다 이거지. 서 있으면 네 다리 아프지 내 다리 아프냐.”
 그제야 자리에 앉는 해왕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박노식 형사가 피식 웃는다.
 곧 정색으로 가려졌지만.
 “내가 참는다, 참아.”
 라고 말하면서 서류철을 옆으로 멀찍이 밀어낸다.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야, 너 정말 이 일과 관계없냐?”
 “······.”
 “말을 해, 말을!”
 이젠 고개까지 돌려 버리는 해왕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과연 누가 할 소릴까?
 그때였다, 누군가 박노식 형사를 부른 것이.
 “박 형사, 잠깐 이리와.”
 “예?”
 “뭉개지 말고 빨리 와.”
 “다녀와서 보자. 기대해라.”
 엄포를 날린 박노식 형사가 선배 형사에게 달려간다.
 저만치서 두 형사가 쑥덕거리는 것을 흘낏 본 해왕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십여 분이 흐른 후, 박노식 형사는 어색한 헛기침을 토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십 분전과 다른 표정으로.
 “커험, 얌마.”
 박노식 형사의 태도와 눈빛이 왠지 변한 것 같다.
 이를 알아차린 해왕은 내심 의아했다.
 “내가 요즘 예민해서 엉뚱한 널 잡은 것 같다. 흐음, 미안하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순순히 고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점에서 박노식 형상의 인격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다혈질의 그 성격만 고친다면 하지만.
 내가 욱해서 그렇지 사실 뒤끝은 없어, 그러니 이해해라.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시원시원한 인간이라고들 생각한다.
 당한 사람이 느꼈을 모멸감과 수치심이 자신의 한마디면 해결된다고 믿는 것이다.
 피해자가 붕어 대가리면 돌아서는 순간 그 일을 까맣게 있겠지만 사람인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의자에서 일어선 해왕이 좀 전 박노식 형사가 한쪽으로 치운 서류철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뭘 보나 싶어 해왕의 시선을 쫓던 박노식 형사가 인상을 와락 구긴다.
 그러곤 서류철을 집어 소심하게 서랍장에 넣어두는 박노식 형사다.
 그게 민망했는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제가 설마 형사님을 치겠습니까?”
 노코멘트를 고수하던 해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말투에 섞인 감정은 비웃음이었다.
 해왕의 태도에 울컥했지만 양심은 있는지 속으로 삭이는 박노식 형사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를 쳐다보던 박노식 형사가 그를 부른다.
 “해왕아.”
 “······?”
 “밥 먹고 갈래?”
 갑자기 웬 친절? 몇 초 사이에 인간에 대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걸까.
 “먹고 가.”
 
 * * *
 
 해왕은 연행 당하듯 박노식 형사에 의해 허름한 식당 안으로 끌려왔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해왕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왔다.

댓글(1)

항마력3성    
여자의 꼬붕 역활 잘하네 .. 약간의 찌질함. 어린 몬스터라고 생명을 존중 해주는 배려심까지 .. 그참 ㅎㅎㅎㅎ
2018.02.23 02:34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