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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온 마스터 1권 (상)

2017.01.06 조회 5,525 추천 42


 제1장 프롤로그
 
 
 
 
 
 유일신 ‘룬’은 잔인하고 사악한 전사 2만 5천 명에게 저주의 낙인을 찍어, 25개의 군단으로 나누었다.
 불멸의 병사의 탄생의 신화적인 배경이다.
 이들은 영원히 낙인을 가진 채 그 주인의 뜻대로 싸우는 운명을 갖게 되었다.
 불멸의 병사, 혹은 저주받은 전사라고도 그들은 불린다.
 25개의 문장에 영원히 귀속된 자들, 이들을 지배하는 자를 우리는 레기온 마스터라 부른다.
 그리고 마스터를 모신 불멸의 병사는 부정한 이름이 아닌 레기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레기온 마스터는 상속되지 않는다.
 바람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르듯.
 이들을 상징하는 25개의 문장 역시 누가 언제 어떻게 가지게 될지 미지수다.
 한 세대에 스물다섯 명의 레기온 마스터가 탄생할 수도 있고,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학자 알론 드 슈타이어의 특별한 소환사에 대한 고찰 중에서.」
 제2장 별채에 유배된 장자
 
 
 
 
 
 ‘레기온 마스터라······. 부럽네.’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 책에서와 같은 행운은 찾아오지 않으리라.
 은발이 이색적인 십칠 세의 소년 빈센트, 그는 한숨과 함께 자신이 소유한 낡은 서른 권의 책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책을 그렇게 덮었다.
 탁.
 대기가 살짝 흔들리면서 촛불을 흔들었다.
 그 불빛은 소년의 몸을 비추었다.
 앙상한 몸매에선 살집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나 그 눈빛만큼은 그 몸과 달리 뚜렷하고 깊었다.
 소년이 소장한 서른 권의 책은 사실 그의 지금 처지로는 가질 수 없는 책이었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가문의 서고에 가득한 모든 책들이 소년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그때와 처지가 사뭇 달랐다.
 한때 소년은 가문의 장자였었다.
 하지만 소년이 여덟 살이 될 무렵에 그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많이 것이 변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고 이복동생이 태어나면서 자신이 누렸던 특권과 풍요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적자(嫡子)가 소년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어머니는 평민의 신분이었다.
 만약, 그의 어머니가 이복동생의 어머니처럼 대단한 가문을 친정으로 두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몰락한 귀족이었다면 어쩜 소년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똑똑.
 “도련님.”
 우울한 표정을 거둔 소년이 애써 표정을 밝게 했다.
 “들어와, 도로시.”
 삶 그 자체가 서러운 서자 빈센트에게 유모 도로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향한 도로시의 애정과 충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오늘도 그 책을 보시네요. 지겹지 않으세요? 적어도 수십 번은 읽었을 텐데.”
 도로시의 목소리에는 서글픔과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오죽 읽을 책이 없으면 저럴까 싶어서 가슴이 미어진다.
 베르키엘 가문의 장자였던 소년의 급작스러운 몰락.
 그리고 친어머니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였을 텐데도 의젓함을 잃지 않았다.
 그 속이야 들여다보지 않아도 썩어 문드러졌으리라.
 “별로,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가끔씩 도련님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셔서 저를 당혹시킨다니까요. 호호.”
 “그런가?”
 “예, 그래요.”
 “그렇구나. 도로시, 지금이라도 가족에게 돌아가는 게 어때? 여기보단 그 편이 훨씬 도로시에게는 좋을 텐데.”
 “제가 싫으세요, 이 늙은 유모가?”
 “아, 아냐. 내가 어떻게 도로시를 싫어할 수 있겠어.”
 “그럼 왜 자꾸 그러세요. 전 살아서도, 죽어서도 언제까지나 도련님만의 유모랍니다.”
 그녀의 말이 소년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글썽.
 눈물이 맺힌다.
 급히 이를 추스른 소년은 애써 웃으며,
 “열렬하군.”
 “예?”
 “도로시의 구애가 너무 열렬하다고. 하하.”
 “호호호, 도련님도 참.”
 “도로시에겐 늘 미안해.”
 “또, 또 그러신다. 제가 도련님 앞에서 펑펑 울길 바라세요?”
 “그럴 리가.”
 빈센트에게 허락된 유일한 대화 상대, 그리고 그가 가장 신뢰하는 상대.
 가끔 도로시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그녀가 없는 이 낡고 오래된 별채에서의 생활을 소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녀가 없다면.
 ‘미쳐 버릴지도.’
 또 우울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식사 가져왔어요. 식사부터 하세요, 도련님.”
 쟁반의 보자기가 치워지자 이가 빠진 낡은 접시에는 검은 귀리(빈민이나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는 잡곡) 빵 하나와 물 한 잔이 달랑 놓여 있었다.
 치즈, 잼, 스프, 우유는 서자의 유배지인 별채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다.
 소년의 처지에선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도로시는?”
 “저는 주방에서 벌써 먹었답니다. 얼른 드세요, 식기 전에.”
 도로시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웃음에 가려진 뱃속의 끓는 소리는 어쩌란 말인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을 텐데.’
 대외적으로 도로시는 소년을 돌보는 일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는 소년을 돌보고 있음에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했다.
 베르키엘 백작 가문이 가난해서? 결코, 아니다.
 바로 소년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니 혐오하는 안주인 엘리자벳 백작 부인의 야비한 짓거리다.
 맥칼핀 르 베르키엘 백작.
 베르키엘 가문의 가주이자, 베르키엘 영지의 영주.
 이 소년의 아버지다.
 하나 그의 권세는 아내인 엘리자벳 백작부인의 친정인 후작 가 앞에서는 빛을 발할 수 없었다.
 가문을 지키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맥칼핀 백작은 자신의 장자를 이처럼 방치하고 있었다.
 아내와의 마찰, 아니 아내의 친정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도련님, 다음 달이면 성년이 되시네요.”
 만인의 축복을 받아도 모자랄 베리키엘 백작 가문의 장자 빈센트, 올해 그의 생일의 의미는 예년과는 사뭇 달랐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내년이면 18세가 되기 때문이다.
 왕국 법으로 18세는 성년이다.
 온전하게 열여덟 번째 생일이 돼야 하겠지만.
 이는 빈센트도, 도로시도 알고 있었다.
 생일. 그 단어를 뇌까리는 빈센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다.
 그날은 더 이상 소년에겐 축복받은 날이 아니었기에.
 
 * * *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진 별채의 머리 위로 밤이 서리처럼 내린다.
 휘이이이잉.
 11월 말, 바람은 오거처럼 힘차게 달려와서 이 집을 날려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세차게 들이박는다.
 덜컹덜컹.
 삐걱삐걱.
 끼익, 끼이이익.
 낡은 창문 경첩과 낡은 대들보는 숨이 곧 끊어질 듯 요란하게 앓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만 매번 빈센트는 이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잠에서 깨자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감각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오늘도, 어제도, 엊그제도.
 별채에 몇 장 없는 모포를 칭칭 감고 있어도 한기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자의 굴레처럼.
 앙상한 가지 사이로 크고 화려한 빛나는 본채가 보인다.
 돌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저 집은 거센 바람에도 묵묵하다.
 마법진으로 냉난방이 되는 깨끗한 본채 건물들과 달리 소년을 가둔 외딴 별채는 여름이면 벌레와 지독한 더위, 겨울이면 피까지 얼려 버릴 듯한 맹추위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동안 도로시가 모아 놓은 돈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그것도 올해로 끝이다.
 내일이 암담하다.
 ‘유모가 추울 텐데.’
 빈센트는 낡고 음산한 복도로 나왔다.
 삐걱삐걱.
 낡은 복도 마루판이 골골거린다.
 한 번은 복도 마루판이 푹 꺼지는 바람에 소년의 유모 도로시가 다리를 크게 다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복도를 걸을 때도 뛰거나, 혹은 쿵쾅거리며 걸을 수 없었다.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걸어가야 한다, 긴장하면서.
 
 아래층 유모의 방문 앞에 선 빈센트는 숨이 넘어갈 듯한 위태로운 유모의 잔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록콜록.
 이 소리는 소년으로 하여금 늘 아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시큰.
 가슴이 몹시 아프다.
 고리도 없는 문이라 살짝만 힘을 줘도 문은 문짝 채로 무너질 듯 크게 휘청였다.
 극도로 조심해도 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의 유모는 불협화음에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얇은 모포 달랑 한 장을 둘둘 말고서 잔기침을 해대는 유모의 모습은 비수가 되어 소년의 가슴팍에 박혔다.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아니, 그것은 피눈물이다.
 그녀에게는 성실하고 착한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그들의 곁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삶은 저처럼 초라하지도, 힘들지도 않을 텐데.
 빈센트는 자신이 두른 모포까지 전부 풀어서 유모를 덮어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모포 하나 없이 잠자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는 별채 뒤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빈센트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알리구나,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는데.”
 “찍찍.”
 작은 생물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시커먼 쥐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보니 쥐, 알리는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건 뭐야?”
 자세히 살펴보니 녀석이 물고 있는 것은 동전이었다.
 일반적으로 화폐로 쓰이는 동전 같지는 않아 보였다.
 동전은 상당히 두꺼운 데다 전체가 녀석의 털 색깔처럼 새까맣다.
 어디서 저런 걸 물고 왔을까?
 입에 문 동전을 바닥에 내려놓는 알리.
 그 표정은 마치 너 주려고 갖고 왔어! 하고 말하는 듯했다.
 ‘녀석의 눈에도 내가 불쌍해 보인 건가?’
 그 순간 문득 씁쓸함이 차올랐다.
 그래도 녀석의 정성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피식.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찍찍.”
 “너도 내가 가난뱅이란 걸 아는구나. 하지만 그 동전으론 귀리 빵 하나도 살 수 없는 걸. 걱정 마, 네 성의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니까.”
 빈센트는 알리가 내려놓은 동전을 주워 들며 일단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자, 이거 먹어.”
 빈센트는 알리를 주려고 챙겨둔 귀리 빵 한 조각을 꺼내어 녀석 앞에 내밀었다.
 도로시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대경하리라.
 순식간에 소년이 준 빵을 먹어치운 알리는 더 없냐는 듯 작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호주머니를 계속 쳐다보았다.
 “없어. 봐.”
 호주머니를 까뒤집어 보인 빈세트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혐오하는 쥐였지만, 빈센트에게 알리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친구였다.
 도로시와 다른 의미의.
 알리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지 매일 밤마다 그를 찾아와 주었다.
 그랬던 녀석이 오늘은 열흘 만에 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그 사이 빈센트는 녀석이 고양이나 맹금류에게 잡혀 먹힌 게 아닐까 되게 걱정했었다.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쥐 알리는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내일 보자.”
 하지만 그 뒤로 빈센트는 알리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사소한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운명이 바뀌리라는 것 역시.
 
 * * *
 
 “도로시, 도로시, 괜찮아?”
 식은땀을 흘리는 도로시의 몸은 불덩어리였다.
 헝겊을 적셔 그녀의 열을 식히려고 하였지만 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으으으, 우리 도련님 식사를······.”
 “됐어, 됐어. 도로시. 안 되겠어. 여기 잠깐만 있어. 내가 본채에 갔다 올게.”
 “아, 안 돼요.”
 빈센트는 도로시를 저 상태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별채를 나서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빈센트는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곤소곤.
 “별채의 서자네.”
 “여긴 웬일이지? 마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그러게 말이야. 조용해, 이쪽으로 온다.”
 두 경비병은 빈센트가 다가왔지만 그를 허깨비 취급했다.
 이 저택의 안주인 엘리자벳 백작부인은 그 누구도 빈센트와 말을 섞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측은한 마음에 말을 섞거나, 혹은 허락되지 않은 물자를 건네준다면 그 길로 그자는 치도곤을 면치 못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다들 빈센트만 보면 피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했다.
 “집사는 어디 있지?”
 서자라곤 하지만 소년은 베르키엘의 핏줄이다.
 “말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어디 있는지만. 어디 있는지만 눈빛이든, 손짓이든 가리켜 줘.”
 간절한 소년의 애원에 두 경비병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나 저택은 벽에도 눈과 귀가 있는 법.
 일개 경비병이 어찌 대 베르키엘 가문의 안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빈센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본채로 들어가려 했다.
 석상처럼 가만 서 있던 경비병은 그제야 움직였다.
 소년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비켜라!”
 그의 말에도 경비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키라고 하였다!”
 언성을 아무리 높여도 경비병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수치와 분노가 그의 가슴속에서 펄펄 끓어올랐다.
 아니, 그보다는 빈손으로 도로시에게 돌아갈 일이 더 큰 걱정이었다.
 “뭐야? 별채의 쓰레기잖아.”
 최고급 털가죽과 가죽신과 모자를 눌러쓴 칠팔 세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양옆으로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거만한 표정의 소년은 빈센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비웃음과 경멸이 그 시선에 담겨 있었다.
 “파, 파이론.”
 “뭐! 파이론이라고? 감히 어디서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파이론 베르키엘, 녀석은 빈센트의 이복동생이다.
 분명 동생이었지만 녀석은 빈센트를 단 한 번도 자신의 형으로 여기지 않았다.
 빈센트는 자신의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흥,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천한 서자 녀석 주제에. 경비병.”
 “예, 파이론 도련님.”
 “어머님의 명령을 잊은 거야? 당장 쫓아내.”
 두 경비병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길을 막고, 질문에 대답은 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빈센트의 몸에 손대고 개처럼 질질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르키엘 성을 빈센트가 사용하고 있는 이상에는 말이다.
 거듭되는 파이론의 억지는 경비병들을 점점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 가신들과 함께 이 주변을 걸어가고 있던 베르키엘 백작 가문의 수장이자, 베르키엘 영지의 영주인 맥칼핀 백작이 걸음을 멈춰 이곳을 바라보았다.
 “주군, 가시지요.”
 가신들의 재촉이 있었지만 맥칼핀 백작은 쉽게 그 자리에서 걸음을 떼지 않았다.
 냉정하고 무심한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백작의 표정에선 빈센트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백작은 빈센트가 이복동생에게 능멸을 당하는 모습에 화가 났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신이 나서는 순간 자신의 아내이자, 베르키엘 가문이 섬기고 있는 아내의 친정인 후작 가문에서 무리한 세금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야, 아무래도 너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할 것 같구나. 자유롭게······.’
 
 빈센트는 끝내 빈손으로 별채로 돌아왔다.
 그는 유모 도로시의 방문에 이마를 대고서는 비통한 심정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수치스럽게도 이복동생에게 얻어맞은 자국이었다.
 그 자리에서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빈센트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후환이 도로시에게도 미칠 것이기에.
 ‘힘을 갖고 싶어, 누구도······ 누구도 날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세상에는 마법사, 정령사, 기사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특별한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중 마법사와 정령사는 자질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나마 마법사 자질 시험이 쉬운데 빈센트는 이 자질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이복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치른 시험이다.
 정령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기사뿐이었다.
 하나 그가 본격적으로 검술을 전수받기 전에 이복동생이 태어나면서 그는 이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빈센트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돌아섰다.
 ‘검술서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빈센트의 처지에서는 결코 소장할 수 없었던 책, 그 책 중에서 한 권이 검술서였다.
 누가 지었는지, 그리고 검술명이 무엇인지는 표지가 훼손되어서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보잘것없는 하급의 검술이더라도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원망을 풀어내기 위해서 목검을 휘둘렀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오늘도 이 목검과 함께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함께하였다.
 슬픔과 검과 소년이 하나가 되어 깊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휙휙휙-!
 
 * * *
 
 맥칼핀 르 베르키엘 백작, 그는 베르키엘 영지의 영주이자 능력 있는 기사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맥칼핀 백작은 상급 가문인 후작가의 영애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지금의 본처 엘리자벳 르 베르키엘을.
 하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의 아내는 독선적이고 표독한 성품으로 매사에 자신의 고집을 내세웠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말도 안 되는 어깃장을 서슴없이 부리곤 했다.
 따끔하게 충고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아내의 행동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이가 나빠져서일까? 결혼하고서도 백작의 아내에게선 태기가 없었다.
 그때 백작의 눈에 띈 여인이 빈센트의 친모였다.
 ‘빈센트야, 너의 이번 생일이 이 아비가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너의 마지막 생일이 되겠구나.’
 사실 맥칼핀 백작은 진심으로 빈센트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 아니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빈센트를 베르키엘의 상속자로 만들었다.
 하나, 예기치 않게 본처 엘리자벳이 임신하면서부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아들을 낳은 엘리자벳 백작부인은 친정에 연락하여 베르키엘 가문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했다.
 귀족은 두 부류로 나뉜다.
 영지를 가진 영주 귀족과 비 영주 귀족이다.
 그리고 영주 귀족이 소유한 영지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대영지, 영지, 소영지로.
 베르키엘 영지는 이 중 두 번째인 영지로 분류된다.
 소영지는 영지의 산하가 되고, 영지는 대영지의 산하가 된다.
 대영주는 소속된 휘하 영지와 소영지로부터 걷은 세금을 왕에게 바친다.
 이렇다 보니 상위 영주의 경우 하위 영주에게 무리한 세금을 걷는 것으로서 압력을 행사하곤 했다.
 비열한 방법이었지만 이보다 더 상대를 손쉽게 다루는 방법 또한 없었다.
 억울하면 칼을 빼 들고 상위 영주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지만, 대영주의 경우 그 아래로 최소 네 개 이상의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데다, 그 아래에 있는 소영지까지 합치면 그 수는 이십을 훌쩍 넘는다.
 가문과 영지의 몰락을 바라지 않고서야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바로 상위 영지를 향한 전쟁 선포인 것이다.
 그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또 모를까.
 똑똑.
 “주군, 롤링입니다.”
 “들어오게.”
 지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있었다.
 바깥은 영하의 매서운 칼바람이 성난 황소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래, 결과는?”
 “밀과 잡곡의 총생산량 1천 티카는 가축의 사육을 통해서 메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가 됐던 인구 2천 명은 국왕직할령의 빈민과 범죄자를 섞어서 맞추었습니다. 이 서류에 주군께서 서명하신다면 소영지로 승격될 것입니다.”
 “오!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네. 롤링 행정총관.”
 “주군, 빈센트 도련님을 위해 너무 큰돈을 쓰셨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점은 걱정 말게. 내게 재정을 메울 복안이 있네.”
 “복안이라 하시면?”
 “미안하네만 그건 자네에게도 말할 수 없다네. 이해하게.”
 “아, 아닙니다.”
 “그럼 매직 인장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은가? 되도록 그 아이의 생일에 맞췄으면 하는데.”
 “그때쯤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알았네, 수고해 주게.”
 롤링을 배웅한 맥칼핀 백작은 창가로 걸어갔다.
 ‘며칠만 참아다오, 며칠만, 나의 아들아.’
 “도로시,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도련님.”
 애쓴 보람도 없이 도로시의 웃음은 금세 걷혔다.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빈센트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미안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그런 말씀 마세요.”
 “참, 내가 스프를 만들었는데 먹어봐.”
 “도, 도련님이 어찌 그런 일을 다 하세요. 절 시키실 것이지.”
 “도로시는 환자잖아. 그리고 꼭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맛은 장담할 수가 없어. 도로시가 그동안 주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잖아.”
 도로시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처럼 선량하고 상냥한 어린 주인에게 왜 유일신 룬은 가혹한 운명을 내리신 걸까.
 그녀의 마음이 다시 한 번 미어졌다.
 “도련님이 주시는 건데 돌이라도 씹어 삼켜야죠. 호호.”
 “에이, 설마 내가 도로시에게 돌덩이를 줄까.”
 “우리 도련님이 어떤 도련님인데 그런 장난을 제게 할 리가 없죠.”
 “그럼. 자, 먹어봐.”
 빈센트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도로시를 지켜보았다.
 “어때? 괜찮아?”
 “맛있어요, 제가 먹어본 그 어떤 스프보다.”
 “그런데 왜 울어?”
 “울다니요,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럼 이건 뭐야?”
 도로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보이는 빈센트였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운다고 하잖아요.”
 “그런 거였어?”
 “도련님,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응.”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마의 냄새와 품속이 어땠는지, 가끔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소년은 도로시의 품만 떠오른다.
 이승을 하직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염려하고 사랑한 어머니에게는 정말 죄송스럽고, 미안하지만.
 “도련님, 저랑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래요?”
 “주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아, 아뇨,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큰 약속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로시라면 그게 뭐든 약속할 수 있어.”
 “정말이죠?”
 “응, 정말이야.”
 “그럼 약속해 주세요,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겠다고.”
 도로시의 말이 마치 유언처럼 들렸다.
 그 순간, 빈센트는 도로시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임종이 보였다.
 겁이 났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려왔다.
 설마, 도로시가 죽는 걸까? 안 돼, 안 돼! 빈센트는 도로시를 힘주어 껴안았다.
 아직은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곁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녀가 봐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너무······ 너무.
 ‘도로시, 제발 죽지 마. 제발······.’
 소년의 마음은 눈물바다였다.
 하지만 나약한 그 모습을 차마 도로시에게는 보여 줄 수 없었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은 빈센트는 힘주어 대답했다.
 “도로시, 약속할게.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고마워요. 선량하신 나의 주인님, 도련님 한 번 더 안아 봐도 되죠?”
 “으응. 그래, 그래. 도로시.”
 
 * * *
 
 12월 16일.
 우중충한 잿빛 겨울 하늘이 오늘밤은 또 어떤 매정한 얼굴을 보일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지금도 이가 부딪칠 만큼 몹시 추웠다.
 자신은 괜찮지만 병상을 떨치지 못한 도로시에게 이 밤이 몹시 걱정이다.
 하아.
 내일은 빈센트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다.
 축복받아야 할 그의 생일은 쓰러지기 직전의 낡은 별채에서 무려 일곱 번이나 쓸쓸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작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날아오르고 싶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다.
 “요즘엔 알리가 통 안 보이고······. 날 잊은 건가?”
 요전번에 알리는 그에게 요상하게 생긴 검은 동전을 물어다주었다.
 그날 이후 녀석은 단 한 번도 빈센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우정의 증표(?)를 꺼내 든 빈센트는 때 묻은 동전을 손으로 비볐다.
 소년의 손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의 손처럼 거칠고 투박했다.
 할 일 없이 동전을 비비던 빈센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별채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걸어갔다.
 자루 하나가 거기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자루의 끈을 푼 빈센트는 그 내용물을 확인하곤 씁쓸한 얼굴로 자루를 메고 별채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가 메고 온 자루에는 별채의 두 사람이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이 들어 있었다.
 굶어 죽지 않을 양이었다.
 스프를 끓인 빈센트는 도로시의 방으로 갔다.
 콜록콜록.
 유모의 잔기침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 팠다.
 애써 표정을 밝게 고친 소년은 유모 앞에서 너스레를 떨며 스프를 먹여 주었다.
 “고마워요, 도련님.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당연히 그래야지. 누가 해준 건데. 여기 물.”
 “설거지는 놔두세요. 제가······ 콜록, 콜록. 일어나서 할게요.”
 “도로시, 제발 자신의 몸부터 돌봐. 이런 사소한 건 이 몸에게 맡기라고.”
 냉큼 밖으로 나온 빈센트는 설거지를 마친 뒤 별채 뒤뜰 공터에서 목검을 움켜쥐고 휘둘렀다.
 지난 몇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표지도 없는 낡은 검술서의 검술을 익혀왔다.
 이젠 책을 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이 소장한 책 전부를 유모를 위해 불살랐다.
 하룻밤이라도 그녀가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걸러서 그런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배고픔은 아무리 해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헉헉헉······.”
 오기로 한 시간을 버틴 빈센트는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어버렸다.
 가져온 낡은 수통의 물을 들이켜며 그는 피로와 배고픔을 달랬다.
 꼬르르륵.
 늘 듣던 소리였지만 오늘 따라 무척이나 서글프게 들렸다.
 휘이이이잉.
 바람 소리도 유독.
 ‘결코, 주저앉지 않을 거야. 결코!’
 
 날이 저물었다.
 배고픔은 잠도 달아나게 만들었기에 빈센트는 옥수수 하나를 똑 분질러 반을 물과 함께 끓였다.
 뜨거운 물과 몸집이 커진 옥수수를 천천히 씹어서 목 안으로 넘겼다.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보잘것없는 식사였지만 무언가를 씹고, 삼킬 수 있는 이 순간은 그래도 행복이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물에 부른 이 반 토막의 옥수수에게서.
 “아! 배부르다.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겠는걸.”
 활갯짓을 크게 한 뒤 빈센트는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다.
 똑똑.
 지난 몇 년간 현관을 두드린 사람은 없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마른침을 꿀꺽 삼킨 빈센트는 이내 현관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한 뒤 그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빈센트의 검은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바람에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휘날렸다.
 휘이이이잉.
 ‘아, 아버지!’
 
 빈센트를 찾아온 이는 베르키엘 영지의 주인이자 소년의 아버지이기도 한 맥칼핀 백작이었다.
 “자, 잘 지냈느냐?”
 몇 년 만에 처음 마주한 아버지였다.
 소년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젊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한데, 몇 년이 지난 아버지의 얼굴은 그때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굵은 주름과 자잘한 주름을 가진 슬픈 중노인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빈센트의 목소리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이 소년의 목소리를 몹시 차갑게 만들었다.
 아들의 마음을 맥칼핀 백작은 이해하고 있었다.
 고생이 심했을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 잘못했다, 무능한 아비를 용서해 달라고 백작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부터 자신의 아들은 모진 세파를 홀로 당당히 헤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아들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면야, 자신의 간절함 따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래서 속으로 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
 빈센트는 싸늘한 얼굴로 맥칼핀 백작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던져줄 게 있으면 던져주고 그만 꺼져달라는 무언의 반항이었다.
 “이걸 받아라.”
 맥칼핀 백작이 내민 반지를 본 빈센트는 내심 크게 놀랐다.
 ‘설마? 아니야.’
 빈센트는 순간적으로 저 반지가 영주의 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생각은 그 자신에 의해서 강력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베르키엘 영지의 영주의 인장은 이복형제인 파이론으로 확고부동하게 정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매직 인장이다.”
 빈센트의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의혹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이건 베르키엘의 인장이 아니다. 이건 너에게 내가 주는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다. 이걸 갖고 이 집을, 그리고 베르키엘의 성을 잊어라. 영원히.”
 쿠우우웅!
 “무, 무슨 뜻입니까?”
 “너는 이제 빈센트 베르키엘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영지의 사람도 아니며, 내 아들도 아니다.”
 “추, 추방입니까!”
 차라리 이편이 더 잘됐다는 생각이 한편으론 들었다.
 아니, 홀가분했다.
 진작 이럴 것이지, 진작.
 “······그렇다.”
 “추방자에게 매직 인장이라니······. 관대하시군요. 맥칼핀 르 베르키엘 백작 각하. 그 선물 받겠습니다.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겐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맥칼핀 백작은 상처받은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다시 미어진다.
 “내 네 성을 생각······.”
 “아뇨, 제 성은 제가 짓겠습니다. 맥칼핀 백작님.”
 “······알겠다. 매직 인장을 활성화시켜 주마. 활성화 상태에서 네 피와 목소리를 담아라.”
 영주의 인장은 대개 반지인 경우가 많다, 팔찌나 목걸이일 경우도 있다.
 매직 인장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는 타인은 절대 벗겨낼 수 없도록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다.
 맥칼핀 백작이 매직 인장을 활성화해 주자 빈센트는 자신의 피를 반지에 묻히고 목소리를 담았다.
 “······나의 성은 블러디, 블러디이다.”
 빈센트는 즉흥적으로 자신의 성을 만들었다.
 블러디의 의미는 피투성이, 피비린내 나는, 잔인하다란 뜻을 갖고 있었다.
 백작은 지난 세월 아들의 가슴에 쌓인 울분과 분노를 소년이 천명한 성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매직 인장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였다.
 이제 빈센트는 자신의 영지를 갖게 되었다.
 빈센트 데 블러디 남작, 새로운 영지 귀족의 탄생이었다.
 낡고 허름한 별채에서 그렇게.
 제3장 영지로 가는 길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빈센트는 자신이 나고 태어난 한 서린 고향땅을 떠나 자신의 영지인 블러디로 가기 위해서 새장의 문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맥칼핀 백작에게서 받은 그의 영지는 가이어스 소국 북서쪽에 위치한 외진 소영지였다.
 영지는 크게 소영지, 영지, 대영지로 나뉘는데 각각의 영지가 어떻게 불릴지에 대한 기준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
 소영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1천 티카(1티카는 5인 가족이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의 단위)여야 하고, 영지의 백성은 2천 명 이상이어야 한다.
 반면 소영지의 상위인 영지는 1만 티카의 생산량과 2만 명 이상의 백성이 있어야 하며, 그 위의 대영지의 경우에는 그 열 배다.
 영지, 대영지의 경우에는 외형적인 조건을 맞추더라도 인정받기가 사실 불가능하다.
 소영지는 귀족의 신분과 최소 기준만 갖추면 그나마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귀족원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협상력을 갖춘 후원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도로시,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도련님.”
 “조금만 참아, 백작이 준비한 사람들과 만나면 그때부턴 한숨 돌릴 수 있을 거야.”
 이 세상엔 마법이란 신비한 힘이 존재하지만, 그 힘을 이용한 장거리 공간 이동은 불가능했다.
 아마 그런 마법이 세상에 존재했다면 인간의 문명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발전하고 뻗어 나갔을 것이다.
 저 남쪽 에메랄드 해 건너 작은 타렌테스 대륙이라 불리는 이종족 연합국의 땅마저 인간은 정복하였으리라.
 빈센트가 자신의 아버지를 타인처럼 백작이라고 부르자 도로시는 그 모습이 마음 아팠다.
 “도련님, 그래도 아버님이신데······.”
 “도로시, 다시는 내 앞에서 백작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아줘.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가여우신 나의 어린 주인님.”
 “그 말도······ 하지 말아줘. 명색이 영주잖아. 어린 주인이라니. 휴우.”
 빈센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의 가슴에 깊은 한을 새겨준 베르키엘 백작 성을 돌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짐했다.
 언젠가는 저 성보다 더 높고 강력한 성을 지으리라, 그리고 그때 저 땅을 당당히 밟으리라.
 그리고 밝혀내리라.
 ‘어머니, 기다려 주세요.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셔 갈게요. 꼭.’
 어머니의 유골을 남겨 둔 것이 뼈에 사무치는 빈센트 남작이었다.
 
 빈센트는 맥칼핀 백작이 준비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한데, 그를 맞이하고 그와 동행해야 할 임무를 띤 사람들은 그곳에 단 하나도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수십 구의 시신들이 그를 맞이했다.
 약탈당한 처참한 모습의 승용 마차와 다섯 대의 짐마차, 52구의 시신.
 시신은 끔찍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일이 잘못되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길함.
 엘리자벳 르 베르키엘! 바로 그녀의 짓이리라.
 빈센트는 일말의 의심도, 주저함도 없이 그렇게 단정했다.
 “도, 도련님.”
 이곳으로 오는 도중 도로시가 발을 헛디뎌서 발목을 크게 접질리고 말았다.
 마음은 조급했었지만 그녀의 고통을 무시하고 길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쉿!”
 빈센트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숨어서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을 살해한 흉수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도로시는 겁이 났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어린 주인을 선택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늘 각오했었다.
 지금 그녀의 걱정과 두려움은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빈센트의 안위였다.
 ‘룬이시여, 부디 제 어린 주인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저분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때까지만 부디 천한 이 목숨 주인 곁에 붙어 있게 하여 주세요.’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유일신 룬에게 닿았던 걸까? 살육자의 모습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두 사람.
 “도로시, 여기서 기다려.”
 빈센트는 잔인한 학살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는 끔찍한 저 현장을 뒤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이 자신의 영지까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도로시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련님.”
 “걱정 마. 놈들은 여기 없어. 그리고 지금부턴 내가 도로시를 보살펴 줄 거야. 불안하더라도 날 믿어주지 않을래?”
 빈센트는 도로시의 두려움을 달래준 뒤 참극의 현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태어나서 그는 처음으로 살해당한 시체를 접했다.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으랴.
 ‘지난 몇 년간의 생활에 비하면 이건 일도 아니잖아? 빈센트야, 빈센트야. 좀 더 독해지렴. 좀 더.’
 마음을 다독이자 그제야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인 그는 피가 묻지 않은 튼튼한 배낭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리고 화살을 머리에 박고 죽은 시체에서 온전한 검 한 자루도 발견하곤 허리에 찼다.
 검을 움켜쥐자 두려운 마음이 크게 물러섰다.
 그는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배낭에 쑤셔 담았다.
 끝으로 빈센트는 가장 꺼림칙한 일을 했다.
 시신의 품속을 뒤져서 테스(화폐)를 수거하는 일이었다.
 52구의 시신을 모두 뒤지자 꽤 많은 금액을 그는 모을 수 있었다.
 진땀 빼는 시간이었다.
 “베르키엘은 일단 우리 힘으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 도로시, 힘들더라도 참아줘.”
 추적자가 있을지 모른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야 한다.
 과연, 도로시가 버텨낼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흑흑.”
 도로시는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어린 주인이 시신들의 품속을 뒤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였다.
 “그런 소리 말아줘. 도로시는 내게 가족이잖아.”
 
 베르키엘 백작 성.
 엘리자벳 르 베르키엘은 이 성의 안주인이자, 장차 베르키엘을 이끌어갈 상속자의 어머니라는 막강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친정은 베르키엘의 주인인 맥칼핀 백작조차 두려워하는 집안이었다.
 “흥, 맥칼핀 그자가 애를 썼지만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감히, 내 아들의 재산을 그깟 천박한 쓰레기에게 주다니. 재물은 회수했나요? 나의 충실한 기사 보베이여.”
 “한 푼도 남김없이 가져왔습니다, 마님.”
 “호호, 수고했어요. 그런데 그 천한 놈은 어찌 됐죠?”
 “송구하게도 그는 현장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아니, 그 녀석을 놓치다니. 보베이 경, 경이 나를 위해 한 일중에서 이번이 가장 실망스럽군요.”
 “용서하십시오, 주군.”
 한동안 인상만 찌푸리던 엘리자벳이 갑자기 그 주름을 폈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편이 더 나을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일푼에 의지할 곳도 없는 데다, 평생 이 성안에서만 살았던 녀석이야, 그런 녀석이 과연 어떻게 살까?”
 “아! 그 인생이 비참하겠군요, 주군.”
 보베이는 그제야 제 주군의 표정이 밝아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분이 풀린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보베이 경.”
 “예, 주군.”
 “맥칼핀 그자의 동태를 잘 살펴요. 그 천한 종자와 연락을 하는지, 그리고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서.”
 “명심하겠습니다.”
 기사 보베이를 돌려보낸 엘리자벳 백작 부인의 눈빛이 사갈처럼 독하다.
 ‘이 가문과 이 영지는 온전히 나의 아들 파이론의 것이 되어야 해. 오직, 내 아들만 이곳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내 아들만이!’
 
 * * *
 
 베르키엘 영지를 벗어나자마자 빈센트는 사람들을 피하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제법 큰 규모의 마을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는 이 마을에서도 제법 괜찮은 번듯한 여관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쪼르르 달려와서 맞이하는 종업원의 친절에 빈센트는 당황했다.
 넙죽 허리를 숙였던 종업원이 고개를 들었다.
 한데, 그 표정은 좀 전의 싹싹한 목소리와 달리 꺼림칙함으로 가득했다.
 이유는 빈센트와 도로시가 궁색해 보여서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종업원의 표정과 말투가 퉁명하다.
 평생 베르키엘 백작성에서만 살았던 빈센트였다.
 세상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사람을 상대하고, 물건을 사거나하는 일에 그는 익숙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종업원의 태도가 자신의 행색을 보자 단숨에 바뀌었다는 것을.
 “넓고 따뜻한 방이 필요하다.”
 빈센트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살짝 놀란 종업원이 그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신비로운 은색의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와 가는 얼굴선에 자리한 또렷한 이목구비.
 궁색한 행색만 아니라면 귀족가의 자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귀함이 묻어나는 대단한 미소년이었다.
 종업원은 빈센트의 검은 눈동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에헴, 숙박 손님이시군요.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빈센트는 도로시를 부축해서 프런트 앞으로 다가갔다.
 종업원이 언질을 했는지 프런트를 맡고 있던 이는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숙박을 원하오.”
 “객실은 일반, 고급, 특실이 있습니다. 어떤 방을 드릴까요?”
 빈센트는 일반이 가장 싼 방이고 그다음으로 고급, 특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고급으로 주시오.”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 프런트의 직원은 한동안 침묵했다.
 곧 정신을 차린 직원이 활짝 웃으며, 속으론 숙박비를 계산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서 말하였다.
 “고급은 하루 일박에 35테스입니다. 조식이 포함된 금액입니다. 장기 숙박, 그러니까 장기는 일주일 이상입니다. 장기 숙박은 하루에 30테스씩 계산됩니다.”
 “이틀만 묵을 생각이오.”
 “저희 업소는 선불입니다. 총 70테스입니다. 그리고 여기 숙박부를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숙박부? 빈센트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읽었던 책에서는 숙박부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었다.
 소장했던 책의 절반 이상이 영웅들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책이었다.
 직원이 숙박부에 대해서 빙긋 웃으며 설명한다.
 그제야 빈센트는 숙박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명과 행선지라······.’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지만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도로시가 나섰다.
 “제가 하죠.”
 “신분증을 주시겠습니까?”
 도로시는 자신의 신분증인 목패를 꺼내어 내밀었다.
 평민은 목패, 귀족은 동패나 매직 인장을 사용한다.
 참고로 매직 인장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영지의 영주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다른 하나는 신분증이다.
 숙박부를 대신 작성한 직원이 이번엔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손가락에서 매직 인장을 보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곳은 번듯한 여관이다.
 귀족들도 이곳에 자주 묵곤 했다.
 매직 인장을 가진 귀족이라······. 어중이떠중이 귀족이 아니다!
 직원의 표정이 더욱더 정중하게 변하였다.
 ‘대단한 귀족 집안의 자제 같은데 행색이 왜 저렇지? 호위기사도, 병사도 없고. 범죄잔가? 저 인장을 사용하지 않으면 치안대에 신고해야겠구나.’
 직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빈센트는 상대가 자신의 반지를 보자마자 변하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내심 긴장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매직 인장이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빈센트가 막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직원이 그보다 더 빨랐다.
 “매직 인장이 있으시군요. 동패가 없으시면 인장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렇소.”
 “예, 그럼 이 부분에 인장을 찍으시고 활성화시켜 주시면 됩니다.”
 매직 인장이 활성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빈센트는 직원이 가리킨 숙박부에 인장을 붙이고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잉크도 묻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선명한 낙인이 숙박부에 찍혔다.
 
 「빈센트 데 블러디 남작, 소영지 블러디의 영주」
 
 빈센트를 의심했던 직원의 표정이 단숨에 돌변한다.
 일반 귀족이 아니라 그가 영주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앗! 나, 남작님이셨군요.”
 여차하면 두 사람을 쫓아낼 기세로 노려보고 있던 이들을 맞이한 종업원의 표정도 그 순간 변한다.
 놀람과 두려움으로.
 
 빈센트는 객실로 안내한 종업원에게 의사의 왕진을 부탁했다.
 종업원에게 5테스를 쥐어주었다.
 “곧 모셔 오겠습니다.”
 쌩.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종업원의 태도를 통해서 빈센트는 자신이 꽤 큰 금액의 봉사료를 지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소한 경험이 이렇게 쌓인다.
 ‘좀 더 적게 줘도 되는구나.’
 이왕 준 돈을 다시 회수할 수 없으니 다음번을 기약했다.
 “도로시, 몸은 어때? 조금만 참아 의사를 불렀어.”
 “저 때문에 괜히 돈만 쓰시고.”
 “무슨 소리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약속해.”
 “도련님······.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자자, 그만 누워 있어. 아차, 음식 주문하는 걸 깜빡했네. 내려가서 가져올게.”
 도로시가 눕는 걸 확인한 빈센트는 곧장 프런트로 달려갔다.
 직원이 깍듯하게 그를 반겼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계신가요, 남작님?”
 “음식을 시키려고 하는데.”
 “식사는 객실에서 하실 건가요?”
 “그렇소.”
 “여기 메뉴판이 있습니다. 콕콕 짚어 주시면 바로 요리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이런 것도 있구나.’
 몹시 신기했지만 상대의 시선을 의식해서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빈센트는 메뉴판에서 몇 가지 요리를 찍었다.
 “금방 올려다드리겠습니다, 남작님.”
 “부탁하오.”
 의사보다 요리가 먼저 올라왔기에 빈센트와 도로시는 음식을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얼마 안 있어 의사가 도착했다.
 도로시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가 빈센트에게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상태를 설명했다.
 영양실조에 감기 몸살이 겹쳐서 충분한 음식 섭취와 요양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의사의 말에 빈센트는 내심 다짐했다.
 앞으로 도로시에겐 영양이 풍부한 최고의 음식만 먹이겠노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처방전에 적힌 약을 사오게 한 빈센트는 도로시가 약을 먹고 잠이 들자 여관을 나섰다.
 그는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상점에 들러 지도를 구입하고, 그 옆 옷가게에선 자신과 도로시의 옷과 망토를 구입했다.
 돈이 제법 나갔지만 쉰두 명의 시신에서 거둔 돈이 꽤 되었기에 여행 경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차를 한 대 사야겠구나. 그리고 용병도 고용해야겠어.”
 춥고 황량한 이 계절에 도보로 여행하는 일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외곽으로 베르키엘 영지를 벗어나면서 뼈저리게 느꼈었다.
 탈의실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빈센트, 옷가게의 여주인과 여종업원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정말 잘생긴 미소년, 그것도 신비한 느낌의 미소년이 자신들을 바라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넋이 나간 표정의 옷가게 여주인에게 용병길드를 물었다.
 이후 옷가게를 나선 빈센트는 주저 없이 용병길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드로 가는 와중 빈센트는 지도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지도 그 어디에도 블러디 소영지란 지명이 나와 있지 않았다.
 ‘신생 영지라서 그런가?’
 지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핀 빈센트는 한 가지 의문에 봉착했다.
 ‘이상하네? 소영지로 표시된 지명이 하나도 없잖아.’
 소영지 자체가 영지의 최소 단위인데다, 소영지를 거느린 영주의 뜻에 따라 소영지는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다.
 물론,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영지 대 영지의 싸움보다는 그래도 빈번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 보니 지도에는 소영지를 아예 표시하지도 않았다.
 의아했지만 눈앞에 용병길드가 보이자 빈센트는 지도를 수습한 뒤 건물로 들어갔다.
 긴장했지만 애써 이를 눌렀다.
 “어서 오세요.”
 용병길드에 들어선 빈센트는 젊은 아가씨가 반겨주자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가 알고(책을 통해서) 있는 용병길드는 덩치 큰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이처럼 깨끗하고 단정하며 화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분명 간판을 보고 들어왔음에도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 용병길드 맞습니까?”
 “옙, 용병길드 맞습니다.”
 “아, 맞군요.”
 “용병 등록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고용을 원하시나요?”
 “고용을 원합니다.”
 
 * * *
 
 귀족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가 부유한 것은 아니다.
 귀족이면서도 가난한 자들은 이 세상에 넘쳐 난다.
 대신 이들에게는 평민보다 직업의 선택과 진출의 폭이 넓다.
 용병 디런과 톰이 보기에 자신들을 고용한 어린 고용주는 몰락한 가문의 귀족 자제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서잔가?’
 디런은 C등급의 용병인 그의 실력은 소드 러너로, 이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초입의 경지를 뜻한다.
 그 옆의 톰이란 남자는 D등급 용병으로 일반 병사보다 실력이 조금 나은 정도이다.
 삐걱삐걱.
 낡은 포장 짐마차가 쓸쓸히 홀로 길을 간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덜컹덜컹.
 이 낡은 마차에는 빈센트와 도로시가 타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한 겨울에 여행은 도보나 마차 여행이나 몹시 힘들긴 마찬가지.
 고급 승용 마차라면 내부에 난방이 가능하지만 낡은 포장 짐마차에 그건 바랄 수 없는 사치였다.
 “도로시, 이거 덮어.”
 모포를 넉넉히 구입하여 바닥에 깔고 남은 모포는 겹쳐서 이불로 사용했다.
 짐칸의 천막 역시 두 겹으로 두텁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몸은 절로 으슬으슬했다.
 ‘별채보다 그래도 이곳이 백배 낫지.’
 빈센트는 스쳐 가는 풍경을 천막 틈새로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지만 소년의 내심은 이런저런 걱정들로 가득했다.
 잘할 수 있을까? 자신의 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도착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쭉 늘어지는 물음표의 행렬.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호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은 빈센트는 동전만 물어다주고 사라진 설치류 친구 알리의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버릇처럼.
 그러다 이전과 다른 촉감을 동전에서 느낀 빈센트는 바지에서 이를 꺼내려 하였다.
 하나, 그의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차가 갑자기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베르키엘 백작부인이 보낸 암살자일까?’
 그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빈센트.
 “무슨 일이오?”
 “앞에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막고 있습니다.”
 디런이 퉁명한 어조로 말한 뒤 연방 인상을 찌푸렸다.
 한겨울에 호송 업무는 사람 할 짓이 못된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다.
 디런은 사실 이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여동생이 다쳐서 치료비가 필요치 않았다면.
 반면, D급 용병인 톰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톰.”
 “예, 디런 형님.”
 디런은 올해 36세로 톰보다 아홉 살이 많았다.
 전에도 이 둘은 몇 번 함께 일한 적도 있어 손발이 척척 맞는다.
 “마차 브레이크 단단히 잡아라.”
 “에이, 제가 초봅니까. 염려 붙들어 매세요. 하하.”
 “전에··· 아니다.”
 뒤에서 고용주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디런은 말끝을 흐렸다.
 마부 석에서 내린 두 사람은 길가에 쓰러진 나무를 치우기 위해 힘을 썼다.
 그때, 비탈길에서 도끼, 창, 칼, 검을 쥔 사람들이 우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디런과 톰이 재빨리 무기를 뽑아서 이들과 대치했다.
 도적의 숫자는 모두 열세 명이었다.
 “이곳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놔라. 두당 10테스, 여자는 20테스, 마차는 50테스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서는 언 손에 입김을 후후 불면서 소리쳤다.
 디런이 고개를 돌려서 빈센트를 보았다.
 통행세를 내고 그냥 가자는 기색이다.
 도적들이 요구한 금액은 100테스로 1티카의 곡식을 살 수 있는 꽤 큰 금액이다.
 1티카는 5인 가족이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이다.
 100테스는 이를 사고도 조금 남는 돈이다.
 ‘음, 디런의 표정은 저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왜 도적에게 돈을 줘야 하지?’
 빈센트가 읽은 영웅소설에선 그 누구도 도적과 협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섬멸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렸다.
 하지만 소설과 현실은,
 ‘혼동하지 말자.’
 그렇다고 도적을 만날 때마다 통행세를 낸다면 지갑이 화수분도 아니고 돈은 금세 바닥나고 말 것이다.
 싸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빈센트는 고민했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디런의 무언의 재촉에 통행세를 내고 가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유경험자의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디런 씨.”
 디런이 도적들을 경계하며 마차로 다가왔다.
 “여기 100테스 있습니다.”
 100테스짜리 은화 1개를 빈센트는 디런의 손에 올렸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빈센트가 디런에게 돈을 건네주는 장면에서 그가 끼고 있던 매직 인장을 도적들이 그만 보게 된 것이다.
 허름한 짐마차이다 보니 도적들은 힘 뺄 것도 없이 통행세만 챙기고 보내줄 생각이었다.
 깎아줄 생각도 있었다.
 한데, 저 볼품없는 마차에 귀족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매직 인장을 가진 어린 귀족이다. 잡아다가 저 아이의 부모에게 후한 몸값을 받고 넘긴다면 몇 달을 놀고먹을 돈이 아닌가.
 번뜩.
 도적들의 태도와 눈빛이 단숨에 돌변했다.
 “잠깐, 거기 너 어린놈 내려 봐라.”
 그 변화에 디런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푸닥거리를 피할 수 없겠구나.’
 디런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흐른다.
 디런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빈센트를 나무랐다.
 “매직 케이스에 넣으라고 분명 말했잖습니까.”
 “아, 깜빡했소. 내 실수요. 한데, 저들이 내 매직 인장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매직 케이스란 매직 인장에 내재된 마법 중 하나로 장거리 여행이나, 혹은 기타 등등의 사정 때문에 매직 인장을 감춰야 할 때 사용된다.
 빈센트는 앞서 디런에게서 매직 인장이 쓸데없는 사건에 일행을 휘말리게 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명백한 실수였지만 디런의 말투에 반감이 생겨서 다소 퉁명하게 대꾸했다.
 “휴우,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소. 그보다 실전 경험은 있으십니까?”
 몇몇 경우를 제외한 귀족가의 사내들은 어릴 때부터 검술을 연마한다.
 최소한 제 한 몸, 이왕이면 도로시란 늙은 여자를 소년이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디런이었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없소.”
 “하긴, 일단 저들과 다시 얘기는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쇼.”
 “알겠소.”
 디런이 돌아서서 도적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교섭은 해본다.
 안 되면 그땐 최악의 상황인 칼부림이다.
 칼 밥으로 먹고살지만 칼싸움이 싫은 디런이었다.
 “형씨들 100테스만 받고 우릴 보내 주시오. 날도 추운데 쓸데없이 땀 뺄 필요 있겠소?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귀족이 타고 있는 이상 몸값은 지금의 10배다.”
 우두머리의 말에 디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 마차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쇼? 귀족이라고 다 부자도 아닌 걸 댁도 알 거 아뇨.”
 “알지.”
 “그런데 왜 가격을 올리는 거요?”
 긴장된 신색으로 장내의 상황을 주시하던 톰은 디런의 신호를 받고서 자연스럽게 후방으로 빠졌다.
 우두머리가 히죽 웃으며,
 “매직 인장을 갖고 있는 귀족이 가난하다는 말을 내 평생 못 들어 봤으니까. 흐흐.”
 디런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서 끝까지 가자 이 말이오?”
 “당연하지. 도둑의 본분이 그거잖아. 크크.”
 “그럼, 난 내 본분에 충실해야겠군.”
 디런의 싸늘한 일갈에 우두머리는 코웃음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부드럽게 고치면서,
 “형씨, 내가 당신에게 제안 하나 하지.”
 “······?”
 “저 귀족을 넘겨주면 당신과 당신 동료는 풀어주겠어. 어때?”
 “이런 이런,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길드 소속 용병이라서 말이야. 이 바닥에서 신용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거든.”
 “길드 소속이라고? 할 수 없군.”
 “주둥이로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까 한판 붙을 수밖에. 톰.”
 “옙!”
 “고용주를 지켜라.”
 디런이 도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의 표적은 우두머리 사내였다.
 하지만 우두머리의 실력은 디런의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공격해라!”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도적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마차를 향해 몰려들었다.
 
 부들부들.
 “도, 도련님 어서 도망치세요.”
 겁에 질린 도로시가 애가 탄 표정으로 빈센트의 등을 연방 떠밀었다.
 그녀의 상세는 많이 나아졌지만 달음박질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온전한 상태였더라도 남자들의 달음박질을 어찌 여자의 몸으로 따돌릴 수 있을까.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빈센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도련님!”
 “도로시는 여기서 기다려.”
 “어, 어쩌시려고요.”
 “싸워야지.”
 “도, 도련님이 어떻게 저 흉악무도한 놈들과 싸운다고. 제발, 지금이라도 달아나세요.”
 “싸우지 않으면······ 도로시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난 그게 더 싫어.”
 빈센트는 이를 악물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실전은 처음이다. 검술서의 검술은 어쩜 삼류일지도 모른다.
 ‘내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마차에서 뛰어내린 빈센트는 떨리는 마음을 가누며 사방을 살폈다.
 챙챙챙챙-!
 디런과 우두머리가 박빙의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요놈!”
 창을 든 도적 하나가 디런과 우두머리의 싸움을 바라보던 빈센트를 향해 다짜고짜 창을 내질렀다.
 깜짝 놀란 빈센트는 재빨리 후방으로 몸을 빼낸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을 겨냥한 빈센트의 검을 보고서도 도적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콧방귀를 꼈다.
 도적이 보기에 빈센트는 애송이였다.
 “흐흐,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걱정 마라. 죽이진 않을 거야.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도적이 비웃었다.
 “저건 뭐지?”
 돌연 빈센트는 도적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도적은 반사적으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 틈에 빈센트는 놈을 향해서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노력을 배신하는 결과란 없다.
 푸욱!
 도적의 복부를 뚫고 빈센트의 검이 박혔다.
 “크흑! 비, 비겁한······.”
 사람의 살가죽을 뚫고 내장을 훑는 느낌이 검신을 타고 몸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검을 뒤로 뺀 뒤 아래에서 위로 재빨리 올려쳤다.
 수천, 수만 번을 연습했던 동작이다.
 “크악!”
 도적의 얼굴은 빈센트의 검에 반으로 쩍 갈라졌다.
 전방으로 피분수를 뿜으며 도적은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뒤로 쓰러졌다.
 자신이 하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털썩.
 첫 살인!
 책에서 본 것과 달리 혐오감이나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책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또 다른 도적이 빈센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챙챙!
 “크악!”
 톰이 도적 하나를 베어 넘겼다.
 그 비명이 장내를 또 한 번 뒤흔들었다.
 도적떼의 우두머리는 자신의 수하가 연이어 두 명이나 죽어나자빠지자 순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곳은 곧 놈의 허점으로 나타났다.
 경험이 많은 디런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검에 마나를 잔뜩 입힌 디런은 이를 힘껏 휘둘렀다.
 “크아아아아- 악!”
 디런의 일검을 막지 못한 우두머리의 가슴은 잘 익은 수박처럼 쩍 쪼개어졌다.
 휘청거리는 우두머리를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그 목을 잘라낸 디런이 도적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놈들아! 네 놈들의 우두머리는 뒈졌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하자 도적들이 당황했다.
 놈들이 한눈을 판다.
 자신을 상대하고 있던 도적이 한눈을 팔자 빈센트가 달려들어서 막 돌아서던 도적의 가슴팍을 깊게 찔렀다.
 도적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비틀거렸다.
 도적의 가슴팍에서 검을 뽑아 낸 빈센트는 다시 한 번 도적의 가슴팍을 재차 찔렀다.
 이번엔 심장이 찔린 도적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털썩.
 두 번째 살인.
 빈센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행크! 이 개새끼가!”
 빈센트의 손에 죽은 이의 이름이 행크였나 보다.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며 한 도적이 그를 향해 미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하나 이자는 톰이 달려와 옆구리를 베면서 몇 걸음 만에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자의 목을 톰은 가차 없이 베어 숨통을 끊어 버렸다.
 그제야 사기가 와르르 무너진 도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디런이 빈센트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심해!”
 쐐애애액.
 달아나던 도적 중 하나가 빈센트를 향해서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빈센트가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던 두꺼운 검은 동전과 부딪치면서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빈센트다.
 방심하다 당한 공격이기에.
 “이놈들이!”
 빈센트의 안전을 확인한 디런은 바닥에 떨어진 창을 들어서는 활을 쏜 도적의 등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등에 창이 꽂힌 도적은 앞으로 꼬꾸라졌다.
 몇 번의 경련 후 도적은 목숨이 끊어졌다.
 “괜찮습니까?”
 멍하니 서 있던 빈센트를 향해 톰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깨어난 빈센트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죽다 살아난 느낌을 떨치고자,
 “······괜찮소.”
 겨우 대답한 빈센트는 장내를 둘러보았다.
 피와 시체.
 이보다 더한 시체와 더 많은 양의 피를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 자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한 짓도 저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디런이 빈센트를 향해 다가왔다.
 마차에서 도로시가 내렸다.
 빈센트의 옷에 묻은 혈흔을 본 도로시가 그의 것인 줄 알고 놀라 소리쳤다.
 “흑흑, 도련님. 도련님.”
 도로시에게 빈센트는 상냥하고 마음씨 착한 어린 소년이었다.
 한데 그런 도련님이 칼을 들고 사람을, 도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두 명이나 제 손으로 죽였다.
 그녀에겐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충격보다 빈센트의 충격을 더 걱정했다.
 “괜찮아, 괜찮아. 도로시.”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화살에 맞은 빈센트의 검은 동전, 그 동전의 두꺼운 표면이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껍질(?)을 완전히 벗은 동전에는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윈(W).
 그것은 레기온 마스터의 25개의 문장 중 하나를 상징하는 문자였다.
 문자는 빈센트의 호주머니 속에서 소리 없이 빛나고 있었다.
 이 빛은 동전에서 빠져나와서는 빈센트의 골반으로 파고들더니 낙인(烙印)을 남겼다.
 당사자조차 이를 느끼지 못하였다, 전혀.
 제4장 윈(W)의 문장
 
 
 
 
 
 가이어스 소국 중부도시 레논.
 도시는 국왕직할령으로 가이어스 소국 수도 가노아와는 마차로 불과 나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수도와 가깝다 보니 도시 레논은 귀족, 상인, 여행객들로 일 년 내내 붐비는 번성한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점심이 갓 지났을 무렵 도시 레논으로 빈센트 일행을 태운 초라한 포장마차가 들어섰다.
 일행은 마차바퀴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이를 수리하느라 이틀을 길가에서 추위에 떨면서 보냈었다.
 역시, 겨울은 여행자들에겐 악몽의 계절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레논은 언제 봐도 화려함과 활기로 가득 차 있다니까. 안 그래요, 디런 형님?”
 톰이 주변을 돌아보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디런이 고개를 내저으며 충고한다.
 “분위기에 휩쓸렸다간 빈털터리 신세 면치 못한다, 명심해라.”
 “제가 어린아입니까? 저도 알 만큼은 안다고요.”
 “알면 됐어.”
 “그런데 숙소는 어디로 정하죠?”
 디런이 뒤쪽을 힐끔거린다.
 고용주의 뜻에 달렸다는 표현이다.
 “고용주님, 어디로 갈지 정해주시겠습니까?”
 빈센트를 대하는 디런의 태도는 처음 그에게 고용되었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의 변화는 도적떼를 상대로 함께 싸운 후부터였다.
 용병에게 있어 오만한 철부지 고용주처럼 불안하고 불편한 존재는 없다.
 하지만 저 어린 고용주는 아무리 힘들어도 징징거리지도, 그리고 무턱대고 나대지도 않았다.
 용병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법도 없었다.
 그 점이 디런의 마음에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빈센트.
 “저렴한 곳으로 가죠.”
 “그러죠, 톰 들었지? 럼의 여관으로 간다.”
 “럼의 여관요? 아, 나 거기 외상 있는데.”
 “럼이 네게 외상을 줬단 말이야?”
 “왜 그리 놀라요? 원래 주는 거 아닌가.”
 디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톰의 위아래를 쓸어보더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럼이 어떤 사람인데. 외상을 줘.”
 “쉽게 주던데.”
 “쉽게?”
 톰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디런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톰을 빤히 보더니,
 “럼도 늙었나?”
 “제가 세 달 전에 봤는데 여전히 쌩쌩하던걸요.”
 “신기한 노릇이네. 아무튼 목적지는 럼의 여관이다.”
 덜커덩, 덜커덩.
 흔들리는 마차 안.
 빈센트는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도적들과의 전투 이후 며칠이 흐른 지금까지도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도로시의 표정엔 안쓰러움과 염려로 가득했다.
 “도련님, 그 일은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절대!”
 “도로시, 지금까지 그 말을 백번도 넘게 들었어. 나 정말 아무렇지도······.”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폐다.
 그래서 빈센트는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도로시에게만큼은 그녀가 알던, 잘 안다고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아냐, 그래. 고마워. 노력할게.”
 “가련하신 도련님. 흑흑.”
 “또, 또. 이제 그만 울어 도로시, 도로시가 울면 나도 슬퍼지잖아. 그리고 그 생각도 나고.”
 “앗! 에고고. 죄송해요. 앞으로 요놈의 입 꾹 다물고 있을게요.”
 “그렇게 꽉 쥐면 아프잖아. 그만해.”
 “이렇게나 상냥하신 도련님인데, 그놈들이 나빠요. 얌전히 보내줬으면 저들도 살고, 우리 착한 도련님도 이렇게······. 앗, 또 실수.”
 “하아, 도로시 이젠 다 나았나 보네. 수다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도로시가 난 좋아. 앞으로도 쭉 아프지 마. 수다는 좀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걸로. 후훗.”
 “노력은 할게요, 도련님.”
 그때, 마차가 한번 크게 덜컹거리더니 가던 것을 멈추었다.
 톰이 천막을 걷고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저렴한 여관치고 럼의 여관은 규모가 작다 뿐이지, 깔끔한데다 음식도 맛있게 잘했다.
 객실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럼의 여관엔 단골이 많아 일 년 내내 성업 중이다.
 현재 여관 뒤로는 증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가올 봄을 위해서.
 이곳에 여장을 푼 빈센트는 방 세 개를 잡았다.
 하나는 용병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시의 것, 그리고 하나는 그의 것이었다.
 똑똑.
 “예.”
 “손님, 부탁하신 목욕물 받아놨습니다.”
 번듯한 규모의 여관은 객실 내부에 목욕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럼의 여관은 개별적으로 돈을 지불한 뒤 목욕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커다란 통에 뜨거운 물을 담는 일은 수작업이다.
 그래서 약간의 봉사료를 지불해야 한다.
 종업원에게 봉사료로 3테스를 지불한 빈센트는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욕실로 들어섰다.
 한쪽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그는 옷을 벗어서 담았다.
 그 옆으로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철검도 놓아두었다.
 빈센트는 자신의 몸에 낙인(레기온 마스터의 문장)이 찍힌 걸 알지 못했다.
 첨벙.
 뜨거운 물의 열기가 온몸으로 흡수되는 듯하다.
 “하아, 천국이 따로 없구나.”
 날개처럼 두 팔을 활짝 펼쳐 욕조에 걸쳤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뒤로 젖혔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툭 떨어져 그의 콧잔등을 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블러디 소영지를 발판으로 일어서야 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영지로 만들고 싶었다.
 아직은 초라한 소영지에 불과하지만.
 과연, 자신에게 그런 역량이 있을까? 조용히 반문하는 그의 표정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여관의 종업원을 부리는 것도 돈이 드는데, 영지라는 큰살림을 사는 데는 돈이 얼마나 들까?’
 52구의 시신과 승용 마차와 짐마차가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영지 운영에 필요한 인력.
 그리고 마차에는 영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쉬웠다.
 자신은 왜 남들처럼 편안하게 인생을 살지 못할까?
 여태껏 살면서 수도 없이 자신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답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타월을 든 그가 욕조를 빠져나와 몸을 닦았다.
 슥슥.
 이내 골반을 닦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한쪽은 매끈한 데 다른 한쪽에서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전에 없던 문신이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빈센트는 재차 확인했다.
 그것은 ‘W’의 문신이었다.
 문신이라니? 언제 자신이 이런 문신을 했지? 빈센트는 고개를 연방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사학자 알론 드 슈타이어의 특별한 소환사에 대한 고찰이란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끼고 살다시피 한 책이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어준 다리였다.
 그래서 그 내용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유일신 ‘룬’은 잔인하고 사악한 전사 2만 5천명에게 저주의 낙인을 찍어, 25개의 군단으로 나누었다. 불멸의 병사의 탄생의 신화적인 배경이다. 이들은 영원히 낙인을 가진 채 주인(인간)의 뜻대로 싸우는 운명을 지속하게 된다. 불멸의 병사, 혹은 저주받은 전사라고도 불린다.
 
 ······신실한 자들이 세운 유일신 ‘룬’의 성지(교회)를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선 레기온(불멸의 병사)은 소환이 되지 않는다. 허나, 범위 밖에서 소환하였을 때는 성지로의 진입과 그곳에서의 전투가 가능하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레기온 마스터를 두려워한 권력자들에게 룬의 성지는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안전한 방책과 같은 곳이다. 그렇다 보니 수도나 혹은 도시마다 룬의 성지가······(중략)······ 레기온 마스터를 상징하는 25개의 문장은 이러하다.
 
 F(페오), Ur(울), Th(손), A(안스르), R(라드), K(켄), G(지푸), W(윈), H(하갈), N(니이드), I(이스),
 J(제라), Y(에오), P(페오스), Z(에오르), S(시겔), T(티르), B(베오르크), Ee(에오에와즈), M(만),
 L(라구), ing(잉그), Ot(오셀), Od(오달), Da(다에그)이다.
 
 ······불멸의 소환주문은 “나 〇〇(문장이름)의 레기온 마스터 〇〇〇이(가) 원하노니, 레기온이여 그대들의 주인의 부름에 현신하라.”로 알려져 있다.]
 
 빈센트는 이 소환 주문을 내심 입버릇처럼 외우곤 했었다.
 이 주문을 외울 때면 뭐랄까? 자신이 레기온 마스터가 된 듯한 든든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뜻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자신의 삶에 더할 나위 없는 해방구로서.
 한데, 지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기온 마스터의 문장 중 여덟 번째인 W(윈)의 문장이 제 몸에서 발견됐다.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대체?’
 
 마음이 조급한 사람처럼 빈센트는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먹었다.
 도로시의 염려와 잔소리를 들었지만 빈센트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확인!’
 그의 머릿속에는 목욕하면서 보았던 레기온 마스터의 문장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룬의 성지(교회)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낮에 그는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공터에서 소환 주문을 외웠었다.
 몹시 떨리고, 한편으론 기대와 흥분된 마음이었다.
 하지만 소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착각이었나? 내심 실망했을 때 성지의 종소리를 듣게 됐다.
 “도련님, 왜 벌써 일어나세요?”
 식당 안에는 식사를 위해서, 혹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 상인, 직장인, 용병, 병사들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 식당은 금세 왁자지껄했다.
 이런 경우 말싸움이 번져 싸움이 일어나게 마련이었지만, 여관의 주인 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 모두 럼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디런과 톰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서.”
 빈센트는 참을 수 없었다.
 당장에 이 도시를 벗어나, 성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문제는 그 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기에.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 사학자 알론 드 슈타이어의 특별한 소환사에 대한 고찰의 책을 되짚기 위함이었다.
 즉,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볼일이라고요? 여긴 초행이잖아요, 도련님.”
 “서점에 가보려고.”
 “하긴, 한참을 더 가야 하니까. 예전부터 우리 도련님은 책을 참 좋아하셨죠.”
 도로시는 다들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였다.
 빈센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도로시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 보았다.
 개중 여자들의 시선은 내내 빈센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었다.
 달빛으로 만든 듯 신비한 빈센트의 은색의 머리칼과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그의 신비한 검은 눈동자, 미소년 하면 떠오르는 가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는 꽃이 나비와 벌을 부르듯 여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여정 내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자 그의 미모는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적인 가냘픈 미모는 아닌, 강인한 느낌의 미모였다.
 특히, 그의 검은 두 눈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처럼 끌어올렸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지만, 몇 년 후의 그는 희대의 미장부를 예고하고 있었다.
 “톰, 안내해 드려라.”
 “아뇨, 괜찮습니다. 종업원에게 대략적인 위치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초행이지 않습니까? 밖이 저리 어두운데.”
 거리는 마법 등으로 도시 전체에 별을 박아 놓은 듯했다.
 “금방 다 먹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음식을 입안에 모조리 쓸어 담은 톰이 일어서면서 우물우물 씹는다.
 빈센트는 거절하려다가 저들의 임무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임을 상기하곤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도련님.”
 “도로시는 무리하지 말고 올라가서 바로 쉬어.”
 식당의 훈훈한 기운은 문을 열자마자 오간데 없이 스러진다.
 휘이이이잉.
 외투를 여민 두 사람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빈센트 님.”
 “예.”
 “말 편히 하십시오. 저보다 신분도 높으신데. 헤헤. 저······.”
 “말하세요?”
 “혹시, 빈센트 님도 마나연공법을 수련하시고 계십니까? 아! 당연히 그러시겠죠. 뛰어나신 검술 솜씨에, 귀족이시고. 거기다 인물도 좋으시고. 빈센트 님을 보면 룬의 축복이 몰빵 한 것 같습니다. 헤헤.”
 빈센트의 입가에 씁쓸함이 차오른다.
 “그런데 몰빵이 무슨 뜻입니까?”
 “몰빵요? 평민들이 사용하는 비속언데. 빈센트 님 같은 분은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그렇군요.”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성격이 좋으시군요, 톰 씨는.”
 “예? 하하, 실력이 없음 성격이라도 좋아야죠.”
 톰은 D급 용병이었지만 조금만 가다듬으면 C급도 문제없는 인물이었다.
 “겸손하시네요.”
 “귀족이시라 그러신지 말씀도 참 고상하신 게. 저도 배워야겠습니다.”
 “그리고 전 마나연공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예? 에이, 설마······.”
 빈센트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톰이 의아했다.
 ‘내 말이 그렇게 신용이 없었나?’
 디런과 톰에게 단 한 번도 실언이나, 빈말을 던지지 않았다.
 한데 자신의 말을 정면에서 부정하다니.
 이유가 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다른 뜻이 없어······.”
 “아뇨, 불쾌한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으음, 정말 모르십니까?”
 걸음을 멈춘 톰이 그를 바라보며 그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큰 실례라는 것을 떠올리곤 눈을 내리깔았다.
 “몰라서 묻는 겁니다.”
 “으음,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요. 디런 형님이 한 말인데요. 절대, 저도 그리고 디런 형님도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일까? 의아했지만 한편으론 궁금했기에 무언으로 톰의 말을 재촉했다.
 톰이 혀로 제 입술을 적시며 말한다.
 “저 소년의 검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언뜻 보니 그 실력이 나보다 비슷하거나, 혹은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어라고 디런 형님이 일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내 실력이 소드 유저란 말입니까?”
 “디런 형님이 소드 러너니까, 바로 윗 단계면 소드 유저죠.”
 소드 유저는 소드 익스퍼트나 소드 마스터처럼 초급, 중급, 상급이 없었다.
 한 평생 검을 잡아도 소드 유저에서 익스퍼트로 올라가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올해 서른여섯 살인 디런의 경우 열여섯 살에 처음 검을 잡고 용병 일을 시작했으니, 검을 잡은 지 햇수로 딱 20년이다.
 유저에서 익스퍼트로 가기 위해서는 흔히 말하는 벽이란 것을 깨야 한다.
 익스퍼트에서 마스터로 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두 경우 후자가 당연히 힘들다.
 한데, 톰의 입을 빌린 디런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익스퍼트로 가기 전 단계인 소드 유저라고 한다.
 빈센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기에 내심 얼떨떨했다.
 “농담이겠죠.”
 “디런 형이 보기와 달리 검에 관해서는 굉장히 냉철한 구석이 있습니다. 결코, 빈말이나 할 위인이 아니랍니다. 헤헤.”
 어느새, 두 사람은 서점 앞에 도착했고 이야기도 거기서 끝이다.
 톰은 서점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책 냄새만 맡아도 멀미가 난다나 뭐라나.
 “그래도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긴 추운데.”
 “이깟 추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고향은 이곳보다 열 배는 더 추운걸요.”
 “할 수 없군요. 그럼 용무만 끝내고 나오겠습니다.”
 “천천히 하십시오.”
 빈센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잉크와 종이 냄새가 가게 안에 가득 차 있었다.
 톰은 이 냄새를 싫어할지 모르지만 빈센트는 이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젊은 여종원이 무심결에 인사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라서는 얼굴을 붉힌다.
 “어,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사학자 알론 드 슈타이어의 특별한 소환사에 대한 고찰이란 책을 찾고 있습니다.”
 “잠시 만요. 제가 가져다······.”
 상냥하고 적극적인 친절을 받고도 책을 사지 않기란 힘들다.
 참으로 대단한 상술이 아닐 수 없었다.
 ‘두고두고 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빈센트는 모르리라, 여종업의 행동이 그만을 향한 특별한 호의라는 것을 말이다.
 이래서 남자나 여자나 인물은 일단 잘나고 볼일이다.
 
 * * *
 
 도시 레논의 빈민가.
 겨울은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 사신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다.
 그들의 낮과 밤은 언제나 추위와 배고픔으로 함께하고 있었기에.
 이곳에선 사람들이 수시로 죽어 나간다.
 특히, 겨울이 더 심했다.
 ‘하아, 이대로는 안 되겠어.’
 노인 벨키오의 얼굴에서 근심이 자욱했다.
 올해 쉰여덟 살인 벨키오의 얼굴은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힘든 삶의 찌든 때이리라.
 벨키오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쌍둥이 손자 손녀가 있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다.
 며느리는 폐병으로 죽었고, 아들은 상단의 일을 배우겠다며 떠나서는 아직 소식 하나 없었다.
 올해로 6년째였다.
 위태롭게 서 있는 판잣집 한쪽에는 벨키오가 아끼는 책이 놓여 있었다.
 빈민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부족한 장서량이었다.
 턱턱턱.
 벨키오는 자신의 손 때 묻은 책을 낡은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지식은 머리를 살찌우지만, 어린 손자와 손녀에게는 지식보단 떼거리와 땔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노인은 어린 쌍둥이들을 위해서 안전한 내일을 열어주고 싶었다.
 그들이 꿈꿀 수 있는 미래를.
 ‘테일러, 더 이상 널 기다려줄 수 없을 것 같구나.’
 벨키오는 며느리에 이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역시 자신의 가슴에 묻기로 했다.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오기만을 더는 이곳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마르고 왜소한 노인에게 책 이십여 권의 책의 무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콜록, 콜록.”
 
 용병 톰은 지나가는 마차와 행인들을 구경하며 입김을 뿜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이렇게 번화한 대로에서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좋았기에, 이쯤의 추위는 참을 수 있었다.
 ‘와우, 저 여자 몸매 봐라. 벗겨 놓으면. 꿀꺽.’
 그렇다 톰은 특히 여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길 건너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던 톰은 마차가 그 사이를 지나가자 몹시 안타까웠다.
 시야를 가리던 마차가 사라지자 아가씨도 사라지고 없었다.
 낙심천만!
 하지만 곧 그는 새로운 아가씨를 볼 수 있었다.
 이번엔 단체로.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뺀질뺀질한 사내놈들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보게, 가게 문을 막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드나들겠나. 옆으로 비켜서 주겠나.”
 아름답고 예쁜 아가씨를 바라보며 눈을 정화하고 있던 톰은 눈앞에 웬 추레한 노인이 기침을 해대며 서 있자,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 표정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들어가세요.”
 “고맙네.”
 노인은 벨키오였다.
 서점으로 들어선 노인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은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을 보게 되었다.
 “이보게.”
 벨키오는 은발의 소년, 빈센트를 이곳에 일하는 점원으로 생각했다.
 빈센트는 깡마른 체구에 허름한 옷의 노인이 자신을 부르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 불렀습니까?”
 벨키오는 빈센트의 말투에서 고전적인 느낌을 받았다.
 어둠의 한 조각을 떼어다 둥글게 압축한 듯한 소년의 또렷한 검은 눈동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위압감 같은 것을 느꼈다.
 소년의 분위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가이어스 소왕국에서도 인재들만 모인다는 왕국 아카데미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민이 아니다.’
 벨키오는 단숨에 상대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빈센트는 현재 자신의 매직 인장을 매직 케이스를 발동하여 숨긴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를 알아차린 것은 한때, 귀족들의 자제들만 입학이 가능한 가이어스 왕국의 왕립 아카데미의 전임 강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가이어스 인들은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조국이 소왕국으로 분류되었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왕국민이라 불렀다.
 소년의 옷차림은 여행자들의 흔한 복장이었지만, 이러한 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분위기란 게 있었다.
 귀족적인 용모는 평민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분위기는 절대 흉내 낼 수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체취와도 같은 것이기에.
 “시, 실례했습니다. 귀인을 몰라 뵙고 서점의 점원으로 착각했습니다. 늙은 것이 눈이 어두워서 귀인께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귀족, 특히 젊은 귀족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았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대접해 주기를 바랐다.
 반대로 자신을 무시하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을 때는 트집거리를 만들어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곤 하였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치기의 발로이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큰 고통이었다.
 빈센트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고 가문을 부정하였지만 그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점원은 날 대신해서 책을 찾으러 갔습니다. 저기 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기다리세요.”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함과 비굴함은 다르다.
 벨키오의 행동은 정중했지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빈센트는 초라한 복장의 노인이 소중히 감싸고 있는 보따리를 보았다.
 보따리의 모양새로 보아서는 책이 분명했다.
 허름한 저 옷차림만 놓고 볼 때 노인이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훔친 걸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노인의 태도와 눈빛을 보았기에 빈센트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남의 물건이나 훔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노인이 자신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빈센트는 시선을 거두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손님이 찾으시던 책이 오래전에 출간된 것이라서 찾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아뇨.”
 빈센트는 책값을 지불하였다.
 차례를 기다리던 벨키오는 그가 구입한 책의 표지를 보곤 노안을 반짝였다.
 ‘사학자 알론 드 슈타이어의 특별한 소환사에 대한 고찰이로구나.’
 한때 벨키오도 저 책을 통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바 있었다.
 레기온 마스터!
 이 세상에서 저 책에서처럼 레기온 마스터를 자세하게 설명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인 벨키오는 가이어스 왕국 아카데미에서 평민으로는 최초로 전임 강사를 맡아 했었다.
 그가 가르친 학문은 병법.
 그러나 세상은 평민인 그가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으로 그를 몰아붙이며 나락으로 내던졌다.
 “안녕히 가세요.”
 여점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빈센트는 문으로 다가갔다.
 “이 책을 팔고 싶은데.”
 “책이요?”
 빈센트가 아직 서점을 나서지 않았기에 여점원은 그의 얼굴을 좀 더 보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노인은 종업원 앞에서 보따리를 풀었다.
 노인의 손때가 묻은 책이 드러났다.
 “이걸세.”
 “죄송한데요. 내일 낮에 오세요. 지금 주인님이 안 계셔서.”
 벨키오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빈센트가 돌연 발길을 돌려 계산대로 걸어왔다.
 그가 다가오자 여점원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빈센트의 관심은 여점원에게 있지 않았다.
 “그 책을 파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귀인.”
 실망이 가득했던 노인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밝아졌다.
 벨키오가 가져온 책은 그가 몹시 아끼는 것으로서 전쟁의 역사, 병법, 용병술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책에 빈센트가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눈치챘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귀인.”
 허락을 얻은 빈센트는 그 자리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장마다 주인의 손길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한 주인의 개인적인 견해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으음, 이 주석은 누가 단 것인지 아십니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빈센트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제가 달았습니다.”
 대답하는 벨키오의 얼굴에 씁쓸함이 녹아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는 듯했다.
 ‘이 책을 진심으로 아끼는구나. 그런데도 내놓는 것을 보니······.’
 노인의 행색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삶에 처해 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빈센트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삶을 살아보았기에.
 “그 책을 제가 다 사겠습니다, 어르신.”
 
 * * *
 
 힐끔, 힐끔.
 빈센트는 벨키오 노인과 그의 쌍둥이 손자 손녀와 함께 자신의 영지 블러디로 향해 가고 있었다.
 쌍둥이 중 여자아이가 빈센트를 수시로 흘끔거렸다.
 낡은 마차는 내부가 넓어서 다섯 사람이 앉아도 불편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체온이 내부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흐음.’
 빈센트는 벨키오의 주석이 달린 병법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러다 의문점이 생기면 벨키오에게 이것저것 수시로 물었고, 학생을 가르쳐 본 경험이 풍부한 벨키오는 그가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다.
 벨키오 일가와 빈센트 일행이 동행하게 된 것은 이들 일가의 목적지가 놀랍게도 블러디 소영지였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일단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이들을 일행에 합류시켰다.
 빈센트의 신분은 용병들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벨키오가 어떻게 신생 소영지를 알까? 그 이유는 레논의 빈민가에서 일부 사람들이 빈센트의 영지인 블러디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아버지 맥칼핀 백작은 소영지의 최소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빈민들을 상대로 집하고 소작할 수 있는 땅과 가축을 약속한바 있었다.
 물론, 이는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 일이 아내에게 알려졌다간 그 독한 여인이 아들 빈센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아무튼 이러한 배경으로 벨키오 일가와 빈센트의 인연이 이어졌다.
 빈센트는 벨키오의 학식과 해박함에 매순간 놀라워하고 있었다.
 “동부 노르곤 평야의 대회전이 양국의 결정적인 승부수였지요, 당시 그 지형과 양국의 군세는··· (중략)··· 그 전투로 열세였던 벨루시아 왕국이 승리하여, 지금의 노르곤 평야를 벨루시아가 얻게 되었지요.”
 “아! 그렇군요.”
 백이십 년 전, 가이어스 소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벨루시아 왕국과 벨루시아의 북쪽에 위치한 왕국 험잠은 노르곤 평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5년간 싸웠다.
 빈센트가 펼쳐 든 책은 양국의 전쟁을 기술한 책으로 당시 벨루시아 측 장군인 키엘 드 로만이 저술한 것이다.
 다른 책에서도 그렇듯 이 책에도 역시 벨키오의 주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벨키오의 견해 하나하나가 빈센트에겐 빛으로 가득한 신세계였다.
 “한데, 빈센트 님.”
 “예.”
 “귀족이신 빈센트 님께선 무슨 일로 소영지 블러디로 가시는 건지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벨키오.”
 영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빈센트는 은근한 목소리로 벨키오의 견해를 물었다.
 
 “나라를 강대하게 만드는 방법은 때로 백성의 뜻에 따르고, 그들이 순종할 때는 칭찬을 하며, 좋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습니다. 가혹하고 전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한, 백성은 즐겁게 순종하며 왕을 따를 것입니다. 영지는 작은 왕국, 빈센트 님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을 빈센트는 잊지 않기 위해서 되새겼다.
 베르키엘 백작 성을 능가하는 영지를 꿈꾸고 있는 빈센트에게 있어 벨키오의 조언은 잊지 말아야 할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었다.
 “젊은이에게 여행만 한 훌륭한 스승이 없지요.”
 “벨키오는 블러디 소영지로 가서 무엇을 하실 겁니까?”
 이리 말하며 빈센트는 쌍둥이를 보았다.
 쌍둥이의 나이는 열세 살로 빈센트와는 불과 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첫째 아일러는 눈빛이 맑고 영특하며 뼈대도 굵은 것이 잘만 가르치면 훌륭한 인재가 될 것 같았다.
 둘째 에일리는······.
 ‘귀엽군.’
 어쨌든 이들 조손과의 인연이 빈센트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초장이 일을 해볼까 합니다.”
 초장이란 초를 만드는 직업을 이른다.
 어둠을 밝히는 이 물건은 현재에 와서는 서민이나 이용하지 귀족과 부호는 마법 등을 사용했다.
 초장이의 주 고객층이 서민이다 보니 노력에 비해서 수입은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블러디 소영지는 인구 이천을 겨우 채운 신생 소영지가 아닌가.
 벨키오의 말에 쌍둥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두 아이는 벨키오에게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서 어려운 문장과 단어도 쉽게 읽고 쓸 수 있었다.
 빈센트는 벨키오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내 영지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그리고 블러디에 있어 벨키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빈센트는 벨키오를 자신의 영지에 중용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것은 훗날의 일이기에 빈센트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톰이 마차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며 말했다.
 “빈센트 님,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바람막이도 없이 밖에서 노숙하는 일은 몹시 고통스럽다.
 그나마 빈센트와 도로시, 벨키오 조손은 마차 안에서 쉴 수나 있지, 디런과 톰은 모포와 모닥불에 의지한 채 밤을 지새워야 한다.
 마차는 길옆으로 멈추었다.
 말린 땔감이 마차 뒤쪽에 있었기에 젖은 땔감을 말려서 모닥불을 피우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마차가 짐이 되긴 해도 이럴 땐 좋았다.
 쌍둥이들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처음 쌍둥이들은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며 얌전히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틀을 함께 여행하다 보니 이젠 그 경계심과 두려움이 허물어져서 이처럼 발랄한 어린아이의 면모를 드러냈다.
 “도련님, 저 아이들 참 귀엽지 않나요?”
 “응, 귀여워.”
 도로시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쌍둥이들도 도로시를 무척이나 따랐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은 도로시에게서 엄마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빈센트가 도로시에게 느꼈던 것처럼.
 도로시가 빈센트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도련님도 한참 뛰어노실 나이였는데.”
 열여덟!
 하나 소년은 한창인 시절에 서자의 굴레 속에서 하루하루를 빈곤과 두려움에 전전긍긍했다.
 그 참혹한 세월을 알기에 쌍둥이 남매의 모습에서 도로시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왈칵 치밀었다.
 
 일행이 노숙 준비를 마치자 세상은 주황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었다.
 모닥불 가에 앉아서 황혼을 바라보던 빈센트가 일어나더니 잡목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볼일.”
 “멀리 가진 마세요.”
 도로시가 디런과 톰에게 눈빛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당신들의 고용주가 움직이는데 왜 불가에서 노닥거리느냐며.
 주섬주섬.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톰이 자청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표정으로.
 빈센트는 그의 동참이 반갑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에게 발생한 중요한 현상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데, 톰이 따라붙으려고 하자 어떻게든 주저앉힐 명분을 찾아야 했다.
 “톰 씨는 여기 있어요. 난 예민해서 일을 볼 때 누군가 옆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됩니다.”
 “하지만······.”
 톰이 도로시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빈센트는 톰이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한 배경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로시도 참.’
 자신을 늘 걱정하는 도로시의 마음에 그는 한편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도로시.”
 “예, 도련님.”
 “멀리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멀리 가심 안 돼요!”
 “알았어.”
 도로시를 안심시키자 그제야 톰이 그녀의 채근에서 해방되어 자리에 앉았다.
 빈센트는 빠른 걸음으로 잡목림으로 들어갔다.
 얼마간을 속보로 걸어간 빈센트는 작은 공터에 멈춰 섰다.
 두근두근.
 심장이 약을 먹었는지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통해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빈센트는 레기온 마스터의 주문을 상기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본 후,
 “나 윈(W)의 레기온 마스터 빈센트가 원하노니, 불멸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의 주인의 부름에 현신하라!”
 대기의 흐름이 순간 그의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휘감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돌개바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라라락.
 빈센트의 눈앞에 이상한 전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선택을 바라는 자들의 강렬한 염원,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들의 아우성이 형상화된 장면이었다.
 선택이란 숙제가 그에게 펼쳐졌다.
 일천의 레기온.
 이들 전원을 한 번에 소환시킬 것인지, 혹은 이중 일부를 소환시킬 것인지를 묻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빈센트는 장소의 협소함을 생각해서 레기온 하나를 선택하여 소환했다.
 “···현신하라!”
 휘류류류륭!
 쿠우우우웅!
 선택을 끝내자 그의 눈앞에 190센티미터 장신의 인영이 등장했다.
 인영은 전신이 촘촘한 흑색의 비늘로 덮여 있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체모는 단 한 오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동자는 빈센트의 눈동자와 같은 흑색이었다.
 하나 명료하고 깨끗한 빈센트의 눈동자와 달리 혼탁하고 거친 어둠을 담고 있었다.
 레기온은 한 손엔 원형의 대형방패인 호플론을, 다른 한 손에는 길이 7, 80센티미터의 쇼트 소드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레기온의 이마에는 그 자신이 종속된 문장과 같은 윈(W)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쿵쿵쿵쿵.
 두 눈으로 직접 레기온을 보게 된 빈센트의 심장은 고장 난 물레방아처럼 이 순간 격렬하게 움직였다.
 꿈인지, 생신지.
 ‘지, 진짜였어! 내가··· 내가 레기온 마스터야!’
 소년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5장 소년 영주
 
 
 
 
 
 블러디 소영지.
 주인이 도착하지 않은 이곳 신생영지는 내부적으로 반목과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인구 2천 명을 급조하느라 영지의 백성 대부분이 범죄자, 빈민,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의 주민들은 지배층을 향한 거부와 반감의 골이 무척이나 깊었다.
 이들을 다독이고 이끌기에는 지금 당장으로 봐서는 쉽지 않은 험난한 과제였다.
 맥칼핀 백작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수족인 롤링 루 프록 행정총관에게 은밀히 일러 빈센트를 도와줄 실력과 성품이 훌륭한 행정관을 이곳으로 미리 보내었다.
 하지만, 영지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행정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젊은 행정관들은 하루 빨리 자신들이 모실 영주와 영주의 군대(베르키엘 백작부인의 사주로 사망한 두 명의 기사와 오십 명의 병사)가 오기만을 목 놓고 기다렸다.
 이들의 하루하루는 가시방석이다.
 영주관, 행정관실.
 세 명의 행정관 중 유일한 여성인 레이즈는 분개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여 행정관은 흔치 않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행정관으로서의 출세는 제한된 게 현 대륙의 실정이다 보니 여성이 행정관에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행정관을 지원했으니, 그녀의 소신과 열정의 대단함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포부를 품고 신생 소영지 블러디로 오게 된 레이즈.
 막상 와보니 이건 무법자의 소굴이었다.
 ‘팰런 그자가 제일 문제야.’
 행정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던 레이즈는 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큰 세 집단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팰런이란 자와 수시로 충돌했다.
 그녀는 팰런이란 자에게 모멸감과 낭패를 여러 번 당했지만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오기와 열정을 불태웠다.
 레이즈가 툴툴거렸다.
 “대체 영주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정말, 오시긴 오시는 거 맞아?”
 “올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영주님이 오실 거라는 기별을 받았으니까, 분하더라도 조금만 참자. 레이즈.”
 연장자 알란이 좋은 말로 레이즈를 다독였다.
 연장자라고 해봐야 다른 두 행정관보다 그는 고작 한 살이 많을 뿐이다.
 레이즈, 리마는 22세. 알란은 23세이다.
 행정관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연줄이 필요하다.
 젊은 세 행정관에겐 머리와 재능과 열정은 넘쳐흘렀지만 이들을 밀어주고 끌어줄 연줄이 없었다.
 이러한 약점이 이들에게 없었다면 블러디 소영지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마가 한숨 쉬면서 말한다.
 “주민들이 믿고 따르는 자들은 프랭크, 팰런, 헤일리아라는 자들이잖아. 영주님이 오셔도 지금의 상황은 변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영주님을 겁박해서 영지를 지들 맘대로 하려고 들 거야.”
 현재 영지의 병력은 스무 명으로 이들은 영지의 정식관료인 자신들의 말보다는 세 유력자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현상은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마의 말에 알란이 한숨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랬다간 주변 영지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영주님을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겠지만.”
 알란의 말에 레이즈와 리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영주가 오더라도 이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묘수를 세우기 힘들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영지를 떠야 하나? 레이즈를 제외한 알란과 리마는 내심 이러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더욱이 이곳의 주인인 영주는 고작 15세의 소년이지 않은가.
 레이즈가 이를 부득부득 갈아붙였다.
 “특히, 팰런 그자가 문제야.”
 “그나마 팰런 그자는 다른 두 사람들에 비해서는 다루기가 쉬운 편이야.”
 알란의 말에 리마도 동의하는 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레이즈 역시 수긍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 행정관은 1남 1녀를 떠올렸다.
 빈민으로 굴러다니기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멀쩡한 허우대와 뛰어난 무술을 가진 프랭크, 그는 빈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헤일리아라는 젊은 여성으로, 이 여성은 놀랍게도 3서클 러너 마법사였다.
 어딜 가도 환영받을 존재인 마법사.
 행정관과 달리 마법사는 성별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이 모든 걸 결정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3서클 러너면 대단한 마법사다.
 세 행정관들에게 있어 헤일리아는 그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왜? 그런 실력의 인물이 왜 이곳에 왔을까.
 “휴우.”
 “하아.”
 “두통이 또 몰려오네.”
 세 사람은 각자의 답답한 마음을 이처럼 표현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과연, 자신들의 어린 영주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아니, 극복은커녕 무섭다고 질질 짜며 달아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리마, 재정 상태는 어때?”
 “영주관의 일꾼들과 병사들의 급료, 그리로 우리 세 사람의 급료 외에는 지출이 없어서 당장은 괜찮아. 어차피 영주님께서 자금을 갖고 오실 거잖아. 앞으로 2년간은 세금 수입은 기대할 수 없으니까. 어쨌든 영주님이 오시면 대충 가닥이 잡힐 거야.”
 일단은 영주가 와야 한다.
 젊은 세 행정관은 영주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영주가 가져올 군대와 자금만 목 빠지게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간, 마을에서도 2남 1녀가 회동하고 있었다.
 현재 블러디 소영지의 진정한 실세인 3인방이다.
 모임의 주최는 소영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마법사 헤일리아였다.
 그녀는 금발에 푸른 눈, 육감적인 늘씬한 몸매의 여성미가 물씬한 미녀였다.
 그녀의 외양만 놓고 보면 누구도 그녀를 마법사로 여기기 힘들다.
 복장 역시.
 “조만간 영주가 올 거야. 그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으면 해.”
 헤일리아는 도청을 통해서 세 젊은 행정관에게서 영주에 대한 정보를 빼냈다.
 하지만 행정관들도 빈센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에 비중 있는 정보는 얻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하나 자신들의 영주가 어리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팰런이 괄괄한 목소리로,
 “꼬맹이라며? 대책은 무슨 대책 적당히 겁을 주면 알아서 슬슬 길 텐데. 안 그래? 프랭크.”
 팰런은 올해 25세, 그리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적발의 남자 프랭크는 32세다.
 하나 각자가 무리의 대표이다 보니, 존칭을 써서 자신을 상대보다 아래라는 느낌을 주기 싫어했다.
 특히, 팰런의 경우가 심했다.
 프랭크는 팰런의 말투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은 지금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켜보는 게 옳아.”
 프랭크의 말투와 눈빛, 그리고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굉장한 무게감을 띠고 있었다.
 겁이 없는 팰런이었지만 유일하게 프랭크 앞에서는 위축되곤 했다.
 그 자신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저런 포스는 연륜에서 나오는 게 분명해. 나도 프랭크처럼 나이가 들면 분명 저런 포스를 가질 수 있을 거야.’
 막연한 바람이다.
 헤일리아 역시 팰런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프랭크를 꺼려하긴 마찬가지였다.
 남녀에게 있어 프랭크는 적으로 삼기에는 꺼림칙하지만 동료일 경우에는 그보다 더 든든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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