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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1 - 박지함과 커피연구소

2017.01.31 조회 6,690 추천 70


 Prologue 1 - 박지함과 커피연구소
 
 
 한국대학교 사범대에 위치한 ‘커피연구소’는 점심시간을 지나며 붐비기 시작했다.
 공강을 활용해 커피 한 잔과 함께 리포트를 쓰고 있던 박지함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책들을 맞은편의 의자로 옮겼다.
 그때쯤 카페의 음악이 바뀌었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가느다란 남자의 목소리가 노랫말을 읊조린다.
 
 [언젠가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소,
 아마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햇살 한 줌 없는 창고에서 했던 그 노래-
 우리는 그 골방에서 처음 만났소.]
 
 박지함이 눈을 감고 노랫말에 집중하는 동안, 그가 비운 자리를 두 명의 여학생이 다가와 꿰찼다. 여학생들은 두꺼운 교재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와······ 한진 오빠 노래다!”
 “아, 그래? 이거 이한진 데뷔곡인가?”
 박지함은 무심결에 혀를 찼다. 데뷔곡이 아니라 2집 타이틀 곡인데.
 “아니, 데뷔곡이 아니라 2집 타이틀 곡인데······.”
 “빠순이냐? 뭘 그걸 기억해.”
 “아······ 그치.”
 이한진의 노래를 제법 잘 아는 것 같은 묶음머리 여학생에 비해, 갈색 단발머리의 여학생은 꽤나 냉담했다.
 “제목이 뭔데?”
 “어, 이거, 「편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하여튼 이미래, 취향 하고는.”
 이미래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박지함은 그 사실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아마도 15학번 후배거나 같이 수업을 들었던 다른 과 학생이겠지. 그 정도 지인의 이름이야 몇 번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라는 걸 박지함은 잘 알고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여학생들의 대화는 곧 음악소리에 묻혔다. 이한진의 「편지」 역시 묻힌 건 아쉬웠지만, 하루 이틀 들은 노래도 아니다. 박지함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개강 첫 주부터 주어진 해양학 리포트는 꽤 쉬운 편에 속했다. 박지함은 지체 없이 해저 탐사의 알려진 공식들을 써내려갔다.
 그가 막 디스커션을 적으려 할 때였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옆 테이블이 휘청거렸다.
 “악! 으아, 죄송합니다!”
 돌아보니, 묶음머리의 여학생이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발머리 여학생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박지함의 맞은편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개를 돌려 정면의 의자를 바라본다. 내려뒀던 그의 교재가 액체로 젖어들고 있었다.
 “으아······ 이거 어떡해, 어떡해.”
 갈색 단발머리 여학생은 선 채로 손을 비비고 있다. 젖어드는 책을 집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박지함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갈색 머리의 여학생이 떠들던 와중에 테이블을 무릎으로 쳤고, 그 결과 컵이 넘어지며 그의 책 위로 커피를 쏟아낸 모양이었다.
 두꺼운 전공서적을 들어 올려 살펴본다. 하필이면 오목한 부분에 놓았던 터라 이미 상당 부분이 침수되어 있었다.
 “진짜 죄송합니다······ 어, 어라? 저기, 지함 오빠?”
 고개를 꾸벅거리던 묶음머리 여학생이 문득 알은척을 한다.
 박지함은 눈을 들어 그녀를 살폈지만, 도무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시죠?”
 “저기, 교육학개론 같이 듣는······ 이미래라고 하는데요······.”
 박지함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름도 얼굴도 명확하지 않은 걸 보면,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박지함은 맞은편에 서 있는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시선을 줬다.
 “됐고, 이거 어쩔 겁니까?”
 “예? 아······ 그게, 테이블이 덜컹거려서······ 비싼 책이에요?”
 단발머리 여학생은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를 꺼내지 않았다. 테이블이 잘못한 일이니 자기가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박지함은 환하게 웃으며 젖은 책을 내밀었다.
 “두께를 보세요, 당연히 비싸죠. 받으세요.”
 단발머리 여학생은 박지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를 대신해 이미래라는 여학생이 그 책을 받아든다.
 “받았으면 책값 내놓으세요. 현금 없으면 학생증 맡기고 찾아오거나, 계좌이체 하거나.”
 대신 책을 받은 이미래는 당황해서 눈만 깜빡였다. 그녀를 대신해 단발머리 여학생이 눈을 부라린다.
 “저기요. 기분 상하신 건 알겠는데, 이거 저희 잘못도 아니거든요? 테이블이 덜컹거려서 그런 건데 책값을 다 내라고 하시면, 좀 그렇죠.”
 “그래요?”
 박지함은 자신의 커피를 들어 여학생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흔들어 보세요, 어디. 진짜 덜컹거려서 쏟아진 건지 보게.”
 “와······ 못 믿으시는 거예요? 하, 진짜 황당하네.”
 기다려줄 필요는 없겠지. 박지함은 미소를 머금고 여학생들의 테이블을 잡고 흔들었다.
 테이블은 정말로 덜컹거렸다. 그러나 반쯤 남아 가벼워진 커피 컵조차 균형을 잃고 쓰러지진 않았다.
 “속일 걸 속여요. 잘못했으면 책임을 져야죠. 이만 칠천 원, 내놓고 책 가져가세요.”
 애초에 그녀들이 앉은 테이블은 박지함이 책을 올려놓았던 자리였다. 정확히는 박지함이 2년 동안 애용한 일종의 지정석. 그 테이블이 컵이 넘어질 만큼 덜컹거리는지 아닌지는 박지함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 진짜 별꼴이야. 미래야, 가자.”
 “응? 그게······ 지함 오빠, 여기, 삼만 원이요.”
 팔을 잡아끄는 단발머리 여학생을 대신해 이미래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낸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만 원짜리 세 장이었다. 돈을 왜 구겨놓는 거야. 얜 지갑이 없나. 박지함은 그 정도로 생각하며 빳빳한 삼천 원을 거슬러줬다.
 녹색 지폐 세 장을 주고 푸른 지폐 세 장을 건네받은 이미래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공손히 모은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뭐 하러 대신 내줘요? 저 여자가 쏟은 커핀데.”
 “아, 하하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박지함은 코웃음을 치며 이미래에게서 시선을 뗐다.
 단발머리 여학생은 이미래를 다시 한 번 잡아끌었다. 그리고 테이블로부터 세 걸음쯤 멀어진 뒤에, 고개를 돌려 박지함을 노려봤다.
 “진짜, 완전 논리적인 분 나셨네. 앞으로도 그렇게 사세요.”
 그런 말을 내뱉는다. 키도 덩치도 일반인이라고 보기 힘든 박지함에게서 고작 세 걸음 멀어진 정도로 용기를 되찾다니, 보기보다 제법 강단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 철부지겠지. 용기와 만용도 구분하지 못하는.
 분노와 공포를 함께 얼굴에 담고 있는 단발머리 여학생을, 박지함은 눈동자만 굴려 바라봤다.
 “할 말 끝났으면 가세요. 바쁩니다.”
 “와, 지, 진짜, 별꼴이야, 진짜.”
 박지함은 쿵쾅대며 멀어지는 여학생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미련 가득한 눈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이미래를 보며 작은 탄성을 냈다.
 이미래, 생각났다. 16학번 새내기······ 내 이름을 듣고 굉장히 당황했었지. 박지함은 그런 생각과 함께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기억이다. 굳이 알아둘 필요 없는 인간, 가까워질 이유가 없는 후배. 지워야지.
 박지함은 다시 리포트에 집중했다. 불의의 사고로 교재를 잃었지만, 이미 전반부는 여러 차례 훑어본 뒤였기에 리포트 작성에 문제는 없었다.

댓글(1)

서생이    
설마 커피연구소가 서울대 사대 랩 이야기하는건가요? 맨날 랩 그랬는데 커피연구소라는 참신한 발상이라니.... 근데 막상 랩 안에는 공간이 별로 없어서 슬픈....
2017.01.3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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