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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메이커 1권-1

2017.02.01 조회 913 추천 13


 1. 좀도둑 리암
 
 대륙의 북동쪽에 위치해 사계절이 뚜렷한 마케니안 왕국과 라트시아 왕국.
 과거 화려한 대제국이었던 마케니안 제국이 내분으로 여러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마케니안 왕국으로 크게 축소되었고, 라트시아 왕국도 이때 생겨났다.
 두 왕국은 서로 영토를 마주했으며, 수백 년이나 앙숙 관계를 유지하고 지내 왔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전쟁은 20년 전으로 라트시아 왕국의 왕세자인 다르뮤가 왕위에 오르며 일어난 시비 때문이었다.
 먼저 전쟁을 선포한 쪽은 라트시아 왕국.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라트시아 왕국은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국경을 넘어 마케니안 왕국의 영토를 유린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마케니안 왕국은 금방 무너지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케니안 왕국에는 뛰어난 천재 마법사 베르메니가 있었다.
 당시 70대의 나이에 막 6서클에 오른 베르메니는 마케니안 왕국에서 최초로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중요한 격전지마다 나타나 마법을 써서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며 위험에 빠진 자국의 병사들을 구하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렇듯이 베르메니도 신체적인 능력은 떨어지기에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싸울 수는 없었다. 베르메니의 죽음은 마케니안 왕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타격이기에, 그는 적에게 공세를 펼칠 때에 앞으로 나가 싸우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적군이 아군의 진영까지 쳐들어오는 불리한 상황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베르메니의 활약에 힘입어 마케니안 왕국은 수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덕분에 라트시아 왕국군을 자신들의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5년 가까이 밀고 당기는 형세를 이어 가다 양국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마케니안 왕국의 수도 마케스.
 외성 밖 빈민가에서 태어나 아기 때에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나 다름없게 자라난 22살의 좀도둑 리암.
 이리저리 굴리는 큰 눈, 툭 드러난 광대뼈, 말라서 쑥 들어간 볼, 뾰족한 턱. 리암의 얼굴은 족제비처럼 생겨서 딱 보기에도 남의 눈치나 보며 살 것 같았다.
 키는 보통보다 크지만 잘 먹고 자라지 못해 몸은 삐쩍 말랐으며, 어려서부터 해 온 도둑질로 인해 몇 번인가 잡혀 감옥까지 끌려가 크게 혼난 적이 있어서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오늘은 누구 주머니를 털까?’
 여느 때처럼 훔칠 게 없나 이리저리 상점가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때 저 멀리서 웅성거리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쳐다보고 있었다.
 ‘옳거니!’
 소란이 일어난 곳은 구경꾼도 많고, 주의가 산만하니 좀도둑인 리암에게는 물건을 훔칠 절호의 기회였다.
 날쌘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골목길을 잽싸게 뛰어 소동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칼을 버려라!”
 힘차게 외치는 건 창을 든 경비병이었다.
 “으으, 싫다! 다가오는 놈은 죽여 버린다!”
 칼을 든 채로 경비병이 다가오기만 하면 바로 찔러 버리려는 듯 날을 세우고 있는 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남자 하나가 죽은 듯 쓰러져 있었는데,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피를 쏟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저놈이 사람이 죽였고, 경비병이 달려온 거로군.’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바닥에 쓰러진 자와 칼을 든 자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겠지만, 그건 리암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구를 털지?’
 힐끔힐끔, 힐끔힐끔.
 그는 양쪽 눈을 좌우로 열심히 굴리면서 훔칠 대상을 찾았다.
 ‘흐흐, 저놈이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경에 여념이 없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걸친 옷도 깨끗해 보이고, 살도 토실토실한 게 돈도 꽤 있어 보였다.
 목표를 정한 리암은 인파를 헤치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대의 등 뒤까지 바짝 다가갔다. 이제 손만 뻗어 훔치면 되었다.
 그런데 그때 대치 중이던 경비병이 칼을 든 자를 공격했다.
 “우와앗!”
 샤샥.
 칼을 든 자는 민첩하게 옆으로 피했다.
 “오오!”
 구경하던 이들이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칼을 든 자는 반격을 가하기 위해 한 손으로 경비병의 창을 잡고 얼른 거리를 좁히며 칼을 휘두르려 했다.
 “어딜!”
 휘익~ 푸욱!
 “크아아악!”
 언제 나타났는지 다른 경비병이 칼을 든 자의 등 뒤를 창으로 공격했다. 칼을 든 자는 비명을 지르며 물건이 잔뜩 쌓인 선반 위로 쓰러졌다.
 우당탕탕탕!
 사방으로 물건이 흩어졌다.
 “아휴, 이를 어째!”
 물건의 주인인 중년의 여자 상인은 두 발을 동동거리며 안타까워했다.
 떼구르르르~
 바닥에 떨어진 물건 중에 하나가 리암의 발밑으로 굴러 왔다.
 ‘오호, 이게 웬 횡재?’
 그는 얼른 물건을 주워 품속에 집어넣었다.
 ‘크크, 이제 피하자.’
 쓰윽.
 그는 살며시 몸을 돌려 모여든 구경꾼들 속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여자 상인의 목소리가 리암의 뒷머리에 꽂혔다.
 “야, 이 도둑놈아! 품속에 숨긴 거 내놓고 가! 저놈 잡아요! 내 물건 훔쳐서 달아나려 해요!”
 ‘헉! 들켰다.’
 리암은 쏜살같이 달려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덥썩.
 “크으윽.”
 누군가 뒷덜미를 강하게 잡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에 목이 걸린 리암은 신음 소리를 내며 뒷걸음쳐야 했다.
 “어딜 도망가냐, 이 도둑놈아!”
 아주 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경비병이었다. 살인 사건이 나서 경비병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에게 재수 없게 걸린 것이었다.
 “컥컥! 놔, 놔주세요. 훔친 게 아니에요.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웠을 뿐입니다.”
 “흥! 어디서 거짓말을 해! 품에 넣고 도망치려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소란을 틈타 도둑질을 하다니!”
 경비병은 우악스럽게 리암의 양손을 뒤로 잡아당겨 철로 된 수갑을 채웠다.
 철커덩!
 ‘으으, 또 감옥이구나. 제발 적게 맞아야 할 텐데.’
 감옥이라면 어려서부터 수시로 들락날락 해서 잘 알았다. 리암처럼 물건을 훔치다 걸리는 경우에는 감방에 갇히기 전에 매질부터 당했다.
 감옥에 수감되는 기간은 물론이고, 매를 맞을 때도 딱히 이만큼이다라고 정해진 숫자는 없었다. 그냥 감옥에서 일하는 관리의 그날그날 마음에 따라 바뀌었다.
 “가자!”
 리암을 잡은 경비병은 등을 떠밀었다.
 “나리, 눈앞에 보여서 집었을 뿐입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시끄럽다!”
 “제발요, 네? 저처럼 보잘 것 없는 놈 잡아 봤자 뭐에 쓰겠습니까?”
 비는 것도 감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유효하기에 리암은 간절히 애원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하던 경비병은 얼마쯤 끌고 가더니 한적한 골목을 보자 좌우를 살핀 후에 그 안으로 리암을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흠흠, 가진 돈은?”
 “제, 제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흥, 그럼 그냥 끌려가든가.”
 “다, 당장은 없지만 기회를 주시면 제가 꼭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어떻게?”
 “훔쳐서······.”
 “하! 도둑놈의 새끼. 가자!”
 경비병은 거칠게 리암의 몸을 잡아끌었다.
 ‘에이, 씨! 지금은 가진 게 진짜 없단 말이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정말 난감했다.
 감옥에 도착하자 아주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관리가 리암을 맞이했다.
 ‘윽, 난 죽었다.’
 리암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익히 알고 있는 관리이기 때문이었다.
 “흐흐, 리암?”
 관리는 리암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네, 스네크 나리.”
 리암도 관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다시 끌려오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단단히 각오하라고 하셨죠.”
 “그래. 그리고 또 말한 게 있을 텐데?”
 “못해도 일 년은 썩을 줄 알라고······.”
 “맞다. 채찍으로 서른아홉 대. 그리고 일 년간 노역을 시켜라!”
 그가 말한 채찍은 그냥 채찍이 아니었다. 가죽 끈의 끝에는 날카로운 쇠붙이가 붙어 있어 39대나 얻어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노역은 사슬로 연결된 족갑을 차고 간수 밑에서 노예처럼 온갖 잡일을 다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으으··· 나리, 채찍만이라도 봐주십시오.”
 지금까지 채찍으로 제일 많이 맞은 게 15대였다. 그때도 죽다 살아났다. 그런데 39대라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럼 채찍 없이 삼 년간 노역?”
 “···아, 아닙니다.”
 채찍을 맞고 죽으면 죽었지 3년이나 노예처럼 살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냥 감방에 갇혀만 있다가 나온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었지만.
 “이놈 끌고 가.”
 스네크가 말하니 간수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리암을 잡아당겼다.
 잠시 후, 리암은 고문대에 달렸다. 그리고 간수로부터 사정없이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휘이익~ 차아앗!
 “크아아악!”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채찍은 리암의 등을 찢어발겼다. 상처에서는 피가 튀어나왔고, 비명도 함께 나왔다.
 차아앗, 차아앗, 차아앗······!
 한 대, 두 대, 세 대······.
 리암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리고 20대를 넘어서서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잃었음에도 채찍질은 감해지는 것 없이 계속됐다. 채찍질이 끝나자 간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약하게 할 걸 그랬나? 그래야 일을 시켜 먹는데. 이래서야 몸이나 가누겠어? 쳇, 그래도 아직 숨은 쉬니까.”
 간수는 리암을 고문대에서 끌어내 감방에 데리고 가기 위해 들쳐 업었다. 그런데 몸이 너무 차가웠다.
 ‘벌써 죽은 거 아니야? 에이, 내일 아침이면 알겠지.’
 간수는 리암을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감방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털썩.
 감방 안에 던져진 리암은 이미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도무지 깨어나지 않으니 간수는 스네크를 찾아갔다.
 “저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바쁘니까 빨리 말하게.”
 “삼 일 전에 채찍질을 했던 리암이라는 놈 말입니다.”
 “죽었나?”
 “지난 사흘간 아무리 몸을 두드리고 별짓을 다 해도 미동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전에 가서 몸을 만지니 시체처럼 차갑더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수의 물음에 스네크는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참나, 어이가 없군.”
 “예?”
 “그냥 갖다 버려. 쓸데없이 날 피곤하게 하지 말고.”
 “아하! 네, 죄송합니다.”
 간수는 스네크가 째려보는 시선이 두려운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곧장 감방으로 간 간수는 죄수 둘을 시켜 리암을 꺼내 시체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도록 지시했다.
 죄수 둘은 2명의 병사에게 감시를 받으며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진 리암의 머리와 다리를 나눠들고 시체 버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감옥 밖에 있었다.
 버려진 시체는 새벽녘에 버려진 곳에서 다시 운반되어 땅에 묻힌다. 그 일은 빈민가에서 뽑힌 일꾼들 몫이다.
 이윽고 일행이 시체 버리는 곳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리암은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죽은 게 확실했다.
 “으으, 시체는 정말 싫어. 너무 무겁거든.”
 “그보다 난 여기가 싫어. 냄새가 지독해.”
 “힘을 내. 던지기만 하면 끝이야.”
 “알았어. 셋 하면 던진다. 하나, 둘, 셋!”
 두 죄수는 안간힘을 쓰며 리암을 크게 흔들어 시체들 위로 집어던졌다.
 휘이익~ 터억.
 리암이 시체들 위에 떨어졌다. 축 늘어진 채로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돌아가자.”
 병사 둘 중에 하나가 소리쳤다.
 죄수 둘은 시키는 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때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우뚝.
 병사들은 소리를 못 들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죄수 둘은 즉시 서로 얼굴을 쳐다본 후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설마, 안 죽었어?”
 죄수 중에 하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른 죄수에게 물었다.
 “우리가 잘못 들었겠지. 안 움직이잖아.”
 실제로 리암은 전혀 움직일 줄 몰랐다.
 “어서 가자니까!”
 병사 중에 하나가 다시 닦달했다.
 “예, 알겠습니다.”
 죄수 둘은 함께 대답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죄수들과 병사들까지 다 가 버리고 한참이 지나자 쌓인 시체 더미에서 다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으.”
 신음 소리를 내는 이는 바로 리암이었다.
 
 
 2. 46살 대출 상담사 현민
 
 2013년 5월, 대한민국 서울의 삼성역 전철 입구.
 현민은 아침 출근 시간에 전철역 출구 앞에 서서 대출 전단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한 손에 태양풍에 관한 기사가 쓰인 무가지만 바라보며 전단지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이, 씨. 오늘따라 유난히 받는 사람이 적네. 이게 다 저 태양풍 때문이야.’
 현민은 고개를 들어 사거리 맞은 편 건물을 바라보았다.
 [21세기 들어 가장 강력한 흑점 폭발이 태양에서 관측되었습니다. 이 폭발로 인해 발생되는 태양풍은 오늘 오전 12시쯤 지구를 덮칠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태양풍이 지구를 덮으면 전 세계가 암흑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태양풍에 관한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태양. 지름 139만 2천 킬로미터의 빛을 내는 기체 구. 질량은 지구 질량의 33만 배.
 혹시 태양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주는 팽창하니 당연히 태양도 움직인다. 움직일 뿐 아니라 은하계 중심을 돌고 있다. 그 주기는 약 2억년이다.
 참고로 지구는 태양을 총알보다 8배나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 그리고 하루에 7천5백만 개의 별똥이 지구에 떨어지나 공중에서 다 타 버리고 5개 정도만 땅에 떨어진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태양은 고사하고, 지구라도 한 바퀴 돌려 봐라. 차라리 마음에 맞는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게 낫다.
 태양풍이란 태양으로부터 날아온 전기를 띤 입자의 흐름을 말한다. 이 입자들은 주로 양성자와 전자로 구성되며, 태양 코로나 안에서 초속 4백 킬로미터까지 가속되는 고에너지 입자군이다.
 태양풍이 지나가는 시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이유는 태양의 흑점 폭발이 미리 관측된다는 것과,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이미 알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태양에서 날아오는 전기 입자의 속도를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대략 어느 정도인지 알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들이 많았는데 간단히 말하면 태양풍이란 놈으로 인해 대재난이 닥친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번에 몰아닥친 강력한 태양풍으로 인해 전 세계의 전기, 통신 시설이 마비된다면 피해액은 무려 2조 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2조 달러. 환율을 1달러에 1천 원으로 계산하더라도 무려 2천조나 되는 막대한 돈이다. 2012년 대한민국의 국가 예산은 326조 원가량이니 2조 달러가 얼마나 많은 돈인지 알 수 있다.
 “이번 태양풍은 가히 카트리나급 우주 폭풍이라고 할 수 있죠.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각국 정부는 비상대책 본부를 마련하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공공시설을 비롯해 은행과 공항 등은 비상 발전으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으나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전기가 다 나가 버리고, 전화까지 안 되면 큰 혼란이 있을 수 있었다. 특히 돈이 있는 은행이 문제였다.
 ‘이 기회에 은행이라도 털까?’
 세상이 다 어둠 속에 묻히니 나쁜 짓을 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뭘 들고 은행을 털어?’
 칼 한 자루 들고 은행을 털러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총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크크, 크크크······.”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생각하는 게 이렇게 바보 같다니. 은행 터는 게 보통 일이야? 그리고 설사 은행을 털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잡히잖아. 내가 잡히면 집에 있는 은희랑 수현이는······.’
 은희는 현민의 아내였고, 수현은 작년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냥 아들도 아니고 결혼 7년 만에 낳은 아기.
 현민은 돈이 없어서 결혼도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했다. 현재 나이 46살. 그래도 장가가는 결혼식 날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세상 고민은 다 잊은 채.
 ‘아기가 태어나니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아.’
 직장 다닐 때 받았던 마이너스 대출, 카드론에 현금 서비스로 버티고 있지만, 매달 결재일이 다가오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했다.
 ‘정말 은행을 털고 싶지만 아빠가 감옥에 갈 수는 없잖아. 번듯한 직장이라도 있으면 이런 고민은 안 할 텐데······.’
 결혼 직후에 직장에서 잘리고, 현재까지 여러 일을 전전하며 근근이 한 달 한 달 버티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난 7년간은 아기가 생기지 않아 자신과 아내가 어떻게든 돈을 벌며 살았지만, 아기가 태어나니 생활은 금방 힘들어졌다.
 가장 최근에 현민이 하고 있는 일은 제1금융권 은행의 대출 상담사. 다른 사람이 대출을 하면 그 수수료를 수익으로 버는 직업이었다.
 사람들은 대출 상담사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사실 현민도 대출 상담사에게 전화나 문자가 오면 기분이 나빴다.
 공짜로 주는 돈이 아니라 빌려 주는 돈. 이자라도 싸면 모른다. 게다가 진짜로 빌려 보려고 신용 조회를 하면 신용도가 낮아서 안 된다는 말이 대부분이다.
 현민도 자기가 일하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자격이 없었다. 대출 상담사는 알선 수수료를 받을 뿐이지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행이 돈을 빌려 주고 싶어 하는 고객은 직장인, 그중에서도 번듯한 직장을 가진 신용도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 중에서 대출을 받을 이를 찾으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휴우,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인 9시에서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지하철 입구로 나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철수해야겠어. 사무실로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사무실로 들어가려니 왠지 내키지 않았다.
 사무실에 가서 하는 일은 전화를 걸어 사람들에게 대출 받으라고 하는 건데 대부분 그냥 끊어 버리거나, 욕을 하거나, 어떻게 내 휴대폰 번호를 알았냐고 따지면서 화를 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곧 12시야. 혹시나 전화가 먹통 될 수 있잖아. 그리고 이런 날은 가족들끼리 안부 전화가 우선인데 대출 받으라고 전화하면 욕이나 진탕 얻어먹지. 오늘은 그냥 제끼자.’
 팀장에게 전화해서 오늘은 외부에서 전단지나 돌리겠다고 말하기로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태양풍 때문에 곧 난리가 날 수도 있는데 어디 가서 전단지를 돌리겠는가?
 ‘팀장도 뻔한 거짓말이지만 이해하겠지. 집에나 갈까? 아침 일찍 집에 들어가자니 아내에게 눈치가 보이는데······.’
 현민에게 아내는 고마우면서도 무서운 존재다. 죄 지은 것이 없는데도 아내 앞에만 서면 괜히 움츠러든다.
 “20년 전으로 돌아갔으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때 길 건너 코엑스 전시관 외벽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는 ‘첨단 과학 전시회’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첨단 과학이라······.’
 솔직히 과학은 친한 분야가 아니다. 거기다 첨단이라는 단어까지 붙었으니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시간을 보낼 곳이 없었다.
 ‘곧 태양풍이 닥칠 텐데 무슨 전시회야?’
 현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태양풍이 큰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것은 예상뿐, 정확한 건 닥쳐 봐야 했다.
 또 태양풍이 온다고 모든 일을 멈추고 있을 수도 없었다. 다른 공공시설도 비상 전력을 가동시킬 준비를 해 놓고 평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구경이나 좀 해 볼까?’
 마음을 정한 그는 바람도 쐴 겸 코엑스로 향했다.
 전시장 앞에 도착하니 전시회 시작은 10시였고, 입장도 무료였다. 만일 입장권을 사야 한다면 그냥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전시장 안에 들어오니 짧은 치마에 어깨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은 늘씬한 미녀 도우미들이 각 부스마다 배치되어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첨단 과학과 미녀 도우미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눈은 즐거웠다.
 ‘히야, 예쁘다. 저런 미녀들은 일당도 세겠지?’
 20대나 30대라면 미녀를 보고 사귀고 싶다고 생각할 테지만, 40대가 되니 아름다운 미녀를 보고 하루에 얼마나 벌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잠깐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중고생 애들만 우글거렸다. 각 부스를 돌아다니며 무얼 그렇게 많이 받았는지 커다란 종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전시회 구경 왔나?’
 40대인 자신은 왠지 아이들 지도하러 따라온 선생님처럼 보일 것 같았고, 오지 말아야 할 자리에 온 기분이었다.
 ‘끄응, 그래도 시간은 보낼 수 있잖아. 이왕 온 김에 구경하자.’
 슬슬 돌아다니며 구경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25년이 넘도록 과학이랑은 담을 쌓고 살아서인지 신기한 게 많았다.
 잠시 후,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던 중에 아주 긴 줄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줄을 서있지? 좋은 거라도 나눠 주나?’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줄이 길게 서 있는 부스는 어김없이 공짜로 뭔가 나눠 주고 있었다.
 긴 줄에 가까이 간 후에 맨 끝에 서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줄이니?”
 “원판 돌리기예요.”
 “원판?”
 “네. 저기 있는 저 원판을 돌리는 거죠. 잘 걸리면 최신 스마트폰 받아요. 가상 체험기 이용도 할 수 있어요.”
 ‘오호, 스마트폰!’
 최신 스마트폰이라면 몇 십만 원이 넘는 고가였다.
 “가상 체험기가 뭔데?”
 “저 앞에 보이잖아요.”
 학생은 손을 들어 앞에 있는 큰 박스를 가리켰다.
 ‘저게 가상 체험기?’
 박스가 어찌나 큰지 몇 사람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박스 겉에 가상 체험기라고 쓰여 있었다.
 학생은 계속 말을 이었다.
 “3D로 만든 가상현실 세계를 체험하는 거예요. 체험 시간은 10분 정도로 짧지만,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이 전부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요. 진짜 현실 같다고 하던데요.”
 “으음. 그래······.”
 원하는 것은 스마트폰이고, 가상 체험기는 관심이 없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신 스마트폰이 당첨되면 정말 좋겠다. 줄이 좀 길지만 나도 해 보자.’
 당첨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로또를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우선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당첨 확률도 로또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었다.
 줄이 어찌나 길던지 1시간 30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원판 앞에 설 수 있었다. 다리가 무척이나 아팠다.
 ‘휴우, 이제야 겨우 해 보는구나.’
 원판은 사람 키만큼 컸다. 그리고 그 안에 꽝을 비롯해 갖가지 경품들이 쓰여 있었다. 가장 비싼 경품이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원판 돌리기 게임을 진행하는 도우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원판을 힘껏 돌리세요. 스마트폰의 행운이 함께합니다!”
 “후우우, 스마트폰 걸려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원판을 힘껏 돌렸다.
 탁탁탁탁······.
 원판이 돌아갈 때마다 걸림쇠가 탁탁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속도가 느려지며 원판이 멈춰선 곳은 ‘가상 체험기 10분 사용’이었다.
 ‘젠장.’
 속으로 욕이 나왔으나 얼굴 표정은 최대한 담담하게 지었다. 주변에 있는 어린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40대인 자신이 불평을 터트리는 것은 볼썽사나울 것 같았다.
 도우미는 밝게 웃으며 가상 체험기를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상 체험기로 가시면 10분 동안 무료 체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에이, 씨. 내가 애들도 아니고.’
 못마땅했지만 쿠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갈등했다.
 ‘그냥 버려?’
 그런데 쿠폰 뒷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보험?’
 가상 체험기는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데 만일 잘못되어 가상 체험기 안에서 사망하는 경우 10억이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죽으면 아내와 아기가 10억을 가지게 된다.’
 현재 한 달에 많아야 2백만 원을 벌었다. 1년이면 2천4백만 원. 2천5백만 원이라 생각하고 계산을 해도 10억이면 40년을 일해야 버는 돈이었다.
 ‘40년 후면 86살. 아마 50대를 지나 60대부터는 한 달에 2백만 원 못 벌겠지? 그렇다면 10억은 내가 평생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은 액수야.’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52분.
 ‘12시에 태양풍이 지나가잖아. 8분 남았어. 어쩌면 태양풍 때문에 가상 체험기가 잘못되어 내가 죽을 수도 있겠는데?’
 물론 코엑스 측에서 이런 전시를 할 때는 태양풍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놨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쳇, 내가 20대라면 사고가 나서 죽을까 봐 겁을 낼 텐데, 지금은 오히려 사고가 나기를 바라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고, 착잡한 기분이었다.
 현민은 쿠폰을 들고 가상 체험기로 갔다. 그리고 쿠폰을 내미니 그곳에 있는 도우미가 웃으며 손으로 가상 체험기 안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발판에 고정된 신발이 있습니다. 지금 신으신 신발은 벗으시고 그 신발을 신으세요.”
 “신발도 벗어야 해요?”
 당황해서 저절로 질문이 나왔다.
 “네. 가상현실 체험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신발입니다. 신발을 신으신 후에는 양손은 팔걸이에 올리세요. 그리고 양손은 팔걸이 앞에 있는 장갑에 집어넣으세요. 이 과정이 끝나면 머리 위에서 헬멧이 내려옵니다. 움직이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면 헬멧이 착용되고, 가상 체험기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상현실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신발이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후에 현민은 가상 체험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도우미의 말처럼 바닥에는 발판에 고정된 신발이 있고, 허리 높이에 있는 팔걸이와 미용실에서 볼 법한 둥근 유리 헬멧도 보였다.
 ‘저 위에 서면 되겠지?’
 신발을 벗고 발판에 고정된 신발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 팔걸이에 달린 장갑에 양손도 집어넣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무슨 변화가 있으려나 기다리는데 머리 위에서 둥근 유리 헬멧이 내려오며 현민의 얼굴을 감쌌다.
 지이이이잉~
 ‘흠흠, 유리 헬멧이라 밖이 다 보이는데 이걸로 어떻게······.’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변화가 찾아왔다.
 번쩍!
 너무나 밝은 빛이었다. 빛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 * *
 
 파아앗!
 현민이 나타난 곳은 화려한 전광판이 가득한 거리.
 차도에는 많은 차들이 줄을 지어 다니고, 길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지나다니고 있었다.
 ‘와아! 여기가 어디야?’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가상 체험기의 도우미입니다.
 ‘도우미? 누가 도우미지?’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여인들 중에 그 누구도 현민을 신경 쓰는 여자가 없었다.
 -저는 눈으로 보실 수 없으며, 목소리만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아, 목소리만!’
 그제야 도우미가 보이지 않는 게 이해되었다.
 -고객님께서 지금 계신 곳은 뉴욕의 타임스퀘어입니다.
 ‘아하! 여기가 말로만 듣던 뉴욕이구나.’
 영화나 사진에서만 보던 바로 그 타임스퀘어였다. 어쩐지 생소한 장소에 온 것 같은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었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진짜 뉴욕에 온 것처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부딪혔을 때에도 똑같이 충격을 받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현민을 툭툭 치고 가는데 부딪히는 느낌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어떠세요? 현실처럼 느껴지시죠?
 “오오, 네.”
 충격까지 현실처럼 느껴질지 몰랐던 현민은 신기함에 목소리만 들릴 뿐이지만 마치 앞에 상대가 있는 것처럼 입을 열어 대답했다.
 -직접 몸을 움직여 보세요.
 ‘발이 발판에 고정되어 있는데 걸을 수 있나?’
 가상현실에 접속하기 전에 신고 있던 신발은 벗고, 발판에 고정된 신발을 신었었다. 때문에 발을 움직일 수 있을지 의아스러웠다.
 ‘되는지 해 보면 알겠지.’
 발판에 고정된 신발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좀 힘을 주며 한쪽 다리를 들었다.
 쑤우욱~!
 비틀.
 “어엇!”
 평상시처럼 가볍게 다리를 드는 게 아니라 잔뜩 힘을 주는 바람에 다리가 번쩍 들려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려야 했다.
 -괜찮으세요? 다리에 너무 힘을 주셨어요. 평소처럼 걸으시면 됩니다.
 “흠흠, 알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잡은 후에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현실에서 걷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우와! 신기하다. 여기서는 걷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내 몸은 가상 체험기의 발판 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발판에 고정된 신발을 신었으니 벗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하, 재밌네요.”
 -이곳을 현실과 똑같이 생각하시며 행동하면 됩니다.
 “역시 과학은 대단해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때 목소리가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제로 하는 SF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SF 영화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40년 넘게 살면서 당연히 봤지 못 봤겠는가?
 “있어요.”
 -SF 영화 중에는 짧은 시간에 뇌와 육체의 신경세포 속으로 정보를 전달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영화가 있지요. 예를 들어 비행기를 한 번도 조종한 적이 없는 사람도 조종법에 대한 정보를 뇌에 입력받으면 곧바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구요, 무술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술에 대한 정보를 뇌에 주입받고, 육체의 신경세포에 운동 감각을 입력받으면 곧바로 무술을 쓸 수 있습니다.
 ‘맞아, 영화에서 그랬었어.’
 과거에 보았던 SF 영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현실로도 가능하게 하려는 비슷한 실험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FMRI.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을 이용한 기술이죠. 간단히 말씀드리면 시신경으로부터 흥분을 받아들이는 대뇌피질의 부분에 신호를 보내 뇌의 행동 패턴을 바꿈으로써 뇌가 곧장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죠.
 ‘으음, 역시 과학기술은 대단해.’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현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의외의 질문이 들려왔다.
 -저희 가상 체험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실험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고객님이 동의만 하신다면 고객님의 뇌와 신경세포 속에 저희가 준비한 실험을 진행하겠습니다.
 “엥? 내 몸에?”
 너무 의외라 저절로 입을 열어 반문했다.
 가상 체험기가 자기 뇌와 신경세포에 무슨 짓을 할까 살짝 두려워졌다. 이런 현민의 마음을 알았는지 목소리는 부연 설명을 했다.
 -현재까지 동의하여 실험에 참가해 주신 분들 가운데 부작용을 일으킨 분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을 받았다 하더라도 실험 결과가 유지되는 것은 불과 10분이 안 됩니다.
 “에이, 고작 10분?”
 너무 짧은 시간이라 입술을 삐죽거렸다.
 -10분이 지나면 입력받은 것은 거의 모두 사라지죠. 단, 10분 동안은 특별한 능력을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에이, 난 그냥······.”
 안 할래,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 생각이 바뀌었다.
 -혹시라도 이 실험에 의해 이상이 생긴다면 치료비는 물론 피해 보상 차원에서 3억의 보험금을 지급할 것입니다. 가상 체험기를 이용하시기 전에 주의 사항으로 적힌 사망 시에 지급하는 10억과는 별도입니다.
 ‘오호, 3억!’
 돈 얘기를 들으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얼른 동의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기억을 다 잃고 백치가 돼 버리거나, 전신 마비로 누워 있는 송장이 될 수도 있잖아. 그래도 좋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억을 다 잃는다면 은희와 수현도 잊어버리겠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건 안 되지. 그리고 전신 마비에 걸려서 송장처럼 누워 있으면 아무리 3억을 받는다 하더라도 은희와 수현이가 얼마나 슬프겠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실려 가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병원에 가 보니 할머니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 산소호흡기를 하고 계셨는데, 의사는 가망이 없다며 산소호흡기를 떼는 문제는 자식들이 알아서 결정을 하라고 했었다. 당시에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가 모여서 상의를 하는데 무척이나 괴로워 하셨었다.
 ‘은희에게 고통스런 선택을 하게 해서는 안 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니 실험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치료비를 다 대 준다고 하잖아. 그리고 아직까지 부작용도 없었다는데 백치가 되거나, 살아 있는 송장이 되는 것과 같은 심한 결과가 생기겠어? 적당히 돈 받을 정도로만 부작용이 생기면 좋잖아.’
 가상 체험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10분에 불과하기에 실험을 받을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었다.
 ‘해 보자. 기회는 다시없잖아.’
 결심이 선 현민은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실험에 동의합니다!”
 목소리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잘못되면 보험금이나 확실하게 줘요.”
 -물론입니다. 실험하는 과정 전부가 녹화되기에 부작용이 생기면 바로 보험금이 지급니다. 이제 실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실험은 총 네 개입니다.
 ‘네 개나 돼?’
 -첫 번째는 대량의 정보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전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불어, 스페인어와 1백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백과사전의 내용을 머리에 주입하겠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대량의 정보 습득만이 아니라 기억 능력까지도 향상됩니다.
 ‘어휴, 네 개나?’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영어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리 외우고 또 외워도 잊어버리기만 했고,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는 써먹지도 못했다.
 1백 테라바이트는 10만 기가바이트를 의미했다.
 ‘내 머리가 컴퓨터도 아닌데······.’
 숫자로 말해지는 정보량이 듣기 거북했다.
 -두 번째는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과 운동 신경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관장하는 신경 세포를 자극하여 평상시의 3배에서 5배까지의 오감 능력 향상을 가져오며. 운동 신경을 향상시킵니다. 동체 시력과 순발력이 3배에서 5배까지 늘어납니다.
 ‘이거 괜찮네.’
 현민은 눈이 나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시각이 좋아져 안경을 벗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냄새도 잘 맡지 못해서 아기가 기저귀에 똥을 쌌는지, 안 쌌는지 전혀 몰라 아내에게 혼난 적이 많았다.
 또 평소에 운동 신경도 안 좋아 잘하는 운동도 없었다.
 -세 번째는 실전에서 쓸 수 있는 크라브 마가입니다. 크라브 마가는 이스라엘에서 개발된 특공 무술로 이스라엘의 첩보 단체인 모사드, 여러 나라의 대테러 부대와 민간 군사 기업에서 채택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오호, 이제 난 격투기의 달인이 되나?’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서 이번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케이블 등에서 하는 격투기 시합을 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싸움을 잘했으면 했었다.
 -네 번째는 무협 소설 등에 나오는 인체의 기에 대한 것으로 정확한 효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기혈이 흐르는 주요 통로 12개와 그 기혈이 지나는 곳 중에서 매우 약한 혈의 지점 365개를 정하여 자극한 후에, 배꼽 밑의 단전에 기의 저장소를 만들겠습니다.
 ‘무협에 나오는 단전? 내공을 쌓으라는 건가?’
 피식.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실험을 위해 가상공간을 연구실로 바꾸겠습니다.
 파아아앗!
 금세 뉴욕의 타임 스퀘어 거리는 사라지고, 현민은 병원 수술실처럼 생긴 곳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가 연구실?’
 -실험을 위해 한가운데에 있는 실험대에 올라가 앉으시기 바랍니다.
 연구실 한가운데에는 치과에 가서 치료 받을 때에 앉는 것 같은 실험대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가서 앉으니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손목, 발목에 안전장치가 채워집니다.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상공간인데 진짜 무슨 수술이라도 받는 것처럼 이러네. 돈만 아니라면 정말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꾹 참고 앉아 있으니 실험대에서 금속 장치가 나와서 머리와 손목, 발목에 탁 채워지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그리고 삐익거리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삐익~! 대량의 정보 주입을 시작합니다.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이상한 기계 장치가 머리 위에 나타나 레이저 같은 것을 현민의 몸 위로 쏘아 댔다.
 팍팍팍팍, 팍팍팍팍······.
 “컥컥컥, 컥컥!”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들과 언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쉴 새 없이 뇌를 주먹으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약 20초의 시간이 지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1백 테라바이트의 백과사전과 5개의 언어 주입이 끝났습니다.
 "크으으으으··· 휴우우······.“
 긴 신음과 함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찾아온 주체할 수 없는 갖가지 영상과 정보들의 폭주.
 1백 테라바이트의 백과사전에는 글로 된 것만이 아니라 영상으로 된 정보도 있었다. 그리고 5개 언어는 단어만이 아니라 실제로 상황에 따라 쓰이는 예문도 함께 있어 정보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이라면 5개 언어를 가지고 그 누구를 만나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을 거 같다.’
 뇌가 뒤죽박죽인데 쉴 틈도 안주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습득률을 알아보겠습니다.
 현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실험대 위의 기계 장치는 다시 머리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레이저를 쏘아 댔다. 그리고 곧바로 결과를 말해 주었다.
 -백과사전 습득은 97퍼센트, 언어 습득은 96퍼센트, 손실률이 3퍼센트와 4퍼센트입니다.
 ‘손실되는 것도 있네?’
 손실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기분이 좀 묘했다.
 ‘나한테 뭐가 기억나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지 멋대로 입력하고, 지 멋대로 손실률을 말하다니.’
 현민의 기분은 관심도 없는지 목소리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약 8분 후부터 손실이 급속히 늘어나 10분이면 약 0.000001퍼센트의 데이터만 기억에 남고, 나머지 정보는 사라집니다.
 ‘빌어먹을. 뇌를 진탕 얻어맞고 10분이면 끝나?’
 잠시 여유를 가지나 싶었는데, 다음 실험을 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신경 세포를 자극하는 1단계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끝나자, 다시 기계 장치가 머리 위에 나타나 레이저를 쏘아 댔다. 이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잉······.
 찌릿찌릿, 찌릿찌릿······.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바늘로 수백, 수천 번이나 아주 꼼꼼하게 꾹꾹 찌르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감아야 했다.
 ‘평생 맞을 침을 여기서 다 맞는구나. 그것도 전기침으로.’
 약 30초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습득률을 알아보겠습니다.
 기계 장치가 온몸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며 레이저를 쏘아 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프지 않았다.
 -시각 5배, 청각 5배, 후각 10배, 미각 3배, 촉각 3배의 향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끝났어?’
 번뜩.
 눈을 떴다. 그런데 갑자기 시력이 늘어나 저 멀리 있는 것도 아주 잘 보였다. 가상공간임에도 늘어난 시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이 크게 좋아지니 절로 기쁨의 탄성이 나왔다.
 “와아!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데 이때 코를 통해 갖가지 냄새가 들어왔다. 귀를 통해서는 아주 세밀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피부 하나하나는 지하 연구실에서 배어 나오는 기운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온 세상이 다르게 느껴져!’
 마치 자신이 만화책에 나오는 초능력자라도 된 느낌이었다.
 -약 8분 후부터 손실이 진행됩니다. 10분이 되면 약 0.000001퍼센트의 향상만 남고, 오감 능력 향상이 사라집니다.
 ‘으으, 다른 건 몰라도 두 번째 실험으로 얻은 오감 능력은 10분이 지나도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시력만이라도.’
 다시 안경을 쓰는 게 정말 싫었다.
 -삐익~! 신경 세포를 자극하는 2단계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고 두 번째 실험처럼 온몸을 레이저가 쏘면서 지나갔다.
 찌릿찌릿, 찌릿찌릿, 찌릿찌릿······.
 평생 맞을 전기침을 다 맞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온전히 똑같은 고통을 또 느껴야 했다.
 “으드득, 으드득, 으드득······.”
 이를 악물고 참았다. 30초가 지났다.
 -동체 시력 5배, 순발력 5배의 향상이 있었습니다. 약 8분 후부터 손실이 진행됩니다. 10분이 되면 약 0.000001퍼센트의 향상만 남고, 운동 능력 향상이 사라집니다.
 ‘쳇.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는데 또 지 맘대로 말하는군. 일어나서 걸어 보라든가, 뛰어 보라든가 그러면 안 되나? 그런데 부작용은 어떻게 해야 일어나지?’
 돈 3억이 절실한 현민은 부작용이 일어나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휴우, 부작용이 안 일어나면 빨리 끝나기라도 해라.’
 -삐익~! 크라브 마가에 대한 정보 입력과 신경 자극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뇌를 연속해서 얻어맞으며, 온몸에 전기침까지 같이 맞는 것 같았다.
 30초쯤 지난 후에 머릿속에 크라브 마가를 써서 상대를 제압하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영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약 8분 후부터 손실이 진행됩니다. 10분이 되면 약 0.000001퍼센트의 향상만 남고, 크라브 마가 습득이 사라집니다.
 ‘이제 끝났나?’
 그만했으면 하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마지막으로 기 조절 능력 향상 실험을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끝나자 기계 장치가 온몸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며 레이저를 쏘아 댔다.
 “크아아악! 크으으윽!”
 아까와 달리 온몸에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으로 이빨을 꽉 깨물며 버텨야 했다. 시간은 약 1분이 지나갔다.
 -삐익~! 기 조절 능력 향상 실험이 끝났습니다. 습득 성취도를 알아보겠습니다.
 곧이어 결과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인체의 혈도가 모두 뚫렸으며, 단전에 기의 저장소가 생겼습니다. 약 8분 후부터 단전의 저장소가 줄어들며 기의 흐름도 약해집니다. 10분이 되면 약 0.000001퍼센트의 저장소만 남고 사라질 예정입니다.
 “우오오오~”
 이번에 입에서 절로 나온 감탄사의 의미는 또 달랐다. 갑자기 전신에서 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이것이 무협에서 말하는 생사 혈관이 타통한다는 것과 운기 조식에 의해 단전에 내공이 쌓이는 건가?’
 배꼽 밑에서 약한 기운이 회오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휴~ 언제든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이때 갑자기 경고음이 연속으로 들려왔다.
 -삐익, 삐이익, 삐이익······.
 ‘으으, 왜 이러지? 아휴, 시끄러워! 혹시 이게 부작용?’
 아까와 달리 경고음은 멈출 줄 몰랐다.
 그 시간, 거대한 태양풍이 대한민국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태양풍은 그 어떤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정부에서 미리 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구멍이 뚫려 버려 전국이 정전 사태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비롯해 통신 기기가 전부 마비되었다.
 이 상황에서 코엑스는 건물 내부에 있는 비상 발전기를 돌려 전력이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이때 코엑스의 하늘 위에서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쏴아아아아!
 저 높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갑자기 시커먼 돌풍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돌풍 속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오오오!”
 코엑스 주변에 있던 이들은 신비한 자연 현상에 놀라움과 경이의 탄성을 내질렀다.
 추추추추- 추추추추-
 돌풍은 코엑스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비상 발전기의 전력이 그 순간 끊어졌다.
 그 시각 가상 체험기 속에 있던 현민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며 그대로 정신을 잃은 뒤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3. 리암이 된 현민
 
 가상 체험기 속에서 어둠이 찾아왔을 때에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두 발을 잡아당겼다. 분명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마치 텅 비어 버린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쑤우우우우욱.
 “으으으, 멈춰! 멈춰!”
 목이 터져라 외쳤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블랙홀에 빠진다 해도 이렇게 길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 시점에 갑자기 방향이 틀어져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곧바로 몇 톤짜리 트럭에 치인 듯 엄청난 충격이 밀려옴과 함께 밝은 빛이 두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여기는······.’
 “으으으······.”
 제대로 눈도 못 뜨고 극심한 고통이 밀려와 절로 신음이 나왔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아픔이 너무 크니 곧바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정신이 든 현민은 신음했다.
 “으으으······.”
 정신을 차리자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서 냄새가 느껴졌다. 충격으로 인해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던 아까와는 달리 지독한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우웨에에엑, 웨엑, 웨엑······.”
 현민은 속을 완전히 게워 낼 정도로 구토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앞에 시체가 있는 게 아닌가!
 “으어어어!”
 철퍼덕.
 그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다시 쓰러져야 했다.
 그런데 넘어진 후에 현민은 더 놀라야 했다.
 ‘여, 여기가 어디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현민이 있는 곳은 막힌 좁은 골목이었고, 좌우에 회색빛 담벼락이 막고 있으며, 차가운 시체 두 구가 바로 옆에 있었다.
 ‘혹시 가상 체험기 속인가?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곳을 설정했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부작용?’
 머리가 이상하게 되면서 주위 환경까지 바뀐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주위 환경까지 바뀐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특히나 이렇게 빌어먹을 장소로 가상공간이 바뀐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시체 옆에서 다 죽어 가는 상태로 정신이 드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현민의 눈에 자신의 손이 들어왔다.
 ‘어? 이건 내 손이 아닌데?’
 힘겹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얼굴도 내가 아닌 것 같아.’
 현민은 영혼만 빠져나와 리암의 몸에 들어온 상태였다.
 아무리 육체가 고통으로 미칠 것 같아도 현민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뿌드득~ 뚝뚝뚝.
 지끈! 지끈!
 “으아아악!”
 저절로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굳어 있던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고통을 호소해 왔다. 그중에서도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아픈 곳은 등이었다.
 ‘으으, 견뎌야 해. 견뎌!’
 이를 악물고 참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힘겹게 걸어서 더러운 뒷골목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시체 버리는 곳에서 멀어질수록 현민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도, 도대체 어디야. 여기는······.’
 로마 시대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지나다니는 인간들도 모두 이상했다.
 ‘저들도 다 가상으로 만든 거겠지?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인정할 수 없어. 인정 못 해!’
 주변에 얼굴을 비춰 볼 만한 곳을 찾다가 길바닥에 물이 고인 곳을 찾았다.
 ‘물에라도 비춰 보자.’
 가까이 가서 얼굴을 비춰 봤다. 그런데···
 ‘허억! 이게 누구야?’
 자기 얼굴이 아니었다. 생판 처음 보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털썩.
 놀라기도 하고,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잔뜩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하여 잠이 몰려왔다.
 ‘여기서 한숨 자는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난 가상 체험기 속에 있는 거야. 아니면 가상 체험기에서 나와 코엑스 전시장에 있는 거다.’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말하며 잠이 들었다.
 
 벌벌벌.
 “으으으, 추워. 추워.”
 한숨만 자려고 했으나 시간은 3일이나 지났다. 그리고 의식과 함께 감각이 돌아오면서 극심한 추위가 밀려와 견딜 수 없었다.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말하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그런데!
 ‘변한 게 없어. 난 아직도 이상한 곳에 있어.’
 아니, 변한 게 있기는 했다.
 10분 유지하고 사라진다던 5개의 언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또 극심한 아픔 속에서도 시력은 너무 좋았다.
 ‘왜 이렇게 잘 보이지?’
 만일 지구에서처럼 시력 측정을 한다고 하면 안경을 벗고도 2.0이 아니라 2배나 좋은 4.0은 될 것 같았다.
 시력만이 아니라 청각도 좋았다.
 ‘왜 이렇게 잘 들려?’
 아주 멀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곤소곤 나누는 대화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전혀 생소한 언어를 쓰기 때문이었다.
 시력이나 청각만 아니라 후각도 좋아져 각종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왔다. 아직 촉각이나 미각은 확인을 못 했으나 좋을 게 분명했다. 크라브 마가에 대한 기억이나, 백과사전에 대한 기억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가상 체험기에서 얻은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힘이 세지게 해 주는 것도, 체력을 늘려 주는 것도 아니었다.
 ‘잘 보이고, 잘 들리는 건 가상 체험기에서 했던 실험의 결과가 분명해.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잖아.’
 아무리 이곳이 가상공간이라 하더라도 10분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났다.
 ‘왜 아직도 효과가 지속될까? 그리고 이 육체는 내가 아니잖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가상 체험기에서 이루어졌던 실험의 효과가 지속되는 것은 현민의 영혼이 리암의 몸에 들어오며 실험을 통해 뇌와 신경 세포들이 받았던 모든 자극이 그대로 리암의 몸에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영혼이 새로운 육체로 이동하는 불가사의한 일이 실험의 효과마저 사라지지 않도록 해 주고 있었다.
 욱식욱신, 욱신욱신.
 온몸은 추운데 등은 예외였다. 채찍으로 난도질당했기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렇게 아픈데 가상현실일까? 그런데 왜 난 내가 아니지? ···환생? 그런데 이렇게 나이 많은 상태로 환생하는 경우도 있나?’
 납득 되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저승사자가 실수로 내 영혼을 육체에서 꺼냈는데 살생부에 내 이름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 육체로 넣어 줬나? ···21세기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꼬륵, 꼬르르륵.
 이 상황에서도 배가 고픈 건 무슨 조화인가?
 ‘뭐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할 수 없다. 구걸하자.’
 구걸하는 데 꼭 말이 통할 필요는 없었다.
 리암이 된 현민은 추위와 고통으로 견디기 힘들었기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걸을 시작했다.
 
 움직일 힘도 없어 제자리에서 하루 종일 구걸해 겨우 배를 채웠다.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는 말이었다. 다행히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게 구걸에 도움이 되었다.
 ‘거지의 삶이 이런 거구나.’
 지구에서 이일 저일 많이 해 봤지만 거지는 처음이었다.
 구걸하는 게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웠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피범벅이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또 보기에는 사람들이 다들 거지 같은 옷만 입고 다녔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그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여, 여기는 지구가 아니야. 지구일 리가 없어!’
 숨 쉬는 공기는 지구랑 같았다. 낮에 본 해는 워낙 강렬하니 비슷하게 보였다. 하지만 달이 뜨는데 육안으로 표면이 보일 정도로 컸다.
 ‘내가 시력이 좋아져서 보이는 건가?’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별자리였다.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있어야 할 게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내가 아는 북극성이나,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없어!’
 곰곰이 생각하니 별자리가 아니라도 지구라고 느낄 수 없는 게 있었다. 사람들이었다.
 ‘이 많은 인간들이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텔레비전에 안 나왔지?’
 마을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건물들의 모습은 21세기를 산다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중세 시대 정도면 이해가 되었다.
 하루 동안 본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명은 넘었다.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중세 시대에 사는 것처럼 하고 사는데 어떻게 뉴스거리가 안 될 수 있는가? 게다가 이들이 하는 말은 도대체가 알아먹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여긴 지구가 아닌 게 틀림없어. 아니면 과거로 옮겨 온 건가?’
 어쨌든 현민은 사라졌다. 자기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툭, 투두둑.
 두 눈에서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으으, 은희랑 수현이는 이제 다시 못 보나?’
 아내와 아기를 생각하니 고개가 떨궈지며 울음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흑, 흑흑.”
 한참을 우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은희가 보험금은 받았겠지?’
 자신의 영혼이 새로운 몸에 들어왔으니 가상 체험기에 있던 원래 몸은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 게 분명했다.
 또 가상 체험기에서 실험을 진행하던 중에 죽은 거라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상 체험기 안에서 죽을 때에 받는 십억에다가 실험 중의 부작용이 발생하면 받는 삼억까지 보태면 십삼억이다. 이 정도면 은희가 수현이를 키우면서 한평생 사는 데 부족하지는 않겠지?’
 3억은 못 받는다 치더라도 가상 체험기 안에서 죽은 시체가 발견되었을 테니 10억은 받을 게 분명했다. 10억이라도 아껴만 쓰면 수현이를 장가보내고, 은희가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쓸데없이 재테크 욕심내다 돈을 날리지만 않으면 괜찮아. 그리고 은희도 일하잖아.’
 은희와 수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큰돈이 생겼을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돈을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돈도 못 남기고 비명횡사했으면 정말 면목이 없잖아. 은희와 수현이도 내가 없는데 돈까지 없으면 얼마나 고생하겠어?’
 이렇게 마음먹으니 슬픔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후우,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도 난 숨 쉬고 있어. 살아 있어. 우선은 살아남는 게 먼저야.’
 그는 구걸하는 자세로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추위와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며 열흘을 버텨 내자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라 여기는 찰나 문제가 생겼다.
 툭툭.
 구걸을 위해 내밀고 있는 두 손을 누군가 발로 찼다.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구걸이야?”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거지 패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싸울 힘도 없는데 덤볐다간 죽는다.’
 리암은 벽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며 무거운 두 발을 질질 끌고 옆으로 피했다.
 이때 거지 패거리 중에 하나가 리암을 알아봤다.
 “어? 이 자식, 좀도둑 리암인데?”
 “그래? 근데 몰골이 왜 이래?”
 “열흘쯤 전인가 병사들에게 끌려가더니 쥐어 터졌나 봐.”
 “등이 완전히 피범벅이다.”
 거지 패거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렸다. 그러나 리암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채 눈치만 보며 거지 패거리들이 안 보이는 곳까지 힘겹게 걸어갔다.
 털썩.
 적당한 곳에 도착한 그는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휴우···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그동안 지켜보니 이 세계는 누가 보는 자만 없다면 힘없는 자는 칼로 찔러 죽여도 그냥 묻혀 버릴 곳이었다.
 ‘21세기의 사고방식은 갖다 버려야 한다. 중세나 로마 시대라 여기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말이 통해야 한다.’
 그때부터 그는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언어라는 게 마구잡이가 아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게 바로 문법이다. 이 세계 언어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는 입장이기에 반복되는 단어를 주의해서 들으며, 규칙이 되는 문법도 찾으려고 애썼다.
 당장은 일할 힘이 없기에 리암은 거지 패거리가 나타나는지 주의를 기울이며 다시 구걸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거지 패거리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리암이 먼저 그들을 알아보고 시비가 붙을 게 겁이나 얼른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 * *
 
 사회의 가장 바닥에서 약자로서 하루하루 버티며 몇 달을 보냈다.
 이제는 한 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거지 패거리들을 피해 빈민가를 비롯해 외성 밖 거주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걸로 버텨 나갔다.
 그런데 빈민가를 돌아다닐 때면 가끔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걸 가만히 들으며 자신의 이름이 리암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는 정확히 몰랐다. 누구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대충 20대라는 것만 짐작했다.
 하루 종일 힘들게 구걸하면서 절로 눈물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지구에 있는 은희와 수현을 생각할 때였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아기를 안고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면 뻔히 은희와 수현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눈길이 갔다.
 ‘수현이가 아버지 없이 자라느라 놀림 받지는 않을까?’
 괜히 보험금 생각에 가상 체험기에 들어갔나 후회가 됐다.
 가족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팠으나 리암은 점점 이 세계에 적응했다. 그리고 말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신분 사회가 어떤 것인지 배웠다.
 ‘수백 년, 수천 년이 흐르면 이곳도 지구처럼 바뀌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21세기의 정신세계를 가진 리암으로서 신분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를 느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는 철저히 고개를 돌리며 목숨 부지에만 전념했다.
 말을 배우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덕택에 어려운 단어를 빼놓고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일반적인 성인이 외국어를 습득하는 속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배운 것이었다. 이곳에서 쓰이는 언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지구에서 쓰이는 5개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또 기억력이 무척 좋아서 한 번 들으면 절대 까먹지 않는다는 점도 새로운 언어를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이유였다.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도둑질하다가 잡혀서 채찍질을 너무 과하게 맞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달이 흘러 대화를 나눌 자신이 생기자 용기를 내어 자신을 알아보는 자 중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내가 도둑질하다 잡혔었나요?”
 “맞아. 지금 보니까 곧잘 말을 하네? 듣기로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던데.”
 “아직도 정상은 아니에요. 옛날 일은 기억이 안 나요. 말도 못 알아듣는 게 많구요.”
 “흐흐, 그래도 넌 운이 좋은 거다. 감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왜요?”
 “네가 살아 있는 걸 알면 다시 잡으려 할 테니까. 거기서 넌 죽은 사람이야. 원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데 네가 채찍질을 심하게 당해 쓰러져 있으니까 죽은 줄 알고 시체 버리는 곳에 버렸대.”
 상대는 무척이나 상세하게 리암의 일을 알고 있었다.
 “자세히 아시네요?”
 “너를 직접 버린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와 해 준 소리니까 정확해.”
 “그렇군요.”
 “요즘은 도둑질은 전혀 안 하나 봐?”
 “정신 차렸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도둑질도 할 생각이었다. 단지 도둑질을 하다가 걸리는 게 두려웠다.
 ‘이 세계에 제대로 된 재판이나 있겠어? 죽기 전까지 매질을 당하거나, 팔을 잘라 버릴 수도 있어. 최소한 구걸은 그럴 일은 없잖아.’
 하지만 몸이 좀 괜찮아지자 싸움 충동이 일어났다. 대상은 패거리가 아니라 혼자서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이었다.
 몸이 성치 못해 처음에는 홀로 시비를 거는 놈들도 슬슬 피했지만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는 힘이야. 나를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으니 살아남으려면 싸워야 해.’
 머리에는 크라브 마가에 대한 기억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가상 체험기의 실험을 통해 동체 시력과 운동 신경도 좋아져서 싸움이 벌어지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걸하는 중에도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무기로 쓸 만한 주먹만 한 돌도 구해서 가지고 다녔다.
 한 달쯤 운동하며 적당한 상대를 골랐다. 이놈은 리암만 보면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하고, 구걸해 얻은 것까지 뺏던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그래서 언제든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며칠이나 주위를 살핀 후에 달빛만 환한 어두운 저녁, 주위에 쳐다보는 사람도 없을 때에 그놈 앞에 비굴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렇게 해야 놈이 방심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놈은 리암을 보자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을 부라렸다.
 “이 새끼, 또 여기서 구걸하냐? 내가 몇 번이나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앙!”
 평소처럼 리암이 반항도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자신 있게 주먹을 날려 왔다.
 단단히 싸울 마음을 먹고 상대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노려보던 리암은 상대가 주먹을 휘두르려고 크게 동작을 취할 때에 잽싸게 앞으로 다가갔다.
 ‘목표는 눈!’
 눈은 유일하게 외부로 드러나 있는 신체 기관이다. 게다가 눈을 찔리고 아파하지 않을 사람도 없으며, 눈을 공격당하면 상대는 어둠 속에서 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몸을 웅크리며 그동안 손톱을 깍지 못해 잔뜩 날카로워진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세워 상대의 두 눈을 강하게 찔렀다.
 파앗! 파앗!
 가상 체험기로 인해 운동 신경이 좋아지며 동체 시력과 순발력까지 증가된 상태였다. 그래서 정확하게 상대의 두 눈을 찌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주르르, 주르르.
 상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두 눈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
 ‘지구라면 그냥 이 정도 복수하는 걸로 끝내겠지만 이곳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이놈을 죽여야 한다.‘
 살려 두었다간 나중에 후환이 될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주먹만 한 돌을 꺼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렀다.
 휘이익~ 빠아악!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끽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흐흐, 아무리 센 척해도 이렇게 짱돌 한 방이면 끝장이지.’
 일단은 남의 눈이 의식되니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아무리 힘 있는 자가 제일인 세상이지만, 그래도 누구든 신고하여 병사에게 걸리면 좋을 게 없었다.
 ‘죽었는지 확인은 나중에 하자.’
 리암은 얼른 상대를 들쳐 업은 후에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놈 옷을 벗겨서 입을까?’
 리암은 아직도 피투성이 옷을 입고 있었다. 얼른 상대의 옷을 벗겼다.
 툭, 툭.
 ‘이게 뭐야?’
 벗기는 중에 품속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작은 가죽 주머니와 단검이었다. 주머니는 열어 보니 이 세계에서 쓰이는 동전이 몇 개쯤 들어 있었다.
 ‘횡재했군.’
 옷과 주머니, 단검은 한편에 치워 놓고, 무기로 쓴 돌을 들어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대의 얼굴을 몇 번이나 내리쳐 완전히 짓이겨 놨다. 이렇게 해야 죽은 놈이 누군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가 많이 튀겼으나 리암은 이미 피투성이 옷을 입고 있기에 전혀 상관없었다.
 일을 다 끝낸 후에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손과 얼굴에 묻은 상대의 피를 옷가지로 닦은 후에 죽은 시체 위에 던져 버렸다.
 ‘내가 살려고 이런 짓을 하기는 했지만 좀 찝찝하군.’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며 한편에 둔 상대의 옷을 입었다. 주머니도 품에 챙겼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며 골목길을 나왔다.
 ‘돈이 생겼으니 제대로 좀 씻어 볼까?’
 그동안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뒀기에 자신 있게 빈민가 입구에 있는 대중목욕탕으로 갔다.
 대중목욕탕 입구로 가니 주인이 서서 돈을 받았다. 우선 잠깐 지켜 서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폈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었으며 다들 구릿빛 동전을 하나씩 주인에게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릿빛 동전은 쿠퍼였다.
 ‘동전 하나면 되는군.’
 대중목욕탕 주인에게 다가가니 리암을 아래위로 살펴본 후에 물었다.
 “처음 보는 놈 같은데?”
 “리암입니다.”
 “아! 좀도둑 리암. 병사들에게 끌려갔다가 바보가 돼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돈은 있나?”
 리암은 대답 대신에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열고 안에 있는 구릿빛 동전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으음, 어디서 한 건 했나 보지?”
 “들어가도 되죠?”
 “잠깐. 옷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지만 냄새가 심해. 하나로는 안 되겠어.”
 “끄응.”
 리암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동전을 하나 더 꺼내 동전 두 개를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괴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동전을 더 요구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흐흐, 오래 있지 마. 돈을 더 받겠어.”
 주인은 돈을 챙기며 실실 웃었다.
 대중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니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란 탕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탕 주위에 앉아 씻고 있었다.
 얼른 옷을 벗어서 보이는 곳에 두고 물을 퍼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물은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었다.
 지구에서처럼 때 미는 수건이 있을 리 없기에 손으로 때를 밀었는데 굵고, 시커먼 때가 하염없이 나왔다.
 ‘으으, 정말 더럽구나. 더러워.’
 주인은 오래 있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때를 깨끗이 밀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다 씻고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직 주머니에 돈도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 좀 먹어 볼까?’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그는 음식을 배불리 먹기로 결심했다. 기실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배불리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곧바로 빵집에 가서 가진 돈을 전부 주고 푸짐히 빵을 샀다. 그리고 개천으로 가서 물을 마시며 배가 터져라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온몸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제 구걸은 하지 말자. 대신에 날 괴롭힌 놈들을 찾아서 복수를 하자.’
 구걸하면서 받은 모욕과 괴롭힘, 아내와 아기를 다시 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슬픔 등, 그동안 어디에도 풀지 못하고 눌려 있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다.
 
 한밤중.
 휘이익~ 빠악!
 털썩.
 리암이 휘두른 돌에 뒷통수를 가격당한 상대는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복수를 다짐하고 죽인 상대가 벌써 6명째였다. 이제는 능숙한 솜씨로 상대가 알아채기도 전에 뒤에서 몰래 접근해 단번에 쓰러뜨릴 정도였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
 눈을 좌우로 돌려 이리저리 살펴보고, 귀는 쫑끗 세워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자 쓰러진 상대의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 가지고 있는 게 있는지 살폈다.
 ‘흐흐, 주머니가 있군.’
 묵직하게 잡히는 걸 보니 주머니 속에 꽤 많은 돈이 있는 게 확실했다. 얼른 주머니를 챙긴 후에 쓰러진 자는 버려두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이동했다.
 사건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후에 주머니 속에 돈이 얼마나 있나 보았더니 1실버 20쿠퍼가 있었다.
 이 세계의 돈은 쿠퍼,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단위였으며, 1플래티넘은 1천 골드, 1골드는 1백 실버, 1실버는 1백 쿠퍼였다.
 ‘흐흐, 이거면 당분간 여관비는 충분하겠어.’
 돈이 생긴 이후로는 1층에 주점을 겸하고 있는 여관에 방을 잡고 지냈다. 잠만 자는 방은 가격이 싸지만 일부러 돈을 2배로 주고 목욕도 할 수 있는 방을 잡았다. 지구에서 살던 생활이 있기에 되도록 매일 목욕하며 깨끗하게 있고 싶어서였다.
 또 그동안 등에 큰 상처를 입은 채로 노숙을 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 돈을 더 주더라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지내고 싶었다.
 여섯 번째 살인을 끝내고 머물고 있는 여관에 오니 1층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 들었어? 연쇄 살인마 소문 말이야.”
 “응. 들었지. 벌써 다섯 명이 죽었다며?”
 “오늘 밤에도 누군가 죽었을 테니 여섯 명이 되겠지. 요즘 매일 한 명씩 죽잖아.”
 “관리 귀에도 소문이 들어가 내일부터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다던데?”
 “진짜 살인범은 잡지도 못하고 엉뚱한 우리만 괴로워지겠지. 의심스럽게 보이면 무조건 잡고 볼 수도 있어.”
 리암은 속으로 뜨끔했다.
 ‘조사? 당분간 몸조심해야겠다.’
 가장 악질로 괴롭히던 놈들 중에 6명을 죽이면서 복수도 웬만큼 한 상태였다. 며칠간은 잠잠히 지내기로 했다.
 
 다음 날이 되니 연쇄 살인마를 잡겠다며 병사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심문하느라 시끄러워졌다.
 병사들은 여관에도 찾아와 방에 있는 자들을 전부 나오게 했다. 다행히 청각이 좋은 리암은 병사들이 여관에 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서 짐을 챙겨 슬쩍 도망쳐 나왔다.
 ‘어디로 숨지?’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이럴 때는 어딘가 속해 있으면 좋은데. 그래야 떠돌이 좀도둑 취급을 안 받잖아.’
 이때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일꾼이 되어 볼까?’
 마침 가을이 되어 추수가 한창이라 품삯을 주며 일꾼을 뽑았다.
 외성 밖의 땅은 국왕의 것으로, 추수하는 일꾼은 동쪽 성문에서 일하는 관리가 뽑았다. 리암은 그동안 외성 안으로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외성 밖이라면 지리가 훤했다.
 농사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일꾼으로 일한다면 병사들에게 걸리더라도 떠돌이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 연쇄 살인마라 의심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옷도 이만하면 괜찮고, 그동안 깨끗하게 씻은 데다 잘 먹어서 혈색도 좋으니 뽑아 주겠지?’
 동쪽 성문으로 가서 관리에게 일꾼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관리는 위아래로 리암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승낙의 표시였다.
 “저기 가서 일해 봐라. 감독관이 지켜볼 것이다. 하는 걸 봐서 계속 일하게 해 주마.”
 품삯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오늘은 일하는 모습만 지켜보려는 심산에서였다.
 또 원래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서 받는 품삯은 4쿠퍼지만 감독관이 봐서 일을 시원찮게 하면 돈을 주기는커녕 다시는 일하지 못하게 했다.
 리암은 낫을 받았고, 그것으로 밀을 베는 일을 맡았다.
 농사는 처음이었지만 일꾼으로 뽑히기 위해 허리도 펴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해가 지는 저녁이 되자 감독관은 내일도 나와서 일하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손등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다시 여관에 가서 방을 잡자.’
 이번에는 처음과 다른 여관을 잡기로 했다. 여관까지 가는 길에 병사들에게 잡혀 이름과 하는 일을 추궁당해야 했다.
 “이름은 리암입니다. 동문의 관리께 허락을 받고 추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관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암을 보내 줬다.
 ‘휴우, 다행이야.’
 리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 이터널 럭 마법
 
 다음 날, 새벽같이 일터로 가서 몇 시간이나 일을 하니 아침으로 멀건 죽을 주었다. 점심은 빵과 죽이었고, 저녁은 없었다.
 혹시나 잘릴까 봐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 일을 한 후에 감독관으로부터 2쿠퍼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절반만 준다. 내일도 잘하면 삼 쿠퍼. 모레부터 사 쿠퍼다.”
 “예, 감사합니다.”
 따져 봤자 자기만 손해니 얼른 고개를 숙이며 돈을 받았다.
 저녁을 사 먹으러 빵집으로 가면서 구걸할 때가 그래도 육체적으로는 더 편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농사 도구라도 좀 현대적이면 좋겠는데.’
 지구에서 살 때에 40대가 되면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을까 고민했다. 누구처럼 모아 놓은 돈도 없고, 하루 벌이로 이 일, 저 일을 하느니 차라리 농사를 짓고 싶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알아보며 조사를 하니 시골 생활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리고 돈도 없어서 땅을 사지도 못했다.
 땅이야 빈집을 얻어서 어떻게 해 본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아내였다. 자신은 시골 생활이 전혀 자신이 없으며, 그나마 자기가 일하려면 서울 부근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시골로 가서 농사짓는 것은 포기했으나 당시에 농사짓는 법이나, 농기구에 대해서 많이 알아봤었다.
 물론 21세기의 농사짓는 법으로 중세 시대나 다름없는 이 세계의 농사를 비교한다는 게 말도 안 되었다. 게다가 이곳은 철이 귀해서 대부분의 물건을 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
 ‘휴우, 이곳에서는 그래도 20대니까 견디는 거야. 지구에서라면 지금과 같은 육체노동을 견디지 못했겠지?’
 지구에서의 나이는 46살. 나이 드신 분들이야 아직 젊다고 하겠지만 20대와는 판이하게 체력이 틀렸었다.
 ‘조선 시대는 임금의 평균 수명이 47세고,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24세였지.’
 임금은 지극 정성으로 건강을 챙겨 주기에 그나마 오래 살지만, 백성들은 영아 사망률도 높고,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며, 죽어라 일만 하니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20세기에 태어나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던 때는 실감을 못했는데, 중세 시대나 다름없는 곳으로 와서 살아 보니 왜 조선 시대에 백성들이 일찍 죽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뼈 빠지게 십여 년 일하다 죽으려나? 편하게 잠잘 수 있는 집도 없는 주제라 더 일찍 죽을 지도 모르지. 에휴, 어차피 다시 살려 줄 거면 귀족이나 왕족이 되게 해 주지.’
 저승사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잖아. 그리고 힘든 육체노동으로 은희랑 수현이 생각도 잊을 수 있어서 좋아.’
 몸이 힘드니 이별의 아픔도 잊은 채 시간이 너무 잘 갔다.
 추수가 끝나갈 때까지 일꾼이 되어 해가 뜨기도 전에 일을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 일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첫날과 둘째 날만 2쿠퍼, 3쿠퍼를 받았고, 그 이후는 계속 4쿠퍼를 받았다.
 ‘곧 추수도 다 끝나고, 이제 무슨 일을 하지?’
 일을 구하지 못하면 특별한 방도가 없는 한 구걸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강도가 되어 뺏는 게 전부였다.
 다행인 것은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났는지 더는 병사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심문하지 않았다.
 ‘올 겨울은 가진 돈으로 버티자.’
 그동안 번 돈과 6명이나 죽이며 뺏은 돈이 있어서 겨울은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추수 기간에 일하는 걸 지켜본 감독관이 리암을 불렀다.
 “거기 너, 이리로 와 봐라.”
 “네.”
 후다다다닥.
 쏜살같이 달려갔다. 감독관이 품삯을 주기에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너, 외성 안에 가 본 적 있냐?”
 “한 번도 없습니다.”
 “내일 수확한 곡물을 짐마차에 실어서 외성 안에 있는 창고로 옮겨야 한다. 장정 다섯이 필요한데, 너도 그중에 하나로 일해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네가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때깔이 제일 나아서 뽑은 거니까. 내일은 외성 안에 들어가야 하니까 제일 깨끗한 옷으로 입고 와라. 몸도 씻고.”
 외성 안은 평민 중에서도 돈이 많은 상인이나, 세공업자, 재단사, 대장장이와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들만 살았다. 그래서 허름한 복장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자는 제외시키고 되도록 깨끗해 보이는 자를 뽑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리암에게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작은 다음 날 리암이 짐마차에 곡물을 싣고 외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한 노파로부터 시작했다.
 “으으, 추워요. 누, 누구든 저를 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인 주름투성이 얼굴, 딱 보기에도 충분히 살만큼 살았다 여겨지는 노파는 여기저기 헤진 낡은 옷을 입은 채로 숨을 헐떡거리며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거리를 지나가는 자들에게 말라비틀어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는 자들은 없었다. 오히려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 이름은 새튼이다.”
 리암과 같은 짐마차에 탄 40대의 중년 남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해 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리암입니다.”
 “외성 안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네.”
 “와 보니까 어때?”
 “무척 크네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부자겠죠?”
 “흐흐,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도 빈민들은 있기 마련이야. 저기 봐 봐.”
 새튼은 저 멀리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노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렇게 애원해도 누구 하나 거들떠도 안 보잖아.”
 “아니, 저런!”
 리암은 얼굴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눈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무심하게 쳐다보는 것뿐이지만, 아직 지구에서 가졌던 노인 공경 사상이 남아 있는 리암의 경우는 동정심이 크게 일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아들이 죽었다 생각하고 크게 슬퍼하셨겠지?’
 그동안 아내와 아기에 대한 아픔이 대부분이었는데 노파를 보니 칠순이 넘으셨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돕자!’
 새튼이 말릴 사이도 없이 리암은 짐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휘이익~ 타앗.
 “뭐하는 거냐!”
 새튼이 놀라서 리암이 등을 향해 소리쳤다.
 “얼른 뛰어갔다 올게요.”
 “가서 뭐하게!”
 “겉옷이라도 벗어 주려구요.”
 “이런 미친 놈! 딱 봐도 곧 죽을 노파야. 넌 옷이 몇 개라도 된다더냐? 어서 돌아와!”
 “아니에요.”
 리암은 노파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겉옷을 벗어서 내밀며 말했다.
 “가 봐야 해서 더 도와드릴 수 없네요. 이거라도 걸치세요.”
 덥썩!
 노파는 겉옷을 받는 게 아니라 손을 뻗어 리암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하도 꽈악 쥐는 바람에 리암은 화들짝 놀랐다.
 “허엇. 아픕니다!”
 ‘죽기 직전에는 저승사자에게 안 끌려가려고 괴물 같은 힘을 낸다고 하더니.’
 손을 빼지 못하면 이대로 짐마차를 놓친다는 위기감에 등줄기를 타고 찬기가 주르르 흘렀다.
 “으으, 제 손은 좀 놔주세요. 짐마차로 돌아가야 합니다.”
 힘을 주며 손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은 꿈쩍도 안 했다.
 “누구도 도와주려고 안 했는데 젊은이는 입고 있던 겉옷까지 벗어서 주려고 하니 눈물이 날만큼 고맙네.”
 노파는 빙그레 웃었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
 순간 리암은 노파의 확 달라진 표정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잡힌 손을 뺄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빛줄기가 노파의 손을 타고 리암의 손으로 들어왔다.
 스르르, 스르르르.
 빛줄기는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가며 손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옷 속으로 들어가 팔로 그리고 팔에서 어깨를 지나 가슴까지 들어왔다.
 “어어, 어어!”
 리암은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빛줄기는 가슴 한가운데를 빙그르 돌더니 그대로 몸 안에 흡수되며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쓰러져 있던 노파는 어느새 일어나 서서 한 손에 리암이 준 겉옷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리암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젊은이, 복 많이 받을 거야.”
 “어? 일어나셨네요?”
 노파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웃었다.
 “흐흐, 잘 가게.”
 말을 마친 노파는 등을 돌려 골목길로 걸어갔다.
 “자, 잠시만요!”
 리암은 노파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두 다리가 꼼짝도 안 했다.
 앞으로 걸어가던 노파는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한마디 했다.
 “쫓아오지 말게. 얼른 돌아가! 그래야 짐마차를 안 놓치지.”
 “아! 짐마차!”
 아차 싶은 리암은 몸을 돌렸다. 짐마차는 벌써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이런, 잘못하면 놓치겠어. 하지만······.’
 노파를 잡아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 노파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헉! 순식간에 사라졌어!’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볐다. 자기 눈이 이상해져서 노파를 보지 못하는가 해서였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쳐다보았으나 노파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으으, 어떻게 된 일이지?’
 시간만 있다면 앞으로 뛰어나가 노파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멀어지는 짐마차가 부담스러웠다.
 ‘돌아가야 해!’
 어쩔 수 없이 노파는 포기하고 짐마차를 향해 죽어라 뛰었다.
 잠시 후, 짐마차에 올라타니 새튼이 크게 나무랬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겉옷도 없이 이제 어떻게 할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노파가 제 손을 잡았을 때에 황금빛이 나며 무언가 제 몸으로 들어오는 거 보셨죠?”
 “황금빛? 무슨 소리냐?”
 새튼은 전혀 모른다는 눈치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못 봤나?’
 “그러면 노파가 일어나는 건 보셨죠?”
 “글쎄. 난 네가 노파에게 겉옷을 주고 뛰어오는 것만 봤는데?”
 “저, 정말이요? 다른 분들은요?”
 리암은 새튼 말고 같이 짐마차에 탄 자들을 쳐다보았다.
 도리도리.
 다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누구도 리암에게 일어난 일을 아는 자가 없었다.
 “후우, 그럼 직접 보여드리죠.”
 리암은 얼른 웃옷을 벗었다. 가슴에 분명 무슨 흔적이라도 있으리라 여겨서였다.
 하지만···
 “어, 없잖아!”
 가슴은 물론, 어깨나 팔, 손까지 그 어디에도 빛줄기가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새튼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리암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냐? 겉옷을 벗어서 노파에게 주더니 이제는 남은 옷마저 벗어서 벌거벗고 다니려고 그래?”
 “아, 아닙니다.”
 리암은 다시 옷을 입었다.
 ‘하! 미칠 노릇이군. 도대체 그 빛은 뭐였지?’
 리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 했다.
 한편 리암의 눈에서 사라진 노파는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유희를 끝내는 마당에 준비했던 선물을 아무도 받지 못하나 했는데 마지막에 운이 좋은 놈을 만났군.’
 노파의 정체는 무려 8천 년을 산 골드 드래곤 아일스.
 수십 년의 유희를 막 끝내고, 레어로 돌아가 수백 년에 걸친 긴 잠을 자려 했다. 그러나 그냥 인간 세상을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든 아일스는 재밌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파로 변신해서 땅에 쓰러져서 도움을 청하자. 누구든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놈이 있으면 큰 선물을 주리라.’
 그런데 노파로 변신해 도움을 청했으나 사람들은 모두 무관심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반나절이 다 지나갈 즈음에 드디어 아일스는 포기하고 레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리암이 나타나 겉옷을 벗어주었다.
 ‘보아 하니 귀족도 아니고, 평범한 농부에 불과한 놈이다. 겉옷은 딱 하나 밖에 없을 텐데 그걸 나에게 주다니.’
 8천 년이나 살며 수십 번의 유희를 했던 아일스는 인간 세상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리암이 내미는 그의 겉옷이 그 자신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알았다.
 ‘아주 기특한 놈이군. 너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마.’
 그에 감명 받은 아일스는 본래 주려고 했던 선물보다 더 큰 것을 주기로 마음먹고 리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용언 마법을 시전했다.
 ‘이터널 럭!’
 이터널 럭 마법은 행운이 평생 지속되도록 해 주는 것으로, 어떤 자가 저주를 걸었다 하더라도, 그 저주까지 행운으로 바뀌어 작용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흐흐, 넌 평생 운이 좋은 놈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일스는 어리둥절해하는 리암을 뒤로한 채 골목길로 들어왔다. 그리고 좌우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포털 마법을 시전해 자신의 레어로 사라졌다.
 
 짐마차에 다시 올라탄 이후로 리암은 몇 번이나 입고 있던 옷을 들추며 가슴에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뱀처럼 기어 다니는 빛이 내 몸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헛것을 봤나?’
 새튼은 리암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예 옷을 벗지 그러냐?”
 “예?”
 “도대체 가슴에 뭐가 있다고 계속 들여다보는 거야?”
 “아, 아닙니다.”
 처음에는 직접 보라며 옷까지 벗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까지 하니, 리암도 이제는 설득을 포기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밖에 좀 봐라. 저기가 내성 성벽이다.”
 어느새 짐마차는 내성 성벽까지 도착했다. 가슴만 자꾸 보다 보니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오호, 그래요?”
 리암은 목을 길게 빼며 내성 성벽은 어떻게 생겼나 쳐다보았다.
 “이제 다 도착했나요?”
 “더 가야지. 창고는 아직 더 가야······.”
 새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하는 도중에 큰 사고가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히이잉, 히이잉!
 옆을 지나가던 마차의 말이 짐마차를 끄는 말들 중에 하나를 보고 발정이 났는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이 마차는 짐마차처럼 허름하고 볼품없는 게 아니라, 지붕과 창문, 거기에 문까지 있어서 딱 보기에도 귀족 같은 귀한 신분이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마차 뒤쪽으로는 마차를 호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말 탄 기사들과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헛, 왜 이래? 이럇! 움직여라, 움직여!”
 마부는 당황하며 채찍질을 가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되어 버렸다.
 말은 앞발을 치켜들며 짐마차를 끄는 말에게 달려들었다.
 히이이잉!
 “으악! 이놈의 말이 미쳤나!”
 갑작스런 말의 행동에 마부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말은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고, 마차는 기우뚱하며 크게 흔들렸다.
 “어어, 으아악!”
 휘이익~ 쿠웅.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마부는 중심을 잃고 땅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부가 떨어졌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뒤쪽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기사들이 얼른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마차에 귀한 분이 타고 계시다. 얼른 말을 잡아!”
 기사들은 소리치며 발광하는 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말이 워낙 심하게 요동치니 고삐를 잡지 못했다.
 “워워, 진정해라, 진정해!”
 “짐마차를 옆으로 비켜서게 해.”
 “말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어. 앞발을 조심해. 찍히면 즉사할 수도 있어.”
 다들 걱정하며 어떻게 말을 진정시킬지 난감해 했다.
 짐마차에 타고 있던 리암과 새튼은 짐마차에서 내렸다.
 “쯧쯧, 마부가 떨어졌으니 어쩌지? 고삐를 잡아야 할 텐데.”
 새튼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요동치는 말을 바라보던 리암은 출렁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고삐가 정확히 눈에 잡혔다. 가상 체험기의 실험에 의해 동체 시력도 월등히 좋아져서였다.
 ‘저거만 잡으면 될 텐데. 누구든 나서서 저걸 잡아!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야?’
 말에게 다가가 손만 내밀면 고삐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쉬워 보이는데 고삐를 잡지 못하고 쩔쩔매는 기사들이 안타깝게 보였다.
 “차라리 말의 목을 베어 버려!”
 기사들 중에 하나가 소리치며 검을 빼들었다.
 ‘안 되겠어. 내가 나서자.’
 말이 죽게 생기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리암은 앞으로 뛰어나갔다.
 “리암! 뭐하는 거냐!”
 뒤에서 새튼이 소리쳤지만 리암은 발버둥치는 말에게 얼른 다가가 한 손으로 고삐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말을 향해 높이 쳐들며 말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워워, 괜찮아. 워워~ 괜찮아.”
 푸르르르, 히이이잉!
 도저히 통제가 안 될 것 같던 말은 리암이 고삐를 잡자 웬일인지 온순해지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터널 럭 마법으로 인한 행운 때문이었다.
 “우와아!”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감탄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끼이이익.
 마차 문이 열리며 안에서 긴 로브를 걸친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기사들 중에 하나가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베르메니 대마법사님. 괜찮으십니까?”
 베르메니는 마케니안 왕국에서 최초로 대마법사 칭호를 얻은 6서클 마법사로 90살을 넘긴 노마법사였다. 그는 현재 대륙에 있는 모든 마법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였다.
 ‘대마법사?’
 리암은 마법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아직 이 세계의 언어가 익숙지 않기에 발음만 알아들었으며 뜻은 몰랐다. 그래서 대마법사의 의미도 알 수 없었다.
 베르메니는 이마를 찌푸리며 기사를 나무랬다.
 “마차가 이렇게 흔들렸는데 괜찮을 리가 있는가?”
 질책을 받으니 기사는 어쩔 줄 몰랐다. 베르메니를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로서는 이번 일로 인해 크게 문책받을 것이 분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말이 미쳤는지 갑자기······.”
 “크으음, 지금은 진정된 듯싶은데? 저 아이가 말을 진정시켰나?”
 베르메니는 아직도 고삐를 잡고 있는 리암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 그렇습니다.”
 “어떤 아이지?”
 “그, 글쎄요. 천한 신분인 것 같기는 한데······.”
 “내 앞으로 데려오게.”
 리암에게 왠지 호감이 느껴지기에 베르메니는 직접 대화를 하고자 했다.
 기사는 얼른 리암에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기사를 불러 고삐를 잡게 한 후에 리암을 데리고 베르메니 앞으로 왔다.
 “데려왔습니다.”
 “으음,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철퍼덕.
 리암은 얼른 주저앉아 두 손을 땅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주저 없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동안 이 세계의 신분 체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였다.
 기사가 절절 매는 것을 보았으니 베르메니는 상당히 귀한 존재가 틀림없었다. 신분 사회에서 귀족에게 잘못 보이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리암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리, 리암이라고 합니다.”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은 걸 보니 무척 민첩하겠구나?”
 “아, 아닙니다. 그냥 저라도 나서서 말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잘못했습니다. 귀한 말인데 제가 손을 대었습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제법 말을 잘 하는구나. 나는 너를 벌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사느냐?”
 “아닙니다. 외성 밖에 사는데 수확한 곡물을 옮기고자 외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으음, 마부가 말을 잘 다루지 못해 소동이 났다. 너는 말을 잘 다루는 것 같으니 네가 말을 몰아야겠다.”
 “예? 제가요?”
 리암은 당황하여 고개를 들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베르메니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베르메니는 시선을 돌려 기사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를 마부로 쓰고자 하는데 누구에게 따로 허락을 받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베르메니의 기분을 풀어 줄까 고심하던 기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리암은 제 맘대로 말하는 기사가 황당했다. 그러나 잘못 입을 놀리면 죽을 수도 있기에 입을 열어 말을 하지는 못했다.
 베르메니는 리암의 표정이 변하니 직접 질문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리암은 대답하기 전에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리암을 노려보았다. 대답을 잘못하면 정말 죽일 것 같았다.
 “저, 저는 동쪽 성문의 관리에게 고용된 일꾼입니다.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나중에 관리에게 크게 낭패를 받을까 염려가······.”
 베르메니가 뭐라고 하기 전에 기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건 걱정마라. 병사를 보내 관리에게 말을 해 놓겠다.”
 “알겠습니다. 그, 그런데 저는 하루 벌이로 사는 일꾼인데······.”
 피식.
 베르메니가 가볍게 웃었다.
 “마부로 일하는 삯을 받고 싶으냐?”
 “······.”
 리암은 아무 말도 못하고 기사의 눈치만 보았다.
 베르메니는 품에서 황금빛 동전을 하나 꺼냈다. 동전 중에서도 플래티넘 다음으로 비싼 골드였다. 4쿠퍼를 받고 하루 일을 하는 리암에게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휘익~ 땡그랑.
 “받아라. 이건 말을 진정시킨 대가다. 마부 일을 잘하면 또 주마.”
 “허억! 감사합니다.”
 얼른 동전을 챙긴 리암은 넙죽 절을 했다.
 기사는 샘이 났는지 리암에게 한마디 했다.
 “최대한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
 베르메니는 기사를 흘겨본 후에 한마디 했다.
 “지금과 같은 사고만 내지 않으면 되네.”
 “으음,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이 아이가 말이나 몰게 하게.”
 말을 마친 베르메니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마차를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기사는 급히 베르메니의 등에 대고 말했다.
 “미친 말은 당장 교체하겠습니다.”
 쓰윽.
 베르메니가 고개를 돌려 기사를 쳐다봤다.
 “어떤 말로?”
 “얼른 마굿간으로 병사를 보내서······.”
 “됐네.”
 “네?”
 “날뛰긴 했지만 딱 보기에도 힘은 좋아 보여.”
 “그, 그래도 또 날뛰면······.”
 “새로운 마부가 잘 돌보겠지.”
 베르메니가 말하는 새로운 마부는 바로 리암이었다.“
 “하, 하지만······.”
 기사는 또 사고가 일어날까 불안했다.
 “괜찮다니까. 정 바꾸고 싶으면 가는 길에 들르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바꾸게. 난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기 싫네.”
 베르메니는 기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예! 앞으로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사는 아직도 땅에 엎드려 있는 리암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서 일어나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 길도 모르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해야 하지만 어디까지 가는지는 알고 싶었다.
 “넌 말이나 몰아라. 길은 우리가 인도한다.”
 이번 일로 짜증이 나 버린 기사는 리암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
 리암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시선을 돌려 새튼을 바라보았다.
 새튼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혀를 찼다. 입을 열어 말은 안 했으나 그의 표정만 보더라도 왜 괜히 나서서 이런 일을 만들었냐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리암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기사는 병사들을 불러 땅에 쓰러진 채 있는 마부를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놈은 감옥으로 끌고 가라!”
 마부는 한 팔을 부여잡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저,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팔까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어디서 감히 말대답이냐! 네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거늘!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감옥에서 신께 기도나 드려라!”
 마차에서 떨어진 마부는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로 병사들에게 이끌려 감옥에 끌려가야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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