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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거 1권-1

2017.02.01 조회 4,546 추천 51


 프롤로그
 
 멀고 먼 우주 어딘가에 있는 행성.
 대륙 남부에 있는 커다란 밀림과 그 안의 비밀한 곳에 큰 무리를 이루고 사는 엘프 종족.
 7백 년이 넘는 삶을 살며 온 생애를 마법에 바친 엘프 종족의 장로 보아텡은 그토록 원하던 8서클 마법을 마스터했다.
 “드디어! 우와아아~ 아, 아? 아! 아악! 아아악!”
 기쁨의 외침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시, 심장이······. 이런 빌어먹······.”
 순간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하필 왜 이럴 때 죽음이!’
 인간의 10배에 달하는 수명을 살았음에도 엘프는 왜 드래곤처럼 오래 살 수 없는 건지 괴로웠다.
 ‘차라리 리치가? 아니지. 엘프가 어찌 그딴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죽기 전에 반드시 스승님의 연구를 현실로 이루어 내리라!’
 결심을 내린 보아텡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법 주머니 3개에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챙겨 부족의 거주지를 떠났다.
 도착한 곳은 엘프 종족이 사는 땅과는 아주 먼 대륙 북쪽에 있는 네나드 산맥의 어딘가에 있는 커다란 동굴.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혹시라도 있을 마법 실패와 그로 인해 벌어질 대폭발을 우려해서였다.
 마정석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겹쳐진 크고 작은 동그라미와 육망성의 별을 동굴 바닥에 새기고 마법의 문자 룬으로 쓰인 마법 주문까지 빽빽이 새겨 넣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마법진 한가운데에 스승님이 준비해 주신 팔뚝만 한 최고급 마정석을 콰앙 박아 넣었다. 이 마법진을 만들고자 자신과 스승이 대를 이어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했다.
 보아텡의 스승은 같은 엘프 종족의 이단아 바로크!
 보아텡처럼 8서클을 마스터한 바로크는 차원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겠다며 653년 평생을 바친 자였다.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보라! 수천, 수만, 수십의 셀 수도 없는 별들이 있노라. 그곳에는 분명 우리와 같은 엘프들이 살 것이다. 나는 차원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 또 다른 엘프와의 만남을 이루어 내리라!’
 
 그러나 바로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바로크의 뒤를 이은 것이 보아텡.
 바로크는 죽기 전 유일한 제자였던 보아텡에게 차원 이동 마법진의 연구를 계속할 것을 명하며, 자신의 지식과 함께 준비한 모든 것을 물려주었다.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마법진의 작동뿐!”
 ‘스승님, 지켜보십시오. 제자는 반드시 스승님이 이루지 못하신 차원의 문을 열고야 말겠습니다.’
 “자아, 시작이다!”
 기합을 넣듯 큰 소리로 외치며 주먹 크기의 수정구가 박힌 기다란 마법 봉을 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이 가진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니 저절로 온몸이 떨려 왔다. 솟구치는 마력의 양만큼이나 가슴의 통증도 서서히 강도를 높여 갔다.
 ‘크으윽, 쓰러지지 않는다.’
 “우우움.”
 콰직!
 주르륵.
 보아텡은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
 ‘반드시 해낸다.’
 쭙쭙쭙, 쭙쭙쭙.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빨며 그는 정신을 집중시켰다.
 끌어올린 마력으로 온 몸의 실핏줄이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오른 전신의 아픔에 비하면 찢어진 입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굽은 등뼈가 우두둑 소리와 함께 저절로 펴졌으며, 볼이 움푹 들어가 튀어나왔던 광대뼈는 어느새 팽팽히 부풀어 오른 살에 파묻혔다.
 그뿐 만이랴? 보아텡의 덩치는 지금 평소와 비교해 2배로 커진 상태.
 ‘으으으, 이제 마력을······.’
 보아텡은 마력을 마법 봉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어 차원 이동의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파아앗.
 번쩍!
 마법 봉에 박힌 수정구가 황홀한 빛을 내며 동굴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이글이글, 이글이글.
 수정구 주위에는 하얀 오러가 솟구쳐 나와 활활 불타올랐다.
 ‘1단계는 성공이다. 다음은 2단계!’
 보아텡은 주문을 읊조리던 목소리에 힘을 주며, 들고 있는 마법 봉을 앞으로 쭈욱 내밀어 마법진을 향해 기울였다.
 푸아앗~ 슈우우우웅.
 파팟, 팟팟팟, 팟팟팟.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수정구의 빛나는 빛무리가 마법진에 쏘아지자, 바닥에 새겨진 선과 글씨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마법 봉에서 나는 진동음의 파장과 깨어난 마법진이 공명하며 진동음은 더욱 커졌다. 동굴이 다 흔들릴 정도였다.
 어느새 보아텡의 몸은 다시 줄어들었다.
 ‘으으, 2단계도 성공이다. 이제 차원의 문을 여는 3단계!’
 “크아아아아압!”
 다음 주문을 외우기 전에 목이 터져라 외치며 산산이 찢어지려는 고통을 외부로 발산시켰다.
 두우우웅~ 츠츠츠, 츠츠츠.
 마법 봉과 마법진에서 울리는 소리와 전혀 다른 또 다른 진동음이 일어났다.
 휘이이이이~ 빠드드득, 빠드드득, 빠드드드득.
 콰아앙!
 촤아아아.
 생소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마법진 한가운데에 박혀 있던 팔뚝만 한 최고급 마정석에 마치 거미줄처럼 실금이 생겨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폭발하듯 터지며 산산이 부서진 하얀 마정석 가루들이 마법진 안에 가득 퍼졌다.
 신기한 것은, 터져 나간 마정석 가루들은 마법진 안을 채울 뿐 마법진 밖으로는 전혀 퍼져 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보아텡의 읊조리던 마법 주문이 어느새 바뀌었다.
 그리고! 그리고 드디어!
 푸슈슈슈슛.
 마법진 한가운데에 작은 점이 생겨났다.
 점은 점점 커지며 원이 되었고, 그 원은 안이 뻐엉 뚫려 있는 구멍이었다. 바로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였다.
 “오오오오.”
 보아텡의 기쁨에 찬 탄성이 피어나는 미소와 함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때, 심장을 검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쿠우우우욱.
 “커억!”
 이 고통은 그냥 고통이 아니라 심장이 멎으려는 신호였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비한 탓에, 나름대로 측정한 것보다 죽음의 시간이 아주 가까이 와 버렸다.
 “안 돼. 흐흐흑, 제발! 제에발, 조금만······.”
 보아텡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붉은 빛깔의 피눈물이었다.
 ‘어떻게 만든 마법진인데! 얼마나 오랜 세월을 들여 만든 마법진인데! 여기서 쓰러지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
 툭!
 꼿꼿이 서 있기만 했던 보아텡의 발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몇 걸음만, 단지 몇 걸음만. 죽어도 좋다. 죽더라도 다른 세상을 눈에 담고 죽으리라.’
 질질질, 질질질.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떼어 내고자 마지막 한숨의 힘까지 쥐어짜 허벅지에 밀어 넣고 발을 옮겼다.
 차원의 문이 열린 마법진은 보아텡을 기다려 주듯 한 치의 변함도 없이 고요하게 화려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아아악.”
 털썩.
 ‘왜? 왜 신께서는 나에게 허락지 않으시는가? 왜에!’
 파아앗.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보아텡의 숨이 끊어졌다.
 쿠쿠쿠, 쿠쿠쿠쿠~ 쿠쿠쿠쿠, 쿠쿠쿠쿠.
 마법 시전자가 죽음을 맞이하니, 마법진은 심하게 요동쳤다.
 마법진이 불안해지고, 마법진을 가득 메웠던 마정석 가루들이 열려진 차원의 통로 속으로 밀려들어가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촤아아앗.
 우우우웅~ 촤아아앗.
 서로 다른 차원의 장소에 시커먼 2개의 구멍이 생겨났다.
 하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동국이 들어가 있는 게임 캡슐의 바닥이었다.
 또 하나는 보아텡이 사는 대륙의 어딘 가로 세스타크 왕국 바레토 지역의 대장장이 쿠캔의 아내 줄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 바닥이었다.
 이상 현상으로 만들어진 2개의 구멍은 서로가 서로에게 입구와 출구가 되는 것으로, 영혼과 육체가 같이 이동하는 완벽한 차원 이동에서 벗어나 육체가 빠진 영혼 교환만 이루어지는 차원의 통로가 되었다.
 마법의 구멍이 바닥에 열리자마자, 캡슐 속에 들어가 있던 동국의 영혼은 몸에서 이탈하여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슈우우우웃!
 “으아아아아아아~ 악!”
 갑자기 게임으로부터 접속이 끊어지고, 시커먼 차원 이동의 터널 속에 떨어진 동국의 영혼은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또 대장장이 쿠캔의 아내 줄리아의 침대 바닥에 생겨난 구멍으로 인해 줄리아의 배속에 있던 아기의 영혼도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지듯, 차원 이동의 터널로 떨어져 내렸다.
 마침 줄리아는지금 아기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
 “하아악, 학학, 하아악······.”
 “그래, 잘하고 있어. 이제 힘을 줘!”
 산파 에스더가 땀을 흘리며 아기를 받으려고 대기 중이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줄리아의 배 속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
 슈우웃.
 “커어억!”
 줄리아는 이상함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왜 그래? 줄리아?”
 “아, 아기가··· 아기가······.”
 그런데 몇 초도 안 지나 다시 느껴지는 배 속의 변화!
 슈수우우웃.
 “허어엇!”
 “왜 그래?”
 “아, 아기가······.”
 “다른 생각하지 말고 힘을 줘. 아기 머리가 보이고 있어. 힘을 내! 어머머, 나왔어. 잡았다. 잡았어!”
 쑤우욱.
 “어윽!”
 “하하, 봐봐. 나왔어. 줄리아! 줄리아? 줄리아~!”
 “······.”
 줄리아는 너무 지쳐 기절해 버렸다.
 
 
 1. 최초의 400레벨 사냥꾼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이 판을 치는 가운데 <에베레스트>라는 가상현실 게임이 한국에서 개발되어 나왔다.
 에베레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
 21세기가 한참 지나 좀 있으면 22세기가 다가오지만 아직도 이 산에 올라가는 사람은 뉴스에 나왔다. 물론 두 발로, 배낭을 메고, 무산소로 등정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게임 이름을 왜 에베레스트라고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게임 홈페이지에 이렇게 나와 있다.
 
 -험난한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듯 최고의 권좌에 오르라는 의미입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괜히 겉멋만 잔뜩 든 말이었다. 쉽게 말하면 캡슐 사고, 매달 정액으로 돈 내면서 캐릭터를 999레벨까지 키우라는 뜻과 다를 게 없었다.
 의미가 너무 퇴색되는가? 어쨌든 본질은 그거다.
 회사는 수많은 유저들로부터 돈을 벌어 에베레스트 같은 돈산(발음이 이상하지만 돈으로 만든 산)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에베레스트를 게임 이름으로 정했다.
 속셈이 뻔히 보이지만 전 세계인들은 <에베레스트>가 서비스되자 찬사를 쏟아내며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유는 게임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재미가 있으니 제목이 뭐든 용서가 되었다.
 게임에 달리 무엇을 바라겠는가?
 화려한 그래픽에 리얼한 판타지 세계, 그리고 거기에 용솟음치는 재미가 더해지니 누구든 이 게임에 발을 담그면 헤어 나오질 못했다. 돈을 쓰면서도 기쁨에 차서 환호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한민족의 아들로 지방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의 이동국은 평범했다. 특출 날 것이 없는 그냥 그런 젊은이.
 뭐든 표준인 이동국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대부분의 평범하고 보통인 젊은이들이 겪는 과정을 똑같이 겪게 되었다.
 바로 연속된 수없이 뿌리는 서류 전형과 가뭄에 콩 나듯 이루어지는 면접, 그리고 취업의 실패.
 “으아아아, 교통비라도 달란 말이다!”
 동국은 건물을 나오며 울화통이 터져 대로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오늘 면접 본 곳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이름이 높은 대기업. 지난 1년간 면접 본 곳 중에서 가장 빵빵한 회사였다.
 ‘허엇! 어떻게 이런 곳에서 나에게 연락을?’
 감지덕지였다. 면접 연락을 받고 회사가 있는 쪽을 향해 넙죽넙죽 허리 굽혀 절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제기랄. 선행 지수가 뭔지, 유로화의 환율이 어떻게 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또 지동건과 구소영의 결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구!’
 “알 만한 것을 물어보란 말이다, 이 쫀쫀하고 쓰잘데기 없는 것들아!”
 동국은 소리 높여 삿대질을 한 후에 바람처럼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왜?
 경비가 째려보며 현관 유리문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오늘은 금요일 오후.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다가올 주말을 기대하며 희희낙락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예 팔짱까지 끼고 돌아다니는 커플들도 많았다.
 ‘젠장할! 캡슐이 터질 때까지 게임이나 하자.’
 동국은 지갑에 든 돈은 몇 푼 안 되지만 친구 영수가 아르바이트하는 홍익 캡슐 게임방(옛날에 PC방이라 불리던 곳)을 찾아 신촌으로 향했다.
 ‘영수가 자리에 없어야 할 텐데.’
 “쩝쩝.”
 지난번 일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하지만 부족한 지갑 사정에 그나마 빌붙을 곳이 영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익.
 동국은 주저앉은 자세로 유리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가게 안을 살폈다.
 ‘오호, 자리 비웠다!’
 횡재였다.
 살금살금.
 동국은 몰래 들어가 계산대 테이블 위에 있는 접속 카드 하나를 슬쩍한 후에, 최근에 들여 놓은 1시간에 3천 원짜리 최신형 캡슐로 직행했다.
 그리고 카드를 옆으로 세워 들고 마그네틱 선이 잘 인식되도록 조심하며 쓰으윽 긁었다.
 피쉬쉬쉬.
 캡슐 뚜껑이 천천히 열린다.
 “히야, 멋있어!”
 안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나오는데, 마치 이계로 들어가는 차원 이동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흥분으로 인해 몸속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최고조에 달한 동국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으며 캡슐 안으로 한쪽 발을 집어넣었다.
 와락!
 “캐액!”
 “어딜!”
 뒷덜미를 잡힌 동국은 두 손으로 목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으으, 하필 마지막 순간에······.’
 도끼눈을 하고 있는 친구 영수였다.
 ‘눈으로 찍어라. 찍어!’
 “헤헤, 안녕.”
 “너, 지난번 외상값 가져 왔냐?”
 “하하, 왜 이래. 친구끼리.”
 “친구니까 봐줬잖아. 이제 내놔.”
 영수는 손바닥을 쫘악 펴고 동국의 눈앞에 내밀었다.
 지난번에 영수가 아르바이트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에 찾아와 10시간이 넘게 게임을 하고 자신 있게 외상을 해 버린 동국이었다. 그때 친구니까 봐준다며, 꼭 외상값 갚으라고 영수는 신신당부했었다.
 “나 지금 돈이······.”
 “어쭈? 돈도 없으면서 또 캡슐에 기어 들어가?”
 “하하, 봐주라. 응?”
 “죽을래?”
 “헤헤, 그건 사양이구.”
 “돈 내놔. 아니면 돈 가지고 올 때까지 오지 마. 네가 달아 놓은 외상값은 내 월급으로 갚아야 돼. 알바의 피를 빨아먹는 놈!”
 영수는 매몰차고 잔인했다.
 “크윽! 피? 내가 모기냐? 벼룩이냐?”
 “응!”
 영수는 단호하기까지 했다.
 “······.”
 ‘짜식, 단단히 삐쳤네.’
 동국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여기 알바 또 안 뽑니?”
 “안 뽑아. 나가!”
 영수는 세차게 동국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어허! 잠깐. 잠깐! 왜 이렇게 성급하니?”
 동국은 입맛을 다시며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꺼냈다.
 탁탁!
 먼저 지갑을 손바닥에 때려 주며 가죽이 내는 탄성 섞인 소리를 들려줬다. 지갑을 연 후에 빳빳한 만 원짜리 2장을 영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어험! 지난번 밀린 외상값 2만 원이다.”
 “이게 돈이 있으면서 없는 척을 해?”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인상을 쓰는 영수.
 “쯧쯧, 난 손님이야, 손님! 손님은 왕이다. 알지?”
 “어쭈? 이건 지난번 밀린 외상값이고. 오늘은 돈 있어?”
 찔끔. 아팠다.
 ‘아까 지갑 열 때 안을 봤나?’
 “짜식이. 있어. 있어!”
 동국은 지갑 속에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지만 자신 있게 말했다.
 영수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일단 돈을 받았으니 뒷덜미를 놓아 주었다.
 “휴우우, 목이 다 뻐근하네.”
 “가진 돈만큼만 해라. 알았지?”
 “그래. 믿어. 믿어야 천국 간다.”
 ‘짜식, 나중에 돈 없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동국은 영수에게 잡혀서 답답해진 목을 좌우로 꺾으며 푼 후에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지금은 즐길 타임이다. 크크크.’
 등을 캡슐 안쪽 벽에 대니 머리 위에서 헬멧이 자동으로 내려오며 얼굴을 덮었다.
 위이잉~ 착.
 “소리 죽여준다~ 아!”
 동국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이이잉~ 철컥.
 열려진 캡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에베레스트> 게임에서 동국의 캐릭터 정보는 이러했다.
 
 이름:이동국 명성:1,500 직업:사냥꾼
 레벨:399 생명력:8,824(+710) 마나:5,247(+1,700)
 힘:1,196(+140) 체력:1,196(+190) 민첩:1,196(+110)
 
 지혜:400(+170) 지식:400(+170) 행운:400(+120)
 
 무두질(패시브)-100/100%
 고기 발라내기(패시브)-100/100%
 함정(보물) 찾기(패시브)-100/100%
 활 전문화(패시브)-100/100%
 발달된 오감(패시브)-100/100%
 사냥감 추적(패시브)-100/100%
 죽은 척하기(패시브)-100/100%
 덫 제작(패시브)-100/100%
 동물 훈련-100/100%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100/100%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아울베어-100/100%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운디네-100/100%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샐러맨더-100/100%
 
 캐릭터 이름은 본명과 같은 이동국.
 자기 이름을 캐릭터 이름으로 하는 것은 촌스럽지만 동국이 <에베레스트>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가 고등학교 1학년.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학생들 사이에 자기 이름으로 캐릭터 만들기가 유행이었다.
 직업은 사냥꾼.
 사냥꾼은 사냥하는 몬스터의 능력을 구사한다. 능력을 구사한다는 것이 혹시 변신? 폴리모프 마법?
 아니다. 변신은 드루이드가, 마법은 마법사가 쓰는 것이다.
 실제로 스킬을 쓰는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늑대!”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라는 말은 시동어고, 그 뒤에 얻고자 하는 몬스터의 이름을 외치면 사냥꾼은 대상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다. 단, 능력을 구사할 수 있으려면 대상을 단 한 번이라도 사냥했어야 했다.
 늑대를 잡으면 늑대의 능력을, 곰을 잡으면 곰의 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딱 한 번 잡았는데 대상의 능력을 다 쓸 수 있다면 너무 불공평하기에 제한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냥 경험.
 사냥 경험이 100퍼센트가 되어야 대상의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대상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에 따라 정해졌다.
 늑대의 능력을 제대로 얻으려면 못해도 1만 마리는 죽여야 했다.
 늑대는 레벨 10밖에 안 되니까 죽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무지무지 지겨웠다. 욕이 튀어나오고 구토가 나올 정도였다.
 필드에 늑대가 많을 것 같겠지만 어느 게임이나 인기가 있으면 초보존이 북적이게 마련이었고, 초보존에서 고렙이 자신들이 잡아야 할 몬스터를 죽이고 있으면 눈총과 원망, 질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킬 하나를 얻고자 경험치도 안 올라가는 레벨 10짜리 늑대를 1만 마리나 잡다 보면 ‘다른 직업을 하는 건데.’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평이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미친 척하고 1만 마리 잡으면 되기 때문에. 하지만 레벨 20인 곰의 능력을 얻으려면 2만 마리를 죽여야 했다.
 철퍼덕!
 유저들은 사냥꾼을 포기했다.
 <에베레스트>에는 300레벨이 넘는 사냥꾼이 거의 없었다. 300레벨이 넘으면 아버지를 뛰어넘어 할아버지라고 불려야 할 정도였다.
 파티를 하려 해도 방어력이 낮으니 탱커가 안 되고, 마법을 못 쓰니 힐러도, 버프도, 강력한 한 방의 데미지 딜러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활을 가지고 쏘는 풀링!
 하지만 활이 아니라 먼 거리에서 단검을 투척한다거나, 저주 마법을 건다거나 등등 다른 방법으로도 풀링할 수 있으니, 굳이 사냥꾼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냥꾼은 대표적인 저주 클래스인데 위에 말한 것 외에도 강력한 저주가 또 있었다.
 그건 능력을 쓸 수 있는 대상을 등록했다가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 등록할 수 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완벽히 저주스럽게도 등록 취소를 한 대상의 사냥 경험은 사라지고 복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즉, 한 번 등록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했다. 중간에 바꾸면 바꾸는 만큼 손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높은 레벨의 몬스터들이 더욱 좋은 능력을 가졌으니, 이들의 능력을 등록해야 더 좋은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등록하는 공간이 많아 몬스터들을 많이 등록시킬 수 있다면 그걸 위안 삼아 사냥꾼을 키워 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100레벨에는 등록하는 공간이 2개로 늘어났다. 200레벨에는 3개, 300레벨에는 4개.
 단, 300레벨이 되면 좋아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등록된 2개의 능력을 동시에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늑대! 곰!”
 이렇게 외치면 늑대와 곰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중요한 설명의 핵심은 바로 400레벨!
 아직 400레벨이 되었을 때의 비밀은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
 그 이유는 400레벨 사냥꾼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미친 척하고 300레벨까지 키웠던 사냥꾼들은 하나같이 게시판에 ‘혹시나 혹시나 하고 키웠지만, 정말 너무합니다.’라고 말하며 욕을 바가지로 써 놓고, 캐릭터를 삭제한 후에 다른 직업을 새로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나 별종이 존재한다. 그 별종은 바로 동국!
 ‘흥, 사냥꾼이 그렇게 어려워? 좋아. 내가 사냥꾼에서는 최고가 되어 주마.’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에베레스트> 게임을 하면서 사냥꾼이 된 동국은 거의 8년째 포기하지 않고 사냥꾼을 키워 왔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서 보낸 2년여의 시간은 거의 게임을 못 했고,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에도 시험 기간 등등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려 8년이었다.
 8년간 오로지 사냥꾼 직업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런 노력 끝에 드디어 오늘 400레벨 달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현재 동국은 399레벨. 경험치는 99퍼센트였다.
 
 * * *
 
 접속 시간 10시간째.
 “헉헉, 헉헉.”
 ‘영수가 죽이려고 할 텐데······.’
 징글징글했다.
 ‘젠장! 10시간이나 사냥했는데 1퍼센트가 안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 반드시 400레벨을 만들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한 마리만 더!’
 다시 힘을 내고 경험치도 드럽게 안 주는 392레벨짜리 트롤에게 덤벼들었다.
 “경험치 좀 주란 말이다! 우와아아아앗!”
 퍽퍽, 퍽퍽퍽.
 1분 후.
 [띠링!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에베레스트> 최초로 이동국 님이 사냥꾼 400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최초! 지난 몇 년간 묵었던 체증이 다 날아가는 소리였다.
 “푸하하하하, 400레벨이다! 사냥꾼 중에서는 내가 최고다!”
 전사, 마법사, 도적 기타 등등 다른 직업의 최고수는 이미 700레벨을 넘은 상태. 하지만 사냥꾼만큼은 400레벨이 된 동국이 최고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띠링! 사냥꾼 400레벨 최초 달성의 보상으로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이 생성되셨습니다. 경험치는 100%가 됩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사용 마나:스킬이 해제될 때까지 1분에 10씩 감소.
 트롤의 영혼이 몸에 들어와 트롤의 재생력을 가진다.
 재생력이 크게 강화된다. 공격당했을 때에 상처가 빨리 치유되고, 생명력 복구 속도가 크게 올라가며, 소비된 마나도 빨리 채워진다.
 사냥 경험 100%:생명력 복구와 상처 치유 속도가 300% 증가하며, ‘큐어 엑설런트’ 스킬을 쓸 수 있다.
 
 [큐어 엑설런트]
 사용 마나:1,000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을 썼을 경우, 트롤 사냥 경험이 100%일 때 사용이 가능. 죽음을 제외한 모든 상처와 이상 상태를 치료한다.
 
 ‘오홋, 경험치 100퍼센트?’
 지긋지긋한 사냥 경험 올리기가 필요 없었다. 엄청난 횡재였다.
 400레벨까지 참고 참으며 키웠던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하하하하, 하하하하!”
 동국은 크게 웃었다.
 이때 메시지가 또 들려왔다.
 [띠링! 사냥꾼 400레벨 최초 달성의 보상으로 전승 선택의 기회가 부여됩니다. 설명을 듣고 선택을 해 주십시오.]
 [전승 선택.
 <에베레스트>의 험난한 등정과 같이 인내와 고난의 세월을 지나 사냥꾼 최초로 400레벨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동국 님은 최초 달성자이므로 전승 선택의 기회가 부여됩니다.
 전승 선택은 현재 캐릭터의 능력을 이어 가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겁니다. 즉,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레벨 1부터 다시 키우는 것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 시작하신 캐릭터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사냥꾼으로 키우셨던 능력이 되살아난다는 점입니다. 단, 레벨에 따라 사용되는 능력에 제한 시간이 있습니다.
 만일 새로운 캐릭터가 400레벨이 되신다면 현재 가지신 사냥꾼의 능력은 그대로 다 쓰면서 새로운 캐릭터가 가진 직업의 능력도 같이 쓸 수 있게 됩니다.
 또 추가 보너스가 있습니다.
 1) 몬스터 능력 중에 1개를 레벨 1부터 쓸 수 있습니다.
 2) 100레벨씩 올라갈 때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스킬을 등록할 공간이 추가로 1개씩 생성됩니다.]
 [띠링! 전승 선택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다시 키우실지, 아니면 사냥꾼을 계속 키우실지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 시간은 1분이며, 1분이 지날 때까지 선택을 안 하시면 ‘전승을 한다’가 선택됩니다. (전승을 한다/전승을 안 한다)]
 ‘전승?’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다시 레벨 1부터? 다른 직업으로?’
 고민되었다. 어떤 이들은 무슨 소리냐며 어떻게 레벨 1부터 키우냐고 하겠지만, 동국은 달랐다.
 ‘사냥꾼을 400레벨까지 키우는 거 정말 힘들었어. 앞으로 이걸 더 해야 해?’
 최고가 되겠다며 꾸역꾸역 키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사냥꾼은 저주 클래스였다.
 ‘새로 하면 처음부터 키우기는 하지만 장점이 있다. 사냥꾼의 능력을 가지고 시작하니 엄청난 광렙을 할 게 분명하다.’
 8년 동안 노력해 400레벨을 만들었으나, 흔하게 하는 전사나 도적, 마법사를 했더라면 진작 400레벨을 넘어 못해도 600레벨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새로 캐릭터를 키운다 하더라도 사냥꾼 능력을 가지고 시작하니 초고속 광렙은 예견되는 일이었다.
 ‘히든 클래스보다 훨씬 좋을 수 있어!’
 두 직업의 능력을 사용하니 훨씬 좋을 터였다.
 ‘1년? 아니면 2년이면 다시 400레벨이 된다. 그냥 400레벨이 아니라 파워풀한 400레벨이겠지. 그래, 선택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전승을 한다!”
 [띠링! ‘전승을 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띠링! ‘전승 확인’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전승 확인]
 사용 마나:없음.
 전승이 이루어지기 전의 캐릭터 상태와 전승이 이루어진 후의 캐릭터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이다. 전승이 된 후에는 이전의 캐릭터 정보는 모두 사라지므로 주어지는 스킬이다.
 
 [띠링! 새로 시작할 캐릭터가 레벨 1부터 가질 몬스터 능력을 선택하세요. (1/2/3/4/5)
 1)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2)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아울베어
 3)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운디네
 4)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샐러맨더
 5)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그야 당연히 5번이지.’
 가장 늦게 얻은 능력이 가장 강한 법이었다.
 “5번!”
 동국은 자신 있게 외쳤다.
 [띠링!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을 선택하셨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캐릭터는 이 스킬을 가지고 시작하게 됩니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거친 바람이 동국의 영혼을 감쌌다.
 [띠링! <에베레스트> 시작 도시로 이동합니다. 레벨은 1입니다.]
 ‘크크크, 그래. 얼른 시작해라.’
 새로운 캐릭터로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파파팟!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야? 혹시 접속이 끊어진 건가? 요즘도 이런 일이 있나?’
 게임 중에 접속이 끊어지는 일은 가상현실 게임이 처음 나오던 때에나 있던 일이었다. 이제는 캡슐도 좋아지고, 통신망도 튼튼하고, 게임 서버에도 전혀 문제가 없기에 이런 무지막지한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쑤우우욱.
 바닥이 꺼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위를 쳐다보니 그의 몸은 그대로 위에 있었다. 마치 죽어서 유체 이탈을 한 것과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이나 어지러운 통로를 지나야 했다.
 정신을 차리니 너무 아팠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응애~ 응애~”
 ‘어, 어떻게 된 거야?’
 울음소리가 너무 이상했다. 다시 울어 봤다.
 “응애~ 응애~”
 ‘세상에, 이런 미친!’
 눈을 떠 보려고 했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래?’
 손을 쥐어 보려 해도 느낌이 이상했다.
 손만 그런 게 아니라 발의 느낌도 이상했다.
 아니, 손과 발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너무 이상했다. 귀로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로그아웃을 하자.’
 있는 힘껏 로그아웃을 외쳤다.
 “응애~ 응애~”
 그러나 발음이 되지 않았다. 울음소리만 나왔다.
 ‘젠장할!’
 동국은 다시 로그아웃을 외쳤다.
 “응애~ 응애~”
 ‘영자야~ 아! 날 어디로 보낸 거냐! 영자야~ 아아악!’
 동국은 운영자를 찾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응애~ 응애~ 응애~”
 ‘미치겠군. 미치겠어!’
 동국은 마치 알 속에 들어간 것처럼 괴롭고 답답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동국을 토닥거렸다.
 ‘으으, 내, 내가 왜 이러지?’
 동국은 원치 않는 졸음이 쏟아져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2. 내 이름은 크리거
 
 나는 대장장이 쿠캔의 아들, 이름은 크리거.
 나에게는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건 바로 24살의 정신세계를 가진 아기라는 것.
 ‘나는 이동국이야. 이동국!’
 아무리 그렇게 외쳐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발음이 되질 않았다.
 몸도 움직일 수 없어 등을 뒤집지도 못한 채로 누워만 있어야 했다. 게다가 새로 태어난 곳의 언어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대화가 될 리도 없었다.
 참고 참으며 두 달쯤 되어서 겨우 입술을 오물딱쪼물딱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크리거(동국)의 첫 옹알이는 엄마가 아니라 ‘로그아웃’이었다.
 왜 이걸 선택했는가?
 두 달이나 지났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닐 거야. 현실이 아니야. 난 꿈을 꾸고 있어. 아직 게임 속에 있는 거야.’
 “오으아우.”
 발음을 했지만 너무 이상했다.
 ‘젠장! 젠장! 젠장! 이게 아니잖아.’
 다시 입술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오으아우우~”
 ‘으으으, 이놈의 자식! 제대로 발음 좀 해 보란 말이야.’
 “오웅아우우우~”
 안 됐다. 아무리 해 보려 해도 되질 않았다. 몇 시간이나 해 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헥헥헥, 헥헥헥.”
 숨이 가빠 오고 눈이 뒤집히려 했다.
 ‘나중에 하자. 이러다 죽겠다.’
 이상한 곳에 왔지만 죽기는 싫었다.
 다시 한 달을 기다렸다.
 “오그아우.”
 태어난 지 네 달째가 되었다.
 “오그아울.”
 태어난 지 다섯 달째가 되었다.
 “로그아울.”
 태어난 지 여섯 달째가 되었다.
 “로그아웃!”
 드디어 성공이었다.
 “헤헤헤, 헤헤헤!”
 기뻐서, 너무 기뻐서 크게 웃었다. 살면서 단어 1개를 말하고자 이렇게 애썼던 적이 있었나? 없었다. 결코 없었다.
 그런데···
 “······.”
 반응이 없었다.
 ‘에이, 18.’
 
 * * *
 
 이 세상에 차원 이동한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안 이후로 한동안 절망에 쌓여서 멍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머, 아기가 왜 이렇게 웃음이 없지?”
 “눈이 흐릿하고 초점이 흐려요.”
 “아무리 애써도 관심을 안 가지네?”
 마을 아주머니들은 수군덕거리며 흉을 봤다.
 “아니에요. 왜 이쁜 내 아기를 가지고 그러세요!”
 엄마 줄리아는 화를 내며 크리거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눈치로 모든 것을 파악한 크리거는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엄마를 울렸네. 미안 한데?’
 하지만 허탈한 심정은 여전했다. 차원 이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새로 태어난 곳은 과학이 발달된 현대와는 한참 뒤떨어진 중세 시대 느낌이었다. 게다가 눈치를 보니 귀족도 아니었다.
 ‘쳇, 이왕 다시 태어나려면 왕자나 귀족이 될 것이지······.’
 왕, 왕족, 귀족, 평민, 노예의 신분 중에 크리거의 신분은 평민이었다.
 ‘귀족이면 좋겠지만 그나마 노예가 아닌 게 다행이다.’
 그래도 커서 고생할 걸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시간 참 정말 안 가네.’
 지구에서 살았던 24년의 삶의 기억이 고스란히 있기에 멀뚱멀뚱 먹고 자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일어나자. 걸어야 마음껏 돌아다니잖아.’
 결심을 하고 갖은 애를 쓰며 걷기 연습에 몰두했다.
 “어머머, 크리거, 일어나려고 그러는구나!”
 줄리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헤헤헤.”
 오랜만에 아기의 환한 미소를 엄마에게 선물했다.
 “오우, 사랑하는 크리거.”
 감격한 줄리아가 크리거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 댔다. 그 바람에 크리거는 줄리아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앞으로 미소 좀 많이 날려 주자. 아기로서 해야 할 의무라는 게 있는 거잖아.’
 9개월이 되자 그동안의 노력으로 드디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헤헤, 헤헤헤!”
 태어나서 두 번째로 크게 웃었다.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 서 보니 키 높이 교육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키가 작으니 온 세상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또 계단이 너무 무서웠다. 고작 몇십 센티미터의 높이일 뿐인데 말이다.
 ‘이제 모두 내 세상이다!’
 아장아장, 아장아장.
 엉덩이를 흔들며 마음껏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지나 이곳이 꿈도 아니며, 게임 속도 아님을 인정하고 이 세계에 적응해서 살기로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어. 난 다시 태어난 게 확실해.’
 그동안 죽어라 리스닝(Listening)을 한 덕분에 어느 정도 이 세계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3살이 되자 남자 동생 크링이 태어났다. 가까이서 봤는데 왜 이리 쭈글쭈글한지 정말 못생겼다.
 아빠 쿠캔은 일로 바빴고, 엄마 줄리아는 새로 태어난 동생을 돌보느라 크리거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고 뒷전이 되었다.
 다른 아기와 다르게 크리거가 기저귀를 안 차고 스스로 거실 한편에 마련한 조그만 통에 대소변을 가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다.
 
 5살이 되자 여자 동생 에리나가 태어났다. 여자아이라 좀 예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막 태어난 아기는 다 똑같았다. 쭈글이였다.
 쿠캔은 물론 줄리아는 더욱 바빠졌고, 크리거가 더 이상 밤에 이불을 적시지 않는 것도 신기해하지 않았다. 정말 크리거는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놓은 자식 같았다.
 
 7살이 되자 쌍둥이로 셋째 동생 차르와 넷째 동생 단크가 태어났다. 아기의 생긴 것에 전혀 관심이 없기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도대체 아빠가 뭘 먹었기에······.’
 아무튼 아빠는 대장장이. 힘이 좋았다.
 아무튼 아빠는 대장장이. 힘이 좋았다.
 아무튼 아빠는 대장장이. 힘이 좋았다······.
 
 * * *
 
 24살 더하기 7살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무료하게 이 세계에 적응하며 살던 크리거에게 어느 날 대사건이 벌어졌다.
 크리거는 언제나처럼 울부짖는 동생들로 복작거리는 집을 나와 혼자서 마음껏 마을을 돌아다니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무리 신분 사회라도 어린 크리거에게 신분이 어쩌고저쩌고할 놈은 없으니 귀족이나 기사를 만나도 두려울 게 없었다.
 ‘오늘은 어디부터 갈까? 왼쪽?’
 왼쪽 편으로 쭉 가면 쿠캔의 대장간이 있었다.
 ‘그래, 모처럼 아빠가 뭐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자신 있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마쯤 갔을까? 덩치가 성인 남자만큼 크고 얼굴도 넓적한 게 무시무시한 외모의 개가 갑자기 나타났다.
 “흐읍!”
 으르르릉, 으르르릉.
 크리거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하지?’
 뒤도 도망치고 싶어도 조그만 발로 뛰어 봤자 금방 잡힐 게 뻔했다.
 크리거가 완전히 꼿꼿하게 경직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자, 무시무시한 개는 사납게 짖으며 물어뜯으려 뛰어올랐다.
 쿠와아앙!
 절체절명의 순간!
 “동물 훈련.”
 게임에서 쓰던 스킬을 무심코 써 버렸다. 왜 이게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미쳤구나. 여기가 게임 속이니?’
 찰나의 순간이지만 크리거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그냥 눈을 꽈악 감아 버렸다.
 “······.”
 ‘왜 안 아프지?’
 이상했다.
 스르르.
 크리거는 살짝 눈을 뜨고 앞을 봤다.
 “엥?”
 당장이라도 물어뜯으려던 무시무시한 개는 조용히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크리거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이때, 개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꼬리를 마구 흔들며 크리거의 다리 밑에 와서 발라당 누우며 배를 드러내보였다. 항복의 표시였다.
 ‘허거덕! 얘가 왜 이러지?’
 정말 어색한 순간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있으면 안 된다는 본능의 외침이 뇌를 파고들었다.
 “헤, 헤헤. 이, 이쁘구나.”
 ‘이쁘긴 개뿔! 가죽을 벗겨 탕을 끓여 먹을 놈!’
 크리거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이려고 달려들던 무시무시한 개의 배를 조막만 한 두 손으로 쓱쓱 문질러 주었다. 최대한 정성을 다해.
 헥헥, 헥헥.
 개는 기분이 좋은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거렸다.
 지나가던 마을 아주머니 하나가 크리거와 무시무시한 개가 보여 주는 놀라운 광경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어머머,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기 좀 보세요. 사납기로 유명한 유르가 배를 깔고 누웠어요. 모두 이리로 와 보세요!”
 ‘유르?’
 무시무시한 개의 이름은 유르였다.
 아주머니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 진짜네? 저놈, 지난달에 날 물었던 놈이잖아?”
 “어떻게 저놈이 조그만 얘에게 저럴 수 있지?”
 “얘들만 보면 물어 대서 잡으려고 했던 놈이야.”
 “신기하네~ 우와, 얘가 유르를 잘 다루네~”
 유르는 사람들이 몰려오자 벌떡 일어나더니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머머, 피해요!”
 “으와앗, 깜짝이야!”
 “다쳐. 물러나!”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크리거는 재빨리 유르의 귀를 문지르며 달랬다.
 “착하지? 괜찮아. 저 사람들은 널 해치지 않아.”
 헥헥, 헥헥.
 유르는 바로 주저앉으며 온순하게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습에 또다시 놀라워했다.
 “히야, 어떻게 저렇게 금세 바뀌지?”
 “허허, 별꼴이네. 별꼴이야.”
 “쟤가 도대체 누구야? 어느 집 얘야?”
 “대장장이 쿠캔의 첫째 아들 크리거잖아요.”
 “오호, 그래? 개 다루는 솜씨를 타고났나 봐.”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급기야 집에 있던 줄리아까지 나와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머머머, 크리거!”
 줄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크리거에게 달려왔다.
 ‘헉, 엄마가 다치면 안 되지.’
 “유르! 엎드려!”
 차악.
 유르는 크리거의 명령에 곧바로 반응하며 배를 땅바닥에 찰싹 붙였다.
 “오호!”
 마을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괜찮니? 응? 안 물렸어?”
 줄리아는 크리거가 어디 물린 곳이 없나 살피기 바빴다.
 “네, 괜찮아요. 얘는 유르예요, 엄마.”
 닭살스럽지만 7살 말투를 쓰는 크리거였다.
 “가자.”
 줄리아는 무거울 텐데도 크리거를 반짝 들어 집으로 향했다.
 으으으으응?
 유르는 앓는 소리를 하더니 꼬리를 살랑거리며 따라왔다. 그리고 줄리아와 크리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르는 현관문 옆에 주저앉았다. 이때부터 유르를 크리거가 키우게 되었다.
 
 유르와의 만남이 있던 날 저녁.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낮에 있었던 일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임 스킬이 작동한 걸까? 하하, 그게 말이 되니? 하지만 그게 아니면 유르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지?’
 게임 스킬 외에 해답이 없었다.
 ‘으으으, 이 이해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은 뭐란 말인가?’
 번뜩!
 ‘아! 다른 스킬도 써 볼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아울베어!”
 “······.”
 역시 반응이 없었다.
 ‘이기이기~ 뭐꼬!’
 실망이었다.
 ‘쳇, 그럼 그렇지. 동물 훈련이 먹힌 거는 우연이었어. 잠깐만, 나 전승했잖아.’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전승이 떠올랐다.
 ‘그때 새로 키울 캐릭터가 가질 스킬을 고르라고 했었지. 난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을 선택했었어.’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휘이이잉.
 문이 닫힌 방 안에 바람이 일어나 온몸을 감쌌다.
 ‘스킬이 시전된 거야? 어떻게 확인하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애매하고 찝찝했다.
 ‘아, 스킬보다 더 좋은 게 있잖아!’
 “캐릭터 상태창!”
 “······.”
 반응이 없었다. 게임 시스템 메뉴를 불러오는 게임 명령어는 먹히지 않았다.
 ‘에이, 젠장할. 안 되잖아. 아차, 전승 확인!’
 마지막에 받았던 전승 확인이라는 스킬이 떠올랐다.
 전승하기 전의 캐릭터 상태를 보여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스킬이었다. 캐릭터 상태창에는 전승 후의 캐릭터 상태만 보이고, 전승 전의 캐릭터 상태를 볼 수 없기에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스킬이었다.
 ‘동물 확인 스킬은 먹혔어. 그러니 이것도 될 거야. 이건 스킬이잖아.’
 “전승 확인.”
 말이 끝나자 눈앞에 익숙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바로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한글이었다.
 
 [전승 후 상태]
 직업:없음 레벨:4
 생명력:130 마나:162
 힘:10 체력:10 민첩:10
 지혜:10 지식:10 행운:10
 
 동물 훈련-100/100%
 (레벨 2에 활성화, 제한 시간:없음)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100/100%
 (레벨 1에 활성화, 제한 시간:1분)
 전승 확인-100/100%
 (전승 시스템 스킬, 제한 시간:없음)
 
 [동물 훈련]
 사용 마나:100
 동물은 사냥감이기도 하지만 훈련을 통해 키우게 되면 사냥꾼을 잘 따르는 뛰어난 동료가 될 수 있다.
 훈련이 가능한지는 스킬을 시도해 봐야 알 수 있으며, 경험치가 낮아 훈련이 실패할 수도 있다. 경험치가 올라가면 높은 레벨의 동물을 훈련시킬 수 있다.
 훈련에 성공하면 다음부터는 충성도의 정도에 따라 주인을 위해 싸운다. 충성도가 낮으면 도망치거나 주인에게 덤벼들 수도 있다.
 훈련 경험 100%:300레벨 이상의 동물에 대해 훈련이 가능.
 
 “크어억.”
 너무 놀라 숨이 멈춰 버렸다. 예상대로 스킬은 먹혔다.
 1분 후, 눈앞에 나타난 글자들이 사라졌다.
 “푸하하핫. 헉헉, 헉헉.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전승 확인!”
 다시 글씨들이 떠올랐다.
 껌벅껌벅, 껌벅껌벅.
 눈을 부비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글씨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다시 글씨는 사라졌고, 또 전승 확인을 외치며 글씨가 떠오르게 했다. 이러기를 10여 회.
 “부르르르.”
 숨을 빠르게 내쉬며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리며 소리가 났다.
 ‘상황 좀 정리해 보자. 난 꿈을 꾸는 게 아니다.’
 꽈악.
 허벅지 살을 부여잡고 비틀었다.
 “쿠어억! 으으으, 아파라.”
 확실하게 확인이 되었다. 꿈을 꾸는 게 아니었다.
 ‘좋아. 난 깨어 있어. 하지만 게임 스킬이 작동되고 있다. 시스템 명령어는 안 먹히는데 왜 스킬만 먹히지?’
 순간, 재미나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 떠올랐다.
 “호, 혹시?”
 몸은 다르지만 머리는 24살 이동국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이 세계에 태어난 것처럼, 캡슐 속에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에 게임 스킬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아 그대로 가지고 왔다는 느낌이 머릿속을 화악 감쌌다.
 ‘그런데 왜 레벨이 1이 아니고 4란 말인가?’
 레벨 4라는 말은 세 번의 레벨 업이 있었다는 말과 같았다.
 ‘내가 한 게 뭐가 있지? 퀘스트? 사냥?’
 없었다. 한 거라고는 먹고, 자고, 싸고 했을 뿐이다.
 ‘끄응, 혹시 나이 먹은 거?’
 나이를 먹는다고 레벨 업이 된단 말인가?
 ‘에이, 무슨!’
 게임에 접속하고 시간만 보내면 레벨 업이 된다던가? 말이 안 되는······. 아니, 된다. 왜? 레벨 업을 해 버렸으니까.
 ‘골 때리지만 레벨 4잖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눈으로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휴우, 이것만 이상해? 내 자신이 다 이상한데?’
 그랬다. 왜 여기에서 갑자기 태어났는지, 왜 지구에서의 기억이 그대로인지, 게임 능력은 왜 가지고 있는지, 따질 게 너무 많았다.
 ‘나이를 먹으며 좋아진 게 뭐지? 우선 똥오줌 가리고, 밤에 쉬야 안 하고, 체격과 머리가 커지고, 이곳 언어도 배웠고······.’
 “휴우우~”
 따져 보긴 하지만 뭐가 원인이지 몰랐다.
 이날 저녁, 깊은 생각에 빠진 크리거는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든 크리거. 그는 잠들기 전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레벨 업을 해 보자.’
 하지만 어떻게? 고작 7살짜리가?
 ‘어린 나이에 근육 운동은 키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두 번째 삶인데 이곳에서까지 180센티미터가 안 되는 루저가 되기는 싫었다.
 ‘안 돼. 싫어!’
 크리거는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사냥은 어리니까 못하지. 하지만 머리라면······.’
 지식의 습득! 이거라면 가능해 보였다.
 ‘근데 지식을 습득한다고 레벨 업을 할 수 있나?’
 레벨 업을 하면 힘, 체력, 민첩까지 늘어난다.
 지식 습득의 가장 빠른 길인 책을 읽는다고 치자. 책을 읽었다고 힘, 체력, 민첩이 늘어나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거꾸로 몬스터 사냥했다고 지식, 지혜, 행운이 늘어나는 건 말이 되니?’
 “······.”
 ‘흠흠, 마찬가지군. 에이, 이리저리 고민하지 말자. 걍 해 보면 되잖아.’
 해서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 머리 아프게 따질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도 책이 있을 텐데. 영주의 성에 가면 많이 있을 거야. 하지만 평민인 내가 영주의 성에? 맞아 죽겠지.’
 귀족이나 보는 책을 보여 줄 리가 없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식이 꼭 책을 통해 얻는 건 아니잖아? 남의 말만 잘 귀 기울여 들어도 지식을 익힐 수 있지. 그리고 아빠의 대장간에 가서 대장 기술을 눈여겨보더라도 지식은 늘어날 거야.’
 전에는 정말 아무 관심이 없기에 대충 쳐다만 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즉각 시험해 보자.’
 잠을 깨고 일어나니, 워낙 늦게 자서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줄리아는 동생을 챙기고 있었다.
 스르르.
 이불을 젖히고 몰래 밖으로 나왔다.
 ‘유르가 밖에 있을까?’
 식탁 의자를 벽에 붙이고 올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빵을 챙겼다.
 ‘절반은 내 거. 절반은 유르 거.’
 동물 훈련의 설명을 보면 충성도가 낮으면 주인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했다. 유르의 충성도를 올리는 가장 기본은 먹을 거 챙겨 주기.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 주저앉아 집을 지키던 유르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며 크리거에게 매달렸다.
 으으으응~ 응~ 응.
 부비부비, 부비부비.
 ‘에휴, 나중에 크면 여자들이 나에게 이렇게 해 줘야 할 텐데······.’
 지구의 이동국은··· 그만하자.
 “잘 잤니? 자, 먹을 거야.”
 빵을 주었더니 날쌔게 먹는 유르.
 꿀꺽.
 “야, 한 번에 삼키면 어떻게 해?”
 유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크리거가 들고 있는 남은 반쪽의 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으, 할 수 없지.’
 “먹어라.”
 크리거는 결국 나머지 빵까지 다 주었다.
 단숨에 빵을 삼키며 유르는 무척 좋아했다.
 “먹었으니 밥값을 해라. 유르! 엎드려.”
 차앗!
 어제처럼 유르는 배를 땅바닥에 찰싹 붙였다.
 “크크, 잘 했어.”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에 유르의 등에 올라탔다.
 “일어나!”
 발딱!
 “앞으로 너는 내 전용 말이다.”
 유르는 덩치가 커서 타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레벨 업을 위해 마을을 다녀 볼까?’
 “가자!”
 유르의 왼쪽 귀를 당기며 말했다. 유르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리거가 대로를 따라 유르를 타고 가니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와, 개를 타고 다니네?”
 “너무 귀엽다~”
 “개가 애를 잘 태우는데?”
 “하하, 이름이 뭐니?”
 크리거는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저는 대장간 집 아들 크리거예요.”
 크리거는 눈웃음을 쳤다.
 ‘마을 사람들하고 친해져야 해. 그래야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어.’
 나름대로 속셈 있는 웃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크리거를 무척 귀여워하며 안아 주기도 하고, 먹을 것도 많이 주었다. 덕분에 크리거와 유르는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3. 레벨이 올랐습니다
 
 유르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닌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첫날에는 줄리아도 놀래서 나와 봤지만 이제는 크리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리거는 챙겨 주지 않아도 잘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크리거는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워듣기 바빴다. 전과 달리 유용한 정보는 잊지 않으려 열심히 애를 썼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기에 오러를 일으키는 소드익스퍼트, 소드마스터 등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오크와 같은 몬스터도 살고 있으며, 심지어 드래곤도 있고, 드워프나 엘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이걸 알고 황당함에 머리가 멍했다. 마법이나 소드마스터 같은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꿈은 아니겠지?’
 믿을 수 없어 머리를 몇 번이고 흔들었지만 고개만 아플 뿐이었다.
 밤에 돌아오면 매일같이 전승 확인 스킬을 쓰며 레벨 업을 확인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아무 변화가 없었다.
 ‘에휴, 될 리가 없지. 책 읽는다고 레벨 올라가는 경우가 어디 있니. 경험치를 올려야 올라가는 거지.’
 경험치를 올리는 방법은 사냥과 퀘스트, 아니면 캐릭터가 변하는 경우였다.
 ‘그래. 내가 레벨 4가 된 것은 캐릭터가 변해서인 거야. 게임은 한 번 캐릭터 만들면 키가 크거나 몸무게가 늘지도 않고 늙지도 않잖아.’
 일주일간 고민한 결과, 왜 레벨이 1이 아니라 4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이 먹고 중년의 나이쯤 되면 50레벨쯤 되려나? 하지만 더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가 되면 다시 렙따를 당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레벨 50은 실제 게임이라면 한 달만 죽어라 해도 금방 올리는 수치였다.
 ‘끄응, 할 수 없지.’
 완전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나마 동물 훈련과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이 있다는 걸 위안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포기한 순간에 놀라운 일이 생겼다.
 “크리거야, 엄마가 바빠서 그러는데 빵가게에 가서 빵 좀 사와라. 심부름 갔다 오면 엄마가 이거 줄게.”
 줄리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모양도 이상한 장난감. 쿠캔이 크리거가 가지고 놀라고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쳇, 날 뭐로 보고.’
 줄리아는 구릿빛 동전을 꺼내 크리거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빨리 부탁한다.”
 “알았어요. 갔다 올게요.”
 크리거는 동전을 쥐고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유르! 앉아.”
 유르의 등에 올라탄 크리거는 쏜살같이 빵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빵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엄마, 빵 사왔어요.”
 크리거는 한 아름 궁금증을 가지고 사온 빵을 줄리아에게 내밀었다.
 “어머, 빠르기도 해라. 수고했다. 자, 이거 가지고 놀아라.”
 줄리아는 장난감을 내밀었다. 크리거는 그걸 받아드는 순간에 느낌이 이상했다.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현관문 앞에 나와 자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전승 확인.”
 
 [전승 후 상태]
 직업:없음 레벨:5
 생명력:148 마나:185
 힘:12 체력:12 민첩:12
 지혜:12 지식:12 행운:12
 
 동물 훈련-100/100%
 (레벨 2에 활성화, 제한 시간:없음)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100/100%
 (레벨 1에 활성화, 제한 시간:1분 10초, 재사용:24시간)
 전승 확인-100/100%
 (전승 시스템 스킬, 제한 시간:없음)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레벨 업이 되었다.
 사냥꾼일 때는 1레벨 업에 힘, 체력, 민첩이 3씩 올라가고, 지혜, 지식, 행운은 1씩 올라갔다. 하지만 새로운 캐릭터는 직업이 없기에 1레벨 업에 힘, 체력, 민첩, 지혜, 지식, 행운이 동일하게 2씩 올라갔다.
 스탯이 올라간 것만 아니라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의 경우는 제한 시간이 1분에서 1분 10초로 10초 늘어났다.
 ‘허엇, 했다. 레벨 업!’
 비틀!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못 참고 몸이 흔들려 벽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어머, 크리거! 너 왜 그러니?”
 줄리아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크리거에게 뛰어와 두 손으로 번쩍 들었다.
 “크리거! 너 다쳤니?”
 “···엄마?”
 “그래, 말해 봐.”
 “자, 잠깐만 내려 줘.”
 “괜찮아?”
 “내려 줘. 나 오줌 마려.”
 크리거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어 오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
 줄리아는 크리거를 내려 줬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후다다닥.
 집 근처에 ‘노상방뇨 금지’라 쓰인 벽으로 뛰어가서 볼일을 봤다. 이상하게 쉬는 이런 곳에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확인하자.’
 “전승 확인.”
 같았다. 몇 번을 보아도 레벨 5는 변함이 없었다.
 ‘원인이 뭐지?’
 레벨 업을 한 이유가 분명이 있었다. 그냥 레벨 업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이유라면 엄마가 시킨 일을 했다는······. 혹시 퀘스트?’
 도저히 퀘스트 외에는 답이 없었다.
 ‘이제까지 다른 심부름에는 보상이 없었어. 그런데 엄마가 장난감을 준다며 일을 시켰지. 보상이 있는 심부름은 경험치를 받는 거야. 확실해.’
 게임 서버에 저장된 퀘스트도 아닌데 어떻게 퀘스트가 생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을 못한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게임을 떠올리면 인공지능을 갖춘 NPC들이 스스로 퀘스트를 만들어서 주기도 했었다.
 ‘이유가 뭐든 무슨 상관이냐.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잖아. 크크크, 그래. 이거다. 이걸로 이제부터는 광렙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7살짜리로서는 벅찬 시작이었다.
 
 * * *
 
 1년이 지나 크리거는 8살이 되었다. 레벨은 9.
 크리거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엄마나 아빠의 심부름은 도맡아 했다. 물론 보상은 철저히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상이 따르는 심부름을 요구했다. 간혹 귀엽다며 일을 주는 어른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놈이 벌써부터 뭘 바라냐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리다고 시켜먹기만 하려는 나쁜 XX.'
 가장 만만한 것이 아빠 쿠캔이 일하는 대장간.
 크리거는 쿠캔의 일터인 대장간에 가서 열심히 일을 도왔다. 쿠캔은 첫째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대장장이가 되려고 열심히 준비한다며 대견하게 여겼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맛있는 먹을거리를 보상으로 주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짭짤했다. 하지만 레벨 8이 된 후에는 아무리 대장간에서 일을 해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첫째로 같은 일의 반복, 둘째로 어린아이에게 주어지는 일의 단순함, 셋째는 보상이 너무 약하다는 것.
 크리거는 대장장이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대장간에 가던 것을 멈췄다.
 ‘난 귀족이 될 테다. 그래서 화려한 두 번째 삶을 살 테다!’
 두 번째 인생에서의 첫 번째 목표는 귀족이었다. 이 세계는 신분이 먼저 갖춰져야 자유롭게 뭐든 할 수 있는 사회였다.
 평민에서 귀족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돈.
 엄청난 재물을 왕이나 황제에게 바치면 그에 따라 작위가 내려졌다. 이 세계에서는 자작까지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다.
 ‘돈은 감당을 못하지. 어느 세월에 벌겠어?’
 두 번째로 빠른 길은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는 것이었다.
 ‘으으, 한 번 죽으면 끝인데.’
 여긴 게임 속 세상이 아니었다.
 ‘좀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레벨 업을 충분히 한다면······.’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도달했던 400레벨쯤이면 충분히 활약을 펼칠 자신이 있었다.
 세 번째로 빠른 길은 소드익스퍼트의 수준에 올라 기사로 임명을 받는 길이었다. 기사는 귀족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세습이 안 되는 작위였다. 하지만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에 오르면 남작의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소드익스퍼트 고급의 수준에 오른다면 기사단의 부기사 단장이나 기사 단장이 되어 남작 이상도 노릴 수 있었다.
 소드익스퍼트의 벽을 뚫고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그때는 몇 계단을 훌쩍 뛰어 적어도 백작이나 후작까지 단번에 올라갈 수 있었다.
 검이 아니라 마법의 경우도 단계가 있었다.
 1서클이나 2서클 마법사는 왕국이나 제국에 등록을 하여 마법사 신분증을 받게 되는데, 마법사는 기사쯤의 작위로 인정되었다.
 3서클이 되면 소드익스퍼트 중급으로, 4서클이나 5서클이 되면 소드익스퍼트 고급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6서클은 소드마스터와 동급으로 백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6서클로 후작의 작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소드마스터와 일대일로 싸웠을 때에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는 데 시간이 걸리기에 전력이 달렸다.
 하지만 6서클을 넘어 7서클에 오르면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붙으며 후작의 작위가 내려졌다.
 대륙 역사에 있어서 7서클을 넘은 자는 손에 꼽았으며, 현재도 7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으으음, 레벨이 400쯤이면 어느 정도 수준이 될까? 소드마스터? 검에서 오러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레벨도 소용이 없으려나?’
 크리거는 빨리 레벨 업을 하고 싶은 욕망이 불타올랐다.
 
 * * *
 
 간간이 보상이 주어지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12살이 되었다. 지구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키는 150센티미터쯤 되고, 몸무게는 재 본 적이 없지만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레벨은? 16.
 ‘몇 년이 지났는데 겨우 16레벨······.’
 안타까웠다. 그나마 이 정도 레벨 업도 육체적인 성장이 뒤따라 준 결과였다.
 ‘사냥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은 그렇지만 12살짜리가 사냥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내가 귀족으로만 태어났어도 검술 훈련을 받으며 실력을 갖췄을 텐데······.’
 귀족들은 어려서부터 검을 들고 정식으로 검술 교사를 두고 훈련했다.
 ‘나 혼자 검 들고 설쳐 봤자 전쟁놀이에 불과하잖아.’
 어떤 검로를 따라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마나의 움직임은 어떠해야 하는지, 호흡법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이런 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마구잡이 휘두르기밖에 안 되었다.
 ‘끄응, 전쟁놀이로 보인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검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도 검 훈련을 해 볼까?’
 미련을 못 버리고 사냥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고자 검을 들어 볼까 고민했다.
 ‘아니야. 괜히 욕만 먹지. 끄응, 무슨 방법이 없을까? 가만, 나는 사냥꾼이었잖아. 사냥꾼이 검으로만 사냥하나?’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덫!
 그랬다. 12살이라도 덫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나이였다.
 또 사냥꾼 직업을 꿋꿋하게 400레벨까지 키운 베테랑이었다. 덫 제작도 경험이 100%에 이를 만큼 수도 없이 많이 만들었었다.
 ‘당장 만들자!’
 크리거는 게임에서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곧장 덫을 만들기로 했다.
 쇠로 만들면 튼튼하겠지만 쿠캔은 바쁘다며 만들어 줄 리가 없으니, 크리거 스스로 나무를 구해 손수 간단한 덫을 만들었다.
 덫 제작 스킬이 활성화되지 않았으나 머릿속에 있는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손이 잘 따라 주지 않아 몇 번 고생했지만 크리거는 결국 원하는 덫을 만들어 냈다.
 첫 번째 목표는 쥐.
 ‘에이, 고작?’
 우습게보겠지만 쥐는 더 큰 사냥감을 잡기 위한 미끼였다.
 처음 만든 덫은 엉성했지만 이곳은 쥐가 워낙 많기에 금방 잡혔다.
 ‘크크, 성공이구나.’
 다음에는 크고 단단한 덫을 3개나 만들었다. 이때는 대장간에 가서 몰래 쇠붙이를 훔쳐 내 그걸로 만들었다.
 작업이 끝나자 크리거는 유르를 데리고 마을 부근의 산으로 갔다. 이제는 덩치가 커져서 그는 더 이상 유르의 등을 타고 다니진 않았다.
 크리거는 산에 덫을 설치하고, 덫마다 죽은 쥐를 한 마리씩 놓아두었다. 그냥 아무 곳이나 덫을 놓은 게 아니라 야생동물들이 잘 다닐 만한 장소를 골라 덫을 설치했다.
 다음 날이 되자, 크리거는 덫에 무엇이 걸렸을까 확인하기 위해 산으로 갔다.
 나무로 만든 긴 목창과 칼도 함께 준비해서 들고 갔다. 혹시라도 덫에 걸린 놈이 있다면 이걸로 죽일 작정이었다.
 첫 번째 덫에 갔더니 들개가 있었다.
 간단히 목창으로 처치. 들개는 소용 가치가 없기에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덫만 회수했다.
 두 번째 덫은 비어 있었다.
 세 번째 덫은 커다란 늑대가 걸려 있었다.
 ‘오, 대박이다.’
 늑대 가죽은 값이 꽤 나갔다.
 늑대가 으르렁거리니 유르는 무서운지 뒷걸음쳤다.
 “유르, 괜찮아. 내가 있잖아.”
 토닥토닥.
 12살밖에 안 된 크리거가 늑대를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늑대는 덫 때문에 발이 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혹시나 상처를 입을 수 있기에 트롤의 능력을 부여하고, 목창을 들고 늑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늑대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몸을 돌리려 했지만 덫 때문에 완전히 몸을 돌리지 못했다. 크리거는 기회를 보다가 목창으로 늑대의 뒷다리를 공격했다.
 ‘가죽은 손상시키면 안 되잖아.’
 뒷다리를 공격받자 늑대는 몸부림을 쳤다.
 크아아앙. 크르르릉. 크아앙!
 기세만이라면 크리거는 늑대에게 갈기갈기 찢어질 판이었다.
 “으으, 걍 죽어라.”
 게임과 현실의 사냥은 다른 법.
 늑대 피가 사방에 튀니 몸서리가 쳐졌다.
 뒷다리가 상처를 입어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늑대는 숨을 헐떡이며 배를 깔고 앉았다. 크리거는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배를 노렸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 늑대가 완전히 숨을 거뒀다.
 “전승 확인!”
 확인하니 레벨 업이 되었다. 16레벨에서 17레벨로 오른 것이다.
 “하하, 예상대로야.”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늑대를 죽인 것보다 몇 배는 기뻤다.
 ‘징글징글하게 안 올라가더니, 늑대 잡으니 단박이네. 역시 경험치는 사냥이 최고야.’
 크리거는 승리를 거두고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덫에 걸린 놈을 죽이는 것도 이렇게 힘든가?’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크리거는 품속에서 칼을 꺼낸 후 죽은 늑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끄응, 가죽을 벗겨야 하는데······. 그냥 가져갈까?’
 배를 가르면 내장이 쏟아져 나오고 피가 줄줄 흐를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크리거는 징그러웠다.
 ‘중학교 때 개구리 해부한 거 이후로 처음인데······.’
 크리거는 칼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끄응, 하지만 무두질을 하면 그것도 경험치가 될 거야. 남에게 경험치를 뺏길 수는 없잖아. 용기를 내라, 크리거!’
 “아아아압! 아합!”
 크리거는 기합을 넣으며 기운을 북돋았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 법. 크리거는 자신 있게 칼에 힘을 주고 늑대의 배를 찔렀다.
 푸욱~ 주르르르르.
 “으에에엑.”
 뻘건 피가 꿀꺽꿀꺽 흘러나왔다.
 징그러웠지만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안 건들었다면 모를까, 이미 배에 칼을 집어넣었는데 끝장을 봐야 했다.
 무두질도 덫 제작처럼 활성화된 스킬이 아니지만, 크리거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그는 다소 서툴게나마 칼을 놀리며 늑대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동맥인지 정맥인지를 잘못 건드려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젠장! 내가 개장수가 된 기분이군. 아니지. 개 요리사인가?’
 무두질의 과정은 확실히 깨끗하고 깔끔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돈이다. 돈으로 바뀔 물건이다. 피는 그냥 빨간 물일뿐이다.’
 크리거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무두질을 지속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나 뻘뻘 애를 쓴 끝에 어렵사리 무두질을 끝내고 가죽을 챙겨 둘둘 말았다. 둘둘 만 가죽을 옆구리에 차악 끼고 서니, 크리거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헤헤, 이제야 사냥꾼의 폼이 나오는군.’
 손이며, 머리며, 옷까지 온통 늑대 피가 잔뜩 묻어 있지만 자신감이 솟아났다.
 ‘이제 고기를 챙겨 볼까?’
 크리거는 가죽이 벗겨진 늑대 시체에서 고기까지 쓱쓱 발라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개울가에 들러 옷을 씻었다. 입은 채로 들어가 그냥 씻었다. 어차피 탈수기가 있는 세계도 아니었다.
 또 귀족이 아닌 이상 다들 찢어지고 해진 추레한 옷을 입고 다니니, 젖은 채로 다닌다고 뭐라고 흉볼 사람도 없었다.
 ‘잡화점에 가서 팔까? 아니면 재봉점? 아무래도 재봉점이 낫겠지?’
 크리거는 후한 가격을 받기 위해, 평소에 그를 귀여워해 주는 알리코 아저씨의 재봉점으로 늑대 가죽을 가지고 갔다.
 알리코 아저씨는 늑대 가죽을 가져온 크리거를 보고 입을 쩌억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네가 잡았다고? 그리고 가죽만 벗겨 왔어?”
 “네.”
 “허허, 네가 늑대를 어떻게 잡아?”
 “덫으로요.”
 “······.”
 “덫 만드는 건 비에르 아저씨께 배웠구요.”
 비에르는 마을에 있는 사냥꾼이었다. 크리거는 혹시나 이렇게 의심받을 경우를 대비해 비에르의 집에 많이 놀러가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늑대를 잡다니. 가죽 벗기는 건 누구에게 배우고?”
 “비에르 아저씨에게요.”
 “허허, 아무튼 대단하구나, 크리거. 어리게만 보았는데 12살에 늑대를 잡다니.”
 ‘제가 그냥 12살이 아니거든요. 몸만 어리지 살아온 삶은 36년이랍니다.’
 지구에서의 삶 24년을 더하면 36년이 맞았다.
 “가격은 후하게 쳐주실 거죠? 제가 처음으로 잡은 걸 아저씨께 파는 거라구요. 앞으로 저하고 쭉 거래를 하시려면 알아서 잘 해 주세요.”
 “허허, 말하는 것 하고는. 누가 너를 당하겠니.”
 알리코는 머리를 흔들며 테이블 뒤쪽의 서랍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동전 2개를 꺼내 왔다.
 “2실버다.”
 2실버면 일주일 치 식량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하지만 크리거는 투덜거렸다.
 “쳇, 많지는 않군요.”
 “그것도 후하게 쳐준 거야. 네 서툰 솜씨 때문에 가죽이 좀 상했어. 군데군데 구멍이 났잖아.”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크리거는 2실버를 챙기고 늑대 가죽을 넘겨 주었다.
 2실버는 크리거가 이 세계에 태어나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우헤헤, 이걸 가져다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크리거는 한걸음에 달려와 줄리아에게 2실버와 늑대 고기를 내밀었다.
 “제가 벌었어요. 이건 제가 잡은 늑대 고기구요.”
 “어머머, 크리거! 늑대?”
 “네. 덫으로 늑대를 잡았어요. 가죽을 벗겨서 재봉점의 알리코 아저씨에게 팔았구요.”
 그는 덫을 만든 것부터 시작해 자신의 활약상을 전부 얘기했다.
 “어머머, 엄마는 네가 만드는 게 덫인지도 몰랐다. 덫 만드는 것까지 배우다니, 정말 장하구나. 동생들 때문에 바빠서 신경도 못 썼는데······.”
 줄리아는 크리거를 무척 대견하게 여기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에 쿠캔이 돌아와 크리거의 사냥 얘기를 듣고 마찬가지로 놀라워했다.
 “오호, 크리거가 벌써 자기 몫을 하다니 놀라운 걸?”
 크리거는 이 틈에 원하는 걸 얻고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빠, 저 단검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단검?”
 “네. 무두질할 때 쓰려구요.”
 집에서 가져간 칼보다는 무두질 전용으로 쓸 단검이 있는 게 훨씬 좋았다.
 “으흠, 그건 생각 좀 해 보자.”
 어린 크리거에게 단검을 주는 게 좋을지 몰라 쿠캔은 망설였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되어 크리거가 늑대를 3마리나 잡아 오자, 쿠캔은 결국 무두질용 단검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뿐 아니라 창날이 쇠로 된 창도 하나 만들어 주었다.
 덫이 있다고만 잘 잡는 건 아니었다. 잡힐 만한 장소를 골라 동물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히 설치하는 게 중요했다. 이건 오랜 시간 사냥꾼 생활을 하면서 경험으로 익혀야 했다.
 가상현실 게임 <에베레스트>는 초원이나 숲, 산, 강, 던전 등을 만들 때에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지구의 자연환경을 철저히 조사해서 게임에 그대로 반영했다.
 또 사냥꾼 직업을 만들 때에도 각국의 사냥 전문가들을 불러 조언을 구하며 게임을 만들었다. 그래서 게임에서 배운 사냥 실력이 현실에서도 발휘될 수 있었다.
 비에르는 어린 크리거가 연거푸 늑대를 잡아 오자 점차 시기하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크리거는 그의 눈치를 보며 늑대 고기를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해야 혹시라도 해를 끼치는 일이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 * *
 
 3년의 세월이 흘러 크리거는 15살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기준으로 본다면 중학교 2학년. 덫으로 사냥하는 크리거는 어느덧 소년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레벨은 33.
 
 [전승 후 상태]
 직업:없음 레벨:33
 생명력:652 마나:829
 힘:68 체력:68 민첩:68
 지혜:68 지식:68 행운:68
 
 발달된 오감(패시브)-100/100%
 (레벨 30에 활성화, 제한 시간:없음)
 동물 훈련-100/100%
 (레벨 2에 활성화, 제한 시간:없음)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100/100%
 (레벨 33에 활성화, 제한 시간:1분, 재사용:24시간)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100/100%
 (레벨 1에 활성화, 제한 시간:5분30초, 재사용:12시간)
 전승 확인-100/100%
 (전승 시스템 스킬, 제한 시간:없음)
 
 [발달된 오감(패시브)]
 사용 마나:없음.
 패시브 스킬로 스킬 시전 없이 항상 시전 중인 스킬로 발달된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 능력을 가진다.
 오감 100%:4.0의 시력, 20m 이내 냄새 파악, 100m 이내 미세한 소리 파악, 조리된 음식의 재료 구분, 20m 이내 살기 파악.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사용 마나:스킬이 해제될 때까지 1분에 10씩 감소.
 표범의 영혼이 몸에 들어와 표범의 민첩성을 가진다.
 민첩 스탯이 크게 상승한다. 이에 따라 이동속도와 점프력이 올라가고, 높은 곳에서 추락해도 데미지가 적다.
 사냥 경험 100%:민첩 스탯이 800 증가하며, ‘표범의 회피’ 스킬을 쓸 수 있다.
 
 [표범의 회피]
 사용 마나:500
 1분간 회피율이 50%까지 올라간다.
 재사용:1분
 
 33레벨이 되자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스킬이 활성화되었다. 이 스킬을 쓰는 순간에 민첩 스탯은 단박에 800이 늘어났다.
 또 표범의 회피라는 스킬도 쓸 수 있었다. 이건 회피율을 50퍼센트로 올려 주는 것으로, 회피율이 100퍼센트라면 모든 공격을 피한다는 의미였다.
 사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크크크, 사기 맞다.
 제한 시간이 1분이기는 하지만 민첩이 800이 늘어난다면, 1분 동안 크리거가 산속에 사는 몬스터(특별난 놈 빼고)에게 맞을 일은 절대 없었다.
 1분간은 그 누구보다 빨리 달릴 자신이 있었다.
 ‘레벨 업을 해야 해. 그러면 제한 시간도 늘어나고, 다른 스킬들도 활성화된다.’
 하루라도 빨리 레벨 업을 하고 싶었다.
 레벨 업으로 변화가 또 있었는데,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트롤 스킬의 재사용 시간이 하루에서 12시간으로 줄었다.
 3년간 레벨 업한 결과가 33레벨이라면 미약한 점이 많지만, 마을을 멀리 벗어나 사냥할 수 없는 크리거에게는 이것이 한계였다.
 대신에 사냥으로 버는 돈을 투자해 구입할 수 있는 책은 최대한 많이 구입해서 읽었다. 책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평민으로서는 정말 사치였다. 사냥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글은 상인들에게 배웠다. 이들은 물건을 거래할 때에 계약서를 교환할 일이 많아 글을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라면 책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아무튼 즐길 거리가 너무 없었다. 오로지 책이 유일한 재밋거리였다.
 또 이 세계를 더 알고 싶은 욕구도 작용했다.
 12살 때부터 덫으로 야생동물을 잡으며 성인 남자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하는 크리거 덕분에 쿠캔과 줄리아는 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졌다. 하지만 정작 크리거 본인은 이 굴레를 벗어나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33레벨에서 정체된 지가 일 년째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크리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저녁 식사 시간에 쿠캔과 줄리아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다.
 “아버지? 어머니? 앞으로 본격적인 사냥을 나가야겠습니다.”
 “응? 더 이상 어떻게 본격적으로?”
 “너는 매일 사냥을 하잖니.”
 쿠캔과 줄리아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음, 지금은 마을 주변에서만 사냥을 했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비에르 아저씨처럼 토시아 숲으로 들어가 사냥을 해야겠어요.”
 토시아 숲은 바레토 지역에 있는 숲으로 네나드 산맥 밑에 있었다.
 네나드 산맥에는 오크는 물론 트롤과 오우거까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봄과 가을에 오크 무리가 산에서 내려와 크리거가 사는 세스타크 왕국의 각지에 출몰했다. 때문에 왕국에서는 매년 봄, 가을로 토벌대를 조직해 오크를 퇴치했다.
 또 세스타크 왕국은 왕명으로 지시를 내려, 오크를 죽여서 그 머리를 영주에게로 가져가면 10실버를 지급하도록 했다.
 “토시아 숲?”
 놀란 눈으로 쿠캔과 줄리아가 되물었다.
 “네. 며칠 거기서 사냥을 하렵니다.”
 “며칠? 비에르는 한 번 사냥 나가면 한 달이나 두 달 만에 오던데?”
 “다시 생각해 봐라. 지금으로도 충분하잖니. 만일 멀리 나갔다가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사냥 경력 4년차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지만 너는 덫으로만 잡았잖니.”
 “지금은 봄이라 오크가 나올 수 있어. 오크 알지?”
 줄리아는 크리거가 오크에 대해 아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요. 이번 사냥 목표가 오크인데요.”
 “허억!”
 “어머!”
 쿠캔과 줄리아는 동시에 신음성을 터트렸다.
 크리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보기보다 날렵해요. 그리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활을 살게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쓸 검을 만들어 주세요.”
 “······.”
 쿠캔과 줄리아는 어찌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12살 때부터 사냥으로 돈을 벌어 오며 집안에 큰 기둥으로 자리매김을 했기에 크리거가 하는 말은 허투루 들을 수도 없었다.
 “새로 동생이 또 태어날 텐데 준비를 해야죠. 새집으로 이사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쿠캔과 줄리아는 크리거를 시작으로 크링, 에리나, 쌍둥이 차르와 단크까지 아이가 전부 다섯이나 되었다.
 또 이번에 여섯 번째 애가 줄리아의 배에서 나오기 직전이었다.
 “······.”
 돈 얘기가 나오니 쿠캔과 줄리아는 침묵했다.
 “걱정 마세요. 우선은 토시아 숲 입구에서만 사냥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넓힐게요. 그리고 익숙해지면 밖에서 머무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겠어요.”
 “그, 그래. 정 네 뜻이 그렇다면······.”
 쿠캔은 내키지 않지만 허락하고 말았다.
 허락이 떨어지자 크리거는 그동안 틈틈이 모았던 30실버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갖췄다.
 먼저 무기 상점에 가서 자신이 쓸 활을 골랐다. 크리거라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왔기에 무기 상점의 주인 요바노는 거의 원가에 활과 화살 20개가 담긴 화살 통을 팔았다.
 다음은 잡화점에 가서 야영을 위한 작은 천막과 이불, 부싯돌 등을 구입했다. 그리고 식료품점에 가서 일주일 치 빵을 구입했다.
 이것저것 챙기니 짐이 꽤 많아졌다.
 ‘안 되겠다. 짐을 줄이자.’
 공간 확장 마법과 경량화 마법이 걸린 마법 주머니가 있지 않고서는 산을 타고 사냥하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짐이 아니었다. 너무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한 게 화근이었다.
 크리거는 짐을 줄이기 위해 야영을 위한 짐 중에서 가장 부피가 크고 무거운 천막과 이불을 빼 버렸다.
 ‘어차피 천막 치고 여유 있게 잘 수 없다.’
 어떤 야생동물이나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는 터라 제대로 잠잘 생각도 없었다.
 
 
 4. 사냥 시종 Ⅰ
 
 토시아 숲으로의 사냥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출발이었다.
 쿠캔과 줄리아, 그리고 동생들은 불안 한 눈으로 크리거를 전송했고,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 몇몇도 나와서 웅성거리며 그를 걱정했다.
 “크리거가 멀리 사냥을 나간다는데? 산속에 들어가 며칠이나 있다가 올 거래.”
 “고작 15살인데 산속에 들어가서 잔다구?”
 “산속에는 무서운 동물들이나 오크, 트롤, 오우거도 있을 텐데?”
 “어우, 쿠캔과 줄리아가 아들을 포기한 거 아니야?”
 “포기라니. 크리거는 12살 때부터 늑대를 잡으며 제 몫을 단단히 했는데. 말을 나눠 보면 애어른이라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크리거는 모두 무시했다.
 그는 먼저 쿠캔과 줄리아에게 인사하고, 동생들도 하나씩 쓰다듬었다.
 13살 첫째 동생 크링, 11살 둘째 동생 에리나, 9살 셋째 동생 차르와 단크. 곧 태어날 여섯째 동생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
 “너희들, 내가 없는 동안에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응!”
 평소에 혼도 내고, 용돈도 줘 가며 철저하게 자신을 따르도록 했기에 동생들은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크리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유르를 쳐다보았다.
 “유르? 넌 집을 잘 지켜라. 알았지?”
 멍! 멍멍!
 유르는 꼬랑지를 흔들며 짖었다. 이제 유르는 나이가 너무 많아 털이 빠지고 짖는 것도 예전 같지 못했다.
 가족들과 인사를 끝낸 크리거는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다시 돌아올 때는 오크를 잡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에 아버지 쿠캔이 만들어 준 검을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긴 창을 들었다. 어깨에는 새로 구입한 활과 화살 통을 메었고, 등에는 이것저것 준비한 짐들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본인은 자신 있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뒤뚱거리는 크리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거는 이틀을 꼬박 걸어서 토시아 숲에 도착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자신 있게 오기는 했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현실이었다. 죽으면 게임처럼 되살아나는 법이 없었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다!’
 챡! 챡챡!
 그는 두 손으로 양쪽 뺨을 두들겼다.
 “아자, 아자!”
 그리고 고함을 내지른 후에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나무들이 많이 우거져 조금만 들어와도 햇빛이 차단되어 어두웠다. 그래도 아직은 한낮이라 사물을 구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크리거가 한참 들어왔을 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있다!’
 레벨 30에 활성화된, 발달된 오감 스킬의 영향으로 민감한 청각을 가진 크리거는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발달된 오감 스킬은 경험치가 100퍼센트였다. 전승의 장점이었다. 사냥꾼일 때에 열심히 키운 혜택을 전승 후에 보는 것이었다.
 크리거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계속 났다.
 ‘저쪽이다. 소리의 무게감으로 볼 때에 덩치는 대략 나만 하겠군. 그리고 발자국을 보니 직립보행을 하고, 냄새가 구리며, 위치는··· 헉, 오크다!’
 50여 미터 앞에 짙은 녹색의 피부를 한 오크가 보였다. 숲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만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너무 빨리 만나 버렸다.
 봄이면 네나드 산맥에서 오크들이 내려오는데 이놈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너무 빨리 숲을 지나온 놈이었다.
 꿀꺽!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이놈은 그냥 넘어갈까?’
 원래 계획대로면 덫부터 설치하고 잡는 게 순서였다.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오크가 그만 크리거를 보고 말았다.
 “취이익, 죽인다. 인간!”
 오크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들고 있는 기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며 뛰어왔다.
 ‘진짜로 말을 하네?’
 오크가 말을 한다는 건 들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얼른 대응하지 못하면 죽는 건 자신이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휘이이이이잉!
 거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표범의 회피!”
 마나가 500이나 소비되어 딱 한 번만 쓸 수 있지만 회피율 50퍼센트는 보호막을 펴는 것과 같았다.
 샤샤샥, 샤샤샤샥.
 크리거는 달리는 두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뛰어가 달려오는 오크의 목에 들고 있던 창을 기대 놓았다. 달려오는 속도에 스스로 창이 목에 꽂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민첩은 스킬을 썼으니 올라가지만 힘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힘이 약한 크리거가 창을 휘둘러 두꺼운 오크 가죽을 뚫기는 무리였다.
 푸우욱.
 “꾸어어억.”
 힘차게 달려오던 오크는 크리거가 번개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창에다 목을 내미는 꼴이 되어 버렸다.
 “커어억, 컥컥, 컥!”
 급소인 목이 찔렸으니 괴로움이 말이 아니었다. 눈이 벌게진 오크는 몽둥이를 떨어뜨리고서 두 손으로 창을 잡고 목에서 빼내려 했다.
 “흥, 어딜!”
 기회를 잡았는데 오크가 목에서 창을 빼면 상황은 다시 어려워졌다.
 크리거는 오크가 떨어뜨린 몽둥이를 잽싸게 들고 두 손으로 꽈악 부여잡은 후에, 숙여진 오크의 뒷목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죽어!”
 휘이익~ 퍼억.
 “캐액!”
 오크가 미처 창을 뽑기도 전에 몽둥이를 맞는 바람에, 목에 꽂힌 창이 더욱 깊숙이 박혔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휘이익~ 퍼억, 퍽퍽, 퍽퍽.
 창이 완전히 오크의 뒷목까지 뚫고 나왔다. 이 모든 일이 표범의 능력을 쓰는 1분 안에 이루어졌다.
 마침내 창을 잡은 오크의 두 손이 추욱 늘어졌다.
 ‘죽었나?’
 툭!
 크리거는 발로 오크를 찼다.
 휘익~ 쿠웅.
 오크는 아무 저항도 없이 옆으로 그냥 쓰러졌다. 죽은 게 확실했다.
 “전승 확인!”
 레벨 업이 되어 있었다.
 “하하, 하하하.”
 크리거는 승리의 기쁨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크 한 마리에 바로 레벨 업이었다.
 ‘그렇게 레벨 업이 안 되더니, 단 한 마리에 레벨 업이구나.’
 그는 오크를 잡았다는 기쁨을 만끽한 후 뒤처리를 시작했다.
 죽은 오크의 머리는 잘라서 챙겨 두었다. 이걸 영주에게 가져가면 10실버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원래 사냥을 나올 때에 목표는 오크 한 마리였다. 그런데 그 목표를 너무 빨리 달성했다. 오크를 잡으려 가져온 덫은 쓰지도 않은 채 짊어진 보따리 속에 들어 있었다.
 ‘덫도 안 썼는데. 게다가 식량도 남아 있잖아. 며칠 더 있자.’
 크리거는 오크를 잡은 위치에서 덫을 설치하며 좋을 장소를 물색했다.
 비록 레벨은 34지만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은 400레벨의 것이었다. 그는 적당한 곳에 덫을 설치한 후에 죽은 오크의 몸으로 덫을 가렸다.
 ‘같은 동족의 시체를 보면 가까이 오겠지?’
 오크는 죽은 오크를 잡아먹는 놈들이었다.
 크리거는 덫 설치가 끝나자 뒤로 돌아 숲을 나왔다. 숲은 위험하니 되도록 밖에서 자는 게 안전했다.
 초원으로 나오니 늦은 저녁.
 ‘밤을 숲에서 보내지 않아 다행이다.’
 초원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어 근처의 큰 나무를 찾았다. 가까운 마을까지 가려면 몇 시간이라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숲으로 오기 전에도 나무 위에서 잠을 잤었다. 나무 위로 올라온 크리거는 굵은 가지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에 잠에서 깼다.
 “으아아아아아~”
 크리거는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몸을 비비 꼬며 기지개를 했다.
 우두둑, 우두두둑.
 ‘으으, 이슬비 맞아 가며 나무 위나 바위 밑에서 선잠을 자야 하니, 사냥도 젊어서 하는 거지 나이 먹고는 못 하겠구나.’
 그는 스트레칭으로 뻐근한 몸을 푼 후에 짐을 챙겨 덫을 설치한 숲으로 갔다.
 ‘혹시 오크가 무리지어 있지는 않겠지?’
 덫은 한 마리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오크가 하나가 아니라 2마리만 보여도 그대로 뒤돌아 도망칠 작정이었다.
 긴장하며 덫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렸구나!’
 덫에 걸려 괴로워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덫은 아버지 쿠캔이 크리거의 설명에 따라 만들어 준 것으로 재질이 쇠라 튼튼했다. 또 연결된 굵은 쇠사슬은 옆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 놨기에 쉽게 끊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 곰이잖아?’
 기대했던 오크가 아니라 덩치가 큰 곰이었다. 곰은 죽은 오크 고기를 먹으려고 가까이 왔다가 덫에 걸렸던 것이다.
 ‘응? 뿔이 있네. 뿔곰이다!’
 더없이 사납다고 알려진 뿔곰이었다.
 뿔곰은 앞다리가 덫에 잡혀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놈은 잡기만 하면 오크보다 더 가치가 나가는 녀석이었다. 다만 가죽이 손상되면 가치가 떨어졌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게 있지.’
 크리거는 보따리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강한 마취액이 들어 있는데, 잡화점에서 3실버나 주고 산 것이었다.
 “조화와 야성의 영혼으로, 표범!”
 그는 다시 표범의 능력을 시전한 후에 병을 들고 뿔곰에게 달려갔다.
 ‘한 번에 성공시켜야 한다.’
 마취액은 비싸서 딱 하나만 사왔기에 실수하면 3실버를 그대로 날리는 셈이었다.
 후다다다닥.
 휘이익~ 쨍그랑.
 병을 던진 곳은 뿔곰의 코였다.
 크리거는 뿔곰이 공격을 취하기도 전에 병을 던져 깨뜨린 후에 잽싸게 뒤쪽으로 도망쳤다.
 크아아앙!
 뿔곰은 화를 내며 숲이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을 내질렀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크리거는 혹시나 덫에서 빠져나올 경우를 대비해 충분히 뒤로 물러나 뿔곰이 쓰러지기만 기다렸다.
 병이 깨지며 마취액이 얼굴에 번져 버린 뿔곰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눈을 해롱거리며 쓰러졌다.
 털썩.
 “하하, 됐어.”
 주둥이에서 혀가 쭈욱 빠져나온 걸 보니 마취에 걸려 쓰러진 게 확실했다.
 크리거는 창을 들고 뿔곰에게 가까이 다가가 창으로 배를 쿠욱 찔렀다.
 ······.
 “크크크, 마취해서 수술하는 거랑 다를 게 없구나.”
 그는 창은 내려놓고 품속에서 무두질용 단검을 꺼냈다.
 ‘벌떡벌떡 숨 쉬고 있는 놈에게서 가죽을 벗기다니.’
 엽기적이기도 하고, 잔인한 것 같기도 하지만 완벽한 뿔곰 가죽을 벗겨 내기 위해서는 지금 손을 써야 했다.
 크리거는 깨끗하게 가죽을 벗겨 내기 위해 한참을 용쓴 후에 완벽한 뿔곰 가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전승 확인 스킬을 쓰니 레벨이 올랐다.
 ‘또 레벨 업 했다. 한 마리에 1레벨씩이라. 돈만이 아니라 경험치도 대박이구나.’
 “이제 웅담을 꺼내 볼까~”
 사실 웅담은 틀린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웅담은, 곰의 담낭을 절취해 중탕으로 열을 가한 후 농축하여 1~2주간 대기 중에 건조해 담즙을 응고한 것이라고 나온다.
 효과는 이것저것 많이 나오는데, 한마디로 여러모로 몸에 좋은 것.
 크리거는 단검을 뿔곰의 배 속에 집어넣어 담낭을 잘라 낸 후에 보따리에 챙겼다.
 “휴우, 남은 건 고기인데 양이 많네.”
 들고 가기엔 벅찰 만큼 많았다.
 가죽만으로도 한 짐이었다. 보따리 위에 뿔곰의 가죽을 얹어서 들어 봤는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으으, 고기까지는 힘들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레벨 업으로 힘 스탯이 올라갔다는 것.
 고기를 뺐는데도 짐을 다 챙기니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안 돼. 더 이상은 버릴 게 없단 말이야.’
 온전한 뿔곰의 가죽은 20실버가 넘었다.
 피 냄새를 한참이나 풍겼기에 크리거는 기를 쓰고 다리를 옮기며 숲에서 나왔다.
 
 * * *
 
 짐이 무거워져 마을로 돌아오는 데는 3일의 시간이 걸렸다.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
 야심한 밤인데 짐을 하나 가득 짊어진 크리거가 마을 입구에 나타나니, 목책 울타리의 망루에 서서 경비를 보던 마르틴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서라! 누구냐?”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마르틴 아저씨! 저 크리거예요.”
 “뭐? 크리거?”
 “네. 저예요, 저.”
 크리거는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정말이냐? 잠깐만 기다려라.”
 마르틴은 횃불을 가지고 내려와 울타리 문을 열었다.
 “오호, 진짜 크리거구나.”
 “하하, 네.”
 “그런데 이 짐들은 다 뭐냐?”
 눈이 휘둥그레진 마르틴이었다.
 “사냥한 거예요.”
 “으응? 네가?”
 “네. 저 가볼게요.”
 크리거는 밝게 웃으며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니 쿠캔과 줄리아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라는 모습이었다.
 “아버지, 오크는 아버지께 드릴 테니 돈으로 바꿔 주세요. 그리고 뿔곰 가죽은 잡화점에 팔게요.”
 “그, 그래. 그런데 진짜 이걸 네가 잡은 거냐?”
 “그럼요.”
 “오오~”
 쿠캔과 줄리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렸다.
 크리거가 오크와 뿔곰까지 잡았다는 소문은 금세 마을에 퍼졌다. 마을뿐만이 아니라 바레토 지역 전체에 퍼졌다.
 이 지역을 통치하는 라스 폴센 자작은 소문을 확인하고자 크리거를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였다.
 영주의 지시를 받은 기사가 병사 둘과 함께 크리거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말을 탄 채로 크리거를 보더니 위협적인 말투로 대뜸 물었다.
 “네가 크리거냐?”
 “네, 그렇습니다.”
 “몇 살이지?”
 “15살입니다.”
 “영주님께서 널 부르신다.”
 ‘영주님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귀족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쓸데없는 관심을 받으니 부담스럽네. 괜히 건방지다거나, 예절을 모른다거나 하면서 벌을 내리는 거 아닐까? 아니면 세금을 더 내라거나, 잡은 사냥물을 바치라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기사와 병사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의 명을 거절했다간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쿠캔과 줄리아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리거는 기사의 말을 타고 영주의 성으로 갔다.
 영주인 라스 폴센 자작은 60대의 노인네였다. 그는 크리거를 보자마자 무척 신기해했다.
 “네가 크리거라고? 오크와 뿔곰을 잡았다는 소문의 그 크리거가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
 크리거는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로 대답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야.’
 신분이 없는 지구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세계의 삶에 적응한 상태라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 자세를 취했다.
 “나이가 어리다며?”
 “15살입니다.”
 “재밌구나. 어떻게 잡을 수 있었는지 얘기해 보아라.”
 폴센의 지시에 크리거는 토시아 숲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얘기했다. 사냥할 때에 표범의 능력을 썼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엉겁결에 뒤로 도망치다 오크의 목에 창이 박혔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뿔곰은 덫에 잡힌 놈을 마취 약으로 잡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하하, 우연과 실력이 모두 겹쳤구나. 우연도 실력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크리거는 가만히 있으며 영주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영주는 웃음을 멈추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너를 성으로 불러들여 영주병으로 삼을까?”
 ‘헤에에엑?’
 예정에 없던 진로였다.
 ‘싫어! 영주병이라니.’
 전도유망한 사냥꾼이 한순간에 영지군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크리거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
 “흠흠, 영주병보다는 사냥 시종이 좋겠구나.”
 귀족들의 유흥거리 중에 하나는 말을 타고 사냥개를 몰고 다니며 즐기는 사냥이었다. 이때 귀족들의 사냥을 준비하고, 사냥개를 돌봐 주며, 사냥할 때에 따라다니는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사냥 시종이었다.
 “그래, 사냥 시종이 좋겠다. 시종장?”
 영주는 옆에 서 있는 시종장 비엘을 불렀다.
 “예, 영주님.”
 “저 아이를 사냥 시종으로 삼을 테니, 네가 알아서 준비시켜라.”
 순식간에 취업이 된 크리거였다.
 “저어······.”
 크리거는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모기만 한 소리로 들리지도 않게 나올 뿐이었다. 입을 잘못 놀리면 이곳에서 곧바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사냥에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시종장이 잘 관리해라. 그리고 귀족들 앞에 세워서 오크와 뿔곰을 잡은 것도 얘기하도록 할 테니, 좋은 옷도 준비해서 입혀라.”
 “알겠습니다.”
 영주는 다시 크리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를 즐겁게 했으니 상을 내리겠다.”
 영주는 직접 주머니 속에서 황금빛이 나는 동전 1개를 꺼내 크리거에게 건넸다.
 ‘오홋, 골드다.’
 1골드면 100실버. 현재 부모님과 자신, 4명의 동생들까지 총 7명인 식구가 못해도 3개월은 먹고살 돈이었다.
 “감사합니다.”
 주저하며 뭔가 말하려던 것은 쏘옥 들어가고 저절로 허리가 굽혀졌다. 생전 처음 보는 황금 동전이라 받는 손이 떨렸다.
 영주에게 허리 굽혀 절한 후에 비엘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집에 다녀올 시간을 줄 테니 얼른 갔다 와라. 시종이 되면 앞으로 마음대로 집에 갈 수 없다.”
 시종은 1년에 한두 번 기회를 얻어 집에 갈 수 있지만 나머지 시간은 영주의 성에서 살아야 했다. 크리거가 노예는 아니지만 영주의 명은 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옷은 따로 줄 테니, 가능한 한 짐은 최대로 적게 가져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크리거는 허리 굽혀 공손히 절했다.
 그리고 자신을 영주의 성으로 데리고 갔던 기사와 병사 둘의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니 영주가 두렵기도 하고, 큰돈에 흔들리기도 해서 말을 못한 게 약간 후회가 되었다.
 ‘영주에게 안 한다고 말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1골드가 큰돈이기는 하지만 성에 들어가서 시종이 되면 레벨 업은 어떻게 하지? 휴우,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취소도 할 수 없고. 끄응. 난감하군.’
 쿠캔과 줄리아는 1골드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함지박만큼 커졌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영주님의 사냥 시종이 되었어요. 앞으로 영주님의 성으로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오, 장하구나, 내 아들.”
 쿠캔은 아들이 집을 떠나게 되었음에도 무척 기뻐하며 크리거를 끌어안았다.
 이 세계에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는 한 제대로 대접받고 살 지 못했다. 시종이라면 영주의 성에 기거하는 특혜와 함께 평생직장이 보장된 것이기에 기뻐할 일이었다.
 또 시종은 영주를 모시니 세금을 낼 필요가 없고, 오히려 한 달마다 월급을 받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할 일이었다.
 줄리아는 그래도 엄마이기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데, 너를 보내기가 그렇구나.”
 “무슨 소리야. 크리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데?”
 쿠캔은 줄리아를 나무라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영주님 성에 가서 사니까 얼굴 보기가 힘들잖아요.”
 “크리거는 장남이야. 우리 가정을 위해 큰일을 할 아이라구. 그리고 크리거?”
 “네?”
 “매달 집으로 돈을 보내 주어야 한다. 네 동생들을 생각해서 말이야. 알았지?”
 “여보! 지금 그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죠. 크리거가 언제는 우리를 안 챙겼나요?”
 줄리아는 쿠캔을 흘겨본 후에 크리거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영주님께 가면 다른 사람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미움받지 않게. 알았지?”
 “걱정 마세요. 사람들과 친해지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크리거는 아주 어릴 때부터 모든 마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특히 영주님 눈 밖에 나면 큰일 난다.”
 “네, 명심할게요.”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줄리아는 다시 크리거를 부둥켜안았다.
 
 
 
 TO BE CONTINUED

댓글(6)

박독자    
지구에서는 부모님 안계신건가요? 아님 애가 싸가지가 없어서 기존 부모님은 잊은건가요?
2017.03.09 09:33
[탈퇴계정]    
ㅋㅋㅋㅋㄱ엌ㅋㅋㄱ
2017.03.09 22:42
ls*******    
1권 무료로 먼저 보고 그냥 저냥 볼만하겠다 싶어서 전권 대여를 했는데 3권까지 보다가 접습니다 주인공이 현세에서 23살인가 하고 이세계 이동해서 23살 대략 합쳐서 46살 이정도인데 읽어보면 중2스럽고 특히 여자에게 완전 10호구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런 주인공을 극혐하기에 전권 대여한 돈이 아깝지만 도중에 포기합니다
2017.03.13 18:02
실버워커    
저도 전권대여했다가 3권에서 포기합니다. 왠만하면 돈아까워서 읽어보려 했지만 개연성은 하나도 없고 뒤죽박죽에 일관성도 없고 초딩이 글짓기 한거 같내요 비추합니다.
2017.03.16 15:30
bluesun    
아.. 윗분글을 읽었어야 하는데.. 전권대여해서 보다가 열받아서 때려치는중.. 작가가 중딩인듯..
2017.03.18 13:22
홈즈홈    
말을 잘 못하시는거 같아요 설명이 뭔가 음 살짝 외국인 삘 나요
2017.05.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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