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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기적의 연출 [E]

기적의 연출 1-1

2017.02.09 조회 2,696 추천 16


 기적의 연출 1권
 
 Chapter 1. 섬광 기억
 Chapter 2. 전환점은 우연히 찾아온다
 Chapter 3. 우연한 만남
 Chapter 4. 악연, 아니면 필연
 Chapter 5. 시작이 반
 Chapter 6. 황무지에 씨앗을 심어라
 Chapter 7. 배우 낚아 올리기
 Chapter 8. 상대를 이해하는 법
 Chapter 9. 여배우 길들이기
 Chapter 10. 시간을 단축하는 법
 
 
 
 
 Chapter 1. 섬광 기억
 
 
 
 
 섬광 기억 [flashbulb memory]
 매우 놀랍고 중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순간이나 환경에 대해 포착된 사진(snapshot)과 같이 자세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
 
 -속보입니다. 오늘 밤 열 시경 강원도 한계령 중턱을 지나던 신명일, 김희수씨 부부와 아들 신지호군이 탄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신명일, 김희수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아들 신지호군은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늦은 오후부터 나오기 시작한 속보는 TV와 인터넷을 통해 질리도록 반복됐다. 한 가족에게 느닷없이 불어 닥친 비극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고의 사망자가 한국의 대문호로 이름을 날리던 작가 신명일과 아름다운 미모로 손꼽히던 여배우 김희수였기 때문이다.
 최초로 소식을 접한 서재현은 수전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자가용 핸들을 잡았다. 그는 병원으로 차를 모는 중에도 절친했던 신명일, 김희수 부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 두 사람이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영안실에 들려 시신을 확인한 서재현은 입을 틀어막고 오열했다.
 “···미안하네.”
 끝내 뱉은 말은 무용지물에 불과한 한마디였다. 한편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관이 입을 열었다.
 “아들이 이제 열 살이라더군요.”
 서재현이 충혈된 눈으로 돌아보자, 그는 목에 걸고 있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영양경찰서 교통계 반장 오영수라고 합니다. 서재현 선생님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고인들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셨더군요. 여기, 사고차량 내부에서 발견된 유품입니다.”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있는 서류봉투 표면에 ‘서재현 감독에게’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영화 대본 같더군요.”
 서재현은 오영수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자신에게 남긴 서류봉투 속의 내용물을 꺼내다 그만 손에서 놓쳤다. 동시에 가슴속이 진탕되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그렇게 가버렸나, 이 사람아.’
 곁에서 지켜보던 오영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유품을 주섬주섬 주우며 사무적인 말투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응급실에 입원한 아들 이름이 지호라고 했던가요? 사고 당시 어머니인 김희수씨가 몸을 던져 그 녀석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 덕분에 큰 부상 없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녀석도 고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야 할 테니··· 깨어나면 꼭 전해주십시오.”
 오영수가 수습한 종이들을 건네자,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서재현이 대답했다.
 “희수라면 분명 그랬을 겁니다. 반장님 말씀처럼 지호도 꼭 알아야 할 일이지요.”
 “네, 그럼 전해주시리라 믿고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오영수는 명함을 넘기고 영안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어서 철문을 밀고 나가려던 그가 막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아직 조사 중 입니다만, 아이는 퇴원하는 대로 친척들에게 인계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서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호는 친척이 없습니다. 고인이 된 두 사람 모두 외동이고, 지호의 양측 조부모님도 녀석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중매를 섰기 때문에 잘 압니다.”
 “허, 그럼 생존자는······.”
 “가족들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아마도 제가 보살피게 될 것 같습니다.”
 “고인들과 아무리 친한 사이였다 해도 쉬운 결정은 아닐 텐데요.”
 서재현은 그 말에 동의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확고한 다짐을 한 상태였다.
 “제게 아이를 부탁하려고 달려오다 사고가 났습니다. 제가 같은 사고가 났더라도 가족을 보살펴 줬을 친구들입니다.”
 더 이상 어떤 부연도 필요치 않았다. 비극의 현장이지만, 또 새로운 희망이 꽃피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번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영수조차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에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뒤에 남겨진 서재현도 머지않아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벨소리가 반복될 때마다 얼굴의 그늘이 짙어졌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을 고민 없이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재현이 할 말을 떠올리며 복도 끝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쯤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지호가 발작을 일으키며 눈앞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순간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란 서재현은 수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의료진이 침대 째로 지호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웅성이는 것처럼 귓가에 박혔다.
 “소생실로 옮겨서 모니터 달고, 활력징후 체크하고, R L 팔라인 달아주세요! 그다음 지켜봅시다.”
 지호는 한쪽 방으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다. 그 결과 다행히 체온, 호흡, 맥박, 혈압 등이 점차 안정됐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의료진 역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재현은 침대에 누워있는 지호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도 병원 침대에서 발작하며 위기를 넘나들었던 지호는 텅 빈 동공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지호가 입을 열었다.
 “삼촌. 엄마, 아빠는요?”
 서재현은 말문이 탁 막혔다. 그 역시 절친했던 이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어린 지호를 보면 더 그랬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부모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일 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심지어 의료진도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결국 소식을 전해줄 이는 서재현뿐이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무척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말했다.
 “지호야. 엄마, 아빠가··· 하늘로 잠시 쉬러 가셨단다.”
 “삼촌. 그럼 언제 오시는데요?”
 “글쎄, 아빠가 삼촌한테도 얘길 안 해주고 갔구나.”
 “······.”
 지호는 펑펑 울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방금 전에 만났단 말이에요.”
 “···그래.”
 서재현은 작고 따뜻한 체구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의식을 되찾은 지호는 MRI를 통해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일주일 더 안정을 취했다. 그는 퇴원 판정을 받은 이후 서재현의 손에 맡겨졌다.
 두 사람은 사고가 일어났던 당시 살고 있던 강원도의 한계령 별장 대신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헤이리 마을의 본가로 향했다.
 지호는 뒷좌석 창문을 열고 위태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백미러로 훔쳐보던 서재현이 주의를 줬다.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와라.”
 지호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시선만은 여전히 창밖 도로변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섬광(閃光)이 번쩍였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한계령 사고 순간 보았던 풍경이 겹쳐졌다.
 “흡!”
 숨이 탁 막힌 지호가 시트 위로 쓰러졌다. 백미러 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포착한 서재현이 화들짝 놀라 대로변에 차를 세웠다.
 “지호야! 괜찮으냐?”
 지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쏟으며, 앞섶을 지푸라기처럼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잠시 찾아왔던 호흡곤란은 다행히 바람처럼 사라진 후였다.
 한편 서재현은 그 모습만 봐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괜찮은 것 맞아?”
 “···네.”
 천천히 호흡을 고른 지호가 자신이 보았던 것에 대해 말했다.
 “사고 났을 때 기억이··· 사진처럼 보였어요.”
 서재현도 지호 머릿속까지 들여다 볼 재간은 없었다. 그는 의미를 정확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답했다.
 “큰 충격을 받아서 생긴 후유증 같구나.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내다 보면 금방 괜찮아질 게다.”
 지호는 떨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레 창밖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 후유증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쳤다. 사고 순간 보았던 모든 장면들이 사진을 찍어둔 듯 점 하나까지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난 지호는 보기 흉한 상처를 감추듯이 움츠러들었다.
 
 신명일, 김희수 부부의 장례를 마친 서재현은 절친했던 그들의 유골을 집 뒤편 언덕에 수목장(樹木葬) 방식으로 묻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지호는 새로운 울타리 안에서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마당의 아름드리나무 위에 올라가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형아! 엄마가 나무 위에서 놀면 위험하대!”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 서수열은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 눈썹 위로 손을 갖다 대며 외쳤다.
 반면 지호는 들은 체 만 체하며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었다. 그러자 네모 안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여럿 들어왔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몇 없는 마을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반 관광객 같지도 않았다. 관광객이라기에는 젊은 남녀의 미모가 비범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 있어도 그림이었다.
 “영화배우 같이 근사한데?”
 씨익 웃은 지호가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았다 뜨자, 동시에 눈앞에 새하얀 플래시가 터졌다.
 번쩍!
 남들은 의도적으로 섬광기억을 남길 수 없지만 그는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방금 전 봤던 장면이 사진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두 눈으로 촬영한 장면은 혼자 보기 아까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광경을 나 혼자만 볼 순 없지.’
 지호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눈으로 본 것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옮겨 담기 위해서였다.
 한편, 니무 아래서는 서재현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평소의 덤덤한 표정과 달리 찌푸린 인상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거절 의사를 표했는데, 그걸로 부족했나?”
 “그러실 것 같아서 우리 주연배우들까지 대동해 왔습니다.”
 선두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답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그는 능글능글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선배님이니까 직접 찾아온 거지, 다들 귀한 몸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하.”
 “여러 사람 들이기에는 집안이 비좁으니 자네만 들어오게.”
 서재현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 남겨진 중년 남자는 데려온 남녀 배우들을 보며 말했다.
 “영 찬밥 신세로군. 주변 산책이나 하고 있어.”
 현관문이 닫히자,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여배우가 주위를 경계하며 파우치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물었다.
 “저 영감탱이가 뭐 대단하다고 이 난리람?”
 “말 함부로 했다가는 훅 가는 수가 있다.”
 남배우가 주의를 줬지만 여배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오빠. 옛날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은퇴한지 벌써 십 년이 다 돼가는 양반이에요. 업계 선배들 사이에서도 일할 때 괴팍하기로 유명하고요. 그런데 맞는 말 좀 한 거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해요?”
 “일할 때 실력만큼은 최고잖아. 서 감독님 손에 탄생한 작품이며 배우들 모두 명작이나 명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거만해 빠진 제작자가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알아서들 하겠지. 한 대 줘요?”
 그녀가 담배를 들이밀자 남배우는 고개를 저었다.
 “끊었다.”
 그사이 지호는 일련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배우들은 이제야 셔터 소리를 들었다.
 찰칵!
 남배우의 고개가 바람처럼 돌아갔다.
 ‘하도 시달려서 노이로제가 걸렸나 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네?’
 셔터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나무에서 내려온 지호가 휴대폰을 들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를 보며 표정을 휴지조각처럼 구긴 여배우는 기가막히다는 듯 반응했다.
 “방금 뭐죠? 나, 파파라치 당한 거예요?”
 “함부로 행동하지 마. 서 감독님 아들인 것 같다.”
 일찌감치 그녀를 제지시킨 남배우가 허리를 숙이며 지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느닷없이 일어난 돌발 상황에도 침착하고 능숙하게 대처하며 물었다.
 “고 녀석, 참 잘생겼다. 서 감독님 아들이니?”
 지호는 대답 없이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을 계속 촬영했다.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아니, 잠깐······.”
 찰칵!
 “내 말 좀 들어······.”
 찰칵!
 계속되는 촬영에 남배우는 별수 없이 지호에게 달려가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그 찰나, 지호가 먼저 휴대폰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것 좀 보실래요?”
 남배우는 자세가 무너지며 비틀거렸다.
 ‘허락 없이 찍어댈 땐 언제고··· 뭐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알 만한 나이같은데 장난이 지나치구나. 몇 살이지?”
 “저는 열한 살, 형은 열여섯 살이요!”
 서수열이 끼어들며 천지난만하게 대답했고, 지호가 휴대폰을 내민 채 말했다.
 “죄송해요. 사진 찍는 데 너무 집중하느라··· 저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요.”
 어떻게 말하든 배우들 입장은 곤란했다.
 두 사람이 제작사 대표와 서재현 감독을 찾아온 것 자체가 비공식적인 밀행인데다 여배우는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음대로 사진 막 찍으면 안 돼.”
 그때 여배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와서 나무랐다.
 “무슨 얘길 그렇게 길게 해요?”
 그녀는 지호가 내밀고 있던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냥 빼앗아서 지우면 될 걸······.”
 순간 여배우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 남배우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여배우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담뱃불이 타들어가는 것도 잊고 자신이 찍힌 사진들에 정신을 팔았다. 그리고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거 뭐야? 화보보다 잘 나왔잖아?”
 “어디, 나도 좀 봐봐.”
 남배우는 어깨 너머로 휴대폰 앨범을 훔쳐본 뒤 동공이 확장됐다.
 ‘이건······.’
 사진은 의도된 연출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화보에서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겨있었다. ‘잘생기고 예쁜 사진’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특별한 이미지 컷이었다. 소장하고 싶은 사진이랄까?
 더불어 기술적인 면모도 뛰어났다. 자연광을 조명삼아 촬영한 사진들은 난이도 높은 역광임에도 불구하고 피사체가 깨끗하게 나와 있었다. 두 배우의 피부 톤에 노출을 맞춘 후 정확한 구도에서 찍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막 찍은 것 같은데··· 사진에서 감정이 보여. 방금 찍은 사진 모두 포토그래퍼가 찍은 것 같아.”
 “풍경사진도 좀 봐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따로 없네?”
 배우들은 어느새 지호가 촬영해 둔 사진에 완전히 홀렸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동생 수열이 지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아. 왠지 혼날 것 같진 않은데?”
 지호도 남모르게 안도했다. 서재현은 예의범절이나 교육에 있어 엄격했기 때문에 그 역시 나름대로 가슴을 졸였던 것이다.
 그 순간, 한참 동안 사진에 빠져들어 있던 여배우가 고개를 들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사진이 욕심난 그녀는 담뱃불을 흙바닥에 눌러 꺼트리며 말했다.
 “이 누나가 나름 잘 나가는 배우거든?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은 건 괘씸하지만 내 사진들을 돌려주면 서 감독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물론 네 핸드폰에선 사진들을 지워야겠지. 어때?”
 어차피 그녀를 촬영한 사진이니 주인도 그녀였다. 하지만 여배우는 구태여 지호에게 허락을 구했다. 뜻밖에 자연스럽고 분위기 있는 사진을 건지게 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평소 파파라치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산들바람에도 좌지우지되는 갈대 같은 여심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남배우는 지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거들었다.
 “형 생각에도 그게 좋겠다. 기왕이면 내 사진도 좀 보내주고.”
 “사진이 마음에 드세요?”
 뜻밖의 질문에 남배우는 뜨끔했다.
 “음, 마음에 들긴 하는데······.”
 “그럼 몇 장 더 촬영해 드리고 싶은데. 어때요?”
 당돌하게 얘기한 지호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두 배우를 번갈아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직격탄으로 맞은 두 배우는 서로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남배우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여배우는 이미 홀라당 넘어간 표정이었다.
 결국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남배우가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뭐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만··· 좋아. 원하는 포즈가 있으면 말해봐.”
 “아까처럼 서 있으면 돼요!”
 자신의 제안이 통하자 신이 난 지호는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멀찍이 떨어지며 다시 구도를 잡았다. 그는 머릿속에 설계도라도 그려둔 사람처럼 단번에 촬영 지점을 확보한 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배우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얘들은 우릴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네.’
 지호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진뿐이었다. 심지어 수열도 두 배우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로움이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여기 애들, 좀 이상하지 않아? 우리를 무슨 길가의 전봇대나 가로수처럼 대하네.”
 “서 감독님 밑에서 큰 애들이잖아요? 원로 배우들 보고 아저씨, 아줌마 하면서 컸을 텐데 신기할 게 뭐있겠어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지호는 바쁘게 셔터를 눌러댔다. 몇 컷 더 촬영한 그는 두 배우에게 다가가서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은 배우들 마음에 쏙 들었다. 남배우가 감탄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이거야 원··· 포토그래퍼가 꿈이니?”
 “아뇨.”
 지호의 짤막한 대답을 들은 여배우는 사진에 이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의 꿈이 포토그래퍼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꿈이 뭔데?”
 “영화감독이요.”
 꿈을 얘기한 지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영화를 만드는 게 제 꿈이에요.”
 
 그 시각, 집 안에선 열띤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재현에게 불청객 대접을 받은 중년의 남자가 날카로운 창이라면, 집주인인 서재현은 견고한 방패였다.
 “업계 선배님이시니까 기탄없이 얘기하겠습니다.”
 중년 남자는 대뜸 통보하고 말을 이었다.
 “저나 되니까 한참 전에 은퇴하신 선배님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것도 주연배우들을 대동하고 말이죠. 밖에 쟤들, 요새 최고로 비싼 몸들이에요. 저도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느니만큼 조건도 최대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슬슬 복귀하셔야죠.”
 “잘 나가는 영화제작자께서 나 같은 퇴물 감독을 기억해주는 것도 모자라 선배 대접까지 해주고, 이거 영광이로구만. 하지만 전화로도 말했다시피 영화판에 복귀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 자네, 헛걸음했어.”
 서재현이 다시금 거절하자 중년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정말 확고하신 겁니까? 선배님, 오래 전 신 작가님께 일어난 사고는 우연이었을 뿐입니다. 징크스 같은 게 아니에요.”
 “내가 왜 은퇴했는지 잊었나? 그 후로도 번번이 같은 일이 일어났었네.”
 “현장에서 배우가 다치는 일도, 흔치는 않지만 종종 벌어지는 사고입니다. 비단 선배님께만 일어난 일이 아니죠.”
 끈질긴 설득에도 서재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카메라를 잡을 때마다 사고가 터진 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네. 괜한 소리 그만하고, 이제 가줬으면 좋겠군.”
 물론 중년 남자의 말대로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일어났던 사고는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재현의 몸이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트라우마를 가진 채 지휘봉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습니다. 선배님 결심이 정 그러시다면 더는 복귀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신 작가님이 남기고간 유작만 넘겨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서재현은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며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질 듯 주먹을 내리쳤다.
 “결국 노린 건 신 작가의 유작이었나?”
 “세상 빛을 보는 편이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겁니다!”
 중년 남자가 마주 소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따지고 보면 어쩌다 얻어걸린 것뿐이지, 그 작품의 판권을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선배님이 무슨 권리로 신 작가님의 유작을 땅에 묻느냐는 말입니다. 그 아들을 데려다 키우신다고 해서 작품의 주인 행세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나가!”
 서재현은 현관문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중년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재현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잔인한 말을 뱉었다.
 “충무로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아십니까? 그 희곡이 대단한 걸작이라는 추측이 난무하면서, 선배님이 신 작가님의 아들을 곁에 두는 것도 작품을 가로채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지만, 계속 버티시면 오해를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차피 사장시킬 게 아니라면 괜한 경쟁 붙일 생각 마시고 원하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얼마가 됐든, 뭐가 됐든 맞춰드리겠습니다.”
 도를 한참 지나친 언사에 서재현은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으며 말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손님으로 대하지 않겠네. 꼭 힘을 쓰지 않고도 자네를 내 집에서 쫓아낼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아.”
 “하, 주거침입으로 신고라도 하시게요?”
 서재현의 돌덩이 같은 표정을 빤히 보던 중년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럼 곤란하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는 명함을 탁자에 올려두고 일어났다. 그러자 서재현의 아내 이지은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중년 남자가 집을 나가기 전, 나직이 말했다.
 “남편의 비즈니스에 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다신 찾아오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남편은 고혈압이에요. 아마 당신 얼굴만 봐도 건강에 해로울 겁니다.”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인 중년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마당에 있는 배우들에게 외쳤다.
 “협상결렬이다. 가자고!”
 마당 밖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로 향하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여배우가 그 사이 친해진 수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이 누난 갈 테니까 잘 지내. TV에서 보면 꼬박꼬박 인사하고.”
 수열이 꺄르르 웃었다. 두 사람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수열과 여배우의 나이차는 열 살이 넘었지만 정신연령만큼은 비슷해 보였다.
 한편 남배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지호를 격려해 주었다.
 “넌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 다음에 크면 훌륭한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대단한 감독님과 함께 지내고 있잖아? 꼭 다시 보자.”
 배우들을 기다리며 승용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년 남자를 잠시 바라보던 지호가 남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형도 안녕히 가세요.”
 작별 인사를 나눈 배우들이 잔디밭을 밟으며 승용차로 향했다. 마침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는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호는 다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한편, 창문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던 서재현은 술잔에 브랜디를 채웠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꽤 오랫동안 음주를 멀리해왔지만, 꿀꿀한 기분에 사로잡힌 오늘만큼은 술 생각이 간절했다.
 평소 참견을 하던 이지은도 묵인해 주며 걱정스레 물었다.
 “여보, 괜찮아요?”
 서재현은 아까 들었던 말이 못내 신경 쓰이는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 이유로 지호를 데려온 게 아니야.”
 “남들이 뭐라 하던 우리 가족은 당신을 잘 알아요. 그 작자는 당신을 자극해서 뭔가를 얻으려 했을 뿐이에요. 돈이 될 만한 감독과 작품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지호가 직접 영화를 만들게 되기 전까지 그 작품은 누구도 못 건드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서재현은 거실에 설치된 빔 프로젝터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지호가 촬영해 둔 헤이리 마을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 구도가 전환될 때마다 직접 풍경 속에 서있는 느낌이 들만큼 생동감 넘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한참 동안 벽면을 덮은 스크린을 바라보던 그는 술잔의 브랜디를 마저 들이켰다.
 
 ***
 
 밤이 되자 서재현은 잠을 못 이루고 서재 책장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호를 생각하던 그는 카메라 기법에 대해 자신의 이름이 저자로 들어가 있는 두툼한 책을 두 권 뽑았다.
 ‘카메라를 제 새끼처럼 끼고 다니는 아이이니, 카메라 기법을 익혀두는 편이 도움 되겠지.’
 서재현이 보는 지호는 카메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지호의 관심사는 영상, 그 다음 사진이었다. 하지만 두 분야 모두 기초는 카메라였다. 지호의 탁월을 감각을 빛내려면 기본적인 카메라 기법을 익히는 게 먼저인 것이다.
 그때, 서재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이지은이 들어섰다.
 드르륵-.
 그녀는 성냥으로 수그러든 등불을 되살리며 서재현이 들고 있는 책들을 살짝 엿보았다.
 “지호 주려고요?”
 “음.”
 서재현은 애매하게 대답하며 두 권의 두툼한 책을 든 채로, 자리를 피하듯 서재를 나갔다. 그는 막 바로 2층에 있는 지호 방으로 갔다.
 지호는 아직 잠들기 전이었다.
 똑똑.
 서재현이 문틀에 노크를 하자 지호가 돌아봤다.
 “아, 삼촌. 아직 안 주무셨어요?”
 어깨 너머 모니터에서 흑백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빤히 지켜보던 서재현이 책상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책 두 권을 슬쩍 내려놨다.
 “카메라에 관한 책이다. 비록 기초적인 내용이지만 읽고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게야. 하지만 기본을 알아야 응용도 가능한 법이니, 한번 훑어 보거라.”
 서재현은 용건만 툭 던져두고 몸을 돌렸다. 유유히 방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게 앉아있던 지호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작게 외쳤다.
 “감사해요, 삼촌! 안녕히 주무세요!”
 서재현은 이미 1층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러나 지호는 자신의 인사가 그에게 닿았는지 고민할 새도 없이, 그가 두고 간 책을 펼쳤다.
 파라락.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지호의 표정은 환희에 젖었다. 자신이 카메라를 잡은 뒤부터 궁금했던 부분들이 속 시원히 나와 있었다. 이렇듯 일반 서적과는 전혀 다른 전달력의 원천은 서재현이 직접 쓴 책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와 잦은 대담을 나누는 지호로서는 배로 이해가 잘됐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보석 같네.”
 말 그대로 한 문장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한 번 보고 통째로 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지호라면 쉽게 가능했다. 그는 혀를 내두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전문을 이미지화 시켜서 찍어냈다.
 번쩍!
 눈앞에 환한 플래시가 터졌다. 자신이 가진 섬광기억 능력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수차례 같은 행위를 반복하자 금새 눈이 피로하고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뻐근해왔다.
 결국 지호는 지속하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등을 기댔다.
 ‘삼촌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지만··· 하루하루 야금야금 찍어대면 일주일 후에는 전부 다 머릿속에 넣어 둘 수 있겠는 걸?’
 시간은 많고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지호는 매일같이 섬광기억 능력을 이용해 두 권의 책을 통째로 이미지화시켜 버렸다. 이제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필요한 내용을 써먹다 보면 이해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았다.
 
 
 
 
 Chapter 2. 전환점은 우연히 찾아온다
 
 
 
 
 올해 열한 살이 된 수열은 평화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헤이리 예술마을은 외딴 곳에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했다.
 학교에 가면 깐족거리는 성격의 짝꿍 정성우가 있었다. 성우는 수열과 대체적으로 비슷한 성격인 탓에 종종 다투기도 했다. 오늘 쉬는 시간도 그런 이유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자랑하기 바빴다.
 “우리 형아는 중학생인데도 키 백팔십 넘거든!”
 성우가 턱을 치켜들고 거만한 태도로 말하자 수열도 지지 않고 형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형보다 우리 형이 훨씬 잘생겼거든?”
 “그럼 뭐해? 너희 형 자폐증 아니야?”
 뜻밖의 인신공격에 수열은 잠시 벙 찐 표정이 됐다.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성우의 대답을 들은 수열은 순간 울컥했다. 마음 같아선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고 싶었지만 서재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하지만 언성이 높아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우리 형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 우리 형은 자폐가 아니고 천재거든?”
 “웃기시네. 너희 형 항상 카메라만 붙들고 있잖아. 완전 이상해!”
 “네가 뭘 알아? 형이 찍은 거 보는 사람마다 천재라고 말하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열은 씩씩대며 쌍심지를 켰다.
 ‘두고 봐. 우리 형이 천재란 걸 보여줄 테니까.’
 그날,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학교가 파하고 수열이 집에 도착했을 땐 서재현과 지호가 마당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고 일광욕을 하며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 형, 학교 벌써 끝났어?”
 수열이 묻자 지호가 손을 흔들며 답했다.
 “왔어? 나 오늘 단축 수업.”
 그 순간 서재현이 수열을 나무랐다.
 “수열이 너, 가서 방 청소 좀 해라. 어제부터 말했는데 아직까지 개판이야?”
 “죄송해요······.”
 기가 팍 죽은 수열이 총총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힘없는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서재현은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지호에게 시선을 줬다. 그는 원래 말하던 본론으로 돌아갔다.
 “모든 작품은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네가 가장 관심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 영화란 감독 자신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인 게야.”
 지호는 짙은 호기심이 서린 눈빛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영화는 관객들을 위한 거잖아요?”
 “숱한 영화감독들이 빠지는 함정이지.”
 서재현이 부정하며 덧붙여 물었다.
 “영화의 주관이 뚜렷할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다. 상업적인 영화는 두 번 보면 질리게 마련이고. 왜 그럴까?”
 “감독이 조금 더 애정을 갖고 촬영할 수 있어서요?”
 “그래, 그리고 또 하나.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면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런 영화라면 누가 카메라를 잡아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지호는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라면 열광하는 두 사람은 자주 이렇게 간접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지호는 그때마다 배우는 게 있었다.
 “네, 삼촌.”
 그때, 서쪽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오늘 마을 축제한다던데, 수열이 데리고 다녀오지 그러냐.”
 “그럴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활짝 웃어 보인 지호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올라가자 수열은 방 창문에 턱을 괴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만화책이 널브러져 있고 이불은 침대 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서수열! 뭐해? 청소는?”
 짐짓 화난 척하는 지호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 수열이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 맞다! 형, 오늘 라임걸즈 공연 온대!”
 “그래서? 청소 안 하면 라임걸즈도 싫어할 걸?”
 지호가 팔짱을 끼며 짐짓 엄격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상황파악을 마친 수열이 두 손바닥을 붙이고 싹싹 빌었다.
 “헤헤헤, 형아. 잘못했어.”
 “대충 정리하고 나와.”
 뒤돌아선 지호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혼나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동생 수열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애지중지하는 카메라를 챙긴 뒤 수열과 합류했다. 축제가 열린 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던 수열이 한쪽을 가리키며 깜짝 놀랐다.
 “어! 정성우?”
 오늘 싸운 성우가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그들 가족 역시 축제에 놀러온 것이다.
 수열의 시선을 쫓은 지호가 물었다.
 “친구야?”
 “응, 같은 반 짝꿍! 그런데 친구는 아니야.”
 “에이, 같은 반이면 친구지 무슨.”
 지호는 수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수열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친구 아니야!”
 그 순간,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걸 그룹 라임걸즈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뜨거운 환호성이 터지며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미리 포진하고 있던 취재진이 셔터를 사정없이 눌러댔다.
 그 와중에 키가 작은 수열은 대충 무대의 방향만 알 뿐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줄넘기하듯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라임걸즈 정수리라도 보려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땀범벅이 돼서는 자신을 높이 들어줄 큰 키의 지호를 찾았다.
 “형아?”
 어느새 지호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수열은 반사적으로 나무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그곳에 지호가 있었다. 그는 이미 취재진 머리 꼭대기보다도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멋진 작품이 나올 거야.”
 빙그레 웃은 지호는 정신을 집중하며 두 눈을 매처럼 날카롭게 빛냈다. 그는 서재현이 준 책 내용을 떠올리며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먼저 라임걸즈가 서있는 무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넓은 숲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전체적인 화면을 길게 촬영하는 스테이징(staging)기법을 사용했다. 또한 카메라 구도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같은 하이앵글(hight angle)로 잡았다. 그러자 광활한 자연을 등에 업은 라임걸즈의 콘서트 모습이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이게 되네?’
 그동안 무작정 찍어댔던 경험들이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거기에 책에서 본 내용들이 어우러지자 연습하지 않고도 머릿속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
 
 한편 무대가 보이지 않는 수열과 성우는 학교에서의 싸움 이후 2차전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엄마! 저 형, 또 저래. 수열이네 형아 이상해.”
 성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성우 엄마가 기겁했다.
 “어맛, 깜짝이야!”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지가 타잔이야, 뭐야? 왜 나무를 타? 쟤는 중학생씩이나 돼서 동네 창피하게 뭐하는 짓이라니.”
 두 모자(母子)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은 수열은 분한 마음에 이를 갈았지만, 어떻게 두 사람을 골탕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성우에게는 엄마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던 것이다.
 ‘형은 내가 지킬 거야!’
 속으로 다짐한 수열은 지호가 앉아있는 아름드리나무 위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당사자인 지호는 나무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부르며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열의 눈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전혀 모르는 형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따름이었다.
 ‘어떻게 하지?’
 수열은 성우네 모자를 보며 골려줄 고민을 시작했다. 이내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서 실수인 척 두 사람 옷에 범벅해줄 요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이스크림 차를 찾았다.
 ‘저기 있다! 응? 저건······.’
 수열은 아이스크림 차 뒤에 붙은 벽보를 보고 번뜩 아이디어가 스쳐지나갔다. 벽보에는 ‘파주시 지역홍보 영상 공모전’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래, 저거야!”
 크게 소리친 수열은 카메라에 정신이 팔려있는 지호를 보며 생각했다.
 ‘형한테 말해봤자 어차피 공모전 같은 건 관심 없다고 하겠지?’
 평소 귀찮은 이벤트를 질색하는 지호를 떠올려 봤을 때, 어지간해선 설득당하지 않을 게 불 보듯 빤했다.
 마침내 수열은 자신이 직접 지호 이름으로 출품하겠다는 간 큰 계략을 꾸몄다. 그것만이 얄미운 정성우 모자에게 형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진정한 승리를 거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형! 나 먼저 간다!”
 마음을 굳힌 그는 집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따르릉- 따르릉-!
 인테리어 소품으로나 쓰일 법한 고풍스러운 전화기에서 시끄럽게 벨이 울려댔다.
 때마침 주방에서 저녁 메뉴를 손질하던 이지은이 거실로 나서며 손의 물기를 닦았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어올리며, 숏 컷 헤어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단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여보세요?”
 이내 수화기 뒤편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문화체육관광부 파주시 지역 홍보 공모전 담당자 김대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신지호 선생님 댁 맞나요?”
 대본을 읽는 듯 기계적인 말투나 뜬금없는 공모전 관련 소식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지호의 이름 뒤에 붙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었다. 수상한 점이 다분한 전화였지만 이지은은 차분히 물었다.
 “우리 애 이름이 지호는 맞아요. 하지만 중학생한테 선생님이라니··· 무슨 일이시죠?”
 “아, 죄송합니다. 작품이 너무 출중해서 중학생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개인 정보에 생년월일이나 휴대폰 번호도 적혀있지 않았고요. 사실, 집 전화번호도 간신히 찾은 겁니다.”
 머쓱하게 말한 남자가 덧붙여 물었다.
 “혹시 어머님 되시나요?”
 “아뇨, 숙모예요.”
 대답한 이지은은 처음 듣는 공모전 전화의 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우리 애랑 얘기해 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문화체육관광부라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이번 공모전에서 신지호 학생이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네? 공모전 대상이요?”
 이지은이 화들짝 놀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한 공모전이라면 그 규모가 작진 않을 터였다. 다양한 지원자들이 몰렸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대상이라니!
 “정확히 어떤 공모전이죠?”
 “파주시를 홍보하는 데 적합한 영상을 뽑는 공모전입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공모전 시상식 일정과 초청장은 근시일 내에 우편으로 갈 겁니다.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이지은은 전화를 끊은 후에도 얼떨떨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생각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돌아가 벨을 울리자, 지호와 수열이 2층에서 내려왔다. 별채의 작업실에 있던 서재현도 저녁을 들기 위해 넘어왔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자 이지은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오늘 지역 홍보 공모전에 당선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서재현이 반찬을 집으려던 젓가락을 멈췄다.
 “공모전?”
 그는 반사적으로 지호를 봤지만, 정작 지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바로 옆에 앉아있는 수열의 초조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수열이, 네가 신청한 게냐? 형 작품으로?”
 수열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 변명을 둘러댔다.
 “그, 그게··· 아니라, 우리 반 애가 자꾸 형아 이상하다고 놀려서요. 진짜예요··· 딸꾹!”
 지호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특이한 행동을 흠잡는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기에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참에 이런 식으로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수열이도 그동안 많이 상처 받았었나 보다.’
 생각한 그는 책임을 느끼며 말렸다.
 “에이, 삼촌! 괜찮아요. 언제가 됐든 기회가 되면 공모전에 한번 참가해 보려던 참이었어요.”
 지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재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문제는 수열이가 자기 것이 아닌 네 작품을 허락도 없이 보냈다는 게다. 네가 평소 공모전에 관심이 있었건 말건, 그건 중요치 않아.”
 그는 수저를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한 눈빛으로 수열을 보았다.
 “밥 다 먹고 별채로 건너오너라.”
 서재현은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빠의 호랑이처럼 엄격한 모습을 본 수열은 벌써부터 울먹이며 오금을 저렸다.
 
 ***
 
 한 시간 동안 별채에서 혼쭐이 난 수열은 눈물 자국이 번진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와 먼저 방에 올라갔다. 꼬리를 물고 나타난 서재현은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지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지호야, 난 네 장래가 걱정된다.”
 그는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주무르며 말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질시를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재능은 행복을 위해 누려야지, 이용의 대상이 되어선 안 돼. 해서 난 네가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후에 알려져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가 그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요?”
 지호는 모르는 척 물었다. 서재현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차리게 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떤 재능인데요?”
 “이 바닥 일은 타고난 부분이 중요하다. 넌 남들에 비해 특출난 글 솜씨와 촬영 감각이 있고.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기는 쉽지 않다.”
 서재현이 말하는 점은 상당히 일반적인 부분만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호는 안도감과 실망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그나저나 이미 공모전에서 입상하게 된 이상 눈총을 피할 순 없을 게다. 네 작품을 보고 중학생이란 것까지 알게 되면 분명 화젯거리 삼고 싶어 할 테니.”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서재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가 알려지면, 너희 가족이 겪었던 일도 재조명받게 될 게야.”
 순간 지호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그건 제가 원치 않아요.”
 서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기 위해 널 부른 것이고.”
 “사실··· 그동안 늘 신세 지는 느낌이었어요. 저를 거둬주신 삼촌과 숙모, 수열이한테도 항상 감사해요. 모두 갚을 수는 없겠지만 언제고 반드시 보답할 거예요.”
 서재현이 잠자코 듣고 있자 지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까지 신세를 지고 싶진 않아요. 당장은 부모님이나 제 자신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고요. 그렇다고 당장 독립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자립하고 싶습니다.”
 지호의 의견을 끝까지 들은 서재현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 어미를 닮아 눈썹이 짙었으며, 맑고 큰 눈은 지혜롭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제 아비와 꼭 빼다 박은 오뚝한 코, 앙다문 입매에선 고집이 엿보였다.
 ‘자네 아들은 잘 컸네.’
 친구를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은 서재현이 말했다.
 “그래. 네 생각을 존중한다만, 천천히 상의해 보도록 하자구나.”
 
 시상식은 파주시청 강당에서 개최됐다.
 지호는 이지은과 수열이를 대동하고 참석했지만 따로 앉아야 했다. 수상자석은 맨 앞 줄, 그 뒤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관계자들이 앉고, 다음 가족이나 지인 등이 자리했다.
 수상자들 중 지호 같은 청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옆 좌석의 이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그나마 젊었다.
 ‘이 사람이 금상인가?’
 지호는 지레짐작하며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그를 발견하고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이십 대 초반의 남자 김현수는 대상 수상자 지정석에 앉은 지호를 보며 깜짝 놀랐다. 이번 공모전 최후의 승자라기에는 너무도 어린 모습 때문이었다.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니야?’
 현수가 그런 의심을 품는 찰나, 사회자가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를 본 수상자들이 술렁였다.
 “정도연 아니야?”
 “광고계 마이다스의 손!”
 “스트릿 포토그래퍼였을 때 친구 사진 한 방 잘 찍었다가 데뷔했다던데.”
 내용만 들어도 유명인사가 사회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사회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광고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정도연입니다. 같은 분야의 목표를 가진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박수 소리를 등에 업은 정도연이 스크린에 수상 작품을 띄웠다. 그녀는 이번 공모전의 금은동상 수상작을 차례로 소개했다.
 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대상인 지호 순서가 왔다. 정도연은 일등이란 타이틀에 맞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발표했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대상 수상작입니다. 자, 그럼 대상으로 선정된 영상을 함께 보시죠.”
 강당이 일제히 소등되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자 객석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지호가 촬영한 영상은 헤이리 마을 곳곳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언덕 위 벚꽃이 만연한 ‘헤이리의 봄’.
 진돗개가 혀를 할짝이며 개울 속으로 스며들어 부서지는 햇살을 마시는 ‘헤이리의 여름’.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아름드리나무를 물들인 붉은 단풍이 대조적인 ‘헤이리의 가을’.
 밤하늘의 환한 별무리를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눈밭이 아름다운 ‘헤이리의 겨울’.
 네 단락의 시퀀스(sequence)로 이루어진 십 분짜리 영상이 끝난 후 불이 들어오며 다시 나타난 정도연이 입을 열었다.
 “사계절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은 상징적이고 매혹적입니다. 이 사진들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혹시 여러분도 발견하셨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관객들은 대체로 흥분하거나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들의 면면을 뜯어보던 정도연은 잠시 애를 태운 뒤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문득,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작품을 어떻게 촬영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헤이리의 사계절을 뜻하는 제목에 집중하고 다시 봤죠. 그 결과 이 작품이 각 계절의 24시간 중 가장 특별한 순간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영상을 본 모두가 순간적으로 자신이 스크린 속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품은 헤이리 마을이 통째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을 품고 있었다.
 현수 역시 지호의 실력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영상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방금 본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분석했다.
 ‘카메라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
 영상은 몸을 직접 움직이며 촬영하는 달리쇼트(dally shot)는 카메라 기능을 이용한 줌(zoom) 방식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 자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화면이 흔들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레일을 깔고 움직이는 트레킹(tracking)을 이용해 촬영하는데, 이 작품은 직접 들고 움직이며 찍은 것이 분명했다.
 ‘구도를 정한 걸 보면 촬영 감각도 뛰어나고··· 중학생치고 말도 안 되는 테크닉까지 갖췄다.’
 오죽하면 비전문가인 관객들도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까 나온 마을 전경은 어떻게 촬영했대요?”
 “그러게요.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정말 이게 학생이 만든 거라고요?”
 “역시, 괜히 대상이 아니네요.”
 말소리가 들려오자 현수는 피식 웃었다.
 ‘중영대 연출과 합격하고 세상이 내 것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 중학생한테 밀릴 줄이야.’
 한편, 지호는 촬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내는 동생 수열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히 편집된 파일을 보냈네. 만약 미리 알았더라면 편집에 더 신경을 썼을 텐데.’
 그는 다른 수상자들이 들으면 거품 물고 쓰러질 만한 생각을 했다. 수열이 막무가내로 보내는 바람에 검토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모두를 놀라움에 빠트렸던 영상이 대미(大尾)를 장식한 가운데, 사회자 정도연이 객석의 넋 나간 침묵을 깼다.
 “편집 기술은 살짝 아쉬운 반면 구도를 잡는 감각은 현역에서 뛰는 프로 이상이라고 봅니다. 대상을 받게 된 수상자는 헤이리에 살고 있는 신지호 군입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아주세요!”
 지호는 갈채를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순금으로 된 상패를 수여받은 그는 몸을 돌려 식구들을 찾은 뒤 활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지은과 수열로서는 마음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날개를 펼치겠구나.’
 그 시각,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지켜보는 또 한 시선이 있었다. 수열의 초대를 받은 성우네 가족도 기꺼이 시상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성우가 단상 위에 올라간 지호를 보며 말했다.
 “헐! 수열이 말대로 저 형, 진짜 천재였나 봐.”
 입을 반쯤 벌리고 감탄하는 아들을 본 성우 엄마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천재는 다들 독특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 바보랑도 한 끗 차이래고.”
 그녀는 멈추지 않고 지호를 폄하했다.
 “저애 학교생활도 빤하다. 사진기를 자식처럼 끼고 다니면서 나무나 타는 별종을 누가 좋아하겠니?”
 “그건 그래. 나 같아도 우리 반 애가 나무에 매달려서 맨날 사진만 찍고 다니면 이상할 것 같아.”
 성우가 동조하자 성우 엄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답했다.
 “그래. 엄만 너희가 평범해도 친구들과 잘 지내고, 이 다음에 커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성우의 형, 정성진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신지호 얘기하는 거야?”
 두 사람이 나란히 긍정의 눈빛을 보내오자 그는 지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쟤, 나랑 같은 반이잖아. 우리 학교에서 완전 유명한데.”
 “유명하겠지. 어떻게 안 유명하겠니?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 날 집 없는 애처럼 혼자 사진만 찍고 돌아다니는데······.”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보며 성진은 황당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슨 소리야? 신지호가 성적이 얼마나 높은데. 게다가 키 크고 잘생겨서 여자애들한테 인기 짱. 운동 잘해서 남자애들한테도 인기 짱.”
 “헐, 대박.”
 성우가 입을 떡 벌렸다.
 성우 엄마 역시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충격 받은 얼굴로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막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가 했더니 죄다 동네 아이들이잖아? 저애, 우리 옆 동 사는 닥터 강 딸내미 아니니?”
 “맞아, 우리 반 얼짱 강지원.”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학생은 의사 집안인데다 타고난 미모를 겸비해 콧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녀 외에도 같은 학교의 동급생 다수가 응원하러 나와 있었다. 이것만 봐도 능히 교내에서 지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성진이 몽롱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나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지. 얼음공주 같으니라고.”
 “형은 맨날 게임만 해서 그렇지!”
 오히려 망신을 당하게 생긴 성우가 원망스럽다는 듯 태클을 걸었지만, 성진은 끄떡하지 않았다.
 “괜찮아. 나는 저 둘과 사는 세계가 다르거든. 신지호는 우리 학교 얼짱과 친한 사이지만 나의 전투토끼 리븐은 모르겠지.”
 그 말을 들은 성우 엄마는 속 터지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Chapter 3. 우연한 만남
 
 
 
 
 시상식이 끝난 뒤에는 출장 뷔페 업체가 꾸민 만찬이 준비돼 있었다. 수상자들은 대개 가족들과 삼삼오오 모여 함께 식사를 했는데, 현수는 혼자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접시를 든 채 멀찍이서 그를 바라보던 이지은이 지호에게 말했다.
 “저쪽에 가서 먹자.”
 “네, 숙모.”
 지호는 이지은과 수열을 동반하고 현수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되죠?”
 “아, 그래요.”
 현수는 접시들을 자신 앞으로 치우며 지호를 유심히 뜯어봤다.
 ‘이런 어린애가 대상 수상자라니,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믿기 힘들었다. 현수는 신기한 기분에 절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대상 수상자 맞죠?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더라고요. 축하해요.”
 거리낌 없는 태도에 지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참, 반말하셔도 되요!”
 “아, 그럴까요?”
 씨익 웃어보인 현수는 아직 손대지 않은 음식들을 중앙으로 빼며 이지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현수라고 합니다.”
 말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의 인사를 받은 이지은은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그리며 물었다.
 “아까 보니까 중영대학교 학생이라고요?”
 “하하, 네. 이번에 입학합니다.”
 “축하해요. 명문인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현수를 보았다. 일전에는 정신이 없어서 중영대학교란 사실을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중영대학교 연출과라면 이 분야에서 최고로 쳐주는 곳이었다.
 “부러워요. 저도 나중에 가고 싶은데.”
 지호가 말하자 현수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중학생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했어. 솔직히, 누군가 도와줬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을 정도야.”
 “에이, 말도 안 돼요.”
 지호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인사치례가 오간 후, 현수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수상자들끼리 합작으로 뭔가 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요새는 드라마나 웹툰 쪽도 다들 힘을 합친다고 하던데, 같이 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해서.”
 지호는 이지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무척 들떴다.
 “영화를 만든다고요?”
 “응. 학기 중에 같이 각본을 만들고, 방학 때 만나서 촬영을 하는 거야. 너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연히 도움이 되겠죠!”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친 지호가 이지은에게 슬쩍 물었다.
 “그렇죠, 숙모?”
 “그렇겠지.”
 이지은은 편안한 얼굴로 현수와 지호를 번갈아 보았다.
 “확실히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거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현수는 지호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재밌을 거야. 곧 겨울방학이니까 그때부터 시작해보자.”
 지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이 빨개진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감사해요, 현수 형!”
 
 ***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지호는 중 삼 겨울방학 동안 현수와 함께 작업했다. 오늘도 두 사람은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24시 카페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지호는 대략적인 줄거리가 담긴 시놉시스(synopsis)를 써왔고, 이를 모두 읽은 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왼데? 촬영 감각이 뛰어나다는 건 공모전 때 찍은 환경다큐 보고 익히 알았지만, 스토리텔링까지 수준급일 줄은 몰랐어.”
 그는 모니터에 반쯤 정신이 팔린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건 손 댈 게 없네. 내가 스토리 라인 그대로 살려서 트리트먼트(treatmen)를 만들어 볼게. 트리트먼트는 본편을 쓰기 전, 시놉시스 다음 단계야. 훨씬 구체적인 줄거리로 구성되지.”
 설명을 들은 지호는 홍조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몹시 흥분된 표정이었다.
 “트리트먼트? 그거, 저도 보여주세요!”
 “당연하지. 우린 비즈니스 파트너잖아?”
 현수는 지호에게 시익 웃어 보이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이어서 가방을 뒤적이더니 비닐파일을 건넸다.
 “트리트먼트를 써올 때까지 여기 적힌 추천도서 좀 읽고 있어. 연출과 입시 볼 때 권장도서목록이야. 그리고 별도로 내가 작법에 관해 도움이 됐던 책 몇 권 빌려줄게.”
 현수는 가방이 요술램프라도 되는 듯 무척 두툼한 책 여러 권을 주섬주섬 꺼내두었다. 지호는 가방 안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더 있어요?”
 피식 웃은 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끔찍한 소릴? 노트북에 책까지 들고 온다고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이것만 다 보는 데도 몇 달은 걸릴 거야.”
 “감사해요, 형. 이렇게까지 해주시고.”
 “아니야. 책은 내가 다 본 것들이니까 편할 때 돌려주면 돼. 그렇잖아도 중고서점에 넘기려 했는데, 제 주인 만났네.”
 시원한 대답을 들은 지호는 실실 웃으며 여섯 권이나 되는 책을 날름 챙겼다. 무척 좋아하는 그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현수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호야. 미안한데 형 먼저 가 봐도 될까?”
 “아, 약속 있어요?”
 지호가 아쉬운 기색을 보이자 현수는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일 오리엔테이션 겸 새내기배움터라고, 입학하기 전에 선배들이랑 친해지는 행사가 있어서··· 준비 하려면 일찍 들어가 봐야할 것 같아.”
 “네, 형. 그럼 어쩔 수 없죠. 또 연락드릴게요!”
 지호는 미련을 버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이내 노트북을 집어넣고 테이블을 정리한 현수가 먼저 일어났다.
 “넌 안 가?”
 그 물음에 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 잔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전 책도 좀 읽어보고, 다 마시고 갈게요.”
 “그래. 조만간 또 보자.”
 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카페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지호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책을 펼쳤다. 그는 인상 깊은 쪽수를 섬광기억 능력으로 찍어두며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읽어 내렸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커피 잔을 모두 비운 지호는 책을 챙겨서 일어났다. 비록 현수는 자신이 빌려준 책을 읽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릴 거라고 했지만, 섬광기억을 잘만 활용하면 금세 더 많은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섬광기억으로 책의 내용을 모조리 이미지화 시켜둔 다음, 연관성 있는 부분끼리 연결해서 틈 날 때마다 들춰보는 거야.’
 마음 먹은 지호는 바로 현수가 적어준 권장목록을 사러 근처 대형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에 도착한 그는 ‘영화·예술’이라고 분류된 곳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몇 권 뽑아 품에 간신히 안아들었다. 그리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낯선 사람과 툭 부딪혔다.
 “아!”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호가 앞을 바라보자 아기고양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여자가 서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엄청 잘 생겼잖아?’
 지호 역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관자놀이 핏줄이 투영되는 맑은 피부 톤과 긴 속눈썹이 청초해 보였다. 그녀의 미모에 잠시 넋을 놓았던 그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지호가 몸을 돌려 한 발짝 걸음을 떼려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뭐지?’
 그가 돌아보니 좀 전에 부딪혔던 여자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 책. 혹시 저한테 팔 수 없을까요? 책값은 두 배··· 아니, 원하는 대로 드리죠.”
 여자의 시선은 맨 위에 올려져있는 책, ‘시나리오 읽는 법 - 배우 편, 감독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뜬금없는 부탁을 하면서도 대뜸 가격부터 제시하는 그녀를 접한 지호는 황당했다.
 “죄송해요. 저도 봐야할 책이라서.”
 지호가 거절했으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딱 하루면 돼요. 전공서적인데 인터넷이나 서점 모두 절판 됐거든요. 방금 조회해 보니까 여기도 한 권 뿐이었어요.”
 그녀의 초조한 표정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지호가 생면부지(生面不知) 여자에게 책을 빌려줄 의무는 없었다. 상쾌한 아쿠아키스 향수 향을 풍기는 어여쁜 여대생의 부탁을 받고 본능적인 갈등에 빠졌을 뿐이다.
 ‘어차피 더 많은 사람이 보면 이 책을 쓴 작가한테도 뜻 깊은 일 아니야?’
 가볍게 합리화한 지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답한 지호는 나머지 책을 내려두고 ‘시나리오 읽는 법 - 배우 편, 감독 편’을 펼친 뒤 우두커니 서서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 모습이 여자의 눈에는 미련을 못 버리고 책 속 내용을 훑는 것처럼 보였다.
 ‘뭐하는 거야? 어차피 저 많은 책을 하루 아침에 다 읽을 수도 없을 텐데.’
 지호는 섬광기억을 통해 책 한 권을 사진처럼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작업 중이었다. 단번에 이토록 많은 양을 찍어내는 건 처음이었고, 그만큼 무리한 일이었다. 그는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자 몸을 휘청거렸다.
 순간 화들짝 놀란 여자가 물었다.
 “저기, 괜찮아요?”
 “아··· 네! 별 거 아녜요.”
 지호 자신도 적잖이 놀랐으나 애써 둘러대며 책을 덮었다. 아무리 신통한 섬광기억 능력이라도 단번에 모두 이미지화 시키는 건 무리였던 것이다.
 ‘괜히 오버 할 필요는 없지.’
 생각한 지호가 책을 건네며 물었다.
  “저도 꼭 필요한 책이라서··· 정말 내일까지 돌려주실 수 있죠?”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책이 그녀에게 완전히 넘어가기 전, 지호는 돌려받을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명시했다.
 “그럼 내일 오후 여섯 시에 서점 건너편 카페에서 주세요.”
 “알겠어요.”
 대답을 들은 지호가 책을 잡은 손아귀 힘을 풀었다.
  마침내 원하던 책을 손에 넣은 여자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냥 저한테 팔지 그래요?”
 참 뻔뻔하다.
 지호는 걸려들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안 돼요.”
 아쉬운 눈빛으로 품속의 책을 보던 여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내일까지 가져다 드리죠.”
 그녀가 먼저 자리를 뜨자 지호는 불쑥 의문이 생겼다.
 ‘수업 때 필요한 책이면 같은 반 친구들한테 빌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내 여자의 특이한 성격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빌릴 친구가 없나보지, 뭐.”
 
 집에 돌아온 지호는 서재현의 서재로 갔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편집되지 않은 상태의 메이킹 필름을 보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현역 시절부터 보관해 뒀던 필름 감상을 마친 서재현이 물었다.
 “학교가 어디랬지?”
 “두림예고 연출과에요.”
 지호는 덧붙였다.
 “기숙사도 있더라고요.”
 서재현은 어느 정도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물었다.
 “입학하게 되면 쭉 기숙사 생활을 할 생각인 게냐?”
 “네.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미 합격한 상태고, 이번 레벨 테스트에서 수석까지 노려볼 생각이에요. 수석 입학자에게는 학비, 숙식비, 교복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한다고 나와 있었거든요.”
 “알차게 준비하고 있구나. 숙모한테는 말했고?”
 “물론이죠. 수열이도 알고 있는 걸요?”
 “내가 제일 늦게 알았구나.”
 서재현은 섭섭한 기색을 숨겼지만 티가 났다.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서랍에서 통장 여러 개를 꺼냈다. 그다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여기에는 네 아버지, 어머니가 남긴 유산이 들어있다. 네 명의로 되어있지.”
 지호가 움찔 떨었다.
 그를 주시하던 서재현이 덧붙였다.
 “이 외에도 네게 남긴 재산이 더 있지만 성인이 된 후에 말해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집 떠나 생활하게 됐으니 네게 선택권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즉시 대답한 지호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서재현은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느긋하게 기다려 주려는 것이다. 치이익- 담뱃불 붙는 소리에 지호가 입을 열었다.
 “삼촌, 제가 없는 동안··· 부모님 잘 부탁드려요.”
 대답 없이 지호를 빤히 바라보던 서재현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뿌연 담배 연기를 내보냈다. 육안으로 보이는 언덕 위, 한 쌍의 부부를 고이 모셔둔 영생목(永生木) 한 그루가 보였다.
 “걱정 말거라.”
 서재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꾸벅 인사한 지호가 서재를 나갈 때까지도, 그는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
 
 지호는 다음 날 새벽 헤이리 집을 나섰다. 두림예술고등학교가 위치한 서울 송파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무려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기 때문에 일찌감치 출발한 것이다.
 “오! 춥다.”
 새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2월 중순의 차가운 공기를 피부로 쐬며 정신을 차린 지호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과 버스를 다시 갈아탄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림예술고등학교 정문에서 손목시계를 봤을 땐 정확히 오전 7시 30분. 시험 시작은 8시 정각이었다.
 ‘아슬아슬했네!’
 지호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눈에 익은 걸음걸이였다.
 “정성진?”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성진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호! 너도 두림예고에 지원했군.”
 지호가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이야, 반갑다. 우리 중학교에선 나 혼자 온 줄 알았는데.”
 그는 운동장을 곁눈질했다.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는데, 대부분 같은 학교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바로 옆에서 서서 그들을 바라보던 성진이 말했다.
 “난 애니메이션과인데, 너는 무슨 과?”
 “난 연출. 그나저나 빨리 들어가자, 늦겠다!”
 지호는 성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하는 구령대 앞에는 두림예고 교복을 입은 재학생들이 각 과의 팻말을 들고 서있었다. 연기, 뮤지컬, 무용, 실용음악, 패션모델, 연출, 애니메이션. 제법 다양했다. 그중 ‘연기과’ 앞에 모인 학생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우리 과겠지?”
 “망했다. 안 그래도 경쟁률 높은데.”
 “저 정도 비주얼이면 올 킬 아니야?”
 “야, 연기 발로해도 붙겠다.”
 “혹시 몰라, 모델과일지도.”
 이미 모여 있던 학생들끼리 지호를 살피며 경계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지호가 외향적인 학과일 거라고 확신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정작 지호나 성진은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학과를 찾아갔다.
 “또 보자.”
 지호가 말하자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 흩어졌고, 지호는 ‘연출과’ 팻말 앞에 서게 됐다.
 “에? 연출과?”
 “저 얼굴에? 저 옷발에?”
 다들 쉬쉬하지만 지호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헤이리에 있을 때도 숱하게 겪었던 일이기에 그는 모른 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꼬리를 물고 퍼진 작은 소요는 팻말을 든 재학생들에게까지 번져나갔다.
 “아! 딱 내 스타일인데. 아깝네.”
 “웃겨! 남자 스타일 신경 쓰기 전에 네 패션 스타일이나 신경 쓰지?”
 ‘모델과’ 팻말을 들고 있는 큰 키의 여학생이 비꼬자 ‘연기과’ 팻말 아래 서있는 예쁘장한 여학생이 마주 쏘아봤다.
 “모델과 많이 컸다?”
 두 여학생의 살벌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다른 과 팻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용음악- 실용음악-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뮤지컬과- 이동하겠습니다!”
 “무용과는 조금 떨어진 건물로 움직일게요!”
 “애니메이션과도 출발합시다!”
 그중에는 연출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출과 인원 체크 끝났습니다. 이동할게요!”
 크게 외친 재학생이 선두에서 안내하자 지호는 줄지은 학생들 맨 끝자리에서 따라갔다. 이내 ‘실기고사장’이라고 붙어있는 교실로 들어간 그들은 자유롭게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때, 교실 안으로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교사가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전 두림예고 연출과 학과장 배기영입니다. 오늘 최종실기고사는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반에 들어갈지 결정하는 레벨 테스트입니다. 그렇지만 규율은 엄격합니다. 떠들어도 퇴장, 핸드폰 제출 안 해도 퇴장, 커닝을 하다 걸려도 퇴장입니다. 이점 유의하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배기영은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 우람한 체격과 잘 어울리는 무뚝뚝한 음성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들어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시험지 뭉텅이를 풀어 교탁에 탕, 탕! 두드린 후 맨 앞줄의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시험지를 받은 학생들이 뒤로 전달했다. 머지않아 지호의 책상 위에도 같은 시험지가 놓여졌다. 그리고 마침내, 배기영이 통보했다.
 “시험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먼저 끝난 사람은 시험지를 교탁 위에 뒤집어서 올려두고 조용히 나가서 집으로 귀가하면 됩니다.”
 지호는 시험지에 나와 있는 문제를 응시했다.
 첫 번째 문항은 가장 감명 깊게 봤던 영화 내용을 세 줄로 요약해 쓰는 것이었다. 또한 두 번째 문항은 운문, 세 번째 문항은 산문을 쓰라고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실기고사라 그런지 생각 외로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치 않았다.
 ‘긴장했는데 별거 없네.’
 도전적으로 웃은 지호는 볼펜을 잡고 시험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볼펜 끝이 시험지를 스치는 소리부터가 남달랐다. 막힌 댐이 터진 것처럼 글자들이 술술 쏟아졌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문장력으로 퍼즐 맞추듯 스토리텔링을 해나갔다.
 일련의 과정이 마법처럼 이루어졌고 지호는 최종실기고사가 시작된 지 이십 분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가장 먼저 일어나 시험지를 제출하고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한편 시험지를 들고 읽어 내리던 배기영은 황당한 얼굴로 교실 문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놀람을 담고 있었다.
 ‘잰 뭐하는 애지?’
 
 
 
 
 Chapter 4. 악연, 아니면 필연
 
 
 
 
 사십 분 후 최종실기고사 마감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시험 감독관으로 참석한 배기영은 학생들에게 걷은 시험지 뭉치를 들고 교무실에 있는 교무행정사를 찾았다.
 “선생님, 이번에 입학 지원한 신지호라는 학생 원서랑 포토폴리오 좀 뽑아주세요.”
 그 주문에 따라 삼십 대 주부인 교무행정사가 능숙하게 프린트를 뽑아왔다. 그녀는 두 가지 서류를 넘기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야, 열여섯 살 때 파주시 지역홍보 영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었네요? 그런데 이 학생은 갑자기 왜······?”
 “평범한 애는 아닌 것 같아서요. 20분 만에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가버리더라고요.”
 “20분 만에요?”
 배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네받은 서류를 유심히 살폈다.
 “글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놀랐는데, 카메라도 잘 다루나 봅니다. 시청에서 주관한 거라면 규모가 꽤 큰 공모전인데.”
 중얼거린 그는 궁금한 눈빛을 보내는 교무행정사에게 지호의 시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내 교무행정사의 입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왔다.
 “감상문, 운문, 산문··· 색깔이 다 다르네요. 전공자가 아닌 제가 보기에도 생각이 참신하고 문체가 유려해요.”
 배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말아 지호의 입학 원서를 톡톡 쳤다.
 “여기 보면, 중학교 내신 성적까지 우수해요. 매 년 수석 입학자가 나오지만 이런 녀석은 오랜만입니다.”
 
 ***
 
 최종실기시험을 첫 번째로 마친 지호는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커피숍에 도착했다. 구석구석 돌아봐도 어제 만났던 여자 같은 미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보네.’
 지호는 따뜻한 핫 초코 한 잔을 주문해 출입문이 보이는 창가 쪽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가방에서 현수에게 빌린 작법에 관한 책 한 권을 펼쳤다. 그리고 벽걸이 시계의 분침이 여섯 시 십오 분을 넘길 때 즈음, 카페의 출입문이 열렸다.
 딸랑, 딸랑-.
 실내로 들어선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지호는 잠시 시야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어제 보여준 뻔뻔한 태도가 떠올랐다.
 ‘다시 봐도 예쁘네.’
 이내 지호를 발견한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맞은편에 떡하니 앉았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좀 늦었네? 책은 고마워요.”
 짧게 인사한 여자가 핸드백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딸려 나온 물건은 빌려간 책이 아닌,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 책은···?”
 “안 그래도 그 말 하려던 참이었어요. 하루만 더 빌려주면 안 될까요? 저보다 서점에 조금 일찍 도착했을 뿐이지, 그 책에 침 발라놓은 것도 아니잖아요?”
 “뭐라고요?”
 지호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아, 더워. 그나저나 이름이 뭐에요? 저는 유나에요. 최유나.”
 “전 신지호에요. 여튼, 약속했으면 돌려주셔야죠.”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몇 살이에요? 고등학생?”
 “네. 열일곱 살인데요.”
 “흐음.”
 그를 빤히 바라보던 유나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좀 줘 봐요. 고등학생 용돈으로는 구경도 못할 비싼 밥 한 끼 살 테니까.”
 “빌려간 책은 반납하지 않고요?”
 “하루만 더 빌려줘요. 하루 더 빌린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팔아도 좋고요.”
 그녀의 뻔뻔함은 점점 더해갔다. 이쯤 되자 완전히 얼굴을 구긴 지호가 딱 잘라 말했다.
 “저 돈 많아요. 지금 주세요. 당장.”
 “못 줘요.”
 “하, 그냥 좀 주시죠?”
 “지금 나한테 없거든요.”
 “뭐라고요?”
 “제본 떠놨고, 내일 찾으러 가요.”
 지호는 기가 찼다.
 ‘옛말에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한다더니.’
 그는 기분이 상해 말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딱 그쪽 얘기네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유나가 하얗고 앙증맞은 손의 엄지와 약지만 펼쳐 내밀었다.
 “대신 내일까지 꼭 가져다줄게요. 약속! 전 한국예술대학교 연기과 1학년이에요. 혹시라도 제가 책을 돌려주지 않으면 찾아올 수 있죠?”
 지호는 이번 만남이 종결되면 다신 그녀와 얽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완전 악연이구만.’
 결국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가 탁자 위에 올려둔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가며 답했다.
 “책 찾으면 여기 제 번호로 연락주세요.”
 그날 저녁, 유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의외로 빠른 소식이었다.
 “여보세요?”
 -책 돌려줄 사람인데요.
 “아하!”
 지호가 반가워하려는 찰나.
 유나가 말했다.
 -제가 공연일정 때문에 당분간 학교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거든요? 주소 좀 불러주세요.
 지호는 황당했다.
 ‘그럼 밥은? 밥 산다며?’
 처음부터 예뻐서 빌려준 것인데, 그림자도 못 밟아보고 시간만 까먹은 셈이 됐다.
 ‘똥 밟은 셈 치고 참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호가 수화기에 대고 두림예고에서 온 우편물에 붙어있는 운송장스티커의 주소를 읽어주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장지동 두림예고 기숙사······.”
 
 ***
 
 얼마 후, 지호의 수석 통보를 받은 이지은은 식구들이 한데 모여 축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모두 둘러앉자 가장인 서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석 입학을 축하한다. 이제 집 밖에서 생활하게 됐구나.”
 “네, 삼촌. 너무 걱정 마세요.”
 지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수열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으··· 흑흑! 끅··· 끄으.”
 ‘···생각했던 것보다 격한 반응이네.’
 지호는 피식 웃었다. 떠나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이가 있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편 이지은이 수열의 머리통을 껴안으며 달랬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자주 올 텐데 왜 울고 그래? 괜찮아. 아예 떠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지호에게 동의를 구했다. 부정했다가는 날이 새도록 수열의 울음소리를 들어야할지도 몰랐다. 따라서 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하핫.”
 미소를 간직한 채 식구들을 바라보고 있던 서재현이 막 생각난 듯 이지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참, 그리고 당신. 식사 마치고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네, 그래요.”
 이후에도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이 계속됐다. 자리가 정리될 때쯤, 지호가 설거지를 하러 일어나는 이지은에게 말했다.
 “쉬세요, 숙모. 제가 정리할게요.”
 “나도, 나도!”
 수열이 거들겠다고 나섰다.
 두 아이를 보며 이지은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 좀 할까?”
 흔쾌히 설거지를 맡긴 그녀는 서재현과 함께 서재로 갔다. 이내 소파에 앉은 서재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 학교 측에서 지호 정보 열람할 수 있을 거야. 담임선생님한테 미리 얘기해서 괜한 소문 안 나도록 당부해 놓아야겠어.”
 맞은편에 앉은 이지은 역시 동의했다.
 “그럴게요.”
 서재현이 말하는 ‘괜한 소문’이란 지호의 부모에 관한 것이었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호의 부모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작가, 여배우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주목받을 테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지호의 속사정까지 알게 될 터였다. 지호가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자 기분이 착 가라앉은 이지은은, 화제를 전환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나저나 애들 교복 사면서 책가방이랑 학용품, 옷도 몇 벌 사줘야겠어요.”
 “그래야지.”
 “수열이는 지호 따라 두림예고 간다고, 연기학원 등록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건 해봐야지.”
 서재현의 말을 들은 이지은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 가계부를 펼쳐 보였다.
 “여보··· 우리 애들이 돈을 많이 안 잡아먹는 편이긴 하지만, 클수록 점점 지출이 늘어갈 거예요. 그동안은 모아둔 돈으로 살았지만 그마저도 슬슬 동이 나고 있고요. 이제 애들도 컸고 노후대비도 할 겸, 저나 당신 중 한 사람 정도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에요.”
 그 말을 들은 서재현은 가계부에 적힌 숫자들이 영 불편한지 창가로 몸을 피하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내가 출강하면 돼. 들어오는 일거리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학기별 시간강사 자리 정도는 만들 수 있어.”
 “괜찮겠어요?”
 이지은은 걱정스레 물었다. 서재현의 명성을 감안했을 때, 대학교 시간강사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업계 후배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무 오래 쉬었어. 이제부터라도 다시 경력을 쌓아야 하지 않겠어?”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다시 영화를 찍을 순 없으니까. 분명 엉망이 될 거야.”
 서재현에게는 전작들로 인한 부담이 있었다. 다시 영화에 손을 못 대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나기에 그는 너무 오래 쉬었고, 기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지은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누구도 아닌 자신의 남편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길 다 찾은 걸 보면 내일 떠나긴 하나 봐요.”
 그녀의 시선은 서재현 어깨너머 창밖에 머물고 있었다. 그 눈길을 쫓던 서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인사하나 보군.”
 두 사람이 바라보는 영생목 앞. 지호가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지호의 기숙사 입소일.
 교무행정사는 행정정보공동이용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차례로 열람하며 특이한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을 분류했다. 그다음 내용을 요약해 보고서로 작성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즐겁게 임했지만 학생 수가 세 자리를 넘어가자 지루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휴, 대체 언제 끝나?”
 그녀는 탄식하면서도 다음 학생의 정보를 클릭했다. 순간 모니터를 응시하던 멍한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배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무슨 일 있습니까?”
 배기영이 다가와서 책상을 손으로 집고 섰다. 눈으로 모니터를 훑던 그는 나직이 침음했다.
 “허······.”
 학생의 호적등본에 부모가 모두 망(亡)이라고 표시돼 있던 것이다. 부모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명일, 김희수?’
 자연스럽게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고가 떠올랐다.
 ‘신지호가 그들의 아들이라니.’
 교무행정사와 배기영이 놀란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한 중년 여성이 우아하게 걸으며 교무실 안으로 등장했다. 바로 이지은이었다.
 “실례지만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 어느 분이시죠?”
 배기영이 손을 들며 대답했다.
 “제가 1학년 3반 담임입니다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신지호 학생의 학부형입니다.”
 “신지호 학생이요······.”
 그는 말을 길게 늘어트리며 모니터에 떠 있는 지호의 호적등본을 다시 한 번 보고 이지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오시죠.”
 배기영이 그녀를 안쪽 접객실로 안내했다. 티 테이블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녹차 티백을 얹어 대접한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지호는 위탁 가정에 맡겨진 케이스에요. 오래 전, 저희 부부가 지호를 위탁받게 됐죠.”
 배기영이 잠자코 있자 이지은이 말을 이었다.
 “그 애를 낳은 부모님은 유명한 사람들이였어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 애는 세간의 눈총을 받게 될 거예요. 이러한 상황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파악한 배기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주 개인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절차상 확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지호가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이지은은 배기영과 몇 마디 안 해봤지만 믿음이 갔다. 차분한 음성과 듬직한 체격이 절로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우리 지호 잘 부탁드립니다.”
 
 ***
 
 서재현은 오랜만에 까칠한 수염을 밀고 정장을 차려입었다. 단정하게 동여맨 검은색 보타이는 아내 이지은의 선택이었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자신을 강단으로 이끈 순간을 회상했다.
 -그동안은 모아둔 돈으로 살았지만 그마저도 슬슬 동이 나고 있고요. 이제 애들도 컸고 노후대비도 할 겸, 저나 당신 중 한 사람 정도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에요.
 그날부로 서재현은 다시금 가장의 책임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절망적인 심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여지껏 영화를 가르칠 수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 광범위한 작업을 어디부터 어떤 문장으로 말해야 할까?’
 강의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그는 혼란스러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초조할 때마다 버릇처럼 겪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어느새 손은 강의실 문을 밀쳐내고 있었다.
 “와아아!”
 학생들의 환호성에 정신이 아찔하더니, 머리가 어질어질 해졌다.
 ‘나도 이제 늙었군.’
 서재현은 강단에 올라 기대로 얼룩진 학생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비록 은퇴했다지만, 그는 영화계에서 스무 작품 이상의 수작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동안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과 수차례 작업했다. 이곳 학생들이 보기에 서재현은 그들이 열망하는 꿈길을 걸어본 우상인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서재현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강단에 서봅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부지 시절에는 내가 영화를 잘 안다고 교만했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게는 애석하게도 정해진 대답이 없습니다.”
 처음만 해도 뜨겁게 술렁이던 학생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동시에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세요.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은 현장에 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현장에서 경험해 왔던 이야기들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여러분의 질문들만으로 수업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두 시간 동안 답변 시간이 이어졌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끝날 때 즈음 서재현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마무리로, 진작 학교 측과 상의된 내용을 공지했다.
 “이번 학기 첫 번째 과제입니다. 다다음주까지 단편영화제작기획안을 약식으로 제출하세요. 기획안 양식은 제작 예산, 스태프 명단, 시놉시스, 트리트먼트까지입니다. 심사는 제가 직접 하며, 기획안들 중 하나를 선택해 여름방학 동안 영화제 출품용으로 촬영하게 될 예정입니다. 물론 제작비 전액은 학교 측에서 지원합니다.”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학생들은 흥분한 얼굴로 세상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중에는 현수도 끼어 있었다.
 ‘이번 기회만 잡으면 내 힘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입학하고 처음 온 기회였다. 더구나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국내 영화감독, 서재현이 직접 주관하는 것이었다.
 ‘절대 놓칠 수 없지.’
 굳게 결심한 현수는 단편영화제작기획안에 들어갈 시놉시스, 트리트먼트를 구상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머릿속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꺼뜨렸다.
 “후. 돌아버리겠네.”
 길게 한숨을 내쉬는 현수의 머리에는 까치집이 여러 개 생겼다. 거뭇거뭇한 수염도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었다. 그는 퀭한 눈으로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파지(破紙)들을 보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도저히··· 이 이상 안 나와.”
 문득 거울을 본 현수는 자신의 모습이 노숙자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씻고 면도를 한 뒤 벽걸이 시계를 확인했다.
 ‘휴, 시간이 다 됐군.’
 누군가를 만날 기분이 아니었지만, 약속을 펑크 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주기적으로 지호와 만나는 24시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모임 장소에 도착한 현수는 종업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먼저 와 있는 지호에게로 갔다.
 “형······!”
 지호가 몸을 일으키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며칠 새에 얼굴색이 누렇게 뜬 현수의 몰골을 본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짐작한 현수가 힘없이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골방에 갇혀서 구상만 해대다 보니 꼴이 이 모양이야. 좀 이해해 주라.”
 “에이, 아니에요.”
 지호는 그를 훔쳐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와. 한순간에 사람 인상이 바뀔 수가 있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창작의 고통이란 건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신기한 느낌이 더 강했다. 자신도 겪어야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현수는 지호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써오기로 한 트리트먼트, 과제가 생겨서 못 써왔어.”
 현수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지호의 반응은 뜻밖에도 밝았다. 지호는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반색했다.
 “마침 잘 됐네요! 형이 빌려주신 책 보고 제가 한 번 써봤거든요.”
 그는 들뜬 얼굴로, 가방에서 자신이 쓴 트리트먼트를 꺼냈다.
 “이거 한번 봐주세요!”
 현수는 여러 장 겹쳐 스테이플러로 찍어둔 트리트먼트를 한 장 씩 넘겨보았다. 보는 내내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지호는 절로 초조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현수가 물었다.
 “이걸··· 진짜 네가 썼다고?”
 “네. 어때요?”
 지호의 물음에 현수는 복잡한 표정이 됐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동안 말이 없던 현수가 간신히 답했다.
 “트리트먼트는 내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볼게. 말했다시피 과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지금은 객관적으로 읽기가 힘드네.”
 그 말을 들은 지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형, 아무리 바빠도 건강은 챙기세요.”
 “그래.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현수가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 몸이 좀 안 좋아서. 다음 모임 땐 나도 트리트먼트 하나 만들어 올게. 모임 일정은 서로 연락해서 다시 잡자.”
 “그래요, 형. 들어가세요.”
 지호는 개의치 않고 선뜻 이해해 줬고, 현수가 먼저 자리를 뜨면서 이번 만남이 서둘러 마무리됐다.
 집으로 돌아온 현수는 트리트먼트를 보고 또 봤다. 지호의 트리트먼트는 그에게 ‘벽’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도저히 이런 세심한 인물 묘사와 참신한 발상을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바람이나 쐴 겸 지호를 만나러 다녀온 뒤 더욱 답답해진 현수는 트리트먼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책장 위에는 지호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시놉시스가 있었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현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갈등에 빠졌다. 시놉시스, 트리트먼트는 말이 공동창작물이지, 함께 작업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지호 작품 그 자체였다.
 ‘이거면 무조건 기회를 따낼 수 있어.’
 이런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 밀려들었다. 굳건히 버티던 양심조차 욕망과 융화되어 버렸다.
 결국 현수는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래! 어차피 같이 영화도 만들기로 한 걸, 지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날려버릴 수는 없잖아? 같이 작업하면 돼.”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서로 좋은 일이야. 고등학생이 이런 기회를 어디서 잡아?’
 온갖 합리화 끝에 결정을 내린 현수는 시놉시스를 트리트먼트 바로 옆에 고정시켜 뒀다. 그는 지호에게 허락을 맡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채,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내용을 모조리 노트북으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2주 후. 서재현은 초저녁부터 서재에 등불을 켜두고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검토중이였다. 그는 여러 차례 안경을 썼다 벗었다 반복하며 피로감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이지은이 따뜻한 허브차를 들고 들어왔다.
 “피곤할 텐데 쉬엄쉬엄 해요.”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결정하기가 까다로워.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도 고민이란 말이야.”
 그녀는 창문을 열고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를 챙겼다.
 “담배 피울 때 창문 꼭 열고요.”
 미안한 표정을 짓던 서재현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지호랑 공동작업 한다던 친구도 중영대 연출과라고 하지 않았나?
 “현수요?”
 이지은이 되묻자 서재현은 무릎을 탁 쳤다.
 “그 이름 맞지? 그래도 아직은 내 기억력이 쓸 만하구먼.”
 “가만··· 혹시 현수도 당신 강의 듣는 수강생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서재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시놉이랑 트리트먼트만 봐서 판단하긴 이르지만, 발상이 엄청 참신하더군. 이 정도 구상이면 각본이 잘 뽑힐 수밖에 없을 게야.”
 “그래요? 안 그래도 마침 지호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해야겠네요. 당신이 말해줘요. 서프라이즈!”
 덩달아 흥미를 보인 이지은이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신호가 몇 차례 울린 후 지호가 전화를 받았다.
 “그래, 저녁은 먹었니?”
 -네, 숙모는요?
 “우리도 먹었지! 참, 오늘 재밌는 일이 있어서 전화했다. 네 삼촌이 얘기해 주실 거야.”
 -재밌는 일이요?
 “기다려봐, 바꿔줄게.”
 -네!
 수화기를 넘겨받은 서재현이 이어서 통화했다.
 “너랑 시나리오 공동작업 한다던 친구가 중영대 연출과 김현수 맞느냐?”
 -네, 삼촌.
 “허허, 놀라지 말거라. 삼촌 요즘 중영대 출강한다. 그 친구, 시놉시스랑 트리트먼트를 단독작품으로 제출했는데 발상이 참신하더구나.”
 -그래요? 하긴, 요새 과제한다고 꽤나 바쁜 것 같더라고요. 제목이 뭐예요?
 “제목? <완벽한 인생>이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기숙사 방에서 전화를 받던 지호는 제목을 듣고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완벽한 인생?’
 그건 바로 자신이 정한 제목이었다.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역시 직접 썼다. 그런데, 그 작품이 현수의 단독 작품이라니?
 “삼촌, 그게 정말이에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확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이쯤 되자 지호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확인해 봐야겠어.’
 현수는 자신에게 도움도 많이 줬기에 지호는 쉽게 단정 짓지 않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그는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게 누구야? 마이 파트너 신 작가 아니야?
 현수는 취기가 한껏 오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술자리인 듯 배경음이 시끌벅적했다.
 지호는 일단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형 뭐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물어봐, 물어봐. 내가 너한테 뭔들 못 알려주겠어?
 “트리트먼트 작성은 잘 되가세요?”
 지호가 떠보자 현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얼마 후 수화기 너머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용하게 전환되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미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네. 미안하다 지호야. 사실은···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영화 제작비를 지원해주는 공모전 비슷한 걸 하거든? 그래서 네 시놉시스랑 트리트먼트로 냈어. 교내 학생만 참여가 가능해서 일단 내 이름으로 내긴 했는데, 작품 선정만 되면 여름방학 때 학교 측 전액 지원으로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지호는 현수 이름으로 출품했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지만,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말에 기대를 걸었다.
 “그런 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럼 발표는 언제 하는데요?”
 -다음 주면 발표가 날거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이번에 뽑히면 좋은 영화 꼭 같이 만들어보자.
 “···알겠어요.”
 대답한 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같은 지역에서 와서 어쩌다 룸메이트까지 된 정성진이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다 말고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쳤다.
 “아씨! 죽었어! 망할 브론즈 새끼!”
 지호는 그를 보았다. 한참 동안 씩씩대던 성진은 이어폰을 귀에서 제거하고 침대로 가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 실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속편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지호가 불쑥 불렀다.
 “야, 정성진.”
 성진이 고개를 돌렸다.
 “왜?”
 “넌 사람을 믿어?”
 “같은 팀도 던지는 판에 남을 어떻게 믿어?”
 “던져? 팀 킬, 뭐 그런 건가?”
 “응.”
 대답을 듣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못 믿는다 치고, 만약 너한테 사기를 쳤어. 그래, 누군가 게임 아이디를 해킹했다 치자. 그럼 어떻게 할래?”
 “상상조차 할 수 없지. 내가 지른 스킨이 얼만데. 끝까지 쫓아가서 받아낸다.”
 성진의 결연한 태도에 지호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사실 그는 딱히 현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영화판 자체에 주인 없는 시나리오가 넘쳐나고, 먼저 읽은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할 정도로 질서가 무분별하다는 이야기를 서재현에게 들은 적이 있을 뿐이다.
 ‘혹시 모르니 각본이라도 써둬야겠어.’
 생각한 지호는 일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일주일 뒤, 선정된 단편영화제작기획안이 발표됐다. 현수의 예상은 적중했고, 지호가 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서재현은 결과를 발표하며 그에게 선정 이유를 꼬집어주기까지 했다.
 -기획안은 제작할 영화의 스토리에 맞춰 작성됩니다. 김현수 학생은 누구보다 참신한 구상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 한마디가 현수에게는 비수처럼 돌아와 꽂혔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중영대학교 재학생이 아닌 외부인은 제작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지호 역시 함께 작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굳이 지호를 끼워 넣으려면 힘들게 따낸 학교의 지원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젠장······.’
 양자택일의 고민에 빠진 현수는 책상 앞에서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밤이 새도록 스토리를 고민해 봤지만, 지호만한 발상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끝도 못 따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는 건 담배꽁초뿐이었다.
 현수는 허공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생초짜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리트먼트가 뭔지도 몰랐던 애가?”
 입술도 바싹 말라갔다. 그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열등감’이란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래,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어. 작품 구상과 실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은 차원이 다르니까.’
 결국 막다른 결정을 내린 현수는 지호에게 장문의 문자를 전송했다.
 
 ***
 
 띠리링!
 이른 새벽, 환하게 들어오는 액정 불빛에 지호가 슬며시 실눈을 떴다. 광고 문자인 줄 알고 넘기려던 그는 내용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났다.
 -[web발신] 먼저 미안하다, 지호야. <완벽한 인생>은 학교 측 지원을 받기로 결정됐어. 하지만 중영대 학생만 제작에 참여할 수 있다더라. 그래도 여름방학 기간 동안 촬영이 끝나면 영화제에 출품하니까 그때가 되면 상금도 나누고, 함께 작업할 기회도 생길 거야. 당장은 내가 영화제작에 유리한 환경을 가졌으니까 네가 양보해 줬으면 한다. 아이디어는 네가 제공했지만 본격적인 각본은 모두 내가 쓸 거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어찌됐든 이렇게 돼서 다시 한 번 미안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현실감을 느낀 지호는 실없이 웃으며 자문했다.
 “설마 내가 쓴 시놉시스랑 트리트먼트, 전부 도둑맞은 거야?”
 웹 문자를 받은 지호는 즉시 현수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에 의해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메시지가 영어로 반복된 후 전화가 끊겼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진 지호는 내일 중영대학교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만나서 얘기는 해봐야지.’
 다음 날 학교 수업을 마친 지호는 교복차림으로 흑석동에 위치한 중영대학교에 갔다. 목적지인 301동 아트센터는 정문에서 십오 분 거리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는 지나가는 학생을 아무나 붙잡았다.
 “저, 잠시만요! 실례지만 혹시 연출과 1학년 학생 강의실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무턱대고 물었지만 운 좋게 처음 잡힌 남학생이 알고 있었다.
 “누구 찾아 오셨어요?”
 “김현수 학생이요.”
 대답을 들은 남학생은 시익 웃었다.
 “마침 현수랑 수업이 겹치는데 잘됐네요. 강의실까지 같이 가요.”
 지호는 그의 도움을 받아 아트센터 5층 복도 가장자리 507호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절한 사람이네.’
 그런 생각을 한 지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불러줄 테니까 여기 잠깐 있어요.”
 남학생이 강의실로 들어가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김현수. 웬 고등학생이 너 보러 왔는데?”
 “고등학생?”
 현수가 고개를 돌려 지호를 보더니 즉시 일어났다. 그는 남학생에게 먼저 말했다.
 “태일아. 미안한데 나 오늘 강의 못 듣겠다. 교수님한테는 잘 좀 말해줘.”
 남학생, 유태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 네 동생이야? 거참, 형 하나도 안 닮고 잘 생겼네.”
 “시비는 걸지 말지?”
 그를 보며 톡 쏜 현수가 강의실 뒷문으로 갔다.
 “지호야.”
 문틀에 기대고 있던 지호가 등을 떼며 물었다.
 “형, 저한테 할 얘기 없어요?”
 현수는 주변을 살피며 답했다.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자리를 옮기자. 곧 강의 시작이야.”
 “네, 그래요.”
 지호는 평소랑 비슷했다. 그가 흥분하리라고 짐작했던 현수는 예상이 빗나가자 의아했다. 막상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때늦은 죄책감도 올라왔다.
 ‘왜 화를 안 내는 거지?’
 현수는 생전 처음 도둑질을 해본 사람처럼 초조한 상태였다. 그는 지호를 교내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커피를 주문해 마주보고 앉자, 제 발 저린 현수가 먼저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밥은 먹었어?”
 “학교 급식 먹었죠. 형은요?”
 “나도··· 학식 먹었지.”
 고개를 끄덕인 지호가 대놓고 물었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후······.”
 나직이 한숨을 내쉰 현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냐. 너도 알다시피 우리 파주시 영상 공모전에서 만났을 때 내가 먼저 너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제안했었고. 우리가 그걸 추진 중이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때마침 학교에서 좋은 기회가 와서 출품하게 됐어. 선정되면 당연히 너와 같이 제작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하필 연출부 인원을 우리 학교 학생으로만 구성하라는 거야. 솔직히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회인데··· 이미 당선된 작품을 물릴 수도 없잖아,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장황한 변명을 들은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뜻을 잘 모르는 것 같네요. 형 입장도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저랑 같이 영화를 만들기로 해놓고 배신한 점이 용서가 안 돼요. 형을 안 볼 때 안보더라도 왜 그랬는지 정도는 듣고 싶었어요.”
 또박또박 감정이 전해지는 어조를 들으며 현수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지호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무슨 짓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차마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는 여름방학 때 연출하게 될 영화로 영화제까지 나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기숙사로 돌아온 지호는 깜깜한 방안의 형광등을 밝혔다.
 “무슨 낮잠을 지금 시간까지 자?”
 불쑥 불을 켜자 성진이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아아! 눈부셔! 뭐야?”
 지호는 피식 웃으며 성진의 이불을 걷어내 버렸다. 곰 같은 덩치의 성진이 이불을 끌어안고 발버둥 쳐봤지만 지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우씨, 난 잘 때 깨우는 놈은 적으로 간주한다.”
 “그러지 말고 나와. 이 형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
 “기분이 좋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
 “빵 살게. 예쁘게 따라오면 우유도 쏜다.”
 지호의 단 두 마디에 성진의 태도가 달라졌다.
 “매점 문 닫기 전에 가시죠, 형님.”
 그들은 매점 앞 난롯가에 위치한 통나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지호는 성진이 먹는 모습을 감상하며 멍 때렸다. 그러자 입안 가득 빵을 우물거리던 성진이 물었다.
 “그러고 있을 거면 난 왜 데리고 나왔어?”
 “왜 데리고 왔는지 진짜 궁금해?”
 “아니.”
 짧게 대답한 성진은 우유를 까며 덧붙였다.
 “먹고 마실 양식까지 주셨는데 왠지 관심은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물어봤어.”
 그를 빤히 보던 지호가 피식 웃었다.
 “그냥 마음이 짠하네.”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하며 운동장 구석의 농구 코트를 바라봤다. 모델과 학생들 몇몇이 낄낄대며 서로 농구공을 빼앗고 있었다. 다시 멍 때리는 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성진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계정 해킹 당했냐? 티어가 뭔데?”
 “뭐?”
 지호가 되묻자 성진이 말했다.
 “왜, 너 저번에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해킹 당하면 어떨 것 같냐고. 근데 네가 지금 딱 해킹 당한 표정이길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브론즈로 강등되기라도 했어?”
 “뭔 소리야? 게임 잘 안하는 거 알잖아.”
 성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답했다.
 “인간의 4대 욕구 중 하나를 포기하고 있군. 수면욕, 성욕, 식욕, 롤욕.”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성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보상받긴 힘들겠지만 해킹당했으면 일단 신고라도 해봐.”
 ‘신고하라고?’
 안 그래도 지호는 어젯밤 잠 못 이루고 저작권법에 대해 찾아봤다. 그 결과 저작권 등록이 되어있지 않은 작품의 경우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만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학교 측에 항의할 생각은 진작 접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바로 서재현이었다.
 ‘삼촌이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어.’
 지호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내 주머니 속 USB를 만지작거렸다. USB 안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주일 간 써두었던 단편영화의 각본이 들어있었다. <완벽한 인생>의 완성작이었다.
 ‘여름방학 전까지만 이 각본을 영화로 만들면 저작권을 선점할 수 있어.’
 영화제작이란 각본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여러 장비와 그에 상응하는 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지호는 자신이 현수보다 더 좋은 각본으로,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현수는 자신의 계획을 짐작도 못하겠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걸음을 멈춘 지호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엔 미련을 버리자. 두고 봐. 한 방 먹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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