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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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1권 (1)

2017.02.14 조회 584 추천 3


 #프롤로그
 
 
 
 
 비가 주르륵 내린다.
 손을 뻗자 새하얀 연기 같은 것이 내 손을 통과해 지나갔다.
 그러고는 덧없이 흩어져 버렸다.
 “할아버지······.”
 그것은 영혼일까.
 사람의 영혼이 이렇게 흐릿한 걸까······.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얼굴에 흐른다.
 비에 젖어 버린 카메라.
 작동이 될지 의문이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뷰파인더에 보이는 그것은······.
 슬픔, 애환, 비애, 기쁨, 아련함······.
 느낄 수 있어.
 그 감정이 밀려온다.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나는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다짐한다.
 “네놈 얼굴······ 내가 찍고 말겠어.”
 
 
 
 
 #어긋난 여행
 
 
 
 
 수현은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학생들이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수현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요즘같이 디지털이 기본이 된 세상에 수현의 카메라는 낡은 필름 카메라였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엔 힘이 없었다.
 그 누구 하나 수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찰칵.
 수현이 신중하게 셔터를 눌렀다.
 필름 카메라는 마구잡이로 찍을 수 있는 디지털과는 달랐다.
 하나하나 신중하게 찍지 않으면 비싼 필름 값을 감당해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야, 쟤 또 시작이다.”
 “오늘은 뭔데?”
 “글쎄······ 저게 뭐냐. 찌그러진 캔 같은데? 쓰레기라도 찍나?”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는 좀 아니다.”
 “왜? 잘 어울리는구만.”
 몇몇 학생들이 수현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이었다.
 쓰레기란 말에 학생들이 키득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들의 웃음이 비웃음임을 알면서도 수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비웃으라면 비웃으라지.
 저들의 생각 따윈 아무것도 아니니까.
 “야, 너희들은 여전하네? 또 수현이 구경하고 있냐? 그럴 시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어라.”
 사진과 3학년 최민철였다.
 입학하자마자 뛰어난 센스로 선배들은 물론 교수님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수재였다.
 그가 등장하자 학생들이 저마다 그를 반겼다.
 “어, 너 언제 왔어?”
 “그러게? 멕시코에서 돌아온 거야?”
 “응, 그저께. 잘들 지냈어?”
 민철은 작년 겨울에 있었던 공모전에서 올해의 사진상을 수상하면서 이제는 학생이 아닌 엄연한 프로가 되었다.
 게다가 방학 동안엔 중국과 한국이 공동으로 추진한 ‘고대 마야문명 한중 조사단’의 정식 포토그래퍼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기가 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철은 과에서 인기가 좋았다.
 “야야, 너희들보다 수현이 사진이 백배는 좋을걸? 언젠가 걸작을 찍을 거라고.”
 “뭐, 보여 줘야 좋은지 알지. 저 녀석은 맨날 혼자 찍잖아.”
 “맞아. 그리고 그건 아니지. 걸작이라니.”
 “쟤가? 농담도 참. 크큭.”
 그가 인기가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재능을 들어 잘난 척하지 않고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기 때문이었다.
 “수현아.”
 민철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방학 동안 잘 지냈어?”
 수현은 자신의 앞에 민철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현아?”
 “그림자.”
 “응? 아······ 미안, 미안. 하하하.”
 민철은 수현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황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사람들의 말처럼 수현이 보고 있는 곳은 그저 찌그러진 캔이 있을 뿐이었다.
 “뭘 찍는 거야?”
 민철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수현은 몇 차례 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것도.”
 “응?”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무것도 안 찍었어.”
 수현은 민철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사진과 학생들은 민철에게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저 보라니까? 이상한 새끼.”
 “민철이가 일부러 말도 걸어 줬구만.”
 “하여간 싸가지가 없어요.”
 친구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곳을 벗어났다.
 “나중에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 수현아.”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도 민철은 수현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러나 수현은 그런 민철의 태도에 냉정하게 대답했다.
 “난······ 사람은 안 찍어.”
 
 
 
 “흠······.”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한동안 그렇게 계속 서 있던 수현이 결국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어떤가요?
 “수현 군. 자네, 사진을 찍은 지 이제 얼마나 되었지?”
 “어릴 때 할아버지와 가끔 찍던 걸 빼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은 건 이제 한 3년쯤 됩니다.”
 “기초는 그렇다 쳐도 본격적으로 배운 건 대학교 때부터라고 봐야겠군.”
 “네······.”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어릴 때부터.
 초등학생 때부터 수현은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달고 다녔다. 마음껏 찍고 또 찍었다.
 그러나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어쩐지 변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여나 할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를 찍을 수 있으면 확실히 대단한 일이야.”
 “그, 그런가요?”
 “하지만 딱 그 수준에서 머물고 있어.”
 “······네?
 “난 입시 때 자네 사진을 보고 뭔가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네.”
 “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반짝임이 없어.”
 신랄한 평가였다.
 기대를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평가에 수현은 뭐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사진을 찍어 보는 건 어떤가?”
 사진과 박철한 교수는 수십 장의 사진을 책상에 펼쳐 놓았다.
 “자네가 1년 동안 나에게 보여 준 사진이네.”
 “······.”
 “내가 자네 할아버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자넬 뽑은 것은 아니네. 자네 사진은 분명 좋아. 하지만 좋은 것뿐 감동이 없어.”
 “그 정도인가요?”
 “시야를 좁게 하면 결국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네. 어째서 자네는 인물 사진을 찍지 않는 거지? 자네는 온통 풍경만을 찍는군.”
 “그건······.”
 “벽을 부수지 못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걸 명심하게.”
 “네······.”
 “자네, 민철이와 동기지?”
 “그렇습니다.”
 “가끔은 민철이 찍는 사진을 보는 게 도움이 될 걸세. 그 친구는 올라운더니까. 한 가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네에겐 다양함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결국 사진을 평가하는 것은 사람이니까.”
 수현은 대답 대신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수실을 나왔다.
 나름 방학 동안 준비해 온 사진들이었다.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평가는 쓰디썼다.
 “나······ 재능이 없는 건가.”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조차 불안했다.
 “할아버지······ 나 어떻게 해야 하죠?”
 그도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람을 보기만 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멀미가 나는 것 같고 두통이 밀려왔다.
 분명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올해의 사진상 : 미소 [최민철]
 
 복도에 커다랗게 프린트되어 붙여진 사진.
 어린 소녀의 행복 가득한 웃음.
 원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결코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훗, 재능의 차이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사진은 최고다. 그래, 벌레나 찍는 자신과는 천지 차이였다.
 수현은 마치 사진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잡지에도 실린 사진이었지만 수현은 그저 얘기만 듣고 찾아보지 않았다.
 일부러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역시나 직접 그 사진을 보고 나니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계단을 내려가던 수현은 코너를 도는 순간 아래에서 황급히 달려오던 여자와 부딪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악!”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자 순간 시야는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해 버렸다.
 “아아······.”
 수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손을 더듬었다.
 부딪힌 상대방의 안위를 확인할 만큼의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앞이라도 보여야 상황 파악이라도 할 테니까.
 “수현 오빠? 괜찮아요?”
 목소리가 익숙하다.
 “여기 안경요. 죄송해요. 다치지 않으셨어요?”
 수현은 서둘러 안경을 썼다.
 살짝 흠이 난 듯 왼쪽 눈 쪽이 미묘하게 흐릿했다.
 “아아, 미니구나.”
 “네. 일어서세요, 오빠.”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는 이번 신입생인 홍미니였다.
 커다란 눈망울과 조금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비율이 좋고, 성격도 활발해서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얻는 아이였다.
 신입생 OT에도 가지 않았던 수현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녀는 수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거의 혼자 생활을 하는 수현으로서는 그저 서글서글하고 예의 바른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분명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헤에, 제가 좀 세게 부딪혔죠? 다치지 않으셨어요?”
 “응? 아냐, 아냐. 괜찮아.”
 수현은 창피한 마음에 황급히 일어섰다.
 엉덩이가 시큰거렸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여자랑 부딪혀서 넘어진 것도 모자라 아프다고까지 할 순 없는 일이었다.
 “방학 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아아······ 응, 잘 지냈지.”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동욱이랑 다른 애들하고도 출사 다녀왔었는데.”
 “응? 그랬어?”
 “네, 강원도 쪽으로요. 거기 근처에 오빠 할아버지네도 있지 않아요?
 “아, 응. 강원도에 사무실이 있으셔.”
 “꺄아! 아깝다. 오빠한테 연락해서 구경시켜 달라고 하는 건데!”
 “그, 그러네.”
 미니의 웃음은 아름다웠다.
 수현은 아마도 지금껏 자신이 봐 온 미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엔 꼭 구경시켜 주세요. 할아버님도 뵙고 싶구요.”
 “응? 아아, 그래.”
 “아싸! 꼭이에요!”
 “응.”
 미니는 수현의 말에 무척이나 기쁜 듯 두 손을 모으고선 팔짝팔짝 뛰었다.
 “미니야! 거기서 뭐 해?”
 계단 위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동욱이 패거리였다.
 “응! 갈게.”
 “빨리 안 오면 늦는다.”
 “알겠어! 오빠, 그럼 다음에 봬요.”
 “그, 그래.”
 미니는 수현에게 손을 흔들고는 위층으로 달려갔다.
 수현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가 동욱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 모습에 동욱은 피식 웃고는 미니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연락처도 모르는데.’
 설령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방법으로 그녀에게 연락을 하겠느냔 말이다.
 “뭐, 그럴 일도 없을 테니까.”
 하긴, 미니가 자신과 여행을 할 일도 없을 테고 그럴 기회가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현은 아직까지 시큰거리는 엉덩이를 쓱 문지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 배고프네······.”
 강의가 끝난 뒤에 수현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다. 친한 사람도 없는지라 쉬는 시간 없이 강의 시간표를 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학교에 나오는 것은 고작 3일. 물론 필요한 학점은 꽉꽉 채우지만, 수업들이 좀 타이트했다.
 “가는 길에 빵이라도 사 먹을까······.”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간은 오후 6시.
 점심때부터 강의를 들었던 수현은 지금까지 먹은 것이라곤 커피 한 잔이 고작이었다.
 꼬르르륵.
 “아아······.”
 수현은 당장에 편의점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행여나 누가 볼까 봐 학교 근처에선 그러지도 못했다.
 사진가 민찬수의 손자.
 그 꼬리표 때문에 수현은 마음 편히 행동도 하지 못했다.
 “빨리 집에 가야지 안 되겠다.”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학기 도중에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먹을 것을 좀 싸 와서 수업 중간중간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빨리 걷던 수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직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오빠, 오빠, 오빠!”
 “······어?”
 그제야 수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멀리서 자신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오는 여자는 다름 아닌 미니였다.
 “하아, 하아!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아, 미니구나.”
 “대답도 없구. 한참을 뛰었잖아요.”
 “아아, 미안. 그런데 무슨 일이야?”
 “오늘 개강 총회 있잖아요. 오빠는 안 가세요?”
 “응? 아······ 그렇지.”
 그런 게 있었나?
 수현은 오늘이 총회가 있는 날인지도 몰랐다. 누가 그에게 알려 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알려 준다고 하더라도 갈 생각도 없었다.
 “그게, 내가 좀······.”
 “같이 가요.”
 “······어?”
 “저 입학했을 때에도 안 왔었잖아요. 작년에 한 번도 안 오셨죠? 난 맨날 참석했는데.”
 “응? 그건······.”
 가 봤자 같이 이야기할 상대도 없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테니까.
 “난 괜찮아. 다음엔 참석할게.”
 “다음 언제요. MT 날엔 아예 학교에 오지도 않으실 거면서. 제가 봐 온 게 있는데.”
 “그, 그날은 정말로 몸이 안 좋았어서······.”
 “그러니까 오늘은 꼭 가야 해요.”
 “어? 어엇, 자, 잠깐만.”
 미니가 있는 힘껏 수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늘은 절대로 도망 못 가세요!”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 거야?’
 
 미니 때문에 결국 총회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수현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선배도 오셨네요?”
 “아, 어······ 그러네.”
 그러네라니.
 이런 바보 같은 소리가 또 어딨는가?
 “내가 데리고 왔어. 잘했지!”
 “응······. 그러네.”
 똑같은 말. 자신도 딱 저런 표정으로 얘기했을까 봐 수현은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자, 다들 모였으니까 시작할까? 신입생 환영회도 겸하는 거니까 신입생들부터 자기소개 시작하자.”
 과대표인 호성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저마다 돌아가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난 환영회도 오지 않았었지.’
 입학을 하자마자 아웃사이더의 길을 택한 수현이었다.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건 한편으론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까.
 “자, 다들 알겠지만 이쪽은 3학년인 최민철. 올해의 사진상을 휩쓸면서 정식으로 프로 데뷔. 그리고 이번에 마야문명 조사단도 다녀왔지. 다음 달에 잡지에 실릴 거니까 다들 한 권씩 사라고. 알겠냐?”
 “네!”
 “그리고······ 어?”
 수현을 본 호성은 조금 놀란 눈이었다.
 하긴, 이런 곳에 그가 있을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수현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괜히 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미니가 말했다.
 “이쪽은 3학년인 민수현 오빠. 다들 알지? 사진 작가 민찬수 님의 손자셔.”
 “우아······.”
 “정말이에요? 그 유명한 포터그래퍼신?”
 신입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 한 번도 이런 주목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수현이기 때문에 그는 미니가 제발 그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사진도 얼마나 잘 찍으시는데.”
 “미, 미니야. 이제 그만······.”
 “선배님! 저희도 사진 좀 보여 주세요!”
 “어······? 아······ 응.”
 “오빠는 교수님께만 보여 준다고. 아직 선배인 우리들도 못 봤는데 너희 차례는 멀었지.”
 “아니, 그건······.”
 “그쵸, 오빠?”
 “응? 응······ 뭐.”
 사실 누구에게라도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부턴가 막혀 버린 벽을 깰 수 있도록.
 어쩌면 미니에게 부탁하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친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 일을 기회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친절했으니까.
 “오, 벌써들 모였구나.”
 “교수님!”
 조금 전에 자신에게 모진 소리를 했던 교수다.
 그를 위한 소리임을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다시 보려고 하니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았다.
 “다들 모였으니까 이참에 OT 장소도 정하는 게 어떠냐. 이번에 특별히 이사장님께 지원금을 받아서 단체 출사 나가기로 협의 봤다.”
 “오오, 대단하신데요!”
 “에이, 또 강원도로 가는 거 아니에요? 작년에도 지원금 받는다고 하시고는 거기로 갔잖아요. 선생님 혹시 지원금 받아서 딴 데 쓰시는 거 아니에요?”
 “이 녀석이. 선생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강원도에서 찍을 실력도 안 되면서. 호성이 너 이번에 기초 사진학 또 재수강이더라? 4학년이나 돼서 기본도 못 익히고 그런 소리 하는 거냐?”
 “윽! 후배들 있는데 선생님도 참······.”
 교수의 질책에 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과대표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호성은 교수의 말에도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큰물에서 한번 놀면 바로 걸작이 나올 거거든요? 강원도 말고 이번엔 좀 해외로 나가 보는 건 어때요? 안 그래, 민철아?”
 “네? 아······ 네네. 뭐, 그렇겠죠, 선배?”
 민철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에 다시 한 번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술집에 퍼졌다.
 사진과 교수님은 민철을 바라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민철이만큼 찍으라고 바라지도 않는다. 민철이 이번에 마야문명 공동 조사단에 다녀온 건 너희들도 잘 알지? 알아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 게 얼마나 대단하냐. 선후배 할 것 없이 본받도록 해.”
 교수의 칭찬에 민철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몇몇의 여학생들은 그 모습마저도 멋있다고 생각한 듯 선망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철 덕분에 이번에 특별히 이사장님께서 사진과 OT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시는 거야. 다들 박수 한 번씩 쳐 줘라.”
 “이야~!”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민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반응했지만 구석에 앉아 있는 수현은 그런 그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손을 든 것은 민철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에 모든 학생들이 그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장소라면 수현이가 잘 알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수현의 할아버님께서는 유명한 포토그래퍼셨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그런 분과 함께한 수현이가 좋은 장소들을 많이 알 것 같은데요?”
 의외였다.
 민철이 자신을 추천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현이가······?”
 교수 역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더 당혹스러운 것은 정작 민철이 추천을 한 수현이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수현의 표정에는 당혹함이 역력했다.
 “네? 에······?”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서 입안이 말라 버린 듯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급하게 맥주를 마셔 목을 축이지만 오히려 그 바람에 사레가 들어 켁켁거릴 뿐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 말을 걸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 수현아. 네가 한번 추천해 봐라. 어릴 때 많이 다녀 보았을 것 같은데.”
 과대표인 호성도 민철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수현은 당혹스러웠다.
 출사 장소라니.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와의 여행?
 그런 걸 갔었던 적이 있었나. 수현의 기억 속엔 그저 할아버지의 집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밖에 없었다.
 찍고 싶은 것을 찍을 뿐.
 그것이 그의 할아버지가 항상 했던 말이었다.
 “혹시 마땅한 곳이 없으면 제가 이번에 조사단에서 갔던 멕시코는 어떠세요? 호성 선배 말대로 해외이기도 하고······ 그리고 저도 조사단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아! 멕시코?”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는 사이 민철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뭐야,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으면 그냥 말하지 왜 가만히 있는 자신을 끌어들여서는······.
 “멕시코라······ 그거 괜찮은데? 이거 민철이 덕분에 나도 여행 한번 갈 수 있겠는걸.”
 “선생님, 출사잖아요! 놀러 가시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나 출사지, 난 너희들이 찍은 사진을 평가해 주면 되거든?”
 “으악, 심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짙어질수록 수현은 자신이 있을 곳을 잃어 가는 기분이었다.
 순간, 민철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볍게 웃으며 수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야?’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
 ‘재수 없는 새끼.’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 자신이 할 말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 선배?”
 “먼저······ 가 볼게.”
 “벌써요?”
 “응. 미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니가 수현이 일어나자 그를 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지······.”
 “아냐. 다음에 보자.”
 “네. 다음에 밥 먹어요.”
 “으응······ 그래.”
 수현은 어색하게 대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뜨지만 그를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졌다.
 
 “아, 배야.”
 맥주를 연거푸 마셔서 그런지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에 배가 아파 왔다.
 다행히 화장실은 위층이었다. 다시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아서 수현은 그대로 위로 걸어 올라갔다.
 “수현 선배는 갔나?”
 “그런 것 같던데.”
 “참, 그 사람도 불쌍해. 할아버지가 아무리 잘났으면 뭐 해? 정작 본인이 사진을 못 찍는데.”
 “그래도 그 사람 처음에 입학할 땐 괜찮았다던데?”
 “그야 모르지. 그 사진을 본 사람도 없고. 교수님도 어쩌면 친분 때문에 뽑아 준 거 아냐? 얼굴마담도 필요하니까 말이지.”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수현은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철 선배하고는 옛날부터 아는 사이라던데. 어떻게 친구가 완전 다르냐. 재능은 역시 물려받는 게 아닌가 봐.”
 “그러게 말야. 그래도 그 선배도 속 좀 쓰릴걸. 친구는 그렇게 잘나가는데 자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야, 그건 그렇고 오늘 홍미니 봤냐? 옷 스타일이 완전 딱 내 취향이던데?”
 “미친. 그래서 뭐 어쩌려고? 네가 미니랑 뭐라도 해 볼 생각이냐?”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조심해라, 너. 걔가 어떤 앤지 알면 깜짝 놀랄걸.”
 “어떤 애라니?”
 “마녀 홍미니. 내가 걔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는데 그때부터 잘나가는 남자라면 선배든 후배든 상관없이 다 꼬리 치던 애야. 단물만 쏙 빨아먹고 버리기로 유명하다고.”
 “우엑, 진짜? 그렇게 안 보이던데.”
 “안 보이긴. 딱 봐도 색기가 좔좔 넘치는데. 설마 너 벌써 당했냐?”
 “당하기는 무슨······.”
 “하긴, 넌 잘난 것도 없잖아.”
 “시, 시끄러워.”
 두 사람의 대화는 수현으로서는 충격적이었다.
 홍미니가 그런 아이라고?
 언제나 당사자가 없는 뒷담화는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수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미니까지 싸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야, 너희들 지저분하게 왜 화장실 앞에서 수다야?”
 “뭐, 그냥. 헤헷.”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멍청이들아, 너희들이 말도 안 걸고 가만히 있으니까 가 버렸잖아. 오늘도 간신히 불러온 건데. 그 인간 민철 오빠한테 싸가지없이 대해서 내가 오늘 좀 골려 줄려고 했는데 말야.”
 미니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니를 두고 음담패설을 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한 척 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하, 너 그래서 그 선배하고 같이 온 거였어? 와, 홍미니. 소문대로 완전 마녀네?”
 “시끄러워. 너 또 헛소리할래? 이게 고딩 때부터 맞아도 안 고쳐지네.”
 “우악. 크크크.”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하여간 동욱이 넌 쓸데가 없다니까.”
 민철이 때문에 자신을 부른 거였다고?
 수현은 화장실의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크크,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건 그렇고, 너도 민철 선배한테 관심 있었냐?”
 “관심이 아니라 사귈 거거든?”
 “풋. 네가? 너 같은 스타일은 선배 취향이 아닐 것 같은데.”
 “시끄러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어쨌든 그 인간 기분 나쁘다니까. 우울하게 생겨서는 혼자 잘난 척.”
 “하긴 그건 그렇지. 크큭.”
 최악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유일하게 과에서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가끔은 밥도 사 주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웁, 우욱.”
 그 모든 게 거짓이라니······.
 수현은 변기를 붙잡았다.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 내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천공항.
 “캬아! 내가 해외를 다 가게 되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오빠, 촌티 나게 왜 그래요? 부끄럽게.”
 “그래, 녀석아. 네가 그렇게 소원하는 해외에 가는 거니까 제대로 된 사진 찍어야 한다.”
 “넵!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모인 사진과 학생들은 저마다 들떠 있었다.
 술자리에서 가볍게 나왔던 멕시코 출사가 정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학교의 지원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일이었다.
 “이게 다 네 덕분이다, 민철아.”
 “아닙니다, 선배.”
 민철이 조사단과의 인연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자란 금액을 민철의 회사에서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복지 사업 차원에서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계셨던 일이거든요. 그중에 저희 사진과가 들어간 것뿐이에요.”
 “그래도 이게 다 네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비행기 표에 숙박까지 공짜라니.”
 “하하. 아닙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비행기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수현만은 여전히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수현아. 하필이면 표 하나가 예약이 잘못되어서 말야.”
 “괜찮아.”
 수현은 자신의 표를 받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럼 수현아 이따가 보자.”
 “그래.”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혼자라니······.
 50명이나 되는 인원 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수현 역시 해외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몇 번 할아버지를 따라갔었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할 수 없지······.”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철의 회사에서 전산상의 오류로 인해 표가 한 장 부족하게 예매가 되었다고 했다.
 뒤늦게 한 장을 더 예매했지만 비행기는 매진. 할 수 없이 다음 비행기를 수현 혼자 타게 되고 만 것이다.
 “혼자인 게 편할지도 모르니까.”
 그 긴 시간을 옆에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어쩌면 더 곤욕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C-7게이트라······ 저기인가.”
 수현은 혼자가 익숙했다.
 꼭 과에서 아웃사이더라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혼자 지냈다.
 “반갑습니다.”
 “아, 네······.”
 게이트에 들어가 탑승 수속을 밟은 수현은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좌석에 앉았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진작가인 할아버지 때문에 해외를 많이 다녀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수현은 지금 모든 게 낯설었다.
 “그거······ 혹시 D-76 아니에요?”
 “네?”
 “우아, 이거 진짜 오래된 모델인데. 이걸 이런 곳에서 보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수현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아,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 그게······.”
 “그냥 보기만 할게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
 긴 생머리를 위로 질끈 묶고, 살짝 까무잡잡한 구릿빛 피부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 미녀였다.
 실제로 매끈하게 빠진 다리는 제법 탄력이 있었고, 잘록한 허리는 가늘지만 매력적이었다.
 수현은 카메라를 보기 위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녀가 부담스러워 살짝 몸을 뺐다.
 “이거 그쪽 거예요?”
 “아······ 네, 그런데요.”
 카메라를 한참 만지던 그녀가 이제야 수현에게 물었다.
 “이거 엄청 비쌀 텐데.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저도 여러 가지로 알아봤는데 못 구했거든요.”
 “단종된 모델이니까요. 그 당시엔 별로 비싸지도 않았어요. 단지 지금 구하기가 어려울 뿐이죠.”
 “그쪽은 어떻게 구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물건이거든요.”
 “대단한데요? 할아버님께서 사진을 좋아하셨나 봐요. 이게 나왔을 때만 해도 다루기 힘들다고 말이 많았었는데.”
 “네······ 뭐. 그렇죠.”
 “그쪽은 괜찮아요?”
 “네?”
 “이 녀석요. 보통 까다로운 카메라가 아니잖아요.”
 “아······ 네. 어릴 때부터 썼던 거라서요. 이거 말곤 다른 카메라는 써 보질 않아서······.”
 수현은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준 이 카메라 이외에 다른 것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가끔 디지털로 된 카메라들을 만져 본 적은 있었지만 이것만큼 손에 가는 것이 없어서 결국은 다시 이 카메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혼자 여행 가시는 거예요?”
 “네? 아뇨. 사정이 좀 있어서 도착해서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이번에 과에서 멕시코로 출사를 가게 되었거든요.”
 “그래요? 학교에서 해외도 보내 주고 좋네요. 그런데 보통은 멕시코시티로 가지 않나요?”
 “당연하죠. 저희도 거길 가는걸요.”
 수현의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이건 칸쿤 가는 비행기인데요?”
 “······네?”
 
 
 
 
 #마법사의 우물
 
 
 
 
 “하하, 혼자만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 거네요?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죠.”
 수현의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웃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안소미였다.
 혼자 비행기를 탄다는 것 때문에 긴장을 했던 탓에 목적지라든지 하는 것을 확인할 생각도 못 했었다. 그저 표에 적힌 대로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으니까.
 소미는 그런 수현이 재밌다는 듯 공항에 내려서도 연신 웃을 뿐이었다.
 “우, 웃지 말죠.”
 “크······ 크큭. 알겠어요. 미안해요. 그런데 갈 곳은 있어요?”
 “아뇨, 돌아가야죠. 다행히 편도 티켓은 아니네요.”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말해야 할지······.
 수현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회사에서 착오가 생긴 걸까?
 유독 그의 표만 예매를 하지 못했고, 부득이하게 예매한 표가 완전히 엉뚱한 행선지였다.
 ‘웃기지 마.’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민철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로 갈 방법도 없거니와 행선지도 확인해 보지 않고 비행기를 탄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보일까 봐 얘기도 못 할 일이었다.
 “에? 그냥 간다고요? 힘들게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걸요.”
 “하지만······.”
 “이왕 온 거 아깝잖아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여기도 찍을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
 소미가 수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째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푸는지 솔직히 수현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적지를 찾는다고 했죠? 내가 데려다 줄게요. 나도 유적지를 찾으러 왔거든요. 멋진 사진을 찍어서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 주자구요.”
 “자, 잠시만······!”
 소미는 수현을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수현에게 있어서 호의는 오히려 배신으로 돌아왔었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하지만 그런 의심을 품기도 전에 소미는 어느새 수현을 택시에 태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른 사람.
 소미는 그런 여자였다.
 
 
 
 “네? 민찬수 작가가 수현 씨 할아버님이라고요?”
 “아, 네.”
 “와아! 내가 대단하신 분의 손자를 만나고 있었던 거네요. 어쩐지 보기 힘든 카메라를 쓴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이건 정말 어릴 때부터 써서 그런 거고······. 할아버지를 뵌 지도 오래돼서 사실 별것 없어요.”
 “그래도요. 재능이란 게 있잖아요.”
 재능······.
 또 그 얘기다.
 정말로 할아버지의 재능이 물려지는 것이라면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그리고 수현 역시도 그런 아버지가 싫어 사진과에 왔지만 별다른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흐음, 왜요?”
 “벽에 막힌 기분이라서요.”
 수현은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칸쿤은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라는 이름답게 여기저기 해변엔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커플들이 잔뜩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변가에 있는 호텔에서 이렇게 미모의 여인과 있으니 수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샤워를 하고 나온 소미는 비행기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난 사람을 찍지 않아요. 아니, 찍을 수 없어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카메라로 사람을 보는 게 힘들거든요.”
 술에 취한 것인지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수현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재미없죠?”
 “아뇨, 재밌어요. 그렇게 뛰어난 작가의 손자도 나랑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다르지 않다뇨?”
 “저요, 사실 도망 온 거예요.”
 “도망요?”
 “네. 나 이래 봬도 제법 잘 나가요. 후훗. 돈도 많구요.”
 반감이 생길 수 있는 말이었지만 소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모습에 수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보여요. 이런 고급 호텔에 숙박하고 있는 걸 보니까요.”
 둘이서 함께 묵어도 방이 남을 정도의 호화스러운 호텔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쓰자는 말에 깜짝 놀라 극구 반대했지만 도무지 그가 예약을 할 수 있는 수준의 곳이 아니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이런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뻔했다. 로또를 맞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회사가 있어요. 부산에서 올라와서 자수성가하신 분이죠.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어엿한 회사를 차리셨으니까.”
 “대단하시네요.”
 “네, 대단하죠. 그런데 너무 대단하셔서 덕분에 임원들 누구도 제 말은 듣지 않아요. 꼭 왕따당하는 기분인걸요. 그런 거 알아요? 그냥 온실 속에 키워 놓은 공주님처럼 앉아만 있는 인형.”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할아버지 성격을 가장 잘 물려받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 안정화된 회사의 임원들은 그녀의 변화가 두려운 것이었다.
 “둘 다 대단한 할아버지를 둬서 고생하네요. 안 그래요?”
 “훗, 그러네요.”
 소미가 씨익 웃으면서 맥주를 들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그래서 여기에 왔어요.”
 “네?”
 “마법사의 물을 찾으러.”
 “······에?”
 수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저, 저기 소미 씨.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쉿. 조용히 해요.”
 “이건 범죄라구요.”
 “인생은 때론 모험을 해야 하는 법이죠.”
 “그러니까 이건 모험이 아니라 범죄······.”
 술기운에 따라오고 말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유적지인 치첸이사였다.
 “마야문명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낮에 표 끊고 와도 되잖아요.”
 “에이, 그럼 재미없죠. 게다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걸요. 우린 엘 카스티요에 들어갈 거니까.”
 엘 카스티요.
 치첸이사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확실히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꼭 들어간다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전 굳이 안으로 안 들어가도 되는데······.”
 “바뀌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소미는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바뀔 수 있는 문제였으면 진작 어떻게든 변했으리라 수현은 생각했다.
 “치첸이사의 뜻이 뭔지 알아요? 바로 마법사의 물이 있는 세노테의 입구라는 뜻이래요. 저 위의 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있대요. 신비한 마법의 물. 분명 그건 저곳에 있을 거예요.”
 그런 유치한 전설을 믿고 여기까지 온 건가?
 도대체 제정신인 것인지 수현은 그녀의 허무맹랑한 말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곳에 숨어들어 오다니 말이다.
 “술 취하셨어요?”
 “무, 무슨 말이에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요, 들키는 날엔 우리 모두 잡혀 들어갈 거라구요.”
 “싫으면 말아요. 난 갈 거니까.”
 소미는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힙플라스크를 꺼내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그 안엔 독한 양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아······.”
 그녀 역시 떨리긴 마찬가지였는지 양주를 꿀꺽 삼키고 나서야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술에 취한 게 분명하다.
 “좋아, 간다.”
 “소, 소미 씨!”
 수현이 말릴 새도 없이 소미는 그대로 울타리를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아씨, 내가 미쳐!”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 수현은 욕지기를 내뱉으면서도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하아! 하아! 빌어먹을 계단, 많기도 하네.”
 허허벌판에 지어진 유적지는 어두운 밤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경찰에 신고를 당하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두 사람이 움직인 새벽엔 달조차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미 씨,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빨리 내려가······.”
 수현으로서는 이렇게 몸을 움직인 적이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이마엔 땀이 주르륵 흐르고 안경엔 김이 서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도착하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도 힘들었다.
 “어때요?”
 그러나 그 순간 수현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다.
 “끝내주죠?”
 그때였다.
 마치 소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나타나 두 사람을 비추었다.
 엘 카스티요는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그 꼭대기엔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우연일까?
 마치 두 사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달빛이 환하게 어두운 입구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치곤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소미는 씩 웃으며 수현에게 말했다.
 “어때요? 아직도 안 갈 건가요?”
 수현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 대답했다.
 “아뇨. 갈 거예요.”
 
 “이거······ 꼭 동굴 탐사하는 것 같네요.”
 까마득한 어둠.
 소미는 처음부터 이러려고 한 것인 듯 품 안에서 손전등을 꺼내었다.
 유적지에 무단으로 침입하기 위해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라니······. 수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된통 당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한 이유.
 이상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세노테라고 알죠? 멕시코에 있는 커다란 자연 호수죠. 옛날부터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었대요. 그리고 그런 제단은 여러 곳곳에 있죠.”
 소미는 신이 난 듯 설명했다.
 하지만 수현으로서는 솔직히 관심 없는 일이었다.
 “성스러운 제단이라고 하지만, 사실 옛날부터 제단이란 건 결국 제물을 바치는 곳이었죠.”
 “그래서요?”
 “특히 영적인 능력이 강한 제단일수록 더 강한 제물이 필요하죠. 순수하고, 깨끗한.”
 “순수하고······ 깨끗한?”
 “어린 소녀랄까?”
 “에엑!”
 “호호, 농담이에요.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어요.”
 “근데 그러면 오히려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괜히 귀신이라도 들러붙으면······.”
 “푸핫! 귀신이라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은근 겁이 많으시네요. 여기까지 와서는.”
 그녀는 수현의 말에 배를 잡으면서 웃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런 소미의 태도에 수현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중얼거렸다.
 “전 오기 싫다고 했거든요.”
 미로와 같은 계단 주위의 벽은 온통 해골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그것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수현은 영 찜찜한 기분이었다.
 똑-.
 “응?”
 똑- 똑-.
 “허어?”
 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한 노크 소리였다.
 “뭐, 뭐야!”
 수현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왜 그래요?”
 뒤따라오던 소미가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손길에 오히려 수현이 화들짝 뒤를 바라보았다.
 “네? 아, 아니에요.”
 뭐였지?
 수현은 자신이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인가 생각했다.
 확실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긴 했다.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유적지에 무단으로 들어가다니 말이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끝이 보이지 않았던 계단도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수현은 조금 전에 들렸던 꺼림칙한 소리를 떠올리며 소미의 옆에 좀 더 가까이 붙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자 소미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이내 곧 별일 아니라는 듯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이게 진짜······ 우물이에요?”
 수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법의 물이 있는 우물이라더니······ 우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호수가 아닌가?
 “세노테는 우물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사실 동굴 속에 있는 호수 같은 곳이에요. 관광객들이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군요.”
 “하지만 이 안에 이런 게 있을 것이라곤 저도 생각 못 했는걸요? 그것도 이렇게 거대한 호수가 말이죠.”
 유적지 아래에 이런 신비한 동굴이 있을 것이라곤 소미 역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호기심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물론 이 일이 불법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일탈이었다.
 “마치······ 영화 같네요.”
 “네. 이런 풍경은 정말 처음인걸요.”
 수현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불법 침입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만요.”
 수현은 카메라를 들었다.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일이었다. 아마도 사진과의 그 누구도 이런 사진을 찍을 순 없으리라.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부터 종유석, 기괴하게 생긴 석순까지 수현은 오랜만에 마음껏 사진을 찍고 싶은 광경들이 잔뜩 있다고 생각했다.
 “저도 한 장 찍어 줘요.”
 “네?”
 “히힛. 여기까지 왔으니 기념사진 하나 정도는 찍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수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인물 사진을 찍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뷰파인더로 사람을 보는 순간 매스꺼움이 올라오는 이유 불명의 병.
 의사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수현은 스스로 이것을 병이라고 생각했다.
 “아, 죄송해요. 수현 씨는······.”
 소미는 아차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사과를 하는 그녀를 보니 수현의 마음이 무거웠다. 사진 한 장 찍어 주지도 못하는 자신이라니······.
 ‘한 장 정도는 가능할까······?’
 여기까지 온 것도 소미 덕분이었다.
 보답의 의미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 줘야 할 것 같긴 했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슬쩍 구도만 보고 눈을 감으면 괜찮을 거야.’
 혹시 실패해도 어두워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잠시만요.”
 수현은 심호흡을 했다.
 얼마 만에 카메라에 사람을 담는 거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은 뒤로 단 한 번도 사람을 찍어 본 적이 없는 수현이었다.
 “후우······.”
 “괜찮겠어요?”
 “네? 그럼요.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긴장할 수밖에.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소미에게만큼은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현은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는 큰맘 먹고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갔다.
 ‘······어?’
 잘못 본 건가?
 순간 흐릿하게 무언가 소미의 뒤에 보인 것 같았다.
 “치즈!”
 그런 사실을 모르는 소미는 브이 자를 그리며 씨익 웃었다.
 “아! 죄, 죄송해요. 하나······ 둘······.”
 수현은 깜짝 놀라며 다시 카메라를 쥐었다.
 뷰파인더로 보이는 소미의 얼굴.
 순간 수현은 매스꺼움을 느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잠깐 보았을 뿐인데 이 모양이다. 사진의 구도 같은 것은 카메라로 보기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해 둔 수현이었기에 그는 뷰파인더에서 서둘러 눈을 떼며 셔터를 누르려 했다.
 찰칵-.
 셔터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 퍼졌다.
 플래시가 어둠 속에서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수현 씨······?”
 브이 자를 그리고 있던 소미는 카메라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 있는 수현을 보며 자세를 언제 풀어야 할지 난감해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손을 내렸다.
 “뭐람, 지금 장난치는 거예요?”
 그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수현.
 아무리 당당하게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소미 역시 여자였다. 이런 어둠 속에서 혼자 남아 있는 건 그녀에게도 무서운 일이었다.
 “에이, 그만하세요.”
 소미는 아닌 척 웃으며 수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그만. 끝! 재미있었으니까 이제 올라가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으니까.”
 소미는 구부정하게 있는 수현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날이 밝기 전에 올라가야죠. 더 있다가는 정말 경찰서로 잡혀 갈지도 몰라요.”
 어린아이를 달래듯 소미는 말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느껴지는 어둠이 주는 공포에 애써 침착하려고 말이 많아지는 게 분명했다.
 “수, 수현 씨?”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러나 수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떨리는 손으로 소미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수, 수현 씨!”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몸.
 의문은 비명이 되어 유적지 안을 가득 채웠다.
 똑- 똑- 똑-.
 우물 위로 물이 마치 노크 소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수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미의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둠뿐이었다.
 단순히 유적지 안에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닌······ 절대적 암흑.
 손을 저어 봐도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조금 전 플래시의 빛이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수현의 두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 거기 누구 없어요?”
 유적지 안에 불법 침입을 한 주제에 소리를 치는 게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있던 소미도 보이지 않고 오직 혼자 남았다.
 행여나 꿈이 아닐까 싶어서 수현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려 했다.
 “어······?”
 그러나 그 순간 묵직한 무게.
 당황스러운 나머지 잊고 있었던 카메라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음을 그제야 수현은 알아차렸다.
 찰칵. 찰칵.
 셔터는 눌러지지만 플래시는 터지지 않았다.
 “고장이라도 난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혹시나 유적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서 자신이 기억을 잃고 쓰러졌던 건 아닐까?
 행여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면 어쩌지?
 난생처음 와 보는 곳에서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자 수현은 갑자기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것 같았다.
 “저, 정신 차려, 민수현.”
 수현은 자신의 뺨을 때렸다.
 얼얼한 기분이 들자 그래도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야 한다.
 이대로 생매장당해서 죽을 순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지자 자신의 표만 잘못 준 민철이 원망스러웠다. 일부러 자신만 떼어 놓으려고 했다는 생각이 미치자 수현은 화가 났다. 후배들 사이에서 자신의 뒷담화를 하던 미니에게도 열이 받았다.
 “나쁜 놈들······.”
 심지어는 이런 곳에 가자고 우겼던 소미마저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가. 특히 소미에게 원망따위를 하다니 말이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화를 내는 건······ 사실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걸어도 어둠뿐이었다.
 수현은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했던 모든 원망들이 이제는 서서히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포가 포기가 되고 익숙함이 될 때쯤, 수현은 누군가를 만났다.
 “사, 사람이다!”
 저 멀리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얼마 만에 사람을 보는 건가!
 시간도, 날짜도 셀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수현은 마치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드디어 만나는 기분이었다.
 “저기요! 저, 저기요!”
 수현은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그를 놓치면 더 이상 영원히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
 수현의 목소리를 듣자 그가 일어서려고 했다.
 그의 행동에 당황한 수현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주세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분에 달리고 달려서 수현은 겨우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헥······헥······!”
 운동과는 거리가 먼 그였기 때문에 얼마 달리지 않은 것 같은데도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저기, 저 좀 도와주세요.”
 “······.”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허리를 숙여 겨우 호흡을 정리한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
 수현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황급히 사과를 했다. 숨이 차올라서 그를 붙잡고 기대었는데······ 그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소녀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꼬마······야?”
 수현은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이는 마치 수현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여기가 어딘지 알아?”
 수현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 생각했기에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평상시였다면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그 역시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런 아이에게라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가 길을 잃어서 말이야. 하하······ 이 나이 먹고 길을 잃다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수현은 민망한 마음에 횡설수설 말이 많아졌다.
 사람이 급하니 이렇게 변하는 건가. 처음 보는 아이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수현은 대답 없는 아이의 반응에 결국 포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아이를 붙잡고 뭐 하는 건지.”
 머리를 긁적이며 수현은 아이의 옆에 앉았다.
 “혹시 너도 길을 잃은 거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미안해.”
 수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말했다.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혼자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어디서 왔어? 부모님은? 어쩌다가 혼자······.”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수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정신 좀 봐. 혹시 멕시코 사람인 건가? 에······ 그러니까.”
 수현은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우선 특이한 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기념품 가게에서나 팔 것 같은 오래된 부족의 옷.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전통 무늬로 짠 끈을 이마에 두르고 있었다.
 “캐, 캔 유 스피크 잉글······.”
 떠듬떠듬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는 순간 웅크리고 있었던 아이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하늘색의 영롱한 눈동자.
 마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비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외국인들의 푸른 눈동자는 많이 보았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눈동자가 있겠는가?
 “어······?”
 수현은 영어를 하려던 것도 잊고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빠져들 것 같은 호수를 닮은 그것.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소미가 말했던 세노테라는 동굴 속 호수가 떠올랐다.
 그것은······.
 신비한 마법사의 물.
 아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보여요?”
 순간 어둠뿐이었던 공간에 새하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현은 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으아아아악······!”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돌풍이 수현을 휘감았다. 그대로 있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수현은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이 잡혔다.
 수현은 자신의 품 안으로 그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수현은 깊은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여긴······?”
 수현은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에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설마 그 유적지에서 나오게 된 걸까?
 그 빛 때문에?
 수현은 조금 전 자신과 함께 있었던 소녀를 찾았다. 그러나 분명 품 안에 꽉 안고 있었던 그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둠 대신 보이는 것은 잔잔히 흐르는 물과 대지뿐이었다. 조금 전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분위기에 수현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긴 또 어디야······?”
 수현은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큭! 아프잖아.”
 꿈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말이 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수현은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목이 탈 정도의 뜨거운 열기와 피로가 가득한 몸을 이끌고 수현은 무거운 발을 겨우 겨우 이끌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 저기······!”
 흐릿하게 보이는 무언가.
 수현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는 그 모습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사르······!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람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달려왔던 수현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만.”
 수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말을 한 것치고는 두 사람은 마치 수현이 없는 것처럼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거 어쩐지 좀 전과 비슷한 상황인 거 같은데······.’
 그래도 그 아이는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바라봐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인 이 두 사람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이사르.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하늘의 계시입니다. 노여움을 풀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어린 아이이지 않습니까.”
 “지금 신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지팡이를 잡고 있는 노년의 남자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구릿빛 피부의 남자에게 대답했다.
 “윰. 당신은 모든 마야인들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이 클란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건 거역할 수 없는 신의 계시입니다.”
 이사르라 불리는 노년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아······.”
 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을 타고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이시여······ 어째서······.”
 “그녀는 가지지 말아야 할 힘을 얻고 말았습니다. 그릇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큰 힘······. 그녀 혼자서 그것을 감당해서는 안 될 터.”
 이사르는 지팡이를 들어 주위를 천천히 두르며 말했다.
 “이곳에 거대한 우물을 지으십시오, 윰. 그리고 그 깊숙이 그녀를 감추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높은 탑을 세우십시오. 우리는 앞으로 그곳을 엘 카스티요라 부를 것입니다.”
 “엘 카스티요? 방금 엘 카스티요라고 했죠? 저기 할아버지, 잠시만요.”
 수현은 깜짝 놀라며 이사르에게 말을 걸었다.
 엘 카스티요가 어디인가.
 바로 그가 들어온 거대한 피라미드이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조차 모르게. 신을 속일 수 있도록 그 주변에 많은 우물을 만들어 성스럽게 모십시오. 그녀가 잠든 우물에 대한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매년 세노테에서 화려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저기······ 여보세요. 이봐요? 제 목소리 안 들려요?”
 “그리하면······ 피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 역시 신만이 알 뿐.”
 “나 좀 살려 줘요.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네?”
 수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두 사람은 그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
 참다 참다 못한 수현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 씨발! 나 좀 보라고!”
 수현은 있는 힘껏 남자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때였다.
 수현과 윰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친 것은.
 “······어?”
 그때 천천히 이사르의 말이 들려왔다.
 “언젠가······ 신의 뜻이라면······ 그자만이 만날 수 있겠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돌풍이 수현의 주변을 에워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있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새하얀 빛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흐르던 물도 광활한 대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곳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새하얀 빛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으아아아악······!”
 수현의 절규가 점차 바람 속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자신도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변하다
 
 
 
 
 “헉······ 흐억!”
 눈을 뜬 수현은 낯선 풍경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창문 밖으로 보였다.
 “여긴······.”
 마치 깊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몸이 뻐근했고 기운이 없었다.
 “수현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수현이 돌아보자 거기엔 소미가 있었다.
 “정신이 드세요?”
 소미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이곳이 멕시코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된 비행기 표로 혼자 떨어졌던 자신이 그녀와 함께 유적지에 몰래 들어갔던 일까지, 천천히 모든 게 기억났다.
 “소미 씨?”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보름이나 누워 있었어요.”
 “보, 보름요?”
 “네.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었어요. 다행히 다치신 곳은 없다는데 깨어나지 않아서······.”
 출사 여행 기간인 일주일이 훌쩍 지나 버렸다. 이미 다른 학생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았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우악!”
 수현은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소미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혼수상태에 빠지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라고······. 정말······ 너무 놀라서······.”
 소미의 좋은 향기가 수현의 코에 닿았다.
 멕시코의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향기는 매력적일 정도로 달콤했다.
 “정말 놀랬다구요.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아, 그날 우물 안으로 빠져서 제가 끄집어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수현을 안고 있던 소미는 조금 진정이 된 듯 그에게 말했다.
 살짝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수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름이나 자신의 옆을 지켜 주고 있었던 것인가?
 기껏해야 첫날 하루 처음 만났던 사이인데 이렇게 자리를 지켜 준 그녀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요······?”
 “후훗. 덕분에 결국 무단 침입으로 잡혔지만 말이에요.”
 소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수현은 그녀가 경찰에 잡혔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어, 어떻게 됐어요?”
 “뭐, 괜찮아요. 여행객이라 잡아뗐죠. 몰랐다구 말이에요. 하하······. 벌금을 좀 많이 내긴 했지만 말이에요. 회사에서 변호사를 보내서 잘 끝났어요.”
 “그랬군요······.”
 “돈으로 해결 못하는 일은 없네요.”
 소미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는데 결국 회사의 도움을 받게 된 그녀였다.
 수현은 자기 때문에 그녀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이렇게 깨어나 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그리고 재밌었잖아요? 후훗. 우리 둘만의 모험 말이에요.”
 소미는 살짝 혀를 내밀며 애교 있게 웃었다.
 그녀가 이렇게 귀여운 여성이었는지 수현은 새삼 느꼈다. 첫날 저녁에 섹시한 이미지완 정반대의 모습.
 마치 그녀의 주위로 화사한 빛이 감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수현은 아마도 그녀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 안경하고 카메라도 가져왔어요.”
 “감사해요.”
 “배고프시죠? 일어나면 뭐라도 좀 먹어요.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해 둘게요.”
 카메라와 안경을 건네받은 수현은 그녀에게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너무 폐를 끼친 것 같아요. 저 때문에 계획도 틀어지고······.”
 “후훗. 맞아요. 수현 씨 보느라 여행도 못 하고 계속 여기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수현을 나무라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 풍기는 느낌은 그대로였기에 수현은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못 본 곳들 열심히 구경 가야죠. 수현 씨를 제 찍사로 고용할 거니까, 단단히 각오하세요. 못 찍으면······ 알죠?”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면서 위협했지만 그 모습마저도 귀엽게 보여 수현은 피식 웃었다.
 “어머? 웃어요? 흥, 두고 봐요. 지옥의 일정으로 돌아다닐 거니까.”
 “어디든 좋지만 치첸이사만큼은 빼 주세요.”
 “쿠쿡, 그건 저도 찬성이네요.”
 소미 역시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
 시간이 너무 지나 버려서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이 갔을 가능성이 컸다.
 “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대학교에 들어와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였다. 연락 두절이란 소식을 들으면 과연 그는 어떤 기분일까?
 “뭐······ 그 인간이라면 알아도 찾을 생각도 안 하겠지.”
 당장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자신을 따돌렸던 학과 사람들을 생각하자 수현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며칠만······ 더 있을까?”
 적어도 자신을 돌봐 준 소미에 대한 보답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수현은 안경을 썼다.
 “······어?”
 그 순간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갑자기 눈이 더 나빠진 건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꼈던 안경이 맞지 않자 수현은 조금 당황해하며 안경을 벗었다.
 그 순간 수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 안경을 끼지도 않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오히려 반대로 안경을 끼자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고 어지럽게 보인 것이었다.
 “눈이······ 좋아졌어?”
 수현은 자신의 안경을 잡고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수현 씨.”
 “저야말로요. 소미 씨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요.”
 “큰일은 저 때문에 수현 씨가 겪었죠. 후훗. 그래도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수현은 소미와 함께 일주일을 더 멕시코에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거의 한 달 가까이 그곳에 있게 된 셈이었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비우자 수현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사진도 마음껏 잔뜩 찍었기에 수현 역시 기분이 좋았다.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어요? 저 때문에 돈도 많이 쓰셨는데 밥이라도 사야죠.”
 “애걔? 겨우 밥요? 여행 경비 다 받을 건데요? 전화번호 대신에 계좌 번호를 찍어 줘야겠네.”
 “······윽.”
 소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한 달 가까이 함께 있다 보니 낯을 가렸던 수현조차 그녀와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거기엔 서슴없는 소미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모델같이 늘씬한 체형의 그녀가 공항에 서 있자 지나가는 남자들이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소미는 선글라스를 끼고는 수현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여행 경비는 농담이에요. 대신 찍은 사진들 저한테 보내 주세요. 그때 밥도 사 주시고요.”
 “네, 그럴게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혼자였으면 아마 외로웠을 텐데. 이렇게 인연이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저 역시 소미 씨가 아니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후훗. 그쵸? 우린 비밀을 공유한 사이니까.”
 소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며 웃었다.
 “다음에 또 봐요, 수현 씨.”
 처음 만났던 것처럼 그녀는 당찬 모습으로 돌아섰다. 첫 만남부터 끝까지 소미는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수현은 좋았다.
 누구처럼 뒷담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꼼수를 부리지도 않았으니까.
 변한 것이 있다면······.
 그녀의 주변에서 풍겼던 달콤한 느낌의 아우라가 이제는 좀 더 당당한 느낌이랄까?
 사람의 아우라를 표현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현은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안, 흥분, 떨림, 기쁨······.
 멕시코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긴가민가했던 자신의 변화가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는 사람의 감정을 볼 수 있다.
 “수현 씨.”
 떠나던 소미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그거 알아요?”
 “······네?”
 “수현 씨 처음 봤을 때보다 멋있어진 거.”
 “······에?”
 “밥 사 주겠다는 약속,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
 소미는 그 말을 마치고 가볍게 뛰어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소미의 아우라가 붉게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원룸으로 돌아온 수현은 새삼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너부러져 있는 이불과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들. 청소부터 해야 할까 싶었지만 뭔가 긴장이 풀린 듯 나른한 기분에 수현은 짐을 던져 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수업을 가야 하나?”
 집에 돌아오자 오후 1시였다.
 3시에 필수 과목인 사진미학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수현은 잠시 망설였다.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강의실에 가면 분명 대부분의 학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민철은 물론이거니와 미니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평생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낡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분명 물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 있던 필름은 멀쩡했다.
 가방에 가득 들어 있는 필름 통을 보며 수현은 생각했다. 어차피 이 필름들을 인화하려면 과에 가야 했다. 사진을 맡기는 것보다 수현은 직접 인화를 하는 것을 즐겼다.
 과에서 유일하게 필름 카메라를 쓰는 수현이었기 때문에 인화실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사진을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게 핑계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동안 소미와 함께 있어서 그 역시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썼던 안경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수현은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끼지 않은 얼굴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긴 머리도 멕시코에서 돌아온 지금은 짧게 변해 있었다.
 소미의 추천으로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답답해 보이던 머리를 바꿨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멕시코를 다녀온 수현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단순히 안경을 벗었다는 것 이외에 그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기운은 분명 죽음의 문턱을 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생사의 위기를 뛰어 넘어야 가질 수 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그 아인 도대체 누굴까······?’
 수현은 그날 어둠 속에서 보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단 한 번뿐이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멕시코에서 찾아봤지만 그런 소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현에게 남아 있는 풀지 못한 숙제였다.
 “뭐, 그 만남이 운명이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혼자서 골머리를 썩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현은 왁스를 꺼냈다.
 “으흠······.”
 왁스를 바르는 것이 아직도 어색해 보였지만 수현은 소미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거울을 보며 바르기 시작했다.
 “좋아. 가 볼까.”
 한동안 공을 들여 거울을 보던 수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와 가방을 챙겨서 수현은 방을 나섰다.
 한 달 만에 돌아온 학교였다.
 과연······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은근히 궁금한 그였다.
 
 
 
 “수, 수현 선배!”
 과실의 문을 열자 안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인화실을 사용하려면 과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들러야 했다.
 한 달이나 소식이 없던 수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그가 나타날 것이라곤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듯싶었다.
 “오빠, 오랜만이네요.”
 어색하게 말을 꺼낸 것은 미니였다.
 아직도 자신이 수현과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 그녀는 보란 듯이 수현에게 얘기했다.
 “어, 안녕.”
 “아, 안경 벗으셨네요? 아니, 렌즈 끼신 건가? 그러니까 머리도······ 에······.”
 미니는 수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음······. 아, 맞아! 출사 여행에도 오지 않으시구······. 어떻게 되신 거예요? 우리 다들 기다렸는데.”
 기다렸다고?
 뻔한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고 있었다.
 수현이 정신을 차린 뒤에 가장 먼저 한 것이 핸드폰 확인이었다.
 그들에게서 온 통화는 0건.
 핸드폰엔 기껏해야 스팸 문자가 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무슨 기다리고 걱정했다는 말인지 수현은 어이가 없었다.
 “미안. 갑자기 비행이 문제가 생겨서······. 민철에게 얘기했는데 못 들었어?”
 “네?”
 미니는 뒤에 앉아 있는 민철을 바라보았다. 포토샵을 만지작거리던 민철은 수현의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콕 집어서 얘기하자 결국 그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어······ 맞아. 비행이 취소돼서······ 못 온다고 했었어.”
 “에? 그땐 그런 말 없었잖아요, 오빠.”
 “그, 그게······ 수현이가 몸이 안 좋아서 쉬겠다고 별일 아니라고 해서 말야.”
 단 한 번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뱉은 말을 끼워 맞추려고 민철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현은 처음으로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아닌데? 나 그래서 대신 칸쿤섬에 다녀왔어. 멕시코시티는 아니지만.”
 자신이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간 민철은 떨리는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수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민철을 향해 웃었다. 아마도 지금껏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칸쿤섬요? 그 여행지요?”
 “응.”
 확실히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여학생들이 그곳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빛도 있었다.
 “덕분에 잘 놀다 왔지. 여행사에서 사과 차원에서 그렇게 해 주더라. 다 민철이 덕분이지 뭐. 고맙다, 신경 써 줘서.”
 “응? 아······ 아냐. 뭐 그랬다면 다행이지.”
 불안하게 떨리던 민철의 표정이 조금은 안정되어 갔다. 아마도 수현이 진실을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신기한데?’
 수현은 민철의 감정의 변화를 보며 또 다른 사실을 알아내었다.
 민철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순간순간마다 다르다는 점이었다.
 처음 자신을 보았을 땐 옅은 붉은빛을 띠었다면 비행기 얘기를 했을 땐 보랏빛에 가까웠다.
 ‘하지만 항상 보이는 건 아닌 것 같군.’
 과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아우라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이 능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수현은 그저 그 변화가 신기할 뿐이었다.
 “덕분에 사진도 많이 찍어서 말이야. 인화실 좀 사용할까 싶은데.”
 “응? 아아, 그럼. 지금 비어 있을 거야.”
 “고맙다.”
 수현은 민철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넓게만 보였던 그의 어깨가 수현의 손길이 닿자 움찔거렸다.
 처음으로 수현은 민철이 작아 보였다.
 물론 그것이 능력이나 재능으로 이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란 듯이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놀라게 한 것이었다.
 ‘아니,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갚아 줘야 한다.
 “그럼 나중에 봐.”
 “어어, 그래. 이따 보자.”
 수현이 인화실로 들어가자 과실에서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 오빠 완전 딴사람 같은데?”
 “그러게······. 사람이 안경을 벗는다고 저렇게 달라 보이나?”
 “칙칙한 머리도 완전 짧게 자르고 말야. 의외지 않아? 난 여태까지 선배가 저렇게 생긴 줄 몰랐다니까?”
 “맞아.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걸? 근데 은근히 저음이지 않아?”
 “뭐야, 민정이. 너 수현 선배 음침해 보인다고 싫어했잖아.”
 “야야, 그땐 그때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들으라고 큰 소리로 얘기를 하는 것인지······.
 수현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평가에 어이가 없었다.
 머리를 자르고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
 그녀들의 수군거림은 예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촤르륵-.
 수현은 필름을 뽑아 잘라 내기 시작했다.
 불빛에 비춰 보자 필름 한 칸 한 칸마다 담겨 있는 사진이 눈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보였다.
 소미.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왠지 그녀가 다시 보고 싶은 수현이었다.
 
 
 
 “자, 다들 자신이 찍은 사진 중 베스트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져왔겠지?”
 사진미학 강의는 출사를 함께 갔었던 박철한 교수의 수업이었다.
 수현이 칸쿤섬으로 가게 되었을 때 유일하게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박철한 한 명뿐이었다.
 치첸이사에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전화를 받을 순 없었지만 수현은 내심 그에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강의는 미美에 대한 것이다. 사진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잘 담겨 있는지 설명하면 된다. 미라는 것은 의도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란다.”
 수현은 교수의 말에 소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포토그래퍼라고 할 수 있겠지.”
 “교수님! 이번 출사에서 찍은 사진 중에 그런 미를 찾은 사진이 있으면 무조건 A+라는 게 정말입니까?”
 “오오오······!”
 호성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원리 원칙이 철저한 박철한 교수가 그런 제의를 먼저 할 리가 없었다.
 교수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능글맞은 호성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면서 말했다.
 “이 녀석아, 하여간 맨날 쓸데없는 꿍꿍이만 하기는······. 그래, 자신 있나 보지? 이번에 걸작이라도 하나 찍었느냐?”
 “헤헤, 제가 또 원래 해외파지 않습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교수님.”
 “하여간 말은 잘하는구나.”
 호성의 실없는 말에 교수는 피식 웃으면서 강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호성이 말대로 이번엔 다 함께 같은 곳을 갔으니까 같은 공간에서 얼마나 찰나의 미학을 잘 포착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지.”
 “오오, 그러면!”
 “자신의 사진을 평가받는 것 역시 포토그래퍼로서 중요한 시간이니까. 이번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사진을 제출하도록. 1등은 공평하게 학생들 스스로 뽑는 것으로 하지. 너희들이 뽑은 1등이니까 A+를 줘도 괜찮겠지?”
 “우아아······!”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한 학기의 성적이 이미 정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그것도 최고 학점인 A+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환호를 질렀다.
 “그럼, 각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내일까지 내 메일로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강의실에서 교수가 사라지자마자 호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때, 이 몸이 한 건 해냈지?”
 “피~ 그래도 선배는 힘드실 것 같은데요?”
 “야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번에 내가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겠다니까?”
 “민철 선배가 있는데 괜찮겠어요?”
 그 한마디에 호성의 표정이 구겨졌다.
 대부분의 학생들 역시 프로로 활약하고 있는 민철의 사진이 뽑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결과는 모르는 거니까.”
 “크으······. 뭐냐, 벌써 승자의 여유냐? 대충 아무거나 내라. 넌 그냥 해도 A+일 것 아냐.”
 호성이 구걸하다시피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수현은 다른 이유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거 난 뽑아서 제출해야 하나?’
 
 늦은 밤.
 과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12시가 가까워지는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창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수현은 이 시간에 과실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조용한 인화실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불을 끈 암실에서 수현은 오전에 잘라 놓았던 필름을 꺼내어 보았다.
 요즘 학생들의 대부분은 그저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을 해서 스튜디오에 맡길 뿐이다.
 사진을 인화하는 작업은 그저 번거로운 단순 노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달랐다.
 인화를 하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그에게 해 준 말이기도 했다.
 “아······ 뜬다!”
 현상액에 담근 인화지에 서서히 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현은 이 순간이 가장 좋았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스튜디오에 맡긴다면 이런 기분은 절대로 경험해 볼 수 없을 것이다.
 수현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말리기 시작했다.
 “······어?”
 사진을 잡고 있던 수현의 팔이 가볍게 떨렸다.
 쿵쾅. 쿵쾅.
 손의 떨림은 팔을 타고 심장까지 도달한 듯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이건?”
 
 
 
 안소미.
 그녀는 오늘도 시작되는 잔소리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예상했던 기간을 훌쩍 넘기고 귀국한 그녀에게 임원들은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미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할아버지의 친구, 혹은 후배들이었다. 소미에겐 회사 동료라기보단 아저씨들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소미가 하려고 하는 것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 일쑤였다.
 ‘하아······. 이러면 여행을 가기 전하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소미는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아를 찾는다는 그런 거창한 여행까진 아니었다. 사실 일탈을 꿈꿨다는 것이 더 맞을 테니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수현과 함께 있었던 멕시코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쓰러졌을 때의 당혹감, 깨어났을 때의 기쁨. 그리고 함께 여행을 다니던 자유로움까지.
 답답하기만 했던 일상과 비교하면 그녀에겐 그때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오늘 임원 회의에 나오지 않았더구나. 이런 식으로 자꾸 빠지면 회사에서도 입지가 곤란해진단다.”
 “알고 있어요, 아저씨.”
 “아저씨라니. 이사님이라고 부르셔야죠, 사장님.”
 “우······ 알겠구요.”
 할아버지의 절친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회사에서 속내를 다 보일 수 있는 한 사람.
 “녀석, 아직도 네가 철부지 학생이라고 생각하느냐. 이젠 네가 회사를 이끌어야지.”
 그의 이름은 류지건.
 새하얀 백발임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체격을 유지하는 노신사였다. 그는 처음 회사를 일으킬 때부터 함께해 온 창립 멤버였다.
 “네 아빠처럼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만 이왕 시작한 일, 제대로 해야지 않겠느냐.”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한 달이나 마음대로 자리를 비우고 나서?”
 “윽······ 거기엔 다 사정이······.”
 어쩐지 얘기가 점점 더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소미 역시 슬슬 지쳐 가기 시작했다.
 드르륵.
 책상에 놓아 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며 소리를 내었다.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든 그녀는 생각지 못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내 말 듣고 있는 게냐?”
 소미는 황급히 가방과 외투를 챙기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머,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아저씨, 식사하러 안 가세요? 전 점심 약속이 있어서 말이에요.”
 “우리 회사 점심시간은 12시 30분이잖느냐!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 무슨······ 자, 잠깐!”
 “아니요. 사장님이라고 부르셔야죠, 이사님.”
 소미는 보란 듯이 사무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대로 소리를 치면 분명 밖에 있는 비서들이 듣게 될 것이었다.
 “끄응······.”
 “잠깐 외근 나갔다 올게요.”
 “평사원도 아니고 무슨 외근이십니다, 사, 장, 님.”
 “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식사 약속이 잡혔거든요.”
 “비서도 모르는 약속이 말입니까?”
 “후훗, 나머지는 돌아와서 얘기해요.”
 “너, 너어······!”
 류지건이 그녀를 쫓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소미는 문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천방지축인 건 꼭 제 할애비를 쏙 빼닮았단 말이야.”
 바람처럼 사라진 소미를 보며 지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겨우 빠져나왔네.”
 가까스로 회사를 빠져나온 소미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기지개를 쫙 피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맑고 기분 좋은 날에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완전 나이스 타이밍.”
 소미는 핸드폰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중얼거렸다. 때마침 문자가 오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점심시간까지 잔소리를 들었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점심도 같이 먹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회사에서 그녀를 가장 많이 돌봐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밥은 마음 편히 먹고 싶단 말이지. 후훗.”
 소미는 수신 목록을 열어 재차 확인했다. 정확하게 적혀 있는 세 글자.
 민수현.
 그녀는 그 이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통했다고 말한다면 조금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를 생각한 순간 그에게서 문자가 왔으니 말이다.
 “어디 보자······ 뭐라고 답을 해야 하지?”
 
 -오늘 시간 되세요?
 
 간단한 문자였다.
 실제로는 점심에 만나자는 얘기도 아니었기에 어쩌면 지금 당장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녀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금부터 내내 혼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너무 가볍게 보여서도 안 될 테고······. 끄응.”
 시원시원한 몸매에 아름다운 외모지만, 소미는 지금까지 사적인 대화를 나눠 본 이성을 손에 꼽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외모에 혹해서 다가올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보내야지······?”
 그런 점에서 수현은 조금 특별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와 함께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소미가 고민을 하는 동안 수현에게서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바쁘신가 봐요. 전에 얘기했던 사진 드리려고 하는데······.
 
 “아뇨, 아뇨! 전혀 안 바빠요. 그러니까······.”
 어째서 당황하고 있는 것인지 소미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왔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고작 남자의 문자 하나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오늘 점심 어때요?
 
 “자, 잠깐만요!”
 소미는 상대방이 있지도 않은데 소리치며 황급히 문자를 보냈다.
 
 -네, 어디서 볼까요?
 
 “후아······.”
 긴장한 탓에 숨을 꾹 참고 보낸 문자였다. 몇 번을 지웠다가 썼다가 하면서 보낸 문자가 결국 저거라니······.
 소미는 혹시라도 답장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그리로 갈게요. 12시쯤 도착할 것 같은데······. OO호텔 라운지에서 볼까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소미는 쾌재를 부르면서 벌써부터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고 있었다.
 
 -네, 거기서 봬요.
 
 아무것도 아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였을 뿐이다.
 외모도 그다지 잘생기지 않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키. 그렇다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설레는 이유는 뭘까?
 그와 함께 있었던 한 달 중에 그와 제대로 보낸 시간은 기껏해야 보름 남짓이었다.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한국에 돌아와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소미는 깨달았다.
 그가 보고 싶다고.
 아마도 그녀가 이렇게 변한 것은 분명 그날 이후였다고 소미는 생각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건가?’
 택시를 타고 겨우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시계를 보니 이제 11시 30분이 지나는 무렵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문자를 보고 괜히 들떠서 서둘렀잖아······.’
 예상치 못한 수현의 문자였기에 소미는 더욱 기뻤다. 그녀는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채로 연신 수현의 문자를 보고 또 보았다.
 ‘내가 왜 이러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미는 수현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정도가 과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생각에 빠져 있었던 소미는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하, 소미 씨는 여전하네요.”
 수현이 자리에 앉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소미는 짧은 머리의 수현을 보며 살짝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야, 왁스 발랐어요?”
 “아아······ 네. 뭐······. 하하.”
 “이젠 제법 잘하는 것 같은데요? 수현 씨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릴 것 같더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니까요.”
 수현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스타일링을 내는 것부터 사실은 모두 소미가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깨어난 그날 소미가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했다.
 뜬금없는 제안에 수현은 당황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그녀가 하자고 하는 것은 모두 하려고 생각했었다.
 머리를 자르는 일 따위야 그에겐 아무런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수현은 거울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자신을 바라봤었으니까.
 “어?”
 소미가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조금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눈썰미 좋은 소미가 놓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피로해 보여요.”
 “아아······ 별일 아니에요. 어제 밤을 새웠거든요. 학교에서.”
 “학교에서요? 왜요?”
 “이거 때문에요.”
 수현은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수현의 표정에 소미의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사진?”
 “드리기로 했었잖아요.”
 봉투 안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사실 내용물을 보고 나서 소미는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 목적이 이것이긴 했지만 좀 더 다른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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