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카펫을 걷는 톱스타들의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36년간 살아오면서 맡았던 공기가 이리도 달콤했던가 김정환은 감회가 새로워짐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매연에 공기가 오염되었음이 분명한데도 더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달콤하고 맛있었다.
김정환은 눈앞에 보이는 대검찰청 건물을 바라보았다.
오늘 그는 대검찰청 반부패부 수사지원과장으로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대검찰청. 일개 검사마저 지방 검찰청에서 과장급의 대우를 받는 엘리트들이다.
하물며 검찰총장의 직속 부서인 반부패부는 과장이 지방의 부장급의 대우를 받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부서,
그곳에 김정환은 36살이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의 눈앞에 그동안의 고생이 스쳐 지나갔다.
김정환의 가정은 화목했다.
변호사일을 하시던 아버지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 정환의 어머니는 정환을 낳기 전부터 몸이 약하셨고
정환을 낳은 뒤 안 그래도 약했던 몸이 더 약해져서 정환이 5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그 후로 정환은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아왔다.
어머니는 없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김정환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불행이 시작되었다. 정환의 아버지 김준은 정환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하던 중 괴한에게 피습당해 돌아가셨다.
가해자는 변호사였던 김준에게 앙심을 품은 피해자의 가족이었는데 아버지가 피습당하자 이 일은 곧바로 신문지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김정환의 아버지는 굉장히 능력 있는 변호사였고 맡았던 사건들도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많았다. 검사들은 김준하면 치를 떨었다.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김준만 거치면 징역 10년 정도로 확 줄어드는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수형인들은 수임료가 얼마가 들든 간에
김준을 변호사로 고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스스로가 정말로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변호했다.
물론 수임료는 따박따박 챙기셨다. 누군가는 김준을 보고 돈에 미친놈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일부 의견일 뿐이었다. 정환은 어린 나이였지만 진짜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특히 형사정책에 관련해서 매우 관심이 많으셨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주는 황금의 다리 이론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학설을 주장하셨고 그 대부분 학계에서
현재까지도 인정되는 학설들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를 꿈꾸는 정환에게 법이라는 건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법에 명시된 대로 죄에 따른 형벌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법이 사람을 가린다면 그게 법으로서의 역할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법조인들을 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정환은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서 변호사가 되려 했다.
그런 김정환에게 갑작스러운 김준의 사망 소식은 천지가 무너지는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꿈일 리가 없었다.
회칼에 10번 이상 찔린 사람이 살아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워낙에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아버지를 잃고 방황했다.
그러다 성인이 되던 날 아버지가 남기신 개인금고를 확인한 정환은 억장이 무너지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울었던 거 같았다.
또래 구타는 물론이고 대마초까지 손대는 불량학생이었던 정환은 그날부터 잊고 있던 꿈을 다시 한번 쫓기로 했다.
우선 공부를 했다.
평소에 천재 소리 듣던 정환이었지만 고등학교 공부를 다시 하기에는 그도 적지 않은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정환은 단 1년의 재수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한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법고시 수석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정환의 사법고시 합격 소식은 전국을 강타했다. 언론에 있어 천재 변호사의 사망 후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이어간다는 소재는 나름 흥미로웠을지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정환 또한 아버지를 따라 변호사의 길을 걸을 것이라도 생각했지만.
정환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검사를 선택했다.
연수원 차석이었기에 검사로 임용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환은 검사로 임용되고 나서 스타검사가 되었다.
첫 발령지는 경기도 수원지방검찰청이었다.
그가 재판에서 지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고등학교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싸움 실력으로 경찰들을 지휘해 조폭들을 뿌리째 뽑아 수원을 박살 냈다.
범죄자들에게 정환의 이름은 사신과도 같았다.
아무리 비싼 변호사를 써도 정환의 손에만 걸리면 최고형을 받기 일쑤였다.
그의 아버지와는 분명 다른 길이었지만 목표는 같았다.
'사법정의' 그것만이 정환이 추구하고자 하는 길이었다
분명 성공가도를 달리는 촉망받는 천재 법조인의 모습 그 이상이었다.
이 일로 정환은 서울중앙지검 형사부로 발령 났다. 그런 정환의 인기가 정점을 찌른 건 천하의 개새끼였던 전성우 총리를 구속시켰던 때였다.
수사는 치가 떨릴 정도로 어려웠다. 검찰이 정계를 건드리는 건 불문율과도 같은 일,
그것을 정환이 깨트린 것이다.
결국 정환은 자연스럽게 검찰 내부에서 혼자가 되었고 그에게 가세하는 사람은 검찰 내부에 없었다.
오히려 방해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하지만 정환은 무시했다.
정환은 자신있었다.
우선 뇌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확보된 상태였고 훌룡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일은 누구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도와준 한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증거를 당장 터트릴 수는 없었다. 그 증거는 일개 검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검찰청 전체가 움직여야 할 정도로 스케일이 큰 규모였다.
다만 이 증거를 이용해 머리를 자를 수는 있었다.
힘든 길이었지만 정환은 멈추지 않았다. 썩어빠진 정국을 정화하고 싶었다.
검찰을 우습게보고, 나라를 자신들의 무대로 삼고 국민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연극 무대를 꾸며놓는 놈들을 싸그리 잡아다 감옥에 처박아 넣고 싶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전성우 총리에게 매달렸다. 전성우를 잡는다면 정국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할 것이고 그럼 검찰 내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정계를 조사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환은 세상을 바꾸는 건 최강의 방패가 아니라 최강의 창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확신했으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진짜 검사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
그런 정환의 바램이 하늘에 닿았을까?
마침내 전성우의 살인교사 청부의 정황을 잡았고 증거를 확보했다.
정환은 망설이지 않고 기소했다.
거기다 뇌물수수 혐의를 비롯해 5개 죄목을 엮었다.
재판은 치열했다. 하지만 결국 승자는 정환이었다.
정환은 가석방 없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고
판사는 정환의 구형을 따랐다.
전성우는 억울하다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환은 이 일로 이근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또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검찰 내부에서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촉망받는 인재를 한직에 앉혀둘 수도 없기에 단숨에 대검찰청 반부패부 수사지원과장으로 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동기들에 비해서도 이례가 없을 정도로 굉장히 빠른 승진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대망의 첫 출근 날이다.
정환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생겨났다. 눈앞에 대검찰청 출입문이 흐릿하게 보였다.
앞으로 50걸음 정도만 걸어가면 대검찰청 요직의 주요인물로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리라
그와 동시에 머리 없는 용의 꼬리와 몸통은
하루하루를 악몽으로 지새울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검찰총장을 설득해야 한다.
반부패부는 총장의 직속 부서니까,
정환이 알기로 이번 검찰총장인 안형규 총장은 청렴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지금 정환이 품에 들고 있는 증거만으로도
오늘 국회와 청와대는 폭격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는 생각만 해도 좋은지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무심결에 대검찰청을 올려다보며 총장실을 찾았다.
그때 꼭대기의 총장실의 커튼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층 높이의 총장실의 커튼을 지금 이 거리에서 구분했다고?
정환은 피식 웃으며 착각이겠지.. 하며 신분증을 찾았다.
이 모퉁이만 꺾으면 검문소다.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려던 정환은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옆구리가 따끔했다. 그 느낌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푸욱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정환의 눈에 회칼을 자신의 옆구리에 쑤셔넣은 검은색 장갑이 보였다.
검은 장갑을 낀 그 자의 손을 따라 그자의 얼굴로 힘겹게 시선을 옮겼다.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자의 찢어진 두 눈과 정환의 눈이 마주쳤다.
그자의 눈이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때 밀려오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정환의 다리가 풀렸다.
정환이 힘겹게 손을 들어 자신을 연거푸 찌른 남자를 붙들어잡았지만 점점 힘이 빠져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정환은 핏발 선 눈으로 온 힘을 다해 그자의 마스크를 잡아챘다.
매우 평범한 얼굴.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자의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두 눈이 정말 즐겁다는 듯이 반달 모양으로 찢어졌다.
섬뜩한 웃음이었다.
정환도 마주 웃어주었다.
"뭘 쪼개냐..씹새끼야"
그자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그러니까.. 적당히 설쳐댔어야지 이건 너 스스로가 자초한 거야"
그자는 그 말을 남기고는 용무는 다 마쳤다는 듯이 허물어지는 정환을 뒤로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개새끼..시팔새끼..아..시팔..염병.."
정환은 뒤로 벌렁 누웠다.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환은 포기했다.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피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단 두 번의 칼질로 양쪽 폐를 관통시켰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이건 프로의 솜씨였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정환이 힘겹게 피식 웃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에 칼 맞아 사망했고 자신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에 칼 맞았다.
칼 맞는 건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살아날 가능성? 없다 이건 100% 사망이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에 사람들이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귀에 이명이 낀 듯 위잉 하는 소리만 들렸다.
"시.. 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구멍에서 피가 쉼 없이 올라왔다.
힘겹게 뜨고 있던 눈에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날씨는 오질 나게 좋네..'
정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의 뇌리에 한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약속했는데..시발'
힘차게 뛰던 정환의 심장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그렇게 천재검사 김정환은 형장의 이슬처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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