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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전기 1화

2017.03.02 조회 4,104 추천 23


 서장. 칠질개(七耋丐) 소장(素樟)
 
 칠질개 소장은 나이가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칠질(七耋)이라 함은 곧 나이 일흔을 가리키는 것, 칠질개라는 별호 역시 그의 나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비단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십 년 전에도 칠질개였다.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에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칠십 년 전에도 그는 여전히 칠질개였다.
 
 ‘내가 얼마나 살았지?’
 
 간간이 생겨난 의문의 답은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린 시절은 있었는지?
 아니, 아니, 본래 인간이기는 한 것인지?
 그래서 그는 친구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친구가 없지는 않았다. 사람 사귀기가 서툰 탓에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친구라 할 만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 있기는 했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였다.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세월이 흐르면 부뚜막에도 귀신이 내려앉는다고했다.
 흙과 돌이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비록 꼬리는 나지 않았을망정 그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을 넘어섰다.
 돈과 명예, 부귀, 공명...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부분들은 더 이상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생과 사, 흑과 백, 옳음과 그름 역시 그의 기준은 아니었다.
 언제였던가? 세상의 덧없음이 가슴에 새겨질 무렵 그는 방관자이자 초월자가 되었다.
 
 세상에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르는 일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결혼이었다.
 결혼을 못 했으니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요괴나 다름없는 처지에 장가를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애는 키워보고 싶었다. 씨를 남기고픈 동물적 욕망은 없었지만, 평생을 일궈 체득한 심득(心得)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 제자를 구하기로 했다.
 반강제로 아이 하나를 거둬 제자 겸 손주로 삼았다. 근골 좋고 똘똘하며, 눈치 빠르고 심기 곧은 아홉 살배기 사내아이였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조금 무식하다는 점이었다.
 
 
 제1장. 무식한 놈
 
 1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싸움에 진 적이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위험에 처한 친구를 외면한 적이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누구에게 돈을 빌려본 적도, 신용을 잃어본 적도 없다. 물론 평생이다.
 험!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악의를 품고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거지나 문둥이에게 돌을 던져본 적이 없다.
 험, 험!
 자랑은 아니지만 먹을 것이 생기면 꼭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여자 애를 울리거나... 한 적은... 한... 적은... 으험, 으허험! 그것은 정말이지 고의가 아니었다.
 아홉 평생, 많지 않은 삶에 있어 단지 그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뭐 하고 있어?”
 지나간 삶의 대단함에 도취돼 있던 단목(檀木: 박달나무)은 고개를 돌렸다.
 왕삼(王三)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왕삼은 고아원 친구로 나이는 그보다 두 살이나 많은 열한 살이었지만 한 번의 다툼이 있고 난 후 친구가 된 아이였다. 덩치는 태산만 한 것이 코피를 줄줄 흘리며 엉엉 울던 모습이란 참으로 가관이었었다. 싸울 때는 선방, 한 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뇌이며 단목은 고개를 저었다.
 “뭐, 별로.”
 “별로? 아까부터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던데.”
 “나중에 발표할 내용을 정리해보는 중이었어.”
 “발표? 뭘?”
 단목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왕삼의 위아래를 훑었다.
 왕삼이 불안한 표정으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왜...?”
 “자식, 생각 없이 살기는. 몽둥이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소리 몰라?”
 몽둥이는 은혜원(恩惠院)의 원주(院主), 곧 고아원의 원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엄연히 방위대(房偉大)라는 성명이 있었지만 한 자 반쯤 되는 몽둥이를 허리에 차고 있다가 아무 때나 휘둘러대는 까닭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몽둥이가? 아-!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굳은 신념으로...”
 왕삼이 알겠다는 듯 평소 몽둥이가 입버릇처럼 주절대는 소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 됐어. 내가 그 시답잖은 소리를 듣겠다는 것은 아니고. 나중에 그렇게 한 자리 차지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겠다 이런 말씀이야. 왜 부자들 보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으레 한 마디씩 하잖아.”
 왕삼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부러움과 안도, 감탄이 뒤범벅된 표정이었다.
 “역시... 난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단목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렇다고 몽둥이가 대단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아냐. 대단하다면 장 대야(張大也) 정도는 돼야지.”
 장 대야는 은혜원의 주인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유주(柳州)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데, 재력(財力)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힘이 천 리(千里)를 넘어 계림(桂林)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그는 고아들을 위해 은혜원을 설립한 한편 그 아이들이 열세 살이 되면 다른 곳으로 데려가 기술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일자리까지 제공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로 보살 같은 사람이었다.
 동글동글 호떡 같은 얼굴에 후덕한 미소를 지으며 ‘귀여운 놈들. 튼튼하게만 자라라.’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장 대야. 비록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단목은 그 장 대야의 사람 좋은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돼야지.”
 왕삼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그도 역시 장 대야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왕삼의 표정은 단목과 조금 달랐다. 입가에 침이 조금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장 대야보다는 장 대야가 가져왔던 선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단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돼지 같은 놈! 야, 토끼는 어떻게 됐어?”
 왕삼이 화들짝 놀라 단목을 바라보았다.
 “으응, 응? 아, 토끼. 아직...”
 “머저리 같은 놈들. 상까지 차려줘도 지랄이야. 꼭 처먹여줘야 한단 말이지. 어딨어?”
 “응, 소슬바위 뒤쪽에.”
 단목은 침을 찍 갈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왕삼이 잰걸음으로 따랐다.
 
 때는 가을.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한 날이었다.
 그 좋은 날 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숲 한쪽에서 작은 가시덤불을 사이에 두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작은아이는 여섯이나 일곱쯤, 큰 아이는 열 살을 조금 넘어 보이는데, 저마다 작대기나 돌 따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한껏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린 것이 마치 전장에 임한 병사들과도 같았다.
 잠시 후 그곳에 새로운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단목과 왕삼이었다.
 “미련한 놈들 같으니라고. 이런 곳을 뒤져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단목은 나타나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이들은 움찔하여 겁먹은 얼굴로 단목을 바라보았다.
 “참, 이런 놈들을 데리고 일을 하자니 내가 미치지. 촌놈이라는 것들이 그래 아직도 토끼를 모르니. 태생이 의심스럽다, 의심스러워.”
 한 아이가 주억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토끼가 덤불 사이로 도망쳤는데.”
 그 아이의 말에 용기를 얻었을까, 조심스러우나마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나도 분명히 봤어. 이 가시덤불 속으로 사라졌다고.”
 단목은 빽 소리를 질렀다.
 “염병, 도망쳤다고 그곳이 다 집이라더냐. 너희들 몽둥이한테 쫓겨서 도망칠 때 방으로 도망쳐? 앙?”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하지만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단목은 목소리를 낮춰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잖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토끼란 놈이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어 구멍을 엄청 파놓는다고. 생각해봐라. 토끼가 발톱이 있냐, 송곳니가 있냐. 그것도 아니면 지혜가 있냐. 기껏 가진 것이라고는 부채만 한 귀와 말 다리 같은 뒷다리뿐 아니냐. 그 정도로 어떻게 이 암도진창(暗渡陣倉) 같은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겠냐? 문 앞에 버티고 선 승냥이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냔 말이다.”
 하나둘 아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싸움도 잘하는 놈이 아는 것도 많아! 하는 표정이었다.
 단목은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오래가지는 못했다. 꿩 잡는 게 매라, 단목 잡는 순옥(荀玉)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목 네 말 중에 틀린 곳이 두 군데 있어. 기본적으로 토끼가 구멍을 여러 개 파놓는다는 말은 맞아. 하지만 설명하는 말은 틀렸어.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말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냐. 이럴 때는 토영삼굴(兎營三窟)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암도진창 역시 틀렸어. 너는 아마도 어두운 진창길 같은 것을 떠올렸나 본데, 암도진창은 그런 말이 아냐. 암도진창은 삼십육계(三十六計) 중의 하나로 적의 눈을 속여 기습을 한다는 말이야. 따라서 이때는 풍진세상(風塵世上)이라는 말을 쓰는 거야.”
 단목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염병할 자식이 있나. 전생이 아교였나. 뭐 처먹을 게 있다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지나, 늘어지길.
 이걸 그냥 콱!
 아서라, 아서. 계집애 때려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저번에 한 대 때려놓고 며칠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 참자. 참아!
 괜히 또 인생에 오점만 늘어날라.
 계집이 벼슬이다. 벼슬!
 
 단목은 못 들은 척 애써 분기를 삭이며 아이들을 불렀다.
 “야, 구태(口太), 안규(安規). 저기를 뒤져봐.”
 “저기, 어디?”
 “저기 돌 틈 사이로 잡풀 우거진 곳 있잖아.”
 지적을 받은 아이들이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단목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자식들이, 빨리빨리 못 움직여!”
 앗 뜨거라! 아이들의 행동이 민첩해졌다.
 하나 조금 늦었다. 이미 단목이 주먹을 쥐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말씀 아닌 참이다. 오냐, 너희 두 놈 잘 걸렸다. 단목의 주먹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목은 또다시 제지당하고 말았다. 뒤따라온 순옥에게 팔을 붙잡힌 것이었다.
 단목의 힘에 끌려 질질 몇 걸음을 끌려가던 순옥은 단목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비로소 팔을 놓았다.
 “단목 너, 이게 무슨 태도야?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면 ‘누나 잘 알겠습니다. 오늘 소제가 안목을 넓혔습니다.’ 하지는 못할망정 도끼고리눈을 부릅뜨고 애꿎은 애들에게 화풀이를 하려 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너 세상...”
 단목은 매몰차게 순옥의 말을 끊었다.
 “알았어, 알았어. 너 세상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지. 오냐, 그래.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뒈질 테니까 그러는 너나 그따위로 살지 말아.”
 순옥이 눈살을 찌푸리며 두 손을 척 허리에 올렸다.
 “그따위?”
 “그래, 그따위. 왜, 더 듣고 싶어. 듣고 싶다면 몇 번이라도 해주지. 그따위, 그따위, 그따위.”
 “이, 이게.”
 순옥은 울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어쭈! 이젠 쳐보시겠다. 오냐, 그래. 한번 쳐봐라. 계집애 주먹 맛 좀 보자.”
 단목은 이마를 순옥의 고사리 같은 주먹에 댔다. 그리고는 눈을 잔뜩 치켜뜬 채 팍팍 밀어붙였다.
 “쳐, 쳐, 쳐보라고.”
 “......”
 “쳐. 못 쳐?”
 그러던 어느 순간일까, 한껏 비아냥거리던 단목이 홀연 찔끔하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놀라는 꼴이 마치 곶감 본 호랑이와도 같았다. 순옥의 눈에 드리운 뿌연 장막을 본 때문이었다.
 염병, 눈물은.
 오냐 그래, 계집도 벼슬이고 눈물도 벼슬이다.
 한데, 벼슬은 벼슬... 틀림없는데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제 곧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대성통곡을 할 텐데.
 하- 이것 참!
 그때였다. 전전긍긍, 어떻게 해야 되나 머리가 지끈거릴 때 저편에서 아이들이 소리쳤다.
 “토끼다!”
 “나왔다!”
 구태와 안규의 음성이었다.
 십 년 가뭄 끝의 단비가 이러할까, 단목은 냅다 뛰었다.
 “잡았냐? 잡았어?”
 “아니. 고개만 삐죽 내밀고는 들어가 버렸어.”
 구태의 대답은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단목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야, 너희들은 여기를 지켜. 그리고 아귀(餓鬼)하고 우대(宇大)는 나를 따라오고, 너희 셋은 주변을 뒤져봐. 또 구멍이 있는지.”
 아이들이 신속하게 흩어졌다.
 걸음을 옮기던 단목은 등 뒤에서 순옥의 기척을 느꼈다. 아닌 척 힐끗 보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기를 놓치고는 갈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단목은 냉큼 시선을 거두고는 더욱 음성을 높였다.
 “낫, 누구 낫 가져온 사람 있냐?”
 “응, 여기.”
 왕삼이 낫을 건넸다.
 낫을 건네받은 단목은 토끼가 사라졌다는 자리로 뛰어가 가시덤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아귀와 우대가 달라붙어 작업을 도왔다.
 이내 가시덤불이 걷히고 조그만 구멍 하나가 나타났다. 주먹이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 토끼가 들락거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작은 구멍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토끼 굴이라는 것을 단목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동물들은 본래 간신히 머리만 들어갈 수 있도록 굴을 파는 법이다.
 “너희들은 낙엽이나 잔가지를 주워와.”
 “응.”
 “알았어.”
 “구멍 없어?”
 “아직.”
 단목은 아이들을 채근하고 지시를 내리는 한편 구멍 앞에 쪼그리고 앉아 덤불을 거듭 쳐냈다. 아귀와 우대가 낙엽과 잔가지들을 주워왔다.
 “더 가져와. 될수록 많이.”
 단목은 아이들이 가져온 낙엽과 잔가지들에 덤불을 한데 얽어 동그랗게 뭉치기 시작했다. 돼지 방광 크기로 토끼 굴보다는 조금 크게 뭉쳤다. 하나, 둘, 덤불 뭉치가 이십여 개쯤 됐을 때 단목은 다시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없냐?”
 “하나 더 찾았어. 더 이상은 없어.”
 “아니, 이쪽에도 뭔가 있어. 굴 같아.”
 “너희들은 거기를 지켜.”
 단목은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였다.
 몇 번의 실패가 있고 난 후 마침내 불이 붙었다.
 그는 첫 번째 것을 불씨 삼아 뭉쳐진 덤불에 차례차례 옮겨붙였다. 덤불은 불이 붙은 즉시 단목의 발에 의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야, 상의 벗어.”
 단목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귀가 상의를 벗었다. 먹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빨랐다. 그래서 아귀였다.
 단목은 구멍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상의로 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친히 시범을 보인 후 아귀에게 건넸다.
 “봤지. 너는 낙엽을 계속 쑤셔 넣으면서 부채질을 해.”
 아귀가 대답도 없이 부채질을 시작했다.
 단목은 두 번째 굴이 발견된 곳으로 뛰어갔다. 그가 오자 아이들은 자연스레 길을 터서 그가 들어설 만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잡풀에 가려 교묘하게 위장된 작은 구멍이 보였다. 틀림없는 토끼 굴이었다.
 “자, 이제 뛰어나오는 놈을 잡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아무래도 세 번째 굴 쪽이 마음에 걸렸다. 토끼란 놈이 워낙에 힘이 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뛰어나오는지라 놀란 아이들이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엔 자신이 있을 테니 문제없지만. 세 번째 굴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중에 문득 침을 흘리는 왕삼이가 눈에 띄었다. 그렇지 왕삼이가 있었지, 단목은 그를 보며 세 번째 구멍을 손짓했다.
 “왕삼이 너는 저쪽에서 기다려.”
 “응.”
 왕삼이 꿀꺽! 침을 한번 삼키고는 뛰어갔다.
 먹을 것에 관한 한 아귀와 쌍벽을 이루는 왕삼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녀석은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토끼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 이제 되었다.
 남은 일은 쌀이 익어 밥이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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