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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객 1화

2017.03.09 조회 3,105 추천 22


 서장
 
 '정말 날 아무 대가없이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의인(義人)이기 때문입니다.'
 
 
 제1장 검우빈, 복수를 꿈꾸다
 
 문을 제외한 삼면의 벽을 책이 차지한 방에는 두 사람이 자리해 있었다.
 오래 말이 없었기에 적막의 깊이가 천 길은 내려앉아 숨소리조차 또렷이 들렸다. 긴 침묵을 깬 사람은 문을 등지고 앉은 중년인이었다. 자리의 형태로 보아 객이 분명한 그는 윤기 나는 머리칼과 보기 좋은 수염을 길러 귀티가 흘러넘쳤다.
 "열어 보시지요."
 중년인은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초로의 노인 쪽으로 아주 조금 밀었다. 검은색보다 흰색이 많은 푸석한 머리칼, 이마와 눈가, 볼, 입 주변에 얽히고설킨 주름은 노인의 나이가 쉰다섯이라고 믿기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칠십쯤 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도 마치 이십대처럼 보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눈이었다. 흑백이 너무도 뚜렷해서 상대의 마음까지 읽어 버릴 것 같은 그 눈은 지그시 중년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보통의 목소리를 세 번쯤 겹쳐 놓은 것처럼 두터웠다.
 "저희 어른께서 우참정(右參政) 어른께 보내는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우참정 노재문(盧宰文).
 종삼품의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겨울에 방의 온기가 없고 여름에 시원한 수박조차 못 먹는다 하여 무열무량선(無熱無凉仙)이라 불리는 사람이 노재문이었다. 무열무량선이란 괴상한 이름은 백성들이 붙여 준 것이었는데, 마지막의 선(仙)이란 글자가 백성들이 노재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청렴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노재문의 이마에 주름이 다섯 개쯤 더 늘어났다.
 "거절하시기 전에 일단 한번 보시지요."
 노재문의 인물됨을 너무도 잘 아는 중년인은 서둘러 상자를 싼 보자기를 풀었다. 파란색의 보자기가 미끄러지자 적색 같기도 하고 흑색 같기도 한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만(南蠻)에서만 나는 흑단목(黑丹木)입니다. 지니고 있으면 몸의 양기를 보호하여 준다고 하여 보양목(保陽木)이라고도 불리는 귀한 물건입니다."
 중년인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짜 보물은 이 안에 있습니다. 흑단목으로 외피를 써야 할 만큼의 보물. 직접 열어 보시겠습니까?"
 노재문은 대꾸 없이 중년인만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머쓱해진 중년인은 잔기침을 두어 번 뱉은 후 상자로 손을 가져갔다.
 딸깍!
 단단하게 맞춰진 이음새가 벌어지며 낮은 소리를 토해 냈다.
 창문이 작아 햇살이 방에 가득 차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낮의 제 색깔 정도는 능히 갈무리할 만큼은 밝았다. 그런데 조금 열린 상자 안에서 낮보다 더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냥 흰빛이 아니었다. 자주와 파랑, 붉음이 어우러진 그 빛은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요기(妖氣)마저 품고 있었다.
 중년인이 완전히 상자 뚜껑을 열자, 범상치 않은 빛은 허공으로 두 자 이상 영롱함을 뻗쳤다. 가지고 온 중년인조차 탐욕의 눈빛을 번뜩일 정도로 빛은 휘황했다. 넋을 잃고 상자 안을 보고 있는 중년인을 향해 노재문이 물었다.
 "뭔가?"
 화들짝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안색을 고치며 대답했다.
 "칠채금강석(七彩金剛石)입니다. 여타의 금강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극상품으로 값을 매기기가 불가능한 물건이지요. 특히 이처럼 큰 칠채금강석이라면 성(城)을 살 수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칠채금강석은 일곱 개의 색깔을 내뿜지도 않았고 그것으로 성을 산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천고의 보물인 것만은 분명했다. 실제로 중년인이 가지고 온 달걀 크기의 칠채금강석은 설사 황제라도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귀물(貴物)이었다.
 "좌포정사(左布政使)께서 내게 이걸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사흘 후에 있을 연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어른의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그 말인즉슨 내게 좌포정사 어른의 계파에 들라는 뜻이로군."
 너무도 직설적인 물음에 중년인은 선뜻 대꾸를 못 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노재문은 뚜껑을 닫더니 상자를 중년인에게 밀었다. 거절을 뜻하는 그 몸짓에 중년인은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품안에 굴러 들어온 칠채금강석을 거절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재문이 비록 무열무량선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렴하다고는 하지만 칠채금강석 앞에서는 틀림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렴이란, 만족할 만한 뇌물이 들어오지 않아 받지 않는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로 여겨 왔던 중년인이었다.
 "우참정 어른. 이것은 칠채금강석이옵니다. 혹여 진정한 가치를 모르신다면······."
 "이것이 얼마나 비싼 물건인지는 알고 있네."
 "그런데 왜······?"
 "사람마다 생각하는 최고의 보물은 다르기 마련이지. 좌포정사 어른의 보물은 칠채금강석이고, 내 보물은 청렴함이니, 그냥 이대로 서로의 보물을 간직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나?"
 낮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중년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한 번도 도덕에 어긋난 일을 행함에 있어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도덕이라는 것은 약한 자들이 자기 위안을 위해 만들어 놓은 틀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부끄러움, 수치심 이런 낯선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중년인.
 곽도강(廓到剛)이란 이름을 가진 그는 그 수치심을 떨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고(전적으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일을 행함에 있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덕이라는, 보기만 좋고 쓸데없는 허울을 오래전에 벗어던졌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노재문이 다시 그 탈을 그에게 씌우려 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부끄러움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해 보았지만, 붉어진 얼굴은 쉽사리 제 색깔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노력이 허사가 되자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 늙은이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절대 감정에 몸을 맡기는 곽도강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폭력에 대한 갈망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의자와 엉덩이가 막 떨어지려는 그때 하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갔다.
 지금 문밖에서 검을 품에 안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서 있을 그. 타인에게는 확실한 존재감을 주면서 노재문에게는 그림자 같은 그.
 그를 생각하자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노재문의 육체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설사 황제라 할지라도 노재문의 몸을 건드리는 순간, 은빛의 검이 허공을 가를 것이다.
 그를 생각하자 화산처럼 치솟아 오르던 분노가 뼈대를 잃고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인 두려움까지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차가움이 있었다. 아무리 고위관직을 가지고 있어도 절대적인 무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놈만 없다면 자객(刺客)이라도 보내 늙은이의 목을 따 버리련만.'
 그러나 그가 있는 이상 자객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자객도 그가 지키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손을 내젓기 때문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성.
 노재문은 난공불락의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천의보객(天意保客)이란 이름의 성 안에······.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그러니까 소년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원장 어머니가 아끼던 화병을 깨트리는 바람에 방에 갇혀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년에게, 주먹밥을 불쑥 내민 하얀 손 하나가 있었다. 겨울의 찬 바람에 살이 갈라져 있었지만 손가락이 길고 손톱에 윤이 나는 예쁜 손이었다.
 "먹어. 조금밖에 못 가져왔어."
 그때의 그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응당 자신이 먹어야 할 몫을 나눠 주었던 그녀는 당시 열 살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소년에게 친구였으며 누나이고 또한 어머니였다. 산에 나물을 캐러 갈 때에도 같이 갔고 밥도 함께 먹었으며 엄격히 구분된 잠자리 또한 그들은 같이했다.
 소년은 그녀의 그림자였으며 그녀는 소년의 심장이었다. 그것을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소년이 너무 어린 탓도 있었고 그런 애틋한 감정 또한 아니었다. 아마 그들은 서로에게 신체의 일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절대 떨어지면 안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년의 몸에서 이탈되어 버렸다. 잠깐의 외출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하게 때가 타서 검게 변해 버린 가마니를 덮고 누워 있었다. 볼과 이마의 검은 피부색은 죽기 전에 있었던 구타의 흔적이리라. 그리고 온통 창백한 피부와 또렷하게 각인된 입가의 말라 버린 혈흔.
 생경한 모습이었는데 소년은 이상하도록 빨리 그녀의 죽음을 인정했다. 아무 상관없이, 단지 눈요기를 하기 위해 모여든 주변의 구경꾼들처럼 그녀의 부재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봄 감기 따위로 누워 있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왈칵 밀려왔다. 나물을 캐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그도 움직였어야 했다. 혼자 보내지 않았다면, 언제나처럼 둘이 함께 산길을 올랐다면 그녀는 사내들의 손길에 저처럼 갈가리 찢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린 소년이 동행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목에 쑥잎 하나를 붙이고 싸늘히 누워 있는 소녀를 이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소년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들의 웅성거림이 쉴 새 없이 귓가를 맴돌았으나 정확한 의미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소년과 그녀가 사는 집, 아니 이제 그녀에게는 살았던 집이 되어 버린 인애원(仁愛院)은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느리게 움직이던 소년은 마당에 발을 들여놓자 끈 풀린 개처럼 뛰어갔다. 소년의 친구 황두(黃頭)가 사건 현장을 봤고 원장 어머니에게 불려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법 너른 마당의 정면에는 사십 평쯤 되는 큰 건물과 스무 평이 조금 넘는 조그만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소년의 걸음은 원장 어머니의 거처인 작은 건물로 향했다. 네 개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른 소년은 예고도 없이 방문을 왈칵 열었다. 평소 같으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오늘은 예전의 우모(牛毛)처럼 많았던 나날과 달랐다.
 원장 어머니가 놀란 시선을 소년에게 던졌고, 의자에 꿇어앉은 황두도 기겁을 했다. 소년은 원장 어머니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황두에게로 다가갔다.
 "검우빈! 뭐 하는 것이냐?"
 소년 검우빈(黔宇彬)은 원장 어머니의 호통을 귓가로 흘리며 황두의 앞에 섰다.
 "누구냐?"
 묻는 검우빈의 눈은 빛에 반사된 짐승의 그것처럼 번들거려 황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장난도 잘 치고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여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졌었는데, 지금 검우빈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 맹수를 보는 듯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원장 어머니는 위로 올라간 눈꼬리를 더욱 치켜뜨며 소리를 질렀으나 곧 검우빈의 나직한 목소리에 막혀 버렸다.
 "누구 짓이냐고 물었잖아."
 그녀에게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왠지 모를 서늘함에 소름이 돋았다. 검우빈의 기세에 눌린 황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복가장(卜家莊) 둘째아들······."
 "말하지 마라!"
 그녀가 황급히 막았음에도 필요한 것은 이미 들은 후였다. 막 몸을 돌리려던 검우빈은 탁자 위에 놓인 과일 깎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런 검우빈의 앞을 원장 어머니가 막았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심천(沈泉) 누님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그녀의 이름이 가시처럼 식도를 긁고 튀어나왔다.
 "너 따위가 복남봉(卜男峯) 공자님의 옷깃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심천을 죽인 자를 그녀는 아직도 공자님이라 불렀다. 돈 많은 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 원장 어머니의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검우빈이 팔을 쭉 뻗자 칼은 원장 어머니의 아랫배를 겨냥하게 되었다.
 "이대로 뛰어나갈 겁니다. 비키든 그대로 서 있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언제나 밝은 얼굴의 검우빈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파랗게 날이 선 칼 하나를 갈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그녀를 향하고 있는 저 과도(果刀)처럼.
 "네가 이러면 복 공자님께 보상금조차······!"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켜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중심을 잃고 우당탕 쓰러지는 그녀의 곁을 검우빈이 성난 늑대처럼 스쳐 갔다.
 북경의 외곽에 자리한 천 평 남짓한 복가장 앞에는 이 장이 넘는 대로가 놓여 있었다. 그 주위로 크고 작은 집이며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서, 복가장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칼을 품은 검우빈은 대로와 맞닿은 여러 개의 골목 중 하나에 웅크리고 있었다. 인애원을 나설 때만 해도 복가장으로 뛰어들어 복남봉의 가슴에 칼을 쑤셔 박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복가장을 눈앞에 둔 순간 분노로 채워진 가슴과는 다르게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갔다.
 현실적으로 복남봉을 죽이기는커녕 복가장의 문조차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검우빈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이었고 그 천금 같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가슴의 분노는 식지 않게 데워 두고 차가운 머리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금 복남봉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만행을 저질렀으니 멀리 달아나야 마땅하겠으나 복가장의 위세로 보아 떠났을 리가 만무했다. 검우빈의 예상은 일 각이 지나지 않아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복남봉이 복가장의 대문을 나온 것이다.
 대로를 걸어가는 복남봉은 세 명의 수하와 희희낙락 떠들고 있었다. 응당 살인자로서 가져야 할 죄책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죄책감을 가질 인간이면 애초에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리라.
 검우빈은 서둘러 복남봉을 따랐다. 특별한 계획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뒤를 따르며 계획을 짜다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복남봉 일행은 일 장 뒤에서 따라가는 검우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도 많았을뿐더러 꼬질꼬질한 열두 살 꼬마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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