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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란 1권 (1)

2017.03.03 조회 4,688 추천 63


 #프롤로그
 
 
 
 
 눈감았다 뜨니 생전 모르는 풍경이 나를 반긴다. 환경도, 상황도 그리고 나도 바뀌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바로 나한테?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날벼락 쪽이 차라리 낫다. 그건 최소한 납득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예전부터 투드란 소프트에서 사람의 뇌를 가져다가 인공지능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을 들어 왔다. 물론 다 개소리라 생각했지.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게 그런 음모론들이다. 아니라는 증거가 버젓이 존재해도 꾸준히 돌아다는 것이 음모론이라는 것이다. 투드란 소프트는 그런 루머에 맞서 자신들의 인공지능이 어떠한 것인지 수차례 변호까지 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음모론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지어낸 그저 그런 삼류 음모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그게 정말 사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난 분명 사람이었다. 김준서라는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태생의,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세 살의 젊고 혈기 넘치고 건강한 청년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을 보라! 예전의 내 외모라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잘생겼지만 낯선 얼굴에 귀족처럼 화려한 옷차림이라니!
 “라이엔 님,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게다가 옆에서 나에게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가디언 NPC도 있다. 머리 위에 녹색 글자로 안츠라는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NPC다.
 그건 비단 안츠의 머리 위에만 떠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머리 위에도 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비치는 내 준수하디준수한 얼굴을 가진 머리통 위로 케이드라 디 라이엔이라는 이름이 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난 투드란 게임의 NPC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허허······.”
 하도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만 나온다.
 그래, 이건 분명 꿈도 환상도 망상도 아니다. 현실감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볼을 꼬집어 볼 필요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고 왜 하필 나에게 벌어졌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건 현실인 것이다.
 “상태 창.”
 명령어가 떨어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창 하나가 떠오른다.
 
 케이드라 디 라이엔(Lv.??)
 종족 : 드래곤 직업 : 조율자
 칭호 : 세계의 수호자
 성격 : 변덕
 힘 : ?? 민첩성 : ??
 체력 : ??
 지능 : ?? 지혜 : ??
 정신력 : ?? 위엄 : ??
 마법력 : ?? 항마력 : ??
 신앙심 : ??
 물리 방어력 : ??(??%의 물리 데미지를 무시)
 마법 방어력 : ??(??%의 마법 데미지를 무시)
 전설의 드래곤! 공격하는 자는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허헛······.”
 상태 창을 보니 다시금 헛웃음이 나온다.
 정말로 NPC가 되어 버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게다가 무려 드래곤 NPC라니!
 이 투드란 게임에서 드래곤 NPC는 딱 1명이다. 바로 내가 빙의한 이 케이드라 디 라이엔이라는 드래곤.
 “스킬 창.”
 이 와중에도 궁금함이 들어 스킬 창을 열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킬들이 각자 존재감을 뽐내며 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충 읽어 봐도 하나같이 사기적인 스킬들뿐이다.
 잠시 스킬들을 살펴보던 나는 스킬 창을 닫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넓이의 동굴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에는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도 없는 수많은 물건들이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탓에 이토록 넓은 공간임에도 휑하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만 들었다.
 “라이엔 님, 행동이 조금 이상하십니다.”
 “그래, 정말 이상한 일이지.”
 난 그렇게 대충 대답하며 내 손을 쳐다봤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다.
 손 주변에서 마치 재롱이라도 떠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푸른빛의 마나 입자들이 보인다. 드래곤은 마나를 눈으로 볼 수도 있는 건가?
 비단 마나뿐만이 아니다. 원하는 순간 넓디넓은 동굴 끝 벽에 붙어 있는 먼지 입자 하나까지 볼 수 있었다.
 “불.”
 화르륵!
 게다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나가 반응해서 원하는 곳에 마법이 발현된다.
 이게 바로 용족에게만 허락된 절대 권능 용언!
 “번개.”
 파치직!
 불이 순식간에 전기로 변하며 사방으로 스파크를 뿜어낸다.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느낌이었다. 내 의지가 언어로 발현되어 세상과 공명해 조화를 이루는······ 아니,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심오하고 묘한 느낌이다.
 난 만들어 낸 번개를 손을 휘저어 사라지게 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꼴이 되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왜 투드란 게임의 드래곤 NPC가 되어 있는 거지?
 어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자.
 분명 어제 나는 친구들과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조개구이를 안주로 거나하게 술 한잔을 걸쳤다. 그리고······ 집에 온 기억이 없군.
 필름이 끊겼나? 그럼 설마 내가 술 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다가 뒈져 버린 건가?
 젠장, 설혹 뒈졌다 쳐도 왜 내가 NPC가 되어 있단 말인가.
 정말로 죽어 버린 내 뇌를 꺼내서 인공지능으로 대체시켜 버린 거야? 아니면 영혼이 빠져나와서 게임 속 NPC 육체에 빙의라도 해 버린 건가?
 그때였다.
 -뭐지?
 머릿속에서 거대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지고 정신이 띵- 해지는 느낌.
 -웬 잡것이 감히 내 아바타를 차지하고 있어?
 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세상이 한번 뒤집힌다. 그리고 어느새 난 내가 들어가 있던 케이드라 디 라이엔의 몸에서 튕겨 나와 있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이, 이게······.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한 내 몸, 아니 몸이라고 하기도 이상하다. 제대로 형체조차 잡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나를 보라! 이건 영락없는 유령이 아닌가.
 그런 나를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던 케이드라 디 라이엔이 나에게 손을 뻗는다.
 “이리로 와라.”
 순간 내가 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새 내 영체는 흐느적거리며 라이엔의 바로 앞에 당도했다. 어라?
 자신의 앞에 온 내 머리 부분에 손을 턱 하고 올리는 라이엔, 순간 다시 한 번 현기증이 인다.
 라이엔은 검지와 엄지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젯밤 친구들이랑 술 한잔 걸쳤군. 그렇지?”
 -아니,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야 내가 단순한 게임 NPC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진짜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이게 무슨 소린가?
 “흠. 술 한잔 마시고 친구들이 택시를 태워 집에 보냈어. 집에는 무사히 들어갔는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캡슐에 들어가 접속기를 걸치고 접속하는 순간 구토를 했고.”
 지금 이건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부분인데?
 “토사물이 기도로 역류해 숨이 막혀 죽었군.”
 -······.
 “쯧쯧, 젊은 나이에 안타깝구만. 만취한 상태에서도 하고 싶을 정도로 내 게임이 재밌었나?”
 -내 게임?
 “이 게임이 내가 만든 게임이거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 어벙한 얼굴을 본 것인지 라이엔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직도 이게 가상현실이라 생각하는 건가, 지금 이 상황을 보면서도?”
 -그럼 이게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건가요?
 “이래서 인간은 답답하단 말이야.”
 라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차고는 손짓으로 아직까지 근처에 멀뚱히 서 있던 가디언 NPC 안츠를 물러가게 했다.
 “저승 가는 기념으로 간단히 설명해 주마. 이 게임은 내가 본디 존재하는 투드란이라는 차원을 본떠 만든 가상의 세계다. 물론 순수한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마법 역시 개입되어 만들어진 세계지. 대부분의 NPC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으로 움직이지만 그중 중요한 몇몇 NPC들은 실제의 영혼을 가진 진짜 생명체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도대체 왜?
 “왜냐고? 심심하니까. 가상현실 게임을 다룬 소설들을 읽다 보니 실제로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결과도 만족스럽고. 실로 오랜만에 만난 흥미진진한 놀잇감이랄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라 칭송받는 가상현실이 고작 한 드래곤의 호기심과 심심함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건가?
 “그나저나,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네 영혼이 내가 만든 아바타에 빙의되었냐 하는 건데 말이야. 이상해. 본래의 육신보다 내 아바타에게 더 강한 영인력이 작용했다는 건가?”
 -무슨 소리십니까?
 “조용히 해 봐.”
 내 말을 끊은 라이엔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다시금 몇 번 내 머리통이라 짐작되는 부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더니 이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말이지.”
 -무슨 짐작 말이죠?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지만 간단하게 무시할 수는 없지. 별거 아니야.”
 라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내 머리통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예의 그 현기증이 나를 덮치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가 좋냐, 남자가 좋냐?”
 -그, 그야 원래 남자였으니 남자가 좋지 않을까요?
 “좋아, 남자로 해 주지.”
 대답이 뭔가 이상하다. 내 성별을 결정해 준다는 건가, 지금?
 -그러니까, 지금 절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다는 겁니까?
 “그 비슷한 거다. 두 번째로, 귀족이 좋냐, 평민이 좋냐, 왕족이 좋냐, 황족이 좋냐?”
 -······원하는 대로 고를 수도 있어요?
 “식은 죽 먹기지.”
 -귀족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귀족? 그렇게 하지. 후작가나 공작가 정도로 해 줄까? 아니면 평범하게 남작가나 백작가?”
 -후작이나 공작은 너무 높고, 백작 정도가 좋지 않을까요?
 “그럼 백작가로 해 주마.”
 -아니, 잠깐, 잠깐! 그러니까 정말로 지금 저를 다시 살려 주신다는 거예요?
 기겁하는 내 반응을 본 라이엔이 혀를 찼다.
 “거참, 의심 더럽게 많네. 다시 살려 준다니까.”
 -도대체 왜?
 “불만이냐?”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혹시 모를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라. 그 이상은 알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는 라이엔의 얼굴이 마치 더 물어보면 귀찮으니 관둬 버리겠다는 것처럼 보여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됐든 다시 살려 준다는데 이익이면 이익이지 손해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기억은 남겨 두는 편이 좋겠고. 언어나 예법 같은 기본적인 상식들은 공짜로 넣어 주지. 성격이나 말투도 조금 변하게 될 거야.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네가 아는 과학기술들을 퍼트리려고 하지 마라. 난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까 말이야.”
 -뭔진 모르지만 알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그리고 내가 서비스로 좋은 능력 하나 넣어 줬다. 허락된 신의 힘으로 만든 일종의 ‘절대적 규칙’이니까 잘 활용해 보라고. 천재적 오성 같은 걸 주면 더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내 능력으론 불가능해서.”
 라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튀기는 순간, 세상 전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과 함께 라이엔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보였다.
 “그럼 어디 한번 즐겁게 잘 살아 보라고. 마지막으로 알려 줄 건, 네 새로운 몸의 수명은 빙의되는 순간부터 정확히 150년이다.”
 그 말과 함께 일그러지며 회오리치던 세상 전체가 하나의 선으로 수렴되었다. 오래된 TV 화면이 꺼지는 것처럼 좌우에서 짧아지던 선이 하나의 점으로 변하고, 점이 없어진 후 마침내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키아드리스 백작가
 
 
 
 
 정신이 몽롱하다. 사방이 암흑에 휩싸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 일주일? 한 달? 1년? 10년? 100년? 아니, 어쩌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 아니면 눈 한번 깜빡일 정도로 짧은 시간?
 영겁인지 찰나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온통 암흑뿐이던 세상에 잠깐이지만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몽롱하던 정신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것처럼 또렷해지고 명확해진다.
 도련님······ 렌 도련님······!
 멀리서 들리는 듯 아련하던 목소리들이 점차 또렷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난 눈을 떴다.
 “도련님!”
 “어서 신관을 모셔라!”
 “도련님이 눈을 뜨셨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동공을 찌르는 밝은 빛, 동시에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4~5명의 사람들. 복장을 보아하니 기사 1명에 하녀 둘, 하인 하나.
 “목소리 낮춰라. 머리 아프니까.”
 “예, 예.”
 낮게 말하자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젠장.”
 욕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자 머리통이 욱씬거린다.
 주변을 둘러보자 저택 바로 근처의 정원. 고개를 들어 위를 보자 창문이 열린 테라스가 보이고 은빛의 커튼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내가 주저앉아 있는 위치와 어쩐지 연관성이 짙어 보인다.
 “내가 저기서 떨어졌나?”
 “예. 갑자기 누가 민 것처럼 떨어지셨습니다.”
 기사가 대표로 대답한다.
 난 그 표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설마 드래곤 라이엔이 내 영혼을 이 몸에 넣기 위해서 이 몸의 주인을 테라스에서 밀어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생전 처음 접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듣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이나 차림새가 전혀 낯설지도 않다. 라이엔이 말했던 대로다.
 다만 이 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떠오르는 건 기본적인 상식들과 김준서였을 때의 기억들뿐.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머리가 아프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기사는 내 말에 곧바로 자리를 옮겨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단순한 생채기 정도로군요. 2층에서 떨어지신 것치고는 굉장히 양호합니다. 다행입니다.”
 “물론 겉은 그렇겠지. 아니, 겉은 그 정도이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누구지?”
 내 말에 기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몸이 경직된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새하얗게 얼굴이 탈색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여긴 어딘가?”
 “시, 신관! 신관은 아직 멀었나!”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시끄럽게 고함치는 모습을 보며 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 * *
 
 “충격으로 기억에 이상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다만 언어 같은 것들은 잊어버리지 않으신 걸로 보아 다른 기억들도 차차 회복되실 가능성이 큽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지요.”
 백작의 말에 신관은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 난 그런 신관에게서 눈을 돌려 백작, 내 아버지라는 사람을 쳐다봤다.
 가브기니아 제국에서 암흑의 숲과 맞닿은 부분에 제법 큰 영지를 가진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가주, 키아드리스 켈라인.
 깔끔하게 기른 황금빛의 수염과 머리, 금안과 함께 전쟁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듯한 거친 분위기가 인상적인 이다. 외모로 얼추 짐작건대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 사이일 듯했다.
 “다른 아픈 곳은 없느냐?”
 “없습니다.”
 난 그렇게 말한 후 방 한쪽에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금발에 적발이 섞인 머리카락 그리고 마치 피처럼 선명하고 붉은 눈동자.
 하지만 얼굴 인상이 너무 순해서 섬뜩하다든가 하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붉은색이다.
 남자치고는 너무 순하게 생겼다. 뭐랄까, 몸도 비실비실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달까.
 다행히 여자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작해야 열네다섯 살 먹었을 법한 몸이니 자라면서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있다. 워낙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어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야 왼쪽 상단에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게이지가 보인다. 그뿐 아니다. 오른쪽 상단에 원형으로 떠 있는 이것은······.
 “지도?”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지도에서 눈을 떼고는 백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나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뚝뚝한 눈빛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걱정스러운 기색과 부정父情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피곤하겠구나. 좀 더 쉬도록 해라.”
 “예.”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머리를 잠깐 쓰다듬었다. 그 후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백작이 마침내 완전히 방을 나서자 다시 시야에 떠 있는 미니 맵에 집중했다.
 저택의 내부라서 그런지 밖의 모습은 온통 검은색으로 나타나 있다. 단, 그만큼 저택 내부의 모습이 확대되어 보였다.
 뭐, 어디를 가든지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듯하다. 미로 같은 구조의 이 커다란 저택에서도 헤맬 일 없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다 나가 봐라.”
 “예.”
 남아 있던 1명의 기사와 하녀 2명에게 말하자 곧 하녀 2명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기사 1명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경도 나가 보게.”
 “괜찮습니다.”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서 있다.
 난 그런 기사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라이엔이 넣어 준 상식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내 명령을 무시할 리가 없는데?
 “나가 보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물어 오는 기사의 표정에는 나를 염려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찌푸려졌던 인상이 저절로 펴질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나오는 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
 “괜찮으니 잠깐 나가 주게. 혼자 있고 싶군.”
 기사는 내 말이 끝나고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기사가 완전히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태 창.”
 명령어가 떨어지자 다행스럽게도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오른다.
 아니, 이걸 다행스럽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당황스럽다고 말해야 하나?
 
 키아드리스 렌(Lv. 1)
 종족 : 인간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성격 : 유약함
 힘 : 3 민첩성 : 4
 체력 : 3 지구력 : 3
 지능 : 9 지혜 : 9
 정신력 : 6 위엄 : 2
 마법력 : 16
 물리 방어력 : 2(0.06%의 물리 데미지를 무시)
 마법 방어력 : 0(0%의 마법 데미지를 무시)
 “······.”
 미니 맵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진짜로 눈앞에 나타나니 기분이 참 오묘하다.
 이제 확실하다. 라이엔이 나에게 서비스랍시고 준 능력이 바로 현실에서 게임처럼 상태 창을 열고 스킬을 배우는 황당한 능력인 것이다.
 이런 미친 게임 마니아 드래곤 같으니라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어서 표정마저 조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은 점점 펴졌다. 생각해 보니 이거 꽤 괜찮은 능력이 아닌가!
 현실에서 게임 속 캐릭터처럼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다.
 그뿐인가? 현실과는 다르게 게임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캐릭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제의 몸보다 편하다. 간단한 예로 시야 상단에 있는 지도만 해도 그렇다.
 허락된 신의 힘으로 만든 절대적 규칙이라 했나? 그렇다면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해 주는 것이 이득.
 일단 능력치 창을 분석해 보자.
 투드란 게임의 상태 창 인터페이스와 완전히 같다. 반투명한 녹색 바탕에 황금색 테두리로 이루어진 매우 판타지스러운 디자인. 즉, 이 능력치 표기는 투드란 게임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젠장.
 Lv. 1의 갓 시작한 유저들의 모든 능력치가 10인 걸 감안했을 때 참으로 저질스러운 능력치를 가진 몸뚱이다.
 뭐, 어린아이라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근데 이놈은 백작가의 자제라는 놈이 어째서 위엄 능력치가 겨우 2밖에 되지 않아?
 손을 들어 능력치 창을 끈 나는 상태 창과 마찬가지로 스킬 창을 불러냈다. 현재 배워져 있는 스킬은 2개!
 
 친밀함(passive) :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뮬의 축복(passive) : 타고난 마법력으로 뮬(마나)을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뮬이라. 이곳에서는 마나를 뮬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스킬들이 나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어째서 귀족의 자제가, 그것도 백작가의 아들이 친밀함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격식 없이 친밀하게 굴었나?
 “흠.”
 만약 내 짐작이 맞아 아랫사람들에게 친밀하게 굴었다면 인망은 좀 있을 수도 있겠군. 나름대로 좋다면 좋은 일이다.
 대충 상황 파악도 했으니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일단 난 죽었다. 아니, 죽었었다. 드래곤인 라이엔의 말에 의하면 술 먹고 토해서 죽었단다. 참 꼴사납게도 죽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이엔이 다시 살려 줬다. 처음부터 살려 줄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저승 가는 기념으로 알려 준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중간에 생각을 바꿔 나를 살려 줬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 몸의 수명은 빙의되고 나서 정확히 150년이라 했던가.
 띠링-!
 -지능이 1 상승합니다.
 -지혜가 1 상승합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와 함께 지능과 지혜가 올라갔다는 소리가 들린다.
 “······.”
 아니, 뭘 했다고? 설마 열심히 생각해서?
 단순히 생각을 했다고 능력치가 올라갔다 보긴 힘들다. 그러니까, 원래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생각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생각을 해서 올라간 것인가?
 투드란 게임 시스템은 유저의 행동에 따라 스텟 보너스가 있으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지능이랑 지혜가 올라가니 왠지 머리가 맑아진 것 같다. 단순한 플라시보 효과라기엔 느낌이 너무 명확하다.
 게임의 시스템이긴 하지만 여긴 현실이다. 능력치의 변동이 정말로 육체에 직접적인 변화를 주는 것일 테다.
 능력치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하던 생각이나 마저 하자.
 난 가브기니아 제국의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다. 정실의 둘째가 아니라 첩실의 아들이기 때문에 서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렌을 낳은 어머니는 출산 도중 산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선 일단 나 자신의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그야 당연히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서다.
 무슨 능력을? 당연한 것 아닌가! 검술이나 마법 같은 전투 계열 능력이다.
 이 세상에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현대와는 달리 검이나 마법 같은 실질적 힘이 더 존경받는 곳이다.
 그래. 검술과 마법을 익히자.
 게임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나라면 순식간에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랄 만한 속도로 강해지겠지. 그러면 이 백작가에서는 물론 세상에서 내 한 몸 건사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가문은 내부적인 문제가 없는 것인가? 설마 장자와 나를 두고 후계자 다툼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주 기본적인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라이엔은 나에게 기본적 상식과 언어를 넣어 줬지만 정작 중요한 이 몸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알려 주지 않았다. 정체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인가?
 뭐, 어쨌든.
 일단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주변의 정보를 얻는 것이다. 주변 상황에 대해 원래 이 몸 주인이 알고 있던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다음 검술과 마법을 배울 방법을 알아내어 배우면 된다.
 간단하네.
 
  * * *
 
 이곳에 온 후로 사흘이 지났다.
 지난 사흘간 얻은 정보는······ 사실 별로 없다. 확실한 정보들은 모두 기초적인 것들, 좀 중요하다 싶은 정보들은 전부 추측에 가까운 불확실한 정보.
 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도 백작가 내의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아내는 데는 충분했다.
 일단 백작의 정실부인의 아들, 즉 백작가 장자의 이름은 키아드리스 게인. 나이는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열일곱 살. 현재는 가브기니아 제국의 가브기니아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
 여기서 아카데미에 대해 말하자면, 귀족가의 자제들을 주로 모아 놓고 가끔 재능이 있다 평가받는 평민들 소수를 뽑아 함께 교육하는 곳이다.
 당연하게도 교육이라고 해서 내가 살던 세계의 학교나 학원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연회가 열리고 한 달 간격으로 방학이다. 수업은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있으며 심지어 아카데미를 다니는 3년 내내 하나도 듣지 않아도 된다. 숙식은 당연하게도 최고급으로만 엄선되어 제공된다.
 그러니까, 존귀하신 귀족 자제들을 정중하게 ‘모시고’ 감사하게도 공부를 해 주겠다는 귀족 자제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침을 주는 곳인 것이다.
 물론 꼭 가야 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이 가브기니아 아카데미를 일종의 사교계 데뷔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곳에서 다른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고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때문에 그곳에 다니지 않는 자들은 대부분 변방의 허접스러운 귀족들이거나 후계자 구도에서 거의 밀려난 낙오자들뿐이다. 난 현재 열세 살로, 2년 후에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다음으로, 후계자 다툼은 있었다. 장자라는 게인을 만나 본 적 없어서 본인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주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존재했다.
 키아드리스 백작가에는 2개의 기사단과 하나의 마법병단이 있다. 이 각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마법단장 그리고 행정을 다루는 주요 가신들을 포함해 총 12명의 주요 인사들이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들 중 몇 명이 이미 장자 게인의 편으로 줄을 잡아탄 것 같다.
 지금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이 기사의 이름은 로날드. 평민 출신의 기사로, 제1기사단인 키아 기사단 소속이다. 그리고 이 기사단이 바로 장자인 게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하나의 기사단과 마법병단은 아직 중립인 것 같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 슬슬 대세가 장자인 게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이유가 뭐냐? 바로 이 몸의 원래 주인인 키아드리스 렌의 유약한 성품 탓이다.
 친밀함 스킬이 왜 있나 했더니만 이 녀석은 하인 하녀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에게 과잉 친절을 베풀어 왔던 듯싶다. 물론 그 덕분에 내가 친밀함 스킬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의 눈에는 안 좋게 보였겠지.
 게다가 선천적으로 허약한 몸, 검술이나 마법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시집이나 파고들었던 행동이 더해져 다른 귀족들이 가진 렌에 대한 인식은 ‘허약하고 유약한,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가의 어린 도련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단 과잉 친절에 대해 말해 보자면, 이 렌이라는 녀석은 아랫사람들에게 인망을 얻기는커녕 지나친 친절과 온순한 성품으로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인 하녀에게 무시당하는 백작가의 자제라니.
 귀족을 신처럼 대하는 것이 이곳 세상의 기본 상식임에 비추어 본다면 이 녀석의 멍청함은 도를 넘어섰다.
 이놈이 얼마나 멍청하게 행동했는지 빤히 보인다.
 생각 하나 없이 마냥 친절하고, 베풀고, 당연히 혼내야 할 것도 웃으며 용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모두 쌓이고 쌓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잘못을 해도 벌하지 않는 편하고 쉬운 도련님이라는 이미지를 말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시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이곳 세상에서 시라는 것은 꽤 고급스러운 취미로 분류된다. 하지만 남자들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자 귀족들 사이에서 고급스러운 취미로 분류되는 것이지 시를 즐기고 좋아하는 남자 귀족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런 남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시가 주된 취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잠깐잠깐 즐기는 가벼운 여흥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키아드리스 렌은 달랐다. 시인을 꿈으로 삼고 주위에서 권하는 검술이나 마법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시집만 파고들었다.
 병신 같은 놈. 꿈을 좇는 것은 좋지만 주변 환경도 볼 줄 알아야지. 이건 현대에 사는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당장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나면 평생을 시골 별장에 처박혀 갇혀 살게 될 텐데 말이다.
 아니, 그걸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시를 좋아했던, 야망 없는 녀석이었나?
 뭐, 괜찮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난 고작 열세 살 먹은 어린아이니까.
 게다가 내 행동이 좀 달라져서 그런지 둘째 도련님이 머리를 다친 후로 성격이 확 변했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소문을 잘 이용해야지. 여태껏 쌓아 온 이미지를 한번에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바로 지금.
 노크도 없이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나와 기사의 중간 위치쯤에 건성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러고는 다과를 작은 테이블 위에 놓고 나가는데 다시 인사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차도 따르지 않고 그냥 찻주전자만 덜렁 놓고 나가는 꼴이라니.
 어제까지는 그냥 놔뒀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잠깐.”
 내 말에 밖으로 나가려던 하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 동작마저도 여유가 넘쳐흐른다. 동료 하녀가 부른 듯한 태도랄까.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십니까’란다. 이젠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은근히 무시당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내 평가를 정정한다. 멍청이 정도가 아니라 완전 병신 새끼였군.
 내가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하녀가 살짝 뜨끔한 듯 눈치를 살폈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냐고? 내 눈치가 아니라 옆에 선 기사 로날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누굴 보나?”
 “아, 아닙니다.”
 “누굴 보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로날드 경을 봤습니다.”
 하녀가 그제야 몸가짐을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아주 한참 부족하다. 난 지금 단단히 벼르고 각오를 한 다음 일을 벌이는 것이니 절대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 없다.
 “왜?”
 “······.”
 “지금 내 말을 몇 번이나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 그것이······.”
 “그것이?”
 하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맨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런 질문만 던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하급자를 의도적으로 궁지로 몰고 가는 방법은 군대만 갔다 오면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 있다.
 “들어올 때 노크는 왜 안 했지?”
 “······.”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녀를 보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마치 배 째라는 태도처럼 보이지 않는가.
 “한 번만 더 내 말을 무시할 경우 귀족모욕죄로 참수하겠다.”
 내 말이 떨어지자 단순히 불안한 기색이던 하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는 건가?
 옆에 서 있는 로날드 역시 내 발언에 조금 당황한 듯 나를 슬쩍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올 때 왜 노크를 안 했지?”
 “안 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왜?”
 “그, 그것이······ 도련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그리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에 그리해도 될 줄 알았다?”
 난 잠시 말을 끊고 지그시 하녀를 응시했다. 하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내가 아랫사람 위에 군림하며 그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는 아니다. 하지만, 당연히 가져야 할 위엄과 권위는 누려야 한다. 그것마저 누리지 못하는 놈은 한 단어로 호구라고 하지.
 내가 원해서 누리지 않는 것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들어와서 누구에게 인사를 했지?”
 “그······ 도련님께 했습니다.”
 “······로날드 경.”
 “예.”
 “자네가 말해 보게. 저 하녀가 나에게 인사를 했나?”
 로날드는 내 질문에 나와 하녀를 한 번씩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와 도련님 사이에 했습니다.”
 “그럼 하녀가 거짓말을 한 거로군.”
 “아, 아닙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하녀가 중간에 항변했다.
 쯧쯧, 어찌 이리 멍청한가. 정말 고마울 정도로구나.
 “지금 감히 내 말 중간에 끼어든 건가?”
 “죄, 죄송합니다!”
 “게다가 아니라고? 그럼 로날드 경이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겠지?”
 하녀의 얼굴이 더더욱 새파랗게 질린다. 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차는 왜 따르지 않았지?”
 “그······ 그것 역시 도련님께서 아무 말씀 없으셔서······.”
 “말꼬리 흐리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군. 짜증이 날 정도야.”
 난 그렇게 말한 후 침묵하며 하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하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확실하게 알았겠지. 완전히 엿 됐다는 것을 말이다.
 “하녀장을 불러라.”
 “예, 예! 알겠습니다.”
 하녀의 얼굴은 마침내 죽은 사람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고, 방 안에는 잠시 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띠링-!
 -위엄이 1 올랐습니다.
 메시지가 분위기를 깨는구만.
 “로날드 경.”
 “예.”
 “그대가 내 호위 기사로 임명된 이유는 뭔가?”
 “제가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뭐지?”
 “특별한 동기는 없습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입니다.”
 로날드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눈으로 쳐다봤다. 낯설다는 눈빛이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본인이 원했다는 소리로군. 그렇다면 나를 제대로 보필할 이유도, 동기도 충분하겠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조금 다를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로날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마주 보던 눈길을 슬쩍 돌렸다.
 띠링-!
 -위엄이 1 올랐습니다.
 또다시 위엄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들린다.
 흠, 생각보다 제대로 먹힌 모양인데. 말하면서도 살짝 오글거렸는데 다행이다. 잘못하면 손발이 사라질 상황이 연출될 뻔했는데.
 평민 출신의 기사라서 더 잘 먹혀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평민이 귀족에게 가진 두려움은 이 세상에서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
 “경이 1기사단에 속한 것을 안다.”
 “예.”
 “하지만 그에 우선해서 내 호위 기사지.”
 “······.”
 “뭐가 우선인지,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 알 거라 믿는다.”
 그렇게 말한 후 로날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녀가 가져왔던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쓰군.”
 보나 마나 차도 하녀가 우린 것일 테다. 얼마나 대충 우려냈는지 가져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거의 다 식었고 맛도 형편없다.
 쓰디쓴 차를 들이켜며 기다리길 5분 정도, 밖이 부산스러워지더니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장이라고 자신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깐깐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름이 레첼이라 그랬던가?
 옆에는 잘못을 저지른 채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 있는 하녀가 보인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무슨 용건인지는 알 거라 생각한다.”
 “소르안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하녀의 이름이 소르안이로군.”
 “교육을 잘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한 레첼 부인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그에 옆에 있던 하녀 소르안도 허겁지겁 허리를 숙인다.
 “하녀장을 부른 이유는 이 사태가 비단 소르안만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야.”
 “다른 하녀들도 비슷한 잘못을 했습니까?”
 “일단 소르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부터 말해 보라.”
 “······노크를 하지 않았고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차를 따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나 대신 로날드 경에게 인사를 하더군. 그 죄를 추궁하자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했다. 동시에 로날드 경의 진술을 부정했어.”
 내 말을 듣자 하녀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는 소르안을 한번 돌아보고는 내게 다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직 어려서 그러한 듯싶습니다. 어리고 무지한 평민이 무엇을 알겠습니다. 비록 죽을죄를 지었지만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죽을죄지.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 나를 무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거짓을 일삼고 내 호위 기사인 로날드 경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
 하녀장 레첼의 옆에 서 있던 소르안이 다리가 풀렸는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 레첼이 소르안에게 눈을 부릅뜨며 호되게 꾸짖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냐! 당장 일어나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소르안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그 와중 젖어 드는 하녀복 치마를 보니 실금까지 한 듯하다.
 “소르안, 네가 대답해라.”
 “예, 예!”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잘못을 저질렀지?”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시끄럽군.”
 간절히 외치는 소르안의 말에 짜증스럽게 중얼거리자 소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레첼.”
 “예, 도련님.”
 “내가 이 죄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말에 하녀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죽이십시오.”
 그때였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로날드가 입을 열었다. 난 말을 꺼낸 로날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날드는 여전히 벌벌 떨며 주저앉아 있는 하녀 소르안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도련님의 말을 무시했을 때부터 죽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을 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것이 렌 도련님께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건가?”
 “다른 아랫것들이 더 이상 도련님 앞에서 태만하지 못하겠지요.”
 “······.”
 죽이라고?
 물론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얼마 전까지 그저 평범한 스물세 살의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 왔고 내 생각 또한 그렇게 길들여졌다.
 하지만 로날드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소르안을 어떻게 처벌한다고 해도 죽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처벌은 없다.
 내가 아는 생명의 존귀함.
 이 세계에서 평민과 귀족의 위치.
 이 세계에서의 평민의 목숨.
 그리고 현재 내가 가진 이미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명분.
 소르안을 죽일 필요성.
 난 충분히 소르안을 죽일 명분도, 능력도 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이 하녀를 죽일 수 있을까? 꼭 죽여야만 할까?
 로날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르안을 쳐다본다. 내가 시선을 주자 소르안이 필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리며 간절히 비는 것이 보인다.
 “제발······. 도련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제발······.”
 “비록 잘못이 중하나 아직 어리고 무지한 평민입니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하녀장 레첼 또한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다.
 난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결정했다.
 난 아주아주 이기적이고 단순한 놈이다.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이를 해칠 수 있다.
 생명의 존귀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곳은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고작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죽일 명분도 이유도 필요도 충분하지만 꼭 죽여야만 내가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 세계의 기준으로 난 저 하녀를 죽여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기준.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 세계의 기준만을 따른다면 김준서로 살아온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가진 가치관을 그리 쉽게 버릴 수는 없다.
 “소르안.”
 “예! 도련님!”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도 살기를 바라다니 낯짝 한번 두껍구나. 평소엔 이런 행동을 하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나?”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발······.”
 소르안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자신을 죽일 거라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별다른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도 로날드가 바닥에 주저앉은 소르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소르안은 화들짝 놀라며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금방 다가온 로날드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소르안의 뒷덜미를 잡고 방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던 내 인상은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니,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기사가 먼저 움직여?
 “로날드 경.”
 “예.”
 “누가 움직이라 했나?”
 소르안을 끌고 가던 로날드는 주춤거리더니 소르안의 뒷덜미를 놓았다.
 “내가 명령을 내린 적이 있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내 반문에 로날드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하게 행동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게. 하녀장.”
 “예.”
 돌아가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부름에 레첼이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것이 보인다.
 “이런 죄를 지은 하녀를 살려 달라 간청하다니 그대도 제법 간이 크군.”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번만은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시 하녀장을 벌하겠다.”
 “알겠습니다.”
 “나가 봐.”
 하녀장 레첼은 내게 인사를 한 후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소르안을 부축하고 조용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 하녀장과 소르안이 나가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로날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의중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다니, 경이 정말 내 호위 기사가 맞는가?”
 “죄송합니다.”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혹 그렇다 해도 이렇게 티를 내진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시 허리를 숙이는 로날드의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난 그런 로날드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하루빨리 호위 기사를 바꿀 필요가 있을 듯하다.
 
  * * *
 
 집무실에서 한창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키아드리스 켈라인은 갑작스레 들린 노크 소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렌 도련님이 왔습니다.”
 “······렌이?”
 켈라인 백작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깃펜대에 꽂았다.
 “들게 해라.”
 달칵-.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기억을 잃어버린 아이. 그 후로 성격이 확 변해 전과는 달리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하녀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하녀장까지 불러 일을 벌였으니 꽤나 크게 소문이 번졌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그래, 몸은 좀 괜찮으냐?”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거기 앉거라.”
 켈라인은 렌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집무용 책상 앞에서 일어나 렌의 앞 소파에 가 앉았다.
 “무슨 일이냐? 혹 부탁할 것이라도 있느냐?”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검술? 정말이냐?”
 “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백작의 얼굴에 온통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렌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기억은 돌아왔느냐?”
 “아니요.”
 “······넌 원래 검술 같은 거엔 흥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글쎄요. 기억을 잃어버려서인지 지금은 배우고 싶습니다.”
 “큼.”
 짧게 헛기침을 한 백작은 손으로 턱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현재 백작가에서 장자인 게인과 둘째인 렌을 두고 은근히 파벌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백작도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작은 굳이 그것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가 후계자에 적합한지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첫째인 게인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검술도 출중하고 인품도 그러했으며 통솔력이나 전략·전술에도 능하다. 행정 쪽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이지만 원래 행정이란 것은 지배자보단 그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 큰 흠이라고 볼 수 없다.
 그에 반해 둘째인 렌은 보기 딱할 정도로 유약한 성품에, 통솔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고 검술이나 마법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오로지 시만 죽자고 파고들었다. 절대 지도자가 될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성격이 변했다 하니 렌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좋다.”
 “감사합니다.”
 “호위 기사가 로날드 경이었나?”
 “예.”
 “일단 로날드 경에게 기초부터 배우도록 해라.”
 “그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호위 기사를 바꿔도 되겠습니까?”
 백작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렌의 호위 기사인 로날드가 1기사단인 키아 기사단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키아 기사단은 게인을 밀어주는 파벌, 아무래도 렌은 그 때문에 로날드를 떨어트려 놓으려는 듯했다.
 백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렌은 백작과 잠시 더 사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곧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백작은 그렇게 렌이 나간 문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검술과 마법
 
 
 
 
 새로 호위 기사를 뽑아야 검술의 기초를 배울 수 있다. 난 곧바로 2기사단인 카즈론 기사단으로 향했다.
 2기사단의 단장은 루마르 토마슨 남작으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가진 뛰어난 기사였다. 동시에 평민 출신이었다.
 그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카즈론 기사단은 1기사단인 키아 기사단에 비해 자유분방한 성향을 띠었다. 1기사단의 단장인 라르겔 에릭투 단장은 뼛속부터 기사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가 이끄는 기사단 역시 그런 성격을 띤다.
 1기사단이 게인을 따르는 파벌만 아니었다면 난 1기사단에서 호위 기사를 뽑았을 것이다. 자유분방하다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통제를 잘 따르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현실이 이러니 내게 선택권은 없다.
 2기사단으로 가는 길을 잘 모르기에 내 전속 하인 하인츠를 앞세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 후 도착한 2기사단의 연무장에선 기사들이 한창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200명 정도의 기사들이 상의를 모두 벗고 태양 빛 아래서 천천히 검을 휘두르고 있다. 휘두르는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검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저렇게 느리게 휘두르는 것이 빠르게 휘두르는 것보다 배는 어렵다.
 잠시 그런 기사들을 보다가 연무장을 빙 둘러 본관 입구로 향했다. 입구 근처까지 가자 나를 발견한 기사 2명이 내게 군례를 취했다.
 “토마슨 남작 있는가?”
 “집무실에 계실 것입니다.”
 “수고하게.”
 인사를 건네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근무를 서던 기사 1명이 나를 발견하곤 군례를 취했다.
 그런 기사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자 1층보다는 조금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무를 서던 기사가 내게 군례를 취한다.
 그 기사의 인사를 받아 주며 집무실이라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무실 한쪽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토마슨 남작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들의 훈련 광경을 보고 있던 남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군례를 취했고 나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토마슨 남작의 첫인상은 매우 거친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 얼굴에 난 흉터가 어우러져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다.
 “렌 도련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2기사단에서 호위 기사를 뽑았으면 합니다.”
 “호위 기사 말입니까? 로날드가 있지 않으십니까?”
 “사정이 있습니다.”
 내 말에 토마슨 남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를 떠올린 듯 작게 미소 지었다.
 “말 안 듣는 검은 하루빨리 갈아 치워야지요.”
 “하하······.”
 너무나도 직설적인 비유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자 남작은 곧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자 남작은 집무실 한쪽의 책상 서랍에서 두껍기 그지없는 양피지 뭉치를 꺼내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뭔가 해서 보니 기사들의 신상이 적힌 양피지다.
 “제가 호위 기사로 적당한 후보 몇 명을 추려 드리지요.”
 “그래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남작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대부분의 양피지가 그냥 넘어갔고 몇 장의 양피지는 따로 옆으로 분류되었다. 내게 추천할 기사들의 명단이다.
 그렇게 작업을 마친 남작이 내게 건넨 양피지는 총 열 장.
 “각 기사의 수준과 장단점이 대략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제 주관으로 적어 놓은 것이니 참고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난 신중히 양피지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에 뽑을 호위 기사는 정말로 내 호위를 맡길 기사다. 제대로 뽑지 않는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나다.
 기사들의 평균 수준은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서 중급 사이,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기사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기준은 바로 성품이다. 어떤 무기를 쓰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그것은 둘째 문제다.
 기준에 따라 양피지를 분류하니 3명이 나왔다. 난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을 원했기 때문에 다혈질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제외시킨 것이다.
 “이 3명을 실제로 볼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렐튼!”
 남작이 큰 소리로 부르자 밖에서 기사 1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샤르칼, 벨버, 루브란을 데려와라. 빨리.”
 “예.”
 기사는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남작의 친절을 사양하며 난 과연 어떤 기사들이 들어올까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호위 기사를 뽑는 일이다 보니 조금 설렌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훈련을 하던 중이었던 듯 기사들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 * *
 
 샤르칼은 한창 훈련하던 도중 단장님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 동료 기사인 벨버와 루브란도 합류했다.
 “벨버 너도 단장님께 가는 길이냐?”
 “그런데. 루브란 너도?”
 “그래.”
 “무슨 일이지? 뭐 잘못한 거 있냐?”
 하지만 세 사람이 고민해 봐도 별달리 잘못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빨리 가자.”
 샤르칼의 말에 3명은 느려지던 발걸음을 다시 빨리했다.
 잠시 후, 집무실에 도착한 세 사람은 전혀 의외의 사람을 보고 멈칫해야 했다.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서자인 키아드리스 렌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장과 렌에게 각각 인사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렌 도련님이 너희 3명 중에서 호위 기사를 뽑길 원하신다. 자원할 사람?”
 토마슨 단장의 전혀 뜻밖의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품이 부드럽고 시를 좋아하는 유약한 도련님. 그런 사람의 호위 기사를 맡는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 사람 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저 유약한 도련님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렌은 그런 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경의 이름이 뭐지?”
 렌이 지목한 사람은 토마슨 단장과 마찬가지로 거친 회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20대 초반의 기사였다.
 “······루마르 샤르칼입니다.”
 “토마슨 남작의 아들이로군?”
 “그렇습니다.”
 샤르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긴장으로 물들어 갔다.
 렌은 그런 샤르칼을 보더니 몇 번 턱을 문지르고 빙긋 웃었다.
 “자네가 내 호위 기사를 맡아 주었으면 하는데. 토마슨 남작,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샤르칼의 아버지인 토마슨 남작은 흔쾌히 대답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샤르칼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찡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제가 호위 기사를 맡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옆에 있던 벨버와 루브란이 동정에 가득 찬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샤르칼은 입술을 씹었다. 재수 옴 붙었다.
 
  * * *
 
 “후욱······ 후욱······.”
 달리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천 근처럼 무겁다. 공기가 폐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입에만 들어왔다 나가는 듯하고 손끝은 제대로 피가 돌지 못해 감각이 없어진 채 저릿저릿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띠링-!
 -체력과 지구력이 1 올랐습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메시지가 이 방법이 맞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젠장······ 살면서 운동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검술을 익힐 생각만 했지, 그걸 이렇게 실제로 몸을 단련해서 익힐 생각을 하니 왠지 까마득하다. 검술이란 것 자체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 검술이라 해 놓고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만을 생각했지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꾸준한 수련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야 했지. 각오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힘들다. 하지만 그나마 희망적인 사실 하나는 바로 레벨을 올리는 것으로 이 수련을 빠르게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번 올라간 스텟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이들처럼 규칙적이고 꾸준하게 몸 단련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레벨 업!
 경쾌한 메시지와 함께 지쳐 가던 몸에 갑작스럽게 활력이 돌았다. 이로써 세 번째 레벨 업이다.
 천근만근 무겁던 발걸음에 다시 힘이 실리고 속도가 산다. 흐트러져 가던 자세가 곧게 서고 다시금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기 시작한다.
 레벨 업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지쳐 나자빠졌을 테지만 한계에 도달하면 꼭 찾아오는 레벨 업 덕분에 지금 근 2시간째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새로 뽑은 호위 기사 샤르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가는 모습도 보였다.
 샤르칼이 내게 요구한 것은 3시간 동안 일정한 속도로 달리라는 것이었다. 그걸 완료할 경우 다음 기초 훈련으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이 훈련을 마치기까지 최소 일이 주 정도는 걸릴 거라 예상했다는 소리다.
 “상태 창.”
 
 키아드리스 렌(Lv. 4)
 종족 : 인간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성격 : 종잡을 수 없음
 힘 : 7 민첩성 : 6
 체력 : 11 지구력 : 13
 지능 : 11 지혜 : 11
 정신력 : 8 위엄 : 10
 마법력 : 17
 물리 방어력 : 3(0.07%의 물리 데미지를 무시)
 마법 방어력 : 0(0%의 마법 데미지를 무시)
 
 내가 가진 게임 시스템은 역시 투드란 게임의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레벨 업을 한다고 해서 보너스 포인트 같은 것을 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능력치가 올라가는 메시지의 소리나 방법을 봐도 그렇다.
 투드란에서 레벨이란 일종의 재능 같은 것이다. 즉, 레벨 업을 통해 강해진다기보다는 강해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고 말하는 게 옳다는 뜻이다.
 레벨이 높을수록 능력치의 성장 속도나 스킬의 성능이 달라진다. 또한 아이템의 성능을 제대로 뽑아낼 수 있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레벨 업을 통해 강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많이 다르다.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그에 걸맞는 노력이나 스킬 또는 아이템이 없다면 레벨이 크게 낮은 상대보다 약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뭐, 어찌 됐든······ 능력치는 이제야 좀 봐줄 만하다. 그 전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쓰레기였어.
 아, 그러고 보니 지난 시간 동안 인벤토리를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다. 지금 열어 볼까? 아니, 아니다. 수련을 끝마치고 열어 보는 게 나을 듯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길 계속, 슬슬 다시 한 번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려는 순간 샤르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3시간이 지났습니다.”
 “헉······ 헉······ 그럼 이제 멈춰도 되나?”
 “예.”
 난 샤르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화강암 비슷한 석재로 이루어진 바닥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느낌이 기분이 좋다.
 바닥에 누워 버린 내 옆으로 샤르칼이 다가오더니 내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며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혹시 예전에 체력 훈련을 하신 적 있습니까?”
 “난 모른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제 추측으로는 렌 도련님께서는 결코 훈련을 처음 해 보신 게 아닙니다.”
 “왜지?”
 “처음 훈련을 하는 사람은 결코 이 정도 속도로 3시간 동안 달릴 수 없습니다. 건장한 성인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지요. 비슷한 훈련을 일정 기간 꾸준히 한 사람만이 이 훈련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예.”
 샤르칼은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내 몸 이곳저곳을 주물렀다.
 “길게는 한 달 이상 걸릴 줄 알았는데 설마 하루 만에 통과해 버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 훈련은 뭔가?”
 “체력과 지구력의 기본은 갖추셨으니 이제 힘과 속도를 기르실 차례입니다. 검의 속도를 좇을 수 있는 안력 훈련도 겸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넘어가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빠르십니다.”
 “알겠네.”
 샤르칼이 훈련장 밖에 서 있던 하인 하인츠에게 손을 흔들자 하인츠가 달려와 내게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 들자 얼음장처럼 차갑다.
 “고맙군.”
 내 말에 하인츠는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갑기 그지없는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아 내자 어느 정도 더위가 가시는 느낌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호위 기사 샤르칼을 봤다.
 그는 아무래도 내 호위 기사로 발령 난 것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내 소문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계속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야 로날드가 내 호위 기사일 때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식사나 같이 할까?”
 “식사······ 말씀이십니까?”
 “내 식단과 경의 식단이 좀 다를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해산물이 올라온다고 했던 것 같군.”
 샤르칼의 얼굴에 미약하지만 끌린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난 그런 샤르칼을 보고 빙긋 웃었다.
 “1시간 후에 식당으로 오게.”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도련님과 같이 식사를 하겠습니까?”
 “싫은가, 정말로?”
 샤르칼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난 그런 샤르칼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아. 기본적인 예의만 지킨다면 지나치게 격식 차릴 필요 없으니 거절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난 그런 샤르칼을 보고 빙긋 웃었다.
 
  * * *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마법병단이 머무는 커다란 저택, 그 앞에 당도한 나는 옆에 서 있는 샤르칼의 얼굴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1층에 있던 로브를 입은 마법사 2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렌 도련님 아니십니까?”
 “그래.”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 됐고. 마법서를 좀 보고 싶은데.”
 “마법서 말씀이십니까?”
 왼쪽에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어 온다.
 “어떤 마법서 말씀이십니까?”
 “마법서를 따로 모아 놓은 곳은 없나?”
 “있긴 있습니다만······.”
 마법사 2명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도련님이신데 안 될 것은 없겠지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단장님께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내 눈치를 살폈다.
 하긴, 내가 여기서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들로서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하게.”
 그들을 곤란에 빠트릴 생각은 없다. 내 시원한 대답에 마법사 1명이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다른 마법사 1명은 나를 1층 한쪽에 마련된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법사가 안내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 슬쩍 눈을 감았다.
 샤르칼과의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온 길이었기에 편안한 곳에 앉자 온몸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이대로 잘 수도 있을 듯한 느낌이랄까. 식사 전에 고단한 체력 훈련을 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잘 수는 없지. 곧바로 눈을 뜨고는 깊게 묻었던 몸을 조금 곧게 폈다.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바로 마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는 투드란 게임의 마법과 같을까, 아니면 조금 다를까? 하지만 같을 것 같지는 않다. 라이엔이 내 머릿속에 넣어 준 상식에서 나타난 마법과 내가 아는 투드란 게임의 마법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길 잠시, 위로 올라왔던 마법사가 내려왔다.
 “도련님, 마법 서고로 안내하겠습니다.”
 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법사의 뒤를 따라갔다.
 위층으로 올라선 마법사는 꽤나 넓은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고맙네.”
 덜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마법서를 읽던 마법사 몇 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응대해 준 후 내부를 살폈다.
 현대 세상의 도서관 같은 구조였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책들이 하나같이 흉기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두껍고, 천장에는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기 편하도록 밝은 빛을 뿜어내는 마법의 빛이 둥둥 떠 있다는 것 정도랄까.
 감상을 마친 후 걸음을 옮겨 근처에 있는 책들의 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마법 하나에 두껍디두꺼운 책이 네다섯 권씩 있다는 것이었다.
 마법 하나 배우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 겨우 하나의 마법을 풀이하기 위해 저렇게 두꺼운 책이 네다섯 권이나 나올 정도로?
 역시, 이곳 세상에서 마법사들은 천재 중의 천재라는 소리가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도 고작 20개 남짓의 마법만을 익혔다는 소리 역시.
 “흠······.”
 마법서들을 살펴보던 내 눈에 하나의 마법서가 들어왔다.
 바로 간파라는 마법서였다. 다섯 권 분량의 마법이다. 이름만 들어 보면 상대방의 수준을 파악하거나 은신을 탐지하는 등의 마법일 듯했다.
 곧바로 마법서의 1권을 뽑아 들어 펼치자 첫 장부터 빼곡하게 쓰인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훑어보며 넘기자 중간중간 수학 공식들도 보이고 그래프 비슷한 그림들도 많이 보였다.
 다행인 건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인 건 이해하는 것과 그걸 실제로 행하는 것은 차이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이걸 언제 익히지?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으로는 계속 책을 훑었다.
 검술과 마법을 배운다고 결심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둘 모두 내게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다.
 마법은 천재들의 전유물이다. 내가 과연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검술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과연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건성건성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순간이었다.
 띠링-!
 -간파 마법의 초입 부분을 익혔습니다.
 “······.”
 이거 설마?
 갑자기 가슴 가득히 벅차오르는 기대감!
 난 곧바로 2권을 꺼내 들어 1권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 그리고 3권, 4권을 연속해서 독파하기 시작했다.
 사실 독파라고 하기도 창피한 게, 그냥 한 페이지씩 슥 훑어보는 식이었기에 사실 읽는다기보단 그냥 넘긴다고 말하는 게 좋을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권씩 읽을 때마다 꾸준히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권을 읽자 책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리링-.
 -passive 스킬 ‘간파’의 단서를 획득했습니다.
 
 간파(passive) : 한 대상을 오래 바라볼 시 대상의 대략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단, 간파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거나 수준이 월등하게 차이 나는 경우에는 알아낼 수 없다.(사용할 수 없음)
 
 메시지와 동시에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비한 느낌이었다. 두통이라든가 기억의 혼선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마치 내가 이 자리에서 간파 마법서를 모두 외워 버린 것처럼 간파 마법의 지식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축적되었다.
 대박이다, 이건!
 이건 정말 대박이었다. 두껍기 그지없는 책으로 다섯 권에 걸쳐 설명한 마법을 고작 읽는 것만으로 외워 버리다니!
 주변을 둘러보자 그 어떤 마법사도 나를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 책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효과는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듯했다.
 “저······ 도련님?”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내심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하인츠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예.”
 간파 마법서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모양이다.
 난 흥분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간파 마법서를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지금 가자.”
 내가 앞장서자 뒤에서 하인츠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법병단을 나서자 하인츠 말고도 여태까지 1층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던 샤르칼 역시 따라붙었다.
 “첫날부터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샤르칼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럴까?
 다음에 올 때는 샤르칼을 떼어 놓고 오는 게 좋을 듯하다. 나도 이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샤르칼과 하인츠를 대동하고 내가 머무는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난 그 와중 머릿속에 정리된 간파 마법의 지식을 다시금 살폈다.
 역시 복잡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있으니 이걸 실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스킬을 배우긴 했는데 사용할 수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내가 실제로 직접 뮬을 움직여 사용하기 전까진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하다.
 슬쩍 실망감이 들었지만 난 그 감정을 곧바로 지워 버렸다.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 마법을 완벽하게 배워 버리길 원한다면 그건 욕심이다.
 솔직히 다섯 권 분량의 마법서 내용을 한번 훑어본 것만으로 외워 버린 일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남들이 마법을 하나 배울 때 난 10개, 20개도 배울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자. 이미 난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히 남들보다 유리하다.
 몇 배, 아니 수십 배의 속도로 마법을 배우고 검술도 배울 수 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 * *
 
 “마법 서고에서 간파 마법을 모두 읽고 나갔다고?”
 “예.”
 “뜬금없는 일이로군. 왜 갑자기 마법에 흥미가 생겼을까? 오늘부터 갑자기 검술도 익힌다면서?”
 “예.”
 “흐음······.”
 젊은 마법사의 보고를 들으며 턱을 만지작거리는 자는 머리에 새치가 가득한 중년의 마법사로, 바로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마법병단장 드렉타론 켈타스 남작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직접 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영지를 받지 않은 채 키아드리스 백작가에 몸을 의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작가의 재정이 꽤 풍부했기에 자신이 원하는 마법 연구를 원하는 대로 지원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작가 바로 옆에 자리한 어둠의 숲에서 간간이 나오는 몬스터들 역시 마법 연구의 훌륭한 재료였다.
 사실 재정 문제보다는 어둠의 숲 옆에 자리한 영지들 중 가장 안정적이고 큰 영지가 바로 키아드리스 백작가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마법 서고에 발걸음을 했을까. 그것도 잠시 들른 것도 아니고 간파 마법을 골라 그 자리에서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다섯 권을 모두 읽었다고?”
 “읽은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히 살펴본 것 같더군요.”
 “그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마법서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읽힐 책이 아니지.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섯 권을 모두 훑어봤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3시간이 넘도록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보고를 하던 젊은 마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단장 켈타스 역시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닌지 이내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 봐.”
 “예.”
 마법사가 거처를 빠져나가자 켈타스 남작은 의미 모를 표정을 지으며 턱을 매만졌다.
 
  * * *
 
 저녁 식사 식탁은 여전히 푸짐했다.
 나와 샤르칼 둘이서 먹는 저녁임에도 10명은 먹는 것처럼 수많은 음식들이 나온다. 단순히 양이 많다는 소리가 아니라 가짓수가 많다는 소리다.
 테이블 멀리에 손이 닿지 않는 음식은 손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하녀가 알아서 적당히 덜어 내 앞에 대령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현대 문명을 뛰어넘는 간편함! 그것은 모두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현대에 과학이 있다면 이곳엔 권력과 계급이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내 식탁도 이렇게 풍성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귀족제에 대해 불만이 없느냐고?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그 직접적인 수혜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내가 수혜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곳 세상에선 이게 당연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체제를 이용할 생각을 품었으면 품었지 이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한다.
 이 세계가 3만 년이 넘도록 이 체제를 가지고 이 정도 문명에서 정체되고 있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내 생각에 신의 실존과 마법의 존재가 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육질이 부드러운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는 식기를 내려놓고 하녀에게 손짓하자 곧 하녀들이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샤르칼은 내가 식사를 다 하기 전에 이미 식사를 끝냈기 때문에 상관없다. 두 번째 식사였지만 그는 아직 나와 함께하는 이 자리가 조금 불편한 듯했다.
 하녀 둘이 식탁을 대충 정리하는 사이 다른 하녀 1명이 디저트를 내왔다. 과일을 갈아 우유 등과 섞어서 마법으로 얼려 만든 일종의 과일 셔벗이다.
 오늘 저녁은 특히나 더 만족스러웠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스킬을 어떻게 배우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다섯 권의 마법서를 훑어본 것만으로도 그 마법서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섰다. 이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한 가지 아쉬운 건 내 레벨이 낮아 배울 수 있는 스킬의 개수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나는 10개의 스킬을 배울 수 있다. 레벨 10이 넘어가면 11개를 배울 수 있고 20이 넘어가면 12개를 배울 수 있다. 즉, 10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배울 수 있는 스킬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난다.
 현재 내가 가진 스킬의 개수는 총 3개. 앞으로 7개 남았다.
 “샤르칼 경.”
 “예.”
 “식사는 괜찮은가?”
 “저에겐 아주 화려한 식사입니다.”
 난 샤르칼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대답한 샤르칼 역시 내심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는 내 의도가 먹혀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라도 뭔가 혜택을 줘야 내 호위 기사로 있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한다고 했던 수련들 말인데.”
 “예.”
 “혹시 그것들을 책으로 정리한 건 없나? 경이 내게 가르칠 것들 모두를 책으로 먼저 받아 봤으면 하는데.”
 “물론 교본이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경에게 물어보기도 좀 그렇지 않나?”
 샤르칼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수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일 아침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군.”
 기본적 체력을 만드는 것을 책으로 읽어도 효과가 있을까?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러면 일일이 샤르칼의 지도를 받아 체력 훈련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 시간을 어느 정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디저트를 마저 먹은 나와 샤르칼은 식당에서 나와 내 침실로 향했다.
 마주치는 하인 하녀마다 최대한 정중하게 내게 인사를 해 온다. 그들에게서 나를 어려워하는 태도가 여실히 묻어났다. 소르안 사건 이후로 일어난 변화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쉽게 대하지 않았다.
 띠링-!
 -위엄이 1 올랐습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위엄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다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이곳 세계에서는 이것이 제자리인 것이다. 현대 세상처럼 만인이 평등하고 신분의 고하가 없으며 직업의 귀천이 없는 세상이 아니다.
 라이엔이 내 머릿속에 넣어 준 상식들 덕분인지 이런 제도에 난 놀랍도록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도 조금씩이지만 경험치가 오르는 것이 보인다.
 시야 왼쪽 상단에 있는 노란색 게이지가 바로 경험치, 그 밑에 있는 파란색 게이지가 뮬 게이지다.
 뮬이라······ 투드란 게임에서 느꼈던 마나와 같은 감각일까? 아니면 다를까?
 라이엔이 이곳 세상을 기반으로 게임을 만들었다고는 했지만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1에서 10서클로 표시되는 게임과는 달리 이곳 세상의 마법은 서클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오로지 마법을 몇 개 익혔느냐에 따라 그 마법사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마나를 뮬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성질 역시 조금 다를지 모른다.
 그 밖에도 상당히 많은 것들이 다르다.
 “오늘도 수고했네.”
 “편히 쉬십시오.”
 침실 입구에서 샤르칼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침실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 2명이 곧장 내게 다가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몸에 익어서 그런지 라이엔이 준 상식 덕분인지 금방 익숙해진 일상이다.
 동대륙에서 수입해 온 비단으로 만들어진 속옷만 남기고 모두 벗자 하녀들이 나를 욕실로 안내했다.
 하녀들은 내가 욕실에 들어섰음에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내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거품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뿐이다. 씻기고 주무르고 마사지하는 모든 것은 하녀들의 몫이다.
 또한 이들은 원한다면 내 잠자리 시중까지 든다.
 현재 이 몸의 나이는 13세. 사춘기라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다.
 하녀들의 손길이 몸을 스칠 때마다 기분 좋은 쾌감이 몰려왔다. 당연하게도 하반신의 물건 또한 힘이 꽉 들어갔다.
 하지만 나도 하녀들도 그것에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녀들의 옷을 벗겨도 그녀들은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하녀들을 침대로 끌어들인 적이 없다. 하녀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건 이 세계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수시로 하는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지만 난 아직까지 별로 생각이 없었다. 현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내 가치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가치관이냐고? 간단하다. 남자는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는 가치관이다.
 그 정도 자제심도 없다면 뭘 해도 그에 따르는 고통을 참아 낼 만한 인내심이 없을 테니까.
 성욕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기분을 좋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자제력을 떨어트리고 정신과 몸을 무르게 만든다.
 그래서 여태까진 잠자리에 하녀를 끌어들인 적이 없다. 하지만 조만간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여자를 가질 수 있는 귀족이 혼자서 성욕을 해결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소문이 잘못 퍼지면 내가 성 기능에 이상이 있다든가 독특한 취향을 가졌다고 알려질 수도 있다.
 특히 고자라고 소문나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체면 문제는 둘째 치고서라도 후사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귀족으로서 크나큰 결점 중 하나다.
 조만간 하녀 1명과 동침을 하긴 해야 할 텐데. 누구랑 하지?
 슬쩍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 2명의 얼굴을 본다. 얼굴? 당연히 평균 이상이다. 제국의 백작가에서 일하는 하녀들 중 얼굴이 못난 여성은 단연코 1명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몸의 첫 경험인데 아무 하녀하고나 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 몸에 빙의한 이후 갖는 첫 경험이라고 해야겠지.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놈이 내가 빙의하기 전까지 여자와 한 번도 잔 적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나 역시 김준서로 살 때는 여자 경험이 몇 번 있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마사지까지 포함해 목욕이 모두 끝났다. 수련을 하고 나서인지 오늘따라 몸이 풀리는 듯한 개운한 느낌이 더 컸다.
 “그만 물러가라.”
 몸의 물기를 닦아 낸 하녀들에게 말하자 곧 2명은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난 한쪽에 깔끔하게 접혀 있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처음 수련을 시작한 날이라 그런지 온몸이 노곤했다. 게다가 스킬을 배웠다는 성과 때문인지 오늘 하루가 아주 보람찬 기분이다.
 이제 잠을 자 볼까. 아,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지.
 “인벤토리.”
 명령어가 떨어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보통 여타의 창과는 달리 입체적으로 생겨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인벤토리에 제대로 물건을 넣었다는 느낌, 제대로 물건을 빼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구조다.
 어쨌든, 그런 구조의 인벤토리 안에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초보자용 포션 10개
 능력치 향상 오브
 케이드라 디 라이엔의 쪽지
 장검
 단검 한 쌍
 활
 화살 100개
 창
 폴암
 클로 한 쌍
 카타르 한 쌍
 중소형 원방패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능력치 향상 오브라는 물건이었다.
 “능력치 향상 오브?”
 설레는 마음에 급히 오브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꺼내 든 오브의 모습은 그저 반투명한 보랏빛의 구슬이다.
 “아이템 확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투드란 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따랐다면 정보 창이 떠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건가?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난 일단 오브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다른 아이템인 케이드라 디 라이엔의 쪽지를 꺼내 들었다.
 
 김준서에게
 제대로 잘 갔는지 모르겠군. 제대로 갔다면 넌 가브기니아 제국 키아드리스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 ‘키아드리스 렌’의 몸으로 들어갔을 거다. 약속대로 그쪽 세계에서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이나 언어는 머릿속에 넣어 줬으니 주변 상황을 파악하거나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을 거야.
 아, 그 녀석 몸이 좀 비실하다. 딱히 어드밴티지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그리고 이미 게임 시스템으로 충분히 줬지만― 그렇다고 페널티를 주고 싶지도 않거든. 그러니까 능력치를 조금 올릴 수 있는 오브를 주마. 그 몸의 말도 안 되게 빈약한 능력치를 커버할 수 있을 거다.
 오브는 이 편지를 보고 곧바로 사용해라. 그러지 않으면 얼마 후 사라질 테니까.
 내가 널 왜 그곳으로 보냈는지는 궁금해할 필요 없다.
 드래곤은 진실의 존재라는 말 들어 봤나? 내가 장담하지.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야.
 하지만 미안하게도 정확한 이유를 말해 줄 수는 없다. 알려 준다면 틀림없이 네 행동에 변화가 생길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아무 생각 말고, 아무 걱정 없이 네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해라. 나라는 존재를 그냥 잊어도 상관없다. 내가 더 이상 너에게 간섭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그 몸의 수명은 빙의한 순간부터 정확히 150년이다. 중간에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
 전생에선 허무하게 죽었지만 이번 생에선 행복하게 잘 살아 보길 바란다. 어차피 전생에서 미련을 가진 대상도 없었잖아? 그쪽 세상이 너에겐 더 살기 좋을 거다. 부디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
 케이드라 디 라이엔
 
 편지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라이엔이 나에게 남긴 편지.
 능력치 향상 오브라는 물건이 인벤토리에 왜 들어 있나 싶었더니만 라이엔이 보통의 레벨 1짜리에도 못 미치는 이 몸뚱이의 빈약한 능력치를 커버하라는 의미로 넣어 준 것이었다.
 허 참. 내가 왜 진작에 인벤토리를 열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게임이었다면 진작 열어 봤겠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에 인벤토리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마저 까먹은 듯했다. 젠장, 일찍 열어 봤다면 오늘 수련을 할 때 그렇게 힘들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건 그렇고, 끝에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은 뭘까? 다시는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말이다. 한번 자신을 찾아오라는 뜻인가?
 고민해 봤지만 별다른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나를 다시 살려 준 이유도 모르는데 생각한다고 별다른 추측이 나올 리 없다.
 그나저나 이거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먹는 건가?
 생각 같아서는 아껴 뒀다가 능력치를 올리기 힘든 후반에 먹고 싶지만 곧 사라진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라이엔의 편지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며 옆에 놓아두었던 오브를 집어 들었다. 한번 입에 넣어 볼까? 웬만한 오브는 전부 복용식이니 이것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브를 입에 가져갔다. 순간, 오브가 빛을 뿜어내며 흐물흐물하게 변하더니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쏙 들어갔다. 동시에 몸에서 보랏빛이 뿜어지며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오브의 힘으로 빈약했던 능력치가 향상됩니다.
 우드드득! 콰드득!
 1초 정도의 짧은 순간, 전신을 훑는 쾌감과 함께 온몸의 뼈가 어긋나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침실 안을 울렸다.
 하지만 이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현상은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후우······.”
 전신에 도는 활력 때문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이건,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과연 얼마나 올랐을까?
 “상태 창.”
 
 키아드리스 렌(Lv. 4)
 종족 : 인간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성격 : 종잡을 수 없음
 힘 : 17 민첩성 : 16
 체력 : 18 지구력 : 20
 지능 : 12 지혜 : 12
 정신력 : 12 위엄 : 19
 마법력 : 17
 물리 방어력 : 6(0.09%의 물리 데미지를 무시)
 마법 방어력 : 1(0.01%의 마법 데미지를 무시)
 모든 능력치가 조금씩 증가했다. 사실 수치상으로는 채 10도 되지 않지만 지금의 내 상황에서는 이 정도의 향상만 해도 대박이다!
 올라간 능력치를 보니 처음 빈약했던 능력치를 모두 10으로 맞춰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 며칠간 내가 능력치를 올린 덕분에 모든 능력치가 10 이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내가 인벤토리를 늦게 확인한 것이 복이 된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능력치는 낮을 때보다 높을 때 올리기가 더 힘들다.
 난 들뜬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아직 확인할 물건이 좀 더 남았다. 바로 무기와 포션이다. 뭐, 투드란 게임에서 초보자에게 지급하는 그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가장 먼저 장검을 꺼냈다. 왠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듯한 묵직한 느낌이다. 장검의 형태는 바스타드소드다. 베기와 찌르기가 모두 가능하고 양손검과 한손검의 장점을 합쳐 놓은 하이브리드검.
 손잡이는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길고 손잡이 중간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한 손으로 잡아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또한 검날의 폭은 손잡이 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넓어져서 사용 시 무게중심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적인 롱소드보다 조금 길다.
 초보자에게 지급되는 이 검의 특징은 무엇이냐? 바로 절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마법이라도 쉽게 인챈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거 생각해 보니 꽤 좋은 옵션이다.
 투드란 게임에서야 레벨이 조금만 올라가도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마법적 옵션이 붙은 검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때문에 처음 지급되는 이 검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장점이라고는 오직 무한한 내구도밖에 없는 검을 굳이 다른 마법적 옵션들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챈트가 가능하다지만 굳이 비싼 돈 들여 가며 처음 지급되는 검에 인챈트를 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이곳 세상이라면?
 검이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메리트다. 특히나 마법이 걸린 검은 귀족조차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이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거 괜찮은데?
 난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은 초보자용 포션 10개. 물론 옵션이야 뻔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손에 든 초보자용 포션은 사과만 한 크기의 유리병에 붉은빛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전형적인 포션병의 모습이다.
 레벨 10 이하만 사용 가능, 사용 시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하고 부상을 회복시켜 주며 재사용 대기시간은 30분, 그 안에 다시 마실 경우 효과 없음.
 레벨 10 이하만이 사용 가능하다. 게다가 투드란 게임에서 포션이란 당연하게도 귀한 물건이 아니다. 잡화상만 가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 포션이고 가격도 1실버로 초보자도 1~2분만 노가다를 뛰면 두세 병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그런 물건이다.
 때문에 초보자용 포션은 전혀 귀하지 않다. 레벨 10을 넘어 버리기 전에 빨리빨리 써 버리는 것이 이득인 그런 흔하고 가치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무기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상에서는 포션은 꽤 희귀하다. 게다가 레벨 10 이하의 존재에게 이 초보자용 포션은 전설의 엘릭서를 방불케 하는 절대적 치유 물약이 아닌가!
 가지고 있는다면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뭐, 안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수명이 150년이라는데 설마 그동안 단 한 병도 안 쓰겠어?
 들고 있던 포션병을 인벤토리에 넣자 원래 있던 포션들과 겹쳐지며 ×10이라는 숫자가 생겨났다. 그걸 확인하고 인벤토리를 닫으며 침대에 가볍게 몸을 뉘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보람찬 하루였다.
 
 
 
 #스킬 습득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맙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샤르칼이 손에 두꺼운 책 세 권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내게 공손히 건네줬다.
 받아 보니 어제 읽었던 간파 마법서보다 조금 더 두꺼운 수준이다. 한 권은 육체를 다루는 방법, 한 권은 뮬을 다루는 방법, 나머지 한 권은 검을 다루는 방법이 적혀 있다.
 “이게 기초인가?”
 “대륙 모든 기사들이 공통으로 익히는 기본기입니다.”
 “음.”
 기본기밖에 없나? 기본 검술 같은 건?
 “기본 검술 같은 건 없나?”
 “기사단이 익히는 검술이 있지만 도련님은 백작가 직계가 익히는 검술을 배우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 그때부턴 아버지가 직접 지도해 주는 건가?”
 “그러실 겁니다. 장자이신 게인 님도 백작님께 직접 지도를 받고 계시니까요.”
 게인이 직접 지도를 받고 있다고?
 “형님은 아버지께 검술 지도를 받은 지 얼마나 됐지?”
 “2년입니다.”
 “처음 검술을 익히기 시작한 시기는?”
 “여덟 살 때부터 검술을 익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덟 살이라면 현대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다. 완전 어린아이! 그때부터 검을 들었다고?
 아, 맞아. 이곳 세계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육체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는 선에서 적절히 신체를 단련함과 동시에 신체에 맞는 검을 사용해 수련하며 검에 대한 숙련도와 친밀도를 높이는 방식.
 그렇게 균형 잡히게 단련하는 신체는 그 성장이 놀랍도록 빠르다.
 어디 육체뿐이랴? 뮬의 숙련도 함께하기에 정신마저 빠르게 성장했을 거다. 게인이 지금 열일곱 살이니 아마 지금쯤이면 어지간한 성인 장정보다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많이 늦었군.”
 “그렇지 않습니다. 열세 살이라면 충분히 빠른 나이지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난 경이 준 책을 좀 읽어 봐야겠으니 이따가 수련 시간에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바로 부르십시오. 문 앞에 있겠습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실에 들어선 후 바로 신체 단련의 서를 펼쳐 들었다.
 마법서를 읽을 때보다는 확실히 편했다. 내용도 이해하기 편했고 어느 정도는 내가 아는 지식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은 지 20분 정도가 흐르자 신체 단련의 서를 완전히 독파할 수 있었다.
 띠링-!
 -신체 단련에 대한 단서를 익혔습니다.
 예스!
 아무도 없는 것을 알기에 주먹을 허공으로 쫙 뻗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술도 가능하다! 체력 단련도 마법처럼 스킬로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는 것이다!
 곧바로 뮬 수련의 서를 펼쳐 들어 읽기 시작했다.
 이건 체력 단련의 서와는 달리 마법서만큼 어려웠다. 뮬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세세한 성질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총체적으로 알려 주는 내용이었다. 이걸 일일이 외우고 익히려 했다간 한두 해로는 어림도 없었을 거다.
 2시간쯤 지났을까, 마침내 뮬 수련의 서를 다 읽자 처음 신체 단련의 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메시지가 떴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대망의 검술 기본 수련의 서다.
 펼쳐 들자 가장 첫 장부터 그림이 보인다. 단순히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자세와 그 이유에 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그 자세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어떤 자세와 연결되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해 놓은 내용이 보였다.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서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 자세가 왜 이런 모습을 취해야만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또한 어떠한 초식으로 연결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 경우 치명적인 반격을 당할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적어 놓은 책이다.
 셋 중 가장 흥미가 가는 책이었기에 세세히 읽어 보고 싶었지만 스킬로 생성되면 저절로 다 머릿속에 들어올 내용들이다. 그래서 빠르게 훑었다.
 두께는 다른 책들과 비슷했지만 그림이 꽤 많았기에 진도가 순식간에 나갔다.
 그러길 1시간 후,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기자 책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경쾌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세 가지 단서들이 합쳐져 하나의 스킬로 만들어진 것이다!
 띠리링-.
 -passive 스킬 ‘단련’을 배웠습니다.
 -active 스킬 ‘슬래시’를 배웠습니다.
 -active 스킬 ‘피어싱’을 배웠습니다.
 
 단련(passive) : 육체와 뮬을 다루는 기술로서 힘, 민첩성, 체력, 지구력, 위엄, 정신력, 마법력이 상승하며 검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
 슬래시(active) : 무기에 뮬을 담아 초진동을 일으키며 전방을 빠르게 벤다. 무기에 따라 스킬의 효과가 달라진다.(사용할 수 없음)
 피어싱(active) : 무기에 뮬을 담아 초진동을 일으키며 전방을 빠르게 찌른다. 무기에 따라 스킬의 효과가 달라진다.(사용할 수 없음)
 
 간파 마법 때와는 다르게 온몸에 변화가 느껴진다. 마치 오랫동안 검을 수련한 것처럼 몸이 유연해지고 필요한 근육들이 발달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책에 담긴 내용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한편에 안착하는 것도 느껴진다.
 이건 정말, 신의 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기분이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정말이지 힘을 손에 넣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너무 쉬워서 왠지 모르게 불안감까지 들 정도였다.
 “상태 창.”
 
 키아드리스 렌(Lv. 4)
 종족 : 인간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성격 : 종잡을 수 없음
 힘 : 17(+2) 민첩성 : 16(+2)
 체력 : 18(+2) 지구력 : 20(+2)
 지능 : 12 지혜 : 12
 정신력 : 12(+2) 위엄 : 19(+2)
 마법력 : 17(+2)
 물리 방어력 : 6(0.09%의 물리 데미지를 무시)
 마법 방어력 : 1(0.01%의 마법 데미지를 무시)
 
 단련 스킬로 인해 붙은 보너스 능력치들이 괄호 안에 +가 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2가 적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스킬의 효과는 레벨이 오르면 저절로 상승하는 법! 지금 당장은 별 차이가 없을지라도 나중엔 큰 힘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단련 스킬로 얻은 효과는 단순히 능력치들이 오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 몸 자체가 검술을 오랫동안 연마한 것처럼 유연해지고 필요한 근육들이 최고의 상태로 발달한 것이다. 가히 환골탈태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검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는 것 또한 대단한 일이다.
 검술의 기본서를 본 효과로 얻은 스킬 슬래시와 피어싱은 간파 스킬과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글자가 붉은 글씨로 떠올라 있었다. 최소 몇 번은 내가 직접 뮬을 움직여 이 스킬을 사용해야만 스킬의 활용이 가능해지는 모양이다.
 단련 스킬의 영향인지 빨리 수련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난 곧바로 검을 챙겨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렌 도련님, 정말 처음으로 검을 수련하시는 게 맞습니까?”
 “알다시피 난 모른다. 경의 생각은?”
 “절대로, 절대 처음 검을 잡으신 게 아닙니다.”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그렇게 말하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동작을 했다.
 백 번째로 하는 동작이지만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완벽하십니다!”
 샤르칼이 그렇게 나지막이 감탄했다. 의도적으로 꾸며 낸 감탄이 아닌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성이다.
 난 그런 그의 반응에 자세를 거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수련할 내용은 뭐였는가?”
 “기초적인 신체의 힘과 속도를 기르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경의 계획대로 진도를 나갔다면 지금 내가 이 수준에 오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재능에 따라 다릅니다. 솔직히 짧게는 4~5년, 길게는 10년도 생각했습니다.”
 샤르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단련 스킬 하나를 배운 것으로 짧게는 4~5년, 길게는 10년 치의 훈련을 패스해 버렸다는 소리다.
 “도련님께선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신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분명 재능에 걸맞는 노력 또한 하셨을 겁니다.”
 샤르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몇 번 입을 달싹거리다 그만 꾹 다물었다. 기억을 잃은 내게 묻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샤르칼의 머릿속에 들어찬 궁금증이 뭔지는 뻔했다.
 검술을 이토록 열심히 수련했는데 그동안은 왜 전혀 검술을 배우지 않은 것처럼 소문이 났을까? 또한 왜 한 번도 수련하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죄송합니다, 도련님. 기본기에서는 더 이상 제가 가르쳐 드릴 게 없습니다.”
 “내가 미안하군.”
 “아닙니다.”
 샤르칼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난 머리를 긁적거렸다. 샤르칼이 내게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련은 가능한가?”
 “목검 대결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대련을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부디 살살 해 주게. 난 기억을 잃어서 내가 검술을 배웠는지도 모르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샤르칼은 왠지 묘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대련이라,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 * *
 
 “백작 부인이 날 부르신다고?”
 “그렇습니다.”
 마법 서고에 가려던 내 발걸음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백작의 부인이 나를 부른다는 전언을 가져온 한 하녀였다.
 이 몸, 그러니까 렌의 어머니는 죽었다. 그러니 지금 날 부르는 건 장자인 게인의 어머니 키아드리스 에르시나다. 정실부인으로, 가브기니아 제국에서 군사력과 항구를 소유한 게르텔 백작가의 둘째 딸이다. 성격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차갑고 도도하다고들 하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오랜만에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흠.”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야 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무슨 일로 날 불렀는지,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도 생긴다. 어떻게 할까?
 “지금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하녀를 따라, 마법 서고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곧장 백작 부인이 머무는 저택으로 돌렸다.
 잠시 후.
 “안녕하십니까.”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예.”
 “일단 여기 앉거라.”
 에르시나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으며 티 나지 않게 그녀를 살폈다.
 일단, 매우 아름답다. 당연하게도 백작 부인 정도 되는 여자가 안 예쁠 리 없다.
 하지만 전체적 인상이 매우 차갑고 사나워 보인다. 가시 가득한 장미를 연상시키는 그런 이미지다. 푸른 눈동자에 백금발이 그러한 인상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다른 아픈 곳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요즘 검술에 흥미를 보인다 들었다. 그리고 마법 서고에도 한번 갔다 왔다고 들었다.”
 “예.”
 에르시나는 곧장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검술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낼까?
 “그 전의 너는 시에 흥미를 보이던 순한 아이였는데, 갑자기 왜 바뀐 거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 제가 시에 흥미를 보였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사이 하녀 1명이 다과를 내왔다. 하녀가 테이블 위에 다과를 세팅하는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하녀가 물러가자 에르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너에겐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오해하지 말고 잘 듣거라.”
 에르시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 눈동자 속에 칼날이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눈빛이 지극히 차갑기에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예로부터, 후계자 다툼이 일어난 가문은 그 힘이 크게 쇠하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곤 했다.”
 “후계자 다툼 말입니까?”
 “내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직설적으로 말하마. 후계자 자리는 포기해라. 예전의 너였다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겠지만, 기억을 잃었다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댓글(2)

쓰구리    
초반에는 재밌는데 중후반가니 돈아까운. 5권쯤부터 질질끄는 느낌 들기 시작하네요. 엑스트라를 바로앞에서 놓치고 잡을려고하다가 또 바로앞에서 놓치고 이런식으로 한 화동안 이 엑스트라 나오던. 저거보고 바로 하차했음
2017.04.10 16:32
김영한    
흠.. 설명체로 시작이라니.. 스타트 시점의 흥미유발에 좀 더 신경을 써주셨더라면.. 흑흑
2018.07.0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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