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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비도귀환 [E]

비도귀환 1-1권

2017.03.07 조회 14,376 추천 102


 # 1, 돌아가는 길.
 
 호피(虎皮)를 깔고 앉은 장년인이 술잔을 기울였다.
 “크흐, 뱃속까지 뜨끈해지는 것이 좋군. 좋아!”
 호공채(虎恐寨)의 채주가 하는 말이다.
 산적들은 이구동성으로 채주의 호쾌함을 칭송했다.
 “역시 채주께서는 풍취를 아십니다.”
 “술잔을 꺾는 모습에서 품격이 느껴집니다.”
 채주는 한 잔을 더 들이킨 후 술자리에 모인 수하들을 내려다봤다. 이놈들을 제외하더라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산적들의 숫자만 백여 명이 넘었다.
 ‘입신양명이 별거더냐? 살아서 떵떵거리면 그것이 장땡이지!’
 지난 오 년간 참 열심히 산 듯싶다.
 오 년 전 그는 산채에 굴러 들어온 돌이었다.
 하나 어설프게 박힌 돌을 걷어차고,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채주가 된 이후 세를 두 배나 불렸고, 웅 급이었던 산채를 호급으로 격상시켰다. 그렇기에 호공채 내에서는 산신과 동급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녹림왕이라도 한 번 되어봐야 사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산적들의 연합인 녹림칠십이채는 산채의 규모를 용호웅표(龍虎熊彪)로 급을 나눴다. 한데 호공채는 호(虎)급의 산채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규모가 크다.
 그러니 채주가 거드름을 피우는 건 당연했다.
 “크흠! 이번에 충원한 녀석들은 밥벌이 좀 하던가?”
 잔머리가 쓸 만해서 군사로 삼은 녀석이 헤죽거렸다.
 “스물은 칼받이로 쓸 만하고, 열 놈은 칼 좀 쓰더이다.”
 채주는 만족스러운 듯 한 잔 더 들이켰다.
 “일단 최대한 끌어 모아. 일단 머릿수부터 채워야 용공채가 될 수 있지 않겠어?”
 그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강호에 일곱 곳만 존재하는 용 급이 되면 녹림왕에 도전할 자격이 생겼다.
 군사를 비롯해 수뇌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찬란한 내일을 상상했다.
 녹림왕(綠林王).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채주가 누구던가?
 지금은 마도 내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명색이 혈검가(血劍家)의 대주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일개 산적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달랐다.
 “믿습니다! 채주가 아니면 누가 녹림왕이 되겠습니까?”
 “녹림왕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지요.”
 “장차 녹림왕이 되실 채주를 위해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채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수뇌부의 혀가 춤을 췄다.
 속이 뻔히 보이는 녀석들이다.
 하나 그래도 좋았다.
 “크하하! 혈검가의 대주로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이처럼 마음이 맞는 의제들이 한 가득이니 강호를 다 얻은 듯하군!”
 군사가 재빨리 아부를 했다.
 “모두 채주의 은덕이시지요. 제가 최대한 빨리 머릿수를 채워 채주가 영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채주가 불현듯 무엇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굳혔다.
 “흐음, 아니야. 아니지. 내가 너무 흥에 겨웠군.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조금 늦어도 되니까 신분이 확실한 녀석들만 받게. 괜히 미친 놈 한 명 잘못 받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채주는 불콰한 김에 옛일을 떠올렸나 보다.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것도 꽤 되었으니 얘기해주는 걸세. 사실 혈검가는 내분으로 몰락한 것이 아니야.”
 군사와 수뇌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저 비사(秘事)란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만, 동시에 독이 든 술잔이나 다름없는 게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괜히 있겠는가.
 하나 술 취한 채주의 앞에서 듣기 싫다고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해! 그래, 그놈은 살아 있는 재해였어. 처음에는 외단의 타격대와 시비가 붙었었지. 술자리에서 기녀를 희롱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어. 아니! 자네들도 알잖아? 기녀란 주무르라고 있는 거지. 그림처럼 분위기만 살릴 거면 뭣 하러 거금을 주고 기루에 가겠어!”
 채주는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그날 타격대를 시작으로 외단이 무너졌어. 양손에 시퍼런 칼을 쥔 놈이 날뛰기 시작하니까 흉신악살이 따로 없더군. 마치 대붕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박살냈지. 혈검가에 비상이 걸린 거야. 세력의 삼분지 일이 풍비박산 났으니 당연했지. 비번까지 모조리 불러 들여서 놈을 치려고 했어. 그런데······.”
 군사와 수뇌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본래 산적이란 정보에 민감했다.
 비렁뱅이인 줄 알았는데 개방의 고수였고, 여염집 아낙인 줄 알았더니 명가의 여고수인 경우가 어디 한둘이던가.
 채주는 연이어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말했다.
 “크흑! 그놈이 제 발로 찾아온 거야. 그때야 알았지. 기녀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었어. 놈은 그냥 혈검가가 싫었던 거야. 시빗거리로 기녀를 삼았을 뿐이지. 하여간 혈검가의 정문을 절반으로 쪼개버리더니 마치 옆 마을에 놀러온 사람처럼 외치더라고. 뭐라고 했더라? 잠깐!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어쨌든 혈검가의 십기혈조가 죽었고, 팔대장로도 모두 팔이 잘렸어. 삼대봉공과 가주까지 나섰지만, 놈의 곡도는 신병이기라도 되는 것처럼 강기를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군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신병이기라고 해도 강기(罡氣)를 자를 수 있다는 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주는 아예 병을 들더니 술을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씨벌. 진짜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너무 돋아서 닭이 된 것만 같았어. 나중에는 죽일 사람이 없으니 건물에 화풀이를 하더군.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고 아예 미친놈처럼 날뛰었지. 그리고는 혈검가의 보고를 털어서 사라졌어.”
 군사는 그제야 깨달았다.
 채주는 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게다. 미지의 대상에게 느꼈던 공포가 되살아나서 현재의 그를 옥죄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채주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기에······.’
 지금껏 굳건했던 채주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듯했다.
 “그 후 나를 비롯한 몇몇만 겨우 몸을 피했지. 그 후 소문이 돌았어. 혈검가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어. 사도련의 칠대가문 중 철룡방도 쌍도를 든 놈에게 홀라당 털렸다더군. 이유가 뭐였는지 아는가? 길 가다가 어깨가 부딪쳤다는 거야. 빌어먹을! 철룡방도 그렇게 망했지.”
 채주는 비밀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마교와 사도련은 놈에게 쌍익광마라는 별호를 붙이고, 쉬쉬했지. 혈검가나 철룡방과 같이 기세등등하던 곳이 거지가 돼서 망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만한 개망신이 어디 있겠어. 하여간 그 미친놈은 고향을 찾아다닌다고 했으니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군사, 내 말 이해하겠어?”
 “네, 네.”
 “괜스레 이상한 놈이다 싶으면 그냥 버려. 괜히 그런 미친놈이 또 한 번 나타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늦어도 좋으니까 신분 확실한 놈들만 모아서 탄탄하게 가자고.”
 군사는 부복하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속으로는 채주에 대한 충심을 버렸다.
 한 번 꺾인 존재는 기회가 왔을 때 또 꺾이는 법이다.
 ‘내가 꺾지 말라는 법도 없고.’
 쌍익광마(雙翼狂魔)의 이야기는 두려웠지만, 어차피 남의 일이 아니던가. 마교나 사도련을 상대하던 자가 미친놈처럼 산채에 쳐들어올 리도 없고 말이다. 차라리 요즘 들어 산채나 수적만 골라서 털고 다닌다는 도둑놈을 걱정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쌍도를 들고 다닌다던데.
 ‘그건 중요치 않아. 먼저 수뇌부를 회유한 후 채주의 목을 따야겠어. 다 그렇게 먹고 먹히는 거잖아?’
 채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거푸 술을 마셨고, 군사는 다른 마음을 품었을 때였다.
 눈보라를 뚫고 대갈일성이 들려왔다.
 “여기 두목이 누구냐? 나와 봐! 돈 좀 빌려주라!”
 군사는 경박한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동네에서 어린애들끼리 싸움을 할 때나 내뱉을 법한 유치한 한마디가 아닌가.
 호공채에는 번을 서는 산적들의 숫자만 해도 기십이다.
 당장 번을 서던 녀석들을 불러 모아 치도곤을 내려야 할 듯싶다. 놈들이 멀쩡히 번을 섰다면 뜨내기가 멀쩡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냐?”
 군사의 짜증 섞인 외침에 수하가 들어와 보고했다.
 “정문에 비렁뱅이 한 놈이 왔답니다. 애들 보고 처리하라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빨리 치워버려. 동네 소문나면 산적질도 못 해먹는다.”
 잠깐! 산채의 정문에서 난리를 친다고?
 그런데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목소리가 들린다고?
 ‘뭔가 이상한데?’
 군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퀴퀴한 지린내가 풀풀 풍기는 것이 아닌가.
 냄새의 근원지는 상석에 앉은 채주였다.
 “채, 채주.”
 채주는 군사의 부름에도 점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말이 없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진 것도 모를 만큼 넋이 나간 상태였다.
 “채주! 채주! 정신 차리시오!”
 채주는 그제야 힘겹게 입을 뗐다.
 “기억났다.”
 “네?”
 “쌍익광마가 혈검가에 와서 했던 말.”
 군사와 수뇌부가 의아함에 눈을 끔뻑이는 사이 하얗게 질린 채주가 말을 이었다.
 “저 목소리였어. 그때도 그놈은 두목 나오라고······. 고향에 갈 여비 좀 빌려달라고······.”
 채주는 황급히 심호흡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물인 보검을 뽑았다.
 “결정했어.”
 그 순간 군사가 꿈꾸던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채주가 보검을 건네더니 뒷걸음질 쳤다.
 “오늘 부로 채주 자리를 이양하겠네. 그럼 나는 이만.”
 그는 농담이 아니었는지 냅다 뒷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저런 미친!”
 군사는 검을 쥔 채로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하나 잠시 후 그의 얼굴은 채주가 그랬던 것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콰콰쾅!
 진천뢰가 터진 것처럼 폭음이 일더니 대전의 입구가 터져나간 것이다.
 사내는 환도(環刀)를 쥔 손으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에 쥔 환도로 군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두목이냐?”
 사내의 말에 군사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나 수뇌부라는 작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눈알만 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두목이 되기는 했는데······.”
 부서진 문밖을 보니 눈발이 잦아든다.
 지독했던 폭설이 이제야 물러가나 보다.
 하나 군사의 마음속에는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사내의 환도는 햇살을 반사시키며 더욱 시퍼렇게 번뜩였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
 
 연설향은 눈 쌓인 산길을 내달렸다.
 한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던 눈발이 지금은 소복하게 쌓일 만큼 잦아드는 중이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눈이 벌써 그치면 안 되는데.’
 연설향은 무림맹 감찰단 소속으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쫓기고 있다.
 불법자금의 흐름을 좇던 중 멸망했다는 혈교의 잔당이 활동 중인 것을 발견했다.
 빠르게 몸을 뺐지만, 적들은 녹록지 않았다.
 추종술에 일가견이 있는 그녀로서도 며칠째 따돌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죽더라도 정보는 전해야 해.’
 적은 혼자가 아니었고, 무공도 강한 자들로 이뤄졌다.
 만약 그녀가 폭설에 몸을 감춘 채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않았다면 첫날 추살됐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눈이 그친다면 발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육신이 지친 것만큼이나 큰 문제였다.
 “이제 겨우 평공산의 초입인가.”
 평공산 너머에 무림맹 지부가 있다.
 그곳까지만 가면 살 길이 열릴 터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상부와 주고받은 정보에 의하면 오왕(五王) 중 거력대왕이 폭설로 인해 지부에 발이 묶였다고 하더라.
 ‘그분이라면 나를 지켜줄 수 있어.’
 호흡을 가다듬는 김에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평공산은 녹림칠십이채에 속하는 호공채의 영역이다. 그들은 양민을 죽이고, 상단과 표국을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적에게 미끼로 던지기에는 제격인 놈들이다.
 ‘시간이라도 끌어 주라. 쓰레기들아.’
 연설향은 호공채가 있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한데 저 멀리 산채의 그림자가 아른아른 거리는 위치까지 왔음에도 그녀를 막아서는 산적이 없었다.
 ‘이 자식들이 하라는 보초는 안 서고!’
 산적들답게 어디서 몰래 술이라도 퍼마시나 보다.
 그 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연설향은 눈을 부릅뜬 채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고루액 냄새다. 놈들이 가까이 왔어.’
 훈련된 개에게 고루액을 먹이면 피를 토할 때까지 목표를 뒤쫓게 된다. 그 속도가 달리는 말과 비슷할 정도였기에 악인들이 즐겨 사용했다. 다만 단점이라면 추적견이 침을 흘릴 때마다 악취가 풍기는 점일 터였다.
 한데 악취가 너무 짙다.
 마치 지척에 이른 것처럼 말이다.
 컹컹!
 추적견의 미친 듯한 개소리와 함께 살기등등한 외침이 들려왔다.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자가 구겸도를 뽑아든 채 달려들었다.
 “찾았다! 계집이 여기 있다!”
 곧이어 울창한 숲을 헤치며 십여 명의 적이 나타났다.
 모두 얼굴에 붉은 칠을 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붉은 가면을 썼다.
 적면당(赤面黨)은 한때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혈교의 외단이었다. 오래전 몰살당했다던 자들이 그때보다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칫!’
 연설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였다고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하나 며칠째 쫓기면서 먹고 마시지도 못한 채 지친 상태가 아니던가. 싸우는 건 고사하고, 도망치는 것조차 한계에 이르렀다.
 게다가 저들은 선발대에 불과했다.
 멈추는 순간 적은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적을 확인하는 순간 정상을 항해 몸을 틀었다. 여차하면 절벽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한 그녀였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긁고, 가시가 피부를 찢어도 멈추지 않았다.
 ‘다리야! 힘을 내라! 하늘이시여! 정파를 버리지 마소서!’
 그녀의 간절한 소원이 통했던 것일까.
 “철 대협!”
 저 멀리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연설향이 만나고자 했던 거력대왕은 아니지만, 그의 제자인 대웅권(大熊拳) 철충이 만난 것이다.
 철충은 연설향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암어를 보고 오신 건가요? 다행이에요. 이걸······.”
 연설향은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로 이를 갈았다.
 “이런 개자식! 너도 배신자였냐?”
 철충은 낯선 자와 함께였다.
 낯선 자의 등 뒤로 적면인들이 늘어섰다.
 이마에 새겨진 십자 검상, 적면당주였다.
 ‘끝났어!’
 연설향은 한숨을 흘렸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다.
 잠시 머뭇거린 사이 적면당의 포위망이 완성됐다.
 철충은 그제야 보기 좋은 웃음을 지웠다.
 마치 가면을 벗은 것처럼 역팔자로 치솟은 눈매에서는 살기가 가득했다.
 “쥐새끼 같은 년! 혈교의 대업이 너 같은 년 때문에 무너질 뻔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치욕스럽구나.”
 연설향은 철충과 말을 섞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한계에 이른 몸뚱이로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헛되이 힘을 빼서 무엇 하랴.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지옥에 가는 것이 최선이리라.
 “후우.”
 철충은 연설향이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계집 주제에 제법 무인의 기개를 보이는구나. 당주, 저년이 훔친 연판장을 가져오시게.”
 적면당주는 음심(淫心)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철 형, 뒤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리다.”
 철충은 벌레를 보듯 눈을 흘겼으나, 턱짓으로 수락했다.
 적면당주는 박도(朴刀)를 뽑아든 수하들을 향해 음산한 어조로 읊조렸다.
 “병신으로 만들어도 좋다. 숨만 붙여 놔라.”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적면인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연설향은 적이 지척에 이르는 순간 먼저 움직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놈이라도 더!
 채채채채챙!
 적면인 둘이 쓰러졌고, 연설향은 팔뚝을 길게 베였다.
 그러나 적면당주는 수하의 죽음에도 느긋했다.
 적면인 열 명이 죽고, 연설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 아닌가.
 철충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 연판장을 분실해서 이런 거지같은 꼴을.’
 한데 그의 시선에 낯선 이가 보였다.
 얼굴을 붉게 칠한 적면인들 사이에 흰 얼굴을 한 자가 보였다. 게다가 사내는 철충과 눈이 마주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주! 저 자도 적면당인가?”
 적면당주는 철충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낯선 자가 수하들 사이에 위화감 없이 섞여 있었다.
 “헉! 저 새끼 뭐야?”
 철충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으르렁댔다.
 “멍청하기는! 내 얼굴을 봤잖아. 목격자가 있으면 안 돼!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적면당주는 음욕을 억누른 채 벌떡 일어났다.
 만약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혈교의 대업은 상당 부분 늦춰질 것이 분명했다.
 “적이다! 죽여! 내보내지 마!”
 사내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포위망에 발을 들였다.
 “계집을 노린다!”
 철충만이 사내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외쳤으나, 적면인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연설향 역시 갑자기 접근한 사내를 향해 반사적으로 비수를 휘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땅!
 사내는 소매를 휘저어 연설향의 비수를 튕겨냈다.
 “아······.”
 연설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상대가 잘생겼거나,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는 연설향을 앞에 두고 먹잇감을 대하듯 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내 연설향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향기야.”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랐다.
 연설향은 뛰어난 미색과 별개로 사내에 대한 면역력은 그리 높지 않았기에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흔히 하는 말처럼 강호를 위해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무엇보다 처녀한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게다.
 이 버릇없는 작자야!
 그녀의 가슴을 가린 채 얼굴을 붉혔다.
 “이 색마가 어디를 보고 킁킁거려!”
 사내의 얼굴이나 복장을 통해 신상내력을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심지어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사내는 딱 연설향이 물러난 만큼 다가오더니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아! 당신 가슴은 관심 없으니 오해하지 마. 대신 그 냄새 나는 물건 좀 보여주지 않겠어?”
 연설향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화끈거렸다.
 하나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군은 아니야. 제삼의 적? 그냥 변태?’
 그녀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사내는 의아한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 저 자들과 나는 상관이 없어. 나는 당신 품에서 냄새를 풍기는 음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연설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가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
 생사가 갈리는 상황에서 먹을 것 타령이라니.
 상대의 저의가 의심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사내의 확신 가득한 말투에 불현듯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한테 음식이 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리슬쩍 가슴께를 매만졌다.
 물컹거려야 할 것 외에도 무언가가 만져지는 것이 아닌가.
 대나무로 만든 연판장이 말랑거릴 이유가 없다.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육포.’
 적의 추격을 인지하고 처소를 떠날 때 비상용으로 챙겼던 건량이었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육포 아닌가?”
 연설향은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들떠 보이는 사내를 미심쩍게 쳐다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육포를 탐하니 더 이상해보였다.
 ‘잠깐! 그러면 엄마의 향기가 고작 육포더냐?’
 연설향은 사내를 무시한 채 주변을 경계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사내로 인해 숨 돌릴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사내의 움직임으로 보아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대웅권 철충은 거력대왕에게 사사한 절정고수가 아닌가.
 강호백대고수는 아니라도 그에 준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 상대에게 기대를 걸기도 애매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행색은 너무도 추레했다.
 폭설에 흠뻑 젖은 옷차림에 병장기도 없는 빈손이다.
 창이나, 곡도도 없는 완전한 맨손인 게다.
 게다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것으로 보아 숨겨놓은 암기도 없는 듯했다. 그저 길 떠나는 여행객처럼 전낭을 쥐고 있었고, 어깨에는 기다란 목곽(木槨)을 짊어졌을 뿐이다.
 ‘믿을 수 없는 자.’
 이것이 연설향의 판단이었다.
 한데 사내는 연설향의 시선이 전낭에 닿았다가 떨어지자 흔쾌히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건 어때? 피 묻은 돈이지만, 돈은 돈이니까.”
 그러더니 연설향이 반응할 사이도 없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도와줄까?”
 사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무게감에 한순간 기대감이 일어날 정도였다.
 “설마 육포를 주면 저들을 처리해주겠다는 뜻인가요?”
 “응.”
 “육포 때문에?”
 “당신에게 소중하지 않다고 남에게도 그런 건 아니야.”
 나한테도 소중한 육포야!
 이거 없었으면 며칠째 이슬만 마셨을 거라고.
 어쨌든 아무리 육포가 먹고 싶어도 싸움을 자처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저리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연설향은 헛웃음과 함께 반문했다.
 “당신 왜 이렇게 여유로워? 저들이 누군지나 알아?”
 사내는 별다른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혈교의 잔당이라고 했잖아.”
 마치 혈교의 잔당이면 죽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연설향은 눈을 끔뻑이며 수긍했다.
 “어! 맞아.”
 “대가는 육포. 어때? 손해는 아닐 텐데.”
 사내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휘둘린 것일까. 아니면 막다른 길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인해 이성을 잃은 것일까.
 연설향은 그것을 판단할 사이도 없이 되물었다.
 “가능해?”
 그때 적면당주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병신들아! 저 연놈들이 계속 떠들게 둘 셈이냐?”
 적면인들은 마치 뒤늦게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한 번 살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머뭇거린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더욱 거세게 몰려왔다.
 툭.
 사내가 기다란 목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알겠어.”
 말이 끝날 즈음 사내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적면당이 구성한 포위망의 한복판이었다.
 적면인들은 살인에 특화된 자들이다. 죽고 죽이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살인귀였다.
 한데 사내가 뛰어든 순간 그들은 피에 굶주린 늑대가 아니라 이빨 빠진 늙은 개가 되었다.
 콰직!
 박도(朴刀)를 휘두르던 적면인의 안면이 함몰된 채 튕겨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내는 물 흐르듯 적면인들을 지나쳤다. 고개를 슬쩍 숙인 채 박도를 흘렸고, 동시에 적면인의 팔을 휘감았다. 그 순간 우두둑 소리와 함께 손목과 어깨가 동시에 으스러졌다.
 땅—
 사내가 박도의 면을 손등으로 튕기는 순간 그것은 동료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목을 움켜쥔 놈의 손목을 두드리자, 칼을 놓친다. 그것을 낚아채고 전방으로 내던졌다. 가슴팍에 칼이 꽂힌 놈이 쓰러진다.
 적면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공도 없는 박투술에 동료가 죽어나갈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적들이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사내는 아교처럼 찰싹 붙은 채 양팔을 휘돌렸다.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고, 지나치면서 무릎 뒤쪽을 걷어찼다. 각법을 익힌 놈이 발을 현란하게 놀리며 접근했으나, 어느 순간 상대의 다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그대로 몸을 날린 사내의 무릎은 적면인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적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튕겨나갔다.
 사내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적면인의 뼈가 으스러졌고, 병장기는 동료의 요혈을 노렸다.
 연설향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치열하지도, 멋있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일방적인 구타에 적면인들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협의지심이나 명예, 심지어 돈도 아니고 고작 육포 때문에 두들겨 맞다니.
 육포에 환장한 사람한테 맞는 기분은 어떨까?
 ‘아! 진짜 비참하겠다. 아니지! 죽어 마땅한 놈들이야!’
 연설향이 고개를 내젓는 사이 장내는 신음만 가득했다.
 발목까지 쌓였던 눈은 사내가 휘젓고 다닌 덕분인지, 쓰러진 자들의 열기 때문인지 진창이 되어 흘렀다.
 “이봐.”
 사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연설향을 불렀다.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했구나.
 인사라도 할까 하던 그녀는 사내의 한마디에 인상을 써야 했다.
 “육포 좀 주지 않겠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참기가 힘드네.”
 미쳤어. 미친 사람이다. 육포에 미친 사람이 분명해.
 이러다 자칫 육포에 눈이 먼 사람한테 적면인들처럼 얻어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주자. 줘버리자.
 어쨌든 약속대로 적면인들과 싸워서 이기지 않았던가.
 ‘기특한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으니까.’
 연설향은 품에서 육포를 꺼내 던졌다.
 이거 개를 훈련시키는 기분인걸?
 ‘좋아! 이거 먹고 저 나쁜 놈들을 혼내주렴!’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던 연설향은 눈을 끔뻑였다.
 대웅권 철충은 있다.
 한데 그 옆에 있어야 할 적면당주가 보이지 않았다.
 본래 살수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던 자가 아닌가.
 “위, 위험해!”
 연설향의 외침에도 사내의 시선은 허공에 뜬 육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파팟!
 그때 사내의 배후에 쌓여 있던 눈 더미가 폭발하듯 비산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적면당주가 꼬챙이같이 뾰족한 협봉검을 내민 채 솟구쳤다.
 시퍼런 검기가 맺힌 것으로 보아 전력을 다한 일격이다.
 적면당주는 물론이고, 연설향조차 사내의 몸에 꿰뚫리는 것을 예상했다.
 한데 사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상체를 비틀었다.
 상체가 비틀자 골반이 틀어졌고, 자연스럽게 뒤돌려 차는 자세가 완성됐다. 동시에 적면당주의 협봉검은 사내의 겨드랑이와 앞가슴을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 검기든, 검강이든 안 맞으면 장땡이지.
 그래도 저렇게 짜 맞춘 것처럼 피하는 것이 가능하던가?
 연설향은 의아했고, 적면당주는 경악했다.
 “흡!”
 그리고 그것이 적면당주의 마지막 반응이었다.
 육포를 받아든 사내는 뒤를 차듯 뻗은 발로 적면당주의 목을 휘감은 것이다. 무게를 실어 주저앉는 순간 단말마에 비명과 함께 목뼈가 으스러졌다.
 콰직!
 적면당주라면 절정에 근접한 무인이었다.
 어찌됐든 검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실제로 연설향이 지치지 않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싸워야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런 무인이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죽었다.
 아니, 진짜 죽기는 죽은 거야?
 연설향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 갑자기 저런 사람이 튀어나온 거지?’
 이름도 모르고, 출신도 모른다.
 사내의 언행과 복장, 무공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드물었다. 육포에 환장했고, 실전 위주의 박투술을 익혔다는 것이 정보의 전부였다.
 심지어 내공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육포를 씹으며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사람처럼 탄성을 흘렸다.
 “그래, 이 맛이었어.”
 그러더니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들뜬 한마디를 내뱉었다.
 “드디어 찾았다.”
 얼씨구! 찾기는 뭘 찾아?
 이 세상에 그것보다 맛있는 게 수천수만 가지란다.
 데리고 다니면서 맛있다고 소문난 걸 사주면 아주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싶었다.
 ‘어?’
 연설향은 자신의 생각에 한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에 대한 경계심이 언제부터 사라졌던 것일까.
 뒤늦게 사내에 대한 경각심을 끌어올렸다.
 적과 싸운다고 해서 사내가 반드시 아군이라는 보장은 없다. 육포로 시선을 끌고 갑자기 연판장을 노릴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이럴 때가 아니야.’
 그때 대웅권 철충이 나섰다.
 그는 적면당주와 적면인들이 쓰러졌음에도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그는 패배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투기를 끌어올렸다.
 연설향은 결정했다.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
 애꿎은 사내를 미끼로 버려둔 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연판장은 반드시 무림맹으로 가져가야 해.
 이 평화로운 강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수많은 사람이 무의미한 가치로 죽고, 다치지 않으려면 전해야 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도망치자.’
 철충은 대웅권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단단한 주먹을 지녔다. 철판조차 찢어발기는 주먹은 언제나 그를 당당하게 만들어줬다.
 “군부의 금나수와 박투술을 익힌 건가? 제대로 배웠군. 사부가 누구지?”
 사내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궁금해.”
 “뭐라?”
 철충은 놀림을 받은 듯한 기분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 당신이 맞춰봐. 이게 뭔지 나도 궁금하니까.”
 사내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눈과 진흙이 뒤섞인 채 솟구쳤다.
 그 사이로 사내가 일장(一掌)을 내질렀다.
 콰콰콰콰쾅!
 하얗고 누런 것들이 뒤섞인 채 수천 개의 암기처럼 전방으로 폭사됐다. 그리고 그것은 철충을 지나치는 순간 새빨갛게 변색된 채로 흩어졌다.
 후두두두둑—
 연설향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이 싸울 때 도망치겠다던 결심마저 잊은 상태였다. 대웅권 철충이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흩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넋이 나간 그녀의 귓가에 사내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이제 육포 줘.”
 
 
 # 2, 육포권사(肉脯拳士).
 
 똑! 똑! 똑!
 감찰단주는 말없이 탁자를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린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니까 철충이 한 방에 죽어버렸다.”
 맞은편에 있던 연설향이 부동자세를 취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철충이 내가 아는 대웅권 철충인 거지? 덩치 크고, 호인인 척하면서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그 철충 맞지?”
 “네. 그 철충이 확실해요.”
 단주는 연설향의 거듭된 확답에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그 철충이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고, 무공수위나 내력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죽었다?”
 “네.”
 사실이 그러하니 붙이고, 뺄 것도 없지 않은가.
 단주는 연설향이 제출한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며 미심쩍은 눈빛을 내비쳤다.
 “육포에 환장한 사람 같다는 것이 네 판단이고.”
 “그건 확실해요. 아무 육포라도 보여주면 꼬리를 흔들지도 몰라요!”
 “사적인 감정 넣지 말고!”
 진짜 그럴 것 같았는데.
 하나 연설향은 입을 다물었다.
 감찰단주를 사적으로 만나면 아버지처럼 다정다감했다. 하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죄인을 심문하는 판관처럼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단주는 한 장의 종이를 흔들며 읊조렸다.
 “부단주. 보고서가 너무 얇지 않아?”
 연설향은 당당했다.
 “정보는 가감 없이 사실만 적어야 하니까요.”
 감찰단주는 연설향을 속내를 짐작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연설향은 감찰단주의 날카로운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침착하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일이 있기야 있었지.
 ‘기분 찝찝하게 만드는 그런 일.’
 철충의 죽음 이후 육포를 달라기에 줘버렸다.
 거래였으니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기에 저럴까 싶기도 했다.
 한데 사내는 선 채로 연설향이 건넨 육포를 먹어치웠다. 며칠간 아껴서 먹었던 건량이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얼마나 침을 삼켰던가.
 그 사이 사내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회한 가득한 표정은 애절할 정도였다.
 도대체 육포는 그에게 뭐였던 걸까?
 한참을 고민하던 사이 그가 물었다.
  - 이거 어디서 만들었지?
 대답해줬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육포는 여러 의미로 유명했으니까.
 그렇게 그는 떠났다.
 어디로 가냐는 그녀의 말에 이제는 정말 고향에 간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매정한 자식.
 그때 감찰단주의 한마디가 연설향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너 돌아오자마자 육포를 찾았다며? 식재당주가 찾아와 육포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냐고 물어보더라. 이래도 아무 것도 없어?”
 연설향은 발끈하여 대꾸했다.
 “없어요!”
 얼굴이 붉게 물든 건 창문을 닫아서 방안의 온도가 올라간 탓일 게다. 계절이 겨울이라지만, 본인이 덥다는데 어쩌겠는가.
 감찰단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믿어주마.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는 탁자 위의 상자를 바라봤다.
 연설향이 구해온 연판장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고생했다.”
 “칫, 칭찬이 너무 늦네요.”
 “위험했어. 죽을 수도 있었다. 내가 누누이 함께 움직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혼자 사지로 뛰어들다니 누구를 닮아서 도대체······.”
 감찰단주는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끼는 녀석이 물불 가리지 않고 날뛰면 기특한 마음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먼저였다.
 연설향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단주께 배웠으니까요. 그리고 명색이 부단주인데 언제까지 보살핌을 받을 수도 없고요.”
 하나 감찰단주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연설향은 농을 섞어 한마디를 건넸다.
 “혈교의 준동을 미리 눈치채고 배신자들의 명단이 적힌 연판장까지 구해올 만큼 아주 잘 가르치셨어요. 그러니 월봉 좀 인상해 주시지요?”
 감찰단주는 돌아섰다.
 “월봉 인상은 없다.”
 “칫, 무림맹의 전공 정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포상도 없고, 외부에 알리지도 않을 거다.”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
 “이번 일에서 빠지고, 휴가 가라.”
 연설향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어를 낚아온 사람에게 먹지도 말고 빠지라니.
 하나 감찰단주는 단호했다.
 “월봉을 올려주고, 포상을 하면 이유를 밝혀야 해. 혈교 건이 외부로 흘러나가면 네 신상이 위험해진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처리해야 해.”
 “좋아요. 포기할게요. 그렇다고 제가 빠질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설향아.”
 단주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는 부단주에서 순한 여아(女兒)가 되었다. 단주는 부모처럼 자신을 키우고, 이 자리까지 오르게 만들어준 은인이 아니던가.
 “혈교가 언제 적 혈교더냐? 저들끼리 치고 박다가 사라진 게 벌써 십 년 전이다. 적면당이 나타났다고? 그들이 십 년 전보다 강하더냐?”
 그래 보이지 않았다.
 육포 사내가 너무 강해서였을 수도 있고, 그들이 약해졌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것을 논하기도 전에 단주의 말이 계속됐다.
 “평화가 너무 길었어. 강호인은 싸움을 원한다. 공을 세우고,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고 싶어 하지.”
 감찰단주는 치부를 밝히는 사람처럼 부끄러워했다.
 “혈교 건이 알려지면 장로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게다. 싸울 때가 왔다. 적이 생겼다. 그동안 고여 있던 힘을 발산하고, 굳어있던 권력 구도를 재편하자! 그렇게 마음먹겠지. 혈교 건은 정치적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그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패를 내놓을 것이다. 혈교를 없앤 후 얻어낼 이권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말이야. 선배와 우리가 만들어낸 평화로운 강호를 다시 혈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 말을 따라주렴.”
 연설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주님.”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된 침묵이었다.
 잠시 후 감찰단주가 먼저 정적을 깼다.
 “그나저나 육포 사내의 무공은 참으로 특이하더구나. 내기나 강기를 사용한 것도 아닌 듯하고······.”
 연설향은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육포의 힘이라도 빌렸나 보지요.”
 감찰단주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휴가 받은 김에 그놈 뒤나 한 번 캐 보거라. 네가 관심을 가졌다면 이유가 있겠지.”
 “관심 없어요!”
 “크흠, 아님 마시고.”
 연설향은 입술을 삐죽이며 서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명록(不明錄)이라 적힌 서책을 꺼내어 펼쳤다.
 “백발노도, 나타존귀, 무광자, 무명검객, 신비도군, 혈류사귀, 청뢰신창, 공홍마, 고루쌍노, 쌍익광마 외 예순한 명. 지난 이십 년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고수들이에요.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자들은 더 많겠지요? 그들 중에는 은거한 자도 있고, 죽었다는 자도 있고, 고향으로 간 자도 있어요. 강호에 기인이사와 은거고인은 심산유곡의 숫자만큼 많다고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쫓아서 무엇하고, 찾는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쓸 수도 없고, 관리할 수도 없잖아요. 조용히 지내려는 사람들 괜히 들쑤실 필요가 있을까요?”
 감찰단주는 실소를 흘렸다.
 “클클, 그 명단에 네가 관심을 가진 육포권사를 포함시키면 재밌기는 하겠구나.”
 육포권사(肉脯拳士)라는 되도 않는 별호에 연설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주님!”
 연설향의 투정에도 감찰단주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물론 네가 허락한다면 말이다.”
 언제나 두 사람의 싸움은 승자가 정해져 있지 않던가.
 감찰단주가 도망치듯 떠나려던 연설향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자는 어디로 간다더냐?”
 연설향은 토라진 척 고개를 돌렸다.
 “몰라요!”
 무한으로 갔겠지요.
 육포가 만들어진 장소가 그곳이니.
 그렇게 또 한 명의 고수가 호북성의 성도이자, 중원 물류의 집합지인 거대도시 무한(武漢)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으리라.
 ‘이름이나 알려주고 가지.’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작자였다.
 
 ***
 
 사내는 이십 년 전 납치됐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가니 많은 또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복면을 쓴 자들이 내준 이상한 약을 먹었고, 기괴한 몸동작을 따라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면 죽는 지옥 같은 삶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납치되기 전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졌다. 게다가 복면인들은 강해지지 못한 아이들은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내일 살기 위해서는 어제를 버려야 했다.
 그렇게 살았다.
 하나 희미한 옛 기억 중에서도 한 가지만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뛰어놀다가 해질 무렵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내어주신 육포 냄새였다.
 망가진 정신과 뒤틀린 육신에 남은 하나의 기억.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것만 붙잡고 버텼다.
 그 후 사부를 만났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잊힌 기억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몇 년간 중원과 새외를 떠돌았지만, 고향은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한 여인의 품에서 맡은 육포 냄새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떠돌았으리라.
 ‘어머니.’
 이제는 떠올리는 것조차 희미한 그 얼굴.
 이십 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때 수레를 끌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다 왔네.”
 사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지난밤 폭설이 내렸기 때문일까.
 날이 좋다.
 집에 가기 딱 좋은 날씨다.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호감 가득한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곳이 바로 장가장이라네.”
 듣지 않아도 이제는 안다.
 이미 눈에 보이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틀린 삶에 치여 한구석에 파묻혔던 기억들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곳이 고향이라며 추억이라는 녀석이 외친다.
 사내의 눈동자가 회한으로 인해 찰나 물기를 머금었다. 하나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눈빛은 평소처럼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돌아왔다.’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 허름하지만, 낯익은 장원이 보였다.
 장가장(張家莊).
 기억 속의 고향이자,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장가장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열려 있었던 듯하다.
 사내의 눈매는 장가장으로 향할수록 조금씩 가늘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 장원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겉은 허름했지만, 내부는 깨끗하지 않은가.
 누군가 어제까지도 관리를 했던 것처럼 잡초나 덤불도 없이 깔끔했다.
 사내는 어깨에 짊어진 기다란 목곽을 추스른 후 걸음을 옮겼다. 이십 년 만에 찾아왔지만, 이곳의 구조는 낯설지 않았다.
 여기쯤인가 싶으면 그곳이 나타났을 정도였다.
 장가장은 가옥 두 채와 별채가 경(冂)과 같은 구조를 이뤘고, 좌우에 정원과 창고를 포함하여 낮은 담을 둘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던 중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마주했다.
 사당(祠堂)이다.
 선대의 위패를 모셔놓는 곳.
 ‘예전에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사내는 사당으로 다가섰다가 침음을 흘렸다.
 “이런.”
 수많은 위패 중에 한예(韓禮)라 적힌 위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
 자신이 납치당하고도 벌써 이십 년이 흘렀다.
 간혹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으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또 달랐다.
 향을 피웠다.
 하얗고 곧은 연기가 서서히 솟구치며 흩어진다.
 사내는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겼다.
 휘이이이잉—
 어느새 사당으로 들이치는 겨울바람이 조금은 따스한 훈풍으로 변했다. 어머니의 마음인지, 정오가 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당을 나서는 사내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던 장원이 소란스러웠다. 단순한 인기척이 아니라 웃고 떠드는 소리까지 들렸을 정도였다.
 사내는 마당으로 나섰다가 잠시 멈칫했다.
 텅 비어 있던 마당에는 이미 몇 개의 평상이 놓여 있었고, 구석에서는 솥에 불을 지피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잔치라도 벌이는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사내는 소란의 원인인 사람들을 살폈다.
 뜨내기 낭인, 객잔의 점소이, 표국의 짐꾼인 쟁자수, 먼 길을 온 듯한 보따리상인, 거기에 손가락만 빨고 있는 어린 아이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을 제외하면 서로 안면도 없어 보였다.
 그때 나이 지긋한 쟁자수가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허허, 손님이 늘었군. 이리 오시게.”
 그러자 평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사내는 쟁자수의 곁에 앉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자네, 장가장은 처음이군. 이 모든 것이 한 부인께서 내려주신 은덕인 게야.”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 부인요?”
 쟁자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가장의 안주인이신 한 부인은 예전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오가는 사람에게 덕을 베푸시기로 유명했네. 한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래전 큰아들이 납치를 당한 게야.”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럼에도 그분은 항상 웃는 낯으로 어려운 이들을 챙겨주셨네. 장주가 아들을 찾기 위해 중원 곳곳을 헤매는 사이에도 장가장을 훌륭하게 운영하셨지. 돈을 모으고, 위세를 부리는 대신 배곯는 이가 없어야 한다며 매일 같이 음식을 하셨지.”
 쟁자수 외에도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사내는 자신을 장가장까지 데려다 준 노인이나, 눈앞의 사람들을 보며 어머니의 삶을 추억했다.
 ‘예전에도 그러셨지. 모르는 아이들까지 챙겨주셨고, 집에 가는 길에 먹으라며 육포를 싸주셨었지.’
 그때 쟁자수가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한탄했다.
 “저 빌어먹을 하늘이 한 부인을 그리 데려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썩을 놈들이나 데리고 갈 것이지. 왜 좋은 사람을 데리고 가느냐 이거야.”
 “어찌 돌아가셨나요?”
 “밤낮으로 아들이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며 치성을 드렸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변에 덕을 베푸셨네. 몸이 많이 상하셨고, 결국 깨어나지 못하셨어.”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여기에 모인 까닭은?”
 대답은 눈알이 왕방울만 한 점소이에게서 나왔다.
 “헤헷, 한 부인께서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누구나 점심에 장가장을 지날 때에는 밥을 먹여 보내라고요. 그래야 어딘가에 있을 아드님이 잘 사실 거라고요.”
 그런 건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뿐 아니라 장가장을 지나는 사람들까지 모여서 도란도란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이곳은 누구에게나 고향이었던 게다.
 어머니의 따스한 밥과 가족의 웃음이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그때 아낙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밥 먹어요!”
 사람들을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을 앞에 두고 북쪽을 보며 예를 표했다.
 “한 부인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거라네.”
 사내는 쟁자수의 말에 함께 눈을 감았다.
 ‘어머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사내가 놀랄 만한 일이 한 번 더 일어났다.
 밥을 먹은 사람들은 길을 떠나는 대신 저마다 빗자루와 총채를 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집을 청소하는 것처럼 장가장의 내부를 쓸고 닦았다. 콧물을 흘리는 아이는 쓰레기를 주웠고, 소녀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걸레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장가장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청결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내가 웃는 사이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소녀가 어린 동생의 조막만 한 손을 꼭 붙잡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 들판을 뛰놀다보면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지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모두에게 간식거리를 나눠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또 오렴.”
 사내의 말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처음 온 사람이 매일같이 오는 그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그러니 내일 또 오렴.”
 쟁자수가 마지막 짐정리를 끝내고 다가오더니 사내의 어깨를 툭 쳤다.
 “허허, 자네 한 부인에 관해서 잘 아는구만.”
 사내는 장가장을 둘러본 후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니까요.”
 그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했다.
 웃으며 떠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사내를 보며 인상을 썼다. 소녀는 동생을 등 뒤로 숨겼고, 설거지를 마친 아낙들은 혀를 찼다. 쟁자수는 온화했던 눈빛을 지운 채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봤다.
 사내는 담담한 눈빛으로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납치당한 그 아들입니다.”
 경박해 보였던 점소이가 눈을 끔뻑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또?”
 
 
 # 3, 부탁이 있어.
 
 보통 아비가 세상을 떠돌고, 어미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가세(家勢)는 기울기 마련이다.
 하나 장가장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좋은 안주인이 있던 작은 장원에서 부유한 상회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그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 장녀(長女) 장하연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우는 대신 앞을 보았고, 주저앉는 대신 움직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녀는 가장 먼저 무한 외곽의 부호들을 찾아다녔다.
  - 나는 구걸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방년(芳年)의 장하연은 푼돈을 내밀던 부호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한 부인이 아이들에게 나눠줬던 육포와 사람들에게 대접했던 음식을 무기로 삼아 부호들에게 휘둘렀다.
 장가장 인근에서 한 부인의 음식 솜씨를 모르는 이가 없고, 심지어 먹어보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한데 장하연은 그것을 개량하여 저비용고효율의 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부호들은 장하연이 건넨 것을 먹어보고 확신했다.
  - 이건 돈이 된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투자를 결정했다.
 큰돈이 모였다.
 장하연은 곧장 아낙들을 모아 육포를 만들었다.
 한 부인이 혼자 만들었을 때와 비교하면 수십 배의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 만들었어도 팔지 못하면 무소용이 아닌가.
 장하연의 상재와 결단력은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을 만큼 과감했다.
 군문의 수비대에 육포를 무상으로 공급했고, 한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과객들에게 육포를 내어줬다.
 가장 먼저 입소문이 돈 곳은 군부였다.
 무한은 중원 물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장강을 지키는 수많은 군사들이 장가장의 육포를 찾았다. 그러자 군문과 교류하던 무가와 표국이 육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공급에도 신경을 썼다.
 장가장 외곽에 수많은 천막을 쳤고, 수십 개의 솥에서 고기를 삶고, 과일을 졸였다.
 그렇게 포정사사와 도지휘사가 장가장의 육포를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길 떠나는 무인이라면 한 보따리 챙겨가는 것이 당연해질 만큼 유명세를 떨쳤다.
 무한의 특산품 ‘천품육포’는 그렇게 탄생했다.
 장하연은 사업의 규모가 커졌을 때 다시 한 번 나이답지 않은 혜안(慧眼)을 발휘했다.
  - 장가장을 지켜주세요.
 장가장 인근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백검방과 계약을 맺고, 무인들을 빌려왔다.
  - 이것을 대신 팔아주세요.
 무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동호상단에 유통을 맡겨 인지도와 판매량을 극대화시켰다.
 동시에 빈 땅을 사들여 천품당(天品堂)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장원을 세웠다.
 “내 동생이 큰 고난을 겪고도 이처럼 대단한 곳을 세웠으니 참으로 뿌듯하군.”
 냉담한 인상의 무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인상 좋은 사내가 혀를 찼다.
 “이 사람이 미치려면 곱게 미쳐야지. 왜 하연이가 당신 동생이야? 내 동생이지. 남의 동생 탐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시게.”
 비단 옷을 입은 사내는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를 들으며 혀를 찼다.
 “쯧쯧, 천품당의 재산을 탐내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지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어찌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부끄러운 것을 모를까.”
 무인이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적당히 까불어라. 가짜들아.”
 그러자 인상 좋은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하연이를 만나기만 하면 내가 진짜라는 건 금방 밝혀질 일. 몰매를 맞고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떠나시게. 늦지 않았어.”
 시중을 들고 있던 여아가 남몰래 세 사람을 흘겨봤다.
 ‘놀고들 있네.’
 천품당의 인지도는 천품육포가 팔려나갈수록 올라갔다.
 그로 인해 견제하거나 탐내는 세력들도 많아졌다.
 그중 하나의 방법이 바로 한 부인의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등장이었다.
 천품당의 설립 이후 처음 나타났던 자는 허술했다.
 그저 자신이 주장하면 장하연과 가솔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마중할 것이라 여겼나 보다.
 하나 하루 만에 멍석말이를 당한 후 쫓겨났다.
 그자를 시작으로 참으로 많은 사내가 등장했다.
 온갖 사기꾼과 적대세력에서 준비한 가짜들이 천품당의 재산을 노렸다.
 장하연과 직계 가솔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 큰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어도 가짜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진짜야!”
 “하연이가 고생이 많겠어. 내가 빨리 도와주고 싶군.”
 “인륜을 저버린 채 돈에 눈이 먼 자들이로다.”
 여아는 세 사람이 먹고 마신 흔적을 치우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당주님은 왜 저런 사람들에게 잘 곳과 먹을 것을 내어주시는 걸까?’
 저들은 모두 최근에 나타나 한 부인의 아들을 자처한 자들이다. 하나 장하연은 예전과 달리 쉽게 만날 수 없는 명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장하연과의 접견이 허락될 때까지 마냥 음식만 축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행태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기에도 저열하기만 했다.
 ‘당주님같이 예쁘고, 착하신 분의 오라버니가 저런 사람들일 리 없어!’
 그때 틈 날 때마다 함께 어울려 놀던 하인이 누군가와 함께 처소로 들어왔다.
 ‘소강이가 이 시간에 왜?’
 천품당의 입구에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녀석이 데리고 온 사람은 장대처럼 큰 키에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사내가 아닌가.
 ‘설마!’
 소강은 여아의 기대를 짓밟듯 손가락 네 개를 펴보였다.
 ‘악! 네 번째 등장인가? 군식구가 한 명 늘어났어.’
 
 ***
 
 장하연의 집무실은 여인의 처소라기보다 청렴한 관리의 그곳처럼 단출했다.
 넓은 탁자와 접객용 팔선탁, 그리고 좌우를 가득 채운 서가가 전부였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언제나 그렇듯 서류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하연은 서류를 살피다 침음을 흘렸다.
 “황강 지역에 육포 구매량이 줄었네요. 천품육포의 가품이 돌고 있을 수도 있어요. 확인해 주세요.”
 그녀의 곁을 지키던 초로의 노인이 두툼한 서책에 일필휘지로 붓을 휘둘렀다.
 “전하겠습니다.”
 “흐음, 그리고 용진 쪽에 대규모로 수목원을 만든 부호가 있다더군요. 접촉해서 과실을 거래할 수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서류뭉치는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와 납품서였다.
 장하연은 한 손에 장부를 든 채 서류와 비교하며 결정하고, 조언하고, 확인했다. 그렇게 처리된 종이뭉치가 결국은 한쪽 서가를 가득 채웠고, 마침내 탁자 위가 텅 비었다.
 “하아,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요?”
 장하연은 텅 빈 탁자 위에 상체를 누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한 묶음의 서류를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려놨다.
 “고생하셨습니다. 당주님.”
 그제야 여인이 고개를 슬쩍 들며 웃었다.
 “진짜지요?”
 하얀 얼굴은 창백하기보다 백옥처럼 매끄러웠고, 이목구비는 알려진 성격처럼 또렷했다. 그녀의 시원시원한 미소에 노인은 손녀를 보는 것처럼 웃음으로 화답했다.
 “네. 남은 일거리가 조금 있지만, 밑의 아이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월봉을 넉넉히 받는 아이들이니만큼 야근쯤은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강제로라도 맡기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냥 제가 할 게요. 제 별호 아시잖아요. 철산녀! 피로도 모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만 하는 철의 여인! 그게 저라고요.”
 장하연의 말처럼 호사가들은 장가장을 일으키고, 장부에 뒤지지 않는다 하여 그녀를 철산녀(鐵山女)라 불렀다.
 노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크흠! 저는 그 별호가 싫습니다. 이처럼 어여쁜 당주님에게 어떤 놈이 그런 험악한 별호를 붙였는지······.”
 “총관에게만 예쁜 거예요.”
 장하연의 말이라면 세상이 둥그렇다고 해도 믿을 노인이었지만, 저 말만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게는 당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리땁다오.’
 그때 문밖에서 헛기침이 들리더니 한마디를 전했다.
 “큰 공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더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인상을 썼다.
 “크흠! 먹고 재워준다고 소문이라도 난 건가? 비렁뱅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오는군!”
 장하연 역시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미 세 명이나 한 부인의 아들이자, 자신의 오라비를 자처하는 형국이 아닌가. 물론 그 사이 세 사람 모두 가짜라는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내쫓지 않은 것은 한 부인의 유언 때문이었다.
  - 선악을 가리지 말고 찾아오는 자에게 베풀어라.
 장하연은 침음을 흘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며칠이나 됐지요?”
 “가장 오래 된 자가 달포쯤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대접했다고 봐요. 오늘 다 내보냅시다.”
 총관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예, 호위무사들을 대기시키겠습니다.”
 장하연은 발목까지 늘어진 장포를 입었다.
 그녀는 또래 여인에 비해 한 뼘은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로 인해 버드나무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천품당주를 뜻하는 장포를 걸치는 순간 만금을 쥐고 흔드는 노련한 당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가요.”
 
 장하연은 처소에 발을 들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세 명에 한 명이 늘었다면 네 명이 되어야 마땅했다.
 한데 처소에는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사내가 홀로 앉아서 육포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다 어디 갔나요?”
 담담한 어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했다.
 사내는 별다른 기색 없이 어깨를 튕겨 기다란 목곽을 추슬렀다. 그러자 반쯤 열려 있던 목곽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다 갔다.”
 장하연은 대뜸 반말을 하는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갔다고요?”
 “말이 잘 통하더라. 알았다며 그냥 갔다.”
 “어디로요?”
 “집에 갔겠지.”
 장하연은 눈매를 찡그렸다.
 저 사내도 자신의 오라비라며 찾아온 자가 아닌가.
 한데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기만 했다. 오히려 천품육포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은 본체만체 하는 지경이었다.
 심통 난 그녀의 한마디는 다소 냉랭했다.
 “당신도 집에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내는 그제야 장하연과 눈을 맞췄다.
 “많이 컸네. 오랜만이다. 홍심아.”
 장하연은 한순간 눈을 부릅떴다.
 홍심(紅心)이란 과녁의 한복판에 찍힌 붉은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오라비가 자신을 과녁삼아 감자를 던지며 불렀던 별칭이기도 했다.
 “다, 당신 누구야?”
 사내는 다른 사람을 소개하듯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장이결.”
 장하연은 놀라지 않았다.
 스스로를 장이결이라 칭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녀의 냉철한 눈빛이 사내를 속속들이 파헤치려는 것처럼 번뜩였다.
 ‘이십 년 만에 마주한 여동생을 앞에 두고 너무 태연한걸? 뭔가 새로운 접근법인가?’
 잠시 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듯하군요.”
 사내는 육포를 한 조각 입에 넣으며 말했다.
 “홍심이로는 안 되는 건가?”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지만 없지도 않았어요. 홍심이를 입에 담은 자가 여덟 명쯤 되었던가요?”
 사내는 실망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한 부인은 아이들에게 선녀나 다름없었다. 항상 인자하게 웃으며 주전부리를 나눠줬으니 부모보다 좋아하던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장이결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홍심이라는 별명을 접한 아이들도 상당했다.
 악의를 품은 자들 중 철두철미한 자들이라면 그런 과거의 정보까지 수집하여 가짜를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아버지는 낙향한 유자셨지만, 어깨 너머로 한 수의 검법을 익히셨어요.”
 사내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아무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어.”
 장하연의 굳은 표정이 찰나간 무너졌다.
 사내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장가장주는 유운검(儒雲劍)을 수련했다.
 유가(儒家)에서 내려오는 검법으로 제 한 몸 지키기에는 충분한 검법이라고 알려졌다.
 하나 그것은 외부에 알려진 소문일 뿐이었다.
 ‘아버지도 모른다고 하셨지.’
 대과를 보러가던 중 산속에서 만난 노인에게 초식 몇 가지를 전수받았을 뿐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건 가족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장하연은 금세 표정을 수습했다.
 “놀랍네요! 방금 정말 반가울 뻔했어요. 여기까지 온 사람은 당신이 다섯 번째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년간 찾아온 오라비 중 진짜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하나 진짜 같을수록 가짜였던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그때의 배신감과 상실감은 어린 소녀가 홀로 버텨내기에는 너무도 깊고, 컸다.
 하나 그녀는 버텨냈다.
 아니, 버텨야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장하연은 장가장의 가솔들과 천품당으로 인해 먹고사는 수천의 민초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흔들리고, 천품당이 무너지면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가장과 천품당을 지킬 것이다.
 ‘하연아, 흔들리지 말자.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
 
 장이결은 자신 앞에서 감정을 수습하려 애쓰는 장하연을 이해했다.
 서운하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흔히 오랜 세월 헤어졌다가 만난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얼싸안고 주저앉을 것이라 예상한다. 하나 부모자식 간에는 그럴 수 있을지언정 남매 간에 그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수 년간 가짜가 판을 쳤고, 그것을 일일이 골라낸 장하연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오히려 반갑다고 안겨들면 그것대로 곤란한걸.’
 대견했다.
 장주가 장가장을 떠나고, 어미가 죽었음에도 홀로 꿋꿋이 버텨서 여기까지 온 아이였다. 오라비의 소맷자락에 매달린 채 울면서 쫓아다니던 아이는 이제 없다.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인이 장이결을 향해 말했다.
 “흉터를 보고 싶어요.”
 장이결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닐 텐데?”
 장하연 역시 표정을 굳혔지만,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흉터도 알고 있군요.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겠지요?”
 흉터 이야기는 총관도 처음 듣는가 보다.
 반면 장이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의를 살짝 걷어 올렸다. 옆구리가 드러났을 뿐인데도 거미줄처럼 얽힌 상처와 흉터들이 가득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에 장하연은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하나 그래야만 했다.
 진짜 오라비라면, 진짜라면 너무도 좋겠지만.
 자신은 더 이상 어리고 순수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장가장의 후계자이자, 천품당의 당주였다.
 “찾을 수 있겠어?”
 장이결의 담담한 한마디가 장하연을 현실로 이끌었다.
 “잊을 수가 없지요.”
 그녀는 많은 흉터 사이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쯤인데.’
 어린 시절 오라비는 아비의 유운검을 흉내 내곤 했다.
 비록 목검을 쥐고 흔드는 놀이에 불과했지만, 함께 하고 싶어서 얼마나 칭얼댔던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비의 검을 몰래 가져와 오라비에게 건네려 했다.
 하나 철검은 아이가 쥐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장하연은 검을 놓쳤고, 오라비는 검 끝이 그녀를 향하는 순간 몸을 날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 끝이 오라비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광경이었다.
 “아!”
 그렇게 만들어진 흉터가 여기 있다.
 사내의 옆구리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것이다.
 장이결은 대수롭지 않게 옷을 내렸고, 장하연은 탄성을 흘렸다.
 “미안해요.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장하연의 기세가 누그러진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그녀도 상대가 진짜 오라비일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런 사람을 끊임없이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생겼으리라.
 “당신의······.”
 잠시 머뭇거리던 장하연의 말이 이어졌다.
 “꿈이 뭔가요?”
 장이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번만은 그도 태연자약하지 못했다.
 한 걸음 떨어져서 관망하던 자세가 아니라 당사자가 된 것처럼 깊은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그렇게 흘러나온 한마디.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지.”
 장하연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오라비는 검상(劍傷)으로 인해 면포를 칭칭 동여맨 채로 상당한 시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울음을 쏟아내며 주저앉았다.
 달이 동그랗게 뜨던 어느 날 밤 오라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줬다.
  - 나는 꿈이 있어.
 장하연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억누르려 했다.
  - 가족을 지킬 거야.
 오라비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
  - 하연이를 지켰으니 오라비의 꿈이 이뤄진 거야!
 장하연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험은 끝났고, 장가장의 큰 아들이 돌아왔다.
 
 ***
 
 소녀, 소이(小耳)는 장이결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중을 도맡아 했다. 소년, 소강(小糠)은 천품당의 입구에서 장이결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처소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맡았다.
 소년소녀는 처소 한구석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하연이 들어가고 일각이 흐른 후였다.
 “아가씨가 안 나오시네.”
 소강은 장하연이 들어간 처소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소이가 양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꿈을 꾸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설마 진짜 큰 공자님이신 걸까?”
 꿈 많은 소녀인 소이와 달리 소강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처럼 현실적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수십 년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무표정하기만 하더라.”
 “칫!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그럴 수도 있잖아.”
 소강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던 소이의 발목을 잡아끌어 현실로 데리고 왔다.
 “내가 유명한 무인이나 부유한 상단주를 많이 봐서 잘 알아. 그런 사람들은 기품이나 기세 같은 게 남달랐어. 처음 보는 순간 뭔가 있어 보였지.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그런 게 하나도 없더라. 전대 가모께서는 선녀처럼 기품이 넘치셨고, 당대의 아가씨는 철산녀라는 별호처럼 압도하는 기세가 있으셔. 그런데 같은 핏줄인 큰 공자가 저렇게 평범할 리가 없거든.”
 소이는 어딘가 모르게 체계적인 소강의 반박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천품장에서 일하기 전부터 장하연과 친분이 돈독했다.
 지금처럼 가짜가 난립하기 전만 해도 장하연은 오라비와의 일화를 이야기해주며 해맑게 웃지 않았던가.
 아가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것이 소이의 목표고, 꿈이었다.
 “아니야! 특별해. 지금까지 가짜들과는 달랐어.”
 소강은 소이의 오뚝한 코를 잡아당겼다.
 “이그, 멍청아. 다르기는 뭐가 달라.”
 소이는 울상을 지으며 코를 매만지다가 떼를 쓰듯 말했다.
 “진짜 달랐어. 그 사람들이 한마디도 못하고 도망쳤을 정도였어.”
 소강은 그제야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천년만년 눌러 붙어 있을 것만 같더니. 뭐라고 했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친 거야?”
 소이는 즐겨보던 경극의 한 장면을 재연하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렇게 쳐다보는데 그 사람들이 겁먹은 사람처럼 땅만 쳐다보더라. 그러다가 목곽이 툭! 하고 열린 거야.”
 소강은 사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기다란 목곽을 떠올렸다.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무기가 들어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목곽의 뚜껑이 그냥 열렸어.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겠지.”
 소이는 소강의 시큰둥한 한마디에 입술을 삐죽였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그 후에 시퍼런 빛이 휙휙 날아다녔어. 번쩍번쩍했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거운 짐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을 내뱉더라. 어때? 대단하지!”
 “하하하!”
 소강은 박장대소를 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나 알아?”
 소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그게 바로 기세라는 거야. 내공으로 공간을 짓눌러버리는 거지. 엄청 고수만 할 수 있는 거야.”
 “그래? 그렇지! 고수지?”
 하나 소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진짜 기세를 외부로 발출해서 압박한 거라면 너도 다쳤어야 하잖아. 그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렸을 정도면 너는 기절했을걸?
 소이는 눈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
 소강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하기는 네가 강호에 관해서 뭘 알겠어. 또 혼자 망상에 빠져서 다른 생각이나 했겠지. 바보!”
 소이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들이 나열될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아닌데. 진짜 반짝반짝 했는데.”
 소강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긍,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소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랑 말하기 싫어?”
 삽시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양새를 보니 그냥 뒀다가는 펑펑 울기라도 할 기세였다.
 소강은 당황하여 황급히 소이의 곁에 붙어 앉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왜 너랑 말을 안 하냐.”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배시시 웃는 소이였다.
 “그렇지. 다행이다.”
 그때 총관이 처소를 나섰다.
 총관은 십 년 가까이 장하연의 곁을 지키며 고난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천품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소이와 소강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여기 있었구나.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소강은 애써 허리를 쭉 펴며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말씀만 하세요.”
 “소강이는 별채의 곽 부인에게 가서 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하거라. 소이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그자, 아니 장 공자가 나오면 별채로 안내하고.”
 소이가 손을 맞잡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 장 공자라고 하셨지요? 그럼 아까 그분이 진짜 아가씨의 오라버니인 거예요?”
 총관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런 듯싶구나.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을 테니 소강이는 지금 움직이고, 소이는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소이는 눈을 질끈 감고 소강을 향해 혀를 낼름거렸다.
 소강은 총관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소이를 향해 두 번 혀를 낼름거린 후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소이는 조용하기만 한 처소를 보며 꿈을 꾸듯 몽롱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가씨의 꿈이 이뤄졌어.”
 꾀죄죄하게만 보였던 사내가 이제는 왠지 모르게 듬직하게만 여겨졌다.
 ‘두 분이서 무슨 대화를 하실까?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옛일을 추억하시려나? 아니면 가모님을 떠올리며 얼싸안고 펑펑 울고 있으려나?’
 이제는 그녀를 현실로 내팽개칠 소강도 없지 않은가.
 소이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배시시 웃었다.
 ‘아가씨는 좋겠다!’
 
 “밥은 먹었냐?”
 마치 반나절 정도 헤어졌다가 만난 사이 같지 않은가.
 하나 처음부터 담담한 표정을 반말을 했던 사내였기에 거부감은 조금 덜했다.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먹었어요. 드셨나요?”
 “장가장에서 먹었다. 맛있더라.”
 두 사람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을 때 장이결이 물었다.
 “힘든 건 없고?”
 “그럭저럭 버틸 만해요.”
 “괴롭히고 싶은 녀석이나 때려주고 싶은 놈 있어?”
 장이결의 말에 장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 시절 오라비가 울면서 돌아온 자신에게 해주던 말을 수십 년이 지나서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하연은 잠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없네요.”
 장이결은 말했다.
 “그럼 됐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정말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쌓여 있던 돌무더기가 허물어졌다.
 이게 의지가 된다는 기분인 걸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마음은 참으로 낯설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평범하지만, 근황을 묻는 편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이상한 곳에 끌려가서 몇 년을 보냈지. 그 후에는 탈출해서 군문에 있던 적도 있고, 낭인이 되었던 때도 있다. 그렇게 떠돌다보니 수십 년이 흘렀구나.”
 장이결이 담담한 어조로 말할수록 장하연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고민하는 그녀에게 장이결이 답을 줬다.
 “그런가요.”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장이결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시간을 필요했기 때문이다.
 장하연은 다행히도 장이결의 속내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금 더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다보면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알아서 이끌어주겠지요.”
 장이결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어른이 다 되었구나.”
 장하연은 장이결이 처음으로 선보인 미소를 보며 예전을 떠올렸다. 저 미소는 낯설지만, 분명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했던 추억이었다.
 ‘아!’
 언제부터 이렇게 편안해진 걸까?
 그녀는 헛기침을 한 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인정한 건 아니에요. 서운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장이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장하연은 그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낯설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처소를 나서려 했다.
 그때 장이결의 조금은 다급한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부탁이 있어.”
 장하연은 잠시 멈칫했다.
 수십 년 만에 자신을 보고도 담담했던 사람이 다급해진 이유가 뭘까. 게다가 부탁이란 단어는 지금껏 오라비를 자처했던 자들이 너 나 할 것이 입에 담던 소리가 아니던가.
 ‘설마?’
 심심하다고 할 일을 달라는 자가 있었다.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며 설명하려던 자도 있었다. 노골적으로 오라비인 자신이 천품당을 관리하겠다고 욕망을 드러내기 까지 했다.
 잠시나마 사내를 향해 피어올랐던 신뢰라는 이름의 싹이 시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장하연은 다소 실망한 어투로 대꾸했다.
 “뭔가요?”
 “어려울 수도 있는 부탁인데······.”
 얼마나 대단한 걸 거론하려고 저러는 걸까 싶다.
 “듣고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해드릴 게요.”
 장이결은 빈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육포 좀 다오.”
 잘못 들은 듯하다.
 장하연은 잠시 눈을 빠르게 깜빡인 후 되물었다.
 “뭐라고요?”
 “어머니가 해주셨던 육포를 잊을 수가 없었어. 고향이 어디인지 잊었지만, 그 냄새만은 코끝에서 떠나지 않더라.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우연히 맡은 육포 냄새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 말라고요.
 장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육포가 대단하기는 했지요. 그런데 제가 만든 게 비교나 될까 모르겠네요.”
 장이결은 빙긋 웃었다.
 “이미 먹어봤어.”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은 육포 이야기를 할 때만 감정을 드러내는 듯하지 않은가.
 장하연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육포는 얘기해놓을 게요. 더 해줄 건 없고요?”
 장이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면 충분해.”
 그녀가 처소를 나선 후 장이결은 나직이 읊조렸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하마.’
 
 
 # 4, 익도(翼刀)를 묻다.
 
 집무실로 돌아온 장하연은 쉬기는커녕 다시 서류를 산처럼 쌓아놓고 일을 하는 중이었다. 장이결과의 만남 이후 그녀의 마음은 풍랑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요동을 쳤다.
 심란할 때에는 일에 열중하는 게 제일이다.
 한데 그녀의 곁을 지키던 총관은 다른 의미에서 심란했나 보다.
 “소이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
 장하연은 수결을 하면서 대꾸했다.
 “소이는 맑고 착한 아이에요. 그리고 눈치가 빠르면서 영특해요. 그와 잘 지낼 거예요.”
 소이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장 공자의 흉터가 범상치 않더군요. 변방의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지냈거나, 위험한 계약만 도맡아하는 낭인들에게서나 볼 법한 상처가 아닙니까.”
 “어린 시절 납치를 당했어요. 호의호식하며 살았다면 더 이상하겠지요.”
 “그가 안정된 생활을 버텨낼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군문에 몸을 담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과격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탁!
 장하연은 결국 고개를 들어 총관을 올려다봤다.
 “뭐가 문제예요?”
 총관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당주는 지금껏 천품당을 잘 이끄셨어요. 수많은 사람의 삶을 책임질 만큼 대단해지셨습니다. 혹여 장 공자가 당주의 얼굴에 먹칠을 할까 걱정이 됐을 뿐입니다.”
 “과해요.”
 “원래 늙은이는 근심이 많은 법이지요.”
 장하연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나가듯 한마디를 흘렸다.
 “변화가 두려우신 건 아니고요?”
 총관은 어색한 웃음을 남긴 채 떠났다.
 홀로 남은 장하연은 턱을 괸 채 한숨을 내뱉었다.
 ‘변화는 두렵지.’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도와준 사람도, 조언한 사람도 있었지만 결과로 인한 변화는 항상 그녀가 짊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안정된 지금의 환경이 더 소중한 것이다.
 총관이 걱정하는 것도 어쩌면 이해가 간다.
 장하연 또한 장이결이 돌아왔을 때 생겨날 변화를 몇 번이나 고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난을 겪으며 변한 만큼, 오라비도 변했을 터였다.
 그 변화가 부디 올바른 방향이기를 바랄 뿐이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너무나 궁금했지만,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큰 상처가 있거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묻지 못했다.
 눈치 빠른 소이에게 수발을 들게 한 것은 간접적이나마 장이결의 과거에 관하여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핏줄의 이끌림은 두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열어 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오라비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좋은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장하연은 그와 손을 맞잡고, 어머니의 묘를 찾아갈 날을 떠올렸다.
 “엄마 보고 싶어지네.”
 장하연은 피식 웃은 후 누군가 간식으로 가져다놓은 육포를 오물거렸다.
 맛있었다.
 
 ***
 
 장이결의 손은 육포 바구니를 쉴 새 없이 오갔다.
 ‘맛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맛.
 추억은 미화될 수 있지만, 이 맛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어머니가 주셨던 육포보다 맛있었다.
 “그만 힐끔거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장이결을 별채로 안내하던 소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냥 너무 신기해서.”
 “신기해?”
 되묻는 것이 실수였을까.
 소이는 언제 움츠려들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빠른 속도로 말했다.
 “아가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공자가 진짜 돌아오셨으니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이 짠! 하고 나타나신 것 같아요.”
 장이결은 육포를 오물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했니?”
 “네! 가짜가 많아져서 뜸해지셨지만, 그 이전에는 정말 많이 하셨어요.”
 “어떻게?”
 소이는 어미새가 물어다준 먹이를 받아먹으려던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하나 짧은 탄식과 함께 미소를 지우며 한 걸음 물러섰다.
 “헤헤, 아가씨의 일인데 제가 함부로 말하면 혼나요.”
 마냥 어린 아이인 줄 알았는데 제법 맺고 끊는 법을 아는구나.
 장이결은 육포 한 조각을 더 집어든 후 말했다.
 “몇 살이니?”
 “열다섯입니다.”
 “하연이랑은 언제부터 알았어?”
 소이는 손가락을 꼽는 내내 행복한 듯 환한 미소를 보였다.
 “십 년이요!”
 더 묻지 않았다.
 저리 맑은 눈빛을 지닌 아이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말 잘 자랐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수고를 덜었다.
 날벌레를 쫓아내거나, 비를 막아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썩은 뿌리를 다듬는 건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벌써 파리 한 마리가 따라 붙었군.’
 장이결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알 수 없는 시선이 뒤통수를 따갑게 만들었지만, 육포에 환장한 사람처럼 열심히 손을 놀렸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장이결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며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최후의 순간에서야 후회하며 원념 가득한 저주를 퍼붓던 자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리라.
 “육포 먹을래?”
 장이결의 말에 소이는 냉큼 육포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입안에 퍼지는 육즙을 만끽하며 환한 미소를 드리웠다.
 “헤헷, 맛있어요.”
 
 소이가 먹어치우는 육포의 양은 엄청났다.
 오죽했으면 장이결이 바닥을 보이는 바구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정도였다.
 ‘참 잘도 먹는구나.’
 그래도 다람쥐가 도토리를 챙기듯 오물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웠다.
 열다섯이면 한창 성장할 나이였으니 배고프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무한에서 가장 유명한 천품육포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래, 많이 먹어라.’
 한데 방실방실 웃던 소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기가 별채에요.”
 천품당에서 이어지는 소로의 끝에 별채가 나타났다.
 그곳은 얕은 담장을 둘렀고, 작은 월동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 앞에 세 명의 무인이 보초처럼 지키고 섰다.
 가슴에 수놓은 백(白)이라는 글자와 검에 매달은 흰색 수실만 봐도 누군지 짐작이 갔다.
 장이결은 장가장에서 만났던 수다쟁이 점소이의 말을 떠올렸다.
 ‘백검방이 여기까지 지키는 건가?’
 장하연은 혼자 모든 것을 다하는 대신 분업을 택했다.
 장원의 호위는 백검방(白劍幇)에게, 건량의 유통은 동호상단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대신 그녀는 제품을 개량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분업으로 인한 공조관계가 순조롭게 이어져온 듯 보였다.
 ‘이것들 봐라?’
 백검방도들의 눈빛은 묘했다.
 호의도, 적의도 아닌 탐색의 눈초리.
 아무래도 소이가 겁먹은 이유도 저들 때문인 듯했다.
 소이의 미소로 장하연을 판단했듯, 그녀의 반응으로 백검방에 대한 평가가 끝났다.
 세 명 중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섰다.
 “누구신가?”
 조장은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거친 목소리였다.
 삼류 잡배나 주눅들 법한 눈빛과 목소리에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반면 소이에게는 큰 효과가 있었다.
 “으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질 것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아이가 장이결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옷자락이라도 잡고 의지하고 싶은 듯했다.
 장이결은 옷자락을 내어주는 대신 한 걸음 나섰다.
 “나? 장이결.”
 조장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초면에 말이 상당히 짧으시오.”
 “통성명도 없이 누군지 묻는 사람에게 순순히 대답할 만큼 여유롭게 살지 못해서.”
 조장은 흰 수실이 살랑거리는 검을 내밀었다.
 “우리는 백검방이오. 장 당주의 부탁으로 천품당과 장가장의 호위를 맡고 있소. 이 정도면 외인의 정체를 물을 만한 자격은 충분하지.”
 “언제부터 계약이 부탁과 같은 말로 사용된 거지? 그쪽은 돈을 받고, 이곳을 지키는 거야. 게다가 정문도 아니고 내원의 별채를 지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한다고?”
 장이결의 말이 이어질수록 조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내 쪽에서는 그쪽의 노고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신분을 밝혔는데 반응이 왜 이래? 누가 보면 천품당이 백검방의 속문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오랜만에 돌아와서 이 바닥 생리를······.”
 조장이 위협을 하듯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하나 장이결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순간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꿰뚫을 것처럼 꽂혀들었기 때문이다.
 조장은 저런 눈빛을 마주한 경험이 상당했다.
 ‘살기. 그것도 많이 죽여 본 놈의······.’
 장이결은 한 발을 내민 채 상체만 슬쩍 숙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군. 시비를 걸고 싶었던 거라면 받아주지.”
 백검방도 두 명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품당에서 받는 돈은 백검방의 재정을 상당 부분 차지할 만큼 거금이었다. 조장과 장이결이 싸운다면 승패(勝敗)와 상관없이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천품당을 우습게 여기는 거야 사실이지만······.’
 ‘갑자기 시비를 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반면 장이결과 조장은 서로를 탐색하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드는 순간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허허, 중식이 과해서 산보라도 나왔거늘······.”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인이 뒷짐을 진 채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마에 두른 백건과 흰 무복을 보아 백검방의 방도가 확실했다.
 조장은 기다렸다는 듯한 걸음 물러서더니 장년인을 향해 손을 모았다.
 “진검당주께 인사 올립니다.”
 반면 장이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심쩍은 눈빛을 내비쳤다.
 장년인은 그런 장이결을 보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장 공자, 장가장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오. 천품당주께서 그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노심초사 장 공자의 무사함을 빌었다오.”
 장이결도 포권으로 화답했다.
 “장이결이라 합니다. 뉘신지?”
 장년인은 조장과 달리 호의를 보였다.
 “백검방의 사당 중 진검당을 맡고 있는 추보영이외다. 백검방은 천품당과의 계약으로 본 당을 파견했소이다. 내가 저들이 책임자요.”
 그 말은 곧 추보영이 백검방과 천품당의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추보영은 조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쯧쯧,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호승심이라니! 물러서라!”
 그러더니 사람 좋은 목소리로 장이결을 달랬다.
 “장 공자의 말이 옳소. 수하가 무례를 범한 건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자, 더 뻗대기도 애매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백검방도가 길을 비켜서며 월동문을 열어주었다.
 추보영은 장이결과 소이가 별채로 들어설 때 한마디를 건넸다.
 “차후에 술 한잔 대접하겠소이다.”
 장이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말했다.
 “기다리지요.”
 월동문이 닫혔다.
 추보영은 조장을 향해 돌아섰다.
 사람 좋은 미소나 장이결을 향하던 호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버릇없는 새끼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조장은 언제 혼났냐는 듯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납치당했다더니 마냥 노예처럼 산 건 아닌 듯했습니다. 글도 좀 읽은 듯하고, 실전 경험도 어느 정도 있어보였습니다.”
 추보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몸에 흉터가 많다더군. 조금 전 자네를 상대하려고 했던 자세는 군문의 박투술이야.”
 “군문 출신이라면 한계가 있지요.”
 “그래, 말 받아치는 걸 보니 어수룩한 놈은 아니야. 하지만 내 기세에 움찔한 것으로 보아 실전경험이 충분할 뿐 고수는 아니다.”
 조장은 장이결에게 무안을 당한 것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썼다.
 “조만간 날을 다시 잡을까요?”
 추보영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내저었다.
 “되었다. 상부에서 어떤 놈인지 확인만 하라고 했어. 눈치가 빠른 것으로 보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댈 놈은 아니야. 지금 본방은 대업을 앞두고 있다. 저런 피라미는 신경 끄고, 천품당 주변을 살피는 것에 집중해라.”
 조장은 검을 거꾸로 쥔 채 포권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추보영은 어느새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백검방에 잠시 다녀오마.”
 
 장이결은 자신도 모르게 입매를 비틀었다.
 ‘녀석들이 귀엽게 노네.’
 아무래도 대뜸 칼부림을 일삼는 새외와 달리 이곳은 판을 짜는 식으로 일을 벌이는 듯했다.
 장이결은 추보영이 나타나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추보영이라. 일류 정도는 될까?’
 조장은 추보영의 명령을 받고 시비를 걸었을 터였다.
 자신의 말에 움찔하면서 몇 번이나 검을 잡아채려던 그가 아니던가.
 추보영이 만류했으리라.
 조금 더 지켜보라고.
 저들의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낯선 존재의 등장은 변화를 부르는 법.
 저들로서는 장이결이라는 존재를 시험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당주까지 나섰을까? 거기에 내 몸에 있는 흉터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 이거지.’
 추보영이 흘린 대업이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날벌레가 많구나.”
 장이결의 한마디에 소이가 슬쩍 말을 보탰다.
 “천품육포에는 과즙을 첨가해서 원래 벌레가 좀 꼬여요. 그래서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하셨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인 듯도 했다.
 장이결은 피식 웃으며 육포를 오물거렸다.
 “그럼 너는 그만 먹거라.”
 “하루 종일도 먹을 수 있어요!”
 소이는 언제 주눅이 들었냐는 듯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 하나 이미 장이결이 바구니를 자신 쪽으로 당긴 후였다.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해.”
 소이가 뒤늦게 발버둥을 치며 손을 뻗었다.
 하나 장이결의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여아가 아니던가. 결국 소이의 입술을 있는 힘껏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가씨께서 공자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욕심쟁이셨어!”
 하나 장이결은 소중한 것을 대하듯 바구니를 쓰다듬으며 가진 자의 미소를 지었다.
 “후흣, 장 씨한테만 그런 거다.”
 
 별채를 관리하는 곽 부인은 현모양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인상이 좋았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장이결을 귀찮게 하는 대신 인사만 나눈 후 자리를 떴다.
 소이는 입가에 잔뜩 묻은 기름을 훔치며 말했다.
 “공자님.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저는 맞은편 행랑에 있으니까요.”
 “소이야. 가묘가 어느 쪽이니?”
 장이결의 말에 소이는 웃음을 지웠다.
 장씨 일족의 가묘(家墓)라고 해봤자, 한 부인의 묘가 전부였다. 집에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장이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소이는 가묘의 위치를 알려준 후 몇 번이나 장이결을 돌아봤다. 장이결은 순수한 소이의 배려에 몇 번이나 손을 내저어야 했다.
 ‘착한 아이로구나.’
 
 ***
 
 장이결은 낮 동안 침상에 누워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소이가 찾아와 식사를 권했으나, 그마저 물린 채 잠을 청했다.
 딱! 딱! 딱!
 어디선가 삼경을 알리는 딱따기 소리가 들렸다.
 장이결은 기다란 목곽(木槨)을 어깨에 메고 처소를 나섰다. 가묘로 향하는 내내 뒤통수를 간질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도 거기서 해결을 보자.’
 
 ***
 
 동주(同舟)는 하오문도다.
 밑바닥 출신들이 뭉쳐 만들어진 하오문(下午門)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밑바닥 출신은 예전에도, 지금도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동주 역시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밑바닥 인생이 되었다. 다행히 남보다 긴 손가락과 작은 체구, 빠른 다리는 먹고 살 길을 열어줬다.
 주업은 소매치기.
 부업은 미행과 추적, 감시였다.
 이십 년 가까이 남의 주머니를 털어먹다보니 무한 지부 내에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아, 속 쓰려.’
 동주는 아랫배를 매만졌다.
 지난밤 유람 온 취객의 주머니에서 은자 두 냥을 빼냈다. 오랜만의 횡재인지라 계집까지 끼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
 그러니 오늘은 집에서 푹 쉬었어야 마땅했다.
 ‘다 저 새끼 때문이지.’
 동주는 어둠속에서 불 켜진 천품당의 별채를 노려봤다.
 - 장가장의 아들이 돌아왔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령서의 내용은 이게 끝이다.
 노고를 치하하거나, 보상을 기약하는 내용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장이결이라는 자의 신상내력이나 동선 정도는 알려주는 것이 상도의였다.
 ‘하여간 윗대가리들은 말만 하면 뭐든 다 이뤄지는 줄 안다니까. 그나저나 저 자식이 불을 꺼야 나도 좀 쉴 텐데······.’
 동주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뛰어났다면 집중과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장이결이라는 놈은 아무리 냉정하게 보려고 해도 어딘가 빈 구석이 상당했다.
 하루 종일 육포를 달고 사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 끌려갔다가 돌아온 놈이 멀쩡할 리 없지.’
 자정 무렵 별채의 불이 꺼졌다.
 좀이 쑤시던 동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장이결이 기다란 목곽을 메고 나서는 순간 오만상을 지어야 했다.
 ‘저 새끼가 어디를 가는 거야?’
 폭설은 그쳤지만, 쌓인 눈은 그대로였다.
 동주는 굳은 몸을 주무르며 장이결의 뒤를 쫓았다.
 ‘저기가 목적지인가?’
 천품당의 구조도를 구하는 건 손쉬웠다.
 그가 숙지한 바에 따르면 장이결이 향하는 곳은 한 부인이 묻힌 가묘였다.
 육포만 처먹는 줄 알았더니 사람은 사람이로구나.
 동주는 더욱 자세를 낮춘 채 은밀하게 움직였다.
 조용한 곳은 엿듣기는 좋지만, 반대로 들키기 쉬웠다.
 ‘숨을 곳이 있으려나.’
 가묘는 평범했다.
 천품당이 벌어들이는 돈을 생각하면 소박한 장소였다.
 그렇기에 묘 앞의 비석과 낮은 목책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허술했다.
 그때 장이결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한 부인의 묘를 보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했다.
 동주는 그 사이 숨을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파팟!
 그 순간 희미한 소음이 들렸고, 그것이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장이결은 허물어지는 동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달빛 아래서 얼굴을 확인하고 팔다리를 매만졌으나, 마땅히 정체를 유추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하기는 초짜가 아닐 테니.’
 자신이 장가장에 나타나고 한 시진 전후로 미행이 붙었다. 그런 능력과 추진력을 가진 조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장이결은 그런 자들의 표식을 확인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윽—
 동주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흉터처럼 보이는 표식이 드러냈다.
 ‘하오문이군.’
 백검방의 진검당주는 대업을 논했고, 하오문은 자신에게 미행을 붙였다. 마냥 평온하게만 보였던 천품당의 진짜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다.
 ‘날파리가 한두 마리가 아닌 건가?’
 불현듯 짜증이 솟구쳤다.
 ‘일단 넌 대기.’
 장이결은 혼절한 동수의 마혈을 짚어 나무토막처럼 만들어놓은 후 돌아섰다.
 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묘의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하오문도를 확인해서일까. 어딘가 모르게 황량한 기운이 물씬 전해졌다.
 장이결은 한참동안 한 부인의 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효도하고 싶었는데.”
 장하연을 만날 때와는 달리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애써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이었다.
 “너무 늦었네요. 죄송해요. 어딘지 도통 기억나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늦었어요. 예전처럼 뛰놀다가 늦은 게 아니에요.”
 잠시 후 그는 눈을 감았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감정의 동요를 알렸다.
 “그래도 하연이는 예쁘게 잘 컸더라고요. 어머니를 닮아서 마음씨도 고운 것 같아요.”
 장이결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절을 하고, 향을 살랐다.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서늘한 바람이 가묘를 맴돈 후에야 평소처럼 담담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드릴 것이 있어요.”
 그때 어깨에 메고 있던 목곽의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딸깍—
 목곽 안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점점 밝기를 더하더니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었다. 소이가 주장했고, 소강이 타박한 그 현상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고오오오—
 그리고 도(刀)의 손잡이가 먼저 보였다.
 손잡이에 감겨 있던 피에 절은 헝겊이 펄럭거린다.
 그러더니 누군가 허공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도가 서서히 몸체를 드러냈다.
 도신(刀身)은 처절한 흔적이 가득한 손잡이와 달리 갓 벼려놓은 것처럼 매끈했다. 대막에서 사용하는 곡도(曲刀)나 운남과 같은 밀림의 만도(灣刀)와는 달랐다.
 적당히 휜 도신은 마치 미녀의 눈웃음을 연상케 했다.
 장이결은 허공에 떠있는 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마치 한 부인에게 소개하듯 말이다.
 “비도입니다.”
 지이이이잉—
 비도가 허공에서 존재감을 뽐내듯 도명을 토해냈다.
 “제가 오랫동안 쓰던 녀석이에요.”
 잠시 후 목곽 안에서 한 자루의 도가 더 나타났다.
 두 번째 도는 첫 번째 도와 같은 형태였지만, 보존 상태가 달랐다. 날이 손상된 탓에 날카로움을 잃었고, 도신에는 검붉은 핏물이 잔뜩 배여 있었다.
 장이결은 잠시 부르르 떤 후 두 번째 도를 소개했다.
 “익도입니다.”
 강호에 비익쌍도(比翼雙刀)라 알려진 보도(寶刀)였다.
 전설에 나오는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뿐이라 짝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지이이이잉—
 “이건 그 녀석이 마지막까지 쓰던 것입니다.”
 장이결의 결심이 느껴진 것일까.
 비익쌍도는 귀곡성을 연상케 할 정도로 푸른빛을 번쩍이며 도명(刀鳴)을 토해냈다.
 둘이 함께 있어야 하나라는 듯.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다고 항변하듯.
 하나 장이결의 내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절정고수의 상징인 도명은 완전히 잦아들었다.
 동시에 두 자루의 도가 굳은 대지에 내리꽂혔다.
 푹! 푹!
 “어머니.”
 장이결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비익쌍도는 서서히 땅을 파고들었다.
 스스슥—
 “과거의 장이결은 여기에 묻을 게요.”
 비익쌍도 중 한 자루가 완전히 땅속에 파묻혔다.
 장이결이 손을 슬쩍 내젓자, 쌓인 눈이 흩날리며 흔적을 지웠다.
 남은 건 비도(比刀)였다.
 쉬리리릭!
 땅에서 뽑힌 비도가 장이결의 손에 안착했다.
 “저는 내일의 장이결로 살아가겠습니다.”
 그 말을 내뱉는 장이결의 두 눈은 귀기를 연상케 할 만큼 푸르스름하게 번뜩였다.
 탁!
 비도를 품은 목곽이 닫히며 푸른빛이 잦아들었다.
 핑—
 장이결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한 줄기 지풍(指風)이 허공을 날아 굳어있던 동주의 마혈에 꽂혀들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주는 눈을 끔뻑이다가 인상을 썼다.
 장이결은 가묘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그냥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별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쯧쯧, 어미한테 절도 안 하냐?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동주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싼 채 조심스럽게 장이결의 뒤를 미행했다.
 어제 마신 술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일까?
 마치 한참동안 눈밭에 서있던 것처럼 오한이 일었다.
 ‘어우! 속 쓰리고, 춥고 아주 지랄 같네.’
 
 <『비도귀환』 1-2권에 계속>

댓글(5)

왕상성    
ㅎㅇ
2017.12.29 05:14
할게없ㄷㅏ    
그래서 보라는교 말라는교..선발대없나요??
2018.09.26 00:27
늘곁에    
꿀잼인데
2019.11.28 20:04
이자리얼    
선발대 입니다 볼만함요
2021.02.17 11:50
좋아좋아요    
나도 댓글믿고 보는 중인데 후반으로 갈수록 뭐가 급한지 전개를 몰아서 하는 느낌입니다..중반까지는 잘 읽힙니다만 나머지 후반부터는 뭐가 뭔지 생각 좀 해가면서 읽어도 몰입이 안되요 하긴 대부분의 장르소설이 그렇긴 하죠
2021.03.0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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