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종된 공주
“황제 폐하!”
한 여인이 흐느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듣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 역시 주인의 슬픔을 이해한 듯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르륵.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
결국,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한 중년인이 그녀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거칠었다.
중년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거친 손으로 드러난 것 같았다.
“울지 마라, 공주.”
“화, 황제 폐하, 흐흐흑.”
“하늘이 날, 이 나라를 버렸단 말인가······.”
중년인, 아니 플레아 제국의 시즈 드 플레어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반란군에 의해 모두 죽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란군 자체이거나.
“황제 폐하, 힘을 내소서. 곧 저들 반란군들은 황제 폐하의 군대에게 진압될 것이옵니다.”
“아니다. 이미 난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내 덕이 끝을 다했기 때문이다.”
“폐하······.”
공주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때 밖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고함소리.
[이곳이다! 이 문을 부숴라!]
쾅! 쾅! 쾅!
서서히 그들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서둘러 결정을 내릴 차례였다.
“후······.”
한숨을 내쉰 황제는‘그날부터’항상걸고 있던 펜던트를 풀었다. 그리곤 공주에게 건넸다.
공주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 역시 울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공주의 입술이 가볍게 떨리며 말문을 열려 했지만, 황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회피하며 그 이상을 용납지 않았다.
“아, 아바마마······.”
그녀가 목소리를 떨며 황제 아니, 아버지를 불렀다.
크고 나서 처음으로 부른 아버지란 호칭.
허나 황제는 마치 들리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금까지 보필해오던 신하이자 단 하나뿐인 친우인 에스티마르를 돌아보았다.
“···잘 부탁하네.”
끄덕.
서로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시간이 촉박한 탓도 있었지만,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쿵! 쿵!
그 두터운 문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서!”
“아바마마!”
파앗!
그녀의 마지막 단말마 같은 비명과 동시에 거대한 빛 무리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너만은······.’
동시에,
우지직!
쾅!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부서지고 그 사이로 수많은 기사들이 밀어 닥쳤다. 기사들 가운데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황제의 덤덤한 눈동자 속에 들어왔다.
그 자가 웃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던 황제는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내리꽂았다.
푸욱!
“아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당혹감과 동시에 그대로 일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대로 자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젠장. 독한 늙은이! 뭐, 상관없다. 내게 필요한 것만 얻으면 되니까. 크큭!”
사내는 낮게 웃으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황제의 옷을 뜯어 가슴을 풀어헤쳤다.
“······!”
없다.
분명히 있어야 하거늘 그것이 없었다.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것이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고, 공주! 공주는 어디 있지!”
그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크게 외쳤다.
“당장 공주를 찾아라!”
“예!”
홀 안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제각각 흩어졌다.
2. 고교 전설
‘그것은 말이지··· 전설이라고 불릴 만한 전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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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퍼퍽!
붉은 머리를 가진 사내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신형을 날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의 머리가 허공에 흩날리기가 무섭게 폭풍처럼 주변의 양아치들을 휘몰아쳤다.
“저, 저런 괴물 새끼!”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추풍낙엽이 무색하게 쓰러지자 한 사내가 소리쳤다. 짧은 머리에 스크래치가 도드라져 보이는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 한가락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포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30명이나 모였다.
지역에 있는 모든 짱들과 주먹 좀 쓴다는 아이들을 모았지만, 저 괴물한테는 통용되지 않았다.
최강희.
언뜻 듣기엔 여자이름으로 들을 수 있으나, 틀림없이 남자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강한 녀석이다.
괴물이란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쳤다.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녀석의 무표정이었다.
“후우··· 후우······.”
사내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토해졌다.
때리는 녀석은 멀쩡한데 당하는 녀석들이 지쳐 숨을 헐떡였다. 얼마나 싸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덤비는 대로 받아치고 쓰러트릴 뿐이었다.
“좀 죽어라! 괴물 새끼야!”
구석에서 소리만 치고 있던 덩치 하나가 몸통 박치기로 강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강희는 피하지 않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 빠른 움직임을 아니었지만, 덩치의 눈에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휙!
멱살이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덩치는 자신의 몸이 하늘을 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어?”
갑자기 땅이 보이더니 세상이 돌았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하늘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고통과 함께.
쿵!
“으아악!”
콘크리트 바닥에 그대로 매쳐진 덩치가 비명을 질렀다.
어깨부분을 찍혔으니 최소한 골절이다.
하지만 강희는 덩치를 그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네 녀석이 주동자였지?”
비릿하게 웃은 그는 바닥에 쓰러진 덩치를 향해 그의 오른발이 하늘 높이 뻗어 그대로 찍어버렸다.
콰직!
덩치의 안면이 일그러지는 듯 강희의 발뒤꿈치가 파고들었다. 아마 코뼈가 부서지다 못해 으스러졌을 것이다.
덩치가 입에서 거품을 내뱉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주, 죽은 거 아냐?”
이제 남은 인원도 몇 없었다. 십여 명이나 바닥에 누운 이상, 자신들로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주춤 주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바닥에 쓰러진 놈들은 친구 따위도 아니다.
그저 저 괴물 녀석을 잡아보자고 마음을 모았을 뿐이다.
일이 이렇게 꼬인 이상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크크큭, 마저 덤비지, 그래.”
강희가 가슴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지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한쪽 입 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비웃는 것이다.
그의 미소는 그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도망칠까 말까 갈팡질팡하던 녀석들이 이를 갈았다.
“씨발, 그냥 한 번에 족쳐!”
짧은 민소매 티에 근육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사내가 외치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뒤를 주춤거리고 있던 사내들이 함께 달렸다.
다다다닥.
그때 맨 앞에 달려온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폼으로 내지른 주먹이었지만, 강희를 맞추긴 역부족이었다.
휙휙.
한 번, 두 번을 피한 후, 강희가 상체를 최대한 숙였다가 팔을 위로 쭉 뻗어 녀석의 턱을 명중시켰다.
그야말로 완벽한 어퍼컷!
“커헉!”
단말마의 신음소리와 동시에 사내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털썩.
둔탁한 소음이 들리긴 했지만,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눈이 돌아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자식이!”
한 녀석이 몸을 부웅 날리더니 강희를 와락 껴안았다.
“뭐해! 내가 잡고 있는 동안 녀석을 갈기라고!”
“오케이! 꽉 잡고 있어!”
“조까.”
하지만 강희는 뒤통수로 녀석의 안면을 강타했다.
“으악!”
그가 코를 잡으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강희의 신형이 빙글 돌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녀석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체를 틈과 동시에 주먹을 뻗는데 마치 섬광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강희의 주먹이 녀석의 턱을 강타했다.
터엉!
주먹을 맞은 사내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꺼어어어억!”
녀석의 눈이 제대로 돌아갔다. 흰자위를 드러내며 기괴한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강희는 녀석을 발로 치우고 자리를 옮겼다.”
“이런 개새끼들··· 감히 단체로 덤벼?”
그가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직 살아남은(?) 녀석들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녀석들의 반응에 입 꼬리가 올라가는 강희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흡사 악마의 미소라 여겨질 정도였지만, 강희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큭큭큭!”
순간 강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는 착각을 느낀 순간.
서 있던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희는 그들 중 하나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퍼버버버버벅!
“꾸에에에에엑!”
녀석들의 비명이 하이 톤으로 높이 허공을 수놓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후우······.”
강희가 허리를 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그야말로 쓰러진 사내들로 산을 이루었다고 해야 했다.
흡사 그의 붉은 머리가 그들의 피로 물들어진 것이라는 말도 나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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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뚱뚱한 체격의 민석이 이야기하던 태민에게 보채듯 질문했다.
“그래서는 무슨! 그 뒤는 나도 몰라. 그렇게 사고를 쳤는데 학교에서 가만히 놔두겠냐? 뭐 그 뒤로는 그 녀석을 학교에서 봤다는 놈들이 없었어.”
“이야, 죽이는데? 그런데 녀석의 학교가 대구에 있는 우상고라고 했지?”
“넌 어떻게 그리도 잘 알고 있냐?”
“야야, 한 놈씩 물어봐. 정신없게 하네.”
그때 갑자기 옥상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쾅!
“뭐야! 깜짝 놀랐잖아! 씨벌놈아!”
애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닫자 들어온 녀석이 헤벌쭉 웃으며 사과했다. 녀석도 문소리가 그렇게 크게 날 줄 몰랐기에 당황하고 있었으니 애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미, 미안. 헤헤.”
“뭔데 그리 호들갑이야? 별일 아니면 죽을 줄 알아.”
태민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하던 녀석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아, 그렇지! 태민아!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온대!”
“뭐? 누군데? 여자야?”
“아니, 남자.”
“씨발.”
사내의 대답에 태민이가 고개를 숙이며 욕설을 내뱉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비벼 껐다.
“이름이 뭔지 알아?”
“이름? 글쎄··· 계집애 같은 이름이었어.”
“하필이면 왜 남자야. 가뜩이나 우울한 반에서.”
애들의 발언에 태민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 씨발. 어찌되었든 좋다. 하느님께서 아들 주머니에서 용돈이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아시고 봉을 보내주신 것 같으니 말이야. 큭큭, 가자.”
태민이 앞장서서 가자 녀석들이 약간 건들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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