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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럴 1권(1)

2017.03.09 조회 2,814 추천 13


 1977년 5월 12일 오전 11시 15분.
 “여러분 1000-900 은 며칠까요?”
 여선생의 질문에 너도나도 손을 드는 어린 학생들.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참으로 흐뭇해할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의 차이는 있는 법.
 몇몇 손을 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손도 들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고 있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에는 어린아이로서는 조금은 난해한 표정인 허탈감과 허망함 그리고 황당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뭐하는 거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남자아이. 그 아이의 얼굴에서는 절대로 아이가 가진 평온함이나 천진함을 볼 수는 없었다. 아니, 망해 버린 사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석아, 대답해 볼래?”
 그리고 선생 중에는 이런 사람이 꼭 있다. 손 안 드는 사람을 골라서 시키는 사람 말이다. 그러자 우석이라고 불린 그 남자아이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대답을 했다.
 “100입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여러분 정답은 100이에요. 자, 다음 문제. 500더하기 800은 얼마일까요?”
 간단하게 넘어가는 선생. 하지만은 그 여선생의 시선은 은근히 아까 불린 우석이라는 아이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저 아이가 이상하게 변했기 때문에 이제 초임인 그녀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석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우석. 나이 열 살. 초등학교 3학년(지금의 초등학교.) 67년생. 활동적이지는 않지만 주변에 관심이 많음.
 이게 학생 기록부에 남아 있는 그의 정보다. 하지만 이우석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보였고 그 때문에 우석이는 갈등을,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나이 삼십팔 세로 한국방연구소 기갑 파트 수석 연구원이니까. 아니, 그렇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가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 부딪친 이유를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자신의 인생에 기억은 명확하게 남아 있었고 유아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세밀하고 자세한 정보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마지막에, 아니 아이가 되기 전에는 신형 반중력 엔진을 테스트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울리는 경보와 피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섬광. 그것까지는 좋았다, 연구소에서의 사고는 누구나 각오하는 것이니까. 더군다나 군사 연구소이니까.
 문제는 그를 깨운 것이 간호사나 조사 팀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그것도 스물세 살에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다. 그래서 천당에서 어머니를 만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릴 때처럼 학교에 가라고 꿀밤을 맞으면서 집을 나와 보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아, 학교 안 가?”
 “어머니?”
 “어머니? 쪼끄만 게 어디서 어른 흉내야! 그러니까 어제 텔레비전 보지 말고 자라고 했지!”
 “어머니 전 결국 죽은 건가요? 여기 천당인가요? 그런데 천당치고는 좀 익숙한데······.”
 “이것이! 학교 가기 싫어서 별소리를 다 하네. 안 되겠다. 가기 전에 좀 맞아라.”
 따콩!
 “아야!”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학교를 나와 보니 황당하게도 자신은 국민학교 3학년짜리였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히 몇몇 부분은 과거와 같았다. 약간은 까다롭지만 자상하신 어머니 그리고 낚시라면 환장을 하시는 아버지. 어릴 적, 아니 지금의 친구 중 몇 명.
 문제는 자신의 기억과 같은 부분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오래되어 허물어져 가는 학교는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영재들만을 선별해서 만든 최고의 명문이다. 거기다 담임이셨던 노친네는 어디가고 신참 여선생이 담임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모르겠네.”
 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지금의 상황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할 뿐, 아니 한군데 더 있든 했다. 도서실이라고 불리는 어두컴컴한 교실 말이다.
 사실 각 학교마다 도서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책을 소장하고 있는 양이 적다. 활성화도 되어 있지 않고 말이다. 물론 자신의 기억 속 도서실은 언제나 만 원이었지만 여기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역사가 이따위야?”
 고학년용의 책을 간신히 꺼내 들어 보고 있는 우석이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물론 어린이용 도서에서 최신의 정보를 얻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본 적인 사실은 얻을 수 있기에 책을 펼친 것인데 그가 아는 내용과 맞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세계 1,2차 대전? 그런 게 있었나? 미국은 어디지? 설마 지형으로 보자면 미 연합 지역인가? 언제 단일 국가가 생긴 거지? 6.25는 뭐고······ 우리나라가 전쟁을 해? 그것도 내전을? 거기다 아돌프 히틀러, 그 사람이 전범이라고? 현대미술의 거장인데? 노벨은 누구야, 다이너마이트라고? 그걸 노벨이 만들어? 이지찬이 아니고?”
 처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사에 놀라 자빠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놀랄 힘마저도 없어지고 말았다. 우석이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지만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나 큰 충격에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해? 고작 목축업과 관광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그가 아는 역사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그는 몸조차 가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대한민국, 아니 대한제국은 이곳과는 다른 나라였다. 물론 지역은 같다. 하지만 역사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전혀 다르지는 않았다. 조선의 건국까지는 대충이나마 위인전을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전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초반에는 밀린 것이 맞다. 하지만 이지찬이라고 불리는 양인이 천지뢰, 이곳말로 다이너마이트의 대량으로 생산해 이를 기반으로 지상군을 격멸. 그 후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군까지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조선은 사대주의로 인해서 무너진 정치를 바로잡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화약 생산과 같은 무기의 개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은 수많은 실험과 개조를 통해서 과거 총통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구슬이 아니라 천지뢰를 발사하는 초기 벼락불(이곳말로 로켓.)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갑작스러운 조선의 군대 강화에 불안함을 느낀 명나라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벼락불을 쏘는 배와 우마차 등을 이용해 명나라를 패퇴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치고 올라가게 된다.
 순식간에 북경까지 밀려 버린 명나라는 결국 실크로드를 넘어 서양에까지 밀려 버린다. 그 당시 서양은 아무리 망해 가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명나라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고 형편없이 무너지는 와중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조선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청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사대주의를 표방해서 접촉을 자제하여 왔지만 명나라가 먼저 공격한 이상 사실상의 사대는 끝났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동맹을 하고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
 임진왜란과 명의 침략으로 인해서 승전국이었던 조선은 일본에서 북해도를, 중국에서는 만주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점령한 것뿐만 아니라 서양을 대신해서 연락선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와의 접촉을 위해서 시베리아까지 확장하게 된다.
 그 후 명제국은 사실상 몇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고 지금은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명 연합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거기다 여기서 미국이라고 불리는 땅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미 연합이라는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연합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조선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전 세계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두고 피 터지는 전쟁을 벌였고 영국이 승리했지만 정작 영국은 그 전쟁으로 인해 너무 많은 손실을 입어서 아메리카를 관리할 수 없었다.
 중앙정부가 약화되자 아메리카에 파견된 지방관들은 너도나도 독립을 선언하였고 영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놔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지방관들이 독립하였고 그들의 욕심이 과해서 자연스럽게 내전이 발생하였다.
 그 전쟁을 1차 아메리카 내전이라고 한다. 결국 내전은 두 개 국가가 완성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두 개 국가는 너무나 인구가 줄어 있어 마지못해서 외국의 이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변한 게 없는 정부 시책, 유색인종 차별 정책 그리고 구교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해서 2차 내전이 일어난다.
 결국 보다 못한 대한제국이 끼어들면서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인디언이 모여서 만든 서부의 이디모라는 나라와 흑인이 만든 토콰이 그리고 동부의 미스컷 북부 히스패닉 계열의 메사쵸로 4개국으로 분리되어 있다.
 물론 대한제국의 중재로 느슨한 형태의 미 연합 지역으로 만들어 화해를 시도하였지만 언제나 투닥거리며 싸우고 그 덕에 아프리카와 더불어 최빈국들의 모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난했다.
 땅이 크고 자원이 많으면 뭐 하나 만들면 만드는 대로 족족 전쟁이 꼬라박는데 그게 발전할 리가 없었다.
 우석이 알고 있는 세계 역사였다.
 자신의 역사에서는 한국은 선진국이자 세계의 어른 같은 존재 유교로 대표되는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민주주의와 결부시켜 중립을 유지하는 그런 나라였고 혈맹 러시아와 더불어 최강국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현실은 어떤가. 만일 거의 자신에게 이곳의 역사를 준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어디쯤일 거라 생각할 만큼 아주 처절하게 불쌍한 역사였다.
 “지역은 분명히 대한제국 지역이 맞는데 이 코딱지만 한 지도하며 불쌍하게 있는 역사하며. 맙소사, 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너무 놀라서 축 늘어져 있었다. 아마 평생 놀랄 것을 다 놀라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늘어져 버린 덕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님, 어떠세요?”
 “글쎄요, 전 모르겠네요.”
 “담임으로서 걱정이 돼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저렇게 심각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들어 보셨잖아요. 일본이야 한국인이 다 싫어하는 나라이니 이해를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명나라가 아직도 있다고 하고 심지어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부터 갑자기 이상하다고는 생각을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그렇다. 담임이 우석의 상태가 며칠 전부터 이상해지자 결국에 우석의 부모님을 호출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저렇게 변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어요.”
 “저희 형편이······.”
 말을 흐리는 우석의 엄마. 그러자 선생님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돈이라면 제가 보태 드리겠습니다. 우석이는 제 첫 학생입니다. 아픈 모습을 보는 것은 저도 마음이 아파요.”
 
 1977년 6월 3일. 오전 10시 10분.
 그날부터 이우석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병원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없이 살던 시대인지라 부모님은 바쁘게 지냈고 간혹은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동안 찾아다는 병원만도 수십 군데. 처음에는 머리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서 그쪽으로, 그 다음은 내과적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내과, 그 다음은 외상에 대한 문제일제도 모른다는 말에 외과로.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상 증상도 찾아내지 못했고 지난 한 달간 부모님과 선생님의 세 달치 월급이 병원비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의사들은 고개를 모두 절레절레 흔들었고 마지막 남은 병원 앞에서는 부모님과 선생님까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석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몇 갑째인지 모를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석은 긴장은커녕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조용하고 나지막이 병원의 이름을 또박또박 읽어 봤다.
 “용, 인, 정, 신, 병, 원. 미치겠군.”
 “우, 우석아, 그런 말 마.”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미친놈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감금뿐이었다. 약이 아무리 좋아도 인간의 내면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나마 정신질환 치료제는 신체 내부의 호르몬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 다였다.
 “여보.”
 “들어갑시다. 여기까지 온 거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리고 선생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지요. 걱정하시 마세요, 아버님.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정신 병원은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만든는 곳이다.
 그러니 대기실에서도 세 명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차례대로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환자는 엄청나게 많았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사람, 울다 웃는 사람, 벌벌 떠는 사람 등등. 얼마를 기다렸을까? 갑작스럽게 사고가 났다.
 쾅!
 진료실의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열리더니 다 큰 남자 하나가 크게 울면서 뛰쳐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혹시나 미친놈 하나가 광기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면서 우왕자왕하기 시작했고 우석의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우석을 감쌌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든 말든 그 사내는 크게 울면서 뛰쳐나가 버렸다.
 “으허허허허!”
 간호사들은 놀라 그를 잡기 위해서 날다시피 쫓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조금은 황당했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진료는요?”
 사람들이 멍하니 있는 사이 우석은 열린 문 안으로 볼 수 있었다, 자기 또래로 보이는 아이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을.
 “여보.”
 “네.”
 “우리 우석이 몇 호에서 진료받는다고 했지?”
 “305호.”
 아버지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선생을 바꿔야 할 거 같은데.”
 그러는 사이 그래도 연륜이 좀 있어 보이는 간호사 한 명이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우선 입원 환자들은 다시 올려 보내고 다른 분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선생님이 대신 봐 주실 겁니다.”
 서둘러 환자의 분류를 하고 입원 환자들을 다시 올려 보내는 사이에 방에 있던 아이는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나와 대기실 의자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안 그러겠는가? 이제 여덟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정신병원에 와야 하는데 말이다.
 “엄마 그만 좀 울어요!”
 “하지만, 훌쩍, 선생님이······ 훌쩍!”
 “네네, 금방 오신다잖아요.”
 어쩐지 언밸런스한 상황. 엄마가 아니라 아이가 엄마를 위로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우석의 어머니는 동질감을 느낀 건지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로는커녕 나중에는 두 분이 서로를 부여잡고 꺼이꺼이 우는 것이 아닌가?
 우석과 그 아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한숨을 푹 쉬었다.
 “위로 하시다가 같이 울면 어쩌자는 거야?”
 “내말이.”
 전혀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들.
 우석은 그렇게 한숨을 쉬던 중 문득 누군가를 생각해 냈다. 아주 성질 고약한 사람을 말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누구나 비밀이 있고 고민이 있기에 직원들은 누구나 그에게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나온 적이 없고 상담이 끝난 후에는 고민에서 벗어난 사람도 많았다, 다만 그 작자가 성격이 좀 이상했다는 게 문제지만.
 “너 누구냐?”
 “알아서 뭐 하게?”
 “내가 아는 사람이랑 비슷해서 말이야. 유준호라고······.”
 그 순간 움찔하는 어깨를 놓치지 않은 이우석. 우석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만일 그가 맞다면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적이리라.
 “한국방연구소 정신과 팀장 유준호라고 하지.”
 그러자 그 아이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휴, 네가 하는 거 보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군. 나만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한 게 아닌가 보군.”
 “황당하다니 너 설마······?”
 “한국방연구소 기갑연구 팀장 이우석이라고 하지. 기억나나?”
 “설마 그 우석이?”
 “아마 맞을 거다, 그 우석이가. 내 기억이 미친 게 아니라면.”
 “하하하, 하하하.”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유준호. 그도 역시 이 황당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만 웃고 상황 좀 정리해 보자. 마지막 기억나냐?”
 “그래. 기억나지. 신형 엔진 구경하러 갔다가 사고가 난 거 말이야. 나야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호기심에 갔지.”
 “그래.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 그런데 우리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유준호는 정신과 의사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신감응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있던 연구원이다. 물론 정신감응 시스템이라는 게 초능력처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하면 그게 전기적 신호로 바뀌고 그걸 잡아내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거짓말을 하면 눈을 깜빡거린다거나 고개를 돌린다거나 하는 자신도 모르게 들어나는 버릇처럼 생각을 하면 전기적 신호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걸 잡아내기 위해서는 심리적 상태가 중요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들어 온 유준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구원들의 정신과 상담을 함께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공짜로 말이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젋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젋은 사람들이 그 정도 연구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실력이 필요했고 당연히 대부분 결혼은 내팽개친 경우가 많다. 그 덕에 외로움이 많이 있었고 그걸 상담해 준 것이 그였다.
 물론 좋지 않은 버릇, 즉 환자를 울리는 버릇 때문에 울보제조기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그의 상담을 받고는 마음잡고 결혼한 사람도 많아 싱글 킬러라는 별명도 있었다. 물론 이 킬러도 이우석은 탈출시켜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야.”
 “그래. 거기 있던 게 다섯 명이니까. 혹시 우리 말고도 있을지 몰라. 그리고 말했지, 고민할 때 머리 잡아 뜯지 말라고.”
 “아 이런, 너한테 상담 받아도 이건 안 고쳐지네. 우선은 내 전화번호부터 받아 둬라. 적을 종이가 없으니 기억해 둬 0000-0000이다.”
 “그래그래. 상황 되면 전화하마.”
 그때였다, 간호사가 유준호를 찾은 것은.
 “준호 어머니, 여기 307호실로 오세요.”
 “야, 나중에 보자. 지금은 상황이 안 좋다.”
 준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석은 그렇게 들어가는 준호를 보면서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자신만 넘어온 것은 아니며 최소한 자신이 미친 것도 아니라는 증거가 저기 있으니까.
 그가 그렇게 입맛을 다시는 사이 아버지가 다가왔다.
 “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봐 주신대. 307호로 가라네.”
 “그래요? 다행이네.”
 ‘이런’
 하지만 그 말에 우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방은 방금 준호가 들어간 방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만 한 남자가 뛰어 나왔다.
 “어허허허엉!”
 “선생님, 어디가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유준호.
 ‘휴, 오늘 중으로 진료받을 수 있을까?’
 
 1977년 6월 7일. 오전 11시 23분.
 어느 화창한 일요일 한 아이는 거의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그렇게 전화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 중에는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우석의 집은 가난해서 전화는 없지만 그래도 세 들어 사는 집에는 전화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집이 교회를 간 사이 전화통을 붙잡고 살고 이는 우석이었다. 그나마 준호의 집이 부자여서 전화는 물론 그 돈도 감당할 수 있으니 이럴 수 있는 거지만 요금은 당연히 이준호 차지였다. 아무리 부자라지만 이번 달 요금 좀 보고 나면 게거품을 물 거다.
 “그러니까 이 현상을 설명해 보라니까.”
 “내가 어떻게 아냐고 내가 정신과 의사지 물리학자냐?”
 “예상되는 거 없냐?”
 “넌?”
 “나야 매일 철판만 들고 살았는데 알겠냐?”
 “휴,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할고.”
 결국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물리학자가 있다면 혹시나 알지 모르지만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서 일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정신과, 한 사람은 무기공학과. 그들은 전혀 다른 이 나라에서 무언가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넌 학교생활 좀 어때?”
 “지겹지 뭐. 그러는 넌?”
 “나야 매일매일이 새롭지. 전혀 다른 환경이잖아.”
 유준호은 정신과 의사답게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거기다 이 나라, 아니 지금의 한국은 자신이 살던 한국에 비해서 과학이 무척이나 뒤쳐진 상태. 간단한 핵분열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이니 아이들의 정신세계도 전혀 다르고 그에게는 참으로 좋은 관찰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우석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생각해 보라. 복잡한 분자식과 싸우면서 신물질 계발에 앞장서던 그가 어느 순간 1+1 을 풀고 있으니 소위 말하는 천재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천재의 삶을 알고 있기에 그는 천재가 아닌 척 해야 하고 5+5를 8이라고 써야 하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놈들 있을까?”
 문득 물어보는 유준호. 우석은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그 연구실에 있던 연구원은 이우석과 유준호 그리고 물리학을 전공하던 임태수, 전자공학 담당인 최민석 그리고 소프트웨어 담당 이광석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준호는 전혀 상관없는 정신과였지만 신형 엔진이라는 소리에 구경 왔다가 이 꼴이 난 거고 두 명이 넘어왔다면 나머지 세 명이 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만일에 이들이 넘어 왔다면 어떻게든 만나 봐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거, 아니 미래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진짜로 미친 건지 알아야 했으니까.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마도.’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힘들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드러내고 찾아 다닐 수도 없다. 이들은 고작 국민학생. 거기다 가뜩이나 미친놈 소리를 듣고 있는데 동료들을 찾아다닌다면 진짜로 새하얀 독방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우석아.”
 “왜?”
 “당분간 조용히 살자.”
 “뭐? 무슨 범죄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살자니, 아니 그럼 크게 한탕?”
 “내가 볼 때 이곳은 우리가 나서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발전도 안 된 나라고 말이 독립국이지 속국이나 마찬가지야. 만일에······.”
 “만일에?”
 “이곳의 강대국인 미국이 우리가 알던 미 연합과 성향이 비슷하다면 우리를 우리를 포섭하든지 아니면 납치, 최악의 경우에 제거할지도 모른다.”
 미 연합은 3개국으로 나뉘어 살면서 내전 아닌 내전으로 자연사보다 돌연사가 더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연합, 특히 백인 구역은 타국의 인물을 강제로 빼내 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열뿐 아니라 러시아와 한국 등 걸출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납치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가 열을 받아서 대규모로 두들겨 팬 적도 있다. 물론 자국의 과학력을 올려 보려는 수작이었지만 방법이 너무나 틀렸다.
 
 “······.”
 “당분간 우리의 연결선은 보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낼 수 있을지 모르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 최소한 중학생은 되어야 할 거다.”
 “4년인가?”
 “그렇지.”
 “지겹겠구만.”
 
 1980년 8월 18일. 오전 12시 30분.
 그 후로 6년. 그 두 명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아예 바보처럼 생활할 수는 없어 최소한의 평균적 생활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 누구도 그들이 과거에 용인에 들락날락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중학교 1학년 슬슬 청소년 시기에 들어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돈이 많고 적고 싸움을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은 조금은 리더십이 있고 카리스마 있는 어른스러운 아이이기 마련이고 원래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은 이들은 성격 자체가 어른 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딩동 댕동!
 “수고하셨습니다.”
 중학교의 점심시간이 그렇듯이 종을 치기가 무섭게 선생은 나가 버리고 몇몇 학생은 매점으로 전력 질주, 대부분은 잽싸게 도시락을 그리고 극히 일부는 벌써 까먹은 도시락을 보충하기 위해서 젓가락 들고 친구들의 도시락 사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잽싸게 도시락을 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물론 가난한 집답게 반찬도 김치에 김 정도이고 그건 특별히 창피할 필요도 없는 요즘 시대상이니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를 고달프게 하는 사람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야! 어디가?”
 옆자리의 친구가 벌써 눈치채고 잡으려 했으나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우석은 슬쩍 몸을 돌림으로써 그 친구를 걸상과 에로틱한 키스를 하게 만들었다.
 “알면서 왜 물어, 인마!”
 뛰어 나가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우석. 그는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재빨리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자마자 뒤에서 들려오는 하이 소프라노의 소리.
 “우석아! 밥 먹자!”
 “젠장, 오늘은 빠르잖아.”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피해서 가속도를 더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추적 장치가 장착된 신형 내비게이션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석이 방금 5반 앞으로 지나갔다.”
 “지금 옥상으로 도주 중!”
 우석은 들어가기 무섭게 문을 잠그려 했다. 하지만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따라온 자신의 짝 준규가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어 통로의 폐쇄를 방지했기 때문이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
 “좋은 게 좋은 거지, 흐흐흐.”
 “저 능글맞은 자식.”
 그리고 그사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을 따라서 온 것이다.
 “헉헉, 나날이 빨라지네. 오늘은 옥상이야? 여기도 분위기 좋지.”
 “끙.”
 오늘도 결국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걸 보는 준규는 실실 웃으면서 그런 우석을 놀리는 표정이었다.
 
 “아~.”
 “내가 먹는다니까.”
 “그러지 말고 아~.”
 누군가 본다면 닭살이 돋아 하늘의 비행을 시도할 만한 그림이 파란 하늘 아래의 옥상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 팔자야.”
 우석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젓가락을 들고 초롱초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타칭 마누라 자칭 여자 친구 자기는 거머리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았다. 어디서나 인기가 있는 사람은 있다. 거기다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우석은 인기도 많은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이 여자 최아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마누라 팔 떨어진다. 받아라.”
 옆에서 다른 친구들과 밥을 먹던 준규가 슬며시 놀렸다.
 “시끄러!”
 소리를 지르기는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 물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아람은 얼굴도 나쁜지 않고 공부를 못 하지도 않는 인기를 끌 만한 요소를 다 가진 여학생이다. 거기다 남녀 공학인 이 학교는 분반을 한다고 해도 접촉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질기게 자신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는 어린아이들답게 별의별 소문이 다 나기 마련이다.
 유치하게 알나리깔나리부터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의 협박 편지까지. 결국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반쯤은 사귀는 사이처럼 되어 버렸지만 문제는 이 점심때가 문제였다.
 이놈의 인간들은 이 둘의, 아니 아람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밥반찬 삼아서 구경하러 다니니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 나 팔 아프다.”
 결국 마지못해서 받아먹는 우석이. 그리고 그의 눈은 예리하게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반가운 동전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자식들, 또 내기를 했단 말인가.’
 “뭐야, 결국 또 받아먹었네.”
 작게 들려오는 준규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기가 될 만한 쪽에 걸라고.”
 “그럼 재미없지. 한탕 아니겠어, 으하하.”
 500원이라는 거금을 털린 놈답지 않게 웃어넘기는 준규. 그는 거의 매일 안 받아먹는다에 걸고 거의 매일 진다. 다만 간혹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이기면 내기 돈을 탈탈 털어가지만.
 “아람아.”
 “응?”
 “다 좋은데 이 반찬은 어떻게 안 되냐?”
 “뭐가 어때서. 맛없어?”
 “난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봐.”
 맛이 없을 리가 없다. 가난한 우석의 도시락은 언제나처럼 구석에 박혀 있고 아람이 싸 온 도시락을 먹기는 하지만 반찬의 차이가 심각했다. 잘해야 소시지, 계란 정도인 시절. 프랑크햄만 해도 부자인 시절. 그런데 이 아가씨는 부담스럽게 훈제 햄을 반찬으로 싸 온 것이다. 그거야 집이 잘 사는 집이라고 하니 문제는 없지만 자신과 너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반찬이었다. 도대체 이런 집 애가 자기를 뭐가 좋다고 따라 다니는 건지.
 “아니다, 관두자.”
 결국 그날도 온몸을 불태워 친구들의 점심 노가리거리가 된 우석은 5교시가 되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제일 자신 없어 하는 과목인 영어 시간이니까.
 다른 과목들은 거의 그가 배운 것과 비슷했다. 다만 영어는 문제였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한국어가 공용어나 마찬가지니 따로 영어를 배울 필요도 없었고 여기서 가르치는 저급의 미국식 영어가 아니라 영국식의 영어를 사용했다. 누가 찢어지게 가난한 미 연합식 영어를 배우겠는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더니 반가운 손님, 아니 물건이 와 있었다. 3년 전 미국으로 떠난 유준호의 편지였다.
 원래 세상에서는 유학 따위는 가지도 않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미국으로 가 버린 그였다. 여기서는 약하디 약한 한국이니까.
 한 번의 실수란 우연히 집에 있는 원문 책을 본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책인데 영어를 잘 알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는 내용을 잘 모른 채로 소중하게 관리했는데 영국식의 영어를 배운 준호는 어렵지 않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소중하게 관리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냥 개그집이었다. 그걸 보면서 웃다가 딱 걸린 준호는 조기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여기 미국이다. 짜증 나는 나라다. 뭔 놈의 총은 무식하게도 많은지. 잘 먹고 잘 살아라. 준호가.
 
 한 장에 써 있는 문장은 이게 다였다. 하지만 덤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엄청난 약자들이 쓰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뭔 소리인지 전혀 알지 못할 테지만 우석은 이게 자신들이 배운, 아니 알고 있는 암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식 암호 코드는 아니고 연구소 내부에서 통하던 장난 같은 코드였지만 그들의 대화를 감추기에는 충분했다.
 
 -잘 지내시나? 나는 매일매일이 지겹다. 미국 놈들 수준이 낮아서 웃어 줄 수도 없고. 거참, 한국에서는 그나마 여러 가지로 흥미가 있었는데 여기 자식들은 섹스 아니면 총, 연예, 스포츠 따위가 다다. 정치 이야기하면 얼굴부터 사색이 된다. 어떻게 강대국이 된 건지 신기하다, 신기해.
 
 그렇게 편지는 시작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 중1한테 뭘 바란 거야.’
 그렇게 대충 생각하는 우석. 하지만 그는 몰랐다, 미국에는 월반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뭐 마음에 드는 애도 있기는 하지만 끙, 나이 차가 너무 나서 말이야. 세 살 차이 난다.
 
 “이놈이 미쳤나? 세 살 차이면 초등학교 5학년? 키울라고?”
 연상 세 살이라고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여자가 준호를 키운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어째든 너도 그 거머리랑 잘된다고 하니 나도 잘해 봐야지.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우선 난 이쪽에서 나름대로 동료들을 찾는 중이다. 물론 그들도 미국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은 돈만 있으면 뭐든 된다는 게 좋은 거지. 브로커를 통해서 유령 회사 하나 차렸다. 물론 이름만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 회사의 이름으로 한국의 일간지에 우리가 쓰는 암호로 계속 광고를 올릴 생각이다. 물론 나에게 연락은 할 수가 없으니 연락은 네 쪽으로 가도록 광고를 올렸다. 만일에 그걸 해독해서 연락하는 자가 있다면 동료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거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지. 만일에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연락을 주고. 부디 좋은 일이 있기를 빈다.
 
 1980년 6월 10일. 오후 2시 33분. 호성의 집.
 나른한 오후 우석이 간만의 휴일을 만끽하는 사이 흑백 티비에서는 대머리 아저씨가 뭐라뭐라 하고 있었다. 물론 우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딩동.
 “누구세요?”
 간만에 울리는 초인종에 우석은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입구로 나갔다. 입구에는 후줄근한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 한 명이 서 있었다.
 “편지랑 전보 왔습니다.”
 “잠시만요.”
 우석이 문을 열자 그는 땀을 닦아 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부모님은?”
 역시 아직은 아이라서 그런지 대뜸 반말이 나오는 우체부.
 “일 나가셨는데요.”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힘들게 사는 세상에 주말을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 흠 여기 이우석이라는 사람 사니?”
 “전데요.”
 “너? 편지는 여기 있고 전보 여기 있다.”
 넘겨받은 펜으로 사인을 한 우석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편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누가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보도 편지도 전혀 생소한 사람이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 중 하나를 펼치는 순간 누구인지 알아 낼 수가 있었다. 지난 6년간 잊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은 편지를 보냈고 한 명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수를 만들어 보냈다. 누가 보든지 간에 전혀 알 수 없는 글들. 하지만 우석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편지로 본 글이기에.
 “임태수, 최민석, 이광석. 역시 이놈들도 넘어온 건가?”
 임태수와 최민성은 암호를 이용해서 보냈지만 이광석은 프로그래머 아니랄까 봐 0,1을 이용한 이진법으로 보낸 것이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마을을 다잡지 못하는 그였다. 그동안 익숙해진다고 익숙해진 그였지만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꼭 자신을 이 익숙한 세상에서 내팽개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선택은 없었다.
 “만나야겠지.”
 
 1980년 6월 10일. 오후 5시 10분. 서울역 앞 모모 빵집.
 네 명의 소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뻘쭘하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 있던 곳에서는 신형 엔진의 계발 때문에 서로가 친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변한 모습들 그리고 6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너희들도 온 건가?”
 우선은 우석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우리 말고 온 사람 있나?”
 “준호.”
 “준호? 그 울보 제조기?”
 “응.”
 확실했다. 울보 제조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그리고 흐르는 침묵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순간, 거기다 충격적인 순간이다 보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럴 때는 의외로 쓸데없는 이야기가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흠, 흠, 너희들 기억나? 그 경비대에 있던 연대위.”
 “연대위? 아~ 기억나. 그 글래머 아가씨 말이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만.”
 광석의 말에 태수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생각이 난 듯 맞장구쳤다.
 “그래, 그 연대위. 그 아가, 아니 그 아줌마지.”
 “아줌마?”
 다들 반색을 하면서 얼굴을 돌린다.
 “사실은 내가 대시했다가 차였다. 크크, 유부녀더군, 애까지 딸린.”
 “그 얼굴에 그 몸매에 애까지?”
 연대위가 누구던가? 연구소에서 얼마 안 되는 홍일점이자 최고의 몸매를 자랑하던 아가씨, 아니 유부녀라고 하니 아줌마. 어째든 아니던가?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연구원도 많았고 경비를 서던 군바리들도 완전 소중 연대위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부녀라니.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그 뒤였다.
 “그런데 남편이 누군지 알아?”
 “남편? 그, 글쎄? 우리한테 물어보는 거 보니 연구소 사람인 거 같은데 설마 경비대장?”
 “아님 연구소장님?”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추렴해서 말해 보는 그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전혀 뒤엎는 반전이 있었으니.
 “이치석 일병이야.”
 “누구?”
 “그게 누구야?”
 다들 얼빵하게 생각하는 사이 우석이 그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그의 기억대로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설마.”
 “누군데, 누구야? 기억난겨?”
 “있잖아 우리 사고 나기 한 달 전에 온 그 얼빵이 경비.”
 그제야 누구인지 생각해 냈다. 물론 한 달 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친해질 일이 경비와 연구자 사이에는 없다, 잘해야 신분증이나 확인하는 사이니까. 하지만 기억이 나는 이유는 연대위가 진짜 죽을 만큼 사람들이 보자면 아주 불쌍하고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지?”
 “진짜라던데 치석일병한테 직접 확인해 봤다.”
 “맙소사.”
 사내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티가 날까 서로가 괴롭히는 것처럼 꾸민다는 건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건 서로 괴롭히기보다는 이 일병이 불쌍할 정도였는데 부부라니 그것도 애가 딸린 부부라니 말이다.
 “근데 그걸 어째서 비밀로······.”
 “아무래도 아내가 간부고 남편이 사병이면 그렇잖아. 아마 둘 중 하나는 전출 보낼 걸.”
 “결국 같이 있으려고 그런겨?”
 “그런 셈이지.”
 그렇게 황당한 말에 한참을 멀뚱히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내심 연구소에서 연대위에게 관심을 표명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으케케, 아이고 배야.”
 “그. 그만 으헤 으헤헤.”
 그들이 그렇게 웃는 사이 사람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지금 당장 불쌍한 것은 과연 누구일까?
 “평행 우주?”
 그 사건으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올라가자 그제야 이렇게 모인 이유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제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물리학을 전공한 임태수였다. 그 자신도 이 일을 알아내기 위해서 남몰래 많이 연구한 모양이다.
 “그래 아마도 우린 그런 우주 중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걸 수도 있어.”
 “무슨 소리인지 쉽게 설명해 봐.”
 “간단해 인간의 역사에서 보자면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면 그와 동시에 다른 평행 우주가 생길 수가 있다는 거지 물론 충격이 큰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 터진다면 말이야. 너희들도 아마 역사 공부를 했을 테지만 우리가 떨어져 나온 시간은, 아니 이 시대가 떨어져 나간 시대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이야. 이지찬이 천지뢰를 만들면서 역사는 바뀐 거야. 고작 폭발물의 개발자가 바뀐 걸지도 모르지만 그 사건으로 미래조차 바뀐 거지.”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뭐야?”
 “이야기 안 끝났어. 우선 내 생각에는 우리의 실험은 성공했을 거야.”
 난데없는 말에 다들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험이 성공했다니? 실패했으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는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말이 헛 나왔는데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 신형 엔진이 성공한다면 인간의 우주 진출은 획기적으로 변해. 당연히 평행 우주가 생길 만한 중요한 사건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 우주가 생기는 순간, 즉 실험의 성공과 실패가 바뀌는 순간 그 두개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야. 역사가 갈라진다고 해도 완전히 갈라지는 것은 아니지. 즉, 다른 충격적 사건에 의해서 합치는 수도 있어. 예를 들자면 이곳의 2차 대전과 같은 사건이 동시에 다른 우주에서 터진다면 그 두 개의 우주는 비슷한 과정으로 가면서 차츰 합쳐지는 수가 있거든. 물론 이론일 뿐이지만 어째든 우리는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서 평행 우주가 순간적으로 무너질 때 시간의 축 역시 무너지면서 전혀 다른 평행 우주의 과거로 왔을 가능성이 있어.”
 “그럼 돌아 갈수 없는 건가?”
 이들에게는 그게 중요했다. 이곳이 익숙하다고 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조국은 아니다. 약해 빠진 조국은 그들 입장에서는 사절이었다. 하지만 임태수의 말은 조금 달랐다.
 “돌아 갈수도 없지만 돌아가서도 안 돼.”
 “무슨 말이야? 돌아가서는 안 된다니?”
 “우리가 있던 우주는 성공과 실패 두 가지로 나뉘었지 만일 성공한 쪽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당연히 살아 있지. 그런데 우리다 나타나? 불가능하지.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세상은 완전히 무너지는 거야. 실패하는 쪽에 갔다면 우리는 죽어야 해 내 기억에 그 실험은 실패하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우리가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살아남았지만 만일 돌아간다면 그 우주는 그대로 흐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일 가능성이 있어.”
 “그런데 어째서 여긴 괜찬은 거지?”
 “미완성이니까. 만일 동시대로 갔다면 우린 죽었을 테지만 시간의 축이 흐트러지면서 과거로 온 거야. 이곳은 우리가 넘어오기 전과 또 나뉜 거지. 즉, 우리가 넘어오면서 새로운 평행 우주가 생긴 거야.”
 조금은 난해한 설명.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들은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 자들이고 이곳에 소속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물러서 곳은 없었다.
 “그럼 어쩌지?”
 광석이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프트웨어 담당이었던 자신은 이곳에서 할 게 없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곳의 컴으로 실력을 보일 수도 없고 여러 가지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물리학처럼 발표해서 써먹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건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우석의 무기공학이나 물리학은 도움이 될 테지만.
 “움직여야지.”
 “응?”
 한참을 고민한 우석이 입을 열었다.
 “움직여야지.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곳을 바꿀 수 있어. 바꿔 봐야지. 약한 조국이 마음에 안 든다면 바꿔야지.”
 우석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자신이 돌아가려고 한 이유는 이곳이 미개한 이유도 있지만 약해서 굽실대는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난 반대.”
 “응? 준호야, 언제 온 거야?”
 “저게 준호야? 참 뺀질거리게 생겼네.”
 어느 사이엔가 유준호가 온 것이다. 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너희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온 거다. 중요한 부분은 벌서 지나간 거 같지만 말을 들어 보니 갈 방법이 없는 모양이군.”
 “그래 방법이 없어 그런데 조국을 바꾸자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가 뭐지?”
 다들 조국을 강하게 하는 데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준호만이 반대를 했으니 거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난 방법이 잘못됐다고 하는 거야.”
 “잘못?”
 “그래. 너희는 자신들의 지식을 정부에 내줄 생각이지?”
 그러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는 자신들이 할 만한 일이 뭐가 있는가?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 중학생이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잘못된 거라니까.”
 “어째서?”
 최민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좋은 방법이 아니던가.
 “내가 옛날에 우석에게 말한 적이 있지만 미국에 살면서 확실해졌어 미국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다면 파괴한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한국에 전수한다면.”
 “한다면?”
 “내가 장담하지. 100% 미국에서 다 가지고 간다. 그나마 원본이라도 남기면 다행일걸. 기술을 뺐고 원본도 파괴할 가능성이 높아.”
 그의 말에 다들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다. 물론 시대상에서 미국에 반대를 하거나 할 수도 없고 찬미 친미 일색인 한국에서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보아 온 미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슥삭 당하는 거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준호. 하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니까.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조차 암살하는 미국이다. 과학자 한두 명쯤 사고사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럼 어쩌자고? 그냥 그렇게 살다 죽자고?”
 “그건 아니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한국은 한국대로 움직이게 두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세력을 만들자는 거야.”
 “무슨 소리야?”
 “쉽게 이야기하자. 나야 정신과 의사이니 잘 모르지만 너희의 기술이면 이 세상을 뒤집는 거 한두 개쯤 만들 수 있지. 안 그래? 그럼 그걸 기반으로 해서 세력을 만드는 거지. 유태인을 예로 들어 볼까? 미국도 유태인 손에서 놀아나. 유태인들이 강해서? 무기가 많아서? 아니야 그는 거의 경제 불럭이라고 할 만큼 탄탄하게 경제를 휘어잡고 있어 만일 우리가 신기술로 그걸 먹어 치웠다고 생각해 봐. 물론 한국이 그런 게 아니니 한국에 대해서 뭐하고 할 수도 없어. 지금 이스라엘처럼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거지. 알겠어?”
 그제야 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에 한국에 직접 투신한다면 토사구팽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전혀 상관없이 움직인다면 지휘를 받을 필요도 없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다. 진짜로 경제만 휘어잡을 수 있다면 미국은 벌벌 떨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뻑 하면 수퍼인지 슈퍼인지 하는 301조로 지랄을 하지만 그에 대응할 만한 병기가 생기는 셈이니까.
 “그렇군.”
 “좋아 그럼 방법은 말이야.”
 그순간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끼어들면서 이들의 중요한 시간을 방해했다.
 “허니~.”
 “응? 아, 달링.”
 갑자기 뛰어 들어온 금발의 아가씨는 준호를 가슴에 안고는 뭐라고 막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아가씨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준호의 얼굴이 가슴에 딱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럽다.’
 만민 공통의, 아니 만남 공통의 생각이었다.
 
 “아, 미안. 소개할게. 내 여자 친구 엘리스야.”
 “여자 친구? 너 세 살 연하라고 하지 않았냐?”
 “내가 언제? 3살 차이하고 했지. 그리고 연상이라고.”
 “세 살 연상? 그럼 우리 나이가 열네 살 이니까 열일곱 살? 저게 열일곱 살 몸매야?”
 쫙 빠진 몸매에 므흣한 가슴 그리고 큰 키. 애석하게도 준호가 더 작았다. 어째든 전혀 열일곱 살로 보이지 않는 그녀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행동이 빠른 사람이 있는 법이다. 특히 최광석은 연대위에게도 대시했다고 하더니 역시 빨랐다.
 “준호야, 소개팅 좀······.”
 
 다음 날 우석은 언제나처럼 점심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이제는 아예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며 옥상에서 기다리는 신세.
 잠시 후 아람이 바리바리 도시락을 싸 들고 올라왔다.
 “우석아, 밥 먹자!”
 “그래.”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부담스러웠지만 그런 생각을 버리자 어쩐지 예뻐 보이는 아람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예뻐 보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자, 아~.”
 언제나 같은 소리지만 주변에서 그 둘을 반찬 삼아 밥을 먹으러 왔던 자들은 투덜거리면서 내려가 버렸다. 오늘 먹여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석이었으니까.
 여자가 먹여 주는 거야 애교지만 남자가 그러면 진짜 남자 입장에서 넘어온다.
 “오늘은 다정하네.”
 “글쎄, 나야 뭐, 하하.”
 그렇게 닭살 스러운 포즈를 취하던 중 문득 우석의 시선이 특정 부위에 멈추었다.
 “흠, 빨리 좀 키워야겠는걸.”
 “응?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자, 아~ 닭가슴살이 발육에 좋다더라, 단백질이 풍부해서. 하하하.”
 
 1983년 7월 15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랑구 한 허름한 건물에 앞에는 꾸벅거리면서 경비가 졸고 있었다. 사실 5층짜리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주요 도로도 아니고 안쪽에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통행도 없었고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 어떤 가게를 하든 망하기 딱 좋아 보이는 위치였다. 그러니 당연히 경비도 필요 없어 보였다, 경비라고 하는 사람도 사람들을 제지하기보다는 건물 관리나 해 주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니까.
 “아저씨!”
 “으, 응?”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침을 슥 닦으면서 일어나는 경비. 눈앞에는 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누군가 했네. 우석 군 아닌가? 또 심부름 왔나?”
 “그렇죠, 뭐. 그런데 이렇게 졸면 어떻게 해요.”
 “하하, 누가 와야지 건물주는 외국 사람이니 올 일도 없고. 쩝, 그래도 존 건 비밀이다.”
 “네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들어온 우석이었다. 이 건물을 사서 개조한 것이 작년 12월이었다. 당연히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금의 융통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 많은 자금이 필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제조 공식과 방법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 적당하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몇 번의 실험만 가능한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구입한 건물이 이곳이다.
 자금은 미국에서 준호가 한탕 크게 벌려서 만들었다.
 물론 강도짓을 했다거나 또는 은행을 털거나 한 것은 아니다. 우석과 다른 친구들이 만들어 준 장치를 가지고 가서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승부를 조작한 것이다.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서 걸리지도 않는 장비였다. 물론 준호는 미성년자이니 입장 불가이지만 미국은 돈이면 다 되는 나라. 적당한 사람을 하나 고용해서 대신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조작은 멀리서 리모컨으로 준호가 했지만 어째든 몇 사람을 고용해서 몇 개의 도박장을 휩쓸고 났더니만 돈은 충분해졌다. 고용한 사람들이야 뜨내기가 아니라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미국 조직 중에 한 곳에서 한 것이다. 당연히 배신하면 죽음. 그리고 조작은 준호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가지고 도망간 놈은 없었다. 여담으로 그 대가로 받아 든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 그 조직이 속해 있던 동내를 뒤집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군소 조직 거대 조직으로 확장했다나 뭐라나?
 어째든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기존에 만들었던 유령 회사의 이름으로 건물을 사고 그곳에 임시로 연구소를 만든 것이다. 당연히 외부에는 사무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짬짬이 연구를 해서 물건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충분한 게 아닌지라 방학을 이용해서 마무리하러 온 것이다. 자습 문제 때문에 시끄럽기는 했지만 기말고사에서 올백을 맞은 사람이 안 하겠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한국은 성적이면 장땡이다. 그리고 올백의 축하 의미로 아람이 진한 포옹을 해 주었다는 사실은 여담이다. 도대체가 진전이 없는 애들이다. 뽀뽀는?
 “여~ 오늘은 일찍 왔네?”
 “뭐 거의 끝나 가니까.”
 미리 와서 바글바글 끓고 있던 작은 그릇을 바라보던 임태수는 반갑게 우석을 불렀다. 다들 전혀 상관없는 화학 실험 중이었지만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우선 제조법을 다 알고 있고 평행 우주라고 하더니만 재료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다만 화학은 주가 아니라 부로 배운 터라 정확한 비율을 맞추기 힘들어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어째든 그 결과가 지금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건 한제국에 있던 화장품 회사 코라이나에서 만든 화장품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만들고 있는 물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코라이나에서 무궁화 추출물로 만든 화장품 장생 방식은 바르는 방식과 먹는 방식 그리고 입욕제 방식이 있는데 아직 이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르는 방식이 다였다.
 하지만 이게 발매가 된다면 화장품 세계는 난리가 나는 것이다. 100일 이상을 버티는 무궁화에서 추출해 낸 이 물질은 활성액 764번이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화장품 이름을 딴 장생액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물질은 노화를 극단적으로 막아 버린다. 노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체내 활성산소와 세포에 쌓이는 노폐물이다. 활성산소를 빼는 것은 쉽지만 노폐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 결과다.
 하지만 이 물질은 황당하게도 활성산소와 노폐물을 서로 작용시켜 버린다. 쉽게 말해서 물과 기름이 반응하게 만드는 비누 같은 것이다. 그러고는 세포 밖으로 배출시킨다. 물론 완벽하게 작용하지는 않지만 약 50% 정도 작용해서 빼 버리기 때문에 노화가 극단적으로 느려진다. 화장품으로 맨 처음 개발되었을 때도 난리였지만 약용으로 개발되자 코라이나는 세계 최고의 그룹이 되고 말았다. 그 물질 하나로 말이다.
 화장품이야 거죽만 탱탱하게 만든다. 그 덕에 40대, 50대 아줌마가 20대 정도의 피부를 가진 경우도 많았는데 먹는 약으로 나오자 내부에서 작용하면서 장기의 노화를 방지, 사실상 인간의 평균 수명을 50% 정도 올린 것이다. 즉, 세포가 늙으면서 대략 백 세까지 살 수 있던 것에 반해 이 약을 꾸준히 먹으면 백쉰 세까지 살수 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약으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많이 입은 장사는 나이트였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20대로 보이니 누가 아줌마, 아저씨인 줄 모르지 않던가. 심지어 사귀고 보니 어머니뻘이라는 사건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어째든 그 정도 효율은 아직 힘들 테지만 30% 정도의 효율만 낸다고 해도 다른 장사는 필요 없었다, 전 세계에 좀 산다는 나라 중에 이 약 안 먹는 나라는 없을 테니까.
 “어느 정도냐?”
 “응? 한 20% 정도 효율이다.”
 “20%? 너무 약한 거 아냐?”
 “그러게, 최소한 30%는 나와야 하는데.”
 여자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이들의 무서운 대화다. 주름살 제거 화장품이 1%가 안 나오는 판국에 20%만 생각해도 엄청난 약이다.
 이들이야 한 달 한 알 비꿈씨, 아니 장생을 먹었으니 20%는 기별도 안 갈 테지만.
 “대량생산은 어쩔 거야?”
 “불가능하지. 성공한다고 해도 재료를 구할 수가 없잖아.”
 “당분간은 고가책을 유지해야 하나?”
 “그렇지.”
 우석은 그 말에 뭐 씹은 얼굴이었다. 이 약이 맨 처음 나왔을 때의 그 비난 때문이었다. 무려 50년이 넘게 나온 물질이지만 초반에는 엄청난 가격 때문에 있는 자들만이 먹을 수 있었다.
 당연히 돈 없고 가난한 자들은 먹을 수가 없었고 이제는 죽음마저 빈익빈 부익부를 따진다며 그 부분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초반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무궁화를 대규모로 키우는 곳도 없었고 대부분이 관상용 아니면 행사용이었다. 그렇다고 가로수로 심은 무궁화를 잘라 올 수도 없었다. 어떤 무식한 놈들은 그 효과가 그 효과라고 무궁화를 생으로 먹기도 했지만 회사 기밀인 제조법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효과도 없었다.
 그나마 후반부에 가서는 광대한 만주와 산악 지역에 무궁화가 많이 심어지면서 그런 일은 없어졌지만 무궁화의 질긴 생명력 덕에 다른 작물이 자라지 못하는 지역에서도 잘 자라서 다행이었다. 당연히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제조법이지만 안전성 테스트를 위해서 새로운 연구법이 나올 때마다 연구소에서 연구를 한 덕에 제조법은 알고 있었다.
 뭐 만일 새 나간다면 그 주범은 쫄딱 망해도 빚을 못 값을 테니까. 당연히 짝퉁 만든 회사도 말이다.
 사실 말이 약이고 화장품이지 소비량을 보지만 전략 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넌 어때?”
 “나? 나야 뭐 제자리걸음이지.”
 신형 장갑을 만들고 있는 그였지만 애석하게도 화학 실험 몇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장갑이 아니니 지금은 서류상으로 정리만 할뿐이었다.
 “운이 좋았어.”
 “뭐가?”
 “내가 이 제조법을 알고 있는 거 말이다. 안 그럼 세상을 뒤흔들 만큼 강한 뭔가가 없잖아.”
 임태수의 자화자찬. 하지만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으니까.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고 해도 세상을 흔들기에는 오래 걸린다. 신형 컴을 만들어도 퍼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자신이 신형 장갑판을 개발해도 결국 군사용에 국한되는 것이다.
 최민석이 신형 컴을 개발 중이기는 하지만 컴이라는 물건이 단일 물질도 아니고 주변의 물건들이 전혀 안 따라오니 맨땅에 해딩 중이고 자신이야 도가니도 없는 이곳에서 할 게 없고 광석이야 카세트테이프 비슷한 걸로 굴러가는 컴을 보면서 한마디로 끝내 버렸다.
 “뭘 어쩌라고?”
 결국 믿을 만한 것은 이거 하나뿐이었다. 준호야 사기 치는 거 빼고는 할 게 없었다. 심리학자답게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지만 그게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끙.”
 “왜 그래?”
 갑자기 태수가 신음을 흘리자 우석은 놀라서 다가갔다. 일이 잘못됐을 지도 모른다. 제조법이야 안다고 하지만 중간에 잘못된다면 유독물질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 이거 좀 잡고 있어 똥 마려. 빨리, 급해.”
 “에라이!”
 
 1983년 9월 3일. 새벽 2시.
 뉴욕 빈민가에 쌀쌀한 새벽의 기운을 코트로 감춘 한 명의 여자가 어두컴컴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덩치의 백인이 호위하듯이, 그것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양복 안이 불룩한 것이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쌀쌀한 날씨를 피해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 쪼가리들을 태우고 있던 노숙자들은 잠시 힐끔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금방 신경을 꺼 버렸다. 척 보기에도 저 여자가 입고 있는 코트는 명품이고 쓰고 있는 두건도 명품이고 오밤중에 쓰고 있는 선글라스도 명품이니까.
 금방 그 여자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경찰들은 모를 테지만 이들은 노숙자. 길바닥 정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런 옷을 입은 여자가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여자 역시 노숙자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어두컴컴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어느 코너를 돌자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기침을 했다.
 “쿨럭쿨럭, 이런 약이 떨어진 모양인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 하지만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는 여자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쿨럭쿨럭, 먹고살기 힘드네.”
 “무슨 약이 필요하죠?”
 전혀 안 어울리게 자상하게 그 창백한 남자에게 말을 묻는 그녀. 그녀의 마음에 감동해서일까? 그 남자도 입을 열었다.
 “약을 먹어야 오래 살 텐데.”
 “그건 어떤 인간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자 곧 죽을 거처럼 기침을 해 대던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반쯤 죽어 가는 그 남자가 아니었다.
 “첨 뵙는 분인데?”
 “소개받고 왔습니다. 첼시한테서요.”
 “아, 그분. 그분도 조만간 다시 오실 텐데 같이 오시지 이럼 위험한데······.”
 “그건 알지만 지금 좀 급해서요.”
 그녀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남편이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젊었을 적의 화려한 미모도 나이를 먹으니 남편을 잡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남편의 직장은 주변에 유혹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곳. 어떻게 해서든 잡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래요? 이거 원칙에서 어긋나지만 알아두쇼. 소개 받을 사람은 소개할 사람이랑 같이 오는 게 원칙이요. 그래, 얼마나······?”
 “얼마나 있지요? 다 필요해요.”
 “나도 그럼 좋은데 이거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서.”
 “그럼 3달치만 줘요.”
 “어허, 이약 3달치면 적은 양이 아닌데.”
 “아니까 줘요.”
 주변을 둘러보면서 걱정하는 그녀였다. 만일에 누군가 지금 이 장면을 본다면 자신뿐 아니라 남편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한 개 2,000달러니까, 한 달에 8,000. 세 달이면 24,000이요, 돈은······?”
 “여기.”
 그 여자는 서둘러 들고 온 가방에서 100달러들이 뭉치를 여러 개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고작 작은 앰플 열두 개를 받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앰플이 깨질까 두려워서일까? 서둘러 솜으로 싸고 다시 한 번 손수건으로 감싸서는 가방 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순간.
 펑!
 아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사진의 조명이 터진 듯 빛이 번쩍 하고는 끝이었다. 그러고는 누군가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 하나가 사진을 찍은 자를 잡기 위해서 번개같이 달려갔지만 그자는 벌써 골목의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그 여자는 놀라 자빠지면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손수건에서는 그녀가 소중하게 감싸던 앰플이 깨진 건지 무언가가 희미하게 새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특종 장생 불법 밀수 기승.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산다. 장생!
 -장생을 몰래 구입하고 있던 로널드 국무 장관의 부인.
 
 대문짝만 한 관련 사진을 머리에 그려 넣은 신문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더군다나 도주 중인 밀수범을 체포하고 난 후 나온 수첩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의 번호들이 줄줄이 나왔다. 밀수범이야 당연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번호만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아는 거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사 보면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청나게 욕을 하는 것을 잊지도 않았다.
 한국계 기업 고조선에서 나온 장생이라는 저 화장품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노화 방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노화 속도를 40% 낮춰 준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말하는 것을 다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만 노화 방지와 노화 억제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 노화 방지는 말 그대로 피부를 조금 더 탱탱하게 보임으로서 눈만 속이는 거지만 노화 억제는 피부가 늙어 가는 것을 막기 때문에 수명 자체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열광했다. 물론 바로 통과된 것은 아니다. 수차례의 임상 실험과 과학자들의 안전성 실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결과도 입증, 안전도 올 AA라는 기염을 토하면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장생.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국은 장생의 수입을 막았다. 이게 충분히 전략적 위험성을 가진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연장 그것은 어떤 인간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이브의 사과니까.
 만일에 그걸 팔다 안 팔면서 미국 정부 때문이라고 하면 지지율의 급락은 뻔한 정도가 아니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당연히 밀수가 되고 밀수품의 대부분을 구입하는 것은 미국 내 주류라고 일컬어지는 소위 있는 자들과 할리우드의 배우들이었다.
 당연히 그런 걸 살 만한 돈이 없는 소시민들은 그런 자들을 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각 일본.
 “이토 상.”
 “어허, 이런 걸 다.”
 “제 작은 성의무니다. 받아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신다면야.”
 일본의 모 정당의 당수의 이토는 브로커가 넘겨주는 작은 상자를 받으면서도 흐뭇한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정도 크기면 최소한 스무 개는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 가격이 장난이 아닐 것이 뻔했다. 사실 한국에 고조선에서는 수출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자국 내 주문량을 커버하기도 힘들다. 개당 가격이 50만 원. 한 주당 하나이니 한 달이면 200만 원이라는 고액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물량을 예약중이다. 당연히 중간 상들은 어떻게든 구해서 더 가격을 올려서 판다. 미국에서는 개당 2,000달러까지 한다고 한다. 밀수니까.
 일본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다. 없어서 못 파는데 말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특성에 맞게 다른 사용법도 알아냈다.
 ‘저게 그 장생이란 말이지? 저걸 바르면 정력이 하늘을 찌른다던데······.’
 피부보다 애먼 것부터 신경을 쓰는 이토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생을 특정 부위에 바르면 일시적으로 그 부위의 활동이 엄청 나게 활발해지기도 하다. 물론 일시적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것보다 효과가 좋았다.
 이토는 벌써부터 오늘밤 자신과 즐거운 밤을 보낼 애첩 히즈미를 생각했다. 저 비싼 걸 다 늙어 꼬부라진 마누라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히즈미는 저 앰플 중에 두어 개만 줘도 아마 뭐든 해 줄 것이다. 그가 머릿속에서 별의별 포즈를 다 잡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공안이다!”
 “거기 업드려!”
 이렇게 일본의 장생 로비 사건이 전국에 방송되었다.
 
 1983년 9월 5일. 오후 12시 40분. 서울시 가나 고등학교.
 우석은 한숨을 쉬면서 반찬 뚜껑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는 신김치와 메추리알. 그나마 오늘은 소고기 장조림도 좀 들어 있었다.
 “너무하시네 진짜.”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 몇 가지 변화라면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집안이 좀 살 만해 졌다는 거. 가지고 있던 산, 말이 산이지 돌산이라서 아무 쓸모도 없던 산이었고 도리어 재산세만 축낸던 산이 졸지에 보물덩이가 된 것. 산에서 골재 채취 허가가 나면서 돌이 금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 덕에 아주 부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유복했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반찬은 고정식이었다. 운 좋으면 소시지 정도?
 근검절약이 온몸에 밴 어머니 덕에 말이다.
 “아~ 아람아, 네가 해 주던 반찬이 그립다.”
 두 번째가 아람이와 헤어진 것이다. 싸워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은 남고로 아람은 여고로 배정된 탓에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학교라도 가까우면 좋을 테지만 좀 거리가 있어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진짜 아람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아람이 해 주던 반찬이 그리운지 알 수는 없다.
 ‘도대체 고조선의 책임자쯤 되는 놈이 반찬이 이게 뭐냐고.’
 준호는 장생을 발매하면서 회사를 주식회사로 돌려 다섯 명에게 20%씩 주식을 나누어 주었다. 원래가 회사는 이름만 있던 유령 회사인지라 돈이 들지도 않았고 장생이 첫 사업이니까.
 더군다나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자만 주식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야 했다. 재수 없게 유대 쪽 금융이 끼어들면 골치만 아프고 더 재수 없으면 회사 자체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매출액만 몇백억에 이름은 고조선이지만 사실 준호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드러낼 수도 없는 문제라 반찬은 언제나 같은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돈을 쓰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회사로 다시 돈이 흘러가고 그건 회사의 성장을 촉진했다.
 “또냐?”
 “그래 띠껍냐?”
 옆에서 자신의 반찬을 보던 준규는 지겹다는 표정이었다. 준규는 우연히도 중학교에서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왔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지만.
 “네 어머니도 대단하다. 매일 신김치에 메추리알이냐. 고등학생쯤 되면 좀 잘 싸 주시지.”
 “몰라, 인마. 너도 만만치 않구만.”
 “무슨 소리. 난 계란후라이도 있다! 우하하!”
 “빈곤한, 새리들.”
 옆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새로 만난 친구인 철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친구는 비슷한 사람끼리 뭉치기 마련이다.
 철기의 반찬은 언제 김치, 무말랭이, 콩자반, 간혹 소시지 등등이었다.
 “비슷한 놈이 뭘그래.”
 “안 되겠다. 매점을 급습하자.”
 “지금?”
 “이 시간에 미쳤냐?”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10분. 남고, 여고 필요 없다. 초중고 다 필요 없다. 어느 학교든지 이시간의 매점은 전장 그 자체다.
 “컵면이라도 있어야 넘기겠다.”
 그렇게 3총사는 인간의 벽을 넘고 동전의 공격을 피하며 매점 아줌마의 마성에 컵라면 공주를 구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물이 차다.”
 컵라면 공주를 구하면 뭐 하나, 데려갈 말이 없는데. 벌써 뜨거운 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멸당한 후이고 전기 물 끓이기에서는 이제야 새로운 물이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이걸 씹어?”
 스프까지 곱게 차려입은 컵라면은 물이 없어 슬플 뿐이었다.
 
 1984년 4월 8일. 오후 5시 55분. 뉴욕 하워드 고등학교.
 고등학교가 끝나고 나온 준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은 가을하늘답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런 날은 태양이 작살이지.”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나는 중인 그였다. 미국에 월반 제도가 있어 한국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이제야 고1이지만 자신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시간이면 나타날 사람은 대학생이고 말이다.
 “허니~.”
 자동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목소리의 주인공 엘리스.
 “하이, 달링.”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엘리스가 몰고 온 차에 탑승하는 준호. 사실 말이 차지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오래된 차다. 75년 식이라니. 면허를 따고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았다지만 너무하다. 당연히 털털거리는 차는 분위기 있는 드라이브는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덜컹.
 “허니, 이제 어디 갈 거야?”
 “나? 나야 집에 가지 어디가.”
 “피, 너무하다 매일 집, 학교, 집, 학교.”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고조선 서류가 한두 개냐.’
 아무래도 한국계 미국 회사라고 해도 실직적은 본사는 미국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류는 그가 처리해야 했다. 연건 자체도 그 말고는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의 본사는 그 누추한 연구실이니 뭘 더 바라나.
 “준호도 조만간 졸업이네.”
 “뭐 그렇지.”
 문득 그녀의 말에 코앞까지 다가온 졸업이 느껴졌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한국에 가야겠지.”
 “그래.”
 그렇게 말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사실 이들이 만난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했다. 엘리스를 만난 건 미국에 와서 월반 하기 전 동아리에서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친구를 사귀는 데는 그게 좋다는 생각에 찾아간 것인데 그때는 선배였던 그녀가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준호는 은근히 그녀에게 접근했다. 물론 사심보다는 학구적 열망(?)이 더 강했다, 자고로 심리학자들은 고민을 듣는 데서부터 뭐든 시작하니까.
 척 보기에도 고민이 한 다섯 겹쯤 쌓인 그녀에게 다가가기는 쉬웠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심리학자에게 고민 상담을 받는 것은 시간당 100달러일 정도의 고가다. 그런데 훨씬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준호에게 고민을 털어놓다가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그 다음부터는 그녀가 달라붙었다. 친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척 보기에도 나중에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니 물어 놔야 할 듯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가 문제였다.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수재답게 학교에서도 미국에 남아 있기를 바라고 준호의 부모님 역시 가능하면 시민권을 따는 것을 원하지만 그는 눈곱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준호야.”
 “응?”
 “미국에 남으면 안 돼?”
 “안 돼.”
 은근히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단칼. 준호는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하고자 하면 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니까.
 그 순간 역시 75년 식 차량은 노인답게 그 둘이 대화를 해 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펑! 푸쉬쉬.
 “이런, 니기미.”
 간만에 나온 한국말, 즉 차가 퍼졌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다고 했던가?
 쏴!
 비까지 온다.
 “가지가지 하네.”
 투덜거리는 준호지만 차라리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참에 결정할 것은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옆에 없으면 이상했다. 그녀가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 얼마나 옆이 허전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미뤄 둘 수는 없다. 자신은 한국에 가야 하고 그건 무를 수 없는 결정 사항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슬슬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평생을 준비만 할 수는 없기에.
 거기다 대학 생각은 없었다. 대학에서 배울 것도 없고 시간도 아까웠다.
 아까의 말이 서먹했는지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입을 연 것은 준호였다.
 “저기 말이야.”
 “······.”
 “사실대로 말할게. 난 미국에 남을 생각이 없어. 난 한국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고 오랜 기간 준비했어. 물론 네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다만, 휴~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너도 나한테는 소중하지만 친구들과 준비한 일이 더 중요해. 물론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한참을 계속되었다. 도대체 심리학 전공한 사람 맞나? 아니 이런 경우 당연한 건가? 어째든 두서도 없고 정리도 안 된 말은 무려 30분이나 지속되었다. 아무리 잔인하게 끊고 싶어도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다. 하물며 3년이 넘도록 연인이라면 그리 쉽게 끊어질 수는 없다.
 “기다릴게.”
 “뭐?”
 결국 대부분 마지막은 여자가 하게 되어 있다. 특히 남자가 이렇게 어정쩡하게 나올 때면 누가 그러던데 대시하는 건 남자지만 선택하는 건 여자라고 말이다.
 “기다린다고. 네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도 기다릴게.”
 “난 안 돌아와.”
 “그럼 네가 와서 데려 가든가.”
 이제는 우긴다. 막가는 아가씨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지.”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그들은 말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75년 식 차 방음은 확실하다. 도대체 뒤에서 빵빵거리는데 안 빼는 이유가 뭐야? 차가 퍼지면 빼야 할 것 아냐!
 
 1984년 11월 7일. 오후 3시 00분. 서울시 중랑구.
 허름한 5층짜리 빌딩 앞에서는 소요 아닌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동안 건물 계단이나 청소를 하던 경비원 박 씨 아저씨는 원하지 않던 승진을 하고 말았다.
 “조금 들어가 보자니까요.”
 “안 된다니까 그러네! 형철아, 이분 나가신다. 배웅해라.”
 “네, 팀장님.”
 졸지에 경비 아저씨에서 경비 팀장님으로 승진하신 그분 역시 인생 대박이라. 사실 한국에 있는 본사는 대부분 오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서류는 미국에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장생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있는 지사로 가야만 했다, 고조선에서도 한국에 있는 본사는 연구만 한다는 사실을 공개했으니까.
 하지만 미국에 있는 지사가 철수 결정이 내려지고 신형 장생 노화 억제 50%를 가능케 한 엄청난 위력과 약으로 만들어 섭취를 통해 내부 장기의 노화까지 막을 수 있다는 결정이 식품 안전국에서 내려지고 나자 난리가 났다. 수명의 50% 연장이라는 말 그대로 생명의 보물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전격적으로 발표된 미국 지사의 철수.
 사실 그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준호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결정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지사만 덩그러니 돌아가면 마음이 안 놓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미국은 난리가 났다. 그동안 장생의 수입을 차단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철수하는 것으로 생각한 미국 정부는 부랴부랴 수입을 허가하고 신형 장생환에 대해서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생명의 연장 50%는 정치적 논리로 막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거기다 대부분의 장생 소비자들이 소위 말하는 돈 있고 백 있는 미국의 상류층이다. 당연히 그들로서는 장생이 철수하면 더 구하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아저씨, 아버지, 어르신, 장인어른!”
 “나 딸 없어, 이 사람아!”
 일본에서 왔다는 브로커는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존칭을 써 가면서 돌입을 해 보려고 했지만 딸도 없는 아저씨의 아픔만 건드렸을 뿐이다.
 “팀장님, 사람 수가 장난이 아니네요.”
 “그렇지? 이거야 원. 나도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전 같지가 않아.”
 “대단하십니다, 매일 이런 사람들과 싸우셨다니.”
 새로 들어온 신입의 말에 으슥해지는 그였다.
 “뭐 그 정도야, 으하하.”
 절대 전에는 사람이 없어서 썰렁했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박 아저씨, 아니 박 팀장이었다. 전에는 그 한 명이면 다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건장한 그것도 유단자로 구성된 경비를 3교대로 네 명씩 돌리고 있었다.
 지금 고구려는 세계 각국의 브로커와 제약 회사 직원들의 대대적인 습격 아닌 습격을 받고 있었다. 기존의 두통약이나 감기약 아니면 진통제나 항바이러스제 등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약이다. 건강보조제이기는 하지만 그 효과가 엄청난 약이다. 더군다나 이 약은 기존의 약과 다르게 아픈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 건장한 사람도 먹는다. 그래서 수요자가 몇 배나 늘어나는 그런 약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판매권만 확보할 수 있다면 떼돈을 버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거기다 고정 수입이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히 각 나라의 판권으로 사기 위해서 로비는 엄청났다. 아니, 날 뻔했다. 문제는 로비의 대상이 누군지 모른다는 거.
 고조선은 다섯 명에게 모든 주식이 몰려 있는 이상한 형태의 주식회사로 상장은 되어 있지만 매물 자체가 없었다. 거기다 그들이 경영주이자 연구원 당연히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그들의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써 봤지만 드러나지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이들이 생각하는 방향은 달랐다. 고조선의 실질적 지분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다들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최소한 화학과 정도의 대학을 나온 이들이라 생각을 하고 조사를 했지 고딩이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는가? 당연히 이들이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본사였다. 처음에는 본사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허름했지만 틀림없었다.
 “바글바글하네.”
 광석은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을 살짝 내다보고는 중얼거렸다. 방학을 이용해서 간만에 모인 이들은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는 중,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저 시끄러운 사람들만 아니면.
 “어쩔 거야?”
 “뭐?”
 광석의 말에 준호를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들 판권 문제일 텐데 우리가 직매할 거? 아니면 판권을 넘길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역시 직매?”
 저 바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게 미안 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다른 업체에 판권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판권을 넘기는 가장 큰 이유는 관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대량 생산이 아니라 공장의 크기는 중소기업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에 전 세계를 커버할 만큼 생산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가 기존에 판매 라인이 없기 때문이며 대부분이 이 이유 때문에 판권을 넘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 팔면 찾아 와서 팔아 달라고 하니 라인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모든 이득을 한국내 자신들에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졸업하고 난 후 그 누구도 대학에 갈 생각은 없다. 물론 부모님들은 난리를 피울 테지만 이들은 이곳의 대학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제대로 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 에게 상담할 게 있다.”
 “뭔데?”
 사실 경제적 문제나 사업적 문제는 대부분이 준호가 담당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연구원으로 지내 왔지만 그는 여러 가지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잡학 다식 했으니까. 그런 그가 상담할 것이 있다는 데 다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번에 모이자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금융 제제가 들어오고 있다.”
 “금융 제제?”
 난데없는 말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무슨 공산국가도 아니고 금융 제제가 들어올 일이 뭐가 있나? 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모든 의문은 해결되었다.
 “우리가 선택한 물건이지만 장생은 성공적인 물건이야. 하지만 너무 성공적이야. 유대 금융이 우리를 노린다.”
 “뭐가 문제야, 주식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데? 설마 팔 사람이 있나?”
 “당연히 우리 쪽은 문제가 없지 하지만 회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아. 딱 꼬집어 말하자면 우리 빼고는 다 표적이 된 상태야.”
 “쉽게 말해 봐.”
 “우리가 계약한 무궁화 재배 농장들 그리고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던 회사들 거기다. 우리가 지금 세 들어 있는 공장의 주인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출이 금지되고 빌려준 돈들도 회수하고 있어.”
 그건 의외의 사태였다. 고조선 관련 업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업들이 최대 호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무궁화 생산 업체를 선택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끌어다 쓴 모양이야.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에게 자본금을 받으면 충분히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문제는 은행들이 차압 형식으로 무궁화를 압류했다는 거지. 나도 잘 몰랐지만 요즘 들어 입고되는 양이 팍 줄어서 나름대로 조사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쪽에서 고조선의 판매 건으로 접촉을 시도했어. 물론 의향을 물어보는 정도의 서류지만 노리는 건 확실해진 거지.”
 로스차일드는 유대 계열의 대표적인 금융 회사로 당연히 이런 생산물 쪽에는 관련이 없는 회사이다. 하지만 그런 로스차일드가 판매를 종용하고 들어오는 원료의 반입이 팍 줄었다는 것은 뻔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좋은 물건을 팔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유대 금융이 자본시장을 지배한다.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못하겠으니 간접적으로 하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이는 유대인들이 쓰는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발견하면 절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주변 원자재 쪽이나 다른 쪽에 압력을 행사한다. 당연히 그 회사는 쪼들릴 수밖에 없고 나중에 가면 유대 금융에 헐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다.
 “너무 크게 일을 벌인 건가?”
 민석은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방법은 없었다. 물론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 것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자신들의 대출금은 다 갚았고 자기 자본 비율 100%는 벌서 예전에 달성했으니까.
 다만 재료의 공급이 중단된다면 자신들이라고 해도 장생을 만들어 공급할 수는 없다.
 “저들이 저러는 이유도 사실 장생이 출고량이 전에 비해서 팍 줄어 있기 때문이야.”
 “그렇겠지, 수입이 승인된 이상 밀수 같은 위험한 짓은 안 해도 되니까.”
 아무리 수익이 좋다고 해도 땅 파서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원재료를 확보해야 하는데 유대 금융이 자신들을 노리고 버티기 시작한다면 그건 아무래도 힘들었다.
 “민석이하고 광석이 너희들은 어때?”
 “대충 개념 좀 잡고 기본 설계정도만 끝난 상태야.”
 둘 다 컴퓨터 쪽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전자 산업 쪽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취향대로 컴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은 보급률이 높지 않은 컴이고 활용도 자체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우선 다른 전자 산업을 노리는 중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cd플레이어였다.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는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구닥다리 시스템이고 시중에 있는 패킷을 사다가 학생들도 만들 만큼 간단한 기술이었지만 이들이 성공을 한다면 대박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카세트가 좀 넉넉하게 보급하고 있는 시대에 미리 렌즈를 이용한 cd의 인식방법만 개발해서 특허를 등록한다면 차후 그쪽 시장은 선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선은 cd플레이어를 개발 중이다. 물론 개발한다고 해도 카세트 시장에서 cd 시장으로 넘어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우석이는?”
 “뭘 바라냐. 기본 적인 도가니 정도는 있어야 뭘 만들어 보든지 하지. 서류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음향타일 정도라고.”
 “끙.”
 역시 제대로 된 도가니 시설 없이는 아무래도 장갑 시스템은 무리였다. 뭐 개발해도 고작 군사용이니 지금당장 쓸 수는 없을 테지만 태수야 당연히 지금 장생의 생산 라인 관리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거야?”
 “우선은 그래. 대부분의 무궁화 농장은 금융권에 묶여 있는 상태야. 농장주들도 물품만 반납하고 나면 채무를 이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작물들이 몽땅 가압류된 상태니, 그나마 작은 농원들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먼저 갚으면 안 되냐?”
 “불가능해. 우리가 자본 비율이 100%라고 해도 만일에 농장들에 대한 대출을 해 준다고 생각하면 우리 자체가 은행권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어. 늑대 피하다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꼴이지.”
 “당장은 방법이 없는 건가?”
 “망하지는 않겠지,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하지만 크지도 못해.”
 “할 수 없군. 당분간은 더 고급화 전략으로 나가야겠어. 생산량 자체가 없으니까.”
 동유럽의 별장에서 로버튼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와인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50년도 넘은 와인이니 부르는 게 값일 테지만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지점장님.”
 하지만 그런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자신의 비서인 도손이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급한 일이 아니면 그가 들어오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기에.
 “무슨 일인가?”
 “고조선이 또 장생의 가격을 올렸습니다.”
 “또?”
 그의 보고에 로버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생이라는 탐스러운 과실을 노리는 것은 좋았다.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기업이니 흡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대답은커녕 누가 총수인지도 알 수 없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봉쇄를 시도했다. 하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원료의 수급이 힘들어지자 원료를 구하는 대신에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올려 버린 것이다. 일반적인 물건이라면 망하기 딱 좋은 작전. 하지만 원래가 고급 제품이었던 까닭에 수요는 줄지 않았다, 어차피 쓸 놈은 다 쓰니까.
 결국 로스차일드는 자본을 동원해서 작은 크기의 농장들까지 노리기 시작했고 가격은 더욱 폭등했다.
 과거 물고가 50만 원짜리 앰플이 지금 가격이 300만 원대, 장생환은 500만 원대가 출고가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금융권에서 도리어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끼 식사로 200만 원씩 질러 대는 진짜 부자들이 아니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가격에 소비는 팍 줄었지만 도리어 어정쩡한 사람들도 조금씩 잔고를 빼기 시작했고 이미지 자체도 좋지 않아지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유대인들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은근히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조여.”
 “네?”
 “더 조여. 팔겠다고 길 때까지 더 꽉 조여.”
 
 1984년 3월 4일. 오후 4시 서울시 중랑구.
 여전히 바글 거리는 본사 안에서는 새로운 작전을 짜기 위해서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역시 파워 게임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군그래.”
 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졸업하고 나서 죽어라 매달렸지만 역시나 달리 유대 금융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농장들조차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농장들이 로스차일드와 직접 거래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한국 내 거의 모든 금융 회사들은 당연히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거기서 농장을 조이라고 한다면 조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궁화 재고도 얼마 안 남았다.”
 임태수는 자신 앞에 있는 서류 뭉치를 넘기면서 고개를 저었다. 최근 들어 급감하던 양은 이제 생산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무궁화라도 한겨울에 키울 수 없고 비축하기도 전에 조이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겨울이 지나자 사실상 생산은 중단된 상태였다. 물론 각 창고에는 무궁화들이 보관되어 있지만 역시나 풀어 줄 생각을 안 하는 은행들이었다.
 그런데 우석은 이게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회사는 망하기 직전, 아니 망하지는 않을 테지만 주력 상품이자 유일한 상품의 생산조차 불가능한 상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런 상태는 유대 금융이 조이기 전에, 아니 미래에 한번은 올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미래가 이들 앞에는 있었다. 바로 군대 한국 남자로 태어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군대다.
 당연히 네 명다 동갑이니 동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장생의 생산을 담당할 사람도 어차피 없어진다. 원한다면 준호는 미국 국적으로 따서 남을 수도 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였지만 얼마 전 대학을 간다, 안 간다는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는 통에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바로 군대에 끌려갈 거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들은 지금 고등학교 3학년. 아싸리 올해를 기점으로 해서 3년을 포기한다면 뒤집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참에 역습을 해 볼까?”
 “뭘 가지고?”
 다들 부정하는 분위기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게 가능하다면 역습도 가능했다. 물론 자신들도 완전히 무너지지만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할 만했다.
 “너희들이 생각을 못한 모양인데 우리에게는 지금과 같은 미래가 조만간 있을 거야.”
 “뭐?”
 “군대 말이야, 군대. 대한제국이야 모병제였지만 여기는 징병제라고. 다들 이야기가 끝났지만 우리가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가게 될 거야.”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가 터지자 다들 멍한 얼굴이었다. 군인들 이야기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년부터 자신들 역시 입영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생각해 봐. 우리가 군대를 가고 나면 고조선은 사실상 휴업이나 마찬가지야.”
 “끙, 산 넘어 산이로군.”
 “산 너머 산은 아니지. 어차피 망하는 거 확실하게 망해 보자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우석에게 다들 집중했다. 만일에 방법이 있다면 위험하더라고 할 만은 했다.
 얼마 뒤 고조선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옥과 공장을 담보로 로스차일드에서 돈을 대출했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적은 돈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서 계약을 하고 있던 농장에서 재배한 모든 무궁화를 구입 전량을 장생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로스차일드는 자신들에게 담보대출을 신청하자 드디어 자신들이 이겼다는 생각에 얼씨구나 하고는 대출을 해 주었다. 물론 돈을 퍼 주는 그런 우매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고조선이 자신들에 손에 들어오고 황금을 낳는 오리가 생길 거라는 생각에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장생은 생산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판매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건물 자체도 오래된 것이고 기계들도 엑기스를 뽑아내는, 조금은 흔한 기계이기 때문에 담보로 잡힌 물건이 바로 장생이었다. 장생은 생산이 되기가 무섭게 로스차일드가 현지에서 구입한 창고로 직행했다. 당연히 판매는 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가 노리는 것은 장생이 아니라 그 제조법이니까.
 대출까지 하면서 장생을 만들었지만 간접적 압박에서 직접적인 압박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휴, 아쉽구만.”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면서 다섯 명은 한숨을 쉬었다. 그 종이는 폐업 신고서라는 말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돈이야 많이 벌었지만 역시 유대 금융을 흡수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나?”
 준호는 아쉽게 종이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다섯 사람이 도장을 찍고 나면 주식회사 고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민석과 광석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자신들이 이번에 한 일은 전혀 없어도 고조선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의 밑거름이 될 거라 생각을 했지만 누가 그랬던가 보물을 가진 것도 죄라고. 특히나 장생의 개발 아니 카피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한 임태수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할 수 없지. 참아라. 제대하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때는 지금처럼 맨땅에 헤딩할 필요 없잖아. 자본금도 충분히 준비해 두었고 다른 물건들도 가지고 나올 수 있을 테니. 확실히 이번은 너무 장생에만 매달렸어.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투자를 함에 있어 한 가지에 올인하는 것은 바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번에는 그런 바보짓을 한 그들이었다.
 우석의 말대로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격어야 하는 일이고 그런 김에 유대 계열에 타격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주저들 하지 말고 가자고.”
 그날 저녁 주식회사 고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음 날부터 전 세계 신문들은 고조선의 침몰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기사가 나가기 시작했다. 절대 망하지 않을 듯한 회사. 인간에게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루어 줬던 회사가 어느 순간 갑자기 망한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그제야 어어 하면서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정도 몰아붙이면 당연히 팔 거라 생각했지만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그 전에는 그들에게 돈을 받아 조용하던 경제신문들이나 경제학자들 그리고 주요 정치인들은 일제히 로스차일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로스차일드를 대표한 유대 금융이 고조선을 말아 먹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몇 달 후 소더비 경매장.
 “이번에는 장생환 1,000알. 시작하겠습니다. 50만부터 시작합니다.”
 “50만!”
 “55만.”
 “70만!”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돈을 보면서 로스차일드 회장 로버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건 바로 고조선에서 압류한 엄청난 양의 장생들 이었다. 사실 평소에 소모량에 비하자면 세발의 피이지만 이렇게 경매를 통해서 팔고 나면 수익은 몇 배나 올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장생을 만들던 고조선이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생들이니 더 이상 구할 곳도 없다. 가격은 무지막지할 정도였다. 그사이 가격은 100만을 훌쩍 넘어 버렸다.

댓글(3)

윗층삼촌    
며칠까요? -] 몇일까요?
2017.03.14 07:11
돌깨는넘    
흠 제가 책을 가지고 있는데 6권까지 완결 아닌가요?
2017.04.25 09:05
Lime01    
..헐? 이걸 다시 보게 될줄은 몰랐는데;; 6권 이후로도 있네요. ...분량조절인지 추가 분량인지;
2017.04.27 20:29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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