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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절대강호 [E]

[개정판] 절대강호 1-1권

2017.03.28 조회 18,489 추천 140


 # 序
 
 이곳은 신군맹(新群盟)의 머리를 담당하는 신비루의 하부 조직 중 휘각(輝閣)이란 곳이다. 하급 세작들을 관리하는 곳으로 신군맹의 여러 조직 중 한직(閑職)에 속한다.
 나는 이곳 휘각의 부각주 엄백양(嚴伯陽)이다.
 이곳에 속한 이들은 모두 여섯으로 각주와 부각주, 그리고 수하 넷으로 이뤄져 있다.
 제발 그대만큼은 고작 수하 네 명이 전부인 이곳이 조(組)가 아닌 각(閣)으로 이뤄졌느냐고 궁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잖아도 우릴 두고 맹 내에서 말들이 많다. 고작 여섯인 조직에 각주에 부각주까지 갖은 구색은 다 갖춰놨으니, 그 뒷말들이 얼마나 풍성할지는 조직 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그대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릴 두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돈으로 지위를 산 무능력한 농땡이들의 집합소.
 실제로도 이곳 소속들은 무능력하고 지저분한 과거들이 가득하다.
 그럼 정말 그러냐고? 물론 아니다. 다 위조된 이력들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하품을 하는 저놈은 홍사백(洪思百)이란 녀석인데, 믿지 못하겠지만 십 년 전 강동제일수재로 이름을 떨친 놈이다. 만취한 파락호 놈들과 시비가 붙어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옆에 앉아 감자를 깎아 먹는 놈은 임영달(林營達)로 놈 역시 백 년 만에 난 기재라고 별호가 백년수재(百年秀才)인 녀석이다. 절벽에서 미끄러져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 뒤쪽에서 코를 파서 책상 밑에 붙이고 있는 더러운 녀석은 왕소찬(王昭燦)으로 책 한 권 외우는 데 반 시진이면 충분한, 기억력이라면 중원제일이라 할 만한 녀석이다. 내가 직접 확인해 봤다. 두툼한 경서 한 권을 내밀었더니 반 시진은 아니고 한 시진쯤 걸렸다. 한 시진이면 나도 외우겠다며 뒤통수를 때려줬지만 사실 녀석이 어떻게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나조차 가물가물한 게 요즘의 내 기억력이다.
 어쨌든 이렇게 똑똑한 놈들을 끌어모아서 하는 일이 고작 하급 세작들이나 관리한다고?
 천만에, 그럴 리가. 추측대로 이곳은 위장 조직이다.
 그야말로 신군맹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 중 하나란 말이다.
 우리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우선 신군맹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강호제일맹이다. 마교가 후계 다툼으로 인한 내부 분열로 갑자봉문(甲子封門)을 선언한 이후, 강호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새로운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무신(武神) 천아성(天牙城)이다. 그 별호가 그를 한마디로 설명한다. 기인이사들이 워낙 많은 곳이 강호인지라, 정말 맹주께서 최강의 실력인지 목숨까지 걸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누구요, 라고 자신을 밝히는 강호인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이 맞다. 그 자존심 강한 구파일방도 맹주님을 천하제일고수로 인정했다.
 그 무신이 세운, 엄밀히 말하자면 그분을 신봉하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곳 신군맹은 그야말로 강호제일의 세력으로 명성을 떨치며 모든 악의 집합체인 사악련(邪惡聯)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무신 아래 일원(一院), 쌍루(雙樓), 삼천(三天), 사가(四家), 오단(五團), 육대(六隊)로 이뤄진 곳이 바로 이 거대한 신군맹의 정체다. 자세한 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바로 저 쌍루 중 하나인 신비루(神秘樓)에 속해 있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그때 구석의 책상 밑에서 서류를 뒤적이다 몸을 일으킨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거 이상합니다.”
 서류를 들고 들어오는 더벅머리 녀석은 조비랑(曺備郞)으로 이틀 전에 이곳에 배정된 신입이다. 산서 최고 기재로 불리던 놈이었는데 이곳에선 단 이틀 만에 사고뭉치에 머저리란 별명이 붙었다.
 놈이 내민 서류를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다른 녀석들도 놈을 보며 피식 웃는다. 놈이 뭘 이상히 여기는지 이미 짐작이 간다는 표정들이었다. 일종의 통과 의례 과정이기도 했다.
 “뭐가 말이냐?”
 나는 대충 녀석의 의문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 녀석에게 물었다.
 “여기 이자 말입니다. 중요한 개인 정보가 모두 봉인되어 있습니다.”
 녀석이 내민 것은 한 사람의 인적 정보였다. 한 줄 걸러 한 줄에 검은 줄이 쳐져 있었다. 특히 과거 이력 부분은 아예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내 반문에 놈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정색한다.
 “우리가 못 보는 정보도 있습니까?”
 질문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비록 고참들의 신입 다루기에 시달리며 머저리 소릴 듣고 있지만 그 역시 천재 소릴 듣고 자란 녀석이었다. 실제로도 그 비슷하고.
 “너희 등급으로 볼 수 있는 그들의 정보는 거기까지다.”
 그들이란 바로······
 
 십이귀병(十二鬼兵).
 
 우리 휘각이 관리하고 지휘하는, 신군맹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열두 명의 무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제 우리 휘각이 하는 일을 알겠는가?
 우린 바로 신군맹 최정예 무인들의 작전을 하달하는 지휘관들이다.
 그들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지휘하는 이가 조장이나 대주급이 될 수 없다. 맹 내의 여러 조직들 간의 힘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적어도 각주급은 되어야 비밀 조직의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쥐도 새도 모르는 완전한 비밀 조직으로 운영되지 않는 것은 강호제일이라 알려진 신비루의 정보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신군맹 내에서도 최고위층들이다.
 십이귀병은 십이지신의 동물들을 각기 암호명으로 하고 있는데 항상 열두 명으로 유지되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보충되었다. 그들은 한 조직에 속해 있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가끔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철저히 독립적인 명령을 수행했다.
 임무의 종류는 다양했다.
 호위 임무부터 첩보 활동, 위장 잠입, 요인 암살까지.
 신입이 내민 신상 정보가 바로 그들 중 호랑이, 작전명 적호(赤虎)의 것이었다. 특히 그는 십이귀병들 중 가장 많은 이력이 봉인된 인물이었다.
 “그럼 이건 뭡니까?”
 녀석이 도발적인 눈빛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놈의 신경을 건든 것도 바로 그 부분이리라.
 “일 년에······ 기본급만 은자 이천 냥입니다. 이백 냥이 잘못 기입된 겁니까?”
 녀석이 놀랄 만하다. 맹 내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우리들이지만, 저 신입 녀석의 연봉은 대충 칠백 냥, 부각주인 나는 천오백 냥이다. 사실 녀석이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다. 그들은 기본급 외에 임무당 수당을 따로 받는다.
 그 수당이 대충 얼마냐고? 몇십 냥에서 몇백 냥까지 임무에 따라 다른데, 신입 녀석을 기절시킬 일이 있다.
 이 년 전 단일 임무에서 적호에게 지급된 수당이 얼마인지 아는가?
 바로 이만 칠천 냥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 액수는 이 계통 최고 수당으로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그 임무가 무엇인지는 기밀로 묶여 있어서 부각주인 나조차도 알지 못한다. 각주가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그 기밀문서를 열어보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진심이다.
 “왜? 부럽냐?”
 “그게 아니라······ 너무 많지 않습니까?”
 녀석이 우물쭈물했다. 그저 칼잡이에 불과한 현장 요원들보다 적은 돈을 받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리라.
 “그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나?”
 “배속 교육을 받을 때 읽어봤습니다. 평균적으로 육대의 대주급 실력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일 년 차 대주 연봉이 얼마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사백구십 냥이다. 너보다 적지?”
 “네.”
 “네 말대로 대주급 실력이라면 그 대주들을 데려다 쓰지, 왜 비싼 돈 주고 이들을 쓸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본 것은 서류상의 실력이기 때문이다. 무력 집단의 서류상의 기록이란 오직 두 가지뿐이다. 과장되거나 축소되거나. 일반 타격대는 대부분 과장한다. 다섯의 힘이면 열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 그럼 우리 조직은 어떨 것 같나? 그 똑똑한 머리로 추측해 봐.”
 “아무래도······ 축소하겠지요.”
 “그래, 정답이다.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과장해서 좋을 것이 없지. 아니, 애초에 알려져선 안 되는 존재들이지.”
 사실 사악련은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의 비밀 조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도십객(邪道十客)이란 자들이었다.
 “그 정도 받을 실력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충분히.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죽을 고생까지 해서 올라온 자리야. 그들이 받은 훈련은 보통 애들은 단 하루도 못 견뎌. 그러니 자부심 가져도 돼. 그런 애들을 우리가 지휘하는 거다.”
 “그러니까요. 그런 우리가 왜 못 봅니까?”
 딱!
 뒤에서 날아온 무엇인가가 조비랑의 뒤통수를 때렸다. 임영달이 날린 신발이었다.
 “그만 개기고 이리 안 와? 알껍데기도 못 털어낸 햇병아리 새끼가 어디 벌써부터 지붕에 올라가려고 날갯짓이야?”
 입이 한 발이나 나온 조비랑이 인사를 꾸벅한 후, 신발을 주워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왕소찬 옆쪽의 벽면이 열렸다.
 벽 뒤에 또 다른 철벽이 있었는데 기관 장치로 만들어져 있었다.
 스르르릉.
 철벽에 십이지신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각각의 그림 위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덜컹. 뱀 그림에서 기관이 멈췄다.
 슁― 시원한 마찰음을 내며 구멍에서 보고서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것을 확인한 왕소찬이 재빨리 소리쳤다.
 “상황 발생입니다.”
 그 말에 풀어져 있던 모두의 눈빛이 번뜩인다.
 “뭔가?”
 “청사(靑蛇)가 지원 요청을 해왔습니다.”
 “청사가?”
 청사는 사악련 본단에서 육 개월째 세작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분이 발각되어 지금 탈출 중이라는 급보입니다.”
 왕소찬이 재빨리 벽의 중원도에 흰 깃발을 꽂았다.
 “지원을 요청했을 당시 청사의 위치입니다. 현재 비상 접선 지역으로 탈출 중입니다.”
 중원 곳곳에 갖가지 색들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덜컹, 스르르릉.
 그때 다시 벽의 기관이 움직였다. 이번에 멈춰 선 곳은 악(惡)이란 글자가 적힌 그림이었다.
 슁― 그 구멍에서 또 다른 보고서가 내려왔다.
 임영달이 달려가 재빨리 그것을 읽어 내렸다.
 “사악련 칠귀단(七鬼團)의 대규모 병력이 이동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천라지망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빌어먹을!”
 천라지망이 펼쳐지면 청사가 탈출할 확률은 채 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엄백양이 빠르게 깃발의 위치를 살폈다.
 “가장 가까이에 누가 있지?”
 접선지와 가장 가까운 깃발은 붉은 깃발이었다.
 “적호입니다. 마침 인근에서 임무 수행 중입니다.”
 “작전 끝나는 대로 곧바로 투입해, 지급으로.”
 “알겠습니다. 적호에게 임무 하달합니다.”
 이번에는 홍사백이 재빨리 명령서를 가져왔다. 작전 허가 도장을 받은 후 홍사백이 명령서를 능숙하게 말아서 작은 원통에 넣었다. 그것을 임영달에게 던졌다.
 임영달이 기관을 조작했다.
 스르르릉.
 이번에는 기관이 호랑이 그림에서 멈췄다.
 임영달이 명령서를 그 구멍에 넣었다. 슁 하는 소리와 함께 명령서가 통로를 따라 사라졌다.
 “명령 하달 완료입니다. 청사가 무사히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다면 예상 접선 시각은 내일 새벽입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이제 현장 요원들의 몫이다.
 순식간에 상황이 끝났다. 병든 닭처럼 비실대던 선배들이 완전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조비랑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아직도 이거 봐야겠냐?”
 “네? 아, 아닙니다.”
 조비랑이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두고 간 적호의 서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 역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어떤 무공을 익혔고,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심지어는 그의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지난 칠 년간 그가 해낸 결과들뿐이다.
 하긴 모르는 일이 어디 그뿐이었으랴.
 앞으로 일어날 그 엄청난 일들을······ 그 일들을······ 이곳의 똑똑한 수재들 역시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린 점쟁이도 아니었고, 천기를 읽어낼 수도 없었으니까.
 강호를 뒤엎을 용암은 발밑 깊은 곳에서 조용히 용틀임을 하고 있었고 폭풍이 몰려오기 전날의 밤하늘은 더없이 투명하고 맑았기에.
 아직은 평화로웠다. 신군맹도, 휘각도, 사악련도, 그리고 그도. 아직은······.
 
 
 # 제1장 적호
 
 반쯤 부서진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기도가 느껴진다.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내력이 가볍고 경쾌하다. 그는 분명 들떠 있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기도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칼처럼 날카로운 자, 강철처럼 단단한 자, 물처럼 부드러운 자, 불처럼 뜨거운 자. 갖가지 감각들이 상대의 존재를 대신한다. 실제의 성격도 내가 느낀 그것과 같을까?
 들어서며 가볍게 눈인사하던 그가 흠칫 발걸음을 멈춘다. 내게서 어떤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최대한 기도를 숨기고 있었건만 나의 숨겨진 살의(殺意)를 읽어낸 것이다.
 “너는······!”
 상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원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접선자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내 손에 죽었다.
 “살수인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상대는 내가 살수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살수였다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신군맹의 개로군.”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개의 충성심이 얼마나 순수하고 대단한 것인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마음이 바뀌는 인간에게 개를 빗대는 것은 사람이 아닌 개에 대한 모욕이다.
 그의 기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칼날 같은 살기가 날아와 피부에 박혔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새파란 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
 차아앙,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용의는 없었다. 어차피 명령이 내려왔고 죽여야 할 상대였다. 죽이느냐 마느냐의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압! 짤막한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의 심장을 노리며 검을 찔러 넣었다.
 그가 도를 뽑아 휘둘렀다.
 까앙, 검과 도가 불꽃을 일으키던 그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손목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 것이다.
 쉬이익!
 이어진 검이 그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의 숨소리가 단숨에 거칠어졌다.
 “대체 넌!”
 자신이 누군지를 말하려던 그가 이제는 내가 누군지를 묻고 있다.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무섭게 찔러오는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면서 상대가 이를 악문다는 것이 느껴졌다.
 싸움에 있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은 언제나 허점이 드러나는 법. 그 허점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쉬이이이잉!
 다급해진 그가 몸을 비틀어 날아오르며 도기를 발출했다. 좁은 곳에서의 강기란 매우 위협적이지만, 반대로 실패했을 경우 큰 허점을 드러내는 필살의 공격이다. 바로 지금처럼.
 서걱!
 벼락같은 일수에 그의 허벅지가 길게 베어졌다.
 상처를 돌볼 틈은커녕 비명을 지를 시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따다당!
 와직. 연속해서 날아든 검을 간신히 튕겨낸 그의 손목이 부러졌다. 재빨리 왼손으로 도를 바꿔 쥐었지만 오른손이 하지 못한 일을 왼손이 할 순 없었다. 검은 패도적이면서도 깔끔했다. 그에 비해 도는 불안정했고 두려움과 상념이 가득했다.
 서걱! 서걱!
 다시 그의 어깨와 옆구리가 베어졌다.
 그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상대가 쓰러졌다고 기회다 달려드는 것은 초짜들이나 범하는 실수다. 고수일수록, 이런 상황에서 차분하다. 거기에 내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쓸데없는 시간을 끌어 변수를 허용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돈을 주겠다. 내 전 재산을 다 주겠어. 이번에 얻은 비급도······.”
 쉬익!
 망설임 없이 내질러진 검은 그의 심장을 갈랐다.
 원망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던 그가 그대로 절명했다.
 촤아아악, 검신에 흐르는 피를 털어냈다. 땅바닥에 그어진 핏줄기 너머 먼지 가득한 불상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가엽게 쳐다보는 것만 같아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적호가 폐사찰을 나왔을 때, 복면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의 그녀는 바로 휘각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역할과 더불어 시체의 뒤처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을 비선(秘線)이라 불렀는데, 십이귀병은 각자 자신만의 비선을 가지고 있었다. 적호의 비선은 여인이었고 그 암호명은 연(緣)이었다. 인연할 때 그 연이다. 여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은신술과 경공술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는 깊으면서도 맑은 매력적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는데, 아직 복면 아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물건은 제가 회수하죠.”
 연이 작은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받아 든 주머니를 열자 손가락 크기의 황금 막대가 다섯 개 들어 있었다. 이번 임무의 수당이었다.
 가끔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당을 지불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죽인 직후 돈을 받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조직에서는 언제나 이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임무 수행에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긴급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연이 이번에는 붉은 봉투를 내밀었다.
 속에 담긴 명령서를 꺼내 읽고 다시 연에게 돌려주었다.
 “지원 요청이군.”
 “청사군요. 이곳에서 육십 리 거리입니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잔하고 갈 건데, 같이 마실래?”
 “긴급 명령이 내려왔는데 술을 마신다고요? 게다가 함께요? 감찰에 걸리면 사지근맥이 잘려 뇌옥으로 끌려갈 그런 농담, 언제 들어도 상큼하네요.”
 “우리가 그 정도로 융통성도 없는 조직에서 일한다고는 생각지 않아.”
 “전 딱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의 쓴맛이란 말이 왜 생겼겠어요?”
 적호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서먹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제법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함께 일한 지 이 년째, 첫 번째 비선은 이 년 전 작전 중에 사망했다. 그녀는 적호의 두 번째 비선이다.
 적호는 그녀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임무는 뒤처리와 조직과 자신과의 연락망의 역할이지만, 어쩌면 숨겨진 주 임무는 자신에 대한 감시일지도 모른다. 만약 조직을 배신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제일순위는 바로 그녀다.
 “길 아래 빠른 말을 준비해 뒀습니다. 먼저 출발하시죠.”
 적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연이 말했다.
 “참, 조금 전에 처리하신 그자 말입니다. 비급에 눈이 멀어 이가장의 식솔들을 몰살시킨 자입니다. 자신을 숙부라 부르며 따르던 아이까지 겁탈하고 죽였지요. 이가장주와는 오랜 친구였습니다.”
 적호가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왜 그런 얘기를 하지?”
 “그냥요, 궁금하실 것 같아서.”
 “궁금하지 않아, 전혀.”
 적호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적호가 산길을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거짓말.”
 연의 눈에 비친 그는 강한 사람이다. 겁나게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연은 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지독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그녀가 천천히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가 품에서 두 개의 약병을 꺼내 섞었다. 제조된 약을 시체에 뿌리자 연기를 내며 시체가 녹기 시작했다. 더없이 무서운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냉담했다.
 “넌 다시 태어나지도 마라.”
 치이이익.
 
 ***
 
 뒷목을 스친 새하얀 손이 사내의 목젖을 잡아 뜯었다.
 단말마와 함께 빙그르르 돌며 사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뒤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바로 청사였다.
 “하아, 하아, 하아.”
 사방에 오십여 명의 사악련 추적자들의 시체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방금 전까지 해치운 적들이었다.
 이제 남은 적은 고작 셋이었다.
 탈출을 한 이후 지금까지 그녀가 죽인 사악련 무인들의 숫자는 구십에 달했다. 남은 셋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들이 사악련에서도 알아주는 혈도삼객(血刀三客)만 아니라면 말이다.
 수하들이 죽거나 말거나 히죽거리며 지켜보던 행동이 그들의 성정을 말해주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한 자들로 그들은 친형제지간이었다.
 청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쉬지 않고 도주하느라 힘을 너무 뺐고, 방금 전의 일전에서 남은 내력을 거의 다 소모했다. 평상시라도 셋의 합공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혈도삼객의 셋째 양찬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쌈 잘하는 년 보면 환장하겠소.”
 그러면서 자신의 아랫도리를 슥슥 문질러 댔다. 사악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는 그의 두 눈은 색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청사가 조소하며 검을 겨눴다.
 “옆의 두 놈 모가지라도 자르면 그냥 선 채로 싸시겠네.”
 “뭐? 으하하하하!”
 양찬이 배를 부여 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사가 다른 둘을 담담히 살폈다. 차라리 셋 다 색심에 눈이 뒤집혀 설레발을 쳐주면 좋겠는데, 첫째와 둘째는 더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틀렸군. 빌어먹을!’
 어디선가 자신의 비선이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선은 절대 십이귀병의 작전에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설령 원칙을 깨고 도와준다 해도 무공보다는 은신과 경공에 특화된 그들이었다.
 결국 믿을 것은 지원 요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악련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맹의 대규모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신군맹과 사악련은 지난 몇 년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십이귀병이 정예 중 정예라지만 그래 봤자 신군맹이란 거대한 조직에서 하나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자신 하나를 구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정치적 파문을 일으킬 리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경험상 지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제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이 더러운 상황을 정리해줄 수 있는 이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사방에는 사악련 무인들이 쫙 깔렸고, 눈앞의 상대는 사악련 백대고수에 속한 혈도삼객이었다. 까닥하다간 지원이 와도 함께 죽을 수 있었다.
 양찬이 두 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더는 못 참겠소.”
 두 형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가 먼저 달려 나갔다.
 창창!
 청사의 검이 어깨를 노리며 날아든 양찬의 도를 쳐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막고 있었지만, 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양찬이 혼자 튀어나가는 것을 첫째와 둘째가 그냥 두고 본 것도 그녀의 내력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둘째 양진이 첫째 양소에게 말했다.
 “저 자식의 추잡스런 하물 때문에 언제 큰일 한번 칠 겁니다. 생각난 김에 확 잘라버리죠.”
 그러자 싸우면서도 그 이야기를 들은 양찬이 소리쳤다.
 “차라리 내 목을 자르시오!”
 양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새끼!”
 하지만 말과는 달리 두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셋째 놈 때문에 가끔은 수치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잠시의 수치를 참으면 얻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미녀들의 속살이었다. 막내 놈은 정말이지 모든 것이 개차반이었지만, 그래도 형님 먼저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여유롭게 청사와 양찬의 싸움을 지켜보며 양소가 말했다.
 “저년이 육 개월이나 잠입해 있었다고?”
 “네. 보시다시피 일반 세작이 아닙니다.”
 “신군맹 놈들, 요즘 애들 키우는 데 신경 좀 쓰나 본데.”
 양 세력 간에 공식적인 갈등이 없는 대신, 수많은 세작들이 서로를 염탐했고 요인에 대한 암살 시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련에서는 놈들이 어느 조직인지 아는 눈치입니다만······ 기밀에 부친 모양입니다.”
 “새끼들, 만날 기밀 타령이지. 제 놈들 똥 묻은 속옷도 기밀이라며 꽁꽁 숨기는 놈들이지.”
 “아무튼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이 년 전의 그놈도 결국 놓치지 않았습니까?”
 “그놈은 정말······ 굉장했었지.”
 양소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년 전 그 사건은 사악련 내부에선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이자 사악련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그 책임을 물어 관련자 수십 명이 죽었고, 수백 명이 좌천되거나 쫓겨났다.
 퍽!
 그때 양찬의 일격에 청사가 뒤로 나뒹굴었다.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양찬이 소리쳤다.
 “크하하하! 형님들 드시기 좋게 포장부터 풀겠습니다.”
 청사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검을 빼앗겼지만 주먹을 날리며 저항했다.
 “정신없다! 혈도라도 눌러.”
 양진의 말에 양찬이 청사의 얼굴을 찍어 누르며 말했다.
 “안 되죠! 앙탈 부리는 년 꺾는 재미가 어딘데요? 하하하!”
 “미친 새끼! 가지가지 한다.”
 그러면서 양진이 껄껄 웃었다. 그때 양소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양진이 긴장했다. 뒤쪽 숲은 조용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갑자기 기분이 스산해진 것이다. 주위를 조심해서 살폈지만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찌이익!
 청사의 옷이 찢어지는 소리에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뭐야!”
 양소가 벼락처럼 돌아서며 도를 뽑았다.
 푸아악!
 하지만 한발 늦었다. 벼락처럼 빠르게 쇄도해 온 누군가가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것이다.
 적호였다. 귀신처럼 나타나 삼 장 거리를 단숨에 도약해 쇄도한 것이다.
 “크아악!”
 적호의 검이 양소의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뚫고 나오는 그 순간!
 “이놈!”
 양진이 일갈을 내지르며 벼락처럼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적호는 양소의 가슴을 발로 차고 날아올라 허공에 떠 있었다. 적호가 검을 비트는 순간 검에 햇빛이 반사되었다.
 징―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린 양진이 순간 상대를 놓쳤다.
 반사적으로 도를 휘둘렀지만, 양진은 절망했다.
 ‘빌어먹을!’
 다음에 든 생각은 재수 없다, 였다. 설마 상대가 의도적으로 검을 반사시켰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 정확히 햇살을 반사시켜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 찰나에 검에 묻은 피까지 털어내다니! 그래, 이건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 들은 것은 양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형님―!”
 양찬이 양진을 구하기 위해 도를 날리려던 그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의 몸 밑에 깔려 있던 청사였다. 그녀의 찢어진 상의 사이로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너, 잊은 것 있다.”
 “뭐?”
 그가 청사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혈도 아직 안 눌렀다.”
 다음 순간이었다.
 빠아악!
 청사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머리로 박았다.
 “크에에엑!”
 양찬의 얼굴이 움푹 함몰되었다.
 “이 개년!”
 얼굴을 움켜쥔 채 양찬이 마지막 힘을 다해 청사의 얼굴에 도를 내리찍었다.
 쇄애애액!
 푸욱!
 검날이 양찬의 목을 뚫고 튀어나왔다.
 촤아아악!
 청사의 몸으로 피가 뿜어졌다. 검이 청사의 얼굴 한 치 앞에 멈춰져 있었다. 빗나간 도는 청사의 얼굴 옆에 박혔다.
 끄르륵. 괴이한 소리를 내던 양찬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뒤에서 검을 찔러 넣은 사람은 적호였다.
 촤아아악!
 적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검집에 회수했다.
 심장이 꿰뚫린 채 절명한 양소의 시체 옆에 양진의 머리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반신이 벗겨진 채 청사가 잠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힐끔 적호를 쳐다보았다.
 “기왕 벗은 김에 한번 할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적호가 손을 내밀었다.
 “사양하겠어. 따로 사귀는 사람 있거든.”
 “정말?”
 청사가 적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적호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드러난 적호의 팔뚝은 상처투성이였다. 옷을 받아 든 청사가 천천히 옷을 입었다.
 “그런데 누구? 비룡(飛龍)? 적호? 철우(鐵牛)?”
 “적호.”
 “아! 당신 소문 많이 들었지.”
 청사의 눈빛에 싫지 않은 호의가 담겼다.
 “다행히 당신이 왔네. 고마워.”
 “별말을.”
 “한잔할래? 바쁘면 다음에 하고.”
 부담 없이 시원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지금 기분은 매우 더러울 것이다. 적호 역시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다. 가볍게 한잔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적호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발로 툭 찼다.
 쉬익!
 청사의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간 검이 뒤쪽 숲에서 기회를 엿보던 사악련 무인의 가슴에 박혔다.
 “크악!”
 쓰러진 사내 뒤쪽으로 십여 명의 사악련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앙! 적호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일단 여길 나가지.”
 
 그날 오후, 두 사람은 객잔에 마주 앉아 있었다.
 다행히 사악련 칠귀단의 천라지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그들의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청사는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해도 빠져나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적호는 모두 스물셋을 베었는데, 특별할 것 없는 검술이었음에도 왠지 믿음이 갔다. 이백이라도 베었을 것 같았고, 이천이라도 베었을 것 같았다.
 “영광이네.”
 “뭐가?”
 “우리들 중 가장 잘나가는 당신도 이렇게 만나보고.”
 그 말에 적호가 피식 웃었다. 동료들의 일은 관심이 없었다. 같은 동료를 마주한 것도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마지막 십이귀병을 만났던 적이 언제였더라? 이 년 전 묘(卯)와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당신, 꽤나 유명해. 조직에서 가장 신임한다고 들었지. 다음이 비룡이고.”
 비룡에 대한 소문만큼은 자신도 들었다. 곧잘 자신에 비교되었는데, 관심은 없었지만 언젠가 한번 보고 싶기는 했다. 십이귀병 중에 아는 얼굴은 몇 안 되었다. 임무가 바쁘기도 했고, 또 자주 바뀌는 탓이기도 했다. 죽으면 즉각 대체자가 빈자리를 채웠으니까. 다음에 다시 만날 사(巳)가 눈앞의 이 청사란 보장이 없었다.
 그때 기다렸던 술과 안주가 나왔다.
 적호가 그녀의 잔을 채운 후 자신의 잔을 채웠다. 긴장이 풀린 청사의 기분은 많이 나아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뭐지?”
 “이 년 전 임무, 뭐였는지 말해줄 수 있어?”
 대답 대신 적호가 술잔을 비웠다. 다시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웠다.
 “역시 안 되는구나. 이런저런 말들이 많아서 꽤 궁금했거든. 엄청나게 받았다던데. 대체 무슨 임무일까 궁금해서.”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가 적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여자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있지만, 적호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임무에 관해선 철저한 기밀 유지가 되고 있었지만 사실 십이귀병들은 생각보다 많은 소문들을 접한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직접 듣기도 하지만 주로 비선을 통해 들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칼잡이들 같지만······ 어차피 이 바닥도 사람 사는 동네다.
 적호가 화제를 돌렸다.
 “다친 곳은?”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녀에게서 피곤함이 짙게 느껴졌다. 단지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닌 느낌. 그 피곤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어떤 동질감이 느껴졌다.
 말과 행동이 강해서 그렇지 이렇게 보니 청사는 꽤 귀여운 인상이었다. 문득 나이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하지만 묻진 않았다. 일로 만나는 관계일 뿐이다. 깊어져 봤자 좋을 것이 없다.
 “훈련받을 때, 교관이 당신 얘기 많이 하더군.”
 “교관 누구? 황 교관?”
 청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때도 지랄이었지? 정말 죽이고 싶다는 생각 천 번도 더 했을걸.”
 적호가 피식 웃었다. 황 교관은 유독 지독했다. 하지만 그 지독한 교육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은 배신해도······.”
 청사의 말을 적호가 받았다.
 “······훈련은 배신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황 교관이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잠시 추억에 젖은 청사가 다시 말했다.
 “참, 얼마 전에 유(酉)가 죽었다던데. 들었어?”
 적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동료의 죽음에 대해 일부러 관심을 끄고 있었다. 연도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근래에는 잘 알려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잊을 만하면 듣게 되는 동료의 죽음은, 언제 들어도 잘 적응이 안 된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겠지?”
 한숨 섞인 청사의 말에 적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쯤 해보게 되는 그 당연한 물음에 아직은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 전혀 없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당신 실물은 어때? 궁금하네.”
 적호도 청사도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알아보기 힘든 정교한 인피면구였다.
 “못생겼어.”
 “정말?”
 “응.”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다 잘생겼던데.”
 “그걸 노린 거야.”
 “하하핫.”
 그때였다. 천장에서 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환 명령입니다.”
 평소보다 사무적이고 냉랭한 목소리였다.
 청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자기 비선은 여자네?”
 천장에서 다시 들려오는 소리.
 “당장 가셔야 합니다.”
 청사가 가늘게 눈을 뜨고 천장을 흘겨보았다.
 “꽤 불친절하기도 하고.”
 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지.”
 “오늘 고마웠어. 술은 내가 살게.”
 “살아서 다시 보자.”
 적호가 그곳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잠시 후, 청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데 정말 사귀는 사람 있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서도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스르륵.
 그녀 앞으로 복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눈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애꾸였는데, 청사의 비선인 파(破)였다.
 “저희도 가야 합니다.”
 “그래, 가야지.”
 말과는 달리 청사는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이것만 마시고.”
 청사는 한참을 멍하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파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청사가 불쑥 물었다.
 “······너한테 내가 몇 번째 청사지?”
 파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청사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가 앞에 놓인 술을 털어 넣으며 일어섰다.
 “그래, 가자고. 다음 임무는 뭐지?”
 
 
 # 제2장 수라팔절
 
 “알겠습니다. 평소처럼 잘 처리하겠습니다.”
 대륙전장의 남창(南昌) 지점장 양서홍(羊徐泓)이 적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보다 더 예를 갖춰 적호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남창 지점의 뒷문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소.”
 적호는 또 다른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는데 앞서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전장 거래를 할 때만 사용하는 면구였다. 자신이 이 얼굴로 전장 거래를 한다는 것은 연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적호가 돌아서 걸어갔다.
 적호가 사라졌을 때, 양서홍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부지점장 임충(林忠)이었다. 그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이만큼 넣었다던데. 사실입니까?”
 양서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돈 전부 거기로 보냈고요?”
 “그래.”
 임충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적호는 이곳 남창 지점의 가장 큰 손님 중 하나였다. 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양서홍과 임충, 그리고 전장의 호위 책임자뿐이었다.
 그가 입금하는 돈의 액수는 항상 달랐는데 많을 때도 있었고, 적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예금을 했고, 그 돈은 언제나 어디론가 보내졌다. 장소는 계속 바뀌었는데 이 년 전부터는 북해 지점으로 전해졌다. 한 냥이건 만 냥이건, 그는 꾸준히 어디론가 돈을 보냈다.
 “대체 누구에게 보내는 것일까요?”
 “가서 한번 물어보지 그래?”
 “제가 그리도 미우십니까? 확 죽어버렸음 좋겠습니까?”
 “응.”
 “네?”
 “어제 내 동생한테 꽃 줬다면서?”
 “······아!”
 “이걸 콱! 죽을래?”
 양서홍이 손가락을 구부려 임충의 눈을 파려는 시늉을 했다. 앞서 적호를 대하던 진중함은 완전 사라졌다. 뒤로 피하며 임충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노총각이라고 순정까지 낡은 건 아니지요!”
 “갓 태어난 순정을 가져와도 넌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왜요? 나이 많다고 나 무시합니까? 흥! 좋아요, 좋습니다. 내 지금 당장 저 사람에게 달려가서 물어보겠습니다. 너 뭐하는 놈이냐! 살수냐? 도적이냐? 그 돈 다 어디서 났냐? 정말 그래 볼까요? 그래서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보고 평생 주판질에 손가락에 굳은살만 박인 이 한 많은 목숨 콱 끊을까요?”
 “저이, 모퉁이 돌았다. 안 가고 뭐해?”
 “정말 이러시깁니까?”
 “형님! 동생이 하는 포목점, 그거 완전 노른자위 땅이라면서요? 흐흐흐.”
 “갑자기 뭔 소립니까?”
 “엊그제 네가 술이 떡이 돼서 내게 했던 말이다. 흐흐흐, 웃을 때 침까지 흘렸지. 그리고 다음 날 꽃 줬다더군.”
 “······.”
 “치근대지 마! 콱! 아까 그 사람 정말로 고용하는 수가 있어!”
 “······네.”
 적호는 두 사람 사이에 매우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적호는 살기는 고사하고, 변변한 기파 한 번 내보인 적 없었다.
 언제나 예의 바른 그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된 것은 전장을 지키는 호위장 때문이었다.
 그가 올 때면 호위장은 항상 긴장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호위장은 전장의 수만 냥을 책임지는 절정고수였다. 그가 긴장하니 자연 두 사람도 긴장했다.
 “그나저나 진짜 저 사람 뭐하는 자일까요?”
 “글쎄.”
 “나중에 큰 죄인으로 밝혀지면 우리까지 큰일 나는 것 아닐까요?”
 “그 입방정! 정말 큰일 치르고 싶으냐?”
 그러자 임충이 찔끔 놀랐다.
 사실 그가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된 이면에는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어쨌든 그런 그가 지난 칠 년간 자신에게 변함없는 예를 갖췄다. 지나칠 정도의 예의였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예를 다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돈이 무사히 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대체 누구에게 보내는 돈일까? 궁금하기로 따지자면 자신이 더했다.
 “자, 어서 가서 일하자.”
 임충을 안으로 밀어 넣고 뒤따라 들어서던 양서홍이 적호가 사라진 곳을 돌아보았다. 이미 적호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가 걸어가던 뒷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언제나 이곳에 서서 그가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예금액을 볼 때, 정상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임충의 말처럼 그가 살수일지, 도적일지, 살인마일지······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칠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거래를 하다 보니 그와 어떤 남모를 우정 같은 것이 생겼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지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가 매달 보내는 돈이 나쁜 곳에 쓰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적호가 신군맹으로 들어섰다.
 신군맹의 문은 모두 열아홉 개인데 적호가 드나드는 문은 마지막 열아홉 번째 문이었다. 후문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문 앞에 낯익은 무인 넷이 서 있었는데 그중 친분이 있는 최가 인사를 건네 왔다. 면구를 갈아 쓴 적호는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출장은 꽤 길었네그려.”
 “그렇게 되었습니다.”
 적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호의 위장 신분은 신군맹 보급단 휘하 제이군수창의 창고장이었다. 신비루에 속한 창고로 신비루 무인들의 병기를 구입해서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신비루 자체가 정보 조직이다 보니 병기 관리는 자연 중심 업무가 아니었다. 게다가 창고장이니 적호는 출장을 핑계로 자유롭게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위장 신분으로 최적의 자리였다. 굳이 맹 내에 두지 않아도 되었지만, 조직에서는 적호만큼은 가까이 두려고 했다.
 “일은 잘 마치고 왔는가?”
 “네.”
 인사를 건네 온 최보다는 직급이 높았지만, 연배가 높은 그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런 일, 평생 가도 없네.”
 대답에 무료함이 가득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과연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인상 좋은 무인들이 이 교대로 번을 서고 있었고, 이 문을 통해 오가는 이들은 하루에 채 이십 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받곤 한다. 적호는 그 변함없는 풍경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한잔하세나.”
 “네.”
 항상 주고받는 인사말이었지만 정작 그와는 술 한잔 나눠본 적 없는 적호였다.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부담스런 탓이었다.
 적호가 작은 화원을 지나 아담한 크기의 마당을 지닌 군수창에 들어섰다. 대부분 비어 있는 그곳에 오늘은 짐이 가득 쌓여 있었다.
 대여섯 명의 사내가 웃통을 벗은 채 짐을 나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반갑게 뛰어왔다. 우람한 체구에 비해 인상이 매우 선량해 보였다.
 “대장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의 이름은 공철(孔哲)로 창고에 속한 수하들 중 가장 선임이었다. 자신을 창고장이라 부르지 않고 언제나 대장이라 불렀다.
 “별일 없었지?”
 “그럼요.”
 “저건 뭐냐?”
 “황철방(黃鐵房)에서 보낸 무기들입니다. 납품 기한은 지켰는데 이것들이 수작을 부렸습니다.”
 “수작이라니?”
 “가서 보시지요.”
 공철이 적호를 안내했다. 창고 앞에 가득 쌓인 짐들은 모두 병기들이었는데, 도검은 물론이고 활과 화살, 암기류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공철이 따로 모아둔 병기들 중 검과 도를 챙겨왔다.
 적호가 세심히 그것들을 살폈다.
 “황철방 물건이 아니군.”
 “네. 분명 다른 곳에 하청해서 만든 물건입니다. 싸구려 재료에, 대충 구색만 갖춘 불량품들입니다.”
 “얼마나 섞여 있지?”
 “한둘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삼 할이나 됩니다. 도검뿐만 아니라 암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을 떠나 우릴 속이려 했다는 것이 더 괘씸합니다.”
 적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철방은 오랫동안 신군맹에 무기를 납품해 온 곳이었다. 지난 세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공철이 농담 반, 진담 반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새끼들, 깡그리 끌고 와서 확 패버릴까요?”
 적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철방에 기별해서 나 좀 보자고 전해.”
 “알겠습니다.”
 적호가 돌아서며 걸어갔다.
 “좀 쉴 테니까, 마무리하고 들어가.”
 
 적호의 숙소는 창고에서 멀지 않은 맹 내에 마련되어 있었다.
 창고장에게만 특별히 제공되는 곳이었는데, 대가족 살림이라면 모를까 사내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히 편한 곳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그곳은 먼지가 가득했다. 청소는 고사하고 목침에 머리가 닿으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것처럼 피곤했지만 적호는 짐을 던져두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 뒷마당 지하에 적호의 비밀 연무장이 있었다.
 오래전 지하 창고로 사용되던 곳을 발견하고 연무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 작업은 오랜 시간을 걸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이곳에 지하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휘각에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무공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고, 천장은 높았다. 그리고 사방 벽은 튼튼했다.
 연무장의 역할뿐만 아니라 위급한 순간에 잠시 대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에 다양한 응급 용품들과 무기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보관해도 괜찮은 식량이 마련되어 있었고, 한옆에는 물이 흐르는 대나무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비상시 탈출할 수 있는 통로까지 마련해 두었다.
 상당한 돈과 노력이 들어갔지만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무공 수련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호가 한옆에 세워둔 검을 들었다. 같은 검이 수십 자루 늘어서 있었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적호는 딱히 자신만의 검을 지니지 않았다. 일의 성격상 고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고, 무기 없이 잠입해야 할 때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병기에 상관없이 검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위기의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 대장간에서 한 냥 주고 샀건, 상대의 검을 빼앗건 무공을 사용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차아앙!
 적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적호가 펼치려는 무공은 그렇지 않았다.
 
 수라팔절(修羅八節).
 
 수라팔절은 팔열지옥의 여덟 고통을 주기 위해 창안된 검술로 수라염왕(修羅閻王) 천단양(千端陽)의 독문무공이다.
 천단양은 당시 천하십대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강력하고 패도적인 정사지간의 고수였다. 수라팔절은 현재에도 천하팔대절학으로 전해져 오는 무공인데, 극양의 내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었다.
 적호의 사부는 바로 그 수라염왕의 삼 대 계승자였다. 사부가 세상과 인연을 끊으면서 수라팔절은 실전된 것으로 강호에 알려져 있지만, 소문과는 달리 적호에게 이렇게 전수되어 있었다.
 
 수라일절 등활탄(等活彈).
 수라이절 흑승류(黑繩流).
 수라삼절 중합인(衆合刃).
 수라사절 호규참(號叫斬).
 수라오절 대규멸(大叫滅).
 수라육절 염열파(炎熱破).
 수라칠절 극열무(極熱無).
 수라팔절 아비환(阿鼻喚).
 
 여섯 살부터 익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피나는 연마를 한 결과 작년 말에 드디어 팔절까지 대성을 이뤘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처음 십이귀병이 되었을 때, 조직에 적어낸 무공도 수라팔절이 아니었다. 천하팔대절학을 익힌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많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누구도 자신이 익힌 무공이 수라팔절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비선인 연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외부에 사용하는 무공은 수라팔절을 기본으로 자신이 창안한 변칙적인 실전 검술이었다.
 적호가 본격적으로 수라팔절의 초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슁― 쉬잉―
 검이 만들어내는 파공음이 더없이 경쾌했다.
 내력이 담기지 않은 초식이었다. 내력을 쏟아내면 강철로 만들어진 벽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정성이 담겼다. 무공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그렇듯 대충 열 번 연마하는 것보다 제대로 된 한 번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수라팔절은 형(形)의 아름다움보다는 실(實)을 중요시하는 무공으로 가장 경제적인 살(殺)을 추구하는 실전형 검술이었다.
 적호에게 어울리는 무공이었지만 지나치게 패도적이란 단점도 있었다. 견식이 깊은 고수가 접한다면 반드시 알아볼 만한 그런 무공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사용을 망설여 온 것이다.
 한차례 검술 연마를 마친 적호가 한옆에 검을 내려놓았다.
 적호가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었다. 적호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수십 가닥의 크고 작은 검상들. 그중 몇 개는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조용히 심호흡을 하던 적호가 이번에는 맨손으로 초식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쩡― 진각에 바닥이 울렸다.
 파앙!
 주먹 끝에서 묵직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주먹에서 팔꿈치로, 손바닥과 어깨, 무릎과 등으로 파공음이 이어졌다. 손발이 위주가 된 무공이 아니라 온몸을 이용해서 적을 제압하는 일종의 체술(體術)이었다.
 
 무영십삼수(無影十三手).
 
 수라염왕이 말년에 심심파적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위력은 결코 심심하지 않았다. 수라염왕의 심득이 고스란히 담긴 실전 박투술이 탄생한 것이다.
 근래 적호는 무영십삼수를 연마하는 데 주력했다.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한 지 사 년, 이제 겨우 오성의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이 년 전 그 임무에선 무영십삼수를 익히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대성까지의 목표는 십 년이었다.
 수라팔절의 대성이 무르익고 무영십삼수까지 대성을 이룰 수 있다면······ 강호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빠르면서도 격을 잃지 않은 초식이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팡팡팡팡팡팡!
 허공을 연속해서 가르는 강맹한 주먹질에 정면의 철벽이 흔들렸다. 절도 있는 동작 하나하나에 권신의 기개가 느껴졌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심혈을 기울인 탓에 적호의 몸은 흠뻑 땀에 젖었다.
 이윽고 정성스럽게 진행된 무영십삼수의 초식이 끝났다.
 “후우우우.”
 적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수련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오늘 흘린 땀 한 방울이 내일 흘릴 피 한 방울을 아낄 수 있다는 오래된 경구를 적호는 마음에 새겼다.
 적호가 이렇게 기본에 공을 들이는 것은 사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가슴속에 간직된 사부의 말씀이 떠올랐다.
 
 “흔히 고수들은 초식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전한다. 옳은 말이다. 초식이란 싸움에 있어 뿌리와 줄기다. 꽃을 피우고 잎을 여는 것은 초식을 넘어선 실전이다. 하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초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초식을 완전히 지배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애초에 줄기와 뿌리가 없으면 꽃과 잎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성을 이룬 수라팔절조차 아직 완전히 초식을 지배하지 못했다.
 예전 사부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매우 당황했을 일이다.
 
 “네가 언젠가 대성을 이루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간의 일로 비유하자면 대성을 이룬 것은 술 담그는 방법을 배운 것에 불과하다. 술을 담글 줄 모르는 사람에 비하면 그것은 매우 대단하고 값진 일이겠지. 하나 술이라고 어찌 다 같은 술이겠느냐? 어리석은 자는 제대로 숙성되지 못한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자랑이나 하고 다닐 것이다. 그와 반대로 현명한 사람은 술을 담글 줄 아는 이들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겠지. 최고의 술을 빚기 위해서.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
 
 당시에는 그 깊은 뜻을 몰랐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대성을 이루고 나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란 것을.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사부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떨쳐 내며 적호가 연무장 한옆에 마련된 침상에 누웠다.
 숙소의 침상보다 딱딱하고 불편했지만 마음은 이곳이 더 편했다. 적호가 유일하게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유독 임무가 많았던 달이어서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이대로 딱 열흘만 쉬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꿈을 꾸었다.
 유난히도 햇살이 눈부시던 그날 아침,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청초한 모습 그대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부님은 외출 중이셨고, 그때의 난 마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했었는데.
 “수련 중이었어?”
 일 년 만에 불쑥 나타난 그녀는 마치 어제 밀회를 즐기다 헤어진 연인처럼 물었다.
 “응.”
 당황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달랑 서찰 한 장으로 이별을 고한 그녀를 찾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버려진 기분을 피하고 싶어서, 자신을 떠난 이유를 듣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어?”
 순간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하나의 광경이 뒤늦게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 비단보에 감싼 아기가 안겨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아기를 보았다.
 여자 아기였다. 아직 백일도 채 되지 않았을 아기는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굳이 누구 아이냐고 묻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아이였다.
 심장이 찌릿하더니 이내 쿵덕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건네주었다.
 “아, 잠깐. 아.”
 엉겁결에 아이를 받아 든 나는 너무 당황했다. 이렇게 어린 아기는 처음 안아봤으니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내력이라도 흘러나갈까 다리가 후들거렸다.
 “예쁘지?”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한 눈빛은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오뚝한 코, 통통히 살이 오른 부드러운 볼, 아, 속눈썹이 너무 길었다. 아기 속눈썹이 원래 이렇게 길어도 되는 걸까?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난 떠날 거야.”
 “뭐?”
 내가 멍하니 그녀를 보던 그 순간 아기가 으앙 하고 울었다.
 
 적호가 눈을 번쩍 떴다.
 찡―
 한옆에 팽팽하게 걸쳐진 실이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누군가 숙소로 들어섰다는 신호였다. 숙소 곳곳에 아주 가는 실들이 숨겨져 있었다. 사람의 기운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실이었다. 실이 떨리는 소리와 겹쳐져 들리던 아기 울음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후우.”
 적호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웃옷을 걸치고 검을 찬 후, 적호가 한옆의 기관을 건드렸다. 그러자 부드럽게 천장이 열렸다.
 한 번의 도약으로 적호가 삼 장 높이의 통로를 훌쩍 뛰어올랐다.
 방문자는 연이었다. 그녀는 앞마당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달의 위치를 보니 대충 자정 가까이 된 것 같았다.
 “죄송해요. 급한 임무가 내려왔어요.”
 적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연속해서 다섯 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하루도 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조금 야속했다.
 연의 눈빛에는 이미 미안함이 가득했다.
 “급한 일이라서요.”
 “뭔데?”
 “묘에게서 지원 요청이에요.”
 “묘라면? 백묘(白卯)?”
 원래 정식 암호명은 설토(雪兎)였다. 설토 대신 그냥 백묘라 불러 달라고 하던 그녀는 흰색 무복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청사에 이어 이번에도 여인에 대한 지원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예, 맞아요. 바로 그녀예요.”
 “어디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백 리 거리에 있어요. 호위 임무 중이죠.”
 적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시겠어요?”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적호는 안다. 조직의 일이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나 연은 이렇게 물어봐 줬다. 거절하겠냐고.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니. 대신 잠시 씻을 시간이 있을까?”
 “물론이에요.”
 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적호가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백묘가 정말로 급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니, 긴박한 상황이니까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호는 서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날렸을 것이다.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갔을 것이다.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긴장된 삶에 한계가 온 것이다.
 몸 씻는 그 짧은 시간이 모자라 죽게 된다면······ 그건 그냥 그녀가 죽을 운명인 거다. 반대로 자신이 도움을 받을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슬아슬함은 바라진 않았다.
 이런 여유조차 없다면 도저히 이 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다.
 쏴아아아.
 물소리를 들으며 연이 달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달이 휘영청 밝았다. 달을 올려다보는 복면 위의 눈빛이 깊었다.
 안에서 적호의 말이 들려왔다.
 “안 피곤해?”
 여전히 달을 올려다보는 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네.”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정말 피곤했다. 연은 다른 비선들에 비해 일이 두 배는 더 많았다. 적호에게 명령이 두 배 더 내려왔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것을 내색하는 순간은 더 이상 이 일을 버텨내지 못하는 그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야 될 일은 마음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이루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다 자신에게 달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잠시 후, 새 무복을 입은 적호가 머리를 털며 걸어 나왔다.
 그때 그 앞으로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적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쉭! 쉬익! 쉬이익!
 시원한 바람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비스듬히 누운 적호의 검날 위에 나뭇잎이 놓여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네 조각으로 잘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미 잘린 그것이 원래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컹,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검이 회수되었다. 기다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인 듯한 한 수였다.
 “가지.”
 스쳐 지나가는 적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연의 피곤함이 조금은 가셨다.
 스르르.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바람에 날리던 네 조각의 나뭇잎은 다시 열여섯 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오직 적호와 바람만이 아는 일이었다.
 
 
 # 제3장 작전봉인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군요.”
 신입 조비랑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서류를 한가득 안고 작전실로 들어서던 조비랑이 읽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적호 말입니다. 혈도삼객을 처단한 후 청사를 구해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탈출했군요.”
 “이놈아, 이제 알겠냐?”
 엄백양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휘각을 운영함에 있어서 적호 같은 수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있어 작전 운용이 더없이 매끄럽다.
 엄백양이 왕소찬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적호는?”
 “출발했습니다.”
 “많이 피곤하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번 임무 수당, 상향 조정하도록.”
 “알겠습니다.”
 여전히 입구에 서 있던 조비랑이 한마디 했다.
 “능력은 인정해야겠지만······ 그래도 개인 정보에 기밀 사항이 너무 많습니다.”
 홍사백이 책상 위에 올린 다리를 까닥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그 소리냐? 대체 넌 뭐가 그리 궁금해?”
 “한두 가지가 아니죠. 특히 귀병이 되기 전의 이력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당연히 궁금하죠. 적호는 저희의 주력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것이 병이다, 란 말이 있다. 그게 강호로 오면 어떻게 바뀌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너무 몰라도 죽고, 너무 알아도 죽는다.”
 그러자 조비랑이 입을 삐죽 내민다.
 홍사백이 눈에 힘을 주었다.
 “왜? 기회주의자라고? 회색분자라고?”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지만 조비랑은 수긍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습니다, 선배님. 사람마다 다 사연이 있으니 과거사는 넘어간다고 쳐요. 무공에 대해선 왜 기밀로 걸려 있습니까?”
 “그야 사악련 쪽에 정보가 누출될까 싶어서지.”
 “그럴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까?”
 “왜 없다고 생각해?”
 “네?”
 조비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홍사백이 조비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사악련의 세작일 수도 있지.”
 “뭐라고요! 전 아닙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조비랑이 정색하자 홍사백이 눈을 가늘게 흘겼다.
 “흥분하는 것 보니 수상하군.”
 “전, 전······ 어, 어려서부터 누명을 쓰면 혀, 혀가 꼬이고 살이 떨렸습니다.”
 “숨넘어갈라. 알았다, 알았어. 너 결백하다.”
 그제야 한숨 돌리는 조비랑이었다.
 홍사백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잘 들어. 우리 일은 기관의 톱니바퀴를 굴리는 일이다. 바퀴가 부러지면 새 바퀴로 갈아 끼우면 되는 거야. 바퀴가 어디서 만들어졌건 재질이 무엇이건 그건 우리에게 상관없다. 규격만 맞으면 그뿐이야. 알았나?”
 “······.”
 반항하는 아이처럼 조비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정하다고 생각하나?”
 “······네.”
 “그렇다면 넌 잘못 찾아온 거야. 학관이나 무관으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 친절하게 그들의 삶을 보살피고 돌봐주면서.”
 “······.”
 “여긴 과정보다 결과로 말하는 곳이야. 성공이냐 실패냐. 오직 그 두 개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곳이다.”
 냉담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사실 홍사백은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어쩌면 조비랑보다 몇 배는 더 일에 열정적이었고, 십이귀병들을 아꼈다. 친형제처럼 아꼈다.
 하지만 그들을 하나둘씩 잃으면서 그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자신의 실수와 판단 착오로 그들을 잃기도 했다. 그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이제 홍사백은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조비랑이 끝까지 자신의 뜻을 주장했다.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홍사백은 그를 야단치지 않았다. 신입 녀석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다치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다, 이곳의 생리를. 이곳에서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을.
 “왜?”
 “그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들이 아니니까요. 그들은 저희가 아껴줘야 하는 수하들이니까요. 우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지 않습니까?”
 홍사백은 아무 대답이 없었고, 왕소찬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부터 다 듣고 있던 엄백양도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임영달이 급하게 들어섰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엄백양에게 다가와 서류를 건넸다.
 “적호에게 작전 봉인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번 작전 이후 대기하라는 명령입니다.”
 엄백양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언제? 누가?”
 “각주님께서 방금 전에 내리셨습니다.”
 엄백양이 서류를 확인했다. 정말 각주 명으로 적호의 작전 봉인이 내려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보통 실무는 모두 자신에게 맡기는 휘각주였다. 평소에 없는 일이었다.
 “나 각주님께 간다!”
 작전실을 걸어 나가던 엄백양이 그때까지도 비장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조비랑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딱!
 “짜식! 너만 인간적이라서 좋겠다!”
 
 ***
 
 “적호에게 작전 봉인령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엄백양의 말에 휘각주 구양서(俱陽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랬지.”
 구양서는 마른 체형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게다가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인지라 일 처리는 철두철미했고 사람 대하는 것이 무뚝뚝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엄백양과는 사석에선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공석에선 칼처럼 냉정하게 일 처리를 했다.
 엄백양은 오히려 그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결국 손해 보는 쪽은 아랫사람이다.
 구양서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휴가라도 주시려는 겁니까?”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근래 적호는 혹사하다시피 많은 임무를 맡아왔다.
 “그건 아니고. 따로 맡길 일이 있네.”
 따로 맡길 일이란 말에 엄백양이 실눈을 떴다.
 “무슨 일이십니까?”
 구양서가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잠시 엄백양을 응시했다. 엄백양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궁금한가?”
 구양서가 뜸을 들이자 엄백양은 내심 의아했다. 구양서는 이렇게 말을 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네, 궁금합니다.”
 “듣고도 후회하지 않겠나?”
 난데없는 말에 엄백양이 흠칫했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단 호기심이 앞섰다. 무섭다고 물러날 성격도 아니었다.
 “알면 죽는 일입니까?”
 구양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네.”
 “그럼 말씀해 주십시오.”
 구양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넨 차기 후계자가 누가 될 것 같나?”
 갑작스런 질문에 엄백양은 내심 당황했다.
 신군맹의 후계자는 원래 모두 일곱이었다. 모두 다 무신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그 일곱이 지난 오 년간의 암투를 거쳐 이제 남은 사람은 둘이었다.
 대공자와 삼공녀.
 나머지 다섯은 죽거나 실종되었다. 제자들의 죽고 죽이는 암투를 무신 천아성은 그저 지켜만 보았다. 암묵적으로 후계자 다툼을 인정한 것이다. 천아성이 무슨 생각으로 제자들의 싸움을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평생을 무도의 길만 걸어온 천아성이었기에, 그의 삶의 원칙과도 같았던 강자존(强者存)이 후계자의 선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추측만 가능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엄백양에게 구양서가 다시 물었다.
 “말해 보게.”
 엄백양은 이 대답이야말로 가장 신중히 대답해야 할 질문이란 것을 알았다.
 구양서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대공자가 되었음 하네.”
 엄백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기루에서 만취해 개처럼 놀 때도 농담 삼아라도 꺼내지 않던 말이었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대공자가 딱히 더 좋아서가 아니네. 자네도 알다시피 능력 면에서는 오히려 삼공녀가 더 뛰어나지.”
 “한데 왜 대공자를 지지하시는 겁니까?”
 “삼공녀가 후계자가 되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걸세. 몇몇 멍청이들은 삼공녀가 후계자가 되면 사악련과의 관계가 더욱 평화로워질 것이라 기대한다더군.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야.”
 “삼공녀가 여인이기 때문입니까?”
 “그래, 정답이네. 삼공녀가 여인이기 때문이지. 사악련은 본디 온갖 사악한 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이네. 여인을 그저 성적 노리개로 생각하는 자들이 실권을 잡고 있다네. 그런데 본 맹의 맹주직에 여인이 올랐다고 가정해 보게?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굉장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네.”
 엄백양은 그 걱정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창밖을 응시하는 구양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사악련 놈들의 자격지심이 아니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삼공녀, 그 자신이네.”
 “네?”
 “그녀는 여인이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리수를 던지게 될 것이네.”
 “설마 그 말씀은?”
 구양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공을 하는 쪽은 그녀가 될 것이야.”
 쿵―!
 엄백양이 크게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구양서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녀는 반드시 사악련을 칠 것이야. 결국 전면전이 일어나겠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군맹과 사악련의 전면전은 엄청난 싸움이 될 것이고,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싸움이었다. 최악의 경우 강호가 멸망할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엄백양이 삼공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똑똑했으며 야망이 컸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맹 내의 많은 젊은 무인들이 그녀를 지지하며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삼공녀가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소문이었으니 정확한 두 사람의 실력은 알 수 없었다.
 그녀에 비해 대공자는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음모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 험난했던 후계자 다툼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으로 볼 때 분명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힘이 있었다.
 “한데 대공자와 삼공녀의 일이 적호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제야 창밖을 향하던 구양서의 시선이 엄백양을 향했다.
 “한잔할까?”
 구양서가 벽장에서 술을 챙겨 내왔다. 평소 없던 일이라 이제부터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이야기란 사실을 직감했다.
 구양서가 벽장을 열고 비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완벽하게 방음 처리가 된 방이었다.
 한 잔의 술을 비운 다음에 구양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 숨겨진 혈육이 있네.”
 엄백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대공자였다. 그런 대공자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신군맹을 뒤흔들 일이었다. 더구나 대공자는 삼천 중 으뜸이라는 검천(劍天)의 천주 신패극(申覇克)의 장녀와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격에 자존심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신패극이었다. 대공자의 숨겨진 자식의 존재는 어떤 식이든 엄청난 파란이 일어날 일이었다.
 “만약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분명 혼례는 취소될 것이네. 검천은 대공자에게서 돌아설 것이고.”
 엄백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검천은 대공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그가 돌아선다는 말은 곧, 후계 싸움의 패배를 의미했다.
 “한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엄백양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구양서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얼마 전에 대공자가 연락을 해왔네. 비밀리에 만나자고.”
 “직접 들으신 겁니까?”
 “젊은 시절 스쳐 가듯 만났던 여인이라 했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자식을 낳은 것을 모르고 있었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이 엄마에게서 한 통의 서찰이 왔다고 했네. 그간의 사정과 맨 끝에 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더군. 얼마 후 그녀는 병으로 죽었네. 죽기 전에 서찰을 보낸 것이지.”
 “확실히 대공자의 혈육입니까?”
 엄백양은 물어놓고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자신은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대공자가 알아서 확인해 봤을 것이다. 결과가 확실하니까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직접 부탁했습니까? 자식을 지켜달라고?”
 “······.”
 “왜 직접 처리하지 않고요?”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처지지 않나?”
 삼공녀와의 후계 다툼으로 서로 간에 철저한 감시가 오가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서로의 세작들에게 보고되는 실정에서 믿을 만한 고수를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공자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는가?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구양서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또다시 놀랄 만한 대답이 나올 것이란 엄백양의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철혈구로(鐵血九路).”
 “네?”
 엄백양이 깜짝 놀랐다. 철혈구로는 사악련을 대표하는 최정예 타격대였다.
 “그가 철혈구로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왜요?”
 “그는 아버지의 존재조차 모른다네. 사악련의 영역에서 자라 사악련의 무인이 된 것이지.”
 “이 일······ 루주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모르네.”
 엄백양이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휘각은 분명 독자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결국 신비루의 예속 단체였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신비루 내에 휘각을 따로 둔 이유를. 십이귀병이란 엄청난 전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신비루주와 휘각주가 서로를 견제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그런 상황에서 신비루주 모르게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은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일이었다.
 “왜 루주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에게 보고하기를 바랐다면 대공자는 루주를 바로 찾아갔겠지.”
 “젠장! 이런 엄청난 일을 왜 제게 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
 “자네 없인 이번 일 처리를 할 수 없으니까.”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이 돕지 않는다면 절대 신비루주 몰래 십이귀병을 움직일 수 없었다. 특히 사악련과 관련된 임무는 반드시 신비루주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구양서가 조금은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난 자네와 끝까지 가고 싶네.”
 그는 결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대공자의 줄을 잡자고. 엄백양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부각주로 발탁한 것도 그였다.
 엄백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한숨이었다. 자신은 그의 충복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한직으로 쫓겨날까? 사안이 사안인만큼 제거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이윽고 엄백양이 결심을 굳혔다.
 “각주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두 사람이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를 구해내서 어디에 숨겨야 합니까? 그리고 왜 하필 적호입니까? 적호는 주로 요인 암살과 무력 지원을 맡아왔습니다. 요인 호위나 구출은 적호보단 더 적임인 금마(金馬)나 취후에게······.”
 순간 어딘가에 생각이 미친 엄백양이 말을 멈췄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구양서를 보며 엄백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구양서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임무는······ 그를 죽이는 것이네.”
 
 ***
 
 조촐한 술자리가 열리고 있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의 장원이었다.
 후원의 정자에서 벌어진 삼남 일녀의 술자리는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하하하! 그래 봤자 자넨 삼류를 못 벗어난다고!”
 맞은편 사내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청년은 양씨세가의 장남 양세일(羊洗佚)이었다.
 그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는 청년은 인근의 가장 큰 무관인 공무관(公武官)의 공신철(公伸哲)이었다.
 “자네의 그 양씨검법만큼이야 못하겠지만 우리 공무검법(空無劍法)도 꽤 알아주는 무공이라네.”
 “자네 할아버지가 천 냥이나 주고 산 그 공무검법 말이지?”
 그 말에 옆에 앉은 청년이 피식 웃었다. 그 청년은 큰 포목상의 후계자인 구용탁(具瑢卓)이었다.
 공신철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지만 드러내 놓고 분통을 터뜨리지 못했다. 공무관이 무관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양씨세가의 위세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만만한 구용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구용탁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공신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어차피 둘 모두 양세일의 눈치나 살피는 신세였기에 공신철은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다.
 양세일이 두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구용탁은 주머니가 두둑했고, 공신철은 놀려먹기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양세일도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자리의 유일한 홍일점,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는 바로 신초희(申椒喜)였다.
 양세일이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신 소저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초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놈은 삼류 겁쟁이고, 너는 삼류 쓰레기지.”
 멍한 표정을 짓던 양세일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맞아요, 맞습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양세일이 이렇게 쩔쩔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초희가 바로 검천의 천주 신패극의 둘째 딸이었기 때문이다. 신군맹의 삼천 중에서 가장 으뜸의 세를 지녔다는 검천이었다.
 게다가 검천주의 장녀, 그러니까 이 신초희의 언니인 신영영(申瑛瑩)은 대공자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혼인이 이뤄지면 검천의 위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해질 것이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해야 할 상대였다.
 원래 신초희는 양세일 무리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신영영의 혼례가 결정되고 난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그녀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양세일이 다시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대공자께서 신군맹의 정식 후계자가 되면 검천은 강호의 하늘이 될 것이오.”
 구용탁이 맞장구를 쳤다.
 “대공자와 혼례를 하기로 하신 영영 소저는 아름답고 현숙하기로 소문이 나 있지 않나? 대공자는 그야말로 봉 잡은······.”
 쨍그랑!
 신초희가 던진 술병이 구용탁 앞에서 깨어졌다.
 놀란 구용탁에게 신초희가 싸늘히 말했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떠들지?”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영영 소저의······.”
 “닥치고 그냥 술이나 처먹어!”
 “그럽지요.”
 신초희가 다시 술잔을 비우며 나직이 말했다.
 “다들 속고 있어.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세 사내는 그녀가 언니를 시샘한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장차 신군맹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오 할이나 되는 대공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시샘, 그 이상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너흰 아무것도 몰라.”
 그때 그녀에게 중년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바로 그녀의 호위무사인 진홍(陳洪)이었다. 검천의 호위무사로 주로 내원의 호위를 맡아온 그는 신초희의 호위 책임자였다. 십여 명의 호위들이 사방에 서 있었다.
 “괜찮아요. 물러가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기에 진홍이 잠자코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너무 과음하진 마십시오.”
 진홍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백의무복의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은 얼마 전에 갓 들어온 신입 호위였다.
 “뭔가?”
 “여긴 위험합니다.”
 여인의 말에 진홍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가 황당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십 년이나 호위를 맡아온 자신도 감지하지 못한 위험을 풋내기가 경고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이곳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또박또박 앞서의 말을 반복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진홍이 여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진홍은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백아였지?’
 그녀에 대한 진홍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그녀는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는데, 내원의 호위장은 그녀가 어느 줄을 타고 들어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당분간 잘 데리고 있으란 명령만 내렸을 뿐이었다.
 호위란 보기보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남자들조차 견뎌내기 힘든 일이었다. 한두 달 하면 지쳐서 제 발로 나가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돌발적인 행동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바로 십이귀병의 백묘였다. 백아는 이번 임무에 사용한 가명이었다.
 백묘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살기가 느껴집니다.”
 “살기?”
 진홍이 놀라 주위를 살폈다. 호위무사 특유의 감이란 게 있다. 주위에 살수가 섞이면 정말 온몸이 짜릿짜릿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운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물었다.
 “어디서? 어디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
 “아직 살수는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뭐?”
 진홍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다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절 믿으셔야 합니다.”
 진홍이 잠시 백묘를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조금 떨어져 있던 곽 호위를 손짓해 불렀다. 수하들 중 가장 실력도 좋고 경험도 풍부한 고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애들 데리고 가서 주위를 살펴보게.”
 “알겠습니다.”
 곽 호위가 백묘와 진홍을 번갈아 쳐다본 후 물러났다. 신입의 말에 움직이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순순히 명을 따랐다. 곽 호위가 수하들 몇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진홍이 백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되었지?”
 이 정도면 신입에 대한 넘치는 배려라 생각했다. 그것도 백묘의 배후에 권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통의 신입이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백묘에게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뭐?”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진홍의 인상이 굳어졌다.
 “순전히 자네의 감 때문에?”
 “네.”
 백묘는 며칠 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살기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예감이었다. 불길한 예감, 그것은 백묘의 타고난 능력 중 하나였다.
 이번의 불길함은 그녀가 경험했던 그 어떤 때보다 강력했다. 휘각에 지원을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이 오늘 극에 달하고 있었다.
 만약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건 바로 오늘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감이 좋다면 살수를 색출해내게.”
 살짝 비웃음이 섞인 노기였는데 백묘는 진지하게 반응했다.
 “색출했을 때는 이미 늦을 겁니다.”
 백묘는 진지했다. 너무 진지해 이 여자가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순찰을 나갔던 곽 호위가 수하들과 돌아왔다. 저 멀리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고유의 수신호를 보냈다.
 백묘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포착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백묘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가씨께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묘가 성큼성큼 신초희에게 걸어갔다.
 “잠깐 기다리게!”
 당황한 진홍이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백묘는 한발 앞서 신초희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신초희가 귀찮다는 어조로 말했다.
 “가야지, 여기 있는 술 다 마시고. 그런데 그쪽은 누구?”
 “아가씨 호위입니다.”
 옆에 있던 양세일이 거만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이 뭔가?”
 음흉한 호감에 백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양세일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백묘가 신초희에게 말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그러자 신초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하긴 여기도 위험하군. 날 어떻게 한번 벗겨볼까 침을 질질 흘리는 개새끼들이 세 마리나 있으니까. 그러니 잘 부탁해.”
 그러면서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만 가시죠.”
 “술맛 떨어지게 왜 이래.”
 “그럼 강제로라도 모시겠습니다.”
 “뭐?”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어 황당한 표정을 짓던 신초희의 얼굴에 점점 불쾌감이 감돌았다.
 그러자 양세일이 벌떡 일어났다.
 “감히 호위 년이 건방을 떨어?”
 백묘가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대는 나서지 마시오.”
 양세일이 신초희의 눈치를 살폈다. 신초희는 코웃음을 치며 백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혼을 내줘도 좋을 분위기였다.
 “이년이 미쳤나?”
 양세일이 다가와 뺨을 때리려 했다.
 탁탁!
 백묘가 순식간에 그의 혈도를 제압했다.
 우스꽝스럽게 손을 쳐든 채 몸이 굳은 양세일이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당장 이거 풀지 않으······.”
 탁.
 백묘가 그의 아혈까지 제압했다.
 지켜보던 진홍이 버럭 소릴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작 말렸어야 했는데 설마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검천과는 비교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나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양씨세가였다. 그는 그곳의 후계자였다. 이건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사건이었다.
 진홍과 입씨름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백묘가 차분히 말했다.
 “전 신군맹에서 나왔습니다. 아가씨 호위를 위해 특별히 파견된 겁니다.”
 그 말에 진홍이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신초희도 마찬가지였다.
 신초희가 빠르게 물었다.
 “신군맹? 누가 시킨 거지? 혹시 대공자께서 보내신 건가? 날 지켜주라고? 빨리 말해!”
 정체를 밝힌 백묘의 태도가 바뀌었다.
 “난 네 아버지한테 고용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의를 지켜.”
 “흥! 싫다면?”
 다음 순간, 백묘의 안색이 굳어졌다. 신초희의 버릇없는 대답 때문이 아니었다.
 백묘가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십여 장 떨어진 담 위에 복면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사내의 어둡고 파괴적인 존재감 앞에 백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음울하게 말했다.
 “그럼 넌 사지가 찢겨 죽게 되겠지. 그녀 말을 잘 들어라······ 그래야 일각이라도 더 살다가 찢겨 죽지.”
 진홍이 놀라 소리쳤다.
 “적이다!”
 담벼락 근처에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복면인이 사뿐히 담에서 뛰어내렸다.
 “막아! 놈을 제압해!”
 사방에서 달려드는 호위들을 향해 사내의 검이 뽑혔다.
 쨍!
 먼저 달려든 호위의 검이 반듯하게 잘려 나가며 그대로 가슴이 잘려 나갔다.
 사내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고, 강력했다. 병장기도, 사람도, 실력도, 주인을 지키려는 의지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었다.
 쉭! 쉬이익!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어른이 꼬마 아이를 베는 것처럼 주위의 호위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애초에 덤벼들어선 안 될 상대였다. 후퇴하란 말을 내지를 사이도 없이 마지막 곽 호위의 목에 검광이 스쳤다.
 떼구루루.
 곽 호위의 잘린 머리통이 진홍의 앞으로 굴러왔다.
 “······안 돼!”
 진홍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수하들이었다. 온몸에 경련이 일며 피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외원호위들보다 한 수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검천의 호위무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순식간에 몰살시킨 복면인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 뒤에서 백묘의 담담한 말이 들려왔다.
 “너희들까진 지켜줄 수 없다. 알아서 살아남도록.”
 진홍이 뒤를 돌아보자 백묘가 양세일의 혈도를 풀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백묘가 신초희를 일으켜 진홍 뒤에 세웠다.
 “꼭 붙어 있도록.”
 그때 공포에 질려 있던 공신철이 뒷걸음질을 쳤다.
 백묘가 빠르게 경고했다.
 “안 돼! 지금은 아냐!”
 하지만 겁에 질린 공신철은 다짜고짜 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살려줘!”
 슁― 허공을 가르는 하나의 선.
 퍼억!
 공신철의 머리통이 깨지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복면인이 바닥에 떨어진 돌을 던진 것이다. 비수보다 빨랐고 더 위력적이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구용탁이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그의 옆에서 양세일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차라리 신초희가 그들보다 대범했다. 그녀가 진홍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죽여요, 저놈을 죽여요!”
 이내 신초희의 인상이 굳어졌다. 진홍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든든한 그였는데······ 진홍의 공포가 그녀에게 옮아갔다.
 신초희가 이번에는 백묘에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날 구해줘요.”
 그녀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차앙.
 대답 대신 백묘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백묘가 진홍에게 전음을 보냈다.
 [싸움이 시작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녀를 데리고 달아나세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여전한 불길함이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쉭― 쉭―
 백묘의 검이 복면인의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따당!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진홍이 신초희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림없다!”
 복면인의 검이 갑자기 빨라졌다.
 따다다다다다당!
 순식간에 십여 차례 연달아 찔러오는 복면인의 검을 맞받아 친 백묘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단지 빠르기만 한 검이 아니었다. 빨라질수록 검이 더 무거워졌다.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진 그때.
 꽈꽝!
 검을 쥐지 않은 복면인의 손에서 장력이 발출되었다.
 엄청난 위력의 장력이 두 사람이 달아나던 쪽의 벽을 때렸다.
 꽈르릉!
 강기에 휩쓸려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신초희에게 날아든 파편을 진홍이 몸을 날려 막았다.
 퍽!
 진홍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처 튕겨내지 못한 돌에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아가씨! 달아나세요! 어서요!”
 그때 복면인이 살기를 실어 소리쳤다.
 “거기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가루를 내주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신초희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홍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아가씨! 어서 달아나세요!”
 공포에 질린 데다 다리까지 풀려 버린 신초희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글썽거리는 눈으로 백묘에게 소리쳤다.
 “아까 맹에서 나왔다고 잘난 척했잖아! 날 구해줘! 그를 죽여줘!”
 백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백묘는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검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서 복면인과 격돌하는 순간,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내공의 차이였다.
 몇 장이나 떨어진 곳의 벽을 일장에 무너뜨리는 신위는 일반 고수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상대는 진짜 고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지배하던 불길함이 조금 전부터 한풀 꺾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길함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복면인의 살기는 저렇게 더욱 흉흉해지고 있는데.
 슈우우욱!
 복면인의 검이 날카로운 잔상을 만들며 날아들었다.
 창창창!
 백묘의 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점점 좋아지는 기분에 기대 검에 힘을 실었다.
 두 사람의 공방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지켜보던 진홍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수들일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점점 백묘는 밀렸다. 내공에 밀렸고, 기술에 밀렸고, 경험에 밀렸다.
 핏!
 백묘의 어깨에서 길게 핏물이 튀는 순간,
 퍽!
 복면인의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은 백묘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퍼억!
 백묘가 그대로 정자로 통하는 다리의 기둥에 부딪쳤다. 쩍 하고 기둥에 금이 갔다.
 “쿠에에엑!”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을 받은 그녀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는지 복면인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복면인이 신초희를 보며 섬뜩하게 말했다.
 “이제 반각도 남지 않았다.”
 신초희가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었다.
 복면인이 천천히 백묘에게 다가갔다.
 “계집이 제법이군. 재능이 아깝지만 할 수 없다.”
 멍하니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토해낸 피를 내려다보던 백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상 밖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어.”
 복면인은 백묘가 자포자기했다고 생각했다.
 “때론 삶보단 죽음이 나을 때도 있지. 날 원망하지 말고 고이 가라.”
 “그런 뜻이 아니야.”
 “뭐?”
 “날 지배했던 불길한 예감이 완전히 사라졌어.”
 복면인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눈빛에 싸늘함이 흘렀다.
 “제대로 미친년이구나!”
 복면인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검을 드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 미치지 않고선 버텨내기 힘든 일을 하거든.”
 복면인의 검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반쯤 열린 문으로 적호가 들어서고 있었다.
 적호가 쓰러진 백묘를 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묘.”
 잠시 멍하게 있던 백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당신이군요!”
 이 년 만에 재회였다.
 적호가 복면인을 보며 싸늘히 말했다.
 “그 검, 여자나 찌르는 검이면 얼른 찌르고, 그게 아니면 나 좀 보지.”
 복면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그런 검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얄팍한 격장지계에 움직이는 가벼운 검도 아니지.”
 적호와 복면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둘은 동시에 느꼈다,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복면인이 물었다.
 “이 여자와 어떤 사인가?”
 “동료.”
 “꽤 친한 사인가 보군?”
 “이대로 그녀가 죽으면 기분이 더럽겠지. 하지만 그뿐이야. 며칠 지나면 결국 잊게 되겠지. 구해내면 좋고, 못 구해도 할 수 없고. 죽이려면 죽여! 인질 걱정 없이 싸우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
 복면인이 뚫어질 듯 적호를 노려보았다.
 “너, 진심이군.”
 차앙!
 적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여자 계속 땅바닥에 눕혀둘 건가? 내가 아는 남자들은 모두 여자는 침상에 눕히던데.”
 마지막 도발은 제대로 먹혔다. 복면인이 검을 거뒀다.
 복면인이 백묘를 힐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나? 네 목숨 역시 딱 일각만 연장될 뿐이야. 저 샛노란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돌아오마.”
 백묘는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복면인이 천천히 적호에게 걸어갔다. 두 눈에서 앞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기 어린 살기가 흘러나왔다.
 “건방진 놈! 박살을 내주마!”
 적호가 검을 고쳐 쥐며 그 짙은 살기를 향해 걸어 나갔다.
 복면인이 땅을 박차며 적호에게 쇄도했다.
 쉬이익!
 날카로운 검광이 햇살에 번뜩이며 적호의 얼굴을 찔러왔다.
 적호의 신형이 빠르게 비틀렸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적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적호는 똑똑히 보았다. 긴장하는 눈빛을, 분명 자신은 긴장하고 있었다.
 차갑게 얼굴을 스치는 검의 한기가 수련의 깊이를 한마디로 말해주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받았으니 돌려주겠다는 듯 이번에는 적호가 벼락처럼 빠르게 검을 찔러 넣었다.
 쇄액!
 목표는 복면인의 목이었다.
 따당!
 한 발 물러서며 검을 쳐낸 복면인이 휘청하며 다시 한 발 더 물러섰다.
 “호!”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빨랐고 위력적이었다. 까닥 방심했으면 목이 잘려 나갔을 공격이었다.
 복면인이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자신감의 표현도 여유도 아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목에 닭살이 돋았다.
 두 사람 모두 빨랐다. 두 사람 모두 쾌검을 바탕에 둔 검술을 구사했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익숙했기에, 그래서 조심해야 했다. 버릇이 관성을 부르고 관성은 다시 방심을, 방심은 죽음을 부른다.
 깡깡깡!
 두 사람의 검이 서로의 요혈을 노리며 미친 듯이 요동쳤다.
 챙챙챙챙! 스가가가각! 스각!
 불꽃이 일며 섬뜩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적호의 검이 맹수처럼 으르렁댔고, 복면인의 검이 독사처럼 위협했다.
 보는 사람들의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그들은 짤막한 탄성을 연속해서 내뱉고 있었다. 한 수, 한 수가 그들의 눈에는 치명적이었다. 어떻게 막았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다음 공방이 이어졌다.
 용호상박의 일전을 벌이던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떨어졌다.
 적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검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반면 복면인의 검을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아귀가 찢어진 것이다. 손아귀를 내려다보던 복면인의 눈이 쭉 찢어졌다.
 “이런 미친!”
 쉬이익!
 분노한 복면인의 검이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파고드는 검을 단호히 쳐내며 적호가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파앙!
 적호의 주먹이 복면인의 명치에 내리꽂혔다.
 빠각!
 복면인의 검 손잡이가 적호의 주먹을 후려쳤다. 왼손이 휘청하던 그 순간, 몸을 비틀며 적호의 검이 번쩍했다.
 쉬릿!
 복면인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쇄액!
 동시에 적호의 옆구리가 길게 베였다.
 창!
 서로의 검을 때리며 그 탄력으로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복면인의 복면이 반쯤 잘렸고 드러난 볼을 따라 턱 아래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손으로 스윽 피를 닦았다.
 적호가 옆구리에 혈도를 짚어 지혈했다.
 복면인이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넌 누구지?”
 그의 눈빛에 이제 자만심 따윈 없었다. 일각이란 시간을 예고했던 백묘나 다른 사람들의 존재조차 잊었다. 그는 오직 적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명령을 따르는 처지에.”
 담담한 적호의 대답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섬뜩한 살기로 변하며 공격으로 이어졌다.
 복면인이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차며 쇄도했다. 앞서와 같은 초식의 공격이었다.
 얼굴을 향해 날아든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쇄애애애애애앵!
 복면인의 검이 적호에게 날아들었다.
 복면인이 검을 버리는 극단적인 수를 쓴 것이다.
 적호가 혼신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파악!
 검이 적호의 어깨를 스쳤다. 살이 찢기며 피가 튀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땅으로 내려선 복면인이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아앙― 꽝―!
 엄청난 장력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검을 날린 것은 허초였다. 바로 이 공격이 진짜였다.
 엄청난 압박감에 적호가 왼쪽 손바닥을 내지르며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퍼엉!
 충돌음과 함께 적호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꽈앙!
 적호가 문을 부수며 건물 안으로 처박혔다.
 복면인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붙었다.
 꽈앙!
 적호가 내던져진 부대처럼 복도 벽에 처박혔다.
 곧바로 날아들어 온 복면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놈! 이제 끝장이다!”
 다음 순간, 복면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벽에 기댄 적호의 눈빛이 기대 이상 생생했던 것이다.
 “뭐야?”
 그 순간!
 적호가 몸을 쇄도하며 검과 함께 날아들었다. 적호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쇄애애애애액!
 놀란 복면인이 반사적으로 장력을 내질렀다.
 파앙!
 장력과 검이 충돌했다.
 파파파파파팍!
 “크아아악!”
 복면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기의 회오리가 장력을 흩어버리며 그대로 복면인의 팔을 찢어발긴 것이다.
 우드드드드득.
 복면인의 한쪽 팔이 그대로 뜯겨져 나가던 그 순간.
 푸욱!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그곳에 정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댄 채 서 있었다. 적호의 검이 복면인의 가슴을 관통해 뒤쪽 벽까지 박혀 있었다.
 복면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복면인이 힘없이 물었다.
 “그게······ 뭐였지?”
 “흑승류.”
 수라팔절 중 제이절 흑승류였다. 기습적인 수라팔절을 복면인은 예상치 못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수라팔절을 사용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순간 복면인은 방심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마음이 들떴다. 그만큼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에.
 적호는 상대의 장력에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장력에 저항하지 않았다. 호신강기로 버티며 일부러 상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복면인의 얼굴에 너덜거리며 매달려 있던 복면이 스스로 흘러내렸다.
 낯선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볼에 독특한 초승달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설마 당신은?”
 적호가 깜짝 놀랐다. 이 실력에 볼에 저런 흉터를 가진 사람은 강호에 한 사람뿐이었다.
 
 <『절대강호』 1-2권에서 계속>

댓글(13)

풍뢰전사    
보고 또봐도 역시 재미있네요.
2018.03.07 17:14
풍뢰전사    
보고 또보고 또보기.
2019.04.23 22:09
휴먼아이2    
재미있네요
2019.10.23 19:05
EMS27    
명작
2019.11.01 03:36
kk*****    
쥔공~뻐꾸기에 당한거였어?
2019.11.01 15:34
아사유노    
진짜 재밌어요
2019.12.11 17:37
기모히    
전직지존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20년에 보는사람~
2020.05.20 00:49
엔토르    
이분 작품은 다 구매함
2020.12.23 06:54
등골휜다    
꿀잼
2020.12.23 12:17
Ginx    
이분 글은 언제나 강추합니다
2021.01.1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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