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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보표무적 [E](종료230728)

[개정판] 보표무적 1-1권

2017.03.28 조회 15,214 추천 127


 # 서장
 
 밤새 내렸던 눈이 따스한 아침 햇살에 살포시 눈물을 머금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날다람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날다람쥐의 부지런한 움직임은 시작되었고 도토리를 나르는 녀석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니면 눈여겨봐 둔 암놈을 위해 신행(新行) 준비라도 하는지 녀석은 부지런히 도토리를 날랐다.
 그러던 녀석의 행동이 딱 멈춰 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
 귀를 쫑긋거리던 녀석의 눈에 저 멀리 한 사내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이 사내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아주 자그마한 점에 불과했지만 찰나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는 녀석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 밑을 지나고 있었다.
 사내의 체구는 곰처럼 크고 금강동인(金剛銅人)처럼 단단해 보였다. 각진 얼굴과 두툼한 입술,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눈동자는 마치 ‘내 성격은 이렇다’라는 것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성격은 매사 우직하고 단순하며 불의를 보면 좀처럼 참지 못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덩치에 비해 사내의 몸놀림은 날렵했다.
 단숨에 계단을 올라선 사내는 기다란 담 옆의 작은 쪽문으로 사라졌다.
 날다람쥐가 이곳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 옆 측백나무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벌써 이 년이 넘었지만 저 사내가 이렇게 급하게 달려가는 걸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평소의 그는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게 어슬렁어슬렁 이곳을 지나다녔던 것이다.
 다람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이상한 일이군’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이 조그만 짐승은 설마 그런 생각을 하겠냐는 듯 잽싸게 나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결정 났습니다!”
 문이 부서지듯 급하게 들이닥친 사내는 달려오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말부터 뱉어냈다.
 “철무, 우선 숨부터 돌리게.”
 그의 흥분된 목소리와는 다른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철무라고 불린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상관(上官)의 방에 너무 무례하게 들이닥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중년인은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는지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죄송합니다. 빨리 보고를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
 “괜찮네. 자네 마음 이해하네.”
 중년인의 말에도 여전히 철무라고 불린 사내는 급해 보였다.
 “지금 막 새로운 맹주님께서 선출되셨습니다. 새로 선출되신 분은······.”
 “혹시 구양(歐陽) 대협이신가?”
 “헛, 어찌 아셨습니까? 미리 보고라도 받으신 겝니까?”
 철무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네. 단지 그렇게 되리라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네.”
 놀란 눈은 다시 감탄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예상대로 강북(江北)의 무림인들은 남궁(南宮) 대협을 지지했고 강남(江南)의 무림인들은 구양 대협을 지지했습니다. 그 외 섬서(陝西), 호북(湖北) 지역은 지지율이 서로 비슷했는데 예상 밖으로 젊은 층에서 대거 구양 대협을 지지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음······.”
 깊은 신음성과 함께 중년인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왠지 구부정하다는 느낌을 주는 자세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이마에 갖다 댔다.
 철무는 이 자세가 중년인이 바로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 때의 자세라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팔십 년 전 제일차 정사대전(正邪大戰)을 계기로 무림맹, 즉 정도무림연합결맹(正道武林聯合結盟)이 결성되었다.
 당시 삼백여 년 전에 사라졌던 마교의 후예들이 다시 혈마(血魔)를 중심으로 마교 부활(魔敎復活)의 기치(旗幟)를 세웠고 다시 강호에는 피바람이 불어닥쳤던 것이다.
 당시 각파의 이익만을 따지며 서로 연합하기를 꺼리던 구파일방은 그러한 움직임을 소홀히 생각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마교는 잊힌 이름이었고 조부의 조부 때 떠돌던 옛날이야기와 같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마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고 그동안 정도무림에 기죽어 지내왔던 모든 사마 세력들이 혈마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결국 형산파(衡山派)가 몰살되는 대참극을 계기로 뒤늦게 부랴부랴 무림맹 창설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후 구파일방이 중심이 된 무림맹과 혈마를 중심으로 한 현 마교의 전신(前身)인 사마연합(邪魔聯合) 간의 기나긴 싸움이 이어졌고 강호무림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십 년간이나 계속된 싸움은 결국 만안평(萬安平)에서의 마지막 혈전으로 끝이 났다.
 소림 삼신승(三神僧)과 무당파 전대 장로들의 합공으로 결국 혈마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혈마의 죽음으로 마교 천하의 깃발이 꺾이고 강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승리를 이뤘다고는 하나 강호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른 후였다.
 구파일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훼손된 강호의 정기(精氣)를 되살리기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자연스럽게 무림맹은 강호의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구로 굳어지게 되었다. 임시 연합체에서 상설(常設) 단체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구파일방의 추천과 그에 따른 만장일치제로 무림맹주를 추대하였는데 만안평 싸움에 참여하였던 구파일방 중 당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소림과 무당에서 맹주가 교대로 선출되었다.
 이후 사대세가(四大世家)의 참여로 인해 각 지역의 대표를 추대하여 투표로써 맹주를 뽑는 제도로 바뀌었지만 어차피 제도만 바뀌었을 뿐 그 당시의 가장 세력이 강한 집단에서 주로 맹주가 추대되었던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무(比武)를 통해 무림맹주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대두되면서 비무로써 맹주를 뽑기도 했다.
 그러나 과열된 경쟁으로 인해 숱한 죽음과 사고들이 속출했고 또한 일부 대파(大派) 간의 부정적인 뒷거래 등이 문제되면서 이후 그 제도는 철폐되었다.
 결국 오 년 전 지역 무림 대표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투표제가 채택되어 실행되었는데 모든 무림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결과 십삼 대 무림맹주로 검왕(劍王) 석노야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임기도 기존에 십 년이었던 것이 오 년으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특정 세력만의 무림맹에서 모든 강호인들의 무림맹으로 바뀌게 되는 크나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무림맹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 년이 지났다.
 오늘이 바로 제십사 대 무림맹주가 선출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고를 받고 있는 중년인은 바로 무림맹주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현무단주(玄武團主) 광한검협(廣寒劍俠) 혁월(革越)이었다.
 깍지 낀 손가락을 움직여 소리를 내던 혁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힘차게 말했다.
 “새로운 맹주님이 선출되셨으니 이제 우리가 바빠지게 되었네. 전 대원들에게 긴급 복귀 명령을 내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돌아서 나가려던 철무가 쭈뼛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뭔가?”
 “구양 대협께서 맹주님이 되시면 새로운 강호가 펼쳐지게 될까요?”
 철무의 갑작스런 질문에 혁월의 표정이 굳어졌다.
 “새로운 강호라?”
 무림맹 현무단주 혁월.
 그가 무림맹에 몸담은 지도 벌써 십팔 년이 지났다.
 그사이 그는 각기 다른 세 명의 맹주를 거쳤다. 배경과 출신, 무공과 인품 등이 각기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 정의(正義)와 강호평화를 외치며 그 임기를 시작했지만 언제나 결과는 비슷했다는 점이다.
 임기 후 부정부패에 연루되거나 혹은 자파나 출신 지역의 편중 인사 등으로 인사의 공정성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소신껏 일을 추진해 나가려 해도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알력 다툼과 반대 세력의 방해 공작 등으로 처음의 그 의지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과연 이번에는?’
 굳이 철무의 질문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혁월 자신도 궁금한 점이었다.
 이번에 선출된 구양 대협은 젊은 층의 지지에 의해 선출된 재야 무림인이다.
 재야 무림인이란 구파일방이나 사대세가의 배경 없이 활동하는 무림인을 말하는데, 그들 중에는 호방한 기상과 독특한 무공을 지닌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이번에 신임 맹주가 된 구양호였다.
 그는 철혈판관(鐵血判官)이라 불리는 그의 별호처럼 매사에 공정하고 성정이 강직한 무림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약자들의 정의를 위해 검을 뽑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거대 방파들과 맞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눈엣가시 같은 그가 지금껏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그의 의기를 높이 사는 강호의 수많은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는 가문의 배경이나 막대한 재력을 사용하지 않고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시대가 바뀐 것이다.
 무공 서열로 맹주가 되는 시대에서 강호가 원하는 맹주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다. 그가 불의에 대항한 것은 무공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기대서였다. 그의 무공은 역대 맹주에 비해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맹주의 신변 보호 임무가 지난 그 어떤 임무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혁월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글쎄, 자네가 생각하는 새로운 강호란 어떤 곳인가?”
 혁월의 되물음에 철무는 또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뭐, 무식한 제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다들 새로운 강호, 새로운 강호 하길래 여쭤본 것이지요.”
 철무의 솔직한 대답에 혁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혁월의 말에 철무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아는 혁월은 ‘모른다’라는 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런 철무의 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혁월이 말했다.
 “하지만 구양 대협은 믿을 수 있는 분이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힘들고 많아질 것이야.”
 혁월의 말에 철무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철무가 나가자 혁월이 홀로 되뇌었다.
 “새로운 강호라······.”
 혁월은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이제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그 무엇’이 그리워졌다.
 
 아침 햇살이 제법 따스한 기운으로 밤새 얼어붙은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 고개 숙인 풀잎들이 고개를 들며 따뜻한 아침 햇살과 첫 인사를 나눌 때 무림맹 심처(深處)에서는 또 다른 인사가 오가고 있었다.
 “오 년인가?”
 “사 년 하고 팔 개월입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별말씀을,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청년의 맑은 눈빛과 정중한 말투에 노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노인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어주었다.
 칼날같이 준엄하고 강인한 무인(武人)에서 어린 손주의 재롱을 대하는 촌로(村老)가 된 것이다.
 “무림맹주를 그만두는 것보단 자네와 헤어지는 것이 더 섭섭하네.”
 노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혹시 지난 오 년간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한 횟수가 몇 회인지 기억하나?”
 뜬금없는 노인의 질문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네 번이네.”
 청년은 노인이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잘한 것들을 다 빼고도 네 번이나 된다네.”
 노인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하제일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가 그에게 네 번이나 목숨 빚을 지게 될 줄 상상이나 하였던가? 처음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제법 실력이 있는 청년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노인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청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노인은 문득 칠 년 전 제이차 정사대전의 기나긴 싸움을 종식시킨 이후 모든 강호인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분세수했던 전대 맹주 권왕(拳王) 설붕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놀랄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던가?
 임기를 시작했지만 그가 말한 놀라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는 복잡한 맹 내의 일들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림맹주라는 직위가 한 개인의 무력과 권위보다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다스리는 정치로써 이루어짐을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 년쯤 지나자 이 거대한 무림맹이라는 단체는 맹주만의 것이 아닌 무림이라는 거대한 자양분을 받아먹으며 자생적(自生的)으로 살아 숨 쉬는 유기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목(巨木)의 뿌리라고 할까?
 맹주는 바뀌어도 무림맹은 영원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노인에게 놀라운 충격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노인은 무림맹주를 위한 무림맹이라는 생각을 내심하고 있었던 터였다.
 전대 맹주가 말한 놀랄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 년이 지나고 이제 떠날 때가 되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말했던 놀라움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무림맹 호위 무사 중 한 청년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바로 눈앞의 이 청년.
 “우 호위(護衛), 자네 이름이 우이(宇螔)였었나?”
 “네.”
 “우이라··· 집 우(宇) 자에 달팽이 이(螔)라······. 특이한 이름이구먼.”
 강호의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오 년 동안 자네와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얼마 없었던 것 같으이.”
 노인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 노인이 다시 물었다.
 “자넨 왜 보표(保鏢: 호위 무사)가 되었나?”
 노인의 말에 우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어떤 물음에도 금방 답이 나왔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열리지 않았다. 역시 어떤 사연이 있으리라.
 그런 우이의 반응에 노인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한마디 던졌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우 소협!”
 갑작스런 노인의 말에 청년은 깜짝 놀랐다.
 “맹주님?”
 “하하, 난 이제 오늘로 맹주가 아니네. 맹주로 불려서도 안 되고 자넬 직위로 부를 자격도 없네.”
 노인의 말에 우이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노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내 자네에게 몇 가지 부탁이 있네. 들어줄 수 있겠는가?”
 우이는 노인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의 태도에는 어제까지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관계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노인은 이제 강호의 선배로서 후배인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우이는 노인의 이런 호쾌한 점을 좋아해왔던 터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우이의 시원스런 말에 노인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우선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말을 꺼낸 노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칠 년 전 그곳에 자네도 있었나?”
 노인의 질문에 우이의 얼굴이 또다시 굳어졌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노인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석상처럼 꼼짝도 않던 우이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그 모습에 노인은 예상은 했으되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설마 했지만 역시 그랬었군.”
 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였지만 우이는 후회하지 않았다. 구태여 노인을 속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에게선 오래전 돌아가신 사부 냄새가 났다.
 “고맙네, 솔직히 말해주어서. 이 일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겠네.”
 사족(蛇足)과도 같은 노인의 말에 우이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두 번째 부탁은 맹(盟)을 위해 계속 일해달라는 것이네.”
 노인의 말에 약간 의외의 표정이 된 우이가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날 너무 눈치 없는 늙은이 취급하지 말게. 자네가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네.”
 창문으로 한줄기 따뜻한 빛이 들어왔다. 우이의 시선이 빛을 따라 창밖으로 향하며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오르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네 같은 고수가 왜 이곳에서 일개 보표 노릇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르네. 자네에게 사연이 있겠지.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다 자네의 자유라는 것도 아네. 하나 지금 안팎으로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네. 아마 자네가 이대로 떠난다면 신임 맹주는 결코 그 임기를 다 채울 수 없을 것이네.”
 우이는 여전히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맹주는 노인과 같은 절대고수가 아니라고 했다. 눈앞의 노인은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는 열 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도 여러 번 고비를 맞이해야만 했다. 하물며······.
 우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를 지켜주게. 그는 충분히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네.”
 말을 마친 그는 두 번째 부탁에 대한 우이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세 번째 부탁을 했다.
 “세 번째 부탁은 귀찮더라도 손발을 좀 놀려야 할 일이네. 잠시 따라 나오게.”
 노인이 앞서 걸어 나간 곳은 맹주의 집무실 뒷마당의 작은 공터였다. 그가 틈틈이 가꾸어둔 작은 화단의 천리향(千里香)이 신선한 아침 공기 사이로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세 번째 부탁은··· 나와 비무(比武)를 해줄 수 있겠나?”
 말의 내용은 살벌했지만 노인의 표정은 밝았다.
 딴 이가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한 놀라운 말이었지만 정작 그 대상인 우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노인이 문득 물었다.
 “그도 역시 부탁했었나?”
 그란 아마도 전대 맹주 권왕 설붕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권왕의 주먹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역시 십대고수 중 일인이자 자신의 무공에 왕(王) 자를 붙일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승패가 어떻게 났었을까?
 문득 권왕의 공허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장강(長江)의 뒤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는 낡고 오래된 것의 안타까움이 담긴 웃음이······.
 “그전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말하게.”
 “최선을 다해도 되겠습니까?”
 우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헤어지는 날 처음으로 우이가 농을 던졌다. 지난 오 년간 자신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지켜주던 그였다.
 그 한마디에 노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 이렇게 편한 사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까지 들었다. 그는 분명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예끼, 이 사람아, 그게 검왕(劍王)의 검 앞에서 할 말인가?”
 노인이 큰 소리로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신년 초사흘, 새로운 무림맹주가 탄생되던 날 아침 무림맹의 한적한 뒷마당에서 소리 없이 검이 날았다.
 
 
 # 제1장 새로운 출발
 
 담린이 낙양제일루(洛陽第一樓)에 들른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오후, 그러니까 정도무림맹 담벼락 옆 측백나무의 날다람쥐가 도토리를 한 스무 개쯤 모았던 그 즈음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객잔에 들른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겠지만 서둘러 길을 나선 통에 약속보다 반나절 먼저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하루는 어디서든 숙박을 해야 할 처지였기에 주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객잔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그를 향해 이제는 늙어 은퇴를 고려해봄 직한 염소수염의 점소이가 보기와는 다르게 잽싸게 달려왔다.
 “어서 옵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이리 사람들이 많나요?”
 담린의 공손한 말투에 염소수염은 살며시 기분이 좋아졌다.
 칼 찬 작자들의 무례함에 질릴 만큼 질린 그였다. 어린놈이고 늙은 놈이고 간에 점소이에겐 반말부터 하고 보는 게 무림인들이었다.
 “새로운 무림맹주님께서 선출되셨네.”
 염소수염의 굽혀진 허리가 펴지고 말투는 ‘어서 옵셔’에서 ‘되셨네’로 바뀌었다.
 “며칠 후에 취임식이 개최된다네. 모두들 새 무림맹주께 새해 인사 겸 축하를 드리려고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지.”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주점 안의 손님들은 대부분 무림인들이었다.
 “게다가 신년(新年)을 맞아 무림맹에서 새로 무사들을 뽑았다네. 지금 이 넓은 낙양 땅이 무인들로 터져 나갈 것만 같으이.”
 신기한 표정으로 주점 안을 둘러보는 담린을 보며 염소수염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가 올해가 새 무림맹주를 뽑는 해이며 바로 이곳 낙양이 무림맹의 본 맹이 위치해 있는 것도 모르는 촌뜨기 시골 무사가 틀림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딴에는 잔뜩 멋을 부렸지만 처음 꺼내 입은 것 같은 빳빳한 새 경장이며 등에 단정히 꽂힌 검 손잡이가 반질반질 손질이 되어 있는 것이 여지없는 촌뜨기였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넓은 게 제법 심지가 굳어 보였는데 염소수염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짤막한 탄식을 내질렀다.
 ‘의기만개(義氣滿開) 강호초출(江湖初出).’
 눈앞의 사내를 단 여덟 자로 표현한 염소수염.
 바로 이 경우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죽기 쉬운 세 가지 경우 중 첫 번째가 아닌가?
 정의감만 가득한 강호 초출행이 그 첫 번째요, 멋을 부린다고 원수의 아들을 살려 보내며 다음에 찾아오라고 하는 허풍이 두 번째요, 장보도(藏寶圖)를 얻은 후 친우(親友)에게 알리는 어리석음이 그 세 번째였다.
 게다가 그 첫 번째 비극의 배경은 대부분 주점이 아니었던가?
 염소수염이 지난 삼십 년간의 점소이 생활을 통한 그 비극적인 경우들을 일일이 회상하고 있을 때 담린은 혼자 성큼성큼 걸어서 구석 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염소수염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술을 마시던 여인에게 무엇인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헉! 위험해!’
 염소수염은 다급하게 달려갔다. 이제 곧 여인의 검집에서 검이 뽑히겠지?
 ‘강호 초출에 주루에서 여협객과의 낭만을 꿈꾸던 철부지 무사, 단칼에 개죽음당하다.’
 이것이 그 짧은 순간에 염소수염이 생각한 한 젊은이의 인생에 대한 결말이자 내일 인근 장터에 잠시 떠돌 소문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염소수염은 자신의 과장된 상상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랜만이군요.”
 담린의 반가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든 여인의 표정은 차가웠다. 게다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는 표정.
 “일 차 시험 때 감독관이셨죠? 봉황비도(鳳凰飛刀) 소향님.”
 담린의 말을 듣고 그제야 여인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아, 기억나는군요. 성함이?”
 “담린입니다.”
 여인은 목소리는 시원했다.
 “일 차라면 십팔반 병기에 대해서였었죠?”
 “네, 제 기초가 탄탄해 보인다고 칭찬해주기도 하셨습니다.”
 “호호, 그랬었나요? 근데 낙양에는 무슨 일로?”
 “저, 합격했습니다.”
 담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
 “이번 무림맹 현무단 호위 무사 채용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소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변해 있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당황한 담린의 어깨를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축하해.”
 갑작스런 소향의 태도 변화에 담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앉아. 합격했다고 진작 말했어야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이봐, 여기 술 가져와!”
 옆에서 눈치만 보던 염소수염은 그때서야 끼어들 틈을 찾았다는 듯이 냉큼 말했다.
 “저기, 그럼 합석하실 겁니까?”
 염소수염의 말에 소향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제부터 한 식군데. 여기 술이랑 안주랑 최고급으로 듬뿍 가져와.”
 “네, 그럽죠.”
 돌아서는 염소수염은 시체를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단 왠지 정초부터 자신의 예감이 틀린 것에 대해 약간 속상해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염소수염의 한계이자 자신을 삼십 년간 점소이 생활로 이끈 주범인 줄도 모르고 그는 투덜거리며 주방을 향해 종종거렸다.
 “올해 몇 살이지?”
 “올해로 열여덟이 됩니다.”
 “야, 좋을 때다.”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운 차가운 여협객에서 갑자기 한 십오 년 봐온 옆집 푼수 누나처럼 돌변한 소향을 보며 담린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다짜고짜 반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따뜻하고 친밀한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녀는 강호십대여협(江湖十大女俠) 중 비도술(飛刀術)로 유명한 바로 그 봉황비도 소향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와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던가, 신입 대원 입맹식(入盟式)이?”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몇 명이나 뽑혔지?”
 “저를 제외하고 여섯 명이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생은 이제부터야. 신입 대원 실전 훈련(實戰訓練)을 마쳐야 하니까. 거기서 떨어지는 애들도 꽤 되지.”
 담린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제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림맹 무사가 된다는 것.
 그것은 강호에 몸담은 수많은 강호인들의 꿈이 아닌가?
 물론 배경이 탄탄한 구파일방의 제자들이나 사대세가 출신들은 무림맹의 무사가 되는 것을 하찮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자라온 고향에서는 그 의미가 달랐다.
 복건성(福建省) 끝자락의 한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 그의 고향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무림맹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큰 출세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어설프게 강호에 들어섰다가 병신이 되거나 타지(他地)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온 늙은 부모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준이 생겨났다.
 기왕 자식이 강호에 나가겠다면 뜨내기 낭인 무사가 되는 것보단 든든한 배경에 기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무림맹 출신의 무사들은 정말로 쉽게 죽지 않았다. 아무리 하급 무사라 할지라도 일단 무림맹 소속이라면 대부분 상대방이 양보하기 마련이었고 쓸데없는 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다른 문파에 비해 확연히 적었다.
 물론 마교와의 전면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죽어 나갈 신세겠지만 양패구상(兩敗俱傷)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던 정도무림맹과 마교연합(魔敎聯合) 사이의 삼 년간의 기나긴 제이 차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끝난 것이 불과 칠 년 전이었다.
 당시 무림맹주였던 권왕(拳王) 설붕 대협이 마교 교주 천마(天魔)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의 강호는 마교 통치 하의 암흑 시대였을 것이다.
 물론 근래의 고요함을 혹자들은 폭풍 전야(暴風前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그 끔찍한 싸움이 끝난 지 채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금 무림은 평화기였고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에 들어가는 것은 크나큰 출세였던 것이다.
 아들이 무림맹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담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윗대부터 내려온 가전무공(家傳武功)을 어려서부터 착실히 익혀온 데다 무공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무렵 우연히 만나게 된 노승으로부터 몇 수 가르침을 받으면서 담린의 무공은 크게 증진되었다.
 덕분에 그 어렵다던 무림맹 호위 무사 선발 시험에 당당히 합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담린은 가슴이 격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는지 그를 바라보는 소향의 얼굴에 미소가 매달렸다.
 “왜 현무단에 응시했나?”
 담린은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청룡단이나 백호단을 선호하잖아? 우리보다 화려하고 대우도 좋고. 더 알아주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이 멋져 보였습니다.”
 “호호호!”
 소향이 깔깔거렸다.
 “멋있어 보여서라고?”
 담린은 약간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솔직하고 좋네 뭐. 네 나이에 뭐 무림 평화가 어쩌구 사명감이 저쩌구 하면 도리어 밥맛없지.”
 소향의 말에 힘을 얻은 담린이 되물었다.
 “선배님은 왜 이 일을 하시는 겁니까?”
 소향은 이번에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과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담린은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무엇인가 화제를 돌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돈 벌려고.”
 짤막한 소향의 말에 담린은 깜짝 놀랐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린의 놀란 표정을 보며 소향이 무심히 말을 이었다.
 “사실 이만큼 녹봉이 후한 곳도 없지. 기본급만 해도 보통 사람들이 반년은 벌어야 할 돈이야. 거기다 위험 수당에 특별 수당, 야근 수당에 출장 수당까지 나오거든. 초봉이 만리표국(萬里鏢局)의 표두(鏢頭)급만큼 되지.”
 만리표국은 낙양의 가장 큰 표국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놀리려는 것인가? 그러나 소향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무림인도 먹고 살아야지.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굶고는 못 살잖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강호십대여협 중의 한 명이자 한 자루의 비도를 던져 열 개의 목숨을 취한다는 일도탈십명(一刀奪十命) 봉황비도의 말치고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담린의 표정 속에 담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소향이 말했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기루(妓樓)에라도 나가야 한단 말이냐? 아님 밤에 월장(越牆)이라도 해? 돈 벌기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피땀을 흘리며 수련한 것이······.”
 “음, 수련한 것이?”
 무슨 대답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다는 소향의 표정이었다.
 그래도 담린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과도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것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소향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무인의 자존심 같은 것?”
 “··· 비슷합니다.”
 “넌 우리가 무인이라고 생각하니?”
 소향의 말에 담린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때 주점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깥바람을 몰고 곰 같은 사내 철무가 들어섰다.
 철무는 들어서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담린과 소향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치 소향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온 사람 같았다.
 말없이 소향과 담린의 자리로 온 철무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는 탁자의 술을 병째 들이켰다.
 이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웠으면 마치 같은 일행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크앗! 시원하다!”
 주점이 떠나갈 듯한 쩌렁쩌렁한 철무의 목소리에 담린은 문득 무림맹 호위 무사 중 단순(單純), 무식(無識), 과격(過激)으로 유명한 한 사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철권(鐵拳) 철 대협이신가요?”
 정중히 포권을 하며 담린이 물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철무요.”
 누구인가 하는 표정이 역력한 철무였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전 이번에 현무단 호위 무사 시험에 합격한 담린이라고 합니다.”
 딱!
 덩치가 크면 느리고 미련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철무가 번개처럼 담린의 머리에 꿀밤을 날렸는데 놀라고 당황한 담린이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담린의 머리통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
 “이놈아,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언제 진작 말할 기회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우락부락한 철무의 눈을 보니 담린의 억울한 마음이 쏙 들어갔다.
 “게다가 하늘 같은 선배랑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셔? 이거 안 되겠군. 차렷!”
 담린의 신형이 번개처럼 벌떡 일어났다.
 “동작이 이렇게 느려서 어떻게 대무림맹 현무단의 호위 무사가 되겠다는 건가?”
 담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작부터 꼬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은 바로 소향이었다.
 “장난 그만해.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우리 후배가 아니지. 내일 입맹식이 끝나야 정식으로 우리 후배가 되는 거지.”
 소향의 말에 철무가 말했다.
 “오호, 그렇군요. 아직 담 소협이시군요.”
 말끝에는 가시가 한 뭉치나 삐져나와 있었다.
 철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점이 떠나갈 듯한 담린의 대답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선배님!”
 그 모습에 소향과 철무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참, 근데 넌 여긴 왜 온 거야?”
 소향의 말에 철무는 화들짝 놀라 말을 꺼냈다.
 “아, 전 대원 긴급 복귀 명령입니다.”
 “이제 바빠지겠군.”
 “올해는 특히 더 바쁠 겁니다. 새 맹주님을 맞는 해이니까요.”
 “그래······.”
 새 맹주님이란 말에 주눅이 들어 있던 담린의 마음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세차게 뛰던 심장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것은 소향을 따라 주점을 나서며 던진 철무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어이, 신참! 훈련 때 보자! 기대해도 좋아!”
 그들이 나가자 아직 맹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예비 무사 담린은 한바탕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얼떨떨해하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가 버리는 바람에 그날 하루 종일 소향이 마셔댔던 술값은 담린이 계산해야 했다.
 계산을 하면서 담린은 소향이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도 설마 하는 순진한 담린이었다.
 
 드디어 담린이 밤잠을 설쳐 가며 기다리던 무림맹 입관식의 날이 밝았다.
 객잔을 나서는 담린의 표정이 밝았다.
 그는 짙은 청색 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 부위에 ‘맹(盟)’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합격자들에게 미리 인편(人便)을 통해 지급된 무림맹의 기본 복식이었던 것이다.
 그 얼마나 입고 싶었던 옷이던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담린의 입이 찢어질 듯이 벌어졌다.
 저 멀리 무림맹 건물이 보일 때까지 담린의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무림맹 본단은 낙양성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거대한 성을 기대했던 담린은 무림맹의 작은 규모에 약간 실망했다.
 거기다가 무림맹의 담장은 어른 키보다 조금 더 높았고 경공을 모르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는 높이였다.
 담장을 따라 걷던 담린이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길게 늘어진 야트막한 담장이 오히려 높게 둘러쳐진 것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자신 있는 자, 넘어보라’라는 도도한 기세랄까?
 꿈보다 해몽이 좋았지만 지금의 담린에게는 부서진 담벼락조차 유구한 역사의 흔적으로 보였다.
 드디어 무림맹 정문이 보였다.
 자신과 같은 복장의 젊은이들이 하나둘 그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담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떼어놓는 순간인 것이다.
 그에 비해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은 이제 곧 자신들의 후배가 될 젊은이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각각의 부서로 갈라지겠지만 저들 중에는 자신들의 직속 후배가 될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옆으로는 한 사내가 책상에 앉아 들어서는 젊은이들의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름?”
 “담린입니다.”
 “소속?”
 “현무단 소속입니다.”
 담린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서류를 뒤적이던 사내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리고 약간 이채롭다는 눈빛을 지었다.
 “담린, 18세, 복건(福建) 출신, 맞습니까?”
 말투가 바뀌었다.
 일반 무사들에 비해 현무단과 그 외 몇 부서의 무사들의 직위가 한 단계 높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담린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들어가셔서 오른쪽 길을 따라 쭉 가십시오. 조금만 가시면 집합하는 장소가 나올 것입니다.”
 담린을 쳐다보는 정문 무사들의 눈빛에 잠깐 부러움이 스쳤다.
 담린의 가슴이 활짝 펴졌다.
 반 각(半刻) 정도 걷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작은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삼남일녀(三男一女)였는데 담린과 같은 복장으로 다소 어색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이번에 함께 뽑힌 신입 무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둘은 낯이 익은 것이 시험장에서 이미 만났던 이들 같았다.
 담린이 다가가자 그들의 시선이 담린에게로 모아졌다.
 왠지 어색했지만 담린이 가볍게 포권하자 그들 역시 포권으로 인사를 받았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초면(初面)에 딱히 무슨 말들을 하겠는가? 목표를 잃은 어색한 시선만이 부끄럽게 오갔다.
 그때 ‘그 몸으로 용케 합격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푸짐한 살집의 사내가 과장된 손짓으로 말했다.
 “앞으로 목숨을 함께할 동료들이 될 텐데 우리 서로 소개나 합시다.”
 모두들 비슷한 어색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던지라 그의 말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먼저 내 소개부터 하리다. 난 감숙성(甘肅省)에서 온 하윤덕(河潤德)이라고 하오. 나이가 좀 들어 보여도 실제로는 어리니 편하게 대해주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을 훨씬 넘어 보였다. 두 눈에 가득한 장난기가 아니었다면 실제로는 어리다는 그의 말은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달린 것처럼 보이는 키 큰 사내의 차례였다.
 “저는 오가장(誤家莊)의 오령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가장이라면 강남(江南)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가(名家)였다.
 그러나 오령은 명가의 자제답지 않게 부끄러움이 많고 소심한 성격일 것 같은 사내였다.
 오령 옆의 냉막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는 짤막하게 자신을 심한진이라고만 소개했다. 마치 잘 손질된 한 자루 칼 같은 느낌의 사내였지만 칼집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담린의 소개를 끝으로 남자들의 인사가 모두 끝났다.
 남은 사람은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의 홍의(紅衣)여인뿐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나지막이 말했다.
 “산, 산, 산동(山東) 출신의 냉하연이라고 합니다.”
 부끄러워서인지 원래부터 말투가 그런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럼에도 사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왕이면 투박하고 거친 남자들보다 저렇게 귀여운 여자 동료가 더 낫지 않겠는가?
 “이번에 뽑힌 사람들은 모두 일곱이지 않소?”
 하윤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두 명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담린이 자신이 걸어 들어왔던 곳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때마침 두 사람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일남일녀(一男一女)였는데 자신들과 같은 무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이제야 도착하는 이들로 보였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여인에게로 집중되었다.
 갸름한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담린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로 보기 드문 미녀였던 것이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몸매는 그녀의 아름답고 시원스러운 얼굴과 잘 어울려 가히 절세미녀라 불릴 만하였다.
 냉하연도 미녀라고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여인에 비하니 상당히 손색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여자인 냉하연조차 감탄의 눈빛이 되었다.
 “제갈혜(諸葛慧)라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입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무림사미(武林四美) 중 강남제일화(江南第一花)라 불리는 제갈혜가 바로 이 여인이었던 것이다.
 “저는 남궁소천(南宮少天)이라고 합니다.”
 다정히 걸어 들어왔던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무림사미의 일인이자 제갈가의 천금인 제갈혜, 그리고 남궁가의 장남 남궁소천.
 모두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담린은 사대세가 중 두 가문의 자제들이 자신과 동료가 된다는 든든함이나 뿌듯함보다는 그들이 왜 이곳에 지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덜컥!
 그때 공터 앞 별관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담린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철무였던 것이다.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철무와 함께 나온 중년인이었다.
 “제군들의 무림맹 입맹을 축하한다. 더구나 무림맹 내에서도 최고의 기재들만이 모인다는 이곳 현무단 호위 무사로 들어온 것에 대해 환영하는 바이다. 나는 현무단을 맡고 있는 혁월이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혁월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바였다.
 무림맹 현무단을 강호 최고의 호위 무사 집단으로 만든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직 제군들은 하나의 관문이 남았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신입 대원 실전 훈련이 남아 있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담린은 그것만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자신을 보낼 때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떠나는 자식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애써 참으시던 어머니셨다. 아마 오늘도 자식에 대한 기원으로 새벽을 밝히셨을 것이다.
 하루 빨리 자리를 잡아 이곳 낙양으로 모셔올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여기 자네들의 선배이자 매화조 삼조장(三組長)인 철 호위가 자세히 설명해줄 것이다. 그럼 모든 훈련이 끝난 후 다시 보기로 하자. 모두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길 바란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혁월은 자신이 나왔던 별관 건물로 들어가 버렸고 그 자리를 철무가 대신했다.
 일행들을 둘러보던 철무와 담린의 눈이 마주쳤다.
 담린은 고개를 숙여 그 눈길을 피했다.
 “모두들 만나서 반갑다. 난 매화조 제삼조장을 맡고 있는 철무다.”
 모두의 표정이 일순 긴장되었다.
 철무의 명성 또한 혁월 못지않았다.
 물론 혁월이 좋은 쪽으로의 명성이라면 철무는 그 반대인 악명(惡名)인 것이 문제였지만.
 인심철담(人心鐵膽) 철무. 단순 무식의 대명사이며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철한이 바로 그였다.
 “반가운 얼굴도 보이는군.”
 철무의 말에 담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것은 고작 일곱 명 속에서 숨을 곳을 찾는 담린의 애처로운 노력에 불과했다.
 “음, 게다가 올해는 여자가 두 명이나 붙었군. 소향 누님 이후론 처음인데 둘씩이나 붙다니······.”
 제갈혜와 냉하연을 보며 철무가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쩌렁쩌렁 울리는 철무에게 혼잣말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 말에 제갈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여자가 붙은 것이 놀랍다는 듯한 말투가 그녀의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철무가 냉하연 앞에 섰다.
 “잘할 수 있겠나?”
 철무의 갑작스런 질문에 냉하연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한마디.
 “··· 네.”
 “목소리가 그게 뭔가? 잘할 수 있겠나!”
 다시 냉하연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철무의 얼굴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혀를 차며 이번에는 제갈혜의 앞으로 온 철무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멈칫 놀랐다.
 강호사미 중 일인이 붙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철무에게 있어 미(美)란 뼈와 살가죽이 유별난 정도에 불과했다.
 “잘할 수 있겠나?”
 제갈혜를 향해 똑같은 질문이 떨어졌지만 대답은 다르게 나왔다.
 “무슨 의미시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철무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혹시 그 말씀은 저희들이 여자들이라서 걱정이라도 된다는 뜻인가요?”
 제갈혜의 당돌한 말에 철무는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저는 무림인입니다. 무림인이 된 이상 남녀의 구분 따윈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철무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제갈혜를 응시했다.
 무엇인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담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첫날부터 선배와 동료 간의 갈등은 그다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잠시 후 철무의 입에서 담린의 걱정을 깨끗이 날려 버리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좋아! 네 말이 옳다. 무림인이라면 남녀 사이의 구분 따윈 중요치 않지. 내 실수를 인정한다.”
 철무가 호쾌하게 말했는데 그 말속에는 어떠한 악의(惡意)나 후환(後患)도 들어 있지 않았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대로 철무는 단순 과격한 사람이지만 반면에 호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갈혜가 정중히 말했다.
 그녀는 철무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올 줄 몰랐다. 만약에 철무가 자신의 말을 빌미로 모두에게 웃통을 벗으라고 해도 벗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무는 호쾌한 사나이였다. 제갈혜는 그런 그에게 약간 감동을 받았다.
 사실 철무가 순순히 물러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서 강호에 대한 동경과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 년 전 자신이 강호로 뛰어들면서 가졌던 그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만이 꿈꾸는 강호, 모든 무림인들에게는 자신만의 강호가 있을 것이다. 무식하고 단순한 철무였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일 뿐이다.
 제갈가의 천금(千金)과 강호사미라는 자리에도 불구하고 일반 무사로서 이곳에 입맹한 그녀의 결심에는 그러한 것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의 입맹은 대단한 것이었다.
 철무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높이 샀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림인들 사이에도 엄연한 남녀의 구분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반인들의 차이보다 더 넘기 힘든 벽이 있음을 언젠가 그녀도 느끼게 되리라.
 하지만 철무는 첫날부터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사흘 후에 실전 훈련이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푹 쉬도록! 알겠나?”
 이제 마지막 고비만을 남긴 일곱 청춘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져 빈 공터를 가득 채웠다.
 
 ***
 
 “예상치 못했던 결과입니다.”
 황의인(黃衣人)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 말은 다섯 평 남짓한 작은 회의실을 음울하게 울렸고 자그마한 탁자에 둘러앉은 나머지 셋의 표정까지 침울하게 만들었다.
 “모두들 신진회(新進會)라고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오. 강남의 젊은 애들이 주축이 돼서 만든 조직인데 이번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쳤소. 젊은 애들의 치기(稚氣) 정도라 여겨 소홀히 생각했었는데 그게 실수였소. 오늘의 실패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소.”
 적의인(赤衣人)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호가 취임하게 되면 맹 내에 큰 물갈이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상대적인 푸대접을 받았던 강남무림인들이 대거 기용되겠지요.”
 “원로원(元老院)의 반응은 어떻소?”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은 없습니다. 그들도 이리저리 주사위를 굴려보고 있겠지요. 털었을 때 가장 많은 먼지가 날 자들은 그들이니까요.”
 “현재 맹 내 요직(要職)의 팔 할이 강북 지역의 인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편중인사(偏重人事)를 하지 않겠다던 전대 맹주가 결국 공약(公約)을 지키지 못한 셈이지요.”
 황의인의 말에 다시 적의인이 말을 받았다.
 “그건 원로원의 압력이 워낙 강하기도 했고 또 자신을 밀어준 강북무림인들에 대해 등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맹주 직을 마치면 그가 돌아갈 곳은 결국 고향이니까요.”
 “그것보다 문제는······.”
 적의인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맹주가 된 구양호가 순수한 무골(武骨) 출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문사(文士)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그런 그가 무림맹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는······.”
 황의인과 적의인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금포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두 배는 됨 직한 육중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단단하기보다는 비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밀실 내부가 좁게 느껴졌던지 땀을 흘리며 육중한 몸을 연신 들썩였다.
 “그는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키워온 효웅(梟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문제는 진취적이고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서 큰 출혈(出血)을 감수하고서라도 대폭적인 개혁(改革)을 단행할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과연 그 개혁의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금포인의 말에 또다시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원로원이나 강북무림 인사들이 그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요.”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결국 칼자루를 쥔 쪽은 맹주 쪽, 과연 신임 맹주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줄곧 아무 말도 않은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불안한 안색에 비해 노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반쯤 감고 있던 노인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강호는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지 정의니 어쩌니 해서 인기를 좀 끌었다고 한낱 문사 나부랭이가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나지막한 노인의 말에 모두들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으며 그에 걸맞는 힘도 있었다.
 그때 금포인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양호에게는 분명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겁니다. 그게 무공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죠.”
 “그렇겠지. 누구나 비장의 한 수는 숨겨두기 마련, 그도 분명 마지막 한 수가 있겠지.”
 노인은 말에 모두들 고개를 숙여 수긍했다.
 이번 결과는 노인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암중(暗中)으로 이번에 구양호와 맹주 자리를 다툰 남궁단백(南宮蛋白)을 지원했었다.
 남궁단백은 강호사대세가(江湖四大世家) 중 하나인 남궁가의 현 가주(家主)인 남궁혁련(南宮赫蓮)의 둘째 동생이었다.
 손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고 패배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었다.
 거기다가 강북무림 전체의 지지가 더해졌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한번 시험해볼 필요가 있겠어.”
 노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까 두렵습니다.”
 금포인의 조심스런 말이었다.
 상대는 신임 맹주, 함부로 대할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물려는 뱀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 사망곡(死亡谷)에 기별을 넣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금포인이 노인의 심기를 거슬리는 줄 알았지만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금포인이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겠지.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걸세. 그 정도만 해주어도 충분해.”
 말을 마친 노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노인에게 다른 이견(異見)을 제시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모두들 앞으로 일어날 폭풍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제2장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유시(酉時)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려왔다.
 맹 내의 모든 공식적인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모든 하급 무사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유시 타종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호단 제이 경비대 소속의 장이(張二)는 그러하지 못했다. 오늘이 바로 그가 야간 경계를 서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달의 반을 서는 야간 근무지만 오늘만큼은 피해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오늘은 바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여 열리는 제이 경비대의 신년회(新年會) 날이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행사였기에 좋은 술과 안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내 돈 안 내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드는 공식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한 해 운수가 얼마나 나쁘려는지 오늘의 북문 첨탑(尖塔) 근무자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입술이 한 자나 나와 툴툴거리며 걷고 있던 장이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의 두 눈이 커졌다.
 저 멀리 빈 연무장에서 한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이가 두 눈을 비벼가면서까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것은 바로 한 자루의 검(劍) 때문이었다.
 한 자루의 검이 그 사내의 주위를 마치 춤을 추듯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엇! 저게 뭐지?’
 장이가 다시 두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떴지만 검은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샤라라랑!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뽑듯이 검이 꿈틀거렸다.
 선(線)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끝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쉴 새 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고수들이 주변의 사물을 내공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격공섭물(隔空攝物)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가 알기로 그것은 고수들끼리 술잔이나 날려 주고받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조차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자신과 같은 하급 무사들이 그러한 고매한 수를 견식할 기회가 쉽게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저 혼자서 살아 움직이는 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검 끝에 줄이 매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장이는 가뜩이나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장이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웅장한 그림을 완성한 검은 사내는 등 뒤의 제 집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이는 지금 자신이 죽기 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경지를 넘어 심검(心劍)의 초입 단계로 들어서려는 무공의 경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검기가 그려내던 그림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장이의 뒤로 누군가 다가섰다.
 장이가 돌아보니 현무단주 혁월이 마치 ‘자네 여기서 뭐 하나?’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이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관에게 인사를 하는 것조차 잊었다.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 연무장을 향해 손가락을 폈다.
 입에서는 인사 대신 ‘어, 어’라는 말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장이의 손짓에 혁월이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혁월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이는 마치 조금 전에 본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물어볼 사람이 생겼다는 반가움에 연무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이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물음 대신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전에 그곳에 서 있던 사내가 정말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에 저곳에··· 그러니까···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무서운 누명이라도 쓴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는 장이를 보며 혁월의 인상이 굳어졌다.
 “무엇인가 헛것을 본 게로군. 이만 가보게.”
 혁월의 차가운 시선에 대충 허겁지겁 인사를 하고 물러서던 장이는 다시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 넓은 연무장은 자신이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장이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게 아닐까?’
 장이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그러다 문득 아까 그 연무장의 사내가 어디서 많이 본 사내였다는 것을 생각해냈지만 왠지 무서운 것을 보았다는 기분 때문에 그가 누구였는지 통 떠오르지 않았다.
 정초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별 헛것이 다 보인다는 생각에 장이는 연신 침을 뱉었다.
 그러나 장이는 자신에게 불쾌한 시선을 쏘아붙였던 혁월이 그 빈 연무장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연무장 구석의 나무 위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린 것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진작 개인 연공실을 마련해주었어야 하는데······.”
 혁월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맹 내에서는 되도록 조심했어야 하는데······.”
 나무에서 뛰어내린 사내는 바로 우이였다.
 “갑자기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잠시 검을 놀려본다는 것이 그만··· 죄송합니다.”
 무인이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는 게 어찌 미안한 일이겠는가?
 다만 현재 우이의 무공 수위는 맹 내에서도 단지 몇 명만이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고 그렇기에 일개 조장에게 개인 연공실을 제공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이를 위해 혁월이 자신의 개인 연공실을 쓰도록 배려해주었지만 우이는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그는 매일 새벽 산에 올랐다.
 “자네에게는 여러모로 미안하네.”
 사실 장이가 두 눈이 휘둥그레 넋이 빠져 있을 때 혁월 역시 우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무공 수위가 이기어검(以氣馭劍)의 단계까지 들어섰을 것이라 단지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직접 보고 나니 혁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경지가 완숙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단지 검(劍)을 조종하는 단계를 넘어서 어검술을 이용해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혁월로서는 단지 짐작에 불과할 뿐이어서 정확히 우이가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이의 무공은 현재 최절정(最絶頂)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당금 무림의 가장 뛰어난 검의 명가인 무당(武當)과 화산(華山)의 장문인들이 과연 어검술을 구사할 수 있을까?
 무당오검(武當五劍)이나 화산삼수(華山三秀)들 중 그 누구도 어검술을 사용했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마도 심검합일(心劍合一)의 경지에서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 정도가 아닐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재능 있는 이가 좋은 스승 아래서 평생을 부단히 연마했을 때 비로소 중년을 지나야 얻을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우이는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이든지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듯이 우이 역시 무공에 관한 한 천재(天才)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개 보표의 무공치고는 너무 넘쳤다.
 그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는 것일까?
 십 년을 함께해온 그였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그다.
 두 사람은 연무장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말없이 걸었다.
 무심코 바라본 우이의 옆모습에 혁월은 마음이 아파왔다.
 곧은 이마와 강직해 보이는 턱 선 사이로 오랜 시간 쌓여온 피곤함이 곳곳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십 년간 그는 두 명의 맹주를 호위했고 한 번의 커다란 전쟁을 치렀다.
 그 혼란의 와중에 그는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냈다.
 극악한 난세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맹주는 살아서 임기를 마쳤던 것이다.
 십 년 전, 스무 살의 우이가 혁월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제 검은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고 싶습니다.”
 
 그 환한 미소의 청년이 이제 서른이 되었다.
 그사이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자신의 검에 묻혀야만 했던가?
 그는 항상 그것을 괴로워했다.
 더 이상 강호에 상대가 없을 것 같은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는 것도 혹시 더 이상 자신의 검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혁월은 짐작할 수 있었다.
 혁월이 저 멀리 보이는 주점을 보며 말했다.
 “한잔할까?”
 
 담린과 신입 무사들은 세 개의 방을 배정받았다.
 제갈혜와 냉하연이 한 조가 되었고 담린과 남궁소천, 하윤덕이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나머지 방에는 물론 오령과 심한진이 배정되었다.
 여러모로 서먹했지만 그나마 넉살 좋은 하윤덕 덕분에 적어도 담린은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윤덕은 덩치가 크면 말수가 적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정면으로 깨는 존재였다.
 그는 올해 스물둘이라고 했고 이곳에 오기 전 강호 이곳저곳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많은 말만큼이나 아는 것도 많았는데 특히 각 지방마다의 고유 음식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항주(杭州)의 초리척(炒里脊)은 요리가 너무나 맛있던 나머지 자신의 혀까지 다 씹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네. 광주(廣州)의 백운저수(白雲猪手)는 고승의 계율(戒律)을 깰 정도로 맛이 있다고 전해지지. 광동성(廣東省)의 노파병(老婆餠)은 그야말로 껍질이 쫄깃쫄깃해서······.”
 그에 비해 남궁소천은 정말로 말수가 적었다.
 담린은 남궁소천이 해야 할 말을 혹시 하윤덕이 대신 다 해 버려서 그가 말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간혹 자신의 능력보다는 배경만 믿고 까불어대는 천방지축(天方地軸)들이 있다.
 물론 그것도 아무나 천방지축일 수는 없다.
 그러한 자들의 필수 조건은 믿을 만한 배경과 적당한 과잉보호, 그로 인해 생성된 빗나간 특권 의식과 어설픈 자만심 등이었다.
 다행히 남궁소천은 그러한 부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한 사내였다.
 그러한 점들은 담린이 그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
 담린은 몰락한 변두리 무가(武家) 출신이고 설령 자신의 가문이 번창했다 하더라도 남궁 가문과의 비교는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이랄까? 어쨌든 담린은 남궁소천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빈둥거리다 보니 이틀이 지나갔다.
 담린은 마지막 휴가일지도 모를 시간들을 이대로 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여자 대원들의 방 앞을 하릴없이 기웃거리는 하윤덕과 말없이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남궁소천을 뒤로하고 담린은 맹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외출은 했지만 갈 데가 없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처음 소향을 만났던 주점으로 향했다.
 낙양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이곳저곳 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내일의 훈련을 앞두고 한가하게 유람이나 다닐 처지도 아니었다.
 
 간단히 술이나 한잔하자는 생각에 주점 안으로 들어선 담린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심한진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얼굴이나 익힌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딴 자리에서 술을 마시기도 뭣해서 담린은 그의 자리로 다가갔다.
 “앉아도 될까?”
 잠시 담린을 응시하던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나도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구.’
 둘은 말없이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던 술자리는 생각 밖으로 흥취가 있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는 것도 심한진과 같은 사내와라면 제법 어울렸던 것이다.
 “자네는 왜 이곳에 지원했나?”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담린은 궁금했다.
 그가 보기에는 심한진은 그다지 조직 생활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떠돌이 낭인의 느낌이랄까?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론 기대하지 않은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난 살수(殺手)가 싫어.”
 대답을 마친 심한진은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도 한 사람처럼 연속으로 두 잔의 술을 들이켰다.
 살수가 싫어서라고?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라서 담린은 잠시 자신이 무엇을 물어보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던가?’
 잠시 혼란스런 표정의 담린에 보충 설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심한진이 말했다.
 “이곳이라면 살수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 말에 담린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그 살수들을 마음껏 해치우기 위해 호위 무사에 지원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헉! 설마?’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담린이었다.
 “자네는?”
 술기운 탓인지 평소와는 달리 심한진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심한진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 사내의 약점은 술인가?’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대답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담린에게 있어 이 물음만큼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대답이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호위 무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자넨 꿈을 이루었군.”
 그 말에 담린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 셈이지. 하지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잖은가. 그걸 넘어야 되니까.”
 그때 심한진의 시선이 주점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담린이 그의 시선을 따라 그곳으로 돌아보았다.
 두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는데 바로 제갈혜와 냉하연이었다.
 그녀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담린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들도 가볍게 인사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담린이 일어서서 말을 건넸다.
 “한잔하러 오신 거면 합석하시는 게 어떨까요?”
 평소의 그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을 하고 나서 담린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헛!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거절당하면 어쩌려고······.’
 담린의 소심한 걱정은 잠시 머뭇거리던 냉하연과 제갈혜가 그들이 앉은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해결되었다.
 두 여인은 그사이 많이 친해진 것 같아 보였다.
 주점 안에 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제갈혜와 냉하연에게로 집중되었다.
 두 미녀는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해 그런 그녀들과 합석하는 담린은 우쭐해졌다.
 이 순간 누군가 박수라도 친다면 손을 흔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심한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목석같은 사내였고 담린은 그런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어떠한가?’
 그녀들이 다가오니 심장부터 두근거렸다.
 그녀들은 앞으로 자신과 동료가 될 사람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게 사내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린의 의지는 그러하였지만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졌다.
 “제, 제가 주점에 놀러 가자고 혜 언니를 졸랐어요. 전, 전 한 번도 이런 곳에 술을 마시러 와본 적이 없거든요.”
 냉하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냉막한 심한진조차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자주 오게 될 겁니다.”
 담린의 근거 없는 말에 냉하연이 젓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전, 전 이런 주점에 꼭 와보고 싶었어요. 고수들이 이런 젓가락을 날려 악당들을 물리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냉 소저께서는 왜 이곳에 지원하셨나요?”
 담린에게 정작 궁금한 것은 제갈혜 쪽이었지만 질문은 냉하연에게 했다.
 “아, 아버지께서 이곳을 추천해주셨답니다. 제 성격이 너무 소심해서··· 자주 말을 더, 더듬거든요. 그것을 고쳐야 한다면서······.”
 “그렇게 심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담린의 말에 다시 냉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는 사람 앞에선 그나마 괜찮아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 앞이거나 긴장하면 온몸의 힘이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답니다. 사실 이번 시험에서도 검을 놓쳐서 떨어질 뻔했답니다.”
 호위 무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무공을 가졌음에도 그렇게까지 긴장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이한 경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합격했다는 것은 그녀의 무공이 자신이나 다른 동기(同期)들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담린이 제갈혜를 쳐다보자 제갈혜가 살짝 웃었다.
 마치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냐’라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담린의 볼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오,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현무단 무사님들이신가?”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어느 틈에 그들의 주위에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다가와 있었고 그사이에 그냥 작다고 하기엔 너무 땅딸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앞서의 말은 바로 그 사내가 이죽거린 것이었다.
 그들 역시 담린 등과 같은 복장을 하였는데 왼쪽 가슴의 맹(盟) 자 아래에 용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청룡단 무사들인 것 같았다.
 이들은 다른 자리에서 진탕 마시고 돌아가려던 참에 담린 일행을 본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꼭 다른 이의 행사(行事)에 침을 뱉고 싶어 하는 이도 있는 법, 바로 이 작달막한 사내가 그러했다.
 “미인들과 술을 마시니 좋겠습니다, 후배님들.”
 주위의 사내들이 이죽거리며 웃었다.
 반면 담린 일행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특히 심한진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그 모습에 담린은 내심 불안해졌다.
 누군가 사고라도 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내일 최종 훈련을 남겨둔 상태에서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담린은 벌떡 일어났다.
 “어느 소속이신지요?”
 담린 딴에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묻는다고 물은 것이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후배님?”
 그는 후배님이란 말에 힘을 팍팍 주었다.
 주위 사내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담린은 오로지 사고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우린 남자 후배님들에게는 관심 없다네. 단지 여기 계신 미녀 후배님들과 술 한잔하고자 하는 바람일 뿐이지.”
 칼을 뽑아 상대의 입을 찢을 수 없다면 일단 참아야 했다.
 사내가 의자를 끌고 와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술잔을 제갈혜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배에게 한잔 따라주시지?”
 당황한 냉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반면 제갈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옆에 앉은 심한진의 표정이 착 가라앉은 것이 검이라도 뽑아 그자의 손을 베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제갈혜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병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오죽하면 그 말이 정녕 그녀의 저 아름다운 입술 사이에서 출발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모두들 놀랐다.
 그녀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욕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꽈당!
 사내가 의자를 뒤로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사내의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으면 담린은 순간적으로 홍면소견(紅面小犬)이란 별호가 떠올랐다.
 정말로 지금의 저 사내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을 그에게 하지는 못했다.
 사내가 도끼눈을 뜨고 제갈혜를 노려보자 그래도 동료랍시고 뒤쪽에 서 있던 사내들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동시에 담린 일행들도 다 같이 일어나 서로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젠장, 결국 일이 터지는군.’
 담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아무도 무기를 뽑아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해도 같은 무림맹 내의 무사들끼리 칼부림을 벌인다면 그 결과나 처벌은 끔찍할 것이다.
 양쪽 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결될 상황도 아니었다.
 상대는 열 명.
 청룡단 무사들이라면 현무단 무사들과는 거의 무공 수위가 동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심한진이나 제갈혜에게 분명 숨겨진 한 수가 있어 보였지만 하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냉하연을 제외하면 십 대 삼.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청룡단원들의 뒤쪽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들렸다.
 “비겁한 놈들.”
 그 말에 고개를 돌리던 맨 뒤쪽의 청룡단원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를 부수며 날아갔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바로 남궁소천이었다.
 그 뒤로 하윤덕과 오령의 모습도 보였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몰라도 든든한 원군이 도착했다. 하지만 좋은 점은 그것뿐이었다.
 대화로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청룡단원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신형들을 날리며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주점 안은 곧 난장판이 되었다.
 
 낙양성의 가장 큰 표국인 만리표국(萬里鏢局)을 나서는 소향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곳의 표두이자 소향과는 친구인 유성검(流星劍) 사마령(司馬寧)이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도대체 해마다 어디로 보내는 거야? 이제 말해줄 때도 됐잖아?”
 사마령의 말에 소향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일 년에 은자 이백 냥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닌데, 집으로 보내는 것 같지는 않고······.”
 사마령의 집요한 추궁에 소향이 툭 쏘아붙였다.
 “표사면 물건이나 날라주면 되지 뭔 궁금증이 그리 많아?”
 “표사라니? 표사라니? 내가 표두가 된 지 벌써 이 년째야. 자꾸 표사라고 부를래?”
 “넌 내게 언제나 표사야. 물건 잃어버리고 돌아와 질질 짜던 그 귀여운 표사.”
 소향의 한마디에 사마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향과 사마령이 만난 지도 벌써 육 년이 지났다.
 공교롭게도 소향이 처음 무림맹에 입맹했을 때 사마령도 만리표국의 표사로 뽑혔다.
 낙양 땅의 몇 안 되는 큰 조직들이었기에 자연 무림맹과 만리표국은 서로 많은 교분이 오고 갔다.
 무림맹의 물자 수송은 수송대(輸送隊) 담당이지만 간혹 만리표국에 일을 맡기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소향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치곤 시원한 성격이었고 사마령은 그런 소향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러던 중 사마령이 참여했던 표행에서 운송하던 표물이 녹림(綠林)에게 몽땅 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통과세(通過稅) 명목으로 표물 가치의 일 할 정도의 돈을 받고 표국의 체면을 세워주는 게 상례(常禮)였는데 당시 구화채(九樺寨)의 채주 상통달(相通澾)이 더럭 표물에 욕심을 내버렸던 것이다.
 물건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사마령은 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그 모습을 소향이 보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는 소향에게 눈물 질질 짜는 애송이 표사로 남게 된 것이다.
 “그건 오해야. 그때 마침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물이 난 거였다고.”
 “오호, 그러셔?”
 소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때야말로 그녀의 심술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려는 때라는 것을 잘 아는 사마령은 재빨리 말을 돌리려 애썼다.
 “알았어. 인정해, 인정한다구. 제길,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
 “뭐, 그땐 어렸으니까.”
 “그러고 보니 세월이 꽤 흘렀구나.”
 사마령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니?”
 무심히 말을 꺼낸 사마령의 시선은 엉뚱한 곳을 향해 있었다. 마치 묻지 않아야 될 말을 물은 사람처럼.
 소향은 말없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양 떼 모양의 구름이 하늘 가득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미안해.”
 한참이 지난 후에 힘겹게 소향이 말했다.
 사마령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매달렸다.
 그는 처음 소향을 보았을 때부터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소향은 당시 일에 미쳐 있었고 자신 역시 이제 막 출발한 풋내기 표사였다.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사마령은 그 후 몇 년간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친구로 지내왔다.
 이 년 전 표두가 되던 그 감격스러운 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랑을 시작한 상태였다.
 어색한 몇 개월이 지난 후 그들은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왔지만 소향을 향한 사마령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다.
 소향 역시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미안하기는, 친구 사인데 무슨 말이 그래?”
 사마령이 웃으며 말했다.
 “고백 아직 못했지?”
 소향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바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해도 결국 이렇다니까.”
 사마령이 과장스럽게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사실 그가 날 거부할까 두려워.”
 “널 거부하다니, 세상에 어떤 남자가 널 거부할 수 있겠어?”
 소향이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소향이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바보. 자신감을 가져. 넌 충분히 그래도 되는 여자야.”
 사마령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한 방향만 보고 있는 사랑들이다.
 사마령은 소향이 누구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일 년 전쯤 속으로만 애를 태우고 있는 소향이 하도 답답해서 그를 찾아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만나서 모든 이야기를 다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일 뿐 소향의 사랑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결국 자신이 풀어야 할 일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매화조 대원인 정달이었다.
 “가봐야 될 것 같네. 잠시도 쉴 틈을 안 주는군.”
 소향이 사마령을 보며 말했다.
 “혹시 그가 거절하면··· 가지고 있는 거 다 던져 버려.”
 “뭘 던져?”
 “그거 있잖아.”
 “뭐?”
 궁금한 건 못 참는 소향이었다.
 “비도(飛刀) 말야. 가지고 다니며 폼만 잡지 말고 다 날려 버려.”
 사마령이 비도를 던지는 흉내를 과장되게 내며 말했다.
 소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비도에 마음을 실을 수만 있다면 벌써 그랬을 것이다.
 “잘 있어.”
 “그래, 잘 가. 힘내고. 참, 부탁한 일은 내게 맡겨.”
 사마령의 든든한 눈빛에 소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한달음에 달려온 정달이 바쁘게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소향이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오는 도중에 신입 대원들이 패싸움을 벌였다는 정달의 말에 소향은 웃음부터 나왔다.
 옛날 추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 역시 싸움을 벌였었고 그 상대는 바로 자신이 속한 현무단 매화조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후배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기강(紀綱)을 세우려다 미친년처럼 달려든 소향에게 톡톡히 당했던 것이다.
 도착하고 보니 객잔은 난장판이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들이 뒹굴었으니.
 신입 대원들은 한 옆에 일렬로 서서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청룡단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무단 신입 대원들에 비해 청룡단원들의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대부분 시퍼렇게 멍이 들었거나 코피를 흘리는 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겼나 본데?’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기를 사용한 자가 있나?”
 소향의 말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싸우기는 했으되 칼부림을 일으키진 않은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누군가 황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청룡단 제이조장 군백(軍白)이었다.
 그도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소향과 가볍게 인사를 건넨 군백은 자신의 조원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보아도 깨진 쪽은 청룡단이었다. 입소문이라도 나면 잘잘못을 떠나 사기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
 홍면소견이 나섰다.
 “저들이 먼저 기습을 가했습니다.”
 “기습?”
 군백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사실인가?”
 군백이 신입 대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먼저 공격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기습은 아니었습니다.”
 남궁소천이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그거지!”
 어쨌거나 모든 책임을 현무단 쪽으로 몰아가려는 가련한 노력의 군백이었다.
 그때 소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이었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갓 들어온 현무단 신입 무사들이 청룡단 선배들을 이유 없이 기습하다? 멋지군. 그럼 우린 머리가 돌아 버린 녀석들을 뽑은 것이겠군.”
 그 말에 군백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소향이 차분하게 묻자 냉하연이 울먹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울먹이며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더듬거리긴 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가련함과 애처로움을 불러일으켰고 두 명의 청룡단원의 코뼈를 내려 앉힌 그녀를 완벽한 피해자로 만들어주었다. 얻어터진 청룡단원들마저 그녀를 동정할 정도였다.
 끝으로 말을 마친 그녀는 이제 울음까지 터뜨렸다.
 완벽했다.
 잠자코 냉하연의 이야기를 듣고 난 소향의 인상이 굳어졌다.
 “한마디로 선배란 것을 빌미로 여자 후배들을 희롱하려 했다 이거네?”
 소향이 땅딸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실이냐?”
 차가운 소향의 시선에 땅딸보는 오한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살기(殺氣)에 놀란 군백이 막아섰다.
 “잠깐, 소 호위.”
 군백이 황급히 뱉은 말에 소향의 눈에 불이 붙었다.
 “소 호위? 너, 나보다 일 년 늦게 들어왔지? 그런데 선배님이라고 안 부르고 소 호위라고?”
 소향의 막말에 군백의 인상이 굳어졌다.
 “현무단과 청룡단은 엄연히 다른 조직인데 굳이 선후배를 따질 수야······.”
 군백이 갑자기 말을 딱 멈추었다.
 방금 전 자신의 말이 곧 부하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소향은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선배랍시고 신입 무사들에게 시비를 건 청룡단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었다.
 보통 무림맹의 각 조직들은 서로 다른 조직에 관해서는 선후배를 따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서로 친해지다 보면 나이나 입맹 년도에 따라 서로 선후배, 형 동생이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친해진 다음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군백은 기세 싸움에서 졌고 어느 쪽이 잘못인가는 이미 결정이 나 버렸다.
 “따끔하게 제가 교육시키겠습니다. 대신······.”
 소향을 향해 군백이 말끝을 줄였다.
 책임은 이쪽에서 지겠으니 되도록 입소문이 나지 않게 부탁하는 것이리라.
 하긴 그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소향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군백은 힘없이 돌아서 나갔다. 그 뒤를 청룡단원들이 줄줄이 따라나섰는데 패잔병들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들의 고생은 이제부터가 될 것이다.
 그들이 나가자 소향은 일행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누가 잘못을 했든 간에 같은 무림맹 무사들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이제 막 입맹한 신입 무사들이 겁도 없이 싸움을 일으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 잘못입니다. 혜 소저와 연 소저에게 제가 먼저 합석하자고 하는 바람에······.”
 담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혜 언니를 졸라 여기에 오자고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냉하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섰다.
 “제가 먼저 주먹을 날렸습니다.”
 이번엔 남궁소천이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이대면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나섰다. 별달리 이유를 댈 게 없었던 하윤덕은 자신이 뚱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먹하던 관계가 이번 일로 많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자신이 입맹할 때의 동기들이 생각났다. 모두 저러했었다. 서로 보살펴주고 지켜주려 했다.
 형제보다 더 친했던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 죽거나 떠났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감추려는 듯 소향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모두 연무장으로 집합!”
 
 “올해는 대단한 녀석들이 들어왔군요.”
 “젊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이지.”
 우이가 주점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가는 신입 대원들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혁월이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신입 대원들과 청룡단원들 간의 싸움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삼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면 진작 나섰겠지만 젊은 애들의 투닥거림 정도로 생각되어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예상대로 싸움은 작은 소동으로 마무리되었고 둘은 그 눈요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소향을 보며 혁월이 말했다.
 “어서 제 짝을 만나야 할 텐데······.”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란 걸 우이는 알고 있었다.
 그도 소향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혼인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소향이라서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혼인이라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바빴던 지난 십 년이기도 했고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주점 안은 평온을 되찾았고 점소이들은 부서진 집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즘 들어 이런 객잔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강호의 모험담을 들으며 한잔 술을 마실 수 있는 그냥 그런 평화롭고 평범한 삶,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혁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이가 바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표의 삶이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일반 무사들은 호위 무사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들이 전투의 선봉에서 싸울 때 그들은 뒤에서 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호위 무사가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일반 무사들은 싸울 때와 쉴 때가 구분되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때 화끈하게 싸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호위 무사들은 달랐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내가 죽으면 또 다른 누군가도 죽는다는 부담감까지 있었다. 일반 무사가 죽으면 영웅이 되지만 호위 무사가 죽으면 죄인이 되었다.
 그 극도의 긴장감이 사람의 피를 말렸다.
 우이는 십 년간, 그것도 무림맹주 호위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피를 말려야 했다.
 자연 그가 바라는 행복은 소박할 수밖에 없었다.
 “왜 떠나지 않았나? 자네에게는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 않았나?”
 혁월이 진작부터 궁금했던 점이다.
 우이가 쓸쓸히 술잔을 기울였다.
 “떠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했습니다. 떠나는 순간 현실 도피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랬었군.”
 우이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문득 들여다본 술잔 속에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우이가 호위 무사가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인근 마을 부호(富戶)의 개인 보표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우이도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보표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골 촌구석 졸부(猝富)의 구린 뒤나 막아주는 삼류 보표였다.
 자신이 지켜주던 사람이 얼마나 악랄하고 탐욕스런 위인인지 구분하는 눈도 가지지 못했다.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갈 때 아버지는 기녀(妓女)와 나뒹구는 그자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우이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결국 아버지도 죽었다.
 아버지는 지켜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그를 위해 살수가 던진 암기를 온몸에 고스란히 맞고 대신 죽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지켜줬던 그 부호는 정작 아비가 죽자 우이에게 돈 몇 푼을 던져 주곤 곧장 자기 대신 죽어줄 새 보표를 구했다.
 그게 아버지의 삶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켜줘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갔으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보표의 가장 명예로운 죽음이 그러하다고 말했다.
 아비를 묻고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 무덤 옆에서 목을 매려다 그곳에서 사부를 만났다.
 그리고 팔 년간 무공을 배웠다.
 사부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
 산을 내려온 우이는 그 길로 혁월을 찾았는데 그때가 스무 살 때였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사부가 그에게 남겨주고 간 무공은 천하에 다시없는 절기(絶技)였다.
 사부가 끝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 이름이 너무나 커서 도리어 어린 제자에게 해(害)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최고의 보표가 되었다.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진면목을 알았지만 그가 최고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자부심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가 최고가 되면 될수록 마음속에는 하나의 애증(愛憎)이 자라났다.
 그것은 두 개의 상반된 감정으로 우이를 괴롭혔다.
 애정(愛情)은 최고가 되고자 하는 허영심을 부추겼고 증오(憎惡)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왔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제 검은 사람을 지켜주는 검이 되고 싶습니다.”
 
 십 년 전 새파란 젊은이가 던진 말이 십 년이 지난 후까지 혁월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떠나고 싶은가?”
 혁월이 물었다.
 우이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청소를 하고 있는 점소이들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부터 말인가?”
 “······.”
 우이는 과연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홀가분해지기를 바라는지 생각해보았다.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도망가고 싶은 것일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긴 정말로 쉽지 않지. 하지만 진실로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신(神)에 기대어서, 혹은 깊은 산속에 홀로 들어가 세속과 인연을 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인이 강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네. 한번 발을 내디딘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곳.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죽었을 때지. 강호는 바로 그런 곳이라네.”
 혁월은 우이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이가 말했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죽여도 별다른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죽이러 온 자나 지키려는 저나 서로 칼밥을 먹고 사는 처지이고 각자 명분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죠. 그가 한 가정의 아버지일 수도, 남편일 수도, 형이나 동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거죠. 드디어 완벽하게 살인에 대한 면역이 생긴 겁니다.”
 우이는 열병(熱病)을 앓고 있었다.
 보통 무인들이 첫 살인을 한 열댓 살 무렵에 하는 고민을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시작한 것이다.
 아마 그의 무공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리라.
 그 무공의 경지를 그의 삶이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연줄이 끊어져 저 멀리 연이 날아가는 것을 보며 울고 서 있는 꼬마 아이처럼.
 그의 무공은 끊어진 연처럼 높아만 가는데 아직 그의 삶은 울고 있는 꼬마 아이. 그 불균형(不均衡)이 드디어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라고 혁월은 생각했다.
 술이 거의 한계에 온 듯 보였지만 우이는 서슴없이 잔을 비웠다.
 “전 불의(不義)한 폭력으로부터 선(善)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려 했습니다. 하나 지금의 제 검은 살인검(殺人劍)에 불과합니다.”
 우이의 감정이 격해지며 혀가 꼬였다.
 “하지만 자네가 지켜줌으로써 누군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네. 잃은 만큼 얻지 않았나?”
 혁월은 우이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더욱 격해져 갔다.
 “만약 그 선의 기준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쩌죠? 만약 제가 지금까지 선이라고 생각하고 지켜왔던 것이 더 이상 선이 아니었을 때는요? 제가 그 불분명한 명분 아래 수없이 죽여온 그 악(惡)이 사실은 악이 아니었다면 어쩌죠? 세상에는 원래 선이나 악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면 어떡하죠?”
 이 역시 모든 무인들이 젊은 시절 한 번쯤 겪는 갈등일 것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오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죽어야 할 만큼의 악이란 게 존재할까요?”
 쿵!
 꼬부라진 혀로 억지로 말을 마친 우이의 머리가 탁자로 떨어졌다. 더 이상의 취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쓰러진 것이다.
 혁월은 홀로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다음 우이를 업고 주점을 나섰다.
 주점을 걸어 나오면서 혁월은 울고 있는 꼬마에게 잃어버린 연을 찾으러 보낼 때가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이별은 원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때론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게 바로 어른이 해주어야 할 책임이기도 했다.
 
 지난밤에 연무장을 서른 바퀴나 달린 신입 대원들은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 체력만으로 달려야 했기에 모두들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뜬 그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니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예전보다 가깝게 느껴졌고 놀랍게도 동료애마저 느낄 수 있었다.
 사람 사이의 친함에 있어 시간에 의존하는 것은 너무나 수동적인 태도이다.
 담린은 작은 계기가 긴 시간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드디어 신입 대원들의 실전 훈련의 날은 밝았다.
 그들은 처음 모였던 공터에 다시 집합했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담린은 제갈혜를 슬쩍 훔쳐보았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그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쳐다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담린의 눈길은 자꾸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도 혹시 이런 마음일까?’
 담린은 다른 동료들을 슬며시 둘러보았다.
 심한진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고 남궁소천 역시 차분한 표정이었다.
 하윤덕은 냉하연과 무슨 애긴지 속닥이며 연신 웃고 있었고 그 옆에서 큰 키의 오령은 싱거운 표정으로 머쓱하게 서 있었다.
 ‘역시 신경 쓰는 건 나뿐인가?’
 담린은 자신만이 여자에게 흔들리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의지력이 약하게 느껴졌고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담린은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간은 무기력할 따름이었다.
 담린이 그렇게 사랑에 빠져들고 있을 때 제갈혜는 떠나기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게 인연이 닿는다면 그곳에서 기연(奇緣)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네 복일 테니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분명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 눈치였다.
 그러나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라 불리는 그녀의 아버지였건만 더 이상의 말은 해주지 않았다.
 제갈혜는 아버지의 혜안(慧眼)을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모르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모르는 일은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다. 분명 아버지는 이곳 무림맹에서 천기(天氣)의 변화를 읽으신 것이다. 나와 가문의 운명을, 나아가 강호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그 무엇인가를······.’
 그녀는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
 제갈혜가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질 무렵 오령은 하윤덕에 대한 부러움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엇인가 부족함에서 불행을 느낀다.
 키가 작아 고민, 돈이 없어 고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고민······.
 늙은이는 이(齒)가 없어 음식도 못 씹는다.
 그러나 오령은 그 반대의 고민으로 지난 이십 년간을 살아왔다.
 문제는 그의 큰 키였다.
 어딜 가나 그의 머리통은 불쑥 솟아 나왔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놀림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오령은 여자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었다. 말을 더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다.
 이래저래 그는 소심한 성격으로 성장해 왔고 그나마 전통 무가(傳統武家)인 강남오가장(江南吳家莊)이라는 그의 배경이 그를 이만큼이나마 세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냉하연에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지며 이야기를 나누는 하윤덕이 부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령에겐 상대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용기는 있었지만 여인에게 한마디 말을 던질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반면 남궁소천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지금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이번 맹주 선거에서 떨어진 남궁단백은 바로 자신의 숙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림맹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충돌해왔다.
 은밀히 말하자면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항이었다.
 동생이 아버지의 마음에 꼭 드는 모습으로 클수록 그들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그 역시도 아버지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지만 한번 빗나간 저울추는 다시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집을 나오게 되었다.
 석 달을 기루에서 술만 마시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냈다.
 돈은 벌써 떨어졌지만 기루에서는 그를 내쫓지 않았다.
 자신이 남궁가의 자식이라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몰래 기루에 돈을 대주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음 날 그곳을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자란 제갈혜가 무림맹 시험에 응시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같이 응시해 버렸다.
 남들은 강호사미니 강남제일화니 하면서 그녀의 미모를 칭송하지만 그에게는 어린 시절 소꿉장난하던 친구일 뿐이었다.
 그런 점이 둘의 우정을 오랫동안 유지시켜 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무림맹 호위 무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시에 숙부의 탈락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집안의 일에는 이제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그였지만 이번 일은 그렇지가 않았다.
 분명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집에서 알고 있을 텐데도 누구 하나 연락해오는 이가 없다.
 ‘포기해 버린 걸까?’
 각오한 일이었지만 막상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앞섰다.
 그 무렵 냉하연은 귀로는 하윤덕의 수다를 듣고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등 뒤쪽으로 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고 싶어지는 마음, 누군가에 대한 관심이 그녀에게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볼수록 끌리는 사내, 하지만 왠지 다가서기 어려운 사내······.
 바로 그녀의 등 뒤쪽에는 심한진이 있었다.
 
 젊은 청춘들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던 그 시간, 혁월의 집무실에서는 소향의 언성이 한껏 높아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맹주님의 호위 책임자는 이제부터 철 호위라고 했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냐구요?”
 마치 항의라도 하는 듯한 격앙된 말투였다.
 혁월은 소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의 우이에 대한 감정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혁월을 보던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번쩍 스쳐 지나갔다.
 “혹시··· 그가 떠나겠다고 했나요?”
 소향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에게 휴가를 주었네.”
 “휴가라니요? 기한은요?”
 혁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기한이네. 그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겠지.”
 “··· 언제 떠나나요?”
 “그는 이미 떠났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소향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말이 휴가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돼.”
 그녀가 허탈하게 말했다.
 “언제까지나 그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지 않겠나?”
 변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만 혁월은 애써 변명 같은 위로를 하고 있었다.
 그녀만큼이나 혁월의 마음도 답답했다.
 그러나 소향의 귀에 혁월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이가 떠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육 년이다.
 지난 육 년간 그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올해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리라 마음도 먹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그가 떠났단다.
 “인사도 없이 가 버리다니······.”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인 적이 없는 귀한 눈물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그런 소향이 혁월은 마음 아팠다.
 소향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가 직접 나서서 둘을 연결해줬어야 했다. 둘 다 사랑에는 너무나 미숙한 젊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 때면 혁월은 십오 년 전에 집을 나간 아내가 떠올랐다.
 그가 일에 미쳐 있을 때, 지금은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도 없는 이 허무한 현무단주라는 자리를 얻기 위해 미쳐 있을 때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망을 간 것인지 실종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때는 제대로 찾지도 않았다.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생각이겠지만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기분까지 들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그녀를 찾겠다니?’
 그런 그였기에 다른 사람들의 애정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 라는 열등감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까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소향이 물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그때 문이 열리고 철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잘 왔네. 명령서, 받았지?”
 철무는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네. 하지만 잘못 내려진 것 같습니다.”
 “아니네. 제대로 간 것이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철무가 두 눈을 껌벅였다.
 “앞으로 당분간 자네가 신임 맹주님을 책임져줘야겠네.”
 “네? 그럼 우이 형은?”
 “당분간 휴가를 주기로 했네.”
 그제야 놀란 철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향의 넋 나간 표정을 보며 철무는 내심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지난 십 년간 단 한 차례도 쉬지 않은 우이였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휴가를 얻어 쉰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우이 형은 언제 복귀하나요?”
 꼭 우이 형이라 부르는 철무였다.
 철무에게 우이는 형이었고 선배였으며 그리고 자신이 본받아야 할 스승이었다.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왕 쉬게 해주는 거 푹 쉬게 해주자구.”
 혁월의 말에 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우이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그도 걱정을 많이 하던 차였다.
 “지금 신임 맹주님은 신진회 고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으로 오고 계시네. 하남성(河南省)에 들어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 책임이네. 철무 자네는 신입 대원을 제외한 매화조 전 대원들을 이끌고 오늘 당장 출발하게나. 맹주님은 이틀 후에 정주(鄭州)에 도착하실 예정이네. 거기서 맹주님 호위를 인수받고 무사히 모셔오도록. 중간에 어떠한 일이 생겨도 취임식 전까지는 돌아와야 하네.”
 “네!”
 이유야 어쨌든 처음 맡는 큰 임무였다.
 철무는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이때까지 맹주 호위는 우이가 전담했고 철무는 맹주의 자식들을 주로 호위해왔었던 것이다.
 이제 그런 그에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철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반면에 소향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왠지 우이가 이대로 영영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소 호위는 이번 신입 대원들의 훈련을 맡아주게.”
 잠시라도 소향을 쉬게 해주려는 혁월의 배려였다.
 아무래도 일선(一線)에서의 업무보다는 그것이 편할 것이다. 또 천방지축인 신입 대원들과 함께 있다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소향은 힘없이 대답하고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혁월이 말했다.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네.”
 나가려던 소향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리고 그는 지금보다 더욱 성장해서 돌아올 것이야.”
 혁월의 말은 희망적이었지만 창밖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 제3장 사망곡
 
 강호만큼 복잡한 은원(恩怨) 관계가 존재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은혜를 주고받는 것이야 주위의 부러움과 세간(世間)의 좋은 모범이 되어 그것이 설사 천 리 밖 주정뱅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해도 나쁜 일이 아니겠지만 어디 강호란 곳이 그러한가?
 친구보다는 원수가 많은 곳이 강호이고 제 손으로 그 한을 다 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자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살수 집단(殺手集團)이었다.
 무림(武林)이라는 말이 생긴 이래로 살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어느 시대, 어디에서도 곱지 않았다.
 무림의 본질인 협(俠)과 의(義)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비무조차 존재하지 않는 살인의 세계, 그것이 바로 살수의 세계가 아닌가?
 기습에 의한 살인, 그것이 제아무리 예술과 같은 살인술(殺人術)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니라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기존의 무인들이 보기에는 비겁한 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저주받은 천형(天刑)의 운명이 살수라지만 그런 그들 중에도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불꽃처럼 짧은 생(生)을 살다 갔지만 그 짧은 생은 무림인들에게 살수의 무서움을 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살수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숨겨진 칼날의 무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 칼날을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파일방을 위시한 강호 대파(江湖大派)들의 토벌단 구성으로 해결되었다.
 수많은 살수 조직들이 혈배(血杯)를 마시는 순간 벌 떼처럼 달려드는 토벌대에게 도륙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수 조직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강호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권 단체(便權團體)들보다 가장 큰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유혹은 죽음의 공포보다도 강렬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살수 문파들의 활동은 은밀하고 신중해졌다. 반면 토벌 활동은 몇 년에 걸쳐 쉬지 않고 계속되기 어려웠고 여러 문파의 연합체라는 성격상 결국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파일방은 그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수 조직들을 눈감아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당금의 가장 무서운 살수 조직 중 하나인 사망곡(死亡谷)에 한 통의 밀서(密書)가 날아들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불리는 사망곡주(死亡谷主)였지만 그는 그 한 장의 밀서 때문에 머리를 싸매며 고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사망삼살(死亡三殺)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가뜩이나 창백한 곡주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거절해야 합니다.”
 일살(一殺)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살은 누가 보아도 살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가득한 중년 문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일살은 가장 뛰어난 살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안과 밖이 하나같기가 힘들다는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깬 인물이었다.
 그는 겉만 문사 같았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박한 지식과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망곡이 강호의 가장 무서운 살수 문파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일살의 그러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살(二殺)과 삼살(三殺)의 말은 달랐지만 뜻은 하나였다.
 곡주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임도 하지 않은 무림맹주를 암살했다가는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무림 공적(武林公敵)으로 몰리게 될 게 뻔합니다.”
 일살의 말은 백번 생각해도 옳은 말이었다.
 지금 강호의 모든 시선이 새로운 맹주에게 향해 있지 않은가?
 이 시점에 암살 시도라니?
 이건 애초부터 거론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한 통의 밀서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할 단순한 사안이었지만 밀서를 보낸 쪽은 이러한 것을 미리 염두에라도 두었는지 자신들의 정체를 당당히 밝혀놓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의뢰인의 이름은 결코 신임 맹주에 비해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 않아도 우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네.”
 모두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해도 위험하고 안 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일살의 의지는 단호했다.
 “비록 우리가 성공한다 해도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토벌대의 선두에서 우리를 공격하겠지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를 이야기함이리라.
 하지만 문제는 말을 듣지 않는 개를 사냥꾼이 바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잊으셨습니까, 그곳엔 그가 있다는 것을? 아직도 그가 그곳에 있다면······.”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일살이 말한 그곳이 어디인지, 그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어찌 잊으랴? 잊히길 바랐던 것뿐이다.
 십 년 전의 악몽 같은 일들이 떠올랐다.
 사망칠살(死亡七殺)을 사망삼살(死亡三殺)로 만들어 버린 사내.
 당시의 사망칠살은 강호의 가장 뛰어난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살인(殺人)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고 실패를 모르는 무적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혼자 행동했음에도 그들의 살수행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死神)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에게 내려지는 죽음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막내 칠살(七殺)이 살수행(殺手行)에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을 때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위험한 임무였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의뢰였다.
 의뢰자가 바로 마교였던 것이다.
 모두가 함께 갔어야 했지만 그들은 원칙을 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무인들을 향한 그들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칠살이 죽었다.
 언젠가는 모두들 그렇게 될 운명임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막내가 먼저 간 것이 안타까웠다.
 유난히 막내와 가까웠던 오살(五殺)이 다음날 사라졌다.
 그러나 복수를 하기는커녕 남은 형제들에게 슬픔과 증오의 크기만을 더하며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또다시 살수행을 실패한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살수행의 성공이나 복수의 기쁨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원칙을 깨고 합공을 시도했지만 사살(四殺)과 육살(六殺)의 죽음만 더한 채 그들은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그 일을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복수를 하고자 하는 생각도 버렸고 슬픔도, 분노도 모두 잊었다.
 의뢰를 실패한 것에 대한 마교의 보복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잊어버렸다고 생각된 과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지키고 있는 한······.”
 일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살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삼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차라리······.”
 잠시의 침묵을 깨고 일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살의 말에 모두들 침을 삼켰다.
 사망곡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일살은 언제나 해결책을 찾아냈다.
 다행히 사망곡주는 옹졸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자신보다 뛰어난 수하를 경계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망곡은 숱한 위기를 무사히 넘겨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지금도 일살은 사망곡을 수렁에서 건져 내줄 해결책을 찾아냈을 것이다.
 일살이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노인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가 이야기를 마칠 때쯤에는 모두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이살이 이끄는 서른 명의 정예 살수들이 소리 없이 사망곡을 빠져나갔다.
 
 ***
 
 무림맹 주작단(朱雀團) 은영대(隱影隊) 제삼조장 허정(許程)의 발걸음이 그의 급한 마음만큼이나 빨라졌다.
 그의 손에 들린 한 통의 전서에는 맹 내의 일급 상황에만 사용된다는 자주색 매듭이 묶여 있었다.
 지난해 초 삼월에 있었던 강남 풍화장(風火莊)과 강북의 혈옥(血獄)과의 무력 충돌 이후 근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게다가 곧 있을 맹주 취임식을 앞두고 주작단원 전원에게 비상이 내려진 지금 이 자주색 매듭의 의미는 무척이나 컸다.
 무림맹 최고의 무력 단체라 불리며 맹 외의 일을 담당하는 청룡단(靑龍團), 맹 내의 수비를 담당하는 백호단(白虎團), 맹주와 그 가족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현무단(玄武團)과 함께 무림맹 중심 사단의 하나인 주작단은 강호의 모든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일종의 첩보 기관이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허정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은영대 조장들에게만 특별히 전수된다는 강호팔대보법(江湖八大步法)의 하나인 은영보(隱影步)를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그가 그토록 급하게 달려가는 것은 정보를 다루는 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때론 촌각(寸刻)의 차이가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바람처럼 달려오던 그의 신형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그가 멈춰 선 곳은 지금껏 달려왔던 풍경들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으며 그의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처음 이곳을 찾은 이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이곳이 바로 무림맹 내에서 가장 신비롭고 은밀한 조화림(彫花林)의 입구였던 것이다.
 세외선경(世外仙境)의 아름다움 앞에서 허정의 행동은 보다 신중해졌다.
 그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취해 목숨을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조화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으로 오묘한 기문진식이 설치되어 있어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토록 무서운 절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작단주 사연랑(司蓮琅)의 거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보아선 단순한 꽃밭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바로 오행(五行)과 사상팔괘(四象八卦)가 역(逆)으로 혼합되어 만들어졌다는 무극오행진(無極五行陣)이었다.
 허정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삼 일에 한 번씩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의 위치가 바뀌었고 그것은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그가 한 발짝만 헛딛는다면 오늘 아침에도 잔소리를 해댔던 그의 아내는 이 밤이 가기 전에 무림맹으로부터 남편의 죽음에 대한 위로금(慰勞金)을 받게 될 것이다.
 조화림을 빠져나온 허정이 사연랑이 거처하는 작은 모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요?”
 허정을 맞이하는 사연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였지만 허정의 손에 들린 자주색 매듭을 보고는 가볍게 두 눈이 흔들렸다.
 허정은 전서를 사연랑에게 공손히 건네면서 말했다.
 “특급(特級) 상황입니다.”
 사연랑이 전서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사망곡?”
 “네, 그들이 움직였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급(一級)으로 분류된 살수(殺手)가 서른 명이나 함께 움직였다는 겁니다. 게다가······.”
 “일급 살수가 서른 명씩이나?”
 사연랑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지휘자가 바로 이살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사연랑의 기다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자는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걸로 아는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망곡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이살이 일급 살수 서른 명을 데리고 나왔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문제는 그들이 향한 행선지가 바로······.”
 “설마?”
 사연랑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네, 바로 정주(鄭州)입니다.”
 사연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난 칠 년간 단 한 번도 살수행을 나서지 않았던 이살이 함께 움직인 것과 그 행선지가 바로 정주라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마 일선에서도 이 점을 주목해서 특급 정보로 분류한 것 같습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십 대 후반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사연랑이었다.
 언제 보아도 시원해 보이는 그녀의 이마가 살짝 찡그러졌다.
 십 년 전 사망칠살은 가히 전설적인 살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후배 살수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금분세수라도 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해 모두들 의견이 분분했지만 내막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연랑이 바로 그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들이 왜 은퇴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후 그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들이 몸담았던 사망곡을 강호 최고의 살수 집단으로 만드는 일에만 주력했다.
 주작단에서는 그들이 사망곡에 은거한 채 살수 양성에만 힘쓰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계속해서 주시해오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들이 왜 갑자기 다시 움직인 것일까?’
 분명 뭔가 냄새가 났다.
 하지만 행선지가 정주라는 점만으로 신임 맹주와 연관시키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움직임은 포착된 상태고 미리 밝혀진 이상 어떻게 대처하느냐만이 남았다.
 “현재 맹주 쪽에는 누가 나갔나?”
 “철무 호위가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 호위는? 원래 맹주 호위는 그의 담당이잖아?”
 사연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휴가 중이랍니다.”
 “이런!”
 사연랑은 황급히 초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망곡의 이 위험스러운 움직임에도 내심 여유로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놀러 갔단다.
 ‘도대체 이런 시기에? 무슨 생각으로?’
 사연랑은 우이의 진면목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혁월의 집무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그 뒤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허정이 바짝 뒤따랐다.
 
 “호위 무사란······.”
 사흘 동안 술독에만 빠져 있던 소향이 부스스한 얼굴로 첫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곳 개봉(開封) 인근의 훈련소에 도착한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산 중턱에 마련된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장원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무림맹 무사들의 훈련을 위해 마련된 비밀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리라 상상했던 담린 일행은 의외의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이런저런 말도 없이 소향이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나 힘든 훈련이길래 가르치려는 자가 저렇듯 술을 마셔댈까?
 모두에게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던 소향이 쓰러져 잠이 들고 난 후에도 그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갔다. 그러나 둘째 날에도 역시 소향은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모두들 혹시 소향이 술을 마셔야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전설 속의 취권(醉拳) 고수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취권 고수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술타령을 하던 그녀가 결국 술병을 물고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비로소 일행은 소향이 왜 술을 마셔댔는지에 대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나쁜 놈’이란 단어가 등장했고 그 나쁜 놈에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저주를 퍼부으며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깟 남자는 잊으세요’라든가 ‘훈련은 언제부터 시작되나요?’라고 말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미친 여자처럼 술만 마셔대던 그녀는 사흘이 지난, 그러니까 바로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내가 언제 술을 마셨냐’라는 듯한 태연하고 뻔뻔한 표정으로 첫 수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호위 무사란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무사이다.”
 술 냄새가 가시지 않은, 다소 피곤함이 살짝 깃든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청초한 느낌을 주었다.
 ‘이 여인이 정말로 그 봉황비도란 말인가?’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는데 그건 바로 ‘멋있다’였다.
 강하기만 할 것 같은 사람에게서 어느 날 문득 인간적인 약점을 보았을 때 그가 더욱 멋있어 보이는, 뭐, 그런 종류였다.
 술 먹고 난장을 피운 대가치곤 훌륭한 결과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향의 수업은 계속되었다.
 “청룡단이나 백호단 무사들의 명령권은 맹주님이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의 명령권자는 바로 단주님이시다. 아, 물론 우리 단주님은 맹주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지.”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맹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준 것은 소향의 다음 말이었다.
 “음, 쉽게 말하면 이런 거지. 청룡단이나 백호단은 맹주님의 명령이 최우선이지. 어딜 공격하라면 하고 누굴 잡아오라면 잡아오고. 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무조건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지. 하지만 우린 달라. 그들이 수동적인 데 반해서 우린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린 맹주님의 명령을 받고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맹주님을 지켜드리려고 존재한다는 거야.”
 제갈혜와 남궁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윤덕과 오령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고수들의 생리(生理)가 그렇듯이 자신의 주변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그런 마음은 별로 없거든. 오히려 ‘오면 상대해주마’ 하는 자존심 같은 게 있지. 그건 고수일수록 더 심하고. 그러한 방심이 살수를 부르지. 우리의 임무는 그걸 막는 거지.”
 그제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소향이 담린을 보며 말했다.
 “전에 네가 그랬지, 무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고.”
 소향의 말에 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께서는 ‘우리가 무인이라고 생각하냐?’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소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무슨 뜻으로 한 소린지 알겠나?”
 담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너희들은 무인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건 훌륭한 무인들이지. 그걸 부정하려는 게 아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더 이상 피곤한 모습의 소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우리에게는 포기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비무(比武)? 우리에게는 정말 사치스러운 일이지. 우리의 적은 도전장(挑戰狀)을 내밀며 정문으로 들어오는 무인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칼을 들이밀지 모르는 살수들이다.”
 살수란 말에 순간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심한진의 냉막한 표정에는 얼음장 같은 한기가 내려앉았다.
 “살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수행을 나선다. 그런 자를 보통의 마음으로 막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해. 결국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지.”
 소향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알 것 같기도 했다.
 무인이면서도 무인이 아닌 그 미묘한 차이를.
 “정작 원한 관계는 살수를 고용한 사람과 우리를 고용한 사람 사이에 있는데 피를 흘리는 것은 우리들이지. 우리와 살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말야. 솔직히 말하면 더러운 일이지.”
 모두들 침묵했다.
 막연히 호위 무사가 되고자 온 이들이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름다운 환상(幻想)이 아니라 녹록치 않은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기들 죽지 마. 누군가의 목숨을 지켜준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일이니까. 게다가 너희들은 무림맹 현무단의 자랑스러운 호위 무사들이니까.”
 소향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자, 이제 본격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해볼까? 호위 무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모두들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소신껏 대답해.”
 소향의 말에 담린이 용기를 내었다.
 “무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약하면 지켜줄 수 없을 테니까요.”
 이번에는 제갈혜가 말했다.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르는 살기를 파악해 내는 감각,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소천이 입을 열었다.
 “지켜줘야 할 사람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도 필요할 겁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 관계, 습관, 취미, 재산 상태, 원한 관계 등 모든 것을 숙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남궁소천의 의견이었다.
 담린은 저 남궁소천이 실제로 호위를 맡게 되면 틀림없이 저렇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사람들도 돌아가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앞서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기만 하던 소향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해 주지 않은 채 다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만약 자신이 호위를 맡은 인물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라는 게 밝혀졌다. 그래도 그를 지켜주어야 할까?”
 이번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딱 부러지는 성격의 제갈혜는 지켜줄 필요가 없다고 했고 남궁소천은 이미 맡은 임무는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인물이라면 도리어 죽여 버려야 한다고 심한진이 과격한 발언을 했고 냉하연은 자신의 마음과는 전혀 달랐지만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심한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소향은 그저 그 의견들을 듣기만 했다.
 다시 소향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대상을 포기한다면 대신 열 명의 무고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럴 땐 어쩔래?”
 이 질문에는 모두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고한’이란 부분에서 다들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향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회색 구름 사이로 힘겹게 고개를 내밀려는 해가 보였다.
 손을 내밀어 구름을 치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구름도 해도 그녀에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상태에서 소향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가 지켜주어야 할 대상이 인면수심이라도 우린 목숨을 걸고 지켜주어야 한다. 열 명의 무고한 목숨이 아니라 모든 강호인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해도 우린 맹주님의 목숨부터 살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호위 무사들의 사명이다.”
 소향은 해답을 내렸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들에게 닥쳐온 것은 혼란이었다.
 ‘정말 그러한 경우가 닥친다면?’
 오늘 소향의 물음과 이야기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막상 호위 무사를 하겠다고 생각해 왔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들이었다.
 ‘사람마다 그 목숨의 가치는 다른가?’
 ‘상식을 넘어서야 할 만큼 신념은 중요한 것인가?’
 ‘정의가 우선인가, 약속이 우선인가?’
 이런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호위 무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말하려던 소향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리고는 말을 마저 끝내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모두들 그녀의 뒷말이 ‘좋은 동료를 가지는 것이다.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보표무적』 1-2권에 계속>

댓글(9)

cutesd    
이게 이분의 가장 좋은 작품 굿
2018.07.28 18:39
코즈    
다시 읽어보는 보표무적...
2019.10.21 11:56
k4********    
주인공이 따로 정해지지 않는건가요?
2019.10.29 21:07
찰끈    
처음에 조금 헷갈릴 수 있는데, 우이가 유일 주인공입니다.
2019.11.05 15:49
시우(始友)    
와... 글 정말 잘쓰시네요.
2019.12.27 12:57
진격운    
역시 영훈사마 추천합니다! !
2022.01.26 09:46
칼립의날    
잼있게보겠습니다
2022.10.01 19:31
ro******    
이기어검을 쓰는데 최절덩이라니 최소 화경을 넘어 현경에 한발 걸친 상태 아닌가요? 그리고 최절정은 초절정 아닌가? 무공 수위는 작가마다 틀리지만 이기어검에 심검 근처라면 당근 화경은 진작에 넘어서는 무공수위 삼류-->이류-->일류 -->절정--> 초절정-->화경-->현경-->자연경 혹은 ....
2022.12.09 11:51
co********    
비도 맞고 죽는 엑스트라의 러브 스토리... 지나가는 수색대원 A,B의 가정사 및 농담... 이걸 왜 설명하는지... 분량을 늘리기 위한 노오오력 중도하차 한적이 없는데.. 이건 더이상 결제를 못하겠슴돠..
2023.03.0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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