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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마검사 1권 1화

2017.04.17 조회 2,765 추천 12


 <패왕마검사 1권 1화>
 
 
 프롤로그
 
 
 
 아방트 플로렐 공작이 길가에 널브러진 거지 소년을 데려와 지극성정으로 돌봐주고 키운 지 5년째 되던 날.
 거지 소년은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레드 드래곤으로 변했다.
 그리고 말했다.
 “인간이여, 그대는 내가 인간계를 유희하며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친절을 베풀었다. 고맙구나. 내 너에게 드래곤의 이름으로 언약하노니, 플로렐 가문에 위기가 닥친다면 내 이름을 세 번만 불러 보거라. 어떤 위험 앞에서도 내 이름을 세 번만 부른다면 넌 행복해질 것이니. 나의 참된 이름은 시엘이니라.”
 레드 드래곤 시엘은 빛으로 화해 사라졌고, 아방트 플로렐은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이후 3년이 흐를 무렵.
 플로렐 공작 가문은 주변 귀족들의 모함으로 그 힘을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아방트 플로렐 공작은 발코니의 문을 열어젖히고 하늘을 향해 그분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시엘! 시엘! 시엘!”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방트 플로렐 공작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다시 그분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시엘 님! 시엘 님! 시엘 님!”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기는커녕 대답조차 없었다.
 플로렐 공작은 아침, 점심, 저녁 쉬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세 번씩 불렀지만 결국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주변 귀족들의 모함을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1. 드래곤의 언약
 
 
 
 “난 플로렐 공작가의 장남, 아르젠 플로렐이다. 나이는 올해로 열일곱. 크림색의 머리카락과 주홍빛 눈동자가 매력 포인트······. 에라, 관두자.”
 난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걸다가 때려치웠다.
 이런 건 역시 사람을 상대로 해야 제 맛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플로렐 공작가의 사람인 것을 밝히는 순간, 모든 귀족들이 콧방귀부터 뀌며 무시해버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 정말 이해 안 돼.”
 보통 남작 정도의 작위만 얻어도 으리으리한 집에서 여러 명의 시종들을 거느리며 부족함 없이 사는데, 이놈의 집구석은 공작가문이면서도 삶 자체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씩 집사 달란트가 플로렐 공작 가문의 위대했던 초창기 시절에 대해 얘기해줄 때는 왜 지금에 와서 이렇게까지 초라해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플로렐 공작가는 브레이브 왕국의 개국 공신가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위대한 곳이었다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맘에 아버지에게 상황이 왜 이 모양으로 치달았느냐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아들아, 다구리엔 장사 없단다.”
 뭔가 자세한 상황 설명 같은 것은 전혀 해주질 않으신다.
 난 오늘도 허전한 저택 안에 비치된 낡은 서재에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귀족이 평민들과 어울린다는 건 주변 시선 때문에라도 쉽지 않은 일이고, 같은 귀족들은 날 상대해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내 친구랄 수 있는 건 책밖에 없었다.
 서재가 낡긴 했어도 책 하나만큼은 대단히 많이 비치되어 있었기에 아직도 읽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했다.
 오늘은 무엇을 읽을까 생각하며 이리저리 책장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마법이라든가 검술, 그리고 오러 블레이드의 이용에 관한 지식들은 머릿속에 꽉 차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두는 분야가 마법과 검이었기 때문이다.
 정치라든가 상술이라든가 하는 부분들은 머리가 아프고 내 성향이랑은 맞지 않아서 항상 한쪽으로 미뤄두었다.
 그 때문에 지식만 가지고 싸우라면 소드마스터도 이길 수 있겠건만, 현실은 정반대다.
 내 몸은 마법이나 검술을 익히기에 부적절할 만큼 무척이나 약했다.
 조금만 뛰어도 숨부터 가빠지고 현기증이 이는데 어찌 검술을 익힐 것이며,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둔재가 어찌 마법을 익히겠는가.
 과거, 플로렐 공작가는 뛰어난 검사들을 배출해내는 명문가라고 알려질 정도였건만 내게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더불어 플로렐 공작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 검술 ‘리듬(Rhythm)’이나 비기 ‘오르간(Organ)’ 역시도 난 익힐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유쾌해질 수 있는 글을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아주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꽤 얇은 붉은색 표지로 장식된 책이었는데, 그 책의 첫 시작은 이러했다.
 <나는 레드 드래곤에게 속았다.>
 ‘뭐야 이거?’
 난 다시 책표지를 훑어보았다. 표지엔 ‘아방트 플로렐의 후손들을 위한 충고의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방트 플로렐이면 본격적으로 플로렐 가문을 말아먹기 시작한 선조가 아닌가.
 어쩌다 말아먹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늘 아버지는 다구리 얘기만 꺼내시니까.
 난 다시 책 속의 기록들을 읽어 내려갔다.
 (@책 내용)「모두가 드래곤의 언약은 그들의 목숨을 걸 만큼 신성한 것이라 얘기하지만, 내가 아는 드래곤이란 존재는 사기나 치고 돌아다니는 비만 도마뱀일 뿐이다.
 뭐? 자기 이름을 세 번만 부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웃기고 있네.
 내가 정말로 그의 힘을 필요로 했던 그때,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이 넘게 그의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플로렐 공작가는 그렇게 무너졌다.
 힘의 분산을 꾀해 차후 왕국의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더러운 주변 귀족들의 음모에 휘말려서 끝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플로렐 공작가가 무너지게 된 것은 비단 내 잘못만은 아니다.
 지금껏 플로렐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아온 이들은 최고라는 칭호 앞에 너무나 나태했다.
 그것은 곧 우리 가문의 힘이 약해지게 만들었으며, 그 틈을 탄 주변 귀족들이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방치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최후의 최후까지도 레드 드래곤 시엘이 나타나 도와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인간계를 수없이 유희했건만 나처럼 자신에게 맹목적인 친절을 베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언제든 위기가 닥치면 구해준다며 떠난 그날부터 이 망할 비만 도마뱀을 의심했어야 했다.
 드래곤의 언약?
 그딴 거 개나 줘버리라고 해라.
 난 시엘이라는 이름을 저주한다.
 드래곤들을 저주한다.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이 노트에 기이한 힘이 깃들어 녀석의 이름을 세 번, 아니 한 번만 적어도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놈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억울한 마음을 풀 수 없어 이토록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나마 시엘이란 개종자를 죽여 본다.
 공작의 말투치곤 너무 저렴하다고?
 눈앞에 조상님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딴 허례허식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아무튼 후손들은 내 말을 꼭 명심하거라.
 드래곤을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책 내용)
 책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뜩이나 열 페이지도 안 되는 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세 페이지만 글이 적혀 있고 나머지 일곱 페이지는 공백이었다.
 “이거 영 신빙성이 없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오늘도 재정난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그 비싸다는 보르네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집사 달란트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난 아버지에게 붉은 표지의 책을 건넸다.
 아버지는 심드렁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손으로 톡 밀어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난 떨어진 책을 주워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고 아버지는 역시나 손으로 툭 쳐 버렸다.
 ‘······해보자는 겁니까.’
 “가문 말아먹은 게 쪽팔려서 변명거리만 주저리주저리 써놓은 그따위 책은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이미 읽어보셨구나. 하긴 이런 얘기가 진실일 리 없지.’
 나는 보르네주를 음미하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나직이 충언했다.
 “아버지, 그렇게 비싼 술을 밥 먹듯이 즐기시면 언젠가 아버지께서도 ‘그렌트 플로렐의 후손들을 위한 충고의 기록’이란 글을 적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내용인즉, ‘나는 술에게 속았다. 아들이 과도한 음주를 말릴 땐 즉시 잔을 내려놓아라.’정도가 되겠지요.”
 등을 보이고 있던 아버지가 몸을 돌려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마주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곧장 잔을 머리 위로 들어 던질 자세를 취했다.
 난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쨍그랑!
 문 너머로 청동으로 만든 잔이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성질 하시고는.’
 
 ***
 
 넓은 방 안.
 한 커다란 침대에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어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괜찮단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그렇다고 딱히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욱 몸이 약하다.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 편이고,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정신을 놓는다.
 그렇게 약한 분이 기울어져 가는 집안 때문에 부쩍 여기저기 신경을 쓰시더니 더 약해지고 말았다.
 난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하다, 아르젠. 어미가 매일 이렇게 기운이 없어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다.
 어머니는 항상 자기 피를 이어받아서 내가 고생하는 거라며 미안해하신다.
 생각해보니 그 약한 몸으로 나를 낳으신 것만 해도 기적이다.
 “곧 건강해지실 거예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어머니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가 물었다.
 “아버지는 뭐하시고 계시니?”
 “보르네주를 마시고 계세요.”
 어머니는 다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가서 전하렴. 당장 술 끊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끊겠다고.”
 입은 웃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났다.
 “그대로 전할게요.”
 벌써부터 애처가인 아버지가 허둥댈 모습이 그려진다.
 
 ***
 
 어머니의 전언을 들은 아버지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쯤 어머니 침대에 딱 달라붙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계시겠지.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내 방으로 돌아와 조금 쉬려고 했다.
 그런데 방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집사 달란트에게 달갑지 않은 얘기를 듣게 되었다.
 “뭐라구요?”
 “헤럴드 공작가의 연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저······. 가봤자 좋은 꼴 못 볼 게 뻔한데.”
 “가시지 않으면 더 나쁜 꼴을 당하실······. 어험! 죄송합니다. 더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공산이 큽니다. 제크 헤럴드 공작가의 아들인 스펜달 헤럴드 도련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입니다.”
 난 집사 달란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참석하지 않고 넘어갈 좋은 방법이 없을까?”
 “참석하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결국 나 하나 수모당하고 끝내라는 얘긴데······. 또 무지하게 따돌림을 당하겠구만.
 “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언제 출발하는 거야?”
 “오늘 저녁입니다.”
 “······한 일주일 전에는 알려 줘야 정상 아니야?”
 “저도 오늘 아침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헤럴드 공작가에서 연락을 늦게 한 모양입니다.”
 시작부터 대놓고 골려 주겠다, 이거지?
 아무리 몰락 직전의 공작가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잖아.
 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마차 마련해놔. 준비되는 대로 내려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부딪쳐야지.
 
 (다음 화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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