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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검제 1

2017.04.20 조회 6,160 추천 40


 서장
 
 
 콰광!
 “크억!”
 굉음과 함께 유현자의 몸이 뒤로 튕겨 나왔다.
 정확히 열 합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현자가 누구던가? 화산파의 십대고수 중 한 명이 아니던가?
 그런 유현자가 열 합 만에 피떡이 되어 흙바닥에 누워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무림맹 무인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가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상대는 상처 하나 나지 않은 채 비웃음을 머금고 서있었다.
 이대로라면 분타가 잿더미가 되는 것은 둘째 치고 저 마두의 손에 모두가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크하하핫! 정말 나약해 빠진 놈들밖에 없군. 정말로 이게 끝이냐?”
 대소를 터트리며 묻는 마두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순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 같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때, 무인들의 뒤쪽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교의 전대 초고수 치고는 영 볼품없어 보이는데?”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준수한 인상의 청년.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무림맹 무인들 중 몇 명이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녀석이!”
 분명 분타의 지하 감옥에 두꺼운 쇠사슬로 포박을 해놨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단 말인가?
 그 시선에 청년이 씩 웃으며 왼손을 들어보였다.
 “아! 급히 나오느라.”
 왼손엔 끊어진 쇠사슬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열쇠로 연 게 아니라, 힘으로 끊어 내고 감옥을 걸어 나왔다는 말이다.
 그때, 분노에 찬 노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겁을 상실했구나? 이 몸의 행사를 방해한 네놈은 사지를 잘라 죽여주마.”
 노괴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하자, 청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청년의 얼굴엔 다시 웃음이 번졌다.
 “혹시 내가 멍청하게 생겼소?”
 노괴를 향해 묻는 청년의 말에, 노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콧방귀를 치며 말했다.
 “흥,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네놈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자, 그럼 잘 생각해 봅시다. 누가 봐도 난 여기를 그냥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 그런데 빠져나가지 않았소.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말이오. 그럼 이게 무슨 뜻이겠소?”
 청년의 말에 노괴는 물론이고 무림맹의 무인들마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노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 위험한 상황을 언제든지 도망칠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냐? 이 몸을 피해서?”
 노괴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쳤다.
 “그렇지! 바로 그것이오!”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청년의 말에 노괴가 얼굴을 구기며 소리치는데, 청년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렇다면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봅시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청년의 몸에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에는 은은한 서광(瑞光)이 일렁이고, 왼손에는 검정색 마기(魔氣)가 솟구쳤다.
 쾅!
 청년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진각을 구르자 가까이 있던 무림맹 무인들이 몸을 휘청거렸다.
 이미 노괴의 표정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된지 오래였다.
 청년은 웃음기를 머금으며 노괴를 향해 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누가 도망쳐야 되겠소?”
 
 
 1장 낭중지추
 
 
 1
 
 
 째쟁.
 “꺄악!”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
 “빌어먹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겠구나!”
 성화각(珹花閣)의 총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상이 벌써 은자 열 냥이나 쌓였다.
 제아무리 천씨세가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지만 봐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총관이 종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자, 지하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거한들이 손에 마작패를 쥔 채로 물었다.
 “뭔 일입니까!”
 “더는 저 새끼를 봐줄 수가 없다. 우리가 땅을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심하게 하진 말고 적당히 해서 보내라. 쯧!”
 분통이 터지는 듯 명령을 내리자, 거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두에 선 거한은 방금 전까지 마작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마작패를 탁자 위로 던졌다.
 ‘지면 이십 문이나 잃을 뻔했는데, 될 놈은 된다니까.’
 “가자.”
 총관이 턱짓을 하며 계단을 오르자 나머지 거한들이 그 뒤를 따랐다.
 드르륵.
 방의 나무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간 거한이 눈을 부라렸다.
 그의 시선이 먼저 구석에 틀어박힌 기녀에게로 향했다.
 앞섶이 풀어진 기녀는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은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술만 따르는 기녀에게 손을 댔으니 기녀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총관의 눈이 또르르 굴러 방 안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로 향했다.
 청년은 술병을 쥔 손을 연신 잔 위에서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빈 술병에서 술이 나올 리는 만무한 일.
 총관은 인상을 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식한 놈. 오늘도 만취했구나!’
 하지만 상대는 천씨세가의 둘째 공자.
 제아무리 숙주의 망나니로 악명이 자자하다지만 일개 주루의 총관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자였다.
 애써 미소를 지은 총관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자. 이 성화각의 총관입니다.”
 그 말에 청년이 손을 휘휘 저으며 잔뜩 꼬부라진 혀로 말했다.
 “술은 가져왔냐?”
 그 말에 총관의 표정이 일변했다.
 “미안하지만 공자께는 술을 더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벌써 외상이 은자 열 냥이 쌓였는데······.”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총관의 말을 듣던 청년은 검미를 찌푸리더니 이내 팔을 휘둘렀다.
 째쟁!
 총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청년의 손에서 날아간 술병이 총관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깨졌다.
 “아, 미안. 내가 지금 손이 좀 미끄러워서.”
 청년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총관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총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천준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돈을 갚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 성화각에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아니, 달포 내로 외상을 갚지 못하면 직접 천씨세가로 가서 돈을 받아낼 겁니다.”
 “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그까짓 돈 몇 푼 없을 줄 알고?”
 “제가 어찌 공자님을 무시하겠습니까?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밖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총관이 뒤에 서 있는 거한들을 향해 턱짓을 하곤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번에 총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얼른 저 망나니를 밖으로 끌고 나가라는 뜻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거한들이 건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새끼가 그 망나니구나!’
 숙주 현의 유명인사가 아닌가!
 소문으론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이, 이봐!”
 거한은 망나니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술기운에 취해 눈이 풀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수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아닌가!
 거한은 망나니의 얼굴을 보다가 구석에 처박혀서 겁을 집어먹은 기녀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녀의 미색이 비록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망나니의 얼굴을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거한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주먹을 한두 번 휘두르려 했으나 망나니의 얼굴을 보니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아무리 천씨세가에서도 내버린 자식이라고 하지만 얼굴에 상처가 나면 뭔 짓을 당할지 모르니······.
 거한이 뒤의 주먹패들을 향해 말했다.
 “밖까지 모셔다 드려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으로 거한들이 뛰어들었다.
 “어쭈? 겉보기엔 힘 좀 쓰게 생겼다만······.”
 천준서는 히죽히죽 웃으며 술상을 집어 들었다.
 “자, 가져가라!”
 천준서는 술상을 그대로 달려드는 거한들에게로 집어던졌다.
 술상이 바로 옆의 벽을 맞추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자 거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나니 중에서도 개망나니라더니!’
 거한이 고개를 돌려 주먹패 한 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가급적 얼굴은 피해라.”
 “예, 형님!”
 거한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 사내가 천준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얼레?”
 술기운에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저항하는 천준서를 본 사내가 코웃음을 치다가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대충 하려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주먹이 궤적을 그리며 천준서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사내의 어린아이 머리만 한 주먹이 천준서의 복부를 그대로 강타했다.
 ‘이런!’
 사내는 순간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야리야리한 공자님이 자신의 주먹을 견딜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
 하지만 들려온 것은 천준서의 심드렁한 목소리뿐이었다.
 “엇?”
 사내는 고개를 들어 천준서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반쯤 풀린 천준서가 사내를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쳤냐?”
 사내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주먹이란 건 말이다.”
 천준서가 주먹을 슬쩍 들어 올려 사내의 코앞에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렇게 쓰는 거다!”
 쾅!
 천준서의 주먹이 사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꺼어억.”
 천준서의 주먹에 가격당한 사내는 숨넘어가는 신음성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천준서는 휘청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총관을 향해 소리쳤다.
 “술 안 내와?”
 총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꺼번에 쳐라!”
 총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한들이 천준서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져 나왔다.
 “아악!”
 “켁!”
 거한들을 모두 날려버린 천준서는 휘청이며 소매로 입을 훔쳤다.
 그리고는 총관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내가 나름 천씨세가의 둘째 공자님인데, 어디서 하루살이 같은 것들을 데려다가······ 어?”
 천준서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런데······.”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취하냐······?”
 총관은 대자로 바닥에 눕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천준서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한 중 하나가 배를 움켜잡고 다가왔다.
 “어떻게 할깝쇼?”
 총관은 인상을 확 찡그리며 소리쳤다.
 “몰라서 묻냐? 내다 버려!”
 거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준서를 업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총관은 난장판이 된 방 안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씨세가에 어쩌다가 저런 망나니가! 지 형의 반만 닮았어도! 쯧쯧쯧.”
 ***
 슬슬 어두워질 무렵 대로를 울리는 목소리에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내 성화각의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 명의 장한이 나와 청년 한 명을 길바닥에 내던졌다.
 얼마나 세게 내던졌던지, 흙바닥에 두 바퀴를 구른 후에야 멈췄다.
 “으음······.”
 땅에 얼굴을 박고 신음을 내뱉던 천준서가 살짝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하지만 천준서의 눈은 술에 취한 사람이라기엔 너무나도 맑았다.
 주변을 잠시 살피던 천준서는 다시 천천히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잠이 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술에 만취한 천준서가 흙바닥에서 잠을 자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려니 하며 지나갔다.
 몇 년 동안 심심찮게 보던 장면이니, 딱히 감흥이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 시진이 지나고, 쥐죽은 듯 자고 있던 천준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암,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
 끼이익.
 천준서가 집으로 다가가 거대한 정문을 열려다가 벌컥 열리는 문 덕분에 앞으로 나뒹굴었다.
 “아?”
 천준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명의 사람을 발견하곤 씩 웃었다.
 “하하하. 누군가 했더니 아버지였네요.”
 온몸이 흙투성이에다가 독한 술 냄새까지 풀풀 풍기는 천준서를 보던 중년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다름 아닌 천씨세가의 가주 천용철(天龍鐵)이었기 때문이다.
 “넌 대체 언제까지 망나니짓을 하고 살 거냐.”
 천용철이 참지 못하고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그를 올려다보던 천준서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무공을 익히면 바른 사람이고, 술을 마시면 망나니입니까?”
 “······.”
 어금니를 문 채로 주먹을 꾹 쥔 천용철은 결국 번들거리는 천준서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가자.”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짧게 내뱉으며 천준서를 지나 세가를 나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천용철의 부인이 그를 따라나섰다.
 천준익은 말없이 천준서를 내려다보았다.
 천준서와 꼭 닮은 눈매로 그를 노려보던 천준익마저 세차게 몸을 돌렸다.
 천준서는 그 모습을 보며 흙바닥에 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소리쳤다.
 “어어? 아버지! 용돈 좀 주고 가시죠! 이 빌어먹을 놈들이 외상이 많다고 술을 안 주지 뭡니까? 아버지! 아버지!”
 마차로 향하던 천용철은 잔뜩 꼬인 혀로 말하는 소리를 들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반대로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바라보던 천준서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치적거리며 일어난 천준서는 천천히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2
 
 
 잠자리에 앉아 얼굴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던 천준서.
 괴로운 표정으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천준서는 자리에 눕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수마에 빠져든 천준서는 오래된 옛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끼익.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백치였던 상태에서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기쁜 표정으로 달려온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준서야, 내가 누군지 기억이 좀 나느냐?”
 침상에 걸터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천씨세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천준서에게는 이렇게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준서 혼자였다.
 자신이 왜 망나니짓을 하는지, 자신이 왜 백치가 된 척 연기를 하는지.
 ‘나 하나를 희생해서라도 세가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됐지······.’
 천준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꿈······ 이구나.’
 침상에 누워 있던 천준서의 귓가에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눈가를 매만지니 물기가 맺혀 있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천준서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짐짓 무미건조한 표정을 꾸미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왜 이런 빌어먹을 꿈을······.’
 천준서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이삼 년 전부터는 꾸지도 않던 꿈인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다시 꾸기 시작한다.
 덕분에 잠이 확 깨고 말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천준서가 전각의 문을 열고 후원으로 걸어나갔다.
 적어도 새벽은 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동이 트지 않았다.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달빛이 전각을 어렴풋이 비추는 밤.
 천준서는 여름밤의 하늘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어중간한 시간에 일어났구만.’
 은하수가 길게 뻗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준서는 대낮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는 절대 대낮에 보았던 천준서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천준서가 단순히 주정뱅이라면 무저갱처럼 깊은 눈동자를 지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취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답답해 죽겠네. 세가가 이젠 감옥 같아.’
 대체 몇 년 동안인지······.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취 때문에 밖으로 나온 거야?”
 천준서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표정이 굳었다.
 “······형이 알 바 아니야.”
 천준익은 못들은 체하며 천준서의 앞으로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 준서야. 언제까지 술에 의지해서 그렇게 살 거니?”
 하지만 그 말을 듣고서도 천준서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채 바뀔 생각을 않았다.
 “그건 형이 상관할 필요 없다고. 가주가 되어야 하는 형과 나는 달라.”
 천준서는 눈매를 좁히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폐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니면 숙주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사라지던가.
 ‘혼자 짊어지고 간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천준서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천준익이 천준서의 어깨를 다잡으며 말했다.
 “준서야, 이 형 말을 한 번만 들······.”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챙기셨다고 형 노릇을 하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꺼져.”
 천준서가 소리를 치며 천준익을 밀었다.
 한 걸음도 밀리지 않았지만 천준익의 표정이 굳었다.
 천준익은 무공을 익히는데 전심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천준서는 그저 하는 시늉만을 했을 뿐이니,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이 당연한 것이리라.
 천준익이 화난 것은 천준서가 자신을 밀었기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어느 날부터 엇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못난 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고함을 치며 주먹을 들어 올린 천준익을 본 천준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 치고 싶으면 쳐. 맞아 줄게.”
 천준서가 빈정거리며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내었다.
 그를 바라보던 천준익은 결국 부르르 떨던 주먹을 힘없이 내리며 말했다.
 “밤이 깊었다. 세가 사람들이 깨지 않게 들어가 쉬어라.”
 힘없이 말한 천준익이 후원에서 몸을 돌려 나가는 모습을 본 천준서가 고개를 떨어뜨릴 때였다.
 어둠 저편에서 길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몸을 돌려 나가던 천준익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천준서도.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닮은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 채 서로를 직시하고 있었다.
 모두 잠들어 있어야 할 늦은 시각,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비명에 방금 전까지 싸우던 형제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들었어?”
 천준서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그제야 천준익의 고개가 움직였다.
 “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천준익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비명이 터진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천준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편을 직시하던 천준서는 불현듯 솟구치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가보자!”
 급히 소리를 치며 달려가는 천준익의 말에 천준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뛰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해 천준서가 따라오기 벅찰 정도로 달리기 시작한 천준익이 소리쳤다.
 “따라오기 힘들어도 참아라! 느낌이 안 좋다!”
 앞서 달리고 있던 천준익은 볼 수 없었다. 뒤따라오는 천준서의 검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천준익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은 놓치고 있었다.
 연공이라곤 쳐다보지도 않고 몇 년간을 주색잡기에 빠져 살고 있는 동생이 어렵지 않은 기색으로 그의 경공을 따라잡은 것을.
 천준서는 묵묵히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형을 따라갔다.
 ‘아니어야 해.’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천준서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맞다면······.
 ‘아니.’
 천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오직 그것을 막기 위해 버려온 삶이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희망보다 냉정한 법이다.
 내원에 다다른 천준서와 천준익 앞에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다.
 불타고 있는 내원의 전각들 사이로 의문의 복면인들 이 천씨세가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일방적으로 도살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천준서는 보았다.
 복면인들 사이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얼굴을 검은 복면으로 가리고 전신을 흑의로 가리고 있지만 천준서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두려워했던 광경이다.
 꿈에서조차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던 광경이다. 그렇기에 천준서는 복면인의 신형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천준서는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입에서 짐승의 것 같은 울부짖음이 튀어나왔다.
 “장, 소, 궁!”
 
 
 3
 
 
 “흐으······ 하아······.”
 턱선을 따라 주르륵 흐르던 핏방울이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얼굴 위로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가 온 눈이 뻘겋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천준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천준서의 상황은 낭패 그 자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낭패가 아니라 최악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천준서의 몸을 파고든 검은 꿰뚫은 것으로도 모자라 전각 벽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었다.
 이미 전신의 찢기고 베이고 터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는 내를 이뤄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시체다.
 응당 죽어야 하는 치명상을 입은 천준서지만 그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준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것을.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벌써 눈을 감기에는 맺힌 한이 너무 깊었다.
 형은 자신을 감싸다가 장소궁의 검에 목이 꿰뚫려 쓰러졌다.
 아버지는 복면인들의 합공을 이기지 못한 채 팔다리가 잘려 고통스럽게 죽었다.
 심지어 숨어 있던 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천준서는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모두가 죽고 만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천씨세가 전체가 몰살을 당했다.
 그런데 어찌 천준서가 태연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그는 마지막 힘을 아무리 쥐어짜도 고작 어금니를 깨물 힘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뻘겋게 물든 천준서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장소궁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하다. 정말로 놀랍도록 무서워. 네놈 혼자서 빈객 두 명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서 장가방의 무인 서른을 도륙하다니······.”
 장소궁은 천준서가 검에 의해 몸이 전각에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만큼 천준서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시체와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천준서가 두려웠다.
 “그 시간 동안 어떻게 감쪽같이 모두를 속이고 살았지? 어떻게 이런 힘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버틴 거냐?”
 놀랍다 못 해 두렵다는 표정으로 묻는 장소궁의 말에, 천준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거냐?”
 입으로 핏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다.
 장소궁의 말처럼, 천준서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장소궁을 속이기 위해서, 세가를 속이고, 가족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였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차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준서의 물음에 장소궁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득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솔직히 대단했다, 천준서. 나도 정말이지 깜빡 속았다. 눈앞에서 피를 토한 채 주화입마에 걸린 놈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천준서가 너스레를 떠는 장소궁을 노려보자, 그가 더욱 짙게 웃으며 말했다.
 “저분이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네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겠지. 아니, 아마 평생 동안 널 의심할 수 없었을 거야.”
 그 말에 천준서의 두 눈이 장소궁의 뒤에 서 있는 흑의인에게로 움직였다.
 ‘저 새끼만 없었더라면······!’
 천준서가 이를 갈며 노려보았지만, 흑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흑의인에겐 천준서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흑의인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장소궁의 목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타난 흑의인의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두려울 정도의 강력한 무공 앞에서 천준서의 무공은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아 보일 정도였다.
 천준서의 몸을 검으로 꿰뚫어 전각에 고정시킨 당사자가 바로 저 흑의인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내게 조금의 시간만 더 있었으면······.’
 아무리 한탄하고 또 한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천준서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릴 때, 장소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무섭다고 할 수밖에 없군. 넌 정말 무서운 녀석이야. 몇 년 동안이지? 대체 몇 년 동안이나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론 백치로 살아온 거지? 사랑하던 여자까지 내게 빼앗기고. 숙주현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도 참으면서 살아왔던 거냐? 가족들이 손가락질하는 것까지도? 응?”
 축 쳐진 천준서가 이젠 두렵지 않은지 조금씩 다가가며 이죽거리는 장소궁.
 “알아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는군. 애초에 네놈이 천씨세가를 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준서의 말에 장소궁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역시 그것 때문이었나?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니, 아니야. 이젠 의미가 없는 이야기지.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천준서는 웃었다.
 “그렇지. 안타까운 일이야. 내가 너처럼 비겁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말이야.”
 “비겁? 뭐가 비겁하단 말이지? 나 홀로 여명신검의 비급을 독차지하기 위해 너와 천씨세가를 멸하려 한 것? 그것을 피하기 위해 내 앞에서 주화입마를 당하는 연기까지 한 넌 비겁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비겁이랄 거까지야. 천씨세가의 힘으로 장가방을 막아낼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천준서는 입으로 피를 게워내면서도 필사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놀랐다. 그 자존심 강하던 니가 백치연기를 하면서까지 세가와 가족을 위하려 하다니.”
 그렇게 중얼거리던 장소궁이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네놈의 그 빌어먹게 눈물 나는 정성이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친구야! 하하하하핫!”
 대소를 터트리는 장소궁을 노려보던 천준서가 입 꼬리를 씩 올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아니, 일 년만 있었어도 내가 네 목을 따버렸을 텐데. 장소궁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라.”
 천준서의 말에 장소궁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천준서에게 겁을 먹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제아무리 상대가 천준서라도 저렇게 손가락 하나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자신이 겁을 먹다니!
 “건방진 새끼!”
 장소궁이 성큼성큼 다가가 천준서의 어깨를 꾹 쥐었다. 그리고는 천준서의 어깨에 장검을 박아 쭉 그어 내렸다.
 검에 의해 길게 베어진 어깨의 상처가 비틀리며 핏물이 솟구쳤다.
 “크흐으······. 그 정도로 죽겠어? 설마 겁나는 거냐? 이 꼴이 되어 버린 나를 보면서도 겁이 나나? 어차피 넌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지.”
 천준서가 고통을 누른 채로 비웃자 장소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천준서는 꿀럭꿀럭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말했다.
 “네놈과 함께 여명신검의 비급을 발견했을 때도, 그리고 둘이서 그 비급을 연구할 때만 해도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장소궁은 천준서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천하의 천준서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었다니, 그거 정말 영광이로군. 근데······ 난 단 한 번도 너를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그저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을 뿐이지. 이번만 해도 내가 조금만 늦게 알아챘다면 쓰러져 있는 건 내가 되었겠지? 인정해.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긴 건 바로 나야.”
 천준서를 향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린 장소궁이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죽여 버려!”
 장소궁의 말에 뒤에 도열해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검을 뽑으며 걸어나왔다.
 어느새 흑의인의 옆까지 걸어간 장소궁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하셨던 것은······.”
 장소궁이 쩔쩔매며 묻는 말에 흑의인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한 번 말한 것은 지킨다. 일이 끝나면 약속했던 대로 힘을 주지.”
 “감사합니다!”
 장소궁이 들뜬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과, 천준서가 고통과 분노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모습은 사뭇 대조되는 것이었다.
 천준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인의 기척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눈을 감았다.
 ‘단 한 번······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어지면 이런 미련한 짓을 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모두를 속이며 고통 주고 고통받았던 일들도, 무너진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연인도.
 모든 게 다 헛된 것 같았다.
 그저 모두가 처절하게 죽임당하고, 허무와 좌절, 절망만이 남고 말았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자신이 있는데······.’
 억울함과 분함이 천준서의 가슴에서 꿀럭꿀럭 올라왔다.
 푹!
 그와 동시에 무인의 검이 천준서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담담히 감았던 천준서의 눈이 부릅떠졌다.
 “끝······인가?”
 가슴에 틀어박힌 검을 쥐려던 천준서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2장 만사일생
 
 
 1
 
 
 온통 하얀 운무가 자욱한 공간.
 멍하니 서 있던 천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사당의 안으로 향했다.
 사당은 낡고 허름해 언제 세워졌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였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간 천준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당의 제단 위에는 향이나 위패가 아닌 큰 거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을 꿀꺽 삼킨 천준서가 조심스레 발을 옮겨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은 천준서의 전신을 비추었다. 관옥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부터 청색 비단옷을 걸친 몸까지.
 잠시 그렇게 거울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거울에서 기이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쩌적!
 거울에 길게 금이 간 것이다.
 천준서가 깜짝 놀라 당황한 채 서 있다가, 또다시 흠칫 놀라곤 말았다.
 거울 안의 인물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뭐야!”
 천준서는 눈을 크게 뜨곤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하하하하하!”
 하지만 거울 안에서 흑의를 걸친 청년은 더욱 크게 웃으며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흑의를 걸친 청년의 모습은 무서우리만치 천준서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천준서는 절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으으······!’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기운과 두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찌부러질 것 같은 압박감.
 게다가 청년의 웃음소리가 당장 고막을 찢고 머리를 으깰 듯이 들려왔다.
 하지만 천준서가 뒷걸음질을 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
 가슴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원초적인 감각이 천준서를 사로잡은 것이다.
 천준서는 마치 어린 동물이 잔인한 포식자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금까지 굳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돌연 흑의 청년이 천준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거울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거울이 와장창 하고 깨졌다.
 그와 동시에 몸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느낌이 느껴졌다.
 “허억!”
 번쩍 뜨여지는 눈.
 그리고 천장의 보가 시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왼 어깨가 욱신욱신 쑤시는 것을 느낀 천준서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몸을 짓누르고 있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설마, 내가 살아 있는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천준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왼 어깨가 가벼워지며 보이는 것에 절로 신음 소리가 났다.
 “앗?”
 고개를 돌리던 천준서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것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형?”
 천준익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그 소리에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천준익이 잠에서 깼다.
 “준서야?”
 천준익은 요 근래 준서가 걱정이 되었다.
 백치가 되었다가 되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갑자기 천준서가 망나니짓을 하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의원까지 어렵게 데려왔지만, 모두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게다가 예전에는 그러지 않더니 돌연 이복형제라는 이유를 꺼내 들며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벌써 이렇게 된 지 사 개월이 지났지만, 천준익은 천준서에게 더욱 잘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단란한 가정까진 되지 않더라도 천준서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에게도 분명 잘하리라.
 하지만 천준서의 마음은 변할 줄을 몰랐다.
 지난 네 달 동안 계속 험한 태도로 자신과 아버지를 냉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더 잘하면 준서도 마음을 고쳐먹겠지.’
 준익은 그런 마음에 지난밤 준서가 감기에 걸렸다는 시비들의 말을 듣고는 고열로 누워 있는 그를 밤새 간호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던 것이다.
 “형이 왜 여기에 있어?”
 천준서는 내심 마음 아파하는 천준익을 향해 물었다.
 “그······ 게, 간밤에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어.”
 천준익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또 형도 아니면서 형인 양 행세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이 나올 차례였으니, 애써 무시할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형이? 진짜······ 형이야?”
 천준서의 말에 천준익은 쓰게 웃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놈아,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다르다고 하여서 내가 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천준익이 엄한 표정으로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천준서는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꿈. 꿈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은 다음에야!
 형이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예전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그 말인즉슨 형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멍한 표정으로 다시 형을 바라보는 천준서의 표정엔 당황과 의아함이 마구 섞여 있었다.
 그러던 도중 아까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거울 안에서 자신의 행세를 하던 청년.
 천준서는 그를 보며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닮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청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웃고 있었지만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두려웠다.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지만 천준서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천준서가 느끼기에 그는 마치······ 악귀(惡鬼)였다.
 “그러니까, 준서야. 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예전처럼 바르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문제가 있다면 형한테 모두 말해라. 내가 들어줄 테니······.”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자신의 형을 바라보던 천준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자신의 앞에서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죽었어야 할 형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을 하던 천준서는 이 모든 게 아까 그 꿈의 연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자신을 마치 거머쥐려는 듯 손을 뻗었던 흑의 청년이 형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천준서가 해야 할 행동은 너무도 명확했다.
 천준서는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뒤져! 이 악귀새끼야!”
 짜악!
 얼마나 세게 맞았던지 따귀 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동생을 계도하던 천준익은 울상을 지으며 왼쪽 얼굴을 감싸곤 동생을 바라보았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한 천준서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형이구나?”
 ***
 딸그락거리는 자기 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묵묵히 식사를 하던 천용철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준익이 너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그 말에 천준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퉁퉁 부운 형의 얼굴을 보며 밥을 씹었다.
 “그게······ 잠결에 구른 모양입니다.”
 잠시 천준서를 힐끗 쳐다본 천준익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쯧. 무공을 익혔다는 녀석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한 천용철은 다시 식사에 집중을 했다.
 마치 천준서는 이 자리에 없다는 셈 치는 모습.
 사 개월 전만 하더라도 아침식사 때 분위기가 이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준서가 엇나간 뒤로부턴 아침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문제의 원인인 천준서는 입 한가득 밥을 우겨넣고 열심히 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 그 일이 있고 일 년 정도 후란 말이지?’
 천준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말하면 기왕 돌아가는 것, 아예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은가?
 결국은 장소궁 녀석도 비급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장소궁······.’
 천준서는 이를 갈았다.
 마지막 그날, 자신을 비웃던 장소궁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놈의 뼈를 갈아 마시고 싶었지만 천준서는 참았다.
 장소궁은 분명 무재다. 하지만 천준서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가 장소궁이었다면 천준서는 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장소궁의 뒤에서 명령을 내리던 그 흑의인이었다.
 그 질리도록 소름 끼치는 강함.
 전생에서 놈을 보며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절망감이었다.
 ‘문제는 장소궁이 아냐. 그 흑의인이지.’
 천준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흑의인은 강하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부터 연공을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은 좀처럼 솟아나질 않았다.
 그때, 천준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나는 최소한 몇 년 동안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잖아?’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기계적으로 입에 밥을 넣곤 인상을 쓰거나 웃음을 띠면서 생각을 하던 천준서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기회야!’
 천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씩 웃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천용철과 천준익이 이상한 표정으로 천준서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오늘은 정말로 천준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천준서는 의자를 집어넣곤 소리쳤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밖으로 달려 나간 천준서가 다시 얼굴만 쏙 들이밀곤 덧붙였다.
 “그······ 둘 다 보고 싶었습니다.”
 “뭐라고 하였느냐?”
 천용철은 밥을 뜬 채로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다고요. 많이요.”
 한마디를 던지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듯 사라진 천준서를 보던 천용철.
 심지어는 입으로 가져가던 밥알이 무릎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천준익을 바라보았다.
 네 달 동안 갑자기 성격이 돌변했던 천준서가 저런 말을 하다니.
 황당한 것은 천준익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잔에 붓던 차가 넘치는 것도 잊은 채 천용철을 바라보던 천준익은 돌연 의자를 넘어뜨리며 소리쳤다.
 “앗 뜨거! 아고!”
 급히 일어서며 옷을 털어내는 천준익을 보던 천용철은 무릎의 밥알들을 몰래 털어내곤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쯧쯧. 무공을 익혔다는 녀석이!”
 
 
 2
 
 
 천준서는 침상에 누워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로 꿈이 아닌 건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던 가족들이 되살아났고, 시간까지 주어졌다.
 심지어는 전생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정신 차리자. 당장 내가 해야만 할 것을 떠올려야 해······.’
 비급!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 여명신검의 비급.’
 단순한 비급이 아니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초고수의 비급인 것이다.
 한눈팔지 않고 여명신검을 익힌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천준서의 능력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겉으로만 본다면 장소궁 역시 여명신검의 반쪽짜리 비급을 익혔다고 생각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되돌려보니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장소궁은 자신이 여명신검의 비급을 익힌 것을 눈치챘지만, 정작 그는 장가방의 가전무공을 사용했던 것이다.
 ‘왜지? 왜 이렇게 강력한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장가방의 무공 따위를?’
 천준서가 아는 장소궁은 멍청하지 않다.
 숙주현에서 손꼽히는 기재 중 한 명이 아닌가?
 누가 봐도 여명신검의 비급을 사용하지 않고 장가방의 가전무공인 장장성류검법(長暲聖流劍法)을 고집했다는 것은 멍청한 짓임에 분명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하던 천준서는 마침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천준서는 장소궁이 보는 앞에서 여명신검의 비급을 익히다가 주화입마를 당했다. 이런저런 생각보다 몸으로 먼저 부딪치는 이라고 해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장소궁은 신중한 편이다.
 머리를 충분히 써서 장단점을 파악한 이후에야 몸을 움직이는 성격.
 그런 장소궁은 여명신검의 비급을 익히는 데에 확신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확신이 생길 리가 없지.’
 확신이 생기기 위해서는 천준서와 장소궁이 같이 연구했던 부분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잘못된 곳이 없었던 비급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천준서가 눈을 빛냈다.
 ‘장소궁의 입장에서 여명신검의 무공은 위험천만한 것이니까.’
 아무리 정종의 무공이라도 반쪽만 익히면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
 하물며 천준서가 눈앞에서 백치가 된 것을 보았음에야.
 ‘게다가 희대의 절기이니, 혼자서 알아보려 했겠지.’
 보통 그런 엄청난 무가지보 앞에서는 혈육도 몰라보는 일이 빈번한 세상이니.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천준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장소궁이 똑똑하다고 한들, 여명신검이라는 희대의 무인이 일생 동안 쌓은 심득을 어떻게 파악하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는 누구지?’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 흑색 장포의 중년인.
 장가방의 방주는 절대 아니었다.
 천준서도 장가방의 방주를 본 적이 있지만, 전혀 다르게 생긴 자였다.
 게다가 장가방의 방주가 흑의 중년인처럼 강력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천준서는 흑의 중년인의 정체가 너무도 알고 싶었다.
 천씨세가를 멸문시키라고 명령하고, 장소궁에게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던 자.
 천준서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지금으로선 장가방도 어려운 상대야. 하지만 그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도대체 왜 천씨세가를 제거하라고 한 거지?’
 천준서는 그가 륜을 휘두르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보통의 기형병기는 다루기가 어려울뿐더러 대성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흑의인은 붉은 강기를 잔뜩 머금은 쌍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초고수였다.
 만약 지금 그를 본다면 달려들기보단 도망을 갈지도 몰랐다.
 “무시무시한 새끼였어.”
 천준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데 바로 옆에서 천준익이 물었다.
 “누가?”
 깜짝 놀라 형을 바라보던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혼잣말이야.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너 정말 괜찮아? 의원한테 진맥이라도 받아보아야겠다.”
 “아냐! 아주 좋아. 날아갈 거 같아.”
 손을 휘휘 저은 천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젠장. 내공이 없으니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있군. 당장 무공부터 익혀야 해.’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현시점에서 장소궁이 천씨세가를 치지 않는 것은 천씨세가에서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준서가 다시 무공을 익힌다는 소문이 난다면 장소궁은 당장에라도 천씨세가로 쳐들어올 것이다.
 ‘방법이 필요해.’
 무공을 익히는 것을 들키지 않을 만한 곳.
 그런 곳이 있으면 된다.
 망나니 연기를 하느라 집에 며칠이고 들어오지 않은 적도 많으니.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천준익은 벌써부터 불안해짐을 느꼈다.
 저 부탁이란 보나 마나 아버지가 금지한 술을 몰래 가져다 달라는 말일 게 뻔했으니까.
 “준서야! 하아, 그래. 딱 오늘이 마지막이다. 더는 안 된다?”
 “고마워 형. 그럼 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려야겠다.”
 웃음을 지으며 침상에서 일어나는 천준서를 바라보던 천준익이 멍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를?”
 “가주 연공실을 쓰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잖아.”
 “연공실이야 그렇지······ 연, 연공?”
 천준익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망나니가 된 이후로. 아니, 정상적이었을 때부터 무공에 큰 취미가 있던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공이라니?
 “뭐라고? 가주 연공실을 쓰겠다고!”
 가주의 집무실에서 당황에 찬 고성이 울렸다.
 천준서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미묘한 표정으로 천준서를 바라보던 천용철이 물었다.
 “네 형에게 허가는 받았느냐?”
 “받고 나서 곧장 이곳으로 오는 길입니다.”
 “음······.”
 천용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가주 연공실은 직계 중에서도 가주나 소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천준서라 하더라도 차대 가주인 천준익의 허락이 있어야만 입실할 수 있다.
 하지만 천용철이 신음하고 있는 것은 연공실 사용의 재가가 아니었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지?’
 백치가 되었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망나니처럼 행동하더니 이젠 정반대로 자의로 연공을 하겠단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꼭 이런 걸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천용철은 한참을 미심쩍은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준서가 목소리를 높이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무어라 했느냐?”
 “어려운 일이라면 그냥 없던 일로 할게요.”
 천준서는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소문이 외부에 흘러나가지 않게 하면서 예전의 단계를 되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단연 가주 연공실이기 때문이다.
 천준서가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천용철이 손을 들며 말했다.
 “잠깐. 좋다, 네가 그토록 연공을 하고 싶다고 하니 애비가 허락하마. 단, 그 안에서 헛되게 시간을 보낸다면 혼쭐이 날 줄 알거라.”
 천용철의 말에 천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3
 
 
 넓은 석실.
 공간은 넓은데 야명주는 고작 세 개가 박혀 있어 시야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건 천씨세가의 재정이 그만큼 좋진 않단 걸 의미했다.
 그것도 가주 전용 연공실인데.
 한쪽에 자리한 차가운 침대에 누워 있던 천준서는 눈을 슬쩍 뜨며 중얼거렸다.
 “걱정 말라곤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들린 책자의 겉표지를 바라보았다.
 천지성환검(天地聖環劍).
 겉표지만 보자면 그야말로 절기임에 틀림없을 확신을 주는 검공.
 뒤에 몇 권의 책자도 다 저렇게 인상 깊은 제목을 지녔을 것이 분명했다.
 천용철은 천준서에게 연공실을 사용하는 대신 이 가전무공들을 사 성 이상 익히고 나오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도 고작 백 일 연공인데 불구하고 사 성이라니.
 물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하아!”
 천준서는 오른손을 힘없이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천씨세가를 대표하는 가전무공이란 점에서 엄청난 가산점을 준다 해도, 여명신검의 반쪽자리 비급에 비하면 좋게 말해도 쓰레기에 불과했다.
 “근데, 이런 걸 익히고 있으라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한 가지 안심이 되는 것은 장소궁이 여명신검의 비급을 익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준서는 이미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천준서가 고개를 갸웃하곤 중얼거렸다.
 “잠깐······ 난 어차피 비급을 익히고 있잖아?”
 전생이라고 해도 맞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 비급의 상당수를 익힌 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여명신검의 반쪽짜리 비급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여명신검의 무공은 반쪽짜리다.
 아무리 잘난 무공이라도 반쪽은 위험요소가 컸다.
 ‘그래, 이젠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어.’
 그것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서라도 가전무공을 익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익혀야 하나······.’
 천준서는 혀를 찼다.
 익히려니 시간 낭비가 될 것 같고 안 익히자니 그것도 껄끄러웠다. 아버지의 명도 명이었지만 명색이 천씨세가의 차남인데 가전무공을 익히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천준서는 두 무공이 가진 장단점을 분석해보았다.
 여명신검의 비급이 가진 장점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 단점이 있다면······.
 ‘반쪽짜리 무공······.’
 여명신검의 비급은 반쪽짜리다. 발전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안정성도 보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지성환검은 어떨까?
 가문의 무공이라 익히는 것이 당연했고 아버지의 명도 따를 수 있다. 게다가 천준서가 여명신검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데도 큰 도움을 주리라. 문제는 천지성환검은 여명신검에 비에 너무나도 약했다.
 ‘여명신검의 불완전한 부분을 천지성환검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어.’
 불가능에 가깝지만 해야만 하는 시도였다. 결국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천지성환검으로 인해 여명신검을 사용하는 횟수가 줄어든다면 주화입마의 위험성도 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가장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전생에서도 부족했고, 지금은 거의 있으나 마나 하다시피 한 것.
 ‘······내공은 어쩌지?’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내공을 얻는 방법은 운기토납을 하거나 내공심법으로 차곡차곡 쌓는 방법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하며 침상에 누워 있던 천준서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젠장, 내공이고 뭐고 얼어 죽겠네!”
 천년한옥(千年寒玉)이 섞인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천준서는 검을 쥐며 일어났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당장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면 천준서가 해야 할 일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사 성? 까짓것 두 개 다 사 성까지 올리고 뭘 하든가 해야겠어.”
 
 
 4
 
 
 뚝뚝.
 웃통을 벗은 채 벽을 노려보는 천준서의 턱을 타고 땀이 떨어져 내렸다.
 숨을 헐떡이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천준서가 돌연 팔을 뒤틀며 소리쳤다.
 “이얏!”
 검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뻗어 나갔다.
 마치 찌르는 듯 쾌속하게 뻗어나가던 검이 돌연 벽을 긁고 지나가며 곡선의 궤도를 그렸다.
 그그극!
 “하아······.”
 검을 쥔 손의 팔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뒤를 돌아본 천준서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천지성환검의 육초식인 천지번복(天地飜覆)이었다.
 전형적인 변초이다.
 환검의 일종으로 찌르기로 시작해서 베기로 끝나는 초식.
 대성을 하면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리를 담을 수 있다. 천지번복이 변초인 만큼 그 파괴력은 다른 초식들에 비하여 약간은 뒤처지는 것이 정상.
 하지만 연공실의 벽에 남은 검의 흔적은 전혀 가볍지 않아 보였다.
 단단한 석벽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깊은 검흔은 방금 전의 천지번복이 무시할 만한 초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좋아. 이 정도라면 적어도 예전보단 나은 것 같군.”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이던 천준서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시 검을 고쳐든 천준서의 기세가 일변했다.
 사선으로 기이하게 검을 치켜 들은 천준서가 이를 꾹 물며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합!”
 쩌저정!
 놀랍게도 검에서 붉은 검기다발이 쏟아져 벽을 무참하게 훑고 지나가자 벽에 우악한 검흔이 그어지며 파편이 튀었다.
 단참마혼(斷斬魔魂)!
 여명신검의 이초식임에 분명했다.
 검기를 뿌리고 헐떡거리던 천준서가 그대로 벌렁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하아, 하아······ 빌어먹게 힘드네.”
 비록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두 번의 위협을 넘길 수 있을 정도의 검기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 내공이라도 된 게 어쩌면 빌어먹을 천년한옥일지도 모른다는 게 슬펐지만.
 숨을 몰아쉬던 천준서가 문뜩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처음 연공실에 들어와서는 가전무공을 익히기로 했지만, 결국 가전무공은 거의 익히지 못했다.
 ‘껍질만 천지성환검이라고 할 수 있군. 이거 이러다가 아버지한테 걸리면 맞는 거 아닌가?’
 겉은 천지성환검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그 안의 묘리와 운용은 완전한 여명신검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명신검 본연의 위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지만, 천지성환검은 깔끔하게 박살 낼 수 있는 검법이 탄생했다.
 눈속임용으로 쓰기에는 과분한 검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쨌건 결과적으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리라.
 ‘아버지도 뭐라고 말씀하시지 못하겠지?’
 설사 직접 시연해 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시연 정도로는 확연히 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좋아······ 슬슬 준비를 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올 때 챙겨왔던 것들을 대충 챙긴 천준서가 터덜터덜 걸어 연공실의 입구로 향했다.
 ***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물에 몸을 담군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셌나? 이상하네.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 건가?”
 백 일째가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보니 구십구 일째의 밤이었다.
 ‘왠지 형도 아버지도 없다 했어.’
 김빠지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이렇게 씻을 수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땀과 냄새가 범벅이 된 몸으로 아버지나 형을 만나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뜨거운 물에 적응이 되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천준서가 양팔을 들어 나무통에 걸치고 기대었다.
 아무리 전생에 수련을 드문드문했다고는 했지만, 단 한 번의 백 일 연공으로 전생의 무위를 넘어서다니.
 어쩌면 무공 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는 장소에서의 연공이다 보니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은 것일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천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기대 이상의 효과라든가 운이 좋았다는 말로 넘겨버릴 부분이 아니었다.
 과거에 천준서가 올랐던 경지까지야 어렵지 않았다. 기억 속의 경지를 몸과 체화시키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하나가 더 필요했다.
 분노.
 무기력하게 죽어야 했던 전생의 기억이 천준서의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도록 만들었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 어떤 기분인지.
 천준서는 안다.
 그렇기에 멈출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더러운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천준서는 더 강해져야 했다.
 덕분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경지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쉽단 말이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고 하던가?
 천준서는 영 내키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신공이 있다고 해도 반쪽짜리고······ 그렇다고 중요한 내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공을 얻으려면 운기토납을 하든가 영물의 내단이나 영단 같은 것들을 얻어야만 한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
 ‘검기상인에 도달했는데도 내공이 부족해서 쓰고 싶은 만큼 못 쓰다니. 활은 있는데 화살 얼마 없는 셈이군.’
 혀를 차며 눈을 감은 천준서의 콧날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잠잠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천준서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연이라도 얻으면 좋을 텐데.”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여명신검의 반쪽짜리 무공이 기연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중얼거리던 천준서의 머리에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대흉년.
 조월현검(朝月玄劍).
 경석산(磬石山)혈사(血事).
 아미봉문(峨嵋縫門).
 ‘조월현검······ 경석산 혈사라······.’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던 천준서가 미간을 좁혔다.
 경석산 혈사.
 이곳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곳에 일어났던 일이다.
 무림에서 이런 뜬금없는 곳에 혈사가 일을 일이라면 몇 가지 안 된다.
 절세병기가 출몰하거나, 절세무공이 출몰하고나, 절세미녀가 나타나거나.
 그중에서도 경석산 혈사는 무공이었다.
 호사가들의 마존(魔尊)의 무공이 경석산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다는 확언.
 수많은 명문대파부터 시작해서 중소방파까지 몰려들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헛소문이었다는 이야기임에 분명했다.
 어느새 눈을 뜬 천준서는 진중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냐, 분명히 있다.’
 그것이 마존의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지만, 천준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명신검의 비급 중 나머지 반쪽이 거기에 있다고.
 여명신검의 비급을 경석산에서 찾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
 당연히 나머지 반이 경석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장에라도 그곳을 찾아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천준서는 고개를 젓곤 물을 얼굴 위로 끼얹으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괜찮아. 나 말곤 아무도 미래에 일어날 일은 모르니까.’
 경석산 혈사 말고도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못 찾은 걸 내가 가서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겨우 하나를 갖고 불안해할 필요 없어.’
 생각해보면 과거의 천준서와 장소궁도 남은 여명신검의 비급을 찾기 위해 경석산을 이 잡듯이 뒤졌었다.
 하지만 발견 못 하지 않았던가?
 물론 당시에는 천준서도 장소궁도 어렸었고 서로를 견제하느라 비급수색에만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여명신검의 남은 비급을 찾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나올 물건이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하는 것이 옳다.
 최대한 빨리해야 할 것은 단연 여명신검의 비급을 찾는 일이다. 반쪽짜리 비급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으아! 일단 중요한 잠부터 자고 생각해보자.”
 어느새 나무통에서 일어난 천준서가 기지개를 크게 켜며 중얼거렸다.
 
 
 3장 일취월장
 
 
 1
 
 
 “이거, 너무한데.”
 천준서가 투덜거리며 내원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아버지 앞에서 가전무공 시연 정도는 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정기회의?’
 어째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회의가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자신을 제대로 시험해 보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해서 연공실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기회의라니······.’
 총관부터 두 명의 단주 정도가 참여할 것이리라.
 ‘그 앞에서 무공 시연이라니, 광대라도 된 기분이겠군.’
 어느새 내원 밖에서 천준서를 기다리고 있던 세가의 무인들이 천준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이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각으로 들어간 천준서는 다시 후원으로 걸어가는 무인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그리고 후원에 도착하자마자 천준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후원의 입구에서 무인 한 명이 천준서에게 검을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원 한쪽에는 천용철부터 시작해서 총관 그리고 두 명의 단주와 장로가 나와 있었다.
 거기서 끝났다면 천준서도 평소처럼 웃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평소와 그림이 좀 많이 달라 보였다.
 후원 가운데 검을 든 채 서 있는 사내는 천씨세가의 두 무력 단체 중 수천단(守天團)의 부단주인 염명.
 “에이 거짓말.”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본 천준서의 표정이 똥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천용철이 일언반구도 없이 턱짓으로 검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도 아니고 염명을 상대로 비무를 하라고?’
 염명은 나이가 삼십 세가 다 되어가는 무인이었다.
 물론 그의 실력은 이류가 겨우 될랑 말랑 했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천준서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의 허리 어림으로 대령된 검을 내려다보던 천준서가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찌 염 부단주를 상대로······.”
 손을 휘휘 저으며 염명을 바라보던 천준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향해 검지를 까닥까닥 거리는 염명을 본 탓이다.
 그거로도 모자라 염명은 어느새 입 꼬리를 씩 올리고 있었다.
 아마 백치에 개망나니인 이 공자가 무공을 배운다고 설치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천씨세가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하지만 천준서는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다.
 성격이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바로 천준서 아닌가.
 적어도 염명은 세가의 이 공자라는 자리에서 훨씬 아래에 있는 무인이었다.
 그런데 감히 자신에게 저런 도발을 하다니?
 주인을 약 올리는 개새끼는 없는 법이었다.
 자신을 비웃는 염명을 보던 천준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거,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제가 안 들을 수 없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준서가 내원 중간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느새 무인이 양손으로 바치고 있던 검집에서 검이 뽑힌 뒤였다.
 앞으로 걸어가며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천준서가 씩 웃으며 천용철을 향해 물었다.
 “근데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말입니다. 혹시 부단주가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네요.”
 천준서의 말은 누가 들어도 그것은 천용철이 아니라 염명을 향해 묻는 것.
 발끈한 염명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감히 수하가 비무 할 때 생긴 상처로 입을 떼겠습니까, 이 공자님. 걱정하지 마십쇼! 물론 그럴 일이 있을 리 없겠지만요.”
 그 말을 듣던 천준서의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 주둥아리만큼 무공 실력이 뛰어났다면 그날 밤에 천씨세가가 그렇게 참혹하게 당할 리도 없었겠지.’
 슬슬 열이 받자 손이 근질거렸다.
 “십 초를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마는, 뭐 시작해보죠.”
 방긋 웃으며 크게 말한 천준서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을 뒤틀며 검극을 찍듯 뻗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극!
 “헉!”
 염명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아슬아슬하게 상체를 틀며 검을 사선으로 쳐올리자 천준서가 몸을 다시 틀며 검을 횡으로 베었다.
 단참마혼.
 그와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검극이 염명의 옷 위를 스쳐 지나갔다.
 상의가 길게 잘린 염명이 미간을 구기며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씩 웃는 천준서.
 동시에 그 광경을 본 염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너무 방심했나 보군요.”
 염명이 그렇게 말하곤 검을 휘두르며 뛰쳐나갔다.
 천준서의 검과 다시 맞붙었다가 떨어지길 두 번.
 돌연 염명의 검에서 천씨세의 일반 무공인 소천검공(小天劍功)의 삼초식 양운일섬(兩雲一剡)이 뻗어 나갔다.
 염명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초식이자, 소천검공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쾌검.
 중단에서 상단으로 치고 올라가는 검의 움직임에 금방에라도 천준서가 양단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천준서는 이를 꾹 물었다.
 염명 이놈이 자신이 상처를 입든 말든 전력을 다해 양운일섬을 뻗어 낸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천준서의 몸이 슬쩍 옆으로 미끄러졌다.
 연공실에서 몇 번 읽어본 천환구궁보(天幻九宮步).
 일보! 옆에서 튀어나온 천준서가 염명의 검을 쳐내곤 가슴팍을 냅다 발로 후려갈겼다.
 “크헉!”
 비치적비치적 뒤로 물러나는 염명을 향해 다시 한 번 천환구궁보를 밟은 천준서가 검을 뻗어냈다.
 왼쪽 허벅지와 오른쪽 허벅지를 베고 지나간 천준서의 검이 다시 튕겨져 재차 자신을 노리는 염명의 검을 올려치고 팔을 베었다.
 “아악!”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함께 손에서 검을 놓친 염명이 눈을 부릅떴다.
 천준서의 검이 번쩍하며 자신의 미간을 향해 쇄도했기 때문이다.
 염명은 눈을 감기 무섭게 베인 허벅지에서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머리를 정리해놓은 영웅건이 풀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제야 한쪽 눈을 겨우 뜬 염명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천준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영웅건이 반으로 잘리며 살도 베인 듯, 얇은 검상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천준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양운일섬이지. 딱 봐도 부단주의 양운일섬으로는 파리도 잡기 힘들겠네.”
 그제야 염명은 자신의 미간을 반으로 쪼갤 듯 순식간에 튀어나온 검날이 양운일섬임을 깨달았다.
 너무 물 흐르듯 전개되어 자신이 수도 없이 연습했던 초식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천천히 걸어와 염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댄 천준서가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때는 정말 대가리를 쪼개 버릴 거야. 알겠어?”
 그제야 천준서가 일부로 자신의 이마를 베어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염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자들의 표정은 전부 굳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천용철이 천준서를 불렀다.
 “너는 전각 안으로 따라 들어오너라.”
 천준서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말한 천용철이 몸을 돌려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천준서는 염명을 힐끗 쳐다보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궁시렁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전각의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뒷짐을 진 채 심각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용철을 바라보던 천준서가 말했다.
 “아버지 솔직히 제가 좀 세게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준서야, 내 말을 들어라.”
 천용철이 천준서에게 다가가며 말하자,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글쎄 시작하기 전에 말했잖아요. 제 책임 아니라고요.”
 울상을 지은 채 변명하는 천준서의 어깨에 손을 올린 천용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준서야. 설마 마공이라도 익힌 게냐?”
 “에?”
 천준서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아니, 백 일 연공을 막 마치고 나온 아들에게 마공이라니!
 누가 봐도 천준서의 무공은 천씨세가의 천지성환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천준서의 천지성환검의 진면목은 사실 여명신검.
 정도 문파의 무공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여명신검이 단숨에 마공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아니,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찌 그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했단 말이냐? 정말 내게 숨기는 게 없느냐?”
 어깨를 잡고 다그치는 천용철의 모습에 천준서는 속이 찔렸다. 비록 마공은 아니지만 여명신검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아버지에게도 여명신검은 말할 수 없는 비밀 중 한 가지였으니까.
 천준서가 짐짓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에이! 나는 뭐 칭찬해준다고. 들어가서 쉴게요, 아버지.”
 천준서가 실망한 척 몸을 돌리곤 나가자, 천용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쾅!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염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곤 말했다.
 “대주님! 누가 들을지 모릅니다!”
 “지금 누가 듣는 게 중요하단 말이냐? 진짜로 이 공자가 그런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 묻잖아!”
 염명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 방심한 탓인지. 첫수부터 너무 얽혀서 그만······.”
 “멍청한 녀석!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나서서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수천단의 단주인 황용수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아무리 염명이 이류급의 무인이라지만, 내공도 얼마 없는 하루살이한테 그런 수모를 당하다니!
 정말로 놈의 말대로 꿍꿍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나의 눈에도 잡히지 않았어.’
 황용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준서의 몸이 희끄무레하게 변하는 순간, 자신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 말인즉슨, 자신 역시 천준서의 신형을 잠시나마 놓쳤다는 것이다.
 ‘그럴 리 없어. 수련을 고작 몇 개월 한 애송이한테 내가?’
 어쩌면 염명을 이렇게 채근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 공자입니다 대주!”
 급히 목소리를 낮춘 염명이 조심스레 속삭이자, 황용수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멍청하긴. 다시 백치로 만들어주면 되는 일이 아니냐?”
 “······!”
 염명의 눈이 커졌다.
 황용수가 누구인가!
 천씨세가의 가주보다 고작 반 수 뒤처진다는 고수다.
 장가방의 삼대빈객들도 꺼려하는 자가 황용수 아니던가.
 그런 황용수가 죽이려고 한다면 사실상 천준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놀라는 염명을 보던 황용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2
 
 
 천준서는 침상에 반쯤 드러누워 발을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벼운 그의 자세와는 달리 천준서의 얼굴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염명이라······.’
 사흘 전 일.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염명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엔 분명 적의가 섞여 있었다. 자신을 주인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 주인이 아니라 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겠지. 아버지나 형을 주인이라고 생각해도 날 그렇게 볼 수는 없어.’
 자신이 되돌아온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세가 내의 사람들의 시선은 보통 한두 가지로 나뉘었다.
 경멸 혹은 동정.
 꽤나 난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망나니짓을 하는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
 그리고 백치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자신이 이상하게 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눈빛.
 하지만 적의는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에 자신을 노리던 양운일섬은 거의 살초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오호라······ 그런 거였나?’
 천준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후원에는 거의 수뇌부라고 할 만한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며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어 제대로 파악하진 못했지만, 천준서의 생각대로라면······.
 ‘그래, 그래서 그날 천씨세가의 무력단체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었어. 중요한 건 하나인가, 둘인가인데······.’
 배신.
 결국 천씨세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나다는 장가방의 오대빈객 중 세 명이라곤 해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천씨세가의 문이 열려 있단 듯이 그렇게 빠르게 침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배신이 있다면 누가 배신을 했고 누가 여전히 충성을 하는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하아, 세가 내에서조차 실력을 숨긴 것이 다행이라니. 믿을 놈 하나 없구나.’
 만약 자신이 진짜 실력을 드러냈다면 이런 기미조차 눈치를 못 챘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나서야겠어.”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천씨세가가 썩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해온 자신의 행동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나 형에게 해도 결국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배신을 한 자들을 놔두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용하려면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
 무엇보다 자신의 가문에 면상도 보기 싫은 장소궁 놈의 세작들이 수뇌부로 앉아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어디 마음껏 움직여 봐라.’
 입맛을 다신 천준서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다 댔다가 중얼거렸다.
 “아차. 내 검.”
 그러고 보니 새 삶을 살기 시작한 뒤부터는 검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벌써 저녁인데 어쩐다······.’
 결국 천준서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생각난 김에 자신의 손에 맞는 병장기를 사러 갈 셈이었다.
 ***
 “대주님!”
 자신의 거처로 헐레벌떡 뛰어온 수천단의 수하를 보며 탁자에 올린 다리를 슬쩍 내린 황용수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대주님이 명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이 공자님께서 외출을 하셨다고 하는군요.”
 “이 공자가 외출을?”
 눈을 빛낸 황용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황용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자신의 검을 들며 말했다.
 “수고했어. 들어가 쉬어라.”
 그렇게 말하며 사내에게 주머니를 하나 던져주는 황용수.
 주머니를 받은 사내는 짤랑거리는 소리에 반색을 하며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안에는 은자 네 냥이나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닫고 소매에 갈무리하며 물었다.
 “예. 그나저나······ 무슨 큰일인가 봅니다.”
 그 말에 황용수의 표정이 일변했다.
 “네가 알 것 없는 일이다.”
 “아, 예!”
 근래에 황용수의 저런 차가운 표정을 본 적이 없는 사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걸어서 외원 밖으로 나가려던 사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네 수천단이지?”
 “아! 자천단주(刺天團主)님!”
 사내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자네가 이것 좀 수천단주에게 전해주겠나? 이번 정기회의 결정 사안이야.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결제해야 하니 그렇게 전하고.”
 그 말에 사내는 입맛을 다셨다.
 수천단주에게 받은 돈으로 술이라도 마시려고 했는데, 오늘은 세가 안을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할 모양이었다.
 서찰을 받은 사내가 몸을 돌리려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아차. 근데 늦을 수도 있습니다.”
 “응? 늦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천단주가 의아함에 이맛살을 구기며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것 같더군요.”
 “일?”
 자천단주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검까지 챙겨 들고 가시던데요?”
 “검을? 따로 무슨 말은 없었고?”
 “무슨 말씀은 없으셨고······ 이 공자님이 외출하신다고 보고를 하니······.”
 그 말에 자천단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외출? 어디로?”
 “세가를 나가실 때 철방(鐵房) 쪽으로 가신다고······.”
 “그래. 별일 아니겠지. 알았다. 늦어도 내일 오후까진 가주님께 올리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천단원을 보던 자천단주 천승겸이 눈을 굴렸다.
 ‘이 공자가 외출을 하는데 어째서 수천단주가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평소에는 필요치 않다고 검을 장식인 양 생각하던 황용수가 검까지 들고 나가?
 그것도 이 공자가 나간다는 보고를 듣고?
 불안해진 천승겸이 허리춤의 검병을 매만지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이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3
 
 
 천준서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어둑해진 길을 걸었다.
 예전엔 아무도 모르게 만드느라 조심조심 돈을 모아서 싸구려 연검밖에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철방에 의뢰할 때는 무려 은자 열 냥을 들였다.
 벌써부터 언제 검이 완성될지 기다려졌다.
 마치 악공이 좋은 악기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듯,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손에 들린 소홍주가 그것이었다.
 부엌에다 반찬으로 나왔던 전을 좀 데워달라고 해서 함께 먹을 참이었다.
 ‘아버지도 딱히 뭐라 하시진 않겠지.’
 씩 웃으며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걷던 천준서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세가랑 통하는 지름길이라 숙주현의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세가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길이었다.
 술병을 쥔 채 걷고 있던 천준서는 골목 저편에서 마주 걸어오는 사내를 발견했다.
 “음?”
 영웅건을 맨 사내, 염명임에 틀림없었다.
 웃음기를 띄고 있던 천준서의 표정이 일변했다.
 자신을 보며 걸어오는 염명의 손에 검이 들려 있던 탓.
 천준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들어왔던 골목 입구를 바라보았다.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검을 들고 어느새 입구를 막은 채 서 있는 모습이 천준서의 눈에 들어왔다.
 천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야, 수천단주라. 거물이 납셨네?”
 천준서는 약간은 감탄한 듯한 목소리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거, 빠릿빠릿하다고 칭찬해야 하는 건지······ 단순하다고 욕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입구와 출구를 모두 봉쇄당한 천준서가 당황한 기색이 없이 중얼거리자, 황용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태연한 척 애쓰지 마시오. 이 공자. 저번에 실력은 잘 봤소.”
 “장가방 맞지? 내 행동만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이래도 되는 거야?”
 천준서가 궁금하다는 투로 묻자, 황용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어디까지 아는 거지?”
 신음을 흘리는 황용수를 바라보던 천준서가 돌연 눈을 빛냈다.
 은연중에 제삼의 기척을 느낀 탓이다.
 그리고 스쳐 가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폐가에 몸을 숨긴 채로 자신과 수천단주를 불안한 듯 살피는 자.
 자천단주였다.
 ‘적인가? 아니야. 적이라면 저렇게 숨어 있지 않겠지.’
 잠시 고민하던 천준사가 너스레를 떨며 중얼거렸다.
 “자천단주도 한패라고 봐도 되는 거야? 이거 실망스러운데······.”
 천준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목의 폐가 지붕에서 사내가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제길.”
 자천단주 천승겸이었다.
 그의 등장에 황용수가 발걸음을 멈칫하곤 얼굴을 찡그렸다. 자천단주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황용수의 기색을 살피던 천준서가 천승겸을 향해 말했다.
 “소속을 좀 분명히 하시지?”
 “하아. 저는 천씨세가의 자천단 소속입니다.”
 천승겸은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듯 소리쳤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천준서에게 안심하라는 듯 양손을 든 채로 다가와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내가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도망쳐야 합니다, 이 공자.”
 “아아. 솔직히 같은 성씨인 자천단주까지 배신했으면 정말 마음 아플 뻔했어.”
 느물거리는 천준서의 말에 천승겸이 타일렀다.
 “상대는 세가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황용수입니다! 놈이 얼마나 강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염명과는 상대도 안 되는 놈입니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 세가로 도망치십시오!”
 그렇게 말한 천승겸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여기서 황용수의 얼굴을 본 순간 몸을 돌려서 세가로 돌아가려고 했다. 자신이 황용수를 이길 수 있을 터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으니 황용수가 자신을 살려둘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공자가 자신을 불렀으니······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목숨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될 거, 사내답게 처음부터 나서야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이 공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다.
 “뭐하는 겁니까! 얼른 도망치라니까요! 이러다가 둘 다 죽습니다!”
 천승겸이 소리치자, 황용수가 삼 장 밖에서 멈춰 서서 말했다.
 “자천단주. 지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붙는 게 어떻겠소? 거기 붙어 있다간 개죽음을 당할 것이오.”
 그 말에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천승겸이 대답했다.
 “젠장. 일없소. 죽이시오.”
 “미련하군.”
 황용수가 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천준서가 방긋 웃으며 천승겸을 향해 말했다.
 “내가 좀 필요한 게 있거든. 잠깐 빌려줄래?”
 “제길 다 죽게 생긴 판국에 무슨 소리요!”
 천승겸이 소리치자, 천준서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검 좀 줘봐. 안 챙겨 와서 말이야.”
 
 
 4
 
 
 천승겸이 내민 검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하는 천준서.
 “괜찮네. 잠깐만 빌리자고.”
 그 말에 천승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공자가 미친 건가? 아니, 원래 미쳤다고 소문이 났었지!’
 새삼 그 소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천승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친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황용수의 앞에서 저리 검을 들고 설쳐댈 수 있는가!
 천씨세가에서 두 번째로 강한 고수가 황용수였다.
 천씨세가의 가주라 하더라도 쉽게 싸우기 힘든 수천단주.
 천승겸은 천준서의 소맷자락을 잡고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평소보다 곱절은 빠르게 속삭였다.
 “이보시오, 이 공자!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이러다 우리 둘 다 개죽음당한다고요. 내가 시간을 끌 테니 이 공자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그 말에 천준서는 한숨을 쉬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이것 좀 마시고 있으라고. 반 이상 먹으면 알아서 해.”
 건네받은 소홍주 병을 내려다보던 천승겸은 멍한 표정으로 다시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아오, 이런 미친놈!’
 속으로 욕을 뇌까렸지만 천준서는 이미 저만큼 간 뒤였다.
 “오호. 부단주랑 싸우고 제법 기고만장한 모양이구나. 기개는 칭찬해줄 만하다만······ 용기랑 만용을 구분할 줄 몰라.”
 성큼성큼 다가가는 자신을 보며 피식 웃으며 내뱉는 황용수의 말에 천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용기? 만용?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디까지가 용기고 어디까지가 만용인지 설명 좀 해봐라.”
 황용수는 안중에도 없는 말투.
 덕분에 황용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어디 한 번 받아보아라!”
 쇄액!
 황용수는 검을 휘둘렀다.
 천준서가 이 장 안으로 들어온 이상, 황용수의 사정거리 안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내지는 않겠다!’
 검이 천준서에게 쇄도하는 동안 황용수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벌써부터 저 애송이의 몸에 칼날이 박히는 장면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르는 황용수를 보고 있던 천준서는 정확히 반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천준서의 가슴 위로 황용수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보고 있던 천승겸의 심장이 터질 만큼 아슬아슬한 간격.
 하지만 천준서는 마치 자기가 의도했다는 양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수천단주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거기서 멈춘다면 오늘 네 머리통은 무사할 것이다, 염명.”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써늘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천준서의 모습에 염명은 그대로 굳었다.
 ‘······!’
 염명은 자기도 모르게 저 애송이의 한마디에 굳어 버리는 현실에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비, 빌어먹을! 대체 저 애송이가 진짜 망나니 이 공자가 맞단 말이냐!’
 그 생각은 비단 염명뿐만이 아니었다.
 적수공권으로 출수하려고 하고 있던 천승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준서의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하지 않은가.
 “내가 다시 태어나고 나서부터 느낀 게 있다.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 적이랑 손을 잡고 세가를 파먹고 있는 해충을 발견했는데, 그게 이제 주인까지 파먹으려 한다. 이 해충을 그대로 놔두면 후회할까? 후회하지 않을까?”
 “해충?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 주둥이론 그따위 말을 하면 안 된다. 너야말로 세가를 좀먹는 해충이 아니더냐! 그것을 아느냐? 널 보면 세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황용수가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천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달라.”
 “다르다고? 네놈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만 봐도 알 수 있다! 뭐가 달라졌다는 거냐?”
 “많이 다르지. 예전보다 더 비싼 거 마시잖아. 어쨌든 널 그냥 놔두면 후회할 것 같다.”
 마치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한 어투.
 황용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처음 상처만 입히고 제압하겠다던 그의 생각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그은 일검이었다.
 “이익!”
 쩡!
 우습게도 황용수의 검이 너무나도 힘없이 천준서의 검에 막혔다.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황용수를 바라보며 검을 떨쳐낸 천준서의 검에 변화가 일었다.
 “거, 검기!”
 “거짓말! 이 공자가?”
 염명과 천승겸의 입에서 경악에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천준서의 검이 불그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 사술이다!”
 황용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그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나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검기를!’
 그의 말에 천준서가 비웃었다.
 “사술? 그래. 네가 하면 무공이 뛰어난 것이고, 내가 하면 사술이겠지. 인정하기 싫겠지? 밤낮으로 술만 처먹고 계집질이나 하고. 검이라곤 잡는 꼴도 못 봤던 놈이 검기를 쓰다니.”
 천준서가 황용수를 향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엇!”
 황용수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재빨리 검에 전신공력을 불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직감적으로 좌측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쩡! 쩌쩌정!
 순식간에 검이 여섯 번이 넘게 얽혔다가 떨어졌다.
 “크윽!”
 팔목이 찌르르하고 아려왔다.
 분명 자신의 내공이 더 뛰어날 텐데도 불구하고 검기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참고 다시 검을 휘둘러야 했다. 천준서의 검이 다시 쇄도했기 때문이다.
 그의 허벅지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검에 팔목을 틀어 검을 막은 황용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땅!
 천준서는 검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다시 상단으로 찔러 넣었다.
 파공성이 골목을 울렸다.
 “으으!”
 황용수는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천준서의 검에 몸을 굴렸다.
 나려타곤!
 천씨세가의 두 번째로 손꼽히는 고수가 지체 없이 몸을 던져서 더러운 골목길의 바닥을 구른 것이다.
 “만용을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 거기서 좀 쉬다가 가르쳐준다고?”
 땅바닥을 굴렀다 일어나는 황용수를 비웃은 천준서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붉은 검기다발이 날아갔다.
 콰광!
 “어헉!”
 황용수가 디디고 있었던 자리에 검기다발이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몸을 뺀 황용수를 향해 귀신처럼 붙은 천준서가 검을 휘둘렀다.
 황용수를 양단해 버릴 듯 사선으로 휘두르는 검.
 천지성환검의 사 초식 천호풍우(天呼風雨).
 검기를 두른 채 자신을 양단할 듯 다가오는 검세에 황용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검을 들었다.
 쩌정!
 천준서의 검이 벼락처럼 떨어지자 황용수의 검이 형편없이 깨졌다.
 “쿠에엑!”
 그와 동시에 뒤로 우당탕탕 구른 황용수가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다.
 검이 깨지며 주입하고 있던 내력이 역류해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황용수의 상체에는 깨진 검이 마치 암기처럼 이리저리 박혀 있었으니, 그야말로 참담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를 토해내고 숨을 헐떡이는 황용수를 향해 다가간 천준서가 검 끝으로 황용수의 마혈을 찌른 후 턱을 들어 올렸다.
 “뭐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네가 감히 내게 이렇게 행동하고 무사할 성싶으냐!”
 피범벅이 된 황용수가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겨우 이깟 놈이 천씨세가를······.’
 천준서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짝!
 그 검에 베일 줄 알았던 황용수는 뺨을 때리는 검면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애비도 감히 내게 그러지는······.”
 짝!
 “으으 건방진······.”
 “검집.”
 천준서가 손을 뻗으며 말하자 천승겸이 허리춤에서 검집을 풀어 공손히 가져다 바쳤다.
 처음의 행동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이미 천승겸과 염명은 천준서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불과 반 시진 전만 해도 그들에게 천준서는 그저 천씨세가의 이 공자.
 잘생기고 무공 실력도 그럭저럭 되는 이류 가문의 망나니 둘째 아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숙주현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황용수를, 아니. 저 어린 나이에 검기를 사용한 마당에 더 할 이야기가 있을까!
 이미 숙주현의 주인이라고 할 만한 천씨세가의 가주나 장가방주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천씨세가의 이인자를 저렇게 자비 없이 다루다니!
 천승겸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토록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그저 망나니인 줄 알았던 이 공자가 실은 잠룡이었어!’
 천씨세가에 인물이라곤 천준익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던 천승겸은 천준서의 모습에 생각이 바뀌었다.
 ‘가주는 숙주현 안에서 노닐었지만 이 공자는 천하를 무대로 노닐 거야!’
 천승겸이 주먹을 쥐고 흥분하는 사이, 천준서는 황용수에게 다가가 검을 검집 채로 휘둘렀다.
 “이익! 내가 네놈을······.”
 뻑!
 황용수가 입을 여는 순간, 검집은 어김없이 황용수의 몸 위로 떨어졌다.
 황용수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욕설을 내뱉고 위협스런 표정으로 천준서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천준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하게 검집을 휘두르는 모습에 천하의 황용수도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그만!”
 황용수는 사정없이 휘두르는 검에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전신경맥을 잘 아는 자들은 특별히 아프고 크게 상처입지는 않는 곳을 골라서 때린다고 하지만, 천준서는 그냥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 막았던 팔은 금이 갔는지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고, 이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조차 그 광경에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무자비!
 염명은 피에 절은 검집이 황용수의 몸에 달라붙으며 나는 소리가 소름 끼쳐 내력으로 귀를 막아버린 지 오래였다.
 잔인하리만큼 천준서의 손속엔 자비가 없었다.
 아니, 천준서는 악마였다.
 인간이라면 어찌 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새 제압되었던 황용수의 마혈이 격한 구타에 의해서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황용수는 혼자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야심가였던 천씨세가의 이인자 황용수가 천준서의 신발에 고개를 처박고 소리쳤다.
 천씨세가 안에서 가주도 한 수 접어주는 황용수가, 솜털도 마르지 않은 천준서에게 매달린 것이다.
 “으아!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시오?”
 “살려주세요!”
 엉금엉금 긴 황용수는 천준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제발······!”
 더 맞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음은 각오했지만 이렇게 죽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자존심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그만······.”
 황용수가 비굴하게 고개를 처박자, 천준서의 매질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내가 한 번 물었던 개를 어떻게 믿고?”
 천준서가 무릎을 구부리고 바라보며 묻자, 황용수가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것입니다. 목을 걸 수 있습니다!”
 천준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목은 지금도 칠 수 있어.”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믿음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생 이렇게 비굴하게 땅에 머리를 박고 구걸을 한 적이 있을까?
 하지만 황용수는 전혀 비굴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 한 것도 할 수 있었다.
 ‘악마, 악마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황용수를 보던 천준서가 한숨을 쉬었다.
 ‘이놈들 때문에 천씨세가가 그렇게 물거품처럼 쏟아져 내렸다는 건가. 한심하구만.’
 속으로 혀를 차던 천준서가 황용수를 향해 말했다.
 “좋다. 이번 한 번은 봐주지. 단, 다시 한 번 엉뚱한 생각을 한다면······ 너부터 시작해서 저놈 그리고 수천단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릴 줄 알아라.”
 그 말을 들은 황용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편 멍하게 서 있던 염명은 천준서가 자신을 가리키며 웃는 것을 보곤 억지로 웃어 보였다.
 염명은 여전히 청각을 내공으로 막고 있었다.
 
 
 4장 군생무상
 
 
 1
 
 
 수천단주의 집무실.
 평소에도 조용했지만 오늘은 더욱 조용했다.
 그 외에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수천단주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청년이 앉아 있다는 것 정도다.
 “자, 사심 없이 터놓고 이야기해봐. 장가방에서 뭐라고 사탕발림을 해서 널 꼬드겼어?”
 탁자에 놓여 있던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준수한 인상의 청년, 천준서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황용수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것은······.”
 “왜? 아직도 방금 전의 일이 요행인 것 같아?”
 천준서의 물음에 황용수가 입을 다물었다.
 끔찍한 놈.
 적어도 황용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행이 조금이라도 섞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천준서는 머리까지 좋았다.
 “지금 숙주현의 손꼽히는 고수가 무엇에 넘어간 건지 묻고 있잖아.”
 “······사업체 하나를 준다고 했소.”
 “했소? 그래 좋아. 그 정도로 해두지. 그게 끝일까?”
 천준서의 눈이 번뜩였다.
 황용수는 겁이 났다.
 놈은 자신의 속을 훤히 읽고 있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배신했다는 증거라곤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섣부르게 이 공자를 치려고 했던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가리 굴리지 마. 네가 아직도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
 “장가방에서 장로직을 약속했소. 천씨세가는 곧 없어질 거라고 하더구려.”
 천준서는 혀를 찼다.
 “어리석긴. 그래서 나를 감시하라고 했겠지. 내가 무공을 연공하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보고하라고 했지?”
 “그걸 어떻게?”
 황용수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아마 지금 넌 어떻게든 오늘 일어난 일을 장가방에 전하려 할 거야. 왜? 아직 포기를 안 했거든.”
 그 말에 황용수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근데 내가 너라면 그러지 않겠어.”
 황용수가 고개를 들어 천준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궁금해서 눈을 때굴때굴 굴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황용수를 보며 천준서는 웃었다.
 “너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아냐?”
 “그럴 리 없소 내 가치는······.”
 황용수가 발끈하며 말하자 천준서는 오른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내가 장가방이라면 난 그렇게 한다. 현재 장가방에 있는 삼대빈객은 모두 너와 무위가 비슷한 자들이야. 내 첩보에 의하면 그런 자가 두 명 더 합류할 거고. 그것도 단 오 년 내에. 자, 네가 장가방주라고 생각해보자. 너라면 주인을 문 개새끼를 자기 집에 들이겠냐?”
 “······.”
 황용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서 저런 첩보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천씨세가가 없어지면 장가방이 숙주현 제일의 문파가 되겠지. 근데? 그래봤자 장가방이나 천씨세가나 이류에 불과해. 이류 문파가 하나 있느냐, 두 개 있느냐의 차이다. 결국 다 멍청이들만 앉아 있다는 거야.”
 천준서가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에 넘어간 넌 더 멍청하고. 혹시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널 살려주는지?”
 “왜요? 그 말대로라면 나를 죽여야 하는 것이 맞지 않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용수를 보며 천준서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천씨세가는 장가방보다 고수가 부족하다. 물론 내가 없을 때 이야기지만······ 난 아직 나서기가 싫거든. 두 번째. 천씨세가의 방패이자 최고의 무력단체인 수천단은 네놈이 단주로 있는 곳이야. 내가 널 죽이면 반발이 일어나겠지.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다른 놈들은 내가 망나니인 줄 알거든.”
 말을 잠시 멈추고 씩 웃는 천준서의 모습에 황용수가 부르르 떨었다.
 “셋째. 장가방에서 과연 너만 포섭했을까?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너는 놈들의 면면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장가방 측에선? 반대로 머리 나쁜 네가 가장 신뢰 가는 놈인 거야. 알겠냐?”
 “음. 목숨을 걸고 이중 세작 노릇을 하라는 거요?”
 천준서의 말을 듣고 보니, 하나도 틀린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묻는 황용수를 바라보던 천준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럼, 배신이라는 죄악을 구제받는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나? 용서받고 싶으면 목숨을 걸고 정보를 빼내보란 말이야. 그 정보가 가치가 있다면 네 가치 없는 몸뚱이를 보존해 주는 것은 생각해보지. 날 실망시키면 넌 정말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멈칫하던 천준서가 돌연 여태껏 만지작거리던 단검을 뽑아 탁자 위로 내리꽂았다.
 정확히 황용수의 손이 있던 곳.
 황용수는 급히 손을 뒤로 피했다.
 콰직!
 탁자에 깊이 파고들어 부르르 떠는 단검을 보며 눈을 부릅뜬 황용수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이게 무슨······.”
 황용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상대가 천준서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화를 냈을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오른손이 그대로 찔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준서는 황용수를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단검이 오른손을 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의 한계야.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단검의 끝을 내공으로 슬쩍 누르는 천준서.
 황용수는 눈을 밑으로 굴렸다.
 떨던 몸도 웬일인지 가만히 멈췄다.
 “이게 내가 내다보는 수다. 너는 이제 누구한테 붙어야 살 가능성이 커지는지 알았을 거야. 이 정도로 설명을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거기까지 말한 천준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오후까지 시간을 줄게. 그 시간은 네 마음대로 사용해도 돼. 장가방에 연락을 할 정도의 시간도 되고······ 네 친구들의 명단과 너의 충성심을 내게 증명할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다. 선택은 네게 맡기마.”
 황용수의 어깨를 톡톡 쳐준 천준서가 웃으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황용수는 그제야 숨을 천천히 쉬었다.
 천준서가 지그시 누른 단검의 끝이 허벅지를 슬쩍 찌를 때, 비로소 천준서와 자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귀밑머리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2
 
 
 황용수가 불안한 시선으로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천준서는 침상 위에서 종이를 펼쳐 내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명이야 그렇다 치고······ 구종혁 장로, 부총관······.”
 작은 직책부터 해서 총 열여섯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천준서는 피식 웃었다.
 “장로라. 얘네들이 돈을 많이 쓴 모양이구나. 아니면 천씨세가가 그만큼 가치가 없거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런 물음에 황용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됐어.”
 천준서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미 황용수는 기세가 꺾여 있었다.
 오후가 되기 무섭게 자신에게 찾아와 용서를 빈다? 이미 천준서에게 완전히 굴복했다는 반증이었다.
 사실, 황용수의 마음은 이미 칼날이 무릎을 찌를 때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천준서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명단을 보나 맡고 있는 역할을 보나 그를 제외한다면 배신자들의 목록에서 천준서에게 크게 필요한 사람은 그 말고는 별로 없었다.
 천준서가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던 황용수와 염명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를 떤다.
 그리고 그 배신자가 열 명을 넘어가는 상황에서는 노발대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당장 그들을 찾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천준서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명단을 보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 뜻하는 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염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들을······ 잡으러 갈 겁니까?”
 천준서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양손을 들며 말했다.
 “잡아? 이놈들을? 내가 왜 이놈들을 잡아? 놀 수 있는 만큼 놀라고 해. 너희 둘은 장가방에 충성하고 이놈들과 계속 협력하는 척해. 알지?”
 천준서의 시선이 염명에서 황용수로 옮겨가자, 그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장가방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
 황용수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천준서의 속삭임이었다.
 잠시 누운 채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천준서는 종이를 접어 품 안에 넣곤 말했다.
 “좋아. 너희들이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들어가 봐. 나는 아버님을 뵈러 가야겠다.”
 “가주님께 이야기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용수의 물음에 천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규모가 크다고 일이 다 잘되는 법은 아니야. 너도 그걸 기억해라. 그리고 똑똑히 봐둬라. 장가방이 일을 크게 벌이고 있지만 과연 잘될지······ 너희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황용수와 염명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천준서의 거처에서 벗어났다.
 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 일주일 전만 해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애송이에 불과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 공자가 저런 말을 했다면 콧방귀를 끼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공자의 무력도, 지력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이 공자 자체가 더 두려웠다.
 그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 공자가 정말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그저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 공자 천준서의 치밀한 계획일 뿐이라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
 “둘째가? 들어오라고 해라.”
 허가가 떨어지자 무인들이 집무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괜찮을까요? 전 아직도 아무것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구경이나 하고 있어봐.”
 불안해하는 천승겸에게 호언장담을 한 천준서가 앞서서 집무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준서야. 자천단주까지 함께 오다니.”
 천용철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두 명을 반겼다.
 천준서가 자신을 찾아오는 일도 드문데다가, 자천단주가 자신을 찾아온 일도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 두 명이 한꺼번에 집무 시간에 집무실을 찾으니, 의아했던 탓이다.
 “아버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인사는 했지만 머뭇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천용철이 물었다.
 “하하하. 찾아왔으면 말을 해야 하지 않겠나? 원,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구먼.”
 천용철의 물음에 천준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무슨 말이기에······.”
 천용철은 문뜩 불안해짐을 느꼈다.
 근래에 천준서가 이상해졌다는 것은 자신도 충분히 아는 것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천준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돈을 좀 융통해주시면 안 될까요?”
 “돈?”
 천용철이 미간을 구기며 천준서와 천승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천준서와 입을 굳게 다문 천승겸의 얼굴을 보던 천용철은 그것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뭘 하려는 게냐?”
 “천씨세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려고 합니다.”
 천준서가 담담히 말하자, 천용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떤 일인지 말해 보거라.”
 “자천단주와 함께 구상을 한 것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투자한 가치 이상의 것을 얻을 것입니다.”
 “허······.”
 천승겸을 바라보던 천용철은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벌써부터 가문을 위하는 둘째가 왠지 든든하기도 하고 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투자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천용철은 돈을 쉽게 불릴 수 있음에도 그런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 어디 기회를 줘 보자.’
 만약 이번 일이 잘된다면, 천준서의 기를 살려줄 수도 있고,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했다.
 천용철은 웃으며 천준서를 향해 물었다.
 “그래, 얼마를 생각하고 있느냐?”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천준서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은 삼백 냥만 주십시오.”
 천준서의 한마디에 천용철도, 천승겸도 모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천준서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조금도 변화가 없자, 당황한 천용철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너, 너 미쳤느냐?”
 천용철의 말에 천준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일단 먼저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자천단주.”
 “예?”
 무리한 요구에 함께 놀라던 천승겸이 대답을 하자, 천준서는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눈치가 빠른 천승겸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예. 나가 있겠습니다.”
 천용철과 천준서에게 고개를 숙인 천승겸이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던 천용철은 다시 의아함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 자천단주가 둘째를 저렇게 따랐다는 것인가?’
 같은 천씨였지만 천승겸과 천준서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거기다가 천준서가 무공에 대한 열정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연결고리도 없어졌었다.
 그런데 천승겸은 완전히 상전을 대하듯 행동하지 않는가.
 그러나 머리를 치켜들었던 천용철의 호기심은 천준서의 진지한 목소리에 접히고 말았다.
 “아버지. 은 삼백 냥이 많은 돈입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천용철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은 한 냥이면 서민 가족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가의 일 년 치 예산이 대략 일만 냥에서 이만 냥 사이 정도.
 하지만 그것은 세간에서 세도가라고 평가되는 거대 세가의 이야기이다.
 실지로 오대세가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평가되는 남궁세가는 삼, 사만 냥을 일 년 예산으로 쓴다는 소문도 돈다.
 하지만 여기는 안휘 중에서도 바깥쪽인 숙주.
 제아무리 숙주에서 손꼽히는 두 문파의 한 곳이라지만 그것은 숙주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천용철은 한숨을 쉬다가 천준서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준서야. 우리 세가가 들어오는 돈이 약 은자 천 냥이다. 그중에서 육백 냥은 세가의 운영에 쓰이고, 백 냥이 세가 가신들의 녹봉을 해결하고 보수나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거나 할 때 쓰인다. 지금 네가 말하는 삼백 냥이 현실적인 액수라고 생각하느냐?”
 그나마도 천씨세가 소유의 땅이 적었다면 천씨세가는 적자를 면치 못했으리라.
 특출 난 사업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천씨세가에서 돈이란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천준서에게 현실을 깨우쳐주기 위해 말을 하면서도 천용철은 속이 쓰렸다.
 괜히 자라나는 아들에게 세가의 부족함을 가르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준서는 전혀 실망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버지. 우리 세가는 사업장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일 년에 사백 냥씩 모아서 건물을 더 증축하시려고요? 아니면 그 돈으로 무인들을 양성하시게요?”
 “이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니냐.”
 천준서의 날카로운 물음에 천용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더불어 기분이 상하는 것도 느껴졌다.
 지금까지 천씨세가가 이만큼 커온 것은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통을 간직하고 있고, 선대들의 뜻을 좇아 가문을 운영하는 것인데, 천준서는 지금 그런 자신이 틀렸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천준서는 천용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세가의 크기나 무인의 숫자가 무조건 세가의 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 역시 천씨세가의 남자로써 세가가 발전하는 데 최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최고? 네가 세가의 운영에 대해서 알기는 하느냐?”
 천용철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그에 지지 않고 천준서도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적어도 지금같이 힘없는 세가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이대로 몇 년 만 간다면 장가방이 우리 세가를 얕잡아볼······.”
 분노로 푸들거리던 천용철이 급기야 손을 휘둘렀다.
 천준서는 자신의 뺨을 향해 날아드는 손바닥을 보곤 몸에 힘을 뺐다.
 짝!
 얼굴이 휙 돌아간 천준서를 노려보던 천용철이 집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노옴! 당장 나가라!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꼴도 보기 싫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천준서는 천용철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집무실을 나왔다.
 마루를 지나 전각을 나가자 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천승겸이 천준서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어, 얼굴이······.”
 천준서는 뺨이 얼얼한 것을 느끼며 소매로 입술을 슥 문지르며 말했다.
 “됐다. 난리 피우지 마.”
 입술이 터질 만큼 호되게 뺨을 맞았으니 가주가 얼마나 화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준서가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옮기자, 천승겸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준서가 뒤를 돌아 천승겸을 보며 말했다.
 “넌 여기 남아서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
 “예?”
 천승겸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천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내원을 빠져나갔다.
 한편, 분에 씩씩거리던 천용철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곤 해도 얼마 전에 병석에서 일어난 자식을 그렇게 때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천용철이 결국 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서 자천단주더러 오라고 해라.”
 “예!”
 무인의 대답을 들은 천용철이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고 자리에 앉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천단주입니다, 가주님!”
 천승겸의 목소리를 들은 천용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천단주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온다는 말인가?
 “들어와라.”
 “예.”
 문을 열고 들어온 천승겸을 보며 천용철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어찌 이리 빨리 오는가? 마치 내가 부를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사실 전각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승겸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천용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기다려? 무엇을?”
 물음에 천승겸은 고민하다가 결국 대답을 했다.
 “저······ 이 공자께서 가주님이 곧 부를 테니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허······!”
 천용철은 신음을 흘리며 식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고 녀석이 내가 어찌 할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 나이라서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쓴다고 여겼다. 하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했던 말을 되새겨보고, 그리고 자천단주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요 녀석이 설마······ 일부러 나를 화나게 했던 건가?’
 천용철은 기가 찼다.
 아마 자신이 허락을 해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천용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괘씸한 것.”
 “예?”
 “아니네. 자네는 혹시 둘째가 뭘 하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아니요. 사실 저도······ 이 공자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릅니다.”
 “음.”
 너무나 솔직한 천승겸의 답변에 잠시 고민을 하던 천용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자넨 저 꼬맹이에게 삼백 냥이라는 거금을 내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솔직히 길에 버리는 것만큼이나 불안하네.”
 천용철의 말에 천승겸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솔직하게 말했다.
 “가주님, 솔직히 저는······ 버리는 것보단 이 공자에게 삼백 냥을 쥐여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는 천승겸.
 적어도 천승겸이 보기엔 천준서의 뱃속에 구렁이가 한 오십 마리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네. 손해 볼 인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천용철의 눈빛에 정신을 차린 천승겸이 그대로 굳었다.
 ***
 “삼백 냥을 주신다고 하시더냐?”
 여유롭게 침상에 누워서 들어오는 천승겸을 향해 묻는 천준서.
 천승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공자는 어쩌면 무공보다 점괘를 보는 것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탓이다.
 “아이고 아파라. 왜 대답이 없어?”
 “아! 예. 가주님께서 삼백 냥을 내어주신다고 그러셨습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정말로 궁금해하는 천승겸을 빤히 보던 천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모르냐?”
 “끙.”
 신음을 흘리는 천승겸.
 천준서가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 셈이란 걸 깨달은 탓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로 빈둥거리는 천준서를 보던 천승겸이 입을 열었다.
 “근데, 이 공자님. 대체 그 삼백 냥으로 뭘 할 생각이신지요? 전 정말 궁금합니다.”
 천승겸은 묻긴 했지만 정작 기대하진 않았다.
 적어도 천승겸에게 천준서는 신비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능구렁이처럼 대답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천준서가 대답했다.
 “쌀. 닥치는 대로 쌀을 살 거야. 그리고 네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쌀이요? 무슨······.”
 천준서는 천승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는 쌀 말이야. 삼백 냥으로 모두 그걸 살 거야.”
 “아니 쌀로 어떻게 세가를 부흥시킵니까?”
 김이 빠진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천승겸을 보던 천준서가 피식 웃었다.
 “지금이야 쌀이 넘쳐흐르니 값이 싸지. 일 년만 기다려 봐라. 유례가 없는 대흉년이 올 거야. 그때가 되면 쌀값은 금값이 될 거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천준서를 보던 천승겸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하! 그래서 금값이 되면 쌀을 되판다?”
 천준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어째 세가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없냐. 돈은 권력이 될 수 있지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해. 게다가 우리 세가는 돈보다 더 절실한 게 있다.”
 선문답을 하듯 궁금증만 생기게 만드는 천준서의 말에 천승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각 지나지 않아 다시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근데······ 대체 흉년이 오는 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천준서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근래에 이 몸이 천기를 읽으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는 천준서.
 천승겸은 욱 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우, 천기는 개뿔!’
 더럽게 잘생긴 천준서가 뻔뻔하게 행동하자 한 대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준서는 천승겸이 무슨 생각을 하든 진지한 표정으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해······ 조금 있으면 경석산에 이목이 집중되고, 그렇게 되면 여명신검 비급의 나머지 반쪽을 찾는 것도 어려워진다.’
 무림은 냉정하고 잔인하다.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자신이 이유 없이 경석산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면······ 놈들이 자신과 천씨세가에 칼날을 들이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급이 있든 없든 간에 천씨세가는 박살이 날 것이었다.
 결국 혈사가 가까워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 당장 움직여야겠어.’
 당장 경석산을 이 잡듯 뒤져도 발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비급.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천준서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4
 
 
 다른 사람들에겐 천준서가 거처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사흘을 보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실상 천준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용수와 염명을 손에 틀어쥐고, 천승겸을 직속수하처럼 부린 걸로도 모자라, 아버지에게 삼백 냥의 돈을 융통받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씨세가 내에서도 극히 적었다.
 그저 몇몇 사람들만이 근래 수천단주와 자천단주가 천준서의 거처에 자주 드나든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천준서는 정작 자신의 침상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되겠어.”
 천준서는 천씨세가의 누가 보더라도 게으르기 짝이 없는 모습이리라.
 연공실을 들어가 백 일 연공을 했다는 말이 잠깐 돌았지만, 그것은 이어진 천준서의 게으른 행동에 묻히고 말았다.
 모두 천준서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일이었다.
 천준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을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켠 천준서가 허리 위로 손을 올리다가 느껴지는 연검의 감촉에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지금까지 허전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지.”
 하루 전에 찾아온 연검을 허리에 두르니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 썼던 연검보다 돈을 더 들여서 그런지 몰라도 허리에 차고 있는데 이질감이 많이 안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검을 들고 밖을 드나들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장소궁 때문이었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괜히 허리에 패검을 하고 장소궁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검을 제작한 이상 그런 걱정도 없어졌고, 어느 정도 주변의 상황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의도했던 일들을 시행해야 할 때였다.
 “어디 보자. 일단 녀석들을 만나야겠군.”
 턱을 긁적이며 머릿속에 그린 계획을 떠올린 천준서가 소매에서 둥근 환약 두 알을 꺼냈다.
 그리곤 자신의 탁자에 놓여 있는 종이들 중 한 장을 북 찢어 환약 두 알을 대충 감싸곤 다시 소매에 집어넣었다.
 “자, 가볼까.”
 자신의 거처를 빠져나와 어슬렁어슬렁 걷는 천준서의 모습은 누가 봐도 한량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의 직위가 천씨세가의 이 공자인지라, 천준서를 보는 자들이 저마다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그럴 때마다 천준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아. 혹시 남는 술 있어?”
 “아이구. 없습니다요.”
 천준서는 가주의 눈 밖에 날까 무서워 손을 휘휘 젓는 하인들을 뒤로하고 수천각으로 향했다.
 “여.”
 수천각 안으로 들어간 천준서가 수천단주의 집무실 문을 활짝 열며 말하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황용수와 염명이 깜짝 놀라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왜 그래? 또 그 사이에 딴마음을 먹으셨나?”
 천준서가 빙긋 웃으며 묻자, 황용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흠. 두 명이 이 시간에 같이 있는 곳을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천준서는 턱을 매만지며 염명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실 염명은 수천단의 부단주이니 그가 여기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준서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을 한 것이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염명 역시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그제야 천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부를 생각이었어.”
 “예? 저를 왜······.”
 의아해하는 두 명을 보며 천준서는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황용수가 먼저 그 물건을 들어 올렸다.
 누런 종이에 쌓여진 단환.
 황용수의 시선이 단환에서 염명으로 옮겨가자, 염명 역시도 나머지 단환 하나를 들어 올리며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천준서는 두 명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먹어.”
 “예?”
 “이게 뭔 줄 알고······.”
 두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천준서는 콧방귀를 끼며 정색했다.
 “지금 너희들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자꾸 나를 실망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잊었나?”
 매번 웃는 모습이었던 천준서가 정색하자 방 안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이 집무실에서 천준서의 진짜 모습을 봤었던 황용수는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황용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종이를 벗겨 내고 단환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대체 무슨 약인지 알 수 없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염명도 한숨을 쉬며 입으로 단환을 넣었다.
 두 명은 똥을 씹는 표정으로 잘 녹지 않는 단환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두 명이 빈 입을 보여주자, 천준서가 그제야 씩 웃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입안이 텁텁하기 짝이 없자 염명이 묻었다.
 천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알고 싶어?”
 “네. 적어도 먹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천준서는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염명을 보곤 말했다.
 “너희 혹시 고독(蠱毒)이라고 아냐?”
 천준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이라니!
 그 저주받은 벌레를 자신들이 스스로 삼켰단 말인가!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준서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아직 너희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야. 잠시 세가에서 자리를 비워야 하거든.”
 “이런 씨발!”
 염명이 탁자를 뛰어넘어 천준서의 멱살을 잡았다.
 “대체 이게 뭐요! 이렇게 협조하고 있는데 고독이라니! 너무하잖아!”
 염명은 천준서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자라는 것을 잊은 채 멱살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천준서는 염명의 손을 잡아 우악하게 손아귀를 풀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세가를 배신하고 장가방과 손을 잡은 건?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보구나?”
 “이익! 가만두지 않겠어!”
 염명이 고함을 치며 검을 뽑으려는데, 황용수가 소리쳤다.
 “염명! 그만해!”
 집무실을 울릴 정도로 큰 고함에 염명이 숨을 헐떡이며 황용수를 돌아보았다.
 “화도 안 나십니까? 우리가 먹은 게 고독이라고요!”
 “그만둬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느냐? 이 공자가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다!”
 황용수는 염명을 향해 소리치면서도 한편으론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 역시도 상대가 천준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칼을 뽑아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이 공자 천준서였다.
 ‘내가 어떻게 해봤자 이 공자의 손바닥 안을 못 벗어날 것이야······.’
 입술을 깨물며 천준서를 바라보는 황용수.
 잇따른 실패가 가져다준 것은 패배감이 아닌 굴종이었다.
 이미 천준서를 상대로 모든 자신감을 잃고 만 것이다.
 천준서는 피식 웃으며 황용수를 칭찬했다.
 “탁월한 생각이다, 황용수. 내가 고통을 느꼈다면 고독이 발작을 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물론 너희들이 그럴 실력이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황용수가 힘없이 물었다.
 “우릴 살려줄 겁니까? 죽일 겁니까?”
 “그때 말했잖아. 그대로만 하면 넌 산다.”
 천준서의 답에 염명이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젠장! 뱃속에 고독을 품고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염명의 말을 자르며 천준서가 말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면 바로 풀어줄 것을 약속하지. 하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마. 벗어날 방법은 없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나를 파악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 방법을 선택했다면 그 이유는 확실하기 때문이야.”
 천준서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고독이 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다면 이미 두 명의 목숨은 천준서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이제 그들의 생사는 천준서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저, 정말 풀어주실 겁니까?”
 염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천준서는 고개를 끄덕이곤 두 명을 향해 말했다.
 “나는 지키지 않는 말은 웬만하면 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시킨 대로만 하고 있어라.”
 천준서의 웬만하면이라는 말이 불안했지만, 천준서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미 천준서를 겪어 봤기 때문이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황용수가 천준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이 공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장소궁이 움직인다면 어쩌실 셈입니까?”
 황용수의 말에 천준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장소궁은 부족한 전력 때문에라도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직 움직일 시기도 아니고.”
 움직일 시기가 아니라는 말은 천준서만이 아는 것이리라. 이 자리에서 전생을 겪은 사람은 천준서밖에 없으니까.
 천준서는 황용수를 향해 가르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냥 감시만 잘하고 있으면 되는 거야. 지금 당장은 장가방이 쳐들어온다 해도 너희들이 협조하면 막을 수 있는 전력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딴생각 먹지 말고 얌전히 있어.”
 두 명을 뒤로하고 천준서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빌어먹을······ 어째서 이 황용수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차라리 역모를 꾸미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후회는 해봤자 이미 늦은 법.
 황용수는 탁자 위에 놓인 단환을 포장했던 종이를 발견하곤 손을 뻗어 마구 구겼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면 천준서가 들을지 몰랐으니, 그게 그에게는 최선의 분노 표출이었다.
 한편, 수천각을 나온 천준서는 휘파람을 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고독은 무슨 고독.’
 연공실에 쌓인 먼지 속에 떨어트려 먹을 생각도 못했었던 벽곡단이 말 몇 마디에 고독이 된 순간이었다.
 이미 고독을 삼킨 줄 아는 저들은 자신의 말을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천준서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5장 새옹지마
 
 
 1
 
 
 이른 저녁.
 경석산(磬石山)의 주변으로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나타났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목구비가 또렷해 준수한 용모를 숨길 수 없는 소년, 천준서가 경석산 어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 이제 어쩐다?”
 천준서는 볼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과거의 기억들을 이리저리 짜 맞춘 것이라, 비급이 있다고 쳐도 이 넓은 경석산을 다 뒤지게 생겼다.
 천준서는 기억을 되짚으며 천천히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 년 정도가 지난 기억이지만, 장소궁과 반쪽짜리 비급을 찾고 함께 내용을 확인한 것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랐다.
 ‘정말 백치가 되어 죽을 뻔했던 상황을 어떻게 잊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천준서.
 천준서는 발을 부지런히 옮기면서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겠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곤 알고 온 것이지만, 막상 아버지에게 말을 하고 나오진 못했다.
 그저 잠시 여행을 갔다 오겠다는 서찰을 형에게 전해달라고 했을 뿐이다.
 ‘딱히 좋은 변명도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비급을 찾아오겠다곤 할 수 없으니······.’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산다는 것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것이 설령 혈육이라고 해도 말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산을 오르던 천준서의 뺨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빗방울을 맞은 천준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비가 돌연 어린아이의 새끼손가락만큼이나 굵어지며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걸치고 있는 옷이 젖어갔지만, 천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걷기를 세 시진.
 천준서는 점점 몸에 한계가 옴을 느꼈다.
 게다가 사위가 너무 캄캄했다.
 ‘빌어먹을······ 일단 비부터 피해야겠다.’
 점점 몸에 한기가 돌고 이가 딱딱 부딪치는 것이, 더 이상 내력을 일으켜서 해결하기에는 무리였다.
 천준서는 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작은 바위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내력으로 안력을 돋워 안을 살펴본 후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짐승은 없구만. 아니지, 그러고 보니 먹을 게······.’
 급히 주머니를 풀어 안을 들여다보니,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육포들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젠장. 잘 풀린다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설을 뇌까린 천준서가 동굴의 한쪽에 털썩 앉았다.
 동굴은 깊지 않았지만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천준서는 눅눅해진 육포로 배를 채우고 나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고뿔에다가 몸살까지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끙······ 언제 잠들었지?”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일으킨 천준서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약간의 열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십중팔구 고뿔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천준서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참고 참았는데도 불구하고 수마에 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고수가 되면 잠도 안 자고 똥도 안 싼다는데, 나는 왜 몇 시간 못 버티고 곯아떨어지나.’
 천준서는 툴툴거리며 동굴을 나섰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질척거리는 흙바닥을 밟으며 산을 타니, 그만큼 체력소모가 심했다.
 당연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 천준서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땅을 짚으며 산기슭에 멈춘 천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겠다. 어차피 하루 이틀에 끝낸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결국 천준서는 비를 피하려다 발견한 동굴을 거점으로 삼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
 천준서가 경석산을 헤맨 지 벌써 한 달째가 지났다.
 그동안 산을 타고 돌아다닌 천준서의 몰골은 우습지도 않았다.
 비단옷은 넝마가 된 지 오래고, 넉넉하리라 생각하고 가져왔던 육포는 벌써 아끼고 아꼈는데도 보름 전에 다 먹었다.
 열이 받는지 손에 든 마를 반으로 쪼개곤 으적으적 씹은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아, 미치겠네 정말!”
 천준서의 하얀 치아에 마의 흙이 끼었지만, 천준서는 흙까지 다 먹어버리겠다는 듯 마를 입에 쑤셔 넣었다.
 그나마 이레 전까지만 해도 연검으로 마의 껍질을 깎아내고 먹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과 피로함, 그리고 답답함이 천준서를 계속 자극시키고 있었다.
 배가 부른지 먹던 마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천준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육포가 떨어져서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경석산에서 마는 널리고 널렸다.
 땅만 파면 나오는 게 마다 보니 고민하지 않고 버린 것이다.
 ‘점점 시간 낭비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천준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비급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이 시간에 연공을 하면 그것이 더욱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숨을 쉬며 땅을 내려다보던 천준서가 인상을 쓴 채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풍경이 눈 안으로 들어오자, 천준서는 피식 웃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와본 곳이 와본 곳 같고 말이야. 내가 예전에 기억하던 곳이 여긴 것 같은데, 막상 뭘 찾으려고 하면 아니고. 이것 봐라. 또 여기도 와본 것 같지. 어이구, 지랄 같아서 정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에 쥐었던 나무막대를 땅바닥에 내던지는 천준서.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을 몰아쉬던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그래. 와본 것 같은데, 여기.”
 그리고 곰곰이 주변을 다시 둘러보던 천준서가 덧붙였다.
 “뭐야······.”
 천준서가 돌연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한 사흘 전에 지나쳤던 곳이 분명했다. 그때도 샅샅이 살펴봤었지만, 여기에서 뭔가 찾은 것은 없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비가 온 날이 거의 십이 일이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에다가, 신발은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
 땅은 계속 질척질척거렸고, 흙은 밑으로 쏟아지고 있고 흙길에는 물이 흐른 흔적이 남았다.
 천준서가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며 토벽을 발로 걷어찼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지.”
 어찌 된 게 산 전체가 다 거기서 거기 같았다.
 천준서가 돌아서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천준서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기이한 토굴이 보였다.
 며칠간의 비로 인해 토벽이 약해졌다가, 방금 천준서가 토벽을 걷어차자 모습이 드러난 것이리라.
 분명 예전에 여명신검의 비급을 찾았던 장소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찾는 비급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토굴 안에서 기이한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순간 천준서는 고민에 빠졌다.
 ‘들어갈까? 말까?’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막다른 벽이 있을 수도 있고, 위험한 동물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소년의 몸을 지닌 자신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다.
 들어간다고 해도 나올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게다가 또 비가 내릴 테니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이것저것 재보던 천준서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길을 내려가려던 천준서는 결국 몇 걸음 못 가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 내가 이래서 제 명에 못 살지. 어휴.”
 다시 몸을 돌린 천준서가 토굴로 향하기 시작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도 안 해보고 나중에 아쉬워하느니, 차라리 안을 확인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간다, 가.’
 납작 엎드린 천준서가 조심스레 토굴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천준서는 모르고 있었다.
 토벽이 무너져 내린 것은, 자신이 발로 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는 티끌 같은 여명신검의 기운이 토굴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운이 자신을 이끄는 것임을 꿈에도 모를 천준서였다.
 
 
 2
 
 
 콰직!
 천준서가 컴컴한 토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런!’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천준서인데, 하필 손으로 짚은 곳에 지네가 있던 모양이었다. 지네의 체액이 묻은 손을 흙바닥에 벅벅 문지른 뒤 다시 토굴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토굴은 갈수록 협소해져서 혹시나 토굴이 무너지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조금씩 전진했다.
 어두운 토굴 안에서 손의 감각만을 이용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천준서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슨 냄새야?’
 풀의 내음 같기도 하고, 약간 비린 것 같기도 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천준서는 반색을 했다.
 토굴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겠어.’
 천준서는 눈을 빛내며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토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 나게 전진하는 것은 무모했기 때문이다.
 토굴 안에 맹수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책으로나 접하던 무저갱으로 연결되어 그대로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전진하던 천준서의 손에 축축한 무언가가 닿았다.
 천준서는 내공으로 안력을 돋워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끼?’
 이제 보니 기이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이 이끼의 냄새인 것 같았다.
 천준서는 천천히 사방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둘러본 후에야 토굴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굴에서 기어 나온 천준서가 넓게 펼쳐진 이끼들을 밟고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사위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공동이잖아?’
 마치 거대한 동굴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끼와 풀이 자라 있었다.
 게다가 어딘가에 지하수라도 흐르는지, 물이 흐르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천준서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몇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첫째는 이곳에 천준서가 생각했던 비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이 신천지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
 ‘사람이 이런 장소를 만들 수는 없어.’
 천준서는 얼마 되지 않는 내공으로 계속 안력을 돋워 주변을 살피며 감탄했다.
 마른 나무들과 거석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었고, 천장은 어떻게 된 것인진 몰라도 위태롭게 무너져 내릴 듯 보였다.
 천준서는 주변을 구경하듯 둘러보며 축축한 이끼 밭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놀라운 광경에 정신을 잃은 채 주변을 살펴보던 천준서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이거······!’
 토굴 밖에서 잠시간 느꼈었던 기묘한 느낌.
 그것이 다시 느껴졌다.
 천준서는 무엇에 홀린 듯 천천히 어둠 속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사위를 천천히 걷던 그는 이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공동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끼가 갑자기 사라지고 단단한 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 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의 형태로 이끼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천준서는 마치 살쾡이처럼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주변을 살피며 움직였다.
 다시 앞으로 향하던 그 순간 그는 눈을 부릅뜨며 식은땀을 흘렸다.
 “헉!’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못했고, 마치 땅바닥에 자리한 이끼처럼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무언가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단 대여섯 걸음을 남겨둔 채로.
 천준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눈앞에 나타난 형상을 확인했다.
 어둠 속이라 자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천준서는 그 형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사람이잖아?’
 당황한 천준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나!
 비단 천준서가 당황한 것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광경이 너무나도 살벌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검으로 다른 사람을 찌르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우수로 검을 치켜든 채 좌수로 자신을 찌른 사람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압적이어서, 천준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들의 몸에서 저절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당장에라도 움직일 듯 그들의 모습은 생기가 넘쳤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죽은······ 건가?’
 천준서는 조심스럽게 좁은 보폭으로 걸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죽은 것이 확실했다.
 서로에게 저러한 상처를 입히고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살아생전 사람이 꼿꼿이 서서 죽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저······ 기요?”
 천준서는 용기를 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천준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들었다.
 ‘당장에라도 나를 벨 것만 같은 기분이야.’
 조심성은 있어도 겁은 많지 않은 천준서가 이 정도로 경계를 하는 이유였다.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무인의 모습에 기가 절로 질린 천준서는 입술을 몇 번 질겅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조금 더 접근했다.
 그제야 천준서는 두 사람이 가슴에 기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이리라.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인간이 이런 기운을 내뿜는 거야?”
 한순간에 긴장이 팍 풀린 천준서는 연검을 흙바닥에 내려놓곤 두 무인을 지켜보다가 문뜩 드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이자들도 무인이니, 비급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런 존재감을 가진 자들이 비급을 지니고 있다면 범상치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천준서는 천천히 두 무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예의가 아니지만, 좀 뒤져봐야겠어.’
 여전히 자신을 두 동강 낼 것 같은 두 무인들에게로 다가간 천준서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준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두 무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3
 
 
 검을 치켜든 중년인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댄 천준서는 조심스레 겉옷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가 천준서의 손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이건?’
 천준서는 자신의 손이 중년인의 몸으로 약하게 딸려가려는 느낌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어째서 사람의 시체에서 흡력(吸力)이 느껴진다는 말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천준서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장 저 옷가지 속에 무언가 대단한 무가지보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기분이 나쁘다고 몸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는 노파심 때문에,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
 잠시 손을 멈칫하던 천준서는 결국 손을 뻗고 말았다.
 중년인의 가슴팍 위로 손을 뻗어 몇 차례 더듬거린 천준서가 눈을 치켜떴다.
 무언가가 배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준서의 표정이 환해졌다.
 ‘뭔가 있어!’
 슬쩍 입술을 깨물며 웃은 천준서가 손을 뻗어 중년인의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천준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시체를 손으로 만지는 게 내키지 않았다.
 최대한 중년인을 건들지 않으며 안의 물건만 빼내려고 손을 밑으로 집어넣던 천준서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억!’
 너무 미세해서 집중을 하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도 않을 흡력이 손을 세게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천준서의 손이 위치한 곳이 중년인의 단중혈의 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천준서가 당황하는 사이에 천준서의 손은 어느샌가 중년인의 단중혈 위에 달라붙었다.
 ‘이게 뭔 일이야?’
 괜히 불안해진 천준서가 힘을 주어 손을 떼어보려고 했지만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단단하게 붙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교로 몸과 몸을 붙여놓으면 이렇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황한 천준서는 마구 힘을 주다가 여의치 않자, 왼손까지 동원해서 손을 떼기 위해 노력했다.
 왼손으로 밀어내고 오른손으론 잡아당겨서 오른손을 떼어내려 용쓰던 천준서가 멍한 표정이 되어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오른손을 떼기 위해서 가져다 댄 왼손마저도 아교로 붙인 듯 단단히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천준서는 점점 불안해졌다.
 시체에 손을 댔다고 손이 붙어 버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의 시체라면 멀쩡히 서 있기도 힘들 것이 분명한데, 오히려 사람이 용을 써도 미동을 하지 않는 시체라니!
 혹시나 사자(死者)의 물건을 탐내다가 마가 끼어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침을 꿀꺽 삼킨 천준서는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미안하오.’
 당장에라도 눈을 치켜뜰 것 같은 중년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사과를 한 천준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시체가 상하는 한이 있어도 내공을 이용해서 벗어나 보려는 속셈이었다.
 천준서가 눈을 감은 채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비록 강력하진 않다곤 하나, 범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힘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 내공이다.
 천준서는 이제 손만 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사실, 내공을 쓴 이상 시체가 아니라 시체 할애비에 손이 붙었다고 해도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천준서는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진작 내공을 쓸 걸. 산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천준서가 내공을 끌어올린 채로 단숨에 손을 떼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일은 천준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
 “흡!”
 천준서가 장심으로 뿜어낸 내공에 시체에서 손이 떨어질 듯했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오히려 손을 묶어놓던 흡력이 더욱 강해지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억!’
 천준서는 도리어 자신의 장심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흘러드는 기이한 힘에 얼굴을 구겼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치 혈도를 불로 지진다면 이러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그 기이한 힘은 너무도 빠르고 우악스러웠다.
 ‘으어억!’
 마치 억지로 혈도를 관통하는 느낌에 천준서의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붉어졌다.
 고통이 지속된 시간은 겨우 일 각 정도.
 하지만 그 일각 사이에 천준서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다 젖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고통은 천준서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온몸이 난도질당했을 때에도 이보다는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고통이 점차 잦아들자 그제야 천준서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한바탕 몸서리를 친 천준서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눈이 충혈되었고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무어라도 말을 할 만하건만, 천준서는 아무런 말도 않은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머리가 마치 백지장이 된 것처럼 텅 빈 느낌이었으니, 딱히 생각나는 것들은 없었다. 그저 이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막연히 감사할 다름이었다.
 하지만 천준서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그의 손이 붙은 채로 요지부동이라는 것.
 그리고 천준서가 미처 방비도 하기 전에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다시 그의 장심을 타고 미증유의 힘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처럼 우악하진 않았지만, 노도와도 같은 강대한 힘이었다.
 내공이라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천준서의 혈도는 빗물이 흐르는 도랑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천준서의 장심으로 쏟아 들어오는 힘은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었다.
 고통으로 치면 방금 전보다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으아아아!’
 천준서는 다시 입을 쩍 벌린 채로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흙바닥이라도 마구 구르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있는 상태인지라 그러지도 못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로 몸을 마구 움직였지만 고통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참을성이 강한 천준서였지만, 압도적인 고통 앞에서 인내 따위는 무용지물.
 그저 균열이 간 뚝 사이로 쏟아지는 듯한 물줄기처럼, 장심을 타고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힘은 계속 천준서를 괴롭혔다.
 장장 한 시진이라는 시간 동안 천준서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런 고통을 계속 겪느니 죽는 것이 행복하겠다.’
 죽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고문을 한다면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까 의구심이 들었다.
 실제로 천준서의 몸은 그야말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물이 항아리가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이 들어가면, 물은 항아리 위로 넘친다.
 하지만 내공은 이야기가 다르다.
 사람의 몸에는 내공이 넘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공이 몸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죽거나, 아니면 혈도가 꼬이며 주화입마에 들어서거나.
 그리고 천준서는 내공을 담는 항아리로 치면 요강으로나 쓸 만큼 보잘것없는 크기였다.
 내공 수련을 얼마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단전이 작고 혈도도 비좁았다.
 이런 천준서에게 미증유의 내공이 쏟아져 들어오니, 당연히 천준서도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수순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4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내공은 금방에라도 혈도를 찢어발길 듯 움직였다.
 이미 천준서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된 내공은 그야말로 노도와도 같았다.
 엄청난 내공이 요동칠 때마다 천준서의 육체도 금방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행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이미 천준서가 정신을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내하기 어려운 끔찍한 고통을 한 시진이 넘게 겪어야 했을 것이리라.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내공을 받아들이기에 형편없는 천준서의 육체가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준서의 육체에 쏟아져 들어오는 내공은 보통 내공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와 손이 맞닿아 있는 시체는 다름 아닌 여명신검 곽소선이었다.
 사백 년 전 정파의 지존이었던 여명신검(黎明神劍) 곽소선의 내공이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릇의 크기가 다른 천준서의 몸은 한참 전에 깨져야 맞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명신검과 육신을 마주하고 있는 중년인.
 그는 바로 여명신검 곽소선의 유일한 맞수였던 마존(魔尊) 담천종.
 둘 중 누가 천하제일이라 불리어도 이상할 게 없는 희대의 절대자들이었던 그들의 내공이 천준서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천준서의 몸은 마구 뒤틀리면서도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한계를 넘어 갈 곳을 잃은 내공들은 진즉에 폭주하며 천준서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야 정상이었지만, 그의 몸엔 한 가지의 내공만이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끝을 보지 못했던 곽소선과 담천종의 내공이 천준서의 몸 안으로 들어와서도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천준서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종진기는 서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치 두 마리 용이 뒤엉켜 싸움을 하듯, 내공이 혈도를 타고 내달렸다.
 그 고통에 정신을 잃은 천준서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사람 하나 지나기도 급급한 오솔길을 사두마차 여러 대가 달릴 수 있는 대로로 만들어버리는 셈이었으니 당연히 내력이 지나간 자리는 만신창이로 변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종진기는 단단하게 굳어 있는 대혈마저도 단번에 부숴 버렸다.
 순식간에 회음혈을 지나친 이종진기는 혈도를 따라 솟구치기 시작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데에 급급한 이종진기로써는 가장 크게 나있는 길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종진기는 어느새 독맥의 대혈마저도 뚫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사뭇 사나워, 그야말로 성난 용이 용트림을 하는 것 같았다.
 대혈이 하나씩 하나씩 뚫릴 때마다, 천준서의 몸은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흔들렸다.
 어느새 후정혈까지 도달한 이종진기는 백회혈로 향했다.
 처음의 노도와 같은 기세가 전혀 죽지 않은 이종진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백회혈을 향해 부딪쳤다.
 내공의 고수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히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백회혈은 가장 뚫어내기 힘든 혈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민감한 혈이다.
 억지로 타동을 하려고 애쓰다가 백치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민감한 백회혈에 무지막지한 내공이 부딪친 형상이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모습과 같았다.
 쾅!
 쩌적!
 백회혈과 내공이 부딪치자, 기이한 소리가 천준서의 머리를 울렸다.
 지금까지 모든 대혈들이 단번에 뚫렸었지만, 백회혈은 그 이종진기의 질주를 막아냈다.
 덕분에 백회혈을 굳게 닫고 있던 벽에 금이 갔다.
 이종진기는 서로를 밀어내고 잡아먹기 위해 다투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혀 갈 곳이 없어지자,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밑에서 계속 올라오는 내공들이 연달아 밀어 올리자, 벽의 균열이 더더욱 심해졌다.
 천준서에게 쏟아져 들어온 내공의 양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계속 밀려올라오고 있었다.
 결국 계속 벽을 두드리는 내공과 함께 기음이 다시 천준서의 머릿속을 울렸다.
 콰앙!
 앞에서 들렸었던 소리보다 더욱 큰 소리였다.
 아마 천준서가 깨어 있었다면,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표정이 편안해진 천준서가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곽소선의 몸에 굳게 붙어 있던 천준서의 손이 떨어졌다.
 이미 정신을 잃은 천준서는 그대로 흙 밭에 쓰러졌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공동은 다시 적막함에 잠겼다.
 그때 더 이상 변화가 없을 것 같은 공동에 또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천준서의 몸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우득, 우드득.
 마치 뼈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준서의 몸이 흙바닥에서 반 치 정도 위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라 천준서의 피부가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은 천준서의 표정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자의든 타의든 어거지로 생사현관을 타동한 천준서가 천지교태를 이루며 환골탈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이한 빛과 함께 한참 동안 허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뼈가 부러지고 맞춰지기를 반복하던 천준서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오자, 천준서의 몸은 천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5
 
 
 ‘아아······.’
 천준서는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시야로 바위들이 얽혀 마치 지붕처럼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된 거지?’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리는 천준서.
 제아무리 항상 냉정함과 능글맞은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라고 해도 정신을 잃기 전의 그 고통을 떠올리니 절로 인상을 구겨졌다.
 ‘분명히 손이······.’
 누운 채로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던 천준서가 흙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이번엔 의아한 목소리를 내는 천준서.
 정신을 잃기 전과 무언가 바뀌어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시체에 붙어 요지부동이던 손이 떨어진 것은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몸의 변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손에서부터 자신의 상, 하체를 천천히 살피던 천준서가 검미를 꿈틀거렸다.
 자신이 나체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 신경을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전에는 안력을 집중해야 공동 안의 광경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의식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동 안이 훤하게 보이지 않는가!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지?”
 ***
 천준서는 머리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타인들보다 훨씬 똑똑한 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이었으니까.
 급히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하던 천준서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다.
 탁 트인 혈도를 따라 순식간에 내려가 단전에 도달한 천준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원래 천준서가 갖고 있던 단전은 그야말로 작은 웅덩이었다.
 샘이라고 하기도 우스울 정도의 물이 고인 웅덩이.
 하지만 지금 천준서가 느끼는 것은 호수.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너무도 광활한 그곳을 다 채우고 있는 강대한 내공은 천준서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천준서도 스스로 확인을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외부에서 쉴 새 없이 전해져 들어오는 외기(外氣)가 계속하여 단전을 드나들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준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천준서는 고개를 연신 저으면서도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 중원 무림의 그 누구라도 천준서와 같은 반응을 나타냈을 것이다.
 환골탈태를 하고 생사현관을 타동하고서 울상을 짓는 무인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천준서는 당장에라도 권각을 뻗어서 자신의 내공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검기나 권기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씨익 웃으며 주먹을 말아 쥐던 천준서는 앞을 보곤 몸을 멈칫했다.
 그제야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 두 중년인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말아 쥐었던 주먹을 슬쩍 내린 천준서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니, 이젠 주검이 된 저 둘의 내공이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웬만한 영단으로는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식한 내공을 얻을 수 있으랴.
 비록 그 과정이 빌어먹게 고통스러웠지만, 천준서가 당장 자력으로 노력해서 채울 수 없는 부분인 내공이 생겼다는 건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뜻했든 뜻하지 않았던, 천준서에게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이었으니 유해 정도는 수습을 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천준서는 알몸인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 시체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절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인들을 향하여 삼배지례(三拜之禮)를 한 천준서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잠시 예전의 고통이 떠올라 멈칫했던 천준서는 눈을 꾹 감은 채로 손을 뻗었다.
 “후우.”
 천준서의 예상과는 달리 중년인의 시체는 천천히 기울어졌다.
 마치 황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상처럼 꿈쩍도 안 하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내공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지만, 천준서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천준서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공동 안이라서 그런지 적당히 물기를 머금고 있어, 파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천준서는 탈태환골을 통해 일반인보다 더욱 질기고 단단한 몸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탈태환골을 한 무인이 맨손으로 땅을 판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천준서는 내공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정성스럽게 땅을 파내고, 옆에 뉘였던 두 사람을 조심스레 구덩이 안으로 옮겼다.
 ‘이대로 묻어도 되는 거겠지?’
 치켜들고 있던 검은 손에서 떨어졌지만, 서로를 꿰뚫고 있는 손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공이 사라지며 중년인들의 몸도 급속도로 연약해졌기에, 빼내려 한다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흙을 덮으려던 천준서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슬쩍 손을 뻗었다.
 백의 중년인과 흑의 중년인의 몸을 조심스레 뒤져 두 권의 책자를 갈무리한 천준서는 그제야 흙으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모두 메워진 구덩이를 보며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어르신들, 이만 편히 잠드세요.”
 내공도 가져가고 품 안의 물건도 가져간 놈이 편히 잠들라 하다니!
 두 사람이 듣는다면 귀싸대기를 때릴 만한 소리였다.
 
 
 6장 환골탈태
 
 
 1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한 공동.
 게다가 쾌쾌하고 비릿한 내음이 가득한 공동에 있다면 그 누구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을 만도 한데, 천준서는 축축한 흙바닥에 털썩 앉았다.
 두 무인에게서 발견한 두 권의 책자를 살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무인으로서의 열망일 것이다.
 과거의 절대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책자.
 분명 무학에 관련된 것일 확률이 높았고, 무인으로서 강력한 무공을 얻고 싶다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까.
 “후우······.”
 사뭇 떨리는 마음을 안은 채로 무릎 위에 올려둔 두 권의 책자를 내려다보던 천준서가 손을 뻗었다.
 흐릿하고 빛이 바래긴 했지만 책자에 쓰인 글자들은 여전히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혼원파천신공(昏元破天神功).
 공동 안은 어두웠지만 천준서의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환골탈태로 인하여 천지교태를 이루고 강력한 내공까지 지니고 있는 천준서였기에, 이 정도의 어둠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혼원파천!”
 천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엄청난 고수의 무공이 확실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음울하고 광오한 글귀가 쓰여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천준서는 다시 손을 놀려 밑에 있던 책자의 겉표지를 확인했다.
 여명신공(黎明神功) 본편.
 앞서 보았던 마존의 무공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는 글귀.
 하지만 천준서는 책자의 제목만 확인해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여명신검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여명신공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본편이!
 지금은 이런 경우가 많이 없지만, 예전에는 무공을 만들고, 그 무공서로 응용을 할 수 있는 무공서를 따로 만들곤 했다.
 다시 말하면, 천준서가 지금까지 익혔던 것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본편은 진짜 여명신공이라는 말이었다.
 여명신공의 본편이 있다면, 응용편으로 더욱 고강한 무공을 연공할 수 있지만, 응용편만 갖고 있던 천준서는 단지 반쪽짜리 무공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천준서는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여명신검······ 이자가 여명신검이란 말이야?”
 여명신검의 무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공동 안을 찾았을 때 쯔음 그 생각은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죽어 있는 두 명의 무인을 발견하고도 그들 중 한 명이 여명신검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천준서가 알고 있는 여명신검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는 칭호를 지닌 전대의 절대자였으니까.
 그런 절대자가 누군가와 싸워 양패구상을 했다는 생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미간을 좁힌 천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그럼 여명신검의 반대편에 있던 중년인은 누구지?”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희대의 절대자를 대적하고 있던 중년인.
 서로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면, 그 역시도 여명신검만큼이나 강력한 무공을 지닌 자라는 반증이다.
 천준서는 당장 이 책자들을 탐독하고 싶다는 열망에 빠졌다.
 무인에 대한 궁금증과 그가 지닌 무공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한 기대가 천준서의 목을 마르게 했다.
 천준서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대에 존재했던 두 명의 절대적인 무인.
 하지만 한 명은 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되었고,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한 명은 정파의 기둥이자 별이었고, 한 명은 마도의 절대자이며 강력한 율법이었으니까.
 지금 그 두 명의 무공이 청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천준서라는 청년에게.
 ***
 혼원파천신공, 그리고 여명신공.
 잠들어 있던 희대의 두 무공이 사백 년 만에 빛을 발했다.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소가 존재하고, 또 이러한 곳에 두 무공이 잠들었을지.
 천준서는 어째서 경석산 혈사 때 그 누구도 여명신검의 비급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조차 여명신검의 비급이 경석산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비급을 찾은 것은 순전히 천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도 아주 잠시.
 천준서는 자리에 앉은 뒤로 조금의 미동도 않은 채 두 권의 책자를 살피고 있었다.
 시선은 종이에 쓰인 글자에 둔 그대로 고개를 작게 저은 천준서가 중얼거렸다.
 “난해해. 너무 난해해.”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천준서지만,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가 다시 뒤로 되돌리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채 책을 읽는 일에 몰두했다.
 당연히 책자에 쓰인 내용들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당대의 절대자들의 무공이다.
 삼류 무공처럼 한 번 보고 흉내를 낼 법한, 그런 싸구려 무공이 아니라, 당장 현존하는 대문파나 오대세가의 절기와 비교를 한다고 해도 앞서는 것.
 그런 무공이 절대로 알기 쉬울 리가 없었다.
 만약 범인이 이 두 무공을 발견했다면 땔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처지가 되었을 것이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신공은 신공이 아니라 종이뭉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견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천준서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천준서의 머리는 비상하다.
 특히 무공에 있어서는.
 천준서가 말한 난해하다는 말은 지금까지 접해온 다른 무공들에 비하여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말이지, 아예 이해를 못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잊은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몇 시진이 지났는데도 움직이지 않던 천준서가 마침내 변화를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이다.
 누군가가 천준서를 지켜본다면 혀를 내두를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은 무언가에 몰두하며 즐거워하는 천재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간을 잊은 채로 독서에 몰두하던 천준서가 돌연 책자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아우, 이러다가 굶어 죽겠네.”
 입을 닫은 채로 장장 사흘 동안 미동도 않고 책을 보았던 천준서의 첫 마디였다.
 
 
 2
 
 
 천준서는 곤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건 아닌데······.”
 천준서가 일다경 동안 공동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꼼꼼히 탐색했지만, 천준서가 바라는 먹을 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 볼까?”
 고민을 하던 천준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일다경 동안 천준서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비릿한 냄새를 머금고 있는 축축한 이끼들.
 그 외에는 여러 개의 발을 가진 벌레들 정도가 전부였다.
 풀에 대해서는 박식하지 못한 천준서였기에, 선뜻 이끼를 먹자니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독이 있을 수도 있고······ 몸에 무슨 작용을 할지 모르는데······.’
 한숨을 쉬며 바닥의 이끼들을 노려보던 천준서가 살짝 눈을 굴렸다.
 그곳에는 이끼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가는 지네 한 마리가 보였다.
 지네를 본 순간 천준서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이끼를 먹자.”
 제아무리 망나니를 꾸미며 못 볼 꼴을 많이 당한 천준서지만,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는, 그것도 여러 개의 발을 마구 휘젓는 지네는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영양적인 측면에서야 지네가 이끼보다 나을지 모르겠지만, 천준서는 벌레를 싫어했다.
 게다가 자신은 탈태환골을 한 몸.
 웬만한 식물의 독으로는 자신을 중독시키기 힘들 거라는 계산도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천준서는 이끼를 뜯어내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가 미간을 구겼다.
 “젠장, 저리 꺼져.”
 신경질을 내며 이끼 사이로 몸을 드러낸 지네를 발끝으로 툭 차낸 천준서가 이끼를 뜯어냈다.
 손에 물기가 느껴질 정도로 축축한 이끼를 노려보던 천준서는 코끝에 가져다댔다.
 “무슨······ 해초 같은 냄새야.”
 인상을 쓰면서 머뭇거리던 천준서는 손에 쥔 이끼를 반으로 뜯어냈다.
 ‘그래, 전에 봤었던 서적에 적금선(赤金蘚) 같은 이끼는 먹는 것만으로도 보혈을 하고 내공을 증진시켜준다고 했었지! 이런 공동 안에서 외부와는 차단된 채로 자란 이끼라면 그런 공능을 갖고 있을 수도 있어!’
 으적으적.
 무표정으로 턱관절을 쉴 새 없이 놀리며 공동 저 먼 곳을 바라보던 천준서가 움찔했다.
 ‘욱!’
 마침내 목을 잡고 헛구역질을 몇 차례 한 천준서가 애를 쓰며 이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듣도 보도 못한 맛은 둘째 치고, 비린내가 입 안 가득 퍼지는 기분이었다.
 “니밀, 적금선은 개뿔! ······뭔 맛이!”
 자신의 바람처럼 적금선 같은 영약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이끼가 적금선 같은 영약이라면 이렇게 비리고 냄새도 독하지 않으리라.
 ‘그래, 음식 대신 먹는 거니까······.’
 눈물이 살짝 맺힌 천준서가 속으로 중얼거리곤 다시 입안으로 이끼를 쑤셔 넣었다.
 탈태환골을 했다고 해서 무슨 밥을 먹지 않고도 살고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으며 똥도 안 싸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먹어야지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천준서는 알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한참 동안 이끼를 씹던 천준서는 갑자기 며칠 전의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평소에는 줘도 먹지 않을 마를 몇 입 베어 물고 땅에 버렸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마를 몇 뿌리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준서 정말······ 우웩! 많이 변했네.”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주절거린 천준서가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곤 한숨을 쉬었다.
 “그래, 죽지 않을 만큼만 먹자.”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몇 번 고른 천준서가 다시 손을 뻗었다.
 왠지 손에 잡힌 이끼가 아까보다는 먹을 만해 보이는 것 같았다.
 천준서는 꿈에도 몰랐다.
 적금선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는 이끼의 이름이 청풍태(靑風苔)라는 것을.
 아마 그가 환골탈태를 하지 않은 몸이었다면, 지금쯤 오한에 잔뜩 시달리며 폭풍 설사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천준서는 열심히 몸에 좋은 작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끼를 입에 쑤셔 넣었다.
 ***
 사실, 천준서가 원하고자 했다면 공동을 당장 나가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두컴컴하고 습한 공동 안에서 생활을 할 필요도 없고, 천준서가 싫어하는 지네가 몸에 들러붙을 리도 없었다.
 음식 역시 일반 양민들에 비하면 호화롭게 먹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천준서가 스스로 생고생을 하면서까지 공동을 나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위험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하나만 있어도 피바람이 불 만한 비급이 두 권.’
 뜬소문만 나도 칼이 닥쳐오는 곳이 무림이다.
 어떤 방파에 백 년 전 고수의 비급이 있더라 라는 말이 돌면,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불이 붙은 듯 공격하리라.
 그리고 막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끝날 것이다.
 모두들 칼을 들었었으니, 옳은 말을 할 놈이 없는 것이다.
 그저 힘센 자들과 힘 약한 자들만이 있는 세상, 그것이 무림이다.
 그런데,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없는 천준서가 경천할 비급을 두 개나 들고 나간다?
 삐끗했다간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천씨세가의 기둥까지 흔적도 안 남고 사라질 것이다.
 ‘다 외워야 해. 그리고 찢든지 불태우든지 없애 버리고 나가는 게 최선이야.’
 천준서는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쉴 새 없이 본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재확인하면서도 천준서는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명신공도, 혼원파천신공도 너무나 난해했기 때문이다.
 외우는 것이 하책이라면, 그와 동시에 이해하는 것은 상책이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후자였는데, 지금은 몇 번을 읽어야 어렴풋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천준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전생에 여명신검의 비급을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시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괜찮아 천준서. 그때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잖아.’
 천준서는 계속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여명신공을 넘겼다.
 그가 여명신공을 먼저 선택한 것은, 전생에 여명신공의 일부분을 이미 익혔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천준서의 오성이 뛰어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직접 몇 번 해보면 알 것 같기도 한데······.’
 알 듯 말 듯한 아리송함이 천준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뒤로 넘어가질 못하겠네.’
 남들이 보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지 모른다. 절세 비급을 탐독하며 알 것 같은데······ 라고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보면.
 그러나 천준서는 가슴이 꾹 막힌 기분이었다.
 마치 서생이 향시의 문항을 보며,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적고는 싶은데 정작 떠오르지가 않아 다음 문항으로 넘어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
 “어우.”
 한숨을 쉬며 책자를 닫은 천준서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잠시의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한 천준서가 고개를 들고 다시 책을 펴려다가 시선을 멈췄다.
 천준서의 눈 끝은 검게 그을린 장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해보면 되는 거지.”
 멍하게 중얼거린 천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
 
 
 천준서는 검게 그을린 검을 들어 올려 가볍게 휘두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거······.”
 여명신검을 묻을 때,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검에 신경을 쓰기엔, 천준서의 정신이 너무 두 권의 책자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검을 잡아보자,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수하게 검을 잡은 시간만 친다면, 전생을 합친다 하더라도 몇 년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천준서다.
 그러나 지금 검을 잡으며 느끼는 안정감은 무엇인가?
 마치 수십 년간 몸에서 떼어놓지 않은, 몸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두 절대자의 끝없는 내공싸움에 검게 그을려 볼품없지만, 저 검은 여명신검이 들고 있었던 검이다.
 여명신검이 왜 여명신검인가!
 그의 신비로운 검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애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다.
 여명신검 곽소선의 애병.
 곽소선의 검은 주인의 별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사백 년 전에는 아름다운 백색의 장검이었지만, 지금은 거무튀튀하게 바란 검.
 하지만 그 검은 여전히 주인을 잊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만약 천준서의 몸에 여명신검의 내공이 없었다면, 검은 천준서의 손길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곽소선의 내력을 품고 있는 천준서는 그의 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존 담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육신과 정신만이 뒷받침이 되고, 깨달음이 따른다면 천준서는 당대의 두 절대자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천준서로서는 요원한 길.
 천준서는 검을 잡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검을 치켜 올렸다.
 환골탈태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무의식의 발로인가?
 수직으로 올라간 검극은 조금도 떨리지 않은 채로 멈추어 섰다.
 천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전생에 알고 있던 여명신공의 검로를 찾아 천천히 움직였다.
 휘익!
 일체의 내력은 배제한 채로 순수한 육체만을 이용한 검격.
 그러나 검이 만드는 파공성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여명신공의 검공을 시연하자, 얼마 전에 얻은 나머지 내용들이 조금씩 깨우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암흑 속에 있던 사물들이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아······!’
 천천히 무의식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천준서의 검은 장검이 점점 위력을 더했고, 검격이 강맹해질수록 그는 몰아경(沒我境)으로 다가섰다.
 마치 정신을 잃은 듯 천준서가 검을 휘두르길 조금, 강맹하고 예리했던 검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강의 도도한 흐름과도 같이.
 산의 장엄한 봉우리 같이.
 천준서가 휘두르는 검은 그야말로 정파의 기개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천준서의 검은 장검에서 희미한 백광(白光)이 치솟아 오르더니, 점점 짙어졌다.
 마치 새벽에 동이 트며 해가 치솟아 암흑을 물리치는 상서로운 모습이었다.
 사백 년 전의 세인들이 지금의 천준서를 본다면, 필시 여명신검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엔 천준서만이 있는 어두운 공동이었다.
 몰아경에서 자신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며 검을 휘두르던 천준서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으윽!”
 강력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천준서의 검에서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
 천준서가 빠져들었던 몰아경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것도 그와 같은 시각이었다.
 따당!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친 채 복부를 부여잡은 천준서가 무릎을 꿇으며 얼굴을 구겼다.
 “크악! 대체······ 무슨 일이지!”
 마치 오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천준서가 눈을 부릅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장 회자정리
 
 
 1
 
 
 천준서는 인상을 쓰면서 아랫배가 저릿저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 몸 안에 곤히 잠들어 있던 내공이 날뛰는 느낌이었다.
 “크으······.”
 천준서는 급히 손에서 검을 놓고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당장 운기를 하지 않는 한 날뛰고 있는 내공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준서가 운기를 시작하자 고삐가 풀린 말처럼 날뛰던 내공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선 천준서는 더더욱 집중을 하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로 운기를 계속했다.
 그러던 도중, 천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과는 달리 크기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해진 단전 안에 잠든 내공.
 그 내공의 양은 천준서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양이었다.
 문제는 내공의 양이 아니었다.
 마치 단전이 반으로 나뉜 듯, 한쪽에 자리한 내공은 담담하고 고요한데, 나머지 한쪽에 자리한 내공만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천준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곤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혼원파천신공. 그리고 여명신공.
 딱 글자만 놓고 본다고 해도 극과 극의 성질을 지닐 것만 같은 두 무공.
 천준서도 두 신공을 탐독하고 나서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존 담천종과 여명신검 곽소선의 무공들.
 희대의 절대자들이자 대칭점이었던 그들의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내공은 어떠한가?
 내공 역시 온전히 그들의 내공이 천준서의 몸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일반의 기준을 뛰어넘은 강대한 내공 싸움은 육체가 생기를 잃고 나서도 육체 안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느라 몸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 있는 천준서의 손이 그들의 몸에 닿는 순간, 자연스레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듯 천준서의 몸으로 일제히 쏟아진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내력의 성질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고, 천준서의 몸에 있는 내력은 한 종류가 아닌, 이종진기.
 이종진기는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천준서가 감당할 수 없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천준서의 몸이 터지거나 폐인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천준서의 단전 안에 갈무리되고서도 두 내공은 서로를 향해서 여전히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준서가 여명신공을 사용하자, 천준서의 몸에 자리하고 있던 곽소선의 내공이 그만큼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리고 담천종의 내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작을 하며 곽소선의 내공을 잡아먹기 위하여 날뛴 것.
 천준서는 머리가 띵 해지며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무공을 쓸 때마다 이렇게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슬슬 불안해지는 상황.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라고 할 수 없는 천준서이다.
 하지만 그런 내공을 지니고 있어도 이런 제약을 갖고 무공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지금 갖고 있는 내공의 반밖에 안 된다고 해도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이 있는 것만 못한 상황.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종진기를 몸 안에 두고 있는 천준서의 상태다.
 아주 적은 양의 내공이 아니다.
 만약 합일을 할 수만 있다면 천하를 오시할 정도의 엄청난 내공이다.
 이 이종진기가 충돌을 일으킨다면?
 제대로 사용하면 산자락도 무너뜨릴 힘이다.
 천준서의 육체가 제아무리 환골탈태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먼지가 되어버릴 게다.
 그렇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비극적인 방향이 존재한다.
 천준서는 이 내공을 제대로 통제할 힘을 갖고 있지 않으니, 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주화입마에 빠져들 것이다.
 작게는 백치에서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자아를 잃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악귀가 될지도 몰랐다.
 천준서는 입술을 깨물곤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 내공을 한 번에 비슷한 양으로 사용한다면 이런 부작용은 없을 거야.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돼. 아무리 나라고 해도 가능할 리가 없다.’
 아니, 가능할 수는 있으리라.
 무당파의 양의심공(兩意心功)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는 무당파의 절기 중에서도 절기.
 양의심공을 무당파에서 순순히 내어 줄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 경비가 삼엄한 무당파의 안으로 들어가 양의심공을 훔쳐서 익히는 것이 더욱 가능성이 있으리라.
 태산의 북두라고 하는 소림사와 함께 이름을 같이하는 무당파.
 천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접근을 다르게 해보자.’
 천준서는 더더욱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여명신공. 지금의 무공과는 차이가 있지만 딱 정파의 무공이지. 무겁고 도도하며 안정감이 있다. 그만큼 효율적이야.’
 그에 비하면 혼원파천신공은 어떠한가?
 ‘여명신공이 우직한 들소라면 혼원파천신공은 야생마다. 끙······ 정, 마도의 대표주자들 납셨군. 빠르고 강력하며, 공격적이야. 이 두 내공을 어떻게 합일시켜야 하지?’
 그야말로 극과 극.
 당장은 천준서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천준서의 무학에 대한 이해가 대종사의 반열에 들어가면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건 내공이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야!’
 미간을 더더욱 좁히며 한숨을 쉬던 천준서가 돌연 입술을 살짝 열었다.
 ‘잠깐!’
 천준서는 무언가 느낀 듯 재빨리 단전에 집중했다.
 정파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곽소선의 내공.
 천준서는 곽소선의 내공을 여명신기(黎明神氣)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담천종의 내공을 혼원파천신기(昏元破天神氣)라고 부르기로 했다.
 천준서는 우선 여명신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여명신기가 단전을 비우기 시작하자 돌연 잠잠하던 혼원파천신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크!’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빈틈을 찾아 공격하려는 모습이었다.
 천준서는 깜짝 놀라 급히 내공을 회수했다.
 ‘빌어먹을 녀석.’
 숨을 고른 천준서는 이번엔 혼원파천신기를 슬쩍 끌어올렸다. 강력한 힘이 천준서의 인도를 따라 혈도를 타고 올라왔다.
 과연 마공의 힘이기 때문일까?
 혼원파천신공이라는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래! 이거야!’
 천준서는 화색을 띠며 속으로 환호했다.
 혼원파천신기가 단전을 비우며 이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명신기는 잠잠했기 때문이다.
 바로 둘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강한 공격성을 띄는 혼원파천신기와는 달리, 여명신기는 안정감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
 혹시나 했던 천준서의 기대가 맞아떨어진 것.
 ‘하아······ 빌어먹을! 하하하하!’
 천준서는 속으로 크게 웃으며 안도했다.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내공을 회수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천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이제 남은 문제는 얼마의 혼원파천신기를 사용할 수 있느냐인데······.”
 혼원파천신기를 제법 소모한다면, 분명 그만큼은 고통 없이도 여명신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어.”
 천준서의 눈이 반짝였다.
 
 
 2
 
 
 천준서는 보름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될 무렵이 돼서 연공을 하면서 공동 안의 지리를 익히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끼 말고 다른 먹을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들쥐나 박쥐 같은 것들만 있어도 행복하겠는데 말이야.”
 이끼만 먹고 지내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는 먹을 만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슬슬 물렸다.
 천준서는 자신의 위치와 가까이 있는 곳부터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를 확인해도 이끼와 지네 같은 벌레들만이 살지, 동물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천준서가 실망을 하며 먹을거리는 둘째 치고 공동 안의 지리를 살피는 데에 주력을 하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천준서는 미간을 좁힌 채로 공동의 벽을 꼼꼼하게 살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 어디일 텐데?’
 분명 자신이 들어왔었던 입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천준서의 기억대로라면 분명히 어렵사리 통과할 만한 토굴이 존재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토굴은 천준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천준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천천히 손을 뻗어 공동의 벽을 매만지자, 바위의 표면에서 묻어난 물이 천준서의 손을 적셨다.
 천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러면 안 되지.”
 입술을 깨물며 손에 묻어나온 습기의 냄새를 맡던 천준서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공동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안 나는 것, 그리고 습기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양의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
 안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자신이 들어왔던 토굴이 무너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주변 지역의 특성상 우기가 잦은데, 아마 비가 오며 토굴이 무너진 것이 틀림없었다.
 공동의 모양을 봐도 아슬아슬하게 기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 안 될 것은 없었지만, 천준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럼 난 대체 어디로 나가야 하는 거야?”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천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공동의 특성상 다른 어딘가가 무너져 내려서 또 다른 출구를 만들어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출구라는 것이 언제 만들어질지는 운에 달린 일.
 ‘나가려면 힘으로라도 토굴을 만들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천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자칫 잘못하면 나가는 건 고사하고 공동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육중한 바위들에 의하여 압사당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한숨을 쉰 천준서는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공동의 깊숙한 곳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어딘가에는 출구가 하나쯤 있겠지······.’
 천준서는 낙관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그 생각은 낙관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바람이리라.
 바닥의 이끼를 발로 짓밟으며 화풀이를 한 천준서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공동과는 정반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천준서가 연공을 하며 공동을 살피는 일에 주력을 한 지 적지 않은 날이 지났다.
 하지만 천준서는 자신이 공동 안으로 들어왔었던 토굴 따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천준서가 새롭게 찾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작은 연못이었다.
 천준서는 연못을 찾기 무섭게 연못을 향해 뛰어갔다.
 이제는 무언가를 먹기 전에 냄새를 맡는 것이 버릇이라도 된 양, 천준서는 물을 양손 가득 떠 냄새를 맡았다.
 신선한 물의 내음이 코로 들어오자, 천준서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떻게 하늘이 필요한 만큼은 주는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못에 얼굴을 박은 천준서가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공동 안으로 들어와서 마신 물이라고는 이끼들을 한데 모아 힘을 주어 짜낸 것이 다였다.
 이끼가 한껏 품고 있는 물기를 섭취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고, 이끼 즙이라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이끼를 먹는 것보다 더욱 고역이었지만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신선한 물이 떡 나타나니,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내 살다 살다 물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물로 배를 채우다시피 한 천준서가 털썩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그동안 쌓였었던 갈증을 해소해서인지 실없이 웃고 있던 천준서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뭐야?”
 천준서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튀어나오기도 잠시 곧바로 연못으로 손을 뻗었다.
 내력이 담기지도 않은 손이었지만 그야말로 쏜살같은 속도였다.
 이미 환골탈태를 한 천준서였기에 범인의 움직임과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연못 속에 들어갔다 나온 천준서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바둥거리며 천준서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생선이었다.
 천준서는 자신의 손에 잡힌 생선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우와, 이거 물고기잖아!”
 천준서가 공동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생선 한 마리에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
 천준서는 급히 생선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에 잠겼다.
 “이끼로 불을 피울까? 아니야 그냥 익혀 먹을까?”
 열양지공을 익힌 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내력을 사용해 강력한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천준서였기에 생선 하나를 익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잠시 고민을 하던 천준서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연못 안을 들여다봤다.
 “잠깐······ 연못 안에 고기가 산다고?”
 천준서는 다시 손아귀에 잡힌 생선을 내려다보았다.
 천준서의 팔뚝보다 조금 작은 생선.
 어디에서나 쉽게 볼 법한 민물고기였다.
 “연못 안에 민물고기가 산단 말은······ 물고기가 어디서 기어들어왔다는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밖과 차단된 공동 안의 연못에 물고기가 산다는 말은 결국 물속으로 어딘가와 통한다는 말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물고기를 뒤로 내팽개친 천준서가 머뭇거림 없이 연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연못이라고 생각했던 연못은 생각보다 깊었다.
 어렵게 눈을 뜬 채로 밑으로 계속 내려가던 천준서는 자신의 몸보다 더 큰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환골탈태를 안 했으면 나가지도 못하고 죽었겠구나.’
 강대한 내력과 환골탈태로 인하여 한 숨으로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변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 숨을 소비하였을 것이다.
 천준서는 지체하지 않고 어두컴컴한 통로 안으로 자맥질을 하며 들어갔다.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헤엄을 치고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어두컴컴한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고기들이 점점 안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빛이든 뭐든 뭔가 좀 나와 봐라!’
 밖과 연결되었다는 확신만 든다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을 것이다.
 천준서는 천천히 통로를 살피며 들어가다가, 통로 중간에 자리 잡은 암석을 발견했다.
 아니, 암석이라고 생각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점점 그것에 다가갈수록 무언가 기이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암석이라고 하기엔 은은한 광택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뭐야 저거?’
 물속이라서 물 밖에 비하여 시야가 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천준서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공을 써서 치워 버리기 위해 자맥질을 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그것이 돌연 움직였다.
 
 
 3
 
 
 천준서를 향해 돌아선 그것에 천준서는 깜짝 놀랐다.
 부글부글.
 당황한 천준서의 입에서 포말이 쏟아져 나왔다. 돌아선 그 물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천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두 눈을 번들거리며 아가리를 벌리는 놈을 본 순간,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씨발······ 저게 대체 뭐야!’
 천준서는 담담하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손끝이 슬쩍 떨렸다.
 난생처음 보는 생물이, 그것도 매우 위험해 보이는 생물이 자신을 향해 돌아선 상황.
 처음엔 물고기인가 생각했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가리의 날카로운 이빨들은 하나하나가 송곳니 같았는데, 그런 것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게다가 몸체는 은은하게 광이 도는데, 마치 어피 같기도 했지만 뱀의 가죽 같기도 했다. 게다가 긴 몸체와 번뜩이는 눈알은 절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수십 가지 동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지운 천준서가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동물을 떠올렸다.
 ‘요, 용?’
 그리고 그 생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놈이 앞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으악!”
 천준서는 재빨리 손발을 휘저으며 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자맥질에 능하지 못한 천준서였다.
 게다가 당황한 상태라 제대로 손발을 휘젓지 못해 한 자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놈은 천준서의 사지를 뜯어 먹겠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제 보금자리를 침투한 천준서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가리를 마구 열었다 닫으며 순식간에 물살을 갈랐다.
 물속이라서 소리가 들릴 리가 만무한데도 불구하고 천준서의 귓가에는 아가리가 닫힐 때마다 딱딱하고 이빨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씨발!’
 천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암혼파천신기를 마구 끌어올려 주먹을 내뻗었다.
 그렇게라도 발악을 하지 않는다면 놈의 이빨이 육신을 찢어발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뻗은 천준서의 주먹이 움직이며 순식간에 검은 기운이 불쑥 솟아났다.
 지금까지는 조심스럽게 이종진기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내공을 썼는데, 지금은 너무도 다급한 마음에 생각지도 않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덕분에 주먹을 감싼 권강은 한 자도 넘게 일렁이며 천준서의 주먹과 함께 뻗어 나갔다.
 천준서의 주먹과 무시무시하게 쇄도하던 녀석이 부딪쳤다.
 주먹이 놈의 이빨들에 부딪치자, 주변의 물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귀를 찢는 소리가 천준서의 귓가에 들려왔다.
 쩡!
 천준서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물속을 부유하는 놈의 깨진 이빨들이 사방으로 천천히 뻗어 나가는 모양, 그리고 충격이 있었는지 잠시 주춤하며 몸을 부르르 떠는 놈이 보였다.
 ‘으아! 멀쩡하잖아!’
 천준서는 다시 좌수를 움직여 번개처럼 주먹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기 위해 옆 대가리를 노렸다.
 쩡!
 순식간에 다시 일 권이 꽂혔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기절하리라 생각했던 녀석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부르르 떨었다.
 그와 동시에 천준서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속에서 왼손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크으······ 어떻게 된 놈이!’
 천준서는 팔목을 부여잡으며 재빨리 몸을 틀었다.
 다시 공동으로 돌아가려는 심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도 천준서라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놈에게 질렸는지 대가리를 마구 흔들며 몸을 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자맥질을 해 다시 공동의 연못으로 올라온 천준서는 이끼들의 위에 드러누우며 가쁜 숨을 쉬었다.
 “푸아! 하아, 하아······ 빌어먹을!”
 자맥질로 공동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왼팔목은 퉁퉁 부어 있었다.
 달랑거리지 않는 것을 보면 부러지진 않은 것 같은데, 적어도 금은 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연못을 향해 버럭 악을 쓴 천준서가 다시 팔목을 잡고 인상을 썼다.
 
 
 4
 
 
 천준서가 공동 안으로 들어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하지만 천준서는 자신이 공동 안에서 얼마나 지냈는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항상 공동이 어두컴컴한데다가, 환골탈태를 하면서 얼마 동안은 잠을 안 자도 되었고, 허기를 잘 느끼지도 않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체 시계가 범인들과 달라졌고, 노화가 그만큼 느렸기에 천준서는 남들이 사흘, 이레를 지내는 시간만큼을 하루처럼 보냈다.
 게다가 강하게 몰입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바로 무공 때문이다.
 천준서는 백 일 연공을 했을 때보다 시간이 덜 지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 백 일 연공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다가올 일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한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남들이 평생을 무학에 정진해도 얻을 수 없는 내공과, 절세의 비급 두 권을 얻은 마당.
 게다가 원치는 않았지만 공동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연공을 하다 보니, 무공의 성취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준서가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스스로 당장 밖으로 나가서 자신과 비교할 만한 또래의 대상은 몇이 안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여유를 갖게 되었고, 조급함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슬슬 나갈 때가 된 것 같아. 두 달 정도 지났나?’
 어두운 공동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에 잠겨 있던 천준서가 눈을 떴다.
 팟!
 그와 함께 전광과도 같은 빛이 천준서의 눈에 어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종진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서부터는 여명신공을 중점으로 연공하기보다는, 혼원파천신공을 중점으로 연공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혼원파천신공의 성취가 늘면 늘수록 여명신공의 성취도 함께 는다는 것이었다.
 ‘기이할 만큼 비슷해.’
 마치 혼원파천신공과 여명신공, 두 무공이 서로의 짝과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두 무공 다 육 성을 넘긴 상태.
 하지만 미묘하게 혼원파천신공이 여명신공보다 성취가 앞서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후우. 어디 한 번 놀아볼까.”
 천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천준서의 손에는 여명신검이 잡혀 있었다.
 “흡.”
 짧은 호흡과 함께 여명신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동 안의 암흑을 가르며 묵색 검이 매끄러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휙!
 처음 시작은 그야말로 검의 기본을 수련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격을 더해 가면 더해갈수록, 검에 실린 힘도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파앗!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데도 불구하고 여명신검이 기이하게 떨리더니, 이내 검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검은 암흑의 기운, 혼원파천신공의 힘이 검을 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식간에 검기와 검사가 피어오르더니, 그조차도 사라지고 마지막엔 검강이 자리 잡았다.
 무려 한 자의 검강이 검을 감싸고 피어오르고 있었다.
 콰릉!
 검을 뻗어낼 때마다 은은한 우렛소리가 공동 안을 울렸다.
 파천의 소리였다.
 한 자의 검강을 유지하면서도 천준서는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다는 듯 마구 검을 휘저었다.
 콰르릉! 콰릉!
 검격이 더욱 거세지고, 점점 화려하고 강렬하게 고조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우렛소리도 거칠어졌다.
 딱 그때쯤, 돌연 천준서가 검을 중간에 멈추었다.
 “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천준서는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이상 가면 강기가 사방으로 뻗으며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공동이 무너질지도 모를 터.
 아쉽지만 더 이상 힘의 발출은 무리였다.
 천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지내왔었던 공동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뭐, 다 좋은데······.”
 천천히 검을 내려다보는 천준서.
 “······아무래도 이대로 나가면 딱 검마(劍魔)가 될 것 같단 말야?”
 
 
 5
 
 
 천준서는 대충 익힌 생선을 으적으적 씹어 꼬리까지 삼킨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 바닥에 꽂힌 검을 보던 천준서는 두 권의 책자를 집어 들어 내공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천준서의 손에 잡혀 있던 책자는 금방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불이 붙어 천천히 타들어갔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어.”
 복잡한 시선으로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하는 책자들을 내려다보던 천준서가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들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이제 빌어먹을 녀석을 만나러 갈 시간이군.”
 천준서가 말한 빌어먹을 녀석이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어룡(魚龍)이라고 이름 붙인 녀석.
 처음 녀석이랑 만나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아마 천준서가 이번 생에서 가장 놀란 일을 꼽으라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를 꼽을 것이다.
 지금까지 녀석과 투닥거리며 싸운 숫자는 오십 번도 넘었다.
 이레 전에는 녀석의 지느러미를 찢었고 사흘 전에는 녀석이 천준서의 가슴팍에 긴 이빨 자국을 남겼다.
 이제 천준서는 어룡이 친구같이 막역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공동에서 홀로 외로이 생활을 하며 수련에만 매진을 하다 보니, 녀석과 싸우는 일이 재미있는 놀이처럼 변해 탓이다.
 이미 천준서는 녀석과 싸우는 일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사실 어룡을 죽일 자신이 든 것은 오래전이지만, 천준서는 그러지 않았다.
 어룡이 없어진다면 자신이 얼마나 심심해질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천준서는 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연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던 녀석의 목숨을 끊을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는 자맥질도 익숙해진 듯, 여명신검을 쥔 채로 익숙하게 잠수를 한 천준서가 어두운 통로를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엉!
 감각을 끌어올린 천준서의 기감에 어룡이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녀석도 자신이 오는 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좋아, 어서 덤벼라!’
 천준서는 더욱 빠르게 자맥질을 치며 어두운 물속을 미끄러져 갔다.
 어느 순간 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묵광이 비쳤다.
 ‘왔구나!’
 천준서는 여명신검을 치켜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룡이 어둠 속에서 아가리를 흉폭하게 벌리며 천준서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고작 사흘 전에 가슴에 상처를 입으며 녀석의 이빨 중 삼분지 일을 부숴놨건만, 벌써 녀석의 이빨은 다시 자라 있었다.
 어룡은 잔뜩 화가 난 듯 천준서를 노려보며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녀석이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을 매번 괴롭혔으니, 아마 화가 날만도 했다.
 게다가 번번이 자신의 이빨을 부수며 고통을 주고, 자신도 여러 번 상처를 냈지만 여전히 승부를 점하지 못했으니, 이미 어룡은 천준서를 자신의 숙적으로 보고 있었다.
 크엉!
 잠잠하게 헤엄치며 천준서를 노려보던 어룡이 돌연 그림자만 남기며 쇄도했다.
 ‘어딜!’
 천준서는 어룡이 다가오는 궤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릉!
 천준서의 손에서 흑광이 번쩍이며 권강이 뿜어져 나갔다.
 어룡이 꼬리를 후려치며 몸을 튼 것도 바로 그때였다.
 능숙하게 천준서의 권강을 피해 낸 어룡은 속도를 배가하며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이런.’
 천준서는 천근추를 사용해 재빨리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천준서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어룡이 스쳐 지나갔다.
 ‘무서운 녀석!’
 조금만 지체했어도 자신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으리라.
 하지만 시답잖은 감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녀석이 방향을 바꾸는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천준서가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이미 녀석은 가던 길을 돌아 다시 그를 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천준서는 재빨리 여명신검을 들었다.
 여명신검에 검은 강기가 불쑥 치솟았다.
 크으릉!
 어룡은 검은 강기를 보곤 살짝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천준서의 몸에서 검은 강기가 보일 때마다 자신에게 고통이 생겼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피할 수는 없었다.
 어룡은 속도를 줄이기보단 오히려 속도를 더욱 늘렸다.
 천준서는 어룡을 향해 검극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어룡은 천준서의 검극을 살짝 피해냈다.
 깡!
 강기를 머금은 검이 어룡의 피부에 닿자 격렬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그 사이에 어룡은 천준서의 왼팔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살을 주고 뼈를 깎겠다는 심산이었다.
 ‘젠장······.’
 천준서는 검미를 찌푸렸다.
 인간인 이상 물속에서 녀석보다 빨리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은 녀석의 마당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
 팔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신 암혼파천신기를 끌어올려 왼팔에 집중시켰다.
 어룡이 무시무시한 이빨들로 천준서의 팔을 물어뜯음과 거의 비슷한 순간이었다.
 천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콰직!
 어룡이 천준서의 팔을 덥석 묾과 동시에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천준서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반쯤 열린 입 사이로 하얀 포말이 부글부글 흘러나왔다.
 하지만 천준서의 내공이 집중되어 보호되고 있는 팔을 문 어룡의 이빨도 성하지는 못했다.
 마치 강철을 문 양, 어룡의 이빨은 우수수 깨져 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룡은 아가리를 벌리지 않았다.
 도리어 고통을 꾹 참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더욱 빠르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천준서의 팔 하나는 무조건 자르고 보겠다는 뜻!
 어룡의 아가리에 단단히 잡혀 순식간에 물속을 가르기 시작한 천준서는 가까스로 여명신검을 놓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물린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머리를 마구 흔들며 앞으로 이동하는 녀석의 행동에 팔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물속에서 끌려가던 천준서는 고통을 씹어 삼키며 강기를 머금은 여명신검을 휘둘렀다. 여명신검은 마구 흔들리고 바위와 동굴에 부딪히는 상황에서도 정확히 어룡의 지느러미를 잘라냈다.
 끄엉!
 차마 아가리를 열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는 어룡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입을 연다면 천준서가 더 유리해질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느러미 한쪽이 잘려나가서인지 이곳저곳에 마구 부딪히며 헤엄을 쳤다.
 천준서 역시도 팔이 물린 채 녀석에게 끌려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고통을 함께해야 했다.
 ‘빌어먹을 새끼, 수영 더럽게 못 하네!’
 속으로 마구 욕설을 하던 천준서는 다시 여명신검을 들어 올렸다.
 천준서와 어룡이 헤엄치는 궤적을 따라 붉은 핏물이 흔적을 남겼다. 그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핏물과, 어룡의 잘려나간 지느러미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만든 흔적이었다.
 그는 상황을 보다가 어룡의 대가리 옆에 나 있는 세 개의 긴 구멍을 발견했다.
 마치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이 아가미라는 것을 천준서는 알고 있었다.
 물론 아가미가 한쪽에 세 개나 되는 물고기는 본 적이 없지만, 어룡은 물고기가 아니라 괴물이지 않은가!
 ‘빌어먹을 놈! 이제 좀 끝내자!’
 천준서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녀석의 아가미 사이로 쑤셔 박았다.
 그와 동시에 천준서의 몸이 울릴 정도로 큰 괴성이 들려왔다.
 크헝!
 이번에는 어룡도 참을 수 없었는지, 조개처럼 물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천준서의 팔을 놓고 말았다.
 ‘으헉!’
 이젠 검병을 잡은 채로 어룡에게 찰싹 붙다시피한 천준서가 자꾸 미끄러지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피를 흩뿌리고 있는 왼팔을 들어 그마저 어룡의 아가미에 쑤셔 넣었다.
 아가미 속으로 손을 넣은 채로 내공을 끌어올린 손을 마구 휘젓자, 어룡이 몸부림을 치며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어룡과 천준서는 수면 위로 솟구쳤다.
 크허엉!
 “크윽······.”
 어룡은 아가미가 뜯기는 고통에, 천준서는 눈이 타는 듯한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떠 있던 것도 잠시, 둘은 다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천준서는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걸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크으······!”
 반면 한 번 수면 밖으로 나갔던 어룡은 급격하게 힘을 잃기 시작했다.
 천준서를 떨어트리기 위해 호수의 수면 위까지 나왔건만, 도리어 자신만 더욱 힘을 쓴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룡의 눈에서는 광망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기에 담고 있는 생명력도 그만큼 질긴 것이리라.
 크르르릉.
 헤엄을 멈추자 어룡과 천준서는 천천히 수면으로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몸을 버둥거리는 어룡도, 아가미에 검을 박은 천준서도 모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징그러운 녀석.”
 바깥 공기를 들이켠 천준서는 어룡의 몸 위에서 그대로 몸을 늘어뜨리곤 숨을 골랐다.
 그리곤 힘겹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본 천준서는 다시 어룡의 몸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밖으로 나왔네?”
 아마 이제는 저세상에 거의 도착한 어룡이 아니었다면 그 어마어마한 거리를 자맥질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리라.
 한참 동안 숨을 고른 천준서가 슬쩍 어룡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룡의 큼지막한 눈이 천준서에게 고정되었다.
 천준서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보이지만, 정말 너 괴물이구나?”
 반 시진 전만 하더라도 둘은 서로를 죽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노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에게 살의가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를 이제 완전히 인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어룡은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양패구상을 한 듯하지만, 더 싸운다면 이 싸움의 끝은 자기의 죽음이 된다는 것을.
 천준서는 어룡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다. 비긴 걸로 하자.”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어룡의 머리를 두드리자,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르르릉!
 살짝 놀라 손을 뗀 천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원, 더러운 성격하곤.”
 아마 어룡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천준서에게 쌍욕을 내뱉었으리라.
 성격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천준서가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천준서는 손을 뻗어 여명신검의 검병을 쥐며 말했다.
 “참아봐라.”
 동시에 검병에 힘을 주자 어룡의 아가미에 박혀 있던 여명신검이 뽑혀 나왔다.
 크헝!
 어룡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몸을 흔들지 않았다.
 천준서는 잠시 동안 어룡을 내다보다가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동안 상대해주느라 고마웠다. 나중엔 좀 사이좋게 지내자.”
 천준서가 어룡에게 주절거리곤 몸을 기울였다.
 매끄러운 어룡의 등에서 미끄러진 천준서의 몸이 호수로 빠졌다.
 첨벙!
 어룡은 저편에서 떠오른 천준서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이내 천천히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천준서 역시도 끝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어룡을 보곤 피식 웃었다.
 “잘 가라.”
 사라지는 어룡을 보며 중얼거린 천준서가 몸을 돌렸다.
 물가까지 어설픈 헤엄을 쳐서 나온 천준서는 밀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호수가에 누웠다.
 “아이고······ 나도 죽겠다!”
 눕기 무섭게 엄습해오는 수마에 천준서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8장 금의환향
 
 
 1
 
 
 천준서는 귓가를 간질이는 물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끄응.’
 그와 동시에 어룡과 싸우며 얻은 상처들이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 온몸이 부서지는 느낌이네.”
 허리에서 나는 우두둑 소리를 들으며 몸을 푼 천준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아버지에게 사업을 하기 위해 거금을 달라고 해놓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몰래 가문을 떠났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엄청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 밖에 나왔으니 이런 꼴로는 돌아다니지 못하겠지.”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준서.
 환골탈태를 할 때 걸치고 있던 옷이 몽땅 타서 재가 되었다.
 게다가 천준서가 여벌의 옷을 들고 온 것도 아니고, 공동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없기 때문에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다.
 강대한 내공으로 인하여 한서불침을 이루게 된 천준서에게는 옷이 가져다주는 방한이라는 이점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껏 나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눈은 생각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천준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뭇잎으로 중요한 부분만 가릴 수도 없고······ 이거 원!’
 나신으로 나무꼭대기에 올라간 천준서는 저 멀리 마을 윤곽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날렸다.
 누가 본다면 색마가 분명하다고 소리쳤을지 모르지만, 야음에 움직이는 천준서의 모습을 발견할 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무공이 느니까 그래도 편한 게 많은 것 같군.’
 ***
 세상 어디에나 어두운 뒷골목은 있고, 또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는 왈패들도 있다.
 오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 몸이 없으면 뭘 못한다니까.”
 인적도 드문 오하의 밤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던 사내가 으쓱거렸다.
 보통 이렇게 까불거리며 밤거리를 활개 치다가 칼에 맞기 십상인데,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거드름을 피워댔다.
 그도 그럴게, 이 사내가 오하의 뒷골목을 주름잡는 왈패의 두목이었기 때문이다.
 보란 듯이 서슬 퍼런 박도를 맨 채 터벅터벅 걷던 사내가 슬그머니 어두컴컴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어지러운 골목을 지나야만 자신의 본거지로 들어설 수 있으니까.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새하얀 것이 그의 길을 막고 떨어져 내렸다.
 “무, 뭐야! 웬 놈이냐!”
 사내는 깜짝 놀란 듯 박도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검을 든!
 사내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밤에, 저 높은 곳에서 검을 든 채 가볍게 착지한 놈이 자신을 노린다?
 딱 봐도 잘난 무림고수가 아닌가!
 내공도 없이 악과 깡으로 뒷골목 두목이 된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씨, 씨벌! 달라는 건 뭐든지 다 줘야 돼!’
 잔뜩 긴장을 한 채로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을 보던 사내가 뒷걸음질을 치며 중얼거렸다.
 “씨벌······!”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불행하게도 엉뚱한 걸 확실하게 보고 말았다.
 걸어올 때마다 흉물스레 흔들리는 그것을!
 이 시간에 저 높은 건물에서 어둠을 뚫고 가볍게 착지해 자신을 향해 검을 든 채 다가오는 헐벗은 무림고수!
 그게 색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여인을 노리는 게 아니라, 남정네를 노리는 남색가 색마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색, 색마다!”
 사내가 사색이 되어 고함을 버럭 지르며 도망치기 위해 돌아서다가 그대로 엎어졌다.
 새하얀 인형의 손이 어느새 사내의 수혈을 점한 것이다.
 “쯧.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다만, 사람을 색마로 만들면 곤란하지.”
 능글맞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인형은 다름 아닌 천준서였다.
 그는 쥐죽은 듯 자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미안한데 내가 좀 민망한 상황이라서. 옷 좀 빌려 갈게.”
 천준서는 사내의 옷을 벗겨 자신의 몸에 걸치곤 다시 건물의 지붕 위로 도약했다.
 이제 안심하고 숙주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천준서가 떠나고, 다음날부터 오하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단숨에 삼 장을 도약하는 헐벗은 무림 고수가 자정이 넘으면 혼자 돌아다니는 남정네의 순결을 위협한다는 소문이었다.
 
 
 2
 
 
 천준서는 숙주현을 걸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고향인 것 같아.’
 사실 그것도 그럴 것이, 천준서는 반년 만에 숙주현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본인은 고작 두세 달 정도가 지났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그 수중 동굴이 오하로 연결되어 있었다니······ 자맥질을 해서 갈 생각은 어리석었어.’
 공동이 경석산에 있었는데, 막상 천준서가 호수를 통해 밖으로 나온 곳은 오하와 사현 근처였다.
 영벽 근처일 것이라는 천준서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결국 숙주현에 길을 물어물어 도착하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리고 말았다.
 숙주현에 도착한 이상, 당장 천씨세가로 가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겠지만, 그는 다른 곳을 먼저 들리기로 했다.
 포목점과 객잔.
 야음을 틈타 빼앗은 옷을 입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옷을 입은 것이다.
 천준서의 몸에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으니, 오늘만큼은 가문이 아니라 객잔에서 폭식을 해보고 싶었다.
 ‘쯧. 살면서 내가 식욕을 이렇게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배 속에 아귀라도 살고 있는 것 같네.’
 혀를 차며 걸음을 빨리 걸은 천준서가 포목점으로 들려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들었다.
 천준서가 집어 드는 옷을 보고 눈을 빛낸 주인이 손을 비비며 유창하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하하하. 정말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그 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으로 광택이 자르르 흐르지요.”
 천준서가 주인을 힐끗 쳐다보곤 포목점 밖으로 나가려 하자, 주인이 돌연 황당한 표정으로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이봐요! 계산은 하시고 가셔야 할 것 아닙니까요. 손에 든 속옷과 상하의만 해도 얼마인지 아십······.”
 도둑놈 보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소리치는 주인을 향해 손을 들어 입을 막은 천준서가 말했다.
 “그쪽 안목은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는 천씨세가 소유가 아닌가?”
 천준서의 말에 당황한 표정이 된 주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건······ 맞습니다만······.”
 “어떻게 천씨세가 소유의 포목점을 운영하는 주인이라는 자가 천씨세가 이 공자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거지?”
 천준서는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하지만 천준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주인은 사색이 된 지 오래였다.
 “어, 어이쿠! 이 공자님······.”
 “이 옷이 다 합해서 얼마라고? 계산해야겠어?”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요즘 눈이 침침해서······. 하하. 안녕히 가십시오!”
 주인은 손의 지문이 닳을 정도로 손을 비비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 지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기가 고개를 들었을 때쯤 이 공자가 자신의 시야에서 없어지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주인이 고개를 들 때는, 이미 천준서는 저만치 멀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휴. 십년감수했네.”
 주인은 소매 자락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반년 동안 가출을 했다던 이 공자가 갑자기 자신의 포목점에서 물건을 고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니미! 현기증 난 것 같단 말이야.’
 주인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포목점의 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철썩.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천준서가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데우니, 지금까지 쌓였던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 정말 내가 어떻게 살았던 거지?”
 지금 당장 공동으로 돌아가서 일주일만 더 살아보라고 한다면 천준서는 단칼에 거절할 수 있었다.
 옷도 입지 않고, 뜨거운 물로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음식도 없던 곳에서 그만큼이나 버텼다는 것이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그 때문에 얻은 것도 있지만 말이다.
 천준서는 욕조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비하면 훨씬 하얗고 뽀얀 살만 본다면 누가 봐도 서생이라고 할만 했다.
 원체 하얀 피부를 지녔었는데, 환골탈태를 거치고 반년 동안 공동 안에서 빛을 못 받으며 지냈으니······.
 하지만 그와는 상반된 모습들도 생겨났다.
 예전과는 다르게 훨씬 커진 체격, 몸에 붙은 근육들.
 그리고 온몸에 자잘하게 나 있는 상처들까지.
 이 상처들은 거의 다 수룡의 작품이었다.
 맨 마지막에 입었던 왼 팔의 상처는 아직 채 아물지도 않았다.
 게다가 검으로 만들어진 상처가 아니라, 동물의 이빨이, 그것도 수룡의 기형적인 이빨들이 만들어낸 상처들은 크기도 크고 깊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징그럽다고 할지 몰랐다.
 하지만 천준서의 생각은 달랐다.
 “나름 나쁘지 않아.”
 몸에 생긴 상처만큼 자신도 발전한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씻고 나니까 배가 더 고파지네.”
 예민해진 감각 사이로 객잔의 부엌에서 만들고 있는 음식의 냄새가 느껴지자 배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천준서는 가볍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푸수슉.
 그와 동시에 몸에 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기이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천준서는 입구로 다가가 한편에 놓아둔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쪽색 비단옷을 걸치고, 그 위에 검을 메고 나서 장포를 걸쳤다. 그리고 신까지 신고 나서 긴 머리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욕탕에서 나와 방을 지나던 천준서의 눈에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준수한 얼굴을 보는 순간, 천준서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숙주 현의 망나니가 다시 나오셨군.”
 자신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몸이 이렇게 크지도, 머리가 길지도 않았다.
 당당한 모습도 없었고, 허리에 이런 검을 대놓고 차본 적도 없었다.
 숙주 현은 여전히 자신을 망나니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 다른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당장 밥을 안 먹으면 죽을 것 같아.”
 거울을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낀 천준서는 너스레를 떨며 성큼성큼 걸어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지금까지의 거지꼴이 아니라서 숙주 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지도 몰랐지만 이젠 상관이 없었다.
 예전엔 두려워하던 것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으니까.
 
 
 3
 
 
 계단을 내려간 천준서가 객잔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리쳤다.
 “점소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온몸이 흙먼지로 범벅이었고 누추한 옷까지 입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깔끔하게 씻고 옷까지 차려입은 천준서는 아까와는 다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얼굴이 잘생긴 그가 옷을 차려입고 장포까지 걸치고 있다는 것은 둘째 치고, 숙주 현에서 천준서라고 하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천씨세가에서 운영하는 객잔에서 천준서를 모를 리는 없었다.
 점소이는 자신이 받았던 손님이 천씨세가의 이 공자라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네, 네, 손님! 아니, 이 공자님!”
 천준서는 점소이가 건네는 목록을 받는 대신 입을 열었다.
 “차 한 잔 내오고, 음식은 육류 위주로, 여기서 잘 팔리는 것들로 다 가져와. 배가 고프니까 빨리.”
 “아, 예!”
 점소이는 고개를 푹 숙이곤 재빨리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천준서는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가문에서 객잔을 하니 돈을 낼 필요가 없어서 편하네.”
 사실 당장 천준서의 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래서 굳이 천씨세가가 운영하는 객잔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
 천준서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매만지다가 입가로 가져갈 때, 중년인 두 명과 여인 한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천준서는 슬쩍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이를 꾹 물며 미간을 좁혔다.
 ‘유지영······!’
 천준서는 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여유로웠던 그의 표정은 이미 십 리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천준서가 한때 마음을 줬던 여자였으니까.
 그가 살아남기 위해 망나니의 모습을 꾸미며 애처롭게 살아갈 때, 유지영은 자신을 감싸안아주기보단 매몰차게 버렸다.
 그리고 장소궁의 품으로 갔다.
 전생에도 그랬고, 이번 생에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이미 일어난 지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그 분노는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 때문에 단지 유지영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인데, 유지영의 얼굴을 보니 단숨에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준서는 찻잔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른 분노 때문인지, 천준서의 단전에서 혼원파천신기가 끌어 올랐다.
 피어오르던 김이 점점 사라지던 찻잔에서 다시 김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찻잔의 찻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찻잔에 담긴 물이 모두 사라지자, 마지막엔 찻잔에 쩌적 금이 가며 깨졌다.
 “아.”
 손에서 찻잔이 부서지는 것을 느낀 천준서가 그제야 급히 내공을 회수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무인들을 대동한 채로 거리를 걷는 여인의 모습에 뭇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혼을 쏙 빼놓을 것만 같은 여인의 모습에 사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집중된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홀로 생각에 잠긴 듯, 멍하게 거리를 걷기만 할 뿐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대로를 걷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함부로 말을 걸지 않는 것을 보면 이상하기도 하건만, 뒤의 무인들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금색 수실로 용이 수놓아진 무복.
 남궁세가의 무인들이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골몰이 상념에 잠겨 있던 여인, 남궁서희는 숙주 현의 대로를 걷다가 문뜩 드는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남궁서희가 고개를 돌리자, 객잔의 창 안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미남자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남궁서희는 목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남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제히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남궁서희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몇 번 깜빡였다. 하지만 방금 봤었던 검은 기운은 마치 착각인양 보이지 않았다.
 남궁서희는 숨을 고르며 하얀 손을 자신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여전히 목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남궁서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남자, 위험해.’
 너무 상념에 빠져 있던 자신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궁서희는 자신의 의구심을 풀고 싶었다.
 남궁세가의 안마당인 안휘성에서 마공을 익힌 자가 활개 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4
 
 
 천준서는 분을 삭이고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혹시나 다시 차를 내어 오라고 하면 유지영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를까 봐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자신의 바뀐 분위기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기분 더럽군.’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릴 때, 돌연 객잔의 입구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천준서의 시선도 그곳으로 움직였다.
 가슴에 황금색으로 용을 수놓은 무인들.
 아무리 전생에 숨을 죽이고 가문과 기루만 오갔다고 하지만, 안휘성에 사는 사람으로서 저 표식을 모를 리는 없었다.
 ‘남궁세가!’
 천준서는 사뭇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숙주까지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아무리 남궁세가의 힘이 안휘를 포용한다지만, 숙주와 황산은 거리가 있었다.
 남궁세가가 이곳에 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멈춰 있었던 천준서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천씨세가나 장가방에서는 남궁세가와 연이 없다. 그런데 숙주현까지 왔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옷이 심하게 더러워지지 않은 것을 보면 급히 숙주현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야.’
 의심이 되는 곳은 있었지만, 저들과 엮이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슬슬 장가방과의 일전을 준비하며 멸문시킬 생각을 하고 있는 천준서였다. 이목이 이곳으로 쏠리게 된다면 저들의 입김이 자신의 계획을 수정시킬 수도 있었다.
 천준서는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놈들의 이목을 사서 좋을 게 없어.’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객잔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천준서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객잔의 입구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남궁세가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남궁서희였다.
 입구에 선 남궁서희는 무인들을 통솔하는 단주에게 전음을 보내며 객잔 안을 살폈다.
 -오늘은 여기서 묵도록 해요. 저는 확인할 게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단주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무인들과 함께 중앙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때가 되자, 객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남궁서희에게로 쏠렸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요란하게 들어온 여인.
 그녀가 대단한 미색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서희는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눈에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얼른 음식이 나와야······.’
 창밖의 대로를 내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천준서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자신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준서는 내색하지 않은 채로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천준서에게로 다가오던 인기척이 바로 앞에서야 멈췄다.
 “저기요, 소협?”
 마치 옥이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천준서를 부른다는 것은 객잔 안의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준서의 코앞까지 가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작게 한숨을 쉰 천준서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여인을 바라본 천준서는 순간 잠시 몸을 멈추었다.
 ‘여자? 그 많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이 여자를 호위한 건가?’
 단순한 여자가 아니었다.
 천준서가 잠시 멍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객잔 안을 쭉 둘러보자, 객잔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온 남궁세가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피하려던 유지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듯한 유지영과 잠시 시선이 마주쳤던 천준서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남궁서희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
 아름다운 여인이 불렀는데도 불구하고 약간 차가운 반응.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준서를 욕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역시도 수려하게 생겼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녀를 주인으로 둔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칼날 같은 시선을 천준서에게로 고정시켰다.
 천준서가 남궁서희에게 조금이라도 모욕을 준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베어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활짝 웃은 남궁서희가 물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괜찮은지요?”
 그녀의 물음에 천준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목을 피하기는 글렀군.’
 객잔을 훑어보니 여전히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합석을 요구한다면, 필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창가가 좋든지, 아니면 내게 목적이 있겠군.’
 빠르게 생각을 마친 천준서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객잔에 자리가 다 찼군요. 미인을 마주 보며 식사할 수 있다면 저야 환영입니다.”
 남궁서희는 객잔이 비어 있는데도 왜 여기에 앉으려 드냐는 천준서의 일침을 가볍게 물리치며 말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말꼬리를 흐리며 자리에 앉아 천준서를 보며 방긋 웃는 남궁서희.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유지영을 발견했다.
 사뭇 당황하면서도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
 천준서는 저 표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웃기는군. 지금 질투하는 건가?’
 자신이 예전에 느꼈었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다.
 유지영도 당황스러우리라.
 더 잘난 놈을 만나기 위해 버린 놈을,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관심을 가지다니.
 그것도 남궁세가의 여식으로 보이는 여인이!
 천준서는 살짝 웃으며 유지영에게 주었던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즐겨야지.’
 기왕 눈앞의 여인을 어찌하지 못하니, 합석을 하는 대신 그녀를 충분히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천준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서희와 시선을 맞추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왕 합석하게 된 것, 아름다운 소저의 이름이라도 들어볼 수 있을지요?”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서희라고 해요. 저 역시 소협의 이름이 알고 싶은데요?”
 기다렸다는 듯 묻는 남궁서희의 물음에 천준서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쁜 이름이군요. 전 천준서라고 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천준서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남궁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천 소협은 무림인이 아닌가요?”
 패검하고 있는 천준서에게 그렇게 묻는 남궁서희가 이상해 보일지 몰랐지만,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보통 무인들은 인사를 할 때 포권을 하곤 한다.
 자신의 나이 대 무인들은 더더욱.
 그런데 자신은 그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내 가문에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럴 리 없어. 남궁세가가 천씨세가 같은 가문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 뭐지? 내 출신 성분을 묻는 건가?’
 속으로는 머리를 팽팽 돌리면서 겉으로는 씩 웃은 천준서가 말했다.
 “하하하. 비록 강호출도를 해본 적은 없지만 무림인이라고 말씀해두고 싶군요. 열심히는 아니지만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요.”
 천준서의 대답에 남궁서희는 마치 아이처럼 손뼉을 짝 치며 호기심이 든다는 듯 물었다.
 “아! 혹시 사문을 알 수 있을는지요?”
 남궁서희의 이런 청순한 모습에 계략이나 음모가 있다고 생각할 사내들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천준서는 그런 사내들 중 하나였다.
 ‘사문······ 내가 익힌 무공이 궁금한 건가? 왜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지금 거의 마공을 위주로 쓸 수 있는 반쪽짜리였기 때문이다.
 천준서는 내색하지 않고 대신 조금 부끄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여기 숙주 현에 자리 잡고 있는 천씨세가가 제 가문입니다.”
 “아하!”
 말을 들은 남궁서희는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천준서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옆을 향해 움직였다가 돌아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있는 곳.
 어쩌면 전음을 통해서 천씨세가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으리라.
 ‘맞구나. 설마 내가 아까 찻잔을 깨트릴 때 내공을 그만큼이나 끌어올린 건가?’
 천준서는 그제야 얼추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 작은 세가의 나부랭이에게 관심을 가지실 리 없지.’
 때마침 천준서의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 접시가 아니라 탁자를 가득 채우는 음식들을 보던 남궁서희는 이때다 싶었는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런. 제가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예의 같네요. 이야기 즐거웠어요, 천 소협!”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일어나려는 남궁서희를 본 천준서가 속으로 웃었다.
 ‘이제 흥미가 떨어지셨다? 이러면 내가 섭섭하지.’
 천준서는 손을 뻗어 남궁서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 바람에 남궁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궁세가의 무인들 역시 저마다 엉거주춤 일어나며 검병에 손을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며 능글맞게 웃은 천준서가 남궁서희를 향해 말했다.
 “아뇨. 어차피 혼자서 다 먹을 수도 없는데요. 게다가······ 미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사양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남궁서희의 팔목을 놓는 천준서.
 남궁서희는 앙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열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열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남궁서희는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천준서가 적이었다면 순식간에 완맥을 제압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방긋 웃으며 자신의 팔을 놓는 천준서의 손을 잡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5
 
 
 남궁서희는 빈 탁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무언가 상념에 잠긴 모습.
 그녀에게 다가서던 사내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주군. 어찌해서 그런 사내에게 관심을 주신 겁니까?”
 항상 남궁서희의 속내를 짐작할 수야 없다지만, 이번 일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
 앞날이 보장되어 있는 남궁세가의 영애에게 혹시 모를 소문이 도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남궁서희는 그 말을 듣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 단주가 보시기엔 그 남자가 어떻게 보였나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진 단주라고 불린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물론 얼굴은 빼어나 보였습니다만 다른 것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는 모습.
 혹시나 주군에게 자신의 말이 오해로 비추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남궁서희는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단지 수려한 용모로 그 남자를 평가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단주의 말대로라면 그저 얼굴만 잘난 녀석으로 보였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낀 천준서는 단순히 얼굴만 잘난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제게 관심을 가지던가요?”
 “모두가 느꼈을 것입니다. 주군께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진 단주.
 사실, 그의 말대로 다른 세가나 대문파에서도 그녀에게 연정을 품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궁서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 남자는 제게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다른 여인을 의식하더군요.”
 “예?”
 진 단주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자리를 뜨려는 남궁서희의 팔목까지 잡으면서 식사를 권하던 사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니?
 당장 객잔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물어도 자신과 같은 대답을 할 텐데.
 “이런 것은 여자인 제가 더 잘 알아보겠죠. 제 생각엔 다른 사람의 질투를 사기 위해서 저와 합석을 요구한 것으로 보이네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진 단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군을 이용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당장 그놈을······.”
 당장 검을 뽑아들고 객잔 밖으로 나설 것 같은 진 단주를 제지한 남궁서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좋은 생각 같아요, 단주.”
 “하오나······.”
 진 단주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남궁세가에서조차 선망의 대상이 되는 남궁서희를 단지 다른 여자의 질투를 사기 위해서 이용하다니.
 영애가 족보조차 없을 것 같은 놈과 식사를 한 것도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는데, 더욱 심통이 났다.
 “즐겁게 식사를 했으니 그 정도는 웃으며 넘겨야죠.”
 방긋 웃으며 찻잔을 드는 남궁서희.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복잡했다.
 ‘천 소협······ 아무래도 의아한 게 많아.’
 처음 그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사뭇 당황스러운 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객잔 안으로 들어와 가까이에서 천준서를 봤을 때, 그녀는 천준서의 겉모습부터 의아함을 느꼈다.
 무공이라곤 담을 쌓아놓을 것 같은 하얀 피부하며, 고운 얼굴선까지.
 그래서 자신이 혹시 다른 남자를 보았었던 것인지 몇 번이나 둘러보지 않았던가.
 그녀가 느꼈던 것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패도적인 마공의 기운이었다.
 정종의 무공이었다면 내공의 흐름은 느꼈을지언정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몸이 반응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출신이 너무 깨끗해.’
 보고를 받은 바로는 천씨세가의 둘째 아들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야기를 물어보니, 그냥 둘째 아들이 아니라 숙주 현에서는 유명한 망나니였다.
 그러나 그녀가 만나본 천준서는 절대 그런 망나니로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리라.
 그녀가 잠시 잡았던 손은 그의 피부와는 다르게 너무나 거칠고 단단했다.
 한 달만 검을 잡지 않아도 손의 굳은살은 조금씩 사라지기 마련이다.
 근래까지 검을 놓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와 말을 나누면서 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겠다는 눈빛과 의표를 찌르는 말들.
 ‘의문투성이네.’
 강한 흥미가 느껴지는 남자였다.
 남궁서희는 탁자를 몇 번 더 두드리다가 진 단주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씨세가로 사람을 보내세요.”
 “예? 그게 무슨······.”
 당황하는 진 단주를 바라보며 남궁서희가 말했다.
 “그쪽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객잔보다는 천씨세가에서 묵었으면 좋겠네요.”
 진 단주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천씨세가의 내원으로 걸어갔다.
 천씨세가의 정문을 들어가자마자 수문을 지키는 무인이 한 첫 마디는 안녕하십니까가 아니었다.
 “가주님이 무척 화가 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원의 무인 몇 명이 다가와 천준서를 향해 말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이 포목점이나 객잔을 들렸다는 것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운 자신이 세가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가의 무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결국 천준서는 무인들의 뒤를 따라 걸었고, 어느새 눈앞에 아버지의 집무실이 보였다.
 “들어가시죠. 공자님.”
 고개를 숙이며 말하긴 하지만 무인들의 눈빛에는 한심하다는 무언의 쓴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망나니처럼 생활하던 이 공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거금을 받고선 가출을 했으니 말이다.
 이미 천준서는 천씨세가 안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정문을 지키는 말단 무인들마저도 자신을 경멸하는 마당에.
 천준서는 왠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이런 느낌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었다.
 천준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둘째입니다.”
 하지만 들려오지 않는 답변.
 이런 상황은 두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안에 아버지가 안 계시거나, 아버지가 매우 화가 나서 대답조차 하지 않거나.
 ‘후자군.’
 짧게 한숨을 쉰 천준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침묵을 지키고 탁자 위의 서류에 눈을 고정시킨 아버지 천용철이 보였다.
 천준서는 천용철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다시 인사했다.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천준서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묵묵하게 있던 천용철이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천준서의 코앞까지 다가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십니까? 네 입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나오느냐?”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친 천용철의 시선을 피한 천준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설명? 이 고얀 놈이!”
 천준서의 말이 더욱 성질을 돋웠는지, 급기야 천용철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내 그렇게 너를 믿었건만 반년 간 가출을 해놓고 설명? 이제 돈이 다 떨어졌더냐? 그냥 당장 집 밖을 나가!”
 천용철은 고함을 버럭 지르며 치켜든 손으로 천준서를 향해 휘둘렀다.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자신이 뺨을 때리려고 손을 휘두르고서도 아차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번개처럼 움직였던 천용철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준서가 왼손을 뻗어 천용철의 손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천용철은 마치 손목에 천근 바위가 달린 마냥 단단하게 잡혔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이게 뭔······?’
 하지만 그의 손목을 잡은 천준서는 무슨 소리냐는 듯 천용철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 반년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가문 밖으로 나간 지 반년이 지났다고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천용철을 향해 묻던 천준서는 뒤늦게 자신이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이고, 아버지 죄송합니다. 다시 때리세요.”
 천용철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황당함을 느꼈다.
 ‘뭐야? 자기가 얼마나 집 밖에 있었는지를 몰라?’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마치 파리를 잡듯 자신의 팔을 낚아챘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근데도 불구하고 천준서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천준서를 보던 천용철이 그제야 무언가 달라진 그의 모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체격이 다부져졌구나. 키도 큰 것 같고.’
 게다가 허리에 검까지 차고 있었다.
 비록 조악한 검집으로 감싸고 있긴 하지만, 천용철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처럼 보였다.
 적어도 값이 싸 보이지는 않았다.
 ‘흥.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잘 먹고 잘 지낸 듯싶구나.’
 문제는 천준서의 몸을 보면 무공을 연공하는 것에 게으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의 다른 부분을 보면 꼭 햇빛마저 보지 않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듯했다.
 “한번 변명해봐라.”
 천용철이 팔짱을 끼며 묻자, 천준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아버지. 그······ 제가 폐관 수련을 했는데 두 달 정도가 지났다고 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근데 반년이라니······ 제가 너무 무공에 심취를 한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천준서가 슬쩍 천용철을 바라보았다.
 천용철은 입이 반쯤 벌어진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 심취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앉아 있느냐!”
 무공에 무짜도 싫어하던 녀석이 무공에 심취하다니!
 그야말로 개가 풀을 뜯어 먹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화가 누그러질 만한 변명을 듣길 바랐는데, 이런 뻔한 소리를 들으니 더욱 화가 치솟았다.
 천용철이 검지로 문을 가리키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치려는데,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당······ 남궁세가에서? 들어오라 해라.”
 이내 집무실이 열리고 황룡이 수 놓인 무복을 입은 무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큼, 어서 오십시오.”
 “남궁세가에서 왔습니다.”
 천용철이 사뭇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남궁세가의 무인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천준서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감히 말단 무인 나부랭이가······!’
 부단주라는 직책이 단숨에 말단 무인이 되었지만, 천준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 채 무인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 대남궁세가의 영애이신 남궁서희 님께서 천씨세가에서 하룻밤 정도 신세를 지고 싶다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아.”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천준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남궁서희야 식사를 한번 해본 것이 다지만, 저런 식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저 녀석이 건방지게 말을 하는 것이리라.
 천용철은 무슨 짓이냐는 듯 천준서를 향해 눈치를 주고 있었고, 부단주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준서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실례가 되니 그 요청은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서희 소저께는 토시 하나 안 틀리게 전해주시길.”
 “준서야, 손님께 그게 무슨 버릇이냐!”
 천준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친 천용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들내미가 철이 덜 들어서. 세가가 좁지만 다행히 비는 전각이 있으니 그렇게 전해주시지요.”
 부단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뵙지요.”
 그리곤 나가기 전에 천준서를 슬쩍 훑어보았다.
 천준서는 속이 조금씩 끓는 것을 느꼈다.
 “건방진 놈.”
 천준서가 작게 중얼거리자, 천용철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대체 남궁세가의 사람에게 뭐 하는 짓이냐?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하지 마라. 넌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숙해라. 그리고 남궁세가에서 사람들이 오면 인사할 준비하고 있어. 오늘 남궁세가 덕분에 산 줄 알거라.”
 으름장을 놓는 천용철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집무실을 나섰다.
 
 
 9장 주순호치
 
 
 1
 
 
 세가의 정문에 뒤늦게 도착한 천준서는 아버지와 형이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하곤 다가갔다.
 천준익은 천준서를 힐끗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곧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천준서는 이런 천씨세가의 모습이 답답했다.
 ‘고작 그 여자 한 명 때문에 아버지까지 이렇게 나와야 해?’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쩔쩔매는 것을 이해는 한다.
 안휘성에서 남궁세가의 눈 밖에 나서 발 뻗고 잠을 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천준서가 짜증이 난 것은 아버지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천씨세가가 남궁세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짜증 난 것이다.
 ‘천씨세가도 힘을 가졌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아마 천씨세가가 남궁세가와 비등한 전력을 갖추었더라면.
 아니, 남궁세가가 어려워할 정도의 힘만이라도 가졌다면 아버지도 태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천용철은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던 천준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천씨세가의 정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선두에 천준서가 만났었던 남궁서희가 있었다.
 천준서와 만났을 때의 표정 그대로 웃음기를 살짝 머금은 채 세가 안으로 들어온 남궁서희가 천용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천씨세가의 가주님이시군요. 남궁세가의 남궁서희라고 합니다. 실례되는 일일 수 있는데······ 이렇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용철은 표정이 조금 가벼워졌다.
 생각보다 예의 바르고 아름다운 아이가 저렇게 웃으며 인사를 하니, 마치 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무슨 말씀을······ 같은 안휘성의 문파로써 어찌 그런 청을 거절하겠소.”
 웃으며 잠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훑어본 천용철은 옆에 서 있던 천준익과 천준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여기 둘은 제 아들들이오.”
 천준익이 재빨리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천씨세가의 소가주인 천준익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남궁서희예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방긋 웃으며 답한 남궁서희가 눈을 돌렸다.
 그런데도 천준서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천용철이 눈치를 주었다.
 천준서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자리가 자리라지만, 꼭 통성명을 해야겠습니까?”
 천준서의 말에 천용철과 천준익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하지만 남궁세가의 영예.
 천준서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둘과는 다르게 남궁서희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죠. 식사도 천 소협 덕분에 즐겁게 했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죠. 아무쪼록 편하게 지내다가 가시길.”
 시원시원한 것이 마음에 든다는 말투로 웃으며 대답한 천준서가 뒤로 물러났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돌아가도 되겠냐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왔으니, 그들이 묵을 전각을 안내하는 일은 형이 맡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장차 천씨세가를 이끌어갈 형이니, 이렇게라도 엮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천용철과 천준익은 아까보다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허, 대체 저 녀석이 언제 남궁세가의 영애를 만난 게지? 아비인 나도 저 녀석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가 없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용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둘째가 언제 이런 뛰어난 미모의 영애와 식사를 했는지 궁금하구려. 준서야. 어차피 네 거처로 가는 길이니 소저와 친분이 있는 네가 안내를 해 주는 것이 좋겠구나.”
 천용철의 말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던 천준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 하지만······.”
 무어라고 말을 해서 빠져나가려던 천준서의 뒷말을 자르고 남궁서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렇게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허허허. 그럼.”
 남궁서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용철과 천준익이 몸을 돌려 걸어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준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여우같은 년! 생긴 것만큼 머리도 좋을지 몰라.’
 
 
 2
 
 
 천준서가 남궁서희와 함께 외원을 걸었다.
 두 사람 다 방긋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누가 본다면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닐까 착각을 할 만하게 보였다.
 그 뒤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는 실정이라 별로 그림이 좋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실상 한 명은 진짜로 웃는 것이었고, 한 명은 웃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남궁서희가 천씨세가의 풍경을 살피다가 천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천 소협을 보니 굉장히 싫은데 참고 안내해주시는 것 같네요? 제가 싫은 모양이죠?”
 “글쎄요. 설마 저 같은 사람이 대남궁세가를 상대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든 명령이든 말이지요.”
 천준서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남궁서희의 아미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네?”
 “농담입니다.”
 천준서가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보자, 남궁서희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대남궁세가라는 말과, 명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 단주에게 정중하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부 단주가 실례를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아뇨. 자부심은 좋은 거니까요.”
 천준서와 말을 나누며 남궁서희는 계속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이야기를 하며 천준서가 내뱉는 말들이 다 자신을 쏘아붙이거나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천준서의 이런 행동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자존심이 상하게 했다.
 지금까지 자신 또래의 청년들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천준서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되도록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관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천준서는 어떠한가?
 가능하면 자신과 안 얽히려고 하고, 자신과 말을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준서가 그런 것을 보면서 남궁서희는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자존심이 상했다.
 이것은 그녀가 천준서에게 여자로서 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여자로서의 자존심의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어느 것에서도 쉽게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기질이 발휘된 것이기도 했다.
 어느새 남궁서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아지고, 화가 난 듯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튀어나왔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준서가 전각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이 별채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아, 네······.”
 급히 상념에서 깬 남궁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이만.”
 천준서가 가볍게 목례하곤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묘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던 남궁서희는 단주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진 단주, 먼저 들어가 있으세요. 저는 바람을 쐬면서 생각을 좀 정리할 게 있어서요.
 -예.
 “우리는 먼저 들어간다.”
 “옛!”
 진 단주의 명령에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가는 무인들 사이에서 고개만 돌린 진 단주가 남궁서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서 간 천준서를 따라잡으려는 듯 총총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쯧······.”
 진 단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3
 
 
 미간을 찌푸린 채 걷던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려는지 모르겠는데······.”
 천준서의 몇 발자국 뒤에서 걸어오던 남궁서희도 멈춰선 채로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왜요? 제가 방해라도 된다는 듯 말씀하시네요.”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요. 나는 반년 만에 집에 돌아온 겁니다. 좀 쉬었으면 하는데요.”
 “반년이요? 여행이라도 갔다 온 건가요?”
 “소저가 내 연인도 아니고······ 제가 그쪽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천준서가 의아하다는 듯 말하자, 남궁서희는 아미를 살짝 움직이며 물었다.
 “이상하네요. 저 같은 여자가 관심을 가지면 보통 좋아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남궁서희의 말에 천준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스물도 안 된 여자가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좋아할 리가······.”
 천준서의 말에 남궁서희의 입술이 슬쩍 튀어나왔다.
 원래 예쁘다는 소리만 듣다가 시원찮은 반응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법.
 남궁서희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천 소협이 저보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은데요?”
 “하. 내가 이래 보여도 내일모레······ 아니, 관두죠.”
 천준서는 옆에서 쫑알대는 남궁서희의 말을 듣다 보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젠장. 내가 왜 얘한테 이런 걸 설명하고 있어야 하지?’
 차라리 그냥 무공에 대해서 물어보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전혀 터무니없는 것으로 달라붙으니 떼어내기도 곤란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나한테 뭔가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면서까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천준서가 손을 휘젓고는 몸을 돌려 걷는데, 남궁서희가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린 여자한텐 관심이 없으시다더니, 객잔의 그 여자는 예외인가 봐요.”
 그 말에 천준서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고개를 돌리고 검미를 치켜 올린 천준서가 남궁서희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 때문에 나랑 식사한 거. ······아닌가요?”
 남궁서희의 확신에 가까운 어투에 천준서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럼 이것도 아나?”
 “뭐요?”
 “그쪽은 금방 늙을 거야.”
 천준서의 말에 남궁서희가 의아해하자, 천준서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마음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이거든.”
 마치 남궁서희를 비웃는 듯한 투로 쏘아붙인 천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천준서는 속으로 한숨을 길게 뱉으며 중얼거렸다.
 ‘쉬긴 글렀군. 한잔해야겠어.’
 유지영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기분이 축 처졌다.
 일찍 자려해도 한참을 뒤척일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잔 마시고 훌훌 털어버린 뒤에 자리에 눕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반년 만에 돌아와서 기루라니. 아버지가 퍽도 좋아하시겠어.’
 ***
 기루의 객실 안.
 탁!
 단숨에 술을 입으로 털어 넣은 천준서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탄성을 뱉었다.
 “크!”
 하루 동안 쌓였던 정신적 피로함이 단숨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딱 하나만 없었다면.
 탁.
 “후아······.”
 “대체 왜 내가 너랑 술을 마셔야 하는 건데?”
 천준서가 산통이 다 깨졌다는 표정으로 묻자 남궁서희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천씨세가의 대표로 손님을 대접해준다고 생각하세요.”
 천준서는 남궁서희의 웃음을 보며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남들에겐 청순하기 짝이 없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천준서가 보기엔 능글맞은 웃음처럼 보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술잔을 비웠다.
 반년이 넘어서 마시는 술이라 그런 것일까?
 가슴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훅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천준서는 기분 좋은 알싸함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만큼, 오늘 다시 봤던 유지영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 나이이긴 했어도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었던 천준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 모두가 미움으로 바뀐 이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 그녀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아.”
 천준서가 연거푸 한 잔을 더 채우는데, 남궁서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둘이 어떤 사이예요?”
 천준서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남궁서희는 머리가 좋으니 자신이 그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괘씸했기 때문이다.
 남궁서희를 보며 한마디 하려던 천준서가 한숨을 쉬었다.
 하얀 얼굴에 붉은 홍조가 자리 잡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마시는 술은 결코 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적은 양도 아니고, 벌써 네 병이 넘게 마시고 있다.
 자신이야 환골탈태를 이루어 예전보다 취하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계속 마시는 것이지만, 그걸 옆에서 계속 한 잔씩 마셨으니, 주당이 아닌 이상은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내지 않는 이상은 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저건 술도 못 마시면서 왜 여기까지 와서.’
 천준서가 대답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자, 남궁서희도 자신의 술잔을 따라 비웠다.
 “휴.”
 남궁서희가 얼굴을 들이밀고 턱을 괴며 물었다.
 “대답 안 할 건가요?”
 천준서는 술잔을 내려놓고 남궁서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코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니 확실히 예쁘다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남궁서희는 술기운 때문인지 반쯤 졸린 표정이 되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서희와 눈이 마주친 천준서는 애써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너 취했냐?”
 “아뇨, 멀쩡한데요.”
 졸린 듯 작게 고개를 젓는 남궁서희.
 천준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남궁서희의 모습이 또래 여아의 모습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애늙은이 같지 않아서 보기 좋네.’
 힐끗힐끗 그녀를 보며 술을 마시던 천준서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지. 쟤가 술도 잘 못 마시는데 나를 따라와서 같이 술을 마실 애가 아니지. 취한 척하는 건가?’
 장난기가 든 천준서는 남궁서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자꾸 쳐다봐? 나한테 관심 있어?”
 “대답 먼저 해줘요.”
 남궁서희가 지지 않겠다는 듯 말하자, 천준서는 남궁서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천준서는 남궁서희의 얼굴과 고작 한 치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예쁜 것 같네.”
 “······.”
 졸린 듯 그저 멍하니 자신을 보는 남궁서희를 보며 천준서는 검미를 치켜 올렸다.
 ‘아직도 여유로우시다?’
 천준서는 손을 뻗어 남궁서희의 턱을 당겼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만한 거리까지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천준서는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당황한 남궁서희가 자신의 뺨을 때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준서의 생각과는 달리 남궁서희는 고개조차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천준서가 왼쪽 눈만 슬쩍 뜨자, 두 눈을 감고 있는 남궁서희가 보였다.
 이건 허락의 의미가 아닌가?
 ‘이게 뭐야······?’
 천준서의 표정이 곤란하게 변했다.
 마침표를 찍자니 찍고 나서가 걱정이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뒤로 물러서자니 기세에서 완전히 밀린 꼴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껄끄럽기 짝이 없는 남궁서희한테 말이다.
 ‘미치겠군.’
 천준서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남궁서희가 자신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취한 척한 거려니 생각하고 골탕을 먹이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자신이 남궁서희를 꼬시기 위해 자신이 마구 술을 먹인 것처럼 되지 않는가!
 어이없게도 당해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천준서가 막 고개를 내미려는 찰나.
 “음······.”
 남궁서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천준서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음냐······.”
 남궁서희가 스르르 넘어가더니 새근거리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
 천준서는 어이가 없어서 남궁서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 진짜 잠든 거였어?’
 천준서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열심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상대는 이미 훨씬 전에 줄을 놓아버린 꼴 아닌가.
 “하아, 좋다 말았네.”
 천준서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아가씨를 만나버린 것 같았다.
 
 
 4
 
 
 천준서는 잠든 남궁서희를 업은 채 세가로 돌아왔다.
 원래 술에 잔뜩 취해서 쓰러져 잘 생각이었지만, 남궁서희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기분이 묘하군.’
 자신에게 업힌 채로 색색거리며 자는 남궁서희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입맞춤을 하려다가 남궁서희의 잠꼬대가 들렸을 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아마 세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지금까지 눈엣가시로만 느껴졌던 남궁서희가 조금은 어여쁘게 보인다는 것이다.
 남궁서희가 깨지 않게 천천히 걸어 별채 앞까지 도착한 천준서는 별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궁세가의 부단주와 맞닥뜨렸다.
 부단주는 화가 난 표정으로 으르릉거리며 천준서를 보며 말했다.
 “대체 영애께 무슨 짓을 한 거냐?”
 “뭘 하긴. 같이 술 한잔한 걸 갖고.”
 천준서가 너스레를 떨자, 부단주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감히! 네까짓 게! 너 같은 놈이 영애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천준서의 이마를 검지로 밀며 나지막하게 말하는 부단주.
 천준서는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술 한잔 마시는데 꼭 어울려야 마실 수 있는 건가?”
 도발적으로 답하는 천준서의 모습을 본 부단주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 데, 혹시 너 같은 놈이 감히 대남궁세가와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어찌 대남궁세가와 비교가 되겠어?”
 “그럼 네가 지금 하는 짓은 뭐지? 감히 지금 네가 대남궁세가의 부단주인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부단주가 이빨을 드러내며 묻자, 천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남궁세가가 무서운 거지 네가 무서운 것이 아냐. 남궁서희가 네가 이러는 것을 알고 있을지 그게 궁금하군. 아니면 남궁세가 무인들은 다 너처럼 행동하나?”
 “건방진! 네가 감히 영애로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부단주가 주먹을 쥐며 반 발자국 앞으로 나오자, 천준서가 싸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분명 남궁서희에게 네가 천씨세가의 가주님께 했었던 무례를 사과받았다. 만약 네가 또 천씨세가에게 무례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천씨세가의 법대로 처리해도 된단 거겠지?”
 “천씨세가가 감히 나를 처리한다는 것이냐?”
 부단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하자, 천준서가 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천씨세가? 착각이 심하구나? 네까짓 놈이 감히 천씨세가를 상대하겠다고?”
 그와 동시에 천준서의 몸에서 거센 기세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기운이었지만, 그 기운은 끝도 없이 밀려 나와 부단주를 압박했다.
 고작 숨을 두 번 쉬는 사이에, 부단주의 몸은 식은땀 범벅이 되어 잔뜩 젖었다.
 “네 목을 베는 건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을 따는 것보다 쉬운 일이야. 알아? 내가 참고 있는 건 네가 예뻐서가 아니야. 남궁세가가 껄끄러워서 그러는 거지.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자꾸 까불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천준서가 귀에 속삭이며 말하는 동안, 부단주는 손끝 하나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미, 미친······!’
 도대체 천준서라는 놈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이 기세만으로 제압을 한다는 것은 들어 보았지만, 그것을 직접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겨우 약관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에게!
 남궁세가의 부단주인 자신이 제압된 것이다.
 이런 조그마한 세가에, 그것도 가주의 무공이 일류인데 어떻게 둘째의 무공이 자신을 단번에 제압할 무공이란 말인가!
 “제발······ 그, 그만!”
 부단주는 서서히 막혀오는 숨에 겨우 입을 열어 소리쳤다.
 천준서는 싸늘한 눈으로 부단주를 보다가 기운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서로 웃을 때가 가장 좋은 거야. 그쪽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우리는 그쪽 체면 좀 세워주고. 알았지?”
 천준서가 웃으며 묻자 땅바닥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던 부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단주는 천준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그가 깨달은 것은, 천준서라는 놈이 가공할 힘을 갖고 있다는 것과, 자신을 언제든지 파리 잡듯 죽일 수 있는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단주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천준서의 말이 들려왔다.
 “고작 천씨세가의 어린 애한테 남궁세가의 부단주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소문이 들면 어떻겠어?”
 “······!”
 부단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소문이 무림에 돈다면, 자신의 직위가 해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것은 자신의 직위 문제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부단주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기라도 한다는 듯, 천준서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긴장 풀어. 우리 둘 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자고. 알았지?”
 “알······ 겠다.”
 부단주는 천준서와 눈이 마주치자 눈치를 보며 답했다.
 “좋아. 그럼 난 영애님을 숙소에 모시러 가지. 수고하라고.”
 천준서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는 남궁서희를 고쳐 업으며 그를 지나쳤다.
 부단주는 지나치는 천준서의 등을 바라보며 파르르 떨리는 왼손을 꾹 잡았다.
 당장 자신의 명예와 세가의 명예가 지켜지는 것은 좋았지만, 저런 괴물이 천씨세가라는 이름으로 숨어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해도 되는지 걱정스러웠다.
 고작 약관 정도로 보이는 놈의 무위가 자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니!
 몸을 부르르 떨던 부단주는 두려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애님께는 말씀드려야겠어······ 어찌 저런 놈이······.’
 
 
 5
 
 
 아침이 밝아오자 햇살이 창 안으로 비췄다.
 남궁서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자신이 천씨세가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궁서희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어제 천준서와 술을 마시면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물고 이불을 얼굴까지 잡아당긴 남궁서희가 긴 숨을 내뱉었다.
 “내가 왜 술을 그렇게 마신 거지.”
 남궁서희는 뒤늦게 자신이 술을 마신 이유를 깨달았다.
 겉보기엔 청순하고 순진할 것 같은 그녀지만, 그녀는 다른 청년들만큼이나 강한 승부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가 자라며 남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무공을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쉽게 남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것.
 그녀가 술을 마신 이유도 이런 시답잖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천준서는 묘하게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사람이었다. 그것 외에도 그녀는 천준서에게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천준서는 남들에게 얕잡아 보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공의 수위도 뛰어난 것 같았고, 얼굴도 누가 보더라도 준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전혀 달랐다.
 숙주현의 망나니. 골칫덩어리, 호색한.
 무엇 하나를 보더라도 좋은 소문은 아니다.
 게다가 그녀가 살피기에 천씨세가 내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눈길은 찾기 힘들었다.
 그 말인즉슨 스스로 남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일까? 천씨세가라면 이 근방에서는 꽤나 좋은 집안일 텐데.’
 아무리 천씨세가가 남궁세가와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세가라고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중소규모의 세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숨기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가문의 사람들에게까지 말이다.
 남궁서희는 그 이유가 듣고 싶었었다.
 그래서 어제 불청객 취급을 받으면서 그를 기방까지 따라갔던 것이다.
 결국 이유는 듣지 못하고, 묘한 일만 일어났지만 말이다.
 술기운이 다 해소되지 않은 것인지 얼굴이 뜨뜻해지는 것을 느낀 남궁서희가 손등으로 볼을 매만질 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진 단주입니다. 부단주와 함께 왔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남궁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이 남궁서희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남궁서희가 웃으며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남궁서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아침부터요? 말씀해보세요.”
 진 단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궁서희를 향해 말했다.
 “실례되는 물음일 수 있으나······ 혹시 천 공자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이요?”
 남궁서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되묻자, 진 단주가 말을 덧붙였다.
 “남녀 간의 일을 말하는 겁니다.”
 진 단주의 말에 남궁서희가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남궁서희의 말에 진 단주는 믿음이 안 간다는 듯 말했다.
 “가주님께서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혹시나 모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요.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상대는 명문 세가도 아니고 이름 없는 세가입니다. 생각을 좀 깊이······.”
 “그만.”
 진 단주는 손을 치켜들며 말을 자르는 남궁서희의 행동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남궁서희는 진 단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라고 해도 결정은 제가 합니다. 게다가 이 일에 명문 세가가 왜 들어가는지 모르겠군요.”
 강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하는 남궁서희의 말에 진 단주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말을 하려고 이 아침부터 찾아온 건가요?”
 사뭇 기분이 상한 듯 보이는 남궁서희의 태도에 진 단주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부단주가 조심스레 입을 땠다.
 “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천 소협에 대한 겁니다. 이 공자 말입니다.”
 쭈뼛거리며 말하는 부단주의 태도에 한숨을 쉰 남궁서희가 물었다.
 “진 단주와 같은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부단주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남궁서희는 찔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기방에서 있었던 일을 부단주가 본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이 그 이야기는 아닌 듯, 부단주는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제가 별채 앞에서 영애님을 기다렸습니다. 진 단주가 제게 영애님이 천 소협과 함께 어디론가 갔다고 해서요. 천 소협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남궁서희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부단주.
 아니나 다를까.
 경고를 하려고 했다는 대목에서 아미를 찡그리는 남궁서희의 모습에 부단주가 재빨리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영애님을 출신 성분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서······.”
 “계속하세요.”
 남궁서희는 어렵게 자신의 충성을 설명하려는 부단주의 말을 자르며 이야기했다.
 “예. 그래서······ 기다리다 보니 영애님을 업고 천 소협이 별채로 오더군요. 영애님께서는 술에 취한 듯 보이고······.”
 남궁서희는 슬쩍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자신이 잘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천 소협에게 다가갔습니다. 안 그래도 영애님께서 늦으셔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을 한 터라서 화가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화가 나서······.”
 “그래서요?”
 남궁서희가 묻자, 부단주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강한 어조로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천 소협은 제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이한 표현에 남궁서희와 진 단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무슨 말이지요?”
 “남궁세가라는 단어에도, 그리고 제 직위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향해 말하더군요. 더 이상 천씨세가 안에서 도를 넘지 말라고.”
 부단주의 말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세상에, 같은 곳에 적을 두고 있는 중소문파 중에 남궁세가 부단주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그것도 고작 이 공자라는 어린 청년이 말이다.
 오대세가가 가진 이름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중원 어디를 가도 오대세가라는 이름을 쉽게 볼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히려 경고를 하다니!
 남궁서희는 뒷일이 뻔히 보였다.
 천준서는 술을 많이 마셨었고, 젊은 혈기에 그렇게 말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부단주는 성격이 날카로운 사람이다.
 부단주가 천준서를 가만히 안 뒀을 것이 분명했다.
 남궁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 소협을 향해 무공을 썼나요?”
 남궁세가에서 천씨세가에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째 아들을 건드렸다면 이것은 대단한 실례였기 때문이다.
 진 단주도 눈을 굴리며 부단주의 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팼는지, 얼마나 다쳤는지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이 달라지니까.
 하지만 부단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쓰려고 했습니다만······ 못 썼습니다.”
 “참았다는 말인가요?”
 남궁서희는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그런 말을 하려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인가?
 부단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제압당했다는 말입니다. ······제가요.”
 “뭐라고?”
 진 단주는 부단주를 보며 소리쳤다.
 남궁세가의 부단주나 되는 사람이 약관의 청년에게, 그것도 이름 없는 세가의 둘째 공자에게 제압을 당했다고?
 남궁서희도 의외의 전개에 입을 살짝 열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혈도를 점혈당한 것도 아니고, 팔이나 다리를 꺾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기세만으로 저를 못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
 남궁서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진 단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진 단주 역시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부단주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적어도 그는 남궁세가의 장로급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애님은 그를 좋게 생각하고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심이 갑니다.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런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다 천덕꾸러기로 봅니다. 천씨세가 사람들이 그를 보는 표정을 봤습니까? 그는 뭔가 숨기고 있습니다.”
 부단주의 말을 듣던 남궁서희은 이내 본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저도 그 점에 대해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지금 스스로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내가 천 소협과 있었던 이유가 연유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진 단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물었다.
 “천 공자에 대해서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습니까?”
 그 물음에 남궁서희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쉽게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더라고요.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악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네요.”
 
 
 10장 권모술수 上
 
 
 1
 
 
 황용수와 엽명은 날이 저물고 나서 천준서의 거처로 갔다.
 천준서가 사라지고 반년이 지나서, 그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천준서가 돌아온 이상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몸 안에 고독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이상 그들은 천준서를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황용수는 천준서에게 본질적으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 두려움은 이 공자가 돌아왔다는 말과 함께 단숨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 들어오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천준서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천준서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천준서는 이미 두 사람이 자신의 거처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기를 하며 기감을 끌어올린 천준서였기에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왔냐?”
 눈을 감은 채로 묻는 천준서의 목소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그제야 천준서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헉!’
 황용수와 엽명은 천준서가 눈을 뜸과 동시에 번갯불이 피어오르는 듯한 광경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고, 괴물 같은 사람이다. 그 사이에 무공이 더 고강해진 모양이로구나.’
 “하하하! 바, 반년 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황용수는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천준서는 대수롭지 않게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할 일이 좀 있었다.”
 “그사이에 무공이 일취월장하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뭔가 많이 깨달으신 것 같군요.”
 엽명이 부럽다는 듯 묻자, 천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예전보다 늘기는 했지. 한 다섯 배 정도 더 세진 것 같아.”
 천준서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동시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 사이에 다섯 배면 그게 인간이냐?’
 ‘에이 뻥이 심하시구만.’
 두 사람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준서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있다지?”
 그 말에 황용수가 뜬금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강남 쪽은 벌써부터 흉년이 되진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흉년? 유례없는 대흉년이 올 거야. 메뚜기는 시작에 불과하지.”
 “예?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엽명이 신기하다는 듯 묻자, 천준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건 일단 미뤄두고, 황용수.”
 “예?”
 “요즘 장가방의 동태는 어떻지?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황용수는 입을 살짝 벌렸다.
 반년 동안 천씨세가의 무인들이 찾아다녔지만, 천준서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어디서 튀어나온 천준서가 어찌 이렇게 꿰뚫고 있단 말인가!
 대체 천준서라는 사람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예, 생각하신 대로 요즘 동태가 이상합니다. 아직 무언가 명령이 내려오는 것은 없지만······ 슬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몇 달 안에 움직이겠네. 지금 당장은 남궁세가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겠지.”
 “아무래도 남궁세가가 갑자기 천씨세가에 묵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보이더군요. 혹시 남궁세가와의 중대한 일이 결정되면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너무 뻔한데? 뭐 어쨌든, 게네들은 조심성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삼대 빈객과 비교되는 고수 한 명이 더 들어왔습니다.”
 황용수의 말에 천준서가 미간을 좁혔다.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고?”
 “예, 한 명입니다.”
 천준서는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럴 리가 없어. 오대 빈객이 아니라 사대 빈객이 되는 거잖아? 애초에 천씨세가를 공격한 것들은 세 명이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의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장가방엔 중소문파의 장문인과 비등한 능력을 가진 고수 다섯 명이 빈객으로 있어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네 명이라니?
 천준서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뀐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도 바뀔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내가 바꾼 미래도 있지만······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십 할 모두 확신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천준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안개 속에 있는 듯 모호했다.
 ‘그래, 내가 이미 미래를 바꾸고 있는데 다른 것이라고 바뀌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네.’
 천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엽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가주님 정도의 고수가 네 명이나 됩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천준서는 정신을 차리고 엽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대 빈객을 말하는 거야?”
 “네. 두 명 정도는 여기 수천단주님과 가주님이 한 명씩 맡는다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이 공자님께서 맡는다고 쳐도······.”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말하는 엽명을 보던 천준서가 웃었다.
 “왜 웃으세요?”
 “네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니 안 웃길 수가 없다.”
 천준서가 미련하다는 듯 말하자, 엽명이 쀼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배를 갈아탔는데 그 배가 가라앉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잖아. 다시 천씨세가 쪽으로 돌아온 것이 옳은 선택인지 불안하냐?”
 엽명은 천준서가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끄응. 이번 기회에 돗자리 한번 깔아보시죠?”
 “사대 빈객, 그놈들은 걱정 할 필요가 없어. 네 명 모두가 덤빈다고 해도 날 이길 순 없어.”
 천준서가 담담하게 말하자, 황용수와 엽명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준서는 이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진짜 상대는 그놈들의 뒤에 있는 놈이다.”
 “뒤라니요?”
 황용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지만, 천준서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 속에 자리 잡은 흑의 중년인을 떠올렸다.
 “최소한 절정고수의 경지라······ 이번에는 내가 죽여주마. 그리고 그놈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야겠어.”
 중얼거리는 천준서를 보던 두 사람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천준서의 몸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강력한 기세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
 
 
 천준서는 형 천준익과 함께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묵고 있는 별채로 향했다.
 사흘째인 오늘 천씨세가를 떠나 남궁세가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돌아가는 날이니, 두 명이 세가의 문 앞까지는 배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는 천용철이 직접 나오려고 했으나, 천준서의 끈질긴 설득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무리 상대가 남궁세가라고 하지만, 천씨세가의 가주가 남궁세가의 영애가 떠나는데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천용철은 그래도 남궁세가인데 어찌 홀대를 하겠냐고 물었지만, 천준서는 계속 자신의 의견을 강조했다.
 천씨세가의 가주가 남궁세가의 일개 영애에게 도가 지나치게 대접하는 모습은 오히려 천씨세가의 이름을 낮추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용철은 그런 천준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신 소가주인 천준익과 둘째 천준서로 하여금 배웅하게 한 것이다.
 별채로 향하니 이미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별채에서 나오고 있었다.
 천준서는 앞서서 걸어오는 남궁서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분위기가 매우 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끙. 곤란한데.’
 곤욕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세가의 단주와 부단주를 흘낏 살핀 천준서가 딴청을 부릴 때, 다행히 천준익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편안하게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준익의 말에 남궁서희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곳에 있는 동안 집처럼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천준익은 남궁서희의 말을 들곤 흡족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내 천준익은 앞장을 서서 세가의 정문으로 안내하며 의례적인 것들을 물어보고 답했다.
 천준서는 형이 남궁서희와 말을 나누는 동안 조용히 걷기만 했다.
 소가주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형이 말하는 자리이니, 천준서가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천준익이 천준서를 향해 말했다.
 “준서야, 저번에 보니까 남궁소저랑 친분이 있는 것 같던데······ 어째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그 말에 남궁서희와 자연스레 눈이 마주친 천준서가 대충 얼버무렸다.
 “형이 말을 나누고 있는 자리이니까.”
 그 말에 남궁서희는 천준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참. 천 소협, 기회가 되면 우리 남궁세가에 한번 들리시는 것이 어떤지요?”
 “남궁세가에? 나를?”
 천준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반말을 하는 천준서를 뒤에서 지켜보던 진 단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묵묵하게 걷기만 했다.
 남궁서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나서는 것은 실례였기 때문이다.
 “네. 혹시 싫은 건가요?”
 “별로 남궁세가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천준서는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남궁세가에 가서 얻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궁서희 하나만으로도 계속 곤란했었는데, 남궁세가 안에서 어떠한 일이 있을지 몰랐다.
 거긴 천씨세가 안이 아니기 때문에 더 곤란한 일이 많았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천준서의 말을 들은 진 단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은 남궁세가에 별볼 것이 없다는 것이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내가 남궁세가에 가서 뭘 하겠습니까?”
 진 단주를 보며 말을 한 천준서가 남궁서희를 보자, 그녀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왜요? 뭐가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나요?”
 남궁서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자, 천준서는 검미를 치켜 올렸다.
 잠시나마 예쁘게 보였었던 남궁서희가 다시 평소의 그 곤욕스러운 눈엣가시로 돌아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릴 건 없고, 원래 멀리 나다니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하하하.”
 천준서의 말에 남궁서희는 곧바로 물었다.
 “어머, 그런 분이 육 개월 동안이나 여행을 하셨다구요!”
 “······.”
 남궁서희의 물음에 천준서는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천준익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준서가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속으로는 가고 싶을 겁니다.”
 천준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야.’
 하지만 천준익은 천준서의 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천 공자는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는데요?”
 “아닙니다. 안휘성에서 남궁세가를 구경시켜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준서도 쑥스러워서 그런 걸 겁니다.”
 천준서는 형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신호를 보냈다.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천준익은 천준서의 표정을 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소저가 안내해 주실 모양이구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린다면 아버지도 허락하실 거야.”
 천준서는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형은 정말 눈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싫다는 티를 팍팍 내서 주변에서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모를까.
 천준서가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걷는 사이에 천씨세가의 정문에 도달했다.
 천준익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도 이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이번에도 신세를 졌는데, 다음번에 신세를 질 때는 선물이라도 가져와야 할까 봐요.”
 남궁서희가 대답을 하자, 천준서는 두 명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렇게 의례적인 말을 잘할까. 책에 나올 것 같은 인사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천준익이 웃으며 포권을 하자, 남궁서희는 시선을 돌려 천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 소협. 이만 가볼게요. 아마 남궁세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린 다시 만날 것 같군요.”
 천준서는 남궁서희의 말을 듣고 불안해졌다.
 대체 어디에서 다시 만날 거라는 건지 짚이는 곳도 없었다.
 “기왕이면 남궁세가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요. 온다면 그때 술은 제가 사죠.”
 웃으며 말하는 남궁서희의 인사에 천준서도 대충 손을 들며 말했다.
 “생각은 해보지. 잘 가라고.”
 역시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남궁서희와 단주가 세가의 정문으로 나가자, 그 뒤를 이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천씨세가를 빠져나갔다.
 천준서는 그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남궁세가는 걷는 것도 다르구만.”
 순식간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천준서는 형을 보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그때, 천준익이 매우 위험한 표정으로 천준서를 불렀다.
 “준서야.”
 “왜?”
 대답을 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양반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천준익은 묘한 표정으로 천준서를 보며 말했다.
 “나는 저 남궁 소저가 참 착해 보인다.”
 “그래서?”
 천준서가 묻자, 천준익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보니까 둘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더구나. 게다가 남궁 소저도 네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고.”
 “뭐?”
 얼빠진 표정이 된 천준서가 되묻자, 천준익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번 기회에 남궁세가도 갔다 오고, 남궁 소저와 한번 잘 해보는 게 어떻겠어?”
 천준서는 기도 안 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남궁서희와 잘 어울린다고?
 이건 악담이 확실했다.
 “말도 안 돼. 안 가.”
 “준서야, 그러지 말고······.”
 천준익이 설득을 하려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천준서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싫어, 그럴 거야.”
 어느새 저만치 도망친 천준서를 바라본 천준익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녀석, 좋으면서 부끄러워하긴. 아버지께 말씀드려봐야겠군.”
 천준서가 들었다면 팔짝 뛸 이야기였다.
 
 
 3
 
 
 남궁세가가의 무인들이 천씨세가를 떠난 지 보름 후.
 천준서는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신뢰했던 천승겸은 적지 않은 돈을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령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갖고 있는 모든 돈으로 쌀을 산 것은 물론이고, 혹시나 쌀이 상하지 않을까 우려해 시키지도 않은 관리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어. 이미 쌀 가격이 예전의 세네 배는 더 뛴 상황이고······ 쌀값이 금값이군.’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지금 쌀을 되판다면 분명히 큰돈을 만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세가가 몇십 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값싸게 사들인 쌀을 비싸게 판다면 천씨세가는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리라.
 상업도 아니고 무예를 갈고닦는 세가가 먹을 것을 갖고 돈 장난을 하니 말이다.
 쌀은 중원 어느 곳에서나 소비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 용도도 무궁무진하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흉년이 찾아와 쌀의 몸값이 하늘로 치솟은 지금은 더더욱.
 평소엔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럼 이건 이대로 놔두고······.’
 천준서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두 번째 고민은 조금 더 어려운 것이다.
 천씨세가의 현재 위치였다.
 숙주현에서 그나마 영향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 영향력조차 장가방과 함께 나누고 있다. 게다가 숙주현은 안휘성에서 그리 영향력 있는 위치가 아니다.
 천준서는 세가 안에서 세가를 함께 부흥시키기보단 천하를 돌아보고 싶었다.
 남아로서 이런 꿈을 갖고 무림의 세계로 뛰어들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천준서가 편하게 나돌아다니기엔 천씨세가라는 보금자리가 너무 허술했다.
 형편없는 무공실력을 갖고 있던 예전엔 천씨세가라는 울타리가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지만, 지금 천준서가 보기엔 너무도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약해 보였다.
 ‘천씨세가가 크기 위해선 단발적으로 끝나면 안 되는 것이 필요해. 계속 후대에 이어지며 더욱 천씨세가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런 것엔 몇 가지가 있을 순 있겠지만, 무가를 가장 강하게 만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공!’
 천씨세가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공이었다.
 천준서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천씨세가의 무공은 이류 언저리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무공으로 일류를 조금 넘어서는 천용철이 대단한 것이리라.
 문제는 일류 이상의 무공들은 그 값을 쉽게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명문과 일반문파의 격은 날이 갈수록 격차가 심해지는 것이다.
 천씨세가에는 일류나 절정 무공을 구입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설령 그럴 만한 목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인 천용철이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고리타분하시니까. 그만큼 전통성도 중요시하시겠지······.’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만들어야겠어.”
 무공을 만드는 것은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설명 원래 있는 무공들을 짜깁기해서 만들어내는 무공일지라도, 일대 종사의 위치에는 서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 무공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천준서의 능력이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천준서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확연하게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해봐야 해. 일단 날을 잡아서 처리해야겠어.’
 천준서는 확실하게 뛰어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무공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죽기 살기로 무공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정리를 하자 대충 계획이 잡히는 것 같았다.
 천준서의 기억에 있는 나머지 일들이 남았지만, 그것들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다.
 이미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다른 계획들까지 지금 정리할 필요는 없다.
 진행되는 사건에 따라서 대응하면 될 것이다.
 천준서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문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공자,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천준서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지금까지 계속 매만지고 있던 찻잔을 비운 천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침없는 보폭으로 거처를 나서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천준서의 뒤를 따랐다.
 수천단주 황용수.
 지천잔주 천승겸.
 수천부단주 엽명.
 천준서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는 모습을 본 세가의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술 냄새가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 불안한 표정도 아니었다.
 숙주현의 개망나니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는 오만하리만치 들고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가의 무력단체를 대표하는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천준서의 충실한 신하인 마냥,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천씨세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은 더욱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오래 기다렸어. 배신자들, 이제 천씨세가의 피를 갚아야 할 시간이야. 너희들의 피로 천씨세가의 길을 만들겠다.’
 내원을 향해 걷는 천준서의 눈이 검게 번뜩였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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