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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E-1120 1권 (1)

2017.04.26 조회 2,044 추천 30


 # Prologue
 
 
 
 “자네······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하겠습니다.”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아마 살아오기 힘들 거라네. 아무리 자네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채헌필 대령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대한민국 특임대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요원이었다.
 “살아올 겁니다. 저 아시잖습니까.”
 “물론 알지······. 자네가 바퀴벌레보다 질긴 건 내가 잘 아네만······.”
 사내에겐 강철준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E1120이라는 특이한 군번으로만 주민등록증에 등재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다섯 살도 되기 전부터 국가기관에서 교육받고 키워진 비밀 요원이었다. 그의 출신 성분에 관한 모든 자료는 1급비밀이었으며 경찰망으로도 그의 신원 조회는 불가능했다.
 “어차피 누군가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제가 가야 성공률이 가장 높을 거란 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흐으음······.”
 채헌필 대령은 씁쓸하게 웃었다.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토대로 나온 결과에 따르면 이번 작전의 성공률은 반반 정도였다. 그러나 E1120을 투입한다면 7할에서 8할 이상은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작전의 성공률이었지 요원의 생존률은 아니었다. 작전 요원의 무사 귀환은 작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전을 성공시키고 요원이 무사 귀환할 확률은 1할은커녕 1푼도 되지 않았다.
 “자네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특임대 요원일세. 자네를 잃기 싫다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가 국가 10년 예산에 맞먹는 이익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채헌필 대령은 피식 웃었다.
 “후후······ 그런데 자네 정말 국익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는 각오인 건가?”
 “그렇습니다.”
 “웃기지 마, 인마. 내가 모를 줄 알아?”
 “······?”
 “강철준 소령, 그렇게 전역하고 싶었어?”
 미동 하나 없던 사내의 얼굴에 살짝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다 알아, 인마. 목숨 걸고라도 그렇게 전역하고 싶었냐고.”
 이번 작전은 단 1인이 완수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그 1인에게 떨어지는 보상은 엄청났다. 자그마치 100억의 포상금과 함께 민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이는 충분히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원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무리 좋은 포상이 있더라도 목숨을 잃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전······ 주민등록증을 가져 보고 싶습니다. 다른 또래들처럼 학교도 다녀 보고 싶고 연애도 해 보고 싶습니다.”
 “인마, 니가 올해로 스물다섯인데 무슨 학교를 다녀.”
 “······.”
 채헌필 대령은 쓰게 웃었다.
 “자네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살아 돌아오든 그렇지 못하든, 나는 훌륭한 부하 하나를 잃겠구먼.”
 “죄송합니다, 대령님. 하지만 이 작전을 완벽히 수행하여 국가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제 애국심 또한 진심입니다. 믿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포상이 없었더라도 마지막까지 지원자가 없었다면 제가 지원했을 겁니다.”
 채헌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 자네 고집을 어떻게 꺾겠는가? 뜻대로 하시게. 상부에는 바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대령님!”
 채헌필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령 강, 철, 준!”
 두 사내는 손을 맞잡았다.
 “제발······ 살아 돌아오게. 돌아와서 새 삶을 멋지게 살아 봐야 될 거 아냐!”
 철준의 두 눈이 조금 촉촉해졌다.
 “충성! 대령님, 꼭 임무 완수하고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 불가능한 임무
 
 
 
 “이쯤인가······.”
 어두침침한 빌딩 복도. 한 사내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벽면에 붙어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나이프를 꺼내어 들더니 빌딩 유리창에 대고는 빠르게 원을 그렸다.
 스르릉.
 놀랍게도 유리창은 마치 기계로 절단한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그는 잘려 나간 유리를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얼핏 보아도 20~30층은 되어 보이는 높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날리는 사내.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느새 창의 난간과 그의 등이 얇은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턱.
 10여 층 정도를 하강한 후 가벼운 몸놀림으로 벽에 붙은 그는 천천히 창가로 움직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아까 사용했던 나이프를 다시 꺼냈다.
 샤르릉.
 듣기 거북할 정도로 예리한 마찰음과 함께 여지없이 창문은 잘려 나갔고, 사내는 건물 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분명 1708호라고 했는데······.”
 중얼거린 사내는 좌측 사무실의 호수를 보았다.
 
 
 짐작건대 1708호는 복도의 반대쪽 끝에 있을 듯싶었다.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움직이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복도의 중간 지점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는 듯,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젠장, 꼬였군.”
 판단이 끝나자 사내는 열리려는 문을 향해 재빠르게 질주했다. 그는 달리면서 등에 교차되어 있던 두 자루의 중단도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달리는 속력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열리는 문을 지나갔다.
 털썩.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방금 문을 열고 나오던 사내가 숨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어느새 단도를 갈무리해 검집에 꽂아 넣고 벽면에 붙어 있었다.
 “걸리지 않은 건가?”
 위이이잉.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들켰군.”
 사내, 강철준은 빠르게 달렸다. 어차피 자신의 잠입이 들켰다면,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철컹!
 복도 끝으로 달려간 그는 차단기를 전부 내리고 망치로 부숴 버렸다. 이제 17층의 전기는 적어도 1시간 정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이잉.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원이 계단을 통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철준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러시아 노인네 둘만 조지면 되는 거야. 어려울 거 없다고.”
 인원이 최대한 많이 도착하기 전에 1708호를 뚫어야 했다.
 품속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폭약을 꺼낸 그는 1708호의 문짝에 그것을 부착하고 몸을 날렸다.
 퍼어엉!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철문이 터져 나갔고, 그 주변 또한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변의 콘크리트가 전부 가루가 되어 바닥과 천장의 철골구조까지 드러난 것이었다. 시간만 많았다면 문을 따고 들어갔을 테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침입자다! 각하를 보호하라!”
 문 안쪽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입구가 폭파되자 그쪽에 침입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경호원들이 총을 난사한 탓이었다.
 “어둠은 언제나 내 편이지.”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린 철준은 총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구로 진입했다.
 탕 타앙!
 간결한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 둘이 고꾸라졌다. 철준은 한 손에는 예리한 중단도를,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놈을 잡아라! 한 놈인 것 같다!”
 하지만 철준은 피식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러한 어둠과 혼란 속에서는 침착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스르릉!
 철준의 도신이 예기를 뿜어낼 때마다 한 사람씩 고꾸라졌다. 그는 마치 어둠 속을 훤한 대낮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하였다.
 타앙!
 간결한 총성과 함께, 러시아의 대부호이자 로커스 마피아단의 보스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츠의 거구가 쓰러졌다.
 “네······ 네놈은 누구······!”
 하지만 철준은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였으며, 그의 말을 들어 줄 시간 또한 당연히 없었다. 나머지 한 사람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빠각!
 철준의 발길질에 이바노비츠의 목은 기역자로 꺾였으며, 이바노비츠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방 안의 탁자 위에 있던 석판을 창문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째재재쟁!
 철준은 품속에 있던 폭약을 입구를 향해 던진 후 깨진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강철로 된 와이어를 창틀에 던졌다.
 철컥!
 창밖으로 몸을 날린 철준의 신형이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11, 10, 9, 8, 7······.’
 그는 층수를 하나씩 세고 있었다. 한 번에 정확히 4층에 도달해야 했다. 솔직히 17층의 이바노비츠를 죽이는 것까지는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목표인 러시아 전직 의원,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를 사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17층에서 난리가 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피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는 12층에 묵었다. 내가 잠입한 것이 들킨 시각이 03시 52분. 현재 시각이 03시 59분이니까······ 빠듯할 수도 있겠군.’
 보통 특무대 요원들이 비상시에 자다가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출동 준비를 완료하는 데 3분 남짓 걸린다. 배에 기름기 가득한 노인네라 하더라도 생명이 걸린 일에 대충 입고 대피했을 때 5분 정도면 엘리베이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째재쟁!
 철준은 4층에 도달함과 동시에 낙하하는 힘을 이용하여 유리창을 깨고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막탄을 터뜨렸다.
 “침입자다! 죽여라!”
 어두웠던 17층과는 달리 4층의 불은 전부 켜져 있었다. 그의 위치가 쉽게 노출될 수도 있다.
 타앙 타앙!
 철준은 일단 눈에 보이는 조명이란 조명에 총질을 하면서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는 침착하게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는 층수를 확인했다.
 5.
 그와 엘리베이터 사이의 거리는 30여 미터. 그의 예상이 맞다면 분명 저기에는 드미트리 의원이 타고 있을 것이다.
 “쓰벌!”
 그의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그가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아도 1~2초 안에 30미터를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품속에서 폭약을 꺼내 엘리베이터를 향해 냅다 던졌다.
 그리고 그 또한 그 방향을 향해 계속 달렸다. 원래대로라면 폭약이 터질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지만, 그에게는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4······ 3······.
 엘리베이터가 4층을 지나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약이 터졌다.
 콰아아앙!
 “젠장! 1초만 빨랐어도!”
 폭발과 함께 수많은 파편들이 그의 몸을 덮쳐 여기저기서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폭발이 조금 늦는 바람에 바로 엘리베이터를 덮칠 수는 없었지만 아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철준은 엘리베이터 와이어를 향해 몸을 날려 매달렸다. 그리고 품속에서 커다란 절단기를 꺼냈다.
 ‘잘려라! 제발!’
 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기 전에 와이어 한쪽을 잘라 낸다면, 엘리베이터는 곧장 지하 5층까지 추락한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철컹!
 “됐다!”
 한쪽 와이어가 잘려 나감과 동시에 1층에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리기 직전,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준은 한쪽 와이어를 붙잡고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따라 내려갔다.
 촤르르륵.
 철준은 엘리베이터와 가까워지자 엘리베이터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5층 정도의 높이를 낙하했으니 아마 생존자는 없을 터였지만, 혹시 몰랐기 때문이다.
 덜컹.
 엘리베이터의 천장부를 연 철준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에는 한 명의 노인과 셋 정도의 장정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후, 이로써 일단 미션 클리어.”
 타앙!
 철준은 확인 사살까지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이제 살아 나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면 돌파로 빠져나가는 것은 어림도 없다. 이미 수백 이상의 병력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겠지.’
 철준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하수도로 나가 볼까? 아니지, 이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어.’
 짧게 고민을 마친 철준은 가방 속에서 작은 쇠뇌같이 생긴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허공으로 조준했다.
 촤라라락!
 어둠 속에서 발사된 쇠뇌는 끝없이 허공으로 솟아 올라가는 듯하더니 작은 쇳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박혔다. 그리고 쇠뇌에는 얇은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었다.
 철준이 버튼을 누르자 와이어와 연결된 손잡이는 마치 청소기 전선이 빨려 들어가듯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철준을 끌어당겼다.
 한참을 와이어에 끌려 올라갔을까. 철준의 시야에 엘리베이터실이 보였다. 옥상에 가까워진 것이다.
 ‘옥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해. 어쩌면 헬기도 떴을지 모르지.’
 그는 꼭대기 층인 35층보다 2층 아래인 33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 문에 쇠뇌를 쑤셔 박고 천천히 열었다.
 끼기긱.
 실내는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사이렌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철준의 예상대로 그를 잡기 위해 전부 지하로 내려간 상황이라 상층부는 조용했다.
 ‘음?’
 그때 철준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타앙!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과 함께 철준의 왼쪽 어깻죽지에 탄환이 틀어박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심장이 관통되었을 것이다.
 “크윽.”
 짧은 신음성을 토해 낸 철준은 기둥 뒤로 몸을 숨긴 후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젠장, 방심했군. 그래도 놈은 하나인 것 같으니 아직 승산은 있어.’
 상대는 아마 철준이 기둥 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총을 겨누고 있을 것이다. 철준은 기둥 뒤에 있던 검정색 탁자를 발로 밀쳤다.
 그 순간 역시나 총성이 울려 퍼졌고, 철준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권총을 난사했다.
 탕탕탕.
 놀랍게도 세 발 중 두 발이 상대의 머리에 적중했고, 놈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놀라운 사격 솜씨였다.
 철준은 일단 안도했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방금 전에 죽인 놈 같은 녀석들이 또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후우······.”
 게다가 그의 상태 또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까 전 폭발로 인해 전신에 파편이 박혀 피가 줄줄 흐르는 상황이었고, 어깻죽지에 입은 총상 또한 작은 것이 아니었다.
 “시팔, 어떻게든 되겠지.”
 철준은 천천히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창밖에 빌딩이 하나 보였다. 주변 상황을 확인한 그는 비상구로 통하는 철문을 잠가 버렸다. 엘리베이터는 철준에 의해 망가진 상황. 이제 33층으로는 당분간 아무도 올라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였다.
 ‘할 수 있다. 뛰자!’
 철준은 창문을 깨부순 후 반대편 건물을 향해 쇠뇌를 조준했다. 어림잡아도 100미터는 넘어갈 듯해 보이는 거리.
 쇠뇌의 사정거리는 120m 정도였다.
 이제 죽고 사는 것은 전부 운에 달린 것이다.
 파앙!
 철준의 손에서 발사된 쇠뇌가 반대편 건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철컥.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쇠뇌가 어딘가에 걸린 것은 분명했다.
 철준에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흡!”
 심호흡을 한 번 한 철준은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와이어 버튼을 누르자 아까처럼 쇠뇌가 철준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철준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와이어에 매달려 있어 바닥으로 추락하지는 않겠지만, 건물 벽에 부딪히는 순간 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 철준의 눈에 건물 아래쪽에 조성되어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그는 다시 버튼을 눌러 와이어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멈추었다. 와이어가 계속 끌어당긴다면 자신은 분명 건물 외벽에 부딪혀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거리는 대충 계산했지만 이제 운에 맡겨야 한다. 운이 좋다면 자신은 저 나뭇더미에 걸려 생명은 부지할 수 있으리라.
 “제발······.”
 철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남들이 누리는 걸 한 번쯤은 다 누려 보고 죽고 싶었다. 지금 죽는다면 조금 억울하기는 했다.
 철준의 시야에 커다란 나무들이 들어왔다. 와이어 길이 조절을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해 줄 것이다.
 퍽퍼퍼퍽!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철준의 몸을 후려친다. 그는 엄청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쇠뇌의 손잡이를 놓았다.
 곧이어······.
 쾅!
 나무 전체가 흔들릴 만큼 큰 굉음과 함께 철준은 제대로 나무와 충돌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짹째액.
 “아우, 아침부터 시끄럽게 짖어 대고 난리야!”
 어제저녁 업무를 다 못해 새벽부터 출근한 예람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웠다.
 평소 같았으면 상쾌하게 들렸을 새소리가 피곤한 그녀의 귀에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출근하던 그녀는 수많은 경찰, 기자들이 H사 빌딩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뭐지? 아침부터 웬 난리야?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는 H사 빌딩의 바로 옆 건물 2층에 있었다. 그녀는 원래 한국에서 순위를 다투는 무역 회사인 하나물산의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업무 관련해서 1년간 러시아에 연수를 나온 상태였다.
 그녀가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 H사는 마피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1년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수많은 경찰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궁금증이 도졌다.
 “에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지. 조용히 출근이나 해야겠다.”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려던 예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다가 저런 골치 아픈 일과 연관되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긴 한국도 아니다.
 푸스럭.
 “아 씨, 괜히 저것들 때문에 돌아왔잖아.”
 피곤에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그녀는 계속 투덜거렸다. 궁금증 때문에 조금 돌아오는 바람에 길로 안 오고 건물 주변에 조성된 잔디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데, 잔디에 맺힌 이슬 때문에 양말이 자꾸 젖었기 때문이다.
 “응······?”
 투덜거리던 그녀의 눈에 수풀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뭐지? 고라니인가?”
 궁금해진 그녀는 천천히 수풀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수풀 안쪽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으······으······.”
 예람은 깜짝 놀랐다. 수풀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진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잠깐만······.”
 예람은 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쓰러져 있는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이세요?”
 발걸음은 돌렸지만, 아직 무서운지 그녀는 그를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도와······줘요······.”
 예람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간 그녀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사내의 온몸에는 시뻘건 피가 눌러 붙어 있었으며, 다리 한쪽은 꺾여 있고 마치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 조끼 앞주머니에······ 명함이 하나······ 있······ 으······.”
 사내는 말조차 잘 잇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엔 그가 살아 있는 것조차 신기했다.
 예람은 무서웠다. 그의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본 것이다.
 하지만 타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재빨리 그의 조끼 앞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피에 얼룩진 명함 한 장을 발견했다.
 “병원으로 연락하지 마시고······ 여기 연락해 줘요. 으······.”
 천천히 말하는 사내의 입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예람은 손이 덜덜 떨렸지만 침착하게 스마트폰을 꺼내어 쓰여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최문일 박삽니다.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최문일 박사라면 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던 것이다.
 “예, 안녕하세요. 최 박사님. 여기 한국 남성 한 분이 엄청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데, 제게 그쪽으로 연락해 주길 부탁해서요.”
 뭔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핸드폰 너머에서 갑자기 무척이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입니까? 거기가 어디죠? 혹시 바꿔 주실 수 있나요?
 그에 예람은 전화기를 사내의 입에 대었다.
 “박······사님, 저 살았습······니다.”
 오······ 강 소령! 강 소령 맞지? 거기 지금 어디인가?
 대답을 하려던 그는 순간 각혈을 하며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으······.”
 사내는 바로 1시간 반 전, 작전을 마치고 빌딩 30층에서 몸을 날린 철준이었던 것이다.
 그가 예람을 만난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의 몸 상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정신력으로 1시간여를 버틴 것이었는데, 예람이 만약 새벽 6시에 출근하지 않았다면 철준은 아마 사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박사님, 이분 지금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요.”
 철준이 말을 할 상황이 못 되자 다시 예람이 핸드폰을 잡았고, 그에 최 박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가씨, 지금 거기가 어딥니까?
 “여긴······.”
 예람은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최문일 박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적어도 이 사내가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돕기로 마음먹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강 소령을 잘 부탁합니다. 금방 그쪽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십시오.
 “네. 정말 빨리 오셔야 해요. 이분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 것도 기적이에요.”
 그가 소령이라는 말에 예람은 한 번 더 안도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총기가 끝까지 찜찜했는데, 군인이라는 말에 마음이 놓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새 철준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음······ 으으윽!”
 철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전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왔다.
 ‘내가, 살기는 한 건가?’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최문일 박사와 연락이 되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것으로 보아 어떻게든 구출은 된 모양이었다.
 “자네, 정신이 드는가!”
 최 박사의 목소리였다. 철준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으윽······.”
 “듣기만 하시게. 아마 지금 말을 하긴 힘들 거야. 목 전체가 부어올랐거든. 조그만 쇳덩이가 전신에 박혀 있어서 제거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네.”
 뿌옇게 보이던 앞이 천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철준은 미약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몸 상태는 지금 말이 아니야. 정말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지. 일단 어깨에 박혀 있던 총알은 제거했고, 눈에 보이는 외상은 전부 치료했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내상이 심각할 게야. 적어도 한 달은 누운 자리에서 꼼짝도 못할 걸세.”
 예상했던 바였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일단 자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은 확실하네만, 안 좋은 소식도 하나 있어. 자네, 어쩌면 상체의 신경이 반쯤 죽어 버릴 수도 있다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이번에는 철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평범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이······ 으윽, 없는······ 겁니까?”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는 철준을 보며 최문일 박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일단 경과를 지켜보고······. 자네에게 상의를 구할 일이 하나 있네.”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일단 철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회복해야 한다. 할 수 있어, 분명.’
 철준은 자기최면을 걸었다. 지금 낙담해 봐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일단 더 쉬시게. 그곳에서 살아 나온 것도 기적인데,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최 박사는 병실의 불을 끄고 조용히 나갔다.
 그리고 철준은 다시 잠이 들었다.
 
 
 
 “오! 박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핫! 채 대령님, 정말 빨리도 날아오셨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채헌필은 강철준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행 비행기를 끊었다. 철준은 그가 가장 아끼는 부하 대원이었기 때문이다.
 “철준이 이 녀석, 정말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이 일 때문에 국방부는 난리가 났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 강 소령이 뛰어나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 전투력을 경험한 적은 없어서 잘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하하, 확실히 괴물 같은 놈이기는 하죠. 그런데 박사님, 지금 강 소령 상태가 어떻습니까? 대략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채헌필의 말에 최문일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인 후 대답했다.
 “아직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지요. 온몸에 철 조각들이 박혀서 신경을 헤집어 놨습니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기는 한데······ 어디까지 회복될지는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더디지만 회복이 되고 있기는 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채헌필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지어졌다.
 “이번에 박사님께서 진행하고 계시던 프로젝트······ 아직 미완입니까?”
 그의 말에 최문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하지만 거의 완성 단계입니다. 실험을 아직 못했을 뿐이지요.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라면 강 소령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지요. 확률이 반반 정도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신체 구조가 어떤 무지막지한 괴물로 변할지 모를 일이죠. 그건 그렇고, 철준이가 한답니까?”
 채헌필은 강철준이라면 반반의 확률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철준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아직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안정이 더 필요한 단계라서 말이지요. 그리고 강 소령이 하고 싶다 한들 국방부에서 승인이 떨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채헌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강 소령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장관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최문일 박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쉽게 말하면 인간의 신체를 재구성하여 강화시키는 연구였다. 인간 병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국방부와 합작하여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물에게는 이미 실험도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시술해 본 적이 없어 마지막 단계에서 정체된 상태였는데, 그로서도 철준이 실험 대상이 되어 준다면 좋은 일이기는 했다.
 인간의 뼈대를 제외한 세포와 근육들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한다면 철준에게도 좋은 일이고 자신에게도 또한 좋은, 완벽한 시나리오이기는 했다.
 “흐으음······ 그렇지 않아도 대령님께서 오시면 강 소령에게 가 볼 참이긴 했습니다. 지금 가 보시겠습니까?”
 헌필은 마시던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도 정말 고역이군. 차라리 마피아 상대로 총질하는 게 더 편하겠어.’
 철준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몸을 여기저기 움직여 봤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손가락이나 살짝 까딱거리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제 움직이긴 하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단 그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희망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끼익.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채헌필 대령과 최문일 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채헌필 대령을 발견한 그는 반사적으로 경례를 하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후에 깨달았다.
 “오! 강 소령, 이거 결국 살아 돌아오셨구만. 이번엔 힘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핫핫.”
 “죄송합니다, 대령님. 경례를 하고 싶은데 팔이 움직이질 않네요.”
 그에 채헌필은 피식 웃었다.
 “됐다, 인마. 너 이제 민간인인데 무슨 경례야.”
 강철준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저 벌써 전역한 겁니까?”
 “그래, 인마. 전역식 같은 형식적인 거야 한국 돌아가서 하면 되는 거고. 아마 상부에서 조치는 다 끝난 것 같더라. 어디 네가 해낸 일이 보통 일이냐. 장관님께서도 적극적으로 널 지원해 주라 하셨다.”
 철준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대령님.”
 “감사하긴, 인마. 네가 두 노인네를 제대로 조져 준 덕분에 이번에 북에서 찍소리 한번 못하고 물러났다. 북한 이 양아치놈들, 어디서 러시아 마피아단 무기를 넘봐?”
 반쯤 농담조로 얘기하기는 했지만, 철준이 해낸 일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러시아에는 당국에서도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마피아단인 로커스 마피아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북에서 마피아단과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러시아 정부에서 포착했고, 이는 러시아로서도 골치 아픈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협력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피아단과 북의 무기 거래가 거의 성사되려는 것을 철준이 막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강 소령, 자네 몸 상태 말일세.”
 최문일 박사의 말에 철준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예, 박사님.”
 “내 생각에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한다면 오른팔은 어느 정도 쓸 수 있겠지만, 어깨의 총상 때문인지, 왼팔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네.”
 “······.”
 그도 알고 있었다. 손가락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에 비해, 왼팔은 아예 감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모험 한 번 더 해 보겠나?”
 철준은 채헌필 대령을 살짝 쳐다보았다. 그 또한 알고 있는 눈치였다.
 “모험······이라면······?”
 “절반 정도의 확률로 몸이 더 망가질 수도 있지만, 절반의 확률로 전보다 더 건강한 신체를 얻을 수도 있는······ 그런 모험이지.”
 철준으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가 원한 것은 정상적인 삶이었지 반쪽짜리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말씀하시지요. 하겠습니다.”
 철준이 하겠다고 할 줄은 알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오히려 놀란 것은 최문일 박사였다.
 “자네, 나머지 절반의 확률로 거의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네. 그래도 괜찮은가?”
 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무조건 합니다.”
 “그렇다면······ 알았네.”
 “전 박사님을 믿습니다.”
 말하면서 철준이 씨익 웃어 보이자, 최문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지.”
 “그런데 말입니다, 박사님.”
 “왜 그러시는가?”
 “절 구해 주신 여자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데, 혹시 연락처 알고 계십니까?”
 
 
 
 “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러시아 떠나는구나!”
 공항에 도착한 예람은 기지개를 쭉 켜며 공항 바깥 풍경을 돌아보았다.
 1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많이 들었던 러시아. 다시 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오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1년 참 빨리 갔어.”
 예람은 콧노래를 부르며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시간은 좀 여유가 있었지만 딱히 돌아다니기도 귀찮고 해서 게이트 앞 대기실에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위이이잉.
 의자에 앉기 무섭게 예람의 휴대폰이 울렸다.
 “또 뭐야, 회사는 아니겠지?”
 예람은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강철준 소령입니다. 혹시 저 기억나세요?
 그에 잠시 멍해 있던 예람은 순간 기억해 내고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 네! 강 소령님, 몸은 괜찮아지셨어요?”
 덕분에 제가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진즉에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아니에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아무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사례하고 싶은데······ 혹시 계좌 번호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생명의 은인인데 이렇게 말로만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싶어서······.
 철준의 말에 예람은 순간 혹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줄지는 모르지만, 꽁돈 생긴다는 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예람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 아니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예요.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 상황에 모른 척하면 도리가 아닌 거죠. 마음 쓰지 마셔요.”
 말을 해 놓고 예람은 아차 했다.
 ‘으 씨, 한 번은 더 물어보겠지?’
 음······ 꼭 사례를 하고 싶은데······ 러시아에 언제까지 계시죠?
 “지금 공항이에요. 오늘 한국으로 떠나거든요.”
 예람은 뭔가 꼬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요? 그거 잘되었네요. 저도 수술 마치면 바로 한국으로 갈 거거든요. 메일로 명함 한 장만 보내 주시겠어요? 제가 찾아갈게요.
 “네, 그렇게 할게요. 문자로 메일 주소 하나 남겨 주세요.”
 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네에, 네. 꼭 쾌차하셔서 한국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어요!”
 전화를 끊고 난 예람은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좀 강렬한 기억이기는 했지만, 그때 이후로 잊고 살고 있었는데,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만약 무서워서 외면했다면 아직까지도 죄책감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자아, 이젠 한국으로······!”
 
 
 
 # 새로운 시작
 
 
 
 철준은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상 위에 누웠다.
 최 박사는 절반의 확률로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엄포를 놓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수술은 잘될 것만 같았다.
 “인마, 수술실 들어가는 녀석이 어째 싱글벙글이냐.”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채 대령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였다.
 “좋아서 그럽니다. 이제 수술만 끝나면 전 평범하게 살아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학교도 다녀 보고 연애도 해 보고······ 결혼도 해서 행복하게 살 겁니다.”
 그 말에 채헌필은 피식 웃었다.
 “인마, 군인도 결혼할 수 있어.”
 “암튼 그렇다는 겁니다. 자꾸 제 꿈에 딴지 거실 겁니까?”
 “어쭈, 이게 이제 민간인이라고 막 던지는데?”
 채헌필은 최문일 박사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장난스럽게 해도 누구보다 철준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마음 단단히 먹으시게, 강 소령. 분명 잘될 걸세. 믿음이 필요해.”
 “물론입니다, 박사님. 전 잘못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습니다.”
 
 
 
 “이보시게, 장 서기. 이 사람 대체 뭔가? 자네, 입력하다 실수한 거 아니야?”
 “아, 그거 말입니까? 대치 4동 입주자라는데, 입력 오류는 아닙니다. 상부에서 내려온 건데······ 아마 국정원 관련 인사나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전에도 한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가족 관계가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어? 어디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라도 되나? 거참······. 그리고 민번 보니 열아홉인데······ 열아홉 살짜리가 국정원 소속일 리는 없잖아? 게다가 뭐 이리 부자야?”
 “뭐, 그러려니 하십쇼. 고민해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머리는 안 아픈데, 배가 아프니까 그러지. 어떤 놈은 열아홉에 사유재산이 100억이 넘는데 나는 이 나이에 이러고 있고······.”
 
 
 
 “아오 썅! 오늘은 또 누가 오는데 이렇게 귀찮게 해? 유 상병, 뭐 들은 거 있어?”
 “저도 잘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전용기 하나 내려온다고는 하던데······ 대통령님도 지금 해외 계시고, 장관님은 지금 부대 안에 계시고······ 총장님이라도 오시는 거 아닙니까?”
 “아, 말년에 자꾸 일이 생겨, 왜!”
 “김뱀, 그냥 창고 안에 숨어 계십쇼. 이 주사님 심부름 가셨다고 하겠습니다.”
 “아 씨, 그래. 나 없다고 해. 나 내일 말년 나가는데 활주로나 닦고 있어야겠어? 주말이라 낮잠이나 좀 퍼질러 자려고 했더니······.”
 
 공군 제15비행단. 서울공항에 전용기가 하나 내려온다. 그리고 활주로 주변에는 100여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쿠우우우웅.
 비행기 착륙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 하나 둘 비행기에서 내려온다.
 “부대~ 차렷!”
 차착착!
 마치 하나의 연결체를 보는 듯, 절도 있는 움직임.
 “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활주로 아래 도열해 있던 100여 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경례를 하였다.
 “충성!”
 비행기에서 가장 먼저 내린 군인이 수례하자, 군인들은 다시 절도 있게 움직인다.
 “바로!”
 착!
 “허, 이것 참······. 이 소령.”
 “예, 부대장님.”
 “내가 언제 부대장이 된 건가? 한윤만 장군님은?”
 “한윤만 준장님 진급하셔서 국방부로 가셨습니다. 이제 소장 진이십니다. 어제부로 인사 명령 났는데, 아직 못 보셨습니까? 이번 러시아 작전이 성공해서 부대 간부들 전부 1계급 특진했습니다. 저도 이제 중령 진입니다.”
 러시아에 다녀온 사이 얼떨결에 준장 진이 된 채헌필은 입이 귀에 걸렸다. 대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장군과 대령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 참! 이거 강 소령한테 미안한데······ 공을 다 가로챈 것 같아서 말이지.”
 “미안하실 거 없습니다, 부대장님. 저 녀석은 이제 전역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을 인정받아서 중령으로 명예 전역 할 겁니다.”
 이상면 소령은 환히 웃으며 채헌필 뒤에 나타난 강철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 인마!”
 이상면과 강철준은 부대의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상면은 철준의 무사 귀환과 전역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인마. 형님 고생하는 동안 부대에 짱 박혀서 놀고먹었나 보네. 때깔이 좋아졌어?”
 “웃기지 마. 어! 그러고 보니 너는 좀 어려진 것 같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채헌필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얘 이제 열아홉이야.”
 “예?”
 “지가 열아홉 살로 해 달래서 민증 열아홉으로 만들어 줬다. 고딩이 돼 보고 싶다는데 뭐 어쩌겠냐. 그래서 최 박사님이 수술할 때 얼굴에도 손 좀 대신 모양이던데······.”
 강철준은 씨익 웃었고, 상면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거 완전 도둑놈 아냐? 이제 형님이라 불러라. 난 열아홉 살짜리 친구 둔 적 없다.”
 
 철준의 전역식은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25년 평생 가장 기쁜 날이었다.
 부대원들과 전부 작별 인사를 나눈 철준은 헌필, 상면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오늘은 그가 소고기를 사기로 했다.
 “내 살다 살다 철준이한테 소고기를 얻어먹어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헌필의 말에 철준은 기분 좋게 웃었다.
 “평생에 한 번 있는 날입니다. 많이 드십쇼, 대령님.”
 그에 옆에 있던 상면이 거들었다.
 “장군님이라 해야지, 인마. 준장 진이신데.”
 “하하, 그렇게 되나······?”
 헌필은 손사래를 쳤다.
 “장군님은 무슨. 이제 형님이라 불러라. 민간인한테 장군님 소리 듣기 싫다. 상면이 넌 말고.”
 헌필은 올해로 마흔일곱. 특수한 부대에 근무하는 탓에 그렇지 않아도 진급이 빠른 편인 데다가 이번에 1계급 특진까지 하여,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장군이 된 그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철준은 삼촌뻘인 헌필에게 형님이라 하기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형님 하기엔 좀······.”
 “짜식이, 나이 좀 많은 형님 둘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굴어?”
 세 사람은 최고급 한우를 10인분 이상 시켰다. 철준과 상면은 원래 부대에서도 식성이 좋기로 유명했었다.
 “장군님, 그러고 보니 아드님이 올해 고3 아니십니까? 철준이 소개시켜 주지 말입니다. 둘이 친구 시켜 주면 되겠습니다.”
 그의 말에 헌필은 껄껄껄 웃었다.
 “하핫, 그러고 보니 그게 그렇게 되는구만. 우리 아들놈 소개해 줄까?”
 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는 말에 헌필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건 그렇고, 철준이 너 이제 뭐 할 거냐? 정말 고등학교 가서 공부할 거야?”
 상면의 말에 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냐. 정말 공부할 거야. 공부해서 대학도 가고······.”
 “야! 니가 어떻게 1년 공부해서 대학을 가! 민증이 열아홉 살이라고 정말 열아홉 살 된 줄 아네, 이게?”
 “철준이 대학 한 방에 가는 방법, 난 알고 있지.”
 뜬금없는 헌필의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체대 가면 될걸. 한국대 체대도 저 녀석이면 실기 100%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상면의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졌다. 사실 몸으로 하는 거라면 누구도 철준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사격 특기로 지원해 보든가. 바로 국가 대표 할 수 있을걸.”
 “······그건 좀 싫습니다.”
 철준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다. 민간인이 된 지금,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고아원에 있을 때 원래 그의 꿈은 군인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 헌필을 따라 국방부로 들어왔었다. 하지만 이제 군인이라면 신물이 나는 철준이었다.
 “싸움질 말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곧바로 상면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힘들걸?”
 
 
 
 “후아! 이제 정말 시작이군.”
 밤새 술을 마시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뜬 철준은 기지개를 켰다.
 “내 집에서 맞는 첫 아침을 숙취와 함께 맞이하다니······.”
 그는 일어나자마자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서둘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는 오늘 할 일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다 죽어 가던 그를 구해 준 예람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샤워를 하며 거울을 보던 철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병실에 두 달가량 누워 있었음에도, 그의 몸은 완벽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뜨거운 물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철준은 문득 퇴원할 때 최 박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강 소령, 한국에 가거든 우선 힘 조절하는 법부터 연습하시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사님?
 수술이 너무 성공적으로 끝나서 말이지······.
 무슨······?
 모르긴 몰라도 자네 힘이 예전보다 2~3배 이상 강해졌을 걸세. 쉽게 말하면 모든 신체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강화되었으니······ 적응하는 데 애 좀 먹을 거라는 말이야. 아마 나무젓가락 같은 건, 아무 생각 없이 예전처럼 잡았다가는 부러져 버릴걸.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점프력도 예전보다 2배 이상 좋아진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괴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람 씨라고 했었나······? 그녀를 만나고 나서 우선 헬스장부터 등록해야지······. 이 새로운 몸에 완벽히 적응하는 게 최우선이겠어. 그런데 개학까지는 며칠이나 남았지?”
 철준은 오늘 날짜를 생각해 보았다.
 ‘오늘이 1월 7일······ 개학까지는 아직 한 달 정도 남았네.’
 원래대로라면 올해로 스물다섯인 철준이 고등학교 개학날을 생각하고 있으니 뭔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철준은 그저 신 났다.
 ‘근데······ 수학······ 수학 어쩌지? 과외라도 해야 하나?’
 어릴 적부터 특수부대 요원으로 키워졌다고 해서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수준의 학습까지는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부대의 방침이었고, 한국사 같은 경우는 올바른 국가관 확립이라는 취지하에 제법 심도 있는 내용까지 공부했던 그다.
 하지만 수학은 정말 사칙연산 빼고는 하나도 모르는 그였다.
 
 
 
 “예람 씨, 오늘 퇴근하고 애인이라도 만나요?”
 “네? 아, 아뇨. 왜요?”
 “예쁘게 하고 오셨길래요. 화장도 좀 세고······.”
 “아니에요, 대리님. 저 남자 친구 없어요.”
 예람은 평소 화장도 많이 안 했고 수수한 차림새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어쩐지 퇴근 후 만나게 될 철준이 신경이 쓰여 오늘은 좀 꾸미고 출근했다.
 ‘그런데 그 사람 어떻게 생겼었지?’
 사실 예람은 철준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워낙 잠깐 본 데다, 그의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봐요, 예람 씨.”
 “네! 대리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사무실의 최선임자인 유설영 대리가 퇴근하자 하나 둘 사무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람은 철준을 만나기로 한 강남역으로 향했다.
 위이잉.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하자, 예람은 얼른 꺼내어 들었다.
 “여보세요?”
 예람 씨, 저 지금 10번 출구 앞이에요. 도착하셨어요?
 예람은 마침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네, 지금 올라가고 있어요.”
 그리고 통화하던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예람 씨 맞죠! 반가워요.”
 철준과 눈이 마주친 예람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철준이 훤칠하고 잘생겼기 때문이다.
 “네, 맞아요. 철준 씨 미남이셨네요? 그땐 몰랐는데.”
 그 말에 철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런가요? 고마워요. 예람 씨도 미인이에요. 그건 그렇고,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예람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고기요!”
 철준은 어제도 소고기를 배 터지게 먹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고기라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 철준의 평소 생각이었다.
 “혹시 맛있는 데 아세요? 제가 아는 데가 없어서······. 밥은 제가 살게요!”
 철준과 달리 예람은, 강남역이라면 수도 없이 와 본 곳이었다.
 “저 따라오세요. 오겹살 정말 기가 막히게 하는 데 있어요.”
 
 예람은 철준의 식성을 보고 감탄했다.
 “와······ 저도 잘 먹는 편인데 철준 씨 정말 고기 잘 드시네요.”
 철준은 씨익 웃었다.
 “부대에서 받는 훈련을 전부 감당하려면 이렇게 먹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습관이 이렇게 들었어요. 물론 이제는 민간인이지만······.”
 “아, 그럼 전역하신 거예요?”
 “네, 명예 전역 했죠. 이제 지긋지긋한 부대 안 들어가도 돼요.”
 기분 좋게 웃는 철준을 보며 예람은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분명히 그때 소령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군의 계급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소령이라면 어느 정도 높은 장교라고 알고 있는데, 철준의 나이는 많이 쳐줘 봐야 스물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준 씨,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되게 어려 보이셔서······.”
 예람은 철준이 올해 스물여섯인 자신과 대충 동년배이거나 한두 살쯤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얼굴이 동안이기는 했지만, 스물 초반에 그런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철준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은 것이었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예람은 놀라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저요? 열아홉요.”
 “에엑······! 정말요?”
 철준은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정말 열아홉이에요. 자요.”
 그는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예람에게 보여 줬다.
 “저, 정말이네요?”
 철준은 말없이 웃으며 고기 한 점을 더 집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열아홉이면 아직 입대도 할 수 없는 나인데······?”
 철준은 예람이 놀라는 모습이 재밌었지만, 어차피 자신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예람에게는 자신의 원래 나이를 말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열아홉일 리가 없죠. 이 얼굴에 열아홉이면 너무 슬프잖아요.”
 “아뇨, 교복만 입고 계시면 열아홉이라고 하셔도 믿긴 하겠는데······ 그럼······?”
 “저 올해로 스물다섯이에요.”
 “그, 그럼 민증은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아진 철준은 대충 얼버무렸다.
 “실제 나이는 스물다섯인데, 이제부터 열아홉 살로 살 거라서요. 그냥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철준이 한쪽 눈을 찡긋하자, 예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별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럼 제 또래시네요. 우리 친구 할래요?”
 “스물다섯이세요?”
 “아뇨, 제가 한 살 더 많기는 해요. 그런데 뭐 한 살 차이가 별건가요?”
 “한 살 차이, 당연 별거죠! 1년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누나.”
 누나라는 말을 강조하는 철준이 밉지 않은 예람이었다.
 “그, 그래요. 그럼 우리 말 놓을까······요?”
 철준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군인이 아닌 민간인 친구가 처음 생긴 것이었다.
 “나야 환영이지!”
 
 철준은 예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둘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철준아, 그럼 넌 이제 고등학교에 다시 가려는 거야?”
 “응, 공부해 보고 싶어서. 대학도 가 보고 싶고.”
 “십수 년 넘게 안 하던 공부, 이제 와서 할 수 있겠어?”
 “나 생각보다 머리 좋아. 걱정하지 말어. 누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 잘했어?”
 철준의 말에 예람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완전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재수해서 한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잘하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응, 그럭저럭?”
 순간, 철준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누나, 그럼 수학 잘해?”
 공교롭게도 예람은 수학과 출신이었다.
 “내 전공이 수학이었는데······.”
 “누나, 그럼 나 좀 도와주라! 수학 과외 좀 해 줘. 과외비는 보통 받는 돈의 2~3배로 줄게. 어때?”
 예람은 조금 솔깃했다. 지금 직장이 대기업 축에 속하는 기업이어서 괜찮은 대우를 받는 편이었지만, 돈은 많이 벌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나 지금 더하기 빼기 곱하기, 이런 거밖에 할 줄 몰라서 가르치는 것도 쉬울 거야. 어때?”
 하지만 예람은 양심이 조금 찔리는 것을 느꼈다. 사칙연산밖에 할 줄 모르는 철준을 가르치는데, 일반 과외비의 2배나 받는 것은 너무 날로 먹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면 과외 사이트 같은 데 들어가 보면 하겠다는 선생님 천지로 있을 텐데 왜 나한테 부탁해?”
 철준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누나한테 진 빚을 조금씩이라도 갚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냥 초등학생 하나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가르쳐 줘. 열심히 배울 테니까. 그리고 과외비는 시간당 한 5만 원 줄게. 어때?”
 대충 계산해 봐도 일반 과외비의 배 이상은 되는 비싼 돈이었다.
 하지만 예람은 이번엔 사양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에 과외는 많이 해 본 그녀였기에, 잘 가르칠 자신이 있기도 했다. 특히 수학이라면 더욱 자신 있었다.
 “그래, 좋아.”
 빚을 갚고 싶다는 철준의 말을 들었음에도 아직 조금 찔리긴 했지만, 예람은 그만큼 더 잘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에 찜찜함은 털어 버렸다.
 “아! 그리고 누나, 혹시 강남 쪽에서 제일 좋은 헬스장이 어디야?”
 
 고기를 배 터지게 먹고 예람과 헤어진 철준은 그녀가 알려 준 ‘강남에서 가장 좋은 헬스장’으로 향했다. 주민등록증 나이 열아홉인 철준 덕에 술을 마시지 못해서 일찍 헤어졌기에, 헬스장에 들를 시간은 충분했다.
 ‘뭐, 지하철 타고 몇 정거장 가긴 하지만, 기왕이면 좋은 데 다녀야지.’
 하루에 4~5시간은 헬스장에서 보낼 생각이었기에, 그는 일부러 좋은 곳을 고집했다.
 “여긴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검색해 본 철준은 커다란 빌딩 앞에 섰다.
 ‘여기 7층이라 했는데······.’
 띵!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철준은 살짝 놀랐다. 헬스장이라곤 부대에 있던 체력 단련장밖에 가 보지 못했던 그가 보기에, 이곳은 헬스장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쩌, 쩌네.”
 순간 당황한 철준의 입에서 감탄사(?)가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등록하러 오셨나요?”
 “아, 네. 등록하러 왔어요.”
 “헬스장만 이용하실 건가요?”
 상담원의 물음에 철준은 잠시 멈칫했다.
 “헬스장 말고 다른 시설도 있나요?”
 “네, 6층에는 수영장이 있구요, 8층, 9층에는 종합 스포츠 센터가 있습니다.”
 “종합 스포츠 센터라면······?”
 “볼링장, 탁구장, 당구장 등이 있어요.”
 원래 헬스장 외엔 생각도 없었던 철준이지만, 그 말을 들으니 순간 혹했다.
 “전부 다 이용하려면 요금이 얼마나 되나요?”
 “월 30에 이용하실 수 있구요, 3개월 한 번에 끊으시면 70, 6개월로 끊으시면 120입니다. 물론 오실 때마다 개인 트레이너분께서 운동 지도 해 주시구요. 수영은 배우고 싶으시다면 강습료 월 10만 원 더 내시면 가능하십니다.”
 절로 헉 소리가 나는 헬스장 이용료였지만, 철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통장에는 100억이 넘는 거금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100억은 고스란히 은행에 묶어 놓았지만, 은행 이자로 나오는 돈만 해도 월 수천만 원에 달하기 때문에 돈 걱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가 10년 이상 특무대 요원으로 일하면서 벌어 둔 돈 또한 몇억 정도는 되었다.
 “그럼 6개월로 끊어 주세요.”
 철준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카운터에 넘겼다.
 심지어 헬스장을 한번 둘러보지도 않는 시원시원한 철준의 태도에 직원은 조금 놀라는 듯 보였지만, 이런 손님들도 종종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감사합니다. 운동은 오늘부터 바로 하실 건가요?”
 “아뇨, 내일부터 올 겁니다.”
 “그럼 오늘 인바디 검사만 한번 받아 보시겠어요? 물론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트레이너분께서 검사 결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겁니다.”
 인바디 검사란 쉽게 말해 신체의 건강 상태를 수치화시켜 측정하는 것이었다. 철준은 부대에서도 종종 검사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
 “네, 그럼 검사만 한번 받아 보죠.”
 부대에 있을 때였다면 검사해 볼 필요도 없이 최상의 몸 상태가 나왔겠지만, 병상에 제법 누워 있었고 운동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기에 철준은 검사 결과를 한번 보고 싶었다.
 “겉옷 벗어서 카운터에 올려 주시구요, 이쪽으로······.”
 
 간단한 검사가 끝나고, 결과를 받아 본 철준은 살짝 안색을 찌푸렸다. 체지방량이 예상보다 높게 나온 탓이었다.
 하지만 검사 결과표를 본 트레이너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말도 안 되게 낮은 체지방량은 물론, 근육량 또한 어지간한 운동선수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운동선수 출신이신가요?”
 트레이너의 물음에 철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운동선수는 아닌데, 운동을 좀 좋아합니다.”
 “철준 씨는 담당 트레이너가 필요 없겠는데요? 원래 제가 철준 씨 담당 트레이너가 될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몸 상태를 유지하시죠? 제가 한 수 배워야겠어요.”
 그에 철준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윤성 씨라 했죠? 여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철준은 잘 몰랐지만, 그의 앞에 있는 오윤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트레이너였다. 그가 트레이닝하는 고객들 중에 유명 연예인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인지도 있는 트레이너였다.
 사실 윤성이 철준의 담당 트레이너가 될 예정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저 철준의 인바디 검사 결과를 보고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일부터 나오시는 건가요?”
 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매일 아침에 나올게요. 몇 시부터 문 열죠?”
 “아침 6시 이후에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12시는 되어야 출근을 하는데······.”
 그에 철준은 웃으며 말했다.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전문적으로 몸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서요. 궁금한 점 있으면 트레이너님 출근하실 때 나와서 여쭤 볼게요.”
 철준은 사실 개인 트레이너가 전혀 필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으앗······차!”
 기지개를 길게 켠 철준은 시계를 보았다.
 “뭐지? 내가 알람을 못 들은 건가?”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을 가기 위해 6시 알람을 맞춰 놓고 잠들었건만, 9시도 넘어서 깬 것이었다.
 부대에 있을 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확실히 내가 나태해지기는 했구나······.”
 사실 알람을 못 들은 것은 그가 너무 늦게 잠든 탓도 있었다. 어제 대낮에 일어난 탓에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집 안에 들여놓을 가구 등을 검색한다고 늦게까지 자지 않은 것이었다.
 철준은 서둘러 씻고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은 후 헬스장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네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그는 뛰어가기로 했다.
 부대에서 구보 뛸 때의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일정한 보폭에 맞춰 천천히 뛰기 시작한 철준은 자신의 몸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자신이 항상 뛰던 패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100미터를 13~14초 정도에는 주파할 수 있는 제법 빠른 속력의 뜀박질이었다.
 하지만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예전의 그도, 최상의 컨디션일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이 정도 뛰면 1Km 정도만 달려도 지쳤는데, 집과 3~4km 정도는 떨어져 있는 헬스장에 거의 도달하였음에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것이다.
 “후······.”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은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철준은 카운터의 직원에게 어제 받은 회원 카드를 건네었다. 그러자 직원은 그것을 단말기에 넣었다.
 “강철준 고객님, 지금 담당 트레이너이신 오윤성 선생님은 계시지 않은데, 다른 분께 지도받으시겠어요?”
 철준은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로커 키를 받은 철준은 안으로 들어가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평소 하던 대로 모든 준비운동을 꼼꼼히 마친 철준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몸 상태에 감탄했다. 한쪽 팔은 아예 움직일 수도 없었던 암울했던 몸 상태를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최 박사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못해도 100평은 족히 됨 직한 헬스장 안은 수많은 운동기구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은 철준에게도 익숙한 운동기구였지만,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 비슷비슷한지라, 대충 보아도 사용법은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일단 근력 테스트를 좀 해 볼까······?”
 철준은 아직 자신의 근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수술 후 재활을 마치고 단 한 번도, 낼 수 있는 최대의 근력을 사용해서 무언가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벤치프레스 위에 누웠다. 철봉의 양쪽에는 각각 35kg 정도의 바벨이 끼워져 있었다. 봉 무게까지 합치면 총 80kg 정도의 중량. 예전 같아도 쉬이 들 수 있는 무게였지만, 가볍다고 느낄 정도의 무게는 아니었다.
 “읏차.”
 철준은 봉을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라?’
 그리고 그는 당황했다. 분명 80kg의 중량이었다. 하지만 40kg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지 않은가?
 철준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20kg짜리 바벨을 양쪽에 각각 세 덩이씩 끼워 넣었다. 대충 130kg 정도의 무게였다.
 예전의 철준이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무게. 하지만 이 정도는 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흡!”
 다행히도(?) 130kg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그는 봉을 걸쳐 놓고 그 위에 10kg짜리 바벨을 양옆에 하나씩 더 걸었다.
 이제 150kg이다. 역도 세계 챔피언이 용상으로 들 수 있는 무게에 거의 근접한 무지막지한 무게. 사람이라면 저 무게로 벤치프레스가 가능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철준은 사람의 범주를 이미 넘어선 듯했다. 그는 150kg의 바벨을 가지고 한 세트 8회씩 세 세트를 하고 나서야 벤치프레스에서 일어났다.
 “으, 그래도 이건 좀 힘드네.”
 벤치에서 나온 철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헬스장에 있는 어지간한 운동기구를 한 번씩 다 해 보고 난 그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12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아오, 너무 무리했나? 근육이 터질 것 같네.”
 중간중간 휴식도 하고 스트레칭도 계속했지만, 안 하던 운동을, 그것도 무지막지한 무게로 하니 근육이 멀쩡하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 눈치 보며 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네. 다음부턴 무조건 새벽에 와야겠어.”
 그는 운동하는 중간중간 주변에 사람이 올 때마다 눈치를 보았다. 버터플라이같이 무게 추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운동기구는 상관없었지만, 벤치프레스 같은 눈에 띄는 운동기구를 150kg씩 달아 놓고 하면 누구든 놀라 자빠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준은 관심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철준을 불렀다.
 “오! 철준 씨, 와 계셨네요.”
 그의 담당 트레이너라던 오윤성이었다.
 “네.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나서 10시 다 되어서 왔네요. 이제 막 운동 마치고 가려던 참이었어요.”
 오윤성은 얇은 티 한 장만 걸친 철준의 몸매를 대충 훑어보고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를 찾기 어려운 균형 잡힌 몸매였기 때문이다.
 “헬스장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죠.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운동해 보는 것도 처음이네요. 하핫.”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철준은 오윤성에게 처음 보는 몇 가지 운동기구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던 중, 여자 탈의실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여성이 나오더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것 같은데······.’
 사회에 전혀 연고가 없는 철준으로서는 강남땅에 알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낯이 익었다.
 ‘누구지······?’
 “트레이너님, 준비됐어요.”
 한편 그녀를 보고 별 반응이 없는 철준을 보며 오윤성은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그가 전담해서 트레이닝해 주는 연예인 중에서도 요즘 가장 뜨고 있는 가수 서유라였기 때문이다.
 철준은 티비에서 몇 번 스쳐 가며 본 적이 있어서 낯이 익다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윤성은 그가 서유라라는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리고 서유라 또한 자신을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철준을 보며 윤성 이상으로 당황했다.
 ‘내가 화장을 안 해서 못 알아보는 건가? 내가 그렇게 빨이 심하지는 않은데······?’
 서유라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연 미인인 데다, 개성 있는 외모로 인기가 많은 그녀였기에, 그녀를 안다면 못 알아보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아! 그래, 유라 양. 오늘은 스케줄 몇 시부터라고 했지?”
 “2시쯤에 매니저 언니가 데리러 오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마 2시 반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오빠도 알잖아요, 언니 성격. 서둘러 가 보면 아마 한 3시쯤 스케줄 잡혀 있을걸요.”
 “하하! 알지, 그 사람 성격. 아무튼 알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대화를 통해 서유라가 연예인인 것을 알아챈 철준은 그녀가 연예인이기 때문에 낯이 익었던 거라 생각하고 이미 관심을 돌린 상태였다. 윤성에게서 방금 배운 기구를 여기저기 만져 보고 있는 그를 보며 오히려 서유라 쪽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오빠, 저분은 누구예요? 새로 들어오신 트레이너님이신가요?”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매가 오윤성 못지않게 탄탄하고 좋아 보여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아니, 어제 등록한 고객님인데······ 내가 맡기로 했거든.”
 그의 말에 유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오빠 바쁘시잖아요. 연예인들 트레이닝해 주기도 시간 모자라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에 윤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인바디 검사 해 보니까 수치상으로만 봤을 땐 나보다도 몸이 더 좋은 것 같더라고. 그런 사람에게 내가 트레이닝해 줄 게 뭐 있겠냐. 그래서 내가 맡는다 했지. 어떻게 운동하는지도 좀 보고 싶어서.”
 서유라는 진심으로 놀랐다. 윤성은 평소에 자신의 몸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라가 얼핏 보기에는 그저 몸 좋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새삼 윤성이 그렇게 말하니 철준이 달라 보였다.
 “저, 트레이너님.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뵐 수 있으면 내일 또 뵙죠.”
 윤성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 내일 또 오세요, 철준 씨.”
 유라는 자신의 기준에서 무척이나 신기한 사내인 그에게 한번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철준은 바람 소리가 쌩 날 정도로 빠르게 남성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라는 자존심에 약간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우씨, 길 가다 만나는 아주머님들도 요즘 알아보시는데 날 못 알아본단 말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빠, 저 사람 매일 여기 나온대요?”
 유라의 말에 윤성은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서유라 씨, 저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거야? 이거 대박인데? 매니저한테 한번 말해 볼까?”
 하지만 유라는 그런 장난에 전여 개의치 않았다.
 “궁금해서요. 신기하잖아요. 오빠는 안 그래요?”
 윤성에게 있어서도 철준은 신기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맞아. 신기하지. 매일 새벽에 나온다던데, 아무리 부지런해도 어떻게 맨날 새벽에 나오겠어? 오전 중에 나오면 볼 수 있겠지 뭐. 친해지고 싶으면 내일은 오전에 한번 나와 봐. 너 스케줄 있나?”
 “이번 주는 계속 스케줄 잡혀 있고······ 다음 주쯤에 한번 나와 봐야겠어요.”
 서유라의 두 눈이 호기심에 살짝 반짝였다.
 
 
 
 # 신체 개조
 
 
 
 “갑자기 한국엔 어쩐 일이십니까, 박사님?”
 “좀 심각한 일이 발생해서 소환되었습니다.”
 “소환이라면······?”
 채헌필의 집무실.
 차를 한 잔씩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단장님께서 절 소환하신 겁니다. 아마 조만간 국방부 장성급 인사들을 전부 소집해서 회의가 열리겠지요.”
 “국방과학기술단장님 말입니까?”
 최문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어차피 장군님께서도 참석하실 텐데, 말씀 못 드릴 이유가 없군요.”
 그는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샘플 하나를 도둑맞았습니다.”
 “샘플이라면······!”
 “어떤 자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R7이 지난주에 사라졌습니다. 아주 감쪽같이 말이죠.”
 “R7이라면 흑마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신체 개조에 가장 훌륭히 성공했던 샘플 중 하나죠. 평범한 말의 거의 1.5~1.7배 가까운 속력으로 달리던 녀석입니다.”
 채헌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말을 누가 어떻게 훔쳐 간답니까? 연구소 보안이라면 안에서 동전 하나 훔쳐 가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요?”
 최문일은 한숨을 쉬었다.
 “내부 소행입니다.”
 “······!”
 “수석 연구원 하나가 R7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마 어디선가 제법 큰돈과 함께 제의를 받았겠지요.”
 채헌필의 표정이 좀 더 심각해졌다.
 “그 연구원이 샘플과 가지고 있는 연구 자료만으로 기술을 재현해 낼 수 있습니까?”
 최문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간 곳이 타국, 예를 들어 중국이나 미국, 일본 같은 곳의 국가기관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쪽에서 가진 기술력이라면 재현해 낼 수도 있겠지요. 또는 마피아 같은 거대 조직이라든가······.”
 최문일이 진행하고 있던 신체 개발 프로젝트는 특급으로 분류되는 국가 기밀이었다.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외부로 빠져나가면 안 되는 기밀이었던 것이다.
 “좋지 않습니다, 박사님······. 일본이나 북한 쪽으로 기술이 빠져나간다면, 우리 군은 간접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금방 몇 소대 정도의 특수부대를 구성할 겁니다. 신체가 개조된 무지막지한 녀석들로 말이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는 현재 인체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연구 진척이 더뎠지만, 북한이라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어쩌면 완벽히 성공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인체에 실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마피아단 같은 곳으로 넘어갔을 경우가 단기적으로는 더 위험합니다, 장군님. 국가기관에 넘어간다면 전쟁에 이용되겠지만······ 개인 기관에 넘어간다면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될 겁니다.”
 “후······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그리고 장군님, R3를 아십니까?”
 “R3라면······ 들은 것도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늑댑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신체 개조를 두 번이나 성공시킨 샘플이기도 하죠.”
 “설마 그 녀석도 도둑맞은 겁니까?”
 최문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신체 개조를 두 번 성공시킨 녀석은 한 번 성공한 녀석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정말 월등합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 녀석은 총알도 피합니다.”
 “총알을요?”
 채헌필은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물론 살상용 총은 아니고 마취 총이었습니다. 녀석을 마취시키려고 마취 총을 쐈는데, 피하더군요. 처음엔 못 맞힌 줄 알았습니다. 한데······ 세 번이나 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채헌필이었다.
 “기술이 어디로 빼돌려졌는지 어떻게든 찾아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회의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이 나겠지요.”
 “후······ 박사님은 그럼 회의 참석하신 후에 바로 다시 러시아로 가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 전에 강 소령을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철준이를요?”
 “예. 다시 이런 일에 강 소령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철준이 너, 제법이다? 정말 사칙연산밖에 모르는 거 맞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예람은 과외 이야기가 나오고 3일 후부터 바로 과외를 시작했다.
 사실 개학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만큼, 좀 빨리 과외를 시작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게, 생각보다 할 만한데?”
 철준이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은 중학교 저학년 수준의 수학이었다. 수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방정식과 집합 등등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좀 커서 그런가? 중학교 과정은 쉽게 이해하네.”
 “그래, 내 머리가 좀 크긴 하지······.”
 종종 실없는 소리를 하긴 해도, 철준은 정말 이해력이 빨랐다. 고등수학까지 진도를 나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는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깨치는 수준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만 풀면 과외 끝!”
 그녀의 말에 철준의 고개가 시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예람이 가리킨 문제까지 다 풀어낸 철준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벌렁 누웠다.
 “역시 공부가 제일 쉬운 거였어.”
 그의 말에 예람은 피식 웃는다.
 “이제 겨우 중학교 저학년 수준 문제 몇 개 풀어 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재밌잖아. 훈련은 재미없다고.”
 예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제발 계속 재밌었으면 좋겠네.”
 “걱정 마셔.”
 “그건 그렇고, 너희 집 엄청 좋네? 너 혼자 사는데 뭐 이렇게 넓어?”
 철준의 집은 40평이 넘는 고급 아파트였다. 게다가 철준 혼자 사는지라 가구도 많지 않아서 50평은 되어 보였다.
 “몰라, 내가 산 집 아니야. 나라에서 사 준 거라고. 나도 이렇게 넓은 집은 필요 없는데······. 오히려 냉장고가 너무 멀리 있어서 물 마시러 가기 귀찮단 말이야.”
 “배부른 소리 한다.”
 “정말인데.”
 “부자여서 좋으시겠어.”
 “좋지, 그럼.”
 철준이 문제집을 덮자, 예람은 가방을 챙겼다.
 “으, 드디어 주말이네. 집에서 잠이나 퍼질러 자야지.”
 예람의 말에 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 그러다가 소 된다.”
 “얘는 무슨 우리 할머니가 하시는 말을 나한테 하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어련하시겠어? 그러는 넌 뭐 할 건데?”
 “나? 헬스장 가지. 내일은 잠깐 최 박사님 만나기로 했고······.”
 그 말에 예람은 반색했다.
 “최 박사님 한국 오셨어?”
 “그런가 봐. 한국 오셨는데 뵈러 가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지······.”
 “당연하지.”
 예람은 가방을 다 챙기고 일어섰다.
 “자, 그럼 이 누나는 갑니다.”
 “그래. 누나, 고마웠어. 모레 또 봐.”
 예람이 나간 후, 철준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통장 잔고가 270만 원······ 1천만 원을 순식간에 써 버렸네.”
 철준은 억 단위 이상의 목돈은 전부 묶어 놓은 상태였다. 생필품과 가구들을 사고, 생활비로 지출하기 위해 남겨 놓았던 돈이 1천만 원 남짓이었는데, 그것을 거의 다 쓴 것이다.
 “이자 나오는 것만 가지고 먹고살아도 될 거라고 하긴 했는데······.”
 이자가 나올 때까지 270만 원이면, 사실 충분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아껴 쓸 필요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심심해 죽겠네. 운동, 공부 말고는 하는 게 없으니······. 개학까지는 아직도 꽤 남았는데.”
 철준은 침대에 벌렁 누워 이것저것 떠올렸다.
 “녀석들은 잘 지내려나?”
 부대 생각을 하던 중, 철준은 오래전 자신에게 특공무술을 가르쳤던 교관이 떠올랐다.
 “아! 맞다. 사부한테 한번 연락해 봐야겠네. 잘 계시려나······.”
 거의 10년 전, 본격적으로 특무대의 임무에 투입되기 전, 철준에게 특공무술을 가르치던 교관이 있었다. 그는 이미 군문을 나온 지 5년이 넘었지만, 사회의 어디선가 도장이라도 하나 차리지 않았겠는가?
 철준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고 채헌필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장군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어. 그래, 가능하지. 그리고 형님이라 하라니까, 인마.
 철준은 멋쩍게 웃었다.
 “아! 네, 형님.”
 왜 전화했냐? 사회생활 할 만해?
 “네, 뭐 그럭저럭 재밌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쭐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
 뭔데?
 “류현수 교관님 연락처 혹시 알 수 있습니까?”
 류현수? 누구였더라······ 아! 현수 형님!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바로 안 났네. 나한테 연락처 있지, 당연히. 전화 끊어 봐라. 문자로 넣어 주마.
 
 
 
 
 “아무리 강남 한복판이라도 역시 새벽 공기는 상쾌해.”
 헬스장에 가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선 철준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자, 또 한 번 달려 볼까?”
 오늘은 수영장에도 가 보기 위해 수영복과 물안경까지 준비했다.
 철준은 원래 수영을 싫어했다. 부대에서 훈련한답시고 하루 종일 물속에서 살아 본 기억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중 훈련 덕분에 그의 수영 실력은 프로급이었다.
 그리고 훈련으로 하는 수영이 아닌 취미로 하는 수영은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빠른 속도로 헬스장까지 뛰어간 철준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곧장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수영장은 아직 새벽반 강습도 시작하지 않은, 한적한 상태였다.
 수영복을 챙겨 입은 철준은 곧장 물로 뛰어들었다.
 “수영도 더 잘할 수 있으려나?”
 최 박사의 프로젝트로 인해 전체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된 그였기에 아마 수영 실력도 더 늘었을 터였다.
 “아오 씨,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자유형으로 25m짜리 코스를 왕복한 그는 투덜거렸다. 예전보다 오히려 수영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실히 체력은 좋아졌네. 숨은 안 차.”
 철준은 계속해서 자유형과 접영을 번갈아 가며 하면서 한 번씩 왕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능력이 향상된 신체에 자신이 아직 적응이 덜 돼서 예전보다 오히려 수영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나아지는걸.”
 철준은 오랜만에 하는 수영에 재미가 붙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심취해서 계속 레일을 돌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쉬지 않고 30분 정도만 수영해도 진이 다 빠지는데, 철준은 1시간 남짓을 계속 운동하고도 쌩쌩했다.
 “이거 수영만 한 운동이 없네.”
 그리고 철준은 수영이 자신의 신체에 가장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최상의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물 밖으로 나와서 벤치에 앉았다. 스트레칭도 하고, 조금 쉴 필요가 있었다.
 물론 물에 처음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은 했지만, 그래도 쓰지 않던 근육들을 오랜만에 사용해서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수영장에는 그사이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대편에 있는 레일에 새벽반 강습을 받으러 온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저기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철준은 고개를 돌렸다.
 “저요?”
 그리고 그곳에는 웬 훤칠한 사내가 하나 있었다.
 “네, 그쪽 부른 거 맞아요.”
 “무슨 일이시죠?”
 “수영 정말 잘하시던데······ 혹시 강사 선생님이신가요?”
 철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예전에 수영을 좀 빡세게 배웠죠.”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정말 수영하다가 힘이 빠져서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물속에서 훈련받은 적도 있었으니······.
 “그렇군요. 저, 새벽에 항상 여기 수영하러 오는데, 처음 뵙는 분 같네요.”
 “맞아요, 이 수영장엔 오늘 처음 왔으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무튼 반갑네요. 이쪽 자유 수영장에 이 시간엔 항상 저 혼자뿐이어서 적적했는데······. 혹시 새벽마다 나오시나요?”
 잠시 생각하던 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 신체에 적응하는 데 최적의 운동임을 느낀 이상 매일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아마도요?”
 “오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수영 정말 즐겨 하긴 하지만 그쪽만큼 잘하진 못하거든요. 같이하면서 좀 배우고 싶네요.”
 사내가 손을 내밀자 철준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 네······ 뭐······. 저도 반가워요!”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의 물음에 철준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열아홉이에요.”
 그리고 당연히 사내는 당황했다.
 “네? 열아홉요?”
 “왜요? 제가 좀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하죠?”
 두 사람은 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내의 이름은 구자호. 스물넷이었고,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생이라고 했다.
 “그런데 너 정말 열아홉 맞아? 그것보단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철준은 피식 웃었다.
 “열아홉 맞아요. 뭐 믿건 말건 그건 형 자유지만.”
 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준이 거짓말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너 몸 진짜 죽이네. 체대 준비하는 학생인 거야? 수영 말고 무슨 운동 계속하고 있는 거 맞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몸 예쁘게 만들 수 있어?”
 자호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친화력이 대단했다. 말도 많고 조금 까불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인상 자체는 호감형이어서 철준도 싫지 않았다.
 “맞아요. 격투기 같은 것도 하고 운동을 좀 많이 해서 그래요. 그러는 형도 몸 좋은데요, 뭘.”
 자호 역시 철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갓 제대해서 그런지 몸이 좋은 편이었다.
 “에이······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 쑥스럽네. 너 여기 헬스장도 다니지?”
 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녀요.”
 “헬스는 언제 해, 그럼?”
 “이제 수영 1시간 정도만 더 하고 바로?”
 그 말에 자호의 두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뭐! 어떻게 그래, 사람이? 수영을 1시간 더 하고 또 헬스를 하겠다고?”
 “네, 제가 원래 체력이 좀 좋아요.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수영해야겠네.”
 말을 하며 천천히 일어나는 철준을 보며 자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정말 근래 본 사람들 중에 최고로 특이한 녀석일세.”
 뭔가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악동처럼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관장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송파구에서 커다란 특공무술 도관을 운영하고 있는 류현수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매일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단조로운 일상이 어제저녁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조금 재밌어졌기 때문이다.
 “좋은 일? 있다마다.”
 E1120. 류현수가 특임대에 특공무술 수석 교관으로 재임하던 당시 모든 교관들이 입을 모아 괴물이라고 칭했던 녀석인 철준이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어떤······?”
 “네놈들 선배가 오늘 도장에 온다고 연락이 왔거든.”
 이제 50대도 꺾여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현수였지만, 그의 표정은 사탕을 입에 물려 준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했다.
 “형구, 민준, 영필이, 앞으로 나와 봐라.”
 세 사람은 현재 도장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제자들이었다.
 “예, 관장님.”
 세 사람이 앞으로 나오자, 현수는 도관의 모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특공무술을 가르쳤던 모든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녀석이 오늘 여기 오기로 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현수는 칭찬에 무척이나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가장 뛰어났던 제자라 칭하니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 앉아 있던 형구가 현수를 향해 질문했다.
 “스승님, 그럼 오시는 분이 이 도관 출신 선배님이신 겁니까?”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예전 특임대에 근무할 때 가르쳤던 특수부대 요원이었다.”
 그 말에 장내는 한 번 더 술렁였다.
 현수에게 특공무술을 배우고 있는 이들의 절반가량은 취미로 배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머지 절반 중에는 특임대에 정말 지원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아직 현역 특임대 요원이신 겁니까?”
 “아니, 얼마 전에 전역했다 하더라.”
 “그렇다면 연세가······?”
 그 말에 현수는 피식 웃었다.
 “연세는 무슨. 이제 한 스물대여섯 됐으려나?”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려 하자, 현수는 조용히 시켰다.
 “궁금한 게 많을 테지만, 그건 철준이 녀석이 오면 물어보도록 하고······ 형구, 민준, 영필이는 선배랑 대련할 준비 하고 있거라.”
 그 말에 세 사람의 눈이 빛났다.
 “아무리 대단한 선배님이라 하셔도 저희 셋을 차례대로 상대하시긴 버겁지 않을까요?”
 형구의 말에 현수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말도록. 녀석은 같은 특임대 요원들 두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너희들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할 수도 있어.”
 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물론 정말 특임대 요원 두셋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현수의 말처럼 자신들이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하고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은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세 사람의 표정을 본 현수는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으려면 너희 셋은 지금부터 몸 잘 풀고 있어. 너희는 녀석과 붙어 볼 기회를 가지는 것 자체를 진짜 행운으로 여겨야 돼.”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영필은 사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해산! 2시까지 열심히 몸 풀고 있어라. 철준이 녀석 한 2~3시 사이에 온댔으니······.”
 현수가 휘적휘적 걸으며 관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모여 있던 수련생들은 다시 제가 하던 것들을 하러 흩어졌다.
 “민준 형, 사부님 말씀이 정말일까?”
 민준은 올해 스물셋으로, 현수가 불러 세웠던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나도 조금 과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거짓은 아닐 거다. 사부께서 언제 흰소리하시는 것 봤냐?”
 “그건 그렇지만······.”
 영필은 올해로 고3이 되는 열아홉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하고 고집이 세서, 도장 안에서도 똥고집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사부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쳤던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하셨으니까······ 정말 대단하기는 하겠지. 그때까지 몸이나 잘 풀고 있자고.”
 
 
 
 헬스장에서 나와 간단히 국밥을 챙겨 먹은 철준은 휘적휘적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사부 뵙겠네.”
 현수의 도장은 송파구에 있다고 했다.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스마트폰으로 지도까지 켜서 길 찾으면서 걸어가는 것은 뭔가 귀찮아서 지하철로 향했다.
 “엇, 안녕하세요?”
 딴생각을 하던 철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다. 자신을 부른 것이 이제 겨우 일면식이 있는 서유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헬스장을 가는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추리닝을 입고 있었지만, 한번 만나면 인상착의를 귀신같이 기억해 내는 철준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 네. 헬스장 가시나 봐요?”
 그의 말에 유라는 방긋 웃었다.
 “네, 오늘은 오전 스케줄이었거든요. 오빠는 헬스장에서 나오시나 봐요?”
 뜬금없이 오빠라고 하는 유라의 말에 당황한 철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유라는 그가 처음 보는 종류의 여성이었다.
 “오빠라뇨? 제가 더 어릴 수도 있어요.”
 “몇 살이신데요?”
 “열아홉요.”
 열아홉이라는 말에 유라는 조금 당황했다. 철준을 스물둘 정도로 본 탓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유라는 열여덟이었다.
 “그럼 오빠 맞네요. 저 열여덟이에요.”
 “아······ 네······.”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유라는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자신이 연예인인 것을 떠나서, 보통 여자가 이렇게 살갑게 대하면 뭔가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철준의 반응은 정말 색달랐다.
 철준이, 예쁜 데다 연예인이기까지 한 유라가 오빠라고 하는 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별로 관심이 없었던 데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을 뿐이다.
 “그럼 오빠, 다음에 헬스장에서 또 봬요. 그땐 말 놓으셔도 돼요.”
 “그, 그러도록 하죠.”
 눈을 살짝 찡긋하고 가는 유라를 보며 철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여자는 원래 다 저런가?”
 거의 평생을 군대 안에서 자란 철준은 또래의 여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꼬맹이······ 예쁘긴 하네.”
 
 
 
 
 “류현수 관장님 계십니까?”
 철준이 도장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강철준 선배님이십니까?”
 선배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철준은 곧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강철준입니다. 관장님 안에 계시죠?”
 그리고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관장실에서 현수가 나왔다.
 “오, 철준이 녀석 많이 컸네!”
 현수가 철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철준이 열여덟 정도일 때였다. 그때가 벌써 6년 전이었고, 철준은 그때보다 키도 조금 더 큰 상태였다.
 “사부님은 변한 게 없으십니다.”
 “나야 뭐 항상 그렇지. 일단 앉자. 점심은 먹고 왔냐?”
 “네, 먹었습니다.”
 철준은 현수를 따라 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전역했다고? 채 장군님 말씀 들었다. 큰일을 해냈다지?”
 철준은 멋쩍게 웃었다.
 “큰일까지는 아니고요······ 하핫, 이거, 사부님께 칭찬 들으려니까 쑥스럽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구나. 만사에 무감각한 네놈이 어쩐 일이냐? 전역했다고 이 사부를 찾을 생각을 다 하고.”
 철준은 조금 뜨끔했다. 사실 현수를 거의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문득 생각나지 않았다면 언제 그를 찾았을지 모른다.
 “뭐, 그래도 제가 사부 수제자 아닙니까.”
 능글맞은 철준의 말에 현수는 피식 웃었다.
 “네놈이 그렇지 뭐. 사회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나와 보니 생각보다 재미없지?”
 철준은 그 말에 조금 공감했다. 하지만 사회가 부대보다 백배 천배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도 나오니 좋네요. 재미는 이제 찾아 가면 되겠죠.”
 철준의 말에 현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거야 그렇지. 요즘 뭐 하고 사냐?”
 “그냥 운동하고 공부해요.”
 “뭐? 공부?”
 현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다시 물었다.
 “웬 공부야? 뭐든지 몸으로 때우던 녀석이?”
 “그냥 그렇게 됐어요. 남들 하는 거 다 해 보면서 살고 싶어서요. 이제 3월 되면 고등학교도 들어가요.”
 “······?”
 “저 이제 주민등록상 열아홉 살이에요, 올해.”
 현수는 자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철준이 열아홉일 리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전역하면서 민증 발급받는데, 제가 고등학교도 한번 다녀 보고 싶고, 그래서 열아홉 살로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결국 현수의 웃음보가 터졌다. 철준이 특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싶다고 열아홉 살로 전역하다니.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예전부터 알아봤지만, 너 진짜 기가 막힌 놈이다. 특무대에서 소령씩이나 해 먹었던 놈이 열아홉이라니.”
 “뭐, 세상에 별놈 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같은 놈도 하나 있어야지요.”
 잠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홀짝인 현수는 말을 이었다.
 “너 근데 요즘 몸 근질거리지 않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허구한 날 치고박고 쌈질하던 놈이 평화롭게 헬스나 하고 공부나 하면 분명 근질거릴 텐데······?”
 현수의 말은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담이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세요?”
 현수는 바깥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 우리 애들이랑 대련 좀 해 줘야겠다.”
 “대련요?”
 “그래, 대련. 인마.”
 
 오랜만에 도복을 입고 대련장에 선 철준은 감회가 새로웠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철준의 첫 상대는 형구였다.
 그가 정중히 인사하자, 철준 또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현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수련생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가 시작됐고,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형구는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였다. 현수의 말에 의하면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졌을 거라는 철준이 상대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직접 맞닥뜨려 보니 아직 공방이 한 번도 오가지 않았음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형구가 먼저 움직였다. 철준의 자세에서 빈틈을 찾을 수 없다면 공격으로 그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형구의 발길질을 가볍게 피한 철준은 자세를 낮추며 그의 다리를 걸었다.
 하지만 형구 또한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쉭.
 형구는 가볍게 점프하여 철준의 공격을 피해 낸 후 곧바로 다시 달려들었다.
 형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처음부터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철준은 여유로웠다.
 ‘뭐가 이렇게 느리지? 내 신체 능력이 향상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대충 몸이 풀렸다고 느낀 철준은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타탓 퍽!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철준은 형구의 가슴팍에 짧은 동작으로 주먹을 한 방 꽂아 넣었다. 어찌할 새도 없이 공격에 당한 형구는 순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빠르다······!’
 철준의 공격을 인지하기도 전에 가격당한 형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철준의 공격에 당한 가슴팍이 욱신거렸지만, 극도로 흥분된 탓인지 그것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형구는 철준의 스피드에 놀랐다.
 반면 철준은 힘 조절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감을 잡는 중이었다. 철준은 자신이 자칫 실수하면 주먹 한 방에 형구의 흉근이 함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형구는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수차례의 공방이 이어졌고, 주로 형구의 공격을 철준이 막아 내는 모양새로 대련은 진행되었다.
 ‘이제 더 끌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형구의 움직임도 슬슬 둔해지기 시작했다. 철준이 마음먹고 공격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형구의 몸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터였다.
 철준은 그를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슈슉!
 방어만 하던 철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형구는 당황하여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사이, 철준의 오른손이 형구의 왼손을 낚아챘다.
 “헉!”
 순간적인 그의 움직임에 형구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철준은 그의 팔을 꺾고 종아리를 가격하여 그의 무릎을 꿇렸다.
 순간, 장내는 적막에 휩싸였다. 방금 전 철준의 동작은 너무 빨랐고, 또 자연스러웠다. 누가 보더라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든 철준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련을 끝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는 끝났고, 철준은 형구에게서 떨어져 나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뇨, 저야말로 오랜만에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는 유민준의 차례다. 보통의 대련이었다면 얼마간의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시작되었겠지만, 철준이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 버렸기에 곧바로 대련이 시작됐다.
 삑!
 형구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지는 것을 본 민준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자신과 평소 비등한 실력인 형구를 어린아이 상대하듯 하는 자라면 어차피 이길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방금 철준이 대련하는 것을 보았으니 형구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만의 착각이었지만.
 슉.
 형구의 주 무기가 다리인 반면, 민준은 주먹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주먹이 매섭게 철준의 급소를 노렸다.
 빠르게 쇄도해 오는 주먹들을 일일이 쳐 낸 철준은 그 틈새 틈새로 공격을 가하였다.
 순간의 짧은 타이밍을 노려 찔러 들어가는 가벼운 공격이었지만, 철준의 주먹에 실린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민준은 가드를 올려 그의 주먹을 막아 냈다. 하지만 막았다고 해서 데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팔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전력을 다해 내지른 정권을 그대로 받아 내는 느낌이었다.
 팔이 얼얼하기는 했지만, 정신을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철준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준의 공격에 딱히 특별하달 만한 것은 없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빠르고 강할 뿐 화려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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