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도시의 지배자 : 김철

도시의 지배자 1

2017.05.08 조회 3,025 추천 25


 프롤로그
 
 
 우르르, 콰쾅!
 쏴아아아!
 천둥과 벼락이 내리치면서 폭포수 같은 비가 세상에 내리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실내.
 화르르르.
 갑자기 허공에서 작은 불씨가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주먹만 한 크기의 불로 타올랐다.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신비스러운 현상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조용했다.
 어두웠던 실내가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한 남자가 검은 슈트를 입고 소파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는데, 정체를 파악할 정도로 실내가 밝지 않아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스스스스.
 은은한 빛과 함께 그의 손에는 수제 양장 앨범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색이 바랜 녹색 가죽의 앨범으로 A4 용지 크기였다.
 스윽.
 앨범의 첫 장을 넘기자 특이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나에게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글이었다.
 “후후후, 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지배자가 되었지.”
 츠츠츠츠.
 그의 손에는 레드 와인이 담긴 와인 잔이 쥐어져 있었다.
 주우욱.
 한 모금을 마시고는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후후후, 운명적인 그날도 비가 내렸지······.”
 * * *
 1990년 12월 24일 월요일, 부산 해운대, 저녁 8시 15분.
 쏴아아아!
 크리스마스이브에 눈도 아니고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다.
 거리를 걸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인근의 건물에 몸을 피했다.
 “제길, 이런 날에 비라니?”
 20대 초반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10층짜리 해운대 빌딩의 정문 옆으로 뛰어 들어와 비를 피했다.
 175센티미터에 65킬로그램 정도 되는 평범하게 보이는 남자로, 짙은 갈색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며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비니 곧 그치겠군.”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일한 지 6개월 정도 되는 22살의 김철이었다.
 집과 반대 방향으로 버스가 달리는 걸 보고 그제야 자신이 버스를 잘못 탔다는 걸 알고는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려고 길을 건너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 이렇게 빌딩으로 비를 피하게 된 것이다.
 “제길, 오늘은 재수가 지독하게 없는 날이야. 회사에서 한 대리에게 깨지고, 바보같이 버스도 잘못 타고. 배고픈데 밥이나 사먹고 들어갈까? 아, 아냐. 그냥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는 게 돈도 안 들고 좋겠어.”
 잠시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 비가 그쳤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왔다.
 김철도 빌딩을 걸어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3명의 고등학생들이었다.
 아스팔트 도로에 한 발 내려선 김철은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버스 한 대가 다가와 멈추자 고등학생들이 올라탔고, 바로 출발했다.
 아직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지 않아서 김철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조명이 들어온 입간판이 바람에 넘어졌다.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술집의 입간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가 오는지 살피고 있던 김철은 하필이면 운이 없게도 물기가 있는 곳에 서 있던 바람에 전기에 감전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부르르 떨어댔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9인승 승합차의 급브레이크 소리가 터지면서 김철은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아, 이대로 내가 죽는 건가?’
 김철의 의식은 그렇게 끊어져 버렸다.
 
 
 제1장 일상
 
 
 해운대 병원 응급실.
 “으으, 여기가 어디지?”
 김철이 눈을 뜨고 깨어나자 흰 간호사복을 입은 김 간호사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김철 씨, 정신이 드세요?”
 “누, 누구세요?”
 “아, 저는 간호사예요. 청바지 속에서 신분증을 보고 알았어요.”
 “아, 예······. 그런데 여, 여기가 어디입니까?”
 “여긴 해운대 병원 응급실이에요.”
 “으윽, 병원이요? 나 안 죽고 살았어요?”
 “그럼요, 죽긴 왜 죽어요.”
 “그, 그럼?”
 “비록 전신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어요.”
 “아, 그런데 누가 날 병원에 데려왔습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가해 차량 운전사가 김철 씨를 응급실로 데려왔어요.”
 “그래요?”
 “예,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고맙습니다.”
 김철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어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잠에서 깨어난 김철이 눈을 뜨고 살펴보니 흰 천장이 보이고, 자신은 환자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 병원이구나.”
 덜컹.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와 30대 후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김철 씨, 깨어났어요?”
 “예, 조금 전에요.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아, 인사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교통사고의 가해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건 말입니다.”
 가해자에게서 교통사고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켜느라 전방을 주시하지 못한 탓에 그만 김철을 그대로 박은 가해자는 3미터 정도를 날아가 떨어져 기절한 그를 데리고 사고 장소 인근에 있는 해운대 병원으로 왔다고 했다.
 ‘아, 이제야 생각났어. 전기에 감전되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때 차에 받혔었어.’
 응급실에서 먼저 각종 검사를 했고, 결과는 타박상을 제외하고 큰 상처는 없지만 그래도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잠시 지켜보아야 한다고 해서 입원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얼마 후,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사죄한 가해자가 병실을 나갔다.
 오후에 김철은 교통사고가 나서 일주일 정도 출근하지 못한다고 회사에 연락했다.
 회사에서도 무단결근할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했었다며 실장이 몸조리 잘하라고 했다.
 그제야 김철은 회사에 대한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휴우, 이제야 안심이야.”
 그렇게 김철은 5일 동안 해운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다.
 덜컹.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데다 60평이나 되는 2층 단독 주택의 대문을 열고 김철이 들어섰다.
 22살의 회사원인 김철은 이 2층짜리 단독주택의 주인이었다.
 5살 때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은 채 김철과 같이 지금껏 살아오다 그가 군 제대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유산 상속으로 이 집의 소유주가 된 것이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이 집과 은행에 예금해둔 통장에 5천만 원이라는 제법 큰돈이 들어 있었다.
 외아들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아였기에 친척이 없는 김철이었지만, 아버지가 봉사 활동을 하던 희망 고아원에서 원장과 직원들이 장례를 거들어줘서 별다른 일 없이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인테리어 사무실에 취직이 되어 6개월이 지난 지금껏 일해오고 있었다.
 1층에는 신혼부부와 고등학생 아들을 둔 50대의 부부, 이렇게 두 가구가 전세로 살고 있었으며, 2층에는 독채로 김철이 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집 안이 엉망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남자의 집이 으레 그렇듯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은 냄비와 그릇이 한가득이었고, 거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으휴, 너무 지저분하니 청소부터 해야겠어.”
 모처럼 마음먹은 거라 창문을 열고 대청소를 실시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청소와 빨래를 하지 않았는지, 날이 저물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
 지칠 대로 지친 김철은 침대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으, 이젠 더 이상 못해. 너무 피곤해.”
 다음 날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눈을 뜬 김철은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쪼르르.
 그동안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누면서도 연신 하품을 하는 그였다.
 거실로 걸어 나온 김철은 벅벅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굵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개 중국집입니다.
 “여기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하고요, 군만두 한 접시 배달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곳이 어디죠?
 “청화 슈퍼 맞은편 벽돌집 이 층이요.”
 -예, 알겠습니다. 번개같이 배달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철은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캬아, 시원해. 이제야 살 것 같아.”
 라디오를 틀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아노 음악을 좋아해서 늘 즐겨 듣는 그였다.
 딩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예, 배달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자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여기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돈을 받아든 배달원이 음식을 내려놓고 가자 김철은 허겁지겁 자장면 곱빼기를 비벼 먹으면서 군만두도 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리고 목이 막히면 틈틈이 캔 맥주도 마셨다.
 “커억, 잘 먹었다.”
 빈 그릇을 문밖에 내놓고는 문을 닫았다.
 “어디, 목욕이라도 해볼까나?”
 룰룰루, 휘파람을 불면서 욕실의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은 김철은 옷을 훌러덩 벗고 욕조 속에 들어가 기댔다.
 배도 부르겠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자 어느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아, 잠이 쏟아지네? 못 참겠어. ···쿨쿨쿨.”
 평소에는 조용하게 자는 그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코를 골았다.
 우우우웅.
 그런데 김철이 잠에 빠진 후, 욕실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명음이 터지면서 욕실에 있는 물품들이 스르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마치 유령이 장난이라도 치는 듯 비누를 비롯해 칫솔, 치약, 컵까지 마구 떠다녔다.
 나중에는 욕조에 있는 물까지 방울지면서 허공으로 스르르 떠올라 날아다녔다.
 그런 상황인데도 김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으, 으응?”
 잠에서 깨어난 김철은 욕조에서 잠이 들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아, 깜빡 잠이 들었었구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잔 것 같은데 세 시간이나 잤어?”
 욕조 속의 물이 식은 걸 보니 그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야?”
 김철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욕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혹시 도둑이?”
 욕조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는 조심조심하면서 욕실을 나와 보았다.
 거실은 별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아 안방 문을 열어 확인해보았지만 역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도둑이 든 것도 아니고, 이상한 점은 없는데 왜 욕실만 난장판이 되었지?”
 아무도 침입한 사람이 없었기에 벌써 건망증이 생겼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김철은 그동안 못했던 조깅을 하려고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끼룩끼룩.
 흰 바다 갈매기 한 마리가 울면서 푸른 바다 위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으흡, 역시 바다는 마음이 탁 트이는 게 정말 좋아.”
 해변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동백섬으로 향했다.
 등산로가 잘 닦여 있는 길이라 조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에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운동복을 입고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김철도 사람들을 따라서 생수를 마시면서 조깅을 했다.
 “헉헉··· 아, 땀 흘리면서 이렇게 조깅하니까 상쾌하고 좋다.”
 하지만 흘렸던 땀이 식자 쌀쌀한 기온이 느껴졌다.
 “아, 뜨거운 온천에 들어가서 목욕하고, 삼계탕 집에서 따끈한 삼계탕으로 몸보신 좀 해야겠어.”
 모처럼 즐거운 일요일을 보낸 김철은 벌써 날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김철은 모르고 있었지만, 또다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안방에 있는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날아다니다가 떨어졌다.
 다행히 큰 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깊은 잠에 빠진 김철은 전혀 이 같은 사실을 몰랐다.
 출근해야 하는 월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잠을 자던 김철은 눈을 뜨면서 깨어났다.
 “아으, 음··· 잘 잤다. 어? 이, 이게 왜 이래?”
 안방에 있던 각종 물건들이 펼쳐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다가 정리하지 않고 그냥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도둑이 들었다 생각하고는 집 안을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욕실에서처럼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으음, 내가 몽유병이라도 생긴 걸까?”
 은근히 불안감이 생겼지만 출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씻고는 옷을 갖추어 입었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해운대에 위치해 있는 최고 인테리어.
 김철이 다니는 최고 인테리어는 사장을 포함해 12명으로 이루어진 회사로, 120평이나 되는 사무실을 갖추고 있기에 같은 업계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9시까지 출근이었지만, 오늘 김철은 조금 이른 시각인 8시 35분에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에는 한기운 대리가 제일 먼저 출근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 대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아··· 김철 씨, 교통사고 났다더니 몸은 괜찮아?”
 “예, 덕분에 뼈는 이상 없고 전신 타박상만 입어서 오늘 출근했습니다.”
 “고생했어, 김철 씨.”
 “한 대리님, 커피 한 잔 갖다드릴까요?”
 “그래주면야 나야 고맙지.”
 “그럼 제가 한 잔 타드리겠습니다.”
 커피믹스 커피를 두 잔 탄 김철은 한 잔은 자신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머지 한 잔은 한 대리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김철 씨.”
 “예, 그럼 일보겠습니다.”
 “그래.”
 김철은 양복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는 자리에 걸려 있는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후루룩.”
 김철이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갖다 두고 돌아올 때, 세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검정 재킷에 검정 스커트, 흰 블라우스를 입은 2명의 여자였다.
 “김철 씨, 출근했네요?”
 “예, 박 대리님.”
 “김철 씨, 이젠 괜찮은 거예요?”
 “예, 수정 씨. 타박상이라 이젠 괜찮습니다.”
 출근 시간 5분을 남겨 두자 허겁지겁 네 사람이 더 뛰어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김철과 같은 평사원이지만 입사 선배인 김국현이 대표로 말하면서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때 검은 서류 가방을 든 40대 후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김철 씨, 일주일 만인가?”
 “예, 과장님.”
 “병문안도 못 가서 미안해.”
 “아, 아닙니다. 가벼운 타박상이었습니다.”
 “음, 김철 씨도 출근했고, 오늘 점심은 내가 쏠 테니 그리 알아.”
 “예, 과장님.”
 40대 후반인 고영민 과장은 사장의 처남이면서 회사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그때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미모의 여성이 들어서자 사무실 직원들의 얼굴이 일제히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장 최한수의 외동딸인 최미래 실장이었다.
 오늘도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멋진 패션을 보여 준 그녀는 하이힐을 신어 180센티미터나 되는 큰 키에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흰색과 회색이 섞인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옷걸이에 모피 코트를 벗어 걸고 의자에 앉자 어느 디자이너의 옷인 듯 흰색과 검정색이 조화를 이룬 멋진 원피스와 시원스럽게 뻗은 허벅지가 드러났다.
 이렇듯 S라인의 특급 모델 같은 아름다운 몸매와 미스코리아를 방불케 하는 얼굴까지 가지고 있는데도 지적이고 섹시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게다가 조기 유학으로 프랑스에서 5년, 이태리에서 3년째 유학 생활을 하다가 5개월 전에 귀국했기에 영어와 불어, 이태리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하는 엘리트였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으로 큰 계약이라 할 수 있는 10억 원짜리 계약을 무려 5건이나 성사시킨, 대단한 능력과 외모를 가진 25살의 그녀였기에 어지간한 남자는 앞에 서면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11시가 되자 최고 인테리어의 사장인 최한수가 출근했다.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유흥가인 광복동에 7개의 상가와 서면에 5개의 상가를 가지고 있고, 부산 시내 곳곳에도 땅을 가지고 있으며, 10층짜리 건물도 2개나 소유하고 있는 수백억 원대의 갑부였다.
 그래서인지 최한수 사장은 최미래 실장이 들어온 이후에는 11시 정도에 출근해서 하루에 한 번 보고를 받고는 나가 버렸다. 현재 다른 사업을 하나 구상 중인 모양이었다.
 오늘 점심은 고영민 과장이 김철의 퇴원 기념으로 사주었는데 갈비찜이었다.
 오후에 그동안 밀린 업무를 보느라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최미래 실장을 비롯해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했지만 김철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느라 두 시간 정도를 더 일하고는 회사에서 나왔다.
 “아, 이제 퇴근했으니 집에서 쉬어야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김철은 씻자마자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쿨쿨쿨.”
 모처럼 늦게까지 일했더니 몸이 피곤했는지 코까지 골았다.
 잠버릇인지 팔을 휘젓자 안방에 있는 물건들이 그의 손짓에 따라 날아다니기도 했고, 바닥에 떨어지거나 다시 떠오르곤 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어 눈을 뜬 김철은 방 안이 어지럽혀져 있는 걸 보고는 놀랐다.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였기 때문이다.
 “으··· 오늘 또? 내가 몽유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안 꾸던 꿈까지 매일 꾸었다.
 꿈속에서는 이상하게도 가까운 미래, 즉 10년 정도의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마치 자신의 눈이 허공에 떠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는데, 하늘 높이 나는 매처럼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거와 유사했다.
 게다가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그런 장면이 보였지만 보고 싶은 도시의 풍경을 자세하게 내려다보면 점점 가까이 볼 수 있었고, 거리의 일상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들까지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어젯밤에 꾼 꿈속에서는 길을 걸어가는 중년 남자의 신문을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1999년 12월 2일의 신문이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너무 신기해서 즐겁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똑같지는 않아도 유사한 장면을 보게 되자 왜 이런 꿈을 꾸는지 궁금해졌다.
 오늘도 김철의 일상이 바쁘게 이어졌다.
 회사에 출근해서 그동안 밀렸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야식을 배달시켜 먹었으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이하면서도 신기한 꿈을 꾼 그는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서 퇴근해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꿈을 꾸느라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특별하게 병이라 할 수도 없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5일간 안방이 난장판이 되는 일이 반복되자 김철은 특단의 조치를 마련했다.
 “으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어. 오늘은 비디오카메라로 찍어볼 거야.”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김철은 안방에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했다.
 저녁을 먹고 샤워한 후 텔레비전을 틀어 연속극을 조금 본 김철은 침대에 눕기 전에 비디오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난 김철이 비디오카메라를 확인해보자 누가 침입하지는 않았지만 유령이 있는지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거나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면서,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방이 난장판으로 변했다.
 “으음, 누가 침입한 건 아니었구나. 이것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부터 생겨난 일이야. 오늘은 토요일이라 오전에만 일하면 되니까 퇴근하고 집에 와서 다시 고민해보자.”
 밝고 쾌활했던 김철이 말이 없고 일에만 빠져 있자 동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큰 고민을 동료들과 의논할 순 없었기에 일단 회사에 출근해서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비치는 아침.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일어난 김철은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그런 후 소파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달라진 점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매일 꿈을 꾼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물건이 날아다니는 점이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라 어느 정도 추측과 요령이 생겼다.
 “음, 일단 내가 침대에 누워 잠잘 때 일어난 일들은 아마도 염력 때문에 생겨난 일인 것 같아. 그 사용법을 잘 모르다 보니 물건이 마구 날아다녔었어.”
 김철의 추리가 맞았다. 교통사고로 인해서 생겨난 능력으로, 염력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잘 몰랐다.
 “오늘 밖에 나가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소파에서 일어난 김철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캐주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1991년의 1월 초 날씨는 제법 추웠다.
 더구나 겨울 해운대 해수욕장의 해변이라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낮았다.
 “으, 추워. 하지만 꼭 확인해야 돼.”
 김철은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기에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때 같았으면 방 안에 있거나 아님 따뜻한 곳에 있었을 텐데,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해변의 한쪽에 앉아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8분이었다.
 “음, 이제 일 분 후면 저쪽에서 자전거를 탄 소녀가 나타나겠지?”
 시계의 초침이 오늘따라 아주 늦게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때, 진짜 저쪽에서 자전거를 탄 소녀가 나타났다.
 청바지에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는 소녀는 18살 정도로 보였다. 여고 2, 3학년인 모양이었다.
 김철은 그 여고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여고생은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갑자기 기우뚱거리더니 모래사장에 자전거를 처박고는 넘어졌다.
 다행히 모래였기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창피했는지 서둘러 일어나 자전거를 끌고는 저쪽으로 사라졌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김철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으,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너무나 충격적인 일에 경악한 나머지 김철은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머리를 옆으로 흔들면서 정신을 차린 그는 굳어진 얼굴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으, 설마 이것까지 맞는 건 아니겠지?’
 김철이 이동한 곳은 해운대역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추스르면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은 오후 3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음, 아직 십삼 분의 시간이 남았어.’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셨는데도 아직 예정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김철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도 초조한지 시계를 몇 초 단위로 계속 들여다보았다.
 “오··· 사··· 삼··· 이··· 일··· 제로.”
 예정된 시각이었다.
 끼이이익.
 콰쾅!
 급브레이크 소리가 터지면서 택시와 승용차가 충돌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택시의 뒤로 승용차가 빠르게 달려오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는지 그만 택시의 뒤 범퍼를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뒷목을 잡으면서 문을 열고 나왔고, 승용차 운전사는 별다른 상처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빵빵빵.
 자동차 경음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주변 일대에 극심하게 차량이 밀려 혼잡했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차를 길 가장자리에 붙였다.
 애애애앵!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서 레커차 2대가 도착해 차를 견인해서 사라졌다.
 이 또한 하루에 수십 건이나 일어나는 교통사고였지만 김철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이럴 수가!”
 2가지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한 그였기에 놀랍기도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여고생이 자전거에서 넘어진 것은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 일까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장면이 정확한 시각에 일어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집으로 돌아온 김철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캬아, 짜릿할 정도로 차가워.”
 소파에 앉아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김철이 생각하기에 꿈을 꿀 때에는 과거를 제외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시간과 장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염력도 펼칠 수 있으니, 오늘 깨어 있을 때도 가능한지 알아보려 마음먹었다.
 계획을 세우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서둘러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김철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노려보면서 들어올리는 손짓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익! 처음이라서 그럴 거야.”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리모컨을 노려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실패였다.
 어차피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에 실망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자 눈도 아프고 지쳤다.
 “으아! 왜 안 되는 거야? 젠장!”
 그때 불현듯 녹화해두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안방에서 녹화해두었던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와 틀었다.
 역시나 물건들이 마구 날아다니는 장면은 다시 보아도 정말이지 신기했다.
 장면 하나하나를 천천히 확인해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손짓에 따라 물건이 대부분 움직이는군?”
 김철이 생각하기에 염력을 펼치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 정신 집중을 한다고는 했지만 완전하지 못해서 염력이 안 되는 듯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후 다시 눈을 뜨고 리모컨을 노려보았다.
 ‘움직여라. 움직여.’
 스윽.
 리모컨이 약간 움직이다가 멈추었다.
 “우아! 리모컨이 조금이었지만 움직이다가 멈추었어!”
 흥분한 김철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번 염력이 성공하자 그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리모컨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두 번이나 성공하자 요령이라고나 할까, 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생겼다.
 “그, 그래, 이 맛이야. 아무나 할 수 없는 염력을 사용하니까 정말 신기하다. 하하!”
 정신을 집중하면서 손짓으로 리모컨을 가리켜 위로 들어올리자 스르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신이 한 일이었지만 정말 신기한 장면이었다.
 “킬킬··· 리모컨이 떠올랐다, 떠올랐어.”
 휘이익.
 이번에는 손짓으로 리모컨을 움직여 보자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원래 있던 자리에 스르르 내려앉았다.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그렇게 전화기를 비롯해 숟가락, 그릇, 냄비까지 각종 물건을 들어올려 원하는 대로 움직여 보았다.
 “하하하, 이제 어지간한 물건은 다 띄울 수 있어. 이번에는 아예 침대를 한번 들어올려 볼까?”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침대를 노려보면서 양손으로 들어올리는 동작을 취했다.
 역시 침대는 이전의 물건보다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허공으로 들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 정신을 집중해서 염력을 사용하자 침대가 약간 움직이더니 스르르 허공으로 떠올랐다.
 “떠, 떠오른다. 떠올라. 으하하하!”
 염력으로 침대가 허공에 떠오르자 기뻤지만 정신력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해서인지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으으, 더 이상은 무리야.”
 스르르, 침대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털썩.
 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려 주저앉았다.
 “으으, 너무 피곤해.”
 탈진한 사람처럼 되어버린 김철은 기어서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뚜뚜. 뚜뚜뚜.
 알람시계의 트럼펫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김철이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에 너무 무리하게 염력을 사용해서인지 피로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스윽.
 침대에 누워서 손짓하자 부엌에 있는 냉장고 문이 열리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생수병이 스르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벌컥벌컥.”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는 염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인지 꿈은 꾸지 않았다. 또한 안방의 물건도 움직인 것 없이 그대로였다.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김철은 특별하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 일찍 도착한 김철은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출근하기 위해 도시인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으음, 지난밤 염력을 많이 사용했더니 그 후유증 때문인지 목덜미가 뻐근해.”
 마치 이틀 밤을 지새운 사람 같은 피로도였다.
 얼마 후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을 시작했고, 김철도 밀린 사무실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야, 김철 씨, 요즘 너무 열심히 하는데?”
 김국현이 등 뒤에서 내려다보면서 말했지만 김철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교통사고 때문에 업무가 많이 밀렸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몸조심해.”
 “예, 고맙습니다, 김 선배.”
 김철은 일에 한 맺힌 사람처럼 그렇게 퇴근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
 해운대 요트 경기장 옆 방파제, 아침 6시.
 요트 경기장 끝에서 시작해 동백섬까지 길게 방파제가 이어져 있었다.
 방파제 앞에는 파도로 입는 피해를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인 테트라포드(일명 삼발이)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테트라포드는 근해 구조물로 너울을 차단하고 해안의 침식을 막는 아주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이곳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감성돔이나 볼락 같은 횟감으로 쓰이는 바닷물고기를 많이 낚을 수 있고, 낚시의 손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철도 낚시를 좋아했지만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느라 미처 삶의 여유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던 터에 오늘 큰맘을 먹고 나온 것이다.
 붉은색 등산 조끼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데다 손에는 낚시 도구가 들어 있는 배낭까지 쥐고 있었다.
 “후후, 내가 본 대로라면 분명 저 자리에서 오늘 대어를 낚게 돼. 어디 진짜인지 보자.”
 방파제 앞 테트라포드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약 15분 정도 후에 푸른색 등산 조끼를 입은 낚시꾼이 다가오더니 김철을 발견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약 7~8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분명 꿈속에서 본 사람이 저 사람이었어. 원래 이 자리는 저 사람 자리이고, 내 자리가 저 자리였어. 어디 얼마나 꿈이 맞는지 볼까?”
 낚시 준비를 끝낸 김철은 바다에다가 낚싯줄을 힘차게 내뻗었다.
 촤르르.
 퐁!
 간이 접이식 의자를 펴서 앉자 5분도 안 돼서 입질이 왔다.
 ‘어엇? 물고기가 걸렸어!’
 휘리리릭.
 릴 낚싯줄을 감았더니 30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우럭이 걸렸다.
 “우아! 잡았다, 잡았어!”
 옆에서 낚시하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김철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주었다.
 신이 난 김철은 준비해둔 통에 잡은 우럭을 집어넣고는 다시 낚싯대를 던졌다.
 잠시 후 또 입질이 왔고, 줄을 감았더니 이번에는 제법 굵고 몸길이가 40센티미터 정도 되는 붕장어가 걸렸다.
 몸 빛깔은 등 쪽이 암갈색이었고, 배 쪽은 흰색인 놈이었다.
 ‘후훗, 정말 낚시할 맛 나는데?’
 미끼를 끼우고 다시 낚싯대를 바다에 던졌더니 얼마 후 또다시 입질이 왔다.
 낚싯줄을 감았더니 이번에도 우럭이었다.
 옆에 있는 낚시꾼은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김철은 벌써 3마리째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김철은 낚싯대를 던지는 족족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옆에 있는 낚시꾼은 겨우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우럭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김철은 벌써 6마리나 잡았다.
 ‘음,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감성돔만 잡으면 가야겠어.’
 특별히 이번에는 미끼를 2마리나 끼워서 바다에 던졌다.
 얼마 후, 낚싯줄이 팽팽해지면서 입질이 왔다.
 ‘왔다, 왔어. 바로 이놈인 것 같아.’
 팽팽팽.
 낚싯줄이 끊어질 정도로 팽팽해졌을 때 잘못하면 낚싯줄이 끊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줄을 더 풀었다. 그런 후 다시 감는 식으로 밀고 당기고를 했다.
 결국 낚싯줄에 걸린 감성돔도 지친 모양인지 그제야 끌려왔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놈은 역시나 감성돔이 맞았다.
 일제히 주변에 있던 낚시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들은 고기를 제대로 낚지 못했는데, 손맛을 혼자 제대로 느낀 김철만 즐거웠다.
 “우아, 큰 놈이야!”
 “휘유, 오늘 최고의 대어인 것 같군. 축하합니다.”
 김철이 낚은 감성돔은 몸길이가 56센티미터나 되었으며, 등 쪽에는 뾰족한 지느러미가 솟아 있고 몸빛은 암회색이었다.
 김철은 주위에 있는 낚시꾼들과 함께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회를 떴다.
 테트라포드 위는 위험해서 안전한 곳으로 나온 그들은 소주와 함께 회를 먹었다.
 “캬아, 바로 이 맛이야. 끝내줘.”
 “역시 감성돔이 제일 맛있어.”
 낚시꾼 한 사람이 김철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최고는 누가 뭐라 해도 이 감성돔을 잡은 사람이야.”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이 대단해. 낚시한 지 얼마나 되오?”
 “한 이 년 정도 됐습니다만, 그동안 회사 다니느라고 제대로 낚시할 기회가 없었어요.”
 “오늘 보니까 예사 솜씨가 아니던데?”
 “오늘 자리를 좋은 곳으로 잡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그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낚시를 잘해야 이렇게 대어도 잡지.”
 “하하하, 고맙습니다.”
 소주 반병에 잡은 물고기로 회를 쳐서 실컷 먹었더니 기분이 최고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김철의 마음은 평소와는 달랐다.
 ‘이 신기하고 무서운 능력을 잘만 활용한다면 나에게는 복이 되지만, 잘못 사용한다면 큰 재앙이 돼.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겠어.’
 술을 반병 정도 먹어서일까?
 집으로 돌아온 김철은 낚시 배낭을 한쪽에 잘 놓아두고는 샤워를 하고 나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 맥주를 하나 꺼내들고 단숨에 마셨다.
 “아, 시원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어 보던 김철은 예쁜 여자 탤런트가 나오자 갑자기 자신의 배우자가 될 여자가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졌다.
 ‘그래,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면서, 오늘은 꿈속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되새겨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김철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후후후, 정말 예쁘고 나의 이상형인 여자였어. 이제 난 어제의 김철이 아니야. 오늘부터는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두고 봐.”
 그날 오전부터 김철의 마음가짐은 크게 달라졌다.
 외모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지만 피곤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맡은 일에도 자신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 후.
 구정이라 불리는 5일간의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김철은 연휴 첫날에 부모님의 묘소에 다녀온 후 바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멘 후 집을 나섰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처음 그가 향한 곳은 한적한 기장군의 야산이었다.
 김철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등산객도 거의 없고 바다와 가까웠기에, 실험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야산으로 약 50미터 정도 들어가자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스윽.
 배낭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 쌍안경은 2킬로미터까지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장거리 레이저 거리 측정기로, 실험을 위해서 며칠 전에 구입해두었던 것이다.
 “좋았어, 잘 보이는군. 어디, 실험을 시작해볼까?”
 처음에는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였다.
 정신을 집중하고는 염력을 일으켰다.
 츠츠츠츠.
 역시 예상한 대로 쉽게 돌멩이가 허공으로 떠올랐고, 김철의 손짓에 다시 스르르 땅으로 내려왔다.
 “좋았어, 이번에는 좀 더 멀리 있는 것을 실험해봐야지.”
 이번에는 2배 거리인 1백 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돌멩이를 실험해보았는데 역시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시 땅으로 돌멩이를 내려놓은 김철은 점차적으로 거리를 늘려 실험해보았다.
 어느덧 실험 거리는 1킬로미터를 넘어서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작은 돌멩이를 장거리 레이저 거리 측정기로 보고 위치와 거리를 확인한 뒤 의지를 일으켜 돌멩이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아예 측정기로 보면서 실험해보았는데도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하하하, 지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이번에는 아예 장거리 레이저 거리 측정기의 최고 거리인 2킬로미터에 있는 돌멩이를 지정하고는 염력을 일으켰다.
 츠츠츠츠.
 흔들거리면서 돌멩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르르.
 그 돌멩이가 김철의 손짓에 의해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그에게 날아왔다.
 처척.
 손바닥 위에 돌멩이를 올려놓은 김철은 기쁨에 충만해졌다.
 “으음, 지금 상황을 보면 나의 염력이 이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인데? 거리는 그 정도면 된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얼마만큼 무거운 것을 들어올릴 수 있는지 실험해보면 되겠군.”
 주위를 살펴보자 마침 6백 미터 정도 떨어진 길가에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승용차니까 일 톤 정도의 무게는 될 테니 적당하겠어.”
 스윽.
 무거운 승용차를 들어올리기 위해서 양팔을 이용해 손짓했다.
 “으흡··· 야아압!”
 기합까지 넣고서 염력을 끌어올리자 신기하게도 승용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되는 걸 보고 염력을 더욱 끌어올리자 승용차는 2미터가 넘게 떠올랐다.
 더 높은 곳까지 들어올렸다가는 누가 보기라도 할 것 같아서 재빨리 승용차를 길에 다시 내려놓았다.
 “휴우······. 하하하하! 성공이야, 성공.”
 처음 염력을 이용하는 데에 성공한 이후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밤 꾸준하게 연습한 결실이 드디어 나타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걸 실험해보나 하면서 살펴보자 50톤 정도 되는 어선이 눈에 띄었다.
 “저 어선도 될까? 뭐 어때,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지.”
 생각해보니 그것이 맞았다.
 김철이 염력을 실험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용기가 났다.
 심호흡을 몇 번 한 김철은 기마 자세로 양발을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옆으로 펼쳤다가 가슴 앞으로 끌어 모아 들어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츠츠츠츠.
 50톤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가진 어선이라 그리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엔 아쉬웠기에 최대한으로 염력을 끌어 모아 사용했다.
 파도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님 염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선이 출렁거렸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게도 50톤이나 되는 어선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흡! 조, 조금만 더······.”
 자신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자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양팔과 양손이 부르르 떨리면서도 계속 염력을 불어넣었다.
 어선은 2미터 정도 떠올랐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는지 그 상태에서 멈추어 있었다.
 점점 김철의 염력이 떨어지자 어선이 조금씩이지만 아래로 내려갔다.
 “음, 더 이상은 무리야. 그만 멈춰야겠어.”
 그의 손짓에 따라 어선이 다시 물에 내려왔다.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소매로 닦은 김철은 마치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지쳐 버렸기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헉··· 적당한 무게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엄청난 무게를 가진 것을 들어올리는 것은 염력을 많이 사용하는 일이니 앞으로는 자제해야겠어. ···벌컥벌컥.”
 배낭 속에서 생수병을 꺼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셨다.
 그러면서 조금 쉬었더니 지친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땀이 식어서 그런지 쌀쌀했다.
 “아 참! 보온병에 커피 타온 게 있었지? 빵도 사왔으니 같이 먹어야겠어.”
 스윽.
 김철은 배낭 속에서 빵과 함께 보온병을 꺼내 준비해온 따뜻한 커피를 잔에 부었다.
 “냠냠··· 쩝쩝.”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커피와 빵을 먹었다.
 얼굴에 미소 짓고 있는 그는 일차적인 실험이 성공해서인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염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김철은 무리하게 침대를 들었다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매일같이 염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연습한 결과, 지금은 어지간한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는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50톤이나 되는 어선을 염력으로 들어올려 일시적으로 지치긴 했지만, 조금만 쉬어주면 금세 회복되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된 데는 염력을 연습하면서 요령이 생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몸이 염력을 사용하는 데에 적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염력의 실험을 다시 해야겠어.”
 혼자 중얼거리던 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더니 사람 몸통 정도 크기의 바위를 발견하고는 손짓했다.
 두둥실.
 너무나 손쉽게 바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하하, 이젠 바위를 들어올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대단해.”
 김철의 손짓에 바위가 날아다니다가 멈추었다.
 꽈악.
 손가락을 움켜쥐자 허공에 떠 있던 바위가 그대로 박살나버렸다.
 후두두둑.
 박살난 바위 파편이 땅에 떨어졌다.
 자신이 해놓고도 흐뭇한지 고개를 끄덕이던 김철은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바위를 바다로 이동시켜 박살내봐야겠어.”
 스르르.
 바위는 김철이 원하는 대로 허공을 날아 바다로 이동되었다.
 “으흡··· 얍!”
 파삭!
 후드득.
 박살난 바위는 바다 속으로 떨어져 사라졌고, 실험은 이번에도 성공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배낭을 메고는 산을 내려왔다.
 설 연휴라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상가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기에 김철은 집에서 저녁 식사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은 맛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허전하기도 했다.
 일반 가정에서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도 지내고 함께 친목도 도모하고 그러는데, 그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찾아갈 곳도 없는 쓸쓸한 명절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던 김철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냥 교통사고가 아니라 비가 내렸기에 전기에 먼저 감전되었고, 그다음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인데 일종의 초능력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님 불행일까?’
 남들에게는 없는 능력이 생기자 갑자기 슈퍼맨이나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용사들이 생각났다.
 자신도 그들처럼 능력자이기에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나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아주 우연히 찾아온 능력이었고,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음, 모든 것은 나의 결정에 달린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해봐야겠어.”
 김철은 어려운 문제를 접한 학생처럼 깊은 고민에 빠졌다.
 5일간의 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하는 날.
 쓸쓸하게 느껴졌던 설 연휴도 어느덧 다 지나가버렸다.
 김철은 그동안 나름대로 깊은 고민을 한 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렸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영웅이 되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난 그냥 나 자신만을 최우선으로 해서 살고 싶어.”
 김철이 결정한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꿈속에서 최고 20년까지의 미래를 볼 수 있었지만, 며칠 전부터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가능했다. 또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과거 20년까지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와 미래를 전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끼이익.
 버스가 멈추고 김철이 뒷문으로 내렸다.
 최고 인테리어는 버스 정류장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김철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기운 대리가 벌써 출근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음, 대단해. 언제나 열심히 하는 한 대리야.’
 “한 대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아, 어서 와, 김철 씨. 설 연휴는 잘 보냈어?”
 “예, 저야 일가친척이 없으니 조용하게 집에서 보냈습니다만, 한 대리님은 바쁘셨죠?”
 “뭐, 그렇지. 고향에 내려가 성묘 다녀오고, 제사도 지내고, 어젯밤에 돌아왔어.”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좋지. 고마워.”
 “아닙니다. 저도 한 잔 하고 싶어서요.”
 김철은 커피를 두 잔 타서 한 잔을 한기운 대리의 책상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맛있었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이 하나 둘씩 사무실로 들어왔다.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당분간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회사 인근에 있는 최고 증권 회사를 찾은 김철은 그곳에서 거래 통장을 만들고 고객 카드도 발급받았다.
 S전자를 비롯해 H자동차, K자동차, H철강 등 12개 대기업의 주식을 골고루 구입했는데 무려 5천만 원이나 되었다.
 예금 통장에 들어 있던 바로 그 돈이었다.
 ‘후후, 이제부터 시작이야.’
 김철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최미래 실장이 그를 찾았다.
 “실장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래요. 동서 화학 건의 클라이언트와 미팅이 있는데 바쁜 일 없죠?”
 “예, 실장님.”
 “좋아요, 그럼 바로 자료 준비해서 나와 같이 가요.”
 “예, 알겠습니다, 실장님.”
 자료를 준비한 김철은 최미래 실장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빌딩의 정문 앞에 그녀의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붉은색 페라리였다.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된 젊은 여자가 이런 스포츠카를 타다니 정말 대단해.’
 빌딩 경비원이 주차된 곳까지 따라와 굽실거렸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의 시선도 단번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남자든 여자든 최미래의 멋진 모습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석에 그녀가 오르자 김철은 조수석에 앉았다.
 부웅. 부우우웅.
 경쾌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지듯이 출발한 페라리는 곧 빠르게 도심을 질주했다.
 
 
 제2장 부자 되기 작전
 
 
 부아아앙!
 페라리가 도심을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은 동서 화학의 제3공장이 건설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최고 인테리어가 맡은 공사는 동서 화학 제3공장의 사무실과 직원들의 대형 식당 건물이었다.
 현장에는 동서 화학의 기획실장인 윤동훈이 나와 있었다. 그는 올해 28살의 나이에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회장의 삼남이었다.
 동서 화학의 창업주이며 회장인 윤현식에게는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
 장남은 사장이었고, 둘째는 대학 교수였으며, 삼남인 윤동훈은 3년 전에 귀국해서 현재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내딸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페라리를 한쪽에 주차한 최미래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김철이 자료를 들고 뒤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최미래 실장님.”
 “어머, 실장님께서 먼저 와 계셨네요?”
 서로 간단하게 인사할 때 김철이 최미래의 옆으로 다가갔다.
 “실장님, 저희 회사의 직원인 김철 씨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동서 화학의 기획실장 윤동훈입니다.”
 “김철입니다.”
 윤동훈이 악수를 청하자 김철도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이번에는 윤동훈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윤기한 과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철입니다.”
 “윤기한 과장입니다.”
 서로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의 작업률은 78퍼센트를 보이고 있었고, 크게 문제 될 것은 아직 없었다.
 김철이 설계 도면을 보여 주면서 작업 공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자 윤동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공정대로라면 다음 달 중순까지는 완공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공사 기간이 예정보다 한 달 정도 빨리 끝나는 겁니까?”
 “예, 실장님,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럼 저희 회사로서도 이익이군요.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사고 없이 마무리 작업이 잘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십시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김철 씨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어떻습니까, 최 실장님?”
 윤동훈 기획실장이 묻자 최미래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좋아요.”
 프랑스 레스토랑 보르도.
 고급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인테리어가 아주 화려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음식 값이 무척 비싼 곳이었다.
 윤동훈 기획실장과 최미래 실장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 테이블과 좀 떨어진 곳에 김철과 윤기한 과장이 앉았다.
 ‘후후,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군.’
 김철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김철과 마주 앉은 윤기한 과장은 알 수 없는 그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철 씨, 와인 한잔하시죠?”
 “아, 아닙니다. 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예, 간이 안 좋아서 지금 약을 먹고 있거든요.”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과장님.”
 김철과 윤기한 과장은 5만 원 정도의 저렴한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윤동훈 기획실장과 최미래 실장이 먹는 요리는 25만 원이나 하는 고급 코스 요리였다.
 거기에다가 샤또 마고 와인을 시켜 먹고 있으니 사실상 음식 값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보였다.
 김철은 식사를 하면서도 윤기한 과장에게 와인을 따라주었고, 그는 잘도 받아 마셨다.
 한 병을 혼자 다 마신 그는 취기가 올라와 얼굴이 빨개졌다.
 “과장님, 한 잔 더 하시죠?”
 “그럴까?”
 윤기한 과장은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다.
 윤동훈 기획실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답군. 꼭 내 여자로 만들어야겠어.’
 윤동훈 기획실장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미래 실장은 와인을 몇 잔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올라왔다.
 “최 실장님, 한 잔 더 하시죠?”
 “고마워요, 그럼 한 잔만 더 할게요.”
 쪼르르.
 최미래 실장이 내민 잔에 윤동훈 기획실장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흐흐, 외모만 완벽한 게 아니라 뒷조사를 해보니 집안까지 마음에 들어.’
 최고의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윤동훈 기획실장은 계약할 때부터 오늘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와인이 맛있네요.”
 “그러시다고 하니 오늘 와인은 제가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흐흐, 오늘을 위해 특별히 와인에 약을 타두었지.’
 이제 곧 뜨거운 밤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되는 그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어느새 테이블 앞으로 김철이 다가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실장님, 취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그만 하시죠?”
 “음, 내가 그래 보여요?”
 “예, 실장님. 내일 출근도 하셔야 하니 그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알았어요. 윤동훈 기획실장님, 오늘은 제가 취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날게요.”
 “예, 그렇다면 일어나셔야죠.”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격이었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으음, 저놈 때문에 일을 망치다니. 젠장!’
 김철은 입 안에 다 들어온 먹이를 내뱉어야 하는 윤동훈 기획실장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지만, 이런 자에게 최미래를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었다.
 “댁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윤동훈 기획실장님. 최 실장님은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그래도 제가 식사에 초대했는데 제가 모셔다드려야죠.”
 “아닙니다. 제가 술을 안 마셨으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최 실장님, 그렇죠?”
 “그래요, 김철 씨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줘요.”
 최미래 실장이 그렇게 말하자 윤동훈 기획실장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최 실장님 댁까지 잘 모셔다드리세요.”
 “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 그래요. 오늘 수고 많았는데,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죠.”
 “예, 저녁 잘 먹었습니다. 그럼.”
 김철은 술에 취한 최미래 실장을 부축해서 먼저 나갔다.
 윤동훈 기획실장은 화가 치밀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부아아앙!
 페라리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윤동훈 기획실장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검은색 H자동차의 대형 승용차 한 대가 스르르 다가와 멈추었다.
 뒷좌석에 그가 타자 조수석에는 윤기한 과장이 탔다.
 “윤 과장님, 혼자서 술을 드신 겁니까?”
 “아, 예, 실장님. 간이 안 좋아서 약을 먹고 있다고 하기에······.”
 “그렇다고 혼자서만 술을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실장님.”
 ‘으음,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아깝군. 젠장, 그놈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어.’
 “이 기사, 그만 갑시다.”
 “예, 실장님.”
 부우웅!
 H자동차의 대형 승용차도 레스토랑을 빠져나가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부아아앙!
 페라리는 역시 그 명성대로 뛰어난 성능을 가진 스포츠카였다.
 도심을 빠르게 달려 얼마 후 최미래 실장의 집 앞에 도착했다.
 끼이익.
 “실장님, 집에 도착했습니다. 실장님?”
 “으응, 우리 집?”
 “예, 실장님. 이제 연극 그만 하고 눈 떠보세요.”
 “김철 씨, 어떻게 알았어?”
 “주량이 와인 세 병이신데 와인 한 병에 인사불성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내 주량을 어떻게······?”
 ‘아차! 최미래 실장과는 술을 처음 마셨지?’
 “김철 씨, 내 주량을 어떻게 알았냐니까?”
 “그, 그냥 그 정도 될 것 같아서요.”
 “김철 씨, 수상해? 샤또 마고를 여러 번 마셔 보았는데, 오늘 것은 약간 맛이 달랐어.”
 “혹시 가짜였습니까?”
 “그건 아닌데, 술에다 약을 탄 것 같았어.”
 “술에다 약을 탔다고요?”
 “그래. 주량이 세 병인데, 한 병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는데도 기분이 이상해졌어. 뭐라고 할까? 흥분제를 마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
 ‘미각이 아주 뛰어나구나.’
 “그런데 왜 취한 연극을 하신 겁니까?”
 “윤동훈 기획실장의 눈빛이 무서웠어. 술도 이상했고 말이야.”
 “그래서 연극을 한 거군요.”
 “그래. 그건 그렇고, 김철 씨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와봤는데 어떻게 알고 있어?”
 “그, 그건··· 예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거 이상하네. 아빠는 직원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최미래 실장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우기는 수밖에 없었기에 김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언제까지 차 안에 계실 겁니까?”
 “아차! 그렇지? 김철 씨, 어쨌든 고마워.”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김철 씨.”
 김철은 자동차 키를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최미래 실장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철은 5분 정도 걸어가자 빈 택시가 있어 그걸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오전.
 김철은 회사 근처에 있는 은행에 들어가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1억 원을 대출해 그 돈을 가지고 증권 회사로 향했다.
 어제 구입했던 주식은 회사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주당 1천 원에서 2천 원 정도가 올랐다.
 수수료를 제하고 7백만 원 정도 번 셈이었다.
 오늘은 10개 회사의 주식에 1억 5천7백만 원을 전부 투자했다.
 회사로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최미래 실장이 서류를 뒤적이면서 힐끔거렸다. 김철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자신의 업무에만 신경 썼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김철은 내일의 주식 현황표를 확인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평소와 같이 특별한 일 없이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김철은 오후 3시에 사무실을 나와 인근에 있는 증권 회사로 향했다.
 하루에 한 번 그가 잠깐의 외출을 한다는 걸 최미래 실장은 알고 있었다. 집에 한 번 태워다준 이후부터 그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관심을 보인 사람은 유능하다 알려진 한기운 대리였지만 이제는 그가 아니라 김철이었다.
 뒷조사라도 한 것인지 자신에 대해 몇 가지를 알고 있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거라 뒷조사를 한다고 해도 잘 모르는 거였다.
 김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모든 것이 새로웠다.
 맡은 업무는 철저하게 처리했고, 그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뭔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매일같이 잠깐의 외출을 하기에 그것이 궁금해 오늘은 은밀하게 뒤를 미행해보았더니, 최고 증권 회사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증권 투자를 한다고 했었지?’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김철은 붉게 물든 주식 시세 전광판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최고 증권 회사의 여직원 송민정은 한 달 전에 김철이 5천만 원을 가지고 처음 계좌를 개설하고부터 증권 투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계좌를 개설하기에 처음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하루에 한 번 들어와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고 새로운 주식을 구입하고 나가는 것을 열흘간이나 계속 반복하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사는 주식은 언제나 올랐으며, 둘째 날에는 1억 원을 더 가져와 주식 투자를 했었다.
 열흘이 지났을 때 그의 자본금은 3억 4천만 원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이 좀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지만 20일이 지난 다음부터는 생각을 달리했다.
 그에게는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남다른 안목이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정확하게 한 달이 되는 어제, 김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자 12억 원이나 되는 자금이 계좌에 들어왔다.
 그걸로 또다시 다른 종목의 주식을 전부 매수하고 나갔다.
 여직원 송민정도 즉시 김철이 매수한 주식 종목 중에서 2개의 종목을 선택해서 구입했는데, 무려 3천만 원이나 됐다.
 결혼 자금으로 모으던 적금까지 전부 해약하고 투자한 자금이었다.
 김철이 송민정 앞으로 다가오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주식을 팔려고 하는데 처리 좀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송민정이 김철의 주식을 처리하면서 확인해보니 수수료를 제하고도 4억 3천만 원을 벌어 16억 3천만 원이나 되었다.
 ‘어머, 어제 것도 모두 올랐어. 대단해.’
 “고객님, 수수료를 제하고 십육억 삼천만 원입니다.”
 “그래요? 매수표대로 주식을 처리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객님.”
 김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매수했던 주식을 전부 매도하고는 새로운 종목의 주식을 다시 매수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객님, 다 처리했습니다. 확인해보세요.”
 송민정이 내민 통장을 확인한 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요. 수고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고객님.”
 김철은 송민정의 인사를 받으면서 뒤돌아 그곳에서 나왔다.
 최미래는 숨어서 김철을 지켜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조사대로 역시 주식 투자를 하고 있었어.’
 실수 없이 치밀한 일 처리를 하는 김철이라 생각했는데, 불확실한 증권 투자에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철은 서류를 뒤적이면서 업무에 신경 썼고, 10분 정도 지나서 사무실에 들어온 최미래 실장도 책상에 앉아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김철은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열흘 전부터 밥과 빨래, 청소까지 집안일을 해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된장찌개 해놓았으니 맛있게 먹어요.”
 “예,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
 파출부 아주머니는 김철이 건네주는 월급을 받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김철의 집 근처 골목에 차를 정차시킨 최미래 실장은 4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뒷조사를 해보니 혼자 산다고 했어. 지금 나오는 아주머니는 파출부라고 했지?’
 최미래는 자신이 왜 이렇게 김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뒷조사를 해보니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지금은 혼자서 생활하고 있으며, 특별하게 취미 활동을 하는 것도 없었다. 다만, 얼마 전부터 증권 투자를 한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콧대가 높다 자부한 자신이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었다.
 “아냐, 뭔가 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부우웅!
 김철의 집에 들어갈 명분이 아직 없는 최미래는 기회를 보기로 하고는 차를 출발시켜 집으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김철은 피식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후후, 나에 대해 관심을 너무 가지는데? 앞으로 피곤하겠어.’
 김철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욕실로 들어가 손부터 씻고 저녁 식사를 했다.
 “쩝쩝. 역시 아주머니의 된장찌개 솜씨는 일품이야. 정말 맛있어.”
 두 그릇을 뚝딱 먹고 소화시키기 위해 텔레비전을 튼 김철은 특별히 보는 프로그램이 없었기에 뉴스를 잠시 시청하다 꺼버렸다.
 “일찍 자는 게 제일이야.”
 침대에 누운 김철은 곧 잠에 빠져 버렸다.
 “실장님, 말씀하신 기획안입니다.”
 김철은 결재 서류를 최미래 실장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김철 씨, 대단하군요. 마음에 꼭 드는 기획안이에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오늘 나와 점심 식사해요.”
 “그, 그건 좀······.”
 “왜요?”
 “점심시간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그럼 저녁은 어때요?”
 “음··· 아, 알겠습니다.”
 김철은 최미래 실장이 부담스러웠지만 직장 상사의 말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인사를 하고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김철의 모습을 바라보던 최미래 실장은 눈웃음을 지었다.
 ‘호호, 귀엽네?’
 김철은 11시 30분 정도가 되었을 때 사무실을 나와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해운대 동백섬 쪽으로 걸어갔다.
 청색의 러닝복 차림을 한 40대 초반의 남자가 해운대 동백섬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있었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에 배가 약간 나온 모습을 하고 있는 김최고는 올해 43살로, 서울에 있는 연예 기획사에서 20년간 일하다 5년 전부터 독립해 새로운 기획사를 차렸다.
 그런데 1년 전, 믿었던 동업자가 계획적으로 자금을 전부 가지고는 외국으로 잠적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너무나 믿었던 이였기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자신의 아파트까지 처분하고서야 겨우 부도는 막을 수 있었지만, 심한 자금 압박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회사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쇼핑 중독자였던 그의 처는 하루아침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것을 견디지 못했고, 그전부터 내연의 남자를 만나고 있었기에 그와 이혼하게 되었다.
 게다가 악독하게도 3천만 원 전세금까지 위자료라면서 전부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고 2학년인 딸 하나를 두고 있는 그로서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평소에 워낙 인맥 관리를 잘해서인지 주위로부터 작은 도움을 받아 겨우 월세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김최고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해운대 동백섬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
 김최고가 이렇게 하는 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려운 일이나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에는 꼭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3일간을 여관에서 묵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거나 했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재기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부산에 내려온 것이다.
 “후욱··· 훅훅.”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면서 동백섬을 조깅하던 그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아, 왜 이러지?’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면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말이 나오지 않고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잘 돌아가지 않는 눈동자로 겨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이보세요, 괜찮습니까?”
 ‘나 좀 살려 주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김최고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바로 눕힌 젊은 남자는 먼저 머리를 뒤로 젖혀 기도를 유지했다. 그리고는 김최고의 두 손을 양손으로 잡고 그의 가슴 부위를 살며시 압박한 후 체내에서 체외로 원을 그리며 허리가 지상에서 살짝 뜰 정도로 들어올렸다.
 이것이 바로 흉부압박 상지거상법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하나 둘 모여들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삐뽀삐뽀.
 그렇게 1분에 15회에서 20회 정도 행하고 있는데, 멀리서 119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요, 여기!”
 끼이익!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차가 급정거를 하고는 즉시 뒷문을 열고 들것을 가져왔다.
 구급 대원이 지금도 흉부압박 상지거상법을 하고 있는 김철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이분이 쓰러지셨는데, 심장마비인 것 같습니다.”
 “환자와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처음 보는 분입니다.”
 “그래요? 환자 분이 당신 때문에 살았습니다. 응급처치를 아주 잘했어요.”
 “이분이 호흡을 못하는 것 같아 제가 기도를 유지하고 이렇게 응급처치를 했거든요.”
 “예, 아주 잘하셨습니다.”
 구급 대원들은 들것으로 김최고를 옮기고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김철이 워낙 초기에 응급처치를 잘해서인지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채 그 상황을 모두 보고 있던 김최고는 비록 지금은 말을 못했지만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운대 종합 병원에 119 구급차가 도착하자 김최고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김최고의 보호자로 입원 수속을 밟은 김철은 점심시간이 다 되었기에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루에 한 번 증권 회사에 가던 김철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사무실을 나가지 않았다.
 ‘왜 오늘은 밖으로 나가지 않지?’
 최미래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후후후, 실장은 내가 오늘 증권 회사에 가지 않는 게 궁금하겠지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어제 매수했던 주식들은 일주일이 지나야 많이 오르기에 그냥 둔 거야. 어디 장난 한번 쳐 볼까?’
 스윽.
 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미래 실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김철은 커피를 한 잔 타 마시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였다.
 ‘뭐야, 안 나가는 거야?’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이 되었다.
 김철은 최미래 실장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스포츠카를 직접 운전해서 간 곳은 특급 호텔의 일식집 다케였다.
 최미래 실장은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고, 김철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식만 먹고 있었다.
 너무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타악!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김철 씨, 나 좀 봐요.”
 “예, 실장님.”
 음식을 집어먹던 김철은 고개를 들어 최미래 실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김철 씨를 왜 이곳으로 데려온 줄 알아요?”
 “식사하려고 온 것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예,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뭐, 뭐라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최미래는 눈이 커졌다.
 최미래는 조금 전 김철이 한 말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평소 약간 소심하기까지 한 그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곧 정신을 회복한 최미래는 김철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실장님, 오늘 저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회사 일과 관계있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렇다면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김철이 자신의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미래가 소리쳤다.
 “거기 앉아요! 아직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말씀해보십시오.”
 김철이 자리에 앉자 잠시 생각하던 최미래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김철 씨는 내가 싫은가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내가 싫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이런 행동을 하죠?”
 “제가 무슨 행동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스윽.
 김철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미래가 말했다.
 “우리 사귀어요.”
 “예?”
 “못 들었어요? 우리 사귀자고요.”
 자리에 다시 앉은 김철은 최미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실장님, 도대체 저에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귀자고요.”
 “그 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왜 갑자기 저와 사귀려는 건데요?”
 “매력적이라서요.”
 “으음, 제가 매력적인 것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하지만 전 실장님과 사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왜요? 내가 매력이 없어요? 아님 못생겼어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집안 좋죠, 학벌 좋죠. 그것뿐입니까? 얼굴과 몸매 역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귀기 싫어해요?”
 “모든 면에서 차이가 심하니까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그건 내가 이해할게요.”
 “안 됩니다.”
 “그렇게 딱 자르지 말고 생각해봐요. 시간이 필요하면 줄게요.”
 “실장님께서 저에게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전 실장님과 사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그 이유라도 말해봐요.”
 “저는 당장 결혼할 마음도 없고, 더군다나 모든 면에서 부담스러운 여자 분은 싫습니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냥 사귀자고 했지.”
 “그래도 싫습니다.”
 “김철 씨, 지금 사귀는 여자 있어요?”
 “없습니다만, 나중에 필요하면 사귈 겁니다.”
 “그럼 일단 나와 사귀어요.”
 “싫습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김철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부들부들 떨던 최미래는 탁자를 내리쳤다.
 “두고 봐, 내 앞에서 무릎 꿇게 만들겠어.”
 쪼르르.
 술을 들어 들이켠 그녀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병째 나발을 불었다.
 그날 최미래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밖으로 나온 김철은 생각했다.
 ‘후후후. 최미래, 돈 많고 똑똑하고 끝내주는 외모를 가졌지만 독선적이라 내가 감당하지 못해. 지금 나와 그녀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내가 열약하지만, 난 예전의 현실에 안주하던 김철이 아니야. 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이 능력이라면 누구도 두렵지 않아.’
 김철은 해운대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김최고는 6인실 병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죽음을 예감했던 그는 김철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원받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특히 자신의 딸인 김은미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창 공부하고 있을 텐데 아빠라는 사람이 병실에 누워 있다고 연락하면 얼마나 걱정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병실 안으로 간호사와 김철이 들어왔다.
 “김최고 환자 분, 누가 왔는지 보세요.”
 간호사의 말에 고개를 돌려 김철을 바라본 그는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환한 얼굴이 되었다.
 “저, 저를 구해준 분이시죠?”
 김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마침 제가 뒤에서 걸어가다가 발견해 도울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김철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김최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남을 그렇게 쉽게 도와줄 리 없으며, 또한 119 구급차를 불러 병원까지 후송해 병원비를 부담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믿었던 동업자와 처가 배신을 했지 않은가.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김철이 너무 고마웠다.
 김최고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병원에서는 당분간 더 지켜보아야 한다고 했다. 병원비를 걱정하자 김철이라는 사람이 병원비를 일체 부담한다고 간호사가 말했기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김최고는 김철과 할 이야기가 많았기에 휠체어를 탄 채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 밖이 내려다보이는 7층의 휴게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렇게 둘만의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갔다.
 다음 날, 김철은 평소와 같이 사무실에 출근했지만 최미래 실장은 몸이 아프다면서 출근하지 않았다.
 그에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업무에 정신이 없다 보니 금세 잊어버렸다.
 ‘후후. 최미래 실장,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못 나왔군.’
 커피를 한 잔 마신 김철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에 출근한 최미래 실장은 보통 때보다도 더 화려한 복장으로 출근해 김철을 한 번 보고는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오늘 저녁에 무슨 파티에라도 가는지 섹시한 드레스 복장이었다.
 직원들의 눈이 자연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철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만 신경을 썼다.
 최미래 실장은 프로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김철은 그녀의 행동을 잘 알고 있기에 신경이 쓰임에도 모른 체했다.
 ‘흥,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고!’
 ‘이거 괜한 적을 만든 게 아닐까?’
 최미래 실장과 김철은 서로 다른 마음을 먹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주일 만에 김철이 최고 증권 회사를 찾자 송민정의 얼굴은 임이라도 만난 듯 환해졌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예, 그동안 바빠서 못 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전부 처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잠시 후 김철의 주식이 모두 처분되었고, 수수료를 제하니 23억 원이 조금 넘었다.
 송민정은 자신이 구입했던 주식을 조금만 더 그대로 두었다면 최소 1천만 원의 이익이 더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며칠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모두 처분해버렸기 때문이다.
 김철은 주식 현황판을 한 번 보더니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종목의 주식을 다시 매수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철이 나가기가 무섭게 송민정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끌어 모으자 무려 2억 원가량이 되었다. 그녀는 그 돈을 이용해 김철이 매수한 주식들을 종목별로 골고루 매수했다.
 ‘호호호, 이번에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말겠어!’
 5개월 후인 1991년 9월 중순.
 김철의 일상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직장 내에서는 동료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맡긴 일을 철저하게 처리했으며, 아이디어 회의 때에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동료들은 자신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거나, 참신하면서도 독창적이고, 또한 획기적이기까지 한 그의 기획안에 놀라고 있었다.
 최미래 실장은 예전부터 김철의 능력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이제는 직원 전체가 그를 다르게 보고 있었다.
 ‘으음, 이대로는 안 되겠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가 됐어.’
 준비해둔 사직서를 꺼내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미래 실장 앞으로 다가간 김철은 책상 위에 사직서를 내려놓았다.
 “김철 씨, 이게 뭐예요?”
 “실장님, 저의 사직서입니다.”
 “뭐, 뭐라고요? 이걸 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다른 업체에서 스카우트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이유가 뭐예요?”
 “사업을 하려고 그만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인테리어 회사를 차리려고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실장님. 그럼 돌아가서 일보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충격을 받은 최미래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김철이 사직서를 제출한 걸 확인한 고영민 과장 역시 그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사업을 할 거라는 같은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고영민 과장이 김국현과 한병기에게 눈짓하자 김국현이 그 눈치를 보면서 김철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물었다.
 “김철아,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려고 해?”
 “김 선배, 나 이 회사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만두는 거예요.”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그럼요. 그만두는 마당에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 그건 그렇지.”
 “동료들과 정이 많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죠. 서울로 올라가서 사업할 겁니다.”
 “서울?”
 “예, 그렇게 되었어요. 이달 말까지 일하고 그만둘 겁니다.”
 “음, 알았어. 정말 아쉽다. 오늘 술 한잔할래?”
 “아니요, 다음에 해요.”
 “그럼 그럴까?”
 “예, 그게 좋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말일에 한잔하는 거야?”
 “예, 김 선배, 알았습니다.”
 최미래 실장은 그동안 김철과 사귀어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늘 그가 한발 앞서서 빠져나가버렸기에 지금도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직서를 제출해버리자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안 돼.’
 최미래 실장은 퇴근 후 김철과 만나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철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자 다음 날 신규 직원이 한 명 모집되었다.
 김철은 말일까지 일하면서 후임자에게 업무에 관한 인수인계를 철저하게 처리하고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김철이 회사를 그만두는 날 저녁에 회식이 열렸고, 적당하게 술을 마신 그는 호텔로 들어갔다.
 이미 내놓은 그의 집이 위치가 좋고 약간 저렴하게 나온 터라 다음 날 바로 부동산에서 구매자가 나타나 매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에 김철은 회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호텔에서 생활했지만, 직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김철은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 오후, 최고 증권 회사로 향했다.
 평소에는 1백여 명가량의 증권 투자가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3백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최고 증권 회사 안으로 김철이 들어서자 3백 명이 넘는 증권 투자가 중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증권가의 미다스의 손이 나타났다!”
 “어디, 어디?”
 “저기에 있다, 있어!”
 증권 투자가들이 일제히 김철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치 유명 연예인의 인기를 능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철은 그들을 무시하고 송민정에게로 다가가서는 말했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주식 중에서 S전자와 H자동차의 주식만 남겨 두고 나머지를 현재가로 처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고객님.”
 타타타탁.
 송민정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현재가로 김철의 보유주를 처분하기 시작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김철의 보유주가 모두 처분되었다. 워낙 인기가 있는 주식이다 보니 내어놓기 바쁘게 모두 매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수료를 제하고도 280억 원이나 되었다.
 만약 S전자와 H자동차의 주식까지 모두 처분했다면 360억 원은 넘었을 것이다.
 최고 증권 회사 직원들은 서둘러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처분했다.
 증권 투자가들도 각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하느라 소란스러울 지경이었다.
 5개월 정도 전에 2억 원이나 되는 돈을 주식에 투자한 송민정은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둔 뒤 계속 승승장구해서 한 달 후에는 4억 원까지 이익을 얻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 몰라도, 그 이후로도 상한가로 시세 차익을 올렸다.
 그러다 보니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같은 여직원들에게 소문이 퍼져 나가더니 얼마 후에는 전 직원들에게 전부 소문이 퍼져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권 분석가들은 김철의 주식 투자를 두고선 부정적이었다.
 날고 기는 자들이 수두룩한 곳이 증권가인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를 누가 인정하겠는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도 김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증권 분석가들이 예상한 종목은 하한가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김철이 매수한 종목은 전부 상한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증권 분석가들까지 인정한 김철의 소문은 금방 증권가로 퍼져 나갔다.
 한 달 전부터는 어떻게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는지 투자가들이 대거 최고 증권 회사의 해운대 지점으로 몰려들었다.
 송민정은 지금까지 주식 투자로 10억 원 정도를 벌었는데, 모두 김철 덕분이었다.
 김철은 예전처럼 매일같이 증권 회사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두 달 전부터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나왔다.
 “송민정 씨, K은행 계좌와 S은행 계좌에 각각 백억 원씩 송금해주세요.”
 “오늘 주식 매수는 안 하시고요?”
 “할 겁니다. P제철에 십오만 주 매수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P제철 십오만 주 매수하겠습니다.”
 송민정이 말한 P제철은 1주에 2만 원 정도 하는 주식으로, 15만 주면 약 30억 원 정도 됐다.
 “P제철 십오만 주 매수 처리되었습니다.”
 “음, 한국 건설과 대한 건설에 각각 삼십만 주씩 매수해주세요.”
 “한국 건설과 대한 건설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매수하겠습니다.”
 송민정과 증권 투자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P제철 회사는 최근 두각을 그리 나타내고 있는 회사가 아니었고, 한국 건설과 대한 건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권가의 미다스의 손인 김철이 그런 주식을 매수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건설과 대한 건설의 1주는 1만 원이 조금 넘었는데 약 60억 원 정도 자금이 빠져나가버리자 현재 김철의 잔고는 1천만 원도 되지 않았다.
 “김철 고객님, 한국 건설과 대한 건설의 주식 각각 삼십만 주씩 매수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럼.”
 김철이 자신의 일을 모두 처리한 뒤 증권 회사를 나가버리자 투자가들은 전화를 걸어 서로 의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철은 상관하지 않았다.
 김철의 말을 믿는 추종자들은 그가 매수한 주식들을 같이 매수했지만, 그걸 믿지 못한 투자가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주식을 매수했다.
 “흥!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번에는 믿지 못하겠어.”
 김철이 최고 증권 회사의 정문으로 걸어 나오자 그의 앞을 가로막는 두 사람이 있었다.
 조직에 있는 자들인지 어깨가 넓었으며,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뭡니까?”
 “저희 사장님께서 잠시 뵈었으면 하십니다.”
 “댁의 사장님이 누군데요?”
 “일단 저 차에 타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들의 말에 김철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벤츠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저 차를 타야 합니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가시죠.”
 “싫습니다. 내가 왜 당신들 사장을 만나야 하는데요?”
 “그러지 마시고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경호원!”
 김철의 외침에 탄탄한 몸을 가진 보디가드들이 10명이나 우르르 다가와 그를 보호했다.
 당연히 그들 2명은 보디가드들의 위세에 뒤로 물러섰다.
 길가에 정차해 있는 대형 승용차와 승합차 중에서 대형 승용차에 김철이 타자 보디가드들은 2대의 다른 차량에 나누어 타고 즉시 출발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런지 그들 2명은 멍한 표정이었다.
 길가에 정차해 있던 검은색 벤츠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자 그들은 창문으로 다가가서 나직하게 보고했고, 벤츠의 창문이 다시 스르르 올라가면서 차는 출발했다.
 그들도 벤츠의 뒤에 정차해 있던 승합차에 올라 즉시 출발해버렸다.
 
 
 제3장 슈퍼 엔터테인먼트(Super Entertainment)
 
 
 1991년 10월 20일, 서울 여의도.
 20층의 여의도 빌딩 6층에는 총면적 450평의 3개 회사가 입주해 있었다.
 300평 규모의 슈퍼 엔터테인먼트(Super Entertainment)라는 연예 기획사와 50평 규모의 슈퍼 투자 회사, 100평의 슈퍼 경호 회사가 10월 5일에 현판을 내걸었다.
 이들 3개 회사는 비록 규모가 작았지만, 주식회사 등록까지 마친 엄연한 정식 회사였다.
 슈퍼 투자 회사는 사장인 김철을 비롯해 남녀 직원 2명씩 4명만 있는 초소형의 투자 회사였으며, 신변 보호를 주요 업무로 하고 있는 슈퍼 경호 회사는 부장 1명, 과장 2명, 경호원 30명, 행정원으로 남자 2명에 여자 3명 등 모두 해서 약 40명이 김철 사장 아래에 있었다.
 앞으로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예인들을 경호하게 되겠지만, 현재는 김철의 개인 경호 업무를 전담해서 하고 있었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역시 김철이었고, 부사장은 김최고였다. 밑의 직원으로는 부장과 과장 1명에 대리가 2명이었으며, 남녀 평직원이 10명이었다.
 부사장 김최고는 이름대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는데, 알려지기로는 5년간의 계약금으로 5억 원을 받았으며, 연봉은 2억 원이었다.
 이런 계약은 최고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대우였다.
 단연 연예계에서는 처음 있는 최고의 대우라 소문이 금방 퍼져 나갔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에는 4명이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김철 사장이, 우측에는 부사장 김최고, 좌측에는 30대 후반으로 가르마를 한 헤어스타일에 눈썹이 짙고 많아서 인상적인 김형규 부장이었다.
 그는 예전에 김최고와 같이 일했던 경력이 있었는데, 백수인 그를 이번에 김최고가 데려왔다.
 그의 옆자리에는 턱이 뾰족한 생쥐 상의 이장원 과장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가수 매니저 생활을 10년이나 해온 경력이 있으며 일명 번개로 통했는데, 일 처리가 번개 같아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김철은 그것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최고 부사장님, 내가 지시했던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김 부장에게는 탤런트 쪽을, 이 과장에게는 가수 쪽을 지시해놓았습니다. 이 과장부터 보고해보세요.”
 “예, 부사장님. 그럼 사장님께 그동안의 진척에 대해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편준협이라는 성인 가요 가수를 스카우트하려고 서울에 있는 밤무대를 뒤진 저는 삼 일 만에 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예, 사장님. 편준협은 내년에 데뷔하려고 한창 준비 중에 있었으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밤무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스카우트 제의는 했습니까?”
 “예, 일단은 시간을 좀 달라고 하기에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는데 삼 일 만에 전화가 와서는 하기로 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공식 절차는 회사에서 사장님의 입회하에 하기로 했기에 전화만 하면 바로 올 것입니다.”
 “좋습니다. 내일 오전 열한 시에 계약하기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좋습니다. 일 처리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음 건은요?”
 “성전우라는 고등학생으로 1973년생이며, 가수를 꿈꾸고 있는 고등학생입니다.”
 “그럼 열여덟 살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고등학생이니 일단 부모님을 만나서 잘 설득한 후 계약이 될 수 있도록 힘써주세요.”
 “그런데 학생이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년이면 열아홉 살이고, 가수가 되는 게 꿈인 학생입니다. 잘 설득한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이번 주 내로 성전우 학생과 부모님을 이곳으로 모셔서 계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알겠지요?”
 “예, 사장님.”
 “좋습니다. 성전우 학생은 몇 달간 노래 연습을 시킨 후 내년 사오 월에 음반을 낼 것이니 그렇게 알고 대비하세요.”
 “예, 잘 알겠습니다. 이제 사장님의 특별 지시로 알아본 마지막 사람으로, 엄정아입니다. 1989년부터 M방송 합창단에서 활동 중에 있는데 노래에 재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 과장이 보기에 외모는 어떻던가요?”
 “탤런트를 해도 될 만큼 뛰어난 외모였습니다.”
 “잘 보았어요. 계약해야 하니까 연락해서 약속 잡아놓으세요.”
 “예, 사장님.”
 “이번에는 김 부장님이 보고해보세요.”
 “예, 사장님.”
 김 부장은 서류를 꺼내들고 보고를 시작했다.
 “1962년생인 최일종은 서른 살로 1987년에 K방송의 드라마로 데뷔했고, 지금은 기획사 없이 혼자 일하고 있습니다. 스카우트 제의에 시간을 좀 달라고 해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더니 오 일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계약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좋습니다. 내일 오후 네 시에 계약할 테니 연락하세요.”
 “예, 사장님. 두 번째로 제가 스카우트한 사람은 장동민과 이병훈입니다. 두 사람은 탤런트 시험을 준비 중에 있었는데 손쉽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화만 하면 바로 계약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두 시에 계약할 테니 약속 잡아놓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자,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두 분은 나가서 일보시고 부사장님은 잠시 그대로 있으세요.”
 김 부장과 이 과장이 회의실을 나가자 김철은 부사장인 김최고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지시했고, 간간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그럼 저는 나가서 일보겠습니다.”
 “그래요, 김 부사장.”
 김최고 부사장이 사장실을 나가자 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후후후, 미래를 모두 알고 있으니 땅 짚고 헤엄치기야. 앞으로 인기를 얻고 톱스타가 되는 연예인들은 내가 전부 스카우트해서 키우고, 막대한 돈도 벌어들일 거야.’
 삐이이.
 인터폰 소리가 들리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철은 뒤돌아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미스 김, 무슨 일입니까?”
 -사장님,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습니다. 곧 나가죠.”
 김철은 재킷을 걸치고 사장실을 나섰다.
 여의도 빌딩 정문으로 김철과 간부들이 걸어 나오자, 그 주위로 보디가드가 6명이나 철통같은 경호를 했다.
 정차해 있는 검정색 리무진의 뒷문을 보디가드가 열어주자 차에 올랐고, 보디가드들도 같이 승차했다.
 김철이 특별 주문해서 며칠 전에 직수입한 리무진은 차체의 길이가 8.6미터나 되는, 웬만한 중형 버스 길이였다. 배기량이 6천 시시이며, 3억 원이 넘는 고가의 최고급차였다.
 방탄 필름으로 차창을 선팅해 차량 외부에서는 내부 투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내에는 칵테일 바, 냉온장고, 운전석과 뒷좌석 차단 버티컬, 통화용 인터폰까지 설치되어 있는 최신형이었다.
 부우웅.
 리무진이 출발하자 2대의 9인승 승합차가 뒤따랐다.
 운전사를 포함해서 7명씩, 14명의 보디가드가 타고 있었다.
 최고 인테리어 회사를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김철은 이렇게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김철은 좌측에 앉아 있는 슈퍼 경호 회사의 이현기 과장에게 말했다.
 “이 과장님, 통일 증권 회사로 갈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현기 과장이 통화용 인터폰을 들었다.
 띠리리링.
 조수석에 앉아 있는 보디가드가 인터폰을 받았다.
 -예, 과장님.
 “박 요원, 사장님께서 통일 증권 회사로 가신다고 하니 그리 알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통일 증권 회사로 가겠습니다.
 이현기 과장 옆에 앉아 있는 요원이 무전기를 누르고 뒤따라오는 승합차에 연락했다.
 이 정도의 경호라면 장관보다도 더했다.
 그만큼 김철은 자신의 신변 경호에 벌써부터 신경 쓰고 있었다.
 술집 로즈.
 강남의 고급 술집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인 이곳은 500평 규모의 큰 실내에 호화롭고 아늑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호화롭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으며, 오페라 극장 같은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삼면이 대형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작은 무대도 마련되어 있어서 통기타 가수나 외국에서 건너온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연주와 노래를 했다.
 레스토랑처럼 요리와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도 있었으며, 룸살롱처럼 대형 룸이 10개 만들어져 있었다.
 일종의 룸살롱과 바를 접목시켜 놓은 새로운 형태의 고급 술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급 손님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의 한쪽에 앉아서 코냑을 조용하게 마시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있었다.
 감색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에 기름을 발라 빗으로 넘긴 헤어스타일이 무척 깔끔해 보였다.
 무스크 향의 스킨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게 중후한 멋을 내는 남자였다.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야성이 약간 묻어나는 남자다운 얼굴이지만, 왼쪽 뺨 한쪽에 5센티미터 정도의 사선으로 칼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상처 자국이었다.
 강남의 2대 조직 중 한 곳인 해머파의 넘버 투인 손도끼 배영훈이었다.
 “크으, 한 잔 더 줘.”
 “형님, 오늘 벌써 반병째인데 괜찮겠습니까?”
 “잔말 말고 어서 한 잔만 더 줘.”
 그가 잔을 내밀자 바 안에 서 있던 바텐더가 코냑 병을 들고 따라주었다.
 손도끼 배영훈은 술 향기를 잠시 맡더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홀짝거렸다.
 ‘라이타의 요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저벅저벅.
 번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밟고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힐끗.
 고개를 돌려 배영훈이 그를 쳐다보자 캐주얼 차림의 김철이 서 있었다.
 배영훈의 옆자리 의자를 잡아당겨 앉은 김철은 바텐더를 바라보더니 그가 메뉴판을 내밀자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살펴보았다.
 “블랙 러시안 한 잔하고, 과일 안주 한 접시.”
 “예, 알겠습니다.”
 스윽.
 김철은 고개를 돌려 배영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그도 김철의 얼굴을 바라보았기에 서로 눈빛이 마주쳤다.
 김철이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인사하자 그도 똑같이 답례 인사를 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무언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날이죠?”
 김철이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말했기에 배영훈은 흠칫거렸다.
 ‘이, 이자가 어떻게?’
 “하하하, 내가 그렇게 보이나?”
 “예, 죄송한 말이지만 댁에게서 어쩌면 내일의 해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허허, 내가 말이지?”
 “그렇습니다. 짙은 죽음의 피 냄새를 맡았거든요, 제가.”
 “으음, 혹시 예전에 날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오늘 처음 봅니다만,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되어지니 도움이 될 만한 말씀 하나 드릴까요?”
 배영훈은 처음 보는 20대의 젊은이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운명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주먹이 먼저 날아갔을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코냑을 마시고 있는 데다 분위기가 무거워서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도움이 된다는 말인데 어디 들어보기나 할까?”
 “잘 결정하셨습니다.”
 바텐더가 블랙 러시안 한 잔과 과일 안주를 내려놓았다.
 주우욱.
 김철은 블랙 러시안을 절반이나 마셔 버리고는 체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놓인 자기로 된 찻잔 받침대 2개를 집어 들어 붉은 장미가 찍힌 냅킨을 몇 장 가운데 부분에 끼워 넣더니 노란 고무줄로 잘 묶었다.
 스윽.
 김철은 그것을 배영훈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와이셔츠 주머니 속에 잘 넣어두세요.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들어 있다면 죽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나의 목숨을 구해준다는 말인가?”
 “아 참, 또 하나! 해골이 배신자이니 명심하세요.”
 “해골이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자네, 이런 짓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드나?”
 “글쎄요, 이게 과연 장난일까요? 일주일 뒤 이 시간에 여기에서 다시 뵙죠. 살아 있다면 말이죠.”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김철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는 김철이 준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와이셔츠 주머니 속에 잘 넣었다.
 ‘허어, 오늘은 정말 기분이 이상한 날이야.’
 건장한 조직원이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손도끼 배영훈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형님, 큰형님께서 찾으십니다.”
 “꽁초 아니냐? 나를 왜?”
 “긴급하게 상의할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큰형님은 어디에 계시냐?”
 “일식집 청솔에 계십니다.”
 “알았다. 가자.”
 잠시 후 대형 승용차 한 대가 로즈 정문 앞에 다가와 멈추었다.
 손도끼 배영훈이 로즈 정문으로 걸어 나오자 앞에 걸어가던 꽁초라는 자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배영훈이 타자 문을 닫고 그는 조수석에 승차했다.
 부우웅.
 차가 출발하자 배영훈의 부하 5명도 9인승 승합차에 타고는 뒤따라갔다.
 “꽁초, 큰형님께선 혼자 계시냐?”
 “아닙니다. 라이타 형님과 함께 계십니다.”
 라이타 김훈은 해머파의 넘버 쓰리로 싸우기 전과 후에는 반드시 담배를 한 대 피우는데, 늘 지포라이터를 이용했다.
 또한 조직 간의 전쟁이 끝난 후 상대편 조직원 중의 한 명을 선택해서는 반드시 그 지포라이터에 불을 붙여 오른쪽 귀 윗부분의 머리카락을 태워버리는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래? 알았다. 어서 가자.”
 “예, 형님. 이봐, 속도를 높여.”
 “예, 꽁초 형님.”
 꽁초의 말에 운전사가 대답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일식집 청솔의 입구에 차를 멈추자 손도끼 배영훈이 차에서 내렸다.
 정문의 양쪽 옆에는 몇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선이 있었는데, 해머파의 큰형님인 해머 조일의 차인 검정색 벤츠와 라이타의 승용차인 H자동차에서 나온 검정색 대형 승용차 1대, 승합차 2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손도끼 배영훈은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청솔 안으로 들어가 여러 개의 룸 중에서 가장 큰 특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는 회와 각종 요리가 차려져 있었고, 상석에는 큰형님인 해머 조일이, 왼쪽 자리에는 라이타 김훈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따로 옆에 차려진 테이블에는 조직원 10명이 앉아 있었다.
 “형님, 절 찾으셨습니까?”
 손도끼 배영훈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해머 조일의 상체가 스르르 옆으로 넘어졌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어엇? 형님! 라이타, 네가 배신을?”
 “크흐흐, 이젠 손도끼 형님께서도 큰형님의 뒤를 따라가셔야겠습니다.”
 “뭐라고? 이놈이!”
 “손도끼 형님을 편안하게 보내드리거라.”
 “예, 형님.”
 특실 문이 열리면서 반역의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대충 잡아도 40명이 넘었다.
 손도끼 배영훈에게는 5명의 수하가 전부였다.
 쨍그랑.
 파팍!
 두 무리가 서로 충돌하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퍽퍽!
 와장창!
 라이타를 찾던 손도끼 배영훈은 그가 부하들의 뒤로 몸을 숨긴 채 지휘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라이타, 이놈!”
 휘리리릭.
 배영훈은 은빛이 번뜩이는 2개의 손도끼 중에서 하나를 라이타에게 날렸다.
 “허억! 막아!”
 라이타의 긴급한 명령에 그 앞에 서 있던 수하들 중에서 2명이 몸을 날려 날아오는 손도끼를 막았다.
 “커억!”
 2명 중 1명의 가슴에 손도끼가 박히면서 쓰러졌다.
 “모두 손도끼를 죽여라! 어서!”
 5명의 수하 중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자가 2명이었고, 나머지 3명도 두세 곳에 상처를 입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음, 이대로 있다가는 당하겠어.’
 손도끼 배영훈은 테이블을 들어 유리창으로 던졌다.
 쩌쩡.
 와장창!
 유리창이 박살나자 그곳으로 탈출하려는데, 어느새 그 앞에 나타난 자가 단검으로 손도끼 배영훈의 가슴을 찔렀다.
 푸욱.
 “크으··· 에잇!”
 단검에 가슴을 찔린 그였지만 이대로 당할 순 없다는 생각에 어퍼컷으로 그자의 턱을 날려 버렸다.
 퍼억!
 “아아악!”
 그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손도끼 배영훈은 그자의 어깨를 밟고 박살난 유리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3명의 적들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배영훈의 승용차가 굉음을 내면서 1명을 박아버리자 2명은 그걸 피하느라 몸을 날렸다.
 그 짧은 시간에 뒷문을 열고 배영훈이 올라탔다.
 “어서 가, 빨리!”
 “예, 형님.”
 부우우웅.
 사지에서 빠져나온 차는 무서운 속도로 도로를 달렸다.
 “형님, 가슴에 단검을 맞았는데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손도끼 배영훈은 와이셔츠 주머니 속에서 김철이 주었던 도자기 찻잔 받침대를 꺼내 보여 주었다. 2개 중 1개에는 금이 심하게 가 있었지만, 2개였기에 가슴이 직접적으로 찔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
 손도끼 배영훈의 안부를 물어보면서 그의 왼손이 은밀하게 양복 주머니로 들어갔다.
 퍼억!
 “크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차는 급정거했다.
 뒷좌석의 배영훈 옆에 같이 타고 있던 조직원이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머리에 손도끼를 강하게 맞았기 때문이다.
 김철이 일러준 대로 이자의 오른 손등에 해골 문신이 있는 걸 보고는 배신자라는 말을 떠올린 배영훈이 손에 쥐고 있던 손도끼로 머리를 내리쳐 버렸다.
 그의 상체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왼손에 쥐고 있는 단검이 드러났다.
 ‘아, 일 초만 늦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어떻게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을까?’
 “휴우, 진짜 큰일 날 뻔했어.”
 “괜찮으십니까, 형님?”
 “그래, 난 괜찮다. 쥬디스로 가자.”
 “예, 형님.”
 부우우웅.
 멈추었던 차는 다시 출발해 도심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몇 시간 후, 손도끼 배영훈은 라이타가 큰형님이신 해머를 죽이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을 조직원들에게 퍼뜨리고는 세력을 규합해 그를 공격했다.
 명분 싸움에서도 지고 세력에서도 밀린 라이타는 뒤로 밀리면서 도망쳤지만, 3일이 지나기 전에 찾아 나선 조직원에게 붙잡혀 와 제거되었다.
 라이타가 손도끼 배영훈만 제거했더라면 그가 조직의 큰형님이 되었을 텐데,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있지 않고 배영훈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니, 김철의 도움으로 배영훈은 목숨을 구원받고 또한 해머파의 새로운 큰형님이 될 수 있었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상담실.
 테이블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놓여 있고, 6명이 앉아 있었다.
 사장인 김철을 비롯해 부사장 김최고, 김형규 부장, 가수 쪽의 책임자인 이장원 과장, 계약을 하러 온 편준협과 그의 친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김철은 전속 계약서 2부를 내밀면서 말했다.
 “계약서 조항은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자세하게 보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겁니다. 전속 기간은 이 년이며, 전속 계약금은 이억 원입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까지 연예계에서 억으로 계약한 연예인은 없었기에 편준협은 무척 놀랐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인 김철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예, 다른 기획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예, 그렇군요. 다른 기획사에서는 최소 오 년이고, 길면 십 년이나 이십 년인데 여긴 이 년이라니,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하, 분명 계약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으니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 만약 계약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저희 회사가 법적인 조치를 당할 텐데 다른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예,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믿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음반과 그에 관련된 각종 비용은 저희 회사에서 부담할 겁니다. 의상과 메이크업을 책임질 코디네이터 한 명과 같이 따라다닐 매니저, 그리고 승합차 한 대 모두 회사에서 경비를 부담하게 됩니다.”
 “그럼 비용이 많이 들어갈 텐데요?”
 “그건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일하다가 코디네이터나 매니저가 불친절하다 생각되면 언제든 여기 있는 이 과장에게 말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사실이니 믿으십시오. 또한 회사에서 지급되는 차량은 처음 일 년간은 삼천만 원 이하의 승합차지만 일 년 뒤에는 품위 유지를 위해 인기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외제 수입 승합차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으음, 세세한 부분까지 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 그리고 수익 분배는 먼저 세금을 납부한 후, 나머지 돈에서 육은 편준협 씨가, 일은 각종 비용, 그리고 나머지 삼은 저희 회사가 가집니다. 다만, 비용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 때에도 저희 회사의 수익 삼에서 지불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계약서의 각 조항에 잘 쓰여 있으니 확인해보면 아실 겁니다. 이 정도면 초특급 대우라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예,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이 계약서에 아주 잘 쓰여 있군요. 좋습니다. 아주 좋은 조건이니 만족합니다. 당장 계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저희 슈퍼 엔터테인먼트는 투명한 경영을 원칙으로 하며, 모든 세금을 철저하게 납부할 것입니다. 또한 각종 비용 영수증도 철저하게 구비해놓을 테니 언제든 열람하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에 도장을 찍죠.”
 2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확인한 김철과 편준협은 서로 악수를 했고, 옆에 있던 입회원들은 박수로써 환영했다.
 편준협이 돌아간 후 오후 2시에 약속되어 있던 장동민과 이병훈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김철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유명해진 뒤에는 세련되어 보였지만 지금은 데뷔하기 전이라 그런지 풋풋한 매력이 있어 보여. 얼굴이 잘생긴 건 여전하구나.’
 “사장님, 사장님?”
 “으응? 아, 미안합니다. 두 분이 너무 잘생기셔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잘생겼다는 말에 장동민과 이병훈은 기분이 좋아 이를 보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두 분은 탤런트 준비를 하고 계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장동민이 먼저 대답했기에 이병훈은 고개만 끄덕였다.
 “저희 회사에서는 두 분을 탤런트와 영화배우로 집중 육성하려고 합니다.”
 장동민과 이병훈은 영화배우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지 김철이 그렇게 말하자 약간 놀랐다.
 “만약 오늘 저희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면 내년 봄까지 네다섯 달 정도는 저희 회사에 출근해서 연기 연습을 한 뒤에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게 될 예정입니다. 참고적으로 견습 기간에도 견습비로 매달 이백만 원을 지급받게 됩니다.”
 “이백만 원을요?”
 놀란 이병훈이 대답했다. 물론 장동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기획사에서도 신인에게 이런 대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견습 기간이 끝난 후 작품에 출연하게 되면 코디네이터와 매니저, 차량이 지급되며, 자세한 사항은 계약서에 나와 있으니 세밀하게 읽어보십시오.”
 김철의 말에 놀란 장동민과 이병훈은 계약서의 조항을 읽어보고 또 한 번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속 기간으로 삼 년이며, 전속 계약금은 삼억 원입니다. 수익 분배는 먼저 세금을 제하고 나머지 돈에서 육은 본인이 가지고, 일은 각종 비용이며, 나머지 삼은 저희 회사가 가집니다. 다만, 비용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 때에도 저희 회사의 수익 삼에서 지불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면 초특급 대우라 자부하는데, 어떻습니까?”
 “아··· 예,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둘은 아직 정식으로 데뷔하지도 못한 신인인데 3억 원이라는 놀라운 계약금을 보고는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물을 들이켰다.
 계약이 너무 마음에 든 장동민은 바로 결정을 했고, 이병훈은 혹시라도 사기가 아닐까 하고 계약서를 꼼꼼하게 한 번 더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김철은 계약서를 주고받으면서 그들과 악수했다. 이로써 장동민과 이병훈의 계약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후 4시에는 최일종이 계약하러 왔으며, 장동민이나 이병훈처럼 거의 같았지만 전속 계약금만 달랐다.
 전속 3년에 6억 원이었다.
 아직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던 최일종으로서는 이 정도의 계약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기획사의 초특급 인기 연예인이라고 해도 억으로 계약한 연예인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은 3년 전속에 6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계약을 한 것이다.
 ‘우, 내일 신문에 크게 나겠어.’
 다음 날, 신문의 연예 면에는 ‘최일종 6억 계약’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그것 때문에 모든 기획사가 깜짝 놀라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 미친놈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최일종이 계약한 금액의 절반의 절반만 되어도 최고 인기인과 계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일종의 고액 계약으로 인해 슈퍼 엔터테인먼트는 모든 곳으로부터 초미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연예부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정식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 일 때문에 그동안 머뭇거리던 성전우와 엄정아도 연락을 해와 김철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연예부 기자들은 최일종뿐만 아니라 억으로 계약한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는 걸 알아내고는 그들과 인터뷰를 시도 했지만, 슈퍼 경호 회사에서 나온 전담 보디가드들이 막았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른 특종이 흘러나왔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대대적인 공개 오디션을 통해 신인을 선발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기간은 11월 1일부터 11월 11일까지로 연예인, 가수, 연기자 부문으로 나누어 선발하는데, 각 부문의 3등 상금은 1천만 원이며 2등은 2천만 원, 1등은 5천만 원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점수를 계산해 종합 1등에게는 2억 원의 전속 계약을 할 거라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 연예 지망생들의 모든 이목이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집중되었다.
 연예부 기자들은 엄청난 대우와 200억 원의 자본금에 또 한 번 놀랐다.
 아직 대한민국의 모든 기획사를 통틀어도 이 정도의 자본금을 보유한 회사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김철은 강남의 술집 로즈에 방문했다.
 손도끼 배영훈이 바에 앉아 있다가 김철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나. 오늘은 내가 술 한잔 사겠네.”
 “그럼 샤또 마고 와인으로 사주십시오.”
 “호오, 비싼 술을 먼저 마시겠다?”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대접을 받아야죠.”
 “하하하··· 맞네, 맞아. 얼마든지 사겠네. 룸으로 들어갈 텐가?”
 “할 말이 많을 테니 그러죠.”
 “하하하, 자네는 정말 대단해.”
 준비되어 있는 룸으로 들어가자 부하들도 뒤따라 들어오려 했지만 손도끼 배영훈이 제지했다.
 곧 룸 안에는 김철을 비롯해 손도끼 배영훈과 최측근이며 경호원이라 할 수 있는 비도 최형배만 남았다.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들어와 세팅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쪼르르.
 손도끼 배영훈이 직접 샤또 마고 와인을 잔에 부어주었다.
 김철은 와인 잔을 살짝 기울여 와인 색깔을 먼저 감상한 후, 살짝살짝 여러 번 향을 맡아보았다.
 그런 후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입 안에서 혀와 함께 굴려 가며 천천히 맛을 보았다.
 “자네, 제대로 와인을 마실 줄 아는군.”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제대로 마시는 게 좋더라고요.”
 “그거야 그렇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으음, 그럼 염치 불구하고 물어보겠네. 자네는 그날 내가 기습당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글쎄요,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그냥 머리에 떠올랐다는 게 정확합니다.”
 “허허, 좋네. 그럼 찻잔 받침대도 유용했지만 해골 문신을 한 자가 어떻게 배신자라는 걸 알았나?”
 “그것도 그냥 알았습니다. 저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 그럼 그 능력 좀 설명해보게.”
 “그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 이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손도끼 배영훈의 최측근 경호원인 비도 최형배가 분노에 떨면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김철은 아직도 태연했다.
 “후후후, 그 비도로 날 죽일 수 있다 생각합니까?”
 “뭐라? 정녕 죽고 싶으냐!”
 화가 치민 그는 김철에게 따끔한 교훈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비도 하나를 던졌다.
 김철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비도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비도는 김철의 1미터 정도 허공에서 멈추었다.
 순간 배영훈과 최형배는 눈이 커지면서 놀랐다.
 김철이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자 비도가 종잇조각처럼 구겨져 버렸다.
 땡그랑.
 쇳소리를 내면서 구겨진 비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후후후,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날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 이이··· 받아라!”
 슈우욱.
 최형배는 어느새 비도를 양손에 끼우고는 그걸 김철에게 날렸다.
 김철이 파리 쫓듯 손바닥을 휘젓자 2개의 비도는 튕겨져 벽에 각각 박혀 버렸다.
 “허억! 이, 이럴 수가?”
 최형배는 눈이 2배로 커지면서 놀랐다.
 스윽.
 김철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목이 졸린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최형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양손으로 졸린 목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당장 질식할 것 같아 몸부림쳤다.
 “후후후, 어른들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알았나?”
 공포에 질린 최형배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김철의 손짓에 날아간 최형배는 벽에 부딪히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허억, 헉헉······.”
 거친 숨을 내쉬던 최형배는 그제야 좀 진정이 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서 있었다. 자신의 현 상황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허어! 자네 정말 대단하군.”
 “뭐, 이 정도는 보통입니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두려운 것이 없을 텐데 날 도와준 이유가 뭔가?”
 “그게 뭔 것 같습니까?”
 “으음, 자네 입으로 말해보게.”
 “간단합니다. 난 해머파를, 아니 이젠 손도끼파를 나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지만 지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은 나를 인정하지만, 언제든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인가?”
 “역시 잘 알아들으시네요.”
 “으음, 자네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아나?”
 “제가 무섭습니까?”
 “그러네. 그 뛰어난 머리도 무섭고, 앞을 내다보는 것은 더욱 무섭네.”
 “무서운 걸 안다고 하니 잘되었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허허허. 살려면 별수 있나, 자네 말을 들어야지. 안 그런가?”
 “후후후, 맞습니다. 전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수직 상승을 할 겁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적들이 많이 생길 거고, 음지에서 해결할 일도 있을 겁니다. 그때에만 나서주시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그 사업이 뭔지 물어봐도 되나?”
 “뭐,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슈퍼 엔터테인먼트라고, 연예 기획사와 다른 회사를 두 개 더 차렸기에 현재는 세 개의 회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으음, 나도 신문을 보았네. 대단한 수완이더군?”
 “하하하,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 년도 안 되어서 거둔 거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으음, 이전이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믿네.”
 “후후후,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앞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서로 공생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 정도는 지원해드려야죠.”
 “술이나 한 잔 주게.”
 “그러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대우를 해드리고 말도 높여 드리겠지만, 명령을 내리는 쪽은 저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나? 나를 믿어보게.”
 “좋습니다만, 저 친구는 아직 승복을 못하는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린가?”
 “후후후,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날 죽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그럼요. 제가 모르는 게 있는 줄 아십니까? 저 친구가 오늘 화장실에 두 번 갔다 왔고, 점심에는 동태찌개를 먹었다는 것까지도 다 아는데요.”
 “허억! 그, 그걸 어떻게?”
 “쯧쯧, 멍청하기는. 과거와 미래를 엿보는 능력을 가진 내가 권총을 숨긴 걸 모를 것 같아?”
 김철의 말에 최형배는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래도 오늘 나의 능력 일부를 보여 드려야겠군요? 이봐, 친구, 권총으로 날 쏴봐.”
 공포에 질린 최형배는 품속에 있는 권총을 꺼내지 못했다. 먼저 김철의 공격에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쯔쯔쯔,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야. 공격하지 않을 테니 쏴봐.”
 배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하자 최형배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김철을 겨누었다.
 약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였기에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명중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저, 정말 쏜다.”
 “어서 쏴. 시간 없어.”
 부들부들 떨어대던 최형배는 권총을 발사했다.
 타앙!
 총소리가 나면서 탄환이 쏘아졌다.
 고속으로 쏘아진 탄환은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멈추어 있었다.
 스윽.
 김철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탄환을 집어 들고는 배영훈에게 보여 주면서 말했다.
 “후후후, 이게 탄환인데 정말 귀엽지 않습니까?”
 “어떻게 날아오는 탄환을 막았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술집을 허공으로 들어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거짓말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 자네의 말을 믿네.”
 “나머지 세 발도 쏘아서 확인해볼 텐가?”
 “아, 아닙니다.”
 “이번에는 날아오는 탄환을 중국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잡으려고 했는데 기회를 안 주는구먼?”
 덜덜덜.
 손을 떨어대던 최형배는 품속에 권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김철의 경이적인 능력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기가 힘들었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참고 있었다.
 “쯔쯔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저쪽에 가서 앉아 있어.”
 “예··· 고, 고맙습니다.”
 최형배는 겨우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며칠 내로 이십오억 원을 드릴 테니까 그중에서 오억 원은 조직의 운영 자금으로 쓰시고, 나머지 이십억 원은 몇 개의 술집을 개업해 장사를 하십시오. 그곳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조직원들에게 용돈 말고 안정적인 월급을 지급하세요.”
 “술집을 말인가?”
 “언제까지 부하들이 헐벗고 굶주려야 합니까? 월급을 지급하게 되면 그만큼 충성도가 높아질 겁니다. 그런 다음에 세력을 확장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무리하게 확장하시지 말고 말입니다.”
 “으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나? 자네의 말에 따르겠네.”
 “앞으로 자주 만나지는 못할 테지만 전화는 한 번씩 하겠습니다.”
 “알겠네.”
 “한 육 개월 정도까지는 흑구파에서 도발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그게 정말인가?”
 “왜 그리 의심이 많습니까? 내가 하는 말이니 믿으세요.”
 “으음, 알았네. 살펴 가게나.”
 “좋은 와인 잘 마시고 갑니다. 자네도 잘 있게.”
 “예예, 살펴 가십시오.”
 “앞으로 나에게 까불면 어디 한 곳은 부러질 테니 조심해.”
 “예, 알겠습니다.”
 “그럼 너희 형님이나 잘 모셔. 난 간다.”
 룸의 문을 열고 나온 김철은 유유히 사라져 갔다.
 문을 다시 닫고 배영훈 옆에 앉은 최형배가 말했다.
 “형님, 그가 사람입니까, 귀신입니까?”
 “으음, 분명 사람이야. 그 능력이 신에 버금가서 문제지.”
 “진정한 정체가 무엇일까요?”
 “어쨌든 그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며,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었어.”
 “그, 그건 그렇군요.”
 “그러니 앞으로는 조심해. 권총으로도 죽일 수 없는 자야.”
 “으··· 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나도 그래.”
 “세상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부하들에게 말한다면 믿을까요?”
 “아니, 널 미친놈 취급하겠지.”
 “으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을 꾸욱 닫아야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아.”
 “정말 이십오억 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가져올까요?”
 “우리에게는 엄청난 돈이지만 그에게는 푼돈 같아 보이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런 것도 같습니다, 형님.”
 “당분간 흑구파에서 도발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조직 단속이나 잘해야겠어. 괜히 그들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시끄러워질 테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형님께서 조직의 큰형님이 되셨으니 손도끼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정비하는 게 시급한 것 같습니다.”
 “그래,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으니 앞으로 잘해보자고.”
 “예, 형님, 저도 옆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좋아, 이제 진정 나에게 믿을 자는 자네뿐이야.”
 “저도 형님뿐입니다.”
 1991년 11월 1일 금요일, 장충 실내 경기장.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주최한 공개 신인 오디션 대회가 열렸다.
 3천 명이 넘는 엄청난 신인들이 각자의 끼를 보여 주고자 모였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가수 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수 부문 1위와 종합에서도 1위를 차지한 K군과 아이돌이 있었다.
 그들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랩이라는 장르를 가지고 출전했는데, 심사를 맡은 김철은 그들에게 1위를 주었다.
 대회를 구경한 음악 평론가들은 김철의 생각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다음 날, 연예란에 그의 독단적인 결정에 대한 비평이 쏟아졌지만 김철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김철은 K군과 아이돌, 이들과 5년 전속에 15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계약을 맺었다.
 모두들 김철의 행동을 보고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후후후, 너희가 어떻게 나의 마음을 알겠어? 내년에는 아주 깜짝 놀랄걸.’
 김철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이 가능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92년 1월 11일.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편준협이라는 신인 가수의 1집이 발매되었다.
 트로트였는데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대대적으로 방송을 타게 되었으며, 운전하는 기사들도 모두 이 노래를 들었다.
 엄청난 대박이었다.
 그동안 엄청난 비난을 들었던 김철이지만 편준협으로 인해서 비난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3월 초에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고액으로 계약한 최일종이 M방송 월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젊은이들의 풋풋하면서도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를 그리게 될 월화 드라마로 최전설이라는 최고의 여자 탤런트와 함께 드라마를 하게 된 것이다.
 1992년 6월 1일~1992년 7월 21일까지 방송될 예정이었기에 한창 인물의 캐릭터를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5월 1일에는 K군과 아이돌의 1집 음반이 발매되었다.
 이들이 공개 신인 오디션 대회에서 1위를 할 때만 해도 음악 평론가들은 아주 부정적이었지만, 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자 젊은이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서 최단 기간에 1위에 올랐다.
 “후후, 난 이미 이렇게 될 걸 알았지만 너희들은 몰랐으니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걸?”
 6월이 되자 드라마 주연인 최일종이 안방극장을 장악해버렸다.
 워낙 유명한 여탤런트인 최전설과 하는 드라마라 캐스팅되었을 때부터 연예 기자들의 집중적인 인터뷰가 있었고, 겨우 2회가 방송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시청률이 56퍼센트에 올라 방송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우아! 최고야, 최고.”
 “몇 년 이래로 이렇게 높은 시청률은 처음이야.”
 김철의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 덕분에 요즘 가장 잘나가는 기획사는 단연 슈퍼 엔터테인먼트였다.
 화제로 떠오른 기획사였지만 사장인 김철은 공식적인 장소에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9월 초에는 영화계에도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강지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였다.
 국가 비밀 기관의 특수 요원과 북한 요원 간의 암살과 암투, 사랑이 잘 뒤섞인 영화로 지명도가 그리 높지 않은 신인급의 감독인 강지구와 주연을 맡은 한석교, 미국에서 살고 있던 대학생인 김윤희가 여주인공에 캐스팅되었다.
 또한 연극배우인 최민석, 송강훈이라는 신인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에 영화계가 술렁거렸다. 한국 영화계에서 1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투여한 영화는 아직 없었다.
 그것이 또 한 번 화젯거리가 되었다.
 과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인가, 하고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렇듯 대외적으로 시끄러웠지만 내부적으로도 알찬 소득이 있었다.
 바로 최지호라는 17살의 여고 배우 지망생과 배영준이라는 대학교 배우 지망생이 그것이었다.
 어쨌든 1992년은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한 해였다.
 연말이 되자 각종 시상식에서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연예인들이 대거 상을 받았다.
 “후후후, 1993년에도 획기적인 것을 보여 주겠어. 기대하라고.”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대대적인 파티를 열어 소속 연예인들과 견습생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면서 자축했다.
 김철의 말대로 될지 어떨지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1993년 1월 25일 월요일, 여의도 빌딩 5층.
 총면적 450평의 5층 전체에 종합 격투기 단체 회사인 킹 FC(King FC)라는 것이 입주했다.
 김철이 사장에 앉았으며,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철이었기에 기자회견장에는 수십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파파파팟.
 플래시가 번쩍거리면서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김철과 대회 관계자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킹 FC에 관한 질문에 대답해주실 분을 단상에 뫼시겠습니다. 대회 총괄 본부장이신 김태수 님이십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20년 동안 태권도 관장과 킥복싱 체육관을 운영해온 김태수는 올해 47살이었다.
 체육계에서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를 알아보는 기자들이 많았다.
 180센티미터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이라서 그런지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강인한 모습을 가졌다.
 단상에 올라선 김태수는 기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부터 했다.
 “기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에 킹 FC의 총괄 본부장직을 맡은 김태수입니다. 올해부터 대한민국에서는 종합 격투기 대회를 개최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궁금한 점이 많으실 테니 이제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아, 두 번째 줄의 노란 넥타이를 매신 분 질문해주십시오.”
 “태극 일보의 김 기자입니다. 킹 FC의 대회는 어떻게 개최되는 겁니까?”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는 대회 원년이라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 위주로 개최될 것입니다. 대회 참가를 원하는 선수는 대회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자격에 하자가 없는 선수에 한하여 대회 출전 자격을 부여합니다. 규정집을 참고하시면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넘버원 일보의 한 기자입니다. 챔피언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습니까?”
 “예, 팔십 킬로그램 이하의 라이트급 챔피언, 팔십에서 백 킬로그램까지의 크루저급 챔피언과 백 킬로그램 이상의 헤비급 챔피언, 이렇게 세 개의 챔피언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대회 개최는 어떻게 됩니까?”
 “올해 대회는 4월 4일에는 라이트급 챔피언전을, 7월 7일에는 크루저급 챔피언전을, 10월 10일에는 헤비급 챔피언전이 각각 열리게 될 것이며, 12월 21일에는 팬들이 원하는 선수들과 시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대회인 킹 슬램(King Slam)을 개최할 것입니다. 내년 대회는 추후 발표할 예정에 있습니다.”
 “대회 상금은 어떻게 됩니까?”
 “올해는 대회 원년이라 각 챔피언은 오억 원(62만 5천 달러)의 상금을 받게 됩니다만, 내년부터는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승리하는 선수가 십억 원(125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받게 됩니다.”
 “허억, 십억 원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승리한 선수는 십억 원의 상금을 받게 되지만 패하는 선수는 일억 원(12만 5천 달러)의 대전료만 받게 됩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고, 김태수 총괄 본부장의 설명이 30분 넘게 이어졌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규정집을 참고해주십시오.”
 김태수 총괄 본부장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사회자의 마지막 멘트가 이어졌다.
 “그럼 이상으로 킹 FC의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외신 기자들의 기사가 전 세계로 타전되었고, 격투기 선수들은 킹 FC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1993년 2월 22일 월요일.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는 K군과 아이돌의 2집이 지난 7일에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15일 만에 1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K군과 아이돌의 패션과 그들이 하고 있는 액세서리는 시중에서 품절되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1집에 이어서 연타로 히트를 기록 중이었다.
 1992년 9월 9일 수요일에 개최된 제2회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공개 신인 오디션에서 가수 부문 1등을 한 혼성 그룹 토토의 1집이 지난 17일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 일제히 나가면서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기가 급상승 중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한꺼번에 벌여 놓았기에 두서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김철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사업을 시작한 것이었기에 비록 지금은 성공이라고 말하기엔 일러도 모든 사업이 잘 돌아간다고 할 수 있었다.
 슈퍼 엔터테인먼트는 이제 본궤도에 올라섰다고 모두들 인정하고 있었으며, 슈퍼 경호 회사도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들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점차 사업이 확대되는 추세였다.
 슈퍼 투자 회사는 아직도 규모가 그대로였지만 가장 내실이 탄탄한 회사였다.
 다른 곳에 투자하지 않고 오직 김철 혼자서 주식에 집중 투자했으며, 남녀 직원 4명은 그의 소소한 업무 처리만 하고 있었다.
 지난 1월에 출범한 킹 FC도 세월이 지날수록 인기가 치솟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김철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갔다.
 끼이이익.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앙드레 의상실에 리무진이 한 대 정차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보디가드가 뒷문을 열어주자 김철이 내렸다.
 리무진의 앞과 뒤쪽에 정차했던 12인승 승합차에서도 8명씩 16명의 보디가드가 내려 철저하게 경호하면서 의상실로 들어갔다.
 부아앙.
 끼이익!
 그때 급정거를 한 붉은색 페라리 스포츠카 한 대가 길가에 멈추더니 운전석에서 미모의 여성이 내렸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는데, 키도 크고 몸매도 환상적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척 보기에 아주 비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미녀는 앙드레 의상실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미녀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안내했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의상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김철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섹시하면서도 지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가 김철을 바라보았다.
 바로 최미래였다.
 김철의 주위에 있던 보디가드들은 최미래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움 하나만은 그 어떤 여성과 견주어도 뒤질 것 없는 완벽에 가까웠다.
 “오랜만이에요, 김철 씨?”
 “예, 오랜만입니다.”
 “우리가 헤어진 지 일 년이 좀 넘었죠?”
 “헤어졌다고 하면 오해를 사겠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지 일 년이 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앙드레 선생님의 패션쇼에 메인 모델로 나서게 되었어요.”
 최미래는 김철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눈부신 각선미에 주위에 있던 보디가드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음,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아,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그럼 회사는요?”
 “몰랐어요? 나 세 달 전에 그만두었어요.”
 “그랬군요.”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신다고 하던데요?”
 “제가 말입니까?”
 “그럼 김철 씨 말고 누구겠어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에요, 난 분명 김철 씨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할 줄 알았거든요.”
 “하하하,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옷을 봐야 하거든요.”
 “예, 그러세요.”
 먼저 소파에서 일어난 김철은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진열되어 있는 남성복 코너에서 옷을 살피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서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그런 김철을 쏘아보던 최미래는 순간 그 눈빛을 지웠다.
 ‘호호호. 김철, 어디 두고 보자. 조만간 너의 비밀을 철저하게 파헤쳐 줄 거야.’
 “최미래 님,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아, 그래요? 알았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최미래는 여직원을 따라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사라졌다.
 
 
 제4장 아름다운 라이벌 출현
 
 
 재킷을 비롯해 남방, 남성복 등을 입어본 김철은 각각 5벌씩 구입했다.
 2층으로 올라간 최미래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김철은 계산한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기해 있던 리무진에 오르자 스르르 미끄러지듯 그렇게 출발했다.
 최미래는 2층에서 리무진으로 걸어가는 김철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호호호, 저렇게 능력 있는 멋진 남자가 감히 날 거부해? 흥, 어디 두고 보자.’
 김철이 탄 리무진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드레스를 2벌 구입하고는 의상실 밖으로 나갔다.
 길가에서 걸어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최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면서 쇼핑백을 뒷좌석에 내려놓고는 페라리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부릉, 부아아앙.
 묵직하면서도 파워가 넘치는 엔진음을 내면서 페라리는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여의도 빌딩 맞은편 20층의 하늘 빌딩.
 두 달 전 7층, 500평 전부를 전세로 입주한 연예 기획사가 한창 인테리어 공사를 하더니 3일 전에 그 공사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어제는 각종 사무기기를 들여와 배치했고, 오늘 오전에는 현판까지 내걸었다.
 ‘최 엔터테인먼트’였다.
 끼이익.
 하늘 빌딩 정문 옆에 있는 주차장에 붉은 페라리 스포츠카를 주차하고는 최미래가 내렸다.
 워낙 뛰어난 외모를 가진 그녀였기에 주위에 걸어가던 사람들이 전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이셔츠를 입은 2명의 20대 후반의 남자가 달려오더니 뒷좌석에서 꺼낸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뚜벅뚜벅.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최미래가 앞장서자 그녀의 뒤를 2명의 남자가 뒤따랐다.
 그녀와 2명의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내렸다.
 최 엔터테인먼트로 들어간 최미래는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았다.
 부산의 최고 인테리어에서 대리로 근무하고 있던 한기운이 최 엔터테인먼트의 연예부 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최미래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 부장님, 사무실의 인테리어는 마음에 들어요?”
 “예, 마음에 듭니다, 사장님.”
 “좋아요. 오늘 중으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난 한 부장님만 믿을게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조금 후에 K방송국에서 녹화 방송하는 퀴즈쇼에 출연해야 해서 나가봐야 해요.”
 “사장님의 미모라면 이목이 단번에 집중될 겁니다.”
 “호호호. 한 부장님, 고마워요, 좋게 말해줘서.”
 소파에서 일어난 최미래는 사장실에 들어가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한기운 부장은 최미래의 모습을 보고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얀 원피스가 외모와 아주 잘 어울려 마치 여신이나 천사를 보는 듯했다.
 K방송국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최미래는 매니저와 함께 녹화장으로 향했다.
 방송국 복도를 걸어가는 최미래를 본 남녀 연예인들이 모두 길을 비켜 주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그녀의 향수 냄새에 취하고 미모에 취한 그들은 마치 마약을 복용한 듯한 표정으로 멍했다.
 퀴즈쇼 녹화장에 최미래가 나타나자 역시나 먼저 와서 대기해 있던 출연자와 방송 관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살짝 웃어주자 마치 천사가 미소 짓는 듯 황홀해했다.
 ‘아, 아름다워.’
 ‘진짜 천사가 나타났어.’
 10분 후 방송 녹화가 시작되었고, 세 번째 출연자로 단상에 선 최미래는 성우가 질문하는 문제에 명쾌하게 답변했다.
 단연 돋보이는 천사 같은 외모에 집안 좋고, 외국 유학파라 관심이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진행자도 은근하게 관심을 보이면서 약간은 편중된 방송이 되었지만 방청객들도 불만이 없었다.
 그만큼 최미래의 미모는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녹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최미래는 결승에 올라 결국 우승했다.
 그날 저녁에 방송이 나간 후, 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평소 8퍼센트였다 36퍼센트로 급격하게 치솟았다는 후문이 돌았다.
 한 번의 방송으로 최미래는 각종 프로에서 섭외 1순위가 되었다.
 다음 날부터 최미래는 인기 연예인들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세 곳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했고, 앙드레 패션쇼에 메인 모델로 섰다.
 “우아! 어디에서 저런 미녀가?”
 “너, 너무 아름다워.”
 패션쇼를 관람한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최미래에게 관심을 보였다.
 기자들이 대거 그녀에게 몰려들어 인터뷰를 했고, 사진을 찍어 신문이나 방송에 내보냈다.
 그만큼 최미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송 첫 출연 일주일 만에 그녀는 연예계의 신데렐라가 되었으며, 광고업계에서 계약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화장품, 음료, 의류, 자동차, 액세서리 등 모두 7개의 광고 계약을 체결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그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부른 레코드 앨범이 출시되었는데, ‘천사’라는 타이틀곡이 발매 하루 만에 50만 장이 팔리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잘 맞물린 수레바퀴가 힘을 받아서 잘 굴러가듯 최미래의 일정과 계획은 완벽한 성공을 거뒀으며, 지금도 각종 음악 프로에서 1, 2위를 휩쓸고 있었다.
 1993년 4월 4일 일요일, 저녁 6시.
 공식적인 킹 FC의 라이트급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동안 국내에 충분하게 홍보 활동을 했고, 외국에 거주하는 라이트급 격투기 선수들에게도 초청장을 발송했기에 예상보다 많은 선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미 이틀 전에 객관적으로 알려진 자료를 토대로 선발된 32명의 외국 선수를 확보해두었고, 나머지 국내외 선수들은 치열하게 예선전을 거쳐 32명을 선발했다.
 이렇게 64명의 선수가 선발되자 4월 3일 오전에 열린 예선전에서 32명의 선수가 결정되었고, 다시 오후에 그들이 대결해서 16명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16명의 라이트급 선수들은 화끈하고 재미있는 경기를 펼쳐 많은 박수를 받았다.
 K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방송했기에 전국적으로 방송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흑인 선수인 브라운이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어 상장과 상패, 상금으로 5억 원(62만 5천 달러)을 받았다.
 이 정도면 첫 대회치고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손익을 따져 보면 홍보비로 5억 원이 들어갔기에 총경비만 20억 원 정도 되었다.
 그에 반해 수익은 입장객과 방송, 광고를 포함해도 절반이 조금 넘는 12억 원 정도에 그쳤다.
 ‘후후후, 약 팔억 원의 적자가 발생했지만 대회 홍보를 충분히 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성공작이야.’
 간부들은 적자가 발생했기에 김철의 눈치를 보았지만 당사자인 김철은 전혀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이미 첫 대회 때 약간의 적자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4월 25일 일요일.
 김철의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과 제작을 한 강지구 감독의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다.
 그동안 슈퍼 엔터테인먼트는 대대적인 홍보를 했기에 그만큼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관심이 많아졌다.
 100억 원을 투자한 최초의 한국 영화가 드디어 개봉한 것이다.
 남자 주인공으로 한석교, 여자 주인공에 신인 김윤희, 연극배우 출신의 최민석과 송강훈은 이 한 편의 영화로 인기가 치솟았다.
 영화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기분 좋은 출발을 시작했고, 개봉 한 달 만에 650만 명이라는 한국 영화 역대 관객 순위로 1위에 오르는 등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제작비 100억 원에 홍보비 20억 원을 포함해 모두 120억 원이 들어갔지만, 영화 흥행 수익으로 260억 원이 들어왔기에 손익분기점을 넘어 140억 원이라는 이익을 얻었다.
 또한 잠정적인 부가 가치로는 약 500억 원 정도를 기록한 것이라 발표되었다.
 영화 한 편으로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저력을 보여 주었고, 연예계에서는 이제 김철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가 없었으며, 거의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고, 그 중심에 김철이 있었다.
 사장 김철의 특별 지시로 부사장 김최고가 직접 나서서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두 번째 영화에 감독으로 데뷔하려던 장윤한 감독과 남녀 주연 배우가 될 한석교와 전도영과의 약속을 잡았다.
 한석교는 한 편의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로, 이미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장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사장 김철을 비롯해 김최고 부사장이, 맞은편에는 이번에 감독을 맡을 장윤한 감독과 남녀 주연 배우가 될 한석교와 전도영이 자리해 있었다.
 김철은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여유를 보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긴장되었는지 아무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분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우리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두 번째 작품이 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김 부사장, 이분들께 영화 시나리오를 드리세요.”
 “예, 사장님. 일단 한 부씩 받아서 읽어보고 난 후에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한석교가 대답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 30분 정도 지나서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감독과 배우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들은 이런 시나리오라면 충분히 흥행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한석교가 더했는데, 그는 사장인 김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김철이 부사장인 김최고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클릭과 접속’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다들 잘 읽어보셨을 줄 압니다. 드라마와 로맨스가 섞인 장르이며, 신세대 젊은이의 사랑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생각되어지는데 어떻습니까?”
 김최고 부사장이 감독이 될 장윤한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 짐작들을 하고 계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사장님께서는 이번 ‘클릭과 접속’이라는 영화 제작비로 오십억 원을 책정하셨습니다. 감독과 주연 남녀 배우들의 출연비와 홍보비는 제외되어 있는 금액입니다.”
 ‘으음, 그럼 못해도 육십억 원은 투자한다는 말이구나.’
 장윤한 감독의 마음은 벌써 흥분되었다. 이 정도의 제작비라면 다른 걱정 없이 오직 좋은 영상을 담은 영화를 찍는 데에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이다.
 ‘휴우, 사장님이 아니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제작비야.’
 주연 배우 한석교의 마음도 거대한 김철의 스케일에 흥분되었다. 또한 이런 여건이 좋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신인 여배우 전도영은 드라마에만 몇 번 출연했는데, 이번에 이런 큰 규모의 영화에 첫 출연하게 되어 떨리면서도 흥분이 되었다.
 “자, 이제 어느 정도는 생각을 정리하셨을 테니 계약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장윤한은 감독직을 수락하겠습니다.”
 한석교와 전도영도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대표로 한석교가 대답했다.
 “저희들도 계약하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럼 계약서에 사인하십시오. 여기 계약서가 있습니다.”
 사장인 김철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고, 전적으로 부사장인 김최고가 알아서 모든 절차를 진행했다.
 그렇게 모든 계약서가 작성되고 세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다음 날, 오후 4시에 ‘클릭과 접속’이라는 영화의 제작 발표회가 열리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질문과 인터뷰가 이어졌고, 사진도 많이 찍어갔다.
 연예부 기자들이 다른 곳보다 몇 배나 많이 모인 것은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 영화 제작을 한다는 말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5월 초에는 복고풍의 영화를 제작한다고 발표되었는데, 영화 제작비 60억 원을 투자한 데다 신인 배우인 장동민이 주연을 맡게 되어 기자들의 관심이 더욱 쏠렸다.
 충무로의 영화사도 아닌 일개 기획사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영화를 한 해에 무려 2편이나 제작한다는 것에 다들 놀라워했다.
 “으음, 또 슈퍼 엔터테인먼트야?”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기에?”
 충무로의 영화사들도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6월 초에 또다시 ‘엽기 미녀’라는 영화를 50억 원의 제작비로 제작한다는 발표를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으아··· 또야?”
 “이거 사기 아니야?”
 “우, 그놈들은 도대체 무슨 영화만 찍었다 하면 최소 오십억이야?”
 7월 초에도 ‘주유소 사건’이라는 영화를 30억 원에 제작한다는 발표회를 가졌으며, 역시 8월 초에도 ‘달마’라는 영화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놈들이 혹시 구월 초에도 제작한다고 발표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러려고?”
 “미친놈들이니 혹시 모르지, 뭐.”
 충무로의 영화 관계자들은 설마 했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는 9월 초에도 ‘인정사정 볼 수 없다’라는 영화를 제작했고, 10월 초에는 ‘클래식 음악’을, 11월 초에는 ‘연애’를, 12월 초에는 ‘작업남’이라는 영화를 제작해 올해만 모두 9편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대충 잡아보아도 알려진 바로는 영화 제작비가 500억 원 정도 들어갔다.
 충무로의 영화 관계자들은 도대체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김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1993년 연말, 김철의 개인 재산은 영화 제작비로 500억 원을 투자했음에도 그것을 빼고 현금이 약 2천억 원 정도 되었으며, 부동산도 500억 원 정도 되었다.
 이렇게 김철의 재산이 많아진 것은 미국 월가의 주식 거래를 컴퓨터를 이용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매수하고 매도하고 하면서 단기 시세 차익을 얻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후후, 규모가 작은 한국의 주식시장보다는 먹을 것이 훨씬 많은 세계 시장의 주식이 내 스케일에 맞아. 미래를 알고 있으니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니겠어?”
 보통의 주식 투자가라면 절대 이런 방법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겠지만, 김철이기에 통용되는 방법이었다.
 그의 재산은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1994년 4월 10일 일요일, 오후.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입국 수속을 마치고 하드 케이스 가방을 끌고 걸어 나오는 청년이 있었다.
 185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호리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무스로 정성스럽게 잘 세운 데다 그 위에 선글라스를 걸고, 한쪽 귀에는 금도금 십자가 귀걸이를 했다.
 상의는 티셔츠에 힙합 바지를 입었고, 테니스화를 신었다.
 또한 양쪽 귀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몸을 약간 리듬에 맞추어서 흔들면서 걷는 모습은 요즘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구두를 신고는 화장실을 나왔다.
 청사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햇빛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삼 년 만인데 대한민국의 하늘은 언제나 푸르구나.’
 끼이익.
 그 앞으로 흰색 외제 승용차가 다가와 멈추더니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여자가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자는 175센티미터의 큰 키에 가슴이 크고 볼륨감이 있는 글래머였다.
 웨이브 파마에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걸쳤는데, 얼굴에는 볼 살이 약간 있어서 귀여우면서도 섹시하고 세련돼 보였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짧은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키가 훨씬 더 커보였으며, 각선미가 뛰어난 미녀였다.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도 170센티미터나 되는 키였지만 옆에 서 있는 그녀에 비한다면 제법 키 차이가 있었다.
 대신 훨씬 날씬한 몸매의 그녀는 체크무늬가 있는 헤어밴드를 하고 흰색 블라우스에 흰색 치마, 흰색 운동화 차림이었다.
 어깨를 살짝 덮는 정도의 길이에 약간 웨이브 진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 얼굴은 초롱초롱하고 큰 눈에 약간의 화장기만 있었지만 그것이 더욱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청순하면서도 가녀리게 보이는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오빠.”
 “지현아, 오랜만이야.”
 섹시한 미녀가 오빠, 라고 불렀지만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청순한 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것 때문에 약간 삐친 얼굴이 된 그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오빠는 나는 안 보이고 지현이만 보이는 거야?”
 “하하하, 미안. 사랑하는 동생 현아야, 반갑다.”
 “호호. 나도 반가워, 오빠.”
 두 사람은 서로 껴안았다.
 그것을 보던 지현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빈 오빠, 아직 시차 적응도 못했을 텐데 피곤하지 않아요?”
 “약간 피곤하지만 괜찮아.”
 “오빠, 짐이 이게 전부야?”
 “그래, 나머지 짐은 화물로 들어올 거야.”
 “그럼 오빠, 어서 집으로 가자.”
 “그래, 가자.”
 신빈은 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 하드 케이스 가방을 밀어 넣은 뒤 탔고, 신현아는 운전석에, 박지현은 조수석에 타고 출발했다.
 부우우웅.
 흰색의 아우디 승용차는 곧 공항을 빠져나가 도심 속으로 질주했다.
 강남구 도곡동 타워 캐슬에 차가 멈추었다.
 55층 고층 아파트인 타워 캐슬은 110평 규모에 한 평당 2천만 원으로, 22억 원이나 하는 초고가의 신흥 아파트였다.
 타워 캐슬을 건립할 당시 획일적 형태의 아파트가 대부분인 과밀 도시 서울에서 주거 선택권을 넓혀 준 새로운 실험인가, 아니면 자본의 지배를 상징하는 표상인가 하는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시공사인 발해 건설이 최고만을 선택해서 지었다는 타워 캐슬은 최고 110평 22억 원이라는 집값도 화제였지만 분양 대상자와 입주 상점 또한 최고에 어울리도록 선별했다는 차별적 마케팅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품 차별화를 통한 시장 경쟁 위치 정립을 확고히 했고, 가장 살고 싶은 집 1위에 선정되는 등 소비자에 대한 포지셔닝 전략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타워 캐슬이 분양에 성공하면서 고급 아파트와 고급 빌라 시장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대기업들의 주도로 초고가 초대형 주택 건설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타워 캐슬의 55층 펜트하우스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신빈과 신현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다.
 자동으로 천장에 조명등이 켜지면서 문도 자동으로 스르르 열렸다. 각종 첨단 장비가 설치되어 있는 초고가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50대 초반의 중후한 남자와 40대 중반의 귀티가 나면서 세련된 부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흐흑··· 우리 빈이 돌아왔어요, 여보.”
 “아버지, 어머니, 저 돌아왔어요.”
 신빈은 아버지인 신덕수와 어머니 오정화에게 큰절을 했다.
 신덕수는 아들 신빈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자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오정화도 아들 신빈을 껴안았다. 이번에는 모자의 상봉이었다.
 신덕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박지현에게도 말했다.
 “지현이도 왔구나.”
 “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래, 우리야 늘 잘 있었지. 안으로 들어오너라.”
 “예, 아저씨.”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모처럼 화목한 대화를 나눈 그들은 장소를 부엌으로 옮겨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오정화는 미국에서 3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이 느껴졌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다시 거실로 나와 차와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부분 신빈의 유학 생활 이야기였다.
 신덕수는 박지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현아, 아버님의 백화점은 잘되시냐?”
 “예, 아저씨. 작년도와 비교해서 조금 더 매출이 오르고 있대요.”
 “잘되신다고 하니 그것 참 다행이구나.”
 “예, 아버지께서 안부 전하라 하셨어요.”
 “그래, 그 친구와 조만간 점심이라도 함께 해야겠구나. 그런데 넌 날이 갈수록 더욱 예뻐지는구나.”
 “고맙습니다, 아저씨.”
 신덕수는 박지현을 아들 신빈의 처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신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정화는 아들 신빈의 짝으로 박지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집안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중매가 은밀하게 들어오고 있었는데, 모두 대단한 집안이었다.
 신덕수는 기업 순위 23위에 올라 있는 대기업 발해 그룹의 회장이었다.
 발해 건설, 발해 전자, 발해 섬유, 발해 해운, 발해 화학, 이렇게 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명실상부 자본력이 탄탄한 대기업이었다.
 박지현의 집안도 강남에 럭셔리 백화점과 20층의 빌딩 2개를 소유하고 있고, 경기도 일원에 제법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재산가였지만 발해 그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현아와 박지현은 여중 때부터 친구였으며, K대 영어영문학과에도 나란히 입학해서 올해 초 졸업한 재원이었다.
 
 
 제5장 사랑
 
 
 박지현은 타워 캐슬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압구정동으로 향했다.
 집안이 부유하다 보니 어려서부터 사치가 좀 있는 편이었던 신현아에 비해 박지현은 부잣집 외동딸임에도 그 나이 또래 숙녀 정도의 지출만 했다.
 끼이익.
 택시가 압구정동의 바리스타가 직접 만들어주는 커피 전문점인 ‘타임’ 앞에 멈추자 박지현이 내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두리번두리번.
 박지현은 주위를 살펴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소파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뜻밖에도 김철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잘 입던 앙드레의 옷이 아니라 흰색 남방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은 대학생 같은 복장이었다.
 그는 박지현을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박지현이 그 옆에 털썩 앉더니 김철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으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김철은 박지현의 향기로운 머리 냄새를 맡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회상했다.
 능력이 생긴 후 김철은 자신의 반려자가 누구인지 미래를 들여다보았다.
 비록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미래를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김철은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
 심장 안에 그녀가 이미 들어와 있었기에 최미래가 그렇게 유혹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멀리서 박지현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무턱대고 접근할 수도 없었기에 괴로웠지만 드디어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박지현과 김철의 첫 만남은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달 전 그날 오후, 박지현이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대낮에 음주 운전을 한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고, 그녀가 차를 발견했을 때 피하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눈이 커질 대로 커진 박지현은 ‘아, 이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운명은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몸을 날려 그녀를 구한 사람이 김철이었다.
 그녀를 감싸면서 넘어졌기에 박지현은 상처 하나 없었지만, 김철은 팔꿈치에 피가 조금 흘러내리는 정도의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음주 운전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박고 멈추었고, 만취 운전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한 상태였다.
 김철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차와 119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해 사고를 처리했다.
 박지현은 김철을 우선 약국으로 데려가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소독해주고 직접 약까지 발라주었다.
 청춘 남녀들이라 금방 서로에게 마음이 빼앗겼고, 그날 이후 둘은 만남을 가지면서 사귀게 되었다.
 박지현은 김철에게 자신이 부잣집 딸이라는 걸 숨겼고, 김철도 그녀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사고 당시 서로 입고 있던 옷들도 그렇게 고급이 아닌 평범한 옷이었기에 신분을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서로 만남을 가지면서 대화를 나누어보았더니 즐겁고, 편하고 모든 면에서 잘 통했기에 천생연분이었다.
 “오빠, 무슨 생각해?”
 박지현의 말에 그제야 김철은 회상에서 깨어나 대답했다.
 “지현이 머리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래.”
 “정말?”
 “그래, 머릿결도 너무 매끄럽고 좋아.”
 “고마워, 오빠.”
 “카푸치노 마실 거지?”
 “응, 오빠.”
 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주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박지현은 마냥 행복했다.
 잠시 후, 바리스타가 직접 만든 카푸치노를 들고 돌아왔다.
 “와아, 맛있겠다.”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했으니까 마셔 봐.”
 “응, 오빠, 고마워.”
 환하게 웃은 박지현은 커피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무 맛있다.”
 “나도 한 모금 마셔 봐도 돼?”
 “응, 오빠, 여기. 자, 마셔 봐.”
 김철은 박지현이 내민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우아! 이거 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있네?”
 “그럼 오빠가 이거 마셔.”
 “아, 아냐. 그냥 네가 마셔.”
 “그럼 오빠, 우리 나눠 마시자.”
 박지현의 마음 씀씀이에 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가 나의 운명적인 사랑이야.’
 두 사람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찰칵찰칵.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던 점퍼 차림의 30대 후반 남자가 은밀하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찍었다.
 ‘타임’에서 나온 김철과 박지현은 택시를 타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끼이익.
 택시가 멈추고 박지현이 내렸다. 두 사람은 지금껏 같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떨어지기 싫어했다.
 잠시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박지현이 뒤돌아 걸어갔다.
 택시는 다시 출발해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30층 비너스 타워.
 청담동에 세워진 비너스 타워는 90평에 시세가 13억 5천만 원이나 하는 고급 타워 아파트였다.
 그곳의 22층에 박지현의 집이 있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인터폰을 눌렀다.
 딩동.
 “지현이니?”
 “예, 엄마, 저예요.”
 삐리리릭.
 잠금장치가 풀리자 박지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귀부인이 들어서는 박지현을 맞이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는 40대 초반임에도 팽팽한 피부와 미모로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제 오니?”
 “예, 엄마. 아빠는?”
 “서재에 계신다.”
 “알았어요.”
 박지현이 곧장 서재로 향하자 그녀의 엄마인 한미라가 주방에 있는 여주댁에게 말했다.
 “여주댁, 지현이 목욕물 좀 준비해주세요.”
 “예, 사모님.”
 여주댁이라는 가정부가 최고급 월 풀 욕조의 스위치를 누르자 물이 콸콸거리면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미라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주방으로 향해 남편에게 줄 과일을 준비했다.
 박지현의 아버지 박문길은 강남에 있는 럭셔리 백화점의 사장이었다. 지금은 40대 후반이라 중후한 멋이 있지만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으로 인기가 많았었는데, 한미라를 만나고부터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정도라고 한다.
 박문길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박지현을 바라보았다.
 “예쁜 내 딸, 이제 왔니?”
 “예, 아빠.”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예, 밥 잘 먹고 있어요.”
 “아빠가 용돈 좀 줄까?”
 “아니에요, 나 돈 있어요.”
 “허허. 녀석, 아빠가 용돈 좀 주고 싶어서 그래.”
 “웅, 그럼 조금만 주세요.”
 “어디 보자. 여기 있다.”
 박문길이 지갑 속에서 1백만 원권 자기앞수표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박지현은 놀랐다.
 “아빠, 너무 많아요.”
 “용돈으로 쓰고 남는 것은 옷이라도 사 입거라.”
 “그래도 많은데······.”
 “그럼 가지고 있다가 써라.”
 고개를 끄덕인 박지현은 아빠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쪼옥.
 “아빠, 고마워요.”
 “허허, 녀석도. 그만 가서 쉬어라.”
 “예, 아빠.”
 서재에서 나온 박지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목욕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따뜻한 거품 목욕을 하니 나른한 게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목욕을 끝마치고 욕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한미라가 그녀를 끌고 휴게실로 데려갔다.
 “해초팩이 피부에 그만이니 같이 하자.”
 “알았어요, 엄마.”
 휴게실 안에는 두 모녀에게 팩을 해줄 30대 중반의 김포댁이라는 가정부와 윤 실장이라는 여자가 서 있었다.
 4명의 가정부를 관리하는 윤 실장은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 처리만큼은 완벽주의를 표방하는 여자였다.
 “사모님과 지현 양에게 해초팩을 할 테니 침대에 누우세요.”
 “알았어요. 시작해요.”
 한미라와 박지현이 침대에 눕자 윤 실장이 김포댁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포댁이 오디오를 틀자 클래식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윤 실장이 직접 두 모녀에게 해초팩을 해주었고, 김포댁은 팩 재료를 들고 보조했다.
 이렇듯 박지현의 집은 사람을 부리면서 귀족적인 호화롭고 편안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우리 집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말해.’
 박지현이 김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바로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상류층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 최 엔터테인먼트의 상담실.
 냉커피 2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최미래와 낯선 30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김철과 박지현이 커피 전문점 ‘타임’에서 카푸치노를 마실 때 몰래 사진을 찍었던 그 사람이었다.
 “의뢰하신 남자 분의 뒤를 미행해 찍은 사진입니다. 한번 보신 후 말씀하시죠.”
 “줘봐요.”
 하나하나 사진을 살펴본 최미래는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이 여자는 누구죠?”
 “어제 발견한 여자인데, 저 혼자였기에 남자 분을 미행하느라 미처 여자의 신분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인원을 더 투입해서라도 밝혀내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보였으니 조만간 다시 만날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동료와 같이 움직여 반드시 여자 분의 신분을 알아내겠습니다.”
 “좋아요. 여기 특별 비용을 더 줄 테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최미래는 1백만 원권 자기앞수표를 3장이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그 돈을 집어넣으면서 대답했다.
 “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만 나가서 감시하세요.”
 “예,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최미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상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호호호호. 제법 청순하고 아름답군. 남자들이 좋아할 만하겠어. 벌컥벌컥.”
 냉커피를 단숨에 마셔 버린 최미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이 여자한텐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사귀고, 난 삼 년 전부터 그토록 사귀자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면하다니······.”
 찌이이익.
 최미래는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면서도 그 분노가 다 식지 않는지 테이블에 놓인 생수를 병째 들이켰다.
 “김철, 이거였니? 이러려고 날 외면했어? 두고 봐, 내가 널 파멸시켜 주겠어.”
 1994년 6월 1일 수요일, 강남구 청담동 슈퍼 그룹(Super Group) 빌딩.
 김철은 대지 3천 평의 25층 빌딩을 5개월 전에 300억 원에 매입했다. 그리고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자 여의도 빌딩에 있던 회사를 전부 이곳으로 이전했다.
 빌딩의 2층부터 5층까지는 슈퍼 경호 회사가 입주했고, 6층부터 10층까지는 킹 FC의 본부가 입주해 일하고 있었다.
 11층부터 20층까지는 슈퍼 엔터테인먼트가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21층은 슈퍼 투자 회사가, 22층부터 24층까지는 슈퍼 그룹의 사무실이었으며, 마지막 25층은 김철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빌딩의 뒤쪽에는 2만 평 정도 되는 공터가 있었는데, 이 공터는 각종 쓰레기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철이 직접 찾아가 매입하려고 했음에도 망설이던 땅 주인은 현찰로 100억 원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계약에 동의해 매입할 수 있었다.
 땅 주인에게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사업에 부도가 나면서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것이 주효해서 헐값에 땅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후후, 이 땅값이 오 년 뒤에는 열 배까지 오르고, 다시 사 년 뒤에 열 배 올라서 구 년 만에 총 백 배 오른다는 걸 이전의 땅 주인은 애석하게도 모르겠지?’
 김철은 이 공터를 100억 원에 매입함으로써 훗날 1조 원을 벌어들이는 계약을 한 것이다.
 훗날 이 땅을 팔 때에는 2천 평씩 10개로 분할하여 매도하려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그동안에는 슈퍼 경호 회사와 킹 FC 소속 선수들의 훈련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립식 건물을 신축했다.
 슈퍼 경호 회사와 킹 FC 선수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공터를 절반씩 두 곳으로 나누고, 300평 규모의 조립식 건물을 5개 동씩 모두 10개 동을 신축했다.
 조립식 건물은 프리훼브패널에 청색 지붕, 건물 나머지 부분의 내외 피는 모두 착색아연도강판이었고, 색깔은 아이보리로 깔끔했다.
 슈퍼 경호 회사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연예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추가 직원 모집을 하면서 급성장 중이었다.
 간부들을 비롯, 경호원과 행정원들을 포함해 약 40명이던 것이 지금은 3백 명으로 늘어났다.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도 14명에서 4개 부서에 총 4백 명으로 늘어났다.
 연예인부, 가수부, 탤런트부, 영화배우부로 나뉘었고, 각 부서에는 담당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운전사 등이 배치되었다.
 소속 가수가 30명이 넘었으며, 탤런트는 주연과 조연까지 포함하면 60명이 넘었다.
 영화배우는 현재 17명으로 가장 적었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한 해에 제작하는 영화 편수가 10편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단역 배우를 비롯해 모델, 사회자(MC), 방송 스태프 등 연예인들이 83명이었다.
 사람들은 슈퍼 엔터테인먼트가 너무 무리하게 투자를 많이 하는 데다 연예인들과 대거 계약하는 걸 보고는 우려했다.
 하지만 미래를 들여다보고 지시를 내린 김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슈퍼 투자 회사는 남자 직원 2명에 여자 직원 2명이던 것이 20명으로 늘어났다.
 킹 FC 본부는 작년에 라이트급 챔피언전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적자였지만 홍보가 만족스럽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경기가 너무 잔인하다는 비평도 있었지만, 화끈한 경기에 매료된 관중들이나 팬들은 열광했다.
 7월에 열린 크루저급 챔피언전에서는 손익분기점이더니, 10월에 열린 헤비급 챔피언전에서는 흑자로 돌아섰다.
 12월에 열린 킹 슬램 대회는 이전까지의 손해를 전부 만회하고도 20억 원이라는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3월 3일에 열린 킹 FC 1은 각 체급별 도전자를 가리는 대회였는데, 박진감 넘치는 경기로 흥행에 성공해 각종 비용을 제하고 1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7월 7일에는 킹 슬램 2가 열리게 된다. 각 체급별 도전자와 챔피언이 맞붙게 되며, 그 밖에 체급과는 상관없이 팬들이 서로 싸우기 원하는 선수를 선정해서 경기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렇듯 킹 FC는 크게 7월과 12월에 열리는 킹 슬램 대회와 킹 슬램 사이의 기간에 열리게 될 킹 FC 대회(1월, 3월, 5월, 8월, 10월)로 나뉘게 되었다.
 슈퍼 그룹 본사는 자회사인 슈퍼 경호 회사를 비롯해 킹 FC 본부, 슈퍼 엔터테인먼트, 슈퍼 투자 회사를 총괄하는 곳으로 2부가 있다.
 슈퍼 그룹의 총괄 자금 담당부 20명과 감사부 30명이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음, 이제 제법 재미를 보았으니 새로운 사업으로 돈을 모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인재를 먼저 스카우트하는 게 좋겠군.”
 1994년 6월 3일 금요일.
 김철은 ‘슈퍼 경제 연구소’를 설립했다.
 뛰어난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게 주 업무로, 일류 학벌을 위주로 모집하는 게 아니라 능력을 위주로 모집하게 될 것이다.
 슈퍼 그룹 본사에서 차출되어 인사이동해온 10명의 직원들은 김철의 특별 지시를 받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일이라는 건 이미 들었지만 일류 대학교 출신이나 졸업 예정자가 아니라 고졸이거나 중학교 중퇴자도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나이가 30살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김철은 이들을 모집할 때 그 사람의 한 가지 특기를 보았는데, 모두 외국어를 한 가지씩 잘 구사한다는 거였다.
 1994년 6월 9일 목요일.
 인터넷 미디어 기업인 ‘(주)슈퍼 커뮤니케이션’이 설립되었다.
 회장은 김철이었고, 회사의 얼굴은 박홍일 사장이 맡았다.
 그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던 자였다.
 소프트웨어에 재능이 있는 그를 김철이 직접 약속을 잡아 스카우트했다.
 그는 인사말에서 ‘(주)슈퍼 커뮤니케이션의 설립 이념은 인터넷 미디어 기업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잇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세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슈퍼 커뮤니케이션 고객들과 함께 다양한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인터넷 세상을 만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슈퍼 그룹 빌딩의 맞은편 12층 스카이 빌딩을 매입해 지금 한창 공사 중에 있으며, 임시방편으로 슈퍼 그룹 빌딩의 한쪽 사무실에서 국내 최초 무료 웹 메일 서비스 ‘슈퍼 메일 넷’을 오픈했다.
 국내 최초 무료 웹 메일 슈퍼 메일 넷은 PC 통신 이용자들을 흡수하고 새로운 인터넷 이용자층을 창출하며 서비스 오픈 6개월 만에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후후후, 내년에는 대한민국 대표 메일로 자리 잡을 거야.’
 김철은 (주)슈퍼 커뮤니케이션의 사업 계획서 초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9월 초에는 온라인 커뮤니티 ‘슈퍼 카페’ 오픈 예정.
 자사에서 서비스하는 인터넷 포털 서비스인 슈퍼 메일 넷에서 완전히 새롭게 개편한 국내 최대 커뮤니티의 장이 될 슈퍼 카페를 오픈해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년인 1995년 3월 초에는 온라인 종합 쇼핑몰 ‘슈퍼 쇼핑’ 오픈 예정.
 “후후, 이것으로 슈퍼 커뮤니케이션은 완전하게 자리 잡고 매년 초고속 성장을 하게 될 거야.”
 6월 10일 금요일, 저녁 6시, 명동 필 레스토랑.
 2층에 있는 필 레스토랑은 내부의 인테리어가 깔끔하면서도 세련되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블루 민소매에 흰 스커트를 입은 박지현은 늘씬한 각선미가 돋보이는 복장으로 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김철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응, 오빠.”
 박지현이 옆에 앉자 메뉴판을 펼친 김철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지현아, 이 집의 스테이크 소스는 특제 소스라 아주 독특하면서도 맛있다는데, 먹어봤어?”
 “아니, 못 먹어봤어요, 오빠.”
 “그럼 소문대로 맛있는지 한번 먹어보자.”
 “응, 그걸로 두 개 시켜.”
 두 사람은 함께 살펴보더니 몇 가지의 스테이크 중에서 특제 스테이크 2개와 레드 와인을 한 병 시켰다.
 먼저 나온 크림 수프와 갓 구운 따끈한 빵과 치즈. 따끈한 빵에 치즈와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조금 후,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오자 김철이 알맞게 자른 스테이크 접시를 박지현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봐.”
 “응, 고마워, 오빠.”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속에 넣은 박지현은 맛있게 먹더니 한 점을 찍어 다시 김철에게 내밀었다.
 “오빠, 먹어봐. 맛있어.”
 “쩝쩝. 정말 특제 소스라 다르긴 다르다. 그지?”
 “맞아, 너무 맛있어.”
 두 사람은 레드 와인 한 잔씩을 마셔 가면서 식사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서로 웃어가며 맛있게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나온 레모네이드를 마시자 시원하면서도 상큼한 게 입 안이 깔끔해졌다.
 김철과 박지현이 앉아 있는 테이블과 사선으로 뒤로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는 최미래의 의뢰를 받고 김철의 뒷조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자들이 2명 있었다.
 점퍼와 면바지를 입은 자들로, 오늘은 박지현의 뒤를 미행할 자도 함께 있었다.
 외모는 평범했기에 아직 김철이 미행당하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흐흐, 오늘은 확실히 미행할 수 있겠어.”
 “이 대리님,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청담동에 있는 슈퍼 그룹의 본사 빌딩에서 김철이라는 자가 나오는 걸 보니 거기 직원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숙식을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최미래 씨가 알고 있을까요?”
 “글쎄, 나도 그게 의문이지만 어떡하겠어? 물어볼 수도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고, 최미래 씨 정말 예쁘던가요?”
 “저 김철이라는 자가 만나는 아가씨도 청순하면서 미인인 건 분명하지만, 최미래와 비교한다는 건 무리야.”
 “그래요?”
 “그럼, 최미래는 키 크고 날씬한 몸매에 가슴이 얼마나 탐스럽고 크다고. 만약 네가 정면에서 얼굴을 본다면 분명 심장마비가 걸릴걸. 그것뿐인 줄 알아?”
 “크흠, 설마 그러려고요?”
 “허, 정말이야. 최미래의 몸에 뿌린 향수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그 향기가 지금도 잊히지 않을 정도야.”
 “꿀꺽. 그 정도입니까?”
 “그럼, 너는 분명 심장마비 걸릴 거야. 그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라고.”
 “그건 그렇고, 저 두 사람 부러워 죽겠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너도 저럴걸?”
 “히히, 그건 그래요.”
 “어? 저들이 일어나려는 모양이군. 우리도 일어나자고.”
 “예, 알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김철과 박지현은 문을 열고 나와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2명의 미행자들도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면 티를 입은 조직원 10명과 마주쳤다.
 특히 앞쪽에 있는 자의 얼굴은 원래 무섭게 생긴 데다 칼자국이 여러 개 있어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뭐야, 왜 앞을 가로막아?”
 “예?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자식들이 덥게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비켜!”
 “예엣?”
 당황한 그들은 옆으로 물러나다가 그만 그의 발을 살짝 밟고 말았다.
 “어? 형님, 저놈이 흰 구두를 밟았습니다.”
 “뭐야? 이것들이 죽으려고 그러나!”
 찰싹.
 화가 난 조직원이 2명의 뺨을 올려붙였다. 워낙 험악한 분위기라 뭐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
 “햐아, 노려보네?”
 “제, 제가 언제요?”
 “이젠 오리발까지? 안 되겠군. 아그들아, 손 좀 봐줘라.”
 “예, 형님!”
 “왜, 왜들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보면 몰라? 내 구두를 밟고 사과도 없었잖아!”
 “그, 그건······.”
 미행자 2명은 그렇게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여 고초를 겪고 있었다.
 박지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면서 길을 걸어가던 김철은 갑자기 소리 없이 웃었다.
 “오빠, 왜 그래?”
 “아, 아니야. 레스토랑을 나올 때 본 조폭들이 생각나서.”
 “그래? 난 무섭던데.”
 “오빠하고 노래방에나 갈까?”
 “응, 안 그래도 나 노래 부르고 싶었어.”
 “하하, 잘됐구나. 어서 가자.”
 인근에 있는 노래방 안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미행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하필 조폭들과 마주칠 게 뭐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군.”
 “이, 이제 어쩌죠?”
 “음,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미행하자.”
 “벌써 두 번이나 놓쳤으니 다음번에는 꼭 여자의 뒤를 미행해 신분을 알아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나도 알고 있어. 정말 운이 좋은 놈이라니까. 가자.”
 “예, 이 대리님.”
 두 사람은 곧 명동의 수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1994년 6월 14일 화요일.
 김철은 택배 회사인 ‘(주)슈퍼 택배’를 설립했다.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은 슈퍼 그룹을 주시하고 있었다. 워낙 예측 못한 사업에 진출하면서도 이제껏 실패 없이 모두 성공하면서 승승장구했기에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슈퍼 경제 연구소를 설립했을 때만 해도 그룹으로 거듭났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갑자기 인터넷 미디어 기업을 설립했다.
 그에 각 대기업의 참모들이 슈퍼 그룹에 대해 분석 중에 있었는데, 그것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느닷없이 택배 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슈퍼 그룹··· 이, 이놈들 뭐야?”
 “도대체 이번에는 왜 택배 회사를 설립한 거야?”
 “혹시 사과 상자라도 배달하려는 게 아닐까요?”
 “그런 소규모 사업으로 재미를 보겠어?”
 “글쎄요, 그건 모르죠.”
 “젠장, 전혀 예측을 못하겠어.”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김철은 청담동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맞은편에 있는 12층 하늘 빌딩과 제일 빌딩을 각각 매입하여 외부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또한 내부 인테리어 공사도 한창이었다.
 슈퍼 그룹은 워낙 새로운 사업을 많이 벌이기에 대한민국의 100대 기업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1994년 6월 20일 월요일, 발해 그룹.
 기업 순위 23위에 올라 있는 발해 그룹의 회장인 신덕수는 발해 전자의 기획실장으로 신빈을 인사 발령했다.
 회장실에는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으음, 이번에도 슈퍼 그룹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려는 모양인데?”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
 “기획실장, 최근 몇 년 전부터 계속 고속 성장을 해온 기업은 단연 슈퍼 그룹뿐이야. 진출하는 사업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뛰어나서인지 모두 성공하고 있어.”
 “저도 슈퍼 그룹의 성공담을 전해들었습니다, 회장님.”
 “흠, 더욱 무서운 건 슈퍼 그룹의 회장이 아직 이십 대라는 건데, 알고 있나?”
 “그, 그렇습니까, 회장님?”
 “몰랐었나 보구나.”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기획실장, 최근 들어온 정보로는 어쩌면 우리와 경쟁할지도 모르겠어.”
 “혹시 전자 쪽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커. 기획실장은 정신 차려서 대비해야 할 거야.”
 “예, 회장님. 우리 발해 전자의 맞수로 S전자와 L전자만 생각했는데, 이젠 슈퍼 그룹의 전자와도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생각해야만 하겠군요.”
 “그러니까 기획실장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덕수 회장은 중요한 대화 중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회장님, 신덕훈 상무이사님께서 긴급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긴급 면담? 들어오라 그래.”
 “예, 회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발해 그룹 본사의 신덕훈 상무이사가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소파에 앉은 신덕훈 상무이사는 신빈 기획실장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말했다.
 “빈이구나. 오랜만이다.”
 “예, 삼촌.”
 신덕훈 상무이사는 회장인 신덕수의 막냇동생이었다.
 집안의 장남인 신덕수는 그 밑으로 2명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3명 있었는데, 신덕훈은 여섯째로 막내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형님, 슈퍼 그룹에서 슈퍼 전자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으음, 결국 그렇게 되었구먼.”
 “그게 정말입니까, 삼촌?”
 “그래. 오늘 주식회사 설립 절차를 끝마쳤으니 내일 정식으로 출범하여 업무에 들어갈 거다.”
 신빈은 굳어진 얼굴로 신덕훈 상무이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버지인 신덕수 회장을 바라보았다.
 “으음, 대담하면서도 빠른 결단력과 추진력입니다, 회장님.”
 “이러니까 그자가 두려운 거야. 발해 그룹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당장 인사 조치를 단행하고 기업 쇄신을 먼저 해야겠군.”
 “형님, 빈이의 전자 쪽이 걱정됩니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빈이를 불러 이야기 중이었다.”
 신덕수 회장을 바라보던 신덕훈 상무이사는 고개를 돌려 신빈을 바라보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빈아.”
 “예, 삼촌. 그렇지만 다른 사업과 다르게 전자는 하루아침에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이번에야말로 슈퍼 그룹에 전자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겠습니다.”
 “그래, 꼭 그놈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 주거라.”
 “예, 삼촌. 회장님, 그럼 나가서 일보겠습니다.”
 “알았다. 그만 나가보거라.”
 소파에서 일어난 신빈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회장실을 나갔다.
 슈퍼 그룹 때문에 대한민국의 전자 회사는 이제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슈퍼 그룹의 저력을 보아왔기에 얼마나 무서운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자 회사는 이제 무한 경쟁 체제에 접어들게 되었다.
 1994년 6월 20일 월요일, 슈퍼 전자.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뒤편에 있는 공터 한쪽에 조립식 건물 2동을 신축했는데, 그곳이 바로 슈퍼 전자의 사무실이었다.
 사무원 8명에 연구 직원 20명으로 시작되었다.
 시작은 이렇게 소규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성장할 것이라는 걸 김철은 알고 있었다.
 ‘으음, 주변에 있는 빌딩을 매입하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겠어.’
 잠시 고민하던 김철은 미래에 신도시로 개발될 경기도 화성 동탄면에 슈퍼 그룹의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2001년도에 한국토지공사에서 사업을 시행하여 개발될 동탄 신도시 남쪽 지역 50만 평의 땅을 매수했다.
 서울 남쪽 20킬로미터 지점이라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의 100대 기업에서는 슈퍼 그룹에서 전자 부문 사업에 진출한 것을 두고 혹평이 이어졌다.
 “슈퍼 그룹의 회장은 미치광이다.”
 “기술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각종 사업에 신규 투자하다니, 말도 안 된다.”
 “전자 부문은 축적된 기술이 없으면 필패하는 분야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슈퍼 전자에서는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으로써 보여 주겠다는 의지였기 때문이다.
 청담동 슈퍼 그룹 빌딩의 25층.
 회장인 김철이 거주하고 있는 층으로 개인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슈퍼 투자 회사는 김철이 투자한 곳에서 발생하는 각종 서류 처리와 업무를 하는 곳으로, 작년부터 그는 선물 시장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금의 절반 정도를 투자하고 있었다.
 김철이 투자하는 곳은 주로 미국 달러 선물과 일본 엔화 선물, 국제 금 선물을 매도하거나 매수해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아주 민감한 곳이 바로 선물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김철의 능력이 가장 빛나는 곳 또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후후후, 나처럼 손쉽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될 테니 두고 봐.’
 그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정신병자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김철 혼자였다.
 김철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각종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띠리리링.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나의 귀염둥이 지현이구나.”
 -오빠 뭐 해?
 “오빠 소설가로 데뷔하려고 글 쓰고 있어. 넌?”
 -난 그냥 집에 있어, 오빠.
 “그래? 그럼 오늘 오후에 만날까?”
 -오빠 오늘 시간 있어?
 “그럼 있지. 없어도 내야지.”
 -그럼 종로의 ‘스머프’ 커피 전문점에서 만나는 거 어때?
 “그러지 말고 오늘은 한강에서 유람선 타는 게 어떨까?”
 -유람선? 좋아. 재미있겠다. 오빠, 사실 나 아직 한 번도 한강 유람선 못 타봤어.
 “그랬어? 나도 안 타봤는데 잘됐네. 그럼 다섯 시 반에 여의도 선착장에서 보자.”
 -알았어, 오빠. 이따 봐.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2시밖에 안 된 시각이었다.
 “음,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지금 준비하면 조금 일찍 도착하겠군.”
 김철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샤워부터 한 후 청바지와 남방으로 갈아입고는 인터폰을 눌렀다.
 삐이이이.
 -예, 회장님.
 “윤 비서, 십 분 뒤에 나가야 되니 차 대기시켜 주세요.”
 -예,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회장님.
 기이이잉.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경호원들과 리무진이 대기해 있었다.
 경호원이 고개 숙여 김철에게 인사하고는 리무진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부우우웅.
 리무진이 출발하자 그 뒤를 경호 차량인 9인승 승합차 2대와 승용차 1대가 뒤따랐다.
 김철이 한번 움직이는 데에 평상시에는 경호원이 20명 동원되었고, 특별 지시를 하게 되면 50명까지 동원된 적도 있었다.
 오늘은 20명의 경호원이 동원되어 리무진 뒤를 따라 도심으로 사라졌다.
 끼이이익.
 김철이 타고 있는 리무진이 여의도 선착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멈추었다.
 “회장님, 여의도 선착장 근처입니다.”
 “유람선을 타야 하니까 문 조장은 조원들에게 일러 데이트에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써.”
 “예, 회장님.”
 “너무 많으면 그러니까 열 명 정도면 적당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절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난 나가보겠어.”
 리무진에서 내린 김철은 유유히 걸어가 선착장 앞으로 향했다.
 아직 4시 50분밖에 안 되었기에 약속 시간이 40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2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의도 선착장 앞으로 택시가 한 대 달려와 멈추며 박지현이 내렸다.
 흰색 민소매 단추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얼굴처럼 순수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시원하게 팔찌로 포인트를 했으며,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청 스커트를 입어 흰 허벅지와 종아리가 드러나며 매끈한 각선미가 묻어나는 세련된 코디였다.
 “오빠.”
 “지현아, 여기야, 여기.”
 김철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그것을 본 박지현이 뛰어왔다.
 품속으로 들어온 박지현을 김철은 안아서 빙글빙글 돌렸다.
 박지현도 즐겁고 행복한지 환하게 웃으면서 양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런 그들을 봤지만 상관없었다.
 몇 바퀴 빙글빙글 돌리던 김철이 그만 멈추고 박지현을 내려놓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유람선에 올랐다.
 뱃머리에 부서지는 물살을 가르며 유람선이 나아갔다.
 “와아! 상쾌해, 오빠.”
 “지현아, 나도 너무 좋다.”
 “응, 너무 좋아.”
 한강 물줄기를 따라 나아가던 유람선에선 주변의 63빌딩, 남산타워, 밤섬 등 관광 명소와 유적지를 볼 수 있었다.
 근처를 지날 때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승무원이 들려주었고, 한강의 역사와 그 소중함을 비디오로 상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사랑스러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이 겹쳐지며 키스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감정이 담겨 있는 키스라서 그런지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뜨거웠던 키스가 끝나며 서로의 얼굴이 떨어지자 박지현이 말했다.
 “오빠, 사랑해.”
 “나도 사랑해, 지현아.”
 “아, 오빠······.”
 대담하게도 박지현이 양손으로 김철의 목을 감고는 머리를 가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김철이 박지현의 허리를 안아주면서 두 사람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연인들도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키스를 하거나 껴안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강가에 있는 건물에서 하나 둘 야간 조명이 들어왔다.
 유람선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인근에 있는 냉면집으로 들어가 물냉면을 시켰다.
 젓가락을 챙겨 주는 박지현이 김철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넘어 있었다.
 “시간이 벌써 아홉 시가 넘었네? 안 되겠다. 지현아, 그만 집에 가자.”
 “히잉, 벌써?”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 돼. 가자.”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가면 안 돼?”
 “그럼 너무 늦어서 안 돼.”
 “그래도 오빠와 좀 더 있고 싶단 말이야.”
 “으음, 그럼 어차피 집에 가야 하니까 내가 택시 타고 같이 가줄게.”
 “아, 그럼 되겠다. 좋아.”
 “택시, 택시!”
 마침 빈 택시가 한 대 다가와 멈추자 뒷좌석에 두 사람이 탔다.
 “아저씨, 청담동으로 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부우웅.
 택시가 출발하자 박지현은 김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고, 김철도 한 손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입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많은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아, 오빠와 있으면 너무 행복해.’
 ‘나도 그렇단다, 지현아.’
 ‘오빠에게 우리 집이 부자라고 어떻게 말하지?’
 택시는 그렇게 도심을 달려 얼마 후 청담동에 도착했다.
 끼이익.
 택시가 길가에 멈추고 박지현이 내렸다.
 “오빠, 다음에 봐.”
 “그래. 지현아, 사랑해.”
 “나도 오빠 사랑해. 내 꿈꿔.”
 “응, 알았어.”
 부우웅.
 택시가 스르르 다시 움직이자 박지현과 김철은 서로 손을 흔들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택시가 멀어지자 박지현은 뒤돌아 집을 향해 걸어갔다.
 “손님, 보니까 빨리 결혼하셔야겠어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너무 잘 어울리시던데 빨리 결혼하세요.”
 “고맙습니다. 기사님, 저는 저기에 내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택시에서 김철이 내린 후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경호원들이 따라왔다.
 박지현이 집으로 들어서자 엄마인 한미라가 맞이했다.
 “어디 갔다 오는 거니?”
 “응, 친구 만나고 왔어요.”
 “친구 누구?”
 “그, 그게··· 있어, 엄마.”
 “제대로 말 못하는 걸 보니 혹시 너 연애하니?”
 “저, 그게 말이야, 엄마······.”
 “음, 말 못하는 걸 보니 맞구나. 누구니?”
 “······.”
 “엄마가 알면 안 되는 사람이니?”
 “그, 그게··· 알았어, 엄마. 먼저 오빠 만나게 해줄게.”
 “정말이니? 언제?”
 “그, 그게··· 일단 전화해보고.”
 “우리 딸이 벌써 연애를 하다니··· 어떤 사람일까?”
 “엄마, 그렇게 궁금해?”
 “그럼, 내 딸이 만나는 사람인데 당연히 궁금하지.”
 “엄마, 아빠에게는 아직 비밀이야.”
 “알았다. 내가 보기 전에 아빠가 알면 큰일 나요. 알지?”
 “응, 알어, 엄마. 그래서 엄마에게 먼저 만나게 해준다니까.”
 박지현이 가운으로 갈아입고 욕실에 들어가 거품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엄마인 한미라가 들어왔다.
 손에는 주스 잔을 들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목욕해.”
 “알아, 너무 궁금해서 안 되겠어. 그 사람 몇 살이야? 말해봐.”
 “오빠는 스물여섯 살이야.”
 “스물여섯 살? 우리 딸이 스물세 살이니까 나이는 딱 맞네. 키는?”
 “키는 백칠십오 정도.”
 “우리 딸이 백칠십이니까 그렇게 크지는 않구나.”
 “뭐 하는 사람이야?”
 “그, 그건 잘 몰라. 슈퍼 그룹이라는 곳에 다닌대.”
 “슈퍼 그룹? 아, 그 슈퍼 그룹.”
 “응, 요즘 가장 잘나가는 회사래.”
 “그럼 능력 있네. 어떻게 만났어?”
 “그게··· 좀 사연이 있어, 엄마.”
 “사연?”
 “응, 만난 지 네 달 정도 됐어. 그리고 어떻게 만난 거냐 하면······.”
 박지현은 엄마인 한미라에게 김철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오빠와는 이렇게 된 거야.”
 “그건 운명 같은데?”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 만나보진 않았지만 좋은 사람 같구나.”
 “응, 엄마. 오빠와 같이 있으면 너무 행복하고 좋아.”
 “우리 딸이 좋아할 만해. 그런데 아빠는 신빈 군에게 널 시집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어쩌니?”
 “엄마, 빈이 오빠도 좋지만 난 철이 오빠를 사랑해.”
 “엄마가 먼저 만나보고 좋으면 도와줄게.”
 “정말?”
 “그럼, 정말이지.”
 “알았어, 엄마. 오빠에게 당장 전화해야겠어. 전화기 줘.”
 엄마인 한미라가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아든 박지현은 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어갔어?
 “응, 오빠.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
 -할 말? 무슨 말인지 해봐.
 “엄마가 오빨 만나는 걸 알아버렸어. 엄마가 한번 만나고 싶대.”
 -그래? 언제가 좋을까?
 “이번 주 토요일 어때, 오빠?”
 -이번 주 토요일? 좋아, 그렇게 해.
 “그럼 점심때가 좋겠지? 열두 시 어때?”
 -좋아. 장소는 어디로 할까?
 “청담동에 있는 로즈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해. 이번 주 토요일 열두 시야, 오빠.”
 -알았어, 그럼 그때 봐.
 “응, 오빠. 엄마, 오빠한테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난다고 했어.”
 “호호, 삼 일 후인데 그때까지 궁금해서 어쩌지?”
 박지현이 전화기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한미라는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엄마, 너무 흥분하는 거 아냐?”
 “어머, 그렇게 보였니?”
 “응, 얼굴도 빨개졌어.”
 “그러니? 엄마는 나가볼 테니 계속 목욕해.”
 “응, 알았어, 엄마.”
 한미라가 욕실 밖으로 나가자 박지현은 눈을 감고 거품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다.
 1994년 6월 22일 수요일, 슈퍼 건설 설립.
 대한민국의 경제계는 이제 더 이상 놀라기도 지쳤다.
 도대체 슈퍼 그룹에서는 왜 이렇게 각종 사업에 신규 투자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나의 사업에 전력 질주해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 상황인데, 슈퍼 그룹은 무차별적으로 사업에 진출하는 듯했다.
 하지만 김철은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에 회사를 또 설립한 것이다.
 이번에 설립된 슈퍼 건설은 얼마 전 김철이 경기도 화성 동탄면에 매수한 50만 평의 땅을 고르는 작업과 신축될 건물을 위해 설립한 건설 회사였다.
 인력과 자재는 충분하지만 건물을 신축할 기술자들은 모두 독일에서 스카우트했다.
 기술자는 무려 50명이나 되었으며, 건설 경험이 풍부한 게 특징이었다.
 청담동 로즈 레스토랑.
 정장을 차려입은 김철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박지현은 흰색의 앞 꼬임 시폰 브이넥 블라우스를 입어 한층 더 여성스러운 모습이었고, 박지현의 엄마인 한미라는 마치 언니 같은 30대 초반의 동안에 미스코리아 출신이라서 그런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올리브 색상의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붉은 갈색이 약간 들어간 웨이브 파마에 가슴까지 내려오는 헤어스타일이라 입고 있는 옷과 아주 잘 어울리는 코디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철을 보고 모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박지현은 김철 옆에 앉았고, 한미라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처음 뵙겠습니다. 김철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딸에게서 말은 들었어요. 반가워요.”
 “상당히 미인이십니다.”
 “호호, 고마워요.”
 한미라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고 메뉴판을 펼쳐 살펴보고 있을 때, 김철이 말했다.
 “어머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골라드릴까요?”
 “그럼 부탁해요.”
 “어머님에겐 해산물 수프와 나폴리 스타일의 스파게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 두 가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게. 어떻게 그런 걸 알았어, 오빠?”
 “그냥 스테이크 요리 같은 것보다는 아무래도 이런 요리가 나을 것 같아서 생각해봤어.”
 “좋아요, 그것으로 주문해줘요.”
 “예, 어머님. 지현이는 나폴리 피자 어때?”
 “좋아, 오빠, 그걸로 시켜 줘.”
 “샐러드와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응, 좋아, 오빠.”
 한미라는 김철의 첫인상이 깔끔하고 좋아 보였다. 거기에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금방 파악하고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권유했다.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둘이 서로 잘 어울려 보였다.
 “부모님은 뭐 하세요?”
 “아버지는 오 년 전에 돌아가셨고요,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혼자서 살고 있습니다.”
 “아, 미안해요.”
 “아니, 괜찮습니다.”
 한미라는 조심스럽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고, 김철은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주문한 요리가 나오자 김철이 피자를 잘라 박지현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다정하게 딸을 챙겨 주는 모습을 본 한미라는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으음, 성격도 좋고 인물도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지만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나는데 어쩌지? 나는 마음에 드는데 문제는 남편이야. 남편은 발해 그룹의 신빈을 마음에 두고 있는데 말이야.’
 “어머님, 피자도 좀 드셔 보십시오. 기름기가 없어서 담백한 게 맛있습니다.”
 “아, 그래요. 고마워요.”
 김철이 접시에 피자를 한 조각 담아서 건네주자 한미라는 그것을 받아 내려놓고는 맛을 보았다.
 피자는 담백한 게 맛있었다.
 “음, 정말 맛있네요.”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헤이즐넛 원두커피가 나왔다.
 그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때 김철이 한미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안색을 보니까 걱정이 되어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래요? 해보세요.”
 “어떻게 생각하면 무례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님, 병원에 한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오빠, 왜 그래?”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유방암이신 것 같습니다.”
 “뭐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첫 대면에 무례하게도 유방암이니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한미라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좋게 보았는데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미라는 김철을 쏘아보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황한 박지현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빠, 미안해. 먼저 나가볼게.”
 분위기 좋았는데 갑자기 시베리아 벌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김철은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후,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나는 확실하게 인정을 받게 됐어. 두고 봐.”
 집으로 돌아온 한미라는 핸드백을 거실 소파에 던져 버리고는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박지현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흥,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내가 유방암이라고? 미친놈.”
 “엄마, 오빠가 실수했어. 이해해. 응?”
 “그게 나에게 할 소리야?”
 “미안해, 엄마. 나도 오빠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 미친 거 아니니?”
 “엄마도 봤잖아?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데.”
 “흥, 그런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니?”
 “분위기 좋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잘됐어. 네 아빠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엄마, 미안해.”
 “흥, 기가 막혀서······.”
 “엄마, 요즘 혹시 가슴이 이상한 적 없었어?”
 “매일 샤워하는데 뭐가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오빠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흥, 날 무시하려고 그랬겠지.”
 “아냐, 엄마. 오빠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 생명을 구해준 사람인데 절대 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긴 뭐가 없어. 너도 같이 봤잖아?”
 “엄마, 미안한데 나랑 같이 병원에 한번 안 가볼래?”
 “흥, 이젠 너까지 날 유방암 환자 취급이니?”
 “혹시 모르잖아.”
 “이젠 딸까지도 못 믿겠어. 실망이야.”
 “엄마,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와 같이 병원에 꼭 한 번 가보자.”
 “좋아, 오늘 당장 가보고 아무 이상 없으면 절대 난 그 사람 안 본다.”
 “······.”
 “왜 대답이 없어?”
 “그, 그건······.”
 “그럼 안 가.”
 “아, 알았어. 좋아.”
 박지현은 김철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가 말한 것을 믿어보기로 했다.
 청담동 부인 병원에 두 사람이 같이 가서 정밀 검사를 해보았더니 뜻밖에도 5밀리미터 크기의 악성 종양이 2개나 발견되었다.
 담당 의사의 말로는 다행히 초기 유방암인 데다 다른 곳에 전이되지 않았기에 약물만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너무 놀란 한미라는 당장 병원에 입원했고, 박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맞았고, 엄마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다행히 초기 유방암이라 잘 치료하면 완치가 된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지현아, 그 사람에게는 이 엄마가 너무 미안하구나. 꼭 미안하다고 전해주겠니?”
 “응, 엄마, 걱정하지 마. 오빠는 다 이해할 거야.”
 “그래, 어려운 말을 꺼냈는데 내가 너무 무례했어.”
 얼마 후, 박문길이 허겁지겁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박문길과 한미라는 부부 금실이 좋기로 알려져 있었기에 갑자기 부인이 암에 걸렸다는 전화를 받자 하던 일을 팽개쳐 두고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여보, 괜찮아?”
 “괜찮아요.”
 “의사는 뭐래?”
 “초기 유방암이라 잘 치료하면 완치할 수 있대요.”
 “음, 정말 다행이야, 다행.”
 “우리 딸은?”
 “조금 전까지 있다가 집으로 갔어요. 챙겨 올 것도 있어서요.”
 “여보, 먹고 싶은 거 없어?”
 “아직 없어요.”
 “아냐, 잘 생각해봐. 환자는 잘 먹어야 돼.”
 “괜찮아요, 난 당신만 옆에 있어주면 돼요.”
 “당분간은 내가 옆에 있을 테니 걱정 마. 맛있는 초밥 사가지고 올까?”
 “그럼 그렇게 해줘요.”
 “알았어. 지현이에게 오면서 초밥 사오라고 해야겠어.”
 “그러세요, 그럼. 그런데 당신, 병실은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요?”
 “당신이 아프다는데 그게 대수야? 걱정하지 마.”
 “흑··· 여보, 고마워요.”
 “고맙긴, 난 당신 없이는 못 살아. 알지?”
 “알아요, 여보.”
 두 사람은 서로 껴안았고, 박문길은 그런 한미라의 등을 두드리면서 안심시켰다.
 
 
 제6장 슈퍼 그룹의 약진
 
 
 슈퍼 그룹의 회장실.
 테이블에는 냉커피가 3잔 놓여 있었다.
 그룹 회장인 김철이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오른쪽에는 이번에 사장으로 승진한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김최고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왼쪽 소파에는 슈퍼 투자 회사의 최완수 실장이 앉아 있었다.
 “최 실장, 스마트 빌딩의 공사는 어디까지 진척되었나?”
 스마트 빌딩은 슈퍼 그룹의 맞은편 도로에서 3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축된 지 3년밖에 안 된 20층 빌딩이었다.
 그런 빌딩을 김철이 3개월 전에 매입하여 지금 한창 내부 공사 중에 있었다.
 “예, 회장님. 신축된 지 삼 년밖에 안 되었기에 건물 외관은 특별하게 손볼 곳이 없지만, 내부는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많이 달라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다시 했습니다. 현재는 구십 퍼센트의 공사가 진척되어 이번 주 내로 끝날 것입니다.”
 “좋아, 팔월에 케이블 방송국이 설립되어 방송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서둘러야 돼.”
 “이번 주에 공사가 끝나면 각종 방송 장비를 옮겨 와 설치하면 되기에 칠월 말까지는 충분합니다, 회장님.”
 “최 실장, 일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돼.”
 “예, 회장님. 제가 요즘 아예 공사 현장에서 숙식하고 있습니다.”
 “좋아, 최 실장을 믿어보지. 케이블 방송국이 설립되는 팔월 초까지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돼. 알지?”
 “예, 회장님.”
 “좋아. 김 사장, 케이블 방송국이 설립되어 시험 방송을 하게 되면 앞으로 연예인들이 많이 필요하게 될 거야. 거기에 대한 것은 어때?”
 “예, 회장님. 안 그래도 날로 소속 연예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조금 부족합니다.”
 “알아. 하지만 앞으로는 급격하게 연예인들이 필요하게 되니 차질이 없도록 수시로 신인들을 모집해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해두도록.”
 “예, 회장님. 이번 칠월 중순에도 신인 선발 대회가 있으니 최대한 많은 신인을 모집해두겠습니다.”
 “신인들도 중요하지만 기존에 있는 연예인들과의 친분도 유지해 우리 케이블 방송국에 출연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언질을 주도록.”
 “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즘에도 매일같이 수십 통의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좋아. 조만간 케이블 방송국이 개국하게 되면 자체 제작하는 드라마가 많을 거야. 주연 배우나 조연 배우가 많이 필요할 테니 계약해둔 시나리오 작가들을 다그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조치하도록.”
 “예, 회장님.”
 “케이블 방송국이 개국하면 그것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또 한 번 시끄러워지겠군. 두 사람, 오늘 점심 약속 없지?”
 “예, 회장님.”
 김최고가 최완수 실장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김철이 인터폰을 눌렀다.
 삐이이.
 -예, 회장님.
 “미스 윤, 오늘 점심은 김 사장, 최 실장과 함께 일식집 다케에서 할 거니까 예약 좀 해줘.”
 -예, 회장님.
 “김 사장.”
 “예, 회장님.”
 “요즘 부인과 문제 있어?”
 “예? 그, 그게 무슨?”
 “한번 알아봐.”
 “예, 회장님.”
 “가정이 평화로워야 회사 일도 잘할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죄송합니다, 회장님.”
 작년 봄에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던 김최고는 최근 부인과 부부 싸움을 했는데, 그걸 회장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가집의 장인, 장모에게 오늘 보약 지어서 당장 찾아뵙도록 해. 용돈도 좀 넉넉하게 백만 원 정도 넣어서 말이야.”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내가 한 달 전에 매수하라던 한송 화학의 일만 주 있지?”
 “예, 회장님. 그때 한 주에 이만 원이었기에 이억 원 주고 사두었습니다.”
 “그거 내일 전부 팔아.”
 “전부요?”
 “그래. 오늘까지 그게 한 주에 이만 칠천 원인데 내일 오후 두 시 넘어서 팔면 이만 팔천삼백 원이야.”
 회장 김철의 말에 김최고 사장과 최완수 실장이 암산해보니 2억 8천3백만 원이었다.
 수수료를 제한다고 해도 2억 8천 정도 되니 한 달 만에 8천만 원의 수익을 올리게 되는 셈이었다.
 회장 김철은 직원들의 눈도 있어 공식적으로 추가 보너스를 마음대로 줄 수 없었기에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보너스를 만들어주었다.
 “최 실장.”
 “예, 회장님.”
 “자네 요즘 수고가 많아. 보너스를 좀 줘야겠으니, 어디 보자.”
 잠시 생각하던 김철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동안 최완수 실장은 회장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김철이 생각해둔 것을 꺼내어 말했다.
 “자네 통장에 팔천만 원 있지?”
 “예, 회장님.”
 “그 돈 중 칠천오백만 원을 인출해서 오후에 맛나 식품 오천 주만 사둬. 한 주에 만 오천 원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욕심 부리면 안 돼.”
 “예, 회장님.”
 김철이 사두라는 주식을 사면 반드시 수천만 원의 이익이 생겼다.
 이미 최 실장도 두 번이나 이렇게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는데, 욕심을 부려 주식을 비밀리에 더 구입한다든가 하면 큰일이었다. 회장 김철은 점쟁이인지 그런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었으니, 딴마음을 먹으면 안 되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
 회장 김철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김 사장과 최 실장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오늘 점심이 더욱 맛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김 사장은 집안일도 이렇게 회장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보너스까지 받으면서 회장과 점심 식사를 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최 실장도 오늘 주식을 사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세 차익으로 보너스를 받는다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더구나 회장과 점심 식사도 하니 일석이조의 날이라 생각되었다.
 다음 날 오전, 김철은 한미라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한미라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서는 김철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땐 너무 미안했어요.”
 “아,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유방암에 걸린 줄도 몰랐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오해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어머님.”
 “처음에는 오해를 했지만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내가 큰 실례를 했어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초기 유방암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군요. 정말 고마워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나온 박지현은 김철이 병실에 들어온 걸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오빠, 왔어?”
 “그래, 수고가 많구나.”
 “아, 아니야. 이 정고 가지고 뭘.”
 “아침 안 먹었지? 초밥하고 전복죽이니 어머님과 함께 먹어.”
 “고마워, 오빠.”
 김철이 신경 써서 사온 생선 초밥과 전복죽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특급 호텔 일식 주방장이 손수 준비해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쩝쩝. 오빠, 생선 초밥 정말 맛있어.”
 “전복죽도 제대로야. 너무 맛있어. 고맙네.”
 한미라와 박지현은 최고급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여러 번 먹어보았기에 그 맛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호호, 제대로 만든 생선 초밥과 전복죽이었어.’
 ‘오빠는 역시 센스쟁이야.’
 김철은 그녀들이 초밥과 전복죽을 먹을 동안 과일을 깎아서 대령했다.
 “오빠, 고마워. 잘 먹을게. 엄마 드세요.”
 “김철 군, 정말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앞으로도 우리 딸 지현이를 잘 보살펴 주고 아껴 주세요.”
 “예, 어머님.”
 “어, 엄마.”
 드디어 한미라가 김철을 인정한 것이다. 평소 엄마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박지현이었기에 엄마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김철은 그렇게 병실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있다가 나갔다.
 1994년 8월 8일.
 청담동 20층 스마트 빌딩에 케이블 방송국이 7개나 개국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라 방송계에서는 깜짝 놀라면서 그쪽을 주시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방송계를 강타한 초특급 태풍이었다.
 기존의 방송국들이 놀란 것은 그 케이블 방송국 7개가 모두 슈퍼 그룹의 자회사라는 것 때문이었다.
 방송계에서는 공격적인 마케팅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슈퍼 그룹은 케이블 TV 방송국을 설립하고 무려 7개의 채널을 확보했다.
 각종 물건을 판매할 홈쇼핑 채널인 ‘슈퍼 홈쇼핑’, 농산물 전문 채널 홈쇼핑인 ‘슈퍼 농산물 쇼핑’, 영화 채널인 ‘슈퍼 무비’, 음악 채널인 ‘슈퍼 뮤직’, 드라마 채널인 ‘슈퍼 드라마’, 스포츠 채널인 ‘슈퍼 스포츠’, 연예 오락 채널인 ‘슈퍼 N 연예’를 각각 설립해 시험 방송에 들어갔다.
 이것은 지상파 3사의 방송 채널보다도 많은 수였다.
 이렇게 되자 경제 신문에서는 슈퍼 그룹이 이제는 방송계까지 장악하려 한다고 혹평하고 나섰고, 각 기업에서도 비난을 하고 나섰지만 일체 맞대응하지 않았다.
 케이블 방송국은 개국하면서 시험 방송 중에 있었으며, 김철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1994년 8월 12일 금요일, 슈퍼 전자.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첫 제품을 출시했다.
 이미 TV 광고가 한 달 전부터 대대적으로 방송을 타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탤런트나 가수들을 모델로 해서 찍은 광고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제품으로, 초행길도 찾아주는 국내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네비게이션이었다.
 인공위성 추적 시스템인 GPS 기능에 7인치 컬러 액정 화면으로 만들었으며, 요즘 인기 있는 탤런트나 가수, 개그맨들의 육성을 녹음하여 채택한 제품으로 지난 9일 출시와 동시에 2만 개, 3일 만에 10만 개를 판매했다.
 예약 판매만 해도 30만 개가 선주문되어 있어서 대박 행진을 하고 있었다.
 최고급 외제차에는 개당 8백만 원이 넘는 네비게이션이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고가였다.
 그런데 슈퍼 전자에서 개발해 출시한 네비게이션은 99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그러니 폭발적인 인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S전자와 L전자, 발해 전자에서는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이, 이런, 생각지도 못했어.”
 “역시 무서운 놈들이야. 어떻게 이런 제품을?”
 “생각하지도 못한 제품으로 공격해오다니, 젠장.”
 그러나 8월 말에 또다시 슈퍼 전자에서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이번에 출시한 제품은 휴대폰이었는데, 이미 국내 휴대폰 시장은 외국계 3개 사와 국내 3사(S전자, L전자, 발해 전자)로 치열한 판촉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휴대폰 시장에 슈퍼 전자가 끼어들면서 신제품을 출시했다.
 현재 여성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최미래와 삼은아였는데, 슈퍼 전자에서는 과감하게 삼은아를 전속 모델로 삼아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신세대의 문화 코드를 정확하게 읽고 출시한 제품으로 전면부가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메탈과 마그네슘 소재를 휴대폰에 도입한 제품이었다.
 외관이 고급스러워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보였는데, 남자 애인이 이 휴대폰을 선물해주면서 더욱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은 화장을 하기에 급할 때에는 이 휴대폰으로 화장도 할 수 있었고, 거울을 자주 본다는 것에 착안한 제품이므로 더욱 여성들의 인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델이 가장 잘나가는 2명 중에서 삼은아였기에 더욱 난리였다.
 이러니 대리점에서 제품이 품절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존의 6개 사는 깜짝 놀랐다.
 몇 년을 앞서 가는 듯한 획기적인 디자인의 제품이었다.
 각 휴대폰 회사는 디자이너와 연구원들을 닦달해서 신제품을 출시하려고 노력했다.
 ‘후후후, 여섯 개 휴대폰 회사는 충격 좀 받았겠어.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철의 말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같은 것을 이미 예상하고 제품을 출시했기 때문이다.
 6개 휴대폰 회사가 예측하지 못한 제품이 2가지나 더 있었으며, 지금 비밀리에 생산 중이었다.
 신제품 출시는 평균 5개월 단위로 생각하고 그에 맞게 한창 준비 중이었다.
 두 번째 신제품은 특별히 조금 앞당겨 출시할 예정인데, 12월 초였다.
 출시될 제품은 휴대폰 벨소리를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제품이었다.
 단말기에 내장된 멜로디 형태가 아니라 SMS를 통해 다운로드된 벨소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휴대폰 벨소리는 신세대들의 문화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인 동시에 모바일 콘텐츠 사상 최초로 대중적으로 성공을 보이게 될 상품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최신 인기 가수들의 노래 멜로디와 인기를 끌고 있는 강력하면서도 익숙한 멜로디를 제시할 예정이었다.
 벨소리 다운로드 사업은 (주)슈퍼 커뮤니케이션에서 5백 원에 유료로 서비스가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출시할 신제품은 내년 5월이며, 슬라이드 폰인데 최초로 120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가 장착된 제품이었다.
 이것도 아주 획기적인 제품이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신빈은 발해 전자의 기획실장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발해 섬유의 디자인 실장으로 있던 신현아가 발해 전자의 디자인 실장으로 인사 발령되어왔다.
 그만큼 발해 전자의 휴대폰 사업 부서는 초비상이었다.
 신빈이 신현아의 디자인실에 방문했다.
 “어서 와, 오빠.”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거 알지?”
 “응, 이번에 슈퍼 전자에서 출시한 거울 폰은 대박이었어.”
 “그래, 앞으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강력한 적이니 초반에 짓밟지 못하면 우리가 어려워져.”
 “그, 그게 쉽지만은 않겠어.”
 “어떤 점이?”
 “나름대로 슈퍼 전자의 제품 연구소를 알아보다 슈퍼 그룹의 본사 빌딩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조립식 건물에 있다는 것은 알아냈는데, 스파이 침투나 직원 포섭은 어려울 것 같아.”
 “어떻게 어려운지 말해봐.”
 “신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원들이 한번 건물에 들어가면 제품이 출시되고 육 개월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 못 나오게 되어 있었어.”
 “뭐야? 그,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제품 개발을 하려면 최소 일 년은 걸릴 텐데, 일 년 육 개월 동안 연구소에서 못 나오면 포섭할 수 없잖아? 그래서 내가 어렵다는 거야. 또한 슈퍼 전자의 직원들을 포섭하려고 해도 철저하게 각 부서로 나뉘어져 있기에 전체 부서의 직원을 포섭하기 전에는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없었어.”
 “으음, 정말 소름 끼칠 정도군.”
 “이 모든 게 회장인 김철이라는 자에게서 나오는 모양이야.”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니야, 그는.”
 “오빠도 정신 차려서 대비해야 할 거야.”
 “잘 알고 있어. 아 참! 요즘 지현이는 만나니?”
 “아니,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못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어.”
 “그래? 그럼 오늘 한번 불러서 저녁 식사라도 하자고 해봐.”
 “그, 그럴까?”
 “이 오빠 좀 구원해다오, 제발.”
 “호호호. 알았어, 오빠. 나도 지현이가 보고 싶었어. 당장 전화해볼게.”
 따르르릉.
 -여보세요?
 “지현아, 나야, 현아.”
 -어, 현아구나. 웬일이야?
 “웬일이긴, 얼굴 보자고 전화했지. 오늘 저녁 어때?”
 -오늘은 안 돼. 약속 있어.
 “그래? 그럼 이번 주 토요일은 어때?”
 -토요일은 안 되고, 금요일에 한번 보자.
 “요즘 너 뭐 배우니?”
 -응, 나 한 달 전부터 요리 학원 다니고 있어.
 “한식?”
 -응, 육 개월 과정인데 힘들어.
 “그래도 열심히 배워둬.”
 -그래, 안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
 “그럼 금요일 오전에 다시 전화할게.”
 -알았어, 현아야, 그날 봐.
 “그래, 들어가.”
 딸깍.
 신현아가 휴대폰을 내려놓자 신빈이 물었다.
 “오늘은 안 되고 금요일?”
 “어, 요즘 한식 배우려고 요리 학원 다닌대.”
 “쩝, 어쩔 수 없지. 금요일에나 볼 수 있겠구나.”
 한편, 박지현은 김철과의 데이트를 위해 요리 학원에 나서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는 박지현 앞을, 30대 중반의 캐주얼 차림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박지현 씨?”
 “그, 그런데요. 누구세요?”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누구세요?”
 “제가 아니고 옆을 보십시오.”
 박지현이 남자의 말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외제 승합차 한 대가 멈추어 있었는데, 옆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3명의 여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여자는 박지현도 아는 사람이었다.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여자 연예인 최미래였다.
 박지현은 궁금증이 일어 승합차로 다가갔다.
 “이분과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잠시 밖에 있어줄래요?”
 “예, 알았어요.”
 최미래의 말에 차에 타고 있던 코디네이터와 여자 매니저가 차 속에서 나왔다.
 “잠시 차에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 저를 아세요?”
 “그럼요, 박지현 씨.”
 ‘최미래가 날 어떻게 알고 있을까?’
 승합차에 타자 최미래가 문을 닫았다.
 두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먼저 최미래가 말을 꺼냈다.
 “날 개인적으로 처음 볼 거예요. 그렇죠?”
 “그래요. 어떻게 날 아는 거예요?”
 “아, 그거요?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거예요.”
 “내 뒷조사를요?”
 “그래요. 내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있으니 알아보려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내 남자인 김철을 더 이상 만나지 마세요.”
 “최미래 씨가 어떻게 오빠를 알고 있죠?”
 “호호호. 사 년 전부터 사귀었는데 왜 모르겠어요?”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요.”
 “요즘 내가 바쁘다고 딴 여자를 만나다니······.”
 “아, 아니에요. 믿을 수 없어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 김철 씨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나요?”
 “그래요. 최미래 씨보다는 많이 알고 있을걸요?”
 “호호호, 그래요? 그럼 지현 씨가 모르는 걸 한 가지 말해볼까요?”
 “그게 뭔데요?”
 “슈퍼 그룹이라고 알죠?”
 “예, 요즘 가장 잘나가는 회사인데 왜 모르겠어요?”
 “지현 씨는 그곳의 회장이 누구인지 알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바로 김철 씨예요.”
 “뭐, 뭐라고요? 마, 말도 안 돼.”
 “호호호, 뭐가 말이 안 되죠? 회장이라서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오빠가 슈퍼 그룹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회장은 아니에요.”
 “역시 내 말을 안 믿는군요. 좋아요, 그럼 지금 김철 씨를 만나러 가는 걸 테니까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좋아요, 직접 물어보죠.”
 “물어봐서 내 말이 맞다면 조용히 물러나세요.”
 “······.”
 “김철 씨는 지현 씨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잠시 데리고 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거고요.”
 “아, 아니에요. 말도 안 돼요.”
 “직접 만나서 물어보세요. 그럼 바로 알게 될 거니까.”
 박지현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최미래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가서 꼭 확인해보세요.”
 “알았어요.”
 박지현은 차에서 내렸고, 최미래의 일행이 다시 차에 타자 바로 출발해버렸다.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멍한 표정이 된 박지현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서 부정했다.
 “아니야, 오빠가 그럴 리 없어.”
 커피 전문점 ‘프라하’.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실내 인테리어가 세련되면서도 아늑해서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박지현이 안으로 들어와 살펴보았다.
 구석진 곳에 쿠션을 배에 올려놓고 김철은 패션 잡지를 보고 있었다.
 “오빠.”
 박지현이 김철의 옆에 털썩 앉으면서 머리를 기댔다.
 “왔어? 조금 늦었네?”
 “응, 학원 나오다가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느라 늦었어.”
 “그랬구나. 여기는 모카 골드 커피와 치즈 케이크가 맛있다는데, 어때?”
 “좋아, 그걸로 시켜 줘.”
 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카 골드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오늘은 학원에서 어떤 요리 배웠어?”
 “궁중 갈비찜.”
 “정말? 어땠어, 어려웠어?”
 “조금. 그래도 재미있었어.”
 “오빠도 지현이가 요리하는 거 한번 보고 싶다.”
 “그럼 오빠가 뒤에 한번 보러 오든가.”
 “그래도 괜찮겠어?”
 “안 될 게 있겠어? 와.”
 이때, 카운터에서 일하는 직원이 김철을 보면서 외쳤다.
 “모카 골드와 치즈 케이크 나왔습니다.”
 “오빠가 가져올게.”
 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것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자 박지현은 모카 골드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때 김철이 치즈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떠서 내밀었다.
 “치즈 케이크야, 먹어봐.”
 “고마워, 오빠.”
 박지현은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김철은 평소의 그녀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자꾸만 자신의 눈치를 보고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 이상한데?’
 “오빠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저, 그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데 그래? 속 시원하게 말해봐.”
 “오빠,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지?”
 “거짓말? 글쎄, 없는 것 같은데.”
 “잘 생각해봐. 없어?”
 “응, 없는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슈퍼 그룹, 이래도 없어?”
 “슈퍼 그룹? 그게 뭐?”
 “자꾸만 시치미 뗄 거야? 좋아, 저번에 오빠가 나한테 슈퍼 그룹에 다닌다고 했지?”
 “그래, 그게 뭐?”
 “회장이라며?”
 “······.”
 “맞아? 왜 말 못해?”
 “으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게 중요해? 왜 날 속였어?”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한테 오빠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지현아,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슈퍼 그룹에 다닌다고만 했지, 평직원이라고는 안 했잖아.”
 “그래도 내가 착각하도록 유도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 미안해.”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최미래 알지?”
 “최미래? 그럼 알지. 요즘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잖아.”
 “그것 말고 개인적으로 말이야.”
 “으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해줄게. 사 년 전에 같은 회사에 다녀서 알고는 있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야.”
 “흐흑··· 모든 게 사실이었어. 흐흐흑.”
 갑자기 박지현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뛰쳐나갔다.
 당황한 김철이 뒤따라 나왔을 때는 이미 그녀가 빈 택시를 타고 가버린 뒤였다.
 “이, 이런, 젠장,”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인해서 뭔지 모르게 꼬이고 있었다.
 “으음, 이거 심상치 않은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굳어진 얼굴로 길가에 서 있는 김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길 건너편에 외제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차 안에 최미래가 타고 있었다.
 박지현의 뒤를 이렇게 은밀하게 따라와 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두 사람 사이를 간단하게 이간질시켰어.’
 끼이익.
 김철의 앞으로 리무진과 승합차 2대가 달려와 멈추었다.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차에서 내리더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어주자 김철이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타악.
 리무진의 차 문이 닫히자 스르르 움직이면서 곧 속도를 내며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상해의 인근 슈퍼 목장.
 중국 상해에서 내륙으로 1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3개월 전에 신규 목장이 하나 들어섰다.
 여의도 면적(848만 제곱미터)의 10배가 넘는 면적(8,900만 제곱미터)의 목장이었다.
 중국 땅은 모두 국유이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사고팔 수 없지만, 토지 사용권은 사고팔 수 있었다.
 김철은 슈퍼 목장의 목장주로 중국의 조선족 출신인 김복종(38살)이라는 자를 인사 발령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들어와 6개월간 공사장에서 일한 전력이 있었다.
 독립군 후손으로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보려는 야망을 가지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왔으나, 일한 노임을 제대로 받지 못해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걸 김철이 어느 날 찾아가 두 사람만의 대화를 하더니 슈퍼 그룹의 신설된 자회사인 슈퍼 목장의 목장주로 영입해 일하게 되었다.
 김복종은 8남매의 장남으로 집안의 형제자매와 부모님을 포함해 일가 친인척과 친분이 있는 자들까지 전부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는 무척 가난했기에 가져올 게 몇 가지 없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집도 있고 자신이 목장주였다.
 김철과 계약할 때 그는 계약금 1억 원에 연봉 6천만 원을 받기로 했다.
 중국 보통 인민들의 월급이 한국 돈으로 약 5만 원 정도였는데, 앞으로 약 1백 배 정도나 많은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계약금으로 받은 돈만 해도 자신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저와 가족들을 살려 주신 은혜는 이 목숨 다 바쳐 일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아범아, 은혜를 모른다면 짐승과 다름없다. 명심하거라.”
 “예, 어머님.”
 김복종은 김철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이 맡은 일을 시작했다.
 그는 김철의 지시를 받고 중국으로 건너와 먼저 50년간의 토지 사용권을 샀다.
 토지 사용권을 매입하려면 부동산 개발 계획을 세우고 해당 시, 구, 정부와 사용권 계약을 체결한 뒤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목장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토지 사용권 계약을 체결했다.
 슈퍼 목장의 일 중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목장의 가장자리를 전부 에워싸는 울타리 공사였다.
 인건비가 엄청나게 싸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대거 활용하기로 하고는 무려 5천 명이나 동원했다.
 그랬더니 며칠 되지 않아서 울타리 공사가 완공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조립식 건물로 된 우사였다.
 소 1백 두가 들어가 살 수 있는 크기의 우사였는데, 먼저 10개 동을 신축하고, 계속 추가로 짓고 있었다.
 또한 직원들의 숙소와 식당, 실습 직원 숙소, 낙농 연수원, 농기계 보관 창고, 사료 저장고(옥수수, 건초)를 계속 늘려 나가고 있었다.
 뚝딱뚝딱.
 “어이, 거기 서둘러.”
 “예예, 알겠습니다.”
 “어이, 그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저쪽.”
 “아, 죄송합니다. 저쪽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작업반장들의 지시로 인부들은 땀을 흘려 가면서 열심히 일했다.
 직원들이 처음에는 인부 1백 명씩을 맡아서 작업 지시를 하다가 얼마 후에는 인부들 중에서 작업반장을 시켜 일을 처리했다.
 그랬더니 훨씬 작업 능률이 올랐다.
 다른 곳보다 배나 많은 인건비를 받았기에 인기가 좋아 서로 슈퍼 목장으로 일하러 오려고 난리였기에 이러는 것이다.
 혈통이 좋은 황소 10두와 암소 1백 두, 어린 송아지 50두가 대한민국에서 수입되어 슈퍼 목장으로 들어왔다.
 소들에게 병이 있는지 없는지 각종 검사를 한 후 방목했다.
 처음에는 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신경이 날카롭고 거칠었지만, 며칠 지나자 모두 온순해졌다.
 소들은 넓은 풀밭을 돌아다니면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었다.
 보통 대한민국의 목장에서는 소를 하루라도 빨리 키우기 위해서 고칼로리의 사료를 먹이지만 김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일이 좀 걸리더라도 육질이 좋은 품질의 소를 생산하기 위해 이렇게 자연 방목을 택한 것이다.
 다만, 밤에는 우사에 소들을 집어넣어야 하기에 보조적으로 사료를 먹이긴 했지만 옥수수와 건초 더미라 청정 사료였기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슈퍼 목장에는 해발 5백 미터 이하의 야산이 6개나 있었다.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였다.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김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저수지를 만들고 또한 지하수를 개발하라는 지시였다.
 “아, 회장님은 역시 대단하셔. 어떻게 이런 걸 예상하셨을까?”
 김복종은 먼저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가둘 거대한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에 착수했다.
 인부들이 넘쳐나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탐지 장비를 이용해 목장 곳곳을 탐지한 결과 열 곳의 지하수를 찾아냈다.
 인부들을 대거 동원해서 지하수도 개발했다.
 지하수는 지하 150미터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물이 아주 깨끗하고 좋았다.
 슈퍼 목장은 현재 전체 작업 공정률이 25퍼센트 정도였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완전한 목장이 갖추어질 것이다.
 1994년 9월 3일 토요일, 발해 그룹 회장실.
 그룹 회장인 신덕수와 신덕훈 상무이사, 발해 전자의 신빈 기획실장이 모여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신덕수 회장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아들인 발해 전자의 신빈 기획실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그럼 이제까지 조사한 슈퍼 그룹의 재무제표 상태를 보고하겠습니다. 먼저 슈퍼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자본금 오백억 원으로 시작한 회사로 부채는 없으며, 유동 자산은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들입니다. 각종 연예 사업에 진출해 가수 편준협의 노래가 대박 히트를 기록했고, K군과 아이돌의 노래도 연속 대박 히트를 기록하면서 급부상했습니다.”
 “으음, 슈퍼 그룹의 회장은 인재를 보는 안목이 있는 자였어.”
 “형님, 아니 회장님, 정말 대단합니다.”
 “기획실장, 계속해.”
 “예, 회장님. 이후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먼저 작년인 93년 사월에 한국 영화 사상 가장 큰 제작비를 투입, 백이십억 원을 투자한 영화가 개봉 한 달 만에 육백오십만 명을 기록했고, 한국 영화 역대 관객수 일위에 오르는 등 경이적인 기록을 거두면서 이백억 원이 넘는 대박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뭐야, 그럼 또 있단 말이야?”
 “예, 삼촌. 몇 편의 영화들이 전부 대박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영화로 벌어들인 수익만 해도 이천삼십억 원이나 됩니다.”
 “이, 이럴 수가!”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회장님.”
 “이, 이게 정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회장님. 지금도 슈퍼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연예인들과 신인 연예인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을 계약하면서 지출도 많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몇십 배의 이익을 가져오고 있기에 사실상 지출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보면 슈퍼 엔터테인먼트 하나만 봐도 자본금 오백억 원이지만 자본 총계는 삼천억 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으음, 약 여섯 배로 회사가 커졌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다음으로 슈퍼 경호 회사가 있는데 처음에는 회장의 개인 경호를 위해서 설립되었기에 경호원이 오십 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회장 경호는 물론 슈퍼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들의 경호도 전담하고 있기에 팔백 명이 넘습니다. 역시 부채는 없으며, 자본금은 이백억 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천억 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으음, 소름이 끼치는구먼.”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신덕훈 상무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큼 현실적으로 두려움이 되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신빈이 다시 슈퍼 그룹에 관하여 보고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슈퍼 경제 연구소입니다. 자본금 천억 원으로 시작해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회장이 지시한 것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어서 파악이 안 되었지만 제가 추정하기로는 각종 인재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있기에 무형의 자산은 엄청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발해 그룹 회장인 신덕수와 신덕훈 상무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다.
 “이번에는 스포츠 단체인 킹 FC입니다. 부채는 없으며, 자본금 삼백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 대회에서는 약간의 적자가 있었다 합니다만 홍보 효과가 컸습니다. 대회가 열릴수록 인기가 치솟더니 일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으음, 나도 킹 FC를 좋아해서 대회가 열릴 때마다 보곤 해.”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두 사람이 인정할 만큼 킹 FC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인기 격투기 스포츠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다음으로는 (주)슈퍼 커뮤니케이션이 있는데 이 회사는 인터넷 포털 업체입니다. 자본금 이백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슈퍼 메일 넷이라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터넷 기업 순위 일위에 올라서서 엄청난 신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주)슈퍼 택배가 있는데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자본금 백오십억 원으로 시작했으며, 슈퍼 그룹에서 취급하는 물류를 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회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그건 케이블 방송의 슈퍼 홈쇼핑과 슈퍼 농산물 쇼핑 때문입니다.”
 “으음, 모든 사업이 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고도로 계산된 사업들이구나.”
 “그렇습니다, 회장님. 비록 슈퍼 그룹의 자회사들이지만 각자 서로의 회사를 도와주고 있기에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허허. 이거야, 원.”
 “형님, 저는 너무 놀라서 이젠 놀랄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삼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슈퍼 전자입니다. 처음엔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뒤쪽 공터 한쪽에 조립식 건물에서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자본금이 무려 일천억 원입니다.”
 “뭐야? 그, 그게 정말이냐?”
 “예, 삼촌. 네이게이션이라는 것으로 신고식을 치렀는데 알려진 대로 대박이었습니다. 다음에 나온 제품이 우리 발해 전자가 출시하고 있는 휴대폰이었습니다. 거울 폰이라는 것으로 역시 대박 히트를 기록한 제품입니다.”
 “으음, 역시 무서운 자야.”
 “도대체 김철이라는 자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아직은 정확한 것이 나오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부채가 없으며, 기술 개발비를 많이 투자하고 있음에도 그에 반해 히트 제품을 계속 출시하고 있으니 하루가 다르게 회사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으음. 빈아, 그건 나도 인정하마.”
 “형님,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케이블 방송국 일곱 개 채널은 각각 오백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알려져 있으니 모두 합하면 무려 삼천오백억 원의 자본금이 됩니다. 이번에는 슈퍼 건설 회사로, 자본금 오백억 원으로 설립된 회사입니다. 김철 회장이 동탄이라는 곳에 오십만 평을 매입해 그룹의 빌딩을 신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중국 상해에 슈퍼 목장이라는 것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뭐? 중국 상해에도 말이냐?”
 “예, 회장님.”
 “으음, 무서울 정도로 빠른 결단력과 추진력이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이제는 하나 남은 슈퍼 투자 회사인데 이 회사는 조금 특이합니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에 자금을 투자하고 있지만 사실 김철 회장이 투자하는 것에 대한 잡무를 주 업무로 하고 있다 합니다.”
 “그럼 개인 사무실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
 “현재는 오십 명 정도의 직원이 자금 담당과 감사 업무를 보고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김철 회장의 개인 서류 업무를 전담하는 직원이 스무 명이나 됩니다. 김철 회장은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이십오 층에 내부를 개조해 자신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슈퍼 그룹의 빌딩이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날로 부동산이 오르면서 덩달아 빌딩의 가치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어느 것 하나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게 없는 자입니다.”
 “으음, 기획실장의 말은 잘 들었다. 김철 회장은 아직 이십 대라 알고 있는데 그 많은 자금을 다 어디에서 벌어들인 것인지 알아보았나?”
 “90년도까지만 해도 김철 회장은 부산에서 일개 인테리어 회사의 평사원이었습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증권 투자에 손을 대더니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 거참, 증권 투자?”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증권 투자라니?”
 “그는 지금도 증권가에서는 불패의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투자하는 종목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단기간에 벌어들였으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뉴욕의 월가에도 투자하고 있으며, 선물 시장에도 뛰어들어 지금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으음, 그럼 슈퍼 그룹의 모든 자회사는 그가 벌어들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거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단 하나의 회사도 빠짐없이 은행이나 다른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은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돈으로만 직접 투자해오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투자에 관한 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회실장, 그럼 김철 회장의 자본금은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되었나?”
 “이미 벌여 놓은 사업을 종합해보면 약 일조 원 정도 되었습니다.”
 “허억, 엄청나군.”
 “일조 원이라고? 그게 확실한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회장님, 삼촌. 김철 회장이 지금까지 해온 사업을 보면 앞으로도 몇 개의 회사를 더 설립할지 모릅니다. 개인의 재산도 시중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자금만 해도 삼천억 원 정도 되었습니다.”
 “뭐야, 삼천억 원? 그게 사실이냐?”
 “으으음, 소름이 돋는군.”
 “모두 사실입니다. C은행과 스위스 G은행에도 그의 돈이 예치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단지, 수억 불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확인된 것만 해도 일조 삼천억 원이며, 얼마인지 모르는 자금이 더 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으음, 신덕훈 상무이사.”
 갑자기 발해 그룹 회장인 신덕수가 정색하면서 말하자 신덕훈은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예, 회장님.”
 “오늘부터 신덕훈 상무이사는 그룹 차원에서 신설 부서를 하나 만들도록.”
 “신설 부서라고 하면?”
 “슈퍼 그룹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까지 연구하는 연구 부서면 좋겠어.”
 “으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에 대해 필요한 자금과 인원은 추후 나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예, 회장님.”
 “흐음, 신빈 기획실장은 발해 전자에서 이번 주 내로 모든 업무를 정리하고 대기하도록. 다음 주에는 그룹의 총괄 기획이사로 승진 발령할 것이니 그리 알거라.”
 “예, 회장님.”
 “그럼 두 사람은 나가서 일보도록.”
 “예, 형님.”
 “예, 회장님.”
 발해 그룹의 신덕훈 상무이사와 발해 전자의 신빈 기획실장은 신덕수 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렇듯 발해 그룹의 신덕수 회장은 무섭게 커오는 슈퍼 그룹을 라이벌로 인식하고는 그에 대한 대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으음, 앞으로 우리 발해 그룹의 경쟁자는 슈퍼 그룹이야.’
 
 
 제7장 위기
 
 
 1994년 9월 9일 금요일, 슈퍼 그룹 회장실.
 김철 회장의 호출을 받은 슈퍼 건설의 사장 신수동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신수동은 올해 51살로, 건설 현장의 인부와 조장 15년, 소장직을 10년 해서 25년을 건설 현장에서 일해온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외모도 건설 현장 인부를 보듯 어깨가 떡 벌어지고 배가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작년에 소장직을 그만두고 처남의 말만 믿고 식당을 개업했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다.
 살고 있던 집까지 은행에 담보로 잡혀서 투자한 식당인데, 본사가 부도나버리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던 그는 산에 올라가 시간을 때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그를 찾아온 사람이 김철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김철의 큰 인물됨에 탄복한 그는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처음에 그가 생각하기로 김철은 조그마한 인테리어 회사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세상에나, 슈퍼 그룹이라는 곳의 회장이었다.
 자신을 스카우트하려고 계약한 금액이 무려 3억 원이었다.
 연봉도 1억 2천만 원으로 매달 1천만 원이었다.
 어려웠던 집안이 이 한 번의 스카우트로 인해서 기둥이 다시 세워진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수동은 집안에서 다시 큰소리를 치면서 출근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부인도 알아서 보약이다 몸에 좋은 거다 하면서 챙겨 주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절망 속에 있다가 이제는 살맛이 났다.
 그러니 신수동 자신에게는 김철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렇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고마워, 이 비서.”
 신수동이 회장실로 들어서자 김철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윽.
 김철의 손짓에 그는 오른쪽 소파에 앉았다.
 “신 사장.”
 “예, 회장님.”
 “내가 일전에 지시했던 것은 어찌 되었나요?”
 “예, 회장님. 두 가지 일 중에서 먼저 당산역 아파트 건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어서 해보시오.”
 “예, 회장님. 영등포구 당산역 인근 한강변에 있는 땅을 손쉽게 매입했습니다. 오십 층 규모의 타워 아파트 서른 동을 신축하는 사업이며, 일차 사업으로 열 동, 이천 세대의 타워 아파트를 신축하게 됩니다.”
 “신축 절차는 어찌 되었나요?”
 “예, 이미 모든 관계 구청과 건설교통부에 신축 절차를 위한 허가를 받았습니다. 보름 이내로 설계 도면이 나오면 착공할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설계 도면이 나오는 대로 대대적인 TV 광고를 실시하세요.”
 “예, 회장님.”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부산 해운대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미 해운대 요트 경기장 옆 부지는 매입한 상태이며, 이곳 역시 설계 도면이 나오면 오십 층 규모의 쌍둥이 타워 아파트를 신축할 수 있을 겁니다, 회장님.”
 “좋습니다. 부산 해운대의 타워 아파트 건도 중요하지만 국내 최초 해상 호텔은 어찌 되었나요?”
 “예, 이미 구청과 시청에서 허가가 나온 상태라 곧 공사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역시 신 사장의 일 처리는 내 마음에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는데 나와 같이 점심이나 하고 가세요.”
 “아이고, 회장님, 감사합니다.”
 김철이 이번에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슈퍼 건설의 사업 중에서 해상 호텔 사업이었다.
 해운대 매립지의 1백 미터 앞바다에 세워지는 해상 호텔은 기존의 상식을 깨는 공법으로 신축될 것이다.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라는 내열성이 우수하고 투명한 데다 견고해 충격에 강한 소재를 이용하는데, 자동차의 컬러 유리처럼 약간의 푸른색을 집어넣을 것이기에 바다와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수심 속에 다리처럼 교각을 오각 형태로 세우고, 그 위에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교각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런 후 파도에 밀리지 않도록 거대한 볼트 너트 형태로 끼워서 다시 용접할 것이었다.
 이러면 태풍에도 끄떡없게 된다.
 이렇게 수심 속에 3층으로 객실을 만드는데, 한 층에 10개씩 모두 30개의 객실을 만들 예정이었다.
 또한 수면 위에는 마치 유리로 만든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만들 것이다.
 해상 호텔의 이름도 블루 캐슬이었다.
 수면 위의 성엔 레스토랑과 꼭대기 층에는 전망대도 설치할 것이다.
 각 전기적인 장치는 수면 아래 교각을 통해 금속관을 만들어 1백 미터 정도 떨어진 매립지와 연결된다.
 해상 호텔인 블루 캐슬까지 들어가려면 하루에 두 번 이어지는 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1톤 승용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다리로, 기계로 움직여 연결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다리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게 빨리 만들 수 있었다.
 일명 이동식 구름다리였다.
 위는 성, 아래는 지하 3층 정도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만들면 조립식 건물처럼 아주 빠르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을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옮기고 마무리 작업을 거치면 되기에 아주 획기적인 아이디어 건축물이라 할 수 있었다.
 9월 말, 드디어 건축 설계 도면이 나온 후 각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냈다.
 영등포구 당산역 인근 한강변에 50층 규모의 타워 아파트 30동을 신축하는 사업이며, 1차 사업으로 10동 2천 세대의 타워 아파트를 슈퍼 건설에서 신축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슈퍼 그룹이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델 하우스가 설치되자 엄청난 인파가 밀려들었다.
 첨단 방범 시스템과 각종 편의 사양 시설을 많이 설치하게 될 아파트였지만 기본의 아파트와 분양가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라 엄청난 인기를 받았다. 누구나 이 아파트만 사두면 돈이 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산의 해운대 요트 경기장 옆에 50층 규모의 쌍둥이 타워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과 그 앞바다 1백 미터 지점에 해상 호텔인 블루 캐슬이 신축된다는 일간지의 광고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쌍둥이 타워 아파트는 약 2년 정도의 공사 기간이 필요하지만 해상 호텔인 블루 캐슬은 아니었다.
 이미 설계 도면이 나왔으며, 육상에서 조립식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기에 내년 봄에는 설치가 완료되어 내부 인테리어를 한다고 해도 여름쯤에는 완공되어 관광객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국내 최초로 신축되는 해상 호텔 블루 캐슬은 벌써부터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여의도 하늘 빌딩의 최 엔터테인먼트.
 최미래는 연예계에 진출해서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단기간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활발한 활동을 했기에 더욱 인기였다.
 그러나 슈퍼 전자에서 자신을 모델로 발탁하지 않고 경쟁 상대인 삼은아를 모델로 선택하자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서 공작을 펼쳤고, 김철과 박지현의 관계가 틀어져 냉각 상태인 것이 그나마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최미래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김철은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았다.
 “호호호, 이제 좋은 기회를 잡았으니 슬슬 접근해봐야겠어.”
 이제까지는 김철이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았기에 기회를 잡을 수 없었지만, 웬일인지 텔레비전 프로에 그가 출연한다는 것이다.
 K방송국의 ‘화제의 인물’이라는 프로에 김철이 출연하게 되었다.
 이 프로는 정치, 경제, 의학, 과학을 총망라하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인사들을 초대해 궁금증에 대하여 질문하고 답을 듣는 토크쇼 같은 형식의 생방송 프로였다.
 이미 여러 번이나 출연 요청이 들어왔지만 김철이 바쁘다는 이유로 출연하지 않았었는데,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출연한다고 연락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슈퍼 그룹의 김철 회장이 프로에 출연한다고 대대적인 광고가 나갔기에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방송국의 스튜디오에는 한 시간 전부터 방청객들이 2백 명이나 출연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또한 출연자들도 20분 전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Y대 전자공학과 교수 홍기원, S대 교수이며 영화 평론가 김영상, 정신과 박사 윤정신, 인기 연예인 최미래, 사회는 국민 MC인 나한국이 맡았다.
 생방송 시작 10분 전이었다.
 저벅저벅.
 스튜디오 안으로 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김철이 들어왔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살짝 기름까지 발라서인지 무척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도수가 없는 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서인지 엘리트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조연출이 김철의 양복 상의 한쪽에 마이크를 달아주었다.
 김철은 자신이 앉게 될 자리로 이동해서 앉았다.
 테이블에는 뚜껑이 있는 유리잔이 놓여 있었으며, 시원하게 얼음이 들어간 물이 들어 있었다.
 “방송 일 분 전입니다. 준비하세요!”
 조연출이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치자 모두들 입고 있는 옷을 추슬렀다.
 “자, 시간 되었습니다. 오··· 사··· 삼··· 이··· 일··· 큐!”
 국민 MC 나한국이 중앙에 있는 카메라를 보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화제의 인물의 MC 나한국입니다. 오늘은 시청자 여러분께서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는 슈퍼 그룹의 김철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시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특유의 언변으로 진행해나가던 나한국은 출연자들을 소개했다.
 “Y대 전자공학과 교수이신 홍기원 교수님 자리하셨습니다. 그 옆에는 S대 교수이며 영화 평론가이신 김영상 님, 정신과 박사이신 윤정신 님,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연예인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분이시죠? 최미래 씨, 이렇게 나와 주셨습니다.”
 사회자의 출연자 소개가 끝나자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럼 이제 슈퍼 그룹 회장이신 김철 님에 대한 이력을 간단하게 먼저 설명해드리고 난 후 질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철 님은 현재 슈퍼 그룹의 회장으로 계십니다. 자회사로는 슈퍼 엔터테인먼트와 슈퍼 투자 회사, 슈퍼 경호 회사, 슈퍼 경제 연구소, 킹 FC, (주)슈퍼 커뮤니케이션, 슈퍼 택배, 슈퍼 건설, 슈퍼 전자, 케이블 방송국인 슈퍼 홈쇼핑, 슈퍼 농산물 쇼핑, 슈퍼 무비, 슈퍼 뮤직, 슈퍼 드라마, 슈퍼 스포츠, 슈퍼 N 연예, 중국 상해 인근에 있는 슈퍼 목장까지 본사와 자회사 열일곱 개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럼 이제 출연자 분들의 질문이 있겠습니다. 어느 분부터 하시겠습니까? 아, 김영상 님 질문해주세요.”
 “예, 김영상입니다. 김철 회장님, 슈퍼 그룹은 91년도에 출범하여 삼 년 만에 열일곱 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계신데 너무 여러 곳에 한꺼번에 무리하게 진출하신 거 아닙니까?”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열일곱 개의 회사를 설립한 게 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사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회사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규모 면이나 사업 면에서 작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열일곱 개가 적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 저는 일 년에 최소 두 개에서 다섯 개 정도의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철의 상식을 깨는 말에 김영상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무척 놀라고들 있었다.
 “휴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열일곱 개 회사만 하더라도 사업 자금이 많이 들어가셨을 텐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요,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대략적으로 알려 드리기 위해 도표를 준비했으니 그것을 참고해주십시오. 슈퍼 그룹 전체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슈퍼 그룹은 부채가 없으며, 각종 비용으로 자금이 지출된 것은 있습니다만 각 자회사의 자본금의 삼십 퍼센트 정도 됩니다. 유동자산과 고정자산을 포함하면 현재 일조 천오백억 원이 조금 넘습니다.”
 “으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럼 슈퍼 그룹의 자산은 모두 김철 회장님의 개인 자금에서 나온 것이로군요?”
 “뭐,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 박사인 윤정신이 질문했다.
 “김철 회장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의문이 생기는군요. 사회자께서 말씀하시기로 현재 스물여섯 살이라고 하셨는데, 그 많은 자금을 다 어떻게 버신 겁니까?”
 “숨길 게 없으니 말씀드리죠. 91년도에 처음 오천만 원으로 증권 투자를 했습니다. 운이 좋아서인지 투자한 종목에서 큰 이윤을 보면서 자금이 늘어났습니다. 몇 년 동안 증권 투자를 했더니 천억 원 정도를 단기간에 벌었습니다.”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글쎄요, 저는 그게 가능하던데요? 어쨌든 그 이후 미국의 월가에 주식 투자를 하면서 수익을 올렸으며, 또한 현재는 북미 선물 시장에도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자금을 가지고 지금과 같이 슈퍼 그룹의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경영해올 수 있었습니다.”
 “으음, 그럼 죄송한 말씀인데요, 김철 회장님의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슈퍼 그룹과 자회사 열일곱 개는 비록 주식회사이지만 아직 증권가에 상장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주식 백 퍼센트를 제가 소유하고 있으며,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일조 천오백억 원과 아직 남아 있는 개인적인 자금이 시중 은행에 삼천억 원 정도 됩니다. 또한 미국의 C은행과 스위스 G은행에도 얼마의 자금이 들어 있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으음, 그럼 김철 회장님의 재산이 일조 오천억 원은 넘는단 말씀이시죠?”
 “예, 이조원 조금 넘는다 생각하십시오.”
 “으음, 이조원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자이십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김철 회장님의 성공 비법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으음, 글쎄요. 냉철한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투자하다 보니 사업이 모두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최미래가 김철에게 질문했다.
 “김철 회장님, 사귀는 사람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만 최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이 많으신 분이며, 스물여섯 살이라 젊고 매력적이신데 그런 분을 싫어하시는 여자 분은 누군가요?”
 “하하하, 글쎄요. 저의 생각으로 남녀 사이에는 돈보다 사랑이 우선 아닐까요?”
 “여자 분도 김철 회장님을 사랑하시나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오해가 있다 보니 최근에는 냉각 상태라 그것이 은근히 걱정되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여자 분을 사귀어볼 생각은 없으세요?”
 “예, 아직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저와 사귀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미래는 농담 비슷하게 교묘히 김철에게 자신과 사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김철은 웃으면서 여유롭게 대답했다.
 “물론 최미래 씨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대한민국의 남자 분들이 절 가만히 놓아둘 것 같지 않습니다.”
 최미래와 사귀는 걸 허락해도, 안 해도 문제였는데, 현명한 대답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방청객에서 질문이 다시 이어졌고, 김철은 여유롭게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가버렸다.
 이제 방송을 끝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국민 MC 나한국의 마지막 멘트가 시작되었다.
 “오늘 김철 회장님의 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계시면 해주십시오.”
 “예, 저는 앞으로 사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잘 이룬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슈퍼 그룹, 국민 여러분께서 귀엽고 사랑스럽게 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
 방청객들의 박수 소리가 크게 울리며 나한국의 멘트가 이어졌다.
 “오늘은 슈퍼 그룹의 김철 회장님과의 만남을 보내드렸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생방송이 끝나고 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연출이 다가와 마이크를 제거해주었다.
 최미래가 김철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줄래요?”
 “아니요. 최미래 씨, 난 당신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절 그렇게 싫어하죠?”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우린 운명적으로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이입니다. 그렇게 알고 돌아가세요.”
 “흥, 두고 봐. 오늘의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어.”
 최미래는 김철을 한 번 노려보고는 뒤돌아 스튜디오를 나가버렸다.
 ‘쯔쯔쯔, 이러면 이럴수록 최미래 너의 미래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진다는 걸 왜 모르니? 정말 불쌍하구나.’
 김철은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방송국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고, 준비되어 있는 리무진에 올랐다.
 지상으로 나온 리무진은 방송국을 지나 곧 도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쿠르르르르.
 싱가포르 항공의 747 여객기가 미국의 LA 공항에서 이륙하여 김포 공항에 착륙했다.
 입국 수속을 마친 수백 명의 여행객들 중에 공공칠가방을 든 남자가 끼어 있었다.
 190센티미터나 되는 큰 키였지만 몸은 마른 편이었다.
 ‘흐흐흐, 삼 일 이내로 맡은 임무를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가야겠어.’
 여권에는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커스만이라는 화학 회사의 대리였지만 실상은 임무를 받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킬러였다.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울프라는 코드 네임이 있었다.
 울프는 킬러로 활동한 지가 9년이나 되었으며, 일급 킬러였지만 실력은 특급에 가까운 자였다.
 공항 청사를 걸어 나온 그는 길가에 정차해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는 서울 도심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G호텔 정문에 택시가 멈추자 호텔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었다.
 스미스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 로비를 가로질러 프런트로 걸어갔다.
 프런트 캐셔(예약, 안내 등) 김현숙은 다가오는 백인을 바라보았다.
 “예약되었는지 확인 좀 부탁합니다. 이름은 스미스입니다.”
 “아, 1202호실에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방도 하나 보관되어 있군요? 여기 있습니다.”
 룸 카드키와 하드 케이스 가방을 옆에 서 있는 벨맨에게 내밀었다.
 스미스는 벨맨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내린 후 1202호실 앞에서 멈추었다.
 벨맨은 룸 카드키로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스미스는 1만 원을 팁으로 벨맨에게 주었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룸의 문이 잘 닫혀 있는지 확인한 스미스는 하드 케이스 가방과 공공칠가방을 들고 침대에 내려놓았다.
 스미스는 먼저 공공칠가방을 열어 그 속에서 담배 케이스 크기 정도의 은색 금속으로 된 물건을 꺼내들고는 스위치를 켰다.
 그리고는 룸을 비롯해 화장실의 천장까지 세세하게 확인하고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굳어 있던 얼굴이 환해졌다.
 “음, 조사해보니 아무 이상 없군?”
 침대 모서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다시 앉았다.
 그리고는 공공칠가방 속에서 몇 개의 물건을 꺼내어 펼쳐 놓았다.
 어떤 물건의 부속인 모양이었다.
 스미스는 이번에는 다이얼 자물쇠가 채워진 하드 케이스 가방을 바라보더니 비밀번호를 돌린 후 열었다.
 하드 케이스 가방 속에는 금빛으로 번뜩이는 9.8밀리미터 수제 총알 10개와 총신과 개머리판, ZF77(망원 조준경 77) 스코프가 들어 있었다.
 침대에 펼쳐 놓은 것들을 하나씩 조립했더니 수제 저격 총이 되었다.
 저격 총을 들어 겨누어보고는 내려놓았다.
 탄피 수거 통이 측면에 부착되어 있어 저격한 후 총알이 바로 회수되었다.
 조립과 분리가 10초 정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흔적이 잘 남지 않으며,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기에 유효사거리인 1,200미터까지는 백발백중이었다.
 공공칠가방 속에서 봉투를 꺼내 표적이 될 자의 각종 사진과 정보가 프린트되어 있는 자료를 꼼꼼하게 읽고는 다시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저격 총도 다시 분리하여 원래 있던 곳에 넣어놓았다.
 스미스는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하드 케이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속옷과 와이셔츠를 꺼내 입고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정장을 입었다.
 “흐흐흐, 일단 저격 장소를 확인해보고 와야겠군.”
 스미스는 공공칠가방과 하드 케이스 가방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는 룸을 나서다 누군가가 침입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를 문틈에 끼우고는 문을 닫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는 머리카락 하나였기에 본인만 알아볼 수 있었다.
 ‘흐흐, 이러면 누가 침입했는지 알 수 있지.’
 호텔을 걸어 나온 스미스는 서울의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25층.
 회장 김철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곳이었다.
 25층의 정문 앞에는 책상이 놓여 있고, 남녀 비서가 각각 한 명씩 앉아 있었으며, 슈퍼 경호 회사의 경호원이 10명 대기해 있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빌딩의 엘리베이터는 23층까지만 운행된다. 24층은 슈퍼 그룹의 회장실이었기 때문이다.
 24층과 25층은 비상구를 통한 계단으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김철에게는 가정부가 9명이나 있었으며, 이들을 총괄하는 가정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으윽, 왜 이러지?”
 간식으로 해물 칼국수를 먹고 있던 김철은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면서 학질이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머리가 아파왔다.
 “으음, 이건?”
 “왜 그러십니까, 회장님?”
 한쪽에 서서 대기해 있던 가정부장 한은실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올해 33살의 노처녀였지만 E여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한식을 비롯해 중식, 일식까지 자격증을 획득한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아, 한 부장, 나 지금부터 명상실에 들어가 생각해볼 게 있으니까 나올 때까지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간에 일체 방해 말아요.”
 “예, 회장님.”
 “비서실에는 내가 당장 연락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셨죠?”
 “예,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김철은 인터폰으로 비서실에 연락했다.
 박충실 비서실장은 회장인 김철의 연락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예예,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박충실 비서실장은 슈퍼 경호 회사에 연락해 경호원을 50명이나 불러들였다.
 긴급하게 호출된 경호원들은 박충실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는 25층으로 올라가 철저하게 그곳을 통제했다.
 방음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명상실은 김철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설치한 곳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김철은 두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었을 때에야 그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후, 그렇게 된 것이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명상실에서 김철이 나왔더니 한은실 가정부장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는데, 핏발이 선 게 날밤을 지새운 모양이었다.
 “한 부장, 이렇게 있었던 거요?”
 “예, 회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요. 출출한데 뭐 먹을 게 있을까요?”
 “있습니다, 회장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대령하겠습니다.”
 평소에는 조신하던 그녀가 지금은 발등에 불이라도 붙은 건지 후다닥 주방으로 사라졌다.
 김철은 5분도 되지 않아서 2명의 가정부가 차려 준 음식으로 식사를 맛있게 했다.
 “쩝쩝. 한 부장님, 밥 한 그릇 더 먹고 싶은데 있어요?”
 “예, 회장님,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한 부장의 눈짓을 받은 가정부가 밥통에서 밥을 한 그릇 퍼서 가져와 내려놓았고, 그는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고민이 해결되었기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밥맛도 더 있는 것 같았다.
 띠리리리링.
 김철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침부터 전화가 왔지만 김철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나예요.
 “누구신지?”
 -지현이에요, 오빠.
 “아침부터 웬일이야?”
 -난 오빠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
 -오늘 오빠 보고 싶은데 볼 수 있어요?
 “좋아. 어디에서 만날까? 압구정동?”
 -응, 오빠. 거기에 ‘소울’이라는 커피 전문점 있으니까 거기에서 여섯 시에 만나요.
 “알았어. 이따 봐.”
 -이따 봐요, 오빠.
 휴대폰을 내려놓은 김철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나오더니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한 부장, 나 잠시 볼래요?”
 “예, 회장님.”
 김철을 따라 음악 감상실로 들어간 한은실 부장은 그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한 부장의 집이 대치동에 있는 한국 아파트라고 했던가요?”
 “예, 회장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동생이 하나 있지요?”
 “예, 회장님.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지금 군 복무 중에 있습니다. 내년 가을에 제대합니다.”
 “그렇군요. 한 부장은 나의 말을 얼마나 믿습니까?”
 “예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오해는 말아요. 난 그냥 나의 말을 얼마나 믿는지 궁금해서요.”
 “회장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습니다, 회장님.”
 “그렇다면 좋습니다. 오늘 오후에 집에 가죠?”
 “예, 회장님. 오후 네 시에 퇴근하여 내일은 하루 쉬고 모레 아침에 출근합니다.”
 “그럼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요.”
 “예, 회장님.”
 김철이 나직하게 한은실 부장에게 무언가를 상세하게 말했고, 간간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했다.
 약 15분간 이어진 대화가 끝나고, 김철과 한은실 부장이 음악실에서 나왔다.
 재킷을 입은 김철이 24층에 있는 회장실로 가기 위해 문을 열자, 비서실 직원들과 경호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 때문에 다들 수고하는군요.”
 “아,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상과 벌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지난밤부터 현재까지 수고한 직원들을 박 비서가 모두 적어서 오전에 나에게 보고 올리세요.”
 “예, 회장님.”
 “나는 회장실에 가볼 테니 비서실에 연락해서 오늘 처리할 결재 서류를 가져오라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철이 비상구로 향하자 경호원들이 먼저 앞장서면서 문을 열었고, 계단에도 경호원들이 배치되면서 김철을 경호했다.
 슈퍼 그룹 비서실에 김철이 출근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는 곧 슈퍼 그룹 본사의 과장급부터 그 이상의 간부 및 임원진들과 자회사의 모든 간부들에게까지 연락이 되었다.
 안 그래도 과장급부터 그 이상의 전 간부들은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연락을 받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이렇듯 슈퍼 그룹 본사와 자회사의 간부들은 비상 연락망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한 번씩 회장 김철에 대한 일이 생기면 비상이 걸려 집에서도 걱정하면서 대기해 있었다.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호출될 수 있었기에 그런 것이다.
 슈퍼 그룹의 본사와 자회사의 간부들과 임원진들은 다른 대기업에서 받는 대우와 비교하면 월급이나 연봉이 평균 2배 이상이었고, 계약금을 받고 스카우트되었을 때에는 최소 단위로 받는 게 1억 원으로 평균적으로 보면 예외 없이 모두 억 단위였다.
 또한 대리와 그 밑의 평사원들이나 별정직으로 구내식당의 영양사나 주방 보조원들, 화장실 및 사무실 청소원, 경비들까지 모두 용역을 쓰지 않고 정식으로 계약한 정식 사원들이었다.
 대우는 다른 회사와 비교하면 보통 2배 이상이었기에 슈퍼 그룹 본사나 자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었다.
 이렇듯 대우가 좋다 보니 별정직 모집에까지 경쟁률이 엄청났다.
 사원 모집이나 간부들 영입 및 별정직에 이르기까지 김철 회장이 직접 면접을 한 후 입사시켰다.
 특이한 것은 절대 학벌을 보지 않았으며, 오로지 마음가짐과 능력만 보고 뽑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입사 신청을 했다.
 김철은 결재할 서류를 검토하면서 사인을 하다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으음,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넘었군.”
 책상을 정리한 그는 재킷을 입고는 인터폰을 눌렀다.
 삐이이.
 -예, 회장님.
 “박 비서, 차 대기시켜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철이 회장실을 나서자 10명의 보디가드가 따라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리자 그곳에도 정장을 차려입은 경호원들이 10명이나 대기해 서 있었다.
 20명이나 되는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김철이 빌딩의 정문으로 나오자 길가에는 그의 전용차인 리무진이 대기해 있었다.
 슈퍼 빌딩의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옥상에 스미스가 은밀하게 침투하여 스코프로 김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김철의 고개가 스미스가 있는 옥상 쪽으로 돌려지면서 약간 비웃는 듯한 묘한 웃음을 보이고는 리무진에 탔다.
 ‘뭐, 뭐야,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부우우웅.
 리무진이 출발하자 경호원들이 탄 승합차 2대가 리무진을 쫓아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한은실 가정부장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샤워부터 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눕혀 모처럼 거품 목욕을 느긋하게 즐겼다.
 ‘진짜 회장님의 말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아냐, 난 회장님을 믿어. 그분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데 내가 믿지 못하면 누가 믿어주겠어?’
 목욕 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한은실의 아버지인 한현기가 과일을 담은 쟁반을 가져왔다.
 평소 딸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스럽게 대해주는 한현기였기에 한은실의 마음이 즐거워졌다.
 “아빠, 엄마는?”
 “마트에 장 보러 갔는데 올 때 다 됐어.”
 “아빠는 어디 아픈 데 없어?”
 “없다. 난 아직 튼튼하다.”
 “그래도 건강할 때 몸을 지켜야 돼. 아빠, 내일은 내가 쉬는 날이니까 엄마랑 같이 나가서 보약 한 첩 짓자.”
 “내 것하고 엄마 것까지 지으려면 꽤 비쌀 텐데?”
 “걱정 마, 아빠. 회장님께서 특별 보너스로 삼백만 원 주셨어. 그것으로 지으면 돼.”
 “으음··· 은실아, 너는 회장님께 잘해야 된다. 알지?”
 “응, 아빠.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은혜를 잊겠어?”
 “그럼 됐다. 과일 먹자.”
 두 사람이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엄마야?”
 -그래, 문 열어.
 “알았어, 엄마.”
 문을 열어주자 양손에 시장 바구니를 든 은실의 엄마가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남자가 밀고 들어왔다. 손에는 날카롭게 번뜩이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척 보니 강도였다.
 은실은 담담했지만 그녀의 엄마, 아빠는 갑자기 들어온 2명의 강도를 보고는 겁을 집어먹었다.
 “이, 이러지 말아요.”
 “조용히 해. 떠들면 죽이겠어. 야, 넌 안방을 뒤져 봐.”
 “흐흐, 알았어.”
 강도 중 한 명이 안방 문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주먹이 튀어나왔다.
 “커억!”
 얼굴과 배에 연속으로 강력한 펀치를 맞은 강도는 비틀거리더니 넘어졌다.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맞은 강력한 펀치라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본 강도는 눈이 커지면서 놀랐다.
 그때 안방을 비롯해 다른 방의 문이 열리면서 10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강도를 포위하고는 순식간에 제압해버렸다.
 2명의 강도는 워낙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랐다가 차츰 정신을 차리고는 상황을 인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50대 후반의 남자와 여자 2명뿐이라 쉽게 제압해 털어갈 수 있다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들이 10명이나 집 안에 있었기에 오히려 이들 강도가 제압되어버린 것이다.
 ‘아, 역시 회장님의 말을 들은 게 잘한 일이었어. 고마워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 의해서 2명의 강도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인계되었고, 은실과 부모들은 몇 시간 동안 진술 조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밤이 늦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겁이 나고 잠이 오지 않아서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모처럼 함께 잠을 잘 수 있었다.
 커피 전문점 ‘소울’.
 김철의 리무진이 정문 앞에 멈추자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김철이 내렸다.
 이미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대대적으로 노출되어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창가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던 박지현은 김철의 모습을 보고는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예전에 자신이 사랑하던 김철과는 어딘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때에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지금은 세련돼 보였다.
 10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들도 김철의 얼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기에 누구인지 금방 알았다.
 “슈퍼 그룹의 김철 회장이야.”
 “앗, 김철 회장이다.”
 “어디, 어디? 어머, 진짜!”
 2명의 젊은이가 김철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경호원들이 앞을 가로막고 제지했다.
 스윽.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던 김철은 창가에 앉아 있는 박지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김철이 앉았다.
 박지현은 김철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만 보더니 이윽고 먼저 말했다.
 “내가 알던 오빠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랬어? 지금의 내가 진짜인걸.”
 “응, 지금도 멋있긴 하지만 그때의 오빠 모습이 더 좋았어.”
 “어디 아팠어? 얼굴이 많이 상했네?”
 “······.”
 “지현아, 그렇게 어색해할 것 없어. 그때도 김철이고, 지금의 나도 김철이야. 이리 와.”
 “흐흑··· 오빠, 미안해.”
 울음을 터뜨린 박지현은 김철의 옆자리로 이동해 머리를 가슴에 묻으면서 흐느꼈다.
 등을 토닥여 주던 김철이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비로소 진정되었다.
 “지현아,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어 이야기하기 그러니까 나가자.”
 “응, 알았어, 오빠.”
 김철은 카운터에서 밖에서 마실 커피와 케이크를 사가지고는 밖으로 나와 리무진에 올랐다.
 리무진은 도심을 달려 한적한 강변에 차를 세웠다.
 김철은 인터폰으로 경호원들과 운전사까지 차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했다.
 리무진을 뒤따라온 경호원들의 승합차 2대도 약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대기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직 둘만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리무진의 차창은 선팅이 잘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김철은 클래식 음악을 잔잔하게 틀었다.
 차 안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지현은 김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손을 뺨에 대고 만지작거렸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촉촉한 입술이 포개어졌다.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 떨어져 바라보다가 다시 서로 껴안았다.
 “오빠,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랬어. 사랑해, 지현아.”
 “나도 사랑해, 오빠.”
 “지현아, 이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말해봐.”
 잠시 망설이던 박지현은 그날 최미래를 만난 일과 했던 말을 빠짐없이 전부 말해주었고, 그것을 듣던 김철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제는 김철이 박지현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고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
 “그럼 오빠, 이 모든 게 최미래의 거짓말이었어?”
 “그래. 그녀가 먼저 나에게 사귀자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어. 그러자 그때부터 교묘하게 나를 귀찮게 해서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거야.”
 “아름다운 얼굴 이면에 이렇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게 있었다니 정말 난 몰랐어, 오빠.”
 “나도 그녀의 이중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사귀지 않았어.”
 “그동안 나 혼자 착각에 빠져서 오빠를 힘들게 해서 미안해, 오빠.”
 “난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었어. 그동안 지현이가 오히려 힘들었다고 생각해.”
 “오빠를 만나지 못해 미칠 것 같았어.”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까지 못 자니 이렇게 얼굴이 상했구나.”
 박지현은 김철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주자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김철이 그런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이마에 뽀뽀를 해주자 박지현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지현아, 배고프지? 내가 사온 케이크 먹자.”
 “응, 고마워, 오빠.”
 김철이 차 안에 설치되어 있는 테이블 위에 커피와 케이크를 차려 주었고, 박지현은 맛있게 케이크를 먹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닭살 커플 아니랄까 봐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김철에게 내밀었다.
 “오빠, 아······.”
 “아, 쩝쩝··· 정말 맛있어.”
 한동안 만나지 못했기에 지금 둘만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부우웅.
 김철의 리무진이 청담동 비너스 타워 앞으로 멈추었고, 박지현이 차에서 내렸다.
 “오빠, 고마웠어.”
 “오늘은 푹 자고 내일부터는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어야 돼. 그래야 피부가 좋아져. 알았지?”
 “응, 알았어. 잘 가, 오빠.”
 아쉬움을 뒤로하고 박지현은 자신의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오빠는 우리 집이 부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었어. 이젠 절대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오빠의 말만 믿을 거야.”
 김철의 리무진이 슈퍼 그룹 본사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맞은편 빌딩 옥상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스미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표적을 저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4층 회장실과 25층 거주지의 유리창은 모두 방탄유리보다 더 내열성이 우수하고 견고하며 충격에 강한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자신의 저격 탄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또한 표적인 김철 회장이 외부로 잘 나가지 않고, 또 나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나가는지 전혀 정보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스미스는 자신이 계획했던 3일이면 충분하다 생각한 것을 이제는 전면 수정해야 했다.
 “으음, 오늘은 일단 돌아가서 쉬고 앞으로 기회를 보아야겠어.”
 스미스는 자신이 있던 곳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고는 호텔로 돌아가 버렸다.
 25층 거주지로 돌아온 김철은 먼저 한은실 가정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한 부장, 별일 없어요?”
 “회장님, 일이 있긴 있었습니다.”
 “그래요?”
 “예, 회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강도가 침입했었습니다.”
 “경호원들이 강도를 잘 제압했습니까?”
 “예, 회장님. 경호원이 열 명인데 두 명의 강도를 제압하지 못했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피해는 없었습니까?”
 “예, 다행히 초기에 경호원들이 강도를 제압했기에 없었습니다, 회장님.”
 “아, 정말 다행이군요. 그럼 내일 하루 더 푹 쉬고 출근하세요.”
 “아,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에요. 부모님들이 많이 놀라셨을 텐데 잘 위로해드리세요.”
 “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은실은 작은 것까지 신경 써주는 김철 회장이 너무 고마웠다.
 김철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후후후. 한 부장의 일이 잘 처리되었다니 다행이군. 이젠 내 일만 처리하면 되겠어.’
 대한 호텔 그랜드 홀.
 대한민국 100대 기업에 올라 있는 경제인들의 회의가 열리게 되었기에 97위에 올라 있는 슈퍼 그룹의 김철 회장에게도 당연히 초청장이 도착하여 회의에 참석한다고 연락했다.
 이 소식은 곧 킬러 스미스에게도 전달되어 최상의 저격 장소를 찾으려 돌아다녔다.
 “흐흐흐, 이곳이라면 최적의 장소 같아.”
 처음 3일을 예상했다가 9일 만에야 저격할 기회가 찾아왔다.
 스미스는 오늘 표적을 저격하고는 바로 대한민국을 떠나 괌에서 휴가를 즐기려고 일정을 잡았다.
 저격 장소는 대한 호텔에서 9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15층 한상 빌딩 옥상의 광고탑 아래였다.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 저격하기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탈출로도 꼼꼼하게 확인해놓은 그는 이른 아침에 이곳으로 잠입했다.
 배낭 속에서 빵과 우유를 꺼낸 그는 천천히 먹고 마셨다.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표적이 나타나려면 이른 시각이었다.
 “흐흐흐, 오후 네 시에 표적이 나타날 테니 알람을 맞추어놓고 쉬어야겠군.”
 아직은 아침이라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스미스는 고어텍스 소재의 천막을 절반은 깔고 그 위에 담요를 한 장 잘 깐 뒤 천막의 나머지 부분으로 몸을 덮어 위장했다.
 색깔이 국방색이고,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이라서 그런지 완벽하게 위장되어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띠띠띠띠.
 오후 2시 정각에 스미스의 손목시계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스트레칭으로 굳어진 몸을 충분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준비해두었던 빵과 캔 사이다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무엇인가를 조립했는데, 완성된 것을 보니 행글라이더였다.
 “흐흐흐, 여기에서 가장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게 최고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도록 행글라이더를 한쪽에 잘 놓아두고는 이번에는 저격 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조립된 저격 총을 들어 겨누어보고는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튀어나온 헬스 장갑을 끼고는 핫 팩도 준비해 앞에 놓았다.
 “흐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표적이 나타나는 일만 남은 건가?”
 시간이 흐르자 경제 회의에 참석하는 기업 총수나 사장들의 승용차가 속속 대한 호텔 정문으로 다가왔고, 호텔 도어맨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30대가 넘는 승용차가 지나갔을 때, 김철의 리무진 차례가 되어 호텔 정문에 멈추었다.
 도어맨이 차 문을 열어주자 김철이 차 밖으로 나왔다.
 저격 총에 부착되어 있는 스코프로 이를 보고 있던 스미스가 호흡을 멈추고는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 스코프에 보이는 김철의 얼굴에 그를 비웃는 듯한 웃음기가 보였다.
 “저, 저놈 뭐야? 에잇!”
 타앙!
 정확하게 903미터 떨어진 곳으로 저격 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허공을 가로질러 김철에게 날아갔다.
 “흐흐흐··· 표적이여, 잘 가거라.”
 스미스의 얼굴에는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지만,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너무 일찍 샴페인의 뚜껑을 따버렸다.
 김철이 머리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자 탄환은 그냥 지나치며 뒤쪽에 있는 대리석 바닥을 뚫고 들어가 박혀 버렸다.
 파팍.
 “허엇! 이, 이게?”
 스미스는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자신의 저격이 처음으로 실패했다.
 “으아아, 저격이다!”
 “사, 사람 살려!”
 갑자기 날아온 탄환으로 대리석 바닥에 구멍이 나면서 굉음과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자 호텔 정문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지만 김철은 그대로 서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스미스는 저격 총의 스코프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탄환이 또 날아왔지만 이번에도 김철은 스미스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피해버렸다.
 두 번이나 목표물의 저격을 실패하자 스미스는 당황했다.
 “이, 이럴 수가!”
 눈이 커진 스미스가 스코프에서 보이는 김철의 얼굴을 보니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이, 이··· 죽여 버린다. 죽어라!”
 타타타탕.
 연발로 4네발이나 발사했지만 여유롭게 걸어가면서 모두 피하더니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얄밉게도 김철은 기둥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스미스를 자극시켰다.
 “으아아! 죽여 버리겠어! 에잇!”
 타타타탕!
 나머지 4발을 쏘았지만 먼저 김철의 머리가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후드득.
 탄환에 맞은 대리석 조각이 부서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젠장, 실패야.”
 스미스는 즉시 저격 총을 삼단으로 분리했고, 배낭 속에 천막을 비롯해 나머지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고는 등에 멨다.
 쾅쾅쾅!
 옥상의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마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오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스윽, 슥슥.
 행글라이더를 펼쳐 준비를 마친 스미스는 옥상 끝으로 다가가서는 도약했다.
 슈아아앙.
 바람을 가르면서 행글라이더가 하늘을 날아 탈출로로 봐두었던 곳을 향해 날아갔다.
 스미스가 하늘을 날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옥상의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30명이나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스미스는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날면서 도주한 이후였다.
 경호원 중에서 한 명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무전기의 키를 누르며 외쳤다.
 “일 조는 실패했다. 지금 놈이 이 조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
 -이 조가 지금 날아오고 있는 놈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일 조 수고했다. 이상.
 스미스는 길가에 세워두었던 6백 시시 모터사이클 옆에 내려서더니 행글라이더를 회수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로 모터사이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곧바로 튕기듯 튀어나갔다.
 “이, 이놈들은 뭐야?”
 스미스와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뒤쪽에서 슈퍼 그룹의 자회사인 슈퍼 경호 회사의 경호원들이 20여 명이나 달려오고 있었다.
 “이 조도 실패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삼 조뿐이다. 이상.”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스타트가 좋고 파워가 넘치는 모터사이클의 뒤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흐흐흐, 네놈들이 감히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스미스는 이제는 좀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도주로를 어떻게 알고 몰려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들의 포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저격 장소에서 행글라이더로 1차 도주할 수 있었으며, 지금 2차로 모터사이클로 도주 중이기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스미스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전방의 길에서 그물이 펼쳐지면서 스미스를 덮쳤다.
 “이, 이게 뭐야?”
 그는 피하려고 했으나 워낙 범위가 넓은 그물이라 피할 수 없었다.
 꽈당!
 콰드드드드.
 오히려 급브레이크를 잡았기에 모터사이클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넘어진 스미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기에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파지지직.
 이때 사방에서 튀어나온 경호원들이 전기 충격기를 작동시켜 스미스에게 충격을 주었다.
 “크아아악!”
 부들부들 몸을 떨어대던 스미스는 고꾸라졌고,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삼 조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삼 조 수고했다. 대원들이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그동안 놈이 깨어나 반항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으니 철저하게 포박해놓도록. 이상.
 “예, 대장님. 염려 마십시오.”
 50여 명의 경호원들이 주위를 통제하면서 철저하게 그곳을 지켰다.
 대한 호텔은 갑자기 일어난 저격 사건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경제인들의 회의가 돌연 취소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경제인들이나 참석 중이던 사람들은 긴급한 연락을 받고는 각자의 승용차로 되돌아가버렸다.
 김철도 리무진을 타고 현장을 빠져나갔는데, 경호원들의 보고로 킬러가 붙잡혔다는 걸 알았다.
 킬러와 그의 소지품 전부를 경찰에 인계하고 경호원들도 철수했다.
 그날 저녁 뉴스 시간에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무척 시끄러웠다.
 누가 동영상을 찍어서 제보했는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탄환이 날아오는데 김철 회장이 가볍게 피하는 것하며, 다른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달아나려고 호들갑일 때 그는 태연하게 움직이면서도 킬러에게 저격당하지 않은 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우아! 날아오는 총알 피하는 것 좀 봐.”
 “멋지다.”
 “총알이 날아오는데 저렇게 피할 수 있는 여유 좀 봐. 대단해.”
 “돈 많지, 능력 좋지. 누가 저 남자에게 시집가게 될지 부럽다.”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킬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경제인들 중 누군가를 저격하려고 했다는 것에 놀랐다.
 방송국의 기자가 현장에 나가 직접 설명해주니 더욱 실감이 났다.
 저격 장소가 대한 호텔에서 9백 미터 정도 떨어진 한상 빌딩의 옥상에서 킬러가 10발이나 쏘았지만 저격에 실패하자 소지품을 챙겨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달아났다.
 그리고 제법 떨어진 곳에 착륙해서는 다시 준비해두었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아났다는 기자의 말에는 얼마나 킬러가 치밀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킬러를 김철의 경호원들이 그물로 포획한 점이 생생하게 보이면서 국민들은 흥분했다.
 어떻게 킬러가 총기를 버젓이 들고 도심을 활보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따가운 여론을 받은 경찰에서는 확대 간부 회의가 긴급하게 열려 대책을 의논했다.
 쾅!
 강남 경찰서장인 나한수 총경은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경찰서 간부들은 찔끔하면서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우리 관할에서 일어난 일인데 당신들 뭐 했어?”
 테이블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방범과 과장인 김덕수 경정이 대표로 대답했다.
 “저, 그것이 대한 호텔 주변에만 병력을 배치하다 보니···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잘못하면 내가 옷을 벗을 뻔했어!”
 “그나마 슈퍼 경호 회사의 경호원들이 킬러를 인계해주었기에 지금 조사과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있을 겁니다.”
 “으음, 아무튼 잘해. 내가 옷을 벗게 되면 너희들도 무사할 줄 알아? 앞으로 확실히 해!”
 “예, 알겠습니다.”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검사가 온다니까 꼬투리 잡힐 일 없도록 신경 쓰고.”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장님.”
 “좋아, 다들 나가서 일봐. 특히 오늘은 경찰서 주변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방범과장은 관내에도 다른 서에서 지원된 병력을 풀어 대대적인 순찰을 강화하도록 해.”
 “예, 실수가 없도록 확실하게 지시해놓겠습니다.”
 “좋아, 다들 나가서 일해.”
 굳어진 얼굴로 경찰 간부들은 회의실을 나갔고,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한수 서장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음, 이런 큰일이 하필이면 나의 관내에서 일어날 게 뭐람? 젠장.’
 대검찰청 중수부에서도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직접 조사를 위해 특별 검사가 킬러가 유치되어 있는 강남 경찰서 유치장으로 나와서 직접 조사에 참여했다.
 한편, 기절에서 깨어난 킬러 스미스는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용의주도한 자신이 어떻게 붙잡힐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었다.
 행글라이더로 저격 장소에서 1차로 탈출했고, 모터사이클로 2차 도주,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하면서 유유히 대한민국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물고기처럼 그물에 자신이 잡힐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크으으··· 이건 꿈이야, 꿈.’
 “야, 이름?”
 “······.”
 강남 경찰서의 조사과 최 경장은 이번 사건이 얼마나 국민들의 관심이 큰 사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수 있는 것까지는 전부 알아내어야 하는데 이 킬러 놈의 눈치를 보니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육체적인 단련을 많이 한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쭈, 이놈이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말 안 할래?”
 “······.”
 “아, 아니지. 이놈이 외국인이니까 영어로 해야 하나? 어쩐다?”
 “······.”
 “왓츠 유어 네임? 이, 이게 아닌가? 맞는데 발음이 이상해서 그러나?”
 킬러 스미스는 한국말을 잘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으며, 경찰의 말도 대부분 알아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으음, 상황을 보니 탈출하기는 틀렸으니 자결하는 일만 남은 건가?’
 스미스는 이렇게 사로잡힐 것에 대비해서 어금니 앞에 있는 이를 하나 뽑아 거기에다가 의치를 끼워두었는데, 급할 때에는 그 속에 든 것을 터뜨리기만 하면 몇 초 이내로 죽게 되는 액체 독극물이 잘 밀봉되어 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넣어두지 않고, 이렇게 의뢰를 받아서 저격 장소로 나가면 반드시 독극물을 넣어서 나갔었다.
 감옥이나 이런 유치장에 먼저 붙잡혀 들어오게 되면 이 속에 든 것을 꺼내 깨물기만 하면 몇 초 후 죽는다.
 “물 한 잔만 마시고 하면 안 되겠소?”
 “어? 우리말을 할 줄 알잖아? 좋아, 그럼 물을 줄 테니 조사에 잘 응할 텐가?”
 “알겠소. 일단 물부터 한 잔 주시오. 목이 너무 말라서 대답하기 힘드오.”
 “알았다. 물 한 잔 정도야, 뭐.”
 최 경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에 놓여 있는 냉온수기에서 종이컵으로 물 한 잔을 받아 킬러 스미스에게 내밀었다.
 따르르릉.
 최 경장의 책상에 놓인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자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었을 때 스미스는 이미 잇속에 감추어져 있던 독극물을 꺼내 깨문 후였다.
 그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던 최 경장은 1분 정도 통화를 하다가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에야 킬러 스미스가 입에서 거품을 내면서 눈동자가 돌아가 있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걸 확인했다.
 “어? 이,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최 경장의 고함 소리에 주위에 있던 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킬러 스미스는 이미 심장이 멈춘 후였다.
 “이 자식, 죽은 것 같은데요?”
 “뭐, 뭐야?”
 지금 국민들은 킬러 스미스의 조사를 하고 있는 강남 경찰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킬러가 죽어버리자 큰일이 나버렸다.
 너무나 허무하게 킬러가 자결해버림으로 인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경찰계엔 큰 파장이 몰려왔다.
 강남 경찰서의 최 경장은 중징계를 받고 한적한 시골의 지서로 발령받았으며, 나한수 서장도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또한 강남 경찰서의 간부들도 전부 징계를 피하지 못하고 대부분 한적한 곳으로 인사이동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위급 경찰 간부들도 몇 명 인사이동되었으며, 경찰의 최고 수뇌부인 치안총감이 직접 대국민 사과 방송을 하고서야 들끓던 여론이 가라앉았다.
 킬러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에서는 경호 회사들의 인기가 급격하게 치솟으면서 사회적으로 조금 이름난 사람이라면 경호원을 고용하는 게 당연시되어버렸다.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경호원들을 찾다 보니 경호 회사는 때 아니게 호황을 맞이했으며, 경호원을 하려고 입사 신청을 하려는 사람들이 하루에 2~3명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무려 90~100명 정도로 급격하게 많아졌다.
 방송을 통해 저격 사건을 듣던 박지현은 깜짝 놀라면서 급히 휴대폰을 걸었다.
 띠리리리링.
 김철은 휴대폰 멜로디가 울리자 폴더를 열고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나예요.
 “방송 보고 걱정했구나.”
 -응, 오빠, 괜찮은 거예요?
 “그래, 난 괜찮아.”
 -휴우··· 다행이에요, 오빠.
 “나 회사로 들어가고 있는데 나올래?”
 -회사 일봐야 하지 않아요?
 “오늘은 괜찮아. 오늘 오빠 집 구경시켜 줄까?”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좋아요, 그럼 나갈게요.
 “리무진을 집 앞으로 보낼 테니 그거 타고 와.”
 -알았어요. 조금 있다가 봐요, 오빠.
 “그럼 있다가 봐.”
 저격 사건을 방송으로 본 최미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일급 킬러이지만 실력은 특급이라고 하기에 믿었는데 실망이야. 킬러를 동원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줄 알았더니만 일만 더 꼬이고 말았어. 그나마 그가 자결해서 사건이 더 확대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군.’
 킬러 울프, 일명 스미스를 고용한 건 최미래였다.
 유학파 출신인 그녀는 암암리에 킬러를 고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 고용해보았더니만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최미래가 이렇게까지 킬러를 동원하면서 김철을 노린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그녀였기에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먼저 사귀자는 말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김철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게 처음에는 신선하게도 느껴졌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앙드레 의상실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회사의 오너로 변신한 김철의 모습을 보고는 기뻤다.
 이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멋있어져 있었다.
 그러나 김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헤어지도록 공작도 펼쳐 보았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최미래는 킬러를 고용해 김철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실패로 끝이 났기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알아낸 사실인데, 김철의 여자 친구인 박지현을 좋아하고 있는 남자를 알게 된 것이었다.
 발해 그룹의 자회사인 발해 전자의 기획실장에 있는 신빈이라는 남자였다.
 나이는 비록 자신과 동갑이었지만 외모가 꽤 매력적이었다.
 또한 집안도 좋고,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최미래는 방법을 달리해서 신빈에게 접근하려고 궁리했는데,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신빈의 여동생인 신현아였는데, 그녀는 발해 전자의 디자인 실장이었다.
 슈퍼 그룹의 자회사인 슈퍼 전자에는 최미래의 라이벌인 삼은아가 모델로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그녀의 콧대도 눌러주고 아울러 신빈까지 유혹하려고 생각했다.
 자신 정도의 외모라면 틀림없이 신빈을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호호호. 김철, 두고 봐라. 신빈의 손을 빌려 너에게 비수를 꽂아줄 테야.”
 박지현이 아파트 출입구로 나오자 리무진이 대기해 있었는데 경호원들이 5명이나 되었다.
 “아가씨, 김철 회장님께서 저희들을 보내셨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예, 알겠어요.”
 박지현이 리무진에 타자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뒤를 경호원을 태운 승합차 한 대가 뒤따랐다.
 리무진은 슈퍼 그룹의 본사 빌딩으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리무진이 들어서자 곳곳에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대략 30명은 되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으로 올라온 박지현은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아서 비상구를 통해서 25층까지 올라갔다.
 계단으로 올라갈 때 경호원이 안전상의 이유로 엘리베이터가 23층까지만 운행한다는 걸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안내로 드디어 25층에 도착하자 비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가 뒤에 있는 거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박지현이 뒤따라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각종 화려한 인테리어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실이 얼마나 큰지 박지현의 집보다 더 컸다.
 ‘아, 이 정도 거실이면 백 평은 되겠어.’
 박지현의 말이 맞았다. 거실만 정확하게 1백 평이었다.
 거실 한쪽에는 유리로 된 화원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각종 녹색 잎의 식물과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또한 얼마나 인테리어가 화려하게 되어 있던지 천장과 벽면, 바닥이 온통 녹색의 그린 마블(Green Marble) 천연 대리석이었다.
 천연 대리석은 우아한 무늬와 컬러로 고급 인테리어 마감재로 손꼽히는 자재였다.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석에 비해 색채가 우아하고 미려해 고급스런 실내 연출을 원하는 집에서 시공하는데 비용이 아주 고가였다.
 녹색 빛의 거실은 마치 특급 호텔의 화려한 로비를 보는 듯했다.
 “왔어?”
 “응, 이게 다 오빠 혼자서 사용하는 거야?”
 “아니, 대부분은 내가 사용하는 것이지만 가정부와 경호원들이 사용하는 것도 있어.”
 “거실만 해도 우리 집보다 넓은 것 같아.”
 “그런가? 백 평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뭐? 오빠, 그게 사실이야? 정말 거실만 백 평이야?”
 “그래, 여기 이십오 층이 육백 평이야.”
 “우아! 그럼 육백 평 전체를 오빠가 쓰는 거야?”
 “전부는 아닌데 대부분 내가 사용하는 곳이야.”
 “우아! 정말 대단하다. 집 구경 좀 시켜 줘.”
 “그럴까? 날 따라와.”
 김철은 박지현을 데리고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김철이 거주하는 25층은 6백 평이나 되었는데, 그걸 개인 주거지로 만들었으니 엄청나게 넓었다.
 김철이 사용하는 룸만 7개였고, 가정부와 경호원이 묵는 룸도 3개나 되었다.
 이 밖에 명상실, 비디오실, 음악실, 헬스실이 있었다. 그리고 김철의 룸에도 드레스 룸이 있었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드레스 룸이 있었다.
 또한 대용량의 월 풀 욕조가 있는 대형 욕실과 룸마다 있는 화장실과 샤워실, 주방만 해도 50평이 넘었다.
 양문 냉장고도 3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코너에는 배기구, 창가에는 환기구를 각각 설치해 실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집 곳곳을 둘러본 박지현과 김철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김철의 주거지는 비록 빌딩의 한 층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옮겨 놓은 듯 화려했으며, 저택을 방불케 했다.
 “지현아, 배 안 고파?”
 “고파. 안 그래도 고소한 냄새가 났어.”
 “그럼 지금 맛있는 거 먹을까?”
 “그래, 좋아.”
 “한 부장, 식사 부탁해요.”
 “예, 회장님.”
 한 부장이 직접 주방으로 가서 지시하자 가정부들이 동원되어 거실에 10인용 직교자상이 놓이고 각종 궁중 요리가 차려졌다.
 주방에는 출장 나온 궁중 요리 전문 요리사가 만든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밥과 각종 나물, 도미찜과 송이찜, 신선로, 두부전골, 오이선, 겨자채, 죽순채, 월과채, 전복초, 대합전, 녹두 빈대떡, 파전, 너비아니, 더덕구이, 어산적, 송이산적, 화양적, 회로는 육회, 미나리강회, 생선회, 각종 젓갈류와 김치들이 차려졌다.
 밥 한 그릇 먹는데 반찬류와 요리가 많아서 어느 것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어쨌든 이것들을 먹고 나자 후식으로 6가지의 떡과 약식, 강정과 유밀과가 나왔다.
 하나같이 솜씨가 좋은 주방장이 직접 만들었기에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지현아, 맛있게 먹었어?”
 “응, 너무 배불러.”
 “잘 먹으니까 오빠는 좋더라.”
 “정말?”
 “그럼, 너무 다이어트한다고 안 먹고 그러지 마. 그럼 병나.”
 “알았어, 오빠.”
 “그리고 어머님에게 말해서 조만간 인사드리러 간다고 전해줘.”
 “오빠, 정말이야?”
 “그래, 이젠 인사드리고 약혼도 해야지.”
 “고마워, 오빠.”
 “아냐, 내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
 “오빠가 바쁘다는 거 아는데, 뭐.”
 “어머님께 말씀드려서 나에게 연락해줘.”
 “응, 알았어, 오빠.”
 김철과 박지현은 비디오실로 들어가 푹신한 소파에 기대었다.
 그 후 최신 비디오를 보면서 그들은 키스를 나누었고,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권 끝>

댓글(13)

10******    
이작가는 가족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은갑네 어떻게 작품마다 꼭 부모는 죽었네
2021.04.2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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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ㅈ.
2021.08.2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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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ㅇ
2021.08.2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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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ㅇ. ㅇ. ㅇ. ㅇㅈ. ㅁ. ㅁ. ㅇ.
2021.08.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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ㅉ. ㅇ. ㅁ. ㅇ. . ㅇ ㅇ. ㅁㄷ ㅇ. ㅇ. ㅇㅇ. ㄷ ㅇ.
2021.08.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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ㅉ.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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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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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ㅊ. ㄷ
2021.08.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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