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아이언 캐슬 [E]

아이언캐슬 1권 (1)

2017.05.12 조회 1,027 추천 6


 #프롤로그
 
 
 
 
 “조,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
 하르는 침대에 누운 꼬마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말 한마디 하면서도 힘들다는 듯 숨을 헐떡이는 꼬마는 참으로 당돌했다. 정갈하지만 값싼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지 알면서도 조건을 내걸다니. 파리하니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쌕쌕이는 게 아무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만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일족들 사이에서 ‘마魔의 하르’라 일컬어지는 그녀가 이 맹랑한 꼬마의 조건을 들어 보기로 한 건.
 “뭐지, 네 조건이?”
 “나··· 날 건강하게 만들어 줘. 그럼 당신이 누구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맹랑한 꼬마의 조건은 그 맹랑함만큼이나 터무니없기 짝이 없었다. 별것 아닌 그녀의 비밀을 지켜 주는 대가로 하나뿐인 목숨을 구해 달라는 것이다.
 피식!
 저도 모르게 실소한 하르는 신이 그녀의 일족에게만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며 빈정거렸다.
 “그깟 비밀, 너희 인간들에게 알려져도 별상관 없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흐으윽. 무, 물론 당신 말이 맞아. 우리 인간들은 당신에게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니까. 하, 하지만 당신도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하잖아. 뭐, 삼사백 년만 지나면 당신 발톱의 때만도 못한 우리 인간들은 까맣게 잊겠지만 말이야.”
 이젠 맹랑하다 못해 도발적인 꼬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르는 이게 마음에 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대한 반발심인지, 아님 삶에 대한 갈망인지 모를 열의를 불태우는. 심지가 다 된 촛불처럼 생기가 사그라지는 육신과 달리 밤하늘의 별빛 같은 눈빛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는 흡족한 내심과 달리 여전히 이죽거렸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났지만 이 꼬마는 맹랑한 그 말처럼 그녀에게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이기에.
 “잘 아는구나. 네 말처럼 너, 아니 이 일대 인간들을 싸그리 몰살시키고 또 동면하면 그만이라는 걸. 그런데도 번거롭게 널 굳이 살려 줘야 할까?”
 “바, 바로 그래서야. 당신 입으로 방금 말했다시피 당신은 이미 질릴 만큼 자고 일어났거든. 아무리 당신들이 잠자기 좋아하는 존재라지만 발톱의 때만도 못한, 그것도 다 죽어 가는 어린애 때문에 마지못해 또 잔다는 건······.”
 하르는 빙그레 말을 흐리는 꼬마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 맹랑한 데다 여우 같기까지 한 꼬마가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꿰고 있는 것이다. 씁쓸하면서도 유쾌한 그녀는 담담한 가운데 불안과 초조를 감추지 못한 꼬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꼬마, 네 원대로 해 주지. 하나······.”
 “하나?”
 “목숨을 구해 주는 대가로 그깟 비밀은 너무 약소하지. 널 치료하며 마법으로 네 기억을 조작하면 그만이니 말이야.”
 “그럼? 어?”
 하르는 불안하니 묻던 맹랑한 꼬마가 스르륵 의식을 잃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마의 하르’ 아니랄까 봐 더없이 스산하고 불길하게.
 “그건 네 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얘기하마.”
 
 
 
 
 
 #적응 또는 살길 찾기
 
 
 “여전하시지?”
 에린은 소곤대며 앉는 소피에게 시무룩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것도 안 드시고 멍하니 누워 계셔.”
 “정말 걱정이다. 뭐든 드셔야 하루빨리 기운 차리실 텐데. 신관들은 뭐래? 아직도 기적적으로 소생한 데 따른 일시적인 증상이라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해? 전하께서 저렇게 아무것도 안 드신 지 오늘로 벌써 나흘짼데.”
 “그렇지, 뭐.”
 건성으로 대꾸한 에린은 딱딱하니 굳은 빵을 찢어 스프에 적셨다.
 옆에 앉은 소피나 맞은편 주방 식구들 모두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때늦은 점심 식사에 열중했다.
 주근깨 소피나 사람 좋은 마기 아줌마 등 주방 식구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거룩한 곳’이란 뜻의 가데스Kadesh 궁 먹거리를 책임진 그들이 얼마나 전하를 걱정하는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전하의 단식에 가뜩이나 윗분들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전하의 신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주근깨 소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맞은편 마기 아줌마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에도 아랑곳 않고 이렇게 재잘대는 걸 보면.
 “근데 전하께서 마나 과민증이 다 나았다는 게 사실이야? 대신관인 헤로우파 님이나 마도사인 어윈 님도 그 병은 완쾌가 불가능하다 했잖아? 길어야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실 거라던 그 병이 어떻게······.”
 “소피.”
 갈수록 가관인 소피를 보다 못하겠던지 여간해서는 얼굴 찡그리지 않는 마기 아줌마가 인상을 썼다. 그때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는지 소피는 푹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이제 막 궁에 들어온 철부지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망측한 말을··· 안 되겠다. 오늘 일과 후에 나 좀 보자꾸나.”
 “예.”
 잔뜩 풀 죽은 소피가 안쓰러웠지만 모른 체하는 게 상책이었다.
 지금 여기서 소피를 편들었다가는 이따 밤에 있을 마기 아줌마의 훈계만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자기 직분을 잊고 불측한 말을 한 소피에게는 다시는 이러지 않도록 따끔한 질책이 필요했다.
 그나마 같은 신분의 친한 이들만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녀의 앙숙인 마를린이나 윗분들, 그러니까 시종장 미구엘 남작 같은 이가 있었다면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들이 사는 드라셀이 여타 왕국들에 비해 평민들에게 관대하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조금 전 소피가 한 망언이 라인트 대공 전하, 아니 공국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이자 검인 백사자 기사단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잘 먹었어요, 마기 아줌마. 소피, 이것 좀 부탁··· 어?”
 서둘러 식사를 마친 에린은 의기소침한 소피에게 뒷정리를 부탁하다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가슴에 단 자수정 브로치가 별안간 삐빅! 소리를 내며 빛난 것이다.
 지난 한 달여간 온 궁, 아니 공국 사람들을 걱정케 만든 이그리파 전하의 호출이었다.
 죽은 지 만 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한 뒤, 자신은 이계인이라며 식음을 전폐해 연로한 대공 전하를 노심케 한 그가 전속 시녀인 그녀를 찾고 있었다.
 “가 봐야겠어요.”
 “그, 그래. 얼른 가 봐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에린은 걱정과 기대 어린 마기 아줌마 등을 뒤로한 채 주방을 나섰다. 거치적대지 않게 치맛자락을 말아 쥔 그녀는 드넓은 홀을 가로질러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올랐다.
 
  * * *
 
 “부르셨어요?”
 삐꺽! 문을 열고 들어서며 묻는 밝은 검은 머리 소녀.
 쌍꺼풀진 초록색 눈이 귀여운 소녀는 아무래도 서둘러 뛰어온 모양이었다.
 어깨를 들썩이지는 않지만 쌕쌕 몰아쉬는 숨소리가 다소 거친 걸 보면. 머리맡에 있던 종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던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 마법이란 거겠지?’
 서너 명은 족히 편히 잘 수 있는 킹사이즈 침대에 덩그마니 누워 있던 나는 잠시 검은 머리 소녀를 지켜보다 쓰게 웃었다.
 지난 나흘간 쫄쫄 굶으며 끙끙거린 현실이 결코 꿈이 아님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법이라니!
 기이한 주문과 함께 불비가 쏟아지고 투명한 화살이 생기는 따위는 게임이나 영화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초자연적인 미지의 힘—흔히 마나Mana라고들 하는—을 검측, 제어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각종 전자장치로 대변되는 과학 기기들 없이 몇 마디 주문과 기괴한 도형인 마법진, 혹은 마법 지팡이만으로 그런다는 건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터무니없는 일이 마치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처럼 당연시되고 있으니······.
 나흘 전 처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기가 막히다 못해 까무러쳤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깜박 졸았을 뿐인데 내가 이렇듯 다른 세상에, 그것도 보다시피 엉뚱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매 학기 등록금을 걱정하는 처지였지만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이었던지라 나는 지독한 충격에 그대로 기절했었다.
 하지만 기절했다 깨어난 뒤에도 이 악몽 같은 현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살펴본 내 몸은 여전히 지난 이십육 년간 익히 보아 온, 다소 아랫배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봐 줄 만한 내 몸이 아니었다.
 어디 아프리카 기아 난민처럼 빼빼 마른 십 대 소년의 몸만 덩그마니 보일 뿐이었다.
 마치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이 대한민국이 아닌,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 같은 세계임을 각인시키려는 듯.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도 한동안 넋이 빠져 있었다. 한시 빨리 내가 왜 이 황당한 세계에, 그것도 이렇게 비실비실한 꼬마가 되어 있는 건지 알아봐야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망연자실 넋 나간 사람처럼 내 몸 아닌 내 몸만 내려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깨어났을 당시, 나 혼자만 이 침실—꽤나 고풍스럽고 화려한 게 근세 유럽의 성이나 궁전 같은—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걱정과 염려 어린 눈길로 눈치를 살피는 저 검은 머리 소녀를 필두로 십여 명이나 되는 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별힘 들이지 않고 이 허약한 몸의 원주인과 이 세계의 사정 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그리파 엘 드라셀과 드라셀 공국.
 이게 현재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허약한 몸의 이름이자 살고 있는 나라 이름이었다.
 올해 만으로 16세인 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빼빼 마른 꼬마는 놀랍게도 이 드라셀이란 나라의 왕자—가 맞나? 공국인데—였다. 그것도 라인트 대공이라는 공왕의 유일한 직계혈족으로 다음 대 공왕, 다시 말해 장차 왕이 될 꼬마였다.
 운이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이 낯선 세상—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 마당에 신분마저 낮고 비천한 노예나 농노였다면 난 아마 십중팔구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었다. 특별히 지랄 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듯한 이 세계에서는 더없이 불온한 사상 때문에.
 하지만 명색이 왕족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 천지지만 적어도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목 달아날 염려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비단 다행스러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빙의된 원혼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하면 원래 이런 건지, 아님 특별한 경운지 모르지만 나는 이 이그리파란 꼬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외국어라면 학을 떼던 나는 난생처음 듣는 이들의 말—유판테리아어. 드라셀 공국이 있는 유판테리아 대륙의 공용어로 달리 대륙어라고 한다—을 모국어인 한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지만 이 꼬마의 기억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어 이 꼬마와 연관된 사람을 못 알아볼 염려는 없었다.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검은 머리 소녀처럼.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건 이 년 전, 내가 군 제대한 직후 홀몸으로 나를 키우다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평생 호강 한번 못 해 보시고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만일 다시는 돌아갈 가능성 없는 대한민국에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난······.
 “에린, 좀 부축해 줘.”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은 난 검은 머리 소녀, 에린을 불렀다.
 쪼르르 다가와 부축하는 에린은 능숙했다. 왼팔을 어깨에 걸고 일어서기 좋게 허리를 받치는데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십여 년간 이 허약한 몸을 전담 시중든 전속 시녀라는 기억이 괜한 것은 아닌 듯했다.
 “쯧! 겨우 나흘 굶었다고 이 모양이니. 에린, 식당으로.”
 “에? 시, 식당이라뇨? 제가 내려가서 가져올 테니 전하께서는······.”
 “괜찮아. 바람 쐴 겸 산책 삼아서야.”
 나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떠는 에린의 말을 자르며 걸음을 옮겼다.
 지난 나흘간 단식 아닌 단식으로 힘이 하나 없었지만 에린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커다란 창문 덕에 채광 좋은 침실이나 각종 갑옷과 가구 등으로 장식된 거실과 달리 복도는 다소 어두웠다. 족히 반나절은 더 있어야 날이 저묾에도 높은 천장과 맞닿은 채광창이 협소해 벌써부터 저녁 무렵 같았다. 게다가 복도 외벽마저 우중충한 암회색이라 더욱 어둡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쳇! 명색이 대공의 성이 어째··· 조금만 더 음침하면 딱 드라큘라 백작성이네.”
 “에? 드라큘라 백작이라뇨?”
 투덜투덜 구시렁대던 난 난데없는 에린의 물음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걷기도 힘든 이 허약한 몸을 부축받으면서도 그만 깜빡 그녀의 존재를 잊은 것이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너무 어둡지 않아? 이렇게 어두워서야 좋던 눈도 금방 나빠지겠네.”
 “에? 어두우세요?”
 버릇인 걸까?
 난 코맹맹이 소리 내며 되묻는 에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에린이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딱!
 “라이트.”
 명료한 에린의 말과 함께 어두침침한 복도가 환해졌다. 천장과 복도 기둥마다 달린 구슬—둥근 모양이나 희뿌연 색이 영락없는 실내등이다—이 빛을 발한 것이다.
 순간 나는 눈부심과 함께 적잖이 놀랐다. 복도에 설치된 마법등보다 에린이 이걸 켜고 끌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였다.
 에린이나 이 허약한 몸의 원주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 마법등은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센서로 인기척을 감지, 점등되는 현관등이나 계단등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저 마법등들을 켜고 끄기 위해서는 소위 ‘마나’를 느껴야 하는데 한낱 시녀인 에린이 가능해 놀랐을 뿐이었다.
 하긴 피죽도 못 얻어먹은 이 몸뚱이의 신분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마나 과민증—말 그대로 마나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무슨 알레르기나 아토피 피부염 같은 병이란다. 하지만 병세는 간단치가 않아 꾸준히 신성력 치료를 받더라도 심장 발작과 호흡곤란 등으로 만 20세를 넘기기 힘들단다. 허 참—인가 하는 지병을 갖고 태어나 줄곧 침대 생활했지만 이 몸뚱이의 주인은 드라셀이라는 자그마한 공국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더군다나 이야기 속 허약한 후계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명석하고 자애로운, 한마디로 현군 될 자질이 충분했다. 그러니 곧 죽을 것처럼 골골한 이 몸을 에린 같은 인재가 시중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마법사를······.’
 난 묵묵히 걸음을 옮기다 불쑥 물었다.
 “몇 서클이야?”
 “에? 무슨 말씀이신지?”
 “마법사니까 서클이 있을 거 아냐, 펼칠 수 있는 마법을 구분하는 기준인.”
 중언부언 덧붙였지만 에린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허약한 이 이그리파란 꼬마의 기억에 이곳 역시 마법에 ‘서클’이라는 개념이 있기에 물었더니 모르는 양 딴청이었다.
 역시 마법사를 몇 서클 마법사니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건 게임이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저··· 혹시 제가 펼치는 마법의 서클 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난 조심스러운 에린의 물음에 냅다 맞장구쳤다. 그런 후 궁금해 죽겠다는 눈길로 겸연쩍게 웃는 에린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 아홉 갠데요.”
 “엥? 몇 개?”
 “아홉 개요.”
 재차 서클 수를 확인한 난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9서클이라니. 9서클이면 게임이나 소설에서 소위 대마도사나 현자라 칭해지던 최고의 마법사 아닌가. 아무리 타고난 천재라 해도 에린 같은 십 대 소녀가 그런 마법사가 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지, 진짜야? 진짜 9서클 마법사야?”
 “예. 전하께서 혼수상태에 계신 동안 아홉 개 서클의 마법진을 구현······.”
 “가, 가만!”
 난 황급히 에린의 말을 끊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핀트가 안 맞았다.
 같은 주제이나 논점이 다른 토론처럼 얘기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난 9서클 마법사라는 마법사의 서클, 곧 등급을 말하는데 에린은 마법진에 그려진 서클 수를 얘기하고 있었다. 언뜻 들으면 같은 얘기 같지만 만일 이 서클의 개수가 내가 생각하는 것—서클이 많을수록 높은 마법이고 마법사다—과 다르다면 그 의미는 판이했다.
 “저 에린. 에린이 말한 서클이 마법진에 그려진 서클, 그러니까 원의 개수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천연덕스러운 에린의 대답에 난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이 서클과 마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서클이 많다고 레벨이 높은 마법인 건 아니겠네?”
 “당연하지요. 마법진의 서클 수는 해당 마법의 이해를 돕고 그 마법의 발현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한 장치잖아요. 이미 알고 계실 텐데 왜······.”
 “그, 그냥. 그냥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어서. 그것보다 좀 빨리 걷자. 나흘 동안 쫄쫄 굶어 나 엄청 배고프거든.”
 난 의아함 어린 에린의 말에 과장되이 호들갑을 떨었다. 홀쭉한 배를 쓸어 배고프다는 시늉을 한 나는 내심 안도하며 당황하는 에린을 잡아끌었다.
 실수였다.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임을 알면서도 무심코 행한. ‘서클’의 예에서 보듯 이곳에서는 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나 개념이 판이하게 달랐다.
 마치 동음이의어처럼 혹은 우연히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지만 뜻은 백팔십도 다른 외국어처럼. 그런데 말이 같다고 뜻 또한 같으리란 생각에 그만 되도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정신 차려, 김철중. 넌 지금 다른 세상, 그것도 약간의 지식 외에는 보잘것없는 꼬마 몸에 들어와 있다고. 그런 마당에 이곳 사람의 의심을 사면 어쩌겠다는 거야.’
 때 아닌 자책과 반성을 하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애당초 조용한 곳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긴장감이 느껴져서였다.
 상념에 잠겨 또각또각 발소리를 쫓다 보니 어느새 드넓은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신년 축제 때 대연회 같은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가데스 궁의 얼굴이자 무도회 같은 연회가 열리는 ‘영광의 홀’이었다. 일층 태반을 차지하는 넓이 탓에 궁 밖 정원이나 식당 등을 이용하자면 필히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적막하다 못해 음침하기까지 한 위층 복도에서와 달리 나와 에린은 왕왕 놀람 어린 눈길과 마주쳐야 했다. 바삐 종종걸음 치던 시녀들—주로 군청색 계열의 단색 원피스 차림이다—은 물론 하프 아머 차림의 경비병 등 홀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람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로 데뷔는 한 건가?”
 “에? 그게 무슨?”
 난 의아하니 묻는 에린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히죽 웃어 주며 이 짧은 외출의 목적지인 식당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 * *
 
 만신의 어버이이자 이제는 잊혀진 태고신, 체르바인이 자신을 희생해 창조한 유판테리아 대륙은 그 정확한 면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이 세계를 관조하는 조정자이자 초월자인 드래곤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천공을 자유로이 누비는 그들로부터 팽팽히 당긴 활과 같다는 대략적인 그 모습만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판테리아 대륙은 기후나 자연환경 등이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곳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더없이 살기 좋은 반면, 체르바인의 거울이라는 영구 동토처럼 몇몇 생물을 제외하면 살 수 없는 불모지대도 있었다. 하지만 유판테리아에 사는 인간이나 유사 인류들은 대륙을 크게 동과 서, 둘로 구분했다.
 체르바인 산맥.
 영구 동토의 불모지대인 ‘체르바인의 거울’에서 발원해 대륙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이 거대한 천연 장벽 때문이었다.
 마치 인간의 갈비뼈처럼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여러 산맥들의 모태가 되는, 그래서 달리 ‘체르바인의 등뼈’라 일컬어지는 이 산맥은 얼마나 높고 험한지 인간은 물론 산과 숲에 능한 유사 인류들조차 넘기 힘들 정도였다. 더욱이 이 세계의 관조자이자 조정자인 초월자, 드래곤들 태반이 이 체르바인 산맥과 그 지맥들에 레어를 틀고 있는지라 산맥 탐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판테리아 대륙 동서는 상호의 문화와 풍습이 판이할 뿐만 아니라 교역 또한 전무하다시피 했다.
 인간은 물론 전 유사 인류, 아니 하다못해 몬스터인 오크들도 쓰는 대륙어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마치 대양을 사이에 둔 두 대륙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동서 간의 교역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단히 위험하기는 하지만 한번 교역에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또 육지가 아닌 바다를 교역로로 이용하면 되는지라 동 유판테리아 대륙의 바르키한 제국처럼 정책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거칠고 험하기로는 체르바인 산맥 못지않은, 그래서 배들의 무덤이라 일컬어지는 악령의 바다를 지나야 하다 보니 겨우 수년마다 한 번 교역이 이루어질 뿐이었다.
 드라셀 공국은 이런 유판테리아 대륙의 중남부 파일 반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팽팽하니 시위 당겨진 활에 얹힌 화살처럼 대륙을 종단하던 체르바인 산맥이 화살촉이란 이름 그대로의 반도로 변한. 태고신 체르바인처럼 이제는 잊혀진 신이지만 그의 두 딸 중 하나인 전쟁과 사랑의 여신, 아스다롯의 무기인 ‘아스다롯의 활’—이게 유판테리아 대륙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다—의 화살촉에 해당하는—보다 정확히 말해 화살촉과 화살대가 맞닿는—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면 누가 보더라도 축복받은 천혜의 위치였다. 동과 서 어디로든 교통 가능하니 그 이점을 살려 중계무역을 한다면 단시일 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아니, 작심하고 군사력을 키워 정복 전쟁을 벌인다면 드라셀은 유판테리아 역사상 최초로 동서, 양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드라셀의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파일 반도 서쪽에 자리해 서 유판테리아에 속하는 드라셀은 대륙 내 다른 나라들로부터 나라 취급을 못 받았다.
 아니, 모국 격인 세드리안과 가장 가까운 인접국인 베로인 왕국을 제외하면 드라셀의 존재를 아는 나라가 없다 해도 과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드라셀이 위치한 파일 반도는 체르바인 산맥의 끝 자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드라셀의 북쪽과 동쪽은 체르바인의 등뼈 중 마지막 갈비뼈와 꼬리뼈에 해당되는 지맥, 아스다롯 산맥과 헤르칼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그 끝이 어딘지 알려지지 않는 절망의 숲이란 수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인 서쪽 바다는 배들의 무덤이라는 악령의 바다와 인접한 녹해였다.
 한마디로 움치고 뛰려야 뛸 수 없는 첩첩산중의 오지,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고 드라셀의 상황이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국토의 절반가량이 산지이고, 그런 산지에는 몬스터가 득시글대지만 드라셀은 어지간한 왕국들보다 넓었다.
 그리고 이런 드라셀에 사는 백성들은 왕실에 대한 신뢰가 여타 왕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수시로 출몰하는 몬스터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백여 년밖에 안 된 신생국 특유의 활력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신생 왕조가 그러하듯 드라셀도 아직 상류 귀족층이 크게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신분에 관계없이 합심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척박한 환경인지라 백성들을 수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드라셀 백성들은 전적으로 왕실을 믿고 따랐고, 이런 백성들의 믿음은 드라셀의 장래를 밝히는 큰 힘 중에 하나였다.
 문제는 국토 면적에 비해 이런 백성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드라셀은 공국 최남단의 도시이자 절망의 숲과 인접한 젠네로부터 최북단 다시스 고원에 자리한 대장장이들의 도시, 다시스까지 말을 타고 꼬박 보름이 걸렸다.
 말의 하루 주행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매일 평균 시속인 60~70킬로미터씩만 가도 900~1,050킬로미터인, 거의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대한민국을 3분의 2가량 종단하는 것과 맞먹는 거리였다.
 또한 동에서 서로 국토를 횡단하는 데는 말을 타고 보통 칠팔 일이 걸렸다.
 그런데 이런 드라셀의 인구가 겨우 백만이 넘을까 말까 했다. 물론 이 수치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인구 통계나 호적대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30만 골드가 조금 넘는 일 년 세입 중 10만 골드가 채 안 되는 인두세로 산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넓이의 드라셀 인구가 겨우 백만 남짓이라는 건······.
 ‘아, 몰라. 아무리 내가 이 꼬마 대신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벌써부터 골치 썩기 싫어.’
 우물우물 입 안에 든 샌드위치를 씹던 나는 상념을 털어 내듯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자 난생처음 접한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던 맞은편 세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겐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아, 아니에요. 갑자기 딴생각이 나서.”
 난 화들짝 놀라 묻는 세 사람의 기세에 서둘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냐하면 지금 나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때늦은 점심을 같이하는 세 사람은 이 몸의 원주인, 이그리파란 꼬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맞은편 한가운데 앉아 안도 어린 눈길로 나, 아니 이그리파란 꼬마를 바라보는 중후한 백발노인이 바로 드라셀 공국의 공왕인 라인트 대공이었다.
 올해 66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그는 젊은 시절 단신으로 오우거를 잡은, 그래서 지금도 ‘사자 왕’이라 칭송받는 군주였다.
 그리고 그 왼편의 인자한 노인은 드라셀의 국교이자 서 유판테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큰 종교인 텔로스 교의 대사제, 헤로우파 대신관이었다.
 둥글둥글한 생김새와 탐스러운 수염이 영락없는 산타클로스인 그는 라인트 대공보다 세 살 적은 63세로 드라셀 종교계의 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라인트 대공 오른편에 앉은, 매부리코에 하관이 빤 노인은 드라셀 공국의 궁정 마법사이자 마탑의 탑주인 아르트 폭스 어윈이었다.
 올해 70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머리칼과 같은 잿빛 눈매가 여간 날카롭지 않은 그는 앞서 소개한 두 사람처럼 드라셀의 마법계를 총괄하는 이였다.
 “저··· 어윈 님.”
 한동안 드라셀의 성聖과 속俗 그리고 마법을 관장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응? 왜 그러는가?”
 “저기 저··· 그러니까 마법사들의 등급은 어떻게 구분하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가만! 마법사의 등급 같은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왜 갑자기··· 설마 아직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겐가? 자신이 그 태한민쿡인가 하는 이계의 이계인이라는?”
 “아하하. 그, 그게······.”
 “쯧! 당연한 걸세. 명부의 주인인 네르갈 손에 하루 동안 붙임당했다 놓여났는데 하루 이틀 만에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겠나. 아마 이그, 저 아이는 명부에서 엿본 기억이 떠올라 한동안 자신을 키무처르쭝? 하여튼 그 이계인이라 생각할 걸세.”
 난처한 웃음 지으며 얼버무리던 나는 때마침 들려온 헤로우파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아니, 시기적절한 헤로우파의 응원에 힘입어 걱정 어린 라인트 대공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헤로우파 님 말처럼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계인이란 생각이 들어요. 특히 지금처럼 공국이나 마법처럼 저와 연관된 기억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할 때는요.”
 “흠··· 어째 누구나 다 아는 공국 사정을 에린에게 듣고 있어 이상하다 했더니.”
 힐끗 내 왼편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샌드위치를 먹는 에린을 본 어윈이 재차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마법사의 등급을 구분하는 방법은 각 학파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서클 수로 구분하는 게 일반적일세.”
 “에? 서클 수요? 하지만 에린은 그게 아니라던데요. 마법진의 서클은 마법의 이해와 발현을 돕기 위한 장치일 뿐, 마법사의 등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쯧! 그건 마법진의 서클이고 내가 말하는 건 마나 서클일세. 마나 서클!”
 “마나 서클요?”
 난 마나 서클이란 말에 바싹 식탁에 붙어 앉았다.
 마나 서클이라니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마법이라는 게 그냥 해당 마법의 마법진과 주문만 있으면 구현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마법은 마법진을 그리며 주문만 외우면 발현되던데?
 “마나 서클이라는 건 일종의 불씨일세. 아무리 등잔에 기름이 가득해도 불씨가 없으면 불을 켤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지. 해서 우리 마법사들은 명상을 통해 이 불씨인 마나 서클을 우리 몸, 보다 정확히 말해 여기 이 심장에 의체화意體化하네. 뭐, 학파에 따라 ‘현자의 눈’이라는 미간에, 또는 미간과 심장 모두에 의체화하기도 하지. 자연 상태의 마나를 마법사 자신의 의지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물론 명상으로 이 마나 서클을 구축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일단 자연 상태의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데다, 그렇게 느낀 마나를 명상 시에만 체감할 수 있는 구나 고리 등의 형태로 의체화해야 하니 말이야.”
 “아! 그럼 그 마나 서클이라는 게?”
 “그렇지. 마법을 발현할 때나 명상 시 외에는 체감할 수 없는 이 마나 구를 일컫는 걸세. 앞서도 말했듯이 학파에 따라 마나 서클을 의체화하는 위치나 모양이 다르지만 보통은 그 개수로 마법사의 등급을 구분하지.”
 난 장황한 설명 끝에 알겠냐는 눈길로 쳐다보는 어윈에게 고개를 주억였다.
 현자의 눈처럼 생소한 용어들도 있었지만 마나 서클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명상의 통해 의념을 집중, 형상화하는 건 동양권에서 보편적인 기 수련이나 요가, 다름 아니었다.
 의체화하려는 대상이나 목적 등이 다르기는 해도 그 개념만큼은 익숙한 것이었다.
 물론 이 마나 서클을 기 수련의 기나 요가의 차크라에 등치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기와 마나라는 게 같은 것인지 확실치도 않고, 이 의체화한다는 게 기 수련의 축기처럼 마나를 축적한다는 것인지 정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고, 그에 더해 실체화마저 가능하다면 소설 등에서처럼······.
 “소드 마스터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 수련을 하면?”
 “응? 기 수련이라니?”
 혼잣말하던 난 불쑥 들려온 어윈의 말에 내심 아차 싶었다.
 생뚱맞게 그게 무슨 소리냐며 빤히 쳐다보는 어윈의 눈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기껏 마법에 대해 설명을 듣더니 뜬금없이 기 수련 어쩌고 하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왼편에 앉아 잠자코 얘기 듣던 라인트 대공과 헤로우파 대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하하! 그, 그게 제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이계인 기억에 기 수련이라고 마나 서클과 비슷한 개념이 있거든요. 여기와 달리 마법이 없는 세계고 일종의 건강법 같은 거지만······.”
 “허! 마법이 없다니? 보나 마나 꽤나 낙후된 세계겠구만.”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과학이라고 마법처럼 사람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는 학문이 있어 오히려 여기보다 살기 편해요. 발달한 과학 기술 덕분에 어지간한 일은 기계가 사람을 대신해 주는 데다 각종 물자가 풍부하거든요. 뭐, 지역이나 나라에 따라 여기보다 못한 곳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여기보다 나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법도 없는데 어떻게··· 그럼 그 세계에 마법등 같은 게 있기라도 하다는 게냐?”
 마법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윈이 탕! 소리 나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 기세에 움찔 놀란 나는 찔끔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다, 당연하죠. 전등이라고 전기를 이용해 불을 밝히는 조명 기구가 있어요. 물론 궁에 있는 마법등처럼 말만으로도 끄고 켤 수도 있고 마법을 못하더라도 끄고 켜는 게 가능해요.”
 “전등? 전기? 그것들이 뭔데 마법등처럼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게냐?”
 “그, 그러니까 전기라는 건······.”
 난 따지듯 쏘아 대는 어윈에게 번개와 정전기를 예로 들며 가급적 알기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나처럼 보이지 않는 소립자인 전자가 이동하며 생기는 에너지가 전기라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보다 못해 호박과 털가죽으로 직접 정전기 현상을 보여 주고, 레몬에 얇은 구리판과 아연판을 꽂아 전기를 느끼게 해 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번개나 정전기를 예로 들고 직접 실례를 보여 줘도 이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다.
 애당초 모든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원자와 전자로 나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지라, 이제 겨우 수를 헤아리는 아이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처럼 소용없었다.
 차라리 전깃불을 보여 주고 그냥 이게 전기라고 하는 게 속 편했다.
 그러나 전기에 대한 설명이 말짱 헛일은 아니었다. 정전기야 겨울철이면 이들도 왕왕 겪는 일이라 그다지 신기해하지 않았지만 레몬을 갖고 한 실험은 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어윈과 에린의 경우는 누가 마법사들 아니랄까 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과학 선생 노릇하게 된 나는 때 아닌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운전할 줄 안다고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제작 방법 등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기에. 결국 ‘왜’와 ‘어떻게’를 남발하는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느라 쥐가 나도록 머리를 쥐어짜며 난 굳게 결심했다.
 다시는 전기 같은 지구의 과학 문명을 함부로 들먹여 이런 고생을 자초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이 결심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이곳과는 다른 지구의 과학 문명에 흥미를 느낀 건 비단 어윈과 에린만이 아니었다. 나흘 만에 두둑해진 배가 도로 쑥 꺼질 때까지 난 마주 앉은 라인트 대공 등에게 파김치가 되도록 시달려야만 했다.
 
  * * *
 
 (전략) 이그리파와 김철중의 신상 확인 결과
 
 1. 나는 김철중이다, 이그리파란 꼬마의 몸과 기억을 가진.
 -이그리파와 김철중 둘의 기억을 항목별 목록으로 만들며 재차 확인한 거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김철중이다. 이그리파란 꼬마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젖먹이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이 소상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사람이 죽기 이삼 일 전을 제외하고 평생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에서 나오는 드래곤—여기서는 실존한다—처럼 망각을 모르는 존재도 아니면서. 최근의 기억에 비해 어릴 때 기억이 흐릿한 것으로 보아 난 김철중이 확실하다.
 
 2.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 원주인인 이그리파란 꼬마를 걱정할 필요 없다.
 -이그리파란 꼬마의 기억이 하도 생생해 한 몸에 두 영혼이 깃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은 다중 인격이나 그 비슷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더 자세히 검사—여기에도 정신과 의사나 그 비슷한 게 있다면—를 해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는 이그리파란 꼬마의 영혼은 없는 것 같다. 그도 아니면 소설에서 흔히 보았듯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고 있든지. 아무튼 이 부실한 몸을 놓고 이그리파란 꼬마의 영혼과 다투는 황당한 일은 없을 것 같다.
 
 3. 정보! 정보가 절실히 필요.
 -부득불 이그리파로 살아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곳에 대한 정보가 태부족. 비디오처럼 선명한 이그리파의 기억은 오랜 투병 생활 탓인지 지극히 단편적이고 편파적이다.
 이곳에서는 성인이나 다름없는 16세임에도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이 겨우 백여 명 남짓이라니. 이곳이 마법과 드래곤 등이 실존하는, 흔히 게임이나 소설 등에서 보던 판타지와 흡사하다는 건 알지만 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이 드라셀이 어떤 나라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명색이 그래도 차기 공왕이 될 몸인데. 아까 낮에 밥 먹으며 그런 것처럼 이곳에 대한 정보를 부단히 모아야 한다.
 
 4. 강인한 육체, 강인한 정신.
 -정보 취득과 더불어 최우선적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 판타지 소설에서처럼 사고사 후 영혼 소환된 건지, 아님 차원을 넘어 주인 없는 빈집을 보고 기어든 건지 모르지만 부실하다 못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생활—화장실과 더불어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점이다. 명색이 왕족인데 변변한 화장실 하나 없는 왕궁에 노린내 나는 고기라니.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이 둘은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한다—로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도록.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계로 넘어왔으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 한번 돼 봐야 할 것 아닌가! 뭐, 본바탕이 시원찮아 그다지 가망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만······.
 
 5. 사람.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필요.
 -봉건 왕조치고 드라셀의 왕권이 강력하지만 만약을 대비, 내가 믿고 신뢰할 사람이 필요하다. 아직 라인트 대공이 건재해 안심이지만 이 꼬마의 지위는 결코 확고부동한 게 아니다. 지금껏 병치레로 왕세자 구실을 못했으니 라인트 대공 사후 이 꼬마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왕위를 노리는 유력 귀족에게 재수 없게 목숨을 잃을지도.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하기 전 친위 세력을 구축하는 게 필요. 일단 전속 시녀이자 3서클의 마법사인 에린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결론: 현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건강 회복—더불어 정보 취득—이고 다른 하나는 완벽한 이그리파로의 변신이다.
 다행히 깨어나서 오늘 오전까지 내가 보인 행동 탓에 지금으로써는 이 둘을 실행하는 데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예전 이그리파와 다른 언행을 보여도 소생한 후유증이라며 문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정작 큰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삶의 목표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이계로 넘어와 덤 비슷한 생을 살게 된 건 부인 못 할 사실이다.
 게임이나 남가일몽南柯一夢(어느 날 한 왕국의 부마가 돼 잘 먹고 잘 살았더니 다 꿈이었다던) 같은 삶이라고 헛되이 소비하는 건··· 뭐, 나름대로 재미있겠지. 의자왕처럼 삼천궁녀 가운데 묻혀 알콩달콩 지내거나 반지의 제왕처럼 원정대를 꾸려 사서 고생하는 것도. 여하튼 뜻하지 않게 최상의 조건까지 갖춰 주어진 삶, 기왕지사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더불어 악명이든 위명이든 역사에 길이 이름도 남기고.
 
 후회 없는 삶을 살도록 하자. 덤으로 받은 삶이라고 삶 자체가 덤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렴. 결코 덤이 아니지.”
 나는 힘주어 또 한 번의 느낌표를 찍으며 다짐했다.
 장장 하룻밤에 걸친, 이그리파 엘 드라셀과 김철중에 대한 리포트는 결국 각오 다지기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낯선 세계에 똑 떨어진 자신을 위로하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주절주절 당치 않은 분석과 대책을 늘어놓은 건 바로 이것,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헤쳐 나가야 할 이 세계에 첫발을 내딛을 용기를 쥐어짜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나는 영 손에 익지 않는 깃털 펜을 내려놓으며 이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님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유식하게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각오가 생긴 것이다.
 덧붙여 대한민국에서 고 3과 군 시절을 보낸 주제에 못 할 게 뭐 있겠냐는 다소 서글픈 자부심과 함께.
 다시 한 번 리포트를 살펴본 나는 두툼한 책 사이에 이것을 끼워 넣었다.
 그런 다음 늘어져라 기지개를 켠 후,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씩 음충맞게 웃었다.
 “그럼 어디 이그리파로 멋지게 한번 살아 볼까?”
 
 
 
 #건강? 밥이 보약
 
 
 헤로우파는 꿀떡 씹던 것을 삼키며 물었다.
 “이그, 그 아이가 이상하다고?”
 마주 앉은 어윈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처 물었다.
 “어디가?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건가?”
 “모두 다. 요즘 그 아이 하는 짓은 모두 다 이상해. 산책한답시고 성을 쏘다니는 거나 아랫것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 음식을 만든답시고 뻔질나게 주방에 드나드는 것 등 흡사 딴사람을 보는 것 같아. 특히 그 아이가 에린을 이전보다 더··· 아니, 마치 친동기간처럼 대하는 걸 보면 더욱더 그래.”
 “그거야······.”
 “알아. 소생할 당시의 충격으로 그 아이가 자신을 키무처르쭝인가 하는 이계인으로 생각한다는 걸.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현재 보이는 변화가 대단히 고무적이라는 것 또한 알아. 그렇지만 요 며칠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낯설고 생경하다 못해 이질적이지.”
 헤로우파는 날름 뒷말을 가로채며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장방형 탁자의 주인석에 앉은 라인트 대공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자신과 어윈의 얘기가 누구보다 신경 쓰일 텐데도 그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양, 열흘 전 처음 구경한 샌드위치만 묵묵히 먹었다. 마치 입 아프게 왈가왈부해 봤자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듯.
 하긴 라인트 대공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못마땅해 툴툴거려 봤자 이그리파가 단시일 내 원상태로 돌아올 리 만무했다.
 아니, 텔로스 님의 가호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지만 엄연히 한 번 죽었던지라 두 번 다시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오지 않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사람의 성격이야 이그리파가 죽었다 소생한 것처럼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 종종 바뀌기 마련인데. 보름 전 그저 무력하니 이그리파가 명부의 주인, 네르갈에게 붙임당하던 것을 지켜보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모습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암! 설사 그 아이가 진짜 이계인이라도 상관없지.’
 내심 구시렁거린 헤로우파는 라인트 대공을 좇아 먹다 만 샌드위치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훈제한 슈와 살과 야채들을 잘게 다져 마요네즈라는, 이그리파가 이레 전 만든 특제 소스로 버무린 슈와 샌드위치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슈와 살과 아삭거리는 각종 야채 그리고 고소한 마요네즈의 조화가 정말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잦은 주방 행차로 주방장 폴을 핼쑥하게 만든 이그리파는 질척하다며 투정했다지만 이 슈와 샌드위치는 지난 열흘간 먹은 것 중 최상이었다.
 “흠··· 일 년 중 요맘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슈와 때문인가? 오늘 샌드위치는 정말 훌륭하군.”
 “슈와는 무슨. 마요네즈 때문일세, 마요네즈.”
 헤로우파는 불퉁스러운 라인트 대공의 공박에 씁쓸하니 웃었다.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다 반박하는 라인트 대공도 대공이지만 공감하는 양 주억거리는 어윈이 어이없고 우스워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흡족하니 식사를 마친 라인트 대공과 어윈은 다소 아쉽고 미진한 표정들이었다.
 닷새 전부터 함께한 아침이 부족한 탓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반쪽만 더 먹었으면 싶은데, 그러자니 두어 시간 뒤의 점심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아침을 푸짐하게 먹고 점심을 거르면 저녁때까지 견디기 힘드니······.
 ‘쩝! 별수 없지. 내일부터 좀 더 바지런해지는 수밖에.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됐으려나? 새벽같이 만들기 시작했으니.’
 헤로우파는 슬쩍 입을 닦으며 창밖, 보다 정확히 말해 주방 뒤뜰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니, 힁허케 라인트 대공 등을 둘러본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슬슬 가 볼까나? 이그리파, 그 아이가 엊그제부터 부산하게 준비하던 음식이 얼추 다 됐을 테니.”
 끼익!
 기다렸다는 듯 의자 끄는 소리가 일었다.
 
  * * *
 
 뭉클 피어나는 하얀 김과 시끌벅적한 사람들.
 가데스 궁의 먹거리를 책임진 주방 뒤뜰은 완전 시장 분위기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로 제법 널찍한—가로세로 30×15미터가량 되는—뒤뜰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아마 궁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죄다 모여든 것 같았다.
 물론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마요네즈 없는 샐러드는 엘프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란 유행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니. 샌드위치와 마요네즈에 홀딱 반한 이들이 오늘 무심히 넘어가리라고는 애당초 생각조차 안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북적거리리라고는······.
 “생각 못 한 내 잘못인가?”
 “에? 전하, 방금 뭐라고?”
 이그리파는 혼잣말을 듣고 묻는 에린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의아함 어린 에린의 눈길이 따라붙었지만 이그리파는 개의치 않았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주방장 폴이 비지땀 흘리며 젓는 솥으로 다가갔다.
 “폴.”
 “예, 전하.”
 “엷은 막이 생길 때까지 눋지 않게 잘 저어. 조금이라도 눌어붙거나 탄내가 배면 말짱 헛일이니. 마기!”
 “염려 마세요, 전하. 분부하신 대로 콩국을 걸러 짤 만반의 준비를 해 놨으니.”
 열흘 새 몰라보게 변한 폴처럼 열성 신도가 된 주방 하녀장 마기가 그 후덕한 몸매처럼 푸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마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이그리파는 당장이라도 끓어 넘칠 듯한 솥을 들여다보았다.
 뽀얀 잔거품이 이는 콩국은 흡사 하룻밤 푹 곤 사골 국물 같았다.
 갓 짠 우유처럼 농밀하고도 진한 유백색 빛깔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었다.
 아마 지구상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열에 일고여덟은 진한 곰국을 연상할 터였다.
 ‘하긴 콩은 밭의 고기, 아니 우유던가? 어쨌든 된 것 같군.’
 이그리파는 콩국에 엷은 막이 어리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즉부터 준비하고 있던 폴과 마기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지체 없이 움직였다.
 하룻밤 불린 콩을 아침 일찍 갈기 전 일러 준 대로 그들은 커다란 함지에 놓인 베주머니에 콩국을 퍼 담았다.
 베주머니에서 콩 찌꺼기—달리 비지라 하는—와 걸러진 콩국, 즉 두유는 절로 군침이 돌았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데 가만 참기에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그래서일까?
 “에린, 컵! 컵 가져와!”
 이그리파는 성마르게 에린을 재촉했다.
 아니, 그때까지 참기 힘든지 폴의 손에 들린 바가지를 뺏어 들었다.
 “저, 전하!”
 “다른 걸로 퍼! 그보다 설탕, 아니 소금 어디 있지? 간이 맞아야 더 고소······.”
 “여기요, 전하.”
 컵을 찾으러 보낸 에린이 기다렸다는 듯 소금 종지를 내밀었다.
 타고난 영민함과 오랜 병 수발로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대번에 눈치 챈 것이다.
 솔솔 간을 맞춘 이그리파는 조급하니 콩국을 식히다 문득 멈추었다.
 폴과 에린을 위시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
 따갑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이 시선들은 한결같았다. 행여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부릅뜬 눈들에는 기대와 흥분 등이 가득 어려 있었다.
 괜스레 무안해진 이그리파는 헛기침을 하였다.
 그런 다음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는 에린을 불렀다.
 “에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게 뭐랬지?”
 “나··· 남 먹는 거 빤히 쳐다보는 거요.”
 후다닥! 후닥!
 놀란 사람들이 기급하며 눈 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리파는 심통스레 에린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남 먹는데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세상에 그것만큼 추한 게 없어. 한데 그걸 알면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죄, 죄송해요. 하도 서둘러 드시려기에 궁금해서 그만. 그렇지만 그렇게 모르는 척하신 전하도 정말 치사하세요.”
 “그, 그거야······.”
 “아무렴! 모르는 척 혼자 먹으려는 것만큼 치사한 얌체 짓도 없지.”
 맹랑한 에린의 말에 일순 말문이 막혀 떠듬대던 이그리파는 불쑥 끼어든 말소리에 힁허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왔는지 라인트 대공과 공국의 요인들—그래 봤자 궁정 마법사인 어윈과 대신관 헤로우파가 전부지만—이 서 있었다.
 추수한 보리밭처럼 엎드린 사람들 가운데 우뚝 선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와 흥미 어린 모습들이었다.
 특히 심술궂게 말을 건 헤로우파는 그 누구보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세 분이서?”
 “어쩐 일은, 이그리파 전하께서 새로운 음식을 만든다기에 구경하러 왔지. 그게 전하가 만든다는 그 두푸?”
 “두부요.”
 “그래, 두부! 그 두분가 하는 음식인가?”
 이그리파는 바가지에 담긴 콩국을 가리키는 헤로우파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두유, 그러니까 두부를 만들기 전 콩국으로 맷돌에 간 콩을 끓여 베주머니에 거른 거예요. 두부는 여기에 적당량의 간수를··· 폴!”
 장황하니 설명하던 이그리파는 별안간 빽 소리쳤다.
 한창 콩국을 푸고 있어야 할 폴이 멍청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화들짝 쳐다보는 폴을 닦달했다.
 “멍청하게 뭐 하고 있는 거야! 뜨거울 때 비지를 걸러야 된다고 했잖아! 할아버지 좀 왔다고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히익! 죄,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콩국을 퍼 담는 폴을 보며 이그리파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절레절레 도리질 친 그는 주위에서 얼쩡대는 주방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뭘 멍청히들 보고 있어! 어서 폴을 도와 콩국 거르지 않고!”
 때 아닌 날벼락에 주방 하인들은 허둥지둥 콩국을 거르기 시작했다.
 행여 또다시 불호령이 떨어질세라 급급한 그들은 마치 경주하듯 콩국을 퍼 담았다.
 덕분에 잠시 방치됐던 콩국은 삽시간에 비지와 순수한 콩국으로 걸러졌다.
 이제 콩국이 적당히 식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온도계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는 이상, 간수를 탈 적정한 때를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아니면 어느 틈에 콩국을 홀짝이는 헤로우파처럼 직접 확인하든지.
 “헤로우파 님.”
 이그리파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헤로우파를 불렀다.
 머쓱하니 멋쩍게 웃은 헤로우파가 컵을 들어 보이며 의뭉을 떨었다.
 “허허! 달콤하니 고소한 게 정말 좋군, 이거. 그저 콩을 갈아 끓였을 뿐인데 이렇듯 우유와 흡사한 맛 좋은 음료가 되다니. 허허. 믿기지가 않아, 믿기지가.”
 “헤로우파 님.”
 이그리파는 믿지 못하겠다며 또다시 콩국을 푸는 헤로우파를 힘주어 불렀다.
 큰솥으로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너무 매정하게 군다 싶지만 절대 너무한 게 아니었다. 헤로우파처럼 너도나도 한 컵씩 떠먹다 보면 정작 두부를 만들 콩국은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신분에 따라 몇몇 사람만 먹게 하는 건 에린의 말마따나 정말 치사한 짓이었다. 무엇보다······.
 ‘난 맛도 못 봤잖아.’
 잔뜩 심통 난 이그리파는 심술궂게 헤로우파를 노려보았다.
 “험험. 아, 알았네. 이제 그만 먹을 테니··· 뭐 하는 건가, 폴? 그 콩 찌꺼기는 뭐 하려고.”
 “뭐 하긴요. 비지떡 만들어 먹을 겁니다.”
 “엑?”
 불퉁스러운 대꾸에 헤로우파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소리 내어 말은 안 했지만 어떻게 그런 콩 찌꺼기를 먹느냐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리파는 커다란 양푼에 비지를 퍼 담는 폴에게 말했다.
 “폴, 그 정도면 됐어. 거기에 돼지고기하고 파, 고추, 아니 캡시쿰을 넉넉히 썰어 넣고 같은 양의 밀가루를 섞어 걸쭉하게 반죽해. 에린은 마기를 도와······.”
 “걱정 마세요. 마기 아줌마가 만반의 준비해 놨어요.”
 이그리파는 불쑥 말을 가로채는 에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혐오 어린 헤로우파를 필두로 라인트 대공과 어윈 등 주방 뒤뜰에 모인 구경꾼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콩국을 짜내고 난 찌꺼기인 비지가 그럴듯한 음식이 될 듯하자 다들 흥미가 동한 것이다.
 특히 몰래 콩국을 훔쳐 먹는 데서 보듯 먹을 거라면 사족 못 쓰는 헤로우파의 경우, 게슴츠레 뜬 눈을 음흉하게 반짝이며 마기와 폴 등에게 어서 서두르라 노골적으로 재촉했다.
 덕분에 잠시나마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이그리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떠 놓기만 하고 맛도 못 본 콩국을 마실 틈이 주어지자 그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쭉 이것을 들이켰다.
 “크하!”
 단숨에 바가지를 비운 이그리파는 흡족하니 입가를 훔치다 멈칫거렸다.
 마기를 도와 한창 바쁠 줄 알았던 에린이 뾰로통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심 찔끔한 그는 계면스레 헛기침하며 함지에 담긴 콩국을 살펴보았다.
 몽글몽글 김이 오르는 콩국은 적당히 식은 듯했다. 아직 간수를 풀기에는 다소 뜨거워 보이지만 슬슬 준비하면 딱 맞을 듯싶었다.
 “에린, 가서 간수 좀.”
 “예, 전하.”
 이그리파는 새침하니 간수를 가지러 가는 에린을 바라보다 폭 한숨 쉬었다.
 소생한 직후 전속 시녀랍시고, 아니 자기 사람으로 만든답시고 너무 허물없이 대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꾸중하기도 뭣한 일, 이그리파는 간수를 가져온 에린에게 콩국을 한 바가지 퍼 주었다.
 “자, 치사하게 혼자 먹지 않을 테니 화 풀어.”
 “에··· 헤헤!”
 콩국을 받아 든 에린이 언제 삐쳤냐는 듯 생글거렸다.
 이그리파는 열여섯 소녀라기보다 철부지 어린애 같은 에린을 한심하니 바라보다 간수가 든 통을 집어 들었다.
 이제 두부 만들기 중 가장 중요한 간수 타기를 할 때였다. 적당히 식은 콩국에 이 간수를 얼마나 타느냐에 따라 그날 두부 만들기는 성패가 달라졌다.
 너무 많으면 쓴맛이 나고 너무 적으면 아예 콩국이 엉기지 않는, 그야말로 적정량의 간수를 타야만 생크림 같은 순두부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순두부를 틀에 넣어 굳힌 게 두부니, 이 간수 타기야말로 두부 만들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군대 가기 전 고모님 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이후 처음인데······.”
 이그리파는 불안과 초조 어린 목소리로 삼 년 전 일을 웅얼거리며 조심스레 간수가 든 통을 기울였다. 행여 한꺼번에 쏟아질세라 주의 깊게 간수를 흘려 넣으며 그는 천천히 나무 주걱을 휘저었다.
 조금씩 간수가 더해진 콩국은 당장 큰 변화가 없었다. 간수가 더해지기 전이나 후나 다름없이 진한 사골 국물 같은 유백색 콩국은 변함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간수를 탔다고 바로 콩국이 엉겨 붙는 게 아니니. 5분쯤은 기다려야 콩국이 엉겨 순두부가 뜰 터이고, 그때까지는 멀거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음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비지떡 부치는 마기를 거들든지.
 “폴, 가만히 지켜보면 콩국이 엉겨 응어리지기 시작할 거야. 그럼 그것들을 채로 건져 틀에 넣은 후, 준비해 둔 돌판을 올려 물을 빼. 틀 밑에 뚫은 구멍으로 물이 방울져 떨어지면 다 된 거니 올려 둔 돌판을 치우고.”
 “예, 전하.”
 “아! 순두부를 건져 넣기 전 틀 안에······.”
 “고운 베를 까는 것 말이죠? 걱정 마십시오, 전하.”
 이그리파는 자신만만해하는 폴에게 싱긋 웃어 준 후, 고소한 기름 냄새로 사람을 유혹하는 마기에게 다가갔다.
 싼 게 비지떡이란 속담이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어때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오늘 만든 두부가 어떤지는 사람들의 다물어지지 않는 입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사뭇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은 것은 라인트 대공 등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떠냐고? 내 오늘처럼 신기하고 맛 좋은 음식을 먹어 본 건 처음이다. 흔하디흔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는 것도 놀랍지만 그 와중에 만들어진 두유와 비지, 순두부 등 그 어느 것 하나 맛 좋지 않은 게 없어.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 두부의 재료가 값싼 콩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다. 빵 한 덩이 값인 구리 돈 3쿠퍼면 두세 바구니는 살 수 있거든.”
 “어윈 님은요?”
 이그리파는 흡족한 헤로우파를 지나 어윈을 쳐다보았다.
 평소의 그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어윈은 온데간데없었다. 반쯤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웃는 그는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이었다.
 단지 날카로운 눈매가 배부른 늙은 개마냥 유순해졌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윈 님.”
 “흠! 맛도 좋고 재료가 콩인 것도 좋지만 난 두부를 만드는 과정, 특히 그중에서도 간수를 넣으니 콩국이 순두부가 되던 게 흥미롭더구나. 소금이 습기에 녹아 만들어진 간수의 어떤 점이 콩국을 엉겨 붙게 만든 것인지.”
 “그, 그건 저도 잘··· 간수의 주성분인 염화마그네슘과 콩의 단백질이 반응해 응고된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염화마그네슘? 단백질?”
 이그리파는 더욱 눈빛을 반짝이는 어윈에게 계면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간수의 화학작용에 호기심 보이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난감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던 이그리파는 따가운 어윈의 눈길을 피해 라인트 대공을 돌아보았다.
 “나 역시 두부의 재료가 콩이라는 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구나. 아스다롯 산맥 등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몬스터 때문에 항시 곡물이 부족했는데 그나마 풍족하니 생산되는 콩이 재료라니. 샌드위치도 그렇고 두부도 그렇고, 네 덕분에 올 춘궁기는 여느 해보다 수월히 넘길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그런가요?”
 이그리파는 뜻밖인 대공의 말이 객쩍은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두부와 샌드위치를 만든 건 라인트 대공의 생각처럼 거창한 뜻에서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굶주린 백성이나 춘궁기 따위에는 관심 없었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이것들이 다른 것에 비해 만들기 쉽고 간편했기에 택했을 뿐이었다.
 즉 이것들이 무사히 춘궁기를 나는 데 일조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이그리파는 이런 생각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라인트 대공의 눈길에 쑥스럽지만 자긍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가 춘궁기를 무사히 나는 데 일조하게 된 건 사실이고,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장땡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흠! 한데 말이외다, 이그리파 전하.”
 이그리파는 별안간 전하 운운하는 헤로우파의 모습에 내심 긴장하며 계속 말하라 고갯짓을 하였다.
 “뜨거울 땐 몰랐는데 식으니 다소 맛이 떨어지는구려. 게다가 이것만 먹다 보니 뻑뻑하니 물리는 감도 없지 않고.”
 “그야 당연하죠. 두부는 이렇게 맨 상태로 먹기보다 끓이거나 삶는 등 요리해 먹는 재료니까요.”
 “재료? 그럼 이게 완성된 요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요. 두부 역시 샌드위치처럼 주방장의 능력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 다양한 요리를 만들 수 있어요. 고기처럼 스테이크를 해 먹을 수도, 빵 대용으로 샌드위치를 만들 수도 있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돼지고기와 신 김치를 달달 볶아 싸 먹는 두부 김치가 술안주로 좋죠.”
 꿀꺽!
 “큼! 두부 김치라. 마침 맥주도 있고 하니, 폴?”
 요란스레 군침 삼키는 사람들과 달리 헛기침한 헤로우파가 폴을 찾았다.
 보나 마나 입 안 가득 군침 고이게 한 두부 김치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오늘 누구보다 고생한 폴은 당연히 난색을 표했다.
 “저 헤로우파 님, 전하의 말씀에 따르면 그 두부 김치란 것에는 김치란 게 필수인 것 같은데 전······.”
 “그렇군! 그 김치란 게 없으면 두부 김치는······?”
 이그리파는 사뭇 간절한 헤로우파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김치는 두부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두부야 콩만 있으면 되지만 김치는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먼저 고춧가루 아! 여기서는 캡시쿰이라는 걸 말려 가루를 내야하고, 또 주재료인 배추도······.”
 “한마디로 안 된다는 소리군.”
 “지금 당장은요.”
 이그리파는 잔뜩 풀죽은 헤로우파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헤로우파가 히죽 이를 드러냈다.
 “그럼 조만간 그 김치란 것은 물론 두부 김치도 맛볼 수 있단 말이군. 그렇지 않은가요, 이그리파 전하?”
 “그, 그럼요, 헤로우파 님.”
 이그리파는 아쉬울 때만 전하를 찾는 헤로우파에게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영부영 말을 주고받는 사이 그만 헤로우파의 꼼수에 당한 것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씁쓸하니 미소 띤 그는 득의양양한 헤로우파를 피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부 만드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대는 주방 뒤뜰은 한마디로 잔치판이었다.
 여기저기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게 영락없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서로 웃고 떠들며 즐기는 게 마치 한판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값싸고 흔한 콩이 재료지만 두부는 본디 잔치 음식이었다. 한 해의 농사를 갈무리하는 가을이나 경조사가 있을 때,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먹던 음식이 바로 두부였다. 그러니 두부와 그 부산물들—비지와 두유, 순두부—로 잔치가 벌어지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 두부 만들기는 성공이었다.
 근 삼 년 만에 만드는 거라 못내 불안했던 두부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난생처음 두부를 맛본 사람들 반응 또한 만족스러웠다.
 이만하면 생각 외로 빈곤한 식탁 개선과 운동 겸 소일거리로 시작한 요리 보급은 다음으로 넘어가도 될 듯싶었다.
 “흠! 뭐가 좋을까나? 가급적 손쉽고 간편한 거라면······.”
 턱을 괸 채 갸웃대던 이그리파는 별안간 피식거렸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게 다음에 만들 요리를 궁리하는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으쓱 어깨를 들썩거린 그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참! 뭘 고민하는 거야. 명색이 차기 공왕인데 설마 먹고 싶은 것 하나 못 해 먹겠어?”
 
  * * *
 
 만약 다른 세상에 간다면 가장 자주할 착각은?
 난센스 같은 이 질문의 답은 간단했다.
 이쪽 세상에서 가능한 건 저쪽 이계에서도 가능하리라는 생각, 바로 그것이었다.
 같은 행성—가령 지구—에서도 자기 나라를 벗어나면 불가능한 일이 허다한데, 누가 망각의 동물 아니랄까 봐 왕왕 이 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그리파는 다시금 이 점을 상기하며 어윈을 바라보았다. 골난 어린애마냥 그렇게 뚱해 있지 말고 말 좀 해 보라고. 하지만 조개처럼 다문 어윈의 입은 꿈쩍하지 않았고, 결국 참다못한 이그리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윈 님, 제 부탁이 무리한 건가요?”
 “······.”
 “탑에 있는 벤튼에게 물었더니 아이스 실드와 윈드, 두 마법을 연동해 발현하도록 하는 복합 마법진이 다소 까다로울 뿐 마법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던데요. 벤튼 말로는 마법진만 아니면 자기도······.”
 “흥! 입만 산 그놈 말을 믿다니, 아무래도 마법 공부를 헛한 모양이외다, 이그리파 전하.”
 냉소 어린 콧방귀와 함께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어윈의 입이 열렸다.
 생각을 바꿔 제자라기보다 우환덩어리인 벤튼을 들먹이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싱긋 미소 지은 이그리파는 의자를 끌어 바싹 다가앉으며 어윈에게 물었다.
 “하면 어윈 님도 힘들단 말인가요? 저야 마나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마나 과민증인가 하는 희귀병 때문에 마법을 이론만, 그것도 개괄적으로 배우다 말았지만 벤튼은······.”
 “벤튼, 그놈 말이 틀린 건 아니외다. 두 마법을 연동해 발현시키는 복합 마법진이 까다로울 뿐 그렇게 어려운 마법들은 아니외다.”
 “까다롭다니요?”
 이그리파는 유독 까다롭다는 말을 강조하는 어윈에게 되물었다.
 순간 그렇게 되묻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어윈이 슬쩍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하 말대로 그 냉장고?”
 “예, 냉장고요.”
 “어쨌든 그 이계의 냉장고인가 하는 것과 비슷한 물건을 만드는 데는 아이스 실드와 윈드, 두 마법이면 충분할 것 같소이다. 이그리파 전하의 말에 따르면 그 냉장고란 건 냉기를 순환시켜 음식을 장기 보관하는 거니. 솔직히 성 지하의 얼음 창고를 주방 한구석에 조그맣게 만든다 생각하면 그만이외다. 문제는 이 냉장고란 게 얼음 창고 같으면서도 똑같지 않다는 거외다.”
 “그게 무슨?”
 이그리파는 알쏭달쏭한 어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어윈이 예의 그 다분히 이죽거리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그리파 전하, 지금 전하가 만들겠다는 그 냉장고가 어떻게 생긴 물건이오?”
 “그야······.”
 “옷장처럼 생겨 수시로 여닫으며 쓸 물건 아니오? 그것도 항시 불을 때는 주방에서. 게다가 듣자 하니 냉장과 냉동 둘로 기능도 나뉘어 있고. 그렇지 않소이까?”
 연이은 어윈의 물음에 이그리파는 불안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긴 건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얄궂은 미소를 띤 어윈은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의자에서 일어섰다.
 마법사의 연구실답게 정신 사나운 방 안을 가로지른 어윈이 멈춰 선 곳은 벽난로 옆 작은 서랍장 앞이었다. 잡동사니나 담아 둘 법한 허름한 서랍장을 한동안 쓰다듬고서야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잠시 이 서랍장을 그 냉장고라 생각합시다. 전하 말처럼 아이스 실드와 윈드 마법이 걸린. 발현發現!”
 딱!
 어윈이 손가락을 튀기자 서랍장 위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볼품없는 서랍장을 왜 그렇게 쓰다듬나 했더니 어느새 마법진을 그린 것이다.
 한순간 푸르스름하니 빛나던 서랍장이 제 색깔을 찾자 어윈이 냉소 띤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이 서랍장을 열어 보시구려, 전하가 말한 냉장고의 문이라 생각하고.”
 이그리파는 한층 짙어진 어윈의 미소가 불길하기 짝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 서랍장 앞으로 다가간 그는 삼단의 서랍들 중 맨 위 왼쪽 서랍의 고리를 잡았다.
 순간!
 “앗 차거!”
 손끝을 타고 흐르는 싸늘한 냉기에 그는 움찔 물러났다.
 굳이 냉소 띤 어윈의 설명을 들을 필요 없었다.
 이래서는 서랍장 안의 상태가 어떻든 냉장고로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겨우 냉장고 문 좀 열자고 매번 장갑을 끼거나, 손바닥 껍질이 벗겨질 위험을 감수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윈은 이 정도 깨달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만하니 내려다보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걸 보면.
 “파이어 볼!”
 펑!
 주먹만 한 화염구가 터지며 거센 불길이 솟구쳤다.
 느닷없는 불길에 놀란 이그리파는 화들짝 물러났다. 아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태연자약한 어윈에게 벌컥 화를 내었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하마터면 다칠 뻔······.”
 “놀랐다면 미안하외다. 매번 불씨를 가져다 지핀다면서도 버릇이 되어 놓아서 그만.”
 이그리파는 어깨를 으쓱이는 어윈을 사납게 노려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단 말과 달리 눈곱만치도 그런 것 같지 않은 그에게 대들어 봤자 입만 아프기 때문이다.
 한차례 심호흡으로는 채 분이 가시지 않은 그는 재차 깊이 숨을 들이쉬며 구시렁댔다.
 “젠장! 마법사라고 티 내는 거야, 뭐야. 성냥이나 라이터는 뒀다 국 끓여 먹을 거야.”
 “성냥? 라이터?”
 “그래요. 그것들로 불 피우면 됐지, 뭐 하러······.”
 “호오! 성냥하고 라이터라? 이그리파 전하, 참 흥미로운 말을 하는구려.”
 이그리파는 싱긋 웃는 어윈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홧김에 투덜대다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마법사의 천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내심 울고 싶은 마음과 달리 어설픈 미소를 매단 그는 가늘어진 어윈의 눈매를 원상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아-하하! 흥미롭긴요. 6서클 마도사인 어윈 님이 관심 두실 만한 물건들이 아니에요. 그보다 어윈 님, 왜 갑자기 불을 지피신 거예요? 냉장고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불을······.”
 “흠! 그야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게 낫기 때문이오.”
 이그리파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어윈의 말에 서랍장을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랍장은 외견상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윈이 마법진을 그려 넣기 전 그 허름하고 낡은 모습 그대로였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처음 보았을 때보다 짙어진 서랍장 색깔 정도였다.
 힁허케 서랍장을 살펴본 이그리파는 어윈에게로 눈을 돌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과 달리 봐도 모르겠으니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흠! 뭐 이상하거나 달라진 점 없소?”
 “글쎄요. 서랍장 색깔이 다소 짙어진 것 같지만······.”
 “한번 만져 보구려.”
 이그리파는 백문이 불여일견에 이은 백견이 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해 보는 게 낫다)이란 말에 순순히 따랐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랍장에 다가간 그는 마치 쌓인 먼지를 확인하듯 쓱 서랍장을 훑었다.
 축축했다. 손때와 기름걸레질로 은은한 서랍장은 마치 물속에 푹 담갔다 꺼낸 것 같았다.
 방울방울 물방울만 떨어지지 않을 뿐,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분명 물기였다.
 “어윈 님?”
 “수계, 그중에서도 빙계 마법이 화기를 만날 경우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오. 풍수지화風水地火로 대표되는 원소 마법은 보통 지속성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가 아니면 이런 사실을 알기 힘드외다. 아니, 습하거나 건조한 대기의 변화로 느끼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게 정확하겠군. 아! 마법 무구에 이런 현상이 없는 건 무구의 재질과 단발적인 마법의 성격 때문이외다.”
 “그게 무슨?”
 “쉽게 말해 파이어 블레이드가 인챈트된 검의 경우 가드나 힐트가 화기에 강한 재질인 경우가 태반이외다. 그렇지 않음 따로 화기를 막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거나. 그리고 파이어 블레이드 역시 앞서 말했듯이 단발적인, 다시 말해 시전 시간이 짧은 마법이고 말이오.”
 이그리파는 지루하게 이어지던 어윈의 말이 끝나자 콧등을 긁적였다.
 원소 마법이니 마법 무구니 장황한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라 그는 침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음··· 그러니까 어윈 님 말씀은 제가 부탁드린 냉장고가 불가능, 아니 힘들단 말인가요?”
 “그렇소이다. 단순한 얼음 창고라면 모를까, 전하가 전생에 썼던 것 같은 냉장고는 단시일 내는 무리요.”
 “그럼 얼마나 있어야······.”
 “글쎄올시다. 마침 연구하던 마법이 끝나 다소 한가하기는 한데······.”
 슬쩍 말을 흐리며 미소 짓는 어윈의 꿍꿍이는 뻔했다. 일전 두부를 만들 때, 아니 조금 전 라이터 운운하며 투덜거릴 때 보았듯이 저쪽 세계인 지구의 문물과 지식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다.
 누가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욕 빼면 시체라는 마법사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당장 아쉽고 급한 건 이쪽이니 어쩌겠는가!
 폭 한숨을 내쉰 이그리파는 짐짓 근엄한 척 의뭉 떠는 어윈과 협상에 나섰다.
 “어윈 님, 성냥하고 라이터. 또 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험! 뭐 딱히 알고 싶다기보다··· 흠! 일전 전하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화학? 그게 참 흥미롭더이다.”
 “그, 그건······.”
 이그리파는 화학이란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친근한 미소와 함께 어윈이 말을 이었다.
 “전하가 그쪽 방면에 문외한이란 건 일전 두부 만들던 날, 아니 보름 전 전기인가 하는 것을 설명할 때 보아 알고 있소이다. 전하께서는 그저 아는 대로 그 주기율표? 뭐, 그런 것들에 대해 얘기해 주기만 하면 되오이다. 그 화학이라는 게 시약을 제조할 때나 분류할 때 퍽 유용할 것 같으니 말이외다.”
 “그렇다면야······.”
 이그리파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멈추었다.
 아무래도 큰 인심 쓰듯 덤덤히 얘기하는 어윈에게 당한 것 같았다.
 애써 담담해하는 그의 입술이 치켜 올라가지 못해 안달하는 걸 보면. 고양이 쥐 생각하듯 의뭉 떤 그에게 단단히 걸려든 게 틀림없었다.
 
  * * *
 
 주방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직사각형의 검은 물체.
 드라셀 공국의 내정을 책임진 내무경, 자무엘 폰 아시모프 백작은 이 물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흡사 난생처음 보는 흑대리석에 매료된 주방 하인들처럼 그는 이 정체불명의 물체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언뜻 대리석으로 만든 옷장 같은 이 물체에 매혹되어서가 아니었다.
 이렇듯 크고 아름다운, 더군다나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을 보는 것 같은 대리석은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주방 하인들처럼 이렇듯 망연자실 넋이 빠진 건 이 검은 물체를 만든 이가 다름 아닌 이그리파이기 때문이었다.
 한 달여 전 기적적으로 소생한 이래, 몰라보게 사람이 달라진 이그리파는 경이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는 데다 네댓새 간격으로 새로운 음식을 선보이는데 누구나 감탄해 마지않았다.
 특히 일 년 열두 달 딱딱한 빵과 멀건 스튜가 전부이다시피 한 평민 이하 계층은 값싸고 흔한 재료가 주인 그의 요리에 열광했다.
 아니, 신분에 관계없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변해 가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정체불명의 물체는 그런 그가 몸소 궁정 마법사이자 6서클 마도사인 어윈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가뜩이나 빡빡한 왕실 재정에서 2천 골드란 거금을 축내며. 그런 마당에 공국의 재정 운용을 총괄하는, 그래서 그 공을 인정한 이그리파에게 ‘스크루지’란 영광스러운 칭호를 하사받은 그가 어찌 관심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꿀물에 꼬인 개미처럼 모여 조심스레 쑥덕대는 주방 하인들처럼 그가 이 정체불명의 물체에 관심 두는 건 당연했다.
 “아, 글쎄. 제 말이 맞다니까요. 이건 나흘 전 돼지 잡았을 때 이그리파 전하가 얘기한 훈증기라고요. 저기 밑에 보이는 문으로 불을 때고 여기 옷장 같은 이 부분에 훈제할 햄하고 베이컨 그리고 그날 전하가 순대하고 같이 만든 소시지를 넣는 거라고요.”
 “나 참! 아니라니까. 이건 귀한 유리그릇과 금은 식기를 보관하기 위한 식기장이야. 그렇지 않음 이렇게 귀한 흑대리석으로 만들 까닭이 없잖아.”
 “쯧쯧! 생각하는 것들하곤. 다 틀렸어, 다! 어윈 님까지 나서셔서 만든 물건이 그런 하찮은 것일 것 같아. 이건 새 요리 기구야, 요리 기구!”
 “아, 글쎄······.”
 분분한 주방 하인들의 추측은 도통 끝날 줄 몰랐다. 오히려 갈수록 흥이 동하는지 그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도 언성이 높아지며 열기를 띠었다.
 하지만 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 없고 날도 때가 되면 저무는 법, 한창 열기를 더해 가던 언쟁은 느닷없는 말 한마디에 뚝 그쳤다.
 “다 틀렸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언쟁하던 주방 하인들은 나직이 들려오는 말에 흠칫 굳어졌다.
 아니,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낯빛이 새하얘진 그들은 분분히 허리를 굽혔다.
 “저, 전하!”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께서 계신 줄도 모르고 그만······.”
 “아아! 괜찮아. 휴식 시간인데 뭘.”
 밝은 미소와 함께 이그리파가 휘휘 손사래 치자 황망해하던 주방 하인들 사이에서 안도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생한 이래 부쩍 관대해졌다고는 하지만 하늘 같은 그가 행여 진노하지 않을까 다들 적잖이 마음 졸였던 것이다.
 하지만 긴장을 풀며 한시름 놓던 주방 하인들은 재차 들려오는 이그리파의 말에 다시금 자지러져야만 했다.
 “한데 저녁 준비는 다 해 놓고들 노닥거리는 거겠지?”
 “히익! 그, 그건······.”
 “아! 아! 장난이야, 장난.”
 자무엘은 짓궂게 주방 하인들을 놀리는 이그리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지병인 마나 과민증이 완쾌된 후, 몰라보게 밝고 건강해진 건 다행이지만, 너무 아랫것들과 격이 없어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굳이 이를 지적해 이그리파의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지라 그는 속내를 감추며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나오셨습니까, 전하.”
 “아! 스크··· 자무엘 경도 계셨군요.”
 “네. 전하께서 이 스크루지에게서 2천 골드를 털어 가셔서 어윈 님과 뭘 만드신 건지 궁금해서요.”
 자무엘은 곤혹스레 말을 얼버무리는 이그리파에게 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스크루지란 고약한 별명—처음에는 좋은 뜻인 줄 알았다. 한데 지구라는 이계에서는 돈만 밝히는 수전노를 뜻한다니—을 지어 준 이그리파가 더욱 난처해하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대단치 않다니, 그럼 지난 보름여 동안 내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일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다는 게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윈 님.”
 가뜩이나 곤혹해하던 이그리파는 이젠 아예 울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어윈마저 사뭇 시비조이자 적이 처지가 난처해진 것이다.
 괜히 농 한마디 했다 단단히 미움 사게 생긴 자무엘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험! 그런데 전하,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전에 듣기로는 지하의 얼음 창고와 쓰임새가 비슷하다 하셨는데.”
 “아! 이거요.”
 그렇잖아도 난감한 처지이던 이그리파는 반색하며 나섰다. 하지만 당장 궁금증을 풀어 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싱긋 웃으며 정체불명의 물체 앞으로 다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윈 님.”
 “큼! 알았네.”
 다소 뚱한, 그렇지만 흥분된 신색의 어윈은 주저하지 않았다.
 헛기침과 함께 이그리파 옆으로 다가선 그는 흡사 옷장 문 같은 대리석 위에 손을 얹었다.
 “만물의 근원이자 원천인 마나여, 초연超然의 법칙을 탐색하는 구도자 나 어윈 아르트 폭스의 의지에 따르라. 발현!”
 부우웅!
 나직하던 어윈의 읊조림에 확고한 의지가 실리자 칠흑 같던 대리석 표면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주의 깊게 살펴보았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마법진이 확신 어린 어윈의 말과 손짓에 발현된 것이다.
 “아!”
 “오오!”
 검은 대리석 상자를 휘감고 흐르는 영롱한 빛 무리.
 흡사 동토의 대지인 체르바인의 거울에서나 볼 수 있다는 오로라 같은 빛의 커튼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경외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마법사, 그것도 6서클 마도사인 어윈의 마법 시전에 다들 넋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 놀람과 감탄 어린 탄성들은 씻은 듯이 사라지는 빛 무리와 함께 이내 자취를 감췄다.
 웅- 웅- 웅-.
 예의 검은빛을 되찾은 대리석 상자에서 이는 소리만 들릴 뿐 주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스무 명 남짓의 사람이 있었지만 침 삼키는 소리는커녕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괴괴하니 지독히도 고요한 침묵만이 주방을 감싸고 흘렀다.
 “흠!”
 숨소리조차 없는 고요 때문일까?
 주의를 일깨우는 이그리파의 헛기침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자무엘은 단숨에 주의를 끈 이그리파를 돌아보았다.
 기대와 흥분 어린 표정으로 곧 있을 이그리파의 설명을 기다리는 주방 하인들처럼.
 “흠! 방금 어윈 님이 마법진을 발현한 이 물건은 냉장고로, 장기간 음식과 재료들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기구야. 항상 초겨울 날씨와 같은 상태로 여기 이 서랍처럼 생긴 칸은 요리하기 전의 재료들, 그중에서도 야채들을 보관하고 여긴······.”
 벌컥!
 옷장 같은 냉장고 문을 연 이그리파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음식과 음료, 그 밖의 재료들을 보관하는 칸이야. 책장처럼 칸을 나눠 종류별로 수납하기 쉽게 해 놨으니 앞으로 폴이 책임지고 알아서 관리해. 아! 맨 위에 문 달린 이 두 칸은 냉동실로 작은 쪽은 얼음을, 큰 데는 육류와 어류를 냉동 보관하기 위한 거야. 알겠어?”
 자무엘은 장황한 설명 끝에 돌아서며 묻는 이그리파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음 창고와 비슷하다는 말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듯 대단한 것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얼빠진 표정으로 놀라고만 있을 수 없는 일, 그는 이그리파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실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냉장고 안은 초겨울 날씨처럼 선선했다.
 뿐만 아니라 냉동실이란 맨 위의 두 칸은 어윈이 마법을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음에도 칸막이 등에 하얗게 성에가 어리고 있었다.
 “쯧! 그깟 찬 바람 좀 흘러나오는 게 뭐 대수라고.”
 자무엘은 불퉁하니 혀를 차는 어윈이 내심 어이없었다.
 냉장고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서도 아직 그 효용을 모르다니. 이 냉장고는 단순히 왕궁 지하에 있는 얼음 창고를 주방으로 옮겨 온 게 아니었다.
 장기간 음식이나 그 재료를 보관하고 얼음을 만드니 언뜻 얼음 창고 같지만 그 편리함과 마법 물품이란 점을 생각하면······.
 ‘물건! 그것도 부르는 게 값인 돈 덩어리다!’
 누가 스크루지 내무경 아니랄까 봐 금전 감각 하나는 탁월한 자무엘은 단박에 냉장고의 가치를 깨달았다.
 아니, 깨닫는 데 그치지 않고 당장 달려들듯 황급히 이그리파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그리파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그리파가 이 냉장고를 만든 게 단순히 음식과 그 재료들을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란 것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넉넉한 적 없던 오랜 내무경 생활 끝에 얻은 관록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얼까? 전하께서 이 냉장고를 만든 또 다른 까닭이?’
 
 
 
 
 
 
 
 #프리? 외출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청량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
 이그리파는 세숫물을 들고 들어오는 에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스스 일어났다.
 막 잠에서 깨 아직 몽롱하니 정신이 나지 않는 것이다. 쩍 소리 나게 하품한 그는 꾸물꾸물 에린이 부어 놓은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
 “프하!”
 “여기요, 전하.”
 잠시 찰박이며 세수하던 이그리파는 에린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들었다.
 건성건성 얼굴과 손을 닦은 그는 다 쓴 수건을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사이 있었던 일과 오늘 일정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명색이 전속 시녀가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만 하기에 일정 등을 관리하는 비서 일을 맡긴 것이다. 그간 비서 일이 많이 익은 에린이 옷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며 간밤에 있었던 일과 오늘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드신 어윈 님과 헤로우파 님이 배탈 난 것 외에는 평온한 밤이었어요. 덕분에 대공 전하와의 아침 식사 후, 오후에 있을 대장장이 치프와의 만남 전까지 특별한 일정은 없으세요. 오전에 마법하고 신학 강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두 분 모두 탈이 나신지라······.”
 “한마디로 프리! 오늘 하루 자유라 이거군.”
 “예. 며칠 전부터 전하가 노래하신 대로예요.”
 이그리파는 만족스러운 에린의 대답에 싱긋 웃으며 셔츠 밑단을 바지 속으로 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지난 한 달간 이맘때면 언제나 그랬듯 활기찬 발걸음으로 아래층의 영광의 홀로 내려갔다.
 “전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운동 가세요?”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던 하인들과 새벽같이 나온 서리 등이 분분히 인사를 건네 왔다. 이그리파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화답하며 밖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했다.
 영광의 홀을 가로질러 짧은 회랑을 지나자 보기에도 육중한 문이 나타났다.
 드라셀 공국의 왕도인 가데스 성의 제일 심처 가데스 궁의 정문인 ‘광휘의 문’이었다.
 볼수록 신기한 남청빛 바위로 된 광휘의 문이 그 육중한 자태를 자랑하며 활짝 열려 있었다.
 한달음에 광휘의 문을 지난 이그리파는 짧은 층계참을 내려서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속보로 뛰듯이 걸어와 다소 숨찬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청량한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쉬기 위해서였다. 양팔을 들었다 내리며 심호흡한 그는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스트레칭을 하였다.
 우드득! 우득!
 밤새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며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었다.
 부쩍 살이 붙기는 했지만 여전히 앙상한 팔다리가 다소 격한 스트레칭에 법석을 떠는 것이다. 신체 말단 부위인 손발부터 시작해 무릎과 어깨, 허리와 목 순으로 굳어진 몸을 푼 그는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어디 그럼 시작해 볼까?”
 각오를 다지듯 중얼거린 이그리파는 크게 왼팔을 내둘렀다. 그러고는 이에 뒤질세라 뒤처진 오른발을 힘껏 내두르는 왼팔에 맞춰 재빨리 내밀었다.
 파워 워킹.
 양팔을 힘차게 흔들며 빠르게 걷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결코 운동량이 만만치 않은 운동이었다. 죽었다 되살아난 직후 허약한 몸 때문에 고심하던 이그리파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 파워 워킹이었다.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십육 년 생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낸, 그런 까닭에 기초 체력이 형편없는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운동이 거의 전무했다.
 기껏해야 가벼운 산책이나 조깅 그리고 지금 하는 파워 워킹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중 운동량이 많고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을 고르다 보니 부득불 파워 워킹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파워 워킹은 고사하고 쉬엄쉬엄하는 산책도 힘들었다.
 1킬로미터 안팎의 왕궁 성벽을 도는 데 반나절 가까이 걸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성벽을 네댓 바퀴 도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
 “일취월장, 아니 괄목상대인가?”
 피식! 싱겁게 웃은 이그리파는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성큼성큼 걷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 주려는 듯 그는 보폭을 넓히며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반듯하게 포장된 길을 따라 파워 워킹에 열중하던 이그리파는 5~6미터 높이의 성문 앞에 이르자 방향을 틀었다. 웅장한 성문을 축으로 왼쪽으로 꺾은 그는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자 성큼성큼 올라갔다.
 정해진 코스였다. 성문 근처에서 성벽에 올라 왕궁을 일주하는 건. 그날 기분에 따라 10미터 높이의 성벽을 내려오는 위치가 다르지만 성문 앞에서 성벽을 오르는 건, 한 달 전 운동을 시작한 이래 변함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오십니까?”
 “하하! 어째 갈수록 조금씩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성벽 위로 오르자 각기 묵직하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명 녘 단잠을 쫓으며 교대해 아침 식사 직후까지 경계를 서는 근위병들이었다.
 이그리파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알은척했다.
 “다들 수고. 곱트는 남 말 하지 말고 자기나 잘해. 엊그제 보니 매번 늦는다며 앞 근무자들 불만이 장난 아니더구만.”
 “에엑! 저, 전하. 누가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앞으로 잘해. 또 한 번 그런 소리 들리면 그땐 국물도 없을 테니.”
 “저, 전하!”
 이그리파는 험상궂은 얼굴로 울상 짓는 곱트를 뒤로한 채 거침없이 나아갔다.
 너비 1.5미터의 성벽이 무슨 경기장 트랙이라도 되는 양 그는 더한층 걷는 속도를 높였다.
 “훅! 훅! 훅!”
 규칙적인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며 성큼성큼 내딛는 발의 보폭이 다소 줄었다.
 하나 줄어든 보폭에 비해 앞뒤로 흔들리는 팔 동작이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팔 동작의 경우, 보폭보다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힘차게 걷는 게 파워 워킹임을 보여 주듯 더욱 힘 있게 움직였다.
 ‘후! 슬슬 땀이 배는 걸 보니 두 바퀴째, 그것도 두 번째 성탑 근처로군.’
 이그리파는 등과 가슴이 축축하니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리 달린 T형 십자가인 앵크Aankh를 닮은 왕궁 좌측, 창고 같은 마사가 딸린 연무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한창이었다. 드라셀 공국 제일의 무력이자 마지막 보루인 백사자 기사단원들이 여느 때처럼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그리파는 둘씩 짝 지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기사단원들을 훔쳐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하고 있는 파워 워킹에 충실하기로 한 그는 갈수록 우렁차지는 기합 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의 상태로는 한창 연무장에서 대련하는 기사단원들 같은 움직임은 무리였다.
 몰라보게 건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체력이나 근력 등이 형편없는지라 좀 더 몸을 만들어야 했다. 기사단원들처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 아니 검법 수련은 그다음 일이었다.
 ‘아니야. 그랬다간 죽었다 깨도 소드 마스터는 못 돼. 판타지의 꿈인 마법사는 글렀으니—마나 과민증인가 하는 희귀병이 나으며 생긴 후유증이란다. 전처럼 마법이나 마법 도구에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마나를 느끼기 힘들다던가? 어쨌든 어윈이 마법은 이론만으로 만족하라고 했다—그거라도 해 봐야지. 설마 지난 한 달간 열심히 운동했는데 검 하나 못 휘두르겠어?’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한 이그리파는 마음을 다잡듯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한시바삐 지금 하고 있는 파워 워킹을 끝내고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그는 더욱 힘껏 양팔을 내저었다.
 
 판그리온 드 로쉬.
 드라셀 공국 최강의 무력인 백사자 기사단 단장을 맡고 있는 청안 적발의 그는 무심코 귀를 후볐다.
 한창 대련 중인 수하 기사단원들을 감독하다 문득 헛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재차 들려오는 말소리에 앞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여실히 깨달았다.
 “전하, 방금 하신 말씀이······.”
 “그래, 판그리온. 나 검법 좀 가르쳐 줘.”
 16세라기보다 13~4세로 보이는 흑발 소년은 사뭇 진지했다. 콧등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을 생각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데 사십 평생 검을 수련한 그로서도 적잖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판그리온은 반갑고도 부담스러운 현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분명 눈앞의 흑발 소년, 한 달 전 소생한 뒤 부쩍 건강해진 이그리파가 검을 배우겠다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좀 더 정양이 필요한 그에게 검을 가르친다는 건 적잖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니할 말로 자칫 이그리파가 검을 배우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왜? 며칠 배우다 그만둘 것 같아서?”
 “아, 아닙니다, 전하.”
 판그리온은 농기 어린, 그렇지만 정곡을 찌르는 이그리파의 말에 황망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만 전하께서 다치실까 그게 걱정돼······.”
 “검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 각오도 안 했을까. 걱정하지 마.”
 판그리온은 싱긋 장담하는 이그리파에게 마주 웃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몸이 허약해 라인트 대공은 물론 온 공국민이 걱정하던 이그리파가 자청해 검을 배우겠다는 건 분명 환영할 일이었다. 특히 소생한 직후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역동적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음식들을 선보이는 등—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언제 또다시 앓아누울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급적 떠안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이 걱정은 하등 쓸데없는 기우였다.
 드라셀의 유일한 대신관인 헤로우파가 이그리파의 선천적인 지병인 마나 과민증이 완쾌됐다고 장담했으니. 하지만 내일은 고사하고 반나절 뒤도 모르는 게 사람 일 아니던가? 만에 하나 이그리파가 검을 배우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그 자신이나 공국에 불행한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 된다고 딱 잡아뗄 수도 없으니.’
 판그리온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연무장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훈련을 멈춘 기사단원들이 그의 결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기대와 우려, 걱정과 흥분 등이 반씩 어우러진 표정으로 굳게 다문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다들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리피슈!”
 “예, 단장님.”
 호명받은 기사단의 막내, 검고 푸른 오드 아이가 인상적인 리피슈가 힘찬 대답과 함께 뛰어나왔다. 판그리온은 한달음에 앞에 와 선 리피슈에게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서 전하께 맞는 연습용 검 한 자루 가져오게.”
 “옙!”
 “흐음··· 연습용 검이라······.”
 리피슈가 후다닥! 궁으로 뛰어감과 동시에 침음 어린 이그리파의 말이 들렸다.
 아무래도 진검이 아닌, 날이 없는 연습용 검을 가져오라 한 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기껏 검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는데 한낱 얇은 쇳조각에 불과한 연습용 검을 쥐여 준다면 누구나 불만일 터였다. 아니, 성미 고약한 이라면 사람 무시하냐며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그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었다.
 처음 검을 배우는 초심자에게 섬뜩하도록 날이 선 진검은 오히려 독이었다.
 단순히 구경할 때와 달리 직접 손에 쥐어진 검은 그 무게와 새파랗게 선 날이 무섭도록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그리파처럼 허약한 사람의 손에 진검이 들리면 검을 쥔 사람이나 그 주변의 사람들이 피를 보기 일쑤였다.
 그러니 아무리 못마땅해하더라도 검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연습용 검을 들려 주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전하, 원래 진검은······.”
 “알아. 지금 내 처지에 진검은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쯤은. 그보다 판그리온.”
 판그리온은 걱정과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는 이그리파의 말에 뜻밖이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전하.”
 “내가 마스터가 될 수 있을까?”
 “마스터요?”
 “응, 마스터.”
 판그리온은 주저 없는 이그리파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이없고 황당한 눈길로 빤히 답변을 기다리는 이그리파를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스터Master.
 어느 한 분야에서 범인은 넘볼 수 없는 경지를 이룬 이들에게 붙이는 최상의 존칭이었다.
 소위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는 이들을 존경과 경외를 담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만큼 이 마스터란 칭호는 명예로우면서도 얻기 힘든, 평범한 사람은 언감생심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호칭이었다.
 특히 검에 있어 마스터라 함은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들었다.
 객관적이고 뚜렷한 성과물이 있는 여타 분야와 달리 검은 그 경지를 입증할 방법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름난 기사를 꺾거나 숲 속 몬스터들의 제왕, 오우거를 사냥한 것을 마스터의 증거로 삼지만 그것들은 단지 뛰어난 기사와 사냥꾼의 증거일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나무토막을 살아 있는 것 같은 조각으로 승화시키는 명인과 같은 경지를 검으로 보인다는 것은······.
 “흠!”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판그리온은 나직한 헛기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따가운 이그리파의 눈총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 글쎄요. 워낙 늦게 시작하시는지라 뭐라 장담하기 어렵지만 부단히 노력하신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그렇습니다.”
 판그리온은 희망 섞인 이그리파의 물음에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사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한 이그리파의 꿈을 차마 매정하니 짓밟을 수 없어서였다.
 계면쩍은 미소 띤 그는 그저 한시바삐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런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왕궁 한편에 마련된 무기 창고로 검을 가지러 갔던 리피슈가 때마침 돌아온 것이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오는 리피슈를 반색하며 맞이했다.
 공손하니 리피슈가 내민 검은 길이 1미터의 롱 소드였다. 또래보다 왜소한 이그리파를 생각하면 다소 큰 감이 없지 않지만 가장 보편적인 검을 골라 온 것이다. 무엇보다 여타 롱 소드에 비해 두어 푼가량 가벼운 게 팔 힘이 부족한 이그리파가 쓰기 적당할 듯싶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처음 검을 쥐어 보는 이그리파가 어색하니 롱 소드를 들어 보였다.
 흡사 몽둥이 움켜쥐듯 거머쥔 그는 검을 치켜든 것도, 그렇다고 늘어뜨린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판그리온은 난생처음 검을 쥐어 보는 초심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그리파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며 말했다.
 “그렇게 꽉 움켜쥘 필요 없습니다, 전하.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 쥔 듯 만 듯 거머쥐시면 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어깨에서 힘 빼시고 자세도 낮추십시오. 지금 전하처럼 힘이 들어가서는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기 십상입니다.”
 “이, 이렇게?”
 “예. 그 상태로 조금만 더 몸을 낮추··· 예, 됐습니다.”
 판그리온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하는 이그리파를 마지막으로 교정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검을 비껴든 채 말 타듯 어정쩡하니 선 이그리파는 그런대로 봐 줄 만했다.
 검을 비롯한 무술을 배울 때 기본이 되는, 중심을 낮춰 몸을 안정시키고 드러나는 부위를 가급적 최소화하는 게 그럭저럭 된 것이다.
 문제는 이그리파가 이 자세를 얼마나 오래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판그리온은 당장 이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제 그 자세 그대로 연무장을 다섯 바퀴만 도십시오. 첫날부터 무리한다고 좋을 것 없으니 오늘 훈련은 그것만 하겠습니다. 단! 이때 유의하실 점은 절대 검이 밑으로 처져서는 안 된다는 것과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으응. 그렇지만 판그리온, 난······.”
 “그럼 시작하십시오. 시작!”
 판그리온은 당황하는 이그리파의 말을 냉큼 자르며 소리쳤다. 이그리파가 장담한 대로 검을 배울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 * *
 
 세상에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은?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이그리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바로 후회라고. 수수께끼를 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왜 후회가 맞는지 조목조목 가르쳐 줄 용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이그리파는 지금 검을 배우겠다고 한 걸 진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고작 연무장 다섯 바퀴였다.
 흔히 말하는 기마 자세 비슷한 자세로 300여 미터 둘레의 연무장을 미끄러지듯 딱 다섯 바퀴 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검을 배우기로 작심한 걸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드는 데는 이 다섯 바퀴로 충분했다.
 연무장을 다섯 바퀴 돌고 난 뒤, 이그리파는 꼴사납게도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어기적대지 않을 수 없었다.
 기마 자세 비슷한 자세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보니 두 다리와 허리, 검을 든 오른팔에 그만 알이 박인 것이다. 아직은 움직이는 데 그렇게 큰 지장은 없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근육통으로 생고생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이제와 못하겠다고 때려치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나이 체면이 있지, 작심삼일은 고사하고 첫날 아침 맛보기만 하고 그만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어느새 검을 배운다는 사실이 온 궁에 짜하게 퍼져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죽으나 사나 검을 배우는 수밖에 없었고, 그 생각만 하면······.
 “미쳤지, 미쳤어. 뭐 좋은 꼴 보겠다고 그런··· 하아!”
 이그리파는 오늘 하루 벌써 열두 번도 더 쉰 한숨을 또다시 쉬다 고개를 내저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인 부질없는 푸념과 후회를 그만두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로 작심한 그는 쓸데없는 상념을 쫓기 위해 탁자 위에 놓인 종을 집어 들었다.
 딸랑딸랑!
 명료한 종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부르셨어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린 이그리파는 시큰둥하니 에린에게 물었다.
 “오후에 보기로 한 대장장이 치프, 지금 볼 수 있지?”
 “지금 보시려면 볼 수야 있지만······.”
 눈치 하나는 타고난 에린이 슬쩍 훔쳐보며 말을 흐렸다.
 이그리파는 다소 난감한 기색의 에린을 짐짓 모른 체하며 말을 이었다.
 “입궁하라고 해. 아무래도 오후에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전하.”
 공손하니 에린이 물러가자 이그리파는 탁자 한편에 쌓인 책들 중 한 권을 빼 들었다.
 대장장이 치프가 입궁하기를 기다릴 동안, 무료하니 쓸데없는 상념이나 하느니 아직 미흡한 이곳 지식을 쌓으려는 것이다.
 책갈피를 끼워 둔 곳을 찾아서 펼친 그는 ≪대륙기大陸記≫란 거창한 제목이 붙은 책을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가 이는 가운데 조용히 독서에 열중하는 이그리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재미있고 흥미 있는지 에린을 찾기 전 심난해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그는 서재라고 하면 누구나 한 번쯤 그려 봤을 법한 장면—따사로운 햇살이 들이비치는 서재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소년, 혹은 소녀—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읽고 있는 책, ≪대륙기≫의 또 다른 명칭이 ≪한 권으로 떼는 유판테리아의 신화와 민담≫임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작자 미상의 이 책은 유판테리아 대륙에 사는 전 인종—인간은 물론 유사 인류까지—이 가장 애독하는 책이자, 음유시인과 유랑 극단들을 통해 그 내용이 지금도 노래되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니 아직은 어린(?) 이그리파가 흠뻑 빠져 독서에 열중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훗! 이건 완전 유판테리아 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로군. 현명한 공주 덕에 구국의 영웅이 된 바보 청년이라니. 가만! 이 시라센 왕국이란 곳은 분명······.”
 똑똑!
 웅얼대며 또 다른 책을 집어 들던 이그리파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멈칫 눈을 들었다.
 아니,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에린의 목소리에 채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전하, 분부하신 대장장이······.”
 “들어와.”
 빠끔히 문이 열리며 다소 상기된 에린이 작달막한 털북숭이 노인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드워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다부지고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은 다짜고짜 끌려온 게 못마땅한지 송구해하는 가운데 은연중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리파는 어영부영 허리를 굽히는 털북숭이 노인에게 거실 한가운데 있는 소파로 자리를 권했다.
 “아! 자기소개는 나중에 하고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예, 예.”
 엉거주춤 맞은편에 앉는 털북숭이 노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기 공왕인 그가 인사받기를 거절한 건 둘째 치더라도 반존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반쯤 얼빠진 표정의 털북숭이 노인은 뒤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납작궁 바닥에 엎어졌다.
 “에린, 치프께서 드실 다과 좀 내와.”
 “주, 죽여 주십시오, 전하.”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그리파였다. 은연중 뚱해하던 털북숭이 노인이 별안간 죽을죄 지은 사람처럼 굴자 황당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털북숭이 노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치프를 벌주거나 책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 하지만······.”
 “죽었다 되살아난 뒤 생긴 버릇이에요. 치프처럼 나이 많고 존경받을 만한 분께는 저도 모르게 존대하게 되거든요.”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였지만 털북숭이 노인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웃음 띤 에린의 보증이 있고서야 털북숭이 노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전하의 말씀대로예요. 전에도 저희 같은 아랫사람에게 친절하셨지만, 텔로스 님의 가호로 소생한 뒤로 더욱 관대하시고 자애로워지셨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오··· 오 그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털북숭이 노인은 감동하다 못해 감격에 겨워 죽을 듯했다.
 아니 이그리파, 그의 명이라면 당장이라도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 듯한 기세였다.
 이그리파는 내심 씁쓸한 입맛과 달리 감격에 겨워하는 털북숭이 노인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판테리아 대륙 내 여타 왕국들보다 덜하다지만 이곳 드라셀은 엄연한 신분제 사회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비견될 만큼 엄격한 다른 왕국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날 때부터 신분이 갈리고, 그 신분의 벽은 여간해서는 뛰어넘을 수 없었다.
 특히 서 유판테리아의 두 패권국 중 하나인 랑고이트 같은 경우, 눈앞의 대장장이 치프 같은 평민은 똑같은 사람임에도 귀족들에게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무리 드라셀이 타 왕국들에 비해 신분에 관대하다지만 이렇듯 감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털북숭이 노인을 감격시킨 이그리파는 에린이 다과를 내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달칵!
 에린이 견과가 든 쿠키와 아이스크림을 내놓자 털북숭이 노인의 얼굴에 또다시 감동이 물결쳤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 다부진 생김새만큼 한 고집 하게 생긴 노인이 봄볕에 녹는 눈처럼 풀어진 것이다.
 이그리파는 연신 목젖을 꼴딱거리는 털북숭이 노인이 마음 편히 아이스크림을 먹도록 먼저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제가 생업에 바쁜 치프를 이렇게 부른 건 부탁할 게 있어서예요. 치프도 알겠지만 목욕할 때나 주방에서 요리 등을 할 때는 물을 많이 쓰면서도 번거롭게 물을 길어서 쓰잖아요.”
 “그, 그렇습지요.”
 조심스럽지만 부지런히 아이스크림을 떠 넣던 털북숭이 노인이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궁에 수도를 깔 생각이에요. 우선은 시범적으로 주방과 제 거처 한편에 만들 욕실에 깔까 하는데, 그러자면 동관이 필요하거든요.”
 “동관 말입니까?”
 “예. 일정 규격에 맞춰 구리나 황동으로 만든 관이 다수 필요해요. 게다가 물탱크 내벽으로 쓸 동판도 적잖이 필요하고. 아! 여기 제가 대충 생각한 동관의 크기와 길이가 있으니 한번 보고 말해 보세요.”
 돌돌 말린 양피지를 건네받은 털북숭이 노인은 한동안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 안 가는 것이 있는지 조심스러운 얼굴로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저··· 전하, 보아하니 이 옆에 적힌 게 동관하고 동판의 수치인 것 같은데 이건 어떻게 읽는 겁니까?”
 “아! 제가 아라비아 숫자로만 써 놓고 대륙어로는 써 놓지 않았군요.”
 “아라비아 숫자요?”
 “제가 전생에 쓰던···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보세요, 대륙어로 숫자를 표시할 때는 일부터 십까지는 그럭저럭 편해요. 이렇게 일부터 사까지는 수직으로 선을 하나씩 더해 가다 오에서 빗금을 그어 주고, 십은 브이, 아니 쐐기 모양을 그려 주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 가령 백사십팔을 쓰면 어떻죠? 쐐기 모양을 중첩해 백 단위를 나타내도 이렇게 쓰는데 오래 걸리고 한 번에 알아보기 힘들지요?”
 “그, 그렇습니다요.”
 이그리파는 대륙어로 쓰인 백사십팔을 보고 고개를 주억이는 털북숭이 노인에게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런 다음 보란 듯이 대륙어로 쓰인 숫자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백사십팔을 적었다.
 “아! 이, 이건······.”
 “예. 쓰기도 쉽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일부터 구까지 숫자마다 모양이 다 다르거든요. 게다가 아무리 큰 수라도, 가령 만일이나 천십팔 같은 수도 영이란 수를 쓰면 이렇게 쉽게 쓸 수 있죠. 배우기도 쉬워 몇 번만 써 보면 영감님도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있는 에린이나 궁에 있는 사람 모두 얼마 전부터 몇 번 써 보고 쉽게 배웠으니까요.”
 친절하게 일부터 십까지 그리고 몇몇 예시를 보여 준 이그리파는 털북숭이 노인에게 깃털 펜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놀라 휘둥그런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말고 직접 한번 써 보라는 것이다.
 엉겁결에 깃털 펜을 받아 든 털북숭이 노인은 서툰 손길로 펜을 놀렸다.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삐뚤빼뚤 글 연습을 하듯 그는 손에 쥔 깃털 펜을 놓을 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라비아 숫자를 얼추 깨쳤는지 털북숭이 노인은 양피지로 눈을 돌렸다.
 동관을 나타내는 기다란 직사각형과 원, 동판을 뜻하는 정사각형과 이것들의 길이를 나타내는 수치가 전부인 양피지를 그는 그야말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특히 ‘S’ 자와 ‘ㄱ’ 자로 굽은 관과 수도꼭지에 해당하는 밸브, 관과 관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엉성한 설계도를 놓지 못하던 그는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이 거반 다 녹은 뒤에야 다문 입을 열었다.
 “흠! 관의 길이가 길어 연구 좀 해 봐야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별 어려움 없이 만들 수 있다니. 하면 언제쯤이면 이것들을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동판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동관들은 한 사오 일은 지나야······.”
 “그럼 완성되는 대로 다시 한 번 찾아와요.”
 “걱정 마십시오, 전하. 성내의 모든 대장장이들을 닦달해서라도 나흘 뒤에는 전하께서 원하시는 동관을 갖고 꼭 찾아뵙겠습니다.”
 이그리파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털북숭이 노인에게 미소 짓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대장장이 치프 노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웃지 마. 뭐가 그렇게 우습다고 그래.”
 “그, 그렇지만 그 치프··· 아나톨 영감님의 마지막 말이 우습잖아요. 한참을 주저하며 망설이다 넙죽 엎드려 부탁한다는 게 손자들 가져다주게 쿠키 좀 나눠 달라는 거라니. 호호! 전 그 영감님이 너무 진지해 누굴 살려 달라거나 하는 줄 알았다고요.”
 이그리파는 조금 전 물러간 대장장이 치프, 아나톨 노인의 행동을 비웃는 에린을 바라보다 팍 한숨 쉬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지금 에린이 딱 그 짝이었다.
 처음 아이스크림과 쿠키를 맛보았을 때 자신이 어떠했는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까맣게 잊은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고, 요사이 총애를 받는다지만 너무 버릇이 없어진 것이다.
 ‘이 기회에 따끔하게 한번··· 아서라. 괜히 그랬다가 울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
 이그리파는 절레절레 고개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금 같은 자유 시간을 에린과 쓸데없는 실랑이 하며 보내고 싶지 않았다.
 훌쩍 방을 나선 그는 지난 한 달간 틈틈이 해 온 왕궁 탐사를 끝내기 위해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지하 2층까지 합쳐 총 5층인 왕궁은 그 웅장한 크기만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단일 건물에 크고 작은 각종 방이 백여 개가 넘는 데다 각 방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더군다나 간혹 비밀의 방과 통로마저 발견되는지라 탐험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흠··· 어제까지 동관東館은 다 살펴봤으니 오늘은······.”
 “오늘 같은 날 페레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가데스 성은 참 멋질 텐데.”
 “페레스 언덕?”
 이그리파는 총총 뒤따르는 에린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에린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페레스 언덕은 가데스 성 동문 밖 할리스 강변에 자리한 언덕이었다.
 드라셀 공국의 젖줄이자 가데스 성 남쪽을 휘감아 도는 할리스 강과 가데스 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마디로 지금 에린은 왕궁을 나서 가데스 성 밖으로 놀러 가자고 꾀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그리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작스레 변한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휴식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폴 아저씨에게 도시락 준비하라고 할까요?”
 “도시락은 무슨.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좀 사 가.”
 이그리파는 눈치 빠른 에린의 물음에 대답하며 발길을 돌렸다.
 공공연히 왕궁을 나가려 했다가는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는지라 며칠 전 발견한 비밀 통로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그는 침실의 한쪽 벽, 그러니까 침대 맞은편 화목한 일가족의 초상화와 두 구의 갑옷으로 장식된 벽 앞에 멈춰 섰다.
 끼릭! 그그그긍!
 초상화를 가운데 두고 세워진 갑옷 중 왼쪽 갑옷의 투구를 오른쪽으로 반쯤 돌리자 나직하고도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비밀스럽게 설치된 기계 장치가 움직이며 초상화가 걸린 벽 뒤로 감춰진 비밀 통로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그리파는 서서히 드러나는 비밀 통로를 지켜보다 벽난로로 다가가 불을 켜는 부시와 초를 챙겼다. 그런 다음 놀라 망연해하는 에린에게 이것들을 건넨 후, 성큼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저, 전하.”
 퍼뜩 정신을 차린 에린과 서너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비밀 통로가 자동적으로 닫히며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지만 비밀 통로가 닫히는 데 놀란 에린이 서둘러 촛불을 켠 까닭에 곧 환해졌다.
 촛불 아래 드러난 비밀 통로는 역시 비밀 통로였다.
 음침한 데다 어딘지 괴기스러운 비밀 통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지 바닥에는 먼지가, 벽과 천장에는 거미줄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벽에 걸려 있던 횃불마저도 기름이 바짝 말라 있었다.
 “전하. 그, 그냥 궁을 탐사하시는 게······.”
 “무슨 소리야. 일단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히잉.”
 이그리파는 칭얼거리는 에린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확인까지 했지만 직접 탐사하는 건 그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뢰밭 위를 걷듯 한동안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그는 이내 발걸음을 빨리했다.
 처음 들어온 데다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아 조심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이 겨우 함께 지나갈 법한 비밀 통로는 어둡고 지저분할 뿐 위험하거나 하지 않았다. 흔히 비밀 통로 하면 연상되는, 수많은 갈림길의 미로가 아닌지라 꾸불꾸불한 외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터벅터벅 가물대는 촛불에 의지해 걷던 이그리파는 준비한 촛불이 4분의 1로 줄자 걸음을 멈췄다.
 마침내 한없이 계속 이어질 것 같던 비밀 통로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다, 다 온 건가요?”
 이그리파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쫓아다니는 어린애처럼 따라오던 에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장치만 찾으면······.”
 “저거 아닐까요? 저 횃불 고리 밑에 있는 독수리 머리.”
 “어디?”
 촛불을 들어 막다른 골목 같은 비밀 통로를 살피던 이그리파는 에린이 가리킨 곳을 살펴보았다. 이내, 횃불 고리 밑 벽에 부조한 조각처럼 붙어 있는 독수리 머리를 잡아 돌렸다.
 그그긍!
 소리가 일며 머리 위로 빛줄기가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앞을 가로막은 벽이 밀려 나오며 계단이 만들어졌다.
 “호오! 이거······.”
 생각 외로 정교한 비밀 통로의 장치에 이그리파는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일단 어둡고 퀴퀴한 비밀 통로를 벗어나는 게 먼저인지라 그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에? 여긴······.”
 “왜? 어딘데 그래?”
 이그리파는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펴보던 에린에게 다급히 물었다.
 과수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심어진 숲을 둘러보다 당황하는 게 심상찮아서였다.
 다행히 위험하거나 그런 곳은 아닌 듯했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불안해하는 빛이 없는 걸 보면. 비밀 통로의 출구가 뜻밖의 장소라 당황한 거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짐작은 어느새 침착해진 에린의 대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왕실 과수원 같아서요. 가데스 인근의 숲이라고는 왕실 과수원하고 성 밖 북서쪽의 흑림뿐인데, 흑림은 성에서 반나절가량 떨어져 있으니······.”
 “엑! 그럼 페레스 언덕 근처란 말이야?”
 이그리파는 송구해하는 에린의 모습에 맥이 빠졌다.
 그가 이렇게 왕궁을 나선 건 단순히 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에린의 말처럼 페레스 언덕에 올라 기분 전환할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데스 성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 세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과 그 이하 계층의 실상을 알기 위해.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