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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왕번 1권(1)

2017.05.17 조회 2,852 추천 19


 * 序-꽃은 남에서 피어 북으로 올라간다
 
 당唐 초初.
 천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수隋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한때 도탄에 빠진 적도 있으나, 항거해 봉기한 호걸들로 인하여 양제煬帝가 밀려나고 태원 유수 이연이 당을 세움과 함께 아들 이세민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시작된 안정이었다.
 태종이 된 이세민은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용조의 제도로 세금을 감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 국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무역을 장려하고 크게 법을 강화시켰다.
 이로 인해 천하가 나날이 번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 역시 전례 없이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중원사 최고의 황금기를 이루었다고 해야 더 옳았다.
 수양제의 폭정에 맞서 일어난 호걸들이 당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데 이어, 건국의 부작용으로 이어진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 호족들의 반란 때도 진압군과 함께 싸웠고, 이를 숭상한 이세민이 각처의 무림 방파들을 지방 군벌로 하여 치안의 발판으로 삼았기에 이루어진 황금기였다.
 두 가지 제도로서 이때 시작된 것이 행行과 용勇 제도였다. 행은 무역을 장려하는 호부의 부서였고, 용은 지역을 지키는 지방 군벌의 제도로서 강호 무림 방파들을 법이 미치지 않는 열악한 지역을 관과 함께 지키는 자치 방어 제도로서, 이 제도가 천 년에 거쳐 양민들과 중원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일컬어 천하인들은 이를 정관의 치治라고 일컬었다.
 중원의 무문武門들이 크게 개화하기 시작한 시대.
 소림사가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가 된 것도 이 시대였다.
 남북조에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정착해 무승의 도를 연 이후 소림무예가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원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이세민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된 일로서 수양제의 폭정에 맞선 호걸들이 이연을 도와 당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천하는 바로 안정되지 않았었다.
 수양제의 심복이었던 자들이 계속 저항했기 때문으로, 그중 왕세충은 수양제의 아들인 애제哀帝를 섬겼던 장수였다.
 수나라가 망하자 그는 하남 일대를 장악해 정나라라 칭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당에 맞섰다.
 이에 고조로 등극한 이연은 아들 이세민을 하남으로 보내 난을 진압케 했으나 왕세충의 세력이 약하지 않아 이세민은 첫 싸움에서 크게 패해 쫓기게 된 바 있었다.
 이때 소림의 무승들이 떨치고 일어나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 주는 등 구명의 은혜를 베풀었다.
 당황실록에까지 기록된 일로서, 보답코자 이세민은 황제가 된 후 소실봉 일대의 땅을 영지로 내리고, 소림에 무승제도(승병)를 허가하는 등 선종禪宗을 크게 부흥케 했다. 계기가 되어 소림의 명성은 천하를 흔들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무승제도가 계종으로 확산되어 불문이면서도 소림은 중원 무림의 큰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시대의 무협들은 자부심이 높았다.
 향용제가 실시되면서 각 방파들은 다투어 세력을 확장했고, 서로 간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비무대회를 여는 등 수시로 행사들을 치렀는데, 이것이 또한 한 전통이 되어 춘추영웅군림대회春秋英雄君臨大會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화남, 화중, 화서, 화북, 중원 전역의 방파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지역별로 예선전을 치르고, 여기에서 우승한 방파들이 최종적으로 중추절에 운집해 천하의 고수들과 함께 으뜸을 가리는 대회였다.
 군림전과 영웅전, 둘로 나누어 치르는 대회로서, 군림전은 각 방파에서 엄선한 수하들을 출전시켜 기예와 조직력을 겨루는 단체전이었고, 영웅전은 각처의 고수들이 개인적으로 출전해 고하를 겨루는 시합이었다.
 그러므로 군림전에는 개인이 출전하지 않았다. 가을에 열리는 결승전과 함께 열리는 영웅전에만 출전했고, 이로 인해 두 시합이 함께 열리는 중추대회를 총칭해 춘추영웅군림대회라 일컬었다.
 중원 전역을 아우르는 대회인 만큼 당연히 승리한 방파나 우승자의 명예는 컸다.
 방파는 만방에 위엄을 떨쳤고, 개인 역시 천하 서열의 고수로 명성을 떨침과 함께 무천록武天錄에 이름을 남겼다.
 춘추영웅군림대회와 함께 시작된 전통 중 하나로서 현존하는 최강의 고수들을 일에서 백까지 기록해 남기는 무록이었다.
 상금 역시 거대했다.
 우승한 방파와 고수들을 축하하기 위해 천하 각 방파가 출자한 것으로, 두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각각 오백 냥의 금자가 안겨졌다. 명예와 부를 함께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시합은 치열했다.
 갖가지 안전조치를 취하고 있었지만 몸담은 방파와 사문의 명예를 위해, 혹은 개인의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출전한 인물들 모두가 사력을 다해 격돌함으로 대회 때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 역시 수월찮게 나오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출전했다는 하나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우승을 위해 출전자들은 혼신의 투지를 불태웠다.
 당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무림의 황금기.
 측천무후의 등장을 지나 시대는 차츰 당의 후기로 넘어가고 있었으나 대회는 무림의 전통으로 남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병가의 보도
 
 귀양貴陽.
 “와아-!”
 둥둥둥둥둥둥······!
 삼월三月이 되자 또 화계평花界坪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귀주무투대회貴州武鬪大會가 시작된 것으로 귀주성 도처의 방파, 무인들이 운집해 올해도 서로의 기량을 과시하는 시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춘추대회의 지역 예선인 셈이다.
 대다수의 성省들이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승하는 방파가 지역을 대표해 중추절에 열리는 군림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서 귀주에서는 십 년이 넘게 이곳 화계평에서 예선전이 치러지고 있었다.
 귀주의 중심인 지역이기도 하지만 적검부赤劍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주 무림의 최대 방파인 곳으로서 귀양성을 중심으로 안순安順, 검서黔西, 정양井陽, 독산獨山 등 중부를 둘러 가며 동맹 방파들을 둔 대방파였다.
 그런 만큼 시합은 형식적일 뿐이었다. 당 초기, 처음 향용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각처의 방파들이 치열히 최강을 다투며 각축전을 벌였지만 두 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지닌 역량에 따라 모두가 자리를 잡아, 시합을 해도 별다른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방파가 가장 강한 방파인 셈이었다.
 그러나 귀주는 두 세기 동안 춘추대회에 출전해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남의 귀퉁이에 자리해 아직까지 한 번도 특출한 인물이나 큰 세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치 형편이 곤궁하기도 했다.
 중원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서, 화남은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아 어디서나 삼모작이 가능했지만 안타깝게도 귀주는 그렇지도 못했다.
 대부분이 험산으로 뒤덮인 고산 지역으로서 사철 안개가 끼어 일 년이 다 가도 맑은 날이 별로 없고, 어디를 가도 넓은 평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스갯말로 지역민의 주머니에 세 푼도 들어 있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 귀주였던 것이다.
 반면 궂은일은 많았다.
 사방이 산으로 뒤덮인 곳이다 보니 각지에서 죄를 짓고 수배된 범죄자들과 공적들이 끊임없이 도망쳐 들어와 민간을 괴롭히고 세를 구축하기 위해 산채를 짓는 등 혈겁을 일으켜 하루가 멀다 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방파들 간에 뜻도 잘 맞지 않았다.
 적검부가 맹주인 양 하고는 있지만 중부에서나 그럴 뿐 타 지역에서는 인정하지도 않았다.
 적검부 외에도 외곽을 둘러 가며 귀주에는 육반六盤, 사남思南, 천주天柱, 여평黎平 등 네 개의 동맹이 더 있었는데 피차 지존입네 하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에서조차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내륙을 지키기 위해 경계만 넓혀 놓았을 뿐이지 일 년 가야 사흘 연속 맑은 날이 없을 정도로 거친 지역에, 농사조차 변변히 지을 수 없는 곳이다 보니 말만 나라 안이지 세외나 다름없었다.
 지역마다 현이 있고, 태수, 현감들이 있었지만 죄다 좌천되어 밀려난 관료들로서 치안조차 돌보지 않고 그냥 자리매김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끊임없이 사고가 일어나도 ‘어차피 버린 곳’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식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내막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라 안인데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현실이었다.
 그만치 형편이 어려운 곳일 뿐만 아니라, 보태어 까닭이 하나 더 있기도 했는데, 귀주에는 한족漢族이 거의 살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골짜기마다 이족異族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 칠 할이 동북東北에서 남하해 정착한 묘족苗族이거나 안남(베트남), 신강新疆 등지에서 이주한 회족, 장족長族들이었다.
 이렇다 보니 관사는 있으나 마나, 지역민들 역시 관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마디로 골치 아픈 지역이었는데, 이런 상태에 방파들까지 합심이 안 되니 꼴이 제대로 될 게 무언가.
 이로 인해 무림에서도 외따로 떨어지다시피 한 채 별 비중이 없었고, 대회가 열리고 있는 이유조차 하나였다.
 전국대회에 나가 봐야 성과도 없고 출전하는 곳까지 정해져 있어 치르나 마나 한 대회였지만 그래도 열리는 까닭은 내로라하는 동맹들이 서로의 동태를 살피자는 것이었다.
 우습지만 이런 것도 친목이라 해야 할지 시합은 대충대충, 대회를 핑계로 일 년에 한 번씩 모여 혹시라도 저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지 않았나, 눈치를 살피는 게 주목적이었던 것.
 그래도 열기는 하나는 후끈했다.
 능구렁이 같은 패주들이야 무슨 속셈을 지녔건 출전하는 인물들은 명성을 떨치기 좋았고, 특히 영웅을 꿈꾸는 귀주의 젊은이들에게는 매해 열리는 등용문이 되어 있었다.
 상당한 실력을 보이면 지켜보던 동맹들이 손을 뻗어 각 방파에 입문할 기회를 얻었고, 아주 특출한 경우는 간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상금 역시 적지는 않았다.
 은자 백 냥으로서, 논 한 마지기가 닷 냥인 시대니 스무 마지기에 달하는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
 떠나서라도 귀주 무림에 있어서는 축제였다.
 타 성에서야 알아주건 말건 도처의 무사들이 속속히 몰려와 시합을 지켜보는 등 잔치를 즐겼고, 해마다 두각을 나타내는 신인들이 등장했으며, 올해도 똑같이 상당한 실력의 젊은이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진시 무렵.
 둥! 둥! 둥······!
 귀주에서는 드물다 싶게 넓은 화계평에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며 계속 시합이 속개되었다.
 대부분의 성들이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나눠 칠일에 걸쳐 대회를 치렀는데 이는 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체전은 도처 방파들의 수하들이 쉰 명 단위로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주성의 단체전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타 성에서는 각 방파가 특출한 수하들을 엄선하는 등 춘추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시합을 치렀고, 개인전보다 훨씬 중히 여겼으나, 귀주에서는 단체전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이른 대로 각 동맹이 서로를 견제하기 때문이었다.
 피차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다 했듯 전력을 노출하기 꺼려했고, 행여 실력 있는 수하들을 출전시켜 패하는 날이면 얕보일까 우려해 하급 수하들을 보내 대강 시합을 치르곤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특별히 볼만하지 않았고, 개최되는 기간 역시 달랐다. 타 성에서는 단체전을 닷새나 엿새로 잡고 나머지 하루 이틀을 기해 개인전을 치렀는데, 귀주에서는 나흘 안에 벼락치기로 단체전을 끝내고 개인전을 사흘이나 열었다.
 서로의 동태를 살피는 등 남들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이었다.
 어쨌건 이로 인해 귀주의 개인전은 타 성에 비해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고수들 위주로 치열하게 시합이 치러지는 타 성들과는 달리, 보다 많은 무사들이 출전해 실력을 겨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날 하루는 출전을 희망하는 무사들 모두가 나와 실력을 겨루는 예선전이 되었고, 이틀째는 선발전에서 승리한 인물들이 승부하는 준결승전, 마지막 사흘째가 예선, 준결승전을 거쳐 올라온 인물들이 실력을 겨루는 최종 결승전이 되었다.
 대회가 시작된 지 엿새째, 단체전은 이틀 전에 끝나 있었고, 개인전 중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수천에 달하는 군중들이 구름처럼 운집한 속에 평원의 중앙에 가로세로 십 장 규모의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비무대 동쪽에는 대회를 주최하는 적검부를 비롯한 육반, 사남, 천주, 여평, 다섯 개 동맹의 패주들과 휘하 동맹 방파의 웅주들이 자리한 귀빈석이, 비무대 옆, 서, 남, 북에 예선을 뚫고 올라온 무사들이 앉아 있었다.
 뒤에 보이는 화령산의 아래에는 적검부가 웅장하게 우뚝 서 있었고.
 그 밖에 비무대 옆에는 따로 목검, 목봉 등 각종 병기들과 호구를 준비한 거치대와 웅장한 대고大鼓가 세워져 있었으며, 시합을 보러 온 군중들은 그 뒤쪽, 평원 전체를 메운 채 자리하고 있었다.
 심판은 다섯 명으로서 공정을 기하기 위해 비무대의 아래쪽 동서남북에 한 사람씩, 주 심판관만이 작은 삼각기 하나를 쥐고 비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칠순가량의 나이에 청삼 차림, 서릿발같이 하얗게 센 머릿결을 지닌, 세모꼴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이 이는 인물이 시합을 기다리는 무사들과 군웅들을 향해 웅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닷새에 걸쳐 대회를 빛내 주신 영웅호걸들 및 찾아와 주신 전역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아시다시피 이 대회는 우리 귀주 무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서, 태종 황제 이후 반백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유서 깊은 대회올시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대회를 거친 유수한 고수들이 귀주 무림의 명숙이 되었고, 나아가 우리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기도 했소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많은 고수들이 출전해 높은 기량을 보이고 계신데, 미루어 또 한 번 귀주 무림의 명성을 드높이는 장이 될 것 같소이다!”
 내가고수인 듯 음성은 평원 구석구석으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어제 하루 오백여 호걸들이 출전해 기량을 겨룬바, 절반인 이백쉰네 분이 예선전을 통과하셨는데, 오늘은 이 중에서 서른두 분을 선출하는 준결승전을 치르겠소이다! 다소 무리가 가겠지만 세 번 시합을 치르는 것으로, 이분들이 최종 결승전에 오르시는 것이올시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진병眞兵은 불허, 거치대에 준비된 목검, 목봉 등을 사용해야 하며, 격공장력과 암기의 사용 역시 금하고 있소이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호구를 입기를 권하고 있지만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분들이 계시므로 자유의사에 맡기겠소이다! 그럼 어제에 이어 이일 차 개인전 준결승전을 시작하겠소이다!”
 “와아-!”
 둥! 둥! 둥······!
 화계평 전체가 진동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준결승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회의 규정은 간단했다.
 출전을 원하는 사람은 단체전이 열리는 기간 안에 출전 신청을 하고, 시합이 시작되면 첫날 실력을 겨뤄 그중 절반이 남는다.
 이틀째에는 삼분의 일만 남게 하고, 마지막 날에 남은 그들이 겨뤄 마지막 우승자를 결정하는 형식이었다.
 언급되었듯 안전을 기해 개인의 무기나 진병은 사용치 못하게 되어 있었고, 암기 및 격공장력의 사용도 금지되어 있었다.
 거치대에 예치된 목검 등으로 승부를 내되, 회칠을 해 사용함으로 맞는 쪽은 가격당한 부위에 흔적이 남아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동시에 서로를 가격하는 경우에는 심판관들이 가늠해 실력이 위라 보거나 조금이라도 먼저 친 사람을 승자로 간주했다.
 청과 백, 둘로 조를 나누고 두 개의 상자 속에 든 제비를 뽑아 겨룰 상대를 정했는데, 두 상자 안에는 숫자가 똑같이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일一을 뽑은 사람은 저쪽에서 같은 일을 뽑은 사람과 겨루고, 이二를 뽑은 사람은 또한 같은 이를 뽑은 사람과 겨루는 것이다.
 홀수가 될 경우에는 하나가 백지이며, 이를 뽑은 사람은 부전승으로 올라갔다.
 운도 상당히 작용하는 것으로, 이렇게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승까지 갈 실력이 있어도 월등한 실력자를 만나 첫 대결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승과는 관계가 없었다. 어차피 최종 우승자는 한 사람이므로, 언제가 되든 서로 겨뤄야 하고 실력이 못 미치면 탈락하기 때문이었다.
 제비뽑기는 시합 전에 미리 하며, 뽑은 숫자가 공시되어 다음 차례에 부딪칠 상대가 누군지 모두가 알 수 있게 정해져 있었다.
 매우 공정한 운영인 셈이었다.
 특징인 점은 출전한 무사들이 약관에서 서른 후반 정도의 나이로 대부분 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마흔 살 이상의 중진급 고수들이 출전하지 않고 거의 갓 무림에 출도한 청년들이거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층의 실력자들이 출전하는 것이었는데, 까닭은 타 성처럼 무작위로 도전하는 고수 중심의 비무대회가 아니라 사전 신청제 시합이기 때문이었다.
 귀주대회의 특징으로서 앞서 설명되었듯 귀주 무림의 개인전은 미리 출전 신청을 받았다.
 그런 만큼 명망을 가진 고수들은 신청을 꺼려했는데, 체면 문제로 우선 주위의 눈치를 살피게 되기 때문이었다.
 나이와 명망이 있는 상태에 사전 신청까지 하면서 나서기 무엇했던 것으로, 동급의 인물들이라도 출전하면 모르되 후진들과 겨루는 것이라 이겨도 괜스레 낯 뜨겁다.
 더 문제는 패할 경우였는데 아무리 고수라 해도 상당수 운이 작용하는 게 시합이고, 후진들이라 해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가 많아지게 되면 얼굴에 먹칠만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상금 역시 아주 많지는 않았다.
 이래서 중진급 이상의 고수들은 거의 출전하지 않았고, 한창 뻗어 가는 신진들의 잔치 마당이 되어 있었던 것.
 간략하게 대회 규정을 모두 설명한 청삼 노인은 이윽고 쥐고 있던 삼각기를 치켜 올리며 첫 대결자를 불러 올렸다.
 “규정대로 일번부터 시작하겠소이다! 청, 백, 양 진영, 일번을 뽑으신 두 분, 비무대에 올라 주십시오!”
 “와아······!”
 함성과 함께 비무대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각각 서른 살 초중반의 나이로 회의와 흑색 경장을 입은 인물들이었다.
 일어선 그들은 목검, 목봉 등이 비치된 병기대 쪽으로 가서 자신에 맞는 무기를 선택하고 놓여 있는 호구를 걸친 후 끈을 조였다.
 무사들마다 선호하는 무기가 다르듯 목검만 해도 꽤 여러 가지로서, 대장검 용도로 쓰는 넉 자 반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석 자 세 치의 기본 목검, 도刀 대용으로 사용하는 면이 넓은 목도까지 다양한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호구는 대나무를 쪼개 삶은 후 말려 가죽을 덧댄 보호용 장비였는데, 일반적으로 거추장스럽게 생각해 걸치지 않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착용하고 비무대에 올랐다.
 한 번으로 끝나는 승부가 아닌 만큼 부상을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압도해 깨끗하게 승부를 내면 좋겠지만 난타전일 경우 동시에 치고 맞는 예가 많았고, 목검이라 해도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맞은 곳이 결려 다음 시합을 치르는 데 지장이 있었고, 패하더라도 다친 곳 없이 내려가는 게 좋은 만큼 거추장스러워도 호구를 조이고 시합에 임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넉 자 길이의 목검을 선택했고, 비무대에 오르자 곧 심판관인 청삼 노인에게 묵례를 보인 후 포권을 취해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영통에서 온 장호올시다. 진전검이라는 별호를 지녔습니다. 높으신 가르침 받겠습니다.”
 “대백에서 온 적전수 문창선입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예의를 갖춰 인사했지만 한 치도 양보 없이 번쩍이며 서로를 주시하는 눈!
 “준비!”
 그와 함께 청삼 노인은 삼각기를 치켜 올리며 대결 준비를 지시했고, 두 사람은 즉시 시합선 앞으로 가 서로에게 목검을 겨누며 자세를 취했다.
 시합선은 일 장 간격으로 비무대 가운데에 그어진 두 개의 선이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다 싶은 순간.
 “시작!”
 “하아아압!”
 카카카카캉!
 “와아!”
 치켜 올라간 청삼 노인의 삼각기가 떨어져 내림과 함께 즉각 비무대 위에서 불꽃 튀는 대결이 벌어졌다.
 마주 선 두 사람이 호통을 터뜨리며 순간적으로 신형을 번뜩여 서로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 다 일차전을 넘기고 올라온 상태, 얼핏 보기에도 예사의 실력이 아니다.
 누구나 신청하면 출전할 수 있는 시합에 일차전이라야 한 번의 겨룸으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떠나서 성 단위의 비무대회에 어설픈 실력으로 출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격돌하자 바로 비무대 위에는 시커먼 검영이 일어났고, 번뜩이는 두 사람의 환영이 곳곳에서 번뜩였다.
 목검이라 해도 공력이 실려 부딪칠 때마다 쇳소리가 들릴 정도였고, 서로를 쳐 갈 때마다 일어나는 목검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바람 가르는 음향이 울렸다.
 숙련된 실력으로서 호구를 입었다 해도 정타를 맞으면 위험했고, 머리 부위를 잘못 맞으면 그 자리에서 절명할 수도 있었다.
 그런 목검이 순간순간 서로의 코앞에서 급소를 노리며 빗발같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중진급 인물들도 꺼려한다 했듯 이들이 바로 귀주 무림을 이끌고 갈 차세대들로서, 선배 잡아먹는 귀신들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아아압!”
 카카카캉! 캉!
 “와아-!”
 불꽃 튀는 격돌 속에 묘기가 나올 때마다 군중들은 갈채를 보내고 함성을 토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지켜보는 웅주들 역시 방심치 않고 대결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출전자들이었다.
 당장 벌여야 할 대결도 문제지만 누가 되건 상대를 물리친다고 생각하면 지금 대결을 벌이는 승자와 다음 시합에서 부딪칠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누가 어떤 무예를 쓰는지, 어떤 특기를 지녔는지 파악하는 게 유리하므로 다들 눈을 찢어지게 치켜뜨고 승부를 지켜봤다.
 함께 온 벗이 있는 출전자들은 전개되는 무예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출전자들만 앞 선에 나와 앉을 수 있었지만 시중을 드는 한 사람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 대부분의 출전자들이 마음도 안정시킬 겸 벗을 옆에 두고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치열하게 두 사람이 부딪치기를 반 각여.
 “하아압!”
 퍽!
 “흡······!”
 “승부! 진전검 장 대협 승!”
 “와아-!”
 첫 번째 승자가 가려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수월찮은 실력으로서 백중지세의 대결을 펼쳤으나 영통에서 왔다 한 장호의 실력이 좀 더 위였던 듯 삼백여 합 만에 그가 대백의 문창선을 꺾었던 것이다.
 소나기 같은 난타전 속에 간일발의 차이로 문창선의 허리를 가격했던 것.
 청삼 노인의 깃발이 장호를 가리키며 허공으로 올라감과 함께 장내에는 우레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고, 대결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포권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한 후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음 이번, 비무대로 올라와 주십시오!”
 더불어 청삼 노인은 두 번째 출전자를 불러 올렸고, 지켜보던 인물들은 저마다 앞서의 겨룸에 대한 평을 나눴다.
 “첫 대결부터 불꽃이 튀는군. 승리한 장호, 분명히 화산검華山劍이었지?”
 “그런 것 같아. 일어나는 검영이 매화가 나부끼는 형상이었어. 미루어 화산파의 옥매검법임이 분명한 것 같네. 끊이지 않고 완벽하게 수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정수인 것 같고. 틀림없이 화산의 속가야. 여간한 실력이 아닌데 스승이 누군지 모르겠군.”
 “만만하게 생각할 친구가 아닌 것 같아.”
 시합을 앞둔 출전자들은 더더욱 경계심을 곧추세웠다.
 제비뽑기로 결정 나긴 하겠지만 누가 다음 차례로 그와 싸우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준결승전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력이 처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아닌 경우라 해도 방심할 수 없어 초조함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속에 출전자들이 둘러앉은 서쪽 후미.
 유난히 눈길을 끄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스물너덧 살가량의 나이에 훤칠하다 싶을 정도로 훌쩍한 육 척의 키, 떡 벌어진 어깨에 칼날 같은 검미를 지닌 드물게 잘생겼다 싶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대부분의 출전자들이 시합에 대비해 간편한 경장만 입고 나온 것에 비해 옥색 경장 위에 진청색 금삼錦衫을 덧입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끌기도 했다.
 미루어 이름 있는 세가의 출신 같았는데 분명히 많은 출전자들 중에서도 돋보일 만치 잘생긴 청년이었다.
 부하인 듯 옆에 흑의를 입은 자그마한 청년 하나를 대동하고 있기까지 했다.
 아니, 흑의 청년을 작다 하기보다 금삼 청년의 키가 육 척이라 비교되어 작아 보인다고 하는 게 더 옳았다. 무인으로서는 작은 편인 게 맞지만 흑의 청년도 아주 작은 키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어 금삼 청년이 더욱 돋보이기도 했다.
 금삼 청년이 보기 드문 미남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흑의 청년도 만만치 않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영기가 발랄해 보인다고 할까.
 키는 좀 작다 쳐도 검게 그을린 갈색 피부에 통통, 동그란 형상의 얼굴, 재기가 넘쳐 보이는 작안雀眼을 지닌 모습으로 여간 복상이 아니었다.
 곧은 콧날에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술이 꽤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나이는 스물두엇 정도 같았지만 이런 용모의 사람들은 대부분 동안童顔이라 아직도 치기가 남아 있는 소년 같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공처럼 튀는 듯한 모습으로서 마찬가지로 드물게 잘생긴 귀염성을 지닌 청년인 셈이었다.
 당연한 일로서 부하가 잘나면 주인은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출전을 앞두고 걱정이 되는 듯 금삼 청년의 미간도 찌푸려져 있었다.
 “걱정이 앞서는군. 줄곧 지켜봤지만 다들 예사 실력이 아닌 듯하니. 어떻게든 결승까지는 가야 할 건데······!”
 흑의 청년을 보며 잔뜩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야, 진珍아. 삼십오번, 분명히 괜찮다 그랬지?”
 그러나 흑의 청년은 문제없다는 듯 송곳니를 빼물었다.
 “글쎄, 걱정 말라니까요? 분명히 도련님은 결승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말씀대로 다들 예사 실력이 아닌 것 같지만 도련님은 확실하게 상급에 속해요. 형산파의 도법을 쓰는 것 같았는데 상당히 강했지만 어딘지 완숙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원칙에 입각한 정직한 검을 전개하는 모습이 보였죠.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이런 경우는 시간을 주지 말고 시작에 제압해야 하는데, 침착하게 상대하시면 분명히 도련님이 이겨요! 그냥 말씀드린 대로만 하시면 돼요.”
 시합을 앞둔 주인을 격려하기 위함일까?
 다시 보니 왼쪽 송곳니까지 살짝 뻐드렁니였다.
 갖가지로 귀염성을 타고난 셈이다.
 “왼쪽이 비어 보인다고 했지?”
 흑의 청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공격이 시작되면 무조건 좌측으로! 제가 신호를 드릴게요.”
 금삼 청년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워낙 일이 중해서 말이다. 집안일도 그렇고 어떻게든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
 초조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저만치 비무대의 동쪽으로 가져갔다.
 언급되었듯 동쪽에는 대회를 주최하는 적검부를 비롯한 육반, 사남, 천주, 여평, 다섯 개 동맹의 패주들과 동맹 방파의 웅주들이 앉은 주최석이 있었는데,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앞 열의 중심이었다.
 한데 보자 거기에도 유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크게는 귀주 무림을 대표하는 동맹의 패주에 최소한 한 방파의 주인들이라 적은 연치라 해도 사십 대 초반, 모두가 나이 지긋한 웅풍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는데, 유독 가운데 한 자리를 젊은 처녀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히 특이한 일로서 흡사 누군가를 대신해 나온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앞 열 가운데라 했듯 있는 곳이 일반 웅주들의 자리가 아니라 패주들이 앉는 자리기 때문이었다.
 어느 행사를 가도 같은 일이지만 서열에 따라 최고 신분인 인물이 앞 열 가운데에 앉고 좌우로 동급이거나 비슷한 서열의 사람들이 자리하며, 그 뒤에 휘하의 웅주들이 앉는 게 상례였는데, 뜻밖에도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처녀가 귀주 무림을 이끌어 가는 최고 동맹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 있었던 것!
 자체만 해도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는데 모습 또한 과인했다.
 스물예닐곱 살가량의 나이에 남삼을 입고 있었는데, 앉아 있어도 훌쩍 커 보이는 후리후리한 여섯 척에 가까운 키에, 여자임에도 칼날같이 삐친 검미하며, 번쩍이는 정광이 일어나는 봉안鳳眼, 곧게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이 삼척동자가 봐도 고수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설상가상 빼어난 미모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걸女傑이라고 해야 할지 여성스러우면서도 남자 이상의 기도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패주인 인물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아 보일 정도였는데, 다만 옥玉의 티라면 절제된 표정에 피부가 희어서인지 찬바람이 느껴질 만큼 냉랭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석상같이 차가워 보이는 그런.
 옆에는 또한 육 척이 넘어 보이는 키에 항아리 같은 큰 체격을 지닌 메기수염의 육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비만한 모습으로서 살에 덮여 눈이 좁쌀처럼 작게 보였는데 깜박일 때마다 그 눈에서 섬전 같은 푸른 안광이 뻗어 나오는 인물이었다.
 귀주의 패주 중 한 사람임이 분명했는데 금삼 청년은 정확히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래도 저래도 우려스러운 기색으로.
 반면 흑의 청년은 오로지 비무대 쪽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주인인 금삼 청년에게조차 눈길을 돌리지 않고 비무대 한곳에만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
 “하아아압!”
 캉!
 “와아-!”
 이즈음 비무대 위에는 두 번째 출전자들이 올라가 또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역시 실력들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이 모두 날고뛰며 폭우 같은 검망을 퍼부어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고, 비무대 위가 검영으로 새카맣게 뒤덮여 보일 정도였다.
 ‘옳지! 그렇게, 그렇게!’
 한데 특이한 것은 지켜보는 흑의 청년의 시선이었다.
 귀염성 있는 얼굴에 원래도 재기가 넘쳐 보이는 작안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결을 지켜보는 시선, 눈동자가 그야말로 전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상하좌우, 비무대에서 날고뛰는 두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고 손을 쓰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는 듯하다.
 대결을 보면서 움찔움찔 손까지 놀리고 있을 정도.
 대단히 특이한 일이었다.
 보는 듯한 느낌은 들지만 실제로 겨루는 두 사람의 번뜩임은 검영 등에 파묻혀 육안으로는 거의 구별도 안 갔는데 설마 그가 정말 실전이나 다름없는 대결을 벌이고 있는 그들의 움직임을 다 살피고 있다는 것인지.
 사실일 경우라면 두 가지 가정을 들어야 했다.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보다 그가 월등한 무예를 지녔거나, 특별한 안공眼功을 수련했을 경우였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그에게 특별한 무예를 수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르면 기예를 숨길 수 있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는 법인데 그런 것도 없었고, 그냥 재기 넘쳐 보이는 청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민활하게 움직이는 시선이나 태도를 보면 겨루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는 것 같고.
 금삼 청년의 태도 역시 시종일관 같았다.
 상태를 보면 분명히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 같았지만 남들이 겨루는 것보다 주최석의 두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특이한 두 사람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 한 시진.
 “하아아압!”
 퍽!
 “승부!”
 “와아아아-!”
 지속해서 출전자들이 꼬리를 물고 대결을 벌이는 속에 시간은 사시巳時에 이르렀고, 마침내 금삼 청년의 차례가 온 것 같았다.
 “다음, 삼십오번 출전자, 비무대로 올라와 주십시오!”
 삼십오번.
 금삼 청년이 이야기했던 번호였다.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이 대결을 벌인다 했듯 금삼 청년도 삼십오번을 가졌던 것.
 “잘하셔야 해요, 도련님.”
 호명이 되자 금삼 청년은 힐끗, 한 번 더 주최석의 두 사람을 바라본 후 비무대 옆의 병기 거치대 쪽으로 다가갔다.
 큰 키인 만큼 허리춤에 넉 자 반의 대장검을 두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출전자들이 미리 병기를 풀고 나왔지만 그대로인 상태였고, 거치대 앞에서야 풀어 흑의 청년에게 건네줬다.
 그러면서도 덧옷은 입은 그대로.
 “바람막이는 벗는 게 낫잖아요?”
 “괜찮아. 인사를 해야 하니까 이대로 오르는 게 낫지.”
 “호구는요?”
 “다음 회에서부터 입지.”
 흑의 청년은 장검을 받아 들며 그에게 거추장스러운 덧옷을 벗기를 원했는데 그는 그냥 싸울 뜻을 보였고, 호구 역시 걸치지 않은 채 거치대에서 장검과 길이가 같은 넉 자 반의 목검을 뽑아 들고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우려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흑의 청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무대 옆에 섰고.
 비무대 위에는 같은 삼십오번을 지닌 다른 청년 하나가 한발 앞서 올라가 있었다.
 네모꼴의 얼굴, 다섯 척 반의 체격에 단단히 호구를 조여 입고 넉 자 길이에 폭이 넓은 목도木刀를 들고 있었는데, 상당히 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야기대로라면 형산파의 출신이라는 청년.
 그런데 묘한 것은 금삼 청년의 태도였다.
 비무대에 올라서도 그는 대결할 상대보다 주최석 쪽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는데, 입증이라도 하듯 또한 예상 밖의 태도를 보였다.
 다른 출전자들은 오르면 심판관에게 묵례를 취하고 상대에게 인사를 한 후 바로 대결을 벌였지만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묵례를 보이는가 싶더니 뜻밖에 몸을 돌려 가며 사방의 군웅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주최석 쪽을 향해 인사를 했던 것이다.
 한데 그의 인사말이 크게 뜻밖이었다.
 “수성水城 용담문龍潭門의 왕중악王重嶽, 패주님들을 위시한 명숙들께 인사 올립니다. 미흡한 사람이 참가할 대회가 아닌 것으로 아오나, 부친께서 창파創派를 하게 되어 사실을 알리고자 용기를 내어 출전하게 된 것입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 올릴 것이지만 많은 격려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창파라고?”
 “용담문?”
 순간 모두의 얼굴에 일제히 멈칫하는 기색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도처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역시 뜻밖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액면대로라면 금삼 청년의 이름은 왕중악, 집안에서 방파를 열게 되어 도처에 알릴 겸 출전했다는 뜻인데, 말이 쉬울 뿐 창파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대 이전처럼 도처가 비어 있기라도 하다면 모를까, 향용제가 시작되면서 사람이 사는 지역이라면 어디나 이미 영역으로 삼은 방파들이 있었으므로 우선 그들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주체하지 못할 만큼 큰 영역이라도 가진 곳이 있으면 모를까, 중원이 좁다 하고 모든 방파들이 세력을 늘려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남에게 영역을 양보할 리 없었고, 양보한다고 해도 열외의 일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명성이 있어야 했고, 타에 얕보이지 않고 지역을 지킬 수 있는 세력 역시 필요했다.
 누군가가 영역을 양보한다고 해도 무조건 방파를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신임을 얻고 관사의 허가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일단 모두가 인정할 정도의 명성과 실력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문제는 더 있었다. 측근 지역의 방파들에도 인정을 받고 우호를 돈독히 해야 했는데, 아닐 경우에는 바로 시비가 벌어질 수 있었다.
 거칠디거친 세계가 무림이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주위의 눈 밖에 나면 수하들의 사소한 시비조차 빌미가 되어 멸문지화를 입을 수 있었던 것.
 이로 인해 동맹도 결성되었다. 주위의 방파들과 유대 관계를 지니고 유사시 일어날 불상사에 대비하고자 힘 있는 세력을 중심으로 군소 방파들이 동맹을 이룬 채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명성과 당사자의 실력,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방파를 유지할 정도의 재력과 지역을 지킬 세력, 인맥까지 모두 갖춰야만 창립 가능한 게 방파인 것으로서,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금삼 청년, 왕중악의 집안이 이를 다 갖추었단 뜻이었다.
 무림인들 모두가 꿈꾸는 일이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무인들 모두가 꿈꾸는 일인 만큼 창파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구태여 이런 자리를 빌려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위 방파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사실을 알리고 인맥을 쫓아 인근 동맹에 가입만 하면 되면 것이다.
 그래도 소문은 나게 마련이었다. 실력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명성 역시 올라가게 마련이었고.
 이런 경우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귀주 각처의 명숙들과 군웅들이 모인 만큼 창파에 관한 일은 단숨에 널리 알릴 수 있겠지만, 자칫 실수하여 누군가에게 쉽게 패하기라도 하면 망신살이 뻗칠뿐더러 시작도 전에 타에 얕보여 하찮은 곳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왕중악은 비무대에 올라 창파 사실을 고했는데, 누가 생각해도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거참 이상하군. 창파한다니 축하할 일이지만 왜 하필 여기서······!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단 뜻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왕중악에게 우승을 넘볼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창파 사실과 함께 단숨에 방파의 명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았다.
 “그렇다 해도 좋지 않은걸? 그건 시작도 전에 우리가 이 정도다 하고 으스대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좋게만 생각할 리는 없지 않는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돈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자칫하면 시기부터 사기 쉽기도 하다.
 그러나 ‘왜?’ 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지니는 의혹이었고, 의외로 청년 왕중악이 의도한 바는 이뤄진 것 같았다.
 일찍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던 두 사람, 주최석에 앉은 남삼 처녀와 비둔한 체격의 육순 인물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스쳤던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왕중악의 말을 인식한 모습이었다.
 더불어 왕중악은 심판관과 상대 청년을 향하며 포권을 취해 보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비무 시합에서 알릴 일이 아니지만 사유가 있어서 한 것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싶군요. 가르침 받겠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이해했다.
 넓은 천하에 사람들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라 그러려니 한 것이었다. 실제로 비무대회에는 온갖 사연을 지니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사적인 은원 문제로 보복을 하기 위해 출전하는 경우도 많았고, 자리를 빌려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올라오는 이들도 상당했다.
 비하면 이런 정도쯤이야. 상대인 청년은 격려까지 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창파를 하신다니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소. 불초는 나주에서 온 최환이라 하오. 형산파의 속가인데, 왕 형의 지도를 받겠소이다.”
 “준비!”
 더불어 청삼 노인이 삼각기를 치켜 올렸고, 왕중악과 최환은 곧 시합선 앞으로 가 목검과 목도로 서로를 겨누었다.
 왕중악은 가볍게 목검을 두 손으로 잡고 앞으로 뻗은 중단 자세를 취했고, 최환은 비스듬히 목도를 옆으로 비껴 잡은 모습이었다.
 “시작!”
 “하아압!”
 카카캉!
 “흡······?”
 그와 함께 대결 역시 바로 시작되었다.
 자세를 잡자 청삼 노인은 치켰던 삼각기를 내려 신호를 보냈고, 순간 최환이 빛살같이 신형을 번뜩이며 전진, 목도를 휘둘러 무수한 도영을 왕중악에게 퍼부어 내면서였다.
 최환의 선공先攻.
 그러나 뜻밖에도 최환이 오히려 당황스러운 경호성을 토했다.
 쳐 가는 순간 왕중악의 신형이 쉭, 최환의 좌측으로 돌아가며 공격을 피해 내는가 싶더니 더불어 또한 폭우 같은 검망을 퍼부어 내었던 것이다.
 선공을 했지만 바로 역습을 당했던 것이다.
 마주 선 간격이 일 장임을 알고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의 길이가 있어 한 걸음만 내디디면 공격권인 것으로 시작하면 바로 마주쳐야 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중악은 피해 냄과 함께 바로 역공까지 퍼부었으니 적잖은 실력 차라 볼 수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상대의 공격 수법을 간파해 회피와 함께 반격까지 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수법은 노출, 허를 찔린 최환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촌각의 일이라 피할 수도 없고 몸조차 다 돌리기 어려운 셈이다.
 급히 허리를 틀어 퍼부어져 오는 왕중악의 공격을 간신히 차단했다.
 “하아압!”
 카카카카캉!
 “아······!”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황 중에 방어하긴 했지만 그런들 발은 이미 꼬여 있었고, 선기를 잡은 왕중악이 그에게 중심을 잡거나 반격을 가할 기회를 줄 리가 없다.
 주위가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폭우 같은 맹공을 퍼부어 연거푸 최환을 몰아붙였고, 최환은 가까스로 공격을 막으며 연타에 밀려 주춤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그러나 몸의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의 방어는 해 봐야 한계가 있었다.
 “하-!”
 퍽!
 “흡······!”
 시작된 지 불과 촌각, 입증이라도 하듯 폭우처럼 맹렬히 상단 공격을 퍼부어 최환을 몰아붙이던 왕중악이 호통을 치며 발을 교차시켜 한 번 더 좌측면으로 돌아감과 함께 수법을 바꿔 상단 공격에서 중단 비껴 치기를 감행했고, 최환은 속수무책으로 허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승부!”
 “우와······!”
 순간 심판관의 삼각기가 번쩍 치켜 올라갔고 사방에서 경탄성이 터졌다.
 지독히 신랄하고 깔끔한 솜씨! 삽시간이라 할 정도로 빠르게 승부를 결정지어 버린 왕중악의 실력에 다들 입이 벌어진 것이다.
 “창파 이야기를 하더니 저 친구, 실로 보통 실력이 아니군. 최환도 만만한 실력 같지는 않았는데 어린애 상대하듯 끝냈어!”
 “오늘 경기 중 처음인데? 수성의 용담문이라 했나?”
 “처음 듣지만 상당한 무위가 있는 곳이 아닐까 싶네. 저 친구, 우승도 노려 볼 만하겠어.”
 “어느 유파지?”
 “모르겠어. 특별한 수법을 쓴 게 아니라 폭우 속공으로 끝내 버린 셈이니까. 일단 대단히 빨라.”
 그대로 왕중악은 어떤 유파의 출신인지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몰아치기 상단 공격에 중단 치기로 간단히 승부를 결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다.
 “속도 하나만으로도 쾌검이라 할 만하군.”
 심판관인 청삼 노인이나 보고 있던 패주들 역시 눈에 기묘한 빛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드문 실력이라 생각했다. 대회를 통해 또 귀주 무림을 떨어 울릴 신예가 등장한 것일지도.
 창파까지 한다 하니 집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으므로 눈여겨봐야 했다.
 “잘하셨어요! 도련님!”
 그런 속에 왕중악은 비무대에서 내려왔고 흑의 청년이 싱글벙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다.
 왕중악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의외로 약했어. 말한 대로 별로 어렵지 않더군.”
 “우승까지 가죠. 실수만 하지 않으시면 될 거예요.”
 “해 보자!”
 자신이 붙은 듯 왕중악은 어깨를 으쓱거림과 함께 힐끗, 다시 주최석의 남삼 처녀와 비둔한 체격의 인물을 바라본 후 비무대에서 물러섰다.
 그로부터 다시 한 시진.
 “이십이번 출전!”
 “일차전에서 최환과 겨룬 친구다!”
 “와아-!”
 화계평이 들썩하는 함성과 함께 또 왕중악의 차례가 돌아왔다. 예선을 뚫고 올라온 이백오십여 출전자들이 치열하게 실력을 겨룬 결과 절반이 탈락된 속에 백이십여 명이 남게 되었고, 이들이 다시 실력을 겨뤄 또 절반을 남기는 이차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추첨에서 이십이번을 뽑은 왕중악이 역시 같은 번호를 뽑은 상대와 겨루게 되었던 것.
 호명과 함께 그는 다시 흑의 청년과 함께 비무대로 입장했다.
 한데 이때도 묘한 일이 있었다.
 “강한 상대예요, 도련님. 청성파의 속가제자 같은데, 사람들이 청풍적하검을 쓰는 것 같다고 해요. 잘은 모르겠지만 허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속도 역시 수월치 않아요.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예요. 다만 한 가지, 칼이 엉키면 그때마다 오른 무릎을 걷어 올려 상대를 가격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거리를 두지 마세요.”
 “알았다.”
 두 번째 상대는 도문영이라는 서른세 살가량의 청년이었는데, 비무대로 오르기 전, 두 번째 제비뽑기가 끝나고부터 흑의 청년이 계속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왕중악에게 알려 주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흡사 그는 출전한 인물들의 특성을 파악하려고 온 것 같았고, 참고해 왕중악은 대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 같았다.
 “수성에서 온 왕중악입니다. 높으신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금산의 도문영이오. 일차전에서 뵌바, 여간한 분이 아닌 것 같던데 잘 부탁드리겠소.”
 “준비!”
 일차전에서 창파 인사를 했으므로 이번에는 왕중악도 덧옷을 벗고 호구를 조여 입고 올랐고, 오르자 간단한 인사를 한 후 다시 도문영과 함께 시합선에서 마주 섰다.
 “시작!”
 “하아아압!”
 투카카카캉!
 그리고 이어진 대결, 접전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격돌음이 터지는 난타전으로 시작되었다.
 첫 시합에서 역습으로 상대를 제압한 왕중악이 두 번째는 벼락같이 먼저 선공을 가해 바로 목검에서 불꽃이 튈 정도의 격돌이 펼쳐졌던 것.
 흑의 청년이 일렀듯 도문영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첫 상대인 최환은 좌측면의 공격에 허를 지님으로써 쉽게 무너졌지만 도문영은 그보다 훨씬 강한 청년으로서 난타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피하지 않고 바로 왕중악의 공격을 맞받아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두 번째의 대결은 치열했다.
 악물린 어금니와 번쩍이는 눈과 눈! 진검이든 목검이든 거리를 두지 않고 맞붙어 겨루는 근접전의 위험성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무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것이었다.
 맞붙어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는 만큼 눈곱만치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바로 승부가 나고 말기 때문이었다.
 수법을 떠나 누가 실수를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겨룸인 셈!
 입증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공방을 주고받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여가가 없었다.
 피차 몸이 닿을 듯 가까운 근거리에서 폭우가 퍼부어지듯 번개같이 서로를 향해 숨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붓고 또한 날아오는 서로의 목검을 막으며 휘돌아 가는 필사적인 접전이 펼쳐진 것으로, 순간순간 서로의 칼끝이 얼굴, 팔, 목, 할 것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휘돌아 갔다.
 위험천만한 대결로서 섣불리 물러설 수도 없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몰아침으로 그럴 여유도 없고 밀리면 바로 허가 드러나 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압!”
 카앙-!
 한데 이런 근접전에서는 일률적으로 펼쳐지는 공통된 현상 하나가 있었다.
 대부분의 무사들이 검으로 싸울 때는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두고 칼끝으로 공방을 주고받는 게 상례인데(끝에서 한 자), 붙듯이 가까이서 부딪침으로 깊은 공격이 가해질 때가 많아 중간으로 검을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그럴 때는 칼이 엉키게 되어 대부분 몸싸움을 하게 되어 있었다. 엉킨 칼을 맞대고 서로를 밀어붙이면서 다시 떨어져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상황은 두 사람에게도 일어났다.
 양보 없이 맞붙어 공방을 주고받음으로써 한순간 서로의 칼이 중간에서 부딪치면서 맞붙듯 몸이 얽히게 되었던 것!
 한데 문제는 바로 이때 일어났다.
 “하압!”
 퍼퍽!
 “흡?”
 목검이 얽히자 상대와 떨어질 겸 재공격의 기회를 잡기 위해 도문영이 순간 오른 무릎을 걷어 올려 왕중악의 하체를 공격해 갔던 것인데, 이 수법이 문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또한 대부분의 무사들이 함께 무릎을 걷어 올려 상대의 하체 공격을 차단하게 마련이었는데, 이는 왕중악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도문영의 공격을 차단하며 순간 몸에 힘을 실어 그를 힘껏 밀어붙여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도문영은 당연히 크게 위험해지게 된다.
 불시의 무릎 치기라면 대부분 막아 내는 것으로 끝나지만 수법을 간파하고 떠밀어 버리기까지 한 것이니 한 발을 뗀 상태에서는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증명이라도 하듯 왕중악에게 떠밀린 도문영은 휘청, 몸의 중심을 잃고 엉거주춤 크게 뒤로 한 걸음 밀려나게 되었다.
 “하!”
 쉭!
 “아······!”
 “승부!”
 “와아-!”
 그리고 그것으로 또 승부가 나고 말았다.
 도문영이 중심을 잃고 밀려나는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중악이 바로 앞으로 전진, 섬전같이 앞으로 목검을 뻗어 그의 목에 들이대었던 것이다.
 “또 간단히 이겼다! 백중지세 같았는데!”
 청삼 노인의 삼각기가 올라가며 재차 화계평이 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군웅들이 거품을 물고 탄성을 토해 낸 것이었다.
 “왕중악이라는 저 친구, 진짜 보통 실력자가 아니군. 공격도 과감하고 방어도 아주 훌륭해! 상대의 허를 파악해 승기를 잡아내는 순발력은 완전히 발군이고!”
 실로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흑의 청년의 조언이 모두 먹혀들어 간 것이다.
 앞서 싸운 최환의 경우는 좌측 공격에 허가 보이니 돌아가며 제압하라 했고, 도문영은 검이 얽힐 때 바로 하체 공격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 기회를 노리라 한 조언이 다 적중했던 것!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모두 왕중악의 실력이었다. 대결을 벌이면서 한순간 상대의 수법을 간파해 제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더 전에 간파했다 해도 그 스스로 상대의 허를 찾아 승부를 낸 것이라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잘하셨어요, 도련님! 역시 이기셨군요!”
 “아, 어렵지 않았어.”
 하지만 정작 주역은 따로 있는 셈이다. 보이는 대로 상대의 허를 찾아내고 있는 것은 역시 흑의 청년이었고, 왕중악은 그의 조언에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왕중악의 실력을 얕볼 수는 없었다.
 부딪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분명히 일반을 넘어서는 실력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조언한다고 해도 능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응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밀려나는 상대에게는 유감이지만 두 사람이 아주 찰떡궁합이었던 것.
 ‘히히······!’
 으쓱으쓱, 어쨌건 왕중악과 흑의 청년은 두 번째 시합에서도 싱글거리며 물러섰고, 보고 있던 패주급 인물들도 결국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첫 대결도 그렇더니만 저 청년 제법 아니오? 도문영도 보통 실력이 아닌 것 같은데 또 저렇게 패하고 말았으니. 수성이라면 화華 패주의 지역 같은데 창파라니 아는 일이시오?”
 호기심이 간다는 듯 앞 열에 앉아 있던 다섯 패주들 중 하나가 비둔한 체격의 노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더 먼저 옆에 앉은 남삼 처녀부터 살펴본 후 대답했는데 이때 그에게서 뜻밖이라 할 말이 흘러나왔다.
 “글쎄올시다. 측근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안순도 좁지 않아서. 오히려 육반에서 더 가까운 곳인데, 맹孟 패주께서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소.”
 패주!
 같은 서열의 자리에 젊은 처녀가 앉아 있어 누군가를 대신해 나오지 않았나 했는데, 뜻밖에도 남삼 처녀를 패주라 한 것이었다.
 남삼 처녀가 귀주 무림의 태두 중 하나라는 뜻.
 더 정확히 사실이 증명된 것은 다음 질문에 의해서였다.
 “용담문이라 하는 것 같았는데 맹 패주께서는 아시오?”
 비둔한 노인이 모른다 하자 물었던 인물이 남삼 처녀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미루어 확실히 그녀가 귀주 무림의 태두 중 하나, 육반의 패주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삼 처녀도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듣습니다. 육반도 좁지 않으니.”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는데 어투가 얼마나 냉랭한지 서릿발이 날리는 듯했다.
 다시 말을 붙여 보기도 어려울 정도.
 물었던 인물의 얼굴에 얼핏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연치도 그렇고, 얼굴이라도 보면서 대답하는 것이 예의일 것인데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 그냥 입을 다물었고, 미묘한 기운이 흐르는 속에 대회가 속행되었다.
 “칠번 출전자, 비무대로!”
 “와아-!”
 “또 그 친구다! 왕중악!”
 그로부터 반 시진 후, 다시 왕중악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절반, 두 번째에 또 절반이 떨어져 나감으로 이백오십여 명이었던 출전자는 이제 예순네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결승 진출자들을 가리는 대결이었다.
 서른 명이 남아 결승전에 오르는 것으로 다들 세 번째 시합을 치르는 셈이었다.
 출전자들도 점차 고수들만 남고 있었다.
 한두 번 정도라면 운이 작용할 수도 있다지만 두 번이나 상대를 물리친 만큼 다들 예사의 실력이라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왕중악은 대진운까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환호는 했지만 다들 고개를 저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려울 거야. 상당한 실력 같지만 상대가 아주 좋지 않아. 합강검合江劍 남궁명南宮明일세.”
 “남궁명······?”
 “맞아. 동東귀주의 강자지. 남궁가의 사람이자 공래파의 태을귀인太乙貴人의 의발을 이은 친구지. 무림에 출도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어. 이번 대회에만 해도 간단간단히 상대를 격파하고 있고. 우승 후보일세.”
 바로 그러했다.
 왕중악이 세 번째 만나게 된 상대는 합강검 남궁명이라는 청년이었는데, 그가 천하에 이름 높은 남궁세가의 출신이자 공래파의 이인 중 한 사람의 직전제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지닌 실력자였던 것이다.
 흑의 청년의 얼굴에도 긴장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고수예요, 도련님! 아시겠지만 아주 특출해요. 남궁가의 출신에 공래 기인의 제자, 명성도 대단하죠. 부딪칠 때마다 상대의 목검이 튀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강한 공력에 특별한 결점도 보이지 않았고.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피하시면서 상대하세요! 제가 즐겨 쓰는 수법 아시죠?”
 “그······?”
 그러나 왠지 이번에는 유독 왕중악이 내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누차 그래 왔듯 흑의 청년이 뭔가를 일러 주는 것 같았는데, 그 방법을 탐탁해 않는 눈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흑의 청년은 계속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권했다.
 “강하신 건 알지만 맞부딪쳐 득이 될 게 없잖아요. 기왕이면 쉽게 이기는 게 좋죠.”
 “알겠다.”
 그러자 한참 만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왕중악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대결의 시작.
 “높으신 명성 익히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왕 소협이시구려. 실력이 보통 고강하지 않으시던데 불초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소.”
 “준비!”
 호구를 조여 입은 왕중악은 다시 비무대에 올랐고, 곧 합강검 남궁명과 마주 섰다.
 서른여섯 살가량의 나이, 우승 후보라는 말이 나왔을 만큼 합강검 남궁명은 확실히 보통의 고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칠 척에 가까운 체격에 완벽한 자세를 보였다.
 왕중악과 같은 넉 자 반의 대목검을 들고 중단으로 그를 겨눴는데, 자세와 눈빛이 마치 잘 갈린 비수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왕중악의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똑같이 중단 자세를 잡고 마주 서 팔상八相! 두 발을 앞뒤로 주먹 간격의 위치에 놓고, 양쪽 팔을 안으로 조여 물샐 틈 없어 보이는 자세를 취했는데, 똑같이 서릿발 같은 안광을 뿜어내었던 것이다.
 “시작!”
 “하아아압!”
 카카카카캉!
 “아······! 저런!”
 실력 역시 여기에서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두 차례 모두 흑의 청년의 조언에 힘입어 수월히 상대를 격파하는 듯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조언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흑의 청년은 피하며 상대할 것을 권했으나 꺼려하는 눈치를 보였듯 정면으로 남궁명과 격돌했던 것!
 신호와 함께 남궁명이 앞으로 나온다 싶은 순간 그 역시 함께 움직이며 번개같이 목검을 휘둘러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도 결코 남궁명에게 밀리지 않았다.
 전후좌우로 신형을 번쩍이며 힘을 다해 제압코자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일어나는 검망이 흡사 큰 매화나무의 꽃잎들이 돌풍에 휩쓸려 회오리치듯 한 장관을 이루었을 정도.
 비교해 남궁명의 검망은 수천의 번갯불이 작열하듯 한 것으로서 종격 횡격으로 쉴 새 없이 왕중악의 공격을 차단하며 회오리치는 검망 사이사이로 쏘아 들듯 파고드는 형상이었다.
 벼락이 떨어져 꽂히듯 빠르고 신랄한 검법으로서 현존하는 검법 중 최고의 쾌검 중 하나로 불리는 공동의 독문검법 뇌정검雷霆劍인 것 같았다.
 변화와 수식은 달랐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격돌!
 “으아-!”
 “진짜 대단하다! 만만찮은 실력인 건 알았지만 저 정도로!”
 보고 있던 군웅들도 다시 거품을 물었다.
 수천이 운집한 평원이었으나 왕중악을 아는 인물이 없는 듯한 것을 보면 무림에 갓 출도한 청년 같았는데, 그런 청년이 동귀주의 고수라 한 남궁명과 쌍벽을 이룬 채 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서 왕중악의 출신이 밝혀지기도 했다.
 “알고 보니 화산파의 제자인 것 같군! 분명히 옥매검법이지? 일어나는 검영이 매화꽃 형상인데!”
 “아닐세. 옥매검법은 저렇게 회오리치지 않아! 매화꽃 형상이긴 하지만 초식이 모여 전체적으로 큰 모양을 보이고, 그 안에서 상대를 제압하지! 저렇게 회오리치는 것은 태청검법太淸劍法의 특징일세! 그는 곤륜의 제자야!”
 “맞아. 확실한 태청검법일세. 태청검법도 매화 같은 검영을 일으키는데, 옥매검에 비해 훨씬 변화가 많고 검을 단출하게 놀려! 그래서 빠르게 전개하면 저렇게 회오리치는 형상이 일어나는 걸세!”
 왕중악이 곤륜파의 제자.
 본신의 무예가 전개되면서 일이차전 때와 달리 내력이 밝혀진 것이었다. 수천의 군웅이 운집한 만큼 각파의 인물이 다 있었고, 이로 인해 출신이 밝혀졌던 것.
 “굉장한 실력인데 누구의 제자이지? 저 정도로 태청검법을 전개하는 젊은이는 처음 보는데······!”
 다들 경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진짜!”
 그러나 유독 흑의 청년의 표정은 죽을상이 되었다.
 왕중악의 선전은 훌륭했지만 그가 무리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우승까지 가자고 했듯 실제 그는 왕중악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괜한 말이 아니라 진짜 왕중악이 최종 결승까지 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대로 왕중악은 출중한 실력을 보이고 있었고, 우승 후보라 이야기하는 남궁명과 백중지세로 격돌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이런 대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기력 손실이 컸고, 이게 결승전도 아닌 것이었다.
 한참 남은 시합에 남궁명 외에도 우승 후보로 꼽히는 인물들은 여럿이 더 있었는데 출신이나 특기가 노출되어서 좋을 게 무언가.
 안타까움에 흑의 청년은 쾅쾅! 비무대를 치면서까지 소리쳤다.
 “도련님! 제발요!”
 얼마나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쳤던지 심판을 보던 청삼 노인까지 수시로 그를 쳐다봤을 정도.
 “하아아압!”
 카카카카카캉-!
 그러나 왕중악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흑의 청년은 지금이라도 그에게 자신이 이야기한 대결을 할 것을 주문하는 것 같았지만 정면 승부를 결심한 듯 왕중악은 남궁명에 맞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로세로 십 장인 비무대가 좁다 하고 휘돌아 가며 격렬하게 검망을 뿌리며 공방을 주고받는 용호상박의 대결.
 시시각각 서로의 목검 끝이 코앞을 스치고 두개골을 바숴 버릴 듯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섬뜩한 접전이 지속되었다.
 두 사람 모두 부릅뜨인 눈에 무섭게 안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기를 천여 합!
 “하아아압!”
 카카카캉! 퍼억!
 “흡!”
 “앗······!”
 “승부!”
 “와앗!”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대결 속에 결국 승부가 가려진 것 같았다.
 회오리같이 휘돌아 가며 격돌하던 두 사람의 신형이 한순간 비무대 복판에서 충돌하듯 붙는 것 같더니 들고 있던 목검이 각기 섬전 같은 포물선을 그리고 직선으로 뻗어 나가면서 청삼 노인의 삼각기가 번쩍 허공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보고 있던 군중들은 누구의 승리인지 알지 못했다.
 워낙 빠르게 휘돌아 가며 눈이 현란할 정도의 검망을 일으켰던 접전에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맞붙으며 가려진 승부라 누가 누구를 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
 하지만 흑의 청년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듯 안색이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미루어 왕중악이 패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수성의 왕 소협 승! 두 분이 동시에 서로를 가격했지만 왕 소협의 찌르기가 빨랐소이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남궁 소협을 찔렀고, 뒤이어 남궁 소협의 목검이 왕 소협의 허리를 가격했소이다! 그러므로 왕 소협의 승리올시다!”
 곧이어 청삼 노인이 결과를 발표했는데 찔러 간 것은 왕중악, 포물선을 그린 것은 남궁명 같았다.
 왕중악이 한발 앞서 남궁명을 찔러 승리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던 것.
 “와아아아-!”
 순간 화계평에는 지축이 들썩해질 정도의 함성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일어난 어느 때의 것보다 큰 함성으로서 모두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굉장한 승부였다! 왕중악도 남궁명도 모두 대단했어! 분간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몸놀림에 구름같이 일어난 검망 하며! 보기 드문 대결이었어!”
 “설마 남궁명까지 이기다니! 분명히 파란 맞지?”
 “맞아! 동귀주의 검귀라 불릴 정도의 남궁명인데 들어 보지도 못한 친구가 그를 이기다니! 파란일 뿐만 아니라 귀주 무림에 앞날이 확실시되는 고수가 등장한 것일세!”
 “갈수록 호기심이 커지는군! 스물 중반밖에 아닌 나이에 남궁명을 격파한 무예, 집안에서 창파까지 한다고 하니! 어떤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닌 느낌일세! 수성 쪽에 돌풍이 예고되는군!”
 사방에서 왕중악을 칭송했다.
 “도련님······!”
 하지만 시커메진 흑의 청년의 안색은 그대로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비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는 왕중악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훌륭히 이기긴 했지만 남궁명의 목검에 심하게 허리를 가격당한 모습으로 호구가 안으로 푹 꺼져 들어가 있었고, 제대로 몸을 펴지 못한 채 엉거주춤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던 것.
 급히 내려오는 왕중악을 부축했다.
 “괜찮으신 거예요?”
 하지만 왕중악의 표정은 밝았다.
 “하하······ 괜찮다! 나 잘 싸웠지?”
 와중에도 함성은 쏟아지듯 울리고 있었고, 군웅들을 향해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흑의 청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웃고는 있었지만 역시 왕중악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계속 허리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어서 이리로!”
 부랴부랴 서둘러 그를 부축해 비무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화계평에서 보인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결승 진출자를 가리는 시합에 세 번 모두 이겨 왕중악은 이날은 더 출전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결과로 더 이상 시합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쓰레기 처리장 귀주
 
 밤夜.
 “와아!”
 덩덩덩덩······!
 화계평의 열기는 시합이 끝나고도 계속 물씬댔다.
 낮에는 출전자들의 대결로 열광하지만 밤에는 잔치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언급되었듯 대회는 칠일에 걸쳐 치러지는데, 시합이 끝나면 운집한 군웅들이 사방에서 술판을 벌이는 등 놀이를 하기 때문이었다.
 허허벌판에 뭐가 있어 술판을 벌이겠느냐는 생각도 들 일이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나 상인들도 몰리기 마련이었다.
 대회장 저변 도처에 천막을 치고 대회를 보러 오는 군웅들에게 술과 음식 등 갖가지 물건을 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므로 숙식을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막사를 만들어 잠자리를 제공하는 상인까지 있었다.
 이로 인해 군웅들은 대부분 대회 기간 동안 화계평 주위를 떠나지 않고 막사에서 머물면서 낮에는 시합을 즐기고 밤에는 호호탕탕 술을 마시는 등 잔치를 즐겼다.
 운집한 군웅들을 생각해 주최 측에서도 밤늦도록 폭죽을 터뜨리고 용춤, 사자춤 등 탈춤을 벌이는 등 즐길 거리를 따로 제공하고 있었다.
 이래서 열리면 비무대회는 그 지역의 잔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속에 화계평이 내려다보이는 화령산의 기슭에 우뚝 솟은 적검부의 접객관.
 황촉 불이 흔들리는 속에 남삼 처녀가 묵직하게 뒷짐을 진 채 객실 중간에 서 있었다.
 귀주 무림의 태두 중 하나로서 육반 지역의 패주로 알려진 그녀.
 후리후리한 키에 항아 같은 자태를 지닌 이 처녀는 어떻게 봐도 멋지고 아름답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잠력과 얼음 같은 표정만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
 앞에는 수하인 듯해 보이는 눈에서 불덩이 같은 정광이 이글거리는 호안虎眼의 육 척 장한이 몇몇 남색 경장 무사들을 대동한 채 조심스럽게 부복하고 서 있었다.
 “알아봤느냐?”
 남삼 처녀의 입에서 서릿발처럼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천성인 듯한 싸늘함이었다. 태어나 한 번이라도 웃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그런.
 익숙한 듯 호안 장한은 묵직하게 포권을 취해 보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송림松林 쪽 사람들이 아는 눈치더군요. 용담표국龍潭驃局의 장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용담표국?”
 “수성 내성內城에 있는 백오십 명 규모의 표국이라 합니다. 용담검龍潭劍 왕정王征이란 인물이 국주라는데 호인이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곤륜의 속가로서 육 대째 표국을 운영하고 있고 가세도 넉넉한 편이라 합니다.”
 아무래도 왕중악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핏, 남삼 처녀의 눈에 의혹 서린 빛이 스쳤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인원이 백오십 명이면 작은 규모가 아닌데, 수성에는 지키는 방파가 없단 소린가? 개인이 소수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정도로 표국이 크도록 방치할 리가 없는데?”
 호안 장한은 차분히 대답했다.
 “까닭이 있더군요. 말씀대로 방파가 있는 곳에는 표국이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방파의 외당들이 일을 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용담표국은 좀 특이한 경우인데, 수성에도 자하방紫蝦幇이란 방파가 있긴 합니다. 용담표국과 마찬가지로 육 대째 이어진 꽤 오래된 방파인데 그다지 세가 크거나 하진 않고, 그냥 외성 주위만 살피는 곳입니다. 한데 창파한 인물이 용담표국을 연 인물과 친구였다는 것 같습니다.”
 “친구?”
 “용강이호龍江二豪로 불렸던 인물들로서 크게 명성을 떨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같은 수성의 출생에 함께 강호에서 활동했다던데, 당 초에 향용제가 시작되면서 고향으로 내려와 한 사람은 자하방을 열고 한 사람은 표국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이 같이 방파를 이끌기도 그렇고, 친구지간에 신분 차를 둘 수도 없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동향의 출신에 친구, 창파.
 “의가 좋은 인물들이었던가 보군.”
 “그렇습니다. 나눠 시작했지만 그냥 한 방파나 같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방파를 맡은 쪽은 세를 키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욕심이 없었다고 봐야 할지 향용 신임을 받아 그냥 외성 밖의 삼 개 현만 살폈는데 당대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후대에 가서 점차 신임을 잃고 주위 방파들에게 영역을 넘기게 되었다 하더군요. 지금은 동지현董地縣 한 곳만 남아 있고 인원도 오십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로만 방파지 그냥 마을 청년들로 이뤄진 자치대인 셈입니다.”
 호안 장한은 차분히 계속 설명했다.
 
 “반면 표국을 맡은 쪽은 계속 가세를 키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업 수완이 상당했던 것 같은데, 운남, 서안西岸 방향으로 무역을 하는 행수들과 연대해 호송업을 한 게 주효해 점차 규모가 커졌다더군요. 대강 그런 사정입니다.”
 남삼 처녀의 이마가 끄덕여졌다.
 “창파라는 것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자하방이 더 버티기 어려운 모양이더군요. 갈수록 옹색해지는 형편에 동지현마저 잃을 정도로. 아마 자하방을 인수하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대의 인물들이 함께 개파한 곳이라는 점에서 몰락하게 버려두기도 그렇고, 동지현까지 잃어 타 방파가 들어서면 자신들도 압박받기 쉬울 것이오니.”
 남삼 처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군.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 하나 있다. 그는 합강검 남궁명까지 격패시켰는데 이 정도의 아들을 키워 낼 정도라면 용담표국주는 여간한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상당한 명성이 있어야 할 것인데 듣기조차 처음이니, 까닭이?”
 호안 장한은 계속 알아 온 것들을 이야기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사오나 그냥 그 하나가 특출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왕정이 특별한 고수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는데, 유독 아들이 걸출하다는 것으로 개천에서 용이 난 셈입니다. 수성 안에서는 장룡소호長龍小虎로 꽤 소문이 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장룡소호?”
 “곽진郭珍이라고, 그 외에도 휘하에 괴상한 녀석이 하나 더 있다던데, 지모가 여간 아니고 매의 눈을 가졌다 합니다. 선천적으로 눈이 밝아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셀 정도의 시력을 지녔다던데, 천리안千里眼으로 유명하고 늘 붙어 다녀서 그렇게 불린다더군요. 각기 소호랑小虎郞, 장룡검長龍劍이라 불리는 모양입니다.”
 장룡소호.
 장룡검 왕중악과 소호랑 곽진.
 뜻밖의 곳에서 의외의 일이 밝혀진 셈이다.
 미루어 역시 왕중악과 집안에 관한 일 같았는데, 이상으로 왕중악의 출신 내력이 상세하다시피 밝혀졌고, 보태어 함께 있던 흑의 청년에 대해서까지 말이 나온 셈이었다.
 금삼 청년, 왕중악이 진珍이라 불렀으니 필경 그가 곽진이기 쉬웠다.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셀 정도의 천리안! 드물지만 움직이는 물체를 유난히 빠르게 포착하는 매鷹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흑의 청년이 그렇다는 것.
 사실이라면 어째서 특별한 무예의 흔적이 없던 그가 겨룸을 벌이던 출전자들의 허를 찾아낼 수 있었던지에 대한 의문까지 풀린 셈이다.
 호안 장한은 이윽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집안일은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앞날이 보이는 청년입니다.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닌데 벌써부터 남궁명을 능가할 정도니. 미루어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이름을 천하에 떨어 울릴 듯하군요.”
 하지만 남삼 처녀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더 먼저 화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실력을 떠나 그는 신중치 못했다. 수성에, 집안일로 왔다면 필경 앞으로 부딪칠 주위 방파들에게 녹록지 않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하기 위함일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맹위를 보여야 했다. 개인적으로도 최종전까지 가는 게 좋을 것이고, 실력 역시 되었지. 여러 일을 생각해서라도 남궁명과 정면 승부를 피해야 했는데 호승심으로 격돌해 부상까지 입은 것이다. 호구가 깨질 정도로 정타를 맞았으니 그 몸으로는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한다. 나와도 탈락하기 마련이고. 그런 기질로는 무림에서 커지기 어렵지.”
 휙, 고개를 저어 보인 후 화제를 돌렸다.
 “패주들은?”
 호안 장한의 입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각자의 처소에 있습니다. 이범문李範文은 계속 통합연맹統合聯盟을 추진하려는 눈치를 보이고 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더군요. 보나 마나 올해도 그냥 끝날 것 같습니다.”
 남삼 처녀의 눈에 얼음장 같은 냉광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이루려면 다들 마음을 비워야 할 것인데 한결같이 산만큼이나 욕심이 클뿐더러 이범문 자신부터 야심이 그득하니. 끝없이 약소 방파를 누르고 타의 영역을 먹어 치우려는 자들이 누굴 위해 하나가 되려고.”
 휙, 한 번 더 고개를 저으며 또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방심치 말고 어느 자들이 모이는지 동태를 살피도록.”
 “명.”
 호안 장한은 밖으로 나갔고, 넓다 싶은 객실에는 남삼 처녀 하나만 남았다.
 훌쩍 큰 키에 흔들리는 황촉 불에 비치는 모습이 언덕처럼 완고해 보이기도 했다.
 
 적검부의 후원.
 같은 즈음 여기에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십여 명.
 모두 산만큼이나 웅혼해 보이는 기도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시합 때 주최석에 있었던 인물들로서 앞 열에 자리했던 인물도 둘이나 있었다.
 한 명은 앞 열의 중앙에 있었던 인물인데, 떡 벌어진 어깨에 오순 중반의 나이, 칠 척의 키에 긴 검은 수염을 길러 내린 중년인이었다.
 마른 듯 균형 잡힌 체격에 긴 흑삼, 미끈한 흰 피부, 칼날 같은 검미와 번쩍이는 용안을 지닌 모습으로서 미장부라 할 만한 인물.
 적검부의 주인 이범문이었다. 귀주 제일의 동맹주東盟主이자 귀양호貴陽虎, 혹은 천검수라千劍修羅라 일컬어지는 남자.
 어쩌면 귀주 제일의 고수일 수도 있었다.
 넓은 귀주에 모래알처럼 많은 이인들이 있을 것인데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귀주의 특이함 때문으로,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귀주성은 중원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였다.
 말썽만 많을 뿐 조정에서도 등을 돌리고 있는 곳으로서, 천하에 내세울 이렇다 할 종주宗主 하나 없는 곳.
 측근인 사천四川만 해도 청성靑城에 공래?崍, 아미파娥?派에 이르기까지 무림의 종주 격인 칠파가 셋이나 있었고, 아래인 광서廣西에도 십만마교十萬魔敎가, 광동廣東에도 남해검문南海劍門이 버티고 있었지만 귀주에는 그런 대종파가 없었던 것이다.
 당대는 아닐지라도 어느 성이든 우리로다 자랑하는 종주 격인 종파가 존재했는데, 유독 귀주에는 그런 게 없었던 것.
 희한한 일이었지만 고쳐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한 게 종사들인들 사실 이렇게 말썽 많고 궁색한 곳에 자리 잡으려 할 리가 없다.
 풍수風水조차 그랬는데 성 전체가 칠 할 이상이나 산악으로 뒤덮인 곳이 귀주였지만 똑똑하게 영산靈山이라 할 봉우리조차 하나 없었다. 굳이 들자면 천태산天台山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거칠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종주 격인 인물이 나와도 출생만 귀주일 뿐 모두 떠나 비옥하고 풍수가 좋은 타 성으로 가서 종파를 열었고, 타 성의 자랑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타 성에 가도 내로라하지 못할 지질한 인물들만(?) 있어 보이는 곳이 귀주로서, 형편이 이렇다 보니 또한 가장 큰 방파의 주인이 가장 강자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떠나서라도 적검부와 이범문은 천하에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적검부는 개파한 지가 팔 대째였는데, 창파주는 적하신장赤河神將 이여청李麗靑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귀주의 사람이 아니라 감숙 출신으로서 일반 무림인도 아닌 무장武將이었던 인물이었다.
 조정의 녹을 받았던 병부의 사람으로서 귀양절도사貴陽節度使로 내려왔던 인물.
 이십 년간 절도사로서 귀양을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러나 정이 들어서인지 그는 임기를 마치고도 감숙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창파를 했다.
 전직 귀양의 절도사이자 대관인으로서 귀양 무림의 태두로 남았던 것이다. 귀주가 곤궁하다 해도 신분이 그만하니 남을 만하기도 한 것으로, 귀양은 귀주에서 가장 비옥한 곳으로 험지가 아니기도 하다.
 이후 적검문은 귀양의 태두로서 대대로 자리매김을 해 왔고, 팔 대 손인 이범문 역시 선조의 뒤를 이었다. 대관인의 후예인 만큼 귀족이라 할 만하다.
 이로 인해 적검부는 귀양의 세가勢家로 중원 무림에 알려져 있었는데, 이범문은 역대 세가주 중에서도 단연 걸출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세가주가 되기 전 수업차 중원으로 나가 무수한 사마외도들과 싸웠지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돌아와 적검부를 물려받은 후에는 귀양을 넘어 안순安順, 검서黔西, 정양井陽, 독산獨山 등 도처를 동맹으로 통합, 적검부를 귀주 최대의 동맹으로 발돋움시키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무천록武天錄의 서열 삼십 위권에 들어 있는 남자로서 인물이 없는 귀주에서는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기예는 선조로부터 이어진 광풍천환검光風千幻劍. 감숙 출신인 이여청은 출사하기 전 대막 광풍사의 절기를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창파 후 천하 각파의 무예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더 큰 기예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검수라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 못 다루는 무기가 없고, 모르는 기예가 없다고도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 또 한 인물은 남삼 처녀의 옆에 앉아 있었던 비둔해 보이는 체격의 메기수염의 인물이었다.
 정확히 그는 적검부의 산하에 있는 안순, 검서, 정양, 독산, 네 동맹주 중 안순 월명부月明府의 주인으로서 귀륜鬼輪 화영華榮이라는 명호를 가졌다.
 귀주의 패주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그럼에도 같은 서열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은 다섯 패주에 못지않게 월명부가 컸기 때문으로, 귀주의 서남부를 거의 휘어잡고 있었다.
 서서히 최대 패주로 부상하고 있는 인물로서 현 귀주에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극히 심계가 깊고 야심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월명부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검서, 정양, 독산 등을 장악한 적검부의 최대 동맹주로서 귀주 무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인물들이었다.
 말이 쉬울 뿐이지 일반 무림인들로서는 정면으로 얼굴조차 대하기 어려운 인물들로서 각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천양검天陽劍 초문楚文.
 검서, 천양보天陽堡의 수뇌로서 세모꼴의 눈에 매부리코를 지닌 사십 대 중반 인물. 검은 피부에 육 척의 키를 지닌 장작개비처럼 마른 장한으로서 스쳐만 봐도 으스스함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휘하에 다섯 개의 동맹 방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독산, 벽파문碧波門 용문도왕龍門刀王 손익孫翼.
 초문과 유사한 사십 대 후반의 나이로 절반이나 앞머리가 벗어져 보이는 거구의 인물이었다. 철탑처럼 웅후해 보이는 모습이 외견상으로는 웅주들 중 가장 강해 보이는 남자.
 공력이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 전해지고 있고 넉 자 반의 환도還刀를 썼으며, 일반의 무인들은 부딪치기만 해도 창검이 엿가락같이 부러져 버리거나 손아귀가 터져 버린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휘하에 여섯 개의 동맹 방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정양, 남홍문南弘門 범보장극梵步長戟 선우환鮮于煥.
 조용하고 온순해 보이는 마흔 살 초반의 유생같이 보이는 인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특징 아닌 특징을 지닌 중년인으로서 함께 있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네 명의 동맹주 중 가장 강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검을 두르고 있었지만 대화극大畵戟을 무기로 사용했고, 그에 맞서 천 합을 버텨 낸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세 개의 동맹 방파를 거느리고 있는데 수효는 작지만 모두 대방파에 필적하는 규모로서 휘하에 고수가 많아 동맹주들이 모두 어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섯 명만 해도 거실 안이 꽉 차 버리는 것 같은 무게감이 있는 인물들. 모두 적검부의 사람들로서 동맹회의라도 하기 위해 모인 것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 실내에는 이들의 수효보다 더 많은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누군가들을 기다리는 듯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이범문의 만면에 적잖은 불쾌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일각.
 길다 싶은 침묵이 흐르는 속에 검서의 초문이 으스스하게 안광을 쏟아 내며 말문을 열었다.
 “더 기다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아무도 오지 않으려나 봅니다. 심기 상할 필요 없이 그만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눈치.
 씰룩, 이범문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어이없군. 역시 반대 의사인 모양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다른 일도 아닌 귀주 무림의 대사를 논하자는데 패주라는 사람들이. 타 성의 동맹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접촉하고 화의를 맺어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만 이 모양이니. 어떻게든 하나가 되어 안정을 꾀하고 밖으로 뻗어 나가자는 뜻인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통합연맹.
 남삼 처녀가 언급했던 일 같았다.
 짧게 스쳤던 이야기지만 그녀의 이야기와 지금 나온 말을 되짚어 보면 이범문은 조각나 있는 귀주 무림을 통합해 대맹을 이루자는 계획을 지닌 것 같았는데 나머지 패주들이 반대하는 듯한 눈치 같았다. 지금도 일을 추진키 위해 패주들을 청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은 느낌이었고.
 독산의 손익이 냉소를 머금었다.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제 하나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젠 그만 포기하시지요. 사실 우리가 아쉬울 게 뭐가 있습니까.”
 이범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물론 아쉬운 거야 없지. 하지만 귀주 전체를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돼. 경계에서 경계 끝까지 가도 제대로 된 평야조차 보기 힘든 척박한 지역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고들하며, 이대로라면 귀주는 백 년이 가도 무법 지대로 남고 말아. 조정조차 등을 돌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라도 각성해 질서를 잡고 발전을 도모해야지. 그러자면 하루라도 속히 통합동맹을 이루고 밖으로 뻗어 나가야 할 것인데, 정작 패주라는 자들은 와각지쟁蝸角之爭만 벌이고 있지. 이렇다 보니 사마외도들조차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 공적共敵으로 낙인찍혀 갈 곳을 잃은 범죄자들일세. 무림의 쓰레기통이 귀주이고, 우린 타 성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청소부에 지나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자는 것인가.”
 안타깝지만 귀주의 실정인 게 맞았다.
 
 피식, 초문이 실소 지었다.
 “그게 좋은가 보지요. 사실 심심치는 않지 않습니까. 한 달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사고에 사방에 나뒹구는 잘린 목들하며, 사마외도 놈들을 추적하는 재미가 쏠쏠한 셈입니다. 명색이 무인이 그런 재미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이범문의 눈이 찢어질 듯 치켜뜨였다.
 “자네?”
 “하하! 농담입니다.”
 외모는 으스스해도 초문은 농담을 즐기는 인물인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손익이 섬뜩한 안광을 떠올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힘으로라도 밀어붙여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로만 정파에 명숙이지 귀주의 내일을 도모하자는 것조차 반대하는 자들이니 실제로는 저들이야말로 귀주를 좀먹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초문이 웃으며 거들었다.
 “저희 천양동맹 역시 그렇습니다. 결정만 내리시면 지금이라도 움직일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육반, 사남, 천주, 여평! 어디를 쓸어버릴까요? 그냥 네 곳 다 해삼 젓을 담가 볼까요? 오가기가 성가셔서 그렇지 하루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큰일 날 소리들을 하는군.”
 이범문의 표정이 크게 굳어졌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마라.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십상이니!”
 사실 농담이라도 해서 될 소리가 아니었다.
 행여 누가 듣고 오해라도 하는 날이면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신분이 있는 만큼 더욱.
 그러자 잠자코 있던 비둔한 체격의 노인, 안순의 화영이 좁쌀눈에 기묘한 빛을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농담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요. 노부 역시 손 패주의 말에 동감합니다. 말씀처럼 조정이나 관사에도 기대할 게 없는 상태에 앞장서 안녕과 발전을 도모해야 할 자들이 좋은 뜻을 세워도 반대하고 있으니 이는 자격이 없는 것이올시다. 말마따나 좀벌레에 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선우환 역시 짧게 한마디 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범문의 눈길이 힐끗 그들에게로 돌려졌다.
 그러나 손익, 초문에게와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기가 풀리지 않는 듯 그냥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한참 실내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기를 반 각여.
 돌 같은 표정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려나 보군. 아무리 뜻이 좋다 해도 모두가 싫다는 데야 방법이 없으니. 그냥 일 년만 더 각고해 보기로 하세. 성의를 보여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각자 갈 길을 찾는 수밖에.”
 “갈 길이라시면?”
 모두의 눈에 번뜩 기묘한 광채가 떠올랐다.
 이범문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생각들 하지 마. 우리끼리라도 좋은 길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니. 분명한 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지. 활로를 찾지 못하면 귀주는 정말 쓰레기밭이 되고 말 테니까.”
 일 년.
 어떤 묵시적인 기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결코 긴 시간이 아닌.
 “수고들 많았으니 가서 쉬게.”
 “맹주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이범문은 모두에게 해산하기를 일렀고, 동맹주들은 서로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흩어졌다.
 짧은 대화였지만 귀주와 귀주 무림의 정세를 다 보여 주는 듯한 일면으로서, 일단 액면만으로는 적검부가 좋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거론하기는 뭣하지만 다시 이야기해도 중원 복판의 사람들은 귀주성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중원 각처의 쓰레기장처럼 되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려고만 하고 들어오는 자들은 죄다 타 성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오는 자들뿐이었으니.
 사고가 나도 관사에서는 잘 나서지도 않았고, 도처의 방파들이 치안을 맡고 있었으니 그대로 타 성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꼴이 맞기도 했고.
 오죽하면 귀주 무림의 최대 동맹의 패주인 사람의 입에서 쓰레기 청소부 소리가 나왔겠는가마는, 이를 방지하고 좋은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이범문은 통합연맹을 세워 귀주 무림의 안정과 발전을 꾀하자는 뜻 같았는데 각 지역의 패주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
 사실대로라면 타 지역들에 문제가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있었다.
 모인 사람들이 흩어진 지 불과 이각여.
 그렇게 나눠진 이범문 등의 대화 내용이 어이없다시피 바로 다른 누군가들에게 흘러들어 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다들 냉소 지었다.
 “여우 같은 놈이 정인군자인 척 마냥 허튼수작을 하고 있군. 말은 그럴싸하지만 통합연맹을 세우면? 대체 누구 좋은 일을 하라는 소리냐. 우리에게 맹주직을 주겠다는 아니고, 제가 꿰차려는 것인데, 저부터 마음을 비워야지.”
 “아마 속이 탈 것이다. 야심은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귀양은 귀주의 중간에 갇혀 포위되어 있다시피 하니. 창살을 뚫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힘으로 쓸어버리겠다니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우리야말로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해삼 젓을 담가 줄 테니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황당하다 싶지만 이렇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언급되었듯 귀양동맹은 귀주에서 가장 컸고, 또한 가장 비옥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귀주의 복판이라는 것. 타 지역에 둘러싸여 밖으로 뻗어 나가고 싶어도 그러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되새겨 이범문이 모종의 야심을 품고 위선을 보이고 있다면?
 오히려 이 호랑이를 지키고 있는 타 지역들이 정正이 되는 셈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늑대와 여우의 시간이라고 보는 수밖에.
 
 
 
 그런 한편 관계가 있으면서도 거리가 먼 사람들도 많았다.
 산하에 있는 군소 방파의 주인이 그들이었는데, 상부에서 거론되는 일인 만큼 알아도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눈치만 봐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
 통합연맹을 결성하든 전쟁을 벌이든 하라는 대로 끌려다니는 장기판의 졸卒밖에 아닌 셈이었다.
 그나마 그 졸조차 못 되어 고심하는 사람은 더 많았는데, 군소 방파의 주인도 못 되는 휘하의 무사들이 그들이었고, 좀 더 가깝게는 비무대회에서 모습을 보였던 왕중악이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수성 용담표국의 아들로서 창파를 알리고자 비무대회에 출전한 청년. 그렇다면 동맹에 가입할 차례니 일반 무사들보다는 한참 형편이 좋은 셈이지만, 이제야 졸이 되려고 하는 상태인 것.
 “하하! 무지하게 아프군! 이래서야 내일 최종전에 출전할 수 있을지 몰라!”
 귀양 내성에 위치한 한 객잔의 침대 위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허리에 잔뜩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
 장룡소호長龍小虎에 곽진郭珍이라고 했던가?
 침대 옆에는 함께 모습을 보였던 흑의 청년이 볼이 퉁퉁 부어 입을 꼭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력을 가져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센다는 청년.
 꽤 화가 난 표정이었다.
 벌쭘했던지 결국 왕중악도 눈치를 살폈다. 아니, 눈치를 살핀 것은 시합 직후부터였는데, 이후로 내내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야, 진아! 아직도 화 안 풀렸냐? 이젠 그만 풀릴 때도 됐잖아. 내가 뭐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몰라요! 진짜 말도 안 듣고!”
 그러자 비로소 곽진도 말문을 열었는데 표정도 그렇고 역시 불만이 꽉 차 있었다.
 “이러실 것 같으면 왜 함께 오자고 했어요?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늘 이 모양이니 화가 안 날 수 있어야죠. 무슨 꼴이에요, 이게?”
 부하와 상전지간이라 해도 허물이 없는 모습으로 왕중악은 싱겁게 웃었다.
 “하하! 미안하긴 한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정면 승부를 해 보고 싶어서! 어쨌건 멋있었잖아? 자그마치 동귀주의 검귀라는 남궁명을 깬 건데!”
 번쩍, 곽진은 더욱 화난 기색을 떠올렸다.
 “멋만 있으면 뭐해요? 산통이 깨졌는데! 도련님이 오신 건 창파 일 때문이잖아요? 주위 동맹들의 상황도 살필 겸 실력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요! 그러자면 최소한 최종전까지는 올라가야죠! 국주님께서 크게 기대하고 계실 텐데 돌아가셔서 뭐라 하실래요?”
 왕중악은 그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일 때문이라면 괜찮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보니까. 사실 너무 잘해도 문제가 되거든. 알다시피 현재 우리 입장이 그런데, 어중간하게 중간에 끼여 이도 저도 아닌 상태란 말씀이야. 그런 만큼 너무 잘해도 문제가 생기는 거지. 자칫하면 반대쪽에 밉보일뿐더러 경계까지 사게 되니까. 그냥 수성에 새 방파가 생기나 보다 적당히 인식만 시키면 되는 거야.”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생각하고 보면 남궁명 하나로 충분해. 본가는 아니라 해도 남궁가 쪽의 사람에, 태두들도 알 정도가 되니까. 피하면서 허를 노려 이기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아. 약아 보이거든. 약게 구는 것을 싫어하는 게 사람들의 속성이기도 하지.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는 것이 더 나은 일일 수도 있어.”
 곽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제가 정정당당하지 않고 약다 이거죠?”
 “아!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쩌다 말이 꼬인 것 같았다.
 설득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그대로 상대의 허를 찾아 공격하거나 피하며 승부하라 한 조언이 약을뿐더러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뜻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크, 싶어 왕중악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냥 내 말은 기왕이면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낫지 않느냐, 뭐 그런 거지! 오해하지 말자!”
 얼렁뚱땅, 번개같이.
 “그리고 뭐 네 수법 말인데, 사실은 그거 아껴 두려고 했던 것이었어! 결승전이 남았었잖아? 그게 결정적인 승부수가 될 수도 있는데 함부로 보여서 되겠어? 아껴 뒀다가 안 되겠다 싶은 상대를 만났을 때 써야지! 그래서 일부러 안 썼던 거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화 좀 풀어라.”
 “햐······! 진짜 말씀 하나는······!”
 곽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왕중악을 쳐다봤다.
 뭔지 모르겠지만 왕중악의 대처법도 꽤 노련한 것 같았는데, 사실 남궁명과 부딪친 것은 일차 준결승전이었다.
 최종전으로 올라가면 더 강한 상대와 부딪칠 수도 있는 만큼 결정적인 어떤 승부수가 있다면 확실히 숨겨 두는 게 좋긴 하다.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곽진이 잘 넘어가지 않자 왕중악은 초강수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말실수도 그렇고 미안하다는 의미로 흑탄黑彈을 주마! 됐지?”
 “옛?”
 곽진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질풍疾風을요? 그 말씀 진짠가요?”
 왕중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지. 내가 언제 헛소리하는 거 봤냐? 대신 화 풀고, 특히 다른 생각 하기 없기다? 먼저 말했던 거?”
 또 다른 뭔가가 있는 눈치.
 곽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 동안 눈을 끔벅거리며 왕중악을 봤다.
 하지만 믿고 말고를 떠나 어차피 물은 엎질러져 있었다.
 속이 상했지만 더 왈가왈부해야 무슨 소용일까.
 그의 심정도 이해되지 않는 눈치는 아니었다. 실제로 무인들은 호적수를 만나면 누구나 정면 승부를 해 보고 싶어 했는데 왕중악 역시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으니.
 지난 일에 계속 화를 내기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한 번만 더 용서해 드리죠!”
 “하하하! 역시!”
 왕중악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태풍이 지났다 싶자 넉살 좋은 소리까지 했다.
 “털어 버렸으니 그럼 됐고, 나 배고프다! 가서 만두라도 좀 사 와라! 육즙이 듬뿍 든 고기만두로.”
 비로소 곽진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중악이 다치는 등, 내성으로 오느라 그도 아직 요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녀올게요.”
 싫은 기색 없이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까지는 두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들 간에는 늘 있는 일 같기도 했다.
 
 뜰.
 “진아.”
 “아, 형.”
 나오자 건물 밖, 객잔의 정원에 세 명의 청년이 서성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곽진과 같은 흑의를 입은 청년들로서 모두 허리에 장검을 두르고 있었는데, 미루어 일행이 더 있었던 것 같았다.
 중심이 잡힌 자세에 번뜩이는 눈빛이 세 명 다 여간한 실력이 아닌 듯한 모습으로, 곽진이 나오는 것을 보자 급히 다가왔고 곽진 역시 아는 내색을 했다.
 “소가주님 상태는 좀 어때?”
 “괜찮아. 다행히 뼈를 피해 갔어.”
 “내일 시합은?”
 “그건 틀렸어. 허리가 많이 부었거든. 몸도 돌리기 어려운 형편이야.”
 세 청년 모두 실망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바보스럽군. 우승은 아니라도 최종전까지는 갈 것이라 믿었는데. 대체 왜 정면 승부를 한 거야? 한참 남은 시합에 강적이다 싶으면 피하며 상대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곽진은 왕중악의 말을 전했다.
 “약아 보이는 게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랬대. 너무 강해 보여도 안 좋고. 눈치를 살펴야 하니까 아주 틀리지도 않아.”
 역시 뭔가 까닭이 있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세 청년에게도 그 말은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약아 보이는 게 안 좋으면? 미련해 보이는 건 좋은 거냐?”
 “끼여 있다는 것도 그래. 어차피 경계이니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부딪칠 것 아니냐? 경고하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보여 줘야지!”
 심드렁히들 말했다.
 “됐다. 어차피 난 그만둘 거니. 표국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향용 일은 관심 없어. 위험한 상태기도 하고. 표국처럼 자유도 없지. 국주님 심정은 알 것 같지만 난 싫다.”
 “마찬가지다. 위험하긴 표국 일도 같지만 방파 일 정도는 아니거든. 도적들을 상대하는 만큼 최소한 원수는 만들지 않지. 그냥 다른 일 하는 게 낫다고 본다.”
 “그래서 의논해 봤는데,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다들 방파 일에는 관심 없고, 배운 게 도둑질이니 우리끼리 사업을 해 보는 게? 작게라도 호송업을 하는 거야.”
 “하하!”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곽진은 웃음 지었다.
 “겨우 넷이서? 말이 돼?”
 청년들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을 거다. 열 명만 만들면 되지. 큰일은 못 맡겠지만 군소 상인들 호위해 주는 것으로. 너만 마음먹으면 된다. 네가 한다 하면 동조할 친구들이 수월찮을 테니.”
 곽진은 웃으며 반대했다.
 “그건 더 안 돼. 욕먹을 일에 지나지 않으니.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발전도 없어. 수성에서는 할 생각도 말아야 하고, 어딜 가도 방파들 등쌀에 커질 수가 없거든. 없는 인원으로 하다가 다치거나 죽고 끝나는 거지.”
 청년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어쩌려고? 너 이대로 방파로 옮겨 갈 거냐?”
 “모르겠어. 일단은 그럴 것 같은데, 아버지 말씀부터 들어 보고. 다른 일이라면 생각해 볼게.”
 습관처럼 송곳니를 빼물었다.
 “어쨌건 왔으니 우리도 술이나 한잔 해. 도련님 시장하시다니까 일단 만두부터 좀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
 휑하니 객잔에 딸린 반점飯店 쪽으로 달려갔다.
 “······!”
 물끄러미 바라보며 청년들은 싫은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거 보니 옮겨 갈 모양인데?”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곽 숙숙 문제가 있다 해도 이젠 나이가 있는데. 옮겨 가서도 계속 저렇게 지내려나?”
 “설마. 표국과 체제가 다른데. 이젠 제대로 자리를 잡겠지.”
 “너희들은 어쩔래?”
 “진짜 안 내켜. 알다시피 들어가면 강호 방파는 자유가 없어. 계약을 해야 하고 기간 안에는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지. 복종하지 않으면 불복죄로 처벌받고, 시기도 위험해. 귀주 무림 전체가 화약고 같은 데다 수성은 특히 더 그렇잖아. 이래서야 어디 되겠어?”
 “그렇긴 한데 당장 할 일이 없잖아. 점원이 되겠어, 농사를 짓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우리끼리 뭐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다못해 같이 장사라도 하면······!”
 “아, 그래!”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세 청년은 번쩍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호송업이 아니라 그럼 아예 우리가 장사를 하는 게 어때?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요령 알잖아. 길도 잘 알고. 삼사 년만 고생하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군! 호송업보다 발전할 가능성도 많고. 다시 의논해 보기로 하지.”
 길을 찾았다는 듯 세 청년은 크게 표정이 밝아졌다.
 어떤 영문인지는 똑같이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대화들을 조합해 보면 왕중악의 집안이 무림 방파로 전업하는 과정에서 진로進路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뿐.
 
 다음 날 아침.
 “하-!”
 두두두두두······!
 왕중악과 일행들은 미련 없이 말을 치달려 귀양을 떠났다.
 화계평에서는 한창 최종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출전하지 못하게 된 이상 지켜봐야 속만 상할 뿐이다.
 밤사이 호전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왕중악의 상세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야, 천천히 좀 가자! 달리니 허리가 울린다!”
 말조차 타기 부담스러운 듯 속도를 내자 왕중악은 오만상을 찌푸렸는데, 어지간히 허리가 결리는 것 같았다.
 “하하! 그러게 누가 그렇게 싸우래요? 도련님은 혼 좀 나셔야 해요.”
 하지만 싱글벙글, 곽진은 아랑곳 않고 앞장서 바람처럼 달렸다.
 그러고 보니 타고 있는 말이 여간이 아니었다.
 이마 쪽에만 세로로 마름모꼴의 흰색 줄이 있을 뿐,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잡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전체가 흑마黑馬였는데, 체장이 무려 여덟 자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준마駿馬라 불리는 말의 체장이 일곱 자임을 알고 보면 완전히 보기 드문 준마였다.
 늘씬한 체장에 긴 목, 걸맞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완강한 가슴과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뒷다리 하며, 웅장해 보인다고 표현해야 맞을 듯한 그런 말.
 사람을 태우고도 전혀 무게감을 느끼지 않는 듯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치달리는 모습이 사뭇 아름답기까지 했다.
 약이라도 올리듯 곽진은 앞장서 달리며 계속 웃었다.
 “이제 질풍은 제 말입니다? 분명히 약속하셨어요?”
 왕중악은 계속 오만상을 썼다.
 “촌스럽게 질풍이 뭐냐? 흑탄이 훨씬 낫지! 어쨌거나 알았으니 좀 천천히 가자! 나 죽겠다!”
 “하하! 알았어요.”
 비로소 곽진은 다소 속도를 늦췄는데, 그러고 나니 또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병기를 지니지 않고 있었는데 의외로 지금은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이 일 장에 달하는 장창!
 소지하고 다니기 불편해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묘하게도 그것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양으로 지니고 다니는 것인지 정말 사용하는 병기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이래저래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한 청년이었다.
 
 *천하제일악인 황보추
 
 수성 동지현.
 “이제야 좀 무림 방파 같은 느낌이 드는군.”
 “폐가廢家가 따로 없었어.”
 용담표국의 표사들은 한 달 만에 보루의 청소를 끝내고 이마의 땀을 씻어 냈다.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자하방의 보루였다.
 동지현은 귀주 수성의 동쪽, 오몽산맥烏蒙山脈의 언저리에 둘러싸인 현이었다.
 귀주의 현락들이 다 그렇듯이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산자락 안에 제법이다 싶은 논밭이 있었고 오십 리 안에 수성 내성이 자리 잡아 안정적인 지역에 속해 있었다.
 자하방은 현의 측근 비자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남삼 처녀와의 대화에서 호안 인물이 이야기했듯 이 방파가 발촉된 것은 당 초기였다.
 태종 이세민이 도처의 치안을 우려해 강호 방파들을 준관부로 인정하는 향용제를 실시한 직후로서, 창파주는 용강이호라 불렸던 수성 출신의 두 호걸 중 하나였다.
 용강곤龍江棍 이규李奎와 용정검龍正劍 왕중산王重山이라 불리는 벗이었는데 곤륜파의 속가제자라 봐야 할 인물들로서 큰 명성은 떨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성 쪽에서는 호걸이라는 정평이 있었고, 약관에 출도해 십여 년간 함께 무림을 주유한 친구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향용제가 실시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이규는 수성 태수에게 향용 신임을 받아 자하방을 열었고, 왕중산은 수성 내성에서 표국업을 시작했다.
 당시 이세민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기 위해 향용제를 실시했을 뿐 아니라 호부戶部 안에 ‘행부行部’를 신설하여 적극 무역을 장려했었다. 이때부터 중원의 무역업은 크게 발전해 중원 안은 물론 비단길을 통해 세외까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무역업을 하는 상단을 행行, 우두머리를 행수行首라 칭하기도 하는데, 두 친구가 시대에 맞춰 지방자치대인 향용 일과 호송업을 나란히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하방을 연 이규 쪽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귀주라는 곳 자체가 농토가 없고 빈한한 곳이라 향용이라 해도 타 성처럼 방파를 운영하기에 적절한 향용세를 거두거나 할 수 없어 발전하기 어려웠고, 신임을 얻은 것도 측근의 남정南井, 북덕北德, 동지董地, 삼 개 현뿐이라 더욱 힘든 점이 있었다.
 어쩌면 반쪽 업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원래 강호 방파의 소득원은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외성의 치안을 살펴 주고받는 향용세와, 위치한 지역의 상단들을 보호, 호송 등을 도와주고 받는 수수료 등이었는데, 왕중산이 표국 일을 함으로 그나마 소득이 나눠졌던 것이다.
 일만 많았을 뿐 방파를 열었다 해도 이규는 그리 소득이 없었던 것.
 반면 왕중산의 경우는 사정이 괜찮았다. 삼 개 현이라 해도 성을 낀 표국이라 도처 현들의 특산물이 모이는 등, 운남으로, 내륙으로 오가는 상단이 적지 않아 실속이 컸기 때문이다.
 업무 자체도 많은 인원이 필요하거나 하지 않다. 소득이 있든 없든 향용을 맡은 방파는 늘 지역을 순회하며 치안을 지켜야 하므로 일정한 인원이 필요하지만, 표국은 호송할 인원만 있으면 되어 필요에 따라 인원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작게 시작한 왕중산은 발전했고, 방파를 맡았던 이규는 사정이 힘들었던 셈이다.
 그래도 당대에는 운영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친구 사이였고 나눠 일을 했다 해도 한 방파나 같았던 셈이라 이득을 나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두 사람이야 친구라서 의가 좋았다 하지만 후대까지 같긴 어려운 셈이다.
 이로 인해 후대부터 자하방은 형편이 어려워져 인원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 나니 부족한 인원으로 지역을 제대로 살필 수 있을 리 없다.
 맡았던 삼 개 현 중 남정, 북덕, 두 현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동지현 하나만 남았던 것이다.
 명색만 방파지 현의 청년들을 모아 지역을 지키는 자치대 정도에 지나지 않는 셈이었다.
 이렇다 보니 동지현의 치안도 불안하고, 결국 현민들은 힘 있는 방파에 치안을 맡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용담표국도 문제가 발생했다.
 동지현까지 넘어가게 되면 주위가 모두 타 방파에 둘러싸이게 되기 때문인데, 언급되었듯 방파들의 수익원 중 하나가 상단의 호송 호위라, 들어선 방파들이 일을 양보하려 할 리 없다는 점이었다.
 일찍 잡은 곳이라 아직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지만 상단들을 회유하거나 압박해 일을 맡으려 할 수 있고, 그리되면 용담표국도 형편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왕정이 자하방을 인수, 창파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방파라 해야 현의 청년들 오십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곳.
 일이 참 많았다.
 지금은 그렇다 쳐도 시작에는 삼 개 현을 살핌으로 삼백 명의 무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라 보루가 작지 않았는데, 옹색하다 보니 보수도 거의 되지 않았고, 인원이 줄어듦으로 사용치 않고 있는 숙사 주변이 다 잡초밭이었다. 거미줄로 덮인 채 방치되어 문짝이 너덜대는 숙사도 여럿이었다.
 한 달에 걸쳐 청소를 하고 건물들을 보수해 이제야 간신히 무림 방파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고, 용담문龍潭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정은 이준李俊을 만났다.
 오 대째 자하방을 물려받았던 인물은 이혁이라는 인물이었는데, 폐적으로 한발 앞서 세상을 등졌고, 아들이 뒤를 잇고 있었는데 특별한 무예를 지니지도 이름을 떨치지도 못한 서른 초반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유감일세. 부친의 일도 그렇고, 어른들의 뒤를 이어 발전하기를 원했는데 가업을 마무리하게 되다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약소하지만 이건 새 출발 하는 데 쓰도록 하고.”
 깨끗이 새 단장된 집무실, 탁자 위에 놓인 전표錢票.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것조차 숙숙의 도움 덕분이었사온데. 아버지께서도 감사하실 것입니다. 숙숙께서 인수해 주셔서 마음도 가볍고요.”
 이준의 눈자위가 다소 붉어졌다.
 보루의 이양금을 받는 자리였다.
 “시작부터 무리가 있었던 일이네. 워낙 어르신들의 우애가 좋으셔서 그리된 일이지만 작은 영역에 일까지 나눠졌으니. 규께서 욕심이 없는 분이셔서 더 그랬는지도 몰라. 다른 자들은 영역을 넓히려고 혈안이 되어 무력까지 앞세우는데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셨으니. 그런 분은 드물지.”
 왕중악과 비슷한 키에 쉰 초반의 나이. 덕이 있어 보이는 용모.
 그러나 이준은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 무예에 재질도 없고 무림 일에 별로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지역을 지키고 사람 보호하는 것은 보람된 일이지만 성격 자체가 싸우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꾸중도 많이 들은 일이지만 그냥 무난하게 사는 게 더 좋습니다. 감사드리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뭘 하려고?”
 “차茶 농원을 해 볼까 합니다. 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남정 쪽에 좋은 땅이 나왔더군요. 모쪼록 크게 방파를 일으키셨으면 싶습니다.”
 포권과 함께 전표를 넣고 일어섰다.
 어쩌면 물러서는 그가 더 마음 편히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마따나 지역을 지키고 양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보람된 일이지만 무림인들의 삶이라는 게 결코 순탄하지 않은 것이다.
 사마외도들과 시시때때로 칼부림을 해야 하고, 관사에서 토벌령이라도 내릴라치면 사방으로 오가며 녹림적과 싸워야 할뿐더러 영역 문제로 타 방파들과도 수월찮게 충돌해야 하는 삶이었다.
 명예가 크고 보람도 있지만 타고난 협골이 아닌 다음에는 피비린내 나는 무림 일이 좋을 리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각축전 속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방파가 한둘이 아님을 알고 보면 드물게 잘 마무리하는 편이기도 하다.
 “잘 가게.”
 왕정은 떠나는 그를 보루의 문 앞까지 배웅했다.
 마치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크지는 않다지만 그도 이젠 영역을 가진 어엿한 한 방파의 주인이 된 것이다.
 동지현 하나뿐인 상태라면 마찬가지로 어려운 형편이 되겠지만 도처의 상단들도 꽉 잡고 있었고, 표국과 합쳐 기반도 튼튼했다. 표국은 이제 자연스럽게 용담문의 외당이 된 셈이다. 그런 만큼 ‘우리 영역 안에서’라며 시비를 걸 방파도 없었고.
 하지만 아직도 문제가 있었다. 표국 일은 이것으로 안정이 될 것이지만 방파를 엶으로 또 다른 숙제가 생긴 것인데, 주위 방파들과 화친을 도모해 시비 및 충돌을 방지해야 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표국을 하는 인물들은 발이 넓어 다들 도처의 방파들과 친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부분 아랫사람으로서 지니는 친분이었다. 세에서도 월등히 차이가 날뿐더러 향용은 자치법을 지닌 준관부에 속하지만 표국은 개인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방파의 외당이 하는 일 중 하나가 표국의 일이라 보면 어느 차이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표국을 할 때는 그러려니 머리를 숙이고 그들의 규칙에 맞춰 일만 하면 되었으나 방파를 가지게 되면 상황은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신분이 동등하게 격상됨과 함께 이쪽도 영역과 스스로의 규칙을 가짐으로 주위 방파들과 여러모로 부딪치게 되기 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비를 피하자면 무조건 주위의 방파들이 뭉쳐 있는 동맹에 가입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가맹함으로써 같은 규칙을 가진 한 가족으로서 충돌을 피하고 협조해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정은 아직 동맹을 정하지 못했다.
 친분 있는 인물을 통해 동맹주에게 인사하고 가입 신청을 하면 될 것이었지만,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난제難題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수성의 미묘한 위치 때문으로, 이 지역에는 두 개의 동맹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두 개의 동맹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귀양동맹에 속한 안순安順! 바로 비무대회의 주최석에 다섯 패주와 나란히 있던 비둔한 노인, 화영의 월명동맹이었고, 또 하나가 육반! 맹 패주로 불렸던 남삼 처녀가 이끄는 동맹이었다.
 두 동맹이 경계에 걸친 지역에 방파를 가짐으로 어느 쪽 동맹에 가입해야 하는가 하는 고심에 빠져 있었던 것!
 동맹 간에 사이라도 좋으면 모를 일이나 그조차 최악이기도 했다.
 패주들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듯 귀양과 네 동맹은 피차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육반동맹과 안순은 완전히 벽을 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까닭은 화영의 욕심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순동맹과 육반은 지리적 문제로 예부터 경계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수성 일대는 육반동맹에 속해 있었다. 수성뿐 아니라 훨씬 더 아래쪽인 하궁下弓까지도 육반동맹이었던 상태.
 한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귀주의 다섯 패주 중 하나이자 전 육반의 태두였던 맹익孟翼이 숨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이범문과 마찬가지로 귀주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던 남자로서, 그가 육 년 전 행공을 하던 중 주화입마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육반동맹은 당시 몹시 흔들리게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태두인 인물이 숨을 거둔 까닭도 있었지만 보다 그에게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맹강孟康이라는 약관의 딸 하나만을 두었던 상태로 그녀가 바로 대회 때 패주석에 있었던 남삼 처녀였다.
 딸이라 해서 가업을 잇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러나 거친 무림에 젊은 처녀가 동맹을 이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휘하의 동맹주들이 흔들렸던 것이다.
 나이라도 많으면 모를까 갓 스물인 연치였던 터라 더욱 흔들리기도 했다.
 젊다 해도 마흔에서 칠순에 이르는 동맹주들이 딸이나 손녀뻘인 어린 처녀에게 머리를 숙이려 할 리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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