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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명무명 1

2017.05.22 조회 3,792 추천 31


 검명무명 1 - 득검출세(得劍出世)
 
 
 제1장 뜻 없이 깨어나다
 
 
 "뭐지?"
 두 손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곱디고운 손이었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너는······ 누구지?"
 고개를 돌리니 동경 속에서 자신을 마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두툼히 살이 올라 있는 그 얼굴은 자신을 의아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얼굴.
 일생 동안 배불리 먹어본 적도 없는 그에게는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출렁거리는 뱃살과 힘없는 팔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는 데만도 엄청난 힘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 안의 정경이 보였다.
 일평생 자신의 집은커녕 방을 가져보지도 못한 그로서는 낯설 따름이었다.
 이런 화려한 것은 자신의 성정에도 맞지 않았다.
 입은 옷은 화려한 금의요, 덮고 있던 이불은 금침. 베게는 옥으로 만든 것이고 주변에 놓여 있는 가구들은 하나하나가 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으음······"
 잠깐 몸을 틀자 등에서 우드득하는 소리와 통증이 몰려왔다. 어지간히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침상에서 이불을 걷고 내려왔다. 무릎에 실리는 체중과 부하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걸음, 한걸음 간신히 옮겨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탁자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정신이 혼미했다. 오랜 시간 잠을 잔 것처럼 혼몽스러웠다.
 눈을 감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 나는 죽었었구나······"
 은거지에서 쓸쓸히 두 눈을 감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럼 여기는 저승인가? 어디인가?"
 그가 의아해 할 무렵이었다.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문가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계집아이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대야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있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아이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덜덜 떨다가, 누군가를 찾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님! 마님!"
 "무슨 일인가?"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계집아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인 듯싶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왜 자신이 이런 몸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 답답함은 더해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 하는 소리와 일단의 사람들이 방으로 달려왔다.
 가장 앞에 선 것은 커다란 덩치의 중년인이었다. 호랑이와 같은 기세를 지닌 그에게는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전장의 향기. 혈향.
 그의 옆에는 현숙한 중년부인이 서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은 한결같이 걱정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는 젊은 남녀가 서 있었는데, 그들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띠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여인은 그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아야. 괜찮은 거냐."
 "이 어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두 부부가 한탄을 하며 그를 다독였다. 그제서야 시선을 돌린 그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어, 어머니?"
 "그래! 니 어미다, 이 녀석아."
 부인은 그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옆의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어, 어머니······"
 낯설었다. 어머니란 단어가, 가족이란 존재가. 일평생 홀로 살아왔던 그에게 느닷없는 가족이 생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아닌 이 몸의 가족이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싫지 않은 감정이었다.
 "어머니, 이제 정아를 쉬게 해주지요."
 "그래 큰아이 말대로 합시다. 부인."
 뒤에선 사내 중 가장 기골이 장대한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얼굴이나, 덩치까지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이 몸의 큰형인 듯싶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은 그의 부인일 터였다.
 그녀 역시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숙한 기품이 큰형이라는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들 사이는 부모님의 사이 못지않게 금슬이 좋은 듯, 화기애애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냉막한 인상이 인상적인 사내였지만, 그도 왠지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이 몸의 둘째형이었다.
 그 역시 성혼한 듯이 한 여인이 찰싹 붙어 있었다. 다만, 한 여인만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멀뚱히 서 있었는데, 처음부터 무표정하게 서 있던 여인이었다.
 그녀의 미색은 출중했는데, 특히 맑은 듯 청아한 두 눈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무복을 걸치고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보검인 듯싶었다.
 그가 힘겨운 듯 한숨을 내쉬자, 그제야 그 사람들은 걱정스런 미소를 보이며 방을 나섰다.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무표정한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하고는 다독이며 나갔다.
 활짝 열린 방문 앞에는 그녀만이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철저히 제 삼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싶었는지, 무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가족들이 사라진 것과 반대방향으로 모습을 감췄다.
 활짝 열린 방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가슴속 깊은 곳의 탁기마저 씻어줄듯이 청량한 바람이었다.
 "후~"
 복잡한 심사를 날려버릴 듯이 거세게 심호흡을 한 그는 막연한 심정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운공에 들어갔다.
 차분히 조식을 취하자 의외의 결과에 놀라고 말았다.
 몸은 형편없었지만, 의외로 내력만큼은 기초가 튼실했던 것이었다. 물론 기초뿐이었지만, 몸 상태와 비견해본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흐음······"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전에 쌓여 있는 내공을 운기 해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호흡을 통해 축기는 했지만, 운공을 해본 적은 없는 듯했다.
 다만, 착실히 단전에 공력을 쌓아놓기만 해왔던 것이었다.
 혈도는 곳곳이 탁기에 막혀 있었다.
 "희한하군."
 그는 차분히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호흡에 집중하며 서서히 의식을 몸속으로 이끌었다.
 몸속의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의 의식이 다시 돌아왔다.
 "후우우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하, 엉망진창이군."
 어이가 없었다. 일단 몸을 단련하고, 탁기를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몸이 누군지도 알아야 했다.
 그것을 찾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침대 한켠을 통한 비밀통로.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그처럼 뚱뚱한 몸이라면 더더욱 들어가기 힘든 공간이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발견한 세 권의 책자.
 세 권 모두 어떠한 제목도 달려 있지 않았다.
 "이건······"
 한 권은 무공비급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건강도인술 따위의 기공술이 적혀 있는 책자였는데, 태반이 단편적인 지식에서 끝났다.
 대충 훑어 본 그는 그제서야 이 몸의 주인이 어떻게 착실히 내공의 기초를 쌓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 책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기공과 축기만큼은 분명 정종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잡다한 좌도방문의 술수들뿐이었는데, 일례로 금단, 금액 따위의 연단술이나, 귀신을 부리는 초혼술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파고들어가 보면 알맹이가 없는 그저 수박 겉핥기식의 두서없는 묘사나, 상상 속의 이야기 대부분이었다. 다만 추측할 따름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을 던지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어라?"
 많이 낯익은 글귀들이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이것은 꽤나 상승의 내공심법이 아닌가.
 시간을 들여 글을 읽다보니 거슬리는 부분이 몇 군데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교묘하게 글귀를 변형하거나 삭제하여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름 모를 이 무명의 심법을 곰곰이 따져 보니 이건 딱 사람 잡기 알맞은 심법이었다.
 이 글을 적은 자는 교묘하기 그지없어 설사 내가고수라 할지라도 속아 넘어가기 십상일 정도로 교묘하게 구결을 감추고 삭제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이 몸의 주인은 이 심법을 운용하려다 만 듯싶었다.
 비록 내공의 기초가 튼튼하다 할지라도, 이 심법은 애초에 주화입마를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내력만 착실했지, 틀어 막힌 것이나 다름없는 혈도로는 진기운용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주화입마의 심법도 한편으로 던져 놓고 마지막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천만 뜻밖에도 이 몸의 주인의 일기였다.
 일기는 작년부터 시작되었다.
 ―모월모일
 오늘은 내 혼례식 날이었다.
 로 시작되는 일기였다.
 가슴이 설렌다. 어린 시절의 태중약혼이라지만, 솔직히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으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강호에서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에 하나라는데.
 그녀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하기사, 나 같은 놈을 좋아할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뚱뚱하고, 소심하고, 옹졸하고. 매일 색주가나 돌아다니는 나 같은 난봉꾼을······ 이렇게 자포자기 하고는 기방에 갈 생각만 했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나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리고 그녀의 얼굴만이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기방에 가 기녀를 안을 생각만 하던 나였다. 나 자신도 경멸스러운데······ 그녀라고 다를까.
 식을 마치고 신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녀는 나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그녀는 지금 침상에서 잠이 들어 있다. 아름답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모월모일
 답답하다.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데. 다들 신혼이라 좋겠다고 말하지만, 글쎄?
 물론 싫지는 않다. 비록 그녀는 나를 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으니까.
 그녀 몰래 무공을 배우려고 한다. 그럼 그녀도 나를 달리 보지 않을까?
 듣자 하니 무공을 익히려면 내공이 중요하다고 한다.
 다행히 내공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차분히 익혀왔다. 비록 축기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생을 튼튼하게 살 수 있다고 해서 배웠던 것인데, 열 살 때부터 시작해서 이제 열아홉이니 그래도 구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했으니, 늦은 나이는 아니겠지?
 ―모월모일
 책을 구했다. 한 권은 어린 시절 배웠던 내공심법이 들어 있던 책이었다. 나를 가르쳤던 도사님께서 이외의 부분은 읽을 필요도 없다 하셨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펼쳐보았지만, 내가 원하던 무공에 관해서는 없었다. 그저 내가 배웠던 기초심법만이 전부였다.
 다른 한 권의 책은 너무 어려웠다. 내가 그래도 기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머리가 영민하다고 소문났었던 사람인데,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지. 답답하다.
 오늘도 몇 번이나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읽어 내려간 그는 이 몸의 주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충렬 양가장(忠烈 楊家場) 당금 천하의 대장군부이기도 한 곳이었다.
 아버지인 대장군 양호상(楊虎相)은 두 형들 양한정(楊閑征)과 양무정(楊武霆).
 그리고 자신 양운정(楊雲霆) 그리고, 지금은 집에 없는 막내 여동생인 양혜령(楊慧鈴).
 이렇게 삼남일녀를 두었다.
 이제 25세의 양한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장군부의 천호의 자리에 있는 앞길이 창창한 무관이었고, 작은 형인 23세로 양무정은 양가제일창으로 불릴 정도로 출중한 무예를 자랑하지만, 오히려 문사의 길로서 한림원의 학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막내인 양혜령은 이제 16의 어린 나이이지만,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를 지닌 착한아이였다.
 지금은 저 멀리 사천의 아미산에서 무공을 배운다고 했다.
 글을 읽을수록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기억조차 그에게는 낯설고 거북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 가족이란 존재가 생겼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자신의 부인인 여인. 저 남궁세가란 곳의 금지옥엽이란다.
 나이는 동갑인 20세. 남궁아현.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한 모양이었다.
 한 장, 한 장에, 그녀에 대한 찬사와 원망이 가득 적혀 있었다.
 꽤나 두꺼운 일기였지만, 마지막에 다 달았다.
 ―모월모일
 아버지께서 부르셨다.
 두려웠다. 언제나 아버지는 나를 호통만 치시니까.
 그런데, 그날은 왠지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저 안쓰런 눈길로 바라보실 뿐이었다.
 큰형이 옆에서 말해주었다. 징병되었다고 했다.
 무슨 정신으로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방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불과 반시진 전의 일이다.
 무섭다. 석 달 후면 이 집을 떠나야 한다. 왜 대장군부의 아들이 변방 따위를 가야 하는 건가.
 무섭다. 두렵다. 그녀를 두고 그런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모월모일
 결심했다.
 왠지 두렵다. 하지만, 그녀를 두고 떠나가기는 싫다. 비록 그녀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그녀를 두고 그런 지옥 같은 곳으로, 내가 버틸 자신이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5년이다. 오년이란 시간 동안 변방의 척박한 환경을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모월모일
 마지막이다.
 눈앞의 파란 환약······ 이것이 나에게 안식을, 그리고 그녀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끝이었다. 눈물자국으로 보이는 자국이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자살이었나. 사치스런 인생이군."
 그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일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였다.
 이 몸의 주인, 이제는 자신의 몸이 되었지만, 양운정이란 이 사내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너무나 뛰어난 두형들 때문에 항상 아버지께 혼나고 그에 대한 반항일까. 매사 쾌락과 저 좋을 대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불쾌감이 밀려왔다.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 한 기분이었다.
 온몸에 출렁거리는 살들이 더더욱 그런 기분을 부추겼다.
 "하하. 한 가지를 빼고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녀석이군."
 그 하나란, 물론 가족들이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다시 내려주신 이 삶 감사한 마음으로 영위하겠나이다."
 그는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는 방문을 나섰다. 새로운 일보였다.
 
 
 제2장 전장에 서다
 
 
 "으아아아!!!"
 뜨거운 피가 난무했다. 언제나와 같은 소규모의 전투였지만, 양운정의 검은 순식간에 두 기병의 목을 베고 또 다른 피를 찾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이십의 명군들도 분전하여 채 이각이 지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가 속한 북로3군을 정찰하던 일단의 무리들과 몽고군의 정찰을 마치고 복귀하던 양운정이 마주친 것은 정말 더러운 우연이었다.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아니 양운정의 모습은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결코 길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한 인간이 변화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한때 극의를 체험한 이로서는 오히려 긴 시간이라 할만 했다. 양운정은 북로군의 십부장으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대장군부라는 거대한 배경을 본다면 너무나 낮은 직위였지만, 처음의 양운정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과분하다 할 터였다. 제대로 뛰기는 커녕 걷지도 못하는 뚱뚱한 몸임에도 명색이 십부장의 직위로서 복무를 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배려를 받은 결과였다.
 그와 함께 입대한 이들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그저 재수없는 좋은 가문의 돼지가 그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됨과 동시에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투입된 병사들은 하나 둘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예전의 파락호 양운정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양운정은 이곳 북방의 변경에 온지 2년 만에 북로3군의 백호장의 직위로 복무하고 있었다.
 백호의 직위부터는 개인 천막이 지급되었다.
 양운정은 몽고의 정찰병과의 교전을 마치고 복귀했다.
 보고를 마치고, 막사에 들어선 양운정은 투구를 벗었다. 길게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렸다.
 하나, 둘 갑주를 벗기 시작했다. 갑주가 떨어져 나가며 그의 나신이 드러났다.
 양운정의 변화로서 가장 큰 것은 당연히 그의 몸이었다.
 이전의 출렁거리던 그의 지방들은 간데없고 잘게 잘 짜여진 근육들로 다져진 그의 몸은 결코 서너 달 정도의 단련으로 생길 수 있는 근육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수하게 새겨진 상처들.
 하나하나가 깊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견 흉측할 수 도 있는 상처들이었지만, 오히려 양운정의 잘 벼리어진 기세와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하기 까지 했다.
 양운정의 몸도 몸이었지만, 그의 외모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홀쭉해진 뺨과 거칠게 자란 수염.
 그리고 흔들림 없는 그의 눈. 크지 않은, 작은 편에 속하는 그의 눈, 심연의 늪처럼 깊고 깊었다.
 그리고 왼쪽눈 아래에는 일(一)자의 깊은 상처가 생겨있었다. 그 상처는 의외로 양운정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유약하게 보일수도 있는 그의 외모를 날카롭게 벼려주었다.
 갑주를 다 벗은 양운정은 마른 천에 물을 부어 대충 몸을 닦았다.
 고개를 빙글빙글 돌리며 목근육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음미하듯이 두 눈을 감고 천천히 그러나 크게 돌렸다.
 십여 회나 돌렸을까.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꺽은 양운정은 검을 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검집에서 검병까지 모두 묵색으로 되어 있었다.
 스르릉······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검이 뽑혀져 나왔다. 평범한 장검이었다. 무슨 백련정강이니, 청강검이니 하는 것이 아닌 거무튀튀한 철검이었다. 검면에 비친 양운정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돌렸다.
 양운정의 검은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사 처음 검을 접한 아이가 장난이라도 치듯이 좌우로 상하로 이리저리 검이 흔들렸다. 그의 발은 단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의 검만큼은 자유로이 허공을 노닐었다.
 얼마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까, 아차 하는 순간에 양운정의 검은 얌전히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양운정은 다시 갑주를 걸쳤다.
 갑주를 걸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양운정은 익숙한 듯이 순식간에 갑주를 차려 입었다.
 곧 막사로 한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양 장군님, 회의에 참석하시랍니다."
 "아."
 양운정은 가볍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태양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거친 모래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고 있었다.
 양운정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병졸들의 모습이 보였다.
 불과 일 년 전에는 궤멸 직전까지 갔던 북로3군이었다. 당시, 고위무관은 물론이오 대다수의 하급 무관들마저 몰살당하고 말았었다. 양운정은 그 난전을 버텨 끝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무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1년,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튼실한 군영을 만들게 된 것은 신임 장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등정(可登鄭) 지장이요, 덕장이었다. 병졸들과 무관들 사이에서 그 신뢰가 높았다.
 어찌 보면 이런 자리에 있을 위인은 아닌 듯싶었다. 지닌바 능력에 비해 너무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뼛속까지 무장인 자.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회의가 열리는 막사에 들어서니 긴 탁자를 중심으로 여러 무장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깊숙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가등정이 보였다. 검은 갑주를 걸친 중년의 장군이었다.
 나이 사십에 그 얼굴은 온갖 흉터가 그의 지나온 풍상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흉측한 얼굴의 상처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눈동자는 순수한 열정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가등정에게 군례를 취한 양운정은 얌전히 말석에 자리 잡았다.
 "그럼 회의를 계속하지."
 가등정은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양운정의 군례에 답한 후, 회의를 재촉했다.
 "예! 장군."
 "북로군의 본영에서 내려온 지령입니다."
 한 장수가 내민 붉은 두루마리를 받은 가등정은 한자, 한자 유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등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에서 연기라도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 붉게 달아오른 가등정은 급기야 지령을 냅다 던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닭대가리들!! 도대체 어떤 놈이냐, 이딴 말도 안 되는 것을 계책이랍시고 내린 놈이!"
 "본영의 군사 최흠이란 자이옵니다."
 "이런 망할 지금 3군보고 나가 죽으라는 거야! 뭐야!"
 가등정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가등정이 화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부관들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지금 이 지령이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는 자가 있느냐."
 무관들은 서로 마주 볼 따름이었다.
 "젠장! 한 달. 한 달 안에 저 몽고3대 부족을 몰아내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무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심지어 양운정마저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북로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은 몽고의 3개 부족들이었다. 수년 동안 끊임없이 명군을 자극하던 저 3개 부족을 북로군 전체도 아니고 북로3군만으로 한 달 안에 몰아내라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란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들 3개 부족, 각기 혈랑, 청랑, 흑랑이라 불리는 이들은 30세의 젊은 족장. 철홀이란 영웅의 깃발 아래 사실 상 하나의 대군과도 같았다.
 3개 기병단, 하나의 기병단이 무려 일만에 달했다. 몽고라는 부족의 특성상 전원이 기병이란 점을 감안한다 하여도 정말 대다한 수였다. 철홀의 무력과 용병은 놀라워서, 그가 나선 전투에서 몽고군은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출귀몰한 몽골의 기동력을 극한에 이끌어낼 줄 아는 용병술을 지닌 철홀이었다. 그나마, 전쟁이 이렇게 대등한 교착을 이루는 것도 가등정이 북로3군을 맡으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북로3군은 삼만 정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만의 북로군의 병력 중 3할을 차지하는 3군은 북로군 중에서도 가장 최전방에 나가 있는 부대였다. 그만큼 사망자도 부상자도 가장 많았던 부대이며, 궤멸지경에 간 것도 수년간 5회에 달했다.
 가등정이 새로운 정병을 이끌고 3군의 이름을 받아 군영을 짓고, 일방적으로 물러나던 전쟁을 그나마 대등한 교착상태 만들어낸 것은 그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한 달 내에 철홀의 3개 부족을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책이랍시고, 당당히 본영의 군사가 내민 계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암살(暗殺).
 분명, 3개 부족은 젊은 부족장인 철홀의 영도 아래 묶여 있기에, 철홀의 존재가 없다면, 전황은 명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터였다. 하지만, 철홀에게는 그의 직속 호위대인 붉은 늑대들이 있었다.
 전원 삼십에 그들은 하나 하나가 일당백이었다. 그들의 무력은 저 중원의 날고기는 무림의 고수들을 압도하는 괴물들이었다. 더더군다나, 철홀의 개인의 무력 또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
 확인된 바로는 붉은 늑대 전원이 달려들어도 철홀 하나를 못 당한다고 하였다,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철홀이 있는 몽고족의 본영은 북로3군의 진영으로 부터 수백리. 불가능했다.
 한 달 내에 철홀을 암살하고 철홀의 부족인 청랑족을 북로3군 단독으로 밀어붙여라. 후에 본영과 1,2군이 총공세를 펼쳐 전황을 뒤집는다는 것이 이번 지령의 요체였다.
 "장군!"
 "젠장! 제장들은 각자 생각을 정리하도록, 내일 다시 회의를 열겠다."
 한참 머리를 싸매며 격렬하게 토론을 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등정이 거칠게 막사를 박차고 나가자, 그제야 휘하의 무관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양운정은 끝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해는 이미 모습을 감추고 둥근 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보름이었다.
 양운정은 막사에서 벗어나 달을 바라보았다.
 뜨겁고도 시린 달빛은 낮 동안 태양이 달구었던 전장의 열기를 식혀주기는 커녕, 더더욱 달구고 있었다.
 "아직, 여기에 있었나."
 가등정이었다.
 "장군을 뵙습니다."
 "아. 되었네. 내가 자네의 사색을 방해한 것 같군."
 "아닙니다."
 "······"
 가등정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양운정의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양 백호. 어떻게 생각하나, 암살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가."
 "불가(不可)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네, 우리는 군인. 군인은 명에 살고······ 명에 죽어야지."
 "······"
 "자네가 나서주었으면 하네."
 "······"
 "자네보다 뛰어난 무장들은 많네, 진백호나, 우백호는 무공이 뛰어나지, 장백호는 계략과 용병이 특출하고······ 하지만, 자네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네."
 "살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가등정은 부정하지 않았다. 양운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붉은 늑대와 마주치고도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장수가 양운정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특출한 무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건만, 그는 언제나 적을 죽이고 귀환했다.
 "명이시라면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미안하네."
 가등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는 휘하의 장수에게 나가 죽으라는 것을 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장수는 묵묵히 그의 뜻에 따랐다.
 양운정은 묵묵히 군례를 올리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개인막사에서 그나마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다.
 가등정은 양운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네. 정말로."
 그는 품에서 지령과 같은 붉은 색의 첩지를 꺼내었다.
 첩지를 묵묵히 읽은 가등정은 한숨을 쉬며 막사 앞에 있던 화로 속에 첩지를 던져 넣었다.
 불길에 휩싸이며 타들어가는 첩지에 몇 개의 글자가 보였다.
 <필사(必死) 양(楊)······>
 야음을 틈타, 몽고군의 본영에 도달했다. 말은 도중에 돌려보내고, 양운정을 비롯하여 북로3군 중 가장 날래고, 무공이 있는 자들만 추려낸 7인이 모래언덕 위에 모습을 숨기고 본영을 바라보았다.
 "장군, 이건 아무리 봐도 미친 짓입니다."
 일행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몽고군의 위용은 실로 대단해서 북로군의 총본영의 두 배가 넘는 규모와 병력들이었다.
 저 한가운데에 당당히 서 있는 파오가 철홀의 천막일 터였다.
 철홀의 천막 앞에는 성스런 푸른 늑대의 깃발이 강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미 밤은 깊었건만, 몽고군 진영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무리를 지어 순찰을 하는 몽고군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했다.
 "강군이군. 기강이 잘 잡혀 있다."
 "힘들겠습니다. 양 장군님."
 양운정은 말없이 몽고군의 진영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 이들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죽기는 매한가지 아니오. 아니 그렇습니까. 장군."
 묵묵히 몽고군의 모습을 바라보던 양운정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낯익은 얼굴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을 지칭하는 별명은 알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양운정의 얼굴을 바라보는 호전적인 눈빛의 거친 사내가 도부(屠夫)였다.
 엄청난 근육 때문에 당장이라도 입고 있는 야행의가 터질 것 같았다. 전생에 촉한의 장비라도 되는지 밤송이 같은 수염과 부리부리한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양운정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전 북로3군 중 하나였다.
 그 옆에서 관심 없다는 듯이 드러누워 있는 자 역시 같은 처지였다.
 졸린 듯한 눈으로 염소수염을 비비꼬고 있는 이자의 이름은 혈창(血創). 한 자루의 장창을 귀신같이 다루어 달리 귀창(鬼創)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었다. 방만히 퍼질러져 있는 모습이었지만, 검은 장창을 쥔 그의 손은 긴장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도부와 혈창은 양운정보다도 오랜 시간동안 전장을 전전해온 사내들이었다.
 그 뒤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인은 가등정과 함께 새로이 북로3군에 배치된 사내들이었는데, 그들은 같은 동문인 듯싶었다.
 군관이라기보다 무림인에 가까운 그들은 잘 절제된 기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양운정은 그들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가등정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는 호위대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정광이 가득해 한눈에도 명문의 제자임을 쉽사리 알 수가 있었다.
 철홀에게 붉은 늑대라는 호위대가 있다면, 가등정은 칠성(七星)이라는 무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력을 확인할 길이 없기에 확신을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절제된 기세로 보건대, 하나하나가 결코 붉은 늑대의 아래가 아니었다.
 가등정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그들이 이렇듯 작전에 투입된 예는 없었기에, 양운정과 다른 두 사람은 못내 미심쩍어 하면서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양운정의 물음에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이가 대답했다.
 "그저 일검(一劍)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일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검, 삼검이오? 하하하."
 도부가 끼어들며 농을 던졌다. 칠성 중 네 사람은 도부의 말에 움찔했는데, 실제 그들끼리도 일검, 이검 하며 불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사신으로 하지 그러오. 그래, 당신부터 청룡, 백호, 주작, 현무하면 되겠네. 그쪽이 더 멋있지 않소."
 옆에 있던 혈창마저 맞장구를 쳤다. 놀리는 투가 다분했다. 네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순간, 가만히 있던 양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 정히 이름을 말하기 싫다면······ 자네부터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고 부름세."
 말을 꺼낸 도부와 혈창마저 움찔해 그를 돌아보았다. 양운정은 이미 시선을 돌려 적진을 살폈다. 네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간단하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은밀히 적진으로 숨어든다, 암살한다. 도망친다. 또 하나는 철홀을 밖으로 불러낸다. 암살한다. 도망친다."
 태연히 말하는 혈창의 모습에 다들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간생략이 많았다.
 확실히 철홀을 보아야 암살을 하던가 말던가 할 일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잠행을 하던지, 불러내던지 해야 할 터였다.
 "답답하구먼, 정말."
 도부는 짜증을 내며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답답하기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때였다. 양운정이 벌떡 일어났다. 양운정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돌연한 그의 행동에 다른 이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움직이자."
 양운정이 모래 언덕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몽고군의 후방이었다.
 철홀은 왠지 불길한 기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으음······"
 잘 꾸며진 그의 파오는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파오 중앙에서 타오르는 화덕이 실내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벌거벗은 그의 몸은 잘 짜여진 근육과 곳곳에 남아 있는 상처가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켠에 놓아진 마유주를 한 모금 들이킨 철홀은 홑옷을 걸치고, 옆에 놓여 있던 거도를 들고 천막을 나섰다.
 그의 천막을 지키던 병졸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군례를 취했다.
 철홀은 그런 모습에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보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청량한 밤공기가 폐부를 씻어주는 듯 했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다만 군영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흡사 불야성을 이루는 듯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철홀은 군영 뒤쪽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껏 땀을 흘리면 머릿속에 가득 찬 잡념과 불안이 사라질 것 같았다.
 널따란 연무장에 곳곳에 불빛 타오르고 있어, 대낮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밝았다.
 "흐음······"
 천천히 도를 꺼내었다. 흑오철로 만들어진 명도(名刀)였다. 검은 도신은 마치 거울처럼 철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도신에는 네 글자의 도명이 적혀 있었다.
 일휘혈우(一揮血雨).
 날카롭게 벼려진 도인이 소름끼치는 예기를 뿜고 있었다. 처음 도를 잡았을 때부터, 그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가볍게 도를 돌리기 시작하며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한참을 천천히 도를 휘두르던 철홀은 가볍게 숨을 토하며 부드럽게 도면을 쓰다듬었다.
 "한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돌연한 목소리였지만, 철홀은 놀라지 않았다. 그의 등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무장의 한쪽 구석을 보니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했다.
 양운정이었다. 그의 뒤에는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6인이 있었다.
 양운정의 뒤를 쫓아 허겁지겁 도착한 곳은 몽고군의 후방에 위치한 방벽이었다.
 아니 방벽이랄 것까지도 없었다. 간단한 목책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몽고군의 진영의 후방은 진영의 3할을 차지하는 연무장이었다. 몽고군은 연무장과 본영이 이어지는 곳에만 경계병력을 투입했었다.
 야음을 틈타 목책을 넘어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이 본 것은 소름끼치는 살기를 뿌리는 철홀의 거도였다.
 철홀은 양운정의 등장에도 신경 쓰지 않고 연무를 계속 했던 것이었다.
 "명군인가?"
 "북로3군 백호장 양운정이라 하오."
 "그대는 나의 도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
 철홀은 오만한 얼굴로 양운정에게 도를 겨누었다.
 타타탁!
 잰 발소리와 함께 30의 붉은 갑옷을 걸친 사내들이 나타났다.
 붉은 늑대였다.
 완전 무장한 그들은 어느 틈에 철홀을 에워싸고 있었다.
 폭발할 듯한 살기가 넓디넓은 연무장을 가득차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족장님!"
 "괜찮아. 물러서."
 철홀의 명령에 붉은 늑대들은 마지못해 정면을 열어주었다.
 "양운정이라 했나. 대답해라. 나의 도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
 양운정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좌수에 든 검을 들어올렸다. 수평이 되게 들어 올린 양운정은 말없이 짧게 목례를 취했다.
 "하하하. 좋다!"
 철홀은 대뜸 거도를 치켜들고 거세게 휘둘렀다.
 양운정과 철홀간의 거리는 못해도 20장. 하지만, 철홀의 기세는 거리를 무시하고 양운정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양운정은 아니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실로 몇 년 만의 쾌감인가.
 철홀은 양운정의 얼굴을 보았다. 희열을 느끼는 듯한 그 모습에 깨달았다.
 지난 밤, 불길함의 정체가 바로 이 녀석이다.
 "크아압!"
 서로의 간격이 닿기 무섭게 철홀의 거도 혈우도(血雨刀)가 거세게 춤을 췄다.
 그 모습에 붉은 늑대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들의 눈에 양운정은 그저 애송이 적장이자 암습자에 불과했다.
 저런 자에게 철홀이 직접 상대해주는 것도 모자란 초반부터 저런 생사를 결할 자세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의 소름끼치는 무력과 마음가짐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철홀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도를 휘둘렀다.
 일도양단의 기세를 담은 철홀의 도는 순식간에 양운정의 코앞에 쇄도해 들어갔다.
 한순간에 거대한 도신이 길게 늘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헉!"
 양운정의 뒤에서 조마조마하던 육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도신에 양운정이 휘말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양운정은 마치 무언가에 몸이 딸려가듯이 찰나지간에 철홀의 도세에서 벗어났다.
 철홀의 거도는 내리치던 기세에서 조금도 줄이지 않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양운정을 따라 붙었다.
 "부우웅!"
 소름끼치는 파공성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을 한듯이 철홀의 거도는 그 육중함에 어울리지 않는 쾌속함을 보였다.
 양운정은 아직까지 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그의 검과 철홀의 도의 길이는 못해도 두 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양운정은 철홀의 간격 안에 있었지만, 철홀은 아직까지도 양운정의 간격의 바깥에 있었다.
 "크하하하!"
 철홀은 호탕하게 웃으며 도를 휘둘렀다. 철홀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양운정은 아직도 그의 간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야행복은 이미 곳곳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양운정의 기묘한 움직임이 점점 철홀의 눈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철홀의 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인가!"
 철홀은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슨 어이없는······
 저 애송이는 지금 자신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철홀은 도영의 사이로 파고드는 양운정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며
 순식간에 도초를 전개해 들어갔다.
 "크읏!"
 양운정은 이를 악물고 몸을 번신하며 간신히 철홀의 도초를 피했지만, 찌익 소리와 함께 등쪽의 야행의가 길게 찢어지며 한줄기 피가 솟구쳤다.
 거죽만 베어졌을 뿐이었다.
 그 순간, 철홀은 깨달았다. 자신의 도에 실린 경력이 단순히 거죽만 베어낼 정도였던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를 베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득! 이를 악물며 충분한 거리에 있는 양운정을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자신의 최대살초를 펼쳐냈다.
 광풍살광(狂風殺光)!
 "우아아압!"
 지금껏 거도를 한손으로도 유연하게 휘두르던 철홀은 두손으로 도를 쥐고는 거세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철홀의 도는 수십 회 대기를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살을 에일 듯한 무형의 도기(刀氣)가 양운정을 쓸어왔다.
 어디 한 곳 피할 데가 없어 보였다.
 철홀의 광풍도(狂風刀)의 최후절초가 펼쳐진 것이었다.
 "아앗!"
 육인은 깜짝 놀라 경호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 경호성이었다.
 안타까움과 감탄.
 생사지경에 처한 양운정에 대한 안타까움과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는 철홀의 경지에 대한 감탄이었다.
 비록 지금은 군문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들 모두 무공을 익힌 무림인의 출신으로 하나같이 일류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지만, 저렇듯 철홀처럼 검기를 발출하는 경지는 무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놀람은 칠성의 사인들은 더욱 심하였다.
 청룡, 혹은 일검이라 불리는 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비롯한 칠성의 사형제들은 사실, 몽골의 무장들을 은근히 경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호의 명문, 구대문파중 청성파(淸成派)의 제자들로 사문과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문에서도 철홀처럼 검기를 쏘아내는 경지는 극히 드물었다. 나이 지긋한 장로나 장문인이나 가능할까. 그것도 저렇게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라면 가히 전무하다 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비단 청성파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무림제파를 따져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당금 강호의 절정고수라는 신주십육성(神州十六星)이라면 능히 가능하겠지만, 여기 변방의 몽고인이 그런 경지를 보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라졌다. 마치 어둠 속에 스며드는 그림자처럼 쏟아지는 도기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헉! 아··· 하아······"
 철홀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은 양운정의 철검을 보았다.
 어느 틈에······ 믿을 수 없었다. 철홀은 양운정을 몰아친 것이 아니라, 양운정의 발을 멈추게 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 무슨 초식이냐."
 "······십보필사(十步必死)."
 "조, 좋은 이름."
 스릉!
 양운정의 검은 검집으로 얌전히 돌아갔다. 철홀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피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내 나이 삼십하고도 다섯······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허나 하늘을 우러러 당당했음을 자신한다. 너는 어떠하냐."
 "······글쎄."
 "너도 당당하길 바라마."
 그 말을 끝으로 철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몽고 청랑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거침없이 살아왔고, 당당히 살아온 한 젊은 영웅이 영면의 안식을 얻고, 조상의 품으로 돌아갔다.
 초원을 사랑했던 초원의 아들이 초원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철홀의 얼굴에는 어떠한 회한이나 후회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흐뭇한 미소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양운정은 정말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치열하게 살아온 자만이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떠했을까.
 "조, 족장님!"
 삼십의 붉은 늑대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들은 편안히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주군의 시신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들의 울부짖음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그들에게 철홀의 존재는 그저 단순한 상관이나, 부족장의 의미가 아니었다. 철홀은 몽고족의 미래요, 지도자였던 것이었다.
 양운정을 제외한 육인은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절절한 붉은 늑대들의 울부짖음은 그들에게 원초적인 살의를 선사했다.
 "······가라. 정확히 한시진 후 추격하겠다."
 붉은 늑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였다.
 "이것은 우리의 주군과 정당히 검을 겨루어 승리한 자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피를 쏟을 것처럼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양운정은 묵묵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필살의 의지와 원한이 서려 있었다.
 양운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묵묵히 검을 들어올려 목례를 취하고는 뒤돌아 일행에게 다가갔다.
 "이제, 도망치자."
 양운정은 일행들과 흩어지기로 했다.
 "그들은 십중팔구 나를 쫓을 것이다. 너희는 각자 흩어져 본영으로 복귀하라, 나는 반대쪽으로 가겠다."
 "장군!"
 "나 하나로 끝날 일이다. 너희까지 목숨을 내어놓을 필요는 없어. 게다가 붉은 늑대들이 나를 쫓음으로서 생기는 병력의 공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너희는 속히 복귀하여 북로3군을 이끌어 남은 몽고군을 쳐라."
 그들의 심사는 복잡했다. 마치 휩쓸리듯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는 저 양운정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양운정이 도대체 어떤 수로 철홀을 쓰러트려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양운정의 짐작하지 못할 한 수에 대한 열망이 무엇보다 컸다. 하지만, 양운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 모두 양운정이 내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철홀을 상대할 당시의 움직임은 내공이 없다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실지로 목격했음에도 쉬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양운정으로부터 더더욱 답변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칠성의 네 명은 더더욱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가등정으로부터 모종의 밀명을 받은 상태였다.
 일의 성공여부를 떠나, 양운정을 사살할 것. 그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철홀 정도의 고수를 격살한 양운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붉은 늑대의 추격은 확실히 양운정의 목숨을 끊어 놓을 터였다.
 도부와 혈창은 양운정의 두 손을 꼭 잡고 떠나려 하지 않았지만, 무표정했던 얼굴에 그려지는 양운정의 미소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정말 고맙다. 하지만, 너희가 나로 인해 죽는다면 나는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너희가 떠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돕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이었지만, 발걸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였다.
 양운정은 마지못해 하는 그들을 억지로 보냈다. 그들의 모습이 가물해질 무렵. 그의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크억!"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발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의 근육에서 극심한 경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으흐흐······"
 앓는 소리를 내며. 양운정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머리를 부여잡은 양운정은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아 한참을 앓았다.
 양운정은 이를 악물고, 한 자루 검에 의지하여 간신히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길을 떠난 육인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약속된 시간은 지났다. 붉은 늑대들도 출발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헤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달인들이었다.
 철홀을 상대로 했을 때, 현재 그의 경지로는 필사였다. 부득이하게 둔 무리수가 지금 그의 몸을 좀 먹고 있었다.
 "하. 하. 이 고통도 오랜만이군······"
 지각의 한계. 양운정은 철홀을 상대하기 위해, 뇌의 지각의 한계를 억지로 열어버린 것이었다.
 뇌력의 한계를 억지로 염으로써, 양운정은 일시적이나마 극한의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비록 '그'였을 때의 경지에 비교하자면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경지였지만, 철홀을 상대함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이 지금이었다. 극심한 두통으로 눈도 뜨기 힘들었고, 온몸의 근육과 신경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 단련되어 있던 한계 이상의 움직임을 펼쳤으니, 이렇게 고통으로 끝난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이라 할 만했다.
 대다수는 이 부작용으로 광인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간으로도 무려 수십 년 만에 펼친 술수였다.
 밀려오는 구토 감을 참으며 양운정은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몸을 숨길 곳이라도 찾아야 했다.
 아직까지 붉은 늑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양운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몸을 숨겼다.
 "아, 왠지 비참하다. 일단 몸이 회복돼야, 도망을 쳐도 칠 텐데······"
 양운정은 아직까지 몸 안의 내력을 사용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어느 정도 내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모험까지는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력의 성질은 정종의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혈도가 굳고, 탁기가 가득하다고 하여도, 어느 정도 움직임이 있어야 할 텐데.
 요지부동이었다. 흡기와 축기야, 몸에 익은 대로 습관적으로 행했지만, 도무지 운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운기가 불가능하니, 여타의 심법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리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주화입마 당할 확률이 높았다.
 예전의 그라면 주화입마가 두려워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삶을 다시 영위하는 이상.
 그런 자폭에 이르는 길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양운정은 문득 집을 떠나올 때의 일이 떠올랐다.
 커다란 양가장의 정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양운정이 집을 떠나는 날이었다. 언제나 금의에 화려한 옷만 즐겨 입던 돼지가 웬일인지 평범한 검은 무명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말에 오를 때 웃지 못할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그를 탓하는 자는 없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참으며 귀여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애써 눈에 담으려 했고, 아버지와 형들은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며 한편으로 양운정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사실, 양운정의 입대는 그의 아버지와 형들을 주축으로 세워진 계략이었다.
 이놈 사람 한 번 만들어보자는 심산으로 그다지 치밀하지 않은 모의 통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천만뜻밖에 양운정의 반응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반응으로 들어났으니.
 바로 자살미수 사건이었다.
 독약을 먹고는 근 한달을 생사지경에 오락가락했으니, 그들로서는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했건만, 정신을 차린 이 인간이 느닷없이 제 발로 입대하겠다고 나섰으니, 어찌 기특하고 대견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양운정으로서 당당히 살아가기로 한 그로서는 이것이 그런 계략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저 징집되었으니, 가지 않으려 한다면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저어하기도 했고, 이 한심한 몸과 마음을 단련할 필요 역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한때 군문에 몸을 담았던 바라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이 곳의 군대는 어떠할까라는 약간의 호기심 또한 컸다.
 자신의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던 양운정은 문득 싸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드니 공교롭게도 그를 바라보던 남궁아현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커다란 정문의 기둥 한켠에 덤덤하게 서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오히려 반가운 기색마저 느껴졌다.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채를 띠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껏 양운정이 감히 그녀와 시선을 맞출 엄두도 내지 못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은 짧았다.
 양운정이 길을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남궁아현은 곧 길을 떠난 양운정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에게 양운정은 세가의 강압에 못 이겨 이어진 저 길에 굴러져 다니는 돌보다도 못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안의 식구들은 그녀에게 위로 아닌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판이었다.
 집을 떠난 훈련소에 들어간 양운정은 주변의 기류가 탐탁지 않음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몸을 굴리고, 단련하는 것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점차 발달해가는 몸에 양운정은 진정으로 다시 삶을 시작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어려움과 난관들이 그에게 닥쳐왔다.
 훈련내용이나 몸의 괴로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출신과 외모로 인한 문제였다. 대장군가의 아들, 최악의 몸, 최악의 평판이 아닐 수 없었다.
 시기와 질시는 물론이고 노골적인 협박에 따돌림. 이어지는 온갖 구타와 욕설 등등······
 당할 수 있는 모든 수모를 당했다. 지난 양운정이라면 모를까, 그로서는 그저 귀여운 애들 장난이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개소리로밖에 안 들리고, 구타와 몰매를 뒤집어쓸 때는 외공 수련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그를 구타하던 이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양운정은 북로군으로 임관하게 되었다.
 그가 북로군에 오게 되었을 당시 전황은 극히 좋지 못했다.
 몽고군과 명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몽고제일부족인 청랑족을 이끄는 철홀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에 2개의 대부족이 동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양운정은 북로군 본영에서 복무를 했어야 했지만, 전황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양운정과 함께 훈련을 마치고 북로군에 도착한 전 병력이 최전선의 북로3군으로 배정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최전선에 배치됨과 동시에 본가에 소식을 전할 길은 끊기고 말았다. 물론 그로서는 전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게 3년간을 치열하게 전장을 누벼온 양운정이었다.
 말달리는 소리에 양운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붉은 늑대일까?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지만, 저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후······"
 숨을 들이키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두통과 근육통은 여전했지만, 최소한 떨림과 어지럼증은 사라졌다.
 "좋아. 일단 움직일 수는 있겠군."
 천근, 만근에 가깝게 무거운 몸이지만, 양운정은 호흡을 고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한기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기수는 없었다.
 "아니. 저 말은······"
 분명, 양운정이 풀어준 군마였다. 알아서 본영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풀어준 말이었는데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모양이었다.
 말의 모습은 다소 지쳐보였지만, 지금의 양운정에게는 천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양운정이 나서자, 달려오던 군마가 주인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왔다.
 지친 말이 그에게 얼굴을 비벼대었다. 안장에는 몇 가지 물품이 그대로 있었다.
 약간의 은자와 건량, 그리고 물통. 천행이었다.
 양운정은 약간의 물을 들이켜고 손에 뿌려 말의 입에 대어주었다.
 말은 허겁지겁 핥아대었다.
 말을 끌고 잠시 말을 쉬게 한 양운정은 힘차게 말 등에 올랐다.
 이제 본격적인 도주를 시작했다.
 도주라고 해도 무작정 내달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을 뿌리치기는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천천히 말을 몰았다. 말에 기대어 최대한 휴식을 취하려 노력했다.
 씨이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운정은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후려쳤다. 조금만 늦었다면 머리가 꿰뚫릴 뻔했다. 그리고 화살을 좀 더 빨리 쏘았더라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신경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뻔했다.
 화살에 실린 역도는 감당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상당한 내력이 실린 화살이었다.
 양운정은 붉은 늑대들의 화살임을 직감했다.
 수십의 화살이 하늘을 수놓았다. 양운정은 오히려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다.
 붉은 늑대들은 나아가는 것을 노렸던 터라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허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맞추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도주로를 막기 위했을 따름이었다. 20기의 붉은 늑대들이었다.
 10기는 화살을 다시 재우고 있었고, 나머지 10기는 양운정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의 목을 직접 거두어가기 위해서였다.
 붉은 늑대와 양운정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양운정은 태연히 그들을 기다렸다. 그의 몸에 전에 없던 활기가 느껴졌다.
 뇌력을 연 것도, 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최소한 몸이 무겁지는 않았다.
 양운정은 혹여라도 말이 상할까 저어되어 말에서 내렸다. 붉은 늑대들이 깔아뭉갤 것처럼 말을 달렸다.
 "크아아악!"
 선두의 기마가 무리에서 이탈하며 거세게 돌진해왔다. 달려드는 말의 속도와 괴력의 참마도가 어우러지며 대기를 찢으며 달려들었다.
 일격필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양운정은 대뜸 기마의 앞으로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동시에, 검집째 말의 다리를 두들겼다. 달려오던 말은 힘없이 주저앉으며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마상의 붉은 늑대는 균형을 읽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그 틈에 좌우로 그를 감싼 붉은 늑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장창과 대도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방금 전의 일격 때문인지, 그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공격을 함으로써, 쉽사리 말의 다리 근처에도 가기가 힘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터졌다. 그 사이 화살을 재고, 양운정의 도주를 경계하던 남은 10기의 붉은 늑대들이 합류했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검을 뽑을 새도 없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살초를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이중의 원진(圓陣) 안에 양운정은 고스란히 갇혀 살초를 받아내고 있었다. 안쪽에 원을 이룬 기마들의 틈에는 바깥쪽의 원을 이룬 기마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병과 단병이 어우러지고, 안과 밖으로 상호동조하며 유연히 대처하는 그들의 합격은 실로 무서웠다. 도무지 틈이 보이질 않았다.
 말에서 떨어졌던 최초의 붉은 늑대도 어느 틈에 공세에 가담했는지, 무식한 참마도의 기파가 살을 에일 듯했다.
 한마디로 풍전등화(風前燈火), 언제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상당한 내력의 소유자인지라, 지치지도 않았고, 그들의 무기에 실린 내력으로 한번 받아낼 때마다, 온몸이 떨리고, 내장이 울렁거렸다.
 그러기를 수십 합, 그가 방어에 급급하며 힘없이 물러나자, 그들의 원진이 점차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양운정은 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공간에 갇혀 붉은 늑대들의 살수를 여과 없이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공방 사이에 틈은 없었다. 그때였다.
 양운정의 눈에 모든 것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뇌력의 개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채 반작용이 끝나기도 전에 펼쳤기에 그 후에 어찌될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이대로라면 반드시 죽음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의 무기를 차올리며 신형을 날렸다.
 십보필사!
 철홀을 잠재웠던 필살의 검초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붉은 늑대들의 눈에는 양운정의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공기 중에 온몸이 녹다 든 듯 흐릿해진 그의 신형이 허공을 노닐었다.
 휙, 휘리릭······
 어느 틈에 양운정은 검을 쭉 뻗은 자세로 원진의 바깥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이건 도, 도대체가······!"
 "십보필사······"
 "무, 무서운······"
 이십 인의 붉은 늑대들은 모두 힘없이 말위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힘없이 추욱 늘어지며 몸을 떨어뜨리는 주인들의 모습에도 열아홉 기의 기마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잘 훈련된 전마들이었다.
 뇌력이 정상으로 돌아온 양운정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상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급격한 반작용이 닥쳐왔다.
 "끄으으으······"
 간질환자처럼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급격한 호흡곤란이 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빌어먹을 고통이었다.
 아까의 반작용의 고통은 이에 비하면 애교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와중에서도 손에 쥔 검만큼은 꼭 그러쥐고 놓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으음······"
 눈을 찌르는 강렬한 태양빛에 정신이 돌아왔다.
 "하아······하아······"
 숨이 찼다. 용케 목숨을 건진 듯싶었다. 살짝살짝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들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뒤로 넘어갈 뻔했다.
 겨우겨우, 중심을 잡은 양운정은 마치 무거운 돌을 머리 위에 잔뜩 얹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열이 들끓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붉은 늑대와 자신의 말들이 그대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겨 모든 말들을 모았다. 양운정의 공격으로 다리가 부러진 한 마리의 말을 제외하고는 한쪽으로 나란히 몰아놓았다.
 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말에게 다가갔다. 말은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혀를 길게 내빼물고 움찔거리는 말에게 다가갔다.
 말의 안장에서 약간의 물과 건량, 그리고 몇 가지 잡다한 물건을 챙겼다.
 푸욱!
 짐 안의 단검으로 말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더운 피가 쏟아졌다.
 말은 부들부들 사지를 쭉 뻗은 채 경련하더니 곧 축 늘어졌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지금은 걷는 다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고 고행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고통 없이 단박에 말의 목숨을 끊은 그의 솜씨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양운정은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대로 머물기로 했다. 이곳은 명군에게도 몽고군에게도 상당히 떨어진 장소였고, 불모지였다. 이곳까지 척후를 보내는 부대는 없었다.
 반나절이 지났다. 몸은 아직도 무거웠고, 통증은 여전했지만, 최소한 열과 어지러움은 사라졌다.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양운정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펴져 있는 붉은 늑대들의 사체는 쾌쾌한 냄새를 뿌리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 중 대도를 집어든 양운정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몸은 무거웠지만, 일단 움직여야 했다.
 한참을 쉼 없이 파내려 갔다. 거의 자신의 키만큼 판 양운정은 간신히 기어 올라와 그대 드러누웠다. 녹초가 되어버렸다. 한참을 크게 숨을 몰아쉬던 양운정은 붉은 늑대들의 사체를 하나하나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그들의 몸에서 쓸 만한 물건들은 챙겨놓은 상태였다.
 금, 은붙이나, 단검, 암기 등이었다.
 사체를 남김없이 밀어 넣고, 그들의 애병들도 전부 같이 매장했다.
 자신의 말에 여타의 짐을 실었다. 필요 없는 것들은 전부 땅에 파묻어버렸다.
 붉은 늑대의 말들은 안장이나 재갈들을 모두 벗겨 묻어버리고는 풀어주었다.
 잘 훈련된 말들이라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양운정은 한 마리씩 이곳저곳으로 끌고 가 호되게 때려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대로 야생마가 되든, 누군가의 눈에 띄어 전마가 되든, 짐마가 되든 그 말들이 붉은 늑대들의 말임을 눈치 채기는 어려울 터였다. 양운정이 그 말들의 소속을 나타낼 만한 것을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자신과 붉은 늑대는 실종처리가 된 셈이었다.
 풀어준 붉은 늑대들의 말은 자신의 말과 비교도 되지 않는 명마였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모두 풀어주었다.
 게다가, 비록 평범하지만, 튼튼하고 충실한 이놈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양운정은 말에 올라타 길을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명군의 진영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달린 곳은 천산(天山)이었다.
 "그래, 양 백호가······"
 "예, 이십 기의 붉은 늑대가 떠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양 백호의 희생······ 헛되게 하지 말라!"
 조용조용히, 짓씹듯이 가등정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지며 회의장의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확! 폭발적인 열기가 쏟아졌다.
 "전군! 공격!"
 더 이상의 명령은 필요 없었다. 이미, 준비는 끝마친 상태였다.
 그 한마디만이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북로3군이 출진했다.
 닷새 뒤, 북로군 본영에 장계가 올라왔다. 북로3군이 청랑족을 몰아내고 그들의 거점을 점령했다는 보고였다. 아울러 전공자와 사상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곳에 양운정의 이름은 없었다.
 그의 이름은 본영 어딘가에 위치한 다소 엉뚱한 인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양운정. 사(死).
 그는 이 진중에서 유일한 문사의 차림을 하고 있는 자였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사이에 종이를 끼우고는 가볍게 비볐다. 곧, 종이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앞으로 2년인가······ 크흐흐흐······ 재미있겠군."
 청수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괴소를 지으며 그 사내는 즐거워했다. 사내는 곧 빠르게 손을 놀려 한 통의 밀지를 작성했다.
 평범한 장소였다. 좁은 입구의 동굴이 보였다. 무슨 여우굴이나 너구리굴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은 천산산맥의 한 줄기였다. 하늘과 잇닿은 산.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이곳은 사람의 삿된 욕망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하늘만을 바라본다.
 산에 가득한 하늘의 영기가 오히려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그 옛날에도 이러했을까.
 천산험로를 말 한필에 의지해 오른 길이었다. 그간의 전란으로 대상들의 행렬도 끊긴 지 수년째. 양운정의 방문은 그들에게는 오랜만의 방문자이건만 산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실로 얼마만인지 몰랐다. 한순간 양운정에서 그로 돌아 온 듯했다. 말을 풀어주고 짐을 챙겨 동굴로 기어 들어갔다. 입구가 워낙에 좁아 서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동굴 안은 입구와는 달리 상당히 넓었다. 양운정의 개인 막사에 비하면 열 배 정도의 넓이와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바닥을 느끼며 걷던 양운정은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석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거석을 칼로 잘라낸 듯이 매끈한 단면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 정좌한 채로 좌화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있었을까. 자신이 벗어버린 육신이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 백염의 홀쭉하게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그 외에는 너무나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그가 바로 그였다.
 양운정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가슴이 무거웠다.
 무명(無名). 이름이 없음이 그의 이름이었다.
 무명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그는 전란 중에 태어났다. 그 흔한 전쟁고아가 그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때부터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너 살의 작은 아이가 살아가기에 전란은 너무나 가혹했다.
 스스로를 무명이라 이름 지은 아이는 악착같이 살았다.
 시체들을 헤집고, 땅을 파헤치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훗날, 스스로 그때를 생각하기에도 정말 용케 살았구나 싶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장성한 무명은 스스로 군문에 들었다.
 전란의 시대. 수많은 군웅들이 할거하고, 수많은 생명과 피가 대륙을 물들이는 거친 시대였다.
 일개 병졸로서 시작한 무명의 전적은 눈부셨다. 언제나 살아 돌아오는 유일한 일인이 바로 무명이었다. 어떤 상황, 어떤 전투에서도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물론 죽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지만.
 무명은 그곳에서 자신의 색다른 재능을 깨달았다. 검에 대한 재능.
 체계적인 검술을 배운 바는 없었지만, 무명은 본능적으로 검을 펼쳤다.
 그의 재능은 실로 놀라웠다. 비록 병졸로서 군문에 발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전란의 시대였다. 신병을 체계적으로 조련할 시설이나 시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무작정 투입되는 전투. 그 와중에서 무명은 홀로 검을 들고 싸웠고, 검에 대한 본능적인 깨달음은 그에게 언제나 삶의 길로 인도했다. 그러기를 십수년. 전란은 막을 내렸다.
 무명이 속해 있던 군벌의 승리였다.
 정확히는 대장군의 승리라 해야 옳으리라. 송태조 조광윤이 등극했다.
 송나라가 열린 것이었다. 당시, 무명의 나이 27세. 약관의 나이에 최연소 백부장으로서 전투를 수행해왔던 무명은 모든 명리(名利)잊고 군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의 무위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이탈은 여타의 장수들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그가 빠짐으로서 공은 공대로 상은 상대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명이 군부에서 몸을 뺀 것은 군문의 이권다툼에 지쳤기도 했지만, 한 이인(異人)의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인의 가르침으로 살검밖에 알지 못했던 무명은 신세계를 볼 수 있었다. 이인으로부터 십 년의 가르침을 얻고 홀연히 법과 도를 깨달으니, 한 자루 철검으로 독보천하(獨步天下) 하였다.
 강호에 나서니, 무수한 은원과 명리가 그를 붙잡았다. 전장보다 더 추악한 명리다툼. 무명은 자신의 길을 가려 하나, 사람이, 강호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소위 명문정파라 하는 것들······ 강호인들은 그들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무명이 처음 강호행보를 시작 할 때. 세인들은 그를 검광(劍狂)이라 부르며, 백안시하였다.
 그들의 눈에 당시의 무명은 비천한 낭인에 불과한 자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무명의 눈에는 그저 권위와 어쭙잖은 실력에 안주하는 거만한 인가들로 비추어졌을 따름이었다.
 그러던 것이 1년이 지나자, 검귀(劍鬼)로 불렸고, 다시 수년이란 시간이 흐르자, 검신(劍神)이라 불렸다. 미치광이에서 귀신······ 그리고는 신이라.
 무명은 그대로 일진데, 타인들이 멋대로 그를 바꾸려 들었다.
 그럼으로써, 그를 이용하려 하는 뻔한 수작들이 눈에 보였다.
 검신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다. 더 이상, 그와 검을 겨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강호출도이래 하나의 생명도 섣불리 앉은 일 없건만, 그가 10년 동안 독보일로(獨步一路) 해온 결과는 무수한 원한과, 검신이라 불리는 허명(虛名)뿐이었다. 그리고 배신의 상처.
 한참 무명(武名)을 날릴 때였다.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검조차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을 때 면, 그는 삶의 행복을 느꼈고, 그녀의 언행 하나하나에 무명은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그녀가 혹여라도 떠나버릴까 두려워했던 적조차 있었다.
 그렇게 검 아닌 다른 존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애정을 나눈 것이 정말로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서 두렵도록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녀 일족의 명예욕과 탐욕 때문에······
 아니, 애초에 그녀가 내게 보였던 미소부터 거짓일지도 몰랐다.
 그날의 기억이 새롭다.
 남천방가(南天方家). 송대의 새로운 명문으로 발돋움한 신흥무가였다. 의기를 가훈으로 삼고, 강호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몸가짐과 그를 뒷받침하는 무력으로 대송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가문이었다.
 무명은 남천방가의 연무장의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은 그는 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짙은 붉은 색의 옷이었기에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등은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등에 꽂힌 한 자루 단검에 의해.
 그의 주변에는 방가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백이십의 남천단원들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탐용과 살기의 기세가 방가의 장원을 가득 메웠다.
 저 앞에 방씨일족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나같이 득의한 웃음을 지으며 무명을 바라보았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중년인과 젊은 여인. 그 여인. 그녀가 바로 그의 등에 칼을 꽂은 당사자였다.
 "흐흐흐. 검귀, 여기까지다. 네놈이 죽어줘야, 우리 세가가 더욱 크게 부흥할 수 있다."
 "······"
 방가주의 득의한 웃음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무명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 방수윤. 이 방가의 장녀가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 주변에서 시작된 소음들이 그를 귀찮게 했지만, 무명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그와 그녀의 혼례날이었다. 우연찮은 선행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그녀를 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에 이르기 직전까지 왔건만, 이리되고 보니, 그 곤경이란 것도 모두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나 싶었다.
 능욕 당할 위기에 처한 여인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어서, 부득이 검을 들었건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곁에 그녀가 다가왔을 때는 당시의 흉수들에게 감사까지 할 정도였건만······ 그것이 모두 꾸며진 일이었던 것인가.
 "아프군······"
 너무나 평이하여 지금 등에 칼이 깊숙이 꽂히고, 절정고수들의 살기가 만장한 포위망에 갇힌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하하! 내가 아무렴 너 같은 떠돌이에게 내 딸을 줄 것 같았느냐. 네놈이 비록 검귀라 불린다 하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네놈의 죽음 덕분에 우리 남천방가의 위명이 대송남북을 뒤흔들 테니, 그것은 감사히 여기마! 우하하하!"
 방가주의 빈정거리며 기운차게 외쳤지만, 무명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장담컨대, 군문을 벗어난 이후,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앗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저들은 그를 일방적으로 살인귀로 몰아가며 호시탐탐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정말 살인귀인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겠지.
 그들은 다만 무명의 쟁쟁한 위명이 중요할 따름일 테니 하지만, 그는 그런 것보다도 그녀의 배신이 가장 아팠다.
 아니 처음부터 작정을 했었다면, 배신은 아니겠지. 그것은 기만이겠지.
 지난 그녀와의 추억이······ 그토록 즐거웠던 추억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방수윤은 그 눈물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비록, 가문의 계략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위한 눈물이었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순간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그의 눈을 직시한 방수윤은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움찔, 움찔 하더니, 등 뒤에 깊숙이 박혀 있던 단도가 조금씩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캉! 소리와 함께, 그녀가 꽂았던 치명적인 칼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쉭!
 한순간 등에서 피가 길게 치솟았다, 그 한줄기 피로서 무명은 그녀와의 추억을 떨쳐버렸다.
 "무얼 멀뚱히 보고 있어! 쳐라! 어차피 요혈을 꿰뚫렸던 놈이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당장 남화살진(南花殺陳)을 펼쳐라!"
 방가주의 호통에 남천단원들이 와아아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들의 반사광이 눈부셨다.
 "흡!"
 무명이 숨을 들이키며, 손을 내뻗자, 한 건물의 벽이 부서지며 무명의 검이 마술처럼 빨려 들어왔다.
 "아니!"
 창!
 검을 뽑으며 몸을 날렸다. 검을 쥔 손들이 하나, 둘. 핏줄기를 꼬리삼아 하늘로 치솟았다.
 "우아악!"
 남천단 마지막 일인을 끝으로 온전히 두 발로 땅을 딛고 있는 이들은 저 방가일족과 무명밖에 없었다. 백이십의 절정고수들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오른손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살기가 만장하던 방가장원은 이제 고통과 비명에 가득 차고 말았다.
 헬쓱하게 질린 방가일족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공포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무명은, 검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무명은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과도한 움직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질려 있는 방가일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명은 천천히 피에 찌든 붉은 색의 혼례복을 벗었다.
 한 겹 한 겹 벗으며, 무명은 착잡하게 올라오는 감정의 편린들을 느끼며 옷을 벗었다. 혼례복 안에 평범한 검은 무명옷을 입고 있던 무명은 옷을 벗고, 방수윤을 한번 바라보던 무명은 그대로 방가를 떠났다.
 방가일족들 중 나서서, 그를 막을 생각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압도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명의 무위는 그들로부터 검을 잡을 생각마저 지우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검을 뽑았다가는 그들의 손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일로, 무명의 별호는 검신이 되었다. 방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들이 무명의 위명을 더욱 높여주었고, 남천방가는 강호동도들의 비난과 불구가 된 주력무인들로 인해 봉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방수윤은 강호상에 희대의 악녀 등으로 화하여 소문이 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천일화, 강남제일미라 불리며 칭송을 받던 여인이었건만, 그녀는 그렇게 세인들의 배척을 받으며 남천방가는 스스로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의 그릇된 판단과 욕심의 결과였다.
 무명은 그 후로 삼년간 강호를 떠돌고, 은거하니 무명은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스스로 검에 귀의를 하였다.
 그 후 삼십 년, 스스로 자부하기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가 홀연히 강호를 떠날 때, 세인들은 그를 진정한 검신(劍神), 진정한 천하제일인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흘렀다. 한때 검신이라 불리며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이는 이렇게 한 구의 시신으로 남아 있다.
 양운정은 한참을 그렇게 시신을 바라보았다. 무명으로서 살아왔던 수많은 일들이 뇌를 가득 메웠다. 한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 애정과 배신. 그럼에도 한 자루 검에 의지해 독보천하 했던 자신의 모습. 허나, 허상이었다. 삶과 죽음이 시간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가슴을 차오르는 허무감이 온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천하제일이면 무엇 하나, 무명이란 인간으로서 세상에 남긴 것이 무엇이 있던가.
 그저 홀로 독보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이었던가. 한때 천하제일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여도 지금의 사람들이 수백 년 전의 천하제일을 기억이나 하겠는가.
 이곳에서 쓸쓸히 외로운 시간을 홀로 보내며 나는 무엇을 했던가.
 삼십 년이란 세월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까지의 시간은······ 그 시간 동안 그가 매달린 것은 한 자루의 검뿐이었다.
 검은 그에게 친우이며 애인이고, 자식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양운정은 무명으로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로 돌아갔다.
 "하아아······"
 긴 숨을 내쉬었다. 죽는 순간까지 놓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의 애검을 집어 들었다. 이 검을 잡은 지 무려 오십 년. 사부로부터 받은 철검이었다.
 이 검 한 자루로 무수한 수라장을 파헤쳐 왔다.
 무명은 이 검 한 자루에 인생을 걸었었다.
 "내 나이 칠십하고도 일곱. 비록 늦은 나이지만, 나이 스물일곱에 진정한 검로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오십 년. 이제야 겨우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나의 검을 찾으니 검명(劍名)을 무명(無名)이라 하리라."
 무명은 검을 뽑았다. 낡은 철검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맑은 소리를 토하며 검이 뽑혔다.
 동굴은 한순간 무명의 검 아래 놓였다.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그의 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의 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없었다.
 그의 검은 분명 이 동굴의 공간을 지배했다.
 어느 틈에 무명의 철검은 얌전히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무명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검을 떨구었다.
 검은 땅에 떨어졌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그는 쓸쓸히 두 눈을 감았다.
 양운정은 눈을 떴다.
 "검명······ 무명. 훗······ 그래, 그것이었지, 그것을 위해 삼십 년의 세월을 여기서 보냈구나. 무명검(無名劍)······"
 자조적인 미소였다. 미소는 곧 허탈한 웃음이 되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
 힘없이 주저앉아 시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웃어대었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 그래, 검즉아(劍卽我). 검은 곧 나였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검은 검일 뿐이야. 난······ 나이고. 내가 누군지 이제야 알겠다."
 그의 웃음은 이제 곧 흥소(興笑)로 변하여 광장에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 난 무명이 아니다, 양운정도 아니야. 난 그저 나일 따름이다."
 그는 새로운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함과 동시에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변했다.
 그는 정말로 하늘에 감사하며 땅에 축복을 빌고, 새로운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문득 죽어간 철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그때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리라.
 그가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자, 그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내력이 미약하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시신을 바라보았다.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슬며시 어깨에 손을 대니, 확하고는 한순간에 먼지로 화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한때 무명이었을 때와 이어주는 하나의 끈이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새로운 자신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리라.
 
 
 제3장 검을 벼리다
 
 
 그는 스승을 만났을 때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가 최초에 스승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은 격자지법(擊刺之法)이란 이름의 검법의 기초와 운기공(運氣功)이란 이름의 내가공부였다.
 잔뜩 굳어버린 화산암처럼 요지부동이던 내력이 순간의 깨달음의 영향인지 운기공의 의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너무나 느린 진도였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반년 동안 하루 종일 격자지법과 운기공에 매달렸다. 건량이 다 떨어지자 솔잎 같은 생식을 하며 수련에 매달렸다. 새록새록 변해가는 몸과 새로운 재미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마치 처음으로 검을 쥐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격자지법이 몸에 완전히 붙을 무렵이 되자, 이제 새로운 수련에 돌입했다.
 다음 단계인 십보검(十步劍)을 시작했다.
 이 십보검은 격자지법을 바탕으로 무명이었을 당시 전장에서 익힌 살검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검법으로 워낙에 살기가 강하여 강호를 종횡할 당시에도 펼친바가 극히 드문 검법이었다.
 최소의 힘과 움직임으로 상대를 격살하는 이 검법은 후에 수월지경, 검의 수발의 뜻대로 되는 의검의 초입지경에 이르러서야 살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에 무명은 이십보검을 한 개의 초식으로 정리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무명의 목숨을 구해준 십보필사였다.
 군문에서도 격자기검과 십보검만큼은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운기가 가능해지면서 그 경지 또한 놀랍도록 발전하였다.
 그간의 수련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격자지검과 십보검을 같이 수련하면서도 오히려 운기공의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였다. 느린 진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기를 계속하면 할수록 더 많은 깨달음과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도 달빛을 태양 삼아 운기삼매에 몰입했을 때였다. 이곳에 도착한지 정확히 반년이 되는 날이었다.
 혈도에 쌓인 탁기는 어느 정도 배출해내었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렇게 운기공에 매달려 내부에 흐르는 진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하던 그는 문득 상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념을 지우며 애써 진기에 집중하려 했지만, 한번 시작한 상념은 멈출 줄 몰랐다.
 "후우우······"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운기에서 깨어났다. 이대로라면 주화입마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것이 뻔했다.
 "이게 무슨······"
 곰곰이 불현듯 떠오른 상념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낯익은 구결들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것은 양운정의 침상에서 발견했던 반쪽짜리 내공심법의 내용이 아닌가.
 "응? 왜 이것이 지금 떠오르는 거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차분히 구결을 바닥에 적어가며 참오했다. 생각해보면 외우려고 한 적도 없었건만, 마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 선명하게 구결들이 떠올랐다.
 꽤나 상승의 심법이었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자꾸 거슬리는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일단 구결을 적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채 한 시진이 되기도 전에 일필휘지로 모든 구결을 바닥에 그렸다. 꽤나 많은 양이었기에 한참을 구결을 들여다보며 참오하던 그는 왠지 어색한 글자들을 따로 골라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충 옮겨 적고는 그 부분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분히 구결을 읽어나갔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지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어색한 부분을 삭제했음에도 오히려 더더욱 어색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뜻은 분명히 통했지만,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힌 것 마냥 어색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는 다시 어색한 부분을 또 다시 추려내고, 지우고, 다시 추려내는 식으로 무려 사흘밤낮을 이 내공심법에 매달렸다.
 무려 구회에 이르는 수정에 처음 적어놓았던 구결은 말끔히 지워졌다.
 "허, 이거야 원······"
 그는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무심코 따로 옮겨놓았던 그 어색한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엇!"
 그는 발견했다. 그 어색한 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가 숨어 있는 아홉 단계의 심법이었다.
 정말 교묘하게 숨겨진 구결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 아홉 단계의 구결로 이루어진 심법은 바로 그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구법연화심공(九法燃化心功)의 구결이었던 것이었다.
 그 중의 일법이 바로 지금껏 죽어라 연마해온 운기공이었다.
 "이게 도대체가······?"
 그가 무명이었을 무렵, 그는 이 구법연화심공의 칠법까지밖에 전수받지 못했다. 그것은 팔법과 마지막 구법의 구결이 실전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완성된 구법을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완성된 구결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어색하다고 여겼던 글자들이 사실은 무의식중에 찾아낸 완벽한 구결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완벽히 구법을 구미한 연화심공이 양운정의 손에 있었을까······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기억과, 일기장 상의 내용을 비교해보아도, 그저 책을 구했다고만 되어 있어,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훗, 아무렴 어떤가, 적어도 칠법까지는 완벽한 구결이니, 걱정할 필요야 없지."
 구법연화심공은 모두 아홉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 중 일법이 바로 그가 조석으로 단련하던 운기공으로 이는 평범한 운기법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지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단계이기도 했다.
 이법은 염의공(念意功). 순수한 의념만으로 내력의 수발을 자유로이 하는 공부였다.
 삼법, 개문공(開門功). 의념을 이용하여 온몸의 문을 열어 전신으로 진기를 받아들이고, 호흡하는 공부였다. 온몸으로 호흡하니, 성취가 빠르다, 개문공을 이루면 그제야 구법연화심공의 초입에 들었다고 한다.
 사법, 연신공(鍊身功) 개문공을 통해 쌓은 진기로서 신체 내부에 자극주어 단련을 시키는 공부인데, 연신공을 이루면 혈도, 경락에 구애받지 않는 이른바 무혈지체를 이루게 된다. 금강불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타의 외문기공과 비교하면 월등한 신체를 이룰 수 있었다.
 오법, 연혼공(鍊魂功) 달리 심마지공(心魔之功)이라 불리는 공부로, 뇌에 직접적인 자극으로 통해 일어나는 심마로 정신과 영혼을 단련시키는 공부였다.
 연혼공을 이루면 절대 부동심(不動心)을 얻을 수 있다.
 육법, 뇌문공(腦門功). 뇌문을 여는 공부이다. 연신, 연혼을 완성해야만 이룩할 수 있는 공부로, 초상능력을 포함하여 인체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공이었다. 연신, 연혼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을 해칠 뿐이었다.
 전년, 양운정이 생사지경에 펼쳤던 것이 바로 이 뇌문공이었다.
 단련되지 않는 영육으로 억지로 펼쳤기에 그토록 죽을 만큼의 고통과 부작용을 받아야 했던 것이었다.
 뇌문공을 완성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가히 퍼도 퍼도 줄지 않는 대하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당년 무명은 완성되지 않은 뇌문공만으로도 천하에 적수를 찾지 못했다.
 칠법, 양신공(養神功). 뇌문을 통해 영기를 받아들여 몸속에 양신을 이루는 경지였다. 양신을 이루어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인데, 무명이었을 당시 강호를 떠나 자신의 검을 찾는 데 여념이 없어 상대적으로 심공에 소홀히 했던 터라, 그때에는 간신히 영기를 받아들이는 양신공의 초입에 든 상태였다.
 팔법, 원영공(元靈功). 양신을 이루어 완전한 원영이 되는 경지로 이 경지는 말 그대로 반선지경(半仙之景)을 뜻했다.
 구법, 무상경(無上景). 언제든지 육신을 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이루는 경지였다. 천선과도 같은 경지이다. 허나 양신공을 이룩한 이도 극히 드물거늘 원영공과 무상경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완전한 구법연화심공을 얻게 되었다.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심공수련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모르지만, 구법연화심공의 전인으로서는 최연소로 칠법의 경지에 이른 이가 바로 그였다.
 그 극의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그의 경지는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르고 격렬하게 높아져갔다.
 "너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그 목소리에 묘한 위압감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기가 죽은 듯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사내는 꽤나 새것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명군의 백호장의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바탕이 꽤나 미남이었을 것 같은 사내는 살이 우락부락 붙은 전형적인 비만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갑주가 꽉 낄 정도였다.
 사내의 얼굴이 많이 낯이 익었다.
 "너는 누구냐."
 "소장은 북로군 백호장 양운정이오. 충렬 양가장의 삼남이외다."
 사내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턱을 치켜 올렸다.
 "흥. 꽤나 비슷하구나. 듣자하니 네놈이 제법 여색을 밝힌다지?"
 "헤헤헤······"
 사내가 간사하게 음흉한 미소로서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철썩!
 "머저리 같은 놈! 네놈이 지금 대계를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양운정. 그놈이 결혼을 하면서, 일체 여색에 손을 끊었다고 하니, 어설프게 계집질 따위만 해봐라, 네 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거센 살기가 실려 있었다.
 "조, 존명!"
 "남궁가의 계집이 네녀석 부인이다. 천하절색(天下絶色)이라고는 하지만, 양운정 그놈은 손목도 못 잡아봤다고 하니, 어설프게 행동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존명!"
 양운정으로 화한 사내는 허리가 부러져라 숙이며 외쳤다. 그의 몸은 극도의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방파에서 잔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인자한 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인물이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아니, 과거라고 해보았자, 불과 몇 년 전이었지만.
 자신의 친족조차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죽이는 인물이 이자였다.
 "허허허, 양 백호장. 전역을 축하하네."
 "가, 감사합니다. 최 군사님······"
 "멀리 배웅하지 않겠네."
 그는 양운정의 탈을 쓴 자에게 몇 가지의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것은 전역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바야흐로 음모의 수레바퀴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
 스으으······
 그는 몸 안에 태동하는 새로운 생명을 느꼈다.
 밝은 우윳빛을 내는 작은 구체였지만, 그것은 그의 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키워갔다.
 그것은 원정(元精)이었다. 양신공의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영기를 차분히 쌓아 원정을 만들게 되고, 이 원정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양신을 키우는 장소가 되는 것이었다.
 양신공을 깨우쳐 원영공에 이르게 되면 이 원정에서 양신이 깨어나게 될 것이었다.
 무슨 만년교룡이니, 천년독각이니 하는 영물들의 내단과는 전혀 다른 것이 이 원정이었다.
 불과 일 년하고도 반년만의 일이었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 경지였다.
 운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몸이 벌써 양신의 자궁을 키울 정도라니. 원정의 성장을 느끼며, 그는 삼매경에서 벗어났다.
 그 역시 자신의 성취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몸이 그렇게 뛰어난 무골인 것도 아니었고, 내공의 기초가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그 몸의 상태에 비교해 그런 것이었을 따름이었다.
 과거 무명이었을 당시에도 뇌문을 열기까지 십 년이란 세월을 조석으로 연마하였건만, 불과 이 년 정도의 시간으로 양신공의 중반까지 오른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경지는 명확하게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온몸에 가득 찬 활기와 정기.
 처음 스승으로부터 운기공을 전수받고 단련하는 데 무려 이 년의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입문한 내공임에도 스승의 아낌없는 수고와 가르침 덕분에 이 년이란 그 짧은 시간에 내공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개문공을 거쳐서 연신과 연혼공을 단련하는 데만도 무려 육 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당시의 끔찍한 고통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년 동안 매달린 뇌문공. 마치 광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우며 완성한 뇌문공이었다.
 그런 십 년의 세월을 보냈던 공부를 불과 이 년도 안 되어 이룩한 것이었다.
 그는 어렴풋이 자신이 무명이었을 때 모았던 영기의 덕분이 아니었나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무명의 시신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무명은 세상을 뜰 무렵, 그의 성취는 원정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많은 양의 영기를 받아들인 무명이 그 생을 다하자, 이 영기들은 흩어지지 않고, 그의 시신 주변에 모여 무려 수백 년간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영기들은 무명의 영혼의 영파를 느끼고 영향을 받았다.
 그는 무명으로서 수십 년간 닦았던 영기를 다시 돌려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기의 영향으로 구법연화심공의 완성이 수배에 달하는 속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볍게 굳은 몸을 푼 그는 다시 운공에 들어갔다.
 그의 몸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단단하게 잘 짜여진 몸과 무수한 흉터자국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달라진 점은 없었건만, 같지는 않았다. 한층 몸이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이할 점이 없건만,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것은 은은히 비추어지는 그의 영기였다.
 그가 운공삼매에 빠져들자 그의 영기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며 운공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영기의 영향으로 보다 높은 집중과 성과를 얻게 된 것이었다.
 무명으로서 모았던 영기들이 아무에게나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영혼의 영파를 지니지 않는다면, 아무리 영기가 많이 모여 있다 하여도 별무소용이었다.
 영기는 세상의 가장 근본이 되는 힘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가장 희박한 힘이기도 했다. 오행기니, 음양기니, 하는 모든 것들의 근본이 바로 영기였다. 그만큼, 인세에서 순수한 영기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법연화심공의 칠법의 수련은 정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팔법과 구법이 실전되기도 했었던 것이었다.
 그는 본시 오법 연혼공까지 마친다면 하산하려 했었지만, 상상도 못할 정도의 빠른 진경으로 벌써 칠법 양신공의 중반에 이르렀다.
 양신공에 이르면서 느끼게 된 영파와 영기들로 그는 이곳의 모여 있던 한때 자신의 영기들을 모두 모았음을 깨달았다.
 "이 정도였나? 하기사 그 당시에는 영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으니······"
 그는 자신의 경지를 새삼 확인하며 놀랐다.
 그가 손을 내뻗자 한쪽 구석에 새워져 있던 철검이 그의 손에 날아 들어왔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내공을 이용한 허공섭물(虛空涉物) 따위가 아니었다.
 순수한 그의 의지로서 행한 일이었다. 뇌문공을 완성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뇌문공의 중반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잠력, 초상능력이 가능한데, 뇌문공을 완성하게 되면 온전히 자신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었다.
 힘차게 검을 떨치니 그의 검이 일수에 동혈을 가득 메웠다.
 기본인 격자지법에서 십보검의 검형을 펼치더니 곧 그만의 검이 펼쳐졌다. 무명검법(無名劍法).
 무명으로써 죽기 직전에 완성했던 그만의 검이 온전히 펼쳐졌다.
 한참을 검무에 몰입했다. 홀연히 어디선가 불어오는 일진광풍들이 그의 검과 어울려 멋들어진 검무를 춤추었다.
 바람이 몰아오면 휘둘러 베고, 검이 베고, 찌르면 홀연히 물러섰다. 몰아치는 바람과 사람의 검무가 한바탕 펼쳐졌다.
 다음날. 동굴은 비었고, 그 작은 입구는 거대한 바위로 막혀져 있었다. 한때 천하제일인이었던 그가 과거의 유산을 돌려받고 현재로 돌아왔다.
 세상은 응당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가 최초로 향한 곳은 북로군이었다. 정당하게 복귀신고를 하고 전역을 해야 할 터였다. 이대로 집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대장군인 아버지의 체면에 손상이 갈 터였다.
 변명은 나름대로 생각해두었다. 붉은 늑대들의 추적을 피해 저 천산 너머까지 도주했다가 사고를 당해서 부상을 치료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등의 대충 이야기 거리를 생각해두었다.
 자신이 있던 북로3군의 자리에는 새로이 북로군 본영이 위치하고 있었다.
 2년 전 몽고군의 자리에 북로3군은 자리 잡았던 것이었다.
 양운정은 동정을 살피고자, 은밀히 본영에 잠입해 들어갔다.
 수년 전에야 내력이 없었기에 경공이든 보법이든 딱히 수련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천둔보(天遁步)와 풍운비(風雲飛)라는 경공으로 순식간에 본영으로 숨어들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양운정은 곧 빠져나가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리라고 마음먹었다. 근무를 서고 교대하는 네 병사들을 발견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난주에 마신 술이 덜 깼나, 왜 이리 늦어!"
 "헤헤헤. 미안, 미안. 그래도, 그때는 정말 배터지게 먹고 마셨어."
 "정말인지 그 뚱땡이 양 백호가 그렇게 통이 클지 누가 알았겠나."
 "이봐 이봐, 그래도 그 사람이 저 대장군가의 아들이라던데."
 "에에~ 정말로? 아니 대장군씩이나 된 사람이 아들을 왜 이런 전방으로 보내?"
 "그야 낸들 알겠나? 뭐 어쨌든 양 백호야 무사히 전역해서 집으로 갔으니. 좋겠네······ 우리 같은 졸자들이야 빨리 시간 가기만 목매야지 뭐······ 아이구, 이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빨리들 가 쉬어."
 "그래, 고생하게."
 양운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양 백호? 대장군부의 아들? 양운정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자신이 아닌가. 전역을 했다고?
 등 뒤로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음모의 악취가 풍겨왔다. 무명으로서 강호를 종횡할 당시에 온갖 더러운 꼴을 겪었던 그였다. 자신을 상대로 한 음모와 모략임을 깨달았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존재하지 않았을 자신의 존재가 전역을 했다. 그것은 단순히 서류상의 오류로는 보기 힘들었다.
 저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가짜는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전역을 했다하니, 분명 계획된 음모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철홀을 암살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것조차 이들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판단을 내리기가 무섭게 그는 순식간에 본영에서 벗어났다. 머리 위로 휘리릭 몸을 날리는 양운정의 모습을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북로3군의 진영이 보였다. 본시 이틀밤낮을 말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양운정에게는 거리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하루 만에 도달한 양운정은 곳곳에 퍼져 있는 경계병들의 사각지대로 교묘히 움직이며 군영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목적하는 곳은 중앙의 커다란 대형막사였다.
 막사 바로 앞에는 불을 좌우로 피워놓고 병사가 한명씩 서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슬며시 틈을 보고 있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호위대가 없었다. 과거 가등정을 호위하던 직속친위대 칠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암중으로 은신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천막 안에 있을 인물도, 가등정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굳이 힘들게 천막 안에 들어설 필요는 없었다.
 양운정은 지체 없이 몸을 움직였다.
 병영의 외곽을 조심스럽게 돌던 양운정은 홀로 떨어져 끄덕끄덕 졸고 있는 한 병사를 발견했다. 그는 졸다 깨다를 반복하는 그 병사의 뒤로 은밀히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병사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병사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졸기 바빴다.
 "읍!"
 양운정의 손에서 비롯된 영기가 병사의 몸에 침투해들어갔다.
 병사는 급살 맞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더니, 정신이 혼몽해져갔다.
 양운정의 영기가 병사의 이지를 제압했다.
 "이 곳 책임자는 누구냐."
 양운정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자, 병사는 꿈꾸는 듯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초소명 장군이십니다."
 "가등정 장군은 어디로 갔느냐."
 "그, 그분이라면 2년 전의 청랑족을 섬멸한 공로로 진급하셔서 사천위도지휘사(四川衛都指揮使)직위에 올라 사천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양운정이란 자는 알고 있나."
 "양 백호장 말씀이십니까? 우리의 북로3군의 영웅이지요.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전사하셨지만, 그 분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양운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떼었다.
 "잘 자라. 병사."
 "예······"
 그 말을 끝으로 병사는 아예 고개를 처박고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는 전사처리가 되어 있었던 건가. 가등정······ 가짜 양운정······ 도대체가. 무슨 계략 따위가 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만약. 나의 가족들에게 해가 생긴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양운정은 병영에서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제4장 세상에 발을 내딛다
 
 
 "이 망할 년이!"
 퍼퍽, 퍽!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감숙성은 중원의 구석진 곳이었다. 가장 북방에 위치하여 치안이 불안정하고 연이은 이민족의 침입이 가장 잦은 곳이기도 했다.
 장성을 넘어 들어오니, 대명의 실질적인 영토는 이곳부터였다.
 그에게는 백호의 신분을 보장하는 철패가 있었기에 장성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막, 인파를 헤치고 검문소를 벗어난 그의 귀에 들려오는 난데없는 구타성과 소란에 양운정은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다란 누더기를 걸친 작은 아이였다. 이제 한 열너댓살이나 먹었을까.
 시커멓게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가 한 덩치 좋은 중년인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보기 흉한 광경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질 장면이었다.
 아이의 깡마른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는데, 노예인 모양이었다.
 이곳 감숙성에서는 이민족의 노예들이 자주는 아니어도 심심치 않게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이한 점이랄 것도 없었지만, 양운정은 왠지 아이의 모습이 많이 낯이 익었다.
 아이는 사내에게 그토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눈빛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 눈빛이 양운정을 이끌었다.
 저 눈은······
 "헥헥, 이 독한 몽골 년이!"
 한참을 몽둥이로 쥐어 패도 비명성 한번 아니 지르는 아이가 징그러웠는지 사내는 몽둥이를 던져버리고는 커다란 대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네년의 팔을 잘라버려 혼쭐을 내주마!"
 사내는 숨이 딸리는 듯, 헉헉 거리면서도 대도를 크게 들었다.
 아이는 눈앞에 번쩍 들려 날카로운 빛을 반짝이는 대도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노려보았다. 자를 테면 잘라보라는 듯이 오히려 벌떡 일어나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년이!"
 캉!
 사내가 욕을 하며 크게 휘두른 칼이 무언가 막혀 버렸다. 양운정이었다.
 검을 들어 사내의 대도를 막은 것이었다.
 "이, 이, 넌 또 뭐야!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사내는 붉어진 얼굴로 사내를 몰아붙였다.
 "이 아이, 당신 노예인가?"
 "그래! 왜!"
 "이 아이는 2년 전 몰살당한 몽골 청랑족의 아이 같은데, 당신이 어떻게 이 아이를 노예로 삼았지?"
 "······예?"
 "난 북로군 소속 백호장이다. 어떤 경로로 이 아이가 자네의 노예가 되었는가."
 양운정은 품속에서 패를 꺼내어 보내주고는 사내를 추궁했다.
 "······헤엣! 아니, 저 나리.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라, 전쟁 후 노비들은 일괄적으로 관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 자네 같은 민간인이 청랑족의 아이를 노예로 삼을 수 있단 말이냐."
 "히익! 자, 잘못했습니다요. 잘못했습니다요."
 사내는 노예로 끌려가는 몽골족들에서 아이를 슬쩍 납치했다고 했다.
 사내의 말에 양운정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사내를 꾸짖었다.
 "이 아이는 국가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데, 네놈이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도대체 네놈은 뭐하는 놈이냐!"
 "히익~, 자, 잘못했습니다. 나리, 살려주십시오."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국가의 재산을 훔치고, 저렇게 버젓이 대도를 들고 다니니······ 네놈 혹시 현상범 같은 것 아니냐?"
 "헤에? 아이구,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상인입니다."
 "상인이란 놈이 칼을 들고 다녀?"
 "헤헤······ 그, 그냥 호신용입지요."
 "가봐라! 내 그냥 넘어가도록 하마."
 "하이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들고 있던 대도마저 버려두고는 급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양운정은 사내의 득의한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놈은 산적 같았다. 아마도 이 아이도 호송 도중 산적에게 습격당했었겠지.
 양운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는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매질에 칼의 위협에도 이를 악물고 버티던 아이는 최후의 선택으로 혼절한 모양이었다. 아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양운정의 어깨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작은 아이였지만, 그래도 너무 가벼웠다. 깡마른 팔, 다리와 홀쭉한 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이를 안아 들고 양운정은 일단 객잔으로 향했다. 여비는 꽤 넉넉하게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일단 아이를 안고 방으로 향했다.
 점소이를 시켜 목욕물을 받게 하고는 아이가 깰 때까지 자신의 묵은 때를 벗겼다.
 근 몇 년 만의 목욕인지라 한참이 걸려서야 물통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벗어났다.
 아이도 씻겨야 했기에, 점소이를 시켜 다시 물통을 채우게 하고는 은 부스러기를 쥐어주었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점소이는 잽싸게 목욕물을 받아놓았다.
 아이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아 들려다. 풍기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올렸다. 흡사 새끼를 옮기는 어미 호랑이처럼 뒷덜미를 잡고는 그대로 목욕통 속에 처박았다.
 갑작스런 물세례에 아이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꺄악!"
 매질에 신음성 한 번 흘리지 않던 아이가 따뜻한 물임에도 깜짝 놀라며 물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소매를 걷어붙인 양운정의 우악스런 손길에 잡히고 말았다.
 양운정은 축축이 젖은 아이 옷을 북북 찢어서 던져버리고는 손에 든 거친 천으로 아이의 온몸을 문질러 때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꺄악!"
 아이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양운정의 꿀밤이었다.
 딱!
 "얌전히 있어! 내가 널 잡아먹냐! 아이구, 이놈 때 좀 봐라!"
 양운정의 손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시커먼 때가 주욱주욱 밀려나왔다.
 첨벙거리며 아이가 발버둥 치자 다시 한 번 꿀밤을 먹였다.
 "우우······"
 아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니, 양운정은 실소를 하며 아이의 손을 잡아채 다시 때를 밀었다. 아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붉게 달아올랐는데 달아오른 것이 땟국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어······ 너 여자였냐?"
 한참을 손을 붙잡고 때를 밀어대던 양운정은 다른 손으로 가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아이의 성별을 눈치챘다.
 "아이구, 꼴에 여자라고······ 나머지 손에 닿는 부분은 직접 해. 깨끗이 안 씻으면 밥 없다."
 "우우······"
 양운정은 간단히 손을 씻고는 손을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점소이를 불러 몇 가지 심부름을 시키고 음식을 시켰다.
 한참을 앞으로의 계획을 짜던 양운정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점소이가 음식과 심부름 시켰던 물건을 들고 왔다.
 시켰던 것은 한 벌의 여아의 옷과 속옷, 그리고 자신이 입을 몇 벌의 옷이었다.
 음식은 탁자 위에 놓고 옷을 들고는 욕실에 들어섰다.
 아이는 아이인지, 어느새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모습에 피식 실소가 새어나왔다. 아이는 양운정이 들어서자 깜짝 놀라며 가슴을 가리고 물속에 몸을 숨겼다.
 "이런 녀석 하고는. 다 씻었으면 이 옷을 입도록 해라. 어디 보자, 깨끗이 씻었느냐?"
 아이는 말없이 양운정을 노려보았다.
 "손."
 "······"
 딱!
 "우우!"
 "손."
 아이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는 팔을 문질러보니 시커먼 때가 다시 올올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
 "······"
 양운정은 말없이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 녀석! 씻으라고 했더니 물장난이나 쳐!"
 양운정은 다시 소매를 걷어붙이며 천을 들고 싫다는 아이를 때려가며 때를 문질렀다. 무려 두 시진이나 지나서야 아이는 물통에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양운정이야 펄펄했지만, 아이는 완전히 탈진해서 비실비실 흔들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욕실 밖으로 나왔다.
 씻고, 새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에는 티 하나 없었고, 맑고 깊은 두 개의 큰 눈과 오똑한 코, 작고 붉은 입술. 삼단 같은 검은 머리는 이제 깨끗이 정리되어 등 뒤로 넘겼다.
 "이제 사람 같구나. 먹어라, 식었지만, 먹을 만할 게다."
 양운정이 탁자 위의 음식을 가리키자, 아이는 주저주저하면서도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먹었다. 교자와 소면이었는데, 아이는 손으로 음식을 집고 입으로는 씹으며 눈으로는 계속 양운정을 살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했다.
 "안 뺏어먹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먹어라"
 "우읍······"
 소녀는 목이 메이는지 캑캑 거렸다. 양운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탁자에 놓여 있는 다기에서 차를 따라 소녀에게 마시게 했다.
 소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잽싸게 양운정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이켰다.
 "후아아······"
 살았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몰아쉬는 소녀의 모습에 양운정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눈을 보았을 때, 양운정은 그 눈으로부터 철홀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섰던 양운정이었다.
 마치 딸이나 귀여운 여동생 같았다. 왠지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라니, 싫지 않았다.
 양운정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싫지는 않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양운정이 시킨 음식 양은 상당히 많았다. 성인 남성2인분에 달하는 양을 소녀는 혼자서 다 먹어치운 것이었다.
 침상에 드러누워 만족한 듯 배를 쓰다듬는 소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는 모습이라니······
 "아저씨는 왜 날 구했어요?"
 "응?"
 "왜 날 구했냐구요. 뭘 원해요? 저한테······"
 "음······ 아저씨냐······?"
 올해 나이 25세. 아이의 나이는 겉모습으로 보건데 15세 정도. 그래도 아저씨라니······
 잠시 침울해지는 양운정이었다.
 "너, 철홀과는 무슨 관계냐."
 양운정은 아무것도 아닌 양 대수롭지 않게 물은 말이었지만, 소녀의 반응은 격렬했다. 침상에서 튕기듯이 벌떡 일어난 소녀는 죽일 듯이 양운정을 노려보았다.
 "당신 뭐야. 어떻게 아버지를 아는 거지!"
 "······앉아. 널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아니, 오히려 보호해주고 싶다."
 "······무, 무슨."
 "2년 전. 나는 철홀, 아니 네 아버지의 은혜로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은의 의미로 해석해도 좋아. 네가 아까 그놈한테 맞을 때. 그때 보여주었던 눈이 그와 너무나 닮았기에 널 구한 것이었는데, 설마 네가 진짜 그의 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하는 양운정의 말에 아이는 슬며시 적의를 거두었지만, 머뭇거림을 지우지는 못했다.
 "2년 전에 무슨 은혜를 받았다는 거죠?"
 "2년 전 네 아버지는 나와의 대결에 응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임무를 달성했다."
 "네?"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
 "······!!!"
 한바탕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당사자는 침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눈두덩이는 하도 눈물을 흘려서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양운정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가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양운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난동을 부리는 아이를 양운정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에게 의자, 꽃병, 접시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욕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악을 써대던 아이가 제풀에 지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쁜놈! 나쁜놈! 으아아앙!"
 그렇게 통곡을 하는 아이의 앞으로 다가간 양운정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으으으······"
 아이의 흐느낌은 멈출 줄 몰랐다.
 아이 앞에서 양운정은 검을 뽑았다. 그 검이었다.
 돌연, 스르릉 하는 소리에 아이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양운정은 한 손으로 검신의 중간을 잡았다. 검극은 그의 가슴을 향해 있었고, 검병은 소녀를 향해 있었다.
 "잡아라. 검을 잡아."
 양운정의 말에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검을 붙잡았다.
 "날 그렇게 죽이고 싶거든 죽어주마, 찔러라."
 검극이 가슴에 닿았다.
 "아······"
 "네가 힘을 주어 그대로 찌르면, 난 그대로 죽어주마, 용케 죽지 않는다면 난 널 평생 보호해주마."
 "아······"
 소녀는 할말을 잃고 멍하니 양운정의 가슴과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찔러라."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던 양운정의 입가에서 슬며시 따뜻한 미소가 그려졌고, 차가운 두 눈에서 그녀에 대한 염려를 느꼈다.
 소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영민했다. 과거 청랑족 제일의 기재라고 평가 받았던 소녀였다.
 슬프고 기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감정에 소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영민하다고 해도 아직은 어린 아이였다.
 소녀는 검을 놓치고 눈물을 쏟았다. 양운정은 행여 검날에 아이가 상할까 소녀를 안아주었다. 양운정의 가슴팍이 축축이 젖어들 때까지 아이는 울다 잠이 들었다.
 양운정은 다소곳이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검이 날카로워도, 아이의 힘 정도에 찔릴 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사기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소녀에 대한 양운정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보호해주고 싶었다. 이 아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러길 원했고,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가족이란 존재가 있음에 감사했고, 이 아이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자신이 행복했다.
 "그럼, 아저씨가 그 양운정이야?"
 "아, 아저씨······ 그, 그래 내가 그 양운정이란다."
 "아······ 죽었다고 들었는데······"
 "죽을 뻔했지."
 "붉은 늑대 아저씨들은 어떻게 됐어요? 스무 명이나 쫓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겠니."
 "그래요······"
 "그들한테 쫓겨서 천산까지 갔었어. 그들은 정말 훌륭했다."
 양운정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침상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난 철란(鐵蘭)이에요."
 "란······ 예쁜 이름이네."
 "아저씨, 정말 강한가 봐요."
 "네 아버지는 그저 그런 무인한테 쓰러질 정도였니?"
 "절대로 아니에요!"
 "그럼, 나도 믿어봐."
 "······예."
 두 사람이 나란히 말 위에 올라 관도를 따라 가고 있었다.
 양운정과 철란이었다. 양운정의 앞에 란이가 앉아 있었다. 초원의 아이라 말을 타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양운정보다도 말을 더 잘 다루었다.
 오랜만에 말을 타게 되어서 즐거운 모양이었다.
 란이 입에 당과를 물고 오물거리고 있었는데, 양운정이 틈만 나면 란이를 먹이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숙성을 떠나온 지 일주일째였다. 란이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정서적인 안정 덕분인지, 란이의 모습은 나날이 밝아지고 예뻐졌다.
 비쩍 말라 피골이 상접하던 팔다리에 슬쩍 살이 붙었고, 얼굴에도 살이 붙어 더이상 홀쭉한 뺨을 드러내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두 눈에 생기와 활기가 가득해서 보기 좋았다.
 이렇게 꾸미고 보니, 철란은 보기 드문 미소녀였다.
 양운정은 이렇게 철란이 예뻐지는 것이 마냥 기뻤다. 자신의 딸이 예뻐지는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럴까 싶었다.
 "아저씨!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앙? 참 빨리도 물어본다. 아저씨 집."
 "어딘데요?"
 "북경."
 "북경이면 황제가 사는 곳 아니에요?"
 "응, 맞단다."
 란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다가 또 묻기 시작했다.
 "아저씨 집은 커요?"
 "글쎄? 꽤 큰 편이지."
 "으응······ 잘 사나봐요."
 "아무렴. 잘 살지."
 "그렇구나······"
 이런 길지 않은 시원찮은 대화가 하루 종일 오고갔다. 양운정이야 란이가 물어오기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줄 뿐이었고, 란이야 너무나 심심하고 또 양운정과는 대화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며칠째 인적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란이의 무료함은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양운정은 귀찮아 할 만한데, 그도 란이가 심심해 하는 것을 알기에 차마 짜증은 내지 못하고 가볍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슬슬, 풍경이 바뀌고, 새로운 풍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란이의 표정도 더이상 심심해하거나 뚱한 표정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초원에서 자라온 아이가 이렇게 웅장한 산수를 언제 보았겠는가, 게다가 번화한 거리들과 사람들을 바라보느라 란이의 눈은 바쁘기 그지없었고, 입은 다물 줄 몰랐다.
 그런 란이의 모습이 궈여웠는지, 양운정도 한줄기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는 란이가 가자는 대로 선뜻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섬서성(陝西城)의 서안(西安)이었다.
 당대(唐代)까지 국도로써 번영한 도시라 수많은 유적 등의 볼거리가 많았다.
 란이의 눈이 행여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고루거각이 즐비한 서안의 대로를 란이는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그럴까? 그래 여기서 자고 내일 출발하자."
 "와! 오늘은 노숙 안 해도 된다!"
 란이는 노숙하지 않는다는 것에 굉장히 기뻐했다. 란이에게 이것저것 사주고 먹이느라, 넉넉했던 주머니가 상당히 홀쭉해졌기 때문에, 몇날 몇일을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자리라도 좀 알아봐야 할 듯싶었다.
 이렇게 번화한 곳이라면, 무슨 일자리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바로 표사였다. 정식표사는 무리겠지만, 북경까지 가는 표물이 있다면, 호위한다는 핑계로 슬쩍 끼어들면 어떨까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즐거워하는 란이에게 끌려 서안의 번화한 거리의 이곳저곳을 신나게 구경하던 두 사람은 이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객잔을 찾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 작고 허름했지만, 깔끔해 보이는 한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청학루(淸鶴樓)란 이름의 객잔이었는데, 후덕한 인상의 노부부가 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방을 잡고, 짐을 풀고는 식사를 하기위해 바깥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손님이 꽤나 많았다.
 자리를 잡아 앉으며 슬며시 객잔을 둘러본 양운정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 객잔에 자리잡은 이들 치고 무공을 지니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인 노부부를 포함하여 대략 오륙십에 이르는 인물들이 무림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일단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삼십 명 정도의 깨끗한 푸른 무복을 걸치고, 검을 가슴에 품은 젊은 검수들이었다. 대략 약관을 조금 넘긴 듯한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정광이 흘렀고,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양운정은 속으로 잠시 감탄하고는 곧 그들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그로서는 별로 얽히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이었다.
 양운정은 마음 같아서야, 모든 음식을 다 사주고 싶었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했기에, 값싼 소면과 소채, 그리고 만두를 주문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란이는 한번 씩 웃어주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란이가 먹는 모습을 기분좋게 바라보던 양운정도 만두 하나를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맛나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객잔문이 거칠게 벌컥 열리며 한명의 피투성이가 다 된 인물이 객잔으로 비틀거리며 뛰어들어왔다.
 그 모습에 양운정과 란이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양운정의 눈길을 끌었던 푸른 무복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신속히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부축하여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주인부부가 각종 약들이 들어 있는 약통을 들고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치료를 할 테니 물러들 서게."
 노부인의 입이 떨어지자, 푸른 옷의 무인들은 모두 물러섰다.
 피투성이의 인물은 회색 승포를 걸친 승인이었다. 노부인은 이곳저곳에 깊숙한 검상을 입어 신음하는 승인의 옷을 벗겨내어 약을 바르며,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으음······"
 승인은 가냘픈 신음성을 흘렸는데, 알고 보니 여인이었다.
 "아저씨, 저 스님 많이 다쳤나봐요."
 "그래, 그런 모양이구나, 어서 먹고 올라가 자자꾸나."
 "예."
 란이는 피투성이가 된 스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쪽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철란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철홀의 뒤를 따라 전장을 떠돌았던 아이라 피에 별다른 거부감이나 두려움은 없었지만, 상처입은 이들을 보면 가슴 아파하는 착한 마음이 가득한 아이였다.
 객잔 안의 무림인들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양운정과 란이의 존재에 차마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양운정 역시 그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란이만이 치료를 받는 비구니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얼추 식사를 마치자, 양운정은 란이를 데리고 이층의 객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자리에 일어나, 란이를 끌고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였다.
 비구니의 정신이 돌아온 듯하자, 노부인은 비구니를 다그쳐 물었다.
 "어찌 된 게냐?"
 "아아. 사, 사숙님. 혜령이가 혜령 사매가 위험합니다!"
 "아니, 혜령이라면 그 아미옥봉(峨嵋玉鳳) 양혜령 소저 말씀입니까?"
 "아! 남궁 소협."
 비구니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등을 돌리고 있던, 푸른 무복의 청년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미남자였다. 짙은 검미와 정기 넘치는 두 눈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양운정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미의 양혜령이라면 자신의 여동생이 아닌가. 게다가 남궁 소협이라면 그의 처가인 남궁세가인가?
 양운정이 걸음을 멈추자 란이도 그 큰 눈을 깜박거리며 양운정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올라가자꾸나."
 걸음을 다시 옮기면서도 그의 귀는 저들의 대화에 집중되었다.
 "남궁 소협, 남궁 소저도 그곳에 있습니다."
 "아니 우리 하군이도 말입니까? 어디입니까? 청음(淸吟) 스님?"
 "남문의 보경사(寶慶寺)입니다."
 "보경사. 알겠습니다. 선배님, 저희 남궁가의 창천검룡단(蒼天劍龍團)이 다녀오겠습니다."
 남궁씨의 젊은 검사가 노부부들에게 외치자, 두 사람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노부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궁세가의 창천검룡단이라 불리는 푸른 무복의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객잔을 빠져나갔다.
 보경사라. 양운정은 검을 들었다.
 "어디 가시게요?"
 "응, 여기에 아저씨 여동생이 와 있나봐."
 "사천에서 수련한다던 그 여동생이오?"
 "음, 좀 위험한 데에 있나봐, 그래서 아저씨는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란이는 자고 있어. 알았지."
 "예."
 양운정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란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제5장 신위(神威)를 드러내다
 
 
 남문, 남문이라.
 양운정이 풍운비를 펼치자 그의 몸은 마치 한줄기 바람이 된 듯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본디 청정해야 할 불문도량이 늦은 시간에 때 아닌 검광과 비명성이 울렸다.
 일단의 흑의인들이 흉칙한 살기를 풍기며 보경사의 뒤편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칼끝이 한결같이 향하는 곳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낭패한 기색을 보이고 있는 두 여인이었다.
 두 여인 모두 보기 드문 보검을 들고, 싸늘한 살기를 뿌리며 서 있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한 여인은 속인인 듯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음에도 승포를 걸치고 있었다. 칙칙한 회색빛의 승포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전혀 감퇴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청초한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얼핏 눈매가 양운정의 날카로운 눈과 닮은 듯했다. 그녀가 바로 아미옥봉이란 이름으로 강호상에 널리 알려진 양혜령이었다.
 그녀의 옆에 선 파란색의 무복을 걸친 여인이 남궁세가의 남궁하문(南宮河雯)이었다.
 강호상에서 다지현화(多知賢花)이라 불릴 정도로 출중한 외모와 지모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양혜령이 한 떨기 아름다운 난화(蘭花) 같다면, 남궁하문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화사함을 한껏 갖춘 장미(薔薇)와도 같았다.
 남궁하문은 남궁세가의 다섯 자제들 중 막내로 그녀의 큰언니가 바로 양운정의 아내인 남궁아현이었다. 남궁아현이 얼음같이 차가운 매력이 있다라고 한다면, 남궁하문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매력이 있었다.
 여하튼 이 두 절세미녀들이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다.
 흑의인들의 사정없는 차륜전에 이미 기력은 빠질 대로 빠져서,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남궁하문이야, 무공보다는 외모와 지모로 더욱 유명했기에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용하다 할 터였다.
 양혜령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육 년 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쌓아온 양혜령이었다. 아미옥봉이란 별호는 거저 얹은 것이 아니었다.
 여인으로서 별호에 봉(鳳)자를 얻는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당금 천하에 봉자를 얻은 여인은 양혜령을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이었다.
 그 중 첫째가, 오빠 양운정의 아내이자, 남궁세가의 장녀인 빙화검봉(氷華劍鳳) 남궁아현.
 다음이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금지옥엽인 성수독봉(聖手毒鳳) 당의연(唐倚淵)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아미옥봉 양혜령이었다.
 무림삼봉(武林三鳳)이라 불리는 이 세 여인은 무공으로서 세인들에게 인정받은 여인들로 한 명 한 명이 같은 연배의 남자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더구나 이 세 명은 동시에 무림의 절세미녀들을 일컫는 무림육화에 속하기도 했다. 물론 남궁아현이야 양운정과의 혼인으로 빠지기야 했지만.
 양혜령과 남궁하문은 마음을 다잡고 검을 곧추 세웠지만, 여전히 앞일은 어둡기만 했다. 안 가겠다는 청음 사저를 간신히 설득해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두려웠다.
 흑의인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져만 갔다.
 으득······
 "양 언니······"
 남궁하문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양혜령은 애써 강한 모습을 보이며 남궁하문을 다독였다.
 "괜찮아, 조금만 버티면 누군가 도우러 올 거야."
 "그, 그렇겠죠."
 "그래."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 역시 낙관적인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양운정은 저 멀리서 길을 따라 신속히 몸을 날리는 남궁가의 무사들을 확인하고 달리는 속도를 배가시켰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싶었다.
 양운정의 몸은 말 그대로 한줄기 바람이 되었다.
 수십 장에 달하는 거리를 한번에 건너뛰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양운정은 채 일각(刻)도 지나기 전에 보경사에 도착했다.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양운정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경사의 가장 큰 건물 꼭대기에 올라서니, 저 뒤편에서 일단의 흑의인들과 그들의 포위망에 휩싸여 있는 두 개의 인영을 발견했다.
 두 명의 무위가 만만치 않았고, 흑의이들이 그녀들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려 하는 바람에 그나마 근근이 버티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봐도 그녀들은 기력을 이미 쇠잔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양운정은 품속에서 한 장의 하얀 천을 꺼내어 코 아래를 가렸다.
 아직 양혜령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짜 양운정이 자신을 대신해 양가장에 있을 터였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愚)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수련을 마친 후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분심(忿心)은 일었으되 살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기를 수련한 결과였다. 양운정은 가볍게 몸을 띄웠다. 그 높은 곳에서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마냥 기류를 타고 흑의인들의 후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동시에 가차없이 십보검을 펼쳤다.
 수월지경에 이른 십보검이었다.
 한번 휘두르고, 찌를 때마다 흑의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십보검은 사혈이니 뭐니, 치명적인 급소를 가리지 않고 치고 들어갔다. 슬쩍 스쳐도 죽을 수 있는 곳을 무자비하게 베고, 찌르고, 후려치지만 다들 혼절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뿐, 아무도 죽은 자는 없었다.
 수월지경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경지였다.
 극한의 고통에 단련되어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을 흑의인들은 양운정의 일검일검에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다.
 고통에 못 이겨 혼절하거나,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어 신음하며 쓰러져갔다.
 수십의 흑의인들이 쓰러지며 포위망이 붕괴되었다. 그제서야 흑의인들은 양운정의 존재를 눈치 챘다. 검은색 옷을 입고 한 장의 하얀 천으로 코 아래를 가린 양운정의 모습에 그들은 허겁지겁 흩어지며 다시 양운정을 중심으로 한 살진을 구성했다.
 양혜령과 남궁하문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살기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살기는 양운정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양운정은 늑대가 되었고, 흑의인들은 양떼가 되었다.
 양운정의 천둔보는 흑의인들을 농락했다. 공격해 들어오면 피하고 친다.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단 일수에 이루어졌다.
 흑의인들이 공격을 위해 검을 들기가 무섭게 양운정의 십보검이 그들의 요혈을 흝고 지나갔다. 그러면 그들은 급살맞은 이처럼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속절없이 쓰러졌다. 일수일실(一手一失).
 양운정의 검 아래 벌써 수십의 인원들이 전투불능에 빠졌다. 이제 남은 것은 불과 이십 명.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크게 갈등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신들이 언젠가, 무림맹의 정보망에 걸릴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들의 행사를 목격한 세 명의 젊은 여인들.
 의외로 높은 무공이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치다 몰아붙인 곳이 이곳 보경사였다. 몰아놓고 보니, 이건 생각지 못한 대어였다. 아미옥봉과 다지현화. 욕심이 생겼다. 이들을 제압해 포로로 삼는다면 회에서 자신의 위상은 높아질 것이었다.
 그렇게 양혜령과 남궁하문을 생포하려 한 것부터가 판단착오였다. 적어도 빠져나간 아미제자가 원군을 끌고 오기 전에 제압하고 사라질 수 있으리라 여긴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실착은 저 검은 옷의 사내 정도의 고수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가 이끌던 흑암대(黑暗隊)라면 못해도 이곳에서 와 있는 남궁세가의 창천검룡단 정도야 웃으면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속한 회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집단이 바로 이 흑암대였건만,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내가 신주십육성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십수 개의 검날을 왼손의 검집으로 거칠게 거두어 냈다. 카카캉! 날카로운 소음과 더불어 양운정의 검이 아름다운 한줄기 호선을 그렸다. 십수 줄기의 핏줄기가 치솟았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목줄기를 부여잡으며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한 깊이였다.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목의 혈관이 모조리 잘려 나갔을 터였다. 게다가 검에 실린 경력이 그대로 혈관을 타고 흐르며 몸속을 두들겨대었다.
 극도의 고통에 그들은 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져 부들부들 전신을 떨어대며 입으로 피거품을 쏟아내고, 목에서는 피를 쏟아냈다.
 길게 늘어뜨린 검끝에는 한줄기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양운정과 시선을 마주친 흑암대주는 저도 모르게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
 그제서야 자신의 실책의 깨달은 흑암대주는 으득 이를 악물며 시뻘게진 눈으로 양운정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양운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흑의인들 중 두 다리로 튼실히 서 있는 자는 저자 하나뿐이었다.
 "으으으!"
 사내는 분한 듯 이를 악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대체 네놈은 뭐하는 놈이냐! 무림맹이나, 정파에 네놈 같은 것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다!"
 악에 받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절규하는 사내의 모습은 앞뒤 사정을 모른다면 비극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알 거 없다. 확실한 건······ 너는 죽는다."
 "헉!"
 사내와 양운정 사이의 거리는 약 사 장(四丈). 한걸음에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양운정의 마지막 말은 바로 사내의 코앞에서 들렸다.
 목을 꿰뚫었다. 마치 환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상식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검이었다. 단순히 검이 빠르다, 몸이 빠르다 라고 할 경지가 아니었다.
 "미, 믿을 수가······ 하아······"
 사내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생기를 잃고 쓰러졌다.
 양운정은 검을 거두었다. 완벽하게 펼친 십보필사였다.
 내 의지가 정했으니, 너는 이미 죽었다.
 십보필사의 극의였다.
 검을 집어넣은 양운정은 두 눈을 찢어져라 동그랗게 뜨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입은 헤벌리고,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방금 생사지경을 거친 여인들의 얼굴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괜찮으시오?"
 "아, 예······ 예! 가,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오."
 양운정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녀들의 인사를 받았다. 멀리서 남궁가의 무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쾌속한 발놀림들이었다.
 "그럼······ 보중하시구려."
 "아, 대, 대협! 잠시만!"
 양운정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담장을 타고 사라졌다.
 양혜령과 남궁하문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모습도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마지막 검법은 도대체 뭘까."
 "하, 흑암대의 흑멸진(黑滅陳)을 혼자서 뚫다니······"
 "저런 검법은 도대체가······"
 "진법을 알고 파훼했을까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두 사람은 멍하니, 상대방이 듣건 말건 자신들의 관점으로 보고 느낀 것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아저씨?"
 "아직 안 잤니?"
 "잠이 안 와서요. 어? 왜 혼자 오세요?"
 "아아. 그 아이는 일행들이 있더구나."
 "윽, 피냄새."
 창문을 타고 나갔을 때처럼 홀연히 들어온 양운정을 란이가 반겼다.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자지 않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했지만, 옷에서 풍기는 피냄새에 란이가 코를 부여잡자, 손을 거두고 옷을 벗었다.
 "많이 죽었어요?"
 란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히 기분 좋은 질문은 아니었지만, 양운정은 개의치 않았다.
 "음 아니, 치명적인 상처는 꽤 있었지만, 죽을 정도는 거의 없었어. 한 명만 확실히 죽였지."
 "그 사람은 왜요?"
 "그자가 우두머리 같았거든."
 양운정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는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그만 자려므나."
 "아저씨."
 "왜?"
 "나 자는 사이에 어디 가면 안 돼요."
 "······응. 아무 데도 안 갈게."
 "약속."
 란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약속."
 양운정은 잠시 란이의 앙증맞은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그제서야 란이는 안심이 되었는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양운정을 기다리는 사이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래층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양혜령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양운정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문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다급한 발소리에 아래층이 상당히 부산스러운 듯했다.
 뭔가를 바닥에 던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생각해보니, 그가 부상을 입혔던 흑의인들인 듯했다.
 양운정은 이내 신경을 끄고, 고개를 돌려 곁에서 잠이 든 란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에는 란이가 팔을 베고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다.
 왼손으로 슬며시 란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그도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자,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한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기억 속에서 여동생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본 것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수년 동안 쌓은 수련이 상당한 수준으로 보였다.
 찢어져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귀여운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자, 용서치 않으리······
 양운정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양가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가짜 녀석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군의 인사를 그렇게 임의대로 조정할 정도라면, 가짜의 뒤에는 관이든, 무림이든 상당한 세력의 배후가 있음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이미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이상, 지금 그는 그들의 인식의 사각지대라는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양운정은 섣불리 움직여 어려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청학루에는 수십의 흑의인들이 상처를 부여잡고 끙끙 앓고 있었다. 상처는 그리 깊거나 크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위험한 부위였고, 어째서인지 모두들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막강한 경력이 상처를 통해 주입되었다. 그 경력이 혈맥을 타고 돌며 고통을 주고 있는 게야. 어느 놈의 솜씨인지 정말 절묘하군그래."
 주인노인은 흑의인들의 상처를 돌보며 말했다.
 "이놈들 잘 치료한다면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겠지만, 모두 무공은 포기해야 할 게다. 이 정도 경력이 몸을 타고 돌아다니니 십년적공(十年積功)은 물거품이 돼버리겠지."
 객잔 안에 있던 무림인들은 노부부의 지시에 손을 쓰고 있었다.
 정확히 구십구 명의 환자와 한 구의 시신이었다.
 양혜령과 남궁하문은 깊은 상처는 드물었고 기력만이 부족했기에 이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남궁하룡이 그녀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막 보경사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수라장이었다. 죽은 자는 없었지만, 태반이 심각해 보이는 부상을 입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극도의 고통을 시달리며 피거품을 물고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게다가 넋이 나간 듯, 어디 한 곳을 빤히 바라보는 두 여인의 모습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는 무심코 넘어갔지만, 지금 이곳으로 부상자들과 시신을 옮기고 조치를 취하고 보니, 검흔이 위치한 곳과 그 절묘한 깊이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 역시 후기지수들 중 수위를 다투는 실력이었다.
 자고로 남궁세가는 검의 명문이었다. 무당(武當), 화산(華山)과 더불어 중원검공(中原劍功)의 정종(正宗)으로 이름 높은 곳이 바로 남궁세가였다.
 게다가 당금 천하제일인이자 신주십육성의 제일인이 누구던가. 바로 자신의 조부인 검성(劍聖) 남궁무빈(南宮武彬)이었다.
 남궁세가의 장자로 태어나 이날 이때껏 검 하나에 인생을 걸어 왔다.
 축복이랄 수 있는 주변 환경에서 검로에 매진해온 남궁하룡이었다. 그 성취가 결코 낮을 리가 없었다. 또한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재능이 있었으니,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대표하는 쌍룡(雙龍) 중의 하나가 바로 검룡(劍龍) 남궁하룡이었다.
 여인들에게 삼봉이 있다면, 남자들에게는 쌍룡이 있었다.
 검룡 남궁하룡과 도룡 팽무벽(彭務闢).
 후기지수들 중 우뚝 선 두 이름이었다.
 그런 남궁하룡이었지만, 이 검흔은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확하게 열여덟에 이르는 환자들이었다. 지금은 혼절해 있었지만, 그들의 검상은 한번에 이어져 있었다. 열여덟의 목을 단 한번에 휘둘러 베다니. 그것도 혈관과 근육, 성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깊이가 18인 모두 일정했다.
 조금만 깊었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고, 얕았다면 펄펄 날뛰고 있었을 것이었다.
 정밀하기 그지없는 검기(劍技)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호승심(好勝心)이 끓어올랐다. 이 검의 주인과 당장이라도 붙어보고 싶었다.
 지금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도 바쁘게 움직이는 주인노인. 사실은 무림의 대선배이자, 무림맹의 팔대호법 중의 하나인 검선편작(劍仙扁鵲) 조준성(趙準誠)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바삐 움직이는 노부인이 바로 조준성의 내자이자 역시 팔대호법 중 일인으로 아미활선(峨嵋活仙) 하문청(河汶淸)이었다.
 조준성은 수십 년 전부터 무림을 종횡하며 인술을 베풀기에 여념이 없는 일대기인이었다.
 의술뿐만 아니라 검으로서도 일가를 이룬 인물로 그의 선풍십팔격(旋風十八擊)은 강호상에서도 이름 높은 절기였다.
 그의 부인인 아미활선 하문청은 전 아미 장문인인 관음신창(觀音神槍) 오정신니(悟定神尼)의 속가제자로 현 장문인인 불검신니(佛劍神尼) 다비사태(多備師太)의 사매이기도 했다.
 속가임에도 그 자질이 뛰어나 아미의 무공을 대부분 사사받은 바 있는 절정의 고수이기도 했다.
 조준성에게 의술을 사사받으며, 그와 함께 천하를 떠돌며 의술을 베풀었다. 이 두 사람을 활인부부(活人夫婦)라 부르며 정사를 막론하고 이들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수년 전, 다비사태의 간곡한 요청으로 무림맹에 몸을 담게 되어, 호법원(護法院)의 팔대호법의 위(位)에 올랐다.
 이 객잔을 차지하고 있던 다른 이들은 모두 호법원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이 청학루가 기실 무림맹에 소속된 객잔으로, 무림맹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며 정보수집과 예산확보 및 거점의 역할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지금은 마치 야전의 병동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남궁하룡이 넋놓고 검상을 바라보고 있자, 바삐 움직이던 조준성이 크게 호통을 쳤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게야! 네놈이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네놈 경지로는 어림도 없어. 이리 와 손이나 거들어 이놈아!"
 남궁하룡은 조준성의 호통에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어떤 자일까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운 자다. 다 죽일 수 있었는데, 한 놈만 죽었다. 보면 알겠지만, 급소 아닌 곳이 없고, 사혈이 아닌 데가 없다. 그런데 안 죽었어. 아니, 죽이지 아니한 게지."
 "······"
 "나도 장담 못 할 정도다."
 "그 정도란 말씀입니까?"
 천하의 검선편작이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검선이란 별호가 알려주듯이 검 하나로 천하에 두려울 것 없던 조준성이었다.
 "나라면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생사를 장담하지 못해. 이놈들 조석지간(朝夕之間)에 단련한 놈들이 아니야. 전문적인 살공(殺功)을 연마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일백이라니······"
 "······"
 "이놈들이 당한 것은 완벽한 살검이다. 살검으로도 죽이지 않았으니, 그 경지가 수월지경에 오른 자야."
 조준성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역시 무인. 피가 끓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애로운 조준성의 얼굴이 한순간 검객의 얼굴로 돌아온 듯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뚫어져라 검상을 바라보는 남궁하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배우려하는 의지가 절절했다.
 "좋구만."
 "예?"
 남궁하룡은 조준성의 한마디에 정신이 돌아왔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 다른 환자들에게 향했다.
 "과연 남궁세가······ 피는 못 속이는 건가."
 감탄사에 비슷한 말을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두 시진 동안 바삐 움직여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조치는 끝마쳤다. 그때 양혜령과 남궁하문이 운공을 마치고 나타났다.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양혜령이 한숨을 돌리고 있는 노부부에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그 옆에는 남궁하룡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고, 양혜령과 남궁하문 역시 할 말이 산더미였다.
 ***
 "뭐라고! 흑암대 전원 미복귀? 말이 돼? 흑암대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당했습니다."
 흥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이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있었지만 실내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 당해? 푸훗, 흐하하하! 자네 농이 많이 늘었구만! 하하하!"
 "······"
 "하, 하······ 정말인가."
 "예."
 "섬서에 누가 있다고 흑암대가 당해!"
 "······"
 "입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
 잠시지간 침묵이 흘렀다. 흥분했던 사내의 목소리는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냉철해진 이성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흑암대의 이번 임무가 뭐였는가."
 "화산속가무문 풍매문(豊梅門)의 멸문입니다.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그런데, 풍매문이랑 동귀어진이라도 했다는 얘기인가?"
 "아닙니다. 꼬리가 밟혔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의외인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누구에게?"
 "아미에서 조사차 무림맹으로 파견했던 양혜령과 청음입니다. 흑암대의 전 목표였던 아미파의 속가 금정문(金頂門)의 멸문을 조사하기 위해 아미본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정보가 샜습니다."
 "······어디로 말인가."
 "무림맹입니다.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지는 못했는지, 서안에 위치한 무림맹 소속의 비밀객잔인 청학루에 호법원의 무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아울러 당시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던 남궁세가의 창천검룡단이 그들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부족해, 그들만으로 흑암대 전원을 상대할 수는 없어. 내가 하나하나 직접 키운 것이 흑암대다. 그들의 능력은 내가 잘 알아.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게다."
 "조사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전모를 파헤치도록."
 "존명!"
 "그리고, 정보유출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도록."
 "예."
 "궁금하지 않나?"
 슬쩍 떠보려는 듯, 목소리의 울림이 미묘했다.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주군의 뜻은 절대적입니다."
 "그래? ······고맙군."
 "존명!"
 다시 어둠만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풍매문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현판이 불길에 휩싸였다.
 일백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커다란 장원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을 질렀다. 쌓여 있는 시신들의 수를 하나하나 파악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이며 간혹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의 몸에 무자비하게 검을 찔렀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남궁하문은 잔혹무도한 참상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공무(公務)라지만, 모처럼만에 세가를 떠나왔던 남궁하문이었다. 큰오빠 남궁하룡의 과잉보호에 지칠 대로 지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도망쳤다. 강호상에서 다지현화라 불리며 영민함을 자랑하는 그녀였지만, 아직은 소녀였다.
 남궁세가의 창천검룡단은 호법원 소속의 무사들과 함께 서안으로 향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섬서의 무문을 노린다는 출처불명의 정보 때문이었다.
 남궁하룡은 극구 그녀를 무림맹에 남겨놓으려 했지만, 그녀의 고집에 결국에는 항복한 남궁하룡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무명을 날린다고 해도 그에게는 철없는 막내였다.
 서안에 다다를 때까지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참견하고 보호하려 드는 남궁하룡과 창천검룡대의 대원들에 질린 그녀는 급기야 도주에 가까운 이탈을 감행했다.
 그것이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녀가 풍매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수상한 흑의인들의 은밀한 행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행들 몰래 관도를 벗어나 산길에 올랐던 남궁하문은 삼인으로 이루어진 흑의인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수상함을 느끼고 그들의 뒤를 은밀히 쫓았다. 그들의 종적을 따라 도착한 곳이 바로 풍매문이었다.
 그녀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그녀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그때, 돌아가서 일행들을 불렀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자책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 이들에게 한 가닥 구원일 수 있는 끈을 잘라버린 듯했다.
 이대로 뛰쳐나가면 의미없는 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자신의 모습을 그녀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의검천세! 남궁가의 가훈이었다.
 의기를 생명으로 여기는 남궁가의 피를 이은 후손으로서 그녀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검을 잡고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헉!"
 남궁하문은 놀라 거세게 검을 뽑으려 했지만, 상대의 무위는 자신보다 훨씬 높았다.
 난화를 그리듯 아름다운 수영을 그리며 상대의 손이 자신의 맥문을 움켜잡았다.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
 "쉿!"
 "아, 양 언니!"
 "조용히 해, 들킬 뻔했잖아!"
 "언니가 여긴 어떻게?"
 "무림맹으로 가던 길이었어, 산에 길을 잃었는데, 갑자기 화광이 보이길래."
 "어, 언니, 으흐흑······"
 "괜찮아. 울지 마."
 남궁하문은 일시에 긴장이 풀린 듯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소리죽여 끅끅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양혜령은 안아주었다.
 "그랬구나······ 너무 자책하지 마. 네가 그때 발길을 돌렸다고 해도, 어차피 늦었을 거야."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마. 네가 정 마음에 걸린다면 저들을 잊지 말고 그들을 위해 대가를 받아내줘."
 양혜령은 눈물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은 남궁하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눈을 맞추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남궁하문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훔쳤다.
 "청음 사저."
 "양 사매, 일단 숨어 있는 것이 좋겠어. 저들의 행사가 어찌나 치밀한지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아."
 남궁하문이 진정할 무렵, 한 비구니가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양혜령의 사저인 청음 스님이었다.
 "어머, 남궁 소저죠. 빈니는 청음이라고 해요."
 "예, 청음 스님."
 "상황이 좋지 않네요."
 양혜령은 조심스레 수풀 사이를 내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저들의 추적은 뿌리칠 수 없겠지."
 "이곳에 있다가는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양 언니."
 남궁하문이었다. 양혜령 역시 익히 느끼고 있었다. 언제 이곳이 발각될지 알 수 없었다. 시체의 수 하나하나를 세어가며 곳곳에 불을 지르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는 흑의인들이었다.
 "사매, 서안에 아미활선 하 사숙님이 계실 거야. 서안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저희 오라버니와 무림맹의 무사들도 서안에 있을 거예요."
 "여기서 서안까지 목숨을 걸고 달리면 반나절이면 가능할 거예요."
 세 사람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주변 수풀에도 불을 질러. 혹시 쥐새끼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 말에 세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뭐, 뭐야! 쪼, 쫓아!"
 수풀을 헤치고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세 인영의 모습에 흑의인들은 당황하면서도 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그것이 그녀들 생애에 가장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남궁하문은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자, 저도 모르게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남궁하룡은 그런 여동생의 모습에 살풋이 그녀의 앞에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미안해요, 오라버니. 흐흐흑."
 남궁하룡이 갑자기 사라진 그녀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다. 호법원 무사들의 인솔로 도착한 이 청학루에서 활인부부를 만나지 않았었다면, 창천검룡단은 아마도 남궁하룡의 닦달에 전부 쓰러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활인부부는 수년째, 이 청학루를 맡아 운영해오고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극비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팔대호법의 두 사람이 운영하는 객잔이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실상, 이 두 사람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안락한 노후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참이었다.
 비록 표면적인 주인으로서 그들이 객잔을 운영하지만, 실상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점원들이 무림맹의 호법원이나 정보단인 현무단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양혜령은 그들의 우애에 자신의 가슴도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북경에 있을 그녀의 세 오빠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녀의 막내오빠인 양운정이 전역하여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림맹에 도착하는 대로 말미를 얻어 집에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린 시절 항상 공무로 바쁘셨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내조하시던 어머니, 일찍부터 아버지의 뒤를 따랐던 큰오빠와 항상 공부만 하던 작은오빠. 실상 그녀를 돌보며 보살펴준 이는 바로 셋째 오빠인 양운정이었다.
 항상 자신에게 밝은 웃음만을 보여주던 그가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와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만 갔다. 급기야 그녀가 아버지의 배려로 아미에서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되어, 집을 떠나는 날에도 그는 집에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어째서였을까.
 양운정의 행동에 그녀는 잠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곧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또다시 동생을 멀리하면 어쩌지······
 이번에는 바보처럼 혼자 가슴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사랑하는 오빠이고 가족이다.
 남궁가의 두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며 결심을 다지는 양혜령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구였느냐?"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조준성이었다. 의술 못지않게 검에서도 자부하는 조준성이었기에, 더욱 이들을 도와주었던 정체불명의 검수에 대한 관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한참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던 남궁하룡의 눈빛도 달라졌다.
 두 사내의 눈에 담긴 것은 바로 열망, 검에 대한 열망이었다.
 하문청은 그런 조준성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조준성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 그것이······"
 양혜령으로서는 드디어 나올 것이 나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흑의인이었습니다. 한 자루 철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목소리가 상당히 젊었습니다."
 "목소리가 젊다고? 확실하더냐?"
 "예. 한 이십대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 그렇게 젊다고!"
 조준성은 양혜령의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는 적어도 갑자의 세월을 넘긴 백발의 노검수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조준성을 제치고 남궁하룡이 물었다.
 "양 소저, 그자의 검은 어떠했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양혜령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제대로 본 게 있어야 말을 할 게 아닌가.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자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 검로에 일체의 군더더기나 허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하기 그지없는 검.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검이었다.
 "죄송합니다. 남궁 소협.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했어요. 그들 흑암대의 흑멸진을 순식간에 와해시켰으니까요. 파훼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는데······"
 "뭐라고? 흑암대? 흑멸진?"
 양혜령의 말에 이어 남궁하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정말로 대단한 장면이었을 강조라도 하듯이 손을 크게 휘저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보다 더 크게 놀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준성이었다.
 "저들이 흑암대라 불리더냐? 또 흑멸진이라니?"
 "저들이 자신들을 흑암대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저들의 입으로 직접 들은 바입니다. 또 흑멸진이라는 것은 여기 하문이가 말해준 사실입니다."
 양혜령은 차분히 조준성의 놀람에 답하였다. 남궁하문이 한 발 나서며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를 포위하며 펼친 살진은 분명, 천년마교(千年魔敎)의 흑멸진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흑멸진의 아류 정도로 보입니다만, 그들의 펼친 살진은 분명 흑멸진과 크게 닮아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구문에 의거한 소녀의 판단입니다만······"
 "흑멸진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진 중의 살진······ 그렇다면 너는 이 일련 사건들의 흉수가 마교라고 보는 것이냐."
 "정확히는 마교와 어떤 인연이 있는 자로 보입니다."
 "무슨 뜻이냐?"
 "말씀드렸듯이 그들이 펼친 흑멸진은 순수한 흑멸진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아류라고 보아야겠지요. 그리고, 마교라면 이런 식의 암수를 쓰지 않습니다. 아니 쓰지 못하지요. 그것은 마교의 절대 율법인 순수한 힘에 위반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니까요."
 "결국에는 다시 오리무중이군."
 조준성은 대화를 정리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부인, 아무래도 일간 맹에 가봐야 할 것 같소."
 "······그래요. 왠지 혈향이 느껴지는 듯하네요."
 "······"
 장내가 조용해지면 일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것은 다가오는 암운을 미리 예견하는 듯했다.
 아침이 밝자, 양운정은 곧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란이를 깨워 세안을 시켰다.
 "우웅······ 아저씨 좀만 더요······"
 "이제 일어나야지."
 눈꺼풀이 무거운지 눈 뜨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이를 다독여 억지로 세안을 시켰다.
 전날 입었던 흑의는 혈향이 깊게 배어 있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아저씨는 왜 맨날 흑의만 입어요?"
 "흑의가 제일 편하니까. 때도 안 타고."
 란이는 양운정이 다시 칙칙한 흑의를 걸치자, 트집 잡듯이 물었다. 잠을 일찍 깨운 것에 심술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양운정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짐을 싸 객방을 나섰다.
 아래층의 식당에는 분주히 움직이며 청소하는 몇몇의 점원들뿐이었다.
 "아, 손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발하십니까?"
 "음, 그렇게 되었네. 아침 되겠는가?"
 "아······ 저 가벼운 것밖에는 안 되겠습니다만······"
 "괜찮네, 그거라도 부탁하지. 아, 그리고 말을 준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갔다.
 점소이가 내어온 것은 간단한 소면과 소채가 전부였다. 란이는 별다른 투정 없이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란이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슬며시 품안의 돈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
 상당히 가벼웠다.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집어 삼키고, 그도 아침을 들기 시작했다. 깨끗이 그릇을 비운 두 사람은 계산을 하고 청학루를 나섰다.
 아침 햇살에 슬슬 깨어나는 도시들을 둘러보며 그들도 발걸음을 옮겼다.
 양운정이 객잔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학루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부상을 입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자결한 것이었다.
 치료한 상처를 파헤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 아흔아홉의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했는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객잔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제6장 발걸음을 돌리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개봉(開封)이었다. 송대의 고도(古都) 개봉을 둘러보며, 란이의 얼굴은 마냥 즐겁게 보였다.
 개봉 역시 서안 못지않게 번화한 도시였다.
 좋다고 뛰어다니는 란이를 진정시키며 양운정은 드디어 터져버리고 만 사태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텅텅 비어버린 돈주머니.
 "말을 파는 수밖에 없나······ 하······"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끄러미 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간 잘 먹었는지, 혈색 좋아 보이는 얼굴이 왠지 얄밉기도 했다.
 푸르릉······
 양운정의 시선을 느꼈는지 말은 냉큼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
 한숨만 터져나왔다. 당장에 돈을 변통할 곳도 없었다.
 "말······ 팔까?"
 "······꼭 그래야 돼요?"
 "아니, 꼭은 아니지만, 한 일주일쯤 굶고 하면······"
 "······팔아요."
 "그래, 그러자."
 신나게 돌아다니던 란이는 양운정의 말 한마디에 침울한 기색을 보이며 머뭇거렸다. 역시 말과 함께하던 아이라 그런지 말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보다는 먹을 게 우선이었다.
 양운정은 그래도 예산확보에 성공했음을 자축하며 마시장을 빠져나왔다.
 란이가 많이 풀이 죽어 있었다.
 타박타박 옆에 걷던 란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급작스러운 양운정의 행동에 란이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양운정은 그런 란이를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올려 목말을 태웠다.
 "내, 내려주세요."
 "괜찮아."
 "나 애 아니에요!"
 "네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서, 나이를 먹어도 나한테는 영원히 애야."
 양운정은 기분좋게 웃으며, 란이를 목에 앉히고 걸었다.
 란이의 체중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늘었지만 양운정에게는 아직도 부족한 듯싶었다.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이고, 틈날 때마다 맛난 것을 사먹여 이제는 제법 살도 붙고 혈색도 좋아졌지만, 양운정은 여유가 생기는 대로 보약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벼웠다.
 그래도 열다섯이나 먹은 소녀인데, 이렇게 애 취급이라니. 란이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해 창피하기도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돈 란이는 냉큼 두 손으로 양운정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하하하."
 그리고 끝이었다. 두 눈을 가렸음에도 양운정은 아무런 불편없이 복잡한 대로를 걷고 있었다.
 "에이, 아저씨 재미없어."
 "하하하. 미안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눈을 가린 손을 치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유유히 인파 사이로 걸어가는 한 남자와 그 어깨 위에 앉은 작은 소녀 그들 사이에는 왠지 따뜻한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뭐야, 저 사람 맹인(盲人)인가? 손에는 검을 들고 있으니, 일단은 검을 쓰는 자인 것 같은데."
 바보 같은 말이었다. 맹인이라면 어깨 위에 앉은 소녀가 뭐하러 두 눈을 손으로 가리겠는가.
 "흐음, 뭔가 냄새가 나는구만."
 실상 냄새는 자신의 몸에서 풍기고 있음을 잊고 있는 한 거지였다.
 거지였다. 허름한 낡은 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이결의 매듭이 지어진 띠를 두르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덩치였는데, 얼굴의 반을 가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두 눈에는 영기가 가득했다. 한 손에는 밥그릇을 한 손에는 죽봉을 든 거지는 양운정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뒤를 쫓았다.
 양운정이 란이를 데리고 가까이 보이는 식당에 들어섰다. 모처럼 란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서안에서 부터는 계속 소채나 소면, 만두밖에 먹이지 못했기에 오늘은 모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기로 했다.
 "우와!"
 란이의 두 눈이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한상 가득 쌓여 있는 각종의 산해진미들. 란의 시선이 양운정에게 향했다.
 정말 다 먹어도 되냐는 의미일 것이다. 양운정은 찻물로 입술을 축이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며 란이의 두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각종 요리를 미어터져라 양볼 가득 부풀리며 먹어대는 란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양운정은 차를 들이켰다.
 "······?"
 한 거지가 바로 옆에서 란이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침이 바닥을 적셨다.
 침이 흐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골적으로 란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열망을 읽었음인지 란이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양운정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려 점소이를 찾았다. 한쪽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 점소이와 눈이 마주쳤다.
 양운정이 빤히 쳐다보자, 점소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곳은 개봉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개봉. 개방의 총타가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개방제자의 위세는 숭산에서 소림사의 위세와 비견할 만했다.
 일개 식당에서 개방제자에게 잘못 걸리면 그날 하루의 장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식당문을 닫아야 할지도 몰랐으니, 점소이로서야 딱 봐도 외지 손님인 양운정의 눈치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운정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고개를 홱 돌려 문 앞의 계산대에 앉아 있던 풍채 좋은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주인도 찔끔하더니 슬금슬금 양운정의 시선을 피했다.
 양운정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점소이를 비롯한 주인 등 이 식당의 점원, 누구도 나서서 이 불쾌한 사태를 정리해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와중에 거지의 노골적인 눈빛에 못 이겼는지, 란이가 결국에는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거지의 헤벌어진 입이 활짝 피어나며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진 두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발하는 듯했다.
 "아이구! 이런!"
 호들갑을 떨며 거지가 탁자에 바짝 다가왔다.
 "아니, 음식이 이렇게 많이 남았네! 아이구, 이거 아까워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거지가 음식들에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탁자 위의 음식을 쓸어담을 듯했다.
 양운정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만."
 거무튀튀한 검집이 거지의 손목을 살짝 누르며 행동을 제지했다.
 "어? 어라?"
 "지금 못 먹으면 다 싸가지고 갈 거니까, 건들지 마시오."
 양운정은 고개를 돌려 거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지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명백한 조소였다.
 "아이구, 나으리, 이 배고픈 거지에게 그 남은 음식 좀 적선하시구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집 아래 눌려 있던 거지의 손이 움직였다. 손목을 돌려 검집을 타넘으며 다시 음식에 손을 뻗었다.
 탁.
 하지만 거지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다시 양운정의 검집이었다.
 "한 번만 더 해봐라. 손모가지를 잘라주마."
 "당신이 그럴 능력이 있을까?"
 빈정거리는 거지의 목소리로 양운정은 확실해지는 사실에 짜증이 치솟았다.
 이 망할 거지는 지금 시비를 걸고 있었다.
 양운정은 치솟는 짜증을 억눌렀다. 일단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이 거지의 위세를 보아하니 개방이라는 무림방파의 일원인 듯싶었기에 섣불리 화를 내지는 않았다.
 "너 개방이냐?"
 "아니, 개봉 거지 중에 개방제자 아닌 거지가 어디 있나?"
 빈정거리는 말투가 여실히 드러났다.
 거지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매듭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거지로서야, 자신이 개방 소속이라는 위세를 떨고 싶은 모양이었다.
 "거지 아저씨! 왜 우리 아저씨한테 시비예요?"
 "하하, 아니, 돈도 넉넉하신 것 같은데, 사해는 동도라, 이렇게 굶주린 거지한테 적선 좀 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뻔뻔하게 란이의 말을 비웃으며 거지가 빈정거렸다.
 "그게 무슨 적선하는 태도예요!"
 기분이 상한 란이가 뾰족히 소리를 질렀다.
 "쳇! 그럼, 당당한 개방제자인 나 연미개(燕尾?)가 몽고계집이나 껴안고 다니는 밸 없는 놈에게 드러누워 구걸이라도 하란 소리냐!"
 날카로운 연미개의 말에 란이는 가슴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퍽!
 "우앗!"
 양운정의 검이 뽑혀졌다. 검면으로 거세게 연미개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가볍게 후려쳤기에 치아는 무사했지만, 실린 여력이 가볍지 않아 연미개는 저도 모르게 뒤로 나동그라졌다.
 "이놈이!"
 연미개는 자세를 바로하며 손에 쥐고 있던 양운정의 검집을 던졌다. 그 역시 무공을 익힌 고수였는지, 검집에 실린 힘이 제법 강했다. 하지만, 양운정은 그저 검을 뻗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검은 검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연미개가 그것을 노리고 던진 것 같았다.
 양운정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연미개는 잠시 놀라 넋놓고 있었다.
 비록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그 역시 제법 강호상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였다. 급히 검집을 던져내긴 했지만, 결코 검집에 실린 힘이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상대는 어려움 없이 검으로 검집을 받아내 착검(着劍)하는 묘기를 선보인 것이었다.
 실상, 개방의 연미개 하면 나이 약관에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후기지수였다.
 비록 이결이지만, 그는 개방 용두방주인 불패신개(不敗神?) 왕치공(王治公)의 이제자였다.
 그의 사형인 유룡개(流龍?)는 후개(後?)로서 직분을 다하고 있지만, 그야 방주가 될 욕심 따위도 없었고, 그저 무한한 호기심과 호승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으니, 강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그가 빠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언제는 사천에서 난리를 치고, 또 언제는 산동에서 난리를 치니, 중원 대강남북이 자신의 안방이요 놀이터였다.
 입이 험하기로 유명하고, 천지간에 구분을 못하여, 그의 험한 입담과 손속에 낭패를 본 무림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지금껏 하늘 아래 사부를 제외하고는 무서울 것 없다고 큰소리치며 설쳐온 연미개였지만······
 연미개는 잡념을 떨쳤다. 손에 들고 있던 죽봉을 힘차게 바닥에 꽂으니, 나무로 된 바닥에 죽봉이 깊숙이 꽂혔다. 연미개의 충실한 내력을 보여주었다. 연미개가 내력을 운용하며, 순식간에 좌우쌍수를 놀려대니 우르릉 하는 낮은 공명음이 손에서 울렸다.
 개방 비전의 용음십이수(龍吟十二手)였다. 용음십이수는 연청쌍비(燕淸雙飛)의 경공술과 더불어 연미개가 가장 자신하는 절기였다.
 검집째 팔을 쭉 뻗고 있는 양운정의 오른팔을 집어 삼킬 듯이 거센 기파가 연미개의 쌍수에서부터 퍼져나왔다.
 "차핫!"
 호리호리한 두 팔에서 뻗어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질 않을 만큼 강맹한 일격이었다.
 양운정의 일련의 수를 보고는 감히 그를 경시하는 생각을 버린 연미개였다. 구성에 이르는 옥현귀진신공(玉玄歸眞神功)을 바탕으로 펼친 용음십이수였다.
 양운정은 뻗었던 팔을 가슴 안쪽으로 거두어들이며, 좌장으로 거세게 검병을 끊어 쳤다. 그러자, 검집이 마치 화살처럼 연미개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헉!"
 쏘아진 살처럼 날아드는 검집에 연미개는 다급히 한 발 훌쩍 물러서며 노렸던 양운정의 팔 대신 검집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검집에 실린 역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붙잡은 채로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버틴 두 발이 바닥에 긴 자국을 남겼다.
 이대로라면 활짝 열려진 정문을 통해 거리로 나동그라질 판이었다.
 "이익!"
 연미개는 이를 꽉 물며 뒷발을 힘차게 뻗어 정문의 문지방을 발로 버티어 신형을 세웠다. 그러자 손안의 검집이 벗어나려는 듯이 강하게 요동을 쳤다. 전력을 다해 운용한 용음십이수로도 더이상 검집에 실린 내력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연미개는 모험을 걸었다. 검집을 쥔 손을 비틀어서 놓으며, 신속히 손을 뒤집어 손등으로 검집을 후려쳤다. 파옥권(破玉拳)의 도전포옥(挑轉捕玉)의 일수였다. 검집은 목표를 잃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식당의 구조는 가운데 뚫린 이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검집이 정문 바로 위에 위치한 2층 바닥을 뚫고 높이 날아올랐다.
 연미개는 이 거력(巨力)을 버티어낸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양운정이 움직였다. 무려 이 장에 달하는 거리를 눈 깜박할 새에 줄이며 연미개의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연미개는 놀라며 손을 뻗었지만, 양운정이 훨씬 빨랐다. 양운정은 냉큼 검면(劍面)으로 연미개의 머리를 호되게 후려갈겼다.
 빠악!
 골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건물 안에 울려퍼졌다. 연미개는 머리에 당한 거센 일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모로 쓰려지려는 몸을 간신히 한발을 내딛어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는 꼴은 면했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지는 편이 그에게는 좋았을 터였다. 연미개는 죽기를 각오하고 힘차게 주먹을 떨쳤다.
 굳게 쥔 그의 주먹에서 푸른빛이 어렸다. 파옥권의 파옥충권(破玉充拳)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 했다. 채 팔을 뻗기도 전에 양운정은 연미개의 손목을 후려쳤다.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파옥권력이 흩어졌다.
 "크윽!"
 철썩! 철썩!
 검면으로 양뺨을 후려갈겼다. 연미개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자, 양운정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검면이 연미개의 한쪽 어깨를 가격했다. 뼈가 끊어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억!"
 연미개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연미개의 허리를 양운정이 검을 휘둘러 허리를 가격했다. 연미개의 몸이 붕 떠 구석을 향해 처박히려 했다. 양운정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서 빈손을 쭉 뻗어 연미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안쪽으로 손목을 비틀자 연미개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벽에서 바닥으로 바뀌었을 뿐 처박히는 꼴은 면하지 못한 연미개였다.
 "크으윽!"
 온몸이 쑤시며 통증이 몰려왔다. 사부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처음 맞는 악재였다. 강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 핍박 할 수 있는 자가 사부 이후로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연미개였다.
 말은 길었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득 양운정이 검극을 세우자, 허공 높이 떠올랐던 그의 검집은 마치 검이 검집을 부른 듯이 검신을 감추며 얌전히 착검되었다.
 착!
 신기에 가까운 묘기에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토해내었다.
 입안이 터졌는지, 입술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몸이 온전한 구석이 없었다. 양운정은 차갑게 연미개를 노려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와······!"
 란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몽고최고의 용사인 철홀의 딸인 란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변에는 붉은 늑대라는 고수들이 항상 같이했었다.
 비록 그녀는 제대로 된 상승의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안목은 있었다.
 그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저 거지의 무공은 적어도 붉은 늑대들과 비견 할 만하다고 느꼈다.
 붉은 늑대들도 저런 무공이라면 고전하지 않을까? 양운정이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 무공을 지닌 거지를 단숨에 두들겨 패버린 양운정의 모습에 란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연미개의 무공이라면 못해도 붉은 늑대들 중 2인 정도와는 능히 자웅을 겨룰 만했다. 단, 붉은 늑대들이 말을 타지 않았을 경우에 한했다. 붉은 늑대들이 말에 타고 안 타고의 차이는 진검과 맨손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붉은 늑대들이 말을 타고 싸움에 임할 때는 생사대결이나 전투를 벌일 때뿐이었으니, 그들의 전장에서의 모습 외에는 본 일 없었던 란이로서는 오류에 빠진 셈이었다.
 양운정이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띠며 자리로 돌아왔다. 란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란이는 기묘한 열기가 담긴 눈으로 양운정을 바라봤다.
 "더 패줄까?"
 "아니오. 괜찮아요."
 "그 말······ 신경 쓰지 마."
 "······아저씨가 더 신경 쓰는 것 같은데요."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네가 상처받는 거야."
 양운정은 음식을 란이의 접시에 덜어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몽고인 것은 맞는 말인걸요."
 "그래,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업신여기고, 상처 주는 짓은 내가 용납 못하겠다."
 "······"
 란이는 왠지 눈물이 터져나올 듯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며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인 란이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그를 슬프게 했다.
 양운정은 손수건을 꺼내어 란이의 눈가를 훔쳐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예······ 고마워요."
 "······식겠다, 어서 먹어."
 양운정이 다시 음식을 권하자, 란이는 토끼같이 빨개진 눈을 하고는 웃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 음식은 그녀 평생에 먹은 음식 중 가장 달고 맛있었다.
 양운정은 그녀 옆에 붙어 앉아, 이것저것 요리들을 그녀에게 옮겨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철홀의 눈을 닮은 아이이기에 호기심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철홀은 그가 양운정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큰 영향과 계기를 만들어준 인물이었다.
 그런 눈을 가진 아이라면, 제자로 한번 삼아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다소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이 아이가 진정 철홀의 딸일 줄은 그로서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양운정은 이 아이와의 인연을 느꼈다. 솔직히 그것은 철홀에 대한 자기 위안에 가까운 속죄라고 해도 좋았을 것이었다.
 시작은 그러했을지라도, 맹세컨대 양운정에게 지금의 란이는 친혈육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양운정은 다시 한 번 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누구시오? 당신은······?"
 연미개는 기가 잔뜩 죽어, 머뭇거리며 양운정에게 물었다. 바닥에 꽂아 놓았던 죽봉에 의지해 힘겹게 몸을 일으킨 연미개는 주저주저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양볼이 개구리 볼마냥 빨갛게 부풀어 올라 발음이 불명확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양운정은 한차례 연미개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양운정의 눈길에 연미개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왜?"
 "예?"
 "왜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얘기 해야 되는 거냐?"
 "아, 아니, 사, 사람을 이렇게 패 놓고!"
 "그럼, 그 잘난 주둥이를 아예 뽑아줄까?"
 "······무, 무슨!"
 "네가 개방이면 개방이고, 무림인이면, 무림인이지. 나와 무슨 상관인데, 이리 무례한 게냐!"
 양운정의 일갈에 연미개는 할 말이 없었지만, 개방을 걸고 넘어지는 데야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으득! 개방의 십만거지를 무시하는 겝니까?"
 "허! 개방의 위세를 빌려, 나를 겁주겠다는 것이냐."
 품에서 백호패를 꺼내어 가볍게 연미개에게 던졌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발밑에 떨어진 백호패를 무심결에 주워 든 연미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연미개는 눈앞이 깜깜했다. 자신이 관부의 인물을 건드린 것이었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불가분의 관계라 할지라도, 백호 정도에 이르는 무관을 허투루 업신여기며 시비를 건 행위는 명백히 관과 강호에서 지탄을 받을 만한 행위였다. 이는 자신 개인뿐만이 아니라, 개방에게까지 화가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미개는 경솔했던 자신의 행동에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로서야 몽골족의 여아를 데리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검사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뒤를 따랐을 따름이었다. 요사이 연이은 혈겁으로 강호정세가 뒤숭숭하여, 개방에서도 각 지역마다 낯선 무인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라, 연미개는 간만에 개방을 위해 일을 좀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선 일이었건만, 하늘도 무심하여라, 무관일 줄은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퍼렇게 질린 연미개의 얼굴이야 어찌되었든, 양운정이야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되었느냐?"
 "죄, 죄송하게 됬습니다, 나으리."
 "필요없다. 너의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 아이에게 해야 할 터."
 양운정의 싸늘한 말에 연미개는 흠칫했다. 그제야, 란이를 떠올린 것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억센 무관도 실상, 이 아이 때문에 그리 분노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 아이를 잘 구슬린다면 큰 탈이 없으리라.
 "아이구, 미안하네, 꼬마 아가씨. 이 거지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말을 함부로 했네. 용서해주지 않으련?"
 베실베실 웃으며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사근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연미개의 얼굴은 란이는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양운정은 란이의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슬쩍 웃어주었다.
 란이가 인상을 쓰며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니, 일초일초가 지날 때마다 연미개의 미소가 점점 굳어져 갔다.
 "미, 미안하다니까. 꼬마 아가씨."
 "이거 먹어요."
 란이가 탁자 위에 있던 만두하나를 집어 연미개에게 내밀었다. 연미개는 활짝 웃으며 만두를 받아들었다. 물론, 그는 만두보다 일이 무사히 마무리 되겠구나 여겼기에 기뻐했다.
 연미개 활짝 웃으며 만두를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먹었으니까. 여기 음식값은 거지아저씨가 내요."
 연미개가 입을 우물거리기가 무섭게 란이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케, 켁! 케헥!"
 맙소사, 거지한테 음식 값을 내라니! 연미개는 순간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양운정과 란이가 시켰던 음식들이 제법 양이 많아서 그렇지, 고급음식은 아니었기에 부담없다면 부담없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개방이라는 데 있었다. 개방이 무엇인가, 거지 아니었던가. 거지한테 뭔 놈의 돈이 있겠는가.
 돈 앞에 중원천하를 질타하던 협개(俠?)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양운정과 란이를 앞에 두고 연미개는 탁자 위에 음식들을 입으로 쓸어담으며 쉴 새 없이 씹어대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데도 고기 한 점 안 흘리는 묘기가 놀라웠다.
 "아그작! 꿀꺽! 후르륵!"
 참, 사람의 입에서 어쩜 이렇게 다채로운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는지······ 조금 전만 해도 시퍼렇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연미개가 아니었다.
 먹던 만두가 목에 걸려 질식 직전까지 갔던 연미개는 이제는 제법 넉살을 떨며 란이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다.
 연미개는 갖은 아양을 떨며, 그가 주워들은 신기한 강호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아 간신히 어려움을 모면했다.
 연미개의 넉살이 싫지는 않았는지 음식을 권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탁자 위의 음식을 위 속으로 쓸어담는데, 그 손놀림이 양운정에게 펼쳤던 용음십이수는 저리 가라 할 지경이었다.
 음식을 전부 처리한 연미개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연미개가 하는 말은 강호정세나, 기담등 란이에게는 신기한 얘기들이었다.
 당금 강호에는 두개의 커다란 세력이 있는데, 바로 무림맹과 사마련이 그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연미개의 말이 끝나기까지 장장 2시진이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무림맹,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하는 정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이 무림맹이었다.
 사마련, 정파에 무림맹이라면, 사파에는 사마련이 있었다.
 사파제일세라는 혈곡을 주축으로 하여 강호 상의 수백의 사파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대표자인 곳이 바로 사마련이었다.
 무림맹과 사마련은 각기 비등한 세와 전력을 가지고 강호를 양분하여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정파의 무림맹과 사파의 사마련은 서로를 경원시(敬遠視)하면서 함부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전력이나 세력면에서 비등하기도 했거니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현 무림맹주이자 소림속가제일인 용비등검(龍飛登劍) 화문강(華們强)과 사마련주이자 사파제일세인 혈곡(血谷)의 곡주인 귀문혈존(鬼門血尊) 사무혁(査茂爀)은 각각 정파와 사파를 대변하는 입장으로서 서로 간의 견제와 화친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헌데, 최근 들어 정사를 막론하고 서로간의 산하문파나 속가무문이 멸문을 당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었다.
 정파 측에서는 사무련이, 사무련 측에서는 무림맹이 벌인 짓이라고 맹렬히 비난을 하며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십수년간 이어온 무림의 평화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셈이었다.
 최근 2년간 구파의 속가무문 다섯 곳과 오대세가 산하의 군소문파 세 곳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사무련 측에서는 혈곡을 위시한 사무련의 주요문파들의 산하문파 열 곳이 멸문을 당했다.
 두 세력 간에 견제가 한층 가열된 상태에서 한 달 전 커다란 사건이 터졌으니, 제천회(帝天會)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남궁세가에게 봉문을 전제로 한 생사투(生死鬪)를 제안한 것이었다.
 "뭐? 남궁세가?"
 "예. 천하제일세가라는 남궁세가에 그런 도전장이라니. 남궁세가로서는 피할 수가 없겠지요. 그들의 이름이 달린 일이니까요. 무림맹으로서도 끼어들 수가 없는 일이지요."
 "······흐음······"
 "남궁세가 하면 정파의 정신적인 지주를 상징하는 가문 아닙니까. 그 제천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남궁세가를 봉문시킨다면 무림맹의 무력의 2할이나 감소시킬 수 있지요. 굳이 남궁세가의 무력 때문만이 아니라, 사기나 뭐 그런 것들까지 감안한다면 못해도 3할 이상은 되지 않겠습니까?"
 호응을 바라는 듯이 되묻는 연미개의 말에 양운정은 그저 말없이 연미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연미개는 어떤 생각도 읽어내지 못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 데, 무슨 감정이라도 보여줘야 얘기할 맛도 나지 않겠는가.
 저렇게 맞장구치지도, 관심이 있다는 얼굴도 아니니 왠지 맥이 빠졌다.
 그나마, 옆에 있던 란이의 맞장구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얘기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듣자 하니, 북경으로 시집갔던 큰딸도 불렀다는데요? 하기사 그 딸이 또 삼봉 아닙니까. 삼봉. 전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요."
 "······그래?"
 "그런데, 그 사위라는 사람은 뭐하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듣자 하니 얼마 전 군에서 나왔다는데······"
 "사위?"
 "예, 대장군부의 삼남이지요. 이름이 양 뭐라고 하던데······"
 연미개의 말에 양운정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가짜가 도대체 왜 남궁세가로 향하는가. 생각에 빠져들었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추리하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
 거친 바람에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최 군사, 이제 군사가 없으면, 나는 어쩌라고 이렇듯 낙향하신단 말이오."
 화려한 갑주를 차려 있은 장수가 한 문사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수십 기의 기병들이 군례를 취하고 있었는데, 바로 대명의 정예 중의 정예라 불리는 북로군의 정병들이었다.
 최 군사라 불린 문사는 애써 겸양을 떨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초로의 장수는 이 북로군을 책임지고 있는 자였다.
 "장군님. 지난 5년간 장군님의 아래에서 책사로 일한 시간이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내 최 군사를 절대 잊지 않으리다."
 "하하. 그저 범부에 불과한 이 최흠이에게 이렇듯 과한 대접이시라니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최 군사라 불린 노문사는 북로군의 군영을 떠날 수 있었다.
 얼마나, 떠나왔을까. 전 북로군 군사 최흠은 힘없는 노마위에서 흔들거리며 천천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말을 달리는 수십 기의 기마들이 있었다.
 먼지를 피우며 다급히 그를 향해 달려오는 그들은 하나같이 타는 듯한 붉은 적의를 입고, 병장기를 소지한 무림인들이었다.
 최흠을 따라잡자, 그들은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제천회 적무대(赤霧隊)!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으음, 왔느냐? 그래, 대계는 어찌 되었느냐?"
 "일회주님께서는 위천일계(僞天一計)를 마무리 지으셨고, 이회주님의 위천이계(僞天二計)가 곧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 으음······ 그 인간이 이계를 마무리 지어야. 우리의 삼계도 빨리 시작될 수 있을 터인데······"
 최흠은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천의 장군은 어쩌고 있느냐?"
 "아직도 고민 중이십니다."
 "망할 인간! 그렇게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거늘······ 그 인간이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최흠은 사이한 미소를 띠우며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서생의 모습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피를 즐기는 도살자의 모습이었다.
 ***
 "아이고, 매정하게 그냥 가시깁니까?"
 "뭐?"
 양운정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연미개의 모습에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어디를 가느냐는 말에 알 것 없다 하고는 식당을 나서자, 바삐 뒤를 쫓아온 연미개였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앵무새마냥 조잘조잘거리던 연미개는 급기야 양운정이 개봉을 떠나려 하자, 이제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애걸하는 것이었다.
 "그만해라······"
 "아이고, 매정하기 그지없습니다. 안 알려주실 요량이거든 데려가주십시오."
 "······"
 이제는 숫제 데려가란다.
 "으득!"
 "엥?"
 급작스런 이 갈리는 소리에 잠시 동작을 멈춘 연미개였다. 조심스레 위를 올려다보니, 양운정이 이를 꽉 깨물고는 싱긋 미소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죽었다.'
 연미개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퍽!
 "크억!"
 바지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차버리며, 가차없이 밟기 시작했다. 얼굴, 몸통, 다리 할 것 없이 한쪽 발로 어쩌면 그리 잘 밟는지, 연미개는 결국 다시 매를 벌고 말았다.
 흠씬 밟힌 연미개의 목덜미를 번쩍 들어올린 양운정은 헤롱헤롱거리며 정신을 놓고 있는 이 거지를 그대로 던져버렸다.
 연미개가 정신을 차릴 무렵이면, 이미 개봉을 떠나 있을 터였다.
 양운정은 가볍게 손을 털며, 란이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
 "백의대는 목적지에 도착했느냐?"
 "예! 일회주님!"
 "교에서는 별 말이 없던가?"
 "흑암대의 전멸에 그들도 꽤나 당황한 듯싶습니다."
 "그렇겠지······ 망할! 차라리 흑살대(黑殺隊)를 보낼 것을······!"
 어둠속에서 사내는 이를 부득 갈았다. 흑암대와 흑살대. 그의 휘하에 있는 흑의이대(黑依二隊)였다.
 흑암대는 비록 인원이 흑살대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하나의 무위가 가히 일당백이었다. 온갖 눈치를 보며 키워온 소중한 그의 전력들인 흑암대가······ 그에 비하자면, 흑살대는 교에서 보내준 전력이었다.
 그들 역시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흑암대와 비교한다면 손색이 있었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흑의에 백포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검사.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무지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무의식 중에 발출한 무형지기가 어둠을 가득 메웠다.
 "크윽······"
 낮은 신음성에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무형지기를 회수했다.
 어둠 속에 부복한 사내의 입에서 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흠······"
 수하 앞에서 흥분한 모습을 보인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지, 낮은 헛기침을 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의 사내는 한차례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는 조심스레 물러났다.
 철저한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사내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바닥에 흘린 한줄기 핏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 임에도 사내의 눈에 핏자국은 한 치의 가감없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젠장! 흑암대가 없다면, 회에서 입지도 줄어들 텐데······ 이회주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망할······"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살기 어린 대기만이 한때 사람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
 양운정과 란이는 개봉을 벗어난 관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심각하게 굳어진 양운정의 얼굴에 란이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양운정의 뒤를 쫓을 따름이었다.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듯이 계속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는 길은 북경으로 향하는 길에 반대되는 길이었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텐데, 양운정은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양운정은 고민거리를 토해내듯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그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가짜가 어째서 등장했는지도 짐작하지 못하는 이상, 가짜가 무슨 목적으로 남궁세가로 떠났는지 어찌 알겠는가.
 양운정은 가짜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가짜에 대해서 생각하면 음모와 모략의 낌새에 불쾌감이 치솟기 때문이었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양운정은 문득 남궁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양운정으로서 살게 된 이후로는 딱 두 번 얼굴을 보았을 따름이고, 이 몸의 기억을 살펴보아도 얼굴을 마주 본 적이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도 마치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돼 있는 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확실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전 생애를 뒤져보아도 그녀만큼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어떠한 연모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아름다운 여인. 그것으로 끝이었다.
 양운정은 이내 머릿속에서 남궁아현의 모습마저 털어냈다.
 "아저씨? 무슨 걱정 있으세요?"
 "응? 아, 아니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냥 골치 아픈 일이 좀 생겨서."
 "으응······ 그런데 왜 이쪽으로 가요? 이쪽은 북경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아저씨 처가에 일이 좀 생겨서, 한번 가보려고."
 "처가요?"
 "응······"
 란이는 양운정의 얼굴이 전에 없이 어두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다그닥! 다그닥!
 다급한 말발굽 소리에 양운정은 슬쩍 관도의 옆으로 비켜섰다.
 삼 기의 기마가 어찌나 빨리들 말을 달리는지 그들의 뒤에는 자욱한 모래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나고 있었다.
 앞에 사람이 걷고 있음에도 마상의 인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몰았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양운정과 란이를 뒤덮었다.
 "콜록! 콜록!"
 란이가 거칠게 기침을 토하자, 양운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것들이!"
 타는 듯이 붉은 홍의경장을 걸친 여인과 그녀의 뒤를 바짝 붙어 말을 모는 푸른 무복의 두 청년들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양운정은 란이의 옷을 털어주며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불쾌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꽤나 명마였는지, 채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시야에서 벗어났다.
 "괜찮니?"
 "예!"
 "정말, 무례한 것들이군."
 "저 괜찮아요. 화내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란이의 만류에 양운정은 찡그렸던 얼굴을 풀었다.
 양운정은 곱지 않은 눈으로 먼지가 차차 가라앉는 관도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란이의 머리를 습관처럼 쓰다듬었다.
 ***
 남궁아현은 수년 만에 돌아온 본가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남궁세가의 정문 앞에는 수십의 인부들이 달라붙어 비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제천회와의 생사투를 위한 장소였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세가내의 무사들이 연무하는 연무장의 족히 두 배는 될 듯했다. 그녀의 뒤에는 잔뜩 기가 죽은 모습으로 산만한 덩치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뚱뚱한 사내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양운정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흘깃 바라본 남궁아현은 말없이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양운정은 허겁지겁 뒤를 쫓았다.
 그들 뒤로는 수명의 호위무사들이 따랐는데, 그들은 모두 남궁세가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남궁아현과 양운정이 가문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그 누구도 양운정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이는 없었다. 한결같이 남궁아현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양운정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다독였다. 여기서 실수했다가는 바로 목이 달아나리라.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숙부인 뇌운검협(雷雲劍俠) 남궁장현(南宮張賢)이었다. 남궁아현 역시 그의 모습에 반가워했다.
 그녀로서는 보기 드문 감정표현이었지만, 그것을 읽어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리 그녀를 빙화검봉이라 불리겠는가.
 남궁장현은 파악할 수 없는 남궁아현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양운정과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흘렀다.
 그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양운정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심지어 좋은 술이 있다며 그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것은 양운정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부복하는 양운정이었다.
 "그래, 실수한 바는 없겠지."
 "옛! 양가의 식구들 모두 처음에야 무사히 돌아왔다고 환대했지만, 제가 얌전히 방에만 처박혀 있으니, 하나, 둘, 실망을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가짜의 말에 남궁장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흡족해했다.
 "그래, 잘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한 남궁장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헌데, 양운정 그놈이 오 년 전에 어떻게 살아났는지······ 정말 대장로가 아니었다면, 대계에 차질이 왔었을 게야. 오 년 전에 그 일만 성공했었다면, 네 녀석이 이런 꼴로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터인데, 애석하구나."
 가짜 역시 오 년 전의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부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 아현이는 어떻더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다. 양가장에 도착하고 이날까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기사, 그 아이는 이 양가 놈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아이지······ 이번에 세가를 위하여 큰일을 해줄 아이이기도 하고······ 후후후······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남궁세가는 물론 대장군부까지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크흐흐흐!"
 그의 얼굴은 평소 협의가 넘치고 인자한 인물로서 강호무림에 이름 높던 뇌운검협 남궁장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망에 사로잡힌 한 사내의 추악한 모습에 불과했다.
 ***
 한참을 관도를 열심히 걷던 양운정과 란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걸어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이라도 부릴 법 하건만, 아직까지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런 란이가 기특한 양운정이었다.
 개봉을 떠나고 갑자기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던 란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란이가 누구던가.
 몽고 최고의 용사의 핏줄이 아니던가. 양운정 역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당시, 제자로서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으니, 그로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물론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그저 호신을 위한 정도로만 가르칠 생각이었지만,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가 언제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한 양운정이었다. 그저 체력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걷게 하고, 쉴 때마다 운기공을 시킬 따름이었다.
 추후에 몸의 단련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격자지법을 가르칠 생각이었지만, 그 이후가 또 문제였다. 란이에게 십보검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십보검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참살하는 필살의 검. 란이에게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십보필사는 또 어떠한가, 무수한 전장과 아수라를 헤쳐온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살의의 검이 바로 십보필사였다.
 형조차 없는 살의를 기반으로 한 검법들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구법연화신공이 없었다면, 검의 살기에 홀려 살귀가 되고 말 터였고, 수월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검을 펼치는 족족 인명을 헤쳤을 터였다.
 아아, 군소리없이 힘차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바른 걸음을 걷기 위해 노력하는 란이를 보면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인 양혜령이 떠올랐다. 그 아이도 아미라는 곳에서 검을 익힌다 하지 않았던가, 운기공과 격자지법을 어느 정도 가르치고 난 후에 그녀에게 부탁한다면······? 양운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운기공과 격자지법은 내공과 검법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무공을 익힐 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생각을 결정하자, 양운정은 란이의 수련에 좀 더 박차를 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흘린 땀을 식혀주려는 듯이 바람은 그들을 감싸안았다.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달콤한······ 비명성······ 비명?
 느닷없는 거친 비명성과 칼부림 소리에 양운정은 의아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고 하여도, 벌건 대낮의 관도 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멀리서, 일단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십수 명의 백의에 백면으로 얼굴을 감춘 이들이 삼인의 남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라? 아까 그 말 탄 녀석들 아니야?"
 불과 반 시진 전 두 사람에게 먼지를 뒤집어씌웠던 세 명의 기수들이었다. 말은 어디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이 달리던 말들은 관도 한켠에 피웅덩이 속에 사이좋게 널브러져 있었다.
 꽤나 좋은 말 같았는데,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 양운정과 란이의 머리를 공통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섬전검(閃電劍) 남궁창(南宮漲)과 뇌운검(雷雲劍) 남궁승(南宮昇). 남궁세가의 쌍둥이 형제로 비검을 위해 세가를 떠났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 옆의 홍의 여인은 무림육화(武林六花)로 유명한 도림검화(刀林劍花) 팽소옥(彭昭鈺)이었다.
 도림검화라는 별호는 대대로 도의 명가인 팽가에서 특이하게 검을 연마했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실상 팽가의 도법은 강맹하기 그지없어 여인의 몸으로는 익힐 수가 없는 것이었다. 허나 그녀의 기재가 실로 출중하여, 이를 아깝게 여긴 그녀의 조부. 신주십육성으로 이름높은 풍지도(風之刀) 팽휘(彭輝)의 부탁으로 그녀는 아미에서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기실 팽가의 혈족이나, 아미파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그녀와 아미옥봉 양혜령을 두고 아미쌍화(峨嵋雙花)라 불렀다. 양혜령과 그녀는 같은 북경 출신이기에 비록, 북경에서는 교류가 드물었지만, 아미에서는 더없이 사이가 좋은 언니, 동생 사이였다.
 이제 약관인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로 남궁 형제의 비검에 마침 본산에서 내려와 있던 팽소옥이 함께 하여 수개월간 중원을 돌아다니며 비검을 나누어 왔던 터였다.
 심산유곡에 은거한 노선배들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를 수회, 잠시 산을 내려왔던 그들은 풍문에 들려오는 남궁세가의 일을 듣고 다급히 세가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들이 어찌 자신들의 행로을 눈치채고, 이리 매복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산에 오른 지 한 달여 만에 산을 내려왔고, 내려오기가 무섭게 남궁세가를 향해 말을 달렸던 그들이었다.
 저들의 이목이 이렇게 광범위하단 말인가.
 남궁 형제는 등을 마주하고 있던 팽소옥을 흘깃 바라보고는 서로 두눈을 마주쳤다. 이심전심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눈에는 어떤 결의가 흘렀다.
 그것은 눈앞의 이 백의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팽소옥을 무사히 살려 보내야겠다는 결의였다.
 사실, 그 둘은 모두 팽소옥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던 터였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팽소옥의 마음을 얻으려 하며 서로 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남궁 형제였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은 팽소옥을 위하여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실상 팽소옥은 어린 시절 같이 자랐기에 그들을 이성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그 극악하기로 유명한 팽가의 무신경함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기에 그녀는 여태껏 그녀를 향했던 남궁 형제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차례의 살초가 오고갔다. 남궁 형제의 날카로운 쾌검 사이로 팽소옥의 유려한 검초가 백의인들을 몰아쳐 수명에게 제법 깊은 검상을 입혔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급격히 체력을 잃어갔다.
 화산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제대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던 것이 실착이었다.
 이미 지친 상태라서 백의인들의 차륜진은 세밀하고 위협적이었기에,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의인들 개개인의 무력이 상당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적어도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아래가 아니었다.
 비검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가득했던 세 사람이었다.
 적어도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최고의 무력집단인 뇌룡검대의 무인들과 비교해도 절대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건만, 백의인들의 괴이독랄한 정체불명의 검법과 치밀한 차륜진 앞에 그들은 점점 무너져갔다.
 '소옥아!'
 '왜!'
 남궁창의 전음에 팽소옥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눈앞의 백의인들을 견제하기도 바빴다.
 '승이와 내가 전력으로 달려들면, 그대로 우리를 타 넘어서 도주해라.'
 "뭐!"
 남궁창의 계속된 전음에 팽소옥은 당장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크게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딱히 굳은 두 사람의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해. 내가 언제 너한테 부탁한 적 있었어? 한 번도 없었어. 단 한 번도 너한테 부탁한 적 없었어. 제발 부탁이다. 우리 형제의 마지막 부탁이다. 살아라.'
 팽소옥은 격랑이 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못해! 나는 팽소옥이야! 죽으면 죽었지, 너희를 남겨두고 등을 보이는 비겁한 짓 못해!'
 "팽소옥!"
 남궁 형제가 거세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어! 절대로 혼자 도망치지 않아!"
 강호에 그 유명한 팽가의 고집이었다.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왜일까 슬픔이 뭍어나왔다. 남궁 형제는 무력한 자신들을 한탄했다.
 "제길!"
 "멍청하기는!"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남궁승의 말에 뾰족히 외치는 팽소옥이었다.
 "누구긴, 누구냐! 강호 제일의 단순무식이지! 뇌아참마(雷牙斬魔)!"
 남궁승은 절규하듯 크게 외치며 백의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세가의 절기인 뇌정십삼검(雷霆十三劒)이었다.
 "뇌격단천(雷擊斷天)!"
 남궁창 역시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들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들이었다.
 "이 망할 남궁씨들아! 난풍분분(亂風紛紛)!
 팽소옥도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잠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양운정은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백의인들을 향해 달려들자, 그 역시 란이를 남겨두고 신형을 날렸다.
 풍운비가 펼쳐졌다. 바람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양운정은 검을 휘둘렀다.
 느닷없이 등장한 양운정의 일검에 미처 뒤를 생각지 못한 백의인들의 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양운정의 십보검이 펼쳐졌다. 단숨에 수명의 목덜미를 베어버린 양운정은 삼인의 남녀를 스치듯이 지나쳐 그들의 뒷덜미를 노리던 백의인들의 검을 하나하나 거두어냈다.
 채채챙!
 양운정의 검에 부딪힌 백의인들의 검은 순식간에 휘고 부러져버렸다.
 "헉!"
 당황하는 그들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크아앗!"
 가슴이 길게 베어진 백의인들의 새하얀 백의가 순식간에 피를 머금은 혈의가 되었다.
 양운정이 순식간에 백의인들의 3할을 쓰러뜨릴 때,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각기 한명씩 격살하고 다시 등을 맞대었다.
 동귀어진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공격이 양운정이라는 의외의 구원자 덕분에 더없는 살초가 되었던 것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과 달리, 양운정의 신색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란이가 곁에 없으면 돌변하는 것이 양운정의 표정이었다.
 백의인들은 검을 그러쥐고 다시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과는 다른 폭발적인 살기가 그들의 몸에서 터져나왔다.
 시뻘겋게 물들은 그들의 눈빛은 삼인에게는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들의 솟구치는 필살의 의지에 삼인은 점점 구속되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검을 잡고 무도에 발을 올린 이후로 이렇게 노골적인 살인의 의지를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이딴 기세 따위에 밀려서 어쩌자는 거야!"
 돌연, 그들의 옆에서 냉엄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으아악!"
 일갈이 가라앉기도 전에 남궁 형제는 발악을 하며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백무대(白霧隊) 1조를 이끌던 환무(喚霧)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완벽한 습격이었다.
 그들은 비록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전에 어느 정도 남궁세가의 검초를 교육받은 바 있었기에 남궁 형제를 상대하기는 수월했다.
 비록 남궁 형제의 예상보다 높은 무위로 수명의 대원들이 검상을 입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별다른 희생 없이 저 삼인을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느닷없이 달려든 저 흑의인만 아니었다면······
 한순간에 허를 찔려 백무대 1조 심십여 명 중 무려 십여 명이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환무는 입술을 깨물며, 대원들을 지휘했다.
 애초에 제압을 위해 형성했던 포위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목적이 달라졌다.
 남은 인원은 이제 스물 남짓, 저들을 제압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는 단 하나였다. 멸살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달라지니 기세 역시 달라졌다. 애초에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교육받은 백무대였다. 환무의 지시에 대원들의 살기가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백무대만의 살진.
 백살검진(百殺劍陳)이 발동했다. 그들의 살기가 거세게 피어오르며 눈앞의 목표들을 압박했다.
 지난 수년간 지옥을 겪어오며 기르고, 벼려온 살기였다.
 백무대의 살기가 그들을 압박하고 살초를 펼치려 할 때였다. 그 순간을 흑의인은 놓치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리던 삼인을 한순간 깨우친 그의 일갈에 남궁 형제들은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먼저 살검을 휘두르려던 백무대원의 오른팔이 피를 튀며 날아올랐다. 거센 기합을 내지르며 저 삼인은 대원들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앞으로 튀어나가는 삼인의 사각을 노리려던 대원들은 양운정의 검 한 자루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에게는 백살검진의 살기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로 절제된 그의 움직임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백무대원들은 그를 처리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자는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원래 목표였던 삼인을 상대하던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대원들이 양운정을 포위했다. 삼인과 겨루는 대원들은 백무1조에서도 손꼽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양운정의 발을 잡기로 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삼인의 사투는 한층 격렬해졌다. 어차피 서로 죽이기로 작정한 이상, 더는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었다.
 서로의 진신절기를 아낌없이 펼치며 호시탐탐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삼인은 초조함을 느꼈다.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체력 때문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쉴 새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벌써 수십 합의 공방이 오고갔지만, 아직까지 서로에게 이렇다 할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에 검로는 엉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창은 홀로 이인의 백무대원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남궁승과 팽소옥은 둘이서 삼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적들은 많았지만, 그들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구원의 손길이 홀로 그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노골적인 적의와 살기에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던 삼인이었다. 그 당시, 나름대로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하던 그들의 긍지는 이미 간데 없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
 돌연 터져나온 흑의인의 일갈. 그것이 아니었다면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의 일갈에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다가온 것은 적도들의 검이 아닌 한없는 수치심과 자괴감이었다.
 그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도 이제는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으아압!"
 남궁창이 펼친 뇌정십삼검의 절초를 백무대원들은 유유히 흘려내고 있었다.
 허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요혈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는 살기어린 두 개의 검날에 다급히 물러서기 급급했다. 사정은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 그들은 등을 맞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득 남궁창은 자신들이 펼치는 뇌정십삼검의 검로가 저들에게 읽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과 공방을 펼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들은 유독 뇌정십삼검의 검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점을 찔러 들어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남궁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강호상에 능히 절기라 평가받으며 남궁세가의 역사와 함께한 유서 깊은 검법이 바로 뇌정십삼검이었다. 남궁가의 직계만이 온전히 수습할 수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세가에 첩자가 있다는 것인가?'
 남궁창은 잠시나마 넋을 잃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정신 차려!"
 팽소옥이 그를 노리던 검을 쳐내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제야, 남궁창은 처지 깨닫고 검을 다잡았다. 일단은 눈앞의 적이 먼저였다. 마음을 다잡은 남궁창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카카카캉!
 찰나지간 수십 회의 공방이 오고갔다. 지금껏 펼쳐왔던 뇌정십삼검이 아니었다. 그와는 전혀 다른 살기 짙은 검이었다.
 연환뇌정검이라 이름붙은 검법이었다. 돌연 변해버린 남궁창의 검초에 백의인들은 순간 적응을 하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검답지 않은 독랄함이 가득했다.
 남궁창은 그들 못지않은 필살의 의지로 검을 날렸다.
 그의 살기 어린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남궁승과 팽소옥이었다.
 평소에 진중하고, 신중했던 남궁창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검을 들었을 때는 더욱 심했다. 지금의 모습은 그보다는 차라리 쌍둥이 동생인 남궁승에게 더 잘 어울렸다.
 "커억! 이, 이이······"
 양운정은 목에서 검을 뽑았다. 목이 완전히 꿰뚫리고 만 백의인이었다.
 그가 마지막이었다. 크게 죽일 마음은 없었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죽기를 원했다. 처음 그의 검에 의해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진 백의인들은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널브러진 그들의 입에서 시커먼 독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양운정은 그들에게서 일말의 자비를 거두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것이 자비이리라.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삼인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양운정은 검을 거두었다.
 그들 중 특히 한명의 남궁가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살초를 정신없이 펼치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가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런 그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다.
 양운정이 보기에 그들의 실력은 꽤나 훌륭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백의인들이 더 노련할 따름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남궁씨라는 큰 소리에 개입하게 된 혈투였다. 원치 않은 살인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저들이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잠시 그들의 사투를 바라보던 양운정은 발밑에 돌을 차 날렸다.
 퍽! 퍽! 퍽!
 양운정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삼인의 백의인의 머리에 작렬했다.
 그것은 실로 절묘한 순간이었다. 삼인의 백무단원들은 필살의 각오로 펼친 남궁창의 연환뇌정검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을 노렸던 것이었다.
 돌에 실린 역도는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머리가 깨어져 버린 그들은 붉은 피와 하얀 뇌수를 흘리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쓰러져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잔혹한 장면에 그들은 투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어······어······"
 살아남은 두명의 백무단원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 이상 목표였던 남궁 형제와 팽가여인이 아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신의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도주와 자결. 하지만, 그들은 도주라는 것을 배운 바가 없었다.
 공포에 질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반사적으로 자결을 택했다.
 "으득!"
 입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남궁 형제와 팽소옥이었다.
 풀썩! 풀썩!
 썩은 집단 처럼 백의대원들은 쓰러졌다. 그들 역시 입에서 시커먼 독혈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두려움을 느꼈다. 대체 어떤 집단이 이렇게 냉혹한 교육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궁승과 팽소옥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들을 도운 흑의인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완전히 죽은 얼굴을 하고 백의인들의 시신을 바라보는 남궁승이 보였다.
 흑의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에 생각에 잠겼던 남궁창도 정신이 돌아왔다. 흑의인은 분명히 그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임에도 저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느낌은?'
 그것은 그들, 삼인에게 공통적으로 스친 의문이었다. 흑의인에게는 왠지 범접하지 못할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양운정이 살인의 의지를 펼치고는 무의식적으로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점차 다가오는 흑의인, 양운정의 모습에 그들은 저도 모르게 검을 다잡았다.
 마치, 생사대적을 맞은 자들처럼······
 "그대들은 남궁가의 사람들이오?"
 "다, 당신은 누구시오?"
 "······"
 양운정은 오히려 자신을 경계하는 남궁 형제들의 말에 잠시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세 사람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제야 양운정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다. 백의인들을 상대할 때 저도 모르게 품었던 살의가 농도 짙게 퍼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양운정은 고개를 흔들며 살의를 거두었다.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자신들을 압박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어둠을 헤치고 밝은 곳으로 뛰쳐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쉬는 삼인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양운정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방금 전의 끔찍한 광경을 연출한 자가 바로 눈 앞의 이 사람임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양······ 백호라고 하오."
 양운정은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보이며 삼인에게 다가섰다.
 "아······ 군부의 분이셨습니까? 구명지은(求命之恩)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그에게 감사를 하며, 무례에 사과했다. 많은 어색함이 있었지만, 양운정은 개의치 않는 듯이 그들에게 답례할 따름이었다.
 "괜찮소. 그보다 당신들은 남궁가의 사람이오?"
 "저는 남궁세가의 삼남으로 남궁창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쌍둥이 동생인 뇌운검 남궁승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무림육화로 유명한 팽가의 도림검화 팽소옥이라고 합니다."
 남궁창이 그들을 소개하자, 그들은 양운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꽤나 거창한 소개였다. 양운정은 내심 실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얼굴들이었다.
 수년 전 남궁아현과의 결혼식에 본적이 있었다. 팽소옥이야 모르겠지만, 이 남궁가의 두 쌍둥이 형제는 그 당시에도 굉장한 개구쟁이로 당시 처음 왔던 양가장을 제집처럼 여기며 뛰어놀던 기억이 있었다. 아직 앳되어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양운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사 지금 그에게서 과거의 양운정의 모습을 찾기는 꽤나 힘든 일이었다.
 빠진 살도 살이지만, 특히 눈가에 새겨진 깊은 검상은 유약했던 그의 외모를 날카롭고, 범접하기 힘들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남궁 형제들은 왠지 본적이 있는 얼굴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저희들이 남궁가인 줄은 어찌 아셨는지요?"
 남궁승은 슬며시 경계의 빛을 띠며 양운정에게 물었다.
 "승아!"
 남궁창은 낮게 남궁승을 부르며 꾸짖었다.
 "괜찮소, 저 소저분께서 외치시는 것을 듣게 되었을 따름이오."
 "아!"
 대수롭지 않다는 양운정의 말이었지만, 팽소옥과 남궁 형제들의 얼굴은 붉어졌다. 이런 망신이 있나.
 "그나저나, 이들은 도대체 누구길래, 당신들을 습격한 것이오?"
 양운정이 널브러져 있는 백의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도, 제천회란 자들이겠지요."
 "백주대로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대범한 자들이로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양 백호님."
 "아니, 개의치 마시오. 무관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무인으로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말은 멋지게 한 양운정이었지만, 실상 남궁세가의 두 형제들 즉, 처남들이 아니었다면, 그저 조용히 자리를 피했을 양운정이었다.
 허나, 그런 양운정의 솔직한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한마디에 두 눈에서 존경의 염을 발하는 삼인이었다.
 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의협지로(義俠之路)가 아닌가. 잔혹했던 광경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삼인이었지만, 의협지로를 동경하는 삼인으로서는 그조차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던 양운정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란이의 비명성에 깜짝 놀랐다.
 “꺄아아악!”
 돌연한 그녀의 비명성에 양운정은 당황하며 란이를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삼인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양운정의 모습에 놀라며 그를 쫓았다.
 "란이야!"
 힘없이 쓰러져 있는 란이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웠다. 급작스러운 혼절에 양운정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양 백호님!"
 뒤늦게, 삼인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이 아이는······?"
 쓰러져 있는 란이의 모습에 삼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양운정과 관계가 궁금했다. 양운정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잃은 채 양운정의 품에 안긴 란이는 오한이 드는 듯이 간혹 몸을 떨고 있었다. 양운정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란이를 안아 들었다.
 "으으음······"
 양운정의 품에 안긴 란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정이 흔들린 양운정은 더욱 품속으로 란이를 끌어안았다. 마치 어미의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괜찮아, 란아. 이제 괜찮아, 아저씨가 여기 있잖아······ 괜찮아······"
 양운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란이를 불렀지만, 란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란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잔떨림은 양운정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양운정은 힘주어 란이를 끌어안았다.
 란이는 양운정이 격전 속으로 뛰어들자, 짐을 가지고 관도의 한켠으로 물러섰다.
 피가 튀는 혈전에 란이의 얼굴은 절로 찡그려졌다. 초원의 아이로 태어나 전장에서 자라며 많은 험한 꼴을 보아온 란이었지만, 눈앞에서 피가 튀고 끝없는 살의로 가득 찬 장면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이내 양운정은 백의인들에게 가려져 란이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얼핏 보이는 그의 여유로운 표정에 란이는 양운정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그녀의 눈을 잡은 것은 양운정이 돕기 위해 달려간 세 명의 남녀들이었다. 그들은 개봉의 연미개가 보여준 일수와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력하게 보이는 검을 펼치고 있었다.
 란이는 격렬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위태위태한 그들의 모습에 같이 가슴을 졸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무언가에 그들을 공격하던 백의인들의 머리가 퍽하고 터져나갔다.
 "헉!"
 그 모습은 그녀에게 단순히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을 목도한 순간, 그녀의 기억은 빨려들 듯이 2년 전의 그 때로 돌아갔다.
 주변은 거센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시체, 시체들뿐이었다.
 원통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온몸에 화살을 뒤덮은 시신들. 피를 쏟으며 잘려진 신체 부위를 움켜쥔 채 쓰러진 시신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감추며 정신없이 뛰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를 와락 움켜잡아 끌어올리는 손이 있었다.
 "끼야악!"
 터져나오는 그녀의 비명은 곧 그 손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그는 붉은 늑대들의 수장, 하마탄이었다. 말을 타고 붉은 갑주를 걸친 그는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마탄!"
 하마탄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명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틈에 본영은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한 발이라도 더 멀리 그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초원의 용사로서 적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수치였지만, 주군의 하나뿐인 혈육을 허무하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용사로서의 자긍심보다도 하마탄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하마탄은 이를 악물고 말을 달렸다.
 그의 등과 말에는 적어도 십수 개의 화살이 박혀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마탄."
 품속에 안긴 철란은 흐느끼며, 그를 불렀다.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화살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악!"
 눈앞에서 날아간 하마탄의 머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추고 있었다.
 "아아아악!"
 란이는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양운정은 란이를 안아 들었다. 제법 진정이 되었는지, 더 이상 떨림은 없었지만, 란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양운정은 그런 란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었다.
 너무나 미안해서, 불쌍해서, 가여워서······
 양운정은 란이에게 다시 한 번 한없는 정을 느꼈다.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정신을 잃은 소녀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고, 그런 소녀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양운정의 모습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다.
 그들은 말없이 양운정과 품속의 란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제7장 남궁세가, 그리고 분노
 
 
 양운정은 침상위에 곤히 잠든 란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간 의원의 말에 따르면 그저 심한 정신적 충격에 의한 것이니, 약재를 처방해주고 갔다.
 이곳은 남궁세가 근처의 한 객잔이었다.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어 객잔은 초만원사태였지만, 남궁 형제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양운정에게 세가로 갈 것을 청했지만, 큰일을 앞두고 있는 세가에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곳에서 란이가 마음 편히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말로 양운정은 그들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했다. 굳이 사양하는 양운정을 차마 잡을 수 없기에 남궁 형제와 팽소옥은 안휘에서 유명한 의원들을 수소문하여 란이의 진료를 부탁했고, 양운정은 그런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해했다.
 "곧 좋아질 겁니다. 너무 심려마세요. 양 백호님."
 "······고맙소, 팽 소저."
 팽소옥은 진중한 목소리로 솔직히 감사하는 양운정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남궁 형제들은 객잔의 주인을 만나 각별히 신경을 써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날 밤. 양운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떨어질세라 그의 손을 꼭 그러쥐고 있는 란이의 손을 느끼며······
 ***
 "실패라고!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놈이냐. 그 양 백호란 놈은!"
 "······"
 남궁장현은 낮은 분노를 조용히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부복한 한 백의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궁장현은 아까까지 참석했던 세가회의에서 분노를 참기 위해 모진 애를 썼다.
 수하들의 손에 제압당해 있어야 할 아이들이 당당히 세가로 돌아오다니.
 "젠장! 군문에 양씨성의 백호가 어디 한둘이야! 잘하면 팽가까지도 손을 뻗을 수 있었는데······ 게다가 그 두 쌍둥이 놈들을 잡아야 내일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설수 있었는데······ 으득!"
 손안에 들어온 토끼를 놓친 듯한 기분은 남궁장현에게 분노를 안겨주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됐다. 안된 일을 더 이상 연연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내일 있을 거사에 실패한다면 내 네놈들의 목을 친히 벨 것이야."
 "존명!"
 음모의 시간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
 "아버님, 저 창이입니다."
 지금까지 내일 있을 생사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던 남궁세가주 검명뇌성(劒鳴雷聲) 남궁장충(南宮張充)은 가주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음, 그래. 들어오너라."
 남궁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 고생했구나."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무슨 얘기냐?"
 남궁장충은 전혀 뜻밖의 남궁창의 말에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저 문안인사나 하러 찾아온 아들인 줄 알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남궁장충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이 정말이냐."
 "예."
 "도대체 누가 있어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아버님······"
 "그만. 더는 거론하지 말아라······"
 "허나, 아버님."
 "그만하래도. 너의 말을 들어보건대, 내일 있을 생사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자꾸나."
 말을 하는 남궁장충의 얼굴에서 수심이 가시지 않았다.
 남궁창은 자신의 짐작이 남궁장충에게 근심을 더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궁세가 앞에는 수십 장 길이의 정사각형의 거대한 비무대가 설치되었고, 그 주변은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뇌룡검대(雷龍劍隊)의 무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궁세가에는 일단이대가 있었는데, 세가의 젊은 무인들이 모인 창천검룡단과 실질적인 남궁세가의 힘이라 불리는 뇌운검대(雷雲劍隊)와 뇌룡검대가 그것이었다.
 현재, 창천검룡단과 뇌운검대는 무림맹으로 파견을 나간 상태였다.
 여타의 문파라면 이런 상황에서 전력을 당연히 복귀 시킬 테지만, 이곳은 남궁세가였다. 천하제일가로 이름 높은 남궁세가에서 그런 판단을 내릴 리가 없었다.
 비무대의 주변에는 못해도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각지에서 올라온, 소위 무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었다.
 그들의 한 구석에서 양운정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란이는 객잔에 재워놓고 온 양운정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지친 듯한 기색이 있었는데, 란이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일단은 수혈을 짚어 잠이 들게 하였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란이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양운정이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남궁세가의 정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 무대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남궁세가의 직계들이었다.
 가운데의 남궁세가주 검명뇌성(劒鳴雷聲) 남궁장충(南宮張充)을 비롯하여 우측에는 그의 동생인 뇌운검협 남궁장현, 좌측에는 그의 장녀인 빙화검봉 남궁아현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남궁세가의 유명한 쌍둥이 형제들 뇌운검 남궁승과 섬전검 남궁창이 각기 좌우의 끝에 듬직하게 서 있었다.
 검성 남궁무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 무림의 신화적인 존재로 일선에서 물러난 지 벌써 십여 년이 넘었으니, 남궁세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몸을 움직일 신분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는 웬 뚱뚱한 금의화복을 입은 청년이 어색하게 서 있었는데, 그를 본 순간, 양운정은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뭐야, 저 꼴이! 얼마나 고생해서 살을 뺏는데, 저딴 몰골이라니······'
 양운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인파들을 헤치고 백의에 백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십 인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바로 제천회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양운정은 낯익은 기세에 의문을 가졌다.
 이것은 마치 서안의 흑의인들과 비슷한 기세이지 않은가?
 "너희들이 그 제천회인가?"
 남궁장충이 입을 열었다.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남궁장충의 목소리에 파묻혀버렸다. 넓은 광장을 가득 메웠던 장내의 소음을 일시지간에 제압한 남궁장충의 심후한 공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유명한 남궁대협을 뵙게 되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제천회의 백무대라고 합니다."
 중앙의 백의인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하니, 내용이나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정중했지만, 그의 말투는 노골적으로 남궁장충을 비꼬고 있었다.
 관객이랄 수 있는 무인들이나, 구경꾼 들이 노골적으로 야유를 보냈지만, 정작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말장난에 흥분할 만큼 남궁세가의 가풍은 연약하지 않았다.
 "긴 말은 필요 없겠지. 감히, 이 남궁세가에 감히 생사투를 원한다 하였으니, 그만한 자신감이 있을 터! 이 검으로 확인하리라."
 남궁장충의 힘있는 한마디, 한마디에 남궁세가 측의 기세가 점점 커져갔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가 좌중을 압도했다.
 과연 남궁세가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백무대원들의 눈은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번쩍이는 검광, 솟구치는 핏줄기. 힘찬 기합과 바람을 가르는 몸놀림. 비무대 위의 광경이었다.
 일합, 일합에 관중들은 탄성을 지르며 몰입했다.
 남궁세가의 검은 과연 명불허전이었지만, 백무대원들의 무공 역시 녹록치 않았다.
 처음으로 나선 것은 남궁가의 쌍둥이 형제인 남궁창과 남궁승이었다.
 남궁창은 처음부터 뇌정십삼검을 버리고 연환뇌정검으로써 백무대원을 상대했다.
 뇌정십삼검을 예상했던 백무대원은 허를 찔린 듯, 이내 손발이 흐트러졌지만, 그 역시 경지에 이른 이라 그리 쉽게 승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살기가 비무대를 가득 메웠다. 연환뇌정검은 그 짙은 살기로 인해 남궁세가에서도 알게 모르게 배척받는 검법이었다.
 지금 세가에서 이 연환뇌정검을 수위에 오르도록 익힌 이는 남궁창이 유일했다. 그에 못지않게 백무대원의 검법 역시 살기가 넘쳤는데, 서로가 서로의 요혈을 노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저들의 검법은 무엇이지?"
 남궁장충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들의 검법이 두렵거나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연원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검법은 연환뇌정검 이상으로 살기가 넘쳤다.
 나름대로 중원각파의 무공에 정통했다고 자부하던 남궁장충이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살검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이는 없었다.
 남궁장현은 두 눈에서 핏발이 섰다. 조카인 남궁창의 무위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이번 비검행에서 제법 높은 성취를 얻은 듯했다.
 그가 백무대원들에게 주로 가르친 검은 바로 탐혈마검(耽血魔劍)이었다. 지금은 하나의 전설이 된, 천년마교의 것이었다.
 천년마교가 운남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그 모습을 감춘 지 어느덧 일백여 년.
 세인의 기억 속에서 마교라는 이름의 공포를 퇴색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교를 통하여 건네받은 탐혈마검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그 위력에 비하여 속성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정수준을 넘어서면, 이름처럼 피를 탐하다 미쳐 죽는 것이 바로 이 탐혈마검이었다. 과거 마교에서도 이 검법을 함부로 익히는 것을 금했다 할 정도였으니, 그 극악함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남궁장충을 비롯한 제천회가 원한 것은 언제까지나 곁에 둘 충복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써먹을 수 있을 정도라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마교의 무공임에도 알려지지도 않고 속성이 가능한 탐혈마검은 그들의 구미에 알 맞는 무공이었다.
 그의 백무대뿐만이 아니라, 제천일회주의 흑암대 역시 바로 이 탐혈검법을 연성했었다.
 "크윽!"
 낮은 비명성과 함께 하나의 손목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백무대원은 잘려진 오른손목을 부여잡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의 목에는 어느 틈에 남궁창의 검극이 대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벨 기세였다.
 "져, 졌소."
 단호한 그의 검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생사투가 시작되었다.
 남궁승은 남궁창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에 그 역시 뇌정심삽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는 뇌정십삼검보다 더 애착을 갖는 검법이 있었으니, 바로 섬전백팔뢰(閃電百八雷)라 불리는 검법이었다. 연화뇌정검이 연환식에 중점을 두어 상대를 몰아가 결국에는 격살하는 검이라면, 섬전백팔뢰는 바로 쾌에 중점을 둔 검법이었다.
 승부는 단 한 순간에 갈렸다. 남궁승은 발검과 동시에 섬전백팔뢰의 파뢰일섬(破雷一閃)으로 상대의 목젖을 갈랐다.
 상대는 채 대응하기도 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세 번째로 비무대에 오른 것은 뜻밖에도 가주인 검명뇌성 남궁장충이었다. 오연히 비무대에 오른 그는 크게 외쳤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할 것 없다, 다 덤비거라!"
 그의 당당한 목소리에 백무대원들 중 삼인이 앞으로 나섰다.
 "천하의 남궁가주라면 저희 삼인이 나선다고 하여도 강호동도들의 욕을 먹지 않겠지요."
 백무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검을 뽑으며 당당히 외쳤다.
 "흥! 시끄럽다. 너희 같은 잡배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니, 닥치고 검이나 뽑아라!"
 남궁장충은 검을 뽑았다. 맑은 검명과 함께, 남궁가주의 상징인 진천검(進天劍)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릿발 같은 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비무대 위로 나선 삼인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남궁장충의 주변을 맴돌며 검을 뽑았다.
 눈앞의 상대는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자들 중의 하나였다.
 절로 긴장되는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의 눈동자에 남궁장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친 남궁장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인은 이를 악물고 힘찬 기합과 함께, 일제히 남궁장충을 향해 검을 떨쳤다.
 카캉!
 삼인의 검을 유유히 흘리며 남궁장충은 뇌정십삼검을 펼쳤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뇌정십삼검의 모습이었다.
 남궁 형제는 진실한 뇌정십삼검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수가 완벽하여 저 삼인의 검이 아무리 날카롭게 공격을 가해도 남궁장충의 검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궁장충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손으로 자유로이 검을 놀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삼인의 검은 남궁장충의 옷깃을 베기는커녕,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차하압!"
 너무나 압도적인 무위의 차이임에도 삼인은 아무런 감흥 없이 그저 필살의 각오로 검을 떨쳤다.
 양운정은 남궁가의 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흠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보완을 계속하여 드디어 검법 자체의 완성을 바라보는 명문의 검이었다.
 양운정의 십보검과는 그 세월의 깊이가 달랐다. 남궁장충의 검은 과거 철홀의 도에 비견할 만했다.
 비무대 위에는 눈부신 검광과 쏟아지는 살기로 가득 찼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인의 눈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터져나갈 것 같은 그들의 안구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의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강해지고, 빨라졌으며, 잔혹해졌다.
 탐혈마검의 마성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크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광인과도 같았다.
 "흠!"
 허나, 상대는 당대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장충이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그들의 검력을 감당하면서도 남궁장충은 절대로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무공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정공은 아니었다. 살기를 뿌리다 못해 이제는 마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검은 실로 마검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키야악!"
 괴성을 지르며 휘두르는 삼인의 검에서 붉은 혈광 한줄기가 솟아나더니, 남궁장충을 향해 쏘아졌다.
 "······!"
 이번만큼은 남궁장충으로서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검기를 쏘아 내다니, 검기를 맞상대 할 수 있는 것은 검기뿐이었다.
 세 자루의 검에서 쏟아지는 붉은 핏빛의 검기가 남궁장충을 향해 달려들었다.
 흡사 태양이 핏빛으로 물든 듯이 남궁장충의 주변은 붉은 혈광으로 가득 찼다.
 "아!"
 좌중은 백무대원들이 발출한 검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기를 발현해내는 것도 기절할 일이었는데, 그 검기를 쏘아 내다니······
 이는 신주십육성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에 비견할 만한 고수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검기를 일으키는 것은 적어도 검경을 완성한 절정에 달하는 무인이라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검기를 쏘아낸 다는 것과는 그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것은 내력의 수발이 자유롭다는 뜻으로, 충실한 공부와 검법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검기를 완전히 깨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백무대원들은 하나하나의 공부가 결코 낮지 않음을 느끼고 있던 관중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검기를 뽑아낼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뽑아낼 뿐만 아니라, 마음껏 쏘아낸다는 것은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탐혈마검의 무서운 점이었다. 비무에 나선 저 삼인은 백무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탐혈마검에 대한 경지가 높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린 것이었다.
 저 삼인의 정신은 점점 마기에 침식당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근원적인 생명력인 진원지기까지 뽑아내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혈광 사이에서 한줄기 푸른 청광이 솟아올랐다.
 남궁장충의 검기가 발현된 것이었다. 그의 검기는 백무대의 검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공에 의하여 억지로 발현된 검기가 정종의 공부를 바탕으로 발현된 검기를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붉은 비단 폭을 좌우로 찢어지듯이 쏘아진 백무대의 검기는 남궁장충의 검기에 닿는 족족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쿨럭!"
 "크헉!"
 "크륵······"
 혈광이 사라진 비무대 위에 오연히 서 있는 남궁장충의 모습이 보였다. 백무대의 삼인은 제각기 검붉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 어린 시뻘건 혈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남궁장충은 심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 저들의 기세에 내심 긴장을 하며, 섣불리 손을 쓰지 않았다.
 "크크크······"
 이들은 이미 인성을 상실한 듯, 기괴한 모습으로 천천히 남궁장충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위태위태 해보였음에도, 그들의 몸에서 쏟아지는 광기에 가까운 기세에 남궁장충은 가벼이 여길 수가 없었다.
 그들의 백의에 앞섬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 같은 토혈로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마공이구나······"
 "쿠아아악!"
 그들은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그저 남궁장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 그대로 동귀어진과 다름없었다. 그저, 같이 죽자고 검을 휘두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궁장충은 조용히 검초를 펼쳤다.
 뇌정십삼검의 절초 천뢰무변(天雷無變)의 일초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남궁장충의 검극에서 솟아나온 눈부신 청광이 종횡으로 움직이며 삼인의 목을 훑었다.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세 개의 머리, 그들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제 되었는가! 남궁세가는 너희들 따위에게 흔들릴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다!"
 남궁장충은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불문의 사자후가 이럴까. 우렁우렁 남궁장충의 목소리는 이 커다란 광장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잠시 정적만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백무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와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저 아무런 말없이 시신을 수습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감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양운정은 뭔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결코 실패한 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히 시신을 수습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들의 얼굴이었다.
 "뭐지?"
 이상함을 느끼던 양운정이 급히 남궁장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욱!
 남궁장충은 느닷없는 통증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느껴진 예기에 힘껏 몸을 돌렸지만, 그래도 숨겨진 독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혀든 검푸른 독비를 잡고 있는 자는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사위였다. 그의 암수는 재빨랐고, 독랄했다. 남궁장현은 점차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비무대를 내려오던 그를 향해 다가오던 두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의 모습에 남궁장충은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렸다.
 그들은 기쁜 얼굴로 아비인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장충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마음 놓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손에 든 진천검을 남궁창에게 맡기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의 싸늘한 예기가 그의 복부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다급히 허리를 비틀어 피하려 했지만, 섬뜩한 파육음과 더불어 극통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크윽!"
 하지만, 상처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독이었다. 찰나지간임에도 독기가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사위의 독수는 그로써 끝나지는 않았다. 독비를 남궁장충의 허리에 찔러 넣기가 무섭게 남궁아현의 목 줄기를 움켜쥔 것이었다.
 남궁아현 역시 여중제일고수로 손꼽히는 몸이었다. 그런 그녀임에도 눈앞에서 부친이 독수를 당한 사태에는 당황하기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몰랐던 그녀의 남편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일이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의 손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암수는 일류고수에 버금가는 실력이었다. 그녀 역시 경황 중에도 손을 쓰려 했지만, 그녀보다도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컥!"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움켜쥔 가짜 양운정은 냉큼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비무대 위에 있던 백무대원들이 일제히 양운정과 남궁아현을 감쌌다.
 "후하하하!"
 가짜 양운정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쪽 손을 번쩍 들자, 관중들 사이에서 수백의 장포인들이 장포를 벗어던지며 비무대와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포위했다. 백무대와 다를 것 없는 백의에 백면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붉은 글씨로 살(殺)자가 그려져 있었다.
 남궁장현의 눈 속 깊은 곳에서 한줄기 광채가 지나갔다.
 그가 교로부터 지원받은 백살대(白殺隊)였다. 일회주에게는 흑살대가 있듯이 그에게는 백살대가 있었다.
 살기 넘치는 백살대의 등장으로 관중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아직 검을 뽑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들이 풍기는 기세는 이곳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이 함부로 설쳐댈 수준이 아니었다.
 "이, 이놈들이!"
 남궁장충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비틀거리며 남궁창에게서 진천검을 움켜쥐었다.
 "아버님! 안 됩니다!"
 남궁창과 승은 그런 남궁장충을 만류했다. 이대로라면 남궁장충은 검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독기가 퍼져 죽음에 이를지도 몰랐다.
 "형님을 뒤로 모셔라!"
 "장현아!"
 "형님! 아현이는 제가 구해내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어서 독기를 몰아내십시오!"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크흐흣!'
 결연한 표정으로 남궁장충을 설득하는 남궁장현은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으음······ 부탁한다."
 파리하진 안색으로 두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선 남궁장충은 지체할 사이 없이 바로 운공에 들어가 내력으로 독기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남궁창과 승은 전혀 의외의 사태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평소 매형인 양운정에 대한 가족들의 대우가 어떠했는지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매형이 이런 식으로 흉적들과 결탁하여 처가에 흉계를 펼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세가에서 팽소옥이 달려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소옥아, 승이와 함께 아버님의 호법을 부탁한다!"
 "아, 알았어!"
 남궁승은 남궁창을 따르고 싶었지만, 단호한 형의 얼굴에 군말 없이 남궁장충의 호법을 섰다.
 남궁창은 앞으로 나아가 숙분인 남궁장현의 옆에 섰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남궁아현은 자신의 목을 움켜쥔 가짜 양운정의 얼굴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살기가 폭출했지만, 맥문을 제압당하여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내 지금껏 네년을 가까이 두고도 독수공방하느라 아주 힘들었단다. 클클클······"
 가짜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를 희롱했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이놈을 쳐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은 고스란히 살기가 되어 뿌려졌지만, 가짜는 그저 징그러운 음소를 흘리며 그녀를 희롱할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남궁세가의 모든 사람들은 분노를 키웠지만, 정작 그 분노를 터뜨린 것은 그들로서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양운정이 아차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일련의 사건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는 가짜에게 제압당해 맥없이 비무대 위로 끌려 올라가는 남궁아현의 모습을 보았다.
 "윽!"
 가슴 한켠을 울리는 통증에 양운정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건······"
 느닷없는 통증에 잠시 당황한 양운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양운정은 한번 숨을 몰아쉬고는 빠르게 장내를 살폈다.
 남궁가주는 뒤로 물러나 운공에 들어갔고, 어디선가 등장한 또 다른 백의인들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양운정은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위에는 수십 인의 백무대원들에게 둘러싸인 남궁아현과 가짜의 모습을 포착했다.
 가짜는 남궁아현의 차갑지만, 고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대며 희롱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도한 양운정은 순간 휩싸이는 살심을 확연히 느꼈다.
 그것은 어딘가 남겨져 있던 양운정의 감정 중 가장 커다란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로 남궁아현을 향한 무조건적인 애정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양운정은 몸을 날렸다. 혼란한 인파 사이에 몸을 감춘 양운정은 찰나의 순간 백의인들을 타넘으며 한순간에 비무대로 몸을 날렸다. 풍운비와 천둔보가 동시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본래 몸의 주인인 양운정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크억!"
 가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목줄기를 파고든 한 자루의 검. 교묘하게 핏줄과 성대의 사이를 휘저으며 목을 꿰뚫었다.
 "허, 허허······"
 온몸이 떨려오며 죽음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왔다. 순식간에 관중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 사내. 흑의를 걸친 사내는 그들의 사각을 헤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에 검을 꽂은 것이었다.
 신출귀몰. 딱 그 단어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남궁아현은 돌연 그녀의 맥문을 움켜잡았던 가짜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헉!"
 등을 돌린 그녀가 본 것은 새파랗게 죽어 있는 가짜의 얼굴과 그 목에 한 자루 검을 꽂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가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검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흑의를 걸친 사내였다. 꽤 준수한 얼굴이었다. 전체적으로 남자치고는 선이 얇은 편이었지만, 한쪽 눈가에 그어진 검상은 그를 강인하고 냉철한 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사내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남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의 남궁아현은 기억을 더듬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차합!"
 남궁아현은 돌연 힘차게 손을 뻗어 장력을 뿜었다. 눈앞의 이자를 당장에 쳐 죽이지 않고서는 타오르는 살심을 달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천풍장(天風掌)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가짜는 도리 없이 거센 장력에 휩쓸렸다.
 "커헉!"
 장력에 밀려나며 가짜의 목 줄기는 참혹하게 뜯기고 말았다. 남궁아현의 천풍장에 나동그라진 가짜 양운정은 목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며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양운정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살심은 이해했지만 양운정은 이 가짜에게 들을 말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분노에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양운정은 그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켠이 아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었다. 양운정은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에 조금은 혼돈스럽기도 했다.
 가짜 양운정이 죽음을 맞이하고 장내는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어디선가 훌쩍 나타난 흑의인과 지금도 피를 토해내며 쓰러져 있는 흉수.
 하지만, 이 정적은 남궁장현의 우렁찬 목소리에 깨어졌다.
 "지금이다! 쳐라!"
 용기백배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용맹스럽게 검을 뽑고 백의인들 백무대와 백살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장현의 얼굴은 이제 숨길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백의인들에게 저만큼 분노하고 있었구나 했겠지만, 실상 그의 분노는 저 비무대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정체불명의 흑의인에게 가 닿았다.
 '도대체, 뭐냐 저놈은! 앞으로 단 일보에 불과 했거늘!'
 타오르는 분노로 남궁장현은 이성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의인들을 전부 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죽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복잡한 계산와중에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은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양운정은 백의인들의 도주로를 완벽히 차단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의 검으로 벌어진 하나의 살인에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여기 백의인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운정은 십보검을 펼치며 백의인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남궁창이 힘차게 검을 펼쳐 백의인들을 격살하며 다가왔다.
 "양 백호님!"
 "아, 남궁 공자."
 "또다시 대은을 입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감동으로 뒤덮여 있었다. 양운정은 그런 남궁창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말했다.
 "그런 말은 나중에 합시다."
 "예!"
 양운정의 말에 남궁창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그만큼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으드득!"
 남궁장현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저 망할 놈의 흑의인이 양 백호란 놈이었단 말인가, 이제는 대사까지 망치다니······
 남궁장현은 가까스로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며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양 백호라는 놈 때문에 백의인들은 도주도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가짜 양운정으로 하여금, 형님인 남궁장충을 암습하고 질녀인 남궁아현을 제압하여 인질로 하면, 자신은 분루(憤淚)를 삼키며, 세가를 위해 조카들 중 가장 아끼는 질녀를 포기하는 불쌍한 숙부를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백의인들은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도주를 하고, 자신은 형님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추적을 미루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시가주직에 올라 세가를 장악하고, 아울러 사위가 장인인 형님을 암습했다는 것을 핑계로 대장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남궁장충이 당한 독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로부터 건네받은 특별한 독이었다.
 주독(呪毒)이라 불리는 이독은 설사 독의 조종이라는 사천당가로서 해독할 수 없는 독이었다. 수백 종의 독초와 독물들로부터 채취한 독을 사이한 주술로써 가공한 독으로 해독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용케 남궁장충이 독기를 몰아낸다 하여도 독에 걸린 저주는 남궁장충의 몸을 갈아먹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은 정식으로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고, 제천회와 교와 함께 천하를 논할 터였다. 하지만······ 대계는 위천이계는 깨어졌다.
 "크아악!"
 남궁장현의 검은 수십 인의 피를 먹어가며 요요로운 혈광을 내뿜었다. 이미 백의이대의 활용가치는 떨어졌다.
 잠시지간의 머뭇거림으로 백의이대가 입은 타격은 너무나 컸다.
 그래도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티어 낼 줄은 알았건만, 분노한 남궁가의 검은 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미 상당수가 죽임을 당하거나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직까지 격렬히 반항을 하며 도주를 시도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남궁장현에게 그들은 더 이상 활용할 수 있는 패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위험요소였다.
 그들의 입을 자칫 잘못 놀리면, 그가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다! 다 죽여버려라! 남궁세가의 분노를 보여주어라!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
 부상을 입고 무릎을 꿇었던 백의인들을 포함하여 물경 삼백에 가까운 백의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의 잔혹한 행사로 남궁세가는 과연 천하제일세가라는 인식과 더불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세가라는 인식을 강호인들의 뇌리에 쐐기를 박았다.
 "뭐지, 이건?"
 양운정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장의 인피면구였다. 널브러져 있던 가짜의 얼굴에서 벗겨낸 정교한 가면이었다.
 흡사 자신의 얼굴에서 벗겨낸 것처럼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가면을 벗은 자의 얼굴은 양운정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의 곁으로 남궁창과 남궁아현이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격전의 흥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했다.
 "양 백호님!"
 "아, 남궁 공자."
 "정말, 또다시 크나큰 대은을 입었습니다. 누님, 이분이 전날 저희를 도와주셨던 양 백호님이십니다."
 "동생에 이어, 저까지······ 구명지은의 대은에 감사드립니다."
 남궁아현은 정중히 머리 숙여 양운정에게 인사했다.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양운정은 슬며시 그녀의 인사를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도, 이자가 누군지 아시오?"
 양운정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가짜의 시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손에 들린 인피면구를 본 남궁아현과 남궁창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가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양운정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표정의 변화가 드물었던 남궁아현의 얼굴이 달라질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양운정은 문득 이들이 어찌 처신할지가 궁금했다. 순간, 그의 입가에 새겨진 작은 미소는 왠지 음흉해 보이기까지 했다.
 ***
 양운정은 남궁세가의 한 객방에서 란이를 돌보고 있었다. 꽤나 신경을 쓴 듯이 넓은 실내에 고급스런 가구들이 보기 좋게 배열되어 있었다. 양운정은 침상 위에 걸터앉아 이제야 지쳐 잠이 든 란이의 얼굴을 마냥 바라보았다.
 란이의 머리맡에는 정신적인 안정을 돕는다는 향을 피워놓았다. 남궁창의 세심한 배려였다.
 란이에 대한 걱정으로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려던 양운정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 남궁 형제들이었다. 아무리 세가에 큰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은인을 이리 대할 수 없다며 그를 잡은 것이었다.
 양운정이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남궁창과 남궁승이 나서서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남궁승이 직접 객잔으로 가 란이를 데려오고 남궁창은 양운정을 붙잡고 있었다.
 양운정은 순식간에 란이를 데려오는 남궁 형제의 발 빠른 모습에 그저 도리없이 남궁세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혼절에서 깨어나 있던 란이는 양운정의 부재에 공포에 떨며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객잔의 주인과 점원들이 그녀를 달래고 있는 와중에 남궁승이 그녀를 데리러 왔으니, 그들은 한숨을 돌릴 따름이었다.
 남궁승은 란이를 설득하여 데려가기 위해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했다.
 겨우겨우 달래어 손을 잡고 남궁세가로 향하니, 란이는 양운정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며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란이의 모습에 난감해진 양운정은 그저 머리만 쓰다듬어 줄 따름이었다.
 양운정은 란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꽤나 흘렀는지, 해는 이미 저물었고, 커다란 달이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양운정은 발걸음을 옮겼다. 의기천세라 쓰인 커다란 편액이 눈에 띄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는 꽤나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양운정이 가까이 다가가니, 꽤나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듯,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그들의 우환거리 중 하나 정도는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에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 행세를 하던 자가 가짜임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에 대한 그들의 우환이 적지 않을 듯했다. 굳이, 처가가 되는 곳에서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마음에 의사청에 다가갔다.
 남궁 형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고민을 하건 말건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그때 의사청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붙잡았다.
 "그럼, 이대로 양운정이가 가짜였다고 대장군부에 통보를 하자는 말이오? 지금!"
 남궁장현은 탁자를 내려치며 거칠게 외쳤다. 흥분한 듯이 붉어진 얼굴을 한 남궁장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태파악이 아니 되시오? 진짜 사위는 보나마나 저 제천회의 무리들에게 화를 입은 것이 분명하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 남궁세가 때문일 터, 대장군부에서 조용히 넘어갈 것 같소! 우리세가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 이 말이외다!"
 남궁장현의 말에 남궁세가의 중진들은 할 말을 잃었다.
 "······허면, 어쩌자는 말씀입니까."
 "어차피 마음에 차지도 않던 사위 아니었소. 아현이에게도, 세가에게도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합시다."
 남궁장현은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시체가 진짜 사위가 되면 될 일이오."
 "······!"
 남궁세가의 회의 중 남궁아현과 양운정에 관한 일은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남궁아현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옅볼 수가 없었다. 죽은 가짜 양운정을 가짜라고 알리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아들 손에 가주가 피습을 당했다며, 파혼과 피해를 보상하라고 한다니, 이것이 천하제일가라는 곳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세가의 가훈으로 쓰여 있는 의검천세(義劍千歲)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가주가 부상으로 쓰러져, 임시가주를 맡고 있던 남궁장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맙소사,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남궁아현마저 한마디 말조차 없었으니, 이는 대장군부를 상대로 사기를 치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들은 누군가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누군가가 절대로 이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회의가 끝나고 남궁아현만이 마지막까지 의사청의 한 곳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얼굴은 변함없으되 눈빛만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남궁아현은 양가장에 있을 시부모님이나 시댁 식구들의 생각에 잠시 눈빛이 흐려졌지만, 곧 제 색을 회복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했던 결혼이었다. 물론, 태중혼약이라는 약정에 묶여 있긴 했어도, 그보다는 가문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 컸던 남궁아현이었다.
 항상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는 식구들의 눈은 익히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가문에는 이득이 될 것이고, 자신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을 구했던 검사를 떠올렸다. 그의 듬직한 팔과 아름답기까지 한 검을······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는 곧 상념을 떨쳐버리고 의사청을 나섰다.
 왠지 얼굴이 붉어짐을 느낀 그녀였지만, 실상 보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양운정은 회의 벌어지고 있는 남궁세가의 의사청의 뒤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더러운 것들······"
 불쾌감에 더 이상, 남궁세가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떠나리라.
 일개 강호의 무림세가가 아무리 위세를 떨친다고 해도 어디 감히 한나라의 대장군부를 상대로 저렇듯 무례한 말을 한단 말인가!
 그는 특히 남궁아현의 태도엔 더더욱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양운정이란 존재가 하찮다고 해도, 어찌 이런 일에 한마디 말조차 없단 말인가.
 그녀에게 양운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대장군부부의 존재조차 부정한단 말인가!
 "망할······ 어디 두고 보자······ 이 망할 남궁씨들······"
 양운정은 한차례 남궁세가를 노려보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제8장 귀로(歸路)
 
 
 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양운정은 짐을 싸들고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사정 모르는 남궁세가의 문인들이었다.
 어쨌든 세가의 큰 은인을 이리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그의 활약상은 하루 만에 안휘성 곳곳으로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안휘성 내의 개방이나, 하오문도는 물론이고 무림맹에서까지 이 사건의 전모를 전달하고 조사하느라 난리가 난 상태였다.
 양운정은 해가 뜨기도 전에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는 아직 새벽녘이기에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나 비몽사몽하는 란이를 등에 업었다. 란이는 지난 밤사이에 많이 안정을 되찾았지만, 아직까지 정상이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녀의 위태위태한 모습에 양운정은 아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내 짐을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남궁 형제들이 기겁을 하며 그에게 달려왔다.
 "아니, 양 백호님! 이리 가시다니요. 안 될 말씀입니다."
 간곡히 그를 만류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두 형제의 선한 얼굴에 차마 양운정은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남궁세가에 머물 수도 없었다.
 "미안하네, 내 일이 있어, 지금 길을 떠나야 하니 양해해주게나."
 양운정은 말을 마치고, 방문을 나섰다. 남궁 형제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양운정을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양운정을 말릴 수 없었던, 남궁 형제는 세가의 대문 앞에서 그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세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남궁세가 측에서 준비해준 말 위에 짐과 란이를 앉힌 양운정은 고개를 돌려 남궁 형제와 남궁세가의 문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남궁승이 직접 마사로 달려가 마부들을 닦달해 준비해준 말이었다. 겸양을 할 처지는 못 되었기에 양운정은 감사히 신세를 지기로 했다. 어차피 북경에 도착하면 제 손으로 끊어버릴 연이었지만, 적어도 이 젊은 두 형제에게까지 매정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양운정은 적어도 이 두 형제에 관하여서만은 좋은 인연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짙은 아쉬움을 담은 얼굴로 떠나려는 양운정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리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양운정의 발목을 잡았다. 양운정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리니, 임시가주인 남궁장현이었다. 앞장서서 가문을 기만하려는 위인.
 "이리 자네를 보낸다면 이는 우리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격. 부탁이니, 며칠만 더 묵어주지 않겠나."
 간곡한 그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애롭고, 명예를 중시하는 명문가다운 말이었지만, 그의 속을 들여다보노라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네놈이 양운정이가 가짜라는 것은 목격한 이상. 네놈을 이렇게 간단히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두 남궁 형제야 순수한 마음에서 양운정을 붙잡았지만, 남궁장현을 비롯한 세가의 중진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에게 양운정의 존재는 가문의 은인인 동시에 그들의 치부를 목격한 목격자였다.
 그에 대한 가문의 태도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장현으로서야 남모르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기에 그를 섣불리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운정은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감추었다.
 "가주님의 호의에 감사드리지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 바삐 북경을 가야하니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뭣! 북경!"
 남궁장현은 허를 찔린 듯, 저도 모르게 비명성에 가깝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당황한 남궁장현은 곧 호탕한 웃음소리로 무마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남궁아현은 지난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정도 무엇도 없던 결혼생활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죄스런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왠지 쓸쓸한 모습의 한 사내였다. 변방에서 무관을 했었다는 그는 몽골의 여아를 품에 안고 세가로 들어섰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 모습을 보이는 몽골아이를 달래며, 걱정하던 그의 모습이 마치 확대라도 되듯이 상념 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남궁아현은 제풀에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였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누가 볼세라 조심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남궁아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팽소옥이 머물고 있던 객방이었다.
 팽소옥은 새벽부터 웬 날벼락인지, 평소에도 그렇게 어려워하던 남궁아현이 당당히 찾아오자 깜짝 놀라 그토록 달콤하던 잠들이 한순간에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아하하······ 어, 언니 무,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
 남궁아현은 팽소옥의 더듬거리는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무작정 찾아오기는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록 가문에서 파혼을 하기로 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부군이 있는 몸이었다.
 그런 여인이 외간남자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다는 것이 걸렸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 남궁아현의 모습에 더더욱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팽소옥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 잠에서 깨우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두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뭔가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었나? 팽소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남궁아현의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히익! 모르겠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저기······"
 "헉! 으, 응?"
 "양 백호라는 분······ 설명 좀 해봐."
 "응?"
 팽소옥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를 못하고 다시 되묻고 말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남궁아현의 아미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마, 말할게!"
 그 순간 팽소옥은 진실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내 생명의 은인이신 분이니 좀 알고 싶어서 그래."
 겁에 질린 팽소옥이 대뜸 소리를 지르기가 무섭게 남궁아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 그대로 튀어나왔다.
 "어······ 그, 그래······ 그러니까······"
 팽소옥은 사고정지의 상태로 기억을 되감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팽소옥에게 남궁아현의 존재는 세가의 어른들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장난친다고 진검으로 두들겨 맞고, 던져지고, 무공의 기본을 가르친다면 돌리고······
 그녀에게는 가장 공포적인 존재가 바로 남궁아현이었다.
 허나 당시의 남궁아현으로서는 한참 수련에 매진할 때 웬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눈앞에서 알짱거리기에 같이 수련을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아이는 수양딸 같은 존재이고, 지금 정신적인 충격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지."
 "으, 응······"
 솔직히 팽소옥이 양운정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저 단편적인 사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남궁아현은 그것만으로도 왠지 그에게 한 발 다가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다급히 달려 들어온 시비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 양 은공께서 지금 길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
 "하하하하하! 그래, 북경! 하하하하!"
 "······"
 남궁장현은 당황한 나머지 몇 번을 호탕하게 웃었는지 몰랐다.
 어떻게든 붙잡아야만 했다. 왜 하필이면 북경이란 말인가, 북경에는 대장군부가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자가 대장군부에 가서 입을 잘못 놀린다면, 그것은 그로서도 세가로서도 크나큰 실책을 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양 백호님!"
 팽소옥이 남궁아현과 함께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왔다.
 남궁장현은 남궁아현의 모습을 본 순간 삐걱거리며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팽소옥은 남궁 형제들을 닦달하며, 양운정을 만류하려 했지만, 일이 있다는 양운정의 말에 팽소옥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남궁아현은 결코 익숙지 않은 불안감으로 휩싸여서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양운정의 얼굴을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장현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남궁아현과 양운정을 바라보았다. 양운정을 남궁세가의 그늘 아래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잘만 한다면, 추후에는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궁장현의 입장에서 남궁아현은 어떻게든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
 "뭐라고! 백의이대가 전멸을 해?"
 "옛!"
 어둠 속의 목소리는 경악을 담아 소리쳤다. 짤막한 대답이 나오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푸훗, 후하하하!"
 실로 통쾌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웃음소리에 실린 경력은 실로 대단하여 실내가 우르릉거리며 진동을 했지만, 앞에 부복한 어둠속의 인영은 그저 온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을 감내했다.
 "후후후······ 우습게 되었군, 백의이대가 몰살 당했다라······ 좋아하기만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교에게 우습게 보이면 곤란한데······ 이회주 이 멍청한 인간······ 계속 보고해보아라."
 웃음 멈춘 그는 두 눈에 살광을 뿌리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호탕했던 웃음과는 달리 착잡함이 가득했다.
 "옛! 위천이계의 당초 목적이었던, 남궁세가의 접수는 불안정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현 세가주의 암습에는 성공했으나, 이를 위한 상황을 연출하려던 백의이대는 한 검사의 등장으로 방해를 받아 완전 전멸을 당했고, 이회주는 지금 임시가주라는 이름으로 세가를 맡고 있습니다."
 "남궁가주가 암습을 당한 이상, 적어도 남궁세가의 접수는 완전히 이루어진 것 아닌가?"
 "······얼마 전 검성이 은거를 깨고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뭐라? 그 늙은이가?"
 "예!"
 "그럼, 이회주는?"
 "임시가주로서 직책을 다하고는 있지만, 검성이 나타난 이상······"
 "힘들겠군······"
 "지금 검성은 사경을 헤메고 있는 가주의 치료에 관여하며, 세가의 대소사에도 손을 뻗고 있다고 합니다."
 "······흑암대의 일도 그렇고, 남궁가의 일도 그렇고, 최근들어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구만······ 그래, 그 검사라는 놈은 어떤 놈이냐?"
 "양 백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본명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략 20대 후반의 나이로, 몽고 여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특징입니다. 남궁세가에서는 은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사건발생 다음날, 남궁세가를 떠났습니다."
 "어디로?"
 "북경입니다. 특이하게 남궁아현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몇몇 문인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이자에 대하여 정보단체에 모두 비상이 걸렸습니다. 개방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오문, 무림맹의 현무단, 사마련의 비각 등등, 내놓으라 하는 정보단체가 모두 이자에 대한 조사로 치열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그의 흑암대 역시 돌연 등장한 검사에게 당했다. 그런데, 이번 일에서도 한 검사의 등장으로 대계를 그르쳐 백의이대가 전멸을 당했다?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흑암대를 홀로 전멸시킨 이는 모르긴 몰라도 신주십육성에 버금가는 무인이라야 가능했다. 그런 이라면 적어도 갑자의 세월을 넘긴 고수라야 가능한 일. 20대 후반의 젊은 검수일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나친 생각이라 여기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흑암대의 전멸로 위천일계는 그가 목적한 바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위천이계마저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지 못했으니, 어차피 서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뭉친 세력들이었다.
 상대의 세력이 줄어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궤멸당하고 말다니······ 그는 이회주를 욕하며 두 눈을 감았다.
 얼마 후면, 약정대로 교의 위천삼계가 시작될 터였다. 벌어들인 것은 미미하기 그지없었지만, 퍼줄 것은 산더미 같았다.
 어차피 자신의 것도 아니긴 하지만······
 ***
 양혜령은 정신이라도 나간 듯이 멍한 눈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잔뜩 굳은 얼굴로 길 떠날 채비를 하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었다.
 남궁세가의 사위가 사악한 무리들과 결탁해 가주를 암습하고 죽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당사자가 자신의 친오빠이니 양혜령이 제정신일 수는 없었다. 조만간에 집에 돌아가 오빠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참변이 일어났는지, 소식을 접하고 충격에 기혈이 역류되어 토혈까지 했던 양혜령이었다.
 "사매······"
 "아, 청음 사저."
 뒤에서 한 비구니의 부름에 양혜령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 역시 안쓰런 얼굴로 양혜령을 위로할 따름이었다.
 불과 몇 일 전만 하더라도 서로 곧잘 어울리며 무림맹을 돌아다니던 남궁남매는 이제는 그녀를 피하며 가끔 마주치더라도 적의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애써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하며 마음을 위로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상처로 남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출발한다!"
 남궁하룡의 목소리에 남궁세가 소속의 창천검룡단과 뇌운검대의 무사들이 일제히 무림맹을 출발했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세가에서 날아온 소식과 강호상에서 퍼진 소문이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나란히 앞서 말을 모는 남궁하룡과 하문 남매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평소 그들의 매형인 양운정에 대한 세가의 평이 어떠했는지는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큰 충격이었는지도 몰랐다.
 남궁하룡은 문득 양혜령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에게 품었던 호감은 이미 내어버린 후였다.
 따지고 본다면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그는 감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혼란함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궁하룡의 마음은 불안감과 혼란함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
 양운정은 묵묵히 말을 달렸다. 그의 뒤에서 남궁아현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쫓아오건 말건,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말을 달릴 따름이었다.
 그의 품안에 있어야할 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남궁세가를 출발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하하하. 이보게 양 백호. 내 부탁이 하나 있네."
 "······예?"
 "우리 아현이도 북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제천회의 무리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 동행해주지 않겠나? 자네라면 내 믿고 우리 아현이를 맡길 수 있을 테니 말일세."
 양운정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남궁아현을 호위한단 말인가. 차갑게 거절을 하려던 찰나였다. 양운정은 얼굴을 굳히며, 급작스럽게 신형을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핫, 위험!”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남궁아현이 순간, 경호성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양운정의 뒤에서 말 위에 있던 란이가 아차 하는 순간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평소의 란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직까지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궁아현은 순간적으로 신법을 펼쳐 떨어지려는 란이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란이는 무사했다. 양운정 역시 몸을 날리려 했지만, 남궁아현이 보인 뜻밖의 모습에 순간 당황하여 멈칫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남궁아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란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양운정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큰일 날 뻔했군. 괜찮으냐?”
 남궁장현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뜸 나섰다. 손수 남궁아현과 란이를 일으킨 그는 이내 굳은 표정의 양운정을 돌아보며 속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양 백호, 그럼 내 믿고 맡김세. 허허허."
 남궁장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은근슬쩍 양운정에게 쐐기를 박았다. 양운정은 미처 거부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양운정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패였다.
 양운정의 미간에 새겨진 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남궁세가에서는 파격적이라고 말할 만큼 순식간에 남궁아현의 출발준비가 완료되었다.
 채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일행은 남궁세가의 문을 나섰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헌데, 어째서 란이가 남궁아현이 탄 마차에 같이 타고 있느냔 말이다.
 양운정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섣불리 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헤헤헤."
 마차에서 들려오는 란이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양운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패여 놓았다.
 양운정은 괜한 질투심에 마차를 한번 노려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양운정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란이를 위해서라고 자신을 정당화 시켰다.
 양운정은 북경으로 돌아간 후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남궁장현은 남궁아현에게 기대를 걸었다. 남궁아현은 아직도 지지 않은 꽃이었다. 무림육화 중의 일인으로 손꼽히던 미모는 시들기는커녕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남궁장현은 남궁아현이 있는 이상, 양운정이 딴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양운정은 확인된 바로는 상당한 무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남궁세가 측에서의 판단으로 양운정은 뇌운검대나 뇌룡검대의 대장급에 해당할 정도로 보고 있었다. 실상, 백의이대를 상대할 당시 양운정의 등장이 비록 전세를 뒤집었지만, 그의 무공을 제대로 파악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궁 형제들의 말과 제법 수월하게 백의이대를 상대하던 모습에 상당한 무위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따름이었다.
 아직까지 그들은 양운정의 진실한 무위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궁장현은 양운정을 제거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독아를 감추고 한 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현혹을 할 따름이지만, 꽃을 따라오지 않는다면 필요 없는 꽃과 함께 물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남궁장현은 이를 부득 갈면서 잔혹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형인 남궁장충은 아직까지 운공 중에 있었다. 그곳에는 세가의 의원들과 모든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 사이에 최대한 자신의 세력을 끌어 모아야 했다. 교의 독에 당한 이상, 적어도 수일동안은 독기에 시달릴 것이었다.
 용케 독기를 몰아낸다고 하여도 얼마 못 갈 것이 자명했다. 남궁아현 등의 조카들에게는 비록 위험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란 말과 치료에 지장이 간다는 이유로 철저히 그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가주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말로 그들을 속인 남궁장현은 역시 세가를 위한다는 말로 남궁아현을 구슬렸다.
 어차피 빨리 대장군부에 소식을 전하며, 받을 것을 받아내야 했다.
 머뭇거리다가 혹시라도 남궁장충이 깨어난다면 오히려 대장군부를
 상대로 받아내기는커녕 퍼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를 따라 길을 나선 총관과 호위무사들에게는 양 백호는 양운정의 정체를 목격한 인물이니 필요하다면 입을 막을 것을 따로 지시해놓았다.
 남궁장현은 그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을 자기 위안으로 삼았다. 아울러, 양 백호를 손안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음흉한 흉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그렇게 홀로 복수심에 취해 의기양양해 있을 무렵, 한 무사가 헐레벌떡 그가 있던 가주의 집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뭐얏! 아버님이!"
 곧 비명에 가까운 남궁장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결국 위천이계는 정말인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했다.
 ***
 양가장, 대명의 군부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양가장의 거대한 정문은 안휘성으로부터 불어온 소문의 바람 때문인지,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
 본명보다도 대장군이란 호칭이 더욱 익숙한 양가장주이자 당금 대명의 군부를 이끌어가는 양호상이었다.
 며칠 사이에 십여 년의 세월은 훌쩍 넘긴 듯, 피로한 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삼남이었다. 어린 시절 그 영민함으로 얼마나 커다란 기대를 했었던지······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나 밝은 모습만으로 보여주던 아이가, 어둡고 비뚤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여러 가지로 바빴던 양호상 부부는 그저 곧 정신을 차리겠지, 한때의 치기 어린 시기에 불과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양운정의 방종해진 생활을 탓하지 않았었다. 헌데,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삼남을 돌아보았을 때는 아차하고 말았다.
 학명(學名)이나 무명(武名)으로 이름을 날릴 줄 알았던 아들은 북경에서도 손꼽히는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매를 들어보기도 하고, 좋은 말로 타일러 보아도, 양운정의 생활에 변함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양운정과 남궁아현 간의 결혼은 본시 두가문의 큰어른인 검성 남궁무빈과 지금은 작고한 신창(神槍) 양우도(楊優度)간의 약속이었다.
 두사람은 강호에서도 유명한 절친한 친우로 젊은 시절에는 창검쌍절(槍劍雙節)이라 불리며, 한 명은 강호에서, 한 명은 전장에서 이름을 널리 떨쳤던 사내들이었다.
 양우도는 양호상의 부친이며, 양운정의 조부였다. 그는 양호상이 청년 일 무렵, 전장에서 수천의 적을 맞이하며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이미 고인이 된 분과의 약속이었다. 만약, 양호상이 선친의 뒤를 이어 대장군의 직위를 물려받지 못했다면, 양가장의 세가 조금이라도 약해졌다면, 유명무실했을 태중혼약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시키고 보니, 적어도 주색잡기는 끊은 아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며느리가 어찌나 고맙던지······
 비록 주색잡기 등은 그만두었다고 할지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려는 것이 없는 아들의 모습에 꾀가 동한 양호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며 군대에 밀어 보내려 했건만, 어디서 났는지 덜컥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 않겠는가. 그 순간만큼은 정말 세상을 다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젊은 시절 급작스러운 선친의 전사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이후로 처음으로 맞았던 좌절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들이 제 발로 군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는 반대로 세상을 다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대에 또 고대를 했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일은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양호상이 양운정을 배치하려 했던 곳은 최전선인 북로군의 본영이었다.
 본영이라면, 적어도 적과 대면하여 싸우는 곳이 아니었기에, 양호상은 은밀히 연통을 넣어 양운정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었던 것이었다.
 지난 5년간 북로군 본영의 군사인 최흠이란 자에게서 날아오는 전서들은 양운정의 무사안위를 확인시켜주며, 그들 부부의 마음을 놓게 만들어 주었건만, 실상 그것이 조작되었던 것임을 그들로서는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양운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정말 큰 기쁨을 느꼈지만, 그 기쁨은 채 십 일을 채우지 못했다.
 군에 들어가기 전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에 가족들은 더한 실망감을 느꼈고, 그저 몸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헌데 느닷없이 들려온 남궁세가의 일을 들은 아들이 며늘아이를 따라 직접 처가를 다녀오겠노라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 말을 했던 순간만큼은 지금껏 보여주었던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래도 군에 보냈던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색을 했던 식구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방 안에 밝혀진 등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양호상의 두 눈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문득 문이 열리며 두 사내가 들어왔다. 첫째 양한정과 둘째 양무정이었다.
 "아버님······"
 두 아들이 양호상을 불렀다. 그제서야 양호상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벌써 며칠째를 저렇게 힘없이 계셨는지 몰랐다.
 "무슨 일이냐······"
 "이제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아니다······ 이게 더 편하구나."
 "아버님, 벌써 며칠째 잠도 못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간곡한 그들의 목소리에도 양호상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 운정이가 아른거리는구나······"
 "아버님······"
 양호상의 물기어린 목소리에 그들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가슴이 찢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
 "그래, 남궁장현이가 실패했어."
 젊은 목소리였다. 피처럼 붉은 색으로 도배한 거대한 제전이었다.
 한가운데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이 놓여 있었다.
 그 불을 바라보고 있던 한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수십의 인물들이 말없이 부복을 취하고 있었다.
 은발에 은미를 휘날리는 사내의 두 눈에는 감히 따질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사내의 두 눈은 검은 빛이 아닌 사이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은발(銀髮), 은미(銀眉)에, 은안(銀眼).
 마치 사람이 아닌 듯한 그의 모습은 그를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부여했다. 그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나른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절대자의 나태함이었다.
 그의 눈길이 닫을세라 수십 인의 혈포를 걸친 이들은 서로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대장로. 말해보시오."
 교주의 지명이 있자, 그들 중 가장 선두에 부복해 있던 한 초로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놀랍게도 북로군의 군사를 맞던 최흠이었다. 이곳에서 그의 모습은 군사로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 최흠이 교주께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비록 제천회의 두 가지 계략이 무위로 돌아갔다 하나, 교의 입장으로 본다면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본교가 실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백살대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렇군."
 "오히려 이를 통해 제천회의 두 회주에게 빚을 지워놓을 수 있었으니 후에 저희의 대계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어라!"
 대장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주의 목소리가 제전에 울려 퍼졌다.
 "저 운남 오지에서 웅크리고 있는 교에서 벗어난 지 벌써 십수 년. 그간 음지 중의 음지에서 고난과 핍박을 감수했던 우리들이 언제부터 산중은자인양 오지생활에 만족하며 은유자적을 즐겼단 말이냐. 나 은명후는 말한다. 비참했던 우리의 과거를 잊은 저들을 더 이상 우리의 뿌리로서 인정하지 않겠다. 대장로를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내말을 들어라!"
 "존명!"
 "대계를 시작해라! 이곳 사천은 지금부터 본교의 뿌리가 될 곳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천하를 교의 깃발 아래 두겠노라!"
 "존명! 혈교천하, 혈세천하!"
 은명후의 은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절대자의 나태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광기만이 남아 그를 지배했다. 혈풍이 선언되는 순간이었다.
 ***
 "그래, 혈교가 움직인다고······"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앙상한 어깨 위에 흑포를 걸친 작고 왜소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한줄기 검상이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 검상은 마치 노인의 주름인 양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반대로 특이점이 가득했다.
 혈포를 걸치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팽팽한 피부에 혈발(血髮)에 혈미(血眉)인 중년인이었다.
 "뭐······ 나쁘지는 않은 일이지······ 그들로서는 오래도 참았구만."
 "하지만, 교주님."
 "되었네, 그들은 우리의 뜻과 맞지 않았던 이들. 굳이 붙잡아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이."
 "한바탕 혈겁이 일어날 것입니다."
 "잘들 해보라지. 어느 쪽 어찌 되든 우리로서야 상관없는 일일세."
 "허나, 후에 혈교든, 중원무림인이든 본교를 핍박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간신히 이 오지에 적응을 마치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교인들 사이에 소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하하. 이 사람도 많이 늙었구만. 이런 자네를 보고 누가 천하의 혈수혈인(血手血人)을 떠올릴까?"
 "교주님!"
 노인의 장난스러운 말에 혈수혈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정색을 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잊고 싶어 하는 동시에 결코 씻어 낼 수 없는 과거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괜한 걱정일세. 중원에는 남궁무빈이, 혈교에는 은명후가 있어 그들이라면, 그런 어설픈 생각으로 본교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야."
 "······"
 교주의 입에서 남궁무빈, 검성의 이름이 거론되자, 혈포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명백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이런, 이 사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삭히지 못했는가. 그것은 정당한 승부였어, 마교의 율법에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던 일이었거늘, 자네는 아직도 수양이 모자라는구먼."
 "허나, 교주님!"
 "그만, 자네부터 이러니, 내가 더더욱 그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게야. 에잉······"
 교주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등을 돌리 그의 흑포에는 커다란 하얀 글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천(天).
 노인은 당금, 천년마교의 주인인 천마 소우문이었다.
 그의 신색을 살피자면, 마교라고 하기보다는 시골의 촌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방을 벗어난 노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힘써 농지를 개간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여러 장정들과 밝은 모습으로 그들을 도와 열심히 일하는 아낙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천년마교의 교인들이었다.
 ***
 한참 말을 달리던 양운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를 쫓아오는 서너 기의 기마와 한대의 마차, 마차 안에는 란이가 타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란이를 정식으로 자신의 양녀로 입적시킬 생각이었다.
 남궁세가를 출발한 지 십수 일, 란이는 이제 제법 안정을 되찾고 완전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남궁아현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양운정은 그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본래의 양운정이 죽고 못 살았던 여인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그에게는 번거로운 동행에 지나지 않았다.
 곧 남궁아현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를 대했을 당시 느꼈던 떨림과 통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앞으로 이틀이면 북경에 도착할 터였다. 양운정은 더 이상 남궁아현과 란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하루의 여로가 끝나고, 객잔에 방을 잡았다. 이 밤이 지나면 북경은 코앞이었다.
 남궁아현은 점원을 통해 전해진 전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양운정으로부터였다.
 남궁아현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표정변화 하나 없는 것이 설사 그녀의 얼굴을 본다하여도 눈치 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었다.
 남궁아현은 나름대로 꾸미고는 초조하게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처음으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하고도 다섯. 결혼 전까지 십수 년의 세월을 무공일로에 매진했던 그녀였다. 천생 무골이었던, 그녀에게 무공 외의 모든 것은 그저 관심 밖이었다.
 무가의 여식이라면 한번쯤 설레었을 강호의 기남아나, 청년협객 등은 그녀에게 그저 한사람의 무인이오, 호적수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결혼 역시 세가의 뜻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감정은 극히 낯선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시간을 셀 따름이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란이가 있었다. 귀여운 모습으로 잠이 든 란이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살짝 묘한 상상에 빠져든 남궁아현이었다.
 양운정이 방을 나서자, 총관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접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양운정을 향한 감시의 눈길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양운정은 따갑게 느껴지는 그들의 눈길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남궁아현과 만나기로 한 것은 객잔의 후원이었다.
 파르라니 밝은 달빛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만월이었다.
 후원의 한켠에 놓여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달빛을 바라보았다. 만월의 푸른빛은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남궁아현의 발소리에 양운정은 달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 양운정은 순간 흔들리는 가슴을 느꼈다. 달빛의 마력을 빌린 남궁아현의 모습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양운정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양 백호님······"
 남궁아현은 담담한 양운정의 모습에 내심 얼굴을 붉히면서도 혹여 마음이 들킬까 두려워 애써 냉정한 신색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양운정의 차갑고, 날카로운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더는 우리 란이와 어울리지 마시오."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 그대로요."
 양운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차가운 얼굴일지도 몰랐다.
 "그간, 란이를 돌보아 준 것에 감사드리오, 덕분에 란이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소."
 비록 정중한 말이었지만, 남궁아현은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더는 곤란하오. 나는 당신이 더 이상 란이와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오."
 양운정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남궁아현은 차가운 밤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었는지,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상태로 굳어 있었다.
 그녀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던가. 그녀의 머리는 혼란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저 정신이 나간 듯이 멍하게 서 있는 그녀를 남겨두고, 양운정은 그저 제 할 말만을 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남궁아현은 다분히 공격적인 양운정의 태도에 당황하여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남궁세가가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녀로서는 절대 알 수도,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양운정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양운정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여러 눈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총관과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로간의 눈빛을 교환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총관이 손짓하자, 그들은 바삐 흩어졌다.
 "아가씨께 저런 무례라니······ 어차피 임시가주님의 명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놈을 가만둘 수는 없겠다."
 총관은 출발하기 직전, 조용히 그를 불러 당부하던 남궁장현의 말을 떠올리며 결연히 눈빛을 빛냈다.
 '혹여, 아현이와 그 양가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알겠지? 그놈은 어쨌든 치부를 알고 있는 자야, 회유가 불가하면 은밀히 시행하게······'
 남궁아현과 란이가 같이 묶는 방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지체한 양운정은 방에서 들려오는 새근거리는 잠든 란이의 숨소리를 듣고는,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그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바깥의 소란스런 기척들을 느끼며 양운정은 침상으로 간 몸을 뉘었다. 이제 북경은 코앞이었다. 문득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실상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겨우 며칠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과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낯선 감정에 양운정은 떨려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친숙하지 않은 감정임에는 틀림없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생각에서 벗어난 양운정은 별다른 내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보니 남궁세가의 무사 한사람이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하하, 양 백호님. 다름이 아니라, 저희들이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했는데, 함께 하시면 어떠실지······"
 무사의 말에 양운정은 의외로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가슴 졸이며 이것저것 핑계거리를 만들었던 그가 당황할 정도였다.
 그대로 무사를 따라나서는 양운정은 빈손이었다.
 무사의 눈이 찰나지간 번뜩였지만, 양운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태연히 앞장 선 무사의 뒤를 따랐다. 자리를 마련하였다면서, 그가 향하는 방향은 오히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어둠 속 저 멀리서 하나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주변을 둘러싼 대략 십수 명의 인원이 불꽃을 감싸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 당도했다. 술자리라면서 술은 간데없었고, 살기등등한 모습의 무사들만이 잔뜩 굳은 얼굴로 양운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한결같이 굳게 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양운정의 눈을 향했다가 곧 그의 빈손으로 향했다. 그들의 굳은 얼굴에 슬며시 비웃음이 떠올랐다. 양운정은 개의치 않았다. 정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총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총관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타오르는 불꽃이 가득 메운 그의 눈동자로부터 어떤 것을 읽어내기란 무리였다.
 "무슨 뜻이오. 총관."
 "······"
 양운정의 물음에도 총관은 말없이 불꽃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되, 그 물음에 답한 것은 무사들의 검이었다.
 맑은 검명을 토해내는 그들의 검과 달리 그들은 눈은 탁한 살기로 가득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해준다면······ 해치지는 않겠소."
 "······무엇인가."
 "귀하는 남궁세가의 사람이 될 생각이 없소?"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이지?"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중년의 남궁세가의 무사가 다그쳤다. 목에 닿은 검날이 차가웠다.
 "어떤 대답을 원하나?"
 이번에는 정말로 궁금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익!"
 무사는 당장이라도 양운정의 목을 칠 듯이 검을 바싹 들이댔지만, 휘두르지는 못했다.
 "우습군, 천하제일세가라는 남궁세가가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까지 나 같은 졸자를 부리고 싶다는 건가."
 명백한 비웃음이고 도발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조소는 한층 짙어졌다.
 "죽고 싶은가!"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남궁세가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자들이었다.
 양운정에게 검을 들이댄 무사를 비롯한 중장년의 무사들은 뇌룡검대의 수석조장들이었다. 하나같이 일류이상이 아닌 자들이 없었다.
 그들이라면 절정에 이르른 무인이라도 쉬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너희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
 양운정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순간에 일어났다. 목에 닿은 검날을 왼손으로 잡음과 동시에 몸을 틀며 오른 주먹이 무사의 얼굴을 강타했다.
 빠르다기보다는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뻔히 두 눈을 뜨고도 양운정의 일 권을 막을 수 없었다.
 권에 실린 경력에 무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검을 잡은 양운정은 한번 검을 휘둘러보고는 그를 둘러싼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양운정의 기세를 이제사 느낀 모양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꿈틀거리는 모습이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살기 어린 얼굴에 긴장을 한 꺼풀 덮어쓴 그들은 양운정을 향해 검을 펼쳤다.
 "차합!"
 검경을 잔뜩 머금은 그들의 검이 힘차게 양운정을 향해 펼쳐졌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헉!"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무사들로부터였다. 십여 개의 검이 맞닿아 있었다.
 어디에도 양운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다! 바보들!"
 총관의 경호성이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마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듯이 양운정의 신형이 가볍게 나타났다. 그들의 맞닿아 있는 검을 밟고 서 있었다.
 퍼퍼퍽!
 양운정은 훌쩍 뛰어오르며 검을 타고 내달렸다. 그들의 검, 팔, 머리를 밟아 벗어난 양운정은 달려드는 무사들의 검을 하나하나 흘리며 여유로이 노닐기 시작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검로는 양운정의 이목을 피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들의 무리로부터 벗어난 양운정은 멈추어서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양운정은 손에 든 검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낮은 울림을 토하며 떠올랐다.
 "······!"
 "차하압!"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방은 다시 시작되었다.
 무수한 검영을 그리며, 그들의 검은 양운정을 뒤덮을 듯이 달려들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뇌정십삼검이었다. 하지만, 양운정에게는 무용했다.
 양손을 한번 떨친 양운정은 오히려 그들의 검영 사이로 몸을 날렸다. 수십 개의 검영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양운정은 검을 쥔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돌려 그의 손목을 꺾어버리자, 굳게 움켜쥐어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떨어지는 검을 무릎으로 차올리고는 바로 무사의 턱을 올려 찼다.
 "크헉!"
 무사는 입에서 핏물을 토하며 수장을 맥없이 날아가 버렸다.
 양운정은 철저하게 남궁세가의 무사들의 검을 쥔 손을 노렸다.
 그들의 검로를 속절없이 파훼하며 검을 쥔 손을 붙잡아 꺾어버리거나, 달려들려는 그들의 손을 발로 차 검을 날려버리며, 그들의 공세를 무위로 돌려버렸다.
 그들이 아무리 협공을 가하려 하여도, 양운정의 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양운정은 빼앗은 그들의 검을 차 날리니 섣불리 그에게 접근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양운정이 날리는 검에 실린 경력도 속도도 가볍지 않아, 그것을 받아내는 것만도 그들의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벌써 수십 합이 흘렀지만, 그들은 양운정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가의 무사들은 이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멀쩡히 서 있는 자는 다섯도 채 되지 않았다.
 "헉헉······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을 양운정은 고요한 신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그려졌던 한줄기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심한 그의 얼굴과 시선은 남궁가의 무사들에게 더욱 큰 자극을 주고 있었다.
 양운정의 내심이야 어떻든 그의 시선에 남궁가의 무사들은 점점 더 비참해지는 자신들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위력적인 초식도, 현란한 초식도 무용했다. 양운정은 그들의 검세를 타고 흐르며 코앞까지 접근해 공격했다.
 그의 간결하면서도 힘찬 몸놀림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양운정의 움직임을 살펴보자면 중간과정이 전부 생략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저 한발자국을 내딛으려 한 것처럼 보일 뿐인데, 어느 틈에 검세를 헤집으며 코앞에 접근해 있었다.
 그들은 양운정에 대한 평가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일류니 절정이니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니었다.
 양운정은 여전히 맨손이었다.
 "자네는 도대체 누구인가?"
 "북로군 백호를 지닌 양모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총관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닌 한 자루의 유엽도였다.
 유려한 도신을 그리는 그의 도는 양운정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군부의 백호가 이정도 무위라면, 천호나 대장군은 무신이겠군."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입과는 달리 그의 두 눈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보이는 양운정의 무위는 한사람의 무인으로서 피가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 수법은 무엇이라 하는가?"
 "도검탄비(盜劍彈飛)."
 "······도검탄비······"
 총관은 양운정의 말을 낮게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낯선 무공이었다.
 강호상에 이런 무공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맨손으로 도검을 제압하는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류의 무공은 여럿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해 들어오는 도검(刀劍)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양운정의 도검탄비는 이름그대로 검까지 빼앗아 바로 날려 공세를 취하니 가히 공방일체의 수라 할 수 있었다.
 양운정의 빈손을 노려보며 총관은 천천히 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 물러서라······"
 "총관!"
 "물러서라······"
 총관의 고요했던 기세가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무사들은 총관의 낮은 목소리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총관은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는 남궁세가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총관은 한 순간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일도(一刀)다."
 "······좋을 대로."
 양운정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 양운정의 모습에도 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양운정의 무위가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은 인정했지만, 그는 그보다도 자신의 도를 더욱 믿었다. 그의 나이 사십하고도 일곱. 칠세의 어린 나이에 도를 잡아, 물경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바쳐 연마한 도였다.
 그는 자신의 일도를 믿었고, 그 일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십 년 전의 그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혈세도(血洗刀) 장천(張擅).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이름. 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의 일도에 아직도 악몽을 꿈꾼다.
 오로지 도법지로(刀法之路). 그 한가지만을 바라보며 내달린 수행자가 혈세도 장천이었다. 자신의 도법을 완성하기 위해 무수한 사투를 벌였고, 무수한 피를 보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혈세도라는 결코 영예롭지 않은 별호와 사마외도라는 질시였다.
 급기야, 그에게 원한을 품거나, 그를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생사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빈사지경의 그를 구한 것은 현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장충이었다. 그에게 구함을 받고 스스로를 낮추어 그의 밑으로 자처하여 들어간 지 어느덧 이십 년.
 장천은 서서히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하루라도 연무를 게을리 한 적은 없었지만, 무려 이십 년 만의 실전이었다.
 지금 그의 무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도 없었지만, 그것이 그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높게 치켜든 도에서 낮은 울림이 토해졌다. 장천의 혼신의 내력이 그의 유엽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우웅······
 머리 높이 치켜든 그의 도세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은 다른 무사들의 기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사들은 장천의 몸이 한순간 커져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정작 장천 당사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거대한 산이 되었다면, 양운정은 형체 없는 바람이라도 되어버린 듯 했다.
 분명 눈앞에 버티고 서 있건만,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장천의 투쟁심을 제압했다.
 "끼야아압!"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장천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힘차게 일도를 내리그었다. 대기가 갈라졌다.
 장천의 유엽도의 경력에 갈라진 대기가 향한 곳에 양운정이 태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장이 넘는 거리를 격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순식간에 양운정을 노렸다. 무표정하던 양운정의 입가에 마치 가면이 깨어지듯이 한줄기 미소가 드러났다.
 당장이라도 일도양단이 되어버릴 듯한 양운정의 신형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그것을 목격한 장천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경악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불꽃이 바람에 흩날려 꺼져버리듯이.
 그들의 시야 어디에도 양운정은 없었다.
 장천은 등 뒤에 닿아 있는 양운정의 검결지를 느꼈다. 굳어진 그의 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장천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도대체가······?"
 "괜찮은 한 수였소."
 "사, 사술인가?"
 "사술이라니, 서운한 말을 하는군."
 "사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저······ 빠르게 움직인 것뿐이오."
 "빠, 빠르게?"
 양운정은 가볍게 짚은 손가락을 밀어냈다. 장천은 온몸에서 힘이 빠진 듯 그저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초, 총관!"
 장천은 쓰러진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고개를 돌려 양운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단천도(斷天刀)는 가주님조차 피할 수 없었던 초식이었는데······"
 띄엄띄엄 말을 잇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양운정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는 다만 장천의 얼굴을 바라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장천은 극도의 심력을 소비하고, 자신의 비장의 절초가 허무하게 깨어진 충격으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장천은 그저 멍한 눈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늘의 일은 기억하고 있겠다. 남궁가여."
 양운정은 나직히 통보하듯이 말했다. 묘한 힘이 실린 그의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장천은 당황한 눈으로 양운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수였다. 그런데, 검이 없는 그를 남궁가의 정예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가슴 속을 가득 메운 것은 절망이고 후회였다. 자신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은인을 핍박했다는 이야기가 새어나간다면 남궁세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다.
 오연히 우뚝 선 양운정이 그들 하나하나를 눈 속에 담아두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기력한 남궁세가의 총관과 무사들을 남겨두고 양운정은 홀로 숙소로 돌아갔다.
 남겨진 그들은 분루를 삼키며 장내를 정리했다.
 "으으윽······"
 "아아······"
 고통의 신음성이 울렸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는 동료들을 수습하여 치료하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장천은 허탈함과 좌절감에 그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양운정은 적어도, 적어도 십 년 전의 남궁가주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녔다.
 세가에 지금의 상황들을 알려야 했다. 더이상 장천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 그들의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죄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명예보다 세가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그들은 길을 재촉했다. 양운정의 앞에는 란이가 앉아 있었다. 흩날리는 바람에 란이의 삼단 같은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혔지만, 양운정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탄 말이라 그런지 즐거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차 안에 홀로 남겨진 남궁아현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들 중 반수 이상이 얼굴을 붕대로 동여맨 상태였으나, 그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란 행렬에서 자신만이 내쳐진 듯한,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 그녀를 뒤덮고 있었다.
 탁한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원래 무심했던 얼굴이지만, 지금은 아예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인형의 얼굴처럼 생기 없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챙겨줄 사람도 없었다. 호위무사들과 총관역시 전날 양운정으로부터 받은 충격으로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고, 란이는 양운정이 보란 듯이 데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저 손에 든 장검을 꼭 움켜쥘 따름이었다.
 란이는 양운정의 품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주변에서 말을 달리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다수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들은 란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붕대 속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시선을 회피하자, 란이는 뚱한 얼굴이 되어서 양운정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가 그랬죠."
 "응? 뭐가?"
 "저 아저씨들이오."
 "아아······ 자기들이 먼저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정말이요?"
 란이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양운정을 추궁했지만, 양운정은 그저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런데, 남궁 언니는 왜 그러지? 아저씨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요?"
 "······응?"
 "아까, 마차에 타려고 할 때, 아저씨가 말에 태웠잖아요. 그때 남궁 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단 말이에요. 언니한테 뭐라고 했지요? 그쵸?"
 "······응."
 "뭐라고 했는데요?"
 란이는 정말 궁금한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바싹 내밀었다. 그 시선이 자못 부담스러웠는지, 양운정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지나가듯이 입을 열었다.
 "란이야, 아저씨는 남궁 소저가······ 그러니까 싫단다."
 "예?"
 느닷없는 양운정의 말을 아무것도 모르는 란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란이는 남궁 언니가 좋은걸요."
 "······어디가?"
 "으음, 멋있고, 예쁘고, 똑똑하고······"
 예쁘다는 말에 양운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만큼은 그로서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 예쁘긴 참 예쁘지."
 "게다가 마음도 얼마나 착하고, 따뜻한데요."
 따뜻하다는 란이의 표현에 양운정은 빤히 란이의 두 눈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어디가?'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남궁 언니가 많이 서툴러서 그래요. 하지만, 가슴이 참 따뜻하고, 착한 언니예요!"
 단정 짓듯이 못을 밖아 얘기하는 란이었다.
 "아저씨는 자기 부인이었다면서, 그런 것도 몰랐어요? 나는 아저씨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숨길 생각이에요?"
 란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양운정을 몰아세웠다.
 양운정은 난처한 미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란이의 시선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흠······ 뭐 조만간에 밝혀야겠지."
 양운정은 꽤나 심각한 란이의 추궁에도 그저 시선을 피하며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대꾸했다.
 "그리고, 언니는 아저씨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응?"
 양운정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저하고 있을 때, 얼마나 이것저것 캐물었는데요. 아저씨 이름 빼고는 상관없죠?"
 "······뭐······ 그렇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양운정의 얼굴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양운정의 표정이나 속내가 어떻든 란이의 미소는 그보다 강력했다.
 "흐음······ 남궁 소저가 그리 좋으니?"
 "예."
 "알았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저씨도······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란이의 물음에 양운정은 다만 두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잠시 쉬어가는 도중 란이는 다시 남궁아현의 마차로 돌아갔다. 남궁아현은 그제서야 멍한 기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란이가 돌아오자, 그나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언니, 괜찮아요? 어제 아저씨가 너무했다고 대신 사과해 달라고 했어요."
 양운정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건만, 란이의 한마디에 남궁아현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미미한 변화였지만, 예리한 란이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부터는 줄곧 극히 미비하게 움직이는 남궁아현의 표정을 관찰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눠온 란이었다.
 가족들조차 쉬이 읽어내지 못하는 남궁아현의 냉면(冷面)을 겨우 며칠로 란이가 읽어낼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이번의 변화는 그만큼 극적이었다.
 "······그, 그래."
 표시도 나지 않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란이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아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란이가 떠들고 남궁아현이 무뚝뚝한 얼굴로 맞장구를 쳐왔다.
 음충맞은 미소를 띤 란이의 모습에 남궁아현은 슬쩍 오한에 몸을 떨었다.
 "흠흠..근데 언니는 우리 아저씨 어디가 좋아요?"
 직설적이다 못해 후벼 파는 질문이었다.
 "무, 무슨······ 누, 누가."
 이제는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버벅거리는 남궁아현의 귓볼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 그럼 싫어하는구나."
 "아니야!"
 저도 모르게 외친 남궁아현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남궁아현은 빠르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완벽하게 방음이 되게 설계되어 있어 바깥의 무사들이나 양운정에게 들릴 리 없었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기분에 남궁아현의 얼굴이 완전히 붉게 달아올랐다.
 "후후······ 그렇구나."
 "마, 말하지 마. 란아."
 "으음······ 예."
 놀리듯이 빙글빙글 웃는 란이의 모습에 남궁아현은 당황하며 재차 강조했다.
 "마, 말하면 절대 안 돼!"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진짜 우리 아저씨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자, 잘 모르겠어."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도란도란 끝날 줄을 몰랐다.
 ***
 달빛이 비추는 작은 정원이었다. 거대한 대장군의 규모에 비하자면 정말로 작은 규모였다.
 파르라한 달빛이 물들인 정원에 한 거석에는 두 사내가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힘든 일이 있었던 듯이 지친 얼굴의 그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양가쌍호(楊家雙虎), 비록 무림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 북경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호랑이는 간 곳없고 그저 막막함에 한숨짓는 나약한 두 사내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어찌하면 좋을지······ 부모님도 걱정이지만, 제수씨의 얼굴은 또 어떻게 봐야 할지······"
 양한정의 한숨짓는 말에 양무정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한숨밖에는 나올 것이 없었다.
 "운정,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무리들과 어울렸을까. 형님, 그 제천회란 무리들에 대한 조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알 수가 없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 개방이나 하오문도들에게까지 손을 넣어보았지만······"
 무겁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답답함이 가득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선에 손을 써보았건만, 돌아온 것은 알 수 없다는 전문뿐이었다.
 6년 전 양운정은 결혼 이후, 외부생활을 모두 끊었다. 일체의 외출이 없었던 양운정이었다. 그리고 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불과 몇 십일, 도대체 언제 제천회와 같은 무리들과 접촉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저물어가는 달을 바라보며, 두 형제의 마음도 타들어갔다.
 "제수씨가 처가에서 출발한 지 십수 일, 얼마 후면 도착하겠더구나."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양한정이었다. 그의 말에 양무정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벌어지고 바로 다음날 출발했다지······ 무슨 뜻이겠느냐?."
 "남궁세가에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입니다. 부모님께서 충격이 크시겠습니다."
 "으음······ 그래······ 그렇겠지."
 말끝을 흐리며 두 형제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새삼 양운정이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그 아이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이 또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지, 어쩌면 대장군부의 이름을 내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령이에게서도 전서가 왔습니다. 며칠 전 무림맹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 아이도 많이 힘들어하겠구나."
 "······어린 시절 주로 령이와 놀아준 것은 운정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어린 시절을 추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잠시지간 정적이 두 형제 사이에 흘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운정 그 녀석이 어떻게 사돈어른을 암습할 수 있었던 걸까? 사돈어른을 암습할 정도라면 적어도 우리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잖아."
 양한정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껏 양운정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떻게 양운정이 남궁장충과 같은 절세고수에게 암격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양무정 역시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양운정이 무공에 관하여 익힌 것이라고는 어린 시절 건강을 위해 배운 바 있는 기초 운기법뿐이었다.
 양운정은 그 외에 양가에 전래되는 양가창법(楊家槍法)이나, 연운십팔타(連運十八打)와 같은 무공을 익힌 바가 없었다. 군문에서 백호장이라는 위치에 까지 올랐으니, 적어도 몇 가지 기본적인 무기술이나, 권각술 정도야 익혔겠지만, 어디 그런 것으로 남궁장충을 암습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도 제천회란 무리와 연관이 있겠지요, 운정이가 집에서 익힌 것이라고는 선생의 운기토납법 하나뿐인 것을요······ 아마도, 그들에게 어떤 강호의 기학을 전수받았다면······"
 "그렇다는 얘기는 군에 있을 때 제천회와 접촉했다고밖에 볼 수 없겠군······"
 "북로군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만, 당장은 무리입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이때에 섣불리 북로군을 조사한다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북로군은 군내에서도 입김이 거센 곳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대장군부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손은 써보아야겠지······"
 "······그 일은 직접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은 타인의 손을 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럼?"
 "제수씨가 돌아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주겠느냐?"
 "예."
 양무정은 선뜻 나섰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로군이었다. 북로군을 조사한다는 것은 대명군부 내부의 일이었다. 군문의 공무로서 조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이것은 대장군부라고 하기보다는 한 가문인 양가로서 행하는 조사였다. 이런 일에 외인에 손을 빌리거나, 공권으로 행할 수는 없었다.
 양한정은 양무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일찍부터 뛰어난 무재(武材)로 양가제일창이란 이름을 얻은 양무정이었다. 하지만, 본래 다툼을 싫어하고 세류에 휩쓸리는 것을 경계하기에 무(武)보다는 문(文)으로 입신한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을 풍진강호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검성 남궁무빈. 그 이름이 주는 무게는 강호상의 어떤 인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장현은 눈앞에 앉아 있는 그의 부친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그의 흉금 속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이 드러날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백발, 백염, 백미의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신선의 풍모를 고루 갖춘 이 인물이 바로 검성 남궁무빈이었다. 신주십육성의 일위이며 무림의 최강자라 불리는 남궁무빈은 눈을 아래로 하여 수십 장의 서찰과 서류들을 읽고 있었다.
 서류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남궁장현의 어깨도 따라서 흔들렸다.
 바짝 긴장한 남궁장현의 이마에서 한줄기 땀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 남궁무빈의 서류검토는 모두 끝났다.
 "······나쁘지는 않구나."
 "감사합니······"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구나."
 목소리에 고저가 없어 질책하는 것 같지는 않았음에도, 남궁장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장충이에게 가봐야겠구나."
 남궁무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심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를 남궁장현은 조용히 따랐다.
 남궁장충의 증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궁장현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남궁무빈은 남궁장충이 당한 주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남궁무빈은 은거지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남궁장충의 몸에서 수차례 손을 써, 독기를 진기로서 태워버리거나 밀어낸 지 오래였다.
 아직 몸에 남은 여독과 저주로 인하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남궁무빈은 수시로 남궁장충을 확인하며 직접 손을 쓰며, 한편으로는 영험한 술사를 초빙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남궁무빈이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청한 곳은 바로 화산(華山)의 남천궁(南天宮)이었다.
 대대로 법술(法術)에 있어 종가라고 하는 삼개도문이 있으니, 바로 나부파(羅附派)와 모산파(茅山派), 그리고 화산의 남천궁이 그것이었다. 본시 무림과는 별개의 세계였으나, 과거의 수차례 마교대전 당시 마교의 온갖 사술과 저주를 앞장서서 막아준 이들이 바로 이 삼개도문이었다.
 남궁무빈은 남궁장충의 증세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직접 서신을 작성하여 화산 남천궁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혈교 무리들의 호언장담이 점점 못미더워지는 남궁장현이었다.
 아직까지 남천궁의 도사들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행여 그들이 저주를 풀어낼 수 있게 된다면, 남궁장현의 모든 계책은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으음······”
 두 눈을 감고 있는 남궁장충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독기를 뽑아내어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지만, 남궁무빈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이 주독에 포함된 독기의 일부를 배출해냈을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궁무빈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점차 사그라드는 생명력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독기는 밀어냈으되, 그의 몸에 펼친 사악한 저주가 그의 몸을 좀 먹고 있는 것이었다.
 ‘남천궁에서 늦지 않게 도착을 해야 할 터인데······’
 남궁무빈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의 큰아들에게 펼쳐진 주독. 이것은 그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 옛날 마교의 것이었다.
 그의 둘도 없는 친우를 앗아갔던 독이기에 그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 독이 나왔단 말인가.’
 비록 마교의 것이지만, 마교에서 나왔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남궁무빈의 두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북경의 큰손녀사위가 저질렀단 말이지.”
 “예, 노가주님.”
 남궁무빈은 손을 휘저어 장로들을 물리쳤다. 그의 눈에는 깊은 불신이 어려 있었다.
 “허어······ 제천회란 무리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북경의 그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휘말리게 되었단 말이더냐.”
 북경의 대장군부와 파혼을 하기로 했다는 말에 남궁무빈은 아무 말도 없었다.
 대장군부에서는 아들을 잃었고, 남궁세가에서는 가주가 암습을 당해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
 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남궁무빈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실로 수십 년 만에 맞는 고통이었다.
 ***
 거대한 대장군부의 정문은 초상집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위사는 간 곳 없었고, 굳게 잠긴 대문만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인적마저 끊긴 듯, 황량한 대장군부의 모습에 양운정은 입맛이 썼다.
 살짝 미간을 모으던 양운정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남궁아현의 차가운 얼굴을 살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가 남궁아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면, 미미하게나마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양운정은 오래도록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저 차가운 그녀의 겉모습만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결코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비록 남편에게 어떠한 정도, 추억도 지니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살갑게 대하며, 아껴준 대장군 부부의 마음마저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짓이 결코 옳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대문이 마치 자신을 덮칠 듯이 거대하게만 보였다.
 그녀의 죄책감과 흔들리는 마음은 고스란히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타났건만, 양운정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장천과 무사들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복잡한 상념에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양운정이 양가장에 닿게 해서는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북경에 도착했다고 그를 떨구어 낼 수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로서는 무리였다. 그들은 다만 양운정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란이는 양운정의 곁에 붙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양운정의 본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호기심이 날 만도 했다.
 그 와중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셋째 작은 마님······ 돌아오셨습니까."
 양가장의 총관이 달려 나오며 남궁아현을 반겼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불안한 기색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새카맣게 죽은 얼굴의 총관은 남궁아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뭇거리면서도 그들을 양가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말미에 섰던 양운정은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며 따라 들어갔다.
 양운정을 비롯한 여타의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접객당에 머물렀다. 내당으로 들어선 것은 남궁아현과 총관뿐이었다.
 양운정이야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은 양운정의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양운정은 접객당이 많이 낯설었기에,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분명 그의 기억에는 있던 공간이었지만, 막상 직접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양운정은 기억을 더듬으며 접객당을 나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기겁을 하며 그를 잡으려 했다.
 “야, 양 백호님!”
 “무슨 일인가?”
 다급한 그들의 음성과 달리 양 백호는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그냥······ 구경.”
 “예?”
 “이런 집은 처음 봤기에 그냥 구경이나 하러 가는 길이네.”
 “아, 아니······”
 너무도 담담한 양운정의 말에 당황하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의 뒤로 란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저씨, 나도 갈래요.”
 “그럴까?”
 양운정은 란이의 손을 잡고 접객당을 나섰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다급히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려 쏘아보는 양운정의 눈빛에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헉!”
 찰나지간이었지만, 스쳐 지나간 양운정의 두 눈은 그들의 뇌리 한 구석에 남아 있던 두려움을 이끌어내었다.
 그들이 간신히 두려움을 헤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양운정과 란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양운정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곳은 내당 쪽이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양운정을 의식하는 식솔들은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양운정은 새삼 떠오르는 기억들에 의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접객당을 나서서 외당을 지나 연무장을 걷고 있는 양운정의 눈에 커다란 내당이 보였다. 잠시 연무장에 멈추어 선 양운정은 연무장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양운정의 시간들이 남아 있는 공간들이었다.
 “으음······”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며, 급작스러운 두통에 양운정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치 머릿속의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듯한 느낌, 불쾌했다.
 “아저씨?”
 “아, 아니. 괜찮아.”머리를 뒤로 넘기며,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두통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양운정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정면에 위치한 내당을 향해 다가갈수록 양운정의 두통이 강해져 갔다. 양운정은 두통을 무시하며, 발에 힘을 주어 걸음을 재촉했다. 양운정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남궁아현은 심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내심을 잘 아는지, 선뜻 악역을 자처한 것은 장천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냉혹한 자세를 유지하며, 양가장의 가족들을 핍박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장천은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동시에 남궁세가에서 요구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였다.
 “······그래? 그 아이가 확실히 그런 짓을······”
 양호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앞의 며느리는 설마설마하던 일말의 기대마저 끊어버렸다.
 내당은 무거운 한숨소리로 가득했다. 양 대부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녀의 모습에 두 아들 부부 내외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 그렇다면 시신은 어찌 되었느냐?”
 양호상은 두 손을 내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애절했지만, 그의 물음에 답하는 장천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양 공자는 몸에 독을 품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했습니다.”
 “화, 화장을······!”
 양 대부인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고는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두 며느리가 달려 나와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 여인들의 모습에 양호상을 비롯한 두 형제는 눈물을 삼키느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장내는 여인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남궁아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독비(毒匕)에 꿰뚫린 듯,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장천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그 역시 오열하는 그들의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거칠게 문이 열리며, 한 소녀를 데리고 날카로운 인상의 한 사내가 들어섰다. 상하 흑의를 걸친 사내의 한 손에는 한 자루 철검을 들고 있었고, 반대쪽 손에는 소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좌중의 모든 사람들은 당황했다.
 아니, 장천은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아······ 저, 야, 양 백호님······ 여기는 어떻게?”
 그간 냉막했던 얼굴은 어디가고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장천은 속으로 그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무사들에게 욕을 하며 다급히 양운정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양운정은 묘한 미소를 띠우며 그를 흘깃 바라보고는 스쳐지나갔다.
 남궁아현 역시 느닷없는 양운정의 등장에 당혹스러워하며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어진 그의 행동은 그녀를 공황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양운정은 란이에게 검을 주어 한쪽으로 가 있게 하고는 양가의 식솔들 앞에 침착하게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이제 돌아왔습니다.”
 “······!”
 “······!”
 낮은 목소리였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는 비수와 같이 파고든 말이었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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