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안휘성(安徽省)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을 대보라면 대부분 남궁세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남궁세가가 안휘성 제일 가문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남궁세가를 제외한 다른 가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문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하나같이 합비(合肥)에 자리 잡은 풍가장(風家莊)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 많고 많은 가문들 중에 안휘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풍가장을 손에 꼽을까.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풍소천이라는 인물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듣게 될 이야기는 안휘성은 물론 중원 무림인들에게 풍가장이란 이름을 각인시켜 버린 희대의 풍운아 풍소천(風昭天)이란 인물에 대한 것이다.
제1장 소문
“요즘은 왜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한지.”
합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진성 객잔의 주인 왕진보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손님도 없는 데다, 날씨까지 도와주질 않아 매상이 오르긴 힘들 것 같았다.
“주인어른, 얼굴 좀 펴십시오. 오던 손님도 나가겠습니다.”
“뭐야?”
점소이 용삼의 툴툴거리는 말에 왕진보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그렇지 않아도 장사가 안 되는데 점소이 놈까지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용삼은 틀린 말도 아닌데 짜증을 낸다며 입술을 삐죽이다가, 마침 들어오는 손님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뛰어갔다.
“어서 오십쇼!”
막 짜증을 내려던 왕진보 역시 손님이 들어오자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헤헤거렸다.
“간단히 술상 좀 봐 주게. 몸이 으슬으슬하군.”
부슬비라곤 하지만 초봄에 내리는 비는 여전히 한기를 느끼게 했다.
점소이 용삼의 안내를 받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사내는 옷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 냈다.
객잔 안에는 사내를 포함해 모두 6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혼자 앉은 사내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사내는 연방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다섯 사람들의 모습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중원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수집해 소설을 쓰는 게 사내의 일이었는데, 최근에는 쓸 만한 소재를 건지지 못해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풍가장은 풍세윤을 1대로 계산해야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풍세윤이 풍가장의 터를 닦은 것은 맞지만, 실제로 장주 자리에 오르진 못했다고.”
얼굴이 길쭉한 말상 사내의 말에 뚱뚱하게 생긴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막 술잔을 내려놓던 털보 사내가 입을 열었다.
“풍무진이 제 아비의 위패에 풍가장 1대 장주라고 새겨 넣었다니까.”
털보의 말에 뚱뚱한 사내가 곧바로 반문했다.
“니가 봤어? 그것도 소문일 뿐이잖아.”
“소문이었다 해도 내 귀에 들릴 정도면 없는 위패도 만들어 놨을 거야.”
털보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젠장! 술 다 떨어졌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점박이 사내가 털보의 말을 듣더니 곧장 화를 냈다.
“이 자식이! 그게 마지막 술인데 혼자 다 처먹어?”
“그래서 털보는 빼자고 했잖아.”
점박이 사내의 말에 이마가 훤히 벗겨져 나이를 짐작하기 애매한 사내가 역정을 냈다.
“에이! 돈도 없고 집에나 들어가자고. 마누라 엉덩이나 두들겨 봐야지.”
말상 사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나머지 사내들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가진 돈이 없다 보니 술 한잔 마시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때 부슬비를 맞고 들어왔던 사내가 말상 사내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응? 나 말이오?”
“괜찮다면 그쪽 분들에게 술 한잔 사고 싶은데 말이오.”
사내의 말에 다섯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본 사람이 술을 산다고 하니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쪽이 왜 우리들에게 술을 산단 말이오?”
“일단 내 소개부터 하리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5명이 앉아 있던 자리로 옮겨 왔다.
“허! 이 사람 뭐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술이 올라와 있던 털보가 기분 나쁜 눈으로 사내를 훑어봤다.
“내 소개를 듣고 나면 이해가 될 것이오. 일단 앉아들 보시오. 이보게, 점소이, 술과 안주를 이쪽으로 가져다주게나.”
사내는 하하! 웃음을 보이더니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나는 제남(齊南)에서 온 이 모라 하오.”
“제남? 산동 출신이요?”
점박이 사내가 제남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렇소. 혹시 그쪽 사람이요?”
“그건 아니고, 우리 마누라 고향이 산동이거든.”
“아하! 그렇구려. 이거 반갑소.”
술을 산다는 사내는 점박이 사내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거,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엄한 소리 했다간 평생 죽만 먹고 살 줄 아시오.”
점박이 사내는 산동 출신의 마누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오히려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소. 헛소리하려고 술을 산다고 했겠소. 나는 중원 곳곳의 이야기를 모아 책을 쓰는 사람이오.”
“책?”
손가락 하나는 일 자요, 손가락 2개는 이 자, 손가락 3개는 삼 자라는 것까지는 알지만, 사(四) 자가 왜 손가락 모양을 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이들 5명이었다. 한마디로 무식이 넘쳐흐르는 인간들에게 책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곧바로 인상들이 구겨졌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 빨리 용건부터 말해야겠다.’
다섯 사람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지자 사내는 급히 용건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조금 전 다섯 분이 나누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겨서 말이오.”
“우리 이야기?”
대머리 사내가 ‘무슨 이야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있지 않소. 풍가장이라던가?”
“아, 풍가장.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해하는 거요?”
대머리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말하지 않았소.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 소재가 될 만한 것을 찾고 있다고.”
“흠··· 그러니까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그걸 글로 쓴다, 이거요?”
말상 사내가 대충 이해를 했는지 확인차 질문했다.
“바로 그거요!”
사내는 손뼉까지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하니 풍가장이란 곳에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흥미가 생겨서 말이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주리다. 어이, 여기 술 주라고 했잖아!”
털보 사내는 언제 성을 냈냐는 듯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나머지 네 사람도 ‘풍가장 이야기라면야!’ 하면서 주섬주섬 엉덩이를 붙이기 시작했다.
‘호! 이것 봐라. 잘하면 합비에서 이야깃거리 하나 건지겠구나.’
글을 쓴다는 사내는 다섯 사람 모두가 한입이 된 것처럼 풍가장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풍가장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이제 3세대를 이어져 내려왔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줘도 60년이 넘지 않는다.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여타 가문들에 비하면 확실히 역사가 짧은 곳이 풍가장이지만, 사람들에게 안휘성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으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그 역사에 있다고 한다.
6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안휘성에서 힘 좀 쓴다는 여러 가문들의 견제를 이겨 내고, 마치 처음부터 안휘성에 있었던 가문처럼 탄탄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풍가장이란 이름으로 이들 일족이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장돌뱅이처럼 흘러 다니던 풍세윤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이들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그냥 ‘낭인’이었다.
칼을 차고 있긴 했지만 지니고 있는 무공이라고 해봤자 삼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재산을 이야기한다 해도 가진 거라고는 달랑 두 쪽밖에 없는 인물.
아무리 살펴봐도 성공과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에게 딱 한 가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이라고 끄덕여 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천하제일까지 논할까마는, 아무튼 엄청나게 잘생긴 것만은 사실인 듯싶다.
당시 합비 외곽에 이가장(李家莊)이라는 곳이 있었다는데, 딱히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당할 정도로 힘이 없지도 않은 나름대로 지역 유지 행세를 하고 사는 집안이라고 했다. 대대로 손이 귀했던 이가장은 당대에 이르러 딸 하나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을 보지 못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바로 데릴사위였다.
이가장주는 대를 이어 이씨 성을 보존할 일종의 씨받이를 찾고 싶어 했다. 딸을 시집보내는 입장이라면 잘나고 똑똑한 놈과 짝을 지어 주고 싶었지만, 그런 놈이 데릴사위로 들어올 리도 없었고, 자칫 그 똑똑한 머리로 이가장을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 와중에 딸의 눈에 든 사람이 있었으니 가진 것은 두 쪽밖에 없고, 재주는 고만고만해 보이는 풍세윤이었다. 풍세윤 역시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한곳에 정착하고 싶던 차에 안성맞춤의 자리였고 말이다.
“잠깐만. 그 풍세윤이란 사람이 합비에 정착하고자 찾아온 것이 확실한 것이오?”
한참 붓을 놀리던 글쟁이 사내가 말상 사내에게 확인차 질문을 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오래전 일이니까. 하지만 다들 그렇게 알고 있던데?”
“아,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소. 계속 들어 봅시다.”
여기까지는 이가장주의 계획대로 모든 게 정리되는 듯했단다. 하지만 고만고만해 보이고 내세울 거라고는 멀쩡한 얼굴 하나뿐이던 풍세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가장을 넘어설 만큼 거목으로 성장해 버렸다.
그것 참 사람 팔자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비빌 곳이 없어 떠돌긴 했지만, 막상 뒷배가 생기고 나니 감춰져 있던 재능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것이다.
풍세윤이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산술 분야였다는데, 아내에게 꾸다시피 얻어 낸 종잣돈으로 10년 만에 안휘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갑부가 되었다.
대부분 여기까지만 들으면 풍세윤이 장사를 했다거나 상단을 꾸려 갑부가 되었나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드러난 재주는 산술이다. 사람을 부리거나 기업을 일구는 쪽에는 그다지 능력을 보이지 않았지만, 숫자를 세고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한 머리를 지녔다는 뜻이다.
그럼 뭐가 있겠는가.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 뻔하지 않은가. 풍세윤의 직업은 바로 고리대금업이었다.
“아주 지독했지. 우리 아버지도 풍세윤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는데, 이자에 이자가 붙어 아주 허리가 부러질 뻔했다고 했으니까.”
점박이 사내의 말에 글쟁이 사내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라고 부연 설명을 넣었다.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이가장주 입장에서는 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 처가살이에 눈칫밥이나 먹이며 씨나 받으려고 들인 놈이 제 마누라는 물론이고, 자신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마음대로 휘둘리겠소.”
점박이 사내가 말을 끝내자 이번에는 대머리 사내가 입을 열었다.
“풍세윤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중에 첫째 아들과 둘째 딸까지는 빚 갚는 셈 치며 이씨 성을 물려주었지. 하지만 마지막으로 태어난 막내에게는 자신의 성을 붙여 풍씨의 대를 잇게 했다는군.”
대머리 사내가 풍가장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벌컥벌컥 술을 마시던 뚱뚱한 사내가 자신 차례라는 듯 입을 열었다.
“풍세윤이 합비 풍가장을 만드는 데 일조한 부분은 딱 여기까지였지. 막내아들이 열여섯 되던 해, 젊어서 얻었던 상처가 지병이 되면서 먼저 세상을 떠나 버렸거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풍세윤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풍무진은 셈을 잘하는 것은 둘째 치고, 기업을 이끄는 쪽에도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했다. 재미있는 것은 첫째와 둘째는 풍세윤의 재주를 물려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가장 사람들은 먹고사는 데만 문제가 없다면 딱히 부지런을 떨지도 않았고, 가업을 확장하고자 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는데······. 그것 참,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안빈낙도만 이뤄진다면 세상이 어찌 흘러가던 신경을 쓰지 않는 무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좋게 말하면 성격이 넉넉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마디로 게으름 그 자체인 것이다.
“이씨 성을 물려받은 첫째와 둘째는 희한하게도 그런 이씨 일족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신생 상단이나 다른 가문들의 공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지. 풍무진은 그 기회를 틈타 이가장을 자신의 그늘 속으로 끌어당기더니, 몇 년 뒤 이가장이란 현판을 내리고 풍가장이란 현판을 달더라고.”
뚱뚱한 사내는 풍무진의 태도가 배은망덕하지 않느냐고 분통 비슷한 것을 터트리더니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말상 사내가 말을 이었고, 글쟁이 사내는 부지런히 받아쓰기 시작했다.
풍가장을 안정시키다 보니 어느덧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된 풍무진은 후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풍가장에 속한 상가들 중 비단을 사고파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하가(昰家)의 딸에게 마음이 있던 풍무진은 적당한 기회에 혼례를 올리고 가정을 이뤄야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세상살이에 열심이었던 풍무진은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을 만큼 재산을 모아 놓은 상태였지만, 가진 게 돈밖에 없다 보니 다른 가문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
“한두 번은 웃어 넘겼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무시를 당하다 보니 어느 날인가 속이 뒤틀리고 말았지.”
점박이 사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뒤틀린 속을 풀기 위해 풍무진이 선택한 길은 명문가와 혈연을 맺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명문이란 소리를 듣는 가문이 뭐가 부족해 풍무진에게 딸을 내놓겠소.”
“호오! 그렇기도 했겠소.”
글쟁이 사내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놀렸다.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한동안 출사를 못해 가세가 기운 집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회녕(懷寧)에 연씨 성을 가진 가문 하나를 찾아냈는데, 풍무진이 생각한 조건에 딱 맞아떨어졌다. 단지 하나 흠이라면 그 집안의 딸이 이미 한 차례 출가를 했었다는 점이다.
멀쩡한 처녀가 아닌 출가를 했다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것을 알고 어떤 사연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당장 불편한 표정을 짓는 연씨 가문 사람들 때문에 결국 궁금증을 덮어 두어야 했다. 자칫 긁어 부스럼이 되는 날에는 어렵게 잡은 혼사 자리가 깨질 수도 있으니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풍무진 입장에서는 풍가장이 안휘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맺어진 첫 번째 부인은 연미리(燕美璃)라는 여인이었는데, 아들 하나를 데리고 풍가장에 들어왔지.”
“아니, 남의 씨로 낳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단 말이오?”
글쟁이 사내는 붓을 놀리다 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냐는 듯 사내들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처지 아니오. 결국 연미리와 그 아들까지 한 가족으로 받아들였답디다.”
“그것 참, 풍무진이란 사람도 속이 말이 아니었겠네.”
글쟁이 사내는 점박이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붓을 놀렸다.
여기까지는 풍무진의 계획대로 모든 게 흘러갔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명성 있는 집안과 혈연으로 맺어지자 주변에서도 대놓고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풍무진을 욕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자칫하면 회녕 지역의 가문들과 얼굴을 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 정도가 지나갔다. 풍무진은 명가 출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아들을 얻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해도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들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른 놈의 씨를 데려다 풍가장을 물려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약도 먹어 보고, 민가에 전해지는 요상한 술수도 모조리 동원해 봤지만 아내에게서는 전혀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마음이 답답해진 풍무진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 보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만 듣고 돌아왔지.”
“혹시 풍무진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었소?”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맞지만, 풍무진이 아니라 마누라가 문제였답디다. 아, 갑자기 마누라 보고 싶네.”
산동 출신의 마누라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박이 사내는 말을 하다 말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다음은 내가 이야기하리다.”
뚱뚱한 사내가 점박이 사내를 밀어내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는 고사하고 집안에 식객만 늘린 셈이니 풍무진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늘이 풍무진의 답답한 처지를 알아준 것일까. 예전에는 그토록 부탁을 해도 문전박대를 하던 명가 한 곳에서 매파를 보내왔다. 집안에 과년한 딸이 하나 있는데 데려가 달라는 것이다.
풍무진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화씨 가문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첫 번째 부인은 그렇다 치자. 지역 토착민과 혈연관계를 맺어 풍가장의 위치를 돈독히 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얻은 부인까지 혹을 하나 달고 들어온 것이다. 자신이 남의 자식 맡아서 키워 주는 사람도 아니고,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두 번째 부인도 말이오?”
글쟁이 사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풍무진도 잔뜩 화가 났는지 당장 화씨 가문으로 달려가 이 일을 따지고 싶었지.”
“싶었지로 끝났다는 말은 그러지 못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때 좀 웃기는 소문이 돌았거든.”
말상 사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문 말이오?”
“그게 말이지······.”
딱 그 시점에서 사람들 사이에 소문 하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풍가장주가 돈만 밝히는 줄 알았더니, 어려운 처지가 된 여인들을 쉬 지나치지 못하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 소문의 출처가 어느 곳인지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그렇게 소문이 나 버렸다면 이제 와 노발대발해 봤자 망신만 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두 번째 부인은 첫째 부인과 달리 미모가 출중하고 자태가 고왔기 때문에 일단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찌 됐든 자신의 아들만 낳아 준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쯤에서 일이 마무리되었다면 풍가장이 합비 사람들에게 유명세를 떨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새로 얻은 부인 역시 3년이 넘도록 자식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풍무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과거 그 의원을 찾아 몸을 살펴 달라고 했다.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일까. 두 번째 부인 역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예전과 달리 풍무진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표정이 덤덤하다고 마음까지 그럴까. 속이 잔뜩 상한 풍무진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에 취해서 밤길을 떠돌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허허! 나 같으면 전부 내쳐 버렸을 텐데.”
글쟁이 사내는 풍무진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며 혀를 찼다.
“아직 끝이 아니오.”
“그렇소? 계속해 보시오.”
세상에 인연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정신을 잃은 풍무진을 구해 준 사람은 상가의 비단을 관리하던 하가의 딸 하은소였다. 말은 안 했지만 은연중 정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 여인이 풍무진을 구한 것이다.
풍무진은 정신을 차리고도 한동안 풍가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몸을 가누기 어려워 신세를 지겠다고 했지만,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몇 달 지나지 않아 하은소에게 태기가 나타났고, 풍무진이 덩실덩실 춤을 다 추었다고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아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보물 같은 아들을 안겨 준 하은소는 산후 허약해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곁을 떠나고 말았다.
풍무진은 아들 이름을 소천(昭天)이라 지었는데, 밝게 빛나는 하늘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소천은 달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고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채 건강하게 자라났다.
소천은 어려서부터 풍씨 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좋은 집안에 드디어 천재가 태어난 것이다.
물론 외모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천하제일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풍세윤의 핏줄 아닌가 말이다.
“소천은 여섯 살이 되기 전 사서삼경을 섭렵했고, 열 살 무렵에는 근방에 선생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 먼 곳에서 사람을 청해야 할 정도였소.”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것 같소. 그 고생 끝에 그런 아들을 얻었다니.”
대머리 사내의 말에 글쟁이 사내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내가 듣기론 머리는 좀 좋기는 해도 천재는 아니라던데.”
점박이 사내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도 들은 것 같다. 풍가장에 신동 난 것처럼 하려고 꾸민 짓이라는 말도 있더라고.”
말상 사내도 점박이 사내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 소문도 있었소?”
글쟁이 사내는 뭐가 진짜냐는 듯 다섯 사내를 바라봤다.
“그런 소문도 있긴 했지만 바보를 데리고 사기를 칠 수는 없지.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으니 소문이 났다고 보는데.”
뚱뚱한 사내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부뚜막에 연기도 그냥 나진 않는다 하니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좋겠구려. 계속 이야기해 주시오.”
“술 좀 더 시켜도 되겠소?”
글쟁이 사내의 말에 말상 사내가 슬쩍 탁자를 보며 술이 떨어졌다는 신호를 보냈다.
“당연한 소리를. 점소이! 여기 술 좀 더 주시오! 수육도 넉넉하게 썰어서 한 상 더 내오고 말이오!”
글쟁이 사내가 얼마든지 먹으라며 추가 주문을 하자, 사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계속해 보겠소.”
글쟁이 사내는 붓에 먹물을 적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풍가장이 합비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긴 했지만, 그 시작이 무척 미묘했던 터라 풍소천의 등장은 풍가장의 미래를 밝혀 줄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천이 등장한 뒤로는 풍가장을 낮춰 부르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미래가 확실해 보이는 소천과 자신의 딸을 엮어 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풍무진 인생에 이 시절만큼 많이 웃고 어깨를 펴고 다닌 적이 없었다 하니, 소천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그토록 영특하고 부지런하던 소천이 12살 되던 해 도가 계열의 책을 접하면서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풍세윤은 물론이고 풍무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가장 꺼려하고 조심하던 이씨 일족의 기운이 소천에게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만사가 형통하고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 유유자적하고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골치 아프게 머리 굴리지 않고 대충 살다 갈렵니다.”
“소천이 그리 말했단 말이오?”
글쟁이 사내는 잘 나가다가 이야기가 이상해진다는 듯 점박이 사내를 바라봤다.
“그게 끝이면 풍가장이 아니지.”
점박이 사내는 신이 난 표정으로 계속 입을 놀렸다.
소천의 탄생으로 입지가 좁아졌던 부인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피어났다. 두 여자는 엄청난 기부금을 내고 화산과 무당에 입문한 자식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상 형제로 기록된 첫째 풍상조와 둘째 풍조양. 그 둘은 각자의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 들더니 한참을 웃었다 한다.
자, 이쯤 이야기했으면 안휘성에서 유명한 가문이 어디냐는 질문에 왜 풍가장이 손가락에 꼽히는지 다들 이해가 됐는가?
보는 눈들이 있어 대놓고 떠들지는 못했지만, 안휘성의 호사가들은 데릴사위 풍세윤에서 시작된 풍가장을 ‘씨받이장’이라고 불렀고, 정략혼까지 동원해도 자손을 보지 못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칠삭둥이 아들을 얻었을 때는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다른 놈의 씨를 받은 게 아닐까 하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 ‘씨받이장’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아들이 천재라 소문이 나면서 합비를 한 차례 크게 흔들어 놓았을 때는 훔쳐 온 씨가 더 튼실한가 보다며 떠들어 댔고, 얼마 전 소천이 ‘유유자적 안빈낙도’라는 말을 했다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자 ‘이씨풍씨이씨장’이라는 괴상한 이름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가장이 풍가장이 되고, 이번에는 풍가장에 이씨 일족의 성향을 가진 소천이 태어났음을 비꼰 것이다(여전히 소천에 대해서는 풍가장에서 씨도둑을 해 얻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남아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풍무진이 씨 없는 종자라는 뜻이다).
“풍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 이름을 떨치겠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상당히 크게 벗어났다고 봐야겠지만, 아무튼 안휘성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 되긴 했으니, 이 정도 유명세면 풍가장을 널리 알리겠다던 풍무진의 바람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글쟁이 사내는 붓을 내려놓으며 다섯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푸하하하!”
“킬킬킬킬!”
“아이고! 배야!”
세 사람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고, 두 사람은 마시던 술에 사레가 걸렸는지 연방 기침을 해 댔다.
“풍가장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으려면 우리에게 삼 일 밤낮으로 술을 사야 할 것이오.”
사내들은 풍가장 이야기를 하자면 아직도 끝이 없다는 듯 킬킬거렸다.
“까짓것 그렇게 합시다. 아예 방을 잡을까요?”
글쟁이 사내는 그게 뭐가 어렵겠냐는 듯 큰소리쳤다.
제2장 가문의 후계자는
풍무진. 풍가장의 장주이며, 안휘성 상권의 3할이 그의 손에서 움직인다는 거부.
거칠 것 없이 살아왔던 풍무진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는지 기력이 떨어져 병을 얻고 말았다.
올해 나이 62세. 2년 전 생일잔치를 할 때만 해도 앞으로도 10년은 거뜬할 것 같던 그였다.
인생사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고 했던가. 그토록 정정해 보이던 풍무진이 어이없게도 반위(反胃)로 쓰러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속이 안 좋아 그러나 싶었지만, 몇 달 사이 급속도로 상황이 나빠지더니 결국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풍무진이 쓰러지자 거금을 내고 무림 문파에 들어갔던 두 아들이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각자 어머니를 따라 풍가장에 들어와 아버지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저 족보상의 아버지일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허벅지를 쥐어뜯어서라도 눈물을 쏟으며 부자간의 끈끈함을 보여야만 했다. 안휘성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거대한 유산을 남겨 두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것이다.
“어버지!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흐으윽!”
“크윽! 아버지!”
풍상조와 풍조양은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비통한 목소리로 풍무진을 불렀다. 이상한 것은 당연히 자리에 있어야 할 풍소천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쿨럭! 나······.”
풍무진이 한 차례 기침을 토해 내고 뭔가 말하려고 하자 풍상조와 풍조양, 그리고 두 부인이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나······.”
“가문은 역시 큰아들인 제가!”
풍상조가 귀를 쫑긋거리며 장남의 위치를 생각해 달라고 하자, 풍조양이 형을 밀쳐 내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허울뿐인 장남보다는 역량 있는 둘째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 아직 안 죽는다.”
“여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의원 말이 오늘내일한다는데.”
첫째인 연씨 부인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유언을 남기라며 재촉을 했다.
“현판만 남은 연씨 가문보다는 우리 화씨 가문에 힘을 실어 주세요.”
둘째 화씨 부인이 연씨를 밀쳐 내며 풍무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그만··· 숨을······.”
풍무진은 거칠게 흔들어 대는 화씨 부인 때문에 숨을 쉬기가 곤란한지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동생!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연씨는 화씨의 허리를 잡아채 뒤쪽으로 끌어냈다.
“형님, 지금 해보자는 겁니까?”
화씨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연씨를 노려봤다. 마치 그동안 많이 참아 왔다는 표정이었다.
“미쳤어? 얼굴에 분만 바르지 말고 머리로 생각 좀 하라고!”
연씨는 유산 상속에 대한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숨이 끊어지면 곤란하지 않느냐며 화씨를 노려봤다.
사실 그랬다. 서열로 따지자면 큰아들 풍상조와 둘째 아들 풍조양이 유산을 상속받는 게 맞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가족 관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풍가장에서 유산 상속에 대한 정통권은 첫째와 둘째가 아닌 막내 소천에게 있었던 것이다.
풍상조와 풍조양은 풍씨 성을 가져다 붙였을 뿐, 풍씨의 핏줄이 아니었다. 저잣거리의 소문에 따르면 소천이 밖에서 씨도둑질로 받아온 자식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연씨와 화씨는 소천이 풍무진의 친자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다가 장주가 죽고 나면 소천 그 아이를 쫓아내면 그만 아닌가요?”
화씨는 뭐가 그리 복잡하냐며 따지고 들었다. 물론 자신들만 살고 있는 작은 집이라면 정통성이니 뭐니 따질 이유도 없었다. 그냥 소천을 쫓아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풍가장이 어떤 곳인가. 합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거대한 장원이 아니던가.
“장원에 엮여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풍가장의 가신들이야. 우리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뼈를 묻은 자들이라고. 그자들이 과연 우리를 가만히 둘까?”
당연히 가신들 입장에서는 풍가장의 후계자로 소천을 내세울 것이 분명했다. 어찌 됐든 풍무진이 자신들에게 유산을 남기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흥! 아무리 가신들이라 해도 어차피 풍가장 식솔들 아닌가요? 제 놈들이 감히······.”
“그 머리로 어떻게 그동안 버텨 왔는지 모르겠네.”
“뭐라구요!”
“큰어머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연씨의 말에 화씨와 그녀의 아들 풍조양이 함께 언성을 높였다.
“그동안 빼돌린 재산이 한두 푼도 아니고, 친정에 가져다준 재물도 이루 말할 수가 없지?”
“그걸 어떻게······.”
“쯧쯧쯧! 저들이 그 사실을 몰랐을 것 같아?”
“······.”
풍무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방패가 되어 줬지만, 그가 죽고 나면 풍가장에 목숨을 걸고 있는 자들이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제 놈들이 어찌 나서겠어요. 오히려 장주가 죽고 나면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잘된 일 아닌가요?”
오래전부터 서로가 풍가장의 돈을 노리고 시집온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풍무진이 멀쩡할 때는 말과 행동을 조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연씨는 화씨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한 년아! 십중팔구 소천 그놈을 앞세워서 우리를 밀어낼 거라는 말이다! 그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하잖아!”
“그··· 그런!”
화씨는 미처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해 봤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 멍청한 짓 좀 그만하란 말이야!”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는 풍무진은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런 여자들을 믿고 10년이 넘도록 살을 비비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자, 그나마 남아 있던 정까지 모조리 떨어져 버렸다.
‘풍가장을 키울 욕심에 괜한 일을 벌여 일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구나.’
풍무진은 과거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자신의 태도를 뼈에 사무치도록 반성했다. 명성과 명망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허상을 좇는 바람에 집안이 콩가루가 된 것이다.
그때, 방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풍가장 총관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연씨 부인은 허락도 없이 난입한 사람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총관, 일을 어떻게 하는 건가.”
화씨 부인 역시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총관에게 신경질을 냈다.
“죄송합니다. 저 사람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총관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연씨는 총관 뒤에서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뉘시오? 어찌 예의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이오!”
연씨 부인은 풍가장의 대부인답게 위엄 어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인상을 쓰고 있는 자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소문이 맞았군!”
“감히 내 돈을 떼먹어?”
연씨와 화씨, 그리고 두 아들은 사람들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돈을 떼먹다니,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말이다. 합비 부자들 중에서도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풍무진이었다. 그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빚을 진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님이 돈을 떼먹다니?”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첫째 풍상조가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쏟아 내며 검병에 손을 얹는 풍상조의 태도에 움찔하는 표정이 되었다.
“여기 보시오. 차용증이 있으니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오.”
돈을 빌려 줬다며 몰려온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차용증을 꺼내 들었다.
“이게 무슨······! 총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연씨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총관을 바라봤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총관 역시 정신을 못 차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풍상조는 사람들 손에서 차용증을 받아 어머니 연씨에게 건넸다. 한동안 차용증을 살펴보던 연씨는 풍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화씨 역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연씨 손에서 차용증을 받아 들었다.
“헉!”
화씨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가, 침상에 누워 골골대고 있는 풍무진 쪽을 바라봤다. 완전히 어이없는 눈빛으로 말이다.
“금자 삼만 냥이라니··· 도대체 무슨 짓을······.”
금자 3만 냥이면 은자로 60만 냥이다.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인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금자 삼만 냥이라니! 당신들이 무슨 수로 이렇게 큰돈을 빌려 줬단 말인가!”
연씨는 빌리는 것은 고사하고, 빌려 줄 수도 없는 액수라고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당연히 개인이 융통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니 우리가 모두 나선 게 아니오!”
“그럼?”
“나는 강소성에서 만가 전장을 운영하고 있소.”
“나는 절강에서 전장을 운영하오.”
“나 역시 하남에서 전장을 운영하고 있소!”
연씨와 화씨는 방 안으로 난입한 자들의 정체가 각 성의 금전을 쥐락펴락한다는 전장의 주인들임을 알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해졌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금자 3만 냥이 천문학적인 금액이긴 하지만, 각 성의 전장들이 돈을 긁어모았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당신들 역시 돈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니 무작정 빌려 주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많은 돈을 왜 빌려 준 것이오?”
연씨는 속이 탔는지 돈을 빌려 준 전주들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당연히 돈이 될 것 같으니 빌려 준 것이고, 담보가 있으니 융통을 해준 것이오. 그런데 돈을 벌어 줄 당사자가 병을 얻어 오늘내일한다고 하니 불원천리 날을 새 가며 달려온 것이오.”
“우리도 소문으로 끝나길 바랐단 말이오!”
전주들은 자칫하면 자신들 역시 파산을 하게 생겼다며 가슴을 탕탕 내리쳤다. 그러자 풍조양이 앞으로 나섰다.
“혹시 아버님께서 그 돈을 왜 빌렸는지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풍조양의 말에 액수에 눌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 사람이 눈을 반짝였다. 그 엄청난 돈을 가져다 바닷속에 버렸을 리는 없을 테고, 뭔가 투자를 했을 게 분명했다. 사업이 망해서 쫓아온 것도 아니고, 사업의 책임자가 병석에 누웠다는 말에 달려왔다고 했으니 어쩌면 투자금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오?”
전주들의 말에 네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허!”
전주들은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도 그것이 궁금하오.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것이오. 아무리 담보가 잡혀 있다고는 하지만, 빌려 간 돈에 비하면 삼분지 이밖에는 되지 않으니 남은 돈이 회수가 될지 확인을 하려고 온 것이란 말이오.”
“아니, 그 큰돈을 빌려 주면서 어디에 쓸 돈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오?”
풍조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전주들을 바라봤다.
“당연히 물어봤소. 하지만 사업상 비밀이 새어 나가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하니 더 이상 물어보질 못했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풍가장 장주가 전 재산을 담보로 사업을 벌이는데, 그 정도 사항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으니 말이오.”
확실히 풍가장의 신용은 중원 제일이라 할 만했다. 금자 3만 냥 중 2만 냥은 담보를 걸고 빌렸다면 1만 냥 정도는 신용 대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
전주들의 말에 네 사람의 시선이 침상에 누워 있는 풍무진에게 향했다. 유산은 고사하고 당장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부터 알아내야 할 판이었다. 자칫 일이 꼬이는 날에는 대신 빚을 갚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 풍가장 가신들이 우르르 풍무진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중원 곳곳의 전장 주인들이 차용증을 들고 찾아왔다는 말에 급히 달려온 것이다.
“대부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신들은 은자도 아니고 금자 3만 냥에 이르는 차용증을 확인하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풍가장의 모든 것을 담보로 걸었다니!
연씨 모자와 화씨 모자는 둘째 치고 가신들까지 마음이 급해졌다.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풍가장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그때, 숨을 헐떡이고 있던 풍무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후··· 후계자는······.”
풍무진의 말에 방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귀가 섭선 펼쳐지듯 활짝 열렸다.
“처··· 첫째······.”
풍무진의 입에서 첫째란 말이 흘러나오자 풍상조와 연씨 부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담보를 제하고도 금자 1만 냥이라는 빚이 남는다는데, 그 말인즉 풍가장의 후계자가 되는 순간 완전히 빚더미에 깔려 죽게 되는 것이다.
“네? 자세히 말해 주세요.”
풍무진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연씨 부인은 잘 안 들린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풍무진 입가에 바짝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볼로 입을 막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세히 들으려 노력하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연씨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풍무진의 발언을 차단하는 중이었다.
“네? 둘째라고요?”
연씨의 입에서 느닷없이 둘째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이번에는 화씨 부인과 풍조양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던 것을 생각하면 웃기는 장면이었다.
“형님, 함께 들어요!”
화씨 역시 다급한 눈빛으로 풍무진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 소천에게 말인가요?”
“역시 당신은 소천을······.”
연씨와 화씨 입에서 거의 동시에 소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풍상조와 풍조양의 입에서는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찌 장남을 두고······.”
“어린 동생에게 그런 큰 짐을······.”
두 사람이 각각 속마음과 다른 안타까움을 내비칠 때, 두 여인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공!”
“상공!”
두 여인은 풍무진을 끌어안더니 창자라도 토해 낼 듯 거칠게 통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풍무진이 생을 달리하자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이었다.
전주들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거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담보로 잡힌 풍가장과 하위 사업장을 모두 처분한다 해도 1만 냥이라는 거금은 어찌한단 말인가. 자칫하면 풍가장의 뒤를 이어 자신들 역시 파산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풍무진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총관이 풍가장의 가신들과 전주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주 몇몇은 이성을 잃어버린 듯 고함을 지르며 풍무진을 욕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따라 나왔다.
“풍 장주가 저렇게 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우리도 상황이 급한지라······.”
전주 한 명이 가신들을 바라보며 차용증을 흔들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그나저나 소천 공자는 아직도 장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오?”
유기(鍮器:놋그릇)를 담당하고 있던 가신 한 명이 사태가 지금에 이르렀는데도 소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인 말씀에 따르면 연통을 넣은 지 보름이 넘었다 하더이다.”
“허허! 도대체 어디까지 가셨기에······.”
다른 가신의 대답에 질문을 했던 가신이 답답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찌할 것이오? 작년에 소천 공자가 한 말을 모두 들었지 않소. 삼 공자는 풍가장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소.”
“장주님의 유일한 핏줄이 그 모양이니··· 어쩌면 풍가장은 이미 망조가 들었었는지도 모르겠소.”
가신들은 장주가 살아 있다 해도 후계자가 그 모양이니, 풍가장의 미래는 굳이 고민해 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가신 한 명이 물끄러미 동료들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그 질문에 한동안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결국 한두 명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더니 대부분 공감하는 눈빛이 되었다.
다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오랫동안 돈을 만져 온 이들답게 곧바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동안 풍가장 덕에 먹고살긴 했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발을 빼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임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나 여타 긴 역사를 가진 가문이라면 모를까, 1세대에 겨우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기에 타개책을 찾는 것보다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쪽으로 먼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풍무진이 그토록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이런 것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가문들, 그 가문을 유지하는 모든 이들의 끈끈한 유대감, 자부심, 그리고 그것을 명예로 아는 사람들.
풍가장을 열고 창대한 꿈에 부풀어 있던 풍무진에게 그들의 결속된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였었다.
***
“장주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의 말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하인의 말에 소천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빈낙도나 부르짖는 이씨의 삶이 아닌, 도전하고 역경을 넘어서길 즐기는 풍씨의 마음을 택하기 전에는 거처를 떠나지 말라 하셨습니다.”
“거처를 떠나지 말라?”
“그렇습니다.”
“뭐, 그렇게 하지. 쓸데없이 여기저기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잘됐군.”
소천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전하는 하인을 보며 가서 일이나 보라고 했다. 거처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 역시 추구하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풍소천이 거처에서 빠져나온 것은 하루 종일 식사하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던 날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언제나 밥을 가져오는 하인이 탁자 위에 상을 차리고, 밥 먹으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 아침은 그렇다 쳐도 점심까지 밥이 나오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소천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이 찾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끼니를 거르는 것은 안빈낙도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처를 나와 걷기 시작한 소천은 전각 2개를 더 지났음에도 인기척이 없자 연방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가장에 상주하는 사람만 해도 1천여 명이 넘는데, 그 많던 사람들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어딜 갔나?”
소천은 풍가장에 큰 행사라도 있나 싶어 걷는 속도를 빨리했다.
“어라?”
풍가장의 대소사를 치르는 중앙 전각에 도착하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지 하는 표정으로 급히 달려왔던 소천은,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며 지전(紙錢)만 흩날리고 있는 전각을 발견했다.
“누가 죽었구나.”
짙은 향냄새와 곳곳에 흩어진 지전을 보며 소천은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집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왠지 으스스한걸.”
소천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중앙 전각에 들어섰다. 그래도 전각 안에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마음과, 전각 안에 모셔진 위패를 보면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딸그락! 떼구루루!
전각 안으로 발을 내디디던 소천은 발끝에 뭔가 차이면서 굴러가는 소리를 내자, 자연스럽게 그 물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기······.”
제를 지낼 때나 사용하던 자단목으로 만든 목기 하나가 발끝에 차여 한참을 굴러간 것이다.
“확실히 누군가 죽긴 죽었구나.”
위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상주 노릇을 하고 있던 청년 하나가 그릇 굴러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삼 공자님?”
“응? 너는 마삼이가 아니냐?”
‘마삼이는 고아인데 그새 부모를 찾은 건가?’
소천은 상복을 입고 위패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마삼을 보며, 다시 한 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흐윽! 삼 공자님!”
마삼은 마치 3일은 굶은 몰골을 하고 있는 소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뭐, 뭐냐!”
소천은 미친 소처럼 자신을 향해 질주해 오는 마삼을 피하고자 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평소에도 남는 것은 힘밖에 없다는 마삼의 돌격은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소천을 껴안은 마삼은 바닥을 뒹굴며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엉엉! 도련님!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뭐야? 왜 그래? 널 버렸던 부모라도 찾은 거야? 그런데 만나자마자 죽어 버린 거야? 그런데 다들 어딜 간 거지? 집안에 일이 있다면 나도 불렀어야 하잖아.”
소천은 궁금한 게 많았는지 설명 좀 해보라며 연방 질문을 쏟아 냈다. 마삼은 소천의 질문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통곡을 시작했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도련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엉엉엉!”
“무슨 소리야?”
“장주님께서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뭐얏?”
소천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에 놀람과 황당함이 어우러진 표정을 짓더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마삼을 급히 떼어 냈다.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마삼이었지만, 충격을 먹은 모습으로 소천이 발버둥 치자 껴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비켜 봐!”
마삼의 손에서 풀려난 소천은 그를 밀치듯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단 위에 모셔진 위패를 확인했다.
<풍가장주(風家莊主) 무진(貿進) 신위(神位)>
“이, 이게 도대체······.”
소천은 꿈이라도 꾸는가 싶어 연방 눈을 비비더니 다시 한 번 위패를 확인했다.
“그토록 정정하셨던 분이 어찌 돌아가신단 말인가!”
소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마삼을 바라봤다.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마삼은 소천의 반응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야?”
“장주님께서는 반위를 앓고 계셨습니다. 두 달 전부터 몸이 약해지시더니, 얼마 전부터는 아예 거동을 못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럴 리가··· 그 정도 상황이었다면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리 없잖아!”
“도인을 만나 공부를 청하고 오겠다며 편지 한 통 던져 놓고 떠나신 분이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마삼은 오히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누굴 만나? 내가 편지를 썼다고?”
소천은 그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냐며 연방 질문을 해 댔다.
“대마님과 작은 마님께서 그러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장주님께서 무척 속상해하셨고 말입니다.”
마삼은 이제는 원망에 가까운 표정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난 거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어!”
“네? 그게 무슨······.”
이번에는 마삼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언제 어딜 갔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혹시?”
마삼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소천을 바라봤다.
“뭔데?”
“휴! 결국은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마삼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냐니까!”
“대부인과 작은 부인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계략?”
소천은 큰어머니가 자신을 상대로 계략을 꾸몄다는 말에 웃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착하신 분이 그럴 리 없다.”
“도련님!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도련님이 추구한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치중하고자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소천은 마삼의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형님들은 물론이고, 두 분 어머니들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느냐! 그런데 나를 계략에 빠트리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천의 말에 마삼은 뭔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소천이 손을 들어 말을 막더니 위패 앞에 무릎을 꿇자,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아 현실감이 없다. 눈물도 나지 않고 기분이 묘하구나.”
“도련님······.”
마삼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듯 울음을 집어삼켰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실감을 하지 못해 우두커니 무릎만 꿇고 있던 소천의 눈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울음소리. 꺼억거리는 울음소리가 중앙 전각에 울려 퍼졌다.
제3장 그냥 배를 째라니까
마삼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떠나 버린 황량한 풍가장.
마삼의 도움을 받아 상을 마무리한 지도 벌써 열흘 전이었다. 소천은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하늘만 보며 지냈다.
“도련님, 기운을 차리셔야죠.”
“하아!”
소천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마삼을 바라봤다.
“마삼아.”
“네, 도련님.”
“너는 왜 떠나지 않는 것이냐?”
“네?”
왜 떠나지 않느냐는 소천의 물음에 마삼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떠났잖아.”
“흥! 은혜도 모르는 그 인간들 이야기라면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배 곪고 힘든 인간들 데려다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 줬는데, 장주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나 몰라라 한 사람들입니다.”
마삼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쯧쯧쯧! 그렇게 둔해서야······.”
“둔하다뇨. 의리가 있는 겁니다.”
마삼은 전혀 다르다는 듯 허리에 손까지 올리며 대답했다.
마삼은 올해 20살이 된 전형적인 시골 청년이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데, 구걸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풍가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겨울에 얼어 죽을 뻔한 걸 자신이 발견하고 집 안으로 들였는데, 그 뒤로 저렇게 나름대로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충성심을 발휘했다.
정작 마삼을 구해 줬던 자신은 마삼이 장원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상단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후회할 거야.”
“킁! 후회는 무슨. 도련님이 풍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는 일 아닙니까. 천재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투박하고 단순한 성격. 소천은 마삼이야말로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들과 어머니들의 계략이었다곤 하지만, 풍씨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세상에 나오지 말라고 말을 전하던 하인의 목소리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풍씨의 삶이라······.”
하인의 말을 음미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던 소천은 장원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마삼 역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자 소천을 따라 전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장원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10명이었는데, 아름답게 생긴 소녀와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 하나, 그리고 칼을 찬 무사들이 모두 여덟이었다.
“누군데 남의 장원에 함부로 들어온 거냐!”
마삼이 앞으로 나서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염소수염 노인이 귀찮다는 듯 무사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무사 2명이 앞으로 달려 나와 마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칼을 뽑아 들지는 않았지만, 정식으로 무예를 수련한 자들이었기에 보통 사람들과는 몸놀림이 전혀 달랐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상식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무사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낸 마삼이 으랏차차! 기합 소리를 내며 무사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것이다.
“크악!”
“컥!”
상대를 무시했던 무사 2명은 쌍코피를 터트리며 나가떨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기절을 하거나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챙!
챙!
무사 둘은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앞 다퉈 칼을 뽑아 들었다. 쌍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어 모양새가 좀 안 나긴 했지만, 그래도 칼을 뽑아 들자 확실히 두려움이 생겼다.
“남의 집에 찾아왔으면 용건을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닌 듯싶소. 무작정 주먹부터 휘두르는 것은 무뢰배들이나 하는 짓 아니오.”
소천은 혹여 마삼이 칼이라도 맞을까 두려워 급히 말을 건넸다.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청산유수네. 무기는 쓰지 말고 일단 패!”
“존명!”
소천은 노인을 향해 한 말이었는데, 정작 대답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입을 열면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날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던 소녀가 저자에서 주먹패들이나 쓸 법한 어투로 대답한 것이다.
“뭐? 일단 패?”
소천은 소녀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풍가장의 유일한 적자이자 후계자인 나를 향해 일단 패?’
그렇지 않아도 응어리 진 가슴 때문에 한바탕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던 소천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신과 마삼을 향해 달려드는 무사들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방심한 적의 장난스러운 공격이라면 모를까, 마음 단단히 먹고 달려드는 무인들의 공격은 하인 마삼이나 책벌레 소천이 상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야심 차게 주먹을 쥐고 달려 나갔던 마삼과 소천은 정말 복날 개 패듯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얻어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바닥난 체력에 소나기 맞듯 무인들의 공격을 당하게 되자, 두 사람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츄악!
“어푸! 어푸!”
“어푸푸푸!”
정신을 잃고 있던 두 사람은 얼굴에 차가운 물이 뿌려지자 급히 고개를 흔들어 대며 숨을 골랐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인식을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패!’라는 명령을 내렸던 소녀를 발견하고는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쿨럭! 이게 무슨 행패요······.”
소천의 시선이 소녀의 눈과 마주쳤다.
“아직 멀었네. 또 패!”
“존명!”
“자, 잠깐! 뭐하자는 거야?”
소천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이번에도 기절을 할 때까지 얻어맞았는데, 두 번째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입만 열어 봐야 눈앞에 있는 요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눈치가 좀 생겼나 보네. 이번에도 주둥이를 나불댔다면 이삼 일 못 깨어나게 패줄 생각이었는데.”
소녀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하고는 소천을 바라봤다. 비록 소천이 입을 다물긴 했지만 눈빛까지 죽어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소녀를 보는 소천의 시선은 뜨겁다 못해 녹아 버릴 지경이었다.
“어디서 눈을 부릅뜨는 것이냐!”
염소수염 노인이 소천의 도발적인 눈빛에 발끈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어지는 소녀의 음성에 조용히 물러섰다.
“그 정도 눈빛은 되어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마삼도 잠시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조용히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각자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지만 먼저 입은 열지 않았다. 소천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불청객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할 만도 하련만, 상대를 노려보기만 할 뿐 입을 다문 상태였고, 소녀 쪽에서는 분명히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을 텐데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결국 당사자들보다 더 답답해진 구경꾼들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삼과 염소수염 노인네가 동시에 입을 연 것이다.
“아가씨, 시간은 금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도련님,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두 사람의 말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소천과 소녀의 눈싸움이 드디어 끝장을 봤다. 하지만 눈싸움을 끝냈을 뿐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누구냐, 넌.”
말라비틀어진 소천의 입이 조그맣게 열렸다.
“네 주인.”
소녀 역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오는 말이 좀 황당했다. 느닷없이 장원을 쳐들어와 사람을 패더니 이제는 자기가 주인이라니, 소천은 허허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웃어?”
소녀는 소천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염소수염 노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험험!”
염소수염 노인은 짧게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소매에서 꺼내든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마치 황제가 신하에게 보내는 칙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풍소천. 나이 십칠 세. 풍가장 이대 장주 풍무진의 유일한 혈육.”
노인의 입에서 자신의 신상 명세가 줄줄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소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녀와 노인이 어떤 자들인지는 몰라도 순순히 물러날 자들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염소수염 노인의 두루마리 낭독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오 세에 이미 천재로 소문이 날 정도로 명석한 머리를 지녔으나, 과거 풍가장의 전신인 이가장의 성향이 나타나면서 나태해지고 게을러짐.”
염소수염 노인의 말에 소천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안빈낙도라 하는 것이다, 늙은이.”
쇠귀에 경 읽기라고 했던가. 염소수염 노인은 소천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쭉 자신의 할 일만 했다.
“중원 일곱 개 전장에서 금자 삼만 냥을 융통. 이만 냥은 풍가장과 그에 소속된 사업을 담보로 했으나, 나머지 일만 냥은 신용 대출.”
“뭐, 뭐라고?”
소천은 아버지 풍무진이 풍가장의 전 재산을 담보로 금자 2만 냥과 신용 대출에 의해 1만 냥을 빌렸다는 대목에서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리 장원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도 그 역시 풍씨 일족이다. 셈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그였기에, 금자 3만 냥이 얼마나 엄청난 돈인지 곧바로 인지한 것이다.
“마삼, 저게 무슨 소리야?”
소천은 유일하게 풍가장에 남아 있던 마삼에게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마삼은 불청객의 입에서 느닷없이 금자 3만 냥에 대한 대출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흙빛이 됐다.
“조용히 하고 마저 듣지.”
소녀는 집중하지 못하겠냐며 짜증난 목소리가 됐다.
“빚이 삼만 냥이라는데 지금 집중하게 생겼어?”
소천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소녀를 노려봤다.
“아직도 교육이 부족한가 보네.”
소녀는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무사들에게 턱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8명의 무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천과 마삼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컥! 나는 왜?”
마삼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입을 연 만큼 주먹질이 더 거세지자 급히 입을 다물고 몸을 웅크렸다. 맞을 때는 맞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천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가늠을 해보고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장원에 쳐들어온 소녀의 정체는 물론이고, 적절한 설명도 없이 사람을 왜 이렇게 두들겨 패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녀의 태도를 보아 절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잘생긴 얼굴도, 천재라는 위명도 소녀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최소한 안쓰러운 눈빛이라도 보였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돈이다. 아버지가 중원 곳곳에서 빌렸다는 금자 삼만 냥. 도대체 그 큰돈을 어디다 쓰려고 빌린 거야!’
소천은 무지막지한 사건을 저질러 놓고, 수습도 하지 않은 채 저세상으로 가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나저나 저년은 좋게 말로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사람을 개 패듯 잡는 거냐.’
소천은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엄청난 구타 중에도 얼굴만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삼이 저 녀석은 괜히 장원에 남아서는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아니지. 마삼은 이미 금자 삼만 냥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거지?’
소천은 한동안 실의에 빠져 스스로 대화 자체를 거부했던 일은 망각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장원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거야. 어느 누구도 금자 삼만 냥이라는 빚을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빌리지도 않은 돈 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천은 개미 새끼 한 마리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텅 비어 버린 장원의 상황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주인의 장례 정도는 끝내고 도망을 가야지. 은혜도 모르는 놈들!’
대충의 상황을 알게 되자 위패를 지키고 있던 마삼의 존재가 너무도 고맙게 느껴졌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함께 벼락 맞는다더니, 마삼의 신세가 딱 그 꼴이었다.
‘마삼아, 이 위기만 넘고 나면 꼭 보답을 해 주마.’
소천은 자신과 함께 장원을 지켜 준 마삼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맞아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마삼은 어디로 데려간 거지?’
분명히 함께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마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무자비한 놈들이 마삼을 죽여 버린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사람 목숨이란 게 질기디질기면서도 막상 허망하게 죽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 금자 삼만 냥이라니······. 그나마 장원이 담보로 잡혀 있어 이만 냥은 어찌 해결이 된다 해도 여전히 만 냥이란 돈이 남는다. 은자로 바꾸면 깔려서 죽을 정도로 엄청난 양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소녀가 정확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본다면 그녀는 수금을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게 분명했다.
‘나를 가져다 판다 해도 그 돈을 회수하긴 힘들 텐데······.’
소천은 문득 자신에게 그 돈을 갚으라고 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신세는 완전히 개털 아닌가 말이다.
폭삭 망해 버린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 그것도 금자 1만 냥의 빚만 잔뜩 떠안은 최악의 상속자였다.
‘까짓것 가진 게 없는데 어쩔 거야!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미친 척하는 거야!’
소녀는 물론이고 다른 빚쟁이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나 몰라라 하는 것뿐이었다. 막말로 그러다 죽어 버리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사고가 엉뚱한 쪽으로 발휘가 된 것이다.
***
소녀가 다시 소천을 찾아온 것은 정신이 든 뒤 한 시진 정도 흐른 후였다.
“생각 좀 해봤나 모르겠네.”
소천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았다.
“생각?”
“빚을 어떻게 갚을지 말이야.”
“빚?”
소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내가 왜 그 돈을 갚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네.”
“또 패려고? 마음대로 해. 그러다 죽으면 그만이지.”
소천은 배 째라는 식으로 대답해 줬다.
“호!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평생 노예가 되어서라도 빚을 갚겠다고 할 줄 알았나?”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소천을 바라보더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정도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잖아?”
소천은 소녀의 어투 속에서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을 꼭 받아 내겠다는 확고한 신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신념도 현실적으로 가능해야 인정받는 것이다. 지금처럼 목을 내놓아도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될 뿐.
“다른 식으로 갚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만 냥은 담보로 어찌해 본다 쳐. 하지만 남은 일만 냥은? 은자로 치면 이십만 냥이야. 안휘성 일 년 예산도 오만 냥이 넘지 않는데, 개인이 무슨 수로 그 돈을 만들어. 중원 최고의 상단이라고 해도 한 번의 실패 없이 십 년은 달려야 겨우 만들 수 있을까?”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지.”
소녀는 그런 것은 자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며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들어는 보지.”
“아버지가 돈을 빌린 곳은 중원 각지의 전장이라고 들었다.”
“나같이 어린 소녀가 왜 그 돈을 받으러 왔는지 모르겠다, 이 말이군.”
소천은 궁금하지 않을 수 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빌려 준 자들이 회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구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풍가장의 시작도 고리대금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처럼 어린아이가 돈을 받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풍가장의 채권을 모두 샀으니까.”
“뭐?”
소천은 금자 3만 냥의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채권을 모두 사들였다는 소녀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훗! 순진하게 삼만 냥을 전부 지급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뜻이지?”
“우리가 사들인 권리는 삼만 냥짜리지만, 전장의 주인들이 받아 간 금액은 이만 이천 냥이 전부야.”
“왜 그런······.”
소천은 전장의 주인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풍가장에 받아야 할 빚을 전부 넘겨줬다는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멍청하긴. 손에 쥐고 있어 봤자 담보로 설정된 풍가장을 제외하고는 돈을 돌려받을 길이 없잖아.”
“······.”
“이천 냥이라도 건지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다시피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소천은 금자 2천 냥을 무슨 수로 회수할 생각이냐며 킥킥 웃어 버렸다.
“이천 냥? 착각이 심하군. 내가 받아야 할 금액은 한 푼도 빼지 않고 금자 일만 냥이다.”
“재주 있으면 받아가 보시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소천은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세상에 오직 자신 한 명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수로 그 큰돈을 만든단 말인가.
결국 금자 2천 냥을 투자해 1만 냥을 벌어들이고 싶었지만, 최종적으로 금자 2천 냥만 날리는 꼴이 된 것이다. 소천은 생각할수록 웃기는지 연방 킥킥거렸다.
“훗! 여전히 착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군.”
“응?”
“금자 이천 냥이면 은자가 사만 냥이 넘어. 그 돈으로 군대를 운용해도 삼천 정병을 일 년간 유지할 수 있는 돈이지. 그런 돈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낭비했다고 믿는 건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착각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하는 것 아닌가? 내가 그 돈을 무슨 수로 갚을 수 있다고 믿는 건지.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파산 신고나 하지 않을까 모르겠군.”
소천은 누가 현실을 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소녀를 바라봤다.
“우리는 돈 갚을 당사자만 존재한다면 투자 금액을 회수하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군.”
“그 말은 당사자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뜻이네?”
소천은 궁지에 몰리면 자살해 버릴 수도 있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훗!”
“웃어?”
“아직 한 사람 남아 있잖아. 당신이 죽는다 해도 말이야.”
자신이 죽어도 한 사람 남아 있다는 소녀의 말에 소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 말고 누가 있다는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삼이라고 했던가?”
“마삼? 마삼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라고!”
혹시나 죽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마삼이 살아 있다는 말에 반가운 표정이 되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자 소천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주인의 위패를 지킬 정도의 충성심이면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못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천은 잡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 불쌍한 놈을 걸고넘어지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소녀는 피식피식 웃음만 보였다.
“내기 하나 할까?”
소천은 난데없이 내기 운운하는 소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내기라니.
“지금 같은 상황에?”
“할 거야, 말 거야?”
소녀는 소천의 비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을 바랐다.
“좋아. 뭘로 내기를 할 건데?”
“오 년 잡지.”
“오 년?”
“당신이 빚을 모두 갚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푸하하하하!”
소천은 진짜 미친 거 아니냐며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실패하면 빚 모두 없었던 걸로 해 주지. 그리고 마삼도 놓아주고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질 이유가 없는 내기다. 소천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 년 안에 빚을 갚으면 나에게 뭐라도 떨어지나?”
“훗! 풍가장이 신용 불량이라는 낙인 정도는 풀리지 않을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
소천은 이왕 말이 나온 것 서면으로 자료를 남기자고까지 했다.
“금전 거래에 서류 작업은 필수지.”
소녀 역시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가볍게 박수를 치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염소수염 노인이 지필묵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렇게 될 줄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소천은 불현듯 소녀와의 내기가 잘못된 선택이지 않을까 하는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전혀 없으니, 왜 이런 내기를 걸어왔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 년 안에 돈을 갚는 데 실패하면 빚을 없애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소천은 반듯하게 작성되어 있는 서류를 받아 들고 천천히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은 결정을 내렸지만, 혹시 함정이 있지 않나 싶어 꼼꼼히 살피기로 한 것이다.
“응?”
“왜? 문제라도 있나?”
“오 년간 빚을 갚는 방법은 채권자 쪽에서 결정을 한다?”
“당연한 조건 아닌가? 무턱대고 오 년을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어떻게든 돈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항목이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시켜서 그 많은 돈을 받아 내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젠장! 세상에 어떤 일을 해도 오 년 안에 이 돈을 만들 방법은 존재치 않아. 결국에는 내가 이길 거야.’
소천은 꾹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부분에 수결을 했다. 소녀 역시 소천의 수결 옆에 수결을 놓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류를 챙겨 들었다. 소천도 똑같이 작성된 다른 한 장을 챙겨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 한 가지. 만에 하나 도주나 잠적 등의 의무 불이행에 관련된 행위를 할 경우를 대비해 우리 쪽 사람 한 명을 붙여 둘 거야.”
“날 어떻게 보고!”
소천은 감시를 하겠다는 소녀의 말에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봐? 오 년 안에 빚을 청산하지 않으면 포기하겠다는 내 말에 혹한 인간으로 본다. 왜?”
소천은 매몰차게 자신을 깎아 내리는 소녀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그런 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멍청이지.”
“뭐야?”
“천재라고 소문이 났기에 조금은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걸려들어서 말이야. 하긴 소문난 잔치치고 제대로 된 곳이 없는 법이니까.”
소문난 잔치집이란 소녀의 말에 소천은 잠시 움찔한 표정이 되었다.
“차차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천은 자신이 수결한 서류에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다시 내용을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딱히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소녀는 팔짱까지 끼고 한심하다는 듯 소천을 바라보다가, 염소수염 노인에게 눈짓을 했다. 염소수염 노인은 소녀의 눈짓에 밖으로 나가더니 익숙한 사람을 한 명 데리고 들어왔다.
“마삼아! 살아 있었구나!”
소천은 반가운 얼굴로 마삼을 맞이했다. 그러나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에 마삼을 향해 걸어가던 소천의 발걸음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아까 말한 감시자야.”
“뭐? 누가 누굴 감시해?”
소천은 황당한 눈빛으로 소녀와 마삼을 바라봤다.
“말했잖아. 우리 쪽 사람 한 명을 붙여 놓을 거라고.”
“하지만 마삼은······.”
“풍가장 사람이라고? 훗!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무슨 뜻이지?”
“마삼이 우리 쪽 직원이 된 지 오래됐다는 뜻이지.”
“······.”
소천은 마삼이 소녀 쪽 사람이라는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또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려 댔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아무도 없는 장원에 홀로 남아 지전을 불사르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개미 새끼들까지 모조리 도망을 간 곳에서 말이야.”
“······.”
“거기다 유일한 상속자는 어디에 있는지 위치 파악도 안 되는 상황이고 말이야. 정보에 의하면 공부를 위해 이름 모를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솔직히 그대로 잠적을 해 버리면 골치가 아프잖아. 금자 삼만 냥에 대한 정보를 주워듣고 도망이라도 치는 날에는 손해가 막심해지거든.”
“그러니까··· 지금 마삼이 위패를 지킨 게 아니라, 혹시나 나타날 날 잡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소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삼을 바라봤다. 스스로 은혜 운운했던 인간이 이제 보니 제대로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렇게 보지 맙시다. 솔직히 그동안 밥값 정도의 일은 충분히 했지 않소.”
마삼은 소천의 눈빛이 껄끄럽다는 듯 눈길을 돌렸다.
소천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조금 전 수결을 맺은 그 서류 한 장을 자연스럽게 받아 내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처음부터 그런 조건으로 서류를 내밀었다면 소천은 절대 수결을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한 조건일수록 함정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혼란이 가중되는 사이, 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충신 운운하며 뼈를 묻겠다던 가신들도 모조리 자취를 감췄는데 말이야.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풍가장을 배신하고 저년 치맛자락을 움켜잡은 거야?”
“말이 좀 심하십니다. 풍가장을 배신했다기보다는 망하고 나서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새로운 일을 찾은 것뿐입니다. 솔직히 쌀 한 톨 남지 않은 곳에서 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러니까 같이 얻어맞고 고생한 모든 게 연극이었다, 이거지?”
“일입니다.”
“일이라. 큭큭큭! 좋아. 그렇다 치자고. 하지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감시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소천은 과거 하인으로 부리던 사람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점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먹고살려면 뭐든 해야죠. 다른 일보다 소천 공자를 감시하는 게 보수도 많고 말입니다.”
“하하!”
소천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데, 날 감시하는 게 보수도 두둑하다는데.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도와줘야지. 그렇게 하자고.”
소천은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짙게 배어들었다.
제4장 그냥 일할래, 아니면 병신 되고 일할래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 왔던 집, 그 집에서 쫓겨난 기분이 어떤 것인지는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소천은 몰랐지만 풍가장은 이미 주인이 바뀐 지 오래였다. 다른 사람 집에서 무단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라며, 소녀는 자연스럽게 소천을 밖으로 내쫓았다.
“나가. 나가서 돈 벌어야지.”
“어떻게?”
소천은 서류에 명시된 대로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일단 계약은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킨다고 곧이곧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소천이었다. 어떻게든 5년만 버텨 내면 숨 막힐 듯 쌓여 있는 엄청난 빚더미가 햇빛에 흩어지는 안개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건 마삼이 알려 줄 거야.”
소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돈을 받아 낼 방법을 마련해 놓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 그러지, 뭐.”
소천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마삼을 보며 어서 안내하지, 뭐하냐는 듯 눈짓을 했다.
“갑시다.”
“그래, 가지.”
염소수염 노인은 소천과 마삼이 모습을 감추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면······.”
“안 들은 걸로 하겠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게 아니에요. 투자를 했으니 어떻게든 뽑아내야죠.”
“아, 네······.”
***
소천은 마삼을 따라 합비 번화가로 발길을 돌렸다. 분위기를 보니 시작은 가볍게 할 모양이었다.
‘열일곱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점소이? 심부름꾼? 하인?’
소천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을지 고민해 봤다. 아니, 솔직히 그런 일을 제외하고는 딱히 다른 일을 할 만큼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봐야 했다.
“무슨 일부터 시킬 건지 알려 주면 안 되나?”
“알고 싶지 않을 겁니다.”
소천은 마삼의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니. 한마디로 굉장히 불편한 일이라는 뜻인데, 합비 번화가에 그런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봤다.
‘젠장! 일을 해봤어야 알지!’
지금껏 주는 밥이나 먹고, 책이나 읽으며 지냈던 자신이 무슨 수로 세상일을 알겠는가 말이다.
“다 왔습니다.”
마삼은 허름한 객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라는 거지?”
“그건 안에 들어가면 알 겁니다.”
객잔 안으로 들어서려던 소천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마삼을 보며 왜 함께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는 감시를 하는 거지, 함께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삼은 그 말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등을 돌려 버렸다.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하는 짓인데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마삼도 솔직히 자신이 맡은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짜증을 냈다.
“쩝! 그래. 먹고살아야지.”
소천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객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무슨 일을 시키든 대충 하는 척만 하고 시간이나 때우면 그만인 것이다.
객잔은 밖에서 보나 안에서 보나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객잔이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아무도 없나?”
안에 들어가면 알 거라던 마삼의 말만 믿고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객잔 안은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천은 잘됐다는 듯 아무 자리나 앉더니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객잔 뒤뜰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무식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손님이요?”
사내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소천을 보며 대뜸 손님이냐고 물었다.
“손님이면?”
“주문을 해야지.”
소천은 생긴 대로 논다고 생각했다. 반갑게 맞이해 주지는 못할망정 퉁퉁거리는 목소리로 주문을 하라니. 분명히 이놈의 객잔은 조만간 문을 닫을 게 분명했다.
“마삼이라고 아나?”
“마삼? 아, 그 인간이 보내서 온 건가?”
소천은 사내의 질문에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식하게 생긴 사내는 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보이더니, 다짜고짜 소천을 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으악! 뭐야!”
“미친놈의 새끼가 어디서 반말 짓거리야? 일을 하러 왔으면 고개를 숙여야지!”
사내는 눈에 살기를 띠고 소천을 잘근잘근 밟아 댔다.
“그만! 그만해!”
“크크크! 그만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너 오늘 한번 죽어 봐라!”
사내는 의자 하나를 부러뜨려 몽둥이를 만들더니, 바닥을 기고 있는 소천에게 다가갔다.
“그만······.”
“오냐. 그만이라는 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교육을 시켜 주마.”
사내는 잔인한 표정을 지은 채 몽둥이를 들어올리더니 인정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빡!
소천은 어떻게든 몽둥이를 피해 보려고 발악했지만, 허우적거리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이다.
마치 풍가장에 쳐들어온 소녀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소천을 두들겨 팼듯 객잔의 험악한 인상의 사내도 그렇게 소천을 두들겨 팼다.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소천이었지만 사내의 매질은 멈추질 않았고, 기어이 소천을 기절시키고 말았다.
빠각!
“끄아아악!”
반쯤 정신을 잃고 있던 소천이었지만,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벌벌 떨었다.
“퉤!”
사내는 소천을 향해 가래침을 뱉어 냈다.
“으으으!”
“앞으로도 그렇게 뻣뻣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마.”
사내는 몽둥이를 거칠게 집어던지더니 객잔 뒤쪽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 데려가!”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추레한 몰골의 사내 2명이 재빨리 달려 나오더니 소천을 질질 끌고 가버렸다.
“으으으!”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던 소천이 신음 소리를 흘리며 겨우 눈을 떴다. 알싸한 약향이 느껴지는 게 다행히 의원에게 데려간 모양이었다. 혹시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나 발을 움직여 봤는데 뼈까지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
소천은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오자 힘겹게 눈을 떴다.
“미련하긴. 뭐,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5년 안에 빚을 받아 내겠다던 그 소녀였다.
“여긴 어떻게······.”
“빚이 늘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뭐?”
“몸 곳곳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은자 다섯 냥이 들어갔다.”
“······.”
“그러니까 어디 보자.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 금자 일만 냥에 은자 다섯 냥이 되었군.”
소녀는 겉표지에 풍소천이란 이름이 적힌 장부를 펼쳐 들더니, 은자 5냥을 적어 넣었다.
“이런 식이었나?”
“이런 식? 그게 뭔데?”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내가 그랬나? 자기가 처지를 망각해서 그리된 거지. 엉뚱한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자고. 당신과 나는 오 년이란 시간을 두고 빚을 갚기로 계약을 한 사이야. 난 돈을 받아 내면 그만이고, 당신은 오 년을 버텨 내면 그만인 거지. 그 안에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내 알 바 아니지. 안 그래?”
“으드드득! 그래. 그런 식으로 어디 잘 받아 내 보시지.”
소천은 죽어도 소녀가 원하는 대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어금니를 갈아 댔다.
“이미 말했잖아. 어찌 되든 우리 관계는 오 년 안에 끝나게 되어 있다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관여치 않을 거야. 하지만 투자한 돈이 있으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계속 만들어 주지.”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장부를 덮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친년! 어디 한번 쫄딱 망해 봐라! 내가 한 푼이라도 갚아 줄 것 같아!”
소천은 문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녀가 나가고 나자 곧바로 다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객잔 안에서 자신을 개 패듯 두들기던 그 험악한 인간이었다.
“목소리가 살아 있는 걸 보니 바로 일을 시켜도 되겠군.”
“뭐?”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고, 전신 타박상을 입은 사람에게 바로 일을 시키겠다는 말에 소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선택해.”
“뭘 말이냐.”
“계속 반말 지껄이다가 남은 다리도 부러질 건지, 아니면 조용히 입 닥치고 시키는 일이나 잘할 건지 말이야.”
“이건 뭐······.”
“매가 부족하다고? 뭐, 나야 상관없지.”
사내는 대뜸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들었다.
“자, 잠깐!”
“이 새끼는 학습 능력이 아주 바닥이네.”
“잠깐만요!”
소천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잠깐만요!’를 외쳤다.
“그래. 잠깐 멈췄다. 뭐?”
소천은 의자를 집어 든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사내의 태도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성은 끝까지 버티라고 지시하고 있지만, 감성은 이대로 갔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뭐! 말을 해, 이 새끼야!”
“시키실 일이 뭔지 알아야······.”
소천은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해야만 했다.
약초를 발라 묶어 놓기만 했는데 은자 5냥이라니. 소천은 자신의 발을 살펴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은자 5냥이면 독방을 배정받고, 의원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아도 될 만큼 큰돈이었다.
“그런데 내 몸도 생각보다 튼튼하네.”
소천은 풍가장에서부터 그렇게 얻어맞았는데도 통증을 제외하고는 멀쩡히 움직이는 몸을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채권자 입장을 내세우며 자신을 길바닥으로 내몬 상대에 대해 화가 풀릴 리는 없었다. 얻어맞을 때만큼은 죽을 듯 고통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도둑년.”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욕 한마디 하지 않던 소천이었지만, 자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그 소녀에게는 더 이상 예의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객잔 주방에 배정을 받은 소천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감자를 보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오늘 내로 다 깎으라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시킬 수 없는 규모의 일이었다. 반항을 해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래 봤자 돌아오는 것은 몽둥이질일 게 뻔하니 따질 수도 없었다.
“당신들도 빚을 졌소?”
소천은 맞은편에서 엄청난 속도로 감자를 깎고 있는 사내 2명을 보며 말을 걸었다.
“······.”
“벙어리요? 말 좀 해보시오.”
소천은 자신의 질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감자만 미친 듯 깎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이보시오.”
“떠들 시간 있으면 감자나 깎아.”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연방 손을 놀리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허허!”
소천은 매몰찰 정도로 차갑게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 가볍게 혀를 찼다.
“아직도 웃는 걸 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눈치군.”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사내가 불쌍하다는 듯 소천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오 년 약정으로 계약을 했지 않소?”
“호! 두 분도 그리한 겁니까?”
소천은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바로 알아차린 사내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꿈 깨는 게 좋을 거요.”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크크큭!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소천의 말에 두 사람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소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감자 깎는 일을 하는 두 사람에게 넌지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는지 물었다.
“난 사 년 됐소.”
“나는 올해가 오 년 차요.”
“호! 조만간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빚을 얼마나 졌기에······.”
소천은 계약 기간이 거의 끝나 간다는 두 사람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보아하니 그동안 이곳에서 감자만 죽어라 깎은 모양인데, 그것만으로도 4년에서 5년을 버텼다니 그 정도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은자 칠천 냥이요.”
“나는 좀 많소. 은자 팔천 냥을 빚졌소.”
소천은 두 사람의 빚이 생각보다 액수가 크자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가도 만져 볼 수 없는 돈 아닌가 말이다.
“어쩌다······.”
“처음부터 그렇게 빚이 많은 것은 아니었소.”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소천은 처음에는 그 정도 액수가 아니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자 백 냥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리됩디다.”
“은자 백 냥이 칠천 냥으로 불어났다는 말이오?”
소천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설명을 요구했다.
“먹고 자고 싸고 돈 안 드는 일이 하나라도 있소. 거기다 아프기라도 하면 약값도 필요하고 말이오.”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진짜 무서운 건 이자야.”
“이자요?”
소천은 갚아야 할 돈에 이자가 붙는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은 그런 소리를 전혀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허! 젊은 친구가 큰일이구만.”
이자가 붙느냐는 소천의 말에 사내들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당연한 일이니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나 보지.”
두 사람은 소천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감자 껍질을 벗겨 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감자 깎는 일로 갚았단 말입니까?”
소천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 빚도 거의 갚아 가는데, 험한 일 하다가 몸이라도 상할까 봐 이쪽으로 옮겨 온 거지.”
험한 일이라는 말에 소천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러니까 감자 깎는 일은 빚을 갚는 일 중에 가장 편하고 쉬운 일이라는 뜻 아닌가.
“헛생각 하지 말고 부지런히 갚아 나가는 게 좋을 거요.”
“그래. 대충 시간을 보내며 오 년을 버틴다고 생각했다간 큰코다치지.”
소천은 두 사람이 마음 약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독하게 버티기로 하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두 분은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한 겁니까? 험한 일이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소천의 질문에 한 번도 쉬지 않던 두 사람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
소천은 두 사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자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험한 일이 뭔지 알고 싶다고?”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날로.”
사내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죽을 수 있다면 좋게?”
“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 인간들은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돈을 받아 낼 자들이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버리는 게 좋을 거네. 괜히 자살한다고 난리쳐 봤자 눈 뜨면 멀쩡하게 침상에 누워 있을 테니까.”
“에?”
소천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연방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감시인이 하나 있을 텐데.”
“네, 그렇죠.”
“그 감시인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말이야.”
“······.”
소천은 사내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목숨이라도 살려 주는 날에는 목숨 값으로 또 빚이 늘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싶어지더라고. 그 악마 같은 놈들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말이야.”
소천은 두 사람의 말에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곳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5년 운운하며 안 갚아도 그만이라는 말에 혹하는 순간, 일은 자신들이 알아서 주선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순간, 더 이상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게 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혹시 오 년간 잘 버티다가 빚을 털고 나간 사람이 있습니까?”
다시 감자 깎기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소천의 질문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다고 들었네.”
“오래전에 금자를 이만 냥 정도 빚진 사람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 사람도 결국에는 모두 갚았다고 하더군.”
금자 1만 냥도 턱이 빠질 지경인데, 2만 냥을 갚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소천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시키기에 5년 안에 그 엄청난 돈을 모두 회수했단 말인가. 억지로라도 5년을 버티겠다고 생각하던 소천은, 자신을 보며 싱긋 웃어 보이던 소녀의 미소가 저승사자의 손짓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
감자 깎기에 소홀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다른 두 사람이 해 놓은 분량과 자신이 깎은 감자의 양은 하늘과 땅 차이. 험악한 얼굴의 사내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소천을 내려다보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꿀꺽!”
소천은 사내의 미소에 마른침을 삼켰다. 의연하려고 해도 이제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육당하는 건가?’
소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시키는 방향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가 되었든 시킨 일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폭력이 난무할 것이고, 자신은 희생양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인생이 끝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감자 깎는 곳에서 만난 두 사내의 정보에 의하면 그건 하나의 바람일 뿐,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을 하게 만들지. 마음은 거부할지라도 몸이 말을 듣지 않거든.’
자신이 깎아야 할 감자를 모두 처리한 사내가 자리를 뜨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해 준 말이었다. 어쩌면 그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할지 충고를 해 준 것인지도 몰랐다.
소천은 하루 사이에 연속으로 기절하는 참사를 겪으며, 1825일 중 하루의 시간을 소진했다.
기절에서 깨어나 지금 이 자리에 앉기까지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반복된 과정.
소천은 자신의 장부에 또다시 은자 5냥이 추가되는 것을 확인했고, 성치 못한 몸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손만 멀쩡하다면 병신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오늘도 분량을 채우지 못하면 이번엔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생각이니 마음대로 해봐.”
사내는 킥킥거리며 몽둥이를 만지작거리더니 부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객잔은 도대체 뭘 팔기에 허구한 날 감자만 깎으라는 걸까.”
객잔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따지자면 청소도 있을 것이고, 음식을 나르거나 주문을 받는 일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이틀 연속 감자를 깎는 것뿐이었다.
“일단 깎자. 이러다간 빚은 둘째 치고 병신이 되겠어.”
소천은 앞에 놓여진 작은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렵군.”
칼을 들고 뭔가 깎아 본 적이 없는 소천이었다. 보기에는 단순해 보였지만, 최대한 껍질만 벗겨 내고 깨끗하게 알맹이만 남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30개 정도 깎았을까. 여전히 속도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감자 살을 깎아 내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윽!”
조금은 익숙해졌다 생각하는 순간, 조각칼이 감자를 쥐고 있는 손을 파고들었다. 금세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감자를 빨갛게 물들였다.
“상처를 치료하면 또 돈이 들 텐데.”
소천은 길게 찢어진 손바닥을 움켜쥐며, 고통에 찬 음성보다 자신의 장부에 또 빚이 늘어난다는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흠칫.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상처 입은 손을 걱정하기보다 장부에 추가될 은자를 걱정하다니, 소천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사고에 변화가 생긴 자신을 보며 부르르 떨림을 일으켰다.
정말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간 미쳐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분량을 어떻게든 채워야 해.”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매던 소천은 또다시 예기치 못한 말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멍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는 여전하건만,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소천은 절규하듯 소리를 질러 댔다.
“뭐가 안 돼! 입 닥치고 감자나 깎아!”
소천의 괴성에 부엌 안으로 들어온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몽둥이를 들어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이번에는 아예 주둥이를 꿰매 줄까? 어차피 감자 깎는 데 주둥이는 필요 없으니 말이야!”
사내는 주둥이를 꿰매겠다고 했으면 정말 꿰맬 인간이었다. 소천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감자 깎기에 열중해야만 했다.
소천은 5년 뒤에는 무조건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라던 말이 어쩌면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의 승리가 아닌 소녀의 승리로 말이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개념과 살짝 차이가 있겠지만, 어찌 됐든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소천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소녀의 손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잘난 척하던 자신의 머리를 통째로 잘라 내 버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냈을까. 소천은 그 뒤로도 수시로 얻어맞고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엉망이 됐던 몸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멀쩡히 움직였다. 한마디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아니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병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부지런을 떨기 시작하자, 소천의 감자 깎는 능력은 누가 봐도 대단하다 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스스로 잘라 내고 싶다던 머리를 어떻게 하면 감자를 잘 깎을지에 대해 사용한 대가였다.
소천은 해가 지기 전에 자신의 할당량을 끝내 놓고 감자 깎기를 관리하는 사내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지?”
“일이 끝났습니다.”
“벌써?”
사내는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다시 객잔 안으로 돌아온 사내는 신기한 물건 바라보듯 소천을 훑어봤다.
“뭡니까?”
처음 사내를 만났을 때처럼 반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소천의 어투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나와 동업을 할 생각이 있나?”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동업을 제안했다.
“감자 깎기를 말입니까?”
“우리 집에서 깎은 감자가 합비에 있는 객잔 열 곳에 제공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소천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힘을 합치면 합비에 있는 모든 객잔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해서 한 달간 벌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됩니까?”
“그 정도 물량을 소화할 수 있다면 한 달에 은자 열 냥, 아니 열다섯 냥은 족히 벌 수 있지.”
은자 10냥. 감자 깎기로 번다는 개념을 떠나서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악마 같은 채권자 손에서 벗어난단 말인가.
“어렵겠습니다.”
“자네, 빚이 얼만가? 솔직히 그 정도 벌이면 어지간한 빚은 탕감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한 달에 10냥을 잡고 1년이면 은자 120냥. 5년이면 600냥이다. 확실히 작은 돈은 아니지만, 금자로 환산하면 겨우 30냥어치밖에는 되지 않는다. 갚아야 할 돈이 금자 1만 냥이 넘는데, 결국 5년을 꼬박 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물론 이자라는 조건을 제했을 때 그 정도라는 소리다.
소천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장부를 찢어 버리고 자유를 찾고 싶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안 그래?”
객잔 주인과 소천의 고개가 동시에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악덕 채권자가 얼굴을 보였다.
“오랜만이군.”
“호!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오랜만이라. 내가 보고 싶었나 보지?”
“헛소리가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
소천의 말에 그럴 리가 있냐는 듯 소녀는 소천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펼쳐 들었다.
“그동안 실적을 알려 주려고 온 거지.”
비록 한 달간이었지만 소천 자신도 그동안 얼마나 벌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비록 감자 깎기였지만, 범인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양을 깎아 댔으니 말이다.
“어디 보자. 원금이 금자 만 냥에 은자가 열 냥이군. 은자 열 냥이 왜 붙었는지는 알고 있지?”
“본론만 이야기하지.”
“이곳에서 한 달간 일한 대가가 은자 여섯 냥이군.”
“얼마?”
“은자 여섯 냥.”
“한 달 내내 일을 했는데?”
소천은 너무 적게 책정된 것 아니냐며 객잔 주인을 바라봤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똑같이 한 달을 써도 부엌 잡부가 벌 수 있는 돈은 거기서 거기라고.”
소녀의 말에 소천의 입이 실룩거렸다. 손에 온갖 상처를 입어 가며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겨우 은자 6냥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단하긴 해. 지금까지 감자만 깎아서 이 정도 수익을 벌어들인 사람은 최초라고 봐도 되겠어.”
최초가 되었든, 최후가 되었든 소천의 머릿속에는 은자 6냥이란 금액만 맴돌고 있었다. 부러진 다리 부목 값도 안 되는 금액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현재 금자 일만 열 냥에 은자 네 냥이 남았어.”
“뭐? 얼마?”
소천은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겼나 싶어 급히 귀를 후비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금자 일만 하고도 열 냥. 은자는 네 냥.”
“금자가 열 냥이 늘었네?”
“이자야. 치료비로 들어간 은자의 이자도 계산에 넣을까 하다가 야박해 보여서 뺏어.”
“······.”
“별로 고마운 표정이 아니네. 나름 생각해 준 건데.”
“퍽이나 고맙군.”
“그렇지? 아, 그리고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또 뭔데?”
“오 년 뒤 사라지는 빚은 원금만이야.”
“뭐?”
“그렇게 계약했잖아. 금 일만 냥의 빚을 탕감해 주기로.”
소녀의 말에 소천의 표정이 참혹하다 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결국 5년이 지나도 원금에서 파생된 이자는 그대로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한 달에 10냥씩. 5년이면 600냥이다. 은자로 치면 12,000냥에 달하는 금액. 지금처럼 감자만 깎아서는 원금은커녕 이자도 감당할 수 없다는 소리다.
“선택해.”
“또 뭘!”
“여기에서 계속 일을 한 건지, 아니면 살짝 피곤하긴 하지만 수입이 좋은 쪽으로 옮겨 갈 건지 말이야.”
소녀는 선택을 하라고 했지만, 정작 소천의 귀에는 그쪽으로 옮겨 가라는 강요로 들렸다.
“가야지.”
“그래. 잘 생각했어. 어차피 감자 깎는 일은 푼돈 정도 빚진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니까. 너처럼 거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있나?”
“가보면 알겠지. 그때그때 바뀐다고 들어서 나도 정확히는 모르거든.”
“이번에도 가보면 안다?”
소천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정보를 주지 않았던 한 달 전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그와 비슷할 것임을 예상했다.
“밖에 나가면 짝이 기다릴 거야. 앞으로도 수고하고.”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 버렸다.
“많기도 하네.”
대화를 듣고 있던 객잔 주인은 소천이 갚아야 할 금액이 상상 이상이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빚을 다 갚고 나면.”
“······?”
“당신 두 다리 말인데, 그대로 갚아 주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 되어 가는 것 같으니 말이야.”
“······.”
소천은 자신의 다리를 거침없이 부러트렸던 사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고 객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한 달 동안 자신을 감시하며 동태를 살피고 보고하던 마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라. 나에게는 일 년처럼 느껴지던걸.”
마삼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풍소천의 모습에 한기라도 느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다음은 어디지?”
소천은 한시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다음 장소를 요구했다. 유유자적 안빈낙도를 꿈꾸던 그 소천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변화였다.
제5장 소천은 웃음을 팔고, 소녀는 여인이 되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두가 알고 지내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정반대에 위치한 이면세계(裡面世界). 마삼은 그곳을 흑도라 불렀다.
“설명은 거창하지만 결국 범죄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이로군.”
소천은 뭘 그리 복잡하게 설명하느냐는 듯 한마디로 뭉그러뜨려 흑도를 표현했다.
“일부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세상이라 부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도둑을 양산군자라 바꿔 부른다고 도둑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마삼은 자신이 어떻게 이야기해도 소천이 받아들이는 부분이 한정적임을 깨달은 뒤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너 역시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냐?”
“말해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가 정확할 겁니다.”
“안내를 맡은 자가 모른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달걀을 맛있게 먹을 수는 있어도, 달걀을 낳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천은 마삼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마삼, 너 원래부터 그렇게 말을 잘했었냐?”
“말을 못한다고 한 적도 없었던 것 같군요. 아니,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소천은 그가 알던 마삼이 지금 자신을 안내하고 있는 마삼과 동일 인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겨울에 얼어 죽을 뻔한 사람이 마삼이었다. 지금 자신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를 할 정도의 말재간이면 절대 얼어 죽을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떨어지고 주변이 어두워져 갈 때쯤 마삼의 걸음이 홍등가 앞에서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홍등가에서 일을 하라고?”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도리를 좇던 자신에게 홍등가라니. 소천은 잠시 망설이는 눈빛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소천은 이번에도 그렇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서 마전(魔錢)에서 보냈다 하십시오. 그러면 알아서 일거리를 줄 겁니다.”
“마전?”
소천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라는 듯 마삼을 바라봤다.
“예상하시는 것처럼 제가 몸담고 있는 곳입니다.”
“하는 짓이나 이름이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군.”
소천은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몰라도, 악착같이 돈을 회수하는 데 열을 올리는 그들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삼은 감자 깎는 객잔에서 그랬던 것처럼 홍등가 앞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지정이 아니라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된다고?”
물론 홍등가가 거기서 거기겠지만, 일할 곳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말에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예 지정을 해 줬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들어갔겠지만, 막상 자신이 임의로 고를 수 있다고 하자 아무 곳에나 들어가기 어려워진 것이다.
“오라버니~ 쉬었다 가세요!”
“잘생긴 오빠, 여기 좀 봐!”
소천이 길게 이어진 홍등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누각에서 얼굴을 내민 기녀들이 온갖 아양을 떨어 댔다.
‘젠장!’
소천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에서 추파를 던지며, 심하게는 가슴까지 드러내자 피가 거꾸로 솟구친 것이다.
소천은 급한 걸음으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골목 가장 끝에 있던 누각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자,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소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천은 여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여인들을 찾는다면 다른 집으로 가주세요.”
‘무슨 소리지? 홍루에서 사내를 쫓아내? 여자를 찾는다면 다른 집으로 가라고?’
소천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자신은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것이었다.
“난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오.”
“그럼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마전에서 보냈다 하면 알 것이라 하던데.”
“아! 마전에서 오신 분이었군요.”
소천의 말에 여인은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팔을 끌어안고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파, 팔 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인의 가슴이 팔꿈치를 자극하자 소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이걸 어째!”
“네?”
“설마··· 여자 경험이 전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그, 그게······.”
책이나 보고, 밥이나 축내는 사람의 표본형을 찾으라면 풍소천만 한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여자에 관심을 두거나, 딱히 만나는 사람도 없었기에 소천은 숫총각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머머! 언니! 기가 막힌 물건이 들어왔어!”
소천의 당황하는 모습에 그가 어떤 상태인지 직감한 여인은 별채 쪽으로 달려가 언니를 찾았다.
“왜 이렇게 소란이니? 조금 있으면 손님 오실 시간인데 여긴 왜 온 거야?”
“이 공자님 좀 봐주세요. 인물은 훤한데 아직 경험이 없다지 뭐예요.”
“설마.”
언니란 여인은 말이 되냐는 듯 손을 내젓더니 소천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서른 초반이나 되었을까. 외모는 평범했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소천의 몸을 어루만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건진 거야?”
“건지기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
“그게 무슨 소리야?”
“마전에서 왔대.”
“그래? 마전이 웬일이래. 상급을 다 보내 주고.”
여인은 동생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이곳에 가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물론이죠.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자 같은 분이라면 일 년도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곳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벌 수 있는 곳은 전무하다고 보면 될 거예요.”
“무슨 일을 하기에······.”
소천은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느 곳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뒷걸음질 치지 못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설명도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할 기술도 있으니 말이에요.”
소천은 두 여인에게 붙들리다시피 방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온 곳이 어떤 장사를 하는지 듣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음은 당연지사였다.
“나는 못하오!”
소천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봄바람 불듯 귓가를 간질이는 여인의 말에 발걸음이 굳어 버렸다.
“다른 곳에 가봤자 허드렛일 아니면 기둥서방인데. 그렇게 벌어 봤자 감자 깎는 일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걸요. 하지만 우리와 일을 한다면 최소한 두세 배는 보장해 드리죠. 물론 급여 외 수입은 건드리지 않고 말이에요.”
마전에서 온 자들의 최대 약점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돈 많은 누님들 어깨 좀 주물러 주고, 웃음 좀 날려 주면 되는데······.”
“정말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오?”
“나머지야 본인 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급여 외 수입은 역량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급여 외 수입이 얼마나 되기에······.”
“잘나가는 오빠는 급여보다 부수입이 더 많아요.”
기본 수입만 감자 깎기의 두세 배다. 거기에 부수입은 기본 수입을 상회한다니. 작게나마 망설임이 남아 있던 소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돌리더니 두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려서는 학자를 꿈꿨고, 철이 들고 나서는 안빈낙도를 꿈꿨던 소천. 현재 그의 꿈은 하루라도 빨리 악마 같은 채권자 손에서 자신의 장부를 되찾고, 풍가장의 신용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고 했던가. 한 달 전 홍루에 들어와 어색하고 부끄러움 타던 소천은 온데간데없고, 색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소천만 남아 버렸다.
“돈도 벌고 즐거움도 얻고, 여기야말로 천상이구나.”
영업 준비를 하던 소천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천.”
천은 소천이 이곳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예명이다. 일 자체가 음성적이다 보니 누구 한 명 본명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합비 출신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천의 경우 거의 바깥 활동이 없다 보니 그가 합비 사람인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천이란 예명을 가진 청년이 얼마 전 풍비박산이 나 버린 풍가장의 유일한 상속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한바탕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네, 누님.”
“오늘 지명 있다.”
“지명이요?”
소천은 누군가 자신을 지명했다는 말에 루주를 바라봤다.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는 동안 열흘을 소비했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자리가 익숙해지는 데 다시 열흘을 소비했었다. 다시 말해 본격적으로 소천이 일을 시작한 것은 이제 열흘 정도 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벌써 지명이라니. 단골이 생긴다는 것은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된다는 말과 같았기에 소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지부 대인의 작은 마님이셔.”
지부 대인의 작은 마님. 돈만 가진 게 아니라 권력도 가졌다는 뜻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 같은데······.”
“그럴 거야.”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고 지명을 한 거죠?”
“이 바닥은 소문이 빨라. 아직 손이 안 탄 신상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거기까지 들어간 모양이야.”
아직 손이 안 탄 신상. 평범한 말로 풀어내면 여자 경험이 없는 신입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숫총각.
남자가 숫처녀를 탐하듯 여자들도 비슷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남녀 간의 합궁과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경험 많고, 힘 좋은 사내를 찾겠지만 말이다.
“누님, 조언 좀 주시죠.”
그동안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들어갔었다. 하지만 지명이라면 혼자서 손님을 상대해야만 했다.
“돈 좀 만지고 싶어?”
“물론이죠.”
“그럼 두어 번 빼.”
“네?”
“널 덮치려 해도 재주껏 피하란 뜻이야.”
“더, 덮치다니요?”
“지부 대인의 작은 마님은 물론이고, 돈과 권력을 동시에 가진 여자들은 남들이 아직 가지지 못한 물건을 손에 넣고 싶어 하지.”
“······.”
소천은 욕심 많은 유부녀에게 동정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언제고 사라질 동정이지만, 당하는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잔뜩 달아올라서 돈질을 해 올 거야. 물론 그사이 소문이 돌 테니 다른 손님이 더 적극적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
소천은 루주의 말에 상인들이 한정된 물건을 고가에 팔아넘기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그렇게까지 해서 빚을 갚아야 하나, 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이미 망가지기 시작한 소천은 완전히 사고의 전환이 이뤄진 상태였다. 이제는 돈만 된다면 그것도 많이 되는 쪽으로만 머리를 굴렸다.
루주의 말대로 잠시 뒤 지명이 들어왔다며 객실 안내를 맡은 여인이 소천을 데리러 왔다.
“난(蘭)실이야. 실수 없도록 잘해.”
“알았습니다.”
소천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지명한 지부 대인 작은 마님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잘하게 설명하지 않기로 하자. 일단 결론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첫 지명이 있은 지 정확히 한 달 뒤, 소천은 17년간 지켜(?) 왔던 동정을 잃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소천의 활동력은 왕성하다 못해 넘친다고 표현할 정도로 대단했고, 잘생긴 얼굴과 유려한 지식 덕분에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그렇게 다시 한 달쯤 지나자 소천은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즐거워하는지를 거의 다 외워 버렸다.
사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외운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감정적으로 교류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계였고, 또 소천은 그럴 만큼 여유가 넘치는 신세도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인생의 목적인 양 오직 돈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여인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효과적인지 암기를 해 버렸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소천은 세 달 만에 채권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왔군.”
일은 죽어라 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돈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버는 돈은 자동적으로 마전에게 전달이 됐기 때문이다.
“신세 늘어졌네.”
“그렇게 보여?”
소천은 정말 좋아 보이냐며 되물었다.
“장부 정리나 하지.”
소녀는 그다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는지 사무적으로 나왔다.
“그러시든지.”
“원금 금자 일만 사십 냥. 은자 네 냥. 남창으로 일하면서 벌어들인 세 달간의 수입이 금자 다섯 냥 하고도 은자가 열두 냥이군.”
확실히 돈이 벌리는 일이긴 했다. 세 달 동안 금자를 무려 5냥이나 벌었다니. 하지만 빚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금은커녕 여전히 이자만 쫓아가기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인 것이다.
“많이 벌었어.”
“아직 멀었겠지.”
“총체적으로 본다면 그렇긴 하지만, 세 달 동안 금자 다섯 냥에 은자 열두 냥이면 절대 작은 돈이 아니지.”
“그래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군. 더 분발해야겠지?”
소녀는 더 분발하겠다는 소천의 말에 눈 끝을 찡그렸다.
“아니, 여기서 할 일은 끝났어.”
“무슨 소리야! 이제 돈이 좀 벌리기 시작했는데!”
소천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말에 바로 언성을 높였다. 그동안 단골손님을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이제야 단골들 덕을 보기 시작했는데 일자리를 옮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앞으로 1년 정도는 이곳에서 뽑아낼 수 있는 대로 뽑아내야 했다.
“계약대로 해야지. 일거리는 내 쪽에서 제공하는 거야. 거기다 본래 일반 기루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들어와 버렸잖아.”
“무슨 소리야. 마전에서 왔다니까 바로 알아듣던데.”
소녀는 소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남창은 업무 목록에 없었던 일이야. 아무래도 마삼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군.”
“남창, 남창 하지 마. 듣는 놈 기분 이상하니까.”
“그럼 뭐라고 할까? 기녀들처럼 기남이라고 해 줄까? 아니면 접대부?”
“내가 뭘 하든 너는 돈만 받아 가면 그만 아니었나?”
“아니. 내가 회수하는 자금은 노동에 맞는 정당한 수입에서야. 노동력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입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
소천은 어이없는 얼굴로 채권자를 바라봤다.
“대신 더 수입이 높은 곳으로 보내 주지.”
소녀 역시 자신의 말에 약간은 억지가 섞여 있다고 생각했는지, 소천이 반발을 하기 전에 미끼를 던졌다.
“그나저나······.”
“뭐?”
“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컸다. 소녀티를 완전히 벗었어.”
“헛소리!”
“아니, 정말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남자들 좀 울리고 다니겠는걸. 그냥 예쁘장한 얼굴인 줄 알았더니, 점점 선이 살아나네.”
소천은 느닷없이 악덕 채권녀를 살펴보며 이런저런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소녀는 소천의 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 콧방귀를 날렸다.
“그런데 여태껏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이름이 뭐야?”
“······.”
“왜? 말하면 안 되나?”
“여전히 멍청해.”
“뭐야?”
“눈앞에서 적어 줬잖아. 잃어버리면 큰일 날 것처럼 챙기더니, 그 뒤로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모양이지?”
소녀는 괘씸하다는 듯 소천을 노려봤다.
“아, 그렇지. 수결을 써 넣었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때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만큼 마음이 편치 못했잖아.”
“꼭 지금은 편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말이 그렇다는 거지. 까칠하기는.”
예전과 달리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천의 태도는 확실히 유연해져 있었다. 그동안 여인들을 상대하면서 배워 둔 것들을 적당히 풀어낸 것이다.
“루주에게는 따로 이야기할 테니 당장 나와.”
소녀는 장부 정리를 마무리 짓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뭐야. 저 반응은.”
소천은 소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구시렁거리더니, 자신의 짐을 챙겨 뒤따라 나갔다.
“그나저나 진짜 많이 컸네. 하긴 저때가 한참 클 나이긴 하지.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벌어서는 답이 안 나오는데. 뭔가 확실하게 판을 키울 만한 일이 없을까.”
소천은 그냥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빚을 갚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무리를 해서라도 한 방에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6장 그녀의 이름은 해유유
소녀, 아니 이제는 여인이라 불러도 될 만큼 부쩍 커 버린 채권자의 이름은 해유유였다.
“해유유라. 은근히 예쁜 이름이네.”
계약서를 꺼내 이름을 확인한 소천은 새로운 일자리로 이동을 하는 동안 해유유가 기분이 좋을 만한 이야기를 틈틈이 던져 넣었다.
“엉뚱한 소리 그만해.”
“엉뚱하긴. 그런데 말이야, 정말 이런 식으로 빚을 갚을 수 있기는 한 거야?”
소천은 해유유가 소개시켜 준 일들로는 도저히 금자 1만 냥이 넘어가는 돈을 갚지 못할 것 같다며 입맛을 다셨다.
“일도 순서가 있는 거야. 처음부터 홍루에 보냈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때려치웠을걸.”
하긴 해유유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감자 깎는 일조차 못해 먹겠다고 버텼던 소천 아닌가. 물론 객잔 주인이 완전히 무식해서 어쩔 수 없이 감자를 깎긴 했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 어느 정도 생각도 바뀌게 됐고, 이 바닥의 선배(?)들을 만나서 조언을 듣기도 했으니 확실히 도움이 됐다고 봐야 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소천은 해유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돈은 줄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불어난 상태였다. 막말로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1만 냥을 어찌어찌 갚는다 해도, 5년간 이자만 금자 6백 냥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또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확실히 네 말대로 이런 식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해유유는 자신도 공감하는 부분이라는 듯 소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채무 관계로 엮인 뒤, 처음으로 상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은 대화였다.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고 한 방에 확 가는 그런 일 없어?”
앞서 걸어가고 있던 해유유는 소천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뭐?”
“한 방에 갚아 버릴 수 있는 그런 일 없냐고.”
“······.”
“뭐야, 그 표정은?”
소천은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는 해유유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거든.”
“뭐? 한 방에 확 가는 그런 일이 있어?”
“하지만······.”
해유유는 소천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몸으로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서.”
“무공? 무림인들이 익힌다는 그거?”
“그래. 당신이 말한 방법을 사용하려면 무림에서 말하는 절정급 이상의 무위를 지니고 있어야 하거든.”
무림에 대해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소천은 절정급 무위가 정확히 뭘 말하는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절정? 그게 어느 정도인데?”
“철근을 구부리고, 성인 머리만 한 바윗돌을 맨주먹으로 부수는 사람들이지.”
“뭐? 철근이 어쩌고 바위가 어째?”
소천은 그런 황당한 일이 가당키나 하냐며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하긴 무림과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
해유유는 자신의 손을 소천의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뭐야! 어딜 만져!”
“뭐가 무공인지 직접 경험해 보라고.”
“응?”
소천은 자신의 배에 손을 얹어 놓고 무공을 경험해 보라는 해유유의 말에 ‘어떻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배에 힘주는 게 좋을 거야.”
“무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여자 손에 나가떨어질 만큼 허약하진 않거든!”
해유유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기합을 넣었다.
“합!”
뻥!
“꾸웩!”
해유유가 숨을 참으며 ‘합!’ 소리를 내는 순간, 소천의 아랫배에서 가죽 공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와 동시에 돼지 멱따는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소천의 신형이 3장 이상 떼구루루 굴러가 버렸다.
“우웁! 우엑!”
아랫배에 가해진 충격이 상당히 컸는지 소천은 바닥에 엎드린 채 연방 구역질을 해댔다.
“그러게 배에 힘 좀 주라니까.”
해유유는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소천의 잘못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천이 배에 힘을 줬다 해도 평범한 사람이 내공이 실린 공격을 막아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일각이 넘도록 허우적거리던 소천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이, 이게 뭐야?”
“무공.”
“무공?”
“그래. 아직 절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 무림인이란 소리지.”
해유유가 기합을 지르는 것만으로 자신을 3장 넘게 날려 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던 소천. 그런데 그런 해유유의 실력이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 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무림인들이 하늘을 날고 바위를 가른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과장하기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것이라 치부해 버렸던 소천에게는 쉬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적 충격과도 같았다.
그러나 요 몇 달 사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바로 신색을 회복하고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무공을 익혀야 하고, 그 수준이 절정 이상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이거지.”
“하지만 절정급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열 살 이전부터 무공을 익혔어야 해.”
“열 살 이후에 무공을 배운 사람 중에는 절정급 고수가 된 사람이 없나 보지?”
“아니, 그런 것은 아니야. 하지만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든 일이란 뜻이지.”
소천은 하늘의 별을 따는 수준이라는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하긴 바위를 부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 데 개나 소나 못할 게 없다면, 세상은 진즉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으니 말을 꺼낸 거 아닌가?”
소천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든 방법은 있지. 하지만 내가 왜 그 방법을 알려 줘야 하지? 자칫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지? 문제가 생기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다니.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무림은 물론 무공에 문외한답게 소천의 질문은 단순 무식 그 자체였다.
“주화입마라는 게 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는 하네.”
“급하게 먹다가 체한다는 말처럼 무공도 마찬가지야.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을 잃거나 병신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될 바에는 지금처럼 많지는 않아도 한 푼, 두 푼 회수하는 게 그나마 손해를 줄이는 방법이거든.”
해유유의 말대로라면 무공이라는 것을 익히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은 인지를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잡부처럼 살아가다가 5년 뒤 다시 이자에 깔려 죽느니, 위험할지라도 한 방을 노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유유, 네가 말린다 해도 이미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난 어떻게든 그 길을 가려고 할 거야.”
“뭐? 누구 마음대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시자가 있다고 해도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소천은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해유유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천이 무공을 익히려 든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몰래 숨어서 익히다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게 더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소천은 가장 중요한 점을 망각하고 있었다. 절정의 고수가 되려면 알맞은 무공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그걸 가르쳐 주겠냔 말이다.
“괜한 말을 꺼냈어. 못 들은 걸로 해.”
“그럴 수는 없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데, 익힐 무공은 있는 거야? 그것도 고수가 될 수 있는 고급 무공 말이야.”
“응?”
“쯧쯧쯧! 헛생각 그만하고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해유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돈이 된다고 하니 무작정 하겠다는 소천의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소천 역시 숨어서라도 무공을 익히겠다고 했지만 해유유 말대로 익힐 무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공이 있다 해도 아무런 지식도 없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엉뚱한 짓을 하다가 해유유 말대로 죽거나 병신이 되면 정말 최악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쩝! 그림의 떡이로군.”
소천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해유유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일을 할 곳은 상당히 먼 곳인지 두 사람은 합비를 벗어난 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동을 해야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해유유는 남자가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냐며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됐다. 벌써 똑같은 질문을 열 번이 넘게 해 온 것이다.
“길바닥에 쏟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지.”
소천은 자신이 괜히 급한 게 아니라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두 사람은 구화산(九華山)을 넘어 황산(黃山) 근처까지 이동했다.
“죽겠군.”
“다 왔어.”
“다 왔다는 말만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네. 응? 진짜 다 온 거야?”
소천은 앞서 가던 해유유가 발걸음을 멈추자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해유유 앞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고생이 많네.”
“고생은요. 오랜만에 봐요.”
소천은 해유유가 목소리에 대답을 하자 연방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거야?”
소천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화려한 궁장 차림의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유유가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이라면, 궁장 차림을 하고 나타난 여인은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소천과 비슷하거나 한두 살 많아 보였는데, 손에 검을 들고 있어 그녀 역시 무림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사내야?”
“언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요?”
둘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오가자 가운데 껴 있던 소천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호호호!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니. 어엿한 경쟁자인데 관심을 가져야지.”
궁장 여인의 입에서 경쟁자란 말이 흘러나오자 소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두 여인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은 분명했고, 경쟁하는 관계라면 소속이 같다는 뜻이었다.
‘저 여자도 마전 사람인가 보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투자를 잘못했다가 크게 손해를 봤다던데.”
“헛소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서로 갈 길이 바쁜 것 같은데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해유유는 상대와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지 자리를 피하고 싶어 했다.
“동생이 그렇다면야.”
궁장 여인은 옆으로 비켜서더니 얼마든지 지나가라고 했다. 그러자 해유유는 소천의 허리를 잡더니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으악!”
갑자기 허공에 떠 버린 소천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해유유는 소천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여 궁장 여인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일각 정도 달렸을까. 해유유는 지친 얼굴로 발을 멈추더니 소천을 바닥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뭐야! 놀랐잖아!”
소천은 한 번에 1장씩 쭉쭉 날아가는 해유유의 능력에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무림인들이 하늘을 난다는 말도 사실이었던 것이다.
“시끄러워! 남자가 겨우 그딴 일로 놀래? 창피해서!”
“······.”
소천은 자신 때문에 창피했다는 해유유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걸 창피해하다니. 소천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 지금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가?”
“멍청이!”
해유유는 소천과 말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고, 소천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해유유가 자신을 멍청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금전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을 때였다. 물론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 창피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이 대담했기를 바랐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쳇!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잖아.”
소천 역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자신 마음대로 행동하는 해유유의 태도가 서운하긴 마찬가지였다.
***
소천은 해유유를 따라 도착한 곳을 올려다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해유유는 못 볼 거라도 봤냐는 표정이었다.
“남궁세가?”
소천은 완전히 예측을 벗어난 도착지에(그동안 해유유의 행보를 보면 딱히 예측하기도 힘들었지만)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풍가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곳이지.”
해유유는 소천의 놀람, 또는 긴장감을 이해한다는 듯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남궁세가의 현판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여긴 왜?”
설마 자신에게 소개시켜 준다는 일자리가 남궁세가에 있냐며 해유유를 바라봤다.
“왜, 여기에서는 일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누가 널 알아보기라도 할 것 같아서?”
“······.”
소천은 해유유의 계속되는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 있나 보네. 남창으로 허영 덩어리들의 엉덩이 닦을 힘은 남아 있고, 과거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
해유유는 웃긴다는 듯 소천을 비웃었다.
‘미친년.’
소천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잡아 눌렀다. 화를 내든, 반항을 하든 해유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이 안에 집어넣고 말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이 어떻게 상처받든, 과거의 인연이 어떻게 망가지든 그녀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은 자금 회수를 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소천이지만, 그것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전제하에서였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상황이 달랐다. 안휘성 최고의 가문이자, 무림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 중의 명문이 바로 남궁세가였다.
“풍가장이 멀쩡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신분으로 방문을 했겠지.”
해유유의 말에 현판을 바라보던 소천의 시선이 그녀에게 이동했다.
‘알고 있는 건가?’
안휘성에는 어느 정도라도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 무려 수백이다. 그중에 명문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40여 가문이었고, 그 가문들을 안휘명가라 불렀다. 그 가문들은 상계와 학계, 그리고 무림세가로 다시 나뉘어졌다.
역사는 짧았지만 풍가장 역시 기존 상계 계열의 가문에 새롭게 이름을 보태 안휘명가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았었다. 풍가장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지금쯤 소천은 이곳 남궁세가에 손님으로 와 있었을 것이다. 10년에 한 번꼴로 행해지는 안휘성 가문들의 대회합이 올해는 남궁세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지랄 맞군.’
소천은 착잡한 표정으로 남궁세가를 바라봤다.
“과거는 잊어. 지금 너의 신분은 오 년이라는 계약에 묶여 돈을 갚아야 하는 빚쟁이일 뿐이야.”
“······.”
성큼 남궁세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해유유를 보며 소천은 다시 한 번 갈등을 했다.
“안 들어갈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려 줘.”
“아직도 규칙을 숙지하지 못했나 보네.”
“일을 겪기 전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규칙?”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건 네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일을 거부할 경우,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정도는 이미 공부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해유유는 소천의 말을 막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랬었지.”
“그러니 시간 낭비 그만하고 따라 들어와.”
소천은 해유유의 차가운 미소를 보며 차츰 표정이 굳어졌다. 해유유는 소천이 어떤 표정을 짓든 관심 없다는 듯 그를 세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채권 회수라는 거 말이야.”
해유유에게 끌리다시피 움직이던 소천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정말 정 떨어지게 하는 일인 거 알아?”
“······.”
“언제고 벌 받을 거야.”
“웃기지 마. 남의 돈 가져다 쓰고 미친 척하는 놈들이야말로 벌 받아 마땅하니까.”
해유유는 더욱 서늘한 목소리가 되어 소천의 말을 잘근 씹어 버렸다.
남궁세가는 거대한 규모만큼 평범한 장원들과는 비교 자체를 하기가 어려웠다.
남궁세가는 구조상 외원과 내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방계혈족과 세가의 무사들, 그리고 가신들이 거주하는 외원만 해도 풍가장의 3배는 거뜬히 넘는 크기였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해유유가 걸음을 멈춘 곳은 외원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전각 세 채가 작은 동산 하나를 끼고 지어진 곳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운데 있는 전각 안으로 들어갔던 해유유가 중년 사내 한 명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입니까?”
중년인은 소천을 보며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지금은 볼품없어 보이지만 어려서는 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으니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해유유는 중년인의 질문에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하는데 저런 말까지 하는 거지?’
소천은 천재성 운운하며 일을 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는 해유유의 말에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좋습니다. 계약을 하죠.”
중년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해유유는 소천에게 손짓을 하더니 전각 귀퉁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천은 불안한 표정으로 해유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머리를 쓰는 일이야.”
“머리 쓰는 일?”
소천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세가는 안휘성은 물론이고 중원 곳곳에 많은 사업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는 상식 아닌가?”
소천은 안휘성, 아니 중원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말고 자신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그걸 알려 달라고 했다.
“어렸을 때 사서오경을 공부했다는 말, 사실이겠지?”
해유유는 소천이 해야 할 일은 알려 주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해 왔다.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게으름을 피우기 전까지 도가 계열의 책에 빠져 살았다고 들었다. 장주가 너를 위해 희귀한 서적까지 구해다 줬다고 하더군. 물론 안빈낙도니 유유자적이니 하는 미친 소리를 하기 전까지였지만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뭐?”
소천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해유유를 바라봤다.
“일 년간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거다.”
“······.”
소천은 1년간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는 해유유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까 그 중년인이 해 줄 거다.”
“······.”
계속되는 해유유의 말에 소천은 묵묵부답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잡다한 생각이 용솟음치며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큰일이다. 이제 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만에 하나 어려서 사서오경을 떼면서 천재라는 위명을 얻게 된 과정에 살짝 조작이 있었다고 하면 해유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표정이 왜 그래?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긴장하지 마. 그리고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일에만 집중해.”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
소천은 자신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나 떠들고 있냐며 묻고 싶었다.
“세가에 들어온 안휘성 가문의 후기지수들은 외원 동쪽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아.’
소천은 그녀가 말하는 자신의 걱정거리가 어떤 것인지 바로 이해했다. 물론 남궁세가에 처음 들어올 때는 그 부분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과 천재성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미치겠네.’
소천은 속이 바짝 타올랐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해야 한다는 일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묻고 싶은 거겠지?”
“그래.”
“일 년간 금자 백이십 냥짜리 일이다. 능력만 된다면 부수입으로 조금 더 벌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꿀꺽!”
“위약금이 두 배다. 물론 그 비용은 내가 지불해야겠지.”
해유유는 위약금 지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만 일으켜 봐. 비극이 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지.’ 하는 눈빛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1년간 금자 120냥. 엄청난 돈이다. 소천이 기루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린다 해도 100냥은커녕 60냥만 벌어도 대성공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만한 비용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세가에서 그 정도 비용을 지출할 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소천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하지만······.”
“끝났나 보군.”
“뭐?”
소천은 해유유의 고개가 전각 쪽으로 돌아가자 자신도 따라서 그쪽을 바라봤다. 잠시 기다리라던 중년인이 자신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유유!”
소천은 마음이 급했는지 해유유의 이름을 부르며 알려진 사실 속에 ‘약간의’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려 했지만, 해유유는 곧바로 중년인에게 걸어가 버렸다.
“육십 냥이요.”
중년인은 중원 전장에서 발행한 금자 60냥짜리 전표를 해유유 손에 넘겨줬다.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일 년 뒤, 일이 마무리되면 지급하리다.”
“그렇게 하죠. 그럼 전 이만.”
해유유는 전표를 품 안에 갈무리하더니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천은 해유유가 돈을 받아 챙기더니 자신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볼일 끝났다 이건가.’
“이쪽으로 오게.”
“네?”
“설명을 들어야 일을 할 것 아닌가.”
중년인은 소천의 반응에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가에서 내세운 조건에 부합되기는 했지만, 금자 10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중년인이기에 소천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빨리 움직이세.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
중년인은 굼뜬 동작으로 자신의 시간을 빼앗지 말라는 듯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 버렸다.
‘해유유, 정말 가차 없구나.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네 실수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마음대로 처리를 해 버리다니. 일 년 뒤, 위약금 물을 준비나 해 놔라.’
물론 일이 잘못되면 빚이 늘어나는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신변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리는 해유유의 행동은 빚이 늘고, 몸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고쳐 주고 싶어졌다.
‘일 년, 마음껏 허비해 주마.’
소천은 중년인을 쫓아 달려가며 해유유를 향해 으드득 이를 갈아 댔다.
솔직히 자신이 벌인 일도 아니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던 소천이었다.
해유유와의 시작이 절대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풍가장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해유유의 말에 조금은 미안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아니지.’
아무리 약자의 입장이고, 계약서상의 조건대로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곤 했지만 최소한 협의라는 게 있는 것이고, 대화를 통해 좀 더 건설적인 방향을 만들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선택과 결정을 하고 책임은 자신에게 넘기겠다니, 5년 뒤에 원금이 사라진다 해도 결국에는 평생을 노예처럼 살라는 말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의를 보이려 했던 소천의 마음에 날카로운 쇠말뚝 하다가 푹 소리를 내며 박혀 들었다.
‘그래. 해유유는 소녀도, 여자도 아니다. 그저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돈을 회수하면 그만인 채권자일 뿐이지.’
소천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채권자와 채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관계가 자신과 해유유였다.
제7장 이해할 수 없는 업무
중년인은 외원 서쪽 지역을 책임지는 총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가의 사람들은 그를 서(西) 총관이라고 했다.
외서원(外西園)은 세가의 물품 구매 및 관리를 하는 전각이 많았는데, 해유유와 처음 도착한 곳은 외서원의 업무를 총괄하는 전각이었다.
서 총관은 외서원에서도 가장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소천을 데리고 갔는데, 일종의 서책을 관리하는 서고와 같은 곳이었다. 다른 전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앞으로 네가 머무를 곳이다.”
“네.”
소천은 서 총관을 따라 서고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갔다. 서고 안쪽은 다시 밖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통과하자 객잔의 별관처럼 작은 크기의 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은 높은 담으로 막혀 있어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이 책들을 분야별로 나누고, 도가 계열의 책만 추려 내라.”
서 총관과 함께 들어간 방에는 언뜻 보기에도 수천 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도가 계열만 말입니까?”
소천은 자신이 해야 할 금자 120냥짜리 업무치고는 너무 쉬운 일이라 생각됐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간은 열흘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일을 일 년씩이나 할 이유가 없겠지.’
소천은 열흘 안에 서책을 분류하고, 도가 계열의 책만 골라 내라는 말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 내용을 살피고 해석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분류를 하는 일이라면 당장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식사는 때가 되면 가져다 줄 것이다. 종소리가 들리면 별관 앞으로 나오거라.”
“그 말씀은······.”
“너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
“열흘 뒤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일을 끝내 놓거라.”
서 총관은 그 말을 끝으로 뭐가 그리 바쁜지 곧장 돌아가 버렸다.
소천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을 바라보다가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자리를 잡았다. 상당히 많은 분량의 책들이었지만, 분류만 하는 것이라면 열흘 안에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군.”
흩어져 있는 책을 들춰 보며 내용을 살피던 소천은 왜 이런 일을 시켰는지 깨달았다.
해유유가 자신을 남궁세가에 집어넣으며 그들이 원하는 일에 적임자임을 장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유유의 말만 믿고 무작정 일을 시킬 수는 없는 일. 과연 해유유 말대로 자신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일종의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자 백이십 냥짜리 일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 년간은 이곳에서 버티는 게 좋겠지.”
5년의 계약 기간 중 1년이면 상당한 시간이다. 해유유에게 끌려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곳에서 소모해 버리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물론 1년 뒤, 찾아온 해유유가 위약금을 무는 장면도 구경해야 하고 말이다.
열흘의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서 총관의 말대로 종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 보면 식사가 배달되어 있었고, 의복 역시 3일에 한 번씩 갈아입게 준비가 됐다. 생활만 따진다면 지금까지 일했던 어떤 곳보다 대우가 좋았지만, 실수를 하는 날에는 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도 분명했다.
“흠.”
서 총관과 함께 나타난 또 다른 인물. 나이는 대충 서른 초 중반으로 보였다. 마흔 정도로 보이는 서 총관보다 어려 보였지만 신분은 더 높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문제는 없겠군.”
사내의 말에 소천은 머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시험이었다.’
“비용은 다른 곳에 비해 과하긴 하지만, 마전이 신용만큼은 확실하군.”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서 총관은 거래 금액이 예상을 웃돈 것에 불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어린 나이에 옛 문자들까지 확인하고 분류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 비용은 감수할 수 있다.”
“그럼 내원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사내는 소천을 힐끔 보더니 서 총관에게 눈짓을 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던 서 총관의 시선이 소천 쪽으로 향했다.
“자리를 옮길 것이다. 따라오거라.”
“알겠습니다.”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소천은 망설임 없이 서 총관을 따라 나섰다.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일에 끼어드는가 싶어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해유유가 금자 120냥에 자신을 팔아넘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망설이지 않는 이유였다.
‘이 일이 끝난다 해도 삼 년이 넘는 기간이 남는 데다, 나에게 받아 내야 할 돈도 여전하다. 겨우 그 정도 돈에 나를 버린다면 웃기는 일이지.’
소천은 서 총관이 이동하는 길이 세가의 뒷길임을 알아차렸다. 규모는 작지만, 그 역시 거대 장원의 후예였다. 일반인들이 다니는 길과 세가의 사람들만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소천은 남궁세가에 들어온 지 열흘이 넘도록 서 총관과 조금 전의 사내를 제외하곤 사람 구경을 해보지 못했다. 식사와 의복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식경 정도 이동한 소천은 이번에도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전각 앞에 도착했다.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다.”
이미 열흘 전에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이 서 총관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서책을 분류하는 일입니까?”
소천은 곧바로 업무 파악에 들어갔다.
“비슷하다. 하지만 좀 더 신경을 써야겠지.”
서 총관은 안에 들어가면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다며 소천을 전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천은 이번에도 잔뜩 서책이 쌓여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간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 정갈한 느낌까지 들었다.
“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소천은 방 안을 살펴보다가 서 총관을 바라봤다.
“책은 곧 준비가 될 것이다.”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인지 헷갈리는군.’
소천은 서 총관의 말투가 묘하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한 일과 큰 차이가 없다는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지?”
막 발길을 돌리려던 서 총관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에 조건이 맞는 사람이 필요하다 했는데, 어떤 조건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서 총관은 소천의 말에 잠시 말이 없어졌다. 소천은 자신이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조심스러워졌다.
“마전에서 전해 듣지 못했나?”
“사서오경과 도가 서적에 대한 공부를 했으면 된다고······.”
“잘 알고 있군.”
소천의 말에 서 총관은 틀리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소천은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 질문을 했는데 그게 전부라는 대답을 듣자, 오히려 자신이 너무 민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도착하면 해야 할 일도 서면으로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소천이 대답하자 서 총관은 더 이상 일이 없다는 듯 돌아가 버렸다.
“귀신 놀음도 아니고······.”
그저 책을 읽고 분류하는 일에 금자 120냥이라니. 소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지만 이 정도 일은 자신 말고도 얼마든지 할 사람이 넘쳐났고, 이렇게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지원자가 줄을 설 일이었다.
전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소천은 해유유와 계약을 한 뒤 처음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자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풍가장에서 쫓겨난 지 네 달 동안 한 번도 여유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생기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 것이다.
앞서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 시간을 제외하고 밖으로 나간다면 계약 위반이라는 말까지 들은 상태라, 소천의 행동반경은 50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였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닌데······.”
정확히 규칙적으로 울리는 종소리를 통해 시간을 가늠하던 소천은, 정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소리가 울리자 식사나 의복이 아닌 드디어 책이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소천은 반가운 사람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달리다시피 전각 앞으로 나갔다.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천 앞으로 보내진 책은 모두 3권이었다. 책에는 업무 내용이 적힌 서신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
“어디 보자.”
서신과 책을 전각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소천은 자신이 할 일을 확인하기 위해 서신을 펼쳐 들었다.
“은유적으로 표현된 부분들을 이해하기 쉽게 바꿔서 적으라고?”
소천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구 사항이 너무 단조로웠다. 어린아이들이 공부하기 좋게 해석본을 만들어 주는 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소천은 서신을 내려놓고 책을 집어 들었다. 따로 제목은 적혀 있지 않은 깨끗한 표지.
“제목이 없어?”
소천은 이 역시 이상하다 생각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깨끗한 표지와 달리 책 안쪽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낡아 있었다. 대충 살펴봐도 족히 백수십 년은 넘은 상태로 보였다. 거기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옛 문자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표지가 낡아서 새로 제본을 했거나, 아니면 아예 표지가 없었다고 봐야겠군. 그나저나 신기하네. 아버지가 심심파적으로 가르쳐 준 글자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군.”
소천은 제목이 없는 이유가 애초부터 표지가 너무 낡아 그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권은 공책(空冊)이군.”
자신이 해석본을 적어 넣을 책도 함께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기간이 명시가 안 되어 있네. 설마 이 책 하나를 풀어쓰는 데 일 년이나 준 것은 아닐 테고······.”
소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때가 되면 와서 확인을 하겠지, 하며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책 한 권이라며 우습게 생각했던 소천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히 도가 계열의 책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도무지 일반적인 사고로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방문좌도(傍門左道)에 빠진 도사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책을 써 내리면 이렇게 될까?
“끙! 앞뒤가 맞지 않잖아!”
소천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집어던져 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한동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씩씩거리던 소천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예 손을 대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려서 천재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와 같았다. 솔직히 그 어린 나이에 사서오경이 다 뭐란 말인가. 뜻을 파악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안에 적힌 글자를 모두 읽어 내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문제는 호기심 삼아 책을 펼쳐 들고 있는 것을 아버지 풍무진이 봤다는 데 있었다.
풍무진이 소천에게 거는 기대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는데, 그 기대가 지나치다 보니 소천이 하는 일은 소소한 일도 크게 보이고, 또 부풀려 자랑을 했다.
정작 당하는 소천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었지만, 자식이 아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나중에라도 천천히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소천이 천재라고 소문이 난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방 안에서 사서오경을 펼쳐 놓고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있었으니, 풍무진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문의 뿌리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풍무진은 소천이야말로 향후 풍가장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인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덜렁거리는군.”
소천은 제목도 없는 책을 들여다보며 옛 생각이 떠올랐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책들을 무턱대고 외우지 않았던가. 물론 사서오경을 모조리 외웠다는 등의 소문은 해도 너무했지만 말이다.
6살에 사서오경을 뗐다는 말이 나오게 된 사연도 정작 속을 들여다보면 어이가 없는 사건에서 시작됐다.
풍무진은 소천의 6살 생일에 잔치를 열어 손님들을 초대했는데, 천재로 소문난 아들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찾아온 사람 중에 소천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문사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이 질문을 하거나 물어보는 부분들이 하필이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부분들이었다. 합비에서 방귀 좀 뀐다는 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사서오경을 뗐다는 소문을 증명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어.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연출하고도 남을 분이었으니.”
사연이야 어찌 됐든 소문으로만 나돌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버리자 소천은 다시 궁지에 몰려야 했다. 합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풍가장의 셋째 아들은 천재라고 치켜세웠고, 크게 고무된 풍무진은 글 선생까지 초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을 뻔했는데······.”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실망하거나 풍가장에 피해가 갈까 두려워, 하루 두 시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던 소천이었다. 말 그대로 천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루 열 시진 이상을 남 몰래 책만 보고 산 것이다. 다른 이들 눈에는 천재로 보였을지 몰라도, 소천 자신에게는 피를 토하는 각고의 시간을 보낸 대가였다.
10살이 넘어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하던 소천은 이렇게 살다간 정말 제 명에 못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도가에 빠진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해 간다 했던가. 쉬지 않고 책을 들여다보던 생활에서 하루 종일 자고 먹는 걸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자 만사가 귀찮아지고 게을러졌다. 머리 쓰는 일이라면 질색을 하게 된 것이다.
합비에 알려진 풍가장 천재의 진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과거의 일이지.”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것이 몇 달 전의 소천이었다면,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의 소천이었다. 굳어 있던 사고는 점차 회복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천재라는 헛소문만큼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이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런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하루에 한두 시진만 자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으니까.”
해유유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과거를 철석같이 믿었기에 이런 일에 투입을 시켰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한다.”
소천은 해석본을 만들라는 남궁세가의 요청에 난감한 마음이 되었다. 그들 역시 해유유의 말과 마전의 신용도를 믿고 자신을 고용했겠지만, 이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 나올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소천은 그 뒤로도 보름이 넘게 책을 들여다봤지만 세가에서 요구한 ‘은유적 표현의 일반화’에 대해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멍하니 책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소천에게 서 총관이 찾아온 것은 오후쯤의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소천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총관을 맞이했다.
“일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고자 하네.”
서 총관은 책상 위에 올려 있는 해석본을 집어 들더니 책장을 넘겼다.
“이게 뭔가?”
서 총관은 여백만 가득한 책을 내려놓으며 소천을 바라봤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원본의 내용이 난해하여 아직 연구 중에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서 총관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저 반응은.’
화를 낼 줄 알았던 서 총관이 순순히 인정을 해 버리자, 잔뜩 긴장했던 소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언제쯤 가능하겠나?”
“그게······.”
소천은 답하기 어렵다는 듯 고민스러운 표정이 됐다.
“너무 많은 시간을 줄 수는 없네. 그건 알고 있겠지?”
“······.”
“두 달 안에 최소한 일 할 정도는 끝내 줘야 하네.”
“네? 아, 네.”
해석해야 할 책의 분량은 모두 32장이었다. 1할이라면 3장 정도만 해석을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당장 한 장도 풀어 내지 못한 소천이었지만, 전체가 아닌 1할이라는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 소리를 듣던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보네. 난 이만 가 보겠네.”
“살펴 가십시오.”
서 총관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재 소리를 듣던 자네라니.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해유유 그녀가 이야기를 한 걸까?”
하긴 남궁세가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를 이런 일에 고용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난해한 책을 해석하는 데 왜 하필이면······.”
소천이 의구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자신이 천재라 알려져 있고, 또 도가 서적에 심취해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 분야에 대해 평생을 공부한 학자들에 비하면 얼굴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천은 책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고용에 분명히 감춰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주고자 일부러 일을 만들었다면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 아이는 어찌하고 있는가?”
서 총관과 함께 소천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고심하는 듯 보입니다. 일단 두 달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잘했네.”
“저기······.”
사내의 말에 서 총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인가?”
“······.”
서 총관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궁금하냐는 사내의 질문에 선뜻 대답은 못했지만, 얼굴에는 그렇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주나라 사람 이이(李耳)를 아는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서 총관은 모르는 이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네.”
“도가의 창시자라면, 노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노자의 이름이 바로 이이네.”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서 총관은 학식이 짧아 모르고 있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껄껄껄! 자네가 그리 말하니 재미있군. 하지만 도가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 자들을 제외하곤, 노자와 도덕경은 알아도 노자의 본명을 아는 이는 많지 않네.”
사내는 웃음을 보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주나라가 무너질 때쯤 이이는 은둔할 것을 결심하네. 그리고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중에 남긴 책이 바로 도덕경이지.”
“아······.”
서 총관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작게 감탄사를 보였다.
“하지만 도가사상의 경전이라는 도덕경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존재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네.”
“혹시 그 책이······.”
“소천에게 준 책이지.”
서 총관은 그렇게 중요한 책을 어찌 소천 같은 이에게 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나라고 그러고 싶겠는가.”
“······.”
“도덕경은 그 책을 이해하기 편하게 만든 일종의 해석본이라고 보면 될 것이네.”
사내의 입에서 도덕경의 원전이 소천에게 전해 준 책이라는 말이 나오자, 서 총관은 더욱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도덕경 역시 책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지.”
“하지만 소천에게 전해 준 책은 서른 장 남짓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서 총관은 그 얇은 책에서 도덕경 같은 책이 만들어졌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나 역시 신기하고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네.”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군요. 그 책도 노자가 만든 것입니까?”
“전해지기론, 은(殷)나라 때부터 전해진 책이라고 하더군.”
서 총관은 ‘은나라’라는 말에 그게 사실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상에 존재했다는 고대국가의 유산이라니, 서 총관은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 되었다.
“뭐,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이야기이니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
“하지만 그 시대에 쓰인 글이라면 갑골이나 대나무에 적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종이를 사용했다면 아무리 빨리 만들어졌다 해도 후한(後漢) 시대 아닙니까.”
서 총관이 소천에게 건네준 책은 갑골이 아닌 종이에 쓰여 있었다. 상고시대부터 전해진 것이라 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승되는 과정에 옮겨 적은 거겠지. 아니면 노자가 그렇게 만들었거나. 사실 노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는 없지. 결국 몇 번에 걸쳐 다시 만들어졌다고 봐야지.”
“아무튼 놀라운 일이군요. 그들의 책이 도덕경의 원전이라니······. 그런데 어떻게 그 책을 손에 넣으신 겁니까?”
“그 책은 내 것이 아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세가의 것이란 뜻이네.”
“아······.”
“세가가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손에 넣었다고 하더군.”
세가가 안휘에 자리를 잡았을 때 손에 넣었다는 말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세가에 존재했다는 뜻이었다.
“남궁세가의 무공은 모두 그 책에서 비롯됐다고 보면 될 걸세.”
“······!”
서 총관은 자신이 몰라도 되는 부분을 알게 됐다는 생각에 표정이 굳어졌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가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세상에 책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그 책을 통해 남궁세가의 무공이 정립됐다곤 하지만, 무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네. 대대로 연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는 책이니 말일세.”
사내는 손에 넣는다 해도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물건임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가의 중추들만 알고 있고, 또 비밀리에 전승되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부분은 변함이 없었다. 서 총관은 자칫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군. 궁금한 점이 왜 그 책을 소천에게 주었냐 하는 것이었지?”
“그렇습니다.”
“다들 소천이란 아이가 어려서 사서오경을 뗄 정도로 천재라 알고 있겠지만, 사실 내가 바라는 천재성은 일반적인 학문 분야가 아니네.”
“네?”
서 총관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사내를 바라봤다.
“풍가장의 주인들이 어떤 분야에 재능을 보였는지 알고 있는가?”
“그건······.”
서 총관은 풍가장에 대해 딱히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기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바로 산술이네.”
“산술이라면 상인들에게 필요한 공부가 아닙니까?”
“그 책에서 가장 최근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그런 책이 존재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들었는데 그걸 어찌 알겠는가. 서 총관은 고개를 저었다.
“소천의 아비인 풍무진이네.”
소천뿐 아니라 풍무진까지 그 책을 봤다는 말에 서 총관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러네. 그 책은 도가사상에 깊이가 있다 해서 해석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뜻이네.”
서 총관은 그렇다면 어떤 지식이 있어야 책을 해석할 수 있는지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그 책은 읽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암문들이네.”
“속하가 알기론 암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것의 모체가 되는 약어(略語)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이네. 하지만 그 책의 약어를 어디서 찾겠나.”
그런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전무한데, 어찌 약어가 남아 있겠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약어가 남아 있어 책을 해독할 수 있었다면, 남궁세가는 안휘의 지배자가 아닌 중원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산술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말은, 약어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과 같네. 풍무진은 그것을 통계학이라고 하더군. 작은 규칙만 찾아내도 어느 정도는 해독이 가능하다고 했고, 실제로 일부 내용을 풀어내기도 했네. 무려 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말일세.”
수많은 조건을 대입해 일정 규칙을 알아내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에 무던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결국 해독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서 총관은 역사가 짧고, 안휘에 기반이 없다시피 한 풍가장이 다른 가문들의 압박을 견디고 자리를 잡은 과정에 남궁세가가 개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풍무진은 무가 사람도 아니고, 무공을 익힌 적도 없는 사람이니 더욱 적임자였을 것이다.
“소천이란 아이가 그런 규칙을 찾아내길 바라시는 거였군요.”
“솔직히 많은 기대는 하지 않고 있네. 풍무진이 갑작스럽게 죽지만 않았어도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지.”
서 총관은 소천이 가지고 있는 책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알게 되자, 소천의 생활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책 속에 담긴 비밀을 찾아낸다면 소천은 남궁세가의 중요한 손님으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서 총관의 마음을 읽어 냈는지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따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네. 그 아이와의 계약은 일 년. 풍무진만큼의 재능을 보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서 총관은 자신의 주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사내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해석을 해낸다 해도 그 아이는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네.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쓰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서 총관은 세가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미래가 양단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소천의 운명처럼 영원히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거나, 다른 총관들과 달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세가의 핵심이 될 것이다. 서 총관은 전자보다 후자의 미래가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고 싶었다.
제8장 무공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다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막막함과 함께 오기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문장 자체에서 납득이 될 만한 내용을 해석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다가, 점차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쓰인 그대로가 아닌 감춰진 글자가 있거나, 특정 규칙에 따라 읽어야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처음에는 설마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으로는 책을 읽어 낼 수가 없었고, 의미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소천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바로 지필묵을 준비하고 책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책을 훼손할 수는 없었기에 다른 곳에 적어 놓고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해 문장을 완성해 볼 생각이었다.
서 총관이 다녀간 지 3일 만에 소천은 해석본 작성용으로 보내 준 공책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안 되겠다. 종이가 더 있어야겠어.”
소천은 마지막 남은 한 장을 찢어 내더니 그곳에 종이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적어 빈 그릇과 함께 밖에 내놓았다. 이곳의 관리는 서 총관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자신의 요청이 곧바로 그에게 전달될 것이다.
소천이 편지를 보낸 지 반나절 만에 서 총관은 종이 수백 장을 가져다주었다.
“부족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감사합니다.”
쌀쌀맞아 보이던 서 총관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소천이 서 총관을 만나고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서 총관이 웃음을 보인 이유가 자신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 말이다.
“다시 시작해 볼까.”
소천은 종이를 넓게 펼치더니 다시 내용을 옮겨 적고, 문장을 재배열하거나 넣고 빼기를 반복하면서 서책에 감춰진 비밀을 알아내고자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천은 딱히 기억력이 좋거나, 한눈에 핵심을 파악하는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뭔가를 분해하고, 재배치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속도가 빠르고 정확했다. 소천이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정보를 다루는 방파에 발을 들였다면 초고속 승진을 하고, 그 분야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문제는 소천이 파고들기 시작한 서책이 금전적 비밀을 담고 있거나, 산술적 이치를 감춰 둔 서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천은 자신이 조합한 문장들을 읽어 내리며 연방 머리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내용들.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적지 않은 소득을 만들어 냈지만, 질적 요소에 있어서는 도저히 자신할 수가 없었다.
“젠장! 내용에 확신을 못하니 찾아낸 배열 조합의 규칙이 정말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네.”
하지만 얼토당토않던 원전의 내용과 달리 자신이 조합해 놓은 문장들은 확실히 완성된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첫 구절인 일원(一元)과 끝 구절인 무극(無極)으로 마무리되는 구조는 분명히 문법적으로 상통하고 있는데······.”
소천은 자신이 뽑아 낸 내용이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이것들이 무엇을 위한 문장들인지는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요구한 것은 은유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책 속에서 찾아낸 내용 역시 이해하기 쉬운 문장은 결단코 아니었다.
“도가 서적이라 했으니 일단 그쪽에 맞춰 해석을 시도해 보자. 시작과 끝을 자리 잡고 있지만, 끝이 시작과 맞물리는 형국이니 끝없이 순환하는 혼돈(混沌)의 이치와 같다고 봐야 하나?”
소천은 도가의 경전이라는 최초의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찾아낸 문장을 그럴듯하게 풀어 보기 시작했다.
“무극이라. 말이 무극이지, 그 하나만 파고들어도 평생을 고민해야 할 화두인데.”
소천은 자신의 주석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붓으로 적어 보는 것이야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무극 자체를 논하기 시작하면 수백 수천의 학자들이 모여도 설왕설래 끝없는 토론의 연속이 될 것이다.
소천은 이런저런 고민 속에 다시 한 달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내 버렸다.
서 총관과 약속한 두 달 중 4분지 3이 지나가 버리자 소천의 마음은 점점 쫓기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결과를 내놔야 다시 시간을 벌 텐데, 이건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천은 자신이 뽑아 놓은 일종의 경문 외에도 또 다른 문장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초에 발견한 31자의 머리 터질 것 같은 문장이 아니라, 문외한인 소천이 봐도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그런 내용을 찾아낸 것이다.
“하늘의 뜻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다. 좋구나. 드디어 서 총관에게 할 말이 생긴 셈인가?”
소천은 온통 먹물투성이의 모습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닌 이해 가능한 최소의 문장을 도출해 낸 것이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던 소천에게는 여명이 비춘 것과 같았다.
두 달째 되던 날, 소천을 찾아왔던 서 총관은 방 안 가득한 먹향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다 뭔가?”
서 총관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양의 연구 내역(낙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죄송합니다. 방이 좀 어지럽습니다.”
방이 어지럽다? 이 정도면 쓰레기장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진척은 있는가?”
서 총관은 곧바로 결과에 대해 질문을 했다.
‘해유유나 서 총관이나 정말 과정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구나. 어떻게 결과에만 집착을 하냐.’
두 달간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고민을 했었는데,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자 살짝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에 친한 척 서로를 챙겨 주는 것도 이상한 짓이라 생각이 들자 소천은 아쉬움을 털어 내 버렸다.
“여기 있습니다.”
종이 더미를 뒤적거리던 소천이 몇 줄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내 서 총관에게 건네주었다.
“하늘의 뜻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다. 바람(風)과 구름(雲), 그리고 비(雨), 뇌(雷)가 함께하며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 운행을 관장하리라.”
서 총관은 소천이 넘겨준 내용을 쭉 읽어 내리더니, 이게 뭐냐는 듯 다시 소천을 바라봤다.
“그, 그게··· 삼백육십여 가지라고 한 것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가 힘들어서······.”
서 총관은 소천이 해석했다는 내용을 보며 이것이 정말 해석을 한 건지, 아니면 두 달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썼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말인지를 확인하고자 소천을 바라봤었다. 그런데 소천은 내용에 문제를 제기한 걸로 착각하고 변명을 해 대는 것이 아닌가.
‘설마··· 정말 뭔가를 찾아냈다는 말인가? 풍무진도 십여 년에 걸쳐 살펴봤다는 비서(秘書)를?’
서 총관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쳐 갔지만,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소천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없는가?”
“딱히······. 아, 종이는 지금보다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구해 줄 수 있네.”
“그리고.”
“뭐든 이야기해 보게.”
“참고할 만한 책들이 좀 필요합니다. 종류는 상관없으니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을 좀 보내 주시겠습니까? 가끔 어려운 말들이 나오거나, 전혀 이해 불가의 부분이 있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서 총관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찾는 책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떤 책이 도움이 될지 모르니 그것은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럼 계속 수고해 주게.”
서 총관은 소천이 건네준 종이를 품속에 넣더니 발길을 돌렸다.
“저기··· 서 총관님.”
“또 생각나는 게 있는가?”
“그건 아니고··· 다음 해석본은······.”
서 총관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입을 열었다.
“빈 그릇을 내놓을 때 서신을 보내게. 그럼 그때 찾아오도록 하지.”
서 총관은 딱히 기한을 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때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다. 소천은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책의 내용은 몇 장씩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잘됐구나.’
소천은 서 총관이 돌아가자 안도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
서 총관은 책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 필요하다는 말에 어떤 책을 보내 줘야 할지 고민해 봤다. 소천에게 보내진 책이 도가의 경전이라고 알고 있을 때라면 도가 서적을 잔뜩 보내 줬겠지만, 그것이 무공에 관련된 내용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고민스러워진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 뼈를 묻을 아이니······.”
이미 무엇이 되었든 책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아끼지 말고 지원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자신의 업무실로 이동하던 서 총관은 발길을 세가의 서고 쪽으로 향했다.
***
소천은 자신에게 보내진 서책들을 살펴보며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자신은 도가 경전을 해석하는 데 참고할 만한 것들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에 당연히 도가 계열의 서책들이 보내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엉뚱한 책들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무공의 이해, 내공의 기초, 혈행도, 인체의 중심과 움직임의 변화?”
소천은 표지에 적힌 제목들을 쭉 훑어보다가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분명히 자신은 도가의 경전을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책들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도가 철학을 수학하는 학자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들이었다.
“무인들이나 보는 책이야.”
소천은 책상 위에 놓여진 오래된 경전에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다.
“설마······.”
설마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 중얼거림이었다. 남궁세가는 무가였다. 그것도 그저 그런 무가가 아니라, 중원에 떨치고 있는 이름이 유명한 무림 문파 못지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도가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쓸 이유가 없지.”
소천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해석을 내놓아야 하는지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나를 이렇게 감춰 놓고 일을 시킬 정도면, 그 책의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는 뜻이다. 해유유의 말대로라면 무공이라는 것은 쉽게 가르쳐 주지도 않고, 또 자신의 무공이 새어 나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했다.”
소천은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섬뜩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아차렸다.
“잘되어도··· 잘못되어도······.”
소천은 무서운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죽는다.”
해유유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계약을 했던 것일까?
“아니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유유는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여자가 아니야. 한두 푼도 아니고 아직 계약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를 버릴 이유가 없다.”
소천은 해유유 역시 이 일의 정확한 성격을 모르고 계약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이곳에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갚아야 할 돈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나를 통해 금자 백이십 냥을 받아 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어쩌면 그 돈이라도 챙길 생각에······.”
소천은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경험을 했다. 만에 하나 해유유가 자신을 버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도 결국에는 남궁세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곳에서 평생 남의 일이나 하고 산단 말인가!”
소천은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지, 1년이란 시간을 보낸 뒤에도 좀 더 버텨 낼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사로잡는 도가 경전.
“저들은 해석본을 원해. 물론 내가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지.”
소천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책을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천천히 저들이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게 만들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해유유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일 년 뒤 나를 찾아올 것이다. 일단 그때까지는 버텨 봐야 한다.”
1년이 지나도 해유유가 돌아오지 않을 것도 대비를 해야겠지만, 일단 소천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초조한 심정이 되었는지 소천은 윗입술을 연방 깨물었다. 그러다 서 총관이 보내준 무공서에 시선이 갔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말하라고?”
소천은 무림인이 되면 빚을 빨리 갚을 수 있다던 해유유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가능성을 넓혀야 해.”
소천은 도가 경전은 제쳐 두고, 일단 무공이 무엇인지 지식을 쌓기로 했다. 자신이 해석하고 있는 것이 도가 경전의 껍질을 쓴 무공서라면, 아니 자신이 그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위해 잠까지 줄여 가며 노력을 했던 소천이었다. 이미 다 큰 어른이 된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이곳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빼앗지도, 또 방해하지도 않는 최적의 공간 아니던가.
소천은 마치 무공에 미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무서운 속도로 공부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해력이 높지 못해도 충분히 독학이 가능한 기초 부분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상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무공서를 제외하고는 학식이 짧은 무림인들 때문에 책 자체가 어렵지 않게 쓰인 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소천은 서 총관이 가져다준 기초 서적을 기반으로 점차 필요한 서책을 늘려 가기 시작했다.
무공의 이해는 무공의 역사와 발달에 관한 책으로 변해 갔고, 내공의 기초는 일류 무인을 키워 낼 수 있는 실제 내공심법이 실린 무공서까지 요청했다.
***
서 총관은 소천이 요구한 책자들 속에 일류 무인들을 키워 낼 수 있는 무공서가 포함되어 있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소천이 경전의 해석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 총관은 자신의 집무실 은밀한 곳에 감춰 두었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소천이 건네줬던 첫 해석본이 적힌 종이였다.
소천에 대한 부분을 완전히 일임 받은 서 총관은 한꺼번에 2마리 토끼를 쫓는 중이었다. 하나는 소천이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무공을 높이는 부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물을 소가주에게 바치고 입지를 확고히 하는 일이었다.
“이럴 때는 소가주가 폐관에 든 것이 나에게는 복이라고 봐야겠지. 나 남궁홍의 인생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외원 서쪽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총관 남궁홍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방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천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일곱 달 정도가 남았지만, 계약은 갱신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소가주의 폐관 수련이 끝나는 삼 년 안에 모든 걸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점인데.”
소가주 남궁수환이 자신에게 비서의 존재를 알려 준 이유는 사실 복잡한 사연을 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방계혈족인 자신에게 그 큰 비밀을 알려 줬겠는가 말이다. 이래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기는커녕 기연을 만나는 놈도 있는 것이다.
소가주 남궁수환이 소천을 끌어들여 풍무진에서 끝이 난 비서의 해독 작업을 맡기는 순간, 현 가주인 남궁무상의 폐관 명령이 떨어졌다. 세가도 슬슬 세대교체가 이뤄질 때가 오자, 남궁무상은 자신의 아들이자 소가주 위치에 있는 남궁수환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창궁검법은 물론이고, 가주가 익혀야 할 무공의 수련을 명한 것이다.
다음 대 가주 자리를 잇기 위해 내려진 명령이니만큼 남궁수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도가의 경전을 해석한다는 미명 아래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했던 남궁수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없는 동안 소천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미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데 또 다른 이를 끌어들이기 난처했던 남궁수환은 결국 남궁홍에게 비밀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뜻을 따름으로써 차후 세가에서 어떤 위치를 얻게 될 것인지 넌지시 말해줘야 했다.
남궁홍은 이러한 세가의 상황 때문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다음 대 가주의 심복이 됨과 동시에, 소천이 해석해 놓은 문장을 가지고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크크크큭! 크하하하!”
집무실에 앉아 소천이 넘겨준 종이를 내려다보던 남궁홍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소천이 남궁세가에 들어온 지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미치듯이 무공에 파고들며, 서 총관이 의심하지 않게 한 달에 한 번씩 작은 분량의 해석본을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자신이 해석본을 넘겨줄 때마다 보여 주는 서 총관의 눈빛이었다. 그가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동안 만났던 이들 중에 서 총관만큼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인 사람은 단연코 한 사람도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미친 듯이 움직이는 사람도 광기를 보이지는 않았다.”
소천은 무림인이란 존재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무림인의 무공에 대한 집착은 돈에 미친 것과는 차원을 달리했던 것이다.
돈을 위해서 타인의 목숨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지독한 인간들도 최소한 자신의 목숨만큼은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로 할 정도로 무공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철저하게 강자존의 세계, 야수의 세계가 무림이다.”
소천이 무림에 대해 내린 결론은 강력한 힘을 지닌 야수만이 살아남는 무정한 세계라는 것이었다.
“싫든 좋든, 나 역시 무공을 익히고자 마음먹었으니 그들 이상으로 지독해져야 해.”
소천은 서 총관이 가져다 준 무공서를 통해 지식을 쌓아 가고는 있었지만, 곧바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내공에 관련된 책 속에 시작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결정된다는 구절 때문이었다.
“경전 속에 감춰져 있는 무공을 찾아내 그걸 익혀야 한다. 무작정 아무거나 익혔다간 죽도 밥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거야.”
자신의 해석본을 받아 갈 때마다 탐욕의 눈길이 강해지는 서 총관의 모습을 보며, 경전의 가치가 자신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천의 마음은 경전에 감춰져 있을지 모를 무공에 집착했고, 집착이 강해질수록 점점 경전에 투자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분량이 많군.”
“일부 막혔던 부분이 풀려서 그렇습니다.”
소천은 서 총관의 말에 운이 좋았다는 듯 대답했다.
“고생했다. 앞으로도 분발을 해다오.”
“저기······.”
서 총관은 소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고민하지 말고 말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 년 안에 이 책을 모두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소천은 애초부터 1년이란 계약 기간이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지금 같은 속도라면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면 되는 것입니까?”
소천의 말에 서 총관의 얼굴에 불편함이 나타났다.
“이미 네가 이 일을 맡았는데, 또다시 사람을 찾아 인수인계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계약을 갱신할 것이다.”
계약의 갱신. 최소한 1년째 되는 날 소리 소문 없이 목숨을 잃을 일은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계약에 대한 갱신 이야기가 나오자 대뜸 할 말이 있다는 소천의 말에 서 총관의 얼굴에 짜증이 드러났다. 소천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마전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흠··· 그랬는가?”
서 총관은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 됐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마다 마전 사람과 협상을 하는 중인데, 계약을 갱신하기 전에 제 담당자와 만났으면 합니다.”
“담당자라면 그때 찾아왔던 소저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서 총관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계약 기간을 늘리고 갱신을 하려면 자신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니,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마전이 신용에 얼마나 지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서 총관이었다. 계약을 갱신하기 전에 그쪽에서도 분명히 소천을 만나려고 할 것이니,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었다. 괜히 마전과 문제를 일으켰다가 엉뚱한 소문이라도 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도가 경전의 해석이라는 업무를 맡겨 놓았는데 민감하게 반응하면 곧바로 의심을 할 게 분명했다.
“다른 할 말이 더 있느냐?”
“혹시 무림에 관한 야사나 정보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구해 주십시오.”
“무공이 아닌 무림사에 관한 책을 말이냐?”
서 총관은 의외의 주문이라는 듯 소천을 바라봤다. 소천은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말을 늘어놨다.
“제가 무공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것은 서 총관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서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무공서만 봐서는 그게 어떤 힘을 발휘하고, 또 어떻게 활용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네 말은 무림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좋다. 그런 책이라면 저자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많은 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두 권 정도 보내 줄 생각이었던 서 총관은 최대한 많은 양을 보내 달라는 소천의 말에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라는 눈빛을 날렸다.
“사실 하루 종일 연구만 하다 보니 좀 지친감이 있습니다. 가끔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쓸까 합니다.”
결국 이야기책을 보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크크!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알았다. 며칠 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해석본을 품에 넣고 돌아가 버렸다.
“휴! 일단 계약 기간이 끝나도 죽지는 않을 것 같군. 해유유를 만나게 되면 남궁세가를 등에 업고 협상도 가능할 것이고······.”
소천은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무공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휘리릭!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책장을 보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좋은 검을 지녔다고 고수가 된다면 대장간의 장인이 무림을 장악했겠지.”
무공도 중요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림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잡서로 취급받는 야사나 이야기책 속에는 그 문화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과정과 경험들이 녹아 있다. 무림에 관한 야사나 이야기책 역시 다른 잡서들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 총관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과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소천은 약점을 극복하고,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을 방법을 공부하는 데 최소한의 자료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또다시 네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앞으로 남은 계약 기간은 한 달 남짓한 시점.
소천은 그동안 해석해 놓은 내용과 서 총관이 가져다준 세가의 무공 서적들 사이에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남궁세가가 거인으로 자리 잡는 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경전이 지대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으로 한 달. 드디어 해유유가 온다.”
소천은 현재 자신의 가치가 최소 금자 120냥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르겠지만, 남궁세가에서만큼은 금전적 가치 이상의 존재가 되어 간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는 것부터 시작해, 경전을 해석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라면 쓸개라도 빼 줄 듯 행동하는 서 총관의 태도는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남궁세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보내 줄 수 없을 것이다.”
계약 갱신이 아닐지라도 자신은 결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세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온 사람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해유유, 너는 이번 기회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얼굴을 마주할 날이 그만큼 줄어들겠지.”
소천은 해유유에게 자신의 가치를 설명한 뒤, 최대한 많은 금액을 챙기게 할 속셈이었다. 어차피 자신을 놔줄 리 없는 남궁세가이고, 해유유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자신을 데리고 나갈 수도 없을 터. 그렇다면 서로가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전을 세워야 했다.
물론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 남궁세가에서 좋은 않은 시선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선은 자신이 아닌 해유유에게 향한 것이고, 부담스러움 역시 그녀가 받을 수밖에 없다. 소심한 복수라 할 수도 있었지만, 매번 압박을 받아온 자신이 역으로 그녀를 압박할 수 있다면 통쾌하지는 않아도 기분 좋은 미소 정도는 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하늘의 말을 찾아내고 무공에 입문하다
서 총관에게 경전의 내용을 해석해서 내주는 동안에도 전혀 공개하지 않았던 31자의 글귀.
소천은 그동안 긴가민가했던 글자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자 살짝 흥분감을 느꼈다. 자신이 적어 놓고도 무슨 뜻인지 이야기해 보라면 대답하지 못할 글귀들이었지만, 서 총관에게 전해 주는 내용과 달리 경전 전반에 걸쳐 감춰져 있던 것이니만큼 큰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글자가······.”
소천은 31자의 글귀 밑에 다시 글자 세 자를 추가했다.
“선(仙), 천(天), 경(經).”
소천은 글자를 적어 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위치를 바꿨다.
“경천선? 아니지. 선경천? 아닌데. 그렇다면 천선경인가?”
소천은 글자 세 자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천선경이란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천선경(天仙經). 하늘 신선의 법이라······.”
소천은 자신이 적어 놓은 글자를 보며 한동안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이 세 글자가 표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의 본래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해석되는 내용들도 하늘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수였고, 인간의 도리와 근간을 다루는 것 역시 적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이야기한다면 천선경이라는 세 글자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천선경.”
소천은 다시 한 번 소리 내서 경전의 이름을 되뇌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책이다.”
소천은 그동안 천선경을 해석하면서 남들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사고력을 지니게 됐다.
거기다 세상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사상이나 철학들 역시 천선경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주절주절 늘여 쓰면서 본래 취지를 잃어버린 책들과 달리 천선경의 이치는 단조로우면서 명확했고,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간결해 딱히 학문적 소용이 깊지 않은 자라 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소천은 천선경이라는 세 글자처럼 어쩌면 이 경전이야말로 인간이 깨달아야 할 이치의 극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한동안 도가 사상에 빠져 신선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던 소천에게는 개벽이 열리는 짜릿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공과의 상관관계만 따지고 본다면 큰 연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무공 역시 세상의 이치에 속해 있는 것이니만큼 상승으로 가는 단계에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구나.”
직접적으로 무공을 익히거나 수련하지는 못했지만, 지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온 소천이었다. 물론 천선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무공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렇듯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자들은 어떻겠는가.
서 총관의 일그러진 눈빛도 이해가 됐고, 남궁세가에서 그 큰돈을 들여 일을 맡긴 것 역시 납득이 됐다. 무림인들에게 천선경의 가치는 황금 몇 덩이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일단 기본적인 해석은 모두 끝난 셈인가.”
천선경 안에 담겨진 비밀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31자로 이뤄진 글귀와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억조창생의 내용만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서 총관에게 넘겨준 분량은 삼분지 일 정도. 나머지 분량은 시간을 조절하면서 처리하자.”
소천은 비축분을 가지고 시간을 조절하면서 외적으로는 여전히 연구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천선경의 또 다른 비밀을 파헤치며 무공을 익힐 생각이었다.
***
남궁세가에 들어온 지 정확히 1년 되던 날. 한 치의 어김도 없이 해유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남궁세가에 들어왔을 때는 서쪽 중앙 전각에서 만남을 가졌지만, 소천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거꾸로 해유유가 자신이 있는 구역으로 찾아왔다. 물론 서 총관이 함께 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려던 해유유는 서 총관의 제지로 밖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소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야.”
“그래. 이번에는 오랜만이네.”
소천의 인사에 해유유 역시 가볍게 응대를 했다. 한동안 서로 바라만 보는 두 사람. 해유유는 서 총관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서 총관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비켜 주며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세가의 일은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럼요. 업무에 대한 비밀을 지키겠다는 항목은 유효해요.”
해유유는 남궁세가가 약속을 지켰으니 자신도 지킬 거라며 문제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자, 서 총관은 헛기침을 늘어놓더니 건너편 전각으로 들어가 버렸다.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얼굴의 소천을 바라보던 해유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 총관님이 계약을 갱신하고 싶다고 하던데.”
해유유는 관심이 있냐는 듯 질문을 던졌다.
“나도 들었다.”
해유유가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일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
“전혀. 햇빛을 보지 못해서 그럴 거야.”
“그래······. 건강 좀 챙겨야겠네.”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해유유는 예전과 달리 조금은 차분해진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소천이 받았던 느낌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가지는 관심은 오직 투자금의 회수였다. 채권자 입장에서 꾸준히 납입을 받으려면 채무자의 건강에 신경을 쓰는 것 역시 업무의 연장일 것이다.
“그럼 정산을 해볼까?”
“그래.”
해유유는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 느껴지는 소천의 태도에 더 이상 말을 늘어놓지 않고 곧바로 장부를 펼쳤다.
“원금에 일 년 이자 금자 백이십 냥. 매달 일만 냥의 원금에서 이자가 열 냥씩 불어나는 것은 알고 있지?”
“그래.”
소천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해유유는 웃음을 보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자에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해유유는 소천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정말 고맙기도 하네.”
소천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해유유는 다시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에서 보낸 기간이 일 년. 기존에 남아 있던 금자 일만 삼십사 냥, 은자 열두 냥에 일 년치 이자를 합하면 총액은 금자 일만 백오십사 냥에 은자 열두 냥이야. 이번 남궁세가의 일을 통해 삭감한 금액이 금자 백이십 냥이니,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은 금자 일만 삼십사 냥에 은자 열두 냥이 남았어.”
소천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1년간 금자 120냥을 벌고도 빚은 제자리걸음이다. 1년 전 금액에서 한 푼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그렇군.”
“오 년에서 일 년 반이 지났네. 앞으로 삼 년 정도만 고생하면 끝날 거야.”
해유유는 힘내라는 듯 남은 기간을 강조해 줬다.
“계약을 갱신하게 되면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재계약인 데다 기존의 일을 이어가는 것이다 보니······.”
“비슷하다?”
“그래.”
해유유의 대답에 소천은 고개를 저어 버렸다.
“무슨 뜻이지?”
“열 배로 받아.”
“뭐?”
금자 120냥의 10배면 1,200냥이다. 어지간한 장원 두 채는 구입할 비용을 계약을 갱신하는 대가로 받으라니, 돈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명석하다 생각했던 해유유는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예전에 말했지. 똑같은 일을 해도 감자를 깎는 것과 다른 일을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해유유는 합비에 있는 감자 깎는 객잔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똑같은 이유야. 작년 일 년에는 백이십 냥도 넘치는 돈이었지만, 앞으로 일 년간은 천이백 냥을 투자해서라도 나를 잡아 두려고 할 거야. 물론 그 돈을 다 받아 가느냐 하는 것은 네 재주에 달려 있지만 말이지.”
“도가 경전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데 금자 백이십 냥을 내놓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더라니. 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해유유는 금액을 떠나서 그런 유의 일이라면 끝이 좋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다.
“알아. 영원히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걸.”
“그런데 왜?”
“훗! 별걸 다 걱정하는군. 솔직히 내가 오 년 안에 그 많은 돈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몇 달 지내다 보니 어떻게든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해유유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네 말대로 남창으로 일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빚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발악을 해도 쫓아갈 수 없는 길이 있는 거야. 금자 백이십 냥.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돈을 만지는 자들도 고민 정도는 해야 쓸 수 있는 금액이야. 그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해유유는 곧바로 본론을 말하라는 듯 목소리마저 차가워졌다.
“자, 이제 네가 대답해 봐. 내가 앞으로 금자 천 냥 이상을 벌어 줄 방법이 뭐가 있지?”
“그건······.”
“그 잘난 머리를 콱콱 쥐어짜 봐. 그런 일이 있기는 해?”
소천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해유유를 보았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존재치 않아. 어떤 일이든 만들어지고, 또 그렇게 존재하는 거니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일을 네가 만들어 내고, 또 나에게 쥐여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지.”
해유유는 송곳으로 콕콕 찌르듯 말을 던지는 소천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객잔에서 점소이로 일을 한다면 한 달에 은자 한 냥, 많이 벌어 봐야 두 냥이겠지. 그런데 지금의 나를 봐. 기껏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고 풀어쓰는 것뿐인데, 그들은 상상도 못할, 아니 평생을 가도 구경조차 힘든 돈을 벌었다.”
“······.”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끝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지불될 때는 그 반대급부도 무시 못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일이 성사됐을 때는 그 누구도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낄 수 있겠지.”
“지금 그깟 희열 때문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야?”
“왜? 자살도 고민해 봤던 나인데 어려울 게 있나? 거기다 여긴 남궁세가야. 네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해유유는 소천이 과연 네가 남궁세가마저 나 다루듯 할 수 있을까 하는 표정을 짓자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서 해 주는 말이야. 그 돈······.”
“······?”
“받고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채무 관계는 없는 걸로 하자고.”
“그럴 수는 없지.”
해유유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고집불통이군.”
“너야말로. 뻔히 보이는 결과를 눈앞에 두고 그 길을 택해? 이 계약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거야!”
해유유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건너편 전각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서 총관은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자 곧바로 전각을 나와 소천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오?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것이오?”
서 총관은 해유유를 보며 얼굴에 짜증을 드러냈다.
“계약 갱신은 없는 걸로 하죠.”
해유유는 서 총관의 짜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툭 던져 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예요. 저 사람을 데려가겠어요.”
“불가하오.”
“마전과의 계약을 깨겠다는 말인가요?”
“흥! 마전의 전주가 와도 이런 식의 억지는 부릴 수 없지!”
서 총관은 헛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해유유를 바라봤다. 그러나 해유유 역시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끝난 계약을 마무리 짓겠다는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두 배로 내겠소. 금자 이백사십 냥이면 사람 하나 보내준 대가로 챙겨 가기에는 충분히 큰돈이오.”
“훗! 이백사십 냥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소.”
“삼천 냥이라면 고민해 보죠.”
“뭐, 뭐라?”
서 총관은 해유유의 입에서 3천 냥이라는 금액이 흘러나오자,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던 그도 입이 쩍 벌어졌다.
“뭐야?”
어이가 없긴 소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전만 해도 자신을 데려가겠다던 헤유유가 자신이 말한 금액보다 최소 3배를 높여 부른 것이다. 하긴 저 정도는 불어야 남궁세가에서 포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대로 사람 하나 쓰는 데 금자 백이십 냥이라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죠. 하지만 그 사람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면, 향후 그 사람이 나에게 벌어 줄 돈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죠.”
“그게 무슨······.”
“십 년만 부려먹어도 그 이상은 벌어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황금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겠다고 하니 어찌 이대로 물러나란 말인지 모르겠군요. 남궁세가야말로 실수를 하는 것 아니냔 말입니다.”
서 총관은 혹시나 싶어 소천 쪽을 바라봤다. 둘이서 짜고 이러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쯤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소천의 모습에 그 생각을 머리에서 털어 내 버렸다.
‘난감하군. 이래서 마전과 거래를 할 때는 조심을 하라고 했던 건가.’
폐관 수련에 들기 전, 소가주 남궁수환이 말했다.
‘마전과는 어떤 충돌도 일으키지 말거라.’
당연히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서 총관이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흐르기 시작하자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엄청난 금액이긴 하지만 여기서 경전의 해석이 멈춰 버린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소가주의 분노 역시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소천을 잡아 두라는 소가주의 명령이 있었다 해도 금자 3천 냥은 자신의 재량권을 훌쩍 넘어 버린 금액이었다.
“나는 그 돈을 감당할 자신이 없소.”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이군요.”
“하지만 소천을 보내 줄 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소.”
서 총관, 아니 남궁홍은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여기서 닫아 버릴 생각이 없었다.
해유유는 서 총관의 표정이 변하자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는 우리 셋뿐이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 살인멸구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실수하는 겁니다.”
남궁홍은 해유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 총관과 해유유의 대치를 보고 있던 소천은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해유유가 무사히 탈출한다면 남궁세가는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경전의 해석을 포기하거나, 자신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감옥 같은 곳에 가둬 버릴 수도 있었다. 심하면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을 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유유가 남궁세가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내 빚이 기록된 장부는 이대로 사라질 것이고, 마전과의 관계도 끝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천은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끝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 20살도 되지 못한 해유유를 채권업자로 내모는 마전이 과연 이대로 1만 냥이 넘는 돈을 포기하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해유유보다 더 지독한 자가 자신의 담당이라며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마전은 채무자 혼자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지 않지 않는가. 지금도 세가 어디에선가 마전의 눈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었고, 해유유를 기다리며 바깥 어느 곳에서 대기를 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서 총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궁홍은 소천의 외침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마전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남궁홍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빚이 얼마인지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알고 있냐는 질문에 남궁홍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금자 일만 냥이 넘습니다.”
“······!”
남궁홍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어찌 개인이 그런 엄청난 금액의 빚을 질 수 있는가 하는 눈빛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풍가장의 마지막 후예입니다.”
소천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담담한 눈빛을 유지하는 서 총관의 태도를 보며,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풍가장이 현판을 내리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빚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제 빚을 관리하는 마전의 담당자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 년입니다. 제가 마전에 빚을 갚기로 한 기간입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그 빚을 모두 갚지 못한다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 총관님이 바라는 것처럼 연장 계약이 이뤄지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여기서 저 여인을 죽인다 해도 마전은 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마전은 제 빚을 남궁세가에 전가시키려 할 겁니다.”
“음······.”
소천의 말에 남궁홍은 잠시 고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해유유.”
“말해.”
“너도 양보해. 아무리 돈을 회수하는 게 중요하다곤 하지만, 삼천 냥은 무리한 액수야.”
소천의 입에서 양보와 협상에 대한 말이 흘러나오자 해유유와 남궁홍은 잠시 소강상태가 됐다.
“여기서 죽어 버리면 네가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일도, 그동안 회수한 돈도 모두 주인을 잃게 될걸.”
해유유는 소천의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소천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것이다.
해유유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천은 순간 심장이 덜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내가 이렇게 나올 것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소천은 설마하면서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돈을 받아 내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해유유가 이런 일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천 냥을 내놓겠네.”
“이천 냥 이하로는 불가합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돈은 그게 한계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을 것이야.”
해유유가 돈을 받아 내는 채권회수업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남궁세가 외서원의 책임자 서 총관은 세가의 물류를 책임지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매회 물품을 구입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데 이골이 난 자이니,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천이백 냥을 내겠다면 여기서 물러서죠.”
“천백 냥이면 나도 계약을 갱신하겠네.”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천백오십 냥.”
“천백오십 냥.”
동시에 같은 금액을 이야기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금액에 합의를 봤다.
소천은 자신이 이야기한 금액과 비슷한 수준에서 계약이 마무리되자 해유유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소천이 자신을 볼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보이더니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소천의 귀에 바짝 입을 가져다 대더니 소곤거리듯 한마디 해 주었다.
“오십 냥 정도 부족하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금액 대부분 받아 줬다. 고마운 줄 알아.”
“······.”
귀를 간질이는 해유유의 입김이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황에 자신이 말한 비용을 모두 받아 내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음을 알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절묘한 순간, 온몸이 찌릿한 느낌을 받으며 머리가 멍해졌다는 사실이다.
귓속말을 끝낸 해유유가 소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 짓더니,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머리를 굴리려면 좀 더 연구를 했어야지. 그나마 협상을 나에게 맡긴 게 다행인 줄 알아. 네가 이야기했다면 이백 냥도 받기 어려웠을 거야.”
“······.”
“훗! 멍청이.”
해유유는 소천이 하는 짓이 귀엽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1년 뒤에 보자는 말을 남겨 놓고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
“뭐··· 뭐야.”
소천은 해유유의 당돌한 태도에 한동안 굳어 있다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래, 난 멍청이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나서 이따위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지 내 두고 보자! 아니, 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서 총관은 느닷없는 소천의 외침에 급히 달려오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짓이냐!”
“읍읍!”
“보아하니 저 여인에게 당한 게 많아 보인다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래서는 곤란하지.”
서 총관은 날아간 돈이 얼마인데 문제를 일으키느냐며 가차 없이 소천의 아혈을 눌러 버렸다. 느닷없이 벙어리가 되어 버린 소천은 연방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잠긴 듯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되자 소천은 다시 전각 안에 갇히다시피 들어가야 했다.
서 총관은 최대한 비용을 깎아 내리긴 했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 버리자 급히 자신의 직무실로 돌아갔다. 소가주의 허락이 있었다 해도 금자 1천 냥이 넘어가는 돈은 남궁세가 전체가 3개월을 운영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홀로 방에 남겨진 소천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혈을 풀어 주지 않은 채 돌아가 버린 서 총관 때문에 소천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공에 대한 지식을 쌓고 공부를 해 왔지만, 실제로 혈도가 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동안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손짓 한 번에 목이 잠기는 현상에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쯤이었던가?’
소천은 서 총관이 눌렀던 혈도를 만지작거리며 위치를 확인했다.
‘같은 혈도라 하더라도 수련한 내공과 수준에 따라 혈도를 제압하는 기술이 다 다르다 했다.’
이론으로만 공부를 할 때는 별의별 무공이 다 있구나 싶었는데, 막상 그 기술에 당하고 보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하··· 이런 게 무공이라는 건가.’
내공을 반 갑자 이상 쌓게 되면 누구나 공부를 한다는 혈도술이 이렇게 유용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확실히 책을 통해 접하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구나.’
고대 경전을 해독하는 동안 소천에게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 생기면 하늘이 무너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에 몰입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무시무시한 집중력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면 다른 것에 둔해지는 것 역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소천은 학자가 아니라 무림인이 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간발의 차로 목숨을 잃는 그 세계에서는 다른 곳에 정신을 판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대결 중에 상대의 검이나 무공에 궁금증이 생겨 정신이 흐트러진다면, 그야말로 망신을 떠나 세상을 등질 수도 있는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서 총관이 눌렀던 아혈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풀렸다. 무려 하루 동안이나 효과가 지속된 것이다.
물론 자신이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 더 빨리 해소를 시킬 수 있었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내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찾아야 해.”
소천은 이런 상태로는 해유유의 빚을 갚는다 해도 결국에는 남궁세가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무공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금자 1천 냥이 넘는 돈을 내놓을 정도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고, 또 위험한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해석이 끝나게 되면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세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결국 용도폐기될 것임이 확실해졌다.
소천은 숨 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고대 경전에 코를 박고 또 다른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남궁세가의 무공이 경전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한 이상, 자신이나 남궁세가가 바라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쯤, 소천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공과 유사한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
각각의 비밀을 찾아낼 때마다 그에 맞는 규칙과 순서가 존재했는데, 무공에 관련된 부분은 처음 찾아냈던 31자의 글귀와 관련이 있었다. 어쩌면 그 글귀를 먼저 발견해야만 나머지 역시 찾을 수 있도록 안배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했다. 31자에 포함되어 있는 숫자와 글자를 약어 삼아 경전을 확인한 결과, 모두 3가지 내용이 도출된 것이다.
하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심법이고, 다른 하나는 기운을 담는 방법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어떤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 같았는데, 너무 오래전 기록이라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모두 바람과 구름, 비, 그리고 뇌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군.”
소천은 자신이 찾아낸 무공을 살펴보다가 문득 자신이 처음 해석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급히 종이 뭉치를 풀어 첫 번째 부분을 찾아낸 소천은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읽어 내렸다.
“하늘의 뜻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다. 바람(風)과 구름(雲), 그리고 비(雨), 뇌(雷)가 함께하며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 운행을 관장하리라.”
소천은 그저 세상의 이치와 순행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던 내용이 자신이 찾아낸 무공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이들 무공 모두 네 가지 기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데다, 초식 역시 3초 5식으로 이뤄져 있다!”
소천은 자신이 해석한 경전의 내용이 무공을 익히는 데 필수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동안 풀이해 놓았던 내용을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경전은 물론이고 자신이 해석한 내용까지 모두 회수해 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경전을 해석한 내용은 어쩔 수 없이 넘겨주겠지만, 31자의 무극의 이치를 담고 있는 글귀와 무공만큼은 넘겨줄 수 없지.”
소천은 수백 수천 번의 반복을 통해 경전의 내용을 모두 외우고, 몇 번에 걸쳐 자신이 외우고 있는 내용이 정확한지 파악하더니, 경전을 풀어 놓은 해석본을 제외하고는 31자의 글귀와 무공에 관한 기록은 모조리 파기해 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해유유의 말처럼 고수가 되어 빚도 청산해 버릴 것이고, 남궁세가의 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소천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10장 수련의 시작
소천의 생활은 경전을 해석할 때와 달리 차분하고 단조롭게 변해 갔다. 가끔씩 서 총관이 찾아오면 종이 뭉치에 파묻힌 모습을 보여 주며 해석본 일부를 전해 줬고, 그가 돌아가고 나면 천선경에서 찾아낸 무공을 익히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소천은 자신이 찾아낸 무공에 천선신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선은 경전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신공이라 이름 지은 것은 천선경 자체가 하늘에서 내린 물건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천선신공은 천선심법과 기운을 다루는 공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소천이 집중한 것은 바로 심법이었다.
사실 전각 안에서 몸을 움직여 수련한다는 것에 상당히 애로 사항이 많았던 소천은 일단 심법에 집중해 내적 힘을 기르고, 그 후에 내공을 기반으로 초식을 익혀 나갈 생각이었다.
보통은 심법과 초식을 함께 수련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소천에게 주어진 환경은 동시에 2가지를 익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법이야 조용히 수련할 수 있다 하지만 초식은 움직임이 필수였고, 소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비밀스러운 상황이다 보니 주변에 감시하는 자가 없다곤 하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했다. 아니, 분명히 어딘가에 세가의 눈길이 자신이 지내는 곳을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한데, 만에 하나 정말 어렵게 해석했다며 넘겨준 기존의 내용을 제외하고 다른 비밀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은 그날부로 곧장 고문실로 끌려갈 게 분명했다.
소천이 해석한 천선경의 내용을 참고해 보면 천선심법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전의 내용과 천선신공을 연결하면 마음을 공고히 하고 스스로를 다스린 자만이 바람과 구름, 비, 번개를 부리며, 그때야 비로소 인간의 360여 가지 운행을 관장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경전의 내용을 천선심법에 대응해 분석하자면 그런 뜻이 된다는 의미다. 딱히 그렇게 대입해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지만, 소천의 입장에서는 당장 기댈 수 있는 것은 경전을 해석한 내용뿐이었다.
“후!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
미증유의 무공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것을 익힐 수가 없다면 그림의 떡과 다를 게 무엇인가. 소천은 아무리 노력해도 진도를 나갈 수 없자 점차 지친 얼굴이 되어 갔다.
“나는 무공에 재능이 없단 말인가.”
사실 재능에 의존하기보다 노력을 통해 결과를 이뤄 왔던 소천은 이번에도 그렇게 노력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무공이란 놈은 단지 노력만 하는 것으로는 어떤 결과도 얻어 낼 수가 없었다.
물론 소천이 익히고자 하는 무공이 재능과 상관없이 꾸준한 반복으로 습득 가능한 무공이었다면 상황이 달려졌을 것이다.
“서 총관이 가져다 준 무공서들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구나.”
문제는 천선신공이 깨달음을 중시했고, 그것이 없으면 구결에 따라 수련을 해도 진전을 보기 어려운 무공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천선신공만이 아니라 상승 무결을 가진 무공들은 대부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무공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탄탄한 수련을 겪으며 익혀야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스승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결국 최종 단계에 있어서는 스스로 올라서야만 했다.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며 무공을 배워도, 정점에 오르는 순간 자신만의 무공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럴 때 조언이라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으련만.”
각자 올라서는 방법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같은 힘을 사용해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런 상승 무공을 홀로 수련하고자 하니 쉬울 리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성공을 해야 했다.
뭔가에 빠져들면 온통 그 한 가지에 마음이 쏠리던 성격은 무식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 주며 큰 도움을 줬지만, 이번에는 그 집중하는 성격 때문에 덜미가 잡힌 것이다.
“무념무상. 말은 참 쉽다.”
소천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처음 알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할수록 계속 뭔가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고, 그것을 억누르고 나면 또 다른 잡념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으아······!”
하루 종일 끙끙거리며 무념무상의 세계에 들고자 했지만, 오히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까지 생각이 나서 결국 명상은 포기하고, 그 생각들부터 정리에 들어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려 할 때 떠오르는 것들은 평소 마무리가 안 되었거나 걱정하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일단 이것들부터 정리하는 거야!”
물론 정리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어떻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을 내린 것들은 점차 잡념들 사이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소천은 어느 순간 희귀한 경험을 했다. 감각적으로는 깨어 있지만 사고는 정지된 느낌. 드디어 마음을 비우는 작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후! 이런 느낌인가?”
소천은 스스로도 신기했는지 잠시 들뜬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들뜬 기분 때문에 다시 명상에 드는 게 힘들어졌고, 상태는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런!”
소천은 느낌조차도 명상에 방해를 주자 살짝 질린 표정이 되었다.
“사람이 스스로를 조절한다는 게 이렇게 버거운 일이었구나.”
소천은 고승들이나 도사들이 수시로 이런 명상에 든다는 이야기가 떠오르자,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뤄 낸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일단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게 되자 점차 성공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토록 원하던 고요의 상태를 맞이했다.
“후······.”
길게 숨을 뱉어낸 소천은 기이한 희열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는 모두 갖춰졌다.”
소천은 심법을 통해 마음을 추스르는 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호흡법을 파고들었다. 정신적 수련에 가까운 심법과 달리 몸속의 장기와 혈맥, 그리고 단전을 단련하고 탁기를 배출시켜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수련이었다.
소천에게는 명상에 드는 것보다 정신을 집중해 최대한 몸을 조율하는 이 수련이 오히려 쉽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집중력 자체를 무시해 버려야 하지만,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며 몸을 장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나마 이건 낫군.”
수련에 빠져 지내자 경전을 연구할 때보다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갔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기 시작하자 무작정 시간을 때우던 예전과 달리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간 것이다.
서 총관은 여전히 10일 단위로 해석본을 가지러 왔고, 소천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듯 일정 분량의 해석본을 넘겨줬다.
그러던 어느 날, 서 총관이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속도를 냈으면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간 해석 작업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 남은 분량도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서 총관은 앞으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쯤이면 거의 끝나야 하지 않겠냐 했다.
“최대한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혹, 기간을 넘긴다 해도 한두 달 안에 마무리가 될 겁니다.”
소천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일단 알았네. 더 분발해 주게.”
“물론입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말을 던지는 정도였던 서 총관은 계약 기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자 점점 속도를 높여 달라는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자신이라도 속이 탈 것이다.
소천 자신만 놔두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가며 이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마전. 하필이면 돈을 받아 가는 당사자가 소천이 아니라 마전이란 말인가.
그들은 나물 한 가닥까지 따져 가며 가격을 깎는 억센 성격의 안주인 같은 자들이었다. 돈에 있어서는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자들.
서 총관은 금자 10냥이면 해결될 일이 마전이 끼어드는 바람에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용한 돈의 액수가 커서 속이 타들어 가는데, 또다시 재계약을 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소천은 서 총관이 돌아가자 남아 있는 해석본을 펼쳐 들었다. 전체 해석본의 5분지 1이 남은 상황.
“이걸 모두 넘기고 나면 과연 나를 보내 주려 할까?”
소천은 마지막 부분은 언제쯤 넘겨주는 게 가장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가장 좋은 시간은 해유유가 정산을 하러 오는 날이군.”
삼자가 모두 모인 장소에서 최종 보고서 성격의 해석본을 넘겨준 다음, 해유유와 함께 남궁세가를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지 모르겠군.”
복잡한 생각과 계획을 세우는 등의 일에 취약했던 소천이다. 하지만 천선신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판단력이 좋아지고, 그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부분까지 점차 발달하기 시작했다.
“다시 수련을 해볼까.”
아직 계약 기간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두 달 이상이 남은 상태. 분위기를 봐 가며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는 죽어라 고민하는 것보다 최대한 그 시간 때까지 상황을 살피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쪽이 실수가 줄어들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이군.”
소천은 호흡법을 완성하고자 무던히 노력을 해 왔는데, 아예 습관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스스로를 조율했다. 그 결과, 평소에도 호흡법이 어느 정도 유지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명상과 호흡을 동시에 진행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어가서도 호흡법이 유지가 되는지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무의식에 속하지만, 호흡법은 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과연 의식적 호흡이 가능할지, 그것을 알아보고자 했다.
수련에 든 지 두 시진 정도가 됐을 때쯤, 소천은 머릿속이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빛은 점차 한곳으로 뭉쳐 작아지더니, 빛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작아졌다. 시각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크기.
소천은 의식의 폭을 확대시키며 그 빛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진 빛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다가, 일정 흐름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빛을 따라 어둠 속을 배회하던 소천은 한참이 흐른 뒤에야 그 흐름이 몸속에 자리 잡은 혈맥임을 깨달았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빛도 그렇게 흘러 다녔는데, 빛이 지나간 자리는 긴 선이 이어지며 복잡한 미로의 형상을 띠었다.
‘아······.’
관조라 했던가. 스스로 자신의 몸속을 들여다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소천. 땀구멍 하나까지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빛은 다시 머리 쪽으로 이동을 하더니, 처음 시작했던 곳에 이르러 천천히 멈춰 섰다.
번쩍!
감겨 있던 소천의 눈이 떠지자 한 차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깊은 밤이 되어 사위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소천은 사물 하나하나가 대낮처럼 눈에 들어왔고, 주변 환경 역시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반각 정도 시간이 흐르자 주변은 본래 시간으로 돌아가며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길을 완성했다.”
남궁세가만 아니라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뿌듯한 느낌. 드디어 천선신공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일단 길을 닦고 나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명상과 호흡을 반복할수록 빛은 크기가 불어났고, 불어난 상태로 몸을 돌 때마다 실처럼 가느다랗던 선은 점차 굵고 넓어졌다.
“이제 축기의 단계인가.”
그동안 몸을 관조하고, 기의 흐름을 따라 혈맥을 강화시켰던 소천은 단전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미미하지만 몸 곳곳에 쌓여 있는 기운을 한곳에 모으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단전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랫배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의식을 집중하자, 몸 전체에 퍼져 있던 빛들이 서서히 움직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긴 대롱을 꽂아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을 빨아들이듯 압력을 높여 가는 식이었는데, 압력을 길고 강하게 줄수록 모여드는 빛의 양도 크게 늘어났다.
다시 10일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깊은 밤 내공 수련에 열중하던 소천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단전에 모여든 빛이 요동을 치더니, 맹렬한 속도로 혈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헉!”
몸속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나 곧바로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는 몸을 추슬렀다.
갑작스러운 일에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런 경우에 의식을 놓게 되면 주화입마에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천선신공을 익히기 전, 무공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 왔던가. 그 책들에는 주화입마에 드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잘 적혀 있었다.
‘제발······.’
소천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며 마음대로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빛을 향해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몸속의 압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상승하자 픽! 소리를 내며 코피가 터져 나왔다.
‘으윽! 혈관들이!’
빛이 다니는 길은 둘째 치고, 그 주변에서 열심히 피를 실어 나르고 있던 혈관들까지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마치 야수에 쫓긴 가냘픈 사슴처럼 부르르 떨어 대던 혈관들이 어떻게든 빛과 거리를 만들기 위해 꿈틀거렸다. 그리곤 결국 혈관에 상처가 생기면서 몸 곳곳에 피를 쏟아 냈다. 몸 역시 성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가뭄 든 어느 날처럼 소천의 몸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속살이 보일 정도로 살이 벌어진 소천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하며 빛의 제압에 나섰다. 살아서 생명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니던 빛은, 점차 포위망을 좁혀 가자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못하고 혈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되, 된다!’
빛은 몇 차례 반항기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소천의 의지에 붙잡혀 단전에 들어가 누웠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주인은 이 고생을 시켜 놓고 제 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누워 버리자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몸을 추슬렀는데 또다시 녀석과 전쟁을 벌일 자신이 없었다.
“지독하군.”
몸을 일으킨 소천은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을 닦아 냈다.
“훌쩍! 뭐지? 콧물이라도 나오나?”
소천은 코끝이 간질거리자 손을 들어 쓱 닦아 냈다.
“어억! 코피까지 났던 거야?”
소천은 급히 콧속을 틀어막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현기증을 느낀 것이다.
“코피 좀 쏟았다고 피 부족이 된 사람은 세상에 나뿐일 거야.”
소천은 스스로도 한심했는지 투덜거림을 늘어놨다. 2년 가까이 전각에 갇혀 지내다 보니 몸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내일은 일광욕이라도 해봐야겠다. 낯빛이 이렇게 핼쑥하다니. 정말 못 봐주겠군.”
물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창문을 열고 볕을 쐬는 것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서 총관 남궁홍은 재계약한 1년의 시간이 끝나 가는데도 경전의 해석이 마무리되지 않자 속이 타기 시작했다.
소가주 남궁수환의 3년 폐관 수련이 끝나기 전에 경전의 완벽한 해석본을 손에 넣고 싶었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석본을 연구해야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궁수환의 폐관과 해석본을 손에 넣는 기간이 가까울수록 세가의 보물을 손에 넣는 일이 요원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을 심복으로 생각하고 차후 중하게 쓰겠다고 했지만, 이미 보물의 존재를 알고 있고, 또 자신보다 먼저 해석본을 손에 넣은 것을 남궁수환이 그냥 보고만 있겠느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도 소천 그 아이처럼 토사구팽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은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남궁수환의 심복이 되어 탄탄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 생각만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남궁수환이라도 자신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무공 근원이 되는 경전이 아니던가.
‘위험해.’
남궁홍은 며칠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궁수환이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날, 자신이 경전의 해석본을 그에게 바치는 날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호지세라 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니 중간에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다.
‘세가에서는 아무도 소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남궁홍은 소천이 경전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과 남궁수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흔적을 감추고 잠적한다. 경전을 이용해 남궁수환이 나를 어찌할 수 없는 힘을 얻기 전까지 숨어 버리는 거야.’
남궁홍은 도주를 결심했다. 그러나 무작정 도주를 한다는 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남궁수환은 자신의 소식을 듣는 순간 곧바로 추격을 시작할 것이고, 자칫하면 무공 수련에 들어가기도 전에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남궁수환의 눈을 속인단 말인가.’
남궁수환은 근 100년 이래 최고의 인재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무공은 물론 무서운 귀계까지 어느 것 하나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남궁수환이었다.
‘말로는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남궁수환은 자신에게는 소천을 관리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을 감시하게 지시를 내려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지시를 했을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솔직히 누구라도 그 정도는 안전책을 준비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보물을 다른 사람 손에 던져 놓고 어찌 무신경하겠는가.
‘혹시 풍가장이 망한 것도······.’
남궁홍은 빚을 잔뜩 지고 망해 버렸다는 풍가장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소천이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소천의 아비인 풍무진이 해석 작업을 했다지 않았던가.
‘분명해. 풍무진이 뭔가를 알기 시작하자 비밀을 감추기 위해 제거해 버린 게 틀림없어! 역사가 짧다곤 하지만, 탄탄하게 성장해 가던 풍가장이 갑자기 파산이라니, 남궁수환이 손을 쓴 거야!’
풍가장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궁홍은 소천의 작업이 끝나는 날을 기점으로 기회를 봐서 세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남궁홍은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서 총관의 닦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것도 점점 간격을 줄여 가더니, 이제는 수시로 찾아와 해석본을 달라고 했다. 아직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면 몇 글자라도 좋으니 내놓으라고 성질을 내기도 했다.
소천은 서 총관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몰라 수련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되자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서 총관님.”
“왜 그러느냐.”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시면 제가 일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음···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나 역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서 총관은 방해가 된다는 소천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눈빛이 되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어떻게 말이냐?”
“삼 일에 한 번씩 찾아오십시오.”
“그럼 삼 일에 한 장씩 넘겨줄 것이냐?”
서 총관은 눈을 빛내며 소천을 바라봤다. 여기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그동안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흠.”
서 총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날을 새서라도 분량을 맞춰 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대신 삼 일씩 반장 분량을 만들어 육 일에 한 장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기존보다 사 일을 줄이는 겁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계속 날을 새야겠지만··· 그렇게 급하다 하시니.”
서 총관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야지. 그간 너를 고용하는 데 들어간 돈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휴!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삼 일 뒤에 다시 오마.”
소천은 서 총관이 돌아가자 남아 있는 해석본을 빼 들었다.
“모두 스무 장이군.”
열흘에 한 장씩 넘겨줄 계획이었으니 최소한 여섯 달 분량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애를 태우는 걸까.”
소천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서 총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서 총관과 함께 나타났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위기를 보면 이 일을 총괄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 남자였어. 그런데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소천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총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전의 값어치를 알게 된 것 같지만, 그 사내는 처음부터 경전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신분이 범상치 않은 사람 같았는데··· 어디 먼 곳이라도 간 건가?”
소천은 가까이 있다면 분명히 자신을 보거나 일의 진척 상황을 살피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가 이곳에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흠··· 멀리 떠났던 그가 돌아온 건가? 아니,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까?”
수하로 보이던 서 총관이 저렇게 안달을 내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속도를 내라 해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어차피 손에 넣을 것, 며칠 늦어진다고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한 장으로 만들어 놓았던 해석본을 두 장에 나눠 옮기던 소천은 혹시 하는 생각에 붓을 멈췄다.
“서 총관, 저 사람··· 엉뚱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소천은 빈 종이 위에 자신과 서 총관, 그리고 서 총관과 그 정체불명의 사내를 쓰고는 어떤 관계인지 적어 내렸다.
“나와 서 총관은 을과 갑의 관계지. 서 총관과 그 사내의 관계도 역시 을과 갑의 관계.”
소천은 자신이 을의 입장에서 일을 하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고민스러웠는지 적어 봤다.
“살인멸구. 토사구팽.”
죽어라 일만 하고 결국에는 버려지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다.
“설마······.”
소천은 서 총관도 그 사내에게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동안은 불안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으니,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토사구팽 당할 단계라 이거니.”
소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생각한 부분을 적어 내렸다.
“사냥개를 삶으려면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 현재 내 입장에서는 경전의 해석이 토끼다. 서 총관 입장에서는··· 경전의 해석본이 토끼인가? 그렇겠군.”
소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 총관 역시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파악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군.”
풍가장이 파산을 하고, 자신의 집에서 쫓겨났던 과거의 소천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집은 있지만 어수룩했고, 노력은 하지만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했던 소천은 과거에 묻어 버렸다.
여전히 경험이 부족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위상하다 싶으면 바로 사태 파악에 나섰고, 특유의 자잘한 근거를 바탕으로 핵심을 찾아내는 분석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타인의 손에 휘둘리거나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인생은 사절이었다.
“내 인생은 내가 끌고 나가야지.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이의 인생도 내가 조율하고.”
소천은 3일 뒤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열일곱에 집을 나왔던 소천은 2년 사이 훌쩍 자라나 이제는 열아홉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제11장 도주
서 총관이 들어오자 소천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그래. 분량은 맞췄는가?”
“물론입니다.”
서 총관은 분량을 맞췄다는 소천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습니다.”
소천은 약속된 반 장 분량이 아니라 무려 2장의 해석본을 그에게 넘겨줬다.
“이, 이건.”
“네. 십이 일치 분량입니다.”
“······!”
12일치 분량이라는 소천의 말에 서 총관은 잠시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3일 만에 12일치 분량을 끝냈단 말인가.
“설마······.”
서 총관은 웃음을 짓고 있는 소천을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맞습니다. 경전의 해석은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소천은 의자 쪽을 가리키며 자리를 청했다. 마치 집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모양새였다. 서 총관은 눈 끝을 실룩거리며 당장이라도 소천에게 주먹을 휘두를 태세였다.
“완성본을 받아 보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소천은 서 총관이 어떤 표정을 짓든 관여치 않는다며 다시 한 번 자리를 청했다.
“무슨 생각인 거냐?”
서 총관은 소천이 왜 그런 사실을 밝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순진하게 해석한 내용을 모두 넘겼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음······.”
“안 앉으실 겁니까?”
소천은 다시 한 번 자리를 청했다.
“앉지.”
서 총관은 소천의 모습에서 완성본을 두고 협상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제가 뭘 원하는지 짐작을 하셨을 겁니다.”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거겠지.”
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하다. 너는 이곳에 들어와 경전을 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예견되어 있었다.”
“그건 서 총관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소천은 사돈 남 말 하지 말라는 듯 서 총관을 바라봤다. 자신의 예측이 맞다면 작게나마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역시 그렇군. 서 총관도 목숨에 위협을 받는 거였어.’
소천은 자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움찔하며 놀라는 눈빛의 서 총관을 놓치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자신보다 더 두려움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최근에 그 사실을 깨달았나 보군.’
예전부터 자신이 그리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지금쯤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서 총관은 그 사실을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아직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최후의 순간 경전의 해석본으로 협상을 하려 했겠군.’
자신이 완성본으로 협상에 들어간 것처럼 그 역시 최후의 보루로 경전의 해석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천이 한 가지 모르는 일은 서 총관이 두려워하는 그 사람이 당장은 힘을 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눈치가 빠른 것이냐,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냐?”
서 총관은 부인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결국 솔직히 말을 한 것이다.
“이 정도 일에 눈치까지 필요합니까? 일의 특성과 경전의 값어치를 생각해 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겁니다.”
“음······.”
서 총관은 소천마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자신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소천의 말투에 뭔가 계획이 있음을 파악한 서 총관이 처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획이 무엇이냐?”
“계획이요?”
소천은 뜬금없이 무슨 계획이냐며 오히려 서 총관을 바라봤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 나에게 완성본이 있다고 말을 했을 것 아니냐.”
서 총관의 말에 소천은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이놈!”
서 총관은 소천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계획은 제가 아니라 서 총관님이 세워야죠.”
“그게 무슨 소리냐?”
소천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완성본, 갖고 싶지 않습니까?”
“······.”
“그간 경전을 해석하다 보니 무공을 익히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정도는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서적을 요청하기도 했죠.”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혀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림인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저에게는 가지고 있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죠.”
소천은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가져야 물건이 빛을 보지 않겠냐며 서 총관을 보았다.
“나에게 넘길 테니 살려 달라, 이 말이군.”
“살려 달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세가를 떠나게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완성본은 서 총관님의 것이 될 겁니다.”
소천은 다른 건 필요 없다는 듯 세가만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더니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 말입니다.”
“······.”
“상황을 보니 이곳에 없는 것 같던데······.”
소천은 슬쩍 떠보는 말투로 서 총관을 바라봤다.
“소가주님은 폐관 수련 중이다.”
‘역시.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소가주라니.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군.’
소천은 사내의 정체가 소가주라는 말에 조금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소가주가 출관을 하기 전에 도망을 쳐야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돕는다 해도 완성본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이라고요. 제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누가 가지든 관심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서 총관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오겠다.”
“기다리겠습니다.”
소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서 총관은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딱히 똑똑하지도 않고 특정 분야에 재능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맡은바 업무는 누구보다 성실히 끝낼 줄 아는 전형적인 사무형 인간이었다.
그러나 소가주 남궁수환이 지시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신분 상승이 보장되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계혈족이라는 한계를 넘어 내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동아줄을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 줄이 보이는 것과 달리 썩은 줄이었음을 알게 되자,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지.”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소심한 성격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냥 완성본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남궁홍은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않을까 고민해 봤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입막음이었다. 자신이 눈멀고, 귀 먹고, 벙어리가 되지 않는 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미래였다.
세가를 중원 오대 무가의 자리에 올려놓은 기반이 그 경전이라고 했다. 만에 하나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온갖 도적들이 안휘성으로 모여들 것이고, 무림 문파들 역시 옛것을 함께 보자며 낯짝을 들이밀 것이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자신을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방계혈족인 나를 선택했던 거야! 세가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나를 선택한 거야!”
처음부터 모든 게 남궁수환의 계략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남궁홍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궁이라는 성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세가에 충성을 해 왔던가. 그런데 이런 일에 이용이나 당하고, 토사구팽 당할 처지라니. 남궁홍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소천의 말이 맞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해.”
서 총관은 급히 물류 입출고 내용이 적혀 있는 서책을 펼쳐 들었다. 갇혀 있는 소천이 아니라 밖에 있는 자신이 계획을 세워야 했다.
***
서 총관이 소천을 찾아온 것은 대화가 있은 지 2일 만이었다. 고민이 많았는지 얼굴이 좋지 못했다.
“안색이 나쁜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소천은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총관직을 수행하고 있고, 소가주 남궁수환이 일을 맡길 정도면 어느 정도 인물은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 며칠 겪어 본 바로는 그야말로 아무런 재능이 없기에 선택된 일종의 희생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다. 며칠 신경을 썼더니······. 그렇게 티가 나는가?”
“좋다곤 못하겠군요. 표정 관리 좀 하셔야겠습니다.”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라며 자리를 청하던 소천은 문득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총관님.”
“자네 말대로 계획을 세워 봤네.”
소천은 자신이 생각한 부분을 말해 주려고 서 총관을 불렀는데, 서 총관은 어서 계획을 말해 보라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소천은 일단 그가 세웠다는 계획을 들어보기로 했다.
“사실 세가 내에서 자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나와 소가주뿐이네.”
“마전의 해유유도 있습니다.”
“아, 그렇지.”
서 총관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니니 일단 제하고 이야기하죠.”
“알았네. 일단 들어보게.”
서 총관은 소천이 내놓은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자신이 고민해서 세운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세가의 물류 유통을 책임지고 있네.”
“네.”
“삼 일 뒤, 사천으로 떠나는 표행이 하나 있네.”
“사천이면 굉장히 멀군요.”
안휘에서 사천 거리면 전문적으로 표행에 나서는 자들도 두 달 가까이 기간을 잡아야 했다.
“멀어서 좋은 거지.”
“사천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중간에 모습을 감춰 버리면 찾지 못할 거야.”
딱히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다. 물류를 책임지는 총관이 표행에 참가를 한다는 것이 전부다. 자신은 시종이나 쟁자수 정도로 신분을 위장하면 어렵지 않게 안휘를 벗어날 것이다.
“소가주 남궁수환이 따로 감시를 붙여 두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 부분도 고민을 해봤네.”
“있군요.”
“당연하지 않겠나? 정확히 누구인지 파악을 하지는 못했지만, 소가주 성격에 나만 남겨 두지는 않았을 거야.”
“흠······.”
소천은 남궁수환이 숨겨 두었다는 감시자들과 세가 밖에서 근황을 살피고 있을 마전의 감시자까지 모두 따돌려야 했다. 남궁세가에서 경전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자신을 살려 둘 이유도 없지만, 마전 역시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붙잡으려 들 것이다.
“혹시 표행에 나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자네와 먼저 이야기를 해보려고 그러지는 않았네.”
“그럼 끝까지 말하지 마십시오.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말했다시피 나는 감시를 당하고 있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아예 떳떳하게 표행을 나서는 것이 의심받지 않고 세가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 총관님의 임무는 분명히 저를 감시하고, 해석본을 받아 내는 겁니다. 그렇죠?”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이 일을 한 뒤로 몇 번이나 외부 일에 나가 봤습니까?”
“······.”
“역시 한 번도 없군요.”
서 총관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아는 남궁수환이 수하들에게 그런 것도 지시해 놓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그럼 어떻게 세가를 빠져나간단 말인가?”
서 총관은 머리가 돌지 않는다는 듯 소천을 바라봤다.
‘나중에 제거할 때를 생각해 서 총관 같은 사람을 뽑았는지는 모르겠다만, 남궁수환 당신이 머리를 써 준 덕분에 내가 이득을 보는군.’
소천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지친 표정을 보이는 서 총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야망을 불태웠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천이 잘못 생각한 부분이었다. 남궁홍이 세가를 배신하는 데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은 그간 세가가 보여 줬던 태도 때문이었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준 세가의 행사. 남궁세가에 발을 들이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엉뚱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남궁홍이 그 길을 가고자 하니, 손발은 물론이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물론 그의 유약한 성격도 한몫 단단히 했지만 말이다.
“벌써 이 년째입니다. 아무리 감시자들이 있다 해도 반복되는 일상에 그들도 어느 정도는 방심을 하고 있을 겁니다.”
“예상일 뿐이지.”
“표행의 담당자에게 친인척 두 명을 일꾼으로 써 달라고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는?”
“표행이 떠난 뒤, 반나절 정도 늦게 합류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서 총관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받아 두었던 해석본은 소가주 남궁수환의 방에 가져다 놔요. 물론 감시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그러면······.”
소천은 미련을 갖지 말라는 듯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러고 나선 귀를 열고 있으면 누구나 다 들릴 목소리로 소가주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말들을 늘어놔요. 그리워하는 표정까지 지으면 더 좋겠군요.”
서 총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다음에는?”
“방을 나서며 넋두리하듯 부모님 산소에 벌초할 때가 되었구나, 하면 됩니다.”
“두 분은 아직 정정하시네.”
서 총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그럼 할아버지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그분도 정정하시네.”
소천은 서 총관의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야? 다들 왜 이렇게 목숨이 질겨?’
소천은 말하는 족족 다 살아 있다는 서 총관의 말에 그럼 죽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오래전 여동생이 병으로 먼저 갔네.”
“그럼 여동생을 말하면 되겠네요. 오빠가 여동생을 위해 벌초를 한다. 좋지 않습니까?”
“험험! 그게 화장을 해 버려서······.”
“······.”
소천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서 총관을 보았다.
“세가 밖으로 마실을 나가는 게 목적이라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네. 굳이 무덤에 가지 않아도······.”
“네, 그러셨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소천은 빨리도 말한다며 서 총관을 노려봤다.
“저는 아침에 해가 밝기 전에 이곳을 나서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새벽녘이면 감시자들도 피곤한 시간이니 괜찮군.”
“그렇게 움직여 보죠.”
“알았네. 그럼 이만.”
소천과 책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없는 데다, 유일한 문지기 서 총관이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되자 세가에서 도망가는 게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때까지만 그랬다는 뜻이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잃어버렸는데 가만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
소천과 남궁홍의 탈출 계획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물류를 담당하는 총관이 표행 책임자에게 넌지시 ‘내 인척 좀 써.’라고 하는데 ‘안 됩니다!’라고 할 놈이 어디 있겠는가. 책임자는 손바닥을 비벼 가며 ‘그렇지 않아도 일꾼이 부족했는데 잘됐습니다.’라고 싹싹하게 알아 모셨다.
“이보게, 양 표두.”
“나오셨습니까, 총관님.”
진진 표국의 표두 양산표는 서 총관을 발견하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내가 부탁한 것 말일세.”
“아, 두 사람을 일꾼으로 써 달라는 것 말입니까?”
“그래. 일이 있어서 양 표두가 출발하고 반나절 정도 뒤에야 합류가 가능할 것 같은데, 사정 좀 봐주면 안 되겠나?”
양산표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 욕을 해 댔지만, 진진 표국 최대 고객이자 물류 담당인 남궁홍 앞에서 싫은 표정을 보일 수는 없었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나중에 술 한잔하지.”
“하하하! 그러면야 좋죠.”
양산표는 남궁홍의 입에서 술을 사겠다는 말이 나오자 입이 쭉 찢어졌다. 남궁홍이 술을 사겠다는 말은 객잔에서 화주나 마시자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 두는 말이네만······.”
남궁홍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임무가 있어서 합류를 하는 것이니, 딱히 일꾼으로 부리려 들지는 말았으면 하네.”
“아······.”
양산표는 인척이라는 두 사람이 사실은 남궁세가에서 특정 임무를 띤 사람들임을 알게 되자, 왜 술까지 사겠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세가의 일인데 당연히 협조를 해야죠.”
“보안이 필요한 일이니, 다른 이들에게는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네.”
남궁홍은 그 말과 함께 짤그락 소리가 나는 전낭 하나를 양산표 손에 올려 주었다.
“당연하죠. 저만 믿으십시오.”
남궁홍은 양산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천까지 가려면 두 달이 넘는 여정이니, 마지막으로 빠트린 게 없는지 확인해!”
“문제없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문제없다는 말이 들려왔다.
“자! 다들 출발한다!”
양산표는 표사 2명을 좌우에 두고 남궁세가 서외원을 나서기 시작했다.
***
닭이 울기 전, 전각을 빠져나온 소천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진 곳만 찾아다녔다.
서 총관이 그려 준 약도를 보며 슬금슬금 외서원 담벼락을 타고 이동하니 작은 문 하나가 나왔다. 서 총관 말로는 똥지게가 드나드는 곳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구린 냄새가 올라왔다.
삐거덕-
녹슨 경첩이 죽는 소리를 내며 소문(小門)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 총관이 손짓을 했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겠지?”
“없었지만, 무공을 지닌 자가 따라왔다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소천의 말에 서 총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고 했다.
“어디에 숨어 있으면 됩니까?”
“저 창고에 들어가면 갈아입을 옷이 있을 것이다.”
서 총관의 말대로 창고 안에는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소천은 어른 머리통만 한 주머니가 몇 겹으로 동동 묶여져 있자 질문을 던졌다.
“알 것 없다.”
서 총관은 네 일이나 잘하라는 듯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소천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슬쩍 주머니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짤그락!
여러 겹으로 둘러싸 크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저런 소리를 내는 물건은 소천이 알기로는 한 가지뿐이었다.
‘도망가는 김에 한 살림 빼 가는구나.’
소천은 주머니의 정체를 알고 나자 문득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게 낫다. 저 돈을 쓰고 다녔다간 얼마 가지 않아 흔적을 잡힐 거야. 아예 평범한 행색을 하고 일을 하는 게 나아.’
예전 같으면 자신도 서 총관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소천은 여러 번의 변화를 겪으면서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심사숙고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차피 때가 되면 헤어질 사람이다. 나 대신 시간을 벌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옷을 다 갈아입은 소천은 품에서 경전을 빼 들었다.
“받으십시오.”
“이건······.”
“네. 그 경전입니다.”
“이걸 왜?”
서 총관은 해석본만 있으면 되는데 이걸 왜 주냐는 얼굴이 되었다.
“해석본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원본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천의 말에 경전을 받아든 서 총관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잡혔을 때 경전이 있어야 나에 대한 추격이 느슨해지지.’
서 총관이 잡혔는데도 경전이 없다면 남궁세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잡으려 들 것이다. 경전은 일반적인 무공서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표행은 반 시진 전에 출발을 했다.”
“문제는 없겠죠?”
“알아서 처리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좋습니다. 언제쯤 나가실 생각입니까?”
“조식을 마치고 나면 세가의 상점들을 들러 물품 상황을 확인할 것이다.”
서 총관은 순시를 도는 것처럼 세가의 상점으로 들어가, 그곳 뒷간에서 변복을 하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조잡한 계획처럼 보였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 벌어지는 일이 상대를 속이기 쉽다는 소천의 말에 따른 것이다.
“알겠습니다.”
“약속대로 손과 발에 구속을 해 놓겠다.”
소천은 별다른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함께 도망을 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무작정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서 총관은 자신이 변복을 하고 올 때까지 소천을 묶어 놓겠다고 했다. 소천 역시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별말 없이 응했다.
서 총관은 창고 한쪽에 감춰져 있던 쇠고랑을 빼들더니 소천의 팔과 다리에 채운 후, 창고 밖으로 사라졌다.
소천은 서 총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올 때까지 체력이나 보강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두 시진 정도 잤을까. 소천은 서 총관이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깜짝 놀랐습니다. 서 총관님인지 정말 못 알아보겠습니다.”
소천은 서글서글해 보이던 서 총관의 얼굴이 거친 수염으로 뒤덮여 있자 큭큭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앞으로는 그 호칭도 조심해야 한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서 총관은 호칭에 대해 따로 생각해 둔 게 없다 보니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죠.”
“뭐?”
언뜻 봐도 나이 차이가 스물 이상인데 형님이라니. 서 총관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아저씨라고 부를까요?”
“음··· 그래. 그게 좋겠다.”
“알았습니다, 아저씨.”
소천은 짤그락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과 발을 흔들어 보였다.
그 후, 부지런한 걸음으로 세가를 벗어난 두 사람은 표행과 합류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남궁홍이야 방계혈족이라고 해도 무림세가에서 총관까지 지낸 사람이라 그렇다 쳐도, 소천의 체력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경공을 쓰다시피 움직이는 남궁홍의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칠 만한데도 꿋꿋이 뒤를 쫓았다.
“보기보다는 체력이 좋구나.”
“무공을 익힌 아저씨만 하겠습니까?”
소천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겨우 대답했다.
“이 정도 거리면 표행과 반 시진 정도 차이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쉬어 간다는 남궁홍의 말에 소천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석본은 언제 넘겨주는 것이냐?”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던 소천에게 곧바로 질문이 날아들었다. 남궁홍 입장에서는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무조건 해석본을 얻어야만 했다.
“표행과 합류했다가 헤어질 때쯤 드리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라고.”
남궁홍은 소천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지금이야 무공에 관심도 없고 익힐 방법도 없다지만, 언제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거기다 세상에서 경전의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소천이고, 또 그것을 이용하려 든다면 가장 빨리 적용시킬 수 있는 사람도 소천이었다.
‘해석본을 얻고 나면······.’
소가주 남궁수환에게 토사구팽 당할 것을 걱정해 도망을 친 상태지만, 어차피 자신의 임무는 소천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경전과 해석본을 얻은 후의 일이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왔다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녀석을 살려 보내기에는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나와 헤어지고 나면 어디로 갈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안휘성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아는 곳이 있어야지 말입니다.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천은 그건 왜 물어보냐는 듯 남궁홍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어디로 갈 겁니까?”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겠지.”
“하긴 그렇겠네요. 해석본으로 무공도 익혀야 하고.”
소천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자들이 알아차렸을까?”
“저야 원래 안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니 아직 탄로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아저씨는··· 어쩌면?”
소천은 자신은 문제가 없지만, 남궁홍은 긴장해야 할 것이라는 듯 말끝을 올렸다.
물론 자신도 조심해야 할 대상이 있긴 했다. 마전에서 보냈을 감시자. 어쩌면 마삼이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마전의 감시자라도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설마 세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자와 짝짜꿍하고, 함께 도주를 할 것이라고는 감시자 할아비가 와도 눈치를 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홍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바로 내 상태를 확인할 것이고, 결국에는 알게 되겠지.’
소천의 말에 남궁홍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돈주머니를 다시 허리에 찼다.
“출발한다.”
그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곧바로 휴식을 끝내고 다시 ‘도주’를 시작한 것이다.
“함께 가요!”
소천은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곧바로 몸을 날리는 남궁홍의 태도에 피식 웃음을 보였다. 남궁홍 서 총관. 확실히 겁 많고, 소심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뭐든 좋으니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으라 했던가.”
소천은 한때 남궁홍이 구해다 줬던 무림의 이야기와 야사들 속에서 잊지 못할 글귀들을 수없이 접할 수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영웅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 와중에 이득이란 이득은 다 챙기고 다녔던 귀재들의 행동까지 어느 것 하나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소천은 그 글귀들 덕분에 앞으로 닥칠 여러 가지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 첫 번째 인물이 코앞에서 증명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12장 소풍(消風), 목표를 세우다
스스로 양산표라 이름을 밝힌 표행의 대표는 남궁홍과 소천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소천은 자신들이 합류하면 반갑게 맞이하라고 지시라도 했냐는 듯 힐끔 남궁홍을 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군. 알아서 아부하는 건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세가를 나선 사람들이라고 소개를 해 놨다더니, 오히려 조용히 짐꾼이 되느니만 못한 짓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 분에 대한 말씀은 서 총관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음······.”
소천은 걱정하지 말라던 남궁홍의 다짐이 허망하다는 듯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고, 남궁홍은 얼굴을 붉혔다. 얼굴을 가득 털로 채웠는데도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일 정도이니, 얼마나 무안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소천은 계속 말을 받아 주었다간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양산표라는 표두에게 슬쩍 귓속말을 던졌다.
“서 총관님은 우리가 조용히 합류하길 바라셨을 텐데 말입니다.”
소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게걸스럽게 떠들어 대던 양산표의 주둥이가 꽉 다물어졌다.
“우리는 뒤쪽에서 조용히 따를 것이니 평소처럼 행동을 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서 총관님에게는······.”
“내가 잘 말해 주리다. 너는 나와 함께 뒤쪽으로 간다.”
소천은 남궁홍을 보며 ‘너’라고 호칭을 했다. 남궁홍은 느닷없는 소천의 지시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소천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양산표는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소천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행동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그만 가 보시오.”
“네, 네.”
소천의 말에 양산표는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표사들과 함께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소천을 따라 표행 끝자락에 자리를 잡은 남궁홍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천의 행동을 따지고 들었다.
“그럼 거기서 계속 그렇게 있습니까? 일 처리 기가 차게 하시는 아! 저! 씨?”
“나는 분명히 제대로 지시를 했는데······.”
“그러셨겠죠.”
소천은 믿어 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 녀석!”
남궁홍은 소천의 돌변한 태도에 버럭 화를 내려고 했지만, 지긋한 눈빛으로 건네는 소천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는 남궁세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고, 아저씨는 호위 정도로 인식이 되었을 겁니다. 차후 추격자들이 행색을 묻는다 해도 아저씨가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뜻입니다.”
“음······.”
“싫다면 지금이라도 원상 복귀 시킬까요?”
“아니다. 네 말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언행도 일치를 시켰으면 합니다.”
“언행? 일치?”
“철저히 호위처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끙! 그래, 그래야지.”
남궁홍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행동이 마음대로 되질 않으니, 아예 소천 쪽에서 시선을 돌려 버린 것이다.
‘필요에 따라 환경에 적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티가 나게 행동하니 남궁수환 같은 자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거지.’
소천은 남궁홍의 태도에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과거 자신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해유유가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봤을지 굳이 물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유유,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제고 나에게 했던 행동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소천은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기계처럼 움직이는 표행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루하기도 하고, 무한이 반복되는 하루에 세상에서 가장 심심한 직업을 고르라면 표행 쪽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 주는 효율적인 움직임과, 톱니바퀴 돌아가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치된 행동은 달구지를 끌고 있는 쟁자수들까지 전문가 냄새를 풍겼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더니, 무슨 일이든 경지에 들면 무시할 수 없겠구나.”
남궁홍은 소천의 말에 개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귀천 없는 직업은 없고, 경지에 들어도 똥을 잘 푸는 일이라면 써먹을 데라고는 똥 푸는 일밖에 없는 법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불편함을 호소하던 남궁홍이었지만, 보름 정도 생활을 하고 나자 어느 정도는 호위로서 행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소천은 남궁홍의 말에 이유를 듣고 싶어 했다.
“누구도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부림을 당하는 것보다 부리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도 틀린 말은 아니군.”
남궁홍은 소천이 고집스럽게 반대 의견을 펴면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생각이었는데, 순순히 긍정을 해 버리자 맥이 빠졌다.
“예전에는 왜 세상에 참여할 생각을 못했던 걸까.”
소천은 보이는 족족 새로움을 느끼자, 과거 자신의 행동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어찌 보면 반성일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면 소천이 그만큼 성장을 한 것이다.
그때, 앞쪽에 있던 표사 한 명이 소천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후, 녹림의 세력에 들어갑니다. 대부분 통행세를 내는 걸로 끝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공자께서는 조심을 하시랍니다.”
“알겠습니다. 양 표두께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남궁홍은 어느새 남궁세가의 공자가 되어 있는 소천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은연중 공자라는 호칭이 소천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기분이 묘해졌다. 정작 남궁 성을 쓰는 사람은 자신인데, 엉뚱하게 망해 버린 풍가장의 후손이 그 대우를 받으니 말이다.
“의창(宜昌)을 지나 형문산 근처라면 낙산채겠군요.”
소천은 이곳에서 통행료를 징수하는 녹림이라면 낙산채일 것이라 이야기했다. 남궁홍은 소천의 말에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잊었나? 자네가 구해다 주지 않았나.”
“네?”
“일하는 데 필요한 자료라고 내가 요청을 했었잖아. 무림에 관련된 책들을 구해 달라고.”
“하지만 그 책들은 무림의 정세나 세력을 적어 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궁홍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야사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엮어 놓은 이야기책에는 그렇게 나오더군. 특히 형문산 근처에 낙산채는 무당과 같이 호북성에 자리를 잡고도 토벌되지 않은 강력한 산채라고.”
“허······.”
남궁홍은 이야기책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책에서는 무당의 영웅이 그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오지만, 책 말미에 작가가 써 놓은 말에는 그저 바람을 적어 봤다 하더군.”
소천은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지명과 세력을 무작정 정보로 취급했겠냐는 듯 남궁홍을 바라봤다.
“음··· 작가가 그렇게 적어 놓았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남궁홍은 그냥 이야기나 잘 지어 낼 것이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사족을 달아 놓아 자신을 망신 주는지 모르겠다며 구시렁거렸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표행 앞쪽에서 거친 음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군요.”
남궁홍 역시 앞쪽을 기웃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은 산채들이야 맞서 싸운다 해도 물리칠 수 있겠지만, 녹림십팔채에 이름을 올린 곳들은 규모가 중소 문파를 능가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남궁홍이 무공을 익혔다고는 했지만, 일류를 넘지 못해 결국에는 출셋길이 막히지 않았던가. 서류 관리에 소질을 보이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방계혈족으로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세가에서 경비나 설 팔자였다.
남궁홍이 경전의 해석본에 집착을 보인 것은 무(武)를 통해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위는 날 잘 지켜 줘야 할 것이오.”
소천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웃음을 보였다. 자신이 다치거나 죽어 버리면 경전의 해석본은 끝이라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남궁홍은 가면 갈수록 자신과 소천의 위치가 뒤집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소천을 내칠 수도 없으니 짜증만 늘어났다.
‘낙산채인지 나해채인지, 이 일만 무사히 넘어가면 표행과는 작별을 해야겠다. 이러다 화병으로 죽을 것 같구나.’
남궁홍은 더 이상 표행과 함께 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천을 남궁가의 소공자로 알고 있다 보니 자신의 운신이 좁아진 데다,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도 제재를 가할 수가 없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거기다 틈만 나면 부려 먹으려 드니, 아무리 속 좋은 사람이라도 더 이상 참지 못할 일이라 생각했다.
‘조만간 표행과 떨어지자고 하겠군.’
소천은 남궁홍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다가, 그가 더 이상 끌려 다닐 생각이 없음을 파악했다.
하지만 소천이 미쳤다고 남궁홍과 함께 이동을 하겠는가. 그가 떠나겠다고 하면 적당한 기회에 해석본을 넘겨주면 그만이었다.
해석본을 주고 안 주고를 떠나, 표행과 함께 붙어 있어야만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거기다 오랜만에 공자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여행을 하는데 뭐하러 이들과 헤어지겠는가. 솔직히 수중에 가진 돈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추적자들이나 마전의 감시자가 쫓아올 것을 대비해 이들과 헤어지긴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사천까지 이대로 쉬엄쉬엄 가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오늘 밤 남궁홍보다 먼저 선수를 친다.’
소천은 앞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생각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표물이라면 쉬 건드릴 자가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소천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앞쪽으로 이동을 했다.
***
소천과 남궁홍이 세가를 빠져나간 지 이틀 뒤,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물론 세가 전체 회의가 아닌 몇몇 사람들만의 회동이었다.
“남궁홍이 모습을 감췄다는 게 정말이냐?”
눈썹까지 하얗게 서리가 내린 노인 한 명이 노한 음성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이틀 정도가 지났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무상은 노인의 말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남궁세가 깊은 곳에서 은둔 생활을 즐기고 있던 태상가주 남궁지환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형님, 그 아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가주의 동생이자 창천검대를 책임지고 있는 남궁무현이 소천의 행방을 물었다.
“그 아이도 함께 사라진 모양이다.”
“그 아이를 감시했던 자가 누굽니까?”
남궁무현은 무공도 모르는 아이가 내원 깊숙한 곳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에 화를 참지 못했다.
“반복적인 생활을 지켜보다 보니 느슨해졌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청룡검대에서 살피고 있었다.”
남궁무현은 창천검대와 쌍벽을 이루는 청룡검대에서 일을 맡았다는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세가의 이대 무력 집단 중 하나가 그런 실수를 했단 말인가.
다시 분통을 터트리려던 남궁무현은 태상가주의 음성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만회하지 못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태상가주의 말에 남궁무상과 남궁무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방에 누군가 불쑥 모습을 나타내더니 앳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저를 보내 주세요.”
“설화,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어서 나가지 못할까!”
남궁무현은 엄한 표정으로 남궁설화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이번 일은 청룡검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 역시 그 일원으로서 이번 일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날 감시 임무를 맡았던 조가 바로 3조입니다. 저는 조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남궁설화는 창천검대의 대주 남궁무현의 딸이면서 청룡검대 3조 조장의 직위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소천과 남궁홍이 사라지던 날, 감시 임무를 수행하던 조였기도 하고 말이다.
남궁무현은 설마 그날 임무를 수행하던 조가 자신의 딸이 조장으로 있는 3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버님, 안 됩니다. 설화는 아직 경험도 부족한 데다······.”
“그만.”
남궁지환은 둘째 아들의 말을 가로막으며 설화를 바라봤다.
“자신이 있느냐?”
“실패한다면 남궁가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성을 버리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 남궁설화의 대답에 남궁지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안 됩니다!”
남궁무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딸과 아버지를 번갈아 봤다.
“그러나 무현 말도 틀리지 않다. 이번 추적대는 모두 둘로 구성을 한다. 무현 너의 창천검대와 설화가 속해 있는 청룡검대에서 2개 조씩 차출을 하되, 책임자는 무자 항렬이 맡는다.”
무자 항렬이면 현 가주와 같은 항렬들이 추적대의 책임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무자 항렬이 세가의 검수들을 이끌고 무림에 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폐관 수련 중인 수환이의 소가주 직위는 회수하도록 하겠다.”
쿵!
태상가주 남궁지환의 마지막 말에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세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세가의 근간이 되는 보물을 챙기지 못했으니 어찌 자격을 주겠는가. 그 이상의 공을 세운다면 모를까. 소가주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것이니 그리 알거라.”
남궁지환은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을 모두 돌려보냈다.
“풍무진, 그자가 죽기 전에 일을 마무리만 했어도. 어차피 마무리되고 나면 죽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갔어.”
남궁지환은 아쉬운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색이 바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것에는 소천이 찾아냈던 천선신공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단지 신공의 마지막 부분이 미완으로 남아 완전치 못한 형태였다.
“소천 그 아이가 어디까지 알아낸 것일까. 제 아비가 십 년이 넘게 걸린 작업이었는데, 짧은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하지만 고대 문자를 알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다고 봐야겠군.”
남궁지환은 손에 들려 있는 천선신공을 한 차례 쓰다듬더니, 조심스럽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동안 너무 오래 고여 있었어.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세가는 물론이고 무림에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남궁세가가 다시 날아오를 때가 된 것이야.”
홀로 남은 남궁지환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태상가주의 거처를 걸어 나온 세 사람은 각각의 생각에 빠져 한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무현아.”
“네, 형님.”
“아버님의 말씀을 어찌 생각하느냐?”
“······.”
남궁무현은 가주 남궁무상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제 생각에는 소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을 허락하신 것 같은데요.”
어리면 생각이 짧고 당돌하다 했던가.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하질 않으니 종종 핵심을 곧바로 집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두 사람은 설화의 말에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이 공석으로 두겠다는 소가주 자리에 대한 아버님의 생각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공을 세우지 못하면, 이라는 말을 덧붙이셨겠어요?”
설화는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
“공을 세워야 한다.”
그 순간 남궁무현의 얼굴에 기이한 열기가 일렁였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형님,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추적대를 구성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니 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큰아버지, 저도 이만.”
“그래. 설화 너도 가 봐야지.”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걸어가 버리자, 홀로 남아 있던 남궁무상의 시선이 동쪽 방향으로 향했다.
“수환아, 아버님이 세가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는구나.”
남궁무상은 폐관 수련에 들어가 있는 아들 쪽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하더니 곧바로 몸을 날렸다.
폐관 수련보다 가문의 보물을 찾아오는 것이 우선이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2개의 추적대가 구성이 되고 있지만, 실상 이번 추격전에는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조리 참여할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 잃은 날개가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어느 누가 한눈을 팔겠는가.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양산표는 벌게진 얼굴로 낙산채 녹림도를 노려봤다. 충분히 인사를 하겠다고 했는데도 다짜고짜 칼을 휘두른 것이다. 평소 수련을 게을리 했다면 팔 한쪽이 허공으로 날아오를 뻔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몰라서 묻다니. 먼저 신분을 밝히고 자초지종을 말해 보시오.”
양산표가 알랑방귀나 뀌며, 아부에 능숙한 인물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벌써 15년 넘게 표행을 해 온 전문가였다. 이들이 무작정 칼부터 휘두른 점만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끊어 놓고 싶었지만, 앞뒤 상황을 잘 살펴본다면 오해를 풀고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다.
“말하는 것을 보니 무지렁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이 뭐냐?”
낙산채 녹림도 중 하나가 거대한 도 한 자루를 어깨에 얹은 채 앞으로 걸어 나왔다.
“본인은 안휘성 진진 표국의 양산표라 하오.”
“쌍도 양산표가 당신이었군.”
상대는 양산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시오?”
“나는 낙산채의 채주 요우석이라고 하지.”
양산표는 채주 요우석이 직접 나섰다는 말에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낙산채가 다른 산채에 비해 거칠고 안하무인이라는 말을 종종 듣기는 했지만, 채주까지 나서서 표물을 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하긴 통행세만 받고 보내 줄 거였다면 저렇게 몰려나오지도 않았겠지.’
진진 표국은 활동 구역이 안휘성과 절강성을 주 무대로 했기에 호북성 쪽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표행을 하는 표국이 존재했고, 또 산채들도 표국과는 척을 지지 않으려 했기에 대부분 섭섭지 않은 인사치레로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산채 인원이 모조리 몰려와 전면전이라도 벌일 듯 기세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요 채주셨구려.”
양산표는 요우석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예의를 갖출 것이니 영문이라도 알자는 의미였다.
“쌍도 양산표가 표두들 중에서 군자라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붙여 준 이름일 뿐이오.”
양산표는 당치도 않다는 듯 요우석을 바라봤다.
“두말하지 않겠다. 표물을 두고 떠나라.”
요우석의 말에 양산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진 표국이 비록 안휘성과 절강성에서 활동을 한다곤 하나, 다른 곳의 채주들과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소.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알려 주시오.”
양산표는 진진 표국이 호북에서 활동을 하지 않으니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며 돌려 물었다.
“흥!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셋을 세겠다. 그 안에 표물을 놓고 물러나라.”
양산표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낙산채 녹림도들의 행태에 고개를 저었다.
“내 비록 이곳에서 몸을 누인다 해도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소.”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표물을 잃는다 해도 내 목이 이곳에 남는다면 진진 표국이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표두로서 명예는 지킬 수 있지 않겠소.”
요우석은 표두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양산표의 말에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요우석의 부하들도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명예라. 목숨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면 그렇게 해 줘야지.”
요우석이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걸어 나온 소천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낙산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웬 놈이냐!”
소천의 말에 녹림도 하나가 발끈한 표정으로 소천을 노려봤다.
“요 채주라고 했나? 내가 하나 물어보지.”
요우석은 어려 보이는 소천이 대뜸 반말을 해 오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놈이 겁을 상실했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 같은데, 유언이라 생각하고 한번 들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크하하하! 좋다. 어디 떠들어 봐라.”
“낙산채와 남궁세가의 창천검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뭐?”
요우석은 난데없이 남궁세가의 창천검대 운운하는 소천을 보며 웃음을 멈췄다.
“좋아. 창천검대 정도는 낙산채가 쓸어 버릴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창천검대가 무너지고 나면 이번에는 청룡검대가 찾아올 텐데 어떻게 할 거지? 아, 그렇지. 창천검대를 쓸어 버렸는데 청룡검대라고 무서울까.”
요우석은 소천의 말이 계속될수록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소천이 입고 있는 옷과 달리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는 누구냐?”
“나? 내가 누구더라? 양 표두님, 제가 누굽니까?”
소천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양산표는 자신이 누구냐며 물어 오는 소천의 말에 급히 대답했다.
“남궁세가의 소공자십니다.”
양산표의 입에서 남궁세가의 소공자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낙산채 녹림도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진진 표국이 호북성에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궁세가의 표물을 전담으로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겠지?”
소천은 요우석을 보며 ‘알고도 하는 짓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남궁세가와 안면을 붉히고 싶지 않소.”
“그래? 그런데 왜 앞을 막고 있는 거지?”
요우석이 아무리 막 나가는 녹림이라고 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인물들과 중원 오대세가의 인물들, 그리고 각 지역의 왕처럼 군림하는 독립 문파들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별것 없어 보이는데 알고 보면 고수로 돌변하는 후기지수들은 녹림도들에게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영약을 밥 먹듯 먹으며 키워진 데다, 사는 데 걱정이 없으니 종일 하는 짓이라고는 무공 수련뿐인 놈들.
요우석은 남궁세가의 소공자라는 소천을 보며, ‘재수 없는 후기지수’ 중 하나가 이곳에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목을 날려 버리고 싶지만, 저놈 하나를 상대하고 나면 나중에는 그 집안 놈들이 떼로 몰려올 게 분명했다.
처음 보는 깃발이라며 일단 쓸어버리자던 부채주의 얼굴을 잘근잘근 밟아 버리고 싶었다.
물론 표물만 있고 남궁세가의 사람이 없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낙산채는 얼마든지 흔적을 지우고, 표물을 꿀꺽할 실력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각 세력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 낸 저 어린 핏덩이들을 건드렸다간, 지옥 끝까지 도망을 쳐도 결국 목이 날아가고 말 것이다. 중원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세력은 지독하리만치 팔이 안으로 굽었다.
“하하하! 그러셨구려. 미처 몰라봤습니다. 얘들아, 길을 열어라!”
녹림도들 역시 남궁세가가 몰려드는 것은 원치 않는지 슬금슬금 길목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궁가의 표물이라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요우석이 소천의 말 몇 마디에 꼬리를 내리자 양산표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갔다.
“어서 움직여라! 낙산채 영웅들이 길을 내주셨다!”
양산표는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응원하며 최대한 빨리 길목을 빠져나갔다.
채주 요우석은 똥 밟았다는 표정으로 부하들과 산채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다.
“요 채주.”
소천은 요우석이 발길을 돌리자 급히 잡아 세웠다.
“공자께서는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것이오?”
요우석은 많이 참고 있다는 듯 ‘이쯤 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가면 어쩌자는 건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양 표두님!”
양산표는 소천이 요우석을 멈춰 세우고 자신을 부르자,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멀뚱히 소천을 바라봤다.
“주셔야죠.”
“네?”
“통행세.”
“아니, 그걸 왜?”
알아서 길을 내주었는데 통행세를 뭐하러 주냐는 듯 소천을 보았다.
“평생 표행을 했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습니까?”
소천은 요우석 쪽을 보며 호북성 표국들이 얼마의 통행세를 내는지 물었다.
“은자 다섯 냥이오.”
‘은자 다섯 냥이면 통행세로 작은 돈은 아니군.’
소천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요구하자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돈을 내는 것도 아니니 신경을 꺼 버렸다.
“주십시오.”
양산표는 아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표물은 물론이고 사람들 목숨까지 구해 낸 소천의 명을 어길 수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두 냥 더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네? 다섯 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사 오늘만 할 것입니까?”
“끙!”
양산표는 정말 아까워 죽겠다는 듯 은자 2냥을 더 올려놨다.
소천은 양산표가 준(?) 은자 7냥을 요우석에게 내밀었다.
“지금 뭐하자는 것이오?”
“통행세는 챙겨 가야지.”
“허······.”
요우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천을 바라봤다. 자신이 만나본 후기지수들은 녹림도라면 검부터 빼 들고 난리를 치는데, 이자는 기이한 사고를 지닌 것 같았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럼 그렇지.’
요우석은 부탁이 있다는 소천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언제고 진진 표국을 만나게 되면 오늘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예의를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
“······.”
“누구 하나 다치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냐 이거지.”
“그거야 그렇지만······.”
“양 표두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천은 양산표가 가까이 오자 오늘 일은 오해로 생각하고 앞으로 얼굴을 붉히지 말자고 했다.
“험험! 요 채주가 그렇게 해 준다면야.”
“알았소. 진진 표국과는 얼굴을 붉히지 않겠소. 그러니 이만하고 갑시다. 나 참,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일을 다 당해 보네.”
소천이 무턱대고 검을 휘두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긴장한 표정을 지우고 금세 툴툴거렸다.
“자, 이제 갈 길 갑시다.”
소천은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며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그때 저 멀리 산속으로 사라지던 요우석이 고함을 질렀다.
“공자! 이름이나 알고 지냅시다!”
소천은 순간적으로 이름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했다.
‘상대가 저렇게 통성명을 하자는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소천은 발길을 멈추고 요우석을 향해 목청을 높여 대답해 주었다.
“소풍(消風)!”
소천의 외침에 산채로 돌아가던 요우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궁소풍? 뭔 이름이 저러냐?”
“그러게요. 바람처럼 사라진다니. 해괴한 이름입니다.”
수하들 역시 이름 한번 묘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
형문산을 벗어난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앞 다퉈 소천을 칭찬하기 바빴다. 소천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진진 표국의 인원 3분지 1이 객지에서 비명횡사할 뻔했기 때문이다.
소천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더니 표두 양산표에게 다가갔다.
“아, 소풍 공자님.”
양산표는 소천이 자신의 이름을 소풍이라 밝히자 호칭을 할 때도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이번 표행의 의뢰비가 얼마입니까?”
양산표는 갑자기 의뢰비를 묻는 소천의 말에 그건 왜 묻느냐는 표정이 되었다.
“저도 일한 만큼 돈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네?”
양산표는 소천의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의뢰비가 얼마냐니까요.”
“금자 다섯 냥입니다.”
금자 5냥이면 은자로 100냥이다. 소천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까 같은 상황에 누군가 중재를 해 주겠다면 어느 정도 비용을 내겠습니까?”
“그게 무슨······.”
“그냥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칫하면 표물을 다 빼앗기고,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양산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소천을 빤히 쳐다봤다.
“그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어느 정도 비용을 지출할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양산표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삼 할 어떻습니까?”
“삼 할이요?”
“왜요? 많습니까? 의뢰비는 의뢰비대로 날아가고, 표물을 배상해야 하며,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무리한 요구는 아닙니다만······.”
양산표는 설마 정말 3할을 요구하지는 않겠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삼 할을 받도록 하죠.”
“네에?”
양산표는 의뢰비의 3할을 내놓으라는 소천의 말에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방금 양 표두도 인정을 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제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흠··· 부탁을 하지 않아서 줄 수 없다, 이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쩝! 별수 없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
소천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감사합니다.”
양산표는 별수 없다는 소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개업 기념으로 일 할만 받도록 하죠. 그 이하로는 안 됩니다.”
소천은 불쑥 손을 내밀며 양산표를 빤히 바라봤다.
“그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인지라······.”
양산표가 표행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곤 하지만, 표국의 운영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조건을 달았다면 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봤겠지만, 이미 다 끝난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죠.”
소천은 표국 사람들에게 지필묵이 있냐고 물었다. 표사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종이와 붓을 준비해 주었다. 물론 왜 지필묵을 달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았다면 절대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씁시다.”
“뭘 말입니까?”
“오늘 있었던 일.”
“하지만······.”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을 써 달라는데 그것도 안 된단 말입니까?”
양산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천의 표정에 하는 수 없이 형문산에서 낙산채와 있었던 일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삼 할의 협상비를 요구받았다고도 쓰십시오.”
“그건······.”
“양 표두는 결정권이 없다 하니 직접 국주를 만나 이야기하겠습니다.”
“······!”
양산표는 국주를 만나 오늘 사건을 이야기하겠다는 말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소천이 원하는 내용을 모두 적어 넣었다. 어차피 돈을 주고받는 것은 국주가 알아서 하겠지 생각해 버린 것이다.
소천은 먹물이 마르도록 후후! 불더니 곱게 접어서 가슴속에 집어넣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표행 뒤쪽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뭐하는 겁니까?”
남궁홍은 소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나왔으면 뭐든 해야 하지 않겠나. 처음이라 아직은 서툴지만 차차 실력이 좋아질 거야.”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협상.”
“네?”
“협상의 달인이 될 거야.”
남궁홍은 소천의 말에 ‘이놈이 갑자기 미쳐 버렸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봤잖아. 누구 한 명 다치는 사람도 없었고, 낙산채도 통행세를 받았으니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에서 분쟁을 처리한 거.”
“그거야······.”
남궁홍은 남궁세가의 위세를 빌려 사기를 친 거 아니냐고 말하려고 했다.
“서로가 좋게 끝났으면 좋은 거지. 뭘 복잡하게 생각해. 평소대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끝내라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보내 준 책 중에 감명 깊게 읽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지.”
소천은 아련한 기억이라도 떠올리는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보내 준 책들 말입니까?”
“그래. 작자는 미상이지만 내용만큼은 심금을 울리더군.”
남궁홍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었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감숙성 난주라는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내의 일대기였다.”
남궁홍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야기라면 진진 표국을 도와주는 선에서 끝내야 정상 아니냐며 다시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가진 놈들에게는 혹독하게 뜯어내더군. 아니, 정당한 대가를 받아 낸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겠군.”
“뭘 뜯어낸다는 건지······.”
“척하면 척이지, 별걸 다 물어보네.”
“돈을 뜯어낸다는 말입니까?”
소천은 남궁홍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벌고, 명성도 얻고, 빚도 갚고, 풍가장도 살려 내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결론만 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과정이 살짝 의심스러운 이야기군요.”
소천은 비꼬는 듯한 남궁홍의 말투에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남궁 아저씨도 금자 만 냥이 넘어가는 빚에 쫓기고 있었다면, 그 빚이 다달이 금자 열 냥의 새끼를 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남궁홍은 살기까지 느껴지는 소천의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야말로 영웅이라는 데 백번이고 동의했을 겁니다.”
남궁홍은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설마··· 그 이야기 속의 영웅이라는 사람이 실존하고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조수로 들어가 그 많은 협상의 기법들을 전수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뿐입니다.”
“급하긴 급했군.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에 빠져 그런 황당한 직업을 추구하다니.”
“과연 그럴까요?”
“아무리 협상의 기술이 좋다고 해도 무림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힘이야.”
“가끔 맞는 말도 할 줄 아시는군요.”
“뭐야?”
남궁홍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천을 봤다.
“내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천하제일인이었다는 말은 안 해 줬던가요?”
“······.”
남궁홍과 조용히 밀담을 끝낸 소천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표행 꽁무니를 쫓아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헐! 저놈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네.”
남궁홍은 황당한 직종을 향후 목표로 삼고 있는 소천을 보며, 오늘 밤이라도 표행과 떨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칫 저놈 옆에 있다간 벼락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하제일 좋아하네. 오늘 밤도 넘기지 못할 놈이······. 그래, 꿈이라도 그렇게 실컷 꾸어라.”
남궁홍은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소천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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