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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의 계승자 1

2017.05.29 조회 688 추천 4


 선법의 계승자 1권
 
 
 프롤로그
 
 
 멍한 눈빛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보고 있다. 넓은 세상에 혼자만 남았으니 가슴 한구석에 휑하니 구멍이 뚫렸구나. 중천에 솟아 있던 해님이 고개를 숙이고 사방천지가 붉어지니 꽤나 오랫동안 이렇게 있었구나.
 “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 그지없어 또다시 한숨이다. 아침부터 굶었더니 뱃가죽이 눌어붙는구나.
 아직도 마르지 않아, 물기가 묻어나는 봉분 하나가 소운의 눈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렇게 떠날 것을······.”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고약한 살쾡이처럼 그렇게도 괴롭히더니, 떠날 때는 말없이 왜 그리도 조용하던지. 어울려도 정(情)이요. 미워해도 정이라. 세월 속에 늘어만 가는 게 긴 한숨과 정뿐이다.
 며칠 전부터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가 싶더니, 오늘 아침녘에 날 밝자마자 조용히 가버렸다.
 “영감탱이, 치매기가 있어 고생 꽤나 시키더니, 시원스럽게도 잘 가버렸다.”
 어젯밤 뜬금없이 세상 구경이나 해보라며 궁상스럽게 주절거리더니 아침녘에 조용히 그렇게 가버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유언(遺言)인 줄 알았다면 대답이라도 곱게 해줄 것을.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이 몸을 잡놈으로 만드는구나.”
 영감탱이가 죽을 때가 되었나, 헛소리 그만 하라며 지렁이 가득한 면상에 갖은 면박을 줬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내가 아무리 못된 놈이라지만 이런 기분에 어찌 잘 먹고 잘살겠는가. 산중 생활이라 가진 것도 없고 나눌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둘이서 그렇게 살아 왔는데······.
 맘 같아선 발이나 닦고 미친 척하고 싶지만 하필이면 영감탱이 마지막 말이 그따위라니. 스물다섯 해를 청개구리와 친구 먹고 살았는데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젠장! 늙은이 저승길 보내는데 뒤가 구리면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빌어먹을! 한 번도 안 들어 처먹고 귀머거리 행세한다고 그렇게도 투덜대더니, 혹시라도 한(恨)을 품고 저승길 마다하면 나만 괴로울 일 아닌가. 치매 걸린 늙은 귀신이 밤마다 쫓아오면 그것도 큰일이다. 그래, 눈 딱 감고 소원 한번 들어주자.
 “영감! 어젯밤에 늘어놓은 그놈의 헛소리 말이요. 살풀이 겸 들어줄 테니, 행여나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은 절대로 하덜랑 마쇼. 그동안 키워준 은혜(恩惠), 이렇게 갚는 셈 치고 내 세상구경 나가보리다.”
 눈 뜨고 입 벌릴 때부터 보이는 건 나무요, 잡히는 건 잡초들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세상은 이것이다 하고 살았단 말이요. 에잇! 빌어먹을 영감탱이. 풍진세상(風塵世上)에 내려가면 그냥은 못 산다던데 뭘 챙겨야 하냔 말이요. 이왕에 가라 했으면 그 정도는 알려줬어야지!
 
 “방년 스물다섯, 봉래산(蓬萊山:금강산의 여름) 강소운이가 세상구경 나가신다! 주워들은 풍월 재량껏 튕겨보면 산중 살이나 세상살이나 다를 게 있겠느냐!”
 구들장에 모아두었던 호랑이 가죽 석 장과 영감탱이가 몸보신 한다고 숨겨두었던 영험하다는 산삼 두 뿌리 챙기고, 젯밥만 축내는 몇 대조 영감탱이가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던 긴 칼 한 자루 차고 나간다. 주섬주섬 아침밥 한 끼 제대로 챙겨먹고, 뜬 구름 사이사이로 세상살이 끼어 보련다.
 “봉래산 온갖 잡것들아, 강소운 떠난다니 흥겨워서 춤을 추느냐. 아서라, 이것들아! 내 죽어 묻힐 곳이 세상에서 한곳이고, 살아서 숨 쉴 곳도 천지간에 한곳이다. 세상 구경 시원스레 해보고 봉래산이 풍악산(楓嶽山:금강산의 가을) 되는 날, 강소운이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것이야!”
 
 
 제1장 하산(下山)하는 길
 
 
 “그러니까, 형씨만 믿어라 이 말이요?”
 소운은 본래 생겨 먹은 성깔이 아무 말이나 덥석덥석 들어먹지 못하는지라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복이라는 놈을 흘겨봤다.
 ‘만약 저놈이 내 눈탱이와 맞장구쳐서 구린 기색이 없다면 모를까, 조금만 기세가 흔들려도 사단을 내야 한다. 자고로 매에는 장사(壯士)가 없다고 했다.’
 말복이는 넘어올 듯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소운 때문에 속이 끓어올랐다.
 거지같이 생긴 놈이 귀한 호랑이 가죽을 메고 있기에 슬그머니 말이나 걸어본 건데, 이건 완전히 봉이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산속에서만 살았다니, 잘만 구슬리면 쌀 몇 가마는 그냥 굴러들어올 참이다.
 “허허! 좋은 값에 넘겨준다니까 그러네. 나도 내 갈 길 바쁜 것을 뒷전으로 밀어놓고 발품 좀 팔아주려고 하는데, 그리 노려보면 어쩌자는 것인가?”
 소운은 자신이 산속에서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가죽 파는 걸 도와주겠다며 가던 길을 돌아선 말복이를 믿을 수가 없다. 말복이 놈의 눈빛이 희번덕거리지만 않았어도 대충대충 팔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놈은 아니다.
 ‘어쭈, 이놈 봐라? 영감탱이가 말하기를, 저 남는 것 없이 그냥 도와준다는 놈은 모조리 도둑놈이라고 했겠다.’
 “답답하네그려. 이러다 노상에서 밥 때 놓치게 생겼네.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왕 대인 집으로 가보면 알 것 아닌가.”
 ‘말복이라는 이놈, 말하는 짓거리가 나를 봉으로 보는 게 틀림없구나. 우선 패놓고 봐야 하나······?’
 소운이를 등쳐먹으려는 말복이 놈은 잔뜩 거드름까지 피워가며 분위기를 잡고 있었지만, 정작 소운이는 이놈을 패대기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싫으면 관두게. 시답잖은 호랑이 가죽 좀 가지고 있다고 지금 재는 거여, 뭐시여! 근방에 호피를 취급하는 것은 왕 대인뿐인데, 내 소개도 없이 팔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놈의 왕 대인이라는 놈이 어찌 생겨 먹었기에 말끝마다 왕 대인이냐. 어찌 됐든 호피를 처리하려면 왕가(王家) 놈을 찾아가야 하는 것 같으니, 그 전에 궁금증이나 풀고 보자. 말복이 이놈이 참말을 했든 허튼소리를 했든 우선은 패고 보자! 어떤 놈이든 때리면 찌그러지는 법. 맞다 보면 참말을 할 것이다.’
 “지금 산속에서 빌어먹었다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요? 호랑이 가죽 한 장에 세끼 밥을 먹는다니, 웃기고 지랄하는 소리요. 만사가 귀찮으니 우선은 몇 대 맞고 시작합시다.”
 “아니, 거지 발싸개 처럼 생겨 먹은 놈이 감히 이 말복 어르신을 어쩌것다고?”
 “말복인지 초복인지, 아니면 그것이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해볼 것이니 한번 두고 보면 알 것이요.”
 말복은 소운이 대차게 나오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호피에 눈이 멀어 때를 놓쳐버렸다.
 ‘호~ 요놈의 자식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장단지에 힘이 풀렸구나. 어디 한번 복날 개 패듯이 맞아봐라. 행여나 신나게 두들기다가 꼴까닥 넘어가면 소똥 밟은 것보다 재수가 없을 것이니, 삭신만 고달프게 뼈마디만 추려주마.’
 소운은 맘 가는 대로 행동하고자 생각이 끝나는 순간, 선방을 날렸다. 허리춤을 치켜세우고 시커먼 주먹을 사정없이 내지르니 바람 갈리는 소리가 시퍼렇게 살아난다.
 ‘영감탱이, 곧 죽어도 손짓 발짓 배워야 한다더니 이래저래 쓸모가 있구나.’
 “이놈, 말복아! 큰소리 질렀으면 손발이라도 놀려봐라. 내가 봉래산을 발아래 두고 용호를 아울렀던 산두령 소운님이다.”
 힘차게 내지른 주먹이 말복이 놈 귓바퀴를 스쳤다.
 말복이 놈은 갑작스런 소운의 주먹질에 간담이 서늘해졌고, 눈가가 있는 대로 찢어졌다.
 “아이쿠! 동네 사람들! 시커먼 잡놈의 새끼가 노상에서 사람을 패요!”
 말복은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큰 소리로 악을 썼지만, 동네 어귀도 아닌, 산중 산길이니 누구 하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
 “노상에서 사기 처먹으려는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놈아! 너 오늘 임자 만났다 생각하고 죽을 각오나 하거라.”
 그래도 동네에서 한가락 한다는 말복이었기에 소리는 고래고래 지르면서도 소운이 말하는 틈새를 노려 재빠르게 발을 질렀다.
 소운은 말복이 놈 하는 꼴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다. 쭉 뻗은 말복이의 다리는 슬쩍 몸을 틀어 피해버렸고, 활갯짓으로 말복의 안다리를 잡아 올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내 말복이 놈의 허우대가 하늘을 올려보며 납작하게 들어붙었고, 바닥에 돌부리라도 있었는지 말복이 놈 등짝이 활처럼 휘어졌다.
 하지만 패대기 한 번으로 끝내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소운이다. 소운은 차분한 기색으로 말복이 놈의 팔도 꺾고 발도 꺾고 시원스레 사지를 꺾어주었다. 말복이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지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꺽꺽거렸다.
 “네놈이 오늘 죽어볼 테냐?”
 “아이고, 형님! 살려주쇼. 이놈 눈이 동태 눈인지라 어르신을 몰라봤습니다.”
 말복이 놈, 죽인다는 말에 기겁을 하고 부러진 팔다리를 놀려 소운의 바지춤을 물고 늘어졌다.
 소운은 말복을 죽일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독해야 할 때 물러서면 뒷덜미를 물린다는 생각에 모질게 행동했다.
 “아직도 호랑이 가죽이 세끼 밥밖에 안 되느냐?”
 소운이 말복의 부러진 왼팔을 ‘퍽’ 소리 나게 걷어차자 말복의 비명 소리가 걸쭉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고, 아닙니다! 천한 것이 산두령을 몰라보고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소운은 산두령에게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이번엔 오른쪽 정강이를 뒤꿈치로 찍어놓았다.
 한 번 더 자지러지던 말복이는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어 발발거리는 목소리로 왕가(王家) 놈이 사는 곳과 가죽 값을 알려주었다.
 소운은 골골거리는 말복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패놓고 도와주자니 계면쩍었기 때문이다. 운수 좋으면 금세라도 발견될 것이고, 재수 없다면 한나절이고 며칠이고 산중에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영감탱이에게 두고두고 당했던 것을 풀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산중에서 기어 나와 처음 본 놈이 말복인데, 영감 말 하나도 틀린 것이 없구나. 세상천지에 기대고 의지하면 내 설 곳이 없다더니 참으로 틀린 게 없어. 생강은 늙을수록 맵다고 하더니, 듣고 흘린 좁쌀 소리라도 죽자사자 떠올려야 풍진세상 살겠구나.”
 왕가(王家) 놈이 산다는 곳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소운은 뱃속에서 우레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그것도 힘쓴 거라고 벌써부터 허기가 밀려오다니.”
 소운은 뼈마디가 부러지기 전에 밥 때를 운운하던 말복이의 말을 떠올리며 면상을 찌푸렸다.
 “그놈 삭신이 후끈거리는 건 둘째 치고, 밥까지 굶게 생겼으니 정말 불쌍하게 되었군. 인생에 세 가지 즐거움은 먹고 싸고 자는 것이지 않는가. 영감은 개 풀 뜯는 소리라고 고함을 쳐댔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말복이 놈이 산다는 마을까지 이 속도로 이동하다간 정말 밥 때를 놓칠 것 같았다.
 소운은 어쩔 수 없이 뜀박질을 준비했다. 가뜩이나 배고픈데 뜀박질까지 하고 나면 허기가 심해지겠지만, 끼니를 거를 일은 없을 것이다.
 소운은 휘적휘적 여유롭던 몸짓을 멈추고 서서 주춤한 동작을 취하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뺐다.
 뜀박질이라는 걸 처음 배울 때는 오리 새끼 판박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것 또한 익숙해지니 모양보다는 실리다.
 왼발이 2할쯤 땅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뿌연먼지가 일어나면서 소운의 몸뚱이가 쏘아진 화살 같아졌다. 말복이 말로는 반 시진이면 마을이라 했으니, 뜀박질로 용을 쓰면 일각 안에 도착할 것이다.
 “헉헉! 말복이 이놈! 반 시진이면 도착할 거라고?”
 뜀박질까지 하면서 이각을 넘게 달려가고 있지만 마을은커녕 개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아이고, 끼니 챙기려다 그 전에 지쳐 죽겠다.”
 소운은 전력으로 질주하던 뜀박질을 그만두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가진 재주 중에서 힘 빼는 걸로 순서를 매기자면 무시 못할 재주가 뜀박질이었다.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는 최고지만, 힘 빠지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재주이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간사한 게 사람이라, 몇 숨 고르고 나니 다시 우레와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산만 내려가면 금방이라도 세상살이에 끼어들 줄 알았지, 배까지 곯아가며 뜀박질만 죽어라 해댈 줄은 생각도 못한 소운이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아니다. 곧 죽어갈 놈이 뭐가 아쉬워 거짓말을 했겠는가. 아무래도 초행길이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하다.”
 나무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던 소운은 반 시진만 가면 동네 어귀라며 눈물 콧물 쏟아내던 말복이를 떠올렸다. 거짓말을 해봤자 자기에게 남는 것도 없는데 그놈이 헛소리를 했을 리 만무하다. 말복이에게 심하게 대했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지 마을을 못 찾는 건 자신 탓으로 돌려버렸다.
 뜀박질에 지쳐버린 소운은 더 이상 왕가(王家) 놈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태양은 이미 한참을 기울어 사방 천지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산길은 벗어났지만 지리를 알지 못하는 소운은 어둠까지 밀려오자 노숙할 곳을 찾아야 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끼니를 해결할 욕심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꼭 오늘만 날은 아니다. 그나마 시기가 여름이니 노숙을 한다고 해서 얼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 것이라도 챙겨둘 것을.”
 소운은 가끔씩 산 밑에 내려가 한나절이면 생필품을 구해오던 영감을 보며 사람 사는 곳이 금방이려니 생각하고는 행낭을 꾸릴 때 음식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산을 타고 다니다 보면 방향 감각이 둔해지기 마련이고, 그것이 초행길이라면 온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하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자칫하면 아침 한 끼 챙겨 먹은 걸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굶는 처지가 될 것이다.
 “내 팔자에 거지새끼라도 끼어들었단 말인가? 세상 구경 나오자마자 상거지가 따로 없구나.”
 사냥을 하려고 산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평지에도 땅거미가 내려앉는데 산중은 이미 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소운은 아쉬운 대로 칡이라도 찾아야 했다. 여름철이라 씁쓸한 맛이 강하긴 하지만 풀뿌리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다.
 그래도 저녁까지 굶을 운은 아니었는지 어른 팔뚝만큼 알이 굵은 놈을 하나 찾아냈다. 내일 당장 인가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굶을 걱정은 사라졌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에 고기 반찬 얹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근심을 덜었다는 측면에선 만족할 만했다.
 칡뿌리에 달라붙은 흙덩이를 털어내고 뽀얀 속살을 발라내니 생긴 것은 닭 가슴살이다. 눈이라도 호사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입 안 가득 칡 덩이를 씹어대며 호피를 풀어놓은 소운은 간단하게 잠자리를 마련했다. 낮 공기가 후끈거려 땀을 꽤나 흘렸지만, 산바람이 불어오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다음날 새벽, 이슬을 털고 일어난 소운은 대충이나마 갈 곳을 정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돌아다니다간 영락없이 거지 팔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영감 말로는 해뜨는 곳에 옛 땅이 있고, 해지는 곳엔 뙤놈들이 산다고 했겠다. 하지만 옛 땅이라고 해봐야 지금은 뙤놈들 세상이니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남으로 가면 조선 땅이지만 조선과는 상종도 말라고 했으니 북으로 가야 하나?”
 소운은 조선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목에 핏발을 세우고 열변을 토하던 영감을 떠올렸다. 조상들의 염원을 위화도에 내팽개치고 뙤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이(李)씨 성을 가진 호족을 죽일 놈 취급을 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세뇌 당하다시피 인이 박혀버린 소운에게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왠지 꺼림칙했다.
 “북으로 가면 뙤놈들에게 쫓겨난 만주족들이 산다고 했으니 분위기가 흉흉할 것이다. 집 뺏긴 놈 치고 웃고 사는 놈 없을 테니. 그렇다면··· 어차피 남쪽은 정이 안 가고, 북쪽은 위험해 보인다. 동쪽에 옛 땅이 있다고 하지만 겨울이 오고 나면 돌아다니는 걸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춥고 척박한 동네라고 하니 먹을 것이 풍족할 리 없고, 자칫하면 발품만 팔지도 모르지.”
 소운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내더니 결국엔 서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서쪽으로 가야것다. 영감도 소싯적엔 그쪽 동네에서 잠시 놀았다니 나도 한번 놀아봐야겠다.”
 겉으로야 삼방(三方)을 두고 이런 저런 핑계를 늘어놓았지만, 내심 영감이 들려주던 소싯적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소운이다.
 “먼저 가신 할머님이 서쪽에서 오셨다고 했으니 할머님의 고향에라도 한번 들러봐야겠구나. 뭐라고 부른다더라······? 무슨 세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황제가 사는 고을에서 고을목 제상(宰相)이라면 다 안다고 했었지. 종종 할머님이 자랑 삼아 말씀하셨으니 황제가 사는 곳을 찾아가면 되겠구나. 영감탱이와는 다르게 바르고 고운 말만 하시던 분이니 농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소운은 지난밤에 다듬어두었던 칡 덩이를 입에 물고, 밝아오는 아침 해를 뒷전으로 맞이했다.
 
 
 제2장 조의선인(早衣仙人)을 만나다
 
 
 소운은 태어나 강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개울물이나 계곡물은 보았어도 넓고 길게 늘어서 있는 거대한 강줄기는 스물다섯 해를 살아왔어도 오늘에서야 처음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지니 감격에 겨워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것이 강이로구나. 하하하! 이것이 강이로구나. 눈뜨고 살았어도 보이는 게 산뿐이니 세상엔 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강이란 게 이렇다면 바다라는 것은 얼마나 진기할까!”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상상하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소운은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강줄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떨려오는 느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아직은 상류 쪽이라 나루터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주먹을 불끈 쥐는 소운의 모습에 검버섯이 듬성듬성 난 노인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거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강줄기에 도취되어 있던 소운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뇨?”
 소운은 노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별일은 아닐세. 그저 자네 모습이 토문강(송화강의 지류)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에 그냥 물어보는 걸세.”
 소운은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이 강의 이름이 토문강인지도 이제야 알았고, 또 토문강이든 아무개 강이든 강이라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 토문강을 처음 봤다는 건 알아듣겠네만, 강을 처음 봤다니. 평생 산속에라도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먼.”
 “하하하! 맞습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처음으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도 보고 들도 보려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소운의 모습에 노인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보이더니, 방금 전에 보인 소운의 행동을 이해했다. 사람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면 몇몇은 당황하지만 몇몇은 신기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르신, 제가 이 근방이 초행길이라 아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명(明)이라는 나라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네 명나라로 가는 길이었는가?”
 “네, 어르신.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귀동냥으로 들은 바가 있어 서쪽으로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리 봐도 그 땅이고 저리 봐도 그 땅이니 어디가 조선이고 어디가 명인지를 확인 할 길이 없는 소운이다.
 “물론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가는 길을 알고는 있네만, 국경을 접하고 있어 쉬이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네.”
 “아니, 내 발로 걸어가는데 누가 뭐라 한다는 겁니까?”
 노인은 소운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쯧, 산속에서만 살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모르겠구먼. 어느 곳을 가든지 경계를 벗어나거나 새로운 곳으로 들어갈 때는 길목을 책임지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슨 일로 조선 사람이 명에 가고 싶어 하는지 설명을 해야만 하네. 물론 거기다 돈까지 내라고 하는 곳도 있다고 하니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네.”
 소운은 노인의 이야기에 기가 막혔다.
 ‘사람이 사람 사는 곳을 찾아가는데 가는 곳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누가 정해놓은 법도란 말인가.’
 소운의 미간이 좁아지면서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르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그 경계라는 것이 얼마나 넓은 것입니까? 몇 리라도 좋으니 돌아서 들어가는 방법 같은 건 없겠습니까?”
 설마하니 그 경계라는 것이 천리 길로 가로막힌 것은 아닐 테고, 설사 천리 길에 걸쳐 있다고 해도 그 경계를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게 수천의 책임자들이 지키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참,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행여나 꿈도 꾸지 말게나. 동네에서 동네 가듯이 좁은 외길이라면 한두 사람 서 있고 말겠지만, 나라 사이에 선을 그어놓은 곳일세. 창칼로 무장한 군대가 마주 보는 곳이 바로 이곳일세. 허튼짓하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게 되면 첩자로 오인 받아 칼 맞기 십상이지.”
 노인은 소운이 생각하는 또 다른 방법을 싹둑 잘라버렸다. 자칫하면 소운 때문에 인근 마을들이 엉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들은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일이 발생하면 너도 나도 마을로 몰려와 난장판을 만든다. 그들이 휘두르는 창칼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있긴 하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 놈들은 군사들의 행패에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문제가 발생해도 기름에 불을 붙이듯 순식간에 활활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노인장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명나라로 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 관리라는 사람들을 만난다 해도 이렇다 설명할 것도 없고, 가진 거라고는 호피 세 장뿐인데 그냥 길 위를 걸어가는 값으로 내놓기에는 억울해서 그리 못하겠습니다. 어차피 잡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 같으니 제 나름대로 가보렵니다.”
 노인이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 청년의 말하는 투가 지금이라도 훌쩍 국경으로 향할 태세다. 소운은 잡히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툭 내뱉었지만, 누군가 국경을 넘나들었다는 흔적이라도 발견되면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 것이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가 무엇 때문에 명나라로 가려는 줄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네. 꼭 가야만 한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제발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게나.”
 노인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청년이었지만, 하늘님이 마을을 보살펴주시려고 큰일이 나기 전에 청년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이 청년과 연이 닿지 않았다면 토문강 어촌 마을들은 완전히 줄초상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소운은 소운대로 어떻게 해야 명나라로 갈 수 있을지 막막하던 차에, 인상 좋은 마을 노인을 만나 크게 횡재한 느낌이다.
 앞뒤를 재고 나면 서로가 동상이몽이나, 두 사람 다 기쁜 일이니 노인의 말대로 하늘님이 돕는 것도 같다.
 노인은 나루터 쪽으로 바쁘게 걸어가더니 사공들과 몇 마디 나누고 소운에게 손짓을 했다.
 “여기 이분들을 따라가게. 자네 사정은 대충 이야기했으니, 잡부로 잠시 생활하다 보면 금세 명나라에 들어가 있을 걸세.”
 소운은 노인이 무슨 이유로 친절을 베푸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말복이 놈이 추구했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소운은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뒷짐에 묶어놓았던 호피 한 장을 풀었다.
 “어르신, 생면부지인 저에게 타지에서 도움을 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호피 값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노인은 이런 것을 받으려고 도움을 준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소운의 고집도 보통이 아닌지라 얼마간 아옹다옹 실랑이를 벌이고 나니 호피는 어느새 노인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귀한 것을······.”
 길손을 돕는다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속내로는 마을의 안전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기에 노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귀한 물건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보게, 아무래도 이 호피는 내가 지닐 물건이 아닌 것 같네.”
 “이미 제 손을 떠나 어르신께 넘어갔으니, 이미 그 호피는 제 물건이 아닙니다. 불편해 하지 마시고 유용한 곳에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소운은 노인이 불편하든지 말든지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것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오히려 지금 노인의 행동을 적당히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두말 없이 호피에 대한 주인을 정해버렸다.
 “이보시오, 노인장.”
 두 사람이 호피 한 장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고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네, 선주 어른.”
 “저 총각은 주었다 하고 노인장은 받을 수 없다고 하니, 보는 사람이 답답하구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노인장 말씀대로 그 호피가 부담스럽기는 하겠소.”
 선주라고 불린 남자는 소운과 노인의 대화에 끼어들어 적당히 운을 띄웠다.
 “선주 어른께서 좋은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소운은 선주라고 불린 남자에게 노인이 공대를 하자 의아하게 생각되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선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배에 대한 개념은 알고 있어도 아직 신분에 대한 개념은 중심이 잡히지 않은 소운이다.
 “호피라는 것이 워낙 귀한 것에 속하는지라, 노인장이 지니고 있기엔 탐내는 자가 많아 위험이 따를 것이요. 그러니 남들이 쉽사리 탐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을 것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호피 값은 후하게 쳐드리리다.”
 소운은 선주의 말이 끝나고서야 자신이 넘겨준 호피의 값어치가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밥 세끼는 먹을 수 있는 값어치라며 생색을 내던 말복이 놈을 떠올리니 생각할수록 괘씸해졌다.
 “아이쿠, 그렇게만 된다면 저야 바랄 것이 없겠지만, 지금 이 호피는 제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길손에게 말 한마디 해준 대가치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훗날 화가 될까 두렵습니다.”
 선주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뒷날을 따지는 것을 보면 노인장 말하는 모양이 천것들은 아닌 듯싶소.”
 선주는 그저 귀한 것을 가지고 있어 혹시나 누가 될까 하는 마음에 도움을 주려고 생각했으나, 자신의 행동에 합당한 대가인가를 따지고 있는 노인에게 호기심이 동했다.
 소운 역시 세상살이에는 둔하기 그지없으나 산중 생활의 대부분을 책과 살았는지라 선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외진 곳의 촌로만으로 생각하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선주 어르신께서 이 늙은이를 높게 쳐주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루터 위쪽에 있는 모름골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이나 깨우쳐주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눈이 어두워 어르신을 앞에 두고도 실례를 범했습니다.”
 선주는 노인의 말을 듣더니 급히 엎드려 인사를 했다.
 노인은 선주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갑자기 순박하던 눈빛이 사라지고 갑작스레 안광이 드러나면서 경계의 빛을 보였다.
 “누구기에 나를 알아보는 것이냐!”
 노인의 목소리가 징소리로 바뀌었는지 쩌렁쩌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운은 이게 뭐 하는 짓들인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노인의 목소리에 귀가 아려오자 급하게 2장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나루터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잡부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짐을 나르고 있을 뿐이다.
 ‘영감탱이가 논하기를, 단(丹)의 깊이가 두 갑자를 넘어서면 소리로 사람을 때릴 수가 있다더니, 여기서 고인을 보는구나.’
 넙죽 엎드린 선주라는 사람도 노인의 호통에 내침을 당했는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아이쿠! 조의선인(早衣仙人)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정 모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선주는 노인을 조의선인이라고 부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소운 역시 조의선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두 눈을 크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영감탱이 말로는 조의선인의 맥이 거의 끊어졌다고 하던데, 영감 말도 전부 다 믿을 것은 못 되는구나.’
 “네놈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는 모르나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으니, 오늘 나를 보았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갈 길이나 떠나거라!”
 자신을 정가(家)라고 말한 선주는 노인의 말에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함흥에서 조의선인의 방계를 잇고 있는 정사빈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부친께 토문강 모름골에 조의선인의 대맥을 지니신 어른이 은자 생활을 하신다고 들었기에 인사라도 여쭙고자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노인은 몇 해 전에도 정사빈이라는 자와 똑같이 행동하는 이를 만났었다. 그에게 조의선인의 맥을 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반가운 나머지 집으로 초대했으나,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 안을 북새통으로 만들어 놓고, 앞집 사는 천둥이에게 모습을 들키자 천둥이 놈마저 크게 다치게 한 적이 있었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자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노인은 그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조의선인의 선법(仙法)을 훔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이후로 행동을 조심하던 차에 또다시 조의선인의 방계를 이었다는 자를 보게 되니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네놈이 진정으로 조의선인의 방계를 이었다면, 오늘 나를 만난 걸 모조리 잊어버리고 어서 갈 길을 떠나거라. 그러면 너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르신, 제 부친 되시는 분이 ‘철’ 자 ‘민’ 자를 사용하십니다. 몇 년 전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으셨다 하니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노인은 사빈이라는 자에게 철민의 이름을 듣자 번뜩이던 안광을 살며시 누그러뜨렸다.
 “정녕 네놈이 철민이의 자식이더냐?”
 “네, 어르신. 둘째 되는 사빈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여전히 미심쩍긴 했지만 예전에 인연이 되어 조의선인의 방계를 잇고 있던 철민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만약 정사빈이라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철민이의 소식 한 번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내칠 수는 없지 않는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자와 다를 바 없던 철민이었기에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자신에게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속세의 인연 하나하나가 허투로 느껴지지 않았다.
 “좋다. 네놈이 철민이의 자식 놈이라 하니 더 이상 성을 내지 않겠다만, 그렇다고 따로 시간을 내지도 않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노인이 기운을 거두자 정사빈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철민이는 잘 지내느냐?”
 사빈은 노인의 물음에 입을 열어야 할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르신,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치 않은 듯싶습니다.”
 노인은 그가 나루터의 사공들과 멀뚱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뒤쪽에 떨어져 있는 청년이 이야기를 들을까 걱정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걱정 말아라. 석(三) 자 거리를 넘어서면 우리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네, 어르신. 부친께서는 종종 어르신 말씀을 하시며 길을 나서고 싶어 하시지만, 작년에 다리를 다치신 게 아직 아물지 않아 요양 중이십니다.”
 노인은 철민이 다리를 다쳤다는 말에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정사빈의 이야기인즉, 작년 가을쯤에 ‘박만수’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자신도 조의선인의 방계를 잇고 있다며 인사차 들렀다는 것이다. 철민은 맥을 잇고 있는 조의선인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정성을 다해 박만수라는 자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만수라는 자가 부친의 서재에서 조의선인의 맥을 기록한 계보도와 팔도에 은거 중인 조의선인들이 보내온 편지들을 뒤지는 걸 발견했고, 깜짝 놀란 철민이 만수라는 자와 다투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만수라는 자도 철민의 손바람을 맞아 앞마당을 몇 바퀴 굴렀다고 하니 쉽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그 만수라는 자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낼 수 있겠느냐?”
 “네, 어르신. 얼굴이 세모지고 턱에 난 수염은 두 갈래로 무리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눈 밑에 옅지만 검상이 분명해 보이는 흉터 자국도 하나 있었습니다.”
 노인은 몇 해 전 천둥이를 상하게 했던 이와 동일 인물임을 확인하자, 불현듯 그자의 행적에 불안함을 느꼈다.
 처음에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어 조의선인의 선법을 훔치려고 했다 생각했으나, 사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도적으로 조의선인들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부친께서 그자를 내쳤을 때, 마음이 급했는지 우연히 명나라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족(漢族)이라는 말이냐?”
 사빈은 노인의 질문에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말을 쓰는 게 어눌해서 잠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만수라는 자가 북쪽에 오래 살아 말투가 바뀌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터진 뒤에 생각해보니 한족이 신분을 숨기려고 그렇게 한 것 같다는 의견도 조심스레 내놓았다.
 “아직도 한족들이 욕심을 못 버렸구나. 배달(檀國)에서 받아간 단(丹)련법으로 만족할 것이지, 감히 선법에까지 손을 내밀다니,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는 것들이로다.”
 노인은 철민과 손을 겨루었던 자가 한족이라는 말을 듣자 노기 서린 얼굴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르신, 말씀 중에 끼어드는 게 도리가 아닌 줄 알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씀을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소운을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가 하는 말이 전부 들렸단 말인가?”
 “가까이 있는데 못 들을 건 또 뭐 있습니까?”
 노인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는 소운의 답변이 이어지자, 소운이 있는 쪽으로 품세를 밟으면서 손끝을 크게 벌렸다.
 “어이쿠! 말해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할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요!”
 소운은 노인이 자신의 손목을 노리며 손가락을 매의 발톱처럼 만들어 갑작스레 공격을 해오자 급히 몸짓을 일으켰다. 그러자 노인의 눈이 더욱 빛을 발하며 왼손을 허리에 가져다 붙였고, 검지를 엄지 밑으로 말아 쥐더니, 어느새 손가락 사이에 쌀알을 얹어 놓고 소운을 향해 검지를 튕겨냈다.
 소운은 노인의 손끝이 엄지 밑으로 말릴 때부터 낱알 튕기기를 쓰려는 것을 알아봤기에 기운을 움직여 몸을 낮추었다.
 손끝에서 일어난 날카로운 파공성은 소운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끊어버리며 위쪽으로 솟아올랐다.
 “이놈! 네놈도 선법을 노리고 접근했던 것이냐!”
 소운은 호통을 치는 노인의 말에 자신이 선법이라는 것을 노리고 노인장에게 치근덕거린 잡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누가 뭘 노린다는 것이오!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한마디 했더니, 다짜고짜 사람을 치려고 하네? 그러려면 내 호피나 돌려주시오!”
 소운은 계속해서 자신을 공격해오는 노인의 행동에 짜증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의 뼈마디를 들쑤셔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가죽밖에 남지 않아 오늘내일하는 늙은이가 아닌가.
 소운은 계속해서 늙은이와 손을 겨룬다는 것이 무의미함을 느끼고 발끝에 기운을 모아 기회를 노렸다.
 노인의 손바람이 가슴 어림을 스치는 순간에 허리를 틀어 거리를 벌리자, 노인의 중심이 약간 앞쪽으로 쏠리면서 오른쪽 발을 신속하게 질러 넣었다. 소운이 재빠르게 간격을 떨어뜨리자 바로 쫓지는 못하고 임기응변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이런 행동은 소운에게 도망갈 틈을 만들어주었다. 노인이야 소운이 계속해서 손발을 섞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온갖 귀찮은 것들을 꺼려하는 소운에겐 미치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노닥거릴 이유가 없었다.
 “이얍!”
 짧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며 소운의 신형이 순식간에 뒤쪽으로 쭉 늘어났다. 몸에 있는 기운을 모조리 짜내 뜀박질을 시전하였기에 그 움직임은 더욱 날쌨다.
 소운이 갑작스레 몸을 빼며 뒤쪽으로 도망쳐버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바로 몸을 가다듬더니 소운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이것이 바로 노인이 가진 비기 중의 하나, ‘돌개바람’이다.
 소운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운을 뜀박질에 퍼부었기에 노인네의 체력으론 죽어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틈만 나면 나를 괴롭히는 거냐!”
 소운은 붉으락푸르락 인상을 쓰며 쏜살같이 토문강 상류 쪽으로 내달렸다.
 “이놈! 게 서지 못하겠느냐!”
 “이런 미친 영감탱이! 곧 죽을 몸을 하고서 어딜 쫓아오는 거야!”
 뒤를 쫓던 노인은 소운의 말에 더욱 노기를 토하며 ‘소리 울림’을 준비했다.
 소운은 도망치는 틈틈이 노인의 상황을 주시하다가 노인의 가슴 부분이 크게 부풀어 오르자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 순간, 천지를 찢어 놓을 듯 무시무시한 굉음이 소운의 뒷전을 강타했다.
 “이놈!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서 귀를 틀어막았지만, 노인이 쏘아낸 ‘소리 울림’은 소운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버렸다.
 “크악!”
 죽자사자 뛰어가던 소운은 두 다리가 급하게 뒤엉키면서 흙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쿨럭! 쿨럭!”
 뽀얀 흙먼지 사이에서 심하게 기침을 하던 소운은 뒷덜미가 시원해짐을 느끼며 급하게 다시 한 번 바닥을 뒹굴었다.
 “이놈의 늙은이가 앞뒤 가린다며 자랑할 때는 언제고, 이젠 앞뒤 가릴 틈도 없이 사람을 죽이려 드는 거냐!”
 입가에 검붉은 피를 흘려내던 소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감각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지금쯤 머릿골이 부셔져 여기저기 흩어졌을 것이다. 뒷골을 서늘하게 했던 바람은 ‘뻥!’ 소리를 내며 땅거죽을 한 자는 뒤집어놓았다.
 “네 이놈! 말이 필요 없다. 네놈이 무슨 연유로 조의선인의 뒤를 캐는지 모르겠다만, 선법은 고사하고 뒤꼍에 묻어둔 절은 무 한 조각도 얻어가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언제 조의선인의 뒤를 캤다는 것이고, 또 선법을 노렸다는 것이요? 뒤꼍에 묻혀 있다는 냄새나는 절인 무엔 관심도 없으니 나 좀 가만히 놔두시오!”
 소운의 악다구니에 또다시 노기가 솟은 노인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지만, 그제야 두 사람을 따라온 정사빈에 의해 소운의 머리가 쪼개지는 상황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어르신! 저놈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저놈이 정말 조의선인의 뒤를 캐던 놈이라면, 놈의 배경을 알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길손이라면 애꿎은 사람만 다치는 게 아닙니까.”
 소운은 사빈의 말에 내심 ‘그렇지!’ 하면서도 다치는 게 아니라 죽어 자빠진다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쭙잖게 나섰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이다.
 노인은 사빈의 이야기에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하게 행동했던 것에 부끄럼을 느꼈다. 그렇다고 어린놈의 말이 옳다며 쉽사리 맞장구를 치기엔 체면이 서질 않았다.
 “사빈,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 잠시 손을 거두지만, 알아볼 것도 없이 한족 놈이 분명할 것이네. 어찌 조선 사람이 토문강을 모를 것이며, 명나라로 돌아갈 방법을 천연덕스럽게 물어보겠나. 저놈이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내 앞에서 헛짓을 했음이 분명하네. 방금 전에도 저놈의 재주를 보지 않았는가? 유유자작 세상 구경한다는 젊은 놈의 몸짓이 수십 년 갈고 닦은 몸짓이니 어찌 쉽게 보겠는가.”
 노인은 나름대로 근거를 들어 한 소리 늘어놨지만, 속으로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억지들이다. 한족의 첩자 놈이 뭐 하러 토문강을 모른다고 할 것이며, 명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저렇게 힘들어 할 것인가?
 거기다가 먼저 말을 걸고, 시시비비 가리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사빈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족의 못된 놈들이 자신과 다른 조의선인들의 근거지에 얼씬거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이성을 잃었음이 분명했다.
 사빈이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그나마 말이 먹혀들었다 싶어 줄어든 가슴 부분을 슬그머니 펴 올렸다. 그러나 사빈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아버님께 듣기로는 어르신의 뜻이 하늘에 닿고 어질기가 공구(孔丘:공자의 이름)와 같다고 하셨거늘, 한족들의 폐해가 어르신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사빈이 보기에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엉망인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청년이 결코 한족의 끄나풀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만난 듯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어떻게 풀어야 서로 간에 오해가 없을지 고민스러울 뿐이다.
 “조금 전에 자네가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빈은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시작이 부드러울까 생각하다가 일의 발단이 된 청년의 궁금증에 대해 물어보았다. 노인은 사빈의 부드러운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헛기침을 연신 터뜨렸지만, 사빈의 입장에선 그것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흥! 죽어라고 팰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것이 궁금해진다는 말이요?”
 소운은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몸은 괜찮은지, 피를 보이는데 내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최소한 이 정도의 이야기는 건네줄 줄 알았다.
 “지금 이 상황이 서로 간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원인부터 풀어놓는 게 맞지 않겠는가?”
 사빈은 오랜 장사 경험으로 소운이 원하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렇다고 사문의 어른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자칫하면 ‘어르신 때문에 이 청년의 몸이 상했소’라는 엉뚱한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빈의 표정을 보니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자리를 파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묻어났기 때문에 소운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 늙은이가 조의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이런 저런 궁금한 것이 생겼을 뿐이요. 내가 듣기론 조의선인의 맥이 거의 다 끊어져서 방계나 몇 수 주워들은 놈들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갑자기 대맥을 이었다고 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행색을 보면 떠돌이 같은데, 자네가 조의선인을 알고 있다니 어찌 의심하지 않겠는가?”
 소운은 사빈의 말을 ‘네놈 처지에 무슨 소리를 늘어놓는 거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되로 받았으면 말로 주어야 한다.
 “그러는 당신은 동네 장사치 같은데 어찌하여 조의선인의 핏줄이라고 하고, 저기 늙은이는 곧 죽어도 시원찮을 판에 조의선인의 대맥을 이었다는 것이요? 내 보기엔 두 사람이 농을 치는 것 같소.”
 사빈은 소운의 대답에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놈, 쉽게 볼 놈이 아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잡아놓고 봐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어른이 하는 일에 반기를 든 상태에서 또다시 말을 바꾸는 것 또한 예의에서 벗어나는 꼴이 된다. 어르신이 적당히 양보해주실 동안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자네, 말하는 것이 조금 지나친 감이 있군.”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뭐라고 한다더니, 당신네들 모양이 딱 그 이야기요. 내 행색이 떠돌이든 거지새끼든 그것은 모양일 뿐인데, 어찌하여 앞 집어 이야기한단 말이요?”
 다시 사빈의 얼굴이 반쯤 굳어졌다. 저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 인정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을 하면 사빈과 노인을 똥 묻은 개가 된다.
 옆에서 소운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린놈이 입 하나는 발라당 까졌구나! 네놈 부모들이 그리 가르치더냐?”
 가뜩이나 조부와 조모 손에서 자란 탓에 부모에 대한 정이 각별한 소운은 노인의 말에 왈칵 성질이 났다.
 “아이고~ 미친 영감탱이야! 그러는 너는 네놈 조상들이 이렇게 핍박하라고 가르쳤더냐?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고, 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 좀 해보거라. 길 떠난 나그네라고 나를 쉽게 보는 게 아니라면 글깨나 읽은 사람들 같으니, 그 잘난 공론 짓이라도 납득이 가게 늘어놔 보거라!”
 소운의 악설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자, 노인과 사빈의 안색이 똥 씹은 얼굴처럼 까무잡잡하게 변했다. 노인은 물론이고 사빈의 표정까지 심하게 일그러진 걸 보면 더 이상 대화로 풀어내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노기가 치솟자, 그 모습이 마치 야차 같다. 구부정했던 허리는 어느새 반듯하게 펴졌고, 왜소해 보였던 어깻죽지는 바람이라도 들어간 듯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사빈 역시 소운의 악설에 화가 치밀었지만, 갑작스런 노인의 변화에 주춤거리며 물러서야 했다. 조의선인의 대맥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강맹한 기운을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잔뜩 흥분한 상태로 씩씩거리던 소운도 노인의 변화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뒤쪽으로 물러섰다. 홧김에 악다구니를 치긴 했지만, 사빈이 느끼는 것처럼 이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던 영감 하나가 순식간에 막대한 기운을 뿜어내며, 호랑이 찜 쪄 먹을 눈빛을 쏟아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소운이다.
 “흥! 늙은이가 회광반조라도 보이는 거요? 정말로 죽을 때가 되었나 보군!”
 소운은 노인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숨넘어가기 전에 깜빡 타오르는 회광반조로 치부해버리며 다시 한 번 염장을 질렀다.
 하지만 주절거리는 입과는 달리 몸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잔뜩 웅크려놓았다.
 사빈은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잇값 못하고 쉽사리 흥분하는 어르신의 모습이나, 폼은 금방이라도 튈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죽어라 악만 써대는 소운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네놈이 판 무덤이니 억울하지는 않을 게다!”
 시라소니가 사냥감을 노리는 눈빛으로 소운을 노려보던 노인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흔들었다. 소운 역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노인의 말꼬리를 잡았다.
 “무덤을 파놓았으니 쉬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들어가시구려!”
 끝까지 염장질이다.
 소운은 노인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순간, 망설임 없이 사빈 쪽으로 달려들었다.
 사빈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소운의 엉뚱함에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피했고, 뒷덜미를 잡아채려던 노인의 손아귀는 사빈의 몸을 방패로 삼으며 후다닥 숨어버리는 소운의 행동에 멈칫거려야 했다.
 사빈 역시 조의선인의 맥을 이은 자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엉뚱하다 못해 어이없는 두 사람의 행태 덕분에 평소 때의 기민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사빈은 소운의 뒤를 쫓던 노인의 손끝이 자신의 앞섶을 스쳐 지나며 매서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쳐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매서운 바람을 일으킨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이러다 속병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였다.
 소운은 사빈의 뒤쪽으로 몸을 숨겨 노인의 공격에서 몸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사빈이라는 사람이 노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언제 돌변해서 자신의 손발을 가두어버릴지 알 수 없었다.
 소운이 사빈이 자신과 노인 사이에서 당황하는 틈을 이용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루터 쪽으로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강줄기를 구경하다 말고 이게 무슨 한심한 짓인지 열불이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지기보단 염통이 튀어나올 정도로 뜀박질에만 신경을 쓸 때였다.
 맘 같아선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고도 싶었지만, 부엌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저런 영감탱이와는 두 번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왕에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이기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 내가 힘이 세거나, 또는 이길 만한 준비도 하지 않고서는 몸부터 사리자는 게 소운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튀고 보는 게 상책이다. 자고로 36계란 모든 계략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위해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위대하고도 고매한 전술적 후퇴가 아닌가. 자신이 두고두고 공부해왔던 손자라는 병법가가 했던 말이고, 또 그 손자라는 양반이 그 몇 마디 말로 세상에서 이름 꽤나 떨쳤다니 절대 자신의 행동은 부끄러운 처세가 아니었다.
 저 영감탱이는 두 번을 생각하고 세 번을 생각해도 절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 오늘만 날은 아닐 것이다.
 온갖 잡생각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던 소운은 갑작스레 하늘이 빙글거리며 땅거죽이 일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소운은 ‘어··· 어!’거리며 당황한 목소리를 내더니, 잠시 뒤엔 세상마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운의 황당한 도주 사건에 잔뜩 기운을 끌어올려 바람처럼 쫓아오던 노인은 앞서 뛰어가던 놈이 잠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에 뒹굴어버리자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또 다른 잔꾀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소운을 건드려보던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놈! 소리 울림에 내장이 진탕된 상태로 미친년 지랄 떨 듯 발광을 했으니 기혈이 뒤틀려버렸군. 요놈 볼수록 황당한 놈일세.”
 사빈은 갑작스레 소운이 쓰러져버리고 뒤쫓던 노인이 그 앞에 서서 구시렁거리자, 허공을 격하고 노인이 손을 썼다고 생각했다. 어르신의 손바람이 3장을 격하고도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이니 대단한 경지라 생각이 들었다.
 존경심이 우러나왔지만 아직은 어려 보이는 젊은이에게 과하게 손을 썼다고 생각되자, 세상을 호령하는 하늘의 무예라도 저렇게 함부로 사용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탄식도 함께 나왔다.
 하지만 정작 내용을 듣고 보니 어이없기가 세상을 호령했다. 본신진기도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뛰다 말고 기혈이 막히다니. 상것들이 쉬이 하는 말로, ‘뒈지려고 환장했구나’였다. 보아하니 수련이 어설픈 젊은이는 아닌 듯 한데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다.
 “사빈아, 이놈 좀 들고 따라오너라.”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쪼그라든 모습을 하고 인자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빈에겐 적응이 안 되기는 소운이나 어르신이나 매 한가지였다.
 ‘젠장! 물건 싣다 말고 이게 뭔 짓이람.’
 “네, 어르신.”
 생각과 대답이 따로 노는 사빈이다.
 
 ***
 
 노인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맥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빈은 노인의 모습을 보고 청년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어르신, 이 청년의 상처가 중한 겁니까?”
 노인은 조심스럽게 소운의 상태를 물어오는 사빈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니다.”
 대답의 뜻만 따지자면 문제없다는 말이겠지만, 짧게 끊어지며 확연히 낮아지는 음색은 분명히 문제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용은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만 말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는 노인의 모습에 다시 말을 건네려던 사빈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니 채근할 필요는 없다. 일단은 조의선인의 뒤를 캐고 다니는 박만수라는 인물이나 그와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저··· 어르신.”
 사빈은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건넸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하루하루 맘고생이 심했었다.”
 “조의선인들의··· 네?”
 사빈은 또다시 이어지는 노인의 엉뚱한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선인들의 의지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노인이었지만, 짧은 식견으로 생각해볼지라도 지금 자신에게 큰 인연이 닿았음을 느꼈다. 사빈은 조용히 노인의 시선을 좇으며 귀를 기울였다.
 “사빈아.”
 “네, 어르신”
 “너 역시 조의선인의 맥을 잇고 있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지켜야 할 것이다.”
 “어르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사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운의 맥문을 잡았다.
 “내가 잠시 오해를 했었다만, 이제와 확인해보니 이 아이는 한족이 아니더구나.”
 사빈은 노인의 말에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표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씀은 저리하셔도 당신께서도 모르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뒤섞인 피를 품고 있지도 않다.”
 “······.”
 사빈은 다시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이번에도 선뜻 대답을 찾지 못했다.
 “너는 피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피의 순결성이라 하심은 정통성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이어가는 정통성이란 의지를 잊지 않는, 의미를 상실치 않는 모든 이들의 하나 된 마음입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한족의 피나 왜인의 피는 사실 한 울타리에 섞여진 승냥이와 소들 같습니다. 서로 먹히고 먹는 관계로 인해 피에서 찾는 정통성은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미약하나마 남아 있는 순정의 기운만이 저희들이 언급할 수 있는 정통성입니다.”
 노인은 사빈의 대답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이 놈이 자식 교육은 바르게 시켰구나. 방계의 맥을 잇고 있는 너조차도 알고 있는 그 전승들을 어찌 나라고 모르겠느냐. 하지만 대맥을 지키고, 또 전승시켜야 할 책임을 진 자에겐 그 이상의 것이 이어져 내려온다.”
 사빈은 노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에 다가서는 기분이 들었고, 또 그것은 오감을 긴장시키며 기운을 일으켰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함께 느껴지는구나.”
 노인은 사빈의 마음을 단호하게 표현했다.
 “어르신, 저는 선인들의 뒤를 좇는 몇몇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고, 또 그것을 전해드리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감히 감당 못할 말씀은 심히 두렵게 느껴집니다.”
 “예로부터 스스로의 그릇을 아는 자는 자신을 넘치게도 또는 부족하게도 담지 않는다 했다. 사빈이 너는 너의 아비보다도 좋은 깨달음을 지니고 있구나.”
 “그것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조아리는 사빈을 보고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그릇을 아는 자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을 탐내지도, 또 흩트리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넓은 자를 기다리며 그 무게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들이지.”
 “······.”
 사빈은 계속되는 노인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는 날에는 알몸으로 아낙네들 사이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너의 그릇은 넘치면서도 채우는 그릇이다. 너의 그릇은 고인 물을 스스로 쏟아낼 줄 아는 그릇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고인 물은 썩지 않느냐. 세상이 너를 각박하게 대할지라도 너의 기운이 그것을 유하게 하고 순환시키니 어찌 복이 아니겠느냐. 네가 너의 그릇을 넓히지는 못할지라도 격동하는 기운들을 수시로 주고받을 수 있음이니, 상인의 길을 선택한 너의 결정은 모름지기 바르다 하겠다.”
 사빈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나를 알고 나를 이야기하며, 나를 보는 그를 이야기하고 그를 알아가는 경지를 굳게 꿇은 무릎 사이로 조신하게 깨달아갔다.
 숨은 쉬고 있되 숨 쉬지 않을 수 있으며, 숨을 멈출 수 있되 멈춰서는 안 되는 또 다른 경지에 슬그머니 손끝을 담갔다.
 노인의 말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사빈의 귓바퀴엔 울림이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그릇을 깨닫는 순간 쌓이고 머물렀던 모든 한(恨)들이 뿌연 안개처럼 흩어져 승화로 이어졌다.
 그릇을 깨달은 자는 그 용도와 올바름을 아는 자니, 소중함을 알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이와 느끼면서도 그 소중함의 진실함을 모르는 범인들의 경지를 넘어섰다.
 사빈의 의식이 깊숙이 솟구쳤고 무겁게 떠올랐다. 마음이 열리고 머리가 아는 순간, 세상을 경험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니 생의 모든 인연이 그 진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그 인연을 베풀어준 이름 모를 청년의 잔상이 그의 뇌리에 차분히 머물렀다. 눈앞이 맑아지며 이(異) 차원에 머물렀던 세상의 모습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사빈은 조심스럽게 몸을 세우고 흐트러짐 없이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노인을 향해 정성껏 대례를 올렸다.
 노인은 동네 영감 웃는 모습을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빈이 세상의 벽을 넘나드는 동안 길게 써 내린 몇 장의 편지를 곁에 두고 선인들이 그랬듯이 자신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빈은 그 모습 그대로 속세를 등지는 노인의 모습에 맑고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다시 한 번 대례를 올렸다. 만약 오늘 자신이 오지 않았고 또 대맥의 전승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모습 그대로 건강하게 장수할 분이었다.
 죄를 짓는 느낌이란 내가 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담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크게 펼칠 선인을 기다리며 미래를 준비하는 자리야말로 조의선인들이 대를 이어 맥을 지키는 마지막 의미였던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며, 또 정통성을 논할 만한 저 청년의 정체를 알아가는 것 역시 남겨진 자의 몫일 것이다.
 사빈은 노인이 남긴 유언을 따라 토문강 흐르는 물에 유골을 흩뿌렸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작은 변화였고, 또 큰 바뀜이 기다리고 있던 날에 일어난 일이다.
 
 소운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기침을 하고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몇 안 되는 물건이지만 꼼꼼히 챙겨둘 필요가 있었다.
 며칠간 사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돈이라는 것이 가벼이 볼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밥을 먹는 것에도, 옷을 입는 것에도,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도 모두 이 돈이라는 기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호피가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사빈의 충고대로 적당한 가격에 처분할 생각이다. 산삼 두 뿌리야 무게도 가볍고 가지고 다니기에 부담스런 크기도 아니니 호피를 판 돈과 산삼 두 뿌리면 한동안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빈은 이른 아침부터 나루터에 나와 있었다. 출발 전에 다른 일꾼들에게 소운을 인사도 시켜야 했고, 사신단이 배에 오르기 전에 조심할 것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해놔야 맘이 편할 것이다.
 물론 자신이 부리는 아랫사람들은 상단에서 밥 좀 먹었다는 사람들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문제는 소운이었다. 예의를 보면 귀한 교육을 받은 호족의 자제 같기도 했지만, 뒤틀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저잣거리 주먹패들보다 거칠게 덤벼드는 게 소운이었다.
 “저 왔습니다.”
 한참 물품의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던 사빈은 차분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가득한 소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모를 놈이다. 어찌 이리도 변화가 무쌍하단 말인가?’
 하는 행동마다 그 무게가 달라지는 소운의 모습에 사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단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빈은 자신이 데리고 온 가신들과 일꾼들에게 소운을 인사시켰다.
 “먼 친척이지만, 나와 같은 길을 공부하는 사람일세. 명나라에서 경험을 쌓고자 동행하는 길이니 알아서들 챙겨주게나. 참고로 이 친구는 산에서만 살았던지라 세상 물정이 매우 어둡다네. 김 서방은 황도로 가는 도중에 매매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주고, 박 서방은 명나라 말에 소질이 있으니 그쪽으로 도움을 주게나.”
 사신단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배에 올랐다. 사신단이라는 게 급한 걸음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닌 데다, 명과 조선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의 고급 대신들이라는 감투보다는 한동안 여행길에 오른 호족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운이야 명나라든 조선이든 그 내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종종 앞뒤 가리지 않는 그들의 말투는 허울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느낌이 들었다.
 사신단은 총 44명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가장 직책이 높아 보이는 노인 1명과 그를 호위하는 무사 7명, 그리고 견문을 넓히고자 참여한 인원들이 10명가량이다. 나머지는 이들을 수행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견문을 넓힌다는 것은 명목일 뿐이고,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행사에 한 발 걸쳐야 한다는 중앙의 젊은 호족들이었다. 아직은 젊은 친구들이지만 차후에 한 자리씩 꿰찰 것이니 지금부터 인맥을 살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게 김 서방의 설명이다.
 명은 조선보다도 건국이 빨랐고, 또 강력한 군세를 자랑하는 나라였다. 왕조가 새롭게 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황권이 대륙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세를 보이는 신흥 강국이었다.
 그에 비하면 혁명 정권으로 왕조가 뒤바뀐 조선의 입장에선 그들이 북으로 신경을 쓰고 있을 때 자주 인사를 해두어야만 했다.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가장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신흥 왕족은 지지 세력이 필요했다. 고려의 충신들이자 강력한 권세를 자랑하던 군부의 호족들이 이씨 왕조에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이때, 강대국에서 한 손만 덜어주어도 조선은 안정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소운이 보기엔 덧없이 세월을 보내는 풍류가들처럼 보였지만, 실상 사신단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는 무시 못할 것들이었다.
 “이보게, 소운이라고 했는가?”
 김 서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리던 소운에게 느린 걸음으로 박 서방이 다가왔다.
 “네, 소운이라고 합니다.”
 “작은 어른신의 말을 들으니 명나라 말을 배워야 하는 상황 같은데, 명나라에서 한동안 머무를 생각이라면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세.”
 “네. 가르쳐주시는 대로 부지런히 배우겠습니다.”
 박 서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툼한 책자를 하나 내밀었다.
 소운은 박 서방에게서 책을 받아들었다. 제본 상태나 종이의 색을 보니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단은 이야기책일세.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쉽게 풀어놓은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역사 이야기라는 겁니까?”
 “우리 같은 무역 상단은 내국의 정세에도 민감하지만 외국의 상황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네. 그래서 상단에서는 종종 사람들을 풀어 이야기들을 모으곤 하지. 그것들을 적어놓은 책일세.”
 “네······.”
 소운은 박 서방의 설명이 그럴듯했기에 쉽사리 수긍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의 가치가 상단에서 어느 정도로 귀한 것인지 알았다면 선뜻 받아들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문 밖에 나가면 외세가 된다. 내실을 다지고자 생각한다면 담을 튼튼히 해야겠지만, 어느 담이 부실하고 어느 담이 보수를 해야 하는지는 검토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사빈이 운영하는 무역 상단 정도라면 그런 부분에 더욱 민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종의 정보 상단을 운영하는데, 그곳에서 모아지는 정보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였다. 호족들처럼 내 집 앞마당만 생각하는 배부른 이들은 세도가의 흐름만 따라가기도 버거웠지만, 상단들은 그 이상을 넘나들어야 했다.
 “대충 보니 글 꽤나 읽은 것 같아 주는 것일세. 말로 전해야 할 것도 있겠지만 그 책만은 못할 것이네. 그것을 다 읽고 나면 명 말을 가르치도록 하겠네.”
 박 서방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시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김 서방은 소운의 손에 들린 책자를 바라보며 놀란 눈을 했지만, 소운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상단에서도 일부만 볼 수 있는 대륙 정세를 적은 책자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저녁때 박가(家)가 주고 간 서책을 읽도록 하게나. 많은 도움이 될 것이네.”
 “네. 알겠습니다.”
 김 서방은 그렇게 이야기하고서 사신단에 참가한 사람들의 신분과 조심할 부분들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소운의 입장에선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못 되었지만, 보름 이상을 함께 보내야 할 입장이니 김 서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빈은 선상 귀퉁이에서 소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여행 중에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낼 것 같아서 마음을 놓고 선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소운만 떠올리면 불안한 사빈이다.
 “저기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분이 이번 사신단을 이끄는 분일세. 강천일이라는 분이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유유자작 보낸다고 하시지만, 한때 대장군까지 지내셨던 분이네.”
 “그럼 사신단에서 저분의 신분이 가장 높은 것입니까?”
 “그렇지. 이번 행사는 저분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신다네. 듣기로는 고려 때 이름을 떨치던 무가(武家)라고 하더군. 친구들 몇몇이 강천일 장군 휘하에 있었는데, 연무 때 보여주시던 일성검법은 가히 무적이라고 하더구만.”
 “무적의 일성검법이라······.”
 김 서방은 소운이 일성검법과 무적이라는 말에 반응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무적이라는 말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만큼 기운이 충만하고 호령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네.”
 “네.”
 소운은 김 서방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강천일 장군을 바라보았다. 거친 강바람에 도포를 휘날리며 서 있는 모습이 한때 군세를 이끌고 대륙을 호령하던 모습처럼 굳건해 보였다.
 소운은 처음으로 영감탱이도 멋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녹아들어 그의 인생이 드러나고, 삶의 풍파 속에서 바르고자 노력했던 대장군의 모습이 소운의 머릿속에 하나씩 그려진다.
 자신은 지금 모습대로 한없이 늙어간다면 버르장머리 없는 영감탱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고, 기껏해야 봉래산 영감처럼 치매기나 보이면서 헐떡거릴 걸 생각하니 오한이 일었다.
 “영감··· 난 절대로 그렇게 늙어가진 않을 것이요.”
 “응? 뭐라고 했나?”
 김 서방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소운이 하는 소리를 듣고 뭔 소리냐는 듯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죄송합니다.”
 “그랬는가? 뭐, 미안할 것까지 있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은 나이일 텐데.”
 소운은 너털웃음을 보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김 서방의 모습에 쑥스러움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이야기하는 데 상대방이 헛소리를 지껄였다면 앞뒤 안 가리고 분탕질을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운은 서늘한 강바람을 깊게 들이켰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세상 구경을 시작하면서 자신은 세상의 반을 얻고 시작하는 것이다. 두려울 것도 멈칫거릴 것도 없었다.
 
 
 제3장 무림(武林)이라는 또 다른 세상을 알다
 
 
 소운은 박 서방에게 명나라 말을 배우면서 기인이사들이 존재한다는 무림이라는 세상에 관심을 보였다. 박 서방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편하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선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자, 혀가 꼬이는 급박한 상황에도 소운의 말재주는 나날이 발전했다. 일단 글로 통용되는 부분에는 한자를 이용하니 문제될 것이 없었고, 우리와 읽는 소리나 어순의 차이를 알고 나자 어렵다고 느끼지 않는 소운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 어렵고 중간이 쉬우며 끝이 고되다. 소운의 즐거운 말 배우기는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허, 그게 아니래도.”
 박 서방은 초반에 잘 따라온다 싶었던 소운이 드디어 헷갈리기 시작하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소운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다가 구박 받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소운은 짜증이 일었다.
 “아니, 모양만 다를 뿐 소리가 같은데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그럼 자네는 우리말 중에 말(馬)과 말(言)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딴죽을 걸려던 소운은 명료한 비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게 내가 전체를 보고 이해를 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하지 않았나.”
 “휴- 이렇게 배우다간 끝이 없겠습니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박 서방은 잘 나가다 앞뒤 어문을 받아들이는 데에 자꾸만 실수를 하는 소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에 적응하고 또 익숙해지기 나름이지. 실제로 처음 만났으면서도 뜻이 잘 통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것 같은 벗을 알게 되면 다른 것들은 생각지도 못한 채 서로가 잘 알고 이해한다고 오해하기 나름이지.”
 “그게 지금 이것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혼인을 한번 생각해보세나.”
 “말을 배우다 말고 말의 차이를 말씀하시더니, 벗을 이야기하고, 이젠 인륜지대사까지 말씀하시니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소운은 지쳤다는 듯 허리를 젖히더니 한숨만 내쉰다.
 “혼인이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약속일세. 그리고 그 약속의 정도가 아주 엄중해서 함부로 결정하기도, 또 쉬이 깨뜨리기도 어려운 것이 혼인이지. 그런데 말일세. 그 혼인을 치르는 두 사람은 최소한 십 년, 늦으면 이십 년 이상을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걸세. 그렇게 서로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붙어사는 게 혼인이고 연분이지.”
 “그래서요?”
 소운은 박 서방의 이야기에 시큰둥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함께하며,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라는 관계도 알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네.”
 “······.”
 “생각해보게. 자네나 나나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일세.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사유가 무엇이든 함께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게 말을 배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니까요.”
 “젊은 사람이 성격이 그리 급해서 어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소운의 눈끝이 꿈틀거렸다. 박 서방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는 소운을 보면서도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정리를 한번 해보겠네. 자네는 하나를 알면 둘을 알고 둘을 알면 넷을 아는 신동일세. 하지만 그 신동이라는 것도 모든 것에서 빛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 보통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는 것은 평생을 투자해도 부족한 점이 많다네. 내가 혼사를 이야기했던 것이 그것과 같네. 자네는 십 년 이상 연분을 모르고 지낸 사람이네. 그런데 갑작스레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생전 알지도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마음을 받아달라고 하니,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막상 상대방이 자네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또 이해해줬다고 해보세. 그렇다고 달라질 건 또 뭔가? 어차피 상대는 측은지심에서 이해해주는 것이지, 자네의 십 년 넘는 다른 삶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네. 자네가 그 사모하는 사람과 정분을 나누고 한 이불을 덮었을지라도 돌아서면 남인 것이 부부의 인연이네. 무정한 것이 사랑이요, 매정한 것이 돌아선 님이라. 말을 배우고자 하는 자네의 급한 심정은 이해가 되네만,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이지.”
 소운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는 박 서방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어떻게 남녀의 정분으로 말 배우기를 비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하다.
 “그··· 그래서요?”
 “진정 사랑을 얻고 싶다면, 아니지 말을 배우고 싶다면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고 또 지켜주어야 하네. 자네는 자네의 세상에선 누구보다도 강하고 위대한 사람이지만, 다른 이의 관점에서는 내가 아닌 타인에 불과하지 않는가? 말이란 쓰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고, 세월이 담겨 있고, 또 그들만의 문화가 담겨 있는 것일세. 자네의 영특함은 내 이미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것일 뿐, 결코 정성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지.”
 소운은 박 서방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결론은 급한 성질 죽이지 못하면 결코 말을 못 배울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소운의 눈끝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박 서방, 이 사람은 그냥 그렇게 상단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지간한 달변가도 괴상망측한 비교로 사람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무서운 양반이었군.’
 소운은 기가 죽지 않는 한도 내에서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박 서방은 소운의 기질이 슬그머니 바뀌자 방글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다시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저기··· 그런데 전직 사기꾼 뭐, 그런 거 아니셨습니까?”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는가!”
 박 서방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대뜸 올려친 말이었지만 박 서방이 반응을 보이니 흐트러졌던 기분이 다시 즐거워진다. 여전히 지기 싫어하는 소운이다.
 
 ***
 
 소운은 저녁 때 들었던 박 서방의 이야기에 선뜻 잠이 오질 않았다. 수백 가지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배우는 입장으로선 잘한 행동이 아니었다.
 한동안 뒤척거리던 소운은 밤바람이라도 쏘일 생각으로 선상으로 올라갔다. 밤은 깊었지만 동그랗게 떠오른 달이 갈대밭을 은은하게 흔들어놓는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겨울이 빨라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벌써부터 차가워진 공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조의선인의 맥을 이었다던 노인이 남겨준 편지가 생각났다. 외울 정도로 읽어내렸지만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손이 갔다.
 대뜸 호통이나 치고 힘깨나 쓴다고 나대더니 잠들어 있는 사이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 못마땅했다. 맘에 안 드는 영감탱이들은 다들 떠나는 방식이 그 모양인지 소운의 심정이 복잡해진다.
 
 <눈을 뜨고 나면 나는 없을 것이다. 네놈 말대로 회광반조에 슬쩍 미친 척을 하고 나니 가야 할 날이 지났음에도 버티고 있던 내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구나.
 제대로 된 제자 하나 키우지 못해 가뜩이나 불안한 삶이었는데, 사빈이 놈이 그릇이 되어 맘 편히 숨을 놓는다.
 내 나이 120살을 넘긴 뒤로 몇 해가 흘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구나. 네놈의 몸에서 형님의 흔적을 찾은 것도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분이 세속을 등진 것이 벌써 스무 해를 넘어가니, 네놈이 바로 강씨 집안의 핏덩이렷다.
 내가 젊어서 졌던 빚은 너를 통해 갚고 떠난다. 조선 땅에 유일하게 남은 선문의 후예가 바로 네놈이라니 심히 걱정이로구나.
 네 몸을 살펴보니 형님에게 남겨진 시간 역시 촉박했던 것 같구나. 오래전에 하늘에 오르는 길을 찾아내고도 그 힘을 느끼지 못한 것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아마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에 뛰쳐나올 것을 대비해 형님이 금제를 걸어놓았던 것 같다. 뇌호혈을 막고 있던 탁기를 몰아냈으니, 파천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정성을 다하기를 바란다.
 태곳적부터 선법의 계승자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다 했다. 천지인을 하나로 모르고 진심으로 선법을 마음에 담길 바란다. 대륙에 가면 무림을 둘러보거라.>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무림이라는 것이 무를 닦는 문파쯤 되는 줄 알았는데, 박 서방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세상임을 깨달았다. 처음엔 단지 세상 구경이라며 흘려버렸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인들의 인연은 모두 무림의 법칙에 적용된다는 박 서방의 말에 허투로 흘려버리기엔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가진 재주가 무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가슴을 열었다. 3년 전에 찾고도 오르지 못했던 하늘로의 길이 슬며시 모습을 나타낸다. 조의선인의 맥을 이었다는 영감탱이가 빚을 갚았다는 것이 이것일 것이다. 자신이 익힌 재주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들어본 바는 없었지만, 적어도 봉래산 영감탱이가 조의선인들에게 은혜를 베풀 정도라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봉래산 영감탱이가 떠오르자 또 마음이 심란해진다.
 “젠장! 가르쳐줄 거면 제대로 가르쳐주지, 몸짓만 가르쳐주고 설명은 쏙 빼버릴 게 뭐람.”
 심란해진 마음이 영감탱이를 원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다.
 “잠이 오지 않는가 보구나.”
 소운은 조용히 운치를 즐기던 중에 뒤쪽에서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등지고 있기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당당한 체구와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상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신단을 책임지고 있는 강천일 장군이다.
 “아··· 네.”
 소운은 평소 모습과는 달리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약간 말을 더듬었다. 강천일 장군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언제나 들떠 있던 소운의 기운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강하다!’
 처음에 먼발치에서 바라봤던 느낌과는 또 다른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려왔다. 조의선인의 대맥을 이었다던 모름골 노인이 기운을 열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기운을 감추는 듯 보였지만 기세는 살아 있고, 그 굽어 보는 기세가 사람을 억누르는 것 같으면서 대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기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이것이 대인(大人)의 모습인가?’
 단지 강하다는 것과 너그럽다는 것, 또는 풍채만으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멋스러움이다. 소운은 오늘에서야 남자가 보여야 할, 아니 남자라면 지녀야 할 무엇인가를 찾은 느낌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난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인가, 수없이 떠오르던 질문들에 당당히 마침표 하나가 찍히고 있었다.
 “생각이 많은 젊은이인 것 같군. 밤이 길면 꿈도 길어지는 법. 모름지기 느꼈으면 행하고, 그 행함은 군자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법.”
 강천일은 소운이 보여주는 반응에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이 떠올랐다. 공허한 미래와 손끝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닿을 수 없었던······. 세상을 알아가면서 언제나 새로움에 환호하고, 또 그 새로움에 좌절하면서 세상의 불합리함에 일침을 날리고자 삶을 불태웠던 그날의 모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처음엔 한숨 섞인 모습으로 갈대밭을 바라보고 있기에 호기심으로 다가섰지만, 소운의 주변에 일어나는 기묘한 기의 흔들림은 결코 저 나이 때 보여줄 수 없는 깊은 수련의 흔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뒤이어서 나타난 소운의 떨림.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큰 결심을 내딛을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에 자칫 주제넘은 참견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소운은 강천일 장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떨리던 손끝을 모아 양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만약 평소 때의 강천일 장군이라면 점차적으로 확산되는 소운의 패도적인 기운에 젊은 친구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넘겨버렸겠지만, 오늘은 참견한 값을 치르는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방금도 말하지 않았나. 남자란 느꼈으면 행할 것이며, 그것은 군자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일세. 오늘은 연배를 떠나 남자를 만난 기념으로 자네의 마음을 받아주겠네. 오게나.”
 강천일 장군은 오랜 친구를 만나 술이라도 한잔 걸친 듯 이야기했지만, 소운에겐 그 어떤 충고나 설명보다도 가슴을 쳐대는 한마디였다.
 겨울을 알려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두 사람을 두들겼지만, 후끈거리는 열기 사이에 비명도 없이 사그라졌다. 그러나 겨울을 이끌고 오는 북녘의 동(冬) 마왕은 자신의 아이 하나가 토문강 어느 한 어귀에서 비명에 간 것을 바로 알아챘다. 동(冬) 마왕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눈물은 흘러내림과 동시에 얼어붙었다.
 하나 둘씩 떨어지던 작은 얼음 조각들은 순식간에 소운과 강천일 장군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세상을 뒤덮었다. 올해의 겨울은 더욱 매서울 것이다.
 소운의 주먹이 세상에 내려진 첫 번째 눈송이를 조각내면서 앞으로 쏘아졌다. 강천일 장군 역시 거의 동시에 주먹을 내밀었고, 선상 중앙에서 첫 번째 격돌이 이루어졌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지는 않았지만 힘껏 내지른 두 사람의 어깨는 심하게 뒤틀렸다. 각자의 주먹을 겹겹이 보호하던 기막의 충돌은 살이 부딪치고 뼈가 엉켜들지 않았지만 충분히 치열했고, 매서워진 겨울바람을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강천일 장군의 권장이 자연스러움에 동화되었다면, 소운의 권장은 동토(凍土)를 뚫고 올라오는 봄날의 새순처럼 거칠 것이 없다.
 우정이라도 나누듯이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휘몰아치는 열정으로 인해 또다시 멀어졌다. 첫날밤 새색시를 찾아 헤매는 신랑의 손길처럼 서툴고 어색한 나눔이었지만, 귓바퀴에 속삭이는 끈적거리는 밀어는 소름이 돋도록 날카로웠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쾌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첫경험이란 평생토록 잊지 못하기에 더더욱 신중하고 대범하게 이루어진다. 소운의 첫날밤은 나라와 나라를 사이에 두고, 젊음과 연륜을 넘나들며 대범하게 이루어졌다.
 어느새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이 귀와 귀를 타고 전해지면서 선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처 갖춰 입지 못한 의복 사이로 몸뚱이가 얼어갔지만 소운과 강천일 장군이 나누는 정렬적인 사랑놀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홍조를 일으켰다.
 문풍지에 뚫린 호기심 구멍들은 김 진사 댁 셋째 딸이 신방을 차리던 날보다 더욱 치열했고, 더욱 크기가 넓어졌다. 용호상박이란 이럴 때 쓰여야 감칠맛 날 거라던 김 서방의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강천일 장군의 쉰 번째 주먹이 소운을 쫓아갈 때 동(冬) 마왕도 숨을 죽이고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당연히 몸을 피하리라 생각했던 소운이 두 다리를 무겁게 하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하더니 가슴으로 강 장군의 주먹을 맞이한 것이다.
 요란하다면 요란한 마찰음이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강천일 장군이 주먹으로 몰고 온 바람과 소운이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바람이 서로 부딪쳐서 사방으로 비산했기 때문이다. 쇠붙이들끼리 긁어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임을 잃은 아낙네의 흐느낌 같기도 했다.
 “그 나이에 하늘을 열었는가?”
 강천일 장군의 음성에 잔잔한 떨림이 배어 있다.
 “열리는 문만 보았을 뿐, 아직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소운의 음색 역시 희열에 들뜬 음성이다.
 “절정에 다다라본 것이 언제인지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네.”
 “어린 후배가 감사드립니다.”
 강 장군은 소운의 가슴에 주먹을 얹어놓고 이야기했고, 소운은 허리에 힘을 준 기마 자세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강천일 장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자 소운의 몸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한동안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강천일 장군이 손짓을 하자 급하게 달려 나왔다.
 사빈은 아닌 밤중에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선상으로 올라왔다가 강경하기가 대쪽같아 흑죽 장군으로 불리는 강천일 장군이 소운과 겨루는 모습을 발견하고 염통이 덜컥 내려앉았다. 출발한 지 며칠 동안은 잠잠하다 싶었는데 드디어 사단이 난 것이다.
 그러나 상인 특유의 눈썰미로 장군과 소운의 관계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판단이 서자 강 장군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섰다.
 “장군, 이곳 상인들의 우리머리로 있는 정사빈이라고 하옵니다.”
 “자네가 철민이의 둘째 되는 사빈이구만.”
 사빈은 강 장군이 자신을 바로 알아보자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젊은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단지 내 호기심에 생긴 일이니 문제 삼지 말았으면 하네.”
 사빈은 강천일 장군이 문제를 삼더라도 한 번만 넘어가주시길 부탁하려던 차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장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에게 좋은 차가 있는데 바쁘지 않다면 차나 한잔 나누세.”
 “네, 장군.”
 사빈은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또다시 자신의 가려운 곳을 콕 집어 긁어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사빈은 두말없이 강천일 장군을 선실로 안내했다. 말썽쟁이 소운은 박 서방과 김 서방이 잘 돌봐줄 것이다.
 이내 강천일 장군과 사빈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여졌다.
 “들게.”
 “네, 장군.”
 강 장군은 조용히 차를 음미하며 사빈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을 위해 강 장군과 자리를 하기는 했지만, 사빈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어려서 몰래 훔쳐보던 병영의 강천일 장군을 이렇게 독대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그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뿔 도깨비가 양각된 검붉은 흉갑. 그리고 군세를 호령하던 우레 같은 목소리는 어렸을 적 사빈 또래의 친구들에겐 하나밖에 없는 우상이자 자신만의 영웅이었다.
 머리칼에 서리가 내리고 날카롭던 인상은 사라졌다고 하나 아직도 매서운 눈빛만은 여전한 강 장군이 자신을 지긋이 바라본다 생각하자, 어릴 때 그 시절의 어린 사빈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번 사신단의 책임자가 강천일 장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상단을 이끌겠다고 우기다시피 길을 나섰다. 하지만 동행을 한다 해도 먼발치에서 얼굴이나 뵐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독대라니! 그것도 자신을 위해 차까지 내주셨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넙죽 인사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영웅을 동경하던 소년 사빈이 아닌, 상단의 책임자인 사빈이다.
 우선 소운과의 다툼이(언제나 그렇듯이 소운의 실수 또는 구렁이 혓바닥으로 인한 재앙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감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지 후배에게 내리는 가르침이었는지를 파악해야만 했다. 소운을 대하는 강 장군의 태도가 부드러워 보였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소운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될 요지도 배제할 순 없었다. 명나라에 안전하게 들어설 때까지는 사문의 어르신이 부탁했던 것처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강 장군은 사빈 자신처럼 따르는 자들이 많다. 이번에 호위로 참가한 인물들만 해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신예들이니, 자칫 잘못하면 황도에 이를 때까지 소운은 두고두고 싸움질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청년을 아는가?”
 강 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장군. 사문 어르신의 부탁을 받고 명나라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청년입니다.”
 “사문의 어르신이란 누구를 말하는 건가?”
 강 장군은 소운 같은 청년을 길러낸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며칠 전에 타계하신 무선(武宣) 최연희 어르신입니다.”
 강천일 장군은 무선 최연희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그도 모르는 사이에 찻잔이 흔들렸다.
 “그 어르신이 타계하셨는가?”
 “네, 장군. 미흡하지만 제가 어르신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강천일 장군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사빈은 조의선인의 대맥을 지니신 분의 함자가 무선 최연희라는 것을 안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강 장군의 놀람이 선뜻 와 닿지 않았다. 물론 조의선인의 대맥을 지키신 분이니 윗줄에 어느 정도 인연이 있으시리라 생각했지만, 강 장군의 반응은 파격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어르신의 연세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강천일 장군의 나이가 일흔을 넘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강 장군이 어르신이라고 부를 정도면 최소한 그 이상일 것이다.
 “그 어르신의 후손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
 “네?”
 “그 젊은이가 무선 최연희 선생의 손(孫)이라는 뜻으로 들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사빈은 강 장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소운의 재주가 어느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르신의 핏줄로 생각될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이 부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사실 소운이를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어르신과 소운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또 내상을 입은 소운이를 제가 며칠 돌봐준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로 어르신과 소운이가 함께한 시간은 그 다툼이 있었던 잠깐뿐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내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어르신이 타계하셨기 때문에······.”
 사빈은 잠시 소운에 대해 설명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소운에 대해 자신이 아는 거라곤 그게 전부다. 그리고 자신이 명상에 들어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자신과 소운에게 전해진 편지 정도가 전부였기에 때를 기다리시던 어르신이 귀천하셨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얼마 동안의 시간에 다른 일이 있었다면··· 소운이 깨어나면 확인해봐야 할 것인가······.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소운 그 친구가 쉽사리 이야기해줄지 의문이었다.
 강천일 장군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빠져든 사빈을 보며 오늘 밤은 젊은 친구들에게 사념이 많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소운이 그러더니 사빈 이 친구도 이 모양이다.
 “험험!”
 강 장군은 사빈의 생각이 길어지자 가볍게 기침을 늘어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장군. 요 며칠 정신이 없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잠시 정신을 팔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니?”
 사빈은 설명이 길어질 것을 생각해 미지근해진 차로 잠시 목을 적셨다. 그리고 자신이 무선 최연희을 찾게 된 사연부터 소운이라는 청년을 알게 된 상황, 그리고 어르신이 타계하고 며칠간의 내용까지 자세히 설명을 올렸다.
 강 장군은 사빈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아무 말 없이 찻잔만 노려보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강천일 장군은 사람을 불러 다시 차를 내오라고 했다.
 “일단 자네의 이야기는 잘 들었네. 그런데 정말 어르신께서 한족과 왜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정통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가?”
 사빈은 강 장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설명을 해드렸다.
 “음······.”
 “장군, 그 부분에 대해 특별히 아시는 거라도 있으신지.”
 사빈은 얼떨결에 넘겨받은 대맥의 전통과 맥을 잇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정통성의 정의까지 자신이 가늠할 수 있는 경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했다. 왠지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 소외된 느낌이다.
 “자네 말을 따르자면 소운은 어르신의 핏줄도 아니고, 인연이 오래되어 서로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군.”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르신은 적절한 설명도 없이 소운이를 명나라에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하셨지?”
 “네, 장군.”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
 문제가 생겼다는 강 장군의 말에 사빈이 움찔거렸다. 문제라면 소운이 덕분에 질리도록 겪고 있는 사빈이다.
 “내가 느끼기론 소운은 분명히 선족(仙族)만이 알고 있는 선법을 단련했네.”
 사빈은 소운이 선법을 단련했다는 부분에서 토끼 눈이 되었다. 자신은 이제야 선법의 정체를 알고 입문만 했거늘, 이미 단련했다 함은 하루 이틀 전에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일세. 거기다 하늘을 열었고, 어느 정도 진척이 된 상태였네.”
 사빈은 강 장군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도 먼저 선법에 입문했던 형들이나 선배들도 하늘을 열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 아버님만이 지나가는 말씀처럼 하늘이 열릴 것도 같다고 하셨다. 열린 것도 아니고 열릴 것 같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그런데 소운은 이미 하늘을 열었고, 일정 부분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소운이 이 상태로 명나라로 들어가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때는 소운이나 조의선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파고드는 한족(漢族)들이 파리 떼 꼬여들 듯 몰려들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소운이 명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런데 소운을 명나라로 데려다주라는 부탁을 하신 분이 다른 분도 아닌 무선 최연희 선생님이라면 이건 또 다른 문제가 되네.”
 사빈은 강 장군이 문제가 된다고 했던 부분이 무선 최연희 어르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군··· 그러면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일단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와 소운에게 편지가 따로 전해졌다고 들었네. 어쩌면 그 편지들에 어르신의 뜻이 담겨 있지 않겠나?”
 “장군, 저에게 내려진 글은 열려 있었지만, 소운에게 내려주신 글은 봉인된 글이었습니다. 제가 임의로 소운에게 전해진 내용을 알려달라기엔 뜻이 달리 전해질까 두렵습니다.”
 강천일 장군은 사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을 법도 하네.”
 “네?”
 사빈은 문제라고 했다가 다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강 장군의 말에 이해 못할 표정을 지었다.
 “자네나 나나 어르신의 뜻을 바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지 않겠는가? 자네에게 소운이를 명나라에 데려다주라고 했다면 그 또한 바른 길일 것이고, 소운이 명나라에 가는 것을 어르신이 막지 않았다면 그 또한 바른 길일 것이니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접도록 하세나.”
 “그게 무슨······?”
 “자네가 어르신을 뵐 때 바로 타계하실 것처럼 불안해 보이시던가?”
 “그건 아닙니다. 기운이 강성하시고 얼굴은 대춧빛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그거네. 그런데 갑작스레, 그것도 당신이 원하신 길로 떠나셨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세.”
 “······.”
 “그러니 그분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보게나. 자네나 소운에게 절대 어려움을 주실 분이 아니지 않은가?”
 사빈은 강 장군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머리를 굴려봤자 어찌 된 상황인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흐르는 그대로 두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가져다놓은 차도 차갑게 식어버렸고,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목구멍으로 들이붓는 사빈이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이 알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소운을 통해서든, 아니면 스스로가 깨달아서든지.
 
 강천일 장군과 소운은 한동안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종종 느끼는 것과 바라는 마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고(以心傳心) 했다.
 지금 강천일 장군과 소운의 모습이 그랬다. 강 장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운이라는 청년이 자신의 길을 선택했고, 또 조언을 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엔 소운이 다가올 차례다. 그래서 그는 소운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소운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물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 장군은 소운이 이 자리에서 죽어 자빠져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묵묵히 차만 음미할 뿐이다.
 “장군님의 일성검법이 일가를 이루셨다고 들었습니다.”
 “······.”
 “어제 베풀어주신 은혜, 검무(劍舞)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소운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강 장군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벽에 걸려 있던 장군의 검을 뽑아들었다. 강천일 장군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은 할아버님이십니다. 세상에서 멀어진 상태로 산중 생활만 스무 해를 하면서 검을 벗하고 책을 스승 삼았기에 모자란 부분이 많습니다.”
 다른 이들의 숙소와는 다르게 강 장군의 방은 그래도 공간이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검무를 추기에는 한없이 좁은 곳이 선실이다. 그러나 검무를 즐길 사람도, 또 검무를 보여줄 사람도 그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이미 반보(半步)나 일보(一步)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두 사람에겐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강 장군의 검이 소운의 손길에 이끌렸고, 맑은 검성(劍聲)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소운은 수수한 검집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검이라고 생각했다. 뼈를 가를 듯한 예기도, 검사의 눈에 탐욕을 불러일으킬 명인의 손길도 찾을 수 없는 검이다. 그러나 주인의 기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정돈된 분위기는 어떤 명검보다도 마음을 이끄는 재주를 보여준다.
 소운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검을 인정하자, 검 또한 자신의 주인을 위해 검무를 추고자 하는 소운의 마음에 힘을 실어준다. 이심전심이란 사람만의 관계가 아닌 세상의 만물에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소운은 검의 울림을 통해 느껴지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소운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대기의 흔들림이 강 장군의 허연 수염을 간질였다. 산들산들 봄바람에 동네 처자 바람 들 듯이 강 장군의 수염이 흔들거렸다.
 소운의 시선이 앞을 볼 때면 검이 뒤를 따르고, 뒤로 돌 때면 검이 좌우로 흔들렸다. 끝없이 순환하는 물줄기를 보여주던 소운의 검무는 댕기머리가 물결치듯 팔랑거리자 부드럽던 분위기에 반전(反轉)을 일으켰다. 검날의 기운이 거친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천년거석(千年巨石)처럼 버티고 선 것이다.
 검을 잡고 있던 소운의 손길이 합장하듯 모여졌고, 검사의 손길을 벗어난 강 장군의 철검은 자연의 섭리에 어울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검끝이 선실의 나무 바닥에 박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 강 장군의 표정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거칠게 파닥거렸다. 소운은 자신의 의지에 고개를 끄덕여준 철검의 대답에 싱긋 웃어주었다.
 소운의 합장한 손이 풀리면서 이번엔 새벽녘 보여주었던 권장이 쏟아져 나왔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권장에 맞춰 철검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빛살 같은 빠르기는 강 장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고, 마지막엔 검의 그림자마저 찾을 수 없게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무릎에 탁자가 거칠게 부딪치고 아끼던 찻잔이 부셔졌지만, 그의 시선은 절정에 다다른 소운의 검무에 빠져버렸다.
 검영이 사라지고 검 또한 사라지자 이제는 소운의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강 장군의 노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넘쳤다.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눈물은 감격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이 녹아들었고,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어울리지 않게 눈과 입은 한없이 웃고 있었다. 아이와 같이 해맑은 노안의 미소는 세상에 남겨진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소운의 검무는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더니 찰나에 정적을 유지시켰다. 정중동(訂中動)의 묘리가 그 한 수에 녹아들었고, 어느새 강 장군의 철검은 검집으로 되돌아갔다.
 
 소운의 검무는 끝이 났지만, 강 장군의 눈물은 쉽사리 멈추질 않았다. 소운은 강 장군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강 장군의 철검을 벽에 걸어놓고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강 장군의 눈에는 소운의 모습이 치기 어린 젊은 무도가에서 거대한 산세를 등에 업은 거인으로 겹쳐 보였다. 무선 최연희 선생의 갑작스런 귀천도 이해가 됐고, 소운이 어린 나이에 선법을 계승했다는 것도 의심치 않았다.
 물이 차오르면 넘치는 법이다. 잔뜩 웅크린 조선 땅에서는 희망이 없었음이라.
 강 장군은 더 이상 선족(仙族)의 테두리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태양은 동천(東天)에서 떠오르지만, 때가 되면 중천(中天)에 올라 세상을 밝히는 법.
 소운의 운명은 동(東)에서 시작하고 중(中)에서 타오를 것이다. 훗날 서천(西天) 하늘에서 단(丹)과 선(仙)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날, 선족(仙族)의 역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강 장군은 소운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소운은 강 장군의 갑작스런 행동들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강 장군이 말한 것처럼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잠시 뒤, 강 장군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법사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번 행렬의 길흉을 점치고 천문을 살피기 위해 동참했던 황문조는 자신을 매달다시피 끌고 온 강 장군을 무슨 일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멀미 때문에 울렁거리던 속이 한층 더 꼬이는 느낌이다.
 “황 법사, 이 젊은이의 화복을 살펴주시게.”
 황문조는 강 장군이 가리키는 사람이 어제 새벽녘에 소동을 일으켰던 젊은이임을 알아봤다.
 “장군, 제가 가진 재주가 그러한 것이니 화복을 살펴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을 설명해주시면 도움이 될 듯하니,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차분히 말씀을 하시지요.”
 황문조는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강 장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수건을 건넸다. 강 장군은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엉망이라는 것을 깨달고 급히 얼굴을 정리했다.
 황문조는 강 장군이 의복을 바로 하는 동안에 소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음······.”
 소운의 이목구비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황문조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름이 소운이라고 했는가?”
 “네, 법사 어른.”
 “생시(生時)를 알려주게나.”
 황문조는 그새 지필묵을 준비하고서 소운의 생시를 받아 적었다. 사람의 팔자라는 것이 천지간의 기운을 빌어 움직이는 것이라 정확히는 아닐지라도 복(福)이 되거나 화(禍)가 되는 것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소운의 팔자는 전생의 덕(悳)이 하늘에 닿아 재주를 얻고 뜻을 펼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듯이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는 법이다. 강 장군이 저리 나대는 것을 보니 소운이 어떤 명운을 지니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복을 보는 것보다 화를 피할 수 있도록 괘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부터가 문제다. 관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헷갈리더니, 사주 또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결국엔 좋은 일이라도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도 중첩이 되면 피할 구멍이 없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했다.
 소운의 팔자는 영웅의 기상을 타고났으나, 나라의 기틀이 새롭게 바뀌었고 사람들의 흐름이 정리되는 이때쯤엔 어울리지 않는 팔자이기도 했다. 자고로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다.
 소운의 팔자는 10년 전에 세상에 나왔어야 명운이 상승했을 것이다. 이미 이(李)씨 혈족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지세를 다지고 있으니, 지금 소운의 입장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거나 자칫하면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할 운이었다.
 그러나 이(李)씨 혈족이 강세를 떨치는 곳에서 천리 길을 멀어지고 있으니 최소한 참수될 팔자는 피한 것이다. 서(西)쪽으로 향하면서 길해졌으니 소운의 명운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빛을 볼 것이다.
 황문조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해놓고 다시 한 번 팔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허······! 조선은 그렇다 치고, 명나라 또한 주(周)씨가 자리를 잡았으니 괴이하기 짝이 없구나.”
 강 장군은 황 법사의 말에 불안함을 느끼고 혼자만 떠들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
 “장군, 일단 소운이 조선을 떠난 것은 복에 속합니다.”
 “복에 속한다니 다행이지만, 일단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이오?”
 황문조는 가늘게 기른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운은 이씨 혈족이나 주씨 혈족처럼 나라의 기틀을 잡을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하지만······.”
 “어허, 어차피 해줄 거라면 말 좀 빼지 마시구려.”
 강 장군은 황 법사가 은근히 말을 늘이자 의자를 당겨 앉으며 다음 말을 독촉했다.
 소운은 난데없이 자신의 팔자를 살피더니 횡설수설하는 황 법사나, 애가 타는 얼굴을 하고 황 법사의 입만 쳐다보는 강 장군의 모습에 벙벙한 표정이다.
 “하지만 땅 주인이 이미 있으니 어디에서 기틀을 잡을 것이요. 어디에서 뜻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요.”
 강 장군은 황 법사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법사의 말인즉, 기틀을 닦고 뜻을 펼칠 곳만 있다면 제왕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요.”
 황 법사는 가뜩이나 여기저기 피바람이 불고 있는 이때, 제왕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자 급히 말을 막았다.
 “장군, 그냥 영웅의 운명을 지녔을 뿐이요. 말을 조심해주십시오.”
 강 장군도 대뜸 뱉어놓고 뜨끔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정작 당사자인 소운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다.
 “황 법사의 말은 잘 알았소. 그럼 길한 방향은 서쪽이고, 그 서쪽에서 주인 없는 세상을 만나 뜻을 품으면 그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구려.”
 “붙여서 이야기하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황문조는 얼떨결에 끌려와 제왕의 명운을 지닌 자를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걱정할 것이 없구려.”
 황문조는 강 장군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 그··· 그게 무슨 말이요? 걱정할 것이 없다니. 설마?”
 강천일 장군은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 법사를 보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황 법사,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소이다.”
 “하지만······.”
 “일단 헛소리는 그만 하시고, 오늘 일은 잊어버리시구려. 가뜩이나 바쁘신 분을 이렇게 괴롭히게 되어 죄송하외다.”
 강 장군이 그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한시름 놓았지만, 그렇다고 맘 편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장군,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요? 황 모는 진실을 듣기 전엔 이곳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허~ 이 사람, 겁 많기는. 세상엔 법사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있소. 팔자에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같은 재주만 배우라는 법은 없지 않소?”
 황문조는 강 장군의 말에 이해 못할 표정을 짓다가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렇지. 황 법사도 이제야 생각이 드나 보구만. 난 이 아이를 그쪽으로 보낼 생각이네.”
 황문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급하게 팔자를 살펴보더니 붓을 내려놓고 소운을 바라봤다.
 “내 인심 한번 쓰겠네. 보통 이런 것들은 복채를 받아야 봐주는 거지만, 큰 인물을 만난 기념으로 말해주는 것이니 꼭 기억해두게나.”
 소운은 갑자기 생색을 내며 이야기하는 황 법사의 태도가 맘에 들진 않았지만, 심각한 표정까지 지으며 이야기하자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 법사는 큰 비밀이라도 이야기해줄 것처럼 소운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강 장군도 뭔가 특별한 화복을 가르쳐주는가 해서 소운에게 달라붙었지만, 황 법사의 말 한마디에 선실의 기온이 뚝 떨어져버렸다.
 “팔자에 도화살이 끼었으니 영웅호색의 길을 가게 될 것일세. 하지만 아무리 미인을 데리고 살아도 세월이 지나면 마누라 얼굴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 쯧쯧쯧! 고생길이 훤하네. 삼처 사첩에게 바가지 긁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구만. 여자를 조심하게나.”
 이런 저런 썰렁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황 법사가 강 장군에게 쫓기듯 돌아가자 소운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강 장군을 대하던 의연함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황 법사가 다녀간 동안 자신의 명운에 대한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가자 소운도 사람인지라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뭐든지 물어보게. 자네가 궁금해 하는 것이라면 내 아는 대로 이야기해주겠네.”
 “황 법사님과 말씀하시던 중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이야기할 때 법사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아서······.”
 “‘그것’이란 ‘역성’을 의미하네.”
 강 장군은 조심스런 소운의 질문에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다시 강 장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자네도 신경 쓸 필요 없네.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관심이 있다면 모를까.”
 “아닙니다. 그런 귀찮은 일에 관심을 둘 리도 없지만,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해도 눈곱만큼도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강 장군은 그런 것이었냐는 표정으로 정색하는 소운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됐네.”
 “그런데 장군께서 말씀하신 또 다른 세상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해 이야기해줄 참이라네.”
 세상일이라는 것이 길고 복잡하게 늘어놓자면 끝이 없는 것이고, 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마땅한 말을 찾기가 어려운 법니다. 강 장군은 무인들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기량을 겨루는 장소를 통칭하여 무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왕조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 무림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홀로 외길을 걷고 있어서, 예로부터 관과 무림은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 거슬리지 않는 존재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소운은 짧으면서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강 장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럼 힘센 놈이 두령이 되는 세상이군요.”
 “그, 그렇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구먼.”
 “결국엔 왕 놀이 하면 이기고 들어가는 팔자지만, 이미 언놈들이 자리를 꿰찼으니 딴 동네에서 대장 놀이 하라는 말씀이군요.”
 “······.”
 소운의 두 번째 해석에 선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아닌가요?”
 자신의 이야기에 강 장군이 대답을 않자, 소운은 헛다리를 짚었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하하하하! 자네 말이 맞네. 어차피 세상이라는 게 힘센 놈들의 장기판이니, 제대로 짚었네.”
 소운의 뒤바뀐 말투에 잠시 헷갈리던 강 장군은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감이 묘하긴 하지만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소운의 혼잣말에 강 장군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모름골 영감탱이가 무림인가 하는 곳으로 가라고 해서 뭔가 특이한 장소인 줄 알았더니, 고작 주먹패들 힘자랑하는 세상이라니······. 까짓것 한번 놀아주지.”
 “······.”
 강 장군은 혼잣말을 하는 소운의 눈빛이 갑자기 번쩍거린다고 느꼈다. 보통 때라면 젊은 사람의 눈빛이 살아 있다며 칭찬이라도 했겠지만, 소운의 눈빛은 왠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문득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사빈이 보고 싶어지는 강 장군이다.
 그 시간, 사빈은 재앙 덩어리 소운을 어떻게 떨어뜨려야 잘 떨어뜨렸다고 소문이 날까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던 순간, 두 시진 후면 포구에 도착한다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박 서방 덕분에 행복한 사색들은 우아한 모습을 하고 허공에 떠버렸다. 사빈은 머리를 쥐어짜며 흩어져버린 생각들을 끌어 모아봤지만, 이미 되다 만 밥이었고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박 서방은 사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랭한 기운에 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뛰어야 부처님 손바닥이고 달려봐야 배 안이다.
 시퍼렇게 부어오른 오른쪽 눈두덩이 박 서방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이유도 모르고 얻어맞았으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유일한 동무인 김 서방이 어깨를 다독거려줬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생이 고달프다고 생각했다.
 
 “장군.”
 “말씀하시구려.”
 “장군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강 공자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명을 다할 것입니다.”
 황 법사의 또 다른 말에 강 장군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제왕의 상을 타고난 자가 어찌 명줄이 짧다고 할 수 있소?”
 “용문을 오르는 잉어에게도 물길이 있어야 희망이 보이는 법입니다. 강 공자가 가져야 할 모든 것들은 이미 두 왕조에서 장악을 해버렸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소? 내 그래서 소운이에게 방법을 일러주었소.”
 “혹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림이라 할지라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무림에 있어도 그 땅이 주씨의 세상이니 뜻을 펼칠 수 없다는 뜻이오?”
 “죄송합니다.”
 “음··· 정녕 운명이 그러하다면 누구를 탓할 것이오?”
 강 장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려의 새로운 왕조를 이어갈 인재가 있다 해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인재나 앞에서 끌어줄 스승도 없는 상황이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면, 목숨이라도 구할 방도가 없겠소?”
 황 법사는 강 장군의 간절한 눈빛에 평소의 가벼워 보이던 모습을 털어버리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가진 법물 중에 천신의 기운이 담겨져 있다고 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
 
 
 제4장 비무(比武)하는 점소이
 
 
 은화 객잔의 주인이자 3대째 이곳 고려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곽 대인은 두 달 전쯤 고려에서 태껸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최 명인(名人)의 제자인 박선봉의 부탁으로 소운이라는 청년을 처음 만났다.
 곽 대인은 견문을 넓히고자 중원을 여행 중이라는 소운이 대견스러웠기에 두말하지 않고 일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두 달 전쯤에 그랬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소운이 덕분에 황도의 제일가는 객잔으로 이름을 날리며 돈을 쓸어 담고 있지만, 곽 대인은 할 수만 있다면 두 달 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처음 한두 번은 힘깨나 쓴다는 지역 주먹패들이었지만 지금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이름난 무림인들까지 나타났다. 정파라고 불리는 이들과 사파라고 불리는 이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던 날은 객잔의 일부가 몽땅 부서지기도 했으며, 심할 때는 도검이 난무하고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객잔 곳곳을 붉게 물들이기까지 했다.
 부러진 칼날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을 때는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은 물론, 남들 모르게 찔끔거린 오줌만 해도 한 번에 모아놓으면 주전자 하나는 거뜬히 채울 정도로 곽 대인의 생활은 엉망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더니, 내가 그것을 증명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 같구나.”
 곽 대인은 자리를 꽉 채우고 앉아 있는 무림인들을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오늘도 해질 무렵이 되면 눈앞을 가득 메운 이 인간들은 어김없이 후원으로 몰려갈 것이다. 오늘은 거력패왕 장거대라고 했던가?
 장거대가 처음 객잔에 나타났을 땐 세상에 이렇게 거대한 인간도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정도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은 인간이 바로 장거대였다.
 그도 소운의 소문을 듣고 나타난 무림인 중에 하나였고, 다른 무림인들과 마찬가지로 소운에게 비무를 신청했었다.
 소운은 다른 무림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장거대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주문부터 하시지요.”
 먼저 비무를 신청했던 무림인들과 비무를 구경하고자 은화 객잔을 찾았던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거기까지는 다른 날과 다를 바가 없는 진행 과정이었다. 하지만 장거대는 막무가내로 비무를 외쳐댔다.
 “무인이 무인을 찾아왔는데, 음식이 목에 넘어가겠는가!”
 곽 대인은 무쇠라도 삶아먹은 듯한 장거대의 목소리에 객잔 지붕이 내려앉지는 않을까 걱정에 휩싸였지만, 소운의 대답은 요식업 전문가인 자신이 듣기에도 감동받을 만큼 명쾌했다.
 “무사님, 저는 점소이입니다.”
 장거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일단 자리를 잡고 난 후 허기가 졌던 장거대는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서민적인 음식인 만두 한 접시와 소면을 주문했다. 나름대로 무명(武名)을 얻고 있던 장거대였기에 그에 걸맞는 음식을 시킬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중인들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점소이가 몇몇 이름 있는 무림인들과 비무를 치렀고, 또 그 비무에서 이겼다는 소문만 듣고 은화 객잔을 찾은 장거대는 아쉽게도 소운의 규칙을 몰랐던 것이다.
 장거대는 사람들의 기묘한 시선에 의아함을 느꼈고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그는 만두와 소면을 취소시키거나 또 다른 음식을 추가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무인이었다.
 곽 대인은, 소운은 무공보다도 전문 경영인의 길에 더욱 큰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비무를 받아들이는 몇 가지 규칙 때문이었다.
 일단 그 규칙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비무를 할 수 있었고, 또 최상의 만족감을 얻어갈 수 있었지만, 규칙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모기 눈알만큼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규칙은 오직 하나다. 비무를 원하는 자는 객잔에 오는 첫 번째 목적인 식사를 하거나, 두 번째 목적인 숙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시킨 음식이 구리돈 네 냥짜리 소면이라면 소면의 소박함에 어울리게 소박한 비무로 응해주었고, 은자 한 냥짜리 고급 요리라면 그에 맞는 고급 비무로 응해주었다.
 일단 비무를 원한다면 주문을 해야 한다는 규칙과, 주문한 음식의 값어치에 어울리게 비무를 즐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은화 객잔은 돈 많고 무공 센 무림인들을 위하여 최상급 요리 목록들을 새롭게 추가해야만 했다.
 은화 객잔의 한 달 수입이 은자 2백 냥을 넘지 못했던 두 달 전에 비하면 지금은 하루 매상만으로도 그것을 넘어설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던 곽 대인의 평화로운 삶은 벌어들이는 돈만큼 자연스레 포기를 해야 했다. 역시 세상은 공평했다.
 장거대는 이번에 소운에게 두 번째 비무를 칭했다. 처음엔 정보 부족과 가난한 주머니 덕분에 사기당한 기분까지 느꼈지만, 근 한 달 동안 은화 객잔의 잡군으로 일하면서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사고 싶은 것 안 사면서 은자 두 냥을 모았던 것이다. 구리돈 7냥으로 만두와 소면에 어울리는 비무를 치렀던 한 달 전과는 달리 이번엔 제대로 된 비무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첫 번째 비무는 자신의 두 번째 공격이 끝나는 순간 그대로 완료가 되어버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또 이름난 무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다는 생각에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슬쩍 움직였을 뿐인데, 만두와 소면에 어울리는 비무는 끝이 나버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허무한 비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구경하는 사람조차 몇 되지 않는 초라한 비무의 결정체였다.
 은자 두 냥이면 구리돈 2백 냥이다. 셈이 짧은 자신의 머리로도 이 정도면 2초식의 가난한 비무에 비교하면 대단한 비무가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사람들도 그가 은자 두 냥짜리 요리를 시키자 꽤나 기대하는 눈치다.
 장거대는 소속도 없고 정사지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를 걷는 무림인이었다. 덕분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날도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무공과는 별개의 문제였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이름과 무공을 내세워 적당한 단체에 소속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거대는 열악했던 시절, 자신을 지저분한 똥개 보듯 바라보던 정파의 인물들을 잊을 수가 없었고, 딱히 도리를 넘어설 정도로 악한 일을 한 적도 없었기에 사파 단체에 몸을 맡기도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히 안다. 강자존의 무림 율법은 명분과 힘을 필요로 한다. 아직 이렇다 할 명분은 없지만 다들 인정할 만한 힘은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희생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비무하는 점소이 소운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고만고만했던 소운의 무명은 이제 누구나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어버렸기에, 오늘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의 입지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이다.
 후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객잔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저 많은 관객들이 자신의 멋진 모습을 중원에 널리 퍼뜨려줄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비무하는 점소이다!”
 오늘 비무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소운이 나타나자 환호하는 사람과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일반 계층의 사람들은 소운을 자신만의 영웅이라도 된 듯 바라봤지만, 무림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근 사람들은 무공을 장사하는 데에 활용하는 소운의 행동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소운의 비무 상대들이 엄청난 고수들은 아니었지만(이름난 고수들이 동네 점소이 하나가 벌이는 기행에 동참할 리도 없지만) 그나마 인근에선 이름을 알리던 무림인들이었기에 실력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협객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무림인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전통 깊은 문파 출신들의 생각들이다.
 일반인들에겐 사파나 정파나 힘으로 군림하는 놈들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지만, 나누기 좋아하는 무림인들은 각각의 행동거지에 대한 기준을 칼날 세우듯 잡아놓았다.
 하지만 자부심이 넘치는 대륙의 무림인들과는 달리 소운의 평가는 여전했다. 그가 보기엔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힘이 센 ‘주먹패’일 뿐이다.
 “점소이! 한 달 만이다.”
 거력패왕 장거대는 의연한 자세로 자신 앞에 선 소운을 노려보았다. 막상 마주보고 서자 한 달 전의 창피함이 뭉실뭉실 피어올랐기에 더욱 거칠어진 음성이다.
 “한 달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객잔 허드레꾼으로 일해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중원어에 상당히 익숙해진 소운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장거대를 올려다봤다.
 “이, 이놈! 나에게 그런 말이 나오느냐!”
 장거대는 비무를 관람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을 만한 멋진 대사를 읊으면서 비무하는 점소이를 일격에 때려눕힐 생각이었지만, 아픈 곳을 푹 찔러버리는 잔인한 소운의 말에 혈압이 급격히 상승했다. 장거대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다는 듯 바로 자세를 잡았다.
 소운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행동하는 장거대의 모습을 보며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저런 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비무를 했던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말 한마디에 발끈하고 모욕을 줬다거나 명예를 더럽혔다며 성질부터 냈다. 그나마 양호했던 무림인도 ‘당신의 생각이나 의도엔 전혀 관심이 없소! 단지 난 무림인이니 나를 지킬 것이요’라는 헛소리나 지껄일 뿐이다.
 상대가 자세까지 잡았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고 있다간 또 같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소운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드디어 시작하려는가 보군!”
 소운과 장거대가 서로를 살펴보며 자세를 갖추자 잠시 가라앉았던 소란스러움이 다시 꾸물거리며 살아났다.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 달려 나오더니 급하게 비무를 정지시켰다.
 “잠시 멈추시오. 아직 시작해서는 안 되오!”
 사람들은 갑작스레 분위기를 깨는 소리를 하며 달려 나오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물론 불만과 호기심이 섞인 눈초리다.
 “무슨 일이요?”
 소운은 뒤를 돌아보며 비무 중단을 외친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공갈만이라고 하오.”
 자칭 우내제일학사 공갈만은 가볍게 포권을 하며 싱글거리는 모습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사람들은 공갈만이라는 이름을 듣자 대부분 놀라는 표정이었다. 공갈만은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과 관에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기이한 행적과 심취하는 분야에 대해선 외면당하는 처지였지만, 종종 상황을 판가름하거나 아무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두 집어먹듯 쉽게 해결하는 모습은 쉽사리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충돌이나 관부의 골치 아픈 사건 등에 종종 초청을 받는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소운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소운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인 데다, 그런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그래서요?”
 종일 손님들에게 시달렸던 소운은 비무를 빨리 매듭짓고 쉬고 싶었기에 공갈만이 끼어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공갈만은 내심 자신을 알아보고 높여주기를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썰렁하다 못해 ‘너 뭐야?’라는 식이자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하하하! 소협의 행사를 방해코자 이런 것은 아니니 인상은 펴주시지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자신을 소개하고, 다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또 딴소리다. 소운의 이마에 내천(川) 자가 더욱 깊이 새겨졌다.
 “할 말이 없다면 들어가시오.”
 
 공갈만은 계속되는 소운의 쌀쌀함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소운의 점소이 경력이 짧아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하하! 소협, 본인은 우내제일학사 공갈만이외다.”
 “······.”
 또다시 이어지는 공갈만의 딴소리에 소운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공갈만은 소운이 이제야 자신을 알아봤다고 생각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소협······.”
 “귀찮아.”
 “······!”
 매우 딱딱해진 말투로 한마디 툭 던지더니 등을 돌려버리는 소운이다.
 공갈만은 순간적으로 살의를 느꼈다. 공부를 끝내고 세상에 나와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런 건방진 놈! 나이를 먹어도 내가 더 먹었고, 무림에 출두한 것도 내가 대선배이거늘, 감히!”
 공갈만은 세모난 턱에 쥐꼬리 같은 수염을 부들거리며 분노의 음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소운은 등도 돌리지 않고 공갈만을 더욱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어린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어린놈 하는 짓이 귀여워서 위대하고도 위대한 나의 무림괴사에 한 줄 적어주려고 했더니!”
 “한마디만 더하면 쥐꼬리를 모조리 뽑아버릴 것이니 그리 아시오.”
 자칭 우내제일학사 공갈만은 쥐꼬리를 뽑아버린다는 말에 급히 턱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비겁한 놈을 봤나! 내 약점이 수염인 걸 어떻게 알고!’
 공갈만은 자신의 지식이나 어투, 그리고 몸매와 외모까지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유일하게 평점을 깎아먹는 볼품없는 수염 때문에 언제나 괴로워했다. 그래도 그나마 힘들게 기른 수염인데, 그것을 몽땅 뽑아버린다고 하니 더 이상 소운에게 말을 섞기가 꺼림칙해졌다.
 그리고 그런 고민에 잠시 빠져 있는 사이, 관객들은 소운의 당당함에 갈채를 보내며 환호하는 게 아닌가?
 공갈만은 새파란 점소이 한 놈 때문에 그동안 끌어올린 자신의 명예가 곤두박질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네 이놈!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뭐라고!”
 공갈만은 노기 어린 음성을 터뜨림과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돌리는 소운 때문에 두 발자국 더 물러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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