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만약 당신이 죽음으로 인해서 백억 원을 남길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 등등, 당신이 지목하는 누군가에게 백억 원을 남길 수 있다면 말입니다.
조금 더 제한을 두자면, 당신은 현재 빈털터리이며 미래에 대한 어떤 가능성조차 닫힌 상태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기도 합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가족에게 백억 원을 남겨 주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과거였거나 미래, 아니면 아주 먼 우주 어딘가에 사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상상력을 조금 활용하자면, 그는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입니다
1장. 새벽의 제안
미드랜드 대륙력, 5234년 2월 34일의 새벽 동이 터 오는 어느 아침. 엔서크 왕국의 수도.
길버트는 건물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새벽바람을 피해야만 했다.
어제 저녁 8시 무렵부터 벌어진 도박판에서 길버트는 제법 끗발이 잘 붙었다.
평소라면 성문이 닫히기 전, 9시쯤에 일어났겠지만, 그 짭짤한 손맛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차라리 그때 그만두었다면 상황은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12시를 넘기면서 급격히 페이스를 잃더니, 아차 하는 순간 몽땅 털리고야 말았다.
“씨발.”
그게 어떤 돈인데!
무려 일주일이나 서류를 작성해 준 대가로 겨우 손에 쥔 돈인데······ 그걸 한 번에 털리다니!
“씨발. 술이 웬수지.”
아이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막막하다.
무엇보다 냉랭한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씨, 더럽게 춥네. 무슨 봄 날씨가 이 따위야.”
거기에 연방 터지는 이 하품은 또 어떻고.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아, 이제 무슨 일을 하지? 집에 있는 건 눈치 보여서 싫은데. 뭐, 그건 내일 걱정하지 뭐.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오늘 10실버를 날렸다. 결국 또 빈털터리 신세.
“아, 씨발 진짜! 성문은 언제 여는 거야, 이 새끼들!”
언젠간 저 성문을 몽땅 불사르고 말리라, 길버트는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연거푸 다짐했다.
또각. 또각.
그때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길버트는 괜히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리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취기 어린 눈에 무릎까지 오는 고급 코트 자락과 반짝이는 은제 단추가 들어왔다.
저런 재질의 코트라면 상대가 어떤 신분인지 뻔하다. 길버트는 서둘러 골목길을 비켜서며 슬쩍 시선을 올려 상대를 바라봤다.
역시나 딱딱한 원통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실크햇을 쓴 노신사가 그곳에 있었다.
멋들어진 콧수염은 물론 반들거리는 지팡이까지.
어딜 봐도 귀족이란 티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기분도 더러운데, 아침부터 귀족을 만나다니.
‘뭐, 이 근처 어디에 작은 집 하나 차려 놨는지도.’
그러니 이 시간에 이런 으슥한 골목길을 배회하는 것이겠지.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남에 일인데.
“지나가시죠, 나리.”
길버트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자신을 무시한 채 빨리 지나가 주길 바라면서 길버트는 멀리 성문을 바라봤다.
여전히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욕이 치밀었다가, 곁에 귀족이 있다는 생각에 꿀꺽 삼켰다.
추워, 졸려, 씨발, 돈, 돈, 돈! 그걸 다 날리다니.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번갈아 하다가······ 길버트는 그제야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도 귀족은 멈춰 선 채 길버트를 훑어보고 있었다.
“나리,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괜스레 불안해진 길버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히 노신사는 밝은 웃음을 짓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자네, 돈 한번 벌어 보고 싶지 않나?”
“네에?”
귀가 솔깃하다.
두서없이 튀어나온 말에 의아했지만 ‘돈’이란 얘기에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귀족을 바라봤다.
“돈이라 하심은······?”
“아주 큰돈이지.”
“큰돈이요?”
“그래. 평생 만져 보지도 못했고, 만져 볼 수도 없는 큰 돈. 만 골드일세.”
“허억!”
길버트는 숨이 멎는 듯했다.
만 골드라니, 웬만한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급 주택이라도 수십 채는 사고도 남을 돈이다.
귀족이 거주한다는 저택이나 별장이라도 대여섯은 거뜬하리라.
하지만 길버트는 이내 놀람을 거두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귀족 신사를 바라봤다.
“허허, 귀족 나리께선 농담도 심하십니다. 어찌 그런 큰돈을 제게 주신단 말입니까?”
“농담 아닐세. 자네가 한 가지 일만 해 준다면, 내 기꺼이 만 골드를 주겠네.”
웃음기 어린 얼굴이지만 어쩐지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버트는 속는 셈치고 질문을 던졌다.
“하면 그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노신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자네의 죽음이지.”
“네에?!”
정말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대번에 화가 치솟았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봐요, 귀족 나리. 내가 지금 꼴이 이렇다고 아주 갖고 놀기 좋은 놈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나 빈민 아니오. 한땐 나도 이 수도에서 잘나가는 몸이었다 이 말이외다. 어디서 되도 않는 수작이오?”
“허허, 배짱이 좋군. 그래서 하겠나, 말겠나?”
“이 사람이 진짜!”
치미는 욕을 애써 누르며 길버트는 눈을 부라렸다. 어쨌든 갖춰 입은 복장으로 봐선 그저 그런 귀족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화가 치민다고 귀족을 건드렸다간 큰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시당하고만 있기엔 길버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보쇼. 나도 한땐 기사였고, 훈작에 봉해진 적도 있소. 사람 봐 가면서 입 놀리는 게 좋을 거외다.”
길버트는 괜히 어깨를 비틀어 대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덕분에 새벽 내내 추위에 떨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다.
노신사는 그저 피식 코웃음치더니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드 크기의 작은 종이 쪼가리 한 장을 꺼냈다.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게.”
당연히 길버트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더 으름장을 놓았다.
“댁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내 알 바 아니오만, 사람 목숨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니외다. 죽고 나서 만 골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순간 귀족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약간 취기가 남은 길버트에겐 그렇게 보였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이상한 종이 쪼가리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락하고 싶으면 찢으면 되네.”
‘뭐? 찢어? 아주 그냥 지랄 맞네.’
얼핏 종이를 살폈지만 어떠한 무늬도, 기호도 없었다.
그냥 민무늬의 종이일 뿐.
“아, 진짜, 이게 무슨 마법 스크롤도 아니고, 찢긴 뭘 찢······어?”
참지 못한 길버트가 고갤 들었지만 놀랍게도 눈앞에 있어야 할 귀족은 온데간데없었다.
재빨리 주변을 훑어봤지만,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존재인 것 같은, 그런 황량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카드가······ 길버트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황하길 잠시, 길버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나 술 덜 깬 거야, 뭐야?”
알 수 없다.
비틀대는 와중에 길버트는 손에 쥐어졌던 카드를 무심코 외투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2장. 슬픈 하루
1
성문이 열렸다.
골목을 벗어나니 차가운 새벽바람이 폐부를 찌르듯 다가온다. 옷깃을 더욱 세우고 어깨를 움츠려 보지만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여어-, 길버트! 이제 집에 가나?”
익숙한 목소리, 성문을 지키는 고참병이다. 이어 몇몇이 속닥거리며 낄낄 웃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저놈들이 병사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텐데.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더 화가 치밀었다.
“씨발, 두고 봐라. 반드시 불태워 버린다. 이 따위 성문.”
속삭이듯 다시 한 번 씹어뱉은 길버트는 서둘러 성문을 벗어났다.
황량한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찬바람을 맞은 탓에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그래도 발놀림은 휘적휘적하며 조금씩 비틀거린다.
그렇게 한 시간 조금 못 미쳐 걷자 판자촌이 나타났다. 이리저리 골목과 골목을 헤집으며 걷길 잠시 곧 집에 도착했다.
길버트는 흘깃 동이 터 오는 아침 해를 바라봤다.
대충 8시 즈음, 아침 먹고 있을 시간이겠다. 어젯밤에 왔으면 마주칠 일은 없었을 텐데, 또 한바탕하겠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누울 곳이다. 발 뻗고 누워 쉴 수 있는 곳, 그만큼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빠 왔다.”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순간 멈췄다.
방 두 개에 식당 및 거실로 쓰는 작은 공간 하나뿐인 판잣집은, 싫어도 얼굴을 맞대야만 했다.
차갑고 분노에 찬 두 쌍의 눈동자가 막 들어서는 길버트에게 향했다.
벌써 식사를 마쳤는지 큰딸, 엠마-하트는 접시를 담는 설거지통을 든 채 무심한 시선을 건넸다.
반대로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지 부스스한 머리의 아들, 에이스-로딘은 식사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분노와 원한에 찬 눈으로 쏘아보더니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에이씨, 아침부터 재수 없게!”
명백한-, 원망이 담긴 독설.
그리고 로딘은 벌떡 일어나더니 의자에 걸린 외투를 낚아채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 이 자식, 애비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외쳐 보지만, 이미 로딘은 문을 박차며 밖으로 뛰쳐나간 후였다.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
콰앙!
온 집안을 울리는 굉음에, 길버트는 기가 막힌 듯 ‘허’하며 문을 노려봤다.
그 착하던 아들이 어찌 이렇게 과격해 졌는지. 애써 털어 버리려는 듯 길버트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어쩌면 안절부절 하는 듯, 담담한 시선의 엠마가 보였다.
“식사는요?”
“다오.”
짤막하게 대꾸하며 길버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
왠지 엠마한테는 말을 걸기가 힘들다. 집에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쭈욱-. 언제나 단답형의 짧은 대화가 전부였다.
하긴 로딘과도 항상 말다툼이 벌어질 뿐이니, 결국 길버트는 둘뿐인 가족과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 셈이었다.
엠마는 조용히 빵을 내밀었다.
길버트는 식탁 위를 휘둘러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잼은?”
“없어요.”
“그럼 아무 소스라도 다오.”
“다 떨어졌어요.”
길버트의 인상이 구겨지더니 빵이 담긴 접시를 던지듯 밀어젖혔다.
“빵만 씹어 먹으란 거냐, 지금? 하트,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냔 말이다!”
“하트라고-!”
빽 하는 고성에 길버트는 찔끔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나 담담하던 엠마의 얼굴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분을 참아 내며 평소의 건조한 얼굴로 바뀌었다.
“···부르지 마세요. 나는 포커 판의 카드가 아니니까요.”
“그건 네 아명이야. 어릴 땐 좋아했잖니?”
“내가 아직 어린애로 보여요? 내가 몇 살인지 알기나 하세요?”
“······.”
“로딘의 나이는 아세요?”
길버트는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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