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대한민국. 서울.
아이를 받아 들고 남자는 서럽게 울었다.
“흑흑흑.”
결혼 후 부부는 10년째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를 올린 부부의 정성 때문인지 드디어 아내가 임신하게 되었다.
“오오, 고맙습니다.”
부부는 기뻤다. 하지만 10달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고 죽었다. 충격으로 남편은 일주일 내내 술만 마셨다. 그러다가 보았다. 초췌한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아이를. 아이는 아내를 쏘옥 빼닮아 있었다.
아이의 아빠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엄마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듣게 하지 않기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아이에게 베풀었다.
그 노력과 사랑에 어긋나지 않게 아이는 잘 성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세상에 되돌려 주겠다며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장성한 아이는 30살의 어린 나이에 당당히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약자를 위해서, 또한 정의의 편에서 의정 활동을 해 나갔다. 그런 그를 국민들도 사랑했고, 그는 40대에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기호 5번 무소속 최진철 후보. 개표 50퍼센트 진행 중 631만여 표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압도적으로 앞서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천만 표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소속 출신으로 최초의 대통령이, 그것도 40대의 젊은 대통령이 탄생되기 직전이었다. 시간이 지나 개표가 진행될수록 표차는 더 벌어졌다.
“최진철 후보 당선이 확실시됩니다.”
“와아아아!”
최진철의 선거 캠프는 난리가 났다. 모두들 기뻐하며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모든 방송사와 신문, 잡지사에서 최진철을 인터뷰하기 위해 줄을 섰다.
아직 개표가 90퍼센트밖에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선이 확정된 최진철은 자신을 뽑아 준 국민들 앞에 수줍게 나섰다.
“미흡한 저를 뽑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 바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사람들은 제 어미를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놀렸지요. 그때 제 부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해 네 어미가 희생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너는 네 어미의 그 숭고한 사랑만큼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최진철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는 지금까지 두 사람의 몫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오천만 국민 여러분들의 몫까지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개표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인지라 최진철은 간단하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부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소리에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 진철아.
“아버지!”
최진철은 아버지의 목소리만 듣고도 벌써 목이 멨다.
- 장하다, 아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사랑합니······ 크윽!”
갑자기 최진철은 얼굴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잡았다. 그리고 힘없이 쓰러졌다.
털썩!
- 진철아! 진철아!
“헉! 최 당선자님!”
“최 당선자님이 쓰러지셨다. 어서 119에 연락해.”
최진철은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심장은 멈춰 있었다. 급성심장마비로 최진철은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해 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쪵 쪵 쪵
트렌시아 제국.
“아아아악!”
난산이었다. 산파가 창백한 얼굴로 방을 나왔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젊은 남자 귀족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
“어서 치료사를 불러 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부인께서.”
콰쾅!
그때 뇌성이 일었다. 산파의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 귀족이 큰소리로 외쳤다.
“치료사, 어서 치료사를 불러라.”
잠시 후, 치료사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귀족은 안절부절 못하고 방 앞을 기웃거렸다.
그때였다.
“응애응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남자 귀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울음소리가 우렁찬 것이 사내아이가 분명했다.
덜컹!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남자 귀족은 갓난아이를 든 산파가 나와 아이를 보여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치료사였다.
“뭐, 뭐냐? 어떻게 된 것이냐?”
남자 귀족의 외침에 치료사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 귀족은 치료사를 밀쳐 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붉게 변해 있는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레이첼!”
너무나 사랑해서 평생을 같이하기로 한 아내였다. 침대로 걸어간 남자 귀족은 아내를 일으켜 안았다.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오. 레이첼. 제발 정신 차리시오.”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남자 귀족은 어떻게든 아내의 몸을 덥히려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싸늘히 식었다.
“안 돼!”
남자 귀족의 입에서 절망에 겨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녀 옆에 누워 있던 아이가 그를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나의 레이첼을 죽인 것이. 너였더냐?”
자신의 아이를 보는 남자 귀족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남자 귀족은 비틀거리며 힘없이 방을 나섰다.
그는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한 번 안아 보지도 않았다. 그날 하루 종일 그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사랑하는 아내를 그는 그의 가슴에 묻었다.
Chapter 1
에반스는 트렌시아 제국의 10대 제후 중 하나인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후란 황제가 임명한 지방 영주들의 우두머리였다. 즉, 지방 정부의 실권자로 사실상 영지 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에반스가 태어나던 날, 압실론 후작가는 축제 분위기였다. 후작가를 계승할 후계자가 태어났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에반스를 낳은 그의 모친이 죽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어찌 내게 이런 가혹한 일이······!”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던 압실론 후작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보기 싫다. 치워라.”
압실론 후작은 그날 이후 아들인 에반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에반스는 집사 올란도와 시녀장인 엘렌의 손에 키워졌다.
그 후, 압실론 후작은 명문가인 램버튼 백작가의 영애와 재혼해서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첩들에게서도 무려 10명의 자식을 봤다.
에반스의 새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당연히 장남인 에반스가 눈엣가시 같았다. 에반스만 없다면 그녀가 낳은 아들 중 하나가 제후가 될 테니 말이다.
트렌시아 제국의 신분제도는 철저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했다. 때문에 에반스가 살아 있는 한, 압실론 후작가의 차기 주인은 에반스였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의 부친 압실론 후작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다.
에반스는 사실 심성이 여리고 착하며 성격도 상당히 밝은 아이였다. 그러나 압실론 후작은 어미를 잡아먹은 자식이라며 거들떠보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에반스는 죽은 후작 부인을 속 빼닮아 갔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에반스를 볼 때마다, 압실론 후작은 죽은 아내가 계속 생각났다. 진정으로 죽은 아내를 사랑했기에, 그래서 압실론 후작은 더욱더 차갑게 에반스를 대했다.
에반스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고 고독했다. 부친은 그를 자식으로 보지 않았고 계모는 그를 보는 것 자체도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유년 시절을 고아처럼 보내야 했다.
그때 그 시절 에반스를 지탱하게 해 준 것은 바로 검술이었다.
에반스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검술 스승 나이트 홀렌스와 함께 검술을 배웠던 집사의 아들 라르손뿐이었다.
에반스의 검술 스승인 홀렌스는 원래 전대 제후의 호위 기사였다.
계모가 낳은 이복동생들에게는 최고의 기사들이 검술 스승을 맡은 것에 비해, 70살이 넘어 퇴직한 기사 중에서도 한참은 더 퇴물인 홀렌스로 하여금 가르치게 한 것은 검술을 배우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나이트 홀렌스는 늙었지만 검술 실력만큼은 대단한 기사였다. 비록 몸은 예전만 못해도 그의 검술에 대한 열의와 식견은 최고의 검술 스승이라 자부해도 될 정도였다.
“도련님께서는 검을 대하는 자세며 신체 조건은 가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싶을 정도로 뛰어나십니다.”
홀렌스는 여러 차례 에반스의 천부적인 검술 실력을 압실론 후작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에반스의 만류로 결국 말하지 못했다.
사실 에반스 몰래 말할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홀렌스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것들 봐라?’
모두들 다 늙은 홀렌스가 무슨 검술을 가르치겠냐며 에반스가 제대로 검술을 배우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것이 홀렌스를 자극시켰고, 홀렌스는 모두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나, 홀렌스가 반드시 도련님을 최고의 기사로 만들어 보이겠다.’
그때부터 홀렌스는 자신이 생각해 온 검술 수련 방식대로 검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스승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제자는 그렇게 함께 검술 수련을 해 나갔다.
홀렌스가 에반스에게 처음 전수한 검술은 압실론 후작가의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검술, 스텐다드 소드였다.
“처음 검술을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기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홀히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홀렌스의 물음에 이제 10살인 에반스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스프를 빵에 찍어 먹는 것과 같은 것 같아. 배가 고픈데 스프만 먹으면 빨리 배가 부르지 않잖아. 그러니 성급하게 스프에 빵을 찍어 먹게 되는 거지. 그럼 빨리 배가 부르니까.”
“허허허. 역시 총명하십니다. 스프와 빵이라?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배가 부르게 되면 그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기본이란 의미 자체를 잊어버리지요. 즉, 검술의 기본이 머릿속에서 망각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 번 잊어버린 그 기본은 다시 찾기란 어렵지요. 도련님께서는 바로 그 기본을 평생 잊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익힌 후, 본격적인 검술을 배우게 될 겁니다.”
홀렌스의 말에 에반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홀렌스 경이 시키는 대로 할게.”
그렇게 에반스는 1년 동안 기본 검술인 스텐다드 소드를 배웠다.
그에 반해 에반스의 이복동생들은 한 달 만에 스텐다드 소드를 끝내고 본격적인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에반스에게는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제외하고 계모에게 태어난 3명의 이복 남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9살의 테오르와 8살의 라오치, 그리고 6살의 레이언이었다.
그들은 에반스보다 어렸지만, 에반스가 검술을 배우기 시작하자 후작 부인의 뜻에 따라 억지로 검술을 배웠다. 후작 부인은 자신의 아들들이 에반스에게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었다.
모두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며 영지 기사들의 갖은 아부 속에서 그들은 검술을 배웠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3명의 아이는 검술 수련이 시들해졌다.
특히 10살이 된 테오르와 9살인 라오치에게 검술이란 그들이 배우는 다른 수업과 다를 것 없는 그저 시시한 수업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테오르와 라오치가 결정적으로 검술에 흥미를 잃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에반스도 검술을 배운 지 1년이 조금 넘은 때였다. 그날은 바로 후작 부인의 생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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