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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1

2017.06.05 조회 2,690 추천 18


 허리케인 1 - 켈리온 성
 
 
 프롤로그(Prologue)
 
 
 졸졸졸.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
 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동굴은 천장과 바닥이 온통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러 곳에 형성된 광장을 비롯해 동굴 바닥 곳곳에는 지하수로 인해 연못이 생성되어 있었으며, 피압지하수가 마치 분수대 모양으로 여기저기에서 솟아올라 아름다운 광경까지 자아내었다. 게다가 내부는 대규모의 종유석상이 발달되어 장관을 연출했다.
 딱정벌레가 날아다녔다. 연못 속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경사면이나 천장에도 다리가 긴 거미 등 희귀한 벌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쉐에에엑.
 무엇인가가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갔다.
 바람 소리만 들어보아도 묵직한 것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푸드득.
 동굴 천장에 붙어 있던 것이 갑자기 떨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박쥐였는데 특이하게도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슈가가각.
 황금박쥐는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다가 갑자기 두 동강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리리릭, 처척!
 황금박쥐를 두 동강낸 물체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것을 붙잡았다.
 뒤돌아선 자의 품속으로 들어간 물체.
 자세히 보니 부메랑과 아주 흡사해 보였다.
 “크크크큿··· 이곳에 제법 오랫동안 있었군. 이제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스으, 스스슷.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문스러운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1장 못 말리는 김씨 일가
 
 
 1980년 6월 7일 오후 4시, 서울 강남의 최 산부인과의원.
 “아아악···악.”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으읍··· 아악······.”
 어느 산부인과에서든 다 그렇겠지만 분만실에서 나오는 비명이었다.
 특실 304호에 입원해 있는 이영숙은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몹시 불안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영숙은 키가 173cm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흰 피부에 큰 가슴, 몸매까지 S라인이었다. 외모만 본다면 완벽할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또한 미녀가 많다는 대구에서 출생해서인지 대학 때는 5월의 여왕이었으며,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늘 10명은 되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의 남편인 김재엽을 만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날따라 영숙은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학교 인근의 하숙집으로 향하던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납치하려고 강제로 입을 막고 차에 태우려고 했다.
 그때였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재엽이 이를 발견하고는 의협심을 발휘해서 겨우 그녀를 구출했다.
 멋진 정의의 기사가 나타나 깡패들을 혼내주고 미녀를 구한다는 내용은 영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에서 그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둘은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사실, 까까머리 군인 아저씨인 재엽은 영숙을 납치하려던 2 명의 남자들에게서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라 원 없이 두들겨 맞았다. 영숙을 납치하려던 일이 틀어지자 그 분풀이로 신나게 재엽을 두들긴 것이다.
 운이 따랐던 것인지 마침 그곳을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나타나 재엽과 영숙을 구해주었다.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영숙은 재엽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얼굴이 터진 만두처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싸울 줄도 모르면서 연약한 여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재엽의 의협심에 무척 감동하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더니 친구들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받는 닭살커플이 되었다.
 그렇게 휴가 기간이 끝난 재엽은 6개월 남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귀대하게 되었고, 영숙은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잡지 모델이 되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큰 키에 완벽한 몸매까지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품 모델까지 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제대한 재엽은 영숙과 다시 만나 깊은 관계를 가졌다.
 3달이 지나고 점점 배가 불러왔다.
 영숙은 어쩔 수 없이 재엽을 데려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착실하고 집안도 좋은 재엽을 본 장인과 장모는 그 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아버렸다.
 더 배가 불러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들은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어느덧 해가 바뀌더니 출산 예정일이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재엽은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백두그룹의 기획이사였다.
 백두그룹은 한국의 30대 기업으로 재엽의 아버지가 사장이고, 할아버지가 회장이었다.
 재엽은 어려서부터 유독 물건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새로운 장난감을 사들고 오면 하루 만에 모두 분해해서 고장 내기 일쑤였다. 집안이 풍족해서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자랐기에 이렇게 고장 낸 전자제품들이 한 트럭은 족히 되었다.
 엄한 아버지였지만 할아버지가 계시니 재엽을 큰소리로 야단칠 수도 없었다.
 그의 집안은 유독 손이 귀해 독자로 핏줄이 이어졌다.
 오대독자인 재엽은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지원과 물질적인 지원들을 많이 받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떼만 쓰면 모든 것이 이루어 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달리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중학생이 되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기에 학교생활이 평탄치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런 재엽을 조기 유학의 길에 오르게 했다. 결국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입대했고, 휴가 중에 영숙을 만나 사귀더니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던 영숙의 아랫배가 서서히 아파왔다. 그리고 갑자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고통까지 찾아왔다.
 “아아악.”
 “여보, 많이 아파?”
 “배···배가 너무 아파요.”
 재엽은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가더니 바로 의사와 간호사를 데려 왔다. 특실에 입원했으니 인터폰으로 호출해도 될 것을 아내 때문에 정신이 나가서 뛰어갔다 온 것이다.
 “서···선생님, 아내가 배가 무척 아프다고 합니다.”
 잠시 청진기로 영숙의 상태를 점검하던 의사는 간호사에게 말하였다.
 “간호사, 산모를 분만실로 옮겨요.”
 “예, 선생님.”
 “아내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양수가 터져서 분만실로 옮겨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부모가 되시겠습니다. 허허허.”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재엽은 흥분하며 말하였다.
 “아내는 괜찮겠지요?”
 “그럼요. 저희를 믿으세요. 모든 산모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아기가 태어나죠. 그럼.”
 “예? 아, 예······.”
 재엽은 분만실 앞 의자에 앉아 태어날 아기와 산모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으으으아악!”
 영숙의 비명이 분만실 밖까지 흘러나오자 재엽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벌써 2시간째였다. 곧 나올 것만 같은 아이가 저렇게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으아앙!”
 힘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재엽의 귓가에 맴돌더니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분만실의 문이 열리자 푸른 가운을 입고 입에 마스크를 한 의사가 걸어 나왔다.
 “선생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엽은 어느새 의사 앞에 다가와서는 의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재엽의 얼굴을 바라보던 의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아들? 아들··· 정말입니까?”
 “그럼요.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그거야 그렇죠. 하하.”
 재엽은 너무나 행복해서 연신 히죽거렸다.
 “가···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재엽은 팔불출처럼 십여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귀한 집안의 육대독자가 드디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느새 재엽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백두그룹의 본사인 백두빌딩 54층 사장실.
 사장 김천명은 오늘따라 안절부절못하겠는 데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띠리리링.
 깜짝 놀란 천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터폰이 울린 것이다.
 “휴우··· 진정해야지.”
 천명은 마음을 가다듬고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뭔가?”
 “사장님, 기획이사님으로부터 전화입니다.”
 “그래? 돌려봐.”
 “여보세요?”
 “아···아버지, 손자입니다! 손자!”
 “뭐?! 저···정말이냐?!”
 “예, 그럼요.”
 “으하하하! 학수고대하던 손자가 태어났어! 손자가······.”
 “아버지 놀라지 마십시오. 김씨 집안의 6대독자가 태어난 것만 해도 대단한데 쌍둥이입니다, 쌍둥이!”
 “으하하하! 쌍둥이? 손자가 한꺼번에 둘이란 말이지?”
 “언제 오실 겁니까?”
 “언제라니?! 당장 달려가야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천명은 맛이 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더니 눈빛까지 몽롱해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어깨위로 올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혼자 기분에 취해 춤을 추다가 멈추었다.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천명이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자 꾀꼬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사장님.”
 “미스 김, 차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장실에서 걸어 나온 천명은 재킷을 여미고 엘리베이터에 승차했다.
 
 백두그룹의 본사인 백두빌딩 55층 회장실.
 푹신하고 호화로운 의자에 왜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흰 저고리를 입은 그의 얼굴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인지 인상이 날카로웠다. 그래도 흰 수염이 길게 나 있어서 그나마 중후하게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눈이었는데 눈빛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 누구도 이 노인과 눈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가는 그대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신비한 분위기에 카리스마까지 넘쳐났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대답했다.
 “들어와.”
 정장을 차려입은 30대의 비서가 노인에게 인사를 한 후 말했다.
 “회장님, 사장님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그래.”
 “예, 회장님.”
 “사장님, 들어가십시오.”
 비서가 회장실의 문을 열어주자 천명이 후다닥 들어왔다.
 부하직원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경망스럽게 허겁지겁 들어온 것이다.
 “아···아버님.”
 백두그룹의 회장 김수리는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쯔쯔··· 넌 어째 사장이라는 놈이 경망스럽게··· 확 아들만 아니라면 그냥··· 회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
 주눅이 든 천명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중대한 일인데요?”
 “그게 뭔데 그래?”
 “기뻐하십시오, 육대독자가 태어났는데 쌍둥이라고 합니다.”
 “뭐?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이걸 그냥··· 콱!”
 “뭐, 제대로 말할 기회나 주셨나요?”
 “흠··· 그건 그렇군.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두루마기, 내 두루마기······.”
 그렇게 중후한 노인이 갑자기 경망스럽게 움직이자 천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뒤쪽 옷걸이에 걸려 있잖습니까?”
 “아··· 그렇지?”
 후다닥.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속도로 움직인 수리는 두루마기를 제대로 입지도 않고 회장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천명도 그런 회장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가를 떠올리더니 후다닥 튀어나갔다.
 “가···같이 가요, 아버지!”
 백두그룹의 회장님과 사장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정신없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튀어나가자 비서실 미스 김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수리는 큰소리로 외쳤다.
 “미스 김, 뭐해? 당장 차 대기시켜!”
 “예? 아··· 예, 회장님.”
 평소와는 너무나 다르게 경망스레 움직이는 회장님과 사장님 때문에 잠시 넋을 잃었던 미스 김은 인터폰을 들어 운전자 대기실에 호출하였다.
 
 서울 강남의 최 산부인과의원.
 끼이익.
 급브레이크 소리가 터지면서 최고급 세단인 검은색 벤츠 2대가 한꺼번에 최 산부인과의원의 정문에 정차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비서가 재빨리 문을 열어주자 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었는데, 뭐가 그리 급했던지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노인의 뒤를 이어 정장차림의 중년인이 뛰어갔으며, 그 뒤를 정장을 한 10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뛰어 들어갔다.
 정문 앞의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때 아닌 구경거리에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았다.
 최고급 세단인 벤츠였기 때문이다.
 끼이익.
 갑자기 연속적으로 고급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차하였다. 무려 50여 대나 되었다.
 뒷좌석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한눈에 보기에도 사회에서 한자리를 하고 있을 정도의 고위인사로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병원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기 무섭게 다른 차량들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들의 수행원들은 화환과 꽃바구니, 풍성한 과일 바구니 등을 한두 개씩은 꼭 들고 뒤따라갔다.
 개중에는 국회의원과 장ㆍ차관들의 보습도 보였고, 연예계에서 제법 인기를 누리는 탤런트나 영화배우들도 있었다.
 “무···무슨 일이지?”
 진풍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생아실에는 조금 전에 태어난 신생아들이 많았는데, 유독 한 쌍둥이 신생아만 특별대우를 받는 듯 창가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 밖에는 백두그룹의 회장인 수리와 사장인 천명, 신생아의 아버지가 된 재엽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퉁퉁 부은 눈과 함께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귀하디귀한 육대독자가 쌍둥이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세상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육대독자’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김씨 집안은 손이 유독 귀한 집안이었다.
 한 방에 쌍둥이를 출산하자 영숙은 자신의 본분을 다한 듯,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로부터 축하를 받고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남편인 재엽도 영숙의 곁에서 열심히 산후조리를 돕고 있었다. 지금은 영숙의 어깨를 안마하고 있었는데, 이마에서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너무 기분이 좋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싱글벙글했다.
 “여보, 정말 수고 많았소.”
 “당신도 수고 많았어요.”
 “내, 앞으로 더욱더 당신에게 잘하리다.”
 “고마워요, 여보.”
 “참, 아이들 이름도 지어놨는데······.”
 “언제요?”
 “흐흐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워낙에 급한 성격을 가진 양반들이라 미리 지어놓았소.”
 “빨리 말해 봐요. 궁금해 죽겠어요.”
 “큰아들은 김창, 막내는 김준으로 지어두었소. 어때요?”
 “호호, 김창, 김준! 예쁜 이름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하하.”
 준의 부모들은 특실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었고, 백두그룹의 회장 수리와 사장 천명은 신생아실 앞에서 보초를 서듯 잡인들의 출입을 경계하고 있었다.
 백두그룹의 실세들이 모두 이 병원에 모여 있어서 그룹이 일시 마비가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김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준이 태어난 날에 병원에는 때 아닌 높으신 양반들이 많이 다녀갔다.
 정ㆍ제계, 연예계 할 것 없이 많은 높으신 양반들이 신생아실 주위에 모여 백두그룹의 회장과 사장에게 덕담을 하고 때로는 악수를 하고 돌아갔다.
 간호사들은 혹시라도 신생아들에게 소홀한 것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워낙 높으신 양반들이 병원에 많이 와서인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야했다.
 한바탕 높으신 분들의 행차로 원장인 최돌수는 정신이 다 없을 정도였다. 높으신 분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아예 떼거리로 몰려 왔으니, 그 정신적인 피로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높으신 어른들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최돌수였다.
 서울 강남 최 산부인과의원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다.
 
 10년 후.
 쌍둥이 형제인 김창과 김준은 세월이 지나자 너무 다르게 성장했다.
 형인 창은 건강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주위로 부터 칭찬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지만, 동생인 준은 잦은 병치레를 하느라고 얼굴과 몸이 많이 야위었다. 그래서 각종 보약을 지어 먹여보기도 했지만 큰 차도가 없었다.
 성격도 형인 창이는 활달한 반면, 준은 말도 별로 없고 내성적이라 부모들은 걱정이 많았다.
 준은 혼자 놀기를 좋아해 언제나 방에만 있었다.
 두 달 전부터는 밖으로 나가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영숙이 준을 몰래 따라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해보았다.
 집 근처에는 아담한 야외 놀이터가 있었다.
 그 놀이터의 시설은 매우 낡아서 이젠 이용하는 아이들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한쪽에는 썩은 나뭇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서 더욱 위험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아들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영숙은 처음에는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 준이가 위험한 곳으로 가면 안 되는데······.’
 그러나 다행히 준은 위험한 놀이터의 안쪽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썩은 나무들이 방치된 곳의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 준을 본 영숙은 별다른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저분한 것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쪼그려서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호기심이 생긴 영숙은 살금살금 준의 등 뒤로 다가갔다.
 ‘준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준이 보고 있는 것은 각종 벌레들이 저마다의 일들을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아들 준이, 뭘 보고 있니?”
 “엄마, 이것 봐.”
 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4~5cm 정도의 녹색의 사마귀 한 마리였다.
 사마귀는 양 앞다리의 퇴절에 있는 예리한 가시로 귀뚜라미가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잡고는 연신 귀뚜라미의 몸통을 뜯어먹고 있었다. 제 몸이 뜯겨나가는 중에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귀뚜라미가 불쌍해 보였다.
 영숙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잔인한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준은 그것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그녀는 아들 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성적이며 잦은 잔병치레로 언제나 조용한 아들 준이다. 그런 아이가 몇 시간 동안이나 한곳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열 살짜리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정상적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자폐증상을 조금 가지고 있는 준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들은 초등학생이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서는 책가방을 던져놓고 근처의 공원에 쌓여 있는 썩은 나뭇가지들이 있는 곳에서만 놀았다. 그렇게 1년 동안이나 이곳에 혼자 놀러오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준은 몸에서 심한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평소에도 연약한 아이였지만, 이번에는 목숨이 위험한 지경까지 처하게 되었다.
 최고의 의료진을 동원해서 겨우 큰 고비는 넘겼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으으으··· 엄마, 아파.”
 “준아······.”
 “어···엄마.”
 “흐흑··· 우리 아들, 또 아파?”
 “많이 아파, 엄마.”
 “가여운 것······.”
 아파서 자신을 부르는 아들을 보는 영숙의 가슴은 찢어졌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똑같다. 자식이 아프면 어머니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픈 것이다.
 그날 저녁, 보다 못한 가족들은 회의를 했다.
 준의 미래를 생각해서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을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어린 자식을 어디에서 홀로 요양시킨단 말인가?
 “어디가 좋을까?”
 “공기 좋은 곳이 좋지 않겠어요?”
 “흠··· 그럼 강원도가 어떨까? 그곳에는 친분이 있는 분이 계시니 말이야.”
 “그래요? 그럼 강원도로 해요.”
 준을 강원도로 데려가서 요양시키자는 결론이 확정되었다.
 강원도 영월 동강의 한 야산에는 백두그룹의 회장인 수리와 친구인 한월 스님의 암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월암’이었다.
 수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영월암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족회의에서 말했고, 만장일치로 준을 그곳에 보내기로 했다.
 
 강원도 영월 동강부근.
 덜커덩, 덜컹.
 험한 산길을 덜컹거리며 사륜구동의 외건 5대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건의 뒤로는 흙먼지가 자욱했다.
 2대의 외건에는 백두그룹의 회장 일가가 타고, 나머지 3대의 외건에는 수행원들이 타고 있었다.
 한 시간을 그렇게 덜컹거리며 움직이던 차는 드디어 목적지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더 이상 차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 움직인 외건 5대를 인위적으로 만든 공터에 모두 주차해둔 그들은 도보로 움직였다.
 500m 정도를 걸어가자 한월 스님이 있는 영월암이 나왔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길이 좋지 않았다. 백두그룹의 회장인 수리가 친구와 만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부들을 동원해 길을 넓혔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길이 나게 된 것이다. 비록 영월암의 근처까지 비포장이었지만 말이다.
 영월암의 일주문에는 승복을 입은 지긋한 나이의 스님 한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작은 암자에 무슨 일주문이냐 하겠지만, 그래도 있는 것이 특이해 보였다.
 일주문도 백두그룹의 회장 수리가 박박 우겨서 만들어준 것이다.
 한월도 처음에는 그런 것 없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수리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보기가 좋지 않겠느냐고 우기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일주문 앞에서 서성이는 스님은 백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얼굴도 인자해 보이는 분으로 공경심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하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한월 스님이었다.
 예지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연락이라도 받은 것인지 이렇게 영월암의 일주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그룹 일가도 어느새 영월암의 일주문 앞에까지 다가왔다.
 수리는 친구인 한월이 나와 있자 반가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했다.
 “그간 무탈하셨소, 한월?”
 “허허허허··· 김 시주도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그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리는 뒤에 서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한월 스님이시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스님?”
 “허허허. 천명 시주와 재엽 시주도 오셨군요, 아미타불.”
 천명은 옆에 서 있는 영숙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제 며늘아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잠시 폐를 끼치겠습니다, 스님.”
 “폐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아미타불.”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하고는 모두 영월암의 승방으로 들어갔다.
 영월암은 일 년 내내 손님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채 10명도 안 되었다. 몇 달 만에 등산객들이 비를 피해 잠시 쉬었다갈 뿐인 작은 암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한꺼번에 25명이나 찾아 온 것이다.
 영월암은 강원도의 영월에 있는 곳이라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준은 앞으로 영월암에서 요양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영월암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으며, 날이 밝아오자 가족들은 준을 남겨둔 채 돌아가 버렸다.
 
 
 2장 영월암
 
 
 짹짹짹.
 산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지저귀더니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는 아침이었다.
 영월암의 뒷방에는 준이 피곤한지 잠에 취해 있었고, 한월은 어느새 새벽 공양을 마치고 승방에서 참선 중이었다.
 영월암은 40대 후반의 공양주 보살 1명과 승적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의 젊은 스님 1명이 있었는데, 모두 해봐야 3명뿐이다.
 그런 영월암에 식객이 하나 더 늘었다.
 오전 8시가 되었을 때, 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침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강원도 영월의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힘껏 들이켰다.
 “푸하······.”
 깨끗한 공기는 너무 상쾌했다.
 “안녕?”
 뒤에서 들린 소리에 준은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을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푸르스름한 머리색의 까까머리 젊은 스님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스님.”
 “안녕.”
 “스님은 이곳에서 사시는 거예요?”
 “그래··· 네 이름이 김준 맞지?”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응, 주지스님께 들었어. 많이 아프다며?”
 “예, 이곳에 있으면 안 아플 거래요.”
 “그렇구나. 반갑다. 나는 일현이야.”
 “일현? 법명이 좋네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하하.”
 “일현 스님은 이곳에서 뭐하고 지내세요?”
 “한월 스님께 가르침을 받는단다.”
 “가르침? 그게 어떤 건데요?”
 “글쎄, 그게 뭐라고 해야 네가 이해를 할까?”
 “일현 스님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바보 같아.”
 “하하하, 바보라··· 어쩌면 난 정말 바보일지도······.”
 김준과 일현이 이렇게 첫 만남을 갖고 있을 때 승방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현아, 거기서 뭐하고 있느냐? 떠오라는 물은 어쩌고?”
 “아···아차, 잊고 있었구나. 예, 스님 지금 바로 가지고 갑니다. 가요.”
 일현은 재빠르게 시원한 물 한 사발을 뜨더니 조심스럽게 승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기심에 준도 일현을 따라 승방 안으로 들어갔다.
 승방 안에서는 한월이 정좌를 하고 있었는데, 감았던 두 눈을 뜨자 눈빛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일현은 떠온 물 한 그릇을 한월에게 내밀고는 마주보는 곳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준도 일현 옆의 방석에 앉았다.
 “으음··· 준이는 이리로 오너라.”
 “예, 스님.”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월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오른손을 내밀어 보거라.”
 “예, 스님.”
 준이 오른손을 한월 앞으로 내밀자, 한월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준의 손을 덥석 잡고는 두 눈을 감고 진지하게 진맥을 했다.
 준은 한월이 의사들처럼 자신의 아픈 몸을 진맥한다고 생각했다.
 ‘흐음······.’
 한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준은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아팠지만 머리는 매우 총명했다.
 남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가 이제 겨우 10세로, 초등학교 4학년.
 지금은 몸이 아파서 학교에는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병 치료를 했다. 늘 집에 있으면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3학년 정규과목의 교과서를 구입해 읽곤 했다.
 그런 모습이 가족들에게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형인 창도 또래들보다 뛰어났지만, 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준이 건강했다면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살았을 것이다.
 영숙은 아들 준이 좋아하는 책을 거의 300여 권이나 가지고 와서 승방 한쪽에 놓아두고 떠났다. 영월암에서 얼마나 보내게 될지 몰라 일단 이렇게 비서들을 동원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10세 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하루에 10여 권이나 되는 책을 읽는 준이었다.
 공기 좋은 영월암에서 병이 낫기만을 기대하며 요양을 한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었다. 그래서 자신은 쉽게 나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준이었다.
 한참을 진맥하고 있는 한월의 얼굴은 심각했다.
 준의 몸은 매우 불안정했다.
 기경팔맥이 서서히 막혀 죽음에 이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모든 기경팔맥이 상통해 있다가 태어나면 화식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모든 팔맥들이 상통하지는 않는다.
 한월은 준이 10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총명하다는 것을 들은 뒤라 이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경팔맥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였다.
 “내장과 직접 관계된 십이경맥과 교차되면서 운행하는 경맥을 기경이라 한다. 몸의 좌우에 여덟 개씩 있으며 그 작용과 순환의 부위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이것이 기경팔맥이니라. 준아, 기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기는 ‘단독’이라는 뜻이다. 기경팔맥 상호 간에 밀접한 음양의 관계가 있다. 여덟 개의 기경 가운데 임맥과 독맥은 자기의 독립된 경혈을 갖고 있지만, 다른 여섯 개의 기경은 십이정경 사이에 있으며 자기 부속의 경혈을 가지지 않는다. 십이정경과 임ㆍ독맥을 합쳐 십사정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려워요.”
 “처음 듣는 것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들어두어라.”
 “예, 스님.”
 “그럼 계속하겠다. 기경팔맥은 각각 하나의 통혈을 갖고 있어 그 대표혈은 맥을 조절하고 그곳을 치료해야만 기경팔맥들이 조절이 된다. 기경팔맥의 특징은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 독맥의 ‘독’자는 모두를 감독한다, 독촉한다는 뜻이다. 머리, 목, 척추 등 인체의 정 중앙을 순행하여 전신의 양경을 총감독하므로 양맥의 바다라 부른다.”
 “양맥의 바다라고요?”
 “그렇단다. 그리고 임맥의 ‘임’자는 담당한다, 맡는다는 뜻이다. 머리, 가슴, 배 등 인체의 정중앙을 순행하여 전신의 음경을 맡는다고 하여 음맥의 바다라고 한다.”
 “음경은 음맥의 바다?”
 “다음으로 충맥이 있다. 충맥의 ‘충’자는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가 있고, 순환 경로가 밑에서 위로 올라가기만 한다. 십이경맥의 중요한 길목에 있다하여 경락의 바다라 하지.”
 “이번에도 바다예요?”
 “쉽게 얘기하자면 그렇단다. 일단은 한번 들어본다고 생각하거라.”
 “예, 스님.”
 “다음으로는 대맥이 있는데, 대맥의 ‘대’자는 허리띠와 같이 묶는다는 뜻이며 배꼽을 중심으로 한 바퀴 몸 주위를 돌아가며 음양의 여러 경맥을 다 묶는다. 그리고 양교맥과 음교맥의 ‘교’자는 민첩하다는 뜻과 발뒤축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발뒤축이라고요, 스님?”
 “그렇단다. 이 두 맥은 발뒤축에서 시작하여 한 가닥은 안쪽으로 올라가는데 이것을 음교맥이라 하고, 다른 한 가닥은 바깥쪽으로 올라가는데 이것은 양교맥이라 한다. 이 두 맥은 인체의 운동기능 유지와 눈을 뜨고 감는 것을 주관한다.”
 “예.”
 ‘허헛, 녀석. 일단은 지루해도 나중에는 지금 설명해주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될 날이 있을 게다.’
 잠시 생각을 하던 한월은 준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하였다.
 “조금 지루할 테니 일단 조금 쉬었다가 하자꾸나.”
 “예, 스님.”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방을 나왔다.
 일현과 준은 마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스님의 말씀이 어려웠지?”
 “네, 처음 듣는 말이라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잘 들어볼 필요가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호오? 그런 생각을 가졌다니 대단한데?”
 “그게 대단한 거예요?”
 “그럼. 열 살짜리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기가 쉽겠어?”
 “웅.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현 스님.”
 “하하, 녀석. 이제 좀 쉬었으니 다시 들어가 볼까?”
 “예, 일현 스님.”
 방 안으로 들어가니 한월은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설명을 시작했다.
 “커험··· 잘 쉬었느냐?”
 “예, 스님.”
 “그럼 다시 설명을 시작하겠다. 기경팔맥 중 이번에는 양유맥과 음유맥을 설명해주도록 하겠다. 양유맥과 음유맥의 ‘유’자는 얽어맨다는 뜻이다. 모든 음경을 얽어매는 것을 음유맥이라 하고 모든 양경을 얽어매는 것은 양유맥이라 한다. 참고로 기경팔맥의 설명은 편작이 지은 팔십일난경을 보면 잘 나와 있다.”
 “편작은 의술에 뛰어난 사람 아닌가요?”
 “그렇단다. 편작은 기경팔맥에 대해 설명하기를 ‘맥 중에는 기경팔맥이 있고 십이경에 구속되지 않는다. 기경은 양유와 음유가 있으며, 음교가 있고, 충맥, 독맥, 임맥, 대맥이 있다. 이것은 모두 8개이며 모두 경에 속해 있지 않는다. 그럼으로 기경팔맥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단다.”
 “휴··· 스님, 기경팔맥이라는 것이 인체에 아주 중요한 것이군요.”
 “그렇지. 기경팔맥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그 경맥이 넘치게 되면 모든 경맥을 복구할 수 없게 된다. 명심하거라, 준아.”
 “예. 스님.”
 “어렵고 생소하겠지만 이왕 시작한 것 기경팔맥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마.”
 “예, 스님.”
 “기경팔맥의 유주는 이렇다. 독맥은 최고 아래 부분에서 시작하여 피부를 타고 위로 올라가 풍부에서 뇌로 들어간다. 임맥은 중극 밑에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 모제를 타고 배 안, 눈 근처와 혀로 들어간다. 충맥은 기충에서 시작되어 족양명과 같이 병행해서 배꼽 옆으로 올라가서 가슴까지 가서 흩어진다. 대맥은 계늑에서 시작해 신체를 옆으로 한 바퀴 돈다. 양교맥은 발꿈치에서 시작해 안쪽 복사뼈 위로 올라가 인후에 오른 뒤 충맥과 관통한다. 양유ㆍ음유맥은 신체를 유지시키는 경맥이다. 쌓인 것이 넘쳐서 되돌아올 수 없을 때 그 넘친 경맥들을 조절하는 경이다. 그러므로 양유는 모든 양경이 모인 데서 출발하고 음유는 모든 음이 교차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설명해주시니 조금은 알겠습니다.”
 “허허··· 녀석도. 다음은 기경팔맥의 특징에 대해서 알려주마.”
 “예, 스님. 이젠 조금은 알 것 같으니 설명해주세요.”
 “그러자구나. 기경팔맥의 특징은 이렇다. 정경과 달리 일정한 운행순서가 없으며, 인체를 상하로 직선운행, 경사로 운행, 옆으로 운행하기도 한다.”
 ‘휴우··· 어려워.’
 “이번에는 기경팔맥의 순행에 대하여 설명해주도록 하겠다. 독맥은 윗잇몸인 인중과 콧마루에서 이마와 정수리인 백회로 올라가 뇌 속에 들어간다. 그런 다음 뒤통수인 풍부와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가 꼬리뼈 밑인 장강을 지나 항문을 돌아 회음에서 임맥에 연결된다.”
 “······.”
 “임맥은 생식기와 항문사이에서 시작하여 음모가 난 부분으로 올라가는데, 뱃속으로 관원을 지나 인후에 갔다가 턱으로 올라가 아랫잇몸과 얼굴을 돌아 눈으로 들어간다.”
 “······.”
 “충맥은 아랫배(胞中)에서 시작하며, 대맥은 옆구리 밑에서 시작하여··· 다음은 음교맥으로··· 발 안쪽 복사뼈 아래서 시작하여 복사뼈 안쪽 위를 지나 양백에 이른다. 경락은 기혈이 운행되며 인체의 모든 곳에 에너지와 필요한 영양을 운반하는 통로이다. 경맥은 낙맥보다 굵고 곧게 가며, 보다 깊은 곳에 분포되어 있는 인체의 기본 줄기이다. 낙맥은 경맥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로 가늘고 짧고 옆으로 퍼져나가며 얕은 곳에 분포되어 있다. 낙맥은 열다섯 개의 낙맥이 있으며 낙맥에서 갈라져 나간 것을 손낙맥이라 한다. 알겠느냐?”
 “예, 스님.”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조금이라도 기억은 할 수 있었느냐?”
 “예, 스님 쉽게 설명해주셨기에 대부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뭐? 그걸 기억한다고?”
 “예, 스님.”
 ‘뛰어나다는 일현도 처음에는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을 장장 한 달이나 반복하고서야 겨우 알게 되었는데, 열 살의 어린아이가 한 번 듣고 그 어려운 것들을 다 외운다고 말하다니.’
 “으음··· 그럼 내가 설명해주었던 것을 한번 말해보거라.”
 “예, 스님.”
 준은 전혀 막힘없이 줄줄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에 대해서 말하였다. 이에 일현과 한월은 무척 놀라고 말았다.
 “그···그래, 장하다. 정말 장해.”
 총명하다는 것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준이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을 모두 설명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기재야, 기재.”
 일현도 너무 놀라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준아.”
 “예, 스님.”
 “허허허··· 열 살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구나. 나이가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내 너에게 무엇을 더 감추랴?”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준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거라.”
 “예, 스님.”
 “너는 선천적인 병이라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 생각하고 있겠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저···정말이세요?”
 “그렇단다. 그래서 내 너에게 기공술을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익혀볼 테냐?”
 “그걸 익히면 앞으로 안 아픈가요?”
 “처음에는 힘도 들겠지만 기공술만이 너의 생명을 연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하게 가르쳐주세요.”
 ‘흐음··· 어쩔 수 없음인가?’
 잠시 뜸을 들이던 한월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음··· 그래. 내 너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마. 이 상태로 세월이 흐르면 너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단다.”
 “제···제가 죽는단 말예요?”
 “그래. 내가 가르쳐 주는 기공술을 3성만 익혀도 생명이 연장되고 고통도 많이 약해진다.”
 “한월 스님, 그럼 당장 익힐래요.”
 “힘들 텐데 괜찮겠느냐?”
 “힘들어도 참을 거예요. 그럼 전 안 죽는 거예요?”
 “기공술을 3성까지 익히면 5년은 더 살 수 있고, 5성을 익히면 20살까지는 무난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한월 스님, 그럼 내가 기공술을 5성 이상 익히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허허허,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서······.”
 “한월 스님,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 가르쳐주세요.”
 준은 한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월은 어린 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두 눈을 감고는 잠시 침묵했다.
 한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궁금하다고 하니 알려는 주마. 하지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기공술을 익히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이 있다.”
 “그게 뭔데요?”
 “모든 기공술은 기라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기는 우주만물 작용력의 근원이며 공은 정성을 다해 기를 단련하는 방법이다.”
 “기공술에 그런 뜻이 있었어요?”
 “그렇단다. 기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옛 선인들이나 무인들이 익혔던 전통 기공과 근대 이후의 기공인 현대의 기공이 있다. 우선 현대의 기공에 대해서 설명해주마.”
 “현대의 기공이요?”
 “그렇단다. 현대의 기공은 크게 무술기공, 보건기공, 의료기공 등 세 가지로 나눈다. 195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보건, 의료기공 측면에서 기공학을 강조한 중국은 1979년 이후 두 차례의 기공 대논쟁을 했지. 사람은 인체 내의 경락을 열어주는 기공의 삼조를 통해 인체 내외의 기를 잘 조화시켜 심신 긴장완화, 진기 촉진, 도덕수양, 지력과 특수능력 개발, 질병예방을 통한 무병장수를 꾀한다고 일단락 지었단다.”
 “중국에서요?”
 “그렇단다. 기공은 내용상으로는 성공(정신수양)과 명공(신체단련), 형태상으로는 정공(서거나 앉거나 누워서 하는 수련)과 동공(체조나 무술처럼 걷거나 뛰며 하는 수련), 작용상으로는 경공(무공연마나 차력 등 강한 공법)과 연공(병치료나 체조 등 부드러운 공법)으로 나뉜다.”
 “기공이라 하면 모두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러 공으로 나뉘네요?”
 “그렇다. 중국에서는 기공의 종류가 300여 가지나 되는데, 도가양생, 장수술 등 십여 가지는 일반화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인 태껸, 불가의 선무도, 전승 선도의 하나인 기천문과 심무도, 국선도, 천도선법, 단학선원 등에서 선호흡이나 단학, 특히 단전호흡을 건강도인법으로 세웠다. 이들은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중화의 길을 걸었지. 1980년대에 들어서자 해외 기공수도자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기공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기공의 붐이요?”
 “한때 그런 적이 있었지. 한국에서는 특히 단전호흡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것은 음양오행의 기를 인체의 단전에 충만하게 하여 자연 속의 기와 교감을 꾀하는 수련법이다. 가슴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서양의 흉식호흡과는 다르며, 배꼽 5cm 이하의 단전에 기를 모으는 양생호흡법이지. 기공에 관련된 국내 사회단체로는 한국기공연합회, 한국기공협회, 중국 중심의 내공국제협회, 홍콩 중심의 국제기공협회, 타이완 중심의 태극권, 국제연맹의 한국지부와 조계종 한국참선체조 구도회, 한국 태극권 동호회 등이 있단다.”
 “우와! 스님은 산속에서만 사시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알고 계세요?”
 “허허··· 녀석. 산속에서만 산다고 텔레비전이나 속세의 공부를 전혀 안 하는 줄 아느냐?”
 “아, 그렇지. 텔레비전이 있었지?”
 “허허··· 녀석. 이젠 단전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단전에는 크게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있다.”
 “한월 스님, 단전은 배꼽 아래에 있는 것이 단전 아니에요?”
 “흔히들 알고 있는 배꼽 아래의 단전은 하단전이라 한다. 그것 말고도 중단전과 상단전이 있지.”
 “그럼 단전이 세 개네요?”
 “그렇단다. 단전은 모두 세 개로 이루어져 있지. 단전의 유래는 중국의 도교에서 말하는 신체 부위의 이름인데, 진의 갈홍의 포박자에서는 양 눈썹 사이 세치 들어간 곳을 상단전, 심장 아래에 있는 곳을 중단전, 배꼽 아래로 두 치 네 푼 떨어진 곳을 하단전이라 한다. 이 세 단전에는 옷을 입고, 이름을 갖는 구체적인 신인이 거하며, 이 신을 지키는 일, 즉 수일의 도술을 설명해놓았단다. 북송에서 일어난 자양진인, 장백단의 금단도에서는 세 단전 중 특히 배꼽 밑 단전이 주목되었지.”
 “아, 그렇구나.”
 “상, 중, 하단전 중 하단전이 가장 기본이 되며, 점차적으로 경지가 높아지면 중단전이 열릴 것이고, 다시 상단전이 열릴 것이다.”
 “한월 스님, 바로 상단전을 수련하면 안 되나요?”
 “고 녀석, 참···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달리려고 하는구나. 하단전만 대성하려고 해도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한월 스님, 하단전을 수련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렇단다. 단전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흡하는 방법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그럼 호흡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네?”
 “허허허··· 좋다. 우선 많이 알려진 단전호흡에 대해서 설명해주마. 단전호흡은 단전을 이용한 호흡법으로 장생술의 일종이며, 호흡법은 도교에서 익수연명하기 위한 수련법의 하나로 시대의 도맥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것은 태식법이다.”
 “태식법이요?”
 “그렇단다. 태식은 태아가 모태 안에서 입과 코가 아닌 탯줄을 통하여 원기를 받아들이듯이 호흡하는 것이지. 이때, 태아는 네 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주먹을 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수일하기 위해서란다. 수일에서 ‘일’은 몸 안의 원기 혹은 신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세 개의 단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상단은 이환이라 하여 눈썹 위 세 치에 위치하고, 중단은 강궁금궐이라 하여 명치, 하단은 흔히 말하는 단전으로서 배꼽 밑 두 치 네 푼에 위치하여 있단다.”
 “예. 그럼 다른 방법도 알려주세요.”
 “허허··· 녀석도. 태식법을 알려주었으니 이번에는 수일법이다.”
 “수일법이요?”
 “수일법은 몸 안의 단전에 있는 제신을 보는 내관법과 통하는데, 이 법은 체내에 존재하는 신을 정신 통일하여 내시하는 것이지. 또한 내관은 행기와 더불어 행해지는데, 행기란 기를 삼단전에 보내는 것을 말한다. 호흡기를 통하여 들어온 기는 하단전 바로 위에 있는 관원을 거쳐 하단전 혹은 기해에까지 이르며, 수관에 의하여 뇌에 도달하고 뇌에서 다시 가슴으로 내려와 삼단전을 두루 거치게 되지. 이를 단전호흡이라고 한단다. 호흡 시 주의할 점은 숨을 항상 코로 가늘고 길게 들이쉬고 조용히 입으로 내뿜는다고 하는 점이다.”
 “그럼 스님, 단전수련은 숨쉬기가 무척 중요한 거네요?”
 “그래. 이왕 시작한 설명이니 이번에는 단전 박타공에 대해서도 알려주마.”
 “단전 박타공이요?”
 “단전 박타공은 아침에 눈을 뜨면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머리와 어깨를 일으키면서 두 주먹으로 아랫배에 있는 단전을 두드리며, 한 번에 20~30회 두드린 뒤 조용히 숨을 내쉬면서 누운 자세로 돌아가 긴장을 푸는 것이지. 소화액의 분비기능과 복부의 혈액순환기능이 순조로워지며, 소화기 계통이 안 좋은 사람은 복부를 고르게 두드려주기만 해도 효과가 있단다. 2개월 이상 해주면 웬만한 변비는 없어지지.”
 “스님, 그것은 무술의 기공술이 아니라 건강도인술이잖아요.”
 “녀석 한 번 듣더니 바로 아는구나. 그렇단다. 다음으로 현재 가장 유명한 태극권에 대해서 알려주마.”
 “태극권이요? 나도 들어는 봤는데. 히히.”
 “그래, 그 태극권.”
 “한월 스님, 태극권의 권법이 멋있던데요?”
 “그래, 권법이지만 기공술도 겸하고 있단다. 태극권은 심장질환에 도움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고, 그런 태극권의 효과와 원리, 운동 방법을 일단 설명해주마.”
 “태극권의 효과와 원리요?”
 “그렇단다. 태극권의 효과는 유산소운동인 태극권은 폐 기능을 향상시키고 횡격막을 하강하게 해 호흡도 편안케 하며, 하체를 튼튼히 하고, 신장, 내장 기능을 높이는 것이지. 등뼈 등 자세를 바르게 해주기도 한단다.”
 “태극권에 그런 효과가 있었어요?”
 “그래. 디스크처럼 골격이 틀어져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도 유익하단다. 고혈압, 소화불량에도 좋으며,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더는 등 정신건강에도 이롭지. 신체균형 조절과 유연성을 개선할 수 있으며, 심장 건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긴장을 푼 상태에서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데서 나오는데, 팔다리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되 면면히 끊어지지 않게 하면 내부 장기까지 안마해 신진대사를 활발히 해준단다. 그 때문에 경락소통과 기혈 흐름에 도움이 되지.”
 “아아.”
 “태극권의 유의점으로는 우선 가슴이나 어깨, 팔 등 전신을 이완시켜야 하며, 무게중심은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거지. 아랫배 단전부위에 힘이 들어가게 한 후 머리와 허리는 곧게 세운다. 혀는 입천장에 가볍게 붙이며, 동작은 끊어져선 안 되지. 기초체력을 충분히 기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너무 동작의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호흡도 억지로 동작과 맞추려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너처럼 체력이 약한 사람은 자세를 너무 낮추면 무릎에 무리를 줄 수 있단다.”
 “한월 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시죠?”
 “허허, 녀석. 출가하기 전에 무술에 관심이 많아서 전문서적들을 본 것이야. 이번에는 태극권의 유래에 대해서 알려주마.”
 “태극권의 유래라고요?”
 “그래. 태극권은 중국 송나라 말 사람인 장삼봉 진인이 역경의 음양오행설과 황제내경소문의 동양의학, 노자의 철학사상 등에 기공 및 양생도인법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집대성한 것으로 정, 기, 신의 내면적인 수련을 중시하는 내가권법이다. 이는 의식, 호흡, 동작의 협조를 추구하고 노자의 전기치유, 이유극강, 그리고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가 되는 기를 도로 승화시킨 기화지도이다.”
 “태극권이 도로 승화시킨 기화지도라는 말씀이세요?”
 “그렇다는 구나. 태극권을 창안한 근본 목적은 치병 및 건강 장수에 있지만 그 수련과정에서 자위의 능력이 자연히 생겨나는 체용이 겸비된 기예이며 유연하고 완만한 동작 속에 기를 단전에 모아 온몸에 원활하게 유통시키고 오장육부를 강화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지. 태극권을 보고 사람들은 백학의 춤처럼 우아한 자태,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는 동작, 모남이 없는 구름처럼 자연스런 변화 속의 고요한 마음이란다. 집중된 정신으로 기를 단전에 모으고 전신에 운기하는 태극권은 기혈순환을 촉진시키며 소주천이 자연히 이루어지게 하는 최상의 기공이라 했다.”
 “한월 스님, 장삼봉 진인이 그렇게 뛰어난 분이세요?”
 “장삼봉 진인은 무인들의 전설 같은 분이다.”
 “무인들의 전설이요?”
 “그래.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가장 강한 무인으로는 모두 여섯 분이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 장삼봉 진인이시지. 그분들을 통틀어 무적육인이라 한단다. 각기 시대를 달리하고 태어나셨으며, 각자 무의 하늘이 되신 분들이지.”
 “무의 하늘이요?”
 “그렇단다. 한 번도 이들 여섯 분들끼리 겨루지 못했지만 활약했던 것으로 본다면 고금 무공서열 일위가 마의 하늘인 천마대제, 이위가 정파의 지존 소림의 달마대사, 삼위가 무당의 장삼봉 진인, 사위가 화산파의 검성, 오위가 독의조종 독왕, 육위가 암기의 왕 살탄대제라 한다. 이들 여섯 분들은 각자의 시대를 누렸으며 무패의 신위를 떨친 분들이지.”
 “이야··· 정말 대단한 분들이네요?”
 “그럼 이번에는 상, 중, 하단전의 단계를 설명해주마. 하단전은 기공술을 통해 하루에 네 시간씩 60년 동안 매일같이 열심히 정진하면 이것을 일갑자라 한다. 예전의 무인들은 더욱 뛰어난 기공심법들이 많아서 각자의 심법으로 기를 하단전에 축적하면 십여 년 만에 일갑자의 내공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십 년 만에 일갑자요?”
 “나도 직접 본적은 없지만 그렇다는 구나. 하단전은 오갑자(300년)의 내공이(내공은 기를 정화하고 농축해서 단전에 축적한 것을 말함) 쌓이면 하단전을 대성하였다고 하지. 이전까지는 수많은 무인들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각자의 심법으로 수련을 하였지. 하급과 중급까지는 그런대로 노력하면 되지만, 상급과 대성을 하려면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더구나.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피라미드 모양처럼 단계가 올라 갈수록 그만큼 성취하는 자들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
 “그래서 하단전을 대성한 자는 수많은 무인들 중에서 백 년 동안에 채 열 명이 안 되었다고 하더구나. 대성한 무인들이 무림방파를 세워 일가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하단전을 대성하면 흔히 화경에 들었다고 한단다.”
 “화경이라고요?”
 “그래. 중단전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깨달음이 없고는 오를 수 없는 단계이지. 중단전의 초입에 들면 극명하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전해져 오는 얘기로는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이루어진다고 한단다.”
 “한월 스님, 환골탈태가 뭐예요?”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뼈를 바꾸고 태를 빼앗는다는 뜻이지만, 무인의 경지를 말할 때에는 육신이 다시 재구성되어 무술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신체로 변하는 것을 말한단다.”
 “아··· 사람이 그런 게 가능해요?”
 “믿기 힘들지만 사실인 것 같구나. 어쨌든 중단전에도 하급, 중급, 상급 ,대성의 단계가 있지. 이런 경지는 글로써는 표현이 잘 되지 않는데 그건 깨달음의 경지이기 때문이란다.”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한월 스님.”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중단전의 경지는 인간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경지이자 신인의 경지라 말하지. 정도에서는 현경의 고수, 마를 심봉하는 자들에게는 탈마의 경지라고도 한단다. 훗날 무인들이 추정하기로는 태극권을 창시한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이나 다른 다섯 분들이 중단전의 상급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단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 한월 스님, 정말 그럴까요?”
 “글쎄다. 나도 전해져오는 말만 듣다보니 자세한 건 모르겠구나. 상단전의 마지막 단계인 대성의 단계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도달한 이가 없다 한다. 단지 마의 하늘인 천마대제와 소림사의 달마대사, 이렇게 두 분만이 중단전의 대성단계에 들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중단전의 대성단계를 생사경의 경지(생과 사를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경지)라 하는데, 도교에서는 신선, 무인들에겐 꿈의 경지라 할 수 있지. 무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단전과 중단전처럼 상단전도 이런 단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이름을 지어놓은 것이다. 아무도 그런 경지에 가본 자가 없으니 어떻다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구나. 이것만 보아도 상단전의 경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알겠지?”
 “예, 한월 스님. 정말 무의 끝은 없는 것처럼 멀고 높게만 느껴지네요.”
 준은 풀이 죽은 듯 힘없이 대답했다.
 한월은 그런 준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가?’
 
 
 3장 수련
 
 
 준의 어린 마음속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싹트고 있었다.
 무적육인들도 성취한 경지라면 자신도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재이지 않은가?
 한월은 준을 보며 말했다.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내공을 연마하는 무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단다. 과학에 많이 의존함으로써 무공을 힘들게 연마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연히 각종 무공들이 절전되어 버렸지.”
 “그···그럼?”
 “현재 남아 있는 것들도 어려워 쉽게 익힐 수 없는데다가 힘들게 몇 십 년을 토굴이나 산속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극소수라 할 수 있단다. 열심히 내공을 연마해도 하단전의 하급 수준이고, 그 정도의 내공을 연마한 사람들이라 해도 총 앞에선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총이요?”
 “그래. 기공수련을 해서 하단전의 중급만 되어도 총알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인데······.”
 “사람이 정말 총알을 피할 수 있어요?”
 “물론 가까운 거리거나 등 뒤에서 기습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마주보고 있을 때는 피할 수 있단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을까요?”
 준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녀석, 의심은. 내가 6. 25전쟁 당시에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어디서요?”
 “그곳이 지리산 부근이었지, 아마?”
 그렇게 한월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젊었을 때 우연히 지리산 부근을 지나고 있을 때였지. 삼베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길어 줄로 묶었는데 말총머리였단다. 지금으로 치면 기인이라 볼 수 있지. 그 기인의 5m 앞에는 두 명의 북괴군이 서 있었는데 한 명은 권총을 겨누고 있고, 한 명은 따발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200m 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작게 서로 주고받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 서로 몇 마디를 하더니 갑자기 장교처럼 보이는 북괴군이 권총으로 그 기인을 쏘았지. 기인은 고개만 살짝 옆으로 움직이면서 너무나 쉽게 총알을 피해버렸다.”
 “그···그래서요?”
 “이에 당황한 북괴군의 장교는 권총을 그 기인의 가슴에 겨누고는 연속으로 4발을 발사했지. 이번에도 그 기인은 몸을 조금씩 움직여 너무나 쉽게 총알을 모두 피해버렸어. 그러자 따발총을 겨누고 있던 북괴군도 당황하더니 총알을 발사했지. 20여 발을 그렇게 순식간에 발사했지만 그 기인은 어느새 4, 5m는 족히 될 것 같은 높이로 도약하고는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뿌렸어.”
 “우와··· 그렇게 높이 도약했어요?”
 “그래. 직접 보고서도 믿기 힘들 정도였었지. 어쨌든 두 명의 북괴군은 치명상을 입은 듯 비명을 터트리더니 쓰러졌단다. 그 기인은 쓰러져 있는 두 북괴군을 살피지도 않고 그대로 가던 길을 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꼭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았던 나는 쓰러져 있던 북괴군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살펴보았어. 얼굴은 파리했고, 즉사한 상태였단다.”
 “왜 죽었어요?”
 “쓰러져 있는 북괴군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얼굴에 솔잎이 세 개씩 박혀 있었단다. 모두 치명적인 사혈이었어.”
 “한월 스님, 정말 솔잎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예요?”
 “휴··· 나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을 처음 보았다. 훗날 내가 무예를 익히자 그 기인이 하단전의 중급 정도의 실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럼 그 후에는 그 기인과 마주치지는 않았어요?”
 “그날 이후 그 기인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스님, 그 기인이 하단전의 중급 실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세요?”
 “허허허, 그것이 궁금하더냐? 내가 바로 하단전의 중급이기 때문이지.”
 “예, 스님이요?”
 “믿지 못하는 게로구나. 어디 그럼 한번 보여줄까?”
 “예, 보여주세요. 빨리요. 궁금해요, 스님.”
 준의 독촉에 한월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똑같은 것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럼 재미가 없으니 방 안에 있는 것으로 해볼까?”
 한월은 한쪽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들었다.
 일현은 무언가 알고 있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척이나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준아, 이 얇은 종이를 던져 저 벽에 박히게 할 수 있다면 믿겠느냐?”
 “정말이요? 정말 그렇게 하실 수 있으세요?”
 “허허허, 그럼 한번 보려무나.”
 한월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자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빠르게 날아가 벽에 격중되었다.
 퍼억.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는지 종이가 부르르 떨렸다.
 준의 눈이 커졌다.
 “우와··· 저···정말 종이가 벽에 박혔어!”
 준은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었는지 종이를 만지면서 확인까지 했다.
 열 살 소년은 이렇게 놀라워하면서 기공술에 푹 빠져버렸다.
 “준아, 이것이 몸속에 내력을 쌓는 기공술의 힘이다. 너도 내일부터 배워볼 테냐?”
 “정말요? 그래도 돼요, 한월 스님?”
 “되고말고.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부터 수련 하자구나.”
 “예, 스님,”
 
 짹짹짹.
 영월암의 마당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지에 산새가 내려 앉아 지저귀더니 날아가 버렸다.
 아침이 밝아오자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월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월의 승방에는 일현도 있었다.
 승방 안에서 녹차를 마시고 있던 중 준이 들어온 것이다.
 준은 방석이 깔린 곳에 앉았다.
 한월은 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밤사이 아프지는 않았느냐?”
 “예, 스님. 어젯밤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구나. 오늘부터 정식으로 기공술을 연마하게 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간단한 절차가 있단다.”
 “절차요?”
 “그렇단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알았어요. 그럼 절차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한월 스님.”
 “좋다. 문파를 너에게 정식으로 소개해주마.”
 “이곳에도 무림과 같은 문파가 있어요?”
 “그렇단다. 현재까지는 일현이 유일한 제자이니라.”
 “그럼 두 분만 있는 문파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우리 문파는 이천 년 전부터 전승되어오고 있으니까.”
 “이천 년 전부터요?”
 “그렇단다. 네가 우리 문파에 정식 제자로 입문하고 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내 제자가 되겠느냐?”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월 스님.”
 “그럼 우선 나에게 아홉 번의 절을 하거라.”
 “아홉 번이오? 알겠습니다, 스님.”
 준은 정성을 다해서 절을 시작해 아홉 번을 끝마쳤다.
 한월과 일현은 그런 준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럼 이제 네 사형인 일현에게도 한 번 절하거라.”
 “예, 한월 스님. 아니, 사부님··· 사형, 절 받으세요. 사제인 준이 인사 올립니다.”
 “그래, 준 사제.”
 준은 사형인 일현에게도 한 번 절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한월은 자신들의 내력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문파의 이름은 천왕문이라 한다. 문파가 창건된 지는 이천 년 정도 되었단다. 천왕문을 창건한 분은 현이라는 외자의 이름을 가지고 계셨는데, 문파의 이름이 천왕문이다 보니 제자들이 그분을 말할 때에는 천왕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20명의 제자로 시작되어, 금강산의 깊은 산속에서 오직 수련에만 정진하였다. 제자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 불만이 없었지.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입문하였기 때문이란다.”
 “아··· 대단하신 분들이시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천왕문은 특이하게도 다른 문파들처럼 큰 전각을 짓고 생활하는 게 아니라 산속의 동굴이나 움막을 짓고 오직 무예수련에만 몰두하는 그런 문파였느니라. 천왕 조사님은 혼인을 하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은 수련하던 중 속세로 내려가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오곤 하다가 하나씩 혼인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천왕문 주위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지. 그들이 아이를 낳으면 천왕문에 입문시키곤 하였어. 그러니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입문하는 제자들의 숫자가 늘어나 수백 명이 되기도 하였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참전하여 이름을 떨치거나 죽기도 했단다.”
 “아··· 그런 일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입문하는 제자의 수가 줄어들어 백 명이 넘지 않게 되었으며, 겨우 그 명맥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단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어져 오다보니 전각도 생기고 마을도 형성되었지. 그러다가 약 4백여 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들이 조총을 앞세우면서 쳐들어와 천왕문이 불타면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단다.”
 “아··· 임진왜란······.”
 “그 당시 61대 문주였던 조휘라는 분께서는 팔도를 떠돌다가 마침내 자리를 잡으셨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음··· 혹시 영월암이 아닙니까?”
 “하하하, 똑똑하구나. 그렇단다. 강원도 영월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것이 영월암이었느니라.”
 “그 뒤 천왕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휘 문주님은 피난 중에 팔도를 떠돌다가 거두어들인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영월암을 짓고 생활을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문파의 번영은 기대하기 어려웠단다. 성공(정신수양)과 명공(신체단련)을 병행해서 산속에서 수십 년이나 힘들게 보내야만 하니 누군들 도망가지 않겠느냐? 무술을 익혀 이름을 떨치길 바라고 이곳에 들어왔지만 힘든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들 떠나간 것이다. 천왕문에서 몇 년간 수련을 한 자들은 나름대로 도장을 열기도 해서 그럭저럭 생활을 영위했지만, 무림문파가 어디 우리뿐이더냐? 그래서 우리 천왕문은 점차 무림에서 사라졌고, 지금까지 겨우 두 명의 제자만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단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스승님.”
 “그렇단다. 천왕문의 역사는 이렇게 길었지만 유명무실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천왕문의 83대 문주이고, 보는 바와 같이 일현이와 준이 네가 유일한 제자이니라.”
 “아······.”
 “이젠 천왕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마.”
 준은 기대어린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한월이 꺼낸 것은 겨우 책 세 권이었다.
 ‘뭐야, 겨우 세 권이 다야?’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준을 바라보던 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오랜 세월을 이어온 천왕문에서 겨우 세 권의 책이 전부이니 실망한 게로구나?”
 “예, 스승님. 약간 실망했습니다. 겨우 책 세 권뿐입니까?”
 “이 세 권의 무경이 내려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말해주마. 천왕 조사님때에는 제대로 된 무경도 없었고, 오직 천왕 조사님의 가르침뿐이었단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께서도 연로해지시자 일단 그분의 무예를 동물의 가죽에다가 기록해놓았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가죽이 매우 낡아서 자칫하면 새겨 놓은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에 질 좋은 한지에 다시 옮겨 기록해놓았지.”
 “아아, 2천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었으니 당연히 그런 조치가 있었겠어요?”
 “보통 2백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질이 좋은 한지로 만든 책에다가 옮겨 보관해왔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천왕문에는 제법 많은 무경들이 있었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61대 문주이셨던 조휘라는 분께서는 이 세 권의 책들만 가지고 피난을 하시게 되었단다.”
 “그럼 스승님, 임진왜란 이후에 내려온 것이 이 세 권이 전부이겠군요?”
 “그렇단다. 그러나 이 세 권을 우습게보지 말거라. 이 세 권이 이천 년을 이어온 천왕문의 모든 것이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천왕문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 권의 무경이 전부라 생각하니까 좀 허탈했다.
 “그럼 이 세 권의 무경에 대하여 알려줄 테니 잘 듣거라. 가장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이 천왕대심공이라는 심법이다.”
 “천왕대심공?”
 “천왕대심공은 호흡으로 기를 축적하는 심법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검술이 적힌 천왕검경과 잡술을 총망라한 백팔천왕경이다.”
 ‘천왕검경과 백팔천왕경이라······.’
 천왕삼보라 명명한 세 권의 무경은 전반부는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중반부에 들어가면 점점 그 속도가 떨어진다. 그런 후 마지막 후반부에 들어가면 진정한 상승무경의 깨달음이 없고서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다.
 오십 년을 수련한 한월도 이제 겨우 하단전의 중급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무경인지 알 수 있었다.
 한월은 준에게 세 권의 낡은 무경을 내밀었다.
 책에 관심이 많았던 준은 즉시 무경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천왕대심공과 천왕검경, 백팔천왕경이라 쓰여 있었다.
 
 준은 세 권의 무경 중에서 먼저 천왕대심공이라 쓰여 있는 무경을 손에 들고 펼쳐보았다.
 천왕대심공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를 축적하는 심법이 적힌 책이었지만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천왕대심공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천왕검경을 집어 들었다.
 천왕검경은 전사식, 중사식, 후사식으로 모두 12식으로 되어 있었다.
 전사식은 간단한 초식들이고, 중사식부터는 제법 많은 설명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후사식에는 깨달음을 담아 펼치는 초식이기에 간단하게 쓰여 있었다.
 ‘음··· 검술이라서 그런지 천왕대심공보다는 두껍지 않네?’
 천왕검경도 내려놓고 이번에는 마지막 무경인 백팔천왕경을 집어 들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두꺼웠다.
 백팔천왕경은 무림에서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병기와 암기들을 총망라한 책으로, 그저 특성을 서술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성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인지 두꺼운 무경이었다.
 백팔천왕경 상의 후반부에는 천왕문의 유일한 암기무공이 적혀 있었는데, ‘천왕십이류’ 라고 쓰여 있었다.
 ‘천왕십이류’ 라는 무공은 한월과 일현도 예전에 읽어 보았지만 하도 허황히 쓰여 있어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천왕십이류는 모두 12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비상식적인 문구들로 가득했다.
 어쨌든 천왕십이류는 천왕대심공을 팔성으로 익힌 후 펼치게 되면 하늘도 놀랄 정도의 위력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세 권을 살펴본 준은 조금은 황당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문구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허풍이 심한 무경이라 치부했다.
 “준아, 우선 이 세 권의 무경 중 심법이 적힌 천왕대심공을 알아야 수련에 들어갈 수 있으니 우선 이것을 외우도록해라.”
 “예, 스승님.”
 준은 천왕대심공을 다시 한 편 펼쳐 외우기 시작했다. 워낙 머리가 좋았기에 제대로 읽기 시작하자 바로 암기할 수 있었다.
 천왕삼보를 다 외운 준은 스승인 한월의 명령으로 바로 천왕대심공의 수련에 들어갔다.
 “준아,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집중하면서 설명을 듣거라.”
 “예, 스승님.”
 “우선 모든 심법의 기본은 숨쉬기에 있단다. 보통 사람들은 입으로 숨을 마시고 목에서 다시 내뿜지. 하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들은 배로 숨을 쉰단다. 짧게 숨을 들이 마시고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내뿜는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힘들 것이나 자꾸 반복하면 익숙해질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이렇게 들이마신 숨을 단전으로 보낸다. 무형의 기운을 의지만으로 단전에 보내기는 어렵지. 이런 노력들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단전에 따뜻한 기운이 생긴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기본이 된 것이지. 그럼 정식으로 천왕대심공의 수련에 들어갈 수 있단다.”
 “예, 스승님.”
 “그래. 그럼 우선 기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니 오늘부터 기를 느낄 때까지 반복적으로 호흡을 하도록 해라.”
 “예.”
 준은 두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바르게 하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호흡을 하였다.
 이것을 바라보던 한월과 일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준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자 하는 배려였다.
 그렇게 준은 첫날은 오전에 한 시간을 호흡하고, 다시 오후에 한 시간을 호흡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다시 두 시간을 호흡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일어난 준은 호흡에 열중했다.
 하루, 이틀···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준은 생명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인 천왕대심공에 정신을 집중하며 심법에 익숙해지고자 정진했던 것이다.
 열흘 째 되는 아침, 마침내 천왕대심공의 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것이다.
 “어? 무엇인가 느껴진다. 이것이 기라는 것인가?”
 준은 처음으로 느낀 기에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에 열중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호흡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형인 일현이 문밖에 서 있다가 문을 열려고 하자 스승인 한월이 일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를 막았다.
 일현이 한월의 얼굴을 쳐다보자, 한월이 나직이 말했다.
 “준이가 드디어 기를 느낀 듯하다. 그러니 우린 자리를 피해주자꾸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문밖의 사정을 모르는 준은 호흡을 열중하며 기를 느끼는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다.
 준의 단전에 깨알만 한 크기의 기가 모이더니 계속된 호흡의 영향으로 점차 커졌다.
 “으응? 생각보단 빠르게 커지는데?”
 준의 단전엔 깨알만 한 크기의 기 덩어리가 얼마 후 포도 알만 하게 커지자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으윽··· 갑자기 통제가 안 되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갑자기 준의 배에 큰 고통이 찾아왔다.
 “크···큰일이다. 어쩌지?”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온몸은 고통에 부르르 떨렸다.
 “으윽, 이러다 죽겠어.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이번 기회에 한번 운용해봐야겠어.”
 츠츠츠츠.
 처음에는 잘 통제되지 않던 기가 점차적으로 천왕대심공의 심법에 순응하며 준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의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은 거의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막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죽는 천형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준은 거대해진 기의 덩어리를 천왕대심공으로 운용했다. 이것이 막혀 있는 충맥에 다다르자 좁아진 충맥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몇 번의 진퇴를 거듭했는데도 뚫리지 않자, 거센 기의 덩어리는 정체되더니 저수지에 물이 고이듯 불어났다.
 준의 세맥 곳곳에 잠복되어 있던 영약의 기운들이 몸 밖의 기를 빨아들였고, 기의 덩어리는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으윽! 큰일이야. 어쩌지?”
 고통이 점점 커지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여···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충맥을 뚫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준은 모험을 하기로 했다.
 호흡을 통해 기를 모으는 것에 소극적이던 준은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떠올리며 더욱 기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충맥 앞에 정체되어 있던 기의 덩어리가 거대해졌다.
 기의 덩어리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충맥을 강타했다.
 콰쾅!
 기의 덩어리는 거대한 힘으로 충맥을 순식간에 뚫고 나가더니, 배꼽 옆으로 올라가 가슴까지 가서는 다시 신체의 옆으로 한 바퀴 돌았다.
 콰콰콰콰!
 거센 기의 덩어리는 마침내 대맥과 양교맥도 뚫어버리더니, 발꿈치에서 시작해 안쪽 복사뼈 위로 올라가 충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도 기의 덩어리는 멈추지 않고 독맥으로 향했다. 인중과 콧마루에서 이마와 정수리로 올라가 뇌 속에 들어갔다가 뒤통수와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꼬리뼈 밑인 장강을 지나 항문을 돌아 회음에서 임맥으로 달려갔다.
 쾅!
 기의 덩어리는 앞을 가로막는 것은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여 단번에 뚫어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뱃속으로 관원을 지나 인후에 갔으며, 턱으로 올라가 아랫잇몸과 얼굴을 돌아 눈으로 들어갔다. 이는 양교맥과 위경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뚫어버렸다.
 준은 이렇게 해서 기경팔맥 중에서 육맥을 뚫어버렸다. 이에 자신을 얻은 준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나머지 임맥과 독맥을 뚫어버리려고 도전했다.
 그것을 무림인들은 생사현관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어렵고 위험한 곳이었다.
 “크윽!”
 아무리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운행해도 마지막 남은 임맥과 독맥은 뚫리지 않았다.
 생사현관이라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 없으면 쉽게 뚫을 수 없는 곳이다. 그만큼 무예를 익히는 자들에게는 생사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울컥.
 준은 검붉은 피를 내뿜었다. 무리하게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운행하여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크으음··· 더 이상 운행하는 것은 무리야.”
 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기를 단전으로 유도했다.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점차 기들은 단전으로 모였다. 그리고 점차 안정을 되찾더니 잠잠해졌다.
 너무 극심하게 심력을 소모한 준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내 육체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자 그대로 엎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준은 한나절이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기경팔맥 중에서 육맥과 십이경락이 모두 뚫리자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스승인 한월과 사형인 일현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다.
 “그래. 장하다, 준아.”
 “드···드디어 십이경락과 기경팔맥 중 육맥이 모두 뚫렸구나. 축하한다, 사제.”
 “감사합니다.”
 “임맥과 독맥도 뚫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스승님, 전 지금의 성취한 것들만으로도 기쁩니다. 조금 더 노력하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 장하다.”
 “사제, 조금만 더 노력하자.”
 “예, 사형.”
 다음날부터 준은 이제까지 익혔던 것을 반복 수련했고, 열심히 천왕대심공상의 심법도 수련해나갔다.
 그러나 임맥과 독맥을 뚫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훌쩍 지나갔다.
 
 7년 후 영월암.
 쏴아아아.
 5일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폭우인지 모른다.
 계곡의 물은 급속도록 불어나 누런 흙탕물이 되어 빠르게 흘러갔다.
 영월암에서도 너무 많은 폭우가 내리자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기에 선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월과 일현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허허··· 비가 그칠 줄 모르는군.”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폭우인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그렇구나.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밤부터는 비가 그치겠지요?”
 “지난 5일 동안 계속 비가 내렸으니 그칠 때도 되지 않았겠느냐?”
 “선방에만 계속 있으려니 갑갑합니다, 스승님.”
 “그럴 것이야. 참, 준이는 지금도 계속 심법을 운행하고 있더냐?”
 “예. 자신의 방에서 꼼짝 않고 지금도 계속 심법에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으음··· 이제 준이의 나이도 어느덧 17살이니 말이다. 만약 3년 안으로 임맥과 독맥을 뚫지 못하게 되면 모든 혈도가 다시 막혀 종래에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스승님, 저만큼의 노력이라면 곧 임맥과 독맥도 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7년 동안이나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맥과 독맥이 뚫리지 않으니 그런 것이야.”
 “그래도 준이의 말을 들어보면 최근에는 계속된 노력에 많이 약해져 막힌 맥에 약하게나마 금이 갔다고 하니 어쩌면 며칠 내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
 “그렇게 된다면야 내 무얼 더 바라겠느냐?”
 스승 한월과 사형인 일현은 준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폭우는 밤사이 계속 내리더니 새벽녘이 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멈추었다.
 
 영월암에서 조금 떨어진 가파른 계곡의 중턱.
 지름 4m가량의 넙적한 바위 위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계속된 폭우로 인해 지난 5일 동안을 방 안에서만 보내니 너무 갑갑하던 차에, 비가 그치자마자 한걸음에 이곳까지 달려와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고 있는 것이다.
 “흐음··· 좋군.”
 청년은 조금 낡은 승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목을 덮을 정도로 장발이었다.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해 꽤 미남자였다.
 그는 바로 준이었다.
 지난 세월이 적지 않은 듯 이젠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지금 준이 앉아 있는 넙적한 바위는 몇 년 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전혀 없는 곳이었기에 준도 특별히 이곳으로 올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주변 경치가 너무 좋아 틈틈이 심법수련을 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준이 바위 위에서 심법을 연마하려고 자세를 잡을 때였다. 갑자기 자신의 두 눈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으응? 뭐였지?”
 준은 전방의 계곡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계곡의 중턱부분에서 아주 작지만 무엇인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게 뭘까?”
 지난 5일간의 폭우로 계곡의 일부분이 무너져 저곳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호기심에 이끌린 준은 즉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계곡의 흙은 물을 흠뻑 먹어서인지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그대로 무너졌다.
 “이크, 조심해야겠어.”
 준은 무인이기에 신법을 운용하면서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나?”
 폭우로 인해 무너진 곳은 미지의 동굴 입구였던 것이다.
 흙덩이가 무너지면서 드러난 동굴의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동굴의 천장에는 수정 같은 것이 몇 개 박혀 있었다.
 그것이 우연히 준의 눈에 띄어 마침내는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굴은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준은 동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동굴은 높이가 5m는 되기에 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길이는 약 10m 정도였다.
 동굴의 끝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혀 있었다. 끝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운데 부분은 지름이 2m 정도 되는 제법 큰 바위가 놓여 있었는데 윗부분은 매끄럽게 잘려 있어서 평평했다.
 “오··· 무엇으로 잘랐는지 매끄럽군.”
 바위는 동굴의 가운데 부분에 세워져 있었을 것인데 무엇으로 잘랐는지 가운데 부분이 단칼에 자른 듯 매끈했다.
 준은 이 바위 위에서 심법을 운용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올라가보니 둥근 원이 파여 있고, 원의 바깥부분과 안쪽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멋있는데?”
 준은 무심코 원의 가운데 부분에 앉았다.
 “이곳에 앉아 심법을 연마하면 좋겠군. 그럼 어디 한번 운용해볼까?”
 준은 즉석에서 그렇게 결정하고는 천왕대심공상의 심법을 운용했다. 그렇게 단전에 있던 기를 일으켜 심법을 한창 운용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앉은 자리에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은 두 눈을 감고 심법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우우웅.
 신비하게 일어난 빛은 원의 안과 바깥 부분에 새겨진 것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났다.
 스파팟!
 갑자기 동굴 안이 빛으로 가득해지더니 준을 삼켜버렸다. 허공에 먼지가 흩어지듯 그렇게 준은 사라져버렸다.
 동굴은 심하게 진동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마치 폭탄이 동굴 안에서 그대로 터져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콰쾅!
 안 그래도 폭우에 흙이 축축했던 터라, 폭발로 인해 무너진 동굴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인적 없는 곳에서의 폭발이라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준이 사라진 후 한월과 일현이 영월암 주위를 찾아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준은 그렇게 신비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4장 미지의 세계
 
 
 “크으윽, 으으······.”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여···여기가 어디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칠흑 같이 어두운 곳이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 밤인가?”
 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자신은 한창 천왕대심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기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깨어나 보니 낯선 곳이었다. 자신이 들어온 동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음··· 기온이 낮지만 일정한 것을 보니 이곳도 동굴 속인 것 같은데?”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운용 중이던 천왕대심공을 멈추자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크으··· 갑자기 왜 이러지?”
 천왕대심공을 중도에 멈추게 되었을 뿐인데 준의 몸 곳곳에 물집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자 미칠 것만 같았다.
 “크윽··· 이···이게 어찌된 상황이지? 너무 고통스러워······.”
 너무나 큰 고통이 일어나자 오히려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기에 즉시 천왕대심공을 다시 운용하였다.
 스스스스.
 천왕대심공의 효용인지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피부 곳곳에 불룩하게 솟아 있던 수십 개의 물집은 대부분 그대로 터져 피고름이 흘러나왔고, 남은 몇 개는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줄어들었다.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심법을 한참 동안이나 차분하게 운용하자 이탈한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콰콰콰콰!
 단전에서 일어난 기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몇 배나 불어난 기의 덩어리는 통제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임맥과 독맥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간 기의 덩어리는 곧 충돌을 일으켰다.
 쾅!
 그러나 임맥과 독맥은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기의 덩어리는 몇 번이나 임맥과 독맥에 부딪혔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기의 덩어리는 계속 세력이 커지면서 더욱 강력한 힘으로 충돌하였다.
 쾅!
 엄청난 충돌음이 생겼지만 그건 몸속에서 일어나는 충돌이라 외부로는 들리지 않았다.
 콰콰콰콰!
 가로막혔던 기의 통로가 생겨나자 기의 덩어리는 거침없이 마구 빠져나갔다.
 막혀 있던 임맥은 한지가 찢어지듯 찢어졌고, 탄력을 받은 기의 덩어리는 천왕대심공 상의 심법운용으로 힘찬 움직임을 보이더니 독맥까지도 뚫어버렸다.
 그동안 막혀 있던 혈맥들이 모두 뚫리자 기의 덩어리는 마치 자신의 세상을 만난 듯 힘차게 날뛰며 맹렬한 기세로 돌아다녔다.
 우두둑.
 준의 몸속 뼈들이 갑자기 어긋나더니 마침내는 사지까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막혀 있던 몸속의 각종 노폐물들이 혈전들과 피고름 이 되어 땀구멍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심한 악취를 동반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흘러나오던 노폐물들은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쩌쩌쩍.
 이번에는 피부가 심한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급속도로 건조해지더니 그대로 갈라져 부서졌다. 그리고 이내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무림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탈태환골 과정이었다.
 탈태환골은 진기가 몸속에 들어와서 생사현관을 타통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피부가 벗겨지고 온몸의 뼈들이 뒤틀리면서 제자리를 찾아 최상의 몸 상태로 바뀌는,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상의 신체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찌된 일인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급속하게 하단전에 진기들이 가득 들어차버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막대한 양의 진기들이 중단전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좀 흐르자 중단전에도 진기가 가득 들어찼다. 흘러넘치는 진기들은 이번에는 상단전을 향해 달려갔다.
 준이 그동안 익힌 천왕대심공은 겨우 4성이었지만, 탈태환골이 이루어져 중단전을 진기로 가득 채운 후 상단전을 열자 순식간에 5성을 넘어 6성까지 높아졌다.
 천왕대심공이 6성의 성취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치 피부가 숨을 쉬기라도 하듯 수많은 땀구멍에서도 진기를 빨아들이자 막대한 진기로 변환되면서 주채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넘쳐났다.
 쩌쩌쩍.
 이미 한 번의 탈태환골 과정을 거쳤는데 또 한 번의 탈태환골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준은 조금 전 한 번의 탈태환골 과정을 겪은 후 뽀얀 우유 빛 피부를 가지게 되었는데, 또다시 탈태환골의 과정을 거치게 되자 뱀이 허물을 벗듯 머리카락 하나 남김없이 그대로 가죽이 홀랑 벗겨져버렸다. 그러더니 새살과 새 머리카락이 윤기를 머금으며 어깨 길이까지 길게 자라났다.
 머릿속에도 순수하고 강력한 진기들이 뇌의 수많은 핏줄들에 스며들더니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뇌의 모든 핏줄들에서조차 불순물이 제거되자 완전하게 또 한 번의 탈태환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 나오려고 요동쳤다.
 스스슷.
 투명하지만 흰빛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허공에 떠서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았다.
 영혼은 일단 육체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은 경지가 미약해서인지 육체의 끈을 끊지 못하고 다시 육체 속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준의 몸에 영혼이 완전하게 다시 스며들고 감겨져 있던 준의 두 눈이 떠지자 안광이 두 자나 뻗어 나왔다.
 두어 번을 깜빡이자 안광은 사라져버렸다.
 ‘아··· 기분이 너무 황홀하다. 몸 상태를 보니 천왕대심공의 성취가 7성에 오른 것 같군.’
 그렇다. 준의 현재 성취는 천왕대심공의 7성 경지였다. 인간의 연약한 신체에서 이젠 완전하게 변한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
 키도 어느덧 190cm나 자라 있었고, 피부도 우유 빛으로 보기 좋았다.
 “음··· 천왕대심공의 성취가 7성에 올랐으니 이젠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든 병마로부터 벗어난 것인가?”
 준은 탈태환골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병마를 모두 물리쳤다. 게다가 완벽한 신체를 가지게 되었기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보통 인간의 수명을 한참이나 넘어서게 되었다.
 “후후··· 천왕대심공의 성취가 7성의 경지에 접어들게 되니 몸속에 진기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넘치는군. 이로써 인간의 벽을 완벽하게 뛰어넘게 되었어. 예전보다 눈과 귀도 훨씬 밝아진 것 같고··· 으응? 이 기운은 뭐지?”
 준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몸속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준의 심장 옆에 자리를 잡은 기운은 계란 크기만 했으며, 기는 아닌데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음··· 이게 뭘까?”
 준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차원을 넘어오게 된 준의 몸속으로 혼돈의 기운이 스며들었고, 그것이 심장 옆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기절한 상태였기에 준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칠흑 같이 어두웠던 주위도 천왕대심공의 성취가 높아짐에 따라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음··· 천장과 바닥이 온통 석회암인 걸 보니 동굴 속인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자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엇, 이···이게?”
 몸속에는 진기가 가득했고, 천왕대심공의 경지가 어느새 7성에 접어들었기에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려고 하자, 몸을 둥글게 말아서 발바닥으로 천장을 딛고 다시 회전하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으음··· 나의 몸이 이렇게 가벼워졌다니··· 아직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겠어.”
 준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탈태환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은 듯 탈피한 몸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준은 팔부터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역시나 팔도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으음··· 팔에 흐르는 기가 너무 충만해서 그런 것 같은데 조금 줄여볼까?”
 스스슷.
 역시 생각한 대로 팔에 흐르는 기를 조금 줄이자 이전보다 움직임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보았다. 역시나 몸이 가벼웠는데, 기를 조금 줄여보자 훨씬 걷기가 편하였다.
 “이제는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군. 그런데 여기는 어디이기에 이토록 기가 충만할까? 이런 곳에서 천왕대심공을 더 운용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성취가 높아지겠어.”
 준이 생각하기에 여기는 영월암에서 수련할 때보다 적어도 열 배 정도는 많은 기가 공기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졸졸졸.
 귀가 밝아진 준은 물이 흘러가는 미세한 소음을 들었다.
 “음···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어딘가에 물이 흐르는 모양인데? 가봐야겠군.”
 앉아 있던 곳에서 조금 걸어 나오자 꺾어진 곳이 있었고, 그곳을 벗어나자 동굴의 광장이 나타났다.
 “동굴 속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광장의 저편에는 여기저기에서 지하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동굴은 천장과 바닥이 온통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동굴 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조심해서 이곳을 살펴봐야겠군.”
 여러 곳에 형성된 광장을 비롯해 동굴 바닥 곳곳에는 지하수로 인해 연못이 생성되어 있었으며, 피압지하수가 마치 분수대 모양으로 여기저기에서 솟아올라 아름다운 광경까지 자아내었다. 게다가 내부는 대규모의 종유석상이 발달되어 장관을 연출했다.
 딱정벌레가 날아다녔다. 연못 속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경사면이나 천장에도 다리가 긴 거미 등 희귀한 벌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쉐에에엑.
 무엇인가가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갔다.
 바람 소리만 들어보아도 묵직한 것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푸드득.
 동굴 천장에 붙어 있던 것이 갑자기 떨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박쥐였는데 특이하게도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슈가가각.
 황금박쥐는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날아가다가 갑자기 두 동강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리리릭, 처척!
 황금박쥐를 두 동강낸 물체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것을 붙잡았다.
 뒤돌아선 자의 품속으로 들어간 물체.
 자세히 보니 부메랑과 아주 흡사해 보였다.
 “크크크큿··· 이곳에 제법 오랫동안 있었군. 이제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스으, 스스슷.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문스러운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휘이이이.
 바람이 거세게 언덕으로 불어와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언덕의 앞에는 온통 녹색의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이었다.
 언덕의 한쪽에는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의 입구에 무엇인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준이었다.
 입고 있었던 옷과 신발은 이미 다 헐어서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가죽 신발은 두 달 전에 발견한 동굴의 입구의 안쪽에서 찾은 것이었다. 그 옆에는 옷과 신발의 주인으로 보이는 두 구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죽은 지 몇 년이나 지나 살은 이미 썩고 뼈만 남아 있었다.
 죽은 시신의 옷을 입는 건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이 회수해 깨끗하게 빨아서 입었다.
 시신에서 회수한 것은 옷과 신발을 비롯해 낫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 하나가 전부였다.
 준은 혹시라도 있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새로운 무기로 만들었는데, 그게 부메랑이었다.
 “오늘로 5일째 태양빛에 적응했으니 내일 아침에는 이곳을 나가도 되겠어.”
 해는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 이제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 너머로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천왕대심공을 운용 중이던 준은 의지로 심안을 펼쳤다.
 스스스스.
 주위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의지가 원하는 대로 점점 멀리까지 그 범위가 넓혀졌다.
 마음의 눈인 ‘심안’은 천왕대심공 상의 성취가 7성에 이르면서 생겨난 능력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 성취가 부족해 2km까지 살펴보는 것이 한계였다.
 심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온통 나무들로 가득하고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온통 울창한 숲이었다.
 “으음··· 온통 숲이구나. 그래도 이 동굴을 나가야겠어.”
 준은 운용 중이던 천왕대심공을 마치고는 눈을 떴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르듯이 날았다.
 슈슈슈슉.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빠르게 숲을 향해 날아갔다.
 용천혈에 기를 보내자 더욱 속도가 빨라졌다.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으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경공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도 불구하고 의지로 심안까지 펼치면서 나아갔다.
 콰아아아.
 준은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익혔던 경공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또한 허공으로 높이 도약하고 공중제비와 각종 무술동작들을 펼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숲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덧 머리 위에 해가 머물렀다.
 “음··· 도대체 숲이 얼마나 되기에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걸까? 해가 머리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오인 모양이니 잠시 쉬었다가 가야겠어.”
 파악.
 준은 허공으로 20m를 도약한 후 다시 나무를 세 번이나 차면서 솟아올라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휴우··· 이곳의 나무들은 어떻게 된 게 모두 수백 년은 자란 것 같이 크네?”
 크기가 작은 나무도 60m는 족히 되는 것 같았고, 큰 나무는 100m가 넘는 것도 즐비했다. 둘레도 성인 남자 네 명은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로 굵었다.
 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20m 정도 떨어진 한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 나뭇가지에는 황금색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크기가 수박만 했다.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날갯짓하면서 그 황금색 과일을 쪼아 먹고 있었다.
 “음··· 새들이 먹는 것으로 봐서는 독이 없는 과일 같은데, 마침 목이 마르니까 나도 따먹어봐야겠다.”
 스윽.
 준은 황금색 과일을 노려보면서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움켜쥐는 동작을 취하였다.
 부르르르.
 나뭇가지가 떨리면서 툭하고 황금색 과일 하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고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준이 팔을 안으로 굽히자 황금색 과일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터억.
 준은 나뭇가지 위에 살짝 황금색 과일을 내려놓고는 수도로 내려쳤다.
 퍼억!
 파편이 사방으로 조금 튀었지만 가볍게 두 동강났다.
 와사삭, 쩝쩝쩝.
 “음··· 멜론과 비슷한 맛이구나. 시원하고 달콤한 게 맛있어.”
 준은 한 번 더 염력을 이용해서 황금색 과일을 땄다.
 염력도 심안능력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능력이었다.
 황금색 과일이 상당히 컸기에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음··· 이제 갈증도 해소되고 배도 부르니까 다시 출발해봐야겠지?”
 파악.
 그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도약해 앞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사라져버렸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 두 시간 정도면 해가 사라질 시간이었다.
 그때까지도 열심히 경공술을 발휘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준은 나무위에 내려서더니 잠시 쉬면서 가지고 있던 황금색 과일을 쪼개어 먹었다.
 “으··· 정말 지긋지긋한 숲이야. 도대체 언제 이 숲이 끝날까?”
 사사삭, 사삭.
 갑자기 들려온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준의 이목에 걸렸다.
 “으응? 뭐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멧돼지였다. 그런데 준이 알고 있는 멧돼지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거의 황소만 한 크기였다.
 “저···저렇게 큰 멧돼지는 처음 봐.”
 스윽.
 약간 놀랐지만 이내 품속에서 부메랑을 꺼내들었다.
 “안 그래도 단백질이 부족했는데 잘됐어. 오늘 저녁은 저 멧돼지로 해야겠군.”
 준이 노리는 것도 모르고 멧돼지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먹을거리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쉐에에엑.
 허공을 가르면서 무엇인가가 날아오는 소리에 멧돼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가가각.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온 부메랑은 순식간에 멧돼지의 목을 가르고 되돌아갔다.
 휘리릭, 처척.
 준이 되날아온 부메랑을 손가락으로 붙잡았을 때였다.
 멧돼지의 목에 줄이 생기더니 이내 피를 내뿜으면서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윽, 슥슥.
 땅으로 내려온 준은 날카로운 날을 가진 부메랑으로 사냥한 멧돼지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칼집을 내고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잘라와 멧돼지를 끼웠다.
 마른 풀과 마른 나무를 준비해 오른손 바닥에 마른 풀을 조금 쥐고 비비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르르르.
 미리 쌓아두었던 나무 아래에 불이 붙은 풀을 집어넣자 불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지글지글.
 멧돼지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면서 바닥에 기름이 떨어졌다.
 스윽.
 “룰룰루··· 쩝쩝,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보는군.”
 양념도 안 되어 있었지만 고소한 맛과 담백한 맛을 즐기며 고기를 뜯어먹었다.
 숲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준이 멧돼지 고기를 구워먹고 있을 때는 날이 벌써 어두워진 뒤였다.
 활활활.
 충분히 준비해둔 장작을 모닥불 위에 던져 넣자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라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숲속의 밤은 몬스터들의 천국이다.
 멧돼지의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준이 있는 장소로 몰려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몬스터들이라 준의 이목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피 냄새를 맡은 모양이군.”
 준은 심안을 일으켜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쪽과 남쪽에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40마리의 돼지 무리가 무기를 손에 들고 접근하고 있었으며, 서쪽에서는 신장이 4m가 넘어 보이는 엄청난 근육질의 괴상하게 생긴 동물이 한손에 몽둥이를 들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또한 북쪽에서도 4m 정도의 몸을 가진 녹색 괴물 세 마리가 접근 중이었다.
 준은 몬스터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오크와 트롤, 오우거였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준은 부메랑을 꺼내 손에 쥐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몬스터는 남쪽에서 접근한 오크 무리로 10마리였다.
 “취익··· 인간 먹이다··· 취익.”
 걸어 다니는 돼지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걸 듣고 준은 깜짝 놀랐다.
 “으음··· 말하는 돼지라니!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취익··· 인간 먹이를 잡아라··· 취익.”
 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던 두 마리의 오크가 준에게 달려왔다.
 피리리릭.
 준의 손에서 날아간 부메랑은 회전을 하면서 접근하던 두 마리 오크의 목을 자른 후 되돌아왔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오크가 쓰러지자 오크 무리는 눈이 커졌다.
 “취익··· 모두들 조심해라··· 취익.”
 오크 무리가 자신을 포위하면서 접근하자 준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퍼퍽.
 준의 발차기에 배와 가슴을 맞은 오크 두 마리는 5m 정도를 날아가 떨어졌다.
 입에서 녹색 피를 내뿜으면서 부르르 떨던 오크 두 마리는 잠잠해졌다.
 갑자기 권법가로 돌변한 준은 공력을 주입하여 휘두르는 손에 장난치듯 가볍게 내쳤다.
 준의 일장을 맞은 오크들은 훨훨 날아가 떨어졌다.
 꾸엑, 케에엑.
 비명과 녹색피를 내뿜으면서 쓰러지는 오크 무리는 준의 상대가 아니었다.
 열 마리나 되던 오크 무리는 순식간에 모두 쓰러져 있었다.
 준은 오크의 무기 중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무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중 약간 녹이 쓸었지만 롱소드와 바스타드소드 한 자루씩을 수거했다.
 “호오? 아쉬운 대로 이 검들은 쓸모가 있겠어.”
 준의 등 뒤로 30마리의 오크 무리가 몰려와 포위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 번 겨루어본 오크들은 준의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콰콱.
 “상대가 안 되는 것들이 몰려왔군. 좋아 마음껏 몸을 풀어야겠어.”
 준은 두 자루의 검을 땅바닥에 꽂아놓고는 순식간에 오크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양손바닥으로 오크들의 가슴을 밀었다.
 장난 같은 준의 동작에 오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을 그냥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있는 오크들에게 있어 준의 이런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곧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취에엑, 케엑.
 준의 손바닥에 밀린 오크들은 7m 정도를 훨훨 날아가 떨어졌다.
 입에서는 녹색피를 내뿜었고, 가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준은 손과 발에 공력을 주입해 마음껏 휘둘렀고, 오크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날아가 떨어졌다.
 오크들은 그리 약한 몬스터가 아니었으나, 이건 아예 상대 자체가 안 될 정도였다.
 채 오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30마리의 오크들이 모두 쓰러졌다.
 쿠워어어어!
 오우거가 엄청난 포효를 내지르면서 나타났다.
 신장이 무려 4m는 넘어 보이는 오우거는 한 손에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한 방 잘못 맞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즉사할 것 같았다.
 “으음··· 어디에서 이런 괴물이?”
 오우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준을 발견하고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쾅!
 흙덩이가 사방으로 튀면서 구덩이가 생겼지만, 이미 준은 그런 어설픈 몽둥이 공격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뒤로 튕기듯 물러나던 준은 손바닥을 활짝 펴면서 면장을 날렸다.
 퍼억, 쿵쿵쿵.
 가슴에 일장을 맞은 오우거는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되었다.
 그것만 보아도 준의 면장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었다.
 쿠워어어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오우거는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쾅!
 하지만 그런 공격에 당할 준이 아니었다.
 화가 치민 오우거는 이성을 상실했는지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준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였다.
 쉬이잇, 퍼억!
 준의 발차기에 오우거는 우측 종아리를 맞고 휘청거렸다.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준은 회전 돌려차기로 오우거의 배를 차버렸다. 너무나 빠른 공격이었기에 미처 방어를 하지 못한 오우거는 뒤로 넘어졌다. 오우거는 준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면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는 괴물을 꼭 죽일 이유는 없었기에 준도 그대로 서 있었다.
 이때, 북쪽에서 나타난 세 마리의 트롤들은 이미 준과 오우거가 대결하는 것을 보았기에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주위에 쓰러져 있는 오크를 뜯어먹었다.
 “음··· 배가 고파서 접근한 모양이군.”
 준은 땅에 꽂아두었던 두 자루의 검을 쥐고는 나무 위로 도약해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물러서 있던 오우거도 다가와 오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트롤과 오우거가 싸우면 오우거가 이긴다.
 그러나 오늘은 트롤이 세 마리나 되었기에 오우거가 이기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죽은 오크가 40마리나 되었기에 굳이 서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거리를 두면서 오크를 뜯어먹었다.
 워낙 많이 먹는 상위 몬스터들이라 오크 한 마리를 뜯어먹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우거와 트롤은 오크를 다섯 마리나 뜯어먹고 나서야 배가 부른지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래도 욕심이 있어서 양손에 오크 한 마리씩을 끌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위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죽어 있는 오크를 뜯어먹다가 남은 것을 입에 물고는 사라져버렸다.
 40마리나 되던 오크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무 위로 올라선 준은 등을 기대면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엔 초록색으로 물든 달과 붉은색의 달이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이···이럴 수가! 달이 두 개였다니······.”
 처음에 깨어난 동굴만 해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 이것이었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군.”
 큰 나무들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 사냥했던 멧돼지,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괴상한 말을 하던 돼지와 엄청나게 큰 괴물들까지···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준이 살았던 세상과 다르지 않고는 이런 것들이 가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슈슈슈슉.
 준은 바람을 가르면서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경공술을 발휘해서인지 평지에서 최고속도로 달리는 말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빠르게 나는 듯 달리면서도 앞을 가로 막는 게 있으면 허공으로 도약해 나뭇가지를 차거나 하면서 질주했다. 대단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경공술에 익숙해서인지 양손을 허리 뒤로 한 상태에서도 빨랐다.
 “음··· 오늘이 숲을 가로지른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언제까지 달려야 이 숲이 끝날까?”
 숲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숲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 그냥 한쪽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데도 이렇게 넓으니 가히 숲의 바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준은 숲을 가로지르면서 그냥 달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익힌 무술을 복습하면서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기에 날이 갈수록 기가 몸속에 충만해졌다. 그렇다보니 날이 갈수록 심안의 한계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콰콰콰콰.
 “으응? 물소리가 큰 것으로 보아서는 폭포가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데.”
 준은 방향을 약간 틀어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렸다.
 “아··· 이런 웅장하고 멋진 폭포가 있었다니······.”
 계곡 사이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센 물줄기는 시원했다.
 며칠간 씻지도 못하였기에 땀에 찌든 준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아, 시원하다.”
 몸을 씻은 뒤 입고 있던 옷도 물에 적셔 잘 빨아 바위 위에 펼쳐 놓았다.
 스윽, 슥슥.
 부메랑을 먼저 꺼내 무디어진 날을 돌에 갈았다.
 오크에게서 입수한 롱소드와 바스타드소드에는 녹이 제법 많이 슬어 있었기에 돌로 날을 잘 갈았다.
 “음··· 날에 묻어 있던 녹을 제거하니 쓸 만하군.”
 준은 옷이 마를 동안에 특별히 할 일도 없었기에 검술 연습이나 하기로 했다.
 휘휘휙, 파라라락.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은 두 자루의 검이었지만 그것을 휘두르면서 점차 익숙해져갔다.
 우우우웅.
 롱소드의 검날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면서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혔다.
 쉬쉬쉬쉭.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휘두르는 검술은 멋있었지만 약간 민망했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검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폭포에서 시전하는 것이라 주변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츄웅.
 롱소드의 검날 끝에서 푸르스름한 강기의 덩어리가 생기더니 그것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파앙!
 강기가 폭포 바로 아래에 있는 큰 웅덩이에 날아가 폭발하였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 거센 물보라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수면위로 기절한 물고기가 몇 마리 둥둥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부수입을 올리게 된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 구워 먹으면 맛있겠어.”
 기절한 물고기를 수거한 준은 일단 한쪽에다가 잘 놓아두고는 다시 수련을 계속하였다.
 지글지글.
 물고기의 비늘과 내장을 제거한 뒤 칼집을 넣고는 나뭇가지에 잘 끼워서 구웠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물고기는 담백하면서도 고소해 먹을 만했다.
 “쩝쩝··· 고소해서 먹을 만하지만 소금으로 간을 하지 못한 게 아쉽군.”
 물고기 구이로 배를 채운 준은 폭포가에 앉아 다시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어두운 밤에 특별히 할 일이라곤 수련밖에 없었다.
 대기 중에 풍부한 기를 흡수하는 게 즐거웠고,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천왕대심공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날이 밝자 준은 폭포에 들어가 목욕을 한 후 과일과 물고기를 구워 배를 채우고는 다시 출발하였다.
 경공술을 발휘해 나아가면서 잠깐 휴식도 취하고 주변에서 과일을 따서 갈증도 해소했다.
 그렇게 준은 3일을 더 숲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숲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였다.
 동굴 속을 벗어난 지 꼭 9일만의 일이었다.
 
 
 5장 켈리온 성
 
 
 숲이 끝나는 곳의 나무 위에서 준은 전방을 바라보았다.
 온통 평지로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밀밭에서 일하는 농부들 10여 명이 보였는데 모두 서양인들이었다. 그들은 낡은 옷을 입었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녀들로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양했다. 금발이 있는가하면 갈색 머리카락도 있었고, 녹색과 보라색, 파란색과 빨간색의 머리카락도 있었다.
 인간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기에 처음에는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잠시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준은 영어를 비롯해 불어와 독일어까지 조금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전혀 생소한 언어였으며, 도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으음··· 모습은 분명 서양인들인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언어를 쓰는군.”
 한참을 나무 위에 숨어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보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행동도 함께 하였기에 그것으로 약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에 세워놓았던 수레로 모여들었다.
 다가닥 다가닥.
 엉덩이에 채찍질을 하자 소는 깜짝 놀라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준은 수레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심안의 능력이 있으니 수백 미터의 거리를 두면서 뒤따라갔다.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하던 수레는 이윽고 마을에 도착하였다.
 준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엎드려 마을을 관찰하였다.
 마을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는데 집이 50여 채 정도 되었다.
 대부분 통나무집이었으며, 몇 개의 집은 돌을 쌓아 지은 것도 있었다.
 “음··· 중세의 시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좀 더 살펴봐야겠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통나무집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츠츠츠츠.
 준은 심안을 일으켜 통나무집의 내부를 은밀하게 살펴보았다.
 나무 식탁과 의자, 스프를 끓일 수 있는 쇠 냄비 큰 것과 중간 것 각각 하나, 나무로 만든 그릇이 부엌살림의 전부였다. 그리고 방 안에는 나무로 된 침대와 이불이 전부였다.
 너무나 살림이 없고 단조로워서 다른 집도 확인해보았는데 거의 유사했다.
 농부들의 집은 대부분 이런 모양이었다.
 “음··· 이 마을은 고려시대보다 더 낙후된 사회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식사하는 집을 살펴보았다.
 40대 초반의 남자와 30대 후반의 여자, 10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와 6세 정도의 여자 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나무식탁 위에는 스프를 끓인 냄비 하나와 갓 구운 길쭉한 빵 두 개, 양상추와 당근이 전부였다.
 남자가 나무 그릇에 스프를 덜고 빵을 여러 개로 잘라 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빵을 들고 스프를 찍어 먹다가 양상추와 당근도 같이 먹었다.
 어른들도 그렇게 식사를 했는데 특이한 것은 숟가락이나 젓가락, 그것도 아니면 포크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작은칼 하나가 유일했다. 대부분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으음··· 이상한데? 이 집만 그런가? 다른 집은 어떤지 알아봐야겠군.”
 다시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손도 대충 씻고 식사를 하였기에 매우 불결해 보였다.
 “손으로 식사를 하려면 깨끗하게 씻고 먹어야 하는데 여긴 위생관념이 전혀 없는 사회인 것 같아.”
 식사를 끝마친 집들은 얼마 후 유등을 끄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마을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원시사회를 보는 것 같아 허탈했다.
 엎드려서 마을을 관찰하던 준은 언덕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약간 굽은 바위였는데 밑으로 들어가 앉아 있기 적당한 곳이었다.
 바위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자 어둠이 물러갔다.
 마을의 집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났다.
 준은 천왕대심공을 중지하고 심안으로 집안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처럼 단조로운 식사를 마친 후 부부는 수레를 타고 밀밭으로 일하러 나갔으며, 집에 남은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이웃의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여자 아이들은 한쪽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으며, 남자 아이들은 목검으로 전쟁놀이를 하였다.
 낙후된 마을이었지만 평화롭고 순박하게만 느껴졌다.
 마을에서 출발한 수레를 쳐다보던 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수레를 미행하였다.
 농부들은 밀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점심은 먹지 않았다.
 해가 질 때가 가까워지자 농부들은 수레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왔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에는 농부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마을에 남은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부모가 없는 시간동안 아이들은 뛰어 노는 게 전부였다.
 일부 아이들은 집 밖에 우리를 만들어 키우는 닭에게 모이를 주기도 했지만 공부를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으음··· 부모와 아이들 모두 아침과 저녁, 이렇게 두 끼를 먹는군. 또한 낙후된 사회라서 그런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어. 집에 책 한 권 없으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준은 아직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일상을 살펴보고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는 알아낼 것이 없어. 다른 곳을 가봐야겠어.”
 
 다음날 아침.
 준은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서 먹고는 경공술을 발휘해 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였다.
 약 2시간 정도 이동하자 다른 마을이 보였다.
 통나무집이 83채였고, 돌로 쌓은 집도 10채나 되었다.
 “이 마을은 이전의 마을보단 좀 더 크군.”
 준은 마을이 잘 보이는 곳에 숨어서 마을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도 규모만 좀 더 컸을 뿐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으음, 모든 마을이 이렇단 말인가··· 어쩌지?”
 그는 실망감을 안고 다른 곳을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쿠르르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마차 1대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6명의 기병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그 마차를 추격해오는 일단의 무리들.
 가죽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는데 모두 70명이나 되었다.
 수백 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말을 탄 무리들의 추격하는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더니 이윽고 30m 정도까지 접근하자 보우를 겨누었다.
 슈슈슈슝.
 몇 발의 화살이 날아오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병들은 팔에 부착되어 있던 원형 방패로 화살을 막았다.
 티티팅, 퍽!
 대부분 화살은 방패에 가로막혀 튕겼지만 한 발이 호위병의 등에 맞았다.
 “크으윽!”
 비명을 지르면서 호위병 한 명이 비틀거리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허엇, 패터슨!”
 “패터슨이 당했다! 모두 조심해!”
 “크아아악!”
 말에서 떨어진 패터슨이라는 자는 추격자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즉사했다.
 화살 공격에 재미를 본 추격자들은 또다시 화살 공격을 감행하였고, 호위병들은 당황했다. 등을 보이면서 도주하는 중이라 화살 공격에는 아주 취약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떨어지자 두 추격자들이 따라잡아 서로 충돌하였다.
 채채챙, 파팍!
 호위병들과 추격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싸웠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추격자들의 일부는 싸우지 않고 마차를 추격하였다.
 마부 옆에 앉아 있던 호위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보우를 겨누어 추격자들에게 쏘았다.
 “어엇, 조심해!”
 “크아악!”
 경고에도 불구하고 추격자 중 한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으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추격자들도 보우를 꺼내들고 쏘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았기에 잘 맞지 않았다. 오히려 호위병이 쏜 화살이 더 정확했다.
 추격자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보우를 말에게 쏘았다.
 이히히힝!
 말의 등과 엉덩이 부분에 화살이 명중하자 말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네 마리의 말이 서로 뒤엉켰다. 이에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고, 그것 때문에 호위병은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다행이 마부는 떨어지지 않았기에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의 속도를 늦추었고, 결국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멈추었다.
 추격자들은 넓게 원을 그리면서 마차를 포위했다.
 퍼억!
 추격자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은 마부는 상체가 기울어지면서 고꾸라졌다.
 추격자들 중에서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마차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하였다.
 “소공녀님, 이제 그만 마차에서 나오시죠?”
 조장의 말에도 마차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음··· 소공녀님을 마차에서 끌어내려라.”
 말 등에서 내린 추격자 한 명이 마차로 접근하여 문을 잡아당겼다.
 마차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바로 열렸다.
 그때였다. 롱소드의 날이 같이 튀어나와 추격자의 가슴을 뚫고 등 뒤까지 튀어나왔다.
 “끄으으··· 이게?”
 믿을 수 없었는지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마차 속에서 발이 튀어 나와 추격자의 가슴을 발로 밀어버리더니 롱소드의 날을 뽑았다.
 추격자는 피를 흘리면서 뒤로 벌렁 넘어갔다.
 마차 속에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모습을 보였는데, 체인아머를 착용하고 있는 기사였다.
 “감히 공녀님을 노리다니!”
 “흐흐··· 공녀가 별건가? 지금은 우리의 포로일 뿐이다.”
 “닥쳐라! 이놈들··· 나, 한스가 살아 있는 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흐흐··· 그렇다면 죽여줘야겠군. 저자를 죽여라!”
 마차를 포위한 추격자들이 공녀의 기사 한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채채챙.
 검술실력이 뛰어난 한스는 추격자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연신 공격하였다.
 현란한 한스의 검술실력에 추격자들이 작은 상처를 입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악!”
 그때, 거리가 조금 떨어져서 싸우던 마지막 호위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살아남은 추격자들까지 모두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한스가 생각하기에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마차 속에는 공녀와 하녀 한 명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마저 추격자들 손에 쓰러진다면 사실상 이들을 막을 자는 전무한 상태가 된다.
 추격자들은 몇 명이 쓰러졌지만 60명이 넘었다.
 “크으읏··· 으음.”
 순간적으로 집중하지 못한 한스는 추격자의 검에 어깨와 옆구리를 살짝 베이면서 뒷걸음질 쳤다. 추격자들이 합공으로 공격하자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추격자의 검날이 그의 목에 겨누어지자 상황은 추격자들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추격자들은 대장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마차 가까이 접근했다. 그자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아래의 뺨에 사선으로 칼자국이 나 있어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빛에도 살기가 담겨 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자 같았다.
 그는 추격자의 대장인 크리노스라는 자였다.
 “공녀님, 한스 경까지 우리에게 잡혔는데 이제 마차에서 나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어요. 한스 경을 죽이지는 마세요.”
 마차 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0대 후반의 통통한 하녀가 먼저 마차 속에서 나오고, 그 뒤를 이어 흰 드레스를 입은 엄청난 미녀가 나왔다.
 170cm 정도의 키에 가슴은 크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에 흰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것만 해도 매력적인데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공녀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흥, 왜 날 공격한 건가요?”
 “공녀님을 모시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누군가요?”
 “그건 공녀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준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엄청나게 눈부신 미녀가 곤경에 처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타악.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 오른 준은 공중제비를 선보이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밀 위를 밟고 달렸다. 처음으로 초상비의 경공을 시전한 것이다.
 촤촤촤촤.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와 함께 준이 빠르게 마차 쪽으로 접근하자, 추격자들은 그제야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파악.
 준은 밀 위를 도약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공중제비를 선보이면서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신기에 가까운 동작에 추격자들의 눈이 커졌다. 이런 것은 듣도 보도 못한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대장인 크리노스는 얼굴이 굳어지면서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이에 말을 타고 있던 두 명의 추격자들이 말을 몰아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양쪽에서 휘두르는 검이라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준은 상체를 약간 흔드는 것으로 두 명의 공격을 간단하게 피하였다.
 “어엇, 피했어?”
 추격자 두 명이 다시 선회할 때 준은 휘돌아차기를 시전하였다. 6~7m나 떨어져 있었기에 전혀 발이 닫지 않는 거리였다.
 “크억!”
 “아아악!”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 명의 추격자가 뒤로 튕기듯 날아가면서 비명을 지르다가 떨어져버린 것이다.
 크리노스의 손짓에 이번에는 5명이 달려들었다.
 준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이면서 양손바닥을 펼쳐 내뻗었다.
 퍼퍼퍼퍼퍽.
 “우왁!”
 “커억!”
 “아아악!”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면서 추격자 5명이 말 등에서 뒤로 튕기듯 날아가 떨어졌다.
 마치 장난치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무서웠다.
 준은 공격해오는 적 7명을 가볍게 쓰러뜨린 후 이번에는 먼저 추격자들을 공격하였다.
 쉬이잇, 퍼퍼퍽.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 같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주먹과 발로 공격을 하였다. 이에 추격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1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르자, 말에 그대로 타고 있는 자는 대장인 크리노스를 비롯해 6명이 전부였다. 나머지 60여 명은 모두 땅에 쓰러져 기절한 상태였다.
 “으으··· 네놈은 누구냐?”
 두려운 나머지 크리노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준은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눈치로 자신의 정체를 묻는 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소공녀와 하녀, 한스도 놀라 눈이 커졌다.
 크리노스의 눈짓을 받은 추격자 5명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면서 준을 공격하였지만, 준은 가볍게 모두 피하였다.
 기회를 보고 있던 크리노스는 석궁을 준에게 겨누더니 발사하였다. 약 10m의 짧은 거리였기에 석궁에서 발사된 퀘럴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게 사람들의 공통된 상식이었다.
 준은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퀘럴을 가볍게 피하였고, 오히려 지나치던 퀘럴을 손으로 붙잡는 신기까지 보여주었다.
 “허억, 마···말도 안 돼!”
 크리노스는 너무 놀라 입이 쩌억 벌어진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나가버렸다.
 준이 퀘럴을 손가락으로 휘돌리면서 튕기자 공격해오던 추격자의 명치에 격중되었다.
 “끄으으!”
 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퍼퍽, 빠악.
 준의 주먹과 발차기에 얻어맞은 나머지 추격자들도 기절하면서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추격자들의 대장인 크리노스와 기사 한스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자가 전부였다.
 “음··· 가까이 오지 마라. 오면 한스를 죽이겠다.”
 크리노스가 소리쳤지만 준이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듯 준의 손바닥이 가볍게 흔들렸다.
 퍼억!
 한스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추격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준의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크으으으!”
 이미 내부가 박살나버린 그는 칼을 떨어뜨리면서 고꾸라졌다.
 덜덜덜.
 공포에 젖은 크리노스는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준이 가볍게 손바닥을 흔들자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쉐에에엑.
 도망치던 크리노스는 제법 거리를 벌려놓았기에 약간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라면서 뒤돌아보았다.
 퍼억!
 “크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놀란 말은 계속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크리노스는 부르르 떨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의 등에는 손바닥이 찍혀 있었다.
 소공녀와 하녀, 한스는 준이 검술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손과 발을 이용해 60명이 넘는 추격자들을 혼자서 처리한 것을 직접 보고서도 믿지 못하였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소공녀인 아리안느가 준이에게 물어보았지만 준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고맙다고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말이지.’
 “이봐요, 대답해 봐요.”
 그녀의 재촉에도 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기사 한스가 말하였다.
 “소공녀님, 이자는 우리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당신의 정체가 뭐예요?”
 하지만 준은 전혀 못 알아듣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리안느는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면서 부끄러워졌다.
 ‘어머··· 내가 왜 이러지? 처음 보는 남자인데······.’
 소공녀 아리안느는 자신이 끼고 있던 두개의 반지 중 한 개를 빼더니 준에게 내밀었다.
 준은 아리안느를 쳐다보더니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조금 도와준 것 가지고 이런 대가를 받을 순 없지.’
 아리안느도 준이 자신이 건네는 반지를 사양하는 것 같아 보이자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행동을 번갈아 보여주고는 다시 준에게 내밀었다.
 ‘으응? 이 반지를 받아 손에 끼우라는 건가?’
 자꾸만 권하는 아리안느 때문에 준은 어쩔 수 없이 반지를 받아들고 손가락에 끼웠다.
 “이것 봐요, 내말 알아들어요?”
 “어엇··· 말을 알아들을 수 있네?”
 “이봐요?”
 “아··· 네, 아름다운 아가씨.”
 “이제야 내말을 알아듣는군요.”
 “이 반지 때문입니까?”
 “그래요. 그 반지는 통역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의 반지예요.”
 “정말 신기한 물건이군요.”
 “당신 같은 외모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는데, 어디에서 왔어요?”
 “그게··· 저 멀리에서 왔습니다.”
 준은 그들 뒤에 있는 거대한 숲을 가리켰다.
 그제야 아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강했던 거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흔하지 않은 검은 머리에, 몬스터들의 천국이라는 고요의 숲을 건너왔으니 강하지 않겠어요?”
 “저 숲이 고요의 숲입니까?”
 “그···그럼 그것도 몰랐어요?”
 “예. 이곳은 처음이라······.”
 “그렇군요.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돼요?”
 “김준이라고 합니다.”
 “김쭌?”
 “쭌이 아니고 준입니다, 아가씨.”
 “주···준!”
 “그래요, 준.”
 “성은 없어요?”
 “성은 김이고 이름은 준이에요.”
 “아··· 그렇군요. 혹시 뮤란 대륙인이에요?”
 “뮤란 대륙?”
 “예.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 마케리안 대륙에서 당신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구경하기 힘들거든요.”
 “아··· 그럼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가 그만큼 구경하기 힘들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뮤란 대륙에서는 제법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곳 마케리안 대륙에서는 거의 구경하기 힘들죠. 특히 대륙의 남부 왕국인 이곳 오이란트 왕국에서는 몇 십 년 만에 처음인 걸요. 특히 왕국의 남부 켈리온 자작령이니 더 말해 뭐하겠어요?”
 “으음··· 그렇군요.”
 “켈리온 자작령에는 어떻게?”
 “아··· 이곳이 켈리온 자작령이었군요. 저는 숲에서 길을 잃어 마을을 찾던 중 이 길을 발견하고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잘되었네요. 우리들과 마을까지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뭐··· 안 될 게 있나요? 오히려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과 같이 동행하게 되어서 저로서는 무척 영광입니다. 참,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름도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저는 로리 아케비안 드 아리안느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아리안느라고 부르세요.”
 “예. 그러죠, 아리안느.”
 “참, 제 일행을 소개해줄게요. 이쪽은 저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드리노 폰 한스이구요. 이쪽은 저와 항상 같이 다니는 베누아.”
 “반갑습니다. 저는 준이라고 합니다.”
 “소공녀님과 저희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는 서로 도와야죠.”
 “소공녀님, 마부가 죽었으니 말을 타고 가셔야겠습니다.”
 “알았어요, 한스 경.”
 아리안느는 마차 속에 있는 물건들을 마법의 자루에 집어넣었다. 옆에서 기사 한스와 하녀인 베누아가 도와주었다.
 그동안 준은 쓰러져 있는 추격자들의 품속을 뒤져보았지만 정체가 들어날 정도의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몇 명에게서 골드와 실버, 실링화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발견하였다.
 눈치로 이것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라는 걸 알게 된 준은 일단 그것을 챙겨 품속에 넣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쓰러져 있는 자들에게서 30cm 정도 되는 대거를 두 개나 수거해 허리에 찼다.
 오크에게서 입수한 검집도 없는 롱소드와 바스타드소드는 그냥 버리고 추격자들에게서 두 자루의 롱소드를 입수해서 허리에 찬 것이다.
 또한 한 자루의 바스타드소드는 등에 짊어졌다.
 “후후, 이놈들 때문에 나만 횡재했군.”
 출발 준비가 끝나고 아리안느와 한스, 베누아가 말 등에 올랐다. 하지만 말을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준은 어쩔 수 없이 걸어가기로 했다.
 “김준 님은 말을 한 번도 타보지 않았어요?”
 “예, 그렇습니다. 아리안느 님.”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스가 준이에게 다가와 말 타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그제야 준은 말 등에 올라타 천천히 말고삐를 잡고 타보았다. 무술을 익힌 준이라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다.
 다가닥 다가닥.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이동을 시작하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말 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기에 준은 두 시간 만에 제법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준이와 아리안느 일행이 떠나고 난 후 기절했던 추격자들의 대장인 크리노스가 깨어났다.
 “크으으··· 가죽갑옷 속에 이것을 넣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지.”
 크리노스가 가죽갑옷을 살짝 벌리자 속에는 가슴과 등에 고리로 이어진 철판이 보였다.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일어난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던 말에게 손짓을 했다. 영리한 말은 크리노스에게로 다가왔고, 그는 말 등에 올라타고 중얼거렸다.
 “으음··· 어디에서 나타난 놈이기에 60명이나 되는 수하들을··· 정말 무서운 놈이었어.”
 휘이이이.
 크리노스가 사라진 곳에 흙먼지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와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죽은 수하들만 쓰러져 있었기에 이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았다.
 
 다가닥 다가닥.
 준과 아리안느 일행은 천천히 말을 타고 켈리온 성으로 이동 중었다.
 아리안느는 준의 허리에 찬 두 자루의 대거와 롱소드 두 자루, 등에 메어둔 바스타드소드를 쳐다보고 말했다.
 “김준 님, 그렇게 검을 많이 차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가질 수 있을 때 많이 가져야죠. 몇 개 가져갔다고 그자들이 화내지는 않겠죠?”
 “호호··· 아마도 그럴 거예요.”
 “나만 이렇게 많은 이득을 본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군요. 하하.”
 “당연히 그 정도는 수고비로 챙기셔야죠, 김준 님.”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준이와 아리안느 일행은 여유롭게 켈리온 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3km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지만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외곽을 돌아서 나아갔다.
 그렇게 준이와 아리안느는 세 곳의 마을을 더 지나서야 켈리온 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달하였다.
 “우와아, 멋지다!”
 “김준 님은 켈리온 성을 처음 보시는 거지요?”
 “예, 처음입니다. 아, 그리고··· 불편하실 테니 성은 빼고 이름만 부르셔도 됩니다.”
 “예, 준 님.”
 아리안느와 기사 한스는 켈리온 성을 여러 번 방문하였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도시를 보게 된 준의 마음은 설레었다.
 15m나 되는 우뚝 솟은 성벽이 평지위에 축성되어 있었는데 수 km나 이어져 있었다. 성벽 안에는 통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2백여 가구씩 구역을 이루고 있다. 헤아려보니 모두 10곳이었다. 길 양쪽에는 벽돌로 된 2층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리와 개울도 보이고 우리를 쳐 소나 돼지, 닭 등 가축을 키우는 곳도 보였다.
 그런 곳을 지나면 200m 정도 되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을 빙 둘러 성을 쌓아놓았다.
 그 성벽 안에는 좀 더 고급스러운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있었으며, 정상에는 중세 유럽의 성과 비슷하게 생긴 성이 하나 있었다.
 이 성이 바로 켈리온 자작의 성이었다.
 켈리온 자작령은 오이란트 왕국의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켈리온 성을 벗어나서도 사방으로 20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영지민은 약 3만 명이며, 성 밖의 곳곳에 유민들이 천막을 치고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약 만 명 정도 되었다.
 기병 6백에 보병 3천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각 마을에도 50명의 자경대를 갖추고 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도시를 발견한 준은 이곳을 알아보기 위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심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이전의 마을에서는 농부들만 보았기에 정보를 취득하기에는 미흡했었다.
 그러나 영주가 살고 있는 성을 보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대로의 가장자리에는 노점상들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제대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도 보였다. 농부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마차도 간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성문 앞에서는 경비병들이 외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말을 타고 접근해오고 있는 아리안느를 보고는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인간이 아닌 듯 극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아리안느였기에 멍한 표정들이었다.
 “크흐흠······.”
 한스의 헛기침에 경비병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체인아머를 입은 기사 한스를 보고는 찔끔거렸다. 눈빛에 살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행증을 보이시오.”
 한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이놈 감히··· 나를 모르느냐?”
 “모르겠소이다. 나는 켈리온 자작님의 외성 경비 7조장인 페론이라 하는데 누구요?”
 “이거 원··· 나는 아케비안 공작 각하의 기사 한스라 한다.”
 “뭣? 아케비안 공작 각하의 기사?”
 “그렇다.”
 그때 페론의 곁으로 40대 초반의 고참 보병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페론은 고개를 간간이 끄덕이더니 한스를 곁눈질하였다.
 “크흐흠···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뒤에 계시는 분들은?”
 “여기계신 분은 공작 각하의 영애이신 아리안느 소공녀이시다. 이제 자작님을 뵈었으면 하는데?”
 “좋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호위병들은 왜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아서 일부의 호위병들은 지원병력을 요청하러 떠났다. 나머지 호위병들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모두 죽고, 남은 사람은 나와 저 검은 머리카락의 김준 호위병이 전부다.”
 “으음··· 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호위병은 혹시?”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김준 호위병은 뮤란 대륙인이다.”
 “그···그렇군요. 어쩐지 이방인 같다고 생각했는데···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켈리온 성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20명의 영지병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페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스가 앞장서자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뒤따랐고, 마지막으로 준이 외성 안으로 들어갔다.
 외성을 통과하자 한스가 준에게 다가왔다.
 “준 님, 저기 언덕위에 보이는 성이 켈리온 성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성이군요.”
 “소공녀님과 저희들을 구해주시고 이렇게 안전하게 켈리온 자작의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준 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하, 너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기에 도와준 것뿐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으니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한스는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준에게 내밀었다.
 “음···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켈리온 성에서 필요한 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리안느 님의 통역반지도 받았는데 이렇게 돈까지 받아도 되겠습니까?”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준 님, 언제든 기회가 되시면 아케비안 공작령에 방문해주십시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그러겠습니다.”
 아케비안 공작의 기사인 한스는 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을 몰아 켈리온 자작의 성을 향해 나아갔다.
 준은 아름다운 아리안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윽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뒤돌아 거리로 사라졌다.
 
 켈리온 자작령은 50년 전 국왕으로 부터 영지를 하사받기 전에는 오이란트 왕국의 낙후된 영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진력이 강한 켈리온 자작의 명으로 철광산을 하나 개발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였다.
 영지가 발전하게 되자 다른 광산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에메랄드 보석광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되어 영지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영지 내에 광산이 무려 10개나 되었다.
 켈리온 자작이 광산개발로 거부가 된 것의 이면에는 드워프 장인이 있었다.
 왕국에서 10대 부자에 속하는 켈리온 자작은 후작급에 맞먹는 부유한 영지를 갖게 되었다.
 켈리온 자작령은 10년 전부터 켈리온 2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준이 말을 타고 이동한 곳은 숙박업소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은 벽에 걸려 있는 간판들 중에서 녹색의 늑대 얼굴모양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숙박업소 앞에서 멈추었다.
 녹색 늑대의 그림 밑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서로 교차하며 그려져 있었기에 글을 몰라도 숙박업소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준을 지켜보던 소년이 재빨리 뛰어와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린 울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식사와 빈방이 필요한데, 있느냐?”
 “예. 깨끗한 방과 맛있는 식사를 저렴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알았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가도록 하지. 말에게도 먹이를 부탁한다.”
 “예. 손님.”
 소년에게 고삐를 건네준 준은 그린 울프의 정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30여 명의 손님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테이블에 술통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동시에 준을 쳐다보았다.
 준의 외모가 이들과는 다르게 이국적이었기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190cm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 일평생이 지나도 한 번 볼까 말까한 검은 머리카락, 등에는 바스타드소드를 메고, 허리에는 롱소드 두 자루와 대거 두 자루를 꽂은 모습이었다.
 이국적이지만 잘생긴 얼굴에 강한 기운을 몸에서 뿜어내는 자였으니 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당연했다.
 준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자 모두 찔끔거리면서 시선을 피하였다. 그만큼 준이 내뿜는 기운이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바에 서 있는 배불뚝이 주인에게 걸어간 준은 저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식사와 1인실 방이 필요한데, 있소?”
 “얼마나 묵으실 겁니까?”
 “음··· 일단 이틀만 머물 것이오.”
 “식사는 아침과 저녁, 이렇게 2번 제공되며, 따뜻한 물로 하루에 1번 씻을 수 있습니다. 말의 먹이까지 1실버를 추가하면 21실버인데, 선불입니다.”
 “식사는 어떻게 나오는 거요?”
 “특제소스로 버무린 5가지의 채소와 치즈, 빵, 스테이크. 후식으로는 과일이 나옵니다.”
 “음··· 그 정도면 괜찮군. 정오에도 한 끼 더 주문하면 얼마요?”
 “이틀이면 2번의 식사가 더 제공되는 것이니 2실버만 더 주십시오.”
 “그럼 모두 23실버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여기 있소.”
 준은 돈주머니 속에서 23실버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마구간에 준의 말을 매어두고 안으로 들어온 소년에게 주인이 말하였다.
 “로이, 손님을 203호실로 모시거라.”
 “알았어요. 손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이의 뒤를 따라갔다.
 그제야 사람들도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준은 로이를 따라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긴 통로를 걸어 203호실 앞에서 멈추었다.
 “손님께서 묵으실 203호실입니다.”
 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방 안이 금방 환해졌다.
 안에는 여행자들이 옷을 넣어둘 수 있는 옷장이 하나 있고, 테이블 하나와 깨끗한 흰색 시트가 깔려 있는 싱글침대, 나무 창문이 하나 있는 단순한 구조의 방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고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몸을 씻을 곳은?”
 소년은 방 한쪽의 커튼이 쳐져 있는 곳을 열어젖힌 후 말하였다.
 “몸을 씻을 수 있도록 이렇게 목간통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몸을 씻을 동안에 식사를 가져왔으면 하는데?”
 “예. 즉시 가져오겠습니다.”
 로이가 방을 나가더니 곧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근육질의 노예 5명이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통이 들려 있었다.
 촤아아악.
 목간통에 물이 가득 채워졌고, 하녀가 식사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을 닫고 모두 나가자 준은 먼저 식사부터 했다.
 식사는 제법 훌륭했다.
 옷을 벗고 목간통에 들어간 준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는 비누도 없나? 참, 이 세계는 중세나 그 이하의 낙후된 시대라 생활필수품이 없었지?”
 준은 어쩔 수 없이 물속에서 몸을 불려 문지르는 것으로 목욕을 끝마쳤다.
 “으음, 생각보다 상쾌한 목욕은 되지 못했어.”
 준은 커튼을 젖히고 나와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남겨두었던 노란색, 붉은색, 황금색의 세 가지 과일 중 노란색 과일을 집어 들었다.
 “꼭 참외처럼 생겼네? 맛은 어떨까?”
 후루룩, 쩝쩝.
 “으음···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야. 꼭 귤에다가 바나나를 섞은 것 같은 맛이군. 이번에는 붉은색 과일을 먹어볼까?”
 사과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껍질이 두꺼워 깎아먹어야 하는 과일이었다.
 스윽, 슥슥.
 껍질을 깎자 속은 황금색이었는데, 맛은 뭐랄까··· 망고와 비슷했다.
 “흠··· 이것도 생각보다 달콤하고 맛있군. 나머지 과일도 기대되는데?”
 황금색 과일은 길쭉한 것이 바나나 같이 생겼는데 껍질을 벗기자 속은 녹색과 붉은색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었고 그 맛은 레몬과 수박이 섞인 듯한 묘한 과일이었다.
 “이 과일들, 생각보다 맛도 있고 모양도 특이하군. 그런데 이름이 뭘까? 궁금하네.”
 준은 목욕 후 맛있는 요리도 먹고 후식으로 이름 모를 과일까지 먹어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준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문을 잠갔다. 또한 롱소드를 침대 주위에 놓아두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으음··· 이제 좀 안심이 되는군. 언제나 조심하는 게 제일이지.”
 츠츠츠츠.
 그는 눈을 감고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자 점차 마음이 진정되며 편안해졌다.
 시간은 흘러 새벽이 되었다.
 준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음··· 몇 시간이라도 자둬야겠어.”
 
 짹짹짹.
 새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을 열자 날은 이미 밝아 있었지만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아, 상쾌한 아침이야.”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창문을 닫고 천왕대심공이나 운용하자는 생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츠츠츠츠.
 준의 몸 밖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서서히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2m 정도에서 멈추었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몸 밖으로 내뿜은 기운들은 더욱 많아졌다. 그 기운들은 머리위에서 황금색 덩어리로 뭉쳐지더니 다시 황룡으로 변하면서 준의 몸 주위를 휘돌기 시작하였다.
 휘우우웅.
 그렇게 휘돌던 황룡은 백회혈로 스며들면서 사라졌다.
 황룡이 완전히 사라진 후 허공에 떠 있던 준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감았던 두 눈을 뜨자 황금색의 안광이 1m나 뻗어 나왔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안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후후, 이곳은 환경오염이 없는 세상이라서 그런지 기가 충만하다. 매일 천왕대심공을 운용하다보니 경지가 더욱 심후해졌어. 지금은 비록 7성에 머물러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8성에 다다르게 될 것 같군.”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천왕대심공을 운용하다보니 막대한 기가 하단전에 축적되어 있었다. 이 세상은 기가 충만해 무술을 익히기에는 최적이었다.
 준은 천왕대심공의 구결을 읽고 익힐 때만 해도 반신반의 했으나, 익히면 익힐수록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반지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고는 있지만 글은 아직 모른다. 오늘은 책방에 나가서 책을 구입해 글을 배워야겠어. 그런 다음에 이 세상을 좀 더 알아보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어.”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준은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바 안에서 그릇을 닦고 있던 주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손님.”
 “그렇군요. 이름이 뭡니까?”
 “저는 크린스라 합니다.”
 “크린스? 그렇군요. 지금 아침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린스는 로이에게 말하였다.
 “주방에 말해 식사를 가져오거라.”
 “예.”
 로이는 대답 후 주방 안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준 혼자였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빵과 스프가 나왔다.
 준은 빵을 찢어서 스프에 적셔 먹기도 하고 치즈를 발라 먹기도 하였는데, 주방장의 요리 솜씨가 좋아서인지 맛있었다.
 기다리던 과일이 나오자 준은 어젯밤에 먹은 과일이 생각나 로이에게 물어보았다.
 “로이, 이 과일들의 이름이 뭐지?”
 “아, 설명해드릴게요. 이 노란색 과일은 키온이라는 과일로 생긴 것이 좀 울퉁불퉁하지만 손으로도 쉽게 껍질을 벗길 수 있습니다. 그 맛은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특징이죠.”
 “제법 맛있더군.”
 “예, 가격도 1개에 5실링으로 저렴하면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입니다. 다음으로 이 붉은색 과일은 에론이라 합니다. 모양이 예쁘지만 껍질이 단단해서 칼이 있어야만 껍질을 깎아 먹을 수 있는데, 속이 황금색이며 과즙이 많고 달콤합니다.”
 “에론? 이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인가?”
 “예. 에론도 1개에 5실링으로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입니다.”
 “그렇군. 그럼 이 과일은?”
 “마지막으로 이 황금색 과일은 레콘이라는 과일로 모양은 길쭉하게 생겼지만 손으로도 쉽게 껍질을 벗길 수 있죠. 속은 이렇게 녹색과 붉은색이 꼬여 있고, 그 맛은 새콤하면서도 과즙이 많아 갈증에 아주 좋습니다. 가격은 1개에 7실링으로 이것 중에서는 가장 비싼 과일입니다.”
 “그렇군. 로이, 설명 고마웠다.”
 준은 품속에서 1실버를 꺼내 로이에게 내밀었다.
 “이···이건?”
 “나에게 과일 이름을 가르쳐준 값이다.”
 “이···이건 너무 많습니다, 손님.”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마. 어떠냐?”
 “예, 얼마든지요.”
 “무기점과 양장점, 책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다오.”
 “예.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켈리온 성이 보이는 오른쪽으로 3블럭 걸어가다 보면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무기점을 비롯해 모든 상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군. 고맙다, 로이.”
 “감사합니다, 손님.”
 고개를 끄덕인 준은 잠시 후 그린 울프를 나왔다.
 대로를 조금 걸어가다 보니 길가에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 한 양장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살이 많이 찌고 배가 나온 전형적인 항아리 몸의 40대 후반남자가 걸어 나왔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앙드레 양장점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고개를 끄덕이던 준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을 둘러보았다.
 “손님, 찾으시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입을 옷을 몇 벌 구입했으면 하는데요.”
 “그렇습니까? 그럼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샘플이 많이 걸려 있으니까 원하시는 옷으로 골라보십시오.”
 “그러죠.”
 수십 벌의 옷이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 준은 그중에서 고급 옷 2벌과 야영할 때 입을 편한 옷으로 2벌, 회색 로브를 하나 선택하였다.
 “치수를 좀 확인했으면 하는데요, 손님.”
 “그렇게 하시오.”
 “손님처럼 몸이 좋은 분은 흔치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선택하신 옷들은 치수가 있는 것이라 바로 가져가셔도 되겠습니다.”
 “아··· 잘되었군요. 혹시 배달은 안 해줍니까?”
 “배달도 됩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그린 울프라는 집의 203호실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드리죠.”
 옷값을 계산하고 양장점을 나온 준은 근처에 있는 무기점으로 들어가려다가 망치질 소리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땅, 따땅땅.
 가까워질수록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였다.
 땅땅, 치이익.
 대장간에서는 2명의 사람들이 한창 작업 중이었는데,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고, 집게로 고온에 달구어진 쇠를 집고 있는 사람은 40대 후반이었다.
 그들은 한창 검을 만들고 있었다.
 한쪽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작업을 바라보던 노인이 준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예. 무기를 구입하려고 왔는데 망치질 소리가 들려서 잠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를 구입하려면 앞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준은 대장간의 앞쪽으로 이동해 무기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40대 중반의 나이에 얼굴이 통통하며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어서 제법 남성다운 멋을 풍기는 주인이었다.
 “무기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어떤 종류를 원하시는지?”
 “잠시 구경해보고 결정했으면 하는데요.”
 “예. 얼마든지 구경하셔도 됩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대장간을 보았는데 손님이 원하는 무기대로 특별주문제작도 해줍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클라이튼 무기점은 왕국의 15곳에 지점이 있을 정도로 품질이 좋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무기를 원하십니까?”
 “일단은 무기를 먼저 보고난 후 주문하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저··· 그런데 혹시 마법물품도 판매합니까?”
 “그···그건 저희 상점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마법물품을 구입하시려면 길 건너편에 있는 매직상점으로 가시면 됩니다.”
 “혹시 매직상점에는 물건들을 많이 넣을 수 있는 마법배낭 같은 것도 판매를 합니까?”
 “예. 고가이지만 마법배낭을 판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어디 진열된 무기들을 좀 볼까요.”
 진열된 무기들은 롱소드(Long Sword)를 비롯해 바스타드소드(Bastard Sword), 대거(Dagger), 레이피어(Rapier), 찌르기 위주의 펜싱할 때 쓰는 연습용 검인 플뢰레(Fleuret)도 보였다.
 그리고 세이버(Saver), 일명 샤벨이라 많이 알려진, 기마병이 말 위에서 사용하기 위해 한 손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 가능한 길게 만들어진 검도 있었다.
 대형 전투용 도끼인 그레이트 엑스(Great Axe)와 보통의 전투 도끼인 배틀 엑스(Battle Axe).
 창과 검의 경계선상에 있는 무기로서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글레이브(Glaive), 곧은 자루 끝에 스파이크가 달린 쇠뭉치를 부착한 형태로써 떨어지는 유성의 형태를 닮은 모닝스타(Morningstar).
 전투 중에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발달하게 된 창인 스피어(Spear). 창신의 옆에는 도끼날이 달리고 그 반대편에는 걸어서 당길 수 있는 훅이나 스파이크가 붙어 있다.
 그래서 찌르기, 베기, 걸기, 찍기 등의 모든 공격이 가능하여 마상의 적이든 지상의 적이든 모조리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인 핼버드(Halberd), 창기병이 사용하는 무거운 창인 랜스(Lance) 등 많은 무기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의 종류가 가장 많았다.
 준은 반대편에 진열된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한쪽에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은 장거리 무기들과 갑옷이었다.
 큰활인 롱 보우(Long Bow), 작고 단순한 활인 쇼트 보우(Short Bow), 뿔과 나무, 쇠, 가죽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작은 크기이면서도 매우 긴 사정거리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컴포짓 보우(Composite Bow).
 직사각형의 커다란 방패인 타워 실드(Tower Shield), 레더 아머나 체인 메일 위에 가슴을 가리는 철판을 부착한 형태인 플레이트 메일(Plate Mail), 사슬을 촘촘히 엮어서 만든 갑주인 체인 메일(Chain Mail) 등 거의 대부분 전쟁에서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주인은 준이 관심을 보이는 무구는 설명을 해주었다.
 준은 이렇게 많이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 중에서 가죽 띠에 15cm 길이를 가진 단검 12자루가 촘촘하게 꽂혀 있는 것을 집었다. 그리고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
 “이 컴포짓 보우(Composite Bow)는 얼마입니까?”
 “예, 손님 그 물건은 35실버는 받아야 합니다.”
 “그럼 컴포짓 보우에 필요한 화살의 가격은 어떻게 합니까?”
 “손님께서 이 컴포짓 보우(Composite Bow)를 구입하시면 50발이 들어 있는 화살통을 하나 드리지만, 5실버만 더 지불하신다면 화살통 3개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것을 구입하기로 하지요.”
 “예. 정말 화끈한 손님이십니다. 이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일단은 이것들만 구입하도록 하고, 무기를 특별 주문하겠습니다.”
 준은 미리 생각해둔 무기를 떠올리고는 그것의 크기와 모양을 설명했다.
 주인은 잉크를 찍어서 양피지에 준이 설명한 무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무게와 크기, 모양까지 전문가의 솜씨처럼 잘 그리며 주인은 고개를 간간히 끄덕이면서 알겠다는 듯 동조하였다.
 “햐··· 어떻게 이런 무기를 생각하셨는지?”
 “평소 무기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보니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요. 기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모양이 조금 특이해서 그렇지 그리 오랜 작업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내일까지는 완성할 수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요. 완성되는 대로 제가 묵고 있는 그린 울프 203호실에 배달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손님, 그런데 계약금은 얼마나?”
 “지금 모두 지불하지요. 얼마입니까?”
 “손님께서 구입하신 무구와 특별 주문한 걸 포함하면 24골드 80실버 되겠습니다.”
 “24골드 80실버?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
 아침부터 제법 큰 주문을 받은 주인은 기분이 좋았는지 문 앞까지 준을 따라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음··· 이번에는 마법 상점에 가봐야겠어.’
 마법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은 한 블록 옆에 있었다. 간판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준이 상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열장을 청소하던 주인이 준을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주인은 배가 나온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후덕한 얼굴에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매직 스테프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있는 가방 있습니까?”
 “예, 손님. 그건 이쪽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이곳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어제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한번 둘러보시고 구입하시면 됩니다.”
 “그러죠.”
 진열장에는 마법이 걸린 각종 장신구들의 아티팩트와 상처 치료에 도움을 주는 각종 포션 류가 즐비하였다.
 준이 구입하려는 것은 마법이 걸려 있는 가방이었다.
 진열장에 놓여 있는 것들 중 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주머니였다.
 “이 주머니, 혹시 마법 물품입니까?”
 “예, 맞습니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설명 좀 부탁합니다.”
 “보시면 그냥 작은 주머니 같지만 이속에 짐수레 두 대 분량의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가 말입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기에 물건을 넣든 안 넣든 기본 무게인 200g이며, 도난 방지를 위해 알람마법도 걸 수 있지요. 5서클 마법사께서 만든 아티팩트입니다.”
 “음··· 대단하군요. 이것은 얼마나 합니까?”
 “귀족 분들이 여행을 하실 때 가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며, 5백 골드입니다, 손님.”
 “생각보다 비싸군요.”
 “5서클 마법사께서 만든 마법물품치고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닙니다.”
 이번에 준이 손으로 가리킨 것은 밀 한 말 정도를 넣을 수 있는 크기의 검은 자루였다.
 “이 자루도 마법자루 입니까?”
 “그렇습니다. 짐수레 한 대 분량의 물건을 넣을 수 있으며, 주로 용병대에서 애용하는 물건입니다. 여기에 식량을 넣고 이동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죠.”
 “주머니보다 용량이 작군요?”
 “그렇습니다. 4서클 마스터 마법사께서 만든 물품이며, 가격은 2백 골드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준은 이번에는 한쪽에 진열되어 있는 배낭을 가리켰다.
 “저 배낭은 어떻게 합니까?”
 “예, 손님. 그 마법배낭은 6서클 마법사께서 만든 물품으로 최신형입니다. 가격이 천 골드입니다.”
 “음··· 가격이 비싼 것으로 봐서, 기능이 좋겠군요?”
 “그렇습니다. 이 마법배낭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등에다가 메고 이동할 수 있기에 아주 실용적입니다. 거기에다가 배낭 안에는 짐수레 3대 분량의 물건을 넣을 수 있으며, 기본으로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주머니보다 짐수레 한 대 분량이 더 들어 간다는 것 말고는 특이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6서클 마법사께서 만든 물건이기에 주인 인식 기능이 있습니다. 확실한 물건이며, 명품입니다.”
 “음······.”
 “이 마법배낭에는 우수한 보존마법이 걸려 있기에 외부로 부터 충격이나 마법 공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훼손되지 않으며, 음식을 넣어두어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이 가능합니다. 특히 방수 기능이 있으며, 불에 잘 타지도 않습니다. 또한 주인 인식 기능이 있기에 주인이 아니면 절대 열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명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워낙 고가이기에 저희 가게에도 현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입니다.”
 ‘으음··· 현재 전 재산이 230골드 정도이니 마법자루를 하나 구입하는 게 좋겠어.’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음··· 마법자루가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마법자루를 내밀었고, 준은 대금을 지불하면서 말하였다.
 “보석을 처분하고 싶은데 보석상점이 근처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골드 쥬얼리점으로 가십시오. 주변의 보석상점 중에서는 가장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곳입니다. 매직 스테프에서 소개를 받고 왔다고 말하면 더욱 친절하게 해줄 겁니다.”
 “그렇습니까?”
 “예, 다음에도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준은 매직 스테프점을 걸어 나와 골드 쥬얼리점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에 있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컬컬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석을 처분하려고 하는데 매직 스테프점의 소개로 왔습니다.”
 준은 주인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주인을 바라보았다.
 골드 쥬얼리점의 주인은 150cm의 작은 키에 깡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에 쌍꺼풀이 없고 광대뼈가 툭하고 튀어 나와서인지 무척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자였다.
 “그렇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준은 주인의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았다.
 “처분하실 보석이 어떤 것입니까?”
 “이것 입니다.”
 준은 처분하려는 보석 3개를 모두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리안느 소공녀에게서 받은 보석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간절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받았던 거였다.
 골드 쥬얼리점의 주인은 흰 장갑을 끼더니 서랍 속에서 주먹 크기의 정사각형 검은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정사각형의 검은 상자는 모든 면이 검었지만 윗면만은 투명하였다.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주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3개의 보석 중에서 녹색의 보석을 들어 검은 정사각형 상자의 윗면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상자 위 허공에 녹색 보석이 주먹만 한 크기로 확대되어 나타났다.
 마치 홀로그램을 보는 듯했다.
 준이 보기에 이 검은 정사각형의 상자는 마법 아이템 같았다.
 “손님, 이 그린몬드는 등급이 B플러스급 이기에 저희 상점에서 드릴 수 있는 금액은 80골드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 가격에 처분하죠. 그런데 이 그린몬드의 등급이 B플러스급 이라고 했는데 보석의 등급은 어떻게 나뉘는 것입니까?”
 “보석의 등급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설명드리겠습니다. 모든 보석의 등급은 12등급으로 나뉘는데 A, B, C, D, E, 이렇게 5등급과 각 등급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기에 모두 합하면 10등급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단계 위에는 S 라는 등급이 있으며, 그 위에는 SS등급이 있습니다.”
 “12등급이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25년째 이 업계에 있었지만 S등급을 단 한 번 보았습니다만 SS등급은 그 한 번 조차도 구경하지 못할 정도로 희귀합니다.”
 “그렇군요.”
 “예, 보석 장인들 중에서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 보석을 가공한다고 해도 A마이너스 등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왜 등급이 그렇게 나뉘어져 있는 겁니까?”
 “하하··· 그건 바로 드워프 장인들의 보석 때문입니다. 인간 장인의 최고가 B플러스급입니다만 드워프는 가공한 보석류는 최하 등급이 A 마이너스 등급입니다. 그만큼 드워프 장인의 보석 세공술은 독보적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나머지 것도 감정해주시죠.”
 “예, 손님.”
 골드 쥬얼리점의 주인은 이번에는 붉은빛이 나는 보석을 집어 들고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 검은 상자 윗면에 보석을 내려놓았다.
 허공에 확대된 보석을 잠시 살펴보던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하였다.
 “손님, 이 레드몬드도 B플러스급이고, 조금 더 크기에 120골드까지 쳐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도 처분하겠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보석도 마저 감정해주시죠.”
 “예, 그러지요.”
 이미 감정한 레드몬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주인은 마지막 남은 백색의 보석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감정하였다.
 “오오, 이런 귀한 물건이!”
 “어떻습니까?”
 “아주 귀한 물건이군요. 이 화이트몬드는 A플러스급입니다. 드워프 장인이 가공한 물건이지만 아쉽게도 크기가 조금 작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군요. 그렇지만 이 물건은 흔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300골드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오, 그렇게나 나갑니까?”
 “예, 그렇습니다. 매직 스테프점의 소개로 오셨기에 정확한 감정과 가격을 쳐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이 보석들을 모두 처분하겠습니다.”
 “예. 정말 모처럼 좋은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린몬드와 레드몬드, 화이트몬드의 가격은 모두 해서 5백 골드입니다. 골드화로 드릴까요? 아니면 오이란트 왕실에서 발행한 어음으로 드릴까요?”
 “골드화로 받고 싶은데요. 가능합니까?”
 “예, 즉시 지불해드리겠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의 서랍을 열더니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골드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5백 골드를 집어넣은 주머니를 건네받은 준은 마법자루에 집어넣었다.
 그걸 쳐다보던 주인이 한마디 하였다.
 “마법자루군요?”
 “그렇습니다. 조금 전 매직 스테프점에서 구입한 것이죠.”
 “어쩐지··· 손님께서 왜 보석들을 처분하나했는데 마법 물건들을 구입하느라 현금이 부족했던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갑자기 여러 가지의 물건들을 구입하다보니 돈이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보석들을 처분한 것이죠.”
 골드 쥬얼리점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한 보석을 속이지 않고 시세를 잘 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매직 상점에서 소개한 분인데 당연히 시세를 잘 쳐드려야지요. 다음번에 보석을 구입하려고 하거나 처분을 하려면 저희 골드 쥬얼리점을 이용해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골드 쥬얼리점을 나온 준은 그린 울프로 향하다가 서점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서점 안은 준이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쪽 벽면에 꽂혀 있는 300여 권의 책이 다였다.
 ‘음··· 생각보다 책이 얼마 없네?’
 이마가 벗겨지고 호리한 몸을 가진 30대 후반의 주인이 고개를 내밀면서 준을 쳐다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마케리안 대륙어를 배우려는데 그런 책이 있습니까?”
 “혹시 뮤란 대륙인이십니까?”
 “그···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주인은 뒤돌아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얇은 책 한 권과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이 얇은 책은 마케리안 대륙어의 기초 발음과 글이 그림으로 잘 나와 있는 ‘마케리안 대륙어 완전정복’이라는 책입니다. 두꺼운 책은 기초적인 글을 익히고 난 후 배우게 되는 단어와 그림이 나와 있는 ‘마케리안 대륙어 단어집’이라는 책입니다.”
 준은 주인이 내민 책을 살펴보았다.
 책의 표지는 가죽으로 되어 있었으며, 책장을 넘겨보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처럼 글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완전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배우기 쉽게 되어 있군요. 얼마입니까?”
 “얇은 책은 2골드이며, 두꺼운 책은 5골드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주인에게 7골드를 내밀고 책을 받았다.
 “혹시 마법에 관한 책도 있습니까?”
 “몇 서클에 관한 마법서가 필요하십니까?”
 “마법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아, 그렇다면 설명해드리죠. 예전에는 모든 마법서는 마탑에서 관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3백 년 전부터는 호기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2서클까지의 마법서를 서점에서 판매하도록 되었죠. 지금도 팔고 있습니다. 드릴까요?”
 “어떤 것이 있는지 봅시다.”
 주인은 마법에 관한 책을 다섯 권이나 꺼내었다.
 “이것들이 전부 마법에 관한 책들입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이것은 기초마법에 관한 총정리를 해놓은 ‘마법총요’라는 책이고, 이것은 마나와 마나 고리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마나와 마나 고리 생성방법’이라는 책입니다.”
 “······.”
 “다음으로 이 책은 ‘백마법과 흑마법’ 이며, 이 책은 ‘원소 마법’, 마지막으로 이 책은 ‘신성마법과 드래곤 마법에 관한 진실’ 이라는 책입니다.”
 “모두 얼마입니까?”
 “모두 다섯 권이니 25골드입니다만, 24골드만 주십시오.”
 “검술에 관한 책은 없나요?”
 “있습니다. 대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3대 검술이 설명되어 있는 ‘3대 검술에 관하여’ 라는 책이 있습니다.”
 “3대 검술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까?”
 “하하하,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3대 검술에 모르시다니··· 뮤란 대륙인이시니 어쩌면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죠.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인의 설명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첫 번째는 천이백 년 전 기사 월리엄이 창안한 검술로, 뱀의 움직임을 보고 창안한 스네이크 검술이다. 이 검술의 특징은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최초로 자신이 창안한 검술로 소드마스터가 된 사람이었다.
 두 번째 검술은 대지의 검이라는 검술로, 800년 전 네스란 남작이 창안한 검술이다. 파워를 앞세운 검술로 단순한 듯하지만 그와 상대해서 이긴 자는 전무했다. 네스란 남작은 후일 후작이 되었으며, 또한 소드마스터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세 번째 검술은 번개의 검이라는 검술인데, 눈으로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검술을 펼치는 게 특징이다. 오백 년 전 칼스번이라는 자가 창안한 검술로 후일 그도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그는 백작가문의 차남이었기에 가문을 이어 받을 수 없었다. 대륙을 떠돌다가 20년 만에 왕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마침 전쟁이 일어났기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올리면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칼스번의 형은 백작가문을 이어받아 백작이었지만 그는 후일 가문을 세우면서 후작이 되었다.
 
 책을 구입한 준은 그린 울프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방에서 해결하고는 손가락에 소금을 묻혀서 양치질을 했다. 칫솔과 치약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할 만했다.
 또한 비누 없이 목간통에 들어가 때를 불린 후 손으로 문질러 목욕을 끝마쳤다.
 ‘으음··· 이거 생활필수품이 전혀 없다보니 많이 불편하군. 나중에 시간을 내어 비누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저녁 식사도 마쳤고 목욕까지 끝마친 준은 침대에 기대어 낮에 구입했던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탈태환골을 거친 후 머리가 많이 좋아졌기에 한 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는 밤이 깊어지자 침대에서 가부좌를 틀고 천왕대심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츠츠츠츠.
 준의 몸 밖에선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준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번쩍.
 감았던 두 눈을 뜨자 황금빛의 안광이 뻗어 나왔다.
 ‘후후··· 천왕대심공을 운용할 때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기가 흡수되고 있어. 이런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8성의 경지에 도달하겠는데?’
 날은 이미 밤을 지나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준은 며칠간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약간씩이라도 잠을 자두는 게 몸에 더 좋을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웠다.
 
 짹짹짹.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잠에 빠져 있던 준을 깨웠다.
 “으응··· 벌써 아침인가?”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나자 로이가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준은 기분 좋은 식사 후 어제 구입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로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손님, 저 로이입니다.”
 “무슨 일이냐?”
 “앙드레 양장점에서 주문하신 옷들이 도착했는데요?”
 “그래? 좀 가지고 들어와 줄래.”
 “예.”
 로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 뒤를 따라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은 뒤 나갔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로이, 수고했다.”
 로이가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준은 내려놓고 간 옷들을 손에 들고 살펴보았다. 앙드레 양장점에서 구입한 옷들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돈을 물 쓰듯 하다가는 쪽박 차기 쉬운데, 어쩌지? 그래도 이렇게 낯선 곳에 불쑥 떨어졌는데, 기본적인 것들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않겠어?’
 그는 주문한 옷들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법자루 속에 넣었다.
 오후가 되자 클라이튼 무기점에서 주문했던 물건이 배달되었다. 직원이 노예 두 명을 대동하고 가져온 물건은 상자였다.
 준은 직원에게 1실버를 팁으로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도 물건을 배달하고 이렇게 1실버나 되는 팁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감사합니다, 손님.”
 “수고했어요. 그만 가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들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준은 상자를 열었다.
 “후후, 이것들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지.”
 잠시 나무 상자 안을 내려다보던 준은 만족한 듯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져보려는데 노크 소리가 나면서 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한스라면 알 거라는데요?”
 “한스? 아···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한스가 아리안느 소공녀의 호위를 하던 기사였다는 것과 며칠 전 그와 헤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준은 주문한 무기들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면서 무기가 든 나무상자를 일단 마법배낭 속에 넣어두고 문을 열어주었다.
 “준 님, 오랜만입니다.”
 한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뒤에는 롱소드를 허리에 찬 병사 5명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준 님을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예? 저를요?”
 “그렇습니다. 소공녀님께서 준 님을 켈리온 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무···무슨 일로?”
 “소공녀님께서 큰 은혜를 입으셨는데 제대로 대접도 못하셨다면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아···아닙니다. 그 정도면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래도 소공녀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셨는데, 가시죠.”
 “음··· 알겠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가야하니까 문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준은 앙드레 양장점에서 구입한 옷을 꺼내 입고 기사 한스를 따라 그린 울프를 걸어 나왔다.
 밖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마차가 움직이자 마차를 호위하는 기병들이 따라 붙었는데 모두 10명이나 되었다.
 마차의 작은 창문을 열자 멀리 있는 켈리온 자작의 영주성이 보였다.
 영주성은 웅장하며 거대했다.
 “한스 님, 소공녀님께서는 잘 계시지요?”
 “예, 습격자들 때문에 많이 놀라셨지만 켈리온 성 안에서 충분하게 휴식을 취해선지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이 모든 게 준 님 덕분입니다.”
 “아···아닙니다. 그때는 당연히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차가 켈리온 성의 성문 앞에 도착하자 성문이 스르르 내려왔다.
 마차가 성 안의 정문에서 멈추자, 집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기사 한스가 먼저 내리고 준이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녀님과 자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집사가 뒤돌아서 걸어가자 그 뒤를 기사 한스와 준이 따랐다.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갔는데 벽의 양쪽에는 그림과 조각들이 잘 배치되어 있었다.
 집사는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문을 열자 넓은 홀이 펼쳐졌다.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드리에가 안을 밝히고 홀의 중앙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는 소공녀인 아리안느가 앉아 있었으며, 우측에는 노인이 좌측에는 40대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소공녀님, 준 님을 모셔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소공녀님.”
 “어서오세요, 준 님. 여기에 계시는 분은 켈리온 자작님이시고, 이쪽은 아들인 켈리온 2세입니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난 켈리온 자작이라 하오.”
 “예, 처음 뵙겠습니다. 김준이라고 합니다.”
 “소공녀님께 말은 많이 들었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군요.”
 “가···감사합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준이와 한스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한쪽에 서 있던 집사는 켈리온 자작의 눈짓을 받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하녀들이 들어와 테이블에 저녁 식사를 차렸다. 수십 가지의 고급 요리가 차려졌는데 그동안 준이 보아온 평민들이나 농노의 식탁과는 확연히 달랐다.
 ‘응? 이곳은 유리가 귀한가? 도자기 접시는 하나도 없네?’
 물 잔 5개만 투명한 유리잔이었으며, 모든 요리는 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솜씨가 좋은 주방장이 만든 요리였기에 맛은 매우 좋았다.
 포크와 나이프는 있는데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없었다.
 ‘으음··· 역시 농노나 평민보다는 호화로운 귀족의 식탁이지만 낙후된 사회이기에 아직도 부족한 것들이 많구나.’
 식사가 끝나고 금으로 만들어진 찻잔이 놓여졌다.
 쪼르르.
 찻잔에 담긴 황금색 차를 한 모금 마셔보니 향기로웠다.
 준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차를 마시자 아리안느와 켈리온 자작은 약간 놀랐다.
 평민이나 기사는 차에 익숙하지 않아 준이처럼 저렇게 차를 음미하면서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 차를 많이 마셔본 사람 같아.’
 ‘흐음··· 소공녀님께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대단해 보여.’
 밤이 깊어지자 각자 방으로 돌아갔고, 준도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린 울프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아마 귀빈들이 영주성에 들어오면 묵게 되는 방인 모양이었다.
 준은 잠에 들것 같지 않았기에 가부좌를 틀고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워 잠시 잠에 빠졌다.
 
 날이 밝았다.
 준은 세수를 한 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50명의 병사들이 앉아 있고, 그들의 앞에는 체인아머를 착용한 기사가 허리에 검을 차고 병사들에게 검술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게 없었기에 다른 곳을 쳐다보았더니 정원의 한곳에서 한창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한스의 모습이 보였다.
 땀을 많이 흘리면서도 내려치기와 가로베기, 사선베기 등 다양한 검술을 수련 중이었다.
 ‘으음, 저렇게 무식하게 검술 연습을 하다니··· 쯧쯧.’
 심안을 일으켜 기사 한스의 몸 상태를 살펴보니 하단전에 기가 모이지 않고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나마 오른팔 쪽에 가장 많은 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저렇게 하면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칠 수 없을 텐데?’
 한창 검을 휘두르던 한스는 심호흡을 몇 번하더니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는 가슴 앞으로 천천히 내밀다가 멈추었다.
 부르르르.
 미세하게 떨리던 롱소드의 날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이야압!”
 차앗!
 한스는 기합을 넣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음··· 한스 경이 힘들게 검날에 검기를 불어넣었어.’
 그는 겨우 10번 정도 검을 휘두르더니 곧 멈추었다. 그러자 날에 맺혀 있던 검기도 모두 사라졌다.
 준은 한스의 검술 경지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기사의 몸속도 심안으로 살펴보았더니 역시나 몸에 기가 골고루 퍼져 있었다.
 그도 역시 오른팔에는 좀 더 많은 기가 뭉쳐 있었다.
 ‘음··· 저 기사는 한스 경보다 약하구나.’
 준은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대거를 꺼내 손에 쥐고 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대거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빛이 날 끝에 생겨나 고무줄처럼 주우욱 늘어났다. 검강이 무려 1m나 솟아 나왔다.
 이 세상에서는 검강을 오러 블레이드라고 하는데, 너무 아름다운 빛이었다.
 스스스스.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검강이 대거의 날에서 사라졌다.
 대거를 다시 허리에 꽂은 준은 마법자루 속에서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특별주문 했던 것이 들어 있었다.
 어깨에 착용할 수 있는 띠였는데, 검은색 물결무늬가 약간 들어간 가죽이었다. 단검 같은 것을 꽂아 넣을 수 있는 홈이 있었다. 띠를 어깨에 착용한 준은 이번도 역시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을 꺼내 들었다.
 검은 가죽 밖으로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뽑자 에이형 부메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통적인 형태의 부메랑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며, 멀리 날아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날개가 두 개로 이루어져 있고, 공기의 저항이 적기 때문에 날개가 많은 부메랑보다는 던지는 기술이 필요했다. 은색의 강철로 만들어져 있으며, 날을 세웠기에 칼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약간 특이한 것은 보통의 부메랑에는 없는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준은 부메랑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그는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생각했던 것대로 잘 만들어졌어.”
 에이형 부메랑은 모두 다섯 개였다.
 띠에 에이형 부메랑을 차례대로 꽂아 넣고는 이번에는 삼각형 부메랑을 손에 들었다.
 일명 트라이얼 부메랑이라고도 하는데 날개가 세 개이며, 정삼각형 모양이었다. 에이형 부메랑보다는 비행 거리가 짧고, 던지면 쉽게 되돌아오는데 초보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부메랑이었다. 두 개였다. 이것도 띠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십자형 부메랑으로 일명 크로스 부메랑이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날개가 네 개이며 십자형 모양의 부메랑이라 비행거리가 짧지만 아주 쉽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작은 공간에서도 던질 수 있어서 유리한 부메랑이었다. 이것도 삼각형 부메랑처럼 두 개였다.
 준은 잠시 십자형 부메랑을 만지작거리다가 띠에 꽂았다.
 검은 가죽 띠에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부메랑의 날 일부가 드러난 모습은 멋졌다.
 그는 회색 로브를 꺼내 차려 입고는 방을 나와 정원으로 향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적한 정원의 가장자리를 택한 것이었다.
 역시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조용했다.
 “음··· 여기에서 부메랑을 시험해보는 게 좋겠군.”
 제일 먼저 꺼내 든 것은 십자형 부메랑이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라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휘리리릭.
 회전하면서 날아간 십자형 부메랑은 허공을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준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집었다.
 “이번에는 두 개다.”
 양 손가락에서 날아간 두 개의 십자형 부메랑은 허공을 날아가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그냥 받지 않고 보법을 밟으면서 낚아채더니 다시 날렸다.
 이번에는 작은 나뭇잎을 하나 겨냥하고 던졌다.
 십자형 부메랑은 준이 의도한 대로 잘 날아가 나뭇잎을 박살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이나 연습해보더니 띠에 꽂아 넣었다.
 “하하, 잘 만들어졌구나. 이번에는 삼각형 부메랑을 시험해봐야겠어.”
 휘리리릭.
 삼각형 부메랑을 하나 꺼내 날려보았다.
 십자형 부메랑보다는 훨씬 멀리까지 날아가 허공에서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하나 더 꺼내어 두 개를 동시에 날려보았다.
 허공을 회전하면서 날아간 부메랑은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박살내고는 되돌아왔다.
 삼각형 부메랑과 십자형 부메랑은 준이 의도한 대로 잘 날았기에, 그 성능에 만족했다.
 “후후, 삼각형과 십자형 부메랑은 에이형 부메랑에 비하면 무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
 휘리리릭.
 에이형 부메랑이 준의 손가락을 떠나자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준은 에이형 부메랑을 집어 띠에 꽂으면서 경공술을 이용해 순식간에 그 자리를 피하였다.
 조용하던 정원에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급하게 방으로 되돌아온 준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긴장했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하···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리가 커서 마음대로 시험도 못하겠어.”
 아리안느 소공녀와 켈리온 자작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 준도 참석하게 되었다.
 아리안느 소공녀의 얼굴이 약간 굳어 있는 것으로 봐서 무언가 근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준은 물어보려고 하다가 옆에 앉아 있는 켈리온 자작을 보고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준 님, 이곳 켈리온 성에는 얼마나 머무실 거예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케리안 대륙어도 익혀야 하니까요.”
 “특별한 일이 없으시다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어요?”
 “부탁이요? 무슨······.”
 “아케비안 공작령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경호를 좀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요?”
 “예, 준 님의 실력이 뛰어나시니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으음··· 이를 어쩐다?’
 준은 아리안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곳 켈리온 성에서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려 했는데, 느닷없이 소공녀가 부탁을 해오자 고민에 빠진 것이다.
 “준 님께서 호위만 해주신다면 충분한 사례와 마케리안 대륙 공용어를 가르칠 글 선생까지 붙여드릴게요.”
 “음··· 저에게 글 선생을요?”
 “대륙공용어는 마법의 통역반지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지만 아직 잘 쓰지는 못할 테니까요. 어때요?”
 “음···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알겠습니다. 제가 목적지까지 호위를 해드리겠습니다.”
 “호호, 고마워요. 켈리온 자작님, 그것 좀 주시겠어요?”
 “예, 소공녀님.”
 켈리온 자작의 눈짓에 한쪽에 서 있던 하인들이 두 개의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켈리온 자작은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면서 설명했다.
 “이것은 자네의 신분을 나타내는 기사의 신분증이고, 이것은 오이란트 왕국 어디든 갈 수 있는 통행증이네.”
 “아,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소공녀님의 부탁을 받아 만든 것이네. 거기에 켈리온 성의 기사신분을 새겨놓았네. 그냥 평민으로 하려다가 아무래도 기사가 좋을 것 같아서 그리 하였네.”
 “고맙습니다, 켈리온 자작님.”
 “허허허, 소공녀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켈리온 자작이 두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골드화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이건?”
 “이건 자네가 소공녀님의 의뢰를 받아준 데 대한 의뢰비라 생각하게. 일만 골드라네.”
 “이···이건 너무 많습니다.”
 “물론 의뢰비라고 한다면 많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소공녀님의 생명을 구해준 데 대한 사례금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주게.”
 “음··· 알겠습니다.”
 준이 순순히 켈리온 자작의 말에 수긍하자 아리안느의 얼굴도 밝아졌다.
 “소공녀님, 언제 이곳을 떠날 것입니까?”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다가 내일 떠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숙소에 놓아둔 물건도 가져와야 하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성을 나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의뢰비도 받았지 않습니까?”
 마차를 타고 켈리온 성을 나온 준은 그린 울프에 먼저 들러 방에 놓아두었던 짐을 찾았다. 그런 후 매직 스테프점에 들러 마법주머니를 구입하였다. 크기가 작은 데 비해 짐수레 두 대 분량을 집어넣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물건이었다.
 곡물상점에 들러 밀가루를 충분하게 구입하였고, 또한 과일가게에 들러 각종 과일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게다가 고기 가게에 들러 각종 고기류와 육포도 구입했다.
 이렇듯 혼자서 세 달 정도를 먹을 분량을 구입했더니 어느새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 있었다.
 준은 즉시 마차를 타고 켈리온 성으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켈리온 성의 광장에는 소공녀 아리안느가 타고 갈 마차와 짐을 실은 수레 세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으로 남자 노예 10명과 하녀 3명, 기병 50명이 대기해 있었다.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모습을 보였다.
 아리안느 소공녀는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여행자들의 편안한 복장인 은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겉은 풍성한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아리안느 소공녀의 미모는 뛰어났다.
 그녀들의 뒤를 기사 한스와 준이 따랐다.
 그들과 10m 정도 거리를 두고 켈리온 자작과 켈리온 2세, 30대 후반의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준에게 다가온 그들은 서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인사 나누게. 이 사람이 자네의 글 선생이네.”
 “그렇습니까? 준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준 님의 글 선생을 맡게 된 네디스 폰 쉐인이라 합니다.”
 김준과 글 선생 네디스 폰 쉐인이 인사를 나눌 동안 켈리온 자작도 아리안느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는데, 귀족이라서 그런지 소공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소공녀님, 공작 각하의 생일에 뵙겠습니다.”
 “예. 켈리온 자작님, 고마웠습니다. 그럼.”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들어가자 한스를 비롯해 준, 글 선생 쉐인까지 마차에 올랐다.
 “출발!”
 기병들의 대장인 맥칸이 외치자 마차와 기병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짐수레에는 노예들과 하녀들이 타고 뒤따라왔다.
 켈리온 자작의 영주성을 벗어난 일행은 곧 외성에 도착하였고, 성문을 바로 통과해 아케비안 공작령이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40일 정도 걸리는 제법 먼 곳이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자는 언덕의 나무 위에 서 있었는데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크크크,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군. 곧 그 물건은 내 차지가 될 것이다.”
 스스스슷.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던 그자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덜컹덜컹.
 땅이 고르지 못해서 마차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지난 이틀 동안은 길이 제법 잘 닦여져 있는 평지였기에 아무런 사고 없이 순조롭게 이동을 하였지만, 3일째로 접어들자 길이 심하게 나빠졌다. 켈리온 자작령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갔으며, 전방에는 산이 나타났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던 기병들의 대장인 맥칸이 말을 돌려 마차로 다가와 말하였다.
 “소공녀님, 곧 날이 저물 시간이니 산을 통과하지 말고 야영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야영할 것이니 서둘러라!”
 맥칸의 말에 기병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곡의 적당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리 험한 산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산의 입구에서 야영을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무리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밤에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는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천막을 치고, 하녀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0명이나 되는 기병들과 소공녀 일행, 10명이나 되는 노예들과 자신들까지 먹으려면 제법 많은 양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렇기에 음식을 만드는 일에 손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은 10명씩 조를 이루어 산의 초입에서 흩어져 땔감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가져온 장작을 쌓아 모닥불을 피웠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얼마 후 연기가 줄어들었다.
 준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 물을 끓였다. 그리고 야영 첫날에 만들어두었던 천연비누를 꺼내보았다. 앞으로 쓰려면 더 만들어두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불을 지피고 남은 재를 끌어 모아서 물에 우려내었다. 이것은 양잿물이라고도 하고, 가성소다라고도 한다.
 두 번째 준비한 것은 고기를 굽자 나온 폐기름이었다. 이것은 찌꺼기를 잘 걸러 모아둔 것이다. 이 둘을 한곳에 부은 후 잘 저었다.
 30분 정도 젓자 걸쭉한 액체가 되었다.
 여기에다가 주위에서 구해온 향기로운 허브 즙을 넣고 잘 저었다. 그리고 천연비누의 사각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하나 잘라 그 속을 잘 파내 직사각형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걸쭉한 액체를 그 속에다가 부어 그늘진 곳에서 놓아두었다.
 날씨가 건조해서인지 비누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말랐다.
 준이 만든 천연비누는 회색도 검정색도 아닌 두 가지 색이 섞인 칙칙한 색이었다.
 ‘음···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대로 해보았는데, 실패인가?’
 허브 식물의 즙을 듬뿍 넣어서인지 향기는 그런대로 좋았다.
 “그나마 향기는 좋군. 이젠 직접 사용해보는 일만 남았어.”
 준은 길쭉한 직사각형의 틀에서 천연비누를 떼어내어 대거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렇게 해서 천연비누가 10개나 만들어졌다.
 마법주머니 속에서 천연비누를 꺼내어 손을 씻어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쓸 만했다. 더럽던 손이 아주 잘 씻겼기 때문이다.
 “됐어, 성공이야.”
 얼굴도 씻어 보았는데 뽀송한 게 좋았다.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았기에 준은 아예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비누로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천연비누에 만족해하며 마차로 돌아왔더니 아리안느는 놀란 눈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아직 위생관념이 적었다.
 소공녀인 아리안느도 매일 세수를 하고 실로 이를 닦는 정도였다. 오늘이 켈리온 성을 떠나온 지 3일째인데 아직 머리를 감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리안느에게 향기가 나는 것은 방향 주머니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향수라는 것도 개발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모든 것에서 낙후된 세상이었다.
 “준 님, 향기로운 냄새가 나네요?”
 “몸을 씻어서 그럴 겁니다.”
 “무엇으로 씻으셨는데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죠?”
 “제가 개발한 비누라는 물건인데 하나 드릴 테니 써보십시오. 아주 좋을 겁니다.”
 “비누라고요?”
 “예, 여기 있습니다.”
 준은 천연비누 하나를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비누를 받아든 그녀는 냄새를 맡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절대 먹으면 안 됩니다. 또한 눈에 들어가도 아주 따갑습니다. 그것만 조심하시면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될 것입니다.”
 “아···알겠어요.”
 “사용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손을 씻는다고 가정하면, 손에 물을 묻혀서 이 비누를 약간 문지르면 거품이 일어납니다. 그때 물에 씻으면 때가 벗겨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래요? 아주 간단하네요?”
 “예, 그럴 겁니다. 일단 손을 씻어 본 후 나중에 목욕할 때도 사용해보면 아주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럼 당장 사용해볼게요. 베누아, 가자.”
 “예, 소공녀님.”
 아리안느가 천막 속으로 들어가자 하녀 베누아가 뒤따라갔다.
 아리안느가 하녀 베누아의 도움으로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자 천막 밖에서 기사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공녀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어요, 한스 경.”
 천막 속에서 걸어 나온 아리안느는 더욱 아름다웠다. 원래부터 아름다웠던 그녀였지만 방금 목욕을 끝마치고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습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준을 비롯해 한스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한마디 하였다.
 “왜 그러고들 있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우십니다.”
 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아리안느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비누로 목욕했더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그러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들은 천막 앞에 놓인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켈리온 자작이 보내준 시녀들의 음식 솜씨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공터의 중앙에는 모닥불을 크게 피워 놓았기에 주위가 제법 따뜻하면서도 밝았다.
 아리안느와 한스, 준, 쉐인, 맥칸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노예들은 한쪽에 앉아서 식사를 했으며, 베누아는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50명의 기병들도 10명씩 조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쩝쩝, 후루룩.
 야외에서 먹는 저녁이라 더 맛있었기에 준은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준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깨작거리던 아리안느도 준이 식사하는 것을 보더니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웃었다.
 ‘어머, 어쩜 저렇게 예절 없이 먹을 수 있지?’
 ‘허어, 며칠은 굶은 사람 같군.’
 ‘이게 그렇게 맛있었나?’
 한참 신나게 먹던 준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크흠.”
 “어어험.”
 “흠흠.”
 준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빵을 뜯어 입에 넣으면서 스프를 떠먹었다.
 잠시 후 후식까지 모두 비운 준은 만족한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이 먹어치운 음식의 양이 자신들의 배가 넘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자 베누아가 향기로운 차를 가져왔다.
 “소공녀님, 에델차입니다.”
 쪼르르.
 아리안느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준도 베누아가 부어주는 차를 마셨다.
 ‘음··· 에델차라··· 향이 좋구나.’
 준은 배도 부르고 향기로운 차도 한잔 마셨으니 소화라도 시킬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물가에 있는 제법 크고 평평한 바위였다.
 준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먹었나? 소화도 시킬 겸 천왕대심공이나 운용해보자.’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기가 하단전에까지 이르도록 했다.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은 준을 쳐다본 한스와 맥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두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면서 천왕대심공을 운용한 준은 석상이 된 것처럼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대로 앉아 있었다.
 주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병들은 준이 앉아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그 자세로 있자 서로 모여 잡담을 시작하였다.
 “야··· 저것 봐. 얼마나 더 저러고 있을까?”
 “심심하던 참에 잘되었군. ‘30분은 더 있는다’에 20실링 걸었다. 너는?”
 “좋아. 나는 30분 안에 일어난다. 30실링.”
 “어허··· 무슨 소리, 한 시간은 더 앉아 있을 거야.”
 우루루.
 기병들은 세 편으로 나뉘어 내기를 걸었다.
 귀가 밝은 준은 기병들의 내기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하고 계속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어느덧 30분이 넘어 한 시간이 지나자 울고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내기에서 이긴 자들은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돈을 잃은 자들은 울상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준은 무려 3시간을 더 그대로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기병들은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흩어져버렸다.
 준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응? 이곳으로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어.’
 츠츠츠츠.
 모닥불 근처를 제외한 모든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의 심안에는 모든 것이 대낮같이 환하게 보였다.
 야간 사냥을 나온 오크 무리였다.
 오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도 코를 벌름거리며 곧장 야영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각보다는 후각이 더 발달된 모양이었다.
 ‘으음··· 가만 보니 62마리나 되는군. 느낌에 저것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좀 더 주위를 살펴봐야겠어.’
 츠츠츠츠.
 심안을 이용해 주위를 더 살펴보았지만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걸까? 어? 저게 뭐지?’
 산속의 서쪽 편에서 은신해 있던 자가 조금 움직임으로써 준의 심안에 걸리게 되었다.
 나뭇가지와 잎으로 위장을 해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밤이라 더욱 구별이 힘들었지만, 본질을 보는 심안에는 들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의 무장을 갖춘 무리들이 주위에 은신해 있었다. 잠시 그들을 파악해 보았더니 250명이나 되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아. 저놈들이 기습공격을 하려는 모양인데? 대비를 하고 있어야겠어.’
 아리안느가 있는 천막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스에게 다가간 준은 나직하게 말하였다.
 “한스 님,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 말입니까?”
 “예, 조금 급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에 앉으시지요.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금 오크들이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오크들이요? 얼마나 됩니까?”
 “현재 저의 이목에 걸린 오크 무리는 62마리입니다.”
 “으음··· 그렇게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는 오크가 아니라 주변에 은신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무장한 무리들입니다.”
 “예? 그게 무슨······.”
 “쉬잇, 조용히 말씀하십시오. 놈들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산의 서쪽 80m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데, 대략 250명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병 50명이 전부인데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오크 무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찰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한곳으로 모여서 적들을 막으라고 기마병들에게 은밀히 말해야 할 겁니다. 저는 그동안 오크 무리와 놈들을 막아 보겠습니다.”
 “혼자서 가능하겠습니까?”
 “이 방법밖에 없으니 해볼 수밖에요. 한스 님은 서둘러 아리안느 소공녀님을 마차로 모시십시오. 아무래도 마차가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천막보다는 철판을 덧댄 마차가 훨씬 안전할 겁니다.”
 “당장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당장 소공녀님을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한스는 즉시 소공녀의 천막으로 가서 베누아를 불렀다.
 아직 잠을 잠자리에 들지 않았기에 한스의 부름에 머리를 천막 밖으로 내밀었다.
 “한스 님,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즉시 소공녀님을 모시고 마차에 들어가 있어라. 우리를 습격하려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아···알겠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습격을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베누아는 한스의 말을 알아듣고 천막 속으로 사라졌다.
 준은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후 마법자루 속에서 컴포짓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었다.
 뿔과 나무, 쇠, 가죽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작은 크기이면서도 매우 긴 사정거리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컴포짓 보우였다.
 스윽.
 컴포짓 보우의 줄을 잡아당겨 어두운 산의 한 곳을 겨누고는 손가락을 놓았다.
 투웅.
 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아무리 컴포짓 보우의 사정거리가 길다고 해도 적들이나 오크 무리는 250m가 넘는 거리에 있었다.
 퍼억!
 나뭇잎으로 위장해 엎드려 있던 자의 등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크으윽!”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그자는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투웅.
 또 한 발의 화살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고는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자의 가슴에 명중되었다.
 “커억!”
 믿을 수 없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두 명을 가볍게 처리한 준은 이번에는 점점 접근해오는 오크 무리에게 화살을 쏘았다.
 퍼억!
 취에에엑.
 화살은 오크의 머리통을 뚫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오크가 쓰러지자 나머지 오크들이 흠칫 하면서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크의 뛰어난 후각에 인간의 피 냄새가 들어왔다.
 오크 무리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피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당황한 은신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오크 무리와 충돌한 뒤였다.
 몬스터들 중에서도 전투종족이라 불리는 오크들이었기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스의 말에 따라 기병들을 한곳에 모은 후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기병대장 맥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타난다는 적들은 나타나지 않는데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화살을 쏘는 준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맥칸은 옆에 있는 한스에게 말하였다.
 “한스 님, 정말 적들이 있는 겁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저자는 왜 쓸데없이 허공에다 화살을 쏘는 겁니까?”
 “이유가 있을 거요.”
 “아니, 어두운 산을 향해 화살을 쏘는 데 이유가 있다고요?”
 “그렇소. 산속에는 오크와 우리를 기습하려는 무리가 은신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말입니다.”
 맥칸과 한스가 대화를 나눌 때였다.
 갑자기 준이 화살을 쏘다 말고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산의 입구까지 접근하더니 속사로 화살을 쏘았다. 능숙한 궁병이라고 해도 이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다.
 준은 화살통 속에서 화살을 꺼내 줄에 걸고 쏘는 손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슈슈슈슈슝.
 어두운 밤하늘을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오크나 은신해 있던 무리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준에게 밤을 대낮같이 훤하게 볼 수 있는 심안이라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산의 초입, 한 나무 위에 회색 로브를 입은 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아주 얇은 나뭇가지라 무게를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으나 신기하게도 나뭇가지는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츄웅.
 한 발의 화살이 그에게 날아왔다.
 그러나 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화살 공격을 피하였다.
 스윽.
 회색 로브를 입은 그는 품속에서 크로스 보우를 꺼내들었다.
 츄츄츄츄츙.
 은빛이 번뜩이는 퀘럴이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보통의 크로스 보우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기능이었다.
 기병들이 모여 있는 곳에 퀘럴이 날아와 가슴이나 어깨, 머리를 격중시켰다.
 “크억.”
 “아아악.”
 기병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퀘럴의 파괴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격중된 것은 모두 관통해 버렸다.
 은폐물에 몸을 감추고 있던 기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우수수 쓰러졌다.
 크로스 보우에서 발사된 퀘럴의 파괴력은 그만큼 공포스러웠다. 이는 마법이 가미된 아티팩트 무구가 아니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퀘럴이 날아온다! 엎드려!”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라!”
 기병 대장인 맥칸과 기사 한스의 외침에 기병들은 서둘러 땅바닥에 엎드렸다.
 벌써 8명의 기병들이 퀘럴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준은 크로스 보우를 가진 자를 향해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았다.
 슈슈슈슈슝.
 한 번에 다섯 발이나 되는 화살이 날아오자 그자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하면서도 크로스 보우를 준과 기병들에게 날렸다.
 츄츄츄츄츙.
 어두운 밤이라서 퀘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날아오는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는지 짐작이 되었다.
 준은 컴포짓 보우를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보법을 이용해 상체를 흔들면서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기병들은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퀘럴에 맞아 부르르 떨다가 잠잠해졌다.
 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그자는 더 높은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사라져버렸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젠장, 저것도 마법인가?’
 정체를 알 수없는 자였지만 은신해 있던 자들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 짐작되었다.
 목표물이 사라져버렸지만 준은 그대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오크 무리와 은신해 있던 자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채채챙, 파팍.
 오크 무리와 은신해 있던 무리가 서로 충돌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오크들이 제법 잘 싸우고는 있었지만 은신해 있던 자들도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자들이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고 있었다.
 오크는 겨우 20여 마리가 살아남아 싸우고 있었으며, 은신해 있던 무리도 250명에서 170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80명 정도가 오크와 준의 화살 공격에 쓰러진 것이다.
 경공술을 이용해 빠르게 앞으로 날아가던 준은 허리춤에서 두 개의 부메랑을 빼 날렸다.
 날아가는 부메랑에는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혀 있었지만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끼아아아앙.
 마치 소프라노가 최고음으로 외치는 것 같으면서도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 같은 묘한, 아무튼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인적인 음파의 영향으로 은신해 있던 자들과 오크 무리는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지럼증까지 생기는 묘한 소리였다.
 가가가각.
 “아아악!”
 “커억!”
 갑자기 날아온 부메랑에 두 명의 가슴이 쩌억 갈라져 분수처럼 피를 내뿜으면서 쓰러졌다.
 휘리리릭.
 허공을 선회하던 부메랑은 또다시 근처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였다.
 “뭐···뭐야?”
 “습격이다. 조심해!”
 끼아아아앙.
 또다시 괴상한 소리가 나면서 두 명이 고꾸라졌다.
 준은 다시 부메랑 두개를 날렸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을 손가락으로 집어 날리기를 반복했다.
 싸움은 갑자기 끼어든 준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내공을 실은 준의 손바닥에 격중당한 자들은 피를 내뿜으면서 튕기듯 날아가 떨어졌다.
 보기엔 살짝 미는 듯한 동작이었으나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8~10m 정도 날아가 버렸다.
 파파팍.
 퍼퍽.
 “크악!”
 “커억!”
 종횡무진 활약하는 준 때문에 채 5분도 안 되어서 30명이나 쓰러졌다.
 준은 날린 부메랑이 되돌아올 동안 주먹이나 손바닥을 휘두르면서 주위에 있는 자들을 날려버렸다. 환상적인 장면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자들은 다리를 떨면서도 연신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저···저자는 악마야.”
 “도망쳐야 돼.”
 겁을 집어먹은 자들 중 한 명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하자 공포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한편, 허공에서 사라졌던 회색 로브를 입은 자는 준이 산속으로 들어간 후 다시 나타나 아리안느가 있는 야영지를 습격하였다.
 위력적이며 공포스러운 크로스 보우를 쏘자 퀘럴이 연속으로 날아왔다.
 퍼퍼퍽.
 “아악!”
 “커억!”
 하늘 위에서 쏘는 것이었기에 엎드린다고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놈이 하늘에 있다! 보우로 공격해!”
 “조심해! 놈이 계속 퀘럴을 쏘고 있어!”
 회색 로브를 입은 자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퀘럴을 쏘았는데, 방패를 들어 막아도 그것을 뚫고 들어와 가슴을 관통했다. 또한 나무 뒤에 숨어도 퀘럴은 어김없이 나무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피범벅으로 만들어놓았다.
 도무지 저 무지막지한 퀘럴을 막을 만한 게 없었다. 유일한 길은 검으로 튕기거나 피하는 것인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화가 치민 맥칸은 하늘에 떠 있는 자에게 외쳤다.
 “이 비겁한 놈아, 땅으로 내려와서 싸우자!”
 “크크크, 비겁하다고 욕해도 소용없어. 모두 죽일 거야.”
 “으아아··· 죽어라, 이놈!”
 맥칸이 화살을 쏘았지만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를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츄츄츄츄츙.
 폭격하듯이 쏘는 퀘럴 때문에 기병들은 제대로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쓰러졌다. 50명이나 되던 기병들이었지만 이젠 10명 정도도 남지 않았다.
 
 산속에서는 준이 이상하게 양쪽에 끼어들면서 오크를 도와주었기에, 오크 무리도 힘을 내어 정체를 알 수없는 자들을 공격하였다.
 뒤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물러나던 준은 양손을 움켜쥐면서 기를 끌어 모았다가 양손을 내뻗었다.
 “천왕십이수!”
 파파파파팡.
 푸르스름한 주먹 모양의 강기가 무려 12개나 생성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퍼퍼퍼퍽.
 “커억!”
 “아아악!”
 위력이 강력한 강기 공격이라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박살내버렸다.
 강기 공격을 피하려고 나무 뒤에 숨는 자도 있었지만, 나무도 강기의 위력에 박살나면서 그 충격파에 내장이 파열되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무려 40명이 넘는 인원이 이 한 수에 쓰러진 것이다.
 
 “아아악”
 켈리온 성에서 따라왔던 하녀들 중 한 명이 퀘럴에 가슴을 관통당하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미 켈리온 성에서 지원받은 세 명의 하녀들 중에서 한 명이 퀘럴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산속에서 무서운 기세로 적들을 죽이고 있던 준은 하녀의 비명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아차! 도망쳤던 그놈이 다시 나타난 모양이군.’
 파파팍.
 경공술을 발휘해 그곳을 이탈한 준은 최고 속도로 야영지로 되돌아왔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한 번 도약하면 30m 정도를 날았다. 그러다가 다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곤 하였다.
 준이 야영지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한스가 좌측 팔에 퀘럴을 한 방 맞은 뒤였다.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관통하지는 못하고 박혀 있었다.
 맥칸의 가슴과 옆구리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퀘렐이 세 발이나 관통했기에 치명상을 입어 살기는 어려웠다.
 비틀비틀.
 맥칸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끄으으··· 이렇게 허무하게······.”
 울컥.
 그는 입에서 검붉은 피를 내뿜더니 고꾸라졌다.
 이로써 살아남은 사람은 마차에 타고 있는 아리안느와 베누아, 쉐인,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하녀 한 명, 팔에 부상을 입은 기사 한스와 기병 두 명이 전부였다.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던 그자는 크로스 보우를 다시 겨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끼아아아앙.
 돌아보았더니 낯선 무기가 코앞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허엇, 이···이런!”
 당황한 그는 크로스 보우를 쏘았다.
 티티팅.
 연속으로 발사된 퀘럴은 부메랑에 부딪치면서 튕겨졌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갑자기 부메랑이 두 개로 분리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준이 두 개의 부메랑을 서로 끼워서 날린 것이었다.
 준의 의지에 따라 부메랑은 좌, 우측으로 휘어지면서 그자에게 날아들더니, 이윽고 우측 팔을 잘라버렸다.
 “끄아아악··· 내 팔!”
 그자의 우측 팔이 땅으로 떨어지면서 붉은 피와 함께 크로스 보우도 떨어졌다.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계속 지를 여유가 없었다. 팔을 자르고 지나쳤던 부메랑이 허공을 선회하면서 다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 재차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해 겨우 부메랑 공격을 피하였다.
 “으아아! 또 네놈이냐? 두고 보자! 오늘의 수모는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다.”
 츠파파팟.
 원독에 찬 말을 외친 후 그는 또다시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부메랑을 회수한 준은 피식거렸다.
 “흥, 다음번에는 네놈을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다.”
 준이 다가오자 그제야 아리안느도 안심이 되었는지 마차에서 나왔다.
 “소공녀님, 제가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준 님. 이번에도 큰 도움을 받았어요.”
 “당연한 일인걸요.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디로 가죠?”
 “저 산에는 오크와 정체를 알 수없는 자들이 많으니, 우선 이곳을 벗어나면서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리안느 곁으로 한스가 다가왔다.
 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 님, 부상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포션이 있어서 팔에 박힌 퀘럴을 뽑고 외상을 치료했으니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공녀님, 준 님의 말씀대로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마부와 10명의 노예들이 퀘럴에 맞아 쓰러졌기에 마차를 몰 사람이 없었다.
 “소공녀님,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말을 타고 가셔야겠습니다.”
 “알겠어요, 한스 경. 그렇게 할게요.”
 간단하게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준비하는 동안 준은 땅에 떨어져 있는 크로스 보우를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상당히 위력적인 무기가 틀림없군. 일단 챙겨둬야겠어.”
 잠시 후, 말에 올라탄 준과 아리안느 일행은 야영지를 떠났다.
 산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무리들이 오크를 물리친 후 야영지로 왔으나 아리안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퀘럴 공격에 당한 자들만 수십 명 쓰러져 있었을 뿐이다.
 아리안느를 납치하기 위해 의뢰를 받은 이들은 이글 용병대로, 회색 로브를 입은 자에게 막대한 의뢰비를 받고서 출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속에서 은신하면서 기회를 보던 중에 예상치 못한 오크 무리의 공격을 받았으며, 준에게까지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50명이나 되던 이글 용병대는 절반도 안 되는 106명만 남았다.
 이글 용병대장인 스칸디 곁으로 부관인 쉬츠가 다가와 말하였다.
 “대장님, 마차는 그대로 두고 말을 타고 간 것 같습니다.”
 “으음, 얼마나 되어 보이나?”
 “말발굽의 흔적으로 보아서는 여덟인 것 같습니다.”
 “알았다. 즉시 추격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모두 말에 올라타라! 즉시 추격할 것이다!”
 
 다가닥 다각.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길을 따라 8마리의 말이 이동 중이었다.
 기병 두 명이 앞장서고, 아리안느와 한스, 준, 쉐인, 베누아와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하녀 한 명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위는 온통 녹색 풀밭이었다. 약간 경사진 언덕만 있을 뿐 평야와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대낮이라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반나절가량을 말 위에서 이동하였기에 남자들은 아직 괜찮았지만 연약한 아리안느와 하녀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한스 님,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준의 말에 한스는 아리안느와 하녀들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합니다. 미쳐 소공녀님이 힘드신 걸 몰랐습니다.”
 “마침 저기 언덕 위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사방이 탁 트였기에 주변을 살피기에도 좋고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덕위에 도착한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각자 말 옆구리에 묶어두었던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마셨다.
 아리안느도 하녀들이 건넨 물주머니를 받아 물을 마셨다.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과일을 꺼내 하녀들에게 건네었다. 그들은 달콤한 과즙과 과육을 나누어 먹었다.
 한스는 준과 함께 아리안느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지도가 그려진 양피지를 꺼내어 펼쳤다.
 “소공녀님, 약 반나절 정도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그대로 직진한다면 공작 각하의 정적인 헤리슨 백작령이 나올 테고, 우측 길로 이동한다고 해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바로 드로이안 산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쩌죠, 한스 경?”
 “일단은 드로이안 산맥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몬스터들이 많아서 위험이 예상됩니다.”
 “두 곳 다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헤리슨 백작령보다는 그래도 드로이안 산맥을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드로이안 산맥은 몬스터도 많고 여간 험한 곳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그렇습니다. 여기 준 님께서 계시기에 이런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왕국의 10대 상단이 가끔 통행하기도 합니다.”
 “왕국의 10대 상단이 말입니까?”
 “예, 소공녀님. 몬스터가 많이 살고 있기에 300명 정도 규모의 용병대를 이끌고 드로이안 산맥을 넘는다는군요.”
 “하긴, 그 정도 규모면 어지간한 몬스터도 접근하기 힘들겠어요.”
 “그렇습니다만, 우리에게는 무척 힘든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겨우 여덟 명이 전부이니 말입니다.”
 “한스 경, 내가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꼭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죽더라도 준 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한스 경이 죽긴 왜 죽어요?!”
 “소공녀님, 그래서 제가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한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리안느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옆에 서 있던 준이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 님, 드로이안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이 그렇게 위협적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실을 추격해오는 적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군요.”
 “아마 이번에는 기회만 보고 있지 않고 바로 막강한 무력으로 소공녀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운 좋게 그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드로이안 산맥에 살고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그럼 신속하게 드로이안 산맥을 지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미 적들은 우리가 어디로 갈지 예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놈들이 먼저 드로이안 산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기다린다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놈들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큰일이군요.”
 “그러니 고민입니다. 드로이안 산맥만 잘 넘는다면 공작 각하께서 보내신 병력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니 더 이상 적들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한스 님, 다른 방도가 없다면 드로이안 산맥을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그럼 걱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체력을 회복한 후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소공녀님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준 님의 말이 맞아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겠어요.”
 “으음··· 소공녀님, 그럼 더 이상의 의견이 없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회의는 끝이 났으며, 베누아와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하녀 베스는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일행이 전부 여덟뿐이라 금방 식사가 준비되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언덕 위 길가의 풀밭에 자리를 잡았기에 천막은 치지 않고 그냥 모포만 깔고 휴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야 언제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우웅, 붕붕.
 날이 어두워지자 풀밭의 언덕으로 나방 한 마리가 날아와 주위를 날아다녔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나방 같았지만 두 눈이 붉은 게 조금 이상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있던 준은 나방이 날아다니는 소음이 거슬렸다.
 츄웅.
 준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간 지공에 나방이 박살나버렸다.
 “음···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준이 있는 곳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글 용병대가 대기해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 합류한 마법사의 조언을 수렴했다.
 백색 로브를 입은 프린스는 화염계 마법을 익힌 5서클 마스터급의 마법사였다.
 부대장인 쇼칸과 함께 의뢰받았던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용병대장인 스칸디의 긴급 통신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리안느의 뒤를 추격하면서 스칸디 대장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마법사들이란 원래 분석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게 일이라 머리가 뛰어난 편이었다.
 프린스가 스칸디의 말을 듣고 판단한 결과, 공격할 때 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5km나 떨어져서 대기하면서 나방에 마법을 걸어 아리안느가 있는 언덕을 정찰해본 것이다.
 “끄으으··· 젠장!”
 울컥.
 프린스는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더니 입에서 피를 한사발이나 내뿜고서야 괜찮아졌다.
 옆에 있던 스칸디 대장과 쉬츠 부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린스, 괜찮나?”
 “크으음, 괜찮습니다.”
 “프린스, 갑자기 왜 그러나?”
 “으음··· 대장님께서 말해주셨던 그자가 눈치를 채고는 나방을 박살내버렸습니다.”
 “으··· 또 그놈이야?”
 “이것으로 놈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습니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군.”
 “어차피 소공녀는 드로이안 산맥으로 갈 것입니다. 길을 앞질러서 가기보다는 뒤를 따라가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생겼을 때 공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소공녀 일행은 겨우 8명이야. 우린 229명이나 되는데 뒤만 따라가야 하는가?”
 “비록 106명에서 123명이 증원되어 229명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놈의 실력이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나 어쩌면 소드마스터급에 근접한 놈인지도 모릅니다.”
 “그···그럴 리가?”
 “아닙니다. 대장님, 만약 놈이 소드익스퍼트 중급만 되어도 이글 용병대원 50명과 맞먹습니다. 상급이면 150명이고··· 만약 소드마스터급이라면 이글 용병대원 전원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럼 수적인 우세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프린스가 있기에 적절하게 화염계 마법으로 지원공격을 한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역시 프린스야. 이제야 그놈을 처리할 방법이 생겼군. 프린스의 작전대로 할 것이니 모두들 오늘밤은 마음껏 쉬어라!”
 
 언덕 위의 풀밭에서 가부좌를 틀고 천왕대심공을 운용 중이던 준은 그동안 꾸준하게 기를 끌어 모아서인지 넘치는 파워를 느꼈다. 현재는 7성의 경지였지만 곧 8성에 들어갈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구나. 이래서는 절대 원하는 걸 잡을 수 없어.’
 그는 흐트러진 마음을 잡기 위해서 먼저 숨결부터 안정시켰다. 긴 호흡을 통해서 점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파앙.
 갑자기 머릿속에서 그동안 꽉 막혔던 것이 터지면서 환희가 찾아왔다. 그리고 마약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진 것처럼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츠츠츠츠.
 그동안 깨닫지 못해서 답답했던 구결이 일시에 다 풀렸다.
 ‘후후후, 깨달았다! 드디어 천왕대심공의 8성에 올랐어!’
 준은 느낌만으로도 7성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 푸르스름한 안광이 뻗어 나왔으나 한 번 더 눈을 깜박거리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준이 일행과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6장 드로이안 산맥의 혈투
 
 
 활활활.
 약해진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집어넣자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지만 피곤함을 모르는 준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심안을 일으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법 멀리까지 살펴보았지만 위험이 될 만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후, 컨디션이 최상이군. 아침에 드로이안 산맥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적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리안느는 내가 지켜줘야겠어. 틈틈이 게릴라 전법으로 적들을 괴롭히면서 산맥을 나아가면 될 것 같아.’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크로스 보우를 꺼내었다.
 기병들을 많이 죽인 놈의 무기였다. 준이 생각하기에 보우는 연속발사가 불가능한 무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연사가 가능했던 것일까?
 준은 크로스 보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쌔신이나 병사들이 보유한 크로스 보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장식이 섬세하였고, 강철로 주조된 것인데 아주 가벼웠다. 또한 발사 장치는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가 되도록 되어 있었으며, 퀘럴이 장착되어 있는 공간에는 온통 룬문자와 도형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 이것이 핵심적인 부분이었어.”
 어느 장인이 만든 것인지 크로스 보우는 대단한 무구였다.
 줄을 잡아당겨 장착한 후 한쪽을 향해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투웅.
 경쾌한 소리가 터지면서 퀘럴이 빠르게 날아갔다.
 퍼억!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돌멩이를 겨누었는데 조준한 대로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돌멩이는 퀘럴과 부딪치면서 튕겨져 버렸고, 퀘럴은 땅바닥에 박혔다.
 스윽.
 준의 손짓에 땅속에 박혔던 퀘럴이 스르르 밖으로 빠져나오더니 되날아왔다.
 천왕대심공이 높아지면서 염력도 많이 강해졌다.
 은빛이 번뜩이는 퀘럴의 촉은 날카롭고,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져 광택이 났다. 또한 나뭇잎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어서 한층 멋을 더하였다. 퀘럴 하나에도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음··· 이것을 만든 장인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정말 잘 만들었어.”
 퀘럴이 장착되는 공간은 약 여섯 발 정도 넣으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할 좁은 공간인데, 이 공간에 마법을 새겨 넣었기에 퀘럴을 많이 집어넣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착해둔 줄을 풀자 퀘럴이 들어 있는 공간의 덮개 면에 있던 글자가 사라져버렸다.
 “으응, 뭐였지?”
 준은 호기심에 다시 줄을 당겨 걸었다. 그러자 퀘럴이 들어 있던 공간의 덮개 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준은 쉐인에게서 마케리안 대륙어를 틈틈이 배우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준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하하, 이 글자는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었어.’
 해석해보니 그 글자는 ‘812’였다.
 걸었던 줄을 다시 풀자 글자가 사라졌다.
 다시 손에 쥐고 있던 퀘럴을 공간에 집어넣자 글자가 또 나타났는데 ‘813’이었다.
 “이건 퀘럴이 몇 개 남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였어.”
 마음에 드는 무구였기에 이것을 획득한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후, 놈들에게 써먹기엔 안성맞춤인 무기야.”
 준은 크로스 보우를 다시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날이 밝았기에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따끈한 스프와 빵, 과일로 아침을 먹은 일행은 서둘러 드로이안 산맥으로 향하였다.
 
 스스스스.
 회색 로브를 입은 자가 기이한 빛과 함께 나타났다.
 “크으으, 젠장!”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고통스러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급처지를 해서 잘린 오른팔에서는 피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러웠다.
 “크크크, 이놈···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작은 동굴 이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그는 품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황금으로 코팅된 방석이었는데 룬문자와 도형이 새겨진 이상한 물건이었다.
 방석에 앉은 그는 회색 로브를 벗었다.
 60대의 노인이었다.
 흰 머리에 잔주름이 많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턱까지 뾰족해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또한 두 눈이 주욱 찢어져 있어서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거기에다가 상체는 갈비뼈가 튀어나온 것이 보일 정도로 깡마른 모습이었고, 피 묻은 오른팔이 보기 흉하게 잘려 있었다.
 그가 방석에 앉은 뒤부터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최소한의 방어력은 갖추게 되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면서 중얼거리는 주문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자 잘린 오른팔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스르르 기어 나오더니 팔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기이한 주문을 계속 중얼거렸고, 검은 연기는 점점 사람의 살과 비슷한 색으로 변하였다.
 스스스슷.
 놀랍게도 오른팔이 생성되었다.
 트롤도 아닌 인간이 재생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크크크, 잘렸던 팔이 다시 재생되었구나. 나 블루투스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것 같으냐? 이놈, 이번에는 반드시 내손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
 크워어어어.
 팔이 재생되어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거기에 찬물을 끼얹듯 포효가 터졌다.
 블루투스가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보았더니 거대한 갈색 불곰 한마리가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보금자리인 동굴을 차지했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크크크, 안 그래도 기력이 많이 떨어졌는데 저놈으로 보충하면 되겠구나.”
 크워어어.
 불곰이 포효를 터뜨리면서 동굴로 달려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발톱이 무시무시했다. 곰은 앞발을 강력하게 휘둘렀다.
 터텅.
 투명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었기에 거센 공격은 모두 튕겨져 버렸다.
 이에 흥분한 불곰이 양 발을 마구 휘둘렀지만, 보호막이 약간 출렁거릴 뿐 깨어지지는 않았다.
 “좋은 먹잇감이야. 홀드 퍼슨(Hold Person)!”
 스스스.
 갑자기 갈색 불곰이 포박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크워어어.
 당황한 불곰은 포효를 터뜨렸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블루투스의 한 손이 보호막 밖으로 튀어나와 불곰의 머리를 붙잡았다.
 츠츠츠츳.
 불곰의 에너지가 블루투스의 손을 통해 고속으로 빠져 나갔다.
 불곰은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가 늙어버렸다.
 털썩.
 불곰은 허무하게 쓰러져서 잠시 부르르 떨다가 잠잠해졌다. 생체 에너지가 모두 몸 밖으로 빠져나가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에 반해 블루투스는 60대 노인의 모습에서 40대의 모습으로 젊어졌다.
 “크크크··· 이제야 활력이 느껴지는군. 기다려라, 내가 간다.”
 동굴 안에 있던 물건을 정리한 블루투스는 플라이 마법으로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저편으로 날아갔다.
 
 드로이안 산맥으로 들어온 준 일행은 길이 험해서 이동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말을 몰아 달리기에는 경사가 높고,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길도 없었다.
 없는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니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말을 몰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앗, 악!”
 주우욱.
 아리안느가 미끄러졌다.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난 괜찮으니 계속 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면서도 이동을 하였다.
 안 그래도 느린 속도로 이동 중인데 더욱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추어야 했다. 아리안느의 발목이 심하게 부어올랐기에 더 이상 걷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베누아가 그녀의 가죽신을 벗기고 발목을 주물러주었다.
 “아악, 아아아!”
 아리안느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베누아는 손을 멈추었다.
 “소공녀님, 발목이 너무 심하게 부어서 더 이상 걷기에는 무리입니다.”
 “준 님, 일단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스의 말에 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물주머니의 물을 나누어 마셨다.
 날씨는 무더웠으며, 길은 아주 험해서 이동이 쉽지 않은 드로이안 산맥이었다.
 얼굴이 굳어진 한스는 옆에 앉아 있는 준에게 말하였다.
 “큰일입니다. 이런 속도라면 열흘이 아니라 보름이 걸리겠는데요?”
 “날씨가 무덥고 길이 험한 것만 해도 힘든데 밤에는 몬스터가 나타날 것이고··· 적들도 기회를 보고 있을 텐데······.”
 “과연 이 드로이안 산맥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한스 님, 저는 반드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힘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쉬게 되었으니 간단하게나마 요기라도 하고 이동하도록 하죠.”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배가 든든해야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먹을 것을 꺼내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안 그래도 땀을 많이 흘리고, 지치고, 허기졌는데 마침 적당한 때에 준이 내민 음식에 기운이 샘솟았다.
 푸드득.
 작은 새 한 마리가 저편에서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새는 준 일행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붉게 물든 게 보통의 산새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행 누구도 작은 산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리안느 일행을 추격 중이던 이글 용병대가 마침내 드로이안 산맥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기에 이동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프린스는 수정구를 꺼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흐흐, 정말 잘되었구나.”
 프린스의 얼굴에 웃음이 생기자 대장인 스칸디가 쳐다보았다.
 부대장인 쇼칸이 성질이 급해서 먼저 말했다.
 “프린스, 무슨 일이냐?”
 “아리안느 소공녀가 발목을 다쳐 쉬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길이 험한 드로이안 산맥이니 조금만 방심해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죠. 3시간 정도의 거리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 정도의 거리는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대장님, 오늘밤 기습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쇼칸, 너무 서둘지 마라. 소공녀 옆에는 무서운 놈이 붙어 있으니까 말이야.”
 “놈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를 당하지는 못합니다.”
 “비록 내가 방심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한 놈을 당하지 못하고 대원이 절반 넘게 죽었다.”
 “쇼칸 부대장님, 저, 프린스의 생각에도 지금 공격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일단 드로이안 산맥에 들어왔으니 2일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어차피 소공녀가 부상을 입어 이동속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15일이 걸려도 드로이안 산맥을 통과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프린스의 말을 믿어 보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부대장님. 소공녀 일행은 모두 여덟이며, 그중에서 기사 한스와 기병 두 명, 문제의 그놈과 글 선생 한 명.그래봐야 겨우 다섯입니다. 이틀 정도만 지나면 많이 지칠 것입니다. 그때 공격한다면 큰 피해 없이 소공녀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쇼칸, 프린스의 말이 맞네. 우린 느긋하게 추격하면서 체력을 비축하면 돼. 일단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장님. 이곳에서 잠시 휴식하도록 한다!”
 부대장 쇼칸의 말에 이글 용병대원들은 말에서 내려 그늘진 곳에 흩어져 물을 마시는 등 휴식에 들어갔다.
 조금 쉬었다고는 하지만 아리안느는 아직 걷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일단 말에 태워서 천천히 이동하였다. 일행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숲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날이 저물었기에 사방이 제법 탁 트인 곳을 정해 야영을 시작하였다.
 활활활.
 모닥불이 거세게 타올라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한낮의 뜨거움과는 다르게 숲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모닥불을 피워서인지 따뜻했다.
 준은 쉐인에게서 이동하는 틈틈이 마케리안 대륙어의 기본을 익혔는데, 지금은 그것을 완벽하게 외우고 간단하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준 님, 상당히 빨리 익히시는군요.”
 “하하, 쉐인 님의 가르침 덕분에 빠르게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설명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준 님이 열심히 공부하셨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칭찬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일행은 끓인 물로 차를 타서 나누어 마셨다.
 밤이 더욱 깊어지자 사방에서 몬스터나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스 님은 소공녀님 곁을 지켜주십시오. 전 나무 위에서 경비를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준은 한스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무 위로 도약해 크로스 보우를 꺼내 들었다.
 모두 처음에는 몬스터나 동물의 울음소리에 긴장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그렇게 하나둘씩 잠에 빠졌지만 준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천왕대심공을 익히면서 생겨난 심안의 능력 때문에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대낮같이 볼 수 있었다.
 스윽.
 준은 크로스 보우의 줄을 잡아당겨 한곳을 겨누더니 쏘았다.
 투웅.
 나직하게 발사음이 터지고 날아간 퀘럴은 남쪽에서 접근하던 고블린에게 날아갔다.
 퍼억!
 끼에엑!
 고블린의 머리에 퀘럴이 명중되자 비명을 지른 고블린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인간의 냄새를 맡고 접근하던 고블린 무리는 모두 30마리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퀘럴에 맞아 쓰러졌다. 고블린 무리는 순간 주춤거렸다. 그때 또다시 퀘럴이 날아와 다른 고블린을 쓰러뜨렸다. 고블린 무리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명사수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7마리가 퀘럴에 쓰러지자 고블린 무리는 뒤돌아 도망쳐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서 빼앗은 크로스 보우는 역시 뛰어난 무구였다.
 이번에는 동쪽에서 오크 다섯 마리가 접근했지만 모두 크로스 보우의 퀘럴에 맞고 쓰러졌다.
 끄워어어어!
 동남쪽에서 오크의 피 냄새를 맡고 접근한 몬스터를 보고는 준은 흠칫거렸다.
 4m에 육박하는 녹색 괴물은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는 거대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으며, 나무와 풀을 헤치면서 잘도 다가왔다.
 스윽.
 준은 이번에도 크로스 보우를 겨누고는 퀘럴을 발사하였다.
 녹색 괴물은 거대한 신장을 가진 몬스터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몽둥이를 들어 날아오는 퀘럴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퀘럴은 나무 몽둥이의 옆을 스치면서 팔에 박혔다.
 쿠워어어어!
 가죽이 질겨서인지 관통하지는 못하고 깊게 박혔다.
 고통스러워 포효를 지른 몬스터는 트롤이었다.
 트롤은 팔에 박힌 퀘럴을 잡아 뽑았다. 녹색 피가 흘러나왔지만 상처는 곧 아물었다.
 화가 치민 트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200m가 넘게 떨어진 나무위에 있는 준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쉐에에엑.
 두발의 퀘럴이 트롤을 향해 날아갔다.
 트롤은 몽둥이를 들어 한 발은 잘 막았지만 나머지 한 발은 막지 못해 허벅지에 박혀버렸다.
 쿠워어어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트롤은 허벅지에 박힌 퀘럴을 잡아 뽑았다. 이번에도 녹색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지만 곧 상처가 아물어버렸다. 뛰어난 상처 치유력과 재생능력이었다.
 “후후후, 저 몬스터가 책에서 본 트롤이라는 거구나. 잘됐어.”
 준은 크로스 보우를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도약해 트롤에게 날아갔다.
 트롤은 갑자기 인간이 나타나자 입맛을 다셨다.
 쿠워어어어!
 트롤은 크게 울부짖으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보법을 이용해 간단하게 피한 준은 배에 꽂아두었던 대거를 뽑아 들고서는 휘둘렀다.
 스팟.
 트롤의 허벅지 살이 쩌억 갈라지면서 녹색 피가 흘러나왔다.
 스스슷.
 역시나 트롤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하하하, 연습상대로는 최고구나.”
 화가 치민 트롤은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보법을 이용해 피하는 준의 움직임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느렸다.
 준이 트롤의 허벅지를 향해 강력한 발차기를 먹이자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비틀거렸고, 뒤돌려차기로 배를 차버리자 뒤로 벌렁 넘어졌다.
 트롤은 자신이 넘어진 게 믿어지지 않는지 머리를 옆으로 흔들면서 다시 일어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약한 상대라고 느껴지자 준은 대거를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고는 권법만으로 트롤을 상대하였다.
 퍼퍼퍽, 파팍.
 쿠워어어어!
 샌드백도 아닌데 트롤은 준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한 대 한 대가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는 게 전부인 트롤이었다.
 10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트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보법으로 앞쪽에 나타난 준에게 또다시 맞았다.
 내공을 담아 펼치는 권법이었기에 한 방을 맞으면 살이 터지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비록 재생능력이 뛰어나 상처가 아물었다고는 하지만 그 고통만은 어쩔 수 없었다.
 트롤은 미칠 것 같았다.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오우거나 사이클로프스 같은 몬스터도 트롤이 만만치 않아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먹이라 생각했던 인간족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너무 많이 맞다보니 이젠 어지럽기까지 했다.
 쿠워어어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트롤은 그대로 넘어졌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쩝··· 녀석, 기절해버렸군. 아쉽지만 몸을 잘 풀었으니 선물을 주고 가마.”
 준은 주위에 퀘럴에 맞아 죽어 있는 오크 두 마리와 고블린 세 마리를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잠시 후 깨어난 트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준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기에 안심하고는 오크와 고블린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몸집이 커서인지 오크와 고블린 한 마리를 먹어치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가 조금 채워졌다 생각한 트롤은 남은 오크와 고블린의 시체를 집어 들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시간은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었다.
 스프를 끓여 빵과 함께 먹은 준 일행은 다시 출발하였다.
 발목의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아리안느는 걸어가려고 했지만, 아직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베누아의 말을 듣고 말을 타고 이동하였다.
 콰아아아.
 앞장서서 이동하던 준의 귀에 폭포수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어왔다.
 “한스 님, 앞에 폭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귀에는 안 들리는데요?”
 “틀림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폭포입니다.”
 기사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준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믿어보기로 했다.
 30분 정도 더 나아가자 일행은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거대한 폭포에서 쏟아지는 맑은 물줄기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폭포야, 폭포!”
 “정말 폭포가 있었어!”
 쉐인과 베누아가 신이 나서 외쳤다.
 아리안느도 폭포를 쳐다보고 다시 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준 님, 정말 폭포가 있었군요?”
 “마침 식수가 떨어지려던 찰나였는데 잘되었습니다. 보충하고 가야겠어요.”
 “준 님, 조금 전에는 믿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한스 님,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폭포 밑에 도착한 그들은 물을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하였고, 준은 물주머니에 물을 채웠다.
 말들도 모처럼 충분하게 물을 마셨다.
 아직 해가 머리위에 있어 무더웠기에 폭포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모두 그동안 제대로 씻지를 못하였기에 준이 준 비누로 목욕을 하고 입고 있던 옷도 세탁해 바위에 펼쳐 말렸다.
 준은 물웅덩이 속에 제법 큰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발견하고 말린 육포 조각을 하나 집어던졌다.
 물고기들이 육포 조각을 먹기 위해 수면으로 몰려들었다.
 준은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주위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둥둥둥.
 수면 위로 물고기가 떠올랐다.
 준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기절한 것이다.
 물고기는 제법 컸다. 돌멩이로 잡은 물고기는 다섯 마리나 되었다.
 “허허, 정말 대단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스는 준이 잡아 올린 물고기를 치켜들자 준과 마주보며 웃었다.
 기병 두 명이 주위에서 장작을 만들어와 불을 피웠다. 그러는 동안 준은 물고기의 내장을 제거하고 칼집을 내어 소금을 뿌렸다.
 지글지글.
 물고기가 불에 구워지면서 흘러나온 기름과 육즙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싱싱하고 제법 큰 물고기였기에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아리안느도 처음 먹어보는 구이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고소하고 짭짭하며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도 부르고 충분하게 쉬었다고 판단했기에 이동을 시작하였다. 폭포를 지나 숲속으로 갔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준 일행을 추격 중이던 이글 용병대 중에서 선봉을 맡은 자들이 폭포 근처에서 모습을 보였다.
 조심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프린스와 대원 30명이 선봉을 맡아 이렇게 뒤를 추격 중이었던 것이다.
 프린스는 뒤돌아보면서 대원들에게 말하였다.
 “폭포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한다.”
 “예,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신이 나서 물에 뛰어 들었다.
 프린스도 손수건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에 탄성을 질렀다.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구나!”
 그때였다.
 파아앗.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빠르게 날아간 퀘럴은 물웅덩이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이글 용병대원의 등을 뚫어 버렸다.
 물웅덩이는 금방 피로 물들었다.
 “허엇, 공격이다! 조심해!”
 퍼퍽!
 “아악!”
 “커억!”
 제대로 은폐물에 몸을 숨기지 못한 두 명의 대원이 퀘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세 명의 대원이 당했지만 재빨리 은폐물에 몸을 숨겼기에 나머지 대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적들의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자 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한바탕 휘저어야겠어.”
 휘스스스.
 준이 경공술을 발휘해 폭포가에 나타남과 동시에 전방에서 무엇인가 엄청난 것이 날아왔다.
 “허엇, 불덩어리?”
 콰쾅!
 엄청난 폭음이 터지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흙먼지가 흩어지자 지름 2m나 되는 흙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허공으로 도약해 파이어 볼을 피하였고,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음··· 정말 대단하군. 이게 말로만 듣던 마법이라는 건가?”
 준은 자신을 공격한 자를 바라보았다.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였는데 폭포가 쏟아지는 곳의 건너편에 서 있었기에 30m는 넘게 떨어져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양손을 옆으로 벌리면서 천천히 머리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놈이었군.”
 준은 크로스 보우를 프린스에게 겨누고는 발사하였다.
 투웅.
 퀘럴 한 발이 빠르게 프린스에게 날아갔다.
 프린스도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슈슈슈슈슝.
 다섯 발의 빛을 머금은 마법 화살이 생성되어 준에게 쏘아졌다.
 쾅!
 다섯 발 중 한 발이 날아오던 퀘럴과 충돌하면서 폭음이 터졌다. 나머지 네 발의 마법 화살이 날아왔으나 보법으로 가볍게 피하였다.
 콰콰콰쾅!
 네 발의 마법 화살이 모두 바위에 격중되자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이글 용병대원들도 프린스의 뒤쪽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가 화살을 쏘았다.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준이 서 있었기에 위험해 보였지만, 준은 보법으로 화살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러고는 크로스 보우를 등에 걸고는 경공술을 펼치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파라라락.
 바람 소리가 터지면서 준의 허리춤에서 꺼낸 부메랑이 날아갔다. 정삼각형 모양의 트라이얼 부메랑과 십자형인 크로스 부메랑이었다.
 “마나여, 불꽃의 뜨거움을 보여주소서. 파이어 볼트(fire bolt)!”
 슈아아앙.
 위력적인 불덩어리 다섯 개가 준에게 날아왔다.
 준은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피하다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허공을 선회하면서 날아가는 부메랑에 당황한 프린스는 뒤로 튕기듯 날아가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원들도 재빨리 엎드리면서 부메랑 공격을 피하였다.
 도약한 허공에서 부메랑을 회수한 준은 허리춤에 꽂아 넣으면서 공중제비를 한 후 땅에 내려섰다.
 스윽.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에이형 부메랑을 꺼내 들고서는 내공을 불어넣었다.
 프린스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긴장했다.
 끼아아아앙.
 부메랑에서 귀청을 찢어발기는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강력한지 이글 용병대원들은 양쪽 귀를 틀어막으면서 괴로워했다.
 슈가가각.
 두 명의 배가 부메랑의 날카로운 날에 베였다. 그들은 비틀거리다가 고꾸라졌다. 가죽갑옷이 갈라지면서 그 속에 있던 속살까지 쩌억 갈라져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허공을 선회하면서 되돌아온 부메랑을 잡은 준은 팔을 휘저으면서 부메랑을 다시 날렸다.
 끼아아아앙.
 상위 몬스터의 포효보다 훨씬 강력한 굉음이었기에 적들의 피해가 늘어났다. 고막이 터져 피가 귀 밖으로 흘러나오는 자도 있었으며, 코피를 쏟는 자도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당하겠다는 생각에 프린스는 즉시 마법을 영창하였다.
 “불꽃의 뜨거움이여, 일어나라. 파이어 링(fire ring)!”
 활활활.
 이 마법은 주변을 거대한 불꽃으로 감싸는 마법이었다.
 날아오는 부메랑과 준의 접근을 막고자 펼친 것이다.
 거대한 불꽃이 활활 타올라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었기에, 준은 튀로 튕기듯 물러나면서 등에 메어놓았던 크로스 보우를 연발로 발사하였다.
 투투투투퉁.
 퀘럴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날아갔지만 완전하게 통과하지는 못하였다.
 후두두둑.
 퀘럴 다섯 발이 바닥에 떨어졌고, 파이어 링의 거대한 불꽃도 처음보다는 현저히 위력이 떨어졌다.
 “호오? 퀘럴이 조금 먹히는 것 같은데?”
 투투투투퉁.
 다시 퀘럴이 불꽃을 향해 날아갔다. 허공을 선회하면서 되날아온 부메랑도 다시 날렸다.
 퍼퍼퍼퍼퍽.
 위력적인 퀘럴이라 마법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
 끼아아아앙.
 부메랑에 뚫린 구멍에서 또다시 위력적인 굉음이 터지자, 프린스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는 코피를 쏟아내면서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크으음··· 이런 괴상한 공격에 내가 물러설 것 같으냐?”
 프린스는 큰 각도 차이로 뚝 떨어지면서 날아드는 부메랑에 놀라 상체를 뒤로 젖혔지만 부메랑이 약간 더 빨랐다.
 슈가가각.
 부메랑은 프린스의 왼쪽 아랫배 부분에서 오른쪽 가슴 부분까지 길게 사선으로 살을 가르고 지나가버렸다.
 “크으윽!”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으으··· 큐어(cure)!”
 츠츠츠.
 상처에서 기이한 빛이 쏟아져 나오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지만 속도가 아주 느렸다.
 “상처가 너무 깊어 큐어로는 안 되는군. 마나여, 상처를 치료해 주소서. 힐(heal)!”
 츠츠츠츳.
 이번의 치료마법은 큐어보다 훨씬 강력한 치료마법이라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면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으음··· 두고 보자. 후퇴하라!”
 프린스의 후퇴명령에 엎드려 있던 대원들의 일부는 화살을 날리면서 다른 대원들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부상을 입은 대원들을 어깨에 기대게 하면서 모두 뒤돌아 도망쳤다.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피한 준은 얼굴이 굳어졌다.
 “으음··· 역시 마법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구나. 까다로운 적이니 다음번에는 마법사를 최우선으로 죽여야겠어.”
 준은 뒤돌아 경공술을 발휘해 아리안느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프린스는 이글 용병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대장인 스칸디와 부대장인 쇼칸이 다가왔다.
 “프린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대장님, 대원들이 놈에게 당했습니다.”
 “으음··· 역시 그자가 문제였어.”
 “놈에게는 강력한 무구가 두 개나 있었습니다.”
 “두 개씩이나?”
 “예. 연사가 가능한 크로스 보우를 가지고 있었으며, 굉음을 동반한 이상한 무기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으음··· 역시 무서운 놈이었어.”
 “다행히 마법을 펼쳐 놈을 공격 하였기에 피해가 이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음··· 세 명이 죽었고, 피를 흘리는 대원들이 대부분이야.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어.”
 “놈이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해왔으나, 이제는 우리가 놈에게 기습공격을 할 차례입니다.”
 “그래. 놈을 공격하는 게 좋겠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제 생각으로는 20명씩 한 개의 조를 이루면서 공격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흩어지면 놈에게 기습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데?”
 “멀리 흩어지는 게 아니라 조를 이루면서 각 조의 거리는 10m 정도로 한다면 충분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큰 걱정은 없겠군.”
 “그렇습니다. 제가 상황을 보면서 마법공격을 지원한다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도 죽은 목숨이야. 밤에 놈을 치도록 한다. 그동안 푹 쉬어라.”
 “예, 대장님!”
 어차피 아리안느와의 거리가 3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추격엔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일단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행에게로 돌아온 준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소공녀님, 적들이 근처까지 접근했습니다. 이대로 도망만 다니다가는 놈들의 기습공격에 당하거나 포위될 것 같습니다.”
 “준 님, 적들은 얼마나 되던가요?”
 “제가 적들과 싸울 때는 30명 정도였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200명 정도의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겨우 8명이니 이 인원으로 적들을 막기는 힘듭니다만··· 어쨌든 제가 남아서 놈들을 저지해보겠습니다.”
 “혼자 남아서 적들을 저지한다고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저 혼자서 치고 빠지는 게 싸우기 용이합니다.”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해요.”
 “아닙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아서 놈들을 막을 동안 소공녀님은 계속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스가 한 발 나서서 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준 님, 저도 남아서 돕겠습니다.”
 “아···아닙니다, 한스 님. 소공녀님을 옆에서 지켜드려야죠.”
 “그···그건 그렇지만······.”
 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스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놈들이 노리는 건 소공녀님입니다. 최대한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안전합니다. 저는 기회를 봐서 치고 빠지면서 놈들을 혼란시키겠습니다.”
 “적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혼자서 상대하려 합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는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소공녀도 한스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지 말고 지금과 같이 이동하고, 그러는 동안 적들이 접근하면 준 님께서 적들을 공격하고 그동안 우리가 이동하는 것은 어때요?”
 “소공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준 님, 드로이안 산맥에는 몬스터들이 넘쳐날 정도이기에 언제 우리를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던 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음··· 듣고 보니 한스 님의 말씀도 맞는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럼 지금과 같이 이동하면서 적들이 접근하면 제가 저지하는 방법으로 하죠.”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준 님.”
 “아닙니다, 소공녀님. 제가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소공녀님, 일단 준 님의 말대로 적들이 가까이 접근하였다고 하니 서둘러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놈들이 오늘밤에라도 공격해온다면 큰일이니까요.”
 “그게 좋겠어요. 한스 경, 바로 출발해요.”
 
 한편 소공녀의 뒤를 추격하던 이글 용병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프린스가 마법으로 살펴보니 소공녀 일행이 날이 어두워지는 상황에서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속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이런 제기랄! 즉시 추격한다!”
 “놈들이 우리가 오늘밤 공격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놈이겠지.”
 “정말 대단한 놈입니다. 그놈만 없었더라도 일이 쉽게 끝났을 텐데······.”
 “이번에는 기필코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다.”
 “저는 놈의 팔을 잘라버리겠습니다.”
 “크크크··· 그럼 난 놈의 다리를 자를까?”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즉시 소공녀를 추격한다!”
 “예, 대장님!”
 대원들은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둘러 추격에 나섰다.
 
 쉐에에엑.
 퀘럴 한 발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퍼억!
 “크아악!”
 가슴에 퀘럴이 박힌 이글 용병대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20명씩 한 개의 조를 이루면서 조심스럽게 울창한 숲속을 지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퀘럴이 날아든 것이다.
 “조심해, 놈이 근처에 은신해 있어.”
 “······.”
 이글 용병대원들은 조장의 경고에 일제히 상체를 숙이면서 퀘럴이 날아올 것에 대비했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그로부터 5분이 지나도 퀘럴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금 조장의 손짓에 따라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쉐에에엑.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소리만으로도 퀘럴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퀘럴이 날아온다! 조심해!”
 “······.”
 퍼억!
 날아온 퀘럴은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이글 용병대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방심해도 갑자기 날아온 퀘럴에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이다.
 슈슈슈슉.
 그때였다. 갑자기 전방의 높게 솟은 나무위에서 세 발의 화살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졌다.
 “조심해! 위에서 날아온다!”
 “손방패로 막아!”
 퀘럴에 대해서만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화살이 날아든 것이다. 하지만 화살은 퀘럴보다 현저하게 위력이 떨어지기에 손방패로 잘 막자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효과만큼은 충분했다. 언제 다시 가해질지 모르는 공격에 선뜻 앞으로 나서는 자 없이 용병대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준은 150m 정도 떨어진 풀밭에서 심안으로 이 같은 상황을 보고 있다가 뒤로 물러나 일행이 있는 곳으로 후퇴하였다.
 ‘하하, 목적대로 놈들의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어.’
 험한 지형이라 소공녀 일행이 이동하기가 힘든 편이었지만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곳에서는 말을 타고 이동하였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준의 기습적인 공격에 대원들이 피해를 입은 이글 용병단은 적의 공격 목표가 자신들 자체가 아닌 그저 추격 속도를 늦추는 것이란 걸 알고부터는 경계하면서도 추격 속도를 높였다.
 약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글 용병단과 소공녀 일행은 끊임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젠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다.
 이글 용병단은 번번이 준에게 기습공격을 당해 모두들 화가 치밀어 흥분해 있었다. 이에 마법사 프린스는 그들의 사기 때문이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보복 공격을 하기로 했다.
 부우웅.
 플라이 마법으로 허공에 떠오른 프린스는 곧이어 투명화 마법도 시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날기 시작했다. 더블 캐스팅을 한 상태라 약간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프린스는 소공녀 일행을 지나쳐 적당한 나무 위에 내려섰다. 그 사이에는 투명화 마법 때문이었는지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던 프린스는 30m 정도 앞으로 소공녀 일행이 다가오자 캐스팅해두었던 마법을 펼쳤다.
 “크크크, 한번 당해봐라. 매직미사일(Magic Missile)!”
 시동어와 동시에 프린스의 손끝에 빛나는 화살촉 모양의 매직미사일 열 발이 형성되었다. 매직미사일은 1서클 마법이었지만 5서클에 이른 그가 펼치는 마법이었기에 위력이 상당해진 공격마법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알아서 찾아가 맞출 수가 있음은 물론, 쏘기 전까지는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목표를 놓치는 일은 결코 없으며 목표물은 어떻게든 타격을 입게 되는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다 죽여 버려라. 가랏!”
 슈아아아앙!
 프린스의 손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직미사일 열 발이 발사되었다.
 퍼퍼퍼퍼퍽!
 “으악, 커억!”
 이히히힝!
 느닷없이 전방에서 날아오는 매직미사일에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소공녀 일행이었다. 게다가 준이 이글 용병대의 추격 속도를 늦추고자 일행들과 떨어져 있었기에 더욱 피해가 컸다.
 선두에서 이동 중이던 기병 둘은 매직미사일에 머리가 터지면서 쓰러졌고, 켈리온 성에서 지원 나왔던 하녀도 옆구리에 매직미사일을 맞고는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가던 쉐인과 베누아는 천만다행으로 말에 매직미사일이 격중되어 낙마하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
 날아오는 매직미사일을 보고 몸이 굳어버려 멍청하게 서 있던 아리안느를 한스가 재빨리 몸을 날려 감싸 안았다.
 퍼퍼퍼퍽!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했기에 한스는 매직미사일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말과 함께 쓰러졌다.
 한스가 감싼 덕분에 소공녀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으로 매직미사일 공격을 막은 한스는 쓰러진 채 피를 내뿜었다. 충격이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체를 단련한 기사라 이 정도의 공격은 견딜 수 있었다.
 공격마법 한 방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프린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크크크, 진작 이런 공격을 할 걸 그랬나? 이젠 끝장을 내주마.”
 그가 막 다시 공격마법을 캐스팅 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프린스를 향해 퀘럴이 연이어 날아왔다.
 “어엇, 놈이 벌써?”
 한 발이나 두 발 정도의 공격이었다면 보호막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집중적으로 날아오는 퀘럴이라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춤거리는 동안 준이 약 100m 전방에 나타났다.
 “으··· 이렇게 빨리 나타나다니··· 제기랄!”
 프린스는 준과 싸워 보았기에 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그는 마지막으로 저쪽에서 떨고 있는 소공녀와 기사를 향해 또다시 매직미사일 열 발을 발사했다.
 빛을 머금은 화살촉 모양의 매직미사일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본 아리안느와 한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한스 혼자서 열 발이나 되는 매직미사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상을 입어 쓰러져 있던 쉐인과 베누아에게 먼저 매직미사일이 날아와 격중했다.
 “크악, 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온몸을 부르르 떨던 두 사람이 이내 잠잠해졌다. 한스는 이를 악물고 몸으로 아리안느를 감쌌다.
 퍼퍼퍼퍼퍽!
 이미 한 번 매직미사일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시 여덟 발이나 되는 매직미사일에 맞았기에 그 충격은 엄청났다. 플레이트 아머의 곳곳이 찌그러졌고, 연신 입에서 검붉은 피를 내뿜던 한스는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으으··· 끝까지 소공녀님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한스는 중상을 입고 기절해버렸다.
 보통 때라면 이정도 공격에 당할 한스가 아니었지만, 기습공격 이었고 아리안느를 지키려고 몸으로 마법공격을 막은 결과 이런 중상을 입게 된 것이다.
 준이 아리안느 곁에 다가왔을 때에는 프린스는 도망치고 없었다. 그는 이내 쓰러져 있는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다행이 아리안느는 별다른 부상이 없었지만, 한스는 중상을 입어 이대로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으으··· 으윽······.”
 잠시 후 기절했던 한스가 깨어났다.
 “정신이 드십니까, 한스 님?”
 “한스 경, 정신이 드세요?”
 “으으··· 소공녀님, 무사하셨군요.”
 “그래요. 한스 경이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예요.”
 “으··· 준 님, 난 틀린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한스 님.”
 “말씀은 고맙지만 내 상태는 내가 잘 압니다. 더 이상 소공녀님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품속에 지도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같이 갈 수 있어요, 한스 경.”
 “아닙니다, 소공녀님. 제가 있으면 짐만 될 뿐입니다. 으윽······.”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스는 다시 기절해버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적들이 추격해오는 상태에서 부상자인 한스를 데려갈 수는 없다. 아리안느는 밀려오는 슬픔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소공녀님,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어서 가시죠.”
 “그래도 어떻게 한스 경을 두고 간단 말예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공녀님께서 이곳에 남기를 바라지도 않을 겁니다.”
 간곡한 준의 설득에 아리안느는 결국 준과 함께 말에 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식사를 했던 한스는 아리안느와 이렇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소공녀님,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요.”
 “알았어요. 가요······.”
 물론 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다못해 죽은 동료들을 땅에 묻어 주고라도 떠났으면 좋겠는데 추격자들이 가까이 접근한 상태이기에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스스스스.
 준과 아리안느가 떠나고 난 자리에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쓰러져 있는 한스에게로 다가갔다.
 “흐흐, 곧 죽을 놈이군. 실험재료로 쓰기에 적당한 걸?”
 그자의 손짓에 허공으로 한스의 몸이 스르르 떠올랐다.
 츠츠츠츠.
 갑자기 허공에 쩌억 금이 가더니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의 손짓에 한스의 몸이 스르르 공간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벌어졌던 공간이 다시 닫혔다.
 츠파파팟!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입은 자는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 이글 용병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스를 비롯해 준과 소공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린스, 기습공격은 참으로 잘했구나.”
 “감사합니다, 대장님.”
 “흐흐, 이제 소공녀에게는 그놈과 한스라는 자가 남았구나.”
 “그렇습니다. 한스라는 자는 저의 매직미사일에 몇 발이나 격중되었기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좋아, 좋아. 번번이 놈에게 우리가 피해를 입었는데 이번에는 프린스의 활약으로 인해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구나. 하하하!”
 “하하하! 그렇습니다, 대장님.”
 “이제 소공녀와의 거리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좋아. 속히 추격해 사로잡아야 하니까 선발조 20명을 먼저 보내라.”
 “예!”
 
 이히힝, 푸르륵.
 아리안느를 태우고 달리느라 말이 많이 지쳐 있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계속 험한 산맥을 이동했기에 말은 더욱 힘들어 했다.
 이대로는 얼마 가지 못하고 말이 쓰러지겠다고 느낀 준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곁에서 달리던 아리안느도 준이 말을 세우자 같이 멈췄다.
 “소공녀님, 말이 너무 지쳤으니 조금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그는 말의 고삐를 나뭇가지에 묶고는 물을 먹인 후 마법주머니 속에서 건초를 꺼내 내려놓았다. 두 마리의 말은 정신없이 고개를 처박고 풀을 먹기 시작했다.
 준은 또 다른 물주머니를 꺼내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고맙게 받아 마셨다.
 “아··· 시원해. 정말 고마워요.”
 “소공녀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래요? 그게 뭔데요?”
 “적들이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해 소공녀님을 끝까지 추격하는 겁니까?”
 “저를 사로잡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닐까요?”
 “영지병들을 동원한다면 간단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용병들을 고용해 추격하는 것으로 봐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리안느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이 보기에는 무언가 중대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뭔가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혹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아리안느의 소지품이라고는 허리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 한 개가 전부였다. 마차 안에는 옷가지를 넣은 가방도 있었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입은 옷이 전부였다.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가 전부인데 혹시 보석 종류인가? 으음··· 어쩌면 보석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겨우 보석 하나를 노리고자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사사삭!
 그때였다. 풀을 밟는 미약한 소음이 일었다. 귀가 예민한 준은 추격자들이 가까이 접근했다는 걸 느꼈다.
 “소공녀님, 놈들이 가까이 추격해온 것 같으니 떠나야겠습니다.”
 “아직 말들이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또 달릴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 테니 말을 타지 않고 일단 고삐를 잡아당겨 걸어서라도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그들이 막 묶어 두었던 말의 고삐를 잡고 이동하려는데 뒤쪽에서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준은 양손으로 두 발의 화살을 잡았다.
 “어머··· 화살을 손으로?”
 아리안느는 깜짝 놀랐다. 날아오는 두 발의 화살을 양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한스라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공녀님, 어서 나무 뒤로 숨으세요! 어서요!”
 “아···알았어요.”
 아리안느는 말의 고삐를 놓은 채 뛰어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20명의 이글 용병대원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그중 다섯이 보우를 겨누고는 화살을 쏘고 있었다.
 준은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화살을 전부 피하였다.
 퍼퍼퍽, 이히힝!
 그 바람에 화살을 맞은 말들은 구슬프게 울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부르르 떨면서 피를 쏟아내던 말들은 잠시 후 잠잠해졌다.
 “아차, 말을 노렸구나!”
 “방어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어서 화살로 집중 공격해!”
 슈슈슈슝!
 준은 보법을 밟으면서 여유롭게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피하였다. 그리고 허리에서 에이형 부메랑을 꺼내 날렸다.
 끼아아아앙!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음과 함께 회전하면서 날아간 부메랑은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의 목을 절반 넘게 자르고 지나쳤다.
 “끄어어억!”
 준의 공격에 당한 자는 분수 같이 솟아오르는 핏물을 손으로 막아보려고 목을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털썩.
 달리던 말에서 떨어진 그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는지 눈을 부릅뜨고는 부르르 떨다 잠잠해졌다.
 허공을 선회한 부메랑은 준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자에게로 날아갔다.
 부메랑의 위력을 본 그는 방패를 들어 부메랑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비행각이 크게 휘어지면서 방패의 사각으로 파고든 부메랑은 옆구리의 가죽 갑옷을 자르면서 큰 상처를 냈다.
 “이···이게?”
 그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렸다. 그리고 나무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파악!
 준은 땅을 발끝으로 찍으면서 화살같이 쏘아져 날아오면서 허리에 꽂아 두었던 대거를 검집에서 꺼내어 휘둘렀다.
 가가가각.
 그 움직임이 얼마나 신속하면서도 현란한지 달려오던 자들은 순간이지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름다워. 아악!”
 “저···저런 움직임은 처음 봐··· 커억!”
 순식간에 네 명의 옆구리가 쩌억 갈라지면서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그들은 말에서 떨어졌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준은 블링크 마법이라도 펼쳤는지 포위하려던 자들을 하나씩 따라 붙으면서 대거를 휘둘렀고,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전부 말에서 떨어져 쓰러졌다. 순식간에 이글 용병대의 1개 조, 20명이 준 한 사람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이다.
 철컥.
 대거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은 준은 아리안느에게로 되돌아왔다. 겁을 먹고 있던 아리안느는 준이 적들을 제거하는걸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말들이 도망쳤는데 어떻게 해요?”
 “어쩔 수 없지요. 일단 놈들의 말을 타고 이동해야겠습니다.”
 
 준과 아리안느가 말을 타고 사라진 후 이글 용병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벌어진 참상을 보며 스칸디 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프린스, 얼마나 된 것 같나?”
 “대원들이 죽은 지는 약 15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20명을 혼자서 다 죽이다니······.”
 “이번에는 2개 조를 한꺼번에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2개 조로 놈을 막을 수 있을까?”
 “그건 힘들겠지만 거리를 좁힐 수는 있을 겁니다. 또한 놈에게는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소공녀가 붙어 있기에 보우로 그녀를 노린다면 마음대로 날뛰기는 힘들 겁니다.”
 “크크크, 놈에게는 소공녀가 있었지? 좋아, 2개 조를 먼저 보내라. 우리도 최대한 녹도를 높여 추격한다.”
 “예. 6조와 7조는 나를 따르라!”
 6조의 조장인 헤스가 앞으로 나서자 그 뒤를 6조와 7조의 조원들이 따랐다.
 이렇게 2개조 40명이 먼저 말을 몰아 소공녀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이글 용병대원들도 조별로 대형을 유지하면서 추격에 나섰다.
 
 말을 타고 이동하던 아리안느와 준은 말을 멈춰 세웠다.
 앞에는 거의 50도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지가 있었다. 흙보다는 자갈 같은 작은 돌멩이가 더 많이 깔려 있는 곳이었다.
 “소공녀님,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너무 경사가 심해 보이니 말에서 내려 이동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준이 말의 고삐를 잡고 앞장서자 아리안느도 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들이 경사지를 약 100m 정도 올라가고 있을 때 추격대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다! 화살을 쏴라!”
 “소공녀를 꼭 잡아야 해!”
 시간차 공격을 하려는지 40명의 추격대원들 중 10명이나 화살을 쏘았다.
 슈슈슈슈슝!
 경사지의 끝에 있는 나무까지는 앞으로 50m 정도는 더 가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몸을 은폐할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휘리리릭!
 준은 급한 대로 대거를 꺼내 들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하지만 화살은 아리안느도 노리고 있었다.
 퍼퍼퍽!
 이히히힝!
 그 사이 말의 옆구리와 배에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말은 구슬프게 울부짖으면서 비틀거리다가 경사지에서 굴렀다.
 “아아악!”
 동시에 아리안느가 오른발 허벅지에 한 발의 화살을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렸다. 그녀가 먼저 굴러 떨어진 말과 같은 상황이 되려는 순간, 준이 보법을 밟으면서 다가와 아리안느의 허리를 껴안고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어엇, 저저······!”
 “제기랄!”
 “뭐해? 화살을 쏴라, 쏴!”
 슈슈슈슝!
 허공으로 도약한 준은 아리안느를 가슴에 안은 상태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며 공중제비를 선보였다. 물론 화살은 모두 빗나가 버렸다.
 “놓치면 안 된다! 쏴라!”
 조장 헤스의 외침에 조원들은 연속으로 화살을 쏘았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화살로 인해 더 이상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땅으로 내려서더니 엄청난 파도를 넘는 금잉어의 몸놀림을 본 따 만든 경신법인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를 시전하였다. 그리고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틀어 순식간에 이동해 경사지 끝에 도착했다.
 그것을 본 추격자들의 조장인 헤스와 대원들은 넋이 나갔다. 준이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 같았던 집중화살 공격을 믿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이럴 수가··· 블링크 마법은 아니었어.”
 “놈이 도망쳤으니 어서 추격해야 합니다.”
 옆에 있던 대원에 말에 정신을 차린 헤스는 외쳤다.
 “소공녀가 화살에 맞았으니 멀리가지는 못한다! 추격하라!”
 “놈을 잡자!”
 이들이 경사지에 접어들자 경사지 끝에서 은신하고 있던 준은 크로스 보우를 꺼내 겨누었다.
 “이젠 내 차례야.”
 츄츄츄츄츙!
 연속으로 발사된 퀘럴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날아갔다.
 퍼퍼퍽!
 “커억, 아아악!”
 가슴이나 배, 머리, 다리에 퀘럴을 맞은 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리다가 경사지를 굴러 떨어졌다.
 “이···이런!”
 당황한 헤스는 앞에 있던 대원이 퀘럴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의 몸을 잡아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그러나 강력한 파워가 실린 퀘럴은 시체의 등을 뚫고 튀어나와 헤스의 가슴에 박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을 뚫고 틀어 박혔다.
 “끄으음······.”
 신음을 흘리면서 인상을 찡그린 헤스는 쓰러지지는 않았다. 준비성이 뛰어난 그였기에 가슴 부분에 철판을 끼워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퀘럴에 맞고도 죽지 않은 이유였다.
 그는 가슴에 박힌 두발의 퀘럴을 뽑았다. 다행이 철판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 철판이 아니었다면 죽었겠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뒤를 돌아보니 바로 자신의 등 뒤에 두 명의 대원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덕에 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퀘럴 공격에 당해 굴러 떨어져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크으··· 40명 중에서 겨우 3명이 살았단 말인가?”
 퀘럴은 두 발이나 더 날아왔지만 별다른 효력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후로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헤스와 두 명의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언제 또다시 퀘럴이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이런. 이걸 어쩐다?”
 나무 뒤에 아리안느를 내려놓은 준은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으나 곤혹스러웠다. 민망하게도 그녀의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으으··· 아악······.”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마에서도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소공녀님,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으으··· 날 이곳에 두고 가지 말아요. 제발······.”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공녀님을 두고 혼자 가지 않습니다.”
 “그···그 말··· 저···정말이죠?”
 “예, 믿으세요. 경사지에 세 놈이 남아 있으니 그들을 먼저 처리한 후 상처를 치료해야겠습니다.”
 “아···알았어요.”
 경사지 끝에 다시 준이 나타났다.
 헤스와 두 대원들은 막 이동을 하려다가 그를 보고 멈칫하면서 긴장했다. 기마자세를 취한 준이 양팔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면서 내뻗었다.
 “격공장(隔空掌).”
 “······?”
 헤스와 대원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상한 자세를 한 준이 갑자기 양팔을 내뻗었기에 마법이라도 펼쳤나 싶어 긴장했었지만 자신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준이 펼친 격공장은 수많은 장법의 하나로, 임의의 한 점에서 힘을 터뜨리는 발경법이었다. 목표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위력도, 영향도 없어 알아채기가 힘들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면 방어할 방법도 없이 기가 폭발해 공격을 당하는 것이기에 살아남으려면 먼저 알고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들이 아는 것은 무리였다. 한 번도 본적도 없는 공격의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퍼퍽!
 타격음이 터지면서 헤스의 가슴에 격공장 두 방이 모두 명중되었다. 철판을 덧대어 몸을 보호하였지만 격공장은 내력으로 펼치는 발경법이었기에 이번에는 무사할 수 없었다.
 울컥.
 “크아아악!”
 가슴에 대놓았던 철판이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갔다. 헤스는 내장 조각이 뒤섞인 검붉은 피를 분수같이 내뿜으며 뒤로 튕기듯 날아갔다. 폐부를 찢길 때 나오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가 낸 마지막 소리였다.
 헤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두 대원은 그와 부딪히면서 경사지를 굴러 떨어졌으며, 8m 정도 날아가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갔다.
 츄츄츄츄츙.
 연이어 크로스 보우에서 발사된 퀘럴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격중되어 머리가 터지면서 즉사해 버렸다. 헤스의 머리에도 두 발의 퀘럴이 박혔다.
 그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라졌다.
 
 아리안느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준은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먼저 대거의 날을 불에 달구어 소독한 후 화살을 뽑고, 그 상처에다 술을 부어 소독함과 동시에 대거의 날로 살을 지져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에 상처가 남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소공녀님, 이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필요한 걸 꺼내 준비해야 하는데 혹시 포션을 가지고 있습니까?”
 별다른 기대 없이 한 말이었으나 그녀에게선 희망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한스 경이 나에게 준 포션 한 병이 있어요.”
 “저···정말 입니까?”
 “주머니 속에 있으니 좀 꺼내 주시겠어요?”
 “그럼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금화가 몇 개, 작은 보석함이 한 개, 그리고 향수병 같은 자그마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유리병 속에서 녹색의 액체가 출렁거렸다.
 “소공녀님, 이게 혹시 포션입니까?”
 “그···그래요. 그게 포션이에요.”
 “그렇군요.”
 준은 포션을 처음 보았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들었던 포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살짝 기대가 됐다.
 “소공녀님, 조금 아프시더라도 참으세요.”
 “네, 알겠어요.”
 아리안느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자, 준은 화살의 깃대를 부러뜨렸다. 그런 다음 그곳에 술을 부어 소독하고는 재빨리 화살촉이 튀어나온 곳을 잡아당겼다.
 주우욱.
 이내 붉은 피와 함께 화살이 뽑혀 나왔다.
 “으으으···아악···아아······.”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아리안느는 그 고통을 잘 참았다. 준은 화살이 뽑힌 상처에 재빨리 포션을 살짝 부었다.
 치이이이.
 소독이 되는 것인지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순식간에 상처 부위가 아물기 시작했다.
 ‘으음··· 포션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한 약이구나.’
 허벅지 윗부분은 이렇게 포션으로 상처가 아물었지만 아직 허벅지 밑부분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곳에 포션을 부었다.
 치이이이.
 조금 전과 같이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피어오르면서 즉시 아물었다.
 “소공녀님, 이제 상처가 아물었으니 나머지 포션을 복용해야 합니다.”
 “아···알았어요.”
 눈을 뜨면서 고개를 돌린 아리안느는 준이 내민 포션을 받아 들고 마셨다. 그 사이 준은 아리안느의 허벅지를 살펴보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새살이 돋아나 있었으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준은 새살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말하였다.
 “소공녀님, 아프지는 않습니까?”
 “네, 약간 아픈 느낌은 있지만 심한 편은 아니에요.”
 “치료가 잘된 것 같습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한번 걸어볼게요.”
 아리안나는 일어나 걷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은 아니었고, 일주일 정도는 무리하지 말아야 할 듯했다.
 “아직은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적들이 추격해오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그···그런······.”
 “지금은 걸을 수도 없고 말도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경사지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제가 여기에서 적들을 막는다면 얼마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은 버티지 못하지만 일단 해가 질 때까지는 가능할 겁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소공녀님을 업고 최대한 멀리 거리를 벌려볼 생각입니다.”
 “나를 업고 이동하려면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소공녀님은 가벼우니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준의 말에 아리안느는 부끄러운지 흰 뺨을 붉게 물들였다.
 준은 추격해오는 적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과일을 깎아서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먹어봐요. 맛있습니다.”
 “고마워요.”
 준과 아리안느는 분위기 좋게 과일을 깎아서 나누어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두두두두.
 스칸디 대장이 이끄는 이글 용병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경사지에 도달하였다.
 이제 160명 정도가 남았는데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타고 가파른 경사지를 넘을 수는 없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대장님, 주위를 살펴봐야겠습니다.”
 프린스의 말에 스칸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9조가 주위를 살펴봐라.”
 “예, 알겠습니다.”
 9조의 조장인 로지의 수신호에 조원들이 주위에 흩어져 살펴보기 시작했다.
 땅의 곳곳에는 발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으며, 검붉은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제대로 방어조차 못하고 당한 듯 경사지 주위의 곳곳에는 6조와 7조의 조원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검술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6조의 조장이었던 헤스까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로지의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40명이나 되던 조원들이 모두 당했구나.’
 이들의 사인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퀘럴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그때 로지의 대원중에서 추격술에 능한 베른이 다가왔다.
 “조장님, 퀘럴이 이렇게까지 강력한 것으로 보아 보통의 크로스 보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봐라, 손방패가 뚫려 있어.”
 “그렇군요. 개조한 크로스 보우인 것 같습니다.”
 “조심해야겠어. 특히 이곳 경사지를 넘다가 놈에게 기습적인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큰일이겠어.”
 “대장님께 말해 한꺼번에 넘기보다는 조별로 나누어서 신속하게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가 추격하는 자는 알려지지 않은 정말 무서운 자 같아.”
 “예. 용맹하다 알려진 우리 이글 용병대의 절반이 넘는 대원들이 그자에게 철저하게 당했으니 말입니다.”
 “으음···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소공녀와 그자 둘만이 남았다는 거지.”
 “조원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해라. 난 대장님께 보고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베른이 조원들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때 조장인 로지는 스칸디 대장에게 다가갔다.
 “대장님, 주위를 살펴본바 6조와 7조가 모두 당했습니다.”
 “조장인 헤스는 어찌 되었나?”
 “무언가에 맞아 죽었는데 또다시 퀘럴에 머리를 맞아 박살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저도 처음에는 보고서도 믿지 못했습니다만 사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원들은 퀘럴에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으음··· 또 그놈의 솜씨구나.”
 “대장님, 경사지를 통과할 때는 조별로 나누어 신속하게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뭐? 이까짓 경사지를 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나?”
 스칸디의 말에 옆에 있던 프린스가 대답하였다.
 “대장님, 로지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곳 경사지에는 아무런 은폐물이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놈이 저 끝에 숨어 있다가 크로스 보우로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날 겁니다.”
 “그래 봤자 놈 혼자야.”
 “그렇게 가볍게 볼 상황이 아닙니다. 놈의 크로스 보우는 연사가 가능한 무구입니다.”
 “그렇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그들의 염려대로 준은 경사지의 끝에 숨어 적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눈치라도 챈 것인지 20명으로 이루어진 1개 조가 말고삐를 잡은 채 조심스레 경사지를 이동해 왔다. 나머지 대원들은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크로스 보우를 겨누고 있던 준은 조금 더 적들이 다가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20명의 조원들이 경사지의 끝에 가까워지자 다시 1개의 조가 걸어왔다.
 ‘맛 좀 봐라!’
 슈슈슈슈슝.
 위력적인 퀘럴이 연속으로 적들에게 날아갔다. 경사지를 넘어오던 1개의 조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퀘럴에 모두 쓰러지는 것을 보자, 경사지 초입에 있던 이들은 도무지 이동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크아악, 아악!”
 가슴이나 머리에 퀘럴을 맞은 조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경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경사지의 초입에 서 있던 프린스는 재빨리 마법을 시전하였다.
 “이···이놈 죽여 버리겠어. 파이어 볼!”
 화르르르!
 불길이 이글거리는 화염의 구가 프린스의 손짓에 따라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엎드린 채 공격을 하고 있던 준은 날아오는 파이어 볼에 퀘럴을 쏘아 맞추었다.
 콰콰쾅!
 폭발음이 터지면서 허공에서 파이어 볼이 폭발하였다.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리 큰 피해는 주지 못하였다.
 “으아아··· 이놈, 죽어라! 매직미사일!”
 츄츄츄츙!
 프린스의 손끝에서 생성된 매직미사일 열 발이 발사되었다. 매직미사일을 이미 경험했던 준은 유도탄처럼 목표물에 격중되지 않고는 멈추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은 크로스 보우를 들어 날아오는 매직미사일에 쏘았다.
 슈슈슈슈슝.
 꽝, 콰쾅!
 여섯 발은 퀘럴로 쏘아 맞추었지만 나머지 네 발은 그대로 준에게로 날아왔다. 엎드려 있다가는 그대로 당할 것 같아 준은 즉시 튕기듯 일어나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매직미사일 네 발이 지나쳐 갔지만 다시 허공을 선회하였다.
 그 바람에 매직미사일이 선회하느라 속도가 약간 떨어진 것을 느낀 준은 들고 있던 크로스 보우를 잘 겨누어 퀘럴을 날렸다.
 콰콰콰쾅!
 운이 좋아서인지 매직미사일 4발은 퀘럴과 충돌하면서 폭발하였다.
 이글 용병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였다. 마법으로 생성시켜 발사한 매직미사일을 피하지 않고 그걸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준이 해낸 것이다.
 슈슈슈슝!
 매직미사일을 처리한 준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퀘럴이 날아온다! 조심해!”
 “커억! 아아악!”
 대부분의 대원들은 몸을 날려 피하였지만 약간 늦은 자들은 어김없이 퀘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는 스칸디 대장은 준에게서만큼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프린스, 퀘럴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법으로 공격해다오.”
 “알겠습니다! 강력한 화염계 마법으로 공격하겠습니다! 파이어 버스트!”
 츄츄츙!
 강력한 불꽃의 구가 생성되어 준에게 날아갔다.
 “뭔가 이상하고 기분 나빠.”
 슈슈슈슝!
 콰쾅!
 피하려다가 무언가 이상해서 퀘럴을 쏘아 맞추어보았더니 역시나 대단히 위력적인 불꽃의 구였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준의 재치로 인해 중간지점에서 폭발해 프린스의 의도가 무산되었다.
 “이···이런! 어디 이번에도 피할 수 있는지 보자.”
 화가 치민 프린스는 다시 강력한 마법을 영창하였다. 서클이 높은 마법을 시전하려는지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잠시 후 그가 양손을 옆으로 벌리고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스톤 블래스트(Stone Blast)!”
 후우우웅!
 그러자 프린스의 반경 30m 안에 있는 모든 돌멩이들이 스르르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칸디 대장은 수천 개의 돌멩이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흥분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쇼칸 부대장에게 말하였다.
 “쇼칸, 저 공격이라면 놈에게 타격을 주겠지?”
 부대장인 쇼칸이 스칸디 대장의 얼굴을 처다 보면서 즉시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수천 개의 돌멩이입니다. 저것이 한꺼번에 날아간다면 놈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관통성이 뛰어나서 데미지가 상당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마력 소모가 심하므로 조건이 맞지 않으면 잘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기도 했다.
 프린스의 손짓에 돌멩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이놈, 이것도 막아볼 수 있으면 막아 보거라. 가랏!”
 콰콰콰콰콰.
 허공이 온통 돌멩이로 뒤덮였다. 그 광경에 준은 처음으로 마법에 대하여 놀라움을 느꼈다.
 “이것이 진정 마법인가? 그렇다면 나도 제대로 상대해주지.”
 준은 품속에서 에이형 부메랑을 세 개를 전부 꺼내 포개었다. 그리고 부메랑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부메랑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면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휩싸였다.
 “가랏, 햐압!”
 끼아아아아앙!
 이제까지와는 확연하게 틀린 굉음이 부메랑에 뚫려 있던 구멍 속에서 터져 나오면서 날아갔다.
 티티팅, 푸스스스!
 날아오던 돌멩이들은 부메랑에 의해 그대로 튕겨지면서 박살나버렸다.
 콰콰콰콰콰!
 고속으로 회전하는 드릴의 날처럼 막강한 위력을 머금은 부메랑은 거침없이 적들에게 날아갔다.
 그것을 본 준이 앞으로 내뻗었던 양손을 양쪽으로 벌리자 날아가던 부메랑이 갑자기 세 개로 분리가 되더니 일제히 그들을 공격하였다.
 “어···엎드려!”
 “이···이럴 수가!”
 마법도 아닌데 이런 현상을 처음 접해보는 이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부메랑이 내는 소리가 인간의 고막으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음파인지라 모두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슈가가가각.
 “아아악!”
 “커억!”
 이글 용병대원들은 입에서 분수처럼 검붉은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부메랑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에 고막과 장기에서 출혈이 발생하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날카로운 부메랑의 강기를 머금은 날에 베이면서 살이 쩌억 갈라져 다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이글 용병대원들 대부분은 심한 내상을 입었다.
 스칸디 대장을 비롯해 부대장인 쇼칸, 마법사인 프린스까지 충격을 받아 비틀거리다가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스톤 블래스트가 소멸되어 돌멩이가 힘없이 땅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들은 마나를 수련한 자들이라 중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상처를 입은 채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휘리리리릭.
 허공을 선회하여 되돌아온 부메랑을 집은 준은 피식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보았느냐? 이것이 진정한 부메랑의 위력이다. 또다시 추격해오면 그땐 모두 죽일 것이니 명심하거라.”
 스윽.
 준은 품속에 다시 부메랑을 집어넣고는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7장 드로이안 산맥의 엘프부족
 
 
 준은 혼자 두고 온 아리안느가 걱정되어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또한 벌써 제법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도살자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기대고 있는 나무로 준이 돌아오자 불안감에 떨고 있던 아리안느는 환하게 웃었다.
 ‘우훗, 아리안느 님은 역시 눈부시게 아름다워.’
 “무사히 돌아왔군요?”
 “일단은 놈들을 저지했지만 또 다시 공격해올 겁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겠어요.”
 “알았어요. 그럼 어서 가요.”
 준이 뒤돌아 등을 내밀자 아리안느가 상체를 기울여 등에 기대었다.
 그녀를 등에 업은 준은 경공술을 발휘해 그곳에서 사라졌다.
 스스스스.
 잎이 제법 크고 무성한 식물.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살짝 흔들거리면서 잎사귀가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잎의 점점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녹색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는데 등에는 보우를 메고 있었으며, 날씬하면서도 귀가 뾰족하고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위대한 분은 아닌데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인간족의 상단이 지나가므로 그들을 숨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준 같이 강한 인간족은 처음이었다.
 파팍.
 땅을 박차고 도약한 엘프는 준이 사라진 쪽으로 사라졌다.
 
 츄츄츄츄.
 바람 소리를 크게 일으키면서 숲 속을 달리는 준.
 그는 등에 아리안느를 업고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아갔다.
 경공술을 이용하였기에 이런 속도가 가능했다.
 숲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경악했을 정도였다.
 아리안느는 엄청난 속도에 겁을 먹었다.
 그녀는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숲 속을 나아가는 속도에, 머리를 준의 등에 바짝 댄 채로 눈을 꼭 감았다.
 ‘아··· 포근하고 따스해.’
 준도 아름다운 아리안느를 등에 업고 달리는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으로 건너온 후 고위 귀족의 딸을 업고 다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후후후, 아름다운 미녀를 등에 업고 달리는 기분도 나름대로 즐겁고 좋은걸?’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어떻게 이 세상으로 이동되어 왔는지 잘 모르며 다시 돌아가기란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망설임이 무뎌져 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리다 보니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 있었다.
 “소공녀님, 오늘밤을 보낼 적당한 장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드로이안 산맥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반드시 공작령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미···믿어요. 믿을게요.”
 아리안느의 곁에는 이제 준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준은 높은 나무 위로 도약해 주위를 살폈고 마침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맑은 물이 흘러내려 오는 계곡 근처에는 한쪽에 깎아지는 절벽의 움푹 들어간 곳이었다.
 잔 돌멩이 때문에 울퉁불퉁한 바닥을 고른 후 마법주머니 속에서 꺼낸 천막을 깔았다.
 그런 다음에 아래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막기 위해 모포를 두 장 깔았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자 나름대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적당한 야영지가 되었다.
 준은 주위에서 주워온 땔감을 잘 쌓았다. 모닥불이 피워지자 냄비에 물을 부어 올려놓았다.
 따끈하게 끓인 스프와 빵, 과일을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다.
 “소공녀님,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드셔보세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아리안느와 준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거리가 제법 떨어진 나무 위에서는 추격해온 엘프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빨라 추격이 어려웠지만 다행히 흔적을 찾았어. 그 흔적마저 찾지 못했더라면 추격은 실패했을 거야.’
 와삭.
 엘프는 품속에서 노란색 과일을 하나 꺼내 깨물었다.
 미세한 소음을 감지한 준은 식사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크로스 보우를 자신의 등 쪽으로 겨누고는 발사하였다.
 퍼억.
 퀘럴이 나무에 박혀 부르르 떨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요?”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소공녀님, 식사를 계속하십시오.”
 준은 퀘럴이 박힌 나무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식사했다.
 한편, 느닷없이 날아오는 퀘럴에 놀란 엘프는 몸을 날려 피하면서 은신술을 펼쳐 주변과 동화되었다.
 ‘어떻게 저자가 나의 위치를 알았지?’
 준은 빵을 뜯어 먹으면서도 신경은 뒤쪽에 가 있었다.
 은신술을 펼쳤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느껴졌다.
 ‘음··· 숲에서 수련을 제법 많이 한 모양이군.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지?’
 식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리안느는 피곤했는지 잠자리에 눕더니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준은 모포로 아리안느를 덮어주었다.
 “밤 날씨가 제법 쌀쌀하겠어.”
 모닥불에 땔감을 몇 개 집어넣자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준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근처에 있는 바위를 은폐물로 삼고자 제법 큰 바위를 들어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들 수 없는 무거운 바위였지만 내공을 사용하는 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위를 몇 개 옮겨 아리안느가 화살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은 그녀를 등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드로이안 산맥의 월계수 엘프부족의 여전사 글리아나는 평소보다 멀리까지 정찰을 나왔다가 우연히 강력한 인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그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왔었다.
 한 발의 퀘럴이 자신이 은신해 있는 곳으로 날아왔기에 이번에는 배나 멀리 떨어져서 감시하고 있었다.
 ‘으응? 왜 저렇게 앉아서 눈을 감고 있지? 저렇게 잠을 자면 불편할 텐데?’
 강력한 인간이었지만 조금은 괴팍하다고 해야 하나···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특이한 인간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벌써 두 시간 정도를 저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아··· 따분해. 어쩌지?’
 하품까지 나오기 시작하더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고,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뽀로롱.
 날이 밝았는지 이름 모를 산새 두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더니 부리를 서로 부딪치면서 한 차례 지저귀고는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글리아나는 눈이 커졌다.
 ‘이···이런?’
 있어야 할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휘휘휘휙.
 준은 아리안느를 등에 업고는 경공술을 시전해 숲속을 빠른 속도로 나는 듯 나아갔다.
 바람 소리가 큰 것으로 보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준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서 추격하고 있는 글리아나는 점점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보다 숲에서 더 빠르게 달리는 것만 해도 믿을 수 없는데, 월계수 엘프부족이 살고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큰일이었다.
 “이···이거 어쩌지? 큰일인데?”
 한참을 달려 나가던 준은 갑자기 멈추었다.
 아리안느는 준의 등에 업혀 너무 빨리 달렸기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준의 등에 바짝 붙였었다. 그런데 준이 갑자기 멈추기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절벽이었다.
 “절벽이네요? 다른 곳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아닙니다, 소공녀님. 눈앞에 보이는 절벽은 절벽이 아닙니다.”
 “예? 눈앞의 절벽은 절벽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죠?”
 “누군가 결계를 펼쳐놓아서 절벽이라고 착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누···누가 그랬을까요?”
 “아마도 드로이안 산맥에서 살고 있는 종족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죠?”
 “결계가 얼마나 강한지 실험해봐야겠습니다.”
 “그···그냥 가면 안 될까요?”
 “드로이안 산맥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결계라 얼마나 많이 돌아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음··· 그럼 준 님이 알아서 하세요.”
 준은 등에 업고 있던 아리안느를 내려놓았다.
 아리안느는 뒤로 물러나 지켜보았다.
 잠시 눈앞에 펼쳐진 결계를 바라보던 그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 던져보았다.
 팅.
 역시나 준의 예측대로였다. 날아간 돌멩이는 튕겨져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것 같은 영상이 순간이었지만 출렁거렸다.
 그것 때문에 결계가 설치되었다는 것이 들켰지만 다시 복구가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했다.
 글리아나는 준의 등 뒤 150m 정도 떨어진 곳의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서 이를 지켜보았다.
 준은 양발을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리더니 양손을 가슴 위로 천천히 치켜들었다.
 “흐압······.”
 파팡!
 내력을 담은 장력이 날아가 결계에 격중되었다.
 콰아앙!
 결계의 막에 격중된 장력의 영향으로 수면이 출렁거리듯 큰 파동이 일어났지만 결계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초였지만 결계 안의 세상은 볼 수 있었다.
 ‘저 인간··· 엄청난 능력을 가졌어.’
 글리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준을 계속 살펴보았다.
 스윽.
 준이 한 손을 앞으로 내뻗자 이번에는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강기가 튀어나오더니 점점 커졌다.
 치이이이.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결계의 막 일부가 얼음이 녹듯이 순식간에 녹으면서 주위로 점점 넓어졌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뻥 뚫리자 결계 안의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투웅.
 글리아나는 더 지켜보다가는 자신의 부족이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에 기습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스윽.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오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으로 화살공격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티팅.
 화살은 결계의 막에 가로막혀 땅에 떨어졌다.
 “아리안느 님, 일단 결계 안으로 피해야겠습니다.”
 “알았어요.”
 화살이 날아온 것을 보았기에 위험하다는 걸 알아챈 아리안느는 준의 말에 따라 일부가 뚫린 결계 안으로 몸을 날렸고, 준도 재빨리 결계의 막 안으로 몸을 피하였다.
 스스스스.
 결계 막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결계 밖에서는 절벽 끝으로 보이지만 결계 안에서는 밖을 유리창처럼 전부 볼 수 있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글리아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튕기듯 몸을 날렸다.
 처척.
 가볍게 땅에 내려선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결계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면서 한 손을 결계의 막에 대었다.
 그러자 거부당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듯 스윽 팔이 결계의 막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다리와 몸까지도 전부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앗!”
 글리아나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준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준의 팔이 그녀를 잡으려고 내뻗어졌고, 그녀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공격을 피하였다.
 쉬익.
 엘프 여전사라서 그런지 몸이 먼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보우를 무기로 사용하면서 휘둘렀다.
 파파팟.
 그러나 현란하기까지 한 준의 수공에 가로막혀 공격은 무위로 끝나버렸다.
 오히려 준의 수공을 완전하게 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퍼억!
 내력이 실린 준의 수공에 가슴을 격중당하려는 찰나 글리아나는 재빨리 양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면서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쩌쩍.
 “아아악!”
 바위도 박살내버리는 준의 내력이 담긴 공격이었기에 양팔의 뼈에 금이 가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양팔이 스르르 밑으로 내려오고 몸은 비틀거렸다.
 연속으로 이어진 준의 수공이 그녀의 가슴 앞까지 날아오자 글리아나는 두 눈을 감았다.
 아무런 충격과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떠 보았더니 준이 피식거리면서 웃고 서 있었다.
 그가 공격을 멈추었던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준도 충격을 받았다.
 글리아나의 모습은 미의 여신이라도 되는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리안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미모만 놓고 본다면 글리아나가 한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제각각 매력이 달랐다.
 아리안느는 화사한 장미라면, 글리아나는 청순하면서 너무나 맑고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남자라면 보호해주고픈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네 정체는 뭐냐?”
 준이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글리아나가 그런 그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더니 대답하였다.
 “그러는 네 정체는?”
 “나? 나는 김준이라고 한다.”
 “김준? 정말 인간인가?”
 “그렇다.”
 “으음··· 믿을 수 없군. 어찌 인간이 이렇게 강하고, 몸속에 마나가 가득하지?”
 ‘마나? 아··· 내공을 말하는 모양이군.’
 “수련을 해서 그렇다.”
 “233년을 살아온 나도 그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대로 말해라.”
 “233년? 그···그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제야 준은 글리아나의 모습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으음··· 18살 정도의 아가씨와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유독 귀가 뾰족하고 크구나.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종족이 엘프라고 했었지?’
 “그렇다. 나는 드로이안 산맥의 월계수 엘프부족의 여전사 글리아나다.”
 “으음··· 왜 우리의 뒤를 추격한 거지?”
 “숲에 정찰을 나왔다가 너무나 강하게 보이는 인간이라 추격해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결계 안으로 들어왔나?”
 “그럼 우리가 쫓기고 있었다는 것도 다 알 것이니 말 안 해도 알겠군.”
 “······.”
 그때, 양팔의 통증이 심해지자 글리아나는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양팔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화악 일어나다가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글리아나의 금이 갔던 양팔의 뼈가 다시 복구되어버렸다.
 ‘으음··· 엘프의 치료마법인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결계 밖으로 나간다면 지금까지의 일을 잊어주겠다. 그러니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라.”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우린 이 드로이안 산맥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우리 월계수 엘프부족과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어.”
 츠으, 츠츠츠.
 준은 하단전의 내공을 몸 밖으로 내뿜었다.
 그 막대한 기운에 놀란 글리아나는 멈칫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준은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면서 양 무릎을 조금 굽혔다.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자세였다.
 와사삭.
 약 700m 안쪽의 숲에서는 녹색 물결이 밀려오듯 엘프 전사 무리가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워낙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글리아나의 귀에는 전부 똑똑히 들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라.”
 글리아나는 이상하게도 준이 위험해지는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기에 약간 말을 돌려서 결계 밖으로 나가길 바라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하하하, 동료들이 접근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인가?”
 “허억, 그···그것까지 알고 있었느냐?”
 “물론이지. 너의 귀는 커서 밝겠지만, 나도 그에 못지않다.”
 스스스슷.
 보우를 손에 든 엘프 전사들이 20명이나 나타나 준의 주위를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그들은 모두 허리에 롱소드를 차고 있었다.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준은 너무 태연했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글리아나였다.
 “넌 포위되었는데 걱정되지도 않느냐?”
 “하하하, 내가 포위되었다고 해서 겁에 질려야 한단 말인가?”
 “내 동료들이 널 공격하면 넌 살아서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거야 싸워봐야 아는 거고. 한 가지만 말해 주지.”
 “그게 뭐냐?”
 “날 건드리지 마라.”
 “호호호, 네가 위대하신 분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양쪽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엘프들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였다. 준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츠츠츠츠.
 갑자기 준의 전방 10m 앞에서 2m나 되는 노인의 형상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60대로 아래턱에 수염 난 노인이었다.
 “글리아나, 그 인간을 마을로 데려오거라.”
 “케르킨 부족장님, 이 인간을 말입니까?”
 “그렇다. 그 인간에게 함부로 무례하게 굴지 말아라.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그제야 포위하고 있던 엘프들도 보우를 아래로 내리고는 재빨리 10m 정도 물러났다.
 “인간, 잘 들었지? 어떻게 할 테냐?”
 “초대하니까 당연히 가봐야 하지 않겠어?”
 용감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글리아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프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부터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던 아리안느는 준이 손을 잡아주자 그제야 조금 안정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으니까요.”
 아리안느는 준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엘프들을 따라 엘프 마을로 향하였다.
 숲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엘프들이라서 그런지 엘프 마을은 거대한 나무들이 군집을 이루는 곳에 있었다.
 성인남자 10명이 서로 양팔을 벌리고 잡아야 될 정도로 나무는 굵고 높이 또한 어림잡아도 150m는 될 듯싶었다.
 ‘으음··· 이런 거대한 나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을 줄이야.’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은 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그런 거대한 나무였다.
 월계수 엘프부족의 마을은 거대한 나무 위에 있었는데, 새집처럼 나무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속에서 엘프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무로 만든 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나무와 넝쿨이 다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글리아나가 앞장서고, 그 뒤를 준과 아리안느가 따라 걸어갔다.
 이동하는 동안 주위에서는 엘프전사들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케르킨 부족장의 집은 다른 엘프들보다는 좀 더 컸지만 그렇게 화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나무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글리아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준과 아리안느가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15평 정도 되는 집으로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50m 운동장 넓이는 되는 것 같았다.
 ‘뭐야? 말도 안 되는 이 넓이는?’
 “허허허··· 그렇게 놀랄 것 없소. 공간확장마법이 걸려 있기에 이렇게 좀 넓은 편이오.”
 “아··· 그렇습니까?”
 나무 탁자와 나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정면에는 케르킨 엘프부족장이 앉아 있었다.
 마법으로 보인 얼굴과 똑같았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준은 두리번거리면서 집안을 살펴보았다.
 “저희를 초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호기심이라 해두고 싶소, 강력한 전사 인간이여.”
 “호기심이라고요? 저를 본 적 있습니까?”
 “드로이안 산맥에 들어올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오.”
 ‘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이것이었어.’
 “혹시 저에게 원하는 게 있는 겁니까?”
 준의 말에 케르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그렇다오. 몇 가지 질문에만 답해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소.”
 “그 정도라면 답해드리죠.”
 “그럴 줄 알았소, 강력한 전사 인간이여. 글리아나는 인간 여자를 데리고 밖에 잠시 나가 있거라.”
 “케르킨 부족장님, 저 인간은 위험한 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잠시 문밖에서 기다리거라.”
 아랫입술을 깨문 글리아나는 아리안느를 쳐다보았고, 아리안느는 준을 쳐다보았다.
 준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아리안느는 글리아나를 따라 문밖으로 나갔다.
 집안에는 케르킨과 준만 남게 되었다.
 스윽.
 케르킨이 한 손을 가슴팍까지 들어 올리면서 무언가 중얼거리자 기이한 빛이 번쩍하더니 집안을 환하게 비췄고,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준은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인지 두리번거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인간이여. 잠시 밖에서 들을 수 없도록 마법으로 결계를 쳐 놓은 것뿐이라오.”
 “으음··· 무슨 질문을 하시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건 그대 혼자만 들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오.”
 “으음··· 좋습니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하신 것, 말씀해보십시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의 기운이 들어 있는 아티팩트가 있었소.”
 “아티팩트라고요?”
 “그렇소. 너무나 강력해서 선택받은 자나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소유하거나 지킬 수 없었다오.”
 “그래서요?”
 “신의 아티팩트는 모두 5개. 물과 얼음의 기운을 가진 빌헤임(Bilhem)은 수정에 그 기운이 봉인되어 있으며, 반지 형태의 아티팩트로 만들어졌다오. 그리고 불의 기운을 가진 바나리르(Vanalir)는 붉은 보석인 루비에 봉인되어 있으며, 스피어에 박혀 있어서 무기로 사용할 수 있소.”
 “······.”
 “바람의 기운을 가진 벤뵤르그(Venbjorg)는 사파이어 보석에 봉인되어 반지 아티팩트로 만들어졌소. 또 파괴되거나 죽어가는 것을 다시 소생시키는 기운을 가진 벤겔미르(Vengelmir)는 에메랄드 보석에 봉인되었으며, 보우에 박혀 무기로 만들어졌소. 마지막으로, 혼돈의 힘이 든 히민반가르(Himinvangar)는 보라색 다이아몬드에 봉인되어 있으며, 팔찌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전해진다오.”
 “으음··· 그 5개의 신의 아티팩트가 그렇게 강력합니까?”
 “나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만 알고 있을 뿐 진정한 위력은 어떤지 잘 모르오. 하지만 그 5개의 신의 아티팩트 중에서 벤겔미르(Vengelmir)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소.”
 “벤겔미르라고 하시면 보우에 박혀 있다는 그것 말입니까?”
 “그렇소. 그게 300년 전에는 우리 부족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오.”
 “그···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오. 내가 어릴 때 호기심에 벤겔미르의 줄을 당겨 한번 사용해보았는데, 반경 100m 정도 되는 숲이 그것 한 발에 폐허가 되어버렸다오.”
 “으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군요.”
 “나도 처음에는 그러했지만 직접 사용해보고 나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오. 너무나 두려운 힘에 난 마법을 이용해 그걸 다시 봉인해버렸소. 지금은 10분의 1 정도로 크기가 줄어들어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 같은 형태로 되어 있소.”
 “으음··· 대단하시군요. 그 강력한 힘을 봉인하시다니······.”
 “허나 완벽하게 봉인된 것이 아니라오. 크기가 줄어든 만큼 그 힘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 번 줄을 당기면 10m 정도는 폐허가 되어버린다오.”
 “그것만 해도 엄청나군요.”
 “그렇소. 드래곤이 아니라면 직접적으로 그 공격을 막을 수도 없소. 그때 난 벤겔미르의 힘 일부를 강제로 뽑아내어 에메랄드 보석에 봉인시켰으며, 진정한 벤겔미르를 모방한 보우를 가지고 있소. 보여주겠소.”
 스윽.
 케르킨이 한 손을 들어 휘젓자 대기가 일렁거렸다.
 쩌어억.
 아공간이 벌어지면서 그 속에서 케르킨이 말한 보우가 튀어 나왔다.
 전체가 은으로 만들어졌는지 은빛으로 번뜩이는 게 아주 멋진 보우였다. 활대의 중간에는 에메랄드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잘 보시오. 이것이 벤겔미르의 힘 일부가 봉인되어 있는 보석이라오.”
 “으음···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군요.”
 “그럴 것이오. 이 에메랄드 보석에 봉인되어 있는 힘만 해도 성룡급의 드래곤 하트와 맞먹을 거요.”
 “정말 대단한 아티팩트로군요.”
 “그렇소. 내가 생각하기에는 벤겔미르만 해도 엄청난 물건인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소?”
 “으음··· 그렇겠군요.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시는 겁니까?”
 “강력한 전사 인간이라면 잃어버렸던 물건을 회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부탁을 하고자 하는 것이오.”
 “으음··· 제 어떤 점을 믿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 물건을 회수하였다고 해도 이곳으로 가져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허허허, 수백 년을 살아온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 없소. 우리 월계수 엘프부족에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수의 씨앗이 있소. 그것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벤겔미르의 생명력이 필요하오. 그것의 싹만 틔운다면 벤겔미르를 당신에게 돌려주겠소.”
 “으음··· 저를 그렇게까지 믿어주시니 고맙긴 합니다.”
 “나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당신이 필요한 것을 최대한 도와줄 용의가 있소.”
 “저는 그렇게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만······.”
 “아니오.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은 마법에 아주 관심이 많더군.”
 “크흠···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원래 인간에게는 엘프의 마법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당신에 게는 알려줄 수도 있소.”
 “으음··· 저는 지금 의뢰받은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허허허,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펼치는 마법의 공간 속에서 수련한다면 단기간에 효과를 볼 것이오.”
 “마법의 공간 속에서라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마법의 공간 속은 밖의 시간과는 확연하게 다르지요. 지금 이곳의 하루가 마법의 공간 속에서는 10년 정도이니 7일만 수련한다면 70년을 수련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이라오. 어떻소?”
 “음···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한 겁니까?”
 “허허, 그렇소. 이런 마법공간을 만들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지만, 벤겔미르의 힘 일부가 봉인되어 있는 보석을 이용한다면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오.”
 케르킨 부족장의 너무나 매력적인 제안에 준은 고심하였다. 하지만 7일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일이기에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으음··· 케르킨 부족장님의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단,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요?”
 “그게 무엇이오?”
 “7일 후에 이곳 드로이안 산맥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들어주겠소.”
 “고···고맙습니다, 케르킨 부족장님.”
 준은 케르킨과의 비밀 대화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걱정에 얼굴이 굳어 있던 아리안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안느 님, 케르킨 엘프부족장과 대화를 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런데 당분간 이곳에서 묵었다가 떠나야겠습니다.”
 “이곳에서요?”
 “예, 7일간만 이곳에 묵고 떠나야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건 걱정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케르킨 엘프부족장이 7일 뒤에 공간이동 마법으로 드로이안 산맥 밖으로 이동시켜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그게 정말인가요?”
 “예, 그러니 절 믿으세요. 이곳에서 몸을 돌본 후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아···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준은 아리안느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준은 월계수 엘프부족의 마을에서 7일간 머물게 되었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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