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염왕

1화

2017.06.08 조회 7,786 추천 72


 시작하기에 앞서
 
 
 
 1.
 언제나 그렇지만 새로 시작하는 글은 늘 설렘과 희망을 준다. 또 그와 정비례해서 두려움과 불안감도 함께 가져다준다. 특히 평소 써 보지 않던 스타일과 주인공을 내세울 때면 더더욱 그렇다.
 
 이번 글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림의 원천적 시발(始發)은 복수라고 할 수 있다. 부모를 잃고, 사부를 잃고, 형제를 잃은 주인공이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고 무공을 수련하는 것.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거의 대부분의 무협이 그런 타입이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복수극은 사라지고 정사의 대립. 군림천하의 야망, 혹은 개인의 소소한 일탈로 시작되는 모험담이 주류를 차지했다. 어쩌면 읽는 독자들도, 쓰는 작가들도 복수물이 지겨워졌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꽤 많은 글을 써 왔지만 이게 <복수물>이다, 라고 내보일 만한 글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음울한 이야기보다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좋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복수물을 제대로, 훌륭하게 써 내려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그럴 자신이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단지 때마침 적당한 기회가 왔고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다시 복수극에 대해 쓰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복수극이라고 해서 우울하고 잔인하며 악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가지고 복수극이라 할 수도 없다. 그 간극을 얼마나 제대로 메울 수 있는지가 이번 이야기의 모토라 할 수 있겠다.
 
 
 
 
 
 
 
 2.
 또한 이 글은 이른바 [무림오적]으로 구성된 연작 중에하나로 전작 <무림포두>에 이른 두 번째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전작과는 전혀 다른 스토리이지만 그래도 기존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전작에서 나왔던 등장인물이 다시 나올 가능성도 매우 높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개연성을 잃지 않도록 구성하는 것 역시 이번 글의 잔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전작을 읽은 분들이라면 그 잔재미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전작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개별적인 이야기임을 다시 한 번 밝혀 둔다.
 
 모쪼록 이번 여정 또한 독자 여러분과 더불어 흥미진진한 여행이 될 수 있기를, 나 또한 빌어 마지않는다.
 
 
 백야 拜上.
 
 
 
 
 서장
 
 
 1. 추격자
 
 “쥐새끼 같은 놈!”
 가래침 뱉듯 그렇게 내뱉던 왕대호(王大虎)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의 입에서는 새하얀 입김이 연초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
 눈이 그친 가운데 조그만 발자국 하나가 산등성이 너머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제부터 내린 눈임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아직 발자국이 새로 내리는 눈에 지워지지 않은 걸로 짐작한다면 놈은 최소한 한 시진 전까지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왕대호는 수하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왕대호는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겨우 열대여섯 먹은 어린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무슨 고생이냐? 늦어도 오늘 안에는 놈을 해치워야 한다. 알겠느냐?”
 나이 지긋한 초로의 늙은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녀석, 어리다고 얕보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조 영감?”
 왕대호는 퉁방울 같은 눈으로 늙은이를 노려보았다. 조칠(曺七)이라는 이름보다는 조 영감, 혹은 조 노대(老大)로 더 자주 불리는 늙은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아이, 어렸을 적부터 제 아비와 함께 이 산을 탔습니다. 산에 대해서라면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봤자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마다.”
 왕대호의 말투가 매서워졌지만 조칠은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추위라면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었다고 하더라도 얼어 죽기······.”
 “헛소리! 내 밑에 그런 약한 놈은 조 영감뿐이다!”
 왕대호는 일언지하에 조칠의 걱정을 물리치고는 다시 수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놈을 잡거나 죽이는 자에게는 은자 백 냥을 주마. 그리고 장주(莊主)께 말씀드려서 좋은 자리도 하나 만들어 주지.”
 스무 명가량의 사내들은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그들의 얼굴은 탐욕과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사내들은 곧 다섯 개의 조로 나뉘었고 산등성이 쪽으로 이어진 발자국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조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 그는 오랜 경험과 연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날씨의 산은 산중대왕 호랑이보다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산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다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 게다가······.’
 게다가 소년은 어리다고는 하나 산에서의 경험이 녹록지 않았다. 산의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해낸다는 칭찬이 자자하던 놈이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릴 때, 왕대호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하나, 조 영감!”
 조칠은 황급히 동료들을 따라 산길을 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대호는 혀를 찼다.
 “저 늙은이, 아버지의 옛 친구라고 해서 봐줬더니 안 되겠군. 이번 일을 끝내는 대로 끝을 봐야겠어.”
 왕대호는 팔짱을 꼈다. 겨울 산의 매서운 한기는 그의 장대한 체구로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다. 저도 모르게 한바탕 몸서리가 쳐졌다. 문득 조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추위라면······.
 하지만 왕대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놈. 그렇다, 지금 그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고 있는 놈.
 “영악한 미꾸라지.”
 확실히 놈은 영악했다.
 놈은 시체 사이에 끼어서 죽은 듯 엎드린 채로 두 시진을 버텼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미꾸라지처럼 그곳을 빠져나가 곧장 이 산 위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 한 명의 수하까지 목숨을 빼앗겼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물건도.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왕대호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놈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위호장(衛護長)이라는 자리는 물론, 목숨마저도 위태로울 처지였다. 그러니 어떡하든 놈을 잡아야 했다. 이깟 추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왕대호는 발밑의 눈을 힘껏 걷어찼다. 사방으로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왕대호는 이를 갈았다.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만든 죄,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주마!”
 
 
 2. 도망자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이 살인적인 추위였다. 발목까지 파이는 눈밭, 매서운 바람, 격한 호흡마저 단번에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
 기어오르듯 산등성이를 오르던 장예추(張刈錘)는 아차 하는 사이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워낙 가파르고 미끄러운 산길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데구루루 굴러 떨어지던 그는 악착같이 손을 뻗어 바위 하나를 잡았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바닥이 찢어졌다. 장예추는 이를 악물며 팔에 힘을 모으고 버티면서 발을 디딜 공간을 찾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갈수록 깊게 가라앉는 잿빛 하늘로 인해 안계(眼界)가 흐릿한 가운데, 자신을 쫓는 추격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면 안 돼.”
 장예추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놈들은 반드시 날 쫓아올 거야. 그런 일을 벌였으니,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을 살려 둘 리가 없어.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날 죽이러 올 거야.”
 소년은 곱은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살아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장예추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하루 종일 흘려서 이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만 같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는 씩씩하게 말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손등이 트고 손바닥이 찢어졌다. 게다가 손과 발을 움직일 때마다, 죽어라 매타작을 당했던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몽둥이에 맞아 깨진 뒤통수에서는 다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는 순간, 자신은 곧 죽은 목숨이고 진실은 저 어둠처럼 깊은 심연에 파묻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계속해서 손과 발을 놀렸다.
 힘겹게 산등성이를 기어오른 후 장예추는 허리를 굽히고 할딱거렸다. 일순, 저 산등성이 아래 거뭇한 것이 움직이는 광경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장예추는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봤지만 세찬 바람과 잿빛 공기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장예추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대로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어.’
 산을 넘으려면 사흘은 족히 걸릴 것이다. 물론 그전에 체력은 바닥날 것이다. 그 결말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굶어 죽거나, 지쳐 죽거나 혹은 잡혀 죽거나.
 장예추는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를 확인했다. 약간의 건량과 몇 가지 약, 부싯돌과 소금, 그리고 은자 두 냥가량이 전부였다.
 아쉬웠다, 칼과 활이 없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커다란 행운이었다.
 ‘사냥터로 떠나던 길이었으니까 그나마 이걸 가지고 있었지. 만약 집에서 쉬고 있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을 거야.’
 장예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육포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딱딱하기가 얼음 같은 육포가 입에서 잘게 부서졌다. 장예추는 그 조각을 침으로 녹이면서 품을 매만졌다. 소피를 보러 나온 장정 하나를 몰래 기습하여 죽이고 되찾은 책자가 그의 품에 있었다.
 ‘이것 때문이지, 우리 가족들을 모두 해친 게?’
 놈들에게 얻어맞아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장예추는 분명히 들었다. 책자를 찾았다는 사람들의 소리를. 또 놈을 죽이고 도망칠 때도 들었다. 저쪽 대장인 듯한 자가 책자부터 찾는 소리를.
 ‘도대체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미 책자의 내용을 읽어 본 바가 있는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품을 단단히 단속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살 언저리부터 부친과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올랐으니 벌써 여섯 해 가까이 탄 산이었다. 익숙한 곳. 하지만 언제나 낯설기만 한 곳이 바로 이곳 청령산(靑靈山)이었다.
 “그래.”
 장예추의 눈빛이 문득 빛났다.
 나름대로 한 사람 몫을 하는 사냥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장예추조차 언제나 낯설고 험하게 느껴지는 산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뒤를 쫓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낯설고 험한 산일 게다.
 장예추는 다시 산 아래를 내려 보았다. 안개처럼 사방은 희뿌연 공기로 뒤덮여 있어서 불과 십여 장 밖의 광경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한껏 뛰어오르면 손에 잡힐 듯이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 분명히 눈은 그친 게 아니었다. 더 많은 눈을 쏟아 내기 위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좋아. 가능해.”
 소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 산 아래, 자신을 뒤쫓아 오는 사람들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소년은 살기가 언뜻 드러나는 눈길로 그곳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청령산 사냥꾼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 주겠어. 다들 죽여 주마. 아주 처참하게, 잔인하게, 복수해 주지.”
 
 
 
 
 
 
 
 1
 
 1.
 
 “흑흑,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소홍(小紅)은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빌고 또 빌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반항과 항변의 물결이 꿈틀거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청소하라고 해서 청소한 것뿐인데 왜 그러는 건데? 잘못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라 청소하라고 시킨 아가씨잖아?’
 하지만 그 속마음은 소홍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저 소홍은 이 참을 수 없는 매질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따름이었다.
 “정말 쇤네가 모르고 한 일입니다. 그저 아무런 쓸모없는 물건인 줄로만 알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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