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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카운트다운 1

2017.06.09 조회 2,932 추천 15


 <작가서문>
 
 
 몇 권의 이북을 내놨지만 이북을 출간하면서 작가 약력이나 소개를 쓸 때는 늘 당황합니다. 작가라는 말이 아직도 제겐 무거운 단어거든요. 아마도 작가라기보다는 독자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독자로서 제 이야기의 제일 첫 독자는 저 자신입니다. 제가 재미있으면 다른 사람도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퍼스트 카운트다운은 저 자신도 쓰면서 울고 웃고 굉장히 재미있게 즐겼던 이야기입니다.
 춥디추운 설원이라던가, 기괴한 생물이 자라는 숲이라든가 얼마나 신나게 썼는지 기억이 납니다. 마치 새로운 상품이 나올 때처럼 저 자신도 다음에는 뭐가 나올 거지? 다음에는 뭐냐? 하고 신나했던 기억이 나네요.
 때론 너무 막나가서 수습하느라 애먹은 적도 있었지만 완결이 될 때는 정말로 존 윌리엄스와 함께 외계행성을 탐험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새로 이북으로 이 이야기를 읽으시는 독자 분들도 모쪼록 그 유쾌한 경험을 같이 하셨으면 좋겠네요.
 제게 퍼스트 카운트다운에 대한 기억은 쓰면서 굉장히 추웠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써서 그런지 더더욱 그랬지요. 얼음지옥을 쓸 때는 일부러 빙옥의 기분을 느끼려고 찬바람이 휭휭 부는 눈밭위에서도 쓴 적이 있습니다. 손이 얼어서 멍충하게 덜덜 떨었었네요.
 이야기가 뭐냐고 작자(?)인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주인공은 엑소슈트, 아니 로봇뜨(!)를 타고 용에게 돌격해서 용의 심장을 부수는 이야기입니다.
 이 길디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그렇게 되겠네요. 아 물론 그뿐만은 아닙니다. 가슴 큰 엘프 아가씨가 있습니다. 수많은 수인 아가씨들도 있고요. 주인공은 혈기왕성한 남자고 뭐 더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청소년 버전으로 보시게 될 청소년 여러분께는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무튼 퍼스트 카운트다운과 주인공 존 윌리엄스는 저에게는 각별한 이야기입니다. 배경이 쓰는 저에게도 재미있었던 건 뭐든지 가능한 세계였고 뭐든지 말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욕쟁이이자 근사한 야전지휘관인 존 윌리엄스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 옳은 것이냐’라는 거였지요.
 수많은 상황에서 존 윌리엄스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합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을 해선 안 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죠. 저는 그 판단보다도 그 고민하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신보다 더 멋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아. 이렇게 사족을 달아놓으니 굉장히 딱딱한 이야기 같네요. 사실 뭐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단 쓰는 저 자신이 유쾌하고 즐거웠던 이야기거든요. 모쪼록 독자 분들도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위님 이 아가씨 ‘엘프’라는데요?
 
 
 1)
 
 
 짧게 이야기 하도록 하지.
 우리는 좆 됐어.
 아아, 뭔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긴 그냥 좆 됐다고 말하면 니들이 뭘 알겄냐? 길게 나불대기는 싫은데 결국 길게 이야기해야 되잖아?
 우리는 생판 본 적도 없는 행성에 헤딩을 해야 할 판이야. 음······ 이것도 말하고 보니 영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네.
 아오,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저 약 빤 강하엽병(우주궤도에서 대기권 강하를 전문으로 하는 부대) 새끼들하고 땅에 처박혀야 될 기구한 운명이 된 썰을 찬찬히 풀어주도록 할게.
 혹시 ‘외우주개척회사’라고 알아? 소위 Outer Space Frontier Company. 줄여서 ‘OSFC’ 혹은 ‘개척회사’라고 부르지.
 내가 보기엔 이 새끼들 순 사기꾼이야. 뭐 행성연방정부에서 돈 좀 뽑아 쓴다고 하던데, 아무튼 ‘인생의 떨거지여, 외우주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자!’ 거기까지는 좋아.
 근데 왜 우리 육전군한테 그 호위를 맡기는 거여? 우주함대 순양함 한 척, 구축함 몇 척과 그 개척선을 호위하래요? 이 우주에서 무슨 외계인이라도 나온대냐? 무슨 놈의 호위가 필요해?
 그리고 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니들도 빽 있고 돈 있고 하면 그 좋은 지구나 화성에서 꿀 빨고 싶지 않겠냐? 돌아올 기약도 없는 이따위 호위임무 누가 자원하겠어? 외우주라구! 외.우.주!
 인류 따윈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의 땅!
 테라포밍(인간이 살 수 있도록 행성에 대기를 개조하는 작업)을 하거나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찾아서 정착할 때까지 가는 험난한 여행.
 으으. 이쯤 되면 알만하지? 그려 정답이여. 내 주위에 있는 이 미친 강하엽병 새끼들이랑 이 순양함의 함장이나······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어!
 결국 그 호위부대로 뽑혔다는 놈들은 병신들의 집단이야. 복무부적격 판정을 받은 새끼에, 사령부에 강하 실린더를 처박은 또라이 새끼.
 아······. 나? 이거 봐, 나는 말이야 그래도 정상적인 놈이라구.
 헤에? 의심스럽다고?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눈치들은 빨라요. 나는 육전군 정예 중에서도 정예 중장기병 ‘블루숄더’였는데 장사하다가 이렇게 된 거지 뭐.
 하하. 정상적인 장사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씨벌. 그래그래. 보급품 내다 팔다가 걸렸다. 주스나 전투식량 그런 거. 아? 그 정도는 누구나 꽁무니로 하는 장사라고? 하하. 나도 그랬었지 근데 나중에는 간땡이가 부어서 보급창고 하나를 깡처리하다가 걸렸어. 헤헤. 생각해보니 나도 미친놈이군.
 문제는 말이야. 목성기지에 있는 식료품 창고 하나를 개러지 세일해 버렸는데 어엉? 씨부럴. 거기에 최신 전함의 재머 기술이 들어있다는 거여! 사람이 재수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니까?
 난 보급대 쉐끼한테 분명 2-b를 깡처리하자고 그랬는데 그 새끼가 2-a를 준거야. 아오······.
 진짜 창고를 보니까 전투식량 깡통은 없고 웬 쇳덩이가 있었지. 좆 된 거야. 딴것도 아니고 행성분리주의자들하고 엮여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거지. 겨우 깡통주스나 팔려다가 그 꼴이 된 거야.
 아무튼 걸려가지고 헌병대에 붙잡혀 있는데 웬 연방보안국 떨거지가 오더라고? 나보고 딜을 치재. 감옥갈래? 아님 이 배 탈래?
 아무튼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지,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지······. 뭐 딜에 응하는 수밖에.
 잘 있어라! 태양계여!
 사실 뭐 거기까지도 좋았어. 저쪽 행성개척선 배에 근무 나가면 예쁜이들이랑 밤도 불 싸지를 수 있고 제법 밥도 맛있었거든. 좋은 시절이었지. 내 좆같은 인생 여기서 꽃을 피우는구나, 뭐 그런 생각도 했었어. 개척대에 지원한 예쁜 아가씨랑 가족도 이루고 신천지에서 농사짓고 땀 흘리면서 사는 거야. 캬~ 좋지 좋아.
 근데 인생 맘대로 되는 게 있어? 무슨 c45항성인가? 중력 도약으로 다시 도약항해를 하려고 할 때 항성의 영향으로 도약드라이브가 부셔져 버린 거야.
 그게 뭐냐고? 나도 잘 몰라. 아무튼 광속을 넘어서 별의 바다를 헤쳐 가는 장치래. 군대에서 교육은 받았는데 뭐······.
 암튼 로켓으로 별을 탐사하는 시절은 지났고, 뿅 하고 워프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편해. 어려운 이야기는 엔지니어들한테 물어봐. 밤을 새면서 설명해 줄 거여. 아마 걔네들은 그거 설명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낄 거다. 하하.
 여튼 천신만고 끝에 재도약에 성공해서 거기를 벗어났을 때, 아뿔싸! 온통 소행성 지대야! 프론티어의 배도 아작이 났고 거기서 구축함 두 척이 박살나 버렸어. 아아. 그뿐만이 아니야······.
 아······ 뒤의 이야기는 또 썰을 풀어줄게. 강하해야 할 시간이다.
 “중위님! 강하 전 체크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미친 강하엽병 새끼들아! 니들은 만날 이 미친 짓을 하는 거냐?”
 “행드맨(hanged man-교수형당한 사람. 강하엽병의 별명)이니까요. 중위님은 강하 경험이 없습니까?”
 “그쪽은 처녀다. 좀 살살해줘라.”
 “흐흐흐. 우리 강하엽병은 거칠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럽지요. 조심이나 하세요.”
 “아오, 이 미친 새끼들. 씨발 이 짓거리 제정신 가지고 하겄냐?”
 “하하. 우리 강하엽병들은 다 미쳤다구요.”
 강하엽병 새끼가 머리에 손가락을 돌리고 있다. 저 새끼만 미친 거 아니지? 봐봐. 미친 짓이라구. 저 푸른 행성을 보라구! 거기에 그냥 우주복 하나 입고 강하하는 거여!
 나도 우주비행경험 100시간을 간신히 채웠지만 우주에서 지상으로 꼴아 박히는 건 상상도 못했어. 아아. 군바리의 나쁜 점이 뭐겠어?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존 윌리엄스 중위 강하준비 완료! 로더(loader-짐을 싣고 나르는 유인로봇)체크. 탄소케이블 체크. 최종점검 완료.”
 [중위. 건투를 빈다. 그대의 어깨에 프론티어의 주민들과 우리 제군들의 목숨이 걸렸다. 히끅.]
 샌더스 대령 또 취하셨구만. 제기랄, 그 술이나 날 달라고! 지금 난 술을 진탕 마시고 싶다구!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 실린더가 움직인다. 그래. 웬만한 빌딩 같은 강하 실린더 안에 들어있는 나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지. 내 옆의 행드맨 새끼들은 대기권을 우주복과 방패만으로 통과해야 돼. 미친놈들.
 대기.
 후우. 아무튼 다행이라고 한다면 소행성지대를 빠져 나왔을 때 우리는 노오오올랍게도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별을 하나 발견했어.
 무려 대기도 있었지. 아니 그냥 대기가 아니라 거의 산소함량이 우리 지구랑 비슷한 대기야. 오히려 산소가 프론티어 배의 유인거주지구보다 높으니 말 다했지. 중력도 0.9배에다 지구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행성이야. 설마 그런 행성이 눈앞에 있을 줄이야.
 “퍼스트 카운트다운 5, 4, 3, 2, 1 강하!”
 으아아악! 미추어 버리겠군!
 으으. 갑자기 중력이 느껴지는 그 기분 알아? 왜 있잖아?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서 버렸을 때? 내가 느끼는 좆같은 기분은 그 기분의 수백 배야 지금. 환장하겠군! 거기다 가속도 때문에 몸에 심한 압력이 느껴진다구. 작용반작용. 빌어먹을 물리법칙 녀석!
 [끼야아아앗호우우우! 중위님 멋지지 않은가요! 뿅가죽네!]
 “아오 이 미친 새끼야. 전체통신으로 지랄 트지 말라고!”
 [이 맛에 강하한다 아닙니까?]
 아아, 미친 새끼들. 씨벌 통신채널로 노래 쳐 부르지 말라고. 쌔끼들 정작 부르랄 땐 안 부르고 이럴 때만 군가를 불러재껴요.
 [상공 3만 미터 감속 추력자 발사. 중위님 준비를.]
 “알았어.”
 이놈. 무슨 에이스 파일럿이라던가? 이 약 빤 놈들의 소굴에서 이놈만 정상이야. 파일럿이 지시해주는 대로 할 수밖에. 이게 ‘탄소기둥 고정 장치’였나? 탄소 필라가 끊어지면 우리는 말짱 헛짓거리 하는 거여.
 탄소 필라(pillar)로 뭘 하느냐고?
 우리는 지금 간이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있어. 강하 실린더의 꽁무니에는 개척선에서 부터 뻗어 나온 탄소 케이블이 걸려 있어. 이게 개척선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면 궤도 엘리베이터의 토대가 만들어지는 거지. 지금 우리는 그 지상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
 음······ 저 밑에는 뭐가 있을지 몰라.
 “어이, 파일럿. 그 동생물학자가 뭐랬지? 잘하면 지적 생명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예. 그래봐야 목성 미역이나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명왕성을 지나서도 그 사람은 별 하나를 찍고 호들갑을 떨었죠.]
 “목성 미역. 크크크. 하긴 그 마약재료 같은 식물이나 자라겄지. 근데 그 동생물학자 양반 입방정 때문에 우리가 이런 좆뱅이를 치고 있잖아. 씨발 무기들을 가지고 내려가서 목성미역하고 전면전이라도 벌이라는 거야, 뭐야?”
 [하긴 중무장이긴 하지요. 그래도 무장병력이 있는 건 프론티어 측도 든든하겠지요. 뭐가 있을지 모르는 외계행성이니까요. 게다가 중무장 병력과 동시 강하는 규정이니까요.]
 “흐흐흐. 규정······. 누가 만든 규정이야 그거. 군인들만 좆뱅이 치라는 거겠지. 어? 잠깐. 어! 어! 이거 뭐야!”
 파일럿과 수다를 떠는 와중 지금 쯤 감속 추진재가 켜지고 우리는 슬슬 땅에 터치다운 했어야 했다. 분명 계기는 센서들이 예상한 고도를 지나서 또 한참 내려가고 있었다. 거기다······.
 “파일럿. 지금 뭐지! 우리 바다를 지나고 있는 거냐?”
 [예······. 세······센서 상으로는 바······바다입니다. 아니. 담수입니다.]
 어라? 분명 관측 위성이 분석하기에는 고체 바닥이라고 했는데? 어라! 게다가 물! 바다!
 세상에! 우리가 이 지랄을 하게 된 이유가 뭔데! 소행성 충돌로 순환급수(오수를 정화해서 다시 식수로)를 할 수 있는 물의 절대량을 잃어버려서였는데 이만큼 많은 물이라니!
 나와 파일럿 녀석이 어이없어 할 때쯤 쿠왕 하고 우리는 정신을 잃었다.
 빌어먹을! 바다를 지나서 땅이라구? 근데 왜 여기서 항성이 보이는 거야!
 태양(편의상 태양으로 하자)은 마치 물속에서 일렁이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서 환상적으로 보였다. 그게 내가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
 “음······ 음······. 깨우지 말라고.”
 “윌리엄스 중위님.”
 나는 파일럿 녀석이 깨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어욱. 쏠리네.
 “통신은 안 되나?”
 “예······. 아무래도 저 물층 때문에 상부와 연락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흠······. 중위님이 깨어나셨으니 그분에게 이후의 일을 듣는 게 낫겠군.”
 뭐지? 쟤네들 뭐라고 씨부렁거리는겨?
 으윽. 다리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중위님 움직이지 마십시오. 터치다운 충격으로 다리가 부러지셨습니다.”
 “제기랄······ 암튼 물층이라니 무슨 소리야?”
 파일럿 녀석은 대답 대신 머리 위를 가리켰다.
 세상에. 워터파크야? 이게 뭐야? 혹시 물병에 물을 넣고 그걸로 햇빛을 비춰본 사람? 딱 그거네.
 우리가 목표로 잡은 이계 항성이 저 멀리서 푸른빛을 발하고 대기를 통과할 때 그 ‘담수 물층’으로 난반사하고 있었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이다.
 아니, 그전에. 저게 말이나 되는 거야?
 “보고하라······ 준위?”
 “실린더 및 틸트로터 파일럿 중위 정명원입니다. 날개 달린 거면 뭐든지 조종 가능합니다.”
 “췅명훤?”
 “휴우······ 아무리 소수민족이라지만 제대로 제 이름을 발음해 주는 사람이 없군요. 그냥 ‘원’이라고 부르세요.”
 아, 거 새끼 누가 그런 이름을 가지래냐?
 아무튼 원은 내가 기절하고 있을 동안의 간단한 상황을 브리핑했다. 아무래도 이 선발대의 최선임자는 나님인 것 같다. 일단 사정을 파악해야겠지.
 “병력은?”
 “강하엽병 25명. 프론티어 측 엔지니어 17명. 로더의 기자재의 대부분은 쓸 만하고 탄약이나 무기류도 주변에 떨어진 건 끌어 모았습니다. 다만 아까의 물층으로 강하엽병들과 강하 실린더가 뿔뿔이 흩어진 상태입니다. 게다가 고대의 단파통신 외에는 통신기도 저 물층 때문인지 먹통입니다.”
 “다른 실린더는?”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본대의 탄소필라가 끊어지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라고 할까요?”
 음······ 수수께끼군. 저 물층······.
 아무튼 선발대 120여 명 중 제대로 강하한 자는 이게 다인가? 인력이 턱없이 모자란다. 다른 8개의 실린더에 실려 있는 기자재를 끌어 모아야 궤도 엘리베이터의 토대를 마련하고 2차 터치다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양함은 소행성의 타격으로 대기권 강하를 할 수가 없다. 프론티어의 배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정지스테이션 노릇을 해야 할 거고······.
 결국 우리는 석 달 이내에 따로 떨어진 실린더의 병력을 모아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안 그러면 물의 절대량과 농업섹터를 잃어버린 배는······.
 순양함의 강하 실린더를 전부 사용한 마지막 발악이나 마찬가지다. 간이 궤도 엘리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우리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물을 가지고 그쪽으로 되돌아 갈수도 없는 노릇인거다.
 “엑소슈트(강화복- 중장기병이 타고 싸우는 일종의 탑승형 로봇)는?”
 “다행히도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몸으로는······.”
 “쳇. 걱정 마라. 나는 좆으로도 엑소슈트를 조종할 수 있으니까.”
 “크하하하. 거 중위님 보면 볼수록 맘에 드는구만요!”
 “돼얐다. 나는 이쁜 여자 아니면 안 쳐준다.”
 “흐흐. 언제든 우리 막사는 열려 있으니 들어오십시오.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아. 약 빤 새끼들. 뭐 진짜로 강하직전에 마약 성분이 들어있는 내압약을 처마시니 틀린 말은 아니다.
 주변에서 경계를 서는 병력들을 바라보니 다들 헤드모듈을 벗고 있었다. 음······. 나도 벗어볼까?
 치익 하면서 모듈에서 여분의 공기가나오고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일이야 어찌되든 이토록 신선한 공기를 마셔본 게 얼마 만이냐? 물론 프론티어의 배에도 자연치료실이 있긴 하지만 신선한 흙과 풀 나무······.
 음······ 풀 모양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풀 맞겄지. 암튼 꽤 끝내주는 경치로군.
 “저기······.”
 으잉? 웬 여자 목소리? 강하엽병들은 긴장하면서 최신식 레일건을 그쪽으로 겨눴다. 앞에 서있는 소드맨들은 지향성 레이저권총을 들고 뒤에는 중화기병이 박격포 모양의 야포를 겨눴다.
 이윽고 저쪽의 나문지 관목인지가 부스럭거리더니 무려 사람 모습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어? 여자다. 그리고 예쁘다······.
 “여자?”
 
 
 2)
 
 
 “이방인들이여······ 하늘에서 떨어진 용사들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어라? 여자?”
 사람이 너무도 얼떨떨한 상황이 되면 오히려 날카로워진다. 그 동생물학자가 ‘지적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무려 ‘행성연방 공용어(영어를 베이스로 한 우주국제어)’가 통하는 상대라니? 꿈인가? 우리는 강하 실린더에서 뒈지고 단체로 집단 무의식에 빠져든 건가?
 제1종 조우라구. 1종 조우! 우리는 인류최초로 외계인과 마주하고 있는 거다.
 음······ 1종 조우 절차가 어떻게 되더라? 에이 몰라. 벌써 말을 주고받았으니 매뉴얼이 있더라도 소용없지.
 이 여자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해칠 의도는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해치지는 않겠지요?’
 이 따위 질답을 하기엔 벌써 늦었다구! 게다가 그새 내 방정맞은 입은 지 멋대로 움직여 버렸다.
 “몸매 죽여주는구만.”
 “예? 모······몸이요?”
 얇은 천 아래로 탐스러운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차림새는 요염하면서도 청순해 보였다. 단 하나 우리들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의 귀. 그녀의 귀는 뾰족하고 찡긋찡긋거렸다.
 “아무튼 뭐······뭐냐! 여자 민간인! 정체를 밝혀라!”
 “우······우리는 미드가르드의 엘프들입니다. 이방의 전사들이여.”
 “에······엘프으?”
 나는 파일럿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중위님, 엘프라는데요?”
 엘프으으으? 우주시대 이전 그 옛날 지구의 민담 따위가 지금 내 눈앞에서 귀를 쫑긋쫑긋하고 있었다. 잠깐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엘프으?
 “저희는 ‘사제단’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그래 씨발 나만 말문이 막힌 건 아니겄지. 다들 멍한 눈이 되서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들, 다 좋은데 가슴만 보지 말라고. 하아······ 뭐 나도 남의 말할 건 아니지. 정말 예쁜 가슴이다.
 “자······. 잠깐! 질문은 산더미같이 많지만 일단 하나 물어보자구. 여기엔 지적생명체······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고 있나?”
 “사람이요? 인간이라면······. 몇 백 년 전에 멸종했습니다.”
 “멸조옹?”
 “예······. 사제들이 인간들의 마지막 후손을 잡아 죽였어요······.”
 아, 이게 뭔 개소리야.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은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로켓제너레이션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씨발. 엘프니 뭐니 이미 지구에 처박아두고 온 사람들이라구. 아니, 그 전에 이게 말이 돼?
 “중위님 어떻게 하지요?”
 “난들 알겠냐. 통신기는 저 물층 때문에 되먹지도 않는다면서? 야 근데 그런 거 있지 않았냐? 어이 프론티어 아자씨들. 제1종 조우에 대한 매뉴얼 같은 거 있다면서? 새로운 땅의 새로운 지적생명체를 만났을 때 같은 거 말이야. 그쪽에서 어떻게 해보지? ‘민간교류’로······.”
 저쪽에서 기계류를 정리하던 아자씨들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로봇정비만을 하고 있다. 젠장할. 결국 내가 ‘퍼스트 카운트다운 팀’의 대빵이라 이건가? 아아. 제군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대빵은 하는 일이 많다구. 이것저것 결정도 내려야 하고. 그래 서열 2위. 2인자가 좋은 거여.
 “흠흠. 누구도 매뉴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튼 당신 이름은 뭐야?”
 “라피르.”
 “제기랄, 3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이름이네. 아 내 이름은 존 윌리엄스 프론티어 방위군 중위.”
 “중위?”
 “아 그런 게 있어. 군대 계급이야. 음······. 중간지휘자라고나 할까? 실질적인 대빵은 저 위에서 술에 취해 계시지.”
 “구······군대? 중간지휘자? 그러면 당신은 기사님이시겠군요.”
 아오, 씨발. 갈수록 태산이네. 내가 무슨 기사여? 근데 저 쌔끈이 엘프 아가씨는 완전히 납득한 모양이다.
 “기사님. 혹시 다리를 다치셨나요?”
 강하엽병들은 날카로운 얼굴로 총을 들었다. 제1종 조우에 대한 매뉴얼 따위는 없어도 이 신비 돋는 땅에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놈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있는 거겠지. 약 빤 놈들이라고 놀린 건 취소. 꽤 믿음직하구만? 이 녀석들은 우리 중장기병들이랑은 웬수지간이었는데 말이지.
 “저······ 이······이건 뭐지요? 차······창? 석궁?”
 “총도 모르는 거야? 빵 하고 탄자(彈子)가 나간다구. 음······. 뭐랄까. 하긴 석궁? 레일건은 석궁하고 비슷하니까······.”
 “아······. 그럼 궁수시로군요?”
 “······.”
 행드맨 놈들의 표정을 보라고. 벙쪄 있잖아. 로켓제너레이션 시대에 무슨 놈의 석궁이여? 그런데 이 맹추 아가씨는 뭐든지 자기페이스대로 납득하는 취미가 있나 보다. 어이 아가씨. 얼굴하고 몸매는 쌔끈한데 왜 이리 멍충······. 음······. 아니 그것도 괜찮군. 좋잖나. 백치미.
 “아무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엘프들은 전투는 잘 못하지만 상처 치료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어······ 주······ 중위님 몸에 손을 대면······.”
 라피르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부러진 곳을 쓰다듬었다.
 어? 근데 이거 야릇한데? 야릇하다구. 아, 야릇하다는 게 성적으로 야릇하다는 건 아니야. 물론 여자의 가슴골은 거의 그랜드캐니언 수준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구. 다리에서 통증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이게 말이 돼?
 “힐입니다.”
 “힐? 치료?”
 “예. 힐. 치료.”
 이 맹추아가씨랑은 계속 말이 헛돌겠다. 아무튼 어? 나노주사를 쳐 맞아도 완치되는데 일주일은 족히 걸릴 상처가 안 아프다. 잉? 아까 먹은 내압약 때문일까? 아니야 이건 여자가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나를 치료한 거다.
 “이제 걸으셔도 될 겁니다. 과격한 검술은 무리겠지만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무······무슨 소리야! 나노머신을 맞아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상처라고! 너 중위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놈은 위생병. 의대 졸업하고 끌려온 함대근무자였다나? 통칭 닥(doc). 아까 나한테 나노주사를 놓고 내 상처를 돌본 놈이지. 물론 이놈도 정상은 아니야. 마약 성분이 있는 진통제를 빼돌리다가 나와 같은 코스로 이 지경이 된 놈이지. 오오, 나의 전우여.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닥. 괜찮아. 정말인데? 저 여자 말이 맞아. 정말 걸을 수 있겠어.”
 “예? 무슨 개소립니까?”
 “야. 상관에 대고 개소리가 뭐냐? 개소리가?”
 “아. 개소리니까 개소리라고 그러죠, 씨발.”
 “으으. 너 상관모독죄로 영창에 집어 처넣는다?”
 “헤에. 영창? 좋지요. 한번 독방호텔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아보지요. 닥터스톱은 닥터스톱입니다. 스캔할 테니 기다려 보세요. 씨발.”
 “너 요새 개김성이 풍부해졌다. 에휴······. 그래 내가 참지. 아무튼 난 괜찮아. 봐봐, 달릴 수도 있겠어.”
 “어? 이게 뭐야?”
 닥은 입을 떡 벌리고 인체스캐너를 떨어뜨렸다.
 아마 스캐너엔 내 아름다운 정강이뼈가 비치고 있을 거다. 크! 내 몸이니까 내가 더 잘 알지. 오히려 부러지기 전보다 더 상태가 좋은 거 같은데? 중장기병들의 지병인 관절염도 나은 거 같고······.
 아무리 대로켓시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부러진 뼈를 바로 맞춰서 신경까지 바로 낫게 하는 기술은 없었다. 이건······. 음······. 인정하기 싫지만 소위 마법이다.
 “닥. 너 잘하면 폐업해야겠다?”
 “이······.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구요!”
 “휴······ 세상엔 말도 안 되는 게 많이 일어나는 법이야. 저 태양을 보라구. 우리는 아주 좆된 거야. 야, 담배 있는 사람? 일단 한 개비 피우고 시작하자.”
 강하엽병들도 슬슬 정체불명의 여자들과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담배가 좌라락 분배되고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캬아아.
 “쥑이죠? 터치다운 후의 담배는 각별하다니까요?”
 “시꾸랏. 아무튼 담배는 가능한 아끼도록 해. 농업섹터가 작살나고 제일먼저 담배밭부터 없어졌으니까.”
 “흐흐. 여기엔 담배가 아니라 목성미역이나 대마를 심어도 잘 자라겠는데요?”
 “아오, 이 미친 약쟁이 새끼들.”
 강하엽병들은 킬킬킬 웃으면서 또 내 후장이 어떠느니 질 나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아오, 쇄키들 두고 보자.
 아무튼 음······. 제1종 조우. 이런 식으로 다른 지적생명체와 만나게 될 줄이야. 저쪽에서는 강하엽병하고 엘프 최연장자로 보이는 양반이 맞담배를 피우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씨부랄. 1종 조우에 관한 매뉴얼이 있더라도 설마 서로 맞담배를 피우는 상황까지는 예견했을까? 아무튼.
 “아무튼 다시 소개하지. 우리는 외우주 프런티어 탐사대의 호위병들. 저 색깔 옷 입은 양반들은 개척자들이지.”
 “개척자······. 아! 별의 바다를 걷는 방랑자시군요. 그것까지 예언과 동일합니다.”
 “으으. 예언이라니 처음부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무튼 우리도 정보가 필요하니 그쪽이랑 정보를 교환하도록 하지.”
 여자는 늙은 양반 하나랑 알 수 없는 말로 수군거렸다. 음······. 라틴어인가? 아니면 짱개 말인가? 대학에서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허고······.
 “알겠습니다. 기사님과 궁수님들. 먼저 궁금한 것을 물어봐 주십시오. 그 다음에 우리가 용사 분들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부탁은 이쪽에서 드리고 싶다구. 우리 말고 여기로 떨어진 일행들이 있어 혹시 그걸 아냐고 물어봐줘. 시발, 그 파츠들이 없으면 우리가 내려온 이유는 말짱 황이 되거든.”
 “예에······? 시발. 마······말짱 황이요?”
 “······.”
 예쁜 여자가 아나운서 발음으로 ‘시발’이라고 말하니 새로운 충격이군.
 “강하한 이유가 없어진다구. 저 위에는 물이 없어서 말라죽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물이 없어서요?”
 “그게 소행성지대에 농업섹터를 잃어버리······. 에효. 아무튼 저 위의 ‘배’에는 물이 없어서 곤란한 사람들이 많다구. 우리가 일단 내려온 이유는 배에 물을 가져가기 위해서야.”
 “아, 예······다른 일행 분들을 만나지 못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전해드리죠······.”
 또 낭랑한 말로 쏼라쏼라거리더니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고 뭐라뭐라 토론했다.
 행드맨들은 여자들의 몸매를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풀고 있지 않았다. 좀 문제가 많아서 그렇지 전투감각으로 따지자면 이놈들은 상위 1% 안에 드는 놈들이다. 이 호위함대에 참여할 수 있는 놈들은 제2차 화성전쟁의 참전자가 자격조건이니까. 물론 나도 화성에서 좆뱅이 쳤던 적이 있었지.
 “예. 일행들을 만나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답니다.”
 “그거 고맙군. 굉장히 도움이 되겠어. 그런데 그쪽에서 하고 싶은 부탁이란 건 뭐지?”
 “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사제단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저희는 싸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어서······.”
 “쉽게 말하면 경호원 역할을 해달라?”
 “예······.”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쪽의 과학 레벨이 어느 정도인가였다. 아까의 마법처럼 우리 쪽의 상식이나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경호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워야 하는 거다.
 “그건 좀······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우리도 쪽수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가용할 수 있는 전력도 꽤 제한되어 있으니까. 어이, 프론티어 아자씨들! 양자발전기는 쓸 만해?”
 다시 아자씨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씨발 말을 하라고 말을. 이 괴상한 이종족도 아니고 뭔 말만 걸면 어깨를 으쓱거리는 거여?
 그나저나 저 표정들을 보아하니 양자엔진도 터치다운의 충격으로 박살난 모양이군······. 그렇다면 우리 쪽의 배터리만으로 싸워야 한다는 건가?
 “원. 군용 항성 광발전기는?”
 “예······. 뭐 레일건을 충전하고 한 20차례 정도 교전할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이후는 저 항성의 빛으로 얼마나 충전할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요······.”
 “흠······. 이 정도 밝기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어이, 야전포병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몇 번 쏠 수 있냐?”
 “흐흐흐. 중위님! 제 아랫도리 대포는 무한으로라도 발사 가능합니다!”
 “누가 니 비리비리한 걸 물어봤냐? 구축(驅逐-쫓아내기)은 할 수 있겠어?”
 “예. 실린더에서 떨어지면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깡통 아자씨(CANNED MAN중장기병을 속되게 이르는 말) 몇 군단이 와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야, 그거 듣기 거슬린다? 나도 깡통 아자씨라구!”
 “헤헤. 중위님은 제외요!”
 거 참말로 믿음직들 하시구만.
 대충 전력을 보자면······. 항성 광발전 패널만 지킨다면 우리랑 동일 전력 서너 부대와 맞붙는다고 해도 그럭저럭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음······. 식량 문제도 있고. 절대적인 쪽수 부족은 저 엘픈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도와줄 수도 있겠군. 뭐 에너지 문제로 이 1실린더를 떠나서 멀리 갈수는 없겠지만······.
 “선택의 여지 따윈 없군. 좋아. 거래하지. 다만 우리는 여기서 멀리 떠날 수는 없어.”
 “예······. 괜찮습니다. 동맹군의 회합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요.”
 “동맹군?”
 “사제단에 저항하는 이들이죠.”
 음······. 내가 이런 쪽으로는 촉이 굉장히 좋은데 말이야. 우리는 아무래도 쫄리는 축과 손을 잡은 것 같다.
 “그 사제단이라는 건 뭐지?”
 맹추아가씨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이봐. 우리도 뭐하고 싸우는 건진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사제단은 용과 마물을 부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종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종교가 모든 대륙을 뒤덮고 폭정이 시작되었지요.”
 “뭐야 3류 판타지 영화 같은 설정은······.”
 “예? 3류 판타지라고요?”
 “아니야. 그런 게 있어. 계속해 보라구.”
 어? 근데 나는 왜 이 여자한테 계속 반말을 하고 있지? 영어가 베이스가 된 행성연방 공용어는 분명 존댓말이 있다. 그런데도 여자는 나에게 존댓말이고 나는 계속 반말이었다.
 “그 사제단은 유일신교를 믿고 다신교를 믿는 무리들을 이단이라고 탄압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숲의 정령을 숭배한다고 탄압했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군.”
 뭐 어디나 유일신교들이 말썽이라니까. 뭐 나야 무신론자니까 넘어가도록 하지. 이 로켓제너레이션의 시대에 무신론쯤은 흠도 아니니까 말이야.
 “뭐 대충은 알겠어. 이단 심문이 벌어지고 마녀사냥을 하고 다른 것을 믿는다고 쳐 죽이고 학살하고.”
 “예······. 과연 하늘의 용사. 알아주셨군요.”
 “아니······. 우리 인류들도 그런 시대를 겪은 적이 있거든.”
 “······.”
 인류역사에서 그런 장면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 최근까지도 통합기독교단과 이단들하고 함대전까지 벌일 정도니 말이야.
 그때 여자가 거의 코가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묘한 향기는 뭐람? 두근두근거리는구나! 씨브얼 사춘기 발정난 청소년도 아니고 나 왜 이러지?
 “기사님······. 저······.”
 
 
 3)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어디선가 동물이 울부짖는 울려 퍼지고, 강하엽병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느낌이 쎄한데? 난 동물원 가서도 쫄아서 곰 우리 같은 건 들여다보지도 못했거든? 근데 저건 아무리 들어도 곰 따위의 대형동물의 울음소리 같다.
 “그리폰이다! 그리폰나이트들이 습격한다! 용이다! 마물이다!”
 “오오······. 세계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세계수의 대지신님!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엘프 일행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휴우, 일어나! 싸우기도 전에 김빠지게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저희는 싸울 수 없는······.”
 “닥쳐! 기도할 시간이 있으면 뒤에 가서 숨기나 해!”
 아아, 화가 나는구만. 대지신이고 나발이고 알 게 뭐야. 보이지도 않는 투명인간 새끼한테 기도해봤자 뭐 이뤄지는 게 있겠어? 결국 싸우는 건, 죽는 건, 또 이기는 건 우리들이라구.
 그래놓곤 이 전쟁신이라는 작자들은 은근슬쩍 숟가락을 올려놓고 ‘오오! 전쟁신의 굽어 살핌으로 너희가 이겼다!’ 하겠지.
 무임승차는 딴 데 가서 하라고! 기도할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싸우라고. 그게 이기는데 더 보탬이 될 테니까.
 “어이, 강하엽병 게이새끼들아!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한번 신나게 재껴보자(Roc'n roll baby)!”
 “예! 중위님! 흐흐흐.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제프! 네가 CP(command post-지휘소)를 맡아라. 강화방벽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야포들로 진지를 방어해! 혹시 모르니까 대공포도 전개시키고! 그 전까지는 내가 싸운다!”
 “주······중위님은 무슨 짓을 하려고?”
 “아직 전투진형이 안 갖춰졌잖냐! 먼저 나가서 휘젓는다.”
 “예? 그게 대체······.”
 “보병집단에 돌격해서 휘젓는 거 그게 깡통인간의 숙명이지. 방어진은 인공지능이 도와줄 거야! 아! 또 인형기(人形機-로봇 3원칙이 적용되는 휴머노이드의 총칭)를 기동시켜!”
 나는 강하 실린더로 뛰어 들어가서 엑소슈트를 입었다. 아니, 뭐 입는다는 표현이 좀 괴상하긴 하지. 그런데 탄다는 표현도 안 어울려. 이 중장기병용 엑소슈트는 딱 사람크기만 하거든.
 “어이, 존나게 반갑다. 바니테일(bunny tale)!”
 [예. 주인님. 존나게도 오랜만이군요!]
 “거 새끼 주인한테 말뽄새 봐라?”
 [하하. 그럼 나긋나긋한 소녀의 목소리로 해드릴까요?]
 “새꺄. 나는 로봇 오타쿠는 아니라구.”
 [그거 다행입니다. 제 순결은 지켜졌군요.]
 “크하하하! 아무튼 각부 보고!”
 바니테일. 중장기병용으로 개수한 오퍼레이팅 인공지능이다. 화성에서 좆뱅이 칠 때부터 함께한 나의 동료랄까? 이놈만 있다면 화성의 대군이 몰려온다 한들 하나도 안 무섭거든.
 바니테일은 각부 이상보고를 1분 안에 다 해 버렸다.
 어디 보자. 왼팔에는 리니어체인건. 오우, 좋아. 미사일 포트 식스팩 두 개. 그리고 오른팔에는 굴착용 파일벙커가 달려있다. 파일벙커 아주 좋아. 남자라면 이런 튼실한 물건으로 쑤시는 게 로망이잖아? 아? 그거 이야기냐구? 뭐 그것도 그거지만 의외로 중장기병끼리는 근접전투가 많이 벌어지거든.
 “바니테일! 적 탐색은?”
 [예······. 레이더와 시각탐색모듈에 모두 걸렸습니다.]
 “헤드모듈로 바로 쏴줘. 위험요인 별로 니가 필터로 걸러!”
 기잉 하면서 외골격의 장갑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흙바닥싸움이라······. 화성전쟁 때 생각나누만. 그때도 화성의 붉은 모래 속에서 존나게 악전고투했지. 그런데 잠깐만. 이건 뭐래냐?
 “이게 뭐야? 말? 독수리?”
 [대형 파충류······일까요? 제 기억소자에는 없는 종입니다.]
 “당연하지. 이곳은 빌어먹을 놈의 외계행성이니까.”
 나는 말로 바니테일을 갈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저게 뭐야? 말이 독수리지, 무슨 거대한 사자가 날아댕기잖아! 게다가 그 위에는 무슨 갑옷을 입은 녀석들이 화살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용이냐 저거? 동화책에서나 볼 것 같은 괴생명체들이 총출동하는 것 같다.
 내가 반쯤 얼이 빠져있을 때쯤. 이 망할 바니테일 녀석이 의외의 사실을 알려왔다.
 [아, 그리고 주인님.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군요. 아직 이 장갑복은 충전중입니다.]
 “뭐? 그걸 먼저 말하라고 이 멍청한 인공지능아!”
 [데헷♥]
 “개객갸! 귀여운 척하지 마! 그럼 뒤에 전기코드를 꽂고 싸워야 한다는 거야?”
 [코드 뽑은 후의 작전시간은 4분여. 또한 작전 반경을 계산하겠습니다.]
 250미터. 거 씨발 존나게도 알량하구만. 길다면 긴 거리고 짧다면 짧다.
 [주인님, 옵니다. 사격통제는?]
 “늘 마시던 걸로!”
 [알아 모십죠! 존 윌리엄스 중위님! 롤아웃! 롤아웃(roll out)!]
 바니테일과 나는 지긋지긋한 화성에서도 살아남은 녀석이다. 쿵하면 착이고, 착하면 탁이지.
 내가 엄지발가락을 움직이자마자 쏜살같이 강하 실린더에서 중장기병의 갑옷이 튀어 나왔다.
 드드득. 발바닥에 있는 캐터필러에 걸리는 흙은 적당히 딱딱하다. 턴픽(turn pick-한쪽 발바닥에서 말뚝이 튀어나와 급선회하는 중장기병의 회피기술)도 가능하겠어.
 좋아. 외계행성의 외계생물들아, 니들 임자 잘못 만났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때려 부숴주마!
 “픽시(대인전투용 간이 인공위성) 사출! 전장정보를 획득하라!”
 [3차원 지도 업데이트 완료!]
 바니테일 이 녀석은 부하 수십 명 분의 일을 혼자서 다한다니까? 개객기가 말투만 나긋나긋하면 좋으련만.
 아마도 세부조정이라면 검지를 굽히는 게 미사일들이었나? 좋았어.
 헤드모듈의 시각 디스플레이에 바니테일이 맨 앞서 오는 용인지 뭔지 흉물스러운 도마뱀 새끼들을 다중 표적으로 좌라락 조준했다.
 “대인탄 있냐?”
 [후후. 바텐더에게 없는 게 뭐겠습니까!]
 “좋우아! 저 새끼들에게 한 잔씩 돌리라구!”
 쇄끼. 크크크. 나랑 화성바닥에서 만담잔치를 하다 보니 이 녀석도 썰렁한 농담이 많이 늘었어.
 나는 오른손 약지를 굽히면서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퍼퍼퍼펑! 뒤로 반동흡수용 유동액이 촥촥 쏟아지고 미사일 포트에서 네발의 대인탄이 하늘로 뻗어나갔다.
 언제 봐도 헛구역질 나는 광경이라니까? 맥주캔처럼 생긴 대인탄이 팅팅 안전 캔틴을 날려 버리고 조그만 미사일들을 하늘에 가득 쏟아냈다. 그 뒤는 고기 다지는 소리뿐이다.
 다행이군. 이놈들은 그 요상시런 기술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적은?”
 [27개체 격······추. 격추라고 부를까요?]
 “쇄꺄, 니 좋을 대로 하셔!”
 펑! 내가 리니어레일건을 조준할 때 뒤에서 굉음이 울렸다. 야전포병들이다. 이햐아아. 저건 언제 봐도 신난다니까. 세 줄기의 확산레이저가 저 이름 모를 동물들을 찢어 발겨 버렸다.
 피떡이 된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퍽퍽 걸레조각이 된 사체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나는 검지를 방아쇠 당기듯 당겼다.
 “중장기병의 친구 TEG-302다! 불빛이 보이면 이쪽을 보고 ‘치즈’ 하고 웃으라구! 내가 아주 잘 찍어줄게!”
 드드드득!
 웃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푸른 레일건의 전류를 보자마자 하나하나 피떡이 되서 땅에 처박혔다.
 중형레일건의 탄자는 날개달린 도마뱀의 척추를 부수고 그 독수리 같은 녀석들의 대가리를 전기톱으로 자르듯 드드득 갈아서 날려 버렸다. 그 위에 탄 기사? 뭐 기사 맞겠지. 하여튼 인간형의 무엇도 갑옷 째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면서 퍽 하고 땅에 처박혔다.
 [적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뭐? 무슨 벌집을 건든 것 같잖아? “
 나는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 후두둑 떨어지는 시체들을 피하고 있었다. 뒤에 걸린 케이블이 좀 신경 쓰이지만 이 정도도 기동 못하면 ‘블루숄더’의 이름이 운다구!
 [적들의 공격 패턴이 바뀌고 있습니다.]
 “흥, 공격은 무슨. 이쪽으로 뭐 하나 날리지도 못했잖냐?”
 [아오. 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십쇼.]
 “호오? 너도 좀 개김성이 많아졌다?”
 [후후후. 주인님 밑에서 완전히 버린 몸 아니겠습니까♥ 흑흑흑. 책임져요 주인님?]
 “아오, 새꺄. 역겨워. 하트는 띄우지 마라. 하트는!”
 [여자 목소리로 해드릴까요? 웃흥? 이왕이면 디스플레이도 이런 야시시한 모습이 어떻습니까?]
 “개객기. 내가 반드시 너 정비창에 보내서 정신 세정을 받게 할 거다.”
 [웃흥. 주인님은 여고생 목소리를 제일 좋아하더라? 봐봐용♥]
 “시벌. 나 잡혀가게 할라고 환장했냐!”
 [후후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좀 더.]
 “이런 개객기가!”
 바니테일은 나랑 만담을 하면서도 열심히 위협표적들을 시각조준모듈로 포착하여 조준해주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나불거리면서 숲으로 속속 내려오는 녀석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어이, 바니테일. 숲은?”
 [음······ 방해전파가 심합니다. 적외선 모듈로 돌리겠습니다.]
 뭐야 이게? 뭐······ 뭐 이리 많아? 아까 벌떼라고 했는데 취소. 개미떼 같잖아? 게다가 적외선 스캔으로 보이는 적들의 모습은 형체도 제각각이고 생긴 것도 다 달랐다. 괴물들의 행진.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중위님. 이제 그만 돌아오셔도 됩니다! 간이 진지구축은 끝났습니다!]
 뒤를 슥 보니 5층 빌딩 같은 실린더의 주위로 강화방벽이 번쩍번쩍 빛났다. 강하엽병들이 강하해서 본대의 병력이 강하하기 전까지 방어거점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미 약쟁이 새끼들은 강화방벽의 난간에 기대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새끼들 진지구축도 끝내주게 빨리 하누만.
 [주인님 후퇴하시겠습니까?]
 “아니. 깡통인간(Canned man)의 체면이 있지. 그리고 놈들이 심상치 않아. 누군가 작전을 지휘하고 있어. 좀 더 상대방의 패를 봐야 알 것 같아.”
 [흠, 과연······.]
 놈들은 작전을 바꾸었다. 아마도 그렇게 원거리에서 레일건과 레이저야포가 날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놈들이 그 거리에서 우리를 공격할 수단은 없다는 거다.
 “원. 대전차 지뢰를 준비해. 지상전이 될 것 같다.”
 [예? 대전차 지뢰라니요?]
 “너 시각링크 안 되는 거냐? 저 봐봐. 저 등치를. 대전차 지뢰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고릴라? 아니 고릴라가 땅꼬마 같이 보이는 것 같다. 분명 적외선으로 보니 움직이는 모양은 고릴라가 맞는데 그 옆에 나온 크기는 무려 3미터를 넘어갔다. 고릴라? 고릴라. 고릴라에도 사람들이 타서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씨부랄······ 바니테일. 행성개척회사 새끼들은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했을까?”
 [글쎄요······.]
 “내가 생각한 1종 조우는 존나 문명이 발전한 외계인들이 ‘어머머? 님들 너무 미개함 우리가 도와주겠음. 님들의 ‘유년기’는 이제 끝났음.’ 뭐 이런 거였는데······. 오히려 우리 쪽이 더 문명이 발달했다니······ 이래서야 우리가 ‘지구 최후의 날’의 클라투와 다를 바가 뭐야?”
 [하하. 주인님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다니까요? 그럼 저는 파멸로봇 ‘고트’ 정도 되는 건가요?]
 “크크크. 그거 웃겼다. 야, 근데 씨발. 아무리 그래도 지구시대 고리짝 스타일의 ‘냉병기 근접전’을 하는 건 좀 아니잖아?”
 쿵쿵!
 고릴라들이 크아아악 괴성을 지르고 우리의 몬스터군단들은 옛날 지구에서 인간들이 쌈박질할 때처럼 진영을 짜고 있었다. 그 뒤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도마뱀이랑 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규모 냉병기 근접전을 예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휴우······ 원시적으로 이게 뭐야. 궤도 폭격을 하면 간단한데······.”
 중갑을 두른 탱크들이 2선으로 돌려지고, 지상전의 교리가 완전히 바뀌게 된 이유가 궤도 폭격이다. 또한 함대전이 승패가 전투의 결과를 결정하고 중장기병들이 대세가 된 이유도 그거다.
 함대가 상대편 함대를 쳐바른 후 궤도 폭격 가능 지점에 다다라서, 대기권 밖에서 폭탄을 떨구면 지상전의 왕자고 나발이고 억 소리도 못하고 인생 하직하는 거지.
 뭐 씨발? 천하의 중장기병이 왜 이리 후달리느냐고? 궁금하면 한번 궤도 폭격 당해보라고. 오줌이 질질 나올 정도로 무서워. 마치 비나 눈처럼 손가락 한마디만 한 소형 폭탄자들이 몇 시간이고 내려오지. 펑펑펑 터지면서. 그게 지원된다면 저 지랄 트는 외계 생명체들은 한 방에 가는 거야.
 “씨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냐?”
 [주인님을 따라다녀야 하는 저도 좀 생각해보시죠?]
 “쇄끼. 아주 해체되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저 물층 어떻게 안 되겠냐?”
 [글쎄요. 저의 센서로도 측정 불가입니다. 아니, 그 전에 물리학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구요.]
 하지만 우리는 공교롭게도 저 물층 때문에 순양함에 연락할 수 없다. 순양함에서도 여기서 무슨 개지럴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겠지. 강하엽병이랑 강하 실린더를 전부 닥닥 긁어모아 한 방에 내려 보냈으니까.
 “어이 행드맨 약쟁이 새끼들아! 잘 들어라! 우리는 씨발 이 이름 모를 땅에서 존나게 냉병기 접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진동나이프 착검!”
 [끼얏호우! 씨발 진탕 한번 놀아보자고!]
 [내 총하고, 아랫도리 물총이 근질근질했었지!]
 하여튼 이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저 고릴라 떼와 도마뱀 떼를 보고 환호성이 나오냐? 환호성이? 니들 미친 거 아니냐?
 [······주인님. 저건 뭐지요?]
 “······.”
 저런 게 튀어나오면 3류 영화 광고처럼 말하게 되잖아.
 지금까지의 뭐뭐뭐는 잊어라.
 이봐들. 지금까지의 괴물군단은 잊어도 좋다구.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강하 실린더보다 더 큰 거대한 도마뱀 새끼야. 문제는 이 새끼가 입에서 불꽃을 내뿜으면서 나를 노려본다는 거지. 저거 턱이 무슨 호텔 입구만 하다.
 용. 드래곤. 머나먼 지구시대의 신화가 내 눈앞에 떡하니 서있다. 티라노사우르스나 뭐 그런 거냐고? 아니여. 입에서 시뻘건 불을 확확 내뿜는 저 왕도마뱀은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나오는 그 드래곤이 맞는 것 같다. 빌어먹을. 왜 그런 거 있잖아? 용자 지크프리트와 용 파프너라든가.
 
 
 4)
 
 
 놈의 등장으로 전투는 잠시 중단되고 맨 앞에 튀어나와있는 내 엑소슈트와 거대한 드래곤의 대치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놈이 입을 열었다.
 “이방인들이여! 그대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 그대들이 저 검은 탑에 숨기고 있는 엘프와 아인종의 반란군들을 내놓으라!”
 어? 지금 저 도마뱀이 행성연방 공용어로 말한 거냐? 어? 진짜?
 “별의 기사들이여!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리는 그대들과 싸울 이유가 없노라! 반란군들을 내놓는다면 그대들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한다!”
 “바니테일, 외부 스피커로. 아, 이 도마뱀 새끼야, 좆 까세요. 십새꺄. 어디서 건방지게 도마뱀 새끼가 우리한테 안전을 보장한다, 만다 지랄이야? 너야말로 우리가 누군지 알아? 씨발 밑바닥 막장 인생들이다!”
 [크하하하! 중위님! 최고! 제 침대를 비워드리죠!]
 [그래,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화성전쟁 이후! 피가 끓어오른다 이거야!]
 강하엽병들이 킬킬대면서 질 나쁜 농담을 주고받았다.
 니들이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저 불 뿜는 도마뱀 새끼하고 아까의 미녀. 니들 같으면 뭐 택하겠냐? 고자 되기? 인생 뭐있냐? 한번 뒈져보는 거지! 죽어보자!
 “별의 기사들이여······. 어쩔 수 없군! 전군 돌격!”
 “존 윌리엄스 중위 도마뱀사냥을 시작하겠다!”
 기이잉.
 발바닥에 달린 롤러대시가 흙을 좌라락 뒤로 튀기면서 움직였다. 문제는 저 왕도마뱀이야. 질량······. 그러니까 몸뚱이로 밀어붙이면 탄소필라가 끊어질지도. 또 저 맛 간 강하엽병 놈들을 지키려면 케이블이 닿는 250미터에서 저들의 전군을 격침시켜야 한다.
 “바니테일. 무기 정산 시간이다.”
 [철갑탄 열둘. 리니어체인건 아직 1371발. 파일벙커 하나.]
 “말이 씨가 됐군. 냉병기 운운은 하지 않는 건데. 근접전을 하게 생겼군.”
 두두두두.
 혹시 야구장에서 응원해본 적 있어? 관중들이 뛰면 궁궁 하는 소리와 꺄악 소리 지르는 응원소리 있지? 딱 그 느낌이다. 온갖 생물들이 소리를 지르고, 지축을 박차고 나한테 다가오고 있다.
 나는 픽시가 전해주는 3차원 지도로 놈들의 군세를 파악했다.
 [오줌 지리신 건 아니죠?]
 “새꺄. 저걸 보고 안 지리면 예의가 아니지. 예의가!”
 다시 리니어체인건이 불을 뿜고 맨 앞의 전열이 고기다지는 소리와 함께 작살났다.
 중장기병용 TEG-302는 일반보병이나 함대에는 ‘전기톱’으로 통했다. 그야말로 전기톱으로 드드득 갈아 버리는 것처럼 체인건에서 미친 듯이 나가는 원형의 탄자가 적들의 신체를 뜯어 버리고 있었다.
 아니, 찢어발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레이저로 적들을 순식간에 분자 상태로 확 지워 버리는 건 몰라도 휴······. 그래서 중장기병의 또 다른 별명은 개백정(butcher)이다.
 나는 내 앞으로 달려드는 괴생명체들을 박살내면서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님. 놈들이······.]
 “알고 있어. 저 용가리 놈이 꾀를 쓰는군. 내가 막고 있는 전열은 미끼고 양익의 고릴라 떼가 진짜. 듣고 있지? 원!”
 [예. 중위님!]
 “언덕 양옆으로 달려올 거야. 전장정보를 주시하라!”
 지금 전장은 앞에 툭 튀어 나와 있는 나를 중심으로 마치 날개를 편 새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내 뒤에는 검은색 강하 실린더와 은색으로 반짝이는 강화방패가 있고 거기엔 엘픈지 뭐시깽이인지 하는 여자들이 있다. 어?
 “바니테일, 케이블 절단 후 기동시간이 얼마라고?”
 [이제 7분여입니다.]
 “제기랄 우린 당했어! 놈들은 우회해서 치는 것과 동시에!”
 우회하려던 고릴라 놈이 강하 실린더와 연결된 케이블을 도끼로 찍었다.
 망할! 어떻게 저 놈들이 케이블의 존재를 눈치 깠지? 아니 케이블하고 이 엑소슈트하고 저 미개한 놈들이 뭘 어떻게 생각한 거야?
 “탯줄을 끊었다! 저 기사는 이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가라 이블하임의 전사들이여!”
 아아. 그런 거냐······. 하긴 코드가 꽂혀있는 엑소슈트는 태아하고 비슷하긴 하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기사를 죽여라! 은빛의 성을 무너뜨려라!”
 “좌우익 돌격! 저 은빛 성을 무너뜨리면 승리한다!”
 7분. 씨벌. 존나 시간 빡빡하구만.
 전장은 내가 퍼뜩 생각한 바로 그 장면대로 변했다. 250미터의 거리. 나를 우회한 고릴라와 각종 생명체들의 주력은 안전거리를 넘어서 강하 실린더에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 우리 군인들이야 어차피 밑바닥에 뒹굴다가 뒈지는 녀석들이라지만 저 위에는 물을 기다리는 꼬마와 민간인들이 있다구! 이 개새끼들아! 니들 뜻대로 해줄까 보냐!
 “바니테일 절전모드! 모든 전력을 무장과 롤러대시에 돌려!”
 대답은 없다. 짧게 파란 신호로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바로 남은 기동시간을 띄웠다.
 7분. 그래, 씨부얼. 인생 뭐 있냐? 한 방이지? 자자, 냉병기 싸움에서는 가장 중요한 건 사기(士氣)하고······. 또 중요한 게 하나 있지. 개객갸. 니들은 사람 존나 잘못 건드렸어!
 “바니테일! 적전 돌파! 각부 충격에 주의하라!”
 또 파랗게 신호가 뜨면서 ‘못 말리겠군요.’ 하고 텍스트로 녀석이 구시렁거렸다. 좆 까 새끼야. 로봇 3원칙(1원칙 하반부-로봇은 위험에 처한 인간을 방관하면 안 된다)으로 나를 가로 막으려 해도 소용없어.
 뭐 녀석 같은 고급 인공지능은 오히려 ‘내가 잘 보조해서 우리 주인님을 죽게 만들지 않겠다’ 하고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을 테지. 하급의 인공지능이라면 이 엑소슈트 자체를 위험원인 전장에서 이탈시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기특한 것. 우쮸쮸쮸다.
 나의 돌진은 놈들로서도 의외였나 보다. 전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강하 실린더로 돌아갈 것을 상정하고 군대를 부린 것 같았다.
 우회해서 돌아가던 놈들은 우물쭈물하면서 본대 쪽을 쳐다봤다. 또한 그때 아까 숲으로 내려왔던 놈들이 후드득하고 날갯짓을 해서 뛰어 올랐다.
 파상공격.
 저 왕도마뱀새끼는 지휘자로서도 훌륭하군. 본대를 돌파하는 나를 보고 머뭇거리던 놈들이 다시 쿵하고 강화방패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야야. 이거 완전히 원시시대 공성전이잖아? 보병들은 위에서 아래로 총을 다다다다 하고 날리고 레이저 야포가 펑펑 나가면서 강화방패를 타넘으려는 고릴라들을 공격했다. 거기에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중병력이 있었다.
 어? 저건 대구경 스나이퍼 라이플의? 퍽. 퍽. 그리고 미리 전개시켜놓은 거점 방어용 대공포가 불을 뿜었다.
 드드드득.
 으으 가능한 아끼라고 했는데 별수 없지.
 두 문의 거점 방어 대공포는 하늘에 화망을 만들면서 하늘의 모든 것을 청소해 버렸다. 우주군의 청소기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지.
 [롤러대시 레드사인!]
 “알았다! 긴급청소는?”
 바니테일은 다시 삐잉, 붉은 빛을 띄웠다. 설상가상이군. 롤러대시의 캐터필러에 적들의 고기가 끼어 버린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환장하겠군!
 치익 하고 비상 캐터필러 세척용 증기를 뿜어도 안 된다. 달리라 이 얘긴가? 사관학교에서 어떤 새키가 교관한테 ‘우리는 중장기병 지휘과인데 왜 구보를 해야 합니까?’ 하고 개겼다가 우리는 연병장에서 뺑뺑이를 돌았지. 그때는 로켓제너레이션의 시대에 웬 완전군장 구보 뺑뺑이냐면서 교관을 욕했지만 그때 좆뱅이 친 보람이 있는 모양이야.
 “원숭이 새캬! 그딴 걸 맞아줄까 보냐!”
 원숭이 놈이 내게 펀치를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 펀치를 피하고 오히려 놈의 팔을 타고 퍽퍽 놈의 머리로 올랐다.
 바니테일이 중심을 교묘하게 잡아주고 나는 고릴라의 대가리에 콱 하고 파일벙커 보조갈퀴를 박아 넣었다. 이건 화살을 거꾸로 뒤집은 형태에 끝에 스파이크가 박혀 있다구. 주로 중장기병의 배때기를 잡을 때 쓰는 거지. 의외로 튕겨나갈 때가 많으니까.
 “뒈져라! 고릴라 새캬.”
 왼손 검지를 굽히자마자 레일추진으로 가속되는 초합금 말뚝이 고릴라의 머리를 쑤셔 버렸다.
 파일벙커는 전력소모도 적고 근접전에서는 위협적인 무기지. 아니나 다를까, 고릴라의 뇌수가 퍽 하고 앞으로 터져 나오고 나는 휙 우주용 추력기체를 뿜어서 놈의 머리에서 도약했다. 드드드득. 오른손에서는 여전히 리니어기총이 내 앞을 가로막는 녀석들을 썰어 버렸다.
 흥, 내가 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뭐 정확하게는 난다기보다는 활강 정도지만. 나는 폭발적으로 왕도마뱀 새끼한테 전진했다.
 “어? 씨발.”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건 꿈에도 생각 못했는걸? 왕도마뱀 새퀴가 집채만 한 꼬리로 나를 후려 까 버린 것이다.
 으으윽! 토 나와! 엑소슈트가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 처박혔다.
 “기사가 쓰러졌다! 마법을 써서 뚫으면 될 것이다! 마법사여!”
 치직거리는 디스플레이로 보니까 후드 쓴 변태새끼들이 이쪽으로 다다다 달려오고 있었다.
 카악 퉷. 우리 깡통맨들을 우습게보면 안 돼지, 씨발람들아. 이까짓 피칭 요잉(항공기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토하면 중장기병의 이름이 울지. 사관학교에서도 3차원 훈련기로 얼마나 토를 쏟아냈는데!
 “바니테일, 미사일!”
 청색 사각형이 깜빡이고 나는 다시 오른손 약지를 구부렸다.
 퍼버벅!
 에헹? 저건 뭐냐? 머리위에 이상한 고리 같은 걸 띄우고 있는 놈들이 철갑탄을 막으려고 지랄하다가 부식액에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바보들.
 쐐액 날아간 철갑탄은 아직도 바니테일 녀석이 유도를 하고 있었고 펑펑펑 보기 좋게 왕도마뱀의 옆구리에 처박혔다. 놈의 거대한 몸체가 기우뚱거리더니 옆으로 쿵하고 넘어가 버렸다.
 꼴좋다 새꺄! 아, 진작 미사일부터 쏘고 시작하는 건데.
 나는 다시 엑소슈트를 일으키고 발을 디뎠다. 아까 날아간 충격일까? 캐터필러에 박혀있던 이물질이 없어지고 다시 롤러대시를 쓸 수 있었다.
 “바니테일! 롤러대시!”
 아마 이 녀석 음성모드였다면 ‘잘도 부려먹으시는군요’ 하고 투덜댈 거다.
 어디 보자. 남은 기동시간은 3분여. 자, 이제 대장을 잡으러 가야지!
 위이잉.
 굳이 총으로 갈길 필요도 없었다. 후드를 눌러쓴 놈들은 엑소슈트에 치어서 퍽퍽 나가떨어지고 나는 거침없이 왕도마뱀에게 전진했다. 왕도마뱀은 화아아악 하고 엄청난 열기의 불을 뿜어냈다.
 그런데 말이야. 여보셔요. 저는 ‘수성’ 같이 항성 근처에서도 싸우라고 만든 엑소슈트를 타고 있거든요? 불타는 항성권역이라면 몰라도 이까짓 열기 따위 아무런 위협이 안 된다구! 헤엥!
 바니테일은 불길을 뚫고 놈의 거체를 디스플레이에 띄워 주었다. 머리통이 저건가? 즐거웠다, 도마뱀 새꺄! 뒈져 버리라고!
 드드드득!
 화염을 뚫고 리니어체인건이 불길을 흩으면서 놈의 머리에 족족 처박혔다. 청색에서 적색으로 ‘적중’ 표시가 좌라락 떠오르고 나는 왼쪽 발을 꼼지락거려 불길에서 확 뛰어 나왔다. 어?
 [기사님! 드래곤 슬레이어에요! 용은 드래곤 슬레이어로밖에 못 죽여요! 저 자는 진짜 용 알버레이크입니다!]
 “어이, 원! 씨발, 이게 무슨 소리야! 민간인에게 통신기 누가 넘기래!”
 [저도 모릅니······. 제기랄! 이 여자가 계속 졸라서요!]
 원은 강화방벽을 기어오르는 고릴라를 쏴대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씨발. 저 왕도마뱀 새끼는 철갑탄 세 발과 수많은 레일건을 얻어맞고도 멀쩡하게 꼬리를 이쪽으로 날렸다. 어디 한 번 다시 먹여보자고!
 나는 턴픽으로 가볍게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면서 놈의 꼬리를 피했다. 놈도 화염과 몸체공격 외에는 나를 박살낼 방법이 없다. 마법 어쩌고 그랬지만 아직까지는 나는 멀쩡하니 개소리겄지.
 문제는 시간이다. 이제 1분 30여 초. 이 좆같은 행성에서 뒈지는 거냐? 그런 거냐, 존 윌리엄스!
 [주인님! 추력포가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바니테일이 긴급음성으로 알렸다. 뭐야 이 약 빤 새끼들 추력포로 나를 쏘려는 거냐!
 추력포. 4세대 레일건은 이론상 전력만 있으면 뭐든지 초음속으로 쏴댈 수 있다. 길가의 돌멩이나 통돼지고기, 사람 등등등 비유기체에서 유기체까지 탄자로 쓸 수 있다.
 다만 소비전력이 엄청나기에 아예 방어계획에서 말도 안 꺼낸 건데 씨발롬들아! 그걸 쏘면 축전에너지가 다 방전될지도 모른다구! 잊었어? 양자발전기가 부서졌잖아! 게다가 삥삥 시각탐색 조준으로 왜 나를 노리는 거냐! 뭘 그 안에 넣은 거냐!
 펑!
 “야, 이 약 빤 새끼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또 턴픽을 이용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으윽. 또 쏠리네.
 거대 도마뱀과 자잘한 괴생명체들은 나를 죽이려고 아득바득 하고 있고, 추력포에서 발사된 탄도체가 콰앙 하고 진동하고 흙먼지를 온 사방에 흩뿌렸다.
 [기사니이니님! 검을 잡으세요!]
 “검? 칼이라고?”
 아아. 아더왕의 이야기 아는 사람? 그거랑 똑같은데?
 추력포의 가공할 에너지로 주변은 반원형의 크레이터가 패였고, 그 가운데 돌멩이에 턱하니 웬 고풍스런 칼이 꽂혀 있다.
 [드래곤 슬레이어에요! 그걸로 용의 심장을 찌르세요!]
 “어? 어!”
 53초.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은 없다. 롤러대시로 나는 크레이터 안으로 뛰어 들었다.
 저딴 고물 검이 드래곤 슬레이어? 아니 그전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뭐여? 공용어로는 용을 쳐 죽인 자, 그 정도 되려나?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서 그 검을 손에 쥐었다. 검. 이상한 붉은 무늬 문장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씨발 고물이잖아?”
 나는 오른손에 든 칼을 바라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이걸로 뭘 어쩌라고?
 드드드.
 리니어레일건이 뻗어나가면서 놈의 시야를 딴 데로 돌렸다. 하여튼 말이 존나게도 씨가 되는 거라고. 그 쌔끈이 말을 종합하면 이걸로 저 왕도마뱀의 배때기를 쑤시라는 거겠지.
 “바니테일! 채프 연막탄!”
 [예? 하지만 그건······.]
 “닥치고 해!”
 엑소슈트의 어깨 부분에서 펑펑펑 캔틴이 터져나가면서 주변을 안개로 자욱하게 만들었다.
 이 안개는 알루미늄 분말이 섞인 차단제였다. 레이더로도 시각조준모듈로도 이렇게 하면 탐지가 불가능하다. 대신 이쪽도 먹통이 되어 버리지만.
 어디 근거리의 전투를 해보자구!
 나는 놈이 있을 만한 쪽으로 중장기병의 슈트를 몰았다.
 28초. 씨발. 좋았어! 좋았어! 놈의 옆구리가 보인다! 옆구리가 보였다는 건 놈이 나를 발견 못했다는 거다.
 나는 냅다 고물 칼을 놈의 옆구리에 찍어버렸다.
 
 
 5)
 
 
 무려 레일건을 견뎌냈던 놈의 살이 두부 자르듯 슥 하고 베어지더니만 피가 좌아악 샤워하듯 엑소슈트로 쏟아져 내렸다.
 “크어어어어억!”
 다시 턴픽이다! 제자리에서 원을 돌면서 놈의 배때기의 상처를 넓히다가 칼로 주우우욱 그어 버렸다.
 드득. 뼈가 베이는 소리가 나다가 툭하고 끊어져 버리고 내장이 징그럽게 쏟아져 나온다. 으윽, 나는 비위가 약해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왕도마뱀 놈은 쓰러지고 있었다. 좋았어! 나는 놈의 머리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드드드득. 칼은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동시에 어? 내 엑소슈트도 푸르게 빛났다. 이 모델에 이런 기능은 없었는데?
 아무튼 놈의 머리에 도달한 나는 검을 푹 모가지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파일벙커로 미친 듯이 푹푹푹 꽂아 넣었다.
 아, 뭔가 잊고 있었는데. 심장을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았나? 이놈은 배때기부터 모가지까지 상처가 벌어졌는데······. 씨발 이게 말이 돼? 다시 회복하고 있잖아? 그렇게 쑤셔도 소용이 없단 말이야? 그래?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지.
 “다이달로스 어택이다, 시발롬아.”
 나는 어깨에 달린 식스팩 중 하나를 떼어서 아예 놈의 목의 구멍에 처박았다.
 “바니테일 전탄 발사!”
 [전탄 발사! 잔존 에너지 10, 9, 8······.]
 오른손에서는 미친 듯이 리니어레일건이 나가고, 목에 박힌 미사일포트에서는 퍽 하고 감속 추진액이 쏟아져 나오면서 남은 철갑탄이 죄다 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기랄! 제기랄! 아무 소용없는 건가!
 서서히 채프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고, 놈은 그 거대한 목을 곧추세우고 나를 깔아뭉개려는 것 같다.
 [1. 주인님 다음에 뵙······.]
 툭 하고 외골격의 슈트를 지탱하던 힘이 빠져버렸다. 타임아웃이냐? 씨발. 나 이렇게 뒈지는 거냐? 이름 모를 행성에서 이름 모를 용가리한테 밟혀서?
 “후후후. 별빛의 기사여! 소용없다!”
 외골격을 떠받치는 모터가 돌아가지 않는 이상 놈에게 짜부러졌다간 그대로 뒈지는 거지. 아아, 엘픈지 뭔지 훌륭한 가슴을 가진 아가씨. 그대의 가슴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소.
 그 순간 놈의 몸에서 퍽하고 섬광이 일어났다.
 “그렇지! 꼴좋다! 시발놈아!”
 연이어 남은 철갑탄들이 펑펑 놈의 몸 안에서 터지면서 놈의 모가지가 뜯겨져버렸다. 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예상도 못하는 것 같았다. 놈은 나를 노려보면서 그대로 땅에 패대기쳐졌다.
 강화방벽을 넘으려던 고릴라 떼는 용의 마지막 울부짖음을 듣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내 예상이 맞았군. 보조전력으로 돌아가는 디스플레이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는 괴생명체의 대군이었다.
 “후우, 이 위대한 존 윌리엄스님을 얕본 결과다. 딸딸이들아.”
 그나저나, 으으으. 엑소슈트의 패널이 몸을 누른다. 아오. 전력이 떨어지면 이게 문제라니까. 결국 구난차량이 와서 세워주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러고 있어야 된다.
 픽.
 보조전력도 나가고 눈앞에는 생명유지장치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화성에서도 이런 적 있었지. 줴기랄. 우리 깡통맨들에게 이 중장기병의 엑소슈트는 믿음직한 동료이자 관이기도 했다. 만약 우주에서 생명유지장치가 박살나면 이렇게 서서히 말라죽는 거겠지.
 [기사님? 제 말 들리시나요?]
 “어이, 민간인? 괜찮아?”
 [예. 주인을 잃은 몬스터들은 전부 물러갔습니다. 다른 주인을 모시거나 하겠지요.]
 “주인? 그게 무슨 소리야?”
 [용은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 사이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입니다. 신을 대신해서요······.]
 “신? 지랄 옆차기 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런 게 있다면 내 응가나 닦아달라고 말하고 싶어.”
 [풋. 푸하하하. 겁이 없으시군요?]
 “겁대가리 없는 놈들은 저 약 빤 강하엽병 놈들이고. 나는 겁쟁이야.”
 전장에서 이렇게 여자랑 수다를 떨고 있으니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군.
 [아무튼 기사님. ‘계승의 서약’을 하겠습니다.]
 “헤에. 그게 뭔데?”
 [기사님의 갑옷으로 저 용 알버레이크의 능력이 계승되는 것이죠.]
 “······.”
 이게 또 무슨 지랄을 빵에 발라먹는 소리냐?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굉장히 낭랑한 소리로 뭔가를 말했다. 진짜 뭔가 하프나 피아노의 음색이 따라랑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뭐라?”
 순간 팟 하고 엑소슈트의 전력이 들어왔다가 나가 버렸다. 바니테일이 기동하려다가 토끼 꼬리를 닮은 아바타를 남기고 사라지고, 나는 웅웅 우는 듯이 진동하는 엑소슈트의 진동을 들을 수 있었다.
 [주······ 중위님! 이게 대체······.]
 “왜 그래? 이 엑소슈트가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
 [그······그게, 무슨 글자가 새겨지고 있습니다.]
 어엉? 뭣이라? 이 중장기병 슈트는 OSFC회사와 행성연방 우주군의 자산으로서······. 엥? 아무튼 글자가 새겨진다구? 갑옷 안에 들어가 있는 나로서는 뭐가 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윽고 구난차량이 달려와서 케이블을 연결했다.
 팟.
 [주인님 반갑사옵니다.]
 “너 말투가 왜 그러냐?”
 [왠지 냉병기 시대라 이쪽이 어울릴 것 같아서요. 호호호. 그럼 야시시한 복장으로?]
 “아니 됐다, 됐어. 바니테일 일단 메인 디스플레이부터 켜고 나를 비쳐봐.”
 [예.]
 “야······. 근데 이거 뭐냐? 무······문장이냐?”
 노즈아트(비행기 기수에 그리는 그림)는 옛날 지구 시절 항공군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뭐 내가 있던 블루숄더는 군기가 빡세서 노즈아트 따위는 허가가 안 떨어졌었다. 근데 이 중장기병슈트에 멋들어지게 노즈아트가 그려져 있었다.
 글자는 잘 모르겠지만 멋진 글자와 저 용가리를 닮은 문장이 박혀있었다. 그 문장의 모습은 아까 주워든 고물 칼과 비슷했다.
 아하! 용을 죽인 자.
 “이게······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이걸 새겨 넣었단 말이야?”
 [예······ 이제 이 갑옷은 용 알버레이크의 갑옷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알버레이크.]
 “어엉?”
 이거 원 집으로 마녀를 깔아뭉갠 도로시도 아니고, 졸지에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전설’의 갑옷에 탑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껄렁껄렁한 강하엽병 놈 하나가 걸어와서 스프레이로 뭔가를 그려 넣었다.
 “야, 쇄캬. 내 기체에 낙서하지 마라!”
 “크하하하. 중위님 오해하지 마십쇼! 킬마크입니다. 킬마크!”
 놈은 용가리 머리를 하나 그려서 엑스라고 빗금을 쳐버렸다.
 헤헷. 하긴 블루숄더에서도 킬마크는 예외적으로 허용했었지. 나도 킬마크를 두 자리 수 이상 달고 다녔다. 아아, 그때가 참 좋았지.
 아무튼 강하엽병들은 각종 생물들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기도 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엑소슈트를 바라보면서 걸쭉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놈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야.
 이렇게 느닷없이 시작된 ‘알로이 언덕’의 싸움은 우리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호오. 주인님 스타일인 걸요? 저 여자?]
 “씨꾸랏. 바니테일. 내 통신기로 돌아와. 전황분석과 앞으로 일에 대해서 회의를 할 거다.”
 [흥! 부끄럼 타시기는.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으시면서.]
 “아오. 이 망할 녀석.”
 [호모 사피엔스 수컷의 본능에 충실해지시죠♥]
 ***
 너구리굴이다, 너구리 굴.
 엘프 양반들은 무슨 담배를 저렇게 피운다냐? 그리고 짜식들, 명령은 귓등으로도 안 듣네. 담배 보급 없다니까?
 “원. 탄소필라와 같이 깐 유선통신망으론 통신이 안 돼?”
 “예. 아무래도 대기권을 돌파하면서 끊어지거나 타버린 모양입니다.”
 “음······. 하긴 탄소필라는 여분이 있었지만 저 물층을 통과하면서 통신선은 예상보다 몇 백 미터는 더 필요했으니까. 뭐 통신이 된다고 해도 순양함 현재 상태로는 궤도 폭격을 지원하기도 그렇겠지. 폭격창이 소행성에 씹창이 났잖아.”
 “흐흐흐. 위에서 침이라도 뱉으라고 하지요. 더러운 우주군 새퀴들. 함대에서 꿀은 신나게 빨면서 언제 그치들이 우리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오폭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요.”
 우리 육전군과 우주함대가 주축인 우주군은 사이가 무척 안 좋다.
 “중위님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새끼들아. 가만 좀 있어봐.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강하 실린더 위로 마치 나뭇잎처럼 뻗어서 태양빛을 받고 있는 항성발전 패널을 노려봤다.
 전력 수급은 아직까진 원활하다. 이 군용 광발전 패널이 있는 한 이 강하 실린더의 주변은 문명(?)이 유지될 수 있다. 문제는 따로 떨어진 녀석들이다. 거기엔 군용 발전시스템이 없을 텐데······. 물론 강하 실린더마다 양자 발전기가 기본으로 하나씩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바니테일. 순양함과 떨어진 실린더의 궤도를 띄워봐.”
 [예. 주인님. 순양함의 위치는 여기. 반구(半球)의 위치정보를 토대로 이곳 01번 실린더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개의 실린더가 떨어진 곳은 대략······. 이 정도 위치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야, 여기서 여기는 거의 중국에서 유럽까지의 거리 아니냐?”
 [아무래도 물층을 통과하면서 궤도가 틀어졌으니까요. 거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공산오차도 넓어집니다.]
 “어휴. 이게 주인을 가르치려 드네. 알아, 나도 안다구.”
 3차원 디스플레이에는 각 실린더의 궤도가 보였다. 휴우. 말이 수색가능 범위지······ 다른 실린더들이 떨어진 곳은 거의 수백 킬로미터는 넘을 만한 거리였다.
 차량이나 비행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본대의 강하 실린더에는 주로 궤도 엘리베이터의 콘트롤 타워와 부속기자재가 실려 있고 차량 등은 다른 실린더에 있다. 여기엔 차량이라곤 엑소슈트 이동용 컨테이너와 험지 주행용 버기카 한 대가 다다. 그나마도 이 간이 요새에서 떨어지면 언제까지 기동할지 감도 안 잡힌다.
 “후우. 어떻게 생각하냐? 제프?”
 “······.”
 아 거 새끼 말 존나게도 안 하네. 이 녀석이 강하엽병들의 팀장. 계급은 소위 나부랭이다. 병사 출신으로 위관으로 재임용되었다던가? 쇄끼 생긴 건 산도적처럼 생겨서 아까 저격총으로 하늘을 저격하던 바로 그놈이다. 이름은 제프 창. 중국계라던가?
 “원. 탄소필라로 통신봇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예. 이미 프론티어 측에다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만······.”
 “물층 때문에 답이 안 나온다는 거군.”
 하늘에 떠있는 수수께끼의 담수층.
 물론 통과할 때의 센서측정으로 물인지는 확인했지만 거기를 통신봇이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통신봇? 간단하다. 혹시 어릴 때 실에 종이 대롱 따위를 끼워서 편지를 주고받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 방식대로 순양함에 ‘우리 좆 됐음!’ 하고 알리는 거지.
 “그런데 알려도 별 소용없지 않습니까? 로봇과 기자재를 아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잠자코 지도를 살펴보던 제프 녀석이 끼어들었다. 녀석의 말대로다 순양함에 알려도 소용없다. 커넬 샌더스는 보고 받고도 술이나 더 퍼먹겠지.
 “그러게······. 이미 강하 실린더 8개는 전부 사용해 버렸고, 순양함은 도크가 씹창나서 대기권 강하를 못하고. 프론티어의 배는 강하하면 두개로 뚝 부러지겠지.”
 “······.”
 “그러면 연락할 방법도 없고, 연락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군요.”
 “괜히 프론티어의 민간인들에게 소문이 돌면 폭동이라도 일어나겠지. 뭐 조만간 우리 술주정뱅이 대령께서 지시를 내리지 않겄냐?”
 절망은 사람을 집어삼켜 버린다. 만약 궤도 엘리베이터 계획이 실패했다고 알려진다면 저 위는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어쩌면 강하기능이 없는 개척선이 무리하게 강하하다가 별빛으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나는 7만여 명의 프론티어 개척민과 8천여 명의 군인들의 목숨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씨발······. 여기서 피칠갑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살려낼 것이다.
 올. 제법 군인 태가 난다고? 그럼 내가 군인이지 남창이겄냐? 나도 사관학교에서 시민의 안전 어쩌고 나발하는 선서를 한 적이 있다구.
 내가 3차원 지도를 노려보고 있노라니 쏘가리는 가장 가까운 예상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05번 실린더가 그나마 가깝지 말입니다.”
 “흠······. 그건 나도 안다고.”
 지도상으로야 가깝지. 하지만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알 게 뭐야. 막말로 화성의 북극처럼 대 크레바스가 미친 듯이 나 있다면 거리는 여기보다 실질적으로 멀어지지.
 음······. 물론 강하하기 전에 위성으로 지도는 찍었다. 지도는······ 그 지도가 저 물층 위의 ‘뭔가’라서 문제지. 즉 우리는 이 근처의 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통신봇 대신 정찰봇을 필라에 꽂아.”
 “이미 했습니다만 이상하게 영상이 왜곡되었습니다. 아마도 저 물층에 다가가면 갈수록 이쪽의 전자장비는 맥을 못 추는 모양입니다.”
 “아주 만능의 물이구만.”
 나는 원이 띄워주는 지도를 노려봤다.
 제기랄, 차라리 픽시가 낫지. 정찰봇이 각종 모듈로 찍어온 영상들은 화질이 개판이었다. 휴우,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엘프 아가씨 좀 다시 불러다 주련?”
 “에헤이, 중위님 벌써 꼬실라고 그럽니까?”
 쳇.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 그 여자만 생각하면 그 가슴골이 떠오르네.
 ***
 “흠흠. 라······라피르라고 했던가?”
 “예. 기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저 여자 내 생각을 읽는다든가 그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겠지? 흠흠. ······저 가슴 보라고. 가슴! 꺄오오오옷! 무슨 가슴이 수박만 하냐? 아. 씨발 이게 아니지.
 “혹시 이곳과 이곳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어?”
 “아······ 크로넨 협곡 말씀이군요?”
 “어이, 쏘가리. 협곡이랜다······ 씨발······.”
 협곡. 딱 이름부터 좆뱅이 깐다는 느낌이 안 오냐? 화성 올림푸스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화성반란군노무 시끼들. 거기서 게릴라전을 하면서 부하와 동료들을 꽤 잃었다. 테라포밍으로 숲이 우거지고 물이 졸졸 흐르는 올림포스는 그야말로 정글이었지. 나무 위에 타서 중장기병이나 중장차량 따위를 노리는 전술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후우. 그럼 여기로 가야 합니까? 05번 실린더 말고 가까운 건 02번이군요.”
 나는 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니테일에게 물었다.
 “음······ 어이 바니테일, 02번 실린더에는 분명 비행장비가 실려 있었지?”
 [예. 아마 강하충격으로 박살나지만 않았다면요······.]
 “그쪽에서 본대로 접촉할 가능성이 있겠군. 아. 거기엔 대위님도 계셨지?”
 흐흐. 대위님. 카리스마 넘치는 여군 대위님이시지. 무슨 장군인가 뭐시깽인지랑 바람피우다 걸려서 좌천, 이 지경이 된 거야. 나랑도 같이 밤을 보낸 적이 몇 번 있다. 게다가 대위님이랑 합류하면 나는 서열 2번이 된단 말씀이지. 굿.
 아무튼 차량이나 비행체가 있다면 저 은색으로 보이는 탄소필라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올 것이다. 사람 팔뚝만 한 탄소필라는 지금도 햇빛에 반짝이면서 푸른 하늘에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면 02번 실린더와의 접촉을 우선하는 쪽으로 가야겠군. 일단은 이곳의 진지구축을 단단히 한 후 수색조를 짜자구. 수색조는 제프 너한테 일임하지.”
 “예. 중위님. 맡겨주십시오.”
 원도 제프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하사관하고 장교가 이게 다야······. 뭐 병사들도 고작해야 스무 놈 안팎이니 말 다했지.
 순양함에는 고위 장교들이 더 있고 하사관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강하에 지원한 놈들은 그중에서도 맛이 간 놈뿐이다. 순양함을 고치고 프론티어 쪽의 치안을 잡아야 하거든······.
 나야 따지고 보면 짬으로 밀린 거여. 거기다 대위가 내려가서 질펀하게 한판 뛰자고 꼬시기도 했고.
 “저······ 기사님?”
 “엥? 따······ 딱히 여자 생각을 한 건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 저 크로넨 협곡을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협곡이라면서? 그런 지형은 개척하는 데만 며칠이 걸릴지 몰라. 그리고 우리는 병사들이나 민간인들을 잃을 수는 없다구.”
 “그게 아니구······. 여기부터 여기. 아······ 이거 무척 신기하네요?”
 그녀는 삑삑 3차원 패널에 손을 올려서 두 지점을 연결했다. 한곳은 대인정보위성 픽시로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지만 다른 한곳은 픽시의 작전반경의 밖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드워프의 대공동(大空洞)이 있습니다.”
 “대공동? 그게 뭔데?”
 “지하도시지요.”
 
 
 6)
 
 
 아······. 어떤 것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드워프? 지하도시?
 “서부 드워프들은 용들에게 멸망했습니다만 그 도시들은 그대로 지하에 남아 있습니다.”
 “음······ 그럼 다시 말해서 지하통로가 있다는 이야기군.”
 “예. 게다가 저희들의 회합장소도 거기입니다.”
 그 대공동이라는 터널의 거리는 20킬로미터 내외······. 차량으로는 한 시간이면 왕복도 가능하지만 글쎄······. 우리는 2륜 차량 몇 대 외에는 차량도 없다. 또한 안쪽의 지형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우리는 모른다.
 “혹시나 개미굴같이 복잡해서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니야?”
 “아니오. 드워프들은 성격이 굉장히 직선적이라 도시 역시 탁 트인 대로가 있습니다. 대로를 따라 걷는다면 두 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거······ 매력적이군.”
 “예엣? 아······아니······.”
 “아니 그쪽 말고 그 거리 말이야······. 05번 실린더 쪽도 패닉에 빠져 있겠지······.”
 여자는 얼굴에 퐁하고 홍조를 띠우면서 부끄러워했다. 아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이 엘프 여자를. 흠흠.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략 지형을 감안해서 하루면 05번 실린더에 닿을 수 있다. 제기랄······.
 “원. 제프. 어떻게 생각하냐?”
 “음······. 그렇다면 사정이 달라지긴 합니다만······. 아까 그 괴생명체 따위를 생각하면.”
 “그렇지. 왕도마뱀은 방어도 거의 간당간당했었지······.”
 그 대공동인지 뭔지에서 그런 것들의 습격을 받는다면 아찔하다. 강화방벽도 없고 보병들을 막아줄 아머드비히클도 없다. 물론 강하엽병들은 장갑강화복 정도는 입고 있지만 중장기병의 엑소슈트 정도는 아니다. 더군다나 지하라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이다.
 “지하라면 광발전 패널의 도움을 못 받겠군.”
 “에······. 엑소슈트나 야포나 전부 충분한 전력 없이는 구동할 수 없으니까요.”
 “어이, 프론티어 아자씨들! 혹시 배터리팩 남는 거 좀 있으셔들?”
 아오, 씨발 말을 하라구! 말을! 또 어깨를 으쓱하면서 손으로 엑스자를 지어 보인다. 민간 쪽의 배터리팩 전부는 양자발전기를 ‘시동’하는데 쓰이는 모양이다.
 “제기랄 답이 안 나오는 군. 일단. 02번 05번 실린더와의 접촉을 우선시하고 오늘은 일단 숙영하도록 하지.”
 원과 제프는 경례를 붙이고 자기 위치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럴 때는 제법 군바리 냄새가 난단 말이지.
 “저······. 기사님. 그런데 이곳과 이곳은······.”
 “아. 그거랑 그건 다른 강하 실린더가 떨어진 곳.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게······. 여기는 니플헤임의 영향을 받는 절대영도의 빙옥. 이곳은 용 샤른호스트의 영역. 이곳은 사막······.”
 여자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콘솔의 디스플레이 패널을 돌리면서 차례로 이야기를 해줬다.
 “비······빙옥? 그게 뭐야?”
 “늘 눈이 내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가혹한 땅입니다.”
 “아니아니. 북극이라고? 적도에?”
 여자가 가리킨 그곳은 이 행성의 적도였다. 적도에 얼음의 지옥이 있다니······. 이 미개한 원주민들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당연히 빙옥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은 항성의 에너지가 닿기 힘든 극점에나 있는 거잖아? 적도에 웬 얼음의 사막이여?
 “아마 그곳에 떨어졌다면 살아남기 힘들 거예요. 식물도 자라지 않고 먹을 것도 없는 가혹한 땅이니까요.”
 “······.”
 나는 3개월이라고 넉넉잡아 리미트를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생각 못했군. 이 괴상망측한 행성의 지리와 기후는 왠지 여자의 말대로 적도에 빙옥이 있을 것 같았다. 내 다리가 부러졌다가 말끔하게 나은 걸 보면 거짓말일 리 없잖은가?
 “바니테일. 강하 실린더의 내압온도는 얼마였지?”
 [영상 1천도, 절대영도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 행성개척용으로 개발된 강하 실린더니까요. 그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도 작동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만약 우리처럼 양자발전기가 부서졌다면?”
 [그거야······. 지속가능시간은 더 줄어들겠지요. 거기는 광발전 패널도 없으니 더더욱······.]
 나는 거기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도 우리의 동료들은 얼어붙은 지옥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들 하늘에서 반짝이는 탄소필라를 보면서 손을 뻗겠지.
 나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화성의 전장에 처박혀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 턱하니 날 찾아온 아머드비히클이 어찌나 반갑던지······.
 결국 결론은 인원도 가장 많고 본대 중의 본대인 우리가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우······. 결국 지하로 들어가야만 한단 말인가? 후우우우.”
 “예?”
 “아니야. 그쪽의 제안에 또 응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 지하도시인지 뭔지까지 호위해 드리지.”
 “정말요?”
 으아. 이 아가씨야. 그렇게 갑자기 안기면 어떡하냐구?
 라피르는 내 볼에 쪽 하고 뽀뽀까지 해줬다. 야야야. 행드맨 새끼들아. 부러우면 니들도 장교 계급장을 달라고. 나라고 놀며 사관학교에서 뺑이쳤겠냐?
 ***
 아침밥을 먹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행성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리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들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다. 내 다리를 고친 마법인지 지랄인지도 그렇고, 저 물층도 그렇고. 정말로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강하 실린더를 갖다 처박은 느낌이다.
 “우아아아아앙. 이거 맛있네요?”
 “휴우······ 맹추 아가씨 적당히 먹어 적당히. 지속형 전투식량이라 그거 많이 먹으면 똥이 잘 안 나와.”
 “······.”
 거 알기 쉬운 아가씨일세. 변비시로구만? 그녀는 엉덩이를 움찔하면서 숟가락질을 멈췄다.
 [매너 한번 죽여주시는군요. 주인님. 밥 먹는데 화장실 얘기를 하지 않나, 숙녀 분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나. 에휴······.]
 “시꾸랏. 그럼 말도 이상하게 통할지도 모르는데 장 기능에 장애가 와서 배변이 원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랴?”
 [아아. 정말 인기 없는 남자의 전형이시라니까요?]
 “새꺄. 이래봬도 꽤 인기인이라구. 프론티어의 아가씨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뻥치시는군요. 인기 없는 남자.]
 나는 a메뉴의 초콜릿을 으적거리면서 바니테일 녀석에게 FUCK YOU를 먹였다. 엘프 라피르는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보고 다시 피식 웃었다.
 움찔움찔. 저 기다란 귀. 설마 특수효과로 해서 붙인 건 아니겠지?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하군. 한번 만져보게 해달라고 하면 만지게 해줄까? 아니 그 전에 정말 만지고 싶은 건 저 풍만한 가슴 쪽이지만······.
 “흠흠. 아무튼. 그 동맹군의 회합인지 뭔지는 언제야?”
 “어제······였지요.”
 “미안하게 되었군. 우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거야?”
 “아뇨. 천만에요. 오히려 기사님들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알버레이크에게 추격당해서 잡혀갔을지도 몰라요.”
 여자는 정말로 우리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근데 벌써 세 개째나 지속 전투식량을 먹는데 아가씨, 화장실 괜찮겠어? 아니 그보다 뭔 식성이 이렇게 좋아? 마치 잘 먹는 어린이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냅킨으로 그녀의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이 여자 그렇게 농염한 몸을 가진 주제에 하는 짓은 사춘기 여고생이다. 라피르는 다시 헤에 하고 웃고 나머지 식사를 마저 먹었다.
 “중위님. 담배는?”
 “됐어. 어제 경계 때 너무 많이 피웠더니 목이 아프다. 원이랑 제프를 불러줘. 회의를 해야 한다.”
 “옛! 알아 모시겠습니다.”
 녀석들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엘프 양반이나 하플링들이랑 담배를 나누고 있었다. 1종 조우의 두려움 따위 개나 주라지?
 “원. 상부에서 내려온 통신봇은 없어?”
 “예. 근무자들에게 물어봐도 순양함 쪽의 전통은 없습니다.”
 흠······. 그거 이상하군. 샌더스 대령의 명령문이 내려와도 벌써 내려왔을 시간인데.
 결국 여기 대빵인 내가 결단을 내리라는 거다. 02번 실린더 05번 실린더. 어느 쪽이든 강하엽병 등의 병력과 프론티어의 민간인들과 합류하면 일은 더 수월해진다.
 “좋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 이 아가씨가 하는 말에 따르면 그 뭐시깽이 협곡인가 뭔가 하는 곳의 지하에 통로가 있다고 하더군. 우리는 05번 실린더와의 접촉을 최우선으로 한다.”
 “통로라고요? 흠······.”
 제프 녀석은 동양계 특유의 쭉 찢어진 눈으로 라피르를 노려봤다. 말하지 않아도 제프가 하려는 말은 뻔했다. 과연 이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26명의 군인들 중 과연 얼마를 차출해야 할지. 또 그 지하도시를 어떻게 넘어야 할지······.
 “몇 명 필요할 것 같냐?”
 “소드맨(전열에서 레이저 커터를 다루는 근접병과) 두 명, 소총병 세 명. 중화기조 두 명. 그리고 지휘자 한 명.”
 “음······그 지휘자는 이 세 명 중에 하나가 맡으면 되겠군.”
 “예······.”
 거의 전력의 1/3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막을 수 있을까? 왕도마뱀이 와서 탄소필라를 끊어먹으면 프론티어, 순양함은 그 순간 말라죽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대기권을 돌파할 로켓 따위는 없었다. 아니 로켓이 있다고 해도 프론티어의 7만에 달하는 시민들을 먹여 살릴 물을 가지고 올라갈 방법이 없다. 식량이야 아직 비축분이 꽤 남아있다지만 그것도 언제는 한계에 달할 것이다.
 “방벽 방위는······. 내 전문이 아니야. 제프 일단 너는 남아라.”
 “······.”
 “휴우······ 원. 너는 비행체가 발견되면 제일선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에 특공조에 포함되어야 해. 지상전 훈련은 잘 받았겠지?”
 “예. 걱정 마십시오.”
 아아. 새끼. 보면 은근 잘생겼다. 믿음직하고 여자들에게 인기 좀 많겄어.
 “그럼 인선은 제프 네게 맡기겠다. 보병전의 경험은 나보다 네가 나으니까.”
 “예······. 그런데 중위님은 가시지 않는 겁니까?”
 “글쎄. 깡통맨 하나지만 여기서 빠지면 전력누수가 심해지지. 여차하면 밖으로 튀어나가서 지상에서 휩쓸어야 하니까.”
 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그 맹추 처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근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내가 없으면 저 드래곤 슬레이어인지 뭔지를 기동할 녀석들도 없을 테고.
 “제 사견입니다만 중위님도 저 원정대를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제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 새퀴. 이럴 때 쓸데없이 모호한 걸 믿는구만? 너도 생각해보라고. 우리들의 제1 임무는 저 탄소필라의 방어야. 저게 무너지면 모두가 끝장난다.”
 녀석은 중국스러운 부적을 꺼내들고 키스를 쪽 했다. 으윽. 토끼 발이잖아. 녀석도 은색으로 뻗은 탄소필라를 쳐다봤다.
 “이쪽은 야포도 있고 레인저(함내의 전투와 방어 적함 돌입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도 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방어라면 저와 제 부하들이 어떻게든 막아내겠습니다.”
 제프는 돌격컷으로 머리를 자른 레인저 두 명을 가리켰다. 대부분의 해병들은 순양함에 있을 텐데 저놈들도 별종이다. 좋다고 강하에 참가하다니······.
 “정말 이유를 말해봐. 강하엽병의 애기들을 중장기병인 내가 지휘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저놈들은 중위님을 무척이나 좋아하니까요. 중위님 청년막 조심하십시오. 조만간에 따 버린답니다.”
 “얼마든지 오라고 해. 아주 길거리의 창부처럼 잘해줄 테니까. 숏타임은 담배 세 갑이다.”
 나와 제프는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놈의 말대로 나와 저 약 빤 놈들은 늘 마작을 치던 사이였다. 주로 내 월급이 털려주는 식이지만 아무튼 여기서 병종간의 대립은 없었다.
 “정말로 제 촉이 안 좋습니다. 이쪽에도 공격이 가해졌다면 05번 실린더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이. 라피르 처자! 혹시 다른 데서도 그 동맹의 대표가 오는 거야?”
 “예······. 무녀의 예언······. 불타는 8개의 기둥을 봤다면 도와달라고 했을 겁니다.”
 제프의 지적대로다. 동맹군의회의가 열리는 곳하고 가깝다. 그리고 엘프 말고 다른 동맹군들도 05번 실린더에게 보호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력을 나눌 수밖에······ 또한 나는 그 왕도마뱀 새끼가 협상하려던 걸 잊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즉 이 맹추 아가씨 일행들을 데려간다면 오히려 01번 실린더는 안전해지는 거다.
 “흠······. 어쩔 수 없군.”
 ***
 몇 시간 후, 나는 중장기병의 흉부모듈을 등에 짊어지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시부럴! 내가 무슨 보병이여 뭐여! 내가 왜 이 꼴이 되어야 하는데!
 하긴······. 남 말할 건 아니지. 거점 방어용 대공포를 몸에 달고 있는 녀석이 날보고 씩 웃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마작판에서 들은 바론 애들이 부르는 이름은 비프(Beef). 거 존나게도 어울리는 별명이다. 놈은 대공포가 뭐야, 그거에다 군용 배터리팩을 주렁주렁 메고 잘도 산을 기어올랐다.
 “흐흐흐흐. 중위님 등짝을 좀 봐야 쓰겄는디요? 왜 이리 비리비리하십니까?”
 “시꾸랏. 헉헉. 중장기병이 씨······ 씨발······ 산을 모듈을 짊어지고 오르는 게······ 헉헉. 어딨어······. 3보 이상은 무······. 무조건 차량이동인데.”
 “씨발 어쩔 수 없잖습니까? 로봇들은 이미 탄약과 식량들로 하중이 만땅이라구요.”
 “이야······ 너 언제 한번 나랑 맞짱 한번 떠야겠다. 상관모독죄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지.”
 “씨부랄. 뒈지지나 마십쇼. 더 이상은 제 눈앞에서 동료들이 뒈지는 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참가한 거겠지. 어디의 새침데기냐 이건?
 뒤에서 의무병 닥 녀석이 투덜대면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닥도 의료용 기자재를 한 가득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씨발. 세상이 발전하고 레이저 대포가 우주를 가르는 시대가 와도 여전히 보병은 걸어서 좆뱅이를 치는 거다. 흐으. 우주군 사관학교를 떨어졌을 때부터 내 불행은 예고된 건지도.
 아아, 얼마나 좋아? 우주함대 통신장교였다면 지금쯤 순양함에서는 새끈한 상황병들이랑 노닥거리고 있겠지.
 이런저런 상상들을 하고 있노라니 우리는 어느새 커다란 동굴의 입구에 다다랐다. 아니. 이건 동굴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례군. 약간 뻥 좀 섞자면 거의 우주함대가 들락날락할 만한 크기다.
 “중위님 이 정도 편편하다면 호버링 로더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다.”
 “으아아아. 뒈지는 줄 알았네. 휴우우우우.”
 호버링로더가 전자장으로 부웅 하고 뜨면서 나와 부하들은 거기에 짐을 올려놓았다. 이건 바닥이 평평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그 호버링 로더를 꺼내서 턱하니 꺼내 놓는 놈은 엔지니어. 이놈 역시 이름은 모르고 통칭 ‘프로페서’로 통한다. 쇄끼. 이놈만 별 고생 안 했다구! 이놈은 산업용 로더를 타고 산을 올랐다. 뭐 그거야 장갑이 없는 대신 효율성이 뛰어난 것이니까······. 또 전력(戰力)도 아니고.
 내 전용이 된 엑소슈트는 내구도, 에너지와 롤러대시의 마모도를 아끼기 위해 가능한 기동불가명령을 내렸다. 누가? 이, 내가.
 아오······. 씨부럴 스스로 고행을 해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리오? 내가 무슨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들쳐 메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도 아니고······. 아아 중장기병의 모듈을 진 저 가련한 어린양을 보라!
 “프로페서. 여기서 광발전을 충분히 하고 가자.”
 “예. 안 그래도 준비 중입니다.”
 척척척. 저 새끼, 도박은 사기 치는 것 같지만 엔지니어로서의 솜씨는 초일류다. 프론티어의 아자씨들도 저 녀석한테 일을 배우고 간다던가? 약간 노안인 게 흠이지만 놈을 뽑아준 제프의 혜안에 감사하고 있었다.
 호버링로더에 착착착 짐들이 실리고 인형기들은 잠자코 프로페서 쪽으로 등을 내밀어 충전을 준비했다. 비프와 나머지 녀석들은 살기 흉흉한 눈으로 무려 필드매뉴얼 대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뭔 문짝이 저렇게 크다냐? 드워프······. 그 단어가 내가 아는 단어가 맞는다면 난쟁이를 뜻하는 단어일 텐데 말이야. 어째 저 커다란 문짝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군.
 혹시 조각가 로댕 선생의 지옥의 문을 본적 있어? 수많은 조각들과 부조들로 장식된 그 문.
 어째 저 드워프 도시의 대문은 그것과 닮아 있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들이 마치 코믹스 만화처럼 칸칸이 나뉘어져 역사를 설명하는 것 같다. 말풍선만 있으면 코믹스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머나먼 역사입니다. 신이 아스가르드에 자리를 잡으시고 ‘거인’의 몸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요. 저 맨 위쪽의 조각들은 천지창조의 순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9개의 세계. 신들. 드워프들. 엘프들. 용······.”
 “흠······.”
 나도 잘은 모르지만 사관학교에서 이쪽으로 빠삭한 녀석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북구 신화. 토르인가 하는 번개를 뿜는 신이 나오고······. 뭐 본인들이 엘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으니 딱히 뭐라고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담배를 마저 피우면서 기기묘묘한 문양들을 바라봤다. 내가 무슨 인류학자나 그런 거라면 몰라도 그냥 감상은 ‘끝내주네!’ 이거뿐이다. 고작해야 커다란 나무가 9개의 구획을 닭꼬치처럼 꿰고 있는 형태라는 것만 알아보겠다.
 사실 뭐 그것도 별 상관없지. 후후.
 나는 오직 라피르랑 이야기를 하려고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건 뭐야?”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뱀. 요르문간드. 토르 신의 숙적입니다.”
 “그 옆에 있는 건?”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것은 뭐랄까······. 아무리 봐도 중장기병의 프레임과 비슷한 뭔가를 입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머리 위에는 후광이 떠 있고 번개 모양의 뭔가를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음······. 뭐 중장기병의 갑옷이야 고대 지구시대의 냉병기 갑옷과 좀 닮은 구석도 있으니까.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 봐야 결국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다.
 “아. 주신 오딘님입니다. 그 옆에는 토르님.”
 “흐음······.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말해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정말이요?”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 씨발. 신화고 나발이고 그게 중요한 거냐? 지금 라피르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노른(Norns)과 디어사이드(deicide)
 
 
 1)
 
 
 “중위님! 여자 그만 꼬시고 슬슬 출발하십시다!”
 “야, 아주 맞먹어라 맞먹어.”
 우리는 광발전 패널의 일부와 기자재들을 여기다 내려놓고 휴머노이드 로봇에게 호위를 명령했다. 뭐 이 녀석들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
 “비숍. 무슨 일이 있으면 단파통신으로 쏴줘라. 아마 안테나를 이렇게 해놓으면 우리 통신기에 잡힐 거다. 어이! 비프 시험해봐!”
 나는 비숍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이 녀석은 믿음직하게 생긴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다.
 [예. 중위님. 문제없습니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알았다. 짐을 훔쳐가는 녀석은 박살내 버려도 좋아.”
 [박살······. 제거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중위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호모 사피엔스와 전혀 다른 지적 생명체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3원칙의 테두리입니까? 아니면 3원칙(로봇은 인류를 해치지 않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따르고 또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이 우선시 됩니까? 아니면 호모사피엔스 이외의 자들을 죽여야 합니까?]
 비숍은 온화한 얼굴로 라피르와 엘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그걸 깜빡하고 있었군. 생각해보니 빡센 문제잖아? 이 로봇들은 제1종 조우.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이외의 지적생명체와 마주하고 있었다. 씨발. 나도 로보틱스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로직이 꼬이겠는걸?
 “원! 이리로 와봐. 너 인공지능도 다룰 줄 안다며?”
 “예······ 조금.”
 “음······ 이 녀석 지금 1원칙(로봇은 인류를 해쳐선 안 된다. 또한 인간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의 예외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구.”
 “아······ 그렇군요. 하긴.”
 강하엽병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로봇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그래. 씨발. 나도 말로는 나불거리지만 실은 잘 모르겠어. 또 이 녀석들은 그때 내가 죽여 버린 말하는 왕도마뱀이나 기타 등등 말하는 몬스터들도 봤었지.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제1종 조우를 하기 전까지 로봇들에게 인간은 우리 인류 하나뿐이었다. 검든, 희든, 노랗든 호모사피엔스라는 종.
 저 맹추 아가씨 같은 경우 이 녀석은 인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놈은 대번에 저 여자들을 초합금 주먹으로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원······. 이 녀석이 어떻게 대처하려나?
 “제1원칙 부칙. 인간 형태의 지적생명체는 인류로 편입할 것. 1원칙의 적용을 받는다.”
 “아······ 아! 원 너 똑똑하다. 그러면 되겠구나.”
 “머리 헝클어뜨리지 마십쇼.”
 녀석은 투덜댔다. 쫘식, 잘생겼으면서 튕기기는. 아무튼 원이 자판을 두드려 보충해놓은 부칙은 꽤 쓸 만한 건지도.
 아무튼 비숍은 나머지 하위 로봇들을 경계대형으로 배치하고 손에서 레이저를 쏠 준비를 했다. 햇빛이 비치는 한 이 로봇들은 결사적으로 우리의 짐을 지켜줄 것이다.
 강하엽병 녀석은 투덜대면서 맨 앞으로 걸어가고 우리 일행은 살짝 열린 거대한 문틈 사이로 동굴로 들어갔다. 프로페서가 탄 로더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치고 그 뒤로 광발전 패널과 연결된 전선들이 줄줄 풀리고 있었다.
 이게 원, 제프 그리고 내가 오전 내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싸움법이었다. 적어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또한 전선이 닿는 곳까지는 우리는 태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아, 우리들의 태양이여.
 뭐 씨발? 우리들의 태양은 태양계에 있다고? 좀 알아 처먹어라. 문학적인 표현이잖냐. 문학적인.
 그나저나 존나게도 넓네? 메아리 장난을 해보고 싶은걸 꾹 참고 있다. 아아아, 하면 막 동굴 여기저기서 아아아 하는 울림소리가 가득찰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대도시처럼 우뚝 선 건물들은 천장에도 매달려 있고 여기저기 버섯처럼 제멋대로 우뚝 서있었다. 딱 버려진 유령도시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근데 그 드워프라는 놈들은 불빛 한 점 없는 이곳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당연히 지하니까 햇볕은 내리쬐지도 않고 그냥 어두컴컴한 암흑 그 자체다.
 뭐 어차피 나나 다른 병사들은 우주용 헤드모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밖이랑 별 차이가 없었지만 내 옆을 걷는 엘프 아가씨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팔짱을 꼭 끼고 그 풍만한 가슴을 내 팔에 문대고 있었다. 쥑이네!
 “흠흠. 그런데 드워프들은 이렇게 어두운 데서 살았던 거야?”
 “아니요······. 용들이 침략해 오고 빛을 빼앗아간 후 이렇게 버려졌어요.”
 “빛? 흠, 그렇군. 빛이라.”
 나는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뭐 말해줘도 내가 알아먹겠나? 아마 지구시대의 인류와 로켓제너레이션의 현대인이 만난다면 이럴 것이다.
 현대인: 어이 당신들은 석유를 태워서 발전기를 돌린다며? 이런 미개한 것들! 그러면 이산화탄소가 많아지잖아!
 지구인 : 아뇨. 딱히 방법이 없는 걸요?
 현대인 : 아아. 그래서 결국 지구가 좆 됐잖아. 그래서 대기를 싹 들어내고 인류의 고향 지구에 테라포밍을 하다니. 과거 인류의 어리석음이란······.
 뭐 이런 식이겠지. 근데 이 세계에서는 입장이 반대가 된 것 같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멀쩡하게 뼈가 붙은 다리를 내려다 봤다. 헤드모듈이 비추는 내 다리는 멀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함대 급에나 있다는 수중치료기도 그 상처는 족히 3일은 배양액에서 헤엄쳐야 나을 상처였다. 게다가, 에이 말을 말지······. 뭔 다리가 이렇게 가늘고 하얗다냐? 군살 하나 없는 허벅지가 섹시하게 치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꿀꺽.
 “배고프신가요?”
 “아······ 아니······.”
 [후후. 아가씨 조심하세요. 우리 주인님은 여차하면 아가씨를 ‘배부르게 만들’지도 몰라요.]
 “야, 씨발 바니테일. 숙녀 분한테 그 무슨 무례한 농담이냐? 그리고 너 대기모드로 있으라고 했을 텐데?”
 [흐흥. 따······. 딱히 주인님이랑 만담하고 싶어서 나온 건 아······. 아니라구요.]
 지랄을 깐다. 이 녀석도 아주 개김성이 풍부해졌어요? 주인 말을 안 듣는 인공지능이라니까? 아주 지가 상전이여.
 “아무튼 니가 그냥 나오지는 않았겠지? 또 뭐냐?”
 [진동센서에 이상한 것이 잡혔습니다.]
 “뭔데? 거대한 도마뱀이냐?”
 [아니오. 뭔가 진동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크기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구? 단위면적당 질량이 있을 것 아니야.”
 [이런 파형은 저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질량 계산이······. 이건······.]
 “뭐야 모르겠다면서? 그게 언젠데?”
 [중위님의 아파트에서요.]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라고 제발 말해줘.
 “어이 새꺄들아! 전원 전투준비, 전투준비!”
 과연 제프가 뽑은 녀석들이다. 앞의 소드맨 둘은 잽싸게 군용 레이저 커터를 꺼내들고 경화방패를 들었고 프로페서와 비프는 뒤로 물러나면서 소총과 대공포를 장전했다. 짐들이 걱정이군.
 “씨발.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방어대형을 유지하라!”
 “주······중위님 뭐가 오는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바니테일 녀석이 계측한 대로라면 아주 환장할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질지도 몰라. 전선통신을 모듈에 링크시킨다. 니들이 직접 쳐 보라고!”
 “으아아악! 이게 뭐야!”
 “존나게 징그럽네!”
 라그랑주포인트(지구와 달 사이에 인력이 상충되는 곳. 우주콜로니 건설의 최적장소)에 있는 내 아파트는 쓰레기 하치장 근처에 있다. 게다가 농업섹터에서 가까워서 방청소를 쫌만 게을리 해도······.
 “벌레들의 천국이 되지.”
 비프 자식도 꾸물꾸물 대는 뭔가를 바라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분명 뭔가 지구의 벌레들과는 모양이 달랐지만 벌레는 벌레다. 그리고 바니테일이 질량계측을 잘못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크기만 한 개미를 봤는가? 이게 무슨 3류 괴물영화 같은 상황이여?
 “어이, 바니테일. 우리 좆 된 거 맞지?”
 [예. 100%의 확률로 좆 되셨습니다.]
 “쇄키가. 이 상황에서도 맞먹냐?”
 드워프의 도시 곳곳에 온갖 곤충들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개미뿐만이 아니라 지네 바퀴벌레 저건 뭐냐······ 벌이냐? 환장하겠군.
 [주인님 아파트 같네요?]
 “시꾸랏. 한마디만 더해라? 아주 분자 레벨까지 분해해버릴까 보다.”
 [아, 취소. 주인님 아파트보다는 쪼끔 더 깨끗한 것 같습니다.]
 으으, 이 쇄키를 죽여 살려?
 내 옆에는 보조 안경을 쓰고 벌레들의 행진을 바라보는 라피르가 있었다. 그녀도 벌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째서······. 이······이그드라실의 벌레들이······.”
 “아가씨 뭐라구?”
 “이······ 이 벌레들은 원래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엥. 뭐야 그럼 어디에 있는 건데?”
 “태초의 나무 이그드라실에.”
 어이, 어이. 아가씨 말이 계속 헛돌잖아? 나무고 나발이고 알게 뭐야. 일단은 몸을 지키고 볼 일이지.
 “어이 프로페서. 로더로 방패를 들어. 씨발, 이 우주시대에 이 무슨 개짓거리냐······. 이젠 딴지 걸기도 지쳤어.”
 “크하하하! 이젠 벌레들까지. 십샹꾸들! 와라! 아주 발로 다 짓밟아버릴 텡게!”
 비프 녀석이 깔깔 웃으면서 대공포를 챠킹 하고 전개시켰다.
 “잠깐. 아직 쏘지 말라고.”
 “예? 그게 무슨 섭한 말씀이십니까? 선수필승(先手必勝)아닙니까?”
 “생물들의 본능이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이쪽을 공격하지 않을지도 몰라.”
 “에이, 중위님답지 않게 무슨 개소리십니까? 그냥 갈아엎고 시작하지요?”
 아오, 이 생키들 상관에 대한 존경을 지구의 쓰레기장에다 처박고 왔나.
 “라피르 네 의견은 어때?”
 “그······ 글쎄요. 이그드라실에 무언가 사건이 발생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이······.”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라. 이 벌레들이 우리를 맛있는 밥으로 여길까 하는 문제라구?”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는 게 뭐야? 제기랄.
 “소드맨은 전열 나 역시 전열에 있을 테고. 비프, 원. 멀리 있는 적을 쏘지 말고 근거리에서 달려드는 녀석들만 쏴. 아직 발포는 아니다!”
 “예. 알겠습니다.”
 닥도 원도 스마트 자동소총을 견착하고 벌레들의 행진을 노려봤다.
 내 아파트가 저랬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사령부의 애인과 동거할 때는 그래도 쾌적한 환경이었다고. 물론 그 여자랑은 내가 바람을 피워서 싸대기를 짝. 뭐 자업자득이지. 반성합니다. 예, 인생 반성하고 있다고요.
 “저건······. 설마 대표자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라피르의 대표인가 뭔가 하는 일행들이 벌레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기 직전이다. 그들은 천장에 달린 건물에서 시시각각 접근하는 벌레들을 보고 긴장하고 있었다. 적외선모듈로 확인하니 대략 300여명 쯤? 많기도 하다. 어떡하지?
 제군 여러분 그래서 넘버 투가 좋다는 거야. 남바 완은 이런 걸 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회전의자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도장만 쾅쾅 찍는 게 아니라구. 뭐 화성전쟁에서 별탱이 장군님들은 진짜로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야.
 병신 같은 별탱이 새퀴들이 화성의 궤도 엘리에 101 강하엽병 사단을 통째로 들이부었다가 전멸했거든. 그중에 한 명만 살아남았다던가? 그 억세게 운 좋은 놈이 누군지 한번 낯짝 한번 보고 싶구만. 아, 아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씨발 어떡하지?
 “기사님······.”
 그녀는 보조안경을 벗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진한 것 같지만 본능적으로 남자들을 자극하는 게 있다. 이 여자 마성의 여자가 될 것 같다.
 “에이 씨발. 인생 별거 있냐. 비프, 짓이겨 버려!”
 “크하하하, 중위님! 진작 그러실 것이지요! 다 뒈져라! 이 벌레 샤퀴들아!”
 끼에엑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개미나 각종 벌레들의 더듬이가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드드드드득.
 거의 함포에 가까운 대공포가 벌레들을 갈아 마셔 버렸다. 갑각질이 대공포탄에 으스러지고 안쪽의 체액이 끈적끈적한 누텔라처럼 바닥과 벽에 처발라졌다.
 부웅 하고 날 수 있는 녀석들이 날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새꺄들아, 이거 대공포라고. 대공포. 비행기나 탄도체를 잡아먹는 거. 드드득 하고 풍뎅이를 박살내고 벌들의 갑각질을 부숴버렸다.
 “크하하하하하! 최고의 살충제를 뿌려주마!”
 아. 씨발. 강하엽병 새끼들이 제대로 미쳤다는 걸 까먹었다. 비프 이 새키야. 뭐가 그렇게 신이 나냐?
 소드맨들은 우리가 들어온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배에서 지겹게 들은 강하엽병의 군가였다. 미친 새끼들. 지들 강하하다 쳐죽는 노래를 신난다고 부르고 앉아있다. 아아, 약 빤 새끼들.
 그 새끼는 땅에 박혀 피떡이 됐고! 그의 피는 분수처럼 솟아 나왔어.
 (He hit the ground, the sound was 'Spat'. His blood went spurting high)
 전우들은 그걸 보고 이렇게 말했지.
 (His comrades then were heard to say)
 씨발, 멋지게 뒈졌군.
 (Gory~ what a hell of a way to die!)
 씨발씨발, 씨발. 멋지게 뒈졌군! 씨발씨발, 씨발. 멋지게 뒈졌군!
 (Gory Gory~ what a hell of a way to die!)
 그 새낀 다신 강하 못할 거야!
 (He ain't gonna jump no more)
 소드맨(sword man)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레이저 커터의 방아쇠를 당겼다. 강화방패로 지네의 촉수가 닿는 것과 동시에 노릿한 냄새가 나면서 샛노란 레이저가 지네의 몸을 반으로 잘라 버렸다.
 강하엽병의 소드맨들은 적들의 군세를 가장 마지막으로 막는 병종이다. 저 레이저 커터를 가지고 동료들이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녀석들. 놈들은 아직도 후렴구인 ‘씨발씨발, 씨발. 멋지게 뒈졌군!’을 연발하면서 킥킥댔다.
 “바니테일. 롤아웃은 아직이냐?”
 [거 보챈다고 요리가 되겄습니까?]
 “빨리빨리! 이러고 있을 사이 없어!”
 
 
 2)
 
 
 적들은 인간이 아니다. 당연한 거지만 우리는 한계가 있지만 벌레들은 한계가 없다. 닥도 미친 듯이 중화기를 쏴대면서 벌레들의 공격을 막았다. 소총병 두 명은 결국 닥하고 원이 되었다. 중화기병은 비프 녀석밖에 없다 아무튼 척척척 중장기병의 모듈들이 맞춰지면서 조립되고 있었다.
 “프로페서 너는 전열교대! 내가 조립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아. 얼마나 좋아. 명령을 하면 찰떡같이 대답하는 이 멋진 군대여. 나는 소총으로 벽을 타고 오르는 개미들을 박살내다가 소총을 프로페서에게 던졌다. 녀석은 로더에 탄 채로 그대로 위잉 롤러대시를 해서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녀석을 들이받아 버렸다.
 사슴벌레는 로더의 지게차 같은 팔 끝에 창처럼 꿰어서 버둥거리다가 저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장갑판이 아예 없는 공업용로더 안에서 소총을 난사했다. 헤드 모듈에 비치는 생체센서에는 그야말로 벌레들의 바다였다.
 “라피르. 혹시 벌레들도 지휘개체가 있어?”
 “지휘개체라니요?”
 “여왕벌이라든가 여왕개미라든가?”
 “아······ 아마 여왕이 있을 거예요.”
 “어떻게 생겼는데?”
 “그건 저도 잘······.”
 아아. 씨발. 또 그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가? 차라리 왕도마뱀 쪽이 좀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쪽은 지휘계통이라도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어느 군대건 지휘계통이 살아있어야 싸울 수 있다.
 [주인님 다 조립했습니다!]
 “오케이. 나간다! 롤아웃! 롤아웃!”
 중장기병이 급발진할 때는 치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큰소리로 롤아웃 사인을 외쳐야 한다. 제기랄. 나도 약 빨았군. 저 벌레들의 무리로 또 한바탕 나가야 하니까. 뭐 언제는 안 그랬나? 압도적인 다수의 보병사이로 뛰어드는 건 우리 중장기병들의 일상다반사니까!
 “원! 적의 지휘부를 타격하겠다. 가능한 막아! 비프, 길을 좀 쓸어줘!”
 “예! 말씀만 하십시오!”
 놈은 등에서 샷건을 꺼내서 펑펑 쏴대고 있다. 내가 본 병사들 중에 가장 힘이 센 놈 같다. 한손에는 대공포. 한손에는 샷건. 대공포는 잠자리를 찢어발기다가 내가 나갈 곳에 십자포화를 먹여서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면 안정적으로 뛸 수 있지. 좋아.
 “바니테일. 잘 들어. 벌레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돼. 분명 어딘가에서 지시를 받고 있을 거다.”
 [예. 곤충생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다운로드 하겠습니다. 대인정보위성 사출. 전장정보를 업데이트합니다.]
 그러면 어디 한번 적진을 뒤흔들어 보실까?
 나는 창문에서 그대로 떨어지면서 그대로 지네새끼의 위로 떨어졌다. 중장기병의 프레임에 눌리면서 지네는 두 부분으로 잘리면서 미친 듯이 요동했다. 꼴좋다 새끼야.
 그대로 캐터필러가 구동하면서 지네의 몸체는 드드득 반죽이 되어 뒤로 흩뿌려지고 나는 무수한 벌레들이 있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바니테일 저 위에 있는 양반들은?”
 [냉병기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좋아. 지원사격이다.”
 드드드득.
 검은 동굴 안을 리니어레일건의 푸른빛이 번뜩이면서 가로질렀다. 거의 쏜 것과 동시에 드드드득 하고 건물에 흙먼지를 피어 올리면서 벌레들을 떨궜다. 저 위쪽에 있는 맹추 아가씨들의 일행들은 미친 듯이 뻗어나가는 불빛들을 보면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지잉 하고 근거리 레이저가 저쪽에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비프가 쏘는 대공포의 탄자가 좀 커다란 벌레들을 골라서 으스러뜨렸다. 나는 나대로 벌레들을 으깨고, 부수고, 박살냈다.
 “엥? 바니테일. 이건 뭐냐?”
 [글쎄요. 발광기능은 없었는데요. 프레임의 특징은 아닙니다.]
 또 중장기병의 프레임이 희미하게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장갑의 경도가······. 비상식적으로 상승해 있습니다. 근접공격을 한번 맞아보십시오.]
 “뭐야. 너 로봇 3원칙 잊었냐?”
 [거참, 속고만 사셨나. 한번 믿어보십시오. 주인님.]
 어디 보자. 적당한 놈이 없으려나? 그래. 투구풍뎅이다. 놈은 마치 뿔이 달린 탱크처럼 이쪽으로 붕하고 날아와서 부딪쳤다.
 카앙!
 씨발. 이 소리가 제일 싫다고. 중장기병의 숙적. 중화기병들의 RPG(Rail Propelled Granade-레일추진식수류탄)를 쳐 맞으면 나는 소리다. 제기랄. 그래 어디 한번 올 테면 와라!
 [주인님. 보십시오. 픽시가 찍은 외장입니다.]
 “씨발, 뭐? 지금 풍뎅이에게 깔리기 일보직전인데 만담 떨 기운이 나냐?”
 [그게 아니라 흠집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어? 진짜네?”
 진짜다. 풍뎅이의 뿔은 용이 그려진 킬마크에 들이박혀 있었다. 그 정도 힘이라면 RPG 정도는 안되도 분명 찌그러져야 할 텐데? 프레임의 장갑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오히려 풍뎅이의 뿔이 부러져 버렸다.
 “드래곤의 피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그것도 이상하지. 철갑탄을 막아내는 왕도마뱀 새끼가 그딴 낡은 칼에 배때기에서 장기자랑(?)을 할 줄이야. 결국 그 왕도마뱀을 보낸 것은 철갑탄이었지만 놈의 피부를 찢고 철갑탄을 박을 수 있었던 건 그 고물 칼의 능력이었다.
 능력?
 그렇군. 분명 맹추아가씨는 용 알버레이크의 이름과 능력을 계승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타고 있는 이 갑옷은 그 용처럼 단단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씨발. 결론이 존나게 괴상하지만 나는 이 사태를 납득할 수 있었다.
 “뭐 어찌되든 좋은 거잖아? 가자. 바니테일! 신나게 밟고 부수고 찢어발기는 거다!”
 [예. 주인님!”]
 나는 허리춤에 장비(?)되어 있던 그 고물 칼을 들었다. 이거야 원. 신화시대의 근접전과 다를 바가 뭐랴?
 개미의 목을 치고 실을 내뿜는 거미의 꽁무니를 갈라버렸다. 벌레들은 나에게 죄다 몰려서 나를 물고, 뜯고, 맛보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투구풍뎅이의 일격도 견뎌낸 중장기병의 장갑을 무슨 수로 박살낼 수 있을까?
 [주인님. 페로몬입니다.]
 “페로몬?”
 [예. 여왕이 일개미에게 명령하는 방법이랍니다. 어린이 곤충백과에서 이렇게 나와 있답니다. 존 윌리엄스 어린이?]
 “아오, 하필이면 다운로드한다는 게 그런 거냐!”
 [별수 없지요. 강하한 프론티어 거주민의 콘솔에서 다운받은 거니까요.]
 퍽. 나는 턴픽을 걸면서 거대한 사마귀의 앞발과 상반신을 퍽하고 갈라버렸다. 저런 거에 찍히면 장갑복을 입어도 소용없겠다. 그냥 골로 가겠군.
 삐죽삐죽한 갈퀴가 나있는 사마귀의 앞발이 떨어지고 그 다음은 붕하고 날아드는 곱등이였다. 씨발! 하필이면 곱등이여! 내가 다른 건 다 잡을 수 있지만 이 곤충계의 헤비급 챔피언은······퍽.
 “제기랄! 바니테일 어떻게 해보라고! 곤충백과나 쳐 읽지 말고!”
 아, 토 쏠려. 찐득찐득한 벌레들의 체액은 둘째 치고 곱등이에 치여서 엑소슈트가 저쪽 벽에 처박혔다. ······물론 프레임자체는 용의 피인지 나발인지로 무적에 가깝게 되었지만 질량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크윽. 화성군 개객기들도 이런 짓을 꽤 많이 했었지. 질량 부비트랩.
 그게 뭔지 이해가 안 간다고? 과학을 좋아하는 어린이 여러분? 두부를 졸라 짱 튼튼한 용기에 넣고 흔들어 보세요. 용기를 열어보면 짜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튀어나올까요? 아니면 떡 반죽이 된 두부가 튀어나올까요?
 그건 중장기병의 장갑을 부수지 않고 안쪽의 인간을 박살내는 악랄한 방법이었지. 곱등이 새끼 한번만 더 와봐라!
 내 바람을 알기라도 하듯 곱등이 두 마리가 뎀프시롤을 하듯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와라 십색갸! 이게 파일벙커다! 어때! 맛이 좋으냐!”
 퍽. 놈의 두터운 갑각질을 뚫고 파일벙커가 그대로 처박혔다. 그리고 나는 파일 벙커를 뽑고 곱등이의 거체를 피했다. 또한 왼발의 롤링스테이크를 땅에 처박고 그 자리에서 턴픽을 해야 한다!
 부웅 한 바퀴 돌면서 쪼그려 뛰기 하는 것처럼 몸을 숙인 후 이렇게! 차암 쉽죠잉!
 뒤에 있던 곱등이 녀석의 다리가 멋지게 날아가면서 놈은 벽에 퍽하고 처박혔다. 하지만 곱등이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씨발! 그런 것까지 거대화되는 거냐! 뭐가 이 지랄이여! 바니테일! 빨랑 좀 대책을 내봐!”
 연가시다. 문제는 이게 거의 보아뱀 수준이라는 거지! 곱등이 새퀴한테서 튀어나온 연가시가 엑소슈트에 엉겨 붙으면서 무슨 뱀처럼 으드득 프레임을 조이기 시작했다.
 엑소슈트에 기생해서 알을 까기라도 할라고? 좆 까라, 새꺄. 내 몸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것이지 이름 모를 행성의 벌레들에게 줄 순 없다고! 나는 양손으로 연가시를 틀어쥐고 그대로 잡아 당겼다.
 다시 벌레의 체액이 디스플레이에 흩뿌려지고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뭐? 남자가 비리비리하다고? 내 입장이 되어 봐봐. 진짜로 토하지 않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다시 벌레들은 나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고 있었다. 기동 예상시간은 15분 정도. 어제보다는 길지만 씨발 그게 그거지.
 “바니테일! 쫌!”
 [주인님. 화생방 탐지기를 응용하여 놈들의 페로몬 농도를 측정했습니다.]
 “난 주인 버리고 또 농땡이 까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요. 저는 충성스런 주인님의 종복입니다.]
 “만담은 됐어! 벌레들이랑 왈츠 추는 것도 질렸거든! 결과부터 말해!”
 [예. 페로몬이 나오는 방향은 2시 방향입니다.]
 “저 왕벌들이 날아다니는 저곳인가? 딱 봐도 방어가 빡세 보이는군.”
 [예. 본진이라는 느낌입니다.]
 “좋아 간다! 안정화는 네게 맡긴다!”
 다리에서 추욱 하고 슬러스터 노즐이 불을 뿜었다. 원래는 우주전에서 방향을 바꾸기 위한 용도였지만 이렇게 지상전에서 잠시 동안 활강을 할 수도 있었다.
 “비프! 벌들을 떨궈내라!”
 [술 한 잔 사셔야 됩니다!]
 “프론티어 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드드득.
 대공포가 본진인 벌레들의 소굴을 아주 시원하게 다져버렸다. 슬슬 비프의 대공포도 포열 때문에 한계고 소드맨들의 레이저 탄창도 한계일 텐데······. 어제처럼 빨리 끝장을 봐야 한다.
 그때 내 귀로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나의 백성들을 그만······. 아파요. 아프다구요.’
 “어이, 바니테일. 뭐라고 씨부렸냐?”
 [아니오! 3시 방향 적! 제가 일부의 사격통제를 맡겠습니다. 1원칙 적용! 1원칙 적용!]
 바니테일은 긴급 절차로 로봇 1원칙을 적용해 어깨에 달린 근접 방어용 기관포를 쐈다. 로봇은 인간이 아닌 표적은 얼마든지 공격이 가능하다.
 ‘아파요······. 그만······. 그만······’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벌레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이게 뭐야······.
 벌레들은 모든 방향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비프도 소드맨들도 한숨을 돌리면서 상황을 멍하니 지켜봤다. 레일건의 발사음도, 레이저의 삐잉 하는 방출음도 멎었다. 또한 건물입구까지 조여 왔던 벌레들은 급기야 서서히 물러서더니 숨을 고르면서 제각각 까드득 하는 소리를 냈다. 뭐야 이건?
 “뭐냐 이건?”
 [전들 아나요?]
 곤충백과를 신나게 쳐봤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벌들이 위잉 하고 날아다니는 그곳에는 웬 누에고치가 하나 있었다. 나는 커다란 누에고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미들은 집채만 한 누에고치를 들고 더듬이를 옴찔옴찔거렸다. 확실한건 더 이상 적의의 의사표시는 없는 것 같다.
 ‘별의 기사님.’
 “······.”
 전투 스트레스로 가끔 환청이 들리는 경우가 있다. 내 부하 한 놈도 화성에서 그런 증상에 빠졌었지. 그 녀석은 나보다 심했어. 적 함대에 돌입하려다가 슬러스터 노즐이 박살나고 우주에서 일주일간이나 둥둥 떠다녔거든. 환청이 안 들리면 이상한 거지.
 ‘별의 기사님. 우리는 당신들을 해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알프하임의 거주민들도 미드가르드의 거주민들도······. 제 힘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에 제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 했어요······.’
 누가 제발 내가 미치지 않은 거라고 말 좀 해줘. 혹시 기억나? 책을 소리 내서 읽다가 묵독을 하게 되었을 때쯤 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근데 이 목소리는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다.
 “뭐······ 뭐야. 이건······ 여자?”
 [아아. 주인님. 여자를 못 품어서 안달이 나신 건가요?]
 “아니야. 바니테일. 누군가 내 머릿속에 말을 걸고 있어.”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머릿속의 도청기입니까? 농담이 많이 느셨군요?]
 아오 이 개객기 봐라? 너 순양함으로 돌아가기만 해봐라 아주 로직의 바닥부터 고쳐놓겠어.
 씨발 근데 아무도 안 들리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군. 흘끔 뒤를 돌아서 라피르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두려움과 놀라는 표정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환청은 아니라는 거군.
 “좋아. 네 말이 들린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말해봐.”
 ‘예. 저도 잘 들립니다.’
 “흠······.”
 ‘저희는 미드가르드의 벌레들. 저희는 거인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거인? 그게 무슨 소리야?”
 ‘요툰하임에 사는 거인들이요.’
 ······이젠 딴지를 거는 것도 지치는군. 정체불명의 여자 목소리와 혼자서 대화를 하는 내 모습. 군 감찰단이 보면 ‘저 새끼 옷 벗겨!’ 해도 좋을 상황이다.
 “좋아. 자세한 건 말해줘도 나는 잘 몰라.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해 나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고. 또 우리는 시간이 없어. 용건만 말해.”
 ‘제 백성들을 죽이지 마세요.’
 “백성? 이 벌레들이?”
 ‘예. 저희는 그저 요르문간드 님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고자 함입니다. 드워프의 대공동에는 요르문간드 님에게 연결된 통로가 있으니까요······.’
 요르문간드. 몇 시간 전에 라피르가 말해줬는데? 뭐였더라?
 “그럼······. 너희들은 거인인지 뭔지가 공격해서 대피하는 거고 도망가는 너희들을 우리들이 지레 겁먹고 공격했다는 건가?”
 ‘······.’
 
 
 3)
 
 
 그거 미안하게 됐군. 아니 그전에. 집채만 한 풍뎅이나 곱등이를 보고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공포가 만들어낸 해프닝이었다. 우리가 박살낸 벌레들이 몇 천 단위라는 게 문제지만······. 지하철에서 발을 밟았을 때처럼 ‘암 쏘리’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조······좋아. 그럼 더 싸울 이유는 없겠군. 우리도 목적은 이 도시를 가로질러 동료들을 구하러 가는 거다.”
 ‘예······. 다행입니다.’
 “그······그럼 벌······ 아니 네 백성들을 불러서 길을 터줘. 우리는 걸어가기만 할게. 그리고 네 백성들을 멋대로 죽여서 미안해.”
 ‘예······.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허나 이것도 ‘검은 거인’의 뜻 중 하나.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요.’
 휴우······ 이야기가 잘 풀려가려다 곤두박질쳤다. 검은 거인은 또 뭐래냐. 난 거인이라는 말도 못 알아먹겠다고.
 난 솔직히 이 여자 목소리가 거인 어쩌고 했을 때부터 내가 응원하던 야구팀 ‘마스 자이언츠’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오! 우리도 우승 좀 해보자고!
 ‘저는 미래의 노른(Norns=북유럽신화의 세 여신 중 스쿨드). 검은 거인의 뜻 하나를 당신에게 전합니다.’
 “노른?”
 진짜로 딴지 걸기도 지쳤다니까. 나는 이 판타지 세계의 설정 같은 건 관심도 없어! 지금 내 부하들이 뒈졌을지도 모르는데 알 게 뭐야!
 ‘당신은 신을 죽이는 자. 곧 디어사이더(deicider-신을 죽이는 자)가 될 거예요.’
 “휴우······.”
 신을 죽이는 자. 신을 죽이는 자아? 이보셔요? 저는 무신론자거든요? 지구에서 화성으로 올 때 러셀 궤도에 찻주전자를 올리면서 ‘빌어먹을 지구의 인격신들아 영원히 아디오스다! 더 이상 러셀의 찻주전자는 필요없다구!’ 하고 순양함에 탔거든요? 씨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어떻게 죽이냐고오오오!
 휴우. 이 정체불명의 아가씨와 입씨름 해봐야 아무 소용없지. 그래, 그런 걸로 해두자.
 “그게 다야? 다라면······.”
 ‘아니오. 검은 거인의 뜻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 당신은 라그나로크 전쟁의 끝에 낙원의 나무 이그드라실을 다시 세울 자.’
 “잠깐. 내가 내 이름을 가르쳐줬던가?”
 ‘당신의 이름쯤은 이미 알고 있답니다. ‘그들’도 알고 있을 거예요. 또한 그들도 당신이 강하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지켜보고 있겠지요.’
 이그드라실? 아까 이 도시 대문에 있던 그 나무인가? 무슨 아홉 개의 세계를 푹하고 닭꼬치 꿰듯 꿴 나무? 이봐······ 나는 이그드라실은커녕 지금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워야 한다구.
 휴우. 됐다. 됐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질렸다. 이 벌레들과 바이바이하고 내 부하들과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다. 그들이 뭐고 낙원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개풀이나 뜯어 처먹어라.
 ‘디어사이더여. 그대의 무위(武威)에 로키의 가호가 있기를······.’
 “흠흠. 그 쪽도 여행 잘하기를 바라지.”
 스스슥 벌레들이 내 엑소슈트 앞으로 길을 터줬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군.
 [어? 주인님. 고치 안에서······.]
 “거봐, 새퀴야. 난 저 여자랑 지금까지 말을 한 거라고.”
 [하앙? 저는 주인님이 새로운 개인기를 개발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나는 바니테일에게 대꾸하는 것도 잊고 고치 속에서 나온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야······야······ 녹화······ 노······녹화 가능하지?”
 [주인님의 엉큼함은 세계제일이시로군요.]
 여자는 옅은 갈색의 피부에 순백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휴우······ 아찔하군. 약간 동안으로 보이는데 그게 더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
 그녀는 푸르게 빛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 저 눈은······.
 “중위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혼자서 허공에 대고 주절주절 거리시더니 갑자기 벌레들이 왜?”
 “휴전이다. 해프닝이었어.”
 “예에? 그게 무슨······.”
 “저 여자가······.”
 내가 헤드해치를 열고 손으로 순백의 누에고치를 가리키자 어느새 여자의 모습은 고치 속으로 사라졌다. 제기랄. 이거 완전히 복무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할 말 없겠는걸? 하지만 내가 듣고 본 것은 진짜다.
 신을 죽이는 자. 디어사이더.
 낙원의 나무 이그드라실.
 내가?
 뭔진 모르겠지만 저 노른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예언을 한 것 같다. 근데 씨발. 나는 일체의 비논리적인 것들을 안 믿는다고! 게다가 얼마나 많은 사기꾼들이 지구가 개박살 난다면서 책 쓰고 돈을 벌었어?
 야, 이 씨발롬들아. 외우주에 로켓을 보낼 때까지 지구는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지구시대보다 더 풍요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공포의 대왕? 묵시록의 짐승? 좆 까라.
 그렇게 속으로 호언장담을 하면서도 나는 오른쪽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비논리라······. 확실히 내 다리를 낫게 한 것은 신화시대의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제기랄······. 제기랄······.
 얼떨떨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최일선에서 막아준 소드맨들이 제일 먼저 나와서 길을 슬슬 터주는 벌레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벌레들의 행동으로 공격의사가 없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딱 한 놈은 아니지.
 “비프. 벌레들을 쏘지 마. 이놈들은 그저 거인인가 뭔가를 피해서 대피하고 있을 뿐이래.”
 “······.”
 욕구불만에 걸린 남자. 딱 그 얼굴이네. 쇄캬, 나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나도 잘 모르겄는데 어떻게 하냐?
 나는 헤드해치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와서 벌레들의 행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위님. 진짜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담배나 한 개비 줘라. 진짜 담배가 땡겨서 뒈지는 줄 알았다.”
 원은 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서 통째로 내게 건넸다. 담배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벌레들은 끼익끼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우리들의 옆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아오, 곱등이 저거. 저렇게 많았다고? 으윽.
 “그 분은 노른이었군요.”
 “······라피르 당신은 뭐 아는 거 없어?”
 “글쎄요. 저는 들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에게 듣지 않으셨습니까?”
 “······.”
 아, 오글거린다. 무슨 대전쟁에서 신을 죽이는 자?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냐? 나는 대답 대신 담배연기를 훅하고 내뱉었다.
 진짜로 벌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씨발······ 부하들은 몰살을 당했겠군. 벌레들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프로페서. 장비정리 다했으면 슬슬 다시 가자구.”
 “중위님.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교수님. 걱정 안 해도 돼. 우리가 지레 겁먹었던 것뿐이야. 벌레들의 지휘자와 이야기를 했어.”
 씨발. 그런 표정으로 보지 좀 마라. 나도 이 황당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구. 그나마 원과 비프는 용가리 이야기를 하면서 납득하는 것 같았다.
 “휴우. 우리만 잘못 판단을 내린 게 아니야. 저쪽도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가 이 지경이 된 거지.”
 저 위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동맹 어쩌고 하는 아자씨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표정하지 말라구. 원인제공은 당신들이 했잖아?
 근데 솔직히 이런 집채만 한 벌레들이 대뜸 들이닥치면 당황해서 칼질이라도 하게 마련이지······. 그들은 부러진 칼과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비틀거렸다.
 “오오······ 벼······별의 기사님들이!”
 “예.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그렇다면 용이나 사제단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겠군요.”
 “······.”
 라피르는 대답 대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흥. 좀 더 섹시어필하게 싸워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싹수가 있는 아가씨로구만. 계약은 여기까지 호위해주는 거지, 대신 싸워주는 건 아니었지 아마? 지금 우리는 우리 똥꼬도 제대로 못 닦고 있는 주제들이거든.
 “그럼. 우리는 간다. 라피르, 01번 실린더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로 전령을 보내면 돼.”
 “그······그치만 기······기사님.”
 라피르는 황급히 내 손목을 잡았다. 퐁. 이렇게 보면 은근히 귀여운 여자란 말이야? 내 타입은 내 품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스타일이지만 이런 슬렌더 타입의 미녀도 좋지.
 “더 할 말 있어?”
 “아······ 아뇨! 저도 기사님을 따라가겠슴돳!”
 아가씨. 지금 목소리 삑사리난 거 알아?
 “왜? 솔직히 우리는 그 용대가리들이랑 싸우고 싶지 않다구. 조건은 그거였잖아? 당신들은 지름길을 가르쳐주고 우리는 당신들이 본대까지 합류할 때까지 호위해주고. 아 물론 정보교환은 이후로도 할 테지만.”
 “하······하지만······.”
 냉정한 이야기다. 뭐 정보교환 등의 협력이야 상관없지만 이들과 같이 있으면 왕도마뱀이 다시 덮칠지도 모른다. 생명의 귀천은 없겠지만 나는 내 부하들이 더 소중하다. 또한 저 위에 있는 내 인류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고.
 “어이 프로페서! 통신기 하나만 줘라!”
 “크하하하. 번호를 줄 수 없으니까. 아예 전화기를 주시는 겁니까? 이야아아, 부자시네?”
 “시끄럿. 체리보이. 너는 소드맨이라면서 아직도 동정이라며? 강하엽병의 이름이 운다. 새퀴야.”
 “아오! 그 얘기는 왜 또 꺼내는 겁니까?”
 그 녀석은 억울한 듯 투정하면서 통신기를 건넸다. TA-331 구형이지만 광발전으로 배터리충전도 되고 튼튼한 놈이다. 게다가 짧은 거리라면 지상에서도 통신하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걸로 연락해. 아마 머리위에 물이 없는 한 잘 터질 거야. 사용방법은 이걸 이렇게 누르고······.”
 그녀는 내 설명을 잘 듣다가 통신기를 옆에 있는 기사(?) 차림의 남자에게 넘겼다.
 “잘 들으셨죠? 사용법은 요걸 요래요래 누르면 될 거래요.”
 “아니, 이봐 아가씨. 굳이 우리를 따라올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회의를 해야 한다며? 동맹의 중요한 회의라며?”
 “아뇨. 따라갈 거예요. 회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분명 ‘전쟁’은 기사님이 있는 곳에서 날 가능성이 높아요. 저는 기록하는 자로서 따라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그녀는 어디서 깃털 펜과 종이를 꺼내서 들어보였다. ······이런 고집쟁이를 다 봤나?
 라피르는 프로페서의 로더에 타고 방탄헬멧까지 썼다. 굽이치는 은발과 강하엽병의 하이바가 정말 기묘하게 어울리는군.
 “데려가죠? 중위님. 어차피 중위님 거겠지만 우리도 눈요기 좀 합시다?”
 “그러게요. 체리보이는 저 여자만 보면 그대로 싸버릴지도.”
 아아. 씨발 내가 무슨 고등학생들 수련회에 데리고 가는 선생도 아니고.
 결국 라피르는 동료들과 떨어져서 우리 수색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나는 또 라피르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거대한 전쟁’이라. 아까 노른인지 뭔지 하는 여자도 라그나로크 어쩌고 씨부렸는데······. 아, 씨발 잘 기억이 안 나네. 너무 건성건성 들었군······.
 남은 길은 꽤 순조로웠다. 벌레들의 무리와 엇갈려서 우리는 마침내 반대편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쪽은 입구와 달리 굉장히 간소한 문이었다. 프로페서 녀석은 결국 로더를 저쪽에 놓고 걸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들의 짐은 점점 더 늘었다. ······존나 무겁잖아. 으윽 망할 산길. 호버로더도 못 쓰니까 더욱 빡시군.
 “중위님. 실린더입니다.”
 “전원 은폐할 것. 내 명령을 기다려.”
 앞에 가던 원이 포복을 해서 육안으로 실측을 하고 있었다. 이미 프로페서가 동굴에서 미리 보낸 탐색로봇은 탈탈탈 바퀴를 굴려가며 실린더의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바니테일. 카메라를 돌려봐.”
 [예. 주인님. 이거 왠지 도촬하는 기분인데요?]
 “걱정 마라. 여자 탈의실이나 화장실에 가라곤 안 할 테니.”
 뒤에서 킥킥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디보자. 피? 제프 녀석의 촉이 맞았군. 여기서도 뭔가 교전이 벌어진 흔적이 있었다. 강화방벽 여기저기에도 손톱자국 같은 것이 나있고 전체적으로 많이 긁혀 있었다. 게다가 아까 발사한 피아식별 신호에도 실린더 쪽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또······ 싸워야 하는 거 아니냐?”
 “흐흐흐흐. 벌레들을 다 못 밟아서 스트레스가 아직 다 안 풀렸는데 좋지요?”
 “저도요. 저는 벌레들이라면 질색이라.”
 그래그래. 이해한다. 나도 벌레들이라면 질색이거든. 아까도 특히 그 곱등이 새퀴들은 싹 다 불 질러 버리고 싶었어.
 “좋아. 닥, 비프, 니들은 여기서 대기해라. 체리보이하고 원은 나를 따라오고.”
 “어······ 중장기병으로 나가지 않으십니까?”
 “협곡이잖아? 지형이 좆같아서 걸어가나 그걸 타고가나 마찬가지일 거야. 밤이니 에너지도 아껴야 하고. 엄호나 잘해줘.”
 나는 저격총을 비프에게 건네면서 투덜거렸다.
 “저도 따라갈래요.”
 다시 놈들이 부럽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누구 탓을 하랴. 내 잘못인걸. 이 아가씨는 겁도 없는지 어느새 플랙자켓(엔지니어용 방폭 조끼)과 밀착복에 전술바지까지 입고 있었다.
 밀착복. 안에 항온소체가 순환하는 우주복이지.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방탄기능은 있고 헤드모듈 쓰고 이걸 입고 우주로 나가도 상관없어. 지구 시절의 풍덩한 우주복 따위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구.
 덕분에 이 밀착복은 음란잡지 사진가들의 새로운 소재가 되었지. 입으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거든. 저 엉덩이 좀 보라고! 와오.
 “가······가슴이 조금 답답하네요.”
 “그래도 입고 있어. 교전상황에서는 우리가 보호해줄 수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기사님.”
 가슴이 답답한 거야 당연하지. 프로페서가 가지고 있는 밀착복은 남자 거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플랙자켓으로 가려져 있어서 망정이지······ 아까 동굴에서 갈아입을 때 흘끗 봤는데 가슴이 막 이따만 해.
 “좋아. 잘 들어. 저기까지 거리는 450미터. 중간에 풀숲, 바위그림자 등에 05번 실린더와 교전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전진한다. 또 05번 실린더에서 오인사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하고.”
 “흐흐. 올림푸스산이 생각나는군요.”
 “너도 거기 있었냐?”
 “예. 82강하엽병사단은 궤도에 있다가 궤도 엘리가 함락되자 그쪽으로 강하했으니까요.”
 “씨발······. 화성 올림푸스산 좆같았지. 거기. 아무튼 눈보다 헤드모듈의 센서를 신뢰하도록······.”
 
 
 4)
 
 
 우리 넷은 계곡을 타내려가면서 조심조심 실린더 쪽으로 전진했다. 5층 건물만 한 실린더는 기울어져서 V자로 된 협곡의 안에 처박혀 있었다. 대공포가 있던 우리와는 달리 아마 교전이 벌어졌다면 굉장한 사상자가 났을지도 모른다.
 또 피. 그리고 발밑에 뭔가 고깃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몬스터? 글쎄 장담은 못하겠군.
 “라피르 이 살덩이가 뭔지 알겠어?”
 “글쎄요······.”
 그녀는 피떡이 된 조각을 들어 보였는데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런 일에 익숙한 건가?
 거리는 이제 300여미터······ 씨발 450미터가 이렇게 긴 거리였나? 엉금엉금 보병전술대로 나아갈라니 죽을 맛이다.
 소드맨인 체리보이가 광학미채(간단히 말하자면 투명망토)를 입고 앞으로 달려 나가서 안전지역을 확보하면 그 뒤를 통상복장의 원이 엄호하다가 체리보이와 합류한다. 나와 라피르는 차례차례 안전지역을 확보하는 그 둘의 뒤를 따라갔다.
 체리보이 자식. 비록 동정이지만 위치장악은 끝내주는군. 놈이 고르는 곳은 전부 비프가 저격으로 쪼이고 있는 곳이었다. 여차하면 저격총이나 대공포가 엄호를 할 것이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실린더를 노려봤다. 적외선으로 스캔할 때는 잘 몰랐지만 실린더의 윗부분이 무슨 엄청난 힘으로 우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거인?”
 “예? 거인이요?”
 “아······아니야.”
 우그러진 모양이 꼭 손자국처럼 보였다. 제기랄, 아니겄지. 강하하다가 부셔진 걸 거야. 아까 원도 별말 없었잖아.
 원 녀석도 그 우그러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린더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모양은 마치 원통형 프링글스 깡통을 어거지로 쥐어뜯은 모양처럼 보였다.
 그 순간 슷 하고 뭔가가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퍼벅. 저격총의 대구경 탄환이 풀숲에 있던 무언가를 박살내 버렸다.
 “가여워라······ 사슴이······.”
 사슴은 배와 꼬리 부분이 두 방의 총탄으로 피떡이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 내일 아침메뉴는 결정되었군. 라피르와는 달리 나는 실용주의자라서 말이지. 비프의 저격솜씨도 굉장하군. 좋아 안심할 수 있겠어. 이제 150미터.
 “사······ 살려줘······ 히이이익! 죽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윽! 깜짝이야!”
 덤불을 지나갈 때쯤 누가 갑자기 내 다리를 확 잡았고, 나는 간신히 비명을 지르는 것만은 참았다. 뭐······뭐야! 어떤 놈이야!
 “어! 어! 어! 주······중위님! 주······중위님? 위······ 윌리엄스 중위님! 중위님이군요!”
 체리보이도, 원도 깜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풀숲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두툼한 대기권강하복을 입고 있는 강하엽병이었다.
 “너······ 어떻게 된 거냐?”
 “크으으윽! 그게 왔어요! 그게! 거대한 게! 거인! 으아악 거인이! 우리를 짓밟고 먹어치웠습니다!”
 “이봐, 정신 차려! 그리고 소리를 크게 내지 마라. 아직 위험지대일지도 모른다.”
 “크아아아아아앙! 바······발이! 소······손이! 자······잡아먹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
 올림포스 전투에서 이런 녀석을 숱하게 봐왔다. 이 녀석은 극도의 긴장 상태와 전투 피로를 겪고 있는 것이다.
 “닥. 내려와라. 진정제가 좀 필요하겠어!”
 “예. 중위님! 씨발 뒈지지 마라! 행드맨 새퀴야! 내 눈앞에서는 씨발, 아무도 뒈지지 말라고!”
 닥은 신경질적으로 욕질을 하면서 미친 듯이 달려서 내려왔다. 300여 미터. 말이 300미터지, 닥 녀석은 10분여에 걸쳐 우리가 개척한 곳을 한달음에 내려와 버렸다.
 “헉헉. 헉헉. 중위님! 나노······ 헉헉······ 나노······.”
 “알았어. 나노주사 준비할게.”
 “헉헉. 씨발롬아. 괜찮아! 내가 있는 한. 넌 뒈지지 않는다. 씨발······ 내 눈앞에서 죽지만 마라. 걱정 마라. 헉헉······.”
 닥은 놈의 손을 잡고 콱 하고 진정제를 놈의 팔에 쑤셔 박았다. 이 녀석 왜 이러지? 오히려 닥한테 진정제를 놔줘야 할 것 같은데?
 닥은 절대로 죽게 하지 않는다고 되뇌면서 의료스캐너로 그 강하엽병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강하지점이 잘못된 건지 다리 하나는 벌써 괴사상태였고 자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었다.
 “저······ 잠시만요······.”
 “으······으엥? 처······천사?”
 “븅신아. 밀착복을 입은 천사가 어디 있다냐? 아플지도 몰라. 이거 물고 있어라.”
 “자······자르는 거냐?”
 “걱정 마. 01번 실린더에 의족이나 의수들이 있어. 오히려 더 짱짱하게 걸을 수 있을 거다.”
 “씨발······. 다리 자르고 싶지 않은데······.”
 닥은 놈의 뒤통수를 때리고 다시 절단절차를 준비하려고 했다.
 “자르려고 하시나요?”
 “뭐야. 여자. 저리 안 꺼져?”
 “제가 힐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자르지 않아도 돼요.”
 나는 이토록 살기 흉흉한 닥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화약식 권총을 꺼내서 라피르의 미간에 겨눴다. 딸깍 내가 말리기도 전에 닥은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제꼈다.
 “그딴 마술 내 알 바 아니야. 이 녀석은 내가 살린다. 넌 저리 꺼져.”
 “야······ 닥······.”
 “중위님은 빠지십쇼.”
 “괜찮아요. 님의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라피르는 닥의 권총을 무시하고 그대로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 다리를 고쳤을 때처럼 밝은 빛이 나더니 그 빛이 부상자 녀석의 다리로 빨려 들어갔다.
 “아. 지금 너무 많이 놀랐으니 잠시 동안 주무시는 것이 나을 거예요. 슬립.”
 “······.”
 그녀가 머리에 손을 대자마자 놈은 세상모르고 드르렁 코까지 골면서 곯아떨어졌다. 뭐야 이거······. 뭐냐고? 이거······.
 “너······.”
 “힐을 했습니다. 피가 썩은 다리는 좀 치료가 오래 걸리지만 저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간호한다면 곧 문제없이 걸을 수 있을 거예요.”
 아직도 닥은 라피르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제기랄. 다들 명령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네. 아직 위험지대일지 모른다니까? 실린더를 저 꼴로 만든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구.
 나는 천천히 닥의 총에 손을 올리고 총구를 내리게 했다.
 “죄송합니다. 중위님.”
 “알면 됐어. 닥, 너는 여기서 이 녀석을 돌봐라. 체리보이! 커닝검! 원! 우리는 앞으로 간다!”
 씨발 은폐고 나발이고 방금 전의 해프닝으로 적들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한 꼴이다. 체리보이는 광학미채를 끄고 스르릇 하고 검은 형체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냥 걸어가도 되겠지. 공격하려면 벌써 공격했을 거다.”
 우리는 정찰봇이 기어온 길을 따라 천천히 실린더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누구의 피일까······. 요상시럽게도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냐, 원?”
 “글쎄요······.”
 거인.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몇 년 간이나 플래닛 시리즈를 우승 못한 자이언츠를 생각하고 있었다. 드래곤이나 자이언트. 인간들은 신화시대의 생물들을 스포츠 팀이나 무기 따위에 붙이길 좋아했다. 뭐 일종의 토테미즘이랄까?
 현대인인 나로서는 드래곤은 직접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번에 우리 자이언츠를 좌절시킨 야구팀 ‘드래곤즈’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거인 드래곤? 나는 흡사 동화 속에 들어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 거대한 발자국. 누가 장난친 건 아니겠지?”
 “여기다가요?”
 원과 나는 거대한 인간의 발자국 위에서 경악하고 있었다. 발자국은 엄지발가락에서 발뒤축까지 대략 2미터가 넘는다. 즉 이 발자국의 주인은 세로로도 최소한 4미터는 족히 넘는 다는 이야기다.
 “야 원. 혹시 발만 존나게 크고 키는 우리만 한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냐?”
 “······.”
 쇄키. 썰렁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개드립 좀 쳤는데 받아줄 것이지. 차라리 이런 면에서는 바니테일이 낫다니까?
 “바니테일 너도 한마디 해봐라.”
 [땅이 패인 것과 발의 크기로 추산해 봤습니다. 신장 10미터 이상. 몸무게는······.]
 “야 씨발. 잠깐만. 뭐라고? 10미터?”
 “바니테일 너 오류를 일으킨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언제나 짱짱하다구요.]
 알아. 괜히 그래본 거다.
 10미터가 넘는 뭔가가 실린더를 습격했다. 불 뿜는 왕도마뱀도 봤는데 어쩌겠어. 인정할 수밖에.
 “거인이로군요.”
 “그래 아무리 봐도 거인이군······.”
 이번만큼은 순순히 라피르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퍼뜩 아까 패닉에 빠져있던 강하엽병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안 돼······. 안 돼······.”
 나는 총까지 내려놓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렸다. 30, 20, 10······.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아까 처음 봤던 살덩이는 몬스터의 것이 아닐 것이다. 왜 안 좋은 예감은 이렇게 잘도 들어맞는 거냐?
 “이런 개새끼들!”
 방벽의 뒤편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곳에도 거인들의 발자국이 정신없이 나있고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 화약식 자동소총의 탄피까지 나뒹구는 것을 보면······. 05번 실린더의 인원들은 모든 에이리어를 침범 당했고, 무참하게 학살당한 거다.
 실린더와는 좀 떨어져서 잘못 강하한 그 녀석은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바니테일의 분석이 맞는다면 그 광경을 보고 미치는 건 당연하다.
 불시착의 충격이 끝나기도 전에 저 협곡의 끝에서 인간보다 몇 배나 큰 거인이 튀어나온다. 씨발······ 당황했겠지. 순식간에 레일건의 포화가 거인을 공격하고 거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도시락을 쳐다보고······.
 그 다음은 교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참극이다. 실린더가 뜯겨나가고 강화방벽이 부서지고 10미터가 넘는 거인들이 몰려들어와 인간들을 찢고 부수고 먹어치운다.
 중장비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야포라도 한 문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들은 한 세대 전의 병기인 화약식 권총까지 쏘면서 한 명 한 명 잡혀 먹힌 것이다. 시체가 없고 핏자국만 있는 이 상황은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된다.
 “제기랄······. 우리가······ 우리가 더 빨리 왔다면······ 어제 숙영하지 않고! 좀 더 서둘렀다면! 씨발. 좀 더 빨리! 빨리······. 빨리······.”
 씨발······. 모르겠다. 그냥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우면 될 줄 알았던 내 임무가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밀착복에서 뜯겨진 계급장을 주워들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군바리들이 남길 수 있는 개목걸이(인식표)조차도 없다. 누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 또한 몇 명이나 이 참극에서 죽었는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
 이 행성에서 적어도 하나의 세력은 우리를 적대하고 있었다. 우리와 싸우기를 싫어했던 왕도마뱀이나 기타 등등과는 다르게 놈들은 우리를 유린하고 먹어치우기까지 했다.
 거기까지는 내 이성이 말하는 거고. 내 감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히 내 부하들을 건드려어어어어어어! 이 개새끼들이! 뒈질라고 환장했나!
 거인놈들. 네놈들은 궤도 폭격을 써서라도 갈아엎고 말겠다. 정말로 니들은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기사님······.”
 “라피르. 말해줘. 거인들은 뭐지?”
 “예······. 신들에게 패배해 요툰하임에 거주하는 피조물입니다.”
 “요툰하임?”
 “아까 대공동의 문을 기억하십니까? 요툰하임은 이 미드가르드의 밑에 있습니다.”
 또 닭꼬치에 꿰인 9개의 층이 떠올랐다. 솔직히 나무로 층층이 살아가는 고대인의 세계관 따윈 알 바 아니고, 라피르의 말로는 지하라는 건가? 그래 거인 새키들. 지하에 처박혔다고?
 흥! 순양함에는 지하에 숨은 쥐새끼들도 공격하는 무기가 있지. 기대해라 시발롬들아.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네놈들을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씨를 말려 버리겠어.
 나는 기자재들이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잔해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왜 미드가르드의 벌레들이 이동했는지······.”
 “······.”
 “거인들이 미드가르드에 돌아왔군요. 그건······. 거대한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는 뜻입니다.”
 아까도 그 노른인가 하는 벌레들의 여왕은 그런 소리를 했었다. 라그나로크.
 솔직히 용어 자체는 연방의 군바리들이라면 모두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화성 궤도에 있는 우주 요새포의 이름이 그거니까. 그런데 라그나로크라니······.
 그것보다 나는 라피르가 한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거인이 미드가르드에 돌아왔다. 그 얘기는 우리가 있는 같은 곳에 거인놈들이 있다는 거다. 좋아.
 다행히도 탄소필라의 겉면을 씌울 외장재와 건설로봇은 무사했다. 나도 각 실린더에 뭐가 실려 있는지는 잘 몰랐다. 원래 나는 넘버2였다구요.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우리는 동료들의 핏자국을 밟으면서 야참을 먹고 다들 말이 없어졌다. 라피르 조차도 시무룩한 얼굴로 내 옆에서 조용히 있었다.
 그 뒤로는 프로페서와 내가 바빠졌다. 5층 건물 크기의 실린더 위아래를 오가면서 물자를 점검하고, 바니테일에게 수치 등을 기록시켰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밤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중위님······.”
 “좀 더 생각해 봤는데 인형기(사람모양의 로봇들의 총칭)들의 운반 길이가 너무 길어. 제기랄. 골치 아프군. 옮겨야 할 자재들은 많은데. 가용전력은 눈곱만큼이야······.”
 아마 터치다운 시작 후 프론티어 쪽에서도 착착 로봇으로 토대공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동시에 작업이 시작되어야 했지만 지상 강하조는 시작은커녕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냥 배 위에서 좌라락 내려오면 안 되냐구? 대기권 진입 전까지는 별 문제없지. 그 뒤가 문제야. 어린이 여러분. 아래위로 매달린 실에 바람을 후 불면 어떻게 된다. 흔들리지? 지금이야 탄소필라자체의 질량이 작으니까 상관없지만 위에서 내려오면서 패널을 붙이면 대기권의 바람 때문에 아래쪽에서 똑 끊어지는 거지.
 즉 무슨 일이 있어도 성층권까지는 우리 쪽에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모자란 인력이지만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중위님.”
 “뭐 또, 씨발.”
 “저······ 중위님.”
 “아오, 새퀴야. 뭘 묻고 싶은 건데? 말할 것 있으면 해라.”
 “중위님······.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불침번을 세 번째나 서시고 있습니다.”
 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녀석이 불침번을 설 차례였나?
 “괜찮아. 커피를 많이 마셨거든. 잠도 안 와. 너희들이나 쉬라구.”
 “······.”
 남자가 저렇게 잘생겨서 어디다 써먹어? 순간 두근거렸잖아. 하지만 나는 게이가 아니니 패스. 프론티어의 미녀들이여, 여기 좋은 남자 하나 있다구.
 “킬킬. 중위님. 또 커피입니다.”
 “닥. 커피에 위스키 좀 타지 마라.”
 “흥. 좋아하시는 주제에.”
 닥과 나는 오늘의 일로 뭔가 우울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부하가 죽는 꼴은 보기 싫고, 이놈도 위생병으로서 동료가 죽는 꼴은 절대 보기 싫은 거다.
 놈은 위스키를 들이부은 커피를 내게 건넸다. 취하겄다. 하긴 약간 취하는 게 낫기도 하겄어. 커피의 쓴맛과 스카치위스키의 향이 이상하게 어울린다.
 “닥. 그 녀석은 깨어났어?”
 “아직입니다.”
 “음······. 그 녀석은······. 다시 싸울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예······.”
 “그런데 나는 그 녀석을 다시 전장으로 내몰아 싸우게 만들어야 돼. 사람이 너무 부족하거든. 닥. 이해하지?”
 놈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05번 실린더의 전멸로 사람이 졸라게 모자란 건 놈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트라우마에 걸린 놈까지 전장으로 내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거인 같은 녀석들이 한 번 더 침공하면······.
 에라이, 이판사판이지. 그래, 닥 니가 잘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니놈들을 단 한 명도 안 죽인다. 그게 프론티어 방위군 중위 존 윌리엄스의 책임이지.
 으으······. 생각하고 보니까 오글거려서 닭살 돋아. 이거 완전히 나답지 않다고. 여자 꽁무니나 헤헤거리면서 쫓아다니는 게 내 스타일인데.
 “좋아. 너도 쳐 자라. 원, 너도 눈 좀 붙이고. 나는 자재정리표를 더 검토하고 자겠다.”
 “······.”
 “시발롬들아. 명령이다. 담배도 그렇고 장교가 그르면 좀 들어 처먹어라.”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두 놈은 한숨을 내쉬면서 텐트 쪽으로 사라졌다.
 
 
 5)
 
 
 나는 그 뒤로 바니테일과 입씨름을 하면서 자재들을 어떻게 옮길 건지 생각하고 있었다. 픽시로 찍은 전장정보와 조합해보니······ 천상 그 드워프의 동굴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근데 그 벌레 떼가 아니더라도 다른 것이 튀어나오면? 자재들을 하나라도 잃을 수는 없었다. 또 탁 트힌 곳으로 가자니······. 씨발 주위는 다 이런 협곡들이다. 그야말로 판타지스럽군.
 으으. 씨발 생각하면 할수록 나하고 존나 안 어울리는 상황이다. 이래서 넘버2가 좋은 거다. 하나하나 생각했더니 속이 다 씨리네. 아오, 씨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콧속으로 꽃향기가 하늘하늘 들어왔다. 킁킁. 라피르의 체취다. 이 여자는 샴푸를 뭘 쓰고 다니는 거야? 아니 샴푸는커녕 어제 오늘 우리랑 쭉 있었으니까 씻을 시간도 없었을 텐데?
 “기사님. 안 주무시는 건가요?”
 “휴우. 아가씨까지 일어난 거야?”
 “아뇨. 저는 정령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겄냐. 정령. 스피리츠. 쳇. 스피리츠(위스키를 일컫는 다른 말)를 더 마시는 게 낫겠군.
 “상냥한 분.”
 나는 푸웁 하고 위스키를 뿜었다. 그녀는 내 볼에 뽀뽀를 한 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흐······ 흠. 사······상냥하다니 뭐가?”
 라피르는 대답 대신 혀를 살짝 내밀고 프로페서가 준 침낭을 들어보였다.
 므어야? 이 여자? 뭐하자는 거지? 그녀는 바로 내 옆에 침낭을 깔고 도롱도롱 잠에 빠져 들었다.
 아가씨······ 남자는 다 늑대라구. 늑대 옆에서 폭 잠이 들다니······ 나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건가? 아 그리고 다 좋은데 씨발 정신 사납게 코는 왜 고는 거여?
 “크크크크크. 푸하하하하!”
 나는 결국 입을 헤에 벌리고 자는 요 이종족의 아가씨를 보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거 참, 자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군.
 [하아······ 주인님. 사랑에 빠지는 건 작작 좀 하시지요?]
 “시꾸랏.”
 ***
 01번 강하 실린더로 되돌아온 우리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험지 주행용 로봇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 협곡에 처박힌 05번 실린더에서 건설 패널을 가져오는 건 인형기들의 몫이 되었다. 총 거리는 약 35킬로미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인형기들이 협곡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20킬로미터 정도는 대공동에 있는 산업용 로더 두 대로 날라서 다시 산길을 거쳐 여기까지 내려오는 작업이다.
 “이 구간부터 이 구간은 인형기들에게 맡겼다. 이미 비숍들이 작업은 들어갔고.”
 “예······ 하지만 경계 병력은 그 드워프의 도시인가로 들어가는 입구까지밖에 쪼이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지. 실린더 최상층에 저격조를 배치하고 근무를 짜. 근무 로테이션은 제프 너에게 맡긴다. 아, 그리고 다른 실린더에서 연락은 없었어?”
 “예. 단파통신도 정찰로봇도 없었습니다.”
 02번 실린더는 여기서 7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딱 저녁 먹고 여자랑 왕복으로 드라이브하기 좋은 거리다. 레스토랑에서 좋은 식사를 하고 야시시한 이브닝드레스를 흘끔흘끔 쳐다보다 씨발······ 그 다음은 헤헤. 근데 걸어서 그 거리를 가야 간다면 씨발······. 난 다시 행군 안 해.
 “그리고 로봇의 정비 상태가 문제인데······ 프로페서 녀석은 저렇게 바쁘니······.”
 프로페서는 로더를 자기 몸처럼 쓰면서 착착 토대 공사를 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강하 실린더가 땅에 처박힌 형태가 거의 직각이라 지지대 몇 개와 신소재 콘크리트를 들이붓는 작업만 하면 1차 공사는 완료된다.
 쓸데없는 데서 운이 좋았군. 차라리 강하 실린더 8개가 근처에 바바박 떨어졌으면 좋으련만.
 본대로 돌아와 제프와 이런저런 상의를 할 때쯤 비숍이 이끄는 선발대가 건설 패널을 들고 언덕으로 올라왔다.
 “수고했어. 비숍. 잠시 쉬어라.”
 [예. 중위님.]
 로봇도 간간히 정비를 받아주어야 한다. 이 충직한 일꾼들은 왕복으로 산길 20여 킬로미터를 저 무거운 패널을 들고 온 것이다. 사람이라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겠지.
 “아. 프론티어 아자씨들. 혹시 로봇 정비사는 없습니까?”
 노란색 개척복(보유능력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다)을 입은 엔지니어 양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말 좀 하시면 안 될까요?
 “로봇 정비사 분들은 인형기의 상태에 대해 주의해 주십시오.”
 “알겠소. 중위 양반. 당신 일 제법 잘하는구만? 흥. 프론티어 배에 있을 땐 쌩 양아치 바람둥이인 줄 알았구만······.”
 아아. 나의 고명한 평판이 어찌 이렇게 떨어졌단 말이냐.
 “근데 중위 양반.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게요?”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야지요. 그게 우리들의 최우선과제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서야······. 그리고 05번 실린더는 전멸했다고 들었소.”
 프론티어의 엔지니어 양반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긴 나 같은 산전수전 다 굴러먹은 중장기병조차 왕도마뱀이나 벌레떼 앞에선 식은땀이 났으니까 무리도 아니다. 게다가 05번 실린더의 비극은 50명도 안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포를 심어주었다.
 “후우. 군대는 여러분들을 지킵니다. 걱정 마시길. 제 목숨을 걸고라도.”
 “······.”
 “여러분들도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에 모든 걸 걸어주십시오. 우리가 포기하거나 절망하면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말라죽습니다.”
 오글거려도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정론으로 우리의 임무를 되살리는 게 중요했다. 죽어 버린 선임상사도 내가 쏘가리 시절에 내 뺨을 때리면서 그랬지.
 -당신의 임무는 씨발, 이 새끼들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궤도 엘리베이터를 건설하자!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 엔지니어들은 프로페서를 도와 건설현장으로 되돌아갔고 나의 지휘부(그래봤자 원이랑 제프뿐이다)는 3차원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흠······. 나머지 핵심부품은 엘리베이터실과 구동모터로군요.”
 “가까운 데 떨어져있기를 바라야지. 02번 실린더에 대위님과 함께 있다면······.”
 사실 나와 제프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꾸물대다가 05번 실린더를 전멸시킨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 계급에 비해서 걸려있는 중압감이 너무 컸다.
 거기다 실린더 중 몇 개는 라피르의 말대로라면 사막이나 남극 같은 위험지역에 처박혀 있었다. 지금도 05번 실린더의 아이들처럼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담배가 땡기는군. 제프도 마찬가지였는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내게 건넸다.
 “후우. 그래, 씨발. 이 맛이지. 오장육부에 스며드누나······.”
 “중위님 책임이 아닙니다.”
 “뭐가.”
 “05번 실린더요.”
 “······.”
 “우리 강하엽병들은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침대 위에 처박혀 죽나 땅에 꼴아박고 죽나.”
 “씨발······ 우리는 엑소슈트째 찢겨져 뒈지거나 관짝에서 질식해서 뒈지는 거지.”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이겠지. 녀석과 나는 크크크 웃으면서 서로 담배연기를 훅하고 뿜어냈다.
 놈도 나도 어지간한 지옥을 헤쳐 온 거다. 부하들 죽는 걸 본 게 한두 번이냐······.
 아무튼 다음은 02번 실린더다. 대위님이 살아 계시다면 후우, 이 좆같은 상황도 조금 나아지겠지. 거기에는 지상 작전소용 장비도 실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실린더에 뭐가 실려 있는지도 알 수 있겠지.
 02번 실린더와의 거리는 72킬로미터.
 72킬로미터.
 02번 실린더까지 72킬로미터.
 목성코어에서 장사하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쪽은 행성이 워낙 크다 보니 100킬로미터를 1킬로미터 정도로 느낀다는군. 하지만 우리는 02번 실린더가 떨어져 있는 72킬로미터를 한 720킬로미터 정도로 느끼고 있다.
 이 망할 놈의 행성. 72킬로미터 사이에 뭐가 있을지 알 게 뭐야. 휴우. 그 괴상한 엘프 아가씨를 돌려보내지 않은 게 다행이군. 이럴 때는 현지인의 도움이 최고지.
 “어이 체리보이! 라피르는 어디 있냐?”
 “아 저기요!”
 망루 위에 있는 녀석이 강화방벽의 바깥을 가리켰다. 이 여자. 아주 신났군. 아까도 전투식량을 신나게 까먹더니 배탈이 난 건가? 화장실 사용법을 가르쳐 줬는데도······.
 “어이, 라피르. 좀 묻고 싶은 게 있어.”
 어, 씨발. 사슴이냐? 뭐여 이건?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인데? 아무튼 그녀의 주위로 동물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건 어디의 동화책이냐? 짐승들아. 그 여자 고기 잘 먹더라. 튀는 게 좋을걸?
 “흠흠. 라피르? 좀 묻고 싶은 게 있어.”
 “아? 기사님?”
 그녀는 동물들을 돌려보내고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오전의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다시 그 뾰족한 귀가 쫑긋쫑긋.
 “······.”
 “에?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아 주인님. 고백할라면 지금 하라구요. 분위기 좋잖아요? 호수가 보이는 언덕에 햇살도 적당하고.]
 “시꾸랏.”
 그녀는 바니테일과 내 입씨름에 다시 픽하고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강하엽병의 밀착복 차림이었는데, 밀착복이 저렇게 섹시하다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돼. 변태로 오해할라. 물론 뼛속까지 변태지만.
 “흠흠. 여기 지도를 봐주겠어?”
 “아······ 여기는······.”
 “왜? 여기에 뭐가 있는데?”
 “신성황국의 교단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저희를 쫓는 사제단들을 추종하는 국가지요. 전에 국왕이 광신도에게 밀려나면서······.”
 딱 들어봐도 성가신 기분이 든다. 크로넨인지 뭔지 하는 협곡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생각해보니 05번 실린더가 거기에 처박힌 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72킬로미터를 그 많은 자재를 여기 거주민들의 방해를 안 받고 나를 수는 없겠지.
 “경비 상태는 어떤데? 우회할 길은 있어?”
 “여기서 이 마을까지는 별다른 검문이 없겠지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길목마다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어요.”
 “검문? 뭘 검문한다는 거지?”
 “이런 것을 들고 있는지요.”
 그녀는 나무 모양이 새겨져 있는 목걸이를 꺼냈다. 그 전에······ 가슴이 얼마나 큰지 목걸이가 그녀의 가슴을 출렁거리게 하면서 뾱 뽑혀져 나왔다.
 “흠흠. 흥미롭군. 흥미로워······.”
 [주인님이 흥미로워하는 건 처자의 가······.]
 “시······시꾸랏! 이 망할 인공지능!”
 나는 바니테일의 말을 가로채다시피 하면서 그 목걸이를 쳐다봤다. 그 목걸이는 그녀의 체취가 가득 배어 있었다. 달달한 우유향기랄지 꽃잎향이랄지······.
 “사제단은 오딘 님이나 토르신을 경배하는 것을 이단으로 여깁니다. 저도 마녀로 몰려서 죽을 뻔했어요.”
 “하필이면 02번은 그런데 처박힌 거냐······.”
 “아뇨······ 일행 분들은 다행일 거예요.”
 “뭐? 왜 다행이지?”
 그녀는 바니테일이 보여준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서 저해상도로 흐릿하게 찍힌 지도의 어딘가를 찍었다.
 “여긴 성역의 호수에요.”
 “성역? 생츄어리? 씨발 뭐 희한한데도 많군.”
 “사제단들도 여기는 감히 들어오지 못해요. 여기로 대피한 제 동료들도 있을 테고······.”
 “그러면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지 실린더의 주변은 괜찮다는 이야기군······.”
 음······ 뭔가 맞는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02번 실린더에는 내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비행장비가 실려 있었다. 만약 아무 문제가 없다면 가장 먼저 우리 쪽에 접촉했을 것이다.
 나는 05번 실린더의 일을 떠올리고 섬뜩해 하고 있었다. 설마 그쪽도 습격을 받고 전멸한 건가? 아니겠지.
 “거기 혹시 날 수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씨발······. 다섯 살 꼬맹이에게 베르누이의 정리를 이야기 해줘야 하나? 뭐 로켓구동원리를 따르는 로켓부스터도 있을 테지만. 아 씨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거기 새가 못 날아다니거나 하는 지역이야?”
 “글쎄요. 아무리 사제단이라고 하더라도 새를 막을 수야 없겠지요?”
 “휴우······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결국 직접 가서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가······.”
 사제단이라. 이 엘프 아가씨를 쫓았던 용가리하고는 다른 세력인가? 아니면 같은 세력? 아리까리하군. 게다가 쎄한 기분이 내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기분이다.
 
 
 6)
 
 
 나는 라피르를 데리고 제프와 원이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제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02번 실린더로 정찰을 보내야겠다. 몇 명이나 뺄 수 있지?”
 “글쎄요······. 한 명이나 두 명쯤. 한 명도 많습니다.”
 제프는 인형기가 건설 패널을 실어오는 것을 흘끔 쳐다봤다.
 확실히······ 02번 실린더의 인원과 중요하지만 05번 실린더의 자재들이 더 중요하다. 패널을 설치하지 않고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엘리베이터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또한 패널 단계만 완성되어도 실린더에 실린 장비 몇 개를 응용하여 간이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있다.
 음······ 당초 계획대로라면 그 상태에서 행정인력과 프론티어의 선발대가 2차 터치다운을 하고 그 다음엔 병자를.
 뭐 이쪽 땅이 이렇게 흉흉한 전쟁의 땅인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아무튼 우리들의 최우선순위는 일단 05번 실린더의 자재들이다.
 “자재들을 다 옮기기까지 좀 더 기다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정도 페이스라면 한 일주일이면 전부 옮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 돼.”
 72킬로미터. 그 다음은 156킬로미터······. 거기서는 이 탄소필라가 보이겠지. 제기랄. 소행성지대에서 구축함들을 모두 잃은 게 타격이 컸다. 그 배가 있었다면 훨씬 더 수월했겠지.
 “중위님도 고집쟁이시로군요. 05번 실린더······.”
 “흐흐. 씨발 너도 마찬가지잖아?”
 “할 수 없군요. 통상의 정찰조로는 체리보이나 커닝검을 추천하죠.”
 “아······. 그 두 녀석의 실력은 드워프의 동굴에서 잘 봤어.”
 두 녀석 다. 근접전투에는 제법 배짱도 있고 쓸 만했다.
 “좋아. 그럼 둘 중에 한 명을 보내자.”
 “한 명만입니까? 그리고 혹시 이쪽 거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통과하지 않습니까?”
 “새퀴, 예리하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단순 정찰이야. 02번 실린더에 접선까지 하면 더욱 좋고.”
 “잠시만요. 이것도 합리적인 근거는 없는 제 촉입니다만 그렇다면 그 녀석들은 안 됩니다.”
 “뭐야. 방금 네가 추천한 녀석들이잖아?”
 “흐흐흐. 중위님이 가시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상관을 알뜰히 부려먹으려고 하는 군. 그 촉이라도 근거를 말해봐라.”
 쪽. 새퀴. 또 토끼 발에 키스를 하고 그 목걸이를 내게 건넸다. 됐다. 새퀴야. 난 그런 취미는 없다. 이쁜 여자가 주는 거라면 몰라도 산 도적 따위가 주는 걸 받을까 보냐?
 “강하엽병은 현지 잠입훈련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떼거리로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분명 중장기병 지휘과 분들은 생존 훈련을 받는 다고 들었습니다.”
 “음······. 촉으로 찍은 것치고는 합리적이군······.”
 “아마 저놈들은 잠입 임무에 익숙지 않아서 실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흠. 그럼 원 녀석은? 녀석도 파일럿이라 생존 훈련을 받는다구.”
 “원 준위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임기응변이 부족하죠. 중위님의 임기응변······. 즉 용가리에게 덤벼든 모습을 보면 중위님만큼 이 세계를 꿰뚫어보고 있는 자는 우리들 중에 없습니다. 아마 우리라면 전체적인 전황 따위는 못보고 용가리에게 습격당했겠지요.”
 놈은 담배연기를 흐으 하고 내뱉으면서 꽁초를 신발바닥에 비벼 껐다.
 “너 이 새퀴. 나 부려먹으려고 띄워주는 거 아니야?”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정찰을 가신다면 적임자는 중위님입니다. 그게 제 결론입니다.”
 “결국 날 부려먹으려고 그러는 구만?”
 놈은 킬킬 웃으면서 토끼목걸이를 아예 내 목에 걸어주었다. 전에 이야길 했을 때 들어보니 짬밥은 이 녀석이 나보다 훨씬 위다. 이등병부터 전장에서 굴러댔으니······.
 “게다가 저 아가씨는 중위님과 둘이서 여행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것 같습니다.”
 “헤헤헤.”
 아. 이 골칫거리 아가씨를 잊었군. 그녀는 도도도 달려와서 내 볼에 쪽하고 또다시 뽀뽀를 했다. 토대를 건설하던 프론티어 아저씨들도, 강화방벽 위의 아이들도 휘힉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 엘프 아가씨. 만약 지구인이라면 이탈리아계일 것 같지 않냐? 예전에 마피아의 딸내미랑 사귄 적 있었는데, 뚱보삼촌에서 할매까지 인사로 쪽쪽 뽀뽀를 하는 통에 아주 뒈지는 줄 알았거든.
 나는 귓속말로 라피르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라피르. 대체 ‘쪽’은 왜하는 거여?”
 “비.밀.이에요.”
 별놈의 비밀도 다 있군.
 ***
 출발 준비는 간단했다. 전투식량 깡통 몇 개랑 옷들. 그래. 옷. 씨발······ 욕을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구만.
 “냄새가······ 아오······ 이거 언제 빤 거야?”
 “글쎄요? 용병들이 주로 입는 옷이니······.”
 “제기랄. 아무리 잠입이라고 해도 이건 고문이다. 고문.”
 닥과 체리보이는 자재를 나르다가 킥하고 웃었다. 그래 마음껏 웃어라 시발롬들아.
 나는 머나먼 옛 지구시대의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총에도 펑펑 뚫릴 것 같은 흉갑에 꼬질꼬질 웃옷. 바지는 이가 득시글할 거 같아서 벌써부터 사타구니가 근질거린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그 드래곤 슬레이언지 뭔지 하는 그 칼이다. 하아······. 이게 뭐냐구.
 “제법 기사님처럼 보이시네요.”
 “휴우. 나는 기사가 아니야.”
 “뭐 기사 비슷한 거 맞지 않습니까? 중장갑의 엑소슈트나 갑옷이나 그게 그거지요.”
 넌 좀 끼어들지 좀 마라 동정 새퀴.
 “훠이 훠이. 니들 다 저리 꺼져. 얼른 일이나 하려무나.”
 “아아~ 엘프 아가씨의 기사가 될 것이오! 내가 그대를 지키리다.”
 “엄머머 나 반했어요. 기사님. 저의 뽀뽀를 받으시와요~!”
 닥은 체리보이의 볼에 쪽하고 키스하는 흉내를 내면서 우리를 놀렸다. 다시 방벽 안의 건설지에서 왁자지껄한 욕설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말을 말지. 그래 마음껏 놀려먹어라.
 “어이, 라피르. 당신도 무기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무······무기요? 하······하지만 저는 엘프라서 살생은······.”
 “흥. 몰라. 그딴 거. 의외의 지경에 처하면 날 죽일 셈이야? 이 권총은 증기가속식이야. 증기압을 늘 확인하라구.”
 으아. 뭔 손이 이렇게 가늘고 보드랍다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총기류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다. 뭐 총기래 봐야 행색이 이래서 소드맨용 레이저 커터 자동 권총 한 정과 우주용 증기가속식 기관 권총. 그리고 개머리판이 접히는 스마트 자동소총 딱 세 정이다.
 환장하겠군. 아무리 무장이 많다고 해도 깡통맨들은 자기 깡통을 떠나선 늘 불안한 법이지.
 “기사님, 그럼 이것도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되는 건가요?”
 “엥? 이건 뭐지?”
 탁자위에는 권총 비슷하게 생긴 뭔가가 있었다. 이건 우리 중장기병들과는 인연이 없는 물건 같은데······
 “어이, 제프! 뭐냐 이건?”
 “표적 지시기입니다. 로메이드(항공폭격이나 궤도폭격을 유도하는 병과)용으로 받아왔는데 프로페서와 이야기해서 약간 응용했습죠.”
 “아하, 그 로메이드. 우주군하고 육전군 둘 다한테 욕 처먹는 그 아이들?”
 우주군의 항공근접지원은 오폭으로 유명하다. 적군보다 아군을 귀신같이 맞추는 솜씨로 악명 높지. 저 해병들 중에 누가 뜨끔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이로군.
 “크크크크. 근데 우리는 궤도 폭격을 해버릴 함대가 없잖아?”
 “한 발 내지 두 발 정도는 연속으로 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세대 레일포에 72킬로미터는 거리도 아니지요. 또 이쪽 신호보다 그 지시기의 신호를 무조건 우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하. 그런 이야기다. 저 실린더의 꼭대기에 레일포를 설치하고 이 표적 지시기로 찍는 지점에 엄호 포격을 해준다는 이야기다. 그거 괜찮군. 72킬로미터라면 지평선을 감안하고도 거의 정확하게 타격을 때려줄 것이다.
 탄자가 날아올 때까지는 한······ 6초가량? 기억하고 있어야겠군. 대신 저번에 이 고물 칼을 날렸을 때처럼 광발전 패널은 한동안 먹통이 되겠지. 양날의 검이지만 꽤 든든하구만. 쓰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엑소슈트는 프로페서 네가 다룰 수 있게 바니테일이 손을 봤어. 로더를 쓸 수 있다면 엑소슈트도 쓸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답례품. 행군하실 때 꽤 요긴할 겁니다. 그럼 아이템은 다 드렸습니다. 오오. 용자여. 앞길에 영광 있으라.”
 어디의 RPG게임이냐 이건? 프로페서는 국왕처럼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껄껄 웃었다.
 내 옆엔 엘프.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용병의 것. 흐으······. 딱 봐도 마왕을 때려잡으러 떠나는 용자다. 용자.
 ***
 으으. 사관학교에서 내가 제일 싫었던 훈련이 뭐냐고 좀 물어봐줘. 엑소슈트 기동 훈련? 3차원 가속력 적응 훈련? 진공공간 무산소 도약 훈련? 다 아니여! 나는 행군이 존나게 싫었어! 행구우운!
 씨발. 지구의 원시시대나 로켓제너레이션의 마지막인 지금이나 똑같은 게 하나 있다면 보병은 존나게 걸어야 한다는 거야. 화성이든 목성이든 보병이 깃발을 꽂아야 전쟁이 끝나거든.
 전쟁이 그냥 깃발 먹기냐고? 멍충하긴. 궤도폭격으로 싸발르고 그 땅을 그냥 내버려둘 거야? 경찰들이 치안을 회복하기 전까진 군대가 진주해서 무력으로 치안을 유지해야 하잖아. 그래서 보병은 이렇게 좆뱅이 치면서 걷는 거지······. 아아. 존나게 무겁다.
 내 옆에는 엘프 아가씨가 속도 모르면서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그래 아가씨는 아무것도 안 들었으니 노래가 나오지.
 신발은 뭐 이리 불편한 거야? 쿠션? 좆 까라 그래. 그냥 가죽에 나무판을 붙인 부츠야. 냄새는 지독하고 내 발엔 벌써 물집이 잡혔을 거야. 원시인들이란······.
 “힘드신가요?”
 “아니.”
 “에이, 힘드신 것 같은데?”
 이 아가씨. 귀엽게 보인다는 거 취소. 사람이 땀 뻘뻘 흘리면서 걷고 있으면 쫌 알아 처먹어라.
 그녀는 빙긋 웃더니 손을 들고 뭔가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어? 가볍다? 어?
 “설마 바······반중력?”
 “중력이요?”
 반중력. 무한동력과 함께 과학자들의 가심에 불을 싸지르는 주제. 우리 시대의 기술로도 아직 반물질이나 반중력의 개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뭐냐 이건. 근데 궁댕이에서 시원한 뭔가가 느껴졌다. 으아아아악! 뭐여 시발! 깜짝 놀랬잖아!
 “정령들이에요. 바람의 정령들더러 기사님을 약간 도우라고 했지요.”
 “······.”
 씨발, 납득해야 하는 거냐? 근데 씨발, 납득이 가는 걸 어떡하지? 내 궁댕이 주변에서는 옷을 홀딱 벗은 라피르 같은 애들이 끙차끙차 하면서 내 짐을 떠받치고 있다. 그래 스피리츠. 아니 그 위스키 스피리츠 말고 진짜 정령. 스피리츠.
 난 씨발, 지금까지 영매들이 죽은 사람을 불러왔다는 둥 개소리하는 걸 제일 싫어했거든. 근데 막상 정령이라는 걸 내 눈으로 보고 나니까 더 할 말도 없다. 으으, 이제 유령의 존재나 사후세계까지 인정해야 하나?
 “라피르. 근데 이 정령들은 뭐야?”
 “후후. 모든 것들에는 정령들이 깃들어 있어요. 땅. 물. 바람. 불. 이렇게 네 종류의 정령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지요.”
 “······.”
 아아. 머나먼 지구시대의 철학자가 그렇게 말했다. 모든 세계는 땅, 물, 바람, 불의 4원소로 이뤄져 있다고. 근데 말이어요. 우리는 원소가 뭐야, 빛보다 빠른 원소 ‘타키온’까지 발견하려고 하거든······.
 하지만 내 짐을 실제로 떠받치고 있는 바람의 정령들을 보니, 으으. 반론조차 제기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사제단이 이 정령들을 본다면 아마 저를 마녀로 몰아서 죽여 버리겠지요.”
 라피르는 굉장히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마 그녀의 동료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죽었겠지. 미친 세계다.
 “후후. 기사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것도 아마 저 언덕까지일 거예요.”
 “검문소로군······.”
 그동안은 개울이나 숲의 샛길로 피해 다녔지만 이 근처의 모든 길은 그때 말한 시가지를 지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아무래도 여관에서 쉬다가 가야겠군. 씨발. 진짜로 쉬는 거야. 설마 내가 ‘라피르 피곤하지? 잠깐 모텔에서 쉬다 갈까?’ 이러겠냐. 정말로 쉬는 거다. 발바닥이 말이 아니거든. 으으으으으. 쓰라려.
 라피르와 이 세계를 걸어오면서 이 세계의 도시는 어떨까 많은 상상을 했다. 막 도시가 하늘에 떠있다거나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가 있는 몽환적인 광경을 상상했지만 이건 나쁜 의미로 예상을 뛰어넘었다.
 “으으. 냄새. 진흙탕······ 이게 길이라고? 차라리 산길이 낫겠다.”
 “예······ 사제단은 길에 깐 편편한 돌들을 전부 교회에 가져다 썼어요······.”
 나는 왜 이 차림에 망토가 필요하나 했다. 씨브랄! 마차새끼들 앞 똑바로 안 보냐! 푸대댁 하는 진흙이 망토에 엉겨 붙으면서 냄새가 지독하게 피어올랐다. 망토를 안 입었다면 옷에 아주 똥칠을 했겠군.
 옆에는 말인지 뭔지 괴상한 동물이 제멋대로 똥을 싸갈기고 있고. 그 위에는 목 매달린 시체들이 바람에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다. 우욱. 토 쏠려. 인테리어치고는 굉장한 악취미잖아. 그렇게 우리 둘은 거대한 성벽의 문 앞에 다다랐다.
 지금까지의 검문소는 경비 수준이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에 광학미채복을 입고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이 도시의 검문소는 본격적이라는 기분이다. 아무리 투명인간이 되도 저 쇠 철창을 뚫고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딱히 다른 방법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뭐 라피르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믿어봐야지.
 “뭐래는겨······.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기사······ 진짜 기사다. 멧돼지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녀석이 서류와 우리 둘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다.
 문서는 틀림없을 거다. 3차원 스캐너를 우습게보지 말라구, 원시인.
 프로페서가 라피르의 지시에 따라 정교하게 위조해준 문서를 보고 놈은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놈은 또 라피르와 뭐라뭐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뭐 말을 알아먹을 수 있어야지?
 연방 공용어를 쓰는 라피르와 달리 이놈들은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로 이야기했다. 새삼 라피르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제프가 그녀를 데리고 가라기에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데도 꽤 많은 난관을 거쳤을 것이다.
 “어이, 라피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게······.”
 그녀는 다시 내 팔짱을 끼면서 생긋 웃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 각도에서는 가슴골이 그냥 직각으로 내려다보인다. 꿀꺽.
 “문서상으론 우린 부부에요. 출산을 위해 알프하임으로 올라간다고 적혀있어요. 그리고 이 곳 교회에 참배를 드리고 간다고 적혀 있지요. 좋은 아이를 낳기를. 헤헤헤.”
 뿜을 뻔했다. 어떤 머저리 새끼가 생각해낸 변명거리야?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이것보다 더 적절한 변명거리도 없다. 이상하다고? 씨발, 좀 머리들을 굴리라고. 현대인이 아니라 여행도 자유롭지 않은 이 미친 세계에서 벌건 대낮에 요런 반반한 처자랑 다니는 걸 뭘로 설명하게?
 ‘우리는 친한 친구사이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연애감정은 없습니다.’
 요런 변명 따위는 저 깐깐한 산적 새끼들에겐 씨도 안 먹힐 변명이겠지. 아무튼 산적 새끼는 아직도 존나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우리에게 지나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르르릉 하면서 한 5층 빌딩 높이의 쇠창살이 위로 들리고 우리는 그 밑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지나갔다.
 
 
 7)
 
 
 휴, 첫 관문은 무사히 지나가는군. 솔직히 나는 여기서 칼부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다.
 “맥빠지는구만.”
 “예? 기사님 왜요?”
 “난 또 시발, 싸움이 벌어질 줄 알고 이렇게 총을 겨누고 있었거든.”
 나는 슬쩍 레이저 커터 권총을 흉갑의 틈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바라보면서 원을 잠입 안 시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내 차림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고 있었고, 그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동양인’스러워 보이는 얼굴은 없었다. 게다가 놈의 잘생긴 얼굴은 주변의 이목을 끌겠지.
 아오, 시발. 이상한데서 패배감을 느끼누만? 하긴 내 낯짝은 잘생겼다기보다는 그냥 남자답게 생긴 축이지.
 “어이. 라피르 이제 팔짱 풀어도 되지 않아?”
 “헤헤. 잠시만요.”
 그러든지. 나야 좋지. 팔뚝으로 느껴지는 말캉말캉한 가슴살과 그녀의 체취가 좋다. 이 악취에다 더럽기 짝이 없는 길바닥을 걷고 있는데 이런 호사 정도는 누려야지.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테트라 그램마톤(그리스어로 ‘네 글자’)의 성전으로······. 여행 증명서에 써진 대로라면 우리는 거기에 경배를 드리러 가야 하니까요.”
 라피르의 표정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뭐여? 테트라 그램마톤? 씨발. 뭔 컴퓨터 부품 같은 이름이래냐? 아니면 애들 보는 만화의 필살기 이름 같잖아? 받아라, 테트라 그램마톤! 크크크.
 “테트라······는 분명 라틴어인지 뭔지로 4였지.”
 “예. 그 뜻은 성스러운 네 글자를 이르는 이름이에요.”
 “그게 뭔데?”
 “마······말할 수 없어요.”
 “엥? 말할 수 없다니?”
 “그게 ‘사제단’이 믿는 신의 이름이에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이에요.”
 “미쳤군. 이 세계는 확실히 미쳐있어.”
 나는 라피르의 마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 세계에서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이다. 그러한 마법들을 잘만 사용한다면 이 세계는 이 모양이 이 꼴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 세계는 조화와 균형은커녕 광기에 쩔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옛날 중세 암흑시대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나는 암흑시대의 외계 행성을 걷고 있다. 질퍽질퍽한 똥진흙이 이 세계가 얼마나 시궁창인지 잘 드러내는 것 같았다.
 “여기다 신발을······. 닦으세요.”
 “흥. 성전 안은 깨끗하다 이런 건가? 정말 웃기시고 앉아있군.”
 라피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신발을 닦는 샘물에 신발을 씻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진흙길과는 달리 테트라교(편의상 이렇게 부르자)의 교회인지 나발인지는 정갈하고 깨끗했다.
 여관보다 여기서 자는 게 났겄는데? 뭔가 장치가 있는지 악취도 나지 않고 상쾌한 향기뿐이다. 킁킁킁. 그녀가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아오, 귀여운 것. 아······. 내가 뭐래냐. 아무튼 그녀는 베일인지 뭔지를 두르고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오오. 춰여 워리가 쒁어짐으로 인하여 쉐상이 썩고 있슙퀴타! 유리의 최약을 용셔하시욥쇼서!”
 “요오! 유리는! 유리를 감찰하시는 쥬시여어어!”
 ······라피르의 말로는 내가 쓰는 말은 사제들과 고위 엘프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고대어라고 했다. 뭐 지구시대로 치면 라틴어 정도 되는 말이겠지. 처음엔 개소린 줄 알았는데 진짜로 우리 공용어를 저런 식으로 말하는 놈들을 보게 되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군.
 “유리의 최약을 유리의 머리의 톨리지 뫄쉬욥쇼서!”
 앞에서 소리를 내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근데 하나같이 세상이 부패했음을 회개하는 말들이었다. 아오. 여보셔들. 진짜로 땅바닥이 드럽잖아. 그딴 기도할 시간 있으면 밖에서 환경미화작업이나 하셔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행이지. 저 제단인지 뭔지가 있는 안쪽은 아주 난리다. 채찍으로 자기 몸을 후려치면서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도 있고,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괴성을 내지르는 사람도 있다.
 사교(邪敎). 사이비? 글쎄······ 진짜로 중립자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놈들이 사이비에다 사교고, 오히려 라피르가 믿는다는 오뎅인지 뭔지 하는 북유럽신화의 신들이 더 나아 보이는 군.
 아무튼 라피르는 내 손을 잡아끌어서 나를 의자에 앉게 했다. 씨발······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내가 과자 부스러기 얻어먹을라고 주일학교나 성당에서 배운 가락은 있거든. 뭐 이쪽의 신이 그 유대교의 야훼일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지구에 잘 계시는 야훼 씨 미안. 기도 형식 좀 빌릴게.
 “오, 주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시여. 치즈버거와 프렌치프라이에 강림하사 우리를 살찌우는 주시여. 밀크셰이크의 축복을 내리시고 부디 02번 실린더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시옵고, 프링글스 깡통에도 임재하사 치즈 맛을 열어주시옵소서. 아. 스마일은 주문 외에 추가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따란딴딴딴!”
 나는 오래된 맥도날드의 로고송까지 따라하면서 진지하게 간구했다. 알 게 뭐야. 라피르 만큼 말이 통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게 뭐야? 여기에 설마 맥도날드 지점이 있어서. ‘손님 뒈지실래요? 테이크아웃은 손님의 모가지와 손모가지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지랄할 것도 아닐 테고.
 아마 라피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재까닥 저들의 신을 조롱하는 줄 뉘앙스로 알아채고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흐흐. 존 윌리엄스. 나도 생각해보면 미친놈이라니까? 이 미친 광신도의 소굴에서 시비를 톡톡 까다니. 아 그나저나 치즈버거가 먹고 싶어지는군.
 “라피르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예. 슬슬 일어서지요.”
 다시 라피르는 내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서 유창한 행성연방 공용어로 말을 걸었다.
 “코여를 뫌활 쥴 와시는가?”
 “······.”
 고어를 말할 줄 아시는가? 이거겠지? 뜨끔. 괜히 지랄까지 않는 건데.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라피르의 얼굴만 쳐다봤다. 다행히도 그 녀석은 그렇게 말만 걸었을 뿐 라피르에게 이쪽 세계의 말로 나불나불 뭔가를 말했다.
 라피르는 나를 쳐다보면서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히 갑옷을 입은 녀석들이 칼에 손을 올렸다. 척하면 탁이지 일이 꼬였군.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기사님. 달려욧!”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칼을 든 녀석들을 무너뜨리고 도망칠 길을 열어주었다. 놈들은 당황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면서 동료들을 부르고 있었다. 씨발 어째 들어올 때 무사히 넘어갔다 싶었다.
 “라피르! 눈 감앗!”
 “예?”
 “아오, 이 멍충이! 바니테일! 길안내를 부탁한다!”
 [예. 주인님!]
 나는 프로페서가 준 여분의 섬광탄을 퍽하고 터뜨렸다. 헤드모듈이 없는 보병이라면 10분이나 지속되는 지속적인 섬광에 눈이 멀 수도 있었다. 나는 잽싸게 간이 모듈 안경을 끼고 바니테일이 이끄는 대로 라피르를 들쳐 업고 달렸다.
 [왼쪽. 다시 오른쪽! 심장박동이 없는 곳입니다!]
 “오케이. 이게 무슨 개 난리냐? 오늘은 그냥 발 뻗고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헉헉헉. 씨발 담배중화제가 어딨더라? 요 며칠 새 담배를 존나게 피웠더니 니코틴과 타르액이 폐에 질질 흐르는 기분이다. 헉헉헉.
 “바니테일 추적자들은?”
 [아마 그 괴상한 건물에서 뻗어버렸을걸요?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휴······ 씨발 널 데려오길 잘했군.”
 [엣헴. 주인님은 저 없이 곰방 죽어버릴걸요?]
 “좆 까, 새끼야. 아무튼 라피르 괜찮아? 바부얏. 눈을 감으라고 했잖아?”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좋댄다. 나는 바니테일에 달린 간이 스캐너로 그녀의 눈을 살폈다.
 아, 뭐 이래 예쁘냐? 그녀는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다시 내 볼에 키스를 했다. 씨벌 뭐여? 뭔 의미여 이건?
 “흠흠. 눈은 이상 없는 것 같군.”
 “고마워요. 기사님.”
 “그런데 아까 그놈들은 뭐야?”
 “이미 성벽에서부터 쫓아왔어요. 기사님이 미드가르드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의심했겠지요.”
 역시나.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싶었다. 내가 그 미친놈들이라도 미행을 붙였을 것이다. 이쪽 세계의 말을 배우지 않고는 일이 제대로 안 되겠군.
 “그리고 또 뭔가를 물어봤잖아. 그건 뭐야?”
 “예······ 그건. 고어를 말하는 사람을 심문하는데 도와주겠냐는 거였습니다.”
 고어. 고어를 말하는 자. 아까 예배당에서 본 것대로라면 고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말하는 자는 드물었다. 고어는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시대 로켓제너레이션의 사람들이 쓰는 행성연방 공용어고.
 나는 이 기묘한 우연의 일치를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섬뜩해졌다.
 “심문 대상은?”
 “그게······. 갑자기 기사님이 그 밝은 빛을 던지셔서······.”
 고어를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 없다. 또한 라피르의 그 동맹군인가 뭔가였다면 심문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저렇게 목을 매달면 그만이었다.
 “놈들이 심문하려던 대상은 행드맨이로군.”
 “해······행드맨이요? 교······교수형 당한 사람이요?”
 라피르와 나는 동시에 성문에서 을씨년스럽게 흔들리는 교수형당한 시체를 바라봤다.
 물론 저걸 말하는 게 아니다. 행드맨은 강하엽병의 별명이었다. 실린더가 아닌 개별강하를 강하엽병 하나가 이 미친 광신도의 도시로 떨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리브 노 맨 비하인드(Leave no man behind-강하엽병의 구호).”
 “예? 그게 무슨······.”
 “강하엽병 놈들의 신념이지. 씨부랄. 어이, 라피르. 잠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아마 그냥 지나쳤다간 제프나 행드맨 새끼들이 날 가만 안 둘 것 같거든.”
 ***
 스트리트 파이팅 맨.
 술맛은 기가 막히군. 솔직히 광신도들이 지배하는 도시라길래 술 따위는 먹을 수 없을 줄 알았었는데 뜻밖의 횡재를 했다. 포도향 비슷한 게 목구멍에서 어른거리다 톡 쏘고 넘어갔다. 엘프 아가씨도 풍덩한 후드를 쓰고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당장이라도 쫓아올 줄 알았는데.”
 “지명수배야 됐겠지요. 이 도시는 깐깐한 검문과 달리 뜨내기들이 많으니 우리를 잡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또 반대로 저 성벽을 넘을 수 없는 우리는 독 안에 갇힌 쥐 신세니까요······.”
 라피르는 얼굴에 검댕칠을 했고 나도 얼굴을 부랑자처럼 꾸몄다. 입고 있는 옷도 이쪽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것이고 아주 자세히 봐도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술꾼들과 잘 구별할 수 없을 터다. 휴우. 이 씨발스런 옷에 감사를 해야 한다니······.
 “근데 이 술집은 뭐야?”
 “동맹의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흐응, 그런 거군. 여관방을 잡지도 않고 이쪽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소득은 있겠어?”
 “글쎄요······.”
 라피르는 입구 쪽을 쳐다보면서 술잔을 거꾸로 놓았다.
 그녀는 굉장히 긴장한 투였다. 만난 지는 채 일주일도 안 지났지만 씨발. 이상하게 라피르의 행동 하나하나에 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긴장하고 있다. 왜?
 “흥. 교회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셨더군? 와아, 그래놓고 이런데서 술을 마시는 거야? 배짱한번 끝내주네.”
 요염한 목소리다. 누군지 제대로 우리들의 말을 발음했다. 어느새 앞을 바라보니 웬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라피르는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엎어 놓았던 술잔을 다시 원래대로해서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당신 이 말을 할 줄 아는 거야?”
 “흥! 당연하지 마법사니까.”
 “마법사?”
 “아니. 고어로는 마녀나 무당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려나?”
 “······.”
 그래 씨발, 엘프가 튀어나왔으니 마녀가 튀어나온들 대수랴.
 이 마녀인지 마법사인지는 고혹적인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섹시하다. 라피르가 청순하면서도 맹한 매력이 있다면 이 여자는 딱 부러지면서 남자를 아주 잡아먹을 스타일이다.
 이 대목에서 인간 여자를 생각했다면 꿈 깨라고. 저 여자의 머리에는 두개의 뿔이 솟아나와 있고 피부도 푸른색이야. 당연한 소리지만 딱 봐도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야.
 “흥. 당신이 소문의 별의 기사겠군.”
 “호오. 나를 알고 있나?”
 “알로이 언덕(01번 실린더가 있는 곳)의 싸움은 이미 소문이 좍 퍼졌지. 당신 화염의 왕 알버레이크를 죽였다면서?”
 “왕? 그게? 별로 왕 같이는 보이지 않았는데?”
 “후후, 겸손하기도 하셔라.”
 이 별의 여자들은 다 이런대냐? 왜 다 하나같이 왕가슴에 가슴골을 나한테 못 보여줘서 안달이래? 나는 그녀의 탐스러운 가슴골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푸르스름한 살결 때문에 가슴골이 더 탱탱해 보였다.
 “별의 기사님. 마녀의 속살을 훔쳐보는 건 테트라교의 교리로서는 굉장한 중죄라구······.”
 “흐응. 그런 게 죄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거기다 얼굴을 묻어보고 싶구만.”
 “푸하하하하. 고어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당신 진짜 별에서 내려왔군.”
 “별? 별이 아니라 우주선에서 내려왔는데?”
 “헤에. 워츄숸?”
 그녀는 굉장히 이상한 발음으로 우주선을 발음했다. 희한하군. 지금까지는 거의 네이티브 수준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튼 별의 기사님. 당신이랑 노닥거리는 것도 좋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좋아. 나도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거든. 용건만 간단히 존나 좋지.”
 마녀는 다시 흐드러지게 웃었다. 라피르와는 완전히 다른 색기가 줄줄 흘렀다.
 “우리 동료가 사제단에 잡혔어. 도와줘.”
 “글쎄. 왜 내가 도와줘야 하지? 지금 내 코도 석 자라고.”
 “으잉?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코가 어쨌다고?”
 씨발, 말이 잘 연결되려다가 희한한데서 막힌다. 아무래도 내가 쓰고 있는 행성연방공용어에 없는 단어나 관용구가 나오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휴우. 이쪽도 힘들어 죽겠다구.”
 “아, 그런 이야기였나? 미안. 내 고어 실력은 그쪽 엘프 처자랑은 달리 약간 미숙하다구.”
 “밑도 끝도 없이 동료가 잡혔다니 뭔 소리야?”
 “우리 극동마법결사는 알프하임의 엘프 아가씨와는 동맹이지. 우리 마법사들 중 하나가 마법을 쓰다가 들켜버렸어.”
 동맹. 아 술잔을 뒤집어놓은 게 그런 의미였나?
 “일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기 전에 이름이나 가르쳐 줘보시지?”
 “호오. 여자친구를 옆에 두고 날 꼬셔보시겠다?”
 “흥. 여자친구도 뭐도 아니야.”
 나는 살짝 라피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별 반응 없이 술을 홀짝거렸다. 음, 당연하지. 그녀와 나는 아무사이도 아닌 걸······.
 “호오라. 그러면 나랑 밤을 같이 보낼 수도 있겠네.”
 나는 술을 뿜어버렸다. 이런 당돌한 여자를 봤나? 오는 여자 안 마다하고 섹스라면 환장하는 나지만 이 여자는 위험한 분위기가 풀풀 흘렀다.
 “내 이름은 로베리타. 당신 이름은?”
 “존 윌리엄스.”
 “존. 평범한 이름이네? 좋아. 아무튼 도와줘. 별의 기사 당신의 힘이라면 동료들을 구해낼 수 있을 거야.”
 라피르는 잠자코 술을 홀짝이면서 여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도와달라고 한들, 난들 무슨 힘이 있으랴. 용을 죽인 중장기병의 엑소슈트는 01번 실린더에 얌전히 모셔져 있다. 별의 기사고 나발이고 칼에 찔리거나 모가지가 떨어지면 뒈지는 것은 매일반이다.
 “미안하지만······.”
 “정보는 더 있어. 내 동료들이 갇힌 감옥에는 천공에서 내려온 ‘천사’가 갇혀있다고 해.”
 나는 또 술을 뿜었다. 천사랜다. 우리 강하엽병 아자씨들 많이 출세하셨구만. 아무리 생각해도 야시시한 옷을 입은 천사 양반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강하엽병과는 억만 광년의 차이가 있을 텐데?
 “흐음. 동료가 붙잡혀 있는 것 같다 이거군.”
 “흥. 당신이라면 잘 알아들을 줄 알았어. 그 외에도 우리 결사로 들어온 정보가 있다면 더 말해줄 수도 있어.”
 “뭐야. 엘프들과는 동맹이라면서?”
 “동맹은 동맹이지만 다 입장 차이가 있지. 안 그래? 알프하임의 아가씨?”
 “······.”
 “저 치들은 사제단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귀족으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지.”
 그런 거냐? 사제단이나 용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케케묵은 감정은 해소 못했다는 거겠지.
 “좋아. 정보가 더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 극동 어쩌고에서 우리가 잘 곳을 알아봐줄 수 있나? 오늘 꽤 걸었더니 피곤해 죽겠어. 이후의 일을 의논해봤자 지금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아.”
 “그럼 거래가 된 거로군. 좋아. 따라와.”
 
 
 8)
 
 
 우리는 술집을 나가서 골목을 돌았다. 이 도시는 겉보기에는 별로 안 커보였지만 안에서 보니 굉장히 골목도 많고 숨을 곳도 많았다. 만약 함대에 있는 추적기 따위가 있다면 금방 잡히겠지만 여긴 원시적인 행성이었다.
 골목길을 굽이돌아 우리들은 허름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방은 하나뿐이야. 알아서 잘들 해보라고.”
 “에엑? 뭐야.”
 “뭐라니. 발정기를 앞둔 엘프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바······발정기? 그게 뭔데?”
 “엘프 처자한테 물어봐. 그럼 난 이만.”
 로베리타는 문을 탕 닫고 나가 버렸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스륵. 가림막안에서는 라피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긴장되는구만. 첫 경험 때가 떠오르는데?
 “기······기사님······ 쳐······쳐다보지 마세요······.”
 “알았어.”
 에이, 씨바. 어색해서 못 견디겠다. 나가자. 밖에는 도박 같은 거 하고 있더군. 어떻게든 끼어서 있다가 자빠져 자지 뭐. 어?
 “저······. 잠들 때까지만 계셔 주시겠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악몽을 많이 꿔서 무섭거든요.”
 씨발. 잠옷이다. 하늘하늘한 디자인의 잠옷을 걸치고 그녀가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헤헤. 기사님······.”
 그녀는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씨바. 유혹하는 거냐? 그런 거냐? 여기서 가만있으면 남자도 아니다.
 내 입술이 라피르의 보드라운 살결에 닿았다. 쪽. 무슨 입술이 이렇게 향기롭단 말인가? 내 혀가 그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밀쳤다. 뭐야? 사람 놀리는 건가?
 “아직······ 저도 하고 싶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준비?”
 “후후. 비.밀.이에요.”
 거참 비밀도 존나게 많은 처자로군. 아무튼 그녀는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도롱도롱 잠에 빠져 들었다.
 이 맹추 아가씨는 대체 뭐야? 뭐냐구? 정작 잠이 들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구. 쳇. 무방비······ 이래서야 덮치고 싶은 기분도 쑥 사라진다.
 “바니테일. 도시를 스캔했냐?”
 [아하. 좋은 장면일 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닥쳐 짜샤. 창가에서 이 도시를 스캔할 수 있겠냐?”
 [지금 제 통신모듈에 연결된 레이더로는 제한적입니다. 픽시를 이용해 주십시오.]
 아, 맞다. 픽시가 있었지. 나는 프로페서가 챙겨준 픽시모듈을 흉갑에서 꺼냈다.
 픽시. 대인정보위성. 원래는 시가전 따위의 보병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위성이었다. 크기는 엄지손톱 크기만 하고 그야말로 전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장비였다. 뭐 엑소슈트에는 기본으로 장비가 되어 있지만······.
 “바니테일. 픽시를 띄운다. 네가 조종해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커튼사이로 창문을 달칵 열고 픽시를 띄웠다.
 픽시의 사정거리는 대략 반경 1킬로미터 즈음? 일단 높이 띄우는 게 좋겠군. 간이안경과 연결된 픽시가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치 풍선을 타고 오르는 묘한 부유감을 맛봤다.
 [위협 표적을 갱신합니다.]
 “오케이. 그 외에도 망루의 숫자와 길을 잘 찍어놔.”
 [후후. 주인님도 노파심이 너무 많다니까요? 아마 결혼하시면 아내분이 괴로울 것 같습니다.]
 “시꾸랏. 바니테일 너는 꼭 한마디가 많아. 한마디가.”
 말은 그렇게 해도 녀석은 칼이나 활을 든 놈들을 일일이 체크해 주었다.
 이 도시의 면적은 30여 킬로미터. 원시시대 도시 치고는 꽤 큰 편이다. 인구는 대략······ 집의 숫자로 따져보면 1만에서 2만 정도? 아마도 농업이 주요 산업 기반일 테고 그런 것치고는 인구가 꽤 많은 편이다.
 “물레방앗간? 길드······. 그렇군. 저긴 가내수공업의 거리쯤 되겠군.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있으려나?”
 “흐흐흐. 주인님 문화인류학자가 다 되셨군요?”
 “그냥 호기심이야.”
 어찌 보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지구시절의 중세에 날아온 것 같은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면이 지구와 비슷하지만 또 지구와 똑같지는 않다.
 사람들만 해도 마지막 인간들은 몇백 년 전에 전멸 당했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동물의 귀가 달렸거나 엘프처럼 귀가 뾰족하거나 했다. 나도 모자로 귀를 가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까 검문소에서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면 대번에 사단이 났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픽시로 이곳저곳 사진을 찍다가 한곳을 크게 확대했다. 건물외벽이 두부 썰리듯 잘린 현상.
 [주인님. 이 건물이 이상합니다.]
 “레이저 커터로 잘린 자국이다. 우리 예상이 맞았어. 분명히 강하엽병 한 명 이상이 여기에 붙잡혀 있다.”
 [음······ 주인님의 다음 분부는 어디에 붙잡혀 있냐고 물으시겠군요?]
 “흐흐. 바니테일 너는 너무 똑똑하단 말이지?”
 녀석은 대꾸도 하지 않고 의심되는 지점을 삑삑삑 찍어 주었다. 건물 중에 하나는 아까 우리가 생난리를 친 교회당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들은 무슨 관공서 건물처럼 보였다.
 “저기를 찍은 이유는?”
 [밤인데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동하고 있는 사람의 숫자도 많습니다.]
 “하긴 동사무소라면 밤에 경비를 설 일이 없을 테니까. 아, 바니테일 교회는 빼. 저기는 아까 우리가 설치고 난 후라 그런 것뿐이야. 아마도.”
 삑삑 교회건물의 테두리가 사라지고 건물이 네 개로 좁혀졌다. 두 개는 성벽의 외곽에 있는 건물이고 나머지 두개는 중심부였다.
 “노른자는 중심부에 있는 두 건물이야. 외곽에 있는 건 아마도 경비 병력의 숙영지나 뭐 그런 거겠지.”
 [과연 그렇군요. 빼겠습니다.]
 “후우. 픽시를 귀환시켜. 대략의 정보는 알 것 같다. 길은 다 저장했겠지?”
 [물론입니다. 이런 원시적인 도시의 구조 따위는 제게 너무 간단합니다.]
 “아오, 짜샤. 자만하지 마라.”
 [만날 쓸 만하다고 했으면서. 흑흑. 나쁜 남자입니다. 주인님은.]
 나는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쇄키는 하여튼 나랑 이야기하면서 넉살만 존나게 늘었다. 누가 이 녀석을 엑소슈트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 여길까?
 “골목길이라. 어디 한번 또 야바위를 털어보실까?”
 “아······ 또 ‘그거’군요. 여우사냥.”
 무기는 레이저 커터, 증기 기관권총, 스마트 자동소총 한정. 인원은 굉장히 제한적이지만 한번 해볼 만한 것 같았다.
 여우 사냥은 화성시가전에서 내 부하들과 함께 실컷 써먹은 작전이었다. 방법은 이렇다.
 먼저 여우를 끌어낼 미끼가 될 녀석이 적진에 돌진한다. 적의 주력을 꾀어내서는 T자형의 골목에 숨어있는 아군 진지에 끌어들인다. 그러면 골목에서 대기타던 아이들이 맛있게 잡숫는 거지. 그리고 그중에 또 한 놈이 미끼가 되어 적을 교란하고 그 사이에 중화기조가 위치를 바꾸어서 함정을 판다.
 문제는 이번에는 엑소슈트가 없기 때문에 존나게 달려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야바위 전법에는 어느 정도의 인력이 필요했다. 그 마법결사가 도와줄려나? 그 쪽도 자신의 동료들이 잡혀있다고 하니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좋아.
 “뭘 혼자서 쭝얼쭝얼거려?”
 “뭐······ 뭐야. 엿들은 거냐?”
 “아니, 엿듣고 자시고 이쪽은 한판 거나한 섹스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엘프들의 교성은 술안주로 그만이니까.”
 로베리타였다. 그녀는 푸르스름한 피부를 빛내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아차. 통신기를 끄는 것을 잊었다.
 “그게 별들의 마법인가?”
 “마법?”
 “응. 마법. 제법 신기하잖아?”
 씨발, 마법 같은 소리 한다. 오히려 진짜 마법은 라피르가 보여준 치료술 아니던가? 그리고 이 여자는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했으면서 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디 줘봐.”
 “······.”
 “괜찮아 부수지는 않아.”
 그녀는 픽시가 찍은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마 라피르가 내 다리를 고쳐줬을 때 내 표정이 저거였을 거다.
 “이게 대체······. 그······그린 거야?”
 “아니 사진으로 찍은 거다.”
 “솨······솨췬? 그게 뭔데.”
 뭔가 대화가 이어질만하면 어이없이 끊어져 버렸다. 나는 3차원 디스플레이를 클릭해서 그녀의 얼빠진 얼굴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재생.
 “으······으아아아앗! 거······ 거울인가? 아······ 아니잖아! 내······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어!”
 그 순간 라피르가 몸을 뒤척였다. 꼴깍. 그녀의 야시시한 다리가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제기랄.
 로베리타라는 여자는 그런 나를 보고 씨익 웃는 게 아닌가?
 “알프하임의 아가씨는 자게 내버려두고 어때? 한잔하지 않겠어? 이 신기한 물건에 대한 설명도 듣고.”
 “좋지. 좋은 술이 있다면.”
 ······인생 뭐있냐? 추파를 던지는 여자와 남자가 ‘아, 우리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그러면 ‘어머 그럼요. 우리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요.’ 하고 아름답게 놀까?
 나는 이미 그녀의 윗도리를 벗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콘솔의 사용법과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손이 부딪치고······. 결국 이 지경이 되는 것이다.
 휴우. 이 여자의 종족은 ‘마족’이라고 했다.
 마족(魔族). 아닌 게 아니라 푸르스름한 피부나 이마의 도톰한 뿔 혹은 뱀처럼 갈라진 혀가 자연스럽게 악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여기도 지구와 비슷한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걸까? 아무튼 이 종족에 붙은 이름은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명칭이었다.
 “혀가······.”
 “후후······ 마족의 혀는 지옥으로 이끄는 달콤한 꿀이라고들 하지.”
 “동감해. 정말 입 안에서 기묘한 느낌이라구.”
 다시 쑤욱. 혀가 들어와서 안쪽을 휘저어 놓았다. 갈라진 혀가 제각각 내 혀를 민감하게 자극하고 뭔지 모를 묘한 향기로 코를 간지럽혔다.
 “그런데 아까······ 말을 가르쳐달라고 할 때 알프하임의 아가씨가 왜 얼굴을 붉혔는 줄 알아?”
 “엉? 그랬었나?”
 “후후. 미드가르드의 말을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방법은?”
 “몸을 섞으면서 공명(共鳴)하는 거야. 당신은 아까 엘프에게 하자고 대놓고 말한 거라고.”
 아마 술을 머금고 있다면 나는 또 뿜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미드가르드의 말로 말했다. 어? 이것도 설마 마법인가? 귀가 윙윙거리면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아주 좋아! 기적의 언어학습법이로구만! 혹시나 지구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나 이 방법을 배워서 떼부자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눈.”
 그녀의 눈동자는 고양이와 비슷했다. 지금은 동그랗고 호박색인 것이 아름다웠지만 불빛아래에서는 가늘게 변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마족 여자는 나를 부드럽게 리드하고 있었다.
 “이건 자······. 이쪽의 말로는 이렇게 불러. 호호 귀엽게 생겼네?”
 “무시하지 말라고. 제대로 화를 내기 시작하면 몽둥이가 될지도 몰라.”
 “어디 한번 그 몽둥이로 나를 쓰러뜨려 보시지?”
 “분부대로 하실까?”
 나는 그녀를 콱 끌어안고 침대에 던져 버렸다.
 찌잉찌잉. 연속으로 귀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녀가 말한 공명 현상일까? 이건 그래도 심하군. 다리를 낫게 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하나씩 자신의 몸과 관련된 명사를 말할 때마다 내 귓속으로 그것과 연관된 문장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오! 진짜 기적의 학습법이다! 고대 프랑스어를 이렇게 ‘좋은’ 방법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면 우주군 사관학교에 붙었을지도!
 어느새 나는 더듬더듬 이쪽 세계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마족과 엘프들은 발정기가 따로 있어.”
 “발정기?”
 “그래. 나야 혼혈이라 시도 때도 없이 성욕을 느끼지만 순혈의 엘프나 마족들은 발정기 때 외에는 성욕을 전혀 안 느껴.”
 아하. 어릴 때 동물원에 가서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다. 마침 우리가 견학을 갔을 때 사자 둘이 하고 있었지. 가이드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충대충 설명했었다. 흠흠. 동물은 따로 발정기가 있어서 그때에만 성욕을 느낀답니다.
 “그러면 발정기 때 외에는 임신이 안 되는 거야?”
 “물론. 배란이 아예 안되니까.”
 거참 신기하군. 외계인들의 몸이란. 나야 좋지 뭐.
 잠시 식었던 몸의 대화는 몸이 찰싹 달라붙으면서 다시 활활 타올랐다.
 “자. 이제 마법 ‘슬리핑 딕셔너리(sleeping dictionary)’의 중요한 단계야. 절대로 혼자서 가 버리지 마.”
 “슬리핑 딕셔너리? 마법?”
 “그럼 뭔 줄 알았어? 그냥 그거인 줄 알았어?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당신 제법 귀엽다구.”
 “씨발······ 내 스무 살이 넘은 이후로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다시 그녀는 깔깔대면서 내 귓가에 뭔가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나는 쾌감의 파도 때문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대충 말이여 전해져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미드가르드어가 뒤섞여서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이제······ 말해봐······ “
 “으으윽. 기분 좋아. 로베리타! 으윽!”
 “하아아? 아······아니 그것 말고. 으으응!”
 “아니 시벌 뭔 말을 하라는 거여?”
 “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크하하하하!”
 아니 이 외계의 행성에서 웬 데카르트의 명언이란 말이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에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지구시대 철학자가 떠올라서 나는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게 무슨······.
 “빠······빨리······ 그게 ‘시동어(始動語)’란 말이야.”
 “아오, 알았어. 알았으니까 고만 꼬집어. 좋아. 말하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다시 한 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쩌엉. 나는 세계가 붕괴되는 감각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로베리타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 귓가에 쉴 새 없이 뭔가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분명 미드가르드어였다. 세상에나.
 “성공이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내······ 내가 지금 이곳의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녀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내 볼을 할짝였다. 진짜로 고양이 같군.
 생각해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4일간이었다. 순양함에서 강하하여 이름 모를 이계의 도시까지. 그리고 나는 이종족의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목에 걸려있는 인식표 다발이 내 정신을 다시 되돌렸다.
 “그 목걸이는 뭐야?”
 “인식표. 부하들의 것이야.”
 “인식표? 그게 뭔데?”
 “설명하려면 길어질 거야.”
 
 
 9)
 
 
 내가 깨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였다. 아니 말이 중천이지 물층으로 비치는 해는 도대체 어디 떠있는지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킁킁. 좋은 향기. 여기는 어디지? 아, 맞다. 어제 그 마녀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날 꼬셔서······.
 “어이, 별의 기사. 일어났어? 하하. 내 냄새를 맡는 거야? 당신 변태야?”
 “아······. 아니 오해야. 오해라고.”
 “흐응. 아무튼 이쪽 말은 이제 능숙하게 하는 것 같네?”
 “어······ 그렇군.”
 글쎄. 지금 생각은 행성연방 공용어로 하고 있지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전혀 생소한 말의 무더기였다. 그리고 생소한 언어들이 귀로 들어오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간다.
 이게 뭔 소리냐고? 나도 잘 모르겠어. 속성으로 외국어를 배웠을 때의 느낌이려나? 적어도 어제 교회에서 깽판 친 그 일만은 다시 안 벌어지겠지.
 “······.”
 “아. 미안. 알프하임의 아가씨. 좋은 남자라서 먼저 먹어 치워 버렸다. 슬리핑 딕셔너리는 내가 먼저 해버렸어. 이제 말은 자유롭게 통할 거야.”
 “······.”
 라피르는 나를 흘겨보고는 흥 하는 표정으로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성인남녀가 밤을 보내는 게 뭐가 어때서? 아니, 라피르가 무슨 나랑 정혼을 한 약혼자도 아닌데 저 반응은 대체 뭐라냐?
 “휘이. 아가씨가 단단히 화가 나셨네. 자기가 찍은 먹잇감이라 그건가?”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은 옷이나 입으셔. 밑에서 회의를 할 거야.”
 “회의?”
 “흥.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뭔지 알아? 계속 질문만 하는 남자라구.”
 누가 물어봤나? 로베리타는 내 볼을 죽 잡아당기더니 쪽 하고 입 맞추고 계단을 내려갔다 .
 가죽바지를 입은 마족. 저 탱탱한 엉덩이 봐라.
 ***
 “기사님······ 이 세계의 말을 하실 수 있으시군요. 다행입니다.”
 “아 뭐······.”
 밑의 회의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다가 라피르 혹은 로베리타를 쳐다봤다. 아오! 대놓고 말하시지들 그래? 이게 무슨 금기도 아닐 테고. 다들 날 놀려 처먹는 행드맨 새끼들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흠흠. 아무튼 우리 정찰정보를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정찰은 다 끝났어. 어디 잡혀 있는지도 대충 특정했고. 당신들은 그 건물이 뭔지만 말해주면 돼.”
 “예? 그게 무슨······. “
 “이 도시의 지도도 손에 넣었지.”
 사람들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뀌어 날 쳐다봤다.
 “지······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아이들과 상인들의 정보를 토대로.”
 “어제 새벽 1시경의 지도가 있지. 그리고 이건 3차원이라고. 어이, 바니테일.”
 [예. 주인님.]
 사람들은 3차원 입체로 뜬 지도에 뒤로 벌렁 넘어가버렸다. 하긴 이 시대의 기술로는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무리겠지. 원시시대에 라이터를 가져가서 ‘보아라! 내가 불을 소환하겠노라! 나는 불의 신이다!’ 하고 지랄 트는 거랑 똑같은 짓거리다.
 아무튼 나는 어제 픽시가 찍고 바니테일이 분석한 3차원 지도를 이리 저리 돌려보았다. 사람들은 막 고개를 수그리고 오딘인지 오뎅인지 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도 있고 용병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날 노리는 것 같았다.
 무지의 두려움. 에효. 이래서야 앞으로 어쩌겠냐?
 “이건 이렇게 다루면 되는 건가?”
 “응. 손으로 클릭하면 되지.”
 “호오. 쉽네. 쉬워.”
 다시 째릿. 라피르가 나를 쏘아보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로베리타가 이리저리 통신콘솔을 건드리다 어제 찍은 그녀의 동영상이 좍 떠버렸다. 사람들은 다시 호들갑을 떨면서 두려워했다. 아아······ 원시인들이란.
 “흠흠. 바니테일. 다시 지도와 분석으로.”
 [예. 주인님.]
 토끼꼬리를 닮은 동글동글한 바니테일의 아바타가 뜨자 또다시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 거 시끄러운 사람들이구만. 으으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전투브리핑을 할라니 불안하다, 불안해.
 나는 왠지 화성 전쟁에서 별탱이 장군들 앞에서 브리핑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뭐라 그랬더라? ‘좆 까세요! 여기에 궤도폭격을 안 해주면 우리는 다 뒈질 겁니다!’ 아아, 나도 젊었다.
 “바니테일, 설명해라.”
 [예. 목표물 건물은 두 곳. 이곳과 이곳입니다. 적의 총 병력은 하트비트 센서와 픽시의 시각모듈로 얼추 파악한 결과 이 성벽 안에만 3000여 명. 상주병력으로 즉시 출동이 가능한 병력은 약 700여 명에서 1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바니테일은 어제 혼자서 여러 가지 전투시뮬레이션을 짜 두었다. 기특한 녀석. 지금 녀석은 지도를 돌려서 갑옷을 입은 녀석들이 달려 나오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또 사람들은 워어어어 하면서 놀래자빠지고 있었다.
 [적의 약점이 있다면 성벽에서 병력이 증원되어 해당 시설로 달려오는 시간. 그리고 좁은 골목에는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다는 것. 또 하나. 투사병기가 활과 석궁 같은 원시적인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어제 말한 대로 여우 사냥이 최고겠군.”
 [예. ‘언덕 위의 티거’와 병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흠······ 언덕 위의 티거라. 헤드모듈과 라페테(자동소총 삼각대)가 필요하겠군. 라페테는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러면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누군가가 그 총을 들고만 있으면 됩니다. 제가 모든 조준 절차는 완료하겠습니다. 방아쇠는 통신기와 연결된 트리거 모듈로 주인님이 당기시면 되고요.]
 어째 작전회의는 바니테일과 나의 작전회의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은 아바타 모양의 바니테일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씨바 설명을 좀 하란 말이야!’ 하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하아 쉬고는 지도를 쳐다보면서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방법과 작전 내용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사람들만으로 잘해낼 수 있을까?
 ***
 나는 시장의 한 모퉁이에서 쓴 음료를 홀짝 거리고 있었다. 커피이이? 커피일 리가 없잖아. 이 외계행성은 지구와 닮은 듯하지만 요소요소가 다르다. 내가 처마시고 있는 것도 어딘지 커피에 초콜릿을 진하게 탄 맛이다.
 “으웩. 그걸 맛있게 마신단 말이야?”
 “이게 뭔데?”
 “루왁 벌레를 즙을 짠······.”
 씨발. 어쩐지 곤충의 갑각질 같은 게 둥둥 떠 있더라. 나는 커피콩 같은 건 줄 알았지! 괜찮아. 만드는 장면만 안 보면 된다. 맛나네. 하하하하. 우웩.
 로베리타는 뭐가 또 그렇게 재밌는지 날 보고 깔깔대면서 웃고 있다. 묘한 친밀감이 돈다. 시발. 이 여자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신나는 꼬리잡기 게임이지. 저 갑옷 짤랑이 새끼들을 골려먹을 거거든.”
 “어떻게?”
 “아오, 아까 목 아프게 말해줬잖아?”
 어째 테러리스트가 된 기분이다. 하긴 저쪽 사제단인지 뭐시깽인지 입장에서는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짓이 테러 그 자체지.
 “그런데 저 자들을 죽여도 돼?”
 “흥. 저놈들은 우리를 고문기계에 넣고 드드득 살을 발라 버리는 놈들이야. 여자들은 죄다······.”
 그 부분에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족. 마법사. 대충 알 만하군. 밝은 성격이지만 그녀도 꽤 모진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종교적인 광신도들은 이런 경우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 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샌더스 대령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날 후려 팰지도. 어디나 그렇지만 파견된 군바리들은 현지의 분쟁에 일체 관여해서는 안 된다. 뭐 이미 라피르 덕분에 아주 심하게 발을 들여놔 버렸지만······.
 또 오늘만큼은 나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주제라 어쩔 수 없군. 방금 전 로베리타의 말이 조금 남아있던 죄책감을 지웠다. 또한 죄책감을 덜어주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동료들의 복수.
 나는 아까 작전회의에서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의 눈동자를 떠올리면서 후우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은 정의 편이라 그건가? 아니 정의의 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복수극에 도움을 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겠지. 어차피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
 “어이, 리타. 지금부터 당신하고 나는 판세를 잘 읽어야 해.”
 “리타아?”
 “쫌 알아먹어라. 애칭이잖냐. 애칭.”
 “푸하하하. 애칭씩이나 붙여주는 거야?”
 뭐가 그렇게 웃기냐? 일일이 로베리타라고 부르기 힘들어서 그런 것뿐인데.
 “흠흠. 아무튼 이 성대한 꼬리잡기는 아까도 설명했지만 두 건물 중에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한 거야.”
 “호오. 제법 잔머리를 굴렸네? 그런데 확신할 수 있겠어?”
 “글쎄. 확률상이지만 집에 불이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 쪽으로 가니까. 불을 살짝 질러주는 거지.”
 “호오. 영리하네.”
 “바니테일이 도와주긴 하겠지만 여기서 오래 산 리타 너의 판단이 우선이야.”
 나는 아까 슬쩍 모퉁이에 붙여둔 원격폭탄의 스위치를 눌렀다.
 펑!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 의도는 없다. 적당히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적당히 파편들이 위로 치솟았다. 바니테일 니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빤딱빤딱했던 교회 외벽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테트라인지 뭔지에게 존나게 기도나 쳐 하시지.”
 “푸하하하!”
 “자 다음은 여긴가?”
 경비초소 두개를 날려 버리면 쉽지 않느냐고? 불행히도 내가 가져온 폭약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01번 실린더에는 굴착 등의 작업으로 재래식 폭약이 많이 필요하거니까. 아니 뭐 폭약을 많이 가져왔다고 해도 이번 작전(?)의 묘미는 경비초소 제압이 아니다.
 저쪽 골목에서 꼬맹이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준비는 끝났군.
 꼬리잡기 시작이다. 짤랑이 여우 새끼들아. 오늘 니들은 다이어트 제대로 하는 날이다. 존나게 뛰어 보시라고. 다 같이 즐거운 마라톤 릴레이지. 달리는 건 건강에도 좋잖아?
 “마법사다아아아아아아아! 마법사가아아아아아아 마법으로 교회를 공격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좋아. 꼬맹이들, 그렇게 신나게 외치고 다니라고. 자, 우리의 1번 주자 대기하시고. 준비······. 출발?
 “어제 교회를 쑥밭으로 만든 놈이다! 저기 도망친다아아아아!”
 “교회의 적이다아아아아아!”
 꼬맹이들 목청 한번 죽여주는군. 저쪽에서 어제 내 옷을 입은 사람이 골목 쪽으로 뛰었다. 꼬맹이들은 소리치면서 일제히 그 사람을 가리켰다. 주요 위치에 서있던 짤랑이들은 부리나케 그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근데 뛰어도 너무 잘 뛰는데? 아마 우주올림픽이 있다면 100미터 마의 7초대를 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짤랑짤랑.
 갑옷을 입은 녀석들은 미친 듯이 그 사람을 쫓아가고 그 뒤에 있던 궁수들이 활에 화살을 매기거나 석궁의 도르래를 당기기 시작했다.
 직선으로 50여 미터. 음······ 이 정도라면 넉넉하게 100미터로 뛰라고 할 걸. 내 옷을 입은 사람은 이미 저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바니테일 링크.”
 [예. 주인님. 이미 주요 표적을 캐치했습니다.]
 자자자. 우리 편이 안 다칠라면 이게 중요하다구.
 언덕 위의 티거.
 아주 먼 지구시대 지상전의 교리였다. 언덕 위에서 중장차량이 거포로 존나 쪼고, 그 밑에서 언덕을 존나게 기어오르다가 하나씩 뒈지는 거지. 물론 그 양옆에는 수비 병력을 배치해 놨고.
 음, 아니다. 티거라기보다는 어째 라푼젤이 떠오르기는 한다. 긴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탑에 갇혀서 어? 그 뒤는 어떻게 되더라?
 나는 후드를 쓰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미 간이 전술 안경에는 바니테일이 찍어놓은 표적들이 좌라락 떴다. 미안미안. 짤랑이 양반들아. 다리만 맞추고 이런 건 불가능하거든.
 시계탑에서 레일건의 푸른 전류와 함께 탄자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때려 박혔다. 갑옷이 순식간에 우그러지면서 퍽하고 고기조각이 튀어나오고 뇌수가 바닥에 퍽석 흩뿌려졌다.
 저격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상을 주지.
 “궁수들이! 어······ 어디냐! 적들이 저격을 하고 있다!”
 “호오. 저격이라는 개념만큼은 있는 거야? 하지만 소용은 없다구.”
 퍽퍽퍽.
 바니테일은 궁수들만을 조준해 주었다.
 “히······히이익. 도······도망쳐!”
 “어······어째서 기사들은?”
 “구······궁수만을 노리고 있어!”
 자 우리 꼬맹이들과 삼류배우님들 또 한바탕 소리를 질러주실까?
 “마법사가 궁수를 노린다! 활을 버려!”
 “으아아아아아악! 맞았다!”
 “활을 버리면 안 쏠지도 몰라! 도망쳐!”
 공포는 삽시간에 전염된다. 꼬맹이들과 누군가 소리치자 진짜 궁수들도 활과 석궁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제 전장을 지배하는 건 우리 편이다. 놈들은 바니테일과 내가 짠 계획대로 정확히 움직이고 있었다.
 
 
 10)
 
 
 “바니테일. 계속 원거리 투사무기를 든 녀석을 감시하면서 전황분석을 해라.”
 [아아. 정말 알뜰살뜰하게 부려먹는 남자라니까요?]
 “시꾸랏. 이 노처녀 선생 같은 놈. 쫑알쫑알쫑알.”
 긴박한 상황인데도 옆에서 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만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리타. 어때?”
 “어떻냐니?”
 “아오, 시발. 그게 아니라. 두 곳 중에 어디 같아?”
 “아, 그거로군? 아까 불 지르고 그 말이 뭔가 했네? 경비 병력이 우리 동료와 당신 부하를 안 뺏길라고 한곳에 모이는구나! 아! 아! 그래서 이런 복잡한 작전을 생각한 거로구나!”
 휴우······ 이제 이해한 거냐? 시계탑에서 레일건을 든 라피르보다는 낫군.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뱃살을 꼬집고, 훌렁 시계탑으로 올라가 버렸다. 시발 내가 뭔 말을 하는지 알기라도 하는 걸까?
 리타는 내 말을 듣고 두 건물을 번갈아 바라봤다.
 야바위. 한곳은 예전 왕궁이라고 하고 또 한 곳은 공회당 건물이라고 했다. 둘 다 감옥과 고문시설이 있는 곳이었다. 둘 다 쳐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내 몸이 두 개도 아니고 한 곳을 찍어야 했다.
 한 곳이 털리면 다른 한쪽의 경비가 강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경비가 강화되면 그만큼 인원들을 빼돌리기 힘들다. 나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최소 다섯 명의 인원이 움직여야 한다.
 “어이, 리타. 빨리······.”
 “잠시만 아······. 아직까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건가? 그동안 바니테일이 이동하는 병력들을 좌라락 정리해서 위협항적을 표시할 때처럼 번호를 매겼다. 알파1부터 알파7까지. 즉 약 700여 명의 병력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나의 분신(?)들을 뒤쫓았다.
 골목이 많은 이 도시의 특성상 좁은 골목으로 도망치면 병력들이 분산되고 그만큼 여우사냥이 편했다. 우리 쪽의 총인원은 100명 남짓.
 바니테일이 입안한 작전은 일종의 게릴라 작전으로서 적은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전법이 되었다.
 다다다다!
 증기 가속식 기관단총이 여지없이 갑옷을 꿰뚫었다. 좁은 골목길을 간신히 헤쳐 나왔다 싶었더니 T자형의 길목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패들이 기사들을 제압했다. 다른 곳에서는 좁은 골목에 끼인 기사들을 석궁과 투창으로 원시적으로 죽였다.
 쇠스랑. 시발. 쇠스랑이 저렇게 무서운 무기일 줄이야. 기사 한 명의 투구가 뚫리고 피가 솟구쳤다. 으웩······. 나는 이런 장면은 별로라니까. 별명이 개백정인 엑소슈트를 타면서도 이율배반적이군.
 “놈들을 쫓아! 쫓으라구!”
 “하······. 하지만 녀석들은 별의 기사가 가진 무기를······. 가······갑옷을 입어도 소용없습니다.”
 “닥쳐! 빨리 뛰어!”
 거리는 일대 혼란이었다. 내가 있는 카페인지 음식점인지도 애저녁에 창문에 나무판을 씌우고 문을 걸어 잠갔다. 설마 사제단의 지부가 있는 이곳에서 대담하게 게릴라전을 걸 줄 누가 알았으랴?
 저쪽 골목에서도 기사가 식칼에 목이 꿰어서 넘어갔다. 마법? 저게 마법이란 말이야? 이쪽에서는 기사가 불에 타서 버둥거렸다.
 “놀랍네······. 사람들이 기사들을 이기고 있어.”
 “뭐야. 이런 걸 생각한 사람도 없었던 거야?”
 “응. 다들 ‘회전(양측의 군대가 늘어서서 승부를 판가름하는 전쟁형태)’만 생각했거든.”
 “그럼 알아둬.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상대방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우리는 어떻게든 결집시키고. 이게 전술의 기본이야.”
 [하하. 주인님이 그런 말씀을 다하시다니?]
 “쇄꺄 너는 관측이나 잘하라니까?”
 기사건 중장기병이건 어느 정도 숫자가 모여 있어야 힘을 발휘하지 저렇게 여우사냥을 당하면 그걸로 끝이다.
 바니테일의 작전은 멋지게 맞아떨어져서 꺾이는 골목마다 놈들에게 공포를 각인시켰다. 저 양반들이 기관단총은 단 한 자루뿐이지만 기사 놈들은 꺾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주저하고 있었다.
 “크크크. 무섭지, 무서워. 꺾인 저곳에서 뭐가 날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사람은 겁이 많은 동물이거든.”
 나는 화성의 시가지에서 수도 없이 날아들던 RPG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그때도 이 바니테일 녀석이랑 만담 한 마당을 했었지.
 드드득.
 나는 약간 위험하다 싶은 곳은 레일건으로 긁어주고, 베타1, 2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베타는 어제 찍은 주요건물들로 증강되는 병력을 따로 분류한 것이다.
 [주인님. 베타1, 2, 3 움직입니다. 의미 있는 전술적 이동입니다.]
 “어디냐?”
 “교회입니다.”
 전술안경에 다시 삐잉 하고 교회의 이미지가 떴다. 놈들의 예비 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곳은 두 곳이 아니라 교회였다. 나의 정찰정보. 그리고 라피르의 첩자가 제공한 정보다. 모두 틀렸다는 말일까? 회의에서 동맹군의 첩자들도 둘 중에 한 군데에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리타!”
 “아······ 알고 있어. 왜 저기로 모이고 있지? 아······ 아무래도 내 감도 저기 같아.”
 “어떻게?”
 이송? 그 한밤중에? 적어도 픽시가 떠있던 순간과 바니테일이 거리를 감시하는 지금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답은 하나다. 리타의 패거리 중에 내통자가 있다.
 그걸 생각한 순간 전황은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병력들이 다시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누군가 지휘자가 있군. 뒤늦게 조치를 취한 걸까? 아니야. 적은 적어도 한 가지 만큼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갇혀있는 죄수들을 구출하는 작전이라는 것을.
 “리타. 두 가지만 물어볼게.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 그리고 당신 조직 중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확률은?”
 “······.”
 리타는 두 가지 다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에라이. 질문한 내가 바보지. 이 정도 되는 도시라면 하수처리 시설은 있게 마련이고 거기를 이용했겠군. 하지만 왜?
 아······. 나로군. 놈들에게 내가 있다는 정보가 흘러갔을 거야. 그렇다면 오늘 아침의 회의 이후로군. 내통자가 내 존재와 구출작전을 적에게 알렸다. 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걸 보면 내통자는 아마도 주요인물은 아닐 것이다.
 아주 셜록홈즈 나셨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주인님. 교회 쪽으로 병력이 증강되고 있습니다.”
 “좋아. 돌입할 타이밍은?”
 “지금이 최적입니다. 롤아······웃은 아니고 출발하십시오.”
 “오케이!”
 나는 광학미채 후드를 푹 눌러 썼다.
 “자······잠깐 진짜로 저기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응. 리타. 너는 여기서 총 전투를 지휘해. 여차하면 이 신호탄을 쏴서 패거리를 전부 대피시켜. 사용법은 이걸 잡아당기고 이 방아쇠를 누르면······.”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걱정 마. 안 뒈져. 내 어깨 위에 걸린 목숨이 많거든. 저 안에 갇힌 강하엽병도 또 저 우주에 떠있는 프론티어의 시민들도.”
 “알았어. 돌아오면 다시 한 판 거하게 하자구.”
 “푸하하하하. 알았어. 약속한 거다.”
 나는 광학미채의 기동스위치를 켰다. 그동안 검문소를 비켜가느라. 가동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5분여. 바니테일의 도움이 있으니 금방 찾겠지!
 슷 하고 사라진 나를 보고 리타는 어버버 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 나는 흐릿한 형체로 보일 것이다.
 “가자, 바니테일!”
 투명인간이 되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 어렸을 때 다들 한번 생각해 봤을 거 아니야?
 아마 1위는 여자 탈의실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남자들은 다 똑같다구. 뭐 창의적인 놈들은 그걸로 도둑질을 하기도 하더군. 이 광학미채가 민간에 유출되었을 때 일어난 사고도 다 그렇고 그런 거였지.
 아, 그거 보고 따라하지는 마. 이미 관공서에는 3세대 열화상장비랑 체중감지장비가 곳곳에 깔려 있으니까.
 [날씨가 너무 맑습니다. 미채율 75%. 발각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괜찮아. 건물에만 들어가면 된다. 이렇게 적당히 주의만 돌려주면.”
 펑!
 다시 적당하게 작약량을 조절한 폭탄이 터졌다. 아. 초가집이 터지는 거 본 사람? 하늘로 우수수 지푸라기가 튀어 오르고, 나뭇조각들이 폭포수처럼 튀어 오른다. 기사들은 다시 얼빠진 눈으로 폭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다.
 “바니테일 텍스트모드 전환. 나도 텍스트로 지시한다.”
 알았다는 청색의 사각형이 깜빡였다. 나는 어벙벙한 표정의 기사들 사이로 빠져나가다
 문득 그 표정을 보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놈들은 시가지 곳곳에서 벌어지는 접전을 지켜보면서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흐흐흐흐으으으으으으. 분통하도다······ 분통하도다. 나느으은 네가 죽인 자다아아아아.”
 “뭐······뭐라구?”
 “네놈드으으을. 사제다아안을 죽이이이이기 위해 지옥에서 돌아왔다.”
 “히······. 히이이이익! 유······유령!”
 “흐으으으으으으. 원통하도다.”
 목소리를 들은 녀석들은 뒤로 벌렁 넘어졌고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 이 녀석 무슨 짓이냐!”
 “너냐? 너지! 네가 귀신 들린 거지! 분명 나는 들었다고!”
 “무슨 소리야! 가뜩이나 미쳐 돌아가는 판국에!”
 “닥쳐. 귀신 들린 녀석! 죽어!”
 급기야 녀석들은 서로에게 칼을 날리다가 서로 싸워대기 시작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푸하하. 꼴좋군. 사관학교에서 이 지랄하다 퇴학당한 새끼도 있었지?
 「주인님. 기동시간이 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알았다. 노처녀 여선생. 예상 위치를 잡아봐라.」
 「예. 어제 들어온 데이터를 베이스로 하면 위층에는 없습니다.」
 「지하로군. 아마 지하로 이송되었을 거야. 그리고 재수 없으면 또 이동될 수 있어. 하트비트 센서를 최고조로 잡아라.」
 교회 안에는 꽤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과 안 부딪치면서 앞으로 걷는 것도 꽤 힘들다. 에라이, 씨발. 유령 지랄도 했는데 알게 뭐야.
 수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랑 부딪치면서 비명을 꺄악 하고 질렀다.
 오오. 고양이꼬리, 고양이 귀, 수녀복! 누구 취향인지는 몰라도 이거 마음에 드는군? 나는 속치마 아래로 드러난 고양이 꼬리와 야들야들한 다리를 쳐다보다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니테일. 낯익은 녀석이다. 저 녀석 주위를 스캔해.」
 「하아? 저는 여자 다리만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시꾸랏. 저 녀석이 어제 나를 골로 보낼려고 한 녀석이야. 저 녀석 뒤를 따라가면 될 것 같아.」
 어제 그 녀석은 고함을 지르면서 짤랑이들과 병사들을 재촉했다.
 아하. 이 녀석이 지휘자로군. 나는 녀석의 뒤를 바싹 쫓으면서 레이저 커터의 슬라이드를 조심스레 당겼다. 삐잉 하는 레이저 주입음은 주변의 소란스런 소리 때문에 묻혀서 사라졌다.
 좋아. 뭐가 오든 베어 넘기고 구출해주겠다. 더불어 그 마법결사인지 뭔지 하는 놈들도.
 사제단의 대빵 녀석은 교회 지하로 내려가는 몇 개의 문을 열고 또 경비를 똑바로 서라고 지시를 했다. 이 정도로 경비가 삼엄하다면 이곳이 틀림없다.
 구불구불. 씨발 뭔 놈의 계단이 이렇게 많아?
 나선계단, 그냥 계단, 이제 계단은 나와 저 녀석 두 명밖에 걷고 있지 않았다. 놈은 계단을 다 내려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녀석은 다시 두툼한 열쇠 꾸러미를 꺼내서 좁은 문을 열었다. 제기랄, 하수구나 지하통로는 어디에 있는 거지? 저 문이 빙고일까?
 “바니테일. 광학미채 해제.”
 “뭐······ 뭣이! 너······ 너 뭐야! 어떻게 이곳에!”
 “만담은 됐고 조용히 문을 여시지?”
 “너······ 정체가 뭐냐! 이쪽 말을 하는걸 보니 마법결사의 떨거지냐?”
 놈은 두렵지도 않은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챙하고 칼을 뽑았다. 칼싸움? 좋지. 근데 이쪽은 레이저 커터거든?
 놈이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레이저 커터가 그대로 검을 그어서 동강내고, 그 뒤에 있는 문과 벽돌을 쌓아 만든 벽까지 슷 하고 베어 버렸다. 그래, 원시인. 그 표정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냐고? 흐흐흐. 설명해줘봤자 알겄냐?
 “벼······별빛의 기사! 다······당신이 용 알버레이크를 죽인 자로군!”
 “이 어르신은 존나 바쁜 양반이거든. 만담할 시간 없어. 입에 지퍼 채우고 얼른 그 문이나 여시지?”
 “지퍼? 그게 무슨······.”
 아오, 승질 나. 나는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찼고, 놈은 레이저 커터로 반쯤 잘린 문과 함께 뒤로 넘어가 버렸다.
 “어! 어! 어! 어어어어어어!”
 대충 뜻은 알아 먹겄다. 위대한 존 윌리엄스 중위님 저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강림하시다니. 아아, 숭고하셔라~.
 나는 그 행드맨 놈을 쳐다보다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개새끼들······. 리타는 어제 사제단의 수법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고문과 세뇌. 나는 잡혀 있던 행드맨 녀석을 흘끗 보고 비로소 왜 그녀가 동료들을 못 구해서 발을 동동 굴렀는지 알 수 있었다.
 철창 안에 갇힌 녀석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리는 부러졌는지 부어올라 있고 얼굴은 멍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손톱에는 바늘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놈은 침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를 흘려대면서 질질 짜고 있었다.
 “이런 시발.”
 “벼······별의 기사 어······어떻게 당신이 미드가르드어를 말할 수 있지?”
 “병신아. 질문하지 마라. 질문은 내가 하는 거다.”
 “마······마법을 쓴 거냐? 네······네놈 마녀들과 정을 통하였구나! 마법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죄인지 모르는구나!”
 “좆 까. 새꺄.”
 나는 주저 않고 놈의 손가락 하나를 날려 버렸다.
 “개새끼야. 니들은 행성연방의 소중한 병사를 저 꼴로 만들어놨어. 내 새끼들을 건드리는 건 용서 못하지. 개새꺄. 판결을 내린다.”
 “어······어억······. 살려······사······살려······.”
 나는 교회 밑의 고문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악취미의 극치. 핏물이 어찌나 튀겼는지 벽돌 사이에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너도 여기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겠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니 벌은 사형이다 뒈져라.”
 오오, 위대한 탈리오 법칙이여. 흥. 살인? 새끼들아 나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게 내 직업이다. 내 부하들을 죽인 스나이퍼 새끼를 피범벅으로 만들어 죽인 적도 있지. 그나마 내가 징그러운 걸 싫어해서 이 정도인 줄 알아라.
 
 
 11)
 
 
 슷. 다시 놈의 목에 샛노란 레이저가 스치고 놈은 멍청한 표정으로 절명해 버렸다.
 “여기 극동마법결사의 동료들이 있나!”
 [주인님. 살아있는 사람은 강하엽병과 저 노인 한 명뿐입니다.]
 “시발 어떻게 한다?”
 두 사람 꼴을 보아하니 멀쩡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별수 없군.
 “바니테일. 퇴각로는 찾았나?”
 [예. 아까 나선계단으로 들어오기 전에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구, 이쁜 것. 좋아. 둘 다 눈 감아!”
 나는 철창을 레이저 커터로 잘라 버리고 강하엽병에게 다가갔다. 놈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을 전술나이프로 찢어서 던져 버리고 손에 박혀 있는 바늘도 하나하나 뽑았다.
 “크으으윽. 으으윽!”
 “새꺄. 천하의 강하엽병이 약한 소리냐? 제프가 니 아구창을 날려버릴지 모른다! 참앗!”
 “으으으윽! 크크크크! 주······중위님도 가······강하엽병이 다 되셨군요으으윽!”
 “잊었냐? 나는 뼛속까지 깡통맨이다 새꺄. 샘퍼파이(미 해병대의 구호. 뜻은 충성을!)!”
 “후······훌라!”
 쇄키. 이런 지랄 같은 고문을 당했는데도 잘 버텼다. 잘 버텨줬다. 새끼야. 나는 녀석을 콱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놈에게 이야기했다.
 “미안하다. 너도 행드맨이라면 알지? 그 구호?”
 “크크. 예······ 리브 노 맨 비하인드······.”
 “저 민간인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다시 오겠다. 날 믿지? 우리를 도와준 녀석들과 약속했거든. 널 홀로 버려두지는 않는다.”
 “예. 중위님! 걱정 마시고 얼른 다녀오시죠. 중위님 후장을 기다리겠습니다.”
 “크크. 시발롬. 내 후장을 노리는 놈들이 뭐 이리 많아?”
 녀석은 엉망진창인 몸으로 걸쭉한 강하엽병식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존나게 무섭겠지. 이 씨발스런 고문실에 잠시라도 있고 싶겠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녀석에게 외상치료용 나노치료주사를 한 대 놔주고 등을 돌렸다.
 “어이, 노인네. 괜찮아? 당신 마법결사의 일원이지? 세 명이 잡혔다고 하던데?”
 “크큭. 나머지 두 명은 주······ 죽었어. 놈들이 이를 깨고, 혀를 잘라서 마법을 시동할 수도 없었거든. 나는 노인이라고 배려해준 거겠지.”
 “크크. 입은 멀쩡하구만. 좋아. 걸을 수 있겠어?”
 노인네는 부러진 다리를 가리켰다. 놈들의 고문법은 정강이뼈부터 뼈를 전부 부수는 것 같았다.
 “시발, 얼른 업혀. 시간이 없다. 곧 짤랑이 새끼들이 쏟아져 내려올 거야.”
 “크크크크. 짤랑이······ 별의 기사 주제에 이쪽 말을 잘도 나불거리는구만?”
 “만담할 시간 없다니까?”
 “이래봬도. 나도 마법사 나부랭이라구. 이 정도는 치료할 수 있지.”
 아.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라피르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그 노인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빛으로 자신의 다리를 치료했다.
 “조······좋아. 내 부하도 봐줘.”
 “알았다.”
 행드맨 녀석은 금세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노인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 기분 나도 잘 안다. 이윽고 상처가 한순간에 아물어 버리고, 행드맨 녀석도 나도 어벙벙한 표정으로 노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나를 쳐다보고 있어? 튀어야지?”
 [주인님! 심장 박동 수 증가! 내려옵니다!]
 “아오, 시발. 좆같구만!”
 나는 레이저 커터를 놈에게 건네고 검을 좍 뽑았다. 냉병기 접전에서 투명인간이랑 마주친다면? 흐흐흐흐흐흐흐흐. 좆 돼봐라.
 나는 나선계단을 올라가다 아까 입구에서 벌어졌던 유령소동을 떠올렸다. 좋아. 어디 한번 또 해보자. 자, 신나는 술래잡기다. 대신 술래는 존나게 안 보이거든. 니들끼리 잡아보라고!
 “어······어! 뭐······뭐야! 왜 안 가는 거야?”
 “누······. 누가 내 손을 잡고 있어!”
 “뭐라고? 이 미친놈이 대낮부터 술을 쳐마셨나? 빨리 안 내려가? 사제님이 부르셨다구!”
 나는 한 놈의 손을 잡아서 옆에 있는 놈을 쳤다. 퍽. 손을 잡혀서 얼떨떨해진 놈이 옆에 있는 동료의 목에 칼을 박아 버렸다. 이런, 때리게 할려고 했는데 칼을 박아 버리다니······ 헤헤. 내가 찌른 거 아니다? 선생님 얘가 딴 놈을 찔렀대요! 얘가 범인이래요?
 여기다 양념을 살살 섞어 보실까? 영리한 바니테일이 내가 뭘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다. 녀석은 알아서 스산한 음향효과를 넣어주었다.
 [흐흐흐흐흐흐. 나는 이놈의 몸에 빙의한 귀신이다. 원통하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악! 귀신들렸다! 귀신들렸어! 쳐······ 쳐 죽여!”
 “아······아니 잠깐만. 나······나는 멀쩡하다고! 이봐! 보이지 않는 힘이 내 손을 이렇게······.”
 “교적(敎敵)이다! 빙의되었어!”
 퍽!
 도끼날이 날아와서 내가 장난질을 친 놈의 머리를 쪼개 놓았다. 으와 무식한 놈들. 힘 봐라. 도끼는 투구째 머리에 박혀 버렸고 피의 분수를 만들었다. 아, 씨바. 이러면 안 되지.
 물론 이 광학미채 판쵸에는 세척기능이 달려 있다. 몇 만 달러나 하는 장비가 밀가루 푸대 따위에 무효화면 어처구니없잖아? 수많은 실전을 거치면서 개량되어 온 거지.
 “바니테일. 세척하지 마.”
 [예? 그게 무슨······.]
 “흐흐흐흐흐흐흐. 나는 피의 괴물이다아아아아아아아.”
 [아아. 아주 어린애시라니까요?]
 “시꾸랏. 칼질보다는 낫잖아?”
 놈들은 피가 줄줄 흐르는 무언가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형체가 없다.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아닐까? 놈들은 피의 분수로 형체가 살포시 드러난 날 보고 기겁하고 있었다.
 “아······. 악마야 물러가라! 물러갈 지어다아아아!”
 “좆 까라아아아 시발롬아아아아. 너어어어르으으를 붙잡고 지옥으로 가겠다!”
 놈들은 칼을 뽑거나 화살을 쏠 생각도 못했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 서로를 밀치고 우당탕 위쪽으로 올라갔고, 그 와중에 서로를 짓밟으면서 몇 명인가는 절명해 버렸다.
 나는 그 뒤를 쫓으면서 칼로 등이나 목을 찔러 버렸다. 우웩. 내 비위가 약하긴 하지만 개객기들아. 니네 선택을 탓해라. 사제단인지 뭔지 씨발 아주 사람 잘못 건드렸어.
 [주인님은 놀이공원에서 귀신의 집 알바하면 딱일 것 같네요.]
 “흐흐흐. 그렇지? 씨발 지구로 되돌아가면 그 짓이나 할까 봐.”
 [헤에. 칭찬한 거 아닌디요?]
 미채를 끄고 바니테일과 입씨름을 할 때쯤 저 밑에서 할배랑 행드맨 녀석이 올라왔다.
 “어······ 어떻게.”
 “마법이라고나 할까. 암튼 노닥거릴 시간 없어. 빨리 하수도로 나가서 대피해야 돼.”
 행드맨 녀석과 나는 육전군의 FM대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야를 확보하면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유령대소동 덕분에 더 이상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움직임은 없었다. 좋아.
 그렇게 지리한 나선계단을 올라오고 다시 바니테일이 인도하는 대로 구불구불 복잡한 통로들을 지나쳤다. 이 도시는 원시적인 도시 치고는 꽤 발달된 하수처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넓은 하수구로 나올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건 시체 썩는 냄새와 쥐떼들이었다. 회색의 쥐떼들은 우리 가랑이 사이로 우수수수 달려서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런데?
 “씨발, 벌레에 이어 쥐떼들이냐? 아오.”
 [주인님과 친숙한 동물들 아니겠습니까?]
 “벌레?”
 바니테일과 나의 대화에 마법사 할배가 끼어들었다. 그도 고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드가르드어로 바꾸어서 그에게 대답했다.
 “너. 그 벌레라는 게 미드가르드의 벌레인가? 혹시 그 벌레떼를 본건가?”
 “아 뭐······. 좆 될 뻔했거든.”
 “그렇군. 그렇다면 거인이 풀려났겠어······.”
 “아, 씨발. 이 상황에서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래? 일단 가자구.”
 할배. 은근히 미노년 간지로구만. 그는 멍하니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부릅떴다.
 “별의 기사······. 그리고 거인의 미드가르드 출몰······. 안 좋아. 안 좋아······.”
 “아! 씨발 지금 상황이 안 좋다고. 당신 동료들이 위에서 좆뱅이 치고 있을 게 뻔해. 얼른 나가자!”
 “아······알았다.”
 거 노인네 졸라 굼뜨네. 그나저나 이 쥐떼는 대체 뭐야? 거의 쥐떼가 아니라 쥐의 파도다.
 나는 상선에 타는 뱃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우주선에 크랙이 생겨서 쪼개지기 직전 생쥐들이 존나게 구명정으로 달려갔다는 거.
 씨발······ 우주시대에도 옛날 지구시대 도시전설이 유행하는구나 싶었지. 근데 이 쥐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양반이 한 말이 계속 떠오른다.
 -도망치는 쥐떼들을 보게 되면 무조건 쥐떼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그럼 거기에 살 길이 있을 거야.
 내 촉도 쥐떼들을 따라 도망치라고 외치고는 있다. 하아, 시발. 근데 어쩌겠어? 계단 위로 존나게 올라가면 그 사제단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대기타고 있을 테지.
 나 혼자야 아직 미채복의 구동시간이 남아있어서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저 둘을 달고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가보는 거다. 근데 왜 이리 뒷골이 쐐애애하냐?
 우리가 한 300미터 정도를 달렸을까? 악취가 점점 심해지면서 코를 베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 되었다. 어. 잠깐······.
 “······.”
 그곳은 하수구 치고는 꽤 넓은 곳이었다. 저 위에서 오수와 맑은 물이 섞여서 폭포처럼 떨어지고 철망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 금싸라기 같은 햇살을 받으면서 웬 여자가 물 위에 서있었다.
 시발. 예수도 아니고 물 위에 서있다고! 저게 뭐야! 전에도 말했지만 반중력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어! 에이 시발 저거 눈속임이겠지! 그럴 거야······.
 “발키리아······.”
 노인네가 여자를 보고 문득 입을 열었다. 발키리? 이젠 놀라지도 않을 것 같아. 엘프도 봤고 노른인지 뭔지도 봤고, 용가리에 거인의 발자국까지 봤지.
 근데 시발······. 놀라버렸어. 왜냐고? 여자의 등에는 눈부신 하얀 날개가 펄럭거리고 있었거든.
 반짝거리는 금발이 햇살에 반짝이고 가슴······. 그래 하나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세계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이너마이트 바디의 소유자들이다. 브래지어도 안 한 가슴이 숨 쉴 때마다 찰랑거리고 그녀는 고혹적인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조오오온나! 이쁘네! 리타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오오, 경배하라, 핍사. 연방보안국(Federal InterPlanet Security Agency) 아자씨! 나 아자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씨발 이종족의 여자는 미스유니버스 급으로 아름다웠다.
 “존나게 예쁘네. 이 빌어먹을 세계는 다 이런 미인밖에 없나?”
 [후우. 주인님. 대체······.]
 아아. 바니테일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천사라고! 날개가 좍 펼쳐지고 하얀 깃털이 날리는 게 천사가 아니면 뭐냐? 캬아. 이것만큼은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성큼성큼 다가가려던 나를 그 마법사 할배가 제지했다. 왜? 뭐여 이 할아방. 질투하는 거냐? 아무리 간지 스타일이라지만······.
 “너 제정신이냐?”
 “아 뭐가? 이쁜 여자한테 말을 거는 건 수컷의 본능이라구.”
 “이런 미친놈. 말했잖아. 저건 전장의 발키리아라구!”
 “아, 그래서 뭐?”
 할배는 점점 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모르는 거냐? 저 악취미 여자들을?”
 “악취미라니?”
 “저년들은 오딘의 수하. 박 터지게 싸우는 녀석들을 보고 깔깔 웃는 년들이야······. 그리고 싸우던 자들이 뒈지면 그 영혼을 발할라로 이끈다고 하지. 저년들이 나왔다는 건 존나 ‘목숨’을 거는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거야.”
 “전투?”
 여자는 전투라는 말에 활짝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눈은. 글쎄. 노른도 그랬고 분명 저 눈은······. 아무튼 그녀는 푸른 눈동자를 치켜뜨고 나랑 마법사 할배를 노려봤다.
 “별의 바다에서 내려온 별의 전사여.”
 “······.”
 “나는 전사의 귀에 속삭이는 자. 우리는 그대를 지켜보았다. 용을 죽이고 군대를 이끄는 자.”
 -그들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는 드워프의 대공동에서 만난 그 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 아랫도리는 주책맞게 꿈틀대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 벌레들의 여왕인지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뭐라 그랬더라? 아무튼 그들이라니? 그들이 뭐여?
 씨발, 라피르도 그렇고 이 아가씨들 대명사 존나게들 좋아하네. 웬만하면 고유명사는 똑바로 써주자고. 의미도 잘 통하고 얼마나 좋아. 나 존 윌리엄스는 저 발키리아를 보고 꼴렸다. 크하하하!
 “하지만 그대는 아직 선택받지 않았다. 싸우고 또 싸워서 전사의 발할라로. 이것은 오딘께서 내리는 시험일지니······. 모든 것은 검은 거인의 뜻대로.”
 뭐라 발할라. 그게 뭐야?
 “할배 발할라가 뭐여?”
 “전사들이 갈수 있는 천국. 거기엔 존나게 처녀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고 하지.”
 “존내 남성우월적인 천국이네? 크크 하여튼 이슬람 새퀴들이나 이놈들이나. 아마 그거 생각해 낸 놈은 마초맨일 거다.”
 “······.”
 “아무튼 아가씨 내가 지금 발할라에 들어갈 거라고 지금 예언한 거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 나는 또 벌레들의 여왕인지 뭔지가 해준 예언을 떠올렸다. 그때는 존나 웃어 넘겼는데 뭐라 그랬더라? 내가 신을 죽일 거라고 했나? 그리고 나무가 어쩌고 그랬는데. 생각나는 건 갈색의 피부와 그 탄력 있는 가슴뿐이다. 아, 가슴이라면 로베리타도 죽여줬었지.
 “저 근데 아가씨?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점을 지적해 봐도 될까?”
 “······.”
 “일단 나는 무신론자거든? 발할라는 사후세계잖아? 그런 거 나 안 믿는 다구. 전도질은 딴 동네 가서 하세요? 잉?”
 크하하하하! 화냈다, 화냈어. 저거 분명 화내고 있는 거지?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창을 꺼내서 나한테 겨눴다. 씨발 그따위 창 겨눠서 어쩌려구?
 “그리고 예언이라면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이 있지. 노른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나더러 이렇게 말했더군. 나는 ‘신을 죽이는 자’가 될 거래. 뭔진 모르겠지만 무슨 악취미 천국에 뒈지면 간다는 것보다 그게 더 멋지지 않아? 무신론자라면 그 정도 업적은 이루고 뒈지는 게 더 멋질 것 같은데?”
 
 
 12)
 
 
 그 대목에서 내 옆에 있던 할배는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엣헴. 내가 이런 사람이라구. 야. 행드맨 새꺄. 그 불손한 표정은 뭐냐? 개객기 구해줬더니 배은망덕하게스리······.
 “······노른의 예언을 들었나?”
 “어. 근데 그 사람 쪽이 더 나은 거 같아. 나는 무표정한 고무인형은 딱 질색이거든.”
 크하하하. 제대로 화났다. 비로소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노른. 그대에게 예언한다. 그대는 오딘님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적일지 아니면 발할라로 들어갈 것인지······.”
 “······.”
 나는 비로소 오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발키리아는 표정 따위는 없고 미소도 짓지 않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이는 흡혈귀의 그것처럼 뾰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왜 할배가 그렇게 이 미친년을 경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뒤편이 일렁거리면서 무언가 거대한 뭔가가 튀어 나왔다.
 “전사 존 윌리엄스여. 그대의 의지를 보이라! 그렇다면 그대의 의지를 관철하라.”
 팟!
 그야 말로 팟하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뒤에 있던 괴수가 목을 쳐들었다.
 “씨발······. 아무리 짬뽕이라도 너무 심하잖아? 켈베로스는 그리스신화잖아, 이 쐉뇬들아!”
 “전사여! 뒤로 물러나시게!”
 “할배, 부르던 대로 불러!”
 “뭐라고?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는데?”
 “아, 씨바 중위라고 부르면 돼!”
 “아시바 중위?”
 에효, 맘대로 부르세요. 근데 짬뽕에 막 나가도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언제부터 켈베로스가 불을 뿜고 지랄이야!
 아니, 불만이 아니다. 뇌전과 얼음의 기운도 뿜어내고 있다. 각각의 머리가 각각 다른 속성의 마법······. 씨발 마법을 뿜어내고 있다고!
 “중위님 어떻게 합니까!”
 “몰라. 새캬! 넌 노인네랑 튀어!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
 “하지만······.”
 “뛰어! 위로 올라가면 그 할아방이 자기 동료가 있는 곳으로 이끌 거야!”
 “하지만······.”
 “명령이다. 새키야! 민간인을 데리고 전장에서 이탈하라!”
 “······.”
 놈은 뭐라고 말하려다 레이저 커터를 건네고 노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할배도 내 부하를 따라가라고!”
 “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네만!”
 “아오 빨랑 가! 괜히 거치적거린다구! 저 강아지 새끼도 마법을 쓰는데 할배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 말을 듣고 할배도 우물쭈물했다. 라피르나 이 할배나 치료 솜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오늘 골목길에서 싸우는 걸보니 공격 쪽은 글쎄올시다였다.
 “난 안 죽어. 걱정 말라고!”
 결정적으로 할배는 내가 광학미채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주춤주춤 행드맨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래 그게 아니더라도 그 고문을 쳐 당한 둘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무기는 칼과 레이저 커터뿐이다. 하지만 중위 존 윌리엄스, 씨부랄 오딘인지 오뎅인지 모르는 그 개객기의 시험을 돌파해주마!
 “바니테일! 너만 믿는다! 미채의 가동 시간과 전력 분석!”
 [맡겨만 주십시오!]
 씨브알. 바니테일의 소리를 들으니 진정되는 기분이다. 화성에서건 어디서건 이놈의 목소리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전력은 고물 칼 하나와 광학미채. 그리고 레이저 커터 하나. 존나게 불리하군! 이걸로 저 똥개에게 맞서 싸우라구?
 “중위 존 윌리엄스. 왕도마뱀 사냥에 이어 똥강아지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
 [하하. 똥강아지치고는 너무 큰데요? 가동 여유시간 5분 45초!]
 “바니테일. 텍스트모드 돌입. 한번 놀아보자고!”
 사실 바니테일 녀석 말대로다. 발키리아가 꺼내놓은 켈베로스는 개를 한 100배 뻥튀기 해놓은 것 같다. 그 왕도마뱀 새끼보다는 작지만 작대기 던지기 놀이를 하려면 사람크기만 한 통나무를 던져야 할 느낌이랄까? 재수 없으면 내가 그 나뭇가지가 될 것 같은 불안한 느낌도 든다.
 「바니테일. 약점을 찾아라.」
 「아오. 주인님. 제가 무슨 알라딘의 램프인 줄 아십니까? 문지르기만 하면 뭐든지 나오게?」
 「약한 소리하지 마라. 새캬. 너랑 나랑은 올림포스 공략전에서도 살아 돌아왔잖냐!」
 「아하, 정답게 옛날이야기나 하자는 건가요? 좋네요. 저 강아지 앞에서?」
 「아오, 무드 없는 새퀴. 너랑 나랑은 죽어도 살아남을 그런 놈들이라는 거지!」
 「뉘에뉘에. 어련하시겠습니까?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투의 흥분이 몸을 휘감고 눈앞의 강아지 놈을 객관적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일단 시험해볼 것은 나의 가장 강한 무기다.
 근데 시발! 광학왜곡이라고! 말도 안 돼! 저 망할 개객기는 레이저 커터를 종이 구부리듯 휘어 버렸다. 애꿎은 철창이 스릇 하고 잘리고 녀석은 사라진 내 위치를 찾고 화염을 날렸다.
 이크! 뒈질 뻔했네! 그 용가리 왕도마뱀의 불꽃도 그렇고 이놈들의 불은 그냥 불이 아니다. 타닥타닥 마치 위액이 타르인 것처럼 벽과 물위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니테일 저걸 또 맞았다간 뒈지겠어.」
 「생체패턴 확인. 걱정 마십시오. 저걸 쏠 때 놈의 패턴을 확인했습니다. 아마 나머지 두 체의 머리도 같은 패턴······ 아 지금 확인되었습니다. 나머지 머리도 같습니다!」
 「좋아! 시각 시그널로 저 공격이 나올 때를 알려줘.」
 광학미채 덕분에 놈의 눈깔이 적외선 눈깔이 아닌 한 놈은 내 위치를 파악 못한다. 나는 일단 오수에 몸을 굴렀다.
 씨발, 냄새 한번 죽여주는군. 이러면 개새끼야 어디 한번 내 냄새를 맡아보라고! 남은 건 청각인가? 씨발. 그것까지 무력화 시키려면······.
 나는 주저 않고 마지막 남은 섬광탄을 놈에게 집어 던졌다.
 삐잉.
 내가 쓴 헤드모듈이 자동으로 광량을 조절하고 놈에게 달려 나갔다. 광학미채의 가동시간은 3분 21초. 승부다 시발.
 “죽어라아아아 통해라아아아 고물 카아아아아알!”
 제발! 명색이 용살자의 검이니 이 개객기에게도 통해라! 제발! 푹! 그래 푹이여! 푹이라고! 봤느냐! 씨발 이 존윌리엄스 어르신은 용의 피에 곱등이 체액에 이젠 개 피까지 다 본 사람이라 이거야! 이제 이 틈으로 용목을 날릴 때처럼 레이저 커터로 쑤시면 되지!
 푹하고 들어간 고물 칼이 덜덜거리면서 개의 모가지 하나를 반쯤 잘라버렸을 때 나는 토악질을 하면서 개의 앞다리에 얻어맞았다. 으억. 시발롬이!
 이런 막무가내 공격에 얻어맞다니! 내 몸이 붕하고 뜨면서 천장에 있는 철망에 철퍼덕. 나는 철망과 동시에 눈부신 지상세계에 패대기쳐졌다. 크윽. 방심했다. 옆구리 쪽을 쑤셨어야 하는데 모가지를 쑤시다니 나도 참 바보야. 세 머리가 하나로 연결된 것을······.
 「바······ 바니테일······ 소······ 손상보고.」
 「주인님 움직이지 마십시오! 바이탈사인이 위험합니다!」
 「크크크. 씨발······ 바니테일 내가 먼저 이렇게 뒈지나 보다. 깡통맨들은 깡통을 타고 뒈져야 하는 건데 말이야. 크크크크.」
 「그딴 농담 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은 죽게 하지 않습니다.」
 새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저 강아지 새끼가 튀어나왔잖아? 강아지 녀석도 철망을 죄 박살내면서 지상으로 튀어나왔다.
 하늘로 하구 철망이 치솟아 오르고 놈은 크게 포효했다. 뭔가 하고 이쪽을 지켜보던 기사도 사람들도 극동 뭔지의 마법사들도 모두 이 거대한 강아지를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하하하. 하긴 황당할 정도로 크지? 그지?
 내 헤드모듈에 삐잉 시각시그널이 뜨면서 놈이 마법을 쓸 거라는 사인을 알려왔다. 피가 왈칵하고 쏟아져 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졌거나 내장이 다쳤거나 뭐 그런 거겠지. 저 똥개의 앞발에 얻어맞고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거지.
 「주인님! 트리거를 쥐십시오!」
 트리거······ 트리거? 아 맞다. 제프 녀석이 가져가라고 한고 한 추력포 지시기가 있었지?
 아······ 하지만 이걸 쐈다간 01번 실린더의 전력 수급이 엉망이 될 거다. 그러면 저······ 탄소필라를 덧씌우는 작업은 늦어질 거고. 씨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탄소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따위보다 저 작업이 더 중요하다.
 「크크. 됐어. 바니테일. 내 유언이나 들어라.」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원격트리거를 쥐십시오! 잊으셨습니까? 제 작전입안은 완벽합니다!」
 나는 바니테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품안에 있던 스마트 자동소총의 트리거를 꾸욱 눌렀다.
 크하하하하. 그랬지! 그랬어! 저 지붕 위에는 우리 천사님이 계셨지! 스마트 자동소총이.
 한두 세대 전의 화약식 자동소총과는 상대도 안되는 병기다. 탄자 하나하나가 미사일이고 그 안에 든 파편들이 폭발한다.
 그 탄자들이 퍼버벅 고기다지는 소리를 내면서 강아지의 대가리들과 몸을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퍽퍽퍽 피와 살점이 관통한 상처로 고기를 짜내듯 터져 버리고 강아지 녀석은 불과 얼음을 허공에 맥없이 휘날렸다. 어? 어! 시발 이쪽으로 오는데!
 “아스타로스의 방패!”
 “어? 할배?”
 “아시바 중위 당신 말을 믿은 게 잘못이야! 이렇게 이 현자 바솔로뮤의 도움이 필요하잖아? 힐!”
 쏟아지는 얼음과 불의 파도는 할배가 펼친 반투명한 방패에 부딪혀 화악 옆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부러진 내 갈빗대도 이내 욱신거리는 게 사라졌다.
 “치료해준 건가?”
 “흐흐. 당장은. 아마 자네는 몇 걸음 움직이고 다시 쓰러질 걸세. 자네의 상처는 중상이야. 며칠 더 지켜봐야 한다구.”
 “그거면 됐어. 좋다구.”
 나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말대로 몸이 완전하지는 않다. 비틀비틀 시발······. 술 취한 것 같잖아?
 “용자 아시바 중위! 시발 내 마법력은 이걸로 땡이야! 당신이 저 강아지의 목을 따 버리라구! 저 드래곤 슬레이어로! 그게 너의 시련이다!”
 “할배 조루지?”
 “시끄럿! 힐은 굉장한 마법력이 필요하다구!”
 하하. 아픈 곳을 찔렀구만! 할배가 내 엉덩이를 뻥 차 버리고 나를 밀쳤다. 씨발, 넘어질 뻔했잖아요? 아무튼 저 똥개새끼에게 다시 누가 우위인지를 가르쳐주지. 시발롬. 확 탕으로 끓여먹을까 보다.
 “라피르! 엄호해! 놈을 두들기라고!”
 [예엣! 기사님!]
 디스플레이에서 라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예쁜 것!
 퍼버벅 사정없이 자동소총탄이 처박히고 놈의 몸 안에서 터지고 있었다. 질긴 놈! 저걸 쳐맞고도 안 죽는단 말이야! 역시나였다. 놈의 상처는 그때 용가리처럼 다시 회복되고 있었고 놈은 섬광탄의 충격에서 서서히 빠져나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시끼야. 내가 뭐 어쨌다고?
 “중위님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
 어느새 내 앞에서 튀어나온 녀석이 저 멀리 떨어졌던 레이저 커터를 내 쪽으로 던졌다. 나이스 패스! 씨발 이제 런닝백이 달려간다! 똥개 새끼야! 터치다운까지 그렇게 얌전히 있으렴!
 이거 제정신 가지고는 도저히 못하겠는데? 차라리 띠잉한 지금 기분이라서 더 좋군! 그리고 나는 똥개의 앞을 후려치는 바람의 파도를 똑똑히 목격했다. 정령? 그 때 내 짐 드는 것을 도와준 정령이었다. 라피르······.
 “별의 기사여! 돕겠네! 눈을 감아!”
 “아오 시발! 빨랑 말하라구요!”
 뭐야 아까는 마법력인지 뭔지 땡이라메? 저 뒤에 있던 마법사 할배가 웬 공 모양의 빛을 이쪽으로 던졌다. 으아 눈부셔! 비틀. 나는 그 바람에 넘어졌고 공교롭게도 내가 놓친 고물 칼을 다시 쥘 수 있었다. 똥개는 지랄발광하면서 컹컹 짖어댔다.
 너 옆구리가 완전 비어 있다구! 마법사 할배 나이스 어시스트!
 “먹어라!”
 나는 녀석의 목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았다. 그리고 진짜로 런닝백이 수비를 피하듯 놈의 발길질을 차례로 피하면서 놈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뒈져라 강아지 새끼야!
 내 체중으로는 놈이 비틀거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강아지 녀석은 궁하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크아악 하는 괴성을 질렀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오고 나는 놈의 피로 샤워를 하는 것 같았다. 기분 드럽구만!
 “주인님! 레이저 커터는 딱 3초 지속됩니다!”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아아아아아!”
 드래곤 슬레이어가 벌린 틈으로 샛노란 레이저 커터의 칼날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두 칼을 아래위로 교차해 버렸다. 그리곤 내가 했지만 도저히 내가 한 것 같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켈베로스의 몸은 마치 거대한 식칼로 반 토막을 낸 것처럼 호쾌하게 잘려서 두 동강이 나 버리고 하수처리장의 바닥에는 드래곤 슬레이어와 레이저 커터가 교차된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옴마나. 이게 내가 한 거라고? 두 동강난 켈베로스와 함께 하수처리장의 바닥에는 거대한 엑스자가 그어져 있었다. 두 동강이 난 똥개는 커엉커엉 몇 번 짖다가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쌍검의 전사! 그가 이겼다!”
 “우아아아아! 켈베로스를 물리쳤다!”
 어이어이. 이보셔들. 쌍검? 시발 생각해보니 쌍검은 맞네. 나는 왠지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으으, 할배 말대로네······ 옆구리에서 다시 피가 흐른다. 그리고 등 뒤에서 뭉글뭉글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커튼처럼 내 눈앞을 가리는 은발의 머리카락.
 “삐지지 않았어?”
 “흐······흥. 누······. 누가요?”
 거참 솔직하지 못한 아가씨로군. 나는 그녀의 품에 완전히 안겨서 얼빠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13)
 
 
 쌍검의 존 윌리엄스.
 이게 오늘 내가 얻은 별명이었다. 씨발······ 아킴보(akimbo-쌍권총) 존도 아니고 쌍검이 뭐냐 쌍검이. 아킴보 존. 생각해보니 요건 멋지다.
 아무튼 라피르 말로는 이 세계에서 그런 별명도 중요하다니 뭐 넘어가도록 하자. 거기다가 쌍검 어쩌고 저쩌고는 상대도 안 될 해괴한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해방자 존 윌리엄스.
 아오, 돌겠네. 행드맨 새끼들이 들었다간 존나 놀려대겠네. 내가 그 새끼들 패턴을 알아요.
 ‘여자해방자 윌리엄스 중위님! 또 한 건 하셨군요! 마족 여자랑 한판 거하게 하셨다면서요!’
 해방자는 무슨. 내가 링컨도 아니고.
 솔직히 나는 내 앞에서 밥을 처먹고 있는 저 녀석을 구하려 한 것뿐이다. 이쪽의 정치나 세력도 따위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구. 게다가 이런 괴상한 별명이 붙게 된 이유가 또 가관이다?
 사제단 녀석들이 내가 장난친 유령 대소동과 켈베로스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줄행랑을 쳤거든. 우리 극동 어쩌고 마법사들이 분전하기도 했고 결국 3000여 명의 경비병력과 사제단은 이 도시를 포기하고 튀어 버렸다. 제일 웃겼던 건 마지막 남은 사제가 도망칠 때 이렇게 말했대.
 -오오 악마의 도시여! 마침내 지옥에서 악마가 올라왔노라! 오오 저주받은 성읍이여!
 시발. 내가 장난이 좀 심했나? 하긴 피가 질질 흐르는 투명인간을 보고 안 무서워할 사람이 어딨겠어?
 거기다 켈베로스의 거대한 모습은 시민은 물론이고 사제단의 녀석들도 똑똑히 지켜봤다. 그 거대한 똥개를 레이저 커터로 베어 버린 것을. 그러니 도망칠 수밖에. 레이저 커터나 켈베로스나 아마 그들의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들일 테니······.
 거기다 무슨 사제단의 종교적인 이유가 양념으로 첨가되었다고 한다. 뭐 거기까지 내 알바야 아니지.
 결론은······. 의도하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결과적으로 사제단의 손에서 이 그레인 어쩌고 하는 도시가 해방이 된 것이다.
 솔직히 우쭐한 기분이 없다면 뻥이겠지만 쪽팔려서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잔뜩 껴입은 기분이다.
 “야. 빵 좀 건네주겠어?”
 “예. 해방자 존 윌리엄스님.”
 “아오! 개객기. 제프한테 일른다?”
 “아아, 쌍검의 중위님. 참아주시죠.”
 히죽히죽. 고새 나를 놀려먹는 패턴을 마스터한 행드맨 새끼였다. 이름은 호세 알레한드로. 녀석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빵을 건넸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중위님.”
 “낯간지럽게 인사는 됐다. 널 버려두고 갔다간 나도 후회할 뻔했어.”
 고문. 녀석의 손톱에는 아직도 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총에 쳐 맞는 게 낫지 바늘을 어떻게 거기다 꽂을 생각을 한 건지······. 녀석도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후우, 이럴 땐 입장이라는 게 참 괴롭구만. 동료로서는 그 아픈 순간을 다시 묻고 싶지 않지만 대빵의 입장으로선 물어봐야 한다.
 “호세. 괴로울 테지만 몇 가지만 물어보자. 당장 02번 실린더로 가다가 그 개객기들과 부딪혀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좋아. 놈들이 뭘 불라고 널 고문한 거냐?”
 “······.”
 “말하기 힘들다면 됐어. 다음에 말해줘.”
 “아뇨. 놈들은 우리의 숫자에 대해 계속 물었습니다.”
 “숫자?”
 “예. 별의 기사들은 총 몇 명이냐.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걸 계속 물어봤습니다.”
 “흠······. 넌 뭐라고 대답했지?”
 “중위님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대로 말하겠습니다. 내 좆이나 빤딱빤딱해질 때까지 빨아라. 새끼들아!”
 나와 호세는 동시에 웃음을 빵 터뜨렸다. 아, 그래서 그 사제인지 뭔지 하는 놈이 고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셨구만? 저런 식으로 욕질을 했으니 말이 통할 리가 있나. 사제들의 실력으로는 강하엽병들의 걸쭉한 욕설을 알아 처먹을 리가 없다. 라피르조차도 녀석들이 욕질할 때는 가끔 고개를 갸웃하는데 말 다했지.
 “흐음······. 숫자를 물어봤다라.”
 “아! 그리고 넌 어떻게 별의 하늘인가? 거기서 떨어졌냐고 그걸 존나게 물어보더군요.”
 “넌 개별강하를 했었지······.”
 “예. 그래서 저도 그것만큼은 맞다고 수도 없이 설명했습니다.”
 라피르도 우리가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이 사제인지 뭔지 하는 놈들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예언······. 그렇군. 이 행성의 누군가는 우리가 이 행성에 강하할 것을 알고 있었어.”
 “예? 하지만 저희는 공간도약 오류로 간신히 이 행성을 찾지 않았습니까? 우연에 이은 우연인데 어떻게······.”
 나는 퍼뜩 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강하 실린더가 붉게 빛나면서 떨어지고 그 주위로는 하얀 강하장갑복을 입은 강하엽병들이 떨어진다. 놈들이 강하엽병을 ‘천사’라고 부른 건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바니테일.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은 대부분 어디 있다고 생각하지?”
 [하늘이지요.]
 “그래 하늘이지.”
 호세자식은 바니테일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그 ‘별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다. 물론 여기도 새나 용가리 따위가 하늘을 날아다니긴 하겠지만 초고고도에서 그렇게 내려왔다는 건······. 우리는 신의 세계에서 뚝 떨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종교의 대부분은 ‘하늘’의 저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뭔가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게 아닌가.
 그 하늘에서 떨어진 실린더와 강하엽병이 떨어졌다? 차라리 우주개발이 된 곳이라면 어떻게든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개드립을 떠올리겠지만 이곳은 우주는커녕 하늘도 못 나는 판국이다.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들은 그런 종교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존재다. 어떤 의미론 그 노른인가 하는 여자의 말이 들어맞았다.
 신을 죽이는 자. 디어사이더(deicider).
 거기다 놈들은 숫자를 물어봤다. 강하 실린더가 더 떨어지거나 아예 순양함이 대기권강하를 한다면 놈들의 신앙은 작살나게 된다. 숫자를 물어본 건 그런 의미겠지.
 서둘러야겠군. 용가리나 거인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나머지 실린더가 위험할 수도 있다. 거인에 이어 이 사제단인지 하는 녀석들은 명백히 우리를 적대할 것이다.
 “우리는 녀석들의 신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존재인지도 몰라······.”
 “예? 중위님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수고했어. 많은 도움이 됐다.”
 “별말씀을. 그럼 저는 여자를 꼬시러 가도 되겠습니까?”
 “푸하하하. 거긴 멀쩡한가 보지?”
 “아무렴요. 쌩쌩합니다요.”
 녀석은 내게 경례를 붙이고 저쪽에 있는 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여튼 군바리들은 다 이렇다니까. 근데 말이나 통하겄냐? 녀석은 손짓발짓 다하면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여자는 깔깔 웃으면서 녀석을 보고 있었다. 야야. 글른 것 같다. 그 여자 널보고 원숭이 같다고 말하고 있어.
 “당신 부하가 저거야? 꽤 재밌는 사람이네?”
 “하하. 행드맨 새끼들은 다 저래. 강하엽병훈련소에 여자에게 껄떡대는 훈련을 하는 건지 원.”
 “에엥? 사돈 남말 할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내게 부드럽게 키스했고, 그걸 보고 저어 옆에서 라피르가 도도도 달려와서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옴마마? 무서워라. 알프하임의 아가씨?”
 “우······우씨! 기사님을 건들지 마요.”
 “뭐야, 자기가 찍었다 이건가? 헤헹. 하지만 제가 맛있게 먹었습니다요?”
 씨발······. 노른인지 뭔지는 내가 무려 여난에 빠질 거라고 예언했던가? 이야, 사람 일은 모른다니까?
 “그런데 리타. 미안. 약속은 못 지키겠어. 다른 실린더들이 사제단인지 하는 놈들에게 공격을 받았을지도 몰라. 서둘러야겠어.”
 “이 야밤에? 그리고 당신 몸이 좋지 않잖아.”
 “흐흐. 그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남은 거리는. 어디 보자 30킬로미터. 딱 반이네. 씨발······. 밤을 서둘러 가면 닿을 거야. 라피르, 여기서 여기까지는 특이사항 없지? 여기까지는 계곡에 산을 쳐 오르질 않나 난리였잖아?”
 “예. 여기서 호수까지는 그냥 밭하고 시골농가들이 이어진 곳이에요.”
 그녀는 디스플레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이야기했다.
 “검문소는?”
 “글쎄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이라면 여기와 여기 두 곳이 있는데 우회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몸······ 괜찮겠어요?”
 “쌍검의 중위님인데 뭐가 두렵습니까?”
 “아오. 새키야. 그거 말하지 말라니까? 쪽팔려 죽겠다니까.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할래? 여기서 기다렸다가 01번 실린더에 합류할 거야?”
 “아뇨. 중위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제 장비도 찾아줬으니 중위님에게 짐은 안 될 겁니다.”
 녀석은 어느새 자기 전술장비를 전부 군장으로 꾸려놓고 있었다. 든든하군. 이럴 땐 한 명이 있고 없는 게 완전 다르다. 좋아. 두 명이라면 강행돌파도 가능하다.
 솔직히 지리도 낯설고 해서 아마 밤새 걸어도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세의 말을 듣고 또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다른 실린더를 구하려면 02번 실린더의 도움이 절실했다.
 “리타 미안. 이렇게 됐어.”
 “헤에, 그거 아쉽군. 나도 다음 발정기 때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쌍검의 검사 아들이라면 꼭 낳아주고 싶거든.”
 나는 물을 마시다 콱 하고 뿜었다. 다시 라피르는 내 볼을 꼬집었다. 아오, 내가 뭘? 내가 존나 매력적인데 어쩌겠어? 어? 이번에는 진한 키스였다. 뱀처럼 갈라진 혀가 내 입을 휘젓고 아스라한 향기를 남겼다.
 “다음에 왕도(王都) ‘그레인야드’에 올 때는 꼭 들르라구. 내 혀의 향기를 잊지 않기를.”
 “흐흐흐. 어떻게 잊겠어?”
 나는 리타를 콱 끌어안으면서 길게 키스했다. 이번만큼은 라피르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리타의 향기와 탱탱한 살결이 몸 가득 느껴지고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마쳤다.
 “으아. 중위님. 벌써? 중위님에게는 전술보다는 여자 꼬시는 방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시꾸랏. 야간지속행군이다! 먼저 나가서 기다려.”
 나는 애꿎은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까주고 일어섰다. 어? 라피르도 자기 짐을 완전히 꾸려 놓은 상태였다.
 내 짐을 나눠놓은 라피르. 그녀는 끙차 하면서 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 팔짱을 끼고 리타에게 베에에하고 혀를 내밀었다. 아이구, 귀여운 것. 아, 씨발 나 뭐래냐?
 “만약 떨어진 행드맨이 있다면 잘 부탁합니다. 가보겠습니다. 협력 고마웠습니다. 극동 어쩌고 마법사 여러분!”
 사람들은 아쉽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고 난리였다. 아오, 이러다 가지도 못하겠다. 결국 사람들은 나한테 맥주인지 뭔지 모를 술을 세 잔이나 쳐마시게 하고 나를 놓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별의 기사님!”
 “그대의 여행이 해방의 여행이 되기를!”
 “무운을 빕니다. 쌍검의 기사여!”
 “존 윌리엄스 만세!”
 아오! 이 쏴람들아. 낯간지럽다니까. 나는 왁자지껄한 소음을 뒤로 하고 술집 문을 나섰다.
 “어? 할배? 할배는 밖에서 뭐하는겨? 안에 들어가서 마시라고. 거기서 마시다 자면 입 돌아간다고.”
 “이 녀석 시니어에 대한 공경은 어따 갖다 버린 거냐?”
 “흐흐흐. 그런 건 화성의 모래바닥에 처박고 왔거든. 아무튼 바솔로뮤 씨 치료는 고마웠어.”
 어? 따라온다.
 “할배는 왜? 그냥 뜨뜻한 침대에서 이불이나 덮고 주무시지 그래? 밤바람이 차다고.”
 “하여튼 버릇없는 놈이로고. 별의 기사를 수호하는 게 이 현자 바솔로뮤의 임무지.”
 “휴우······. 쫌 요래요래 예쁜 여자로 붙여주면 안 될까? 할배는 좀······.”
 바솔로뮤인지 하는 할배는 내 머리를 꽁 치고는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시발······ 여행은커녕 송장 치우는 거 아닐까 모르겄다. 에라. 자기 운명이지 뭐.
 “저 할배는 뭐하는 양반이야?”
 “현자 바솔로뮤. 제가 아는 한 최고의 마법사에요. 아마 별의 기사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최고의 마브업사? 저 사람이? 저봐 저봐. 넘어졌잖아. 아오. 호세 니가 부축해드려라.”
 “예, 중위님. 흐흐흐. 그럼 두 분은 오붓하게 데이트 즐기십쇼.”
 라피르는 다시 피식 웃으면서 내게 기댔다. 야, 이놈아. 우리는 02번 실린더를 구하러 가는 거라고 데이트가 아니야, 데이트가. 아아, 저 자칭 현자 양반 때문에 뭔가 비장했던 여행의 재시작이 코미디가 되었잖아. 그나저나 아이고 옆구리야······.
 
 
 생츄어리 숲의 대결전. 난 꽃은 질색이야!
 
 
 1)
 
 
 우리가 문제의 호수에 닿은 것은 오전 9시 30분. 글쎄. 대충 이쪽의 시간에 맞추긴 했는데 자전시간이 지구와 약간 다른 것 같다.
 “이게 뭔 안개야? 이 시간이면 안개는 다 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후후. 이 안개 때문에 안전하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 안개는 밤에도 사라지지 않아요. 사제단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을 거예요.”
 성역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도 흠······ 과연 아무것도 안 보이는 이 안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최악이겠구만.
 우리는 벌써 2시간째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생츄어린지 뭔가 하는 곳은 한마디로 지랄 같았다. 숲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모든 계기들이 거의 먹통이 되어버렸다.
 “바니테일. 아까 시도해 보겠다면서? 탐측은 할 수 있겠어? 우리 완전히 길 잃어버린 거 아니냐?”
 [글쎄요 주인님. 방해전파가 많긴 하지만 노이즈를 거르고 있습니다.]
 “또 물인가?”
 [아무래도 저 하늘 위의 물과 비슷한 원리 같습니다.]
 “뭔 특별한 성분이라도 있는 거냐?”
 [아뇨. 그냥 물입니다.]
 라피르를 쳐다봤지만 그녀라고 별수가 있겠나? 그녀도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넌 어떻게 탐측을 하게?”
 [액티브소나를 응용하여 음파탐지를 시험했습니다. 마침 완료되었군요. 주인님의 모듈로 시각정보를 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온 길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똑똑한 것. 그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
 [그러면 뭐라도 사주시고 칭찬을 하시든가요?]
 “아오 쇄끼. 한끝을 안 져요 한끝을.”
 어디보자. 실린더는 어느 쪽이냐? 호세 녀석도 라피르도 나와 같은 영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파샥. 우리 일행이 풀이나 나뭇가지를 밟을 때마다 영상에서 파문이 일어났다. 바니테일 이 녀석은 정말 유능하다. 군용소나도 아니고 그냥 통신기에 달린 통화기능으로 삥삥 음파를 날려서 그것을 시각정보로 쏴주는 것이다.
 “어. 음. 여보게들. 나는?”
 “할배는 그냥 뒤따라오기나 하셔.”
 “쳇. 이럴 때는 따돌리기냐. 쳇쳇.”
 아오, 노인네 퍽이나 귀엽다. 이 양반 아예 내 귀에다 대고 투덜거리고 있다. 뒤끝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그렇게 또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내 헤드모듈의 영상에 실린더의 거대한 실루엣이 비치기 시작했다. 전개된 강화방벽의 위에는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휴우······. 정말 다행이다.
 땡그랑.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라피르는 웬 줄을 건드렸고 잽싸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호세! 대인지뢰다. 시발······. 핀 있어? 찾아서 처리해줘!”
 “알겠습니다. 중위님.”
 라피르는 원시적인 트랩에 걸린 것 같았다. 양쪽에 수류탄을 놓고 줄을 건드리면 쾅. 올림푸스산에서 지긋지긋하게 당한 부비트랩이었지.
 잠시 후 저쪽에서 호세 녀석이 웬 통조림 깡통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중위님. 괜히 쫄았습니다. 그냥 깡통이었습니다.”
 “어? 뭐라고? 저놈들 왜 이딴 원시적인 걸 만들어 놓은 거지?”
 “글쎄요······ 저에게 물어보셔도······.”
 제기랄. 뭐 생각하는 놈이 없어요. 아무튼 라피르는 방금 전의 실수로 잔뜩 신경이 곤두선 것 같았고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때는 그냥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후우, 거리는 한 300미터? 저쪽에서는 우리가 안 보일지도 모른다.
 “어이이이이이이 02번 실린더 새끼들아! 잘 있었냐! 01번 실린더의 인원이다아아아아!”
 “마운티이이이이이이이인!”
 잉? 뭐라고? 이 새끼들 지금 암구호를 말한 거냐? 대답으로 암구호를 말하다니? 뭐여? 농담하자는 거야?
 “마운티이이이이이이인! 대답 안 하면 쏜다아아아아아! 전원 사격준비이이이이!”
 “전원 사격준비이이이이! 행드맨 최고오오오!”
 씨발 근무설 때 암구호는 존나게도 안 외우던 녀석들이 여기서 이 요란을 떠는 거냐? 뭐 대답은 해줘야겠지. 어디 보자. 최후의 암구호가 그거였지. 놈들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리버어어어어어어어어! 나 윌리엄스 중위다아아아!”
 “이 개시끼들! 하필이면 중위님을! 또 속이려는 거냐! 거짓말치지 마라! 또 중위님을 사칭하지 마라고, 시발롬아!”
 “또 그 새끼들이다! 괴물이야! 히이이익! 아무데나 다 갈겨 버리라고오오오오오!”
 시발롬들이 나를 아주 보내 버리는구만? 나보고 나를 사칭하지 말라고 시발롬들아? 어? 갑자기 헤드모듈이 백색의 노이즈로 가득 찼다. 뭐냐고? 음파가 이 지랄이면 총격이지 뭐긴 뭐야!
 “엎드려. 라피르!”
 호세 녀석은 반사적으로 엎드렸고 나는 라피르를 꼭 끌어안고 엎드렸다. 자세 한번 이상하구만. 의도한 건 아니라구. 그녀도 퐁. 얼굴이 빨개져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근데 할배는?
 “아오. 할배 수그리라고!”
 “어? 어. 그러지.”
 할배는 똥 싸는 폼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환장하겠구만? 나는 할배의 멱살을 잡아서 땅바닥에 뉘였다. 그 순간 할배가 기대 있던 나무가 중기관포에 아주 박살이 났다. 놈들은 막무가내로 온 사방에 포탄과 총탄을 날리고 있었다. 다행인 건 대규모 에너지 무기가 없고 ‘정확한 조준사격’이 없다는 것 정도랄까?
 “어······ 부서졌네?”
 “할배! 앞으로는 내 말 좀 들으쇼! 귓구멍 좀 파고!”
 “아니, 자네는 엘프 처자만 엎드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존나 깝깝하다. 깝깝해서 목이 다 메어온다.
 “호세? 저 새끼들 왜 저러는 거야?”
 “글쎄요. 뭔가 존나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시발롬아 그건 나도 알겠다.”
 두렵다? 놈들은 방금 전 나보고 사칭하지 말라고 말했다. 씨발 이게 무슨 조화야?
 “야, 이 약 빤 새끼들아! 나라고! 존 윌리엄스! 니들의 포커판 호구!”
 “좆 까지 마, 이 괴물 새끼야! 그렇게 다가왔다가 한 명씩 한 명씩 안개 속으로 끌고 갈 셈이지! 또 우리를 죽일 셈이냐!”
 “휴우······. 미치겠군.”
 다시 기관총과 레일건이 천지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가고 다시 우리는 고개를 수그렸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피아식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씨발 아주 여기서 삼박사일 이 지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라피르. 뭐 아는 거 없어?”
 “글쎄요······. 저도 저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밖에는······.”
 아오, 맹추아가씨 뭔가 박식한 것 같아도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되더라.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건가?
 “바니테일. 포복으로 접근할 수 있겠어?”
 [힘듭니다. 눈먼 총탄은 소위고 중위고 가리지 않으니까요.]
 뒤에서 호세 새끼가 킥 하고 웃었다. 바니테일이 말한 문구는 프래깅(fraging-전시 중 상관살해)이야기였다. 바니테일 시발롬. 하필이면 말을 꺼내도 그런 얘기를 하냐. 사관학교 시절부터 존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건데······.
 부하들을 괴롭히지 말고 잘해줘라. 안 그러면 전투 중에 니 주머니에서 안전핀 뽑힌 수류탄(fragment granade)이 뿅 하고 튀어나오는 수가 있어요.
 흐흐흐. 그래그래. 내가 좋은 상관이라고는 내 입으로도 말 못 하겄다. 하지만 대뜸 총질은 너무하잖아?
 “바니테일, 총질을 하면 같은 편이라고 알아먹지 않을까? 이쪽 세계에는 총이 없으니까.”
 [글쎄요. 주인님. 제가 인간 정신분석은 잘 모르지만 저쪽은 극도의 흥분 상태인 것 같습니다만? 거기다 총격을 가한다면 오히려 더 패닉에 빠지지 않을까요? 또한 ‘노획’했다고 생각하면서 더 의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중위님.”
 호세 녀석도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저쪽을 노려봤다. 녀석도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아마 저 녀석들하고 통하는 뭔가가 있겠지. 근데 암구호도 안통하고 피아식별 수단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들은 대체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 동안 무슨 개 같은 경험을 한 걸까?
 나는 퍼뜩 05번 실린더의 참극을 떠올렸다. 거인에게 산 채로 잡아먹힌 비극. 녀석들은 인식표도 회수할 수 없었다. 시바랄!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이젠 모가지가 아파서 인식표 따위 더 걸고 싶지도 않다고!
 “우리 착한 바니테일아? 뭐 방법이 없겠냐?”
 [뒤로 물러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안 돼. 새꺄. 우리는 02번 실린더의 비행장비나 기타 등등 물자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엘리베이터실이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저 새끼들도······.”
 레이더나 탐측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안개. 환장하겠군. 저 녀석들이 반쯤 미쳐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야 바니테일의 영리한 응용법으로 안개를 헤치고 왔다지만 놈들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무언가’와 싸워온 것이다.
 “적어도 10미터 정도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면 이 문신으로 어떻게 해볼 텐데 말입니다.”
 호세는 팔을 걷어서 문신을 보여주었다. 목 매달린 졸라맨 그림과 82강하엽병사단의 사단마크가 낙인으로 찍혀 있었다. 아아, 약 빤 놈들. 지들이 무슨 텍사스 소떼여? 몸에다 낙인으로 지지고 지랄이래?
 “아니다. 호세. 놈들은 ‘나’를 봤다고 했어. 흠······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은 그 정체불명의 ‘뭔가’는 그런 문신 따위도 흉내 낼 수 있다는 거야.”
 나는 놈들이 나를 봤다는 말을 듣고 오래된 지구의 전설 하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켈베로스, 드래곤까지 튀어나온 마당에야. 에이, 설마 ‘그거’는 아니겠지.
 “워얼. 중위님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똑똑하시네요?”
 “시발롬아 이 어르신은 언제나 그랬다. 별수 없군. 너랑 내가 존나 뛰는 수밖에 없겠다. 바니테일, 약진(躍進) 준비. 적당한 장애물을 잡아줘라. 다가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예. 주인님.]
 시발 또 존나게 달리는 수밖에 없나? 02번 실린더 놈들도 아마 거리별로 구역을 정해서 중화기와 소구경화기를 유기적으로 짜놨을 거다. 즉 함부로 다가갔다간 피떡이 되서 나자빠진다. 바니테일 말대로 눈먼 총탄이 뭐 가리겠냐?
 호세는 그 사이 군장을 다 놓고 중요한 장비만을 주렁주렁 몸에 달고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짐을 벗고 약진 준비를 했다. 아이고, 옆구리야. 상처가 도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뭐 아직까지는 끄떡없는 것 같다.
 “기사님······.”
 “라피르. 당신은 이 스마트 자동소총을 쥐고 있기만 해. 필요하면 내가 원격으로 쏠 테니까.”
 “하지만······.”
 “너는 내 CP라고.”
 “CP? 커맨드포스트인가요?”
 “흐흐. 알아듣는군.”
 “히야아, 중위님 말빨은 끝내준다니까? 그런 식으로도 꼬시는 겁니까? 당신은 나의 본부. 오오, 그대의 품으로 돌아오겠소이다?”
 퐁. 호세의 말을 듣고 라피르는 얼굴이 빨갛게 되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꾸랏. 준비는 완료됐냐?”
 “예. 잠시만 모듈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런 외계행성에서 약진이라니. 지금 우주시대가 맞기나 하냐? 나하고 호세는 바니테일이 쏴준 포인트들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진 준비!”
 “호세 알레한드로 상등병! 약진 준비완료!”
 “a, b로 순차 약진한다! 약진! 약진!”
 어? 아오오오오오. 할배는 왜 날 따라오는겨! 눈치 상 딱 봐도 라피르랑 후방에 있으라는 거잖아! 이미 호세 자식은 저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시발 약진에는 엄호사격이 필요하지!
 “엄호! 엄호!”
 알았다 시발롬아. 나는 증기가속식 기관단총으로 강화방벽의 윗부분을 긁어버렸다. 아오. 소리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네! 방벽의 난간에서 총을 쏘던 놈들은 잽싸게 방벽 뒤에 숨고 전체적인 대응사격이 느려졌다.
 호세 녀석이 바니테일이 미리 짚은 구덩이에 쏙 들어가서 손을 흔들었다. 오케이. 이젠 내가 뛸 차례다.
 “할배는 라피르랑 CP대기.”
 “CP?”
 “아오! 그냥 따라오지 말라고!”
 “싫은디?”
 앓느니 죽지. 그래 맘대로 허쇼! 레일건에 몸이 드드득 하고 뜯기면 그놈의 마법인지 뭔지로도 소용없을 텐데 어쩔라고?
 “중위님!”
 “알았다! 약진! 약진!”
 시발. 사관학교 때도 난 행군이 존나 싫었어. 그 다음은 당연히 이 씨버럴먹을 각개전투였지. 드드득. 진짜로 눈먼 총탄이 내 옆을 휙휙 스치고 지나가고 나는 처음으로 화성에서 롤아웃(rollout)했을 때를 떠올렸다.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핑핑 솟아가는 기분이다. 용가리와 똥개랑 싸울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쪽도 처절한 건 매한가지만 어딘지 꿈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다! 피 냄새와 쇠 냄새가 느껴지는 처절한 현실이다!
 총에 뜯겨지고 대가리가 터지고 익숙했던 죽음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나는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전장에서 끝끝내 살아남았다 개새끼들아. 이따위 빌어먹을 행성에서 뒈질까 보냐? 날 죽이려면 지구 청색함대 정도는 불러오라고, 시발롬들아! 아 근데 현실이 시궁창이여.
 나는 구덩이에 도달하자마자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헉헉!”
 “중위님. 체력훈련 좀 하셔야겠습니다? 아님 담배를 끊으시든가.”
 “시······ 시꾸랏. 헉헉헉. 바니······ 헉헉, 거리는?”
 [125미터입니다. 이곳은 소화기와 레이저 커터가 중첩되는 지역입니다.]
 “알아······헉헉헉······. 호세······ 헉헉헉. 그레네이드······. 헉헉······.”
 “아오, 쫌 숨 좀 쉬고 말하십시오. 누가 보면 중위님과 섹스하는 줄 알겠습니다.”
 “시발롬, 헉헉헉. 조까, 헉헉.”
 날 따라온 할배가 좋다고 웃는다. 당신 이제 초콜릿은 다 먹었다. 주나 봐라. 그 사이 호세는 헉헉대는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개인용 그레네이드 런쳐를 건넸다. 충전량은 풀.
 “헉헉헉. 연막탄.”
 “중위님. 진짜 저기까지 뛰실 수 있겠습니까?”
 “새꺄. 내가 사관학교 헉헉헉, 스프린터였어. 새꺄. 헉헉헉. 웃지 마.”
 “퍽이나요. 개소리하지 마십쇼.”
 나는 놈하고 썅소리를 주고받으면서 그레네이드 런쳐를 조준했다. 강화방벽 위를 정확히 맞춰야 되는데······.
 좋아! 퉁퉁 하고 발사된 연막탄 두 발이 정확히 강화방벽의 모서리를 맞추고 놈들의 켁켁대는 소리가 들렸다.
 
 
 2)
 
 
 바보 녀석들, 헤드모듈을 써야지······. 알루미늄 채프가 섞인 연막탄은 원플러스 원 행사로 최루성분도 섞여있거든. 아까 보니 놈들은 헤드모듈을 벗고 있었다.
 “헉헉. 호세 약진!”
 “예! 약진! 약진!”
 녀석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동작센서나 기타 등등이 이 개 같은 안개 때문에 쓸모없게 되어서 망정이지 아마 이 정도거리라면 호세는 벌써 총에 맞고 나자빠졌을지도 모른다. 후우. 아니지.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약진을 하는 건데?
 “할배. 잘 따라오쇼!”
 “자네나 잘 달려. 이거야 원 다 죽어가는 소도 아니고 비실거리기는.”
 할배도 개김성이 전염되었다. 강하엽병 시발롬들.
 나랑 할배는 호세가 짱박힌 바위 뒤로 미친 듯이 달렸다. 어? 어? 돌부리? 엑소슈트라면 캐터필러로 그냥 씹고 지나갈 그런 돌부리다! 나는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고 때마침 눈먼 총탄이 드드득 내 쪽으로 날아왔다.
 “아스타로스의 방패!”
 “헉헉. 그게······.”
 할배는 총탄을 퉁퉁 튕겨내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뭐야 그게 꼴사납잖아? 이왕 마법이면 멋들어지게 퉁퉁 튕겨낼 줄 알았더만. 나는 뒤로 나자빠진 할배를 부축해서 다시 앞으로 뛰었다.
 “헉헉헉헉. 할배······. 헉헉 고맙······. 목숨······. 헉헉헉 빚졌······.”
 “젊은 놈이 꼴사납게.”
 할배. 고마웠던 뭉클뭉클한 감정이 쑥 들어간 거 알아? 할배도 호세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휴, 거의 200미터를 전력질주했으니까. 잠시 숨 좀 돌리고 갈까?
 “헉헉. 야, 이 약 빤 새끼들아! 여기까지 왔다! 나 존 윌리엄스다! 상관에 대한 예의는 태양계에 쳐 버리고 왔냐?”
 “웃기지 마! 중위님은 돌아가셨다고오오오오오오!”
 “미친 새끼들아 멋대로 날 죽이지 마라아아아아!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시벌롬들아아아!”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는 불과 35미터. 나는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놈들은 내가 소리친 방향으로 모든 화력을 퍼부었다. 이놈들은 전에도 말했듯이 전투감각이라면 1% 안에 드는 놈들이다. 200여 미터 밖이라면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지만 30여 미터 거리라면 거의 정확하게 방향을 잡은 것이다.
 “중위니임! 계획은요!”
 “몰라, 새캬!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호세 이 자식도 나만큼 미친놈이다. 놈은 무자비한 십자포화가 바위를 깎아내는 와중에도 씨익 웃고 있었다. 전장에서 살아온 놈들은 전장에서만 웃을 수 있다. 흐흐흐. 나도 이 녀석도 전쟁에 푹 절여졌다는 거겠지.
 “중위님. 섬광탄으로 조지는 건······. 제게 딱 한 발이 있습니다.”
 “처음의 연막탄으로 놈들도 헤드모듈을 썼겠지.”
 “처음부터 섬광을 썼다면 어땠을까요?”
 “난 니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연막탄이 지속시간이 더 기니까.”
 이 와중에도 할배는 으적으적 내가 준 초코바를 먹고 있다. 으이그. 초코바. 좋아?
 “아, 호세 너 투수했다고 그러지 않았냐?”
 “예. 마이너리그에서요.”
 “좋아. 이걸 저쪽으로 던질 수 있겠어?”
 “예? 그게······ 무슨.”
 “저놈들이 봤다는 놈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기는 그렇다 치고 초코바를 가지고 다니겠냐? 그리고 산타할아버지도 아니고 초코바를 던지는 놈들이 어딨다구?”
 “아하?”
 놈은 제대로 빵 터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할배는 날 빤히 쳐다봤다. 할배 미안. 나중에 01번 실린더에 가면 초코바 따윈 실컷 먹여줄게.
 [주인님 대체 무슨 생각을······.]
 “초코바가 주공(主攻)은 아니야. 바니테일. 잠시 놈들이 동요하는 시간이 필요해.”
 나는 할배의 손에서 냅다 초코바를 뺏었다.
 “어? 기사? 이게 뭐하자는 짓이······.어! 안 돼!”
 할배. 누가 보면 아주 연인이랑 이별하는 줄 알겄다.
 그 사이 호세는 멋들어지게 수류······ 아니 초코바를 강화방벽 너머로 투척했다. 온통 노이즈 투성이인 헤드모듈로 놈들이 초코바를 발견하는 모습이 잡혔다. 인생 뭐 있냐. 또 승부를 걸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무기도 다 내려놓고 목에 건 인식표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내 인식표와 화성에서 죽은 내 부하들의 것.
 “중위님! 무슨 짓을! 달려 나가시면!”
 “야, 이 강하엽병 놈들아! 그 가짜 윌리엄스 중위가 이 인식표를 달고 있다더냐아아아아!”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인식표를 던졌다. 호세처럼 그 먼 거리를 던질 자신은 없었다. 그래. 뒈진다면 뒈지는 거지.
 짤랑거리면서 은색의 개목걸이가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팔을 벌리고 우뚝 섰다. 안 무섭냐고? 존나 무섭지. 오줌이라도 질질 싸고 싶을 지경이야.
 짤랑하고 인식표가 다행히도 강화방벽의 안으로 떨어졌다. 또 다행히도 다시 총성이 울리지는 않았다. 나는 헤드모듈을 벗고 팔을 벌린 채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두런두런 강화방벽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진짜 중위님의 인식표다.”
 “그래······. 헬스장에서 본 적 있어. 건드리면 무척 화를 냈었지. 그 양반 거 맞다.”
 “그 사람 부하들 거······. 전사자 기록용으로 보관되는 건데 장군 책상을 뒤엎고 받아 왔다더군······.”
 “그래, 이 표시······ 깡통맨들의 뱃지도 있다. 진짜 중위님이다.”
 “진짜 중위님이야! 중위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어!”
 “시발! 그래 진짜 오셨어!”
 시발롬들. 하여튼 우락부락한 사내놈들 주제에 심성은 여고생들이라니까? 놈들은 징징 짜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엉겨 붙은 낯짝. 여기도 그동안 모진 전투를 했나 보다. 저 녀석의 낯짝들만 봐도 알겠다. 수고했다.
 ***
 전투가 끝나고 담배 한 개비는 극락이라. 뭐 아군간의 오인사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나랑 호세가 나눠준 담배를 녀석들은 정말 맛나게 피웠다.
 02번 실린더는 극한의 전투스트레스로 이미 담배는 바닥났고 식량도 간당간당할 지경이었다. 거인들에게 전멸당한 05번 실린더는 아니더라도 놈들 역시 만만찮은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남아있는 놈들은 강하엽병, 레인저 등등 17명 중에 11명. 20명이나 같이 강하한 프론티어 아자씨들은 이미 전부 전멸 당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아니 그 전에 헤이워드 대위님은?”
 “헤이워드 대위님이 02번 실린더에 계실 리가 없잖습니까? 아마 함대사령부에 계시겠지 말입니다?”
 “뭐라고? 분명히 전날 밤 침대에서······ 흠흠. 나한테는 02번에 탄다고 말했어.”
 “예? 제가 알기로는 중위님이 이 강하팀의 최선임자로 알고 있습니다만? 01번 실린더의 탄소케이블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럼 거기에 최선임자가 탑승해야지 말입니다?”
 무슨 제임스 어쩌고 하는 중사가 나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말도 안되잖아? 어디 나 같은 중위 나부랭이가 이런 중요한 임무의 최선임자가 될 수 있어? 적어도 일선 대위급은 되어야 하지 않아?
 “뭔가 착오가 있었군······.”
 “예. 중위님이 잘못 아신 겁니다.”
 대체······ 왜? 퍼스트 카운트다운 직전 30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모습을 도크에서 봤었다. 키스까지 했는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흠흠.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중사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그의 부하들도 다 우울한 표정이 되면서 담배만 뻑뻑 빨았다.
 “알았다. 무척 궁금하지만 그건 다음에 묻기로 하지. 장비표와 목록현황을 내 통신콘솔로 보내라.”
 “아뇨······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흘끔 호세를 쳐다봤다. 저 녀석도 같은 패턴이었지. 강하엽병들은 거칠지만 충성심과 명령에 따르는 것만큼은 칼 같았다. 어떤 의미론 블루숄더의 부하들보다 더 충직했다. 그러니 호세나 이 중사나 극한의 공포를 억누르고 내게 보고를 하려는 거다. 그 공포라는 게 뭐지?
 “첫날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소위님이 저쪽에 잘못 강하한 이 녀석까지 찾아오셨지요. 그 양반 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탄 쏘가리 녀석은 나도 잘 모르는 녀석이다.
 “이 빌어먹을 안개 속에서도 우리들을 잘 이끄셨습니다. 장비들을 점검하고 진지구축까지 지휘하셨습니다.”
 “어째서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지?”
 “소위님이 실린더의 자산은 위쪽의 프론티어 시민들의 생명과 직결된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흠······ 하는 생각은 다 비슷했군. 나라도 그랬을 거야.”
 “또 ‘그걸’ 본 뒤에는 빠져 나가려고 해도 안개하고 센서가 이 모양이니······.”
 중사는 삥삥거리는 통신기를 들어보였다. 저쪽에는 틸트로터 한 대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비행장비가 날아오르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
 슥 봐도 살아남은 애들 중에는 실린더의 파일럿이 없었다. 강하충격으로 전사했나? 파일럿이 없다면 센서나 인공지능 도움 없이 하늘을 난다는 건 무리다. 중력자이로도 이 지경이니······.
 “제 생각엔 첫날부터 소위님도 많이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않으셨습니다.”
 “소위는?”
 “······.”
 녀석은 말없이 저쪽에 만들어진 무덤을 가리켰다.
 “두 번째로 희생 당하셨습니다.”
 “희생? 전사가 아니라? 너희들은 습격한 건 뭐였지?”
 “행성연방군이었습니다. 겉모습은.”
 “겉모습은?”
 “어이, 별의 기사. 달달한 거 뭐 없어?”
 아오, 할배.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 꼭 그렇게 전투식량을 드셔야겠수? 우리 애들 배고프다잖아? 시발 그걸 뺏어먹고 싶은 기분이 드나······.
 “할배. 그거 맛있수?”
 “응. 더 없나?”
 “휴우. 이건 뭐 꼬맹이도 아니고. 옛수, 저쪽에서 드시구랴.”
 할배는 또 좋다고 내가 건네는 초코볼을 받는다.
 “계속 말해봐.”
 “예. 첫날에는 말씀드렸듯이 근처에 강하한 강하엽병들을 집합시키는 게 큰일이었습니다. 거기서 소위님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소위님은 끈으로 이렇게 허리를 묶어서 한 명씩 안개 속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존나게 소리를 지르는 거였습니다.”
 “머리를 굴렸군.”
 “예. 줄만 있으면 탐측을 못하더라도 다시 실린더까지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소득은?”
 “이 녀석 한 명을 구한 게 다였습니다.”
 중사는 다시 앳돼 보이는 병사 한 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흠······. 나는 이 빌어먹을 안개 속에서 줄을 묶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거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존나 무섭잖아? 우리는 그나마 햇님이 있는 곳에 떨어졌지만 이 녀석들은 탄소필라도 보이지 않는 안개의 무덤에 떨어진 거다.
 “그리고 ‘그게’ 섞여들어 왔습니다.”
 “그거라니?”
 “모릅니다. 저희도. 그냥 그거라고 부를 수밖에는요······.”
 남은 녀석들은 몸서리치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뭐야 천하의 강하엽병 녀석들을 이렇게 치를 떨게 만들다니. 그게 대체 뭐지?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난후 둘째 날도 몇 명은 그런 식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조를 갈라서 나머지 인원들은 프론티어의 시민들과 장비 목록하고 장비를 점검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탐색조 쪽에서 소란이 발생했습니다.”
 “줄이 끊어졌겠군?”
 “어? 그걸 어떻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이 지랄 같은 안개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 아닌가? 갑자기 줄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나면서 황급히 줄을 당겨봤더니 잘려져 있는 로프.
 “그래서 너희들은 다시 작업을 중단하고 탐색을 했겠지.”
 “예. 그리고 다행히도 그 얼빠진 이반 안드로코비치 녀석을 발견했습니다. 녀석은 저쪽에 있는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왜 줄이 끊어졌냐?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디다. 그냥 물이 먹고 싶어서 호숫가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끼 태평하군, 하고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고 녀석하고 길을 되돌아 왔습니다.”
 물을 마시러 왔다고? 나는 그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호수가 어디 있는지 안 거지?
 마법사 할배도 초코볼을 까드득거리다 말고 날카로운 눈으로 제임스 어쩌고 중사를 노려봤다.
 “그날 저녁 근무는 저하고 저 녀석이었는데 우리 둘 다 이반 녀석이 소위님에게 용무가 있다고 막사로 가는 걸 봤습니다.”
 “그게 이상한 거였나?”
 “예. 이반 녀석은 그냥 중화기병이라 따로 소위님과 면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 결정적으로 놈은 그 쏘가리를 무척 싫어했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잖습니까? 학사장교 출신은 병사들이 꺼리는 거.”
 “음······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또 한 번 등골이 서늘해졌다. 호숫가에서 발견한 녀석. 그리고 소위는 분명 두 번째로 희생당했다고 했다. 희생. 어감이 존나 이상하잖아? 아까 상황을 보면 ‘교전’이고 ‘전사’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그리고 다음날 소위님하고 이반 녀석이 계속 이야기하는 게 보였습니다. 별일이구나 하고 그냥 넘겼습니다. 하지만 제 촉은 살살 감이 안 좋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군.”
 “예. 촉은 그래도 이 빌어먹을 세계가 뭔지 알 수 있었어야지요.”
 어쩌면 01번 실린더의 인원들은 충격요법으로 이 세계에 한 방에 적응한 건지도 몰랐다. 드래곤, 괴물, 고릴라, 거인. 그에 비해 이 녀석들은 밖이랑 단절된 채 안개 속에서 오직 자신들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무려 스물두 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찾았습니다.”
 “스물두 명이라고!”
 “예. 병사들과 프론티어 개척민을 합쳐서 스물두 명. 실린더가 근처에 떨어졌다고 둘러대더군요. 저희는 그쯤에서 의심을 했었어야 했습니다. 첫날 이후 찾은 녀석들 중에 낯익은 녀석은 그 호숫가에서 찾은 이반 녀석밖에 없었거든요. 이반은 녀석들을 잘 안다면서 농담을 주고받더군요. 소위님도 인원보고를 받고, 맞다고 그러시니 저야 믿을 수밖에요.”
 “그······그래서.”
 
 
 3)
 
 
 “그날 밤은 근무가 없어서 저는 일찍 침낭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는 도중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났습니다. 아, 이 녀석들 나 몰래 또 식량에 손을 댔구나 하고 일어나 보니······.”
 다시 02번 실린더 인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 입으로 뭔가가 들어오려고 하는 겁니다. 시······ 식물이랄까요? 아무튼 그걸 들고 있는 녀석은 그 호수가의 이반이라는 녀석이었습니다.”
 “······.”
 “저는 깜짝 놀라서 놈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그리고 놈이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얼굴이 입 여기부터 여기까지 갈라지고 혀가 쑤욱 나오면서······.”
 씨발······ 이게 무슨 3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란 말인가! 설마설마 했는데 처음 그 이반이란 녀석은! 나중에 한꺼번에 찾은 20여 명의 인원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강화방벽 안에 그것들이 벌써 스무 개체 이상 들어와 있었고 프론티어의 시민들과 이 녀석들은 그 무시무시한 외계생물에게 차례로······. 그래서 전사가 아니라 희생이었군.
 “저는 중위님에게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순양함에 올라가서 군사재판을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알겠어. 더 말하지 마.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그랬을지도 몰라.”
 나는 중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었다. 이 무리 중에는 프론티어의 개척민이 하나도 없었다.
 프론티어의 사람만 우연하게 전멸 당했다? 아니겠지. 아는 사람으로 위장한 사람들. 결국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이 시민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병사들끼리는 내 인식표처럼 서로만이 아는 뭔가가 있겠지만 프론티어의 아자씨들은 그 혼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씨발······. 나는 입맛이 썼다. 프론티어의 시민들을 지켜야 할 호위군이 아무리 혼란 상황이라지만 시민들을 죽였다. 이 이야기가 프론티어 쪽으로 들어간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 다음은 중위님이 보신 대로입니다. 그놈들은 때론 우리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또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끊임없이 안개 속에서 몰려 왔습니다. 중위님의 모습도 있었지요.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라고 믿지 않은거구만?”
 “예. 커넬 샌더스가 이제 괜찮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완성되었다고 방벽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꼬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놈들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 거인을 봤던 녀석도 그렇고 이 녀석들도 그렇고. 시발······. 용가리랑 싸운 우리는 제일 사정이 나은지도 모른다. 나는 줄지어 있는 무덤을 보고 담배연기를 후욱 내뱉었다.
 누군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으랴. 이 녀석들은 일주일 동안 실린더의 기자재들을 지키면서 죽기 살기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핏자국과 녹색의 뭔가가 말라붙은 녀석들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좋아. 이미 바니테일이 지도를 확보했다. 직선거리로 30분 정도만 걸으면 이 개 같은 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거야. 생츄어리······? 지랄한다. 안개지옥이지.”
 “기사님······.”
 라피르는 슬픈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시발 뭐? 지옥을 지옥이라 그러는 건데. 나도 이 빌어먹을 안개가 슬슬 지긋지긋해지려고 한다.
 “실린더를 잠그고 떠나자.”
 “기······기자재를 포기하는 겁니까? 저 안에는 공작기계와 소규모자재가······.”
 “아니. 니들이 더 중요해. 지금 상태로는······. 다른 실린더를 구한 후 다시 오는 게 좋겠다.”
 “하지만. 중위님.”
 “명령이다 중사. 02번 실린더를 폐쇄 후 전장을 이탈한다.”
 내 명령을 듣고 녀석들의 표정에는 온갖 표정이 교차했다. 슬픔. 분노. 안도. 나는 중사의 어깨를 두드리고 일어섰다.
 “얘기를 들어보니 기생식물······. 도플갱어로군. 스내처라고 부르기도 하지······.”
 어? 할배? 지금 뭐라 그런겨? 할배가 날카로운 눈으로 안개 속을 쳐다봤다. 씨발, 아까부터 그럴 거 같더라니. 나는 아까 놈들이 날 봤다느니 어쩌고 할 때부터 도플갱어의 전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라피르와 할배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알프하임의 아가씨. 성역이 오염되었군.”
 “예. 슬픈 일입니다. 스카디 님이 사랑하셨던 호수였는데요······.”
 “흥. 나는 발할라의 신들을 좋아하지 않아. 놈들은 하나같이 이기주의자거든.”
 “······.”
 할배 뜬구름 잡는 소리는 됐그든요? 나는 그 도플갱어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뜻이나 전설 따위야 나도 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마주치게 되고 그 사람은 며칠 후에 죽는다. 왜? 이유는 모른다.
 “할배. 그 도플갱어라는 게 뭐요?”
 “도플갱어가 도플갱어지 뭐긴 뭐야.”
 “아니, 나도 대충 알기는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할 수 있는 거냐고요.”
 “음······. 그러면 이해가 갈라나? 고어로 가능한 비슷하게 말하면 복제인간이랄까?”
 “보······복제인간?”
 할배의 입에서 웬 로켓제너레이션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클로오오온?
 아무튼 내가 미드가르드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자 병사들은 눈을 껌뻑이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놈들아. 허당 윌리엄스 중위님이 실은 이런 능력자였다 이거야.
 “보······복제한다니 뭘?”
 “인간의 모습이지. 자네들이 봤다던 동료는 이미 몸 안에서 놈들에게 먹혔고 껍데기뿐이었다는 이야기지.”
 “으······으웩······.”
 나는 내 몸속에서 내 살을 씹어 먹는 뭔가를 생각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할배들 말대로라면 식물 따위가 어째서 동물들에 몸에 그따위 짓을 하는 거지?”
 “놈들은 기생식물이야. 산돼지, 노루, 뭐든 안 가려. 숙주의 몸에 기생해서 ‘씨앗’을 전파하지. 고등생명체이면 더욱 좋고······. 그렇게 해서 번식하는 거지. 민들레 씨앗을 생각하면 편해.”
 “저 녀석 입에 들어가려고 했다던 게······.”
 “씨앗이야. 그게 숙주의 몸에서 다 자라면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이 이런 식으로 박혀서 성장하면 그중에 하나가 또 다른 본체가 되지.”
 바솔로뮤 할배는 땅에다 시범을 보였다. 그 시범대로라면 사람이 거꾸로 박혀서 퍽하고 그 몸 안에서 정체불명의 식물이 다시······. 으윽 쏠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비위가 존나 약하다니까.
 “본체는 또 뭐요?”
 “본체가 본체지, 뭐긴 뭐야? 본체는 촉수를 이용해서 또 다른 ‘형상’을 만들 수도 있고······. 어린 본체도 있고 큰 본체도 있고. 흥.”
 아오. 이 망할 할배. 지가 무슨 이팔청춘 여고생이여? 말할 때마다 톡톡 쏴대긴 왜 쏴대? 할배를 다그치려고 할 때 바니테일이 말을 끊었다.
 [주인님. 정다운 대화를 방해하긴 싫지만 제 음파 탐지기에 수많은 ‘인간 형체’가 포착되었습니다.]
 “뭐라고?”
 “아마 그 본체 중의 본체가 여기 있다면 별의 기사 자네는······.”
 아, 그니까. 본체가 뭐냐고? 할배는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뭔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시발 저 양반이 저러는 거 보면 또 존나게 싸워야 한다는 건가?
 “새꺄들아! 마지막으로 한 방 신나게 털어먹고 복귀한다!”
 “예, 중위님!”
 녀석들은 씨익 웃으면서 탄창과 에너지탄창을 주고받았다. 웃지 마라, 새꺄들아. 정들겠다. 흐흐흐.
 “바니테일. 탐측정보를 전원에게 공유.”
 [알아 모십죠. 10여 미터까지는 공유 가능합니다. 또 하나 서버를 열어서 중첩공유방식으로 공유하겠습니다. 0.2초의 딜레이가 있습니다.]
 “오케이. 그딴 건 니가 다 알아서 해라.”
 [뉘에뉘에.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크하하하하! 중위님 마누라를 어디서 가져오셨구만요!”
 저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자 다들 크하하하 하고 웃었다. 쇄키들. 내 마누라는 아직 공석이다. 시발롬들아. 물론 애기 낳아주겠다는 여자는 있지만.
 신음을 터뜨리면서 절정에 오르는 리타. 또 아랫도리가 주책맞게 꿈틀거렸다. 헤헤. 어? 시발. 라피르 내 생각도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녀는 째릿 하고 나를 쳐다봤다.
 “기사님. 마법사님의 말대로 본체가 있을 거예요. 그걸 공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니까, 아오. 그 본체란 게 뭐냐고?”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다른 말로는 숲의 주인······.”
 “······.”
 [주인님! 적 접근 곧 육안 가시거리입니다!]
 씨발······. 나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녀석을 보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말 샌더스 대령이었다.
 “저놈들은 숙주의 기억까지 지배한다네. 뇌를 쫄쫄 빨아먹어서 기억을 흡수한 거지.”
 “그게 말이 돼요?”
 “놈들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들기도 해. 또한 놈들끼리는 빨아먹은 기억을 주고받기도 한다네. 복제야 어렵지도 않은 거지.”
 “오······옷들도?”
 “흉내를 내는 거지. 잘 보시게. 진짜 옷은 아니야.”
 뭔 놈의 식물이 유비쿼터스에다 패션디자이너여 아주 그냥.
 중사 이하 병력들은 내 발포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한번 가짜 샌더스 대령이 뭐라고 하는지 볼까?
 “나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더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이미 궤도 엘리베이터는 완성되었다. 그러니 어서 내려와서 맥주를 들자!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야이, 시발롬아. 뻥을 깔라면 제대로 까라! 내가 01번 실린더에서 왔다 이놈아! 아직 좆뱅이 까고 있는데 무슨 완성이여!”
 “아니다. 주······중위. 중위? 중위. 그······ 그대는 존 윌리엄스 중위겠지? 중위 이미 궤도 엘리베이터는 완성되었다. 이리 내려오라.”
 “좆을 까세요. 궤도 엘리베이터가 뭔지나 아냐? 이 빌어먹을 외계 식물놈아! 식물이면 식물답게 동물에게 잡아 처먹히라고! 으디서 근방지게 내려오라 마라야! 엿이나 먹어라!”
 나는 욕질을 퍼부은 후 화약식 자동소총을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개인적으로 술꾼 대령님에게 감정은 없습니다요? 따······ 딱히 술을 안 줘서 대령님에게 화난 건 아니라구. 흐흥.
 샌더스 대령의 몸체를 한 뭔가가 세로로 갈라지면서 징그러운 본체가 튀어 나왔다. 으웨에엑. 누가 날 다시 문명세계로 되돌려줘!
 나는 화약식 자동소총으로 놈을 긁어버렸다. 시발롬 꼴좋다. 녹색과 토마토 같은 피를 흩뿌리면서 그 개체가 땅에 쓰러지고 그걸 신호로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근데 시발롬들이 이쪽으로 총질을 하는 게 아닌가?
 “총이라고?”
 “예! 놈들은 노획해간 총을 다룰 줄 압니다!”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외계식물 같으니라고!”
 드드득 하고 강화방벽에 레일건이 훑고 지나갔다. 식물이 총을 쏘고 있다고! 식물이! 그래서 02번 실린더에 총을 쏴도 지랄같이 반응한 거구만? 그동안 우리가 상추와 양배추를 으적으적 씹어 먹은 복수라도 하는 거냐. 식물이면 식물답게 샐러드 재료로 얌전하게 비벼지라고 이렇게!
 다시 퍼버벅 하고 누군가의 몸체가 박살이 났다. 놈들은 끼에엑거리면서 어떻게든 강화방벽을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쪽 숲의 나무에서도 휙 하고 원숭이처럼 뛰어오르는 놈들도 있다.
 먹어라, 이 식물 새키들아! 달 궤도에서 만든 뜨끈뜨끈한 레일건 탄자다!
 “밑도 끝도 없잖아!”
 “흐흐흐.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지랄 같다고!”
 나는 숲의 바닥에 깔려있는 풀떼기들과 싸우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각양각색의 인간으로 분장한 녀석들이 때로는 연방 공용어로 동정을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끼에에엑거리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02번 실린더 놈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일주일을 이렇게 보냈다고? 일주일을! 신경다발이 실린더 굵기가 아니고서야 이걸 어떻게 버텨!
 “우리 예쁜 바니테일! 빠져나갈 방법이 없겠냐?”
 [음······ 주인님 이번만큼은······ 제 센서가 거의 다 먹통이라.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오, 씨발! 좆 됐군. 존 윌리엄스 선생 제대로 좆 되셨어? 바니테일이 공손하게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답이 없는 거다.
 중기관총이 불을 뿜고 벌써 소드맨들은 시체를 딛고 오르는 적들을 레이저 커터로 베었다. 근접 소드맨들이 레이저 커터를 빼들 정도면 말 다한 거지. 모든 구역을 침범 당하다니······.
 바니테일이 띄워주는 액니브소나 화면에는 숲 전체가,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피르가 말한 대로 진짜 숲의 주인이 우리를 죽이려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어이, 중사! 늘 이랬어?”
 “아니오! 오늘은······. 심합니다!”
 씨발. 다행히도 이 실린더의 양자발전기는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운용할 프론티어의 기술자 아자씨들이 몰살당했지만······.
 “바니테일. 양자발전기를 이용할 수 없을까?”
 “예. 알아보겠습니다. 주인님. 장비 목록을 다운 받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또 한층 더 얄궂은 건 이쪽은 양자발전기가 제대로 돌아가는 대신 그 에너지를 이용할 야포나 에너지 병기가 없었다. 추력포라도 있으면 이 육시럴넘의 풀떼기들 다 쓸어버리는 건데······.
 나는 문득 품안에 넣어둔 추력포 지시기를 만지작거렸다.
 “중위님! 레이저 커터가 과열되었습니다!”
 “내 걸 써라! 중기관총 리로드! 리로드!”
 “오너! 서비스 감사합니다!”
 “새꺄, 내가 무슨 음식점 알바냐!”
 “중위님! 여기 탄창 2인분 추가요!”
 “알갔다. 쫘식들아!”
 나는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놈들을 돕고 있었다. 흐미. 환장하겠군.
 “바니테일! 놈들의 전술을 알겠다!”
 [예? 그게 무슨!]
 “시체로 산을 만들어서 벽을 타 넘으려고 한다!”
 이미 방벽의 밑에는 완만한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고, 뒤에서 끼에엑 하는 복제인간 놈들은 쉽사리 이쪽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과연. 그쪽도 대책을 짜겠습니다.]
 “아이구, 이쁜 것!”
 [설마 저를 로봇 프레임에 다운로드시켜서 범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시발 여기를 벗어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거든!”
 [동네 사람드을! 여기 인공지능을 범하고 싶다는 변태가 있어요오~!]
 다시 웃음소리가 픽픽 터졌다. 강하엽병들은 또 그놈의 고리고리(gori gori)타령을 부르면서 흥을 돋웠다. 니들 제발 그 노래는 안 부름 안 되겠니? 에효. 그래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떠는 것보단 이게 낫지. 에라이 기분이다! 마음껏 불러라!
 나도 어느새 흥얼흥얼, 시발시발 하는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아, 약 빤 새끼들. 군가 부르랄 땐 존나게 안 부르고 이럴 때만 신나게 불러요? 하여튼 말은 존나게도 안 듣는다.
 “씨발씨발 씨발 멋지게 뒈졌군! 헤이! 씨발 시발 씨발 멋지게 뒈졌군!”
 아니다 이럴 땐 중장기병가를 불러야지! 언덕 위의 티거처럼 머나먼 지구시대부터 ‘기갑병’들과 함께 해온 노래! 나는 자동소총탄창을 갈아 끼우면서 목청을 돋웠다.
 “폭풍이 불던지! 태양이 우리를 향해 웃어도! 존나게 뜨겁거나, 존나게 춥고, 배고프고, 우리들은 먼지투성이지만 우리는 행복해. 아, 존나 행복해. 우리들의 전차는! 적진으로 달려간다!”
 흐흐흐. 녀석들은 이 노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판쩌리트’는 뭐 병과불문하고 다들 좋아하는 노래니까. 우리는 ‘아, 존나 행복해’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리면서 낄낄댔다.
 행복과는 억만 광년쯤은 떨어진 상황이지만 그래. 우리들은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남을 거다. 알아 처먹겠냐? 이 건방진 식물 풀떼기 놈들아! 우린 안 죽어!
 
 
 4)
 
 
 얼마를 그렇게 싸웠을까? 과열된 포신에 물까지 부어가면서 우리는 미친 듯이 총을 쏘고 있었다. 숲 자체가 우리와 싸우려고 한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하······할배 지금 뭐하는 거여?”
 “마법. 얻어먹은 밥값은 해야지?”
 할배는 쿵푸 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앞으로 불덩이들을 날렸다.
 중사 이하 02번 실린더의 병력들은 마법을 보면서 얼떨떨해졌다. 불덩이가 휙 하고 날아가 보기 좋게 도플갱어들을 타닥타닥 태워 버렸다. 할배는 연이어 계속해서 불덩이를 날리면서 동료의 시체를 타고 넘어오는 풀떼기를 불살랐다. 아예 강화 방벽의 한쪽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윈드커터. 도와주렴. 정령들아!”
 이쪽에서는 라피르가 정령들을 부려서 놈들의 목을 하나하나 날려버렸다. 쥑이는군! 미친 듯이 몰려오던 놈들의 기세가 두 명의 활약으로 잠시 꺾여버렸다.
 [주인님! 산탄포와 간이 추력포를 만들었습니다!]
 “뭐······ 뭐시라?”
 [장비 목록을 확인 안 하셨군요! 02번 실린더에는 공작기계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우리가 미친 듯이 싸울 동안 바니테일은 인형기 하나를 손수 조종하면서 ‘괴작’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괴작. 저거 발사하다 부서질 것 같은데?
 전체적인 모양은 케이스를 벗긴 헤어드라이어 같은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지구시대 전장식대포(나폴레옹 전쟁 때 쓰던 것)같은 투박한 대포가 놓여 있었다.
 [레이저포는 광학정찰용 모듈을 개량했고, 산탄포는 틸트로터의 추진기를 개조했습니다.]
 “시발······. 폭발은 안 하겠지?”
 [에이, 설마요.]
 “야! 쇄캬. 설마라니?”
 [100% 보증은 못 드립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거든요.]
 야, 존나 불안하다? 너 왜 어깨는 으쓱하는 거냐? 에라이.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어서야!
 “중사! 세 명만 빼! 쏴보자!”
 “예! 호세! 제레미! 날 따라와!”
 이미 풀떼기들은 강화방벽을 거의 다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엉성해 보이는 물건들을 대충 중기관총 거치대에 올리고 포격준비를 했다.
 “시발, 이게 뭔 18세기 해적질하는 것도 아니고!”
 “흐하하하! 중위님은 해적선장으로 딱 어울린다구요!”
 “중사 그럼 자네는 외다리 갑판장인가!”
 “말만 하십시오! 선장님!”
 말이 산탄포 이름만 좋지 18세기 해적선의 똥포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볼베어링에 너트를 미친 듯이 퍼 담았다.
 그야말로 뻥 뚤린 파이프를 반으로 자르고 전도체를 붙인 간이 대구경 레일건. 이래서야 원거리 포격은 무리지만······.
 “발포! 전방주의!”
 “으햐아아아아! 속 시원하다아아아!”
 의심해서 미안. 바니테일! 시발 이거 최곤데!
 마치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한 번의 포격으로 강화방벽에 쌓인 식물들의 시체들이 쓸려 나갔다.
 다시 한 번! 너트들과 볼베어링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쾅쾅 튀고 저 뒤에 있던 풀떼기 녀석들이 녹색의 피인지 수액인지를 흩뿌리면서 쓸려 나갔다. 좋아, 좋아!
 “이거 전도체만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딱 봐도 1세대 레일건이잖냐!”
 “귀중한 베어링하고 너트 따위를 이렇게 소모해도 상관없습니까!”
 “괜찮아! 너트가 필요하다면! 바니테일 녀석은 지옥에서라도 만들어 가지고 올 거야!”
 “거 쓸 만한 인공지능이군요!”
 다시 콰앙!
 나하고 중사는 미친듯이 볼 베어링통을 날랐다. 어디보자. 다음은 간이 레이저포인가? 이쪽은 진짜로 트리거를 눌렀다간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다.
 “바니테일 안전한 거겠지!”
 [거 참, 속고만 사셨나?]
 “좋아! 발사! 섬광에 주의할 것! 광학주의! 광학주의!”
 확산레이저가 앞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뻥 뚫린 공간으로 풀떼기 놈들도 끼에엑 끼에엑거릴 뿐 감히 어쩌지를 못한다. 크하하. 문명의 힘이다 시발롬들아. 너희 풀떼기들은 인간에게 정복받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알아들어!
 할배와 라피르의 마법, 그리고 바니테일이 만들어준 즉석 포들이 놈들을 차근차근 제압하고 있었다. 나는 할배와 라피르에게도 구역을 지정하면서 씨익 웃었다. 이대로라면 이긴 건가? 저 식물무더기를 상대로?
 “중위님!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시바랄 놈들 기특하게도 담배 피울 시간은 주는 거냐? 어? 라피르? 왜 그래?”
 “알프하임의 아가씨들은 식물들과도 교감할 수가 있지. 이런 제기랄······.”
 할배. 뭐라고? 아니, 식물과도 교감한다고? 그런 아가씨가 밥은 그렇게 잘 먹는다고? 밥 먹는 거 보면 아주 빵이랑 스프랑 전투하는 것 같더만.
 “보······본체가 와요.”
 “아니, 그니깐 그 본체가 뭐냐고? 아까부터 본체본체 하는데?”
 “저게 본체라네. 숲의 주인.”
 으억! 시발! 안개 저 너머로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강하 전날 프론티어의 배에서 그 동생물학자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중력이 0.9배라 아마도 지구보다 큰 생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자씨 그때 내가 딴지 건 거 미안. 아니다. 아자씨도 이 미친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여. 저걸 생물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이야?
 “조심하게! 기사여!”
 “촉수? 아주 지랄이 풍년이구만!”
 카앙 하고 수많은 촉수들이 강화방벽을 때려댔다. 마치 무슨 총탄처럼 촉수들이 날아와서 방벽을 긁어놓았다. 빌어처먹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환장할 놈의 촉수는 강화방벽의 조립 틈새로 파고들어서 방벽을 해체하려고 하고 있었다. 삐걱삐걱 강화방벽의 조립체가 곧 부숴질듯이 흔들렸다.
 “시발 레이저포를 들이부어!”
 확산레이저 포가 안개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놈의 본체를 때렸다. 아니 때렸다고 생각했다.
 잠시 멈춰서 있던 본체는 순식간에 잘려나간 부분이 원상회복되면서 정확히 레이저가 발사된 곳으로 촉수를 날렸다. 핑. 씨발 저 새끼 촉수를 음속을 뛰어넘는 속도로 날리고 있어.
 “이런 씨부랄!”
 바니테일이 급조한 레이저 대포와 산탄포 역시 촉수에 부서지고 말았다. 한 술 더 떠서 실린더와 강화방벽은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점점 식물들의 촉수로 뒤덮이고 우리는 급기야 방벽에서 뛰어내려 실린더로 달렸다. 시발! 어째 존나 잘 풀린다 싶었지! 땅바닥에 굴러먹지 않으면 내 인생이 아니지!
 “바니테일 실린더를 폐쇄 준비! 저 풀떼기 개객기에게 버틸 수 있겠어?”
 [글쎄요······ 저 촉수가 문제입니다. 단차가 없는 틈도 비집고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실린더도 위험할 듯싶습니다.]
 “아오, 시발!”
 [주인님. 저를 믿으십니까?]
 “뭔 개소리야? 당연히 신뢰하지!”
 [그럼 그레네이드 런쳐로 이 통신기를 하늘로 쏴 올려 주십시오.]
 “뭐? 너 미쳤냐? 널 백업받을 만한 기기도 없다고!”
 [아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 조사대로라면 안개의 농도가 옅어지는 건 대략 상공 70m까지. 픽시를 이용할 수 없다면 제가 어떻게든 01번 실린더에서 이쪽으로 통신중개를 해서 포격지시를 하겠습니다.]
 “너······.”
 [후후. 주인님은 늘 말했잖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도 주인을 닮아가는 걸까? 놈은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따라하고 있었다.
 [01번 실린더의 추력포라면 저 식물을 확실하게 잠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추력포를 쓰면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이······.”
 [정의란 무엇인가. 저는 그 책의 서문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두를 살리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제1원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겐 판단권이 있으니까요. 또한 주인님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당장 죽을 사람을 구해라. 제 로직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주일간 지옥을 맛본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글쎄······ 나 혼자의 목숨이라면 모르지만 고생만 쌔빠지게 한 이 녀석들을 당장 이렇게 죽일 순 없다. 11명이라면 01번 실린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원이고.
 또 바니테일은 로봇 3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 생명의 우열. 바니테일은 저 위에 있는 수만의 잠재적인 희생자보다 지금 죽기 일보직전인 이들을 택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새끼 사람 짠하게 하고 있어.
 “거기에 또 하나 복안이 더 있습니다.”
 “복안은 또 뭐야?”
 “후후. 비.밀.입니다.”
 이 새끼가? 녀석은 부하들이 경례하듯 경례하는 시늉을 했다.
 이 녀석 말이 맞기는 하다. 인공지능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백업할 기기가 따로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녀석은 중장기병 오퍼레이팅에 커스텀된 녀석이라 다른 통신기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또 백업받을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고. 시발롬. 회수해 주마. 회수해 주겠다.
 “주인님. 시간이 없습니다.”
 “조······ 좋아. 살아 돌아와야 한다.”
 “하하! 잊으셨습니까? 저는 인공지능입니다. 고로 저는 죽지 않습니다.”
 뒤에서 호세 녀석이 강하엽병들의 감속용 낙하산모듈을 건네고 빙긋 웃었다. 이놈도 바니테일에게 목숨을 빚졌지. 나는 내 통신기에 낙하산을 비끄러매고 그레네이드 런쳐에 집어넣었다.
 “몇 분을 버텨야 하냐?”
 “5분쯤이요?”
 “좋아! 다들 들었지! 5분이다! 5분만 기다리면 이 빌어먹을 인공지능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모두 들었지!”
 “예. 중위님! 5분입니다!”
 “5분입니다!”
 그래 최후의 5분이다.
 삑!
 바니테일은 마지막으로 내 헤드모듈에 증원시간을 표시해주었다. 퐁. 바니테일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씨발. 버텨보자!
 우리를 핑핑 우리를 향해 육박하는 촉수들과 기어코 쓰러진 방벽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놈들의 대군과 맞서 싸웠다.
 증원포격까지 4분 37초.
 “중사 포메이션 D! 소드맨 두 명 앞으로! 나도 전열로 나가겠다!”
 “아니오! 중위님은 뒤에서 지시하십시오!”
 “별의 기사여. 내가 앞으로 나가겠네.”
 허. 마법사는 아스타로스의 방패인지 뭔지를 마법으로 뽑아들고 소드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할배까지 하면 소드맨은 총 네 명. 양자발전기야 아직 쨍쨍하니까 세 명이 순차적으로 교대하면서 탄창을 교환하면 된다. 걸리는 건 레이저 커터 자체의 과열이다. 이미 권총 손잡이까지 뜨뜻해져 있었다.
 “바니테일! 레이저 커터의 가동시간을······.”
 시발. 맞다. 녀석은 위에 있지. 망할 바니테일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이 녀석은 부하 수십 명 분의 일을 혼자서 처리한 거다.
 제기랄. 4분 21초. 우리는 실린더의 입구에서 촉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드맨들의 강화방패와 할배의 마법방패로 팅팅 촉수가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치고, 끼에엑거리는 도플갱어들이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발. 로켓제너레이션의 시대에 이 지랄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환장하겠군!”
 “제 말이 말입니다!”
 중사와 나는 소드맨의 뒤에서 미친 듯이 소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데나 쏴도 녹색과 토마토 같은 붉은색 체액을 흩뿌리면서 놈들이 쓰려져 간다. 나는 마치 좀비들과 싸우는 기분마저 들었다.
 끼에에엑!
 알았다 시발롬아 총알을 먹고 싶은 거냐? 먹여주지! 네놈도! 네놈도!
 “잼! 잼(jam-총알 걸림)!”
 “이걸 쓰십쇼!”
 나는 유서 깊은 AK-74를 내던지고 중사가 건네는 화약식 권총을 받아들었다. 시발. 화약식 총기는 누가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여? 이건 최후의 병기다. 부피도 크고 그냥 예비용으로 저장한 물자들인데······.
 거기서 나는 퍼뜩 05번 실린더의 비극을 떠올렸다. 거기서도 밀리고 밀린 녀석들은 화약식 총기까지 사용했었다.
 개새끼들. 나는 아직 거인들에게 복수도 못했다. 이곳에서 죽을 순 없다. 팅팅. 권총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중사는 내 어깨너머로 다시 스마트 자동소총을 건넸다.
 “뭐야 이건? 좋은 게 있었잖아!”
 “제 총입니다. 중위님이 쓰십시오!”
 “너는!”
 “흐흐. 여차하면 이걸······.”
 “이 개색갸. 그건 생각도 마라.”
 중사의 조끼에는 수류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2분 10초. 시발롬 뒤에서 뭐 하고 있나 했다! 나는 발로 중사의 배를 후려 까서 자빠뜨렸다.
 “시발롬아. 하다 하다 안 되면 뒈지는 건 다 같이 뒈지자! 그 전까지는 버텨. 바니테일은 반드시 저 새끼를 박살낼 거다.”
 “하지만······.”
 “좆 까. 내 명령 없이 뒈지는 새끼들은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후장을 따버릴 테니까.”
 녀석들이 킬킬 웃었다. 개색기들아, 아까처럼 군가나 부르란 말이야. 그 따위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총을 쏴!
 삐잉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경화방패가 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배. 시발 밥값은 해주는구나! 할배가 방패를 뚫어 버린 촉수를 잘라주지 않았다면 아마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방패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감싸 쥐었다.
 흠······ 그런데 이상한 걸? 놈은 굳이 머리가 아닌 방패를 노렸다. 한 방에 노릴 수 있었음에도······.
 “라피르! 치료 부탁해!”
 “예! 기사님!”
 라피르는 정령을 부리다 말고 쓰러진 녀석을 뒤로 질질 끌었다. 좋아. 1분 21초.
 복싱을 해본 녀석들은 알거다. 3분? 존나 조루새끼들이 싸버릴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지금 우리들은 1초, 1초를 거의 1년의 단위로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무너진 강화방벽으로 밑도 끝도 없이 끼에엑 하는 복제인간들이 떼로 달려들고 좀 더 굵은 촉수들이 강하 실린더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구웅구웅. 실린더가 쓰러질듯이 심하게 요동쳤다.
 “중위님! 저게 뭡니까!”
 “나도 몰라, 새끼야!”
 
 
 5)
 
 
 드디어 안개 속에서 서서히 본체인지 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식물? 그 거대한 뭔가가 등장하자 작은 풀떼기들은 일제히 길을 터주면서 멈춰버렸다. 퍽퍽퍽. 도플갱어인지 작은 놈들은 뭔가 저 커다란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허어.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큰 본체구려. 새로운 숲의 주인인가······.”
 “할배, 씨발. 강 건너 불구경하는 거여 뭐여?”
 “흐흐흐. 별의 기사여. 어쩌면 자네와 나 둘 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 또한 운명이겠지.”
 허허허. 허허허. 뒈진다는 이야기를 새해 덕담하듯 말하니까 아주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그려?
 나는 식물 어쩌고 하길래 발이 달린 식충식물을 생각했다. 왜 있잖아? 애들 만화에 자주 나오는 그 모양. 대가리는 삐죽삐죽 이빨이 난 꽃모양에······. 근데 내 눈앞에 있는 저건 상상을 초월한 모양이었다.
 “드래곤?”
 “용의 몸체에 기생했군요. 과연 성역을 오염시킬 만한 힘입니다······.”
 “저 용도 이름이 있었던 용이었군. 광룡(光龍) 그나이제나우······ 멍청하게 스내쳐에게 몸을 빼앗기다니······.”
 라피르는 상처를 치료하다 말고 덜덜덜 떨고 있었다. 할배는 할배대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떠는 게 당연하지. 씨발, 처음에 그 알버레이크인가 하는 놈으로 용가리에는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저건 뭐야? 그놈보다 더 무식하게 크잖아? 게다가 등에는 이름 모를 거대한 꽃이 하나 크게 피어있었고, 눈이나 입은 이끼가 가득 덮여서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
 마이너스 00:08초.
 삐잉.
 바니테일이 예고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강하엽병들은 헤드모듈을 벗고 멍청하게 나를 바라봤다. 제기랄. 총성은 멎었고 끼에엑 하는 소리도 멈췄다. 들리는 것은 쿵쿵 거대한 꽃용가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뿐이었다.
 “중위님. 비키십시오.”
 “뭐 시발. 어쩌려고?”
 “제가 저 포위망의 한가운데서 자폭하겠습니다. 거기로 뛰십시오. 놈의 주의는 끌 수 있겠지요.”
 “좆 까. 그런 걸로 놈은 꿈쩍도 안 해.”
 “그럼 여기서 다 죽자는 말씀이십니까! 이걸 받으십시오.”
 놈은 자기 인식표를 내게 건넸다.
 “개새꺄! 싫다고! 더 이상 부하가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고! 알아들어! 모가지가 무거워 죽겠어!”
 나는 제임스 어쩌고 중사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쳤다. 쿵쿵. 그 사이에도 꽃용가리는 이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실랑이를 할 틈도 없이 놈이 꼬리로 실린더를 후려쳤다.
 입구에 있던 우리는 그 바람에 엉망진창으로 굴렀고, 다시 끼에에엑 하는 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용가리에 똥개에 일주일 동안 죽을 고비를 존나 넘겼구만. 내 일생에서 존나게 다이나믹한 일주일이었다. 흐흐흐흐흐흐. 그때였다.
 「약간 ······었습니다. 주······ 님. 데헷♥」
 “시발롬아 하트는 집어치우라구. 하트는······.”
 나는 부러진 이빨과 피 섞인 침을 칵하고 내뱉고 씨익 웃었다. 놈이 보낸 텍스트는 깨진 부분이 있지만 놈은 성공했다. 어떻게 아냐고?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멋지다! 인공지능!”
 “이피카이예이이이이이이이! 씨발색갸!”
 “최고다아아아아아아!”
 녀석들은 엉망진창이 된 포즈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뭔가에 얻어맞고 용가리가 옆으로 쿵하고 쓰러져 버렸다. 커다란 몸체가 두 발 세 발 밀려나더니 나무들을 죄 깔아뭉개면서 저쪽에 엎어져 버렸다. 그 뒤로 이끼들과 썩은 살덩이들이 파바박 쏟아져 나오고 꽃용가리는 지랄 같은 괴성을 질렀다. 아오, 시끄러. 몸체가 크다보니 거의 지구가 울부짖는 듯한 느낌이었다.
 쐐애애애애애액.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우유를 휘젓듯 안개를 휘젓고, 뭔가가 날아와서 용가리를 맞춘 것이다. 맛이 어떠냐, 이 새끼야! 어? 어······. 어라? 일어선다? 추······ 추력포를 맞고도 이······일어선다! 이런 씨발, 개 같은!
 “어······. 설마. 그걸 쳐 맞고도?”
 “세상에 씨발,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딨어!”
 “기사님······.”
 라피르는 내 품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놈이 다시 일어선다. 떨어져 나간 부분이 식물들이 좌악 뻗어 나오면서 잠시 드드득 소리와 함께 원상회복이 되어 버렸다. 아. 아까 레이저 대포에 맞은 부분. 이끼가 없는 부분은 식물줄기 같은 뭔지가 수북한 부분이었다.
 제기랄······ 사기잖아? 씨발, 구라도 정도가 있지······. 그놈은 뜻밖의 공격에 화가 난 듯 다시 지축을 뒤흔드는 포효를 했다. 오히려 01번 실린더의 포격은 화만 돋운 것 같았다.
 “흐흐흐. 별의 기사. 잘 듣게. 내가 목숨을 걸고 그대들을 이 성역 밖으로 내보내겠네. 바솔로뮤의 활약을 부디 후대에 전해주게.”
 “할배도 좆 까지 마시고······. 잠깐만! 아무나 헤드모듈을 줘봐!”
 퍼뜩 아까 말한 바니테일의 ‘복안(plan B)’이라는 게 걸렸다. 나는 망원모드로 바꾸고 ‘뭔가’를 찾았다. 그 녀석이 과연 이 따위로 일을 처리할 리가 없다. 그래 그래 그래! 그렇지! 그렇지! 아이구 예쁜 거어어엇!
 4세대 레일건은 딱히 전도체가 아니더라도 이론상 뭐든지 날릴 수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뭐든. 뭐 도착 후의 상태는 보증 못하지만 말이다.
 [주······. 님. ······아웃! 롤······웃♥]
 “씨발롬아 크하하하하. 하트는 집어치우라니까! 하트는!”
 “어, 중위님! 어디를! 아······안 돼!”
 “중위님! 자기가 자폭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주······중위님이 미쳤어······.”
 나는 중사의 조끼에서 수류탄 하나를 뺏어 들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렸다. 자폭을 누가 하냐! 자폭을! 바니테일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나는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저쪽으로 던졌다. 제발 용갈아 저쪽을 보라고!
 펑!
 꽃용가리의 몸체가 워낙 크다 보니 ‘펑!’이라기보다는 ‘퐁!’에 가까운 폭발이었다. 그래! 그렇지! 굿 보이! 거길 보는 거다! 놈은 거대한 모가지를 돌려서 수류탄이 공중에서 터진 지점을 보는 것 같았다. 중사에게 그딴 거 소용없다고 소리친 게 다 미안하군!
 “크하하하하하! 용갈아! 목을 씻고 기다려라! 기동!”
 자, 어린이들 존나게 즐거운 퀴즈시간이야 힌트는 두 개!
 1. 01번 실린더의 추력포는 뭐든지 날릴 수 있다.
 2. 용의 이름을 계승한 드래곤 어쩌고는 존나게 단단하다.
 문제에? 자 그럼 바니테일이 레일건의 탄자(彈子)로 쏜 건 뭘까용?
 아까 용의 옆구리에서 무너져 내린 이끼와 흙더미. 거기에 바니테일이 특급배송한 엑소슈트가 있었다. 페덱스도 이 정도로 빠르진 못할 거라고! 크하하하하!
 내 목소리를 듣고 엑소슈트가 제멋대로 기잉 움직이면서 롤아웃 직전 상태가 되었고 나는 그대로 엑소슈트에 탑승했다.
 “중위 존 윌리엄스! 롤아웃! 롤아웃! 바니테일!”
 [예. 주인님!]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사누!”
 [하하. 짝사랑이시군요.]
 “쇄키야! 짝사랑이라도 좋다! 한번 걸지게 놀아보자꾸나!”
 [예! 주인님!]
 깡통맨은 깡통 안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중장기병들은 이 좁은 엑소슈트의 안에 익숙해져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전장에서 죽는다면 깡통 안에서. 그게 중장기병들의 소원이었다.
 “바니테일. 미사일은?”
 [대전차지뢰제거용 확산 도폭색을 추천 드립니다.]
 “프로페서 새끼 좋은걸 넣어주었군!”
 [예. 5분 동안 기체 점검과 저의 백업까지 다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5분이었군! 바니테일이 도폭색을 사격통제에 배정했다. 오른손 검지는 TEG-302 리니어 레일건. 왼손 검지는 파일벙커. 오른손 약지가 각종 탄도체들. 엄지발가락은 전진, 나머지 발가락은 브레이크 턴픽은 발뒤꿈치. 좋아 사격배정도 그대로군. 음속의 몇 배로 날아왔지만 소프트웨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나는 왼손 중지를 펴서 FUCK YOU를 먹이는 자세로 도폭색을 날렸다. 바니테일 자식. 이 새끼도 맛이 갔다니까? 이게 사격사인이라니?
 등 뒤에서 파앙 하고 추진체가 줄줄이 비엔나 폭탄을 날렸다. 주욱 퍼져간 도폭색은 적당한 위치에서 콰콱 하고 터졌다. 빵빵 터지는 고폭탄은 아니었지만 그 폭발압력은 지긋지긋한 풀떼기들에 고속도로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그래서 바니테일이 이걸 쏘게 한 거군.
 “중사! 길을 개척했다! 뛰어!”
 “크하하하! 중위님이 자기는 꿀맛을 보는데 우리는 뛰랍신다! 존나게 뛰자!”
 “끼얏호!”
 할배, 라피르도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호세와 중사가 손을 붙잡고 이리로 뛰었다.
 풀떼기 놈들은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니테일. 도폭선을 옆으로 발사할 수 있어?”
 [아뇨. 주인님이 손으로 잡고 옆으로 밀칠 수는 있습니다.]
 “좋아. 해보자!”
 다시 퍽 하고 도폭색이 발사되고 나는 왼손으로 줄을 잡았다. 그리고 채찍을 휘감듯 롤러대시를 밟으면서 휘돌렸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 같구만! 사람 모양의 놈들이 그물에 걸린 듯 도폭색의 줄을 부여잡고 좌르륵 넘어졌다.
 “기폭.”
 이번엔 폭발압이 옆으로 퍼졌다. 마치 파도가 치듯 시원하게 복제인간 녀석들을 쓸어버렸다. 이미 라피르들은 강화방벽 너머로 달려 나갔다. 좋아. 좋아. 이번에는 저 꽃용가리를 견제하면서 후퇴하는 거로군.
 “바니테일. 예상 기동시간은?”
 [충분합니다. 40분 이상 전투지속이 가능합니다.]
 “만날 5분, 10분 하다가 오랜만에 넉넉한 시간을 듣는구만. 크하하하.”
 저 용가리를 상대로 지구전도 가능하다. 나는 쓰러진 실린더를 바라보면서 후진했다. 반드시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바니테일 실린더 폐쇄조치는.”
 [예. 이미 시행했습니다. 곧 폐쇄됩니다.]
 어째 나는 이 강하 실린더도 동료처럼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든든한 성이고 때로는 강력한 요새.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용가리 녀석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내 쪽으로 포효하면서 쿵쿵 돌진하기 시작했다. 날 수는 없는 건가? 첫 번째 용가리도 그렇고 저 녀석도 등에는 거대한 날개가 있었다. 뭐 저딴 게 날아다니는 것도 물리학에 대한 큰 실례가 될 테지만 말이야.
 드드드득.
 리니어레일건으로도 견제 이상은 되지 않을 것 같다. 팍팍팍 하고 흙더미와 살덩이가 튕겨나가지만 저 녀석은 별다른 타격 없이 쿵쿵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중사! 바니테일이 준 지도가 있을 거야! 그걸 따라가라구! 저 용대가리는 내가 끌게!”
 [예. 중위님! 이 빌어먹을 안개 밖에서 보시지요! 술 한 잔 사드리겠습니다!]
 “흐흐. 좋지!”
 우리는 숲의 한가운데서 갈라섰다. 안개 저 너머로 우리 아이들이 사라지는 게 보이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이 엑소슈트가 있지만 저 용가리는 너무 컸다.
 [주인님. 시야 밖입니다. 원거리 무기를 쓸 수는 없습니다.]
 “소나 탐색방식으로 조준할 수밖에 없나?”
 [예. 저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저 용가리를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밖에 없나? 아니 끌어내도 저걸······.”
 보병의 다리로 뛰어간다고 해도 놈의 달리기가 더 빨랐다.
 “너도 봤지. 놈은 몸을 복구한다. 저걸 어떻게 죽이지?”
 “궤도폭격을 들이부으면 되지 않을까요?”
 “흐흐. 함대 급의 적이란 말이야?”
 “예. 아마도 지구 청색함대 정도는 불러와야 될 듯싶습니다.”
 청색함대라구? 이 녀석 농담하는 건가? 청색함대는 지구를 상징하는 제1우주공격함대의 별명이다. 당연히 우주최강의 전력이지. 거의 모든 병사들은 ‘날 죽이려면 지구 청색함대쯤 불러오라구!’ 하고 농담을 해댔다.
 “바니테일. 청색함대도 순양함의 궤도폭격도 없다. 시발······ 우리는 이 엑소슈트로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해.”
 [후우, 언제나 힘든 문제만을 던져주시는군요?]
 “구시렁거리지 마라. 짜샤.”
 쿵쿵.
 엑소슈트 안에 있어도 놈의 움직임은 그대로 전해졌다. 한 번 땅을 밟을 때마다 구웅 하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엑소슈트조차 살짝 들렸다가 다시 땅에 발을 디뎠다. 거기에 움직일 때마다 저 멀리에서 촉수가 핑핑거리면서 쏟아져 나왔다. 촉수는 어떻게든 움직이는 내 다리나 팔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시발, 존나게도 쏴대는군? 어이, 바니테일.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을까? 이대로라면 잡혀 버리겠어! 게다가 중사랑 라피르들이 걱정된다구! 공격을 이쪽으로 전부 쏠리게 해야 해!”
 [하아? 설마 저 괴생명체에게? 하지만 접근할 수 있을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촉수 공격이 심합니다. 그리고 본체의 공격도 만만치 않을 걸로 생각됩니다.]
 “흐흐. 그래 하기는 촉수가 다 뭐냐? 꼬리치기로 실린더를 쓰러뜨려버렸는걸? 하지만 이쪽도 드래곤 슬레이어에 타고 있다 이거야. 죽일 테면 죽여보시라지?”
 [하아. 거기서 저는 좀 빼주시겠습니까?]
 “뭐야 아까는 기세등등하게 올라갔었잖아?”
 [그······ 그건······.]
 정말로 반하겄다. 쇄키야. 바니테일의 목소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것이지만 때론 여자목소리로 때론 듬직한 남자목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주인님 음파탐지로 지형을 스캔하고 있습니다. 잠시 버텨주십시오.]
 “오케이!”
 시발. 나도 약 빤 놈들 옆에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약 빨았군. 나는 뒤꿈치를 밟고, 그 자리에서 턴픽을 했다.
 후우. 심호흡 좀 하고. 저 산만 한 덩치에게 달려들 생각을 하다니. 존 윌리엄스, 너 미친 거 아니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저 복제인간들과 꽃용가리의 주목을 끌지 않으면 중사들이 도망치는 게 더 빡세진다.
 “바니테일. 외부스피커로. 야, 이 머리에 꽃 단 미친 용가리새끼야! 여기다! 여기야!”
 쇄끼 칼같이 이쪽으로 촉수를 핑하고 날렸다. 나는 그 촉수를 솜씨 좋게 휘어잡았다. 오오 나도 깜짝 놀럤다. 이걸 잡아낼 줄이야. 오오. 하지만 촉수는 이내 시들어 버리고 다른 촉수가 카앙 하고 엑소슈트의 겉면을 두들겼다. 으으. 난 이 소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주인님. 근접전이라면 대구경 대함용 레이저 커터가 있습니다. 다만 그걸 쓰면 기동시간이 줄어듭니다.]
 “좋아. 또 한 번 썰러 가보자!”
 
 
 6)
 
 
 팅!
 놈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어김없이 또다시 반기는 것은 촉수였다. 엑소슈트가 기울어질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반대쪽의 다리에서 턴픽을 뽑아들고 지지하면서 나아갔다.
 다시 팅팅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퍼뜩 생각이 들었다.
 이놈은 내 위치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거지? 나야 바니테일이 변환해서 보여주는 액티브소나, 패시브소나 영상으로 놈의 거체를 파악하고 있다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저 본체인지 숲의 주인인지 하는 놈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데도 정확히 실린더 쪽으로 촉수들을 날렸다.
 마구잡이라고? 설마. 거의 조준해서 날리던걸? 방패를 든 소드맨이 당한 걸 보라구. 그건 저격병이라도 흉내 내기 힘든 곡예였다. 봐봐! 지금 나무 뒤로 기동했는데도 놈은 나무를 뚫고 공격했다구!
 “잠깐 확인할 게 있어. 바니테일! 엑소슈트 전 기기 셧다운.”
 [예? 주인님? 미치셨습니까?]
 “하여튼 주인한테 하는 말본새 봐라. 새끼. 말 좀 들어!”
 바니테일은 투덜대면서 엑소슈트의 전원을 껐다.
 기이이잉.
 다시 팅하고 촉수가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어처구니없게 옆에 있는 바위를 꿰뚫고 우수수 부숴버렸다. 바위 위에 있던 새가 푸르릉 날아오르고. 다시 핑. 이번엔 웬 사슴 비스무레한 동물이었다. 날아온 촉수들은 소리가 나는 곳에 꽂히고 있었다. 시냇물. 벌집.
 본체인 놈은 ‘시각’을 사용할 수 없다. 거기에 바솔로뮤 할배의 말이 결정타였다.
 -뇌에서 빨아먹은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하지.
 그래. 그동안 괜히 끼에엑거리는 복제인간들을 투입한 게 아니야. 시각정보는 그 복제인간들을 통해 본체로 이동되겠지. 엑소슈트를 탄 이후에는 복제인간들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니까 청각정보로 저격질을 한 거고.
 대충 이 빌어먹을 외계생명체가 어떤 방식으로 숙주를 사냥하는지 알아먹겠다. 다만 하나 의문으로 남는 건 그동안은 본체가 아니라 미성숙 개체들만이 중사들에게 달려든 것이냐 하는 거다.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 저 거대한 용가리가 튀어나온 걸까?
 그런 거야 바솔로뮤 할배가 또 설명하겠지. 그 양반 설명 존나게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바니테일 재기동. 놈의 탐색절차를 알았어.”
 [냉장고 문 열었다, 닫았다 하면 전기세 더 나옵니다.]
 “크하하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릴 때 엉덩이 팡팡 맞았었지! 바니테일! 놈은 너와 똑같은 방법으로 탐색을 하고 있어!”
 [예? 그게 무슨?]
 “육안관측은 저 끼에엑 하는 놈들로. 놈은 귀로 듣고 저격질을 하고 있어.”
 [아하. 알겠습니다. 우선 저 생명체의 청각을 막아야겠군요.]
 척하면 탁이다. 바니테일도 두 번의 결전으로 이쪽 세계의 전투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아니지. 바니테일은 원래 복닥대는 지상전에서 모든 변수를 분석하고 나를 서포트하기 위해 개량된 녀석이었다. 이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잊지 마라. 우리는 중사들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싸우는 거다. 저 빌어먹을 용가리의 제압이 목적이 아니야!”
 [예. 알고 있습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도가 없어서 헤맸지만 아마 중사들은 지도를 보고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시발. 강하엽병들은 도망치는 것도 죽여주게 하지. 아마 그쪽으로 따라간 복제인간들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여차하면 할배도 라피르도 있을 테고, 있을 테고······ 어?
 할배? 할배냐? 시발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여!
 “바니테일 외부스피커! 할배 여기서 뭐하는 거야? 죽고 싶어!”
 “별의 기사여! 함께 싸우지. 그나이제나우는 녹록한 용이 아니야!”
 이 할배가 미쳤나? 도대체 어떻게 따라온 건지는 몰라도 할배는 촉수들을 튕겨내면서 우아하게 춤을 추시고 앉아있다. 아오! 할배 당신이 있으면 더 빡세진다니까!
 “외부탑승용 손잡이 빼겠습니다. 출력저하 3%.”
 할배는 냉큼 엑소슈트의 등에 달린 발판에 올라섰다. 시발. 보기(步機)합동 훈련 때나 쓰는 거다. 주로 보병 중대장이 저기 타서 나한테 소리를 꽥꽥 질렀지. ‘저어어기야! 저기를 조지라구!’ 하고. 누가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우주시대에 탱크 데산트(러시아의 전차전법)라니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발. 또 그 지랄을 해야 해!
 “어이 할배! 혹시 마법이나 뭔가로 저 꽃용가리의 귀를 씹창낼 수 있어?”
 “씹창? 그게 무슨 말인가?”
 아오, 부글부글. 앓느니 죽지. 이 상황에서 허허허허. 노신사께서 저 드뤠권의 귀를 아야야 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이 지랄하랴!
 “귀를 마비시킬 방법 말입니다.”
 “허허허허.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나는 급정거를 시켜서 할배를 떨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럼 뭣 하러 온 거여, 이 영감아아아아!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할배랑 말싸움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꽃용가리가 육안으로 관측될 수 있는 위치까지 다다랐다.
 “바니테일. 무기정산 시간이다! 읊어봐!”
 [도폭색 두 줄. 철갑탄 세 발. 리니어레일건 1281. 대함용 레이저 커터 한 정.]
 “으아. 언제나 그렇지만 박복한 살림살이구만?”
 [흑흑. 주인님이 벌어다 주시는 게 그것뿐이니까요.]
 “쇄끼야. 나만 한 남편님이 어딨다구!”
 [주인님같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별로 없지요. 저 괴생명체에 단기 돌입이시라니.]
 “크하하하. 칭찬으로 듣겠다!”
 핑핑. 씨발 할배 괜찮을라나? 나는 턴픽을 연속으로 밟으면서 기체를 수평회전 시켰다. 그래 이 씨발 꽃용가리 새끼야. 나 여깄다. 한번 맞춰보라고!
 [적······. 식물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적 증원.]
 “쇄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증원이라고 하지마라!”
 [그럼 여고생의 섹시한 목소리로 해드릴까요? 하트도 팍팍 넣어서?]
 “사양한다!”
 드드드드득.
 저 왕덩치에게 통하지는 않았지만 레일건은 복제인간들을 쓸어버렸다. 마치 밀짚인형들이 쓰러지듯 온갖 사람들의 기억에서 추출한 복제인간들이 박살난다. 할머니도 있고 소녀도 있고. 제기랄. 악몽이군.
 어떤 의미로는 또 다른 지옥도였다. 안개 속에서 체액을 뿜어내면서 쓰러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나는 종교들에서 말한 지옥이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엄지발가락이 시큰거리는 것과 무릎이 살살 아파오는 게 제정신을 차리게 해줬다.
 “시부랄!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이 개 같은 용가리 자식아!”
 “허허허. 거친 말은 건강에 좋지 않다네.”
 “아니 영감. 시발 그럼 저 새끼들이랑 티파티라도 하자는 거야!”
 “티파티. 흐음. 그것도 좋겠네.”
 미노년이 그딴 말을 하니까 확 때려버릴 수도 없고 아오오오!
 “별의 기사. 귀를 막게나!”
 후방카메라를 얼핏 보니까 노인네는 머리위에 후광 비스무레한 걸 띄우고 손을 하늘위로 뻗었다. 뭐하는 거여?
 [주인님! 슈트 뒤에서 고에너지원 관측!]
 “새꺄, 고 에너지 원이라니 그게 뭐야?”
 [전 센서 및 감청시스템 에너지 충격에 대비합니다.]
 뭐 시발롬이? 근데 저게 뭐야? 장풍? 할배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고 뭔가 함포의 에너지탄과 비슷한 것이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뭐야 저게! 꽃용가리는 고개를 하늘로 죽 빼들고 날개를 폈다. 시발. 날았다. 으어어어억 날았어! 저 꽃용가리가 물리법칙을 범하고 있다고!
 삐잉!
 바니테일이 적절한 타이밍에 센서를 셧다운 하지 않았다면 나는 눈이 멀었을지도.
 할배 워얼~ 쫌 하시는데? 날아올라서 뭘 어쩌려던 용가리는 폭음탄에 그대로 격추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별의 기사, 헥헥. 그대의 뜻대로 했다. 난 당분간 쉬겠다.”
 “할배 조루지?”
 “······.”
 흐크크크. 맞네 조루네! 왜 썽질을 부리는 거야? 아무튼 할배 꽉 잡으라고. 이제 바니테일하고. 나는 완전히 미친 짓을 할 테니까 말이야!
 어, 시발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진짜 산이다 산. 이끼가 덮인 곳 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고 거대한 산등성이 같은 등짝에는 거대한 꽃봉오리가 닫혀 있었다. 어? 저거 활짝 펴져 있지 않았나? 에이 시발 아무렴 어때!
 “레이저 커터 에너지 주입! 칼을 들어라 바니테일!”
 위이잉.
 수풀을 헤치면서 엑소슈트가 거대한 꽃용가리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한손에는 그 고물 칼. 또 다른 손에는 어깨의 수납창에서 나온 대구경레이저 커터를 들고 있었다. 이건 치렁치렁 줄이 슈트에 연결되어서 짜증난단 말이지.
 띠리링 소리와 함께 커터에 에너지가 주입되면서 디스플레이 왼쪽 상단에 있는 에너지바가 줄어들었다. 지잉. 소드맨들이 들고 다니는 자동권총형 레이저 커터와 원리는 동일하다. 가속된 광입자를 특수렌즈로 비춰서 절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손에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들려있다. 존나 정들겠다. 이 칼.
 근데 어째 이 세계에 떨어진 후 계속 근접 접전을 하게 되는구만? 이 꼴을 호세가 본다면 오오, 우리의 쌍검의 중위님! 어쩌고 지랄을 해댈 것이다. 그래 씨발 쪽팔린 별명이지만 오냐 쌍검의 중위님이 이제부터 또 미친 짓을 한바탕 해보일 거다!
 “바니테일. 놈의 다리를 자르자! 가속.”
 [슬라스터 노즐 전개! 전개시간 20, 19······.]
 할배 괜찮을라나?
 비행용의 슬라스터 노즐을 지상가속에 배치한 형태. 말이 가속이지 거의 전투기가 날아가는 속도였다.
 푸하하하. 할배 이 상황에서도 머리 스타일 관리하는 거유? 할배는 멋들어지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할배? 조루 아닌데? 미안? 할배는 놀랍게도 거대한 빛의 방패를 만들어서 저 용가리의 꼬리 일격을 막아주었다. 오메, 시발. 그······. 그······. 그동안 무례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또 턴픽! 나는 꽃용가리의 앞에서 턴픽으로 급회전을 해서 놈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시발 밤인 줄 알았네.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서 새카만 밤처럼 그림자 안이 어두웠다.
 [주인님. 트리거를!]
 “오케이! 이 꽃 단 용가리 새끼야!”
 스읏. 나는 에너지바를 흘끗 쳐다봤다. 저 앞에서는 샛노란 레이저의 빛이 놈의 다리에 처박히고 그만 불이 붙어 버렸다. 꼴좋다 개객기야! 장작더미로 변해 버려라!
 화륵!
 레이저 커터의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놈의 다리 하나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래! 장작은 저렇게 태워야 제 맛이지. 나는 놈의 밑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와 구웅 하고 오른쪽 앞발을 꺾는 녀석을 노려봤다. 시발, 맛이 어떠냐! 이 망할 식물새끼야! 인간을 얕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이런 젠장할······.”
 “수복력이 상상을 초월하는군.”
 이미 앞다리는 잘려서 저쪽에 날아갔다. 그런데 촉수와 덩굴 같은 것들이 잘라진 다리를 끌어당겨 제자리에 턱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는 나무덩굴과 뿌리가 휙휙 뻗어나가면서 잘라진 다리에 붙어서 마치 근육이 생기고 뼈가 이어지는 것처럼 회복되고 있었다. 몸까지 번져간 불도 수분 같은 것을 몸 안에서 내뿜으면서 순식간에 꺼 버리고 놈은 포효했다.
 시이발 아까 추력포에 얻어맞고 복구될 때처럼 용가리는 다리를 원상복구 해 버린 것이다. 제기랄! 이 커터는 구축함의 반응장갑까지 잘라 버리는 거라고! 저따위로 간단하게 복구하는 게 말이나 돼! 아오오오오!
 “용은 이미 죽었네. 숙주를 공격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네.”
 “아오 할배! 그럼 진작 말하라고! 그럼 그 빌어먹을 놈의 본체는 뭐야!”
 할배는 멋있게 인상 쓰면서 용가리가 아니라 그 위의 꽃을 가리켰다. 뭐? 용가리가 아니라 저 꽃이 본체였다고? 어?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놈은 식물이라고 했다. 잠시 드래곤의 압도적인 박력에 착각하고 있을 뿐 할배는 처음부터 식물계가 본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날 약 올리기라도 하듯 다시 꽃봉오리가 활짝 펼쳐지고 푸른색의 꽃이 하늘거렸다. 그래, 시발. 자세히 보니까 이 망할 놈의 촉수는 저 꽃의 꽃받침이 있는데서 튀어나오고 있다.
 그래, 정정. 정정. 꽃 달린 용가리라 불러서 미안하다. 용가리를 집어삼킨 꽃봉오리. 뭐야 존나게 길잖아?
 “이 빌어먹을 풀떼기 시끼야!”
 드드득.
 이번에는 꽃봉오리다! 아오, 환장하겠군! 아무리 레일건을 긁어도 소용이 없었다. 놈은 레일건이 발사되기도 전에 꽃봉오리를 오므려서 팅팅 튕겨내 버렸다. 무슨 놈의 식물이 저렇게 단단하다냐?
 나는 비로소 바니테일이 처음 말한 지구 청색함대 드립이 떠올랐다. 저거 궤도폭격에도 견뎌낼 것 같은 느낌인데?
 “바니테일 다시 근접한다!”
 [예? 하지만······.]
 “방법이 떠올랐어! 저 꽃을 도폭색으로 칭칭 감아서 박살내자!”
 [예에? 주인님 제대로 미치셨군요? 그러려면 영거리까지 근접을 해야 하는데······.]
 아, 시발. 미친 짓이다. 엄마가 어릴 때 좋은 친구들이랑 놀라고 할 때 ‘웃기지 마세요!’ 하고 쏘아붙인 게 미안하군.
 엄마 말이 존나게 맞았어. 강하엽병 새끼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나도 점점 맛이 가는 것 같아. 그 똥강아지한테 달려들지 않나 저 산 같은 기생생물하고 맞장을 까려고 하지 않나.
 “슬러스터 노즐 분사! 저 위로 올라간다!”
 아아. 내가 말해놓고도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구만! 바니테일은 군말 안 하고 엑소슈트를 띄웠다. 시발. 또 시간이 째깍째깍 줄어들면서 디스플레이에 시간이 표시되었다. 아오! 내가 이번 위기만 벗어나면 시계는 다 처박아 놓고 신나게 잠만 쳐 잘 거다! 여자?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냥 늘어지게 자고 싶어!
 “할배 버텨!”
 “우에에엑. 버티고 있다네!”
 크하하하! 할배 토할 뻔했지?
 우리는 촉수들을 튕겨가면서 꽃봉오리에 달려가고 있었다. 수많은 복제인간 풀떼기들도 저 거대한 꽃봉오리도 이젠 필사적이 된 것 같았다. 전에 없는 엄청난 공격의 파도였다. 할배 어떻게든 버티라구! 뭔 놈의 꽃봉오리가 저렇게 커!
 [주인님. 꽃가루로 추정되는 분말이 산포되었습니다.]
 “뭐?”
 아마 내가 엑소슈트 밖에 있었다면 저 꽃가루 때문에 재채기를 하고 있었을 거다. 나 꽃가루 알레르기 존나 심하거든. 근데 꽃가루라니······. 대체 왜?
 게다가 끼에엑거리는 복제인간 놈들은 꽃가루가 산포되는 것을 보고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어? 아니 이 근처에 있는 놈들은 무슨 식물을 심듯이 땅을 파고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노란색의 꽃가루가 희뿌연 안개가 섞여서 주변이 온통 노란색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바니테일! 마법사 할배를 보호해라! 라미네이트 폼 분사!”
 등골이 서늘해졌다. 옛날 보급품 빼돌리기를 같이한 녀석에게 들은 적이 있다. 창고에서 밀가루 푸대를 잘못 쏟았다가······.
 “바니테일! 분진폭발이다! 각 부 폭발 충격에 대비할 것!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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