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과 거인
도살장에 끌려온 것 같다.
한종식은 양반다리를 한 채 자기 발끝만 노려보았다.
앞에 있던 큰 아버지가 자못 근엄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종식아 무슨 말인지 알겠냐?”
“네, 듣고 있어요.”
“대학까지 나왔으면 어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아이를 낳아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거든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랐으나 겨우 참았다.
기껏 말을 해봐야 훈계를 듣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다. 차라리 얼굴을 안 보면 모를까, 여기 온 이상 훈계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속 시원하게 질러봐야 고통의 시간만 길어질 테니까.
한종식이 당하고 있자 옆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한종식의 사촌동생인 한종수에게 묻는다.
“그래, 종수는 요즘 하는 일은 잘되고?”
“뭐,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는 돼요.”
한종수는 보란 듯이 왼손에 쥔 차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동그란 원 안에 삼각별이 영롱하게 빛을 뿌렸다. 아버지는 그걸 보더니 잘되나 보구나, 몇 마디 읊조리고 말았다. 한종식도 차 열쇠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누구는 차는커녕 직업도 없어서 저축을 까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데, 누구는 게임을 해서 한 달에 수천만 원씩 벌다니?
큰 아버지가 껄껄 크게 웃었다.
“아, 고등학교 자퇴할 때만 해도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됐다니까.”
“게임 잘 하는 것도 재능이지요. 프로게이머해서 우승까지 한 게 어디 갑니까?”
“에이, 사실 제가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경철이 형 덕에 우승한 거였죠. 전 머릿수 채우는 수준에 불과했어요.”
한종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크나큰 야심을 품고 프로게이머로 데뷔했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개인전 성적은 4강에 두어 차례 든 게 최고였고, 단체전에서 우승을 해본 게 고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경철이 형, 즉 박경철 때문에.
‘박경철······’
한때 한종식과 같은 반이었던 친구다. 함께 몰려다니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소원해졌다. 반이 갈리기도 했고, 서로의 게임 취향이 좀 맞지 않아서였지.
지금은 프로게이머이자 가상 세계의 스타로 잘나간다고 들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후원을 받고, 그 스스로도 1년에 수십억은 너끈하다던가.
화제가 한종수에게 넘어가서 다행이다. 친척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을 듣다가 슬쩍 빠져나왔다. 아예 집을 나와서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휘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벌써 나이 서른. 나이만 먹고 이뤄놓은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백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년에 잘 다니던 회사가 도산하면서 백수가 되고 말았다. 구직 활동은 계속 하고 있으나 어디 그게 쉬워야 말이지. 자기소개서만 줄창 쓰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형, 여기서 뭐해?”
한종수가 뒤를 쫓아 나왔다.
말없이 담배를 가리키자, 한종수도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명절마다 진짜 머리 아프다. 우리도 다른 집처럼 그냥 각자 보내면 안 되나?”
“그래도 넌 처지가 좋잖아. 난 이게 뭐냐?”
“에휴, 형. 3년 전에 일 생각해 봐. 그때 나 욕먹던 거 기억 안 나? 지금은 그래도 돈을 버니까 이 모양이지, 돈도 못 벌고 있으면 아예 가루 수준으로 까였을걸?”
“하하, 그건 그래.”
“그러고 보니까 형은 게임 BJ 해볼 생각 없어? 경철이 형이 가끔 형 얘기 했는데. 형이 프로게이머 했으면 자길 능가했을 거라고.”
“뭐? 푸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한종식은 거하게 웃어 넘겼다.
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박경철과 같이 몰려 다녔을 때, 한종식은 거의 모든 부문에서 박경철을 압도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역전되었다. 박경철은 멀티플레이에 집중한 반면, 한종식은 싱글플레이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에 골몰했는데, 안타깝게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아니어서 명성을 얻진 못했다.
‘그때 경철이 따라서 용호무쌍을 할 걸 그랬나······’
무협 형식의 대전 액션 게임이다. 15년 전을 풍미했고, 지금은 흘러간 옛 게임이 되었으나 가끔 작은 대회가 열리곤 했다.
“아예 노는 것보단 낫잖아? 게임 BJ 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냥 실황 중계 프로그램만 돌려도 돼. 그러다 대박나면 BJ 하는 거고, 아니면 계속 구직하는 거지.”
“에휴, 그게 말처럼 쉽냐? BJ 하는 건 쉽지만 성공하긴 어렵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
한종수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이제 보니, BJ 하라는 게 진심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하려고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조금 솔깃하기는 했다. 어차피 지금도 매일같이 게임을 하고 있으니까, 게임하는 김에 프로그램 하나 더 돌리는 것 정도쯤이야.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빨아낸 후, 슬쩍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싱글플레이 게임 하는 BJ들은 없냐?”
“싱글플레이? 아, 있지. 그 사람들도 인기 많아.”
“진짜?”
“응. 온라인 플랫폼에서 파는 게임들 사서 플레이하는 걸 방송하는 거지. 게임 BJ 중에서는 하위권이긴 한데, 연봉 1억은 너끈할걸?”
“괜찮네. 나도 해볼까······”
“뭘 하려고?”
한종식은 다 피운 담배를 쓰레기통의 꽁초 칸에 버렸다. 그리고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절대신화.”
“뭐?”
한종수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진다.
“그거 완전 옛날 게임이잖아! 요즘 그걸 누가 해?”
“내가 하는데? 카페에도 가끔 글 올라와.”
“그래봐야 조회수 10이나 돼? 형, 솔직히 말해서 그거 하면 아무도 안 본다. 내가 아는 싱글플레이 게임 BJ들도 몇 번 플레이한 적 있는데, 처음 한두 시간만 사람들이 보다가 시청자 엄청 떨어졌어. 차라리 최신 게임을 해. 드래곤 헌터 3나 둠스데이 같은 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인데······”
“으으! 그 변태 게임을 좋아한다고? 경철이 형한테 형 취향이 이상하다는 소린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종수가 몸서리를 쳤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절대신화는 가상현실 게임이 시작된 이래, 가장 난이도가 극악하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콘텐츠도 거의 없었다. 기사나, 무사, 야만인, 닌자, 궁수 등 각종 캐릭터를 골라서 컴퓨터와의 일대일, 혹은 다대일로 싸우는 게 전부였다.
그 전투 하나만큼은 일품이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대신화를 뛰어넘을 대전 액션 게임은 나오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가상현실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멀티플레이를 요구하던 세상인데.
절대신화는 고작 일대일의 멀티플레이만 지원했다. 반면 용호무쌍은 일대일은 물론 백대백의 대규모 난전과 각종 모드를 즐길 수 있었다. 결국 패권은 용호무쌍이 차지했다.
“그래도 몇 명은 보지 않을까?”
“몇 명 봐가지고는 껌 값도 안 나와!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걸?”
“끄응, 그래?”
“당연하지. 차라리 형도 디앤티를 해보지 그래? 기본적인 센스만 있어도 최소한 용돈 벌이는 될 텐데.”
“디앤티? 아, 네가 하는 거 말이구나.”
“형도 알아?”
“당연하지. 나라고 인터넷 안 하는 건 아니니까. 요즘에는 그게 유망한 것 같긴 하더라.”
디앤티.
용과 거인(Dragons & Titans)의 줄임말이다.
흔하디흔한 중세 판타지 게임이었다. 다양한 종족과 직업이 있고, 세계를 탐험하고 보스 몬스터를 잡고, 종족 간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는 게 목적이었다.
다만 다른 게임과 차별점이라면 5세대 가상현실 게임으로도 후각과 미각을 온전히 구현했다는 것. 더구나 세계가 엄청나게 방대하여, 정말로 판타지 세상에서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MMORPG라······’
한종식도 몇 가지 무료 게임을 즐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때려치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투가 너무 재미없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인공지능이 턱없이 부족했다. 몬스터는 손발을 허우적댈 뿐이고, 전투는 HP와 공격력의 지배를 받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다닌다는 뜻이다. 특정한 디버프 공격을 가하는 기술이 아니면 실명시킬 수도, 무기를 놓치게 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실망하고 절대신화로 돌아왔다.
그 말을 하자 한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어휴, 싱글 플레이 전용 게임이랑 MMORPG랑 같아? 그건 감안을 해야지. 그래도 절대신화 했으면 디앤티 정도는 쉽게 하겠다.”
“그래?”
“응. 디앤티는 전투가 어려운 게임이거든. 몹들이 똑똑해서 초보들은 전멸하기 일쑤야. 나도 가끔 죽을 때가 있고.”
“어렵다니 다행이네.”
“생각 있으면 VR 방에 가볼래? 어른들 잔소리 듣기도 지겨운데.”
“좋아, 종문이랑 종성이도 데리고 가자.”
아직 고등학생인 둘은 안에서 실컷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둘을 그 지옥에서 구해내어 인근 VR방으로 향했다.
사촌 동생들은 한종수에게 달라붙었다. 둘 다 이미 디앤티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레벨도 상당히 높다고 하니, 이제 갓 디앤티를 시작할 사촌 형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VR방에는 최신식의 5세대 가상현실 접속기가 잔뜩 놓여 있었다. 4세대와는 다르게 헤드기어 형태가 아닌 캡슐 형태다.
한종식은 접속기를 눈여겨보았다.
‘저게 있으면 감각 동조 영상도 볼 수 있다던데······’
각종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그 현장을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는 소리다. 단지 액션 영화만이 아니라, 19금 멜로 영화나 더 수위가 높은 영상도.
하여간 남자들이란 다 똑같다.
1시간 정액권을 끊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헤드기어를 쓰고 목 뒤에 접속기를 달자, 접속기가 한종식의 목을 주무르더니 단단히 결합된다.
헤드기어에서 붉은빛이 비치고 금방 의식이 끊어졌다. 하얗게 빛나는 공간이 나타나자, 주위를 행성처럼 공전하던 빛나는 구슬 중 하나를 지목했다.
D&T라고 쓰인 구슬이었다. 그걸 선택하자 한종식의 의식이 어디론가 빠르게 빨려들었다.
몇 개의 로고와 화려한 동영상이 빠르게 한종식의 뇌 안에서 재생되었다. 한종식은 그걸 심드렁하게 보며 한마디를 외쳤다.
‘스킵! 이것도 스킵! 또 스킵!’
게임 동영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한종식은 굳이 그걸 보고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캐릭터 생성 화면이 나왔다. 디앤티는 16가지 종족을 자랑하지만, 한종식은 굳이 다른 종족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인간으로 했다.
외모도 마찬가지. 다만 얼굴은 조금 바꿨다. 자기 신상이 퍼지는 게 싫어서였다. 몸매도 살짝 변형시켰다. 불뚝한 배를 좀 집어넣고, 하는 김에 복근도 새겨주고, 가느다란 팔다리도 두툼하게 근육을 만들어준 것이다.
완성된 자신을 보고 한종식은 뺨을 긁적였다. 자세히 보니 절대신화 게임의 기사를 그대로 재현한 뒤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은 듯했기 때문이다.
“에이, 이 정도면 됐지.”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기본적인 게임의 조작 방법을 익히는 거였다. 한종식이 기왕에 해봤던 게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전투. 나무 막대와 짚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허수아비가 한종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목검을 들어 허수아비를 겨눴다.
‘튜토리얼 허수아비는 제법 세니까, 그냥 이런 느낌이구나하고 싸워. 허수아비한테 죽어도 튜토리얼은 종료 돼. 튜토리얼에서 허수아비한테 지는 사람이 90%는 넘으니까, 져도 실망하지 말고.’
한종수가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냥 져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유명하지 않은 게임이라고 해도 자신은 절대신화의 최고수 아닌가.
그렇다, 최고수.
절대신화 유저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워낙 팬덤이 작아서 알려지진 않았으나 절대신화 유저들은 한종식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불렀다.
최고 난이도인 절대신화를 밥 먹듯이 완료하는 것은 물론, 이대일이나 삼대일, 심지어 오대일도 깬 적이 있었다. 그 동영상을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으나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지 않아 묻혔을 뿐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 고수라고 할까.
그런 한종식과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격돌했다.
“핫!”
짧게 기합을 질렀다.
한 걸음 크게 다가서며 목검을 길게 배어냈다. 목검이 사선으로 움직이며 예리하게 허수아비의 목을 노렸다.
이 한 수로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허수아비가 특이하게 움직였다. 제 자리에서 톡 튀더니 몸을 회전시켜 두 팔을 풍차처럼 회전시킨다. 그 바람에 한종식의 사선 베기가 슬쩍 빗나가 허수아비의 어깨 부위에 맞고 말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0레벨인 탓에 파괴력이 일천했다. 옷이 살짝 찢어진 게 전부였다. 허수아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돌리며 한종식의 몸 위에 떨어졌다.
몸놀림이 제법 예리하다. 한종식은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허수아비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이것으로 되겠지 했는데 허수아비는 한종식의 상상을 벗어났다. 몸을 살짝 낮추며 땅을 찍고, 용수철처럼 튀어 한종식에게 날아온다.
“어쭈?”
움직임이 집요하다. 과거에 체험했던 MMORPG의 멍청한 몬스터가 아니라, 절대신화 속 무사를 보는 것 같았다.
한종식은 몸을 돌리며 왼쪽 다리로 땅을 콱 박았다. 목검을 역으로 쥔 채 얼굴까지 들어올렸다. 이어 우측 허벅지로 목검 끝을 지탱하며 버티자, 그 위로 허수아비의 공격이 쏟아진다.
퍼퍽!
바람처럼 이어진 두 차례의 공격.
그러나 그 대가로 허수아비의 움직임이 멎고 말았다. 동시에 한종식이 벼락같은 반격을 뿌렸다.
오른쪽 팔꿈치로 짧게 잡아 쳤다. 허수아비의 머리가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이어 어깨로 밀쳐낸 후, 어느새 왼손으로 쥔 목검 자루 끝으로 허수아비의 머리를 찍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수아비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복부를 오른쪽 무릎으로 강타했다. 누적된 충격에, 허수아비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아니, 그건 속임수였다. 뒤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한쪽 팔로 땅을 세차게 때리며 일어섰다. 강맹한 공격이 덮쳐 와서,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한종식은 서늘한 눈으로 공격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몸을 낮췄다. 거의 옆으로 눕다시피 하며 오른쪽 발로 몸을 지지했다.
그 움직임을 고스란히 회전력으로 변환시켜, 왼손에 든 목검으로 허수아비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정확히 갈라 넣었다.
뻐억!
제대로 들어갔다. 찰진 손맛이 느껴지며, 나무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막을 관통할 듯이 터졌다.
허수아비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글대던 눈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팍 꺼지면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고, 지푸라기가 허공에 흩날렸다.
금빛 글자가 날아들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을 완료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초보자 칭호를 얻었습니다.]
[문으로 나가면 광대한 디앤티의 세상이 펼쳐집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가슴 벅찬 모험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글자들이 알짱대지만 한종식은 그걸 읽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뭔가 석연찮은 느낌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방금 그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허수아비가 움직이는 게 그랬다. 강시처럼 통통 튀는 것도, 고정된 두 팔을 휘젓는 것도 생소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던 것이다.
특히 쓰러질 듯 속임수를 걸면서 역공을 하는 게 그랬다. 지금까지 한종식이 겪었던 많은 게임 중에서도, 이런 인공지능을 가진 게임은 드물었던 것이다.
기껏 절대신화와 기타 인상적이지 않은 몇 개의 게임밖에 없었다.
어떤 가정이 한종식의 머리에 떠올랐다.
‘설마?’
속으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허공을 향해 물었다.
“허수아비와 다시 싸워보고 싶은데 재생성이 될까?”
[튜토리얼 허수아비를 재생성합니다.]
도우미 인공지능이 금방 허수아비를 생성했다.
나무 막대와 낡은 옷, 지푸라기가 허공으로 떠올라 결합되었다. 그 한 장면으로 허수아비의 재생성이 끝났다.
“덤벼!”
한종식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허수아비가 눈을 빛내더니 달려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통을 회전시키며 폭풍처럼 한종식을 공격한다.
제법 날카롭지만 한종식을 어쩔 수는 없었다. 매와 같은 눈으로 주시하며 목검으로 일일이 공격을 쳐냈다. 툭, 탁, 하는 소리가 연거푸 울리며 허수아비의 몸이 조금씩 파였다.
슬쩍슬쩍 약점을 드러냈다. 아주 작은 약점이지만, 허수아비는 놓치지 않고 한종식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 목검으로 전신의 약점을 가려 방어 자세를 취하면 공세를 늦추고 신중하게 한종식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쯤 되자 한종식도 이걸 어디서 봤는지 알아차렸다.
‘절대신화잖아!’
절대신화의 난이도 중 3번째, 정예 난이도와 흡사하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빼다 박았다.
허수아비가 아니라 인간형이었으면 보자마자 눈치챘을 것이다. 움직임이 절대신화의 캐릭터들과 다른 까닭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디앤티에서 절대신화의 전투 시스템과 인공지능을 도용하기라도 한 걸까?
의아한 마음에 즉석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절대신화가 워낙에 망한 게임이다 보니 관련 문서가 아예 없는 것이다.
“아녜스 소프트에 투고라도 넣어야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절대신화의 개발사인 아녜스 소프트는 벌써 5년도 전에 망해 버렸으니까. 거기서 새어나왔을 여러 시스템이야, 벌써 여기저기 다 퍼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신화는 한종식이 가장 좋아하는, 흔히 말하는 인생 게임인데 이렇게나마 자취가 남았으니 하는 생각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디앤티의 개발사인 화백 게임즈의 연혁을 살펴보았다.
생각과는 달리 아녜스 소프트와는 관계가 없었다. 회사 사장도 다르고, 아녜스 소프트가 망하기 1년도 전에 화백 게임즈가 설립되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절대신화의 파편이 숨어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무심코 화백 게임즈의 인터뷰 기사를 하나 찾아보게 되면서였다.
[······저는 살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제가 재미있다고 해서 유저들도 재미를 느끼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변화를 주었죠. 유저들이 뭘 원할까? 유저들은 어떤 것에 재미를 느낄까? 그런 고민 끝에 탄생한 게 디앤티입니다······ 총 개발팀장 신상모.]
“억, 신상모!”
한종식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익숙한 이름이다.
바로 절대신화의 주요 개발자 중 한 명으로, 핵심 중 핵심인 전투 인공지능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있어서 절대신화가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종식의 손이 빨라졌다. 검색 엔진에 전준태와 고미연도 검색해 보았다.
전준태는 절대신화의 전투 시스템을 만들었고, 고미연은 절대신화에 현실의 여러 무술을 적용시켰다. 신상모까지 하여 이 삼인방이 절대신화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둘의 이름이 화백 게임즈에 남아 있었다. 내부 인사는 비공개지만, 핵심적인 위치에 앉아 가끔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이름이 노출된 것이다.
한종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디앤티가 사실상 절대신화의 후속작이구나!’
완전히 이름을 계승하진 않았으나 정신적인 후속작이라고 볼 만했다. 그 증거가 방금 전 튜토리얼 허수아비를 통해 눈앞에서 펼쳐지지 않았나.
왜 이걸 여태껏 몰랐을까?
그도 그럴 것이 절대신화는 삼인방의 흑역사였기 때문이다. 워낙 처참하게 망해서 이름이라도 언급되면 오히려 악영향을 줄 정도였다.
인간형보다 이형의 몬스터가 많은 디앤티의 특성도 한 몫을 했다. 이걸 가지고 절대신화의 흔적을 알아볼 수준의 고수는 기존 절대신화 유저 중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한종식에게는 잘된 일이다. 디앤티에 절대신화의 전투 시스템이 그대로 이식되었다면, 앞으로의 전투에서 한종식을 따라올 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물론 쉽지는 않겠지. 당장 절대신화는 3세대 가상현실 게임이고 디앤티는 5세대 가상현실 게임이니까.
헤드기어와 장갑, 신발, 몇 개의 패드를 붙이고 하는 게임과 캡슐에 들어가 게임을 하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방금 전에도 정예 난이도 수준이라 이긴 거지 장군 난이도만 됐어도 참패했을 것이다.
어쨌든 다른 이들보다는 한종식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게임 BJ? 억대 연봉?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한종식은 전에 없이 강력한 확신을 얻었다.
띵동, 띵동.
어느새 VR방 시간이 다 지나갔나 보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시야 한쪽에 황금종이 나타나 흔들렸다.
그 통에 정신을 차렸다.
‘게임 BJ가 쉽지는 않겠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분명히 어떤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사에게 구박 받고, 사장 눈치를 보면서 겨우 월 2백 받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한종식은 월 수천만씩 벌 수 있다면 똥꼬쇼라도 할 수 있었다.
한종식은 접속을 끊고 캡슐 밖으로 나왔다. 밝은 얼굴이라, 한종수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형, 어땠어? 튜토리얼은 끝냈어?”
“어, 끝냈지. 생각보다 할 만하더라. 재미있던데?”
“거 봐. 괜히 디앤티가 돈을 긁어모으는 게 아니라니까? 앞으로 10년은 너끈할 것 같다더라. 할 거면 하루라도 빨리 뛰어들어야 돼. 그래야 선두 랭커들 따라잡지. 예전처럼 확장팩 나올 때마다 세기말이 오던 시대가 아니라고.”
한종식도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디앤티가 출시된 게 벌써 1년 전이다. 벌써부터 상위 랭커들은 격차를 벌리고 있었다. 그걸 따라잡으려면 지독하니 노력해야 한다.
사실 그 정도까지 안 가도 좋다. 디앤티에는 지금도 폭발적으로 초보자들이 유입되고 있으니까. 한종식은 그저 적당히 레벨을 올리고, 적당히 돈만 벌어도 만족할 수 있었다.
“게임 BJ 하려면 뭐 필요한 건 없어?”
“오, 진짜 해보게?”
“본격적으로는 아니고 어차피 게임 하는 김에 발 살짝 담가보려고.”
“쉽지 않을걸.”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냐.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렇다면야······”
한종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여러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BJ가 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성공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 플랫폼에서 많은 이들이 출사표를 던지기 때문이다.
초기 비용? 없다시피 한다. 헤드기어나 캡슐에 내장된 녹화 기능만 써도 된다. 단, 그걸 실황 중계를 하거나 좀 더 고차원적인 영상을 만들려면 돈을 써야 했다.
단순히 동영상만 보는 것보다야 감각 동조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는 게 낫지 않겠나. 기왕이면 3인칭 시점도 섞어주면 금상첨화고.
“가장 중요한 건 콘텐츠야.”
“콘텐츠?”
“응. 정말 BJ 할 생각이면 오늘 집에 가서 3일 동안 상위권 게임 BJ들이 어떻게 하나 봐. 다 스타일이 달라. 똑같이 레이드를 해도 공부 가르쳐 주듯이 하는 사람이 있고 개그 치면서 잡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어떤 BJ는 데이트하기에 좋은 곳을 알려주기도 해.”
“그래? 신기하다. 넌 어떻게 하는데?”
“나? 난 PK 하면서 돌아다녀.”
“뭐? 그러다 신상 털리면 어쩌려고?”
“당연히 신상 안 털리게 해야지. 원한이 심하게 쌓일 것 같으면 피해가고. 어차피 디앤티는 죽어도 불이익이 크지 않아. 귀속 시스템 때문에 떨어뜨려봐야 잡템이라고. 금전적으로 크게 손해를 보지 않으면 현실에서 쫓아올 확률은 적어. 그래도 일단 죽었으니까 기분은 나쁘겠지? 피해자들이 어쩔 것 같아? 내 캐릭터를 쫓아오겠지? 그걸 역으로 발라주고, 또 내가 밟히는 게 내 방송의 재미야.”
“헐, 별 걸 다한다.”
“뭘. 나도 겨우 머리 짜내서 만든 컨텐츠야. 방플(BJ의 방송을 보면서 움직임을 엿보는 행위)하는 새끼도 많아. 내가 방송만 시작하면 찾아와서 죽이려고 한다고. 사전에 함정 파놓고 그걸 역으로 잡아 족치는 것도 재미지.”
“그러다 시체 지키기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뭘 어쩌겠어. 방송 끄고 레벨 올려야지. 근데 그거 알아? 내가 계산해 봤는데 시체 지키기 당하거나 죽어서 자빠져 있을 때 시청자들한테 별 받는 게 평균적으로 더 많았어. 세상에는 특이한 취향의 인간들이 다 있더라고. 덕분에 나같이 평범한 프로게이머 출신도 먹고 사는 거지.”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사실 별 선물 같은 후원 금액은 자기 수익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청자 수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나. 그래야 광고 수익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놀랄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 아닌가. 그저 몬스터나 잡고, 전쟁이나 할 줄 알았더니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핵심은 간단했다. 장비나 프로그램보다도, 그 알맹이가 가장 중요했다.
추석이 지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한종식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디어 플랫폼의 게임 BJ들 영상을 살펴보았는데, 한종수의 말처럼 하나같이 달랐던 것이다.
크게 보면 비슷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라는 게 복잡 미묘해서, 언뜻 봐서는 이해가 안 갔다. 한참을 본 다음에야 머릿속에 우겨 넣었다.
‘결국은 콘텐츠구나.’
그냥 무미건조하게 몬스터를 잡으면 뭐 때문에 그 영상을 보겠나. 차라리 랭킹 1위가 진즉 풀어놓은 무료 영상을 보고 말지.
뭔가 달라야 한다.
가면을 쓰고 특이한 갑옷을 입은 채 발광을 하든, 쉴 새 없이 입을 털든, 몬스터와 레슬링을 하든, 하다못해 매일 예쁜 여자 손님을 초빙해서 데이트를 하든 간에.
‘난 뭘 할 수 있지?’
한종식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입담? 그런 게 있을 것 같나?
개그? 유머 감각과는 담쌓은 몸이다.
여자?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 중 성염색체 XX를 가진 것은 어머니밖에 없다.
믿을 거라곤 절대신화에서 쌓은 전투 감각뿐이다. 어떻게든 그걸 가지고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점심으로 먹은 라면이 얹힌 것 같아 담배를 한 대 피고 들어왔다. 그제야 속이 풀리며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갔다.
“전투, 전투라 이거지······”
단지 국내만 아니라 해외의 BJ들이 뭘 하나 보았다.
그나마 한종식에게 장기가 있다면 영어 회화가 원어민 수준으로 된다는 것. 그걸 활용해 외국의 동영상 플랫폼을 돌아다녔다.
덕분에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벤 모리스!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자였다. 홀로 던전을 누비며 잡몹부터 보스까지 1인 공략을 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렇다, 1인 공략.
던전이다. 원래대로라면 5명이 파티를 짜서 들어가야 한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낼 탱커와 공격을 퍼부을 딜러, 치료를 할 힐러가 조합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걸 오직 1명이서 해낸다? 아무리 벤 모리스 자신이 무사, 사제, 도둑의 조합 직업인 신성 검객이라도 지난한 일이었다.
자연히 인기를 끌었다. 다른 유명인들에 비해 레벨만 낮을 뿐이다. 돈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벌었다.
벤 모리스의 동영상을 보고 한종식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하겠는걸?’
어떤 면은 낫고 어떤 면은 부족했다. 전투는 자신이 훨씬 잘할 것 같은데, 던전 탐험이나 함정 간파는 벤 모리스가 아주 노련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한종식도 던전 탐험 게임을 해본 적은 있으나 주 종목은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난이도로 즐겼던 정도지.
‘레이드 위주로 가자.’
던전도 던전 나름이다. 함정이 많은 곳도, 미로가 골치 아픈 곳도, 몬스터가 강한 곳도 있었다. 보상은 모두 동등하지만 각자 맞는 곳을 찾아가는 게 좋다.
‘1인 레이드라······’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나중에는 전쟁에도 끼어들면 되겠다. 절대신화에서 다진 실력은 PvP에서도 통할 테니까. 한종식이 부족한 점도 있겠으나, 그거야 보완하면 그만 아닌가.
믿는 구석도 있겠다,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저축을 털어 5세대 가상현실 접속기, 즉 캡슐을 구매했다.
“더럽게 비싸네.”
캡슐 하나만 해서 1천만 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에 디앤티 석 달 정액, 감각 동조 영상 제작 프로그램과 편집 프로그램을 더하자 삽시간에 3백만 원이 빠져 나갔다. 컴퓨터도 사양을 올렸더니 2백만 원이 추가로 소요되었다.
남은 것은 딱 5백만 원.
한종식은 통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젠 정말로 배수진을 친 형국이다. 쌀밥에 김치만 씹으면 석 달은 버티겠으나, 그 동안 결과가 안 나오면 당장 지금 살고 있는 투룸 보증금부터 빼야 했다.
처음 BJ가 되겠다고 결정할 때만 해도 멀어 보였던 냉엄한 현실이, 당장 코앞으로 다가왔다.
“해내야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여기서 성적을 내지 못하면 공사장이라도 나가야겠다고.
나름 대학물을 먹었다고 괜히 눈을 높게 잡았는지도 몰랐다. 한종식 정도의 학벌에,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인물은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렸다. 그런 와중에 연봉 높고 복지 좋은 회사를 찾았으니 서류 심사에서 탈락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잘못 취직하면 박봉으로 야근, 특근에 시달리다가 파리 목숨처럼 잘리고 마는 것을······ 눈을 낮추라, 낮추라고 하지만 구직자 입장에선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한종식은 머리를 홰홰 저었다. 설치 기사의 도움을 받아 캡슐 설치를 끝낸 후 세부 동기화까지 마쳤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예,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음료수 하나를 들려주자 설치 기사가 싱글거리며 떠났다.
가볍게 몸을 푼 다음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VR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목 뒤가 잘근잘근하더니 의식이 멀어진다.
팟!
한종식이 접속한 곳은 온통 하얀 공간, 즉 튜토리얼 지역이었다. 허수아비의 잔해가 중앙에 늘어져 있고, 저 앞에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요 며칠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디앤티에 대해 공부도 열심히 한 참이다. 아무리 절대신화에서 날렸다고 해도 무턱대고 달려드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니까.
‘저기로 나가면 된다고 했지.’
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튜토리얼을 진행할 때 배웠던 것처럼 상태창을 불렀다.
<상태>
[이름] 발뭉 [종족] 인간 [성별] 남성
[레벨] 1 [계급] 평민
[직업] 백수 [칭호] 초보자
[생명] 110 [마나] 110 [상태] 정상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지능] 10 [지혜] 10 [위엄] 10
[여유 능력치] 3 [경험치] 0%
1레벨답게 단출하다.
차츰 키워나가야겠지. 그 생각을 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허수아비 잔해에 시선을 한 번 던지고 문을 열고 나갔다.
번쩍!
섬광과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빛이 그치면서, 작은 성채가 한종식, 아니 발뭉의 눈앞에 펼쳐졌다.
인간 종족 초보 유저들이 처음 발을 딛는 사과 숲 성채다. 과거에는 고블린들이 발호했다고 하나 최근에는 완전히 토벌되어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라고 할까. 지금은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들만 남아 있었다. 다만 성채 지하에 훈련용 던전이 있고, 성채에 설치된 4개의 탑에서 직업을 얻는 게 가능했다.
“넌 전사할 거랬지?”
“어. 탑에서 직업 얻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 빨리 던전 깨고 황금 평원으로 진출하자. 9마리면 잡으면 10레벨이라니까 금방 끝날 거야.”
“파티 사냥은 안 된댔지?”
“1인 전용 인던이잖아. 그래도 난이도 최하로 하면 엄청 쉽다고 하더라.”
초보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꽤나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수대 주변에 흰 빛이 번뜩이며 새로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뭉도 근처에 보이는 탑 중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는 이미 결정을 해놓은 참이다.
1인 레이드다. 공격과 방어가 모두 준수하며, 생존력 또한 뛰어난 직업을 골라야 했다. 미국의 벤 모리스가 괜히 신성 검객을 택한 게 아니었다.
기본 직업은 전사 계열 중 기사로 잡았다. 절대신화에서 쓰던 캐릭터가 기사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단 방패를 쓸 생각은 없었다. 절대신화에서 그랬듯이 디앤티에서도 양손 대검을 들 요량이었다. 대검으로 내리찍어 머리를 박살내거나 목을 벨 때야말로 제대로 된 손맛을 느끼곤 했으니까.
“기사 직업을 얻고 싶습니다.”
전투의 탑을 지키는 NPC에게 말하자, NPC가 작은 구슬을 하나 내밀었다.
“그걸 들고 2층으로 올라가시오. 기사의 방에 들어가서 토마스 경에게 내밀면 전직시켜 줄 거요.”
기본 직업은 금방 얻었다. 토마스 경은 세 개의 기술 두루마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발뭉은 기본 공격 기술인 강타를 골랐다.
방패 막기와 지휘의 외침도 나쁘진 않으나 발뭉에게는 맞지 않다. 즉석에서 강타를 익힌 후, 이번에는 신앙의 탑으로 이동했다.
“사제로 전직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자, 머리가 하얗게 샌 노파가 삐주룩한 눈으로 발뭉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이미 직업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직업을 포기할 셈인가? 아니면 새로운 직업을 얻고 싶은 겐가?”
“기존의 직업과 조합하여 새로운 직업을 얻고 싶습니다.”
“이걸 들고 5층으로 올라가게. 그대가 섬길 신을 결정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날 걸세.”
중대한 갈림길이다.
디앤티의 세계관에서 신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뉜다. 선신 계열과 악신 계열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당연히 직업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선신 계열 사제와 기사의 조합은 성기사가 되지만, 악신 계열 사제와 기사의 조합은 암흑기사가 된다.
암흑기사!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다가, 발뭉이 최종적으로 고른 직업이었다.
쉽게 말해서 악 속성의 성기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성검대신 마검을 휘두르고, 휘광 대신 암운을 두른다. 치유의 손길은 없지만 흡혈의 손길이 있고, 축복 대신 저주를 쓴다.
당연히 파티플레이보다 솔로플레이에 특화되어 있었다. 공격수로는 기용할 만하지만, 광전사나 암살자 등 본격적인 근접 공격수보다는 떨어지는 것이다. 저주 능력은 흑마법사나 암흑사제보다 약하고.
광전사는 어떠냐고?
고려해 보았지만 포기했다. 간판 기술인 광기 폭발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폭발적인 공격력은 모든 전투 계열 중 최고지만, 1인 레이드를 하다 보면 장기전이 필수인데 잠깐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축 늘어질 수는 없다.
5층에 올라 노파에게 받은 구슬을 내밀었다. 문이 저절로 열리며 작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우주가 발뭉을 감싸 안는다.
“음······”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흐릿한 공허 속에서 별들이 수십 개는 넘게 떠 있다. 어떤 것은 찬란한 황금색이고 어떤 것은 짙은 묵색이었다. 가벼운 하늘색도, 무거운 황갈색도, 예리한 백색도, 유혹적인 보라색도 보였다.
발뭉은 그 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때마다 위엄 있는 목소리가 발뭉에게 흘러들었다.
[나는 천상의 왕, 빛이자 근원이며 모든 신들의 아비이니라. 그대, 작은 자여. 나를 섬겨 구원을 얻으라.]
[나는 끝이자 종말일지니, 어둠의 군주이자 만마의 지배자라. 하찮은 자여, 그 보잘 것 없는 영혼을 내게 바쳐라.]
설정상, 이 별들 하나하나가 디앤티의 신들이다.
발뭉은 개중 유독 짙은 어둠을 뿌리는 별을 골랐다. 별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 마리 뱀처럼 발뭉에게 날아왔다.
[하찮은 자여, 그대에게 암흑과 마성, 파멸의 축복을 내릴 지니 나의 손톱이 되어 모든 불손한 자들을 단죄하여 내 위엄을 보여라!]
별의 정체는 어둠의 신 칼라.
빛의 신 라헬을 증오하는 악신이자, 마신 진영의 최상위 여신이었다. 당연히 사제 유저 중에도 칼라를 선택하는 이가 많았다. 칼라를 선택하면 저주와 파괴, 치유로 대별되는 악 속성 신성 마법을 모두 평균 이상으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마신을 선택했을 때의 교단 마법이나 이점은 없지만 무난하게 강력했다. 그래서 발뭉도 칼라 신앙을 선택했다.
[흡혈의 손길을 배웠습니다.]
선택권은 없었다. 첫 기술 선택은 오로지 기본 직업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발뭉이 새롭게 얻은 기술을 살피는 사이 우주가 멀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노파를 만났던 신앙의 탑 1층이었다.
노파가 발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암흑기사가 된 것을 축하하네. 그대에게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빌겠네.”
발뭉은 스스로의 몸을 더듬었다. 기사가 됐을 때도 그랬지만, 직업이 결정되자 저절로 몸에 장비가 채워졌다.
<장비>
[가슴] 교단의 사슬 갑옷(일반)
[허리] 가벼운 가죽 허리띠(일반)
[다리] 교단의 사슬 바지(일반)
[겉옷] 칼라 교단의 휘장(일반)
[속옷] 초보자의 흰옷(폐품)
[신발] 가벼운 가죽 신발(일반)
[무기] 교단의 양손 대검(일반)
장비라고 해봐야 이게 전부.
걸을 때마다 절그럭대는 사슬 소리가 거슬렸다. 기왕 주는 김에 판금 갑옷을 줬으면 했지만, 1레벨부터 판금 갑옷을 입기란 불가능했다. 레벨이 오르고 판금 갑옷 숙련 기술을 배워야 착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발뭉은 절그럭절그럭 소리를 내며 성채로 들어갔다. 주위의 유저들이 눈길을 던지더니 그것도 잠시, 무심히 지나친다. 암흑기사 유저가 비록 레이드에서는 효용성이 떨어져도 전쟁에서는 강력한 까닭에 가끔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채 지하에는 작은 던전이 하나 있다. 흔히 말하는 인스턴스 던전으로, 각 개인과 파티마다 별도의 던전이 생성된다.
흔히 시험의 던전이라 부르는 곳이다. 각 인던마다 1명만 입장이 가능했다. 9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고, 각 방마다 난이도를 설정할 수 있으며 딱 하나의 몬스터만 나타난다.
던전 입구는 옅은 빛 무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머리가 핑 돌며 주위 공간이 바뀐다.
‘여기가 시험의 던전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기껏해야 좌우 10미터 정도 될 법한 크기의 석실 안이었다. 한쪽에는 들은 대로 수정 기둥이 세워져 있고, 앞쪽에는 작은 철문이 하나 보였다.
수정 기둥에 다가가 난이도만 설정하면 첫 몬스터인 고블린이 나타난다고 했지.
공략에서 본 대로 수정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허공에 금빛 문장이 죽죽 늘어졌다.
[난이도를 결정하시면 철문을 열고 몬스터가 나타납니다. 몬스터를 잡고 다음 방으로 가세요.]
[난이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높은 난이도에서 몬스터를 잡을수록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10레벨이 되면 시험의 던전이 종료됩니다. 아울러 완료한 난이도에 따라 다음 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난이도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건투를 빕니다. 난이도를 선택해주세요!]
[초보, 병졸, 정예, 기사, 단장, 장군, 군주, 패왕, 절대신화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습니다.].
난이도 단어들을 보고 발뭉은 잠깐 눈을 비볐다. 어디서 많이 보던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 아예 절대신화에서 따왔구나!’
절대신화의 난이도는 여기서 세 개가 더 추가된다. 패왕과 절대신화 사이에 황제, 절대, 신화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럼 당연히 절대신화 난이도를 선택해야지.
원판 절대신화에서도 절대신화를 고집하던 게 발뭉 아닌가. 디앤티의 절대신화가 어느 정도인 줄은 모르겠으나, 설마 그 극악하던 절대신화의 난이도보다는 낮지 싶었다.
위이이잉.
난이도를 선택하자 수정 기둥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앞에 보이는 철문이 천천히 열리고, 몬스터 한 마리가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발뭉의 허리에나 올 법한 작은 키에 못생긴 얼굴. 바로 고블린이었다.
“키이익!”
고블린은 발뭉을 보고 기성을 질렀다. 손에 든 것은 조막만한 단검이 다고, 옷도 없이 사타구니만 짐승가죽으로 겨우 가린 상태였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절대신화 난이도가 어떤 것인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발뭉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르릉!
검집에서 대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석실 안을 울렸다.
고블린과 발뭉의 눈이 마주쳤다.
샛노란 눈빛이 독살스럽게 발뭉을 노려보았다. 발뭉은 그걸 응시하며 천천히 발을 놀렸다. 가죽 신발이 돌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냈다.
고블린이 정면으로 발뭉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단검을 역으로 쥐고 손 뒤에 숨긴 상태였다.
발뭉은 고블린에게 대검을 겨누었다. 섬뜩한 살기가 흐르자, 고블린이 입을 벌리며 위협했다.
“키익!”
이어 가볍게 땅을 박찬다. 고블린의 작은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발뭉에게 날아왔다.
‘빠른데?’
절대신화의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빨랐던 닌자를 보는 것 같다.
발뭉은 신중하게 고블린을 주시했다. 일단 절대신화의 닌자를 상대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고블린의 손에서 빛이 번뜩이는 순간 대검으로 공격을 쳐냈······
“커억!”
방어에 실패했다.
분명히 공격 순간에 맞추어 대검으로 방어를 했는데, 고블린의 손이 불가사의하게 움직이더니 발뭉의 목울대에 단검을 꽂은 것이다.
[사망했습니다. 저장된 지점에서 부활합니다.]
[10레벨 이하의 캐릭터는 사망 후유증이 없습니다. 완전한 상태로 부활합니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빛과 함께 시야를 회복하자, 발뭉은 자신이 시험의 던전 입구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였지?”
솔직히 말해서 어이가 없었다.
방심했다가 당했다면 모르겠다. 절대신화 난이도인 만큼 충분히 긴장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공격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당해?
고민하다가 캡슐에 내장된 실시간 녹화 기능을 켰다. 다시 절대신화 난이도에 도전한 후, 자신과 대치한 고블린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확인했다.
영상을 보며 발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블린의 움직임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 따로 없었다. 재생 속도를 몇 배나 느리게 한 다음에야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시험의 던전에 나오는 고블린은 1레벨 아니었어?’
1레벨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발뭉이 디앤티의 레벨 체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긴 하나, 최소한 자신이 저 속도를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시험의 던전에서는 각 방별로 다른 레벨의 몬스터가 나옵니다. 첫 번째 방에서는 1레벨 고블린, 두 번째 방에서는 2레벨 코볼트, 3레벨 방에서는 3레벨 회색 늑대, 이런 식입니다. 하지만 난이도가 달라지면 몬스터의 레벨도 높아지는데요, 정예 난이도까지는 같은 레벨이지만 기사부터는 몬스터의 능력치 자체가 차이가 나니 상대하기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탁월한 보상을 보장하니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도전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레벨 차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능력치 면에서 워낙 차이가 나니 손도 못 써보고 당했던 것이다.
절대신화 난이도의 고블린은 무려 20레벨이다. 1레벨당 여유 능력치 3점을 얻으니, 능력치로만 따지면 발뭉의 2배에 가까웠다. 당연히 상대가 안 된다.
[아, 진짜! 고블린 잡으라고 놔둔 거 맞아요? 절대신화에서 10번 넘게 죽고 단장급으로 겨우 잡았네요.]
[윗분 대단하네요. 전 정예도 피똥 싸며 잡았는데.]
[발컨은 서러워서 살겠냐. 병졸도 포기하고 초보로 갔는데······]
[크크크. 초보는 너무한 거 아님꽈?]
[절대신화는 잡으라고 만든 게 아님. 1레벨이 20레벨을 어떻게 잡음? 나는 박경철이 패왕 고블린을 잡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음.]
[시발, 박경철은 금손 중에서도 금손이잖아. 우리 같은 닝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발뭉은 국내외의 여러 사이트에서 시험의 던전 관련한 여러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각 난이도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감을 잡았다.
우선 난이도 자체는 절대신화와 거의 비슷하게 대응된다. 고블린의 움직임을 보니 절대신화의 닌자 캐릭터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덩치가 절반 정도인 까닭에 더 민첩하고, 더 괴상하게 움직일 뿐이다.
다만 레벨 차이가 영향을 난이도에 영향을 미쳤다. 정예까지는 완전히 똑같았으나 기사부터는 살짝 더 어려워지고, 패왕 정도 되면 절대신화의 패왕과 황제 사이라고 봐야 했다. 숫자로 표현하자면 8.5 정도라고 할까.
그렇다면 절대신화 난이도는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상상이 안 간다. 단순히 생각해도 능력치가 2배에, 레벨 차이로 인한 공격력과 방어력 보정까지 있다. 딱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고사가 지금 상황에 어울렸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나, 오히려 그래서 더욱 불타올랐다.
“이거 재밌겠는데!”
발뭉의 지론은 게임은 어려워야 한다는 것이다.
쉬우면 재미가 없었다. 수십 번을 죽어가며 도전하고, 마침내 성취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야말로 발뭉이 게임을 즐기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신화에 그토록 몰입했고, 다른 어렵다는 게임들도 구입해서 즐기지 않았나.
게다가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1년이나 지났는데도 절대신화 난이도 고블린을 이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미답지라는 대목이 발뭉의 흥미를 끌었다.
차분히 속으로 정리했다.
‘전투 인공지능은 절대신화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고, 속도와 힘은 숫자상으로는 두 배 이상에, 레벨 보정까지 하면 세 배 이상!’
세 배!
물론 수치가 두세 배라고 해서 실제 움직임까지 그렇게 적용되진 않는다. 그래도 까마득해지도록 아득한 숫자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발뭉이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고블린의 단검이 목울대에 꽂힐 수밖에 없다.
어지간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발뭉은 옛일을 생각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절대신화 오대일이랑 비교하면 어떨까?’
발뭉으로서도 쉽지 않았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발뭉도 절대신화 오대일을 성공한 것은 딱 3번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절대신화 유저들 사이에선 전설이 되었으나 찻잔 속의 태풍이라 정말로 화제가 되진 못했고.
당시에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내치고 방어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적들이 다 쓰러져 있었지.
그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눈으로만 적들의 공격을 따라갈 수 없어서, 직감에 따라 움직였으니까.
“좋아······”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일단 부딪혀 봐야 한다.
발뭉은 검을 꼬나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겨둔 여유 능력치는 민첩에 붓고 던전에 입장한 뒤, 수정 기둥을 활성화시켜 고블린을 불러냈다.
“키이익!”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덤볐다.
발뭉은 몸을 적당히 이완시키며 고블린을 노려보았다. 상대방이 상식적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절대고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몸이 굳어 있으면 일격에 죽고 만다.
못생긴 녹색 손에서 섬뜩한 빛이 일렁였다. 일직선으로 발뭉의 눈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검을 뻗어 방어를 하는 대신, 살짝 팔을 틀어 자신의 눈앞을 검신으로 가로막았다.
그러자 섬뜩한 느낌과 함께 공중에서 빛이 꺾어진다. 눈으로 그 궤적을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풍부한 경험을 활용하여, 고블린의 다음 행동을 예측했다.
‘이 녀석의 행동은 절대신화의 닌자와 비슷해.’
빠른 움직임도 그렇고 처음에는 직선으로 단검을 뻗다가 궤도를 꺾어 목울대를 노리는 것도 그랬다. 두 차례 죽었을 때의 경험과, 절대신화에서의 행동을 보면 어딜 공격할 것인지는 뻔하다.
발뭉은 팔을 더욱 크게 돌렸다. 눈앞을 방어했던 검이 슬쩍 회전하며, 감각적으로 고블린의 공격을 쳐냈다.
챙!
쇳소리가 울리며 불똥이 튀었다.
고블린의 눈에 살짝 당혹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히려 더 열을 내며 달라붙었다.
빛이 번뜩인다. 지그재그로 허공을 누비며 공간을 찢는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발뭉의 배후를 점하고,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을 폭풍처럼 퍼부었다.
대검을 휘둘러서는 막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크게 휘두를라 치면 고블린이 발뭉의 목울대를 그어버렸다. 그렇게 한 10번은 넘게 죽음을 맞이하자, 고블린의 움직임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신의 감각이 올올이 깨어났다. 몸 전체가 순수한 감각 기관으로 변한 것 같았다. 고블린이 내뱉는 뜨거운 숨결은 물론 움직이면서 나는 아주 작은 소음까지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고블린이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발뭉의 등 뒤로 갔다가, 옆으로 돌았다가, 벽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아주 정신이 없었다.
꼭 다섯 명의 닌자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수십 번의 연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 그걸 대검을 슬쩍슬쩍 움직이며 막았다. 검 끝으로 막고, 검신으로 쳐내고, 몸을 회전시켜 피해가며 검 자루로 고블린의 머리를 찍었다.
지극한 긴장감이 발뭉을 사로잡았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맹렬하게 뛰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를 뿐이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몸만 움직이고 있었다.
“키르륵! 키륵!”
고블린의 눈도 빨갛게 변했다. 악다구니를 부리며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과 대검이 마주치며 뿌리는 불똥이, 은하수처럼 석실 안을 누볐다.
희열이 느껴졌다. 거대한 감정의 폭포가 발뭉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다.
춤이다!
살의와 악의가 부딪치고, 무기가 오가며 서로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죽음의 춤!
옛날 생각이 났다.
우연히 절대신화를 VR방에서 만났을 때.
다른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미에 그만 집에도 가지 않고 밤을 꼬박 샜더란다.
그때의 설렘과 즐거움이 다시금 느껴졌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게임에 몰입하여 밤을 새거나,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느라 주말이 통째로 증발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어느새 하루가 다 간 그런 경험이.
지금 발뭉이 그와 같았다. 고블린과의 전투에 완전히 몰입해 들어갔다. 스스로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현실의 어려움도 모두 다 망각하고, 순수하게 몸을 부딪쳐 고블린과 피와 죽음의 춤을 추었다.
강렬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정신이 잔뜩 고양되었다. 오로지 고블린만을 주시하며, 전신으로 그 살의를 느끼며 영혼마저 불태웠다.
그러나······
푸욱!
한판 춤을 춘 끝에 고블린의 단검이 발뭉의 심장에 꽂히고 말았다.
패배.
아직은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하하!”
발뭉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좌절?
그런 건 없었다.
무한한 생명을 보장하는 게임 속 세상에서, 죽음이란 더 강렬한 성취감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절대신화에서 수천수만 번이 넘게 죽었던 발뭉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주변 유저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시험의 던전으로 들어갔다.
몇 번이나 죽었을까?
백 번? 천 번?
최소한 그것보다는 많았다.
하지만 골이 깊어야 산이 높고, 시련을 겪은 다음에라야 제대로 성취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토록 무수히 죽어가며 사투를 벌인 끝에, 발뭉은 목표를 이뤄내고야 말았다.
# 황금 평야
고블린의 목에 대검이 박혔다.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고블린의 눈이 고통으로 흔들렸다. 손을 뻗어 최후의 발악을 하려고 하지만 발뭉은 슬쩍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다. 가슴을 짓밟으며 대검을 뽑자 고블린이 경련을 일으킨다.
빠바바밤!
요란한 축하곡이 울렸다. 시야 전체가 진동하면서 폭죽이 터지고 황금빛 글자가 별빛처럼 솟구쳤다.
[축하합니다!]
[아니, 디앤티에도 환생자가?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한국 서버 첫 위업 달성자입니다. 위업 보상이 강화됩니다.]
[전 세계 서버를 통틀어 첫 위업 달성자입니다. 위업 보상이 강화됩니다.]
[신화잡이 칭호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9 올랐습니다.]
[절세영웅의 상징(영웅)을 얻었습니다.]
[사과 숲 성채 무기 교환권(영웅)을 1장 얻었습니다.]
[사과 숲 성채 방어구 교환권(영웅)을 1장 얻었습니다.]
[사과 숲 성채 장신구 교환권(영웅)을 1장 얻었습니다.]
[특성 점수 1점을 얻었습니다.]
[여유 능력치 10점을 얻었습니다.]
“캬!”
줄줄이 떠오르는 글자에 저절로 속이 뻥 뚫렸다.
단순히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크나큰 희열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으로 보이는 보상이 있으니, 왜 디앤티가 이리 성공했는지 알 것 같았다.
보상으로 받은 것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위업>
[이름] 아니, 디앤티에도 환생자가?
[설명]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세계에서 환생한 건가요? 어떻게 ‘그’ 고블린을 잡을 수가 있지요? 서비스 끝날 때까지 안 잡힌다고 걸었는데······ 당신은 인간도 아냐!
[효과] 모든 능력치 +1%(+2%)
[조건] 1레벨 상태에서 시험의 던전 절대신화 난이도 고블린을 이길 것.
<칭호>
[이름] 신화잡이
[설명] 당신은 신화적인 존재를 사냥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이뤄낸 당신이야말로 세상에 우뚝 설 존재입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신화를 사냥할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효과] 모든 공격력, 방어력 및 저항 20% 상승.
[등급] 유일
[조건] 1레벨 상태에서 시험의 던전 절대신화 난이도 고블린을 이길 것.
<소모품>
[이름] 절세영웅의 상징
[설명] 옛날 옛적 신들과 맞서 싸웠던 영웅이 남긴 물건입니다. 사용하면 1초에 한해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킵니다. 단, 보스 몬스터에게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효과] 1초간 모든 공격 무효화
[등급] 영웅
[제한] 10회 사용 가능(0/10). 보스 몬스터에게 사용 불가.
여기에 무기와 방어구, 장신구 교환권도 있다. 비록 10레벨짜리 영웅 장비지만, 고작 10레벨에 영웅 장비를 가진 유저는 디앤티 전체를 살펴봐도 매우 드물 것이다.
흡족하게 웃다가 시험의 던전을 빠져나왔다. 이미 10레벨이 되어서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묘한 술렁거림이 사과 숲 성채 전체가 번져 있었다.
“절대신화 고블린이 잡혔다던데?”
“나도 봤어! 전체 공지 떴잖아!”
“세계 첫 번째 킬이지?”
“맞아! 패왕 고블린 킬은 나라마다 몇 명씩은 있지만 절대신화는 완전히 처음이라고!”
“시발, 그걸 어떻게 잡았지? 완전 미친 놈 아냐?”
“미친놈이지. 박경철도 못 한 걸 해낸 거잖아. 어떻게 생겼을지 낯짝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
발뭉은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생각 같아선 그들 앞에서 내가 절대신화 킬러다! 하고 외치고 싶지만 겨우 억제했다. 그래봐야 얻는 것도 없이 괜히 귀찮아질 게 뻔했으니까.
자랑은 동영상으로 하면 충분하다. 지난 며칠에 걸친 사투를 죄다 녹화해 놓았으니까.
성채 적당한 곳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 밖으로 나와 몸을 뒤틀자, 전신의 뼈가 비명을 지르며 삐그덕삐그덕 소리를 냈다.
“으으, 좀 너무하긴 했지.”
천 번을 넘어간 후에는 도전 횟수를 더 세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서 날짜를 보니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날짜에서 자그마치 사흘이 넘어가 있었다.
하기야 1번 싸움에 5분 걸렸다고 쳐도 5천 분이면 이미 사흘이 넘는다. 개중에는 10초도 안 걸린 싸움도, 30분이 걸린 싸움도 있었으나 평균 하면 그쯤은 금방 넘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고블린의 목을 딸 때의 쾌감과, 보상을 확인할 때 얻은 충족감 때문이었다.
배가 고파서 라면 두 개를 끓여 먹었다. 거기에 계란을 다섯 개나 넣고 작은 참치 캔도 하나 땄다. 덕분에 국물이 지독하게 농밀해졌으나, 신 김치를 곁들이자 되레 감칠맛이 났다.
라면을 먹으며 국내의 유명한 디앤티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기대했던 대로, 절대신화 고블린 얘기로 커뮤니티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고블린 대체 누가 잡은 거냐!]
[절대신화 깬 분 연락처 아시면 저희 태양 길드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연락 주신 분께는 소정의 보상금과······]
[으아아! 답답해 죽겠다! 누구 정보 아는 사람?]
[고블린 잡으면서 아니, 디앤티에서 환생자가? 위업이 해금됐던데 그거 보상이 뭐에요?]
[그래봐야 1레벨 위업인데 보상이 좋겠음?]
[아무리 그래도 위업인데요? 다른 위업 보상이랑 중복 적용되는데, 그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하네요.]
[어쩌면 나중에는 박경철이랑 맞붙을지도?]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 되겠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보고, 한종식은 싱긋 웃었다. 그 기운이 음험한 게, 꼭 장막 뒤에 숨은 악당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한 뒤, 두 손을 비비며 생각했다.
‘지금 터뜨려? 말아?’
당장 동영상을 편집하여 올리는 것도 괜찮다. 그 즉시 크나큰 반향을 터뜨리며 디앤티의 주인공이 될 테니까.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느냐는 다른 문제다. 절대신화 고블린 급의 화제를 뻥뻥 터뜨리면서 존재감을 과시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나.
‘숙성시키자.’
고민 끝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절대신화 고블린이 근시일 내에 잡히기란 불가능하다.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가치가 올라가면 올라가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영상 몇 개를 확보한 다음 폭탄 드랍을 하는 거야.’
사람들의 심리는 비슷하다. 어떤 영상을 재미있게 봤으면, 그 영상 제작자의 다른 영상을 보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배우나 감독에게 경도되면, 동일인의 다른 영화를 찾아보는 것과 흡사했다.
한종식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제 겨우 10레벨에 불과하다는 게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디앤티는 레벨이 가장 중요한 게임이고, 레이드든 국가 전쟁이든 레벨이 적당히 확보가 되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오늘 찍은 영상은 감각 동조 영상으로 만들어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 풀 영상은 무려 83시간이나 되었다. 중간에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눈을 붙여가며 싸웠어도 그랬다.
이걸 그대로 올려봐야 볼 사람이 없다. 적당히 편집을 했다. 발뭉이 보기에 그럴 듯한 장면만 잘라내어 이어 붙였다. 중간에 음악도 조금 삽입하자 적당히 봐줄 만한 영상이 완성되다.
“좀 잘까······”
작업을 마치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절대신화 고블린이 천 번이 넘게 죽고 죽어가며 덤벼오는 통에, 계속 몸을 뒤척이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디앤티에 접속하자 어제의 술렁이는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직업을 얻고 시험의 던전에 들어가느라 바빴다.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뭉도 그게 편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는 건 좋지만, 워낙 오래 혼자 겉돌아서인지 과한 관심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성채 구석 병기고에 들어섰다.
이곳도 유저들이 바글바글했다. 시험의 던전을 통과하고 받은 교환권으로 무기와 방어구를 받아들고 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대부분이 상위 등급이고, 아주 가끔 희귀 등급 무기나 방어구를 받아들고 희희낙락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나마 장신구는 보이지 않았다. 절대신화는 아니더라도, 높은 난이도를 통과해야 받는 모양이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에 서 있는 보급관에게 다가갔다.
“보급품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교환권을 주게.”
“여기 있습니다.”
고블린을 잡고 얻은 교환권 세 장을 내밀었다. 일견하기에는 그저 작은 종이쪽지 같지만, 중앙 부분에 보라색의 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등을 위로 하여 안 보이게 내밀자 보급관이 별 짓을 다한다는 얼굴로 발뭉을 보았다. 그러다가 세 장의 교환권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맙소사! 이거······”
“보급관님!”
아무래도 실언을 할 것 같아 짧게 보급관을 소리쳐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너털웃음을 흘렸다.
“응? 하하. 자네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는군. 자. 이걸 받게.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목록일세.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하게. 바로 꺼내갈 수 있게 조치하지.”
보급관은 세 개의 금속 패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자, 발뭉만 볼 수 있는 이름들이 허공에 층층이 쌓인다.
[불꽃 호랑이의 검]
[하늘 빛살 쇠뇌]
[번개 정령이 봉인된 지팡이]
[백색 성화 수정구]
[무쇠 산맥 방패]
[외눈박이 공주님의 관]
[잊힌 기사왕의 사슬 갑옷]
[그림자 여왕 망토]
[마법 폭격 반지]
[원시 곰의 심장]
[신의 이름을 담은 귀걸이]
[독수리 영웅의 안대]
상기한 것들 말고도 참 많고도 많았다. 디앤티에는 기본 직업도 많을 뿐 아니라, 직업과 직업을 조합하여 얻는 직업도 많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발뭉은 대검 한 자루, 사슬 갑옷 한 벌, 장신구 하나를 골랐다.
<장비>
[이름] 타락한 기사의 대검
[설명] 한때 고결한 기사였던 이가 타락한 뒤 사용한 검입니다. 순결한 처녀와 명예로운 기사, 순수한 아이와 연약한 노인의 피를 묻혀 완성되었습니다.
[능력] 공격력 90.
[효과] 근력 15 상승, 체력 15 상승, 파멸 계열 기술 효과 6% 상승.
[등급] 영웅
[종류] 양손 대검 무기
[제한] 10레벨 이상 암흑기사
[이름] 해골 용사의 사슬 갑옷
[설명] 죽음에서 되살아난 용사가 입던 사슬 갑옷입니다. 용사는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마왕과 싸웠으나, 끝내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원한을 불태우며 죽었습니다.
[능력] 방어력 45.
[효과] 체력 10 상승, 위엄 5 상승, 심연 계열 기술 효과 3% 상승.
[등급] 영웅
[종류] 가슴 사슬 방어구
[제한] 10레벨 이상 암흑기사
[이름] 악마 외뿔 목걸이
[설명] 언젠가 흑마법사에게 소환된 악마가 남긴 뿔을 가공하여 만든 목걸이입니다. 사악한 기운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어두운 힘을 주인에게 허락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능력] 악마어 통역 가능.
[효과] 지능 8 상승, 지혜 8 상승, 악신 계열 기술 효과 2% 상승.
[등급] 영웅
[종류] 목걸이 장신구
[제한] 10레벨 이상 암흑기사
과연 영웅 장비는 영웅 장비다.
물론 10레벨 장비인 이상 그 한계는 명확하다. 40레벨 희귀 장비만 되어도 슬슬 이 세 장비와 그 능력이 비슷해질 것이다. 그러나 40레벨이 된다고 해도 희귀 장비를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절대신화 고블린을 잡은 보람이 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상위 등급 장비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대검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상위 등급 대검은 공격력이 45에서 48에 불과하고 부가 효과도 근력 9 정도로 끝이니까.
위업과 특성 점수, 그리고 여유 능력치도 있다. 이것들은 발뭉이 디앤티를 접을 때까지 남을 테니 보상은 차고 넘치도록 받은 셈이다.
“후후.”
장비를 확인할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특히 겉모양은 어지간한 고레벨 장비에 떨어지지 않으니, 나중에 장식용으로 써도 좋을 것이다.
이제 사과 숲 성채에서 볼일은 다 보았다. 장비는 일단 가방 안에 감춰둔 채 물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지역인 황금 평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합니다!”
짜악!
마부가 허공에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는 제법 컸다. 수십 명이 동시에 탈 수 있었다. 승차감은 최악이었으나,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니 황금 평야까지는 마음 편히 가게 됐다.
발뭉은 마차 구석에 앉은 채 인터넷을 확인했다. 황금 평야에서는 뭘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크게 네 가지 경로가 있었다.
퀘스트, 사냥, 던전, 전쟁.
지금 발뭉이 탄 마차는 황금 평야의 주도(主都), 리어스 시로 직행한다.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규모가 상당하여 저레벨 인간 유저들의 요람이 되는 곳이었다.
특히 퀘스트가 풍부하고 동선이 좋아서, 빠른 레벨 업을 바라는 우호 종족 유저들이 몰려들었다. 디앤티에 존재하는 두 진영 중 대륙 연합에 속한 종족이라면 누구든 흔하게 목격할 수가 있었다.
‘뭐가 좋을까?’
고려해야 할 것은 두 가지, 빠른 레벨 업과 화제성이다. 그러니 가장 흔한 방법인 퀘스트 릴레이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착실히 퀘스트를 받아가며 레벨을 올리는 건, 공략만 있으면 완전 초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전쟁도 목록에서 삭제했다. 저레벨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봐야 누가 알아주겠나. 전쟁 전문으로 운영하는 길드에서만 주목할 뿐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 던전과 사냥이다.
발뭉은 리어스 시 인근에 위치한 던전과 보스 몬스터에 대해 정리했다. 50레벨이 되면 떠나는 곳이라 크고 위압감이 넘치는 보스는 없었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보스 몇몇은 봐줄 만 했다.
리어스 시 암흑가의 대부 돈 꼴로네, 바위산의 지배자 백호 캬조크, 마법사의 보물을 지키는 진흙 골렘 쟈에무.
‘캬조크와 쟈에무를 잡자.’
정석적인 경로는 리어스 시에서 잡다한 퀘스트를 하며 돈 꼴로네를 잡고, 북쪽 바위산으로 옮겨가 캬조크를 사냥한 뒤 서쪽 던전으로 들어가 쟈에무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 딱 50레벨이 되어 리어스 시를 떠나게 된다.
물론 이게 정석이라곤 하나 꼭 이렇게 해야 하진 않았다. 다른 사냥터도 많고 던전도 많았다. 대신 이렇게 해야 보상이 가장 많으니,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 방법을 택하곤 했다.
‘바로 북쪽 바위산으로 가자.’
북쪽 바위산!
초입부터 30레벨의 맹수형 몬스터들이 나타난다. 개중에는 은신하는 여우 종류의 몬스터도, 하늘을 나는 매나 부엉이 형태의 몬스터도 있어서 주의를 해야 했다. 대부분 일반 몬스터이지만, 이 때문에 파티플레이를 권장했다.
“리어스 시가 보입니다!”
어느새 동쪽 계곡을 다 빠져나왔나 보다. 황금색으로 익은 밀밭이 펼쳐진 거대한 평야가 나왔다. 그리고 저만치 끝에 거대한 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는 빠르게 도시를 향해 달렸다. 환하게 열린 성문을 통과하자, 도시 특유의 활기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리어스 시는 큰 도시라 마차 역까지 도착하는 데만 꽤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10레벨이 되어서 활성화된 직업 특성창을 열람했다.
[파멸] [악신] [심연].
파멸은 암흑기사의 물리 공격 능력을 강화한다. 악신은 사제로서의 능력을, 심연은 암흑기사의 권능에 영향을 미쳤다. 흡혈의 손길이니 암운이니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했다.
현재 발뭉에게는 10레벨이 되어 얻은 특성 점수와 절대신화 고블린을 잡고 얻은 특성 점수를 합쳐 총 2점이 있었다.
모두 파멸 계열의 기초 특성에 투자했다.
<특성>
[이름] 날카로운 칼날
[설명] 암흑기사의 힘으로 손에 쥔 검을 더욱 예리하게 만듭니다. 모든 파멸이 당신의 검에서 시작합니다. 이 힘으로 당신의 의지를 세상에 관철하십시오.
[효과] 도검류 무기 공격력 2% 상승(2/5)
[기술] 칼날 베어내기
[계열] 파멸
당분간은 파멸 특성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40레벨에는 칼날 베어내기 기술을 얻을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지겨운 마차 이동이 끝났다.
사냥터로 이동하기 전 칼라의 신전을 들렀다. 10레벨이 되면서 개방되었을 새로운 기술들을 받기 위해서였다.
“오, 칼라 님의 검인가?”
까만 옷을 입은 사제가 반가워하며 발뭉을 맞이했다.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내밀었다.
즉석에서 배운 후 지금까지 익힌 기술 일곱 개를 확인했다.
<기술>
[이름] 강타
[설명] 응축된 힘을 이용하여 무기를 강하게 휘두릅니다. 비록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으나, 순간적으로 발현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떤 무기로든 사용이 가능합니다.
[효과] 무기 공격력 125% 피해
[소모] 기본 마나의 4%
[계열] 파멸
[이름] 처단
[설명] 자신의 힘을 극도로 쥐어짜 적에게 치명상을 입힙니다. 생명이 30% 이하로 떨어진 상대에게만 유효합니다. 급소를 공격할 경우, 공격력에 추가 보정을 받습니다.
[효과] 무기 공격력 250% 피해
[소모] 기본 마나의 7%
[계열] 파멸
[이름] 어둠의 치유
[설명] 악신 칼라에게 기도하여 치유의 힘을 받습니다. 누구에게나 시전이 가능하지만, 자신 외의 대상에게 사용할 때는 절반의 효과만 발휘됩니다.
[효과] 자신의 생명 25% 회복. 타인에게는 자신의 생명 12.5%에 해당하는 생명 회복.
[소모] 기본 마나의 15%
[계열] 악신
[이름] 약화의 저주
[설명] 악신 칼라에게 기도하여 상대를 저주합니다. 저주에 당한 상대는 방어력이 약화되어 물리 공격에 더 큰 피해를 입습니다. 10분간 지속됩니다.
[효과] 대상의 방어력 10% 저하, 10분 지속.
[소모] 기본 마나의 8%
[계열] 악신
[이름] 악신의 축복
[설명] 악신 칼라에게 기도하여 축복을 받습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시전이 가능합니다.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나 하루에 딱 한 번만 쓸 수 있습니다.
[효과] 모든 능력치 10% 상승, 30분 지속. 하루 한 번 시전 가능.
[소모] 기본 생명의 1%, 기본 마나의 1%.
[계열] 악신
[이름] 흡혈의 손길
[설명] 어둠의 힘을 집중하여 손에 접촉한 상대의 생명을 흡수합니다. 오래 접촉할수록 더 많이 강탈합니다. 단, 접촉이 끊어지면 흡혈도 중단됩니다.
[효과] 상대방의 생명 흡수.
[소모] 없음
[계열] 심연
[이름] 암운
[설명] 어둠의 힘을 주위에 방사합니다. 어둠의 힘에 접촉한 적들은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언제든 자유롭게 펼치고 거둘 수 있으며, 암흑기사가 죽지 않는 한 취소되지 않습니다.
[효과] 주위 적들의 모든 능력치 3% 감소.
[소모] 없음
[계열] 심연
참 길다. 발뭉은 7개의 기술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절대신화 고블린과 싸울 때는 강타와 흡혈의 손길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익숙지도 않은 기술을 쓰느라 집중력이 흩어지곤 해서, 아예 본인의 실력만 믿고 들이댔던 것이다.
“그렇지, 자네 할 일은 있나? 마침 우리 신전에 일손이 부족하네만······”
직업 퀘스트다. 적당한 연속 퀘스트를 해결하고 나면 30레벨까지 유용하게 쓸 희귀 무기를 얻을 수 있다.
발뭉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리어스 시를 떠날 때쯤이 되면 한 번 들러주게나. 칼라 님의 검으로서, 자네는 신전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네.”
“알겠습니다.”
50레벨에 받는 직업 퀘스트는 필수다. 이 드넓은 디앤티 세상에서 필수인 탈것을 주기 때문이다. 퀘스트로 못 얻으면 거금을 주고 말을 사야 하는데, 퀘스트 보상보다 예쁘지도 않고 성능도 훨씬 떨어진다.
신전들이 밀집한 거리를 나와 북쪽으로 걸어갔다. 디앤티에서도 가장 인구가 많은 인간 종족의 초반 도시라, 다른 종족 유저까지 하여 유저들이 아주 드글드글했다.
특히 중앙 광장을 지나칠 때 그게 극에 달했다. 옆에 경매장과 은행도 있고, 결투장도 있는 까닭에 심심한 유저들이 여기 다 몽땅 모여드는 것이다.
“공동묘지 던전 가실 분 모집합니다! 35레벨 이상! 힐러나 신앙 계열 직업 환영!”
“북쪽 바위산 가실 딜러님 모십니다! 근접은 풀이요! 마법 계열이나 궁수님, 기술자님 오세요!”
“골렘 잡으러 갑니다! 탱커님만 오시면 고고!”
발뭉은 아무렇지도 않게 광장을 지나쳤다. 여러 시선이 발뭉에게 머물렀으나 곧 사라졌다. 나 암흑기사요, 하는 옷차림 때문이었다.
역시 암흑기사는 인기가 썩 좋은 직업이 아니다. 그것을 실감하며 북쪽 대로를 따라갔다.
북문을 나서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도시 주위에는 농토가 많이 있었으나, 그곳을 지나치니 점차 거친 비탈이 나왔다. 바로 바위산과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크우우우!”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5인 파티 하나가 늑대와 싸우는 중이었다. 한 마리라면 쉬웠겠으나, 네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난 까닭에 악전고투를 했다.
“조심해, 라모스!”
“제기랄, 힐 좀 빨리 줘! 생명이 간당간당하다고!”
“보채지 말고 기다려!”
“게일, 숙여! 충격탄 날아간다!”
“오케이!”
발뭉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잠깐 그들의 움직임을 구경하다가 비탈길을 올라 하염없이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아까 봤던 늑대와 유저들의 움직임을 상기했다.
제법 빨랐으나 못 쫓을 정도는 아니었다. 움직임이 단순하다는 면에서 특히 그랬다. 늑대는 직선적으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유저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반격만 가하고 있었다.
‘필드 몬스터 인공지능은 던전 몬스터보다 떨어진다고 했지.’
굳이 따지자면 절대신화의 병졸 정도 될까?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필드 몬스터 중에도 정예 몬스터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만 좋은 게 아니라 생명과 공격력이 일반 몬스터의 몇 배에 달하니, 어지간한 유저는 서넛이 모여야 정예 몬스터 사냥이 가능했다.
발뭉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 아무리 공격력이 세도 안 맞으면 그만이었다. 절대신화 고블린도 그래서 결국 잡아내지 않았나.
“크르릉!”
우연히 늑대 두 마리와 마주쳤다.
운이 좋았다. 대개 서너 마리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데, 아무래도 자기 무리에서 낙오된 모양이었다. 한 마리만 나왔으면 더 좋았겠으나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검을 뽑자 늑대들이 자세를 낮췄다. 덩치 큰 늑대는 으르렁대며 발뭉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조금 작은 늑대는 눈치를 보며 슬쩍 배후로 돌아갔다.
고작 맹수 주제에 머리를 제법 굴리는걸?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슬쩍 암운을 발동했다. 흐린 검은색의 안개 같은 게 발뭉의 주변에서 피어올랐다. 그 기운에 닿은 늑대들의 능력치가 미미하게나마 떨어졌다.
“크앙!”
그게 방아쇠를 당겼다. 이상한 감각을 느낀 덩치 큰 늑대가 덤벼들었다. 폴짝 뛰어올라 발뭉의 목을 물고 늘어지려고 한다.
발뭉이 보기엔 뭔가 희끗하는 게 날아오는 듯했다. 눈으로 보고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대신,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살짝 내밀었다. 검 끝이 정확히 발뭉의 목울대를 가로막았다.
그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뛰어든 늑대의 코와 주둥이가 칼날에 꽂히고 말았다.
“깨갱!”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발뭉이 검을 휘두른 거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코피만 터뜨리고 말았겠지. 그러나 늑대가 자기 힘으로 달려들어 칼날에 찔린 탓에 최상의 결과가 도출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검에 늑대를 매단 채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늑대가 달려든 기세까지 더하여, 뒤쪽으로 대검을 내리그었다.
“켁!”
뒤에서 알짱대던 늑대가 피하지 못하고 거기 얻어맞았다.
거리를 잘못 잰 것이다. 대검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발뭉을 견제했으나, 대검에 덩치 큰 늑대의 주둥이가 꽂히면서 매달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 늑대를 휘둘러 자기를 때릴 거라는 사실도.
두 늑대의 몸이 거칠게 부딪치자 대검에서 덩치 큰 늑대가 빠져나왔다. 제법 타격이 컸는지 저만치 떨어진 채 바닥을 뒹굴었다.
발뭉은 놈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 차례 얻어맞고 웅크린 작은 늑대를 향해 폭풍과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올려치고, 짧게 찌르고, 내리긋고, 옆으로 베었다. 빗줄기처럼 쏟아진 연타에 작은 늑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크르릉······”
“크르르르.”
한 차례의 격돌이 있은 다음에야 발뭉이 겉보기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나 보다. 늑대들이 발뭉을 경계하며 낮은 소리를 냈다.
발뭉은 대검을 까딱거렸다.
“덤벼, 이 똥개 새끼들아.”
꽤나 오래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늑대들도 발뭉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늑대들의 인내력이 먼저 바닥났다. 타는 듯한 긴장감을 오래 버티지 못한 것이다.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앞뒤에서 동시에 길게 도약을 했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발뭉은 큰 늑대의 뒷다리가 움찔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즉각 대검을 앞으로 뻗었다. 시기적절한 그 공격에, 늑대의 벌린 입에 대검이 정확히 꽂혔다.
콰직!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대검은 목구멍을 찢고 목뼈까지 박살을 냈다. 그 다음 늑대의 뒷목을 찢고 그 서슬 퍼런 칼날을 내밀었다. 늑대가 꼬지처럼 대검에 꿰인 채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더니, 이내 마른 육포처럼 축 늘어졌다.
늑대 한 마리를 해결한 후,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자세를 낮췄다. 아슬아슬하게 다른 늑대가 발뭉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쳤다.
마침 근처에 작은 바위가 하나 보였다. 늑대 시체를 거기다 걸치며 검을 뽑았다. 다행스럽게도 검을 뽑는 것과 거의 동시에, 늑대가 몸을 안정시키며 발뭉을 보았다.
“약화의 저주!”
늑대가 으르렁대며 눈치만 보자 저주를 날렸다.
검은 빛이 늑대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 잿빛 육체를 칭칭 휘어 감으려고 하나, 안타깝게도 유리 조각처럼 깨져 버렸다. 레벨 차이 때문에 먹히지가 않는 것이다.
“크릉!”
늑대가 의기양양하게 울부짖었다. 좌우로 몇 번 뛰더니, 몸을 잔뜩 낮춘 채 발뭉의 발목을 노리고 도약했다.
제법 날카롭게 움직였으나 발뭉에겐 역시나 헛것이다. 가볍게 늑대의 코를 걷어찼다. 워낙 예민한 곳이라 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한동안 싸움이 이어졌다. 늑대가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특히 그랬다. 늑대의 공격을 받아치지 않는 한, 발뭉의 공격만으로는 치명상을 입히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착실하게 공략을 했다. 눈을 긋고 코를 찌른 뒤, 뒷다리에 큰 상처를 입히자 아무리 30레벨 늑대라도 뭘 어쩔 수가 없었다. 발뭉의 처단 기술에 의해 목이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발뭉의 승리를 축하하듯, 황금색 글자들이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 북쪽 바위산 上
20레벨 차이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고작 2마리 잡았다고 레벨이 오르지 않았나.
업적은 별것 아니었다. 10레벨 이상 차이나는 몬스터를 혼자 잡으면 자동으로 주는 거였다. 고레벨 사냥꾼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신화잡이보단 못해 내버려 두었다. 다른 사람 이목이 신경 쓰일 때 착용하면 되겠다.
‘이거 오늘 캬조크를 잡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캬조크는 40레벨 호랑이 보스 몬스터다. 더구나 38레벨의 정예 살쾡이 두 마리를 달고 나오기 때문에 난이도가 상당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파티를 조직하여 캬조크를 잡았다. 여의치 않으면 종종 소규모 공격대를 만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 캬조크 사냥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걸 보면, 캬조크가 강하긴 강한 모양이었다.
뭐, 발뭉이 보기에는 캬조크가 강하다기보단 유저들이 약하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지만.
‘물약이라도 사가야 하나.’
그 생각을 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중간에 몬스터를 잡으며 올라가면 캬조크와 마주칠 때쯤 20레벨이 될 것이다. 20레벨 차이가 나는 보스 몬스터라면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절대신화 고블린을 잡을 때 그러했듯,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꽤나 어렵겠다. 시험의 던전은 죽으면 코앞에서 부활이라도 했지, 캬조크와 싸우다 죽으면 저 멀리 리어스 시 광장에서 부활하니까. 회복 물약은 아니더라도 강화 물약은 구입하는 게 좋지 싶었다.
그렇다고 리어스 시까지 돌아갈 수는 없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일 아닌가.
‘행상이 있으면 좋을 텐데.’
북쪽 바위산은 리어스 시와 거리가 멀다. 따라서 사냥을 하다가 가방이 차면 돌아가야 하는데, 그 차익을 노리고 행상들이 바위산을 돌아다니거나 초입에 진을 치곤 했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였다. 비탈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바위산이 시작되는 입구에, 행상들이 가판을 벌여놓고 유저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쌉니다, 싸요! 물약이 쌉니다!”
“잡템 매입합니다! 상점가의 90%! 남는 것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무기 수리 해드립니다! 잡템 파시면 무기 수리가 공짜!”
발뭉은 꽤나 한가해 보이는 행상에게 다가갔다. 행상은 뭔가를 꾸무럭거리며 만들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반색을 했다.
“어서 옵셔! 뭘 찾으십니까?”
“강화 물약을 사려고 합니다만.”
“아하! 그러십니까? 뭐든지 골라보세요! 제가 이래 뵈도 연금술도 익혀서, 저레벨용 강화 물약은 뭐든 구비해놓고 있습니다! 곰의 힘, 거북이의 수명, 학의 고고함도 있어요!”
발뭉은 행상이 내미는 목록을 한 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상당한 낭패감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필요한 물약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으나 돈이 부족했다. 지금까지 잡은 게 고블린 한 마리와 늑대 두 마리에 불과했으니, 자연히 돈을 얼마 벌지 못한 것이다.
강화 물약 두 개 정도 사면 다 털리게 생겼다. 발뭉이 입맛만 다시자, 행상이 조심스레 발뭉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시는지요? 찾는 게 없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요. 생각보다 물약이 비싸네요.”
“네? 물약은 원래 이 정도 해요. 캬조크 잡으려면 도핑이 필수거든요. 재료가 이 근방에서 다 나온다면 모를까, 녹색 대지까지는 가야 나오는 게 많아서 가격이 높게 형성됐죠. 돈이 모자라시면 회복 물약 사시는 건 어떠세요? 회복 물약 재료는 리어스 시 주변에서 찾을 수 있어서 싸거든요.”
그런 곡절이 있었나.
발뭉은 목록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그럼 호랑이의 날렵함만 하나 주세요.”
“어? 암흑기사님 아니었습니까? 보통 암흑기사님들은 곰의 힘을 더 선호하시던데······ 여기 있습니다.”
행상은 노랗게 빛나는 물약을 하나 건넸다.
돈이 남아 회복 물약만 두 개를 샀다. 이제 슬슬 올라가야 하는데, 미련이 조금 남아 가판 앞을 서성이자 행상이 비죽 웃었다.
“암흑기사님, 강화 물약이 더 필요하신 것 같은데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외상으로 사가시죠. 제가 대출혈 서비스를 하겠습니다.”
“외상이요?”
발뭉은 행상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자신을 뭘 믿고 외상을 주겠다는 건지 의아해서였다.
행상이 그 시선을 느끼고 종이를 한 장 꺼내 흔들었다.
“아, 물론 계약서는 쓰셔야 합니다. 원금 상환할 때까지 이자를 꼬박꼬박 내셔야 하고요.”
“그런 계약서도 있어요?”
“당연하지요. 상인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계약서인데요? 어떻습니까? 오늘 내로 갚으시면 이자 없이 원금으로만 상환 가능합니다. 도핑 빵빵하게 하시고, 신나게 레벨 올려서 자정 전에 갚으시면 암흑기사님이 손해 보는 것도 없어요!”
계약서를 확인했다. 혹시 잠적해서 금액을 불린 후 받아내는 사기인가 싶어서였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루에 이자 10%라는 무시무시한 폭리이긴 했으나, 복리 이자가 아닌 단리 이자이고 우편으로도 부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잠깐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발뭉은 서명을 하고 강화 물약을 있는 대로 샀다.
“감사합니다! 참, 숫돌은 안 필요하십니까? 무기 공격력을 1시간 동안 3% 올려주는데요.”
결국 행상의 입담에 휘말려 숫돌까지 구입했다. 딱 1개씩만 구입했지만, 가격이 상당해서 10골드나 되는 빚을 졌다.
행상이 싱글벙글 웃었다.
“도핑 짱짱히 하시고 폭렙, 광렙 하시기 바랍니다! 바위산 졸업하시고 나서도 강화 물약 필요하시면 언제든 여불위에게 우편으로 문의주세요! 제가 도핑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즉석에서 친구 추가도 했다. 앞으로 1인 레이드를 하다 보면 강화 물약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행상과 헤어져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곳곳에서 몬스터를 잡는 유저들이 보였다. 바위산이 워낙 넓어 곧 띄엄띄엄 흩어졌으나, 몬스터들이 질러대는 비명만큼은 쉬지 않고 발뭉의 귓가에 뛰어들었다.
발뭉은 아예 대검을 빼어들었다.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발뭉은 레벨이 낮으니, 몬스터들이 쉽게 감지를 하고 쉽게 덤벼들 터였다.
그러길 잘했다.
쌔액!
바람 소리와 함께 뭔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발뭉은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날렸다. 시커먼 그림자가 발뭉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등에서 뜨끔한 통증이 느껴지며, 피가 절반도 넘게 빠져나갔다.
“이런!”
발뭉은 급히 몸을 굴려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까만 점 하나가 날렵하게 솟구치는 게 보였다.
북쪽 바위산에서 흔히 나타난다는 매였다. 제대로 공격 한 방만 들어가면 죽을 정도로 맷집이 약한 녀석이나 공격력 하나만큼은 무시무시했다. 특히 마법사나 사제 같이 몸이 약한 직업은 두 번만 정타를 허용해도 죽을 지경이었다.
발뭉은 눈살을 찌푸렸다. 매가 하늘 위에서 길게 맴을 돌더니, 몸을 낮춰 급강하하기 시작해서였다.
‘레벨이 낮으니까 약해 보인다 이거지?’
그렇다면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지.
몸을 가볍게 틀었다. 대검을 슬쩍 늘어뜨렸다. 거의 지면에 닿을 정도로 사선으로 비껴든 후, 몸을 살짝 긴장시키며 하늘을 마주보았다.
쌔애액!
공기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검은 점이 내리꽂혔다. 소리를 들었다 싶은 순간, 이미 발뭉의 코앞까지 득달해 있었다.
바로 그때 검을 올려쳤다. 옆으로 반보를 옮기며 검을 날린 탓에 매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발뭉의 몸을 스쳤고, 대신 거대한 검이 매의 날개를 잘랐다.
“키이익!”
날개는 단번에 잘려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매가 몇 번이나 땅을 뒹굴더니, 긴 단말마와 함께 목숨이 끊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일격필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거 괜찮은데?
늑대보다 상대하는 게 더 쉬웠다. 공격력은 매가 훨씬 높고, 하늘을 난다는 장점이 있으나 움직임이 직선적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격만 제대로 들어가면 매는 죽는다. 늑대는 그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매를 계속 잡는 게 좋겠다.
매의 시체를 뒤적여 전리품을 얻은 후 바위산을 올랐다.
몇 번 더 전투가 이어졌다. 여우, 늑대, 살쾡이, 독수리, 매, 부엉이, 사슴, 토끼 등을 가리지 않고 잡았더니 금세 17레벨이 되었다.
‘슬슬 레벨이 안 오르는걸.’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에 1레벨을 올리는 게 고작인데, 발뭉은 전투 1번마다 1레벨이 안 오른다고 투덜거리고 있으니까.
발뭉은 머리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쭉 뻗은 바위산의 주봉(主峯)과 함께, 그 아래에 삐죽삐죽 솟은 세 개의 봉우리가 보였다.
각자 수사슴 앰버, 거대 독수리 르륄, 동굴 곰 비우가 위치했다. 잡으면 무조건 상위 등급 장비를 주고, 딱 하나 나오는 퀘스트 시작 아이템을 가져가면 리어스 시에서 상위 등급 장비를 보상으로 준다.
모두 정예 몬스터. 캬조크와 싸우기 전 몸을 풀기에 적당한 상대였다.
발뭉은 방금 잡은 늑대에게서 전리품을 수집했다. 별것은 아니고, 코퍼 몇 개와 탈 형태의 일반 등급 가죽 투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말라붙은 늑대 탈]
부가 효과는 아무 것도 없이 방어력 한 줌이 전부였다. 얼굴을 다 가리는 형태라 착용감도 안 좋았다. 그래서 유저들은 선호하지 않는 장비지만, 발뭉은 기꺼이 늑대 탈을 눌러썼다.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였다.
바위산은 개방된 지역이고, 누군가 보스 몬스터와 싸우는 장면쯤은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벌써부터 얼굴 팔리고 싶진 않았다.
첫 정예 몬스터인 수사슴 앰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파티가 앰버와 싸우고 있었고, 다른 파티가 공터 구석에 앉아 그것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해당 유저나 파티에게 몬스터가 선점되니 스틸은 불가능하다. 꼼짝 없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자연히 디앤티 초기에는 몬스터 잡는 순서를 가지고 분쟁이 많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조금 줄어들었으나, 가끔 분쟁이 생기는 것은 여전하다고.
발뭉이 공터로 들어서자, 구경하던 파티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 발뭉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사슬 갑옷에 검과 방패로 무장한 기사 유저였다.
발뭉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기사 유저는 앞선 파티와 드잡이 질을 벌이는 앰버에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사슴 잡으러 오셨나 보죠? 다른 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혼자 온 겁니다.”
“혼자요? 으음······”
기사 유저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맨손인 발뭉의 두 손을 보고, 10레벨 때 받은 바지를 확인하더니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등에 짊어진 대검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예 비웃음을 날렸다.
“좋은 무기 좀 가졌다고 정예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더 레벨을 올리시는 게 좋겠는데······ 뭐 알아서 하십시오. 순서는 저희 다음입니다. 아시죠?”
말하는 걸 들으니 발뭉이 현질이라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상했다는 걸 숨길 생각 없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압니다. 사슴이나 잘 잡으세요.”
기사 유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기 파티에게 다가갔다. 그들끼리 뭐라고 쑥덕이며 발뭉을 보는데 별로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덩달아 발뭉의 기분도 축 가라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쫓아가서 항의를 하고 싶다. 하지만 괜히 시비가 붙는 것도 별로 탐탁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는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검부터 뽑아드는 위인이 널려 있으니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적당한 나무 뭉치 위에 걸터앉았다.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 집중을 하며, 유저들이 앰버를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앰버는 웅장한 뿔을 가진 사슴이었다. 날렵하게 움직이며 뿔로 공격하는 것에 능숙했고, 기습적으로 날리는 뒷발차기도 일품이었다.
빠르기는 하나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것이 앰버를 지켜보며 발뭉이 내린 결론이었다.
“오, 단검 나왔네요!”
“도둑님, 축하축하!”
드디어 첫 파티가 앰버 사냥에 성공했다.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산을 올랐다. 거대 독수리 르륄을 잡으러 가는 것이다.
발뭉의 바로 앞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앰버가 재생성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앰버가 나타나는 대로 공격을 날렸다.
꽤나 악전고투를 벌였다. 앰버의 공격력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까닭이었다. 기사의 방패가 중간에 박살 나기까지 해서, 하마터면 전멸할 뻔했다.
“아니, 킹아더 님 방패 수리 안 해 오셨어요?”
“그게 충분할 것 같아서······”
“이러면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와야 하잖아요.”
“아 진짜! 맥 끊기면 캬조크까지 잡기도 힘든데!”
기사의 어깨가 힘없이 쳐졌다. 어째선지 고소한 느낌이 들어서, 발뭉은 늑대 탈 안에서 웃으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곧 앰버가 재생성되었다.
발뭉은 치열한 격전 끝에 앰버 사냥에 성공했다. 정예 몬스터라 제법 어려웠다. 목을 몇 번이나 치고, 머리통을 날린 다음에야 끝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두 개의 파티가 도착하여 발뭉의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헐, 저 사람은 혼자 정예몹을 잡네?”
“레벨이 높은가 보지.”
“그럴 리가. 망토도 없고 손도 맨손이잖아. 레벨은 낮은 거 같은데?”
“진짜네?”
“무기는 좋아 보인다.”
“아, 나 저거 알아! 암흑기사가 군주 고블린 잡으면 주는 대검이야!”
누군가 한 명이 타락한 기사의 대검을 알아보았다.
갑옷과 목걸이는 대충 넘겨서 다행이다. 하기야 둘 다 칼라 교단의 휘장 안에 숨어 있으니까. 눈썰미가 좋으면 알아볼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디앤티 세계에 풀린 적이 없는 물건이니 쉽지 않을 테고.
유저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뭐? 군주 고블린?”
“개쩐다! 저 사람 혹시 프로게이머 아냐?”
기다리던 유저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번졌다.
발뭉은 속으로 웃었다.
군주 고블린은 무슨? 본인은 군주 고블린 정도가 아니라 절대신화 고블린을 잡은 몸이란다.
유저들은 꽤나 발뭉을 귀찮게 했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구 사진을 찍었다. 앰버를 잡고 자리를 뜨는데 다가와 몇 레벨이냐고 묻기도 하고, 당돌하게도 캬조크를 같이 잡자는 제안도 했다.
당연히 모두 거부했다.
“됐습니다. 전 혼자가 편해서요.”
당연한 일이다. 뭐하러 남 좋은 일을 하겠나. 차라리 위업과 업적을 독차지하여 더 많은 명성을 쌓는 게 낫지.
“그러지 마시고······”
“됐습니다.”
유저들을 외면하고 빠르게 바위산을 올랐다. 유저들이 더 달라붙으려고 했으나, 시기적절하게 앰버가 재생성되어 돌아가야 했다.
올라가면서 전리품을 확인했다.
[사슴 장식 망토(상위)]
[수사슴 앰버의 뿔(퀘스트)]
사슴 장식 망토는 38레벨 상위 등급 망토였다. 부가 효과는 체력 8이 다였다. 그나마 레벨 제한이 없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망토를 착용했다. 고작해야 허리까지 내려오는 짧은 망토였다. 비워져 있던 장비 칸이 하나 채워지자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독수리 르륄이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역시 선객이 있어서, 발뭉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쉬었다.
르륄과 싸우는 이들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앞서 앰버와 싸웠던 유저들은 다른 곳으로 갔거나, 아니면 까다로운 르륄과의 전투에 전멸한 듯했다.
뒤쪽에서 유저 다섯 명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다섯 유저들은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 얼른 캬조크 잡아야 하는데 이게 뭔 일이래요.”
“킹아더 님은 앞으로 여벌로 방패 하나 더 들고 다니셔야겠어요.”
“죄송합니다.”
“자자, 이제 그만하죠. 킹아더 님도 죄송하다고 하시잖아요? 같은 길드원끼리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얼른 캬조크 잡고 내려가게요. 40레벨부터 개미굴에 출입이 가능해진다고요. 일단 거기 들어가기면 하면 70레벨까지는 금방이에요. 얼른 가서 폭렙합시다.”
누군가 했더니 아까 방패가 망가져 내려갔던 파티다. 지금 보니 같은 휘장을 두르고 있는 게 동일한 길드 소속인 것 같았다.
발뭉은 그들을 일별하고는 거대 독수리 르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미 발뭉의 관심 밖에 있었다. 르륄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그걸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그리느라 바빴다.
르륄은 바위산에 산재한 매나 부엉이와 비슷한 전투 방식을 보였다. 대신 급강하 공격만 하는 게 아니라 발톱으로 할퀴고, 부리로 쪼고, 가벼워 보이면 잡아채다가 공중으로 낚아 올렸다. 상대하기가 더 까다롭다는 뜻이다.
“으아! 살려줘!”
특히 공중으로 낚는 게 가장 위험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피떡이 되어 죽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유저들이 바삐 공격을 날렸다. 특히 궁수와 마법사가 긴장하다가 원거리 공격을 가했다. 그러면 르륄이 잡아챈 유저를 놓아버리고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다.
‘쉽지 않겠어.’
결판은 첫 급강하 공격에서 난다. 거기서 제대로 반격을 꽂아 넣으면 낙승을 거둘 것이다. 반면 르륄에게 낚아 채이기라도 하면 발뭉이 끝장날 테고.
한창 계획을 구상하는 중에, 뒤늦게 올라온 파티가 발뭉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발뭉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이신지?”
한 명만 온 게 아니고 다섯 명 전원이 몰려와 있었다. 몇몇은 뾰로통한 얼굴이고, 몇몇은 어색한 얼굴로 발뭉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 다들 말이 없었다. 그러다 궁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기사가 침을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암흑기사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저희에게 순서를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발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부정적인 기색에, 기사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아, 진짜!”
답답했는지 궁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예 기사를 젖히고 앞으로 나오더니,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는 님이 우리 다음이었잖아요? 그대로 하자는 거예요. 님은 혼자니까 우리가 오래 기다려야 되는데, 우리가 먼저 하면 님은 얼마 기다리지도 않잖아요? 어때요? 서로 좋게 좋게 가죠.”
그러면서 슬쩍 겉에 입은 길드 휘장을 들어보였다. 하늘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사람이 그려진 휘장인데, 그게 뭔진 모르겠으나 눈치를 보건대 알아서 기라는 의미 같았다.
그제야 발뭉은 궁수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양보를 빙자하여, 사냥터를 강탈하겠다는 것 아닌가.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들이 실수해서 순번이 늦어지는 것을 누구한테 덮어씌우려고 그런담? 늦게 왔으면 얌전히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가 오면 그때 사냥을 해야지.
“뭐라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궁수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다. 눈을 홉뜨며 발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앙칼진 눈빛이 날아와 꽂혔으나, 발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 이거 안 보여?”
이젠 아주 말까지 짧아진다.
궁수가 다시 길드 휘장을 들어보였다. 그 속에 숨은 뜻을 다 알면서도, 발뭉은 짐짓 모른 척을 했다.
“길드 휘장인 것 같은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와, 진짜 말 안 통하네. 이봐, 당신. 우리 천왕 길드에 대해 못 들어 봤어?”
“처음 듣습니다.”
“우와, 모르는 척 쩐다. 대충 오리발 내밀면, 저렙이라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사실 정말로 모르기는 했다. 대충 눈치를 보니 어떤 거대 길드의 휘장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발뭉은 디앤티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참이었다. 어떤 길드가 있는지, 또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기는 힘들지 않겠나.
발뭉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자 다른 유저들도 얼굴이 안 좋아졌다. 단지 그 정도를 떠나서 적의어린 눈빛으로 발뭉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파티창으로 의견을 나누는지, 그들의 입술이 쉬지 않고 달싹였다.
이때쯤 앞선 파티가 사냥을 끝냈다. 길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르륄이 저 하늘 높이 생성되었다. 발뭉도 슬슬 몸을 일으켰다. 곧 횃대로 내려올 테니, 바로 사냥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 순간.
패애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까만 막대 같은 것이 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일직선으로 날아올라 정확히 르륄을 향해 쏘아졌다.
“끼아아!”
까만 막대는 아슬아슬하게 르륄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비록 맞지는 않았으나, 신경에 거슬렸는지 르륄이 기성을 터뜨렸다. 아울러 다른 유저에게 선점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회색 기운이 르륄의 주변에 나타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발뭉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어머, 이걸 어째? 손이 미끄러졌네?”
궁수가 약 올리듯 낭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파티원들도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기사는 머리만 꾸벅 숙이며 르륄의 주의를 끌기 위해 달려 나가고, 전사와 마법사도 뭐 어쩔 거냐는 눈으로 발뭉을 쳐다보았다. 사제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발뭉에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발뭉은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그 파티를 노려보았다. 앞서 르륄을 잡은 파티도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랐는지 발뭉과 유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개념 없는 것들이!’
발뭉은 머리털이 일어나도록 분노했다.
다섯이 르륄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이를 꽉 깨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참아야 하나?’
아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그런 답변이 들려왔다. 검을 힘껏 틀어쥐면서 앞으로 나섰다. 워낙 힘을 주어 땅을 밟은 까닭에 발자국이 깊게 남았다. 그만큼 발뭉의 분노는 크고 무거웠다.
파티가 발뭉을 의식하고 르륄을 끌고 가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발뭉은 정확히 궁수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야! 안 비껴?”
궁수가 고함을 치지만 발뭉은 비껴주지 않았다. 화살을 자신에게 날려보라는 듯이, 차가운 눈으로 궁수의 눈을 응시할 뿐이다.
궁수가 두 팔을 움찔거렸다. 성질 같아서는 발뭉에게 화살을 날리고 싶었으나 PK시 붙는 현상금이 무서웠다. 레벨을 올리기 바쁜데 마을에도 못 들어가고 자칫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안 비키면 운영자한테 신고 넣는다?”
“마음대로 해라.”
발뭉은 비켜주질 않았다.
눈앞에서 사냥감을 빼앗겼다. 이걸 그냥 넘어갈 정도로 발뭉은 순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거대 길드를 등 뒤에 업었든 어쨌든 간에 당한 것은 갚아줘야 직성이 풀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냥 방해는 심한 게 아니냐고?
발뭉이 지금껏 살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화를 낼 때는 내야 하고, 부당한 처우를 당하면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으로 삭이고만 있으면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 취급밖에 못 받는다.
더구나 바위산에서 사냥을 시작한 이래 모든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참이다. 나중에 이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대처가 가능했다.
다른 파티원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저리 안 꺼져? PK 당하고 싶냐?”
“죽여줄까?”
사제만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발뭉은 사제 또한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말로만 사과를 하면 단가? 양심에 찔리면 최소한 치료는 하지 말아야지. 지금도 발뭉의 눈치를 보면서 축복이면 축복, 치유면 치유, 할 짓은 다 하고 있었다. 아까 허리를 굽힌 것 따위, 알량한 자기 양심을 달래보겠다고 취한 자위 행위에 불과했다.
“끼에에에!”
르륄이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궁수는 물론, 저기 떨어져 있던 마법사와 사제 등 유저들 모두의 얼굴이 급변했다.
다름 아닌 낚아채기 공격을 하겠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이때 르륄은 자신에게 두 번째로 위협적인 존재를 공격하는데, 대부분은 원거리 공격수가 될 확률이 높았다.
지금은 궁수가 발뭉에게 묶여 있으니 마법사가 되겠지.
“이런, 안 돼!”
마법사가 손을 허우적거렸다.
급히 방어 마법을 펼치지만 르륄을 막아낼 수는 없다. 벼락처럼 날개를 떨친 르륄이 마법사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방어 마법 따위 콱 으깨버리고 마법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사제가 엉겁결에 공격 마법을 썼으나 형편없이 빗나갔다. 기사와 전사가 고함을 지르지만 너무 멀었다.
궁수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가 죽으면 끝이다. 앞으로 하나하나 르륄에게 죽어나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PK 현상금을 감수하는 게 나았다.
“죽어!”
빼액 소리를 지르며 활을 발뭉에게 겨눴다. 화살을 메긴 후 즉시 쏘아냈다.
발뭉은 그런 움직임을 다 보고 있었다. 당연히 검을 휘둘러 가볍게 튕겨냈다. 화살이 동강난 채 땅바닥에 박혔다. 아울러 궁수를 비롯한 5인 파티의 몸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이놈부터 죽여!”
“알았어!”
“넌 이제 죽었다!”
전사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쫓아왔다. 궁수는 뭔가 기술을 썼는지 몸을 붕 띄워 뒤로 움직였다. 발뭉과의 거리를 벌리고 르륄에게 화살을 날려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면 안 되지.
발뭉은 몸을 낮추고 돌진했다. 속도가 무섭도록 빨랐다. 흡사 미리부터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궁수는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르륄 대신 발뭉에게 화살을 쏘았다.
차가운 웃음이 발뭉의 입가에 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검으로 화살을 튕겨냈다. 궁수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정확히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길게 찌른 대검이 정확히 궁수의 목을 꿰뚫었다.
“그르륵!”
궁수가 제 목을 감싸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만약 궁수가 유저가 아니라 몬스터였다면 일격에 이리 되진 않았을 것이다. 엄연히 레벨 보정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그러나 PK에는 레벨 보정이 작동하지 않는다. 유저의 실력에 따라서는 저레벨 유저가 고레벨 유저를 잡는 일이 왕왕 발생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미진아!”
“저 새끼가 미진이를!”
비통한 외침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안타깝게 궁수를 부르지만, 궁수는 힘없이 고꾸라진 채 그 육체가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 안 돼!”
때맞추어 마법사가 르륄에게 붙잡혀 높이 올라갔다. 그 높이가 상당해서, 떨어뜨리면 즉사할 게 분명했다. 깃털 마법이 있으면 모를까, 벌써 5인 파티 중 2명이 죽은 것이다.
“죽여버린다!”
“야 이 개 같은 놈아!”
전사는 물론 기사도 눈에 불을 켜고 발뭉을 공격했다.
발뭉은 차분하게 대처했다. 기사의 공격은 투우사가 소를 피하듯 흘려보냈다. 전사의 공격도 슬쩍 피해냈다. 반격을 가해 심장에 대검을 꽂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넘겼다. 자신이 뭘 할 필요도 없이, 르륄이 이 파티를 처리해 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르륄이 홀로 동떨어져 있던 사제에게 날아갔다. 기사가 아차 싶어 주의를 끌러 달려갔으나, 발뭉이 왼쪽 발목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늦고 말았다.
“아아악!”
사제의 비명과 함께 르륄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뭉은 천천히 물러났다. 일부러 암운을 쓰지 않아서 르륄은 발뭉을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 파티가 다 죽은 다음에야 발뭉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기사가 르륄의 공격을 받아내며 고함을 질렀다.
“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두고 보자! 디앤티를 접게 해주겠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처음에 조금 미안해하던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자기들이 단초를 제공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발뭉이 의도적으로 공격을 유도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화를 냈다.
“뭐, 마음대로 해라.”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발뭉은 기사가 르륄에게 당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전사의 주요 관절에 칼침을 놔주었다. 결국 기사와 전사 모두 르륄에게 죽어 자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역천의 발뭉』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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