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인랑지왕-야수왕편 [E]

인랑지왕-야수왕편 1

2017.06.14 조회 267 추천 0


 붉고 요염한 색기에 끌린 것인가. 향긋한 꿀의 향기에 홀린 것인가. 자그마한 벌이 꽃 끝에 드리운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청년의 동공에는 벌이 꿀을 빠는 그 세세한 과정이 들어찼다.
 벌은 꿀을 찾아 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분주히 날갯짓을 한다. 그 고생의 종착점에서 달콤한 꿀이 깃든 꽃을 찾아낸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자유로이 노니는 벌을 바라보는 청년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산아, 뭐해?”
 순간 느닷없이 등에 몸을 밀착한 소녀의 탓으로 몸이 기우뚱하며 생긴 그림자에 놀란 벌이 꿀을 채취하는 것을 멈추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뭐야? 이 계집애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벌 관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에 산은 머리를 북적북적 긁으며 자신의 등 뒤에 찰싹 붙어있는 소녀를 떼어냈다.
 아담한 키에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순박한 얼굴의 이 소녀는 산의 평생에 걸쳐 이어진 방랑생활 내내 같이 씻고 같이 먹어온 소꿉친구다.
 이름은 아연(阿淵)으로, 이동생활을 함께하는 이웃들은 저들 멋대로 이미 둘을 미래의 신랑 신부로 점찍어두기까지 했다.
 ‘뭐 그건 어른들의 사정이고.’
 남의 운명을 그렇게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무엇보다도 산에게 있어서 아연은 그저 어린 여동생에 불과했다.
 “근데 여기서 또 뭐하고 있었던 거야?”
 “벌을 보고 있었어.”
 “벌? 왜 꿀이라도 먹고 싶어?”
 의미를 모르겠는지 아연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산은 한숨을 쉬며 대답해주었다.
 “자유롭잖아. 너무 자유로워서.”
 “으음 그게 뭐야? 너무 어려워.”
 “으휴, 됐다. 이 녀석아.”
 산은 피식 웃으며 보란 듯 한 번 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연도 이제 열일곱이 되었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소꿉동무라 해도 시집갈 나이가 된 여자의 몸을 건드리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테지만, 마을 어른들은 그저 보기 좋다는 듯 흐뭇하게 볼 뿐이었다.
 “아앗! 또! 머리 쓰다듬지 말라니까.”
 최근 부쩍 여자 태를 내는 아연이 쑥스러워하며 산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나저나 너 뭐 때문에 왔냐?”
 “아! 아저씨가 슬슬 해가 저물어간다고 저녁 먹으러 오래.”
 “아버지가? 그럼 가봐야겠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산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먼저 부르는 것이 상당히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수풀 사이에서 노니느라 여기저기 풀물이 든 옷을 툭툭 털며 산은 아연과 함께 산길을 내려갔다.
 
 ***
 
 낙양(洛陽)에 위치한 숭산 인근. 몽고족이 초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게르(움막)가 집단으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마을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저녁밥을 짓는 구수한 밥 냄새와 연기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산은 그중에서도 제일 작고 초라해 보이는 게르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왔느냐?”
 다른 이들처럼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있던 아버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산의 기척을 아는 체했다.
 “예. 다녀왔습니다.”
 산은 아연과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자지간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격식과 예를 갖추는, 흔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은 물론 그의 아버지는 중원에만도 수도 없이 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였다.
 본래는 제법 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부족은 과거에 벌어진 무슨 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고, 그 와중에 간신히 살아남아 한데 모인 수는 약 오십 여 가구. 대략 이백 정도의 인원뿐이었다.
 이백이라고는 해도 넓디넓은 중원 땅에서는 얼마 되지 않은 숫자이고, 오랜 시간 함께 이동생활을 한 결과 이제는 가까운 친척인 양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대부분 알고 지낸다. 제법 걸쭉한 농을 주고받아도 좀처럼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화목한 집단이었다. 이를테면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대가족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사실 산과 그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산의 아버지는 그들을 모두 통솔하는 우두머리 격으로 추앙받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곧잘 ‘촌장’이라고 부르며 의지했다.
 이는 산의 아버지가 과거에 중원의 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덕분에 지리에 박식하고 셈도 밝으며, 또한 지금까지 그가 내린 판단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의 판단을 신뢰하고 존경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산은 어느새 차기 촌장인 양 또래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느 부자와 달리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감수해야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앉아라.”
 어느덧 단출한 저녁이 차려졌고, 산은 저녁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면했다.
 산의 눈동자에서 자리 잡은 아버지는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눈의 총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은 건장한 중년이다.
 중년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본래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탓에 아직까지 꽤 많은 아낙네들의 눈길을 받고 다니기도 하지만, 산의 어머니를 먼저 보낸 후 그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적은 없다.
 왜인지는 산도 모른다. 재혼에 대해 물은 적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살가운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낙양에서 일을 마치면 다시 이동을 하려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날 거고, 식량을 비축해두어야 하니 내일부터 너희도 손을 거들거라.”
 ‘젠장!’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동을 한다는 것일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늘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꽃과 꿀을 찾아 이동하는 벌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에게는 거두어지는 벌꿀도, 편히 몸을 누일 벌집 같은 안식처도 없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늘 옮겨 다니기만 할뿐이다.
 산은 그것이 늘 불만스러웠다.
 아니, 사실 무엇이 불만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단 한 번이라도 벌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길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을 가지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벌처럼 분주하게 이동하되,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한 뼘 땅조차 없는 정처 없는 삶. 이런 목적조차 없는 이동생활에 진력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비단 그의 생각뿐만이 아니다. 이런 삶에 대해 모두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혹독하게 청년들을 다그쳤다.
 산은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어째서 겨울을 앞두고 이동을 하는 거죠?”
 “······우리는 영원히 안식처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유를 말하여도 너는 이해 못 할 터이니 잠자코 따르거라.”
 “소자의 나이도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충분히 어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 산의 불만은 늘 있는 이동 따위가 아니었다. 정착하지 못하는 삶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늘 명령만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나 더 윗대의 어른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지만 도망치듯 이동만 하는 생활에 대해 산이 같은 청년층들의 불만과 원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산의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틀렸다. 너는 아직 어리다. 네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젊은 치기이며 오만이다. 너는 아직 네가 사는 우물 안의 것만이 세상이라 생각하지만 우물 밖이야말로 진짜 세상이며, 그곳은 그리 만만치 않다. 너도 나중에 내가 죽고 마을의 사람들을 이끌게 될 때가 오면,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결국 또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꽉 쥔 주먹에 손톱을 박아 넣은 산은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분하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것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후우······. 내일부터 손을 거들겠습니다.”
 “잘 생각했느니라.”
 그것을 끝으로 두 부자간의 대화는 단절됐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움막 안, 부자간의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
 
 고된 노동의 시작은 이른 새벽부터였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는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화가 단단히 날 대로 난 산이었지만 그렇다고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산은 작업 중이던 말린 육포를 우물우물 씹었다.
 떠나기 전까지 필요한 열흘치의 식량을 제외하고 이동하는 동안 먹을 수 있도록 훈제와 건조작업으로 얻어질 물기 없는 식량들을 비축하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힘을 쓰는 일은 어지간하면 그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도맡았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힘든 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연과 또래 처녀들은 하루 종일 숭산의 냇가에서 물을 퍼 날라야 했다. 또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말과 양들에게 먹일 풀을 쉴 새 없이 뜯어 모아야 했다.
 출발은 열흘 뒤로 결정되었다. 덕분에 그들의 작업은 해가 중천으로 뜰 때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다.
 점심을 먹은 후 제풀에 지친 산은 하던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아름드리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서 태평스레 누웠다. 낮잠이라도 한숨 잘 요량이었다.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뭇잎이며 수풀내음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아! 또 잔다! 정말이지!”
 그것도 잠시, 그새 산을 찾아낸 아연이 물동이를 머리에 얹은 채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 단단히 삐진 양 타박을 뱉어냈다.
 “좀 놔둬. 사람이 좀 쉬면서 해야지. 오늘내일로 끝날 일도 아닌데 무리했다가는 떠나기도 전에 골병든다.”
 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는 양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깊숙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가 숨을 돌릴 만할 때쯤이면 그녀뿐만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 그를 찾기 때문이다.
 잔꾀를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실 산이 아이들을 통제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면 일이 빨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걸 보며 마을 사람들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며, 장래가 촉망한 인재라고 호평하지만 산은 그런 칭찬마저 싫었다.
 그는 언제고 마을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자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그 때가 왔을 때 여행을 하는 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테니까······.
 나뭇가지 위에서 잠이 든 척하던 산이 아연에게 불쑥 물었다.
 “연아. 너는 이 생활이 안 지겹냐?”
 “힘들지. 근데 다 같이 있으니까 그래도 즐거워.”
 “그래?”
 아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을 긷고 물동이를 지느라 온몸이 젖을 만큼 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에는 거짓이라곤 숨겨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산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자, 그럼 슬슬 가볼까?”
 왠지 모르게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를 따라 나무 그늘에 앉아 산을 기다렸던 다른 청년들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씩 웃는다.
 ‘뭐, 나쁘지 않으려나.’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햇살 탓인가, 그런 그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마치 환상처럼······.
 “꺄아아악!”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광경도 잠시, 숲 인근에서 한 여아(女兒)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깜짝 놀란 아연이 물동이를 떨어뜨려버렸다. 맑은 냇물이 흙바닥에 얼룩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외부인의 출입이 흔치 않은 곳에 위치한 그들의 거주지 부근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연아, 당장 근처에 있는 아이들을 모으고 없어진 애들이 있는지 확인해봐.”
 “으, 응!”
 호흡을 갈무리한 산의 시야가 다양한 신록의 사이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의 근육을 수축시킨다. 몸 안의 혈관이 꿈틀거리며 그것이 퍼져 오르는 뒤숭숭한 감각과 함께 공기를 가르며 산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
 
 무성히 안개가 낀 숭산의 깊은 산속, 자그마한 발로 분주히 뛰는데 정신이 없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뒤에서 저돌적으로 돌진해오는 멧돼지를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오싹한 기분을 맛보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제갈서연(諸葛西煙).
 강호 오대세가의 일원인 그녀가 왜 이런 곳에서 홀로 멧돼지에게 쫓기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찌 됐건 이 상황은 그녀에게 크나큰 위기였다.
 대개 그녀와 같은 또래의 강호의 후기지수들은 어릴 적부터 저마다 가문의 무공을 익히기에 능히 멧돼지 정도는 제압이 가능했다. 하지만 제갈서연이 이런 위기에 놓이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물론 제갈서연은 오대세가의 일원답게 어느 정도 기본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정도의 무공은 익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주특기로 익힌 것은 기문진법(奇門陣法)과 역리(易理), 토목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 등 촉망을 받는 가문의 인재로서의 지식이었으며······.
 다음의 이유는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평범한 멧돼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아, 왜 하필 흑천삼안저(黑天三眼猪)인 거야!’
 흑천삼안저. 이름 그대로 그녀를 쫓고 있는 멧돼지는 털이 전체적으로 흑색으로 뒤덮여 있으며, 눈이 하나 더 달린 신수였던 것이다.
 놈은 강호에서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신수였으나, 이 순간 흑천삼안저와의 만남은 그녀에게서 기연이라기보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아마 저 괴물의 두터운 가죽은 그녀의 검기로는 쉽게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튼튼할 터다. 뒤늦은 후회로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아앗!”
 두려움으로 인해 심신이 흐트러진 까닭일까? 경공을 취하던 도중 기맥이 일순간 뒤얽힌 그녀는 다리에 쥐가 난 듯 그대로 넘어졌다.
 크르르릉!
 뒤쫓던 목표를 코앞에 둔 흑천삼안저가 콧구멍에서 드센 바람을 뱉어내자, 일순간 지면의 흙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숨소리가 그토록 거친데다 송곳니 역시 묘하게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놈도 흥분하고 있었다.
 “아아!”
 두려움에 제갈서연은 석류 빛을 띠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주저앉은 채 엉덩이로 뒷걸음질했다. 어찌 해야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일까?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아름다운 손가락이 흙을 파고드는 순간······.
 “멈춰!”
 흑천삼안저의 위로 한 청년이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란 흑천삼안저가 이리저리 날뛰며 주변의 바위와 나무 등을 부수며 더욱 흥분하고 있는 가운데, 멧돼지의 등 위에 매달린 청년은 균형감 있게 멧돼지의 갈기를 붙잡으며 놈을 진정시키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 어떻게!”
 제갈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흑천삼안저의 힘은 그 옛날 관운장이 타고 다니던 적토마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대하기로 유명하다.
 물론 멧돼지를 적토마와 비교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흑천삼안저는 그 정도로 몸집이 거대했고, 그 정도로 폭발적인 위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흑천삼안저의 위에서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균형감 있게 허리를 뒤흔들며 놈을 진정시켰다.
 “옳지. 착하다.”
 크르릉!
 청년이 조금씩 진정하며 기세를 가라앉히는 놈의 이마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주자, 흑천삼안저가 마치 말이나 개처럼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그래서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얌전해진 흑천삼안저를 탄 청년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제갈서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진 제갈서연은 안절부절못하고 마냥 흑천삼안저만을 두려운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아, 저 그게······.”
 “낭자한테 묻는 것이 아니니, 조용히 하시오.”
 “윽!”
 그가 제 말을 끊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제갈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허리를 굽실거리거나 한 줌의 관심을 바라며 다가오는 사내놈들만 가득했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그녀를 청년은 무심하게 훑어볼 뿐, 어떠한 관심도 표출하지 않는다.
 더 황당한 것은 그가 멧돼지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사나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사실이야?”
 어느새 어조까지 낮아졌으니, 그 위압감에 바싹 긴장한 제갈서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떤 게 말이죠?”
 “이 녀석의 알을 가져갔다며.”
 “아, 알이라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제갈서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그녀를 쏘아보던 청년은 한쪽 미간을 꿈틀대더니 곧 흑천삼안저의 등으로부터 내려서 다가왔다.
 “뭐, 뭐예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제야 정신이 든 것인지, 새삼 제갈서연은 위협을 느꼈다.
 사위가 고요하고 어두운 숲, 제아무리 그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더라도 지금 여기서 그녀는 단지 무력한 여인일 뿐이었다.
 “오, 오지 마세요!”
 눈가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으며 애원했으나, 청년은 단번에 손을 들어 그녀의 옷섶을 찢었다.
 찌익!
 “꺄악!”
 수치심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드러난 가슴골을 감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여자로서 온갖 수치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총명하기 그지없는 제갈세가의 일원답지 않게 그녀는 이성을 잃고 흥분한 채였다.
 “여기 있네.”
 하지만 온갖 끔찍한 상상과 달리, 청년은 그녀의 왼쪽 옆구리에 갈무리되어 있던 주먹만 한 푸른 돌만을 낚아채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 그건!”
 제갈서연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길을 잃고 들어선 동굴에서 우연찮게 주운 신비한 색의 돌이었다. 혹여 기문진법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어 챙겨둔 것이었다.
 “흑천삼안저는 일반 멧돼지들과 달리 새끼를 낳는 게 아니라 알을 낳아. 생긴 거나 덩치에 비해서 알은 매우 조그맣지. 게다가 일생에 단 한 번만 알을 낳을 수 있어서 녀석들한테는 새끼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거야. 너는 이 녀석한테서 그 알을 뺏으려 든 거고.”
 “하, 하지만 ······.”
 제갈서연은 몰랐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내심 그것이 흑천삼안저의 것이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더욱 욕심이 났고, 그것을 빼앗으려 든 것이다.
 “후우 철이 없네. 이봐, 아가씨. 평소 남들한테 머리 나쁘다는 소리 많이 듣지?”
 “무, 무슨!”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제갈서연은 홧김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태어난 이래 내도록 총명하기 그지없다며 칭찬일색으로 살아온 그녀였기 때문이다.
 “너는 단순히 아름답다는 이유로 한 가족에게서 귀하디귀한 자손을 훔쳤고, 게다가 몰랐다고 변명하려 하려 했겠지만 그건 거짓일 테지. 무엇보다 표정에서 다 보인다고.”
 “······.”
 제갈서연은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직설적인데다 지독한 독설이기는 하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그에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약 이 일이 부끄럽다면, 오늘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씀이시죠?”
 제갈서연은 얼굴을 굳힌 채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장신의 청년이다.
 얼굴과 손, 발 등 피부는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했지만 매끄러워 보였다. 머리는 산발인데다 옷도 누더기마냥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를 깔보는 듯 치켜뜬 눈만큼은 흑요석처럼 반짝거렸다.
 청년은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빼앗은 자는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빼앗긴 자들은 평생을 기억한다는 것을······.”
 실로 오싹한 말이었고, 경고였다.
 “자, 그럼.”
 청년은 손에 쥔 알을 조심스레 흑천삼안저에게 건네주었고 흑천삼안저는 그런 청년에게 감사를 표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다 이내 알을 물고 안개에 모습을 감춘 채 사라졌다.
 “하아······. 괜스레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닐까 몰라.”
 그제야 청년은 한숨 섞인 표정으로 제갈서연을 바라보다 이내 제 옷가지를 벗어 그녀에게 던졌다. 옷이 찢긴 채인지라 부끄러움에 몸을 감싸고 있던 제갈서연은 그 옷가지를 받고 얼른 뒤집어썼다.
 “그건 그거고. 위기일발에서 구해줬으니, 한 닷 냥만 내놔. 아 옷값까지 포함해서 열 냥.”
 순간 제갈서연이 발끈했다.
 “터무니없는 폭리군요! 게다가 이것으로 알았어요. 당신은 누군가를 구해주는 영웅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게다가 열 냥? 하, 참!”
 자신의 목숨 값을 겨우 열 냥으로 때운다는 것에 가장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제갈서연이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 있던 은자 백 냥이 든 주머니를 바닥으로 툭 던졌다.
 “그 말이 맞아. 난 영웅 따위가 아니야. 그딴 건 오만하고 방자하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한테나 붙여지는 호칭이잖아?”
 청년은 언뜻 씁쓸해 보이는 웃음을 내보이며 은자가 든 주머니에서 제가 요구한 열 냥만 빼고 나머지를 다시 툭 던졌다.
 저도 모르게 은자 주머니를 받아들고 청년을 바라보던 제갈서연은 왠지 모르게 울컥한 심정을 느꼈다. 누더기나 걸친 주제에, 사람 목숨을 구한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주제에 어째서 자기보다 더 기고만장한단 말인가?
 하지만 기이한 것은, 이곳이 저잣거리나 강호였을지라도 자신들 둘의 입장이 변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 난 가볼게.”
 청년이 다시 발돋움을 하며 무릎을 굽히고 나무에 뛰어오르려는 순간.
 “자, 잠깐만요!”
 “응?”
 “제, 제 이름은 제갈서연이에요. 당신의 이름은 뭐죠?”
 참을 수 없는 궁금함에 질문을 던지고도 왠지 부끄러운 제갈서연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이름을 물어오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녀가 이름을 물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그를 붙들고 싶었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 이내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섰다. 분명 경공을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몸놀림은 놀랍도록 가볍다.
 “내 이름은 산이야. 다시는 보지 말자고. 제갈서연.”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사이를 종횡무진 훑으며 청년, 산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갈서연은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
 
 어느덧 서산 너머로 해가 기우는 초저녁. 금세 어둠으로 뒤덮인 신록들 사이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며 발돋움을 하는 산이었다.
 그가 도약을 할 때마다 나뭇잎이 사뿐히 휘날리는 그 기세가 요란스러웠다. 조금 전에 비해 몸의 움직임이 둔한 이유는 그가 지쳤다기보다 잔뜩 지고 있는 짐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벌써 두 시진이 지났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둠 속에서 마을 아이들을 죄다 모아놓고 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연이 초조한 기색으로 산의 몸을 살폈다.
 다행이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서 의복까지 하나 맞춘 건지, 반질반질하고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웅성웅성.
 아이들은 그런 산을 향해 내심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산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맛있게 먹어라. 니들 위해서 특별히 사왔다.”
 산이 들고 온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보자기 안에는 당과 등을 비롯해 마을 아이들이 좀처럼 먹기 힘든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와!”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들소 떼처럼 음식을 때 탄 손으로 집어 들며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다.
 “싸우지 마. 모두 배부르게 먹을 만큼 충분히 있으니까.”
 아연은 그러다 다칠까 싶어 만류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리고 있었다. 군침을 흘려가며 입에 욱여넣는 모습이 무섭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들로선 이런 음식을 먹는 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늘 다른 사람들과 척을 진 채 기본적인 욕구만 채우며 사는 그들에게 이런 기름진 음식은 배가 터지더라도 먹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던 것이다.
 “그거 먹고 각자 집으로 가. 내일도 오늘이랑 똑같은 시간에 일 시작하고. 그렇게 알아.”
 “응!”
 산은 아연과 또 다른 친구인 유량(柳椋)을 위한 음식을 챙겨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였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노릇노릇 익어가는 닭이며 메뚜기 튀김과 같은 안주와 함께 고량주도 등장했다.
 “돈은 어디서 났냐? 설마 촌장님 몰래 돈 빼돌려서 산 건 아니겠지?”
 유독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유량은 잘 익은 닭다리를 뜯느라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입을 하고도 내심 불안한 기색으로 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식이~ 형님이 그럴 놈으로 보이냐? 오늘 어떤 멍청한 계집애가 흑천삼안저한테 죽을 뻔한 걸 구해준 대가로 받은 거야.”
 “나 참, 구해주면 구해준 거지. 쪼잔하게 돈을 받았어?”
 그 쪼잔하게 뜯은 돈으로 사온 닭 날개의 살점을 맛있게 발라먹는 주제에 산을 타박하는 유량을 바라보며 아연은 눈을 매섭게 떴다.
 “그냥. 니들 먹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많이 받은 것도 아니야. 백 냥을 턱하니 내놓길래 열 냥만 받아왔어.”
 “백 냥?”
 유량과 아연이 눈을 동시에 크게 떴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겸사겸사 장 보러 가는 김에 그 계집애가 누군지도 알아봤어.”
 “······왜?”
 아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산은 예민하게 구는 아연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콧등을 살짝 쳤다.
 “앗! 이씨. 너!”
 “유량. 며칠 전에 사냥 갔을 때, 숲 인근에서 사람의 흔적을 본 적 있어?”
 “아니. 북쪽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나그네 일행을 보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는 거의 없었어. 그때, 꽤 대규모로 움직였는데도 약초를 캐는 심마니 등을 제외하면 아무 흔적도 없었어.”
 “······그렇지.”
 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직하면서도 꼼꼼하기 그지없는 친구, 유량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늘 이동을 하는지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마을의 생계수단은 양과 소를 키우고, 모자란 것은 수렵과 채취를 통해 자급자족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때를 정해 대규모로 사냥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덕분에 사냥이라면 도가 터 눈썰미가 제법인 유량인데, 그가 흔적을 찾지 못했단다.
 산은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가 운을 뗐다.
 “밑에서 들은 소식인데, 조만간 무림맹에서 마교와 충돌을 한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우리랑은 그다지 상관없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하필 장소가 숭산 인근이야. 그리고 그 계집애는 무림맹의 계집이더군.”
 “그게 그 여자애랑 무슨 상관이야?”
 아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자 입가의 기름기를 손등으로 슥 닦아낸 유량이 산 대신 답해줬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무림맹 측의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산이가 우려하는 거야. 아무래도 저잣거리의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거지.”
 “그, 그럼 어떻게 해?”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먹고 마시는 거야! 하하하하"
 “그게 뭐야!”
 한껏 진지하게 품을 잡던 산이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하는 자세를 취하자, 아연은 토라진 척을 하면서도 제 술잔을 들었고, 유량도 피식 웃으며 술잔을 잡았다.
 “자, 자 언젠가 쟁취할 자유를 위하여!”
 “아아! 또 이상한 소리한다. 이럴 때는 당연히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건배를 하는 순간까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유량이 훈훈한 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면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모두는 각자가 바라는 행복과 자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켰다.
 
 ***
 
 짙푸르게 채색된 밤하늘 위로 시리도록 차고 하얀 달이 떠올랐다.
 양과 소에게 여물을 먹이기 위해 울타리 근처까지 도달한 산의 아버지, 비영(備瑛)은 뒷짐을 진 채,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이쿠! 형님. 이 쌀쌀한 시간에 웬일이오?”
 짚을 엮어 만든 모자를 쓴 중년의 남성이 그런 비영을 보고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비영 쪽이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중년인의 얼굴에 난 수염은 이미 새하얗고 몸도 불편한지 한쪽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훈(曛). 이름 그대로 석양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사내로, 산의 오랜 소꿉친구인 아연의 아버지기도 했다.
 “허허. 이 사람. 몸이 불편하면 들어가서 쉴 것이지.”
 “아, 글쎄 산이 요 샹놈이 아연이를 좀처럼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결국 직접 발을 떼게 하지 않소.”
 “허허 산이 그놈, 그토록 타일렀건만. 미안하네.”
 비영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산인지라 혹여 아연을 상대로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다 큰 처녀를 밤늦게까지 보내지 않는 것은 크나큰 실례였다.
 실제로 훈도 늑대를 견제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일사불란하게 돌리며 산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뭐, 괜찮을 거라고는 믿고 있소. 여차저차해서 형님이랑 사돈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나로선 산이 그놈을 사위로 두는 게 마냥 반길 일은 아니오. 그놈은 역마살이 끼어서 언젠간 가족들도 내팽개치고 떠돌아다닐 놈이니 말이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지.”
 비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그 말 그대로 그의 아들은 언젠가 이 무리를 떠난다. 호랑이를 개구리가 사는 우물에 키울 수 없는 것처럼, 바다만 한 물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그에 맞지 않는 그릇에 억지로 갇히는 것이 얼마나 답답할지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아들은 아직 이 무리에서 몇 번의 위기를 더 거쳐야 세상을 나갈 준비를 마칠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형님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보통 이 시각엔 안에서 책을 읽잖소.”
 “몸도 답답하거니와 잠시 별을 보러 왔다네.”
 “······.”
 비영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빼곡히 메운 별들. 그중 몇 개의 별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지만 그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훈은 그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비영은 점성술을 공부했던 탓에 어느 정도 사람의 운명과 별을 연관 지으며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내뱉는 말은 언제나 어김없이 맞아떨어졌고, 또 마을에 중대한 위협이 있었을 때도 별점을 통해 피해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신출귀몰한 능력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촌장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유난히 힘겹고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형님 잠도 못 자는 것 같구려. 대체 뭐가 문제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 때문일까, 지팡이를 짚는 훈의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비영이 최근 잠을 못 이루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양떼를 노리는 늑대를 견제하려 세워둔 불침번이 슬그머니 전하는 말로는 그가 최근에 종종 깊은 밤이나 새벽에 울타리를 순회하고 다닌다 했다.
 “이번 일. 결단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비영이 아무도 모르게 끙끙 앓아오던 문제를 훈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신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쁜 반면, 훈은 염려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바꾸었다.
 “형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소. 날쌘 장수, 여포가 그러했듯이 혼자 힘으로는 대인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는 있어도 운명은 바꾸기 힘든 법입니다. 허니 안심하시고 저희들에게도 짐을 좀 나누어 주시오. 우리는······.”
 훈이 길게 말을 끄는 순간, 바람에 휘날리는 들풀 너머로 나무 듬성듬성 사이로 검은 인영들이 솟아오르듯 모습을 드러내며 살벌한 기운을 풍겨냈다. 동시에 과연 인간의 것일까라고 생각할 만큼 파괴적인 기세가 쏘아지듯 전해진다.
 비영은 비통한 탄성을 내뱉었고, 훈도 긴장이 어린 음성으로 마저 말했다.
 “강합니다.”
 
 ***
 
 다음날도 일찍 눈을 뜬 산의 하루는 언제나와 똑같이 이어졌다.
 산은 우선 청년들을 모아놓고 각자의 작업 분량을 할당했다. 서툰 손길을 다잡아주고,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은 바르게 숙지시켜준다. 청년이라고는 해도 이제는 슬슬 장가를 갈 나이라서 그런지, 손이 부지런하고 몇몇은 숙달된 장인인 양 솜씨를 보이기까지 했다.
 “아우~ 머리 아파! 젠장!”
 인근에 있는 대장간을 빌려 뜨겁게 달구어진 붉은 철을 깡깡 두드리던 산이 투덜거렸다. 어젯밤의 숙취로 몸도 가누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저 혼자일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장거리 여행인 만큼 생활에 필요한 도구는 물론, 비롯한 호신용 무기도 미리미리 갈아놓고 또 그새 못쓰게 된 것은 다시 녹여 재활용해야 했다.
 산의 지휘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년들도 저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목표량에 도달하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그새 밥 때가 되었는지 소녀들이 제각각 광주리에 주먹밥을 한가득 지고 왔다. 한창 배가 고플 나이의 청년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손을 놓았다.
 산도 아연이 건네주는 냉수를 받아 들고 바위에 앉았다. 냉수를 들이켜니 내내 머리를 부술 듯 밀려오던 두통도 가라앉는다.
 “크윽! 좋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들어 보니 촌장님은 이틀 정도 시간을 더 주신 것 같던데. 역시 그 소문이 신경 쓰이는 거야?”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더 힘을 많이 쓸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고될 수밖에 없었다. 아연은 대장간 주변에서 대자로 뻗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힘겨워하는 몇몇 청년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라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산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힘든 것에 내색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무리를 한 것이다.
 “저러다 다치면 큰일인데.”
 “오늘 안에 끝내야 돼.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산은 주먹밥을 한 입 물며 우물우물 씹었다. 말투나 표정은 무뚝뚝하나 아연은 그가 무언가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혼자 그렇게 걱정하지 마. 적어도 우리는 우리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하다고.”
 아연이 웃으며 산의 입가에 있는 밥풀을 떼더니 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뭐하는 거야, 드럽게.”
 민망한지 산이 소매로 스윽 입가를 문지르며 괜스레 해가 져가는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더할 나위 없는 주홍빛의 노을이 마음을 선선하게 만들어준다. 왠지 평화롭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슬슬 작업을 마무리해야 할 듯했다.
 “빌어먹을, 자유를 달란 말이야!”
 산은 새장에 갇힌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며 큰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
 
 낙양의 중심부에는 높은 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건물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제갈>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건물은 한층 더 화려하게 뻗친 지붕과 거대한 기둥으로 그야말로 위엄이 넘쳤다.
 제갈가에서도 유독 화려하게 꾸며진 한 방 안. 침상에 누운 제갈서연과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아버지 제갈섬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연아, 몸은 괜찮은 것이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멀쩡하니까요.”
 “크흠! 대체 누구를 만난 것이냐?”
 제갈섬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어제 겪었던 일에 대해서 물어왔다.
 제갈서연은 제갈섬의 무남독녀로,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전전긍긍하며 밤에도 안고 재울 정도로 노심초사 기른 금지옥엽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과보호는 어렸을 적의 일이지만 아비의 마음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제갈섬인지라 어제 제갈서연이 숭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며 의복이 찢긴 채 돌아온 것을 보고는 노발대발하며 수하들에게 엄중한 경고와 폭언을 내뱉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안다. 그렇기에 결국 일부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건방진 사내였어요. 길을 잃고 멧돼지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을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어쨌든 저에 대한 태도가 너무 무례했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옷이 찢어진 것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다 찢어진 거고, 저는 정말로 멀쩡해요.”
 말을 하며 다시금 자신을 산이라 소개했던 남자를 떠올리자 제갈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왠지 모르게 사연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제갈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일어섰다.
 “가시는 겁니까?”
 “뭐, 몸이 괜찮다니 되었다. 내일 아침에는 의복을 정갈히 입고 문안인사를 하러 오거라. 이 아비의 속도 그만 썩이고.”
 걱정하는 얼굴이 여전한데도 짐짓 태연한 척하는 아비의 모습에 서연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크흠. 그럼 이만 가보겠느니라.”
 제갈섬. 총기가 배인 눈동자는 그의 방대한 지식과 현명함을 단숨에 짐작케 했고, 풍채 역시 나이에 비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딸의 방을 나선 그의 표정이 놀랍도록 냉정해지며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연못이 조성된 정원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횃불에 언뜻 비치는 그 냉막한 표정에 은연중에 그를 호위하던 몇몇의 호위들마저 숨을 죽인 채였다.
 그 반응을 눈치 챈 제갈섬이 멈춰 섰다. 보통 때라면 호위가 감정을 드러낸 것을 질책해도 모자랄 판국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전음으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소림과 모용세가는 제일 먼저 준비를 갖추었고, 나머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구 할 정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외 제갈세가의 기문진법이 숭산을 중심으로 제대로 발동하고 있습니다. 진법의 이름은 나락금혼(那落擒魂). 아마 오늘 밤은 산에 불이 나더라도 마교의 잔당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일망타진될 것입니다.]
 “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다시금 걸음을 옮기며 정원을 가로질러 어느새 대문을 통과한 제갈섬은 미리 대기시켜둔 마차에 몸을 실으며 껄껄 웃더니 육성으로 자신의 호위에게 알 수 없는 질문을 건넸다.
 “오늘 밤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저 평화롭게 술을 마시고 계집을 즐기는 날일 것을.”
 전음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호위는 가슴에 서늘한 감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소, 송구하옵니다. 실언을 했사옵니다.]
 “됐다. 일을 진행시키거라.”
 제갈섬은 눈을 감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고, 호위는 더 이상의 반문 없이 뒤를 따르는 일행에게 기(旗)를 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기의 색깔은 적(赤).
 무림맹에 위협을 가하는 적을 섬멸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숭산 근처에서는 엄청난 숫자의 화염의 비가 솟구쳤다.
 
 ***
 
 자정이 지난 야심한 시각.
 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뜬 산은 게르 내부가 이상하리만치 뜨겁다는 것을 깨닫고는 퍼뜩 일어섰다.
 “뭐야. 젠장.”
 타닥, 타닥.
 나무가 요란하게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온통 홍염으로 적셔져 있었다. 마치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불꽃을 본 산은 황급히 이불을 박찬 후 문을 열고 나갔다.
 불타고 있는 것은 그의 게르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단위를 이루고 있는 수십 가구의 게르며 초소가 불바다에 뒤덮였고, 사람들은 비명조차 잊은 채 그와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새까맣던 하늘에서 마치 낮을 방불케 할 만큼 불꽃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산의 근처에 있는 울타리에 꽂히더니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화살? 대체 누가!’
 새빨간 불꽃을 태우는 화살을 맨손으로 집어 뺀 산의 눈동자에는 혼란이 뒤덮여 있었다.
 이 화재는 누군가의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적의가 실려 있는 것이었다.
 “사, 산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아버지는 어디 가셨지?”
 “촌장님은 어디에 가신 거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아연과 유량이 산에게 달려왔다. 그들 역시 그을음을 온몸에 묻힌 채, 혼비백산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가족에 대한 염려 때문으로 보인다.
 산은 그들의 걱정 어린 표정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지시를 내뱉었다.
 “유량. 지금 당장 애들에게 오늘 작업한 병장기를 각자 소지하게 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아닌 이상 외부인은 상대가 노인이든 아이든 일단 칼부터 휘두르라고 해. 지금부터는 다 적이야!”
 “알았어.”
 “나, 나도 도울게.”
 유량과 아연이 산의 명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지면을 빠르게 박찬 인영들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
 울타리를 넘어 바람처럼 기민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나타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의 무복을 갖춘 남자들이었다.
 미처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산과 유량, 아연은 침묵을 지킨 채 긴장한 눈빛으로 흑의인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활활 불타고 있는 불꽃의 열과 빛이 은은하게 반사되는 와중에, 그 칼날의 끝에서부터 이슬처럼 맺혀 떨어지는 것은 피였다.
 대체 누구의 피란 말인가!
 순간 머리끝까지 활화산처럼 피어오르려는 분노를 이성으로 어떻게든 억제해보려 이를 악문 산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게끔 하는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꺄악!”
 바람을 가르는 철의 소리와 함께 누군가 베이는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기는 어려운 여인의 비명과 이어진 침묵. 확인할 것도 없는 절명이었다. 바람을 타고 번져오는 혈향이 그것을 증명했다.
 “살려줘!”
 다시 한 번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유량과 아연이 뒤로 돌아 비명의 진원지로 가려고 움직이자, 두 흑의 무인이 그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이제 곧 끝난다. 너희들도 곧 저들처럼 세상에서 없었던 이들이 된다······.”
 “비켜! 대체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목에 들이밀어진 칼날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지금 그녀가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마을 사람들이 칼에 무참히 베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흐흐. 어차피 죽을 연놈들인데. 실컷 즐기기라도 할까?”
 찌익!
 “꺄악!”
 아연을 사로잡던 흑의 무인이 한순간 아연의 앞섶을 잡아채 찢으며 희롱했다. 분노한 유량이 급히 나서려고 했지만, 그 즉시 그를 붙잡고 있는 또 다른 무인의 칼날이 목을 더 파고들었다.
 “크크크크, 하긴 어차피 죽일 건데 상관이야 없겠지. 그건 그렇고 눈요깃감으로는 괜찮은 계집이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산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얼굴에는 밤의 그림자가,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알아서 무엇 하려고? 어차피 네 녀석들은 곧 죽어······.”
 콰직!
 여유롭게 웃음을 흘리며 아연을 희롱하려던 흑의 무인은, 그러나 끝까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마치 돌풍이라고 생각할 만큼 빠르게 움직인 산이 그의 얼굴을 부술 듯 차버린 탓이다.
 “무, 무슨!”
 유량을 잡아두고 있던 흑의 무인조차 그 움직임을 눈으로 훑을 새도 없었다. 동료의 비명과 함께 보인 것은 사람의 각력에 당한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통째로 함몰시키고 두개골마저 으깨진 사체였다.
 “부, 분명 무공을 익힌 자가 없다 했는데.”
 실제로 동료가 당한 것은 무공과는 전혀 근간이 다른 힘이었다. 그렇다면 무인으로서는 전혀 납득이 안 되는 힘을 저들은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설마?”
 무심코 자신이 인질처럼 붙잡고 있던 기골이 장대한 청년의 존재를 떠올린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양손을 붙잡은 유량이 우두둑 관절 마디마디를 전부 부서뜨리며 이어 주먹을 내질렀다. 흑의 무인은 그대로 턱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날아갔다.
 “커헉!”
 기해혈이 뒤엉킨 양 그는 온몸에 반동을 느끼며 각혈을 토해냈다.
 오싹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그는 저를 날려버린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사람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호박색으로 물든 짐승의 눈동자!
 문득 남자는 이 작전을 명하기 전, 지시를 내리던 대장의 경고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부터 마교의 잔당을 치러간다. 아이든 계집이든 상관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죽여라. 얕보았다가는 너희들이 당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 경고를 무심코 넘긴 결과였다. 대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금에 와서 깨달은 것이다.
 그는 얼굴이 함몰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버린 자신의 동료를 흘끔 본 후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거기에서는 여전히 짐승의 눈동자가 빛을 발출하고 있었다.
 모습은 분명 사람인데, 사람으로서는 전혀 가질 수 없는 호박색을 띠는 사나운 맹수의 눈동자. 게다가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제가 잡고 있던 청년과 또 한 청년까지도 눈동자의 색이 변해 있었다.
 “괴, 괴물 놈들!”
 부들부들 떠는 다리로 애써 칼을 더듬어 잡았지만 어느새 하반신이 젖어 들어갔다.
 ‘제, 젠장 이런 얘기는 못 들었다고!’
 “물러나 있어. 내가 처리할게.”
 제 윗옷을 벗어 아연에게 던져준 산이 탄탄한 근육의 굴곡이 드러난 맨몸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순간, 남자의 동공은 더욱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산의 몸이 등 언저리부터 시작해 점점 회색빛의 털로 뒤덮여가고 있는 것이다. 눈동자 역시 더더욱 매섭게 빛나며, 타오르는 광기를 담아낸 호박색 동공이 주위의 공기마저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은거하고 있는, 늑대를 섬기는 부족이 있다는 것을.
 늑대의 저주를 받아 늑대처럼 울며, 늑대 같은 힘을 가진 그런 일족이 있다고 그는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 인랑(人狼)! 쿨럭!”
 인랑.
 그들의 존재 기원이 어디서부터인지는 소문만이 무성하다.
 지리서로 널리 쓰이는 산해경(山海經)에 비슷한 사례가 하나 있긴 하다.
 한 남자가 일주일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 나가더니만 호랑이로 변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이 호랑이는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성질이 흉포해 만나는 사람을 모두 공격해 수많은 사람을 몰살시켰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와 비슷한 인랑의 경우 역시 그 모습이 인간이 아닌 사나운 늑대의 형상을 취했을 경우, 그 성질이 흉포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인랑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산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어리둥절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남자는 제가 입가에 잔뜩 피를 게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는 말하기조차 벅찰 정도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다.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떨리는 시선을 겨우 내려보니, 검지와 중지를 모은 청년의 두 손가락이 정확히 그의 목젖을 관통하고 있었다.
 격심한 통증에, 아니 그보다는 경악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정작 그는 비명 한 톨 내지를 수 없었다. 남자는 흰자위를 가득 남긴 채, 한마디 말을 유언처럼 내뱉었다.
 “괴······괴물······.”
 “괴물이라 불러도 좋다. 너희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니.”
 산은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남자의 목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와 함께 틀어 막혔던 둑이 터진 양 격류를 참아내던 피들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산은 그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그리고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뒤에서 만족한 듯 박수를 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허허허! 휼륭해. 과연 인랑이야.”
 거대한 덩치에 근엄한 표정을 한 삭발의 남자. 딱히 얼굴을 가릴 의도도 딱히 없는지 실금 같은 눈동자로 산을 바라보는 그의 목 주변으로는 굵은 염주가 걸려 있었다.
 우드득.
 천천히 주먹의 관절을 풀며 산은 살벌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는 누군지 캐묻지는 않아주마. 이 달밤에 너희는 늑대의 이빨에 씹혀 그대로 사라지게 될 테니까. 후회도 필요 없다. 오늘밤 너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는 자자손손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실로 살벌한 경고였다.
 산과 승려가 대치한 가운데, 주변은 지옥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온통 불바다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을 온통 태우는 불더미 곳곳에서 검은 인영들이 쉴 새 없이 칼을 들고 도륙을 일삼고 있었다.
 한 자루의 칼에 여인의 가슴이 꿰뚫린다.
 두 번째 칼부림에는 어린아이의 머리가 뎅강 잘려 나간다.
 붉은 핏방울이 끊임없이 허공을 튀기며 그 공백이 웃음으로 메꾸어져 간다. 그야말로 나락을 방불케 하는 풍경을 바라보는 산의 눈동자가 충혈 됐다.
 이유가 뭐냐?
 너희는 대체 누구기에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
 질문은 끊임없이 튀어나왔고, 그 사이에도 그들은 말없이 마을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여인을 취하며 죽이고 웃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댔다.
 그 풍경 속에서 산이 할 수 있는 것은 냉정하게 상황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유량, 아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저 새낀 내가 죽인다.”
 “크하하하하! 배짱이 두둑하구나.”
 언뜻 불계에 적을 둔 중으로 보였으나 말투나 행동으로 볼 때, 파계승임이 틀림없었다.
 “알았어.”
 유량은 산의 뒷모습에서 깊은 분노를 체감하며 아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사, 산아.”
 아연이 불안한 듯 그를 불렀지만, 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중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
 “크크크크. 이 나를 두고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짐승새끼가 말이 많구나.”
 그 말을 신호로 발돋움을 하고 지면에서 발을 뗀 산의 신형이 삽시간에 중의 코앞까지 좁혀버리며 회전과 함께 그의 목 언저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인간의 두개골까지 단숨에 으깰 정도의 각력(脚力).
 평상시에는 평범한 사람에 맞춰 힘을 아껴두지만 지금은 힘을 아낄 여유도, 자비도, 용서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앞서 두 흑의 무인과 달리 중은 그를 한껏 비웃으며 주먹을 말아 쥐더니 산의 복부에 일권(一拳)을 날렸다.
 퍼억!
 “커헉!”
 세찬 격타가 뱃속부터 소용돌이치는 감각. 내장이 단숨에 터져버릴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산의 몸이 바닥을 연거푸 튕기며 지면을 굴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산은 즉시 손톱을 지면에 꽂았다.
 일순간 몸이 주르륵 밀리기는 했지만 금세 네발짐승처럼 자세를 잡은 산의 호박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크하하하! 그래. 그래야 짐승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맞은 것은 겨우 백보신권(百步神拳)일 뿐이다.”
 백보신권은 소림의 칠십이 종 절예 중 하나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복장과 사용하는 말을 고려해보건대, 그는 필시 소림과 연관이 있는 자일 것이다.
 중이 키득거리며 산을 조롱했다. 그러나 내상을 입은 듯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죽일 듯 저를 노려보는 그 호박색 시선에는 오한이 절로 느껴진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무력한 아이가 맹수를 마주쳤을 때 느끼는 공포와도 비슷하지만 그는 이미 살인에 취한 상태였다. 공포와 광증의 사이에서 중은 더할 나위 없는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하아. 네놈 소림이냐? 오냐, 오늘을 기점으로 약속하지. 이 순간 이후로 소림의 이름을 쓰는 이들의 모든 것들을 약탈하고 반질반질한 너희들의 대가리는 죄다 짐승들의 편육으로 삼아주겠다.”
 그 말에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어깨를 움찔거리다 잠시 뒤,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크흑. 아아~ 이런, 이런 소림이 그토록 우습게 보이나 보군. 이봐, 어째서 내가 본모습을 드러냈는지 모르겠냐? 오늘을 기점으로 너희들이 다 죽기 때문이야. 인랑이라······ 사람도 아닌 것들이 사람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죄. 결코 가볍지 않도다.”
 “죄?”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산은 그 말을 중얼거렸다.
 무엇을 근거로 죄로 삼은 것인지는 모른다. 정착하지 못하고 이동하는 삶을 사느라 힘들지만 서로 의지하며 웃고 부족함조차 나누며 그릇된 일은 하지 않는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로 또한 산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의 말은 곧 진실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어찌 숨 죽여 살아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괴물로 보일뿐, 진실을 알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이미 이성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선은 넘고 말았다. 깊은 분노의 칼날이 사방에서 몸을 유린하는 듯 덮쳐버리자, 산이 중얼거렸다.
 “······다.”
 “뭐?”
 “죽인다. 네놈을 죽인다. 네놈의 소중한 모든 이를 죽인다. 뼛속까지 절망시켜줄 테다. 오늘을 기억해라. 네놈이 죽인 내 동족의 원한과 외마디 비명, 여인의 한탄,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내가 흘리는 피눈물의 대가임을 죽어서도 잊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산의 몸이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냥감에 집착하는 끈질긴 야성과 지치지 않는 체력, 자신보다 훨씬 큰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는 강한 힘과 날렵한 속도.
 바람을 가르는 산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몸은 더 없이 가벼워지고 손가락을 쥐는 힘은 터무니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 혼신의 일격으로 산이 머리를 날리는 순간, 중의 몸이 기우뚱 떠올랐다. 그러나 산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대기마저 터뜨리는 철퇴 같은 주먹이 미칠 듯이 중의 몸을 강타한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중의 움직임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연거푸 날아오는 산의 주먹을 모조리 흘려 충격을 반감시키며 산의 속도를 뛰어넘어 더 강하게 더욱더 빠르게 치명적인 일격을 꽂아 넣는다.
 멀리서 보았더라면 서로 한 번씩 주고받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산이 입는 충격과 중이 입는 충격은 애초에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일권에 이가 부서지고 그 일장에 갈비뼈에 금이 가고 있었지만 산은 오히려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크흐흐흐흐. 이봐, 이제 슬슬 알 텐데? 내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유유자적한 한마디와 함께 날아오는 일보신권을 막기 위해 든 산의 팔이 기이한 모양으로 꺾였다.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몸으로 내리치는 일격은 그야말로 천근만근의 힘을 가진 곤봉의 위력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팔을 내준 대가로 산은 남은 왼손으로 중의 목을 짚을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격통의 호소를 이를 악물고 참아온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중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피와 땀에 젖어 내려앉은 머리칼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손톱을 세워 일격을 가했다.
 “크악!”
 돌조차 가루로 으깰 정도의 악력과 인랑이 가진 특유의 날카롭고 긴 손톱. 그야말로 숨겨진 암기와도 같은 일격에 중은 산의 황급히 복부를 걷어차며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하아······ 하아······.”
 심호흡을 하며 내공을 갈무리하는 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자신의 목을 짚어보았다.
 손바닥에 묻어 나오는 붉은 피는 자신의 것이었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금강불괴더라도 본래 약한 부위에는 그만큼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저 피투성이 인랑이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금강불괴? 크흐흐, 지랄하고 있네. 맷집 세다고 기고만장했으면서 겨우 그걸로 죽을까 봐 벌벌 떠는 거냐?”
 “······.”
 그 말 그대로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정의 고수 간의 사투에서야 작은 방심이 죽음을 불러일으키겠지만 눈앞에 있는 청년의 경지는 결코 절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작해야 동네 싸움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등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성장을 거듭하면 어떤 거물이 될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늘 이후로도 저 인랑이 살아남는다면, 그는 인생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사전에 그 새싹을 짓밟고 생명을 끊어놓아야 된다.
 “······죽인다.”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가 처음으로 발을 뗐다.
 “어이, 꼬맹이. 내 이름은 아규(亞竅)다.”
 그가 내뱉은 말에 그의 주위에 붙어 있던 흑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아규, 아규? 병신 같은 이름이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산은 그의 이름을 비웃었다. 이름에 모욕을 입었음에도 아규는 개의치 않는 듯 어느새 산의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얼마든지 지껄여라. 유언으로 들어주지.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은 다른 녀석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만큼은 철저하게 죽이기 위해서다.”
 내공을 갈무리한 아규의 주먹에서 은은히 푸른 기운이 솟구쳤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호신강기라는 생각에 의지와 상관없이 산의 몸은 두려움을 느끼고 또 전율했다. 그리고 그 주먹이 눈 깜짝할 사이에 대풍을 일으키며 산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쿠우우우우!
 일순간 대기가 진동을 일으키며 그 주먹의 진로가 가로막혔다.
 아규의 정권과 부딪혀 밀어낸 것은 다름 아닌 낡고 무뎌질 대로 무디어진 지팡이. 그리고 그 지팡이를 들고 선 노인은 새하얗게 샌 머리에 엉성하게 짚으로 엮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숨죽인 채 산과 아규의 전투를 지켜보던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다름 아닌 금강불괴까지 터득한 초절정의 고수, 아규의 주먹을 겨우 지팡이로 막아낸 이가 저런 초라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라는 것에······.
 “몸은 괜찮냐? 빌어먹을 놈아.”
 산의 등짝을 주먹으로 툭 친 노인은 물었다. 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저씨?”
 그는 바로 훈, 아연의 아버지였다.
 이곳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잦은 이동과 고된 노동에 힘겨운 나날들이지만 냉수 한 사발에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화염의 바다에 뒤덮여 볼품없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어제까지 활기차게 웃던 엄마와 아이가 원한이 어린 동공을 드러낸 채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죽어있었고, 그러한 시체들이 곳곳에 즐비해 있었다.
 또한 검은 무복을 입은 약탈자와 살아남은 일족을 피신시키기 위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인랑들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후우. 결국 너희들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히는구나.”
 사방에서 겨누어지는 암기의 표적으로 집중된 훈이 태연하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소림의 무승이라 칭한 아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오! 네 녀석은 아마 ‘붉은 늑대’라고 불리던 놈이었지? 그래, 소림의 십팔나한승도 뚫어버리고 도주했던 희귀한 놈이었다고 들었어. 그 다리는 분명 그때 입은 부상이었겠지.”
 “······.”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서인지 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저씨?”
 그 불길 속에서 산은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금방이라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놈을 죽이고 싶냐? 산아. 하지만 잊거라. 오늘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잊어라. 오늘은 그저 없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아규를 향해서만 살벌한 기운을 흩날리며 훈은 산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잊어? 잊으라고?’
 동족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잊으라는 건가?
 그러나 목이 메여 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산에게 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살아라. 살아서 아연이를 지켜다오. 살아서 살아남은 일족을 지켜다오. 그 대신······.”
 천천히 손가락의 관절의 힘을 줘, 우드득 소리를 내던 훈의 손가락이 붉은 털로 수북하게 덮이더니,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다.
 “약속하겠다. 내일 해가 떴을 때는 이놈들은 넝마처럼 찢어진 시체로 독수리의 먹잇감이 되어 있을 거라고.”
 “누구 맘대로!”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아규의 뒤에 있던 검은 승복의 남자들이 빠르게 기습을 감행한다.
 용천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간단한 경공과 보법처럼 보이지만 그 은밀함에 산은 다시 한 번 놀라며 눈앞에서 훈이 갈가리 찢길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콰직!
 그러나 그것이 마치 환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훈에게 기습을 가한 검은 승복의 남자들은 가슴 부근이 흉측하게 짐승의 손톱자국으로 거대하게 패인 채 폭포수처럼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호오! 재미있겠소. 소승의 이름은 아규. 오늘은 그 기고만장한 붉은 늑대의 가죽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소.”
 비록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입장에 처했지만 아규는 그 놀라운 움직임을 목도하곤 훈에 대한 경외심마저 느끼고 말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는 포권을 취하며 정중히 예를 갖춘 것이리라.
 “······방금 전에 느낀 것이 겨우 그것뿐이더냐?”
 묵과할 것만 같던 훈의 입에서 싸늘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규는 씨익 웃으며 자세를 잡고는 이에 반문했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는 거야? 크크크크.”
 “네놈의 동료가 죽었다. 네놈 동문의 무승 새끼들이 내 손에 의해 죽었다. 그런데도 네놈은 나에게 경외를 느꼈다고?”
 “그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강한 자에게 호승심을 느끼기 마련이잖소. 원한과 복수라면 어차피 영감을 죽이면 될 일. 딱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하냐. 역시 너희 무림인들은 짐승새끼다.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으며 그것으로 명성을 주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그렇기에 너희는 모를 것이다. 내가 흘리고 있는 눈물의 의미를······.”
 “헤헤, 영감 울고 있었어? 동료가 죽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소리를 그렇게 어렵게 말하고 있어.”
 콰앙!
 그 순간이었다. 눈 깜빡할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현란하게 바람을 가르며 훈의 몸이 아규의 등에 낙하한 것이다. 척추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도달한 강한 압박을 느낀 아규는 순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주둥아리로 비처럼 눈물이 쏟아지는 나의 마음을 그리 가볍게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불편한 다리 때문인지 자세가 어정쩡해 보이지만 훈은 절규하며 손가락을 아규의 귀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아아아악!”
 일순간 고막이 터지는 괴로움을 느끼며 바둥거리는 아규의 거체. 하지만 초절정의 고수라는 지위는 염불로 산 것이 아닌지, 그 상황 중에서도 아규는 금나수의 수법으로 현란하게 움직여 훈의 시야를 어지럽힌 뒤, 그를 잡아 내팽개쳤다.
 그러나 허공으로 날린 훈의 몸은 오히려 나비처럼 자유로웠다. 몸에 자유자재로 회전을 걸며 불편한 다리라는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움직임에 산은 절로 감탄했다.
 인랑 중에서도 최고의 재목으로 평가되는 산의 움직임으로도 저런 동작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것은 훈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일까?
 불타오르는 대지를 뒤로하고 더는 지팡이를 짚지 않은 그 모습은 더 이상 나잇살을 먹은 노인네의 굽은 등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미쳐 등을 곤두세우고 주적을 말살하는 붉은 늑대가 대기를 불태운다. 고고하게······ 날카로운 이빨을 내세우며 눈빛만으로 선언한다.
 죽인다.
 갈가리 찢어 물어 죽인다.
 그 살점은 물론, 뼈까지 박살내서 독수리의 목구멍에 넘길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던 산에게 훈이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뭐하고 있는 것이냐.”
 “네?”
 당혹스러움에 산은 눈을 번뜩 떴다.
 “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살아서 가족을 지켜라!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것이냐!”
 “크윽!”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산은 더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지키듯, 흩날리는 불똥 속에서 훈은 자신보다 두어 배는 커 보이는 아규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인다. 영감탱이.”
 귓속의 통증에 마치 국자로 뇌수를 멋대로 휘저은 것처럼 눈가가 흐릿했지만 피가 흘러나오는 귓구멍을 잡아 누르며 아규는 훈을 노려보았다. 훈은 개의치 않는 듯 지팡이를 버렸다.
 “와라! 땡중.”
 온전하게 두 발로 서 있기도 어려운 붉은 늑대가 투지를 불태우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산은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다. 부러진 오른팔이 퉁퉁 부어올라 피고름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통증에 산은 입술을 우물우물 씹으며 마을 곳곳을 방황했다.
 사방에는 불타오르는 대지와 시체, 그리고 싸우는 이들밖에 없었다. 언뜻 봐도 쓰러진 동족들은 무려 수십이다. 그러나 흑의 무인들과 생사를 건 전투를 이어가던 동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산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진 조용한 초원에 지옥불만이 환히 밝혀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온통 절망뿐. 마치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만 같은 기괴한 느낌이 산의 감각을 정복했다.
 달리던 그의 다리가 멈추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입구를 막은 흑의 무인들과, 살아남은 마을 청년들과 아연, 피투성이 이빨로 으르렁거리는 유량이 대치하고 있었다. 달빛조차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 유량의 눈빛은 마치 도깨비불처럼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사, 산아! 흐윽!”
 유량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연이 산을 보자마자 울컥 눈물을 흘렸다. 산은 달려와서 안기는 아연을 제지하지 않았다. 흐끅흐끅 우는 그녀의 안에서 치달은 분노와 슬픔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진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유량이 흑······아무리 뚫어보려고 해도 비켜주지 않아. 내가 계속 말렸는데도 유량이 고집을 부려서.”
 “울지 마. 유량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녀석들이 다 죽었을 거야.”
 산은 조심스레 아연을 품에서 떼며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까지 합치면 꾀죄죄하니 검댕을 얼굴에 뒤집어쓴 네 청년과 세 명의 소녀, 그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분명 오늘 낮까지도 같이 작업을 했던 인원은 이보다 많았다.
 뿌득!
 잇새에 돌이라도 들어있었으면 그 돌이 그대로 부서질 정도로 산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량은 얼마 남지 않은 동족을 지키기 위해 마을 밖과 연결되어 있는 길을 찾았고, 그 길을 막아선 흑의 무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유량! 가장 성가신 놈이 누구야.”
 “······왼쪽에서 두 번째로 있는 놈. 아마 놈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 같아.”
 유량은 어렵게 입을 떼며 숨을 헐떡였다.
 “······.”
 산들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수십의 무인들은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피가 맺힌 칼날을 겨누고 길을 지나면 죽인다는 기세를 선보였다.
 “그럼 네 녀석부터 죽인다.”
 산은 주저하지 않고 유량이 가리킨 남자를 향해 손톱을 내세워 돌진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한 채 왼손만을 움직이는 게 꽤나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그 거센 돌격에 흑의 무인들은 돌연 기이한 움직임을 펼쳤다. 무인들이 가진 특유의 호흡으로 만들어내는 진법이었다. 그들의 현란한 움직임은 한 사람이 두 사람처럼, 두 사람이 세 사람처럼 보이는 기이한 환영과 함께 수백의 칼날의 휘둘렀다.
 산의 몸이 그 진과 직접 마주 닿은 순간, 일순간 그의 온몸 곳곳에 번뜩이는 칼날이 몸을 낭자했다. 대퇴부, 왼쪽 측두부, 팔꿈치, 명치 등.
 콰직!
 “크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산의 비명과 함께 무인들 주변으로 피가 튀었다.
 솟구치는 생명의 격동. 그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피가 하염없이 그들의 몸을 적신다. 하지만 눈을 깜박이는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그들은 그 피가 산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 뒤편에 있던 무인의 왼쪽 가슴을 꿰뚫은 유량의 짓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산과 유량의 교묘한 합공이었다.
 “어, 어떻게?”
 당혹 어린 탄식과 함께 그들은 침묵을 깨뜨렸고, 그 순간 산의 이빨이 그중 한 명의 목을 깨물어 살점을 단숨에 뜯어내 죽여 버렸다. 죽기 직전까지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는 듯 휘둥그레 뜨여 있었다.
 이어 산과 유량은 거의 동시라고 생각될 정도로 발로 땅을 그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다.
 청년들의 유치한 장난 짓이라고 하기에는 산과 유량의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흑의 무인들의 혼란은 가중됐고, 일순간 그들의 몸에 검이 궤적을 그리며 사지를 베어버렸다.
 “크아아악!”
 “히익!”
 “사, 살려줘!”
 피에 물든 야수들의 잔혹한 몸부림. 그 경이로운 생명력과 파괴적인 힘으로 휘두르는 검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하아, 하아.”
 피어오르던 모래연기가 걷힐 무렵, 수십의 인원이 있던 곳에는 산과 유량, 그리고 남은 인랑들만이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일순간 사력을 다한 거친 움직임에 땀이 턱 끝까지 맺혀 떨어진다.
 사지가 잘려 움직이지 못하는 한 명의 무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어떻게든 살겠다는 의지로 뒷걸음질했지만 산은 그의 등을 즈려밟으며 노려봤다.
 그는 절규하며 호박색을 띤 야수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대면했다.
 “뭐, 뭐야? 어, 어떻게 된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놈들이 대장을 죽여 버렸다. 진을 통제하고 구결을 읊으며 어디를 디딜지 가르쳐 주던 대장이 죽은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무인들이 모였더라고 해도 머리를 잃자 혼비백산 머리가 새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눈앞에서 팔이 부러져 있는 청년은 단숨에 칼을 빼앗아들고 그들의 부대장을 죽여 버렸다.
 그는 처음부터 부대장을 노린 척 몸을 미끼로 던져, 동료를 이용해 자신들의 대장을 죽여 버린 것이다.
 “할 말 있냐? 나는 무지 많을 것 같은데. 가령, 이걸로 찌르면 많이 아프냐?”
 푸욱!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산은 주저 없이 들고 있던 검으로 그의 등에 꽂았다. 결단코 얕게 찌른 것이 아니다. 몸을 관통할 정도로 세게 찌르면서도 내장기관이나 중요한 부위가 다치지 않게 오직 근육 마디마디를 잘라내며 찌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아픈가 보네. 생각해보니까 무림인은 침으로 몸을 치료한다지. 이런 식으로 하냐?”
 푸욱!
 “크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의술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잔학무도한 찌르기는 연이어 계속됐다. 눈물 콧물에 타액까지 쏟아내며 무인은 고통을 호소했다.
 분명 여유를 부릴 판국이 아님에도 눈앞에 있는 인랑은 자신에 대한 목숨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살려줘? 아프냐? 너희들은 그토록 괴로워할 걸 알면서도 우리의 몸에 이딴 쇠붙이를 찔러 넣고 히죽히죽 웃어댄 거냐! 찌를 때마다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역겨워!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구역질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거야. 근데 너희는 괜찮겠지? 살인에 미친 새끼들이니까. 이 감각을 즐기다니, 괴물은 네놈들이 아니냐!”
 처음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듯 작은 목소리가 분노와 함께 커져갔다.
 그와 동시에 산은 들고 있던 검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몸 곳곳을 찔러나가며 거센 분노를 표출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푸욱!
 괴롭다.
 푸욱!
 역겹다.
 푸욱!
 살을 베고 찌르는 그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올 때마다 산은 무엇이 두려운 건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해. 용건이 있어서 그 녀석은 살려둔 거잖아.”
 그때 유량이 흥분한 산의 어깨를 짚으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산은 날카로운 호박색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다 곧 뒤로 물러서며 눈을 감고 몇 번의 심호흡을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너희들이 이 산에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분명 우리 중 아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별의별 함정을 설치해놓았겠지.”
 “······.”
 무인은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주먹을 쥐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이렇게 냉정하게 상황을 예측하며 행동하는 것들이 고작 이런 어린 것들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이곳에서 빠져나갔을 때, 천하에 피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몸을 떨었다.
 “허허. 그건 곤란하지. 자네들은 여기서 단 한 명도 살아나갈 수 없네.”
 살아남은 인랑들과 도주를 감행하던 산의 일행 앞으로 또다시 거대한 장애물이 걸음을 막아섰다.
 사뿐히 지면을 밟고 검을 든 채 등장한 한 남자.
 두 마리의 쌍룡이 장식된 검자루에 이어 과연 장식의 위엄만큼 위험스런 예기를 띠는 검이 묘하게 눈에 뜨인다. 게다가 그것을 들고 있는 남자 또한 중후한 인상을 자랑했고, 다른 흑의 무인들과 달리 고급스런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딱히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누구보다 오만해 보이며 그 기운조차 강맹하기 그지없었다.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모용단(慕容斷). 천하제일의 이름에 도전하러 왔네.”
 “천하제일?”
 산은 지친 안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이 어째서 튀어나온 것일까? 그들의 목적은 분명 자신들의 살육일 터인데.
 아마도 모용단이라는 남자는 그들과는 약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에 대해 숨김이 없으며 누구보다 더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느낌이 강한 인물이었다.
 인랑으로서 웬만한 무인들과 견줄 수 있다 자신한 산조차도 이 순간 검을 든 저 인간이 이토록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로 모용단의 기백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아마 본능이 경고한 대로 따르지 않았다면 한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 일섬에 다리가 잘려나갔을 것이다.
 “훗. 거기였군.”
 모용단이 웃으며 보는 것은 울타리 건너편에서 유유자적하게 당나귀를 이끌고 오는 한 남자였다.
 단정하고 위엄 있는 얼굴과 다르게 소박한 옷을 걸친 채 나타난 것은 바로 산의 아버지 비영이었다.
 “아, 아버지!”
 분위기와 맞지 않을 만큼 그 여유로운 모습에 산은 믿을 수가 없는 듯 두 눈을 깜박였다. 비영은 당나귀를 이끌고 오던 고삐를 놓고선 산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물러서라. 너희들이 낄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비영의 주변을 둘러싼 기운이 평소와 다르게 패도적이었다. 또한 그 주변으로 냉랭한 한파가 퍼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바위인 양 살아남은 인랑들을 막아선 모용단. 그리고 남자의 앞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비영.
 왜일까. 산은 목이 메어왔다.
 인랑족의 마을에서 촌장으로 지내며 언제나 냉철하게 그들을 지도하고 언제나 옳은 판단만을 내리던 아버지.
 단지 눈빛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늘만큼은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져서였다.
 한없이 넓어만 보이는 등이 오늘따라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움츠러들어 보인다.
 비영은 무심한 눈으로 인랑족, 자신이 지켜온 마을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보며 모용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
 “······오랜 시간,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순간을 고대해왔소.”
 비영의 무심한 눈동자와 정면으로 대면한 모용단의 눈빛은 그야말로 환희 그 자체였다. 희열에 찬 눈동자. 꿈틀거리는 입가의 근육. 그것은 모두 비영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 건가?”
 반면, 비영은 여전히 무심한 눈동자로 그를 내려다보며 반문한다.
 그 모습에 산은 일순간 생각했다.
 모용단이 거대한 바위라면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비영은 이미 바위를 뛰어넘은 태산처럼 보였다.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에 발하는 감각이 풍경처럼 변해버리며 그 차이를 인식시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금 천하제일은 무림맹의 맹주 남궁환철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분명 이십 년 전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 무인이 있었소. 사파 출신으로, 아버지를 베고 중원의 모든 검객을 무릎 꿇린 전설 같은 사내였소. 어렸을 때는 그것이 꿈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소. 한낱 전설이라고. 허나 그 전설이 지금 내 눈앞에 있소. 어찌 설레지 않겠소.”
 “······산아.”
 비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모용단에게 대답하는 대신 산을 불렀다.
 “예. 아버지.”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 위용과 위압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유량, 아연 그리고 주변의 인랑들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온다. 혈향이 짙게 배인, 인랑족들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서인지 너무나 선선한 그 바람에 비영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옛날에 아주 바보 같은 남자가 있었느니라. 실상 바라지도 않는 자리에만 몰두해 형제도 아비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가······. "
 “······.”
 산은 쉽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영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하지만 그렇게 차지하려 노력했던 자리는 막상 취하니 별로 득이 될 게 없더구나. 점점 교활해지며 영악해지고 끝끝내 또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되는 생각만을 해야 하는 그 자리라니······. 그러던 중 그 남자는 오늘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한 거지.”
 “······.”
 “하지만 그 날, 하늘이 인도한 그 자리에서 나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벙어리 여인을 만났다. 그것이 바로 너의 어미다. 산아.”
 “······!”
 “지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 있었지. 후회? 기필코 그런 것은 없었다. 그 뒤로 네가 태어났다. 그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네 녀석이 내 손을 잡는 순간,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 오늘은······.”
 비영은 천천히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눈앞에 선 모용단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초라하며 날조차 제대로 서지 않은 검. 하지만 그 초라한 검을 가지고 그는 굳건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살아남아다오. 이제 나를 하염없이 두렵게 만들 유일한 것은 내가 지켜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된다.”
 “하핫! 정말 제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렸다 하지만 이렇게 무딘 검이 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소. 그 검은 무엇이오? 나를 벨 의향이 있기는 한 것이오?”
 비영은 이번에도 모용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산에게 입을 열었다.
 “이주치 식량과 여비를 마련해두었다. 어서 떠나거라.”
 “하, 하지만······. 아버지.”
 울컥하는 심정에 산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여태까지 참아온 복받친 눈물이었다. 그것은 산뿐만이 아니라 유량도, 아연도, 주변의 인랑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서글퍼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자 한이 눈물로 흘렀다.
 “언제까지 나를 무시할 것이오?”
 상황이 이쯤 되자, 자신이 마치 붓으로 휘갈긴 글씨 외에 하얀 공백으로 남은 듯한 기분에 모용단은 참을 수 없었다. 비영은 여전히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조금 늦게 대답을 해주었다.
 “언제까지 근엄한 무인의 탈을 쓸 게냐? 꼴사나워서 봐주기가 민망하구나. 황새가 학을 쫓아봤자, 다리만 찢어질 뿐이다.”
 “네놈!”
 이마에 핏대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모용단이 신형을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그 고속의 움직임을 앞두고도 비영은 가만히 선 채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산아, 벌은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벌도 엄연히 위계가 있고 또 각각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 벌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너의 독단적인 생각일 뿐인 게다. 하지만 사내가 목표를 잡았으면······.”
 카앙!
 경공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모용단의 검을 맞아 유유자적하게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낸 비영. 그 동공 안에는 그를 증오스러운 듯 노려보는 모용단이 있었으나, 비영의 머리를 채우는 것은 끝끝내 아들인 산뿐이었다.
 “벌 따위가 아닌, 이 하늘 아래 가장 자유로운 자가 되거라. 문자에도, 시선에도, 누군가의 명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거라.”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비영은 전력으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염이 뒤얽힌 숭산의 초원을 감싸고 바람이 요란스럽게 불꽃을 뒤흔들어놓았다. 그에 따라 번지는 불꽃은 삽시간에 신록들을 집어삼키며 새까맣게 모든 것을 태워버렸고······.
 “크아아아악!”
 그 분주한 홍염의 굴레 속에서 검에 심장이 꿰뚫린 인랑이 최후의 힘을 발해 자신을 찌른 두 무인의 머리를 깨부술 듯 주먹으로 내려쳤다.
 두 무인의 머리가 우드득 소리를 냈고, 몸뚱이는 시체로 변모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어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인랑들을 죽이기 위해 더 많은 무인들이 몰려와 수많은 검의 궤적을 그리며 그의 팔, 다리, 가슴 등 모든 부위에 검을 꽂아버렸다.
 야수 같은 호박색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점차 사그라지더니 한 마리의 인랑이 다시금 죽음을 맞는다. 전신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바닥을 적신다. 피로 더럽혀진 대지에 고인 피가 발목에 잠길 정도였다.
 그것만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인랑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죽어갔는지······ 눈앞에 그려질 듯한 참상이었다.
 그 짙은 혈향이 풍기는 대지 위로 두 갈래의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곳은 가지의 마디마디가 서걱 잘려버렸고 나무의 밑동이 드러날 정도로 거목이 무너져 버렸다.
 자연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생성된 그 바람의 근원은 메아리같이 기운을 퍼뜨리며 강맹한 푸른 기운이 날뛰는 쌍룡의 검, 바로 모용단의 검에서 발출된 것이다.
 허나 비영은 오히려 그의 검압(劍壓)을 흘리며 주변에서 진을 짜고 있는 모든 무인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크아아악!”
 그들은 하나같이 길을 잃어버린 눈먼 칼에 맞은 것처럼, 피를 흘리며 쓰러져 나갔고 산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강호의 무림에 속한 자들.
 그중에서도 고수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거대한 바위를 쪼개고 바람을 가르며 빙각의 일부를 녹일 정도라는 기록을 남겼고, 한때 그런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던 산은 말도 안 되는 비유라며 이런 터무니없는 기록을 적은 자를 바보 취급했었다.
 하지만 그 책은 거짓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이 포효한다. 그 바람의 포효 속에서 서로의 길을 밟고 있던 두 무인이 다시금 검과 검을 부딪쳤다.
 캉!
 일순간 불똥이 튀는 그 장면에 산과 살아남은 인랑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이 개미가 채 한 걸음을 떼기도 힘든 시간 동안 일어난 것이라고 하면 믿을 이는 과연 몇이나 있을까?
 다시금 둘의 신형이 사라진다.
 경공을 취하던 두 남자는 나무를 박차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대지에서 몸을 튕겼다. 이내 비영과 모용단의 사이가 서로의 힘에 튕겨져 서로가 견제할 수 있는 거리만큼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지면에 힘을 가했는지, 각자가 신고 있던 신에서는 지글지글 열이 피어오르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오는 열기다. 보는 것만으로도 생사의 엇갈림을 엿볼 수 있는 고수들 간의 다툼에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은 그 둘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산은 어찌해야 될지 갈팡질팡 망설이는 눈동자를 했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으셨다.
 게다가 더는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으로 보아 이미 아버지가 생사의 결단을 내린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자.”
 산 역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이후에 취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하, 하지만 우리 가족들이······.”
 아연이 울먹이는 눈동자로 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있다. 누구 하나 생사의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런 아버지를 두고 오는 게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비단 아연 자신뿐만이 아니라 유량도, 남아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산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괜찮을 거야. 아저씨는 강하니까.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일단 너희들이 빠져나가고 안심할 수 있는 곳에 들어서면 나랑 유량이 갔다 올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하얗게 질려 보이기까지 하는 유량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다시금 간절한 눈으로 그녀의 양어깨를 잡자, 아연은 어쩔 수 없이 "······응.”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간다. 피곤할 테지만 유량은 뒤를 봐줘. 그리고 나머지 녀석들 남자들은 바깥쪽에서 여자들을 지키고 내가 정면에 설 테니, 절대 대열을 이탈하지 마. 알아들었어?”
 “으, 응.”
 “그렇게 할게.”
 산이 진중한 표정으로 명을 내리자, 남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마지막으로 산은 아버지의 등을 한 번 더 돌아보곤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남은 아이들을 이끈 채로.
 
 ***
 
 “하아! 하아! 하아!”
 숨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다.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고 들고 있는 검 또한 무겁기 짝이 없다.
 이토록 몸의 제약을 느끼게 된 것이 얼마 만일까 하고 모용단은 생각했다.
 그런 그의 앞에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 있었다. 그와는 달리 초라한 옷을 입고 있지만 표정은 온전하여 일순 기품마저 느껴지며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검을 잡는 모습은 적이지만 경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천하제일이란 말인가?
 “크크크크크.”
 모용단은 절로 웃음이 터졌다.
 맞수가 아니라 도무지 뚫을 수 없는 벽을 만든 것 같았다. 이것이 과연 인간인 것일까? 현경의 경지에 접어든 모용단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비영은 터무니없이 강했다.
 “······.”
 그와 맞서고 있는 남자, 비영은 어떤 말조차 내뱉지 않고 무심한 눈동자로 모용단을 쳐다볼 뿐이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러면서도 상대의 속을 단숨에 간파해내는 듯한 그 얄미운 시선이 계속 쏟아지자, 모용단은 더 이상 경건한 모습 대신 말 그대로 인간의 탈을 벗어던진 짐승처럼 분노를 표출했다.
 바늘처럼 찔려오는 강렬한 살기에 일순간 주변의 모두가 경직됐고 그와 함께 폐부에 강하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토록 아들이 소중한 게냐! 네 녀석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이냐!”
 모용단이 거대한 함성을 내뱉었다.
 “······네 눈은 겨우 나밖에 비치지 않으니, 그 밖의 것은 볼 수가 없구나.”
 그 기합 같은 함성이 끝마친 순간, 모처럼 모용단에게 대답을 해주는 비영. 하지만 그 순간 비영의 위치는 터무니없게도 모용단의 바로 뒤였다. 마치 가벼운 산보를 하는 것처럼 여유가 돋보였지만 그 은밀하면서도 기민한 움직임은 고수들조차 경악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아아앗!
 그와 함께 모용단의 몸 밖으로 붉은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일순간 모용단은 몸을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 했다.
 잠시 후, 모용단은 가슴팍에 검상을 입은 걸 깨달았다.
 “이, 어찌! 이 어찌 이, 나를 속이고 이렇게 기만할 수 있는 것이냐! 비영!”
 “시간이 없구나. 구구절절 사내가 말이 많기도 하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게 너희들의 방식이지 않느냐?
 즉, 화낼 시간이 있으면 빨리 죽이고 끝내자는 말에 모용단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서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극의(極意), 만단검(灣斷劍).”
 극의. 그것은 모든 무인들이 저마다 깨닫는 경지.
 전신에 내력이 갈무리되며 용솟음치는 진기를 형상화시키는 그 이름은 희대의 사람들은 ‘극의’라고 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모용단이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으며 들고 있는 칼에는 두 마리의 쌍룡의 기운이 비영을 노려보며 으르렁 울부짖는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
 
 동이 트기 전,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일부러 험한 산지를 선택했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인랑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여자들은 남자들의 등에 업혀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울퉁불퉁한 바위와 절벽이 이루어진 그 길을 하산하기 위해 산은 당나귀 등에 매달고 온, 사지가 잘린 무인을 직접 업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챙겨주신 여비와 식량을 각자 분담해서 나눠가진 후, 당나귀의 엉덩이를 때려 쫓아냈다.
 “만약 저놈이 발견되면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유량과 남자들은 저마다 걱정이 되는 듯 한마디씩 중얼거렸지만 이 무리에서 책임자는 엄연히 산이었고, 또 그런 그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 이상 불평,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족이 다 죽어가는 판국인데,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 간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 곤란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산은 가장 커다란 짐을 메고 가장 가파른 절벽 아래로 여러 번 지면을 걷어차 도달했다. 그 뒤로 인랑의 무리가 따른다.
 청명한 달이 남은 인랑들에게 가호를 내려주는 것처럼 그 음산한 그림자를 일순간 비추며 검은 인영들이 삽시간에 절벽의 끝에 도달했다.
 산은 아주 잠깐 멍하니 그 달을 바라보았다.
 광기가 서린 은은한 달. 아마 사람들에게는 이 달이 언제나 똑같이 떠오르는 달이라고 생각될 테지만 산에게 있어서 그 달은 너무나 큰 의미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빛을 내뿜는 달.
 그 월광(月光)이 그의 슬픔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남은 동족들은 그 측은한 등이 마지막으로 본 촌장님의 것과 너무나 비슷해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
 “산아. 근데 당나귀는 왜 버리고 가는 거야?”
 아연이 산에게 다시금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질문을 건넸다. 뒤돌아선 산이 그에 답했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어. 그 흔적을 최소화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가파른 곳을 내려가려는데 당나귀는 방해만 될 뿐이야. 게다가 상대는 무림의 고수들. 지금부터, 우리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 산행을 마쳐야 돼.”
 아연의 질문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 그 살인귀는 왜 데리고 온 건데?”
 이번 질문에는 마냥 순수함만이 묻지 않았다는 것을 산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아연의 동공 너머로 활활 피어오르는 증오의 불꽃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산은 그녀가 새삼스럽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과 깨달았다.
 이 산에 어떤 함정을 얼마나 만들어 놓았는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자신이 업고 온 무인은 언제든지 혀를 깨물 준비를 마친 훈련된 자였다. 그런 그가 쉽사리 입을 털어놓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산이지만 그래도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 느낌에 일단은 데리고 온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을 들고 왔다기보다 인질이나 방패막이를 들고 왔다는 느낌이 정확하지만 순진한 아연에게 그런 냉혹한 현실이 그녀에게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잠자코 입을 다물며 하산을 택했다.
 입을 다문 산은 지면을 사뿐히 디디며 나무 위로 건너갔고, 그 뒤를 다른 인랑들이 뒤쫓는다.
 지면에서 몸을 날리는 것과 다르게 굵은 나뭇가지를 디뎌 그 탄력으로 몸을 움직이는 그 순간, 이동속도는 한층 더 빨라져 웬만한 무인들이라도 쉽사리 따라올 수 없는 속도였다.
 이는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굵은 나뭇가지를 각력으로 구부리는 것은 결코 쉬울 일이 아니었다. 무인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나뭇가지를 박차기 전에 나뭇가지가 그 체중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질 판국이지만 인랑은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박차는 다리의 힘은 천리를 지치지 않고 뛰어다닐 만큼 강하다.
 상대를 낚아채고 놓아주지 않는 날카로운 손톱과, 한번 목에 박힌 이상 그 뼈를 통째로 오려 삼키는 이빨과 턱의 힘.
 아마 인랑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피해 다니면서 살아온 이유도 그런 그들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가끔씩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갔기에 어느 정도 보통 인간에 대해서 간파하고 있는 산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다.
 뿌득!
 이가 갈릴 정도의 분노. 그러나 새벽의 한기가 숨결을 내뱉는 순간, 그것이 그대로 김이 되어 날아간다.
 숲 너머에 우중충한 안개의 운무가 끼기 시작해 이제 앞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산은 더 이상 보는 것을 포기하고 동료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줄인 뒤, 노련미 있게 숲을 헤쳐 나갔다.
 “호호호호호! 뭐야? 그렇게 많은 무인들이 쳐들어갔는데도 이만큼이나 늑대가 남아버린 거야?”
 그때 안개의 건너편으로 어디선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우면서도 요염한 목소리.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어린 그 목소리와 함께 눈가에 꽃잎이 아른아른 떨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풍경이 연출됐다.
 알 수 없는 이질감과 공포감에 몸이 그대로 전복 당한다. 멈춰야 한다.
 “······멈춰!”
 산의 즉단과 함께 인랑들이 몸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순간 산의 몸이 꽃잎과 안개에 뒤덮였다. 그 정면으로 수많은 암기가 비처럼 퍼부어지는 바람에 몇몇의 어깨에 그대로 암기가 스쳐 지나갔다.
 “크아아아악!”
 그 중심에 휘말린 산의 몸은 채 피할 새도 없이 피를 뿜었다. 암기가 그의 육신을 가르고 꽂히는 잔혹한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산아!”
 모두가 믿을 수 없는 눈을 휘둥그레 뜬 가운데 유량의 등에 업힌 아연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지금까지 동고동락해온 동료이자, 특별한 의미의 친구를 그녀는 여기서 잃어버린 것이다.
 안개가 섞인 지대에서 익숙해진 시야로 유량은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흐음. 제법 머리를 굴리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치도 빠른 것 같네. 한 박자 늦은 것 같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왼쪽 어깨 부근에 구름을 탄 현무의 무늬가 수놓아진 자색의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는 미녀가 편(鞭)을 들고 요염한 웃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뒤로 질끈 넘긴 머리는 꾸미기 위해서라기보다 거치적거리기 때문에 넘긴 것으로 보이지만 구름같이 가벼우면서도 아름다운 흑단의 머릿결이다.
 분을 칠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피부가 새하얀 건지 곱디고운 얼굴을 가진 미녀는, 얄궂게 웃으며 나무 주변을 둘러싼 검은 무인들의 보호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심상치 않은 여인의 등장에 산 대신 유량이 지시했고, 산이 유지했던 대형에서 인랑들은 약간 거리를 두었다.
 “하아, 하아.”
 “제, 젠장. 몸이 왜 이러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몸의 움직임이 아까처럼 예민하지 않고 둔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 몇몇은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숨을 내뱉고 있었는데, 그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흐음. 너도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녀석들은 얼마 안 가서 그대로 죽고 말걸. 내 이름은 당문혜(唐雯暳). 집안에 사정이 있어서 혁혁한 공이 필요하니. 여기서 좀 죽어줘야겠어.”
 유량의 판단력에 당문혜는 요염한 웃음으로 대처하며 암기를 날리라는 신호로 손을 들어보였다. 그것은 방금 전에 산을 죽였을 때와 동일한 수법이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거대한 암기의 비, 만천화우(萬天花雨).
 그녀의 손이 내려가고 무수한 암기가 인랑의 몸에 빼곡히 채워질 뻔한 그 순간 안개 건너편으로 한 인영이 안개를 박차고 그녀의 위를 급습했다.
 “뭐야? 살아 있었어? 근데 멍청한 거 아니야. 감히 당가의 하늘 위를 내려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건방지다는 듯 그녀가 그 인기척을 손가락으로 지목한 순간, 거대한 암기들이 일순간 하늘을 메웠다.
 모든 것이 정지될 것만 같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당문혜의 눈동자에 비춰진 모습은 이미 빼곡히 암기에 박혀 죽어버린 검은 무인의 시체였다. 하지만 이미 명령을 철회하기에는 늦었다.
 무수한 암기의 파편에 그의 육신은 파편 째로 찢어지며 그대로 터져버렸고, 뒤늦게 당문혜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목가에는 이미 날카로운 손톱이 번뜩였다.
 “······.”
 호박색으로 번뜩이는 야수의 동공과 맞부딪친 당문혜는 생전 처음으로 두렵다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기다란 야수의 손톱이 그녀의 하얗디하얀 목에 한 줄기의 피를 흘러내렸다.
 마치 야수라고 생각되는 이는 바로······.
 “산아!”
 기쁨에 찬 어조로 왈칵 눈물을 쏟은 아연이 이름을 불렀지만 산은 대답 대신 당문혜의 목에 팔을 감싸고 그대로 머리에 손톱을 들이댔다.
 “······.”
 “움직이지 마라. 당가(唐家). 강호에서 이르길 너희들을 건드린 자는 이런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더군. 사천당가의 적이 되면 감미로운 음식을 포기해라. 자는 것을 포기해라. 오직 공포에 떨며 그들의 암습에 대비하라. 아마 이거였지?”
 “······.”
 두려움에 당문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 귓가에 숨을 불어넣듯 산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근데, 내 적이 된 녀석들은 어떻게 되는 줄 알아?”
 “······.”
 “아무 것도 없어. 그저 갈가리 찢어발긴 가족들의 시체를 보며 오열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해독제 얌전히 내놓을 수 있을까?”
 “흐, 흥. 그래봤자, 네놈이 아버지의 상대가 될 리······.”
 푸욱!
 “꺄아아아아아악!”
 당문혜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번뜩이는 야수의 손톱이 아주 조금 그녀의 목을 찌르자, 그녀는 공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몸을 바르르 떨어야 했다.
 그녀를 호위하던 흑의 무인들마저 그 비명엔 몸을 움찔거렸다. 사단이 일어난 만큼 그녀를 호위하는 세력들은 분명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산의 협박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를 위협하는 야수가 조용히 귓가에 언질을 해주었다.
 “여기서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시체가 되는 건 네 아버지가 아니라 네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고.”
 “······사, 살려줘.”
 그 오싹한 한마디에 당문혜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장이라도 지혈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는 쉽사리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산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아무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안하무인한 그녀의 생각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해독제를 내놔.”
 살려준다는 말미조차 보여주지 않는 산의 대답에 당문혜는 바르르 떨며 해독제를 보관하고 있는 주머니를 통째로 넘겨버렸다.
 “유량. 받아.”
 해독제를 받아든 산은 그중 한 알을 깨물어 집어 삼킨 뒤, 남은 주머니를 유량에게 던졌다.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 그 거리에서도 무사히 그것을 받아든 유량은 중독된 다른 인랑들에게 해독제를 건넸고, 당문혜를 인질로 삼은 산은 희번득 동공을 확장시키며 주변에 있는 무인들에게 경고했다.
 “물러서.”
 “하, 하라는 대로 했으니까. 지, 지혈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얕게 찔렀지만 흘리고 있는 피의 양은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당문혜가 벌벌 떨며 그렇게 말했고, 산은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거 금창약이지? 이리 내.”
 “어, 어떻게?”
 그녀와 같은 지위에 있는 여인이 혹여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금창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 놀라운 것은 산이 그녀의 금창약이 어디 있는지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
 인상을 찌푸린 산은 그녀에게서 금창약을 받아들었다.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조개껍질에 담겨 있는 양이 적은 것과 은은한 금색의 빛을 띠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상당히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일 것이다.
 두 손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산은 그 조개껍질에 있는 약을 혀로 핥아 조금 떼어낸 뒤, 당문혜의 목에 난 상처의 피를 핥아내고 혀로 금창약을 발랐다.
 “히, 히익!”
 그 혀의 감촉에 당문혜는 등골이 오싹한 감을 느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야수, 인랑이 자신의 목을 집어삼킬 것 같은 기분에 오한이 서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처녀로서 사내에게 덮쳐진 것만 같은 수치심 또한 동시에 느꼈다. 그렇기에 순간,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피어올랐고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몸을 부르르르 떨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산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말야. 내가 쉽사리 네가 건네준 것을 해독약이라 믿고 동료들에게 넘겨줬을 거라 생각해? 어차피 맞든 틀리든 이미 우리의 습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 한 가지 더 말해주지. 우리는 너희보다 냄새를 잘 맡아. 특히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약초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 냄새로 약을 어느 정도 분간할 줄도 알아. 금창약도 역시 마찬가지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당문혜는 산이 보통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인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대지를 박찰 정도의 각력을 가지고 강하게 물어뜯는 이빨을 가진 괴수라기보다 치밀하게 교섭을 하는 협상가의 실력이 있다는 것을.
 “유량. 아연하고 남은 아이들은 네가 통솔해. 서쪽으로 가다 보면, 계곡하고 강이 보일 거야. 그 쪽의 급류를 타고 하산해. 이쪽은 내가 맡는다.”
 “알았어. 가, 가자.”
 “하, 하지만 산이······. 산아!”
 유량은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면서도 남아있는 인랑들을 통솔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아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그들의 신형은 저 머나먼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산은 여러 감정이 깃든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다 곧 당문혜와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 곳곳에는 나무 사이사이에 가느다란 철사가 여러 갈래로 엮여 있고, 주변의 무인들은 산이 도망치는 퇴로를 전부 막아내며 거리를 둔 채 견제하고 있었다.
 “······.”
 하지만 도망갈 수 없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보다 산은 다른 이유로 자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율이 솟구친다. 지금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 동족의 원한을 갚고 싶지만, 그들이 유량 일행을 놓아준 것은 어디까지나 당문혜에 대한 신변의 위협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서 산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날에는 제아무리 튼튼한 인랑족의 다리를 가진 유량이더라도 경공을 전개하는 무인들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두려움에 떨던 당문혜가 처음으로 입술을 뗐다.
 “과, 과연 괜찮을까? 인랑. 우리 서로 협상을 해보는 게 어때?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고.”
 위로 슬며시 치켜뜬 눈으로 산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바라본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협상이란 본디 얻어야 될 게 많은 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일을 일임해온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산이 가지고 있는 협상의 조건은 그녀의 목숨. 그녀는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산에게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산은 도리어 불쌍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협상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어. 잠자코 포기해.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될 수 있으면 죽을 때까지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최후네.”
 “뭐? 뭐?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시간을 끌면 위험한 것은 오히려 산이었다. 곧 여러 문파에서 보내온 흑의 무인들이 산을 위협할 테고, 그에 앞서 당가의 비전을 가진 초절정의 고수가 당도하면 산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의 표정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내걸 수 있는 거래 조건은 네년의 목숨이 다야.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거래의 결과는 여기 있는 무인들을 통솔시켜 내 동족들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 하지만 그건 아무리 지위가 높은 너라도 불가능할 테고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을 버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지. 상처가 아프더라도 참으라고.”
 “네, 네놈의 목숨은 중하지 않다는 거냐? 조, 좋아. 네 말대로 아무리 나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어. 하지만 여기서 네가 도망친다면 여기서 묵인해줄 수는 있어. 여기 있는 무인들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할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급한 것은 당문혜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살기 위해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지만 산은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애초에 근본적인 것부터 우리는 맞아 떨어지지 않거든.”
 “그, 그게 뭔데?”
 “나는 짐승새끼들과의 거래는 믿지 않아.”
 “······.”
 서슬 퍼런 증오의 불꽃이 호박색의 눈동자 안에서 불타오른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덜미를 뜯을 것 같은 생각에 당문혜는 얌전히 입을 다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온통 산발을 한 채 상체가 은은하게 회백색의 털로 뒤덮인 인랑. 오른팔은 이미 부러져 통통 부어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통증을 참아내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어렸을 적,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이르길, 집념 어린 눈동자와 신념을 가진 자를 만났을 경우에는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즉시 그를 죽이는 것. 하지만 기습을 감행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감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는 두 번째 방법, ‘목숨을 건 협상’을 써야만 했다.
 “후우. 좋아. 모두 무기 버리고 얌전히 무릎 꿇어. 그리고 직속 부대는 이곳으로 반경 삼 장거리까지 인랑들이 거쳐 왔던 흔적을 모두 지워.”
 “하, 하지만!”
 “내 목숨이 위험하잖아.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여? 나는 이미 문책 이상,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협상하고 있는 거야!”
 “······뭐하는 짓이지?”
 목울대를 감싼 팔에서 나오는 그녀의 은은한 떨림을 감지한 산은 조금 당혹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당문혜는 주먹을 부르르 쥐며 말했다.
 “나는 지금 여자로서의 수치와 무인으로서 굴욕적인 순간을 모두 겪고 있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에는 내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야. 이 정도면 납득할 수 있겠어?”
 “아니.”
 산은 단호하게 부정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바라지 마. 나는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지금부터 나를 데리고 그대로 내려가.”
 “······.”
 갑자기 변한 당문혜의 분위기에 산은 조금 침묵을 지키다 곧 다리를 떼 그녀를 안고 나무 사이를 박찼다. 그 뒤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무인들이 줄줄이 뒤쫓아 왔다.
 
 ***
 
 대략 한 시진쯤 지날 무렵, 당문혜가 입을 열었다.
 “멈춰!”
 돌파하고 있는 안개 너머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그 순간, 산은 당문혜의 말에 따라 다리를 멈추었다.
 그 뒤로 수많은 무인들과 정말로 인랑들의 흔적을 지우고 온 것인지 그녀가 보낸 부대의 인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긴다. 산은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 전체가 이미 땀으로 젖었지만 당문혜는 그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보다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앞은 나락금혼이라는 진이야. 이곳을 돌파하지 못하면, 내려가지는 못 할 거야.”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는 듯 당문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가 처한 상황을 대략 설명해주지. 우선 너희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이번에 동원된 무인들의 규모는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어. 운이 좋더라도 너희는 이 두 번째 함정, 나락금혼에 걸려들겠지.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도 못 나가. 도망간 너의 동료들이 운이 좋게 나락금혼의 주박과 상관없는 비밀의 길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여기서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첫째, 여기서 끝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나를 인질로 잡는다. 둘째, 나를 죽이고 여기 있는 모든 무인들도 죽이고 동료들과 합류한다. 셋 째, 나를 놓아주고 이 나락금혼을 돌파한다. 그게 다야. "
 “한마디로 놓아달라는 거군.”
 “맞아.”
 얄팍한 잔꾀가 아닐 수 없었지만 산은 당문혜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어찌 돼서 산이 나락금혼의 영역에 도달하면, 제아무리 당가라도 추적을 포기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산이 그 선택을 하게 만들기 위해 동료들의 흔적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걱정은 되겠지만 동료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인지시켜준 것이다.
 설령 흔적을 지우지 않았더라도 당가의 인원은 전부 이곳에 발이 묶여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문혜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위협하던 손톱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내가 내리고 싶은 결정은 두 번째다.”
 “어째서지? 중요한 것은 너의 목숨일 거라 생각하는데. 우리 모두와 맞서 싸우면 넌 분명 죽어.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릴 정도의 바보는 아니겠지?”
 얼굴은 태연을 가장하며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으로 당문혜는 산을 거의 미친놈으로 인지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목숨을 건 최후의 방법도 통하지 않는 것일까?
 산은 조용히 그녀의 주머니를 모조리 낚아채며 질문에 답해줬다.
 “너희들 같은 짐승새끼는 모르지만······. 나는 내 가족을 지켜야 해.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유량 녀석을 믿어. 반드시 그들과 합류해서 너희들의 억압을 피해 자유로워질 거야.”
 목을 휘감던 팔이 점차 느슨해진다. 그 팔이 완전히 떨어진 순간, 당문혜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을 박찬 산이 나락금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나락을 향함에도 그의 발은 쉴 새 없이 바빴다.
 “이익!”
 몸을 부르르 떤 당문혜는 들고 있던 붉은 편(鞭)을 휘둘렀다. 공기를 쇄도하며 닿는 것은 모조리 터뜨려버리는 강맹한 진기의 편이 산에게 날아갔지만 이미 산의 몸은 나락금혼에 도달한 것인지 몸이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그녀의 편은 애꿎은 나무의 일부를 터뜨렸다.
 “아, 아씨. 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그녀가 신변의 안전을 되찾자, 그녀의 호위, 진운이 찾아왔다.
 짝!
 당문혜는 그를 흘낏 노려보다 손바닥을 들어 있는 힘껏 따귀를 후려쳤다.
 “다시 한 번 내가 이런 굴욕을 겪는 날이면 진운 너는 나의 손에 먼저 죽을 것이야.”
 “······죄, 죄송합니다.”
 진운은 붉어진 뺨을 쓰다듬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허리 굽혀 사과했지만 그녀는 사과를 받는 대신 집합시킨 병력에게 명했다.
 “나락금혼으로 빠진 인랑은 포기한다. 멋도 모르고 지옥에 당도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겠지. 현재 다른 인랑들이 도망친 경로는 우리만이 알고 있다. 그놈들을 모두 섬멸하고 그 공은 우리가 쟁취한다. 실패할 시······.”
 잠시 말을 끈 그녀의 전신에서 거대한 독기가 발산됐다. 과연 사천당가의 당주의 직계자식이라서 그런지, 운용되는 독기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숭고한 무인의 경지에 여기 모인 무인은 모두 경외와 함께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원 참살에 처할 것이다.”
 “합!”
 전원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동시에 대답을 마친 그들의 몸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목표는 서쪽에서 급류를 타고 이동할 인랑의 무리.
 어제의 밤은 잊히고 떠오른 햇살 아래, 살아남은 인랑과 무인들의 추격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낙양의 아침이 밝았다.
 세간에도 큰 화제를 부른 ‘마교 토벌’이란 명목 아래 모인 수많은 무림맹 소속의 단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일찌감치 낙양에서 발을 떼고 있었다.
 말과 마차를 이끄는 무인들과 세가들을 바라보며 구경꾼들이 저마다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의 내용은 마교 토벌의 실패나 혹은 마교가 한 발 앞서 거점을 바꿔서 이동을 바꾸었다는 것들이었다.
 흙먼지를 자욱하게 피우며 이동하는 무인들의 얼굴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으며 왠지 모르게 하나같이 그늘이 져 있었다.
 실제로 마교와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패잔병 같은 그 모습에 모두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허허. 기이하네. 거 참. 대낮에 술을 처마신 것도 아니고 왜 다들 똥 씹은 표정이지?”
 시장에 내놓기 위해 어망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를 물동이에 긷고 온 한 남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대나무 낚싯대를 짊어지던 그의 동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무림인들의 속내를 우리가 알아봤자 득 될 것 하나 없다고. 그보다 그 소문 들었나? 옆집에 있던 올기 녀석이 새벽 댓바람부터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산 속에서 요괴를 봤다고 허둥지둥 도망 와서는 이불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구먼.”
 “쯧쯧, 세상이 어느 땐데. 이 평화로운 세상에 헛것을 보고 미쳤나.”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남자들은 곧 자신들의 생업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요괴라······.”
 고급스런 비단옷을 걸치고 얼굴에 면사를 착용한 한 여인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자신의 옆에 있는, 말끔한 무복을 갖춰 입은 여자 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초희(草僖), 당신은 요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복을 입은 무사의 이름은 초희.
 어찌 보면 전국시대에 살았던 절세미남 송옥(宋獄)과도 비교될 정도로 여인보다는 사내의 기질이 강해 보이는 아름다운 무사였다.
 “얼마 전, 아가씨는 흑천삼안저라는 신수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요괴가 있다고 한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절도 있게 대답을 마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세요. 생각하기도 싫어요.”
 얼굴을 면사로 덮은 여인, 제갈서연은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공을 익힌 그녀라서 그만큼 도망을 칠 수 있었던 거지, 평범한 아낙네였으면 그 자리에서 흑천삼안저에게 짓밟혀 죽어버렸으리라. 그와 함께 자신을 구해주었던 건방진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그와는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하지만 그 두루뭉술한 예감을 그녀는 냉정하게 지워버리며 움직이고 있는 무림맹의 모습을 엿보았다.
 무림맹의 깃발을 꼿꼿이 세우는 아래 무인들이 저마다 근엄한 표정을 내세우며 말을 타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고 있었으나, 제갈서연은 그 모습에 몇 가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을 위해서 각 세가에서 배출한 인원은 각각 서른에 가까웠다. 하지만 처음 여정과 비교했을 때 숫자가 절반가량 줄어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인원을 파악하려고 들었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손을 써놓았는지 그것에 관한 소식은 그녀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움직임. 도저히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가요. 어째서 아버님은 하루아침에 낙양에서 자리를 비우시는 걸까요?”
 본디 무림맹은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는 명분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에 관한 성과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만큼 무림맹뿐만 아니라 모든 무림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이 두 가지 덕목은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무림인들은 명분에 비해 이룩한 바가 없었다.
 “너무 깊이 참견을 하시는 게 아닐런지요? 이러다 또 가주님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겁니다.”
 슬슬 그녀의 깊어지는 통찰력에 불안감을 느끼던 초희는 재빨리 제갈서연을 제지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뭔가 비틀어졌어요. 그게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뚝뚝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초희였지만 내심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본래 제갈서연은 현명하다. 어떤 일이든 그 일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생길 때까지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다. 헌데 지금은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녀는 자신이 불안하다는 감을 입으로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허! 역시 후기지수다워. 그저 가문의 후광에 취해 있는 녀석은 아니구나. 껄껄.”
 그때, 그녀의 바로 뒤에서 찌그러진 쇠그릇에 동냥을 하고 있던 꼬질꼬질한 거지가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감탄을 표했다.
 초희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스르릉 검을 뽑아들며 견제를 취했지만 제갈서연은 채 검집에서 검이 뽑히기도 전에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만두세요. 실례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초희를 뒤로 둔 제갈서연은 면사를 걷은 뒤, 포권을 쥐고 거지에게 예를 취했다.
 “껄껄. 거지한테 인사하는 아가씨라니. 껄껄껄, 우습기 짝이 없구나.”
 “······이!”
 제갈서연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초희는 다시 검자루를 쥐고 분노를 표출했지만 그 순간 제갈서연의 입에서 떨어진 말을 듣고 움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개방의 최고 어르신인 벽란공(壁嬾工) 어르신을 몰라볼 리가 있을런지요.”
 오가는 시선에 수십 마디의 대화를 눈빛으로 단축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제갈서연은 눈웃음을 선보였고, 곳곳을 헝겊으로 기운 누더기 옷자락을 걸치고 있던 벽란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하! 이를 어찌 할꼬. 제갈이라는 것들이 이번에도 괴이한 것을 강호에 등장시키겠구먼.”
 “과분한 칭찬이옵니다. 어르신. 헌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만······.”
 “대답하지 않겠다. 뭐 좋다고 내가 너의 의구심에 대한 답을 주겠느냐. 내 웃은 것도 너의 현명함에 감탄한 것일 뿐, 대답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느니라.”
 “······.”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젓는 벽란공 덕분에 제갈서연은 잠시 얼굴을 붉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르신은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이 노인네가 아직까지도 아리따운 젊은 처자를 보고 두근거린다는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네.”
 능청스레 그는 웃어 보인 그가 찌그러진 그릇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자네 아버지에게 이 말은 전해두게. 다음에 화(禍)가 일어났을 때는 얌전히 다가오는 칼에 맞아야 될 것이라고. 그래야 얽히고 얽힌 끈이 끊어지지 않겠느냐고.”
 “그게 무슨 말이온지?”
 “하암. 오늘은 빈둥빈둥 길바닥을 굴러야 되겠구먼. 쯧쯧.”
 “수상한 노인입니다. 아가씨. 다시는 상대를 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
 키득거리며 멀어지는 벽란공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서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초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어르신은 분명 말씀해주셨어. 이미 일은 일어났고 그 일에 대한 후환으로 누군가 비수를 들고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제갈서연의 말에 초희의 안색이 하얘졌다.
 자유분방한 개방조차,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일까?
 처음부터 벽란공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제갈서연은 당황한 초희의 안색을 바라보다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몰라. 다만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 같아.”
 다시 면사를 착용하기 위해 고개를 든 제갈서연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털복숭이 토끼들이 푸른 벌판에서 뛰는 것처럼 아름다운 푸른 하늘 위로 구름들이 옹기종기 떠있는 모처럼의 절경이다.
 그 하늘을 바라보던 제갈서연은 토끼모양을 한 구름보다 좀 더 옆쪽에서 거대하고 두루뭉술한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 모양이 왠지 모르게 어떤 짐승과 닮아 보여 무심코 중얼거린다.
 “······늑대?”
 
 ***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피의 향이 났다.
 눈을 뜨니 주변은 붉었고, 초목을 피우던 대지의 흙이 모조리 말라비틀어져 모래 같은 고운 입자로 변해버렸다.
 “······여긴? 크윽!”
 방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숭산의 풍경과 다른 나머지, 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오른팔에 통증을 느끼며 왼손으로 검붉게 부어오른 부위를 매만졌다.
 풍경이 변한 이유에 대해서 기억을 되짚는 순간, 산은 이곳이 당문혜가 말했던 나락금혼의 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안에 들어서자마자 의식을 아주 잠깐 잃었던 것처럼 기억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정신을 일깨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얼마 안 되는 체력을 갈무리하며 팔을 짚는 순간, 바위 언저리에서 기다란 무언가가 그의 팔에 똬리를 틀었다.
 “크아아아악!”
 관절의 마디마디가 부러질 것만 같은 격심한 통증에 산은 비명을 지르며 손톱을 내세워, 그것을 잘라냈다.
 서걱, 몸통이 잘리며 자신의 팔에 똬리를 틀었던 것의 정체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 쌍두사(雙頭蛇)였다.
 쌍두사는 본래 어둡고 습한 지대, 거의 어두운 계곡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생물로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신수였다. 하지만 그 뒤로 산의 눈앞으로 말도 안 되는 풍경이 벌어졌다.
 콰콰콰쾅!
 바위까지 휩쓸며 나타나는 거대한 뱀이 혀를 내민다.
 그 한편에서 얄궂은 인상을 가진 원숭이는 무인들이나 사용할 법한 거대한 도에 혀를 할짝이고 있었고 본래의 크기보다 훨씬 큰 벌레들은 땅을 부수고 나무를 분지르며 튀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며 시선을 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할 법한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지던 산은 천천히 멀쩡한 왼손에 손톱을 추켜세우며 그들의 전면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가진 탐욕 덩어리 짐승들은 더 맛있는 것을 음미하지. 이 살덩어리가 탐나더냐?”
 키에에엑!
 회백색의 털이 덮이지 않는 하얀 목덜미를 보여준 순간, 갑각벌레 중의 한 마리가 날개를 든 채 저돌적으로 돌진해왔지만······.
 서걱.
 놈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뿔이 산의 손톱에 의해 잘려버리고 공중에서 산이 일으킨 회전과 함께 강력한 발이 머리를 짓밟는 순간, 머리가 터져 벌레의 몸뚱이가 그대로 바르르 떨다 곧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호락호락 먹혀주지는 않겠다······. 와라!”
 그 말에 반응하는 듯, 대다수의 요괴들이 산을 향해 밀집해서 몰려들어왔다.
 영혼을 가두고 나락의 짐승들과 영원히 사투를 벌이는 나락금혼의 진.
 이 환상 속에 갇힌 모든 이들은 절망에 빠진 채, 끊임없이 힘이 고갈당한 상태로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 절망의 사투 끝에 살아남은 자는 없다. 진에 발을 디딘 순간, 살아남는 방법은 왔던 길을 되짚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수밖에 없다.
 허나······.
 콰직!
 원숭이의 목을 깨물어 통째로 뜯어낸 인간의 형상을 한 늑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손톱이 더럽게 피로 물들고 그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과 함께 요괴들의 공격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가지고 있는 신념은 하나면 충분하다.
 살아라!
 그것이 네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찾아낼 수 있는 근원이자,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되리니······.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인랑이 포효한다.
 울부짖는다.
 이 끊임없는 사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이적인 생명력을 불태운다.
 그 지옥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는 끊임없이 죽이고, 죽이고 끝없이 죽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
 
 “하하하하하하! 할아버지. 여기 황기야. 황기!”
 “허허허 녀석, 정말 고양이처럼 날쌔면서도 약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찾는구나.”
 망태기를 두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깊게 주름진 얼굴은 손녀의 재롱에 한없이 밝기만 했다.
 노인은 손녀가 캔 황기의 뿌리를 아주 약간 떼어내 씹으며 폭포가 보이는 바위 중턱에 몸을 걸쳐 휴식을 취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쫓아온 손녀 역시 오랜 시간 산을 탄 덕분에 갈증이 피어오르는지 물이 흐르는 강가에 얼굴을 담그며 끝없이 물을 들이켰다.
 “크앗! 시원하다!”
 “허허, 그 많은 물이 당장에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천천히 마시렴. 하산할 때는 몸이 무거워서 늘어질 게다.”
 “할아버지가 업어주면 되지.”
 히히, 하고 사랑스런 웃음을 내비치는 소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허허. 이제 어지간히 무거워서 할아비 허리가 남아날 것 같으냐. 어두워지기엔 아직 이르니 조금 쉬다 가자꾸나.”
 “응!”
 소녀가 조금의 불만도 없어 보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할아버지. 저기 사람이 자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생뚱맞은 소리에 노인은 손녀가 앙증맞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동공을 확대시키며 노인은 허리가 아프다는 것마저 잊으며 몸을 벌떡 일어섰다.
 손녀의 말대로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다리는 물에 잠긴 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청년이 보랏빛을 띤 입술로 파르르 몸을 떨며 쓰러져 있었다.
 
 ***
 
 나락의 금혼에서 청년은 끝없이 손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파헤칠 수 없다.
 그가 파헤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 기필코 끊이지 않는 악순환의 굴레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몸을 가눌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여러 음성이 그의 귓가를 자극했다.
 
 -살아라.
 -살아남아다오.
 
 아연의 아버지 훈과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비영이 유언처럼 남긴 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엄마야!”
 나락의 금혼에서 혼신의 힘을 발휘하는 순간, 내뱉은 음성.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산은 그 옆에서 새근새근 졸다가 그가 내지른 고함에 깜짝 놀라 깨버린 소녀를 바라보곤 자신이 나락금혼의 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보니 밤하늘은 무리를 이룬 별이 화려한 광채를 뿜으며 강처럼 흐르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에 데워진 몸 덕분에 감각이 점점 회복되는 것도 느껴졌다.
 야행에 기민하게 비행하는 부엉이 소리가 들려온다. 귀뚜라미와 들풀에 숨어있는 여치 소리가 들려오고 벌레들이 정신 사납게 날아오고 있다.
 “여긴?”
 “끌끌. 그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다니, 천운(天韵)이라는 것은 정말 존재하는 구나. 몸은 괜찮은가? 젊은이.”
 “······예.”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산은 한참만에야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 모닥불을 쬐며 나뭇가지에 생선을 꽂아 굽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특출한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그 모습이 오히려 안정을 되찾게 해준다.
 “얼마 되지 않지만 들게.”
 놋그릇에서 구수하게 피어오르는 쌀죽의 냄새를 맡은 산은 그제야 허기를 깨닫고 허겁지겁 그릇을 받아들었다.
 말랑말랑한 쌀의 그 구수함이 입 안에 스며들자, 산은 저도 모르게 오랜 시간동안 참아온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히히. 내가 했는데. 그렇게 맛있어? 내 이름은 소미야. 오라버니는 이름이 뭐야?”
 산의 옆을 지키고 있던 어린 소녀, 소미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이름을 물었다.
 눈물과 함께 들이킨 쌀을 곱씹던 산은 말을 하려다 혀가 데일 것 같은 뜨거움에 부르르 떨었고, 동시에 전신에 느껴지는 무력감과 흐느낌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소미야. 아직 병세가 깊으니 너무 말을 많이 시키지 말거라. 오늘은 부득이하게 야행을 하게 됐으니, 먼저 잠을 자거라.”
 “에이. 알았어.”
 할아버지의 말이라서 그런지 체념이 빠른 소미는 평평하게 다져놓은 바닥에 기다란 옷을 덮고 누워버렸다.
 “······.”
 “······.”
 대략 한 시진이 지나는 동안, 노인은 끊임없이 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장작을 넣었다.
 침묵을 지키는, 붉은 불빛에 은은하게 비쳐오는 노인의 그 모습은 어찌 보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고맙소.”
 “뭐, 사람이 죽어 가는데 외면할 수는 없잖은가? 자네는 많은 고행을 겪었군.”
 “네.”
 부정하지 않고 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얽매이는 것이 없소. 끊임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되오. 나는 자유로운 벌이오.”
 굳건하게 다물어진 그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은 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무거운 것을 짊어지던 등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등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짊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은 한없이 황량해 보이기만 했다.
 “······내 눈엔 자네가 방황하는 양의 새끼 같군.”
 “큭!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방금 전까지도 의연한 척하긴 했지만 절로 눈망울에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산은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유량은 과연 무사할까?
 자신이 간다고 해서 상황은 달라질 것인가?
 끊임없는 무력감이 그의 전신을, 그리고 정신을 정복했다.
 아버지는 이런 무게를 평생 짊어져온 것일까?
 “아하하하하하하하!”
 별무리가 치닫는 밤. 산은 미칠 듯이 웃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그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세상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자유를 꿈꿔왔다.
 “아아 젠장!”
 한창 그렇게 웃던 산은 이마를 감싸 쥐며 다시 한참 동안 무표정을 일관했다.
 “어르신.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
 노인은 침묵을 지키며 산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순수한 반면, 한없이 눈에 서린 증오심이 어린 눈빛.
 이 남자는 지금 위태위태하게 줄을 타고 있다. 떨어지는 순간, 나락과 직결되는······.
 “잠시, 칼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약초를 다듬을 때 쓰는 칼을 내밀었다.
 칼을 받아든 산은 머리칼을 자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것도 아닌데, 정교하게 머리칼을 자른 그는 잘라낸 머리칼을 전부 모닥불에 던져 태워버렸다.
 삽시간에 불에 타서 사라지는 그 머리칼들을 바라보던 노인은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머리칼을 자르는 의미를 물어도 되겠는가?”
 “잘난 게 없는 남자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에 불응하겠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친구를 찾아 헤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악인들에게는 더없이 조용하고 외면마저 하는 하늘에 대고 맹세할 생각입니다. 그날의 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기에 오늘부로 산이라는 이름은 버리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비야(庇夜). 묻혀진 밤을 기억하는 유일한 남자입니다.”
 청년이 맹세한 그날 밤, 노인은 생각했다.
 어쩌면, 역사에서 이름을 새길 그릇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고······.
 
 ***
 
 낙양 인근에 펼쳐진 장터 사이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총총 지면을 내딛으며 흙먼지를 일으키는 앙증맞은 발의 주인은 소미였다.
 “비야 오라버니!”
 소녀가 기쁜 내색이 가득한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반응과 다르게 주변의 어른들은 웅성웅성 거대한 인파를 이루며, 두려움과 경외가 가득한 시선으로 소미가 부르고 있는 비야라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웃통을 벗고 거대한 호랑이를 짊어지고 있는 청년.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 누구도 청년이 호랑이를 잡았을 것임을 의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 곳곳에는 상흔이 가득하며 이목구비가 단정한 얼굴에는 몇 날 며칠간의 사투를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풀리지 않는 긴장감과 비장함이 묻어 나온다.
 무엇보다 청년에게 잡힌 호랑이에게선 죽었을 때의 표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는데, 동공이 사라지고 흰자위로 가득한 그 표정은 필시 두려움이라.
 물론 여기서 죽은 호랑이의 표정까지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청년의 비장함과 강인함에 대해.
 “히익!
 그런 청년을 향해 천진난만하게 달려오던 소미는 비야가 짊어지고 온 호랑이를 보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발이 주춤 멈췄다.
 그 모습을 포착한 비야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어이쿠! 우리 아가씨 왔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덜 씩씩하네? 그래서야 오빠한테 시집이나 올 수 있겠어?”
 “이씨! 하, 하, 하나도 안 무섭거든!”
 설레발치는 발걸음을 억지로 앞으로 내세운 소미는 강단 있게 달려와 비야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아프다. 맹꽁아.”
 지금 당장이라도 자고 싶다는 얼굴로 그는 태연하게 소미를 상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단지 발걸음을 옮긴 것만으로도 두려움이자 경외의 대상이 된 비야를 위해 사람들은 걸어가는 길을 터주었고, 그 사이로 비야는 소미와 나란히 걸어가며 평소와 똑같이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은 뭐 먹을래, 소미야?”
 “으음. 당과!”
 “좋아. 오늘만은 기필코 당과를 사지 않겠어.”
 “이익, 이 심술쟁이가!”
 괜스레 얄미운 말을 한 덕에 소미의 발에 장딴지를 맞은 비야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정겨운 가족의 모습으로 보였다.
 
 해가 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슬슬 낙양에도 겨울이 찾아왔기 때문에 매서운 한파가 뜰을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빙판이 만들어지기 일쑤였다.
 이때쯤이면 모두가 장작을 패며 난방대책에 시급했다. 그중 소미가 머무는 집만큼은 올해만큼은 풍요로우면서도 따뜻하게 지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소미의 할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 청년, 비야에게 늘 고마움을 안고 있었다.
 “정말 자네 덕분에 여러모로 편하게 지내는군.”
 “······은혜를 갚고 있을 뿐입니다.”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 김이 서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비야는 웃통을 벗고 도끼를 든 채 가지고 온 장작을 패고 있었다.
 비야가 혹여 앓아눕지나 않을까 싶어 노인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땀을 흘리며 비야는 분주하게 몸에 열을 발산시킨다.
 팔에 돋아있는 핏줄은 미칠 듯이 요동치고 있고 어느새 몸 자체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 이 정도면 되려나.”
 “쓰고 남아 장에 내다 팔 만큼 많네. 이제 쉬게.”
 비야가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바라본 노인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휴식을 권유했지만 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들러야 될 곳이 많습니다.”
 “이, 야심한 밤에 어디를······.”
 그는 바빠도 너무 바쁜 사내다. 자신에게 조금의 휴식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늘 초조한 얼굴을 짓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든다. 그렇기에 오늘밤 노인에게 이런 질문을 꺼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초조한가?”
 “······.”
 침묵으로 일관하던 비야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떼며 그 답을 내뱉었다.
 “······괴롭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언제나 남들의 위에서 술에 취해 있고 육즙이 맺힌 고기를 씹고 있습니다. 또한 디디고 있는 대지 위에 그들이 내뱉은 숨결이 섞인 바람을 맞아가는 것조차 한없이 괴롭습니다.”
 “······.”
 한없이 진지하며 중압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한동안 소미랑 같이 살면서 제법 농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늘 한 곳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안녕이, 누군가의 평화가 괴로운 것이다.
 단순히 남들이 잘돼서 배가 아프다는 것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본질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은 달랐다. 그는 남들의 고통 위에 서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그 한을 계속해서 가슴에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청년은 더욱더 빠르게, 더욱더 거칠게 움직일 것이다. 잊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 각인을 내세운다.
 노인은 무심코 비야를 보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럼.”
 꾸벅 인사하며 비야는 울타리를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허허 소미, 그 아이가 많이 섭섭해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노인은 허리를 두들기며 비야가 사라진 곳을 한참 응시하다 안으로 들어갔다.
 
 ***
 
 야심한 밤에도 비야의 일상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머물고 있는 소미의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대장간이었다.
 “하암. 이 자식은 꼭 밤에 오고 지랄이야. 짜증나게······.”
 불친절한 응대지만 비야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거참. 이 집, 대장장이는 단골한테 만날 떽떽거리네.”
 “시끄러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따라와.”
 대장간의 주인은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하품을 하며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객, 비야를 창고로 안내했다.
 날이 추워진 탓에 혹여 서리가 맺혀 쇠붙이에 녹이 슬면 곤란했기 때문에 무기의 보관은 늘 지하였다.
 기름 잔에 불을 붙인 대장장이가 짚더미 사이를 뒤적여 기다란 목함을 꺼내들었다.
 “네놈이 고안한 대로 만들기까지 꽤 시행착오가 걸렸어. 네 녀석도 풀무질을 할 정도 되는 애송이니까. 날이 무디거나 여분의 것을 만들 거면, 방법을 가르쳐 주마.”
 “하하. 고맙네요.”
 목함을 받아든 비야는 기쁜 듯 열었다.
 은은한 광택을 뽐내며 드러난 것은 짐승의 발톱을 형상화한 조(爪) 계열의 무기와 허리에 메는 소가죽 끈이었다.
 한데 제련된 철의 두께가 한없이 얇다. 착용하기 위해서는 소가죽 끈과 연결을 해야 했다. 그가 이런 터무니없는 무기를 만드는 이유에 대해서는 만든 대장장이도 모른다.
 “나라면, 그런 미친 무기를 휘둘렀다가는 손목하고 팔이 나가서 죽을 거다.”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대장장이의 비아냥거림에도 비야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만들어진 쇠가죽 허리띠를 둘러메고 팔에 조를 착용하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냥 폼 재려고 만든 거냐?”
 기껏 만들어준 무기가 의미 없이 폼으로 재고 다니는 거라면, 이만큼 허무할 수가 있으랴.
 하지만 비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짜 무기는 따로 있거든.”
 오른쪽 손목의 관절을 우두둑 풀어주며 그는 비릿한 미소를 풍겼다.
 
 ***
 
 언제나처럼 중원의 아침을 밝히는 햇살.
 새벽의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맛보는 상쾌한 기분은 백만 냥을 주더라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비야는 생각했다.
 “바람이 좋군.”
 피로가 채 가시기 전이지만 그는 평소처럼 소미가 일어나기 전에, 몸의 관절을 풀어주고는 아침 일찍부터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는 저잣거리에서 잣과 호두 등, 견과류를 파는 가게였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오늘은 잣이 아주 좋습니다. 이놈이 참 싱싱혀서······.”
 친절한 점원이 본격적으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대낮부터 취했어? 주정부리지 말고 주인영감 불러와.”
 비야는 냉혹하게 그의 말을 자르며, 품에서 꺼낸 은자 한 냥을 엄지로 튕겨 그에게 던졌다.
 “아아 예예. 그리 하옵죠! 따라오십시오.”
 은자를 받은 이는 얼굴 붉히는 일도 없이 히죽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비야는 가게 안쪽에 있는 나무걸상에 앉아 팔짱을 끼고 무심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무지막지하게 큰 범을 잡고 무사히 귀환하신 우리의 비야 아닌가?”
 잠시 뒤, 비야의 허리에 간신히 와 닿을 정도로 왜소한 노인이 껄껄 이빨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맞은편에 섰다.
 언제나와 같은 염소수염을 단 채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는 노인.
 예순쯤 되었을까? 실제로 그의 나이는 모르지만 그만큼의 연륜을 가진 것은 틀림없다. 그렇기에 비야는 그와 대화하면 남모르게 긴장하곤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언변을 구사하는데 뛰어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자다.
 노인의 이름은 이군(咿群). 그저 견과류와 쌀 등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의 주인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외관상의 명패에 불과했고, 그의 실제 소득원은 정보상으로서 보유한 정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가? 이전과 똑같이 강호의 움직임을 물어보려 온 건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 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네. 차는 오룡차쯤이 적당하겠군. 기율아! 차와 다과를 내오거라!”
 “예입! 금방 갑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비야는 걸상에 팔을 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군이 비야의 맞은편으로 와 팔을 소매에 낀 채,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
 역시 이 노인하고 있으면 기분이 불편하다. 언젠가는 이 자가 자신의 정체를 속속들이 꿰뚫어볼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들어왔지만 앞으로의 여정에 있어 이 고약한 노인네의 입에 내뱉어지는 정보만큼 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잣 가게 주인치고 비싼 차를 마시는 것 같네.”
 “암, 물론이지. 천하제일천의 남령수(南零水)로 만들어진 차일세. 자고로 차는 좋은 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좋은 물로 우린 차는 늘 일품이라네.”
 “이 가게는 차 때문에 적자가 나겠군.”
 그런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중, 기율이 끓여온 찻잔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녹색으로 우러난 차의 뜨끈한 김이 두 사람 사이를 잠시 경계처럼 가른 가운데, 처음으로 이군의 눈빛이 진지해지며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구파일방이야 이전과는 별다를 게 없다네. 다만 사천 부근에서 나오는 색마, 이두괴(二頭怪)의 횡포가 심해져 전국 곳곳에서 그의 악명이 높아지니, 결국 각 세가에서도 움직임을 보였다는군. 그 외에 하북팽가는 최근 개봉 쪽에 사업을 늘리고 있는 참이라네. 더없이 평화롭고 더없이 맑은 나날이라네. 물론 마교 쪽은 약간 사정이 다르네. 후계자로 양성되던 소공자가 갑작스럽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 선 교주의 제자들이 모두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네······. 그리고 사파의 우두머리······.”
 한참 이군의 이야기를 듣던 비야는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곤 잠시 손을 들어 그의 이야기를 저지했다.
 “영감. 언제까지 그딴 쓰레기 정보를 털어놓을 거야. 나는 굶어 죽어도 낚싯대에 걸린 미끼를 먹지는 않아.”
 “흐흠. 과연 그만큼 안목은 높다는 것이로군. 이런 변변찮은 정보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나 보군. 그래. 오늘은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원하나? 비야 자네가 구하려고 하는 정보는 생각 외로 구하기가 까다롭거든.”
 이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비야는 어제 호랑이의 가죽을 팔아 채운 돈주머니를 이군의 앞에 내놓았다.
 “이백 냥. 지금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전부야. 원하는 것은 세 가지. 첫째는 현 무림맹주인 남궁환철 이전의 천하제일인.”
 “허허. 자신의 입으로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이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거늘.”
 쯧쯧 혀를 차며 이군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비야가 내민 돈주머니에 손을 올렸다.
 그에 비야가 그 손등에 제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요구하는 정보는 두 가지 더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소림사에 아규라는 인물이 있다고 언뜻 들었어.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싶어.”
 “쯧쯧, 그 음탕한 땡중을 말하는 것이군. 좋네. 그럼 세 번째는?”
 “······.”
 비야는 아주 잠깐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두 번째 정보까지는 그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제부터 내놓을 요구마저 수용될지 걱정이 됐던 것이다.
 “허허. 장사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네.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나도 듣지 않는 게 내 명줄 늘이는 길임은 아네.”
 돈을 물리려는 듯, 손을 내빼는 이군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초리는 비야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무언가 재밌는 제안이 튀어나올 것임을 본능이 인지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몰려드는 교룡관(敎龍館)이 있다고 들었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인증된 신분이 필요해.”
 “허허허허허허.”
 잠시 넋이 나간 웃음을 내뱉은 이관.
 교룡관은 단순히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몰려드는 곳이 아니었다. 각 문파의 제자들이 교류를 하며, 실전 감각을 훈련하기 위한 일종의 무인의 양성소였다.
 당연히 구파일방과 무림맹 소속의 비야와 비슷한 연령대를 가진 무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경비도 엄중하니, 신분조차 뚜렷하지 않은 비야가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감이라면 할 수 있잖아.”
 “어림없네.”
 비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자, 이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야가 내놓은 돈을 물렸다. 욕심이 나지만 무인들의 눈총을 받기는 꺼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비야는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엄지로 튕겨 걸상에 내려놓았다. 은자가 팽이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는 가운데 비야는 품에서 하나의 주머니를 더 꺼내들었다.
 “대가는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잠시 말없이 주머니를 바라보던 결국 이군은 주머니를 집고 안에 들어있는 것을 손바닥에 조금 쏟았다. 약재의 냄새가 풍기는 구슬 같은 환약이 그의 손바닥에 잡혔다.
 “환약이군. 어떤 환약인가?”
 정보 상인으로서 많은 약재와 환약을 접해왔지만 이군은 처음으로 자신의 코가 콧물에 의해 막힌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환약에 섞인 냄새 중 어떤 재료조차 쉽사리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귀한 것은 알겠지만, 그 용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의구심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혹여 사기를 치지 않을까 싶은 상념이 이군의 표정에서 드러나자 비야는 피식 웃으며 운을 뗐다.
 “사천당가의 비기 중 하나인 자우분심(刺雨紛心)의 해독제. 그 외 조금씩이지만 여러 종류 독에 대한 해독제가 더 있어. 출처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고 내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모두 내줄 생각이야.”
 입을 쩍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군.
 그도 그럴 것이, 독의 명가 사천당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명의는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사천당가의 독을 체내에 품은 순간부터는 죽음이 예정된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야가 내준 해독제는 앞으로 강호를 크게 뒤흔들 수 있는 독이자 약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호흡을 고르던 이군은 눈앞에 있는 비야를 쳐다보았다.
 아직 어리지만 협상에는 능글맞은 그보다 더 영악한 면을 보이는 것이 훗날이 기대되는 모습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승리를 확신했는지,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선택은 당신 몫이야.”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그 말을 끝으로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것을 이군은 통감할 수 있었다.
 
 비야와 정보거래를 마친 이군은 저잣거리를 떠돌며 사라지는 그의 등을 고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꽤나 성과가 좋아요. 어르신.”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율이 히죽 웃었다.
 비야가 오는 날이면 이렇듯 한 주머니에 꽉꽉 들어찬 은자가 수입으로 들어온다. 물론 정보를 거래로 삼는다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지만, 그만큼 버는 수익도 쏠쏠하다. 그러나 이군의 심경은 기율과 달리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에구, 이 녀석아. 눈앞에 있는 것만을 탐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제법 영특하긴 해도 아직 완전한 정보 상인이라기에 모자란 기율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고, 이군은 답답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좀 더 신중해지란 말이다. 비야라는 저 청년, 훗날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남자라는 것만 명심해두도록 하여라.”
 “예? 아, 예.”
 언제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한결같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사람을 상대해오는 이군이 걱정스런 음색으로 충고를 하자, 기율은 얼떨떨하지만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율을 혀를 차며 바라보던 이군은 다시 평소의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끌끌. 그래서 너는 저 청년한테 적합한 신분이 뭘 거라 생각하느냐?”
 “교룡관을 드나들 수 있는 자는 무림맹의 후기지수들뿐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문파라는 배경입니다. 과거 이곳과 멀리 떨어진 월운문(月雲門)이라는 문파가 멸문의 위기에 처해 본단에서 적은 비용으로 그곳을 사들인 적이 있습니다. 월운문이라면 그의 배경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생각해보니, 그 애물단지가 있었군.”
 이군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저조차도 잊고 있던 일을 끄집어낸 기율에게 대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 이군의 시선에 기율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울뿐인 간판이지만 이런 일을 위해서 준비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강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월운문의 후계자라면 각 세가에서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을 테고 혹여 관심을 갖더라도 멸문 위기에 처한 문파 정도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지금부터 그의 신분을 처리하는 작업을 시작하면, 대략 사흘 정도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껄껄! 좋도다! 급하게 해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천천히 진행하거라. 이 일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기율은 감사를 표했다. 이군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잣거리를 바라보며 허리를 두들겼다.
 “근데, 재밌지 않느냐?”
 “무엇이 말씀입니까?”
 “구름을 거니는 달이란 게지. 마치, 가면을 쓴 늑대가 양의 우리에 기어들어가는 것 같구나. 껄껄!”
 “예?”
 껄껄 웃는 이군을 바라보며 기율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눈곱이 잔뜩 낀 눈동자로 잠에서 막 깬 소미는 상에서 노인과 같이 소면을 먹고 있는 비야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저를 응시하는 그 모습에 비야는 젓가락으로 집은 면을 먹지도 못하고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이 계집애야. 물 떠놨으니까. 저쪽 가서 얼굴에 물이나 묻혀.”
 늘 그렇지만 잠에서 막 깬 소미는 평상시 활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없이 멍해지는 바람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괜스레 불안하게 만든다.
 “응.”
 잠이 덜 깬 소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물이 담긴 옹기를 향해 걸어가던 중 철푸덕 넘어졌다.
 “허어!”
 크게 다치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워낙에 볼품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노인은 놀란 것보다 어이가 없다는 양 탄식을 터뜨렸고, 내친 김에 왼쪽 신발짝까지 벗어던진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일어서 세수를 하기 위해 옹기 쪽을 향했다.
 “원래는 아침에도 부지런한 아이였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착한 아이라는 것도.”
 소미의 그런 모습조차도 여동생처럼 귀여운 비야는 피식 웃으며 그제야 집고 있던 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노인은 그런 비야를 향해 우물쭈물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곧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야 오라버니!”
 평소처럼 활발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비야에게 달려든 소미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쿨럭! 켁, 켁! 바, 밥이나 먹어.”
 “후후. 정겨운 남매구나.”
 그 모습에 노인이 뿌듯한 듯 웃었다.
 
 날씨가 춥고 산에도 눈이 쌓여 드나들 수 없게 되니 약초꾼인 노인과 소미는 해마다 겨울이 오면,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비야가 온 뒤로는 그런 걱정을 덜고 노인이 근처 마을에서 얻는 가벼운 일거리로도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노인이 일을 나가고 없는 동안엔 비야와 소미가 집을 지켰다.
 마루턱에 걸터앉은 비야는 조각칼로 굵직한 나무를 깎고 있었고, 저녁식사를 위해 마늘을 까고 있던 소미가 문득 그런 비야를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비야 오라버니, 비야 오라버니.”
 “한 번만 불러. 왜?”
 무뚝뚝한 말투지만 비야의 입꼬리에는 훈훈한 미소가 배어 있다.
 “오라버니가 나무로 깎는 그 사람들은 누구야? 그리고 볼 때마다 사람들 얼굴은 왜 달라?”
 제법 추운 날이라 입을 열고 있는 것만으로도 김이 하얗게 뿜어진다. 비야는 대답 대신 마치 자신의 표정을 가리려는 것처럼 길게 따뜻한 숨을 내뱉었다.
 서걱, 서걱.
 익숙한 손놀림으로 코와 눈을 깎던 비야는 그녀가 대답을 바라는 양 빤히 바라보자 잠깐 침묵을 지키다 겨우 입술을 뗐다.
 “가족들이야. 조금 많아. 한 이백 명 정도.”
 “헉! 그렇게 많아? 그러면 재밌겠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소미의 표정에 비야는 씁쓸한 웃음을 내비치며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만 있었다면······.
 “아주 재밌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팽이도 깎아서 만들고 서로 모여서 사냥도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어딨어?”
 “내가 싫다고 다 가버렸어. 얄궂게도 소리만 꽥꽥 지를 줄 아는 영감이 너 따위 쓸모없다고 궁둥이를 뻥 차지 않겠어.”
 조금. 아주 조금······ 비야는 미묘하게 표정을 구기다 다시금 웃어 보였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지만 그 표정이 왠지 우는 것처럼 보여 소미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와아! 심술쟁이다. 근데, 오라버니는 그 얄미운 사람들 인형을 왜 깎는 거야?”
 “너무 오래 떨어지다 보면, 얼굴을 다 까먹잖아. 안 잊어버리려고 그러지.”
 “왜? 오라버니만 빼고 다 가버렸잖아.”
 “얼굴 잊어먹으면 나중에 만나도 그 영감탱이 궁둥이 못 차주잖아.”
 “아아 그렇구나! 앗! 마늘 넣어야 되는데. 오라버니, 나 잠깐 불 보러 갈게.”
 오라버니의 표정이 너무 슬퍼 나중에 자신도 보면 같이 엉덩이를 차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소미였지만 일단은 오늘 저녁거리가 급한 관계로 어정쩡하게 신을 신고 솥단지의 불을 살피러 달려갔다.
 아주 잠깐 얼굴에 그늘이 졌던 비야도 어느새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조각으로 새긴 것은 생글생글 웃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친구.
 이제는 잊힌 그 밤 속에서 그 눈의 초점은 멍해졌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여동생이 겁탈당하는 것을 보고 죽어버린 녀석이었다.
 “······치사하게 네놈 먼저 가냐?”
 그 얼굴을 바라보던 비야는 피식 웃으며 한손으로 젖어들 것만 같은 눈시울을 손등으로 가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폐부에 한기가 스며들 정도로 미칠 듯이 웃기 시작했다. 손에도 절로 힘이 들어가 목각인형에서 순간 뿌득 소리가 났다.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자신에게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젠장!”
 이렇게 살아남은 자신이 원망스러워진 비야는 손에 들고 있던 목각인형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억센 인랑의 힘으로 집어던졌음에도 신기하게도 목각인형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렇게 끈질기게 버텨보지.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나 보지. ······병신 같은 새끼.”
 누구에 대한 욕일까?
 이내 그의 원망을 마치 새하얀 눈으로 뒤덮겠다는 양,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달빛은 더할 나위 없이 밝고 은은했으며 그 아래에는 모락모락 밥을 짓는 연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달의 빛무리에서 비야는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을 바라본다.
 더할 나위 없이 밝으며 세상에 온화한 빛을 비출 것 같은 금싸라기의 빛들. 하지만 그 빛이 내리고 있는 눈보다 더 차갑다는 것을 비야는 알고 있다.
 “살아는 있냐? 유량.”
 그 날, 잊힌 밤 속의 달을 연상하던 비야는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동족들을 생각하곤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찾지 않을 거다. 괜히 뒈져버렸다는 것을 알면, 나는 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천하를 박살내버리기 전까지 내 분노는 멈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살아있으면, 어디든 찌그러져서 박혀 있어. 너는 모두를 지켜야 하니까. 나는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의 몸이니까 복수는 내가 한다.”
 미칠 듯한 광기가 몸 곳곳을 전율시켰다. 저도 모르는 새 비야의 이빨이 날카로워지며 눈빛조차 달무리의 색깔과 비슷하게 점차 호박색으로 물들여졌다.
 “그날의 달빛에 걸고 맹세할게. 그날 일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죄책감 한 줌 없이, 따뜻한 곳에 자고 있을 어떤 녀석들에게 알려줄 거야. 살아남은 늑대의 이빨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부뚜막에서 그를 부르는 소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야 오라버니. 백숙 다 됐어. 확인······.”
 치맛자락에 물기 묻은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오던 소미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응? 무슨 일 있어?”
 평소의 장난꾸러기처럼 그녀를 놀리려는 비야의 미소. 그러나 소미는 바싹 몸이 얼어붙은 것 같은 긴장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바, 방금 오라버니 눈이······.”
 분명 눈의 색깔이 달랐었다고 말하고 싶은 소미였지만 지금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비야는 평소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눈이 뭐? 부뚜막에서 닭 태워먹다 눈에 재 섞인 연기라도 맞은 거야?”
 “이익 아니거든! 안 태웠다구!”
 괜스레 제가 헛것을 본 탓에 비야의 농간에 당했다는 생각에 소미는 약이 올라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낙양 저잣거리 인근에 자리한 화영객잔.
 지금은 당시의 명성이 퇴색됐지만 한때는 ‘문화의 중심지’라 불릴 정도였던 낙양 곳곳에는 아직까지 과거의 명맥을 잇는 관도를 지나는 길목이 여럿 있었다.
 그렇다 함은 지나는 이가 많다는 말이고, 지나는 이가 많다는 것은 또한 나그네들의 지친 다리를 쉴 곳이 필요하다는 뜻.
 이후 수·당시대에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로, 또한 낙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화려함이 축소되었을 뿐이었다.
 “아아, 피곤해.”
 허난성 초입에 도달한 뒤로 내내 잔뜩 신경질이 나있던 남궁영. 그는 이제야 화영객잔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눈썹이 유난히 짙고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사내다운 풍채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날카로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무척 지친 표정으로 호화찬란한 음식들을 무르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다면, 안에서 쉬어도 좋을 텐데요. 오라버니. 상 앞에서 그렇게 늘어져 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요.”
 “아아, 나를 챙기는 것은 사랑스런 동생 상화뿐이구나. 그 말대로다. 이 오라버니는 피곤한 관계로 그만 가봐야 될 것 같구나.”
 남궁영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곤 그를 얄미운 듯 바라보고 있는 남궁상화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남궁상화가 입을 열어 그를 제지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오라버니께서는 성미로 볼 때 이 길로 곧장 기루로 갈 속셈이 뻔히 보여요.”
 “아차!”
 굳이 입으로 낼 필요는 없지만 남궁상화의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남궁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오라버니. 자꾸 이러시면 교룡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쫓겨나서 아버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거예요.”
 “모른 척해주면 안 되겠나. 나의 사랑스런 동생?”
 “어림없어요.”
 세상 어느 여동생이 자신의 오라버니가 기루에서 노닥거린다는데 그러십시오, 편을 들어주랴. 그러나 그 당연한 답변에 남궁영은 쯧 혀를 찼다.
 “쪼잔하긴······.”
 혼잣말이라기엔 큰소리로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오라버니.”
 탁!
 그에 일순간 남궁상화의 손바닥이 음식이 든 접시가 흔들릴 정도로 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것만으로도 숨겨진 내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엿보인다.
 “알았다. 알았어.”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남궁영이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면,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두 남매의 투닥거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드는 화영객잔의 소란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뭐야! 이 꼬맹이가! 이게 어떤 옷인 줄 알고!”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한 우락부락한 덩치의 대머리 남자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에게 육수에 젖은 자신의 바지를 가리키며 성을 내고 있었다.
 “이런, 어린아이가 그 정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건데.”
 그 장면을 바라본 남궁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남궁상화도 초조한 기색으로 자리에 일어서 남궁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곤란한 것 같은데. 도와줘요.”
 “으음. 그럴까?”
 남궁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채 움직이기도 전,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그 순간 남궁영의 옆으로 한 청년이 스쳐지나갔다.
 “······!”
 청년의 등을 바라보던 남궁영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지루함과 무료함에서 벗어나 놀람으로 가득 찼다. 무림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그가 인기척을 못 느끼고 뒤를 밟힌 것이다.
 그 정도로 가벼운 발소리를 내 앞질러가 잘 정돈된 머릿결을 가진 청년이 자신보다 월등히 큰 대머리의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라버니, 왜······?”
 남궁영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남궁상화가 뒤에서 재촉했다. 그러자 남궁영이 중얼거리며 눈앞에 있는 청년을 향해 웃음을 띠었다.
 “일단 기다려보자.”
 
 모처럼 비야와 같이 장에 나온 소미는 온종일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온갖 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중 식사를 하러 화영객잔을 찾았고, 설렘이 가시지 않은 소미가 점소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뜨거운 육수가 가득 든 국수그릇을 들고 달려오다 한 험악한 인상의 대머리 사내에게 엎지른 것이다.
 사내의 호통에 소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졌다.
 그때였다. 언제 나타난 건지 자연스럽게 비야가 소미를 등진 채, 남자와 시선을 대면했다.
 “비, 비야 오라버니.”
 “뭐야? 네가 이 꼬맹이의 오라버니냐.”
 “그런데?”
 “어쭈. 납죽 엎드려 존대를 해도 모자를 판국에 말을 까?”
 사내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비야와 남자를 둘러싼다. 물론 곧 벌어질 상황을 예상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용건이 뭐냐고.”
 비야는 상대의 덩치나 험악한 기세에도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팔짱을 낀 채, 담담히 그 시선을 응시했다.
 정면에서 그 눈빛을 바라보던 남자는 심상찮은 비야의 기도에 약간 주춤거리며 고개를 홱 젖혔다.
 “네 눈에도 이 꼬맹이가 흘린 국물 자국 보이지? 새로 사야 될 것 같으니까. 돈 내놔.”
 비야는 슬쩍 그의 바지에 흘린 국물 자국을 보곤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엄지로 튕겼다. 휘리릭 허공에서 회전하는 은자가 본능적으로 벌린 남자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헤에. 말 좀 통할 줄 아는데. 자식.”
 대머리 사내는 이겼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뒤로 젖히며 비야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시선에 비야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추켜세웠다. 아직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다.
 “누가 그딴 바지에 은자 한 냥이나 내놓겠냐. 나머지 거슬러와. 미친놈아.”
 “뭐? 미, 미친놈?”
 “오, 오라버니.”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던, 사고를 친 당사자 소미가 더 화들짝 놀라며 비야의 등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사내가 비야의 멱살을 쥐어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드러난 팔 근육이 사내의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비야의 몸은 마치 텅 빈 강정처럼 들려졌다. 주변 사람들마저 침을 꿀꺽 삼키며 표정에는 긴장감이 묻어 나왔지만, 비야는 무언가를 찾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둘, 넷, 여섯. 하아, 너희 매일 이런 식으로 작당하고 노냐?”
 “앙? 이놈이 무서워 미쳤나!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거야!”
 “뻔하잖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뒷골목 장난이지. 깡패 새끼들이 선량한 사람들 등을 처먹으려 구실을 만들어내고 돈을 뜯는다. 아마 소미의 발을 건 것은 저 녀석이겠지?”
 비야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 있던 말라깽이 남자가 뜨끔한 기색으로 몸을 들썩였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죽고 싶다고 사정하는 거냐?”
 “하아. 뭐든지 힘으로 억압하는 새끼들의 대가리는 다 똑같구나. 이봐.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언젠가는 힘에 네놈들도 똑같이 당해야만 된다는 것을······.”
 “뭐?”
 그 순간을 기점으로 비야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리고 비야의 손이 멱살을 쥔 우락부락한 남자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쥔다 싶었는데.
 우드드득!
 “크아아악!”
 탈골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손가락들이 괴이한 방향으로 꺾여버렸다.
 “이 개자식이!”
 구경꾼인 양 주변 사람들과 뒤섞여 있던, 대머리 남자의 무리들이 비야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들이지만 그중의 몇몇은 작은 단검마저 들고 거칠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려는 듯 비야 역시 발을 떼고 자리를 잡더니 그중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의 손날로 목을 내려친다. 그것이 끝이 아니고 그 뒤로 몸을 부드럽게 선회시켜 나머지 일당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한다.
 그의 수상쩍은 움직임에 눈치를 보던 몇몇이 주춤거렸고, 그런 그들을 향해 비야는 쓰러진 남자의 몸을 들어 던져버렸다.
 “크헉!”
 날아온 동료의 몸뚱이에 부딪친 세 사람이 삽시간에 쓰러졌다.
 “제, 젠장! 뭐야? 저 자식 무림인이다!”
 그 신속한 판단에 모두들 표정을 굳혔다.
 “이 개자식이!”
 그 순간, 손목이 어긋난 대머리 남자가 화를 못 이기고 의자를 들어 올려 비야의 등을 내려쳤다.
 콰앙!
 얼마나 강한 힘이었는지, 의자의 다리가 모조리 박살나며 허공을 배회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꺄아아악!”
 소미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공격을 당한 비야는 눈살만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안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 후회하게 될 거다.”
 “뭐가 어쨌다는 거냐!”
 오만해 보일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비야의 태도에 흥분한 대머리의 남자가 주먹을 들어 휘둘렀다. 언뜻 보면 왜소한 비야의 몸이 당장 찌그러질 듯한 기세였다.
 콰아앙!
 그러나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달랐다. 붕 떠서 날아간 쪽은 거한의 대머리 남자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만큼이라고 칭할 만큼 남자의 몸이 그대로 허공을 부양하는 듯 날아가 객잔의 벽을 강타하며 풀썩 쓰러진 것이다.
 “아까 그 거스름돈, 치료비로 써라. 조금 힘을 줬으니까 꽤 아플 거다. "
 비야는 그런 대머리를 흘끔 보곤 아직도 눈을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미의 손을 잡고서 객잔에 붐비는 인파를 뚫고 나왔다.
 “응?”
 그때였다. 두 사람이 눈썹이 짙은 청년을 지나치는데, 비야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청년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법이구나.]
 “······.”
 육성이 아닌 전음이다.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하지만 비야는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소미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서 인파에 몸을 감추었다.
 
 비야와 대머리 거한과의 다툼이 끝난 뒤, 모여들었던 이들도 자연스럽게 해산됐다.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이 일에 대한 소문이 잔뜩 살을 붙여 과장된 채 퍼져나갈 것이다.
 “흐음. 무공을 익힌 사람인 걸까요? 솔직히 저 남자가 어떻게 날아갔는지, 전 제대로 보지조차 못 했어요.”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여인, 남궁상화는 아직도 비야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며 믿을 수 없는 눈동자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여인의 몸이지만 나름 천하제일인의 딸로서 살아가는 자신이 일개 청년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지 못한 것이다.
 “너무 그렇게 초조해할 것 없어. 그는 단지 그 자리에서 발차기를 날린 것뿐이야.”
 “예?”
 오랜만에 여동생이 당황하는 귀여운 모습을 본 남궁영이 씩 웃으며 방금 전에 비야가 디디고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대부분의 객잔이 그렇듯, 이 객잔의 바닥 역시 나무로 짠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곳에 발자국이 깊숙이 패여 있었다.
 “이, 이건!”
 “흠, 상식 범위 밖의 각력을 지닌 남자라······. 다시 한 번 눈앞에 나타나면 그것도 인연이라고 해도 되겠지.”
 교룡관 입관 한 달 전, ‘용’이라 일컬어지는 남궁영과 비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
 
 한산한 새벽의 공기를 마시는 비야의 등에는 조금 커다란 봇짐이 걸려 있었다. 며칠간 집을 떠날 계획이었다.
 “흘흘. 드디어 떠나는 겐가?”
 “꼬맹이가 쫓아오기 전에 가봐야죠.”
 노인은 왜인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런 노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야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뭐, 지금 당장 떠나는 건 아니고요. 마지막으로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뭐 하러 고행을 자초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네.”
 노인의 격려에 비야는 대답 대신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바깥으로 향했다.
 “흘흘, 이제 우리 소미 외로워서 어쩔꼬.”
 그 너른 등이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노인은 끝내 떠나는 비야의 손을 잡아 말리지 못한 것에 손녀에게 미안해하며 떠나는 이의 등을 한참 응시했다.
 말한 대로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날은 또한 그가 영영 떠나는 날일 것이 될 거다. 오랜 세월, 많은 인연을 만나고 그들과 헤어지는 것을 반복한 노인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만큼은 자신의 예리한 감이 틀려주기를 노인은 간절히 바랐지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비야의 산행은 일반인과 비교가 되지 않게 그 속도가 빨랐다.
 산정초목의 모든 자연경광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띄울 때마다 마치 경공을 시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육체의 힘이었다. 따라서 내공을 운용하며 이동하는 무인들의 경공과 비교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비야는 마치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그의 모든 것의 시작이 되고 모든 것을 잃은 터전, 숭산의 인근이다. 그리고 그런 무리한 산행을 감수하고 비야가 찾아온 곳은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중심이었다.
 그곳은 그가 노인과 소미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땀으로 젖은 옷을 벗은 비야는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강물에 얼굴을 묻었다. 목구멍에 시원한 물이 벌컥벌컥 들어오는 그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깊은 산속에서 머물며 소와 산양이 거주할 수 있는 넓은 초원을 수색할 때는 이보다 더한 산행을 감수하고 더 조금의 물만 마셔도 되었었다.
 물론 육체의 성장에 있어서 비야는 이미 인랑으로서 완벽한 힘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조금 힘들다고 느낀 것은 아마 마음가짐의 차이일 것이다.
 그 당시는 어딘가엔 더 이상 방랑하지 않아도 될, 자신들이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낙원이 있다는 멍청한 꿈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던 것이다.
 잠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비야는 상념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보름 안에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잠시 대자로 뻗어 누워 휴식을 취했다.
 이다음에 있을 훈련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걸 위해 소진한 힘을 회복시키고 긴장한 근육의 상태를 원상 복구해야 한다.
 소미의 집에 머무르며 산행 길을 나설 때마다 비야는 사냥만을 해온 것이 아니다.
 약 일 년에 가까운 그 시간 동안, 비야의 머릿속에는 오직 무림인과 대등하게 대결할 수 있는 방법만이 들어차 있었다.
 대체로 인간들과 인랑의 힘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지만 인랑의 힘만으로는 무공을 익힌 인간들을 이기지 못한다. 야수의 날카로운 감각도 인간들이 오랜 시간동안 지혜와 기술로 길러온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인랑들이 날카로운 손톱을 지니고 있다면, 인간들은 더 없이 예리한 칼을 만들어냈다.
 인랑이 산과 들, 강을 자유자재로 뛰어다닐 수 있는 다리의 힘이 있다면, 인간은 내공을 기반으로 해서 더욱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고 효율적인 이동방법을 만들어냈다.
 아마 인간이 그런 힘을 가지게 된 시점부터 인랑의 행방이 역사에서 묘연해지게 된 것이리라. 비야가 정보 상인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십 년 전 ‘붉은 늑대’라는 인랑의 출현이 마지막이었다.
 더없이 강했지만 그는 소림이 펼친 십팔나한진에 걸려들어 고전 끝에 간신히 탈출을 감행한 인랑이라 했다.
 그리고 비야는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랜 소꿉친구의 아버지로, 아규와 전투 도중 행방이 묘연해진 훈이었다.
 어째서 그가 과거에 소림과 대치하고 강호에 관여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지만 그 이후로 무림은 인랑에 대해서 견제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터무니없이 강한 신체를 가진 인랑이 무공을 익히면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 까닭일 것이다.
 일 년간의 수련을 통해 비야는 인간들이 기준에 쌓았던 내공이라는 방식으로 인랑이 그렇게 쉽게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내공이란 선천적으로 인간들의 기준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인간의’ 내공심법으로서는 인랑은 강해질 수 없다.
 오히려 멋모르고 인간들이 정한 기해혈을 따라 운기조식을 취한다면 주화입마에 걸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야는 이 일 년 동안 자신만의 무공의 기반이 될 두 가지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상승무공이든 하찮은 무공이든 기본적으로 무공은 내공과 초식이라는 두 대목이 반드시 필요했다.
 내공은 체내에 있는 응축된 기의 흐름이고, 초식은 몸의 기반이 된 내공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무공의 비전으로써 그 종류가 쉴 새 없이 다양했다.
 이 이치만은 그 간악한 이군으로서도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비야는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의원이 있는 약방을 찾아가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와 관련된 인간의 인체그림을 구하기도 했고, 또 어렴풋하게 구설로 전해 내려오는 묘사를 통해 운기조식을 행하며 수많은 이들이 만들어놓은 길의 터를 짐작만으로 행하기도 했다.
 대개 인간들은 좌선이나 가부좌를 통해 단전의 감각을 일깨운다.
 아쉽게도 비야에게는 맞지 않는 방법이다.
 그 실패에 비야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과정을 통해 인랑의 힘이 어째서 폭발적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랑의 몸은 선천적으로 기의 흐름을 감지하고, 힘을 소모할 때면 저절로 기가 모여든다. 그것을 알아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비야는 마치 강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 흐르는 기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경로를 읽어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기보다 본능이었다.
 늑대는 한번 문 상대를 좀처럼 놔주지 않는다. 그 집요함에 비례하는 것처럼 그의 몸에 응축된 기의 흐름, 내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주변에 흐르는 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흡입하고 있었다.
 그 아집은 결국 단전을 일깨웠고 기존의 체계와 다른 내공으로 변화해간다.
 덕분에 그는 가부좌나 좌선 없이 일상 속에서도 기를 축적해나가고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엔 주변의 기를 먹어치우려고 하는 그 내공심법을 조절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공심법을 발해 몸 안에 축적된 몸에 맞지 않은 기를 모공으로 모조리 배출한 비야가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주변의 기는 인간들과 달리 숨을 쉬듯 우리의 뜻을 존중해준다. 산이 생명의 피와 샘을 나눠주는 것처럼, 뼈가 흙이 되어 기름진 대지로 변하는 것처럼 인랑족은 자신을 맹신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에 늘 감사를 표명한다.”
 비야는 불어오는 바람 속에 인랑이 살아가는 자세를 중얼거리며 봇짐을 풀고 대장간에서 제작해온 낭조(狼爪)의 소가죽 끈을 풀어 자신의 팔에 착용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다.
 내공심법은 완성했지만 초식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고 교룡관에 입관하기 전에 비야는 남은 한 가지를 갖춰야 했다.
 비야는 그 필요 요소의 마지막을 입으로 내뱉었다.
 “극의.”
 무림인이 일생에 얻은 깨달음을 진기로 형상화한 환상의 구현이자 기적.
 그 극의를 갖춘 무인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 뜻을 깊게 깨닫고 천지개벽을 초월하는 극의를 완성시키는 자는 드물었다.
 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 비야는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자신의 극의를 완성시키는데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그는 이 일 년을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풍압을 터뜨리는 듯, 비야의 발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
 일 년 전, 그는 극심한 지옥에서 간신히 도망쳐온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지옥을 향해 다시금 발을 내딛는다.
 주변에는 온통 초목과 잡초가 우거졌다. 이 주변에 요괴가 나온다는 소문이 아직까지 맴돌았기 때문에 사람의 흔적이 끊겼다는 증거이다.
 그가 마치 경고처럼 보이는 이형의 선에 발을 디딘 순간, 주변의 풍경이 붉게 변하며 거대한 뱀 요괴와 거대한 벌레들, 그리고 외눈을 가진 개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비야에게 적의를 풍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모두 실존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공포심이 만들어놓은 환상이었다. 그리고 또한 일전에 제갈세가가 펼쳐놓은 나락금혼의 흔적이었다.
 워낙에 방대하게 깔린 결계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날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도록 이 부근을 영원한 금지(禁地)로 선정한 탓이다.
 요괴라는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요괴에 대한 환상을 끝없이 만들어낼 테고 사람들은 자신의 환상에 먹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될 터. 그야말로 금지로 알맞은 곳이 아닐 수 없겠으나······.
 일 년이 지난 지금, 그 금지를 해방시킬 한 마리의 야수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철컹!
 날카로운 예기를 띠는 네 개의 칼날이 달린 낭조를 들고 비야는 요괴들 사이를 배회하며 말했다.
 “내 이름은 비야다. 그리고 너희는 내 동족의 원한을 외면하고 그것을 즐긴 자들이 남긴 껍데기들. 사라져라! 이 땅의 모든 인랑의 안면을 위해······.”
 그 금지에 발을 직접 들인 야수는 포효를 내지르며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요괴들과 대치했다.
 
 ***
 
 벤다.
 찢는다.
 가른다.
 터뜨린다.
 물어뜯는다.
 그 무시무시한 행위를 반복한 자취로, 육편이 찢어진 요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안개처럼 사라져만 가고 있었다.
 비야가 살아나간 후에도 약 일 년 동안 보존되어온 나락금혼, 그 사이 사람들의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요괴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캉!
 그 순간, 다시금 육편이 찢어지며 청년이 착용하고 있던 낭조의 손톱이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앞으로는 요괴들이 무궁무진, 그야말로 태산이라 칭할 만큼 무수하게 널려 있었다.
 벌써 몇 날 며칠의 사투를 벌였을까?
 “하아, 하아, 하아”
 지겨우리만치 이어진 요괴들과의 교전으로 비야의 눈동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단내에 갈증이 느껴지고 오랜 시간 팔과 다리의 힘을 소모한 탓에 사지는 부르르 떨렸다.
 수많은 상처에서는 온몸에 피를 칠한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출혈이 심했고, 봉합을 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상처들도 많았다.
 제아무리 의지가 굳건한 사람들이라도 이쯤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할 법한 상황.
 비야 역시 몇 번인가는 나락금혼에 다시금 발을 디딘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속 건너편에서 또 다른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어째서 네놈은 움직이는 것이냐? 분명 너의 아버지도 네가 남은 인랑들을 찾아 보호하며 숨죽여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터다. 이럴 필요 없다.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옮겨라.’
 평화?
 뿌득!
 아랫입술에 피가 배어날 만치 이로 입술을 깨문 비야는 오른팔을 휘둘러 원숭이 요괴들의 무리를 갈랐다.
 “나는 자유다! 누구도 나를 제지할 이 없다! 그러니까 나의 뜻에 아무도 개입하지 마! 그 녀석들한테 가르쳐주겠어. 내가 잃었던 눈물, 절규, 비참함 다 느끼게 해주겠어!”
 지면을 강하게 튀기는 그의 신형이 뱀의 눈깔에 낭조를 찔러 넣으며 그대로 몸을 선회해 흑의 무인의 턱을 부수듯 걷어찼다.
 오직 죽이기 위한, 아니 살아남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안식을 허용하지 않고 움직인다.
 그렇게, 몇 시진, 아니 몇 날 며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많은 요괴들이 그의 손에 안개처럼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미묘하게 떨리는 비야의 동공 너머로 흐릿한 인영이 엿보였다.
 “크하하하하하! 기고만장한 건 여전하구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목에 지나치게 굵은 염주를 두르고 있는 거한이었다.
 그의 이름을 비야가 모를 리 없었다.
 “······아규.”
 그러나 비야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아니지. 나락금혼의 잔념이냐? 사람들의 두려움을 요괴로 형상화시키는 기묘한 기문둔갑의 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내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요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곳에 등장할 수 있었던 건가?”
 원수라고 부를 법한 아규가 실제로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나락금혼이 가하는 수작임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본능은 등을 움츠리게 만들고 지금보다 더한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저것은 필시 더 강대한 적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비야는 은연중에 일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금강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단단한 피부. 단단한 거목에 금을 내는 비야의 주먹도 그의 몸을 꿰뚫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입었으며, 철곤 같이 날아오는 주먹에 팔의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비야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만들어낸 빈틈에 손톱을 찔러 넣었음에도 그의 몸에는 마치 바늘에 찔린 것 같은 미미한 상처만이 났을 뿐이다.
 그때의 그것만이 그의 전력이라고 비야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놈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비야가 천천히 호흡을 갈무리하며, 몸 안의 내공을 정제해 힘을 내뿜었다.
 “어이쿠! 이 아규를 상대로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있나?”
 하지만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규가 바로 코앞에서 안면의 뼈가 함몰될 정도로 강한 일격을 휘두른 순간, 비야는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들썩이며 비탈길에 몸을 굴렸다.
 “쿨럭, 쿨럭.”
 비야는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릿한 피를 토했지만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섬광처럼 움직이는 아규의 일격을 막기 위해 두 팔을 들어올렸다.
 콰앙!
 그것은 그야말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권. 호쾌하면서도 모든 것을 짓눌러버릴 것 같은 강권에 비야가 팔에 부착한 낭조의 발톱이 한 가닥이 부서지며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몸의 회복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무거워진 그 몸으로 비야는 지금까지 익혀온 모든 것을 원수의 눈앞에서 펼치고 있었다.
 튼튼한 몸의 근골을 바탕으로 아규의 주먹을 등으로 튕겨낸다.
 천둥축(雷聲築).
 몸에 부딪치는 타격음이 하늘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 그리고 뒤이어 조용한 발걸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아규의 뒤를 점하고 그야말로 아규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선회하며 힘줄을 다지고 육편을 찌그러뜨린다.
 나선(螺線).
 고도의 경공을 중심으로 상대의 육편을 갈가리 찢는 늑대의 발톱.
 하지만 그런 거친 일격에도 아규의 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이 드리운 공포라는 감정을 조절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락금혼의 잔념이지만, 이 순간 비야는 자신의 공포가 극복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강철의 육체를 단숨에 찢을 발톱. 나는 그 발톱을 익히기 위해 여기에 도달했다!”
 쾅!
 하지만 그런 바람과 달리 아규의 주먹을 맞고 비야의 몸이 날아가 거목과 부딪혔다. 낭조의 발톱은 이미 절반쯤 동강이 나 있었고 오랜 시간의 교전으로 무뎌졌다.
 “크흐흐흐. 여전히 입만 산 애새끼구먼. 하지만 그런 악바리로도 결국 인랑들을 지킬 수는 없었지.”
 뿌득!
 절로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똑같다.
 그때와 같은 무력감이 다시 한 번 비야의 몸을 지배했다.
 분명 예전보다 더더욱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온 무림의 세가와 단체들을 이기기에는 그는 턱없이 약했다.
 그래. 그의 존재는 마치 개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비야는 편하게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하, 그렇군. 그랬었지. 결국 난 아무 것도 지켜내지 못했지. 병신같이 입만 살았었지. 솔직히 겁도 많아서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못 하고 있고. 근데······ 내 절규는 더더욱 강한 이빨과 손톱이 되어 너희에게 도달할 거야. 왜인 줄 알아?”
 “크흐흐흐흐. 알 바냐?”
 다시 한 번 아규의 몸이 안개처럼 사라지며 비야의 정면으로 튀어나왔다. 주먹을 들어 올리고 순식간에 무력을 진압하기까지는 불과 눈을 깜박이는 정도의 시간. 그리고 그 순간, 분노를 곱씹고 있던 야수의 눈동자가 짙은 호박색으로 물든다.
 동시에······.
 “무슨?”
 나락금혼에 남아있던 비야의 잔념, 아규의 눈으로 검은 삭풍이 스쳐지나갔다. 눈동자를 크게 확장시킨 그의 동공에 오른손을 뻗어 올린 비야의 팔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그 팔이 뻗혀진 곳은 놀랍게도 자신의 가슴 정중앙이었다.
 “크허허허허! 설마 가슴을 찢고 맨 손톱의 일격이 닿을 줄은 몰랐는걸.”
 허무한 듯 아규는 피를 흘린 채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비야를 바라보았다.
 늑대.
 증오의 불꽃이 서린 호박색의 눈동자에 언뜻 원수를 죽였다는 희열도 같이 피어오르며 비야의 입이 열렸다.
 “상상했을 뿐이다. 네놈이 죽는 그 순간을······.”
 그 말과 함께 강철의 육체를 마치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비야의 오른손에는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 이것은!”
 그리고 그는 놀라고 말았다.
 이 진귀한 현상을 못 알아볼 이가 누가 있으랴.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평생의 깨달음이 진기로 형상화되는 순간, 일격필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무림인들의 비기, 극의(劇意). 그것이 놀랍게도 창창하게 젊은 비야의 오른팔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온몸을 땀과 피로 적신 비야는 조금 지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줄곧 바라왔던 발톱. 너희가 죽인 인랑족의 한이 나에게 가호를 베풀었기에 나는 더더욱 강한 발톱을 얻을 수 있었다. 극의, 고독(孤獨). 이것이 내가 얻은 발톱이다.”
 오랜 시간, 나락금혼에 머물던 사람들의 두려움과 싸워서 끝끝내 얻어낸 결의.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우겠다는 의지가 나락금혼의 진에 빗금이 서리게 하여 ‘고독’이란 극의를 탄생시켰다.
 그에 의해 홀로 살아남은 인랑의 발밑에 즐비한 요괴들의 시체가 안개처럼 변모해 서서히 사라지고 본래의 초목과 바위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피를 잔뜩 문 아규는 무척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크크. 진짜인 나는 너를 무척이나 기대하겠군. 네 녀석은 이후 지금보다 더한 나락을 겪게 될 것이다. 피와 음모가 싹트는 이 더러운 강호에서 과연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크크크크크크!”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진기가 몸을 완전히 정복하자, 아규였던 나락금혼의 잔념이 유언처럼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미 사라진 의념이지만 비야는 지친 표정으로도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피든 음모든 나는 이 강호를 철저히 짓밟는다. 이미 더러운 꼴을 많이 봐서 더 이상 그때만큼 울 수도 없어.”
 
 ***
 
 새벽, 여명이 밝아왔다. 그러나 약초를 캐는 게 본업인 사람들의 인상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아, 대관절 그놈의 요괴들만 없었으면 살만할 텐데.”
 약 일 년 전부터 산에서 나오기 시작한 요괴 때문에 약초를 캘 수 있는 공간이 한정지어진 탓에 약초꾼들의 수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당파에 퇴마를 부탁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결국 약초꾼들의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이, 잠깐 뭐야! 저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아서라. 이놈아. 또 요괴들한테 피 볼 일 있냐.”
 동료 약초꾼이 수상쩍은 표정으로 요괴들이 밀려오는 지역을 가리켰지만 다른 약초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애꿎은 호기심으로 목숨을 잃는 동료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아니야. 진짜 뭔가 이상해.”
 동료 약초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반쯤 미친 사람처럼 비탈길을 내달려 요괴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런 미친놈!”
 안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려야 한다. 약초꾼은 황급히 그를 만류하기 위해 서둘러 뒤를 쫓았다.
 도대체 녀석은 무엇을 본 것일까?
 그러나 요괴가 침몰하는 지역을 눈으로 들여다본 순간, 그는 할 말을 일고 말았다.
 “······이, 이건!”
 “어이 친구. 이거 내가 잘못 본 거지?”
 두 약초꾼은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곳은 분명, 요괴들로 북적이는 장소로 매우 가파른 골짜기 인근.
 일전까지만 해도 요괴들로 가득했던 그 바위 절벽의 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군데군데 균열이 져 돌가루가 흐트러져 있었다.
 붕괴의 흔적으로 낙석처럼 떨어진 거대한 바위는 정중앙에 자리 잡혀 있었고, 그 바위에는 인위적으로 생성된 것을 의심케 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발톱 자국과 함께 피로 덧칠해진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밤에 죽은 원혼들에게 가호를······.
  그 한이 차가운 밤바람에 식어 편하게 저승으로 가도록 위로를······.
  살아남은 자에게는 편안한 낙원을······.
  포효하는 밤에 늑대의 소리에 묻혀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또한 흐르고 있는 피눈물에 대한······.
  가슴에 여미는 통증, 나의 동포들의 한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금부터 치르겠나이다.」
 
 ***
 
 저잣거리의 풍경은 여느 때처럼 산만했다.
 그 와중에도 생계에 허덕이는 어른들과 달리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왁자지껄 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뭇가지로 바닥에 낙서를 하는 소녀 소미의 표정만은 즐겁다기보다는 지루하고 풀 죽어 보였다.
 또래 소꿉친구인 동진이 그런 소미의 곁에서 따분한 표정으로 똑같이 나뭇가지를 들고 낙서를 하고 있었다.
 “소미야.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거야?”
 “칫! 말도 없이 가버리고 이번에 돌아오기만 해봐.”
 “비야 형 말하는 거구나.”
 이것으로 여덟 번째인가.
 동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원망하고 있는 이를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눈매가 사나우며, 왜소한 체격과 달리 근육으로 단단한 몸을 가진 위험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 저잣거리의 소문으로는 그렇지만 그가 알고 있는 비야라는 형은 늘 다정하고 한편으론 짓궂은 형이었다.
 “맨날, 맨날, 맨! 날! 말없이 사라져.”
 “하지만 비야 형이 사냥을 갔다 오면 한동안 쉬니까. 괜찮잖아.”
 “끄응. 넌 몰라.”
 소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남자들이란 당최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을 어린 그녀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그림자로 덮으며 말을 건네 왔다.
 “뭘 몰라? 요 녀석아.”
 “히익!”
 기척 없이 전해진 한마디에 소미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에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얄궂게 웃고 있는 비야가 서 있었다.
 “오, 오라버니!”
 순간,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비야가 맞나 싶었지만 언제나 짓는 얄궂은 웃음과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는 모습은 틀림없이 그녀가 아는 비야가 맞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주었다.
 “어디서 몸을 굴리다가 그 정도로 된 거야. 이 바보야!”
 반가운 한편,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원망까지 같이 떠오른 소미는 토닥토닥 비야의 허벅지를 두들겼다. 그러자 비야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짝 밀쳐냈다.
 “피곤하다. 요 녀석아. 이번에는 저번보다 좀 커다란 녀석이라서 힘들었어.”
 “칫!”
 변명이랍시고 내뱉은 말이지만 용서할 생각이 없는지, 소미는 볼을 부풀렸다.
 “당과 사줄 테니까. 좀 봐줘라. 이 녀석아.”
 비야는 피식 웃으며 소미의 볼을 주욱 끌어당겨 꼬집었다.
 “아앗! 아파! 이씨.”
 “당과 싫어?”
 “헤헤. 어서와. 오라버니.”
 아직 여자로서의 서운한 마음보다는 당과에 끌리는 어린아이에 가까운 소미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반가운 표정으로 비야의 허벅지를 껴안았다.
 그런 비야를 바라보던 동진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형?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이거, 침만 바르면 낫는 거니까. 뭐. 걱정은 하지 마라.”
 “······.”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은 했지만 군데군데 입은 상처를 둘둘 감은 붕대는 아직도 피가 새어나와 붉었다.
 소미와 동갑이지만 남들과 달리 어머니를 잃은 탓에 조금 더 일찍 철이 든 동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자식이 형 말이 말 같지가 않지. 형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동진이 의구심이 깃든 눈동자로 계속 자신을 째려보자, 비야는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볼 꼬집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얏! 미, 믿지! 믿는다고!”
 물론, 언제나처럼 효과는 즉효였다.
 동진은 오들오들 떨며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갈구했다.
 “크큭! 조그만 게 세상사 다 아는 것처럼 이상한 눈빛 하지 마. 애늙은이 취급 받는다, 인마. 넌 뭐가 먹고 싶냐? 오늘은 벌이가 쏠쏠하니까 말만 해.”
 “오리고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미가 비야의 손을 잡고 조르는 듯 발을 둥둥 굴렸다. 이미 입가에 군침이 주르륵 흐르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거의 오리고기라고 확정된 듯 보였다.
 “나, 나도 오리고기!”
 먹을 것에 예민한 나이답게, 동진도 애답게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럼 더 맛있는 것이 있어도 사주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오리고기를 먹어볼까?”
 “야호!”
 두 아이의 환호가 동시에 저잣거리에 퍼졌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표정을 본 비야는 피식 웃으며 소미를 들어 올려 목마를 태워줬다. 소미는 자연스럽게 비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히히, 비야 오빠. 나 오빠가 너무 좋아.”
 “그래? 난 너 싫은데.”
 “이씨!”
 퍽!
 괜스레 한마디를 보탰다가 앙증맞은 주먹에 머리를 쥐어 박힌 비야였지만 그는 그것도 좋은 양 피식 웃었다.
 조금······. 아주 조금······ 이곳이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행복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객잔 안은 언제나 활기가 넘쳐났다. 왁자지껄 붐비는 사람들, 향기로운 음식 냄새와 구수한 입담까지. 넓디넓은 중원의 곳곳에서 모인 이들인지라 특이한 행색을 한 사람도 많았다.
 그 소란스러운 객잔의 안에서 비야는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입가에 오리기름을 묻힌 채,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는 소미와 동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히히히히. 비야 오빠도 먹어.”
 “오냐. 그 전에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먹고 있어. 지난번처럼 날파리 꼬이게 하지 말고.”
 “응!”
 두 아이의 힘찬 대답을 들은 비야는 자리에 일어서서 바깥이 아닌 위층으로 올라섰다. 객잔의 특성답게 아래쪽은 식사를 위해 마련된 장소고 위층부터는 잠을 청하기 위한 장소였기에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무엇을 한지는 모르지만 꽤나 고생이 심한 듯 보이군요.”
 계단을 오르자, 머리에 삿갓을 쓴 남자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쓰디쓴 웃음으로 말을 건다.
 턱에 까칠까칠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중년의 남자. 분위기로 보아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면모를 가진 모사의 분위기가 물씬 피어오른다.
 그는 얼마 전 비야가 찾은 정보 상인, 이군의 측근에 있었던 기율이란 사내였다.
 “그래서 정보는?”
 어차피 그들의 관계는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관계였기에 비야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전에 요구했던 정보에 관해서 먼저 물었다.
 기율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를 얕보시면 곤란하지 말입니다. 우선 요구했던 신분입니다.”
 “월운문?”
 기율이 건넨 신분패를 받아든 비야가 적혀있는 문구를 읽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관한 답변을 내놓았다.
 “저희가 사들인 멸문한 문파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멸문하기 직전의 문파로 알려져 있지만요. 지금부터 당신의 신분은 멸문 직전의 월운문을 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후계자입니다. 어지간히 눈에 띄지 않는 이상, 당신의 신분에 대해서 의심할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관할에 있는 군한테 바친 게 좀 됩니다. 물론 교룡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는 데도 조금 썼고요.”
 기율이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비야는 가볍게 무시하고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두 번째 요구는 분명, 비야의 원수이기도 한 아규의 출처에 관해서였다.
 기율은 그 질문에 관해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 땡중이라면 지금 소림사 본관에서 강제 폐관수련 중에 있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걸걸하고 호탕한 영웅이라고 세간에서 칭송하지만 며칠 전에 유명 세가에 있는 아녀자를 겁탈한 게 밝혀진 탓에 소림사에서 그를 감금했다고 하더군요.”
 뿌득!
 그 말을 듣는 비야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되먹지 못한 자가 무림에서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이유. 그리고 소림사가 그를 쫓아내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금강불괴에 다다른 그의 거대한 힘. 무림에서 몇 안 되는 극의를 깨우친 자를 그리 쉽게 다룰 수 없는 것이리라.
 그런 비야의 행동에 어렴풋이 감정을 읽어낸 기율은 미끼를 던지는 셈치고 말을 건넸다.
 “뭔가 단단히 원한 관계가 있나 보군요.”
 “궁금하다면 직접 알아보지. 기왕지사 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려면, 좀 더 자세히 알아봐도 상관없고.”
 하지만 비야가 내민 미끼에 쉽게 넘어갈 리 없는 기율은 피식 웃어 보였다.
 정보 상인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며 무림맹의 정보를 속속히 빼가는 비야의 정체는 이들에게 있어서, 언젠가 큰 값어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비야를 떠보려 했던 기율의 의도는 전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 상인으로서의 입장에서일 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은 조금 전 제 행동이 틀렸다고 예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저를 그런 얌생이로 보신다면 곤란합니다.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기율은 곧바로 물러서 허리를 굽실거리며 사과를 건넸다. 은연중 비야가 개방한 기도에 얼굴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 역시 표정의 변화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지금의 무림맹주 이전에 있었던 천하제일이란 분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번째에 관해서 비야가 먼저 묻지는 않았음에도 알아서 털어버렸다.
 주절주절 떠드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빠짐없이 비야는 경청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있던 그는 기율의 얘기가 끝나자 수고했다는 치하와 함께 기율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에 남은 해독법과 약 삼백 냥의 돈이 들어 있어.”
 “흐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를 축적한 듯 보이는군요. 한데 이 돈은 무엇에 관한 의뢰일까요?”
 주머니의 묵직함을 체감한 기율은 예상외의 소득에 깜짝 놀랐다.
 우선은 비야가 더 이상 낙양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임에도 더 요청할 의뢰가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정도 금액을 한꺼번에 지불할 수 있는 비야의 자금에 대한 출처를 그들이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새삼 질린 것이다.
 “······소미 녀석이 잘 자랄 수 있게 해줘. 내가 어디를 가 있든, 매해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지불할 거야. 그것으로 녀석들이 굶주리지 않게 해주면 좋겠군.”
 이제 비야의 어조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이 남자에게 이런 따스한 면이 있었나 싶은 기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흠. 어째서 저희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거죠?”
 “아무리 영감이 소미를 사랑한다고 해도 소미보다 빨리 죽을 테니까. 내가 키울 수도 없잖아. 돈으로 바로 보내줬다가 그 쪼그만 년이 돈 맛을 알아버려도 곤란하다고. 여러모로.”
 “저희를 믿는 겁니까?”
 그 말에 비야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새끼들보다는 확실히 믿지. 돈 준만큼 확실하게 하잖아. 살인의뢰도 아니고 이 정도는 수용할 수 있지?”
 “어찌 보면 살인의뢰보다 더 까다롭군요. 하지만 좋습니다.”
 귀찮은 것을 떠맡았다는 생각 반,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진 것 반에 기율은 처음으로 사람답게 씁쓸하게 웃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비야는 곧바로 계단으로 내려갔다.
 “헌데······.”
 그 순간, 기율이 그의 등을 보고 무심코 입을 열어버렸다.
 비야가 고개를 돌아보았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본 기율은 생각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흑색의 눈빛이다. 그 누구보다 세상의 추잡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순수하고 맑은······. 세상에 이런 눈빛을 가진 자가 몇이나 더 있을까?’
 과연 이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무엇일까?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무심결에 그것이 궁금했기에, 그는 이런 질문을 건네고 말았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있으면 잠이나 쳐 자. 있다고 하면, 개돼지를 도축하고 다니는 백정의 길밖에 더 있겠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야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섰다.
 더 물어봤자 뒤도 돌아볼 것 같지 않았기에 기율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백정의 길이 너무나 궁금해서 이런 일을 그만둘 수 없나 보군요.”
 
 ***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달이 구름 사이로 완전히 가려진 밤길을 소미와 비야는 걸었다.
 동진이는 먼저 집으로 보냈지만 비야와 소미의 자그마한 움막집은 아직도 한창 걸어야 했다. 그새 잠이 밀려오기 시작한 소미는 비야의 등에 업힌 채 눈꺼풀을 깜박였다.
 “비야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왜 항상 말도 없이 사라져?”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그 외에도 따뜻하게 살려면 앞날이 창창한 내가 돈을 벌어와야지.”
 “으응. 그래도. 또 말없이 사라질 거잖아.”
 “······아니야.”
 어린아이지만 소미의 감이 무척 예민하다고 느낀 비야는 잠시 말을 끌다 뒤늦게 대답했다.
 “거짓말.”
 “이 녀석이 배가 부르니까 헛소리하기 바쁘지.”
 “꺄악!”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감추기 위해 비야는 그의 등에서 막 잠들려던 소미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소미가 사지를 허우적거리다 발이 땅을 디딘 것을 확인하곤 토닥토닥 주먹으로 비야를 때렸다.
 “으이씨. 아주 미운 짓만 골라서 해.”
 “그래봤자 말라깽이 주먹이다. 이 녀석아.”
 “어? 어!”
 순간 슬쩍 소미와 눈높이를 맞춘 비야가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더니 소미의 발을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놀란 소미가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발에 고운 꽃신이 신겨졌다. 신기하게도 그 꽃신은 소미의 발에 딱 맞았다.
 “이, 이게 뭐야? 오라버니?”
 사내아이처럼 산과 들을 들쭉날쭉 뛰어놀던 소미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여자아이다운 신발을 신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선하면서도 귀엽다고 생각한 비야는 포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번에 일이 좀 큰 사냥거리가 생겨서 어디를 가봐야 될 것 같아. 조금 오래 걸릴 거야.”
 왠지 모르게 비야가 결별을 선언하는 것 같아 소미의 눈가에 눈물이 솟구쳤다.
 “뭐야? 그럼 돌아오지 않는······.”
 그러자 비야는 그런 소미의 입을 검지로 막으며 말했다.
 “뭐 나중에 예쁘게 크면 이 오라버니가 특별히 신부로 맞이할 의향도 있다. 그때까지 울지 않고 잘 먹고 잘 크면 말이지. 아! 근데 예쁘지 않으면 조금 곤란한데······.”
 “이이이이이!”
 훌쩍이던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소미는 비야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씨! 예뻐질 거다! 나중에 오라버니야말로 내 혼기 놓치게 하면, 가만 안둘 거야!”
 혼기라니······. 그게 갓 열 살이 넘은 아이가 할 소리란 말인가? 이래서 동네 아낙네들의 입담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쪼그만 게 별걸 다 아네······.”
 어이없는 표정으로 비야가 말을 늘어놓자, 소미가 즉각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그러니까 약속해. 반드시 온다고. 나한테 장가올 거라고.”
 추운 탓에 입김이 서렸지만 한없이 얼굴에 몰려드는 뜨거운 기운을 감당할 수 없는지, 소미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야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포근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약속할게.”
 
 ***
 
 교룡관.
 무림맹이 관할하는 이 거대한 궁궐은 본래 차후 무림에 이름을 떨칠 후기지수들을 한데로 모아 서로의 무공을 교류하고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에 대를 거듭할수록 그 본래의 취지를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벌목세수와 고귀한 영약을 취해 자연스레 무공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교룡관에서의 정규교육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차별을 실감하며 절망에 취해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많고 많은 후기지수들의 무인이 모여 있는 넓은 정원에는 벌써부터 명문세가의 자제들 앞에 줄을 서는 자가 몇몇 엿보인다.
 교룡관은 말 그대로 ‘용을 키운다’는 취지에서 세워진 곳으로, 그곳에서 정규교육을 마치고 나가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때문에 교룡관의 교육을 마치고 돌아갈 확률이 가장 큰 명문세가의 후기지수에 들러붙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깨달음을 줄 스승들은 이미 명문세가에 포섭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래부터 무공이 약한 이들에게 있어서 명문세가의 자제와의 친분은 절박한 것이었다.
 그를 노려 많고 많은 뇌물이 오갔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묵시하는 것이 현재의 무림맹이었다.
 “허허. 저렇게 한다 한들 기백 없는 놈들은 다 나가떨어지기 마련인데.”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교룡관의 교관, 장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나이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높은 성취와 자리, 그 후 주어질 주색 정도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껄껄! 하지만 벌써부터 용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벽란공 그 녀석의 정보대로라면, 벌써부터 싹을 틔운 이무기들이 숨어있다고 하지 않는가?”
 정강의 옆에 서있던 노쇠한 노파가 허리를 두들기며 먼 옛 시절을 회상하는 눈동자로 젊은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연홍미.
 과거에는 무림의 일곱 송이 꽃이라 하여 무림칠화의 하나라 불렸지만 세월을 붙잡을 수 없던 만큼, 백옥처럼 희고 매끄러웠던 그녀의 피부에도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를 존재케 하는 것은 과거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무림칠화라는 명성은 다른 이가 받아갔지만 그녀의 또 다른 명성은 세월로도 훼손시킬 수 없었다.
 신월검(晨月劍).
 과거 정마대전 당시 새벽을 아우르는 달빛 속에서 펼쳐낸 그녀의 검세는 천상의 선녀가 추는 춤같이 아름다웠고, 또한 그 춤의 흔적이 지나간 자리는 나찰이 칼로 길을 다듬는 것처럼 무인들의 시체가 갈가리 찢겨졌다는 전설 같은 일화에서 얻은 이 명호는 어지간히 기고만장한 남자들마저 주눅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전설을 가진 그녀가 지금 교룡관에 있는 것은 그녀의 직책이 이 교룡관 전부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무림맹 십대 관주이기 때문이다.
 교룡관을 만약 중원에 비유한다면, 그녀는 황제인 셈이다.
 기척도 없이 자신의 옆에 붙은 연홍미가 살짝 껄끄러운 장강이었지만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무기라······. 소인은 당최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질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네도 무인이라면 어느 정도 눈썰미가 있지 않겠는가? 굳이 늙은이 입으로 말하게 하다니······. 쯧쯧. 그대는 여전히 재미가 없는 사람이야.”
 혀를 차던 연홍미는 입가에 곰방대를 물고 손끝으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연초에 불을 피웠다.
 적어도 화경에 들어야만 가능하다는 그 경지로 고작 연초에 불을 지핀다는 것에 어이가 없는 장강이었지만 연홍미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힘껏 연초의 연기를 흡입한 뒤, 뻐끔뻐끔 내뱉었다.
 과거 무림칠화로서 신비롭고 다채로웠던 분위기를 버린 지는 이미 오래인 그녀였다. 대신 그녀는 그 세월 속에 얻은 깊은 지혜가 담긴 눈동자로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잔소리를 얻어먹느라 곤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경거망동할 것 같고 매사가 가벼울 것 같은 남자.
 그러나 연홍미는 입가에 방긋 웃음기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저 녀석, 남궁영이다. 당금 천하제일인의 아들이라서 사람들 시선에 먼저 띄는 것이 당연하지만 얼핏 봐도 상당히 경지에 이른 녀석이야. 아직까지 그 실력이 세간에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그가 본신의 힘을 다하면, 아마 자네 정도와 비슷하겠지.”
 “이런, 저런 애송이와 제가 호각이라는 건가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장강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홍미는 피식 웃었다.
 “이기는 것은 자네가 쉽사리 이길 수도 있고 힘겹게 이길 수도 있겠지. 경지는 비슷하나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경험이 있는 자를 따라갈 수 없네.”
 그 말에 살짝 불쾌했던 마음을 푼 장강은 연홍미와 같이 후기지수들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지나갔지만 그는 유독 발걸음이 가볍고 입가를 천으로 가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지만 눈매가 매섭고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마치 음습하는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저 녀석이겠군요.”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연홍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밝혀지면 안 되는 사실이지만, 저 남자의 이름은 차표기. 암살을 주업으로 삼는 차도문(偖刀門)의 차기 당주가 될 아이일세.”
 “흐음. 신분을 위장한 모양이군요.”
 “비록 정도맹에 속해 있지만 차도문의 특성상,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꺼려지겠지. 그리고 저기서 독기를 내뿜고 있는 아이는, 사천당가의 당문혜. 무림칠화 중 독화(毒花)라고 불리는 독한 년이지.”
 연홍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본 장강은 순간, 눈에 이채를 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그녀의 말대로 분위기가 상당히 사나워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표면에 드러난 가시에 그대로 찔려버릴 것만 같다. 요염한 입술을 가진 꽃, 하지만 가시에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허허. 이번에도 별의별 재밌는 녀석들이 다 모였군요.”
 “그렇지.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용이 될 녀석도 있지. 제갈세가의 여식, 제갈서연. 차후 무림맹의 기문을 다스릴 수 있는 유망한 인재지. 그녀도 역시 무림칠화 중, 현화(儇花)를 담당하고 있는 아이지.”
 “흐음. 재밌을 것 같습니다.”
 정원의 구석에서 자신의 호위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갈서연을 보며 장강은 감탄과 함께 차후 용들이 될 인재에 대한 기대감이 솟구쳐 올랐다.
 
 ***
 
 본격적인 교룡관에의 입관에 앞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젊은 무인들이 앞을 다투어 명문세가의 자제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며 짐짓 자기의 멋을 지키는 자들은 대다수 강호에 이름 있는 명문의 세가의 자제였고, 그들에게 아부를 부리는 쪽들은 출세지향적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서연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 호위무사 초희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렇게 구차하게 굴면서까지 등용문을 거치려고 하는데, 조신한 척 있는 제가 잘못된 걸까요?”
 자기 비하가 아닌, 엄연한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초희가 조금은 씁쓸함이 가미된 눈으로 대꾸해주었다.
 “그게 이미 가진 자와 가지려고 하는 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가씨가 교룡관에 대해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저들 중에는 구차한 것을 암에도 은연중 가문의 명예,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리를 굽히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내지 않는 초희의 답변에 제갈서연은 살짝 얼굴이 상기되고 말았다.
 제갈세가의 자제답게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고 학문을 쌓고 지혜를 가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많이 어렸다.
 가령 그녀는 책에서 사람은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읽으면 곧이곧대로 그것이 지극히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둑질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올곧은 성품이지만 유연성이 없는 딸의 사고방식에 늘 걱정을 하던 제갈섬이 그녀에게 친구 같으면서도 가르침을 줄 호위무사로 초희를 선택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미안해요. 초희. 이번에도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제갈서연은 짧은 생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판단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초희에게 사과를 건넸다.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초희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지만 그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대단한 집안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잘못을 쉽사리 인정하는 그 모습은 볼 때마다 인상적이었고, 또 그녀가 제갈서연을 존경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훈훈한 분위기가 풍기는 와중 난데없는 불청객이 난입하며 말을 걸어왔다.
 “하하하하하! 아름다운 소저구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나눠도 되겠소? 소인의 이름은 남궁영이오.”
 포권을 쥐며 호탕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에 제갈서연과 초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제갈서연 역시 포권을 쥐고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의 이름은 제갈서연이라는 것 알고 계시죠. 분명 맹주님 생신날 서로 이름을 나눴으니까요. 혹 저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겁니까?”
 “하하하하, 이거 이거 두 번이나 이름을 묻다니 저란 남자는 정말 죄 많은 남자구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제갈 소저에게도 죄는 있지 않소?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니, 알아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에요.”
 “······과찬이십니다.”
 그의 칭찬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제갈서연이다. 입꼬리에 거짓 없는 웃음기가 띠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산만한 남궁영의 화법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그때 구세주 같은 이가 그녀와 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여인들에게 추잡스럽게 작업을 거는 거예요? 정말 못 살겠네!”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등장한 소녀는 제갈서연 또래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며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남궁영의 볼을 쭉 늘렸다.
 “아, 아프다. 나의 사랑스런 여동생.”
 “흥!”
 울상을 짓는 남궁영의 표정을 본 그녀는 그제야 오라비의 볼을 꼬집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남궁영은 붉어진 볼을 손바닥을 슥슥 비비며 남궁상화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추잡하다니······. 우리 상화가 언제부터 이 오라버니를 그런 불쾌한 남자로 보았을까?”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요.”
 “커헉! 어찌하여 나에게 그런 잔혹한 소리를 한다는 말이냐.”
 충격을 받았다는 듯, 각혈이라도 하는 척 손으로 입을 막는 남궁영.
 가까이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서연과 초희는 그가 진짜로 토혈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랐지만 그것이 오해라고 밝혀지기까지는 채 일 각도 되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많은 이들 앞에서 여동생에게 약한 오라버니의 인상으로 찍혀버린 남궁영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으로 이 상황을 무마했기 때문이다.
 “크흠! 어찌 됐든, 같이 교룡관에 입관하게 된 처지니 잘 부탁드리오.”
 “오히려 제가 할 말이죠.”
 체면치레의 인사지만 정중한 남궁영의 태도에 꽤 호감이 생긴 제갈서연은 방긋 웃어 보였다.
 “흐음······.”
 그의 옆에 선 남궁상화는 여전히 제 오라버니를 째려보고 있었다.
 
 ***
 
 교룡관의 커다란 대문 안쪽.
 신분확인 절차를 마치고 이제 막 문을 통과한 한 청년이 뒷짐을 진 채, 산보를 하는 듯 여유롭게 교룡관 안의 정경을 살피고 있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른 초목이 무성히 우거진 숲 같은 느낌.
 많은 무림의 자제들을 모아놓았기에 거기에 들인 비용 역시 상당하다는 것을 굳이 길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설을 양성해 후기지수들을 한데 모았다면, 이 안에도 강한 무림인들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교룡관 안에 발을 딛고 있는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있었다.
 “여기가 교룡관이라는 곳이군. 후기지수들을 한데 모아 양성하다니······. 꽤 기발한 것 같아. 안 그래?”
 “소인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마치 소년과도 같은 웃음에 그의 뒤에 서있던 중년의 남성호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흐. 정말로 흥이 돋는 곳이구나.”
 마치 오랜 시간 세속과 단절된 곳에서 살아온 듯한 어조로 그는 계속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자신의 앞에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채, 나무지팡이로 땅을 딛고 걷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어이, 거기 너!”
 “······.”
 남자는 그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지, 무심하게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걷는다.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최대한 이성을 다잡으며 다시금 자신의 앞을 걷고 있는 남자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귀가 먹은 것이냐!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는 네 녀석 말이다!”
 호탕하게 소리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지팡이를 딛고 있던 남자의 손이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삿갓을 뒤집어쓰고 있어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꽤나 의아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조망하고 있는 길가에 얼씬거리지 않았으면 한다. 방해가 되니, 뒤로 물러서 걷도록 하라.”
 “도, 도련님. 그래도 그것은······.”
 원래도 오만하기 짝이 없지만 이곳까지 와서도 이런 말을 막 내뱉을지 몰랐던 호위는 진땀을 흘렸다.
 청년은 물론 밖에서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분 높은 귀공자였지만, 교룡관 안에서는 설령 그라도 조심을 해야 될 정도로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가 많았다.
 물론 눈앞에 선 낡고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금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관전해보기로 했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이냐! 두 번씩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지금 당장 내 뒤로 걸어라.”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
 잠시 침묵을 지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삿갓을 쓴 남자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네가 앞서 걸어. 새끼야.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네 이놈!”
 그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대뜸 주먹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단숨에 뿜어낸 청년은 단숨에 일각을 디디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미처 그 움직임을 채 인지하지 못했는지 삿갓을 쓴 남자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그러나 그 주먹이 삿갓을 쓴 남자의 가슴에 닿기 직전, 청년의 등에서부터 감싸인 손길 때문에 그 일권은 채 내지르기도 전에 멈췄다.
 “크윽!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규태! 썩 이 손을 떼지 못하겠느냐!”
 단숨에 등을 잡힌 것에 청년은 핏대를 세우며 흥분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말했다시피, 저는 도련님의 호위이기도 하지만 도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또한 보고해야 합니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이 손을 치우겠습니다.”
 “······.”
 호위, 규태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는지 반항하던 청년이 주먹의 내력을 슬그머니 뺐다.
 “흐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삿갓을 쓴 남자는 뒤에서 쏟아내는 호위의 애절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청년의 옆에 다가가 삿갓을 벗었다.
 “다혈질인가 보네. 자, 이렇게 옆에서 걸으면, 상관없겠지? 나는 월운문의 비야. 네 이름은 뭐냐?”
 한쪽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내뱉는 비야의 자기소개에 젊은 청년은 부들부들 주먹을 떨다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강제후(姜帝后)다. 거만하게 말을 놓지 말고 썩 내 뒤로 물러가라.”
 “싫은데? 내가 보고 있는 길가에 네놈이 얼씬거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앞에서 걷자니, 또 이렇게 지랄을 놓을 것 같고. 옆에서 걷는 게 답이겠지.”
 “······.”
 당돌한 답변에 강제후가 속으로 ‘뭐 이런 녀석이 있어’라고 당황하고 있는 사이 비야가 먼저 발을 떼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입관식이 치러질 예정이라 빨리 가야 되니까. 네가 알아서 걸음 맞춰.”
 “쳇!”
 왠지 모르게 졌다는 느낌이 든 강제후였지만 또한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걸음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드높은 자존심은 뒤처진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우!”
 그런 강제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호위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 조금 전 삿갓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비야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분명······ 보았던 얼굴인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낯익은 사람의 분위기를 느낀다는 것에 그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다 곧 착각일 것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림맹의 십대 관(官)으로 칭해지는 교룡관은 여타의 관과 달리 그 성질이 거칠기보다 온순하며, 다가올 강호의 위기를 준비하는 곳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명백한 목표이고, 오랜 시간 평화를 유지해온 현재의 교룡관은 말 그대로 후기지수들의 사교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마교와 사파, 그리고 몇몇의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있어서는 교룡관의 존재여부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며 종종 폐관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 무림맹이 교룡관이라는 오랜 전통을 쉽사리 버릴 수 없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 혼세가 겹친 정과 마와 사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정점에 선 영웅, 백여기(白黎器)의 전설이 바로 이곳 교룡관에서 탄생했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중원에서 명패를 새길 정도의 명호를 가진 무인에 대한 경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대제국 원을 건설했던 칭기즈 칸의 전설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무림맹은 백여기의 전설을 쉽게 지울 수 없을뿐더러 아직까지 그의 전설은 사람들 가슴 깊숙이 새겨질 희망이자 빛이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현재 교룡관의 관주가 신월검, 연홍미이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십대 관주는 극의라는 무의 결정을 완전히 통달한 십대 무인들이다.
 제아무리 무림의 서열을 결정짓고 다니는 만학통달 독고재선, 발이 넓은 개방의 문주 벽란공조차 무림맹의 십대 관주들의 실력을 완전히 파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실력은 함부로 단정 짓지 못했다.
 다만 무림맹에서는 그들의 가벼운 의견도 함부로 간과할 수 없으며, 맹주의 강맹한 힘의 바탕에는 관주라는 배경이 있을 정도니, 교룡관을 폐지한다는 것은 한 명의 관주를 추방시키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물론 연홍미 정도 되는 여인이 겨우 관주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시기심이나 복수심을 표출하지 않을 테지만, 관주 중 유일하게 여성이란 이유로 그녀의 존재는 강호의 모든 여협(女俠)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였다.
 만약 그녀가 스스로든 타의적으로든 교룡관에서 물러날 경우 현재의 무림맹은 맹주를 뒷받침해주는 강한 무인을 잃는 것과 동시에 그 후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많고 많은 사연이 얽히는 교룡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닫은 채 봉화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무럭무럭 뒤덮는 성대한 의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넓은 정원에는 많은 무인들이 이 순간만큼은 침묵을 지키며 굳건한 표정으로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집중된 대상은 현재, 교룡관의 본관 건물까지 오르는 돌계단을 느긋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치렁치렁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 갖춰진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온 것은 연홍미.
 그녀가 본관까지 완전히 발을 들이자, 정면으로 보이는 길의 양 갈래로 청(靑), 적(赤), 흑(黑), 백(白)의 무복을 갖춰 입은 네 명의 장성이 절도 있게 허리를 조아리며 그녀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청룡, 주작, 현무, 백호.
 이 넷은 교룡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사신’의 직책을 임명받은 자들이었다.
 연홍미가 평상시처럼 사람이 좋은 표정으로 살포시 웃어 보이며 손을 들었다.
 네 명의 사신이 제자리를 지킨 가운데 그녀는 시선을 약간 내려 장엄한 분위기를 표출하는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수는 언뜻 봐도 사백이 넘는다. 그들 모두 무인으로서 어느 정도 수양과 무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기개에서 뿜어 나오는 본질적인 기질은 마치 천 명을 상대하는 느낌을 품게 해주었다.
 간이 작은 사람들이라면 그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 게거품을 물며 졸도했을 테고, 보통의 무인이라면 입조차 열지 못하고 자신의 분수를 알고 발을 돌렸을 것이며, 제법 대담한 기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이 자리에서 말실수를 하지 않을까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연홍미는 입꼬리에 웃음기를 그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너희가 어떤 녀석들이라도 나는 상관없다.”
 대담하면서도 직설적인 발언에 모두가 놀란 탓인지, 무인들이 일순간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피워냈다.
 늙고 작은 여인의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수백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들의 경쟁심과 투기며 결의를 단번에 뒤집고 말았다.
 “또한 이 교룡관에서 용이 못 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물론 영웅 백여기를 목표로 삼을 필요도 없다. 이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컸다. 하지만 목대에 핏대를 세우는 것도 아닌 평상시의 담담한 어조다. 내공을 담아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일파만파로 퍼져, 모두의 귀에 새록새록 담겼다.
 “허나, 이 교룡관이라는 관문은 결코 통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를 해야 하며, 귀공자와 공녀가 옥신각신 집안 내력이나 자랑한다는 헛소문을 믿는 곳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가 지키고 있는 한 이곳에선 그런 잔꾀가 허용되지 않을 터다. 벌써부터 절망하는 녀석이라면 지금 빠져도 좋다. 허나 그대들이 모두 깨끗하게 인정할 만큼 결과는 다를 것이다.”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연홍미가 오른손으로 무언가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그녀를 지켜보는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떤 이는 그녀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가지며······.
 또 어떤 이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모든 반응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연홍미는 남은 왼팔을 들어 올리며 이 시간 선언했다.
 “내력을 숨긴 용들이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많은 말은 필요 없을 듯싶다. 교룡관의 관주, 연홍미의 이름으로 이 순간 그대들이 교룡관의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한다.”
 “와아아아아아!”
 장대한 환영의 인사를 끝으로 모든 무인들이 손을 들며 기합으로 환영에 응했고, 연홍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사신들이 절도 있게 예를 갖추며 따라가기 시작했다.
 
 ***
 
 성대하지만 짧았던 입관식이 끝나고, 모였던 무인들은 각기 흩어져 소속으로 정해진 집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중 현무가 그려진 노란색의 깃이 팔락거리는, 연무장으로 보이는 곳에도 많은 무인들이 절도 있게 줄을 서 있었다.
 연무장 가장 중앙이며 현무의 깃발 아래에는 흑의 무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연홍미의 뒤를 뒤따르던 사신 중 현무의 직책을 맡은 남자였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비야와 같은 단에 소속이 돼버린 강제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인상 한 번 더럽네.”
 “그치? 내 생각도 그래.”
 그러자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비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
 “······.”
 결코 혼잣말로 들릴 정도로 작은 담소가 아니었기에 그 순간, 그들을 제외한 모든 무인들이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입을 연다.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장강이다. 현무단의 장을 맡고 있으며, 훗날 자격이 된다면 그대들도 이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교룡관에서의 생활은 처음이더라도 대강 어떤 식으로 활약할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만큼 엄연한 규율이 있지만 규율 안에서라면 그대들은 지극히 자유다. 그리고 처음이라 넘어가주는 거지만, 너희 둘. 잡설은 금지다!”
 흘깃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비야와 강제후가 있었다.
 못내 거슬리지만 그냥 참고 넘어간다는 뜻을 표정으로 그대로 읽어버린 비야는 조금 찔린 표정으로 움찔했다.
 “······네.”
 비야는 작으나마 인정을 했지만, 강제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닫으며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 그럼, 낯선 감도 없지 않으니 친선을 위한 비무를 진행하고자 한다. 혹시 자원자 있나?”
 보통의 무인들은 말보다 갖추고 있는 실력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웅성웅성.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장강의 제안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초면에 제 실력을 간파당하거나 혹은 좋은 싫든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자리인 만큼 모두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기 같은 강한 기운을 표출하며 누군가 인파를 갈라서고 비무대의 중앙에 올라섰다.
 구름 같이 부드러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현무가 수놓아진 궁장을 갖춰 입은 여인.
 한 손에는 붉은 채찍을 들었고, 요염하면서도 잔혹함이 서린 표정에는 섬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장강 역시 그녀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사천당가의 당문혜. 오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누구든 올라와도 됩니다.”
 그녀의 어조는 짧고 강렬했다.
 팔대 세가 중 한 자리를 꿰찬 집안 출신에, 독과 암기술에 강한 그녀가 그곳에 오른 것만으로 대다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연무장과 멀리 떨어지려 뒷걸음질한다.
 오를 수 있으면 올라오라는 것은 연무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가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격차를 극복하고 오를 수 있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꽤 기합이 들어간 경고에 장강은 씁쓸한 웃음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쿵 하며 지축이 기우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연무장까지 단숨에 도약했다.
 둔중하지만 위압적인 그 움직임에 모두가 식은땀을 흐르며 당문혜와 같은 자리에 올라선 그를 쳐다보았다.
 싱긋 여유로운 웃음을 보인 남자는 포권을 쥐었다.
 “월운문의 비야라고 합니다. 한 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당문혜에게 인사를 건넸다.
 입관식을 맞이하는 넓은 창공의 밑으로 현무의 문장이 수놓인 노란 깃발이 팔락거린다. 그 깃발을 사이로 두 남녀 간의 사이에는 고고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매서운 눈매로 포권을 쥐고 있는 비야를 노려본 당문혜는 고운 미간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월운문?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만? 나와 견줄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비아냥거리는 것이, 그녀는 듣도 보도 못한 문파의 자제가 감히 자신과 대적하려는 그 자세가 맞지 않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오는 말도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비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뭐지?”
 그녀의 날카로운 기세에도 표정에 여유를 잃지 않은 비야는 느긋하게 낭조를 착용한 상태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상대하는 것은 사천의 당가입니까? 아니면 당신입니까?”
 그 말을 기점으로 당문혜의 전신에서 지켜보는 이마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예리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사천의 당가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오만방자하게 말장난을 하는 네 녀석의 주둥아리는 찢어서 독사의 먹이로 삼아주마.”
 그녀에게 있어, 비야의 말은 제법 그럴싸한 도발이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독기가 가득 찬 그녀의 기운에 현무단에 소속된 신예 무인들은 모두 질렸다는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장강이 나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제지를 가했다.
 “허허. 단순히 친선을 위한 비무이거늘······ 어찌 그리 살기를 풍기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당문혜는 즉각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척했지만 아직까지 미처 살기를 거두지는 못했는지 흉흉한 기운이 얼핏 엿보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장강은 쯧쯧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차하면 내가 막아설 테지만 계집애. 아니, 사람치고 지나치게 독살스럽군. 역시 당가의 환경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저 녀석······.’
 상황이 그리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그는 지금 무엇보다도 당문혜와 마주친 비야라는 청년에게 살짝 놀라고 있었다.
 명문세가의 배경을 가볍게 무시하고 눈앞에서 당문혜에게 도발을 가한 모습은 허세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아냥거림의 느낌이 더욱 컸다.
 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모처럼 재밌는 녀석이 왔다는 생각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무를 개시했다.
 “그럼, 지금부터 사천당가 당문혜와 월운문 비야의 비무를 시작하겠다.”
 비무의 선언과 함께, 순식간에 공기를 찢어버리는 채찍의 자취가 장강의 옷자락을 스치며 비야에게 날아갔다.
 때 아닌 기습 같은 일격에 비야는 껑충 발을 차며 채찍의 궤도에 맞춰 두 팔을 겹쳤다.
 콰앙!
 이윽고 심상치 않은 내력이 실린 채찍과 낭조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 충격에 몸이 반 장까지 밀려가는 충격을 받았지만 순식간에 그의 몸은 빙그르르 선회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제법 매서운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맞았더라면 육편이 찢어지고 머리통이 터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충격이었다.
 그런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충격을 경감시킨 덕분에 살 수 있었던 비야지만······.
 주르륵.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는지, 머리끝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당문혜는 입가를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 올라선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괜스레 문파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구차하게 일어설 필요는 없어. 이것이 당가를 배경으로 둔 나와 약소한 배경을 둔 너의 차이에 불과하니까.”
 그 말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지금이라도 살려줄 테니까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얘기였지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비야는 일어서며 말한다.
 “······비무를 말로 하신다면, 당 소저는 저한테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말이 귓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당문혜의 몸이 꿈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지 주변의 분위기가 술렁술렁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이 비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장강 역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당문혜의 몸이 절로 떨렸다.
 일개 하찮은 문파의 제자가 자신을 모욕했다.
 평상시라면 그런 언사를 내뱉은 자 중에서는 사지가 멀쩡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혹한의 눈보라를 보는 것 같은 당문혜의 눈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겼다.
 그중 으뜸은 오늘의 비무는 더 이상 친선이 아닌, 당문혜의 잔혹함이 서린 피의 잔치가 될 것이었다.
 적어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당문혜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후훗.”
 요염한 아름다움을 띤 입술이 웃음기를 그린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눈매가 능글맞은 호랑이의 웃음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말로는 이길 수 없을 듯 보이는구나. 즐겨보자꾸나. 네가 누구를 건드린 건지 몸소 가르쳐 주마.”
 눈가를 가리는 피를 대충 소매로 닦아낸 비야는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당문혜를 바라보았다.
 인랑족들을 잡기 위해 나락금혼의 진 근처에서 배회하며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그녀의 모습을 어찌 잊으랴.
 하지만 일 년 전과 달리 흥분을 했음에도 그녀는 도발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잃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외견 역시 한창 물이 오를 시기이기에 개화하기 전에 보는 꽃봉오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비야는 어떤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지겠지.’
 우연찮게 그녀를 인질로 잡아낸 것을 성공시킨 그였지만, 만약 그때 정면으로 승부했다면 승부는 보나마나 뻔했다.
 필패(必敗).
 일 년 전보다 더 강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의 패배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가 이곳에 발을 디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순히 들끓는 복수와 증오감을 못 참고 뛰어든 것이 아니다.
 그날의 학살을 벌이던 중심 혹은 근처에 그녀가 있다.
 그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좋든 나쁘든 그녀의 눈에 띄어 접근해야 됐다. 하지만 생각보다 도발이 심하게 먹혔는지, 그녀가 전력을 다할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네 개의 날카로운 칼이 서린 낭조를 추켜세운 비야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당문혜. 목적이 있어서 살려주는 것이지만 곱게 넘어가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당문혜의 채찍이 주변을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비야가 무릎을 굽힌다. 혈관이 수축되는 느낌과 함께, 지면에 강하게 천둥축을 시전하자,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
 그 모습을 당문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분명, 경공 같은 것이 아니라 몸의 반탄력을 극도로 끌어내는 무공일 것이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사용하면 사람의 몸이 감당할 수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런 당문혜의 예상과 달리 거칠게 몸을 날리던 비야의 몸이 어느 순간, 허공을 부드럽게 선회하며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경공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당문혜는 속으로 비웃으며 부드럽게 손목을 휘저어 채찍들을 움직였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을 전달받은 채찍은 무섭도록 꿈틀거리며 독니를 머금은 독사처럼 비야를 습격한다.
 한 가닥, 두 가닥, 세 가닥.
 “뭐?”
 끊임없이 환영처럼 늘어나는 공세에, 어느 순간 당문혜를 향해 돌진하던 비야가 발을 멈추고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허리를 굽히며 팔을 접고 다리를 들며 당문혜의 채찍을 피하기 바쁜 움직임으로 변모했다.
 회타연편십삼식(劊打聯鞭十三式).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열세 갈래로 피어오르는 환영과도 같은 일격으로 변하는 당가의 비기가 지금 이 순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쿵!
 일순간 비야에게서 빗겨간 일격이 지면을 강타한다.
 마치 무거운 철근이 떨어진 것처럼 바닥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구어졌다. 이어 미치도록 내력을 갈구하는 채찍에 더욱 더 힘을 쥐어 빠르게 움직이며 그녀의 채찍은 더 이상 일반인의 식견이 쫓아갈 수 없는 무한의 궤도에서 춤을 춘다.
 찰싹!
 분주하게 그 채찍을 피하던 비야의 허벅지에 채찍이 스치는 듯 타격을 일으키자, 살갗이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크윽!”
 심상치 않은 통증에 비야는 인상을 찌푸리며 빗줄기라고 착각할 만큼 쏟아지는 일격 속에서 땀을 흘리며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당문혜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웃음을 잃고 경직된 것은 분명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허벅지가 저릿저릿한 것이 마비될 것만 같지만 한 방 먹였다는 느낌에 그는 피식 웃었다.
 상황은 더욱더 급박해졌다.
 경미한 타격도 아니고 이런 공격을 수차례 받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빨리 움직이는 채찍의 궤도를 모조리 읽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쿵, 쿵, 쿵, 쿵!
 그 와중에 채찍의 거센 공방에 강타당한 애꿎은 바닥에서는 돌가루가 흩어졌다.
 더 이상 피하기조차 어렵다. 그리고 다시금 찰싹! 소리가 나며 비야의 오른쪽 허벅지에 다시금 타격이 가해졌다.
 “크아아악!”
 핏방울이 공중으로 흐트러지며 연무장에서 비야의 절규가 질타했다. 이미 상처를 입은 곳에 받은 타격으로 인해 비야의 몸이 뒤뚱거리며 기울어진다.
 이겼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유지하던 당문혜의 표정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에서 춤을 추던 당문혜의 채찍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후드득 비처럼 쏟아졌다.
 “헉!”
 “어라?”
 웅성웅성.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 채찍을 휘두르던 감각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고 흔들린 당문혜의 동공에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오는 한 남자가 비춰졌다.
 예상할 것도 없이 그는 비야라는 사내였다.
 ‘그 다리로 경공을 취할 수는 없을 텐데. 왼발의 반탄력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도약한 건가?’
 순식간에 자신의 채찍을 잘라내고 거센 일격을 취하려는 그 사내에게 당문혜는 불쾌감을 표출했다.
 그녀는 즉각 잘려진 채찍을 버리고 진각을 딛고 일어서 자신을 향해 발톱 같은 흉기로 찔러 넣으려는 비야의 가슴을 향해 양팔을 들어올렸다.
 그 짧은 순간, 비야의 낭조 역시 당문혜의 목에 닿기 일보직전이었다.
 오싹.
 순간 불쾌한 기억의 파편이 당문혜의 뇌리에 치솟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이와 비슷한 느낌을 그녀는 분명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일 뿐, 그녀의 이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찌르기 전에 찔러라.’
 그 생각은 그대로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옮겨진다.
 “현무미사(玄武尾蛇)의 장(掌).”
 공기를 쇄도하며 날아오는 낭조, 주변을 검게 물들이는 손바닥이 두 남녀의 눈동자 사이로 스쳐지나간다.
 콰아아앙!
 그 결과 연무장 밖까지 뒹굴뒹굴 몸이 밀려나간 사람은 비야였다.
 “하아, 하아, 하아.”
 송골송골 땀이 맺힌 당문혜의 목가에는 상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자국이 엿보였다. 마치, 바늘에 찔린 느낌이라고 할까?
 “······.”
 주변의 반응은 고요했다. 하지만 피어오르는 열기는 그들 역시 그녀나 비야처럼 똑같이 흥분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쥐고 있는 주먹에는 땀을 흘리고 있었으며 전율이 들끓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기세였다.
 “아주 좋은 승부였다. 너의 승리다. 당문혜.”
 가까이서 이 모든 광경을 엿보던 장강은 의심쩍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승리를 선언해주었다. 그 말이 들리지 않는지 주춤주춤 당문혜가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고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조차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여기서 그녀를 건드렸다가는 용의 역린을 건드릴 것만 같다. 그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위태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고운 입술로 중얼거렸다.
 “······인다.”
 “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장강. 그와 동시에 당문혜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며 쓰러져 있는 비야를 향해 날아갔다.
 “죽인다. 감히 나를 기만한 것이냐!”
 “당문혜!”
 입에서 내뱉는 말과 반응이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한 장강은 즉각 검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당문혜는 눈앞에 있는 현무단의 단장보다 그 뒤의 비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문혜는 소매에 감춰둔 비수를 현무단장에게 내던지며 부드럽게 몸을 선회시키곤 남은 왼팔에 비수를 꺼내 현무단장의 검과 맞섰다.
 캉, 캉, 캉!
 순식간에 불똥이 튀기는 공방이 펼쳐졌다.
 웅성웅성.
 때 아닌 소동에 모든 무림인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사신단의 단장은 교룡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들을 통제하는 교관이며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사에도 전례 없는 이 사태에서 유일하게 웃는 이는 쓰러져 있는 비야였다.
 “쿨럭!”
 웃기는 하지만 꽤나 강한 일격을 받았는지 몸 안에 침투한 독기에 대응해 내력이 꿈틀거리며 그 과정 속에 충격의 잔해물인 죽은피를 쏟아냈다.
 ‘그때의 정신적인 충격이 떠올랐나 보네. 크큭. 마음껏 분노해라. 조만간 절망조차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너희 모두를 이끌어주마.’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그 기쁨을 입으로 미묘하게 꿈틀거리던 그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
 
 중독(中毒).
 교룡관의 입관을 알리는 첫날부터 여타의 다른 사신단에 비해 꽤나 골치 아픈 사건을 겪은 현무단의 단장은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현무단으로 소속된 당문혜가 방침을 무시하고 비무에게 진 상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제지하려던 현무단의 단장까지 습격했다.
 이 땅에 교룡관이 세워지고 나서도 유례없는 그 사건에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은 많은 이들의 표정은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 가운데 이번 사건의 중심인 현무단의 단장, 장강이 남몰래 작은 한숨을 쉬며 서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만큼 제일 위의 책임자가 문책을 받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보아할 때, 이번 사건을 일방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에는 무리라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모두가 수심이 깊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혀를 끌끌, 차며 곰방대를 물며 훈훈하게 웃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연홍미. 신월검이란 명호를 가진 무인이며 교룡관의 모든 것을 통솔하는 관주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아주 재미있군. 그 도도한 년의 콧대가 아주 제대로 꺾였나 봐. 껄껄.”
 “······.”
 이 와중에도 이런 식으로 여유롭게 웃는 것은 그녀다웠다. 모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건을 벌인 당문혜는 현재 자신의 방에서 갇혀있는 상태였고, 당문혜에게 독장을 맞은 비야의 상태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어찌 해야 될는지요?”
 조심스럽게 교룡관의 총관이 이후의 사건을 대처하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겨우 애송이들 싸움에 어른들이 발 벗고 나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게.”
 대답은 그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도 모두 뒤숭숭하다는 기분을 표정에 담으며 자리에 일어서 물러나 예를 취했고 널따란 방에는 장강과 연홍미만이 남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뒤를 잇던 중, 장강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한다.
 “송구하게 됐습니다.”
 “어째서? 사과를 하는 겐가? 흘흘 나는 아주 재미있다네.”
 “······.”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연홍미의 반응에 언제나처럼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싶은 장강이었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고, 뻐금뻐금 연초의 연기를 내뱉던 연홍미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앞서 입관식에 있어 내가 하는 말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하다네. 거기에 제법 많은 녀석들이 흥분하고 수치심을 느낄 테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반응이 재미있었을 뿐이네.”
 “아닙니다. 언제나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경청하고 있습니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지도 못하는 불편한 심정을 숨긴 채, 장강이 정중히 대답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연홍미란 여인은 사람의 속내를 가지고 노는 것을 즐기는 교활한 심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와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녀가 진심으로 감정을 우려낼 때와 가식으로 섞어낸 말을 분간을 못 하다가 큰 화를 겪은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물론 지금 내뱉은 그녀의 말은 거짓 없는 순수한 진담이었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추궁의 말을 내뱉는 것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장강의 대처는 유연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연홍미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자네의 그 지나치게 신중한 면은 재미가 없어. 그 독화 계집이랑 싸운 놈······. 그 녀석은 여러모로 아주 재미있어.”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교룡관 관주의 관심을 받은 신입에게 의구심을 표하는 그에게 그녀는 노쇠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해주었다.
 “끌끌. 말하지 않았나? 입관식 때, 내 말을 듣고 반응하는 녀석들에게 재미를 느낀다고. 내 말에 처음으로 비웃음을 표출한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야.”
 “네?”
 정말로 반응을 살피는 재미만으로 그 많은 인원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 반응을 세세히 기억했다는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연홍미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뭐, 그런 이유라네. 그리고 그 녀석 아마 죽지 않을 거야. 나에게 첫인상이 강하게 찍힌 녀석들은 목숨줄이 질겨. 끌끌.”
 “그건······.”
 억지며 우기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몇몇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그녀의 몇 마디의 푸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크흐흐흐. 원래 작은 소문은 큰 소문에 묻히는 법이네. 아리송한 진리지만 제아무리 폭군인 황제더라도 일만 섬의 쌀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주면 성군이 되는 법이지. 이게 무림의 흔한 사정 아니겠나?”
 비유이긴 하지만 장강이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속내는 심술궂지만 겉으로는 인자하기로 소문난 연홍미다. 자신이 통솔하고 있는 교룡관에서 벌어진 사고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커다란 것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사건사고의 규모가 크든 작든 그녀는 그 상황에 알맞은 대처법을 정해놓고 강약을 조절해 소문이 과장돼서 퍼져나가는 것과 공적이 축약되는 것을 사전에 막아버린다.
 장강을 제외하고 이곳에 있었던 이들이 모두 나가버린 것은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현무단에서 벌어진 것으로, 남은 사람들이 끼어들게 할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즉 그녀는 현무단에 공적을 세울 기회를 줄 테니, 이번 일을 무마하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었던 장강이었지만, 그 내용을 실제로 듣는 순간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보자. 이번에 수도 인근에서 날뛰는 색마 녀석이 있다고 들었네.”
 “······이두괴(二頭怪)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침을 꿀꺽 삼킨 장강은 훈훈하게 미소를 짓는 연홍미를 보며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제아무리 교룡관의 인재들이 뛰어나더라도 적응의 기간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은 적응을 해야 상호 간에 조합을 이루어 용으로 승천하는 길을 밟기 마련일 터.
 이제 막 입관식을 막 치룬 그들은 아직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이무기들뿐이다.
 반면 색마 이두괴는 무림맹에서조차 수습에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고를 치고 다닐 만큼 영악했으며 무공의 성취 또한 신출내기들이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가, 장강?”
 그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연홍미, 그녀는 색마 이두괴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할 참이었다.
 물론 장강은 그녀의 말에 승낙도 거절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얄궂게 웃고 있는 연홍미의 얼굴을 보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 표정을 보고도 거절할 만큼 배짱 좋은 녀석들은 여기 없을 테니······.’
 사신단 현무의 단장 장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다 곧 굳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열흘에 걸쳐 준비를 마친 후, 현무단을 파견시켜 색마 이두괴의 목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순간에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현실과 겹쳐지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곳은 깊숙한 산골짜기였다.
 
 꼬질꼬질하게 콧물을 흘리는 한 남자아이가 하얀 꽃을 신비롭게 바라본다.
 네 개의 하얀 잎들 사이로 기둥 같기도 한 강아지풀 같은 수술이 워낙 특이한 터라 남자아이의 눈동자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까지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도 잠시······.
 코로 킁킁 냄새를 맡다 아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웩! 아버지 이것은 무엇입니까?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납니다.
 -허허 좀처럼 보기 어려운 녀석인데. 이곳 중원에서 피어나는구나.
 아이의 아버지는 털털하게 웃으며 수상한 생선 비린내의 정체에 대해 일컬어 주었다.
 -어망초(漁網草)라는 것이다. 조선의 환경에서 자라나는 약초지. 감초처럼 이 녀석도 독을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단다. 먹어보렴.
 -으윽!
 하얀 잎을 하나 따 소년의 입에 가져다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못내 원망스러웠지만 평소에 엄한 아버지의 질책이 무서워 피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그대로 약초를 씹는 소년.
 이에 우물우물 씹히며 잎에 새어나오는 쓴물이 혀를 휘감으며 툭 쏘기 시작했지만 질근질근 씹어 목구멍으로 그것을 삼키는 순간, 왠지 모르게 상큼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어떠냐? 산아. 인생도 그렇게 쓸 테지만 그만큼 개운한 일도 많단다.
 자신의 아들, 산을 바라보던 비영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어린 소년 산의 몸이 마치 격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왜 그러느냐? 산아.
 그런 산의 반응에 깜짝 놀란 비영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비영의 반응에 산은 더욱더 놀라며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 산아 혹시 어망초 때문에 마음이라도 상한 것이냐?
 장난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굳히며 하는 그의 말에는 미묘하게 자상함이 우러나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산의 눈가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앞이기에 산은 울먹울먹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마주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산이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너의 이름은 산이다. 죽은 네 어미가 지어준 이름을 어찌하여 없다고 말하느냐?
 심상찮은 눈빛으로 비영이 그에게 다가갔지만 산, 아니 비야의 말은 아직 안 끝났다.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주변의 배경이 갑작스레 불바다로 솟구쳤다.
 -꺄아아아아악!
 아비규환의 비명과 절망만이 난무하는 그 곳 가운데, 분노와 전율을 느끼고 있는 소년의 눈이 짙은 호박색을 띠었다.
 -친우가 죽었습니다. 이웃집의 아저씨도 아주머니들도 모두, 모두 죽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할 나위 없는 현실이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잔인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점차 피투성이로 검으로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그 모습을 보기가 고통스러운 청년, 비야는 고개를 떨어뜨리려다 곧 억지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저의 가슴에 그런 모습으로 남아주십시오. 그들 역시 그런 참담한 모습으로 모조리, 모조리 죽여 버리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버지, 비영의 표정에 씁쓸함이 비춰졌다.
 저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알고는 있지만 깨닫고 싶지 않았기에 비야는 그런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르륵!
 비야의 전신이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은 묘하게 광기를 뿜어냈고 더 없이 조용하고 고요한 하늘에 일어난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 그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야수 같은 포효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불자락을 왈칵 쥠과 동시에 상체를 일으킨 비야는 정신이 없는 듯, 초점이 흐려진 시선으로 방 안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강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깜짝이야! 잘 자고 있는데, 웬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강제후는 온갖 인상을 찌푸렸지만 머리칼이 식은땀으로 젖은 비야를 보고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꿈에서 깨어나 일시적으로 착각을 일으킨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보니 섣불리 그를 건드릴 수 없는 거였다.
 정신을 차린 비야는 이마를 감싸고 다시금 침소에 몸을 눕혔다.
 이곳은 교룡관에 있는 남자들의 숙소.
 여러 문파의 자제들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방 하나에 남자 둘이 머무르도록 되어 있었다. 겨우 둘만 쓰는 것뿐인데도 방은 상당히 넓었으며 은은한 향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데 또 강제후가 있는 걸 보니, 그와는 같은 방 동기까지 된 모양이다.
 자는 내내 몸을 뒤척였는지 이불보는 땀으로 젖어 촉촉하다. 하지만 창틀 너머로 살랑살랑 들어오는 찬바람이 머릿결을 훑자 왠지 모르게 시원하다.
 
 상황이 한결 여유로워지자, 그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답답함을 내뱉는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왜 내가 너랑 같이 있는 거야?”
 “얼씨구? 계집애 장에 중독돼 한 시진 이상 누워있던 녀석치고는 쌩쌩하네. 어쨌든 방이 배정된 것에 대해는 투덜거리지 마라. 지들 멋대로 너랑 나랑 교류가 있다고 집어넣은 거니까.”
 “······그러냐?”
 비야는 피식 웃다 가슴을 깨무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흘 동안 그의 몸에 머물고 있는 당문혜의 현무사미의 독은 아직까지 그의 몸을 괴롭히고 있었었던 것이다.
 다시 자려던 강제후는 그런 비야의 통증이 신경 쓰였는지, 한쪽 눈을 뜨며 옆에 놓여있는 탕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독한 독에 중독된 상태니, 꾸준히 마셔야 될 거야. 크큭. 죽을 줄 알았는데. 눈을 뜬 걸 보니 제법 명줄이 기나 보네.”
 “아마 염라대왕이 찾아와도 날 못 데리고 갈 걸.”
 건들거리는 강제후의 말에 이미 익숙해진 것처럼 비야는 자연스럽게 대답함과 동시에 베개 위에 있는 자신의 봇짐에서 환약 꾸러미를 꺼냈다.
 크지는 않았지만 적, 청, 황, 백, 흑 등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주머니가 침상에 펼쳐졌다.
 잠시 뒤, 비야는 탕약 그릇을 외면하고 물이 담긴 찻잔에 조금씩 주머니에 꺼낸 가루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배합이 조금이라도 틀리지 않게 하려는 듯 신중하게 찻잔의 물과 가루를 섞는 비야를 보던 강제후는 조금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찻잔의 물을 휘저은 비야는 대답 대신 그것을 그대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크윽! 더럽게 쓰네.”
 혀에 오묘한 고통을 주는 그 느낌에 전신이 부르르 떨린다.
 “뭐야? 그거 해독제였냐?”
 “어렸을 때부터 약초에 대해서 공부는 해뒀으니까. 그리고 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성이 있거든. 아마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지겠지.”
 “······.”
 천하의 사천당가의 독을 사사로이 제조한 약을 먹은 것으로 해독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농담으로 여겼는지, 강제후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다시 침상에 몸을 눕혔다. 비야는 피식 웃었다.
 두근!
 “크윽!”
 하지만 그 순간, 심장에서 미묘하게 떨리는 소리에 가슴을 거머쥐었다.
 선천적으로 몸의 체질이 건강한 인랑이더라도 독에 대한 내성마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비야가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진 것은 당문혜에게 탈취한 독을 매일 조금씩 섭취했기 때문이다. 실수로 너무 많은 양을 먹어 중독이 됐을 경우엔 그것을 해독시키기 위해 산에서 해독초를 연구하며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왔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겨우 일 년에 불과할 테지만 소미와 놀아주는 시간을 제하고 그의 일상은 오직 몸을 혹사시키며 무공을 단련하는 한편, 해독과 각종 약재에 대한 연구에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렇기에 비야는 자신의 심장이 일으키는 격통의 통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통증의 원인은 방금 전에 약을 조합시켜 삼킨 물이 바로 독이기 때문이다. 이독공독(以毒攻毒)이라는 말이 있듯이 독은 그와 같은 독으로 다스려야 될 때가 있다.
 현무사미의 독은 내공으로 농밀하게만 조절하면 단 한 방울로도 거대한 호랑이를 죽여 버릴 정도로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비무 중에 당문혜가 약하게 손을 쓴 것이기는 하지만 비야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면, 사흘이 아니라 한 달을 끙끙 앓아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현무사미의 독의 특성에 맞춰 이미 제조법을 어느 정도 구안한 그는 어떤 실험단계도 걸치지도 않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을 토대로 시험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밤은 줄곧 누워있던 한 시진보다 훨씬 괴롭고 힘든 밤이 될지도 모르고, 정신을 잃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아, 하아······”
 몸의 열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가고 숨결은 더할 나위 없이 뜨겁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 비야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강제후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서 안달난 놈 같아. 죽을 거냐?”
 왠지 모르게 그 말에 울컥한 비야는 꿈에서 들은 아비의 말을 떠올리곤 자신의 이마에 손등을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직까지는 쓰고 쓸 테지만 그만큼 개운한 일도 많을 테니까.”
 몸 전체에 후끈 열이 오르고 몸의 통증은 막을 수조차 없는 태풍에 휘말려 통각을 자극시켰지만······ 그 고통 가운데에서도 비야는 눈가를 가린 채 한없이 웃고 또 웃었다.
 그렇다. 지금은 아직 쓰고 쓸 뿐이다.
 
 ***
 
 “끄응.”
 훤히 밝아지는 방 안에서 비야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일어났을 때의 감각은 몸이 한없이 무겁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목이 마르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침소에서 일어나 걸으려다 휘청 몸이 흔들렸다.
 대략 나흘쯤이다. 그간 누워있기만 했으니 근육이 굳은 증상이었지만 그 뻐근한 몸을 이끌고 비야는 도자기로 빗어진 찻주전자의 차를 찻잔에 따랐다. 그러나 힘을 주기 좀처럼 어려운지, 그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찻주전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후우, 정신 차려라.”
 그런 나약해 빠진 육체에 억지로 의지를 개입시킨다. 그리고 그의 의지에 따라 부들부들 떨리는 육신은 차츰 주변의 기운을 빼앗아 흡수하는 과정에서 점차 생기를 되찾았다.
 그것은 일전에 비야가 완성시킨 내공심결 아니, 본능으로 빚은 내공의 취득법이었다.
 밤새 통증을 겪으면서도 죽지 않았던 것은 비야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 순간에도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공이 활발히 날뛰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목에 축이는 그 차의 한 모금에 비야는 상쾌함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확인한 몸 상태는 이상 무.
 해독제가 효과가 있었던 듯 그의 몸은 완전히 회복했다. 하지만 몸의 긴장마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몸이 완전히 기력을 되찾자, 비야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동은 텄지만 그와 같은 방에 머물고 있는 강제후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자고 있었다.
 교룡관의 교육체계는 특정한 임무나 수업이 없으면 거의 방임을 하는 주의였다.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고 비무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비무를 하는 게 이 교룡관의 일상이었다.
 다만, 특정한 시험에 합격을 하지 못하거나 특정 조건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은 이유도 묻지 못하고 쫓겨난다. 그것은 나태하게 구는 자나 부지런히 훈련에 임하는 자나 별다를 것이 없는 결과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명문세가들의 자제를 구별하기 위한 방편이다.
 하지만 본래 교룡관의 입관 목적이 시험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비야는 오늘 하루를 훈련으로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꼬르륵.
 오랫동안 위장을 비워둔 탓인지, 배에서 비명을 지른다.
 “······배는 채워야 되겠군.”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비야는 한숨을 쉬며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하암. 그거 잘됐군. 나도 배가 고팠거든. 나도 가지.”
 때마침, 자고 있던 강제후가 귓가를 쫑긋거리며 몸을 일으키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일어났냐?”
 그러고 보니 아픈 기간 동안 그가 이곳에서 한 일이 자고 먹은 일밖에 없다고 깨달은 비야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짓다 피식 웃고 말았다.
 
 ***
 
 무림맹의 십대 관은 무림맹의 본단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도, 남경에 자리하고 있다.
 중원의 땅에서도 황제가 거주하는 수도인 만큼 남경의 휘황찬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입고 있는 사람들의 의복 상태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적어도 비야가 마지막에 거친 낙양보다 훨씬 사람들도 많고 북적였고, 무엇보다 풍요로웠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촌놈이냐? 남경 처음 봐?”
 그런 비양의 시선에서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을 읽은 강제후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요기를 채울 만한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처음 보는 거 맞아.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중원은 정말 넓구나.”
 “암. 천하의 나조차 중원 전체를 보지 못했으니, 너라고 안 신기해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주둥이 좀 닥치고 밥이나 먹자.”
 또 거들먹거리는 모양새를 취하자, 비야가 강제후를 무시하고 점소이를 불러 주문했다.
 “아침 요깃거리로 괜찮은 거 있어?”
 “예입. 고추잡채도 있고 해장에 좋은 국밥도 있고 사천의 진미가 느껴지는 조반(朝飯)도 있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비야가 주문을 했다.
 “국밥 두 그릇.”
 탕!
 “잠깐!”
 이에 항의하는 듯, 강제후가 탁상을 손바닥으로 쳤지만 비야는 화들짝 놀란 점소이에게 손을 내저어 보내며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왜 내가 의견을 내놓기도 전에 네놈이 결정을 하는 거냐!”
 “내가 밥 살 테니까. 그냥 먹자. 사내새끼가 쫀쫀하게······ 음식을 가려.”
 “쫀쫀?”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라도 당한 양 강제후가 그를 노려보았지만 겁먹을 이유가 없는 비야는 오히려 그를 향해 비웃음의 표정을 흘렸다.
 “설마 온갖 기름진 것만 먹는지라 국밥 따위는 먹기 힘든 거냐? 배부른 놈이구먼. 내가 산 속에서 생활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고.”
 “이익! 먹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 얄미운 얼굴에 물을 끼얹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의 그런 행동이 비야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것을 확고히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비야의 뜻에 휘말릴 것을 알기에, 얌전히 자리에 앉는 강제후였다.
 그런 두 사람의 옥신각신이 근방의 시선을 끌어 모았을 때쯤, 단정하게 무복을 차려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그들 사이에 개입했다.
 “어머, 당 소저에게 제법 호되게 당해 고생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완치된 모양이군요. 비 소협. 하지만 모두가 식사하는 자리니 가급적 예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
 “······.”
 갑작스런 소녀의 개입에 당황한 강제후와 비야는 동시에 입을 다물고 자신들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총기를 띠는 눈동자를 갖춘 미인, 무림칠화의 한 명이라고 칭해지는 제갈서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남자 같은 복장을 한 소녀가 인기척을 지우며 호위로 서 있었다.
 ‘······저 녀석은?’
 비야는 그녀가 과거에 흑천삼안저에게 쫓기던 중 제 도움을 받은 소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가 원래부터 타인의 얼굴을 잘 잊지 않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외모가 워낙에 출중하다 보니, 뇌리에 각인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친한 척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한참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말재간에 놀아나서 짜증나는 판국이니까.”
 그때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 그대로, 그녀의 바른 충고에 내심 기분이 나빠진 강제후가 퉁명스런 어조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아! 초면에 너무 나서는 꼴이 되었군요. 괜찮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그런 그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제갈서연은 오히려 웃어 보이며, 비야에게 은근슬쩍 눈웃음을 주었다. 합석의 허락을 구하는 웃음이었다.
 “······.”
 왠지 탐탁지 않지만 비야가 마다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만약 여기서 거절하면, 오히려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에 비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아침은 제가 내도록 하죠.”
 “필요 없어. 아무 거나 못 먹을 것 같은 인상인데 우리 아침은 국밥이니까 못 먹을 거면 꺼져.”
 강제후의 직설적인 독설에 제갈서연의 호위인 초희가 은연중에 살기를 띠었다. 그러나 강제후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비야가 손날을 세워 시선교환을 막아냈다.
 “거기 호위, 아침부터 기분 더럽게 살기 피우지 마. 강제후 너도 그 싸가지 없는 말버릇 고치고”
 “흥!”
 “송구합니다. 비 소협.”
 제갈거연은 자신의 호위의 잘못임에도 초희를 꾸짖기보다 직접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그 사과에 비야는 어깨만 들썩이며 몸을 돌릴 뿐이었다.
 “어디 가?”
 “잠깐 볼일 보러. 금방 돌아올 거야.”
 그 말에 강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야를 보내주었다. 비야는 제갈서연에게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식당에 몰려있는 인파들을 스쳐 지나갔다.
 짧은 용무를 보러가는 것은 아닌지, 아쉽게도 그가 향한 곳은 식당 안이 아닌 밖이었다.
 우당탕!
 “꺄악!”
 그때, 저잣거리에서 비야의 곁을 스쳐지나간 누군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파에 부딪히며 짊어지고 있던 바구니의 장신구를 쏟아버렸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터라 흔히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비야는 무심코 그 현장을 지나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소녀는 주변에 죄송하다고 거듭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에 흙먼지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장신구를 주워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야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곧 등을 돌려 발길을 옮겼다.
 가녀린 몸과 어울리지 않게 많은 장신구를 들쳐 메고 있던 소녀는 죄송하다는 소리를 연거푸 내뱉으며 주섬주섬 땅을 짚으며 장신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한데 주섬주섬 땅을 짚는 모양새를 보니, 틀림없이 눈이 보이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은연중에 그것을 깨달은 몇몇 이들이 그 점을 악용해 소녀의 발을 은근슬쩍 짓밟았다.
 “어이쿠. 이런, 이런 길 가다가 무슨 행패야. 더러운 거지 년 손에 내 신발이 더러워졌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부들부들 떠는 소녀는 싫은 기색도 못 하고 거듭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쯤 되니, 그녀에게 동정표를 내던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자 민망한 것은 시비를 건 낭인이었다. 우연을 틈타 한 몫 챙기려고 했던 낭인으로서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슬그머니 발걸음을 떼려던 그 순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이목구비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흑심이 그의 발걸음을 막아섰다.
 “흐흐흐흐흐. 미안하다면 말이지. 그 곱살스러운 상판으로 돈 좀 벌어보지 않을래?”
 “꺄악!”
 소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쥔 낙인은 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이것은 틀림없이 조개 속에 묻힌 진주다. 소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더 없는 확신으로 다가섰다.
 “그 더러운 손 떼지?”
 그 순간, 그런 낭인의 등을 거대한 남자의 그림자가 덮었다.
 “응? 어떤 새낀지 몰라도 내가 이곳에 귀왕파의 작두라 불리는 건지 모르는 거냐?”
 불쾌하다는 듯, 자신을 작두라 지칭한 낭인이 소녀의 턱에 손가락을 떼며 등을 돌렸다.
 그의 정면으로는 그보다 일 척은 더 되어 보이는 거한이 거대한 검을 등에 매달고 서 있었다.
 그 뒤로도 약 네 명의 인영이 몸에 후줄근한 망토를 거칠고 서 있었다.
 “흐, 흥! 뭐야. 한 번 거칠게 나대고 싶어서 그런가 본데, 적당히 깝치는 게 좋을······.”
 이에 겁을 먹은 작두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알게 뭐야? 썩은 내 나는 입으로 지껄이지 마라.”
 어느 순간, 스쳐지나가는 거한의 인기척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는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푸쉿 소리가 나며 혈관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 줄기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꺄아아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살인사건에 모두가 아비규환으로 뒷걸음질하고 고함을 지르는 순간, 거한은 쓰러져 있는 장님의 소녀에게 무릎을 굽히며 안부를 물었다.
 “몸은 괜찮아?”
 그 걱정이 진심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소녀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소녀는 놀란 듯 입을 벌리다 곧 선하게 웃으며 그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응. 나는 괜찮아. 유량.”
 
 
 <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