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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 (1화)

2017.06.14 조회 588 추천 5


 곤륜무쌍 1권 (1화)
 작가서문
 
 
 장르문학의 본질은 무엇보다 ‘재미’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곤륜무쌍(崑崙無雙)』을 집필함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재미’에 초점을 맞추어 쓰려고 노력했다.
 흔히, ‘킬링 타임’이라는 단어는 장르문학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런데 ‘킬링 타임’이라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그만큼 ‘재미’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창출하는 ‘감동’이나 뭔가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는 ‘교훈’도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재미’, ‘감동’, 그리고 ‘교훈’을 두루 갖춘 소설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재미’라는 한 마리의 토끼만을 제대로 잡아 보기로 작정하고 본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 물론, 이 한 마리의 토끼를 과연 제대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님들의 몫이므로.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어느새 답답한 일상 가운데서 쌓인 스트레스가 다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하는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상황에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을 통해 통쾌한 대리만족을 창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목적에 적합한 행위만을 할 수는 없다. 실용적인 목적에서 탈피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뭔가에 무아지경으로 정신을 빼앗기며 ‘킬링 타임’을 할 때에야 ‘유희’의 목적인 ‘정서적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모쪼록 본 소설이 무목적의 미학인 ‘유희’의 다른 이름, 곧 ‘킬링 타임’의 기능을 확실하게 달성해 주는 매개가 되기를 바란다.
 
 한가람 배상
 
 
 
 제1장 이독제독(以毒制毒)
 
 
 1
 
 “송구하게도 원로원의 장로님들께 또다시 일선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파 이래, 두 번째로 맞은 큰 위기입니다. 실로 사활이 걸린 문제이지요.”
 “실은 노도도 대충 소식을 전해 들었네. 흑혈회주(黑血會主) 위재항(威渽沆)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벌써 본산의 속가제자들이 세운 지파의 상당수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태청오로관(太淸五路關)이 돌파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태을진인(太乙眞人)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그것참!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그래, 숭의맹(崇義盟)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가?”
 “지금쯤이면 이 소식을 충분히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허나, 여전히 이십 년 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터라 곤륜파(崑崙派)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흑혈회도 이를 알고서 숭의맹으로부터 고립된 우리 곤륜파와의 전면전을 감행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설사 숭의맹이 마음을 돌이켜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이미 소집할 수 있는 장로들은 모두 모였다네. 문제는 그게 아닐세. 혈선지화(血仙之禍) 이후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노납을 비롯해 당시 살아남은 장로들 대부분은 아직도 주화입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네. 혈선지화가 있기 전의 원로원에 비하면 지금은 그 힘이 일 할에도 이르지 못할 걸세.”
 그 말에 태허존자(太虛尊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그래도 자네가 장문인이 된 이래로 지난 이십 년간, 곤륜파는 꾸준히 회복되어 왔지. 처음에 비하면 숭의맹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되었고. 아무튼, 우리 장로들과 곤륜파의 모든 제자가 힘을 합친다면 당면한 위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비록 열세이긴 하나, 우리에게는 지형이라는 강점이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면, 결국은 숭의맹도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본산의 많은 속가제자도 내곤륜(內崑崙)을 구심점으로 재차 결집하게 될 테지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곤륜파의 신성한 이 성지가 불한당들의 발에 짓밟히는 일만은 막아야 하네.”
 “반드시 태청오로관에서 놈들을 차단할 겁니다. 절대로 내곤륜까지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의 그 결의 위에 모든 장로가 함께할 걸세.”
 
 ***
 
 “어서 성문을 봉쇄하라! 사마외도의 불한당들에게 절대로 침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내곤륜으로 통하는 태청오로관의 하나인 유운관(流雲關)을 책임진 제사호법 성진자(晟珍子)의 독려였다.
 중앙의 성문을 중심으로 평균 오 장 높이의 성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채를 향해 수많은 흑의인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이미 내곤륜과 이어지는 협로와 성곽이 교차하는 지점에 뚫려 있던 성문은 굳게 닫혔다.
 아울러, 삼백 명의 곤륜제자는 성곽 위의 보행로에 배치되어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척까지 이른 흑의인들은 저마다 비조(飛爪)를 위로 힘껏 던졌다.
 그 갈퀴가 성벽 위의 요철 부위에 걸리자, 발톱으로 옥죄는 것처럼 단단하게 부착되었다. 그러자 흑의인들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성벽 위로 일제히 기어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아 그들은 저마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무공의 고수들임이 틀림없었다.
 흑의인들 가운데서도 어깨에 황색의 피풍의를 두른 자들은 비조의 도움 없이도 연속으로 성벽을 박차면서 꼭대기까지 가뿐하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벽 앞에서 지축을 박차면서 약 삼 장을 치솟은 다음, 불과 서너 걸음 만에 보행로까지 치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적들에 맞선 유운관의 곤륜제자들 역시 방어선을 사수하고자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의인들은 한 손으로 밧줄을 타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각자의 병기를 휘둘러 농성하는 곤륜제자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걷어 냈다. 그 와중에 비조에 의존하지 않고 단숨에 보행로까지 뛰어올라 온 황색 피풍의의 흑의인들은 본격적으로 곤륜제자들을 공격했다.
 유운관을 사수하는 곤륜제자들은 도저히 황색 피풍의를 두른 흑의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적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았다. 창졸간에 농성하던 이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성문은 뚫렸다.
 흑의인들은 유운관을 신속하게 돌파하여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내곤륜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내곤륜 방향에서도 도포를 입은 무인들은 굳이 기다리지 않고 돌격해 오는 적들을 향해 마주 돌진하며 내려갔다.
 잠시 후,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은 물결과 산 위에서 내려오는 하얀 물결이 격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내곤륜 측에서는 내공이 가장 심후하고, 무공 또한 으뜸인 원로원의 장로들이 장문인인 태허존자와 함께 제자들을 진두지휘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육박해 오는 흑혈회의 무사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묵린환(墨鱗環)을 발사했다.
 수많은 묵린환이 전면을 뒤덮으며 날아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장로들이 날린 묵린환들은 혜성과 같은 기장을 드리우며 더욱 빨리 쏘아져 갔다.
 장로들에 이어 제이선에서 진격하던 곤륜파 일대제자들이 날려 보낸 묵린환에도 내력이 충만히 깃들어 있어서 그 위력이 상당했다.
 앞에서 달려오던 많은 숫자의 흑의인들이 묵린환에 몸을 관통당하여 연방 쓰러졌던 것이다.
 그동안, 제삼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자들 가운데서 백여 명이 일제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에 서릿발 같은 피리 소리가 주변의 대기를 진동시키며 널리 울려 퍼졌으니, 다름 아닌 복마곡성(伏魔哭聲)이었다.
 곤륜파의 독문무공을 익힌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소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격심한 현기증을 느껴, 움직임이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흑의인들은 곤륜파 제자들로부터 묵린환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가운데 서서히 그것에 적응했고, 점점 더 효과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복마곡성이 울려 퍼지자, 묵린환은 재차 위력을 발휘했다.
 묵린환도 거의 바닥나고, 흑혈회 무리의 기세도 한풀 꺾일 무렵, 곤륜파의 제자들은 다들 맹수의 발톱처럼 손을 구부리며 운룡조(雲龍爪)를 시전했다. 그런 다음, 주춤하는 적들에게 달려들어 조공(爪功)을 펼쳤다.
 
 
 2
 
 “변변치 못한 것들!”
 흑의인들의 사이가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곳으로부터 독특한 복장을 한 거구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금은사로 수놓아진 휘황찬란한 흑포를 두르고 있었고, 손가락에도 여러 개의 굵직굵직한 가락지들을 끼고 있었다.
 등에는 용봉의 무늬가 금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적색의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과연 곤륜파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군.”
 연이어 금포인은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사자후에는 측량하기 어려운 내공이 실려 있어 곤륜산의 험산 준령으로 울려 퍼지던 복마곡성마저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복마곡성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흑의인들은 본래의 위력을 회복했고, 이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곤륜파의 제자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위재항은 지면을 박차며 높이 치솟았다. 그런 다음, 그는 곧장 피리를 불고 있는 제자들의 가운데로 난입하여 쫙 펼친 손바닥을 사방으로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금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재항의 커다란 양쪽 손바닥에는 대추 하나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공할 만한 흡입력이 발생하여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위재항이 펼치는 흡성대법(吸星大法)으로 인해 인근에 있던 곤륜파의 제자들은 몸도 가누지 못한 채로 딸려 갔다.
 위재항의 손바닥이 몸에 닿을라치면, 끔찍한 살풍경이 벌어졌다. 새하얀 도포를 입은 제자들은 일순간에 백 세가 넘은 노인처럼 처참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진저리를 쳐 댔다.
 손바닥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머리와 사지가 몸통과 분리되며 사방으로 널브러졌다.
 기이한 구멍이 뚫려 있는 양쪽 손바닥을 사방으로 휘젓고 있는 위재항으로부터 반경 오륙 장의 범위는 강력한 흡입력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리를 불고 있던 대부분의 곤륜파의 제자들은 미처 달아날 겨를도 없이 위재항에 의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곤륜파의 많은 제자는 역겨움을 참지 못해 구역질을 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를 계기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아연실색한 곤륜파 제자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확 꺾였고,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더욱 살기등등하게 공세를 펼쳤다.
 그 와중에도 곤륜파의 장로들은 청량선(淸凉扇)을 전개하여 연방 밀려드는 흑혈회의 무리를 막아 냈다.
 “늙어 빠진 쥐새끼들이 어지간히도 설쳐 대는군.”
 자신의 위력에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질린 적들의 모습을 잠시 음미하던 위재항의 양쪽 손바닥에 있는 채기혈(採氣穴)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가공할 만한 흡입력을 몸소 감지하게 된 태을진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사이에 다른 장로 두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겼다. 그 광경에 격분한 태을진인은 위재항과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로 쇄도해 갔다.
 ‘필생의 공력을 쏟아 넣은 투골선(透骨扇)을 시전한다면 능히 놈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태을진인의 각오를 알아차린 다른 세 장로도 그와 함께 위재항을 향해 육박해 갔다.
 하지만 위재항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상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 팔을 휘저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引力)의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장로들은 균형 감각을 잃고서 바닥으로 하릴없이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위재항의 채기혈은 태을진인의 정수리 위로 얹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태을진인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순식간에 위재항에게 빼앗기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태허존자의 퇴각령이 내려지자, 살아남은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줄행랑을 쳤다.
 
 
 3
 
 “기관진식과 함정들이 잠시 시간을 벌어 주기는 하겠지만, 위재항은 이제 곧 이곳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비록 주화입마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나, 태상장로를 그리도 가뿐히 쓰러뜨린 괴물을 대체 어찌 상대한단 말입니까?”
 상청자(霜靑子)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깃들었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태허존자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아니, 장문사형! 그게 정말입니까? 그 방도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상청자의 재촉에 옥허진인(玉虛眞人)이 대신 말을 받았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이독제독이라니요?”
 상청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숙께서도 그 비책을 염두에 두고 계셨군요. 달리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일 테지. 어찌 되었든, 극독은 극독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태허존자와 옥허진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청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대체 뭔 소리인지······. 알아듣게 좀 설명해 주십시오.”
 상청자의 종용에 태허존자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마룡동(魔龍洞)의 봉인을 푸는 것일세.”
 그 순간, 상청자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잠시 후, 그는 정색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어찌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십니까? 그 혈귀를 다시 불러내자니······. 나 원 참!”
 곤륜파에서는 실로 걸출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뇌진천(雷鎭穿)이었다. 무림 전체를 통틀어도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재로서 곤륜파의 수뇌부에서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뇌진천은 무공이 일취월장함에 따라 점점 더 호전적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적수가 없어진 그는 급기야 하극상을 일으켜 곤륜파를 장악하고 혈곤륜으로 개칭했다. 이는 사마외도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혈곤륜의 개파조사가 된 뇌진천은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세력은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혈해(血海)로 변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말미암아 뇌진천은 혈해사신(血海死神)이라는 별호까지 얻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혈해존자(血海尊子)로 통했다.
 뇌진천의 파행으로 인해 결국 곤륜파는 숭의맹에서 파문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림공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곤륜산의 곳곳에 흩어져 유유자적하며 은거하던 원로원의 모든 장로가 직접 나서서 뇌진천을 제거하고 곤륜파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장로들의 힘으로도 뇌진천을 제거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에 그들은 방법을 달리하기로 결정했다.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면 가둘 수밖에 없으리라.
 곤륜산의 심산유곡에 자리한 마룡동에는 역대 장문인들 가운데 기관진식에 조예가 깊었던 현명존자(賢明尊子)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특별히 만들어 둔 감옥이 있었다.
 이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원로원의 장로가 되어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에 뇌진천은 함정에 걸려들어 결국 마룡동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원로원에서도 최고의 무위를 지닌 수위 장로 삼십 명이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장로들도 대부분 극심한 내상을 입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다.
 희생이 이토록 컸던 것은 도저히 뇌진천을 제압할 수 없었기에 장로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그를 마룡동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
 
 “그것 외에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전혀 없다네.”
 “장문인의 말이 맞네. 그리고 너무 그리 걱정할 건 없다네. 나름대로 복안이 있으니 말일세.”
 “복안이라니, 그건 또 무엇입니까?”
 상청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청 사제는 그래도 명색이 우리 곤륜파의 차기 장문인인데, 어찌 그리 호들갑인가?”
 태허존자의 핀잔에 상청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문사형도 참! 그 경천동지할 혈귀를 다시 바깥세상으로 불러내려고 하는데, 이십 년 전 참사의 현장에 있었던 곤륜파 제자들 가운데 그 누가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환진인(九幻眞人)이 뇌진천의 혈륜(血輪)에 대한 파해법을 만들어 냈고, 혹시라도 녀석이 마룡동을 탈출할 경우를 대비해서 오랫동안 연습해 온 건 자네도 잘 알 걸세.”
 “그렇기는 하지만······.”
 “뇌진천과 위재항을 서로 싸우게 만든 다음, 우리는 뒤에서 협공하여 우선 난입자들을 몰아낼 걸세. 그 이후에는 장로들과 문하생들을 비롯한 속가제자들까지 곤륜파의 가용한 모든 인원을 총동원하여 철저하게 방어 위주의 차륜전(車輪戰)을 전개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걸세. 분명히 승산이 있다네.”
 태허존자는 상청자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극강의 고수라고 해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일세. 체력은 내공을 담는 그릇이네. 내공이 심후해도 체력이 소진되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위재항과의 싸움에서 적잖이 체력을 소모한 뇌진천이라면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하네.”
 상청자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한 번 해 보는 겁니다.”
 
 
 4
 
 내곤륜은 곤륜산의 은밀한 절지(絶地)에 자리한다. 그곳은 세속과는 단절된 채, 도학과 무학만을 익히며 심신을 수양하는 순수 문하생들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내곤륜으로 통하는 다섯 개의 관문, 곧 태청오로관은 용봉관(龍鳳關)이라는 현판이 있는 하나의 관문으로 합쳐진다.
 내곤륜은 곤륜산의 중앙 분지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낭떠러지인 비룡애(飛龍崖)가 무거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노곤한 시선으로 내곤륜의 경내를 조망한다. 다섯 개의 외문과 연결된, 내곤륜으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인 용봉관의 남쪽으로는 깊고 넓은 잠룡호(潛龍湖)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에 태청궁을 위시한 내곤륜의 전각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잠룡호를 횡단하는 부교(浮橋)를 건너야만 한다.
 내곤륜의 본산은 비룡애를 등진 채, 앞으로는 잠룡호를 안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를 취한다.
 비룡애의 중앙 하단에는 지상 오 층 지하 이 층의 규모를 지닌 거대 전각인 태청궁(太淸宮)이 자리한다.
 태청궁은 중앙의 대전각으로 장문인의 처소와 곤륜파의 수뇌부가 회동을 하는 대청인 무량전(無量殿)을 비롯하여 주요 수뇌들의 집무실들이 집결해 있다.
 내곤륜의 경내에는 헛간이나 창고로 쓰이는 막사나 작은 전각들이 곳곳에 있고, 도처에 자리하는 수십 개의 봉우리와 심산유곡 등에는 크고 작은 도관이나 정자들이 위치한다.
 내곤륜에는 요새화 된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으니, 각 관문에 자리 잡고 있던 도관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으로는 삼 장 높이의 튼튼한 목책이 세워졌다.
 그것의 전방으로는 대략 일 장 깊이의 참호가 파여졌으며, 그 안에는 인근의 계곡에서 끌어 온 물로 채워져 도랑을 이루어 해자(垓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요새의 요지에는 먼 곳까지 정찰할 수 있는 높다란 망대가 세워져 있었다.
 안 그래도 천혜의 방어 환경을 지닌 이곳 곤륜산에 세워진 전진기지는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만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무색하게도 모든 관문은 활짝 열려진 상태였고, 내곤륜의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덕분에 흑혈회주 위재항을 필두로 하는 수많은 흑혈회 휘하의 흑의인은 단숨에 내곤륜으로 접어들었다.
 “크하하하! 곤륜산에 서식하던 쥐새끼들이 본좌의 위세에 눌려 모조리 숨어 버린 모양이로구나. 크하하하!”
 위재항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우편에 있던 흑포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몇 차례나 말씀드렸듯이, 지금의 이 상황 가운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음모가 숨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제이호법 사공승지(司空承之)의 말에 전위대장 손진광(孫眞廣)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사공 호법은 매사에 너무 조심스러워서 탈이오. 제까짓 놈들이 수작을 부려 봤자 뭐가 대수겠소? 신선놀음이나 하던 샌님들은 필시 지레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친 거요. 그래도 그냥 도망치기 뭐하니까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이렇게 아예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 더 경계하게 하려는 수작을 부린 거지.”
 사공승지는 손진광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위재항을 향해 재차 입을 열어 간곡하게 말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유인책이 분명하옵니다. 조심하는 게 상책이옵니다.”
 “사공 호법은 그만 입을 다물라! 본좌 앞에서 그 어떤 계략도 통하지 않는다. 매복이 있으면 그것을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고, 함정이 있으면 함정을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다.”
 바로 그때, 태청궁 뒤편의 청운봉 위에 모습을 드러낸 태허존자가 조소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위재항아! 위재항아! 네가 어디까지 높아지려느냐?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모르느냐? 정녕 자신이 있다면 내 뒤를 따라와 보려무나.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꽁무니를 내리고 왔던 그 길 그대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껄껄껄!”
 그 순간, 위재항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태허존자의 도발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위재항은 마룡봉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달았다.
 위재항의 뒤를 따라 흑혈회의 수뇌부를 비롯한 수많은 흑의무사가 질주했다. 얼마 후, 위재항과 그의 부하들은 높다란 절벽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었다.
 
 ***
 
 꽈르르르릉!
 마룡애(魔龍厓)의 하단에서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마룡동을 완벽하게 봉쇄하고 있던 만년단룡석의 문이 바닥으로 함몰되면서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위재항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동안 동굴을 지켜보던 위재항은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위재항은 이윽고 동굴의 내부로 천천히 진입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금세 멈추어졌다.
 갑자기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재항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살기를 뿜어낼 수 있으려면 상대방 역시 비슷한 경지에 이르러 있어야 한다.
 그 살기의 진원지는 어두컴컴한 동굴의 내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마치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안광을 번뜩이며 위재항을 노려보는 신형이 있었다.
 ‘헉! 보통 놈이 아니다.’
 위재항은 일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의 기세에 눌려 움찔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계의 고삐를 한껏 잡아당긴 채, 한동안 상대방과 대치하던 위재항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본좌는 위재항이다. 너는 누구냐?”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화감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상대방이 자아내는 위압감만으로도 동굴이 진동되었다.
 그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단지 살기만으로도 대량 살상이 가능할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위재항은 동굴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 자체가 무너져 내려 매몰될 것을 우려하여 일단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체 얼마 만에 만난 적수란 말인가?’
 위재항은 상대방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북명신공(北冥神功)을 극성으로 운용하면서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북명신공을 완성한 이후로 위재항은 이제 다시는 당금의 강호무림에서 자신이 전력으로 싸워도 될 만한 호적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지존으로서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목숨을 걸고서 싸워야 할 상대가 등장하자, 무사로서의 투지가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5
 
 꽈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지난 이십 년간 꼼짝도 하지 않던 문이 갑자기 바닥으로 함몰되어 버렸다.
 그 문은 가공된 형태가 아니라, 만년단룡석을 통째로 옮겨 동굴에 설치된 기관진식의 일부로 만든 것이었다. 도저히 인간에 의해 파괴될 게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동굴을 이루는 석질(石質)은 아주 단단한 반면, 일단 균열이 생기면 전체적으로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자칫 다른 곳을 뚫고 나가려고 하다가는 마룡봉 자체가 무너질 것이 자명했다.
 아무리 초절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몸으로 마룡봉 전체의 하중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온몸을 휘감고 있는, 단지 길다는 말로는 부족한 백발,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백설의 눈썹.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진 백설의 수염, 마룡동에 갇힐 당시 입고 있던, 이젠 거의 다 헤어진 핏빛 혈포.
 그리고 역시나 핏빛의 도관(道冠)까지······.
 이상이 지금 현재 뇌진천의 용모를 나타내는 형언들이었다.
 비록 모발과 수염은 새하얗게 변했으나, 혈색이 좋은 대춧빛의 얼굴이나 전반적인 풍모는 사십 대의 그것이었다.
 위재항은 이윽고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자태를 드러낸 뇌진천의 실체를 목도했다. 지금 보니 상대방의 행색은 영락없는 곤륜파 제자의 그것이었다. 위재항은 재차 말을 걸었다.
 “본좌는 흑혈회주 위재항이다. 네놈은 누구냐?”
 이번에도 대꾸가 없었다. 천하의 위재항도 긴장되는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뇌진천이 입고 있던 붉디붉은 도포 자락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불그스레한 섬광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장의 공간을 대번에 압축하며 위재항에게로 육박해 갔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란 위재항은 황급히 양쪽 허리에 찬 두 개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흑혈회주를 덮쳐 가던 섬광은 그의 지척에 이르자, 두 개로 나누어지면서 양쪽으로 산개했다. 그와 동시에 횡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위재항을 노렸다.
 위재항은 신속하게 뒤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두 개의 섬광은 중 하나가 또다시 둘로 갈라져 기이한 각도로 꺾이면서 그의 사각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위재항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검을 휘저어 자신을 방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수리 위에서 벽력처럼 내리꽂히던 섬광만은 놓치고 말았다.
 그것은 그를 종으로 양단해 버렸다.
 사실 다른 하나의 섬광 또한 부지불식간에 두 개로 분리되었다가 그중 하나가 위로 솟구쳤던 것이다.
 천하를 뒤흔들던 흑혈회주 위재항의 너무나 어이없는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흑혈회의 수하들은 제대로 충격을 받을 겨를도 없었다. 우레와 같은 굉음을 자아내며 주변의 대기를 마구 찢어발기는 네 개의 섬영이 굶주린 상어처럼 주변의 인영들을 덮쳐 갔다. 그 섬광은 다름 아닌 혈륜이었다.
 사방에 무시무시한 톱니가 촘촘히 박힌 수레바퀴 형상의 그것들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자아내며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뇌진천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 소리만으로도 고막이 다 찢어질 정도로 공포에 질리게 하였고, 뇌전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혈륜이 벽력과 같은 기세로 주변을 완전히 폭발시켰다.
 네 개의 혈륜이 한 번 휩쓸고 간 자리에는 흑혈회 무사들의 조각난 육편들만이 사방으로 즐비하게 널브러졌다. 조금 전의 살기등등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흑혈회의 모든 무인은 지금의 상황에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줄행랑치고 있었다. 또한 흑혈회의 잔당을 추살하던 곤륜파의 제자들조차도 뇌진천의 절륜한 무위와 손속에 치를 떨었다.
 뇌진천과 곤륜파의 기이한 협공으로 쳐들어왔던 흑혈회의 무리 가운데 절반은 쓰러졌고, 나머지 절반은 사분오열로 갈라져서 달아났다.
 공적이 사라지자, 드디어 뇌진천과 곤륜파가 서로 격돌하게 되었다. 곤륜파 측에서는 네 명의 장로가 극상승의 신법을 전개하며 네 방향에서 뇌진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공에서 뇌진천의 주위를 맴돌던 네 개의 혈륜은 네 방향으로 산개하여 각각 한 명씩의 장로를 노렸다.
 그 순간, 장로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네 개의 혈륜은 계속해서 네 장로의 뒤를 쫓았다.
 거리가 십 장가량 넓어졌을까?
 각 방면에서 매복하고 있던 청의인들은 날아드는 혈륜을 향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천잠사와 강인한 만년한철로 특수 제작된 비조를 던졌다.
 각 혈륜당 서른여섯 개의 비조가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 절반에서 많게는 삼 분지 이 정도가 노리던 혈륜에 정확하게 부착되었다. 그로 인해 혈륜의 속도가 둔화되는 틈을 노려 회수되었다가 재차 날아든 비조들이 혈륜을 덮쳤다.
 그리하여, 이내 각각 서른여섯 개의 비조가 각각 하나의 혈륜을 완전히 붙든 형국이 되었다.
 비조를 던진 청의인들은 각 방향으로 넓게 소산하며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혈륜이 어디로 향할라치면 서른여섯의 청의인들은 밀고 당기는 힘을 세심하게 조율하여 혈륜을 붙들었다.
 서른여섯 개의 경로를 통해 유입되는 순음지기(純陰之氣)는 혈륜에 충만히 서린 뇌진천의 극양지기(極陽之氣)를 희석시켰다.
 잠시 후, 마음껏 날뛰던 네 개의 혈륜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광경에 자신감을 얻은 상청자는 돌출 행동을 시작했다.
 “이제 보니 뇌진천도 별것 아니로군. 혈륜을 무력화시킨 지금이 기회다! 어서 쳐라! 놈을 없애 버려라!”
 상청자는 자신의 통솔을 받는 직계 문하생들 백여 명과 더불어 뇌진천을 향해 쇄도했다.
 “앗! 위험하네. 어서 물러나게!”
 태허존자가 이렇게 소리쳤으나, 상청자는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연방 부하들을 독려하며 뇌진천을 향해 덤벼들었다.
 
 
 6
 
 “본좌가 어째서 혈해존자라고 불렸는 줄 아느냐? 이 몸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피바다로 변했기 때문이지.”
 뇌진천은 오른손으로 좌측 허리에 차고 있던 폭마혈검(爆魔血劍)의 손잡이를 불끈 거머쥐면서 대번에 발검했다.
 “흐흐흐! 그동안 많이도 목이 말랐을 거다. 허나 오늘은 네게 뜨끈뜨끈한 피를 원 없이 마시도록 해 주겠다.”
 스으으윽!
 뇌진천은 외날검으로서 칼등 쪽으로 유연하게 휘어 있고 끄트머리가 뱀의 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폭마혈검의 검신(劍身)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그 순간, 붉디붉은 검신에서는 핏빛의 검기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뇌진천의 이러한 움직임에 그를 포위하고 있던 무인들 역시 각자의 병기를 전면으로 곧추세우면서 일제히 쇄도해 갔다. 그러자 뇌진천은 두 손으로 불끈 거머쥐고 위로 치켜들었던 폭마혈검을 지면을 향하여 내리쳤다.
 촤아아악!
 지진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폭마혈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지면을 가르면서 굶주린 맹수와 같은 기세로 전방으로 뻗어 나갔고, 양옆으로는 무려 이 장 높이의 흙더미가 튀어 올랐다.
 아울러, 보다 넓은 영역으로는 시야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의 흙먼지가 자욱하게 흩뿌려졌다.
 진행 방향으로 포진해 있던 수십 명의 무인은 난데없는 흙 폭풍에 휩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닥쳐온 기운에 직격으로 맞은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인근의 무인들도 연쇄적인 발경력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차륜전과 연동된 합격술(合擊術)을 제대로 감행하기도 전에 검진(劍陳)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뇌진천은 자신을 포위한 무사들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공간을 삼키듯 달려들며 본격적인 접근전을 시작했다.
 뇌진천은 전면에서 제일 먼저 다가서는 무인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그는 우측 발을 전방으로 내디디며 두 손으로 불끈 거머쥐고 있던 폭마혈검을 하단으로 내리그었다.
 이 일격으로 그는 상대방을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단번에 베었다.
 뇌진천은 폭마혈검을 비껴 쥐면서 연달아 횡으로 그어 좌우에서 달려들던 두 무인을 해치웠다.
 왼쪽으로 몸을 틀며 칼날이 하늘로 향하도록 한 뇌진천은 전진 방향에서 덮쳐 오고 있던 무인의 흉부를 갈라 버렸다. 곧장 폭마혈검을 아래로 감아 쥔 뇌진천은 그것을 자신의 좌측 겨드랑이 뒤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뇌진천의 등 뒤로 덮쳐 오며 기습을 감행하던 무인은 폭마혈검에 의해 명치를 관통당했다.
 “으아악!”
 폭마혈검을 비틀면서 뒤로 회전한 뇌진천은 그 방향에서 달려들던 무인 세 명의 목을 베었다.
 제자들의 공세가 잠시 늦춰지자, 그는 폭마혈검을 우측 하단으로 두 차례 내리쳐서 검신에 묻은 선혈을 털어 냈다.
 기세 좋게 앞서서 달려들던 동료들이 너무 맥없이 당하자, 나머지 무인들은 재차 전열을 가다듬어 차륜전의 검진을 형성하며 전 방위에서 일제히 덮쳐 왔다.
 “그래! 그렇게나마 발악을 해 줘야 덜 시시할 테지.”
 뇌진천은 지축을 박차며 물 찬 제비처럼 위로 훌쩍 도약한 다음,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화아아악!
 폭마혈검에 충만하게 깃들은 핏빛의 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쫙 펼쳐진 검기의 칼날로 인하여 검진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무인들 십여 명의 목이 잘렸다.
 그사이 허공으로 몸을 역전시킨 뇌진천은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다음, 그 탄력을 바탕으로 위로 재차 치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의 칼날을 횡으로 뻗으면서 자신의 몸 자체를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휘이이익!
 뇌진천의 몸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는 칼날에 의해서 수많은 제자의 몸이 공중에서 분해되듯 박살나고 말았다.
 “역시 피 냄새는 언제 맡아도 정말 향긋하군.”
 뇌진천은 감미로운 표정으로 주변에 흩뿌려진 핏빛 안개의 향내를 음미했다.
 움찔하여 주춤하던 제자들이 다시 움직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7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눈으로 자신을 향해 육박해 오는 무인들을 노려보던 뇌진천은 폭마혈검을 비껴 쥐었다.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올린 다음, 칼날을 앞으로 향하도록 하고 왼손으로 그 아래를 받쳐 든 그는 전방으로 치달았다.
 뇌진천은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마치 회를 치듯이 무인들의 살과 뼈를 발라 놓았다.
 전신에 선혈을 흠뻑 뒤집어쓰면서 악귀와도 같은 몰골이 된 뇌진천은 연신 적들이 밀집된 곳으로 쇄도하여, 사방으로 현란하게 방위를 밟으며 검무(劍舞)를 추었다.
 핏빛의 검기를 한껏 머금은 폭마혈검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무엇이든 베어 버렸다. 폭마혈검과 조우하게 되면 강인한 무기들도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과 함께 양단되었다.
 뇌진천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해 갔다.
 폭마혈검에 의해 갈가리 찢긴 채 사방으로 널브러진 시신을 발견한 그의 미간이 다소 찌푸려졌다.
 “젠장! 약해! 너무 약해! 다들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본좌에게 더욱 필사적으로 덤벼 보란 말이다. 너희가 더욱 발악을 해 줘야 나도 죽이는 흥을 느낄 게 아니냐? 크하하하!”
 휘하의 수하들이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맥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상청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피에 잔뜩 굶주린 혈귀를 건드린 꼴이었어. 안 되겠다. 후퇴다! 모두 신속하게 물러나라!”
 이미 상청자 휘하의 직계 제자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거나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청자만이 겨우 성한 몸을 가지고 물러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 이 참상을 목도하던 곤륜파 제자들조차 크게 동요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심리적 공황 상태는 전염병처럼 점점 번져 갔다.
 “당황하지 말고 애초에 연습한 대로만 움직여라!”
 태허존자의 영도력은 상당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던 곤륜파의 제자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흐트러짐 없는 규율을 선보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뇌진천의 주변으로는 어느덧 심층적인 포위망이 수십 겹이나 형성되었다. 잠시 후, 뇌진천을 포위한 진형이 회전하며 차륜전이 전개되었다.
 철저히 방어 위주의 항마검진(抗魔劍陳)은 서서히 옥죄어 사냥감의 숨통을 죄어드는 구렁이의 똬리처럼 강력했다.
 항마검진은 한쪽이 뇌진천으로부터 공격을 받을라치면 신속하게 뒤로 빠지고, 다른 모든 방면에서 그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뇌진천이 공격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에 맞춰 역동적으로 변환하면서 견고한 방어진을 유지했다.
 뇌진천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철저히 회피하면서도 끊임없이 그에게 움직임을 강요했다.
 제일선에서 뇌진천을 상대하다가 지친 무인들은 어느새 후위로 빠진 다음, 진형 밖으로 이탈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물도 마시고 음식도 섭취했다. 그런 다음, 다시 교대하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순환에 의해 검진은 견고함을 유지했다.
 
 ***
 
 “벌써 사흘 주야가 지났건만, 저놈은 도대체 지칠 줄을 모르는군. 정말 인간이 아닐세!”
 “이러다가 자칫 항마검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저 혈귀의 먹이가 될지도 몰라.”
 항마검진의 구성원으로 역할 행동을 하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갈 무렵,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들기 시작했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천둥소리까지 들려왔다.
 뇌진천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뇌진천이 전신에서 자아내는 맹렬한 기장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거무스름한 기운이 이글거렸다.
 꽈과아아아앙!
 천지가 떠나갈 듯한 굉음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뇌진천의 신형을 향해 번개가 내리꽂혔다.
 지축이 울리는 폭발과 함께 그곳은 연기가 자욱해졌다.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에 견고하던 진형은 대번에 허물어졌고, 그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 침착하라! 원래의 위치를 고수하라!”
 태허존자는 목청껏 외치며 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는 사이, 연기가 서서히 걷히면서 시야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뇌진천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마치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멍만이 횅댕그렁하게 생겨나 있었다.
 “큰일이다. 놈이 사라졌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제2장 반로환동(返老還童)
 
 
 1
 
 “흑흑흑! 흑흑흑!”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예쁘장한 아이 하나가 구슬프게 흐느끼며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팔구 세쯤 되었을까?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아이는 시야가 탁 트인 바위 위에 쭈그리고 앉아 병아리처럼 햇볕을 쬐었다. 몸이 좀 데워지자, 아이는 재차 발걸음을 옮기며 산속을 배회했다.
 “꺄아∼앗!”
 언덕 위를 걸어가던 아이는 불쑥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균형을 잃은 아이는 언덕 아래로 굴렀다.
 마침 그 하단으로는 낙엽이 잔뜩 쌓여 있었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몹시 놀란 아이는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런데 뭔가를 발견했는지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그쳤다.
 “헤에!”
 아이의 두 눈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연이어 아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앞쪽으로 쌓인 낙엽을 마구 파헤쳤다.
 잠시 후, 구덩이가 드러났다. 구덩이의 앞쪽으로는 커다란 고목이 서 있었고, 구덩이의 위로는 나무뿌리 몇 갈래가 뻗어 나와 마치 지붕 뼈대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덧붙여 낙엽은 일종의 기왓장 정도랄까?
 아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덩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뭔가 허연 것이 보였는데, 짐승의 털 같기도 했다.
 한껏 호기심이 동한 아이는 주변에서 모서리가 뾰족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고는 이미 삭아 있는 나무뿌리를 마구 내리쳐서 부수었다.
 그러자 구덩이 속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구덩이의 공간은 꽤나 넓었기에 아이는 아예 그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이는 곧이어 저 안쪽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백설처럼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눈썹을 지닌 할아버지였다.
 고목의 뒤쪽은 절벽인데, 나무뿌리로 인해 그쪽으로도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할아버지도 아마 그곳을 통해 구덩이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즉, 아이는 할아버지가 건드리지 않고 고이 남겨 둔 것으로 보이는 위쪽 지붕을 다 뜯어내 멋대로 난입한 셈이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앞에서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이는 눈앞의 할아버지가 잠든 것으로 여겼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의 표정이 점점 새침해졌다.
 조바심을 내던 아이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야! 야! 어서 눈 좀 떠 봐. 어서 눈 좀 떠 봐. 야! 어서 눈을 떠서 내 얼굴을 좀 봐 줄래?”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가 보기에는 말이다.
 “아이잉! 나 배고파! 어서 일어나서 나한테 맛있는 걸 주란 말야. 야! 야! 어서 눈 좀 떠 봐!”
 아이가 아무리 고함쳐도 할아버지는 눈을 뜨기는커녕 돌부처처럼 미동도 없었다.
 혼자 소리치던 아이는 할아버지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대뜸 그의 긴 수염을 마구 잡아당겼다. 수염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몸을 한 바퀴 휘감고 있던 백발의 머리칼까지도 마구 잡아당겼다.
 “아이 참! 야 이 잠꾸러기야! 이제 그만 일어나!”
 
 ***
 
 ‘기척이나 호흡으로 보아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민간인이라고 여겨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대체 뭐야, 이 녀석은? 곤륜파의 떨거지들 때문에 극심한 내상을 입어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 직전이거늘······.’
 뇌진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연방 소리쳤다.
 “야! 어서 일어나! 어서!”
 ‘으윽! 어린아이의 이런 앙칼진 소리는 정말 딱 질색인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내가요상(內家療傷)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도 없고, 이거 정말 미치겠군.’
 “일어나! 일어나! 당장 일어나란 말이야!”
 한동안 난리 치던 아이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이제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려나? 그래, 이제라도 물러나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었던 걸로 해 주지. 고마운 줄 알아.’
 그것은 섣부른 기대였다.
 아이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뇌진천의 우측 눈꺼풀을 강제로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뇌진천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으나, 덕분에 아이의 모습은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직 많이 어린 데다가 곱상한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외견상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뇌진천은 아이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통해 소년임을 알아차렸다.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던 이 혈해존자가 이런 쥐방울만 한 꼬맹이에게 이런 농락을 당하게 될 줄이야.’
 뇌진천이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동안에도 소년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은 계속되었다. 귀에다가 바람을 불기도 했고, 콧구멍에다가 손가락을 쑤셔 넣기도 했다.
 발바닥을 간질이기도 했고, 겨드랑이를 간질이기도 했다.
 급기야 소년은 목마라도 타려는 듯 그의 어깨 위에 양다리를 걸치고 올라앉기까지 했다.
 소년은 마치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뇌진천의 전신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그것도 금세 질렸는지 소년은 그로부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으아앙! 으아아앙! 으아아아앙! 어째서 나를 모른 척하는 거야? 나, 너무 무섭고 힘들어. 그리고 배도 너무 고프단 말이야. 제발 눈 좀 떠 봐! 제발 날 좀 봐 줘!”
 마치 유리를 긁는 것 같은 소년의 앙칼진 목소리는 뇌진천의 심기를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군. 감히 내 성질을 이토록 건드리다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내 당장 네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버릴 테다. 아니, 그러면 너무 쉽게 끝나니까 안 되지. 그래, 천천히 가죽을 벗긴 다음, 불태워 죽여 주마.’
 이렇듯 무시무시한 생각이 무색하게도 뇌진천의 귓전에는 전혀 뚱딴지같은 내용의 명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내가 할부지한테 선물 하나 줄게. 이걸 줄 테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알았지?”
 소년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아기자기한 목걸이였다. 소년은 그것을 걸어 주려고 뇌진천에게로 재차 다가갔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조금만 더 있으면 다 끝나는데······. 젠장!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이로군.’
 뇌진천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소년은 그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려 했으나, 지나치게 긴 머리카락 때문에 불가능했다.
 잠시 망설이던 소년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마침 발검된 상태로 한쪽 구석에 놓인 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헤헤헤! 저거면 되겠다.”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며 칼의 손잡이를 손에 거머쥐고서 들어 올리려고 했다.
 “아이 참. 뭐가 이렇게 무거운 거야?”
 소년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이얍!”
 그렇지만 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내 폭마혈검에 손을 대다니······. 당장 관두지 못해?’
 그때였다. 낑낑거리던 소년은 얼떨결에 폭마혈검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금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손에서 미끄러진 폭마혈검은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마혈검의 서슬 시퍼런 칼날은 뇌진천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태껏 많은 사람의 피 맛을 보더니 이제는 주인의 것까지 맛보고 싶은 모양이다.
 ‘윽, 이런!’
 뇌진천은 운기조상을 도중에서 중단해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겨우 폭마혈검의 칼날은 피해 냈다. 그러나 상태가 아주 심각해졌다. 전신의 혈관이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외부로 돌출되었다.
 급기야 눈과 코, 귀를 비롯한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에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이대로라면 앞으로 반각도 채 못 되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이제야 겨우 바깥세상으로 나왔거늘,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뇌진천의 시선은 엎어진 채 아파서 울고 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래, 그 방법밖에 없어. 비록 이 그릇에 모은 막대한 공력은 다 날아갈 테지만, 곤륜의 무공절학들을 집대성하여 창안이 무극신공(無極神功)을 위시하여 여태껏 축적한 모든 실전경험과 강호에 대한 지식은 고스란히 이어진다. 비록 육체적으로 새로 시작한다고 해도 다시금 무림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을 터. 좋아. 결행하자!’
 뇌진천은 가까스로 몸을 가눈 다음,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소년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그 일대는 갑자기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구덩이 속이 온통 찬란한 광채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실로 장관이었다.
 구덩이 밖으로는 광채의 안개가 녹음이 우거진 숲 전체로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잠시 후, 휘황찬란한 광휘가 모두 사라지자, 뇌진천의 거구는 썩은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만히 엎드려 있던 소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소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까 전과 같은 개구쟁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매서운 안광을 번뜩이며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몸 풀기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탈혼대법(奪魂大法)은 성공적인 듯하나······.”
 소년 뇌진천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몸집이 작은 건 둘째 치고, 이 정도로 약골일 줄은 몰랐군. 이걸 쓸 만하게 만들려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소년 뇌진천은 금세 체념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화경(神化境)을 넘어서야 또다시 탈혼대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겠군. 어디 보자······.’
 뇌진천은 깊은 사색에 잠겨 들었다.
 “부유한 상단의 금지옥엽이라······. 이제야 이 녀석의 아까 그 언동이 이해되는군. 기왕 이리된 이상,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는 수밖에······. 그래, 이제부터 난 한수겸(韓粹謙)이다.”
 
 
 2
 
 만상상단(萬象商團)은 청해성(靑海省)을 대표하는 상단으로 서쪽의 오로목제(烏魯木齊)와 남쪽의 랍살(拉薩)을 연결해 주는 서녕(西寧)에 기반을 두었다.
 전장, 주루, 객잔, 도박장 등 청해성 곳곳에 백여 개에 달하는 점포를 운영했을 뿐 아니라, 무예가 뛰어난 표사들을 수백이나 둔 표국도 거느리고 있었다.
 만상상단이 그동안 청해성에서 이토록 크게 성장한 것은 곤륜파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곤륜파도 반대급부로서 만상상단으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운영 자금을 공급 받았다.
 바로 이 만상상단의 단주인 한경인(韓耿璘)에게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올해로 여덟 살이 된 한수겸이었다.
 한경인의 아내는 늦둥이를 낳다가 산고를 견디지 못하여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능숙한 산파의 도움으로 한수겸은 빛을 볼 수 있었으나, 지극히 허약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이에 한수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비롯하여 상단 가솔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그야말로 금지옥엽 중의 금지옥엽이었다.
 이런 성장 배경으로 인해 한수겸은 자연히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천방지축 개구쟁이가 되었다.
 몸이 약한 탓에 언제나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현실이 답답했던 한수겸은 오로목제로 표행을 떠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 나귀가 끄는 짐수레의 상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표행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발견되기는 했지만, 한수겸은 돌아가는 걸 한사코 거부했다.
 표행을 이끄는 표두로서도 만상상단에서는 황태자나 다름없는 소단주를 강제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 소식은 금세 한경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비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들에게 한 번쯤은 바깥바람을 쐬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표사들의 수를 더욱 보강함과 더불어 한수겸의 표행 참가를 허락했다.
 곤륜산 근처에서 행렬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단조로운 표행에 싫증을 느낀 한수겸은 표사들의 눈을 피해 행렬을 이탈했다가 길을 잃었다.
 그렇게 하여 숲 속에서 한동안 헤매던 한수겸은 뇌진천과 조우하고, 결국 탈혼대법에 의해 몸까지 빼앗긴 것이다.
 
 ***
 
 뇌진천은 자기가 원래 입고 있던, 그러나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예전의 육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그야말로 무림에서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강환지체(剛環之體)였거늘······.”
 그랬다.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강환지체는 무림지존을 위해 하늘이 내렸다고들 하는, 그야말로 무공에 최적화된 특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육체였다.
 무림의 역사상 불세출의 위명을 떨쳤던 이들은 하나같이 강환지체였다는 게 강호의 정설이다.
 태을진인의 사부이며, 곤륜파의 전임 장문인이었던 태명진인(太命眞人)은 녹림의 무리에 의해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뇌진천을 우연히 발견하여 곤륜파의 문하생으로 거두었다.
 아무리 장문인이라고는 해도 이런 방식으로 제자를 뽑는 것은 규율이 엄격한 곤륜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경우였다. 그러나 본산에서는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뇌진천이 강환지체로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이다.
 곤륜파 수뇌부는 뇌진천의 신상을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간다면 정파와 사파의 구분 없이 뇌진천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뇌진천은 본산의 다른 문하생들과 마찬가지로 조사동(祖師洞)에서 개파조사를 비롯한 역대 조사들에게 제례를 올리고, 곤륜파의 장문인과 집법장로들 앞에서 정식으로 사제의 예를 갖춘 이후, 제일 말단의 제자로 출발했다.
 그러나 역시 진주는 진흙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동료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뇌진천이 강환지체라는 사실은 금세 본산의 제자들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곤륜파의 제자로 확실히 자리 매김을 한 터라 수뇌부에서도 그가 사문을 배신하고 다른 곳으로 갈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못 먹는 밥이라면 재라도 뿌리자는 심산으로 외부의 자객에 의해 암살을 당할까 봐 노심초사하여 뇌진천을 더욱 특별하게 대우했다.
 곤륜파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뇌진천을 훈육했다. 어지간한 영약들도 죄다 뇌진천의 몫으로 돌아갔다. 곤륜파에서는 그야말로 황태자로 자라난 것이다.
 이러한 관심과 특별 대우를 차치하고라도 과연 강환지체답게 뇌진천의 무공에 대한 성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목화솜처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먼저 그 어떤 무공이든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공의 증진 속도는 어지간한 무림인의 열 배 이상이었다. 이에 그는 고작 마흔의 나이에 곤륜파의 모든 절학을 습득하여 그 끝을 보았다.
 그 이후로도 뇌진천은 오로지 무공에만 매진하여 일갑자(육십 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출신입화지경(出神入火之境)에 이르렀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듯 무공에서 더 이상 이룩할 것이 없어질 정도가 되자, 뇌진천의 관심사는 서서히 외부로 향했다. 이미 지존 중의 지존이 되어 버린 그는 사문의 어른들이나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고리타분한 법도나 명분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온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 꿇리겠다는 맹렬한 야심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마음을 점령했다.
 일단 새로운 목표를 정하자, 뇌진천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을 거두어 준 태명진인을 제외한 수뇌부를 전멸시키고 단숨에 곤륜파를 장악한 것이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던 태명진인만큼은 전신의 혈도를 제압하여 지하의 뇌옥에 감금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것이 그가 베푼 유일한 자비였다.
 그 이후, 뇌진천은 정파무림의 양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와 무당파까지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숭의맹에서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못 내던 화정회(火正會)까지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소림사의 방장대사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곤륜파와 숭의맹의 오랜 혈맹 관계는 완전한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화정회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회주가 뇌진천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내분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흑혈회 역시 그때 갈라져 나온 일파였다. 그 이후, 화정회는 내부 결속을 위해 수라혈교(修羅血敎)로 개칭하게 된다.
 이토록 무림 전체를 홀로 휘저으며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지금은 지극히 작고 허약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무공은커녕 일상에서의 평범한 활동조차 쉽지가 않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뇌진천은 회한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이제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예전의 육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3
 
 “이제 와서 미련을 가져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렇게 중얼거린 뇌진천은 오른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폭마혈검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무심코 들어 올리려 했다.
 “으악!”
 뇌진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했다. 손목과 팔꿈치에서 찌릿한 고통이 급습해 왔던 것이다.
 “헉! 뭐야?”
 탈혼대법이 펼쳐지기 전에 원래 몸의 주인이 너무 무리를 해서 칼을 들어 올린 탓에 관절과 인대에 충격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자신이 비명을 토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한편, 오기가 동한 뇌진천은 왼손을 동원하여 재차 들어 올리려 했다.
 “으윽!”
 조금 전과 같은 비명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뇌진천의 미간에 깜찍한 주름이 생겨났다.
 “제기랄! 이 정도 무게의 검은 내가 다섯 살 때도 거뜬하게 들고 휘둘렀건만······.”
 바닥에 널브러진 폭마혈검을 노려보던 뇌진천의 얼굴에는 금세 체념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의 내 형편에 폭마혈검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욕심이지. 좋아. 이건 잠시 이곳에 보관해 두자.’
 뇌진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 쪽의 통로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저곳밖에 없는데······.’
 뇌진천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통로 위로 드리운 나무뿌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팔에 얼얼한 고통 때문에 금세 놓쳐 버렸다. 제자리에서 꼬꾸라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천하의 혈해존자가 대체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금 도약한 뇌진천은 드디어 나무뿌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 순간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구덩이 위로 올라서려고 애썼다.
 두 팔은 파르르 떨렸지만, 물장구치듯 앙증맞은 두 다리를 흔들면서 몸부림을 친 끝에 간신히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뇌진천은 제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헉헉헉!”
 턱밑까지 차올랐던 호흡이 가지런해지면서 몸의 열기가 식자, 이제는 오싹한 한기가 덮쳐 왔다.
 “헉! 뭐야, 이건 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천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의 가냘픈 전신은 안쓰러울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추위!
 그것은 까마득하게 오래전에 한서가 불침하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던 뇌진천으로서는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천하의 혈해존자가 이깟 추위 때문에 떨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아무리 떨지 않으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늦가을, 홀로 산속에 있는 가녀린 꼬마의 몸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내부에서 또 다른 고통이 덮쳐 왔다.
 꼬르르륵!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운기조식만으로도 신진대사를 조절할 수 있었던 뇌진천으로서는 배고픔 역시 낯설었다. 뱃가죽이 등짝과 조우하려고 발광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태산이군.”
 뇌진천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먹을 만한 게 없을까?’
 잠시 후, 뇌진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사삼(砂蔘, 더덕)이로군. 마룡동에서 이끼만 먹으며 이십 년을 버틴 나로서는 그야말로 훌륭한 식사 거리가 아닌가?’
 더덕 옆에 쪼그리고 앉은 뇌진천은 뿌리 부분의 흙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사리같이 가녀린 손으로 쉽게 파일 만큼 땅이 무르지가 않았다. 손끝이 아파 오자, 모서리가 뾰족한 돌멩이를 주워서 그것으로 땅파기 작업을 재개했다.
 어느 정도 땅을 파내자, 뇌진천은 이제 줄기의 밑동을 두 손으로 거머쥔 채 힘껏 잡아당겼다.
 이미 팔에는 감각이 없어진 터라, 아까 전과 같은 찌릿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껏 잡아당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더덕 뿌리가 전혀 뽑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부아가 잔뜩 치밀어 오른 뇌진천은 자기 성미를 이기지 못하여 제자리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만약 강환지체의 몸을 입고 있던 뇌진천이 이런 상태에 접어들었다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살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한동안 신경질을 부리며 난리를 치자, 그래도 다소 속이 시원해졌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허기가 기승을 부렸다.
 ‘배고픈 게 이리도 고통스러운 감각이었던가?’
 게다가 속에서 치민 천불이 가라앉아 잠시 잊혀졌던 추위까지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에 뇌진천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더덕을 노려보았다.
 “어디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 혈해존자의 위명을 걸고 맹세하건대 반드시 너를 먹고야 말리라!”
 
 ***
 
 더덕의 밑동을 두 손으로 꽉 거머쥔 뇌진천은 자신의 몸무게까지 실어 전력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뽀∼오옹!
 너무나 용을 쓴 탓에 뒤에서 새어 나온 소리였다. 그러나 뇌진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단단히 악에 받친 그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내질렀다.
 “이야아∼얍!”
 기합이 효과가 있었던 탓일까?
 드디어 더덕이 뿌리째 뽑혔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레 뽑힌 탓에 뇌진천은 몸의 균형을 잃고서 그대로 허공중으로 떠올랐다. 분명히 그의 머리로는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과 같은 곤륜파의 탁월한 신법을 펼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몸이 따라 줄 리가 만무했다.
 “까아∼앗!”
 앙칼지면서도 깜찍한 비명에 이어······. 털썩!
 결국 뇌진천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나 아픈지 두 눈에서는 일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으아∼앙!”
 뇌진천은 부지불식간에 이와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엉덩이의 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될 무렵, 그는 황급히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또한, 뇌진천은 자신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액체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맹호위서(猛虎爲鼠)라고 했던가?
 참으로 위엄을 잃은 호랑이는 쥐와도 다름이 없음을 처절하게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뇌진천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천하의 혈해존자가 엉덩방아를 찧어서 아프다고 찔찔 짜게 될 줄이야!
 뇌진천에게는 이와 같은 배고픔이나 추위, 고통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뇌진천은 이내 자존심도 직면한 배고픔 앞에서는 호사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 것도 없을 테지. 일단 허기부터 달래야겠다.’
 뇌진천의 시선은 바로 앞에 떨어져 있던 더덕 뿌리로 향했다. 큰 뿌리에서 옆으로 뻗은 작은 뿌리를 떼어 낸 그는 흙먼지를 잘 털어 낸 다음, 한 입 깨물었다. 와그작 하는 소리와 더불어 쓰디쓴 맛이 그의 미각을 옥죄어 왔다.
 “캑! 퉤!”
 뇌진천은 당장 입 안에 있던 더덕 뿌리를 뱉어 버렸다. 도무지 인간이 먹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썼던 것이다.
 “이건 또 뭐야? 더덕 맛이 도대체 왜 이래?”
 사실, 문제는 더덕이 아니었다. 언제나 진수성찬만 접하다 못해 그마저도 편식을 일삼아 왔던 귀공자의 혀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뇌진천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
 뇌진천은 더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야말로 계륵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먹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 무렵, 그토록 난동을 부리던 배고픔은 다소 잦아들었다. 언제 또 괴롭힐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은 견딜 만했다.
 ‘사삼 정도면 산에서는 정말 고급 식량인데······. 이런 몸을 가지고는 심산유곡에서 무공 수련에만 정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어. 수련은커녕 하루도 못 견디고 뒈져 버릴지도 몰라. 일단 몸부터 제대로 추스른 다음에 무얼 해도 해야겠어.’
 뇌진천은 몸의 원래 주인의 기억을 더듬어 표행 중이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도 저곳이 내 무덤인데······.’
 뇌진천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다시 구덩이로 다가갔다. 그는 주변에 있는 낙엽이나 나뭇가지들을 한 아름씩 가지고 와서 그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공을 들인 끝에 이젠 예전의 육체가 있던 구덩이는 감쪽같이 은폐되었다.
 뇌진천은 그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잎사귀가 무성한 고목들이 많고 가을은 더욱 깊어지는 중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많은 낙엽이 떨어질 테고, 결국 무덤은 점점 더 깊숙이 감춰질 것이다.
 ‘이곳은 일반인들은 쉽게 진입하기 힘들지만, 또한 강호인들의 입장에서는 은신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그야말로 교묘하게 심리적 사각을 파고든 지역이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무덤은 쉽사리 발각되지 않을 터. 언젠가 때가 되면 내 다시 한 번 찾아와서 폭마혈검을 회수하리라.’
 
 ***
 
 대략 이 식경을 헤매던 끝에 뇌진천은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이르렀다.
 그 순간, 뇌진천의 두 눈은 크게 떠졌다.
 그곳에는 처절한 살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탓인지, 전원이 몰살을 당한 상태였다.
 그 순간, 뇌진천은 곤륜파를 쳐들어온 흑의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그들의 두목은 무척 강한 자였다.
 “아마도 그놈들에게 당한 모양이군.”
 뇌진천은 앞이 캄캄해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은 서녕(西寧)에 있는 것 같은데, 대체 그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저 한숨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뇌진천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저쪽으로 말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훗! 저걸 타고 가면 되겠군.”
 뇌진천은 말을 향해 걸어갔다. 고삐를 거머쥐려고 하자, 말은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화들짝 놀란 그는 뒤로 자빠져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젠장! 이젠 한낱 미물까지 나를 우습게보는구나. 근데 어찌 된 게 이놈의 몸뚱어리는 걸핏하면 자빠지는 거야? 이렇게 둔해서야 원. 그러고 보면, 설사 저놈이 가만히 있다 해도 이렇게 작고 둔한 몸으로 저걸 제대로 탈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이렇게 된 이상, 먹을 거나 찾아보자.”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 와중에 뇌진천은 수송 중이던 짐뿐만 아니라, 돈과 귀중품까지도 그대로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원한 관계인가? 하긴 청해성에서 상단을 한다면 곤륜파로부터 보호를 받아 왔을 테고······. 곤륜파를 공격한 놈들의 입장에서는 이들 역시 적이나 마찬가지일 터.’
 뇌진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진지한 표정은 금세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점점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뇌진천은 물통과 건량을 발견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얼른 허기와 목마름을 달랬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시체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배가 부르자, 뇌진천은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 여행을 하려면 노자가 필요하지.”
 뇌진천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동전이나 은자는 건드리지 않고, 종이로 된 전표만을 챙겼다.
 ‘그래도 청해성에서는 제일가는 상단에서 발행한 것이니, 어디에서나 다 통할 테지. 허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뇌진천은 주로 여자 시체들을 살피면서 진주나 목걸이, 반지와 같이 무게는 가벼우나 가치는 큰 귀중품들을 챙겨서 안주머니 속에 잘 갈무리했다.
 또한, 뇌진천은 두꺼운 피풍의 하나를 발견했다.
 ‘노숙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뇌진천은 비수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으로 큰 피풍의를 자신의 몸에 맡게 잘랐다. 그런 다음, 어깨 위로 둘렀다. 그러자 꽤 그럴 듯한 차림새가 되었다.
 ‘무림제패 같은 건 잠시 접어 두고 일단은 새 육체의 주인이 살았던 집으로 가자.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야.’
 
 
 4
 
 뇌진천은 이윽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올랐다. 뇌진천은 할 수 없이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군. 이래서야 대체 언제 서녕까지 간단 말인가? 그걸 떠나 당장 오늘이 문제로군.”
 뇌진천은 서글픔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몰골이 참담하기가 이를 데 없다.
 ‘날이 저물기 전에 얼른 객잔을 찾아내야 한다.’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천은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외딴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이 뇌진천의 시야에 들어왔다. 완전히 퇴락하여 주변의 담장은 허물어졌고, 곳곳에는 잡초로 뒤덮인 상태였다.
 본당의 건물 또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처마 밑은 온통 거미줄로 뒤엉켜 있었다.
 이미 날이 거의 저물어 가던 터라 더는 객잔을 찾아 헤맬 여유가 없었다. 이에 뇌진천은 산신각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뇌진천은 서너 걸음을 옮기다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산신각 안으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이건 틀림없이······.”
 뇌진천은 황급히 발걸음을 돌이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달았다.
 산신각 안에서 십여 마리나 되는 늑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등을 보이고 달아난다면 녀석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지금의 난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인 체력이나 완력조차 없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셈이지. 궁여지책으로 어린아이의 몸을 빌렸건만, 한낱 이리 떼의 밥으로 전락할 줄이야.’
 뇌진천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대장 늑대를 노려봤다.
 비록 어린아이였으나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대장 늑대 또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듯 뇌진천과 늑대 무리의 대치는 잠시 이어졌다.
 그러나 대장 늑대는 금세 상대방의 허세를 간파했다. 그와 동시에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덮쳐 왔다.
 ‘젠장!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나 내 비록 늑대에게 갈가리 찢길지언정 절대로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리라.’
 뇌진천은 눈도 감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장 늑대가 뇌진천의 지척까지 이르기 직전에 어디에선가 수리검 하나가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그것은 대장 늑대의 몸에 적중했다.
 날아든 수리검의 위력이 제법 대단하여 대장 늑대는 하릴없이 반대편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수리검이 날아든 방향에서는 청색 무복의 장한들 예닐곱이 달려오고 있었다. 대장 늑대가 당한 데다가 범상치 않은 인간들이 몰려오자, 나머지 늑대들은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저놈들은 또 뭐지?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뇌진천은 몸 주인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특히 무리를 이끄는 중년인의 얼굴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이 아닌 건 분명하군. 아무튼 살았다.’
 뇌진천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한경인의 첫째 아들이자 만상표국의 총표두를 맡고 있던 한성호(韓成晧)였다.
 “겸아!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그래도 여전히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던 뇌진천의 귓전으로 흘러드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어!”
 이와 같은 신음과 더불어 뇌진천은 제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갑자기 긴장이 사라지자 두 다리도 풀려 버린 것이다.
 한성호는 신속하게 다가와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그를 안아 들었다.
 ‘헉!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허나 이놈의 몸뚱어리 자체가 부실한 걸 난들 어찌하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난감해진 뇌진천은 얼른 눈을 감고 기절한 척했다. 그러나 워낙 피곤했던 터라 그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당황하여 막내둥이의 상태를 살피던 한성호는 코 고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3장 와호잠룡(臥虎潛龍)
 
 
 1
 
 긴 속눈썹으로 둘린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자, 그 아래에 감추어진 눈동자가 깜찍한 자태를 드러냈다.
 반쯤 떠진 뇌진천의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깔끔한 침상, 휘황찬란한 휘장과 장식품들. 잠시 후, 멍하던 그의 두 눈동자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대체 뭐가 어찌 된 거지?’
 바로 그때, 뇌진천의 귓전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겸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홍삼의 소녀가 보였다. 한설지(韓雪池)였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된 한설지는 몹시 귀여운 소녀였다.
 양옆으로 땋아 내린 머리칼은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그녀의 우윳빛 피부만큼이나 산뜻했고, 사과처럼 빨갛게 영글어 가는 두 뺨은 싱그럽기가 그지없었다.
 침상으로 뽀르르 달려와서 뇌진천을 응시하는 그녀의 사슴처럼 큰 두 눈망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괜찮은 거야? 어디에 아픈 데는 없어?”
 ‘이 물건은 또 뭐지?’
 뇌진천은 도끼눈으로 한설지를 노려보았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계집인데?’
 아니나 다를까? 한설지는 느닷없이 뇌진천을 껴안았다.
 “캐액!”
 뇌진천은 신음했다. 한설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꽉 껴안았기 때문이다.
 뇌진천은 한설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그녀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열이 뻗친 그가 욕설을 내뱉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겸아, 네가 죽었을까 봐 이 누나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정말 고마워. 살아 있어 주어 정말 고마워.”
 향긋한 방향과 더불어 한설지의 고동 소리와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뇌진천은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이런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기랄! 낯간지럽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뇌진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던 한설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확 바뀌었다.
 특유의 말괄량이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이다.
 한설지는 갑자기 새침한 시선으로 뇌진천을 응시했다.
 “쳇! 뭐야? 누님께서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너는 무뚝뚝하게 가만히 있다니······. 겸아, 넌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대체 이 계집아이는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지?’
 뇌진천은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한설지의 얼굴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에∼에? 너, 어쩐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연이어 한설지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몰려왔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표정의 소녀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어린 나이에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으니······.”
 한설지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뇌진천을 가만히 응시했다.
 “겸아! 너 정말 괜찮아?”
 뇌진천은 한설지의 눈길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지금껏 그 누구와의 눈싸움도 피해 본 적 없는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 자체가 몹시 괴로웠다.
 “괘,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뇌진천이 시선을 회피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한설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쳇! 뭐야? 말투가 왜 그래?”
 한설지의 얼굴에는 금세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오∼라! 이제 알았다. 겸아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요게, 감히 누나를 또 가지고 놀고 있어? 어디 맛 좀 봐라.”
 한설지는 또다시 뇌진천에게로 덮쳐 왔다. 그리고는 그의 겨드랑이와 목, 그리고 배를 사정없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
 
 “다, 당장 그, 그만두지 못할까? 깔깔깔!”
 “요게 아직도 누나를 놀려? 아직 멀었어. 멀었다고.”
 강환지체일 때는 간지럼 같은 건 아예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의 몸은 그야말로 간질이는 시늉만 해도 간지럼을 느끼는 체질이었다.
 독보강호하면서 극한의 고통을 다 감내해 온 뇌진천이었지만, 간지럼이라는 감각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깔깔깔! 제, 제발······. 그, 그만!”
 격렬하게 웃은 탓에 두 눈가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으며, 복근에서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
 뇌진천이 이처럼 진저리를 치며 괴로워하자, 한설지는 이윽고 간지럼 세례를 멈추었다. 뇌진천은 너무 지친 나머지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뇌진천은 아예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한설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앗, 괜찮아?”
 뇌진천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심신이 많이 지쳤을 텐데, 깜빡했어. 정말 미안해.”
 꼬르르륵!
 뇌진천의 배에서 나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한설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힝, 이제 보니 배가 고파서 그런 거였구나. 잠깐만 기다려. 이 누나가 금방 맛있는 거 차려서 가져올 테니까.”
 이 말을 남긴 한설지는 문밖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그 광경을 곁눈으로 지켜보던 뇌진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2
 
 홍삼의 여인 하나가 다섯 개의 찻잔이 얹힌 다반(茶盤)을 들고서 회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넓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바로 만상상단의 회의청이었다.
 그 안에서는 단주인 한경인의 장자이자 총표두이자 호위 총관인 한성호, 외총관을 맡고 있는 차남 한성진(韓成進), 내총관을 맡고 있는 삼남 한성준(韓成俊), 그리고 집사인 추동진(錘同進)과 더불어 회의 중이었다.
 차 수발을 드는 여인이 각 사람의 좌석 옆쪽 탁자 위에 찻잔을 하나씩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자, 대화는 재개됐다.
 “지금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이곳 서녕의 읍내에 있는 점포들을 제외하고는 청해성의 각처에 있던 상당수의 사업장이 정체불명의 무인들로부터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더 이상 영업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고요.”
 한성호의 말에 한경인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표행 중인 행렬이 습격을 받은 것도 그렇고, 대체 누가 본 상단을 이렇게 괴롭힌단 말이냐?”
 이번에는 추동진이 말을 받았다.
 “소인의 생각에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흑혈회 휘하의 무인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흑혈회라면?”
 “오래전에 신강(新疆)의 화정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청해성에서 새롭게 기반을 다진 사도 집단입니다.”
 “헌데, 그들이 대체 어째서 무림 조직도 아닌 우리 만상상단을 공격한단 말인가?”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을 수가 없듯이 무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흑혈회는 근자에 들어 청해성의 사파무림을 완전히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랫동안 청해성 강호의 맹주로 군림해 오던 곤륜파까지 노리는 모양입니다. 들려오는 풍설에 따르면 얼마 전에는 곤륜파의 본산까지 쳐들어간 모양입니다.”
 한경인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본 상단을 몰락시켜서 곤륜파의 자금줄을 끊어 버리겠다는 속셈이로군.”
 “그렇습니다.”
 “허면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십 년 전에 곤륜파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힘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그때 숭의맹에서 파문을 당하면서 문하생과 속가제자의 숫자도 크게 줄어서 곤륜파는 줄곧 쇠퇴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반면, 흑혈회는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곤륜파가 흑혈회에 의해 멸문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인가?”
 “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흑혈회의 패권 다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오리무중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추 집사의 말이 지당합니다. 표행을 떠났다가 몰살을 당한 표사들과 쟁자수들의 유족들에게도 상당한 보상금이 지급되어 지금 우리 상단의 재정이 많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지방의 점포들은 모두 포기하고 서녕 성읍 내에서의 장사에만 전념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한성진의 의견이었다. 연이어 한성준이 말을 받았다.
 “청해성에 널리 포진해 있던 곤륜의 지파들도 대부분 흑혈회의 공격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지방의 사업장들은 영업을 계속하더라도 제대로 보호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지요.”
 이번에는 다시 한성호가 말했다.
 “소자가 맡고 있는 표국 사업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전의 일로 표사와 쟁자수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남은 자들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국은 신용이 생명인데, 이번 일로 그간 쌓아 온 신뢰가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의뢰가 갑자기 뚝 끊겨 버린 게 바로 그 증거이지요. 그러니 표국은 일단 접고, 표사들은 본 상단의 호위 무사로, 쟁자수들은 전원 사환으로 전용할 것을 건의합니다.”
 한경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인지······. 그래도 우리 겸아가 무사하게 돌아와서 참으로 다행이다. 헌데, 그런 큰일을 겪어서인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더구나.”
 한성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말수도 현저하게 적어졌고, 웃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을 테지. 앞으로도 너희가 막둥이를 잘 챙겨 주어라.”
 한성진이 수심에 잠긴 한경인을 위로했다.
 “아버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지아가 항상 곁에서 돌봐주고 기운도 북돋아 주고 있으니 머지않아 본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게다가, 꼭 나쁜 쪽으로만 변화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예전에는 그렇게 편식을 하더니, 이제는 전 같으면 전혀 입에도 대지 않던 음식들까지 아주 골고루 먹습니다. 그뿐 아니라, 끼니마다 먹는 음식의 양도 예전의 갑절이나 됩니다.”
 그 말에 한성준은 미소하며 말했다.
 “역시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고생을 해 봐야 철이 드는 모양입니다. 비록 당장은 심적인 충격으로 침울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좋은 약이 될 겁니다.”
 그제야 한경인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혹시 다른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희가 막둥이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
 
 
 3
 
 “이 누나가 해 줄게.”
 “글쎄, 됐다지 않느냐? 목욕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어서 물러가거라.”
 “지금까지는 늘 내가 씻겨 주었잖아? 예전에는 걸핏하면 나한테 목욕을 시켜 달라고 떼를 쓰던 주제에······.”
 “얼른 물러가라니까.”
 “너도 이제 사내라 이거지? 그치만, 내 눈에 넌 여전히 꼬맹이에 불과해. 아직은 널 사내로 인정해 주지 않을 테야.”
 한설지는 뇌진천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름대로 반항을 해 보았으나, 완력으로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뇌진천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버렸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그는 두 손으로 중요한 부분을 가리면서 버럭 호통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꼬맹이 주제에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부끄럼을 타는 거야? 엄마나 다름없는 누나 앞에서 가릴 게 뭐가 있다고?”
 뇌진천은 더는 참기가 어려워졌다.
 “야 이 경박한 계집년아! 당장 나가지 못해?”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그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던 남동생의 입에서 이런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자, 한설지의 두 눈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겸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대체 그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꺼져! 네년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란 말이야!”
 뇌진천이 다시 한 번 이렇게 소리치자, 한설지의 두 눈에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야 이 창기 같은 계집아! 빨리 안 나가?!”
 결정타였다.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의 한설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어른을 놀리다니······. 그래도 내 호통 한번에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군. 훗!”
 모처럼 혈해존자로서의 위신을 세웠다는 생각에 뇌진천은 무척 흐뭇해졌다.
 잠시 후, 뇌진천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뜨거운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목제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캬∼아! 조∼오타!”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던 뇌진천의 뇌리에는 놀란 표정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한설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고작 한소리 했다고 찔찔 짜고 지랄이야? 하여간, 계집아이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뇌진천은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 어째서 기분이 심란하지? 설마 내가 젖비린내 나는 그 계집아이한테 마음을 쓰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지금껏 험난한 강호를 살아오면서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수많은 인명을 죽여 온 내가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4
 
 휘이이이!
 북방에서는 벌써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녕의 시가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장소는 만상각(萬象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장원이었다.
 오 층짜리 고루거각(高樓巨閣)의 양측으로 길게 뻗은 행각은 중앙 정원을 병풍처럼 둘러쌌다.
 정방형의 평면을 이루는 대지의 중앙에는 가산(假山)과 부교(浮橋)가 딸린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자리했다.
 주요 건물들은 그것을 에워싸듯 주랑으로 연결된 채 각 방위별로 포진해 있었다.
 석사자상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 문루 아래의 정문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두터운 털가죽 옷을 입은 채로 바로 이 만상상단의 장원을 거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뇌진천의 발걸음은 후원으로 향했다.
 이제 이곳에 온 지 한 달쯤 되니,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여독도 다 풀린 듯하고, 그동안 포식하여 허하던 몸의 기운도 많이 보강되었군. 이제 슬슬 무공 수련을 시작해 볼까?’
 그 무렵, 뇌진천의 귓전으로는 기합이 들려왔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후원의 연무장에서는 만상상단의 호위 무사 여섯 명이 모여 목검을 휘두르며 검술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호위 무사 하나가 뇌진천을 발견했다. 그는 뇌진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공자님!”
 나머지 다섯 명의 호위 무사도 뇌진천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뇌진천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그들을 향해 가까이 걸어갔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뇌진천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하던 거나 계속해 봐.”
 호위 무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이 머뭇거리자 뇌진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계속하라니까.”
 뇌진천이 사뭇 엄한 표정으로 호통하자, 호위 무사들은 마지못해 둘씩 짝을 지은 다음 목검 대련을 재개했다.
 “야 이 멍청아! 몸을 그렇게 붕붕 띄우면 어떻게 해? 거기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뇌진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호위 무사들을 질책했다.
 만상상단의 단주가 애지중지하는 막내 도련님이라 감히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저런 꼬맹이가 무공에 대해 뭐라고 훈수를 놓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뇌진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흔히 검법을 연마할 때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의 움직임에만 신경 쓰기 쉽지만, 사실은 하체의 보법(步法)이 훨씬 중요하다. 검법이란 무릇 발을 초석으로, 다리를 거쳐 허리를 축으로 삼아 팔과 손을 통해 완성된다. 하반신의 안정이 선행되어야 전신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신속하고 정확하며 위력이 충만하게 깃들은 검식을 쏟아 낼 수 있는 것이지.”
 무공이라고는 전혀 배운 적도 없고, 평소에도 허약하기 그지없는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던 사공자의 입에서 무공에 대한 심도 있는 훈수가 나오자, 호위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뇌진천은 더욱 열띤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너희가 보여 주는 검법은 겉멋만 들어 있는 장난질에 불과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검이라는 것은 절대로 묘기를 부리는 도구가 아니다. 살인을 위한 흉기란 말이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모두 내어 버리고, 필요한 동작만 하는 게 핵심이다.”
 급기야 검법의 도(道)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오자 호위 무사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이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각자를 향해 눈짓했다.
 자연히 대련은 형식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뇌진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대로 못하겠느냐? 검술은 장난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거라. 언제나 실전을 염두에 두고 연습에 임하란 말이다.”
 뇌진천의 추상같은 질책에 호위 무사들은 다시금 진지하게 대련에 임했다.
 뇌진천은 준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실전에서는 자기 검의 길이를 고려해서 늘 자신의 간격에서 싸우도록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공격은 언제나 신속 정확하게 상대방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가야 하지. 사각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일종의 심리전이지. 상대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지점을 기습하여 의표를 찌르는 것이 승부의 핵심이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던 호위 무사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무공을 익히던 무인인 그들로서는 사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동안 검술에 대해 상당히 수준 높은 강론을 선사한 뇌진천은 이윽고 마무리를 지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뇌진천의 말에 호위 무사들은 입을 모아 대꾸했다.
 “네, 도련님!”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호위 무사들의 동작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자, 뇌진천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즛! 그래도 꼴에 무사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던 뇌진천은 체념한 듯 발걸음을 돌이켰다. 호위 무사들은 저만치 걸어가는 사공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5
 
 한설지는 행각을 따라 백화난만(百花爛漫)의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향하는 후원의 중앙에는 가산(假山)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그 앞으로는 연못이 자리했으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였다.
 기암괴석의 가산을 중심으로 곳곳에는 작은 누각들이 자리했고, 그것들 사이는 운남(雲南) 대리(大理)에서 산출되는 대리석이 융단처럼 깔린 주랑(柱廊)으로 연결되었다.
 아울러, 다채로운 화초들과 신선한 향내를 풍기는 수목들이 후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산 앞의 연못 위에는 흡사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수상의 누각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설지는 바로 그 수상 정자와 이어지는 돌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얼마 동안 연못 속의 잉어들을 가만히 구경했다.
 마침, 가산의 뒤편으로 걸어가는 뇌진천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우리 겸아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
 
 가산 뒤편의 공터에 이른 뇌진천은 두 손을 바닥에다 대고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금세 엎드리고 말았다.
 ‘고작 열 개를 채우지 못하다니······. 안 되겠다. 당분간은 완력과 체력 보강에 주력해야겠어.’
 뇌진천이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이었다.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으니, 한설지였다.
 한설지는 몹시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연방 그를 힐끔거렸다.
 뇌진천은 살그머니 다가서는 한설지를 쏘아보았다.
 열여섯 살이나 된 소녀가 자기 나이의 반절에 불과한 남동생의 눈치를 보는 광경이 꽤 이채로웠다.
 뇌진천은 얼마 전에 자기가 한설지에게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 표현을 해 본 일이 없는 뇌진천으로서는 그저 한설지가 눈에 거슬릴 따름이었다.
 “뭐냐?”
 뇌진천이 대뜸 이렇게 말하자 한설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냥 겸아 네가 보고 싶어서······.”
 “······.”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
 “미안해. 그때 일은 내가 사과할게.”
 “······.”
 “그치만, 겸아 너도 말이 좀 심했어. 아무리 화가 나기로서니 누나한테 그런 심한 욕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
 뇌진천이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서운 표정으로 응시하자, 한설지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그게 왠지 불쌍해 보였던 걸까?
 뇌진천은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미안!”
 뇌진천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컥! 뭐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당황할 만도 한 것이 뇌진천은 근 팔십 년에 이르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과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목소리도 작았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 불쑥 지나간 말이지만, 한설지는 그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그녀는 반색하며 말했다.
 “겸아! 방금 뭐라고 했어?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
 뇌진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지금 자기가 내뱉은 말 때문에 충격을 받은 그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거듭 요구하는 한설지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남동생이 악동 같은 눈길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한설지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니까.”
 “험험!”
 괜스레 헛기침을 한 뇌진천은 뒷짐을 진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설지도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뇌진천은 고개를 홱 돌렸다.
 “또 뭐야?”
 “아, 아니야.”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봐.”
 뇌진천의 퉁명스러운 말에 한설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그녀가 멀찌감치 걸어가는 걸 확인한 뇌진천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가산 앞 고목 아래에는 공터가 있었다. 몸집이 작은 뇌진천이 들어가면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쏙 들어간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기조식을 한번 시도해 볼까? 무극신공은 아직 익힐 여건이 되지 않으니, 우선은 적양공(赤陽功)부터······.’
 뇌진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법을 적용하려면 일단 마음을 비우고 입정(入精)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그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풀이 죽은 한설지의 얼굴이었다.
 뇌진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얼굴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한설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재차 고개를 흔들자, 또다시 울상을 짓고 있는 한설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처럼 슬픔에 잠긴 한설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에 뇌진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런, 제기랄! 그 계집년은 왜 자꾸 알짱거려서 내 심기를 다 흩뜨려 놓는 거지? 고것만 한 번 왔다 가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니까. 그래도 일단은 누나이니 어쩌지도 못하겠고······.”
 뇌진천은 지금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불편한 기분이 미안함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6
 
 여든 살의 노인에서 졸지에 여덟 살의 꼬마가 되자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석 달쯤 지나자, 뇌진천도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말투나 행동도 제법 어린아이처럼 취할 수 있게 되었고, 한설지를 비롯하여 만상상단의 가솔들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외적인 환경이 안정되고 한겨울의 추위도 한풀 꺾이자, 뇌진천은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에 돌입했다.
 뇌진천은 일 년 동안 공격이나 방어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몸만들기에 온전히 전념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근력과 체력, 유연성, 그리고 균형 감각까지 네 분야로 구분하여 체계적인 수련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열 개도 쉽지 않았던 팔 굽혀 펴기가 이제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단번에 백 개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십 리를 걷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십 리를 달리는 것도 가뿐해졌다.
 처음에는 다리를 모은 채로 두 손끝이 간신히 바닥에 닿았으나, 이제는 얼굴이 다리와 완전히 밀착될 정도였다.
 처음에는 개천의 징검다리조차 제대로 건너지 못했으나 이제는 폭이 좁은 석교의 난간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뇌진천은 훈장으로부터 글공부를 배우거나 가끔 한설지와 산책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강환지체를 기반으로 무공을 연마할 때는 성취가 너무 빨라서 중간 단계는 건너뛰기 일쑤였다.
 그러나 평균 이하인 몸으로 새롭게 무공을 익히면서 뇌진천은 기초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뇌진천은 예전에 시시하게 생각하던 곤륜파의 기본적인 무공들이 얼마나 탁월한지 잘 알게 되었다. 위에서 볼 때와 밑에서 볼 때의 차이는 실로 컸던 것이다.
 그래서 뇌진천은 자신이 마룡동에 있을 때 완성한 무극신공은 잠시 접어 두고 적양공을 비롯하여 곤륜파의 가장 기초적인 무공부터 차근차근 익혀 나갔다.
 뇌진천은 하루에 한 시진 이상 적양공의 조식(調息)을 하려 했다. 그런데 새로운 몸이 너무 둔감하여 좀처럼 기감(氣感)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진기회전(眞氣回轉) 자체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에 뇌진천은 내가요상술 가운데 하나인 추궁과혈(推宮過穴)을 응용하여 전신의 주요한 혈도를 수시로 지압하며 자극했다. 그 결과, 이윽고 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뇌진천은 언제나 적양공의 원리에 입각하여 몸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니, 이는 조신(調身)이었다.
 뇌진천은 복부 및 항문 수축, 온갖 종류의 체조, 혀로 입 안을 휘저으며 양손으로 신당혈(腎堂穴)을 문질러 주는 것 등등 곤륜파에 이제 막 입문한 초심자들이 사용하는 수십 가지의 조신법을 꾸준히 적용했다.
 뇌진천은 항상 적양공의 원리에 따라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니, 이는 조심(調心)이었다.
 또한, 뇌진천은 언제나 적양공의 원리를 적용하여 음식물을 섭취했으니 바로 식양생(食養生)이었다.
 항상 조심법으로 의식 훈련을 했으며, 음식물도 철저히 가려서 먹고, 씹는 횟수조차도 철두철미하게 통제했다.
 이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식습관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적양공의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는 조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보조 수단이었다.
 뇌진천이 이렇게까지 한 건 지금의 육체로서는 단지 조식만으로 내공을 증진시키기가 여의치 않았던 탓이다.
 이처럼 필사적인 조식, 조신, 조심, 식양생으로 인해 뇌진천의 단전에도 비록 더디나마 내공이 쌓이기 시작했다.
 뇌진천은 적양공의 조식 가운데서 단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행하는 좌식(座息)에서 벗어나서 점점 입식(立息), 와식(臥息), 행식(行息), 면식(眠息)으로 발전해 나가려고 애썼다.
 조식을 할 때는 모든 잡념을 물리치고 오직 단전에만 의식을 집중시켜야 한다. 좌식의 경우에는 일단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모든 의식을 배꼽 아래의 하단전에 집중시킨다.
 이러한 의수(意守)를 계속하면 어느새 의수 자체에 대한 인식조차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게 되니, 이를 입정이라고 한다.
 언제든지 입정의 상태로 접어들어 자유자재로 좌식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입식도 가능해진다.
 입식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면서 조식하는 것이다. 입식이 익숙해지면 누워서도 조식하는 와식도 가능해진다.
 와식까지 완전히 체득하면 깬 상태에서 어떤 활동을 하든 자연스럽게 조식을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는 행식까지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는 누워서 잠이 들었을 때도 조식 상태에 있는 면식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러한 면식까지 가능해지면 불철주야 내공의 증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뇌진천은 본격적으로 적양공을 수련한 지 만 삼 년이 지나자 면식이 가능한 경지까지 이르렀다.
 예전에는 너무나 손쉽게 이룩한 단계였으나, 이번에는 삼 년 동안 전심전력을 다한 끝에 이루어진 결과인 터라 뇌진천이 느끼는 감회는 상당했다.
 사실 처음에 수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솟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가운데 한 단계씩 올라설 때의 성취감은 그러한 실증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인고를 머금은 수련의 과정에서 뇌진천은 욱하는 다혈질의 성품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함량 미달의 몸을 개조하는 와중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약자의 심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난 사 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은 삭막하기만 하던 뇌진천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7
 
 묘령의 한설지에게서는 이제 말괄량이 같은 분위기 대신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등롱에 달린 등불을 든 홍의 소녀와 금을 든 녹의 소녀를 대동한 채 후원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무렵,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점점 부풀어 가는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수상 정자에 당도한 한설지는 자리를 잡고 앉아 녹의 소녀가 들고 온 금을 앞에 두고서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맑고 청명한 소리가 만상상단의 후원을 가득 채워 갔다.
 “사공자께서 드셨습니다.”
 다소 놀란 듯한 녹의 소녀의 이와 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당한 기품의 소년 하나가 정자로 들어섰다.
 “겸아!”
 크게 반색하는 한설지의 목전에 나타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코흘리개 꼬맹이가 아니었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뇌진천은 비록 한설지에 비하면 여전히 머리 하나 정도로 신장 차이가 났으나, 정말 몰라볼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한 모습이었다.
 “누님께서 금을 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황홀하군요.”
 “겸아,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기쁜걸. 그런데, 네가 갑자기 여기는 어쩐 일이니?”
 “동생이 사랑하는 누님을 만나러 오는 데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뇌진천의 너스레에 한설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 어서 와서 이쪽으로 앉아.”
 오누이는 탁자를 두고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홍의 소녀는 용정차(龍井茶)를 대령했다.
 뇌진천은 찻잔을 입가에 가지고 가서 한 모금 들이켰다. 눈을 지그시 감고 용정차의 뒷맛을 음미하던 그는 이윽고 눈을 떴다.
 “누님!”
 “응?”
 “모처럼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산책이라······. 그치만 밤인걸?”
 “밤이면 어떻습니까? 제가 누님을 잘 지켜 드릴 텐데요?”
 “칫,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 주제에······.”
 한설지의 핀잔에 뇌진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했다.
 “껄껄껄! 하긴, 그렇군요.”
 뇌진천은 한경인이 자신을 문사로 키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의 시선을 피해 몰래 무공을 익혀 왔던 것이다.
 곤륜파에 있을 때 비록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운 적은 없으나, 팔십 세 노인의 지성을 가진 뇌진천으로서는 훈장으로부터 배우는 글공부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뇌진천이 참으로 신동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정말 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막내아들을 제대로 공부시켜서 조정의 관리로 출사시키려는 꿈을 품고 있던 한경인으로서는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뇌진천과 함께 웃고 있던 한설지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뇌진천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이곳에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산책을 가자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지? 그렇지?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 봐.”
 한설지의 종용에 뇌진천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실은 며칠 후, 낙양(洛陽)에 있는 삼촌댁으로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한설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떠나다니, 대체 누가? 설마······?”
 한설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뇌진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뇌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떠납니다.”
 벌써부터 한설지의 두 눈동자는 호수 속으로 잠겼다.
 “왜? 갑자기 왜 낙양으로 가려는 건데?”
 “아버님께서 학문에 대해 제게 거는 기대가 크십니다. 그래서 저를 낙양으로 유학을 보내시려는 거지요.”
 한설지는 정색하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로 보낼 수 없어.”
 “누님!”
 “공부는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어째서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는 거야?”
 한설지의 양 뺨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낙양에는 황실의 대학사와 같은 고위 문관 출신의 향신들이 설립한 사학기관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입학하게 되는 풍림학관(風林學館) 역시 조정의 관리들을 많이 배출해 온 명문이라고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줄도 잡아야 출사의 길이 쉽게 열린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그치만······. 그럼, 너도 가고 싶은 거야? 네가 가기 싫다고 하면 아버님도 억지로 보내려고 하시진 않을 거야.”
 낙양으로 가게 되면, 뇌진천은 이제 더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유롭게 무공을 수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뇌진천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한설지가 갑자기 곁으로 다가왔다. 그를 와락 끌어안은 그녀는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가지 마! 가지 않겠다고 말해 줘.”
 뇌진천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을 이토록 아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로가 됨을 이미 깨닫고 있는 그였다.
 뇌진천 역시 두 손으로 한설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 울보 누님을 어이할꼬!”
 뇌진천은 아이를 달래듯이 한설지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크게 흐느껴 울었다.
 얼마 후, 한설지는 뇌진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쌔근쌔근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그의 얼굴에는 이내 결연함이 떠올랐다.
 ‘이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마냥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 낙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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