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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쌍의 1권 (1화)

2017.06.14 조회 619 추천 1


 천주쌍의 1권 (1화)
 책을 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출판입니다.
 사실 출판이라는 걸 꿈꾼 지는 어언 7년 정도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 이름이 들어간 책을 출판하고 싶었거든요.
 그 꿈을 이제야 이렇게 이루게 되었네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천주쌍의는 제가 본격적으로 연재한 네 번째 글이자, 첫 번째 출간물입니다.
 아직 고쳐야 할 점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은 미숙한 글이지만, 나름대로 노력해서 쓴 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글이네요.
 침술, 혈도, 단약, 약초학, 오금희, 편작, 화타, 꽤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읽었습니다.
 정말로 학교 수업 듣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한 적도 있는 것 같네요.
 글을 쓰면서 글이 잘 풀릴 때는 기분 좋게 계속 써내려 갔고,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정말 울상을 지으면서 쓰기도 했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인생이라고 말하는 희로애락을 글을 적으면서 모두 느꼈다고 할까요?
 천주쌍의를 적을 때의 첫 번째 취지는 무협을 처음 접하는 분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습니다. 최대한 쉽게 풀어 본다고 했지만, 그 때문에 어색하거나 이상해진 부분도, 그 때문에 더 좋아진 부분도 있을 겁니다. 좀 과감하게 행했던 부분이라면 한자를 많이 넣지 않은 점이랄까요?
 저는 무협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도 쭉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겁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말을 적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쓸 말이 많이 없네요.
 마지막으로 이 글이 나오기까지 도와준 학교 친구들, 검은 날개 회원분들, 제 독자분들, 뒤에서 괴롭혀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글이 나오는 데 많은 힘을 써 주신 우리 뿔미디어 식구분들은 찬양하옵니다. 오오∼!
 
 
 
 여는 이야기
 
 
 따악!
 곰방대가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코를 골며 자던 장유는 순간적으로 눈에서 별이 튀고 얼얼한 느낌에 벌떡 일어섰다.
 “아악!”
 하나 그가 쓰러지며 매만진 부위는 곰방대로 맞은 자리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하윽, 아파, 아파, 하윽······ 흐윽······ 이대로 죽는 건가?”
 장유가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의서(醫書)를 눈물로 적셨다.
 진짜 심장을 칼로 찔린 듯이 고통을 호소하는 장유였지만,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한 스승은 다시 한 번 곰방대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따악!
 그러자 장유의 입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이 삼천의 악적, 곱게 죽여라! 나는 천수의곡(天收醫谷)의 마지막 의원이자 곡주인 천명신의(天名神醫) 장유다!”
 스승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장유를 지켜보다가, 미친놈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곧 곰방대를 물고는 발로 장유를 질근질근 밟았다.
 “쯧쯧, 미친놈, 지랄을 한다. 지랄을.”
 “이 못된 악적(惡敵), 그냥 죽여라! 그냥 죽여! 고통스럽게 하지 말란 말이다. 이 마두(魔頭)야!”
 스승의 발길질이 더욱 거세졌다.
 “그래, 그냥 죽어라! 이놈, 그냥 죽어!”
 
 
 
 一章 과거로 돌아오다
 
 
 물지게를 들었다. 거기다가 무릎을 꿇고 손까지 번쩍 쳐들고 있었다.
 이 자세가 의미하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
 체벌!
 침술학(鍼術學) 수업 시간에 졸았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지만, 장유가 벌인 만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침술학 스승에게 마두라고 했을 뿐더러, 자신을 곡의 곡주라고까지 칭했다.
 이런 체벌이 아니라 장로회에 불려 가서 싸대기를 왕복으로 뺨이 헐어 버릴 때까지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잠꼬대였다는 걸 참작하여 이 정도에서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장유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것은 꿈인가, 아닌가?’
 그것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팔이 얼얼하게 저려 오는 것으로 봐서는 꿈이 아닌 게 분명한데, 자신은 분명히 죽었지 않은가?
 장유는 자신의 몸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물지게를 받치고 있는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여리디 여린 일고여덟 살 소년의 팔뚝이었다. 늙은 노인의 피부,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검버섯이 피기 시작하고, 슬며시 주름이 생기던 피부가 말끔해졌다.
 한데 자신의 심장을 찔렀던 검.
 그 검이 가져다준 아릿아릿한 감각은 아직 가슴 한쪽에 남아 있었다.
 장유는 그 감각을 되짚으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한 번 회상해 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려고 하는 늦은 저녁의 일이었을 것이다.
 
 화아악!
 하늘 높게 불길이 치솟았다.
 전장!
 아수라장!
 그 위에서는 삼천(三天)의 악귀들이 무림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사람들 위에서 피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베어 버리고, 무인은 사지 근맥을 자른 뒤 단전을 부수어 버리고는 슬슬 가지고 놀다가 목을 쳐 버렸다.
 아직 많은 무인이 악귀들에게 대항하고 있으나, 그 수는 처음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서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아아······.”
 장유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삼천이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 의곡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야욕을 드러내 구룡성(九龍城)까지 멸망시키려 들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천수의곡의 곡주가 된 장유는 구룡성의 무인들을 도와서 무림의 정파를 부활시킴으로써 다시 천수의곡을 부흥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아니라 혈루(血淚)가 흘렀다.
 “이대로, 이대로 무림은 끝인 것인가? 정녕 끝인 것인가?”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의 앞으로 한 자루 칼날이 날아들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파공성 끝에 그의 목이 잘리려는 찰나!
 카앙!
 한 자루의 창날이 검을 차단하였고, 누군가가 그의 옷깃을 잡아 주욱 당겼다.
 장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깃을 잡아챈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선 형님······.”
 사내의 이마에는 낡아 푸른빛이 바랜 영웅건을 질끈 매었고, 의복에는 피가 낭자하였다. 머리는 거칠게 헝클어져 있으며, 수염이 무성하여 산적 두목을 연상시켰다.
 사내는 그와 함께 곧잘 술을 마시곤 했던 은하환영창(銀河煥英槍) 악유선이었다.
 그의 창이 바람을 가르고 공간에 녹아드는 순간, 창끝이 번쩍이며 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른 은색 불꽃이 보여 주는 은하환영!
 
 은하환영창(銀河煥英槍)
 은화개(銀化開)
 
 공간에 녹아내린 창이 벼락을 부르고 대지를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장유를 노렸던 악귀를 포함한 세 명의 악귀가 어깨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나가떨어졌고, 그들의 어깨 위에서 떨어진 목 세 개가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넋 놓고 있지 마. 반드시 탈출한다. 탈출해서 흑룡강성에 있는 장백검문의 도움을 받아야 해. 우리 앞에서 죽어 간 수많은 정파의 기둥들, 그리고 네 환자들의 기대를 저버릴 생각이냐?”
 그의 외침에 장유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전장에서도 자신의 일깨워 주고 챙겨 주는 고마운 사람.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팔 안쪽에서 주섬주섬 붕대와 침을 꺼내는 장유였다.
 “그래, 그런 자세다. 한데 그건 뭐냐?”
 “형님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릅니다.”
 장유는 노련한 의원답게 빠르게 침으로 그의 허리 부위를 찔러 지혈하고 붕대로 둘둘 감아 간단한 응급처치를 마쳤다.
 “좋아.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전장에서의 상황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장유는 희망을 다시 한 번 불태울 수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삼천의 악귀들이 경배를 올리고, 하늘 높게 치솟았던 불마저 고개를 숙인다.
 만마(萬魔)가 경배하고, 천하가 복종해야 하는 자.
 기세만으로 대기가 울리며, 일 수에 산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거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
 염래본마(炎來本魔).
 염왕을 죽이고 지옥에서 올라온 자.
 모든 마귀의 근본이 되는 자.
 흔히들 천살(天殺)이라고 부르는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천살이 우수를 가볍게 뻗었다.
 가벼운 행동이었으나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정파 부흥의 꿈을 가진 반룡련(反龍聯)의 동지들이 쓸려 날아갔다.
 ‘저들은 정파의 기둥인데······. 정파의 거목들인데······.’
 그런 고수들이 천살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가는 것이다.
 천살이 입을 열자 하얀 서리와 같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전장을 지배했다.
 “복종하라, 나에게 복종하라. 그대들에게 천살이라는 이름의, 무림인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
 역천(逆天)!
 다른 말로는 반역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름!
 무림인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관이 없는 세상이고, 관이 없는 세상이라면 황제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무질서가 도래할 것이다.
 황실이 없고 관아가 없다면 법도가 없어진다. 법도가 없어진 세상에서 어떻게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힘이 힘을 지배하고, 더 큰 힘이 힘을 지배하는, 질서가 없어진 인세의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염래본마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내가 그대의 야욕을 멈출 것이오. 그대는 인세에 있어서는 안 되는 지옥의 악귀이니, 내가 그대를 지옥으로 돌려보내겠소”
 장삼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있으나 어깨 부분에는 선명하게 금실로 수놓아진 사자(士子), 두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길게 기른 수염은 명치까지 내려오고, 한 손에는 피가 묻은 청강검을 든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그는, 철사자(鐵士子)였다.
 천살이 그를 향해 이죽거렸다.
 “고작 그대가? 그대 혼자서 말인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명의 고수가 피풍의를 펄럭이며 철장을 들고 그들 옆에 내려섰다.
 “나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것이오.”
 붉은 피풍의를 입고 강철 같은 두 주먹을 내세우며 내려선 노인은 적룡문(赤龍門)의 권군(拳君)이었다.
 “토룡 나부랭이가 나서는데, 나라고 그냥 있을 수 있나. 흘흘.”
 적룡을 토룡 취급하며 쌍검을 늘어뜨린 채 걸어오는 노파는 백화문(百花門)의 개화노란(開花老蘭)이었다.
 “클클, 오늘 웬 개새끼들이 이리 많누······.”
 전투 중에도 술을 마시며 개 타령을 하는 월검문(月劍門)의 전대 문주 쾌검백광(快劍白光)이었다.
 “선배님들이 나선다니, 저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지요.”
 장유의 옆에 서 있던 악유선이 피로 번들거리는 자신의 창을 고쳐 잡으며 은하환영창의 기수식을 취한다.
 “클클. 후배, 그러다가 죽어도 모르네.”
 쾌검백광의 말에 악유선은 장유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털털하게 웃어 버렸다.
 “하핫! 죽는 게 두려웠다면 지금까지 무인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장유, 자네는 빨리 도망가게.”
 장유의 눈에 정파의 운명을 짊어진 다섯 명의 절대자가 들어왔다.
 이들이 진정 정파의 거목이자 거인들이리라.
 지금 이곳에서 정파의 운명이 갈라질 것이다.
 생(生)일 것이냐?
 사(死)일 것이냐?
 이들 사이에 자신이 서 있다는데 기분이 좋았는지 장유는 히죽히죽 웃으며 침과 붕대를 꺼내 들었다.
 “형님, 저는 비록 무공은 지(知)의 수준이지만 거들겠습니다.”
 무공의 경지를 나누는 입(入), 지(知), 벽(碧), 탄(誕), 로(路), 성(成), 완(完), 탈(脫).
 그중 지(知)라고 하면 이제 갓 이류를 내다보는 수준이니, 그가 이런 엄청난 전투를 견뎌 낼 리가 없었다.
 “저는 의원입니다. 지금부터 의원이 해야 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다치신다면 저에게 와서 치료를 받아 주십시오. 당장에 죽게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무림의 운명이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악유선의 창이 쭈욱 뻗어 나갔다.
 번쩍번쩍 피어오르는 은색 불 줄기, 그리고 그 사이를 월검문의 보법 광류도(光流道)가 파고들며 쾌검백광의 성명절기 백광출(白光出)을 날렸다.
 천살은 그 강맹한 공격을 힐끗 쳐다보더니, 좌수와 우수를 교차시켜 쌍장을 날려 공격을 막았다.
 백광출과 은하환영창을 막기 위해 쌍장이 멈칫한 순간, 적룡문의 쌍룡교(雙龍嬌)의 권력이 천살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악!
 천살의 옆으로 불길이 치솟으며 쌍룡교의 강력한 권경이 불에 타 사라지고, 불길은 악귀의 모양으로 천살을 휘감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철사자가 소리를 치며 검을 쭈욱 내뻗었다.
 “염왕옥혼이로군! 내 꼭 염왕옥혼에 한칼을 넣어 주고 싶었지, 차핫! 검선지우(劍仙之雨)!”
 철사자의 검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기운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듯이 펼쳐지면서 천살의 몸을 휘감은 악귀 모양의 불꽃을 수십 갈래로 내리쳤다.
 악귀의 불꽃에서는 순간 팔 모양의 불꽃이 솟아오르며 검선지우의 빗줄기를 손으로 휘저어 날려 버렸다.
 그에 대응하여 철사자는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소지와 약지를 엄지로 그려진 형태의 검결지를 취하고는 염왕옥혼의 팔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염왕옥혼의 팔이 잘리자, 순간 멈칫한 천살의 가슴에 적룡문의 절기가 꽂혀 들어갔다.
 
 등룡락(登龍落)!
 
 적룡문의 절기인 등룡락이 허공에서 내리찍듯이 천살의 가슴에 꽂히고, 염왕옥혼에서 솟아오른 불꽃에 권군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이런 잡것이······.”
 천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염왕옥혼이 소리치며 울었다.
 크허허헝!
 검붉은 불길이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고, 대기가 공명하며 기세만으로 대지가 찢어발겨졌다.
 속살을 드러낸 대지의 아래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올라오며 마침내 염왕이 현신했다.
 
 염왕옥혼(炎王玉魂)
 마중극마(魔中極魔)
 
 거대한 불기둥이 완벽하게 악귀의 모습을 이루고, 등에서는 날개처럼 네 줄기의 불기둥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불길은 타오르는 것을 그만두고 모습을 변형시켜 갔다.
 적옥을 다듬어 만든 듯한 악귀의 조각이 천살의 위에서 형상을 이루었다.
 애초에 하반신이 없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반신이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것인지, 천살의 등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마치 사람의 상반신처럼 보였다. 그것은 상반신에 비해 너무도 커다란 팔을 휘두르며 오연하게 서 있었다.
 놈의 눈길이 향하는 곳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사나운 기세가 전장을 지배했다.
 “다 죽여주마.”
 천살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세가 다섯 명을 짓눌렀다.
 천살의 공간 밖에 있던 장유로서는 다행이었지만, 그 범위 안에 자리하고 있던 다섯 고수들에게는 참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크흑! 이 정도의 기세라니!”
 창을 잡은 악유선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기세의 중압감.
 그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
 이것이 천살이었다.
 “이대로 무림은 끝인 것인가······.”
 권군의 입에서마저 절망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룡은 벌써부터 포기하는구나. 본녀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본녀의 손에 쌍검이 들려 있는 한은 천살을 막을 것이야.”
 “나 또한 한칼 보태겠소이다.”
 “아직 술이 남아 있는 이상, 끝난 건 아니지. 클클!”
 남은 셋은 저 거대한 기세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투기(鬪氣)를 풀지 않고 있었다.
 정파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단지 기세에 눌려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통해 힘을 얻은 악유선과 권군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다섯 명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천살이 기세를 천천히 안으로 갈무리하였다.
 하나 중압감이 사라졌다고 하여 그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다섯 고수는 침음을 삼켰다.
 중압감이 사라지자 장유가 침과 붕대, 약초를 맨손으로 짓이겨 들고는 권군을 향해 다가갔다.
 “상처가 심합니다.”
 쌍룡교를 천살의 가슴에 꽂아 넣는 순간에 권군의 두 주먹이 녹아내리며 화상을 입었다.
 불에 댄 상처는 바람이 통하면 순식간에 곪기 시작하면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후배님은 뒤로 물러나시게.”
 권군이 다가오는 장유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장유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저는 의원입니다. 그것도 정파의 일원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침 끝에 약초 짓이긴 물을 바른 장유는 일곱 개의 침을 권군의 팔에 놓았다. 얇은 세침인지라 일곱 개의 침은 수월하게 권군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이어 세침이 근육과 혈맥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켜보던 권군은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염왕옥혼의 불꽃으로 들어온 마기는 정제할 수 없지만, 움직이기에는 한결 수월하실 겁니다.”
 확실히 그러했다.
 아직 아릿아릿한 통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손가락이 녹아내려 엉겨 붙어 움직일 수 없었던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다.
 “고맙네.”
 권군은 장유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고, 장유도 그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뒤로 물러섰다.
 이들은 무림의 절대자들이었다. 장유로서는 이들 절대자들의 싸움을 감히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클클클, 재롱을 피워 보거라, 정파의 잡것들아······.”
 천살이 팔을 스윽 하고 움직이자 염왕옥혼의 팔도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천살이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 쾌검백광이 입에 머금은 술을 화살처럼 다섯 줄기로 뿜어냈다.
 
 주전(酒箭)
 
 물과 불은 상극이다.
 액체와 불이 상극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독한 술의 경우에는 불이 잘 붙었다.
 주광개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주광개가 날린 주전은 단순한 주전이 아니라 강기로 다듬어진 주전이었다. 염왕옥혼의 팔에 주전이 박살 나는 순간, 주전은 강기를 머금은 술 방울로 변해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마치 당문의 만천화우를 술로 펼치는 형세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은 그의 공세를 피할 수 없어 보였으나, 천살의 대응은 의외로 단순했다.
 염왕옥혼의 등 뒤에서 펄럭이는 날개가 넓게 펼쳐지더니 주전의 방울을 모두 증발시켜 버렸다.
 그리고 날개가 거두어지는 순간, 염왕옥혼의 손가락이 주욱 늘어나더니 쾌검백광의 가슴을 꿰뚫어 버렸다.
 치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는 쾌검백광의 모습에, 분개한 철사자가 허공에 ‘군자’라는 글자를 연달아 적으며 강환을 뿌렸다.
 강환이 연이어 염왕옥혼을 때렸으나, 마치 꽃송이가 불에 타 사라지는 것처럼 강환이 맥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천살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퍼석!
 천살의 검은 분명 철사자를 베기에는 먼 거리에 있었지만, 장포 잘리는 소리가 들리며 철사자의 가슴에 길게 검상이 나타났다.
 심장을 직격으로 지나간 검상이었다.
 “공간절(空簡絶), 이미 탈(脫)을 넘어······ 쿨럭······.”
 철사자는 하려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수십 평생을 놓지 않았던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며 숨이 끊어졌다.
 “본좌는 모든 마의 종주이며 지존이고, 군림하는 자이다. 항복하라, 그리하면 무림인의 천국인 곳에서 영생을 누리리라.”
 철사자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천살이 오연히 말했다.
 하나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개화노란의 우검이 다섯 줄기로 갈라졌다.
 순식간에 늘어난 검영!
 다섯 개의 검영은 자색 검강을 머금은 채 바람을 그리듯이 회전하며 천살의 등을 노리고 들어갔다.
 뒤로 젖혀진 좌검은 둥글게 회전하며 한 송이의 연꽃을 화려하게 그려 갔다.
 백화문에서 자랑하는 앙복련홍(仰覆蓮紅)이었다.
 구구구구!
 대기와 함께한 검강의 울림에 천살의 등이 갈라질 듯한 찰나, 염왕옥혼의 날개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개화노란의 몸에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천살이 입을 열었다.
 “이제 두 녀석······.”
 순식간에 불길이 꺼지며 개화노란의 타다 남은 옷자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살의 눈에 장유가 들어왔다.
 “아니, 세 녀석 남았군.”
 염래본마 천살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수중무검(手中無劍)!
 어검술!
 
 허공을 유영한 검이 한 바퀴 돌아 천살에게로 돌아가며 강기를 흘렸다.
 천살 옆에 떠오른 하나의 검은 완벽한 어검이 되어 공간을 꿰뚫고 날아들었다.
 노리는 것은 장유의 심장!
 뒤늦게 천살의 공격 대상을 눈치챈 악유선이 창끝으로 어검을 걷어 내기 위해 날아들었으나, 아쉽게도 한 호흡의 차이로 천살의 검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꿰뚫리는 장유의 심장.
 불에 댄 듯한 화끈한 감각이 심장 언저리를 지배하며 순식간에 무기력감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장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심장에 박혀 있는 검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손잡이 앞으로 살짝 드러난 검날에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왈칵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의원인 자신이 봐도 이건 가망이 없었다.
 ‘이대로 정파의 부흥도, 천수의곡의 부흥도,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인가?’
 허무, 무기력, 무능력, 자책, 분노, 비통, 슬픔.
 온갖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장유가 악유선을 바라보며 힘들게 힘을 열었다.
 입에서는 기도부터 치고 올라온 피가 한 움큼 가득했기에,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핏덩이가 토해졌다.
 “쿨럭! 형님······ 저 이대로 가나 봅니다. 쿨럭쿨럭······.”
 “그만! 입을 열지 말게 아우. 말하지 말란 말일세······.”
 “쿨럭! 쿨럭! 정파의······ 쿨럭! 부흥을 지켜보고······ 싶었······ 쿨럭······.”
 ‘힘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내가 천살보다 강해서 천살을 막을 수 있었다면······ 의곡도 정파도······. 모두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삼재심법과 검법 외에 쓸만한 무공 하나 배우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무공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의 눈에 헤죽헤죽 비웃음을 짓고 있는 천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미 몸 전체로 죽음이 퍼졌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온힘을 다해 팔을 들어 올려 천살을 향했다.
 “쿨럭! 네놈,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꼭 네놈을······ 쿨럭······.”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내세에도 말이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
 
 “큭!”
 심장 언저리가 다시 아릿아릿해 오자 장유의 몸은 순간 비틀거렸고, 물지게에 들어 있던 물의 일부가 흘러넘쳤다.
 “앗! 차가워.”
 흘러넘친 물이 장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물의 양이 적지 않아 그는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살폈고, 젊어진 피부와 아직까지 멸망하지 않은 의곡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인가?”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타당하였으나,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대충 추측해 보건데 아마도 아홉 살? 열 살 무렵인 거 같은데?’
 그런 그의 머릿속에 문득 도가의 한 구절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으니, 이것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었다.
 문득 이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꿈을 꾼 것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일장춘몽(一場春夢). 하나의 긴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꿈인지, 과거인지······.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하늘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태어난다면, 천살을 죽여 버리기로 했으니까.
 과거와 달리 천살이 없다고 하여도, 아직 확인된 것은 없으니 준비할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
 
 
 
 二章 무학을 익히기 위해 배움을 청하다
 
 
 장유의 추측대로 그는 나이 아홉 살 때 의생관에서 수업하던 당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그 무렵 자신이 받든 수업에 충실하게 참석했다.
 “흔히 약초(藥草)라고 하지만, 풀만이 아니라 목본식물은 물론 버섯 등도 약초에 포함된다. 거기, 졸지 말고 들어라.”
 약초학 수업은 담당 스승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일품이라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상당히 힘든 수업 중 하나였다.
 “신선한 그대로를 약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건조시키거나 삶아서 이용하기도 하며, 성분을 추출하여 화합물을 만드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필기는 안 할 거냐?”
 그의 손에서 날아간 바둑돌이 정확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음 수업을 하고 있는 학생의 이마에 명중했다.
 “악! 크으······.”
 “한 번만 더 졸면 벼루를 집어던질 테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약초학 입문서의 앞 장을 다시 소리 내서 읽었다.
 “인간이 식물을 약용으로 쓴 것은 선사시대부터로 추정된다. 약 삼천사백 년 전, 대륙의 신농씨가 약으로 식물을 이용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비록 야사이기는 하지만, 알아 두면 유용할 것이야. 서역의 식물학은 식물을 약으로 이용하려는 데에서 출발하며, 그것이 번역되어 일부가 대륙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래서 대륙의 약초학이 의학의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그의 눈이 힐긋 장유에게로 향했다.
 요 며칠 사이 확연하게 달라진 수업 태도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꾸벅꾸벅 졸면서 수업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졸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손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필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스승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자세이고, 괄목상대(刮目相對)하는 모습을 칭찬해 주어야 하건만, 하룻밤 새에 저렇게 바뀌었다는 점이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업 중이었기에, 그는 잡생각을 잠시 덮어 두고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종류로는 크게 균조 식물, 선태식물, 양치식물, 종자식물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이중 종자식물이 전체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한다. 균조 식물은 균류와 조류로, 물속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며, 해대(海帶), 복령 등이 있다. 선태식물은 우산이끼와 솔이끼 등으로, 그 종류가 매우 적다. 양치식물로는 석위(石葦)와 해금사(海金砂), 면마(綿馬) 등이 있다. 기억해 두도록.”
 그리고는 장유를 불러 세운다.
 “장유, 일어나 보도록.”
 “예, 스승님.”
 그의 부름에 바로 일어나는 장유였다.
 예전에는 졸다가 당황하며 일어났을 것인데, 지금은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를 보였다.
 “해금사는 어떤 효능이 있는 거지?”
 “버섯류의 성숙된 포자로, 열(熱)을 내리고 해독하며,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통림(通淋)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대답도 막힘이 없었다.
 “그럼 어떤 경우에 사용하면 효과적인가?”
 “요로 감염, 요로결석, 백탁(白濁), 백대(白帶), 간염, 신(腎)의 화(火)로 인한 수종(水腫) 등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막힘없는 대답이 다시 한 번 이어지고 나서야 스승의 눈에 웃음이 걸렸다.
 늙은 나이로 인해 눈 주변의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있는 제자를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잘했다.”
 그의 칭찬에 장유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며 마주 답했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허허, 좋구나. 좋아.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이 말을 항시 잊지 말거라.”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겸손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제자를 걱정한 스승의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런 스승에게 또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저 아이를 저렇게 변하게 했는가?’
 의문이었다.
 그 원인이 좋은 일이기를 바랐고, 설사 좋지 않은 이유라고 할지라도 잘 이겨 내기를 바랐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 시작되겠구나. 오늘 수업은 여기서 파하도록 하겠다.”
 스승의 입에서 수업을 파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제자들은 주섬주섬 책보를 챙겼다.
 모두 식당을 향해 갔으나, 장유는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원무관(元武館)이었다.
 천수의곡은 의생관(醫生館)과 원무관(元武館), 두 개의 관(館)으로 나뉜다.
 의생관은 장유가 다니고 있는 순수 의원 희망자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원무관은 무림인이자 의원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노리는 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의생관 쪽에서는 의술만을 가르쳐 순수 의원을 양성하고, 원무관 쪽은 무공 수련을 주로 하고 의술을 곁가지로 곁들이니, 수련의 목적이 다른 두 관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한데 의생관생인 장유가 원무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
 
 의생관은 점심시간이었지만, 원무관에서는 아직도 수업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생관과 원무관의 학생 수를 모두 합치면 적지 않은 규모였다. 하나 천수의곡의 식당은 크지 않았기에 시간 차이를 두고 점심시간을 시행하고 있었다.
 원무관에 들어서자 의생관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 펼쳐졌다.
 수업 자체도 의생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들은 의원과 무인으로서의 삶을 모두 지향하기에 깊이 있는 의학이 아니라 무림인에게 사용할 수 있는 응급처치를 배웠다.
 한데 응급처치를 어떻게 배울까?
 자기 몸에 자기가 칼질한 후 상처를 만들어서?
 훌륭한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지방의 소규모 의방에서도 의생을 교육시킬 때 의생에게 자해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의방 계통에서는 최고를 달리는 천수의곡에서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원무관생들이 응급처치를 실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통으로 자른 통나무 위에 먹물로 사람의 혈맥을 그려 놓고, 그 위를 스승들이 지나다니며 먹으로 길게 상처 자국을 그었다.
 그러면 교육생들은 그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상처가 곪지 않게 하기 위해,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게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를 감안하여 침을 놓았다.
 공부를 위해 통나무에 침을 놓는 장면은 의생관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의생관에서의 실습은 실제로 잔병치레를 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특이한 수련법을 바라보던 장유는 한쪽 구석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수업은 얼마 있지 않아 끝이 났고, 장유는 원무관생을 지도하는 지도 스승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원무관 제사(第四) 스승 담우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저는 의생관원인 장유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원무관의 담우 스승님이신가요?”
 “그래. 내가 담우다. 어떤 일로 원무관의 제사 스승인 나를 찾아온 것이냐?”
 “원무관의 스승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너는 의생관의 학생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생관 학생이 원무관의 스승인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이냐? 일단 들어나 보자꾸나.”
 원무관과 의생관의 사이는 앞서 말했듯이 아주 좋지 않았다. 하나 스승들의 눈에는 원무관이든 의생관이든 모두 제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담우가 굳이 의생관과 원무관을 분리시키며 물어본 것은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의생관의 아이들은 원무관의 스승을 보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굳어버리기 마련이었다. 한데 이렇게 먼저 다가와서 부탁을 하는 아이를 접하니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의 물음에 장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과 어른이신 스승님들이 보는 세상이 어찌 같겠습니까. 그리고 이 부탁은 꼭 원무관의 스승님들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세상과 어른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 이 말은 자신도 어른이 보고 있는 세상을 보고 있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어디 말해 보거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역시나 담우도 생각하고 있던 무공 수련에 대해 장유가 부탁하고 있었다.
 장유는 원무관생이 아닌 의생관생이다. 의생관의 스승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원무관에서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의생관의 스승에게는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천수의곡의 학칙에는 일정 수준까지의 무공은 누구나 원한다면 배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원무관의 스승들은 의학과 무공을 모두 알고 있지만, 의생관의 스승들은 삼재검법과 삼재심법 이상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의생관생 중에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몇 없을 뿐이었다.
 ‘힘이 필요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상관없었다.
 준비된 자는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천살을 쓰러뜨릴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천살을 쓰러트릴 사람이 빈틈을 노릴 수 있게끔 도움을 줄 정도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목숨을 다해서라도 그 빈틈을 만들 수 있는 힘.
 장유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천수의곡의 특성상 검강지경은커녕 검사지경에 오른 고수도 드물었다.
 검강지경을 이룬 고수라고 하면 의곡의 곡주와 원무관의 제일 스승 정도였다. 하나 그들은 장유가 쉬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높은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담우는 그 다음의 고수로, 검사지경에 올라 있었고, 그나마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장유가 담우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천수의곡 밖에서 따로 스승을 구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담우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원하는 것이 그것이냐? 천수의곡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정 수준까지의 무공은 배울 수 있다. 굳이 내가 봐 주지 않아도 의생관 스승들에게 요청해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담우는 의례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건 장유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저는 담우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너를 단독으로 봐 준다면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개인 지도를 바라는 것으로 들은 담우가 불쾌한 듯 매몰차게 돌아섰다.
 하지만 뒤에서 소리치는 장유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제가 바라는 것은 좀더 높은 수준의 지도입니다.”
 당돌하게 소리치는 장유의 음성에 담우가 발길을 멈추며 뒤를 돌아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무공 수련을 개인적으로 봐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스스로 익히겠습니다. 다만 막힐 때마다 잠깐씩 조언을 청하겠습니다.”
 담우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장유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당돌하지 않은가?’
 조언 정도라면 담우로서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수련이 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그간 상관할 부분이 아니었다.
 “좋다. 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벌써 점심시간이 반이나 지났구나. 어서 점심을 먹으러 가거라.”
 “감사합니다. 담우 스승님.”
 물러나는 장유에게 담우가 한가지를 물어 보았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의생관에서 원무관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느냐?”
 “아직 의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의술 공부는 원무관에서도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말에 담우가 장유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이냐?”
 “······.”
 장유는 말하기를 꺼려 했다.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억지로 입을 열 필요 없다.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하여라.”
 담우의 말에 장유는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장유가 담우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원무관 밖으로 나가자,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걸어 나와 장유를 둘러쌌다.
 원무관의 학생들답게 하나같이 덩치가 컸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로, 소견(小犬) 삼인방인 대털, 호치, 여윤이었다. 원무관 학생들 중에서도 유명한 악질들이었다.
 “의생관 녀석 주제에 감히 원무관에서 무공을 배우려고 해?”
 대털의 말에 장유가 피식 웃었다.
 ‘텃세 부리는 건가?’
 “배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냐?”
 그의 가소롭다는 듯한 태도와 말대답에, 녀석들이 몹시 화가 났다.
 “이놈이! 넌 의생관 학생이야! 의생관이면 그냥 병이나 고치라고! 무슨 무공을 배우겠다고 지랄이야!”
 그 태도가 장유의 눈에는 귀엽기까지 했다.
 몸은 아이지만 정신연령은 이미 어른인 장유에게는 아이들의 행동이 그저 웃길 뿐이었다.
 “내가 내 몸을 지키겠다고 배우겠다는 건데, 뭐 문제라도?”
 장유가 이번에도 맞받아치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여자아이 여윤이 나섰다.
 “무공을 배우고 싶었으면 원무관으로 옮겼어야지. 멍청하긴. 의생관에 남아 있으면서 무공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냐? 약골 주제에.”
 의생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의생관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백면서생이었다. 육체 수련보다는 의술 수업에 매달리기 때문이었다. 현재 소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장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터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쏟아 내는구나? 배우다 만 것들아, 보따리 얇은 거 티 내냐?”
 이번에도 시비 거는 것을 장유는 멋지게 물리쳤다. 전생을 살면서 익힌 걸쭉한 덕담(?)을 함께 곁들였다.
 의생관과 원무관 아이들의 싸움은 장유가 보기에는 딱 애들 놀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소년의 몸이니, 애들 놀음에 적당히 동참해 줘야 했다.
 그래서 장유는 배우다 만 것들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배우다 말다. 무공과 의학을 둘 다 배우는 원무관 아이들은 의학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그 깊이가 의생관 아이들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의생관 아이들은 원무관 아이들을 ‘배우다 만 것들’이라 칭했다.
 물론 보따리가 얇다는 말 또한 들고 다니는 책이 적다는 말이기 때문에 머리가 나쁘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결국 참지 못한 호치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반응하려고 했지만 이 빌어먹을 약골 같은 몸이 반응해 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볼썽사납게 뒤로 날아가 담벼락에 머리를 찧게 된 장유였다.
 “뭐야, 이거? 무공을 배우려고 하길래 좀 강한가 했더니, 순전히 약골이잖아? 킬킬킬.”
 장유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자 주먹을 휘두른 호치가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끄응.”
 주먹을 맞은 볼이 욱신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이런 건······.
 ‘칼 밥 먹은 것에 비하면 애교지.’
 무림에서 의원 일을 하며 수도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칼 밥도 한두 번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완전 장난 수준이었다.
 장유는 옷을 털고 일어난 후 손으로 수도(手刀)를 세웠다.
 약골 의생관생이 반항을 하려 하자 소견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어쭈? 그냥 몇 대 맞고 끝내지그래? 특별히 아프게 때려 줄게.”
 “호홋! 반항하는 거야? 우쭈쭈쭈.”
 “사람 귀찮게 하기는, 쯧.”
 도대체 어디서 보고 배운 것인지 길거리 시정잡배의 행동, 그것도 가장 악질적인 태도만 골라서 하는 게 아닌가?
 장유가 수도를 세워 그들에게 휘둘렀다.
 삼재검법을 익히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식인 팔방풍우가 장유의 소도로 휙휙 펼쳐졌다.
 그 공격에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팔방풍우를 피했다.
 그러나!
 “허초다, 이 멍청아!”
 장유의 발길질이 호치의 좋지 않은 곳에 적중했고, 순식간에 그는 게거품을 물며 사타구니를 부여잡았다.
 “끄으······ 끄으, 끄어어어······.”
 원무관 학생들에 비해 힘과 기술이 떨어지는 장유는 허초를 써서 시선을 돌린 후 급소에 실초를 행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그중 첫 번째 상대가 호치였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공격(?)에 남은 소견 중 둘인 대털과 여윤이 당황했다.
 그 순간을 노리고 또 하나의 발길질이 여윤의 정강이에 작렬했다.
 “아악!”
 순식간에 정강이를 잡고 펄쩍 뛰어오르는 여윤이었다.
 ‘애들 놀이는 좀 애들 놀이답게 놀아 줘야겠지?’
 그들이 놀라는 동안, 장유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든 후 여윤의 목을 다른 한쪽 팔로 휘감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소리쳤다.
 “꼼짝 마. 넌 이제부터 인질이야.”
 아이들 놀이를 잘못 파악한 장유였다.
 안타깝게도 아이들 놀이에 인질극은 없었다.
 천수의곡이라는 의원들의 생활터, 그 가운데 원무관 정문에서 벌어진 의생관생의 멋진 인질극이었다.
 
 짱돌이 눈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흔들렸다.
 여윤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기야, 인질이 되어 짱돌로 위협당하는데, 그것도 아홉 살짜리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너, 너, 뭐하는 거야?”
 여윤의 놀라 떨리는 말에 장유가 너무나도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인질극이라는 건데,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주면 돼.”
 누가 몰라서 그러는가?
 여윤이 물은 것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은가.
 “순순히 나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야.”
 장유는 대털과 호치에게 다시 한 번 지금의 상황이 인질극임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어디서 이런 경우를 당해 봤겠는가? 고작 아홉 살짜리가 인질극이라니!
 대털과 호치의 표정에는 겁이 잔뜩 나 있었지만, 전혀 겁먹지 않은 것처럼 소리쳤다.
 “닥쳐! 빨리 여윤을 풀어 주는 게 좋을 거야!”
 “어허, 미안하지만 지금 여윤의 명줄을 쥐고 있는 건 나야, 이걸 그냥 확!”
 장유가 과장스럽게 돌로 여윤의 머리를 내려치는 흉내를 냈다.
 “아악!”
 장유의 행동에 겁먹은 여윤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고, 호치와 대털은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누그러트려야 했다.
 ‘유치하게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상황은 장유의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지만, 유치하다는 생각은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편하게 원무관에서 들락거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의생관생이 원무관의 스승에게서 무공을 배우려고 한다는 소문이 제대로 퍼지면, 앞으로도 많은 시비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요구 조건은 별거 아냐. 내가 원무관에서 무공을 배우는데 적극 협조하도록 해.”
 그 말에 둘, 아니 셋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적극 협조하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의생관생이야. 내가 원무관에서 무공을 배운다고 하면 시비 거는 녀석들이 많겠지? 너희들이 그 녀석들을 좀 막아 줘야겠다.”
 소견 삼인방은 원무관에서도 소문난 개 종자들이었다. 성격이 포악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달려들면 거머리 같기로 유명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방패 막이로 내세우기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인원들이었다.
 소견 삼인방이 자신의 뒷배를 봐준다고 하면, 감히 시비를 걸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의 조건에 아무런 답이 없자 장유가 다시 짱돌을 치켜들었다.
 그 상황에 다급해진 여윤이 나머지 둘을 향해 악을 쓰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빨리 그런다고 말해! 나 죽어! 나 시집도 못 가고 죽는다고! 빨리 한다고 해!”
 여윤의 악에 받힌 외침 때문일까?
 대털과 호치가 주억주억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입으로 끝내자는 건 아니지?”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다!”
 중천금은 개뿔.
 “쯧쯧. 이 친구들이 뭘 모르는군. 만약에 말로 약속하고 너희가 지키지 않으면 어쩔 거야? 힘이 약한 나는 그냥 맞아 죽어야겠지?”
 장유는 가증스럽게도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털과 호치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윤이 인질로 잡혀 있지 않은가.
 “붓과 종이!”
 장유는 두 사람에게 서면 약속을 요구했다. 말 한마디보다 한 장의 종이가 믿음직스럽고, 한 장의 종이보다 한 갑자의 내공이 믿음직스러운 세상이었다.
 대털과 호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지필묵을 가져왔다.
 “자, 이제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적어. 대털, 호치, 여윤은 앞으로 장유가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털과 호치 밑에 달린 것은 불알이 아니고 땅콩입니다. 여윤은 평생 시집을 가지 않고, 머리를 밀고 절에 들어가겠습니다.”
 대털과 호치가 서약서를 작성하자, 장유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그 밑에 인장 찍어서 이쪽으로 보내.”
 대털과 호치는 장유의 명령(?)대로 먹물을 손바닥에 듬뿍 묻혀 인장을 찍었고, 그것을 돌돌 말아 장유 쪽으로 굴렸다.
 장유는 서약서를 발로 쫘악 펴서 한번 읽어 보더니 강제로 여윤에게도 인장을 찍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인장을 찍었다.
 “좋았어. 이제부터 적극 협조하도록 해.”
 그들은 몰랐다. 이 서약서 한 장으로 인해 그들을 어떤 지옥으로 몰고 가는지 말이다.
 그들이 적은 계약서 내용은 ‘장유가 무공을 배우는데 협조할 것’이 아니라 ‘장유가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장유가 사악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웃었다.
 ‘역시 코 묻은 돈을 뺏는 게 제일 재밌어.’
 몸이 어려지니 정신까지 어려진 것처럼 보이는 장유였다. 비유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
 
 담우의 옷자락이 매섭게 펄럭이며 주먹이 부웅하고 허공을 갈랐다.
 손가락은 잔뜩 움츠렸다가 활짝 펼쳐지며 순식간에 한곳을 짚으며 허공에 펼쳐졌고, 펼쳐졌던 손가락이 마치 과녁을 노리는 화살마냥 정확하게 모이며 짚어 들어갔다.
 순간, 담우의 손가락이 모인 허공에서는 공기 터지는 소리가 파앙 하고 터지며 바람을 퍼트렸다.
 “이것이 천수의곡의 인무(人武)의 지법 중 하나인 북두지(北斗指)의 첫 번째 초식인 탐랑(貪狼)의 모습이다. 이제 의문은 풀렸느냐?”
 장유는 약속한 대로 무공을 익히면서 의문이 생기는 사항을 물어보러 왔다.
 천수의곡의 무공은 크게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뉜다. 천, 지, 인이란 무림에서 무림인의 경지를 나누는 입, 지, 벽, 탄, 로, 성, 완, 탈, 천과는 달리, 천수의곡 내에서 전수되고 있는 무공들의 수준을 나누어 놓은 것이었다.
 인무란 그중 가장 아래에 속하는 최하위의 무학을 말하는 것으로, 저잣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류 무공보다는 뛰어나지만, 한 문파의 절기라고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는 무공들을 의미했다.
 지 급의 무공인 지무(地武)는 한 문파의 절기로는 손색이 없으나, 상승 무공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천수의곡에서 최상으로 치는 천 급의 무공은 상당히 상승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정주육문, 혹은 천지삼가의 비전 절예에 비하면 큰 손색이 있으나, 중견 문파의 절기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초식들이 천 급의 무공인 천무(天武)로 구분되었다.
 비록 저번의 생에서 알고 있는 무예는 삼재검법뿐이었지만, 그는 다른 정파 무림인들의 화려한 무공을 많이 봐 왔다. 어렵지 않게 무공을 펼치는 그들을 보았기에 자신도 배우기만 하면 쉽게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허, 손가락이 느리다. 더 빠르게!”
 “거기서 손목을 부드럽게 돌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손끝에 힘을 집중시켜서 한 번에 터뜨리는 것이다. 힘을 집중시켜라!”
 “손목을 너무 심하게 돌리지 않았느냐. 폭발력이 관절을 통과하며 모두 사라졌다. 다시!”
 “손끝이 흔들리며 힘이 분산이 되었구나. 다시 해 보거라!”
 담우의 매서운 일갈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의술도 그렇지만 무예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수십 번을 시도했지만 담우처럼 손끝에서 공기가 터져 나오지 않았고, 자세만 간신히 흉내 낼 뿐이었다.
 삼재검법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장유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음을 잘 아는지, 장유가 자세라도 그럴듯하게 흉내 내어 보이자 담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초식인 거문(巨門)으로 넘어갔다.
 “거문은 순간 점혈(點穴)의 수법이다. 점혈이라는 것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과 내공을 요하는 것인만큼 실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순간적인 점혈은 가능하다. 잠시간이라도 상대의 움직임에 제약을 둘 수 있다면 승기를 잡기가 쉬워지지. 거문은 그러한 것은 노리고 만들어진 초식이다.”
 담우가 오른손의 소지와 약지를 부드럽게 말아 쥐고,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
 그의 팔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순간, 엄지, 검지, 중지가 번득 하며 장유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그 찰나의 스침에 장유는 순간적으로 무기력감과 무감각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고 순간적이었지만 무인 간의 싸움에 있어서는 승패를 가를 찰나일 것이다.
 “원리를 알겠느냐?”
 “예.”
 그 말에 담우는 상당히 놀랐다는 행동으로 눈을 크게 떴다.
 상승의 수법은 아니지만, 간단히 원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수법도 아니었다.
 그런데 장유가 원리를 파악했다니!
 담우는 모르고 있지만, 장유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과거를 통해 한 번의 인생을 더 살아 본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 속에서 꽤나 높은 의술을 가졌기에 점혈당하는 순간에 원리를 대강 눈치챘다.
 점혈은 자신의 내기를 상대방의 몸속에 넣어 기맥을 막아 버리는, 일종의 내가수법이었다.
 하나 거문은 상대의 혈맥을 내기로 막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비틀어 버렸다.
 뱀이 똬리를 튼 듯이 비틀어진 기맥은 순간적으로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며, 점혈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기맥을 비트는 방법을 사용하신 게 아닙니까?”
 “어떻게 안 것이냐?”
 “스승님의 손끝이 기맥을 스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기맥이 뒤틀리는 것과 동시에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천재라고 해야 할까?
 사실 장유는 천재도 아니고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의원으로서 노련할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하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담우는 장유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거문의 형(形)은 보았느냐?”
 “제자가 능력이 미진하여, 형까지는 완벽하게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에 담우는 장유에게 다시 한 번 팔을 움직여 거문의 초식을 선보였다.
 뱀처럼 움직이는 팔뚝과 동시에 기혈을 잡아채는 엄지와 검지, 잡아챈 기혈의 중심은 중지로 고정되며, 검지로 슬쩍 밀어 수레를 돌리듯이 비틀어 버렸다.
 하나 단 두 번의 시연만으로 그 모든 행동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후 담우가 초식의 형을 몇 번이나 더 보여 주고 나서야, 장유는 겨우겨우 거문의 형을 따라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형을 익힌 후에는 더욱더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공을 익힘에 있어 하나의 초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력은 더욱 중요하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자.”
 담우의 말에 장유는 흐르는 땀을 마른 천으로 닦아 내고는 그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담우는 아직까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조언만 해 주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무관은 의술뿐만이 아니라 무예 또한 배우는 곳이기에 연무장이 여러 개 있었다. 담우는 그중 가까운 곳 하나를 골라 장유를 데리고 갔다.
 연무장에는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은 원무관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대털과 호치, 여윤이 장유의 눈에 들어왔다.
 장유와 그들의 눈이 마주치자 얼마 전에 장유에게 호되게 당했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숙였다.
 장유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귀엽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담우가 들어오자 아이들의 무예를 봐주고 있던 담당 스승이 다가왔고, 장유를 흘긋 바라보고는 담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아이는 의생관 원생이군. 그런데 자네가 의생관 원생과 함께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장유가 굳이 담우를 가장 먼저 찾아갔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스승들이 의생관과 원무관의 자존심 다툼에 무심하다고는 하나,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알게 모르게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우는 달랐다. 얼마 전 원무관생과 의생관생 사이에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나타난 담우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정확하게 가려 먼저 잘못을 한 원무관생에게 벌을 내렸다.
 장유가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는 건, 그의 무공이 천수의곡에 속한 이들 중에서는 고강한 위치에 있다는 것 말고도 이런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생관생이라고 연무장에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리고 이 아이는 내가 심심파적으로 무공에 대해 조언을 해 주고 있는 아이라네. 이번에 체력 훈련 좀 시킬까 하여 이곳에 데리고 왔지.”
 “의생관의 아이가 무공을? 무공이 배우고 싶다면 원무관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에 담우도 똑같이 말했었다.
 하지만 장유는 의생관의 심도 있는 의원 수업과 원무관의 무예 수련을 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담우는 조심스럽게 장유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그 이유가 생각 외로 간단함을 알았다.
 원무관의 학비는 의생관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쌌다. 반면에 장유의 아버지는 농촌에서 소규모 의방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시골의 농촌 의방이 벌어 봐야 얼마나 벌겠는가?
 장유가 의생관에 남으려는 이유는 아마도 부모님을 걱정해서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담우는 그렇게 파악했지만, 장유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남에게 세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담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돌아갔다.
 “자, 이제 이곳을 열 바퀴 돌아보거라.”
 “예.”
 담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유는 연무장 둘레를 뛰기 시작했다.
 원무관의 교육시간이기는 했으나 연무장 전체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연무장의 둘레를 도는 장유의 수련은 그들의 수업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시작에 비해 갈수록 숨이 차오른다. 이제 일곱 바퀴째.
 머리는 백 바퀴라도 돌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은 남은 세 바퀴도 돌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턱 선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옷 위로 떨어졌다.
 “허억! 허억!”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은 몸을 천근만근 무겁게 했다.
 온몸의 세포들, 그 하나하나가 격렬하게 물을 원했다.
 ‘내 체력이 이 정도로 좋지 않았다니.’
 그러고 보니 천수의곡이 멸망하고 처음 무림에 들어갔을 때도 느꼈었다. 차차 나아지기는 했지만, 입(入)의 경지의 자신의 체력은 삼류 무인보다도 좋지 않았었다.
 달리는 도중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쳐서 나자빠질 수는 없어.’
 장유의 머릿속으로 천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인자하게 웃으며 검을 뿌리는 악귀!
 질서를 부수고 반역을 꾀하는 자!
 만약 꿈과 같이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아니,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 꿈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절대로 그를 막아야만 했다.
 하다못해 그자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유선 형님.’
 갑자기 악유선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자신을 향해 날아온 이기어검을 걷어 내려 했던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까?
 천살에게 한순간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최소한 유선 형님의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악유선의 경지는 성(成)과 완(完)의 경계.
 그러니 자신은 성을 넘어야 하고, 완으로 가는 실마리를 잡아야 했다.
 무공의 경지를 나누는 입(入), 지(知), 벽(碧), 탄(誕), 로(路), 성(成), 완(完), 탈(脫).
 
 이제 무공에 입문(入門)한다 하여, 입(入)
 무공을 알게 되었다 하여, 지(知)
 익힘에 있어 봄의 푸름과 같다고 하여, 벽(碧)
 스스로 껍질을 내고 나왔다 하여, 탄(誕)
 배움에 있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간다 하여, 로(路)
 무학으로써 종사와 같은 경지를 올랐다 하여, 성(成)
 무학으로써 완전하게 된다고 하여, 완(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벗어 버린다 하여, 탈(脫)
 
 그 위에 탈마저 벗어난 경지, 천(天)이라는 경지가 하나 더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 상위에 자리한 성과 완.
 과연 자신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도달할 수 있을지, 도달하지 못할지.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질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꿈으로 끝날지.
 모든 것이 미지수다.
 하지만 준비된 자는 걱정할 것이 없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서경(書經)의 열명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 앞으로 뼈에 새겨야 할 말이었다.
 유비무환 각골명심(有備無患 刻骨銘心).
 
 
 
 三章 의원의 마음에도 복사꽃은 핀다(1)
 
 
 의생관의 심도 있는 의예 수업과 원무관의 무예 수업을 병행하는 것은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밤 남들 몰래 공부를 더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장유의 눈 아래에는 거뭇거뭇하게 검은 반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어 일 년이 흘렀지만, 쉬지 않고 반복했다.
 피로는 하루하루 누적이 되어 갔다.
 몹시 지치면 가끔씩 휴식을 위해 정자에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정자를 넘나든 바람은 대나무 숲을 흔들고, 댓잎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그 가운데 장유는 편하게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숲 사이로 은은한 금 소리가 울렸다.
 아련하게 울리는 선율.
 떨리는 현의 감각.
 현을 타고 미끄러지는 손끝에서 시작된 파동이 음의 물결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 대숲에서 머무른다.
 음의 파동은 잠들어 있던 장유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으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지?”
 기분 좋은 선율이자, 사람을 편하게 하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장유가 정자에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의생관과 원무관은 천수의곡의 외원과 내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의생관은 벗어나 천수의곡의 심처에서 울리고 있었다.
 “여기는······ 곡주님이 머무는 곳 근처인데.”
 천수의곡의 곡주 도원겸이 머무는 곳 근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라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곡주가 머무는 곳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 하나. 그곳에서 금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유는 누가 금을 연주하는 것인지 보기 위해 기웃거렸지만, 담은 너무 높았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장유는 돌을 몇 개 받친 후 그 위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올렸다.
 달그락.
 돌끼리 맞물려 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리면서, 금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그쪽을 엿보았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다홍색 비단옷 끝자락뿐이었다.
 그런 장유의 머리 위로 때 이른 복사꽃 하나가 유유히 떨어져 내려앉았다.
 
 ***
 
 여름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천수의곡에서 항시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의생관생들의 실습이었다. 아홉 살이 넘은 의생관생들이 스승들과 함께 인근의 마을을 방문하여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행사였다.
 매해 하는 행사였기에 이번 해에도 의생관 실습을 나갈 때가 다가왔고, 장유도 그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번에 가야 할 마을은 부우촌이란다.”
 천수의곡이 위치한 사천의 대량산(大凉山)은 높은 산으로 주위에 크고 작은 마을이 많이 위치해 있었다.
 그중 부우촌은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침술을 가르치는 의생관 제육 스승 사유관의 조에 속한 장유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부우촌에 별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었고, 좋은 일을 하는 만큼 부우촌 사람들에게 큰 환대를 받았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소의원(小醫員)님들. 올해도 이맘때쯤 오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천수의곡에서 행하는 의생 실습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기에, 소의원이라고 부르며 환영하였다.
 제일 스승 비허량과 함께 아홉 명의 스승들이 동참했기에 열 개 구역으로 나누기로 하고는, 각 구역에 속할 의생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제발 사유관 스승님의 조에 속해야 한다.’
 다른 스승들보다는 정식 스승인 사유관이 더 아는 것이 많았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는 사유관의 조에 속하는 것이 유리했다.
 이미 저번 생에서 다 배웠으니 뭘 더 배우겠냐고 하겠지만, 의원들은 자신만의 비전이나 치료에 도움이 되는 기술들이 하나둘씩은 있었다.
 그러한 비전이나 기술 등은 공개하지 않지만, 의술을 펼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장유가 원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었다.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노련한 의원들이 가진 의술의 진수가 필요했다.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만큼 알아 두어서 나번득하쁠 것은 없었다.
 ‘제발 저를 뽑아 주십시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사유관과 눈을 마주한 장유였다.
 그리고 사유관의 손가락이 자신을 지목하는 순간, 장유는 너무도 기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물론 사유관의 다음 말이 나왔기에 환호성을 지르는 일은 없었다.
 “거기, 장유 옆에 있는 녀석 나와.”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에 자신의 옆 사람을 지목하는 것이 꼭 자신을 지목하는 것처럼 느껴진 장유였다.
 ‘아, 이런······.’
 아쉽게도 그다음 스승이 장유를 뽑아 가 버렸다.
 장유는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지만, 어쩌겠는가?
 찾아가서 ‘당신의 비전이 탐나므로 훔쳐보고 배울 수 있게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깝지만 스승을 따라나섰다.
 장유의 담당 스승에게 할당된 구역은 부우촌의 외곽이었다.
 동물의 침임을 막기 위해 부우촌을 빙 둘러싼 목책이 눈에 띄었고, 그 주변으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밀집해 있었다.
 “자, 저기 있는 집부터 들어가 보자꾸나.”
 스승이 지목한 집은 구역이 나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저 집을 시작으로 순서대로 진찰을 돌려는 계획인 모양이었다.
 집의 겉도 허름했지만 내부는 더 허름했다.
 어린 의생들이 대부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장유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녹슨 경첩이 달린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중년 여인이 버선발로 뛰어왔다.
 “아이고, 의원님들 잘 오셨습니다. 제가 나가 봐야 하는데, 아이들이 몹시 아픈지라······.”
 원생들을 버선발로 반기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이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품에서 침통을 꺼내 들고는 중년 여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오누이는 열이 올라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숨쉬는 것이 힘든지 새액 새액 몰아쉬고 있었다.
 스승은 오누이의 손을 들어 맥을 잡았고, 근처에 있던 장유를 시켜 계곡에서 물을 길어 오게 했다.
 어떤 오염이 있을지 모를 우물물을 환자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었다. 환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결이었다.
 
 물지게를 챙겨 들고 나선 장유는 방책 바깥에 있는 계곡을 찾아갔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로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절경이었다.
 물지게에 물을 채우는 건 금방이었다.
 물지게가 한가득 차자 그는 지게를 들쳐 멨다. 물지게가 몹시 무거웠지만 그간의 체력 훈련 덕분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읏차.”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오는 붉은 자국이 있었다. 계곡 너머에서 흐릿하게 기억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 왔다.
 그 냄새가 익숙해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주변의 분위기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선명하게 장유에게 느껴졌다.
 전장을 흐르던 냄새였다.
 “피······ 냄새?”
 지나치려고 해도 지나칠 수가 없는 냄새였다.
 전생에서는 항시 함께하던 냄새가 아닌가?
 세심히 주변을 살피던 장유의 눈에 피에 젖은 모래가 보였다.
 다른 핏자국을 찾아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저 핏자국의 주인은 냄새를 지우기 위해 계곡을 거슬러 올라왔고,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빠졌을 것이다. 무림에서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누가 추격당하고 있는 거지?’
 그때 뇌리에 무언가가 번득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천수의곡 근처에서 발견된 사자검문(士子劍門) 장로의 시체였다.
 시기적으로 그가 의생 실습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설마 저 핏자국이?”
 사자검문의 장로가 도망간 흔적이란 말인가?
 사자검문이라고 하면 정주육문(正柱六門)의 하나이며 또한 삼세검문(三勢劍門)의 수좌
 
 정주육문(正柱六門)
 ―월검문(月劍門)
 ―사자검문(士子劍門)
 ―백화문(百花門)
 ―적룡문(赤龍門)
 ―시류문(詩流門)
 ―천광문(天光門)
 
 정주육문에서 높은 위치를 자랑하며, 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선비들의 검’이라고 불리는 문파가 아닌가.
 정말로 그렇다면!
 “섬서에 있는 사자검문의 장로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여기서 죽은 사자검문의 장로가 구룡성의 장로라는 소문이 있었지!”
 그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파고들면서 당시에 주워듣고 흘려버렸던 정보들을 모았다.
 “으음······. 사자검문의 장로, 구룡성, 정보, 파견······. 파견? 설마 저 장로가 구룡성에서 정보를 모으기 위해 파견되었던 장로라는 말인가!”
 간신히 정보의 조각을 모아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낸 장유는 깜짝 놀라 지고 있던 물지게를 떨어트렸고, 땅바닥으로 물이 다 쏟아졌다.
 “살려야 한다!”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살려 두어야 했다.
 천살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려야 했다.
 절대로 살려야만 한다!
 장유는 급히 계곡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계곡을 건너자 냄새가 지워졌을 거라고 안심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지울 힘도 없었기 때문인지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흔적이 선명한 게 다행이군.”
 추적술을 배우지 않은 자신이 뒤쫓을 방법은 이 핏자국 흔적뿐이었다.
 하나 이 핏자국을 남겨 둔다면 추격자들이 쫓아와 장로를 죽이고 저번처럼 시체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내가 흔적을 지우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지워야 해.’
 장유는 흔적을 꼼꼼하게 지운 뒤 핏자국을 추적해 갔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갔을까. 풀이 우거진 숲 한쪽이 뭉개져 있었고, 선명하게 금실로 사자(士子)라는 두 글자가 수놓아진 홍포를 입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사자라는 글자에 홍포라고 한다면, 분명 사자검문의 사람이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로 길게 그어 내려진 검상을 입었는데, 갈비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일단 지혈부터······.’
 장유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서둘러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장유가 다가가자 그가 신음하며 손을 움직여 피 묻은 검을 장유의 목에 겨누었다.
 검끝이 흔들리는 것이 힘이 다한 듯 보였지만 날카로운 검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쿨럭! 쿨럭! 네 녀석은 누구냐? 삼천(三天)의 개 종자들이냐?”
 그의 입에서 장유를 경악에 휩싸이게 할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삼천!
 그 공포스럽고 끔찍한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다는 말인가!
 설마 사자검문 장로를 쫓는 이들이 삼천이라는 말인가!
 “어찌, 어찌 삼천을 아시는 겁니까!”
 장유의 손도 덜덜 떨렸다.
 “사······.”
 장로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눈꺼풀을 뒤집은 채 피를 한바탕 게워내고는 풀썩 늘어졌다. 장유의 목에 겨누어진 검도 주인이 힘을 잃자 땅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게워낸 피가 장유의 두 팔을 흥건하게 적셨지만 개의치 않고 손을 잡아 맥을 살폈다.
 손끝을 타고 희미한 맥이 잡혔다.
 ‘아직 살아 있다. 한데 삼천이라니······. 그럼 구룡성은 삼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삼천에게 패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삼천이 예상보다 더 강해서?
 삼천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아마도 이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 장로가 살아나지 못하고 삼천의 추격자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면, 삼천의 정보가 제대로 구룡성에 전달되지 못하였을 것이고, 삼천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살려야 한다!”
 장유, 그가 경험한 삼천의 전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많은 고수들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병졸들이 있었다.
 구룡성이 삼천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설사 막아 낼 수 있다고 해도, 어느 누가 삼천의 전력에 대해 구룡성에 전해 줄 것인가?
 장유가 직접 구룡성으로 찾아가서 전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저번의 생을 살아서 삼천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오히려 삼천의 간자일지도 모른다며 고문이나 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로를 반드시 살려야 했다.
 “당신은 살아서 반드시 구룡성에 정보를 전해야 합니다.”
 손끝으로 혈맥을 눌러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한 장유는 품속에서 침을 꺼내 침술을 펼쳤다.
 어린 의원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정밀한 침술이었다.
 부드럽게 혈을 파고든 침이 기를 자극하며 생기를 북돋았다.
 침놓기를 마친 장유의 손이 이름 모를 사자검문 장로의 근육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온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창백했던 그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이 사람을 여기 놓아두면 안될 텐데.”
 언제 추격자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사자검문의 장로를 안전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어디로 어떻게 옮겨야 한단 말인가.
 현재의 장유는 열 살 소년의 몸이었다. 여리고 덜 자란 소년의 몸으로 큰 몸집의 노인을 옮기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추격자들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람을 놓아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유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후우······.”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
 
 장유가 어찌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을 무렵, 오누이를 돌보고 있던 스승은 계곡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유가 돌아오지 않자 다른 원생을 계곡에 보냈다.
 그 원생은 계곡 근처에서 장유가 가져간 물지게만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장유에게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챘고, 빠르게 돌아갔다.
 “스승님, 장유는 안 보이고 물지게만 있었어요.”
 스승은 빠르게 대책을 생각하여 원생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너희들은 빨리 장유를 찾아보거라.”
 스승은 원생 아이들을 풀어 장유를 찾게끔 지시했다.
 원생들은 물지게가 있던 계곡 부근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한 원생 아이가 제법 먼 거리에 있던 장유를 발견했다.
 풀숲 사이로 보이는 장유의 뒤통수를 보고 원생이 소리쳤다.
 “야! 너 거기서 뭐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장유는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흠칫 놀라 돌아봤다.
 다행히도 추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는 안도감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네.”
 ‘그런데 저거 이름이 뭐였더라?’
 순식간에 ‘저거’가 되어 버린 소년 원생이었다.
 “야! 너, 지금 당장 가서 스승님이나 어른들 몇 분 모셔 와.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 무림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급한 상황에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어? 거기 사람이 왜 쓰러져 있는건데? 그것도 무림인이.”
 장유의 머릿속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저건 왜 빨리 가지 않고 물어본다는 말인가!
 ‘그냥 불러오라고 하면 불러올 것이지!’
 “몰라 임마! 내가 찌른 거 아니니까 빨리 스승님이나 모시고 오라고!”
 아까 소리 지른 것보다 훨씬 큰 목소리였고, 이번에는 성질까지 부렸다.
 그가 역정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소년 원생은 그제야 엉거주춤 돌아서며 왔던 길을 뛰어갔다.
 ‘조금만 더 늦으면 추격자들이 왔을지도 모른다.’
 늦지 않게 발견해 준 덕분에 이 사자검문의 장로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장유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장로의 가슴팍에 길게 나 있는 검상을 살폈다.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 부근까지 길게 베어 내려온 검상이었으나, 중간에 흔들림이 있었다.
 “장로가 이 정도 검상을 입었다면 상대도 꽤 크게 다쳤겠군.”
 장유는 무공 실력이 뛰어나지 않지만 많은 고수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던 경험 많은 의원이었기에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졌다.
 추격자 중 한 명과 사자검문의 장로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치명적인 살초를 풀어냈을 것이다. 호각을 이루며 자잘한 상처를 만들었을 것이고, 큰 기술을 준비하며 틈을 내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파고든 상대방을 향한 치명적인 일격에 사자검문의 장로가 큰 상처를 입었고, 상대 역시 피 분수를 뿌리며 날아갔을 것이다.
 그는 무려 사자검문의 장로다. 그를 추격하는 사람이 천살 혹은 삼천의 천주급이었다면 여기까지 도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삼천은 흑천(黑天), 귀천(鬼天), 암천(暗天)을 말하는 것으로, 각기 흑천주(黑天主), 귀천주(鬼天主), 암천주(暗天主)라는 세 명의 천주(天主)가 있으며, 그 위에 삼천주(三天主)라는 천살이 있었다.
 장유가 기억하기로 삼천주급만 되어도 정주육문의 장문인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그런 그들이 사자검문의 장로를 추격했을 일은 거의 만무했고, 장로가 이 정도까지 상처 입고도 도주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 상처를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곪는데.”
 늦봄이라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거기다 간신히 지혈과 죽지 않을 정도의 기력만 회복시킨 상태였으니,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이다. 이곳에는 제대로 된 약재 하나 없으니 제일 좋은 방법은 의곡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실 자신이 치료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문제가 되었다.
 사자검문의 장로가 입은 검상은 상당히 심각했다. 이 정도의 검상을, 그것도 이제 열 살에 들어선 의생관생이 치료한다면 당장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자신의 능력이 너무 빨리 알려져도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당황하지 않고 지혈 조치를 완벽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을 너무 많이 드러낸 셈이었다.
 그래도 정 위급하면 자신이 손을 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니까.
 다행히도 소년 원생이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격자들? 아니면 스승님이나 다른 어른분들?’
 상황의 급박함을 알고 빨리 달려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장유는 사자검문의 장로를 수풀이 무성한 곳으로 옮겨 몸을 가렸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장유의 숨소리도 점차 조용해지고 식은땀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추격자들이라면 피 냄새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추격에 특화된 그들이 피 냄새를 맡지 못할 리 없었다.
 꿀꺽!
 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장유가 너무 긴장하여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추격자들이라면 접근하면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었다.
 “야! 어른들 모시고 왔어!”
 아까 보낸 소년 원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감이 가슴을 엄습하며 장유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다시 토해 냈다.
 “푸아. 다행이다. 그것보다 어른들 모셔 왔어?”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답답하던 차였다.
 “당연히 모셔 왔지.”
 장유의 물음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뒤로 손짓하는 소년 원생이었다.
 “어라? 어······ 어······. 어······. 설마 다쳤다는 사람이······.”
 아직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 모양이었다. 갈비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의 검상에 기겁하며 입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확실히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잔혹한 광경이었다.
 “어. 이 사람이야.”
 “우웨엑, 우웩, 웨에에엑”
 헛구역질을 해 대는 소년 원생의 모습에 장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후 장로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시급하게 천수의곡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사자검문 장로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건 없이 실습 일을 끝마친 장유의 일상은 언제나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어허, 발 구름을 더 강하게. 힘은 발끝에서 시작해서 허리로, 허리에서 팔 전체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양손의 교차가 이루어진 후에는 좌수, 혹은 우수의 출수가 더 빨라야 한다. 방어와 동시에 순간적인 일격을 가하거라!”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일곱 바퀴 추가!”
 비단 원무관에서 벌어지는 무공 수련뿐만이 아니었다. 의생관에서 익히는 의술 수업 역시 마찬가지로 힘겨웠다.
 모든 내용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예습도 하고 늦은 밤까지 자지 않고 복습을 병행했다.
 “수영은 줄기는 둥글고 속이 비어 있으며 살짝 붉은기가 돌고, 씹으면 신맛이 나는 다년초다. 갈증, 탈수 등에 도움이 되는 약초이니 기억해 두도록.”
 “어허, 혈 자리를 잘못 잡았지 않느냐. 다시 해 보거라.”
 “인간의 오장육부란······.”
 하루하루 지쳐 갔고, 스승들의 지도가 이어질 때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장유는 스스로를 더욱 자책하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삼천을 막는다는 말인가. 더, 더 혹독하게!’
 여유가 없는, 하루하루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의술과 무공을 익히는 일들을 해내는 장유였다.
 그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것이었기에 어느 것 하나 쉽게 손을 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의술은 그다지 건질 것이 없었다. 과거에 익혀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그가 따로 공부하는 의서들이었다.
 ‘이건 또 새로운 치료법이군.’
 과거 삼천의 침입 당시에 의곡의 모든 의서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그 때문에 익히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의곡의 비전은 자신이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만, 그 외의 자신이 섭렵하지 못했던 많은 의서들은 공부해 두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은 무거워지고 마음은 지쳐 갔고, 피로는 더욱 누적되었다.
 오늘도 무거운 몸으로 힘겹게 원무관에서 의생관으로 옮겨 갔다.
 그때 허공에서 음률이 들려왔다.
 띠리링, 디링.
 귓가를 자극하는 맑은소리였다.
 장유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다.
 귓가를 자극하는 맑은소리는 장유의 기억 한구석을 자극했고, 마침내 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때 들은 칠현금 소리구나.”
 얼마 전 대숲에 싸인 정자에서 들었고, 찾아나섰다가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던 다홍 비단옷의 여인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그 건물으로 찾아갔다. 한 번 찾아갔었기에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뭐랄까, 저번에는 느꼈지만, 이곳이 왠지 익숙한데?’
 거기다가 그때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두 무사가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때 장유가 다가오는 것을 본 두 무사가 약간 긴장했다가 금새 풀어졌다.
 “뭐야? 의생관생이잖아.”
 “여기는 웬일이냐?”
 두 무사의 물음에 장유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칠현금 소리를 따라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데 칠현금은 누가 연주하는 것입니까?”
 그 말에 두 무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정말 듣기 좋지 않냐? 캬, 어린 아가씨가 어찌 저리도 칠현금 연주를 잘하는지.”
 “그러게 말일세.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와.”
 대답은 해 주지 않고 딴소리하는 두 무사였다.
 그들은 각자 몇 마디의 말을 더 했지만 그들의 말에서 건질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린 아가씨라는 단어였다.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어린 아가씨란 말입니까?”
 “그래, 딱 네 또래의 아가씨지.”
 “곡주님의 따님이신 도예림 아가씨가 연주하는 금 소린데, 참 대단하단 말이야.”
 도. 예. 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장유는 뒤통수를 큰 돌로 얻어맞은 듯이 번갯불이 번쩍였다.
 바쁘게 산다고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한 송이 꽃이 잘 어울리는 소녀. 삼천의 침입 때 죽어 버린 그 소녀.
 그 소녀가 장유의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자신했건만,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구나.’
 저번 생에서는 그랬다.
 한데 이번 생은 너무 바쁘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짝사랑이라도 상관없었다.
 평생 속으로만 간직해야 할 사랑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 감정이 과연 진짜일까?’
 어린 시절의 미화된 기억은 아닐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천수의곡이 삼천의 습격을 받은 것은 장유가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그 무렵의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과연 지금의 자신이 보아도 그녀가 아름답게 느껴질까? 지금의 그녀는 고작 열 살이지 않은가.
 ‘만약 이번에도 그녀가 내 마음속에 들어온다면······.’
 짝사랑으로는 끝내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얻어 낼 것이고, 삼천에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겠지. 일단 그녀의 얼굴도 다시 한 번 봐야겠고 말이야.’
 강해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소년의 마음속에도 복사꽃이 피는 것일까?
 
 ***
 
 며칠의 밤이 지났을까.
 마침내 사자검문의 장로가 정신을 되찾았다.
 장로가 정신을 찾았다는 말에 천수의곡의 곡주인 도원겸이 직접 방문했다.
 “여기가 정말로 천수의곡입니까?”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자검문의 장로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의곡의 곡주 도원겸입니다. 대협은 사자검문의 장로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무림 동도들이 미숙하나마 군자검(君子劍)이라고 불러 주는 운천이라 합니다.”
 군자검은 섬서뿐만이 아니라 강호 전체에 이름난 고수였다.
 “한데 어찌하여 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죄송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운천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한 문파의 장로가 생사의 갈림길에 설 정도의 상처를 입은 일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개인적으로나 문파로 보아도 함부로 밝힐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도원겸이 웃으면서 말하자 운천도 웃으면서 답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스럽습니다.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에 도원겸은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사를 받아야 할 아이는 따로 있습니다.”
 “아이라니요?”
 그 물음과 함께 운천의 머릿속에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쿨럭! 쿨럭! 네 녀석은 누구냐? 삼천의 개 종자들이냐?”
 “어찌, 어찌 삼천을 아시는 겁니까!”
 
 삼천을 알고 있는 아이!
 삼천이란 구룡성 수뇌부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삼천을 알고 있다니!
 “운 대협을 발견한 건 장유라는 아이입니다. 허허, 그 아이의 응급처치가 빨랐기에 운 대협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수 있는 겁니다.”
 “아, 예······. 그렇군요.”
 운천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장유에 대해서 생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의곡의 아이가, 삼천을 알고 있다······.’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삼천에서 의곡으로 보내진 첩자일까? 아니다. 그가 삼천의 첩자라면 나를 살려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그 아이를 만나 봐야겠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아이를 직접 만나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운천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도원겸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유를 불렀다.
 
 장유는 인간의 장기에 관련된 수업을 듣고 있다가 곡주의 부름에 불려 왔고, 곧 운천의 앞에 서게 되었다.
 “얘야, 이분이 네가 살린 분이란다.”
 “의생관에서 의술을 배우고 있는 장유라고 합니다. 몸은 어떠세요?”
 도원겸의 소개에 장유가 진심으로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운천을 바라보며 안위를 물었다.
 “덕분에 괜찮구나.”
 인자한 웃음을 짓던 운천이 도원겸을 향해 말했다.
 “곡주님, 이 아이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음을 느낀 도원겸이 흔쾌히 승락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도원겸이 나가고, 그의 인기척이 멀어지는 순간, 방 전체의 공기가 일변했다.
 “넌 누구냐?”
 운천에게서 일어난 무서운 기운이 장유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리고 옅은 먹 향이 방 안을 감돌았다.
 “으윽······.”
 반 푼도 안 되는 내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거대한 압력에 장유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살려 주었더니 넌 누구냐 하면서 위압하다니, 말도 안 되는 경우였다.
 “넌 누구기에 삼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지? 말해라. 삼천의 간자냐?”
 그 한마디에 장유의 머릿속에서도 운천이 기절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와 경솔함에 대한 반성.
 성급했다.
 ‘내가 삼천이라는 말에 너무 격하게 반응했구나. 실수다.’
 장유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력 속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채······ 책에서 읽었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에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삼천(三天), 그들은 기실 칠백 년 전 무림을 멸망으로까지 몰고 갈 뻔했던 단체였다. 그러니 무림의 야사를 기록한 이야기책 중에 삼천을 기록한 책자가 제법 되었다.
 “책? 허어, 그러고 보니 삼천이 나오는 책이 있기야 했었지······.”
 그 말과 함께 운천이 손을 휘휘 휘둘렀고, 그 순간 방 전체를 잠식해 있던 기운과 먹 향이 스르르 사라졌다.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진 장유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운천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이거 미안하네.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 실수한 모양이야.”
 ‘내공도 낮고, 이겨 내는 방법도 너무 미숙하군.’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간자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아, 하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 목숨을 구해 주어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삼천에 관한 사실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네.”
 이미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점도. 삼천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 탓이리라.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사람이 살아나서 삼천의 정보를 구룡성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유의 말에 운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자네를 보면 열 살 소년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를 보는 듯해.”
 뜨끔했다. 자신은 최대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그 행동이 아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그럴 리가요. 하하하”
 일단 장유는 부인했다.
 “당연히 농담이라네. 허허허.”
 ‘하하하, 정말로 식은땀이 쫙 흐르는 농담입니다.’
 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
 “내 자네에게 은혜 갚음을 해야겠지?”
 운천이 웃으며 한 말에 장유는 완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로서 당연한 행동입니다. 한데 제가 어찌 보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응? 의원이 환자를 고치고 보답을 받는 건 당연한 걸로 알고 있네만?”
 “그, 그건······.”
 의원 일의 본질이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니, 돈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한 보답이 아니니 부담 갖지 말게.”
 말을 마친 운천은 옆 탁자에 놓인 자신의 검을 들더니 검집에 매달린 금색 장식을 뜯어냈다.
 그 금색 장식을 어떻게 조작하자 그 안에서 조그맣고 은은한 먹색을 띤 단약 하나가 나왔다.
 운천의 손이 불쑥 움직여 장유의 손에 단약을 쥐어 주었다.
 먹색을 띠는 작은 단약에서 좋은 냄새가 손끝에서 코끝까지 전달되었다.
 “아까 그 먹 향······. 사자검문의 단약입니까?”
 “잘 아는군. 사자검문의 군자단(君子丹)이라는 것이지. 왕유신단(王維神丹)보다는 못하지만, 그것의 반절쯤의 효능은 보일 것이네.”
 군자단이라면, 장유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영단이었다. 백 개의 시구를 적고, 먹물이 마르기 직전에 백 개의 약초를 각각 하나의 시구에 감싸서 말려 백 일을 먹 향 진한 곳에서 보관하였다가, 먹 향이 진하게 배어든 약초들을 섞어 만든 단약이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장유가 사양하며 단약을 내밀자, 운천은 다시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닌데 그렇게 거절하면 내가 뭐가 되나?”
 그가 개어져 옆 탁자에 놓인 옷자락에서 꺼낸 것은 손바닥 크기의 철패였다.
 철패에는 음각으로 된 공(孔)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공자패(孔子牌)라는 것이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룡성이나 사자검문으로 찾아와 나를 찾을 때 필요할 것이네. 그때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자네를 도와주도록 하지.”
 훗날 도와주겠다는 약속의 징표였기에,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장유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몸을 회복한 운천이 천수의곡을 떠나갔다.
 떠나가는 운천의 머리에 장유의 모습이 계속해서 밟혔던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천,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인연의 끈이, 후에 사자검문을 살리게 되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먼 미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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