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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 (1화)

2017.06.14 조회 687 추천 4


 마운틴 로드 1권 (1화)
 Chap. 1
 아르도스 영지의 소영주가 된 아이
 
 
 “영주님, 드디어 카스티느입니다.”
 강 건너편에 웅장한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좌우의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 25미터의 회백색 성채는 보는 것만으로 외경심을 갖게 만든다.
 두 눈에 가득 차 보이는 거대한 성문.
 성을 휘도는 강심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5개의 거대한 교각이 서 있고, 그 위에 놓인 마법 도개교는 그 폭만 20미터가 넘어 보였다.
 두껍게 먼지가 묻은 여행자 복장의 사내는 란셋을 향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란셋. 수고 많았네.”
 “별말씀을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내일 저녁에 시작되는 파티까지는 준비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 그야말로 딱 적당한 것 아니겠는가? 일단은 여관을 정하고 좀 쉬세.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지금 몹시 피곤하네. 필콘 영지를 지난 후론 야숙만 했으니, 이젠 따뜻한 물에 온몸을 좀 담그고 싶어.”
 왜 모르겠는가? 자신을 생각해 부리는 엄살이라는 것을.
 란셋 역시 미소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여관부터 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성문에 가까워지자 분주한 성문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성문 왼편에는 병사들의 검문을 받느라 일반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오른편은 한적했지만 기사 다섯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보기에도 번쩍이는 은빛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네 명의 기사가 세워 든 긴 핼버드(Halberd, 도끼창)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전투용이라기 보다 의전용에 가까운 모습.
 그 뒤에는 헤르시온이 분명한 큐래스(cuirass, 흉갑)를 입은 기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어느덧 도개교를 건넌 란셋은 말에서 내려 눈앞을 가로막은 웅대한 성문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헤르시온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두 사람을 향했다.
 “여기는 대 카스틴 왕국의 왕도, 카스티느입니다. 기사 분은 신분을 밝히시오.”
 “나는 아르도스 영지의 리믹스 폰 아르도스 영주님을 수행하고 왕도를 찾은 수석기사 란셋 폰 아란이오. 뒤에 계신 분은 국왕 전하의 마흔 번째 탄신을 축하하고자, 왕도를 찾으신 아르도스의 영주, 리믹스 폰 아르도스 백작님이시오.”
 장황한 듯하지만 정중하고 위엄 있는 소개.
 하지만 왕도의 기사는 무반응이었다.
 “실례입니다만, 귀족 증명을 확인하겠습니다.”
 멈칫하던 란셋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백작가의 문장을 내보이고는 묵묵히 성문을 통과했다.
 뒤늦게 당황하며 예를 취하는 기사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란셋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고 있었다.
 수도의 성문을 통과하는 어떤 귀족도 이런 요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카스틴 왕국의 영지라고 해 봐야 61개.
 61명의 영주밖에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4공작, 7후작, 12백작 중의 아르도스 백작이었다.
 개국공신으로 9대째 내려온 왕위 서열 27위의 고위 귀족인 아르도스 백작이 왕궁도 아닌 왕도 성문에서 귀족 증명을 확인받아야 한다는 현실은 란셋으로 하여금 차라리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런 것이 인심인 것을.’
 란셋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자신이라도 현직 영주이자 고위 귀족인 백작이 마차나 수행인도 없이 달랑 수행기사 하나만 데리고 왕도를 찾았다면 의구심부터 먼저 가질 것이 분명했다.
 
 “송구할 뿐입니다, 영주님.”
 “별말을 다하는군, 란셋. 그나마 방이라도 얻었으니 고맙지.”
 왕도 중심의 일급여관들에는 이미 예약 손님으로 차 버렸고, 그나마 겨우 얻은 것이 외곽의 선술집과 함께 있는 여관이었다.
 란셋은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수도에 저택을 두고 있다. 아니, 대부분의 영주들은 수도에 저택이 있고, 영지가 없는 행정처 소속의 귀족들 중에서도 수도에 거처를 가진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9대째 이어 온 세습귀족인 아르도스 가(家)가 수도의 저택을 팔아 치운 것은 벌써 10년도 넘은 전대 가주인 헤더 백작의 대였다.
 물론 수도에 저택이 없는 귀족들도 많다. 그런 귀족들은 보통 임대한 주택이나, 혹은 거래하는 여관들이나, 그게 아니면 기사나 집사를 미리 보내 거처를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리믹스 백작은 수행원들도 없이 오직 수석기사만 데리고 왕도를 찾을 정도로 빈한했다.
 만약 영지가 부유했다면 달라졌을까?
 단언할 수는 없어도 란셋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기름진 남부의 영지에서 지금의 영지로 옮겼던 전대 가주 헤더 폰 아르도스 때부터 보여 준 백작가의 내력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왕도에 들어온 이후, 란셋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함을 느껴야 했다. 명색이 국왕의 마흔 번째 탄신일이고, 또 등극한 지 10주년이 되는 왕국 최대의 축일이다. 하례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사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왕도에 오기나 했겠는가?
 영지에서 왕도까지 빨리 와도 20일은 걸린다.
 이 일 저 일 영지 일을 핑계대면서 미루던 백작은 보름 전에야 겨우 출발했다.
 당연히 오는 도중 여관에서 쉴 생각은 접어야 했다.
 야숙을 하며 밤낮을 달려온 길이다. 그러다 보니 귀족 파티 전날에야 겨우 도착한 것이다.
 당연히 국왕 탄신 선물조차 준비되지 않았다.
 축일 전야인 이틀 뒤의 저녁 파티에는 선물을 가져가야 했다. 가능하다면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란셋은 조급했다.
 하지만 란셋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띠어야 했다.
 허름한 여관이지만, 그래도 미소로 자신과 마주한 주군 앞이기 때문이다.
 
 ***
 
 선물을 사기 위해 상가를 돌고 있는 란셋은 죽을 맛이었다.
 보통, 귀족들은 이름난 장인이 만든 명품 같은 귀물을 미리 준비하거나 영지의 이름난 특산물들을 선물한다. 하지만 아르도스 영지는 특산물 자체가 없는 곳이었다.
 테이블로스 산맥의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테이블마운틴. 그 서남부 끝에 붙어 있는 아르도스는 전대 영주인 헤더 백작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불모의 땅이었다.
 보통의 영지 2개 정도나 되는 넓은 영지였지만, 인구는 고작 5만에 불과한 변방의 초라한 영지 아르도스.
 북동 지역 전체를 가린 테이블마운틴의 절벽, 그리고 서쪽으로는 해양 몬스터의 천국인 몬스터 해역의 페리스 해가 펼쳐져 있다.
 
 영지로 개발된 것도 이제 겨우 25년이다.
 그 기간 동안 아르도스 백작가는 몬스터 퇴치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거기에 영지 전역이 테이블마운틴과 같은 석질의 암반 지대였으니 무슨 변변한 특산물이 나오겠는가?
 식량인 곡물마저 이웃 영지에서 사들여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정도로 토지는 척박했고, 테이블마운틴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암반 지대에서는 우물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아르도스 영지였다.
 당연히 아르도스는 가난하다.
 더욱이 영지의 세금은 겨우 25%.
 다른 영지는 기본이 50% 이상인 것에 비교하면 말도 되지 않는 세금이었다. 그럼에도 매년 굶어 죽는 주민들을 만들어 냈다.
 그 가난을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영지의 상황이 그러니, 당연히 백작가도 돈이 없다.
 돈이 부족하니, 란셋이 아무리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도 선물을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비쌌고, 금액에 맞추려니 초라했다. 명색이 국왕의 탄신을 축하하고, 10년을 맞은 치정을 송축하는 자리에 올릴 선물이다.
 적당한 가격에 어느 정도 인사치레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선물. 그것이 쉽게 발견되겠는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란셋의 마음은 갈수록 까맣게 타올랐다. 정오에 시장 입구에서 백작을 만나기로 했다. 서두르며 발품을 팔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정오를 알리는 신전의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란셋은 서둘러 시장 입구를 향해 발을 움직여야 했다. 주군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리믹스 백작이 보였다.
 부하를 기다리는 주군, 그가 리믹스 폰 아르도스였다.
 “란셋, 이 시장엔 무슨 일인가?”
 “그게 저······.”
 란셋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선물을 사려 했지만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겠는가?
 란셋의 속은 타다 못해 새까만 연기를 피워 올렸다.
 백작은 그런 란셋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은 듯 물었다.
 “혹, 국왕 전하께 드릴 축하 선물 때문인가?”
 “······예.”
 “이런! 누가 기사인 자네에게 선물을 걱정하라 했는가?”
 “그게······. 오토 집사님께서 20골드를 주시며 신신당부를 하셔서······.”
 “20골드나? 하하, 오토 집사가 큰마음을 먹은 모양이군. 20골드나 되는 거금을 내놓다니. 흠······, 영지에 그 정도 거금이 남아 있었나? 얼마 동안 모은 것이지? 그런 돈이 있으면서 지난봄에 왜 내놓지 않았지?”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달아 반문을 쏟아 놓았다.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것이다.
 그런 백작을 보며 란셋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이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운 것이다.
 그때 리믹스 백작의 음성이 들어왔다.
 “미리 말해 줄 걸. 선물은 걱정 말게. 이미 준비해 왔네.”
 “예?”
 란셋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백작님께서 무슨 골드가 있으셔서······?”
 “하하, 선물이란 게 별건가? 축하하는 마음만 진실하다면, 그 선물의 질이 무어 그리 대단하겠는가?”
 “영주님······!”
 “걱정 말게. 이걸 보게.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이, 이건······.”
 백작이 보여 준 것은 30센티미터 정도의 단검.
 로딘, 아르도스 백작가의 마지막 남은 보물인 로딘이었다.
 칼집과 손잡이까지 은사로 세이지 문양을 새겨 넣고 특이하게 손잡이와 탱(Tang)의 연결부에 보호구가 붙어 있는 단검. 화려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은은한 고색에 세월과 위엄이 느껴지는 단검이었다.
 더욱이 로딘에는 3서클 마법인 파이어볼이 인챈트되어 있었다.
 하루 세 번이나 딜레이 없이 파이어볼을 날릴 수 있는 단검. 아르도스 백작가의 시조인 로딘 폰 아르도스 백작의 친구였던 대마도사 버핸드 사일루스가 직접 인챈트해서 선물했다는 바로 그 로딘이었다.
 정말, 선물다운 선물이다.
 아마도 국왕께서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토록 귀한 선물을 내놓는 귀족들도 많지는 않을 것이라 란셋은 생각했다.
 하지만 란셋은 다른 의미에서 기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 됩니다, 백작님. 저,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데······.”
 “아, 걱정 말게. 이것을 선물할 것은 아니야.”
 “······예?”
 란셋은 당황했다.
 백작은 그것을 선물로 하지 않겠단다.
 그럼 무엇을 선물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리믹스 백작의 말은 더더욱 황당했다.
 “이 비싼 물건을 어떻게 그냥 드린다는 말인가? 팔아서 선물을 사고, 남은 금액으로는 밀과 종자를 사 가려 하네.”
 “그, 그······.”
 란셋은 말을 잊어버렸다.
 국왕의 선물로 로딘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팔아 선물을 사고 나머지는 밀과 씨앗을 사겠다는 백작······.
 리믹스 폰 아르도스 백작은 그런 영주였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자신의 체면이나 개인의 영달보다는 영지민들의 안녕을 구할 사람, 그가 바로 아르도스의 영주였고 란셋의 주군이었다.
 “하, 하지만 로딘을 판다는 것은······.”
 “왜? 내가 주인인데, 내 마음이지 누가 말려?”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마지막 보물이지 않습니까?”
 “하하, 이 사람. 왜, 자네가 물려받으려 했는가?”
 “그, 그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자네가 이해하게. 별 수 없지 않은가? 식량이 너무 부족하니······.”
 “······!”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란셋은 말을 잊고 백작만 바라보았다.
 
 “너무하셨습니다.”
 “하하, 란셋,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그래도 탄신 선물인데······.”
 “허, 또 그 소린가? 내가 아니더라도 귀한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즐비할 걸세. 나 정도야 그러려니 하실걸? 하하하.”
 티 없이 맑은 웃음, 저 나이에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시장 한 켠의 낡은 주점에 털썩 주저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입가에 거품을 묻히며 흑맥주를 들이키는 이가 백작이라니?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핫하, 먹음직스러운 양고기 스튜군. 자, 어서 먹고 서둘러 종자를 알아보세. 그래도 저녁 파티에는 얼굴이라도 비쳐야지.”
 “예. 드시지요.”
 향기로운 냄새와 함께 모락모락 수증기를 올리는 스튜 접시와 윗부분이 살짝 탄 검은 고동색의 보리빵이 먹음직스럽게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흑맥주를 들어 벌컥 들이킨 리믹스 백작과 란셋은 짧은 식사 기도와 함께 나무 스푼을 들어 스튜를 떠 올렸다.
 먹음직스런 향기가 코끝을 감돌고, 허기진 미각을 자극한다.
 찰나였다.
 쿠당탕!
 “헉!”
 “엥!”
 작은 아이 하나가 백작의 발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백작은 아이를 부축하려 오른손을 뻗었다. 백작의 갑작스런 행동으로 식탁이 밀리면서 반대편의 란셋이 황급히 일어섰고, 그 바람에 다시 식탁이 기울어져 스튜가 담긴 접시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따당땅! 텅! 텅!
 시끄럽고 번잡한 소리들.
 바닥은 쏟아진 스튜와 건더기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놈! 이 도둑고양이 같은 놈!”
 “멈추게!”
 쿠탕!
 어느새,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주방에서 뛰어나온 주방장.
 란셋이 손목을 쳐올리자, 프라이팬은 낮은 천정의 나무 기둥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나, 나리······.”
 주방장은 손을 부여잡고,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비록 남루해 보였지만 상대는 기사가 분명했다. 손을 쳐 내는 솜씨나 분위기는 결코 용병 나부랭이는 아님을 보여 주었다.
 기사면 최하위지만 귀족이다. 귀족이 기분이 상해 평민의 목을 잘라도 대륙의 법은 용납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다.
 백작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며 두 눈을 감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주방장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쳐 죽일 놈의 거지새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방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이쪽을 주시하던 작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주방장은 답답한 마음에 카운터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인은 벌겋게 붉힌 얼굴로 고개를 외로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간이라 셋밖에 없는 손님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도 주방장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마침 아이를 품에 안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아이니 너무 책하지 말게. 스튜 가격은 치를 것이니 다른 요리를 내놓게. 사실 자네의 스튜에서 풍기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거든.”
 “아! 예, 예.”
 어떤 말인데 거절하겠는가?
 황급히 허리를 숙일 때, 그것을 막는 외마디 비명.
 “악!”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자 백작은 아이를 내려 주었다.
 문득, 바닥에 쏟아진 스튜를 핥고 있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잡으려는 아이가 눈에 띄자, 주방장은 기겁을 했다.
 “이런! 도둑고양이 새끼!”
 “야옹!”
 발길질에 놀란 고양이는 스튜의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야옹아!”
 아이 역시 고양이를 따라 주방으로 사라졌다.
 주방장은 땀을 흘리며 기사와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를 안았던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앉았고, 기사는 품에서 1실버를 꺼내 던졌다.
 “음식 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자네에게 주는 봉사료일세.”
 “아! 예······? 예. 가, 감사합니다.”
 1실버는 100쿠퍼다. 스튜 한 접시에 7쿠퍼이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주방장은 한껏 허리를 숙여 굽실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주방어귀에서 돌아선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척박한 아르도스의 대지에 적합한 종자는 거의 없었다. 아르도스는 산지는 아니지만 테이블마운틴의 바닥 부분으로 영지 대부분이 암반 지대였다. 그나마 양호한 곳조차 토양이 거의 없는 자갈밭이었다.
 그러니, 그런 토양에 적합한 종자를 찾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스틴 제일의 상단인 모트모스 상단의 도움으로 리믹스 백작은 콩이라는 작물을 구할 수 있었다. 콩을 처음 재배하려면 먼저 재배했던 곳의 농토를 필요로 한다는데, 모트모스 상단의 상주는 기꺼이 토양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오토 집사가 보낸 20골드와 여행 경비를 제외한 남은 골드를 모두 투자해 밀을 구입한 리믹스 백작과 란셋은 기쁜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서둘러야 저녁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시장을 벗어나 바쁘게 걸어가던 란셋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 전에 지나친 오른쪽 골목을 돌아보았다.
 “······!”
 “왜 그러나, 란셋?”
 “아, 아닙니다, 영주님. 가시지요.”
 “잠깐만! 란셋.”
 지나치려고 결심한 란셋의 발을 백작이 붙잡았다.
 돌아선 백작의 눈에도 보인 모양이다.
 “영주님, 왕도의 골목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냥 버려두고 가시지요. 지금도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부랑아 같습니다.”
 란셋의 만류에도 골목으로 들어선 백작은 좁은 골목의 쓰레기통 사이에 쓰러져 있던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니야.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의 그 아이일세.”
 “네? 아, 그렇군요. 아니 이 녀석······?”
 “어허! 누가 이렇게 어린아이를······?”
 “죽은 건가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리는 백작으로부터 아이를 받아 들던 란셋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아이를 살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네. 자네가 먼저 가서 여관으로 의사를 데려와야겠네.”
 “예, 알겠습니다. 영주님.”
 약간은 당황한 모습으로 란셋은 뛰어갔다.
 바스타드 소드를 철컥거리며 뛰어가는 란셋을 보며 골목을 나오던 백작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결코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닌, 마지막으로 골목을 돌아보던 눈에 띈 것이다.
 얼룩무늬의 작은 짐승. 고양이였다.
 죽어 있는 고양이 주변에는 이물질과 핏물이 뒤섞인 토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문득, 백작의 머리로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란셋!”
 
 “어서 오십시오, 저 안쪽에 자리가······.”
 “주방장을 나오라 하게.”
 “그, 그것이······.”
 백작과 란셋을 알아본 사환은 당황하며, 카운터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으, 허억!”
 슬며시 주방으로 향하던 주인은 란셋에 의해 목덜미를 부여 잡히며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 중에 눈에 익은 몇몇이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며 대거를 뽑아 들었다.
 챙! 챙!
 우당탕!
 한통속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신속하게 반응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이때는 결코 망설여서는 안 된다.
 란셋은 테이블 하나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우당탕!
 허공에 떠오른 테이블이 사내들이 있는 테이블에 떨어졌다.
 움찔한 사내들이 다른 테이블로 뛰어 물러서려 할 때, 떨어지는 테이블의 뒤를 따라 란셋의 신형이 파고들었다.
 퍽! 퍽!
 아르도스 백작가의 수석기사 란셋 폰 아란. 백작가가 남부에 있다면 현직 기사단장이었을 존재였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을 오래전 넘어서 상급에 다다른 란셋의 움직임을 따를 자는 왕국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더욱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리믹스 백작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암살자 길드도 아니고 도둑 길드, 게다가 조직원 정도가 감당할 수준은 애당초 아닌 것이다.
 식당 뒷문으로 도망치던 주방장까지 잡혀 오고, 도둑 길드의 지부가 온통 뒤집어지고, 지부장이 참혹한 얼굴로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사건의 정황이 드러났다.
 
 로딘을 판 자금으로 선물을 찾아 헤매던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장물을 취급하는 도둑 길드의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나름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발견한 두 사람은 허기가 졌기에 맞은편에 보이는 식당으로 가자고 이야기한다.
 선물 대금을 치루기 위해 꺼낸 주머니를 보았던 상점의 주인은 도둑 길드의 지역 간부.
 맞은편의 식당도 상점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너구리굴 역할의 아지트였다.
 족히 200골드는 너끈할 주머니를 확인한 간부는 선물을 포장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번 후, 식당의 조직원들에게 전언한다.
 기회였다. 두 사람의 복장은 여행객 차림. 그렇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인 것이다.
 과연, 둘은 처음의 말대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맞은편 상점의 주변을 감시하던 조직원들이 여차하면 대거를 찔러 넣을 준비를 갖춘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방 뒷문으로 들어간 간부는 독버섯에서 추출한 독과 함께 강력한 수면제를 주방장에게 건넸다.
 비프스튜였다.
 소고기를 버무릴 때 독버섯의 독을 버무렸고, 스튜 국물에는 수면제가 향신료처럼 녹아들었다. 더불어 보리 빵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화덕에서 나왔다.
 준비 완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환이 여유롭게 접시를 배달했고, 두 여행객은 나무 스푼을 들어 국물을 떠 올렸다.
 많은 시간도 필요 없을 것이다.
 10분 정도?
 식사를 마치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지면서 피를 토할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꼬마일까?
 주방장인 필이 식당 뒷골목에 있던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에게 남은 음식을 몇 번 주었는데, 그 뒤로 주방의 쓰레기들을 치워 주곤 해서 내버려 두었던 아이.
 이 녀석이 주방 구석에 있다가 간부가 하던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 뒤의 일은 모두가 경험한 바였다.
 도둑 길드 지역 담당 지부장은 거래를 요청했다.
 이 사건은 도둑 길드와 연관 짓지 않고, 간부와 주방장만 구속시키는 대신에 뺏으려 했던 200골드를 제시했다.
 엄청난 금액.
 란셋은 불가를 외쳤지만 백작은 웃으며 받아 들였다.
 200골드.
 1골드는 10실버고, 1천 쿠퍼로, 6인 가족이 3개월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다.
 수확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시세가 떨어진 지금 밀의 가격은 10킬로그램에 28쿠퍼 정도.
 200골드면 못해도 칠팔십 톤의 밀가루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물론 배송비가 더 추가되겠지만 모트모스 상단이라면······.
 리믹스 백작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신전에 들러 10골드나 헌금하고 아이를 찾았다.
 여관에 도착하니 멀리서 들리는 신전의 종소리가 11시를 알려 주었다.
 안타까운 란셋의 표정을 바라보던 백작이 빙긋이 웃는다.
 “란셋, 비록 파티에는 참석 못하지만 어린 생명을 구했지 않은가? 더구나 이 아이는 우리의 생명을 구한 아이야.”
 “하지만 오랜만에 왕도에 오셔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국왕 전하의 전언만 없었다면, 결코 왕도에 올라오진 않았을 걸세. 앞으로도 마찬가지네. 아버님께서 영지를 옮기셨을 때부터······. 아니, 오딘 왕국과의 화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우리 아르도스는 귀족들과의 인연이 끊어진 것일세. 다만 선대로부터 내려온 약속만이 우리에게 남았을 뿐······.”
 순간적으로 비감한 표정으로 변했던 란셋은 화급히 마음을 다잡고 화제를 돌렸다.
 “영주님, 이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도둑 길드에서도 이 아이가 누군지, 어디서 사는지를 모른다고 하니······. 그렇다고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도둑 길드에서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 했으니 당분간은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겠지. 더욱이 아직은 어린아이이니 이왕이면 우리가 왕도에 있는 동안은 데리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혹시라도 연고자가 없을 것이 염려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식당 뒷골목에서 지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생각한 것일까? 말과는 달리 란셋의 얼굴엔 왠지 모를 연민이 흘렀다.
 전대 영주인 헤더 백작은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그 아들들과 같이 가문의 마나연공법과 검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왕국 기사아카데미까지 보내 주었던 것이다.
 백작은 그런 란셋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데려가세.”
 “예?”
 놀라는 란셋을 보며 리믹스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무얼 그리 놀라나? 내게 자녀가 있는가, 다른 형제가 있는가? 아니면 자네에게 자식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우리에게 친척이라도 있는가? 다른 이들 이야기는 하지도 말게. 어차피 내가 죽으면 가느롱 공작은 우리 영지를 찢어 자기 가신들에게 주려고 할 걸. 안 그렇겠나?”
 “여, 영주님······.”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이라도 혼인하여 자식을 보겠다면, 아르도스 영지를 그 아이에게 맡기겠네. 어떤가?”
 “영주님!”
 란셋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란셋의 반응을 일절 외면하고, 백작은 말을 이었다.
 “자네도 참 답답하네. 왜 그리 고집을 부리나?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네가 좋다는 레이디들이 한두 명이었나? 왜 그리 마음을 못 잡는가?”
 “마담 르엔느께서 분명 아기씨를 잉태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좋지. 하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이 가깝네.”
 “신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아기씨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고맙네, 란셋. 하지만 나는 자네가 예쁜 레이디를 만나 자네를 닮은 아이를 가지는 것이 더 기쁠 것 같네.”
 “여, 영주님······.”
 “하하, 말 나온 김에 왕도에서 자네의 신붓감을 구해 볼까?”
 “영주님,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보게, 란셋. 잊을 것은 잊게!”
 “······.”
 한동안 란셋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란셋을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후우······.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는 내게 있어 죽은 누구보다 더 소중한 가족일세.”
 “감당치 못합니다. 제가 어찌······.”
 “아버님이 자네를 데려오던 날부터 우리 남매에게 자네는 형제요, 한 가족이었네. 자네가 그 아이를 잊지 못하는 만큼 나도 잊을 수가 없네. 이젠 나도 놓을 것은 놓고 싶다는 것을 알아주게.”
 “영주님······.”
 “그래. 말이 길어지면 더 괴롭겠지. 어찌되었든 이 아이를 당분간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우리가 없는 동안은 여관 주인에게 맡기고.”
 
 ***
 
 한 아이가 보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
 아이는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와 어깨, 그리고 손등에 작은 새들의 노래가 머물면서 정원에는 목가적인 평화가 가득 차올랐다.
 문득, 새들이 날아오르다 이내 내려앉았다.
 아이에게 다가온 두 마리의 작은 고양이.
 아이는 손을 내밀어 고양이를 반겨 안는다.
 무어라고 하는 것일까?
 어느새 아이 주변에는 토끼와 고양이, 어린 사슴, 그리고 작은 새들이 가득했다.
 특이한 능력이다.
 누구나, 무엇이나, 저 아이를 만나면 저렇게 경계심을 잃어버린다.
 아이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아니, 아이는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아이.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반겨 맞이하며 사랑하는 아이. 항상 조용하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싱그러운 미소를 소유한 아이.
 아이의 이름은 로스, 로스데일 폰 아르도스다.
 수도에서 돌아온 리믹스 폰 아르도스 백작의 외아들로, 이곳 아르도스 영지의 소영주였다.
 
 영주 집무실의 테라스에서 아이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 흐뭇한 미소의 아르도스 백작 왼편에는 수석기사 란셋 폰 아란이 서 있었다.
 백작은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듯, 푸욱 안긴 느낌.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자신에게 안긴 아이를 느끼면서 백작은 그때 이미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 골목에서의 만남.
 아이는 너무 연약했고 가벼웠다. 더욱이 그 아이는 그것이 자의였던 타의였던 자신과 형제의 목숨을 구한 아이였다.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그 연고가 없었다. 심지어 그 아이를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그냥 버려두고 올 수 없는 애틋함이 백작에게 있었다. 그래서 백작은 수석기사와 함께 아이를 영지로 데려왔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소영주의 귀환이었다.
 여섯 살 소년, 소영주의 귀환.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4년이나 흘렀다.
 
 
 
 Chap. 2
  리치 히트러스
 
 
 히트러스······.
 히트러스라 불리는 전설적인 이름들이 존재했다.
 신화와 같은 신마대전 당시부터 내려온 아득한 전설의 이름.
 삼만 년이 넘는 레무니아의 역사에 이 이름은 최소 다섯 번 이상 저주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첫 번째 이름, 히트러스 드 카이너스.
 1차 신마대전 당시, 레무니아 대륙의 중동부에 카이너스라는 이름의 왕국이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카이너스의 국왕이었던 히트러스는 배신의 잔을 마신다.
 마왕이 약속한 영생을 향한 욕심 때문이다.
 히트러스는 마족의 편에 서서, 인간과 천족들의 연합군을 공격하고, 스스로 마왕의 수족을 자처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아흔여덟.
 살 만큼 살았음에도 생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 그였다.
 결국, 인류를 배신하고, 피붙이와 왕국의 백성들까지 마족들에게 바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그는 영생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영생이라는 것은 리치가 되는 것이었다. 결코, 히트러스가 바라던 그런 영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치가 되어 버린 상황에 달리 방법도 없었다.
 분노한 리치 히트러스는 자신의 왕국에 있던 모든 마법 서적과 마구들을 모아 왕궁 지하의 모처로 숨어 버린다.
 전쟁도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간 히트러스는 찬란한 마도시대의 마법서들을 통해 궁극의 마법인 9서클을 완성하고, 10서클의 언령마저 얻어 가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처소로 텔레포트해 온 존재들이 있었다.
 자신과 같은 리치들.
 자신처럼 과거에 마족들과 함께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마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히트러스의 목적은 다시 인간이 되는 것뿐.
 그들의 바람은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리치의 수가 많다고 해도 이미 언령마저 얻어 가던 히트러스를 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히트러스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그들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마계의 문이 열렸다.
 2차 신마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처참한 종말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족 연합의 일방적인 승리가 드러났다.
 그런데 마족 연합의 승리가 확정되어 갈 무렵.
 마족 연합 내 파벌 간의 다툼이 일어났고, 이 다툼은 결국 마족 연합끼리의 전쟁으로 확전하게 된다.
 리치마저 소멸되는 혼전에 혼전이 거듭되었다.
 한편, 그 혼전 중에 히트러스는 은밀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중간계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갈 때, 신의 분노가 모든 피조물에게 찾아들었다.
 신의 진노 아래, 더 이상의 전쟁은 존재하지 못했다.
 마족들은 두려워 숨을 곳을 찾아 바위 아래 웅크렸고, 신을 배반한 자들은 슬피 울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고통에 찬 마왕의 울음이 어둠에서 흘러나올 때, 마계의 문은 닫혀 버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레무니아는 처절했다.
 대륙은 아틀란과 뮤란, 오델란과 수많은 섬으로 찢어졌다.
 곳곳에서 화산이 폭발했으며, 바다는 솟아 산맥이 되고, 다시 끊어진 대륙 사이로 대양이 펼쳐졌으며, 평원이 사막이 되고, 곡창지대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동토로 변해 버렸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전의 레무니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신마대전의 슬픔도 회복되어 갈 때, 역사에 두 번째, 히트러스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대마도사 히트러스, 그 이름은 살육자의 이름이었다.
 마족보다 더 무섭고 잔인했으며 추악했던, 레무니아의 악몽과도 같았던 이름 대마도사 히트러스.
 아틀란 대륙에 처음 나타났던 대마도사 히트러스는 이유 없이 파괴와 살육을 자행하더니, 오델란과 뮤란 대륙에까지 건너가 살육을 행하면서, 그 악명을 전 레무니아에 남긴다.
 단 3년에 불과하지만 그는 신마대전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상처와 피의 수레바퀴를 굴렸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런 대마도사 히트러스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세월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고 회복되는 것처럼, 그 살육의 이름도 기억도 차츰 잊혀져 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자 그 이름은 그저 빛바랜 고서처럼 회자되는 옛이야기로 남게 된다.
 
 다시 천여 년이 지난 아틀란에 다시 피의 바람이 불었다.
 소국이었던 미누아의 국왕 컬킨이,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던 비스토의 침입에 대항하면서,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컬킨의 미누아는 비스토의 공격을 물리치고, 거꾸로 비스토를 점령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이후, 비스토 제국의 힘까지 흡수한 컬킨은 무서운 속도로 아틀란 대륙 전체를 복속시키기 시작한다.
 모든 왕국들이 거침없는 컬킨의 행보에 손을 들었다.
 제국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북 대륙의 제국과 모든 왕국이 컬킨의 발아래 허리를 숙였고, 남 대륙에서도 두 개의 왕국과 비스토 제국의 일부만이 남았을 때, 비스토에 구국의 영웅이 나타난다.
 광란의 기사, 히트러스.
 레무니아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히트러스라는 이름이다.
 광란의 기사라 불리는 말티스 산맥에서 온 이 검사는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며, 컬킨의 검을 부수고, 30년을 이어 온 대륙전쟁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철저한 패도의 길이었다.
 히트러스의 광란에 흘린 3년간의 피가 컬킨에 의해 30년간 흘린 피와 맞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히트러스는 광란의 살육을 벌였다고 한다.
 민담에 의하면 컬킨은 유희 나온 드래곤이고, 히트러스는 인간으로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 경지에 올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던 존재로 전해 온다.
 구국의 영웅일지는 모르나, 그는 피와 살육을 의미하는 광란의 기사, 저주의 이름 히트러스였다.
 
 다시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히트러스라는 인물이 역사에 등장한다.
 그의 정체는 마검사로, 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이랬다.
 시에라네 산맥의 동부 레어에서 수면 중이던 레드 드래곤 라바 에렉쿠스는 마검사 히트러스라는 인물에게 두들겨 맞고 레어마저 빼앗긴 채 쫓겨난다.
 잠결에 겨우 도망친 라바는 다시 히트러스를 찾는다.
 혈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는 라바의 참담한 패배. 히트러스는 절정의 검술과 마법으로 라바를 죽여 버렸다.
 그런데 헤츨링의 문제나 마족들의 문제가 아니면, 결코 협력하지 않던 드래곤들이 무엇 때문인지 뭉쳤다.
 라바가 히트러스에게 죽어갈 때, 갑자기 레드 일족 전체가 나타나 히트러스라는 마검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울리며 바다가 뒤집히는 전투였다.
 지금의 시에라네 산맥 동쪽의 포브스 사막과 발칸 일대는 당시 미리안이라는 제국의 영토였는데, 산맥 동부 라바의 레어에서 발발한 레드 일족과 히트러스의 전투는 미리안 제국의 서부를 거쳐 중부에 이르기까지, 온통 헬 파이어와 헬 브레스로 녹여 버리고서야 끝이 났다.
 당시, 미리안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후, 제국은 멸망하고, 여섯 왕국으로 분할되었다고 한다.
 녹아 버린 땅은 드래곤들의 저주로 사막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은 그 땅을 레드 일족의 수장이었던 포브스의 이름을 따서 포브스 사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인간과 드래곤의 전쟁 결과는 확실치 않았다. 히트러스가 녹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백 년 뒤, 아틀란 대륙의 서부에 히트러스라는 절정의 마검사가 나타났다.
 동일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절정의 마검사가 백 년 내에 두 명일 수는 없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판단이다.
 이후에도 역사에 히트러스라는 걸출한 이름이 몇 차례 나타났고, 그때마다 피는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쌓는 한결같은 결과를 보여 주었다.
 그렇기에 레무니아의 모든 대륙, 특히 아틀란의 모든 왕국에서 히트러스라는 이름은 저주의 대상이며, 가장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누구에게든 태어난 아이에게 히트러스란 이름을 주는 것은 레무니아 전역에서 최고의 금기 사항이기도 하였다.
 
 ― 레무니아 역사서, 인물편 ‘히트러스’ 중에서
 
 ***
 
 “소영주님.”
 “······.”
 작은 새들이 날아올랐다.
 아이는 말없이 그 맑은 눈빛으로 수석기사 란셋을 향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원망과 약간의 당황이 떠올랐다. 하지만 란셋을 발견한 아이는 이내 환한 얼굴로 웃었다.
 란셋이 미소를 지었다.
 “이젠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었습니다.”
 “오늘은 나오지 않았어요.”
 약간은 시무룩한 표정.
 할 수 있다면 란셋은 그 작은 새를 잡아다 주고 싶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내일은 나올 겁니다.”
 “그래도 오늘 보지 못했잖아요.”
 “내일은 빛나는 무지개 날개를 펴고 소영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아쉬운 듯, 테이블마운틴의 절벽 쪽을 힐끔거리는 로스.
 멀리 영주관 방향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식사 시간이 지났으니 찾는 것이리라.
 란셋은 어린 소영주를 들어 목마를 태웠다.
 소영주의 맑은 웃음소리가 테이블마운틴의 절벽을 울리며 퍼져 갔다.
 “하하하하······.”
 
 ***
 
 로스는 오늘도 테이블마운틴의 절벽으로 갔나 보다.
 아침부터 안 보이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가는 길만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그리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예쁜 새를 만난 모양이다.
 로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작은 짐승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
 신기하게도 새들과 온갖 작은 동물들이 로스를 따랐다. 아직도 아이가 테라스에 있으면 작은 새들이 모여들었다. 정원에 나가면 다람쥐나 토끼들이 다가왔다.
 10살짜리 사내아이가 집에서도 고양이를 안고 다녔고, 고양이는 언제나 로스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병사들이 기르는 그 사나운 개들도 로스만 가면 순한 양이 되고 만다.
 로스가 잘해 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영지에 오던 날부터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영주성 아르콘의 주민들은 환호했다.
 처음엔 백작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엔 아이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반기게 되었다. 아이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에게 매료되었다.
 기분 좋은 매료.
 우선 아이는 편안했다. 말이 없어도 그 눈동자는 사랑을 말했고, 그 표정은 평화를, 그 움직임은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의 입가에는 언제나 작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백작은 흐뭇한 미소로 아이를 생각했다.
 영지를 돌보는 바쁜 시간 중에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 백작을 바라보는 백작부인 르엔느의 입가에도 자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평온하게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로스가 사라지다니, 무슨 말인가?”
 “점심 식사 후에 란셋 경과 절벽으로 무지갯빛 새를 찾아가기로 하셨는데, 아침부터 보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절벽으로 가 봐도 안 계시고, 몇몇 병사들이 테이블마운틴 주변과 성 밖으로 찾아 나섰지만 안 보이신다고 합니다.”
 “어디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백작부인. 란셋 경의 명령대로 탑과 방마다 다 찾아봤습니다. 지금 란셋 경이 테이블마운틴을 돌면서 찾으신다고 영지 전역으로 사람을 보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트 경은 즉시 병사들을 보내고, 특히 크란 영지 주변을 잘 감시하라 명하게.”
 “예, 영주님.”
 늙은 기사는 굳은 얼굴로 군례를 취한 뒤에 서둘러 나갔다.
 바느질하던 옷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백작부인. 그녀의 머릿속에 십오 년 전의 그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르엔느······.”
 “아, 아무 일도 없겠지요? 그렇지요. 리믹스?”
 “르엔느, 분명 어딘가에서 새를 따라가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하오. 란셋이 찾아올 것이니 염려 말고 기다립시다.”
 “아니, 아니에요. 리믹스, 아니에요······.”
 백작부인 르엔느는 머리를 흔들었다.
 백작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크란 영지 접경 지역을 감시하라고 했겠는가?
 15년 전의 그날도 이랬다.
 리믹스 백작의 남동생 리벤이 시체로 발견되고, 여동생 에린과 아홉 살에 불과한 아들 로스가 사라졌던 날.
 그 로스가 자랐다면 스물넷, 일가를 이루었을 나이다.
 르엔느는 복받치는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지나친 설움에 정신을 놓고 쓰러져 버렸다.
 “르엔느, 르엔느······.”
 
 ***
 
 넓은 동공(洞空)······.
 솜씨 좋은 석공이 힘들여 다듬은 석실이다.
 천정에 박힌 구체 하나.
 거기서 나오는 빛이 석실 전체를 비추고 있다.
 특이하게도 밝은 빛이지만, 결코 눈부시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음침한 느낌을 주는 빛이라는 것이 아쉬울 뿐.
 벽면으로 돌아가며 세워진 책장의 빽빽한 서적들. 그리고 진열장의 많은 실험 도구와 제정신으로 보기 힘든 물체들이 담긴 유리병들. 중앙의 길고 넓은 탁자 위에는 형형색색의 빛을 내는 플라스크가 가는 연기를 피우는 비커들과 뒤엉켜 어수선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탁자의 중앙 근처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등이 보였다.
 그 어깨엔 일곱 빛깔이 감도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자리해 있었다.
 사내는 비커를 들어 램프로 가열된 플라스크의 액체를 옮겨 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놈의 육체가 가면 갈수록 적응이 안 되니 어쩌란 말인가? 그 변종 도마뱀 자식들만 아니었어도 이따위 육체를 갖지는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욕설과는 달리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음성에는 진득한 허무와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문득 드러난 회색 로브 속에 감춰진 끔찍한 얼굴.
 살점 하나 없이 홀쭉한 볼, 뻥 뚫린 코가 있던 자리의 두 구멍, 상대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 눈썹이 다 빠져 버린 해골처럼 퀭한 두 눈덩이에서는 파란 광망이 흘렀다.
 눈가와 코가 있던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진물만 아니라면, 전설 속에 나오는 리치라 해도 믿을 만한 용모였다.
 붕대를 감은 손등 부위로 진물을 닦던 사내는 못 견디겠다는 투로 탄식을 터트렸다.
 “이놈의 육체는 20년도 채 사용하지 못하고 썩어 드니 어쩌란 말이냐? 갈수록 정신을 통제하기 힘이 드는구나. 변종 도마뱀 놈들 때문에 준비도 없이 영혼전이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각성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야. 빌어먹을······!”
 삐리리리······.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새가 울며 부리로 어깨를 부볐다.
 사내는 붕대 감은 손으로 새의 부리를 만지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크크크큭! 이번엔 그런대로 괜찮은 놈을 골라 왔더구나.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렇게 갑자기 육신이 붕괴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크흐흐흐, 다시 리치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지. 내가 누군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히트러스가 아니지.”
 사내의 눈에서 파란 광망이 뻗어 나왔다.
 “흐흐흐흐! 그리고 이번에 가져온 몸도 너무 아까워. 이미 라이프베슬에 기억전이는 해 뒀으니, 놈의 뇌에 각인시키는 시간만 벌면 돼. 시간은 좀 부족해도 바로 영혼전이를 하는 거보다는 최소 몇 백 년은 벌 수 있을 테니. 크핫하하하하.”
 삐리리리······.
 미친 듯이 웃는 사내와 홰를 치며 우짖는 무지갯빛 작은 새.
 “레무니아여, 기다려라. 이제 나 히트러스 드 카이너스가 다시 한 번 피의 축제를 열어 주마. 으카카카캇.”
 
 거대한 마방진(魔方陣)으로 싸여 있는 석실.
 회백색의 기류가 휘몰아치는 중앙에 놓인 제단과 그 위의 보랏빛을 품은 크리스털 관 하나가 있다.
 석실 바닥에는 석실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마방진이 그려져 있고, 마방진의 각 꼭짓점마다 작은 마방진이 있어 그 중심에 사람 머리통만 한 마정석을 품고 있다.
 천정 역시 바닥과 역방향으로 마방진이 그려져 있고, 사방 벽에도 마방진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심마다 어김없이 박혀 있는 마정석.
 엄지손가락만 중급 마정석의 가격이 100골드가 넘는다. 머리통만 한 마정석은 그 가격 자체를 매길 수 없다. 더욱이 마방진을 그리고 있는 보랏빛을 품은 검은색의 금속.
 그것은 마계의 금속이라는 아만타티움, 마계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아만타티움이 분명했다.
 벽과 바닥을 도배하듯이 새기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이 들어간 것일까?
 이 석실의 주인은 천하의 거부임이 틀림없었다.
 거대 마방진의 마정석을 통해 모인 회백색 마나는 아만타티움의 선로를 따라 소용돌이치며 크리스털 관 안으로 빨려 들었다.
 이 거대한 마방진을 통해 모으는 마나의 양이 얼마일지는 마방진의 규모만큼이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때, 석실에 빛무리가 나타났다.
 빛무리가 사라지고 신음하듯 요동치는 회백색 마나 사이로 나타난 히트러스라는 사내.
 그의 어깨엔 여전히 일곱 빛깔을 품은 무지갯빛 새가 앉아 있었다.
 “이젠 이 육신을 버릴 때도 다 되었구나. 아직 힘을 다 주입하진 못했지만, 더 미루다간 라이프베슬마저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빌어먹을 도마뱀들, 두고 봐라. 힘을 다 회복하고 나면 레무니아에서 도마뱀 일족은 하나도 남김없이 멸종시켜 버릴 테니.”
 히트러스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으며, 크리스털 관으로 다가가 마나를 불어넣었다.
 갑자기 새가 날개를 치며 퍼덕이자, 히트러스는 손을 내밀어 부리를 쓰다듬는다.
 관의 한쪽으로 뚜껑이 사라지고, 붉은 벨벳이 깔린 관의 바닥에는 탐스런 검은 머릿결의 어린아이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맡에 마방진으로 보호되는 아이 주먹만 한 크리스털 하나.
 석실의 마방진으로 모은 모든 마나는 마정석을 거쳐 이 크리스털로 모여들었고, 다시 아이의 정수리로 빨려 들고 있었다.
 “흐흐흐. 지난 세월, 내 라이프베슬에 모아 둔 마나와 내 지식들이다. 이제 사흘만 지나면 디센트 갈라(descent gala, 강림축일). 두 달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그날, 나 히트러스 드 카이너스는 새롭게 이 땅에 강림할 것이다. 크핫하하하하!”
 히트러스는 조심스럽게 관 안으로 들어갔다.
 “내 모든 지식과 힘을 네게 주마. 너는 이 레무니아의 주인 히트러스 드 카이너스의 열여덟 번째 육체가 되는 것이다. 향후, 레무니아의 모든 족속은 경배하리라. 너희 변종 도마뱀들아! 이 육신을 저주해라. 끔찍한 악몽을 보게 해 주마. 너희 교만한 마족들이여! 기다려라. 나 히트러스가 참다운 피의 향연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정령들아, 멍청한 천족들아. 내가 마계의 모든 힘을 얻은 뒤에 너희는 두려워 떨며 스스로 소멸되기를 바랄 것이다. 으핫하하하하하······.”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광소를 터뜨리는 히트러스는 이미 파괴되는 육체로 인해 반은 미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뱉어 내는 말과는 달리 매우 조심성 있게 움직였고, 지금 크리스털 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지키며 서서히 라이프베슬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영혼전이에 앞서 라이프베슬에 있는 지식을 어린아이에게 넣어 주는 일이었다.
 마나는 그 힘과 함께 아이의 정수리를 통해 끊임없이 그 지식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가끔 아이의 이마가 고통스러운 듯이 찡그러지며, 육신이 갓 잡은 물고기처럼 퍼덕였다.
 정신을 잃었지만 뇌에 각인되는 지식들의 방대함은 다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두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양이었고 그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더욱이 심장에 고리를 만드는 마나와 온몸에 차곡차곡 쌓이는 마나의 양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비록 준비 기간이 짧다고 하지만 1차 신마대전 시대부터 살아온 히트러스의 모든 것이 담긴 것이었다.
 어찌 열 살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준이겠는가?
 다만 방 전체에 그려진 마방진과 크리스털 관의 효용, 그리고 아이의 타고난 순수한 두뇌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히트러스의 패밀리어인 일곱 빛깔의 새, 루프가 직접 구해 온 아이인 것이다.
 
 ***
 
 히트러스는 멍한 표정으로 아이를 주시했다.
 지속적으로 주입한 마나가 빠져나간 육신은 붕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러 주듯,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도 가문도 모른다. 다만 루프가 선택한 아이였다.
 오랜 시간 루프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를 구해 주었다.
 지난번 갑작스런 육체의 붕괴 현상에 시간이 촉박했는데도 부족하지만 지금의 육체를 구해 주었다. 물론 조급하게 구한 육체의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 히트러스는 영생을 위해 인류를 배반하고 마왕에게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 영생이 리치가 되는 것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냄새도 맛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 최고의 옷감과 부드러운 여체도 느낄 수 없는 존재.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한, 그저 눈을 뜬 채 세상을 살아가는 그것을 영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리치는 영생을 꿈꾼 히트러스에게 완전한 저주였다.
 히트러스는 치를 떨며 다시 육신을 얻을 방법을 찾았고, 결국 2차 신마대전 당시에 리치들을 도운 대가로 영혼전이라는 열쇠를 얻었다.
 영혼전이는 타인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을 교체함으로써 타인의 육체를 취하는 마법이었다.
 이는 당연히 신의 섭리를 위배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마족의 마법과 언령마저 얻은 리치로서 수천 년을 연구한 히트러스에게 그것은 결코 불가능도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도 아니었다.
 영생을 얻기 위해 혈육과 백성과 나라를 팔았고, 동료마저 버렸던 히트러스였다.
 결국 히트러스는 자신이 보기에도 건장하고 완벽하며 아름다운 육체를 찾아 영혼전이를 행했다.
 완벽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든 육신의 붕괴.
 영혼전이의 부작용으로 새 영혼과 트러블이 나타난 것이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어느 순간, 육신이 영혼을 거부하면서 나타난 육체의 붕괴 현상에 히트러스는 당황했다. 영혼을 거부하는 육신은 시체보다 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며칠이 못 가 육체가 부패되고, 장기들이 녹아 버렸다. 심지어는 영혼전이로 들어온 새 영혼을 파괴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3년, 단 3년이 영혼전이로 얻을 수 있는 육체의 한계였다.
 이후, 히트러스는 수많은 시간을 연구와 착오를 거치며 영혼전이를 발전시켰고, 드디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
 영혼이 완벽하게 안착하기 위해서는 바뀌게 되는 육신의 자질이 가장 중요했다.
 그중에 제일은 정령과의 친화도······.
 정령사들이면 가장 좋겠지만, 이미 정령과 계약을 해 버린 상태에선 정령계와 문제가 발생했다. 한번은 정령왕들과 큰 싸움마저 벌여야 했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정령 친화도가 높은 10세 미만의 아이였다.
 이를 구하기 위해 히트러스는 정령계의 4대 정령과 태초의 대륙 레무니아에 떠도는 세 정령을 잡아 작은 새에게 집어넣고 패밀리어로 삼아 버렸다. 루프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였다.
 이후, 루프는 히트러스에게 완벽한 육신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영혼전이를 통해 얻은 육신은 아무리 완전해도 히트러스가 지닌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먹고 마실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육체일 뿐.
 절대 권력을 누리며 살았던 히트러스에게는 또 다른 저주였다.
 이미 언령을 얻은 히트러스였다. 하지만 새로운 육신은 새로운 연단과 훈련을 통해야만 다시 강해질 수 있었다.
 심지어 연단하는 도중에 육신이 붕괴되는 바람에 다시 리치가 되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바로 지금 시행하는 영혼전이 전 단계로 지식의 전이와 마나의 주입을 통해 강한 육체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완벽한 육체를 얻은 히트러스는 마치 드래곤이 유희하는 것처럼 모두 일곱 번 레무니아에 나타났다. 아틀란에 세 번, 뮤란에 두 번, 오델란에 두 번······.
 때론 대마도사가 되어 이유도 없는 피의 수레바퀴를 굴렸고, 광란의 기사로 구국의 영웅이 되어 시산혈해를 쌓았다.
 뮤란에서는 대현자의 탈을 뒤집어쓴 살인마로 백 년을 보내기도 했고, 마법대륙 오델란에서는 잔혹한 정복자로 대륙의 반을 절단내기도 했다.
 혈육과 백성을 팔고 배반의 쓴잔을 마시며, 수없는 세월을 투자한 대가로 부족함이 없는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허무만 남았다. 무엇을 해도 성취감이나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런대로 마법에 미치고, 검술에 미치고, 학문에 미치며, 세월의 공허함과 싸웠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몇 백 년이면 인세에 찾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루어 버렸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 세월들.
 할렘을 이루어 여인의 육체에 빠졌던 시간들.
 술에 미치고 요리에 미치고 모든 기술들에도 미쳐 봤다.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마족처럼 피에 미쳐 타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았다.
 곧 그것조차 너무 많은 피에 식상해 버렸지만······.
 그나마 개중에 가장 성취감을 많이 주는 유희였다.
 히트러스는 오델란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레무니아를 일통하고, 마계를 정복해서 그 힘을 얻어야 했다.
 레드 일족 라바의 레어 근처에서 마계의 문을 찾은 히트러스는 잠자고 있던 라바를 쫓아내야 했다.
 에이션트 급 드래곤이지만 수면에 빠졌던 라바는 손쉽게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레드 일족을 대표하여 마계의 문이 있었던 자리에 레어를 튼 라바가 각성하여 다시 치른 싸움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라바는 처치할 수 있었지만, 무리한 힘을 쓴 바람에 라바가 소멸되어 버렸다.
 이를 마족의 등장으로 오인한 레드 일족의 수장인 포브스와 그 일족이 찾아옴으로써 히트러스는 멈출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
 시에라네 산맥 동부에서 시작된 쫓고 쫓기는 전투는 레드 일족 다섯 마리가 소멸되고, 미리안 제국의 서부와 산맥의 동부가 완전히 파괴되어 사막이 되어 버렸다.
 레드 일족 다섯 마리를 헬 파이어와 오러 블레이드 빔으로 소멸시킨 히트러스는 도주를 결심한다.
 이미 드래곤 로드인 막시무스에게 알려졌을 것이고 머잖아 다른 드래곤들이 나타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은 포브스 둘 정도를 상대할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로드인 막시무스와 겨룰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했다.
 그래서 포브스의 헬 브레스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워프를 강행했다.
 라바의 레어로 워프한 히트러스는 자신의 몸이 온전치 못함을 깨닫는다.
 레드 일족과의 무리한 전투와 마지막 포브스의 헬 브레스 공격에 몸이 파괴된 것이다.
 서둘러 바닥에 숨겨진 마법진을 찾은 히트러스는 레어를 파괴하여 흔적을 지운 뒤, 뮤란 대륙에 있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치 않았다.
 무엇보다 몸을 고칠 틈이 없었다.
 드래곤들의 추적이 시작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저의 은신 비트까지 숨어든 히트러스는 드래곤들의 추적이 사라질 때까지 리치가 되어 오랜 시간을 수면에 빠지게 된다.
 생체 현상을 죽여 마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은 2차 신마대전 당시에 몸을 숨겼던 방법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어난 히트러스는 과거 자신의 왕국이 있었던 아틀란으로 돌아온다.
 1차 신마대전 당시 왕국이 있었던 자리는 2차 신마대전을 거치면서 대륙이 나누어지고 급격한 조산운동으로 솟아난 테이블로스 산맥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특히 왕국의 남서부는 직벽으로 평균 1,300미터가 넘게 솟아오른 테이블마운틴에 들어가 버렸고 왕궁 역시 남부 테이블마운틴에 속했었는데 오랜 세월 속에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궁 지하에 있던 비트들은 마법진으로 보호되고 있었기에 워프로 찾아들어 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방에는 각기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지 기억조차 의심스러운 장소에 돌아온 히트러스는 그때부터 신을 꿈꾸며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무니아를 가지려면 먼저 드래곤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 후에야 마계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래곤들을 누를 수 있는 힘이 절실했다.
 목표가 생긴 히트러스는 기뻤다. 활력이 넘쳐 나고 산다는 의미를 찾게 되었다.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육체를 구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는 리치의 상태가 오히려 일을 하기에는 더 편했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추어져 갈 때, 히트러스의 몸에 급작스런 변화가 찾아들었다.
 과거 포브스의 헬 브레스와 전투의 후유증으로 리치가 되었지만, 여전히 육체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육체는 소멸해도 라이프베슬만 있으면 언제라도 부활이 가능했다. 리치인 상태로 영생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프베슬에 주입한 힘이 항상 몸을 제자리로 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혼전이의 부작용으로 급작스럽게 생기는 육체의 붕괴에는 미처 라이프베슬이 반응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영혼전이로 얻은 육신이 강력한 충격으로 붕괴되는 위기 상황에서 리치로 변한 후유증이었다.
 순식간에 찾아드는 육체의 붕괴에 히트러스는 조급하게 육체를 필요로 했다.
 그때, 패밀리어인 루프가 찾아 준 것이 지금의 육체였다.
 9살의 꼬마와 21살의 여자. 그 곁에 있던 기사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붕괴되는 육신을 막기 위해 여자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그럼에도 육체의 붕괴는 그 도를 넘어섰다.
 결국, 아무런 준비 없이 영혼전이를 시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15년.
 히트러스는 그간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지금의 육체는 임시 거처였다. 완벽한 육체를 준비를 하기 위한 임시용 육체.
 그런데 이 육체의 주인이 가진 정신력이 놀라웠다. 불과 아홉 살이었던 아이가 영혼전이를 거부한 것이다. 조급하게 진행되는 영혼전이 과정에서 마법의 강력한 힘을 이겨 내고 저항하는 영혼은 여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괴사와 같았다.
 아마도 타고난 강한 정신력이 자신의 고모와 피붙이가 죽는 것을 목도한 원한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이겨 내고 저항하는 것 같았다.
 히트러스에게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영혼전이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미루다가는 이미 붕괴의 막바지에 이른 육체와 함께 자신의 영혼마저 소멸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히트러스는 방법이 없었다. 영혼을 소멸시킨 뒤에 영혼전이를 하는 것은 늦었다.
 그래서 아예 먼저 아이의 육체로 들어가 육체에서 영혼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 방법은 성공했다.
 그런데 불과 15년 만에 육체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육체라지만 너무 빨랐다.
 어차피 영혼전이를 위한 준비가 끝나면 다른 육체로 바꿔치기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수련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수련을 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성취도 이루었다.
 육체의 각성에는 이르지는 않았지만, 6클래스 마스터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몸이었다. 이 상태로도 최소 50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붕괴가 생기다니······.
 
 마침 몇 년 전, 루프가 발견한 몸뚱이가 있었다. 근래 그 몸뚱이는 루프에 빠져 종종 가까이 놀러 오곤 했다.
 영혼전이의 가장 호기는 두 달이 동시에 떠올라 암흑에 속한 마나의 양이 최대치가 되는 강림축일인 디센트 갈라였다.
 하지만 육체의 붕괴 속도도 문제였지만, 방대한 지식의 각인과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해 온 힘을 주입하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결국 히트러스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완전하지 못하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완벽히 준비해서 그다음 육체로 갈아타기로.
 
 우우우웅······.
 마방진이 신음을 내지르며 대기에 충만한 마나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다시 그 마나는 마정석에 모이고, 이 정제된 마나들이 히트러스의 라이프베슬을 통해 아이에게로 주입되었다.
 퍼득이던 아이의 몸은 이미 죽은 듯 늘어졌고, 그 머리맡에 히트러스가 라이프베슬에 손을 얹고 좌정해 있다.
 쿠아아앙!
 갑자기 석실이 흔들리며 마방진과 마정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트러스의 입이 조금 열리면서 빠져나온 하늘색 연기가 서서히 라이프베슬로 다가갔다.
 어느 순간, 히트러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안 돼!”
 끼아아아!
 갑자기 라이프베슬에서 기성이 터져 나오며 히트러스가 라이프베슬을 놓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진물이 흐르던 히트러스의 퀭한 눈에서 암광이 솟아났다.
 “이······ 빌어먹을 노, 놈! 여, 여태 잘도 숨어 있었구나······!”
 라이프베슬로 들어간 하늘색 연기가 떠는 듯 흔들렸다.
 “이제 명하니 그곳에서 나와라!”
 지옥의 어둠 가운데서나 나올 듯한 음성.
 그것은 언령, 바로 언령이었다. 히트러스는 전력을 다해 언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 차원을 통틀어 언령을 이겨 낼 존재는 많지 않다.
 하물며 육신을 떠난 영혼이 타인의 라이프베슬에 머무르며, 언령을 거부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라이프베슬로 파고들던 하늘색 연기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연기를 바라보며 히트러스는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빌어먹을 놈! 지난 15년간 용케도 숨어 있었구나. 마지막에 나 대신 영혼전이라도 할 참이었느냐?”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과 달리 히트러스의 안색이 나아졌다.
 “이 육체의 붕괴 역시 네놈의 짓이 분명하구나. 하지만 어떻게······? 안 돼!”
 히트러스가 육체의 붕괴 원인을 찾고 놀라는 순간, 갑자기 하늘색 연기가 라이프베슬로 숨어들어 갔다.
 히트러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분노에 찬 언령이 떨어졌다.
 “이제 명하노니 나가! 나가라! 이, 이런! 크흐윽······!”
 삐이익!
 히트러스는 언령을 내리다 당혹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라 여겨지지 않는 루프의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하늘색 연기가 라이프베슬을 통과해 아이의 정수리로 들어갔고, 이어 라이프베슬이 그 색을 잃어 갔다.
 히트러스는 덜덜 떨며 두 손으로 라이프베슬을 감쌌다. 원래의 빛을 잃어 암갈색으로 변한 라이프베슬의 여러 부위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영혼전이를 마치면 힘을 잃는 라이프베슬이었다. 15년 동안이나 숨어 있던 아이의 영혼이 영혼전이의 최종 단계인 라이프베슬을 통해 새로운 육신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명한 언령에 따라······.
 “아, 안 돼······.”
 하지만 이미 영혼전이로 마지막 힘을 소진한 라이프베슬은 허무하게도 부서지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와 같이 흘러내리는 라이프베슬.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가늘게 떨고 있는 카나리아 루프.
 울부짖듯 신음하던 히트러스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이놈!”
 오른손에 모이는 검은빛 죽음의 기운은 6서클의 죽음의 손 데드 핸드(death hand)였다.
 순간.
 “크아아악!”
 아이를 내려치던 히트러스는 크리스털 관에서 사정없이 퉁겨 나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어디서 솟아났는지 크리스털 관 위로 뚜껑이 덮였다.
 바닥에 떨어진 히트러스는 죽은 듯이 미동도 없었다. 그 눈과 귀,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던 핏물도 멈추고, 차츰 말라 갔다.
 마방진을 통해 끊임없이 마나를 흡수한 마정석은 다시 마방진의 설계대로 크리스털 관으로 모은 마나를 보내 주었고, 점차 마정석의 빛도 희미해져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의 마정석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거의 사라질 무렵, 죽은 듯 미동도 없던 히트러스가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힘겹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히트러스는 원망과 한탄, 그리고 진득한 미련을 남기고 차츰 빛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든 정적.
 어느 순간, 크리스털 관의 뚜껑이 열리면서 아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마치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일어난 아이는 제단 곁의 마방진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마방진에서 솟아난 흰빛이 아이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아이는 석실에서 사라졌다.
 
 
 
 Chap. 3
 아르도스, 그 새로운 전설의 시작
 
 
 “아저씨, 그럼 저 사람들은 항상 저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소영주님. 그나마 지금은 나은 것입니다. 영주님께서 국왕 전하께 허락을 얻어 세금을 면제받으시면서 그만큼 영지세를 깎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굶주린다는 말인가요?”
 “그나마 9년 전에 구한 콩의 재배지가 넓어지면서 영지의 소득도 늘었고, 그만큼 밀을 구입해서 나누어 주기 때문에 다행히 올해 영지에서 굶어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란셋은 기꺼운 표정으로 자신의 소영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스데일 폰 아르도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처음으로 돌아본 영지의 상황은 상상 이하였다.
 아직 3월이라 봄밀을 추수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밀을 나누어 준 지 벌써 5시간이 흘렀음에도 구호소를 찾는 사람들의 줄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리믹스 백작이 세운 구호소는 영지에 모두 21곳으로 천 명이 넘는 마을마다 구호소가 하나씩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지엔 구호소가 들어서지 못한 일이백 명도 안 되는 마을이 허다했다. 조금의 농토라도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마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멀리서부터 찾아온 주민들의 줄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못해도 두세 시간은 걸어서 구호소를 찾은 사람들.
 개중엔 나무바가지를 든 어린아이도 보였다. 낡고 해진 옷차림에 신발도 없이 콧물을 흘리며 찬바람에 떨며 서 있는 그들은 비쩍 마른 체형에 배만 올챙이 같이 불러 있었다. 저 모습은 영양실조가 분명했다.
 엄마 등에 업혀 칭얼거리는 갓난아이는 얼마나 못 먹었는지 그 엄마와 마찬가지로 퀭한 두 눈에 눈물마저 말라붙어 있었다.
 영지에는 밀이나 보리를 키울 만한 양질의 토지도 없거니와 수확량도 타지와 비교해 극히 적었기에 봄밀 수확기가 지나도 이런 형편이 나아지질 않았다.
 다행히 9년 전, 리믹스 백작이 모트모스 상단을 통해 구해 재배하기 시작한 콩이 그나마 영지민들의 생명 유지에 보탬이 되는 정도였다.
 거기에 처음부터 25%였던 영지세가 리믹스 백작의 노력으로 감면되어 지금은 15%만 걷고 있었다.
 국가가 지정한 영지세가 50%, 그중에 10%는 국세로 국가에 보내게 된다. 하지만 타 영지에서는 보통 국가가 지정한 비율을 넘어 70%선, 개중엔 80%를 걷는 영지도 있는 실정이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악덕 영주들은 90%를 걷기도 했다고 하니, 아르도스 영지는 파격적이다 못해 기적과도 같은 영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땅에 비해 작물을 재배할 토지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의 땅이 자갈밭이거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재배하기 마땅한 작물이 몇 없었고, 그 수확량마저 너무나 적었다.
 무엇보다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물이 턱없이 모자랐다.
 전대 영주였던 헤더 백작은 주변 영지에서 흙을 사들여 밭을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비라도 한번 내리기만 하면 대량으로 쏟아져 흙을 휩쓸고 가 버렸고, 그나마 남은 흙도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대지 자체가 가난을 부르는 버림받은 영지였던 것이다.
 로스데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수석기사인 란셋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
 
 “로스, 이게 대체 뭐냐?”
 “예, 아버지. 영지의 발전을 위한 계획입니다.”
 세 장으로 된 양피지엔 영지의 발전을 위한 10년간의 중장기 계획이 담겨 있었다.
 리믹스 백작은 약간은 당황하여 아들 로스를 쳐다봤다.
 열다섯, 아직 어린아이의 치기를 벗어나지 못할 나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몸과 다부진 체격은 보통의 귀족 아이들과 달리 절정의 검술을 연마한 검사의 풍모마저 풍겼다.
 거기에 덜 성숙한 얼굴이지만 꼭 다문 입과 굵은 눈썹, 그 아래 현기가 깃든 굳건한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신뢰를 갖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백작에게는 아직 어리기만 한 아들이었다.
 계획서를 읽어 보던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호오······.”
 리믹스 백작은 의외의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들은 계획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묵묵히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백작은 다시 계획서를 검토해 나갔다.
 한참을 계획서에서 눈을 떼지 않던 리믹스 백작이 양피지를 내려놓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 로스데일.”
 깍지 낀 양손을 책상 위에 얹고 한참을 그대로 있던 백작의 입이 열렸다.
 올해로 쉰여덟이 되는 리믹스 백작의 두 눈가에 약간의 피곤함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정말 정확한 예측이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진행만 되면, 분명히 네가 예측한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구나. 그것도 10년 내에······.”
 “······.”
 “하지만 로스데일, 네 계획은 초기 시작의 난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모든 계획은 방법과 진행도 중요하지만 시작할 수 있느냐는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다면, 몽상에 불과할 뿐인 것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구나.”
 “······.”
 “네 계획에 따르면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구나. 어디서 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생각이지? 근근이 먹고사는 영지민들을 이 일에 동원할 생각이니? 그렇다면 농사는 누가 짓겠느냐?”
 “······.”
 로스는 여전히 말없이 백작을 주시했다.
 백작은 좀 더 냉정해지기로 했다.
 “그들을 부리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 계획이 처음 우리가 이 영지로 왔을 때 수립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 가문에 남아 있는 재산이 하나도 없다.”
 어쩌다 보니, 백작의 입에서 한탄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린 아들, 자신이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았던 아들이 내놓은 계획은 정말 획기적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뒷받침할 만한 재정적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작은 빵 조각 하나보다 못한 글 장난에 불과했다.
 리믹스 백작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나며 아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데,
 탁!
 “이게 뭐······? 이, 이건······?!”
 아들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건.
 마나석, 분명 마나석이 분명했다. 몇 개 보지도 못했지만, 푸른빛과 녹색 빛이 어우러진 반투명의 보석이었다.
 하지만 마나석이라 부르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컸다. 백작은 이렇게 큰 마나석을 본 적이 없었다.
 백작이 본 마나석 중에 제일 큰 것이 자두만 했지만, 그것은 궁정마법사인 에드리안 후작의 보물이었다.
 한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나석의 크기는 사과보다 더 컸다. 더욱이 마나석의 녹색 빛이 강렬했다. 녹색이 강할수록 고급이라고 들었던 백작이었다.
 이 정도의 녹색이라면 그야말로 최상급이 분명했다.
 백작은 넋이 나간 듯 마나석을 보았다.
 아들은 하늘보다 더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상급의 마나석이에요.”
 “저, 정말 이것이 마나석이 맞느냐?”
 “예. 아무런 티도 없는 결정질에 마나가 집약된 최상의 마나석이 맞아요. 못 받아도 5천 골드는 족히 나갈 거예요.”
 “허허허······.”
 리믹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이것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이냐?”
 “5년 전에 제가 길을 잃은 것도 바로 이 마나석 때문이에요. 그때, 우연히 빛을 발견하고 찾아 절벽을 올랐다가 헤맨 거예요.”
 리믹스 백작은 5년 전 그 사건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아들의 실종. 20여 년 전의 그 일이 떠올라 더욱 끔찍했던 기억이었다. 아들은 사라진 지 자그마치 한 달이나 지나서야 테이블마운틴의 절벽 중간에서 발견되었다.
 테이블마운틴은 테이블로스 산맥의 서남부에 위치한 평균 높이 천삼백 미터의 탁자형 고원으로, 카스틴 왕국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그 절반 길이인 특이한 지형이다.
 전설에는 아득한 옛날인 2차 신마대전 당시, 진노한 신께서 대륙을 찢으셨다. 그로 인해 땅이 흔들리고 산이 솟아났으며 깊은 곳에서 용암이 분출했고, 대지가 꺼져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아틀란 대륙 서부와 붙어 있던 뮤란 대륙이 떨어지지 않자, 땅이 직각으로 솟아나 테이블마운틴이 되었고, 테이블마운틴의 서북쪽에 깊은 대양이 생겨났다고 한다.
 뮤란은 밀려나면서 아쉬움에 지금의 몬스터 해역 북부 페리스 해에 많은 섬들을 남겼는데, 그중에 큰 섬이 지금의 스탠 공국과 페리스 왕국이다.
 어찌되었건 직각으로 솟은 테이블마운틴의 정상은 아직 누구도 오른 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절벽의 하단 지역에는 절벽에 둥지를 튼 새알을 구해 양식으로 삼으려는 사람들과 약초꾼들이 오르는 협로가 몇 군데 있었다.
 제일 높은 약초꾼들의 길은 30여 미터. 그것조차 리믹스 백작의 선친은 위험하다고 금지시켰다. 해마다 많은 주민들이 알과 약초를 구하려다가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발견된 곳은 50미터가 넘는 절벽의 아주 오래전 폐쇄되었던 협로였다.
 보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들은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장대와 밧줄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절벽을 타는 전문 약초꾼들도 오르지 못할 그 높이를 어떻게 올랐는지, 먹을 것도 없이 한 달이라는 기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리믹스 백작이 기억하기로는 자원한 전문 약초꾼들이 겨우 밧줄을 걸어 구출한 아들의 몸에는 분명히 어떠한 물품도 없었다.
 “네 말은 기억이 돌아왔다는 말이냐?”
 “단편적인 부분만요.”
 “이 마나석은 그때 가져온 것이고?”
 “죄송해요. 기억을 더듬어 다시 절벽에 갔어요.”
 리믹스 백작은 무언가 머뭇거리며 말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네 어머니가 그 일로 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 있지?”
 “네, 아버지. 한순간도 두 분의 사랑을 잊지 않아요.”
 리믹스 백작은 그윽한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고마워요. 아버지······.”
 “그래. 그렇다면 이 계획은 충분한 가능성마저 가지고 있구나. 로스야.”
 “예, 아버지.”
 “그럼, 이 계획은 네가 추진해 보겠느냐?”
 “예······?”
 로스는 놀람을 반문으로 대신했다. 너무 뜻밖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지 마렴. 내 아들아, 어디 이리 한번 와 봐라. 오랜만에 널 안아 보자꾸나.”
 “아버지······.”
 백작은 기꺼운 표정으로 로스를 향해 팔을 벌렸다.
 로스는 아버지 품에 안겼다. 아버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로스의 눈에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마스터가 되지 못한 백작에게 세월은 정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비록 건강은 남과 비교할 수 없지만, 늙음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마주 앉은 늙어가는 아버지의 얼굴엔 기쁨과 만족이 흘렀고, 어린 아들의 얼굴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감춰져 있었다.
 “이 계획은 네가 만든 것이다. 당연히 너만큼 이 계획을 잘 아는 사람이 없지. 그러니 네가 한번 추진해 보려무나. 온 영지가 네가 추진하는 이 일을 지원한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구나.”
 “······.”
 “로스, 아직 어린아이로만 알았는데, 네가 이토록 훌륭한 계획을 세웠다니······. 이 아버지는 지금 기쁘단다.”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의 눈에 담긴 사랑을 깨닫고 머리를 숙였다.
 
 
 
 Chap. 4
  모트모스 상단
 
 
 마나를 품은 보석에는 마나석과 마정석이 있다.
 마나석은 태초에 마나가 유동하면서 만들어진 보석으로 마나를 사용해도 자동적으로 그만큼 다시 차는 영구적인 성질을 띤다.
 이에 비해 마정석은 불순물이 적은 석영이나 루비, 사파이어 등이 오랜 시간 특이한 환경에서 마나가 축적되어 만들어지는데, 마나석과는 달리 마나를 사용하면 닳아 버리는 소모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마나를 보충할 수도 있었다.
 물론, 칠 클래스의 마도사 이상이나 여러 마법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마방진을 그릴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마정석 역시 귀물이라 할 수 있지만 마나석은 국가가 나서서 우선하여 매입할 정도로 최고의 보물이었다. 마정석과는 처음부터 다른 대접을 받는 보물인 것이다.
 
 두 손으로 마나석을 감싼 손길에 떨림이 느껴진다.
 최상급.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최상급이 분명했다.
 더욱이 이 크기란 것은?
 로디안 백작은 절로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갈증이 났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틈을 주지 않는다. 대륙을 좁다 돌아다니던 백작으로서도 처음 보는 맹랑한 녀석이었다.
 자신은 카스틴 제일의 상단이자, 대륙 십대 상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모트모스 상단의 주인이자 모트모스 백작가의 가주였다.
 그런 자신이 지금 이 어린 소년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너무 귀한 물건에 대한 욕심 때문이리라.
 “그래서 팔겠다는 것인가, 아닌가?”
 결국 백작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어차피 나가도 다시 돌아올 돈이었다.
 오랜 시간 모트모스는 아르도스 가에 은혜를 베풀었다. 전대에서부터 쌓아온 인연.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금액에 연연하지 않고 아르도스에서 주문한 것들은 우선해서 납품해 주었고, 운송비는 처음부터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손해를 보면서도 아르도스가 필요한 것만큼은 채워 주려 했었다.
 이는 아르도스가 지금의 영지로 옮기기 전부터 이어 온 모트모스 상단과 아르도스 백작가가 맺은 의리이기도 했다.
 “백작님, 상인답지 않으시게 조급하시군요.”
 “굳이 자네 집안에서 이득을 볼 생각이 없기 때문이네.”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 역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사례를 받고자 오랜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닐세.”
 로디안 백작의 눈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난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큰 거래.
 “그렇지요. 그것은 약속이었습니다. 선대에서 저희 가문과 모트모스 백작가가 맺은 약속. 하지만 힘을 잃어버린 가문에 변함없이 약속을 지켜 준 것도 백작님의 가문밖에 없습니다.”
 “······!”
 어린 소년의 말이지만 그 논리가 정연했고, 진심마저 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해서 저는 이것을 백작님의 상단에 넘기려고 합니다.”
 “저, 정말인가?”
 약간의 떨림과 함께 확인하듯 되묻는 백작. 그만큼 이 물건은 보물이었다.
 다급한 상인과 달리, 소년은 느긋하게 제안하고 있었다.
 “단, 적정한 가격을 책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일세. 당장 감정사와 마법사를 부르겠네.”
 “그러시지요. 그럼 밖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아닙니다. 굳이 상단의 대화를 들을 필요는 없겠지요.”
 
 “순수한 마나가 결집된 마나석이 분명합니다.”
 “오오! 그래? 급수는 어느 정도겠는가? 상급 이상이겠지?”
 마법사의 말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말과 동일했다.
 백작은 놀람을 뒤로하고 서둘러 감정사의 감정을 요구했다.
 마법사로부터 마나석을 건네받은 감정사는 기구를 꺼내 마나석에 촛불을 비추기도 하고 물속에 넣기도 하고 햇빛을 굴절시키기도 하더니 이윽고 커다란 돋보기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백작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감정사를 주시했다.
 “아무런 잡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푸른빛 안쪽으로 녹색 빛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상급, 최상급입니다. 최상급 중에서도 지금껏 보고되지 않은 로열 급입니다.”
 “그, 그 정도라는 말인가?”
 “최고의 물건이라 확언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 크기면 프리미엄이 더 붙겠지요. 아마도 제국이나 왕국들뿐만 아니라 마탑들도 이 사실을 알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상단에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그럼 금액은 어느 정도를 책정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팔려는 사람이 어느 정도를 요구하느냐 이겠지요.”
 자두만 한 최하급 마정석의 가격이 10골드 정도다. 같은 크기의 금보다 약 15배 정도가 비싼 것이다.
 하급이면 20, 중급이면 50, 상급이면 120이다. 최상급이면 다른 방식으로 거래되지만, 보편적으로 300골드 이상 500골드 이하 정도가 보편적인 시장가격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크기가 갑절이 되면 가격은 보편적으로 3배였다. 물론 천연의 상태에서 축적된 마정석의 가격이다.
 하지만 마나석의 가격은 그것의 갑절로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녹색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한 마나를 포화 상태로 저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정말, 이 마나석이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었다.
 
 “보통 상급의 마정석이나 중급 이상의 마나석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거래되네. 국가에서 일괄적인 매매의 대상이 되거나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경매의 방법을 택하지. 만일 자네가 경매를 요구하겠다면 전례가 없지만 우리 상단이 나서서 주관해 주겠네. 단 경매 대행으로 수수료 15%를 요구하네.”
 “보통은 10%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작은 다시 한 번 소년을 주시했다.
 “맞네. 하지만 이 경우는 취급 방법이 다르기 때문일세. 이 물건은 다른 품목들과 달리 우리 상단이 주관하여 각국과 마탑들에게 공지를 보내고 오랜 시간 홍보를 하여야만 하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수수료를 인상한 이유일세.”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물건을 백작님의 상단에 넘기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 말은 나도 기억하고 있네. 다만 나는 고객이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일세.”
 “고맙습니다. 백작님의 호의는 감사함으로 받고, 처음 제의대로 모트모스 상단에 이 마나석을 넘기겠습니다. 가격을 책정해 주십시오.”
 “······진심인가?”
 “······.”
 로스는 묵묵히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반응이었다.
 “자네가 그리 말해 주니 진심으로 고맙네.”
 “주신 것이 있으니 가는 것도 있겠지요. 더구나 정당한 거래일뿐입니다.”
 “······!”
 로디안 백작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알고 있기로 열다섯에 불과했다.
 한데, 어떻게 된 것이 아이는 시장에 대해서 너무도 해박해서, 마치 자신이 십대 상가의 상주들과 대화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더군다나 이 소년의 대화술은 아무리 닳고 닳은 왕도의 귀족들이 배운 어떤 수사학도 따를 수 없는 세심함과 배포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말속에 감정을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소년은 말을 할 때와 멈출 때, 기다릴 때를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좋네. 200캐럿(carat, 40g) 정도 사이즈의 최상급 마정석이 경매로 판매될 때, 300에서 500골드 사이로 거래가 되네. 또한 크기가 갑절이 되면 가격은 세 배 정도로 보면 적당할 걸세. 거기에 마나석은 보통 마정석의 세 배 정도 가격에 거래되지. 더구나 이 물건은 순수 마나로 가득 차 있네.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일세. 그렇게 계산하면······.”
 “이 마나석의 무게는 1,570캐럿 정도 나가더군요. 그렇다면 세 번의 갑절에 조금 못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마정석 가격의 세 배면 네 번의 갑절에 못 미치겠군요. 그렇게 볼 때, 최하 24,000골드에서 최대 40,000골드에 조금 빠진 정도가 적정 가격이겠습니다. 거기에 프리미엄이 20% 정도 붙겠지요.”
 “허허······.”
 로디안 백작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침 일찍 아르도스의 이름으로 찾아온 아직 어린 소년.
 로스데일 폰 아르도스.
 누구의 호위도 없이 가문의 문장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와 자신과의 독대를 청했다.
 만일 문장이 아니었다면, 이 소년은 이 자리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거침없이 꺼내 놓은 보석 하나.
 그것은 오늘 식전부터 기함하게 만들고, 지금까지 자신을 설레게 만든 마나석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눈앞의 아직 어린 티도 벗어나지도 않은 이 소년이다.
 한참, 왕립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어울릴 나이고, 파티에 숨어들어 말썽이나 피울 나이를 겨우 면한 정도였다.
 그런 소년이 이미 마나석의 가격을 꿰고 앉았고, 실제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은 제쳐 두고라도, 능구렁이들 속에서 상단을 키워 온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아르도스 가는 이 소년을 어떻게 키웠다는 말인가?
 로디안 백작이 허탈한 쓴웃음을 베어 물 때도 로스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 아르도스 가는 프리미엄의 이득을 깨끗이 모트모스 상단에 넘기겠습니다. 또한 최대치로 잡은 금액의 20%를 뺀 금액을 적정가로 잡겠습니다. 우리 아르도스 영지는 홍보를 하고 경매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경매 대행 수수료에 해당하는 15%를 뺀 가격으로 이 물건을 매도하겠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
 로디안 백작은 허탈함에 젖어 묵묵히 로스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영악하다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천재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누가 가르친 것일까?
 아르도스가 그 정도였던가?
 문득 로디안 백작의 맘속에 이 소년을 향한 욕심과 함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동의하신다면 결정지어 주십시오.”
 “동의하겠네. 자네 말대로 이 물품을 구매하겠네.”
 “그렇다면 최대치를 4만으로 잡았을 때, 20%를 제한 금액이 3만 2천 골드, 수수료 15%인 4,800골드를 제하면 27,200골드가 되겠군요. 맞습니까?”
 로디안 백작의 눈이 오른편에 있는 상단 감독인 브로칸 남작을 바라보았다.
 브로칸 남작 역시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27,200골드······.”
 “그렇다고 하는군. 그러면 어떻게 지불하면 되겠는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보리 200골드, 밀 700골드, 닭과 양, 소 등의 가축 300골드에 해당하는 물품을 영지로 가져다 주십시오. 이는 향후 5년간 봄밀의 수확이 끝난 시점에 정기적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스토일 사무관, 기록하게.”
 “예, 백작님.”
 “5년간 가을 수확이 끝난 시기에 300골드에 해당하는 콩과 200골드의 옥수수, 그리고 300골드의 가축을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면 일 년에 두 차례 총 2,000골드에 해당하는 물품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무관님. 이번만 먼저 보내 주시고 향후 가을과 봄 수확이 끝난 시점에 물품을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단 운송비는 따로 청구해 주십시오.”
 “여지껏 우리 모트모스 상단은 아르도스 영지에 대해 운송비를 받지 않았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는 향후 피차에게 짐이 될 수 있습니다.”
 “······!”
 상인으로서 백작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우리 모트모스 상단은 아르도스 영지에 대해 최대 고객에 준하는 예우를 약속하겠네. 이는 다른 고객에 최우선하여 아르도스 영지의 요청에 응하겠다는 약속일세.”
 “감사합니다, 백작님. 향후 아르도스 영지 역시 로스데일 폰 아르도스가 주관하는 모든 거래에 대해 모트모스 상단을 주거래 상단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금액이 17,200골드일세. 현금으로 찾아가겠는가?”
 “하하, 아닙니다. 2,200골드만 현금으로 준비해 주십시오.”
 “나머지 금액은 어찌하겠는가?”
 “10,000골드로는 사람을 구해 주십시오.”
 “사람? 용병을 말함인가?”
 “아닙니다. 노예입니다.”
 “아니, 무슨 노예를 일만 골드나 들여 산단 말인가?”
 “기술자들입니다. 대장장이들과 암석을 잘 다루는 석공들, 각종 기술자들······. 그리고 농사 경험이 많은 자들도 부탁합니다.”
 “석공? 성이라도 쌓을 참인가?”
 “우선 영지에 부족한 농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농지? 허허, 뭔 말인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가장 능한 자들로 최대한 구해 보겠네.”
 “이 일은 비밀로 추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왜 그런가? 이 카스틴 왕국에서 아르도스 백작가가 숨기면서 무언가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비록 아르도스 영지가 카스틴의 불모지라는 테이블마운틴 아래로 옮겼다고 해도, 아직 아르도스를 시기하는 자들은 충분하니까요.”
 “아르도스 백작가가 드디어 융통성을 얻었군.”
 “융통성은 처음부터 갖고 있었지요. 다만 융통성을 핑계로 나라를 적국에 바치려는 것을 반대했을 뿐입니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로스데일의 모습에 로디안 백작은 짓궂은 말장난을 멈춰야 했다.
 “하하, 과연 아르도스로군. 자네를 보니 충분히 알겠네. 그러면 남은 5,000골드는 어찌하려는가?”
 “먼저, 1,000골드분의 철광석을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후, 저희 영지에서 요청할 때마다 필요한 금속이나 물품을 구해 주십시오.”
 “철광석? 물론 이 일도 비밀을 요하는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 규모라면 비밀을 유지하기에 쉽지 않을 텐데······? 더군다나 운송비 역시 만만치 않고······.”
 “대신에 최상급의 마정석을 일정량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마정석?”
 “그렇습니다. 이것과 같은 레벨입니다.”
 로스데일이 품에서 꺼낸 마정석으로 인해 한동안 소란이 가시지 않았다.
 “이 마정석이라면 최소 100골드를 상회하네. 이것과 같은 레벨을 정말 정기적으로 댈 수 있다는 말인가?”
 “일 년 주기로 100개는 맞출 수 있습니다.”
 “100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장 마법사의 감정이 있었고, 마법사의 감정 결과 최소 5서클 마법을 10번은 무리 없이 쓸 수 있는 마나량을 축적한 마정석으로 판별되었다.
 감정사의 감정 역시 최상급 레벨로 최우선 투자 품목이었다.
 그런 마정석을 일 년에 백 개씩이나 공급해 줄 수 있다니, 아르도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네, 아르도스 백작가가 혹시 드래곤 레어라도 발견했는가? 아니면 고대 던전이라도 발견했다는 말인가?”
 “······.”
 또다시 입을 굳게 다무는 로스데일.
 로디안 백작은 절로 고개가 흔들렸다.
 백작은 점점 더 이 거래에 매료되었다.
 “좋네. 만일 이 거래를 우리 상단과 지속해 준다면 향후, 모트모스 상단은 아르도스 영지와의 모든 거래에 10%의 마진을 할인해 주겠네. 또한 어떤 요구도 최우선으로 실행하겠다고 약속하겠네. 이 사실을 문서로 남겨도 되겠는가?”
 “감사합니다. 아르도스 가 역시 아버님과 상의하여 모트모스 상단과의 관계를 확실히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하하하하, 으핫하하하······.”
 로디안 백작은 통쾌하게 웃었다.
 이미 미래가 없는 가문인 줄 알았다. 밑 빠진 독과 같은 가문이었다.
 선대의 인연으로 가능한 도우려 했지만, 지금의 영지와 영지민을 품에 안고 가려는 그 행태로는 미래가 없었다.
 아무리 국왕의 신뢰가 절대적이라도 왕국은 왕의 의지만으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설사 절대군주라 해도 끊임없이 칭얼거리는 왕 주변의 정치꾼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선대 국왕은 이미 아르도스를 배신하고 버렸었다. 지금의 아르도스가 그 결과였다.
 카스틴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것을 요구했었고 앞장섰었다. 그런 그들이 아르도스가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하기를 바랄 리 없었다. 아틀란 대륙의 대제국인 아라곤의 눈치를 보아서도,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어차피 사라질 가문이었다.
 후계자도 없었다. 아니, 후계자를 잃어버렸다.
 오딘 왕국과의 10년 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일가가 죽어 나갔고, 아라곤의 중재에 반기를 들면서 그 세력마저 잃어버렸다.
 제 몫만 챙기던 왕도의 귀족들 때문에 그 기름졌던 영지마저 적에게 넘겨주고, 국왕의 배려라면 배려로 겨우 얻은 것이 지금의 버려진 대지였다. 그나마 남은 형제와 아들마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는 사라질 가문이었기에 선대의 인연을 지키려 했다.
 다음에는 밑 빠진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켜온 인연을 끊지 못해 손해를 감수했다.
 선대의 약속을 기억하는 자신의 대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포기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에게 아르도스란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던 로디안 백작이다.
 그런 아르도스가 숨겨 키운 아들을 보내온 것이다.
 로스데일 폰 아르도스.
 지금, 기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나석으로 보게 될 이득만 최소로 잡아도 3만 골드. 최상급, 그것도 로열 급이었다.
 프리미엄까지 붙게 되면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는 경매물이었다.
 차후 마정석으로 얻게 될 이득 역시 매년 1만 골드를 상회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상급 품의 경매로 인한 인지도 상승과 상단의 홍보 효과는 금전적 이득을 훨씬 초과하는 무형적 이득이었다.
 로디안 백작은 급히 딸 세린느를 불러오라 했다.
 
 
 
 Chap. 5
  아르도스에서 일어난 기적
 
 
 영지의 발전 계획은 한 가지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살만 한 영지를 만드는 일.
 매년 봄이 되면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없는 영지, 나아가 굶주린 아이들의 칭얼거림이 사라진 영지라는 아주 단순한 목적이었다.
 너무도 단순한 목적.
 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데는 곳곳에 난관이 돌출했다.
 무엇보다 굶주리지 않기 위해서는 식량 자급률을 높여야 했지만, 농지도 부족했고, 단위 면적당 생산 비율도 사막 지역보다 낮았다.
 거기다 토양에 맞는 작물마저 찾을 수 없는 상황.
 로스는 새로운 계획에서 두 방향으로 목표를 구체화시켰다.
 농업과 상업.
 우선 농업을 발전시키려니 농지가 절대 부족했다.
 대부분의 대지가 암반이나 자갈밭이고, 물이 없다 보니 극히 일부분의 토지에 토양이 만들어져도 건조한 토양 때문에 조금만 강한 바람에도 날려 버렸다.
 또 우기가 되면 테이블마운틴의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남김없이 쓸려가 버리니, 남아나는 농지가 없었다.
 그래서 영지의 농사 방법은 자갈밭의 토양에 씨앗을 묻고, 그 위에 자갈을 누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사 흙을 덮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씨앗이 노출돼 버렸고, 설사 싹이 난다 해도 뿌리가 깊지 못하다 보니 대부분 말라죽어 버렸다.
 문제는 토지의 점성에 있었다.
 토양이 점성을 가지려면 수분을 머금어야 했지만, 영지에는 자그마한 개천조차 없었다.
 그저 우기 때 생기는 건천 하나가 전부인 실정.
 로스는 머릿속의 지식을 근거로 수로를 생각해 냈다.
 아르도스 영지는 북쪽과 동쪽 전역이 테이블마운틴의 절벽과 붙어 있고, 서쪽으로는 몬스터 해역의 페리스 해와 붙어 있다.
 오직 테이블마운틴의 끝자락인 남부 절반 정도가 관문처럼 마티스 영지에 붙어 있고, 바닷길 쪽으로 1킬로미터 남짓 크란 영지와 닿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북동에서 남서로 몬스터 해역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장화 모양이 아르도스였다.
 로스는 영주성인 아르콘 북동쪽에서부터 절벽을 따라 관문도시인 아르진까지 지름 200미터, 깊이 10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7개 파는 것으로 계획을 시작했다.
 동시에 이 구덩이를 연결하는 폭 5미터, 깊이 3미터나 되는 통로를 만들게 했다.
 우기가 닥치자 절벽에서 쏟아진 물이 공사하던 현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사 현장에 물이 차면서 구덩이가 작은 호수로 변했고, 그 사이를 연결하던 통로는 인공 하천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기함을 하면서 놀라워했다.
 그저 소영주의 명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도 이런 결과를 상상한 자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천과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그동안 소영주는 각 현장을 다니며 공사를 독려했고, 직접 일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암반을 쪼개고, 구덩이와 통로를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어디서 왔는지 석공들과 기술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지시와 기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일은 너무 힘들어 매일 같이 주어지는 일당만 아니었다면 벌써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쓸모없어 보이던 공사가 영지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호수와 하천을 만드는 일이었다니. 모든 영지민들은 삽시간에 환호일색으로 변해 버렸다.
 몇몇 공사 현장에서 불어난 물로 위험한 사태도 있었지만, 수로가 없었을 때와 비교해서 영지의 피해는 미미했다. 과거 같았으면 테이블마운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영지 전체가 난리치며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엄청난 폭우에도 거의 피해가 없었다. 일차적으로 절벽을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하천과 호수에 모인 뒤에 다시 흘렀기 때문이었다.
 이후, 주민의 참여도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했다.
 로스는 바로 수로를 넘친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총 아홉 줄기의 중심 수로를 만드는 일을 병행했다.
 폭 3미터, 깊이 2미터의 이 중심 수로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영지를 관통하여 바닷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만 일 년이 지났을 때, 영지엔 폭과 깊이 1미터의 작은 수로가 영지 전체를 거미줄 같이 연결되게 되었다.
 영지 발전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간 온 영지는 이 일에 매달렸다.
 석공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는 영지민들에게는 신기에 가까웠다.
 암반에 일정한 홈을 길게 낸 뒤, 끓인 식초를 갖다 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난 뒤 가 보면 홈을 따라 바위가 녹아 있었다.
 식초에 무엇을 탔는지는 모르나, 녹아 버린 홈을 기준으로 좌우에 구멍을 뚫고 나무을 박은 뒤, 물을 부으면 이튿날 어김없이 쪼개진 암반을 덜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기술공들이 세운 도르래로 작동하는 기중기는 무거운 암반도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서 옮길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큰 공사로 인해 영지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로스는 동원된 주민들에게 곡식으로 일당을 지불했다.
 구호소를 통해 식량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일당으로 일정량의 곡물과 육류를 지불한 것이다.
 이 말은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적선이나 구제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떳떳한 대가였다.
 풍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노동으로 여섯 가족이 하루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영지민들은 환호하며 수로 사업에 매달렸다.
 갓난아이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만 아니라면, 누구든 현장에서 하다못해 돌 조각이라도 옮겼다.
 그러다 보니 5만의 영지민들이 대부분 공사 현장에 나서는 형태였다.
 심지어 로스는 원치 않았으나 아이들까지 일을 거들었는데, 먹고사는 것에 예민한 주민들 스스로가 기꺼이 동참시키고 있었다. 결국 아이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일당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 일은 로스로 하여금 영지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게 만들었고, 차후 레무니아 전역에 이름을 떨친 아르도스 아카데미의 시발이 되었다.
 또한 모트모스 상단이 아르콘에 분점을 내었고, 옛 아르도스 시절의 친분이 있는 은퇴한 노신관 얼라인이 루테 신관과 함께 영지로 들어와 신전을 열었다.
 모트모스 상단의 스토일 사무관은 대장장이나 석공, 기술자들과 함께 몇몇 의사들을 영지로 보내 주었다.
 평민 출신인 이 의사들은 전쟁 등을 통해 노예가 되었다가 아르도스 영지로 팔려 온 경우였지만, 로스를 만난 후 적극적으로 영지 일을 거들었고 공사 현장에도 참여했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는 다친 자들에게 즉각적인 시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영지 전체에서 의사들에 대한 인식이 상한가를 치게 되었다.
 하긴 귀족들의 행패를 못 이겨 버림받은 대지라는 이곳까지 도주해서 겨우 연명하던 이들이 언제 의사들을 봤겠으며 의료 시술을 받아 봤겠는가?
 주민들 가운데 남부 아르도스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로웠던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죽어 버렸고 살아 있어도 곧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너무 빨리,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좋아지는 현실을 기뻐하면서도 또 불안해했다. 가시적으로 직접 와 닿는 부분들이 식량 외에는 자신들의 삶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계획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헌데, 이 기초 단계에서 원천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갈수기가 되어 수량이 줄어들면서 인공 하천의 바닥이 드러난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르콘 이북의 가장 크고 깊은 저수지와 관문도시 아르진 동쪽의 마지막 저수지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개의 저수지와 아홉 개의 중심 수로가 말라 버렸다.
 
 “역시 갈수기엔 건천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는군요.”
 “그래도 영지에 이 정도 저수지를 가진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일 년 전만 해도, 이 무렵에는 마실 물을 찾아 해변의 용천을 뒤지다가 몬스터에 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 로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냐?”
 “예, 아버지. 부족한 면은 보수하면서 가렵니다. 이제부터 2단계를 실행해야지요.”
 로스는 아버지 리믹스 백작을 보며 웃었다.
 “란셋 아저씨!”
 “그냥 란셋이라 부르라 해도 그러십니다.”
 “그만하게, 란셋. 자네는 내게 형제와 같은 사람일세. 로스가 그리 부른다면 그리 행동하면 되는 것일세.”
 “영주님, 그러나······.”
 “란셋 아저씨는 제게 영원한 아저씨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은 지금부터 더 이상 하지 말지요.”
 “그래라, 로스. 그리고 란셋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
 오십 줄에 접어든 란셋의 얼굴엔 여전히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아저씨.”
 “말씀하십시오, 소영주님.”
 “참! 하는 수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서로가 편한 대로 행동하지요. 사람들을 동원해서 수로와 하천에 쌓인 토사들을 걷어 몇 군데로 모아 주십시오.”
 “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제는 토사가 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모을 수도 있겠군요.”
 “허허, 그렇구나. 테이블마운틴에서 내려온 토사면 꽤 기름질 것 같은데······.”
 “하하, 아마도 부엽토가 많이 섞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토질을 기름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이걸 보십시오. 지렁이입니다.”
 “허! 그렇구나. 허허허, 아르도스 영지에서 지렁이를 보다니······.”
 뜻밖의 횡재와 같았다.
 갈수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천 바닥의 질펀한 토사에는 지렁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영지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웠던 검붉은 색의 싱싱한 지렁이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하천을 채울 물이 문제였다.
 
 ***
 
 “갈수기가 되자 수로들의 물이 마르면서 토양이 마르고 있습니다. 위에 덮어놓은 밀짚들도 말라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주변의 돌덩어리로 눌러 놓고는 있습니다만, 그 일에 동원되는 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돌덩어리요?”
 여태 많은 보고 중에도 일절 말이 없던 로스가 입을 열었다.
 토지를 만드는 일을 주관하던 아문센 남작의 한탄 섞인 안타까운 보고에 드디어 반응한 것이다.
 아르도스 영지에 단 두 명밖에 없는 남작인 아문센 남작은 오히려 로스의 반응에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
 이 일 년 간, 로스는 그저 지시하고 보고받고, 다시 시정하여 지시하는 형태로 회의를 이끌어 왔다. 그 어떤 보고와 주장에도, 심지어 반발이나 부정적인 보고, 반대의 의견에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문센 남작이나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11명, 그 누구도 로스에게 불경하지 못했다.
 로스는 귀족들의 반발을 철저히 무대응으로 제어했다. 그저 필요한 일을 분배했으며, 성취되지 못한 부분은 끝까지 반복 지시함으로써 지금까지 이 자리를 이끌어 왔다. 그 결과가 명확히 현실로 나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두 로스의 지시와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었다.
 “수로를 만들 때, 나온 돌들입니다.”
 “아, 석공들이 꽤 많은 석재들을 만들었지요?”
 “그렇습니다. 사실 보고 드리지 않아서 그렇지 캐낸 석재들과 돌 조각들도 큰 문제입니다. 여기저기 쌓아 놓다 보니 아이들이 올라가 놀다가 다치는 경우도 빈번하고, 길가에 나온 날카로운 돌 조각 때문에 신이 없는 영지민들이 발을 다치기도 합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문센 남작님!”
 “예, 말씀하십시오. 소영주님.”
 “란셋 아저씨께 최대한 인력을 보충 받아 밭 주변에 일 미터 정도의 담을 쌓도록 하십시오. 특히 바다 쪽은 석재를 이용하여 튼튼히 쌓기 바랍니다. 미티슨 씨는 석공들과 함께 강풍에도 견딜만한 담을 만들 방법을 연구해 공사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도록 하세요.”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또한, 아문센 남작님이 분주하실 터이니, 펄스 경은 란셋 아저씨가 채취한 토사들을 이용하여 초지를 만드는 일을 주관해 주세요. 란셋 아저씨와 상의해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깔끔한 처리와 지시.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크레인 남작님!”
 “예, 소영주님.”
 “포도를 재배할 주민들은 언제 돌아오지요?
 “사흘 정도면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좋습니다. 포도 묘목을 관리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준비를 시키십시오. 그리고 모트모스 상단에 연락하여 포도 묘목을 더 구해 달라고 요청하세요. 힘드시더라도 우리 측에서 직접 묘목 재배지에 다녀올 수 있게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제가 직접 준비하겠습니다.”
 “오딘 왕국입니다. 모트모스 상단이 있다고 하지만 정체가 드러나면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십시오.”
 “예, 소영주님.”
 “그리고 오토 집사님!”
 “예, 작은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조만간 모트모스 상단이 일만 골드를 지불할 것입니다.”
 “이, 일만 골드요?”
 오토뿐만 아니라 모든 중인들이 놀라며 로스를 주시했다.
 “하하, 집사님은 그저 골드 이야기만 나오면 화색이 도시는군요.”
 “지금 일만 골드라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집사님은 귀도 먹지 않으셨으면서 골드 이야기만 나오면 되물으시는군요.”
 “허허, 죄송합니다. 작은 주인님. 아마도 죽을 날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다시 가문이 부흥하려는 모습을 보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평생 변함없이 아르도스 가문만을 위해 충성한 가신 오토 집사. 일흔이 넘은 오토에게 지난 일 년은 근 오십여 년 만에 맛본 풍요로운 한 해였다. 마치 과거 청년 시절의 아르도스 백작가에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닙니다! 집사님.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정말 억울하지요. 아르도스의 번영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 아이에게도 집사님의 단정한 삶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어이쿠! 작은 주인님께서 이 늙은이를 죽지도 못하게 하시는군요. 예, 작은 주인님의 소공자님에게도 이 늙은이의 쉰내를 맡게 해 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
 웃는 오토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 주변의 사람들 역시 같이 웃었다.
 “하하하, 그래 주십시오. 약속하신 겁니다.”
 “예, 그러지요. 그럴 겁니다. 작은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반드시 그래야지요.”
 “고맙습니다, 집사님. 감사하는 마음에는 아무래도 부족하지만 일만 골드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과거 밀렸던 영지 관리금부터 채우시고, 기사들과 관료들, 그리고 병사들의 미지급 급여를 지급해 주십시오. 그리고 올해부터 일괄적으로 급여를 50% 인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옛? 50%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집사님.”
 “일만 골드가 엄청난 금액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마르지 않을 금액은 아닙니다. 더욱이······.”
 “죄송합니다, 집사님.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먼저 말씀드리지만, 해마다 최소 일만 골드가 집사님께 전달될 것입니다.”
 “매, 매년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향후 4년간은 매년 봄밀과 가을밀 수확기가 끝난 무렵에, 이천 골드에 해당하는 곡물과 가축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영지민들에게 인색함을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좌중은 화급히 허리를 숙이며 복명했다.
 “이포란 경은 가까운 시기에 영지 전체의 축제를 기획해 주십시오. 필요한 금액은 오토 집사님과 상의해서 준비하시고, 필요한 물품은 모트모스 상단을 통해 조달받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 축제는 우리 영지민을 위로하기 위한 아르도스만의 축제입니다. 다른 영지에서 우리 영지의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보안에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영지의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토르만 자작님!”
 “에휴, 이제야 불러 주시는군요.”
 “하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기다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일을 맡겨 주지 않으시는 것이 두렵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런데 이번에는 좀 번거로운 일을 맡으셔야 하겠는데요.”
 “어이쿠! 소영주님께서 번거롭다고 하시니 이 늙은이는 겁이 나는군요.”
 “허허, 토르만 자작님, 아직 젊으신 분이, 그 무슨 엄살이십니까?”
 “어이쿠! 요즘 잠잠하던 오토 집사께서 소영주님을 위해 칼을 잡으셨구려!”
 “예?”
 “허허허허······.”
 “하하하하······.”
 “핫하하하······.”
 토르만 자작과 오토 집사는 동년배에 남부 아르도스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인연으로 작위에 상관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영지 최고의 노인들 덕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로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자작님께선 왕도에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왕도에요?”
 순간, 토르만 자작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토르만 자작은 아라곤 제국의 마법 아카데미 출신이다.
 그는 타고난 마나 감응 능력으로 불과 17세에 4클래스 유저에 올랐고, 19세에 카스틴 왕실마법사로 청빙을 받은 천재형 마법사였다.
 카스틴 왕실의 파격적인 지원으로 20세에 5서클의 마나고리를 이루고,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된다.
 어쭙잖은 귀족 정신은 이 어린 마법사를 투기했고, 결국 정쟁의 희생물로 삼아 버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쟁에 찢겨진 토르만 자작은 만신창이가 되어 새롭게 터진 전쟁터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당시 아르도스의 영주였던 헤더 폰 아르도스.
 이후, 벌어진 십년전쟁에서 오딘 왕국에 맞서 숱한 승리를 거두는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구국의 영웅이면서도 정쟁의 최대 희생자가 된 헤더 백작을 따라 지금의 영지로 와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40년도 훌쩍 넘어 버린 지금까지 5클래스를 마스터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그 상처가 너무 커서 깨달음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작에게 로스는 왕도에 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라곤의 수도에도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
 모두의 눈이 놀람을 넘어 염려로 차오르고 있었다.
 토르만 자작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로스를 보았다.
 “왕도를 다녀오라 하심은······?”
 “도서관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우리 영지에 아카데미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요. 자작님께서 이 땅에 남기실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소······ 영주님······!”
 “원하시는 모든 지원을 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년 안에 기틀을 잡아 주시고, 개관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소영주님······!”
 “하하, 앞으로 하실 일이 널리고 널렸으니 연세를 핑계로 쉬실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
 자작의 눈에 벅찬 물기가 차오를 때, 오토가 중얼거렸다.
 “허! 자작님께선 저보다 더 오래 사셔야겠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아카데미까지 하실 일도 만만찮은데, 작은 주인님께서 더 하실 일이 많다고 하잖습니까? 제겐 그런 말씀이 없으셨으니, 저더러 먼저 죽으란 말씀이지요.”
 “허, 허허, 허허허허, 그럼 당연히 나보다 먼저 태어나신 집사께서 먼저 죽으셔야지, 내가 먼저 죽기를 바라셨단 말이오? 허허허, 영지 걱정 마시고 먼저 가시오. 내 이 몸뚱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일하고 따라갈 터이니.”
 “왜? 아예 먼저 죽으라고 기원을 드리시지요? 사실 자작님이 저라도 없으면 이 젊은 척하는 늙은이들 사이에서 버티실 것 같습니까? 저 보십시오. 아문센 남작님이야 그렇다지만, 크레인 남작님까지 도끼눈을 뜨고 보잖습니까?”
 “아니, 왜 오토 집사께선 젊은 이 사람을 가지고 늙은 분들 사이에 끼워 넣으십니까?”
 “이 보십시오, 오토 집사. 해도 너무하시네요. 이 사람이 언제 도끼눈을 떴습니까? 이 사람은 거기 계신 늙은 분들과는 아직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에끼! 크레인 남작, 아문센 남작! 자네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저기 저 젊은 기사들이 자네들을 끼워 줄줄 아나? 꿈 깨시게. 허허허허허.”
 “하하하하······.”
 “푸훗! 하하하하······.”
 다시 웃음이 터지면서 긴장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귀족 같지 않은 귀족들, 회의 같지 않은 회의, 누구의 반대도 다툼도 없는 일사천리의 회의,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예도 있었고, 기사도 관리도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어색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바닥까지 내려간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이었다.
 “올만 경이 벨리스 경과 함께 자작님을 수행해 주시고, 자작님은 밤에 저를 잠시 만나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실링 씨!”
 “예, 소영주님.”
 의사 대표인 실링이 긴장하며 말을 받았다.
 회의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삼십 분 정도가 더 지난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이상하다 할 만큼 철저한 상명하복이면서도 파격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의였다.
 
 ***
 
 어두운 밤, 테이블마운틴은 검푸른 실루엣에 감겨 있다.
 해발 1,500미터의 정상은 언뜻 평평한 테이블을 보는 듯, 잡목들이 드러누운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밭고랑 같은 협곡들이 북동부에서 서남향으로 무수하게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깊은 것은 수백 미터에 이르는 것에서부터 낮은 것은 수십 미터까지.
 하지만 그 양옆의 대지는 자체로 고원이라 할 만큼 엄청난 넓이였다.
 하긴 누구로부터 나온 말인지 모르나 테이블마운틴의 크기가 카스틴 왕국과 비교할 정도라 하니, 그 규모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 어찌 측량하겠는가?
 더 자세히 보면, 대지들은 그대로 암반 덩어리였고, 암반 틈을 파고든 작은 덤불이나 관목들과 드문드문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덩굴식물들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협곡들이다.
 그 넓이만도 엄청나 개중엔 폭이 1킬로미터를 넘는 것도 있고, 협곡 안에 또 다른 협곡들이 존재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협곡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거대한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호수나 숱한 웅덩이, 깊은 하천, 그리고 우거진 밀림까지, 이곳이 과연 테이블마운틴인지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아직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테이블마운틴의 상공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날개를 치지 않는 것이 새는 아닌 모양인데, 이 높은 곳까지 올릴 연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그때 두 번째 쌍둥이 달, 어센드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냈다.
 달빛에 드러난 존재는 인간. 로스였다.
 6서클의 플라잉 마법으로 상공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지난 일주일, 로스는 밤을 새우며 테이블마운틴 상공 곳곳을 탐험했다.
 실로 천혜의 보고였다.
 수많은 과수들과 약초들, 최상의 목재들을 품은 거대한 원시림은 로스로 하여금 왜 미리 이곳을 찾아보지 않았는지 후회하는 마음마저 갖게 만들었다.
 로스의 두뇌에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각인된 이곳에 대한 상세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아득한 고대 카이너스 왕국의 터였던 것이다.
 국왕인 히트러스에 의해 배신당한 백성들과 버림받은 후예들의 터. 과거의 흔적은 사라졌고, 새로운 세계가 그곳에 펼쳐졌다.
 로스가 있는 곳은 해발 천오백이 넘는 지역이었다.
 북쪽의 상부에는 아직 눈이라 불리는 하얀 것들이 쌓여 있었지만, 협곡의 안쪽으로 내려오면 오히려 밑의 영지보다 더 따뜻해서 마치 오월의 초여름 밤 같은 온화함이 느껴졌다.
 지난 며칠, 로스는 영지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이곳에서 찾아냈다.
 각인된 지식들은 갈수록 로스에게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 양이 너무 엄청나 미처 적용을 못 시키고 있었다.
 지난 사흘간 밤낮을 잊고 작업에 매달렸던 로스는, 오늘 마지막 작업을 마쳤다.
 이제, 침식을 잊고 그린 마방진의 위력을 확인할 때였다.
 
 나흘 전.
 로스는 테이블마운틴 중서부에서 바닷가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발견했다.
 세 곳의 협곡이 합쳐지면서 쏟아내는 물의 양은 엄청났다.
 그러나 그 엄청난 폭포도 1,200미터가 넘는 절벽에서 떨어지다 보니 중간에 바람에 날려 실제로 바다에 떨어지는 물은 얼마 없었다. 중간 지역에서 뿌려지는 안개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관을 보던 로스는 순간적으로 마법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마법진들을 연결한 거대한 마방진을 구상했다.
 폭포와 아르콘 북서부의 첫 번째 호수를 연결하는 마방진.
 그리고 다시 사흘이 흐른 것이다.
 로스는 자신의 머리통만 한 마정석에 마나를 주입한 후, 첫 번째 호수로 텔레포트했다.
 메스 텔레포트.
 8클래스 유저 이상이 펼칠 수 있다는 위대한 마법.
 그렇다면 로스는 8클래스의 대마도사라는 말인가.
 
 그날, 아르도스 영지에 기적이 일어났다.
 호수에서 하천을 흐르고, 다시 중심 수로와 핏줄 같은 각 수로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그 광경을 본 영지민들의 환호는 절벽을 울린 뒤, 하늘로 퍼져 나갔다.
 뒤늦게 이를 확인한 영지의 귀족들은 원인을 규명하려 뛰어다녔지만, 솟구치는 물줄기 외에는 발견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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