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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검단향 1권 (1화)

2017.06.15 조회 650 추천 3


 금검단향 1권 (1화)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수염씨입니다.
 다소 생소한, 필명 치고는 이상하겠지만 나름 깊은 인상이 남을 거라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겨웠던 시간을 지나 하나의 이야기를 그 출발선이라도 나름 잘 마무리해서 집필을 완료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금검단향.
 처음 시작했을 때와 많이 달라졌지만 그렇게 나온 이야기가 바로 이 ‘금검단향’입니다.
 가슴에 무수히 많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우선 이 책을 선택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느 작가가, 어느 책이 쉽게 나오겠냐마는 사실 저에게 있어 이 금검단향은 정말이지 고난의 연속이었고 참으로 힘겨운 과정 끝에 나올 수 있었기에 그 감회가 남다릅니다.
 무협으로의 첫 도전.
 어찌 보면 저에게 있어, 아니 사실 하나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하고 도전한다는 부분, 첫 출간이란 부분 역시 험한 산을 등정한 것이겠지만, 이 도전은 저에게 도전 그 이상의 감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한창 무더운 여름, 유래 없는 폭염 속에서 컴퓨터의 열기와 싸우며 연일 틀어야 했던 에어컨에 대한 부담, 정확히는 전기세의 압박이 나날이 늘어 가는 가운데 드디어 책으로 나왔음에,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뿔미디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금검단향은 무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청소년, 그리고 청년이 된 후 무림으로 나서는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가공의 소설을 통해 무림을 꿈꾸던 소년이 현실로 그 세계를 접하고 겪는 이야기입니다.
 읽기 편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독자분들께서 금검단향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즐거웠다면 목표는 달성. 글을 쓴 이도, 편집을 해 준 분도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획실장님과 한 대리님께 참 폐를 끼쳤던 것 같습니다. 의견을 나누고 쓰고, 잠수 타고, 전화하고, ‘아! 이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수정 지시가 산더미 같고, 삭제 컷 되게 많고, 몇 번을 갈아엎고··· 그런 과정 중에 탄생한 것이라 필자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이 글을, 사정이 된다면 좀 더 깊은 부분과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금검단향을 쓰느라 도움 준 많은 분들께 감사를.
 
 2010. 부산 열사의 도시, 그 어느 곳에서
 수염씨 배상
 
 
 
 서막. 황제가 천하를 굽이 살피니 괘씸한 무뢰배가 있더라
 
 
 어느 날 황제는 천하를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세상이 넓다 하되 이 모든 것이 천자의 것인데 짐의 말을 듣지 않는 이가 너무 많더라. 짐의 친우는 어찌 생각하는고?”
 황제의 젖형제이자 황자의 난을 꺾고 제국의 모든 군권을 가진 대장군이 대답했다.
 “그것은 무림인이라는 이들이 있기에 그런 줄 아뢰오.”
 “무림인이라 함은 무엇인고?”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여 무의 완성을 위해 삶과 명예, 긍지 모두를 버리고 투신한 자들인 줄 아뢰오.”
 “그런 자들은 짐의 백성이 아닌고?”
 “그렇지는 않은 줄 아뢰오.”
 “그러하면 무림인들은 어찌하여 짐의 말을 듣지 않는고?”
 “그들의 법은 무력과 협의에 있기 때문인 줄 아뢰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에게 복종하는고?”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제국무제(諸國武帝), 황룡무왕(黃龍武王) 관지충(關至忠)이 대답했다.
 “무림삼성(武林三聖) 및 강호팔강(江湖八强), 세외팔부중(世外八部衆), 마교십종사(魔敎十宗師)와 수많은 무림인들인 줄 아뢰오.”
 “그들을 복종시키면 짐의 말을 따를꼬?”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황제의 의지가 깃든 검이 그들의 법칙에 따라 예봉을 꺾고 위엄을 전파하면 따를 줄 아뢰오.”
 황제는 수염 하나 없는 턱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금위반(禁衛盤)의 고수들은 무림에 통할꼬?”
 “뒤를 캐고 암습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무림의 고수들에겐 무용일 줄 아뢰오.”
 금위반은 황제 직할 내각조사단으로, 황제의 위엄을 위한 모든 정보와 색적, 그리고 문서를 가공한다. 죽을 곳조차도 알아서 들어가야 하는 일이 많아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무림의 최정예였다.
 “어림군(御臨軍)의 장수들은 어떠할꼬?”
 “충성심이 반석 같다 하나, 무림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십시일반 사라질 줄 아뢰오.”
 어림군은 황제의 친위군으로 그 무예와 충성심은 천년의 거석의 굳기와 비견할 정도였다.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훈련과 시련을 통하여 벼려진 이 황궁의 무사들은 황제의 검이라는 식으로 불리며 그 적을 처단해 왔다.
 “그러하다면 궁희(宮姬)들은 무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꼬?”
 “지키고 죽이는 것이라면 모를까 무림에서 패도를 논하기엔 무리일 줄 아뢰오.”
 한때 무림인이라는 야인들이 천하를 노리고자 황제의 궁을 침범하였고, 십요궁희(什耀宮姬)가 삼백에 이르는 무림인을 참살한 바 있다. 황족과 황제를 지키고 정적을 암살하는 자들. 앞서 말한 두 개와 같은 반열에 위치하는 황제 직속의 무사들이면서도 그 정체는 가장 모호하다. 실제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마저도 돌고 있을 정도였다.
 황제가 자랑하는 세 개의 무력 세력조차도 무림 고수들을 꺾지 못한다는 말에 심기가 거슬린 듯했다.
 황제가 터럭 하나 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다소 낮게 하여 노기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짐에게는 아무것도 없는가?”
 “천하의 최강에 자리한 소인이 있는 줄 아뢰오.”
 “그대가 짐을 떠나 무림의 예봉을 꺾을 수 있을꼬?”
 “가능하겠지만 무림인의 반발이 심할 줄 아뢰오.”
 “어찌하여 그런고?”
 황제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관지충이 대답했다.
 “억겁에 이르러 마침내 탄생한 초유의 기재이자 무의 궁극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 군의 지휘에 능통하고 이국의 오랑캐들을 무찔러 황족 중에서도 황제 단 한 명만이 입을 수 있는 황룡의 수실이 새겨진 옷을 입은 과인이 너무 잘나서이기 때문인 줄 아뢰오.”
 “제 자랑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닌고?”
 “사실이니 하는 수 없이 사실을 말하는 것인 줄 아뢰오.”
 그런 말을 하는 관지충의 실력은 스스로가 얼굴에 금칠을 할 만한 정도였다.
 그가 있었다면 망국의 길을 걷는 나라조차도 수백 년 이상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라가 강성할 때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쌓을 수 있었다.
 태어날 때 별이 탄생했다는, 별이 내린 아이이자 무의 기재. 그리고 풍문에는 선골(仙骨)을 지니고 있어 애초에 이 세계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선인이라고도 했으며 그런 주제에 황제의 젖형제이자 대장군, 가장 충실한 친우라 나라의 군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자 앞에 쓰러지는 건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
 “그렇다면 짐이 결정할 길은 무엇인고?”
 “무림인에게 황궁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면 방법이 있는 줄 아뢰오. 대답하오리까?”
 황제는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위반의 재능과 궁희의 기술, 그리고 어림군의 충성을 가진 무공의 고수를 배출하여 폐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그것이 쉬우리라 생각하는고?”
 “천하의 주인이신 황제께서 결정한 일을 어느 누가 막으오리까.”
 황제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고 금색 실로 아로새겨진 곤룡포를 떨쳤다.
 “과연! 짐의 뜻도 그러하도다!”
 황제.
 제국이라는 이 거대한 나라의 정점에 위치한 지상 최고의 거인이 선언했다.
 “들어라! 짐의 친우이자 천년만년 영원할 황가의 수호자여. 짐의 칙령을 전하노라!”
 오체복지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자이며 조짐을 이해할 수 있는 천자의 수호자, 황제가 천하를 지배한다면 그 지배할 무기이자 힘이자 세력이 되어 주는 대장군이 고개를 들고 어명을 기다렸다.
 “저 오만한 무림인들의 예봉을 꺾고 아직 그들의 위에 짐이 있음을 증명하는 최강의 무기를 만들라. 그걸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 오직 그들을 벌할 무력을 만들라!”
 관지충은 무릎을 꿇고 경쾌하게 답했다.
 “폐하의 뜻은 곧 천하의 뜻이니, 원하는 바 이루어질 것이 나이다!”
 
 
 
 一. 나라 일이 되면 고수 완성도 속성으로 이루어진다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紫禁城).
 중원에서 가장 고귀한 이가 살고 있는 지상 최대의 건축물로 동서로 이백오십 장(丈), 남북으로 삼백삼십 장에 이르는 성곽으로, 이미 그곳 하나가 도시나 다름없었다.
 황제와 황족, 그리고 제국을 이끌어 가는 수많은 관료와 그 관료를 수발하는 시종들. 상인이라거나 뜨내기가 돌아다니진 않지만 나랏일을 하는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관이 있고 병기창이 있고 금위반이나 어림군의 막사가 존재하며 문무백관이 드나드는 믿을 수 없이 거대한 대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국조께서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 모든 나무를 뿌리 뽑아 숨을 수 있는 곳도 없고 모든 문이 열려 있지만 그것도 내실에 한정된 것.
 자금성은 그만큼 거대한 곳이며, 나라의 모든 것이 있는 곳이었다. 이름을 걸고 나라를 이끌어 가면서 더해지고 빠지는 건물도 존재하며 그에 따라 물경 만에 이르는 관직이 있다. 그 관직이 다 채워지는 일은 없지만 절반만이라도 물경 오천, 그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자금성은 분명 화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비밀스러운 소문을 좋아하거나 호기심 많은 호사꾼들이 자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십이지금지(十二支禁地).
 이 모든 곳이 중요하다 말할 수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급수를 매겼으니, 최악의 상황에서도 잃어선 안 될 곳이 열두 곳이 있었다. 무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잃어선 안 될 곳이라 하여 엄중한 경계를 펼치는 열두 건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은 황궁 최고의 무사로 어림군이었다.
 언제나 황제의 명만을 받는다는 의미로 황룡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기에 허락 없이 진입한 자는 불충이며 불의이고 역모이며 모반이니, 가장 끔찍한 형벌만이 침입자를 환영할 터였다.
 그 십이지금지란 대개 이해할 수 있는 곳이었다.
 황제의 어전(御前).
 스무 걸음 이내로 다가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황족의 침소.
 어전만큼이나 중요한 곳으로 삼대 이상 황제에게 봉사한 어림군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일이 가능했다.
 대장군부(大將軍部).
 제국 최고의 무장인 대장군부 또한 금지로 지정되어 무려 여덟 단계의 신호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었다.
 경덕숭전(景德崇殿).
 중원의 근본이 되는 삼황오제를 위시한 역대 제왕, 문무백관의 위패를 모은 곳으로 그 관리가 매우 엄격하고 열리는 것도 일정치 않은 금지였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의 이해에 맞게 돌아간다면 그런 역사도 없었을 터. 십이지금지로 지정되기엔 명백히 이상한 곳도 있었다.
 자금성에는 흑옥루(黑玉樓)라는 곳이 있다.
 흑옥루란 다름 아닌 기루. 기루에 살고 있는 건 기녀로서, 황궁 내 있는 유일한 유흥업소였다.
 황제도 물론 사람이니 여색을 탐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황궁 내에 기루가 있다는 건 듣는 이들의 표정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가장 중요한 십이지금지에 기루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청자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흑옥루.
 십이지금지의 말석을 차지하는 자금성 제일의 요충지.
 지체 높으신 이들의 입은 쉽사리 열릴 생각을 않고 언감생심 황제에게서 왜 중요하냐고 물을 수는 없기에 외부에서는 신비의 장소로 남는 곳이었다. 도대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들이 드나든다는 기루라는 것도 신기한데 십이지금지로 지정이 된 것이지?
 도대체 거기에 사는 여성들은 누구이며, 왜 제일 중요한 곳으로 평가 받는지, 소문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있지만 드러난 바는 전혀 없는, 자금성의 신비 중 하나다.
 
 한때는 재상(宰相), 혹은 태사(太師), 수상(首相)이 존재했지만 황제의 권력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변혁을 통해 육부의 모든 기관은 황제 직속이 되었다. 황제는 이후 내각을 구성, 내각의 수장을 대학사(大學士)로 두어 내각의 임무를 대리했다.
 대학사는 사실상의 재상 역할에 위치한 지위지만 권력의 정도는 매우 약하며, 하부 조직이나 다름없는 육부의 장관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작았다. 빛 좋은 개살구까지는 아니겠지만, 나라가 번영하는 과정에서 대학사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대학사는 나라의 두 번째에 위치한 자리.
 그에게 비밀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당대의 대학사인 설악 선생(雪嶽先生)도 흑옥루의 비밀은 알고 있었다.
 몇몇 식자들은 흑옥루가 왜 십이지금지가 되었는지에 대해 주사를 부리고 가장 방심했을 상황을 막기 위해, 혹은 술 마시고 주사를 부려 나라의 비밀이 마음껏 공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곳의 기녀들은 그야말로 나라의 핵심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키려면 제일 먼저 점령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일차적인 이유에서일 뿐, 진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악 선생이 흑옥루에 드나들 수 있는 명패를 내밀자 뙤약볕 내리쬐는 곳에서도 무심한 표정으로 지키고 서 있던 어림군의 금강동인(金剛銅人)들은 문 앞에서 교차했던 창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흑옥루는 황제 바로 다음 자리에 위치한 대학사조차도 명패를 보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설악 선생은 문득 흑색으로 반짝이는 돌로 만든 기루를 올려다보았다.
 자금성의 위세에 걸맞게 건물은 몹시 크고 화려했다. 뿐만 아니라 열 개의 단으로 쌓여 있어 높이도 상당했다.
 설악 선생은 그 위용에 감탄하기 이전에 지붕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자색(紫色)의 바탕 가운데서 바람과 함께 휘날리고 있는 황금빛의 용.
 깃발은 아홉 개나 동시에 펄럭이고 있었다.
 설악 선생은 한숨을 쉬고는 흑옥루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단아한 외모의 여인과 그 여인의 앞에서 신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소동이 있었다. 저 동쪽에서 온 진주를 꿰어 만들어진 주렴을 걷는 소리에 둘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고 표정도 조금 변했다. 무려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달려온 소동이 설악 선생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대인.”
 “선생으로 충분하네.”
 “이쪽으로 오시죠, 대인, 아니 선생님.”
 이제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소동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고쳤다.
 소동은 곧 접수계로 설악 선생을 이끌었다.
 접수계에는 장님조차 눈을 뜨게 만들 수 있는 미모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최신 유행하는 복장을 입고 어깨를 살짝 노출시킨,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운 미녀였다. 연령은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아직 어려 보이는 외양에 비해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원숙한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군청과 흑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미인이 설악 선생을 향해 활짝 웃었다.
 “어머나, 이른 아침부터 기침하셨나요. 대인?”
 “선생으로 충분하네.”
 “아차, 선생님. 자꾸 깜빡한단 말이죠.”
 소동과 마찬가지로 미녀도 자신의 머리를 콩 하고 때리고 멋쩍게 웃었다.
 이런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여인이 세상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십요궁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설악 선생은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어떤 일로? 아침부터 이곳에 강림하신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아니한지요?”
 “으, 으음.”
 천하에서 흑옥루의 진정한 비밀을 아는 다섯 명 중 한 사람.
 설악 선생은 다른 고관들처럼 중원 최고의 기녀들을 안기 위해서만 오지는 않았다.
 나이는 중신들이 비해 파격적으로 젊지만 나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의 실력과 인품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설악 선생은 농밀한 웃음을 흘리며 반문하는 그녀를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애써 말을 정리했다.
 “그녀가 있는가?”
 “네, 무려 아홉이나 있는데요.”
 “어, 어흠. 말을 잘못했군. 자네들 중에서 요희(妖姬)가 있는가?”
 “삼 언니 말인가요?”
 “그래, 꼭대기 층의 그녀 말일세.”
 꼭대기, 즉 구 층이라는 말에 설악 선생의 앞에 있던 미녀 흑희(黑姬)가 조금 긴장했다.
 흑옥루는 기녀가 머물고 있었고 층계마다 미녀가 한 명씩 있었다. 쌍둥이 기녀가 머무는 사 층은 특별이 두 명의 기녀가 있지만.
 진짜 꼭대기 층인 십 층도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곳을 지키는 기녀는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구층이 끝.
 구 층에는 요희라는 화명을 쓰는 기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요희를 볼 수 있는 자금성 내의 손님은 단 두 명.
 황제와 설악 선생.
 나라의 최고 자리에 있는 단 둘 뿐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만.”
 흑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설악 선생은 그녀의 긴장을 느끼고는 빙그레 웃었다.
 “큰일은 아닐세. 그저 의문이 있어서 말이야. 걱정하지 말게.”
 “그렇습니까?”
 “요희 엄마는 왜 찾는지요, 선생님?”
 소동이 물었다. 흑희가 깜짝 놀라 소동의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설악 선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소동은 흑옥루의 유일한 남성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워낙 재간둥이라 못하는 것이 없다. 간단한 안주부터 청소, 단장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동은 흑옥루의 기녀를 전부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문제라면 엄마들 틈에서 사랑을 받다 보니 경우를 모르는 때가 자주 있다는 것.
 설악 선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요희가 무슨 꿍꿍이인지 갑자기 돈을 쓰기 시작해서 말이지. 갑자기 씀씀이가 엄청 커졌지 뭔가.”
 설악 선생은 품이 넉넉한 소매에서 세 번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소동과 미녀가 그것을 받아 펴서 눈을 굴렸다.
 내용을 확인한 순간 과연, 어째서 설악 선생이 여기에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흑옥루에서 사용된 돈의 양이 저번 달에 비해 서른 배 이상 커졌다.
 흑옥루의 특성상 최고급 비단과 입욕제, 향수, 화장품 따위를 사기 때문에 사용하는 돈은 꽤 되는 편이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가격이 비싸다는 것들을 둘둘 둘러매는 그녀들의 지출은 확실히 컸지만 이번 달의 지출은 확실히 설악 선생조차 의아함을 느끼기 충분한 액수였다.
 소동은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깜짝 쥐고 있던 서류를 구기고 말았다. 목소리도 자연히 커졌다.
 “설마 그 서역인가 어딘가에서 왔다는 금강석을 기어코 샀나요, 이 바보 엄마가!”
 요희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으르렁대던 소동을 바라보며 설악 선생은 조금 진정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 그건 아니야. 사용처는 확실하네. 단지 왜 이런 것이 필요한지 몰라서 말이지.”
 “이런 것? 뭔가 이상한 걸 샀나 보죠?”
 “그렇다네. 평소엔 쓰지도 않는 것이지.”
 “뭘 샀나요?”
 흑희가 묻자 설악 선생은 이미 암기해 뒀던 것을 유창하게 대답했다.
 “극지석균(極止石菌), 공청석유(空淸石乳), 만년삼왕(萬年蔘王), 소환단(小還丹)······ 응? 왜 그런 표정인가?”
 “아, 아니 계속하세요.”
 설악 선생은 약재의 이름을 덮어쓴 영약을 물경 반각에 이르도록 말한 다음 끝맺었다.
 “영약이나 비약 종류는 시중에 풀린 건 전부 다 사들였다네. 그리고 지하 시장에서나 돌던 보검도 구입했다더군.”
 내용을 들을수록 고개가 삐뚜름해지는 소동과 미녀였다.
 이들도 아는 바가 없는 기색이자 설악 선생은 난감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그녀에겐 딱히 이런 것이 필요하진 않잖은가.”
 그녀, 흑옥루의 꼭대기에 사는 이에겐 확실히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아니,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기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흑옥루에 사는 기녀들은 그런 것 없이도 이미 강하니까.
 황제의 침소 및 요지를 지키고 암살자들을 저지하는 열 명의 궁희가 사는 비처.
 삼백의 무림인으로 구성된 암살 집단을 단지 열 명으로 정리해 버린 황궁의 비밀 병기, 십요궁희가 사는 곳. 그곳이 바로 흑옥루였다.
 특히 흑옥루의 꼭대기에 위치한 그녀는 다른 아홉 명의 궁희 전부가 덤벼도 거꾸러뜨릴 수 있는 괴물.
 이제 와서 영약이니 뭐니에 욕심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왜 이런 걸 사는지 묻기 위해서 방문했지만······. 허허, 어디 갔는지 정녕 모르는가?”
 “워낙 출타가 잦은 여성이라 글쎄요. 아, 황상(皇上)께서 불러 출타한 게 아닐지요?”
 그녀를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는 천하에 단 둘에 불과했다.
 둘 중 한 명인 설악 선생이 여기에 있으니 부른 것은 당연히 다른 한 명인 황제.
 설악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설악 선생의 반응에 소동과 미녀는 이미 황상을 뵙고 오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접수계를 사용하고 일 층의 기녀이기도 한 흑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뿐이군요. 또 그런 물건을 사기 위해 지하 시장 같은 곳을 간 것이 아닐는지요?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확실한 것 같아요.”
 설악 선생은 가볍게 감탄했다.
 “그런가? 그렇군.”
 그리고 침묵이 일었다.
 흑희도 소동도 그리고 설악 선생도 모두 왜 그녀가 이런 걸 사들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고민은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잠시 후 값비싼 주렴을 걷고 나타난 여인이 바로 화제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장바구니를 짊어지고 문을 열고 나온 매력적인 여성, 고민의 중심에 놓여 있던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뭔가 생각에 빠진 세 명을 바라보며 의아해하다가 가볍게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누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번뇌하는 조각상마냥 침묵하던 이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요희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아침부터 일찍 드셨군요.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지?”
 설악 선생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소동이 반쯤 구겨 버린 서류를 내밀었다.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게 된 요희가 물었다.
 “왜 이런 걸··· 제게?”
 “우선 읽어 보게.”
 “기적(妓籍)에서 빼 준다는 서류면 곤란한데요. 즐기고 있거든요.”
 “아니네.”
 “아니면 첩으로 맞이하겠다는 건가요? 아, 그건 좀 좋을지도.”
 “아니네.”
 “제가 주사를 부리다가 뭔가를 분질러 버렸나요? 죄송해요.”
 “아니네.”
 만년빙정 같은 표정으로 설악 선생이 받아쳤고 소동과 흑희는 다소 감탄했다.
 반대로 자신의 의도가 먹히지 않아 조금 불만인 요희가 입을 삐죽 내밀고 서류를 펼쳐 들었다.
 “어디 보자, 어머, 왜 이런 걸 제게?”
 그동안 소동은 요희가 싸들고 온 짐을 풀어헤쳤다.
 과연 단단히 밀랍되어 있는 환약과 서적, 그리고 암기통이 있었다.
 하나같이 비보요, 영약이 아닐 수 없었다. 밀랍이 되어 있는데도 청아한 향기가 나는 환약, 그리고 올챙이 머리를 닮은 과두문(㏛?文)으로 쓰인 고서적, 암기통은 저 명망 높은 당문의 솜씨가 엿보였다.
 서류를 읽은 요희는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했다. 어째서 설악 선생과 흑희, 그리고 소동이 그런 모습인지. 요희가 단조롭게 물었다.
 “소첩이 말씀 드리지 않았던가요?”
 “말하지 않았네. 방금 본 서류의 그것과 저 짐은 또 뭔가?”
 “고수(高手)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예요. 요 며칠 무척이나 바빴지요.”
 “고수? 고수를 키우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고수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뭔가?”
 아무래도 설악 선생은 학사, 무림의 일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물론 무공을 아는 이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고수를 키우는 일하고 그녀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고 있지만 역시 관계없는 흑희와 아무것도 모르는 소동도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 요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요희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상께서는 황실의 힘으로 무림인의 안하무인의 태도를 손봐 주려고 하세요.”
 “무림이라니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음, 자세히 말하기는 좀 곤란합니다. 어쨌든 황상께선 직접 어명을 내리셨지요. 무림을 곤혹스럽게 할 수 있는 최강의 고수를 키우라고 말이죠.”
 황궁에서 내밀하게 일어난 일까지는 알 수 없는 이들의 의아함이 계속될 무렵 요희가 소동의 뒷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바보 아들, 이제부터 지옥문이 열릴 거야.”
 “지옥문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 올린 손아귀에 붙잡혀 대롱대롱 흔들리는 소동을 바라보며 요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소리도 지금에서나 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많이 떠들어 둬, 이 바보 아들. 어쨌든 선생님.”
 요희가 빙그레 돌아 설악 선생의 앞에서 곱게 무릎을 꿇었다.
 “황상의 어명이에요. 흑옥루의 십요궁희는 이제부터 꽤나 오랫동안 임무에 소모될 것 같습니다.”
 “이, 임무?”
 “네, 속성 고수 만들기 비법이라고 할까요.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좀 파격적이긴 하지만 확실하죠.”
 여전히 해맑게 웃지만 그 속에서 어떤 미지의 감정을 깨달은 설악 선생이 흠칫했다. 설악 선생은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당대의 대학사다운 면모를 되찾았다.
 “허허, 무림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확실하겠지. 그럼 수고하게.”
 “배웅 나가지 못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상아야, 선생님을 배웅하렴.”
 “알겠어요. 나가시죠, 선생님.”
 흑희 옥상아(玉霜娥)가 요희의 눈치를 받고 설악 선생을 배웅했다. 흑희가 설악 선생의 뒤에 붙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소동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엄마들 중에서 특히 바보인 요희 엄마?”
 “우리 바보 아들 무림 고수들 동경했지?”
 “으, 으응? 아니야.”
 “정말?”
 요희가 극렬 부정하는 소동을 향해 물었다. 소동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정말이야. 난 무림 고수 같은 거 동경 안 해.”
 “그럼 무림 자체를 동경하던 거였어? 참고로 엄마는 침대 아래 숨겨 둔 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무림파천황(武林破天荒), 철혈검로(鐵血劍路)······.”
 “······윽! 거기까지만 해 둬! 왜 남의 침대 밑을 뒤적이는 거야!”
 “이 나라 모든 엄마는 아들의 심리 상태를 알아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
 “비겁해!”
 “전혀 비겁하지 않아. 이렇게 엄마는 아들이 다 컸는지 어떤 건지도 확인하고 그런단다.”
 으쓱하고 자랑하던 요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보 아들을 무림인처럼 강하게 만들어 줄게. 이번 수행을 통해서 고수가 되면 무림을 활개 치도록 해.”
 “어째서?”
 “아까도 말했지만 바보 황제의 명령이기 때문이야.”
 사석에서라지만 황제에게도 바보라는 접두사를 붙일 수 있는 요희를 보며 소동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뭐 안 보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도 하니까 그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말의 내용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황상의 명령이라고?”
 “응, 무림인들이 자기네 영역이라고 민간인에게 세금을 걷고 지켜 주는 전답에다가 아무렇게나 농사지으면서 관과 무림은 불가침 뭐 이따위 소리만 하고 있으니 화가 났나 봐. 그래서 이놈의 자식들, 보자보자 하니까 밑도 끝도 없군. 본때를 보여 주겠어, 뭐 이런 의미로 황궁에서 고수를 키워서 내보내기로 했어. 거기에 선택된 거야. 딱 한 명 꼽는 건데 걸렸구나, 축하해. 바보지만 열심히 해.”
 “바보라고 말한 사람이 더 바보.”
 요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소동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빨래 털리듯 허공을 붕붕 날던 소동은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은 감각을 애써 억누르고 파랗게 된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 엄마. 바보라고 해서 미안해.”
 “괜찮아 바보 아들. 난 이미 다 잊었으니까. 엄마의 배포 정말 크지 않니?”
 소동은 한 번 진실을 말하고 순국열사가 되어 볼까 하는 마음은 별로 가지지 않고서 배시시 웃어 보였고, 요희는 귀엽다며 껴안아 댔다. 덕분에 세상을 밝히는 진실은 하나 사라진 대신 현실을 알아가는 소동 하나만 남았다.
 “그럼 엄마. 난 이제부터 엄마들이 아는 무공을 익히는 거야?”
 “사 온 것도 있고 못 익힌 무공도 있지만, 대강은 그래.”
 “싫어, 엄마들 무공 약하잖아. 약한 무공 배워서 뭐에 써먹어.”
 내가 가는 길은 외길 인생, 내 무공은 중원 최강.
 뭐 이런 말을 들은 것처럼 요희는 기막힌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그게 뭐랄까. 궁희가 정면 승부에 약하고 암습을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는 않아? 지금 당장 흑희의 무공만 배워서 무림으로 나가도 만두피 펼 때나 쓰는 밀봉으로도 중견 고수는 쓱싹 살해할 수 있을걸? 게다가 엄마를 봐. 이 엄마가 약하니?”
 “그, 그건 아니지.”
 “물론 엄마와 다른 엄마들 간의 재능이 상상을 초월하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비교는 잘못된 걸까? 아아, 어째서 하늘은 인간을 낳고 나를 나아 인간의 격차를 이리도 벌리셨나이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헛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결국 엄마들 무공 익혀라?”
 “아냐, 무공 서적도 좀 사 뒀으니까 그것 중에서 내가 좀 조사해서 괜찮은 것들을 추려 줄게. 황궁무학도 별반 쓸모는 없지만 좀 찾아보면 괜찮은 게 나올 거야. 뭐 사희(蛇姬)가 있으면 필요 없으려나.”
 “사희 엄마는 못 믿어. 추려 줘.”
 소동은 엄마들 중에서 제일 짓궂은 두 명의 엄마를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어림군의 경기공(勁氣功)도 익히고 금위반 녀석들의 무예 다루는 것과 기원류(基源流)도 배워야겠지?”
 “뭐야? 그걸 다 배우라니. 천하제일의 무공 하나만 가르쳐 주면 돼.”
 “······.”
 요희가 말없이 소동을 바라보았다.
 “······.”
 소동은 잠시간 그 눈빛을 버텼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도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긴긴 시간이 지난 후 소동이 진땀을 흘리며 바닥을 탕탕 두들겼다.
 “화를 내거나 농담하지 말라고 대답을 하란 말이야! 그 긴 정적은 뭐야!”
 “헛소리를 참 진지하게 하는구나 하고 감탄하던 참이었어.”
 “감탄하지 마! 아무튼 무공을 너무 많이 익혀도 곤란하잖아? 날 어딘가의 싸움 귀신, 아수라(阿修羅)로 만들 셈이야?”
 “엄마는 아수라가 아닌데 다할 줄 알아. 엄마는 하늘을 날고 싶어서 다섯 살 때 열심히 허공을 찼더니 결국 허공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어. 엄마만큼은 아니라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건 엄마니까 그렇지.”
 소동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했다.
 “게다가 엄마는 궁희 중 최강이잖아.”
 “궁희 중에서만 최강이 아니지.”
 소동의 엄마 중 한 명, 요희.
 그녀가 태어날 때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던가, 폭발적으로 별무리가 사라졌다던가 하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 그 알려진 능력은 전무하지만 그녀를 아는 극히 적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최강을 자처하곤 한다.
 세상을 제패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날 것을 예감한 아버지가 선술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태내에서 여자로 변환시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환골탈태(換骨奪胎)만 두 번, 반로환동(返老還童)도 두 번을 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어쨌든 엄마만큼 하는 건 무리라니까. 판단 기준이 엄마면 곤란해.”
 “그런가?”
 “그래!”
 “뭐, 알겠어. 아무튼 익힐 수 있게 도와줄게. 사람은 하려고 마음먹으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어!”
 “말도 안 돼!”
 “사람,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니까?”
 소동은 이 일방적인 선언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네네, 알았어. 그런데 그 무공들 다 익히려면 오래 걸리겠지?”
 “십 년 내외엔 끝나게 할게. 괜찮아, 남들은 일 갑자씩 걸려서 얻을 내공을 영약빨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황궁에서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려무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요희가 상큼하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지금까지 이 엄마가 사온 게 다 뭐게요?”
 “비보, 무공 서적 그리고······ 영약!”
 “정답! 이 영약을 다 아들 먹일 거야.”
 “그래도 돼?”
 “바보 황제 명령이니까 괜찮아. 고수를 키우는데 얼마가 들어도 좋다고 했거든. 그걸 사는 김에 눈독 들였던 금강석도 사야지.”
 “뭐야 그거! 사취(詐取)잖아!”
 “그 정도는 괜찮아. 높으신 분들은 다 그렇게 자신의 욕구를 채운다구. 일하면서 의도치 않게 돈이 더 들어간다는 건 세상의 진리란다.”
 “그럴듯하게 포장하면서 결국 하는 건 제 욕심 채우기잖아.”
 “아하하하, 세상은 원래 그렇게 불합리한 법이야.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앙.”
 “아들에게 유혹하지 마시지!”
 요희가 소리 높여 웃었다.
 흑희가 설악 선생을 보낸 후 흑옥루로 들어오다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자, 상아야. 우리들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 생겼어.”
 “뭔가요? 생리가 석 달 정도 멈췄나요?”
 기녀 입장에선 몹시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흑희의 농에 요희가 또 한 번 웃었다.
 “아하하하하! 그것도 문제긴 하겠지. 하지만 더 큰일이야. 우린 우리 바보 아들을 키워야 해. 적어도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설 정도로. 무림삼성쯤은 돼야겠지?”
 흑희가 무척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바보 아들이 삼백 년이나 살 수 있을까요?”
 “아, 그거 무리.”
 소동이 속으로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참았다.
 ‘뭐야, 그 말은. 삼백 년이나 지나서야 지금의 무림삼성쯤 될 거란 말이야?’
 “십 년 안에 원하는 수준까지 높여야 해.”
 “그거 절대로 안 되잖······ 아! 그래서 영약을 사들인 건가요? 과연, 돈 많은 황실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겠네요.”
 흑희는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그런데 언니, 그런 거 사는 김에 저 비취 좀 사 주면 안 되나요? 돈 많이 들어갈 일인데 비취 하나 사는 건 좀 묻어갈 수 있는 일이잖아요.”
 “안 돼. 내 금강석 살 거거든.”
 “에이 그러지 말고. 봐 둔 게 있는데 너무 비싸서 좀 곤란해요. 주 대인에게 사 달라고 말은 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예전 언니가 욕심내던 수박 머리핀 드릴게요.”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면 마음이 흔들리는데. 좋아, 기분이다!”
 “와, 언니 최고!”
 ‘이 여자들 안 되겠어. 어떻게 하지 않으면······.’
 소동이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내심 각오를 굳히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이미 결론을 마쳤다. 은밀한 야합으로 인해 서로를 피가 이어진 자매보다 더욱 신뢰하게 된 두 명은 소동의 어깨와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자, 마음 단단히 먹어. 바보 아들은 바보지만 그래도 가르치는 사람이 천재라서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원하는 수준은 삼백 년 경지의 달성인데, 아들이 그렇게 오래 살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므로, 돈으로 해결하겠어. 아, 돈 많이 드는 아들이네.”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자아, 십 년 후의 미래를 상상하며 힘내자. 네 아버지도 하늘에서 보고 있어.”
 “헉! 우리 아빠 죽었어?!”
 “전혀. 아직 쌩쌩히 살아 있어. 지금쯤이면 되게 심통 맞은 표정 짓고 있을걸.”
 “괜한 사람 죽이지 마! 아, 그런데 아버지라니. 아버지가 누군데? 나 아버지 있었어?”
 흑희와 요희가 소동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폭발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왜 그렇게 웃어! 울지 마!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웃긴 말이었어 그게?”
 “아하하하하하하!”
 “말 안 해 줘, 오호호호!”
 “나중에 말해 줄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
 “아빠를 죽였다 살리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무슨 가치 판단 기준이 그 모양이야?”
 “자아, 아들. 힘내서 열심히 해. 응원하고 있어. 넌 여기서 머물 그릇이 아니니까. 나라는 엄마가 지킬 테니 넌 무림을 돌아다니도록 해. 물론 소설만으로 무림을 아는 네가 얼마나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는 잘 알지만 말이지.”
 “······정말 내 침대 아래 뒤져 본 거야?”
 “물론이지. 넌 자유의 몸이 아냐.”
 “······.”
 소동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실을 들켜 뾰로통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
 소동은 흑옥루에서 일을 하면서 무림이라는 세계를 그린 소설을 보면서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이라는 세계 그 자체를. 엄마들이 안 보는 틈을 타서 그들의 무공을 흉내 낸다고 침대에서 날고 그랬던 것들마저 들켰다는 사실에 그는 좀 우울해졌다. 게다가 그런 그의 심정을 다 알면서도 놀려 대는 요희 덕분에 우울함의 깊이가 더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흑희가 다른 궁희를 소집해 접수계에 불러 모았다.
 황족의 암살을 막아 내는 역할과 동시에 적을 암살하는 일을 맡는 황궁 최강의 비밀 병기.
 외적으로는 기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내적으로는 황제의 명령을 쫓는, 십이지금지 중 하나 흑옥루의 기녀들이 외유로 나간 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모였다. 그 수는 일곱. 다른 한 명은 시시때때로 잠을 자기 때문에 지금은 나오지 않았다.
 문희(文姬) 조설하(曺雪霞)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아들의 무공을 가르치면 보석을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요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와아아아아!”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그리고 궁희가 모이면 국가의 재정이 흔들린다.
 “이건 뭐 십상시도 아니고······.”
 여자들의 환호 속에 묻혀 버린 소동의 중얼거림은 애처롭게만 했다.
 “아니, 십상시보다 더한가? 그네들은 하진이 분기탱천해서 목이라도 베었다지만 엄마들을 목을 벨 이가 있을 리 없으니까.”
 
 
 
 二. 여자의 치맛바람이 고수를 만들다
 
 
 현재 천화(天華)는 흑옥루의 꼭대기 층을 빌려 영약의 기운을 몸 안에 축적하는 중이었다.
 본래 무림의 문파 같으면 문파 내의 최고 기대주를 꼽아 내공심법을 가르친 후 영약을 먹이고 바로 기운을 흡수, 이어 몸속에 남은 잔류 기운을 흡수하는데 몇 달이 걸릴 테지만, 천화는 내공심법 하나 모른 채 밥사발에 담긴 수많은 영약을 퍼먹고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소림의 소환단, 무당의 태청단(太淸丹), 신약당(神藥當)의 최고급 영약에서부터 천년금와(千年金蛙)의 내단이나 영원빙정(永遠氷晶), 만년설삼(萬年雪蔘) 같은 물건까지.
 무림인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영약이었지만 엄마들을 그걸 으깨고 섞어서 묽은 죽처럼 만든 후 천화에게 건넨 것이다. 대번에 무림 명숙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마음에 기묘한 냄새가 나는 걸 참고 한 모금 들이켰다가 흑옥루의 유일한 남성으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엄마들은 싫다고 발악하는 천화를 점혈하고 입에 쑤셔 박았던 것이다.
 물론 흡수 같은 것이 제대로 될 일이 없고 영약의 기운이 안쪽에서 충돌한 덕분에 천화는 심각한 내상을 입기 직전이었다. 몸을 한 바퀴 비틀어 쥐어짜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영약은 천화의 몸을 훑어 냈다.
 본래 체계적으로 먹였다면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고 남은 기운을 축척하는데 이 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테지만,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엄마들은 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영약의 기운이 날아가는 것마저 방치했다.
 천화가 먹은 영약을 최고로 싸게 셈한다 쳐도 무림의 질서를 정립하는 구대문파의 일 년 생활비에 맞먹거나 그 이상의 금액. 그러나 황궁에서는 별로 아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이 년의 시간을 단축시킨 이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황궁, 나라가 움직이는 방식에 익숙한 이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렇게 칠주야.
 독 오른 개구리마냥 온몸이 부어터진 천화를 향해 요희가 말했다.
 “뭐, 영약으로 쌓아 올리는 정도는 이 정도가 최고지. 칠주야 내도록 밥 대신 영약을 퍼먹여 놨더니 세맥이고 어디고 할 데 없이 기운이 꽉꽉 차 있어. 바보 아들은 영약의 기운 덕분에 엄청나게 몸을 혹사해도 몇 달간은 지치지도 않을 거야. 혹시 또 모르지, 피에서도 단맛이 날지도 몰라.”
 “으음, 그래?”
 “상대의 내공을 빼앗는 이들이 본다면 아들은 걸어 다니는 영약 덩어리로 보일걸. ······정말 맛있겠다. 츄릅.”
 “어, 엄마? 뒤에 가서 말이 이상하게 변질됐어!”
 영약을 너무 먹어 온몸의 맥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는 믿지 못할 사태를 접한 천화가 물었다.
 요희는 짓궂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지체(큙큙之體)가 없으니 고생하는구나. 이래서 뼈를 깎는 수련이 필요한 거지. 수고해 아들.”
 “천마지체(天魔之體)나 혈왕지체(血王之體)도 아니고 뭐? 단어만 붙인다고 다 말이 되는지 아나, 이 엄마는!”
 천화는 뭔가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일단 좀 쉬도록 해. 몸이 너무 좋아져서 푹 잠들지도 못할 테지만, 어떻게든 노력해 봐.”
 “어, 엄마도 이런 고통 겪었어?”
 “엄마는 선골이라서 숨만 쉬어도 내공이 쌓이던데?”
 천화가 내뱉는 소리도 커졌다.
 “세상에! 환우제일존(?宇第一尊)도 그 정도는 아니겠다! 그게 말이 돼?”
 천화가 읽던 무림인들의 소설에서 천 년도 이전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무공을 사용했다는 환우제일존을 떠올렸다. 그런 이나 가질 법한 이 환장할 내공에 기겁하자 요희는 픽 하고 웃었다.
 “어마? 환우제일존은 누구니?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제일 강한 사람쯤 되니? 엄마와 비교할 정도니까 말이야.”
 “이 뻔뻔한 말투 좀 보라지!”
 무림인들의 신화인 환우제일존을 겨우 자신과 비교할 만한 녀석쯤으로 판단하다니.
 천화는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가슴에 내려앉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엄마와 비교하면 비교당하는 사람이 불쌍했다. 엄마가 인간과는 다른 종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골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가?”
 “응. 대단하긴 대단하지. 그 체질을 갖춘 상태에서 선술(仙術)을 배우면 등선해서 선인(仙人)이 되어 버리거든.”
 “······소문에만 듣던 대장군도 선골이라던데.”
 “흐응, 그래?”
 요희는 짓궂은 미소로 눈을 반짝거리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 악의 없는 장난기로 가득 찬 모습을 보며 천화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니 뭐 선골이 사실 좀 대단해서 일반인과 비교하긴 그렇지. 특히 엄마는 숨만 들이쉬고 내쉬어도 내공이 늘어나더라.”
 “호흡만 해도 내공이 쌓이는 몸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어.”
 “엄마지체는 원래 그런 법이란다.”
 “에이, 가 버려! 이 괴물 엄마!”
 “우후후, 이제 먹을 영약도 다 떨어졌으니 슬슬 내공을 쌓아 보자구나. 칠주야 내도록 영약 먹느라 고생 많았어.”
 “도움이라니?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나같이 영약을 먹고 이렇게 몸이 개구리처럼 불어 있겠어? 이런 상황에 도움을 줄 사람이 있긴 해?”
 “어머? 여기는 황궁에서 키운 고수밖에 없어.”
 “그건 알아.”
 “후후, 모르는 눈치인데?”
 요희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궁희들은 전부 영약빨이야. 다 아들과 같은 과정을 거쳤어. 아들이 유달리 재능이 없어서 많이 먹어야 했지만.”
 천화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진짜?”
 “그럼, 나라에서 하는 건데 돈을 아까워할 것 같니? 궁희를 키우는 건 국책 사업이야. 국책 사업엔 시간이 중요하지 돈은 아무런 문제가 아냐.”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잖아?”
 “뭐가 심해? 나라와 무림은 돌아가는 생리가 완전 틀려.”
 궁희는 무림인들이 불온한 마음을 먹었을 때를 대비해 만든 최고의 고수들이다. 황족의 생명을 지켜 내는 이들인 것이다. 황족을, 황제를 지키는데 돈을 아까워할 이는 없었다. 한 나라의 주인이 그깟 돈 얼마에 벌벌 떨진 않았다.
 무림에서야 한 문파의 최고 기재를 위해 만년설삼이니 뭐 이런 저런 영약을 덜덜 떨면서 선물하고 문파의 미래를 기약하겠지만 황궁에선 보양식 삼아 먹는다. 천 년의 소림사니 육백 년 무당이니 해도 황궁과는 규모가 다르다.
 “그럼 잠시 후 혈희가 올라올 거야. 지금 녀석이 접대 중이라 부르기가 곤란하네.”
 “접대?”
 “본업은 기녀잖아.”
 “아, 그랬지.”
 천화는 그제야 엄마들의 직업을 떠올리고 가볍게 미소했다.
 천화에게는 열 명의 엄마가 있다.
 물론 피로 맺어진 이는 한 명뿐이지만, 천화는 그녀들 모두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별 같은 것은 두지 않고 모두를 엄마로 불렀다.
 십요궁희.
 무림인들이 황실을 결코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황제의 무력 중 하나.
 기녀 중에는 천화보다 겨우 몇 살 많을 뿐인 소녀도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불과한데도 혈희(血姬)라는 살벌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오 층에 머무는 기녀의 화명은 혈희. 이름은 주란(朱蘭).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한데 그 몸에 품은 내공이 사 갑자에 이른다. 본래는 무림에서 태어난 소녀라던가. 무림의 겁난에 휘말려 부평초처럼 떠돌던 소녀를 보다 못해 춘희(春姬)가 손잡고 데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무공의 정도가 실로 대단하다고. 게다가 그 나이엔 당연히 달릴 내공을 영약으로 해결한, 천화에게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엄마였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해야 할 일? 그게 뭔데.”
 “내공심법 익혀야지.”
 “내공심법! 세상에, 엄마가 그걸 가르쳐 줄 거라고? 뭘 가르쳐 줄 건데? 불문의 신공? 아니면 무당이나, 아니 좀 패도적인 걸로 옛날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의······.”
 “거기까지. 미리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말도 안 돼. 당사자는 알아야지.”
 요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엄마가 이상한 거라도 가르쳐 줄 것 같아? 아니면 벌써 핏줄조차 의심하는 그이의 혈통을 닮아 가는 거니.”
 “그이라니, 그게 누군데.”
 “네 아버지.”
 “그 아버지는 핏줄조차 의심하고 그랬대?”
 요희는 일순 바닥을 바라보면서 말문을 닫았고 천화는 급히 사과했다.
 “아무튼 엄마가 가르쳐 줄 내공심법은 굉장한 거라고? 게다가 익히는데 엄청난 시간이 절약되지. 좋은 내공심법이란 오랫동안 갈고닦아서 천하무적이 되는 게 아니야.”
 “그럼?”
 “빠르고 천하무적이 되는 내공심법이 최고지.”
 기가 막힌 나머지 천화는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런 심법이 있으면 최고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어머, 무예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써 온 거야. 있을 수 없다고? 그럼 옛날의 사람들은 등평도수(登萍渡水)나 금강불괴(金剛不壞) 같은 걸 사용할 수 없었으니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거야?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게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런 내공심법은 있어.”
 “그럼 가르쳐 줘 봐.”
 “후회 안 하지?”
 “그래, 안 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테니 그 훌륭한 무공, 나도 맛 좀 보자.”
 “알았어, 그럼 눈 감아.”
 천화는 주저 없이 눈을 감았다.
 왜 내공심법을 운기할 때나 익힐 때는 다들 눈을 감지 않던가. 책을 읽으면서 매번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내공심법을 전수 받으려고 하니 이해가 된다. 그냥 알아서 눈이 감긴다.
 그런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 통증은 뭔가.
 보통 등 쪽이 따스해지거나 하는 게 아니던가? 아니면 뭔가 내공심법에 도움이 되는 신비한 단어를 읊어 준다거나. 그런데 이건 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뒤통수가 너무 아프다. 상단전이라는 게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뒤통수에 붙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의식이 흐려진다.
 몸이 앞으로 기우는 것 같다. 물론 두꺼비처럼 부풀어 버린 몸 때문에 앞으로 쓰러지는 것 같다가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지만. 뺨이 바닥에 닿는 그 순간이었다.
 “시작해 볼까, 음!”
 요희의 상쾌한 웃음 뒤로 어둠이 깔린다.
 
 의식에서 깨어났을 때는 언제나 시야의 모든 것이 가까워 보인다.
 덕분에 혈희의 얼굴마저도 아주 가까웠다.
 “혈희?”
 혈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혈희가 앞에 있는 걸까. 천화는 눈가를 비비적거리려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떨었다. 생전 느껴 본 적도 없는 통증이라 눈물이 다 났는데 혈희가 그것을 어떻게 용케 알아채고서 손을 내밀어 눈가를 닦았다.
 작은 손이었고 따스한 손이었다.
 지저분하다고 여기지도 않는지 천화의 눈곱까지 떼어 준 혈희가 다시 거리를 조금 벌린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혈희?”
 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기에······.”
 천화는 혈희가 왜 여기에 있고 자신이 의식을 잃은 것 마냥 잠을 자고 있었는지를 떠올리다 순간적으로 헛하고 헛기침을 했다.
 기억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것은 요희가 싸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요희 엄마!”
 요희가 내공심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가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천화가 입에서 불꽃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기세로 고함치다 쿨럭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그의 몸은 탱탱 부어 있는 상태였고 내공을 가졌을 때 느낀다는 미지의 충족감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엄마가 나를 속였구나, 속였어!”
 그러면 그렇지, 빠르게 익히고 최강의 내공을 지니게 해 주는 심법이 있을 리가 있나! 천화가 그리 생각하면서 몸이 빨리 나으면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아 댈 때 혈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속이지 않았어.”
 “어, 응?”
 “안 속였어.”
 “응, 나는 요희 엄마가 속였다고 말한 거야.”
 “그러니까······.”
 혈희가 천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있어, 내공.”
 “······정말?”
 끄덕.
 “그럼 난 이제 무림인이야?”
 혈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무인이 되기 위해서 영약의 기운을 제어하려고 내가 왔어.”
 “정말? 이 몸을 어떻게 제어해 줄 수 있어?”
 끄덕.
 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희는 유달리 말이 적었다.
 숫기가 부족하다고 할까, 나이가 가장 어린데다 소심해서 엄마 중에서는 제일 이야기하기 쉬운 상대였다. 다른 엄마들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바람난 망아지 같은 엄마들 사이에서 혈희는 그야말로 마음속의 샘물이라고 천화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정말 움직일 때마다 아파. 온갖 혈도가 아프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도 따가워.”
 끄덕끄덕.
 천화의 투정 섞인 대답에 혈희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확실히 알아들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곧 모호한 시선으로 천화를 바라보았다. 천화는 표정의 의미를 읽고 잠시 망설였다.
 “꼭 불러야 해?”
 끄덕, 끄덕끄덕.
 무려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혈희에게 있어선 다시없이 확고한 자기주장이었다. 천화는 한숨을 약간 실어 말했다.
 “······도와줘, 엄마.”
 혈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혈희와 대화가 편하긴 하지만, 그 대화를 더욱 정겹게 하기 위해서는 꼭 엄마라는 표현을 붙여 줘야 했다.
 혈희는 매우 어릴 때 고아가 되었는데, 그래도 엄마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눈도 띄지 않았을 아기 시절 엄마의 품속에 있던 기억한 혈희는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우상시 하고 있었고, 그녀를 키우다시피 한 춘희가 워낙 모성애가 넘치다 보니 그게 생활 전반에 파고들었다.
 때문에 혈희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유독 천화를 아꼈고 그에게서 엄마라고 듣기를 원했다.
 혈희가 입술을 달싹여 주의하지 않으면 듣지도 못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공이 충만한 때는 그럭저럭 수월하게 들릴 터이지만, 온몸 가득 퍼진 고통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두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천화는 말을 이해했다.
 “내공심법은 이미 요희 엄마가 가르쳐 줬으니 혈궁(血宮)의 비전무공인 요상심법(療傷心法)을 가르쳐 주겠다고? 아니 언제 내공심법을 가르쳐 줬는데? 난 뒤통수 맞은 기억뿐이야!”
 “하지만 있어.”
 내공이라는 건 정제된 힘이다. 선천지기와도 그렇다고 영물이 지니는 힘도 아니라 만들어 낸 그런 힘. 무림인이 일반인과 다른 이유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잠깐, 엄마. 뭔가 이상한데? 나 내공이 안 느껴지는데?”
 끄덕.
 “조금만 자세히 좀.”
 혈희가 쑥스러워하면서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가르쳐 줬대. 일반적인 내공심법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그런 게 가능해? 영약만 먹는다고 내공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지금 이 몸이 두꺼비처럼 팅팅 부은 것도 영약의 기운을 제어하지 못해서가 아니야? 내공심법은 그 뭐냐, 사용하는 사람이 깨어 있고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일정한 방법에 의해서······”
 혈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천화를 향해서 혈희가 다가와 쓰다듬었다. 등을 어루만지자 뜨거운 열기가 잠시 감도는가 싶더니, 몸속에서 폭발적인 힘이 감돈다. 마치 폭풍이 이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이건 도대체······.”
 “내공, 이 갑자.”
 “세상에, 그 내공을 이렇게 쉽게······. 이게 다 요희 엄마가 해 놓고 간 거야?”
 끄덕.
 “그랬구나, 내가 내공이 있긴 했구나. 요희 엄마가 가르쳐 준 그건 좋은 내공심법이야?”
 끄덕끄덕.
 두 번의 끄덕임에 천화는 만족한 듯 웃었다. 혈희가 다가와 머리를 아프지 않게 쓸어 주었다.
 “그럼 엄마는 요상심법을 가르쳐 줄 거야? 이 기운을 소화하는데 적합한 기술로?”
 끄덕.
 “좋아, 난 무림 소설을 익으면서 늘 그게 궁금했어. 왜 내력이 실린 무공을 맞으면 온몸이 뒤집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까 하고. 그걸 위한 대처 방안도 있지 싶었는데, 이것도 그런 걸 당하면 급히 치유할 수 있는 거지?”
 혈희가 긍정했지만,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혈희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용케 알아들은 천화가 정리하듯 반문했다.
 “맞긴 한데 그 정도의 효율을 가지려면 팔성(八成)에 도달해야 해? 거기까지 도달하기 어려워?”
 끄덕.
 그녀는 그나마 천화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 순수한 영약의 힘이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했다. 타인의 내공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면 육체가 뒤틀리고 장기의 손상도 입을 수 있다고. 혈궁(血宮)에서 비전으로 전해지는 요상심법을 제대로 익혀 팔성에 도달하면 타인의 내공도 자의로 완벽히 해소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근데 혈궁이라니, 단체의 이름치곤 좀 살벌한 것 같은데 혈희 엄마는 혈궁의 비전무공을 어떻게 배운 거야?”
 혈희가 자신의 별명을 허공에 써 보였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허공에 血 자를 그리는 것을 보고서야 천화는 이해했다.
 “혈궁의 무공을 익혀서 혈희였던 거야?”
 끄덕끄덕.
 “아하, 그렇구나. 난 그냥 그 별명들은 옷을 입는 형식에 따라 달라지는 줄 알았어.”
 천화가 오해할 만하게 혈희는 다홍색으로 물든 옷을 주로 입고 있었다.
 혈희가 콩 하고 천화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천화가 멋쩍게 웃자 그녀 또한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녀는 충분한 미녀가 될 거다. 혈희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엄마들 전부는 실로 미모가 뛰어났다. 무림이었다면 중원제일화(中原第一花)라거나 강남제일미녀(江南第一美女) 소리는 쉽게 들을 미모의 여성들이 열이나 모여 있었다.
 문득 천화는 강호로 나가면 이 높아진 안목 덕분에 여자와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왜?”
 천화의 시선이 곤욕스러웠던지 혈희가 주춤거리며 기어들어갈 것 같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 엄마가 너무 예뻐서.”
 혈희가 화들짝 놀라더니 발갛게 된 얼굴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천화의 뒤로 돌아섰다. 천화의 시선을 피할 곳이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
 천화는 온몸이 아픈데도 배를 잡고 웃고 싶어졌다. 그 요희나 사희 엄마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즐겁기까지 했다.
 혈희는 한참 후에야 진정했다. 그동안 천화는 웃다 웃다 방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내 혈희의 손가락이 훑듯이 천화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감각에 어깨를 떨면서 자라목을 하려는 순간, 온몸에 가는 진통이 느껴졌다.
 “미안해.”
 주의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혈희의 목소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참아.”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쥐어 짜이는 듯, 뼈가 조각나는 어마어마한 격통을 느꼈다. 이 고통을 뭐라고 해야 하더라? 소설에서 뭔가 자주 쓰던 표현이 있었는데.
 고통이 뇌리까지 미치는 순간 천화는 간신히 그 단어를 떠올렸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부작용!
 “합죽이.”
 한때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처단당했던 단체 혈궁의 비전술식.
 기공으로 온몸의 근육과 혈관을 쥐어뜯는다. 요상심법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상대를 고문할 수도 있고, 죽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신의 뜻에 달린 기술.
 영약의 기운에 팅팅 부어오른 몸이 정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온몸 가득 품고 있던 영약의 기운이 대부분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몸에 실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힘이었던 데다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화는 가뿐해진 몸 덕분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무 많은 기운이 빠져 나가서 그렇게 느낀 것일 뿐 상당량의 내공이 잠력의 형식이 되어 몸에 깃들어 있었다.
 천화는 이내 실신했다.
 그의 몸을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으며 혈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시련을 이겨 낸 아들을 뒤에서 끌어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품고 혈희는 작지만 확고한 의지를 담아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수고했어, 아들.”
 천화는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혈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응.”
 깜짝 놀라는 혈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천화가 눈을 감았다.
 
 
 
 三. 나라엔 반드시 수 명 이상의 인재가 있다
 
 
 천화가 의식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두 여인의 눈이었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 쌍둥이 여인은 천화가 눈을 뜨자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천화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혈희를 소리 없이 불렀다.
 ‘어, 엄마! 왜 하필 이런 뱀 단지에 나를 놓아두셨어!’
 물론 혈희는 대단한 고수지만 천화의 속마음을 읽을 정도의 신통력은 없고, 또한 여기에 있지도 않아 공염불이 되고야 말았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천화는 순간 몸이 떨렸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사희 엄······.”
 “이제부터 영약으로 실핏줄까지 팅팅 부은 개구리 아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계획, 통칭 ‘배부른 개구리 언제쯤 제정신을 차리나.’가 있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를 해도 모른다.’는 장자(莊子)의 표기에 따라, 바다를 알려주겠어요. 와아, 전부 박수.”
 박수는커녕 한숨 쉬는 이도 한 명 없었지만, 그 말을 한 여성들의 귓가에는 천 명이 일제히 박수를 친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지 지극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복장을 한 여성들 모습을 보며 배부른 개구리 꼴이 되어 있던 천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계획 이름 구려.”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똑같이 생긴 엄마들이 다가와서 천화의 몸을 주물렀다. 주무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것도 잠시, 몸이 시원해지면서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천화가 놀라서 입을 열려 하자 뱅어처럼 가는 손가락이 조심스레 천화의 입술을 덮었다.
 열 명의 궁희 중 한 명, 아니 두 명. 사희의 이름을 공유하는 쌍둥이 엄마들의 미소를 보며 천화는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고 사흘에 걸쳐 벌모세수를 받고 환골탈태를 해 버렸다.
 사흘 후 천화가 의식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두 여인의 눈이었다.
 천화가 눈을 뜨자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천화는 순간 몸이 떨렸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잡아먹진 마. 사희 엄마.”
 두 명의 사희 사영령(謝零玲), 사양령(謝襄玲)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먹고 싶으면 어떡해?”
 “참아, 굶어서 살 빼.”
 “참기 싫으면 어떡해?”
 “그래도 참아.”
 “참는 건 싫은데.”
 “그럼 다른 먹을 걸 찾아 다녀. 귀찮아도 움직여야 먹는 보람이 있는 법이야.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더 맛있는 법이잖아?”
 “흥, 이 무슨 직론이람! 우리 아들 재미없어!”
 “재미없어서 다행이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여인이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져 앉았다.
 천화가 이마에 손을 얹고 기분 좋은 피로감이 남은 몸을 점검했다. 마치 끓는 것처럼 열기를 품은 내공이 단전에 담겨 있었다.
 영약의 기운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이 갑자나 되는 내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화가 만족한 표정을 짓자 쌍둥이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고 짓궂게 웃었다.
 “좋아?”
 “좋아.”
 “그럼 더 좋게 해 줄게! 와아!”
 그녀들이 곧 천화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아, 안 돼! 잡아먹힌다!”
 “잡아먹을 거야, 크릉, 크릉!”
 “우리는 뱀이니까 츄릅 츄릅해야지.”
 “아, 맞아. 그랬지.”
 천화는 결국 이 뱀의 별명을 가진 엄마들에게 잡아먹힌다며 비명을 질러 댔다. 나름 제정신을 차렸을 땐 오폐물에 검게 되어 버린 옷을 벗기고 간단하지만 기능성을 갖춘 옷을 입은 후였다.
 천화는 그제야 민망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옷이 더러우면 더럽다고 말만 하면 되지, 잡아먹히는 줄 알았잖아!”
 “그러라고 한 거야. 까르르.”
 똑같이 생긴 자매 궁희가 입가에 손을 얹고 발랄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곳에 잘 왔어. 우리는 몸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몸을 쓰는 법?”
 “응, 고작해야 벌모세수를 해 주려고 우리들이 여기에 있겠어?”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셋째 언니가 내공심법 환우일기담(?宇一己憺)을 가르쳐 줬잖니. 그리고 막내가 혈궁의 요상심법으로 철혈강체(鐵血强體)로 체질을 변화시켰고.”
 나이순으로 따지면 기녀 중에서 요희는 셋째에 불과했다. 무공의 수위와 실력의 경중을 따져 층을 나누었고 요희가 꼭대기 층을 점거하고 있지만, 궁희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서열이 되었다. 요희는 궁희들 가운데서 세 번째 서열이었다.
 천화가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잠깐만, 사희 엄마. 뭐라고 했어?”
 “응? 뭐가?”
 “내가 배웠다는 내공심법의 이름말이야.”
 “환우제일존의 환우일기담 말이야. 네 몸에 깃들어 있는 내공심법.”
 천화는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서 천장을 응시했다.
 “오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
 사희 사이에서 가벼운 감탄이 일었지만 천화에겐 그게 들리지도 않았다.
 “이 아줌마가 환우제일존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한 거였던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내공심법마저 알고 있다니!”
 으르렁대는 천화를 바라보며 사화가 다시 웃었다.
 “셋째 언니에게 속은 거야?”
 “으으으, 이 바보 엄마. 언젠가 두고 보자.”
 쌍둥이 기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똑같이 생긴 자매가 똑같이 행동하자 눈이 피로해졌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더라.”
 “없더라.”
 “난 달라!”
 “어련하시겠어.”
 “아, 사내들은 크나 작으나 어찌나 아이 같은지. 하긴 우리 천화는 아이 맞지. 거시기도 요만하고.”
 둘이서 마치 운율을 맞추듯 한 토막씩 말을 던지며 놀려 댔다.
 “그보다 철혈강체라는 게 궁금하진 않아?”
 “않아?”
 “설명해 줄 테니 안 궁금해도 되는 거 아냐?”
 천화가 허탈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서 되묻자 두 명의 사희가 어쩔까, 하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 설명해 주세요. 소자 궁금해 죽겠습니다!”
 “응. 철혈강체란 말이지, 혈궁의 비전신법이야. 사람의 체질을 바꿔 놓는 거지. 아, 여기서 말하는 체질이라는 건 외부의 신체, 그러니까 외양을 바꾼다기보다는, 내장이나 혈맥을 강화하는 거야.”
 “단련한다는 개념이 아니라서 바꾼다고 표현했어. 이 상태만으로도 어지간한 내가권에 맞아도 피를 토할망정 죽지는 않겠지. 거기다 놀라운 사실은 내공으로 신체를 단련하면 더더욱 강해진다는 사실!”
 각종 전문용어가 난무해서 잘 알아듣지 못한 천화지만 가까스로 그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좋아진 거야?”
 “응! 무척!”
 “되게 희귀한 대법이야. 무림에서도 이 대법을 익히고 있는 이들은 열이 안 될걸? 시술을 받은 이도 얼마 안 될 테고.”
 “게다가 시전자의 내공이 소모되기 때문에 좀처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회복한다고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평생에 한 번 시술 받기도 힘든 거야.”
 사이좋게 이어지는 사희의 대답에 천화는 새삼 감탄했다.
 자신의 내공이 소모되는 것도 감수하고서 그런 시술을 해 줬다니, 혈희가 수줍어하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천화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엄마들은 뭘 가르쳐 줄 거야? 내공심법을 이미 알게 되었고 체질개선도 되었으니 이제 환우제일존의 무공이라도 가르쳐 줄 거야?”
 “그런 거 우린 몰라.”
 “몰라.”
 “천마(天魔)의 무공이라도 가르쳐 줄래, 그럼?”
 쌍둥이 기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머어머, 여보. 저 말 들었어요? 천마의 무공이래요. 무림은 가 보지도 못한 풋내기 바보가 들은 건 있네요.”
 “하여튼 남자란 말만 앞선 허풍선이라니까요.”
 “거기까지만 해! 잘못했으니까.”
 천화는 자신이 세상 모든 사내 망신을 다 시키는 대죄인이 되었음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
 “농담인거 알면서 이러기야? 그래, 뭐든 가르쳐 주면 배울 준비 되어 있어! 배를 째든 몸을 부수든 마음대로 해!”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두 명의 사희가 사뿐사뿐 걸어와서 천화의 어깨와 팔, 몸의 이곳저곳을 주물러 댔다. 천화가 당황했지만 사희는 평소처럼 귓가에 한숨을 불어 대고 은밀하게 주물러 대지는 않았다.
 “신체의 오른쪽에 무게가 실려 있네. 이래서는 좌우호박권법(左右琥珀拳法)은 무리겠다. 전형적인 오른손잡이야.”
 “그리고 이심분뢰(二心分賴)도 어렵겠어. 뇌의 개화가 늦었어. 우리 아들 많이 바보였네.”
 “발쪽은 괜찮아. 하긴, 별로 걸어 다닐 일이 없어서 버릇이 들지 않았어. 귀검행(鬼劍行) 익힐 수 있겠다.”
 “내공심법이 우월하다 보니까 양극의 무공을 익혀도 괜찮겠네. 빙백장(氷白掌)을 쓰는데 열양공(熱陽功)을 운기 하는 거야. 역시 환우일기담은 최고야. 세상에, 사람의 몸에 내단(內丹)을 만드는 내공심법이라니, 진짜 좀 사기 같긴 해.”
 전설에서나 들어 본 무공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차치하고, 천화는 새삼스레 엄마들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기본적으로 일반인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경험한 결과 이건 뭐 상상을 초월한다.
 좌우호박권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공법.
 그리고 이심분뢰는 제갈세가의 모태가 된 저 와룡(臥龍)이 시간을 아끼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 고안해 낸,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귀검행은 귀검(鬼劍)이라 불리던 절세 고수의 경공. 일반 상궤를 벗어난 형태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하나하나가 비전 아닌 것이 없고 이제는 완전히 잊힌 것도 있었다. 그런 무공들이 태연히 열거되는 것이다.
 천화가 하도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걸 다 안단 말이에요, 엄마들은?”
 쌍둥이 기녀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응으로 끝날 말이냐 그게! 뭐야 도대체 그런 비전을 어디서 익힌 거야!”
 “······어쩌다 보니?”
 천화는 유달리 한숨을 많이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거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잡담은 이쯤하고 다시 하자. 이제부터 우리는 열 가지가 넘는 무공을 서로에게 펼칠 거야.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동하는 걸 고르도록 해.”
 “희한한 방식이네요. 보통은 이런 식으로 가르치진 않잖아요?”
 “우리가 보통 엄마가 아니라서 그래.”
 “그래.”
 까르르 웃고는 엄마들은 천화가 생전 처음 보는 무공들을 느리게 펼쳐 나갔다.
 그녀들이 펼치는 무공 중에는 정종의 무공과 사도의 무공, 심지어는 마교에서 발원한 것으로 알려진 마공 종류도 있었다. 손에 불덩이를 머금은 듯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혈수마공(血手魔功)이라거나 주먹을 마치 딤섬처럼 옹송그려서 휘두르는 탄자권(彈子拳).
 혈수마공은 마교(魔敎)의 비전이며 탄자권은 소림칠십이절예 중 하나다. 그런 것들을 너무도 쉽게 사용하고 있었다.
 단순히 형만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초식을 제대로 된 운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니.
 “도대체 이런 무공들을 어떻게, 왜······.”
 사희 둘이 뱀처럼 웃으며 동시에 대답했다.
 “그야 뱀은 지혜의 열매를 먹었으니까.”
 “하물며 우리는 쌍두사인걸.”
 “무공을 무작정 익히고 그걸 둘이서 분석하는 것이 일이야.”
 “일이야.”
 천화는 뜻밖의 단어를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
 무공을 분석하는 게 무슨 일이 된단 말인가. 무림이라는 세계를 소설로밖에 접해 보지 못한 천화는 생뚱맞은 표현에 당혹했다.
 사희가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붉은 입술 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무림인들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작정하고 쳐들어올 때 초식 이름 같은 걸 외치고 그러진 않잖아. 수없이 대련하고 연구해서 약점을 알아내고 딱 보면 파훼법이 떠오를 정도로 무공을 파헤치는 것. 그것도 십요궁희에게 주어진 일이란다.”
 “그러려면 많은 무공을 익혀야 해. 황궁이니까 무공서를 구하긴 쉽고 역시 나라님이라니까. 돈을 한 번 풀면 거침이 없어.”
 “없어.”
 “세상에! 타인의 무공을 연구하고 파훼하다니, 그런 일도 해요?”
 “응, 이런 걸 무학자라고 해.”
 “좀 큰 문파나 연합에서는 이런 사람들 꼭 있어. 학승(學僧) 중에서도 재능 출중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이런 걸 토론하고 하는걸.”
 둘은 까르르 웃으면서 서로를 붙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천화가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침내 춤을 다 추고난 후에야 두 명의 사희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무튼 엄마들은 무공을 가르쳐 줄 거야.”
 “우리만큼 무리에 박식한 사람도 없으니까 복이 터진 거야.”
 “얘는, 복이 터지긴 어떻게 터지니. 복주머니가 터지지.”
 “그러네? 깔깔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떨기 시작했다. 천화가 한숨 쉬며 물었다.
 “······웃겨?”
 두 명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무 웃겨!”
 
 “지, 지쳤어.”
 엄마들이 무공을 느릿하게 펼치는 것을 보고 가슴에 꽂히는 몇 개의 무공을 발견, 대답했다. 사희는 한 번 보고 묘리까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나름의 경로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천화에게 무공을 펼쳐 보라고 말했고 훌륭한 춤 시위를 보고 난 후 그녀들은 의기양양하게 비웃었다.
 “진짜 재능 없어. 바보 아들.”
 사희는 그렇게 천화를 반쯤 울려 버린 후 재능 없는 이를 위해 서책을 만들어서 주겠다며 묵을 갈았다.
 그리고 완전 희기소침해진 천화는 사희들이 부른 혈희의 손을 잡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혈희가 토닥거리며 천화를 위로했다.
 천화보다야 크지만 다른 엄마들에 비하면, 아니 엄마라고 불릴 연령도 안 되는 혈희의 토닥임은 별로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천화가 한숨 쉬며 말했다.
 “고마워요.”
 끄덕.
 혈희는 몇 번이고 천희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천화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일 층으로 내려왔다. 일 층이자 접수계에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는 흑희가 있었다.
 천화는 내심 흑희도 뭔가 특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추측했다.
 언제나 함께하다 보니 몰랐지만, 엄마들은 뭔가 좀 대단했다.
 궁희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가족이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은 독이 되어 상대의 진짜 힘을 실감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무림 소설을 그렇게 읽었으면서도 비범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먹어 버리겠다!” 면서 사악하게 웃는 사희가 무학자(武學者)라는 것도, 혈희가 혈궁이라는 살벌한 곳에서 자랐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흑희도 평소에 생각했던 일반적인 궁희가 아닐지도 모른다.
 흑희는 일 층의 기녀였는데, 궁희들은 나름의 역할과 무공에 따라서 각자의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흑희는 궁희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데다 셈을 잘한다는 장점 덕분에 접수계까지 도맡고 있었다. 접수계에서 접수 업무를 맡으면서 다른 궁희들의 활동 사항까지 파악해야 하고 외부에서 음식들을 사오며 유행하는 것들을 파악하는 일도 해야 했다. 이 모든 게 그녀의 우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다른 궁희들은 말하는데 천화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흑희가 때때로 허공을 향해 살기 가득한 주먹질을 하면서 엄마들의 이름을 분노에 찬 언성으로 토해 내는 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초췌한 얼굴의 천화를 바라보며 흑희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흘 동안 안 보이던데 영령, 양령 언니들에게 좀 배워 왔어?”
 “벌모세수를 시켜 줬어.”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흑희 엄마가 보기엔 내가 재능이 없어?”
 “응.”
 천화는 한층 더 상처 입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희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천화가 힘없이 다가오자 가슴을 편 후 흑희는 머리부터 끌어안았다.
 “재능이 없다고 상처 받을 생각이야? 천화 너의 재능이 무공의 습득에 있다고 믿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강한 게······.”
 신장이 작고 가슴도 작은 혈희에게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흑희의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천화가 울음기 섞인 소리를 냈다. 흑희는 한 차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천화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영령, 양령 언니들의 장난이 좀 심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거 알아 천화야? 재능이 넘치는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나 있어.”
 천화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흑희는 천화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노래하듯, 시를 읊듯 자상하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성공할까? 그렇지 않아.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의해서, 그리고 의지와 각오에 의해서, 운명과 시련에 의해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꺾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무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사람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고 우리 아들도 그래. 그게 무공을 익히는 재능이 아니었을 뿐이야.”
 흑희는 가슴에서 떼어 냈다.
 천화는 나이에 걸맞게 엉엉 울고 있었다. 코까지 조금 흘렸다. 흑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콧물을 닦아 주었다. 더러운 걸 만진다는 기색 하나 없이.
 “천화에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 무공을 익히는데 재능이 있는 이들보다 그 습득은 느릴지 몰라. 하지만 그들에 비해 불리한 곳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
 “······그렇진 않아.”
 “그럼 재능은 충분하지만 바탕이 받쳐 주지 못하는 이들은 아들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운이 좋다고 하겠지.”
 “그 운을 만든 건?”
 “엄마들······아냐?”
 “아니야.”
 흑희는 자상스럽게 말하고서 천화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엄마들을 이렇게 기쁘게 하고 모든 것을 주고 싶게 만들어 준 우리 아들의 능력이야.”
 그 말은 분명 억지일지도 몰랐다.
 태어난 곳이 부족함 없는 곳이라는, 운이 좋게 작용했다는 말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화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무공을 익히는데 재능이 없다는 말은 아직도 가슴 한곳에 남아 있지만, 그게 울음을 나오게 하지는 않았다.
 “나도 도움이 되는 거야? 능력이 있는 거야?”
 “물론이지.”
 “······씻고 올게.”
 “기다리고 있을게.”
 흑희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른스럽게 웃었다. 그녀도 나이가 결코 많지 않은, 이제 막 어른이 된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다른 어느 엄마의 그것과도 달랐다. 천화는 눈 밑이 빨갛게 된 채로 헤실 하고 웃었다. 그리고 씻으러 종종걸음을 해 사라졌다.
 흑희는 팔짱을 끼고 가볍게 턱짓했다.
 천화와 흑희가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두 명의 궁희가 쭈뼛쭈뼛해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사희였다.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 기분 냈어요, 언니들.”
 “으음, 미안해. 너무 기분을 냈나 봐.”
 “우리들의 특기를 사랑하는 천화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마음에 그만······.”
 뭔가 변명을 하려던 사희는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화는 사내아이란 말이에요. 당연히 그런 것에 상처 받죠. 여자아이와는 달라요.”
 “그래, 그런 것 같네. 아무튼 잘 처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들도 잘 부탁해.”
 “네네, 나쁘게 말하지 않을게요. 대신 언니들이 가진 보물 중 하나를 줘야겠어요.”
 사영령, 사양령이 움찔했다. 두 명의 사희는 뭔가 배신을 당한 얼굴로 흑희를 바라보았다. 흑희가 주도권을 잡은 장군의 그것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싫어요?”
 “······천벌 받을 거야.”
 “후회하게 해 주겠어.”
 “흐응, 그거야 언니들 소관이고. 그래서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사희 두 명은 치를 떨다가 이내 서로의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떼어 내어 흑희에게 던졌다. 상승의 무리를 섞어 던진 귀걸이였지만 흑희는 쉽게 잡아냈다. 그녀는 곧 자신이 달고 있는 귀걸이를 떼어 내고 우윳빛을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를 달고 싱긋 웃었다.
 “두고 봐.”
 “두고 보자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 없던데요.”
 사희가 이를 갈면서 올라갔다.
 조금 늦게 천화가 물기 젖은 얼굴로 걸어왔다.
 “응? 흑희 엄마, 왜 그런 표정이야?”
 “엄마 뭔가 달라진 거 없니?”
 “사희 엄마가 한 짝씩 달고 있는 것과 같은 귀걸이를 걸었네?”
 “······그걸 아는구나?”
 “응, 그런 걸 모르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자랐잖아, 난.”
 흑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나?”
 “그랬지. 다들 뭔가 달라진 거 없니 하고 물었을 때 모르겠어 하면 밥을 안 주잖아.”
 “······그랬나?”
 “응.”
 그 이상 확고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천화였다.
 “그런데 뭐 나 봐 주는 거 순번이라도 정해 둔 거야?”
 공부에 앞서 천화가 물었다.
 “순번이라니?”
 “이러다 엄마들에게 전부 하나씩 배울 것 같아서 말이야.”
 “응, 아마도 그렇게 될 예정인데?”
 “그래도 돼?”
 “뭐가 그래도 돼?”
 흑희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지 모호한 얼굴로 반문했다. 천화는 말하려다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졌다. 뭔가 부조리함을 느꼈는데 그걸 말로 토해 낼 수가 없었다.
 “아니, 뭐 됐어. 그런데 흑희 엄마는 쓰던 향수를 바꿨나 봐?”
 아직 전해지지 않았지만 최고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실권자들은 향을 정제해 액체에 담아 살짝 뿌리는 향수를 애용했다. 향낭(香囊)을 서역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물건을 가지고 온 상인은 같은 무게의 금과 바꿔 갔지만 궁희 누구도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천화도 자신이 쓰는 향수가 있었다.
 흑옥루의 궁희들은 공교롭게도 좋아하는 향이 전부 달라 각기 다른 향수를 샀다. 그게 또 흑옥루를 이용하는 손님들의 흥미를 자극해서, 그녀들만의 특징이 되었다던가.
 “응, 무슨 향기인지 알겠어?”
 “이건 뭐지? 익숙한데.”
 “매화향기야. 주의력을 좀 키워야겠네, 천화는.”
 “겨우 그 정도에 주의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야?”
 “물론, 소설을 보면 그냥 칼 쓰고 다 때려잡고 되도 않는 정의감으로 사파를 싹 쓸어버리고 산적들 다 목을 베어 버리는 녀석들이 많지만 사실 다 쓰레기야. 능력 있는 남자는 이런 걸 배워야 한단다.”
 “하지만 남자는 쾌도난마(快刀亂麻)여야지!”
 “흐응, 그래?”
 “당연하지!”
 “그런 말을 하면 남자를 그만두게 만들어 준다?”
 흑희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뭔가 손아귀 안에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천화는 오금이 저려 무릎을 오므리고 덜덜 떨었다. 천화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탓인지 흑희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화제가 바뀌었다.
 “아참, 이 말을 안 했구나. 아들은 무림에서 최고의 강자가 되어도 검황(劍皇)이니 지존(至尊), 패왕(覇王) 이딴 별호는 쓰면 안 된다?”
 “왜!”
 한때 소설에 심취해 자신이 무림에 나가면 파천검황지존패왕이라는 별호를 지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반문했다.
 흑희는 매우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런 별호를 가진 놈들 다 재수 없어.”
 “······뭐?”
 “게다가 요즘 시대에 칼부림 잘한다고 되는 시대니? 천 년 전에 태어나서 부족 생활이나 하라지. 하여튼, 태어날 시기를 잘못 고른 녀석들이 꼭 그런 표현을 쓴단 말이야. 시대가 어느 시댄데 말이야.”
 “그, 그럼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흑희는 단호하게 손가락 두 개의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돈의 시대지.”
 “뭐야 그게!”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이게 진리야. 무림 맹주라고 옷 안 입고 잠 안 자고 밥 안 먹니? 다 돈이 들어가는 거야. 싸움 못해도 돈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싸움 잘한다고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요즘 세상이 상인을 좀 비천하게 대하긴 하는데 그러면 못써요. 나중에 크게 경을 칠거야.”
 “그래서 엄마는 돈 버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접수계를 맡고 있으니까?”
 흑희는 으음 하고 침음했다.
 “사실은 엄마도 그걸 가르치고 싶었어. 그런데 강호에 나가도 삶이 궁핍하지 않게 금붙이가 따로 지원될 거라고 하더라고.”
 “만세!”
 아무리 그래도 수전노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천화가 만세를 불렀다.
 흑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엄마도 다른 도움될 걸 가르쳐야 하지 않겠니?”
 “그럼 흑희 엄마는 뭘 가르쳐 줄 건데?”
 기다렸다는 듯 흑희가 대답했다.
 “공부!”
 “으악, 공부라니!”
 천화가 불퉁거리자 그제야 흑희는 픽 웃고는 옷자락을 크게 펼쳤다. 코를 살짝 울리는 매화향기. 흑희가 천화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정보야. 이제부터 엄마가 가르쳐 줄 건 무림의 정세와 각 문파의 위치,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들과 강호의 이름 높은 고수들에 관련된 내용을 가르쳐 줄 거야.”
 “그런 공부라면 환영이야.”
 “그렇지?”
 흑희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고서 천화를 떼어 놓았다. 그녀는 다른 언니들이 천화를 가르치는 동안 모아 둔 강호의 이야기들을 모아 둔 책을 펼쳐들 었다.
 “그리고 강호에서 행동할 때 아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교육할 거야.”
 “즉 정도인의 바른 자세라거나, 적을 만났을 때 싸우는 태도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아니, 헛바람 안 들고 바보 같은 별호 안 짓도록 머리에 찬물을 씌워 줄 거야.”
 “너무 냉정한 말인데? 흑희 엄마는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헛바람만 잔뜩 들어 있을 것 같아?”
 흑희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들, 무림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
 화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화는 그런 것을 말해서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천화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그렇게 대뜸 물으면 안 되지. 질문이었으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으음, 아무래도 내공과 익히고 있는 무공의 숙련일까?”
 “아니야.”
 천화도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다. 아까 들었던 말 때문에 흑희가 중요하게 두는 비중이 무공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으니까.
 “그럼 인맥?”
 “뭐, 인맥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네 번째쯤 되겠네. 더 생각해 보면 없어?”
 “으으음······. 그럼 돈일까?”
 “안타까워라. 그건 두 번째야.”
 돈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것 같아 설마 해서 말해 봤지만 아니었다. 천화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럼 뭐야?”
 “사건을 맞서느냐 피하느냐의 선택. 상대를 앞에 둔 채 이야기를 할 때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그리고 사람의 심성을 알 수 있는 관상. 아들이 무림에서 살아가면서 겪을 모든 사건과 사고의 감별. 그리고 선택이 기로에 섰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
 “그런 게 가능해?”
 “물론이지! 나만 믿어.”
 흑희가 가슴을 펴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천화는 그 점이 못 미더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다른 엄마보다 흑희가 말을 좀 조리 있게 한다고 생각했더니 그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솜씨는 빼어난 지식이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금을 잘 탄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시대의 금을 타는 탄주법 따위를 설명해 가며 말하니 훨씬 납득이 갔다.
 황궁에 들어오는 온갖 소식과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들을 조합해 말하는 다양한 지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
 그런 법칙이 지켜지고 있다곤 하지만, 어쨌든 무림은 세력을 가지고 무력을 휘두르는 집단이다. 아닌 척해도 황궁은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고 있었고 그 정보를 흑희가 차곡차곡 모아 두고 나름의 생각을 곁들여 정리한 것이다.
 흑희는 사희와 달리 무공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무공이 약해서는 아니고, 그저 엄마들끼리의 역할 분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법을 말할 때 흑희는 사희처럼 경로를 가르쳐 주고 어떤 식으로 무공배분을 해야 하는지 대신, 검법의 이름이 그렇게 된 이유나 사용된 예, 그리고 현재 그 검법을 누가 익히느냐 등등을 알려 주었다.
 흑희는 정말 소설에서 말하는 만박자(萬博者)라도 되는 것 같았다.
 흑희가 가르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노숙을 할 때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대를 찾는 방법이나 물이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방법, 주변을 살피고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 받는 것까지, 무척이나 많은 걸 배웠다. 어디 메마른 사막 지대로 가는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다 배워야 하나 고민하던 차, 흑희는 이젠 여러 방파에서 사용하는 암호문을 건네어 천화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이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 공부는 조금만 하자.”
 “와!”
 암호해독에 골머리를 썩이던 천화는 흑희가 다시 전해 주는 이야기에 환호했다.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운 천화는 시간 가는 것을 잊었다. 흑희에게 무림의 이야기를 듣고 장난기가 조금 줄어든 사희와 함께 무공을 익히며, 그러다가 무리하면 혈희가 와서는 요상심법으로 몸을 풀어 주는 매일.
 그게 익숙해졌다 싶을 즈음 다른 엄마가 천화를 소환했다.
 
 
 
 四. 고수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돈만 있으면 될 것도 같다 (1)
 
 
 요희보다 나이 상으로 앞선 두 명의 엄마 중 하나, 구희(究姬).
 궁희 가운데서 최강의 힘을 가진 요희 다음으로 강한 무위를 갖춘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도저히 기녀라고 생각되지 않는 강렬한 인상이 있었다.
 이름은 단리서라(端里庶羅).
 이름으로 알 수 있다시피 서역인, 아니 북해 건너 살고 있는 백인이었다.
 “와, 구희 엄마! 너무 오랜만이에요.”
 “음.”
 구희는 아리따운 기녀들 가운데서 외형적으로 가장 특이했다.
 그녀는 화려하게 굽이치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피부가 놀랄 만큼 하얀데다 키도 훤칠했다. 눈동자는 맑은 날의 하늘을 닮은 푸른색. 왜 저 서역 너머의 사람이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히 중원인이 아니었다. 한때 천화는 그녀가 안기만 하면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리서라가 몹시 속상해했다고.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날 일. 천화가 와, 소리를 내며 구희에게 달려들었다.
 구희가 천화를 받아서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구희는 궁희 가운데서 황족 수호의 임무를 거의 하지 않는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유달리 눈에 띄는 외모 탓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로는 서역과의 교역 덕분에 대단히 바쁜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궁희가 만들어진지는 이 나라가 개국된 직후였다고 한다.
 무로 일어서 대륙을 정벌하고 그 와중에 숱한 배신과 반역이 있었고 그것은 나라의 주인이 된 이에게 있어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주인은 목숨이 위협당할 때도 있었고 정적을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기에 궁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사병 집단으로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병은 그 외에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궁희는 다른 어떤 황궁의 집단과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덕분에 지금은 그 형태도 꽤나 괴이하게 변해서 황족 수호의 임무를 맡지 않는 구희 단리서라도 궁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단리서라가 왜 궁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나설 때는 사신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흑옥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화도 물경 수개월 만에 보았다. 무공을 수련한 지도 벌써 수개월이지만 단리서라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 당시 요희가 흑옥루의 모든 기녀를 모았을 때 빠진 세 명의 궁희 중 한 명이었다.
 “피곤하죠? 주물러 줬으면 좋겠죠?”
 “응.”
 천화가 잽싸게 달려와 구희의 어깨를 주물렀다.
 말로만 듣던 기린(麒麟)의 목이 이러할까.
 가늘고 긴 목에서 뻗어 내려온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곡선.
 이것이야말로 미인의 어깨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 만져 보면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예전에야 팔 힘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내공을 가진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음?”
 구희가 어깨를 주무르는 천화의 악력을 느끼고 짐짓 의문의 소리를 냈다.
 “내공?”
 “아, 엄마는 몰랐었구나. 응, 내공 가지고 있어요.”
 구희는 뒤에서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던 천화를 앞으로 오게 해 손목의 맥을 짚고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사 갑자?”
 “허, 그걸 알 수 있어요?”
 “응.”
 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중원인 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어는 모국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발음상의 문제 덕분에 구희는 특히 말수가 줄었다. 숫기가 부족해 말을 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혈희와는 또 다른 특징이었다.
 구희는 말수가 특히 적고 과묵하게 변했다.
 그게 또 그녀의 매력을 더해서 흑옥루를 드나들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하얀 공주가 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게 만들었다. 어디에선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저 북해를 넘어 나오는 나라의 공주가 볼모로 잡혀와 흑옥루에 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응? 그래서라니 뭐가요?”
 “무기, 다른 아우들.”
 “무기라뇨?”
 “가능할 것······ 같아.”
 천화는 구희의 단락적인 말을 이해했다.
 “아, 그러니까 다른 엄마들이 무기를 가르쳐 주라고 해서 이상했는데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라고 말하는 거죠?”
 “응.”
 구희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견.”
 “에헤헤.”
 구희의 풍만한 가슴에 안겨서 채취나 다름없게 된 박하 향을 맡으며 웃었다. 그녀에게는 요희 이하의 엄마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온화함과 근엄함, 그리고 엄마로서의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천화도 구희를 상대로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해 왔다.
 “그럼 구희 엄마가 무기를 가르쳐 줄 거예요?”
 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를?”
 “무슨 무기를 쓸 거냐고요? 여러 개 쓰면 안 되나? 전희(戰姬) 엄마처럼 십팔반무예를 다 쓰고 무기 엄청 많이 짊어지고 싶은데요.”
 전희 악자연(岳紫燕). 궁희 중에서 세 번째로 무공이 강하며, 네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다. 현재는 흑옥루에 없다. 외부로 늘 나가 있는 두 명의 궁희가 바로 구희 단리서라와 전희 악자연이었다.
 “음······.”
 그 신음 뒤에는 ‘전희처럼 되고 싶다고, 네가?’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천화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구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
 천화는 잠깐 울컥했지만 곧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수개월 전이라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혹은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천화는 이제 알고 있었다. 무리(武理)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재능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인정한 이후의 천화는 그런 것에 다소 실망할지언정 가슴의 멍에가 되어 속마음을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구희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이었다가 말끔히 털고 방긋 웃는 천화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후후, 아들이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변했어.”
 “좋은 방향이겠죠?”
 “응.”
 구희야 나라일 때문에 사절단에 합세한다고 치면 전희는 그 별명 그대로 전장에서 장군들을 암살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는 했다. 구희 다음으로 강한, 궁희 중 세 번째 무공 서열의 전희를 따라가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단번에 확답이라니, 좀 너무해요.”
 그래도 부우 하고 입술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
 구희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천화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은 다른 엄마의 그것과는 달리 몹시 딱딱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천화는 금방 기분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말을 알고 있으니까. 비록 말을 잘하지 못하고 표정도 별로 없는 구희라고 해도, 그를 좋아해 주며 몹시 사랑해 주는 엄마인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진다.
 천화도 구희를 좋아했다.
 “그럼 뭘 가르쳐 줄 거예요?”
 “뭐든.”
 “칼? 창? 뭐 이런 거 다 되는 거예요?”
 “응.”
 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엄마들에게 이런 거 다 배워도 되나?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지는데.”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배우는 건 배우는 건데, 엄마들의 무공 수준이나 배우는 것이 너무 고급이 아닌지 우려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에 구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화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좀 자기밖에 모르는 녀석이라면 날름 영약 처먹고 각종 무공이나 섭렵할 것을, 흑옥루에서 금이야 옥이야 길러 놓으니 이렇게 자기에게 주워진 특권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가.
 살며시 천화를 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결과만 내.”
 “······.”
 그 결과를 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투정이었는데 구희 엄마는 쌈빡하게 그리 정리해 버리고 말았다.
 “과연 구희 엄마. 위로를 진짜 한 문장으로 끝맺어 버릴 줄이야.”
 천화가 허탈한 웃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어쨌든 잘 배울게요.”
 “믿어.”
 “저, 혹시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신해.”
 천화는 말만 앞세운 이들을 몹시 많이 알고 있었고 말뿐인 행동을 할 때의 표정 변화를 잘 알았다. 그가 사는 장소가 장소다 보니 국가를 지탱하는 관료들을 무수히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희에게선 그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결론은 두 가지뿐이다. 표정 변화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가 거짓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정말 질문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일 때.
 천화는 굳이 답을 묻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일 아침 이 방에.”
 “내일 아침 일찍이요?”
 “응.”
 구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파란 눈동자로 천화를 바라보며 가볍게 긍정했다.
 “무기 구하자.”
 다음 날 천화는 잔뜩 기대하여 구희의 층계를 밟아 올랐다.
 밤을 새다시피 하며 기대해 버렸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서 깨어나기 전에도 신검이니 보검이니 하는 걸 잔뜩 쥐는 꿈도 꿨다.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는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이 잔뜩 뭔가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달칵달칵 거리는 소리에 의문을 느끼며 올라서려 할 때 두 명의 사희가 잠복해 있다가 천화를 기습했다.
 한 명은 천화의 입을 막고 다른 한 명은 횡경막을 쳐서 반쯤 기절시켰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걸음을 옮겨 사희가 머무는 사 층에 도착.
 천화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바라보자 두 명의 사희가 귀염성 있게 웃으면서 화를 풀려 애썼다.
 지는 건 결국 천화였다. 엄마들 중에서 특히 유쾌하고 장난기 많은 사희의 애교 넘치는 행동은 소동에 불과한 천화조차도 웃게 만들었으니까.
 한차례 웃고 나자 화를 내기도 마뜩잖은 천화가 졌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뭐야 결국? 사희 엄마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납치한 거야?”
 “시종들이 방금 무기를 나르는 것 봤지?”
 “보따리를 짊어지고 움직이긴 하던데 그게 무기였어?”
 “응, 전부 검이야.”
 “검!”
 천화의 눈이 반짝였다.
 “검 좋지! 나도 반드시 검을 쓰고 싶었어!”
 “그건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알지.”
 천화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사희였던 것이다. 사희는 다른 도법이나 편법, 창법 따위는 손도 대지 않고 검법에만 골몰하던 천화를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검이 좋다던가. 무슨 말을 해도 검을 들고 싶다는 말에 사희 두 명은 몹시 골몰해서 오래전 실전된 무공을 꺼내었고 천화에게 가르쳤었다.
 “아무튼 우리 이야기를 들어. 단리 언니가 황궁무고까지 동원해서 무기를 꺼내고 있어.”
 “우리가 넌지시 이야기를 흘려서 검만 가져오게 했지.”
 “그러니까 저기는 검 천지일 거란 말이야.”
 “검이 이렇게 많아.”
 이렇게 하고 가슴 앞에서 큰 원을 그려 보이는 사희를 바라보며 천화는 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 겨우 그거 말해 주려고 날 이 꼴로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있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단리 언니는 널 위해서 기껏 그런 일까지 벌였어. 그리고 저 많은 검 중에서 하나를 뽑아가지라고 할 거야.”
 “뭐 검의 좋고 나쁜 것 따위는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명검과 마검, 보검 따위의 특징은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거거든. 하물며 그렇게 많은 검인데 특징적인 것들을 골라 보면 평범한 건 고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중요한 문제야. 황궁무고에는 네가 익힌 무공과 짝을 이루는 검이 있어. 아마도 틀림없이.”
 천화의 눈이 커졌다.
 “금고검(金古劍)이?”
 “응, 금포마인(錦袍魔人)이 사용하던 검이 있어. 유래를 살펴보면 틀림없겠지.”
 천화가 무림에 나설 때를 대비하여 익힌 대외적인 무공, 그것을 사용했던 전대의 기인인 금포마인. 물경 이백 년 전의 고수였고 후계자도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로, 사희는 용케 그 무공을 알고 있었다. 천화는 각종 무공을 배웠지만 금포마인의 무공이 자신과 상성이 잘 맞는데다 취향이라는 사실에 열성적으로 훈련했다.
 덕분에 화후는 무려 삼성에 머물러 있는 상태.
 “금포마인의 무공은 범재(凡才)라고 해도 쉽게 익힐 수 있는 상승무공이야. 기반을 만드는 과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익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 그러면서도 위력도 있고 확실한 전과도 올린 바 있어. 그런 무공의 대부분은 무기에 구애 받지 않지.”
 “응, 사희 엄마들은 그렇게 말했었어.”
 “하지만 기왕이면 전용으로 만들어진 검이 더 좋지 않을까?”
 천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 년 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에 온갖 거만을 떨고 도도하게 굴던 고수가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는 지금까지도 불명이었지만 무림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완성에 가까운 고수였다고 한다. 번쩍번쩍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포를 입고 온갖 화려한 차림새에, 반지도 일곱 개나 끼고 있었다는 괴상한 남자. 그럼에도 인기는 많았는데 얼굴이 매우 준수하며 돈이 많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떤 전장, 혹은 거상의 하나뿐인 자식인가 하는 소문도 돌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고수도 결국 시비를 피할 수는 없었는데, 그때 진정한 사내의 무공을 보며 관중들은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기인적인 행태에 사람들은 괴인(怪人)으로 분류, 당시에 혼자서 강호를 떠돌며 괴상한 짓을 해 대던 세 명과 엮어 사대마인(四大魔人)이라고 칭했다.
 이백 년 전의 무림은 조금이라도 성격이 이상하고 도의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마교의 후예 따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는지, 나쁜 짓은 거의 하지 않던 그는 마인이라는 별호를 달았다. 사대마인의 실질적인 수위를 차지했던 이에 비하면 악행이랄 것조차 없었는데.
 하지만 금포마인은 마인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뭐가 어째? 난 나의 길을 간다, 이런 말을 던지고 강호를 주유, 각종 기행을 일으켰다고, 그리고 나타났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금포마인이 사용했던 검이 바로 금고검.
 황금빛으로 도야된 화려 무쌍한 보검이었다.
 “금고검이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있어. 그러니까 그 검을 쥐어.”
 “괜히 날 이렇게 거칠게 멈춰 세운 게 아니었구나. 정말 화낼 뻔했어.”
 천화는 따스한 시선으로 사희들을 바라보았다. 심심해서, 혹은 장난삼아서, 대단찮은 이유로 입을 막고 횡경막을 쳤으면 뭔가 큰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런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 천화의 말에 사희 두 명은 손바닥에 난 땀을 번개 같은 속도로 닦아 냈다.
 “물론이지!”
 “우리는 장난을 잘 치지만 진지할 땐 무척 진지해.”
 “그래서 금고검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어?”
 사희가 까르르 웃으며 동시에 말했다.
 “가장 사치스런 모양!”
 그건 금포마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당시 최고로 화려한 차림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던, 그런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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