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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 (1화)

2017.06.15 조회 3,390 추천 23


 생존 1권 (1화)
 part 0. 눈을 뜨고
 
 
 “아······.”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천장이었다. 반쯤 몽롱한 상태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굉장히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 기분. 그래서인지 눈꺼풀이 보통 때보다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어쩐지 몸도 욱신거리고. 아니, 욱신거린다기보다 저려 온다는 것이 맞았다.
 마치 급격한 운동을 한 후 느끼는 근육통 같은 감각. 하지만 어제 운동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기에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잠을 잘못 잤나? 잠버릇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몸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더 누워 있을까 생각했으나 오늘은 아침 9시에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아까 눈을 떴을 때 어둑어둑했으니 늦은 시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장소가 1시간 거리니 빨리 준비하는 편이 좋았다.
 그는 일어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눈가를 비볐다. 눈을 비빈 후에도 여전히 어둑한 것이,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대인 것 같았다. 불을 켤 필요성을 느낀 그는 바로 근처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어?”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형광등이 나갔나? 별로 오래 쓴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 정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불을 켜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서 물이라도 한 잔 먹을 생각이었다. 어둡긴 해도 걷는 것에 이상은 없었으니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겨우 다섯 걸음이나 갔을까, 갑자기 부스럭 소리와 함께 발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뭐지?’
 의아함에 들어 보니, 먼지와 이상한 실 같은 것이 엉켜 있는 봉투였다. 안을 만져 보니 대충 라면 봉지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거 이곳에 둔 적 없는데. 게다가 이런 먼지라니.’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집안일을 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바쁜 아버지나 4살이나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이 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되었다. 요리, 청소와 같은 다른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또래보다는 훨씬 깨끗한 성격이었고, 결코 방 안에 먼지가 쌓일 정도의 물건을 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상했다.
 자산의 방에 이런 먼지투성이의 낯선 물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놓은 것이 아니라면 가족 중 누군가가 그랬겠지. 그럼 왜? 게다가 이 먼지 양은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냐. 하지만 내가 그렇게 잤었을 리가 없는데··· 어제 그렇게 피곤한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 시간이면 가족 중 아무나 깨우러 왔을 텐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단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이다. 근데 어제와 방의 상태가 너무 달랐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다 좋아. 그런 것은 전부 제쳐 두고 가족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물건을 놓은··· 내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엄마? 엄마! 아빠! 아라! 아라야! 거기 있어?! 대답해!”
 쾅쾅! 쾅!
 문을 두들기면서 소리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항의를 하는 이웃의 소리도 없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아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소리, 밖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자동차의 소리··· 그 어떤 소리도. 단순히 새벽이라서?
 정말로 그런 걸까?
 “읏!”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문을 두들겨서 그런지 어딘가를 잘못 때린 것 같다. 무언가에 긁힌 듯 따끔거리는 손날을 거두면서도 그 긁힌 무언가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에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충격을 받았다.
 “못······.”
 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못이 박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나오지 못하게, 혹은 밖에 있는 ‘무언가’가 이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리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누가 자신의 방에 못질을 했단 말인가? 왜, 어째서?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애써 생각했다.
 설마 강도라도 들어와서···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묶어 놓거나 죽이는 것이 훨씬 편한 방법인데 쓸데없이 방에 못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이유로 살인마 같은 다른 범죄자도 아닐 것이고 정신병이 있는 미친놈이 했다고 하기에는 못질이 너무 꼼꼼했다.
 이 정도로 못질을 많이 했다면 소리도 요란했을 텐데 왜 자고 있던 자신이 깨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도대체 누가 못질을?’
 그는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방문을 쳐다보았다. 어둑한 방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빼곡한 못들이 보였다. 그런데 문득, 문 맨 밑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종이?’
 먼지에 덮여 있고 가느다란 식물 줄기가 살짝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종이였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종이를 들었다. 종이에는 급히 휘갈겨 쓴 것 같은 글씨체로 간단히 쓰여 있었다.
 
 조심해. 아무도 믿지 마.
 
 동생의 글씨체였다.
 ‘조심해······? 믿지 말라니, 무엇을?’
 그의 동생이 적은 종이로 확실해졌다. 못질을 한 존재는 틀림없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럼 왜? 무엇 때문에? 조심하라고 한 것을 보니 무언가 위험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위급 상황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왜 더더욱 그를 깨우지 않았을까? 위급 상황이 일어났다면 깨워서 같이 도망치는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아? 위급 상황이어서 한 행동이라기에는 이상하다. 아들 방에 못질을 하고 문 밑에 조심하라고― 아무도 믿지 말라는 쪽지를 넣는 위급 상황이란 뭐지? 화재? 지진? 강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릿속이 지독히도 혼란스럽다. 단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주변의 상황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창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밖을 제대로 확인해 보려는 의도였지만 창문이 있던 곳에 칭칭 붙여진 두꺼운 청 테이프의 모습이 그를 멈추게 했다. 창문조차 막혀 있었다. 안에서 테이프로 꼼꼼하게 막은 창문의 모습에 그의 안색이 더 창백하게 변했다.
 문도 못질되어 있고 창문도 테이프로 막혀졌다. 아마 저 테이프는 가족들이 못질하기 전에 한 거겠지. 하지만 왜? 왜? 도대체 왜!
 그는 어느새부터인가 가늘게 떨리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먼지투성이의 방, 문의 못질, 창문의 테이프, 정전 그리고 그가 오직 내는 소리만 존재하는 짙은 침묵··· 모든 것들이 그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었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꿈이야. 이건 그냥 악몽이야.
 그러나 문의 못에 긁힌 손에서 흘러내리는 약간의 피와 고통이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꿈에서 아플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는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 흔들리는 눈동자로 눈을 떴다. 외면하고 눈을 감아 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따끔거리는 상처의 호소를 무시하고 그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진정하자. 침착해······.’
 분명 상황은 무언가 이상하고 불길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가족들이 자신을 깨우지 않고 이렇게 못질을 하고 가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를 버린 것은 아니다.
 쪽지까지 남기지 않았는가. 또 아까 봉지에 들어 있던 것은 라면 봉지였다. 즉, 먹을 것을 놔두고 간 것이다. 그가 깨어나면 살아갈 수 있도록. 음식을 챙겨 줄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서도 쪽지가 너무 짧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유가 있겠지.
 어쨌거나 그의 동생 특유의 글씨체는 분명했다.
 그리고 애초에 방문만 못질해서 나가는 것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창문이 테이프로 단단히 막혀 있기는 했지만 테이프를 뜯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테이프를 뜯고 창문을 연다고 해도 3층이나 되는 높이라 조금 껄끄럽지만, 조심스럽게 기어 내려가면 된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이 방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든 다시 가족과 연락하는 것. 그것이 현재 자신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상한 일투성이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그거다.
 명확히 해야 할 일을 정해서일까 그는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허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마 최소 하루, 이틀은 잠만 잤다.
 최소 그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물건들에 먼지가 이렇게나 쌓여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실 겨우 배가 조금 고픈 정도로 멀쩡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도 가족을 만나게 되면 병원 검사든 뭐든 해서 알 수 있을 터다.
 라면이라도 부셔 먹을 생각으로 그는 아까 들었던 라면 봉지를 꺼냈다. 그러다가 곧 이런 먼지투성이 방 안에서 먹다가는 라면과 같이 먼지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의 테이프를 뜯어 열고 환기를 시킬까 싶었으나 관뒀다.
 가족들이 테이프와 못으로 창문과 문을 막은 것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일단 상황 자체가 뭔가 이상하니 최대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미 늦었겠지만.
 그래도 일단 최소한의 정리는 하고 먹자는 생각에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켰다. 건전지 형식이라서 그런지 형광등과는 달리 불이 들어왔다. 환한 불빛이 방을 비췄다.
 그는 인조적인 빛으로 인해 펼쳐진 방 안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와 그 근처를 제외하고 전부 얇고 가는 덩굴 식물 같은 것으로 조금씩 덮여 있었다. 회색 먼지로 덮여 잘 알아볼 수 없는 흰 봉투들과 밝은 빛깔의 연녹색의 식물이 얽혀 있는 모습은 묘하게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아름다움보다는 전보다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먼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식물이라니······.’
 그의 가족은 3층으로 된 빌라에 살고 있다. 근데 가장 높은 3층에 있는 자기 방에 식물이 자랄 정도라면··· 다른 층은? 다른 곳은 어떻지?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와 그 주변은 먼지가 하나도 없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누군가 와서 그곳만 청소하고 갔을 리가 없다.
 ‘그럼 정말, 이건 도대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새로운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상황만 일어나기에 도리어 현실감이 떨어져 침착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를 하나 꺼내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힘을 주어 라면을 잘게 부순 후 하나씩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문득 책상에 불을 켜 둔 스탠드 옆의 전자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자동으로 유리 안에 있는 종이의 숫자가 넘겨지는 것으로, 달력과 날짜, 시간 세 개가 표시되는 시계였다. 꽤 비싼 걸로 지난해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은 물건이다.
 그는 그 시계를 보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시계의 달력은 4월 2일에서 멈춰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기는 끊겨 있었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저 시계도 형광등이 끊긴 것과 똑같은 시간에 멈췄겠지.
 ······그런데 왜 4월 달이지?
 그가 잠든 날은 3월 15일이었다. 무려 18일의 공백.
 “이게 무슨······?”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시계가 전기가 끊기기 전에 고장이라도 났던 걸까.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는 지금까지 고장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1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방에서 자신이 잠만 잤다는 사실 또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기껏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금 울렁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으나 손은 오히려 차가워졌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그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후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마지막 라면 조각을 입에 넣었다.
 ‘시계는 고장 난 거겠지. 말이 안 되잖아. 하루나 이틀이라면 모를까 18일이라니.’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래도 18일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어떻게 사람이 영양 공급도 없이 열흘도 넘게 잠만 자겠는가. 사람이 물 없이 살 수 있는 최장 시간은 3일 정도가 한계였다.
 그는 시계가 고장 났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시선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자신으로 인해 흐트러진 먼지들의 흔적만 보일 뿐, 쥐나 벌레 같은 것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도 궁금했지만 그것 또한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기에 그는 그에 대한 생각은 껐다. 쥐 같은 것이 있다면 라면이나 다른 먹을 것이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냥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언제로 정할까. 문이나 창문을 막아 놓은 것을 보면 밖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계속 방 안에 있을 수도 없으니.’
 그는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가족이 쪽지를 남기고 어딘가로 ‘대피’ 같은 것을 한 상태라면 다른 이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최악의 경우 이 근처에 사람은 한 명도 살지 않을지도. 방 안의 식물들을 보니 더욱더 그럴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찾으러 갈 수밖에 없어.’
 떠나지 않고 누군가 도와주러 오기를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아까부터 하나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이곳은 버려진 곳일지도 모른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재난 지역을 폐쇄하고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하니까. 그의 가족이 떠난 것을 보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 짐작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상위권에 드는 성적으로 똑똑한 편이고 책도 꽤나 읽는 편이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학생. 다른 집과 달리 집안일을 겸해 하고 어른스러운 편이지만, 별 다른 위험 없이 평화롭게 자란 일반인.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면 그나마 나을 거야.’
 그는 봉투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벽장에 있던 옷들도 최대한 편한 것들로 펼치고, 책상 서랍들도 다 열어서 최대한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골랐다. 책들 중에서도 혹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같은 서바이벌에 관한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람 소리는 여전히 하나도 나지 않아. 만약 정말 ‘대피’했다고 가정한다면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안전할 수 있게 무기 같은 것도 챙기는 것이 좋을 거야. 우리 동네뿐만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 이 도시 전체가 대피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못 받아. 식량도 구하지 못할지도. 그러고 보면 식량보단 물이 문제인데.’
 그는 침대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커다란 상자 두 개를 열었다.
 그곳에는 급하게 담았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주전자, 물병, 커다란 통 같은 것들에 물이 담겨 있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급하게 랩으로 감싼 모습이 엉망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럴까, 그 근처의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상자에는 먼지가 한 톨도 쌓이지 않았다.
 서두른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물건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눈을 붉혔다. 급하게 대피하던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며 물을 받아 이곳에 둔 가족들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꼭, 꼭 다시 만날 거야. 만날 수 있을 거야.’
 애써 눈물을 참고 이곳을 나가기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몇 분 후, 그는 운 좋게도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한동안 잊고 벽장 구석에서 접혀 있었던 커다란 방수 배낭을 찾을 수 있었다.
 약했던 그의 어머니와는 반대로 그의 아버지는 산악을 취미로 가질 만큼 매우 건강했다. 덕분에 간혹 반강제로 주말에 산으로 1박 2일로 끌려간 적도 있었다. 특히 그가 방학했을 때 자주 그를 데려갔던 터라 덩달아 그도 커다란 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급하게 준비해서 그런지 봉투들에 담긴 식량의 양도 사실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방 안에 충분히 들어갔다.
 아무리 많이 챙겼다고 해도 보관이 긴 식품, 즉, 통조림 같은 것들은 일반 가정에서 별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나마 이 정도도 산악을 하는 그의 아버지가 비상용으로 항상 사 둬서 가능한 양이었다.
 ‘식량은 부족하면 주변 가게에 들어가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들을 가져오면 되겠지. 이렇게 된 상황에서 훔쳐 먹었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 테고. 나중에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면 배상해 주면 되니까.’
 물 같은 마실 것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래 보관이 안 돼 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캔 음료 같은 경우는 유통기한이 1년에서 2년 사이니까 그것을 마시면 된다.
 마음 같아서는 가족들이 힘들게 준비한 물들을 쓰고 싶지만, 저렇게 휴대가 어려운 그릇들에 담겨 있는 것들은 가져가기 어려웠다.
 물통에 담긴 것들은 챙겼지만 다른 것들은 불가능했다.
 생 라면을 먹어서 그런지 약간 목이 마른 것을 느낀 그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방 안의 온도가 약간 쌀쌀해서 그런지 물도 시원했다.
 그의 시선이 문득 고장 난 거라고 취급하기로 했던 시계를 향했다.
 ‘4월 2일. 정말, 아주 만약에··· 세상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저 날짜가 진짜고 내가 18일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게다가 저건 전기가 멈춘 순간 같이 멈춘 거니 믿을 수 없지만 더 오랜 후일지도 몰라.’
 아무리 고장 난 거라고 생각해도 가슴 한 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가끔 벌어지고, 그 당사자가 자신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예전부터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인체 발화 같은 경우도 간혹 있는데.
 ‘정말 그렇다고 해도 아주 많이는 안 지났겠지. 방 안이 이렇게 서늘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날짜는 3월 15일이랑 비슷한 약간 쌀쌀한 날씨인 것 같은데.’
 물론 가족들이 대피한 이유가 자연재해 때문이라면 기후가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솔직히 자신의 동네 전체가 대피할 정도의 일이라면 자연재해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기후가 바뀔 정도의 재해라면 화산 폭발? 그렇다면 벌써 죽었겠지. 지진? 하지만 집 건물 자체는 멀쩡한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식물이 자라 있어서 그렇지. 그럼 전쟁? 홍수?
 ‘정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는 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동생의 쪽지를 기억했다. 조심하라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렇게 써 둔 것일까. 왜 그렇게 짧은 쪽지만 놔두고 자세한 것을 써 두지 않은 걸까.
 그것도 밖에 벌어진 것과 연관이 있을까?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일이라든가······? 하지만 어차피 그만 볼 쪽지일 텐데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무슨 결론을 내든지 밖을 확인해야 하는군. 확인한 다음에야 짐도 제대로 쌀 수 있을 테니.’
 어쩐지 밖의 상황을 보기가 두려워져서 일부러 미루고 있긴 하지만, 지금 밖을 확인해야 가져가야 할 옷들을 정할 수 있다. 정말 날이 춥다면 겨울옷으로, 덥다면 적당히 봄, 가을 옷으로.
 이런 상황에서 맨살이 많이 드러나는 여름옷은 피하는 것이 좋다. 여름에 산에 올라갈 때도 벌레 같은 것 때문에 더워도 긴팔을 입어야 했다. 식물이 이렇게 자랄 정도면 벌레 같은 것도 많을 테니까. 또 그가 잠든 3월 15일에서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날씨 자체도 쌀쌀한 편일 것이다.
 하나 자연재해로 인한 대피라면 그가 짐작하는 기후와는 다를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살며시 귀를 가까이 대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였다.
 “······.”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막은 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테이프는 쉽게 뜯어졌다. 테이프를 전부 뜯어낸 후의 유리창은 테이프들의 점성 흔적이 남아 너무 흐렸다. 무엇보다 금이 조금씩 가 있어서 빛은 들어왔으나 밖을 보기가 어려웠다.
 원래 유리창으로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몰래 보려고 했는데 무리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금 장치를 풀고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야, 이게······?”
 그가 사는 곳은 수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노래방, 편의점, 고층 빌딩, 전철, 할인 매장, 백화점, 빵 가게, 서점 같은 많은 건물이 밤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불을 밝히는 도시.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저마다의 삶을 사는 도시.
 그 도시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이건······.”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방을 빠져나가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다시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걸로 지탱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에 그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숲이었다.
 유적같이 변한 건물들을 뒤덮은 푸르고 기이한 모양의 식물들. 차도였을 곳에 자란 자그마한 나무들. 인간이 없는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그가 자주 다녔던 음식점, 예쁜 점원이 일하고 있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 많았던 편의점, 항상 짙은 빵 냄새를 풍겨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유혹하던 빵 가게.
 그것들은 이미 흔적도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 있었다.
 변함이 없는 것은 오직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과 그의 뺨을 간질이는 바람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보고 있었을까.
 그는 문득 이질적인 것을 깨달았다.
 이 근처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면이 건조식품이라고 해도 몇 년을 가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라면을 먹을 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밖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수십 년은 흐른 것 같은데, 그가 먹은 음식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를 리도 없는데도 존재하는 극심한 차이.
 무엇이 진짜일까.
 그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깨 어림에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만약 수십 년이 지났다면 머리카락이 이보다 훨씬 길어졌겠지. 그때까지 잠만 자면서 살아 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차분했다.
 ‘시간이 저렇게까지 많이 지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힘이 생겼다.
 ‘그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었든, 나는 살아 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을 거야. 내··· 가족들도.’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이대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어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족은 어디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강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살아 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 내 가족들도 살아 있어.’
 스스로 세뇌하듯 강조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한 것은 없었다. 이 근처에 사람이 없다면 찾으면 된다.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됐다면 경찰··· 아니, 군인들이 구조 작업 같은 것을 펼치고 있을지 모른다. 도시의 건물 자체는 멀쩡한 편이지만 이렇게 식물들로 뒤덮인 것은 돌연변이 식물로 인한 자연재해일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피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위험들도 합쳐졌겠지.
 어쨌든 무슨 경우든 간에 정부가 구조 대책을 내놓고 일반인들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다니다가 그들을 만나 가족을 찾으면 된다.
 그저 눈앞의 현실이 절망스럽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아직 자신은 찾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설령 이렇게 도시가 숲이 되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뿐이다.
 그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도 않았는데 그 현상 자체에 겁먹어서 방 안에 처박혀 있은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힘들어 하는 것은 일단 사람을 찾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해도 늦지 않아.’
 확실히 밖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정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식량은 확실히 들어가야 한다. 저 정도로 변했다면 가게들의 보관 식품들도 식물이 들러붙어서 훼손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옷들은 어쩌면 오랫동안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니까 질긴 옷들만.
 책도 챙겨야 할까 고민했다. 지식이 있는 책들은 물론 중요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가면 이동할 때 체력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는 다시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나 멀리까지 푸른 녹음이 보이고 있다. 가로막고 있는 건물들의 흔적과 식물들 때문에 알아보기 어렵지만. 아무튼 눈으로 저 멀리까지 녹음이 보일 정도라면 정말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책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지식들이 있는 최소한의 것만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책장을 신중하게 보았다. 책을 자주 읽기는 해도 흥미 위주의 책들만 읽기에 쓸 만한 책은 없었다. 다만 몇 개는 그의 아버지가 사서 꽂은 거라 정말 좋은 것들이 있었다.
 ‘식물도감은 챙겨야 되겠지. 처음 보는 기묘한 식물들 같아 보여도 원래 식물들도 있을 테고. 여차하면 식량이 떨어졌을 때를 위한 식용식물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서바이벌을 다룬 책··· 안 돼. 만화로 되어 있어서 정작 알려주는 내용은 너무 적어. 쓸 만한 것이 있는 부분만 찢어 가자.’
 몇 분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책 두 권을 정할 수 있었다. 식물도감, 백과사전.
 둘 다 꽤나 두꺼운 책이기에 두 권 이상은 부담이 되는 부피였다. 그밖에 각종 쓸 만해 보이는 지식은 전부 찢어 놨으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터다.
 혹시나 물에 젖으면 곤란하니 비닐 봉투로 싼 후 배낭 안에 잘 챙겨 넣었다.
 기본적으로 방수 배낭이긴 해도 지퍼 같은 것이 실수로 살짝 열려 있을 경우도 있으니 꼼꼼히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그 외에 가위, 커터 칼, 클립, 연필 몇 자루, 공책 몇 권, 3단 접이식 우산, 친구가 담배 같이 피자고 꾀면서 준 라이터 두 개.
 바느질도 가끔 자신이 하기에 아예 사용하기 편하게 자기 방에 놓은 바느질 세트를 챙겼다. 거기에 정전을 대비하느라 준비한 양초까지.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휴대폰의 전원은 쓰지 않은 채 가만히 놔두면 삼 일은 간다. 휴대폰에 배터리가 없어 꺼져 있다는 것은 하루, 이틀은 아니라는 뜻.
 인정하기는 싫지만 멈춘 전자시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자신이 정말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거라면··· 최소 18일.
 ‘최대로 잡는다면 5개월까지일까.’
 그 이상으로 치기에는 자란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의 길이가 걸렸다. 하기야 최소 18일 이상 잔 것 자체가 정상인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면 그가 견딜 수 없으므로 그는 애써 몇 달, 몇 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짓눌렀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문득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니 당연히 신발을 신었을 리가 없다. 가족들도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는지 신발이 들어 있는 봉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못질된 방문을 향했다.
 ‘창문으로 짐과 같이 내려가서, 다시 1층부터 올라와 신발을 챙길까?’
 그러기에는 창문을 내려갈 때까지 맨발인 발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발에 상처가 생기면 이동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방문을 억지로 열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무엇보다 저렇게 문을 막으면서까지 그를 ‘무언가’로부터 지키려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지만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럼 아직 이 건물에서 자신이 있는 이 방을 제외한 다른 곳은 전부 위험하다.
 그는 고민했지만 결국 쓰게 웃으며 문을 부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그런 무언가를 일일이 피하고자 한다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밖에는 그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그것이 동물원에서 탈출한 맹수 같은 위험 생물이든 들개든 아니면 그냥 달라진 ‘환경’ 자체든 간에.
 문을 부수는 것은 쉬웠다. 애초에 저 어마어마한 못질을 전부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전 기술 숙제―선반 만들기―를 하다가 둔 작은 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문에 몸이 빠져나갈 만한 구멍만 만들면 됐다.
 만들어진 구멍을 본 그는 살짝 고개만 내밀어서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먼지와 식물로 뒤덮인 방. 그가 깨어난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점이라면 어째서인지 잔뜩 가구들이나 가전제품들이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 정도.
 부서져 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는 일단 구멍을 빠져나와 식물들을 가로지르며 재빨리 현관을 확인했다.
 반쯤 열려 있었지만 오랫동안 생물이 들어왔다는 흔적 자체가 없는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였다. 저것을 보니 이곳에 그 말고 다른 생물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역시 사람이 없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까.’
 그는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현관 옆에 있는 비교적 멀쩡한 신발장을 열었다. 먼지들이 휘날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발장 안에 들어 있는 신발들은 먼지가 조금 쌓이긴 해도 멀쩡했다.
 그는 그것들 중에 그가 제일 최근에 산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이미 양말을 신어 뒀기에 문제없었다. 그리고 오래 신을 것을 염두에 두고 예비용 밑창을 챙겼다.
 ‘발 문제는 됐어. 이제 이왕 나온 거 다른 방에서 쓸모 있는 것들을 더 챙겨 두자.’
 우선 그의 아버지 방에서 망치, 못 몇 개, 배낭의 고리에 달 수 있는 철제 컵을 챙겼다.
 다른 것들은 워낙 식물로 훼손되어 있어서 무리였다. 특히나 책은 책장 채로 쓰러져서 그 위로 식물이 뿌리 비슷한 것을 내려 손 댈 수 없었다.
 ‘왜 책장이 쓰러져 있는 거지?’
 이상했다. 가전제품이랑 가구들이 부서진 것, 책장이 쓰러진 것도 포함해서 곳곳에 나타난 희미한 흔적들이.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그의 여동생의 방에서 그는 뜨개질용 실 뭉치 몇 개와 열쇠고리 형식으로 달려 있는 작은 거울을 가져왔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의 방에서 ‘가족사진’을 챙겨 왔다.
 그는 모두가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다가 한 차례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액자에서 사진을 뺀 후 현재 그가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검은색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식칼이랑 수저, 집게, 작은 냄비.’
 더 챙기고 싶지만 이 이상은 짐이 된다. 냄비를 챙기고 그 안에 무사한 조미료 같은 것이 있다면 넣어 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요리해 먹을 정신은 아니지만 언뜻 가정 시간에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냥 소금이나 설탕 그 자체로도 좋다고 들었으니까.
 만약 아니라도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 거다.
 그가 그것들을 얻으러 주방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흠칫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엉망이었지만 이곳은 유난히 더 엉망이었다.
 바람에 흔들려 삐걱거리는 찬장과 전부 빼어져 어디론가 던져진 서랍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는 살짝 긴장하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상태라면 식칼이나 다른 것들도 지금 식물로 뒤덮인 어느 바닥에 있겠지. 그렇다면 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도 뭔가 건질 것이 없나 싶어 그는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는 ‘무언가’에 꽂혀진 식칼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식칼인지 몰랐다. 자세히 접근하고 나서야 손잡이가 살짝 보여 알아챘다. 식칼은 여러 모로 쓸모가 있지. 식물에 덮여 있고 반쯤 녹슬어 있는 모양새를 보니 쓸모없겠지만.
 ‘그런데 왜 저기에 꽂혀 있는 거지?’
 그는 식칼에 꽂힌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주방의 싱크대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식물에 덮여 잘 알 수 없지만 긴 포대 같기도 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기다란, 식물에 덮여 있지만 원래 빗자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집었다. 그리고 그 빗자루로 강하게 그 무언가를 밀었다.
 그 무언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옆으로 떠밀려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의 모습을 제대로 봤을 때 그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여태까지 느꼈던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정신적 충격이라면 이번 것은 확실한 ‘공포’였다.
 “아··· 아아··· 아아아아악!”
 관 대신 뒤덮인 식물이 사라지고 썩어 문드러져 백골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아, 아··· 아아······.”
 백골은 영화 속에서 봤던 것보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었다.
 입고 있는 누더기로 변한 옷과 갈비뼈를 관통한 식칼의 뾰족한 끝. 식물이 그 틈새로 자라고 있어 오히려 더욱 끔직해 보이는 해골의 텅 빈 안구.
 “아으··· 으, 흐윽······.”
 시체, 그것도 살해당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보인 시체는 그가 평소 생각했던 막연한 시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강했다. 박물관이나 사진 속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그런 해골 유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
 살해당했을 해골은 편하게 죽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해골의 곳곳에는 갈비뼈를 관통한 식칼은 그렇다 쳐도, 뒤통수가 움푹 들어가 있는데다가 다리 한쪽이 무릎 아래부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문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짙은 공포감에 사로 잡혀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던 그의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졌다.
 그는 시선을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명 뼈밖에 남지 않는 해골인데, 저 텅 빈 검은 눈이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 검은 구멍에 빨려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 주방에 있는 작은 창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식은땀까지 등에서 흐르고 있었는지 바람이 서늘하게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그 오싹한 한기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넋을 놓은 채 해골만 응시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는 알고 있는데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 단순한 해골이잖아.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움직여,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두려움에 질려서 시선조차 뗄 수 없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저 해골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삼켜져 버릴 것 같았다.
 “이미 죽은 해골이야. 그저 해골일 뿐이라고······.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뻣뻣하게 굳어 버린 다리로 뒷걸음질 쳐 겨우 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등이 벽에 닿았을 때 그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몇 분 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지금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 같은 거친 숨을 한참 동안이나 내뱉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는 아득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집 안의 이상한 풍경이 이해가 갔다. 부서진 가구와 가전제품들, 쓰러진 책장, 마치 던져졌다가 부딪힌 것처럼 벽 주변에 뒹구는 의자 같은 물건들.
 싸움이 있었던 거다.
 그것도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해골에 대한 두려움은 서서히 가셨다. 생각하지도 못한, 비록 꼴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집 안에서 그런 것을 보자 충격이 더 심했다.
 그것도 평범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살해당했다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해골이라니.
 ‘잠깐, 살해당해?’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 죽었다. 우리 집에서? 그럼 부모님은? 동생은?’
 설마 싸움이 벌어져서 자신의 방에 못질을 한 걸까. 나쁜 강도들 같은 놈들이 이곳에 와서 싸운 걸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할 정도의, 즉 커다란 재해가 일어났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같은 ‘사람’이라고.
 영화나 소설에서도 흔히 보이는 설정이다. 세계가 멸망의 공포 같은 거에 휩싸이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광기가 생기며 미쳐 날 뛰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범죄자 들끓고 위험한 세상이 될 거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에 와서 가족들을 위협하고, 가족들이 반항하니까 죽이······.
 “읍!”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스스로의 생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못질할 때 여동생도 같이 내 방에 피신 시켰을 거야.’
 모든 정황을 생각해 내며 그는 필사적으로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전제를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시체로 보이는 거 비슷한 거는 하나밖에 없잖아. 설마 아빠?’
 그는 강하게 도리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아, 그래, 맞아. 체격이 달라. 저 시체는 너무 커. 아빠는 작은 편이셨어. 그러니 당연히 엄마나 아라도 아냐. 다른 방들도 식물로 뒤덮여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형체는 보여! 여기에 저거 말고 시체는 없어. 무엇보다 동생이 남긴 쪽지는 집을 떠나면서 남긴 거잖아. 이미 없어. 괜찮아, 괜찮아. 죽지 않았어.’
 절대로 긍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부정의 증거를 찾은 거지만, 정말로 그 나열한 증거들을 생각하니 가족은 최소한 이 집에서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않아야 했다. 절대로.
 그는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일어났다.
 벽을 짚고 나서야 겨우 설 수 있었다. 일어선 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백골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응시했다.
 아주 잠깐이라고 해도 혹시 가족의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알지 못할 슬픔과 씁쓸함만 몰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그는 그대로 침대로 가서 쓰러지듯이 누웠다.
 ‘살해당한 시체라······.’
 그래서 동생의 쪽지에 조심하라고 쓰였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의 동생과 부모님들은 저런 일이 나타날 것을 알고 쓴 걸까, 아니면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들도 겪어 봤기 때문일까.
 ‘이제 사람을 만나도··· 조심해야 하는 거구나.’
 바로 어제, 아니, 그가 기억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집안에서 살인? 시체? 우스갯소리라도 그런 불길한 소린 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런 상황을 그 누가 예상했을까.
 눈을 떠 보니 별 세계. 그는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이렇게 사람을 만나도 죽을 수도 있다면 사람을 찾기 보다는 그것을 먼저 알아야 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살인이 일어날 정도의 격렬한 싸움이 났다. 그 살해당한 시체를 거둬 주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다.
 그 정도 싸움이 일어났다면 큰 난리가 났을 텐데 경찰이 먼저 나서서 오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깨어나기 전의 변해 버린 세상이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고 했었지.’
 그래서 그렇게 쓴 것일까. 경찰이나 통제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 범죄자들이 판을 친다. 이런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은 위험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넷 중 하나.
 정부든 군인이든 어떤 자들이든 간에 그들에게 ‘보호’받고 있던 사람들이거나 그들을 공격하는 ‘범죄자들, 범죄자들을 피해 달아나고 폐허가 된 도시를 방황하는― 구조를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중에 더 활발히 움직이는 자들은 범죄자들 쪽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인이 아무렇게나 방치될 정도면··· 그런 범죄자를 만날 경우 생명이 위험했다.
 왜?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변한 거지?
 ‘정보. 정보가 필요해.’
 그것을 알아야 했다. 우선순위가 가족을 찾는 거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는 돌아다니다 그냥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게 굶어 죽어서든 범죄자를 만나 죽는 거든 혹은 다른 것으로든.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기껏 쌌던 짐을 우르르 떨어트렸다. 그리곤 다시 신중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다른 방에서 챙겼었던 물품과 지금까지 챙기기로 했던 물건들을 배낭에 착실하게 넣고 질끈 묶었다.
 ‘전기가 없어 컴퓨터는 못 써.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약간이나마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
 그는 집 바로 몇 백 미터 안에 존재하는 편의점을 떠올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파는 한 물건도.
 ‘신문.’
 물론 일반 가정집이 이 지경이 될 정도라면 거리의 편의점도 무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편의점에 없다면 서점에서 찾으면 된다. 서점은 식량도, 값비싼 물건도 없으니 되도록 멀쩡할 가능성이 크겠지.
 그러나 배낭을 메고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쓰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시체가 또 있을지도 몰라.’
 무섭다. 아무리 저 해골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가셨다고 해도 다른 시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에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그것도 해골이 아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나 썩어 는 시체를 볼 수도 있었다. 혹은 범죄자를 만나 그 시체가 바로 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관둘 수도 없다.
 지금 두려워서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나가야 했다. 가정집에 시체가 방치될 정도의 세상에 구조대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으니까.
 아니면 여기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식량이 떨어진 후 굶어 죽던가.
 ‘밖으로 나가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
 하지만 정말 이대로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범죄자를 제하더라도 다짜고짜 미친 사람이나, 야생 동물이라도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도망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쉽지도 않을 터다.
 ‘무기가 필요해.’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실제로 그것을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게 휘두를 수 있는지는 자신 없다.
 다만 가지고라도 있는 편이 얕보이지 않으리라.
 그는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망치나 커터 칼은 너무 짧다. 식칼은 녹슬었으니 당연히 제외다. 무엇보다 그 칼에 찔린 백골을 생각하면 차마 칼같이 날카로운 것은 휘두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심정으로는 사실 만지기도 싫었고, 그런 물건이라면 차라리 다른 것이 낫다. 이윽고 그는 적당한 물건 하나를 기억해 냈다.
 그는 침대 옆으로 간 후 바닥에 엎으려 침대 밑을 살폈다.
 거기에는 목검이 있었다.
 ‘있군. 버린 줄 알았는데······.’
 그는 목검을 꺼내 살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검도를 배운 것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1년쯤 전에, 동생이 혼자 다니기 싫다고 떼를 써서 억지로 다닌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목검과 검도복을 샀지만 관둔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 검도도 3년이나 다녔으니까 쉽게 당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아까 방에 들어갔을 때, 항상 책상에 놓았던 목검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 녀석도 목검을 챙겨서 나간 거구나!’
 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인 아라가 목검을 챙기고 나갈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가족은 무사히 이 지역을 빠져나갔다는 거다. 최소 이 동네 밖까지는 무사히 나갔겠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결국 깨우지 않고 문에 못질을 한 것은 조금 걸렸으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고 믿기로 했다.
 어차피 저 못질 덕분에 그 죽고 죽였던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지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니까. 정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목검은 1년이나 지나 있었어도 쌓인 먼지 외에는 별 이상 없어 보였다.
 ‘일단 이걸 챙기자.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단순히 두들기는 거라면 심리적으로 부담감도 덜 할 테니 망설임 없이 공격할 수 있을 테고.’
 목검보다는 각목 같은 것이 상대를 때릴 경우 더 치명적이긴 했으나 적당히 휘두를 만한 각목은 집 안 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물론 구하려고 한다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구를 부숴서라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때라면 모를까 그 후로는 단순한 주먹다짐으로도 상대방을 상처 입힌 적이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를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 두려운 시점에서 목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현재의 그에게는 각목이나 쇠 파이프, 식칼같이 자칫하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껴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물건들보다는 목검이 나을지도 모른다.
 목검으로 때려 봤자 제대로 맞지 않으면 죽을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부담감 없이 마음껏 공격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문득 바지가 축축한 것을 느꼈다.
 ‘뭐지?’
 무언가 물 비슷한 것이 묻어 있었다.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 그냥 생수인 것 같았다. 딱히 문제될 것은 없지만 방금 전까지 없었다가 어디에서?
 그는 그가 엎드렸던 바닥을 만져 보았다.
 ‘젖어 있어?’
 왜 이런 곳에 물기가? 게다가 아까 맨발로 다닐 때는 못 느낀 것 같은데.
 그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아까 물을 마시다가 조금 흘렸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신경을 껐다. 목검을 한 손에 단단히 잡고 방문에 만들었던 구멍으로 다시 빠져나왔다. 엉망진창인 거실을 지나 반쯤 열려진 현관을 밀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끼익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녹슨 이웃의 철문이 그를 마주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그는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시체 비슷한 것도 없었다. 여전히 너무나도 조용했다. 벌레도, 새도, 걱정한 다른 야생 동물의 낌새도 조금도 없었다. 적막한 침묵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녹색으로 덮인 채 군데군데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벌레조차 없는 건 뭔가 이상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것은 불길하다고 들었는데.’
 막연히 불길하고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신중한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편의점은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뒤덮인 식물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창 같은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내부도 진열대가 엎어져 있고 계산대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시체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식물에 뒤덮여서 보이지 않거나.
 그는 신문이 진열되어 있었을 곳으로 가서 목검으로 휘저었다. 목검에 식물들이 엉키면서 가리고 있는 것들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 식물들이 사라지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한 신문들이 있었다.
 ‘솔직히 서점이나 다른 곳을 몇 군데 더 헤매야 될 줄 알았는데. 혹은 아예 못 찾거나.’
 자신과 같이 정보의 필요를 느꼈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무사한 걸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신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했다.
 ‘날짜는 3월 28일. 내가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은 15일이니 한참 후네. 적어도 이때까지는 신문 배달 같은 것이 됐다는 소린가.’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신문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part 1. 변종
 
 
 ···여러 곳에서 변종 식물과 동물들이··· 학자들의 추측으로는 3월 15일 날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식물의 경우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 속도를 보여 주고 있습··· 또한 특히 동물 같은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등··· 를 포함한 각 나라의 정부는 이 사태에 대해서 대대적인 해결책을 준비 중입니다. 지진과 해일, 가뭄 등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난 국가에는 도움의 손길이······.
 
 되도록 멀쩡하다고는 해도 글자가 번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많아 띄엄띄엄 읽어야 했다. 다행히 눈에 띄는 단어들만 연결하는 걸로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신문을 읽은 후 그는 사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각 나라의 정부’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는 것의 그의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로 이상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 또한 ‘각종 자연재해들이 일어난 국가’라는 내용을 따로 쓴 것으로 보아 지금 이처럼 도시가 변한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따로 지칭해서 쓰질 않았을 테니까.
 사실 그는 그의 집안에서 있었던 흔적과 시체를 보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비정상적인 식물은 기이한 화학 공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특수한 항체 비슷한 것이 있다던가.
 하지만 그의 추측과는 다르게 신문에는 ‘전쟁’이라는 말은 조금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자연재해도, 전쟁도 아닌 이상 현상. 도대체 뭐지? 짐작도 안 가.’
 게다가 유난히 거슬리는 ‘3월 15일 날의’라는 말.
 그때는 자신이 잠들었던 날이다.
 그렇다면 그가 잠든 그날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그날을 기점으로 이상 사태가 시작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자신이 잠든 것은 이 이상 사태와 꽤나 밀접한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가 3월 15일 날 깊은 잠에 빠지고, 하필이면 그날 ‘어떤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그냥 우연일 리가 없다.
 또한 이렇게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자신이 최소 한 달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멀쩡한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싫다.’
 이런 사태가 높은 확률로 자신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니,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설마 가족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방에 못질을 한 걸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리’시키기 위해서?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일단 그건 가족들과 다시 만난 다음에 생각해도 괜찮아. 지금 내가 머리를 굴려 봐야 만나지 못한다면 소용없어. 만나서 물어보면 알게 될 테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문을 마저 살폈지만 이밖에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운동 경기가 이번 사태로 지연되었다는 거나 이번 사태에 대한 각 정부의 입장, 대통령과 기자 회견의 내용 같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걸 보면 정부가 아예 손을 놓지 않고 일단 대비책을 마련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의 백골과 부서진 편의점 잔해 같은 것을 보면 실패한 모양이지만.
 ‘갈까··· 아, 그 전에 편의점에 남아 있는 것들 중 괜찮은 것이 있나 봐야 되겠다. 밴드나 감기약, 소화제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집안에 항상 가지고 있던 구급 통은 찾을 수 없었다. 가구들이 난장판으로 부서진 집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을 투자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솔직히 그 백골이 있는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유리 파편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조심하며 그는 편의점 진열대 등을 뒤졌다.
 범죄가 극성이었다면 당연히 도둑질도 있었을 테니 먹을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을 곳은 텅 빈 채 먼지만 쌓여 있었다. 다툼 도중 짓이겨 터졌는지 우그러진 빈 과자 봉지들도 있었다.
 대신 계산대 아래 서랍에 있던 두통약, 해열제, 소화제, 진통제랑 반창고를 찾을 수 있었다.
 편의점 용품이라기보다는 약간 쓴 흔적이 있던 것을 보아 점원들의 것이었던 것 같았다. 범죄자들은 약 같은 것은 그냥 놔둔 모양이다. 하긴, 편의점에서 약을 찾기보다는 정말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약국이나 병원으로 갔을 터다.
 먼지가 쌓여 있긴 하지만 약병들의 뚜껑도 제대로 닫혀 있었고, 일단 작은 종이 상자 안에 있었음으로 딱히 오염되거나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써도 될까? 약들도 유통기한이 있긴 있을 텐데.’
 어렴풋이 약이 오래되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약효가 약하게 나타난다고 하던가? 아니, 탈이 난다고 했었나?
 그는 평소 약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가족 중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전부 튼튼한 건강 체질이라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약 자체를 본 지도 오래됐다.
 ‘유통기한이 좀 지났을 수도 있다고 해도··· 괜찮겠지?’
 조금 불안하지만 일단 챙기고 보기로 했다. 나중에 한 알 먹어 보고 이상이 있으면 버리면 되니까. 먹고 이상이 없거나 나아졌다면 계속 쓰면 되는 거고.
 약들을 챙기고 나서도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더 이상 가져갈 것은 없어 보였다.
 편의점을 나온 그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 고민했다. 학교가 있는 동쪽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면 수도가 나오는 서쪽으로 가야 할까.
 학교에 가면 사람을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학교는 긴급 상황 때 대피용으로 쓴다고 했다. 미성년자가 있는 학교는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도 웬만해서는 건들지 않고, 재해가 일어나면 우선 구조 순위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곳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될까?
 분명 깊이 잠들었던 자신에 대한 소문이, 최소한 그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났을 터다. 그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3월 15일 일어났던 ‘어떤 현상’과 시기가 맞춰지게.
 그렇다면 온갖 기묘한 소문이 돌았을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수도가 있는 서쪽으로 가자. 좀 오래 걸어야 되겠지만, 일단 수도로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수도만큼 사람들이 많은 곳도 없다. 게다가 무슨 위험한 상황이 국가에 닥치면 제일 먼저 수도를 보호할 것이다. 사람들이 많으니 정보도 더 얻고, 운이 좋으면 그곳에 있을 대피소 같은 곳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방향 또한 그냥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가면 되니 어렵지 않을 거다. 가는 도중에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아까보다 더 높이 떠올라 있었다.
 ‘아까 해가 저기에 있었으니까, 서쪽은 저쪽.’
 그는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길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인 도시는 오직 그가 걷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들이닥치고, 백골까지 봤던 터라 신경이 예민해진 그는 침묵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그는 건물들 중 특이한 몇 개를 볼 수 있었다. 불이 났던 흔적이 선명한 검게 그을린 건물 앞을 지나가면서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화재도 일어났었나. 경찰이 없다면 소방관도 없을 텐데 옆으로 번지거나 하진 않았군.’
 처음 그런 건물을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탄 건물들이 보이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이 번지지도 않았는데 여러 곳에서 화재가 일어날 수 있나.
 ‘설마 방화?’
 일부러 불을 냈던 걸까.
 그야 그의 집안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혼란 속이었을 테니 방화를 하는 미친놈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수가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방화를 하게 주변에서 순순히 놔두지는 않았을 텐데. 자칫하면 타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내버려 뒀다.
 왜? 날이 추워서? 3월 달이라면 그 정도로 춥지는 않을 텐데. 게다가 설령 추워서 그랬다고 해도 건물 하나를 태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모르겠어.’
 가면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뿐이었다. 불에 탔던 건물들은 그가 걸음을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많아졌다가 어느 순간부터 적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집 주변에 있던 기묘한 식물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을 때와 비슷했다.
 대신 그 기묘한 덩굴 식물들 대신 마찬가지로 보지 못했던 여러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식물들은 건물을 뒤덮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가 평소에 간간이 보았던 잡초들과 섞여 자라고 있었다. 그래선지 그의 집 근처 같이 오래된 유적 같은 분위기보다는 관리가 오랫동안 안 된 폐허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걷다가 문득 귓가에 울리는 소리를 듣고 놀란 표정을 들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이 소리는······.
 ‘새소리.’
 생물이 살고 있다. 전이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을 사소한 소리. 깨어나서 듣는 최초의 생물의 소리다 보니 무척 반가웠다. 마냥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그를 씁쓸하게 했지만.
 ‘지금부터는 다른 생물이 있다는 거야. 사람일 수도, 들개 같은 야생 동물들도 있겠지.’
 새가 있다는 것은 벌레가 있다는 소리. 벌레가 있다면 벌레를 먹는 다른 작은 동물들도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작은 동물을 먹는 큰 동물들도.
 사람이 있다면 작은 동물이라고 해 봤자 쥐, 고양이나 개 정도고 큰 동물은 없겠으나 이곳은 사람이 상당히 오랫동안 살지 않은 곳이다. 운 나쁘면 여우 같은 육식동물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그가 알고 있는 동물들보다도 신문에 쓰였던 ‘변종 동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변종 동물이란 거, 느낌이 안 좋아.’
 그는 평소 때도 상당히 감이 뛰어난 편이었다.
 가위바위보 같은 게임을 했을 때도 승률이 높았고 시험 때 객관식 문제를 찍을 때도 대부분 정답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래서 그를 부러워하며 우스갯소리로 공부는 때려치우고 다 찍는 것이 어떠냐며 낄낄거리곤 했었다.
 소소한 부분에서 꽤 잘 맞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본인의 느낌을 더 믿는 편이었다.
 그런 그의 감은, 변종 식물은 그렇다 쳐도 변종 동물이 있다는 것에 무척 불길한 느낌을 줬다. 변종 동물이라니. 보통 이상이 있는 동물이라면 돌연변이라고 하지 않나.
 신문을 읽었을 당시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로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 잘 신경 쓰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런 막연한 것보다는 ‘갑자기 나타났다’는 변종 동물이 신경 쓰였다.
 그는 목검을 오른손에 잘 고쳐 잡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계속 차도로 다닐까 싶다가 아무래도 훤히 보이는 차도보다는 부서진 자동차나 우체통같이 조금이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물건이 있는 인도로 걷기로 했다. 인도는 차도와 마찬가지로 잡초들이 자라 있었다. 처음 보는 식물도 드문드문 보였는데 걷음을 옮기는 것에 방해되지는 않았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다행스럽게도 별 다른 생물을 만나지도 않고 그토록 오랜 시간 걸었음에도 불과하고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체력이 이렇게 좋았었는지 조금 의아했다. 체력장을 할 때도 항상 상위 안에 들었던 체력인데다 한창 때이긴 해도 하루 종일 걸었는데 지치지 않다니.
 어쩌면 정신적으로 긴장되어서 몸의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힐끗 자신의 몸을 살피며 생각했다.
 해는 서서히 지고 있었다.
 아직 노을이 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변하는 것을 보아 얼마 있지 않으면 곧 밤이 될 것 같았다.
 ‘슬슬 잘 곳을 찾아봐야 되겠어.’
 주변에 건물은 많으니 잠을 청할 곳은 많았다. 그는 잠을 자고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건물을 찾기 위해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이 상황에서 침대, 수도나 가스를 쓸 수 있을 정도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되도록이면 편하고 안전한 장소면 충분했다.
 이윽고 그는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평범한 건물의 2층. 계단에 먼지가 쌓여 있고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야생 동물도 없을 거다. 사람도 없고. 유리창도 멀쩡한 것을 보니 저곳에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시체도 없겠지.
 그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은 다행히 반쯤 열린 채로 끼익거리고 있었다. 잠겨 있었으면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들어가 보니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기만 했을 뿐 식물들의 흔적도 없었고 접대용으로 보이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도 보였다. 그는 소파에서 자기로 결정한 후 대충 그 근처의 먼지를 털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챙긴 식량 중 조리된 닭고기 요리가 들어 있는 통조림을 열었다. 통조림을 까는 법은 조금 난감했지만 혹 무기로도 가능할까 싶어 챙겨 둔 드라이버와 망치로 이용해서 힘겹게 열 수 있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한 통조림을 다 먹은 후 그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자야지. 혹시 사람이나 야생 동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조명도 하나도 없으니 밤에는 달빛이랑 별빛만 있겠군.’
 그는 삐걱거리는 문을 닫고 잠갔다. 그리고 옷은 벗지 않고 그냥 소파에 털썩 눕고는 미리 꺼내 두었던 담요를 덮었다. 소파치고는 푹신하고 편했지만 잠은 쉽사리 들지 않았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 아라···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걱정되었다. 반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들어가서부터 친하게 지낸 나인과 나힌 형제도, 특히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났었을 정도로 친한 다인이 걱정됐다.
 다인과 그는 먼 친척 관계였었기에 부모님끼리 서로 친한 사이여서 성별이 다름에도 별 부담 없이 친해졌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 고등학교까지 대부분 같은 반이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다인은 몸이 건강한 편이지만 운동은 영 하질 못했고 본인 스스로 취미도 없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아니, 운동 부족으로 오히려 더 연약한 편에 속하는 다인이 이 사태에 무사할 수 있을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자자.’
 그는 억지로 불길한 생각들을 억누르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그런데 그때,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르르르.
 놀란 그는 순간 벌떡 일어나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창밖의 희미한 달빛에 사무실의 모습이 보였다. 숨을 멈추고 귀를 예민하게 세웠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잘못 들은 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랬나 보네. 그는 간단하게 결론짓고 다시 긴장을 풀고 자리에 누우려 했다.
 아르르르······.
 ‘잘못 들은 것이 아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 바로 옆에 세워 뒀던 목검을 재빨리 잡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서 나는 거지? 개 울음소리? 아니야,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
 그는 긴장된 눈빛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밖에서 나는 소리라는 건가. 그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이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은 이미 밤이었지만, 달빛이 워낙 밝아서 밖을 보는데 별문제는 없었다. 그는 머리만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사방을 살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동자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다가 마침내 한 곳에 고정됐다.
 ‘아······.’
 그는 볼 수 있었다.
 야행성인 듯 밤 속에서 그 생명체의 눈동자는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덩치 또한 커다란 개와 비슷했다. 누르스름한 양 송곳니가 길게 튀어나와 인상을 더 무섭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털은 유난히 길고 거칠어 보였다. 텔레비전의 동물 관련 방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늑대와 흡사하게 생긴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생명체는 절대 늑대가 아니었다.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단 하나가 너무나 달랐다. 바로 이마에 있는 30센티는 될 법한 도드라진 뿔. 환상 속에서 나오는 유니콘 같은 동물의 뿔과도 달랐다.
 톱날처럼 뾰족한 돌기 같은 것이 나 있는 그것은 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기에 가까웠다.
 ‘맙소사.’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저런 뿔이라니.
 ‘저건, 변종 동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잖아······.’
 누가 봐도 저건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괴물이었다. 괴물은 어슬렁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다가 돌연 킁킁거리면서 바닥에 주둥이를 가까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곳은 아직 어둡지 않았을 때 그가 서 있었던 곳이었다.
 저 괴물은 자신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싫을 정도로 너무나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사냥하기 위해서.’
 말도 안 돼. 저런 것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총이라면 모를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목검에 불과했다. 도망도 불가능했다. 그는 2층에 있는데다 두 발로 뛴다. 결코 네발 동물을 달리기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괴물은 한참을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어슬렁거리며 점점 그가 있는 건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무실뿐인 이곳에서 비상 탈출구 같은 것은 없었다.
 피할 곳은 없다. 도망 칠 수도 없다.
 ‘겨우 여기까지 오고 끝인가? 다른 사람도, 가족도 만나 보지도 못하고? 저 괴물한테 먹혀서?’
 그럴 수는 없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재빨리 괴물의 위치를 살폈다. 생각보다 그렇게 후각이 좋은 놈은 아닌 듯 그가 있는 건물과 다른 옆의 건물 사이를 왔다갔다거리고 있었다.
 ‘일단 문을 막아서 시간을 벌자. 잘하면 그냥 갈 수도 있어.’
 그는 일단 소파를 문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능한 조용히 그는 책상이나 가구들을 옮기며 문을 막기 시작했다.
 아르르릉.
 기이한 괴물의 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으로 자꾸 힘이 풀리는 손을 억지로 놀리며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사람은 죽을 위기 앞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난다던가. 그래서 그런지 책상 같은 것도 별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무게가 나갈 만한 것들 중 절반 정도를 문 앞에 옮겼을 때, 그는 문이 쿵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쿵! 쿵, 쿵!
 아우르르!
 괴물이 왔다.
 괴물이 문을 부수려 하는 건지, 잠긴 문과 문 앞에 쌓여진 물건들이 들썩거렸다.
 ‘젠장, 제발 버텨라!’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그는 들썩거리는 물건을 밀며 물건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노력했다. 덩치가 큰 개 정도이기만 해서 그런지 예상보다는 강한 힘이 아니었다. 사무실 문이 나무가 아닌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참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을까.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혹시 돌아갔나 싶어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그때,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부서졌다.
 충격으로 문을 막고 있는 다른 물건들도 흩어지고 그도 뒤로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고 물건들의 파편이 부딪히면서 여기저기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는 그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문은 부수고 나타난 것은 날카로운 뿔이었다.
 ‘뿌, 뿔로 뚫었어······.’
 게다가 뚫린 흔적도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뿔에 마치 톱날처럼 날카로운 돌기가 나 있다 싶었더니 상대의 목숨을 확실하게 끓으려는 의도인가 보다.
 뿔로 난 구멍 주위는 형편없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뿔에 찔리면 그대로 끝장이야!’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정말 이대로 잡아먹혀 죽어야 하나? 뿔에 처참하게 찔러 죽어야 하는 거야? 그는 문을 뚫고 나온 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뿔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쾅 소리가 울리면서 다른 곳에도 뿔로 구멍이 뚫렸다.
 문의 경첩은 이제 삐걱거리고 있었다. 아마 다음 한 번이라면 문은 완전히 부서지리라.
 그는 바들거리는 팔로 애써 목검을 잡아 쥐었다.
 목검으로 저 괴물을 죽일 수 있을까. 절대 무리다. 싸움은 사람하고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괴물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죽을 수는 없었다.
 뿔이 세 번째로 문을 들이받았을 때, 문은 결국 그의 예상대로 완전히 부서졌다.
 괴물은 약간 흥분된 듯 기이한 소리를 울면서 그 앞을 가로막은 물건들을 사이로 그를 보았다. 괴물의 노랗게 빛나는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멀리서 보았던 괴물의 모습은 달랐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위압감이 생생히 전해졌다. 아마 의지가 약한 인간이라면 그대로 머릿속이 텅 빈 채 주저앉거나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포기하는 대신 다리에 힘을 주며 반대로 사납게 괴물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괴물 밥이 될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냥은 절대 안 죽어!’
 괴물이 문 앞의 물건들을 헤치고 들어왔다 괴물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괴물로서는 눈앞의 사냥감은 날카로운 이빨도, 힘찬 뒷다리도, 꿰뚫는 뿔도 없는 연약한 생물체에 불과했다.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괴물은 어슬렁거리며 그의 앞에서 천천히 걸어 다녔다. 사냥감을 탐색하는 눈이었다. 이번 사냥감은 여태까지의 것들과는 달리 반항을 할 모양이었기에 혹시나 모를 위험을 찾아보았다.
 얼마 전까지 간간이 보이던 사냥감들이었지만 어느 순간 무리로 흩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덕분에 항상 배부르게 먹었던 괴물은 최근에는 약간 허기진 상태였다.
 괴물은 더 이상 상대를 탐색하는 것을 관두고 이빨을 드러냈다. 어차피 약하디 약한 사냥감이었다. 더 이상 탐색할 필요는 없다.
 뒷다리에 힘을 주며 뿔이 있는 머리를 낮추었다. 한 번에 꿰뚫어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괴물이 몸을 낮추는 것을 보고 공격할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 저 잔혹한 뿔로 자신을 꿰뚫으려고 하겠지. 그는 두려움으로 감기려는 눈을 애써 똑바로 뜨면서 괴물을 바라보았다.
 ‘보지 못하면 공격도 못해. 눈은 감으면 안 돼.’
 두려워서 눈을 감는 순간 끝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문을 막으려고 움직이고 있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괴물과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마주 선 순간부터 점점 그의 머릿속에는 강한 생존 욕구로 꽉 채워지고 있었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바로 그때, 그가 문 앞에 쌓아 두었던 물건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괴물이 뒷다리로 바닥을 박찼다.
 총알처럼 덮쳐 오는 괴물을 피해 그는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옆으로 움직였다. 괴물의 뿔은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나 괴물은 네발짐승 특유의 재빠름으로 바닥을 다시 한 번 박차고 바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2초도 채 흐르지 않았을 빠른 움직임이었고,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었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한데 그는 놀랍게도 엄청난 행운인지 아니면 특유의 쓸 만한 직감 때문인지 뒤에서 무언가를 박차는 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몸을 젖히고 있었다. 그 덕분에 두 번째 공격 또한 피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물어뜯으려는 괴물의 벌린 주둥이 옆에서, 들고 있는 목검으로 있는 힘껏 목을 내려쳤다.
 카릉!
 괴물이 고통 어린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며 분노의 빛을 보였다. 으르렁거리는 주둥이가 침을 뚝 떨어뜨렸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는 이미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저 죽기 싫다는 생각,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괴물이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싸울 마음은 들었으나 어떻게 싸울지 감도 잡히지 않은 그는 일단 이번에도 피하려고 했지만 아까와 반대로 이번에는 운이 나빴다.
 ‘아?’
 그는 몸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짧은 순간, 그의 눈이 바닥으로 향했다. 아까 문 앞에 쌓아 두었다가 부서졌던 잔해를 중 하나가 그의 한쪽 발밑에 깔려 있었다. 이번엔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보이는 것은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
 ‘안 돼, 피해야······!’
 허공을 반쯤 떠 있는 왼쪽 발과 흐트러진 균형.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에 비친 괴물의 입이 움직였다.
 ‘못 피해!’
 “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왼쪽 어깨에 날카로운 이빨이 파고들며 뜨끈한 피가 튀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짐과 함께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큭, 헉, 아흑······.”
 바닥에 처박히는 추락에 괴물의 이빨이 더욱 깊게 박혔다. 처음 물렸을 때보다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비명을 제대로 지르지도 못했다. 괴물은 잡아 뜯듯이 입을 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쳐들었다.
 촤악, 찌익 소리가 들리며 붉은 피와 두터운 재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악!”
 그는 반사적으로 고통에 오른쪽에 쥐고 있던 목검을 위에 올라탄 괴물을 향해 휘둘렀다. 괴물은 아까 목을 맞았던 기억 때문인지 흠칫거리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상처를 입고 이기기보다는 안전하게 이기기를 바라는 모양인지 아까보다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괴물이 몸 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안 그는 고통에 신음을 내면서도 일어났다.
 아프다고 바닥에 뻗어 있다가는 죽는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그는 그 생각에 몸을 움직였다. 몸을 관통하는 아픔에 더욱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행운은 그의 재킷이 두꺼웠고, 어깨에 쇠장식과 괴물의 이빨과 부딪혀 위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깨의 상처는 깊었다.
 개과 괴물의 힘은 나무 정도는 입으로 간단히 부술 만큼 강했으니까. 그런 괴물에게 제대로 물리지는 않고 겉만 살짝 물렸기에 이 정도인 것이다.
 제대로 물렸다면 즉사였으리라.
 그러나 겉만 물렸다고 해서 웃어넘길 상처는 결코 아니었고, 어른스럽다지만 그래 봤자 고등학생이 견딜 고통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파, 아파!’
 피가 그의 왼쪽 팔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강해진 피 냄새에 거리를 재 두고 빈틈을 노리려는 괴물의 눈에 점차 흥분감이 번져 갔다. 고통에 반쯤 마비된 머리지만 그는 괴물의 움직임에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 공격할 거야!’
 이렇게 다친 상태에서 피할 수 있을까? 아프다. 어깨가 너무 아파. 또 공격하면 죽을 거야. 저 뿔에 찔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아아, 생각하기도 싫어. 무서워. 아파.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이 흐릿하게 변했다. 고통과 출혈, 정신적인 압박감에 이성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적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하는 행동은 대부분 두 가지다. 하나는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것과 적에게 무턱대고 돌진하여 무기를 휘두르는 것.
 그는 후자에 속했다.
 “싫어··· 죽기 싫단 말이야!”
 그는 소리치며 목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검도를 겨우 5개월밖에 안 배우고, 그나마도 관둔 지 1년 가까이 지난 베기는 너무나 어설펐다. 무엇보다 왼쪽 어깨도 심하게 다친 상태로 날카로운 공격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괴물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가볍게 피하고 그를 그대로 덮쳤다. 그때 그가 반사적으로 목검을 잡아 막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짙은 고동색 목검 하나가 간신히 괴물의 주둥이를 위태롭게 가로막고 있었다.
 캬르르르!
 괴물의 뜨거운 입김과 침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다른 것보다 두드러진 누런 송곳니와 육식동물의 이빨.
 “아악!”
 주둥이는 막았지만 괴물의 발톱이 오른쪽 어깨를 스쳤다. 왼쪽 어깨는 물리고 오른쪽 어깨는 할퀴어졌다. 추가된 고통에 눈물이 흐르면서도 손에서 그는 힘을 빼지 못했다. 힘을 빼는 순간 죽을 테니까.
 하나 부상을 입은 양 어깨의 상태 때문에 힘은 자꾸 빠져 갔다.
 그를 극심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투둑. 미세한 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목검에서 난 소리였다. 목검은 툭, 툭 소리를 내며 망가지고 있었다. 그가 힘이 빠지는 것보다는 목검이 부서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운 좋게 이빨에 걸리지 않고 입가에 걸려서 부서지지 않았지만 육식동물이란 것들은 턱 힘이 굉장히 좋았다. 어깨를 물렸을 때 옷 따위는 간단히 찢어진 것을 보기만 해도 알았다.
 목검은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죽을 거야··· 이대로 가면 죽을 거야······. 무슨, 무슨 방법이!’
 그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았다. 강한 힘으로 덮쳐진 상태에서 무언가 상황을 타개할 것을. 생명을 구할 수단을 찾아 절박하게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드라이버를 볼 수 있었다.
 아까 통조림을 따는 도구가 없어서 급한 대로 드라이버로 꾹꾹 눌러서 강제로 열었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탁자 위에 두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쓸 예정으로. 하지만 그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괴물이 날뛰는 도중에 탁자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기회는 한 번. 실패하면 죽어!’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어차피 이 방법밖에 없어!’
 할 수밖에 없는 최후이자 최선의 방법이라면.
 그의 눈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상처로 인한 아픔도 그 순간은 잊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이고 살아남겠다는 생존 의지.
 그는 온 힘을 다해 괴물의 복부를 무릎으로 찍었다.
 순간적으로 내려 덮치는 힘이 약해졌을 때, 그는 목검을 잡고 있는 팔 하나를 뻗어 드라이버를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찔러 넣었다.
 “죽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아!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인간 목소리와 괴물의 비명이 얽혔다.
 드라이버는 괴물의 눈에 정확하게 꽂혔다. 가까운 거리이기에 빗나가지 않고 드라이버의 손잡이만 남을 만큼 깊숙이, 정확히 꽂힐 수 있었다. 괴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 덕에 괴물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괴물이 날뛰면서 할퀴어진 상처가 곳곳에 남았다.
 그 정도도 그가 괴물이 날뛰는 모습에 몸을 날리다시피 옆으로 피한 덕분이었다. 그냥 괴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멍하니 있었다면 괴물의 발톱에 짓눌려 죽었으리라.
 캬아아! 캬악!
 괴물은 지독한 고통 때문인지 그가 부들거리며 구석으로 도망친 것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괴물은 사무실의 책상, 벽에 부딪히며 절규했다. 쾅쾅, 거친 소음과 괴물의 울음이 피투성이의 사무실을 울렸다.
 그러다 방향을 창문 쪽으로 잡더니 있는 힘껏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쨍그랑! 창! ······쿵!
 유리창이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와 밑에 묵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걸로 괴물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괴물이 죽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갑자기 곳곳에 입은 상처가 쓰라렸다. 특히 왼쪽 어깨는 죽을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들이지만 어쩐지 아까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픈 것은 분명했다.
 단지 왠지 스스로의 상처가 아니게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몸을 살폈다.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검은 재킷과 회색 셔츠는 곳곳이 찢어진 것은 둘째 치고 너무나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피라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괴물의 피였다. 괴물의 눈을 찔렀을 때 튀었던 피들.
 물컹하게 파고들어 갔던 감촉이 기억났다. 그는 멍한 눈빛으로 붉게 물든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살았어.’
 저 괴물과의 승산 없는 싸움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 있다. 기뻐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올 만큼 괴로웠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깨어난 후에는 그럴 일투성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움직이려고 하자 상처의 고통이 강렬해지면서 도저히 설 수가 없었기에 그는 포기하며 도로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어딘지 흐릿하게 느껴졌던 고통이 점점 강해졌다. 동시에 머리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파······.”
 그는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한계였다.
 “엄마, 아빠··· 아파······. 너무 아파······.”
 그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살아 있는지 조차 모르는 가족을 부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
 
 * * *
 
 눈을 뜨기 전, 그는 어제 일부터 일어난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소망했다.
 눈을 뜨면 늦잠 잤다고 타박하는 아버지가 있고, 웃는 어머니가 있고, 낄낄거리는 여동생이 있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놀고, 편의점의 예쁜 점원을 보며 짝사랑하는 친구를 놀리고······.
 한결 같고 평화로운 일상.
 이제 그는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슬프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고 보인 핏자국들로 엉망이 된 사무실을 보고도 절망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벽을 짚으며 일어서서 괴물로 인해 벽으로 날아가 부딪힌 배낭으로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특히 왼쪽 어깨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래도 그는 움직였다.
 ‘······상처를 빨리 소독하고 가야 해. 아, 소독할 것이 없구나. 물은 아껴야 하고··· 그래도 왼쪽 어깨는 너무 심하니까 물로 씻고 천으로 묶자. 붕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옷 중에 하나를 써야 되겠네.’
 너덜너덜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재킷을 벗으며 생각했다.
 ‘옷도 갈아입고··· 이건 버려야겠어. 피 냄새 같은 것을 맡고 또 오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거야.’
 어젯밤 괴물같이 냄새를 맡고 오면 안 되니까 이 건물에는 불을 붙여야 되겠다. 어차피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개과 동물은 불이 나면 탄 냄새 때문에 둔해진다고 들었다.
 불을 피우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고 보면 이런 생각으로 다른 건물들도 불이 난 걸까? 아, 그건 아니겠다. 저 괴물은 이 근처에만 사는 모양이니까. 탄 건물은 그 전에 있었어.’
 그는 문득 부서진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괴물의 뿔에 뚫려 처참하게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허망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네······.”
 괴물이 한 마리 더 있었다면 저 부서진 문을 통과하고 잠들고 있던 자신을 잡아먹었겠지. 그러나 운 좋게도 괴물은 한 마리였고 그는 무방비 상태에서 잠들었음에도 살았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은 걸까.
 ‘차라리 잠들었을 때, 아프지 않게··· 무섭지 않게 죽었다면······.’
 여태까지 생동감이 없었던 얼굴이 천천히 울 것 같이 일그러졌다. 옷을 갈아입는 그의 손길이 느려지고 마침내 멈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더 만나게 될까.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 나쁘면 죽겠지. 괴물의 이빨에 씹히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가족들은 과연 살아 있을까. 저런 괴물들이 있는 이 세상에서.
 그는 벗었던 피투성이가 된 재킷 안주머니에서 챙겨 두었던 가족사진을 꺼냈다. 다행히 사진은 상처 나지 않았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족사진.
 “엄마··· 아빠··· 아라야, 살아 있지? 응? 살아 있는 거지······.”
 살아 있어야 했다.
 이제 정말 가족을 다시 만나는 걸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까지 사라지면 그대로 주저앉아 자포자기해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사진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췄다. 그의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괴물의 피일까 자신의 피일까.
 그는 혹여 사진이 더럽혀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배낭 위에 올려놓은 후 상체에 남아 있던 옷을 마저 벗고 말라붙은 피를 긁어냈다. 물에 씻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왼쪽 어깨는 상태가 심각했다. 손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소스라치게 몸을 움찔거릴 정도로 아팠다.
 ‘적어도 물로 씻기는 해야 하겠는데.’
 그는 물이 담긴 통을 들어 눈을 꾹 감고 그대로 다친 어깨에 천천히 물을 부었다.
 “우으윽!”
 아직 쌀쌀한 날씨라 그런지 물은 서늘한 편에 속했다. 그것이 상처로 흐르기 시작하자 소름이 끼쳐 왔다. 추워서인지 아파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생수통을 반쯤 다 썼을 정도로 물을 썼을 때, 그는 행동을 멈추고 상처 부위를 보았다. 물로 꽤 많이 씻겨 있는 상처는 괴물의 잇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입에 물은 채로 옷자락과 살들을 뜯어 갔기 때문에 잇자국이 더 큰 상처에 가려진 것이다.
 ‘생각만큼 다치지는 않았네.’
 ‘물어뜯은’ 상처이니 만큼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상처는 얕은 편이었다. 물론 생각 외로 일 뿐, 절대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다.
 명백한 괴물이니 만큼 이상한 병균이 있어 감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의사가 아니니까.
 ‘술 같은 것을 부우면 알코올이니 소독이 되려나. 술도 하나 챙기는 건데.’
 술은 전혀 마시지를 않아 생각 자체를 못했다. 아쉬움을 느끼며 그는 가지고 있는 옷 중 깨끗한 흰 티 하나를 꺼내 챙긴 가위로 길게 잘라냈다.
 몸통 부위를 붕대처럼 만든 후 남은 옷가지는 혹시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챙겨 뒀다. 어제 입었던 셔츠도 피가 묻지 않고 멀쩡한 편인 몸통 부분 일부를 붕대처럼 오려 냈다.
 즉석에서 제조한 엉터리 붕대.
 그래도 그는 만족하며 상처 부위를 묶으려 노력했다. 제대로 붕대 매는법을 몰라 엉터리였지만 그럭저럭 상처 부위를 단단히 싸맬 수 있었다.
 가장 심각한 상처를 처리하자 그는 새 옷을 꺼내 입었다.
 도중에 사진을 새로 갈아입은 셔츠에 넣으려고 했지만, 다시 괴물을 만나서 싸우다가 찢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은 그는 식물도감을 꺼내서 그 사이에 사진을 끼워 넣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통조림 하나와 물 약간으로 아침을 마쳤다. 아침을 마친 후 그는 바지 주머니에 드라이버를 넣었다.
 목검은 쓰기에는 너무 망가져 있었고 드라이버 외에 무기로 쓸 만한 것은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도 어제 괴물의 눈을 찌른 후 워낙 꼭 쥐고 있어서 놓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의 눈에 그대로 꽂혀 있었겠지.
 나가기 전 아까 생각했던 대로 사무실에 불을 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무실에 있는 종이란 종이는 다 모아 한곳에 둔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 후 그는 배낭을 메고 계단을 내려왔다.
 밖으로 나오자 괴물의 시체가 보였다. 이 근처에 다른 동물은 없는 듯 괴물의 시체는 훼손되지 않아 있었다.
 ‘저게 날 죽일 뻔했던 괴물.’
 지금은 싸늘하게 식어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털은 사후 경직으로 더욱 빳빳해져 있었다.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박제나 고약한 취향의 인형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 시체에 차갑게 굳은 피가 한 때 살아 있던 생명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는 것.
 시체라고는 해도 괴물을 다시 보자마자 손에 땀이 나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워낙 깊이 박혔던 두려움과 고통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걸로 두려워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곧 입술을 꾹 깨물고 괴물 시체를 외면하며 걸었다.
 뒤에서 타닥거리는 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를 한곳에 쌓아 두고 불을 붙이니 금방 건물로 번진 모양이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생각보다 상처들이 깊지 않았는지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상처들, 특히 왼쪽 어깨가 욱신거리지만 그뿐이었고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걸으면서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목검을 가지고 나름 무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수였다.
 직접 생명체를 향해 진심으로 목검을 휘둘러보고 알았다. 목검은 어느 정도 타격감이라면 모를까 큰 상처는 줄 수 없다. 확실히 자신도 대련 도중 목검으로 몇 대 맞아 봤을 때 멍이 든 것이 다였으니까.
 살해당한 백골을 봤으면서도 직접적인 생명의 위험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싸움 자체를 너무 만만히 봤다. 하긴 생명의 위험은커녕 여태까지 싸움 한 번 못했으니 막연히 휘두르는 거라면 무기가 되겠지라고 생각한 그의 잘못이 컸다.
 그냥 싸움이 아닌 지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임에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인간만이 적이 아니다. 괴물이 적이다. 괴물을 상대로 목검이라니 어림도 없었다.
 실제로 목검같이 무른 무기는 금방 부서져 버릴 뿐이었다. 쇠 파이프나 식칼 같은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무기가 있어야 했다.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다른 이들이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은 다 챙겨간 모양인지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하다못해 주택에 들어가 식칼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괴물이나 그가 보았던 백골 같은 시체가 안에 있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지나가다가 공사 중이던 건물에서 적당한 각목을 찾아내 그것을 쓰기로 했다. 각목의 가시에 손을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각목의 가장자리에 잘라냈었던 셔츠의 천 조각을 감았다.
 ‘각목을 들고 다니는 것은 영화에서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는 실소를 터트렸다.
 각목을 들고 영화에서 조폭들이 싸운다. 그는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보곤 했었다.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보고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하나 이제 본인이, 그것도 괴물을 상대로 휘두를 생각을 하니 그때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던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진다.
 그 누가 이런 현실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각목을 오른손에 든 채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 몸을 움직여야 그나마 그 생각이 사라졌기에, 그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주변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있었다. 폐가로 변한 건물들과 조금씩 금이 간 도로, 사람이 돌보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무성히 자란 잡풀들.
 잡풀들 사이에 간간이 이상하게 생긴 식물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무시했다. 위험하지 않는 한 일일이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충분히 피곤한데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또 혹여나 관심을 두고 가까이 갔다가 독이라던가 식인 식물 비슷한 거라도 되면 곤란했다. 전에까지만 해도 과대망상이었겠지만, 괴물을 보고 난 후에는 꽤나 신빙성 있는 생각이었다.
 한참을 걸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간 후 다리를 건너면 수도가 코앞이다.
 ‘수도로 간다면, 일단 수도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든 될 거야. 그리고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는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노력하며 걸음에 힘을 줬다.
 그때, 작게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리며 언제든지 각목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 소리의 발생지를 확인하자 긴장이 탁 풀렸다.
 그곳에는 귀엽게 생긴 고양이가 잡초들 사이에서 배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고양이잖아.’
 그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어제와 같은 괴물은 당연히 포함 되지 않지만 저런 평범한 고양이라면 환영이었다. 평소 때도 고양이는 귀여워한 편이었다. 특히 괴물을 봤다가 그가 잘 알고 있는 자그마한 고양이를 보자 평소 때보다 훨씬 귀엽게 느껴졌다.
 고양이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 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야옹, 작게 울은 후 아장아장 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길렀던 고양이일까? 그래도 고양이, 그것도 주인이 있을 리 없는 것 같으니 떠돌아 다녔다면 경계심이 상당할 텐데.’
 그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도 오는 것을 멈추고 붉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
 ······붉은 눈을 가진 동물이 있던가? 아, 흰 토끼가 있지. 그와 비슷한 알비노 동물과. 저 고양이도 마찬가지인가 싶었으나 고양이는 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 털에 붉은 눈은 알비노라 할 수 없었다. 그럼······?
 ‘변종!’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양이와 거리를 벌렸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변종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고양이는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어제의 괴물과 겹쳐 보였다.
 ‘공격할 건가? 아니면 그냥 갈 건가? 적의는 없어 보이지만······방심하면 안 돼!’
 붉은 눈의 고양이는 살피듯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짐승의 붉은 눈동자와 긴장된 검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꿰뚫듯이 마주쳤다. 탐색의 시간은 짧았다. 고양이의 붉은 눈이 돌연 가늘어지더니 긴 울음을 내기 시작했다.
 냐옹― 야오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무엇이 나타나든, 저 고양이가 달려들든 일단 싸우기는 힘들다. 원래도 그럴 능력이 되지 않을 뿐더러 부상까지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주가 가능하든 말든 일단 뛰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달릴 때마다 왼쪽 어깨가 심하게 아파 왔지만 무시했다.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점점 더 많이 들려오고 있는 고양이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뛸 수밖에 없을 터다.
 야오옹. 냐옹.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고양이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고양이 소리가 이렇게 소름끼쳤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 소리라면 한두 마리는 절대 아니다. 적어도 열 마리는 넘는다.
 ‘······고양이는 육식을 주로 하지.’
 기르는 고양이는 사람들이 주는 사료를 먹고, 길고양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쥐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잊고 있지만, 고양이는 엄연한 ‘육식동물’이었다. 먹잇감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육식동물.
 또 눈이 붉다면 변종이든 무슨 병이 걸린 것이든 정상은 아니다. 더 위험했으면 위험했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대신 탓, 탁, 타닷. 생물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나던 소리는 곧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는 소리.’
 그는 이를 악물었다.
 ‘쫓아오고 있는 거야!’
 달리는 속도가 늦춰지지 않게 노력하며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달리는 것과 고양잇과 달리는 것. 당연히 고양이가 빠르다. 네발 동물과 두 발 동물의 달리기 결과야 뻔했다.
 다만 그가 먼저 뛰기 시작했고 다리 길이가 길며,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에 우세하지만.
 그는 달리는 채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하고 귀여웠던 생김새가 사라진, 이빨과 손톱이 잔뜩 두드러져 있고 눈이 쫙 찢어질 듯 올라간 채로 달려오는 고양이 떼.
 이미 고양이라기보다는 고양잇과의 새로운 육식동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빌어먹게 미친 세상 같으니!”
 욕은 연약한 어머니도 있고, 어린 동생도 있어서 쓰지 않는 편이었다. 애초에 차분한 성격이기도 했고.
 하지만 눈 떠 보니 시간이 몇 달은 지난 데다 세상도 이상하게 변해 있고, 해골을 보고, 밤에는 괴물과 싸우고, 생전 처음 심각한 상처를 입은 다음 겨우 출발하니 고양이 떼에 쫓기는 상황까지 오자 욕이 튀어나왔다.
 캬아아! 니야아아아!
 정적 속에서 쫓아오던 것이 언제였다는 듯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날카로운 소리로 울어댔다. 요란하면서도 앵앵거리는 소리에 귀가 아파 왔다.
 귀를 틀어막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따돌려야 해. 절대 다 못 죽여.’
 어떻게? 그는 자신이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수도로 향하는 길은 차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강 위에 다리를 세워 시간을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도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그가 살았던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알 수 없는 식물들과 난리의 후유증으로 폐허가 됐지만.
 ‘맞아, 강!’
 수도와 그의 도시 사이에 있는 강. 다리를 놓았더라도 여전히 밑에 흐르는 강물은 맑았다. 자갈과 모래도 깨끗하고 고았으며 가장 자리의 유속은 거의 없어서 여름철에 사람들이 그곳으로 피서도 갈 정도였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
 강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당장 고양이 떼를 따돌릴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는 거지 수영을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물속에서 고양이의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걸리는 것은 물속에 사는 괴물이 있다거나 강 주변에 있을 경우.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스스로의 운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보이는 거라고는 잡풀로 무성한 차도와 그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추측하자면 차도 전용도로가 시작된 지는 꽤 오래 되었으니 곧 강이 보일 거라는 것 정도.
 그때까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회의적인 생각을 했다. 몇 분 동안 뛰었지? 이렇게까지 최고 속도로 오랫동안 달려 본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 운동은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필사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차올랐다. 금방에라도 다리에 경련이 일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다행히 따라잡히지는 않았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따돌리지도 못했다.
 ‘강까지··· 어떻게 해서든 강까지 가야 하는데······!’
 “큭!”
 부담감 때문이지 바닥의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서 휘청거렸다. 짧은 신음과 함께 간신히 균형을 잡아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잠깐의 틈이 문제가 되었다.
 캬아아앙!
 무리 중에서 유난히 빨랐는지 다른 녀석들과 약간의 차이로 선두에 섰던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균형을 잡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여태껏 외면의 귀여움에 몰랐던 고양이의,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도망치는 사냥감은 다리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하필이면 물어뜯으려는 곳은 다리. 그것도 발목 부근이었다.
 ‘손에 든 각목을··· 아냐, 느려. 차라리······!’
 찰나의 순간 수십 가지의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그중 가장 최선이라 생각되는 방법을 택했다.
 놀랍게도 그는 물어뜯기기 직전에 놓인 다리를 애써 피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반대로 몸을 살짝 비틀어 달려드는 고양이를 향해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있는 힘껏 차 버렸다.
 냐아아아앗!
 아무리 이빨이 날카롭고 몸놀림이 잽싸다지만 서로의 체격이 너무 달랐다. 얼핏 재도 열 배에 가까운 차이.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고양이 한 마리라면 잡거나 이기는 것은 무리여도 반항은 충분히 가능했다.
 고양이는 그의 공격을 예상치 못했는지 제대로 맞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공중을 날았다.
 ‘점심시간 때마다 축구한 것이 이럴 때 도움되는군.’
 축구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년간 대부분 점심시간 때마다 축구를 했던 그다. 그 발차기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발차기에 맞았던 고양이가 착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져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그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하아··· 후우, 제길!”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야로 보이기 시작하는 고양이 떼를 보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뒤돌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리 중 하나가 당한 것을 보아서 그런지 더욱 날카로운 소리가 뒤에서 울리고 있었다.
 다시 뛰기 시작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어······.’
 좋지 않다. 속도가 아주 조금씩이지만 느려지고 있었다. 강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고민하긴 했다. 강이나 그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괴물과 스스로의 체력.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그도 필사적이었다. 덕분에 그가 평소 짐작하고 있던 스스로의 체력보다는 훨씬 잘해 줬지만 이제 한계였다.
 ‘강까지는 앞으로 최소 10분은 더 남았을 텐데.’
 차로는 금방이었기에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고양이 떼와 싸울 걸 그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왼쪽 어깨의 상태 가지고는 싸우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이 순간 뛰는 것에도 왼쪽 팔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고통을 주고 있었다. 어깨가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을 보니 상처도 더 벌어진 모양이었다.
 처음이야 괜찮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거칠게 뛰니 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하아, 하아······.”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숨이 막혔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도 쉬지 못하고 다시 뛴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눈앞에는 여태까지 없었던 오르막길이 모습을 보였다. 지친 상태에서 오르막길이란 끔찍하게 느껴졌겠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
 ‘오르막길이야! 기억나! 이 길만 지나가면 강이다!’
 조금만 더 가면 살 수 있다. 고양이 떼를 따돌릴 수 있어!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달렸다.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점점 느려지는 속도는 어떻게 할 수 없는지 뒤의 고양이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그래도 괜찮다.
 ‘강에만, 강에만 도착하면······!’
 오르막길에 오른 그는 표정을 밝게 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강 바로 위에 세운 다리니 만큼 처음 아래는 그다지 높지 않다. 옆에 강 주변에서 피서 가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따로 빼 두긴 했지만 그렇게 돌아갈 힘이 없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된다. 그러면 저 고양이 떼를 따돌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대신 그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대로 다리를 멈췄다.
 ‘강에만 도착하면······.’
 털썩.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는 완벽하게 무너져 있었다. 수많은 다리의 잔해와 녹이 슨 자동차와 버스들. 그리고 살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기어 나온 흔적이 있는, 떠올라 있는 고철들 위에서 바짝 마른 시체들. 사람들에게 유용함을 줬던 자동차에 깔려 하반신은 보이지 않은 채 상반신만 보이는 시체. 마치 마른 수풀처럼 하늘을 향해 얽혀 있는 구부러진 철근들.
 거리가 멀어서 다행이었다.
 썩어 가는 시체를 바로 코앞에서 보고도 멀쩡할 정도로 강해지지도 익숙해지지도 못했으니까.
 그는 쫓기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멍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온갖 것들이 쌓여 있는 강은 전처럼 맑고 투명한 색이 아닌 녹슨 고철에 섞인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햇빛에 곱게 반짝였을 흰 모래밭에는 피가 말라붙은 것 같은 검붉은 자국들과 앙상한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보··· 같아. 다리가 무너져 있을지도 모를 생각은 왜 하지 않은 거지.’
 강은 시체와 다리의 잔해, 이제는 고철이 되어 버린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진 댐에 완벽히 끊어져 버렸다.
 그 슬픈 댐이 막고 있는 그 너머에는 기이한 괴물들이 생긴 모양이었다. 수면 근처에서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물고기 그림자, 근처의 새를 낚아채 버리는 검은 촉수들. 흐린 물 표면이 흔들거리며 괴물들의 꿈틀거림을 보여 줬다.
 “푸, 후후··· 아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양이 떼에 물어 뜯겨 죽나, 아니면 강에서 사는 미지의 괴물에게 죽나 이제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은 건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려고 했는데. 죽고 싶지 않은데. 결국 여기까지?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계속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웃음을 멈추고 일어서지 않은 채 몸만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떼는 이제 몇 초만 있으면 그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어느 쪽이 덜 고통스럽고, 덜 무서울까.’
 스스로 생각해도 비참한 생각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머리 한 구석은 어쩐지 차분했다. 현실감이 없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공포심이 나오는 구멍을 뭔가가 틀어막은 것처럼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가라앉았다.
 ‘그래, 순순히 죽지는 않아.’
 자신은 저 고양이 떼보다 강한 괴물을 이겼었다. 무섭고, 아프고, 괴로웠지만 끝까지 살기 위해서 발버둥 쳐서 이겼다. 살아남은 것이다.
 맥없이 포기하며 주저앉지는 않을 거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을 거야!’
 격렬한 운동 후의 허탈감으로 인해 힘이 풀린 다리를 각목으로 지탱하며 일어섰다. 고양이는 이제 코 앞.
 각목을 휘두를 힘도 없다. 도망칠 힘도 없다.
 비틀거리는 불안한 걸음으로 그는 무너진 다리로 인해 끊긴 도로 가장자리로 향했다. 가장자리에 도착한 가방이 단단히 메여져 있나 확인 한 후 각목을 가방 한쪽에 고정시켰다.
 도박이다.
 다리가 부서져 막힌 위쪽으로는 괴물의 모습이 보여도 아래쪽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 깊숙이 모습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이 외에 방법이 없었다.
 앵앵거리는 고양이 소리가 등을 때렸다. 어서 먹이가 되라는 듯 무너진 다리 위쪽의 수면에 일제히 촉수들이 올라와 환영하듯 흔들거렸다.
 ‘웃기지 마.’
 그의 눈이 빛났다. 누가 괴물 따위에게 죽는다고? 절대로 순순히 죽어 주진 않을 거다.
 ‘살아남을 거야!’
 그는 망설임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 * *
 
 뺨에 닿는 촉감이 껄끄러웠다. 무거운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몸이 어딘지 눌린 느낌이 들었다. 몸과 주변 상황은 별개로 그의 기분은 어쩐지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모처럼 푹 잠을 잔 듯 나른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으며 좀 더 이 느낌을 즐기기 위해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몸을 뒤척이면서 들린 ‘철퍽’소리에 몸을 멈칫 굳힐 수밖에 없었다.
 ‘철퍽? 왜 내 방에서 그런 소리가?’
 뺨에 닿는 꺼끌꺼끌한 모래의 느낌과 젖은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 게다가 허리 아래부터 느껴지는 서늘하면서 기분 좋게 찰랑거리는 ‘물’.
 ‘잠깐, ‘내 방’? 아냐, 여기는······!’
 그는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아까부터 뺨에서 느껴졌던 거친 느낌의 모래와 모래가 있는 곳에서 조금 멀리 부터 있는 무성한 나무들. 드문드문 자란 들풀 사이에서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
 어쩐지 평화로운 장소라는 생각을 주는 곳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앉으며 좀 더 상황을 살폈다.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은 다름 아닌 물가였다. 아까부터 허리 아래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것을 느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깨끗해. 게다가 그냥 물고기까지 살고 있어.’
 물가에서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그의 몸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작은 송사리들이 있었다.
 그는 언뜻 강으로 뛰어들기 전 다리 잔해로 막힌 위쪽 부근에서 보았던, 아마도 수중 괴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촉수나 검은 그림자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리로 막힌 위쪽만 괴물이 살고 있었던 건가?’
 그렇지 않다면 그 괴물들 입장에서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떨어졌는데 이렇게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몸을 확인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괴물은 둘째 치더라도 용케 익사하지 않고 무사히 물가까지 떠내려 왔다.
 ‘저번에 뿔 달린 괴물과 싸웠을 때도 그렇고, 나 생각보다 운이 좋은 편이었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들었다. 몸에 이상이 없는 것 같으니 주변을 더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푸른 숲 속에서 이질적은 검은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나무들과 생김새가 달랐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보이는 검은 것.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곧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건 마루탑?’
 뾰족한 첨탑의 꼭대기에 마루탑의 상징인 원 두 개가 겹쳐진 기묘한 조각이 보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정확히 30년 전에 만든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가장 높기에 장비가 있고 시야에 장애물이 없다면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수도의 명물로도 정도로 유명하기에 중학교 수학여행의 행선지 중 하나도 저 마루탑이었다. 그 외에 한두 번이지만 가족끼리 가 본 적도 있었다.
 ‘마루탑··· 무사했구나. 다리처럼 무너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수도는 무사하다는 뜻일까? 그는 기대감을 가지고 생각했다.
 다리까지 무너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도 다리는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그것을 수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이 나라 상황이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수도의 마루탑이 저렇게 무사하다면 수도는 예상외로 멀쩡할지도 몰랐다.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가족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생각에 밝은 표정으로 강 건너편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마루탑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러면 빨리 가야······!’
 흥분된 마음에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일까. 충동적으로 급히 수도를 향해 움직이려던 그는 순간적으로 불을 지진 듯이 화끈거리는 어깨의 고통에 도로 주저앉았다.
 “윽!”
 낮게 신음하며 그는 오른쪽 손으로 왼쪽 어깨를 잡았다. 어깨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왼쪽 어깨 상처를 잊고 있었어. 물에 뛰어들기 직전에도 꽤나 아팠었는데. 물에 닿기까지 해서 상처가 더 심해진 건가? 그런데 왜 피가 검은 색이지?’
 분명히 처음 상처가 나서 피가 나왔을 때는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설마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 괴물이 병원균이나 위험한 독이 있어서 이상이 생긴 걸까?
 그는 긴장된 얼굴로 어깨의 상처를 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상의를 풀었다.
 상체를 풀고 드러난 왼쪽 어깨에서 어설프게 감은 붕대 대신의 옷가지까지 모두 풀어 버린 그는 물끄러미 상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데.’
 상처는 송곳니 부분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깊이 다친 곳만 제외하면 아물어 가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보기 징그러웠을 정도로 잔혹한 상처였지만 지금은 멀쩡한 편이었다. 이상하게 검은 피가 새어나오고 있지만 그것도 양이 서서히 주는 것이 곧 멈출 모양이었다.
 정말 지나치게 멀쩡했다.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어디에 심하게 긁혀진 상처로 볼 정도로.
 ‘원래 짐승들에게 물린 상처가 이렇게 빨리 낫던가?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심하게 물린 게 아니었나?’
 아니다. 의학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그지만, 그가 물렸던 상처는 만약 병원에 간다면 몇 십 바늘은 꿰매야 하는 상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처 부근을 바라보았다.
 ‘이상해. 이건 그냥 회복력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수준을 넘잖아. 그러고 보니 고양이한테 쫓길 때도 내 예상보다 훨씬 오래, 더 빨리 뛰었어. 그때는 제대로 생각할 정신이 없었지만, 솔직히 몇 십 분 동안 고양이 떼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은······.’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알 수 없는 한기가 몸을 스쳐 지나갔다. 몸이 젖어 있더라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온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는 양팔을 들어 몸을 감싸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 몸··· 뭔가 이상해.’
 강한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나뭇잎들이 부딪혀서 바다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를 냈다. 거리를 지나갈 때 가끔 들었던 익숙한 새소리가 일제히 울린다. 찰랑찰랑 동심원을 그리며 바람으로 인해 퍼져 나가는 잔잔한 강의 물결과 벌레의 울음소리.
 ‘귀가 너무 예민해.’
 그는 이 모든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귀가 민감하지 않았다. 평범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조용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잘’ 들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 마루탑을 봤다.
 ‘내가, 내가 어떻게 마루탑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지?’
 아무리 가리는 장애물만 없고 시야만 좋다면 어느 정도 거리 안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높은 탑이라지만 한계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수도 쪽으로 휘어진 강에 떠밀려 왔다곤 해도 이 거리에서 식별이 가능하다고? 꼭대기의 조각까지 희미하게라도 보일 정도로?
 ‘이런 신체 능력이라니, 이건 마치 괴물 같······.’
 괴물.
 그 한마디를 인식하자마자 그는 크게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웁, 우윽!”
 심한 헛구역질이 나왔다. 눈물이 나올 정도의 헛구역질에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떨어진 눈물이 헛구역질을 하며 본능적으로 숙여진 머리로 인해 수면 위로 떨어졌다. 그는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로 수면을 보았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더 없이 괴로운 얼굴을 한 채로.
 괴물. 괴물. 괴물. 괴물. ······내가 괴물이야?
 그의 입술이 파랗게 떨렸다.
 “아니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그는 얼굴을 그대로 물에 처박았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겼다. 부글거리는 공기 거품이 일어나고 주변에 먹이를 준 것처럼 모여들었던 송사리들이 놀라 흩어졌다.
 서늘한 물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덕분인지 머릿속에 울리던 괴물이란 단어와 그 단어가 불러왔던 불안감도 차갑게 변해 사라졌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해!’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하며 그는 물속에 잠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렇게 더 이상 숨을 참기 어려울 때까지 된 후에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푸하!”
 홱 머리를 들은 그는 크게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볍게 뺨을 찰싹 때렸다.
 얼얼한 느낌과 함께 정신이 확 깼다.
 ‘동요하지 말자. 몸이 이상할 정도로 좋아지면 뭐 어때. 괜찮아. 괴물 같이 변한 것도 아니잖아. 정신도 미치광이처럼 변한 것도 아냐. 멀쩡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좋은 쪽. 그래. 괴물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이렇게 변했으니까 초능력자? 그, 그런 류가 된 것일지도 몰라. 외향 변화도 하나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일부러 의식적으로 좋은 면만 본 것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우울해질 뿐이니까.
 ‘그래, 어차피 원상태로 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자. 신체 능력이 올라갔다면 앞으로 싸울지도 모를 괴물들에게 더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간 거잖아. 다른 사람이나 가족을 지킬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후우.”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며 스스로의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안도했다. 처음 떠오른 ‘괴물’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앙금처럼 남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물가에서 걸어 나갔다.
 이대로 하반신만이긴 하지만 물 안에 계속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괴물이 사방에 있을 이 상황에서 병이 나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위험했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변한 몸이 물에 좀 있었다고 약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쓴웃음을 지은 그는 모래가 있는 지대에서 벗어나 적당한 풀밭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수 가방이기에 내용물을 걱정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든 것이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는데.’
 그는 젖은 옷을 벗어 몇 차례 짠 후 근처 적당한 나뭇가지 위에 걸어 두었다. 가져갈 사람조차 없는 곳이니 마음 놓고 걸어놓았다. 옷을 전부 벗은 그는 가방에서 긴 팔 난방과 청바지를 꺼내 갈아입고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안전해 보이는 이곳에서 자고 가야 되겠어. 함부로 이동하다가 괴물을 만나면 위험하니까. 이곳도 아주 안전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정신을 들 때까지 별일 없었으니 다른 곳보다는 낫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이동하기에도 날이 늦어서 무리였다.
 달빛이 환하다고 해도 밤에 숲을 헤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보통 숲도 아닌 괴물도 살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숲은 더더욱.
 그는 이러지리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위가 사라져 가기 시작해서인지 벌레들이 있었다.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가 약간 쌀쌀하다 싶은 밤을 울렸다.
 ‘초여름··· 여름이라서 다행이야. 좀 춥긴 해도 불을 피워야 될 정도는 아니니까. 벌레가 많아져서 싫기도 하지만. 아, 괴물이나 이상하게 변한 고양이까지 있을 정도니까 위험한 벌레도 있으려나?’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긴팔 셔츠의 단추를 다 잠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담요 하나를 꺼내서 몸에 둘렀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감쌌다.
 ‘어차피 작은 벌레라면 막기 힘드니까 이 정도만 해 놓자.’
 그 후 저녁을 먹을까 싶었지만 아까 헛구역질을 심하게 해서 그런지 입맛도 없고 딱히 배고프지도 않았다. 그는 뒤로 팔짱을 껴서 머리를 받친 후 나무에 기대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해는 서서히 져 가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투명한 강은 거울처럼 그 하늘을 비춰서 마치 강과 하늘이 이어진 것같이 보였다. 푸르른 나무의 잎사귀들도 노을빛과 섞여져 따스한 적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예쁘네······.”
 이런 상황에서 자연 풍경 감상이라니. 그는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피식 웃었다.
 벌레나 새소리,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한 장소라서 그럴까. 아니면 물속에서 떠밀려져 온 것도 생각보다 몸을 지치게 해서 그런 걸까. 그는 점점 감겨드는 눈꺼풀 속에서 생각했다.
 ‘아무려면 뭐 어때.’
 그는 담요를 목까지 올리며 눈을 완전히 감았다.
 ‘친구들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인한 탓일까, 잠들기 직전 익숙하고도 아련한 피리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추억 어린 꿈을 꿨다. 언젠가 그의 사촌이자 친한 친구인 다인이 학교 음악 시간에 앞으로 나와 연주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작곡한 곡을. 반 친구들과 선생님, 그 또한 모두가 그녀의 연주에 감탄하며 박수를 쳤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제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을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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