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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 (1화)

2017.06.15 조회 970 추천 6


 카미엘 전기 1권 (1화)
 프롤로그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동굴 안.
 백발이 무성한 장발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사내가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인생이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구나. 허허!”
 천마신교의 부교주 사독천은 인생의 무상함에 눈물을 흘렸다.
 동굴 입구에서 죽어 가는 수하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인생을 회고한다.
 교주의 자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며 천마신공에 몰두하였다.
 피에 미친 살인귀가 되어 10년이란 세월을 살았다.
 정신을 차린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토록 바라던 교주의 자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래, 부교주의 자리에서 만족하며 살자.
 욕심을 버렸건만 사독천은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다. 마교에서는 당연시되는 관행, 배신이었다.
 오랜 벗 진설충을 위하여 교주직을 양보한 것이 화근이었다.
 권력 앞에 형수도 베어 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더욱이 암투가 난무하는 마교에서 친구를 믿은 것은 일생일대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조금만 더 독했더라면 이런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교주직을 양보한 것은 모두 늦은 깨달음에 있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진설충과 사독천은 희대의 천재라고 불릴 만하였다. 역사를 통틀어 대성한 자가 몇 되지 않는 천마신공(天魔神工)을 동시대에 대성하였다. 사독천이 교주직을 양보한 것은 신공의 깨달음이 조금 늦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 사독천은 진설충이 오랜 시간부터 배신을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에 중독되었고 오랜 정인이었던 설란까지 빼앗겼다. 그것도 모자라 무림 공적이 되었으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사독천은 천천히 검을 잡았다.
 척!
 그는 차가운 검 끝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싸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입술이 떨려 온다.
 이윽고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흐른다.
 시커멓게 타 버린 가슴속에는 단 한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
 “설란!”
 그녀와의 추억과 함께 이 세상의 미련을 담아서 검을 밀어 넣었다.
 푸욱!
 날카로운 검이 그의 후두부를 관통하여 들어왔고 뜨겁고 비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쿨럭! 컥!”
 푸하하학!
 동맥이 뚫리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사방에 피를 뿌리며 경련을 일으키던 사독천은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죽어 가는 순간, 눈앞에는 설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사독천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녀를 잡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
 
 카이사르 공작령.
 300년 전 칼리어스가 건국될 당시 가장 큰 공을 세운 검공 알테인에게 내려진 영지로써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항구 도시였다.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대륙과 대륙 사이를 이어 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고, 명실상부 칼리어스의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황금기를 누리던 카이사르도 대를 거치면서 점점 쇠퇴해 갔다.
 조직화된 해적들과 산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교역의 루트가 사방으로 막힌 카이사르는 점점 고립되어 예전의 성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300년이 흐른 지금은 일개 자작령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상태와 인구수를 유지하며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제 11대를 맞이하는 카이사르의 영주 랭턴 공작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아, 아니! 내 아들놈이 왜 피떡이 되어 돌아왔단 말인가?”
 왕국의 아카데미로 연수를 보냈던 아들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약관을 넘긴 그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충분이 놀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들것에 그를 싣고 온 쿤트는 말끝을 흐렸다.
 “말하라! 내 아들놈이 이러고 누워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어제 고급 술집에서 계집을 셋이나 끼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순간 걱정스런 얼굴을 하던 랭턴의 낯빛이 변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쿤트의 말을 들은 랭턴은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휴······ 이 미친놈이 또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려다 붙잡혔던 것이군. 아예 앞으로는 일어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 버리게.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군.”
 이제는 지쳤다는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랭턴은 이마를 짚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뿐인 아들이 하필이면 저런 망나니란 말인가!”
 뒤돌아서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던 랭턴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 온다.
 “네, 이놈······!”
 “각하?”
 돌아선 그의 눈에서는 인간의 예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 뿜어져 나왔다.
 더 이상 화를 주체하지 못한 랭턴은 검을 빼어 들었다.
 챙!
 “네 이놈! 아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가, 각하!”
 칼을 빼어 들고 아들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눈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었다.
 “막아라! 공자님이 죽을 수도 있다!”
 “각하!”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달했다고 알려진 그의 신체능력은 인간을 초월하였다.
 랭턴의 허리와 다리를 붙잡은 기사들은 그 엄청난 완력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러지만도 못한 녀석아! 차라리 함께 죽자. 너를 죽이고 나도 조상님들을 따라가련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그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간신히 랭턴 공작을 만류한 기사들은 식은땀을 훔쳐 내었다.
 “아······.”
 랭턴은 마침내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기사들은 기겁하며 그를 부축하였다.
 “주, 주군! 어서 의원을 부르라! 무엇하느냐!”
 “주군!”
 카이사르의 기사단장 헥토르는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랭턴 부자를 보며 혀를 찼다.
 “어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시는 것인지. 주군이 아직까지 거동하신다는 것이 신기하군.”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헥토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미 한두 해가 아니지 않느냐.”
 
 
 
 1장 삶의 의미를 발견하다
 
 
 “독천, 일어나 식사하세요. 어서요.”
 눈을 뜬 그의 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다.
 쌍꺼풀은 없지만 커다란 눈.
 오뚝한 콧날, 앵두 같은 입술.
 비녀와 함께 말아 올린 머리는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과 아주 잘 어울린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여인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천사 같았다.
 “후훗, 뭘 그리 보십니까? 소첩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아름다워서······.”
 얼굴을 살짝 붉힌 여인은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왠지 익숙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다.
 그의 입속으로 그녀의 향기가 흘러들어 온다.
 향기에 취해서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입술을 땐 그녀는 부끄러운 듯 그의 품에 안겼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독천의 품에 안긴 여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후훗,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고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여인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꼬옥 안으며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설란.”
 쪽!
 다시 한 번 그에게 입을 맞추며 설란이 말했다.
 “다시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설란, 내 사랑 설란!”
 이윽고 기나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의 방.
 외상으로 얻어먹고 다니는 술값만 해도 성 한 채를 통째로 살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지독한 한량이었다.
 여자라면 앞뒤 분간하지 않는 난봉꾼에다 검공의 장남임에도 전혀 검과 거리가 멀다.
 그런 카미엘도 혈육이 있다.
 랭턴.
 그의 아버지이며 칼리어스의 공작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카미엘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고요하던 방문이 세차게 열렸다.
 철컥!
 문이 열리며 랭턴이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카미엘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한 자세로 서서 그를 맞았다.
 “아버님, 소자 불민하여 아침 문안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어제의 일을 무마시키려 하는 행동이리라.
 랭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치며 말했다.
 퍽!
 “미친 척하면 내가 용서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이젠 별짓을 다하는구나!”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카미엘은 넙죽 큰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자, 또 한 번 아버님께 불효를 범했습니다. 이 죽일 놈을 용서하십시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며 랭턴은 더욱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 이제 연기를 다 하는구나!”
 “흑흑! 어머니 죄송합니다. 하늘은 편안하십니까? 이 못난 아들이 아버님에게 또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주먹을 쥐어 안면에 한 대 갈겨 버리려던 랭턴의 팔을 부여잡은 카미엘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버님, 요즘 쉽게 피로해지시고 머리가 무겁고 아프시지 않으십니까?”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던 랭턴은 아들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쩍 그런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흠, 그러고 보니 요즘 그런 현상이 잦아졌지.”
 “가끔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발이 저리고 발이 붓는다던지 어지럽고 귀가 울린다던지.”
 곰곰이 되 집어보던 랭턴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데 그걸 잘 아는 놈이 그따위 개도 안 하는 짓거리를 하고 다닌단 말이냐!”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충혈되며, 코피가 자주 난다거나······.”
 “아니, 이놈이!”
 눈에 핏대를 세우는 랭턴을 보며 카미엘은 혼이 나간 듯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아이고, 아버님이 못난 불효자 때문에 고혈압이 오셨구나! 제가 책임지고 아버님의 병을 낳게 해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카미엘을 보며 랭턴은 다시 뒷목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아아······ 저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아버님! 잠시만 계십시오!”
 툭툭툭!
 상승하는 혈압이 좁아진 혈관을 통과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재빠르게 점혈을 통하여 좁아진 혈관을 자극함으로써 쌓여 있던 노폐물을 제거하였다.
 “오오! 이젠 뒷목이 한결 좋군. 신기한 일이로고!”
 “당분간 약주와 기름진 음식을 삼가시지요. 제가 오늘부터 혈압에 좋은 약을 모아 오겠습니다.”
 카미엘은 언제 무릎을 꿇었는지 가지런히 손을 모아 공손하게 접은 자세로 일관하였다.
 “아무래도 저놈이 어제 맞은 매가 잘못된 것 같군. 헥토르, 저놈을 좀 어떻게 해 주게나.”
 헥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자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 주군. 공자님이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실제로 뒷목도 이제는 괜찮으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랭턴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카미엘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들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뭔가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가 잘못되었거나 연기를 하는 것이다. 어찌 사람이 한순간에 변한단 말인가?”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똑바로 앞만 보고 있는 카미엘을 보며 예전의 그를 떠올렸다.
 망나니, 주정뱅이.
 딱히 더 떠오르는 단어도 없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은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라고 하더군. 또 모르지, 나에게 맞아 죽을 날이 가까워서 그런지도.”
 역시 랭턴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하긴,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도저히 구제할 방법이 없다 여긴 랭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오늘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간다 생각하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랭턴은 고개를 저으며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쿵!
 둔탁한 소리에 놀란 랭턴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다름 아닌 카미엘이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며 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가시는 길 살펴 가시옵소서. 아니, 소자가 뫼시겠습니다.”
 일어나려는 카미엘의 이마를 손으로 눌러 그를 앉힌 랭턴은 질렸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좀 누워서 쉬거라!”
 돌아선 랭턴에게 카미엘은 연신 절을 하며 외쳤다.
 “아버님, 살펴 가시옵소서!”
 발걸음이 멀어지도록 카미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들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하는 랭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미친놈. 이제 와서 뭐가 어째? 잠깐, 저놈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따위 행동을 할 리 없다. 일단 저놈을 물고를 내고 알아봐야 할 일이다!”
 카미엘을 요절낼 목적으로 몸을 날리던 랭턴은 그만 다리를 부여잡은 헥토르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기사들도 보는데······.”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눈이 다시 불안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러다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눈치였다.
 주위를 둘러본 랭턴은 몸을 툭툭 털더니 돌아섰다.
 “험험, 들어가지.”
 
 사람이 어떤 계기가 생기면 철이 들기 마련이다.
 카미엘은 확실히 철이 들긴 했으나 그것이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전생에 대한 각성.
 그것은 온전한 카미엘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넙죽 절도 하고 진찰도 해드렸다.
 점혈도 해드려 졸도할 뻔했던 고비도 넘겼다.
 결코 카미엘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전생의 기억이 각성된 지금을 보고 철이 들었다고 해야 옳은 것인가?
 카미엘은 아직도 아까 맞은 머리가 윙윙거리는지 옆통수를 부여잡았다.
 “참, 아버님의 성격이 아주 불같구먼. 그러게 삶을 조금 더 모범적으로 살아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카미엘의 인격은 환생을 거치면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에 전생의 인격이 씌워진다면 아마 사독천일 것이다.
 그는 전생을 되돌아보았다.
 교주의 자리를 위해서 무조건 앞만 보며 달려왔다.
 그렇다 보니 사람답게 살아 볼 기회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배운 의술을 사람 살리는 데 사용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아니면 이렇게 된 마당에 집안에 내려오는 검법을 익혀 정계로 진출하여 효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허리와 턱이 쑤셔서 제대로 된 운신을 하지 못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고 몸을 회복하여 랭턴에게 약초나 캐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카미엘은 방문을 열기 위해 발을 내밀었다.
 아직 욱신거리는 허리가 신경 쓰인다.
 그러던 그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운기조식을 할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가? 젊은 몸을 가져도 정신은 젊어지지 않는 것인가?”
 가부좌를 트는 카미엘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기의 흐름에 집중한다.
 아랫배 부근에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단전이 있다!’
 의외의 일이다.
 선천적으로 단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람을 해부해도 나오지 않는 것이 단전이 아닌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오랜만에 부드러운 단전의 느낌에 기분이 좋은지 카미엘은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무공을 수련할 수 있겠어.’
 그렇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천마신공은 고질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폭주.
 사람의 천성과는 전혀 무관한 폭주라는 개념이 있다.
 일단 마공을 접하게 되면 어느 정도 잔인한 손속을 갖게 된다.
 그러다 점점 피를 갈구하게 되고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이성을 놓아버린 상태로 백치가 되는 경우도 있고 주화입마로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
 이미 폭주를 경험한 카미엘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이성을 잃어서 사람을 도륙 내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일이 그렇게 틀어진다면 강호의 공적이 되었던 것보다 더 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초식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상처 치료에 필요한 운기조식이면 충분하다.
 한 바퀴 기를 순환시키고 나니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몸이 괜찮아졌으니 산과 들로 약초를 캐러 갈 시간이다.
 풀이 자라고 동식물이 번성하는 땅이라면 분명 약초가 자랄 것이다.
 카미엘은 옷을 챙겨 입고 이불보로 봇짐을 만들었다.
 영락없는 보부상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에 기상천외한 짓을 하고 다녔던 카미엘이라서 이젠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원래 미친놈이 조금 더 미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선 카미엘은 약초 채취에 필요한 장비와 지도를 챙기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온 랭턴은 헥토르와 예산에 관한 안건으로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일개 자작령보다 못한 재정으로 거대한 카이사르를 꾸려나가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도대체 몇 대째 가난을 겪고 있는지 그 시간을 수기로 기록하려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백수십 년을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오면서 이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공작의 칭호 하나뿐이었다.
 젊어서부터 부지런하게 영지를 돌보아온 랭턴 덕분에 그마나 이 정도 유지되는 것이었다.
 “올해는 농사도 흉년이라 이 예산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단장과 재정을 함께 담당하는 헥토르는 자신이 만든 장부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나무껍질을 벗겨 먹게 생겼군. 다른 교역로가 없는지 다시 한 번 탐사를 해 봐야겠어. 아무리 높은 산맥이라도 뭔가 방도가 있을 터.”
 헥토르는 랭턴의 생각을 메모하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탐사대를 꾸려 내일이나 모레쯤 출발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요즘은 어업도 못하게 설쳐대는 해적들이 더 문제로군. 어째 해가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저렇게 날뛰는 것인지.”
 카이사르의 가장 큰 문제는 본래의 생업이었던 어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새는 마을 가까이 들어오는 해적들 때문에 어부를 포기하는 주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팔란 섬의 통치가 원활했던 때는 사정이 나았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불어났단 말이야.”
 이윽고 랭턴은 식은땀이 나는지 불편함을 나타내었다.
 “머리가 아프군. 잠깐 쉬었다 하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랭턴을 보며 헥토르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시지요. 소장은 가서 차라도 내오라 하겠습니다.”
 “그래 주게.”
 집무실을 나와 시녀들을 부르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기던 헥토르는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카미엘을 보았다.
 “공자님?”
 편안한 복장으로 뒤에는 이불보까지 매달고 가는 것을 보니 아마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리라.
 헥토르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뭘 잘못 드셨나?”
 
 도서관으로 들어온 카미엘은 지리에 관련된 서적들을 찾았다.
 책이라면 숙면에 필요한 수면제라 생각했던 예전의 카미엘이었기에 지리나 역사에 대하여 지식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정말 주위에 뭐가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본적이 교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까지 책과 담을 쌓고 산단 말인가?”
 독천 역시 평소 독서를 즐겨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 담쌓고 살지는 않았다.
 웬만해서는 출입하지도 않았던 곳이라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당연히 알 길이 없었다.
 사서가 따로 있지 않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다. 한 권 한 권 표지라도 훑어보는 수밖에.
 어차피 해가 지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고 어떤 책이 있는지도 궁금했던 그는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제왕 학, 경제론, 카이사르 지리. 아, 여기 있군.”
 주황색 표지로 깔끔한 외관을 갖춘 지형 설명서였다.
 그나마 글이나 아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런 것도 다 있군.”
 지형 설명서의 옆에는 뭔가 대단히 오래된 책이 꽂혀 있었다.
 “뭐야, 저건?”
 먼지가 자욱하게 앉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 뭐라 적힌 것인지 모르겠지만 범상치 않은 물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무심코 책을 꺼낸 카미엘의 눈은 터질듯이 확대되었다.
 ‘한자!’
 행여 누가 들을까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 하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책을 꺼내어 읽어 내려갔다.
 책에 나와 있는 첫 번째 글귀는 이러했다.
 [천마신공(天魔神工)]
 ‘천마신공? 이럴 수가 있나!’
 번역본까지 떡하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던 것을 보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음이 분명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천마신공은 그저 고서적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말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천마신공을 배우고 성취를 이루었던 카미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만한 비급이 이런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니!
 흥분되는 마음으로 일단 비급을 챙겼다.
 어쩌면 불완전한 비급의 일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였다.
 카미엘은 품안에 잘 갈무리한 비급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중략. 천마신공의 오의는 #$%^ 이다. %$^#&*&&^#$를 조합하면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으며 폭주를 막을 수 있다. 초식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 이며 이 #$%$%^는 %^^%&이며 %#^%&이다. ······중략.]
 한참이나 책에 빠져들었던 카미엘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날판이었다.
 “무슨 책이 이따위란 말인가?”
 정작 중요한 부분은 전부다 지워지거나 상형문자로 되어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번역본 역시 상태는 같았다.
 이것은 분명 완전한 천마신공이 분명하다.
 천천히 읽어본 카미엘은 자신이 왜 폭주를 하였고 피를 갈구하였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중원에서 전수받았던 천마신공은 중간이 잘려나간 비급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교주의 제자들은 모두 반쪽짜리 천마신공을 가지고 연마를 했던 셈이다.
 “하필 정작 중요한 부분만 이따위란 말인가!”
 만약 이 상태라면 지금 찾아낸 기연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천천히 번역본과 대조하던 카미엘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 온전한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마공이 세상에 나와 질서를 어지럽힐까 두려워 원본은 팔란이라 하는 커다란 섬 한가운데······]
 “뭣이!”
 지금은 해적들이 창궐하여 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 되어버린 팔란섬은 가끔 해적들을 피한 배들이 소식을 알려주는 정도였다.
 영지의 면적의 일할을 차지하는 팔란섬은 그 규모로 보면 꽤 넓은 편이었지만 워낙에 거리가 멀어서 원활한 통치가 힘든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해적들이 판을 쳐서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곳에 완전한 비급이 숨겨져 있다!
 만약 반쪽짜리 무공이 아니라 완성된 천마신공을 몸에 익힌다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카미엘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곳까지 간다는 말인가?”
 가깝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초상비로 물위를 뛰어간다 해도 아마 지쳐서 물에 빠져죽을 정도의 거리였다.
 “역시 배로 움직여야 하는데·········.”
 아마 그곳으로 가는 배는 해적선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천마삼경의 원본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다!
 어떻게든 무공을 습득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해적 놈들!”
 쾅!
 테이블을 세차게 내려친 카미엘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네놈들을 도륙내고 천마신공을 손에 넣겠다.”
 
 카미엘의 방.
 천마신공을 손에 넣어도 익히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기본적인 신체조건을 알아보기 위해 카미엘은 거울 앞에서 옷을 벗었다.
 카미엘은 전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의 몸은 실로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게 사람이란 말인가? 차라리 걸어 다니는 시체에 가깝겠어.”
 살면서 검을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몸인지라 근육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다 방탕한 생활을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몸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해 보았다.
 “흡!”
 덜덜덜 떨리며 내려간 몸은 아예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카미엘은 사상 최악의 저질 체력임이 틀림없었다.
 정녕 이것이 건장해야 할 20대의 몸이란 말인가?
 겨우 팔굽혀펴기 1회를 한 것뿐이다.
 아니, 도중 포기를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온몸에는 벌써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먹는 양이 적은 것은 그렇다 치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카미엘은 당장 옷을 챙겨 입고 기사들의 체력단련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래서야 검을 잡을 힘조차 없을 것이다.
 진기를 제외하고도 체력단련은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밑거름이다.
 일과가 끝났음에도 기사들은 체력단련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체에 커다란 무게 추를 매달고 턱걸이를 하는 기사의 팔과 등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후욱!”
 “하나 더!”
 “으아아악!”
 턱걸이는 완력과 근지구력을 길러주는 데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립을 잡는 손의 모양과 팔의 넓이, 다리의 자세에 따라서 자극이 오는 부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수련을 하는 모든 이들이 즐겨하는 운동이었다.
 이미 핏줄이 터질 듯 붉어져 나왔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상체를 고정시키고 하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복근과 허리를 단련하였다.
 전생의 독천이었다면 저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일 테지만 지금 카미엘의 몸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투박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몸을 보면서 카미엘은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세상에, 저것이 사람이란 말인가!’
 나약한 몸을 가지고 보니 새삼 모든 것이 놀라움의 연속이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카미엘을 본 기사들은 단련을 멈추고 인사하였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험험, 그래. 자네들은 항상 이렇게 단련을 하는가?”
 “수련은 멈추어지면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밀린 업무를 보느라 운동을 하지 못했던 헥토르는 편안한 복장으로 단련 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달라붙는 민소매 티를 입은 그의 몸은 중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거대하고 탄탄해 보였다.
 “공자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숙인 부하들을 뒤로하고 카미엘에게 인사한 그의 눈은 놀라움 반, 기대 반이었다.
 “오늘부터 나도 기사들과 함께 체력단련을 좀 할까 해서.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함께 식사도 하시면서 몸을 만드시지요. 특별한 영양식을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지방은 몸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기사들은 무지방의 식단을 고수한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무기질 등 지방이 전혀 없는 식단이라서 상당히 괴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검술에 필요한 몸을 만드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카미엘은 흔쾌히 승낙을 하였고 그때부터 혹독한 체력단련이 시작되었다.
 물론 스스로 할 수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부하가 될 이들에게 본 모습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2시간이 넘는 구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단련이 시작되었다.
 “구령을 확실히 붙여라! 어이! 거기, 어제 밤에 땀이라도 뺐나? 목소리가 작다!”
 아침부터 목청껏 기사들을 독려하는 헥토르의 얼굴은 가히 호랑이와 같았다.
 “헉헉!”
 “공자님도 참가하셨으니 열외 없습니다! 뛰십시오!”
 카미엘은 폐부가 터질 듯 아파오며 급작스러운 산소공급에 현기증이 나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버텨내었다.
 영지를 구보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성에 도착하였다.
 기사들의 어깨에 기대어 거의 끌려오다시피 도착한 카미엘은 아침으로 제공되는 야채와 호밀 빵을 보며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산더미처럼 쌓인 기사들의 식사량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일반인의 범주는 넘어서는 식사를 했다.
 간단히 운기조식을 통하여 몸에 쌓인 젖산을 밀어낸 카미엘은 본격적인 오전 훈련에 참가했다.
 밧줄타기, 통나무 들어올리기, 턱걸이, 팔굽혀펴기, 50m 12번 왕복, 쭈그려서 연병장 5바퀴 돌기 등을 한 번에 순환운동으로 소화하는 살인적인 단련이 시작되었다.
 순환운동의 한 주기가 돌 때마다 기사들의 얼굴에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저질 체력으로 어찌 기사시험에 합격하였는가! 어서 다음 코스로 옮겨라!”
 교관으로서 참관만 한다면 모를까, 순환운동을 병행하며 기사들을 독려하는 것이 역시 단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도 못하는 카미엘을 다그치는 헥토르는 영주의 아들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공자님! 이곳은 기사들의 신성한 단련의 현장입니다.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참여를 하지 마십시오!”
 순간, 카미엘의 눈에 불꽃이 튀는 착각이 일어났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기사들의 뒤를 따르던 카미엘의 이빨은 상당히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틴 카미엘은 1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자신의 저질 체력을 한탄하며 다시 운기조식을 하였다.
 억지로 피로를 몰아낸 카미엘은 닭의 가슴살과 아몬드 등을 먹고 다시 오후 체력단련에 참가하였다.
 카미엘은 가볍게 몸을 푸는 기사들을 따라 연병장을 돌았다.
 몇 바퀴를 돌던 기사들은 뛰어서 바다까지 구보를 하였다.
 “지금부터 바닷가까지 달린다! 힘차게 구령을 붙여라!”
 “예!”
 시가지를 지나 모래사장이 눈에 보였다.
 약 2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바다에는 철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운동기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비틀거리던 카미엘은 기사들의 구령에 화들짝 놀라며 윗옷을 벗었다.
 “상의 탈의!”
 “상의 탈의!”
 훌러덩 옷을 벗는 기사들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조각상에 가까운 몸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우람한 그들의 몸과는 비교되지 않는 앙상한 몸이지만 자신감을 가졌다.
 ‘나도 남자다!’
 팔을 붕붕 돌리며 몸을 푸는 카미엘을 본 헥토르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바다를 향해 질주하였다.
 “전력으로 부표를 찍고 돌아와 맨손 순환운동을 한다! 뛰어라!”
 “와아아아아!”
 헥토르를 선두로 한 행렬은 일제히 바다에 몸을 던지며 저 멀리 떠다니는 부표를 향하여 열심히 팔을 저었다.
 카미엘은 반도 가지 못하여 힘이 빠지며 자꾸 물에 가라앉았다.
 “어푸!”
 발버둥을 칠수록 점점 심해로 가라앉는 카미엘을 보며 헥토르는 소리쳤다.
 “이곳에서 죽는 것은 자신의 역량에 따른 과실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눈을 번쩍 뜬 카미엘은 억지로 진기까지 운용하며 팔과 다리를 저었다.
 목숨을 걸고 부표를 손으로 만진 카미엘은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탈진을 하기 직전인 듯 앞이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턱걸이를 하는 기사들을 따라 철봉에 올랐다.
 오늘 훈련의 마지막이 될 철봉에 매달린 그를 향하여 기사들은 응원을 보냈다.
 “공자님! 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마지막 하나만 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몸을 끌어 올리는 그를 보며 기사들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그들의 응원에 힘을 얻은 카미엘은 괴성을 지르며 힘을 짜내었다.
 “으아아아악!”
 마침내 턱이 철봉에 닿았고, 카미엘은 그대로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털썩!
 바닷물과 땀이 뒤섞여서 머리가 마치 미역처럼 꼬였지만 기사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주었다.
 “역시 검공가의 근성입니다!”
 “매일 이렇게 단련한다면 몇 달 내로 검을 수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기사들의 덕담을 들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신비함마저 드는 해변에 누운 카미엘은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운기조식을 했다.
 자세와 상관없이 집중력만 있으면 운기조식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진기를 일주천시킨 카미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귀 구보를 준비하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힘드시면 말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다. 이대로 영지까지 달려가자! 준비되었는가!”
 패기 넘치는 카미엘의 구령에 기사들은 신이 나서 외쳤다.
 “예, 그렇습니다!”
 “출발!”
 카미엘은 그대로 구령을 붙이며 영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비록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고 다리는 풀려왔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카미엘은 영지에 도착하여 기사들의 행가래를 받았다.
 초급 기사들이 처음 훈련을 마치면 해주는 축하인사였다.
 “축하드립니다!”
 “와아아아!”
 환한 미소를 지은 카미엘은 이들 중 최고가 되겠노라 다짐하였다.
 
 
 
 2장 흡수할 계획을 세우다
 
 
 랭턴은 아침부터 헛소리를 지껄이는 아들을 상대하느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날 지경이었다.
 “벌써 약관이 지난 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제 술과 계집이 없다고 이상한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냐?”
 랭턴은 오히려 어깨를 당당히 펴고 있는 아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네놈을 굳이 팔란까지 데려다 주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미친놈이 아닌가! 그럴 재정이 있었다면 네놈을 아카데미에 재입학시켰을 것이다. 정신 좀 차려라, 이 미친놈아!”
 퍽!
 “으헉! 아버님. 그것이 아닙니다. 소자는 그것이 아니라······.”
 말을 걸 때마다 발로 차는데도 따라오는 카미엘을 보며 랭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그렇게 그곳에 가야 한단 말이냐?”
 순간 카미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손뼉을 쳤다.
 “아버님!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랭턴은 졌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더니 이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퍽!
 “으헉!”
 “그럴 시간 있으면 가서 공부를 하던지, 아님 이곳의 재정난을 타개할 방법이나 마련해 보아라! 이러다가는 우리 가문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카이사르 주민들이 굶어죽게 생겼단 말이다. 이 정신머리 없는 놈아!”
 잠시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느낀 카미엘은 뒤돌아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그는 뭔가 화들짝 놀라며 랭턴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쾅!
 “저런! 아니, 저 놈이 왜 저러지? 어제부터 알 수 없는 행동만 하는군.”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한 랭턴은 다시 업무에 집중하였다.
 
 “아무래도 그의 이성을 몰아내지 못한 모양이군.”
 상식적으로 천하의 일월신교의 부교주를 지낸 자가 떼를 쓸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아직 예전의 카미엘이 남아 있다는 말이 된다.
 “어린아이 하나 이기지 못하다니. 천하에 사독천의 꼴이 말이 아니구먼.”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영지민이 굶어죽으면 무공을 익힌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영지가 발전되면 산적과 해적을 토벌할 수 있다.
 번뜩 정신이 든 카미엘은 손뼉을 쳤다.
 반쪽짜리 천마신공을 보던 카미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이른 아침.
 카이사르의 아침은 적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했다.
 그나마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어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었다.
 원래는 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여관과 상점들이 분주하게 장사를 하며 활기를 보여야 할 터였다.
 하지만 문을 닫아버린 상점들은 간판만 달고 있을 뿐이었다.
 상점가의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홍등가와 빈민촌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없어져버린 홍등가는 더 이상 예전의 시끌벅적하고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재화가 돌지 않아 매춘마저도 어려워진 실정이라 창녀들도 삼삼오오 이곳을 떠나는 처지였다.
 그런 홍등가의 가장 구석자리에 위치한 선술집.
 ‘불꽃’이라고 쓰여진 간판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바람이 불어 삐거덕거리는 간판을 본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가 올 것 같군.”
 아무래도 오늘은 폭우가 쏟아질 조짐이 보인다. 하늘을 가린 구름과 축축한 바람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는 빨간색으로 덧칠한 오동나무 출입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내부는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이곳이 빈민가의 선술집임을 확신하게 했다.
 구석에 마련된 바(bar)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촛불이 습기를 잡는 데 좋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헛소리인 것 같군요.”
 겨우 촛불 하나로 이렇게 눅눅한 실내를 건조시킨다니, 사내는 후드를 벗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작은 촛불 하나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 꼬맹이는 잘 지내고 있던가?”
 그는 아무렇게나 놓아져 있는 의자를 빼어 앉았다.
 그러자 여인은 천천히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글쎄요. 제 입장으로는 그게 잘 지내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봐요.”
 사내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고 끝내 여인은 남자의 얼굴을 만지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농익은 미소를 지은 여인은 말을 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사내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 때문에 온 것이다. 확실한가?”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내일 밤 경매가 열린다고 합니다.”
 “경매?”
 사내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여 여인을 자신의 무릎 위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기분 좋게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앉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요, 경매. 카이사르의 암시장에서 오랜만에 진귀한 물건이 나온다고 골동품에 미친 귀족들이 꽤 많이 참석한다고 해요.”
 쪽!
 입을 맞춘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것은 믿을 만한 자가 입수한 소식이라 신빙성이 있습니다.”
 쪽!
 다시 그와 눈을 맞추며 키스를 한 여인은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것이 우리가 찾는 물건이란 말인가?”
 쪽!
 얼굴을 들어 그의 목에 입을 맞춘 여인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요.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한 자금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물건이라······. 그렇다면 출처를 알아내야 한다.”
 몸을 돌려 그와 마주앉은 여인은 양 다리로 그의 허리를 꽉 조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꼬옥 끌어안고 말했다.
 “이미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여인의 얼굴을 만지자 허리를 감은 다리가 살짝 풀린다.
 “아······.”
 후두두둑.
 밖에는 마침내 우중충한 하늘이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농부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아이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단비를 만끽했다.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와 둔부를 자극하자, 여인은 더욱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실수 없이 진행하라.”
 여인은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을 탐닉하였다.
 
 오랜만에 내린 비는 거리의 이곳저곳에 물골을 만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검은색 우비를 입은 사내가 거칠게 말을 달렸다.
 여기저기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물이 튀었다.
 우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흠뻑 젖은 사내는 말머리를 세워 홍등가로 향했다.
 늦은 밤, 홍등가는 그나마 다른 곳에 비하여 활발해 보였다.
 아직 마을을 떠나지 않는 창녀들이 남아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마를 한 사내는 말고삐를 잡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머, 말 타는 모습이 딱 내 스타일인데? 놀다 가요!”
 “나도 말 잘 타는데······. 특히 침대에서······.”
 노골적인 스킨십으로 사내의 마음을 녹이려는 여인들이 그의 팔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길을 갔다.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좋아하던 여인들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하며 건물로 들어갔다.
 좁고 길게 연결된 뒷골목으로 직진하던 사내는 마침내 허름한 여관을 발견하였다.
 ‘요정(elf).’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을 발견한 사내는 그에게 우산을 씌우며 말했다.
 “테미안 님?”
 테미안이라 불린 남자는 말없이 품속에서 직사각형의 종이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종이를 받은 사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를 인도하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말고삐를 넘긴 테미안이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그는 말을 몰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입구에는 묘령의 여인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의 우비를 받아주었다.
 “지하로 내려가시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안내를 받은 그는 묵묵히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낡아 있지만 오래된 건물이 내는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로 된 통로 밖에서 나체의 여인들에 끈적끈적한 춤사위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유리통 안의 여인들은 그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며 유혹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떤 남자라도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추고 감상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무신경하게 지나쳤다.
 지하에 마련된 장소로 들어간 그의 눈에는 이채로운 광경이 들어왔다.
 극락!
 여자와 술이 넘쳐나는 곳.
 오로지 대륙의 상위 0.1%만이 출입 가능한 경매장이다.
 나라와 국적은 상관없다.
 출신과 성분도 전혀 상관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한 이곳은 오직 돈만이 명예였다.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없는 미녀들은 중요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로 술과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들을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직도 무표정한 테미안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한 여인을 잡아 세웠다.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다.”
 그의 말을 들은 여인은 작은 방으로 안내하였다.
 간단한 탈의와 목욕이 가능해 보이는 방으로 들어온 여인은 손수 그의 옷을 벗기며 말했다.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필요 없다.”
 잘 건조된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던 그녀는 테미안의 손짓에 밖으로 나갔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테미안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나왔다.
 크고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과 약간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갸름하지만 선이 살아 있는 얼굴형 때문에 작은 얼굴임에도 인상이 강해보였다.
 꽃미남이라기보다는 쾌남에 가까운 그의 외모는 음식과 술을 운반하던 아름다운 미녀들조차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적당히 몸에 달라붙어 편안한 옷은 그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주변 남자들로 하여금 경쟁심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았다.
 ‘테미안.’
 자리에 몸을 기댄 그는 손을 들어 미녀들을 불렀다.
 이윽고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필요하신 것이라도?”
 시원한 청 발을 쓸어 넘긴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위스키 한 병. 가능하면 독한 걸로.”
 그 누구라도 한 번쯤 야한 망상이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귓속말을 하는데도 냉랭한 태도로 일관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여인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무대에 불이 켜지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대기하였다.
 경매가 시작되는 것이다.
 경매의 시작을 본 이들은 저마다 경매에 사용되는 숫자판을 점검하였다.
 오늘 나오는 물건은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기하학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기에 경매에 나온 사람들의 눈은 긴장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검은색 나비넥타이와 하이 햇(high hat)을 쓴 중년남자가 정갈하게 정돈된 콧수염을 뽐내며 등장했다.
 모자를 벗어 관중에게 인사한 중년인은 박수갈채 속에 자기소개를 하였다.
 “오늘 경매의 진행을 맞은 루피에르입니다. 오늘도 골든 클래스 옥션에 참가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마침 술과 간단한 안주를 들고 찾아온 여인의 기척에 손가락으로 놓고 가라는 표시를 한 테미안은 독주를 통째로 개봉하여 한 모금 맛을 보았다.
 향기로운 첫 맛과는 다르게 목구멍부터 혓바닥은 물론이고 코까지 얼얼하게 타들어가는 느낌이 일품이었다.
 “좋군.”
 깊은 술맛에 감탄사를 내뱉은 그는 다시 무대를 주시하였다.
 “사설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고객님들에게 득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경매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미녀가 들고 나온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패망한 국가 주피타르 제국의 명장 한트의 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역시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물건이 나왔다. 시대를 풍미한 장수의 검.
 검의 손잡이에는 붉은색 루비가 박혀 있는데, 그 안에는 주피타르의 상징인 블랙 드레곤이 새겨져 있었다.
 보물급의 가치를 지닌다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지금부터 입찰을 시작하겠습니다. 경매 시작가는 10만 골드입니다.”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경매에 들어갔다.
 저마다 번호판을 들고 가격을 말했다.
 “10만.”
 “51번, 10만 나왔습니다.”
 “15만.”
 “59번, 15만 나왔습니다.”
 이곳의 물건은 낙찰되는 동시에 보물을 얻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항상 과열양상을 보였다.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영지의 1년 치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 나왔고 경매는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자, 850만 골드! 더 없으십니까?”
 “천만!”
 “아까 그 분이시군요. 56번, 1000만! 더 없으십니까? 주피타르의 명장 한트가 사용하던 진검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눈치를 살피던 사회자는 오른 손을 들었다.
 “셋을 세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낙찰! 한트의 검은 56번 손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짝짝짝!
 박수갈채가 쏟아지며 낙찰에 성공한 남자는 흥분을 감추기 못하는 듯 만세를 불렀다.
 기뻐하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 진행자는 계속하여 경매를 이어갔다.
 “축하합니다. 낙찰된 물품은 경매가 끝나면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오늘의 메인이벤트라 할 수 있는 물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손짓과 함께 황금빛 상자가 등장했다.
 상자를 들고 나온 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 뚜껑을 개봉하였다.
 메인이벤트를 시작하자 객석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오늘의 이 물건은 칼리어스의 제 1대 검공, 카이사르 공작의 검법서입니다. 감정결과 진품으로 판정되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오랫동안 암호화되어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경매 시작가는 100만 골드입니다.”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번호판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100만!”
 “81번, 100만!”
 “200만!”
 “102번, 200만!”
 “300만!”
 “99번, 300만!”
 순식간에 금액이 뛰어오르는 경매현장의 열기는 아까의 분위기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과열되었다.
 독주를 한 모금 들이킨 테미안은 번호판을 들며 말했다.
 “1000만!”
 순간 정적이 흐른다.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날카로운 눈빛을 유지하며 슬쩍 미소를 흘렸다.
 “오! 젊으신 분이 주머니가 상당히 무거우신가 봅니다. 33번, 1000만! 더 없으십니까?”
 여유로운 33번의 사내는 자리를 정돈하고 객석에 인사를 할 준비를 하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순간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1500만!”
 “오오!”
 객석이 술렁이며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테미안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이목구비를 가진 청년은 잘못 보면 여인으로 오인할 정로도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오늘따라 젊으신 갑부 분들이 많이 참석하셨군요. 93번, 1500만! 더 없으십니까?”
 자작령의 2년 치 예산이 넘어가는 액수가 나왔기에 관중은 낙찰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테미안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이윽고 냉정을 되찾은 그는 번호판을 들고 외쳤다.
 “2000만!”
 “33번, 2000만 나왔습니다! 오늘 정말 화끈하게 쓰시는 군요! 다른 낙찰자 분 있으십니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본 테미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고민을 마친 듯 93번 청년은 조심스럽게 번호판을 들었다.
 “3000만!”
 웅성웅성
 “3000만! 농담은 아니시겠죠? 93번, 3000만 나왔습니다!”
 사회자와 입찰자들은 조심스럽게 33번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4000만!”
 93번 청년의 동공이 과도하게 확장된다.
 “33번, 4000만! 4000만이 나왔습니다. 93번 손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간 정적이 흐른다.
 꿀꺽!
 냉정함을 유지하던 테미안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4000만 골드가 걸린 경매에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와 더불어 경매장의 이목이 93번 청년의 얼굴에 쏠리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방황하던 손은 이내 멈추어 술병을 집는다.
 “입찰을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93번 청년은 인상을 확 구기며 병째로 술을 한 모금 시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합니다! 33번 손님이 낙찰되었습니다!”
 짝짝짝!
 테미안은 조용히 일어나 고개를 숙여 관중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4000만 골드.
 지위고하를 떠나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다.
 만약 이를 마차로 운반한다면 적어도 커다란 짐칸이 몇 개는 필요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홍등가를 빠져나가고 있는 마차는 줄줄이 짐칸을 매달아 마치 상단의 원행을 보는 것 같았다.
 조용히 카이사르의 성문을 빠져나와 외곽으로 접어드는 마차위의 마부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을 몰았다.
 “아니, 무슨 물건인데 이 새벽에 운반을 한다는 거야?”
 늦은 새벽에는 자주 있지 않은 일이다.
 무슨 물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옆 동네까지만 가면 보수를 준다기에 마부 조니는 어쩔 수 없이 고삐를 잡았다.
 투덜투덜 말을 몰아가던 그의 눈에 웬 소년이 들어왔다.
 조니는 굵은 장맛비를 작은 우산과 횃불로 버티고 서 있는 소년이 안타까워 마차를 세웠다.
 “얘야, 왜 이곳에 서 있는 거니?”
 이제 12세나 되었을까?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밤길에 혼자 있는 것이 불쌍하여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말없이 조니를 지켜보던 소년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뒤를 가르쳤다.
 소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조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검은색 복면을 쓴 이들이 소리 없이 마차를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니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아이고, 나리. 소인은 그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마부 인생 20년. 조니는 능숙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
 ‘어쩐지 이 새벽에 마차를 몰아달라고 하더니만!’
 이런 상황이라면 범죄와 관련되었거나 정치인의 비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사코 마다하였지만 절친한 친구가 부탁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해 주었던 것에 후회가 막급이었다.
 마차를 뒤지던 복면인들은 점점 다급해져 가는 듯 보였고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서로 눈빛만 주고받던 그들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다.
 조니는 살인멸구를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오늘은 그나마 운이 좋구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조니는 아직도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니?”
 아무런 말이 없는 소년을 보며 어깨를 으슥해 보인 조니는 계속하여 말을 몰아 목적지로 향했다.
 
 소년은 멀리서 말을 달려 다가오는 청년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선 청년은 하마하며 소년을 응시하였다.
 “그들은 모두 철수하였느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들이 물러갔단 말이지?”
 청년의 손에서 튕겨져 나온 금화는 소년의 손으로 향하여 날아가 착지하였다.
 자그마한 미소를 그린 소년은 몸을 돌려 빗속으로 사라졌다.
 쾅!
 천둥이 치며 번개가 뻔적하였다.
 순간 환해지는 빛에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참 준수해 보였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미엘이었다.
 4000만 골드를 위해서는 비를 맞는 수고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감수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봇짐을 멘 기사들이 변장하여 영주 성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멀쩡히 그 많은 재화를 성으로 옮기면 상당히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금의 유동을 약간 바꾼 것인데,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사상자가 발생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자금은 이동했다.
 슬슬 말에 오른 카미엘이 고개들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한 인영이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공자님, 자금이 안전하게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수고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린 카미엘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달렸다.
 “이랴!”
 
 쾅!
 “없다? 지금 없다고 하였는가!”
 고개를 숙인 복면인들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청년은 경매장에서 환하게 웃던 93번 청년, 테미안이 분명했다.
 ‘불꽃’이라고 쓰여 진 간판을 앞에 두고 부동자세를 한 복면인들은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마리아!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하라!”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은 화장기가 전혀 없음에도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었다.
 천천히 다가와 촛불을 옆에 놓고 그의 허리에 양팔을 감았다.
 테미안의 등에 얼굴을 기댄 그녀는 그의 향기를 한껏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자들이 머리를 쓴 것이겠지요. 자금은 다시 마련하면 그만입니다. 저에게는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껏 찾았던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복면을 벗은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듯 시원한 미소를 짓는 청년은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파밧!
 오로지 바람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리를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천천히 물린 청년은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와 나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마리아는 어떤 유혹도 통하지 않는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얇은 종이로 말려 있는 담배를 꺼낸 테미안은 성냥으로 불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망나니가 맞긴 한가 보군. 돈에 미쳐 가보를 팔아먹다니.”
 
 카미엘은 창고에 가득한 금화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우리가 한동안 먹고 살기에는 괜찮겠지?”
 눈이 휘둥그레진 헥토르는 뒷목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아니,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가보를 팔아먹다니요!”
 만약 아침이 밝고 영지를 순찰하던 랭턴이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눈이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헥토르는 다시 금화를 수레에 주워 담으며 말했다.
 “이런 것 없이도 이제껏 잘 살아왔습니다. 다시 바꾸어 오십시오. 공작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금화를 주워 담는 헥토르를 보며 카미엘은 환하게 웃었다.
 “아마 안 될걸? 누가 물건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으니까.”
 헥토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카이사르 공작이 무덤에서 깨어나실 일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금화를 보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카미엘은 헥토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미에서 한 일이야.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멍하니 카미엘을 보던 헥토르는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무튼 내일 이야기 하시지요.”
 돌아서 창고를 빠져나가는 헥토르는 경비병들에게 함구를 당부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3장 신비의 묘약
 
 
 세상에는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쥐는 길과 머리를 잘 굴려서 거상이 되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일단 돈을 벌자면 결정적 계기도 있어야 하고 뚜렷한 목표의식도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으면 그에 대한 이유가 반드시 생긴다.
 카미엘의 경우가 그렇다.
 천마신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
 경매장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 모양인지 카미엘은 순식간에 가보를 팔아먹은 파렴치한이 되었다.
 비급을 팔아 생긴 이득으로 생활은 윤택해질지 모르겠으나 가보를 팔아먹은 부분은 질타를 받아야 했다.
 맹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실행해 가던 중 손님이 찾아왔다.
 랭턴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인 제피로스 후작이 카이사르를 방문한 것이다.
 접객 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둘은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각하의 아드님이 벌써 저렇게 장성했었습니까?”
 한가롭게 정원을 거니는 카미엘을 보며 제피로스가 말했다.
 이에 랭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저 허우대만 멀쩡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네. 저 나이 먹도록 혼담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소문이 자자한 것이겠지.”
 제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랭턴은 젊어서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입담을 구사하는 멋진 청년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출중한 검술과 인간미 넘치는 성품으로 왕국에서도 꽤나 명망이 높았었다.
 비록 영지는 가난하고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가지만 인간 랭턴을 놓고 본다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꽤 평판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젊은 시절 각하를 꼭 빼닮았습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정원에 쭈그려 앉아서 이름 모를 풀포기나 뽑고 앉아 있는 아들을 보자니 랭턴은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글쎄, 내가 젊은 시절에 저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았나 싶다네. 아니면 아이의 모친이 숨겨놓은 끼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병약하기는 했지만 성품이 곱고 수더분한 외모를 자랑하던 랭턴의 아내는 사교계에서 꽤나 인기가 많았었다.
 “설마하니 그렇겠습니까? 언젠가는 공자도 정신을 차리고 비상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잡초를 뽑아다 맛을 보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 카미엘을 보는 랭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진 않을 것 같아 보이네. 요 며칠 사이에 작은 변화가 있긴 했네만 아직 가망 없어. 차라리 덕망 있는 집안에서 데려가 사위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멀리서 정원을 거닐고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며 랭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피로스는 얼굴색을 바꾸며 헛기침을 했다.
 “험험, 제 딸은 검공 가문에서 데리고 가기엔 너무 부족한 아이라서 제가 감히 말을 꺼내기 힘듭니다.”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혼담은 결사코 싫다는 뜻이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랭턴은 혼자서 풀이나 뽑고 있을 아들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긴 누가 내 아들을 데려가겠나. 빨리 사람이나 만들어야겠어.”
 그러던 중 아리따운 아가씨는 랭턴의 아들을 향하여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카미엘이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제피로스의 딸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 말을 걸 채비를 하는 듯했다.
 “어어, 저!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남자가 있는 곳에 가다니!”
 제피로스는 행여나 딸과 카미엘이 만날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좋지 않은가? 선남선녀가 만난다는데? 허허!”
 기분이 좋아진 랭턴은 속으로 카미엘을 응원하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아침 일찍 운기조식을 마친 카미엘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뒤라서 아침공기는 신선하고 상쾌하였다.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던 카미엘은 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익숙한 약초가 아침 바람에 흔들리며 그를 맞이하였다.
 “오! 유기노초(劉寄奴草)가 이곳에 피다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 그래.”
 곯은 상처나 산후조리에 좋고 칼이나 화살에 베인 곳에 쓰이는 풀이다. 주로 산이나 들에서 자라지만 어쩐 일인지 정원에 피어 있었다.
 카미엘은 금창약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뿌리가 상하지 않게 뽑아서 흙을 털어내었다.
 입으로 나머지 잔여 흙을 털어내 뿌리의 맛을 본 카미엘은 환하게 웃었다.
 “역시! 확실히 유기노초가 확실하군.”
 이곳은 확실히 의술이 발전되어 있지 않아서 금창약은 요긴하게 쓰일 것 이다.
 게다가 이곳의 약초는 상상을 초월하는 효능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얼마 전 그 효능을 확인한 카미엘은 약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카미엘은 얼마나 더 피어 있을지 모르는 유기노초를 채취하기 위하여 허리를 숙여 정원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의 눈에 사람의 발이 보였다.
 “음?”
 천천히 위를 올려다 본 카미엘은 소녀의 미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약간 옆으로 넓지만 전체적으로 얇은 입술은 오히려 깜찍해보였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은 채 뒤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당신이 이곳의 공자 카미엘인가요?”
 칼리어스는 여성이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신사로서 당연히 영광으로 여긴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정중히 인사한 카미엘의 손에는 약초가 쥐어져 있었다.
 살짝 무릎을 구부려 화답하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제피로스 후작님의 딸 엘레니아라고 해요.”
 손을 뒤로하여 깍지를 끼우는 것이 습관인 듯 흡사 뒷짐을 진 자세로 허리를 숙여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약초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쪼그려 앉아서 무얼 하고 있나요? 손에는 이상한 꽃이 있는 것 같은데.”
 “약초를 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처 치료에 아주 좋은 효험을 가진 약초입니다.”
 전체적으로 씁쓰름한 향이 나지만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약초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카미엘은 호의를 보였다.
 “이것을 달여서 먹으면 달콤한 향이 납니다. 몸에도 좋으니 제가 나중에 찻잎이 완성되면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그런데 약초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아마 그녀도 카미엘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예전에 책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검상이나 화살 독에 좋은 연고를 만들까 합니다.”
 “음, 그렇군요. 오늘은 많이 채집하셨나요?”
 “이제 시작을 했으니 오후쯤에는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 중간에 찻잎도 딸 계획이니 댁으로 돌아가실 때 제가 조금 드리겠습니다.”
 엘레니아는 뿌리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는 말했다.
 “좋아요! 주신다면 마다하지 않고 받을게요.”
 그녀는 슬그머니 카미엘에게 귀를 빌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엘레니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댄 카미엘은 서서히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카미엘이라는 공자를 만나면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정원에서 확 덮칠지도 모른다고.”
 묘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던 카미엘은 몇 초 뒤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의 안 좋은 소문을 이용한 약간의(?) 농담인 듯했다.
 “하하하! 저의 명성이 후작령까지 닿은 모양이군요. 확실히 제가 난봉꾼으로 소문이 자자하긴 하나, 백주대낮에 아름다운 여인을 덮칠 만큼 강심장은 아닙니다.”
 그녀는 입가를 가린 채 카미엘과 함께 웃었다.
 카미엘은 그녀의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피로스 후작은 검술과 병법에 대한 경지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의(義)와 덕(德)을 지킴은 물론이고 성격이 좋아서 사람 좋다는 평을 얻고 있었다.
 공작령이 위기를 맞을 때면 발 벗고 나서는 것을 보면 젊은 시절 의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리라.
 “역시 후작님의 영애다운 재치를 가지고 계시군요. 괜찮으시면 제가 야생초를 말린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야 영광이죠, 공자님.”
 카미엘의 애프터 신청을 엘레니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떤 의도인지는 몰라도 망나니 공자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저런 지조 없는!”
 창밖으로 보이는 딸의 행각에 좌불안석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제피로스를 보며 랭턴은 유유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니, 의자에 불이라도 났다던가? 자꾸 일어섰다 말았다 하는가? 후작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험험, 그게······.”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열이면 열, 멀쩡한 놈이 딸에게 관심을 갖는다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그것도 소문난 망나니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제피로스의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렇게 보여도 심성은 착한 아이야. 그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냥 관심만 갖는 것인데 무슨 일 있겠는가?”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 뜨거운 차를 한 번에 꿀꺽 삼킨 제피로스는 몹시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랭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랭턴도 제피로스의 반응에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랭턴은 살짝 화가 난 말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니, 내 아들이 영애에게 다가서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한가?”
 아무리 사람 좋기로 유명한 제피로스라고 하지만 딸의 일만큼은 입장이 다른 듯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딸은 능력 있는 청년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카미엘 군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알고 있네. 내 아들놈이 무능력한 망나니라는 것을. 하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사람의 경우는 아는 놈일세. 남자가 그 정도면 되었지. 안 그런가? 그리고 요즘 작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 않았나?”
 제피로스는 뭐라 반박을 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눈치였다.
 젊은 날에 워낙에 절친하고 랭턴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더 이상 의가 상하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산에서 무슨 약초를 캐다가 금창약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네. 어디서 알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효과가 대단하다네.”
 며칠 전 랭턴은 아들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였다.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칼리어스의 기술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능력이었다.
 “금창약이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입니다.”
 생소한 단어에 금세 호기심을 갖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제피로스를 보며 랭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처가 난 사람에게 효과가 대단하더군. 얼마 전에 시녀 중 한명이 계단에서 굴러서 얼굴에 대문짝만한 상처가 난 사고가 일어났었네. 그런데 카미엘이 만든 연고를 바르고 며칠이 지나자 씻은 듯 나았지 뭔가?”
 “농이 심하십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제피로스는 랭턴이 아들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려 과장을 한다고 생각했다.
 랭턴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처음엔 믿지 못했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정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네.”
 “설마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왕국에 큰 파란을 가져올 만한 일이다.
 의학의 발달이 거의 전무할 정도로 형편없는 의술을 가진 칼리어스로서는 어쩌면 카미엘이 위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잘만 하면 신성제국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제를 데려와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만약 이것이 전쟁에 도입된다면······.”
 제피로스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아직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랭턴은 허위로 사람을 기망하는 인물이 절대 아니다.
 “일단은 아들놈이 만들어놓은 약들을 확인하러 가세. 내가 오늘 자네를 초대한 까닭은 이것에 있었네.”
 제피로스는 반신반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아버지의 대화가 무르익는 동안 청춘남녀의 데이트도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레니아는 진심으로 그와의 대화가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래의 소녀들이 다 그렇겠지만 별것 아닌 얘기에 폭소를 자아내는 것이 카미엘에게는 탄력을 제공한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카미엘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생전 자신이 이렇게 말을 잘 했나 싶기도 하고 원래 자아의 주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기로운 들꽃을 따다 말려 우려낸 차는 그 향기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 이것도 그녀와의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공자님은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이 호감을 느끼는 것은 얼굴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카미엘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애께서 저의 별것 아닌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시니 저야말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보세요. 정말 물 흐르듯 말을 잘 하시잖아요. 다른 여인들도 공자님께 분명히 호감을 갖고 있을 것 같아.”
 살짝 새침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운 엘레니아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고로 통통 튀는 맛이 있어야 한다.
 만약 여인이 남자에게 한 번에 넘어가버리면 남자는 그 여인에게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엘레니아의 행동은 여자의 본능에서 나온 것일 확률이 높다.
 “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후훗!”
 카미엘은 허둥지둥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준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레니아는 살짝 웃으며 그를 곁눈질 한다.
 “참고로 저는 바람둥이를 싫어한답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저는 바람둥이의 근처에도 못가는 사람인지라.”
 왠지 간이라도 빼서 보여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공자님이 어디를 봐서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엘레니아는 천상여자가 분명해 보였다.
 한편 문 밖에서는 두 사람이 들어갈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카미엘은 그녀에게 귀를 잠시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져서 카미엘 쪽으로 몸의 중심을 옮겼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자 엘레니아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밖에 아버님과 후작께서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먼저 인기척을 해야 기다리시는 일이 없으실 텐데.”
 엘레니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먼저······.”
 순간 가까이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런 경우 눈빛이 통했다고 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몸이 그녀를 향해 움직이는 카미엘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쿵쾅!
 긴장하긴 그녀도 마찬가지.
 두 눈은 커다랗게 확장되고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접근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밀쳐내면 그가 민망해 하지는 않을까?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와는 반대로 카미엘은 본능에 충실하고 있었다.
 비록 첫 만남이긴 하지만 키스를 하지 말라는 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남자의 기교와 능력에 따른 것이다.
 마침내 그의 두 눈이 강렬하게 타오르며 의지를 굳건히 다지자 그녀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사뭇 진지하다.
 또래의 남자들과는 다른 무게감을 가진 카미엘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는 그녀도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풋풋한 첫 키스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똑똑.
 “험험! 자네 거기 있는가?”
 눈이 번쩍 뜨이며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카미엘을 보며 엘레니아는 웃음을 지었다.
 억울함과 분노, 아쉬움이 섞여 있다고나 할까?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카미엘은 억지로 문을 열었다.
 “후작님! 이곳까지 직접 오시다니. 소인을 부르시면 될 것을······.”
 고개를 숙이며 제피로스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카미엘은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제때 현장을 덮쳤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제피로스는 카미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도 언젠가는 공작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아닌가? 자고로 남자는 발걸음이 가벼워선 안 된다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미소를 짓는 그와는 반대로 랭턴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남자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눈치채는 것이 당연하다.
 랭턴도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짓궂은 일인지 알고 있다.
 “험험, 글쎄. 아무튼 식사나 하러 가자고. 이미 점심때가 지난 것 같으니.”
 슬며시 엘레니아의 표정을 살핀 랭턴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누가 보아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네 사람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카미엘과 엘레니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눈빛을 맞추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슬슬 안 보이는 곳으로 장난도 주고받는 것 같아 보였다.
 이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는 제피로스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험험! 아참, 전하께서 아까 말씀하신 사항을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본래 식사의 목적이기도 했고 화제를 전환해야 꼴 보기 싫은 광경이 없어질 것 같아 제피로스가 말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랭턴은 그제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세. 카미엘이 저번에 금창약을 만들었었지. 정확한 효능과 치료 범위를 말해 보거라.”
 이윽고 시선이 그에게 몰렸고 엘레니아는 몸을 앞으로 당기며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본 제피로스는 어쩐지 더욱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금창약(金瘡藥)이란 검이나 화살로 생긴, 그러니까 쇠가 낸 상처에 사용하는 약입니다. 그 밖에도 상처가 곪거나 짓물렀을 때 사용합니다. 제가 알고 있던 원료들의 효과보다 카이사르의 약초가 효과가 월등이 높아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시녀가 얼굴을 다쳤을 때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피로스와 랭턴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카미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에 금창약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 시켜주었다.
 “지금 보시는 흰색 연고가 바로 금창약입니다. 비록 연구가 더 진행이 되어야겠지만 만약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면 엄청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고 사료됩니다.”
 아직 카미엘의 말을 백퍼센트 신용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결과만 있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아버지들에게 카미엘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일전에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보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후작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
 순간 랭턴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제피로스도 깊은 신음을 흘렸다.
 “방법이 옳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금창약의 유통의 기반을 마련할 자금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의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놀라고 있었다.
 예전의 카미엘이라면 아마 이런 추진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 우리 둘에게 말이냐?”
 랭턴의 눈을 바라보는 카미엘은 결의를 다진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두 분께서 유통로를 만드는 데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자금력이 없으나 랭턴의 정치적 입지는 결코 작지 않았으므로 카미엘의 자금과 랭턴의 연줄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허나 자네가 말한 사업이 승승장구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확실히 효과가 입증된 것도 아니고.”
 제피로스는 사업 얘기가 나오자 다시 예전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카미엘은 식탁에 놓여져 있던 포크를 높이 들었다.
 “잠시 제가 불경스러운 행동을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푹!
 놀랍게도 카미엘은 스스로 자신의 손등에 날카로운 포크를 찔러 넣었다.
 혈액이 상처 사이로 새어나왔고 엘레니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의 상처를 돌보려 했다.
 그러자 카미엘은 그녀를 만류하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자신의 손등에 상처를 내다니!”
 뭔가 훈계를 하려는 제피로스를 만류한 랭턴은 카미엘을 가르쳤다.
 그는 금창약의 뚜껑을 열어 연고를 상처가 난 손에 발랐다.
 이윽고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물며 피가 멈추었다.
 아직 새살이 차오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았다.
 랭턴을 비롯한 이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자신들의 눈앞에 일어나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힘든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사업은 확실히 성공합니다. 만약 약의 보급이 가능해지면 국가로서는 막대한 이득이 생기겠지요. 전쟁에서 생긴 상처는 대부분 칼로 낸 것일 테니.”
 카미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제피로스와 랭턴에게 말했다.
 “두 분께서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시면 놀라운 결과를 안겨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건 약속입니다.”
 또래 젊은이와 다른 포부와 야망을 확인한 제피로스는 이전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을 조금은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피로스는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만약 본인이 투자한 금액이 상환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카미엘은 패기가 가득한 얼굴로 제피로스를 응시하였다.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일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 목숨을 걸지요.”
 랭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한 번도 결의에 찬 아들의 눈빛을 본 적이 없던 그는 흐뭇함과 놀라움이 공존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제피로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랭턴에게 말했다.
 “각하, 저는 이 젊은이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만. 어떠십니까?”
 “음······. 글쎄. 좀 더 경과를 지켜봐서 완벽한 준비가 마쳐진다면 한 번 고려해보겠다.”
 카미엘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패기 넘치고 당당한 목소리고 두 사람을 설득하는 모습을 지켜본 엘레니아는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던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딸의 눈빛을 본 제피로스는 아직도 못 마땅한지 헛기침을 하였다.
 “험험! 그러나 카미엘 군이 다 타버리겠구나. 엘레니아!”
 흠칫 놀란 엘레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물을 들이켰다.
 찝찝한 표정이 된 제피로스는 가까스로 감정을 다잡고 말했다.
 “아무튼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각하. 밤에 셋이 모여서 긴히 술이나 한잔 하면서 대화를 계속 하시지요.”
 아직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랭턴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 오늘은 아들과 대작을 하게 생겼군.”
 랭턴과 제피로스가 술을 권하자 카미엘은 고개 숙여 답했다.
 “영광입니다.”
 카미엘을 다시 본 제피로스는 그래도 의심이 가는지 오늘밤 있을 술자리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
 
 카이사르의 여름을 알리는 소리는 카미엘의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산의 중턱에 오른 그는 폐부 깊숙이 숲의 청량한 기운을 머금어보았다.
 향기로운 흙냄새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소리가 어우러져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등산을 하면서 본 카이사르는 야생동물이 참 많은 지역이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심심찮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가끔 멀리서 맹수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맹수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산적의 횡포일 것이다.
 랭턴의 혈압약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들어온 카미엘은 체력단련도 할 겸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을 수련하다 보면 생기는 상처에 바르기 위한 금창약을 만들어 기사들과 나누어 쓰다 보니 그 수요가 상당히 빈번해져 있던 이유도 있었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그의 눈에 흔치 않은 광경이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은 불구경이고 그 다음은 싸움구경이라 했던가?
 동굴이 있는 공터 앞에서 맞닥뜨린 곰과 범을 보았다.
 곰과 범을 따로 보기도 힘든데 함께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평생 동안 산만 누벼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흥미가 생긴 카미엘은 기척을 숨긴 채 둘의 승부를 구경하였다.
 마주한 범과 곰은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덩치로 보면 호랑이가 열새로 보이지만 그 맹렬함으로 보면 승부를 점치기 힘들어 보였다.
 선공을 시작한 쪽은 범이었다.
 퍽!
 앞발로 곰의 안면을 후려친 호랑이는 측면으로 돌며 곰을 교란하였다.
 처음 몇 대를 맞아주던 곰은 금세 감각을 찾았는지 몸을 일으켜 호랑이에게 유효적인 공격을 가했다.
 호랑이의 민첩함인지, 곰의 육중한 무게감일지 전혀 상반되는 둘의 싸움은 실로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마치 인파이터와 그래플러의 대결을 보는 듯 흥미진진한 싸움이 이어졌다.
 끝이 없는 잔타를 날리던 호랑이는 곰의 카운터에 저만치 날아 가버렸다.
 퍽!
 “카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른 호랑이는 더 이상의 승부가 불가능하다 여겼던지 자리를 피해버렸다.
 산중호걸이라 하는 호랑이도 역시 불곰은 버거운 상대인 듯했다.
 하지만 녹록치 않았던 호랑이였던지라 곰의 이곳저곳에는 깊은 상처가 나고 말았다.
 “우웅······.”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던 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하늘색 꽃잎을 뜯어먹고 몸에 비비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아마 곰들의 응급처치 법이리라.
 동물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구급법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테면 호랑이는 속이 좋지 않으면 풀을 뜯어먹는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리려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피가 철철 흐르던 곰의 상처가 지혈이 되며 조금씩 아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당장 살이 차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피가 멈추고 더 이상 상처가 벌어지지 않는다.
 저렇게 깊고 넓은 상처가 어찌 한 번에 치료가 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운신이 가능해진 곰은 자리를 떠나자 카미엘은 황급히 곰이 있던 자리로 가 보았다.
 회청색의 꽃잎은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카미엘의 눈이 번쩍 떠진다.
 “도라지?”
 ‘길경(桔梗)’이라고도 하는 여러해살이 풀.
 진통, 진정, 해열 작용이 있어 소염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염작용을 한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 오는 식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곰이 먹은 것은 꽃잎이었다.
 도라지의 효능은 어디까지나 뿌리에서 얻어내는 것이다.
 “연구대상이 많은 곳이군.”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그 역시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도라지는 재배가 가능하다.
 만약 도라지꽃을 따다 약을 만들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알고 있던 금창약 제조법에 도라지꽃을 첨가한다면 상당한 치료효과가 있을 것이다.
 손에 올려져 있는 도라지의 뿌리를 털어내 맛을 보려던 그는 깜짝 놀라 도라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헤헤!”
 마치 간지럼이라도 타는 것 마냥 꿈틀거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인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자신의 따귀를 직접 때려본 카미엘은 볼 언저리가 따끔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짝!
 “꿈은 아니고······.”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리는 도라지는 심지어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헤헤, 헤헤!”
 마치 비오는 날 정신 줄을 놓은 꼬마아이처럼 뛰어다니는 도라지를 보며 카미엘은 할 말을 잃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발광하는 도라지를 잡아다 가방에 집어넣은 카미엘은 흔들리는 가방을 보며 말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풀뿌리도 정신이 나갔나 보군.”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웃어대는 도라지 때문에 정신이 없던 카미엘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헤헤!”
 “하하!”
 엄청난 숫자의 도라지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가 하면 옆으로 구르고 엎어지고 난리법석이었다.
 만년동안 차가운 눈 속에서 잠을 잔 산삼은 뛰어다닌다는 전설이 있지만 멀쩡하게 생긴 도라지가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다닌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귓가에 맴도는 웃음소리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던 카미엘은 뛰어다니는 도라지를 모조리 잡아다 가방에 넣어 버렸다.
 그래도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아 화가 난 카미엘은 가방을 땅에다 집어 던져버렸다.
 “시끄러워!”
 퍽!
 “······.”
 이윽고 잠잠해진 도라지를 보며 한숨을 내쉰 카미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요즘 몸이 허약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 확실해.”
 
 “그래서 요점은, 그 미친 풀포기를 이곳에 잡아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술기운에 얼굴이 빨개진 제피로스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증언에 박장대소하였다.
 “푸하하! 자네 허풍이 도를 넘어서는군. 하긴, 사내에게 허풍은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지.”
 “그게······.”
 카미엘은 품속에 잘 갈무리하였던 흰색 천 뭉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대뜸 천 뭉치를 꺼내어 식탁에 올리는 아들을 보며 랭턴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보시면 압니다.”
 잎사귀가 살짝 시들어 힘이 없이 축 쳐진 도라지를 꺼낸 카미엘은 식탁에 있는 물에 도라지를 살짝 담갔다.
 푸다닥!
 순간, 마치 기절해 있던 물고기가 깨어나는 것 마냥 파닥거린 도라지는 이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식탁 위를 질주하였다.
 “헤헤!”
 랭턴과 제피로스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투명한 물 잔을 뒤집어 도라지를 가둬버린 카미엘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이 조금 방정맞습니다.”
 살짝 고개를 털어 정신을 차린 랭턴은 아직도 발광을 하고 있는 도라지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무슨 풀포기가 저렇게 정신사납단 말이냐?”
 제피로스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듯 연신 눈을 끔뻑이며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많은 개체가 있었는데 왜 아직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도라지는 인적이 드문 곳에 피는지라 산의 출입이 적은 카이사르에선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좁은 유리잔이 답답한지 자꾸 이리저리 구르며 탈출을 꾀하는 도라지를 보며 랭턴은 턱을 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유리잔에 들어 있는 도라지를 꺼내어 한 입 베어 물려던 제피로스는 이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치 살아 있는 물고기를 통째로 씹어 먹는 것 같아서 징그러운 생각이 드는군.”
 몸서리를 치며 탁자 위로 도라지를 휙 집어던진 제피로스는 말했다.
 “그래, 나는 자네 말에 확신이 드네. 설마하니 진짜 미쳐 돌아다니는 풀이 있을 줄은 몰랐네. 땅콩으로 와인을 만든다고 해도 자네 말이면 왠지 신빙성이 갈 것 같군.”
 
 
 
 4장 망나니 카미엘의 갱생(1)
 
 
 칼리어스의 수도 체르나.
 왕국의 주인 칼번이 주최하는 귀족회의가 소집되었고 속속들이 각 지방의 영주들이 도착하였다.
 그중에는 칼리어스의 검술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카이사르의 영주 랭턴도 참석하였다.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 대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과 친분을 다지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국왕은 모든 신하들이 모이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투리 시간은 친목을 다지는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망나니로 유명한 공작의 아들도 참석하였다.
 정치적으로 입지를 굳히는 데 이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가문을 대표하는 아버지가 참석을 하면 아들도 따라서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카이사르의 장남이 얼굴을 드러내자 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오, 자네가 카이사르 공작의 아드님이신가? 젊은 시절 공작을 쏙 빼다 박았군 그래.”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칼리어스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랭턴의 정적 시리스 공작이었다.
 풍요로운 영지를 소유한 시리스는 권모술수에 능했고 잔인한 손속이 특징이었다.
 5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한 절대동안의 외모에 군살이 전혀 없는 탄탄한 몸은 그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보여주었다.
 랭턴 공작과는 젊은 시절 의기투합을 한 적도 있었으나 정치적 뜻과 이념이 달라 결국에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귀족파의 수장이 된 시리스가 왕당파 랭턴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과찬이십니다. 제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백년은 이릅니다.”
 소문과는 다른 정중한 모습에 시리스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듣던 것과 아주 많이 다른 것 같군.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인가? 아니면 다른 이면이 있던지. 후리고 다닌 처자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순간 랭턴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분노를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던 시리스는 유독 랭턴에게 아들에 대한 흉을 많이 보았다.
 오늘은 흉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욕을 하는 바람에 랭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살핀 카미엘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문이 이곳까지 닿은 걸 보니 옛말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발이 없는 말은 정상적인 경로로 여행을 할 수 없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이네. 행실을 단정히 하고 지금부터 검술에 정진한다면 자네 아버지의 발끝에는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소문을 듣자 하니 검술에는 문외한이라던데. 검공의 아들이 문외한이라니. 참 아이러니하구먼. 하하!”
 포근한 미소가 무기인 시리스는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사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소 뒤에 가시를 섞어 오히려 더 사악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자신에게 훈계를 하려는 시리스의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카미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검술에 문외한이긴 합니다만, 공작의 기사단보다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라!”
 “카, 카미엘!”
 카미엘의 도발에 시리스는 물론이고 랭턴을 포함한 각지의 영주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것은 명백한 도전이다.
 계기가 어찌되었던 도전을 한 기사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바래왔던 대답을 들은 시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자네는 우리 영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하였네. 어찌할 것인가, 랭턴 공?”
 당황한 랭턴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표정을 한 시리스는 카미엘을 보았다.
 “제가 할아버님의 검술을 책으로나마 익히긴 했습니다만 그 경지가 미미해 아버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작 각하의 기사단장을 한손으로 제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도전을 넘어선 명백한 도발행위를 자행하는 카미엘을 향해 강한 적의를 들어낸 시리스는 분노하며 말했다.
 “말이면 다인 줄 아는가! 기사도가 전혀 없는 청년이군. 만약 우리 기사단에게 패배한다면 자네의 목은 나에게 바친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카미엘은 순간 공력을 발동했다.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대단한 살기를 발산한 카미엘은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살기?’
 랭턴과 시리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검술을 접해 본 적도 없는 카미엘의 몸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두 사람은 다른 점으로 인하여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제가 두 손을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기어서 카이사르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화를 삭이지 못하는 시리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 말 뼛속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네.”
 뒤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리스의 뒤로 그의 측근들이 따라붙었다.
 대단한 사고를 친 아들을 보며 그저 입만 뻥긋거리며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랭턴을 대신하여 옆에 있던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너무 무리한 수를 두었네. 아무리 시리스 저자가 입을 멋대로 놀린다고 그에 따라간다면 그건 자네가 패배하는 것 일세.”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제피로스는 경솔했던 그의 실수를 지적해주었다.
 “우리도 자네 같은 시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네. 이번 일기토는 없던 것으로 해 주겠네.”
 카미엘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랭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자가 불경하여 아버님 앞에서 몹쓸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남아가 뱉은 말은 목이 달아나도 지켜야 한다는 할아버님의 말씀을 책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시리스 공작의 기사단을 박살내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 말을 하려던 제피로스는 국왕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빠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금색 휘장을 어깨에 두른 국왕 칼번이 모습을 드러냈고 신하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였다.
 “국왕 폐하를 뵈옵니다!”
 공작 랭턴의 선창으로 모든 신하들이 뒤따라 제창하였다.
 손을 들어 일어날 것을 명한 칼번은 금빛 옥좌에 자리하였다.
 이제 희끗희끗 이곳저곳에 흰머리가 자리한 칼번은 그 나이가 무색하게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의 존재만으로 넓은 대전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국왕의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칼번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금일은 짐과 그대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다. 각자 가지고 온 사안을 놓고 발표하도록 하라.”
 칼번의 주최로 시작된 회의는 여러 가지 사안이 나왔고 국명으로 통과되는가 하면 귀족들의 반발로 부결되기도 했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무리 일국의 국왕이지만 그 또한 사람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한 기색이 짙어져 갔다.
 그것은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지 길어진 회의에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중 시리스 공작은 대전이 떠나갈 듯 외쳤다.
 “폐하! 소신 시리스, 폐하께 간청이 있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을 조리하여 적고 있는 서기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칼번은 고개를 돌려 시리스를 응시하였다.
 “말하라.”
 “검공 랭턴의 아들 카미엘이 신의 기사단을 모욕하는 언사를 하였사옵니다! 하여 카이사르 기사단의 카미엘과 루시엘 기사단장 라파엘로의 결투를 윤허해 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랭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오고 만 것이다.
 “흠······. 그렇단 말인가? 그대는 어떠한가? 랭턴의 아들 카미엘.”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번에게 패기 있게 답했다.
 “소신 카미엘 아뢰옵니다. 대회의가 열리기 전 소신이 시리스 공작의 기사단장에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 한 손으로 상대한다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최선을 다하여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웅성웅성.
 카미엘의 폭탄발언에 대전은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피로스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좌절했다.
 칼번은 부복한 카미엘을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짐은 오늘 정오 두 사람의 결투를 윤허한다. 장소는 이곳 대전이 될 것이다. 대결의 증인이 될 대신들은 정오까지 이곳에 모이기 바란다.”
 대신들은 삼삼오오 대전을 빠져나갔고 시리스는 카미엘에게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해가 가장 높게 뜬다는 정오.
 대전의 중앙에 갑주를 차려입은 카미엘과 라파엘로가 마주하고 있었다.
 카미엘의 은빛 갑주에는 비상하는 매가 새겨져 있었다.
 묵 빛 검집에는 칼리어스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새겨져 초대 검공의 자손임을 증명하였다.
 화려한 백색 갑주를 입은 라파엘로는 마주선 카미엘을 주시했다.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검은색 머리칼은 그가 랭턴의 아들임을 가늠케 하였다.
 전체적으로 뚜렷한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인상을 풍겨 그야말로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진하고 강렬한 눈동자는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어 부드러운 인상을 덮어버렸다.
 라파엘로는 이미 불혹을 넘긴 자신이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기사와 대결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대결이다.
 젊고 준수한 저 청년이 목숨을 잃는다면 그 아버지는 평생을 눈물로 살 것이다.
 하지만 기사의 자존심은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다.
 자존심을 건 대결은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숨을 내쉰 라파엘로는 굳게 마음을 먹었는지 결연한 눈빛으로 칼번을 보았다.
 칼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어 내리 잡았다.
 카미엘은 예리한 검 날을 세운 그를 보았다.
 이윽고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검을 꺼내어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전.
 칼번은 긴장의 균형을 깨며 말했다.
 “시작하라!”
 카미엘과 라파엘로는 천천히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라파엘로의 자세와는 다르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카미엘은 검을 아래로 늘어트린 모습이었다.
 시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보기엔 정말 랭턴의 아들은 검에 대해서 백치로 보였던 것이다.
 ‘랭턴 너의 분신을 반쪽 내주마!’
 랭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시작된 대결은 그의 힘으로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젠 아들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팽팽한 긴장감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균형을 먼저 깬 쪽은 라파엘로였다.
 직선으로 빠르게 찔러져오는 검은 상당히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챙!
 선공을 한 라파엘로의 눈을 보며 미소를 날린 카미엘은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은 운이 좋게 그의 검을 쳐낸 것 같았다.
 적어도 관중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속으로 헛물을 삼키고 있었다.
 손이 얼얼하다 못해 어깨 부근이 저려온다.
 아무리 완력이 좋다고 해도 평생 검과 동고동락했던 팔이 저릴 정도의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려오는 팔을 앞뒤로 돌리며 라파엘로가 말했다.
 “어쩐지 젊은이가 너무 용기 있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라파엘로는 긴장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쩌면 그는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젊은 나이에 그 성취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경지를 가졌다.
 게다가 엄청난 완력.
 뛰어난 검객의 탄생은 기사로서 축하할 일이지만 지금은 목숨이 걸린 결투 중이다.
 라파엘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몇 번의 검을 더 섞으면 손에서 검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엘은 이윽고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척!
 검을 찌를 듯이 내리잡고 한 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앞으로 내밀었다.
 자세를 낮춘 카미엘은 앞으로 쏘아져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늑대와 같은 자세를 한 그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팟!
 화살처럼 전방으로 쏘아져 나간 카미엘은 무서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챙!
 일격을 막은 라파엘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한 손으로 휘두른 공격에 두 팔이 떨려 옴을 느꼈다.
 손이 저린 것을 느낌도 잠시, 왼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검을 보며 라파엘로는 몸을 틀어 피해냈다.
 한 바퀴 회전하며 거리를 벌린 라파엘로의 이마에는 어느 새 땀이 맺혀 있었다.
 다시 공격 자세를 취하는 카미엘은 이번엔 메뚜기처럼 뛰어 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그는 무게중심을 검에 실으며 라파엘로의 머리를 종으로 노리며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카미엘을 보며 라파엘로는 급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챙!
 두 손으로 막아낸 라파엘로는 서서히 몸통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척추가 떨려서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온몸이 떨려오는 라파엘로는 가까스로 그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다리가 풀릴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캉!
 이윽고 검을 들어 올린 카미엘은 무표정하게 그의 검을 툭 내리쳤다.
 가볍게 내리친 카미엘의 검은 라파엘로를 그 자리에 무릎 꿇렸다.
 캉!
 이어서 다시 내려친 검으로 인하여 라파엘로는 검을 놓치며 뒤로 넘어졌다.
 “컥!”
 명백한 패배다.
 변변한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카미엘은 검을 들어 그의 목에 겨누었고 고개를 들어 칼번을 보았다.
 대결에서 승리한 기사는 상대의 생사를 결정하게 된다.
 국왕은 뜻대로 하라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카미엘은 검을 높게 들어 라파엘로의 목을 겨누었다.
 시리스의 얼굴은 무참하게 구겨졌고 라파엘로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흐읍!”
 목을 향하던 검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고 이윽고 바닥과의 마찰음을 냈다.
 캉!
 그대로 대전의 바닥에 박힌 검은 라파엘로의 목 바로 옆에 위치하였다.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라파엘로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 빛 검 집에 검을 꽂아 넣은 그는 고개를 숙여 칼번에게 예를 표하였다.
 순간 대전에는 정적이 흘렀다.
 단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쓸 뿐이었다.
 눈을 뜨고도 믿기 힘들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이 일개 기사단장을 너무나 손쉽게 꺾어버린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어나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검을 빼어 카미엘에게 내밀었다.
 “승부에서 이겼으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시오.”
 승부에서 패배한 기사는 명예를 잃었으므로 승리한 기사에게 자신의 검을 바친다.
 라파엘로는 검을 내밀어 자신의 자존심을 카미엘에게 주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미엘은 그의 검을 정중히 사양하였다.
 “승부는 끝났소. 검을 집어넣고 당신의 기사단으로 돌아가시오.”
 카미엘의 아량에 귀족들은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짝!
 고개를 숙인 라파엘로는 칼번에게 예를 표하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랭턴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카미엘은 아버지에게 검을 들어 보이며 당당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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