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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핑 1권 (1화)

2017.06.16 조회 6,726 추천 75


 점핑 1권 (1화)
 프롤로그
 
 
 “끙차! 이게 마지막입니다.”
 “고생했어.”
 3.5톤 트럭 가득 실린 박스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 온몸에 흐르는 땀. 텁텁한 여름의 바람이지만 지금은 제법 시원하게 느껴진다.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몇 번 뽑아 마신 후, 책상에 앉아 오늘 한 일에 대해 간단히 업무 일지를 작성한다.
 팔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손이 덜덜 떨려 키보드를 치는데 느낌이 묘하다.
 업무 일지를 작성하고 사무실의 시계를 보니 6시 30분.
 “정아 씨, 오늘 사장님은 안 들어오세요?”
 “네. 일 끝나시면 퇴근하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고생했어요······.”
 흡사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아 씨. 하지만 못 본 척 사무실을 나섰다.
 내 나이 21세. 내세울 것이곤 쥐뿔도 없지만 아직 청춘을 포기하고픈 생각은 없다. 조금만 더 말랐다면 아님, 조금만 더 예뻤다면이란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어 그 상상을 털어낸다.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정아 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퀴퀴한 땀 냄새가 올라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버스 안에 여고생들이 가득한 것을 보곤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걸어가면 대략 20분쯤 걸리겠지만 차마 여학생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날 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하루 종일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여전하지만 힘든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응? 문이 열렸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물상은 내가 자주 들르는 곳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취직한 곳이 내가 현재 다니는 공장. 일 년간 공장 한편에 마련된 숙소에서 지냈다.
 2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나, 그리고 한씨 아저씨가 한 방을 썼는데 정말이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 한씨 아저씨의 발 냄새는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다.
 일 년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작은 옥탑 방에 전세를 얻어 나온 것이 작년이었다. 여름엔 비가 조금 새고 겨울엔 무지 춥다는 걸 제외하면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집이 생기자 취미도 생겼는데 바로 책읽기.
 책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고물상에 들러 대여점에 없는 예전 책들을 사서 보는 것도 좋았다.
 “금이 왔냐?”
 “아저씨, 안녕하세요.”
 금속에 붙은 플라스틱을 칼로 떼던 주인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한다.
 “금이가 오늘 운이 좋네. 헌책방에서 오기 전이라 꽤 많을 거다.”
 “그래요?”
 난 기쁜 마음에 책을 모아두는 곳으로 향했다.
 고물상에 들어온 책은 모두 폐지로 가지 않는다. 나 같은 이들도 많았고, 특히 헌책방에서는 쓸 만하다는 것들은 싹쓸이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오옷! 읽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 완결까지 있다니.’
 난 차곡차곡 마음에 드는 책들을 뽑기 시작했다. 쓸 만해 보이는 책들이 많아서인지 손놀림이 바빠진다.
 “다 골랐냐?”
 “예. 오늘은 완전 득템인데요.”
 고른 책을 노끈으로 묶고 있는데 아저씨도 일이 끝났는지 내 옆쪽으로 와 담배를 태우신다.
 “얼마예요?”
 오늘 고른 책은 노끈으로 두 묶음. 높이로 치자면 대략 1m에 가까웠다.
 “7,000원. 잠깐만.”
 역시 저렴하다. 한 달간 읽을거리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이거 가져다 봐라.”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갔다 온 아저씨는 검은 비닐봉지에 건넨다.
 받아 안을 살짝 보니 성인잡지다.
 “어, 아저씨. 이거 아끼시는 거잖아요?”
 “오늘 몇 권 들어왔더라. 그건 이제 지겹다.”
 “헤헤! 감사합니다. 잘 볼게요.”
 “웃기는. 내일 일하는데 방해되지 않길 바라마. 킬킬킬!”
 몇 분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눈 후, 계산을 하고 양손에 책을 들고 힘든 줄도 모르고 집으로 왔다.
 문을 열자 바깥보다 더 더운 열기가 확 밀려 나온다. 벽돌로 문을 고이고 책은 한쪽에 던져 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와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은 중고로 산 TV와 오전에 개지 않은 이불, 그리고 주워온 책꽂이들을 가득 채운 책들이 눈에 띈다.
 모기장을 치고 TV를 켠 후, 오늘 득템한 책들을 살펴본다.
 “쳇! 이건 뭐야?”
 급하게 고르다 보니 딸려온 책인가 보다. 흡사 여성잡지를 사면 끼워주는 부록처럼 얇은 낡은 책자가 다른 책에 붙어 있었다.
 찌직!
 붙어 있던 책이 떨어지는 소리.
 낡은 책이라기 보다는 노트에 가까운 책. 희미하게나마 괴발개발 쓴 제목이 보인다.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 방법.
 
 “하하하하!”
 빵 터졌다. 제목만으로도 사람을 웃기는 책이 있을 줄이야.
 호기심에 웃음을 띤 채 책장을 넘긴다.
 
 ······유체 이탈은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정신을 백회 부근에 집중해야 한다. 이때, 백회에 집중된 정신을 눈과 눈 사이의 중심점에서 앞으로 약 30센티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실제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그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몸에 일체의 힘을 주지 않아야 하고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중략)······.
 유체 이탈을 한 다음 정신 이동을 하고 싶은 상대를 바라보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의 머리끝에 집중하고 나아간다는 생각을 지속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음 장에 언급된 주문이다. 주문을 외우며······.
 
 참, 어이없는 책이다. 작가 지망생이 끼적거린 노트인가?
 주문을 한 번 중얼거려 본다.
 “세그라이노 아진카이블로 사이진도 우르지보이노······.”
 
 ······영혼은 원래의 육체로 돌아가려는 힘이 있다. 돌아가는 걸 거부할 땐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뒷장은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을 할 때 응용법들과 사용상의 주의할 점을 적어두었으니 꼭 숙지하기 바란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 뒤를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책은 한쪽으로 치워두고 득템한 판타지 소설을 집었다.
 
 “낼 뵙겠습니다.”
 “몸이 안 좋은 거 같은데 푹 쉬어.”
 초저녁에 잡은 판타지 소설이 볼 만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더니 몸이 무겁다. 빨리 들어가 딴짓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
 버스는 역시 포기. 택시를 탈까 싶어 빈 택시를 기다린다.
 ‘어라, 저 꼬맹이······.’
 건너편에 아기 엄마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꼬맹이가 도로 아래로 내려온다.
 “아줌마! 애기 위험해요!”
 고함을 질렀지만 다른 아줌마와 수다를 떠느라 듣지 못한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
 “젠장! 아줌마! 애기!”
 판타지에 보면 이러다가 죽는 놈들도 많던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향에 있는 동생들이 눈에 밟혀 무작정 몸을 날렸다.
 끼이이이이이익!
 브레이크 소리.
 “꺄아아악!”
 아기를 밀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과 함께 몸이 날아오른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의 화면처럼 세상이 느려진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다. 비명을 지르는 아기 엄마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씨발.”
 눈앞에 먼지 낀 회색 아스팔트가 다가온다.
 까득!
 순간적으로 뭔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아픔이 일어났지만 어둠이 날 먼저 집어삼킨다.
 
 
 
 1. 정신 이동
 
 
 정신을 차렸다. 어둡다.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떠지지 않는다.
 어느 판타지 소설에 나온 것처럼 혹시 아기가 된 건가?
 아니다. 따뜻한 느낌도 심장의 울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죽은 건가? 그것도 아닌 듯싶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확실히 들린다.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 기계의 우웅거리는 소리, 삐익거리는 소리 등등.
 ‘병원인가?’
 대략적으로 짐작해 보면 병원 같다.
 죽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갑자기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딱히 보험을 들어둔 것도 없었고, 퇴근하다가 다친 것이라 산재도 되지 않을 것이니까.
 혹, 그 아이의 부모가 대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도 약간은 든다.
 드르륵!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들리는 문소리.
 다시 눈을 뜨려고 해 본다. 안 된다. 몸을 움직이려 해 봐도 역시나 마찬가지.
 움직이지 않는 무선 장난감이라 해야 할까? 아무리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많이 다쳐서 그런 건가? 시간이 지나면 좀 낫겠지.’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큰 트럭과의 교통사고라면 밑에 깔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병실을 조용히 걷는 이는 간호사 같다. 조용히 한 바퀴 도는 느낌이 들더니 잠시 후 문을 열고 다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좋아져 눈을 뜨게 된다면 방금 그 간호사를 한 번 보고 싶어졌다. 내 옆을 지날 때 느껴지는 그 향기라니.
 ‘히히히!’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간호사와 환자의 뜨거운 사랑!
 고물상 아저씨가 주신 책에서 나온 짧은 치마의 간호사가 마치 날 유혹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렇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하루에 몇 번.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제외하곤 여긴 특별히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지긋지긋한 어둠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
 ‘씨발! 난 살아 있다고! 당장 날 일으켜 줘! 내 목소리 안 들려? 난 지금 깨어 있다고······.’
 ‘제발 한마디라도 해줘! 난 변화가 필요해. 당장 어떤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제발······ 제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갈수록 난 미쳐 가고 있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러한 고통도 이러한 외로움도 없었을 텐데.
 ‘난 지금 살아 있단 말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원망했고, 날 이렇게 만든 아줌마의 부주의에 저주를 퍼부었고, 날 친 운전사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내 상태에 대해서도 짐작이지만 알 수 있었다. 전신 마비에 혼수상태.
 코마(Koma, Coma, 昏睡)에 관련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정신은 깨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다룬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은 10년이 넘는 혼수상태에서 결국 깨어났다.
 하지만, 난 그 영화를 기억해 내며 희망을 가졌다기보다는 더 심한 좌절을 느껴야 했다. 10년간의 어둠이라니······.
 혀를 깨물 수 있는 힘만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노는 법을 알아냈다.
 어둠에 내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방에 틀어도 나오지 않는 TV를 만들어냈고, 책장을 만들어냈다.
 ‘그 뒤 얘기가 어떻게 되었더라?’
 지금은 책을 만들고 있다. 내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을 작성해 책장에 하나둘씩 꽂고 있는 중이다.
 ‘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절벽으로 밀어 떨어졌었지. 그러면서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갔었어.’
 마치 엄청난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이건 하나의 놀이이다. 이 지겹고 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웃기는 건 기억하려는 책들의 토씨 하나까지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간혹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게 오히려 기뻤다.
 생각하느라 시간을 죽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들. 조금 읽은 건 읽은 만큼 쓴 후 책장에 꽂았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흘렀다.
 
 ***
 
 새로운 신입인가 보다. 걷는 소리와 향기만 맡아봐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여자 간호사다!
 내가 유일하게 머릿속 나만의 방에서 외부로 신경을 돌릴 때는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다.
 특히 여자 간호사가 들어올 때다. 물론, 남자 간호사라면 바로 신경을 껐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간호사의 움직임을 체크한다. 특별한 상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기에 하는 것뿐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내 옆에서 뭔가를 할 때도 있었는데 숨소리를 느낄 만큼 가까이에서 뭔가에 열중하는 간호사.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 그놈이 말을 뱉으면서 상상력은 사라졌다.
 “젠장! 이 짓도 못할 짓이라니까. 때는 왜 이리 많아!”
 나야말로 젠장이다.
 간호사는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생각 못하고 있었다니.
 또한, 간혹, 아주 간혹 ‘삐이∼’ 소리와 함께 몇 명의 간호사들이 와 침대를 끌고 가는 소리를 듣는다. 별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아이 엄마에게도 운전사에게도 더 이상 어떤 원한도 없다. 단지 이 기나긴 시간이 멈추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탁!
 문 닫히는 소리.
 다시 나만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둠에 방이 나타난다. 책꽂이에는 이미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정도로 책이 빽빽하다. 그것도 모자라 방 구석구석에 수많은 책들이 쌓여 있다.
 난 저 많은 책을 머릿속 공간에서 다시 기억해 내고 적은 것이다. 집에 있던 책뿐 아니라 대여점에서 빌려본 책들까지 모조리 기억해 만든 것이다.
 언제 태워 버리고 다시 작성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음습한다.
 ‘오늘은 무슨 책을 만들까?’
 사고 일어나기 전날에 읽은 판타지 소설도 어제부로 완료되었다. 딱히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진즉에 책 좀 많이 읽어 둘 걸 그랬다.
 ‘아!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 방법!’
 문득 떠오른 그 웃긴 책. 난 자리에 앉아 책을 만들고 그 책 표지에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책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몸에 일체의 힘을 주지 않아야 하고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
 자, 잠깐!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책을 만든다고 정작 중요한 걸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이라면 난 어쩌면 어둠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자유로운 몸을 가질 수 있을지도.
 한 줄기 빛,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후∼∼ 후∼∼’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표현이 이상하지만 눈을 감았다.
 익숙한 어둠.
 ‘정신을 백회에 두고 눈과 눈 사이의 가운데 30cm 정도로 나아간다. ······나아간다. ······나아간다.’
 쉽지 않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다. 나에겐 남는 게 시간이니까.
 얼마나 누워서 중얼거리는 걸까? 어차피 몸은 움직이지도 못하니 조건은 만족한 상태. 집중력의 차이라 생각하고 오로지 ‘나아간다’를 중얼거리며 집중했다.
 어느 순간 말도 잊고 내가 무얼 하는지도 잊었을 때 몸이 밖으로 나가감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성공이다!’
 내가 만일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을 때보다 더 미친 듯이 날뛰었을 것이다.
 형광등은 꺼져 있어 어두웠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으로 실내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넓은 방. 그곳에 놓인 침대 위에는 혼수상태의 환자들이 있었다. 대략 훑어봐도 3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누워 있다.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다.
 환자들은 뼈골이 상접한 모습에 링거를 꽂고 있었고 두발은 짧게 잘려 있고 수염도 거칠게 나 있다.
 살짝 뒤돌면 내가 보일 텐데 고개 돌리기가 살짝 겁난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샌 후 누워 있는 날 본다.
 바짝 마른 얼굴과 몸. 거친 수염. 짧게 잘린 머리카락. 내가 보기에 난 죽어 있었다.
 다만 가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영체에 불과한 지금의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상관없다. 슬픔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영체인 난 그렇게 과거의 모습이라곤 없는 날 보고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어두워진 병실. 하지만 각 침대에 붙어 있는 각종 장치들이 내뿜는 빛만으로도 안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영체는 어둠과는 상관없을라나.’
 소원하던 어둠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참에 한 번 돌아다녀 볼까 싶다.
 하지만 곧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영체라고 해도 몸에서 1m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어떤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건가?
 최대한 내 몸과 떨어져 몸과 영체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있다!’
 가느다란 투명의 실.
 이걸 끊으면 죽을 수 있는 건가? 끊어볼까?
 하지만 그 투명 실은 내가 잡을 수가 없었다.
 드르륵!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간호사님. 난 그녀들을 볼 수 없었기에 상상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려봤었다.
 온화한 미소를 살짝 띠고 생글거리는 눈으로 환자를 바라보는 그녀들은 하얀 간호사복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 마이 갓!
 난 결코 여자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말문이 막히는 수준이다.
 먹이를 노리는 곰의 모습이 저럴까? 입고 있는 간호사복이 4칸 창문의 커튼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종아리가 예전 내 허리보다 굵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침대와 침대를 누비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난 상상 속의 그녀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꼼꼼히 살피며 연신 손에 든 무언가를 터치하는 그녀. 간호사로서 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그렇다. 일하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일하지 않을 때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탁!
 모든 일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간다. 비로소 막혀 있던 숨이 트이는 것 같다.
 응? 근데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아! 정신 이동!’
 ······.
 부르르 떨리는 영체. 방금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간혹 잊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정신 이동을 할 사람을 정했다. 방을 드나드는 6명의 간호사 중에 한 명. 원래는 남자 간호사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언제 올지 모르니 기다릴 수밖에.
 “정말이지 이 짓은 못할 짓이야. 신참 똑바로 잡아.”
 “예! 정 간호사님.”
 환자들 몸을 닦아주고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환자를 돌보는 두 명의 남자 간호사들이 왔지만 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왜냐고? 난 분명 정신 이동할 사람을 정했다고 했다. 결코 그 여자 간호사가 내가 상상 속에서 만든 그녀만큼 아름다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
 그래 인정한다. 오전 타임에 들르는 그녀는 정말이 아름다웠다. 정신 집중이 엄청 잘된다고 할까? 물론, 정신 이동은 실패했다. 그녀의 머리끝이 아니라 가슴 끝에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반드시 그녀에게로 정신 이동을 할 것이다.
 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을 때처럼 의지에 불타올랐다.
 
 ‘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 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벌써 5일째 실패.
 첫날에 가슴에, 둘째 날도 가슴에, 셋째 날도 가슴에, 넷째 날엔 늘씬한 다리에, 다섯째 날에는 잘록한 허리에 정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집중을 쏟았다.
 그리고 입으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세그라이노 아진카이블로 사이진도 우르지보이노······.’
 이번에는 느낌이 좋다. 집중도 잘되고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이 느낌이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탁!
 이런 썅! 환자를 보러 왔으면 좀 진득이 보고 갈 것이지. 뭐가 급하다고 그리 빨리 가느냔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연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옮길 곳은 많다.
 약간의 불안함이 생겼지만 어차피 그 책을 다 읽지 않았기에 한 가지씩 알아가야 했다.
 정신 이동을 했는데 고작 10분 정도만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단, 적당한 사람을 골랐다. 좀 건강하게 보이고 금방 죽을 것 같지 않은 인물. 혹 옮겨갔는데 바로 심장이 멈춰 버리면 큰일 아닌가?
 ‘휴∼ 여기서 고른다는 자체가 잘못이군.’
 쭈욱 훑어보다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그냥 가장 근처에 있는 인물을 찾았다.
 ‘이종진. 나이 45세.’
 밑에 적힌 영어는 못 알아보겠다. 하지만 가장 적합해 보이는 인물이었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주문을 중얼거렸다.
 이종진의 백회와 주문에 집중했다.
 유체 이탈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유체 이탈 과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기에 이제는 유체 이탈은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연습해 본 결과 유체 이탈하고 몸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까지 합치면 대략 5분 정도.
 유체 이탈한 육체로 들어가는 건 의외로 쉬웠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원래의 어둠 속 내 방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내가 뭘 하는지 망각하는 상태로 들어간다.
 그리고 몸이 앞으로 쑤욱 나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아! 이동했다!’
 이종진의 머리맡에 와 있는 날 발견했다.
 내 육체는 괜찮은 건가?
 돌아보니 내 침대에 있는 생명 유지 장치는 멀쩡히 잘 작동하고 있다.
 난 이종진의 몸에 눕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기분 나쁜 이질감.
 내 몸에 들어갈 때완 다른 느낌이다. 흡사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달까?
 가만히 누워 있자 차츰 이질감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종진의 정신세계라 할 수 있는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나와는 좀 다른 어둠의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본다.
 이 사람 역시 코마 상태이니 움직일 수 없는 건가?
 ‘눈을 떠보자.’
 엇! 나 때와는 다르다.
 내가 아예 작동하지 않는 무선 자동차라면 이 몸은 건전지가 떨어진 무선 자동차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난 힘을 줬다.
 영체 주제에 두 손을 잡고 노력해 본다.
 ‘잠깐, 영체가 힘을 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있을까? 생각? 상상? 의지?!’
 그래! 내가 여기에 올 때 강렬히 원했던 것처럼.
 난 의지를 더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태양보다도 밝은 빛이 눈으로 들어온다.
 ‘윽!’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약한 불빛이라고 해도 지금 이 몸에는 너무 강렬했던 것이다.
 몇 번의 깜박거림 뒤에 빛에 익숙해졌다. 눈동자를 굴려 실내를 살펴본다.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다니······.
 영체로 보나 똑같은 방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그렇다고 내 몸도 아닌데 이 몸을 가진 채 울 생각은 없다.
 이번엔 목을 움직여 보고자 노력했다.
 눈을 움직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이 든다.
 ‘헉! 헉!’
 영체가 힘들어 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기운이 빠진 것처럼 힘이 없다.
 ‘의지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몸을 무언가가 당기는 느낌이 든다.
 거부하려는데 영혼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경고가 번뜩 떠오른다.
 결국 힘을 빼고 당기는 힘에 순응을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머리맡으로 돌아온다. 빨리 몸으로 들어가라고 어떤 힘이 말하는 듯하다.
 드르륵!
 “무슨 일이지?”
 헉! 저 곰이 왜 이 시간에?
 그녀가 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종진이 있는 곳. 생명 유지 장치를 보고야 알 수 있었다.
 이종진의 심장박동수가 엄청 높아져 있었다.
 내가 무리하게 움직이려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응? 눈을 뜨고 계시네? 혹시 깨어나시려는 걸까?”
 잠시 뭔가를 체크하더니 머리맡에 놓인 호출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그녀.
 난 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신 이동 후에 상대방이 어떤 결과를 가지게 될지 궁금해 억지로 참아본다.
 “그냥 일시적인 건가? 좀 주의해서 봐야겠다.”
 그녀는 손에 든 기계에 뭔가를 체크한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치마를 올리더니 속옷을 매만진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속옷도 제대로 못 입었네.”
 윽! 치명타다.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 위에 누웠다. 그리고 일체화되어 간다.
 “어머, 오늘 이상하네. 이 환자는 왜 코피를······.”
 암흑으로 들어가며 쏟아지는 잠.
 코피라니 아무래도 무리했나 보다.
 “훗! 제 속옷을 보신 거예요? 저 이래 봬도 눈이 높답니다.”
 ······.
 컥! 이 곰이 어따 대고······.
 그녀의 마지막 공격에 난 정신을 잃었다.
 
 ***
 
 날짜 관념이 없는 난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깬 후 다시 한 번 이종진의 몸으로 들어갔다.
 24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때 내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내가 만일 움직이는 사람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을 땐 분명 의지를 사용해야 할 터. 그럼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난 바로 간호사에게 정신 이동을 하지 않았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사람은 병실에 있는 여자 환자 중 한 명이었다.
 혹 성별에 따른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거리도 다소 떨어져 있어 거리 문제도 생각할 겸 해서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백회 부분을 봤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의 정신 이동을 해서일까?
 수월하게 그녀에게로 쑥 다가가는 게 느껴진다.
 바로 그녀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누웠다.
 역시 이질감이 있다.
 이종진에게 들어갔을 때보다 좀 더 심한 건 역시 성별 때문일까?
 난 이번에도 어둠의 정신세계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나의 방이었다.
 공포의 방이 이럴까? 괴기스러움과 오싹함이 느껴진다.
 내 방보다 훨씬 넓고 화려한 방에 새하얀 침대가 놓여 있고, 온 벽에는 한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멀쩡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눈이 도려내진 것도 있었고 칼이 박힌 것도, 피눈물을 흘리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 하나하나에 원한이 스미어 있음이 느껴진다.
 ‘이 여자 도대체 누구야?’
 의문을 가진 순간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
 영화에서 필름을 빨리 돌려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으으윽!’
 곽지안. 29세.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이 양친을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고 의사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곽지안의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보고 한 결혼. 결혼 전 사귀었던 여성과 만남을 지속했다.
 그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곽지안은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선수를 쳤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을 그녀에게 먹인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계단에서 떨어트려 사고처럼 죽이려 했지만 그녀는 살았다.
 단지 전신불구에 혼수상태에 이른 것이다.
 난 그녀의 일생을 보며 그 남편의 악독함을 욕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이종진과 곽지안의 차이를 말이다.
 이종진은 영체, 즉 영혼이 몸을 떠난 것이라면 곽지안은 나처럼 영체만 살아 있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눈을 뜨고자 노력해 본다.
 역시나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 몸이 아예 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나저나 그녀의 기억을 받아서일까?
 머리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띵하다.
 그리고 곽지안의 기억들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진다.
 정신 이동마다 이런 식이면 정말이지 곤란할 것 같다.
 아무래도 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이제 돌아가 볼까?’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곽지안의 방을 훑어보다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내가 이 방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면 과연 곽지안이 그것을 볼 수 있을까?
 의문과 함께 난 침대 옆에 작은 테이블을 만들기 시작했다.
 ‘방 분위기에 어울리는······.’
 문득 혼자 중얼거리다 말을 멈췄다.
 내가 언제부터 인테리어에 신경 썼단 말인가?
 ‘에이!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난 작은 메모장을 만들고 그곳에 짤막한 글을 남겼다.
 
 이 쪽지가 보이나요? 보인다면 놀라지 말아요. 전 우연히 당신의 방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당신도 글을 남겨줄 수 있나요? 참, 제 이름은 현금입니다. 그렇다고 돈만 밝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6시간 뒤에 다시 올 테니 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글로 남겨주세요.
 
 펜팔의 느낌이 이럴까?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자신의 정신 이동을 생각해 보면 일말의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완성된 쪽지가 쑥스러워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면 이 갑갑한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결국 놔뒀다.
 그녀가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리고 내 육체가 날 당기는 느낌에 몸을 맡겼다.
 
 
 
 2. 친구를 얻다
 
 
 정신 이동시 밀려오는 대상자의 기억에 대한 문제의 해결점은 지금으로서는 딱히 없었다.
 의지로 거부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과연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을지는 실험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됐다!’
 지금까지 시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3시간 뒤에 간다고 할 걸 후회했다.
 마치 중학교 시절 첫사랑에게 ‘좋아한다’ 고백해 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난 정신을 곽지안의 백회에 두고 정신 이동을 시작했다.
 ‘아!’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나의 쪽지를 봤다는 것을 느꼈다.
 괴기 어린 사진들은 모두 사라졌고, 부잣집 아가씨의 방과 같은 느낌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테이블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쪽지, 아니, 편지가 놓여 있었다.
 재빨리 편지를 뜯었다.
 ‘헐! 정말 펜팔을 할 생각인가?’
 아직 편지를 펼치진 않았지만 편지의 두께에 기가 질린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신인가요? 아님, 저승사자?
 아니, 누구든 그건 상관없어요. 당신이 날 데리러 온 사람만 아니라면요.
 난 지금 죽을 수 없어요.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때까진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갈 수 없어요.
 ······(중략)······.
 안녕하세요. 전 곽지안이에요. 글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군요.
 위에 적은 글은 이해하세요. 사실 당신의 쪽지를 보고 너무 기쁘답니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게 정말이지 고통이에요.
 ······(중략)······.
 당신이 절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전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당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돈도 드릴 수 있어요. 제 재산은 아무도 손댈 수 없게 해뒀어요. 그 악마 같은 놈도 단 한 푼도 만질 수 없죠. 하지만 그 모든 재산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제발! 제발! 절 도와주세요.
 
 곽지안의 편지는 처음엔 광기 같은 것이 보이더니 뒤로 갈수록 차분해진다.
 편지에는 상세히 자신이 당한 일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도 암흑에서 미쳤었다.
 지금도 미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무작정 정신 이동을 할 생각만 했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편지를 들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정신 이동을 한다고 해도 최대 24시간이 내가 상대의 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즉, 아무리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결국엔 이 병원의 병실에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내 육체를 다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에서는 전신 마비는 흔한 경우다.
 그들은 대부분 고대 무술의 내공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한다.
 나도 역시 가능할까?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도 가능한데 그런 무술을 가진 사람이 없을까?
 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정신 이동이 주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정신 이동은 수단이 되었다.
 남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귀찮음이 아니라 이제는 나의 최대의 무기가 되었다.
 목표는 정해졌다.
 내공심법을 익혀 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잠깐! 나 정말 정신세계에 빠져 살더니 바보가 된 건가?’
 우리나라 인구수가 5,000만.
 하루에 한 번씩 정신 이동을 한다고 해도······
 컥! 십삼만 년쯤 걸린다.
 그리고 이 병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겨우 10명 안팎.
 ‘아악!’
 생각할수록 짜증이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라도 좀 해둘 것을.
 곽지안의 기억을 훑어보면 좀 나을까?
 곽지안을 생각하니 비로소 내가 그녀의 정신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그녀의 의문에 몇 가지 답을 적어뒀고, 다시 내가 궁금한 점을 몇 가지 적었다.
 그리고 2시간 뒤 다시 오겠다는 글을 남기고 내 육체로 이동했다.
 
 곽지안과의 펜팔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느끼게 했다.
 특히 인간은 인간과 소통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펜팔이라지만 처음 편지처럼 길지 않았다.
 짤막한 질문과 답이 오고 가는 정도였지만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하루에 10번 이상을 들락날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펜팔의 재미에 반복적으로 오고 가다 강제적으로 튕긴 것이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로는 간호사가 3번 왔다 갔다고 했으니 대략 12시간 정도가 맞을 것이다.
 걸으면 뛰고 싶고, 뛰면 날고 싶다고 했던가?
 곽지안과 요상한 펜팔을 하기 시작하니 좀 더 편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영체끼리는 혹 텔레파시가 통할까?
 아무리 신호를 보내봤지만 헛짓.
 결국 그녀에게 유체 이탈에 대해 설명해 줬다.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몰랐기에 한동안 그녀에게 이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엔 정말 성공한다.’
 난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정신 이동을 할 생각이다.
 곽지안에게 왔다 갔다 이동하다 보니 정신 이동도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이종진과 다르게 영체가 있는 그녀의 머리끝, 백회 바로 위에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정신만 집중하면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드르륵!
 ‘왔다!’
 머리끝을 봤다.
 간호사의 머리끝의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오직 그 기운만을 느끼며 정신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쑤욱 몸이 나아감을 느껴진다.
 곽지안 때와는 또 다른 느낌.
 바로 정신세계로 돌입된다,
 이질감과 함께 드디어 몸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을 떴다.
 “커억! 이 망할!”
 내가 차지한 몸은 아름다운 그녀가 아니라 내가 곰이라 부르던 간호사의 몸이었다.
 설마 순환 근무였던 것이냐?
 어마어마한 실망감이 덮쳤지만 진정해야 한다.
 비록 내가 원하던 몸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몸으로 이동한 것이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한다.
 지금까지완 다르게 어둠도 정신세계도 없다.
 그냥 내가 그녀가 된 기분이다.
 살짝 움직여 본다.
 육중한 다리를 옮기는 것이라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힘들다.
 마치 며칠 잠만 자다 일어난 몸처럼 둔하고 어색하다.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이고 침대와 침대 사이의 복도도 걸어본다.
 어느 정도 움직이고 나서야 비로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든다.
 “예상보다 힘들지 않는데······ 헙!”
 혼잣말에 익숙했는데 앞으론 주의해야겠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
 ‘몸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기억은 왜 안 들어오······.’
 “윽! 스톱!”
 생각과 함께 그녀의 일생이 내 머리로 들어온다.
 멈추라는 강력한 의지 때문인지 일순 멈춘다.
 그 짧은 시간에 곰의 초등학교 기억까지 들어왔다.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미향.
 어린 시절은 빼빼 마른 귀여운 꼬맹이였는데 무슨 일로 이렇게 뚱뚱하게 변한······.
 윽! 젠장! 다시 흘러들어 오는 기억들.
 결국 포기하고 모든 기억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기억과 관련된 것을 생각하려 하면 들어오는 모양이다.
 어차피 오늘은 한 20분 정도 있을 생각이었다.
 정신 이동 당한 대상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손에 들린 장치를 본다.
 마치 책처럼 생긴 기계. 내 기억에는 이런 기계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에는 이 장치의 이름과 사용법, 그리고 이 장치로 그녀가 매일 하는 일을 알 수가 있었다.
 밑에 있는 작고 오목한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떠오른다.
 환자의 이상 유무를 체크하는 프로그램인가 보다.
 난 재빨리 환자 이름 밑에 있는 이상 없음 버튼을 다다다 눌렀다.
 그러다 내 이름이 적힌 곳에서 멈췄다.
 이름은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입원일.
 내가 기억하기론 분명 2003년 7월에 사고를 당했었다.
 한데, 입원일은 2004년 8월.
 ‘다른 병원에 있다가 옮겨진 건가?’
 난 내 이름 있는 곳을 눌렀다.
 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역시 내 예상대로 사고 당시 목뼈와 척추 뼈가 부러지며 척수가 다친 것이다.
 다른 이의 눈으로 나에 대해 보게 되다니······.
 열린 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예쁜 연꽃이 배경으로 된 바탕화면이 보인다.
 작은 아이콘들.
 그리고 날짜······
 “지, 지금이 2011년 4월 5일이라고?”
 여성의 고음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설마 8년 동안 누워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생각 못했던 곽지안의 기억과 신미향의 기억을 살펴봤다.
 곽지안의 기억은 2008년에서 계단에서 한 남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끊겼고, 신미향의 기억은 바로 오늘 할 일에 대해 정리한 업무 일지를 보고 이 방으로 들어오는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 업무 일지에 적은 날짜가 바로 2011년 4월 5일이었다.
 난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갔다.
 침대에 누워서 힘겹게 숨 쉬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지금까지는 단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말라서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내 나이를 알고 보니 이해가 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정신이 혼란스럽다.
 내 상태가 비정상적이어서일까?
 무언가가 날 당긴다. 그 힘을 거부하지 않았다.
 난 내 육체로 돌아왔다.
 “어? 내가 왜 여기에 서 있지?”
 신미향은 얼떨떨해 한다.
 내가 몸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의 일을 기억 못하나 보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 아무래도 다이어트를 한다고 너무 급작스럽게 밥 양을 줄여서 이런 증상이 생긴 것 같은데······ 조금씩 줄여야겠다.”
 잠깐 혼잣말을 하더니 후다닥 병실을 나선다.
 ‘크크크! 하하하하!’
 사실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했는데 신미향의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오전에 밥 세 그릇을 삼겹살과 함께 먹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왜? 이제야 나와요?’
 유체 이탈을 하자마자 들리는 목소리.
 난 곽지안이 있는 곳을 봤다.
 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나 영혼처럼 투명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성공했군요.’
 ‘물론이죠. 좀 어렵긴 했지만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더군요.’
 ‘하하! 정말 이렇게 대화가 될 줄이야. 정말 반가워요.’
 ‘저도 반가워요. 그리고 저에게 유체 이탈에 대해 가르쳐 주신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녀는 정말 고맙다는 듯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그러지 말아요. 저도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사실 대화 상대가 없어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저도 그 기분 알아요. 처음 그 어둠 속에서······ 정말 끔찍했어요.’
 곽지안과는 말이 통했다. 동병상련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마치 친구처럼 편안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얘기하는 게 8년만인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간호사의 정신세계로 가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어? 알고 계셨어요?’
 ‘혼잣말 하는 거 다 들었어요. 대략 짐작할 수 있었죠.’
 똑똑한 아줌마다.
 과거 그녀가 거울을 쳐다보는 기억을 상기하면 정말이지 아름답게 생겼다.
 그 의사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헤헤! 그냥 충격 좀 받았어요. 제가 사고가 난지 벌써 8년이 흘렀더라고요.’
 ‘8년이요? 지금이 몇 년도죠?’
 ‘2011년도 4월이요. 어제가 5일이었으니 오늘은 6일이겠네요.’
 ‘전 3년이 되었군요. 그 기간도 마치 수십 년은 된 것 같은데······ 8년을 어떻게 버티셨어요?’
 그녀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와 이해한다는 얼굴이 마음의 위로가 된다.
 ‘괜찮아요. 그 암흑의 정신세계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니까요. 단지······ 어느새 나이를 먹어 버려 좀 그래요. 젊은 시절이 사라져 버렸잖아요.’
 ‘그렇긴 하겠네요.’
 우리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시시껄렁한 얘기부터 알고 있는 유머까지.
 ‘호호호! 그건 정말 옛날 유머군요.’
 ‘컥! 제가 들었을 땐 최신 유머였다고요.’
 ‘시간을 생각해야죠. 저도 비록 2008년까지밖에 모르지만 많은 것을 가르쳐 드리죠.’
 ‘잘 부탁드립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8년의 세월이 별거 아닌 것 같다.
 하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내공심법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고, 찾는다고 해도 배우다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정신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지내자.
 ‘그런데,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
 ‘일단, 내공심법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내공심법이요?’
 ‘헤헤, 네. 좀 황당하시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이 몸을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소설에서 보던 내공심법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호호호, 나쁜 방법은 아니네요. 유체 이탈도 있는데 그거라고 없으란 법은 없죠. 한데, 문제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떤 문제점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몇 명 없잖아요. 설령 그들 중 내공심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내공심법을 알아낼 생각이에요?’
 그녀가 말하는 사람 찾는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실 어제 그 실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로 정신 이동 후 다시 또 다른 사람에게로의 정신 이동이 가능한지를 말이다.
 ‘음, 그 문제를 사실 어제 연습해 보려고 했거든요. 그리고······ 죄송해요. 다른 사람에게 정신 이동을 하면 그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답니다.’
 ‘······.’
 일순 놀란 표정의 그녀. 잠시 후 부드럽게 표정이 풀린다.
 ‘괜찮아요. 그럼 저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오해는 마세요. 그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은 읽을 수 없어요. 오로지 기억만 읽어요. 아, 죄송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돈을 내세워 금이 씨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겠군요.’
 에에?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휴∼ 생각해 봐요. 제가 그 새끼, 이해해요. 다른 말은 안 나오니까. 그러니까 그 새끼에게 재산을 뺏길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산을 묶어뒀어요. 공식적인 재산의 경우에는 제가 죽으면 모두 사회 환원되게 해뒀고, 차명계좌로 만들어둔 통장은 제가 잘 숨겨뒀죠. 제 기억을 읽었다면 숨긴 곳을 잘 알 테니 그냥 찾아 쓰면 되잖아요.’
 난 성인군자는 아니다.
 돈을 보면 물론 욕심이 생긴다.
 기억하려 하니 그녀가 통장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아는 사람의 돈을 탐내지는 않는다.
 ‘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절대 지안 씨의 돈을 쓰지 않을게요.’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지만, 사용해도 좋아요.’
 아니, 이 여자가 누굴 놀리나?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자존심이 있지.
 ‘사용 안 할래요.’
 ‘사용해요. 어차피 제가 죽으면 언젠가 나라에 귀속될 돈이니까요. 그리고 복수는 안 해주셔도 되요. 다만, 나중에 내공심법이라는 걸 얻게 되면 그걸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이 씨의 몸은 8년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재활치료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내공심법이라고 해도 재활훈련에 족히 몇 년은 걸릴 거예요.’
 틀린 말이 아니다. 은근히 마음이 끌린다.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사용해요. 덕분에 저도 좀 편하게 생활하게요. 돈만 있으면 병실 옮기고 물리치료사를 고용해 최소한 더 이상 근육이 퇴화되지 않게 할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음악 좀 듣고 싶어요. 이 조용함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요.’
 돈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돈 주인이 저렇게 부탁하는데······.
 험!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럼, 잘 쓰겠습니다.’
 ‘천만에요. 부디 저도 버리지 마시고 같은 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크! 전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친구. 호호호!’
 ‘저야말로요.’
 이렇게 난 영체 친구를 한 명 두게 되었다.
 
 ***
 
 지안의 돈을 이용하기로 하고 출발에 앞서 몇 가지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점핑.
 난 정신 이동을 하여 대상자에게 옮겨가는 걸 편의상 점핑이라고 정했다.
 점핑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점핑은 성공적이었다.
 내 몸에서 점핑을 하는 것보다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걸 제외하곤 기억을 흡수하지 않고 바로 점핑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와중에 알아낸 것은 바로 내가 이 병원에 8년이라는 시간을 있을 수 있던 이유였다.
 고아 출신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월 200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낼 수는 없다.
 내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을 처리한다고 해도 역시 불가능.
 의대생들의 실험체가 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야 할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김병우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내 병원비를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공장 사장님의 이름도 아니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굴까?
 내 짐작은 내가 구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가면 반드시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 준비한 것이 동선.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곽지안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할 일은 많은데 하루만에 가능할지가 의문이다.
 ‘잘 다녀와.’
 ‘응!’
 3살 차이가 났지만 우리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드르륵!
 점핑 대상자가 문을 여는 소리.
 급할 건 없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정신 이동이 가능할 정도니까.
 윽! 곰이다.
 ‘호호, 아무래도 신미향과는 무슨 인연이 있나봐.’
 ‘방해하지 마!’
 꼭 정신 이동을 하려면 저 여자가 들어온다.
 지안의 말마따나 무슨 인연이 있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
 난 신미향의 머리끝에 집중했다. 그리고 주문.
 영체가 쑤욱 그녀에게로 향한다.
 난 신미향의 몸을 차지한 후, 바로 패드형 컴퓨터의 환자 상태에 대해 ‘이상 없음’ 버튼을 눌렀다.
 “갔다 올게.”
 지금 영체로 있는 지안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 근무자들은 갔니?”
 동료 간호사에게 물었다. 신미향은 이곳 병동 6명의 간호사 중 선임 간호사를 제외하곤 가장 오래 근무했다.
 “아뇨, 아직 옷 갈아입는 중인가 봐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커피를 마실 때가 아니었다. 지금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두 사람이 보인다.
 선임 간호사와 백윤희. 이미 두 사람에게 점핑을 해 봐서 그 둘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편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백윤희가 유리하다.
 “고생들 해.”
 “고생들 하세요.”
 “들어가세요.”
 “······.”
 난 정신을 집중하고 주문을 외웠고 백윤희에게로 점핑했다.
 “윤희 씨, 왜 그래?”
 “······아, 잠깐 어지러워서요. 이제 괜찮아요.”
 “그래? 많이 피곤했나 보다. 얼른 가서 쉬어.”
 선임 간호사의 물음에 답한 후, 병원을 빠져나왔다.
 “내일 봬요.”
 “수고하셨어요.”
 선임 간호사와 헤어지고 병원 앞 꽃집에서 꽃을 산 후 택시를 탔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분당추모공원으로 가주세요.”
 “네!”
 백미러로 힐끔거리는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
 같은 남자로써 충분히 이해한다.
 백윤희는 정말 섹시하다.
 얼굴, 몸매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띵동!
 메시지다. 명품 핸드백을 열고 스마트 폰을 꺼냈다.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메시지를 확인했다.
 ―노블레스 호텔 2103호. 어서 와. 식사 준비해 놨어.
 백윤희는 병원 의사와 부적절한 관계였다.
 그녀의 부적절한 상대는 이 메시지를 보낸 의사뿐 아니라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녀가 걸친 명품 옷과 액세서리는 그들에게서 나온 돈으로 구입한 것이다.
 처음 그녀에게로 점핑을 했을 때 기억을 읽고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해했다.
 그녀의 어두운 과거를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머리가 많이 어지럽네요.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아 겨우겨우 문자를 작성해 보냈다.
 띵동!
 ―(― ―;;)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몇 번 더 ‘띵동’ 소리가 들려 결국 전원을 꺼 버렸다.
 “허허, 남자 친구와 싸웠나 봐요?”
 “아뇨, 그냥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사람이에요.”
 “저런! 당장 경찰서에 연락해요. 손님 중에도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처음부터 따끔하게 혼내지 않으면 안 돼요.”
 “네.”
 “아는 분 중 한 분은 글쎄 집 앞까지 와서······.”
 말씀이 많은 분이다.
 하지만 나도 맞장구치며 얘기를 했다.
 세상 사는 얘기들과 택시 기사의 어려운 점 등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저씨, 저 잠깐 들렀다 다시 서울로 갈 건데 기다려 주시겠어요? 미터기는 켜두셔도 돼요.”
 “허허, 그럼 나야 좋죠. 다녀와요.”
 택시에서 내려 곽지안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부모들이 안장된 납골묘로 향했다.
 백윤희는 키가 컸다.
 그래서 조금 낮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걸을 만했지 정말이지 높은 굽이었으면 걷지도 못할 뻔했다.
 여러 종류의 납골묘가 보인다.
 모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는데 조각품이 서 있는 것들도 있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화려해 보이는 납골묘들이 나타난다.
 넓은 공간에 병풍처럼 돌 벽이 서 있고 그 앞에 석조 관처럼 생긴 재단이 있다.
 재단 위에는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서로 기대고 있는 조각품이 있다.
 들고 온 꽃을 재단 앞에 두고 잠시 묵념을 했다.
 비록 목적이 있어 왔지만 망자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이 가능한데 영혼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 마치 주변의 잡초를 뽑는 것처럼 움직이며 재단의 옆으로 갔다.
 재단 옆에는 납골함을 넣을 수 있는 입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홈에 손가락을 넣어 당기자 열린다. 반쯤 열고 안쪽으로 깊숙이 손을 넣어 더듬는다.
 ‘죄송합니다.’
 납골함이 손에 걸리자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한다.
 좀 더 더듬거리자 손에 잡히는 작은 가방.
 재빨리 가방을 꺼낸 후, 재단의 입구를 다시 밀어 넣고 일어났다.
 “이런.”
 먼지와 흙으로 엉망이다.
 대충 털고 가방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통장과 도장, 그리고 카드가 몇 개나 있었고 아무도 손댄 흔적은 없었다.
 곽지안이 이곳에 숨겨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남편이 장인, 장모의 납골묘에 올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가방을 백에 넣고 택시 있는 곳으로 갔다.
 “아저씨, ○○은행 △△지점으로 가주세요.”
 “네. 성묘는 잘 끝냈어요?”
 “예.”
 “이런, 흙이 잔뜩 묻었군요. 이 물티슈 사용해요.”
 “감사합니다.”
 기사 아저씨가 준 물티슈를 이용해 옷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통장을 꺼내 금액을 확인해 본다.
 ‘큭! 이거 공이 몇 개야?’
 하나의 통장에 입금된 금액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20억. 알고는 있었다. 곽지안의 기억을 읽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확인한 것은 전혀 별개였다.
 내가 다니던 공장에서 2년간 정말 아끼고 아껴 모은 돈이 2,000만 원이 안 됐다.
 한데 지금은 그 수백 배의 돈을 가지게 되다니.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 돈이 다 내 것이란 말이지.’
 지안은 이 돈을 모두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좋은 집, 스포츠 카, 수영복 입은 미녀들. 영화에서 보던 화려한 생활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아, 예.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요.”
 “허허, 아까 올 때완 다르게 기분이 좋아 보여서요.”
 물론, 기분은 날아갈 것 같다.
 돈은 충분하니 이제 내 몸만 제대로 치료하면 된다.
 하루라도 빨리 내공심법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3. 각인을 하다
 
 
 은행에 들러 아직 유효기간이 남은 카드로 200만 원을 뽑았다.
 그리고 통장과 카드 모두를 대여 금고에 넣었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은행일과 패드형 컴퓨터 구입은 의외로 쉽고 편하게 끝마쳤다.
 대여 금고를 빌리겠다고 곽지안이 만든 가짜 인물의 이름을 말하자 차장이라는 사람이 나와 편안한 소파가 있는 룸으로 안내했고, 이후에는 일사처리였다.
 곽지안의 얼굴이 붙은 가짜 신분증도 제시했지만 문제될 건 전혀 없었다.
 “앞으로도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십시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지 마시고 저를 찾아주십시오.”
 공장에서 2년간 일하며 은행을 들락거릴 때는 상상도 못했던 대접이었다.
 “혹, 이 근처에 패드형 컴퓨터 살 만한 곳이 있나요?”
 “바로 옆에 건물에 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구매하실 거면 여기서 기다리시죠. 제가 잘 아는 친구들이니 구매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소파에 앉아 은행 직원이 가져다준 잡지책을 읽고 있으니 패드형 컴퓨터가 나에게 왔다.
 계산을 하고 은행 문을 나설 때까지 내가 움직인 것은 대여 금고에 통장과 카드를 넣을 때뿐이었다.
 역시 돈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 택시에 올랐다.
 “일은 모두 끝났어요?”
 “아직요. 일단 이 돈 먼저 받으세요.”
 “뭘 이렇게 많이······ 감사합니다.”
 택시의 미터기는 15만 원이 넘게 찍혀 있었지만 난 30만 원을 건넸다. 패드형 컴퓨터가 얼마나 할지 몰라 200만 원을 뽑았을 뿐.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없는 돈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혹시나 싶어 가지고 있지만 일이 끝나면 백윤희의 지갑에 남게 될 돈이었다.
 과거에는 100원짜리 하나까지 챙기던 내가 용됐다.
 “어디로 모실까요?”
 “화곡동 140―XX번지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저씨는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밝다.
 화곡동 봉제산 밑에 있는 작은 빌라.
 지은 지 오래돼 겉에서 보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나동 203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벽은 여기저기 스티커가 붙었다 떨어진 자국들과 벗겨진 페인트로 지저분해 보인다.
 펜으로 쓰인 203이라는 숫자가 보이는 철문.
 철문에 붙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안에서 들리는 아주머니의 목소리.
 “여기가 혹시 김병우 씨 댁인가요?”
 “맞기는 한데 누구시죠?”
 여자 목소리라 그런지 문을 열며 살짝 가재미 눈을 뜨며 물어본다.
 ‘아! 그때 비명을 지르던 아줌마다.’
 정신세계에서 이 아줌마의 목을 수없이 졸랐었다. 그래서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 아줌마도 그때보다 많이 나이가 들었다. 많이 마르기도 했고.
 “누구세요? 제 남편은 왜 찾아오셨죠? 설마 이 인간이······.”
 “아뇨, 김병우 씨가 현금 씨의 병원비를 대고 계시죠?”
 “아! 그건 그런데 무슨 일로······.”
 “잠깐 들어가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들어오세요.”
 안에 들어가니 휑하다.
 거실에는 두 사람의 결혼 사진과 내가 구한 아이의 유치원 졸업 사진이 눈에 띈다.
 오래된 TV, 낡은 장판.
 마치 과거 나의 옥탑 방을 보는 것 같다.
 또 한쪽으로 볼펜 조립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박스들이 있고 볼펜들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차는 뭘로?”
 “그냥 시원한 물 한 잔 주세요.”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자 물을 쟁반에 받쳐 온다. 한데, 아줌마 눈초리가 이상하다.
 ‘헙!’
 치마를 입고 양반다리라니.
 난 재빨리 다리를 옆으로 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준 물을 마시며 쪽팔림을 달래본다.
 “집이 많이 엉망이죠?”
 “별말씀을요.”
 “현금 씨 일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시죠?”
 “그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난 다시 물을 마시고 내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법적으로는 아무 잘못도 없으신데 왜 절, 현금 씨를 도우신 건가요?”
 “글쎄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아이를 구해준 사람이라 그러신 건가요? 하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이신 것 같은데 한 달에 200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금 씨와 무슨 관계시죠?”
 “친척입니다. 외국에서 최근에야 돌아왔거든요.”
 이미 거짓말은 생각해 왔기에 내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휴∼ 그러시군요. 죄송해요. 제 부주의로 젊은 청년을 그렇게 만들었네요.”
 “······.”
 “우리 현아를 구해준 것 때문에 병원비를 냈다고 할 수 없네요. 그날······ 그러니까 현금 씨가 사고를 당하던 그날부터 전 지금까지 악몽을 꾼답니다. 날 원망하고 내 목을 조르는 꿈에 매일 밤 몇 번씩 깨죠.”
 목을 조른다는 말에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장판을 만지며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남편과 현아에게는 미안하죠. 7년이 넘게 남편이 벌어오는 돈은 대부분은 병원비로 들어가요. 하지만 남편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라면서 웃어넘긴답니다. 차라리 저에게 화라도 내면 편할 텐데······ 병원비는 다른 뜻이 아니었어요. 저의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이기적인 도움이었을 뿐이랍니다.”
 고해라도 하듯이 말하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린다.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도 나만큼 아파하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잊어요. 용서할게요. 아마 현금 씨도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그 마음에 고마움을 느낄 거예요.”
 “흑흑! 으흑흑!”
 흐느끼는 그녀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서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잊으세요. 저도 이제 잊겠습니다.’
 세상엔 참 나쁜 사람들이 많지만, 울고 있는 이 여자는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여자아이를 구한 건 잘한 일이라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죄, 죄송합니다. 초면에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이지 속이 후련하군요.”
 “아녜요. 이제 편안히 지내셨으면 합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
 난 내가 온 목적을 말했다.
 “앞으로 현금 씨의 병원비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 돼요! 저를 위해서라도······.”
 “이제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금 씨의 병원비로 사용한 금액을 돌려드리고 싶군요.”
 “그건······.”
 “현금씨를 위해 그토록 애써 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이제 남편분과 저 아이······ 현아라고 했나요? 현아와 행복하게 사세요.”
 난 패드형 컴퓨터를 꺼내 인터넷뱅킹으로 접속했다.
 “계좌번호는 지금까지 병원으로 보낸 그 계좌로 보내면 될까요?”
 나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됐어요. 확인해 보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밖까지 따라 나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저들 가족이 행복하길 바랐다.
 
 오전부터 같이 다녔던 기사 아저씨에게 추가로 20만 원을 주고 병원 앞에서 헤어졌다.
 화곡동에 들렀다 내가 살던 곳으로 갔지만 그곳은 이미 재개발 공사 중이었다.
 유체 이탈과 정신 이동 방법이란 책을 찾고 싶었지만 이미 8년이란 세월이 지났기에 이미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현장을 보고 완전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으로 향했다.
 백윤희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들고 있던 패드형 컴퓨터는 한쪽에 숨겨둔 후,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은 후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지만 좀 피곤한 생각이 든다.
 창밖으로 적당한 인물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병원 관계자면 곤란했기에 간호사들의 기억을 훑으며 바라본다.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중후한 남성.
 괜찮아 보인다.
 이제 백윤희를 떠날 시간이다.
 난 핸드백에서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 옆자리에 던져 놓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메시지를 보낸 후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중년의 남자에게 점핑을 시도했다.
 눈을 떴을 땐 막 차문을 여는 자세였다.
 다시 차문을 닫고 백윤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얼떨떨한 표정.
 아마 알아서 추측하고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납득할 것이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숨겨둔 패드형 컴퓨터를 들고 잠시 기억을 읽을까 고민해 본다.
 좀 피곤한 게 읽으면 그냥 튕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하려면 읽는 게 좋다.
 잠시 고민하던 난 결국 읽기로 결정했다.
 결정하자마자 쏟아지는 기억들.
 극히 짧은 시간에 중후한 남자의 일생을 본다.
 그리고 그의 일생을 본 한마디 소감을 내뱉었다.
 “나쁜 새끼!”
 기억을 안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 자식 이 병원의 이사장이었다. 한데, 정말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아니, 돈만 밝히면 그나마 다행. 젊었을 때부터 어지간히 사고를 많이 쳤다.
 강간, 폭행, 사기 등. 아주 밟아 죽일 놈이다.
 지금도 와이프 몰래 사귀는 여자만 두 명이다.
 당장에라도 병원 제일 위층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할 일이 있어 참는다.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경과 과장의 사무실로 갔다.
 “헛! 이사장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김 선생, 고생하십니다.”
 “별말씀을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내가 들어가자 놀란 표정의 의사. 곧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소파로 안내한다.
 그의 행동을 보니 아주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 같다.
 “한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전화로 하셔도 다 처리해 드릴 텐데.”
 “그럴 수야 있나요. 오늘 원장님 보러 온 김에 부탁할 게 있어 들렀습니다.”
 “부탁이라뇨. 편하게 말씀하시죠.”
 평소 이사장의 성격을 잘 아는지 신경과 과장은 알아서 긴다.
 이러한 모습이 신기하긴 했지만 말을 이었다.
 “제가 좋은 일을 좀 하려는데 김 선생이 좀 도와주세요.”
 “······.”
 헐, 이 아저씨 얼굴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이해한다. 내가 차지한 이사장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나도 어디 가서 자랑할 일이 필요하지 않겠소.”
 “아!”
 그제야 이해하는 얼굴이다.
 난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혼수상태 환자 중 두 명을 선별해 방을 옮겨 재활훈련도 시키고 영양제도 팍팍 넣어주고, 나중에 그들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방송국도 부르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당장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용은 내가 전부 부담할 텐데 얼마나 나올까요?”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경비로 처리하셔도······.”
 “그럼 안 되지요. 방금 말했잖아요. 비용을 내가 내야 나중에 목에 힘 좀 줄 거 아니요.”
 “하하! 맞습니다. 역시 이사장님은 탁월하십니다.”
 참 이 사람도 먹고 살려고 노력한다.
 “비용은······ 잠깐만요. 2인실에, 하루 두 번 마사지하고, 서서히 재활훈련을 하려면 일인당 한 500 정도? 아, 아니 350 정도면 가능하겠습니다.”
 내 눈치를 살피다 금세 가격을 내린다.
 “그 정도면 괜찮겠군요. 그럼 매달 계좌이체시킬 테니 내일부터라도 당장 시행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혹, 환자 명단을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두 명을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패드형 컴퓨터를 가져온 신경과 과장은 명단을 보여준다.
 “여기 현금이라는 환자와 곽지안이라는 환자가 좋겠군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더 좋겠죠.”
 “하지만 그들은 척수를······ 네네, 젊은 환자가 좋겠죠.”
 눈썹을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또다시 말을 바꾼다.
 난 병원 통장으로 자동이체를 신청했고 몇 가지 요구 사항을 더 말했다.
 “물론이죠. 진즉에 그렇게 했어야 하죠.”
 “내 김 선생이 이번에 제대로 신경 써주면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혹 다시 저와 보시더라도 절대 모른 척해 주세요.”
 “네네! 절대 모른 척하겠습니다. 혹, 그들이 깨어나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참, 두 사람을 병실에 옮기거든 이것을 그들이 있는 방에 놔두세요.”
 “예?”
 “음악도 듣고 하려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 두 사람을 위한 제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약간의 억지였지만 이사장의 말이라 그런지 아무 의심 없이 받아 든다.
 “이번 일은 제가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을 던져 주고 방을 나와 차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는 나의 육체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이 나쁜 놈을 그대로 보내자니 화가 난다.
 뭐,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난 눈을 감고 내 육체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날 당긴다.
 지안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잠시 쉬어야겠다.
 피곤한 하루였다.
 
 ***
 
 내가 정신세계 속 쪽방에서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들은 소리는 꽤나 즐거운 댄스음악이었다.
 별빛달빛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아름다운 목소리.
 최신가요인가?
 잠시 정신을 집중해 유체 이탈을 시도했다.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전혀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다.
 ‘미안, 너무 피곤했나 봐.’
 ‘일이 잘된 것 같으니 용서하지. 그나저나 심심했어. 어제 있었던 일이나 자세히 얘기해 줘.’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신경과 과장이 꽤나 신경을 썼나 보다.
 2인실로 나란히 지안과 누워 있고, 채광이 꽤 잘되는 병실이다.
 또한, 벽면에는 큰 TV가 달려 있다.
 물론, 지금은 무용지물이지만 나중에 TV도 켜놓으라고 말을 슬쩍하면 될 일이다.
 내가 맡겨놓은 패드형 컴퓨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꽤나 귀에 거슬리는 음악도 있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호사였기에 불만은 없다.
 ‘······그래서 문을 열어놓고 내 몸으로 돌아왔어. 이게 끝이야.’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없게 해? 너도 어지간히 여자에게 인기 없겠다.’
 ‘무, 무슨 소리. 나 좋다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퍽이나 그랬겠다.’
 눈치가 백단이다.
 ‘그나저나 이 병원 이사장이 그 정도로 망나니였어?’
 ‘응! 얼마나 화가 나던지 병원 옥상에 가서 뛰어내리려고 했다니까.’
 ‘그럼, 재미가 없지. 가령, 그와 관련된 세 여자를 한자리로 불러내거나 그가 숨겨둔 비자금을 숨겨 버리던지. 좋은 방법들 많잖아.’
 ‘······.’
 ‘그런 인간들은 서서히 말려 죽여야 재밌는 거야.’
 독한 것 같으니라고.
 나처럼 깔끔하게 처리해야지.
 음, 생각해 보니 나쁜 방법 같지는 않다.
 놈이 숨겨둔 비자금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꿩 먹고 알 먹고인가?
 ‘이제 어쩔 셈이야?’
 ‘그러게. 내공심법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고민이다.’
 ‘뭐가?’
 ‘우리나라 인구만 5,000만 명이야. 하루에 10번씩 점핑을 한다고 해도 만삼천 년이 넘게 걸려.’
 ‘에휴∼ 넌 공부 좀 해야겠다.’
 이게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만일 네가 대통령을 만나려고 해. 그럼, 너 주위 사람들 모두의 인맥을 이용한다고 할 때 몇 단계나 거쳐야 할 것 같아?’
 ‘글쎄? 만날 수나 있을까? 난 고아에 친인척이 없다고 말했잖아.’
 ‘너 공장 다닐 때 사장도 있고 너와 궁합이 잘 맞는 신미향 간호사도 있잖아.’
 ‘됐거든! 그 곰 얘기는 그만하지. 난 너처럼 예쁜······ 험. 나도 눈 높단 말이야.’
 그동안은 멀리 떨어져 지안의 영체를 봤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바라보니 정말이지 예쁘다.
 내가 그 의사였으면 물고 빨고 난리가 났을 텐데. 쩝!
 ‘예를 든 거잖아. 어쨌든 그런 식으로 만나가면 4번 정도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어. 나라면 한 단계만 거치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지.’
 지안의 말은 공장 사장이 아는 사람 중, 경찰서장이나 청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럼, 그 경찰서장이 아는 사람 중 판, 검사가 있을 수 있고, 그 판, 검사 중에 대통령과 학연이든 지연이든 혈연으로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의미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 알겠어?’
 ‘응! 고마워.’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날지 말해봐.’
 정말 날 무시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영체라서 용서한다.
 ‘점핑을 해서 기억을 읽는다. 그리고 그 사람과 관련된 인물 중 무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나 점핑을 한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
 ‘휴∼’
 지안은 세상 무너질 듯 한숨을 뱉는다.
 아놔∼ 왜 그러는 건데?
 ‘그냥 내가 설명할게. 우리나라 기업 총수들이나 정치인 중 제법 유명한 이들에게 점핑해.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읽는 거야. 아마 네가 찾는 사람이 존재만 한다면 빠르면 며칠 안에 늦어도 일 년 안에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지안의 말을 듣고 있으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그냥 공부가 아니라 인생 공부 말이다.
 
 얼마 전과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생활이다.
 해가 뜨면 햇볕이 드는 안락한 방과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기존에 음식 대신 먹던 링거액도 꽤 고급 링거액으로 바뀌었고 틈나는 대로 간호사들이 와 이상한 주사도 한 방씩 놓고 갔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물리치료사가 들어와 나와 지안의 몸을 열심히 움직여 준다.
 단 이틀이었지만 얼굴 땟깔이 좀 달라져 보인달까?
 ‘눈 돌리지 마.’
 자꾸 눈이 가는 걸 어떻게 해!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방금 전 나의 물리치료가 끝나고 지안의 물리치료가 시작되었는데 이게 상당히 야하다.
 물론, 3년간 빼빼 마른 지안의 몸매가 어디 볼 것이 있겠느냐마는 영체의 모습과 겹쳐 보면 꽤나 훌륭한 볼거리다.
 ‘너도 내 모습 다 봤잖아!’
 난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남자와 여자 다른 거야. 여자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거든.’
 그놈의 비밀 타령은.
 물론, 보기 싫은 모습도 있다.
 특히, 소변 배출 통로를 확보할 때는 난 항상 고개를 돌렸다.
 “응차!”
 이 병원에는 여자 물리 치료사가 없나 보다.
 지금 지안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신미향이었다.
 ‘신미향 씨도 살만 빼면 꽤나 예쁜 얼굴인데 말이야.’
 ‘응, 예전에 꽤 예뻤어.’
 난 뒤로 돌아선 채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데?’
 ‘여자는 민감하거든. 그래서 상처받기가 쉬워.’
 ‘그게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지안의 말은 정답이었다.
 신미향은 남자에게 배신당한 후, 폭식증에 걸렸다.
 그까짓 남자 뻥하고 차 버리고 쿨하게 잊어야지 어지간히 바보다.
 꼬치꼬치 캐묻는 지안.
 ‘그놈은 뭐하는 놈인데?’
 ‘그냥 직장 다니는 사람. 단지, 그 회사 사장 딸과 결혼했어.’
 ‘하여간 그런 놈들은 물건을 잘라 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움찔!
 ‘왜 니가 움찔대? 너도 혹시?’
 ‘아, 아냐! 난 지금까지 여자와 사귀어 본 적도 없었어.’
 ‘오호∼ 인기가 엄청 많았다며?’
 ‘······.’
 ‘알아, 알아. 인기와 사귀는 건 별개라 말하고 싶은 거지? 퍽이나.’
 하여간 말을 못하게 하는 재주는 타고 났다.
 ‘혹시 살을 빼라거나 많이 먹지 말라거나 그런 암시는 못 심는 거야?’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가능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점핑을 하면 그냥 그 사람이 되는 것뿐이야. 너에게 점핑했을 때완 다르다고.’
 ‘어떻게 다른데?’
 ‘글쎄······?’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안에게 들어갈 때는 분명 내 몸에서 유체 이탈한 상태처럼 된 후, 몸과 일체화를 시도했다.
 한데, 표현이 이상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점핑할 때는 유체 이탈한 상태를 지나치고 바로 일체화에 들어간다.
 내 설명에 지안은 점핑 후 유체 이탈을 시도한 후 다시 일체화해 보란다.
 될까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눈앞에 뚱뚱한 실험체가 있으니 바로 점핑을 시도했다.
 약간의 이질감 후 일체화가 되어 눈을 떴다.
 “허억!”
 신미향은 막 지안의 두 다리를 들어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당장 눈 안 돌려!’
 보이지도 않는 지안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최대한 얌전히 그녀의 다리를 침대에 내려놓고 병실 한쪽에 있는 간이침대에 신미향의 몸을 눕혔다.
 유체 이탈을 했을 때 그녀가 쓰러지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였다.
 머리끝에 집중을 하고 양 눈의 중심 30cm 앞으로 나아간다 생각했다.
 처음 내 몸에서 빠져나올 때보다 힘들다.
 얼마나 했을까? 쑥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그러게. 내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
 ‘시간 없어. 얼른 들어가 봐.’
 ‘들어가서 정신세계면 어떻게 해야 해?’
 난 여자에 대해 모른다.
 아니, 아는 남자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남자에 대한 복수.’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지안.
 인상이 자연스레 찡그려진다.
 ‘넌 어째 말만 나오면 그렇게 섬뜩하냐? 막장드라마 인어아줌마에 나오는 복수의 화신이냐?’
 ‘신미향은 결코 복수할 스타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내가 멋쟁이가 되어 날 버린 걸 후회하게 만들 거야라는 복수를 말하는 거야.’
 아니다. 지금 말하는 건 가식이다.
 조금 전 말할 때는 분명 엄청난 복수를 하라는 말이었다.
 난 다시 신미향과 일체화에 들어갔다.
 일체화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 기분이 나쁘다.
 ‘됐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암흑.
 일단 방을 만들었다.
 지안의 방만큼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전 남자 친구가 여자들과 노는 사진들을 4면에 빼곡히 붙여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이어트’, ‘멋진 모습으로 바뀌어 복수’, ‘운동’ 등 그녀에게 자극이 될 만한 글을 붉은색으로 썼다.
 또 한 가지 쓴 것은 기억상실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는 글이었다.
 앞으로도 신미향의 몸을 자주 이용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다이어트의 부작용으로 생각하면 좋지만 혹, 다른 생각을 가질지 몰라서 해둔 안전장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과거 모습을 방 한가운데 조각상처럼 만들었다.
 ‘좀 아닌데?’
 신미향이 과거에 꽤 예뻤다는 말이지 곽지안이나 백윤희처럼 아름답거나 섹시하진 않았다.
 자극을 주려면 좀 부족하다 싶어 곽지안의 얼굴을 아주 살짝 섞었다.
 그래도 부족해 보인다.
 좀 더 섞었다.
 몇 번 그렇게 하고 나니 조각상이 아예 지안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뭐, 자극을 주자고 한 일이니까.’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고 내 육체로 돌아간다.
 
 
 
 4. 암천회
 
 
 백윤희의 몸을 다시 빌렸다.
 내가 외출을 한 날 이후의 기억을 읽어보니 의사와 약간의 말다툼은 있었지만 아무 일없이 넘어간 모양이다.
 이번엔 조심스레 차까지 끌고 왔다.
 공장에서 일할 때 운전면허가 필수라 따놓기는 했지만 딱히 운전해 본 적은 없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차문을 내리고 사과를 하면 대부분 잘 해결되었다.
 역시 이 세상은 돈, 미모 따위로 좌우되는 곳이었다.
 기업의 총수가 일찍 출근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도대체 올 생각을 안 한다.
 아무래도 도로에 비상등을 켜고 너무 오래 있을 수 없다.
 일단 경비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점핑을 해야겠다.
 그전에 잠시 할 일이 있다.
 난 백윤희의 몸에서 유체 이탈을 했고 다시 일체화했다.
 신미향에게 했던 것처럼 백윤희의 정신세계에 방을 만들었고, 몇 가지 작업을 했다.
 자신을 소중히 하라는 것과 기억상실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문에서 서성이는 경비원 중 좌측 사람에게 점핑했다.
 먼저 그의 기억을 읽었다.
 고통이 일어났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인지 버틸 만하다.
 김칠현. 경호팀 소속.
 특수부대 출신으로 꽤나 험한 생활을 하다 경호팀장의 눈에 띄여 취업한 인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정문 근처에 내가 주차해 놓은 차에 관한 것이었다.
 난 김칠현의 몸을 움직여 백윤희의 차로 갔다.
 창문을 두드리니 얼떨떨해 하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괜찮으십니까?”
 모른 척 물었다.
 “아, 예. 제가 요즘 왜 이런지 모르겠군요. 여긴 어디죠?”
 “여기는 삼행그룹 본사 앞입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군요?”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여기 있으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에 주차장이 있으니 피곤하면 그곳에서 쉬시고 가십시오.”
 “아뇨. 배려에 감사해요.”
 차를 몰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차를 바라본다. 멀쩡한 사람을 자꾸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누구의 차량인가?
 귀에서 들리는 소리에 상념을 깼다.
 “피곤한 사람이 잠깐 피곤을 푼다고 주차를 한 모양입니다.”
 ―좋아. 계속 수고.
 “예, 선배님.”
 사람의 기억을 읽는 것도 요령이 생겼다.
 일단, 기억 전송이 모두 끝나면 가장 최근 기억부터 더듬어 본다.
 그럼, 이 사람이 현재 뭘 하는지 어떤 상탠지 등이 간단히 나온다.
 그리고 다시 거꾸로 대략 한 달간을 본다.
 이 사람으로 행동하기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본격적으로 내가 원하는 정보를 검색한다.
 실제 평생 기억이라고 해도 하루하루 밥 먹고 양치하고 하는 기억은 나에게 전송이 안 된다.
 특별한 기억들만 나에게 들어온다고 할까?
 가령, 김칠현의 기억 중 군대에 관한 기억은 훈련소 시절 힘든 기억과 중간에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일은 또렷하지만 다른 기억은 흐릿하다.
 물론, 알려고 하면 더 많이 알 수 있지만 그건 내 영체의 힘을 약하게 할 뿐이었다.
 “수고들 하십니다.”
 출근하는 회사 직원이 인사를 한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인사를 받다가 생긴 요령이다.
 처음엔 일일이 인사를 한 모양인데 출근하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니 자연스레 바뀐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곤욕이다.
 무릎이 아프다.
 본격적인 출근 시간이 되자 엄청난 인원들이 들어온다.
 그 시간도 지나갔다.
 이제 슬슬 점핑을 해야 한다. 점핑 대상자의 기억상실의 공백이 크면 스스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장님 도착!
 기회다. 응? 근데 차장? 차장한테 무슨 경호씩이나 재빨리 기억을 검색한다.
 이남호. 삼행그룹의 후계자. 삼행건설에서 차장으로 근무 중.
 이해가 됐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 같은 분류다.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 차도 타지 않고 다가온다.
 그 뒤로 두 명의 경호원이 뒤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그냥 회장 일가를 보호하는 경호원이라는 것뿐이다.
 난 이남호의 머리끝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나아간다, 나아간다, ······.’
 점핑 성공!
 이남호와 일체화가 되었을 때 들리는 낮은 목소리.
 “괜찮으십니까?”
 “예, 어제 저녁에 책을 읽는다고 좀 늦게 자서 그런가 봅니다.”
 이남호의 기억엔 내 옆에서 날 부축하듯이 잡고 있는 경호원은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시군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난 걸음을 옮기며 재빨리 기억을 훑기 시작했다.
 오늘 이남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삼행건설 문제로 그룹 이사이자 삼촌을 만나러 왔다.
 일단 기억을 읽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가 좀 어지럽군요. 잠깐 쉬었다 이사님을 뵈어야겠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시죠. 물이라도 갖다드릴까요?”
 “네.”
 31층의 휴게실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이남호의 기억을 차분히 정리해 본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생이다.
 이남호는 생의 대부분을 교육받는데 보냈다. 아니, 지금도 삼행건설에서 그룹 후계자로 교육받고 있는 중이다.
 가진 재산과 앞으로 물려받을 그룹을 생각하다면 행복해 보일지 몰라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참 심심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편으론 불행한 인생처럼 보인다.
 특이한 점은 그를 수행하고 있는 경호원들.
 그의 어버지인 삼행그룹 회장이 붙여준 인물들이었고, 그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들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영상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이 무예를 연습하는 장면.
 마치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인간의 키를 훌쩍 뛰어넘고 꽤 먼 거리를 단숨에 도약하여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이들이다!’
 가슴이 뛴다.
 지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나 쉽게 무술의 고수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내공심법을 가지고 있는지는 점핑을 해 봐야 한다.
 더 이상 이남호의 기억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물 드시죠.”
 “고맙습니다.”
 물을 건네받아 마시며 두 사람의 경호원을 본다.
 느낌상 물을 갖다준 사람, 금두환이 아랫사람 같다.
 무술 연습하는 장면에서도 가만히 서서 경호를 서고 있는 차영호가 더 강해 보였다.
 점핑할 상대로 더 강해 보이는 차영호를 골랐다.
 바로 점핑을 하려다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핑이 아닌 이남호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방을 만들었다.
 ‘뭐가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다.’
 방에 뭘 각인시킬까 잠시 고민하다 세 가지 문장을 벽에 가득하게 도배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가지자.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 하고픈 것도 못하고 지내는 것이 좀 불쌍하게 보였다는 점과 개인적으로 부자들이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각인시킨 것이다.
 이렇게 정신세계에 방을 만들고 각인시키는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 한 일이었다.
 난 눈을 뜨고 차영호의 머리끝을 바라보고 주문을 외웠다.
 느낌이 좀 이상하다.
 그의 머리끝에 느껴지는 홀이 마치 무언가로 막혀 있는 것 같다.
 난 그 막힌 벽을 뚫고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
 ‘후∼ 무술의 고수는 원래 이렇게 힘든가?’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다시 시도했다.
 막고 있는 벽을 의지로 계속 두드려 본다.
 그도 이상함을 느꼈을까?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순간 벽에 약간의 구멍이 생긴다.
 ‘됐다!’
 난 그 구멍을 향해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순간 뻥 뚫린 벽. 이제 점핑이다.
 한데, 그 뚫린 구멍이 빠른 속도로 메워진다.
 이미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벽에 부딪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쑤우욱∼∼∼
 다행히 구멍을 통과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강한 이질감.
 ‘젠장! 정말 힘들군.’
 다른 사람들보다 일체화하는 게 몇 배는 힘들다.
 하지만, 이미 몸 안에 들어온 이상 시간문제일 뿐이다.
 “응? 제가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죠?”
 “아까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 잠깐 쉬신다고······.”
 이남호와 금두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일체화가 되어야 할 텐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시겠군요. 서두르죠.”
 “네.”
 이사실로 움직이던 둘이 내가 움직이지 않자 의아한 듯 쳐다본다.
 ‘움직여! 움직여!’
 “사형, 뭐하세요?”
 금두환이 다가와 속삭인다.
 이거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급속도로 피곤해진다.
 “사형?”
 “괜찮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하느라······.”
 다행히 그와 일체화를 이뤘다.
 기억을 읽어 들이며 이남호의 뒤를 따른다.
 “여기에서 기다리세요.”
 “예.”
 이사실로 들어가는 이남호에게 인사를 하고 문 앞에 선다.
 차영호의 삶은 이남호와 비슷했다.
 이남호가 후계자 수업을 평생 받았다면 차영호는 무술 수련에 평생을 바친 이였다.
 문제는 그의 기억 중 많은 부분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찾았다!’
 선도법(仙道法).
 그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오던 호흡법으로 정기신(精氣神) 삼단 즉, 상·중·하단전을 고루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난 선도법에 대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수련 방법에 관한 정보들이 들어온다. 그러다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르며 또다시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
 ‘응? 암천회(햌天會)? 노사(老師)?’
 아무리 그 두 단어를 반복해도 반응이 없다.
 단어를 유추해 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내공심법을 얻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떠날까 하다 이남호에게 했던 것처럼 방을 만들고 몇 가지를 각인시키고자 했다.
 한데 이거 만만치가 않다.
 겨우 방을 만들고 나니 내 육체가 날 당기는 느낌이 든다.
 빈방만 남겨놓고 가기가 아쉬웠지만 각인시키다 영체가 다칠까 싶어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잡고 있던 긴장을 풀며 내 육체로 돌아가길 바랐다.
 차영호의 눈으로 바라보던 복도의 풍경이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
 
 “정신 이동자······.”
 “사형,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다.”
 차영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
 분명 자신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남호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남호는 이사실로 들어가 있는 상태.
 자신의 사부에게서 정신 이동자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잠시 졸았다고 느꼈을 상황.
 만일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사부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 됐습니다. 회사로 가죠.”
 이사실의 문이 열리며 이남호가 나온다.
 “이 차장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말하세요.”
 복도를 걷던 이남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혹시, 아까 기억을 잃지 않으셨습니까?”
 “네? 아! 소파에서 쉴 때 말이군요.”
 “예.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남호는 생각하려 해 봤지만 설명할 것이 없었다
 “설명하고 말 것이 없군요. 그냥 잠깐 존 것 같은 느낌일 뿐이었습니다.”
 “그럼, 아까 회사에 들어오기 직전 쓰러지려고 했던 것은 기억에 나십니까?”
 “그랬었나요? 아마 그때 정신을 잃었나 보군요. 그때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차영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전의 상황을 재생하듯이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 경호원!
 경호원 한 명이 잠깐 얼떨떨한 표정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사제, 차장님 모시고 차에 가 있어. 난 잠깐 들렀다 바로 갈게.”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금두환은 오늘따라 좀 이상한 차영호를 바라본다. 하지만 차영호는 엘리베이터로 급하게 뛰어갈 뿐이다.
 “오전에 입구에서 근무를 서던 친구가 누굽니까?”
 급하게 상황실로 달려온 차영호는 책임자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잠시 당황하던 책임자는 곧 그가 누군지 알고 대답한다.
 경호팀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이들.
 그룹의 중요 인물들은 모두 이들이 경호했다.
 비록 자신이 경호팀 책임자라곤 하나 저들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도 할 수가 없었다.
 “추승교과 김칠현 경호원입니다. 혹, 그들이 무슨 실수라도······.”
 “아닙니다. 단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런 것뿐입니다.”
 약간 긴장한 얼굴의 책임자를 보던 차영호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닫고 말을 부드럽게 했다.
 “두 사람은 경호팀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희열아, 이분 휴게실로 안내해 드려라.”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오전 근무를 섰던 두 사람은 잠깐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아까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경호원이었다.
 “잠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혹시 오전 근무할 때 뭐 이상한 점 없으셨습니까? 가령 잠깐 졸았다거나······.”
 “저, 그게······ 그러니까······.”
 김칠현은 뜨끔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괜찮은 직장인데 혹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코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다만 아까 조금 이상해 보여 묻는 것뿐입니다.”
 차영호는 김칠현의 표정으로 그의 마음을 알고 부드럽게 그에게 말했다.
 “아, 제가 본사 한쪽에 서 있는 차량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잠깐 졸았나 봅니다. 깨고 나니 차장님이 들어오고 계시더군요.”
 “혹시, 그 차량 번호나 안에 있던 사람 기억하십니까?”
 “글쎄요? 그 차량에 가서 뭐라 하기 전에 잠든 것 같은데요.”
 “멍충아! 아까 너 차량에 가서 차 빼라고 하고 왔잖아.”
 옆에 있던 추승교가 끼어든다.
 “그랬나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머리를 긁적이는 김칠현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차영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역시 정신 이동자가 확실해.’
 혹 오전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해서 상황실에 가서 봤지만 차량 종류만 알 뿐 번호는 알 수가 없었다.
 상황실에서 나온 차영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사부님, 저 영호입니다.”
 그의 말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오늘 정신 이동자가 저와 이남호에게 들어온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정신 이동자? 자세히 말해보거라.
 놀란 노인의 목소리에 차영호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제계 5위의 성정현 회장은 어제 받은 메시지 때문에 오늘 저녁에 있는 러시아 기업인과의 만남을 전무에게 맡겼다.
 전무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고 말했지만 그건 어제 받은 메시지의 중요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정신 이동자, 마인드 앰블레이터의 재출현.
 “빌어먹을 놈.”
 평생 있지 못할 뼈아픈 과거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그다.
 ‘벌써 25년 전인가?’
 25년 전 정신 이동자가 SJ그룹에 입힌 피해는 엄청났다.
 비자금으로 모아둔 모든 돈과 재산을 사회복지단체에 기부를 했고, 회사 주식도 회사원들에게 일정 부분 나눠줘 버렸다.
 속을 알지 못하는 국민들은 진정한 기업인이 났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기자단을 모아 그러한 일을 발표한 성정현 회장의 부친인 성남일 회장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한 일을 알아차리곤 쓰러져 몇 년간 고생하다 죽었다.
 그 일이 정신 이동자가 한 짓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때, 그에게 정신 이동자라는 존재를 가르쳐 준 곳이 바로 암천회.
 그들은 암천회에 가입을 하면 전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부분의 재산은 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말 없이 암천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했던 기부금 중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아파 쓰러진 부친을 재산 기부 발표 당시 치매 상태였다고 거짓 증언을 해야 했지만 돌아가신 그의 부친도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 이후 악착같이 재산 증식에 열을 올려 겨우 예전 수준으로 재산을 모았는데 다시 정신 이동자가 출연하다니.
 “이번엔 절대 안 된다. 뿌드득!”
 정신 이동자가 경제인들에게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어느 날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판사들은 터무니없는(?) 판결을 내렸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을 고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5분 뒤에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알았네.”
 암천회에서 붙여준 두 명의 경호원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는다.
 암천회에서 회의가 있을 땐 언제나 이렇다.
 차도 경호원들이 구해 온 차량을 이용해야 하고, 도착해서도 회원들끼리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시간 안배가 철저하다.
 지금까지 어떤 사적인 자리에서도 암천회의 회원임을 밝힌 적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암천회의 절대 규칙 중 하나가 바로 ‘회원이 누구인지 알아서도 추측해서도 안 된다’였다.
 바로 기억을 읽으면 모든 사실을 알아 버리는 정신 이동자 때문이었다.
 그래서 암천회는 철저히 점조직화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대충은 누가 암천회 소속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암천회에서 연락이 와 이번 건은 양보하라는 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반대로 그런 식으로 이득을 얻을 때도 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가시죠.”
 문이 열리자 성정현은 차에서 내려 경호원을 뒤따랐다.
 아무도 없는 길. 뒤에 누군가가 도착했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이는 별장.
 별장에는 몇 개의 방을 제외하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다.
 하지만 목적지는 별장의 지하였다.
 앞선 경호원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고 성정현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와 다르게 화려한 복도를 따라간다. 좌우로 수많은 방문이 보였고 그중 한 곳으로 경호원들과 들어갔다.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앞으로 모니터가 있는 단출한 방이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까지 회의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차를 드릴까요?”
 “시원한 음료가 있으면 주게. 아무래도 목이 타니 시원한 걸 마시고 싶군.”
 성정현은 경호원이 건네는 음료를 받아 벌컥벌컥 마신다.
 팍!
 잠시 후 앞에 있는 모니터가 켜지며 익숙한 노인의 모습과 각시탈을 쓴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회원 여러분이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오늘 회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느 회의처럼 박수 소리는 없었다.
 성정현은 비록 화면이지만 노인과 각시탈을 쓴 이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뒤에 있는 경호원들이 노인의 제자들이고, 각시탈이 암천회의 회주라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한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성정현은 두 사람을 진정 존경했다.
 25년 전 피해에도 SJ그룹이 여전히 제계 5위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저 두 사람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아마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급하게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모두들 이미 연락을 받으셨겠지만 아무래도 정신 이동자가······ 나타난 것 같소.
 노인은 정신 이동자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잠깐 말을 멈췄다 이었다.
 ―확실하십니까?
 회원 중 누군가가 한 말이 변조된 음성으로 들려온다.
 심각한 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내 제자 중 한 명이 직접 정신 이동자에게 정신을 뺏겼다고 말했고, 정황상 내가 추측하기에도 맞는 것 같소.
 성정현은 들고 있는 음료잔을 부수려는 듯 꽉 움켜진다.
 스피커로는 탄성과 분노의 소리가 웅성거리듯 들려온다.
 ―모두들 침착하시오. 이번 정신 이동자는 어리석은 건지 너무 일찍 정체를 드러냈소. 그러니 지금부터 모두 조심만 한다면 피해 없이 해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를 막을 방법이 없잖습니까?
 회주가 침착하라는 말에 또 누군가가 말한다.
 ―막을 수 있습니다. 추측에 따르면 그는 중급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 이동시 걸리는 시간은 대략 1분. 하지만 일체화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여러분 곁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이 제압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외부로 활동이 많은 저로써는 그의 침입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성정현은 자신이 물으려고 했던 질문이 나오자 귀 기울였다.
 ―물론, 완벽하게 막을 순 없겠죠. 일단 대외 활동을 최대한으로 자제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기자 회견을 원천적으로 막을 생각이며 이상 행동을 보일 경우 여러분의 옆에 있는 경호원들이 철저히 막을 겁니다.
 꽤 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회주(會主)는 일일이 그에 답을 한다.
 성정현은 회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있다면 당하겠지만 이미 정신 이동자가 재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어 보인다.
 좀 전까지 조급했던 마음이 이제 느긋하게 바뀌었다.
 ―한데, 그의 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난번처럼······.
 ―말을 조심하세요.
 회주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따르게 딱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한 사람의 질문에 훈훈하게 바뀌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지난번 정신 이동자의 처리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절대 비밀이다.
 영체로 사람들을 옮겨가는 그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많지 않다.
 정신 이동자를 찾아 죽이는 방법과 그들이 누군가의 몸을 차지했을 때 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정신 이동자는 정말 들어가 있지 말아야 할 인물들에게 들어가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는데 이 비밀은 죽음까지 가져가야 했다.
 그때 잘못됐으면 암천회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는 성정현이었다.
 ―이번에는 그런 불상사가 없을 겁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은행에서 자금 추적은 물론이거니와 CCTV로 관련된 자들을 조사하면 정신 이동자 본인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정현은 회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특히, 암천회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성정현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정신 이동자는 자신이 무슨 의적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
 이제 그런 행동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정신 이동자들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릴 테니 상기하여 조심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들은 근처에 있어야 이동이 가능합니다.
 ―둘째, 이동 속도는 상급이 되면 30초 정도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일체화 속도도 눈치가 채기 힘들 정도로 빨라지니 각별히 주의하세요. 반드시 그가 상급이 되기 전에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이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노사(老師)께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5∼10번 쯤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넷째, ······.
 성정현과 회원들은 회주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기 시작했다.
 
 넓고 옛 향기가 물씬 한 방. 큰 모니터에 분할된 화면이 하나둘씩 꺼진다.
 “노사,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회주.”
 각시탈을 쓰고 있는 암천회의 회주는 노인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 많은 이들에게 제약(制約)의 암시를 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심력을 소모하지 않습니까? 저라면 아마 10명에게도 힘들었을 겁니다.”
 “허허! 무슨 겸양을.”
 노인을 향한 회주의 눈빛은 존경으로 가득했다.
 직접도 아니고 화면을 통해 저들의 머릿속에 암시를 걸어놓은 것이다.
 혹시나 정신 이동자가 회원들에게 침입한다고 해도 암천회에 대해 크게 얻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잘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노사와 저희 암천회가 나서는데 잘되지 않겠습니까? 혹, 천기를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영호 그 아이의 심벽(心壁)을 뚫었다고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게 노사께서 걱정할 정도입니까?”
 암천회주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아이의 수련이 약해서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노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만 어딘가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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