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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 고등학교

2017.06.16 조회 1,506 추천 16


 #0 꿈
 
 - 거기 누구세요? 제 목소리가 들려요?
 
 “뭐야!?”
 백찬호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5시 57분. 주변을 둘러보았다. 컴컴한 자신의 방이었고 자신의 침대였다.
 “뭐지? 분명히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찬호는 금발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꿈인가?”
 그리곤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 밝혀지지만, 꿈이 아니었다.
 
 
 
 #1
 
 1994년 대한민국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기록적인 폭염과 최악의 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미국월드컵이 있었으며 듀스의 마지막 앨범이 발표되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있었고 압구정동 오렌지족과 X세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젊은이들만의 새로운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한편 서울과 경인선으로 연결된 서해의 끝 항구도시 인천에서는 도시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고등학생들의 거대한 항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1994년 1월 인천 재건고등학교 운동장]
 
 인천 남구 구월동 주택가 언덕에 위치한 재건고등학교는 인천 최악의 고등학교로 불렸다.
 깡패 집합소, 날라리 고등학교, 공고와 상고에도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최후의 선택으로 들어오는 막장 사립 고등학교였다. 교장과 이사는 부부사이였는데 사이비 종교재단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선생님과 행정직원들 중에는 교장 부부의 친인척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평온한 주택가 언덕길에 위치한 칙칙한 회색빛 건물은 누가 봐도 교도소 같았다. 학교 주변에는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다. 학교 폭력, 선생님 구타 사건, 학생 난동, 패싸움, 퍽치기, 절도, 자해 등 해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추워 죽겠네. 씨발."
 꽁꽁 언 땅을 밟고 텅 빈 학교 운동장으로 사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존나 춥네. 크왁~! 퉷!"
 한 녀석이 아직 녹지 않은 눈 위에 가래침을 뱉었다. 눈이 내린지 며칠이 지났지만 제설작업을 안 해서 운동장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다들 추위에 종종 걸음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학교 참 좃 같이 생겼다."
 다들 휑한 운동장에 서 있는 우중충한 건물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예전에 직업학교로 쓰이던 건물이라는 설도 있었고 전쟁 때 생체실험을 하던 병원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어쨌든 좃 같았다.
 "야! 이 새끼들아. 운동장에 침 뱉지 말고 다들 모여."
 체육선생이 분명한 츄리닝 남자 하나가 하키스틱을 휘두르며 외쳤다. 오늘은 1994년 1월 재건고등학교 신입생 예비 소집일이었다. 동네 복덕방 영감처럼 생긴 작은 노인이 스텐드 위로 올라가 자신을 교감이라고 소개했다.
 "환영합니다.”
 교감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500여 명의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같은 중학교 출신들끼리 모여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와. 쟤가 그 유명한 동인천중 김현중이구나.”
 너구리처럼 생긴 녀석이 멀리서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게 누군데?”
 “재건고 3학년 대장 김현석 동생이야.”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재건고 3학년 대장 김현석은 재건고 뿐만 아니라 인천 일대에 이름을 모르는 학생이 없는 거물이었다.
 "친동생?"
 "시벌놈아. 이름 보면 모르냐?"
 "존나 쌔게 생겼다."
 김현중은 같은 학교출신 패거리들과 함께 있었다. 190에 가까운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군살 없이 역삼각형으로 내려오는 날렵한 몸은 표범을 연상시켰다. 짧게 자른 머리, 검은 피부에 날렵한 턱선과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매, 길에서 마주치면 어른들도 눈을 피할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쟤도 왔네. 상인천 대장. 나현도."
 아이들의 시선이 반대 쪽으로 향했다.
 “별로 안 쎄 보이는데?”
 나현도는 힙합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도 착해 보이고 중간키에 아담한 체구였다.
 “내가 쟤 싸우는 거 봤는데 완전 날아다녀.”
 “조까!”
 “진짜라니까. 한샘학원에서는 유명했어.”
 “쿵후도장을 오래 다녔다나봐.”
 “쿵후? 그런 거 배워봐야 좃도 아니야.”
 “니가 뭘 알아!”
 
 나현도는 자신에 대한 품평회가 이루어지는 줄도 모르고 단짝 친구들과 모여 있었다. 나현도는 품이 넉넉한 마르떼 프랑소아 저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당시 인천에서는 희귀한 초기 힙합스타일 옷차림이었다.
 그의 단짝 친구 성재익도 보였다. 그는 큰 키에 물 빠진 닉스 청바지, 모델 같은 몸매를 자랑하는 멋쟁이였다.
 “쟤는 박진혁 아니야?”
 “그 박진혁?”
 “결국 못 갔구나.”
 “뭔 소리야?”
 “쟤는 동산중 태권도부 주장이거든. 중3때 전국대회 1등해서 한국체고에 스카웃 됐는데 한 달 전에 사람을 패서 입학이 취소됐다고 하더니.”
 “야! 목소리 낮춰. 이쪽 보잖아.”
 박진혁은 키 178에 미들급답게 탄탄한 몸매였다. 곱상하고 샤프한 얼굴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이번 1학년 장난 아니다."
 “피바람이 불겠어.”
 “우리야. 떡이나 먹으며 굿이나 보는 거지.”
 아이들이 낄낄대며 좋아했다.
 "야! 넌 대가리가 왜이래?"
 체육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체육선생 보다 머리 하나가 큰 남자애가 서 있었다. 체육선생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려하자 슬쩍 물러났다.
 "이거 봐라?"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합니다."
 "허. 그러세요? 당장 머리 염색 풀고 와."
 "원래 이 색깔입니다. 자연 갈색.”
 남학생이 말했다.
 "하. 야! 이 새끼야. 니가 무슨 양키야?! 이런 금발머리가 자연갈색이라고?"
 "예."
 남학생이 대답했다. 그의 머리는 누가 봐도 염색한 밝은 금발머리였다. 체육선생은 할 말을 잃었는지 한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이름이 뭐야?”
 “왜요?”
 “왜긴 왜야! 선생님이 물으면 대답해!”
 “백찬호입니다.”
 “좋아. 너 머리 어떻게 하고 오는지 두고 보자.”
 체육선생이 돌아갔다. 백찬호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였다. 몰려 있던 아이들 중 하나가 찬호를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말했다.
 “쟤를 잊을 뻔 했네. 간석중 백찬호.”
 “뭐야? 왜?”
 찬호가 멀리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 떠들던 아이들은 얼굴이 빨개져 둘러댔다.
 “아니야. 아무것도.”
 “싱거운 자식들.”
 아이들은 시비가 걸릴까봐 재빨리 도망쳤다. 이제야 현실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저 놈은 무슨 소머즈인가 왜 이리 귀가 밝아?”
 
 “아. 아.”
 그때 교감선생님이 마이크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더 궁금한 거 없나?”
 교감의 물음에 다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없으면 이상으로.”
 "교복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이 학교에 왜 왔는지 모를 공부 잘하게 생긴 검은 뿔테 안경이 물었다.
 "1학년1반 교실 가면 있으니까. 보고 똑같이 맞춰 와라.”
 체육선생이 마이크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상! 개학하면 봅시다!”
 
 학생들은 춥다고 투덜거리며 학교 교실 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교실 안은 밖보다도 더 우중충했다. 칙칙한 복도 끝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꽤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이게 뭐야?”
 1학년 1반 교실에 들어가니 홀딱 벗겨진 하얀 마네킹이 덩그러니 쓰러져 있었다. 박살난 머리에는 발자국이 나 있었는데 교복은 누군가 훔쳐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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