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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괴동 1권 (1화)

2017.06.16 조회 453 추천 2


 은거괴동 1권 (1화)
 작가서문
 
 
 안녕하십니까?
 은거괴동의 운후서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은거괴동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비록 중간에 얽히고설킨 일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다행히 은거괴동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뿔미디어 관계자 여러분과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를 보살펴 주신 부모님, 하늘에 계신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항상 오십 대로만 보이시는 예쁘신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이모부, 이모,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 고모부 분들, 고모 분들, 큰어머니, 고모할아버지 분들, 고모할머니 분들, 외삼촌할아버지, 외삼촌할머니, 작은 할아버지, 작은 할머니. 그리고 제 글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과 곁에서 지켜봐 주신 동료 작가 여러분.
 비록 모든 분들을 적진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은거괴동, 읽으시면서 잠시나마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운후서 올림.
 
 
 
 序章
 
 
 “이걸로 두 덩어리.”
 턱을 쓰다듬으며 유심히 고깃덩어리들을 살펴보던 백의 노인이 손가락으로 윤기가 흐르는 고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백의 노인의 건너편에 있던 홍의 중년인이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이것 말씀이시지요?”
 “그려.”
 백의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홍의 중년인은 날렵한 손놀림으로 바구니에 담겨 있던 고기를 낚아챘다.
 워낙 표홀한 손놀림에 주위 사람들이 보았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백의 노인은 그저 주위를 둘러보며 지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낚아챘던 고기가 홍의 중년인의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순간 홍의 중년인의 손이 허리춤에 매여 있는 칼집으로 재빨리 옮겨 갔다.
 푸슛.
 작은 소음과 함께 뽑힌 칼이 허공에서 요란하게 춤을 췄다.
 파파팟.
 소음과 함께 빛에 숨어 있던 고깃덩어리들이 바구니에 조심스레 안착했다.
 바구니에 안착된 고깃덩어리들은 놀랍게도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갈라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마흔 조각은 넘어갈 것 같았다.
 쾌검술(快劍術) 혹은 발검술(拔劍術)의 고수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경악하며 한 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의 노인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깃덩어리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치 매처럼 날카로운 눈매였다.
 “저번보다 한 조각마다 약지만큼 부족한데······. 쾌검제(快劍帝)라 불리던 자네의 실력이 녹슨 거여 아니면 오 년 단골손님을 무시하는 거여?”
 마치 직접 저울에 달아 보기라도 했는지 백의 노인이 거칠게 꾸짖었다.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번에 미친놈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소 한 마리를 죽이고 말아서 그렇습니다. 이번만 봐주십시오.”
 홍의 중년인이 애처롭게 말하며 사정을 말하자 백의 노인이 코를 킁킁거렸다.
 고깃덩어리의 냄새를 맡던 백의 노인이 홍의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척 보아도 홍의 중년인의 눈매에서 애처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왔다.
 결국 백의 노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다음에 또 부탁함세.”
 “아이고, 감사합니다.”
 홍의 중년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시원스레 말했다. 사실 백의 노인도 이곳이 가장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한번 농 삼아 떠본 것이다.
 물론 그것을 홍의 중년인도 오 년째 겪고 있기에 가볍게 넘길 정도였다. 백의 노인이 모습을 감추자 홍의 중년인이 호탕하게 외쳤다.
 “다음 손님!”
 
 
 
 第一章 은거괴동(隱居怪洞) ― 네가 이 마을의 막내다
 
 
 날씨는 맑았으나 유난히 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산새들은 날개를 숨긴 채 나뭇가지에 힘겹게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한 청년은 넝마로 변한 청의(靑衣)를 입은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헉, 헉.”
 청년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지 열심히 뛰다가도 가끔씩 뒤로 고개를 돌려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청년은 달리고 또 달렸다.
 넝마로 변한 청의 틈에 보이는 살의 색이 퍼렇게 변할 때까지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다.
 열심히 숲 속을 질주하던 청년이 순간 돌부리에 걸려 나자빠지고 말았다.
 크게 넘어진 청년이 신음성을 내뱉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아.”
 그러나 심하게 다친 듯 청년의 무릎에선 피가 낭자했으며 청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켰던 청년이 신음성을 내뱉으며 나무를 버팀목 삼아 주저앉았다.
 청년은 이를 악다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까 노심초사해하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하늘을 올려 보던 청년이 청승맞게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눈물과 콧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청년은 하늘이 떠나가도록 통곡했다.
 “크흑.”
 통곡을 하던 청년의 뇌리에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지만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큰 장원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먹고살기에 충분했고 홀어머니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광동(廣東)에 흑살문(黑殺門)이라는 이름을 지닌 흑도방파가 들어섰다.
 흑살문이 세워진 그날 독고천(獨孤穿)은 흑살문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친히 보호를 해 줄 테니 매달 금액을 바치라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독고천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정중하게 답신을 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독고천에게서 흑살문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장어를 구하러 시장에 갔다 온 독고천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장원의 대문이 부서진 채 주위에는 파편이 낭자했으며 대문에 들어서자 장원은 이미 폐허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급히 장원을 둘러보았지만 어머니와 자신이 평생 모은 재물들이 사라진 지 오래인 듯싶었다.
 사람이란 분노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법이다.
 고로 독고천도 눈알이 뒤집혀 무작정 흑살문의 대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그러나 흑살문은 시치미를 뗐고 분노에 가득 찬 독고천은 흑살문에서 난동을 부렸다.
 평상시에 무공의 무자도 모르고 살던 독고천은 엉망진창으로 흑살문의 무사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후.
 독고천은 또다시 흑살문의 대문을 두들겼고 몸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독고천은 거침없이 흑살문의 대문을 또 두들겼고 이번에는 쫓기기에 이르렀다.
 복수는 이미 물 건너가 버렸다. 홀로 문파를 상대할 수 없었고, 그에게는 힘이 없었다.
 원래 복수는 사람마다 다른 편이었다. 복수에 미치는 복수귀가 있는 반면 철저한 계획으로 복수 대상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있다.
 독고천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 뛰어들다가, 벽을 깨닫게 되면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다른 쪽을 모색하는 것이 독고천의 복수 방법이었다.
 청승맞게 통곡을 하던 독고천이 하늘을 올려 보았다.
 짹짹―
 맑은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고 광활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가 보였다. 갑자기 그는 날고 싶어졌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구석에 몰리면 미친 짓을 하게 마련이다.
 몸을 일으킨 독고천이 팔을 휘저었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이 팔을 펼친 독고천이 미친 듯이 달렸다.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달리던 독고천이 또다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이번에는 충격이 컸는지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심지어 정신조차 몽롱한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독고천의 눈에는 큰 바위가 들어왔다.
 바위에는 투박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은거괴동(隱居怪洞)
 
 순간 독고천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을 이름으로 장난을 쳐 놓고는 킥킥거리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릴 꼬마들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때였다.
 낡아 빠질 대로 빠져 땟국물이 흐르는 의복을 입은 노인이 독고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고천은 기겁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노인이 킬킬거리며 독고천을 훑었다.
 독고천은 외치듯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킨 채 독고천을 위아래로 재보듯 훑어보았다.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 독고천이 울컥했다.
 “누구십니까!”
 “자네 무림인(武林人)이 아니구먼?”
 노인이 나직이 묻자 독고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노인은 밝은 표정을 유지한 채 독고천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무림에서 은퇴한 자들만이 있는 곳이라 무림인이 오는 것은 달갑지 않네.”
 “그럼 저는 괜찮습니까?”
 노인의 눈은 깊었다. 심해와도 같이 깊었으며 알지 못할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독고천이 묻자 노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대수냐는 듯이 말했다.
 “상관없네. 사실 무림인이 와도 상관없는데 가끔 심마(心魔)에 걸리기에 뒤처리가 귀찮을 뿐이지.”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하던 노인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곳을 어떤 방법으로 찾았나?”
 “저······ 사실은 새가 되고픈 마음에 막 팔을 휘젓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곳이더군요.”
 민망한 듯 독고천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뭐가 그리 웃긴지 독고천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의외로 아팠기에 독고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육십 대 노인에게서 나올 것 같지 않은 힘이 느껴졌다.
 “하하하, 자네 정말 웃기는군. 이곳에는 허영진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어서 인간은 들어오지 못하는데 자네는 잠시 새가 되어 이곳에 들어온 것이야. 하하하!”
 “그렇습니까······.”
 즐겁게 웃는 노인을 쳐다보며 독고천이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혼절해 버렸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혼절해 버린 독고천을 기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노인이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인기척이 없던 나무 뒤에서 백의 노인이 슬며시 걸어 나왔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어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지 피부만큼은 젊은이들 부럽지 않게 파릇파릇했다. 걸어 나온 백의 노인의 허리춤에는 의외로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청목(淸木)아, 저놈은 어떻게 들어왔냐?”
 청목이라 불린 노인이 독고천의 옆구리를 툭툭하고 건들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청목 노인은 고개를 숙여서 독고천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손가락으로 눈을 뒤집으며 킬킬거렸다.
 눈동자는 맑았다. 마치 깊은 숲 속에 흐르는 냇물처럼 맑아 보였다.
 그런 눈동자를 보고는 청목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청목이라 부른 백의 노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놈이 새가 되어서 날아들어 온 게야.”
 “무슨 소리냐?”
 청목 노인의 말에 백의 노인이 되묻자 청목 노인이 즐겁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마치 당과를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소리였다.
 그러나 백의 노인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성을 냈다.
 “무슨 소리냐고!”
 “이놈이 잠시 미쳐서 허영진을 들어올 수 있었던 게야.”
 청목 노인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의 노인은 만족하지 못한 듯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청목 노인은 킬킬거리며 독고천의 팔목을 쥐어 잡은 채 백의 노인에게 걸어갔다.
 독고천이 땅바닥에 끌리며 작은 신음성을 내뱉었지만 청목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백의 노인이 그제야 만족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도 끌어 보자.”
 “옜다.”
 청목 노인은 망설임 없이 독고천의 팔목을 넘겼다. 백의 노인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독고천을 끌면서 은거괴동이라 쓰여 있는 바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지켜보던 청목 노인도 킬킬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새소리만이 텅 비어 버린 숲 속에 고즈넉하게 울릴 뿐이었다.
 
 ***
 
 “으음······.”
 침상에 누워 있던 독고천이 신음성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숨어 있던 고통들이 바늘처럼 찔러 왔다.
 아까는 워낙 급했기에 못 느꼈던 통증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다.
 독고천이 옆구리를 손으로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독고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짙은 약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을 보아 의원인 듯싶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은 숲 속에 버려져 있었고, 괴이한 노인을 만난 것까지는 기억하겠는데······.
 머리가 아파 오는지 독고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주위를 훑던 독고천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고도 인기척은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독고천이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일어났냐?”
 “헉!”
 콰당.
 순간 독고천이 미친 듯이 놀라며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독고천의 옆에는 백의 노인이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독고천이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졌던 인기척은 이미 눈앞으로 옮겨진 지 오래였다.
 독고천이 백의 노인에게 시선을 돌리자 백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까 괜찮은가 보군.”
 백의 노인이 손수 독고천을 일으켜 주며 중얼거렸다. 독고천은 겨우 침상에 올라가서 숨을 고루 쉬었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워낙 놀란 탓에 얼굴도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백의 노인이 킬킬거리며 독고천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자네 재미있구먼. 이제 상처는 나았으니 밖에 나가도 된다네.”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독고천이 조심스레 묻자 백의 노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의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자 독고천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잠시 무언가 아니라는 듯 따지듯 물었다.
 “이곳이 의원이라는 것은 압니다. 이곳이 무슨 마을이냐는 말입니다.”
 “은거괴동(隱居怪洞)이라네.”
 “그럼 은거괴동이라는 곳이 어디 쪽에 있는 마을입니까?”
 “당연히 광동에 있네.”
 백의 노인이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왔다.
 독고천은 당최 백의 노인의 감정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웃다가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에 금세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선은 따라야 했다.
 비록 은인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무림인은 아니더라도, 은인에게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잠시 백의 노인의 표정에 맞추느라 애써 표정을 고치던 독고천이었다.
 독고천이 애써 웃자 백의 노인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독고천이 눈썹을 까닥이자 백의 노인도 눈썹을 까닥였다. 이번에는 독고천이 팔을 슬쩍 올리자 백의 노인도 따라 올렸다.
 이번에는 독고천이 손가락으로 코를 후볐다.
 그러자 백의 노인이 미친 듯이 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노인이 웃다가 졸도할 것만 같았다.
 “크히히히,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험험······.”
 시험을 하려던 독고천이 오히려 민망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백의 노인도 애써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을 보아 애써 웃음을 참는 듯했다.
 독고천은 뒤통수를 긁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광동에서 태어났고, 광동에서 한평생 자라 왔지만 은거괴동이라는 곳은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그걸 왜 나에게 얘기하는가?”
 “아니, 제 말은······.”
 독고천이 손을 내저으며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백의 노인의 참고 있던 웃음보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크히히히.”
 민망해진 독고천은 침상을 내리치며 미친 듯이 웃는 백의 노인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백의 노인의 웃음이 멈췄다. 백의 노인도 이제는 웃음보가 가라앉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험험.”
 어느 정도 분위기가 침착해지자 독고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저를 처음으로 발견하신 노인 분께서 무림(武林)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이곳은 무림인들의 마을입니까?”
 “엇비슷하다네. 그런데 약간 다르지.”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싫네.”
 백의 노인이 또다시 미친 듯이 웃으며 침상을 두들겼다.
 한참을 웃던 백의 노인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힘겹게 말했다.
 “하아, 이런 농이 제대로 통하는 놈은 처음이라 그렇다네. 이곳의 늙은 놈들은 감정이 메말라서 내 농을 받을 가치도 없지.”
 힘겹게 말을 꺼내던 백의 노인이 자세를 바로잡고는 말을 이었는데 꽤나 진지했다.
 “우선 이곳은 무림에서 은퇴한 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네.”
 진중한 말에 독고천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백의 노인이 말을 이었다.
 “무림에 진저리가 나거나, 무림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거나 등등 많은 이유를 지닌 자들이 이곳에서 은거를 하고 있다네. 원래는 노인들밖에 없던 마을이었는데 점차 노인들 사이에 늦둥이가 생기는 바람에 연령대가 낮아지기 시작했지. 또 중년의 나이에 은거를 하려는 놈들도 있고 말일세.”
 뭐가 그리 좋은지 뺨을 붉히며 백의 노인이 실실 웃었다.
 잠시 웃음을 터트리던 백의 노인이 독고천을 마주 대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마디로 이곳은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마을이라 보면 되겠네.”
 “무림인이라면 하늘도 날 수 있습니까?”
 독고천이 소박하게 그러나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백의 노인이 독고천의 눈동자를 마주 보더니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림인이라고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닐세. 자네 무림인을 본 적이 없지?”
 “본 적은 있습니다만, 정말 무림인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합니다.”
 독고천이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하자 백의 노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그 모습에 독고천이 침을 삼켰다. 백의 노인은 진중한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말했다.
 “무(武)를 입에 담는 순간 그자는 무림인일세. 불확실한 무림인이란 있을 수 없다네. 무림에 발을 담근다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지.”
 진지한 말투에 독고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백의 노인이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영원한 무림인일세. 이미 은원관계를 만든 이상 무림이라는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지. 죽기 전까지는 아니, 죽더라도 자손들이 힘들어진다네. 그것이 무림인일세.”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독고천이 감동했는지 눈을 흐리멍덩하게 뜬 채로 백의 노인을 경외하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백의 노인이 킬킬거리며 콧날을 높였다.
 그러다 갑자기 백의 노인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백의 노인은 기겁하며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점심시간일세!”
 “네?!”
 “점심이나 먹으러 가세나. 따라오게.”
 백의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독고천은 기겁하며 침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백의 노인의 걸음이 빠른지 독고천은 숨을 헐떡이며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백의 노인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밭이었다.
 아직은 농사 중인지 땅이 파헤쳐져 있었다.
 밭에 서서 백의 노인은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고천도 백의 노인을 따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백의 노인이 발견했다는 듯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있군!”
 “뭐가 보이십니까?”
 독고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백의 노인은 뭐가 보이는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저 독고천은 백의 노인의 뒤를 쫓으며 방대한 밭의 크기에 입을 벌릴 뿐이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백의 노인이 가리킨 곳에서 기합성이 울리고 있었다.
 “하압!”
 웅장한 기합 소리에 저도 모르게 독고천의 어깨가 주눅 들고 말았다. 알지 못할 서늘함이 다가왔던 탓이다.
 강렬한 햇빛 탓에 독고천의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흐릿했지만 태양을 등지고 있는 청의 중년인이 시선에 들어왔다.
 날렵해 보이는 옷차림새와 짙은 흑색의 머리칼은 강렬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청의 중년인의 움직임이 시선에 들어왔다.
 청의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청의 중년인이 바구니로 손을 집어넣더니 씨로 보이는 것을 한 움큼 쥐었다. 워낙 큼지막한 손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씨들이 붙잡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청의 중년인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화려한 손놀림을 펼쳤다.
 엄청난 빠르기의 손놀림에 독고천이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손 모양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재빨랐다.
 청의 중년인의 손에 쥐어 있던 씨들이 엄청난 속도로 땅에 박히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박히는 것도 아니었다.
 밭에 일정한 크기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곳에 정확히 하나씩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독고천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허공에서 씨를 뿌리던 청의 중년인이 백의 노인을 발견했는지 씨를 던지다 말고 백의 노인에게 다가왔다.
 청의 중년인이 다가올수록 알지 못할 위압감이 느껴져 온 탓에 독고천은 뒷걸음질 쳤다.
 그런 모습에 백의 노인이 청의 중년인을 꾸짖었다.
 “예끼, 호월(號越)아! 척 보아도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않느냐.”
 “흠흠, 몰랐다고 치지요.”
 호월이라 불린 청의 중년인이 헛기침을 하며 짐짓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독고천을 짓누르던 위압감이 순식간에 소멸됐다.
 위압감이 사라진 것을 느낀 백의 노인이 호월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점심은 어디 있느냐?”
 “아이고, 농부의 점심을 빼앗으러 또 오셨습니까?”
 “농부는 무슨. 네놈의 암기술을 볼 때마다 살기(殺氣)가 넘치는데. 퍽도 씨들이 잘 자라나것다.”
 백의 노인이 비꼬며 말하자 호월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누가 본다면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라도 믿을 만큼 애정이 넘쳐 보였다.
 웃던 호월이 독고천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녀석이 청목 선배가 데려온 놈입니까?”
 “그려, 무공의 무(武)도 모르니 건드리지 마라. 어허, 침 삼키고!”
 백의 노인이 농을 걸자 호월이 피식하고 웃으며 독고천에게 말했다. 자신감이 잔뜩 배여 있는 말투였다.
 “난 차호월(叉號越)이라 한다.”
 “전 독고천입니다.”
 백의 노인에게 차분함이 떠올랐다면 차호월이라는 자에게서는 호탕함이 흘러나왔다.
 마치 야생을 돌아다니는 맹호처럼 날카로움과 호탕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낭인 같았다.
 잠시 만족한 표정을 지은 채 독고천을 훑어보던 차호월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거 제 것입니다!”
 백의 노인이 점심을 홀라당 먹어 버린 탓이다.
 물론 차호월은 백의 노인이 올 것을 대비하여 한 끼를 더 가져왔지만 소용없었다.
 그마저도 모두 먹어 버리는 바람에 차호월은 맨 그릇을 긁으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다 드시면 어떡하십니까!”
 “잘 먹었다. 수고해라.”
 그 말을 끝으로 백의 노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없는 상황에 독고천은 그저 백의 노인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백의 노인의 발걸음은 무식할 정도로 빨랐다.
 독고천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헉헉거릴 뿐이었다. 거대한 밭을 지나고 담아해 보이는 마을이 시선에 들어왔다.
 시장 바닥처럼 북적이진 않았지만 하나하나 아담해 보이는 것이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마치 인심이 후한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짙은 미소를 끼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라면 가끔 보이는 자들의 인상이 험악하다는 정도였다.
 단순히 험악한 정도가 아니라 얼굴에 검상은 물론이요, 심지어 살기까지 등등하게 뿌리고 있으니 독고천은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풍문상으로 들어온 마도(魔道)의 고수들 같았다.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의 배를 가른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기에 독고천의 어깨는 더욱 떨렸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백의 노인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예끼, 인상 좀 펴라!”
 당장이라도 그자들이 덤벼들까 무서웠지만 의외로 그들은 백의 노인의 말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독고천은 신기했다.
 무림인은 힘으로 말한다고들 하는데 오히려 강해 보이는 자들이 백의 노인의 말에 주눅이 드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백의 노인을 뒤쫓던 독고천이 나직이 묻자 백의 노인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되물었다.
 “내가 얘기 안 했나?”
 “안 하셨습니다.”
 “거참, 요즘 치매기가 도는지······. 지금 촌장(村長)한테 가는 중이네.”
 발걸음을 옮기며 백의 노인이 말하자 독고천이 놀라워했다.
 물론 어디를 가나 대장이라는 것은 있게 마련이지만 이런 곳에도 대장이 있다는 말에 놀라워한 것이다.
 보통 무림인은 남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고 들었던 탓이다.
 독고천의 반응에 백의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다.
 아담한 마을을 지나고 숲 속에 다다랐다.
 숲 속은 하나같이 얄팍한 나무들이 풍성했으며 옅은 바람이 불어와 졸음을 쏟아지게 했다.
 또한 맑은 냇물이 가로지르고 있어 당장에라도 빠져들고 싶을 정도였다. 손수 만든 듯 돌다리를 건너자 작은 집이 시선에 들어왔다.
 작은 집이라고는 하지만 강풍이 불기만 해도 날아갈 듯 부실해 보였다.
 백의 노인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촌장에게 말해 놓았으니 들어가게나.”
 그 말을 끝으로 백의 노인은 발걸음을 돌려서 냇가로 향했다. 독고천은 백의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의 노인은 신을 벗고는 냇가에 발을 담그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라서 독고천도 그 흥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청천(淸天)이 높다 하되 강호(江湖)의 긍지보다 높으랴. 장강(長江)이 넓다 하되 강호(江湖)의 긍지보다 넓으랴. 청해(靑海)가 깊다 하되 강호(江湖)의 긍지보다 깊으랴. 그 무엇도 강호를 넘을 수 없으니 강호야말로 천하제일(天下第一)이로다.
 
 알지 못할 슬픔이 배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독고천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다.
 오늘 처음 보았으며 농이 심한 탓에 오히려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돌다리 아래에 앉아 태양을 등지고, 냇가에 발을 담근 채 흥얼거리는 백의 노인의 모습은 신선(神仙)과도 같았다.
 백의 노인은 계속하여 흥얼거렸고, 독고천은 눈물을 소매로 쓰윽 하고 닦으며 백의 노인이 가리켰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발이 성한 노인이 독고천을 반겼다.
 아니, 반겼다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그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다.
 독고천은 안절부절못했고 노인은 그저 흐리멍덩한 눈으로 독고천을 노려볼 뿐이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독고천은 이것을 인내심 시험이라 생각하고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으며, 노인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무림이란 곳에 살고 있던 무림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무언가 다르군.’
 흐리멍덩한 노인의 눈빛이었지만 생기가 돌았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눈동자라는 것이 살아 있지만 정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화려한 생동감을 느끼기에는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인은 무림인다웠다.
 아니, 무림인 중에서도 고수(高手)일 것 같았다.
 마치 바위조차 두부처럼 가른다는 무림인처럼.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의 입에서 탄식성과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잘 잤다.”
 순간 독고천은 억울한 나머지 눈에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놈의 노인들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뜨고 자는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물론 노인들은 우대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하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아니, 사람을 불러 놓고 주무시는 경우는 또 뭡니까?”
 독고천이 열을 뻗치며 외치듯 물었다.
 그러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이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넌 누구냐?”
 “전 청목이라는 분에 의해서 이곳에 들어온 독고천이라 합니다.”
 독고천이 자신의 소개를 하며 아직도 분을 삭이고 있자 노인이 털털하게 웃었다. 워낙 털털했기에 독고천조차 움찔거릴 정도였다.
 마치 자신의 화는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말했다.
 “원래 젊은이들은 혈기(血氣)가 넘쳐 화를 자주 내지.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닐세. 혈기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이고, 그것이 일찍 터져서 최대치에 다다르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은 편이지.”
 어느새 화를 삭인 독고천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이 씨익 하고 가볍게 웃었다. 노인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제법 어울리는 미소였다.
 웃던 노인이 독고천을 요리조리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
 “우연찮게 왔습니다.”
 독고천의 대답에 노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독고천을 훑었다. 독고천은 노인의 시선을 피하며 침을 삼켰다.
 예리한 시선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들킬 것만 같은 느낌에 독고천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노인이 독고천을 주시한 채 말했다.
 “그래, 우연도 운명인 셈이지. 그런데 이곳이 무림인의 마을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말하기 편하겠군. 그나저나, 이곳에서 살고 싶나?”
 순간 독고천의 머리에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자신을 키워 주신 어머니를 빼앗기고 장원조차 빼앗겼다.
 그리고 결국 도망에 이른 패배자일 뿐이다.
 돌아간다 해도 받아 줄 사람도 없었고 환영해 줄 사람도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독고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노인이 혀를 차면서 말을 꺼내 독고천의 입을 막았다.
 “쯧쯧, 네 녀석의 눈을 보아하니 고난을 겪었구나. 그것도 인재(人災)를 겪었어.”
 “······.”
 “인재를 겪은 이상 사람이란 편해질 수 없지. 그래, 복수라는 것이 하고 싶겠구나?”
 노인의 직설적인 물음에 독고천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심지어 그놈을 죽이고도 싶겠지?”
 “······!”
 독고천은 노인을 직시했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아서 독고천은 당황했다. 그러한 모습에 노인이 가부좌를 풀고 독고천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던 노인이 손을 독고천의 어깨에 올렸다.
 푸근한 느낌에 독고천의 떨리던 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독고천은 놀란 눈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그저 다 안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그 복수심을 다스리는 데에는 심신(心身)의 수련만큼 좋은 것은 없다. 마을의 주민으로 받아들이마.”
 “그렇다면?”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독고천이 놀란 듯이 되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이 마을의 막내다.”
 “네?!”
 놀란 독고천의 목소리에 노인이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당연하다는 표정에 독고천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표정을 유지한 채 독고천이 다시 되물었다.
 “왜 제가 막내입니까? 언뜻 마을을 돌아다니며 꼬마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막내는 아니지요.”
 독고천의 절망 어린 외침에 노인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노인의 막판 뒤집기에 독고천은 따지는 듯한 모양새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곳 마을에서는 먼저 들어온 자 혹은 태어난 자가 선배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어디 가서 시비 걸 생각 말거라. 이 마을 그 누구도 너보다 아래는 없다.”
 단호한 노인의 표정에 결국 독고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모습에 노인이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우선 아까 복수심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솔직히 무림인(武林人)에게 불가능한 일이지. 최소한 마을의 주민일 동안 삭이고 있어 주면 좋겠구나.”
 독고천은 흠칫했다.
 그랬다. 독고천은 이곳에서 심신을 단련한 후 복수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모두 노인에게 간파되자 움찔거린 것이다.
 잠시 식은땀을 흘리던 독고천이 가볍게 웃었다.
 ‘그때까지만이다. 오 년 정도만 참자. 그 정도면······.’
 “이십 년이다.”
 독고천의 망상을 깨뜨리며 노인의 말이 울렸다. 그러자 독고천이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가 이십 년입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수련해야 어디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아니더냐.”
 맞는 말이었다. 무공이란 절대로 쉽지 않다.
 몇 십 년을 익혀도 고수(高手) 축에도 들지 못한 채 죽어 가는 무림인은 부지기수였다.
 당황한 표정의 독고천을 뺨을 치며 노인이 물었다.
 “그런데 몇 살이냐?”
 “스무 살입니다.”
 “딱 좋은 나이로군. 딱 좋은 나이야.”
 노인의 중얼거림에 독고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은 어릴 때부터 익혀야 효과가 큰 법이다. 하지만 어릴 때는 끈기가 부족하다. 끈기가 부족한 만큼 무공에 흥미를 금방 잃을 수 있으며, 한번 포기했던 것은 다시 시도하기 어렵다.
 그러한 말을 항상 주위에서 들어 온 독고천이다.
 그런데 노인의 말은 오히려 독고천의 상식을 뒤집고 있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노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독고천은 무의식적으로 노인의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마을의 중심부였다.
 마을의 중심부를 가리키며 노인이 외쳤다.
 “가서 한중석(瀚中碩)이란 놈을 찾아라.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 알 것이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를 마친 독고천은 촌장의 집을 나섰다. 냇가에서 발을 담근 채 흥얼거리던 백의 노인은 사라져 있었다.
 독고천은 알지 못하게 어딘가 아쉬웠다.
 자신의 아버지는 금방 돌아가셨다.
 그렇기에 혼자서 상업을 도맡았고 장원을 살 정도로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행복은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흑살문을 찾아갔었다.
 그리고 쫓겨 온 지금, 이상하게도 복수심은 가라앉았다.
 오히려 알지 못할 흥분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무공(武功)이라는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자 온몸에서 열기가 나왔다.
 숲 속을 거닐며 독고천이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이십 년? 십 년 아니, 오 년으로 줄여 주마.”
 독고천이 혼자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순간 짐승인 줄 알고 흠칫했으나 사람인 것을 깨닫고 독고천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십칠 세에서 십팔 세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짙은 청의를 입은 소년이었는데 두툼한 입술에 동그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가 약간 올라가 있어 고집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놀랐던 독고천은 애써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직시했다.
 독고천은 어려서부터 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물론 주위의 친구들은 동생은 원수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독고천은 단호했다.
 그런데 딱 동생 또래의 소년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독고천은 애써 표정을 밝게 하며 활발하게 말했다.
 “안녕?”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네놈은 뭐야?”
 소년의 두툼한 입술에서 거친 말투가 나오자 독고천이 울컥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말라 보이는 놈이 반말도 모자라서 욕설에 준하는 말투를 내뱉는다?
 갑자기 독고천이 거칠게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소년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독고천을 올려 보았다. 독고천은 의외로 키가 큰 편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독고천이 갑자기 손을 번쩍 올리더니, 꾸짖음과 함께 소년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콰앙―
 그러나 비명성은 독고천에게서 나왔다.
 “컥!”
 소년의 머리통은 바위같이 단단했던 것이다.
 주먹이 아파서 신음성을 흘리던 독고천이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네가 새로 왔다는 막내냐?”
 순간 독고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랬다. 이 마을에는 자신보다 막내는 없었다.
 아무리 꼬마로 보일지라도 자신보다 선배 대우하는 것이 이 마을의 규칙이었다.
 독고천의 머리 회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너 이곳에 사니?”
 “그래.”
 “그럼 선배시군요······.”
 “그래.”
 소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러자 독고천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스물다섯이다.”
 소년의 말에 독고천이 놀라워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런데 겉모습은 젖살마저 그대로인 소년인 상태였다.
 동안(童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심하게 어려 보일 줄은 몰랐다.
 이 소년이 무공이라는 것을 익혔다고 생각하자 독고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 아프셨습니까?”
 “아프진 않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네.”
 소년이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서 공포감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독고천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소년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소년이 물었다.
 “어디 가냐?”
 “예, 한중석이라는 분을 찾으러 갑니다.”
 한중석이라는 석 자에 소년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인데?”
 “오, 그렇습니까? 한중석 님은 어디에 계신지요?”
 “따라와.”
 의외로 소년이 친절하게 앞장서며 말했다. 그러자 독고천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렸다.
 소년을 뒤쫓아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중심부에 도착했고 북적거리는 마을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이 대다수였지만 간혹 중년인과 젊은이들도 보였다.
 소년이 멈춘 곳은 꽤 커 보이는 건물이었다.
 겉은 깔끔했으며 의외로 고풍스런 문양이 시선을 끌었다.
 한가객잔(瀚家客棧).
 객잔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꽤나 북적거렸다.
 의외로 젊은이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활기차 보였다. 소년이 들어서자 점소이가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환영해 왔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아버지 계세요?”
 “지금 위층에 계실 겁니다.”
 점소이의 말에 소년이 독고천에게 손가락으로 까닥이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지은 죄가 있기에 독고천은 묵묵히 소년의 뒤를 쫓았다.
 계단을 올라가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약간씩 거슬렸다. 말이 좋아 고풍이지, 결국은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층에 올라간 소년이 곧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그곳에는 낡은 문짝이 버티고 있었는데 소년이 조심스레 두들기며 외쳤다.
 “아버지, 아들 왔어요.”
 잠시 후 낡은 문짝이 열리며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 반겨 왔다.
 “원기가 왔구나.”
 뭐가 그리 좋은지 중년인이 몸을 숙이더니 소년에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소년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지 가만히 있었다.
 중년인이 몸을 일으켜며 자신의 허리를 가볍게 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이번에 새로 온 막내예요.”
 한원기의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독고천은 자신이 때렸던 일을 소년이 말할까 봐 뜨끔했지만 애써 시선을 직시했다.
 잠시 독고천을 훑던 중년인이 독고천의 팔을 만지기 시작했다. 팔을 거쳐서 복부와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중년인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상인 편이군.”
 혼자서 턱을 쓰다듬으며 중년인이 중얼거렸지만 독고천은 그저 눈알만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중년인이 손바닥을 마주친 후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한참을 뒤적이고서야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것은 쟁반(錚盤)이었다.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손질만 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년인은 쟁반을 독고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난 한중석이라 한다네. 우선 촌장님께 대충 들었을 거라 생각하네. 이걸 받게나.”
 “전 독고천이라고 합니······ 컥!”
 쟁반을 받은 독고천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진 독고천이 몸을 일으키며 쟁반을 들려고 했지만 쟁반은 꿈쩍도 안 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중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 그 쟁반은 무리인가. 그렇다면······.”
 또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한중석이 다른 쟁반을 들고 왔다. 한중석은 그 쟁반을 숨을 헐떡이던 독고천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에도 독고천은 쟁반의 엄청난 무게에 신음성을 터트렸지만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한중석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 좋군. 우선 음식을 나르는 것부터 연습하도록 하게나.”
 “이, 이 쟁반으로 말씀이십니까?”
 말을 하면서도 힘겨운지 독고천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한중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반응에 독고천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쟁반을 힘겹게 들고 있었다.
 한중석은 언제 가져왔는지 점소이용 의복을 독고천에게 건네주었다.
 “우선 이것으로 갈아입게.”
 “그럼 오늘 하루는 이것만 합니까?”
 독고천이 쟁반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의복을 받으며 묻자, 한중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수련을 받고, 이틀에 걸쳐서 두 군데를 더 가야 한다네.”
 “두 군데요?!”
 “당연하지, 자네 무공을 익히고 싶지 않나?”
 한중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독고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중석이 독고천의 어깨를 툭툭하고 치며 씨익 하고 웃었다.
 “무공은 기초가 중요한 법일세. 자, 빨리 움직이게.”
 “끄응······. 알겠습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독고천이 힘겹게 쟁반을 들었다. 한중석은 고참 점소이에게 독고천을 맡겨 버린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년도 놀러 간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고참 점소이는 날카로운 눈매로 독고천을 훑으며 말했다.
 “자, 내가 앞으로 자네를 담당할 탁호(卓浩)라고 한다네. 우선 손님이 오시면 경쾌한 목소리로 ‘어서 옵쇼, 무엇을 드릴깝쇼?’라고 해야 하네. 따라해 보게.”
 “어서 옵쇼, 무엇을 드릴깝쇼?”
 독고천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러자 탁호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괜찮군. 그리고 주문은 정확히 받아야 해. 한가객잔은 정확하고 빠른 것으로 신용을 쌓아 왔거든. 주문을 받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방장에게 말해 줘야 하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경쾌한 외침에 탁호가 만족했는지 눈썹을 까닥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탁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점소이용 백의를 벗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독고천에게 말했다.
 “난 쉬다 올 테니 열심히 하게나.”
 “다녀오십시오!”
 탁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독고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고천은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다가올 고생길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독고천은 두툼한 쟁반을 슬쩍 보더니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돌아갈까?”
 
 
 
 第二章 은거괴인(隱居怪人) ― 그래, 나 공처가(恐妻家)다! 불만 있냐?(1)
 
 
 “이봐. 신참, 빨리 오란 말이야.”
 중년인이 어린아이처럼 투정거리며 외치자 독고천은 고개를 푹 숙이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독고천이 애써 영업용 미소와 함께 쟁반을 옆구리에 힘겹게 걸고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흠, 뭐가 맛있나?”
 척 보아도 단골처럼 보이는 중년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독고천이 애써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한가객잔은······.”
 “아, 그냥 소면이나 주게.”
 중년인이 말을 끊었지만 독고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면 한 그릇이요.”
 곧바로 독고천이 주방으로 가면서 주방장에게 외쳤다.
 “소면 한 그릇!”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주방장이 시원스럽게 외치자, 독고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대기 의자에 앉았다.
 손님은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통일된 음식을 시켰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쟁반만이 독고천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다. 주방장이 어느새 소면을 완성했는지 독고천을 불렀다.
 “이봐, 소면 나왔어.”
 “예, 갑니다.”
 뜨거운 소면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는 독고천이 비틀거렸다. 엄청난 무게에 코를 킁킁거리던 독고천이 힘을 주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어가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킬킬거렸다.
 신참 소식은 어느새 은거괴동 전체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빨리 오라니까.”
 중년인이 앉은 채 킬킬거리며 독고천을 재촉했다.
 독고천은 땀을 닦으며 애써 신난 듯이 외쳤다.
 “예, 갑니다!”
 그리고 정신없던 아침이 흘러갔다.
 
 ***
 
 하루 종일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쟁반을 든 채 점소이 일을 한 후 독고천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 무공을 익혔던 자라면 모르지만 독고천은 무공을 천외천(天外天)이라 생각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선 채로 자신의 다리를 주물럭거리던 독고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은거괴동은 은거한 자들만이 사는 곳이 아니었나? 그런 폐쇄적인 공간에 이런 객잔이 있다니?’
 점심때가 되자 밖에 나갔던 탁호와 한중석이 객잔으로 돌아왔다.
 후들거리는 독고천을 보고 한중석이 객잔 안을 둘러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오, 자네 한 번도 쉬지 않았나?”
 그랬다. 손님들은 만석이었지만 모두 탁자에 주문한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고, 만족한 표정들이었던 것이다.
 처음 점소이 역할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철퇴 같은 쟁반을 사용했건만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서생 같은 자가 모든 일을 소화해 낸 것이다.
 “예······.”
 독고천은 힘없이 대답하며 의자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나른한 모습이었다.
 다리로부터 찌르르한 느낌이 상체로 오는 것을 느끼며 독고천은 지친 듯이 혀를 내밀었다.
 의외로 할 만했다. 우선 까다로운 손님은 그다지 없는 편이었고 쟁반도 계속 사용하다 보니 적응되는 느낌이었다.
 잠시 한숨을 고루 내쉰 독고천이 손을 힘겹게 들었다. 그러자 한중석이 눈썹을 까닥이며 물었다.
 “뭔가?”
 “저, 이 마을은 은거한 분들이 사시는 곳 아닙니까?”
 “그렇지.”
 한중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독고천이 침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폐쇄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이런 객잔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주변을 살펴보니 상점들도 많던데요. 장사가 되긴 됩니까?”
 독고천의 지적은 정확했다.
 무엇이든지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은거가 목적인 곳에 이런 상점들이 몰려 있다라는 점은 이상했다.
 분명 은거기인의 수는 많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고천의 질문에 한중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야 사람이 많으니까 가능한 거지.”
 “······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독고천의 반응에 한중석이 혀를 찼다.
 “잘 생각해 보게. 은거를 하는 자들 중에 보통 사람이 있겠나? 보통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은거를 하나. 산전수전 다 겪어 봐야 세상에 질리고, 세상에 질려야 은거를 하지.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 중에 약한 사람이 많겠나, 강한 사람이 많겠나?”
 한중석의 화려한 입담에 독고천이 조심스레 답했다.
 “강한 사람이죠.”
 “그렇지! 강한 사람은 건강하거든. 건강하면 뭐야? 장수(長壽)의 필수조건이지. 그러니 쉽게 마을 인원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고, 자네 같은 신입들이 요즘 자주 들어와서 인원이 늘어난 것이라네. 이제 좀 알겠나?”
 자신의 언변에 만족한 듯 턱을 쓰다듬던 한중석이 뭉툭한 서신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독고천은 흐릿한 눈을 비비며 서신 뭉치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한중석이 설명했다.
 “이것은 우리 객잔을 광고하기 위한 광고지(廣告紙)라고 한다네. 우리 같은 업종은 광고만이 살길이지.”
 “이 마을의 객잔은 이곳 한 군데가 아니었습니까?”
 독고천이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마을의 절반조차 보지 못했던 탓이고 또한 중심지부터 들어왔기에 다른 지방 쪽 부분을 놓친 것이 이유였다.
 은거괴동은 대(大)라고 하기에는 작은 편이지만, 또 중(中)이라고 하기에는 큰 편이었다.
 “그럼 지금 이것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독고천이 놀란 듯 묻자 한중석이 피식하며 웃더니 말했다.
 “당연히 아닐세. 무공도 배우기 전에 죽을 수는 없잖아.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고, 이포후(李浦厚)란 자를 찾아가게. 이곳에서 나간 후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있을 것이야.”
 “또 가야 합니까?”
 “삼 일 후에 다시 오면 되네. 그럼 삼 일 후에 보세나.”
 그 말을 끝으로 한중석과 탁호는 각자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탁호는 점소이 의복을 차려입으며 손님들을 맞이했으며 한중석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용히 객잔 안을 둘러보던 독고천은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며 이포후라는 자를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어디 가냐?”
 청량한 목소리에 독고천이 무거운 머리를 들었다.
 그곳에는 한원기가 무표정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독고천은 어찌나 반가운지 한원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외쳤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달라붙지 말라며 걷어차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한원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무뚝뚝함이 나름 한원기의 매력일 수도 있었다.
 독고천과 한원기는 함께 객잔을 나섰다.
 원래는 이포후라는 자를 찾아가야 했지만 독고천은 지친 상태였다.
 가뜩이나 문무(文武)와 멀리 살았던 존재였는데 갑자기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결국 독고천은 한원기와 함께 근처 냇가로 향했다.
 촤아―
 맑은 물이 흐르며 독고천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 주는 것 같았다. 독고천은 풀썩 주저앉으며 한원기에게 말했다.
 “선배도 앉으시죠.”
 “그래.”
 한원기도 따라 앉자 독고천이 피식하고 웃었다. 처음에는 건방진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저 무뚝뚝한 것일 뿐이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독고천은 말없이 냇가를 응시했다. 부드럽게 흐르는 물결을 보니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조심스럽게 냇가에 손을 담그자 차디찬 기운이 느껴졌다.
 독고천은 머릿속이 상쾌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냇가를 응시하던 독고천이 슬쩍 한원기를 보았는데, 한원기는 그저 독고천의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독고천이 친근하게 말했다.
 “선배도 손을 넣어 보시죠. 시원합니다.”
 “그래.”
 망설임 없이 한원기가 냇가에 손을 집어넣었다.
 독고천은 만족한 눈웃음을 지으며 냇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놀라며 외쳤다.
 “뭐, 뭐야?!”
 한원기의 손을 중심으로 냇가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생긴 채 물결이 갈라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폭포 중간에 박혀 있는 바위처럼 물결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물이 김을 뿜으며 약간씩 증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陽)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기겁할 일이었다.
 단순한 기(氣)로 물을 증발시킨다는 것은 고수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에 속했다.
 더군다나 한원기의 손은 꽤나 넓은 지역의 물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독고천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신기에 놀란 독고천이 기겁하며 물었다.
 “그, 그건 뭡니까?”
 “무공이다.”
 “무슨 무공입니까?”
 “쟁반신공(錚盤神功).”
 무표정하게 한원기가 말을 내뱉자 독고천이 급히 되물었다.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선 우리 집안에는 삼대쟁반이 있다. 백쟁반과 흑쟁반 그리고 현쟁반(賢錚盤)이 있다. 그중에 네가 처음에 들고 넘어졌던 것이 백쟁반이다. 삼대쟁반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이지. 또한 현쟁반을 들기 위한 수련의 과정일 뿐이다.”
 오목조목한 한원기의 설명에 독고천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한낱 쟁반을 들었는데 무슨 신공입니까?”
 “현쟁반을 들기 위하여 백쟁반과 흑쟁반의 단계를 거치면 저절로 신공이 완성된다.”
 그 말에 독고천의 시선이 절로 한원기의 손으로 향했다.
 여전히 물은 증발되고 있었고 물결은 갈라져 있었다.
 저절로 독고천의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말로만 듣던 무공이라는 것을 보게 되자 흥분한 탓이다. 한원기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던 독고천이 한원기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저, 저도 그걸 익힐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나직한 한원기의 말이 독고천의 뇌리를 흔들었다. 한때 독고천은 장사를 해 오면서 이런 상상을 했었다.
 장사를 하다 보면 괴이한 손님들을 만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 무공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놈의 멱살을 쥐어 잡은 채 하늘로 날아가 무인도(無人島)에 던져 놓겠다라는 상상 말이다.
 매번 그런 상상을 하면서 헤벌쭉하게 웃었던 독고천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준하는 무공을 실제로 익힐 수 있다는 소리를 듣다니!
 “정말이시죠?”
 “그래.”
 “그럼 몇 년이 걸리셨습니까?”
 무공에서의 기한이란 매우 중요하다.
 무공의 숙련도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세의 신공이라 할지라도 수련이 부족하다면 삼류무공에도 깨지는 것이 무공이라는 것이다.
 독고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한원기는 갑작스런 독고천의 돌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십 년.”
 “시, 십 년?”
 독고천이 말을 더듬자 한원기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이란 말에 독고천이 혀를 내둘렀다.
 십 년 동안 쟁반이나 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나 독고천은 몰랐다.
 한원기가 펼친 무공을 십 년 안에 익힐 수 있는 방법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모든 무림인들이 달려들 거라는 것을.
 십 년이란 말에 흥미가 식은 독고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우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무공은 없습니까?”
 “있다.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있다.”
 한원기의 나직한 말에 독고천이 탄성을 내지르며 한원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탄지공(彈指功).”
 “그건 뭡니까?”
 갸웃거리며 독고천이 묻자 한원기가 손가락을 펼치며 설명했다.
 “손가락에서 기운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과 동시에 한원기가 손가락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더니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콰앙―
 독고천은 굉음에 놀라며 시선을 급히 돌렸다.
 한원기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던 바위가 박살 난 상태였다.
 그 모습에 독고천은 입을 쩍 하고 벌린 채 멍하니 있었고, 한원기는 말을 이었다.
 “난 아직 정밀하지 못하다. 탄지공의 극성에 다다르면 파괴력과 압축력은 증가하고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고 들었다.”
 “저, 저게 탄지공이라는 것입니까?”
 “그래.”
 한원기가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는 무공으로 탄지공을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한원기는 무가(武家)에서 태어났다. 또한 그 무가는 전설적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체계적인 심법과 절세고수인 아버지의 교육이 있었다.
 그렇기에 탄지공이라는 신공을 쉽사리 익혀 버린 것이다. 만약 탄지공의 원조 격인 소림사(少林寺)가 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소림(少林)은 구대문파(九大門派) 중 수위를 차지하는 명문정파였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림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또한 소림의 고수들 중에서도 사대금강(四大金剛)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고수(高手)의 벽으로 자자했다.
 한원기의 대답에 바위와 한원기를 번갈아 보던 독고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걸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다고요?”
 “그래.”
 “지금 당장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워낙 시원시원한 대답에 독고천이 정신을 못 차렸다.
 독고천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원기는 손가락을 슬쩍 굽히며 말했다.
 “우선 이렇게 손가락을 굽히고······.”
 한원기의 말에 멍하니 있던 독고천이 재빨리 흉내 냈다. 그러자 한원기가 손가락을 쭈욱 하고 폈다.
 독고천도 한원기를 쫓아서 손가락을 폈다.
 그러자 한원기가 말했다.
 “단전에 있는 기를 끌어올려서 손가락으로 모아라.”
 조용히 한원기의 말을 곱씹던 독고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기의 통제란 어려운 편이었다.
 가뜩이나 독고천은 기라는 것을 느껴 보았을 리가 없었다.
 독고천의 반응에 잠시 고심하는 듯했던 한원기가 진지하게 말했다.
 “단전에 있는 기를 끌어올린 후 손가락으로 소변을 본다고 생각해라.”
 “소, 소변이요?”
 “그래, 한곳에 모은 후 발사하듯이.”
 진지한 한원기의 말에 독고천이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소변을 본다, 소변을 본다 하며 한참 동안 말을 곱씹던 독고천이 짜증내며 외쳤다.
 “안 됩니다!”
 “잠깐 와 봐라.”
 한원기가 손짓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자 독고천이 자세를 접고는 다가갔다. 그러자 한원기가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독고천이 풀밭에 털썩 하고 주저앉자 한원기가 독고천의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한원기의 손은 서늘했는데 갑자기 그 손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독고천에게 들어왔다.
 독고천은 놀라며 움찔거렸지만 한원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고천의 몸에 침범한 따뜻한 기운은 독고천의 온몸을 구석구석 들고 나서야 사라졌다.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자 독고천은 내심 아쉬웠다. 포근한 느낌에 잠이 솔솔 왔던 탓이다.
 어느새 손을 뗀 한원기가 독고천을 일으켰다.
 독고천은 알지 못할 기운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 안에서 무언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몸을 가볍게 만들고 있었고, 한층 상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독고천은 몸이 날아갈 것같이 가벼워짐을 느끼고 놀라며 한원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원기가 설명했다.
 “내 기(氣)를 주었다. 어느 정도 탄지공을 할 수 있을 거다.”
 만약 한원기의 아버지인 한중석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고혈압에 쓰러질 일이었다.
 전설의 영약이란 영약은 모두 구하여 한원기에게 먹였고, 한원기의 피는 그야말로 보약이었다.
 또한 단전에는 풍부한 기가 항상 맴돌고 있었고, 웬만한 명문고수(名門高手) 부럽지 않은 순수한 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기가 순백의 상태인 독고천에게 들어온 것이다.
 우선 무공수련에서의 시작이란 매우 중요했다.
 탁한 기운을 받기 시작하면 수련은 늦어지게 마련이고 기를 통제하기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물론 나중에 절대(絶對)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된다면 탁한 기운을 자의적으로 뽑아 낼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 누가 굴러들어 온 복을 마다하리.
 앞으로 탁한 기운이 들어온다 해도 한원기의 기운에 의해서 녹아 버릴 것이며, 독고천의 몸은 본능적으로 순수한 기운만을 받아 낼 것이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독고천의 단전에서 맴도는 영약의 기운은 앞으로 순수한 기운만을 모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연(奇緣)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넘치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독고천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있겠는가. 아니, 알더라도 신경을 쓸지 의문이었다.
 한원기의 설명에 약간 어리둥절하던 독고천이 한원기를 믿기로 했다.
 독고천이 호사가들에게 무림인에 대해서 들은 것 중에 한 가지가 무림인들은 자신의 기운은 매우 소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피붙이에도 안 준다고 소문난 기를 오늘 처음 본 자에게 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처음에는 나이 때문에 선배로 모셨지만, 독고천은 한원기에게서 흘러나오는 대협(大俠)의 풍모에 반해 가고 있었다.
 “그럼 해 보겠습니다.”
 조용히 몸 안에 흐르는 기를 느끼던 독고천이 조심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손을 쭈욱 하고 펴고는 손가락을 굽혔다. 손가락을 굽혔던 독고천이 빠르게 손가락을 피며 한원기의 말을 되새겼다.
 ‘소변처럼!’
 콰앙―
 굉음과 함께 터지자 독고천의 벌어진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박살 나진 않았지만 바위의 일부분이 깨지며 파편이 주위에 흩날렸다.
 놀란 눈으로 바위와 자신의 손가락을 번갈아 보던 독고천이 외치듯 중얼거렸다.
 “······이것이 탄지공?!”
 “그래.”
 용케 독고천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한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천은 멍하니 손을 떨고 있었다.
 희열이라는 것이 이것일까.
 워낙 오랜만에 느껴지는 희열 탓에 독고천은 정신을 못 차렸다.
 그저 손가락과 파편이 부서진 바위를 번갈아 쳐다보며 탄성을 내뱉을 뿐이었다.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던 한원기가 나직이 말했다.
 “기를 잘 통제하는군.”
 “하하, 그렇습니까?”
 허탈한 혹은 기쁜 웃음을 터트리며 독고천이 되물었다. 한원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고천이 정신을 되찾았다. 급히 달려가 깨진 바위를 만지작거리던 독고천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이걸 제가 해낸 거란 말이죠?”
 “그래.”
 확인 차 내던졌던 질문에 한원기가 긍정의 대답을 내놓자 독고천이 두 팔을 하늘로 추켜올리며 외쳤다.
 “하하하, 난 고수(高手)가 되었다!”
 미친 듯 광소(狂笑)를 터트리며 웃는 독고천에게 한원기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
 “하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독고천이 한원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절까지 하려는 시늉을 했다. 한원기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연신 손가락을 까닥거리더니 주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내질렀던 독고천은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가끔 헛기침을 해 가며 몇 마디 헛소리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험험, 진정한 고수는 위엄을 지녀야 하는 법.”
 “당연하다.”
 한원기는 묵묵히 맞장구를 쳤다. 한참 동안을 자화자찬하던 독고천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마주쳤다.
 “아, 맞다! 한원기 선배님, 이포후라는 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그래.”
 “그럼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래.”
 옛날의 독고천이었다면 단순해 보이는 한원기를 부려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한 선배로서 모시고 있었다.
 어렴풋이 독고천은 느꼈던 것이다.
 한원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대협의 풍모를.
 “따라와라.”
 나직한 한원기의 말에 독고천은 그 뒤를 쫓았다.
 
 ***
 
 “다음 손님!”
 푸줏간 안에서 두툼한 몸집의 소유자인 중년인이 외쳤다. 중년인의 눈썹은 송충이같이 진했고 몸은 살집이 붙어 있어 통통해 보였다.
 마치 황소 같았는데 사람이 부딪친다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힘 있는 움직임에 도움이 될 듯싶었다.
 “어서 오십, 응? 원기가 아니냐.”
 접대용 미소를 지우며 중년인이 청년과 소년을 번갈아 보며 부르듯이 말했다.
 그러자 원기라고 불린 소년이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고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라면 빨리빨리 비켜 줘라.”
 중년인의 말에 그것을 농이라고 파악한 청년이 웃었다. 그러나 농(弄)이 아니었는지 중년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러자 한원기가 중년인에게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고천이라는 후배입니다.”
 “아, 그 새로 왔다는?”
 “네.”
 한원기의 말에 중년인이 곁눈질로 독고천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이포후(李浦厚)라고 한다. 보다시피 고기를 팔고 있지.”
 “전 독고천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독고천이 정중히 말하자 이포후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앞으로 나한테 일거리를 배울 놈이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쯧쯧. 다시 외쳐 봐라. ‘네!’ 해 봐.”
 “넷!”
 힘 있게 독고천이 외치자 이포후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독고천의 어깨를 툭툭 하고 쳤다.
 대장부 같은 이포후의 모습에 독고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갑자기 이포후가 들고 있던 식칼을 독고천에게 쥐어 주었다.
 식칼은 이포후의 덩치만큼 두툼했으며 날이 잘 서 있었다.
 이포후가 입고 있던 작업복까지 벗으며 말했다.
 “자, 시작하자.”
 “······뭐를 말씀이십니까?”
 독고천이 식칼을 쥔 채 멍하니 묻자 이포후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하고 치며 말했다.
 “당연히 일 아니겠냐. 자고로 남자라면 게으름이란 없어야 하지. 암.”
 자신의 말에 만족한 듯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포후였다. 결국 독고천은 자신의 고생길을 다시 엿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독고천은 근성이 있는 편이다.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식칼을 움켜쥐며 외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호, 좋다. 남자답구먼.”
 이포후가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의 가슴을 치며 환호성을 외쳤다. 그러자 푸줏간 옆의 건물에서 갑자기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중년의 향기가 넘쳤고 매력적인 눈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뺨에는 검상이 나 있어 여인치고는 험악해 보였다.
 여인의 두툼한 입술에서 상소리가 나왔다.
 “야, 조용히 안 해? 저거 또 시작이네.”
 여인이 이포후를 노려보며 말하자 독고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이 봐도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 멧돼지처럼 커다란 덩치를 지닌 이포후에게 상소리라니.
 짧은 만남이지만 이포후의 성격을 파악하고 추측해 보자면, 아마 여인에게 달려들지도 몰랐다.
 그러한 생각까지 다다르자 독고천이 급히 이포후를 말리려 했다. 그런데.
 “여보, 언제 나왔어?”
 이포후가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여인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그, 저 원수. 저놈은 또 뭐야?”
 여인이 갑자기 독고천을 가리키며 외치자 이포후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누구야. 새로 온 애인데 독고 머시기라고 해.”
 “자, 잘 부탁드립니다. 독고천입니다.”
 이포후의 반응에 멍하니 있던 독고천이 급히 인사를 하자, 여인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포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본 후 여인은 한마디를 남긴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똑바로 해. 지켜보고 있다.”
 여인이 들어가자 이포후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살짝 쳤다. 그리고 독고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냐?”
 독고천은 조용히 이포후의 눈을 직시했다. 그것이 지속되자 이포후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뭘 봐, 빨리 일 안 해?”
 “무엇을 할지 가르쳐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독고천의 지적에 이포후가 애써 수습하려 외쳤다.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알아서 해 봐!”
 그러나 서서히 독고천의 시선에 이포후의 자존심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곁눈질로 독고천을 흘겨보던 이포후가 여인이 들어간 건물을 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거참, 여보야도 왜 그때 나와 가지고······.”
 이포후라는 대장부의 슬픔은 짙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고천의 같잖다는 시선과 함께.
 그 시선을 의식한 이포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갑자기 성을 내며 외쳤다.
 “그래, 나 공처가(恐妻家)다! 불만 있냐?”
 “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오히려 이포후가 성을 내자 독고천은 손을 내젓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나 이포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이놈아, 가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나의 포부를 잠시 접어서 가정이 영원히 평화스럽다면 얼마나 좋은 거래냐, 응?”
 이젠 연설까지 하려는 기세에 독고천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포후의 의견에 동조했다.
 “당연하죠! 선배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힘을 못 쓰셔서 봐주는 것도 아니고, 가정 때문이라는데 그 누가 선배님을 욕하겠습니까?”
 “그, 그렇지?”
 “당연합니다. 전 선배님의 그런 깊은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독고천이 이포후에 대해서 극찬을 떠들자 이포후가 탄성을 내질렀다.
 “나도 네놈을 봤을 때부터 네놈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이포후가 감탄한 듯 표정을 지으며 독고천의 어깨를 툭툭 하고 내려쳤다. 마치 그 모습은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해 온 장군을 격려하는 황제 같았다.
 잠시 독고천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이포후가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우선 이곳에 온 이상, 기술을 익혀야겠구나.”
 진지한 이포후의 모습에 독고천도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드디어 분위기가 잡히자 이포후가 독고천에게 주었던 식칼을 다시 빼앗더니 자세를 취했다.
 몸집이 두툼한 자가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식칼을 앞으로 들이 내민 모습은 강도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포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선 칼을 쥐는 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편한 방법으로 쥐면 된다. 거창하게 손안[手內]이니 뭐니 하고 떠들지만 최고는 단 한 가지다. 자기에게 맞추는 것, 그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지.”
 이포후의 말에 독고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포후가 식칼을 내려놓더니 바지춤을 움켜쥐며 진지하게 물었다.
 “바지춤의 끈은 심하게 얽혀 있고, 넌 변소에 가고 싶다. 어떤 상황이 연출되겠느냐?”
 “끈을 풀려고 노력하겠지요.”
 “그렇다. 그럼 그 끈을 소변이 나오기 전에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대한 빠른 손놀림이 필요하겠지요.”
 독고천이 거침없이 대답하자 이포후가 탄성을 내지르며 독고천의 어깨를 쳤다.
 “크하, 대단하구나. 정확하다. 그런데 만약 그래도 끈이 안 풀린다면? 거기다 당장 쌀 것 같다면?”
 “흠······.”
 이포후의 되물음에 독고천이 고심에 빠진 듯했다.
 그러다 깨달은 듯 외쳤다.
 “바지를 찢어 버리겠습니다.”
 “정확하다! 바로 그거다. 바지춤의 끈을 최단 시간에 풀 수 있는 빠른 손놀림과 풀어지지 않는다면 바지조차 찢어 버리는 거침없는 손놀림이야말로 바로 칼에 필요한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이포후의 설명에 독고천의 머리가 순간 멍해진 듯싶었다.
 언뜻 검(劍)이라는 것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던 독고천이었다.
 그런데 이포후라는 자의 가르침은 머릿속에 구멍이라도 뚫었는지 시원스럽게 물밀듯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비유마저 살이 떨릴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명문정파에 속한 검객들은 자존심을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이포후라는 자처럼 민망한 비유를 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런지 의문이었다.
 거침없이 말을 토해 내던 이포후가 말을 이었다.
 “명가(名家)에서는 머리 아픈 이야기만을 내뱉을 것이다. 무슨 나비의 표홀함이니 뭐니, 태산의 묵직함이니 뭐니, 다 필요 없다. 간단한 것이 최선이자 최고인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천이었지만 한편으론 의심이 갔다.
 명가라는 것은 실력이 인정된 가문들을 뜻한다.
 즉 무림(武林)이라는 곳에서 무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명성 또한 높은 자들임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이포후라는 자는 그들의 가르침을 무시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일까라는 생각이 독고천의 머릿속에 작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내 말을 의심하는 거냐? 물론 의심되겠지. 뭐 이따위 황소 같은 놈이 무슨 검을 쓴다고, 그렇지?”
 이포후의 날카로운 지적에 독고천이 뜨끔해하자, 이포후가 털털하게 웃으며 독고천의 어깨를 내리쳤다.
 “하하하, 다 알고 있다. 나도 말로만 떠드는 놈들을 싫어하지. 직접 몸으로 보여 주마.”
 말과 동시에 이포후가 식칼을 쥐며 자세를 낮추었다. 식칼에는 아직 육향이 배여 있어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이포후의 표정은 진지했다.
 식칼을 쥔 이포후의 오른손이 살짝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표홀했다.
 휙휙―
 흔들리던 오른손이 갑자기 기가 막힌 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워낙 빠른 속도에 독고천이 기겁할 정도였으며 심지어 이포후의 손이 네 개로 보일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최단 시간에 끈을 풀 수 있는 빠른 손놀림이다! 그리고······.”
 힘 있게 외쳤던 이포후가 말을 흐리더니 갑자기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정적이 주위를 맴돌았다.
 아까 이포후가 손님이 많아 가게가 바쁜 척을 했지만, 실상 가게에 손님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위치이기에 돌아다니는 자들도 적었다.
 간혹 지나가던 노인들이 ‘쯧쯧, 저놈 또 시작이군’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지나갈 뿐이었다.
 멈추었던 이포후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쪽은 거대한 바위가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리 거한의 이포후라도 맞부딪치면 성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독고천은 뭐라 외치려 했지만 이포후의 묵직한 기운에 절로 입이 막혔다.
 미친 듯이 달려가던 이포후가 식칼을 쥔 오른손을 뒤로 젖히더니 힘 있게 바위를 향해 옆으로 휘둘렀다.
 스윽―
 무언가 스쳐 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바위를 살펴보던 이포후는 자세를 거둔 채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독고천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거창한 시작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독고천이 급히 입을 열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두두둑―
 멀쩡했던 바위가 비스듬한 횡(橫)으로 갈라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 앞으로 이포후는 꾸준히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갈라진 바위를 보고는 독고천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걸어오던 이포후가 독고천과 지척에 다다르자 씨익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 내용은 왜인지 모르게 이 멋진 상황과 안 어울리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지조차 찢어 버리는 거침없는 손놀림이다.”
 멍하니 입을 벌린 독고천을 보자 다가오던 이포후가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의 무위에 취한 독고천의 반응 때문이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독고천이 이포후에게 사정하듯 물었다.
 “저,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우선 넌 입문자이니 기(氣)도 익혀야 할 것이고 검에 익숙해져야겠지.”
 “기, 말씀이십니까?”
 독고천이 되묻자 이포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래, 사람의 복부 아래에는 단전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기가 쌓이는데 그것을 사용하여 무공의 위력을 높이는 것이지.”
 자신의 단전을 가리키며 이포후가 설명하자 독고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전 단전에 기가 가득 차 있는데요?”
 “하하, 기막힌 농담(弄談)이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포후가 독고천의 등을 시원스럽게 후려치며 말하자, 독고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있다니까요?”
 “거참, 사람이란 말이다, 농담도 정도껏 해야······.”
 이포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고천이 이포후의 손을 부여잡고는 자신의 단전에 대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이포후가 놀랐지만 아니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쯧쯧 하고 차려 했다. 그런데.
 “응······? 이게 다 뭐다냐?”
 보통 무림인이란 혈도를 통하여 상대방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단전에 손을 대어 기의 느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독고천이 이포후의 손을 자신의 단전을 만지도록 한 것이다.
 단전을 만지던 이포후의 눈은 서서히 커져 갔다.
 이포후는 넘실거리는 기운을 손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장강(長江)과도 같은 세찬 물결이 이포후의 손을 간질이고 있었다. 거셀 뿐만 아니라 정갈했다.
 마치 또 하나의 작은 자연(自然)이 독고천의 단전에 자리 잡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포후가 당황했는지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독고천이 사정을 말했다.
 탄지공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한원기가 자신의 몸에 기운을 넣어 줬다고 말하자 이포후가 갑자기 성을 냈다.
 “이놈! 내가 좀 나누어 달라고 할 때는 안 주더니! 크흑.”
 그랬다. 한원기의 단전은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아버지인 한중석이 한원기를 절세의 고수로 키우기 위하여 소문난 영약이란 영약은 모두 구한 뒤 한원기에게 먹였고, 손수 벌모세수(伐毛洗髓)까지 해 준 일화는 상당히 유명했다.
 벌모세수란 무공을 익히기 위해 최적의 몸을 만들기 위한 의식이다.
 물론 타인이 해 주어야 하고 그 타인이 최소한 고수(高手) 소리는 들어야 가능한 것이 벌모세수였다.
 이포후가 갑자기 성을 내자 독고천은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자 이포후는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독고천의 단전에서 손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한 모습에 독고천이 물었다.
 “그럼 이제 검에 익숙해지면 되겠지요?”
 “그렇게 되는구나.”
 이포후가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주위가 어두워졌다. 독고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붉은 태양이 산에 가려져 있었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한숨 자고, 내일 당하천(唐河泉)이라는 놈에게 찾아가 봐라.”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북서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밭이 나올 텐데,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포후의 설명에 독고천이 탄성을 내질렀다. 커다란 밭에 사는 자라면 처음에 만났던 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자의 이름은 차호월(叉號越)이었다. 당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독고천이 물었다.
 “그런데 그분의 성함이 차호월 아닙니까?”
 독고천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이포후가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마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러자 오히려 독고천의 호기심이 증폭되었고 이포후는 결국 사연을 말했다.
 “그놈의 본명은 당하천이 맞다. 그런데 그놈은 한 달에 한 번씩 이름을 바꾸지. 청목 선배님이야 그놈 취미에 맞춰 주시지만 난 그냥 당하천이라 부르고 있지.”
 “그렇군요. 특이한 취미네요.”
 “특이 정도가 아니야. 미친 거지.”
 이포후가 이를 갈며 당하천을 욕하자 독고천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포후가 앞장서며 손짓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그렇게 이포후와 독고천은 파리만 날리던 가게를 문 닫고 이포후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독고천과 이포후를 기다리는 것은 푸짐한 밥상이었다.
 마치 손님을 고려했다는 듯이 화려했다.
 이포후는 헤벌쭉한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독고천도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푸짐했지만 수는 적었다.
 수(數)보단 양(量)이랄까. 독고천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자 어느새 다가온 홍의 여인이 물었다.
 “맛이 어때?”
 대답을 안 하면 당장 목덜미를 칼로 내려칠 기세였다. 순간 이포후의 말이 독고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만약 아내가 맛있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맛있다고 해. 안 그러면······ 넌 죽어.’
 이포후의 살벌한 말이 뇌리를 스치자, 무난하다고 말하려던 독고천은 순식간에 말을 바꾸며 말했다.
 “마, 맛있습니다.”
 “그렇지?”
 “네.”
 긍정의 대답을 듣자 홍의 여인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은 진소화(陳蘇華)였다.
 이포후의 아내이자, 검객(劍客)이었다. 심지어 이포후의 쾌검술을 능가하는 무서운 검술의 소유자였다.
 그 사실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포후에게 듣고 난 후에는 독고천은 조심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저녁을 먹던 독고천은 그릇을 비우자, 가득 찬 자신의 배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아, 잘 먹었습니다.”
 “더 먹어.”
 그 순간 또다시 이포후의 말이 독고천의 뇌리를 스쳤다.
 ‘만약 아내가 더 먹으라고 하면 무조건 먹어. 안 그러면······ 넌 죽어.’
 다시 한 번 살벌한 말이 떠오르자, 고개를 내저으려던 독고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발하게 말했다.
 “예, 더 주십시오.”
 “잘 먹네. 잘 먹어야 우리 남편처럼 듬직해지지.”
 진소화가 기분이 좋은지 옆에 있는 이포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포후는 헤벌쭉하고 웃었다.
 독고천은 다섯 그릇을 더 먹고서야 진소화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났다.
 모두 잠자리에 들고, 독고천은 침상에 누운 채 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다.
 생전 모르는 자신을 재워 주고 밥도 먹여 주고, 심지어 무공까지 가르쳐 준다.
 은거괴동, 처음엔 이름 때문에 괴이하다고 느껴졌지만 이제는 정이 갈 정도였다.
 아직 진정한 무공을 배우진 못했지만 단전에서 요동치는 기운이 독고천, 그의 자신감을 채워 주고 있었다.
 문뜩 독고천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
 쟁반을 받치던 손의 피부가 까져 있었다.
 또 식칼을 쥐었던 주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던 독고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독고천은 몽마(夢魔)에 빠져들었다.
 달은 밝았으나, 유난히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
 
 곤히 잠에 빠져 있던 독고천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포후와 진소화는 이미 잠자리에서 없어진 상태였다.
 독고천은 옷을 차려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상쾌한 새벽 공기가 몸을 간질이자 독고천은 졸음이 확 가시는 것을 느꼈다.
 “나왔냐?”
 독고천이 나오자 이포후가 씨익 하고 웃으며 손짓했다. 독고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포후와 진소화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독고천은 대련이라는 것을 기대해 보았지만 어느새 몸을 다 풀었는지 진소화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을 까닥이던 이포후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기가 왔더구나.”
 그 말에 독고천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 한원기가 졸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독고천은 반가워하더니 한원기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반갑습니다.”
 “그래.”
 졸린지 하품을 하는 한원기를 보자 독고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무림인은 대체적으로 수면 시간이 적은 편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아껴 가며 수련을 하는 탓도 있지만 기라는 것이 사람의 피로를 잠재워 주기 때문이다.
 하품을 쩍쩍하는 한원기에게 독고천이 궁금하듯 물었다.
 “늦게 주무셨습니까?”
 “그래.”
 “언제 주무셨는데요?”
 “저녁 먹고.”
 한원기의 나직한 대답에 독고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치듯 말했다.
 “일찍 주무셨네요!”
 “아니, 저녁 먹은 후에는 원래 자는 시간이고 점심때 한 번 자야 했는데 못 잤다.”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독고천이 입을 닫았다. 어차피 중요치 않은 문제이기에 대충 넘어간 것이다.
 어쨌든 독고천은 한원기가 반가웠는지 연신 입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이포후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진소화의 무서움 등을 말이다. 뒤에 있던 이포후가 독고천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한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기를 쫓아가면 당하천을 볼 수 있을 거다.”
 “어제와 오늘 감사했습니다.”
 독고천이 정중히 인사하자 이포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장비를 챙겨 오고는 인사를 하고 푸줏간 쪽으로 사라졌다.
 “난 일 때문에 먼저 가 봐야겠다. 수고해라.”
 이포후가 사라지자 한원기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자.”
 “그런데 당하천 선배는 어떤 분이십니까?”
 독고천이 한원기의 뒤를 쫓으며 묻자, 한원기가 하품을 했다.
 워낙 큰 하품이라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입을 닫은 한원기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우선 암기와 독(毒)에 대해서는 이 마을의 최고이시다.”
 “암기와 독이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암기는 무림에서 비겁한 수법이라고 들었는데요?”
 독고천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독고천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우선 무림에서 암기란 기습할 때 자주 애용했다.
 그렇기에 비겁한 수법으로 인식되어진 것이며, 살수(殺手)들이 자주 사용했기에 그런 인식이 박힌 것이었다.
 독고천의 물음에 한원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겁하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독고천이 입을 벌렸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뜨끔했던 독고천이었다.
 아무리 암기가 비겁하더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선배가 아닌가.
 그렇기에 한원기가 화를 내며 옹호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동조해 버린 것이다.
 긍정의 반응을 보이던 한원기가 말을 이었다.
 “몰래 던진다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원기의 말에 독고천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한원기가 나직이 말했다.
 “당하천 선배는 암기를 몰래 던지시지 않는다.”
 “그럼······?”
 “그래, 던지기 전에 말하신다. 어디 쪽으로 암기를 던지겠다고.”
 나직한 한원기의 말에 독고천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암기가 왜 위협적인가.
 사각지대, 즉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공격해 오기에 암기가 위험한 것이다.
 또한 암기는 매우 작기 때문에 육안로 구별하기 어려웠다.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라 할지라도 암기를 두려워했고, 항상 암습에 대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암기를 던지기 전에 미리 알려 준다니?
 “그럼 누구든지 피할 것 아닙니까?”
 그랬다. 어디론지 날아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독고천, 자신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암기가 어디서, 어디로 날아오는지를 몰라서 당할 뿐이지 모든 것을 안다면야 무용지물이었다.
 그것이 독고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그런데 그분이 무림에서 활동하실 때······.”
 웬일로 한원기가 말을 끌었다.
 그 모습에 독고천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말을 끌던 한원기가 하품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 암기를 피한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도?”
 “단 한 명도.”
 단호한 한원기의 대답에 독고천이 충격을 받았는지 휘청거렸다.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기인이사(畸人異士)가 많다고 소문난 무림이다.
 그 정도로 많은 고수가 즐비했으며 천지(天地)를 진동시키는 인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림인 중에서 암기를 피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암기술인 것이다.
 긴장했는지 독고천이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흥분으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고수에게 무공을 배울 생각을 하니 독고천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 두근거림을 가득 싣고는 독고천이 조심히 물었다.
 “그럼 그분은 무패(無敗)십니까?”
 “아니, 우선 우리 아버지에게도 한 번 깨졌고, 청목 선배한테도 깨졌고 촌장님께도 깨졌고······.”
 한원기가 손가락으로 당하천이 패한 숫자를 세는 듯하자 독고천이 손을 내저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의 암기를 피한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무슨······?”
 “암기로 맞춘다고 이기진 않는다.”
 시원하고 통쾌한 한원기의 대답에 흥분으로 불타오르던 심장이 팍 하고 식어 버린 독고천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입을 벌린 채 독고천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요. 하하. 암기로 맞춘다고 이기진 않지요. 하하.”
 혼자서 히죽히죽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독고천의 모습은 그야말로 세상사에 해탈(解脫)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독고천 일행이 잡담을 하며 꾸준히 걸어가자 서서히 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번 보았던 밭이었지만, 밭의 거대한 크기에 독고천이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전에 보았던 청의 중년인은 나무 의자에 척 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던 청의 중년인이 독고천 일행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전에 한번 뵈었지요. 독고천입니다.”
 한원기 뒤에 서 있던 독고천이 정중히 말하자 청의 중년인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의 중년인의 시선은 한원기에게 향했는데 무언가 반응을 원하는 모습이었다.
 무심히 서 있던 한원기가 나직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오, 원기가 왔구나. 한중석 선배님은 잘 계시고?”
 “예.”
 한원기가 나직이 대답하자 갑자기 청의 중년인이 헛기침을 했다. 부자연스러웠지만 청의 중년인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험험, 그······ 소연 소저는 잘 계시냐?”
 한원기는 늦둥이 막내였다.
 우선 한원기에게는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그중에서 첫째 누나는 어느새 나이가 사십 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다운 매력이 있고 쾌활한 여인이었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콧대가 높다는 것. 그것이 한원기의 첫째 누나, 한소연이 미혼인 채 사십 줄로 향하고 있는 원인이었다.
 청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묻자 한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누님이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무심한 한원기의 말투에 청의 중년인이 진저리를 쳤다. 물론 감정이 있어서 그런 말투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매번 들어 온 한원기의 무심한 말투였지만, 들을 때마다 청의 중년인은 진저리를 치곤 했다.
 “우선 며칠 전에 당하천 선배님이 몰래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 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훔쳐 간 속곳을 내놓으라고 하시며, 누님께서 소리를 지르시며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대충 제가 이해한 만큼 전해 드리자면 야, 이놈의······.”
 “잠깐!”
 당하천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한원기의 설명을 중지시켰다. 한원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당하천을 쳐다보았고, 당하천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보는 눈이 많았다.
 지나가던 노인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독고천 일행을 비롯해 당하천을 흘겨보고 있었다.
 말[言]은 말[馬]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손을 내저으며 비굴한 표정을 짓던 당하천이 헛기침을 하더니 점잔 빼며 한원기에게 말했다.
 “험험, 우선 누님께 관심을 가져 주신 점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게. 그리고 소식을 전해 준 점 고맙네.”
 “예.”
 한원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하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천과 당하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독고천은 가볍게 웃었고, 당하천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이놈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깨질 대로 깨진 당하천의 평판이었지만, 그 이상은 곤란했다.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던 당하천이 애써 침착하며 독고천에게 말했다.
 “촌장님께 들었네. 비록 힘들겠지만 잘 참는다면 본인과 같은 암기술과 독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걸세.”
 자화자찬도 유분수였다. 그러나 당하천은 당당한 표정을 지었고 독고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반응에 당하천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자신의 자화자찬은 상대방의 성격과 됨됨이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픈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그런데 그러한 시험에 독고천은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넘어갔다.
 예전에 왔던 신입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어서, 신입이 먹는 밥에 몰래 맹독을 뿌려 놓은 적이 있는 당하천이었다.
 당하천이 묘한 눈길로 독고천을 지켜보고 있자 한원기가 끼어들었다.
 “전 점심때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소연 소저께 안부 좀 전해 주고.”
 한원기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원기가 사라지자마자 당하천의 표정이 당당해졌다.
 마치 대군을 아우르는 장군처럼 표정은 진중했고 패기가 넘쳤다.
 당하천이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더니 말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암기입니다.”
 독고천이 쉽다는 듯이 답하자 당하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화려한 색을 지닌 적화(赤花)였는데 뿌리째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언뜻 보면 화려한 나비의 날개와도 같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붉은 꽃입니다.”
 “반은 맞았다. 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독초(毒草)다. 적접몽초(赤蝶夢草)라고 하지. 마치 나비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무시무시한 독초다.”
 당하천이 으스스하게 말하자 독고천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독초의 효과는 뭡니까?”
 “너는 뭐라 생각하느냐?”
 당하천이 되묻자 독고천이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적접몽초를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봉우리가 현란한 색을 지니고 있었고 봉우리 안에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적접몽초를 살펴보던 독고천이 당차게 말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독초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건가?”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독고천이 시원스럽게 답하자 당하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워낙 단호한 모습에 대답한 독고천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당하천이 적접몽초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은 안 하나?”
 “······.”
 당하천의 물음에 독고천이 침묵을 지키자 당하천이 말을 이었다.
 “적접몽초의 봉우리에서 나오는 액을 가공한 후 사람에게 먹이면, 그 사람의 머리 안에 구멍이 뚫려 버린다. 즉 있어 보이는 말로 하자면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빠지게 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바보천지가 되는 거지.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 적접몽초는 독초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최고의 영약(靈藥)이다. 몸을 철(鐵)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주어 도검(刀劍)에도 끄떡없을 정도다.”
 “무섭군요.”
 한참을 듣던 독고천이 신음을 내뱉으며 말하자 당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천이 다시 한 번 적접몽초를 흘겨보았다.
 아까는 단순한 화려한 꽃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무서운 독초로 보였다.
 독고천이 적접몽초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자 당하천이 가볍게 웃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러한 독초를 악용하는 자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독초가 민간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도록 독(毒)에 대해서 배울 것이다.”
 진중한 모습의 당하천의 뒷모습에선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후광(後光)의 효과였을까.
 독고천의 시야에는 아까와는 달리 당하천의 모습이 거대해 보였고 한없이 높아 보였다.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당하천이 독고천의 환상을 무참히 깼다. 아주 간단하게.
 “참, 소연 소저에 관한 거 비밀이다?”
 당하천은 말을 꺼내고도 민망한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부터 가르쳐 주고 싶은데, 오늘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찾아가 봐야 하는데······. 아니지. 같이 갈래?”
 당하천의 물음에 독고천이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자 당하천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
 
 그리고 기다리던 새벽이 찾아왔다.
 새벽이 되자, 아직까지 어두컴컴한 어둠이 즐비했고 그나마 밝은 달이 대지를 내리쬐고 있었다.
 당하천의 뒤를 쫓고 있던 독고천이 무심코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흠흠, 우선 네 녀석에게 무림의 살벌함을 알려 주고 싶다. 그리고 네 녀석의 순발력과 재치를 알고 싶기에 이런 수련을 하는 것이다.”
 당하천의 진지한 모습에 독고천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당하천이 도착한 곳은 폭포였다.
 작은 폭포였지만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폭포가 가까워지자 당하천이 독고천에게 손짓하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했다.
 독고천은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순간 독고천은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파직―
 “누구야!”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왔다. 가공할 속도에 독고천은 멍하니 입을 벌릴 뿐이었다.
 꽈직―
 그것은 암기였다. 독고천 한 치 옆에서 암기가 나무에 박힌 채 떨리고 있었다.
 꿀꺽―
 독고천은 침을 삼키며 자신의 귓등을 훑었다. 옅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하천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짓했다.
 ‘조심해라.’
 독고천은 생명의 위협을 확실하게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인기척이 느껴졌다.
 폭포에서는 여자다운 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독고천이 기겁하며 당하천을 훑었지만, 당하천은 넋을 잃은 채 폭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황한 독고천이 당하천의 등을 툭 쳤다. 당하천이 짜증을 내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해!’
 ‘여긴 도대체 왜 온 겁니까?’
 독고천의 시늉을 당하천은 단호히 무시하며 폭포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여인은 폭포 아래서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결국 독고천은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역시 독고천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당하천으로 옮기며, 당하천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갑자기 당하천이 무언가를 쥐고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독고천은 깜짝 놀라하더니 헛바람을 들이키며 당하천의 뒤를 급히 쫓았다.
 엄청난 당하천의 속도에 독고천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만, 당하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헉헉.”
 독고천이 헉헉거리며 멈춰 있는 당하천 앞에 도달했다. 당하천이 무언가를 급히 품속에 집어넣으며 독고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구나. 나를 쫓아오다니. 시험 합격이다.”
 “도대체 왜 그곳에 간 겁니까!”
 “시험이었다.”
 나직한 당하천의 말에 독고천이 눈을 갸름하게 떴다. 그러자 당하천이 헛기침을 하며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휴.”
 한숨을 내쉬며 독고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하천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다음 녀석한테 가면 될 것이다.”
 “다음 분이요?”
 독고천이 묻자, 당하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녀석은 무공 하나는 기가 막히게 가르쳐 주지. 물론 생명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당하천이 마지막 말을 흐리자 독고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듣지 못했던 탓인데 당하천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가리킨 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전각 같은 것이 나올 텐데 흑색일 게다. 그곳에서 천선우(穿仙羽)를 찾으면 될 게야.”
 “예, 감사합니다.”
 당하천이 만족한 미소를 짓더니 배웅했다.
 “잘 가라.”
 “꼭······ 빨리 사라지라는 말투 같습니다?”
 “험험, 그럴 리가? 새로 온 동생 같은 녀석이 하루빨리 무공을 익혔으면 해서 그런 거지.”
 독고천의 지적에 뜨끔했던 당하천이 털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증거도 없이 계속 물고 늘어질 순 없어서 독고천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당하천을 훑었다.
 그러자 당하천이 슬쩍 움찔거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살짝 가렸다.
 “아까 넣었던 그건 뭡니까?”
 독고천이 무심코 묻자 당하천이 소스라치듯이 놀라며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외쳤다.
 “넌 몰라도 된다! 빨리 안 가?”
 그러한 당하천의 반응에 독고천이 피식하고 가볍게 웃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하자 당하천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독고천은 슬쩍 뒤를 흘겨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림인을 보기만 해도 도망갈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이곳에 산다는 무림인들은 오히려 정이 넘쳤고 개성이 뚜렷했다.
 심지어 왜 무림인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도망갔었나 하고 독고천이 자문을 해 볼 정도였다.
 한때 돈에 미친 적이 있어서 정(情)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독고천이다. 그러한 정이 다시 느껴지기에 독고천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천선우 선배님이라······.”
 그리고 독고천은 서서히 숲 속에 녹아들었다. 어느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작고 맑은 바람 소리가 침묵으로 뒤덮인 밭을 훑고 지나가자 밭에는 새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릴 뿐이었다.
 짹짹―
 
 ***
 
 한참을 걷고 나서야 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전각(殿閣)과도 같은 모습이었는데 아담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절로 탄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독고천은 입을 벌린 채 전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높이 쳐다보던 독고천은 시선 아래가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왜 나타났는지 모를 흑의인(黑衣人)들이 나타나 있었다. 물론 독고천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누, 누구십니까?”
 “그러는 너는 누구냐?”
 대장으로 보이는 흑의인이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독고천이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대꾸했다.
 자신도 모르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탓이다.
 흑의인들에게서 알지 못할 기운이 독고천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 전 독고천이라고 합니다.”
 그때, 독고천의 온몸을 죄어 오던 기운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흑의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정중히 말했다.
 “따라오시죠.”
 “아, 예.”
 처음과는 생판 다른 반응에 독고천이 어리둥절해하며 흑의인들의 뒤를 쫓았다.
 흑의인들의 몸집은 다부졌는데 마치 그들 자체가 잘 벼려진 병기 같았다. 뒤를 조용히 쫓아가던 독고천이 대장으로 보이는 흑의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정중히 나오시는지······?”
 별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는 독고천이었지만, 흑의인은 정중히 답했다.
 “주군(主君)을 찾아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만약에 제가 침입자였다면······?”
 “필살(必殺)입니다.”
 나직한 대답에 독고천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단전은 팽팽했고 탄지공이라는 것을 익혔다고 자만했지만 그것이 한낱 철부지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 대결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량(氣量)과 무공의 고하(高下)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풍부한 경험만이 감당하지 못할 날카로운 검세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줄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물론 극과 극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경험 따위야 불필요하지만 용호쌍박(龍虎相博)일 정도로 무공이 비슷하다면 경험 차이가 그들의 생사를 갈라놓는다.
 그것이 무림(武林)이었다.
 남들은 피 터져 가며 익히는 것을 독고천은 절로 익혀 버렸다. 독고천 특유의 상인 기질, 즉 바닥을 파악하고 무언가를 빨리 흡수해 버리는 능력이 그를 고수의 길로 한 발자국씩 옮겨 주고 있었다.
 별별 생각을 다하던 도중에 독고천은 흑의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도착했습니다.”
 “그럼 이곳이 천선우 선배께서 계신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 말을 끝으로 흑의인들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경공술로 사라진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져 버린 것이다.
 엄청난 무공에 독고천은 혀를 내두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천선우가 있다는 곳은 약간 어두웠다.
 처음에는 숲 속이기 때문에 어두운 줄 알았건만 그것이 아니었다.
 특유의 어둠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고천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침을 삼켰다.
 워낙 조용했기에 독고천의 발소리가 옆으로 퍼져 나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독고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독고천.”
 갑자기 낮은 음성이 울렸다.
 물음이 아니라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갑작스런 음성이 울리자 독고천은 흠칫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음성이 낮게 숲 속에 깔렸다.
 “앞이다.”
 독고천은 곧바로 앞을 직시했다.
 그곳에는 흑의를 입은 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는 금(金)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또한 흑의는 말끔했으며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처, 천선우 선배이십니까?”
 독고천이 침을 삼키며 묻자 천선우라 불린 흑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고천이 더운지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천선우 앞에 섰다.
 천선우 앞에 서자 독고천은 이마에서조차 땀을 흘리고 있었다.
 땀을 흘리던 독고천이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왜 이렇게 덥지. 하하.”
 독고천은 애써 웃음을 터트리며 무마해 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포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천선우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독고천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독고천은 한숨을 쉬더니 숨을 고르며 땀을 닦았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천선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워낙 낮은 음성에 독고천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너는 강자(强者)인가, 약자(弱者)인가.”
 갑작스런 질문에, 또한 괴이한 질문에 독고천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것은 시험일 것이다.
 독고천, 자신을 판단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독고천은 신중히 답했다.
 “전 약자입니다.”
 “그런가?”
 “예.”
 나직한 물음에 독고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선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독고천은 움찔거렸다.
 천선우가 움직일 때마다 알지 못할 기운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내젓던 천선우가 입을 열었다.
 “너는 강자다.”
 “······?”
 “너의 손으로 원한을 지닌 원수를 죽일 수 있고,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조차 죽일 수 있다.”
 천선우의 나직한 말에 독고천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천선우가 말을 이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강자다. 약자는 없다.”
 “그럼 강자에게 진 사람은 약자가 아니고 뭡니까?”
 천선우가 설명하자 독고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자가 없다면 도태되어 온 사람들은 무엇인가.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기에 독고천은 호기심을 가득 채운 채 물었다.
 그러자 천선우가 간단히 대꾸했다.
 “도태된 짐승일 뿐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독고천을 쳐다보던 천선우가 물었다.
 “넌 져 본 적이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한다. 항상 이기는 자란 존재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절대 강자로 이름을 날리던 자도 한때는 목검(木劍)을 휘두르며 나무와 사투를 벌였을 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자와 비무를 해서 져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있습니다.”
 독고천이 대꾸하자 천선우의 눈빛이 경멸로 바뀌었다. 경멸이 담긴 눈초리로 독고천을 훑던 천선우가 나직이 물었다.
 “강해지고 싶은가? 강해져서 짐승의 굴레를 벗고 싶은가?”
 “강해지고 싶습니다.”
 독고천이 이를 악물며 말하자 천선우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천선우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넌 오늘부터 가축(家畜)이다. 엎드려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강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가축 따위가······!”
 순간 독고천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 뽑았는지 모르는 천선우의 검극이 독고천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무심한 눈길로 독고천을 훑던 천선우가 물었다.
 “넌 강해지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독고천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천선우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내 말을 들어라. 가축이 돼라.”
 목젖에 겨누었던 검을 집어넣으며 천선우가 무심한 눈길로 독고천을 직시했다.
 부들부들 하고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으며 독고천이 천선우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무심한 눈길만이 보였다.
 서서히 독고천의 등이 굽혀졌다.
 그리고 양손을 땅을 향해 뻗었다. 그렇게 결국 독고천은 엎드리고 말았다.
 그러나 땅을 짚고 있는 독고천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천선우가 말했다.
 “난 강자다. 그렇기에 네놈을 가축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강자인 것이다.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강해져라. 나를 가축으로 부릴 수 있을 때까지.”
 그저 독고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말을 마친 천선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엎드린 독고천의 등에 앉았다.
 그 순간 독고천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그러나 천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산책이나 가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독고천이 조금씩 움직였다.
 천선우는 무심한 눈으로 독고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느렸지만 독고천은 꾸준히 움직였다.
 어느새 흙바닥에 끌리는 무릎은 피로 낭자했고 손바닥은 피부가 갈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천선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독고천은 계속 기어 다녔다. 천선우의 거처를 중심으로 돌고, 또 돌고 또 돌았다.
 이젠 힘이 빠져서 팔에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독고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 기어 나갔다.
 “수고했으니 먹어라.”
 천선우가 땅에 던진 것은 나뭇잎이었다. 그것도 벌레들이 먹고 난 후의 얄팍한 나뭇잎이었다.
 잠시 기는 것을 멈춘 독고천이 조심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뭇잎을 하나씩 입으로 주워 먹었다.
 나뭇잎이 하나씩 없어질 때마다 땅으로는 작은 빗방울이 독고천의 눈가에서 떨어졌다.
 나뭇잎을 다 먹고 나자 독고천의 입가는 흙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나뭇잎을 씹는 독고천의 입은 떨리고 있었다.
 “잘 먹는구나. 가자.”
 천선우의 나직한 말에 독고천은 또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거대한 폭포에 다다랐다.
 그러자 천선우가 독고천의 등에서 내려오며 폭포 근처 물가에서 물을 떠다 마셨다.
 시원한 물줄기가 허공에 휘날리며 사나이의 가슴을 뚫어 주고 있었다.
 독고천은 미친 듯이 물가로 기어갔다.
 그때 천선우가 나직이 말했다.
 “마시지 마라.”
 기어가던 독고천이 멈칫하더니 아무 말 없이 엎드려 있었다. 독고천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고 있었다.
 독고천은 짠맛을 느꼈다. 자신의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콧물이 그의 혀를 자극했던 탓이다.
 그리고 태양이 지고, 달이 떴다.
 한원기도 중간에 왔었지만 천선우의 호된 호통을 듣고는 쫓겨나 버렸다.
 독고천은 그저 엎드려 있을 뿐이었고 천선우는 폭포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어둠을 밝혀 주는 달만이 그들을 내리쬐고 있었다. 무심히 폭포를 올려다보던 천선우가 나직이 물었다.
 “어떤가? 도태된 짐승의 역할이? 많은 놈들이 이곳에서 이탈했었지.”
 그랬다. 은거괴동에 들어왔던 자들은 천선우를 거쳐 갔고, 많은 자들이 이곳에서 이탈했었다.
 하지만 독고천은 이탈할 수 없었다. 굴욕과 동시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복수를 하기 전에 은거괴동을 떠날 순 없었다.
 작은 희망이라는 불씨가 은거괴동에서 보였고, 독고천은 그것을 잡아내야 했다.
 “······.”
 독고천은 아무 말 없이 땅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천선우가 말을 이었다.
 “이 굴욕을 잊지 마라. 무림(武林)은 결코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진정한 절망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못했던 놈들은 흐릿한 검광(劍光)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곳까지 견뎌 주어서 고맙다.”
 천선우가 엎드려 있는 독고천을 손수 일으키며 나직이 말했다. 몸을 일으킨 독고천이 손으로 흙으로 칠해진 입가를 닦아내더니 눈물을 흘리며 웅얼거렸다.
 “자, 잘 부, 부탁드립니다.”
 웅얼거리는 독고천을 무심한 눈길로 직시하던 천선우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독고천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반갑다. 난 천선우다.”
 감격한 모습의 독고천을 유심히 쳐다보던 천선우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물론 이것을 무림의 삶과 비교하기엔 무리다. 단지 이것도 견디지 못할 애송이라면 내 수련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 담긴 시험일 뿐이었다.”
 독고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짐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 천선우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폭포 옆에 있는 절벽의 위를 가리켰다.
 독고천이 절벽 위로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당하천이 반가운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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