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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 (1화)

2017.06.19 조회 926 추천 2


 천애고검기 1권 (1화)
 작가서문
 
 
 오랫동안 고절한 무협 작가님들의 작품들을 읽으며 꿈을 꾸고 즐거워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러한 작품 하나를 써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서른 중반을 넘어서야 부끄러운 붓을 들어 마음속에 간직했던 이야기 중 하나를 글줄로 풀어내 봅니다.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젊기에 미숙하고, 그러면서도 패기와 의협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고 싶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협기를 품고서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 간직한, 영웅이라 불리울 만한 자격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하여 외로워하기도 하고 힘겨워하기도 하지만, 오직 굳건한 의지와 올곧은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바람만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제 마음속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뿔 미디어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끄러운 솜씨이나마 정성을 다해 써 나간 이 글은, 젊은 시절 저에게 꿈과 즐거움을 벅차도록 선사해 주었던 모든 작가님들께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장협(長鋏) 배상
 
 
 
 序章
 
 
 짹짹······.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허름한 초옥(草屋),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문을 열고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갓 약관(弱冠)을 넘긴 듯한, 이제 청년티가 나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맑고 깊었고, 허름한 백의를 걸친 자태는 단정했다.
 청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사립문을 열고 집을 벗어났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달관의 경지에 이른 학자 같은 침착함과 진중함을 풍기고 있었다.
 아직 해가 다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산길을 천천히 올라가던 청년은 이내 나지막한 구릉에 올라섰다.
 그저 평범한 구릉, 하지만 그곳은 주변에 큰 나무가 없어 햇살이 잘 비쳐 드는 아늑한 공간이었고 작은 꽃만이 여기저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구릉의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봉분(封墳)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봉분은 며칠 전 청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비석 하나 없이, 떼를 입히지도 않은 초라한 봉분 앞에서 청년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자세로 눈을 감더니 명상에 빠져 들었다.
 짹짹······.
 휘스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조용한 공간, 해는 점점 떠올라 중천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청년은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부터 정좌한 청년이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을 넘어 오후로 향해 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시간 동안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덕분에 잠시 다리를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무덤에 큰절을 올렸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과 아픔을 담은 눈빛으로, 청년은 무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의 눈에 한 방울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묻고서 만 하루 동안, 깊이 생각했습니다······.”
 청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은 방울져 떨어지지 않고 다시 그의 눈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하지만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심산(深山) 초부(樵夫)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니나, 어르신의 말씀대로 세상에 내 인연이 끝난 것이 아니라면 다시 세상에 나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상의 인연을 다 매듭짓고 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적적하시더라도 참아 주시길······.”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산을 내려가 중턱의 집으로 돌아갔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그는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어깨에 둘러멘 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서 다시 사립문을 열고 나섰다.
 그 길로 청년은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세에 강호의 이야기꾼들이 언제나,
 “그분의 강호출도(江湖出道)는 이렇게 옆집 나들이 하듯이 이루어졌던 것이오······.”
 라고 운을 떼곤 하는 고검(孤劍) 백의후(白衣候) 금비(金備)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一章 주루풍운(酒樓風雲)
 
 
 삐이걱∼
 문소리와 함께 주루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허름한 백의에 문사건(文士巾), 자그마한 보따리를 등에 진 청년은 바로 금비(金備)였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빠르게 다가왔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 그는 금비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자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첫눈에 비렁뱅이로 알아볼 꼬락서니로구나. 그냥 쫓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방이 있습니까?”
 부드럽게 묻는 금비의 목소리에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방이야 있지요······.”
 ‘아니, 내가 왜 이런 비렁뱅이 같은 자식에게 허리 굽히며 존대를 하는 거지? 당장 쫓아 버려야 당연할 텐데······.’
 점소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허리를 펴고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허리가 숙여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가냘픈 몸집을 한 이 젊은 서생 차림의 손님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하게 하는 위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점소이는 한때 대학사로 이름난 집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 학사의 집에서 그가 주인으로 모시던 가족들처럼, 거만하진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위엄이 이 청년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은 방을 얻어서 쉬어 가고 싶습니다. 아무리 작은 방이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룻밤 묵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겠습니다.”
 “아아, 알겠습니다요. 작은 방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마지막에 꺼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점소이 경력에서 비롯된 직업의식이었으리라.
 “저어······ 방값은······.”
 “아아, 그렇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산에서 살아온지라 은자(銀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위엄이고 뭐고, 돈이 없는 사람을 공짜로 재워 줄 수는 없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금비가 품에서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걸로 방값을 대신하면 어떨까요? 제가 캔 약초입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룻밤 방값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금비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내민 것은 족히 수령이 이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이었다.
 마을 한약재상에 판다면 은 열 냥은 바로 받을 수 있을 듯 보였다.
 하루 방값이 은자 열 푼이니, 이거야말로 엄청난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눈에 교활한 빛이 떠돌았다.
 그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아아, 이거라면······ 흠흠, 이 정도의 약초라면 방값과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식사비까지는 될 것 같군요······. 뭐, 제가 약간 손해를 볼 듯도 하지만 공자님 얼굴을 봐서 그렇게 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렇습니까? 정말 고맙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럼 이리······.”
 점소이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금비에게서 산삼을 받아 들려 했다.
 그 순간, 희고 매끄러운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점소이의 손을 가로막았다.
 “잠깐! 그 거래는 조금 이상한데요?”
 금비와 점소이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쏠렸다.
 푸른 경장(輕裝) 차림에 화려한 귀걸이를 한, 눈부시게 하얀 피부에 아직 다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미모의 한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점소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이내 그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곧 소녀가 비껴 멘 장검에 고정되었고, 파란 수실이 달린 장검의 손잡이를 본 순간 그 얼굴은 긴장을 띠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객점의 점소이 노릇을 해 온 덕분에 눈치 하나만큼은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그는 경험상 이 소녀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강호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로 봐서 상당한 명문가의 사람이며, 잘못 건드렸다가는 소녀 본인에게나 그녀의 배경 세력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흐음······ 이건 최소한 수령이 삼사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인데요? 보존 상태도 좋고······ 한약재상에 가져간다면 아마 은자 오십 냥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여기 방값은 기껏해야 은자 열 푼 정도······ 그 돈이라면 이 산삼의 한쪽 잔뿌리만 떼어 줘도 충분할 금액이지요.”
 ‘빌어먹을, 네년은 이 사람과 대체 무슨 관계기에 남 좋은 장사를 망치려 드는 것이냐?’
 점원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해 대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자세로 말을 꺼냈다.
 “아아, 그렇군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이런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저는 그저 조금 오래된 도라지 뿌리인 줄 알았습니다. 헤헤.”
 소녀는 약간 미심쩍은 눈초리로 점원을 쏘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정당한 가격을 받도록 해요. 그리고······.”
 소녀가 시선을 돌려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띤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아까부터 그저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리는 듯했으나 이내 처음의 표정을 짓고는 금비에게 사뭇 질책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도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그렇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필부는 죄가 없으나 보물을 지닌 것이 죄라는 말을 모르나요? 보아하니 강호에 처음 나온 듯한데, 이런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이고 다닌다면 필시 일신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거예요.”
 금비가 정중하게 포권하며 소녀에게 답례했다.
 “소저의 진심 어린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마음에 새기도록 하지요.”
 소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고작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한 이런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내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그녀는 일행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이곳 객잔에 여장을 푼 후 식사를 하러 내려온 차에 우연히 금비와 점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것이었다.
 가문이 의원과 관련 있는 곳인지라 청년이 대화 중에 내놓은 산삼을 힐끗 보고 그것이 제법 영약 소리를 들을 만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아직 세상을 모르는 듯한 어수룩한 청년이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일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평소 남의 사소한 일에 나서지 않는 자신의 성격인 데다가 현재 맡은 일의 중요함을 생각할 때 튀는 행동은 절대 삼가야 할 상황에 이런 일에 끼어든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판국이었으니, 자신이 이 초라한 행색의 청년에게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제법 오랫동안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쪽은 금비였다.
 “소저의 충고는 마음속 깊이 새기고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게 좀 더 알려 주실 말씀이 있으신지······.”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여인으로서는 거의 뻔뻔하다시피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에 살짝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자, 이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제겐 은자가 없으니······ 이 물건으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군요. 이 시간에 약포(藥鋪)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이렇게 하죠. 마침 제 집이 의원 노릇을 겸하는 곳인데, 이러한 영약이 많이 필요한 형편이에요. 그러니 그 산삼을 제게 파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 주신다면 제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여기, 값을 받도록 하세요.”
 말과 함께, 소녀가 품속에서 은표(銀票) 한 뭉치를 꺼내 그 중 다섯 장을 셈하여 금비에게 건네주었다.
 열 냥짜리 은표 다섯 장을 받아 든 금비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소녀에게 산삼을 건넸다.
 처음 점원에게 방값으로 산삼을 건네주려 할 때처럼 그가 소녀에게 산삼을 건네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소녀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계산을 마치자 금비가 점원을 바라보며 그 중 한 장을 건넸다.
 “자, 다행히 방값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군요. 이제 제게 방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아이구, 그러문입쇼.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쪽입니다.”
 금비는 앞장서는 점원의 뒤를 따르려다, 다시 소녀를 향해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소저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일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좋은 약재를 제값에 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금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남긴 채 점원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금비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소녀도 곧 몸을 돌려 자신의 동행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향했다.
 
 점원이 안내한 방은 작지만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아늑한 별실이었다.
 그는 이제 금비에게 사기를 치거나 바가지를 씌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침상을 정돈해 주며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저어,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방으로 차려 올까요?”
 “아닙니다, 잠시 쉰 후 식사는 내려가서 하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그,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거스름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점원이 사라지자, 금비는 어깨에 진 보따리를 풀어 한쪽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상에 누웠다.
 편하게 다리를 뻗고 누운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는 평소 금비가 자주 하던 휴식의 한 방법이었다.
 남다른 자제력과 맑은 마음을 가진 그는 언제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즉시 편안한 명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곤 했다.
 오늘따라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점 객점에서 만난 소녀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했지만 마치 꽃봉오리를 틔우기 직전의 목련처럼 아름다운 여인.
 금비는 굳이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지 않았다.
 그를 거두고 돌봐 주었던, 그에게 가족이자 친구이며 스승이었던 돌아가신 노인은 언제나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했다.
 노인은 금비에게 무엇도 가르친 것이 없었지만, 금비는 노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금비는 자연스럽게 소녀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마음속에 노닐도록 놓아둔 채 휴식에 빠져 들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금비는 눈을 떴다.
 점원이 쟁반에 은자를 담아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방값을 제한 나머지 잔돈입니다요. 식대는 나중에 식사를 하신 후 계산하시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건 수고해 주신 데 대한 작은 표시니 부담 없이 받아 주십시요.”
 말과 함께 내민 금비의 손에는 반 냥짜리 은화가 들려 있었다.
 금세 점원의 입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미 자신의 사기행각이 들통 난 상황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으면 품었지, 이렇게 방값의 몇 배에 해당하는 수고비를 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점원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가, 감사합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시면······.”
 “괜찮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제가 오히려 고맙군요. 아, 잠시······ 목욕을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산길을 걸었더니 몸이 많이 더러워졌군요.”
 “네, 걱정 마십시오. 지금 곧 목욕물을 대령하겠습니다.”
 그렇게 나가고 잠시 후, 점원은 커다란 물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 와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욕조에 가득 부어 주었다. 금비는 즉시 옷을 벗고 그 속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잠시 후, 욕조에서 나온 그는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옷을 다시 차려입고서,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에 문사건을 단정히 두른 후, 식사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금비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위해 자리를 찾았다.
 이미 제법 밤늦은 시각이라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다들 술병을 앞에 놓고 취기 어린 얼굴로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금비와 같이 단지 식사를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금비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찾기 힘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빈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로서는 바로 옆 자리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자리에는 앉기 싫었고, 그래서 조용한 빈자리를 찾으려니 마땅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의 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씨! 실례하오만 자리를 찾고 계시오? 괜찮다면 우리와 합석하지 않으시겠소?”
 금비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식당의 한쪽 구석에, 네 명의 남녀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금비는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한 제의를 하는가 싶어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 이남 이녀(二男二女) 중 조금 전 자신에게서 산삼을 산 소녀가 끼어 있는 것을 알아보고서 웃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금비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앞에 앉은 이남 이녀는 누가 보아도 그 영준함이 눈에 띄는, 재기 넘쳐 보이는 일행이었다.
 조금 전 금비에게서 산삼을 산 청의 소녀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황의 소녀 하나, 흑의를 입은 청년과 아직 어린 청의 소년 하나가 그 일행이었다.
 금비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청의 소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런데, 그쪽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신지요? 저는 이곳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금검파(金劍派)에서 온 단일비(丹一飛)라고 합니다. 이쪽, 아까 소협께 산삼을 산 분이 제 누님이신 단청하(丹靑河)구요.”
 소년의 말에, 소녀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일비! 처음 뵙는 분께 너무 무례하구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물어보는 법이 어디 있니? 게다가······.”
 단청하가 전음으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란 걸 모르니?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진 않은 것 같다만, 이런 때 낯선 사람에게 아무 의심 없이 말을 걸고 우리의 정체를 알리다니······. 심(沈) 언니나 제갈 오빠가 무어라 생각하시겠어?”
 “하하. 걱정 마세요, 누님. 이제 우리 금검파에 하루거리까지 당도했지 않습니까? 이곳 역시 우리의 세력권 안이고 내일 아침이면 무황성(武皇城)의 어르신들과 본가(本家) 고수님들 역시 도착할 텐데,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을 부른 건 제갈 형님이고, 저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누님 아니었어요?”
 사실 중원에서는 여인의 이름을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청하가 단일비에게 제지를 가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경솔하게 알려 준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강호의 여인인지라 곧 대범하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웃으며 금비에게 말을 건넸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요? 방금 들으셨듯이 제 이름은 단청하예요. 이쪽의 소협께서는 제갈세가(諸葛勢家)의 차남이신 제갈운학(諸葛雲鶴) 님이고, 이쪽 분은······ 음, 그저 심(沈) 낭자라고만 말씀드려야겠네요.”
 그녀, 단청하는 왠지 심 낭자라는 여인을 조금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런 생각에 금비는 잠시 심 낭자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가녀린 팔다리,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바라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외모의 소녀였다.
 그녀, 심 낭자 역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 금비가 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릴 때 제갈운학이 허리를 펴며 포권했다.
 “제갈세가의 제갈운학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저는 금비라고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금비는 자리에 앉았다.
 둘러앉은 좌중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무릇, 강호의 밥을 먹는 자라면 남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에는 출신내력을 말하는 법이다.
 사문은 어디고, 스승은 누구며, 어디의 어느 집안 출신인지를 밝히는 것이 당연한 예의인 것이다.
 물론 금비가 강호인이 아닐 수도, 한갓 촌부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느끼기에 이 사람은 도저히 그런 신분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미묘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 단청하가 굳이 그에게 산삼을 사며 충고한 것이나 제갈운학이 자리를 찾는 그를 불렀던 것, 단일비가 굳이 자기소개를 한 것 역시 모두 그의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비가 단지 이름만 밝히고 마니, 어쩐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불쾌감까지 치솟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듯 금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할 일이 생겨 강호에 나온 촌무지렁이라, 사문도 스승도 없는 몸이기에 더 말씀드릴 것이 없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일동이 다시 보니 과연 금비의 일신에서는 내공의 기운이나 무예를 익힌 듯한 몸가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들 언짢음이 풀려 웃음 지어 보였다.
 그가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를 고요히 바라보는 심 낭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금비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맑고 고요해서, 그 시선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그 시선을 오랫동안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기는 힘들 듯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의 미모가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은한 기품을 느끼며 압도당할 정도가 되는 것, 그것이 소녀가 풍기는 고고한 아름다움이었다.
 금비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차분한 얼굴로 미소를 띤 채 받아 내고 있었다.
 가인(佳人)의 깊은 시선을 마치 봄날의 꽃을 바라보듯, 아무런 동요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 교환은 수십 마디의 언어를 주고받는 듯도 하고 말없이 싸움을 벌이는 듯도 해서, 이제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소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심은(沈恩)이라고 해요.”
 그녀의 인사말에, 둘러앉은 좌중은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나마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단청하의 놀라움은 더했다.
 ‘아니, 심 언니는 평소에 남자와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분인데, 어떻게 자신이 먼저 소개를 할 수 있지? 운학 오빠조차도 심 언니와 하루 종일 가야 한두 마디 나누는 정도고, 저 막무가내 일비 녀석도 심 언니는 어려워하는 판인데······. 이렇게 자신이 먼저 이름을 밝히는 언니의 모습을 난 본 적이 없어.’
 주위의 다른 일행도 단청하만큼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갈운학은 표시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고, 단일비는 아예 입을 헤벌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금비와 심은의 표정은 도리어 차분했다.
 심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는 넓고 인재는 많다 하더니······ 오늘 또다시 새롭게 사람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군요. 제 술을 한잔 받으시겠어요, 소협?”
 “하하, 주시는 술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저는 전혀 감탄할 가치가 없는 촌부입니다. 어찌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과분한 평가를 내리시는지······.”
 “무엇 때문에 소협께서는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심은이 섬섬옥수를 들어 술병을 쥐며 말했다.
 다시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에, 금비는 드디어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가인의 칭찬은 언제나 장부의 마음을 녹이는 법이지요. 제 어디를 보고 훌륭하다 판단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약관을 넘기도록 문재(文才)로나 무재(武才)로나 별달리 이룬 것 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둔하다 야단을 맞을 수는 있을지언정 훌륭하다 칭찬받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마음의 수양이 중요할 뿐 겉으로 보이는 성취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어린 저이지만 근래에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협을 뵈니 머리로 깨우친 일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 매우 기뻐요.”
 금비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웃으며 술잔을 들자, 심은이 술병을 들어 그 잔에 술을 채웠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금비에게, 심은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은 전혀 배우지 않으셨나요?”
 “그저 알게 된 어르신에게서 호흡법 정도를 배워 건강에 도움 삼고는 있으나, 무공이라 할 만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무공을 배우실 생각이 있나요?”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둘러앉은 이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제갈운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두 분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사귀어 온 지기처럼 보여 저희가 쑥스럽군요. 저희에게도 대화를 나눌 기회를 좀 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요, 언니께서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분 소협을 좀 나누어 주셔야지요? 밤은 길고 술은 넉넉하니, 다 함께 이야기하며 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청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금비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 살짝 웃음을 띠자, 금비는 또 달리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껴야 했다.
 한편, 단청하 역시 마음속에 야릇한 동요가 일고 있었다.
 조금 전 금비와 심은이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까닭 모를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심 언니가 저 사람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이지? 처음 저 사람을 발견하고 도와준 사람은 바로 나인데 언니가 저렇게 선수를 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잠시 후 금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뭔가 재미있는 듯 싱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누나, 왜 그래? 저 형 얼굴이 그렇게 멋있어?”
 “쓸데없는 소리! 어디서 그런 무례한 말투를 배웠니?”
 단청하는 자신을 꾸짖듯이 마음속으로 타일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어딜 봐도, 그저 행동거지에 조금 품위가 있을 뿐 한낱 서생일 뿐인 저런 자에게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정신 차려라, 청하! 오늘 이렇게 먼 길을 나온 것은 가문과 무림을 위한 중요한 일 때문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자 이제는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아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를 가다듬고 좌중을 바라보자 제갈운학과 금비는 제법 마음이 맞는지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제 심은은 입을 다문 채 대화 중인 두 남자를 바라보며 조금씩 술과 안주를 먹고 있었다.
 오직 단일비만이 좀이 쑤신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주루 안의 사람들을 둘러본다든지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걱∼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 여기저기에 주름이 잡힌 노인 하나와 흑의를 걸친 중년인 하나.
 노인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웃음을 띠며 느긋한 걸음으로 주루에 들어섰고, 중년인은 죽립(竹笠)을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가 달려 나가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허리를 숙이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스쳐 지나간 중년인을 어리둥절해 바라보는 점소이에게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아이야, 넌 필요 없으니 저리 물러나 있거라. 우리는 잠시 볼일만 보고 나갈 거란다.”
 “네? 네······. 그, 그런데 볼일이 어떤 일이신지. 식사를 대접할까요? 아니면 술을······.”
 “그런 게 아니래도. 잠시면 끝날 일이니 저리 비켜서거라.”
 말과 함께 슬며시 미는 노인의 손길에, 점소이는 비칠비칠 세 걸음을 뒷걸음질 치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단일비였다.
 “누, 누나······.”
 턱짓으로 두 사람을 살짝 가리키는 단일비의 행동에, 단청하 역시 긴장하며 그들을 주시했다.
 어느새 탁자의 모두는 말을 멈춘 채,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제갈운학은 젓가락을 딸각거리며 안주를 휘젓고 있었지만 눈길은 그들에게 가 있었고, 심은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단청하는 중년인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중년인이 아닌 노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는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저 노인은 누굴까? 아버님과 스승님들께 강호의 노고수들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었지만 워낙 많은 데다 저 노인 또한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알 수가 없는데······. 그런데 저 사람은 무공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한눈에 위험해 보이는 저 노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휴우······ 역시 강호의 흉험함을 겪어 보지 못해 그런가 보구나······.’
 금비의 얼굴에 나타났던 관심은 아주 잠시 머물다가 곧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이내 평온하게 변했지만, 오직 단청하만이 그 표정을 보았던 것이다.
 “모두 주의하시오. 저 노인은 모르겠으나 흑의를 입은 저 사람은 아마도 청사검(靑蛇劍) 인당(刃堂)인 듯합니다.”
 제갈운학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사검 인당!
 특유의 청사검법(靑蛇劍法)으로 강호에서 일류고수의 평판을 들어왔고, 한 번 칼을 뽑으면 상대를 죽이기 전에는 집어넣지 않아 발검필살(拔劍必殺)이란 별명을 가진 잔인한 사도(邪道)의 고수. 그 무공 실력도 대단하지만 독랄한 손속 또한 무섭기 짝이 없다는 냉혈한.
 “저 사람은 강남 일대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네, 아마 우리가 목적인 듯하네요.”
 “이거 큰일이로군요. 인당도 어렵지만 그 뒤의 노인 역시 상당한 고수인 듯한데, 무황성의 어르신들께서 도착하시려면 아직 하루는 더 기다려야 할 테고······ 우리야 어떻게든 한다 쳐도 금 형은 어떡하지요?”
 “그게 제일 문제네요. 소협, 죄송하지만 지금 헤어져 주시겠어요? 방으로 돌아가셔서······.”
 심은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인당이 그들에게 다가섰다.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인당은 단청하의 등 뒤로 다가서서, 금비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적의를 가득 담은 채 그를 쏘아보는 단일비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뒤적거리는 제갈운학과, 아무 표정 없이 그를 올려다보는 심은,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금비.
 돌아앉은 단청하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인당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더니, 감정이라곤 섞여 있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놔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리고 그쪽은 누구시기에 이렇게 하대를 하시는지······?”
 대답한 사람은 단일비였다.
 그의 말과 함께 제갈운학과 단청하가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있었다.
 단청하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지고 단일비의 눈빛이 굳어지면서 네 사람은 천천히 긴장을 굳히기 시작했다.
 인당의 죽립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꼬마 놈이 겁이 없구나. 세 번은 말하지 않는다. 내놔라.”
 “무얼 내놓으라시는지 도대체 모르겠군요. 남에게 말을 걸 땐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던가요?”
 이어지는 단일비의 말에, 인당의 대답이 이어졌다.
 “죽이고 찾지.”
 치잉!
 검명이 울리며 파르스름한 검신이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치르르르!
 마치 독사의 울음소리인 양 기이한 음향을 날리며 날아드는 인당의 칼날!
 검집에서 뽑힌다 싶은 순간 허공을 날아든 칼날은 똑바로 단청하의 목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그 순간, 네 사람의 몸이 믿을 수 없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단청하의 몸이 마치 물이 흘러내리듯이 탁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단일비의 칼날이 인당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인당의 칼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단일비의 칼날을 쳐 냈고, 그 순간 의자에서 튕겨 일어나며 찔러 오는 심은의 장검이 인당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채앵!
 “크윽!”
 단일비가 신음을 흘리며 의자째 뒤로 튕겨 나갔다.
 부족한 내공에 내상을 입고 튕겨 나간 것이다.
 하지만 인당 역시 마음속으로 놀라며, 거의 코앞으로 날아온 심은의 칼날을 간신히 고개를 돌려 피해 냈다.
 바로 눈앞을 스치며 지나가는 심은의 칼날에, 인당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새파란 애송이들이라 얕보고 제일 먼저 등을 돌린 계집을 두 조각 내 놓으면 나머지 놈들도 혼비백산하여 행동이 흐트러질 것이고, 하나씩 죽여 버린 후 물건을 찾으면 끝이라는 계산을 했던 그는 마치 수십 년 합공을 해 온 동문처럼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소년, 소녀들의 공세에 순식간에 수세에 몰려 버렸다.
 하지만 이제 심은의 공세까지 무위로 돌아간 상황, 인당은 이를 갈며 검에 내공을 실었다.
 ‘조각조각 내 주마!’
 살기를 끌어올리며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쐐액! 하는 파공음과 함께 눈앞으로 날아오는 물체 하나!
 그때까지 고개도 들지 않고 앉아 있던 제갈운학의 손끝에 쥐어져 있던 젓가락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이것이 제갈세가가 강호에 자랑하는 비전의 절초 중 하나, 탈혼유성(奪魂流星)의 절기였다.
 이제 육성(六成)의 화후를 이룬 것뿐이지만, 제갈운학의 손을 떠난 젓가락은 마치 원래 있던 곳을 찾아가듯 인당의 이마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빼앗는 유성!
 명칭에 걸맞은 상승절기가 갓 스물을 넘긴 제갈운학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압!”
 터져 나오는 기합 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는 검광!
 황하녹림채의 다섯 고수를 한꺼번에 도륙할 때도 한 마디 소리를 내지 않았다던 인당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오며 그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쩌억!
 청사검법 중 쾌검식인 청사출동(靑蛇出洞)이 펼쳐지며 젓가락이 두 조각이 났다.
 원래 청사출동은 상대방을 일검에 격살하는 쾌검식(快劒式), 하지만 인당은 코앞으로 날아든 젓가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가장 빠른 공격검식으로 방어에 융통한 것이었다.
 실로 강호에서 실전을 오래도록 경험해 온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인당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이어지는 공격들은 무섭도록 정교하게 짜인 합공이었고, 그는 이 애송이들이 이렇듯이 무서운 공격을 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하나의 실력이라면 절대 인당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이 펼치는 합공은 자신들의 실력을 두 배로 높여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 모든 공방은 단지 한 호흡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당은 그 모두를 파훼했고,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분노한 반격뿐이었다.
 공격을 위해 검을 추슬러 자세를 바로잡으며, 눈앞에 온몸의 허점을 노출한 심은을 일검에 잘라 버리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성.
 “그르륵······.”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인당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천천히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하단전을 꿰뚫고 등 뒤로 빠져나가 있는 새파란 칼날이 보였다.
 탁자 아래 누운 채 위를 향해 검을 내뻗고 있는 단청하. 그녀의 손에 쥐어진 장검이 인당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모래탑이 허물어지듯, 인당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으아악∼!”
 “사, 살인이다! 으아아!”
 그제야 비명 소리와 함께 객점 안의 사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단청하가 천천히 탁자 아래서 기어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색이 파르스름하게 질린 것이, 극도의 원기(元氣)를 소모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일련의 합격술은 사실 네 사람이 수없이 맞춰 보고 또 연습했던 것이다.
 비록 객점의 탁자를 놓고 연습해 온 건 아니었지만, 네 사람은 어디에서 이 방법을 쓰더라도 손발이 확실히 맞을 수 있도록 연습과 토론을 거듭해 왔다.
 처음 의견을 낸 것은 제갈운학이었다.
 그들 네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어쩔 수 없이 먼길을 떠나야만 했었다.
 강호 경험이나 무공수위 모두 부족한 그들 네 사람의 일행은 믿을 것이라곤 오직 자신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적들이 알지 못할 거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강호의 일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것, 이 여행은 도처에 위험이 널려 있어 어떤 고수와 맞닥뜨릴지 모르므로 한 가지 비기(秘技) 정도는 갖추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합격술을 연마할 것이 제안되었고, 그들은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이 합격술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것이다.
 이 합격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맡은 이는 바로 단청하였다.
 처음에 단청하의 역할은 단일비가 적임라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가장 무공이 낮아 보이는 사람, 그러므로 제일 먼저 공격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그가 마지막 한 수를 쓰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단일비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냉정하고 대담한 일검을 쓰는 것에 허점을 드러냈고, 그 때문에 단청하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고수라면 다수와 상대할 때는 제일 먼저 가장 약한 적을 노린다. 따라서 단청하가 이 역할을 맡게 된 이후 그녀는 가장 약한 듯이 허점을 내비치는 것과 빠르게 피하는 법, 그리고 상대의 마지막 빈틈을 노려 검을 쓰는 법을 한꺼번에 연습해야 했다.
 그녀에겐 버거운 역할이었으나 단청하는 이를 악물고 연습을 거듭했다.
 그녀가 못하면 단일비가 해야 한다. 이 역할을 맡은 자는 가장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가문의 대를 이을 독자(獨子)인 단일비가 그 역할을 맡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실로 가녀린 듯 하지만 오기가 강하고 맘먹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단청하의 기질을 바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하 매(河妹), 괜찮소? ”
 “누나, 정말 멋졌어!”
 제갈운학과 단일비가 각각 말을 걸며 다가왔다.
 단청하가 대답하려는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들의 말을 갈랐다.
 “끌끌······. 대단한 아이들이로구나. 십여 년간 장강(長江) 이남을 활개 치고 돌아다녔던 청사검 인당이 이런 곳에서 너희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을꼬?”
 네 사람은 모두 놀라 목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곰방대를 물고 있던 노인이 어느새 그들의 곁에 다가와 인당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처음부터 범상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고수일 줄은 몰랐다. 이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인당이 죽을 때부터 모두 노인에게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어느새 그들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린 채 그들의 바로 곁에 다가와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라 할 만하다. 쥐꼬리 같은 제 실력을 믿고 상대를 경시했으니, 죽어도 염라대왕 앞에 할 말이 없을 게야. ”
 사람 좋게 웃는 노인에게, 제갈운학이 포권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어르신의 고명(高名)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
 “흐흠,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하지만 곧 죽을 목숨들이 내 이름 따위 알아서 무에 쓰려고? ”
 노인의 말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웃는 얼굴로, 지금 그는 모두를 죽이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금비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하였다.
 “저는 당신을 알겠습니다.”
 “호오······ 너 같은 어린 녀석이 나를 안다고? 어디, 내가 누구냐?”
 금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저 미소를 띤 채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떠돌이 서상(書商)에게서 ‘무림악인록(武林惡人錄)’이란 책을 구한 적이 있었지요. 거기에 쓰인 인물들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십 세가 넘어 출도했다. 곰방대 속에 숨긴 칼날을 검 대신 펼치는 십이로(十二路) 질마검식(疾魔劒式)으로 출도 후 십여 년 동안 죽인 사람의 숫자는 이백에 달했고, 오십 세가 되었을 때 강호에서는 시랑(豺狼)과 이자는 한 뱃속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살인을 즐기고 교활하니 무섭기 짝이 없고, 무공이 높고 도망쳐 숨는 데 능란하니 제거하기 어렵다. 이자의 이름은······’”
 “허허······ 그렇다, 노부가 바로 풍음전(馮陰典)이다.”
 금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점점 굳어지는 일동의 얼굴은, 마침내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착잡해졌다.
 질마검효(疾魔劒梟) 풍음전(馮陰典)!
 그 독랄한 손속과 잔인한 마음가짐으로 무림에 이름을 날린 고수!
 무공은 황화예(黃化藝)에 이르렀고, 자비심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냉혈동물의 잔인함과 올빼미의 교활함으로 더욱 명성을 떨친 마두(魔頭)가 바로 그였다.
 둘러선 단청하 일행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풍음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좀 더 수월하겠구나. 아이들아, 그 물건을 내게 넘겨주지 않으련?”
 “아까부터 무슨 물건을 내놓으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풍 선배님의 고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이곳은 엄연히 금검파의 세력 안이고, 무황성의 보호 안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이렇게 후배들을 핍박하시는 건지요?”
 “허허······. 네 녀석이 제갈세가의 둘째라는 십방수재(十方秀才)냐?”
 “불초가 제갈운학입니다.”
 십방수재(十方秀才).
 이것이 강호에 알려진 제갈운학의 별호였다.
 그의 나이 스물하나, 열일곱에 출도하여 이렇다 할 위명을 떨치지 않았음에도 그의 지략과 무공 및 학문, 기예(技藝)에 걸친 다재다능함은 그에게 이런 별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원래 제갈세가는 무공뿐 아니라 뛰어난 지혜로 이름을 떨친 가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갈운학의 영민함은 날로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두 살 위인 형 탈명신검(奪命神劍) 제갈신룡(諸葛神龍)이 백년 내 제갈세가에서 배출한 인재 중 무공으로는 최고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세 살 아래인 화중봉(花中鳳) 제갈화봉(諸葛花鳳)이 어린 나이에도 무림 사대미인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제갈운학의 명성 역시 이들에게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펼친 비검술은 아주 잘 보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것이 너희 제갈세가의 절기인 탈혼유성검(奪魂流星劍)이겠지?”
 “선배님의 고견(高見)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한 오륙성 정도의 성취인 듯하더구나······. 원래 탈혼유성의 절기가 극성에 이르면 나뭇가지나 풀잎도 극상(極上)의 비도(飛刀)로 변하고, 손에서 떠나는 순간 목표에 이르러 있다고 들었다. 방금 그게 네 최선이냐?”
 “······.”
 묵묵부답, 대답이 없는 제갈운학의 태도가 노인의 말이 맞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끌끌, 나이 스물이 넘도록 가문의 절기 하나 대성(大成)하지 못하다니······ 역시 산수재(散秀才)란 별명이 틀리질 않는구나.”
 제갈운학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원래 산수재라는 말은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 풍음전은 대성치 못한 무예와 제갈운학의 별호를 교묘하게 꿰어서 그를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본시 탈혼유성검은 제갈세가가 강호에 자랑하는 대홍락의 절기, 제갈운학이 스물의 나이에 그것을 육성까지 연마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자랑이 되면 되었지 흉이 될 수는 없었다.
 하나 풍음전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제갈운학을 부끄럽게 함으로써 그의 심기를 흐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풍음전의 격장지계(激將之計)에 금비는 마음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과연, 별호에 들어가는 효(梟) 자가 어디서 왔는지 알 만하군······.’
 그러나 제갈운학은 곧 안색을 바로 하며 풍음전에게 말했다.
 “후배의 성취가 미흡한 점은 항상 부끄럽게 생각해 온 바이니, 선배님의 질책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하나 선배님께서 후배에게 그러한 점을 물으신 뜻이 저를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할 터, 후배의 무공수위를 다 가늠하셨으면 이제 손을 쓰시겠습니까?”
 공손하지만 칼날같이 예리한 제갈운학의 말에, 풍음전의 얼굴 표정이 살짝 변했다.
 말 그대로, 풍음전이 제갈운학에게 꼬치꼬치 캐물은 것은 그의 탈혼유성검의 성취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가 가장 궁금했던 때문이었다.
 탈혼유성검의 절기는 소리비도(小利飛刀)와 함께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대홍락(大紅落)의 절기 중 하나. 만약 팔성의 경지에 오른 탈혼유성검이라면 풍음전이라도 막아 내기 힘들 것이었고, 십성에 이르렀다는 제갈신룡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풍음전은 이미 도망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풍음전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출수(出手)를 막고 있는 생각은 지금 세 가지였다.
 첫째, 제갈운학의 말이 사실인가 하는 것.
 제갈운학의 태도나 청사검 인당에게 탈혼유성을 날린 후 힘겨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육성의 성취가 사실인 듯하지만, 그는 강호에 널리 알려진 신기제갈가(神機諸葛家)의 적통(嫡統). 그 머릿속에서 무얼 꾸미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이 제갈세가가 강호에서 존경받는 가장 큰 이유, 가뭄에 콩 나듯 무학의 인재가 배출되는 제갈세가지만, 그 뛰어난 두뇌들은 오히려 무공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남궁세가(南宮世家)나, 독공과 암기술에서 무림에 따라올 자가 없다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고수들보다 더욱 무림에서 껄끄럽게 여겨지는 이유였다.
 둘째, 한 마디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하고 있는 심은의 정체.
 제갈운학이 본 실력을 다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숨기고 있는 절예가 있는지가 반반의 확률이라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심은은 분명 자신의 실력을 오 할은 숨기고 있다고, 오랜 세월 강호에서 굴러 온 그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게다가 심은이 풍기고 있는 기도 역시 그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열여섯이나 열입곱쯤밖에 안 된 듯한 소녀의 기도라기엔 너무도 차분하고 침착하다. 경계심을 풀지 않으면서도 당황하거나 겁먹은 빛 없는 그 침착함이 풍음전의 심기를 긁어 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비는 누구인가.
 무공을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처럼 보이는데, 은은히 풍기고 있는 풍음전의 살기와 둘러싼 청년고수들이 발산하고 있는 기도에 일반인이라면 벌써 기가 질려 거품을 물고 혼절하고도 남았겠건만 담담하게 미소까지 띠고 서 있다.
 ‘게다가, 분명 처음 보는 놈이건만 묘하게 낯이 익단 말이야······.’
 일부러 내공을 끌어올려 강한 기세를 쏘아 보냈다.
 무공을 모르는 자라면 풍음전의 이 암경(暗勁)만으로도 내상은 입지 않더라도 호흡이 곤란해지고 정신을 잃기 마련. 과연 금비의 얼굴빛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뿐, 다시 몸을 바로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허리를 세우는 그 모습을 보며 풍음전은 감탄했다.
 ‘만약 전혀 무공을 모르는 아이라면, 저 마음의 수양과 굳건함은 육십 평생을 강호에서 구른 나를 몇 배나 뛰어넘는구나······.’
 당장 목이 달아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이 상황에서 저토록 담담하게 마음의 안정을 갖는다는 것은 풍음전 같은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쓸데없는 생각, 저 어린 계집이 어디의 누구면 어떻고 저 아이가 누군들 어떤가? 어차피 오늘 금검파와 제갈세가, 두 문파에 원한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 더 나빠질 것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다!’
 독하게 마음을 다잡은 풍음전의 눈에 진득한 살기가 일었다.
 
 
 
 二章 혈전(血戰)
 
 
 ‘온다!’
 제갈운학은 풍음전이 출수하리라는 것을 느끼고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청사검 인당보다 두 단계는 위라고 평가받는 고수, 지금 그들의 실력으로는 네 명이 합공을 하더라도 백 초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기계(奇計)로 이편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척살할 수 있었던 인당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 뾰족한 방법도 없이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뽑아 든 두 장의 비도(飛刀)를 손안에 살짝 쥐면서 그는 되뇌었다.
 ‘최선을 다할 뿐, 죽음을 겁내서야 강호에 나올 수 없었으리라······.’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니 단씨 남매 역시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검을 고쳐 잡고 있었다.
 과연 명문가의 혈통, 이렇게 죽음을 마주한 상황에서 정통문파의 뿌리 깊은 힘은 그 진가를 보여 주는 법이다.
 제갈운학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심은과 금비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풍음전을 바라보고 있는 심은과 믿을 수 없는 정력(精力)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금비.
 그의 유일한 노림수가 있다면, 바로 심은의 존재였다.
 ‘노괴물은 그녀의 진가를 모른다. 아무리 그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본 실력에서 삼 할은 낮게 보고 있을 터, 오직 그녀의 한 수만이 유일한 돌파구다. 만약 그것이 무위에 그친다면······ 허허, 금 제(金弟), 금 제에겐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지기(知己)로 삼을 만한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제갈운학의 눈에 빠르게 풍마질검을 떨쳐 내며 몸을 띄우는 풍음전의 모습이 비쳐 드는 순간, 그의 독백은 거기서 끊겼다.
 ‘선수필승(先手必勝)!’
 필승을 바랄 수야 없었지만, 풍음전의 선제공격을 받으면 그들에게 승산이라고는 일 할도 남지 않는다.
 오직 선수로 그의 공세가 펼쳐지기 전에 허점을 찾는 것, 그것만이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활로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쐐애액!
 다시 펼쳐지는 탈혼유성의 절기!
 제갈운학의 두 장의 비도 중 하나가 빛살처럼 풍음전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핫핫핫······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풍음전의 곰방대의 반이 벗겨지며,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검이 제갈운학의 비도를 마주쳐 갔다.
 채앵! 하는 소리와 함께 풍음전의 풍마질검(馮魔疾劍)에 마주친 비도가 한차례 떨더니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소리 없이 풍음전의 인후(咽喉)를 노리고 날아드는 비도 하나!
 오른손으로 탈혼유성을 날리면서 거의 동시에 왼손으로 날린 소리비도였다!
 그 옛날 제갈세가의 비조(鼻祖)가 창안한 이후, 수없이 많은 고수들의 목숨을 덧없이 빼앗아 간 대홍락의 절기. 그 절대적인 위력 때문에 비도파천황(飛刀破天荒)이란 별명을 가진 전설의 비도술이 지금 풍음전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탈혼유성검이 극쾌(極快)를 생명으로 하는 절기라면 소리비도는 무음무성(無音無聲), 비도가 몸에 박히고 나서야 알게 된다는 신공이었다.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절기를 양손으로 한꺼번에 펼쳐 내는 것, 이는 노강호(老江湖) 풍음전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제갈신룡의 경우 이 두 절기 모두 십성까지 연마했지만, 그는 제갈운학과 같이 한꺼번에 구사하는 재주는 갖지 못했다.
 그들의 아버지이자 현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각(諸葛覺)은 어느 날 이 양수비도술(兩手飛刀術)을 연습하는 제갈운학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부의 재능은 신룡이 백 년 내 본가(本家) 최고다. 하나 응용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전에도 후에도 운학을 따를 사람이 없을 듯하구나. 운학이 만약 육십을 넘겨 산다면 본가의 무공은 그 녀석을 통해 지금의 두 배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으헛!”
 풍음전이 기겁하는 신음을 내지르며 내공을 떨쳐 풍마질검을 휘둘렀다.
 안개처럼 일어나는 검기, 풍음전이 자랑하는 질마검식 제팔초, 마봉밀밀(魔封密密)이 펼쳐지며 그의 상반신이 푸른 검기에 휩싸였다.
 이 초식은 검식을 세밀히 떨쳐 공격을 막아 내는 수비의 절초, 그러나 제갈운학의 소리비도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나뭇잎처럼 풍음전의 검기의 흐름을 타고 흐르며 그의 인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소리비도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막아서는 것을 꿰뚫든지 멈추든지 둘 중의 하나인 다른 비도술과는 달리, 소리비도는 운기(運氣)의 결(訣)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째애앵!
 찢어지는 쇳소리와 함께 제갈운학의 소리비도가 튕겨 나갔다.
 오성밖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공부(功夫)와 풍음전에 비해 월등히 달리는 내공 때문에 그의 소리비도는 풍음전의 검기를 타고 흐르면서도 급격히 속도를 잃었고, 칼날이 코앞에 다다른 순간 풍음전은 그것을 쳐 낼 수 있었다.
 “훌륭하구나! 하지만 거기까지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오며 자신을 향해 펼쳐지는 질마검의 공세에, 제갈운학은 온몸이 삽시간에 칼의 그림자에 갇혀 버린 듯 느꼈다.
 그때, 드디어 심은이 출수했다.
 쩌러렁∼!
 한꺼번에 서너 개의 종을 울리는 듯한 맑은 금속성을 뿌리며 두 팔을 크게 펼쳤다 모으는 동작 속에, 심은의 양손에서 황금색 서기와 함께 두 줄기 장력이 서로 꼬이며 허공에 뜬 풍음전의 옆구리를 노리고 쏟아져 갔다.
 “쌍류금(雙流金)! 쌍류금이로구나! 이이이익! 질마회강(疾魔回剛)!”
 놀라 외치는 풍음전의 목소리와 함께, 제갈운학에게 짓쳐 들던 그의 몸이 허공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검기를 온몸에 둘렀다.
 십이식 질마검식 중 단 하나의 구명절초(求命絶招), 목숨이 위험할 때마다 펼쳐서 막아 내지 못한 적이 없었던 질마회강이 펼쳐지고 있었다.
 쩌저저정!
 “크으윽!”
 “아흑!”
 풍마질검과 쌍류금의 공세가 서로 부딪치더니, 신음 소리와 함께 풍음전의 몸이 회전을 멈추지 않은 채 탁자 너머로 훌훌 날려 갔다.
 그러나 심은의 가녀린 신형 역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새하얗게 질린 그 입술 사이로는 핏물이 내비치고 있었다.
 “하 매! 일비!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다급한 제갈운학의 외침에, 공방을 바라만 보던 두 남매가 순간적으로 칼을 뽑으며, 날아 가는 풍음전을 따라 공격해 갔다.
 그 순간, 짧은 탄식을 내쉬는 심은의 중얼거림을, 금비는 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인가요······.”
 금비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이며 쓰러지려 하는 심은을 등 뒤에서 부축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힘없이 금비의 품속에 안겨 들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금비를 올려다보는 심은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할 짧은 순간, 그를 바라보는 심은의 눈빛 속에서 깊은 유정(有情)을 느낀 그가 입을 열려 했을 때, 단씨 남매의 기합성이 울렸고 금비는 다시 전장(戰場)을 바라보았다.
 “이야압!”
 기합성과 함께 단일비의 검이 풍음전의 단전을 노리며 찔러 들어가고, 단청하의 검 역시 풍음전의 하체를 쓸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합공은 완벽해 보였고, 풍음전의 몸은 금세라도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어느새 장검(長劍)을 빼어 든 제갈운학 역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주루를 쩌렁쩌렁 울리는 풍음전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기가 극성에 오른 그의 웃음소리는, 처음의 사람 좋은 노인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마굴(魔窟)에서 솟아나는 웃음소리처럼 주루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크핫핫핫! 좋다! 아주 좋다!”
 동시에 풍음전의 몸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더니, 다시 반대편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질마경혼(疾魔驚魂)!”
 온몸을 강기로 두른 질마회강에 이어, 다시 허공에서 회전하는 풍음전의 신형!
 그와 함께 몸에 둘러진 질마회강의 검푸른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수십 가닥으로 뻗은 검기들은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가늘며, 어떤 것은 천장에 닿고 어떤 것은 일 척(一尺)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검기에 닿는 것은 탁자고 기둥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있었다.
 꽈과과광!
 “아으윽!”
 “아악!”
 황급히 공세를 거두며 사력을 다해 풍음전의 검기를 막아 내던 단씨 남매가 팔다리에 검상(劍傷)을 입고 비명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따다다당!
 몸을 날려 공격해 들어가던 제갈운학이 순식간에 십여 번의 검변(劍變)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날아드는 풍음전의 공세를 막아 냈지만, 그 역시 입과 코로 피를 토해 내며 밀려나고 있었다.
 질마검법의 후삼식(後三式) 중 두 초식, 풍음전이 강호에 나온 이래 단 네 번 펼쳤던 비기인 질마회강과 질마경혼의 연속기가 펼쳐진 것이다.
 순식간에, 주루 안은 자욱한 먼지와 비산물로 가득 찼다.
 그런 와중에, 허공에서 회전을 멈추고 내려서는 풍음전의 눈빛만이 새파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흐흐흐······ 내가 이 두 초식을 함께 펼쳐 죽인 놈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강호의 친구들이 믿어 주기나 하겠는가? 과연 제갈세가의 무공은 놀랍고, 성수곡의 절기는 무섭구나······.”
 순간, 심은이 자신을 부축해 안고 있는 금비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마왕 같은 기도를 풍기는 풍음전을 바라보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금비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공자님, 저희는 최선을 다했지만 제 수련이 모자라 오늘 이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할 듯합니다. 제가 전신전력(全身全力)을 다한다면 저 마두를 백여 초는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그 틈을 타 어서 달아나세요.”
 “어찌 저 혼자 살자고 여러분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목숨이란 귀한 것이나 그 정리 또한 인연에 따르는 법, 제 명이 여기까지라면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천천히 가라앉는 흙먼지를 헤치며 풍음전이 다가서고 있었다.
 “크흐흐······ 쌍류금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너는 성수곡(聖手谷)의 아이로구나? 그 나이에 백연탄(白煙炭)을 훨씬 지난 성취라니, 그렇다면 아마도 너는 성수곡 가주의 딸인 황의소성녀(黃衣小聖女) 심은이겠군?”
 
 성수곡!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구파일방(九派一幇) 이외에 일성(一城)과 일교(一敎), 삼은(三隱)과 삼패(三覇)가 있다.
 그 삼은 중 하나가 바로 성수곡이며, 이곳의 현 가주는 성수초은(聖手草隱) 심일평(沈逸平)이었다.
 이미 대홍락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면서 자애로운 마음씨로 의술을 베풀고 있어 강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그의 딸인 심은 역시 의술과 무공, 미모 모두가 출중해 강호사미(江湖四美) 중 하나로 꼽혀 관심을 받아 왔지만 그 행동이 은밀하고 강호에 잘 나오지 않아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 상황이었다.
 풍음전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금비의 손을 더욱 꼭 쥐며 심은이 다시 속삭였다.
 “공자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여기서 죽더라도, 이렇게 작은 일로 공자 같은 분께서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스러져서야 결코 안 될 일, 어서 달아나세요.”
 “저는 소저가 생각하는 그러한 큰 그릇이 못 됩니다.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혼자 벗어나기도 힘든 노릇, 소저야말로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자가 요구하는 물건이란 무엇입니까?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귀중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은 법, 더군다나 지금은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물건을 지키기는 어려워 보이니 일단 그것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금비의 말에, 심은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목숨보다 귀한 보물이란 것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우리를 쫓은 것이 저 사람 정도의 마두가 아니었다면 우리들 가문의 후광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련만······.”
 ‘만천과해(瞞天過海)······ 무슨 보물이기에 이 젊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건 모험을 강요했을까······.’
 마음속으로 탄식하는 금비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심은에게, 풍음전이 질마검의 검기를 일 장(一丈) 가까이 늘이며 성큼 다가왔다.
 “흐흐, 오늘 강호에서 이름난 세가의 자식들 넷을 한꺼번에 죽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편하게 다리 뻗고 잘 일은 그른 듯하구나. 그렇지만 그 따위 일을 걱정해서 손속을 멈춘다면 내 무어라 오늘 일을 말씀 올리겠느냐? 이제 너는 죽을 준비가 되었겠지?”
 심은이 고개를 돌려 금비를 바라보았다.
 힘없는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며 살며시 웃어 보인 그녀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심은의 양손에 금빛 서기가 다시 어리기 시작했다.
 성수곡의 독문내공(獨門內功), 금천선공(金天仙功)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결전에 대비하고 있는 심은의 모습에, 금비는 다시 탄식했다.
 다음 순간, 금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심은의 앞을 막아섰다.
 심은이 놀라 외쳤다.
 “공자님! 물러서세요!”
 금비는 심은의 외침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우뚝 서서 풍음전을 바라보았다.
 “으응? 네 녀석이 나를 막아 보겠다는 말이냐? 흐흐, 무공 한 줄기 익힌 것 없는 네놈이 나를 막겠다고?”
 조롱하는 듯한 풍음전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금비는 바닥에 떨어진 심은의 장검을 주워 들었다.
 검을 흔들면서, 금비가 말했다.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말이오? 어떻게 당신이 그걸 확신하오?”
 “클클······ 무릇 내공을 익혔으면 눈빛과 태양혈(太陽穴)을 통해 그 성취가 드러나고, 손과 팔다리를 통해 수련의 흔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네놈의 온몸에 내공의 기운 하나 보이지 않고, 팔다리가 희고 깨끗하니 수련을 한 것도 아니다.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당신의 말은 틀렸소. 실로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예외란 무수히 있는 법, 눈빛에 내공이 드러나지 않고 손에 수련의 상처자국이 없더라도 무예를 익힐 수 있는 법이오.”
 “클클클······ 그래서 네놈의 무공으로 나를 막으시겠다?”
 “물론이오. 당신은 내 검을 받아 보시겠소?”
 풍음전은 잠시 말을 멈추며 다시 금비의 온몸을 살폈다.
 허허로운 자세, 한 손을 뒷짐 지고 한 손에 든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를 봐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의 모습, 자세는 빈틈으로 가득 찼고 검 끝이 흔들리는 것이 내공이라고는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젠장할, 차라리 저 심가(沈家)의 계집이 계속 나섰다면 적당히 한두 군데 병신으로 만드는 수준에서 몸을 뺄 생각이었건만······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라 못 본 채 살려 주려 했던 놈이 무덤 자리를 파는군.’
 풍음전은 황화예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리고 수십 년 강호에서 구른, 눈치 빠르고 교활한 노강호였다.
 그는 모르는 척하면서도 심은과 금비의 대화를 모두 들었고 그들이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헛수고를 한 것이라고 이미 판단을 내렸다.
 이제 모두 죽고 나면 어차피 밝혀질 일, 지금 순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자 지금 자신의 입장을 계산해 보기 시작한 그는 얻는 것 하나 없이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 한창 세력을 넓히고 있는 신흥방파인 금검파, 게다가 삼은 중 하나인 성수곡과 철천지원수가 될 자신의 입장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청사검 인당과 질마검효 풍음전이 자발적으로 함께 움직인다고 하면, 강호의 사람들이 웃으며 놀릴 것이다.
 ‘어떻게 그 두 사람이 합작을 할 수 있는가? 자네는 올빼미와 독사가 협력한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만약 지금 이 순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는 네 사람의 몸을 뒤져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친절하게 약을 써서 치료까지 해 주고 사과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성고(聖姑)께서 친히 지휘하시는 일, 이 상황에서 내 맘대로 물러났다가는 팔다리 중 하나는 잘릴 판국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네 만용을 탓하거라······.’
 풍음전이 내공을 가득히 끌어올리며 금비에게 다가섰다.
 일 검(一劍)에 그를 척살한 후, 심은과 맞붙어 사지 중 어느 한 군데를 잘라 내 병신을 만들어 놓은 뒤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고 사라지리라 맘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금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때 인연이 있어 두 초식의 검술을 배웠소.”
 “흥, 그래서?”
 “일단 이 두 초식을 펼칠 테니, 막아 보시기 바라오. 당신이 이를 받아 낼 수 있다면 내가 진 것이겠지요.”
 “흐흥, 마음대로 펼쳐 보거라! 오늘 이 자리가 네 묏자리라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니······.”
 금비는 풍음전의 냉랭한 대답에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두 초식의 이름을 알려 드리겠소.”
 “필요 없다! 그 잘난 초식이나 어서 펼쳐 보이거라!”
 금비는 그의 노골적인 무시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우선, 첫 번째 초식의 이름은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라고 하오.”
 금비의 말에, 혹시나 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심은의 입에 아연한 미소가 어렸다.
 ‘천청연자고라니, 갠 하늘에 제비가 높이 난다? 어찌 검술 초식에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웃음이 나올 듯한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떨어진 유엽비도를 수습한 후 단씨 남매의 상세(傷勢)를 보아 주며 이쪽을 주시하던 제갈운학 역시 그 엉뚱한 초식명에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청하와 단일비는 상세가 매우 엄중한 듯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눕거나 엎드린 채 금비와 풍음전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갈운학은 거동은 가능한 듯 비도를 추슬러 기습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했으나, 이 묘한 대화에 절로 어안이 벙벙해진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당장이라도 출수(出手)할 듯하던 풍음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금비 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풍음전을 바라보는 금비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초식의 이름은,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입니다.”
 “풋!”
 결국 심은의 입에서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갠 하늘에 제비는 높이 날고, 추운 밤에 고양이는 가까이 붙어 드누나. 이거야 어딘가 낙방선비의 입에서 나올 한시(閑詩) 구절이지, 무공 초식에 붙일 법한 이름이란 말인가?
 아마도 여인인 자신의 보호를 받으며 숨고 있을 수 없어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시 한 자락을 읊어 보고 싶었나 보다 하고 심은이 생각하는 동안, 금비와 풍음전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할 말을 다했으니 시작해 볼까요 하는 듯한 금비의 여유로운 표정과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금비를 바라보고 있는 풍음전.
 그 순간, 풍음전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누, 누구냐!”
 심은과 금비, 제갈운학까지 풍음전의 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바라보는 순간, 풍음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어디의 누구기에 정정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전음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썩 나타나라!”
 검기를 끌어올린 채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치던 그가 금비와 심은을 한차례 쏘아보며 말했다.
 “어린놈들이 운이 좋구나······. 암중(暗中)의 누군가가 방해를 놓는 듯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서 주마. 하지만, 다음 번에 마주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말과 함께, 풍음전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주루의 창을 뚫고 빠져나갔다.
 “우우우!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방해하고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순식간에 풍음전이 사라지자, 다섯 사람은 아무 말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쨍강!
 금비의 손에서 검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야 일동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새하얘진 얼굴에 입가에는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 금 공자님! 내상을 입으신 건가요?”
 “이, 이것이 내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슴이 답답하고 울혈(鬱血)이 생긴 듯하군요······.”
 “금 제, 그것이 내상이 맞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네가 풍음전 같은 고수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고 서 있었으니, 그 정도의 내상은 오히려 가볍다고 할 만하네.”
 단청하와 제갈운학이 이야기하는 동안, 심은이 가만히 금비의 손목을 잡았다.
 주저앉은 와중에서도 금비가 놀란 표정으로 팔을 빼려 했으나 심은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당한 장부께서 한낱 계집의 손길에 어찌 이리도 놀라시나요? 지금 공자님은 기혈(氣穴)이 막히고 내상이 제법 심하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마음을 편히 하시고 제 손에 따르세요.”
 “아, 저는 제법 버틸 만합니다······. 저보다도 다른 분들의 상세가 더욱 엄중한 듯한데, 그분들을 먼저······.”
 “금 제, 아무 소리 말게. 우리는 강호의 사람들이니 자신들의 상세 정도는 스스로 돌볼 줄 아네. 다행히 심 소저는 가문의 의술을 깊이 터득하고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시게나.”
 “그래요, 공자님. 지금은 금 공자님의 상세가 제일 치료가 필요하니, 아무 말씀 마시고 심 언니의 도움을 받도록 하세요.”
 자유로운 나머지 한 손마저 단청하에게 잡히자, 금비는 웃었다.
 “그,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금비의 말에,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심은이 마주 웃어 보이며 부드럽게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 곁을 지켜보던 단청하의 안타까운 물음이 이어졌다.
 “어, 언니, 공자님의 상세가 어떤가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내상이 매우 깊은 것 아닌가요?”
 “걱정 마, 동생. 금 공자님의 내상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 일단 응급치료를 하고 며칠 휴식을 취하면 건강에 이상은 없으실 거야. 그보다, 동생의 상처가 훨씬 위중한 듯한데······. 일비의 몸 역시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날 거야.”
 “누나, 너무한 거 아니우? 하나뿐인 동생은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금비 형님만 이렇게 신경 쓰다니······. 아버님께 꼭 고해 바치고 말 테야.”
 “쓰, 쓸데없는 소리! 너란 아이는 날이 갈수록 입버릇이 고약해지니,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
 
 “무, 무어라 했느냐? 다시 읊어 보아라!”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이 두 구절이었습니다.”
 화려한 궁등(宮燈)과 회화(繪畵)가 가득 찬 거실 안. 오체복지(五體腹肢)한 풍음전이 고개도 들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의 앞, 휘황찬란한 야광주(夜光珠) 아래에서, 윤기 나는 검은 경장을 걸친 미부(美婦)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면사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눈, 번쩍이는 신광(神光)을 흩뿌리며 풍음전을 노려보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분명, 분명 그 두 구절이었단 말이지?”
 “어느 안전이라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분명 그 두 구절의 시구를 자신이 익힌 초식의 이름이라 말했습니다.”
 “어찌, 어찌 그 두 구절 시구를 안단 말인가······ 설마, 설마······.”
 “······.”
 풍음전은 아무 대답 없이 머리를 처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모 아니면 도다······. 오늘 사지가 잘려 나가든지, 아니면 성고의 마음에 들어 교(敎)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든지 둘 중 하나렷다!’
 모질게 마음먹으며 중얼거리는 풍음전의 사지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히, 어딘지 모르게 성고를 닮은 데가 있었어······.’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기억 속의 금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되뇌는 그의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씩 솟아나고 있었다.
 억겁같이 느껴지던 몇 초가 흐른 후, 미부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그 시구를 듣고서 거짓 연기를 하며 몸을 뺄 생각을 했느냐?”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 풍음전은 자신의 도박이 팔 할 이상 성공했다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작년 교주님의 생신 때, 본교(本敎)의 고수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실 때 저도 말석이나마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성고님께서, 교주님의 생신 축하 선물로 검무(劍舞)를 추시면서 나직하게 읊조리는 이 시구를 듣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날따라 감회가 치솟아 그 구절을 읊었어······. 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다행히 우둔한 머리가 기억을 해 주었습니다.”
 “어찌 우둔하다 하랴······. 그날 모인 고수들 중에 그 시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버님 한 분뿐이셨고, 그 시를 기억하고 있는 자는 너뿐일 것이다······. 과연 이름은 틀릴 수 있으나 별호는 틀릴 수 없다는 강호의 속담이 맞구나.”
 미부의 말에, 풍음전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과분한 칭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잘했다······. 그 물건이야 잃어도 다시 찾으면 될 일이나, 행여 너 아닌 다른 자가 그 아이를 만났다면······ 생각하기도 싫구나······.”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풍음전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뒤돌아선 여인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여인이 돌아서자 풍음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곧 원래의 냉정함을 되찾은 목소리가 울렸다.
 “수고했다, 너는 이만 가 보아라.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구가 알려진다면 네 목을 자를 것이다!”
 “존명(尊命)! 어찌 속하가 가벼이 입을 놀리겠습니까!”
 “오늘부터 너는 만마당(萬魔黨)으로 옮기거라. 부당주 자리가 공석이라고 들었다, 내 일러 놓을 테니 그리로 몸만 옮겨 가면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성고! 속하 분골쇄신(粉骨碎身),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만마당의 부당주라면, 지금의 그의 지위에서 두 계급은 족히 오른 자리다.
 ‘거마효웅(巨魔梟雄)들이 즐비한 만마당의 부당주라니, 꿈이냐, 생시냐? 역시, 그렇다면 그 아이는······ 아서라, 생각이 많으면 말이 되어 나오는 법, 혹여 입에 올렸다가 저 열화(熱火) 같은 성고에게 들켰다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질 일이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엎드린 채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풍음전이 나간 후, 여인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가에 조그맣게 이슬이 맺혔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술에 취해 누각에서 노닐다가, 내가 취흥이 돋아 한 자락 검무를 추어 올리자 그이는 웃으며 ‘천청연자고(天晴燕子高)’ 한 줄기를 지으며 나를 가리켰지. 그 시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나는 그이의 품에 안겼고, 그러자 그는 나를 놀리며 다시 ‘야랭리노근(夜冷狸奴近)’ 한 구를 지었어. 그날 동침하여 너를 가졌고, 네가 잠들 때면 언제나 그이는 그 두 구절을 노랫가락에 맞추어 불러 주며 너를 재웠지. 아직까지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여인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무너지듯 의자에 내려앉으면서, 여인은 가늘게 오열하며 중얼거렸다.
 
 ***
 
 금비는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어림에 뻐근한 통증이 전해져 오자, 금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으나 내상이 제법 깊었고, 거의 완치된 것 같으나 아직 움직일 때면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래도, 내 도박이 맞아 들어갔구나······.’
 처음 풍음전이 마교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때는 그를 본 직후였다.
 그리고 그의 짐작이 맞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격투 중 그가 내뱉은 말,
 
 ‘내 무어라 오늘 일을 말씀 올리겠느냐?’
 
 이 한마디였다.
 풍음전 정도의 노련한 인물이, 자신의 말마따나 죽을 때까지 제대로 발 뻗고 잘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 그가 원하는 보물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아무리 천하의 기보(奇寶)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가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살계(殺戒)를 펼치려 하는 그의 행동과 말에서, 그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를 이렇게 부릴 수 있는 곳이라면 당금 강호에서는 오직 마교가 있을 뿐이었다.
 스치는 인연이지만, 심은 일행이 죽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던 금비에게, 풍음전이 내뱉은 한 마디는 낮은 확률이지만 일행을 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읊은 두 구절의 시구였다.
 풍음전이 마교의 고수라 하더라도, 금비가 읊는 시의 뜻을 알고 있을 확률은 극히 적었고, 다행히 그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냉정하게 판단하여 공격을 멈추어 줄 것인지는 또한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믿을 것이라고는 풍음전의 별호에 ‘효(梟)’자가 들어갈 정도로 영리하고 눈치 빠른 노강호라는 것뿐이었다.
 생강은 그냥 묵지 않는다. 육십을 넘기도록 강호에서 살아남은 자는 절대로 우둔할 수 없는 법이라는 오랜 강호의 속담을 금비는 믿었다.
 그리고 첫 구절을 읊었을 때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하는 풍음전을 보며 확신을 가졌고, 그는 금비의 기대대로 암중인(暗中人)이 있는 듯한 연기를 하면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만약 풍음전이 그 시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금비는 그저 풍음전의 풍마질검 아래에 한줌 고혼(孤魂)이 되었을까?
 그것은 오직 금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어머니······.”
 지금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고 오열하고 있으리라.
 열 살의 나이에 혈겁을 피해 혼자 살아났을 때, 처음 가진 마음은 그 혈겁의 씨앗이 된 어머니에 대한 분노였다.
 찾아가려면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산에 묻혀 풀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했던 나날은 어머니에 대한 울분의 표시였다.
 남편을 잃은 아픔으로는 모자란다. 자식까지 잃어 그 슬픔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가라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금비의 복수였다.
 열두 살에 산속에서 굶어 죽어 가다 무명노인(無名老人)을 만나 그와 함께 살아오면서 모친에 대한 미움을 버렸으나, 이미 노인과 함께 평생을 산속에서 은거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그는 더하여 모친에 대한 미련 또한 버렸었다.
 그러나 노인이 죽고, 그의 마지막 충고대로 세상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 산을 나온 후로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친의 일이었다.
 불꽃같은 정열, 열화 같은 성격, 마음먹어 해치우지 못하면 울화병에 걸리고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를 닮아 그저 점잖고 유순한 금비와 부친을 싸잡아 샌님 부자(父子)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아버지의 부드러운 몇 마디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을 끌어안고 서러운 듯 울어 대던 그녀.
 굳이 풍음전에게 그 시를 읊었던 것은, 그로 인해 어머니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내비친 것이기도 했다.
 “아직도 내 수양은 너무 모자라다······.”
 얼핏 눈물이 비치는 듯하던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금비가 되뇌었다.
 침상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앉은 후,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명상에 빠져 들어갔다.
 무명노인과의 어렸을 적 한때가 머릿속을 아련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저를 거둬 주셨나요?’
 ‘허허······ 큰 기둥을 깎아 보고 싶어졌었단다.’
 ‘그런데요? 제가 그 기둥이에요?’
 ‘글쎄, 기둥으로 쓸 나무는 일단 베어야 하는 법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너를 베고 다듬어서 무림을 떠받치는 재목으로 삼을지, 그대로 놓아두어 하늘을 떠받치는 거목(巨木)으로 클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할지 아직 모르겠구나······.’
 ‘저는 그냥 할아버지와 이렇게 평생 살고 싶어요. 산과 하늘을 친구 삼아서요.’
 ‘그래, 그래······. 하지만 세상에서의 네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三章 유정(有情) 또 유정(有情)
 
 
 금비는 금검문을 나서고 있었다.
 좀 더 쉬어야 한다는 단씨 남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께 제갈세가를 방문하지 않겠냐는 제갈운학의 권유도 웃음으로 거절한 후, 금비는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금검문의 문주, 금검일존(金劒一尊) 단우천(丹羽天)은 처음부터 금비에 대해 별다른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청하가 금비에게 야릇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알게 모르게 금비가 빨리 떠나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드러내곤 했다.
 무황성의 인물들은 아예 만나 보지도 못했다.
 사실 무황성의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 귀찮기까지 했던 금비로서는 그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흘 동안 금검문에 머무르면서 금비는 딱 두 번 단우천을 만났는데, 두 번 다 별다른 대화 없이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만남이었다.
 하기야 강호의 신흥방파의 주인으로서 무공 하나 익힌 흔적 없어 보이는 백면서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딸이 관심을 보인다면 어느 아버지인들 반가워하랴.
 해가 뜨기도 전에 짐을 꾸리는 금비의 모습에, 얼굴에 아쉬움을 가득 담으며 꼭 떠나야 하느냐고 몇 번을 물어보던 단청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꼭 가셔야 하나요? 물론, 물론 언제까지나 머무르실 수는 없겠지만······ 제 마음을 헤아려 조금 더 머물러 주실 수 없나요? 이렇게 급하게 가셔야만 하나요?”
 “하하. 단 낭자, 강호세가의 금지옥엽께서 한낱 필부에게 너무 관심을 두시면 아니 됩니다.”
 “······제 마음을 아시면서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나요?”
 “그저 스치는 인연도 있는 법입니다······.”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는 금비의 말에, 눈빛 가득 어떤 의지를 담고서 그를 바라보던 단청하였다.
 금비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소녀의 방심(芳心)에 잠시 스쳐 가는 바람 정도인 것,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히리라······.’
 이것이 훗날 단심낙화(丹心洛花)의 애사(哀史)라 일컬어지는 비극의 시작, 단청하의 성격을 좀 더 알았다면 금비는 그녀와의 인연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사흘 내내 자신의 곁을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단일비의 모습이었다.
 금검파에 들어간 이후 사흘 내내, 단일비는 금비의 곁에 붙어 살았다.
 둘째 날부터는 아예 잠자리까지 쳐들어와 금비의 침상에서 함께 잠들었던 것이다.
 “헤헤. 형님, 전 금비 형님이 너무 좋아요.”
 “하하······.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할 만하냐?”
 “음······ 글쎄요, 꼭 집어서 말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형님은 내가 이때까지 본 그 어떤 무인보다도 당당하고,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학자보다도 지혜로우세요. 그러면서도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이야기를 나누면 가슴이 툭 터지는 것 같아요.”
 “하하. 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어어? 정말이에요. 아아, 왜 형님이 무공을 익히지 않으셨을까요? 형님이 무공 고수라면 전 형님을 따르며 함께 마음껏 강호를 주유했을 텐데······.”
 “녀석, 금검파의 대를 이을 인물이 강호에 나돌아 다니기만 한다면 그 또한 걱정거리일 것이다.”
 “형님, 저 단일비가 이깟 자그마한 금검파에 매여 살아갈 것 같은가요? 저는 자라면 이 좁은 금검파를 떠나 강호를 훨훨 날아다닐 거예요.”
 “하하. 인연이 따른다면, 너라면 그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인연이 따라야 하나요?”
 눈을 빛내며 묻는 단일비에게, 금비는 아무 대답 없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키워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다······. 그 자질과 성정, 갈고닦으면 대기(大器)가 될 만한 마음의 그릇······. 내가 조금만 더 연륜이 있었다면, 내 앞일이 조금만 덜 위험했다면 공을 들여 가르쳐 볼 만한 아이련만······.’
 훗날 결국 단일비는 금비의 단 하나뿐인 직계 제자가 되고, 타고난 재능에다 단청하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 금비의 애정을 받아 그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운명은 서로를 헤어지게 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각, 금비는 대로를 벗어나 숲으로 난 소로(小路)를 접어들고 있었다.
 한가로이 유람하듯 걸어가는 금비의 시선에 커다란 고목(古木) 아래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심은이 거기 서 있었다.
 천천히 멈추어지는 금비의 발걸음. 금비는 자신도 모르게 심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소리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위험한 길인가요?”
 “하하. 필부의 길에 따르는 위험이라야 별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가만히 금비의 눈을 바라보는 심은의 시선.
 호로록 한숨을 내쉬더니, 심은이 고개를 숙였다.
 “금검천의 단가주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 그는 공자님의 진가를 천 분지 일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
 그저 웃음을 띤 채, 금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온 사람들은 삼대 봉공(奉公) 중 하나와 그 수하들······. 그 사람들이라면 공자님의 숨기고 있는 능력을 어렴풋이 눈치 챌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일부러 그들에게 공자님의 이야기를 대강 전하고 말았어요.”
 금비의 얼굴에서 어느새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심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이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 생각이 틀렸나요?”
 “소저의 안온(安溫)한 배려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부탁이 있어요.”
 고개를 들며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심은이 말했다.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금비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엇인지요? 소저의 부탁이라면 불초, 부족한 능력이나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유정 가득한 시선······. 금비는 풍음전과의 사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심은의 눈빛을 다시 느꼈다.
 “저를······ 저를 은 매(恩妹)라고 불러 줘요.”
 아무 대답 없이 금비는 심은을 바라보았다.
 심은 역시 말없이 금비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간 시간이 흐른 후, 심은이 결국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려 했을 때 금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하시오, 은 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심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심은이 대답했다.
 “비(備)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도 항상 건강하세요. 저는, 저는 오라버니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이것이 정해(情海)란 것인가···? 이것이 심마(心魔)보다 무섭다고 했던 선인의 말씀을 내 믿지 않았더니, 오늘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구나······.’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금비를 바라보는 심은의 마음 가득한 시선에 벅차게 차오르는 애정을 느끼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그런 그에게, 심은이 옷자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웃어 보였다.
 “이제 가세요.”
 “은 매······.”
 “어서 가세요. 소녀 역시 어리나 강호의 사람, 장부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부디 몸을 보중하시라는 제 말만은 잊지 말아 주세요.”
 “은 매 역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오.”
 무정하기까지 한 간단한 작별인사와 함께, 금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금비의 등을 바라보며, 심은은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저녁까지 걸은 끝에, 금비는 산을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어스름히 해가 지려는 시각, 조그마한 시냇가에 접어든 금비가 물을 마시려 몸을 굽히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아이야, 잠시 날 좀 보겠느냐?”
 고개를 돌린 금비의 눈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발에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금비가 놀란 기색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렇단다,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인고?”
 “저는 금비라고 합니다.”
 그의 대답에, 노인은 찬찬히 금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런 노인의 시선에 금비는 일말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너는 금씨(金氏)가 아니야. 네 본명은 무엇이지?”
 “그것이 제 본명입니다.”
 “네가 진정 금씨라고?”
 말과 함께, 노인이 다시 금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만이 가득한 것을 금비는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노인이 웃으며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 이름이 무슨 상관일까. 내 너를 처음 보자마자 알 수 있었거늘, 쓸데없는 이름자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잠시 앉아 보련?”
 부드러운 말에, 금비는 조용히 노인의 곁에 앉았다.
 노인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겠느냐?”
 “아마도 알 듯합니다.”
 “나를 안다······. 정녕 내가 누군지 알겠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허허. 그런데도 너는 내게 제대로 인사 한 번 않고 있단 말이냐?”
 노인의 말에, 금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건강하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허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다행히 어렸을 적 기억을 별로 잊고 있지 않아 두어 번 뵈었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어렸을 적부터 네 총기(聰氣)는 따를 사람이 없었지······. 건강하게 자랐구나.”
 말없이 웃는 금비를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네 어미는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오늘까지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죄스러워 도저히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다고 하더구나.”
 “그러실 필요 없는 일을······. 어머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죄스러워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네가 만나서 말하지 않고? 어미를 만나러 가지 않을 작정이냐?”
 “언젠가는 만나 뵐 것이나 지금은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네가 무슨 할 일이 있다는 말이냐? 이 험난한 강호에서 무공 없는 몸으로 어떻게······ 아니, 잠깐?”
 노인이 갑자기 무언가 느낀 듯한 얼굴로 금비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는 시선을, 금비는 말없이 받고 있었다.
 “맥문(脈門)을 줘 보겠느냐?”
 금비가 말없이 웃으며 손목을 내밀었다.
 살며시 그 손목을 잡고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후 눈을 뜬 노인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이 뚫려 있고 세맥(細脈)까지도 막힘이 없구나. 단전(丹田)은 비어 있으나 넓고 깊어 바다와 같다······. 세상에 이런 괴이한 내공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번쩍!
 노인의 눈에서 한순간 신광(神光)이 폭사되더니, 이내 부드럽고 깊은 눈빛으로 되돌아왔다.
 “사문(師門)이 어디냐?”
 “사문이라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네 일신(一身)의 무공은 대성한 것이냐?”
 “무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공부는 이제 문턱을 넘어선 듯합니다.”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잡은 손목을 놓아주며 노인은 금비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 괴이한 노소(老小)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네 아비 또한 정파무림이 낳은 천고기재(千古奇才)란 소리를 들었었지······. 내 핏줄 또한 마도일맥(魔道一脈), 어찌 네 성취가 범부(凡夫)와 같을 수가 있을까······.”
 노인이 금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핫! 구십을 넘기며 후세를 염려하던 시간들이 오늘 한순간에 씻겨 나가는 듯하구나! 그래, 공부를 게을리 말고 사명(使命)을 다하거라. 네가 가려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 사마충양(司馬衝陽), 너를 위해서라면 본교를 통째로 들어 바치겠다!”
 
 오오, 사마충양!
 십 세에 마교에 입문해 사십 세에 부교주로 등극, 오십오 세 되던 해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기존 교주 조중기(趙中基)를 몰아내고 힘으로 마교를 장악한 마도 최고의 풍운아(風雲兒).
 과감한 결단력과 어떤 열세도 뒤집어 버리는 불길 같은 투혼, 수많은 마도고수 중 홀로 우뚝 서서 붙여진 별호가 마중마(魔中魔), 중원 천하에 맞상대할 이가 없다 하여 불가대적(不可對敵)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이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사마충양이 몸을 일으키며 금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벌써 가시렵니까?”
 “네가 살아 있고, 이렇게 훌륭히 자랐음을 확인했으니 가야지······. 가서 네 어미를 어서 안심시켜 줘야겠구나.”
 “그럼, 살펴 가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금비를 향해, 갑자기 사마충양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네 이놈! 네놈이 정녕 끝까지 나에게 할아비란 말 한 번 안 할 작정이더냐?”
 섬전처럼 폭사되는 신광, 수염 한 올 한 올이 일어서는 듯하더니 보통 체구의 몸이 마치 태산처럼 크게 보였다.
 석년 눈짓 하나로 강호를 진동하던 마중마의 위엄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금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놈이! 볼기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어지는 사마충양의 질책에 금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보중(保重)하십시오, 할아버님.”
 엎드려 절하는 금비를 바라보는 사마충양의 눈길은 다시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금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마충양의 신형은 이미 허공에 떠올라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금비의 귓가에,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강호는 말 그대로 도산검림(刀山劍林), 네가 상상할 수 없는 흉험함이 곳곳에 가득하니 언제나 마음을 놓지 말 것이며 주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하거라······. 어디서든지 네가 부르기만 한다면 할아비는 달려갈 것이다.”
 시선에서 사라져 가면서도, 금비의 귓전에 들리는 사마충양의 목소리는 또렷하기만 했다.
 “네 어미에게 네가 살아서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 말고도 한 녀석이 더 너를 보겠다고 교(敎)를 나왔느니라. 나나 네 어미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골칫덩이라, 만나게 되면 좋은 낯으로 대해 줬으면 한다······.”
 사마충양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금비가 조용히 말했다.
 “건강하십시오······. 일간 찾아뵙고 조손(祖孫)의 예를 다해 오늘의 불민함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만남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四章 월하검무(月下劍舞)
 
 
 며칠 후, 금비는 하남성(河南城)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성 중심에는 개봉(開封)이 있고, 개봉에는 무황성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무황성이었던 것일까?
 또한 하남성에는 숭산(嵩山)이 있고, 숭산 소실봉(小室峯)에는 구파일방의 수좌라 할 수 있는 소림(少林)이 있다.
 금비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하릴없이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유유자적 강호유람을 나온 선비의 모습일 뿐, 어떤 목적의식이나 서두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금비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다시 이틀이 지난 후 해가 뉘엿뉘엿 져 갈 즈음, 그는 개봉에서 사흘 거리의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초입에 이르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길이 왠지 모를 비감(悲感)에 젖어 있는 듯했다.
 금비는 마을에 들어서지 않고, 마을 한편으로 뻗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중턱에 다다를 즈음에는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금비는 마치 제 집 앞을 걷는 듯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정상의 십여 리 아래, 금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온통 잡초가 자라 있고 어지러이 흩어진 잔해들로 무성한 분지였다.
 한때 사람이 살았던 곳인 듯 분지 여기저기에는 집의 잔해로 보이는 파편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은 무성히 자라난 초목에 둘러싸여 있었다.
 분지의 한쪽 구석, 사람 허리만 한 돌을 깎아 만든 비석이 서 있었다.
 
 무림공적(武林公敵), 유자성(劉慈成) 척사비(斥邪碑)
 백도무림의 괴멸을 꾀하여 마도와 내통하고 조사(祖師)를 판 천하죄인 유자성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를 척살한 후, 여기에 경고비를 세우노라.
 
 비석에 쓰인 글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이 흐른 듯 비석은 비와 바람에 여기저기 마모되어 가고 있었으나 웅혼한 내공으로 파내 쓴 글씨는 또렷했고, 밝은 달빛 아래에서 읽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금비는 잠시 동안 비석의 글귀를 음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비석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일 배, 이 배, 다시 반 배.
 절을 올린 후 그 자리에 꿇어앉아, 담담한 눈길로 비석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당신을 보낼 때 소자(小子) 어리고 아둔하여 뼛조각 하나 살점 하나 수습하지 못했으니, 이는 자식으로서 죽을죄입니다. 이제 예전 살던 곳을 찾아 지난 세월의 흔적을 보려 하나 어디에서고 찾을 길 없고, 그나마 당신의 이름자라도 새겨져 있는 이 비석으로 묘(墓)를 대신하려 합니다. 늘 소자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길 공명(功名)은 부운(浮雲) 같고 세상사 어지러워도 당신 혼자 구름 위에 노닐겠다 하셨으니, 묘위에 적힌 글귀 어떠하든 유쾌하게 선계(仙界)에서 노니시리라 믿습니다. 채 펼치지 못하신 큰 뜻을 소자 각골명심하고 있사오니, 아버님, 편히 쉬십시오.”
 낭랑하게 읊어 가는 금비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이 맑고 청량했고, 그 얼굴은 슬픔의 빛을 찾을 길 없이 부드럽고 맑았다.
 말을 마친 후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한 번 폐허를 둘러보고는 이내 걸음을 옮겨 그곳을 벗어났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금비는 한 식경이 지나 산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한쪽의 돌무더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다지 완력이 강해 보이지 않는 그의 몸, 팔을 걷어붙이고 돌무더기를 하나 둘씩 걷어 내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는 곧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손가락 끝에는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금비는 한 마디 말이나 힘든 표정 없이 묵묵히 돌을 하나하나 치워 가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다 치워 내고 바닥의 땅이 드러난 것은 그가 일을 시작한 지 거의 반 시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곧이어 그는 주변의 튼튼한 나뭇가지를 꺾어 그것을 삽 삼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일 장가량을 파 들어갔을 때, 무언가가 흙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금비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다시 손을 놀려 땅을 파내자 흙 속의 물건이 온전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비는 그 물건을 땅속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흙이 묻어 더러워진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 그가 겉을 감싼 천을 풀어내자 한 자루 고색창연한 칼이 나타났다.
 새하얀 검경(劍經)에 옥빛 검집, 별다른 장식 하나 없었으나 은은한 기품이 서려 있는 검이었다.
 스르릉.
 금비의 손에 칼이 뽑혀져 나왔다.
 월광에 은은하게 빛나는 장검. 검신(劍身)은 특이하게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하얀 손잡이와 역시 하얀색 검격(劍格)에 조화되어 칼은 마치 달빛으로 빚어 낸 듯 반짝이고 있었다.
 검신에는 흘러내리는 초서체로 단 한 자, ‘고(古)’가 새겨져 있었다.
 이검이 바로 과거 유운신검(流雲神劍) 유자성(劉慈成)의 독문병기(獨門兵器). 옥루고검(玉淚古劍) 이라 불린 신검이자, 이후 금비의 평생 동안 함께 강호를 헤쳐 나가는 애병(愛兵)이었다.
 마치 연인의 손을 쓰다듬듯 검신을 쓰다듬던 금비는 문득 칼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금비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 손에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검결을 짚으며, 허공에 몸을 띄운 채 금비의 몸은 춤추듯 흘러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금비의 몸 주위를 돌다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다시 물결치듯 흐르다가 달빛처럼 쏟아지는 휘황한 검광(劍光). 수십 개의 원을 그렸다가 하나의 극(極)으로 모이고, 불꽃처럼 터져 허공을 가득 메우더니 이윽고 둥글게 뭉쳐 달과 함께 밤하늘을 떠가는 검로(劍路).
 깃털처럼 허공에 뜬 채, 금비의 검무(劍舞)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달빛 아래 노니는 신선처럼 산 정상을 가득 메웠다.
 금비 평생의 성명절기(盛名絶技)가 되는 천애무극검결(天涯無極劍訣)의 탄생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감(悲感), 달빛 속의 뜻 모를 깨달음, 다시 세상에 나왔으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젊은이다운 자신감······. 한꺼번에 들이닥친 수많은 번뇌(煩惱) 속에서 금비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얻은 이날 밤의 돈오(頓悟, 깨달음)는 그가 이후 창안한 수많은 절기(絶技)들 중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정(絶頂)의 무예. 그 역시 이날 밤의 환상 같은 깨달음을 다시 온전히 체득하기 위해 앞으로 오랜 시간 고련하며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금비의 춤사위가 잦아들며, 그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검신을 등 뒤로 세워 들고 발끝으로 사뿐히 땅을 밟으며 내려선 그는, 눈을 감고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웃음 섞인 목소리.
 “고(古)야, 고(古)야······. 내 너를 잡지 않고 평생 초부(樵夫)로 늙으려 했지만, 결국에 너를 쥐고 또한 깨달아 버렸구나······.”
 그가 눈을 뜨고 몸을 돌리는 순간, 산아래 풀숲에서 나직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아······.”
 금비는 아무 말 없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섰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무표정하던 금비의 얼굴에 조금씩 웃음이 번져 갈 때쯤 한 인영이 몸을 날려 금비의 일 장쯤 앞에 내려섰다.
 새카만 경장에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긴 머리칼. 금비와 거의 비슷한 키의 늘씬한 흑의 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달빛 속에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며,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가가(呵呵)?”
 금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 어찌 귀여운 사촌누이를 잊을 수가 있겠소? 그동안 잘 지냈소, 소연(小燕)?”
 소연이라 불린 미녀가 해맑게 웃으며 금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정말 유 오빠로군요? 유 오라버니! 살아 있었군요? 이모랑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세요? 그리고 저도요! 살아 있었군요, 정말로 살아 있었어요! 으아앙······.”
 품속을 마구 파고들며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의 육탄공세에, 하늘이 무너져도 당황할 것 같지 않던 금비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렸다.
 “소, 소연. 연 매(燕妹), 잠깐, 잠깐 이것 좀 놓고······.”
 “싫어, 싫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살아 있었으면서 연락 한 번 안 주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빠요, 오라버니. 정말 나빠요.”
 “하, 하하. 이것 참······.”
 금비는 벌게진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며 소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소녀, 소연은 눈물로 금비의 앞섶을 적시며 막무가내로 그의 품속에서 바동거렸다.
 바람과 달빛만이 두 사람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
 
 “그런데, 오빠. 이름을 바꾸셨다구요?”
 “하하. 이름자 따위가 뭐 중요할까, 신경 쓰지 말아라.”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데. 자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시며······.”
 “어머님 때문이 아니야. 그리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어머님이란 말을 입에 담는 금비의 표정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래, 이제 어쩌실 거예요, 오빠? 이모부의 복수를 시작하실 거죠? 정인군자(正人君子)의 탈을 쓴 정파의 위선자들, 이제 오빠가 강호에 나오셨으니 모두 몰살해 버려야죠!”
 꽃잎처럼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격정적이었다.
 금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저 불같은 성격, 역시 어머니와 꼭 닮았어······. 외할아버님의 혈통은 아마도 모계(母系)로 유전되나 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금비가 대꾸했다.
 “아니, 연 매.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강호에 나온 건 아니다.”
 “무, 무슨 말이에요? 비명에 가신 이모부님의 복수를 안 한다니, 자식으로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아니······ 혹시 비밀리에 복수를 계획하고 계신 거예요? 맞구나, 그래서 이름도 바꿨구나! 아니면, 혹시 무공이 모자라 그러시나요? 그렇다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맞아요! 아까 시전하신 무공은 대체 뭐죠? 지금까지 그런 무예는 본 적이 없어요. 아니, 그것이 무예가 맞긴 맞나요? 어떻게 그런 검로가 있을 수 있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금비는 대답 없이 웃고만 있었다.
 마구잡이로 질문을 쏟아 내다가 그저 웃고만 있는 금비를 본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또 저 웃음······. 오빠가 열 살도 채 안 되었을 때도 저 웃음만 보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고개를 돌리곤 했었지. 저 부드러운 웃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고개를 돌려 금비를 바라보며, 다시 그녀는 자신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을 물었다.
 “비 오라버니, 아까의 무공은 무엇이었죠?”
 진지해진 물음에, 금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글쎄······ 그것은 내가 순간적으로 얻은 깨달음의 표현이야. 만약에 내가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이었다면 땅바닥에라도 그렸을 것이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樂工)이었다면 악보로 옮겼겠지. 역시 무부(武夫)의 길을 가기로 한 터였는지, 아니면 아버님의 검을 손에 든 터라 그리했는지 모르지만······ 어설프나마 나도 이제 내 무공을 갖게 되었군. 하하.”
 “어설프다구요? 그런 무예는 이 조해연(趙海燕)이 태어나서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니 그 비슷한 것도 본 적 없어요. 숱한 마공절기를 배워 왔고 정파의 신공들을 구경했지만, 오빠가 보여 준 무예는 뭐랄까······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어요.”
 조해연(趙海燕).
 마중마 사마충양에게는 아들 없이 두 딸이 있었다.
 큰딸 사마추상(司馬秋霜)이 정파의 기린아로 떠받들리던 유자성과의 열애 끝에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마교를 나가 버리자, 사마충양은 둘째딸 사마옥상(司馬玉霜)을 그가 패배시킨 전대 마교주 조중기의 외아들 조일기(趙一基)에게 시집보냈다.
 마교의 단합을 위해 전대 교주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고 그 자식으로 자신의 후계를 잇게 한다는 그의 호방한 구상은 당시 마도인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게 했다.
 이후 사마옥상은 일남 일녀를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조해연과 그 두 살 위 오빠, 금비와 동갑내기인 조천악(趙天岳)이었다.
 사마옥상과 조중기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남매를 낳고 오 년 내에 병으로 죽었고, 그 후 사마충양은 둘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난 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덟 살 나이에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조천악의 첫 마디가 귀에 선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해연이 친오빠인 조천악보다 금비를 더 좋아하며 따른 반면, 조천악은 금비에게 무조건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함께 놀려 하지도 않았다.
 무공이라고는 건강을 위해 겨우 내공심법만 익힌 금비를, 제법 위력적인 마공들로 괴롭히던 그였다.
 바람처럼 부드러운 금비와 대조적으로 산악처럼 굳건한 조천악의 기상은, 사마충양에게 좋은 비교거리가 되고는 했다.
 
 ‘한 녀석은 구름이요 한 녀석은 바위니, 두 녀석이 서로 친해질 리가 없지. 요 두 놈은 친해지게 하느니 차라리 경쟁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될 듯하구나.’
 
 서로 티격태격하는 금비와 조천악을 바라보며 사마충양이 웃으면서 던진 말이었다.
 아련히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는 금비에게, 조해연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오빠, 그 무공을 오빠가 직접 창안한 것이라구요? 어떻게 오빠 나이에 그런 무공을······ 지금 다시 한 번 보여 줄 수 있나요?”
 “음······. 그럴까? 나 역시 아까부터 그 무예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중이었다. 어디, 다시 한 번 시전해 보마.”
 말과 함께 금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옥루고검을 뽑아 들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바라보는 조해연의 앞에서, 금비는 잠시 검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던 그는 두어 번 검 끝을 치켜올렸으나 그뿐, 더 이상 동작을 이어가지 못하고 검을 거두어 들였다.
 “왜······.”
 “글쎄, 도저히 펼칠 수가 없구나. 지금 그 무예를 펼친다면 비슷한 무언가는 될 수 있겠으나 아까의 무예를 온전히 펼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한 것을 펼치려 하다가는 조금 전의 깨달음마저 완전히 놓칠 것만 같아서 두렵다.”
 “그럼 어떻게 하죠? 기껏 창안한 무예를 다시 잃어버리다니, 그럴 순 없는 일 아니에요?”
 “하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결국 깨달음의 문제인 것, 내 이미 깨달았으니 몸에 익히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앞으로 언젠가 인연이 닿았을 때 이 무예는 온전히 내 것이 될 것이다.”
 “오빠의 그 알 듯 모를 듯이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투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하지만 해연은 그런 오빠가 좋아요.”
 “다 자라서 시집갈 때가 된 계집아이가 어찌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느냐? 네 무서운 오라비가 안다면 경을 칠 거다.”
 웃으며 말하는 금비를 바라보며, 조해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치이, 목석. 내 마음도 모르면서······.”
 “무어라 했느냐?”
 대답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는 조해연의 귓가에 마교를 나올 때 자신을 불러 당부하던 금비의 친모, 사마추상의 당부가 맴돌았다.
 
 ‘해연아, 네가 어릴 때부터 나는 너를 우리 비아(備兒)의 짝으로 점찍었단다. 너도 비아를 좋아하지? 그놈의 유씨(劉氏) 집안은 대대로 명이 짧기가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이야. 비아의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마흔을 못 넘기셨고, 나 때문이긴 하다만 내 남편 역시 갓 서른을 넘겨 죽었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 비아 역시 그 집안의 핏줄이니 불안하기만 해. 이번에 비아를 만나거든, 어떻게든지 교로 끌고 와서 결혼식을 올리든지 그게 안 된다면 일단 동침이라도 해서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다오. 이모가 오죽하면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겠니? 부탁한다, 해연아······.’
 
 자신도 모르게 새빨개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으며, 조해연이 중얼거렸다.
 “이모도 참······ 어떻게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그런 말을······.”
 “뭐라고? 나한테 하는 말이면 알아듣도록 이야기해 주려무나.”
 화들짝 고개를 저으며, 조해연이 말을 돌려 물었다.
 “아, 아녜요! 그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저와 함께 교로 돌아가서 이모님을 뵈어야죠? 그런 후 할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이모부님의 복수를 하면 될 거예요.”
 “해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지 않아.”
 “왜요? 이모부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으셨어요? 이모님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이모부님의 죽음을 잊으신 적이 없어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모님께서는 오직 이모부님의 복수를 위해 살아오고 계세요. 정파 놈들이 방비를 철저히 하는 데다 근래 우리 마교의 힘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복수의 시기가 늦춰지고 있긴 하지만, 이모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의 대가를 받아 내시고 말 거예요. 그런데 오빠가 이모부님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으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연 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복수를 하겠다는 어머님의 마음까지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만약에 어머님의 생각대로 정파무림과 마도무림의 결전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 또한 무림의 생리인 것. 하지만 내가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오라버니는 왜 세상에 나오신 거예요? 부친의 복수를 할 생각도 없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도 없는 거라면 왜 다시 강호에 나오셨냐구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심산에 묻혀서 유유자적하다 늙어 죽을 것이지, 무엇 때문에 고고하신 몸께서 이 풍진 속에 내려오셨나요?”
 점점 흥분해서 이제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금비에게 따져 묻는 조해연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 듯이 살벌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금비가 이내 말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선사(先師)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있는 것이지.”
 “하! 선사라구요? 그 잘난 무공을 가르친 사람인가 보죠? 그 사람의 한마디 말이, 누명을 쓰고 수십 번 칼질에 난도질당해 돌아가신 부친의 원한보다 더 귀중한가 보죠?”
 ‘아니, 그분은 내게 무공 따위는 가르치지 않으셨다. 스승이라 부르는 것도 그분 생전에는 허락하지 않으셨던 일, 돌아가신 이제야 내 의지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금비의 마음속 되뇜을 깨뜨리며, 조해연의 분노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정녕 부친의 복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계신 건가요? 혹여 비밀리에 진행 중인 복수의 계획이 있고, 그것이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 거짓으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다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 그러면 이 해연,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어요. 오라버니, 어느 쪽인가요?”
 “연 매, 나는 처음부터 네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 강호에 나온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것을 위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르르.
 조해연의 온몸이 떨리더니, 그 몸에서 불같은 살기가 타올랐다.
 온몸을 휘감으며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강기는 사마충양의 호심내공(護心內功)인 천마심공(天魔心功). 조해연이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며 금비에게 소리쳤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네요! 유운비(劉雲備), 아니 금비라고 불러 드릴까요?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의 복수를 외면하고 그렇게 얼굴을 치켜들고 다닐 수 있지요? 마음대로라면 사지 중 하나를 끊어 내서 이모님이나 외조부님을 대신해 벌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이 일을 고한 후에 그분들이 당신께 벌을 내리시는 것을 기다려 주겠어요. 다시 만날 때는 오늘처럼 말로써만 징계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각오하세요!”
 폭포 같은 독설 이후 조해연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듯이 금비를 노려보다가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 뒷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던 금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 열화와 같은 성격과 앞뒤 가릴 것 없는 독설, 마치 어머님이 오셨다 가신 듯하구나. 유순하셨던 이모님의 딸이 어찌 성정(性情)은 저렇게도 내 어머님을 닮았을까······.”
 조해연이 사라져 간 허공을 말없이 바라보던 금비는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손에 검을 쥐고 풀숲을 헤치며 내려가는 금비의 입에서 낭랑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산 기운 저녁이라 더욱 고운데[山氣日夕佳]
 나는 새 짝을 지어 돌아가누나[飛鳥相與還]
 이 가운데 참된 뜻 있으나[此中有眞意]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구나[欲辨已忘言]
 
 술에 취하면 언제나 검날을 튕기며 부르곤 하던 유자성의 애시(愛時)인 도연명의 시구를 노래하는 금비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없었다.
 
 금비는 묵묵히 관도(官道)를 걸었다.
 이 길은 개봉으로 이어지고, 무황성에 연결되는 길이었다.
 걸어서는 사흘 이상 걸리는 거리, 금비의 걸음은 서두름이 없었고, 손에 든 옥루고검은 헝겊으로 감싸여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듯 오후를 지나 저녁으로 접어드는데도 햇살은 꽤나 따가웠다. 그는 길가 주막에서 은전 몇 푼을 주고 산 초립(草笠)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느 순간, 금비는 등 뒤로 달려오는 신법의 기세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힐끗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이남 일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제갈 형······.’
 이남 일녀 중 한 사람은 바로 제갈운학이었다.
 금비는 아는 체하지 않고 앞만 보며 계속 걸었다.
 남녀들은 금비를 발견했을 법하나 신법을 줄이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대로나 관도에서는 무공을 펼치지 않고, 신법을 펼쳐 이동할 때는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무림의 묵계를 모를 리가 없으련만, 지금 저렇게 신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매우 급한 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들은 바람처럼 금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금비는 제갈운학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조금은 다행스러워했다.
 굳이 그를 피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별로 다시 만나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것이 금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금비를 스쳐 십여 장을 달려 나가던 제갈운학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
 “금 제! 금 제 맞지?”
 그가 말과 함께 몸을 날려 금비에게 다가오자, 함께 달려가던 두 남녀 역시 몸을 멈추고는 금비와 제갈운학을 바라보았다.
 반갑게 손을 맞잡으며, 제갈운학이 말했다.
 “역시 금 제로군? 금검파에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 못내 아쉬웠건만, 여기서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군? 하하. 역시 우리의 인연은 질긴 것 같아.”
 “오랜만입니다, 제갈 형님. 그사이 별고 없으셨죠?”
 “안타깝게도 큰일이 생겼다네. 그러고 보니 자네를 만날 때면 꼭 큰일이 생기는군? 어디, 이번에도 자네의 덕으로 일이 해결되려나?”
 웃으며 이야기하는 두 사람에게, 일남 일녀가 다가오더니 남자 쪽이 말했다.
 “제갈 형, 이분은 누구십니까? 갈 길이 급한데······.”
 제갈운학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 제, 인사 나누시게. 이쪽은 무황성의 넷째 공자, 위지천우(尉遲天羽) 공자일세.”
 위지천우.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여러 세력 중 가장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무황성의 주인 가문, 위지가(尉遲家)의 막내.
 장남인 위지신우(尉遲神羽), 둘째인 위지검우(尉遲劍羽), 셋째 딸인 위지소진(尉遲少珍)에 이은 넷째이며, 제왕가(帝王家)라는 별명을 가진 위지가의 자식답게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도 그 총명함과 무명을 강호에 날리고 있는 소년이었다.
 제갈운학이 다시 한편에 서 있는 소녀를 소개하려 할 때, 여자 쪽이 말을 가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갈화봉(諸葛花鳳)이라고 해요. 공자께서는 금비, 금 공자가 맞으시죠?”
 “제 이름이 금비입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흐흠······.”
 제갈화봉, 제갈운학의 여동생이자 강호에 무림사미(武林四美) 중 하나라고 알려진 이 소녀는 과연 아름다웠다.
 금비는 이미 무림사미 중 하나인 심은의 미모를 익히 알고 있었다.
 심은의 아름다움이 고고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이라면 제갈화봉의 미모는 한껏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아름다움과 같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은 매(恩妹)가 난초라면 이 소녀는 모란이로군.’
 금비가 혼자 그렇게 생각할 때, 제갈화봉 역시 금비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위지천우가 약간 짜증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갈 형, 지금 우리가 이렇게 소일할 때입니까? 내 누님의 실종이 형에게는 별다른 큰일이 아닌 듯싶군요?”
 존댓말만 쓴다뿐이지 아랫사람에게 하는 듯한 어투. 제갈운학이 눈쌀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하하. 위지 공자, 그럴 리가 있겠소? 누님의 일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어찌 우리가 사흘 밤늦을 이렇게 달려왔겠소?”
 제갈운학이 몸을 돌리며 금비에게 말했다.
 “금 제, 지금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 무황성으로 가는 중이니 당장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겠군.나중에 다시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어 보세나. 아우도 무황성 쪽으로 가는 중인가?”
 “글쎄요. 아직 특별히 정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쨌거나 무황성으로 오게나. 도착해서 나를 찾아 주면 내 언제든지 달려 나감세. 지금 무황성의 소공녀(小公女)이신 분이······.”
 “제갈 형! 어찌 그 신분도 불분명한 자에게 말이 이리 쉬운 겁니까? 계속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라면 나는 먼저 떠나겠습니다!”
 겨우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한 위지천우의 불손한 말투에, 제갈운학뿐만 아니라 제갈화봉까지도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위지천우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제갈운학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짧은 한마디와 함께 위지천우의 뒤를 따랐다.
 “저 애송이 녀석······. 미안하네, 금 제. 다음에 만나면 오늘 일을 사과함세.”
 말없이 금비를 훑어보고 있던 제갈화봉이 마지막으로 몸을 날려 그들의 뒤를 따르며 금비에게 전음을 날렸다.
 “심(沈) 언니에게 당신에 대한 말씀을 조금 들었어요. 그토록 고고하던 언니의 마음을 빼앗아 간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당신은 무어라 판단해 말하기 힘든 분이시군요. 다음에 다시 만날 때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꼭 나눠 보고 싶어요.”
 전음이 끝날 때쯤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금비는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금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우 녀석······ 정말 잘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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