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대왕 인종 [E]

대왕 인종 1권 (1화)

2017.06.19 조회 3,264 추천 24


 대왕 인종 1권 (1화)
 프롤로그
 
 
 핼쑥한 모습에 인종은 말없이 조용히 자신의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살아온 대궐 밖으로 나서는 인종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종의 앞에는 검은 도포 자락에 긴 수염을 기른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인종은 걸으며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련은 아니었다.
 중종의 적자로 태어나 30년 넘게 왕세자로 살았고 짧지만 왕도 해 보았다. 평생에 자식이 없어 후사를 동생에게 물려주어야 했지만 그것도 미련은 없었다.
 팔자에 없는 자식이니 바란다고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가 문뜩 떠올랐다.
 자식을 낳아 놓고 젖 한 번 못 물려보고 떠났을 어머니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집권하고 1년도 되지 못해 제대로 된 정사 한 번 펼쳐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남으로는 왜구들이 들끓고 북으로는 야인들이 들끓어 조선의 백성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조선이 건국 된 지 어언 150여 성상 좋은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용상에 앉으면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 줄 것이라 다짐했다. 강병을 육성해 왜구와 야인들이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못난 지아비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시어머니 등쌀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중전 박씨도 눈에 밟혔다.
 자신이 없으면 이 큰 궁궐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가야 할 터인데··· 어린 시동생과 시어머니의 등쌀에 얼마나 고생을 할지 못내 걱정스러운 인종이었다.
 “미련을 버리게나.”
 앞서 걸어가는 사자는 이런 인종의 착잡한 마음을 알았는지 미련을 버리라 말하지만 그것이 어찌 인력으로 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참으로 허망한 삶이었다.
 사자를 따라 걷고 또 걸어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천을 무수히 지나쳐 도착한 곳은 명계(冥界)였다.
 “이곳에서 기다리시게.”
 서너 평 남짓한 방 안에 여럿의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모두 인종과 같은 처지이리라.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으며 못내 미련을 못 버리고 현생에 살아 있을 가족들을 걱정하며 오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처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전날 들어온 사람들 또한 모두 떠나가고 다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종은 살아생전 왕으로 살았기에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고 은연중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의 처결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특권의식은 아니었다. 왕이란 현생에서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죄에 따라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이었다. 지켜야 할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으면 그 원한도 풀어 주어야 했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인 만큼 그 대가도 크리라 여겼다. 자신은 필시 지옥을 가리라 여겼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인 듯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대화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빌어먹을 왜구들 때문에 이 무슨 난리냐.”
 “왜구보다도 그 빌어먹을 현감이 더 밉소.”
 “그러게 말이여, 그렇게 왜구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한다고 간청했는데 빌어먹을 현감 놈이 병사들을 조련할 생각은 안 하고 군포 받은 것을 횡령해서는 치부하기 바쁘니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다니까.”
 “윗말에서는 몇 명이나 당했소?”
 “우리 마을은 반이 죽었다니까.”
 “그래도 우리 마을보단 낫소. 우리 마을은 젊은 처자들이 죄다 끌려갔소.”
 “우리 마을은 빌어먹을 왜구 놈들이 도공들을 죄다 납치해 가 버렸네.”
 “도공을요?”
 인종은 가만히 눈을 감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 하니 서해나 남해의 어느 마을이 왜구들에게 크게 당한 듯 보였다.
 안타까웠지만 지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 또한 병으로 죽어 판결을 기다리는 망자이니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며칠이 지나가 다시 서너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사자가 들어왔다. 인종은 자신을 판결하지 않고 계속 방치만 해 두자 궁금하여 사자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저는 이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사자는 인종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보였다.
 “기다리시게, 조만간 이 방에서 나가게 될 것이네.”
 사자가 나가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종은 그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이제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게 홀로 지내고 있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사자의 안내도 없이 혼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가 조선 왕, 이호인가?”
 “그렇소만 누구십니까?”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말하겠네. 자네의 판결이 늦어지는 것은 자네를 다시 돌려보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일세. 어찌 되었든 자네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네. 만약 자네가 다시 돌아간다면 그냥 가서는 안 되네,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자네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에 왔네. 가까이 오게.”
 시간이 없다는 말에 인종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시 멈칫거리며 머뭇거리자 백발의 노인이 다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하네, 어서 가까이 오게.”
 재차 시간이 없음을 강조하자 인종은 이미 죽은 상황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인종이 다가오자 손을 들어 인종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노인이 일어서며 한마디 했다.
 “앞으로 자네는 당분간 명계에 머물게 될 것이네, 이대로 판결을 받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헛일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얼마가지 못하고 또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네. 하여 내가 자네에게 명계의 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능력을 심어 두었네. 자네는 앞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통해 그 사람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네. 하니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디 오랫동안 왕 노릇 하며 살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네.”
 노인은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뭔가에 홀린 듯 인종은 노인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자신이 다시 되돌아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며칠이 흐르고 다시 사자가 서너 명의 사람들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모두 40대 이상의 남자들로 대부분의 망자가 그러하듯 그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찬찬히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 명은 40대로 보였고 한 명은 60대로 보였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서 한숨만을 쉬는 사람도 있었고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60대 노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죽기 전 몹시 힘들었는지 키에 비해 매우 왜소해 보였다. 안쓰럽다는 생각에 노인에게서 눈을 못 떼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인을 바라보자 인종의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인종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은 아이가 태어나서 두 해가 못 되어 어미를 잃고 아비 손에 이끌려 젖동냥을 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자란 소년은 10대가 되어 아비를 따라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아비는 죽고 홀로 남은 소년은 투탁(投託)을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방도가 나오지 않은 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건넛마을 양반집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간 것이다.
 30살이 다되어 갈 무렵 주인 양반은 집안 하녀 중 하나와 짝을 지어 주었고 몇 년 동안 자식 넷을 낳고 그중에 셋을 돌림병으로 잃어버렸다. 그의 삶은 한과 슬픔으로 점철되어갔다.
 40살이 넘어 주인 양반이 관에 붙들려 가면서 그마저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그의 삶은 끝나 버렸다. 부인과 자식이 따로 떨어져 팔려 갔기 때문이다. 부인은 어느 양반집 식모로 팔려 갔고 자식은 향교의 관노비로 본인은 숯을 구워서 파는 곳으로 팔려 가 하루 종일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웠다.
 그때부터 노인은 제발 죽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으니 제발 자신을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며 20년을 보냈다.
 60이 다 되어 갈 무렵 향교에 관노비로 팔려 갔던 자식이 찾아왔다. 하룻밤을 머문 자식은 떠나면서 수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부자는 그렇게 이별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노인은 삶을 마감했다.
 “내가 죄인이로다.”
 인종은 노인의 삶이 어떻게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보다 그 삶이 너무도 안쓰럽고 안타까워 가슴이 아려 왔다.
 한참 동안 격하게 떨려 오던 가슴이 진정되자 벽에 기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응시하자 그 남자의 삶 또한 마치 스스로 살았던 삶처럼 인종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종은 그때서야 백발의 노인이 했던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명계의 판관들이 망자들을 판결할 때 사용한다는 방법이 이것이리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삶을 알 수 있으니 판결 또한 항상 올바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망자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다시 새로운 망자들이 들어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인종은 망자들이 드나들 때마다 하나하나 모두 살펴보며 그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안타깝고 안쓰러운 삶이었다.
 간혹 잘못된 삶을 살다 온 사람도 있으나 자라 온 환경과 주변 여건을 알고 있는 인종으로서는 그를 나쁘다고 마냥 욕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 날 사자가 다시 찾아왔다.
 “따라 나오게.”
 오랫동안 말조차 걸지 않던 사자가 인종을 불렀다. 대답 없이 인종이 조용히 일어나 사자를 따라나섰다.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다짐하는 인종이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회랑을 걷고 또 걸었다. 회랑의 끝에는 물처럼 출렁이는 파란빛의 막이 있었다. 문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도 본 적 없는 것이다.
 푸른 막 앞에 선 사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자네의 판결은 시작하지 못했네. 애초에 자네를 이끌고 올 수 없었는데 자네가 끌려오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버렸네, 그 일로 명왕이신 염라대왕께서 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네, 어찌 되었든 자네에 대한 판결은 더 미루어질 것 같네. 그동안 나와 함께 망자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 주어야겠네, 따라오시게.”
 “허면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사자로 망자들을 인도하며 산다는 것입니까?”
 “자네를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보내려면 시간을 건너뛰어야 하네, 이미 자네의 몸은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 장례가 모두 끝나 땅속에 들어갔는데 다시 돌려보낸다고 살 수 있겠나? 하니 시간을 건너뛰어 자네가 죽음에 이른 그 시간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네. 500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네.”
 “500년이라고요?”
 “그러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지 우선 날 따라오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자는 푸른 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인종 또한 막 안으로 들어섰다.
 푸른 막을 통과하여 나온 곳은 살아생전 보았던 한양이었다.
 “어찌하여 이곳으로 온 것입니까?”
 “오늘 자네가 인도해야 할 망자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인종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자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말없이 걷기만 했던 인종은 고개를 들어 사자가 들어서는 집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사자는 인종의 외가로 들어선 것이다.
 “이럴 수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의 외삼촌과 사촌동생이 죽임을 당했다. 소윤 일파와 대비 윤씨가 벌인 일이었다. 그 뒤로 인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죽음으로 해서 자신의 외가와 형제들 그리고 친형제인 봉성군 완과 충성을 다했던 신하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겨운 시간을 보낸 인종은 얼마 후 다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인종은 사자와 함께 수없이 많은 곳과 수없이 많은 망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의 발호로 명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동쪽 끝까지 와서 거대한 땅을 차지했다. 연해주를 차지하고 사할린을 차지했다.
 양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아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가 막부시대를 끝내고 대정봉환으로 왜왕이 실권을 다시 되찾고는 조선을 침략했다.
 끝없는 환란과 누란(累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민족이 사라질 것이라 여겼지만 외세의 덕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연이어 벌어진 내전으로 다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남북 분단으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민족 간 분열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는 해방 후에도 떵떵거리며 잘만 살았다.
 그 상황에 남한은 남남갈등으로 서로 불신하며 싸우기를 밥 먹듯이 했다. 독재와 탄압으로 민중은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다. 독재가 끝나도 동서 간의 화합은 요원했으며 북한은 기아로 수십만이 죽어 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쪽으로 독재를 향수하면서 찬양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독재를 비난했다. 예를 중시하던 유교는 마치 국가를 위난하게 만든 원죄를 가진 종교 취급당했으면 자신들의 뿌리인 단군은 거부당했다. 말세였다.
 위정자부터 일용직 노동자까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돈이었다. 조금 먹고 살 만해지자 자신의 처지와 국가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만함과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12대 임금 이호가 되돌아 갈 수 있는 서기 2045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1. 생자일필사(生者一必死) 재반생구세(再反生求世)
 
 
 조선왕조신록 인종 1년 7월 1일 첫 번째 기사.
 상(上)이 훙서(薨逝)하다.
 
 묘시(卯時)에 상(上)이 청연루)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인종 1년 7월 1일 승전내시(承傳內侍) 김승보(金承寶)가 나와서 말하였다.
 “상께서 훙서하실 때에 분부하기를 ‘나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내 상사(喪事)를 보살필 만한 아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을 조정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 형제로 하여금 내 상사를 감호(監護)하게 하라고 대신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승하한 인종의 유교(遺敎)를 전하자 경회루 아래 수각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상과 좌상 승지와 사관은 통곡을 하였다.
 국상이 발표되자 문무백관들이 근정전에 모여 통곡을 하였고 성균관·사학(四學)의 유생들이 광화문 밖에 모여서 종일 끊임없이 곡하고 여염의 천인(賤人)과 규중(閨中)의 부녀도 누구나 다 달려가 울부짖었다.
 좌의정 유관을 삼도감 총호사(三都監摠護使)로, 동지중추부사 이명규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아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대비가 영상·좌상에게 전교하기를,
 “사정전에 빈전을 설치하는 것은 예전에 그런 예가 없었고 또 대내에 너무 가까우므로 옳지 않을 듯하니, 예종(睿宗) 때의 전례에 따라 충순당(忠順堂)에 빈전을 설치하는 것만큼 온편하지 못할 것이다.”
 영상·좌상이 회계하기를,
 “전일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상(喪) 때에 합당한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통명전(通明殿)에 빈전을 설치했었는데 물의가 이제까지도 그르게 여기니, 이제 어찌 다시 잘못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충순당은 후원(後苑)의 거칠고 소활한 곳이므로 결코 거론할 수 없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오직 사정전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사정전에 빈전을 설치하도록 하라.”
 
 때는 서기 1545년 음력 7월 1일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이 서른한 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세상을 등졌다. 태어난 직후 생모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를 7일 만에 잃고 계모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조성왕조실록 인종 7월 1일 첫 번째 기사의 사신의 논담을 보면, ‘상은 자질이 순미(純美)하여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言動)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政事)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批答)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연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거의 20여 일이었고 대고(大故)를 만나게 되어 음료(飮料)를 마시지 않은 것이 5일이었으니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서 지극히 쇠약하여 거의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졸곡(卒哭)이 되어 조정(朝廷)이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서는 중종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을 보고 가리키며 ‘여기는 앉으신 곳이고 여기는 기대신 곳이다.’ 하고 종일 울며 슬피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闕門)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퍼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라고 적었다.
 
 인종이 유명을 달리하고 3일째 되는 날 중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수라간 나인이 올리는 미음을 다시 물렸다. 부군인 인종이 죽고 단 한 모금의 곡기도 입에 넣지 않았다.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억울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독살이었다. 그날 저녁 금상은 즉위하고 처음으로 용안에 밝은 미소를 띠었다.
 대비께오서 친히 떡을 건네며 지난날 혹여 섭섭했던 일이 있었더라도 모두 잊고 성군이 되길 바라셨다며, 기실 어마마마도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신 것이라며 어마마마의 말씀처럼 성군이 되실 것이라 환하게 웃던 인종이었다.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장이 모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자신의 부군이지만 금상은 하늘이 내린 성군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혹자들은 인종의 이런 행보에 조선의 앞날에 서광이 비춘다며 성군임을 떠벌려 말하기도 했으며 저 대국이라는 명나라 사신들조차 인세에 보기 드문 효자요, 성군이 되실 것이라며 추켜세워 주지 않았던가.
 흠이라면 오직하나 친족에 관한 일에 대해서만큼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을 쓰는 인종이었다.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태어나 7일 만에 어미를 잃고 임금 노릇하느라 바쁜 아버지는 보기 힘든 상황에 계모의 손에 자란 탓인지 언제나 애정에 목말라 했으며, 특히 친족들에게 만큼은 그 구애함이 극에 달한 것이다.
 “중전마마, 영의정 윤인경 대감과 좌의정 유관 대감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무표정한 상태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대로 부군을 따라갈 것이라 다짐하고 있던 중전에게
 전날부터 끊임없이 대신들이 미음을 들라 하며 찾아왔다. 그들이 말한다고 죽기로 각오한 중전이 마음을 바꿀 리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오직 인종 한 사람만을 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중전 박씨였다. 남은 세월 그 길고 긴 세월을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철창 안 새처럼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종 1년 7월 4일 조선왕조실록 6번째 기사.
 조정에 공포한 대행왕의 유교.
 
 영의정 윤인경이, 중전이 언문으로 쓴 대행왕의 유교를 주서(注書) 안함에게 주어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니, 승지(承旨)·사관(史官) 등이 둘러 앉아 펴서 읽고 누구나 다 통곡하였다. 곧 문자로써 번역하여 별지에 써서 조정(朝廷)에 공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왕께서 임종 때에 전교하기를 ‘내가 우연히 이 병을 얻어서 부왕(父王)께 종효(終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죄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산릉(山陵)은 백성의 폐해를 덜도록 힘쓰고 반드시 부왕과 모후(母后) 두 능의 근처에 써야 한다. 상장(喪葬)의 모든 일은 되도록 소박하게 하고 상례도 일체 예문을 따르게 해야 한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할 일이 있거든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일체 그 말을 들어야 한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오래 있던 사부(師傅)와 요속(僚屬)도 많이 있으니, 어찌 내 뜻을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송종(送終)하는 모든 일은 절대로 사치하지 말도록 하라.’ 하셨는데, 반복하여 백성의 폐해를 더는 것을 생각하고 전교하셨다. 망극한 중에 전교하신 것을 들었으므로 죄다 기억하지 못하여 대강만을 전한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나도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위급하게 되면 어느 겨를에 처리할 일을 알리겠는가. 대행왕의 능소(陵所)를 정한 뒤에 그 같은 언덕 안에 나를 묻을 곳도 아울러 정하는 것이 내 지극한 바람이다. 대행왕을 위하여 정한 경역이 길면 상당(上堂)·하당(下堂)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모자란다면 합장(合葬)하는 것도 전례가 있다.”
 
 사신이 논하기를, 아, 애통하다. 대행왕의 유교를 차마 볼 수 있으랴. 백성을 사랑하는 염려를 성회(聖懷)에서 늦추지 아니하여 병환이 위독하신 데도 한탄하여 ‘백성이 마침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훙서할 때에도 백성의 폐해를 덜라고 분부하셨으니, 대개 중종의 상이 있고 나서 산릉의 일이 겨우 끝나자, 잇달아 네 중국 사신의 일로 온 나라 백성의 재력(財力)이 이미 다한데에 성념(聖念)이 근간(懃懇)하여 마지않았으니 어찌 이 때문에 더욱이 마음이 타지 않았겠는가. 하늘이 나이를 더 주어 그 인심(仁心)·인정(仁政)을 우리 동방에 크게 펴게 하였다면, 그 치화(治化)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이 동방을 돕지 아니하여 우리 백성이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아, 애통하다.
 또 사신은 논한다. 훙서할 때에 ‘일체 예문을 따르라.’고 훈계한 까닭은 어찌 나라의 일이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심한 것을 늘 보았고 중종의 상 때에 어긋난 일이 더욱 많아 깊이 한탄한 나머지 이렇게 분부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대렴·소렴을 미리 하고도 염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궁인에게 맡겼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분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사신은 논한다. 대행왕은 평시에 눕거나 기대어 피로해 졸은 적이 없고 늘 한 방에 바로 앉아 있는 것이 담담하여 마치 서생(書生) 같았고 편찮을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증세가 위중하여져서야 비로소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들이 비로소 그 병환이 깊어진 것을 알았다. 경회루(慶會樓)에 벼락 치던 날에는 대행왕의 증세가 이미 위독하였는데, 측근 신하가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었으니 ‘마음이 안정된 지 이미 오랜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어느 곳에 벼락이 쳤느냐?’고 묻자, 측근 신하가 성려(聖慮)를 놀라게 할 것이 염려되어 숨겨서 말하기를 서쪽에 벼락이 친 듯하나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미안하다는 뜻을 제상에게 말하고 싶다.’ 하였다. 또 늘 측근 신하에게 말하기를 ‘음식을 조절하고 약을 먹으면 권제(權制)를 따르지 않더라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침 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권제를 따르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하였고, 정신을 잃게 되어서는 스스로 헛소리를 하였는데, 번번이 경연(經筵)에 관한 일을 말하거나 청강(聽講)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소리였다. 초하룻날 밤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을 때에 정염(鄭콦)이 들어가 진맥(診脈)하려는데 궁인(宮人)이 손을 끌어내니, 대행왕이 이미 말은 못하게 되었으나 마음속에는 매우 싫어하는 듯이 손을 움츠리고 내놓지 않았다. 윤임(尹任)이 곁에 있다가 그 뜻을 알고서 궁인을 뿌리쳐 보내고 나아가 손을 끌어내니, 정염이 그제야 진찰하였다. 아, 이 몇 가지 작은 일로도 대행왕의 수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사관이 쓰고 기사를 마무리할 때 밖에서 급하게 기별 없이 문이 열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대전내관이 뛰어 들어와 믿지 못할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전, 전하께옵서! 전하께옵서 소생하셨나이다. 전하께옵서 숨을 쉬시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하는 내용에 승정원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 기사를 모두 작성하고 되살펴보고 있던 기사관(記事官) 윤결(尹潔)은 너무 놀라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승정원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윤결이 사정전 안으로 들어서자 상을 치르고 있던 대신들과 궁인들이 상복을 입은 채로 웅성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침 내의원 의관이 들어 몹시 황망한 표정으로 금상의 용안을 살피고 있었다. 윤결은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대신들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연통을 받고 급히 발걸음을 한 것인지 중전과 대비가 사정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주상께서 소생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냐!”
 중전이 몹시 힘든 표정이 역력한 채로 대전내관에게 묻자 의관의 행동을 살펴보고 있던 내관이 중전 앞에 다가가 아뢰기 시작한다.
 “중전마마, 2각쯤 전부터 상궁과 나인들이 꿈에 주상 전하께옵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극한 소리를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하의 용안을 살피던 중 전하께옵서 숨을 쉬시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분명 전하께옵서는 숨을 쉬시옵니다.”
 “어찌 이런! 어디 보자 비켜 보아라!”
 급한 마음에 중전은 뒤늦게 따라 들어온 대비를 무시한 채 인종에게로 다가갔다. 중전 역시 3일 전에 숨이 멈춘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런데 한 번 멈춘 숨을 어찌 다시 쉰단 말인가? 말로 들어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중전이 다가가자 살펴보던 내의원 의관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중전이 인종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코밑에 대고 귀를 가져다 대자 죽은 줄 알았던 인종의 코에서 뜨거운 기운을 내보내며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전하! 어찌 이런 일이! 이런 황망할 때가 있는가. 살아 계신 주상 전하를 아······!”
 중전은 인종이 되살아 난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혼절을 하고 말았다. 3일간 곡기를 전혀 먹지 않아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급하게 달려와 부군이 되살아났음을 확인하고는 기쁜 마음과 함께,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혼절한 것이다.
 옆에서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대비 윤씨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뭐라 말도 못한 채 멀뚱히 인종과 중전을 보고 있었다. 3일만 지나면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꿈에 그리던 용상에 앉는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차마 좋다고 웃을 수도 나쁘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관들이 급하게 이곳저곳에 알렸는지 사정전 외부에 있던 대신들이 줄줄이 정전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중전마마를 어서 뫼시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내관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은 영의정 윤인경이었다.
 영의정의 불호령이 대비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대전내관과 상궁들이 중전을 들쳐 업고 중궁전으로 가자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대비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다가가 인종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핏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는데, 다시 되살아 난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인종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있었다. 작지만 숨소리마저 들리고 있었다.
 ‘그래 봐야 며칠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너는 그대로 저승으로 가야 했어!’
 속으로 독한 말을 내뱉는 것과는 다르게 대비는 온화한 표정으로, 아니 어쩌면 죽은 지아비가 돌아온 것처럼 기쁜 표정을 만들고는 뒤돌아 대신들에게 하명을 했다.
 “주상이 살아 있음이 확실하니 어서 안으로 모시고, 어의가 옆에 붙어 주상의 옥체를 살피게 하시오. 뭣들 합니까! 주상이 다시 되돌아오신 것입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대비의 명에 영상과 좌상은 급히 내관들에 명하며 인종이 타고 갈 만한 들것을 준비하게 했고 죄인이라며 곡기를 끊고 스스로 벌을 청하고 있는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
 기사관 윤결은 이런 모든 상황을 꼼꼼히 기록하여 승정원으로 돌아온 뒤 정리를 하다. 문뜩 이틀 전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인종 1년 7월 2일(임술) 9번째 기사.
 경성(京城)에 밤에 소동이 있었다.
 
 상께서 승하하시던 날에 경중(京中) 사람들이 스스로 경동(驚動)하여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수레가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하였다. 서로 전하여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闕下)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소리는 성 안을 진동하고 인마(人馬)가 놀라 피해 다니는데 순졸(巡卒)이 막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3∼4일 계속 된 후에 그쳤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날 밤부터 혹시 모를 사태를 염려하며 각 군영에 비상근무를 명하고 작은 이상 징후라도 보고하도록 명했다. 한데 그 명이 있고 하루도 안 되어 2일 오후 한성을 담당하는 좌포도청의 종사관에게서 보고가 올라온 내용이었다.
 “설마?”
 뭔가 미심쩍었지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딱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분명 주상 전하가 소생하신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야······.”
 “뭐가 말인가?”
 “아, 아무 것도 아닐세······.”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당황하며 뒤를 돌아본 윤결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젊은 목소리에 동료 사관인 줄 알았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신뿐만 아니라 젊은 관료들 사이에 제일 마주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결례를 범했습니다.”
 뒤에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서 있었다.
 “괜찮네, 한데 주상 전하가 소생하신 것과 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그럼 이만”
 윤결은 황급히 자리를 뜨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저 인간 같지 않은 사람과 엮여서 좋을 일은 없는 것이다.
 
 대전 침상에 인종이 되돌아와 누워 있고 그 곁을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중전이 지키고 있었다. 마침 어의 박세거가 진료를 마치고 물러나 앉자 중전이 박세거를 바라보았다.
 “어떠신가?”
 “숨이 고르고 혈색이 돌아오신 것으로 보아 소생하신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하옵고 지금은 깊은 수면 중이신 것으로 보이옵니다.”
 “주무시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사옵니다.”
 무려 4일이었다. 4일간 의식도 없이 누워만 있는 것이다. 숨을 쉬지 않아 죽은 것으로 알고 국상을 치르려 하지 않았는가. 아니 분명 숨을 쉬지 않았었다. 한데 잠을 자는 것이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려 4일간을 잠에 취해 있었다는 말인가? 중전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면 언제나 깨어나실 것 같은가?”
 “그것은 알 수가 없나이다. 전하께옵서 혼절하시기 전 워낙 위중한 상황이었던 터라.”
 “허면 영영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단 말인가?”
 기실 인종은 몸이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전대 임금인 중종이 승하하자 급격히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용상에 앉은 뒤로 수라상을 제대로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더구나 대비인 문정왕후와 소윤과 대윤으로 나뉜 외척들의 기세 싸움에 명나라 사신 접대까지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다.
 덕분에 급격히 몸이 약해지면서 세자 시절엔 낮에 자리에 눕는 일이 거의 없던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는 내의원들이 3, 4일에 한 번씩 들어 진료를 해야 할 정도로 몸이 약해진 상태였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6월 25일 그날 밤의 일까지 격고 나니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 것이다.
 내의원 박세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숨을 다시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숨만 쉬는 송장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만 혈색이 좋아지니 기대를 해 볼 만은 했다. 우선 임금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다면 죽을 먹이던 탕약을 먹이던 해서 몸을 보하고 기력을 찾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그것이 힘들었다.
 “기다려 보는 방법밖에 없는 듯 보이옵니다.”
 “알았네. 나가 보게.”
 더 이상 어의가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중전은 사람들을 물렸다. 인종이 되살아나면서 궁은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국상을 치르던 손들이 일을 멈추고 한자리에 모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대비를 비롯해 소윤 일파는 며칠 안에 국상이 재개될 것이라 믿는 눈치였고 나인들과 상궁, 내관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었다.
 대윤에 속하는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그의 아들 윤흥인은 자신들이 지난달 26일 백마를 잡아 바치는 의식으로(6월 26일 인종이 자리에 눕자 무속신앙인 백마를 잡아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주상이 되살아났다며 대전 밖에서 내의원들에게 주상의 용태를 물어 가며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종이 이대로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 대윤에 속하거나 외척을 쳐내라 간했던 사림 세력들은 을사사화라는 끔직한 일을 당하게 된다.
 어느새 2시진 동안 인종 곁을 지키던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앉은 채로 잠시간 눈을 붙이고 있었다.
 “모두, 모두 물리시오.”
 중전은 오늘 하루 뜻밖의 상황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바로 지금 인종이 조용히 손을 움직여 중전의 손을 잡고 나지막하게 말을 한 것이다.
 “저, 전하!”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물리시오.”
 너무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색하며 인종을 불렀다. 인종은 그 즉시 조용히 하라는 듯 중전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이르며 다시 사람들을 물리라 했다.
 대전에는 상궁과 내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한쪽 곁에 사관까지 자리 잡고 앉아 있으니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상선 모두 물리세요. 사관 또한 모두 물러나 주세요.”
 중전의 말에 내관과 상궁들은 순순히 물러났으니 사관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형국이었다.
 “누구인가?”
 “전하, 신 윤결입니다.”
 “그래··· 결아 잠시만 중전과 내외(內外) 간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피해 주겠느냐?”
 작지만 간곡한 부탁의 말이었다.
 “예, 전하,”
 윤결은 어쩌면 부부간의 마지막 대화일 것이라 생각하고 사관으로서의 책무를 잠시 놓기로 하고 대전 밖으로 나가 주었다.
 “내 며칠이나 누워 있었소?”
 “나흘이옵니다.”
 “그렇구려, 참으로 긴 잠을 잤구려. 나흘 동안 과인으로 인해 궐 안팎으로 큰 소란이 있었을 테지요? 어찌 되었든 미안하오.”
 “흑흑···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하께서 다시 소생하셨으니 그걸로 모든 것은 되었습니다.”
 중전 박씨는 다시 되살아난 이 기뿐 순간에도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이 힘들어했을 것이라는 인종의 말에 더욱 복받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걱정 마시오. 내 앞으로 천수를 누릴 것이오. 다시는 병으로 자리에 눕지 않을 것이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누워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한 것이 효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포장하려 했던 가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는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소. 그리고 효를 행한다며 중전에게 감내하기 힘든 고초를 겪게 하여 자리에 누워 있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소.”
 사실 그동안 인종은 중전 박씨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 그것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을 회피한 것이다. 자식을 잉태할 수 있는 길일을 일부러 피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대비 윤씨의 마음을 얻고자 한 행동이며 동생이 경원대군에게 대통을 잇게 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중전 박씨는 말로는 다하지 못할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그 마음고생이 오죽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한 것을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아니요 정말 미안하오. 내 사죄하리다. 앞으로는 부군으로서 뭇 사내들과 같이 중전을 위할 것이오.”
 “전하!”
 중전 박씨는 죽다 살아서인지 사뭇 달라진 자신의 부군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허고, 중전.”
 “네, 전하.”
 “중전, 내가 나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기운을 차릴 수 없으니 빈속에 먹을 것을 좀 채워야 할 것 같소. 과인은 앞으로 강건해야 하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다시 뵐 때까지 아국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야 하니 수라간에 일러 미음 좀 들이라 하시오.”
 “네, 전하. 당장 들이라 하겠습니다.”
 중전의 인종의 말에 화색이 돌며 내관을 불러 미음을 들이라 명했다. 내관이 들어왔다 나가자 다시 문이 열리며 사관 윤결과 대전 상궁과 나인들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언제다시 들어왔는지 내의원 박세거도 따라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 인종 1년(1545년) 음력 7월 5일 첫 번째 기사.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가 문안하다.
 
 검열(檢閱) 한지원(韓智源)이 승전색(承傳色) 박한종(朴漢宗)에게 사사로이 물으니, 박한종이 귀에 대고 대답하기를 ‘상의 눈동자가 맑고 깊은 것이 위중하실 때보다 매우 정기가 서려 있다. 또한 상의 용안에 화색이도니 조만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 같다하였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의 대신들이 대전에 강녕전에 들어 인종이 무탈한지 살피고 문안인사를 건넸다.
 “내 기후는 이제 마땅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사를 볼 수도 있음이나 그간 과인으로 인해 조정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고 이로 인해 곧바로 정사를 볼 수 없음이니 사흘간 국상을 치르느라 분주했던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여드레부터는 조당(朝堂)에 나아가도록 할 터이니 모두 그리 알고 물러가라.”
 이에 영의정과 육조대신들이 인종의 강건함에 모든 근심 걱정이 해소되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며 즉시 업무 복귀를 주청했으나 인종은 몸을 추스를 수 있게 시간을 달라 하며 가납하지 않고 대신들을 되돌려 보냈다.
 대신들이 물러날 때 인종이 형조판서 윤임과 그의 아들 윤흥인을 남게 하였다. 이에 도승지 송기수 또한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종이 아무 말 없이 윤임과 윤흥인, 송기수만 남고 모두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임과 윤흥인 부자는 사사로이 인종의 외삼촌이요 외사촌형제이니 인종의 강건한 모습에 절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윽고 모두 돌아가고 대전이 조용해지자 인종이 입을 열었다.
 “과인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하였을 터인데 좀 진정이 되십니까?”
 윤임과 윤흥인를 보는 인종의 눈빛에는 안쓰러움과 애잔함이 묻어났다. 윤임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을 한다.
 “전하의 옥체 미령하시어 지난 열흘간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꼭 저승 문턱에 다다른 것처럼 온 세상이 암흑이었사옵니다. 하나 오늘 이처럼 강건한 전하를 뵈오니 마치 꽃밭에 있는 것 같사옵니다. 참으로 천은 이옵고 열성조의 보살핌 덕입니다.”
 “그래요. 그래 해서 형판을 남으라 하신 것입니다. 과인이 열성조의 가호 아래 다시 자리를 털고 앉았으니 백성들에게 보답을 해야겠지요?”
 인종은 자신이 죽다 살아난 것을 이용하여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을 한 가지 해결해볼 요량이었다.
 “물론 이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해야겠지요. 하오면 대 사면령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형판이 알아서 정리하여 올리시고 대비와 소윤 일파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대비전에 모여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금군과 의금부 좌우포청은요?”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사옵니다.”
 다행히 큰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대궐과 한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인종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전국 팔도에 속한 관노비와 사노비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 것 같소?”
 “예? 아, 송구하옵니다. 정확치는 않으나 대략 4, 50만은 될 듯하옵니다.”
 예상외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윤임은 대략적인 숫자를 말했다. 사실 노비를 관장하는 형조의 판서지만 그라고 관노비면 몰라도 사노비까지 전부 알 수는 없었다.
 “그리 많소?”
 “팔도의 관노비는 10만이 조금 넘을 것이나 양반가들과 중인들이 소유한 사노비까지 헤아린다면 능히 그리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허면 그중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도 있을 듯하오만?”
 인종의 말에 동석하고 있던 송기수 인종을 불렀다.
 “전하!”
 인종 1년 현재 조정에서 파악한 조선의 전체 인구는 500만이 안 되었다. 그중에 양반이 20만 안팎이었고 중인이 40에서 60만에 양인 150만 천인이 200만을 헤아린다.
 이중 국가에 세를 납부하고 역을 담당하는 것은 양인과 중인들이었다. 천인 중에 약 10만이 관노비라면 그들은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일하니 제쳐두고라도 나머지 190만은 백정, 무당, 창기, 광대, 승려 등과 같은 천인이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노비였다.
 노비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양반가에 속한 노비만이라면 그냥 넘어가 준다고 하더라도 중인들까지 노비를 부리거나 양인에 속하는 공인이나 상인들 또한 노비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윤임은 죽다 살아난 인종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매우 두려웠다. 인종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노비 문제를 제일 먼저 해결하려고 한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문제였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양인 확보가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신분이 있다. 신분은 양인이나 그 하는 일이 천인들이 하는 일이라 그들을 불러 신량역천이라고 한다. 소금 굽는 일을 하거나 숯을 만들거나 뱃사공이나 봉수대관리에 역에서 역마(驛馬)를 사육하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신분이 불분명한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히 양인이었다. 다만 신분이 불분명하기에 양인들이 해야 하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는 못했다.
 물론 하는 이들도 있다. 신량역천 중에는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나름 고생하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명확히 양인도 아니며 천인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양인은 100만이 조금 넘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 작은 인원이 국가를 이끌어 갈 세를 납부하고 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양인으로 통계에 잡힌 150만 중 신량역천을 빼고 남은 숫자가 진정한 의미의 양인인 것이다. 그들만으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었다.
 “성종 대왕 때 마지막으로 시행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할까 하오.”
 “전하······!”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옆에서 듣고만 있던 윤임의 아들 윤흥인까지 인종을 놀랜 얼굴로 바라보았다.
 1481년 성종 12년에 마지막으로 설치된 뒤 무려 64년 만에 다시 노비변정도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조선 초 불안한 정국을 다스리고 양인과 노비들의 억울함을 달래며 새로운 신분제를 정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노비변정도감이었다.
 비록 권세 높은 양반들의 노비들은 건들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름 많은 수의 양인을 확보했고 노비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 준 것만으로 큰 역할을 했었다.
 “전하 이 문제는 그리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옵니다. 우선 전하의 옥체부터 살피시고 차차 논의하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형조판서 윤임은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했다. 눈뜨고 하루 만에 노비변정도감을 이야기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인종으로서는 수백 년의 저승 생활을 통해서 노비 문제를 지금 바로잡아 최소한으로 줄이지 않으면 후일 그로 인해 조선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제일 먼저 노비 문제를 꺼낸 것이다. 그것을 통해 얻고자하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조회가 있는 8일 그에 관한 논의를 할 것이니 형판은 그리 알고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그만 나가 보시구요.”
 인종의 말에 형판은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인종이 죽다 살아난 기념으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려 한다지만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임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도승지와 윤흥인이 남았다. 도승지 송기수는 바로 인종에게 질문을 던진다.
 “전하! 노비변정도감을 하시려거든 영의정이나 좌의정을 내세우시지요. 형판은 그 위치로 인하여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많사옵니다.”
 그자식인 윤흥인이 옆에 앉아 있음에도 송기수는 거침없이 인종에게 그 아비가 일을 그르칠 것이라 말을 한다.
 하나 이것은 그 아비를 흉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외척이다. 그에게 노비변정도감을 준비하라 한 것은 그에게 스스로 물러나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다 안 되면 물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허면 다음엔 윤원형에게 맞길 겝니다. 그도 하다 안 되면 물러나겠지요.”
 이것은 엄밀히 말해 외척을 공개적으로 쫓아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윤흥인이나 송기수는 이미 그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예견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막 대전을 나선 윤임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군왕의 권도로 일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그 시행을 책임지는 책임자는 버텨내지 못할 공산이 크다.
 지방 향반 몇몇쯤이야 어르고 달래서 정책을 따르게 하면 되겠지만 조정 대신들과 그 일가친척은 어찌할 것인가. 일을 방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책임자의 잘못을 고변하여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탄핵 상소가 올라올 것이다.
 “흥인아, 너는 너무 그 일을 마음 쓸 것 없다. 어차피 내가 그대로 눈을 뜨지 못하였다면 벼슬이 문제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사옵니다.”
 “흥인이 너는 종5품 교리직을 내릴 것이니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믿을 만한 장정 10인을 선발하여 함경도 관찰사를 찾아가 이 서찰을 전해 주고 그가 준비해 주는 것을 챙겨 명을 수행하도록 해라.”
 “명을 거행하겠나이다. 전하!”
 윤흥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명을 받고 서찰을 받아 챙긴 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따져 보면 인종이 죽으면 대윤과 사림에 속한 사람들은 최소한 파직이거나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정된 수순인 것이다. 원 역사에서 외척들 등쌀에 평생을 제대로 된 정책 한 번 펴 보지 못하고 죽어 간 중종이나 인종이었다. 만약 그대로 인종이 죽어 버렸다면 그 다음 보위에 오를 경원대군(명종) 또한 평생을 외척 등쌀에 제대로 정책 한 번 못 펴고 살았을 것이다. 임꺽정부터 정난정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가 이 시기인 것이다.
 “승지는 흥인이 직첩을 내려 주고 나가는 길에 도화서 들려서 화공 하나 불러 주게.”
 “화공이라 하셨습니까?”
 뜬금없이 화공을 찾자 도승지 송기수가 재차 물었다.
 “그래, 앞으로 종종 불러다 일을 시켜야 하니 능력이 출중한 자로 부르되 젊은 사람으로 불러 주게.”
 이런 심부름은 보통 내관을 시키며, 중한 일이면 상선을 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별 대꾸 없이 인종의 말을 따랐다.
 도승지 송기수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에서 인종이 믿을 만한 사람은 중전과 외척인 윤임일가밖에 없었다. 인종이 죽게 되면 그를 따라서 같이 망하게 될 사람들이다. 상선이나 내관들 또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화공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지 몰라도 매우 중한 일이며 그 일을 맡을 사람을 자신에게 데려오라 시킨 것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네, 전하.”
 도승지 송기수까지 밖으로 나가자 몹시 피곤했는지 인종은 보료 위에 그대로 몸을 뉘였다.
 인종은 죽었다가 살아난 지 하루 만에 수도 없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계획했던 일을 바로 시작했다.
 며칠 동안이라도 몸을 보살피고 시작해도 되지만 인종은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 일을 해야 했다. 그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다
 
 
 아침나절에 의정부와 육조대신들의 문안이 끝나고 오후가 되자 도승지 송기수가 보낸 화공이 들었다는 상선의 말에 화공을 들라 하지 않고 인종이 밖으로 나갔다. 상선과 대전 상궁이 급히 거동하는 것은 무리라며 인종을 만류하였지만 인종은 상선에게 부축하라 명하여 상선의 부축을 받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라.”
 인종은 죽었다 살아난 뒤, 만 하루 만에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상선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이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며 궐 내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다.
 시위하는 금군들과 대전에 속한 상궁과 나인, 내관들이 서둘러 인종을 따라 움직였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수정전 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사용했으며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그리고 후일 고종 때는 고종의 거처로 쓰이기도 하는 건물이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소실되어 고종 때 중건하지만 지금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수정전은 중심이 되는 수정전 건물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여러 행각들이 있었다. 수정전이 40칸이고 그 주변 행각이 7개에 각각 20칸에서 33칸씩으로 이루어졌는데, 수정전은 말 그대로 조선에 있어 학술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예, 전하. 소신은 도화서 화사 최가 성현이라 하옵니다.”
 “허면 종8품이겠구나?”
 “그렇사옵니다. 전하.”
 “상선.”
 “네, 전하.”
 “중향각을 비우게 하라, 중향각이 정리되는 대로 화사 최가는 이곳에 화구를 옮기고 과인의 명을 받들라.”
 “네, 전하!”
 “너는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매일 등청하는 대로 대전으로 오라, 허면 내관이 그날그날 너의 할 일을 알려 줄 것이다. 알겠느냐?”
 “네, 전하.”
 말을 마친 인종은 되돌아서 수정전 뒤편에 있는 경회루로 발길을 돌렸다. 경회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자 후텁지근했던 더위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한동안 말없이 경회루 주변을 바라보던 인종은 작은 목소리로 상선을 불렀다.
 “상선.”
 “네, 전하.”
 “환이는 퇴궐하였는가?”
 “확인치 못했습니다.”
 “그래······.”
 환이는 경원대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죽음에 상주 역할을 하기 위해 입궐하여 있던 경원대군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불쌍하다고 여겼다.
 경원대군도 등극하고 모후와 외척의 등쌀에 제대로 왕 노릇 한 번 못해 보고 살다가 젊은 나이인 45살에 죽는다. 즉위하자마자 을사사화를 겪고 차례대로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는다.
 “너는 가서 환이가 퇴궐치 않았으면 이리로 오라 하여라. 허고 대비마마의 용태가 어떤지 확인도 해 보고.”
 아마도 경원대군은 궁 안에 있을 것이다. 대비나 소윤 일파는 인종이 분명 다시 자리에 눕게 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 내막을 안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만한 근거가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할 것이다. 인종 또한 짐작은 하나 지금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심산이었다.
 “네, 전하.”
 상선이 대비전으로 가자 인종은 이쯤이면 온 궐 안에 자신의 거동이 알려졌을 것이라 여겼다. 아마 조만간 중전이 이리로 올 것이다.
 “박 상궁.”
 “네, 전하.”
 “다과상을 준비하라. 아마도 중전이 곧 올 것이야, 허고 환이가 올 수도 있으니 그것까지 준비하여라.”
 “네, 전하.”
 대전 상궁인 박 상궁이 급히 다과를 준비하러 경회루를 벗어나자 인종의 말처럼 중전 박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잰걸음으로 경회루에 들어섰다.
 “전하!”
 “오셨소.”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히 보이는 얼굴로 인종을 바라보는 중전이었다. 얼마나 빠르게 걸어왔는지 인종을 부르는 목소리마저 거칠게 들렸다.
 “어이하여 벌써 거동하셨나이까?”
 “허허, 다 그럴 만하니 그런 것이오.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하지 말고 앉으시오.”
 인종의 말에 표정을 풀지 못하고 중전 박씨가 인종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오나 아직 거동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신첩은······ 흑흑.”
 자리에 앉자마자 중전 박씨는 중전으로서 체통도 잊은 채 눈물을 보였다.
 인종이 뜬금없이 밖으로 외출하였다기에 너무 놀라 급하게 달려와 보니 뼈만 앙상한 몰골의 인종이 앉아 있었다.
 그런 몰골로 소생한 다음날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대비와 소윤 일파에게 자신의 강건함을 과시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 틀렸다며 대비와 소윤 일파는 낙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큰일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하오. 하나 어쩔 수 없었소.”
 “진정 괜찮은 것이옵니까?”
 “걱정 마시오. 내 몸은 내가 잘 아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전 상궁이 급히 서둘렀는지 다과를 내왔다. 다과를 받고 인종이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있으니 허둥지둥하며 경원대군이 나타났다.
 “전하!”
 안색이 좋지 못한 경원대군이 상선과 함께 나타나 인종을 보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인사를 한다.
 “환이 왔구나. 이리 올라오너라.”
 경원대군은 너무도 겁이 났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와 같았다. 조선이 아무리 신권이 어떠니, 외척이 어떠니 해도 중앙집권에 강력한 왕권 국가였다.
 왕의 입 밖으로 나와야 정책도 발효되고, 왕이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며, 왕이 죽으라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왕이 주인인 나라였다.
 그 왕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었다. 이미 경원대군은 다음 대 보위를 물려받아 용상에 앉으려고 했다. 그것이 인종이 죽었다 여겨 그런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좋게 보일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현재 궁지에 몰린 대비의 생각이었다.
 경원대군은 이제 12살인데 무엇을 알겠는가. 하나 대비전을 나올 때 모후인 문정왕후의 말과 행동이 경원대군으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했다.
 마치 죽으러 가는 자식을 보는 듯 대비 윤씨는 애처롭게 눈물을 보이며 형님 전하에게 무조건 대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빌라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는 임금을 죽었다며 국상을 치르고 관 속에 넣고 다음 대 보위로 경원대군을 올리며 즉위식을 준비했으니, 이는 작게 보면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불과하나 다르게 보면 역모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주상을 공식적으로 죽이고 동생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리 떨고 있느냐? 고뿔이라도 걸린 게냐?”
 7월 한낮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경원대군을 바라보며 장난기가 약간 섞인 음성으로 하문을 했다. 하나 경원대군은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살려 달라 비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전하! 소제를 죽여주옵소서. 이 우둔하고 미련한 소제가 전하에게 참으로 해서는 안 되는 망극한 일을 저질렀나이다. 전하! 흑흑! 전하 소제를 참하여 주시옵소서!”
 경원은 어머니가 이르는 대로 죽여 달라며 죄를 청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경원대군을 바라보던 인종이 입을 열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할까! 일국의 대군이라는 인사가 어찌 그리 눈물이 흔해!”
 환은 중종이 살아 있을 때도 종종 눈물을 보였다. 나약했던 환이었기에 즉위한 뒤에도 어머니나 외삼촌들에게 휘둘려 정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인종 또한 그랬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둘은 모후가 다르다고 하나 엄연히 한 피가 흐르는 형제인 것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너는 당장 동궁으로 처소를 옮기도록 해라, 이만 물러가.”
 “전, 전하!”
 인종의 말에 중전과 상선까지 급작스런 인종의 말에 놀라 당황했다. 아무리 죽다 살아났다고는 하나, 아직은 31살의 젊은 인종이었다.
 지금 경원대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아 국본으로 정한다면 후일 중전이 왕자를 생산할 경우 극심한 내분 사태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
 하나 인종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도 자신에게 자식이 없고 뒤를 받쳐 줄 국본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 원흉이 경원대군의 모후인 문정왕후이고 소윤 일파라고 해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다른 대군을 세제로 삼는다면 문제는 더 커지기 때문이다.
 ‘팔자에 자식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물론 과거에는 자식을 일부러 가지지 않으려 노력해서 없지만 앞으로도 자식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인종이었다. 몸 상태가 도저히 자식을 볼 상황이 아닌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훗날 명종이 되는 환에게도 자식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 있는 왕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조카인 선조를 입적하여 왕통을 이었다. 하나 당장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 정국을 수습하고 서둘러 계획했던 바를 실행해야 했다.
 당장은 자신이 살아나면서 을사사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역사를 알아 버린 인종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필요한지, 또 지금이 얼마나 세계사에 중요한 시기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군주들을 제치고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인종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엎드려 있던 경원대군이 멍한 표정으로 인종을 바라보았다.
 “혀, 형님?”
 “할 말이 있느냐?”
 “하오나, 왕세제라 하시면······.”
 환도 바보가 아니다. 만약 자신이 왕세제로 국본의 자리에 앉게 되면 나중에 조카와 왕좌를 놓고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어미인 문정왕후와 외척인 소윤이 인종에게 어떤 일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순리인 것을 내가 욕심이 과했다. 일찍이 10세에 혼인한 나다. 서른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은 팔자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너는 걱정 말고 동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해라.”
 중전도 지켜보는 대전 상궁과 상선도 차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임금이 그리 결정 했다면 따를 수밖에 없다.
 인종의 말대로 30넘어서까지 자식이 없음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에 임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일지도 몰랐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 선택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문정왕후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경원대군이 국본에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실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복잡하게 그 안에 얽히고설켜 있다. 대윤에 밀리면 경원대군의 생사가 위태롭기에 문정왕후 또한 극단의 방법을 끊임없이 써 왔던 것이다.
 하나 이렇게 인종이 경원대군을 왕세제로 세우게 되면 대윤이라 해도 함부로 술수를 쓸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인종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문정왕후나 소윤 일파도 한동안 잠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원대군이 돌아가고 인종과 중전 박씨는 그 일로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대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3일이 빠르게 흘러 8일 아침이 되자 궐문 안으로 대신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왕의 침소인 강녕전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인종에게 대전내관이 사정전에 대신들이 모두 모였음을 고했다.
 인종은 며칠 전보다 한결 건강해진 모습으로 사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부축을 받지 않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진 인종이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대전내관의 말에 사정전 안 모든 신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종 1년 7월 8일 첫 번째 기사.
 
 상께서 민심에 대하여 하문하시다. 이에 예조판서 윤개가 답하기를,
 “신이 저자에 나아가 확인하지 못하였사오나, 노복들과 가신들의 말로 보아 상께서 천은과 열성조의 가호로 소생하신 것은 아 조선에 큰 홍복이라, 또한 중종 대왕마마의 덕이라 입을 모아 말한다 하옵니다.”
 하니, 영상과 좌상이 말하기를,
 “어느 누구 하나 이를 두고 불민한 말을 하는 이 없고 오직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하니 상께서 말하기를,
 “과인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고 천은과 열성조의 가호라며 반가이 한다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백성이 과인의 근심을 알고 동요치 않음이 매우 기쁘다.”
 사관이 논한다.
 이 마음이 임금이 되기에 넉넉하거니와, 이 마음을 능히 확충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렇게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을 인애(仁愛)하는 것을 알 만하다.
 
 사정전 안으로 들어선 인종은 인사를 받고 혹여 이번일로 민심이 동요치 않는지 묻고는 큰 동요가 없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그동안 쌓인 장계와 전날 명한 일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중 형조판서 윤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하, 노비변정도감에 대하여 아룁니다. 노비에 관한 사무는 그간 장례원(掌隷院)에서 처결하였사옵니다. 이에 장례원을 확대 개편하여 각도와 군에서 송첩(訟牒)받은 것을 처결하심이 옳을 줄 아뢰옵니다.”
 윤임다운 발상이었다. 어차피 노비 문제는 장례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따로 도감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장례원을 활용하여 조금 규모를 키우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정도라면 다른 대신들도 별로 반발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나 인종은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이번 일에 대한 취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간 아 조선이 개국한 이래 노비변정도감이 4번 설치되었는데 당시 노비에 관한 사무를 처결할 부서가 없어서 도감을 설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노비를 두고 서로 쟁 하는 사대부나 호족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태조 대왕께서 정하신 신분에 관한 법을 정비하기 위함도 있었다. 이제 아국이 개국한 지 어언 150여 년이 흘러 그간 아국의 백성의 숫자가 늘었음은 자명한 일이며, 당시와 아국 주변의 형세가 달라졌음을 모두 알 것이다. 해서, 양인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경에 이르러 세수가 줄고 군역을 담당할 장정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줄었다. 경들도 지난 대행 대왕 시절에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왜국이 구로(대마도)를 통하지 않고 무리 없이 아국에 들어와 통교를 허용해 달라 청하고, 명국의 배가 조정의 명을 어기고 수시로 제주와 전라도에 들어와 무역을 요구한다. 또한 여진야인들과의 마찰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해서 장차 수군을 더욱 확대하여 허락 없이 아국의 땅을 밟으려는 자들을 경계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인의 수를 늘려야 하며 세수입을 늘려야 한다. 고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나, 양 부모 중 하나가 양인인 자는 모두 양인으로 환원하는 것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니 장례원의 확대 개편만으로는 이 일을 처결할 수 없으며 따로 도감을 설치하여 처결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논하라.”
 인종의 말에 웅성거리던 대신들이었다. 전날 윤임에게 들은 바로는 인종이 죽다 살아난 기념으로 노비면천을 생각하니 생색만 조금 내면 될 것이라 들었다.
 하나 막상 인종이 편전에 들어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노비 중에 한쪽이 양인인 경우가 적겠는가.
 심지어 사대부와 대신들도 집안 노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본 경우가 허다했다. 어미가 노비이니 자식도 노비인 경우가 많았고, 아비를 모르는 이들도 허다했다. 문제는 그들이 전부 사노비라는 것이다.
 이에 우찬성 권벌이 말한다.
 “전하, 전하의 명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지난 중종 대왕 연간에 여진과의 다툼으로 아국 백성이 많이 상했으며, 또한 대마도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통교하지 않겠다는 아국 조정의 말을 듣지 않고 왜의 선박이 수시로 아국 근해에 나타나 약탈과 방화를 했습니다. 상국인 중국 조정에서조차 금하는 무역을 위해 당물(唐物)을―중국 물건의 총칭―싣고 전라도와 제주로 건너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여 전하의 말씀처럼 수군을 강화하고 세수를 늘려 군선을 늘리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양인을 확보하라 하심은 매우 지당하신 분부이오나 이는 몇까지 이유로 불가하옵니다.”
 장황하게 인종의 말을 되풀이하고서는 불가하다고 끝맺는 권벌이었다. 매우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권벌을 바라보던 인종은 그 이유를 물었다.
 “무엇인가?”
 “첫째로 관에 소속된 노비는 전하의 명으로 모두 면천시켜도 무방하옵니다. 물론 그들이 하던 일을 누군가가 대체해 준다면 말이옵니다. 하나 사노비 즉 사대부나 지주에 속해 있는 노비들은 그들에게는 큰 재산이옵니다. 이를 국가에서 면천시켜 준다면 백성의 재산을 뺏는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둘째로 그들을 면천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세수입이 늘고 군역을 지울 수 없사옵니다. 대부분 농노이온데, 그들이 면천된다 하여 땅이 생기는 것도 아니오며, 장사할 밑천이 생기는 것도 아니옵니다. 당장에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유랑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떨어질 뿐이옵니다. 이는 아국에 큰 화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그 지주와 사대부가 문제가 되옵니다. 당장 노비가 양인이 되면 농사 지을 인력이 부족하여 땅을 놀려야 하고 땅을 놀리게 되면 곡물이 부족해 기근에 시달릴 것 이옵니다. 하니 이 문제는 불가하다 아뢰옵니다.”
 조목조목 반대의 이유를 말했다. 이에 인종이 권벌을 찬찬히 바라보다 말한다.
 “첫 번째 관에 소속된 노비든, 사노비든 본래 노비가 아닌 자가 노비라면 피해가 있더라도 양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재산 상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의 문제다. 양 부모 중 하나가 양인일 경우 그 자식을 양인으로 하는 것은 앞으로 조정에서 더 논해야 할 것이나, 내 생각은 이렇다. 양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대부의 노릇을 못하는 서얼이나, 양인을 부모로 두었으나 천인으로 사는 이들을 제 부모가 거두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 하여 앞으로 서얼도 모두 조정에 출사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가르치며 나라에 헌신하도록 기회를 줄 것이다. 또한 양인을 부모로 둔 천인들 또한 양인으로 하여 조정에서 중히 쓸 것이다. 둘째로, 면천시켜 주되 조정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땅을 주거나 일을 만들어 주기 전까지는 세와 군역을 면해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롭게 면천된 자들은 향후 5년간,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5년을 더하여 10년간 세를 포함해 부역과 군역을 면해 줄 것이며 그 안에 조정은 그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지주나 양반은 노비가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없으면 삯을 주고 땅을 일구면 되는 것이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과실만을 탐하는 것이 사대부가 할 짓인가?”
 이에 대신들이 웅성거리면서도 정작 인종에게 반박하기를 꺼렸다. 죽다 살아나서인지 인종의 말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기존 질서를 무시하는 말들이었다. 세종 대왕도 하지 않던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찌 더 말하는 대신이 없소?”
 인종이 보다가 한마디 더하자 보다 못한 좌의정 유관이 나섰다.
 “주상 전하께서 권도(군왕이 목적을 위해 절대적인 권한으로 행사하는 명령)로써 이 일을 처결하시겠다면 신들은 따를 뿐이옵니다. 하나 대신들과 사대부들의 의견을 더 수렴하시고 논의를 한 연후에 중지를 모아 처결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하니 다른 대신들 또한 다른 말이 없었다. 그들이 이쯤에서 물러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죽다 살아난 인종에게 살려 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죽었다고 국상을 치르며 땅을 파고 묻어 버리려고 했는데 그런 임금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는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대역 죄인이었고 죽을죄를 진 것으로 인종이 그 문제를 꺼내게 되면 조정 안 대소 신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한참 동안 대신들을 둘러보던 인종은 자신이 조금만 고집을 피워도 대신들이 따르는 것 을 보고 왕권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인종은 한동안 입을 닫고 고민했다. 급한 문제였으나 만약 이것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분명 어딘가에서 사단이 날 것이다.
 대신들을 모두 설득한다고 해도 양반 사대부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 또한 문제가 될 공산이 컸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일을 서둘렀음을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4일간이었고 자신은 무려 500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미 인종은 이시대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라면 적당히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서두른 것인데 이런 문제가 계속하여 발생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스러운 인종이었다.
 “허면 그 문제는 더 논의하여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경원대군에 관한 것이오.”
 인종이 경원대군의 일을 말하려고 하자 대신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아니 된다고 반대하였다.
 “전하! 경원대군을 동궁에 들게 했다는 전교를 들었사옵니다. 하나 이것은 아니 되옵니다. 아직 전하의 춘추가 한참이시온데, 어찌 국본을 이리 급히 세우려 하시나이까? 이는 후일 분란을 자초하시는 길이옵니다. 하니 전교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특이한 것은 소윤에 속하거나 그들과 가까운 이들이 더 앞서서 반대를 한다는 것이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한다.
 경원대군이 세제가 되면 인종은 즉시 경원대군의 외척이랄 수 있는 소윤 일파를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내치려 할 것이다. 명분도 딱 좋았다.
 그동안은 그저 대비의 친정이고 왕자 중에 하나인 경원대군의 외삼촌일 뿐인지라 딱히 그들을 견제할 만한 명분이 없었지만, 그가 왕세제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진짜배기 외척이 되는 것이고 후일의 실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역사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이고 더욱이 명종이 등극하고 한 달 후인 8월에 윤원형의 형인 즉 명종의 큰외삼촌인 윤원로가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대신들을 동원해 줄기차게 탄핵하여 결국 해남으로 유배된다. 물론 그 뒤 윤원형이 복수를 해서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을 비롯해 좌의정 유관 등을 처형하고 형인 윤원로를 다시 부르지만 결국 1년 후 동생인 윤원형과 권력 싸움을 하다가 다시 유배를 가서 사사되고 만다.
 여기서 좋다고 왕세제 자리를 받아들이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지만 그로 인해 경원대군의 안전이 보장되기는 할 것이다. 하나 문정왕후의 입장과 소윤 일파의 입장이 달라 벌어지는 일이다.
 “국본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권한이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만약 대신들이 후일 중전이 왕자를 생산할 것을 염려한다면 나는 문무백관과 백성들 앞에 약조할 수 있다. 중전이 왕자를 생산하더라도 경원대군을 내치치 않을 것이며 왕세제의 자리를 거두어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되었느냐!”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속으로 다짐하는 인종이었다. 자신이 무자식팔자이니 국본이라도 확실히 정해 두고 후일 분란을 없애기 위함이다. 또한 이를 이용해 외척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런 인종의 말에 대신들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간언할 수 없었다.
 인종의 지지 세력인 사림 측에서 보면 매우 섭섭하고 걱정스러웠지만 아무리 군왕이 그렇게 정했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왕세제 책봉식을 한다는 것도 아니니 오늘은 그저 듣기만 한다라는 표정으로 넘어가는 대신들이었다. 후일 다시 이 문제에대해 이야기가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뒤로도 몇몇 논의 사항이 더 있었으나 몸이 피곤함을 핑계로 간단히 처결하고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으로 되돌아온 인종은 내관을 시켜 화사 최성현을 불러오라 했다.
 내관이 나가고 인종은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정리가 끝난 듯 인종은 다시 상선을 불렀다.
 “상선.”
 “네, 전하.”
 “가서 선공감(繕工監) 제조를 들라 하라.”
 선공감은 공조에 속한 정3품 아문으로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담당하던 부서였다.
 “네, 전하!”
 상선이 나가자 인종은 서탁 위에 놓인 여러 장의 종이를 한쪽으로 옮겨 놓고 몇 장은 따로 한쪽에 빼놨다.
 “전하! 화사 최가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화사 최성현인 들어서자 인종은 가까이 와 앉으라고 명했다. 중인 신분에 종8품에 불과한 최성현은 몸을 한껏 바닥에 낮추어 인종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준비는 모두 마쳤느냐?”
 “네! 저, 전하! 명을 받자와 화사 두 명과 시중들 아이 3명을 모두 준비시켰사옵니다.”
 “그럼 너는 나가는 대로 이들과 함께 한양을 그려 오너라.”
 “네? 아! 네, 전하!”
 “하하하! 어떻게 그리느냐 묻지 않느냐?”
 잔뜩 긴장한 최성현은 말까지 더듬으며 답변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한양을 그리라 하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관상하기 위해 그리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책에 쓰기 위함이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이제야 자신이 불려 온 이유를 알게 된 최성현이었다. 인종이 필요한 것은 한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인 것이다.
 “하오시면 한양 전도를 그리라 하는 것이옵니까?”
 “맞다. 말 그대로 한양 전도이니라. 직접 밖으로 나가보지 않고도 한양 구석구석 골목 하나에서부터 초가 하나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오게 그려야 한다. 그 크기는 가로 10자, 세로10자로 모두 그 안에 그려 넣어야 한다. 할 수 있느냐?”
 “한지에 그려야 하옵니까?”
 “아니다. 오래 두고 볼 것이며, 정책을 집행하며 계획을 세우는데 써야 하니 광목을 이어 붙여 그려라. 허고, 못해도 8월 안에 끝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성심을 다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화사 최성현이 명을 받고 나가자 선공감 제조가 들어왔다.
 “전하! 선공감 제조 박아무개 이옵니다.”
 “그래 제조를 이리 부른 것은 내 손재주가 좋은 공인 몇을 천거받기 위함이니라 너의 휘하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공작에 능한 공인 몇을 골라 보내어라. 또한 도색에 능한 이도 필요하다. 내 시험을 봐 그 재주가 남다르면 따로 귀히 쓸 것이다. 알겠느냐?”
 “네, 전하! 하오시면 몇이나 대령하면 되겠사옵니까?”
 선공감은 제조가 두 명이다. 정2품인 호조판서가 겸임하고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제조로 정3품의 제조가 따로 있다.
 거기에 부정, 첨정, 판관, 주부, 직장, 봉사, 부봉사, 참봉까지 1인씩이 있고 감역관 3명, 가감역관 3명에 잡직 8명, 서리 20명, 고직 2명, 사령 13명, 군사 4명에 영선만을 위해서 영선서원 18인, 사령 9명, 군사 45명까지 따지고 보면 매우 큰 조직이었다.
 궁 밖에 궐의 영선을 위해 자문감(紫門監)이라는 부속관아까지 있었다. 영선이라 함은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수선하는 일을 말한다.
 하니 이 선공감의 일이란 경복궁과 창덕궁에 창경궁까지 모두 관할하여 새로이 건축을 신축하거나 수선하는 일체의 일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부서에 성격에 따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목수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인 곳이다. 그 수야 항상 변하지만 100명 정도는 상시 운용되고 있으면 궐의 신축이나 큰 공사가 있을 때는 2, 300명 이상으로 몸집이 불어나기도 한다. 여하튼 조선에서 최고의 기술자들은 모두 이곳 부서에서 관할한다고 보면 된다.
 “손재주가 뛰어난 이를 20여 명 보내 주면 시험을 봐서 그중에 서너 명을 중히 쓸 것이다. 하니 너는 그 명단을 작성하여 상선에게 제출하라, 허면 내 따로 날짜를 잡아 시험을 볼 것이다.”
 “네! 전하 그리하겠나이다.”
 선공감 제조에게 명을 하는 것으로 일을 끝낸 인종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을 시키고 점검하는 것이 왕의 주된 업무인지라, 항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야 했다. 엄밀히 말해 죽기 전에는 그저 계절에 따라 또는 장계와 송첩된 것들을 살펴 그때그때 필요한일만을 하였다.
 일이 터지면 수습을 하는 것이 조정이었고 왕의 할 일이었지 먼저 계획을 세워 무엇인가를 추진한 기억이 없다.
 인종은 그런 과거를 생각하며 세종 대왕이 어찌하여 위대한 임금으로 후대까지 사랑받으며 존경을 받게 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 아비인 중종도 마찬가지였다. 야인이 그리 날뛰어도 그들을 항시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적당히 무마했으며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도 않았고 왜인들이 매년마다 문제를 일으켜도 그저 피해를 줄이기에만 급급했지 대대적인 소탕을 한다든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인종은 그런 안일한 통치 방식이 결국 임진년의 참화를 만들고 청의 발호에 굴욕적인 사태가 발생함을 알고 있다. 이제 새로운 통치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저 올라오는 장계나 처결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외척이 득세를 하게 되고 간신이 판을 치며 작은 벼슬 한자리라도 하게 되면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기회를 주면 안 된다. 그리고 인종은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밤이 되고 중전의 처소인 교태전으로 자리를 옮긴 인종은 수라상을 물리고 중전 박씨와 못 다한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도 못할 말을 중전에게만은 하고 싶은 인종이었다. 만약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살아간다면 속이 답답해서 없던 병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하오시면 진정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500년을 명계에서 지내신 것이옵니까?”
 “그렇소. 중전이 믿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하나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정말 답답해서 내가 미칠지도 모를 것이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진실일 것이오나, 참으로 믿기지 않사옵니다. 허면 그들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었나이까?”
 중전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인종을 바라보았다. 인종은 무엇부터 말해 주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가사는 곳이 둥그런 별로 우주에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또한 우리 가사는 별은 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저 우주에는 우리 가사는 별보다 수만 배가 더 큰 별도 있고 또한 이런 별들이 집단을 이루어 태양계를 이루고 태양계가 집단을 이루어 은하계를 이루며 이 은하계는 수억 개의 별들이 모인 것이며, 또 그런 은하계 수십억 개가 모여야 우리가 우주라 부르는 단위가 된다고 하오. 한데 말이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중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종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람의 머리에 뇌라는 것이 있는데, 이뇌가 바로 이 거대하고 무한한 우주만큼이나 경이롭고 복잡하다고 하오. 해서 명계의 존재들은 인간은 모두 머리에 우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군.”
 인종의 말에 매우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천문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던 인종이었다. 그러나 허언은 아닐 것이라 여긴 중전이었다. 하나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대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지휘 고하를, 그리고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만큼 소중하고 중한 존재라는 것이오. 하는 일은 달라도 누구나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하고 존중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소.”
 스스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은연중에 하는 인종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중전이 그런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인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허고 또 무엇을 보았나이까?”
 “중전 왜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아시오?”
 “왜라면 섬나라 아니옵니까? 양식이 없어 삼남 지방에 자주 왜구가 나타나며, 무역하기를 계속 청하는 것을 봐서는 산물이 적고 궁색한 것 같으나 스스로 국가를 칭하니 조선의 반쯤은 되지 않겠사옵니까?”
 “허허! 진정 그리 생각하시오?”
 “아니옵니까?”
 “실은 말이오. 왜국은 조선보다 크오.”
 말을 하다 말고 인종은 급히 집필 묵을 준비하게 하여 종이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그림이었지만 매우 상세한 지도였다. 인종은 저승에서 생활하며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이다. 인종에게도 너무나 충격적인 것인지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었다.
 “이것이 조선이오. 허고 이것이 명이며 이것은 왜고, 이 위쪽의 땅들은 소수민족들 여럿이 나뉘어 살지만 주인은 없는 땅이오. 허고 이곳은 색목인들이 사는 곳이며··· 이곳은 회회인(回回人)들이 여러 국가로 나뉘어 살고 있소. 허고 이 넓은 땅은 아직도 수렵과 채취만으로 살아간다고 하오. 또 이곳은 인류의 발상지인 아프리카라고 하는데 피부가 검은 흑인들이 산다고 하오. 믿겨지시오?”
 “진정! 이 작은 땅이 조선이옵니까?”
 중전 또한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소 중화라 하여 조선은 명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성하며 문명화된 국가로 여겼다. 물론 당시도 아랍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동남아에 여러 국가가 있음도 알았고, 중앙아시아에도 여러 국가나 민족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하나 야인들을 보거나 왜를 보아도 또 세상의 중심이라는 명국을 보더라도 조선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지난 중종연간만을 살펴봐도 명의 백성들도 헐벗고 굶주려 조정에서 금하는 사무역을 어떻게든지 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다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맞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땅의 크기를 보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명은 분명 크기는 하지만 그 너머에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있으며 그 크기도 결코 작지 않았다.
 “중전! 땅을 놓고 보자면 우리 조선은 작은 나라요. 하나 결코 걱정할 것은 없소. 우리는 세상 어느 나라보다 앞선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갈 것이오. 과인이 그리할 것이오. 또한 세상 모든 나라가 우러러 보는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 것이오. 하니 너무 낙담 마시오.”
 “믿습니다. 꼭 그리될 것입니다. 한데 저승에서 그 색목인이나 회회인들도 보았는지요?”
 “보았소.”
 “어떻습니까?”
 “글쎄요. 금빛 나는 모발을 한 사람부터 하얀색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붉은 모발에······.”
 말하는 인종이나 듣는 중전이나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동안 근심과 걱정에 편한 날을 지내 보지 못한 중전은 실로 오랜만에 즐거운 표정이었고, 말하는 인종 또한 즐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명계에서의 오랜 시간 동안 하루도 중전을 잊어 본 적이 없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맞이한 부인이었다.
 크면서 또 성년이 되어서도 오로지 의지할 곳이라고는 중전밖에 없었다. 중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부부 이전에 유일한 버팀목이었으며 형제였고 동무였으며 가족이었다. 또한 가장 연모하는 연인이기도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런 날을 얼마나 꿈꿔 왔던가. 신비롭거나 새로운 것을 보게 되거나 알게 되면 꼭 나중에 중전에게 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인종이었다.
 
 
 
 3. 기군망상의 죄
 
 
 인종 1년 7월 9일 4번째 기사.
 나숙 등이 인종이 명종을 해치려 한다고 한 윤원로에 대한 치죄를 청하다.
 ―실록은 사후에 편찬하기에 이미 이때에는 인종과 명종의 시호가 정해진 상태로 기사를 정리 작성한 것이다. 하여 인종과 명종이라 지칭한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羅淑)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윤원로는 본래 음사하고 흉독한 사람으로 은총만 믿고 방자하여 조금도 기탄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중종 대왕 때에 패역 부도(悖逆不道)한 말을 맨 먼저 주창하여 군부를 미혹시키고 양궁(兩宮)을 동요시키는 등 요망스럽고 간사한 말을 거침없이 날조하여 종사가 거의 위태롭게 될 뻔하였습니다. 중종 대왕께서 이를 우려하다가 병이 생겼고 증세가 날로 악화되어 마침내 평온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신 채로 돌아가셨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이 모두 원로가 그 재앙의 뿌리임을 알고 매우 통분해 하면서 그의 살점을 먹으려 한 지 오래입니다. 더욱이 지금 전하께서 망극한 일을 당하신 뒤 조정을 일신하여 새롭게 정사를 펼치시려 하는 이때에 이 사람을 잠시라도 살려 둔다면 틈을 노려 흉독을 부리고 농간을 부림이 필시 전일보다 더 심할 것이어서 인심이 위구스럽게 되고 종사를 보전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결딴을 내려 그 죄를 명백히 다루심으로써 신인(神人)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원로가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굳이 죄를 가하지는 못하겠다.”
 
 인종 1년 7월 11일 5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나숙 등이 윤원로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으나 불윤하다.
 
 대사헌 민제인과 대사간 구수담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윤원로는 본래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선왕조 때에도 부도(不道)한 말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양궁(兩宮―창경궁과 경복궁)을 이간시킴으로써 인심을 의혹시키고 조정을 위구스럽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종사의 적(賊)이요 선왕의 죄인인 것입니다. 그가 궁금(宮禁)에 의지하여 성(城)의 여우와 사당의 쥐처럼 못된 짓을 다한 실상을 위에서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죄악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지친이라 할지라도 대의로 보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속히 멀리 귀양 보내어 종사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언근을 모르고서 그 사람을 죄줄 수는 없다.”
 고 하였다.
 
 인종 1년 7월 13일 7번째 기사.
 민제인·구수담이 윤원로의 일에 대해 네 번째 아뢰었으나 불윤하다.
 
 민제인과 구수담 등이 네 번째 아뢰기를,
 “원로는 죄악이 쌓여서 밖으로 드러났으니 뒷날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조정을 어지럽게 할 것은 사세로 보아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부·육조·대간·시종들이 같은 내용으로 논계한 것인데, 굳게 거절하심이 이에 이르시니, 장차 온 나라의 인심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인심의 득실(得失)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 것이니 재삼 생각하소서.”
 홍문관과 양사에 답하기를,
 “근일 대신과 함께 의논하여 조처하려 하였으나, 대비께서 크게 상심하신 나머지 일체 수라를 들지 않으시어 몸이 크게 상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원 역사에서 명종이 등극하자마자 조정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윤원로를 탄핵한다. 며칠간을 줄기차게 탄핵하고 대전에 들어 윤원로의 죄 있음을 고변하여 결국 지쳐서 대비인 문정왕후의 제가를 받아 해남으로 귀향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한데 인종이 살아 있어도 그 일은 일어날 것 같았다. 인종은 적당히 파직시켜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온 조정이 윤원로에 대한 탄핵에 들끓었다.
 원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윤원로 하나를 희생시켜 나머지 사람들이 구명 받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이대로 윤원로를 멀리 귀향을 보내게 되면 소윤 일파에 대해 더 이상 칼을 들이대기 힘들어진다. 그 모든 죄를 윤원로가 짊어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전하! 대비마마께서 납셔 계시옵니다!”
 “뫼시라!”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사실 인종이 되살아 난 뒤 아침 문안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내관을 시켜 대신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몹시 바쁘거나 몸이 안 좋을 때는 대부분 내관을 보내 대신 아침 문안을 하는 경우가 있기에 인종도 그리한 것이다. 물론 당장에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가 껄끄럽기도 했다.
 “그간 강녕하시었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대비는 멀쩡했다. 그저 시늉만 한 것 같았다.
 “저는 무탈했습니다. 주상은 어떻습니까?”
 “소자 또한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이제 거동에 큰 불편함은 없사옵니다. 조만간 몸이 회복되면 문안 올리겠습니다.”
 “다행입니다. 문안이야 나중에 와도 됩니다. 주상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백성이 시름을 덥니다.”
 “네, 대비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인종은 차마 밝은 표정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 인사를 했으면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할 때가 왔다. 설마 창경궁에서 이곳 경복궁까지 단지 무사한지 확인만 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주상 원로를 내치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대비가 친 동기간인 윤원로를 내치라 한 것이다. 사실 인종 입장에서는 어리바리하고 욕심만 많은 윤원로보다는 윤원형을 내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인종은 다시 살아나면서 계획한 것이 있었다. 6개월, 그 6개월을 준비 기간으로 계획했다. 어차피 계획대로면 6개월 후면 소윤이던 대윤이던 외척들은 전부 조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더불어 그들과 작당한 인물들까지 전부 몰아낼 심산이었다.
 한데 자꾸 일이 꼬이고 있었다. 역사란 것은 인간과 인간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지는 것이라. 누군가의 간섭으로 쉽게 변하기도 하지만 또한 어떠한 일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 그런 일들이 간혹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인종이었다. 생각을 끝내고 인종은 정색하며 대비에게 말을 꺼냈다.
 “내치라 함은 윤원로의 죄가 참이기 때문입니까?”
 순간 대비의 눈이 부릅떠졌다. 만약 참이라고 대답하면 귀향이 아니라 사약이나 참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대비는 그를 내치라 간하면 주상이 적당히 그를 귀향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이 일을 끝낼 것이라 생각했다.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주상이었다.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는 두 사람 이었다. 주상이 변했다. 뭔지 모르지만 눈빛부터가 변한 것이다. 죽다 살아나서인가? 여하튼 참수당하는 사태는 막아 줘야 했다. 미워도 동기간 아닌가.
 “참이어서가 아닙니다. 온 조정이 며칠간 원로 하나 때문에 마비가 될 지경입니다. 어찌 되었든 인심을 잃은 것은 사실이니, 그를 이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대비로서 대신들이 더 이상 주상을 괴롭게 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원로를 내치시어 조정을 안정시키시라는 것입니다.”
 “허면 그를 더욱 내칠 수 없음이옵니다. 잘잘못을 따져 만약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대신들이 저리하는 것이라면 이는 기군망상 죄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탄핵 상소를 올리는 대신들이나 직접 고변하는 이들이나 모두 그 죄를 물을 것입니다. 만약 그 고변이 사실이라면 윤원로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 하니 대비께옵서는 이만 물러가 주시기 바랍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한참을 표정 변화 없이 앉아 있던 대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일을 축소하려다가 더 키워 버린 꼴이 된 것이다. 만약 윤원로가 인종이 명종을 죽이려 했다는 헛소문을 냈다는 것이 참으로 밝혀진다면 이는 대역죄이다. 참수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상선!”
 “네, 전하!”
 “호조참판 심연원과 도승지 송기수를 들라 하라!”
 심연원은 중종 11년부터 명종 13년까지 벼슬을 하던 사람으로 나름 처세를 바르게 하고 명망을 얻는 인물로 무사 무탈하게 관직 생활을 했다. 사화를 모두 무사히 넘기고 후일 영의정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심연원이 마침 궐 내에 있었던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으로 들었다. 그를 따라 송기수가 들어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송기수는 자신을 부른 것은 인사 명령을 하기 위함임을 알기에 조용히 인종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신 호조참판 심연원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들었사옵니다.”
 “앉으라.”
 “하명하시옵소서!”
 “너에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제수(除授)한다. 지금 즉시 의금부로 가서 군사를 이끌고 과인의 명을 집행하라, 전 영의정 홍언필, 대사헌 민제인, 영의정 윤인경, 부제학 나숙, 대사간 구수담, 첨정 윤원로, 그리고 여기 도승지 송기수를 의금부로 압송하여 구금하고 이일을 모두 마치면 보고하라. 과인이 직접 심문하여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다. 즉시 시행하라!”
 “네, 전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인종의 추상같은 명령에 판의금부사가 된 심연원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의금부로 향했다. 옆에서 멀뚱히 사태를 보고 있던 도승지 송기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종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도승지로서 마지막 명을 수행하고 스스로 의금부로 가도록 해라. 들었다시피 심연원에게 판의금부사를 제수한다. 교지를 작성하라!”
 “네, 전하!”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시시비비는 가리면 되는 것이다. 도승지 송기수 또한 탄핵에 찬동했던 사람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윤원로는 탄핵해야 할 인물이었다. 이왕이면 윤원로뿐만 아니라 윤원형에 대비까지 이 기회에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실로 조정안의 실세라면 실세인 이들이 전부 의금부에 끌려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 훈구파의 윤원형과 이기, 그리고 정순붕을 끌고 오고 사림파로 불리는 유인숙과 유관에 자신의 외삼촌인 윤임까지 끌고 와서 모두 치죄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야 권력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겠지만, 인종이 보기에 그들은 모두 악신이고 간신으로밖에 안 보였다.
 살고 싶으면 벼슬 내놓고 물러나면 될 것을 왜 그리 집착이 많은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양반들이었다.
 판의금부사가 된 심연원이 준비가 끝났음을 보고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인종은 제일 먼저 고변한 영의정 윤인경에게 하문했다.
 “영의정 윤인경은 답하라 경이 말하기를 지난 중종 대왕 연간에 윤원로가 과인이 경원대군을 해하려 한다는 거짓된 소문을 퍼트려 중종 대왕께서 밤낮으로 어린 아들을 보전하지 못할까 우려하신 나머지 심열(心熱)을 이루어 끝내 승하하기에 이르렀다고 고변했다. 맞는가?”
 “맞사옵니다.”
 “영의정 윤인경은 윤원로에게 그 말을 직접 들었는가?”
 “듣지 못했사옵니다.”
 “허면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전하 말의 시작은 중요치 않사옵니다. 말이라는 것은 바람과 같아 그 시작된 곳은 찾을 길이 없사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모든 조정 신료들에게 전해졌고, 또한 모든 조정 신료들은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원로의 형제가 많으나 특별히 원로를 들어 계달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데가 있는 것인데 근거 없는 말이 어찌 온 조정의 청문(聽聞)을 미혹시킬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믿지 않고 망설이시니 신들은 더욱 실망하고 있습니다.”
 근거도 없는 말을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는 윤인경이었다.
 “나숙에게 묻겠다. 너 또한 영의정의 의견과 같은가?”
 “같사옵니다.”
 “좋다, 그럼 묻겠다. 이중 윤원로가 거짓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직접 들은 자가 있는가?”
 이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다시 인종이 윤원로에게 물었다.
 “군기시첨정 윤원로는 답하라, 너는 과인이 경원대군을 해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린 적인 있는가?”
 인종의 말에 윤원로는 연기인지 진실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매우 강력하게 부정했다.
 “전하! 소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저들은 소신이 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음해하여 내치려 서로 짜고 고변한 것입니다. 저들을 무고죄로 처벌하심이 마땅합니다! 전하 소신은 진정 그런 망측한 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사옵니다!”
 “그런가? 과인이 영의정 윤인경에게 묻겠다. 중종 대왕 연간에 첨정 윤원로가 퍼트린 소문이라 했다 맞는가?”
 “맞사옵니다.”
 “다시 묻겠다. 한데 어찌하여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를 고변하는가? 선대왕에 계실 때 고변했다면 그때 확실히 죄의 유무를 판가름하여 처결하였을 것이다. 선대왕께서 외척이라 하여 죄를 추궁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인가?”
 “선대왕 때에 그 사실을 알았으나 차마 고변할 수 없었나이다. 대행 대왕께오서는 옥체 미령하시고 죄인이 대비마마의 동기간인지라 이를 고변한다면 망극한 일이 생길까 저어하여 차마 고변치 못하였사옵니다.”
 “그래?”
 인종은 윤인경의 말을 듣고는 일명 썩은 미소를 날렸다.
 “다시 묻겠다. 너는 처음 분명코 선대왕이신 중종 대왕께서 윤원로의 거짓된 소문을 듣고 어린 경원대군을 지키지 못할까 우려하신 나머지 심열을 이루어 승하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데 어찌 지금은 선대왕의 옥체 미령하시어 차마 고변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가! 어느 말이 참인가!”
 윤인경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결코 승복할 수 없었다. 또한 지금 상황이 이해도 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인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여기 잡혀 온 사람들도 인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고변에 응답하여 윤원로를 귀향 보내든지 사사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속으로 어찌 이런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려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영의정 윤인경이었다.
 “소문은 바람과 같아 떠도는 것이옵니다. 그 소문으로 선대왕께옵서 심열을 얻어 승하하신 것은 맞사옵니다. 하나 소문의 근원을 밝히시지도 못하였고, 또한 조정이 혼란할까 염려하시어 밝히라 명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신들 또한 그 소문의 근원이 윤원로인 것을 알았으나 차마 옥체 미령하신 선대왕께 고변하지 못했사옵니다. 하나 이렇게 전하께옵서 강녕하시고, 또한 국본까지 정하시어 새 뜻으로 조정을 일신하시며 새로운 정치를 펴려 하시니, 이제 거짓된 소문으로 전하께 대변(大變)을 당하게 한 윤원로의 죄를 물으시옵소서!”
 말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인종이었다. 사실 작년에 죽은 중종도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며 외척 간에 둘로 나뉘어 싸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절정이 바로 중종 대왕 마지막 해인 작년이었다. 하나 윤원로가 했다는 저 말이 진짜 했는지를 떠나서 중종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조금 믿기 힘들었다. 어쩌면 했을 수도 있다.
 하나 그 말이 중종의 귀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오로지 대비의 입에서 전해졌을 공산이 크다. 윤원로가 근원이라는 말은 쏙 빼고 저자에 떠도는 혹은 조정 대신들 간에 흘러 다니는 말이라며 운을 떼고 중종에게 했을 공산이 크다.
 인종을 왕세자에서 폐위시키고 경원대군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보란 듯이 인종이 사림과 대윤의 지지를 얻어 무사히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이제 소윤과 대비는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경원대군까지 한곳에 묶어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또 어떤 술수를 쓸지 알 수 없었다.
 한데 인종이 등극하고 도통 소윤 일파나 대비를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어머니로 잘만 모셨다.
 애초에 인종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바보같이 정도만을 생각하는 인물이었고 애정결핍 환자처럼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알면서도 문정왕후나 아우인 경원대군에게 차마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일로 상황이 달라졌다. 명백히 문정왕후에 의해 인종이 죽다가 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대신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경원대군이 국본으로 세워진 마당이니 소윤 일파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인종 또한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 여겨 사림과 훈구 세력 중 대윤 일파는 윤원로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소문은 있으나 그 근원은 알 수 없으며 누구도 첨정 윤원로에게 들은바 없으나 윤원로가 했다 하고, 또한 수년간 그 일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차마 고변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를 어찌 처결해야 하는가? 과인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도다. 해서 과인은 판결한다. 전영의정 홍언필, 대사헌 민제인, 영의정 윤인경, 부제학 나숙, 대사간 구수담, 도승지 송기수를 기군망상 죄를 범한 대역 죄인을 고변하지 않고 숨긴 죄로 파직하고 군기시첨정 윤원로는 왕실의 인척으로서 덕을 쌓지 아니하여 인심을 잃고 조정을 혼란하게 한 죄를 물어 이 역시 파직한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해남, 강진, 제주, 강릉 등으로 나누어 유배를 보낼 것이다.”
 판결이 끝나자 붙잡혀 온 이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간혹 인종을 부르며 아량을 베풀라며 사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강녕전으로 돌아가는 인종이었다.
 
 인종 1년 7월 14일 2번째 기사.
 전라도 전주에서 5, 6월에 큰 소가 벼락 맞아 죽다.
 
 전라도 전주(全州)에서 5월에 촌민(村民)과 큰 소가 벼락 맞아 죽었고, 6월에도 전주에서 촌민과 큰 소가 또 벼락 맞아 죽었다.
 사관이 기사에 대해 논하기를,
 마땅히 본월 기사에 썼어야 할 것이다.
 
 인종 1년 7월 15일 2번째 기사.
 전라도 함평현에서 사람 2명과 말 1필이 벼락 맞아 죽다.
 
 인종 1년 7월 16일 3번째 기사.
 경원대군이 동궁전인 저승전(儲承殿)으로 이어하시다.
 
 상께서 조정 신료들과 논의한 끝에 왕세제의 책봉식은 추수가 끝나는 10월 하순으로 날을 받아 거행하더라도 동궁의 교육은 빠를수록 이롭다 하시어 경원대군의 이어를 명하시었다.
 
 인종 1년 7월 18일 2번째 기사.
 경상도 풍기군에 큰물이 나서 사람과 가옥이 표몰되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큰물이 져서 시내 곁에 살던 민간인 남녀 8명과 온 가옥이 모두 표몰(漂沒)되었다.
 한바탕 조정에 난리를 치르고 나자 한여름인데도 궐내 에 찬바람이 불었다. 처음엔 육조대신들과 사림들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듯 자주 왕래하며 몰려다니며 떠들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명분을 중시하는 대신들이기에 적당한 명분을 찾지 못하니 더 이상 떠들기도 지친 모양이었다.
 더불어 죽다 살았다며 대비나 소윤 일파는 더욱 몸을 사리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신권이내 뭐내 떠들어 봐야 왕명 하나면 죽을 자도 살아나고 죄 없는 자도 목이 달아나는 것이 조선이었다.
 공식 행사장인 근정전 앞에는 영제교가 있다. 그곳을 지나면 궐의 정문사이에 너른 뜰이 있는데 인종은 지금 선공감 제조가 데려온 20여 명의 직급 낮은 하신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은 두 가지로 하나는 근정전을 한 자(1자 30cm) 크기로 축소하여 만들라는 것과 나머지 한 가지는 화사 최성현이 그려 준 새와 호랑이가 들어간 민화를 목판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직급을 올려 주고 중히 쓴다 하니 모두들 열성을 보였다.
 시험에 통과하는 기준은 당연히 누가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진척을 보이며 완성도 높게 만들었느냐이다. 빨리도 만들어야 하고 완성도도 높아야 한다.
 한여름인지라 뜨거운 태양 아래 모여 있지만 더운 줄 모르고 열심히 만들며 나무를 파고 있는 선공감원들이었다.
 “이각(30분) 남았소! 마무리를 하시오!”
 내관이 급조된 해시계를 보며 남은 시각을 알리자 선공감은들의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뽑힌 자들 중 근정전모형을 만드는 이들은 한양 전도가 만들어지면 그를 보고 한양모형도를 만들게 될 것이나 그 후에는 모형 배나 건축물 등을 새롭게 만들 때 미리 모형 등을 만들어 참고할 수 있게 축소 모형물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목판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현재 언문이라고 불리는 한글 이야기 책을 목판화에 새겨 대량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것을 끝내게 되면 후일 국가에서 발행할 소식지의 그림을 판화에 새기거나 그림(만화)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때 담당할 인원들이었다. 인종은 국가를 변화시키는 최우선 과제로 양민들의 교육을 생각했다.
 한데 당장 국가의 재정도 적을뿐더러 기득권층인 사대부뿐만 아니라 중인이나 양인들까지 모두 조선 시대, 그것도 신분제가 막 정착한 시기의 사람들이다.
 왕 하나가 바뀐다고 절대로 세상이 바뀔 리가 없다. 그저 왕만 사라질 위험이 크다. 인종 입장에서 보면 고고조 할아버지인 세종 대왕의 치세를 생각 안 할 수 없다.
 언로를 확대하고 국가의 큰 대사가 있으면 양인에 천인들의 말까지 경청했으며, 무엇보다 백성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한글을 창제했고, 조선만의 하늘을 가지게 해 준 할아버지였다.
 그 세종 대왕의 업적을 참조하여 하나씩 변화를 줘 가면서 바꿔 나가야 한다. 현재 언문은 사대부의 모든 아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며, 대신들 또한 사용함에 무리가 없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쉽고 편한 글이기에 중전 또한 급히 말을 받아 적거나, 가까운 친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한글을 사용한다.
 이것을 일반 양인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사용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어린 시절 가르치는 것이 좋다. 경서를 공부하기 전에 누구나 배워야 하는 기본적인 글로 정착시킬 계획이다.
 자신의 당대에는 힘들지라도 나중에 가서는 국가 공식 문자가 될 수 있게 기초는 다져 놓고 죽고 싶은 인종이었다.
 “종료하시오! 시각이 다되었소!”
 징이 울렸다. 시험을 마치라는 신호이다. 국왕이 직접 참관하는 시험이다 보니 여느 과시 못지않게 엄중하게 치러진 시험이었다. 일찍이 임금이 잡과를 직접 참관한 예가 있겠는가? 물론 임금이 직접 주재하였으니 이 경우는 별개의 경우가 되겠다.
 시험 인원도 적어서 즉시 채점에 들어간다. 모두들 자신이 작업한 것들을 한쪽에 놓고 그 뒤에서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린다. 인종은 하나씩 살펴보며 갑을병정 순으로 점수를 말하고 뒤따르는 승지가 이름과 점수를 적는다.
 어떤 이는 근정전의 뼈대만을 만든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기와까지 만들어 올린 이도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했으며 뛰어나 보였다. 역시 손재주하나는 타고난 민족이라 여겼다.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모두 완성도 높게 만들었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채점하기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판화 역시 비슷했다. 모형을 만드는 이들보다는 빠를 것을 대비해 각기 다른 그림 4장을 걸어 놓고 새기라 했더니 어떤 이는 완성도는 높지만 달랑 한 장을 완성했고, 어떤 이는 완성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3장 넘게 작업한 이도 있었다.
 채점이 모두 끝나고 즉시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는 인종의 확인을 거쳐 승지가 했다.
 “결과를 발표하겠소! 공작과 목판으로 나뉘며 각 3명씩이 선정되었소. 공작에 유인열, 한대수, 강상국이며 목판에는 권희찬, 나대만, 이진만이오. 이들은 주상 전하께서 약조하신 대로 오늘부로 종7품 직장에 명하오.”
 승지의 발표가 있자 만면에 웃음을 보이는 이들부터 탄식하는 이들까지 보였다. 말이 종7품이지 중인이라 하더라도 종7품은 결코 낮은 벼슬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이들이 평생 가도 오르지 못할 벼슬인 것이다.
 새롭게 뽑힌 이들은 화사 최성현이 머물고 있던 중향각으로 근무지를 옮기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향각은 수정전의 행각중 하나지만 33칸의 꽤 규모가 큰 행각이었다. 중향각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행각이나 전각들이 국가의 중대한 업무를 보거나 연구하는 곳이었다. 일명 학술동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수정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중향각에 짐을 풀고 승지로부터 승급 교서를 받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인종을 만나러 간 것이다. 강녕전에 이제 겨우 종7품 벼슬을 제수 받은 직장 6명이 잔뜩 긴장한 채로 인종에게 큰절을 올렸다.
 “너희는 들어라, 너희는 공작과 영선을 하는 잡직들이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당당히 종7품 직장이 되었다. 이는 너희들의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며 과인이 꼭 필요로 하는 재주를 너희가 갖추었기 때문이다. 과인은 너희들이 각별히 자부심을 가지고 왕실과 조정을 위해 충성해 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작아 보일지 모르나 이는 결코 작지 않은 일이다.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명하겠다. 공작사들은 공조에서 넘겨 주는 재료를 가지고 궁궐 축소 모형도를 만들 것이며, 그 일이 끝나면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배들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목판화사로 선출된 이들은 내관이 전해 주는 그림을 그대로 목판에 새기도록 해라 이 일은 올해 안에 끝내야 한다. 알겠느냐?”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이들이 작업하는 동안 인종은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 대왕 당대에는 국가를 반석 위로 끌어 올린 최고의 기관이었지만 그 뒤로는 유명무실해지고 사라졌다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이름도 바뀌고 사라져 버렸다.
 이유야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집현전 출신 신료들이 대부분 불복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집현전을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만들게 되면 분명 사림파에서는 대단히 호응이 좋을 것이다. 훈구파는 매우 반대할 공산이 컸다.
 그러나 인종 입장에서는 사림파도, 훈구파도 아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들을 원한다. 못해도 40여 명의 젊은 학사들을 모으려는 생각을 했다. 업무도 기존의 철학과 유교 사상을 공부하고 관련 저서를 출판하는 일이 당연히 아니었다.
 
 인종 1년 7월 20일.
 좌찬성 이언적이 언문 소학을 인출하여 경연에서 진강하게 할 것을 청하다.
 
 이언적이 아뢰기를,
 “왕세제 저하가 어리시니 급선무는 바로 보양(輔養)하는 도리인데 그 요체는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요(堯)·순(舜)의 일은 너무도 높고 멀어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지만, 진정 그 도(道)를 살펴본다면 효(孝)·제(悌) 이 두 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능히 효제의 도를 행한다면 왕세제 저하께서도 반드시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될 것인데, 효제의 도는 주 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 한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중종 조 때 소학의 법도가 꼭 세상에 시행할 만하다 하여 바야흐로 번역 인출하여 여항(閭巷)의 아녀자도 누구나 해독할 수 있게 하려고 계획하다가 불행하게도 사림(士林)의 화가 참혹하게 일어나 그 일이 정지되고 말았는데, 【이는 조광조 등이 정학(正學)으로 일세(一世)를 창도하다가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게 해를 당한 것을 가리킴.】 세속에서는 《소학》을 쓸모없는 글이라 하여 폐하고 강습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이러니 윤상(倫常)이 무너져 자식으로서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간혹 속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위로 임금에서부터 아래로 사서(士庶)까지 실로 하루도 이 책이 없을 수 없는데, 치적을 이루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방법은 다만 국본이 어떻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빨리 언문으로 풀어 인출케 하여 경연에서의 진강에 일조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본의 나이가 아직 15세도 차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다 아뢴 대로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소학》이 어찌 잠깐 익혀서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래서 나도 이 책으로 항상 교도하려고 하니, 속히 인출하게 하라.”
 
 참으로 이언적이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경원대군이 어려 한자로만 된 책을 보고서는 소학 하나 떼기 힘드니 한글로 된 책으로 우선 외우게 하면서 그 뜻을 반복 학습시키면 빠르게 익힐 것이라며 한글로 풀이된 책으로 가르치자는 말이었다.
 소학이 초반에 배우는 책이기는 하지만 사실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다.
 천자문부터가 다 떼기가 어렵기는 하다. 단순히 암기만을 한다면 하겠지만 뜻 글자이니 그 의미와 뜻을 생각하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이는 글자가 무슨 공부냐며 말하는 이도 있으나, 단순히 글자라고 보면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소통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 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을 아는 것이 공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딸랑 글 몇 자 적어 놓고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뜻을 논하라거나, 심오한 철학을 풀이하라 한다면 그건 정말 억지에 가깝다.
 스승이 있어 옆에서 가르쳐 준다면 모를까. 스승이 없거나 스승이 그 뜻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 보급이 중요하며, 한글이 더욱 뛰어난 것이다. 읽을 수만 있으면 누구나 그 의미와 뜻을 알 수 있다.
 소통의 도구로서도 깊은 문학과 철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도 한글만큼 뛰어난 문자는 없다. 배우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과인이 좌찬성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참으로 옳다. 어린 아이들은 심오한 뜻이 담긴 경서를 읽을 수 없으며 읽는다 하더라도 그 뜻을 알고 실천하기 어렵다. 해서 과인은 좌찬성에게 명한다.”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경을 집현전의 수장인 정1품 영전사에 봉한다. 경은 쪹경희궁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그 휘하로 사관 10인 성균관 유생 10인과 6조의 당하관 1인씩을 차출하여 두고, 경서의 언문해독과 출판에 매진하라. 이는 아국 조선 만백성에게 도리와 예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또한 구전되는 전래 동화와 야사를 언문으로 취합하여 엮어서 책으로 묶고 새롭게 직장에 오른 목판화사 3인을 휘하에 붙여 줄 터이니 이 또한 출판하라.”
 이에 이언적은 자신의 본래 뜻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자 몹시 당황하였으나 정1품이라는 영의정과 동급 벼슬에 집현전 수장이라는 말에 성심을 다하겠다는 말로 수락한다.
 물론 이렇게 집현전이 출발하기는 했지만 당장에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대량 출판은 어렵고 나중을 위해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주된 업무이며 목판화사 3명 또한 인종이 시킨 일이 있으니 당장은 그 일이 우선이었다.
 
 인종 1년 7월 25일.
 첨지중추부사 채세영을 북경에 보내 천추절을 하례하다.
 
 인종은 채세영에게 북경에 가게 되면 되도록 북경의 조정 상황과 주변 정세에 관해서 소상히 알아 오라고 시켰다. 더불어 타국에서 사신으로 오는 사람들과 되도록 친분을 쌓으라고도 명했다.
 아무리 인종이 미래의 일에 대해 안다고 해도 세밀한 내용
 
 쪹 본래 경희궁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1616년 선조의 아들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새문동 집터의 사저를 증축하여 만든 궁이다.
 이 경덕궁은 광해군이 건축을 시작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거처하던 창경궁이 불타자 1624년부터 이곳으로 옮겨 거처했다.
 인종은 집현전을 비롯해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발간하며 논하는 대학의 연구소와 같은 공간이 필요함을 느껴 후일 경덕궁이 들어서는 새문동 터에 살고 있던 왕실 인척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을 경희궁이라 이름 짓고 집현전과 장서각, 책을 만들고 관리하는 교서관(校書館)등을 이곳으로 이관시키라 명했다.
 까지 알지는 못했으며 각 국가의 현시대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북경은 주변 10여 국의 국가나 부족 등에서 수시로 드나들며 통교하는 이들이 항상 있으니 그들과의 교류를 통하면 수천 리 밖의 타국 사정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채세영에게 각별히 명한 것이다.
 
 인종 1년 7월 26일.
 전라도 흥양에서 왜인으로 오인하여 중국인들을 참획한 사건이 일어나다.
 
 전라도 관찰사 심광언(沈光彦)의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이 계본을 보면 흥양(興陽)에서 참획(斬獲)한 것은 분명히 조난당한 중국 배의 사람들인데 매우 경악스런 일이다. 중종 대왕께서는 혹 중국인이 표류되어 오는 경우가 있으면 극진히 무휼(撫恤)하여 쇄환(刷還)시켰는데, 지금 어찌하여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런 뜻을 대신들에게 이르라.”
 (그 계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달 19일 황당선(荒唐船) 3척이 대양(大洋)에서 태풍을 만나 파손, 흥양현 지경에 정박 중인 것을 현감 소연(蘇連)이 왜인(倭人)으로 오인하여 즉시 발포(鉢浦)·여도(呂島)·사도(蛇渡) 등 진(鎭)에 글을 보내어 원조를 구하고는 이어 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급히 그 장소로 달려가 결진(結陣)하였는데 결진하고 나니 발포 만호(鉢浦萬戶) 안지(安止)가 도착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이른바 그 왜인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려는 상황을 보고는 모두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는데, 혹 산에 올라 피하려는 자도 있었답니다. 소연과 안지가 일시에 이들을 덮쳐 공격하여 91급(級)을 참획하였고 사도 권관(蛇渡權管) 오세웅(吳世雄)과 여도 만호 풍계정(馮繼渟)도 이로 인해 특별히 제진(諸鎭)의 적로(賊路) 중 의심 가는 곳을 수토(搜討)하여 추격한바 전후 참획한 것이 모두 1백 8급이라고 합니다. 좌도 수군절도사(佐道水軍節度使) 김세간(金世幹)이 흥양의 첩보(牒報)에 따라 21일 새벽에 달려가서 친히 살펴보니 모발이나 형체가 왜적과는 아주 다른 중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인종은 이날 강녕전으로 돌아와 한참을 웃었다. 생각해 보면 딱한 일이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대신들에게야 참혹한 일이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마디 했지만, 지난봄에 중국 사신이 왔다 가면서 오는 길 가는 길에 하도 난리를 펴서 짜증이 많이 나 있던 참이었다.
 조선에서 나지도 않는 수달피인지 뭔지를 바치라고 생떼를 쓰고 갔기 때문이다. 속으로야 고놈 잘했다고 상찬하고 벼슬이라도 올려 주고 싶었으나, 겉으로는 차마 하지 못했다.
 
 인종 1년 7월 26일.
 우참찬 신광한이 일본과 강화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우참찬 신광한(申光漢)이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풍습(風濕)을 앓던 중 거듭 대휼(大恤))을 당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직무에 분주하였던 바 부증(浮證)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呈辭)하기에 이르렀는데 성자(聖慈)께서 휴식하면서 조리할 것을 윤허하셨으니, 은혜를 받기가 황송스러워 실로 미안할 뿐입니다. 신은 나라에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을 보고도 마침 병중에 있기 때문에 직접 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끝내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날 사량(蛇梁)의 변이 있자 대마도(對馬島)와 절교할 것을 의논할 적에 조정의 논의가 귀일되지 않아 절교해서는 안 된다는 자도 많았습니다만, 중종 대왕께서는 결단코 그들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국위를 보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마도가 거절당한 이래 자못 조심할 줄을 알아 해변 어민에게까지도 감히 표략(剽掠)한 적이 없었으니, 그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자신(自新)하려는 형적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도주(島主)의 위엄과 은덕이 저 간사하고 외람된 왜적으로 하여금 우리 변방에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한 섬의 이익이 오로지 강화(講和)에 있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보존하려면 화친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이 곤궁과 기아를 참으면서 사악과 간특함을 억제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액운이 극도에 달하여 큰 상화(喪禍)가 겹침에 따라 사무가 번다하여 백성들이 그 허다한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흔단이 생긴 것을 다행으로 여겨 상중에 있는 나라를 치려는 간사한 자들이 이를 빙자, 그 흉악함을 부리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비록 여기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만일 구적(寇賊)이 기아와 곤궁에 시달린다면 변방 인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일이 여기에 이른다면 조처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당초 절교를 논의할 때도 영구히 절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우리를 침범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악독함을 믿는 심리를 징계하여 그 오만한 마음을 꺾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들도 또한 우리가 필시 오랫동안 절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헤아리고 감히 와서 범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사세로 볼 때 끝내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반역을 저지른 뒤에 강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강화를 애걸할 때 타이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의 의사도 어찌 화친을 허락하고 싶겠습니까. 마땅히 예조에 계하(啓下)하신 내용대로 일본(日本) 및 대마도에 ‘절교한 이후로 약간 조심할 줄 알아서 해변 어민들까지도 살해함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죄를 두려워하여 자신(自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대들이 성심으로 덕을 닦아 오랫동안 변치 않는다면 어찌 영원히 끊겠느냐?’고 답하고, 또 온 사자(使者)에게도 이러한 내용으로 타일러서 그들의 경망 조급한 마음에 제동을 걸어 더욱 힘쓰게 한다면, 이는 행할 만한 계책인 것입니다. 또 도주가 적 왜를 방치한 채 금지시키지 않고, 항상 ‘그대 나라라고 어찌 구도(寇盜)가 없겠는가? 우리는 알 바 아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왜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비록 도주의 위엄이나 금령의 소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에서 강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를 도주의 공이라 하면서 이것으로 강화를 허락하는 한 단서로 삼으소서. 그렇게 하면 후일 강화한 뒤에도 두려워하여 금할 줄 알아서 갑자기 침범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 변경을 침범해 노략질을 할 때 이것을 가지고 죄를 돌리게 되면 저들은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잘못은 항상 저들에게 있고 정당함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니, 저들이 이 회답을 받으면 반드시 먼저 우려를 품고 조정의 처치가 알맞게 되었음을 더욱 두려워할 것입니다. 지난날 우의정 성세창(成世昌)이 비록 외방에서 종사하면서도 이를 잊지 않고 부중(府中)에 치서(馳書)한 바가 있고 모든 관료들도 기필코 강화를 허락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아무런 의견 없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널리 조정의 논의를 수렴하여 사기(事機)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신광한이 도이(島夷―섬나라 오랑캐)에 대한 처치 사항에 대해 제시한 것을 보니, 원려(遠慮)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뜻을 대신 및 병조와 비변사에 이르라.”
 하였다.
 
 이 문제는 사실 작년인 중종 39년(1544년)에 왜구 무리가 배 20여 척을 이끌고 사량진에 들어와 사람과 말을 약탈해 가서 터진 사량진 왜변 사건으로 이 사건이 터지자 그동안 크고 작은 왜구들 때문에 골치를 앓던 중종이 아예 왜와 모든 관계를 단절시켜 버린 사건으로 따지고 보면 당연히 단절해야 하고 단절을 넘어서 왜구 토벌을 명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만한 여력이 안 되었는지 그 뒤따르는 후속 조치가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마도가 문제가 됐다.
 그들은 오로지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는데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관계를 엄금해 버리니 인종이 생각해도 죽을 맛일 것이다.
 해서 인종이 신광한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신광한에게 뇌물을 몰래 바쳤던지 아니라면 신광한이 정말 미래를 생각해 대마도가 왜구 소굴이 되기 전에 그만 용서하고 왜구소굴로 변하지 않게 다독거리자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대마도와의 무역을 다시 열어 주라는 말이었다.
 인종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쉽게 허해 주면 만만하게 볼 것이고, 그렇다고 마냥 통교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사실 2년 후인 1547년에 몇 가지 조건부로 다시 무역을 허가해 주기는 한다. 인종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버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사이에 수군도 더 방비하고 내다 팔 만한 물건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대신들에게 논의해 보라하고 결정을 미뤘다.
 그런데 그날부터 며칠간 줄기차게 이곳저곳에서 상소가 올라온다. 왜적들을 저리 방치하면 필시 사단이 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름 논리 정연한 의견도 있고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지고 우선 풀어 주어 다독이고 방비하여 다시 준동할 시에는 따끔하게 혼내 주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상소를 올리는 대신이나 학자들의 왜를 바라보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왜가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니고 각 지역마다 나뉘어 있고 딱히 대표라고 내세울 만한 세력이 없기 때문일는지는 몰라도, 그들을 너무 낮추어 본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좀 큰 무리의 도적 떼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조정 대신들도 일본의 정치 체제나 권력 현황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 당시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의 영주나 지역의 세력 분포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문제라면 이런 왜의 세력들을 모두 떼를 지어 도둑질이나 하는 무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 여하튼 그들을 하나의 외교상대로 취급하지는 않은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사라진 후진적 봉건제국가인 왜가 그리 강력하거나 많은 인구수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고 또한 그들이 통일하여 하나로 뭉칠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 때문이었다.

댓글(4)

홈즈홈    
한자는 뭐하러 이케 껴넣는 것이오 ㅉㅉㅉ 시대가 어느때인데
2017.09.04 12:51
Holyman    
중간에 전혀 다른 내용이 삽입되어 있고(일해라 핫산!) , 너무 옛날말투를 잘 살리려고 하다보니 반대급부로 가독성이라던지 흥미가 떨어짐..
2017.10.29 00:41
ESTD    
고증을 떠나서 재미가 없음. 중요하지 않은 기술개발은 주절주절 길게 써놓고 윤원형 역모사건은 몇 글자로 처리해버림.
2021.04.05 14:16
다크라이    
환빠로 땅먹는건 색다르긴했지만 실록문체, 다른사람, 인종이야기가 대충 3분의 1씩 나와서 좀 복잡함. 그래서 잘 안읽히는 부분이 꽤있음. 인종이 ~하라하는건 직접 대화로, 진행되는건 백성이나 관리입장에서 보여주고 결과는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이 적은것처럼 나오는 식. 쪹같은 오탈자와 내용잘리는건 1권에 집중되있음.
2021.04.12 10:51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