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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 (1화)

2017.06.19 조회 747 추천 2


 행운공자 1권 (1화)
 서(序)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날
 
 
 자미비문(紫微碑文)
 
 一. 행운과 불행은 천칭처럼 동등하다.
 二. 일생에 단 한 번, 불행과 행운이 대가 없이 찾아올 것이다.
 三. 인연이 있는 가까운 사람은 지난 날 죄의 대가를 받는다.
 四. 단 한 명이 자미의······.
 
 
 그날은 아주 특이한 날이었다.
 백 년에 한 번 기이한 빛을 낸다는 자미성(紫微星)이 피처럼 붉은빛을 내뿜었고, 만삭이던 돼지가 뿔 달린 새끼를 낳았으며, 건장했던 숫소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사당에 걸려 있던 금줄이 툭 끊어졌고, 동네의 이름 있는 무당(巫堂)과 영매(靈媒)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을 잃고 길거리에서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인근의 영험한 사찰에선 번뇌를 떨치려는 듯 백팔 번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무당들의 절규, 사찰의 종소리, 새끼를 낳는 돼지의 기이할 만큼 째지는 울음소리.
 그 모든 게 뒤섞이며 동네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오늘은 온 세상의 불길함이 한데 모인 듯한 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은 낙양건씨세가의 장손이 태어나는 날이기도 했다.
 
 
 
 제1장 파락호 오대수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낙양(洛陽)이라는 이름의 도읍답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만 봐도 위수분지(渭水盆地) 한구석의 시골 마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예전 천년고도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남 물류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절대로 작지는 않은 지방 도시.
 딱 좋다.
 오대수(吳大手)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거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후, 여기가 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장소로다!”
 나이 서른의 파락호 오대수.
 십대 때는 죽마고우들과 도당을 결성해 천둥벌거숭이처럼 활개를 치고 다녔고, 스물이 넘었을 때는 흑선파(黑旋派)라는 제법 멋진 이름의 전국구 방파에 소속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에게는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꽤나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주먹질을 그다지 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흑선파에서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했던 것은 전부 그 재능 덕분이다.
 아마 일만 술술 풀렸다면 입파(入派) 십 년째에 흑선파의 지부 하나쯤 맡았을 텐데.
 그런데 갑자기 흑선파에 총사(總師)랍시고 들어온 인간 하나가 그의 앞날을 떡하니 막아 버렸다.
 앞으로 내부의 일은 자기가 다 관리하겠다면서 지휘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리더니, 느닷없이 오대수에게 흑선파의 비밀 장부를 덥썩 맡겨 버린 것이다.
 생각없는 놈이었다면 드디어 신임을 얻었다고 좋아하면서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대수는 아니다.
 그는 장부를 받는 순간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장부에는 뭔가 큰 비밀이 있다.
 그걸 뒤집어쓸 것인가.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도망칠 것인가.
 오대수는 후자를 택했고, 표국을 통해 장부를 되돌려 보낸 뒤 그 길로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장소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낙양.
 인근에서 흑선파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땅은 적룡보(赤龍堡)가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는 낙양밖에 없던 것이다.
 오대수는 품 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주변의 풍경을 감상했다.
 시장통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소리 높여 상품을 권유하는 장사치들과 지글지글 끓는 기름에서 튀겨져 나오는 온갖 먹거리들까지.
 “여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구만.”
 오대수는 흡족하게 웃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돈이 많이 지나다닌다는 소리고, 그런 곳엔 어김없이 기회가 있는 법 아니던가.
 오대수의 눈에는 그들이 모두 돈으로 보였다.
 나이 서른.
 신체 강건하고 인생 경험도 어느 정도 있으며 의지도 불타오른다.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흑선파에서 나오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았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나왔을 것을.
 오대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다리 밑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거지 떼를 발견하고 눈빛이 변했다.
 “허어?”
 험난한 시기다.
 게다가 올해에는 큰 가뭄이 들었기에 거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거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구걸을 다니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서 있는 다리 밑의 광경은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다리 밑 공터에 거지 떼가 잔뜩 모여 있는데, 대부분 십대 초반의 어린아이들이 아닌가.
 그 아이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뭉쳐 있었다.
 “뭐야, 저놈은?”
 오대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봤다.
 군계일학도 이런 군계일학이 없다.
 새카맣게 때가 탄 누더기들 속에서 푸른색 비단옷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주변의 거지 아이들과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 소년이었다.
 얼굴도 깨끗하고 생기기도 꽤나 잘생긴 소년이다.
 나이는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처음엔 거지 아이들이 몰매를 놓고 돈을 뺏으려나보다 했는데, 가만히 보니 돌아가는 분위기가 요상했다.
 험하게 굴러먹었을 어린 거지들의 눈빛이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마냥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던 것이다.
 “허어.”
 오대수는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흑선파의 파락호들이 대형을 바라보는 눈빛이 바로 저랬다.
 “요새 거지 왕초는 벌이가 저렇게 좋은가?”
 오대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거지들 좀 부린다고 비단옷을 입고 살 만큼 잘 벌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온갖 사람들이 다 거지 왕초가 되려고 할 날도 머지 않았다.
 하층민의 희망!
 모든 사람들이 되고 싶은 선망의 직종, 거지 왕초!
 “흐핫핫! 생각만으로도 웃기는구만.”
 그때, 오대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거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다리 위와 다리 밑.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으음?”
 오대수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왠지 모르게 뒷골이 서늘하다.
 소름이 쭈뼛 돋고 양팔의 솜털이 곤두섰다.
 뭔가가 달라졌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는지는 모른다.
 오대수는 괜히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 보았다.
 소매 깊숙이 숨겨 둔 전낭도 만져 보고, 발목 언저리에 묶어 둔 비도 몇 자루도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런 씨불. 뭐야, 이거?”
 눈이 마주치는 동안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이쪽을 응시하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거지 아이들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이다.
 묘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별일이 아닌데 희한하게 마음이 찝찝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를 빼앗긴 것처럼.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미쳤나?”
 오대수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려서 정신을 차렸다.
 힐끗 다시 한 번 쳐다보자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등 뒤에 메고 온 봇짐에서 주먹만 한 만두를 꺼내 주변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뭐야, 결국 먹을거리를 나눠 줬을 뿐이구만.’
 부잣집 도련님의 일시적인 동정이었나 보다.
 아마 저 꼬마 거지들도 지금은 고마워하지만, 한 몇 년 지나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진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하며 부잣집 아들의 뒤통수를 쳐서라도 돈을 빼앗고 싶어질 것이다.
 오대수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바로 그랬으니까.
 “카악, 퉤! 눈만 배렸네.”
 그는 구시렁거리며 몸을 돌렸다.
 오른발을 성큼 내딛었는데, 뭔가가 질퍽하니 달라붙었다.
 “엇?”
 뭔가 싶어서 보니까 둥그렇고 시커먼 게 그의 발밑에 깔려 있었다.
 “으악! 똥?!”
 척 보니 말똥이다.
 관도를 지나가던 말 한 마리가 똥이라도 싼 모양.
 “이런 씨불. 재수가 없으려니.”
 그런데 오대수의 불행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발밑의 상태를 보려고 오른발을 들어 올렸는데, 때마침 옆에서 급하게 달려가던 어떤 여인의 발목 언저리에 발이 척 하니 닿고 말았다.
 “어? 꺄, 꺄아아악―!”
 꽃다운 여인네의 발목에 말똥을 발라 놨는데 어느 누가 참을 수 있을까.
 “뭐야, 종 매(妹)! 무슨 일이야?!”
 여인은 비명을 질렀고 동행으로 보이는 사내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두 눈을 활활 불태웠다.
 오대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려 했다.
 “아, 아니, 잠깐. 미안하오. 이건 실수였······!”
 “이런 더러운 새끼가!!”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왼쪽 눈두덩이가 번쩍했다.
 “끄악!”
 오대수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주먹이 어찌나 빠르고 매서운지 도저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오대수는 땅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치는 순간에 속으로 절규했다.
 말똥을 밟은 것도 억울한데 주먹질까지 당한다고?
 세상에 어찌 이런 불합리한 일이?!
 하지만 오대수의 불행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첫 번째 불행은 오른쪽 발밑에 질펀할 만큼 많은 양의 말똥이 묻어 있던 것.
 두 번째 불행은 주먹질을 한 사내의 힘이 오대수의 몸을 뒤집어 버릴 만큼 강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불행은······ 주변의 관도에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
 발에 찐득한 물질을 잔뜩 묻힌 채 양발을 힘차게 차올리며 뒤로 넘어져 버린 오대수.
 그 결과는?
 간단했다.
 말똥이 하늘에서 내렸다.
 마치 검은 눈처럼.
 “끄아아악―!”
 오대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몰매를 맞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삼십 년 인생을 통틀어서 최고로 재수없는 날이라고.
 그리고, 그의 머릿속엔 왠지 모르게 푸른색 비단 옷을 입은 소년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석양이 지는 관도의 한가운데서 오대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온몸이 욱씬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보름 이상은 움직이지 말고 정양해야 할 상처다.
 “이런 씨불.”
 오대수는 저려 오는 뼈마디를 꿈틀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낙양에 온 게 불과 몇 시진 전이건만, 대체 왜 이런 꼴이 된 것일까.
 “우라질 말똥.”
 결국 원인은 그거다.
 어떤 소년의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소년을 탓하는 건 분풀이에 불과하다.
 오대수는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짜르르 울렸다.
 한 걸음을 내딛고, 온몸을 떨면서 전율하고.
 한 걸음을 내딛고, 다시 온몸을 부르르 떠는 과정을 반복했다.
 “크허, 내가 왜 이런 꼴을!”
 다리에 끝에 이르러서 오대수는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떨구고 말았다.
 겨우 삼 장 남짓한 다리를 건너는 데 일각이나 걸렸다.
 위수분지 동쪽에선 나름대로 알아주던 흑선파의 오대수가 거지들이 사는 다리 위에서 골골대는 노파처럼 기어다니다니.
 그는 밀려드는 서러움에 털썩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썩였다.
 짤랑―
 “엇?”
 그때,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에게 동전을 던져 주었다.
 짤랑거리며 데굴데굴 굴러온 동전이 오대수의 무릎에 부딪치며 멈춰 섰다.
 ‘이건, 설마······?’
 오대수는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있던 인상 좋은 중년 사내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부처님의 미소를 짓더니 척 하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으허엉!”
 자신도 모르게 통곡이 흘러나왔다.
 죄없이 얻어맞은 것도 억울한데, 이젠 거지 취급까지 받는 건가!
 그런데 그 통곡을 들은 것인지, 주변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동전을 하나씩 던져 주기 시작했다.
 “쯧쯧, 젊은 사람이 안됐구만.”
 “아까 보니 걸음도 불편하던데, 어디 다쳤나 보지?”
 “힘내게. 힘든 세상이라도 꿋꿋이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게야.”
 덕담과 함께 던져 주는 동전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새 스무 개 가까이 되었다.
 아까 몰매를 놓던 사람들은 떠난 지 오래다.
 뒤늦게 다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 오대수는 그저 불쌍한 거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끄으으······!”
 오대수는 통곡을 멈추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은 거지가 아닌데.
 그럼에도 덕담들이 너무나 따뜻해서 차마 아니라는 말이 안 나온다.
 “아저씨.”
 툭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오대수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푸른색 비단신을 보았다.
 하늘을 닮은 푸른색 비단에 새하얀 버선.
 쭉 시선을 올려보니 신발과 똑같은 푸른색 비단에 하얀색 수실로 장식된 소맷자락이 보였다.
 그리고 생전 햇빛을 못 본 것처럼 새하얀 얼굴에 새카만 눈동자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너는?!”
 오대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곧바로 비실비실 반쯤 주저앉았다.
 “끄어어······.”
 무릎이 가운데로 모였고 허벅지는 경련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렸다.
 몰매를 맞아 전신에 성한 곳이 없는 오대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그를 덮친 것이다.
 “쯧쯧.”
 “불쌍한 사람이로세.”
 짤랑거리는 동전이 더욱 빨리 쌓인다.
 오대수는 잠시 울상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 눈매를 험악하게 굳혔다.
 “너, 너, 너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은 거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비단옷의 소년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이 그 소년 때문은 아니라고 이미 결론을 내렸던 오대수였으나, 막상 소년을 직접 마주하자 원망부터 튀어나왔다.
 이유는 모른다.
 왠지 이 모든 것이 소년의 탓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크윽, 너때문에 나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쓰러지려는 오대수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아 주었다.
 소년이다.
 유난히 눈빛이 영롱한 소년이 오대수의 손을 붙잡고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어리광 피우지 말아요.”
 “······뭐?”
 “남 탓할 일이 아니에요. 아저씨는 예전에 나쁜 짓 많이 했죠? 오히려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예요.”
 “뭐어?”
 그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는 것은 오대수가 실제로 파락호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백마사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누구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어요. 지금의 불행은 다 과거의 잘못에서 오는 거라구요.”
 “허어?”
 “점심시간인데 일단 같이 식사나 해요. 골목 뒤에 소면이 맛있는 객잔이 있어요.”
 오대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소년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소년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막무가내.
 작은 체구지만 대장부처럼 보이는 뒷모습이 눈에 새겨진다.
 ‘이런 씨불. 뭐가 이렇게 당당해?’
 뭔가가 잘못되었다.
 왠지 억울하다.
 뭐라도 얻어먹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대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네가 사는 거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대수는 뒤뚱거리며 따라가려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우선 서른 개가 넘게 쌓여 있는 동전들을 허둥지둥 주워 담았다.
 “······버리기는 아깝잖아.”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대수는 오리처럼 엉덩이를 쭉 내민 채 삐쭉빼쭉한 걸음으로 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 * *
 
 원래 누군가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식욕을 돋우는 법이다.
 싱싱한 야채를 아작아작 소리가 나도록 씹어 먹는다든지.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뜨끈한 국물을 탱탱한 면발과 함께 빨아들인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소년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타고난 듯했다.
 겉으로 보기엔 별거 없는 평범한 소면인데, 소년이 먹는 모습을 보자 천하일미(天下一味)를 먹는 것처럼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심지어 오대수는 이미 같은 음식을 두 그릇째 먹고 있는 도중인데도 말이다!
 “도대체······.”
 후루룩― 후루룩―
 “너는······.”
 쩝, 쩝, 후루룩―
 “쩝, 누구냐?”
 오대수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가 작아져 있었다.
 입맛을 다셔야 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면을 깨끗이 다 건져 먹은 뒤, 소면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며 되물었다.
 “제 정체가 왜 중요해요?”
 “중요하지! 당연히!”
 “왜요? 우린 아까 다리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데?”
 “끄응,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거잖아!”
 “제가 뭘 어쨌는데요?”
 “······.”
 오대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이 아이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뭐가 있는데······.’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오대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너 맞지?”
 “뭐가요?”
 “너 맞잖아!”
 윽박질러 봐도 소년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러니까 뭐가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끄응······!”
 “그럼 아저씨는 누군데요?”
 “엉? 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려면 자기부터 밝히는 게 예의죠.”
 탕!
 소년은 국물마저 싹 비운 그릇을 박력있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살짝 치켜든 턱 선에서 고귀한 기품이 감돈다.
 “아저씬 이름이 뭐죠?”
 “오, 오대수.”
 “하는 일은 뭐예요?”
 “······.”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구나.”
 오대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냐, 인마.”
 “아니긴. 분명히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짓 많이 했을 거야.”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대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럼 하는 일이 뭔데요?”
 “······.”
 “거 봐요. 남들한테 피해 많이 줬을 거라니까.”
 오대수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린 채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
 소년에게 이상한 박력만 없었다면 당장 식탁을 들어 엎었을 것이다.
 흑선파 오대수.
 오늘 많이 참는다.
 “그럼 넌 인마!”
 “네?”
 “넌 이름이 뭔데?”
 소년은 표정 한 번 안 바뀌고 거절했다.
 “안 가르쳐 줄래요.”
 “왜!!”
 “내 맘이죠.”
 소년은 태연하게 찻물을 들이켰다.
 “이런 씹어먹을 건방진 강아지 같은 놈을 봤나. 약속해 놓고 왜 넌 안 말해?”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난 약속한 적 없어요.”
 “뭣? 너, 인마. 치사하게······!”
 오대수는 울화가 나서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탕!
 그가 벌떡 일어나서 탁자를 내려치는데, 소년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오싹!
 “어······?”
 새카만 눈동자에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오대수는 뒷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쭉― 끼치는가 싶더니, 등골을 타고 자르르 올라온 진동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이, 이 느낌!!’
 분명하다.
 몰매를 얻어맞기 직전에 다리 위에서 느꼈던 그것과 똑같은 감각이다.
 빠져나간다.
 분명히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
 “우, 으헛?”
 양팔에 오톨도톨하게 일어난 닭살을 매만지던 오대수는 문득 본능적으로 객잔 밖을 쳐다봤다.
 우연일까?
 새카만 바지에 소매가 없는 검은색 배자를 입고, 오른쪽 손목에는 검은색 천으로 매듭을 묶어 놓은 자들이 마침 객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흐, 흑선파!”
 오대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십 년을 몸 담았던 곳이다.
 그 특이한 복색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확신을 하고 나니 의문이 일어났다.
 흑선파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여기에 있다가 들키면 적룡보에게 묵사발이 날 텐데.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절대로 흑선파는 낙양에 올 수가 없거늘!
 “서, 설마?”
 오대수는 조금 전과는 달리, 목숨을 위협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던 흑선파의 행동대장 몇 명이 멍하니 탁자 앞에 서 있던 오대수를 발견하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비릿한 미소를 보자 확신이 들었다.
 저들은 자신을 잡으러 왔다.
 넓고 넓은 낙양땅에서.
 하필!
 그가 소면을 먹고 있던 바로 이 객잔으로!
 “허허······.”
 오대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은 딱 한 마디뿐이었다.
 “씨불, 재수 옴 붙었네.”
 오대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저씨.”
 “어, 어?”
 “아저씨, 왜 그래요?”
 소년은 오대수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쳐다봤다.
 “혹시 누구한테 쫓기고 있어요?”
 “그, 그게······.”
 오대수는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흑선파의 파락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가장 앞에 있는 행동대장은 전표(奠豹)라는 놈인데, 자기가 때려눕힌 사람의 귀를 잘라 모은다는 소문이 나서 이귀(耳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주 잔인하고 변태 같은 놈이었다.
 지붕을 펄쩍펄쩍 넘어다닐 만큼 몸이 날래고, 특히 비도(飛刀) 솜씨는 십 장 밖의 솔방울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정확하다.
 ‘빌어먹을, 저놈이 총사한테 붙었구나.’
 오대수는 명년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멀쩡해도 상대할까 말까인데, 이런 성치 않은 몸으로 전표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전표의 뒤에는 덩치 좋은 놈이 세 놈이나 더 붙어 있지 않은가.
 ‘우라질, 빌어먹을, 씨불!’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전표는 발목에 숨겨 둔 비수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아저씨?”
 “어이, 꼬마야. 잘 들어라. 네가 나한테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제 장난은 끝이야. 여긴 위험해질 테니 얼른 뒷문으로 나가.”
 오대수는 오른쪽 손바닥 아래에 비수를 감추며 왼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가라고요? 왜?”
 “위험해진다니까.”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소년이 오묘한 눈빛으로 오대수를 바라봤다.
 “걱정은 무슨. 너 같은 밉살스런 놈을 내가 왜.”
 “그럼 왜 나가라 그래요?”
 “이런 씨불,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나가라면 나가면 되지! 건방진 애새끼, 칼에 배때기가 찔려 봐야 말을 들을래? 앙?”
 파락호 시절의 말투를 쓰면서 위협을 했는데도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쪽이 기가 질릴 만큼 깊은 눈빛으로 오대수를 응시한다.
 ‘무슨 애새끼가 이렇게 겁대가리가 없어?’
 오대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꼬맹이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아저씨, 좋은 사람이네?”
 “뭐?”
 “마음이 바뀌었어요. 따라와요.”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문을 향해 통통 튀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야, 인마. 너 혼자 가라니까. 따라가긴 어딜······.”
 오대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갑자기 객잔 앞이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길 건너에서 객잔을 향해 다가오던 흑선파 파락호들도 중간에 멈춰 서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붉은색 바지를 입고 머리엔 흰색 두건을 쓴 장한들이 속속들이 몰려와 객잔 앞에 진을 친다.
 하나같이 흉터를 몇 개나 새기고 있는 험악한 얼굴에 목 뒤엔 용의 비늘 같은 문신을 새기고 있었는데, 세 명이 다섯 명이 되고, 다섯 명이 열 명이 되자 순식간에 거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적룡보(赤龍堡)!”
 오대수는 넋이 나가 버렸다.
 낙양의 뒷골목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흑도의 대방파, 적룡보.
 느닷없이 그들이 나타나 흑선파를 가로막은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갑자기 죽을 위기에 처하는가 싶더니, 절박한 순간에 짠! 하고 누가 나타나서 그걸 막아 준다고?
 “아저씨!”
 “어, 어?”
 “빨리 와요. 늦으면 안 돼요!”
 소년이 뒷문 쪽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민 채 손을 몇 번 흔들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오대수는 냉큼 뒷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근육통이 가시질 않아서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그래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린 보람이 있는지 뒷문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뒷문은 경첩에 녹이 슬었는지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잠깐!”
 툭.
 “흐어억?!”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오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쯤 주저앉고 말았다.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흑선파인가?
 어느새 객잔 안으로 뛰어들어서 자신을 붙잡은 것인가?!
 “뭐, 뭐냐!”
 감춰 뒀던 비수를 꽉 움켜쥐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커다란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한 육체를 지닌 사내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툼한 손이 어깨를 갈퀴처럼 파고든다.
 척 하니 내민 손바닥이 오대수의 코앞에 다가왔다.
 “돈.”
 “······어?”
 “돈 내고 가셔야지, 손님.”
 혼란은 잠시.
 오대수는 격앙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씨불!”
 “뭐요?”
 “지가 내기로 해 놓고!”
 닫혀 있는 뒷문을 열고 소리치려 했지만 어깨를 움켜쥔 두툼한 손바닥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돈.”
 “젠장! 그깟 소면, 얼만데 그래!”
 “뭐라? 지금 감히 우리 객잔의 소면을 우습게 보는 거요?”
 숙수인지 객잔 주인인지 모를 사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우람한 이두박근이 상의를 터뜨릴 듯 꿈틀거렸다.
 전직이 차력사라도 되는 건지, 새끼손가락만으로 호두를 까부술 것 같은 이두박근이다.
 “씨, 씨불.”
 오대수는 대번에 기가 죽어 버렸다.
 ‘내가 몸만 멀쩡했어도!’
 오대수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호기를 부렸다.
 “그, 그래서, 얼마냐고!”
 “세 그릇이니까 동전 서른세 문.”
 “낸다, 내! 그깟 돈, 낸다!”
 오대수는 투덜거리며 전낭을 열었다.
 절대로 이두박근 때문에 내는 게 아니다.
 반평생을 지켜 온 올곧은 양심 때문이다!
 짤랑― 짤랑―
 전낭은 제법 묵직했다.
 마침 좀 전의 의도치 않았던 구걸(?) 덕분에 동전은 많았다.
 “하나, 둘, 셋, 넷······ 어?”
 오대수는 전낭 안에 대충 쑤셔 넣어 놨던 동전들을 세면서 점점 눈이 커다래졌다.
 “어, 어어······?”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른셋.
 “······말도 안 돼!”
 오대수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큰 바위 같은 얼굴을 지닌 사내는 동전을 꼼꼼히 다시 셌다.
 “서른셋.”
 짤랑―
 돈을 챙긴 사내가 어깨를 놓아주며 뒤로 물러섰다.
 “계산했소. 조심해서 가시오.”
 삐걱거리면서 움직인 문이 쾅! 하고 닫힌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뒷골목에 발을 디딘 오대수는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서른셋······ 서른셋······ 서른셋······.”
 그는 마치 자신이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말똥을 밟고, 몰매를 맞고, 구걸을 하고, 소면을 먹고, 흑선파에 쫓기고, 적룡보가 구해 주고.
 참으로 다양하다.
 오늘 하루 일진이 대체 왜 이런 걸까.
 아니, 어쩌면 흑선파에서 도망치듯이 나와 낙양 땅을 밟았을 때부터 뭔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소면 세 그릇의 가격이 서른셋, 다리에서 주운 동전도 서른셋?”
 그토록 많았던 동전이 이젠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오늘 주운 동전과 쓴 동전.
 두 개의 숫자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어떤 운명의 장난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가.
 하늘의 악의(惡意)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어이, 우연이지? 그렇지?”
 오대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어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푸르딩딩한 꼬맹이가 손을 흔들 뿐이다.
 “아저씨, 빨리 오라니까요!”
 오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씨불.”
 
 * * *
 
 적룡보라는 곳은 무림문파가 아니다.
 낙양 땅과 그 인근 스물두 개 마을의 상권을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파락호들이 모여 있는 흑사방에 불과했다.
 낙양에는 그곳을 관리하는 명문세가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낙양건씨세가가 있고, 해검진가(解劍秦家)와 협도이가(俠刀李家), 맹창벽가(猛槍碧家)가 있었다.
 무림문파라 자신있게 칭하기엔 세가에 상주하는 무인들의 숫자가 적은 곳들.
 그래도 모두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래된 명문이며, 그들이 가진 인맥과 힘 역시도 흑사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출중한 세가가 네 개나 있는 땅에서 적룡보가 낙양의 상권을 관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명문세가들은 주변 상가에서 직접 보호비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호비를 받는다는 것은 주변 상가들을 지키는 것에 대한 생색을 낸다는 것인데, 협의(俠義)를 따르는 정도문파로서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정도무림인으로서 주변의 이웃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자들은 무력으로 징치해야 한다.
 하지만 명문세가가 관부의 포졸마냥 항상 상가를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객잔이나 기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벌어지는 일들.
 도방에서 벌어지는 싸움, 시전에서 일어나는 다툼.
 그런 싸움엔 협의가 없다.
 어찌 명문세가 무인들이 그런 곳에 끼어들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대리인이 필요했다.
 상가의 사람들을 지켜 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싸움을 다스리는 자들 말이다.
 네 개의 명문세가는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뒤, 당시 낙양에서 암중에 활동하던 흑사방 중 파락호이면서도 민초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의협심(義俠心)이 있던 적룡보의 활동을 용인했다.
 무림의 싸움은 세가의 몫.
 민초의 관리는 적룡보의 몫.
 강인하고 사납지만 절대로 민초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오히려 외지의 패악한 자들을 스스로 나서서 징치하니, 백성들은 적룡보를 한 가족처럼 아끼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적룡보를 허용한 낙양의 세가들에게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위수분지에 있는 흑선파나 화북평원(華北平原)의 혈화방(血華房) 같은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적룡보는 최소한의 보호비만 걷었고, 다른 파락호들이 얼씬도 못하게 사시사철 사람들을 지켰다.
 그렇게 오십여 년.
 전국에 유례가 없을 만큼 역사가 길어진 적룡보는 흑사회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설마, 이곳은?”
 얼굴이 잔뜩 굳은 오대수는 덜덜 떨리는 입술만큼이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저씨?”
 “너, 너, 왜 여기로 온 거냐? 아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오대수는 복화술을 하듯이 이를 악문 채 물었다.
 그런데 소년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여기가 왜? 그냥 아는 곳인데?”
 “너 같은 어린애들이 알 만한 곳이······ 휴우, 아니지. 화를 낼 일이 아니지. 평범한 꼬마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으니. 혹시 너, 여기의 보주와 무슨······.”
 오대수가 본격적으로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보는 사람이 위압감을 느낄 만큼 지붕부터 입구까지 온통 새카맣게 옻칠이 되어 있던 전각 안에서 칠 척의 거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도련님!”
 “석웅(石熊)?”
 “으하하! 오늘은 오시는 날이 아닌데 어쩐 일이십니까? 도방(賭房)에라도 가고 싶으신 겁니까?”
 밤송이 같은 수염을 가진 칠 척 거한은 온 골목이 떠나갈 것처럼 큰 목소리로 웃으며 소년을 반겼다.
 붉은 바지에 흰색 두건.
 그것만 봐도 상대가 적룡보의 일원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양팔은 쇳덩이를 연상시킬 만큼 강인해 보였고, 목덜미 부근에서 불끈거리는 근육과 태산처럼 넓은 어깨에선 장대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분명히 싸움도 잘할 것이다.
 평범한 졸자들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그런 사람이 소년에게 깍듯하게 대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꼬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오대수는 석웅이라 불린 거한이 성큼 다가와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석웅의 웃고 있는 얼굴에선 엄청난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응? 그런데 도련님, 이 사람은 누굽니까?”
 소년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던 석웅이 오대수를 발견하곤 고리눈을 크게 떴다.
 오대수는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아, 저는······.”
 “쫓기고 있는 아저씨야.”
 소년이 대뜸 내뱉은 말에 오대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적룡보에 몸을 의탁할 마음으로 낙양에 온 사람이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첫인상부터 안 좋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꼬마가 결국 내 앞길을 막는구나!’
 “무슨, 그런······.”
 “객잔에서부터 쫓기고 있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잡혔을 거야.”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 도망쳤을 거다!”
 “그 몸으로?”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오대수의 입이 꿀먹은 벙어리마냥 붙어 버렸다.
 그는 석웅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쫓기고 있다고?”
 지옥의 야차처럼 낮은 목소리.
 섬뜩한 시선이 그를 향한다.
 오대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심정으로 주춤주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쫓기고 있는 거요?”
 “흑선파에서 저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으헉!”
 콰앙!
 석웅의 주먹을 얻어맞은 건물 벽이 썩은 나무둥치마냥 박살 나서 흩어졌다.
 “흑.선.파?”
 “그,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오대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과 무슨 관계이기에 쫓기고 있는 거요?”
 “······.”
 “혹시 한패였소?”
 오대수는 갈등했다.
 철근도 씹어먹을 것 같은 석웅이란 사내는 흑선파에 원한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좋은 것일까?
 나중에 밝혀질지언정 일단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었다.
 “내, 내부에서······.”
 “내부에서?”
 “······장부 관련된 일을 조금.”
 “장부우?”
 성큼 걸음을 내딛은 석웅의 두 눈이 오대수의 이마 앞까지 다가왔다.
 성질이 난 숫소처럼 뜨거운 입김이 코에 닿았다.
 “장부라는 게 혹시 돈 계산한 것들을 적어 놓는, 그 장부를 말하는 거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 흑선파의 돈 거래 내역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뜻이네?”
 오대수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이것 봐라?’
 석웅은 덩치만 봐선 우둔한 듯 보이지만, 절대로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장부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이 순간에 하는 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얼마 전에 이층 전각을 산 것부터 시작해서 근처에서 속곳 하나 산 것까지 다 꿰고 있습니다!”
 “호오, 그 정도로 자세하게?”
 “이래 봬도 그쪽으로 제법 재능이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흑선파가 요새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건 새로 온 총사가 하는 짓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보주님께서 관심이 있어 하실 이야기를 한 가지 알고 있어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매담자(賣談者)들이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듯이.
 하지만 마지막 말이 실수였을까?
 처음엔 흥미로운 듯이 잘 듣고 있던 석웅이었으나, 갑자기 슥―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차가운 눈빛이 되었다.
 “보주님께 말씀드릴 비밀을 나에게 말하면 쓰나.”
 ‘실수다! 정말로 충성스러운 자야!’
 오대수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버림받으면 뒤쫓아온 흑선파 놈들에게 귀가 잘릴 것 같아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아직 말하지 않았소!”
 “비밀이 있다는 것도 비밀인 법이지.”
 “그러니까, 당신한테는 괜찮은 거잖소! 척 보니 적룡보주의 충신이구만!”
 “글쎄, 어떨까? 내가 충신이라는 걸 알고 말했으려나?”
 석웅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오대수는 속이 탔다.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는 얼굴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의 눈빛에선 얼핏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잔인한 냉정함마저 감돈다.
 ‘죽었구나.’
 오대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석웅, 너무 놀리지 마.”
 “흐흐. 알았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들어야죠.”
 한겨울 칼바람처럼 싸늘했던 석웅의 표정이 눈 녹 듯이 사르륵 녹아내리더니, 곧바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 모습에 오대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이 꼬마가 누구기에? 설마 적룡보주의 아들이라도 되는 거야?’
 처음엔 설마 했던 상상이 현실감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십쇼. 보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고, 오대수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쿵!
 육중한 문이 닫힌다.
 오대수에게 있어선 오늘 재수가 없던 날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날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세 사람이 사라진 뒷골목.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어두운 골목길을 쓰다듬었다.
 
 
 
 제2장 신투(神偸) 장일봉
 
 
 뀨에엑―! 뀨에엑―!
 흔히 돼지 울음소리를 귀가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라고 표현한다.
 누가 처음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지당한 말이다.
 돼지의 울음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시끄럽다 못해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뱃심이 두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만큼 처절하게 우는 건지.
 목장지기 장씨는 두툼한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돼지 우리를 땅! 소리가 나게 때렸다.
 “조용히 안 해! 귓구멍이 찢어지겠다!”
 뀨에엑―! 뀨에에엑―!
 “이게, 더 시끄럽게 우네? 한 번 해보자, 이것이여?”
 땅! 땅! 땅!
 대나무 막대기를 미친 듯이 휘두르자 그제야 돼지가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진 건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퍽!
 장씨가 기대고 있던 대나무 울타리를 뚫고 이내 새카맣고 뾰족한 무언가가 위협적으로 솟구친 것이다.
 “으헉! 이 돼지가 미쳤나?!”
 장씨는 기겁했다.
 그의 동작이 조금만 더 느렸더라면 엉덩이에 구멍이 하나 더 뚫렸을 것이다.
 “너, 인마! 대길(大吉)이! 너무한 거 아니냐! 같이 산 게 몇 년인데 누구 엉덩이를 뚫어 놓으려고······.”
 퍽!!
 “으헉! 인마!!”
 퍽! 퍽! 퍽!
 성질을 부리듯이 솟구친 뿔은 주변의 대나무 울타리를 세 번이나 더 뚫어 놓은 뒤에야 멈췄다.
 장씨는 잔뜩 긴장한 채 구멍이 뻥뻥 뚫린 대나무 울타리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울타리 안에는 새카맣고 커다란 돼지 한 마리가 흥분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그저 평범한 돼지 우리의 모습이었을 텐데, 그 흑돼지의 머리에는 소죽(小竹)만 한 두께에 손바닥 한 뼘 반만 한 길이의 새카만 뿔이 돋아나 있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기함을 토했을 것이다.
 뿔 달린 돼지라니.
 아무리 대륙은 넓고 세상엔 온갖 일이 다 벌어진다지만, 쉬이 볼 수 없는 기사(奇事)다.
 장씨는 달래듯이 물었다.
 “인마, 도대체 왜 그래? 뭔 일이 있었어?”
 뀨에에엑―! 뀨에에엑―!
 “너 열세 살이라며? 세가의 도련님이랑 같은 나이라던데······ 참 오래도 산다. 보통 돼지들은 몇 년 안 키우고 잡아먹어. 넌 되게 운 좋은 거야, 인마.”
 뀨엑!!
 퍽!
 다시 한 번 뿔이 튀어나왔다.
 “으악! 알았어! 인마! 내가 잘못 말했다! 잘못!”
 퍽! 퍽! 퍽!
 “돼지님은 잡아먹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장씨가 사과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조용해졌다.
 십삼 년을 산 뿔 달린 흑돼지 대길(大吉)이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동물이었다.
 “네가 이럴 때마다 큰일이 있었는데······ 불길하다, 불길해. 오늘 뭔 일이 있으려나?”
 뀨엑!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장씨는 걱정스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타리 안에 있던 대길이도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오대수는 감히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하얗고 탐스러운 수염을 가진 노인이 눈앞에 서 있었는데, 오대수는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팔순이 지난 노인 앞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노인도 노인 나름이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노인은 흑사회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파락호들이 깡패짓을 몇 년이나 할 수 있는지 아는가?
 보통 삼 년이다.
 회의 막내로 들어온 놈들은 보통 방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절반 이상이 칼받이로 소모되어 죽거나 선배 파락호들을 대신해 관에 잡혀간다.
 일 년이나 이 년쯤 칼밥 먹은 놈들은 잘 안 죽기 시작하지만, 그런 놈들은 또 밑에 놈한테 배신을 당하거나 괜히 자존심 세워서 구역 싸움을 하다가 어느날 뒷골목 구석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살아남는 것은 일 할 남짓.
 그나마도 십 년 이상 못 버티는 것이 비정한 파락호 바닥의 생리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노인이 그 세계에서 몇 년이나 왕으로 군림했는지 아는가?
 자그마치 오십 년.
 적룡보가 낙양을 장악하고, 그 적룡보를 쭉 관리해온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적룡보주 강금산(姜金刪)인 것이다.
 반백년을 지옥 못지않은 파락호들 사이에서 버텨 냈다.
 강금산은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무슨 놈의 노친네가······.’
 오대수는 조심스레 눈동자만 움직여서 위를 힐끗 쳐다봤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금산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이 얼굴에 가득했는데, 여든 살이 넘었다는 나이는 얼굴에서만 느껴질 뿐, 목 아래쪽의 육체에선 노년기를 훨씬 넘은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색 장포 사이로 엿보이는 목덜미와 가슴팍은 단단한 근육으로 덮여 있다. 육 척이 넘는 장신에 활활 타오르는 눈빛은 호랑이 못지않게 강렬했고, 소매 밖으로 드러난 커다란 손등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힘줄과 흉터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몸만 봐서는 새장가들어도 되겠네!’
 과연, 적룡보의 보주라고 해야 할까.
 오대수는 손가락을 꿈틀거리면서 인사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소길(小吉)아!”
 “할아버지!”
 적룡보주 강금산.
 흑사회의 전설인 노인은 껄껄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날짜도 안 되었는데 웬일이냐? 부모님이 걱정하시진 않든?”
 “괜찮아요. 몰래 나왔거든요.”
 “예끼, 이놈! 부모님 걱정시키면 안 된다. 그분들이 너를 얼마나 아끼시는 줄 아느냐.”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안 나오면 애들이 굶거든요.”
 “허허헛!”
 인자하게 웃는 강금산을 보며 오대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는 대체 누군가?
 조금 전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소변을 지릴 것 같던 그 위압감 가득한 노인은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인근의 동네 아이들이 너를 따른다는 말은 들었다. 오죽했으면 종팔이가 나중에 거지 왕초 자리 뺏기는 거 아니냐고 석웅에게 하소연을 했다는구나.”
 “그래요?”
 소길이라고 불린 소년이 옆에서 씩 웃고 서 있는 석웅을 힐끗 쳐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오대수로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까짓것, 거지 왕초나 한 번 해 볼까요?”
 “이 녀석! 건씨세가의 하나뿐인 장손이 그 무슨 벼락 맞을 소리냐!”
 강금산은 소년에게 꿀밤을 먹여 주면서도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졸지에 한 대 얻어맞은 소년조차 배시시 웃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무에 있을까.
 강금산과 소년은 친손주와 할아버지처럼 다정해 보였다.
 오대수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건씨세가······ 소길······ 건소길?”
 비록 낙양이 아니라 위수분지에서 주로 활동하던 오대수였지만 그래도 건소길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십삼 년 전, 낙양건씨세가에선 귀한 독자가 태어난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벌인 적이 있었다.
 오대수는 그때 잔치에 참가했고, 자식의 이름을 소길(小吉)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했던 적이 있던 것이다.
 명문세가의 독자로 태어난 복 받은 놈의 이름이 소길(小吉)이 뭔가, 소길이.
 차라리 남자답게 대길(大吉)이라고 붙여 주든가.
 작은 행운이라니, 얼핏 들으면 굉장히 소심해 보이는 듯한 부끄러운 이름이다.
 오대수는 그 당시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에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소길아, 지금은 때가 좋지 않구나. 오늘은 네가 나와서 놀기에 좋은 날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요?”
 강금산은 지그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낙양 땅이 소란스러워진 상태지. 이럴 때는 괜한 일에 연관되지 않도록 집에 가 있는 것이 좋단다.”
 “할아버지도 겁나는 게 있어요?”
 “허헛! 물론 있지! 요즘은 내 몸도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허리를 삐끗한단다. 이 나이에는 무리를 하면 안 되는 법이야.”
 강금산은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엄살을 피웠다.
 팔순이 넘은 노인이 하는 말이니만큼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강금산이 그런 말을 하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안 믿기네요.”
 “허헛, 이 맹랑한 녀석! 하지만 이번엔 진짜다. 절대로 연관되면 안 돼.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밖으로 나다니지 말거라.”
 다시 한 번 건소길의 머리를 쓰다듬는 강금산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와 함께 육 척 장신의 노인에게서 묵직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오대수는 하필이면 바로 그때 강금산과 눈이 마주쳤다.
 ‘노친네 눈빛이 무슨!’
 오대수의 등골에서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그런데, 이쪽은 누군가?”
 “보, 보주님을 뵙습니다!”
 오대수는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오대수라고 합니다. 저기, 여기 이 꼬······ 아니, 공자님과 함께 오게 된 건 인연이 인도한 탓으로······.”
 “허어, 소길이가 데려왔다고?”
 “예, 예.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오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선파에게 쫓기는 사람을 적룡보로 데려와 줬으니 구해 준 것이 맞다.
 “구해 줬다?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저기, 위수분지에 있었······ 습니다.”
 오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위수분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서 있던 석웅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번뜩였던 것이다.
 “위수분지? 흑선파가 있는?”
 “예······.”
 “혹시 흑선파 사람인가?”
 “그랬······ 습니다.”
 “그랬다? 지금은 아니고?”
 “예, 보주님.”
 강금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석웅이 으스스한 살기를 내뿜었다.
 “오늘 흑선파 놈들 열댓 명이 양선교(陽船橋)를 넘어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놈을 쫓아온 것 같습니다.”
 양선교는 위수분지와 낙양 땅을 가르는 지표 같은 곳이었다.
 양선교를 건너오면 낙양이 시작된다.
 당연히 흑선파는 양선교를 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강금산은 흥미롭다는 듯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네는 무슨 죄를 지었나?”
 “예?”
 “큰 죄를 지었으니까 흑선파 놈들이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온 것 아니겠나?”
 “그, 그게······.”
 오대수는 우물거리며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옆에 있던 석웅이 버럭 화를 냈다.
 “똑바로 말하지 못해!!”
 “윽!”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호통에 오대수의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그, 그게······.”
 오대수는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안 게 죄입니다.”
 “음?”
 강금산의 눈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무슨 말인가, 그게?”
 “여기서 말을 해도 될는지······.”
 오대수가 힐끗 양옆의 눈치를 살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건소길과 석웅이 있어도 되느냐는 뜻이었다.
 “소길아.”
 강금산이 쳐다보니 건소길은 이미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 아저씨 데리고 있어 줘요.”
 “응? 웬일이냐, 그런 말은 잘 안 하던 녀석이.”
 “나랑 인연이 있는 사람 같아요. 성격도 삐뚤어지긴 했지만 근본은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좀만 다듬으면 쓸 만한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오대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강금산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가 파락호 나부랭이의 삶을 살아왔다지만, 나이 서른이나 먹어서 열세 살짜리 꼬마한테 저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천하의 적룡보주가 그런 꼬마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다는 사실이었다.
 “허허허, 그러냐? 알겠다. 이 할애비가 그렇게 하마.”
 “그럼 할아버지만 믿을게요!”
 “오냐!”
 건소길은 강금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나가기 전에 오대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저씨, 더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요. 안 그러면 다음에 저를 만났을 때 크게 혼날 거예요.”
 “뭐······?”
 오대수는 멍하니 건소길을 응시했고, 건소길은 그런 오대수의 팔을 어른스럽게 툭툭 친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오대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그가 미친 걸까?
 아니면 저 아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주변 사람들이 미친 걸까?
 그때, 강금산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운이 좋군.”
 “예?”
 “저 아이와 인연이 닿다니. 그건 큰 행운이나 다름없는 일이지.”
 “······.”
 오대수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강금산이 미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이야기해 보게.”
 강금산은 자리에 앉아 차분한 눈빛으로 오대수를 바라봤다.
 오대수는 옆에서 부동명왕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석웅을 힐끗 쳐다봤으나 강금산은 그런 오대수의 내심을 짐작한 듯 손을 내저었다.
 “석웅은 한 가족 같은 사이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예.”
 오대수는 역시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석웅을 살짝 째려보았다.
 자신이 충복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며 그를 핍박했던 석웅은 실제로 적룡보주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뭘 봐?”
 “아닙니다.”
 오대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주먹은 진실도 침묵시킨다.
 오대수는 그가 알고 있는 기밀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괴뢰마군(怪雷魔君)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석숭.
 그는 한때 중원제일살수문파라 불렸던 흑화방(黑花幇) 방주의 아들이었다.
 흑화방주는 잠행과 암습에 경지가 있다면 초절정의 단계에 올랐다고 평해지는 사람이었다.
 평생 살수 무학을 단련해 온 그는 살수의 무공을 정리해 체계적으로 경지를 나눠 두었다.
 견성(見成).
 체단(體鍛).
 육화(六花).
 견성은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즉시에 공격할 수 있는 중급 살수의 지표.
 체단은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도록 육신을 단련하는 상급 살수의 지표.
 육화는 흑화방주조차 깨달은 지 얼마 안 된 깨달음의 경지였다.
 흑화방주는 장담했다.
 세 번째 단계인 육화의 경지에 오르면 상대가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괴뢰마군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특급 살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 왔다.
 여섯 살 때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법을 배웠고, 일곱 살 때 소리없이 다가가 토끼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단검을 잡을 수 있게 허락받았다.
 처음엔 십 보 떨어진 곳에 있는 소나무를 맞추었고, 그 후엔 십오 보 떨어진 소나무를, 마지막엔 사십 보 떨어진 소나무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과녁도 점점 작아졌다.
 소나무는 대나무로, 대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못에 박힌 메뚜기 한 마리로 변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한 살.
 단검을 일직선으로 던지는 직투술(直投術)에 있어서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견성(見成)에 이른 것이다.
 당시에 기재라고 평가받던 전대 흑화방주가 견성을 열다섯에 이룬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취였다.
 주변의 모두가 극찬을 했다.
 사상 최초로 살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흑화보의 모든 살수들이 열광했다.
 그 기대에 맞춰 훈련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갔고, 종국에는 훈련인지 고문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 갔다.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를 설 수 있게 되었고, 숨을 멈춘 채 단단한 흙 속에서 사흘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보통의 소년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모든 근맥이 끊어져서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이 출중한 소년은 그 고문조차 모두 뛰어넘었다.
 스물두 살.
 그가 흑화방주를 따라잡은 나이다.
 그리고 그가 살수로서 첫 상대로 잡은 것이 바로 그 당시에 무림십대고수로 손꼽히던 뇌정신군이었는데, 선불금으로 먼저 받은 절반의 금액만으로도 흑화방이 창설된 이후 최고의 의뢰비를 경신할 만큼 큰 건이었다.
 석숭은 열흘간의 밑작업 끝에 자신에게 주어진 화기(火器)들을 다 사용하고,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결국 뇌정신군을 잡아 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뿐인가.
 흑화방에서 받은 훈련을 바탕으로 뇌정신군의 진신무공인 진천뇌정신공(震天雷霆神功)의 비급까지 얻어 냈다.
 하지만 뇌정신군의 마지막 반격은 무서웠다.
 한 번 몸속으로 파고든 뇌정기가 내부를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석숭에게 남겨진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첫째, 진천뇌정신공보다 더욱 강한 내공심법으로 뇌정기를 없애 버리는 것.
 둘째, 진천뇌정신공을 익혀서 뇌정기를 제어하는 것.
 하지만 아무리 최고의 살수 문파라도 무림십대고수의 내공심법보다 더 효과가 좋은 내공심법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석숭은 진천뇌정신공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진천뇌정신공을 익히는 방법은 특이했다.
 모든 신공이 그러하듯 익히는 것에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을 것.
 한데 이 번개를 맞을 때의 몸은 내공을 익히지 않은 순수한 몸이어야 했다.
 비급에선 이미 혈맥에 잡스러운 기가 쌓여 있는 사람이 벼락을 맞게 되면 강한 반발력으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석숭은 충격을 받았다.
 즉, 진천뇌정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가 평생을 익혀 온 내공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진 좋다.
 목숨을 건지기 위한 건데 내공이 문제겠는가.
 게다가 만약 아홉 번의 번개를 맞는 데 성공하면 내공이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반로환동(返老還童)까지 할 수 있다고 하니, 무인으로서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평생에 번개를 보는 것만도 힘든데, 대체 어딜 가야 번개를 맞는지가 문제였다.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던 그는 과거 뇌정신군의 행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뇌정신군은 열흘 중 엿새를 무공을 수련하는 연공실에서, 이틀을 가족들과 보내고, 나머지 이틀은 자신이 거둔 제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한 번씩 어딘가로 떠난다는 이야기는 있는데, 아무리 흑화방의 정보망을 이용해 보아도 도저히 어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석숭은 결국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번개를 쫓아다닐 수는 없으니 번개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한 것이다.
 우선 호풍환우를 부른다는 태극관(太極館)의 청안 도사를 찾아갔다.
 함부로 술법을 쓸 수 없다며 거절하던 청안 도사의 처자식을 반쯤 죽여 놓고 협박했다.
 결국 청안 도사가 평생을 쌓은 도력을 절반 이상 쓰고 나서 처음으로 벼락을 맞았다.
 석숭은 흥분했다.
 단 한 번의 낙뢰(落雷)였는데, 그 한 번으로 무려 반 갑자의 내공이 쌓인 것이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내공이 한 갑자 반이었으니, 두 번의 낙뢰만 더 받으면 원래의 내공을 회복하는 셈이다.
 그뿐인가.
 낙뢰로 쌓인 내공은 자연지기의 상태 그대로여서 보통의 내공보다 훨씬 순양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 초식을 사용해 보니 본래보다 두 배나 더 위력이 증폭했을 정도다.
 석숭은 그 길로 명망있는 술법사들은 모조리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삼곤륜(三崑崙), 육도회(六道會), 모산파까지.
 무려 십 년을 유랑하였지만 누구 하나 낙뢰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낙뢰를 떨어뜨리는 것은 술법 중에서도 최고위의 술법이라 웬만한 경지의 술법사는 시전할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청안 도사만 한 술법사가 없다는 소린데, 정말로 그 이후로 석숭은 술법을 통한 낙뢰를 단 한 번도 맞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 호풍환우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
 술법사가 아니면 기문진식의 대가들뿐이지 않은가.
 그는 기문진식의 달인들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마도제일의 두뇌로서 사도와룡(邪道臥龍)이라 불리는 만박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 석숭은 만박자를 우습게 보았다.
 일신에 아무런 무공도 없이 머리만 굴리는 자들이 위험해 봤자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하지만 과연 마도제일의 두뇌랄까.
 그는 석숭을 보자마자 그가 진천뇌정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당당하게 약속했다.
 이십 년.
 만박자가 속한 단체를 위해 이십 년만 일해 주면 남은 여덟 번의 낙뢰를 모두 맞을 수 있게 해 주겠노라고.
 석숭은 의심했지만 이튿날 만박자가 예언한 곳에 정확하게 낙뢰가 떨어지자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석숭은 그날 이후, 만박자가 속한 단체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정정당당한 무력시위를, 또 어떨 때는 암습도 서슴지 않으며 승승가도를 달려 나갔다.
 석숭이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곳엔 언제나 새카맣게 탄 시신이 난무했고, 사람들은 그의 괴이하고 잔혹한 성품을 칭하며 그를 괴뢰마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년 후.
 괴뢰마군은 무림십대고수와 동등하다는 삼괴(三怪)중 한 명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
 괴뢰마군 석숭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리를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삼십 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흑화방에서 가혹한 수련을 하던 예비 특급 살수는 강호에서 인정받는 초절정의 고수가 되었다.
 팽팽하던 피부엔 작은 잔주름이 생겨났고, 뻣뻣하던 머리카락은 연륜이 느껴지는 가느다란 굵기로 변했다.
 세월의 흐름은 강대한 내공으로도 막을 수 없던 것이다.
 게다가 항상 사납게 번뜩이던 두 눈엔 온화하면서 여유로운 빛마저 감돌았다.
 길을 지나다가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치면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네올 정도였다.
 “후후후, 드디어······.”
 괴뢰마군은 나직하게 웃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잠시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괴뢰마군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주체를 못할 정도였다.
 “이보시오.”
 “하나 드릴까요?”
 길가에서 튀긴 전갈을 팔던 노점상이 웃는 얼굴로 꼬치 하나를 내밀었다.
 괴뢰마군은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반질반질하게 튀겨진 전갈을 깨물자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음, 맛있군.”
 “그렇죠? 제 비법이 첨가된 요리입죠! 꼬치 하나에 철전 하나입니다요!”
 노점상은 기분이 좋아진 듯 꼬치 하나를 더 내밀었다.
 괴뢰마군은 그것마저 받아서 우적우적 씹어 먹은 뒤 씩 웃으며 빈 꼬치 두 개를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에서 꼬치가 사라졌다.
 “어······?”
 노점상이 마치 진기한 묘기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라다가 피를 토했다.
 “커허······?”
 경악하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노점상.
 그의 심장 부근에 두 개의 빈 꼬치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가 비명을 토해 내려는 그때, 괴뢰마군은 이미 단단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쉿, 쉬잇. 조용히 하게.”
 “읍! 으읍!”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내가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이지. 조금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겠어. 간단히 말해서 자네는 내 기분 전환용이란 말이지.”
 어깨동무를 하며 노점상 쪽으로 걸어가는 괴뢰마군과, 그런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듯이 보이는 노점상은 겉으로 보기엔 오랜만에 만난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노점상은 발버둥치려 했으나 괴뢰마군은 교묘한 동작으로 모든 시도를 막아 버렸다.
 오른손으로 턱을 붙잡고 왼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손을 대고 교묘하게 몸을 비틀었다.
 단지 그뿐인데 노점상은 땅에서 발이 떨어진 채 허공을 질질 끌려갔다.
 “너무 원망하지 말게나.”
 괴뢰마군은 노점상의 앞섶을 축축하게 적신 피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스으읍―”
 짙은 혈향이 콧속으로 파고들고, 그제야 제정신을 찾은 듯 괴뢰마군의 눈에서 영리한 지성이 번뜩였다.
 “역시, 피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지.”
 괴뢰마군은 축 늘어진 노점상을 가판대 뒤에 내려놓고 몸을 쭉 폈다.
 허리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침에 일어나 차가운 물을 한 사발 들이켠 것마냥 상쾌한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가 볼까?”
 괴뢰마군은 비어 버린 가판대에서 전갈꼬치를 한 움큼 움켜쥐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비어 버린 가판대 아래에서 붉은 피가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많았으나 가판대 뒤에 시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구산(舊山).
 흔히 뇌산(雷山)이라 불리는 바위산은 낙양의 유명한 천진교(天津橋)에서 한 시진 정도만 걸어가면 볼 수 있는 흔한 돌산이었다.
 물론 특이한 점은 있다.
 산 모양이 너비가 좁고 위로만 길쭉하니 솟은 솟대 모양인데다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달에 한 번은 꼭 벼락이 내리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지닌 산이었다.
 벼락이 그냥 내리치는 것도 아니다.
 인근 백여 리가 벌벌 떨 만큼 강렬한 뇌성벽력을 터뜨리는데다가, 구산의 정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며 빛을 내뿜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멋모르는 여행객들이나 뇌산에 오르지, 인근의 마을 사람들 중에서 뇌산에 올라가는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뢰마군은 그런 구산으로 올라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채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만박자는 바로 오늘, 구산에 큰 뇌기가 발생하여 그에게 천운을 가져다줄 거라 말했다.
 점괘를 뽑으면서 연신 희한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분명히 이곳에서 번개를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진천뇌정신공(震天雷霆神功)을 대성하게 해 줄 마지막 아홉 번째 낙뢰!
 그 보물을 맞이하는 셈이니 어찌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흐흐흐흐.”
 괴뢰마군은 뛰어난 경신법으로 금방 정상에 올라 희희낙락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짙은 구름이 새카맣게 덮여 있었다.
 은은한 뇌성벽력까지 울리는 것이, 심상치가 않은 날이다.
 그는 구산의 정상에 놓인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 정확히 남향을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었다.
 도저히 육십에 가까운 나이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서 은은한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쳤고, 그가 앉은 주변에선 파직거리는 뇌기가 번뜩였다.
 괴뢰마군은 눈을 반개한 채 때를 기다렸다.
 진천뇌정신공을 운용하고 있노라면, 자철석이 철을 쫓듯 벼락은 자신과 동질의 뇌기(雷氣)를 쫓아 그의 몸으로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약 한 시진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하늘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하였다.
 묘한 진동을 울려대는 비구름이 구산의 위로 몰려드는 것과 동시에 장대 같은 비를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면 천둥도 따라오는 법.
 괴뢰마군 석숭은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와라! 와라! 와라!’
 그런데 어째선지 한참이 지나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개하고 있던 석숭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가부좌를 풀고 하늘을 살펴야 할지 고민했다.
 만약 가부좌를 푸는 순간 벼락이 치기라고 하면 기껏 기다려 왔던 시간이 허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벼락을 맞아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석숭은 과거 살수로서 훈련받은 기억을 되살리며 인내심을 끌어 올렸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잔뜩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 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산에 오니까 좋다.’
 건소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타는 중이었다.
 경사가 상당히 가파랐지만 돌멩이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건소길은 힘든 줄도 몰랐다.
 왜 굳이 산에 올랐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냥 갑자기 구산에 올라오고 싶었다.
 얼마 전에 다리 밑 아이들이 구산에 토끼가 많다면서 자랑을 하기도 했고, 아마 구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양의 모습도 멋있다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상에 다 왔을 때 즈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장대비를 쏟아 낸 것이다.
 건소길은 황급히 근처의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넓적한 바위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건소길은 처음에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얀 것을 보니 노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노인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산의 정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단 말인가!
 “산신령님?”
 건소길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산신령치고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선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아직 여물지 않은 주먹으로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미친 듯이 내리는 장대비 사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과 그 주변에서 신비롭게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노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건소길은 번개가 치기 직전에 그러듯이 하늘이 우르릉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이 노인이 번개를 맞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노인의 주변에서 뭔가 불빛이 파직거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저기요!”
 하지만 노인은 대답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계시면 위험해요!”
 건소길이 내뻗은 손이 노인의 어깨에 닿는 순간, 새카만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 * *
 
 ‘이, 이 쳐 죽일 놈······!!’
 석숭은 속으로 절규했다.
 만약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는 번개를 맞을 때를 대비해 진천뇌정신공을 극한까지 운용하는 중이었다.
 내공을 대주천하는 중에는 어깨 위에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죽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산신령님?’이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똑똑히 들렸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젠장, 난 산신령이 아니야!’
 석숭은 어린아이의 멍청함을 저주하며 서둘러 진천뇌정신공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임맥을 돌아 독맥으로 들어가고 있는 내공을 거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발만 삐끗하면 주화입마.
 하지만 억울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공을 빨리 갈무리해야만 했다.
 “저기요!”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도 아이는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석숭은 마음이 더 급해졌다.
 백회혈을 지나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내공을 가속시켰다.
 “여기에 계시면 위험해요!”
 이젠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다.
 석숭의 내공은 백회와 인중을 지나 다시 단전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아이의 손이 느껴진다.
 손이 닿기 직전, 그는 운용하고 있던 내공을 다시 단전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내공은 단전으로 되돌아갔고 운기조식은 끝나 있었다.
 석숭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젠 움직여도 되는 것이다.
 툭, 하고 소년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이 꼬맹이,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 주마.’
 석숭의 얼굴에서 잔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일단 자신의 어깨에 닿아 있는 소년의 손을 꺾어 버리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콰과쾅―!!
 석숭의 머리 위로 강렬한 벼락이 떨어졌다.
 
 
 
 제3장 진천뇌정신공(震天雷霆神功) (1)
 
 
 “으아아아악―!!”
 석숭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한 고통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다.
 온몸의 겉과 속이 뒤집어진 듯한 느낌이다.
 피부에선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피가 흐르던 혈관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했고, 과도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린 눈과 코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필 진천뇌정신공을 갈무리하는 순간에 맞은 탓에 대비할 시간도 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먼지처럼 무력할 뿐이다.
 석숭의 어깨에 손을 짚고 있던 건소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소년은 석숭과 달리 비명을 지를 만한 기력조차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머리 위로 김을 내뿜으며 굳어 있을 뿐이다.
 온몸이 급살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고, 충격을 받아 심장이 멈춰 버린 탓에 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건소길의 숨이 잦아들고, 새카맣게 빛나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낙양건씨세가의 장남 건소길.
 그는 그 순간에 분명 죽어 있었다.
 “그······ 어어어······.”
 온몸이 새카맣게 타 버린 채 한참을 굳어 있던 석숭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징그러울 정도로 쭈글쭈글하고 시뻘건 피부가 움직이는 모습은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그는 천하에 보기 드문 무공을 익힌 몸.
 죽어 버리기 직전, 단전에 잠들어 있던 순양한 뇌기(雷氣)가 스스로 움직여서 번개의 기운을 차츰 다스려 갔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던 상처를 일시적이나마 멈추고 오그라들던 장기를 다시 빵빵하게 부풀렸다.
 쭈글쭈글한 눈꺼풀이 올라갔다.
 본래 흰자위와 검은 자위가 있어야 할 자리엔 시커먼 공동밖에 없다.
 터지고 부풀어 올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입술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유난히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석숭은 신음했다.
 극심한 고통에 괴로워했고, 천하의 고수인 자신이 이런 꼴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우르릉―
 낙뢰가 떨어지기 직전의 전조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것이 다 죽어 가던 석숭을 움직이게 했다.
 “그으으으······.”
 석숭은 보이지 않는 눈을 끔뻑이며, 껍질이 다 벗겨진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 두 손이 단전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텅빈 동공이 반쯤 가려지고, 거칠었던 숨소리가 다시 일정한 박자를 되찾았다.
 가공할 생명력이 그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번개를 한 번만 더 맞으면 나는 환골탈태한다!’
 석숭은 천천히 진천뇌정신공을 다시 운용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막고 있던 내공이 빨려 나가면서 일시적으로 상세가 악화되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쾅!
 그 순간, 벼락이 떨어졌다.
 또다시 석숭의 머리 위였다.
 그는 이번엔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마어마한 내공이 그의 혈맥으로 스며드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양한 자연지기가 그의 혈맥을 통과하고 있었다.
 몸속의 노폐물이 모조리 태워지는 것과 동시에 반선(半仙)의 육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대성이다.
 삼십여 년을 이어 온 연공의 시간들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새카맣게 타 버렸던 피부가 다시 제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석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낙뢰가 떨어졌다.
 콰아아앙!!
 ‘허억!’
 혈맥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제 크기를 되찾았다.
 석숭은 심장이 떨어질 듯이 놀랐다.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열 번째 낙뢰였다.
 아홉 번도 채우지 못해서 끙끙거렸는데, 열 번째라니!
 한 사람이 열 번이나 낙뢰를 맞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그는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낙뢰 한 번에 삼십 년 이상의 내공이 쌓인다.
 그만한 낙뢰가 갑자기 떨어졌으니 이건 길가에서 금덩이를 주운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이다.
 다행히 아홉 번의 낙뢰로 단련된 혈맥은 열 번째 낙뢰도 무난히 받아들였다.
 석숭은 희희낙락했다.
 이제 그는 천하제일의 내공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천하를 제패할 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또 한 번의 번개가 떨어졌다.
 콰아아앙!!
 ‘이, 이게 무슨?!’
 열한 번째.
 장마철에 강물이 범람하듯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공이 크게 불어났다.
 이번엔 혈맥이 조금 찢어졌다.
 갑작스레 불어난 내공을 버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단전이 꽉 찬 것은 물론이요, 심장 부근에 있는 중단전도 꽉 차 버렸으며, 이젠 백회혈과 미간 사이에 있는 상단전조차 꽉 채울 듯한 기세였다.
 온몸이 내공으로 꽉 차서 터지기 직전인 인간.
 그게 지금 석숭의 상태였다.
 ‘아, 안 돼! 이 이상은 무리다!’
 석숭은 문득 진천뇌정신공 비급의 가장 끝머리에 쓰여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과욕이초래마(過慾以招來魔).
 과욕이 마(魔)를 불러일으킨다.
 비급의 정식 내용은 아니고, 글을 쓴 뇌정신군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덧붙인 후기(後記) 같은 것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순간에야 그 진의(眞意)를 알게 되는지 통탄할 노릇이었다.
 벼락은 벼락을 불러일으키고, 뇌기(雷氣)는 뇌기를 부른다.
 즉,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뇌기를 많이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벼락을 유도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석숭은 지금 자신의 상태라면 또다시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뇌기를 다스려 보려 했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쾅! 쾅! 꽈광! 꽈과광!
 마치 중양절에 터뜨리는 폭죽마냥 연속적인 충격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무려 여섯 번의 낙뢰였다.
 석숭의 혼백이 산산이 흩어졌다.
 몇 번이나 재생하려던 육신은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채 멈춰 버렸고, 과도한 내공을 흘려보내던 혈맥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지만 혈맥이 찢어졌다고 해서 내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총합 열일곱 번의 낙뢰.
 한 번의 낙뢰마다 반 갑자의 내공을 주었으니 총 팔 갑자 반, 오백십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내공이 석숭의 몸 안에 갇힌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뜨거운 기운은 위로 솟구치는 법.
 포화 상태에 이른 자연지기(自然之氣)는 석숭의 몸을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내 석숭의 어깨에 얹혀 있던 건소길의 손을 발견했다.
 원래 장심(掌心)이라는 곳은 몸속의 내공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다.
 내상을 입은 무인들을 치료할 때도 보통 장심을 명문혈에 가져다 대고 치료하지 않던가.
 그러니 간절하게 갈 길을 찾아 헤매던 거대한 내공덩어리가 건소길의 장심을 통해 흘러들어 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총 팔 갑자 반의 막대한 내공은 석숭의 장심을 통해 노도와 같이 흘러 들어갔다.
 건소길의 몸이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사방으로 전류가 방전되었고, 샛노란 불빛이 구산의 정상에서 몇 번이나 번뜩였다.
 강렬한 불빛과 함께 새까맣게 탄 채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건소길의 몸이 가공할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새카만 잿가루가 장대비와 함께 쓸려 갔다.
 새로 돋아난 살이 뽀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건소길은 무려 세 번이나 몸의 껍질이 벗겨졌다.
 여덟하고도 반 갑자나 되는 내공을 받아들인 덕분에 환골탈태를 세 번이나 하게 된 것이다.
 새카맣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발목에 닿을 만큼 길어졌다.
 피부는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변해 버렸고, 허리가 곧게 펴지면서 골격마저 바뀌어 버린 건소길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커져 버렸다.
 이제 밖에 나가면 누구도 그를 열세 살짜리 꼬마로 보지 못할 터였다.
 석숭처럼 번개를 통해 한꺼번에 내공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장심을 통해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는 점도 컸다.
 건소길에게는 내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고, 한 번 번개를 맞아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점도 기연으로 작용했다.
 건소길은 이 세상에 드문 완벽한 육체, 그리고 여덟 갑자 반이라는 막강한 내공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으음······.”
 신음을 흘리면서 깨어난 건소길은 얼굴 위로 장대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벌떡 일어섰다.
 뭔가가 허전하다 싶어서 내려다보니 알몸이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완전한 알몸.
 바지는 고사하고 속곳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혹시 어딘가에 벗어 두었나 싶어서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주변엔 장대비에 흠뻑 젖은 바위들뿐이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어······?”
 남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
 ‘거기’가 많이 달라졌다.
 원래 새끼손가락만 했던 자신의 분신이 엄지 두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변해 버렸으니 모를 리가 없다.
 다리 밑에서 매일 함께 놀던 거지아이들.
 그중 차기 왕초라는 봉택이가 나름 ‘대물’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봉택이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다.
 “뭐, 뭐야?”
 건소길은 당황했다.
 왜 거기가 달라졌을까?
 그리고 알몸으로 장대비를 맞고 있는데 왜 전혀 춥지 않은 것일까?
 희한한 기분이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려 했는데, 자꾸 머리가 아파 왔다.
 “어······?”
 그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고, 자신이 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서 열 걸음 정도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를 보니 모든 게 다시 기억이 났다.
 기절한 틈에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장대비가 쏟아지자 커다란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던 일.
 웬 노인이 죽은 듯이 앉아있기에 걱정이 되어서 다가갔던 일.
 노인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번쩍거리는 낙뢰를 맞고 느꼈던 어마어마한 고통.
 그 모든 것이 다시 기억났다.
 “으으······.”
 절로 치가 떨린다.
 건소길은 산 정상을 향해 뛰어올랐다.
 죽다 살아났는 데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산 정상의 평평한 바위에 다가가자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코를 기점으로 얼굴의 왼쪽 절반은 젊은이 못지않게 혈색이 좋은 반면에 다른 오른쪽은 피부가 녹아내려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
 건소길은 마음이 안 좋아졌다.
 옷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혹시 노인이 살아서 심술을 부린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득 노인이 불쌍해졌다.
 아무리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혼자서 이런 외진 산 정상에 있다가 벼락을 맞고 죽다니, 이런 기구한 운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강 할아버지는 호상(好喪)으로 돌아가셔야 할 텐데······.”
 그러고 보면 친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적룡보주 강금산도 이 노인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이 노인도 남 같지가 않았다.
 어찌 됐든 자신과 함께 벼락을 맞고 죽은 노인이다.
 건소길은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 노인을 잘 보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장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무리지만, 사람의 도리가 있지 시신이 산 정상에서 썩어 가게 내버려 둬선 안 되지 않겠는가.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무덤을 만들어 드릴게요. 편안히 가세요.”
 진지하게 합장을 하며 명복을 비는 건소길.
 만약 석숭이 들었다면 자신이 대체 누구 때문에 죽은지 아느냐며 기함을 토할 일이었다.
 건소길은 당장 근처의 좋은 자리를 골라 돌멩이들을 들어내고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란만장했던 하루는 그렇게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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