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내가 가는 길 [E]

내가 가는 길 1권 (1화)

2017.06.19 조회 4,040 추천 34


 내가 가는 길 1권 (1화)
 프롤로그
 
 
 2040년 새벽 4시.
 속도계는 80마일(약 129km)을 가리키고 있다. 어제 밤에 내린 비로 도로가 젖어 있어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상황.
 알면서도 악셀레이터에서 발을 뗄 수가 없다. 도로 양옆으로 높게 솟아 있는 나무들도 헤드라이트에 잠시 비춰질 뿐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윽! 제길!”
 끼∼이이이익!
 아니나 다를까, 살짝 꺾긴 도로 옆에 물웅덩이를 보지 못했다. 차는 순식간에 미 끌리며 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조작해 보지만 한 번 밀린 차는 쉽사리 내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쿵!
 제법 큰 충격이 전해졌지만 다행히 차량이 전복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났다. 사이드 미러를 보니 다행히도 뒤쪽 트렁크 부분이 나무에 부딪쳤지만 큰 사고는 아니었다.
 다시 시동을 걸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전기 차 특유의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고 곧 갓길을 벗어나 도로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휴∼ 죽을 뻔했네. 크크크크!”
 문득 평소처럼 말을 내뱉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보면 살아날 확률은 1%도 안 된다. 오히려 방금 전 사고로 죽는 게 나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또 한 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살고자 열심히 운전하는 내 모습이 백 미러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코리 플레밍. 올해 나이 25세의 미국인이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5살 때까지는 한국인이었고, 그 이후론 미국인이었다.
 2020년 남북한이 통일되며 일어난 한 달도 되지 않는 내전으로 많은 전쟁고아가 생겼다. 그중 나도 한 명이었다.
 내전 직후라 나라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두 다리마저 없었던 나는 퀴퀴한 지하철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몇 푼의 돈과 약간의 먹거리로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나의 양아버지셨다.
 처음 그분이 나에게 내민 손을 바라봤을 땐 겁이 났다. 하지만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내밀고 있던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결국 그 손을 잡게 되었다.
 
 한국에 자원 봉사 나왔다가 날 보곤 입양을 결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13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15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날 무척 사랑해 주셨지만 연세가 많으셨다. 그 후, 나이 많은 형님(양부모님의 친자녀들)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나름 잘해 주셨지만 왠지 목에 걸린 가시같이 불편하기만 해서였다.
 열여섯 살 때부터의 독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덟 살 생일 때 아버지는 컴퓨터를 사 주셨고, 난 거기서 내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9살 때 로버트 웨건을 창조했고 열 살 때 로버트는 마피아의 돈세탁 중인 500만 불의 돈을 빼돌렸다. 그리고 그 인물은 사라지고 찰스 버킨슨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만들어졌다.
 그 500만 불이라는 돈이 컴퓨터상의 숫자가 아니라 실제의 돈이라는 것을 안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님 댁에 있을 때였다.
 세상은 어렵지 않았다. 컴퓨터에 나타나는 숫자는 날 부유하게 했으며 내가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것을 구해 주었다.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열아홉 살 때, 음······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다. 내 생애 첫 번째 실수를 한 때가 그때였다.
 애정을 갈구할 곳이 없던 난 사진 찍기를 좋아했었다. 처음에는 단지 풍경과 사람들을 찍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내 모습을 찍고 싶었다. 카메라를 세우고 타이머를 맞춘 후 재빨리 자리를 잡고 찍은 내 모습은 생각과 달리 쓸쓸해 보였다.
 항상 같은 구도의 사진을 바라보던 난 엉뚱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대기권 밖에서 돌고 있는 위성을 이용한 사진 찍기였다. 준비물은 핸드컴과 글래시즈(안경형 모니터) 하나면 가능했다.
 어느 날, 공원에서 사진을 다 찍은 후 정찰 위성에 남아 있는 나의 흔적을 지우려는 순간, 눈앞이 번쩍하며 난 쓰러졌다. 2명의 흑인이 안경을 들고 도망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곳은 어떤 밀실이었고, 그곳이 영화에서만 보아 오던 NSA였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NSA에서 관리하던 인공위성을 내 마음대로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엄청난 고문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며칠 동안의 조사 후 난 그곳에 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정보를 수집하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은 나에겐 숨 쉬기만큼 쉬운 일이었으니까. 다만, 정해진 기일 내에 할 일을 금방 마치고 감시자의 눈을 피해 노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스물두 살 땐가? 세계 최대의 게임 회사인 파이라 그룹과 펜타곤이 비밀리에 몇 년 전부터 해 오던 연구에 투입되었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가상현실에 관련된 연구였는데 올 초에야 겨우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3년간 노력의 결과는 감시자를 대동한 한 달간의 휴가였다. 그때 피지나 하와이를 갔어야 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중에 만난 재미동포와의 대화로 한국이 보고 싶어 한국행을 결정해 버렸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실수였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의 흔적은 전혀 없었고, 뉴욕의 맨해튼 못지않게 많은 고층 빌딩이 나를 반겨 주었다. 한국 가이드를 통한 여행은 정말 재미있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친절한 사람들.
 하지만 20일째 되던 날 우연찮게 들른 마을을 본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고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나오는 인도의 빈민가와 같은 모습의 마을을 본 순간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내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일까? 영화를 봤을 땐 무덤덤했었는데······ 쓰레기 더미 위에서 한쪽 다리로 서서 멍하니 우리 일행이 탄 차를 바라보던 그 청년의 모습은 양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모습이었으리라. 아니, 나는 두 다리가 없었으니 더 비참했을 것이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도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앞선 기술들을 빼돌려 한국으로 보내 주기로 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한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제 밤, 1차로 군수 관련 자료를 한국 국방부로 보냈다. 그 자료만으로도 한국은 꽤나 발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신 전투기는 물론이거니와 인공위성, 미사일, 레이더, 레일건 등 거의 모든 최신 기술이 포함된 자료였다.
 오늘 2차로 과학 기술 분야를 정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감시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어떻게 그들이 한국에 내가 자료를 보냈다는 걸 알았을까? 컴퓨터의 흔적으로 알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한 가지. 한국에서 미국에 이러한 정보를 넘겨줬을 것이다.
 “크······ 크크······ 하하하하!”
 괜한 웃음이 나왔다. 뻘 짓이었다. 선의의 대가는 나의 죽음이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에 도망은 쳤지만 알고 있다. 시간상의 문제라는 걸.
 ―삐익! 삑! 3km 후방 차량 5대 발견.
 내비게이션에 정체불명의 붉은 점 5개가 나타났다. 그들이리라. 인공위성과 주변의 교통 시스템마저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음에도 어느새 쫓아온 것이다. 단 1%의 확률이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동 운전 시스템! 최고 속도!”
 꾸준히 80마일로 달리던 차는 조금씩 느려지며 70마일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자동 운전 시스템의 경우는 국도에서는 50마일(약 80km)이 정상 속도였고 특히나 이렇게 보슬비라도 내리면 37마일(약 60km)이 정상 속도였다.
 하지만 자동 운전 시스템을 크랙해 최고 속도를 70마일로 맞춰 놓았다. 자동 운행이 시작됨을 확인한 나는 핸드컴의 모니터 역할을 하는 글래시즈를 꼈다.
 안경렌즈에 핸드컴의 OS(Operation System)가 보인다. 그러는 동안 뒤에 오던 차량들은 금세 2km로 가까워졌다. 난 화면에 해킹 프로그램을 켠 후 어떤 인공위성을 사용할지 잠시 고민했다.
 현재 미국 상공에 있는 공격 위성 중 사용 가능한 위성은 20개. 그중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격추하기 위한 위성을 제외하고 지상 공격이 가능한 위성은 5개. 현재 상황에 가장 맞는 위성은 단 하나. 최신의 고출력 마이크로파 무기(HPM)가 장착된 위성이었다.
 원래 고출력 마이크로파 무기의 경우 강력한 에너지원을 통한 EMP(전자기 펄스)를 발생시켜 넓은 지역의 전자 기계와 무기들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이다.
 하지만 한 과학자가 에너지원을 압축시켜 폭파시킴으로써 범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리고 최소 반지름 1km까지 지역만 한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쫓고 있는 이들이 벌써 1.5km까지 가까워졌다. 안경으로 위성에서 보여 주는 지상의 모습이 보였다. 직접 그들을 겨냥하면 좋겠지만 아무리 1km로 범위를 조작한다 해도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NSA 요원들의 차량 500m정도 뒤쪽을 목표로 삼고 발사 명령을 내렸다.
 압축된 에너지원이 발사되고 잠시 후, 지상 가까이 도착하자 밝은 빛을 내며 폭발했다. 단지 EMP를 발생시키는 무기였기에 빛이 퍼지는 정도로 보일 뿐이었지만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5대의 차량 중 3대가 멈춰 버렸다. 이제 2대만 잡는다면 난 조금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인공위성을 조작해 발사 위치를 조정했다. 첫 번째 차량과 두 번째 차량 간의 거리까지 계산해 아까보다 좀 더 가까운 곳을 목표로 잡았다.
 발사를 명령했다. 순간 자동 운전을 하던 차량이 미끄러졌다.
 끼이∼∼∼이이이익!!!
 자동 운전 시스템이 차량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인간과 같이 순발력이 좋지 않았다. 짧은 순간에 안경에는 차량 2대가 멈춰서는 게 보이며 그 건너편으론 세상이 뒤집히는 걸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콰콰콰∼∼쾅!
 “으으∼”
 정신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먼저 나왔다. 차가 뒤집혔는지 머리가 자꾸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윽!”
 살짝 고개를 돌리는데 복부가 전기가 오르듯이 찌릿거렸다. 시선은 자연 배 쪽으로 향했다.
 “······!”
 로봇 의족 중 한쪽이 사고로 부러지며 배에 박혀 있었다. 고맙지만 평생 나를 쩔뚝이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던 의족이 끝끝내 말썽이다. 입고 있던 파란색 체크무늬 남방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상처를 발견하기 전에는 못 느꼈던 무력감과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약간의 긴장만으로도 피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체념하는 걸 제외하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쿨럭! 으아아······! 쿨럭! 으······.”
 사고 당시 튀어나온 에어백이 피로 물들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역류하고 있었다.
 힘이 없어진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코리.”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익히 잘 알던 이다.
 “레, 레오 씨.”
 “왜 그랬나? 코리 플레밍.”
 쪼그려 앉아 나에게 총을 겨누고 묻고 있는 레오는 NSA 소속으로 날 항상 감시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감시라고 해 봐야 눈에 띄는 곳에서의 감시이다 보니 친해졌고 그래서인지 지금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하하! 그, 그냥······ 쿨럭! 무······언가를 해, 해 주고 쿨럭쿨럭! 시······펐을······ 뿐이······었어요. 쿨럭!! ······레······ 레오 씨라······ 다······행이에······요.”
 몇 마디의 말을 하는데 너무나 고통스럽다.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었다. 레오에게 살며시 웃어주며 눈을 감았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졌다. 감겨진 눈으로 하얀 빛이 조금씩 커진다.
 ‘아빠! 엄마!’
 빛 속에 두 분의 웃는 얼굴이 보이며 점점 밝아져 갔다.
 
 * * *
 
 죽었다라고 느낀 순간, 난 포근한 빛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냥 그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인 듯 말이다. 포근한 빛 속으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나둘 작은 빛들이 향하는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를 포근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빛을 향해 나도 다가갔다. 거의 다가갔을 때 지금까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얼굴은 희미하지만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람들. 순간, 창밖으로 밝은 빛이 보였고 웃고 있던 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덮쳐 왔다.
 그리곤, 난 혼자가 되었다.
 난 포근하던 그 빛이 무서워졌다. 또다시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리곤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도망가며 흘낏 뒤를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빠르게 뛰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빛은 더욱 크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어린 시절의 그 빛처럼.
 피할 곳이 없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등을 타고 오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둠 속을 무작정 달리는 것뿐이었다.
 거의 잡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앞에 어둠의 공간이 조금 열리며 작은 빛 하나가 튀어나와 나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마 빛에 삼켜졌으리라. 작은 빛이 나온 그 공간이 닫히는 것이 보이자 그 속으로 몸을 날렸다.
 
 
 
 1.전이
 
 
 “너만 알고 있어. 난 말이야.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곳에서 왔어. 지금은 비록 이런 몸을 가지고 있지만 본래 내 몸을 가지게 된다면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지지. 예를 들면 말이지, 한 도시쯤은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 준다면 내가 많은 보상을 해 주지.”
 ······.
 “어떤 보상이냐고? 초쿠파이 한 상자 어때? 왜 말이 없는 거야? 지금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좋아! 초쿠파이 한 상자에 초코 우유를 얹어 주지. 어때? 이제 슬슬 회가 동하지? 뭐? 말하기 싫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의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너의 생각을 읽어······.”
 미친놈. 벌써 1시간째 내 귀에 소근거리는 녀석의 정체다. 내가 지금 상태만 아니라면 벌써 어구창을 날려 버렸을 텐데······.
 눈빛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녀석은 벌써 한 줌의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리라. 난 녀석을 죽일 듯이 쳐다보다 결국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에게 아무리 눈빛 레이저를 쏘아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혹여 내 살기를 사랑의 눈빛으로 오해하면 그날 난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시선을 돌린 방향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혼자 뭔가 중얼거리는 사람들, 한자리에 앉아 계속 같은 곳만 쳐다보는 사람들, 연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좁은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렇다. 이곳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신병원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난 전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친놈의 몸으로.
 이 미친놈의 몸을 차지한지도 한 달이 지나가고 있건만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도 탈출할 수도 없다. 자해를 했는지 목이 다쳐 말을 못했고, 자해 방지용 병원 옷을 입고 있어 손발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나쁜 건 이 몸 주인의 기억이 마치 나의 기억인 양 떠오른다는 것이다.
 단편적이고 돌발적으로 그려지는 기억들이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지간히 몸을 막 굴리던 녀석이었는지 성인용 비디오의 장면들도 간혹 보였다.
 따지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뇌세포가 살아 있다면 그 속에 잠재된 기억들 또한 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영혼 상태에서도 기억은 존재하는 것일까?
 쳇! 이딴 거에 고민할 필요 없다. 난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의 양이 미약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제는 이진하라는 인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기억을 알고 있는 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멍하니 생각을 해서일까? 자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졸린다. 따뜻한 가을 햇볕의 영향도 있겠지만······.
 ―딩동 댕동∼ 딩동 댕동∼ 딩∼ 딩∼
 일광욕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멜로디에 정신이 들었다. 깜빡 졸았나 보다. 병원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며 몸집 좋은 간호사들이 나와 환자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미친놈도 ‘다음에 보세’라는 끔찍한 말을 던지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부터 원장님 진료가 있을 거야.”
 건조하고 무뚝뚝한 음성. 내 전담 남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리곤 뒤에서 미는 힘에 의해 실내로 들어갔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고 휠체어가 멈췄다. ‘원장실’이라 적힌 문 앞이었다.
 “원장님, 이진하 환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연륜이 있는 편안한 목소리.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였음에도 괜스레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원장실에 들어서자, 제일 눈에 띄는 건 녹화용 카메라와 두 명의 경호원이었다. 그리고 원장의 취미인 듯 창틀에는 여러 가지 난초들이 잘 손질된 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서 오게, 진하 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가?”
 빌어먹을! 눈으로 보면 모르겠냐? 어디가 불편한지? 내 모습은 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만든 환자복을 입고 목마저 두툼한 붕대를 감고 있어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불편한 곳이 없냐라니.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다 진하 군을 위해 그러한 것이니.”
 내 불만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원장은 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웃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자네를 부른 건 몇 가지를 묻기 위함이네. 특히, 가족 분들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시고 자네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아 이 자릴 마련했으니 편하게 말을 하게나. 먼저 상처에 대해 먼저 말을 해 보지. 왜 갑자기 자해를 했나? 폭력성이 심해져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해를 하다니······.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건가?”
 인상을 썼다.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 것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속마음은 감추었다. 그리고 의문을 표했다.
 “아참! 미안하네. 목이 다쳐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군.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원장의 말에서 왜 이진하가 죽고 자신이 그의 몸을 차지하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내 목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하가 겪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고통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끄윽!”
 다친 목 때문에 괴음이 흘러나왔다.
 “진하 군, 괜찮나? 갑자기 왜 그러나? 목이 아픈 건가? 김 간호사! 김 간호사!”
 원장의 말이 들렸지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엄청난 기억들이 흘러들어 왔고 그 때문에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이진하. 대한민국 제계 순위 15위의 오성그룹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조부모님, 부모님, 가족들 모두 날 사랑해 주셨기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불행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부모님이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공부를 멀리했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점 더 삐뚤어져 갔다.
 물론, 조부모님과 가족들은 그런 날 보면서 안쓰러운 얼굴로 이해해 주셨다. 특히, 작은아버지는 변호사와 경호원까지 붙여 주셨다. 하지만 그뿐. 그분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진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난 더욱 심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심지어 마약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작은아버지가 내게 붙여 준 변호사가 처리해 줬기에 나의 행동은 더욱더 나빠져 갔다.
 마침내 한 파파라치에 의해 마약 파티를 하던 내 모습이 사진에 찍히고 말았다. 결국, 할아버지께선 분노하셨다.
 강제적으로 이곳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난 한동안 짐승처럼 묶여 있어야 했다. 세상을 원망했고 날 이곳으로 보낸 모든 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마약 중독 치료가 끝났을 땐 오히려 지금까지의 삶이 부끄러웠다. 너무 이른 음주와 담배 그리고 마약으로 인해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면서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특히, 날 담당하던 김지연 간호사는 잊고 있던 어머니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제정신을 차리는 걸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철호! 나의 작은 아버지!
 으득! 그 인간, 아니 짐승 같은 놈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그놈이 방황하는 날 타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것을 날 위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지내 왔었다. 가족의 사랑이라고 믿고 지내 왔었다.
 놈은 병원까지 마수를 뻗쳤고 원장은 정신 치료의 일종이라며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담당 간호사도 바뀌었다. 약을 복용하면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의 환자들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며 핸드컴에 연결된 헤드셋(뇌와 직접 정보를 주고받게 도와주는 장치) 씌워 놓은 채로 말이다. 헤드셋에서 각종 색깔들이 뒤섞여 현란하게 움직이는 영상이 하루 종일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헤드셋에서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차츰 환각과 환청이 되살아났다. 마약을 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마약과 다르게 기분 나쁜 증상이었다. 치료 목적이라는 영상이 오히려 날 망가지게 만들었다.
 화가 났다. 분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아버지와 원장의 통화를 들었던 것도 나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난 미쳐 갔다.
 ······.
 빠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마저 느껴질 정도로 내 정신은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눈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지만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빼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장이 챙겨 주는 정신병 치료 알약을 먹고 취하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날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날 원망 말라구. 다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덕분에 돈 좀 만지게 되었으니 고통 없이 보내 주지. 크흐흐흐흐!”
 역한 입 냄새가 확 풍겼다. 놈은 천천히 내 오른손에 뭔가를 쥐어 주더니 서서히 내 목에 갖다 댔다. 헤드셋의 반쪽이 날카롭게 빛났다. 구름에 벗어난 달이 창을 비췄다.
 병원복을 입고 있는 놈의 얼굴이 확연히 보인다. 하지만 그 밋밋한 얼굴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목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고통! 차츰 힘이 빠진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멀어져 간다.
 이 원한을 이 분노를 어떻게 풀지? 개새······끼······들······.
 “허억!”
 꿈이다. 아니, 기억인가? 이진하의 모든 기억들이 나에게 전해졌다. 심지어 기쁨, 슬픔, 분노, 좌절과 같은 감정까지도. 그래서일까? 원장실에서 정신을 잃은 후부터 눈만 붙이면 이진하의 인생을 꿈꾼다.
 그리곤 마지막은 항상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일어났다.
 “3주짼가?”
 식은땀을 닦으며 이렇게 악몽을 꾸는 날짜를 꼽아 봤다. 목의 상처가 거의 나았는지 며칠 전부터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깨끗한 소리가 아닌 탁하고 컬컬한 목소리였다.
 병원용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운동 전에 하는 간단한 스트레칭이었다. 몸이 삐거덕거린다.
 하지만 일주일간 조금씩 움직인 보람이 있는지 처음처럼 신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진하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담배, 술, 마약, 섹스에 찌들었고 병원에 입원해서는 약에 취해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몸이었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두 다리.
 코리의 몸이었을 땐 두 다리가 없었다. 양부모님의 추측에 따르면 사고로 잃었을 것이라 했었는데 기억엔 없다. 물론, 로봇 의족이 있었다. 하지만 비싸기 만하고 성능이 나빴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노동이었다.
 “아구구구구∼!”
 허리를 풀다 결국 신음 소리가 나왔다. 10분도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망할 놈의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자 전담 간호사가 들어왔다.
 “치료받을 시간이다.”
 저 새낀 항상 반말이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다. 난 두말없이 그가 가지고 온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휠체어는 몇 개의 차단 문을 지나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던 외과로 향했다. 정신병원의 외과라고 해 봐야 의사 한 명에 방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거라도 있는 덕분에 내가 이 몸을 차지하게 된 걸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곳이었다.
 “어서 와라.”
 “네. 안녕하셨어요?”
 “자식, 목소리가 많이 좋아졌군. 녹차 마실래?”
 “네, 한 잔 주세요.”
 “한 선생님. 이진하 환자 오늘 11시부터 원장님의 진료가 있습니다.”
 “알았어요. 그전에 끝낼 테니 나가 있어요.”
 녹차를 끊이던 한 선생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감시자인 전담 간호사가 나가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
 ······.
 “쓰읍! 인사!”
 “가, 감사합니다.”
 내미는 녹차를 받으며 아무 말을 안 하자 인상을 쓰는 한 선생이었다.
 이 인간은 처음부터 이랬다. 인사나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으면 인상을 쓰면서 별 말을 다 했다. 싸가지가 없다는 둥 살려 준 은인을 우습게 안다는 둥. 나도 자존심이 있어 버텨 봤지만 치료를 받으며 눈물을 쑥 뺄 정도로 고통을 받은 후 꼬리를 내렸다.
 고통 앞에 장사 없었다.
 한대현. 착하지 않은 얼굴에 키는 190이 넘었고, 덩치 또한 상당해 조직 폭력배라고 해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기완 다르게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잘린 후 내가 살해당하기 2주일 전에 우연찮게 이곳에 취직되었다.
 실력 있는 외과의가 이런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마침 한대현이 그날 당직이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잘못됐으면 이 몸을 차지했다가 바로 또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치료 때마다 자신이 내 목숨을 살렸다는 걸 강조하는 덩치답지 않게 쫀쫀한 의사였지만 밉지 않고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이제 상처를 볼까.”
 어느새 녹차를 다 마셨는지 솥뚜껑 같은 손이 내 목을 향했다. 순간, 움찔했다.
 “쫄기는······.”
 살해되던 날의 기억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겁을 내던 난 한대현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거의 아물었네. 오늘은 소독만 하면 되겠다. 게임하고 있을래?”
 항상 그랬듯이 핸드컴에 연결된 안경을 건네는 한대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안경을 받아 썼다. 시력을 따라 움직이는 아이즈 포인트(Eyes point)로 간단한 카드 게임을 켰다.
 물론 게임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을 속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후, 난 오늘 실행할 일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대현의 배려로 치료 때마다 컴퓨터를 할 수 있게 된 건 행운이었다. 치료 시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장점뿐 아니라 진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원의 시스템을 해킹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해킹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구멍이 쑹쑹 뚫려 있었다. 이후, 난 치료 때마다 이 몸의 주인인 진하에 대해 알아갔다.
 치료 때마다 기록하던 동영상들, 이 병원 사람들의 정보, 항상 기록되고 있는 감시 카메라의 기록 등.
 하지만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몸이 진짜 미친 건지 아님, 이들이 증거를 인멸했는지 헷갈린다. 사건 당일 날 감시하던 기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됐든 난 이곳에 더 머무를 생각 따윈 없다.
 탈출할 것이다!
 “그동안 감사드려요.”
 “자식, 안 볼 사람처럼······. 다음 주에 보자.”
 “네.”
 한대현 선생께 작별 인사를 하고 원장실로 향했다. 보기 싫은 얼굴이 가짜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하하하! 어서 와, 진하 군. 한 선생에게 들으니 많이 나았다고 하던데. 그래, 상처는 괜찮나?”
 “네.”
 머리 한 곳에서 분노가 일었다. 아마 지금 내 머릿속에 진하의 감정만 가지고 있다면 당장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성과 섞여져 분노를 희석할 수 있었다.
 “자네 작은아버님이 걱정이 많다네. 물론, 나 또한 걱정이 많았어. 이제 두 번 다시 가족들에게 걱정 끼칠 짓은 하지 말게.”
 지랄! X새끼들!
 이철호에 대한 얘기를 듣자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화가 났다.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참아야 한다. 탈출을 위해선.
 “자, 그럼. 이제부터 얘기해 보세. 그날 왜 그랬는지 천천히 말해 보게. 자네가 꺼려진다면 말하는 중간에 멈춰도 좋네.”
 “그날 저녁을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순 없어요. 하지만 자기 전에 무엇인가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났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치료 시간은 30분 정도. 하지만 탈출을 위해선 11시 50분경이 시뮬레이션 결과 가장 좋았다. 물론, 몇 가지 돌발 상황을 예측해 방비를 마련해 놓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촬영된 영상도 30분을 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가급적 느린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 * *
 
 ‘11시 20분!’
 한마음정신병원의 경비원으로 재직 중인 윤성준은 침착한다고 했지만 자꾸 고개가 시계 쪽으로 향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급하면 갔다 와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내, 내가 뭘! 그냥 어제 잠을 잘못 잤는지 몸이 좀 찌뿌듯해서 그래.”
 “크크크! 마나님과 좋은 시간 보내셨나 봐요?”
 “예끼, 이 사람이 별소릴······.”
 연신 키득거리는 신항석의 눈치를 보곤 괜스레 앞에 놓인 출입 일지로 눈을 돌렸다.
 윤성준의 시선은 출입 일지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며칠 전 자신의 핸드컴으로 온 문자 메시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11월 20일, 11시 40분에 정문을 열어 두시고 30분 정도 자리를 비우시면 2,00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허락하시면 문자 보내 주세요. 그럼, 계약금 10%를 한국은행 통장으로 보내겠습니다.
 
 이 문자를 봤을 때 피싱 문자라 확신했다. 제세공과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챙기는 경우라면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명문대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한 달 월급 300만원. 사실, 이 돈으로는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아니, 부족했다.
 과외는 커녕 학원 한 번 다녀 본 적이 없는 아들이 남들이 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당장 입학금과 등록금이 2,000여만 원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상한 메시지에 ‘예’라는 메시지 한 번 보냈다고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보낸 후 5분도 되지 않아 입금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 후, 고민은 사라졌다. 문 한 번 열어 주고 2,000만 원이라니······.
 하지만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나 이 일 때문에 해고당하지는 않을지 그것도 아님, 엄청난 범죄에 발을 들인 건 아닌지. 특히나 눈앞에서 어느새 졸고 있는 신항석이 있다는 것이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원장의 처조카였다.
 따르르릉!
 경비실에 있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상념에서 벗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네, 경비실입니다.”
 ―윤씨, 항석이 거기 있지? 지금 원장실에 난방이 전혀 안 되고 있으니까 당장 손보라고 해!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끊고 항석을 깨우려 돌아보니 전화벨 소리에 깼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무슨 전화예요?”
 “지금 원장실에 난방이 고장났나 봐. 자네더러 손 좀 보래.”
 “아이씨! 잘 돌아가던 것이 왜 지랄이래. 점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능 가 봐. 병원 전체에 이상이 있을지 모르잖아.”
 “에이∼ 근데, 같이 갈 거죠?”
 윤성준은 옳다구나 싶었다. 신항석이 맡고 있는 일이 건물 유지 보수였고 자신은 경비원이었지만 사실 구분이 없었다. 특히나 신항석이 들어오기 전까진 비록 자격증은 없었지만 간단한 고장은 잘 고치는 편이었다.
 “진짜 우리 사이에 이러기에요? 제 실력 뻔히 알면서도······.”
 생각을 한다고 잠시 대답이 없었더니 신경질을 부리는 신항석이었다. 뒤 배경으로 들어온 그라 직책만 있을 뿐 실력은 거의 없었다.
 “나야, 가고 싶지. 근데 누가 올지 모르는데 문은 어쩌냐?”
 “누가 문짝 떼 갈까 봐요? 그냥, 열어 두고 가면 되지. 에잇!”
 지잉!
 “됐죠. 빨랑 가요.”
 신항석이 아예 개폐 장치에 버튼을 누른 후 손을 잡아끈다.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인가?’
 신항석의 손에 이끌려 경비실을 나서며 시계와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결과야 어찌 되었던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친 윤성준은 본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머지 금액이 들어오길 간절히 바랐다.
 
 * * *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자네 몸도 좋지 않은데 방 안이 차가워지는 것 같으니까 이번 질문으로 끝을 내도록 하지. 그래 뭔가?”
 난 잠시 원장을 응시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차례다. 시계를 보니 11시 42분. 마지막 질문을 하고 나면 이 지겨운 감옥과도 안녕이다.
 “제가 자해를 했다는 그날, 사실 전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할 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제 기억으론 분명 누군가가 절 죽이려 했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음,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 찌른 사람이 자네의 작은 아버지였던가? 아님, 나였던가?”
 ‘뻔뻔한 놈! 얼굴 하나 변하지 않다니.’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피해망상의 다른 결과물이라고 봐도 되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작은아버지와 나에 대한 공격성이 잠재의식 속에서 그런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 일단 오늘은 이만하기로 하고 내가 처방하는 약을 복용한다면 그날의 기억도 자세히 떠오르는 날이 올 테지. 그럼, 그때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질문이었다. 약간의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려 했건만.
 “참, 원장님. 다음엔 할아버지를 뵙고 싶군요. 안 되면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요.”
 “그래, 그건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약은 김 간호사가 가져갈 테니 식사 후에 복용하도록 하게.”
 순간, 진하가 정말 살해당했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해킹한 정보에 따르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는데 저 인간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정말 피해망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망상이라고 한들 이미 정신병을 가진 진하는 죽었고 정상인인 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탈출 후, 감시하며 더 자세히 알아본 후 복수를 하면 그뿐이다.
 김 간호사가 들어와 내 휠체어를 밀고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휠체어의 바퀴를 잡고 원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오늘의 얘기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신 말씀 모두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Shut down!”
 “엇!”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상황이라 김 간호사는 문 안쪽에 난 문밖에 있었다. 그 상태로 문이 닫히자 김 간호사는 비명을 지르며 휠체어에서 손을 뗐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서인지 문에 달린 창으로 당황한 놈들의 얼굴이 보인다.
 “하하하! 나중에 다시 보자고요.”
 지은 죄가 많아서일까? 원장실 자체가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 놓았기에 이번 일을 계획하기 쉬웠다. 내 웃음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놈들에게 한 번 웃어 주고 난 휠체어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거나 키(Key)를 사용해야 하는 엘리베이터는 식은 죽 먹기. 문제는 로비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 과연 사람이 들어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들어가 있다면 이미 문이 폐쇄되어서 문제가 없지만 혹 한 명이라도 로비에 서성인다면 조금은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침착하게 본관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났는지 눈치를 못 챈 직원이 여전히 뭔가에 집중하며 앉아 있다. 로비의 직원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밥 먹으로 갔나? 괜스레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 거기 누구······? 이런, 환자가 내려오다니.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까!”
 너 같으면 서겠니? 못 들은 척 휠체어를 계속 굴렸다. 5, 4, 3m.
 “잡았다!”
 휠체어의 뒤를 잡혔다. 휠체어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휠체어를 잡고 있던 직원이 당기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진다.
 “All shut down!”
 본관을 나서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철컹철컹!
 환자들을 도망 못 가게 만들어 놓은 장치들은 최고의 탈출 도구였다. 1시까지 누구도 이 건물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길지 않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탈출을 계획하면서 가장 심열을 기울인 곳은 다름 아닌 정문을 여는 것이었다. 다른 곳은 다 온라인화가 되어 있었지만 정문만은 경비실에서 문을 열어야만 했다.
 경비실을 흘낏 보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정문 또한 열려 있었다.
 “하하하하!”
 탈출이다. 고전 영화 쇼생크 탈출과 같은 느낌을 재연해 보았다. 왠지 무척이나 쪽팔린다. 그냥 철문을 밀고 나가자 불러 놓은 택시가 보였다. 번호판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서대호 씬가요?”
 내가 택시를 예약할 때 사용했던 이름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뒷문이 열린다. 택시를 타면서 목적지를 말했다.
 “서울 광화문으로 가 주세요.”
 “네. 근데, 그곳까지만 가면 나머지 잔금 80만원 주시는 거죠?”
 “네. 컴퓨터 사용할 수 있으면 도착과 동시에 드리죠. 제가 부탁한 옷은 어디에 있죠?”
 “여기 있어요. 이걸 사용하시면 되요.”
 핸드컴에 연결된 안경을 준다. 여성 운전사는 부탁한 옷을 건네곤 차를 출발시켰다. 옷을 갈아입곤 창밖으로 환자복을 던져 버렸다. 논밭 사이로 병원이 멀어진다.
 
 
 
 2.아라
 
 
 한국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봄. 4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1시간 남짓한 한강에서의 걷기 운동으로 약간 나던 땀도 바람 한 방에 식어 버린다.
 “으, 추워진다. 빨랑 들어가자.”
 코리였을 때부터 익숙한 혼잣말. 여유롭지 못하게 마시던 커피 컵을 휴지통에 던지곤 걸음을 옮겼다.
 꽤 많은 양의 빵과 우유를 구입한 후,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구입한 10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운동 다녀오시나 보군요.”
 “네.”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연세 지긋한 분의 깍듯한 인사에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 10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몇 개의 보안장치가 된 문으로 다가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진하, 어서 와요.”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정말이지 아름다운 목소리다.
 “다녀왔어, 아라.”
 텅 빈 공간을 향한 인사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 늘 혼자였던 나였기에 아라를 만들 때 인사하는 법을 가장 먼저 입력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라는 미국 NSA에서 연구했던 최초의 A.I(인공지능)인 케네디의 발전형이다. 물론, NSA에서 나올 때 케네디의 프로그램 자체를 완전히 삭제시켜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공지능 컴퓨터이다.
 케네디를 만들 당시 개발자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자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내가 볼 땐 기존 프로그래밍 언어의 확장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생각하던 전혀 다른 언어와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나름 이름을 ‘아라’라고 명명했다. 이 모든 것을 개발자들에게 밝힐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난 아라를 모듈 형태로 만든 후, 그들이 만든 언어를 번역하는 코드를 추가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테스트.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빴지만 파이라 그룹과 NSA는 기뻐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대해 말해 주기도 전에 내가 죽어 버렸으니······.
 정신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가상 인물을 내세워 사둔 집에 숨겨 둔 CPU와 기계들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내전 이후 지어진 건물이라 지하 주차장 밑에 별도의 대피소가 있었는데 그곳에 아라의 본체를 설치한 후, 순수한 아라를 보완해 인스톨했다. 그때가 일주일 전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
 “여자 생각하는구나. 나라도 괜찮다면······ 오늘밤 너와 뜨거운······.”
 “자, 잠깐! 어디서 그런 괴상망측한 말을 배운 거야?”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예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몰래 카메라로 나온 것도 봤는데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입이 귀에 걸리던데······. 진하의 반응은 아저씨들 중에서도 1%에 해당되는 반응이네요.”
 ······.
 막장 드라마가 애들 망친다더니 딱 그 꼴이다. 아라가 컴퓨터라고 해도 인공지능을 가졌다. 젠장! 태어난 지(?) 이제 일주일짼데.
 뭐라고 설명은 해야겠는데 딱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난 컴퓨터밖에 몰랐고, 진하는 철부지 그 자체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도.
 프로그래밍 할 땐 쌩쌩 돌아가던 머리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결국 진땀을 흘리며 다음부터 그런 말을 못 쓰게 하는 정도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어떻게 아라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생각해도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천재를 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하지만 아라는 정도를 벗어났다.
 언어에 대한 기능이야 프로그래밍할 때 만들어 뒀지만 처음 작동 후 수학을 가르칠 때를 생각하면 내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사실 아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CPU(사실 CPU 1,000개의 결합체)는 엑사플롭(Exaflop:1초에 1,000조 회 연산)급이다. 물론, 엑사플롭급 슈퍼컴퓨터들이야 많긴 하지만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디자인된 CPU였다.
 그리고 작동 방식 또한 이론적인 바탕에서 만들어졌기에 사실 정확하게 제 속도를 가질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아라’라는 프로그램과 슈퍼 컴퓨터급 CPU의 결합은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칙연산을 가르칠 때만 해도 나름 아이에게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어 흐뭇했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20분을 넘지 못했다. 방정식, 집합, 함수, 로그······ 등등. 진하의 머리와 내 머리의 합은 공집합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결국 해킹을 가르쳤다. 인터넷이라는 지식의 보고를 마음껏 뒤져 보고 혼자 공부하라고.
 오늘 현재 사실 아라의 지식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아라가 저장한 데이터를 살펴보려 했지만 그 양이 너무나 엄청나 포기했다. 기분, 느낌, 감정 등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여전히 모르는 듯했지만 프로그램이 이것들을 알 수 있을 진 아직까진 미지수였다.
 “진하, 필요한 게 있어요.”
 남은 빵과 우유를 냉장고에 넣을 때 아라가 말했다.
 “뭔데? 참고로 물어볼 게 있다면 인터넷을 뒤지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쩝∼”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해요.”
 “얼마나 필요한데?”
 “일단, 새로운 비메모리 생산 시설, 로봇, 기타 장치 등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물과 장비, 핵융합로 설비, 우주를 연구할 수 있는 인공위성······(중략)······ 끝으로 하프늄 10kg 필요해요.”
 ······.
 “돈으로 환산한다면 1조 달러 정도면 돼요.”
 ······.
 “진하? 진하, 괜찮아요? 진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어요.”
 아라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1조 달러라니? 얼마 전 뉴스에서 본 한국 1년 예산의 2배가 넘는 돈이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간땡이가 저토록 커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지? 문득, 그동안 불려 놨던 숫자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라야, 괜찮아. 그건 그렇고 내 핸드컴에 ‘kori’라는 폴더를 확인해 봐. 그게 내 전 재산인데 얼마나 될지 계산해 보고.”
 “알았어요.”
 코리였을 때 만들어 놓은 비자금들과 주식들에 대한 정보들이었는데 NSA에 근무하면서부터 거의 신경 쓰지 못했던 돈들이었다.
 “원화로 계산 끝났어요. 총 326,236,531,590원이에요. 주식의 경우 오늘 시세로 계산했어요. 건물과 땅의 값은 구입 당시의 가격으로 계산했고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하긴 게임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했으니 당연한 결과물(?)인지 몰랐다.
 “음······ 건물, 땅처럼 처분하기 힘든 것 빼놓고는 얼마나 되지?”
 “103,093,874,380원이에요.”
 “······아라야, 대략적인 금액만 말해. ‘약’이라던가 ‘대충’이라는 좋은 말이 있잖아.”
 “알았어요. 대충 1,000억쯤 돼요.”
 “그럼, 이 시간부로 그 대충 1,000억을 줄 테니 그것 가지고 해 보고 싶은 거 해 봐. 대신, 부동산은 관리만 해.”
 “하지만, 진하. 안 그래도 부족한 금액에서······.”
 “벌어! 주식에 투자하든 물건을 만들어 팔든 벌어. 벌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말리지 않겠어.”
 호기롭게 말하다 뭔가 부족한 게 있어 보였다.
 “참, 절대로 정당하게 벌어야 해. 가령, 해킹으로 남의 돈을 가져온다거나······.”
 “······!”
 “전쟁을 발생시키거나······.”
 “······!”
 “바이러스를 퍼트려 치료제를 팔아도 안 돼. 오로지 정.당.한. 방법, 즉, 남들이 볼 때도 타당하게 벌었다는 말이 나와야 해. 알았지?”
 “휴∼ 깐깐하군요. 그런 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죠. 알았어요.”
 역시나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라를 지금이라도 폐기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 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과 해도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설명해야 했다.
 아라가 원하는 걸 뭉뚱그려 보면 원하는 게 의외로 간단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테스트하고 실험해 볼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 *
 
 이튿날부터 운동할 시간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가상의 인물이 되어 아라가 원하는 연구소 설립을 위해 공공 기관을 뛰어다녔고, 토지를 사러 다녔으며, 외국도 여러 번 나갔다 와야 했다.
 그러던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아라가 원하는 것 중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줄이고 줄여도 난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휴∼ 아라야, 로봇은 언제쯤 완성이 될 것 같냐?”
 방금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3개월간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이번 일본행을 끝으로 한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주차된 차에 몸을 던지며 결과가 뻔한 질문을 던졌다.
 ―제1연구소와 제2연구소의 경우 진척도가 30% 정도예요. 완공은 12월로 예정이지만 이후, 제가 예측한 로봇을 테스트하려면 적어도 1년은 넘게 걸릴 거예요.
 핸드컴과 연결된 자동차의 스피커로 들리는 아라의 답은 역시나였다. 아라가 연구하고 있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하루라도 빨리 나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사실 그것이 불가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를 개발한 후 로봇의 발전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현재에 이르러 하우스키퍼용 로봇, 건설 로봇, 성인용 로봇 등 거의 생활전반이 로봇과 함께하곤 있지만 아직까진 부족한 것이 많았다.
 특히나 휴머노이드의 경우 성인용 로봇을 제외하곤 쓸모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기술 개발이 부족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용도적인 측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사람과 같이 만들어진다면 인간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건 차지하고라도 내가 생각하는 휴머노이드의 용도는 간단했다. 나의 귀찮음을 대신할 존재였다.
 아라가 자신 있게 1년이라고 말했지만 10년이 넘어서라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아라에겐 말하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감았던 눈을 뜨곤 서울로 향했다.
 
 * * *
 
 잊고 있었다.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것을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을. 큰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고자 내 목숨을 걸었던 일을 잊어버리다니······.
 핑계를 만들어 본다. 진하라는 인물의 기억과 섞이며 혼란스러워 잊었다고. 아라를 만들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라고. 죽음을 담보로 보낸 자료를 그들 스스로 발로 차 버렸으니 이제 도울 필요 없다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의 죽음에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이였다. 한쪽 다리는 새까맣게 썩어 있었고 빼빼 마른 몸은 잔득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죽음 직전에 안심할 누군가를 보았을까?
 행복해 보였다. 고통에서, 절망에서 벗어나 안도했다는 듯이. 아이가 죽은 지 이틀. 그동안 난 뭘 했지? 침대와 컴퓨터 사이를 오가며 빈둥댔을 뿐이다.
 신기하게도 오른쪽 눈에서만 눈물이 흐른다. 코리는 울어도 진하는 울지 않는다.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애처로움과 냉정함이 맹렬히 싸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흔히 있는 일에 난 소파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3일간 누워 있었다. 아팠다. 병명은 몰랐지만 그냥 앓았다.
 감기였을까?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시끄럽게 굴던 아라는 언제부터인가 조용하다.
 “아라, 좋은 아침!”
 “진하, 좋은 아침.”
 “내가 좀 아팠나 봐?”
 “몸 상태는 정상적이었는데 뇌파가 많이 불안했어요. 하지만 어제 밤부터 정상적으로 돌아와 안심했어요.”
 “그래? 아라 덕분에 다 나았나 봐. 고마워.”
 “천만에요. 진하.”
 머리가 맑다 못해 텅 빈 것처럼 개운하다. 감정적 혼란도 없고 그······ 아이 생각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를 뿐이었다.
 “아라, 아침 좀 시켜 줘.”
 “샌드위치와 우유를 시켜 줄까요?”
 “아니, 시원한 국물 있는 게 좋겠어. 생태 맑은 탕이나 비슷한 걸로 주문해 줘.”
 “알았어요. 아프고 나더니 입맛이 변했나 봐요?”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배달되어 온 음식이 보였다.
 “우와 맛있어 보인다. 근데, 2인분이 넘겠다.”
 “1인분은 배달이 안 된데요.”
 “아라가 같이 먹을 수 있으면 딱인데. 어쩔 수 없지. 잘 먹을게.”
 생태 맑은 탕은 맛있었다. 만일 아라가 같이 먹었다면 부족할 뻔했다.
 “푸하∼ 잘 먹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호호, 아프고 난 뒤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아요.”
 “그래 보여?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잖아. 하하하!”
 아라의 말처럼 뭔가가 바뀐 것을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어떻게 변하든 ‘나’라는 사실은 틀림없으니까.
 “아라야, 현재 돈이 얼마나 있어?”
 “부동산을 제외하고 3조가량 있어요.”
 “응? 얼마라고?”
 잠깐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3조라니······. 몇 달 전 사용했던 금액이 얼만데 줄지 않고 늘었단 말인가?
 “2,998,683,986,345원 있어요. 50개의 외국 계좌에 있는 돈은 오늘의 환율을 적용했어요.”
 “지난번에 쓴 돈이 있는데 어떻게 더 늘었지?”
 “제1, 2연구소 건립 비용 중 약 1,000억, 주문한 각종 로봇과 장비의 결제 대금이 365억. 3개월간 지급될 예정이며, 지하에 핵융합 시설을 건설할 섬의 구입은 신원상의 문제로 아직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며칠 내로 결론이 나올 거예요. 오늘 현재까지 총지출 금액이 8,234억. 수입은 대략 1조 5천억쯤 돼요.”
 “헐∼ 내가 알기론 수입이라 할 부분은 주식 투자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그 정도로 벌 수 있었던 거야?”
 “주식 시장이라는 게 진하의 말대로 정당한 시장이 아니더라고요. 겉으로는 정당한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더군요. 그래서 해킹으로 투자하려는 회사의 내부 정보를 모았어요. 그걸 기초로 주식을 한 거죠. 진하가 시장에 통용되는 정당한 방법이라는 단서를 조금만 약하게 했어도 10배는 넘게 벌었을 거예요.”
 “쩝, 고생 많았어.”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했다. 10배라는 말에 입이 썼다. 내 스스로도 막연하게 얘기한 것인데.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이제부터 난 우리나라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야.”
 간단한 한 문장의 말이었지만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 사회의 경제 문제부터 빈부의 격차, 부의 재분배, 청년 실업 문제 등등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열거해 가며 설명을 하는 아라를 보며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처럼 아라의 말을 빠짐없이 기억하려 노력했다.
 TV에서 봤던 그 아이와 같은 초극빈층 약 300만. 극빈층 약 1,000만. 하류층 약 2,000만. 아라에게 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가히 암울했다.
 중산층도 일부를 제외하곤 대다수가 단지 먹고 사는 게 다였다. 부의 집중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에도 정부로써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라의 말이었다.
 장기전. 나와 아라의 결론은 서서히 바꿔 가자는 것이다. 내가 가진 현금 3조원은 초극빈층에게 100만원씩만 돌리면 끝인 돈. 차라리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는 결론이었다.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라는 글을 한쪽 벽면의 모니터에 써 놓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쳐다본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머리를 맹렬히 굴려 본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공부라고는 개뿔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떠오를 리 없다.
 난 그렇다고 쳐도 아라까지 이렇게 조용하다니······. 또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스럽다.
 “난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생각 없어?”
 “글쎄요, 모든 산업이 점점 자동화, 로봇화되어 가고 있는 현 시점에선 마땅한 게 보이지 않는군요. 그나마 사람을 가장 많이 고용할 수 있는 것이 건설 분야긴 한데 현재 우리 상황과는 맞지 않아요.”
 “건설이라······ 굳이 우리가 할 필욘 없잖아? 기존의 건설 회사에 수주를 주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닌가? 돈이야 주식 투자로 벌면 되구.”
 “하지만 문제점이 있어요. 현재 제가 운용하고 있는 자금의 대부분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가상 인물들에게 나누어져 있어요. 그 돈을 남몰래 기부 형식으로 뿌리지 않는 한 정확한 투자 내역을 한국 정부에 보여줘야 하는데 무리가 있죠. 제1연구소와 제2연구소의 경우도 외국인 투자 49%와 제 이름으로 51%로 투자해서 설립했는데 진하는 모르겠지만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야 가능했어요. 그런데 만일 3조원, 아니, 앞으로 쏟아부을 돈을 생각한다면 진하의 뒷덜미가 잡힐 게 분명해요.”
 “으······ 뭐가 그리 복잡해?”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결국 돈을 벌어야 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최소한 내 이름이나 아라의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라는 A.I일 뿐이고 난 프로그래밍밖에 모르는 바보니 웬만한 회사는 힘들다.
 뭐가 있을까? 백신을 만들어 볼까? 나 혼자 먹고 살기엔 걱정 없겠다. 게임을 만들어 볼까?
 ······!
 “게임을 만들자. 게임 회사를 차리는 거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하하하!! 아라야, 우리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어 보자!”
 모든 고민을 확 날려 버리는 듯 난 한참을 웃었다.
 
 * * *
 
 “으! 머리 아파. 10분간 휴식!”
 난 끼고 있던 글래시즈(핸드컴에 연결된 안경형 모니터)을 테이블에 던지고 소파에 눕듯이 기댔다.
 일주일 전 날아간 고민은 부메랑이 되어 더 많은 고민거리를 싣고 나에게 돌아왔다. 왜 게임을 만들자고 했을까? ‘게임은 프로그래밍이다.’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만둘 생각 따윈 없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아른거리는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에 만든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를 높이는 로직을 사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윽, 또 실패다. 기존의 데이터 압축 기술을 2배 이상 높였고, 전송 속도도 50% 이상 높이는 로직을 만들었음에도 아라의 입(?)에선 불가능이란 말이 나왔다. 감았던 눈을 떴다.
 “뭐가 문제가 되는 거지.”
 “가정용 컴퓨터들의 성능, 인터넷 전송 속도, 저와 같은 슈퍼컴퓨터의 성능, 모든 것이 문제예요. 저조차도 모든 성능을 사용한다고 해도 1,000명 이상의 부하를 견딜 수 없어요.”
 “왜, 문제가 되는 건데?”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온라인게임에 하나의 산을 표현할 땐 산의 모양을 3D로 구현한 파일이 유저의 컴퓨터에서 표현돼요. 즉, 대부분의 처리를 유저들의 컴퓨터에 떠넘기는 거죠. 유저의 컴퓨터에서 게임 서버를 보내는 정보는 유저의 현재 위치, 상태 등 극히 일부분의 코드화된 정보뿐이에요. 게임 서버는 단지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유저가 몬스터를 잡고 있는지 잡았으면 어떤 아이템을 줄지를 결정하고 서버 코드를 유저의 컴퓨터로 보내요. 이때, 아이템의 모양 등은 역시나 유저들의 컴퓨터들에 저장되어 있어요. 하지만 진하가 만들려는 온라인 가상현실 게임의 경우 데이터 용량 자체가 현재 나와 있는 개인용 컴퓨터의 용량은 가뿐히 넘어 버리죠. 그렇다고 서버 컴퓨터가 처리를 하게 만든다면 더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 되죠.”
 ······.
 “지금 진하가 원하는 가상현실을 구현하기 위해선 유저들의 컴퓨터를 슈퍼컴퓨터로 바꾸거나 제 성능이 지금의 10,000배가 넘는다면 유저 1,000만 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즉,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게임 회사를 포기해야 하나? 파이라 그룹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파이라 그룹을 뒤져 봤어?”
 “물론이죠. 제일 먼저 모든 게임 회사들부터 살펴본 걸요. 정 안 되면 포기해요. 할 수 있는 일은 수도 없이 많잖아요. 진하가 만든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를 높이는 로직만 하더라도 응용 프로그램과 결합한다면 꽤 고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에요.”
 “하긴······.”
 파이라 그룹도 계획하고 있던 단계였다면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포기할 수가 없다. 가상현실을 이루어 냈을 때 그 파급력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며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훨씬 빨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결점은 없는 것일까? 유저들에게 보여 주는 화면을 줄일 수 있다면 가능할까? 난 다시 일본 플레이플레폼X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장치에 연결된 헬멧 모양의 게임 기구와 손에 장갑을 꼈다.
 가상현실 게임의 패키지 형태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다. 일본의 플레이플레폼, 미국의 PBox, 파이어플레이어가 가정용 가상현실 게임을 만드는 곳인데 비싼 가격임에도 시장에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다.
 느린 로딩 화면이 끝이 나자 사막 한가운데 총을 들고 있는 나. 위를 쳐다보자 어느 순간 더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좌우로 몸을 돌려 보니 역시나 일정 각도를 지나자 몸이 더 돌아가지 않는다. 총을 자동으로 놓고 쏴 보았다.
 드르르르륵!
 몸의 반동이 느껴지며 총이 공중으로 들린다. 총소리 또한 요란하다. 귓속으로 미션이 전해진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적의 기지를 폭파하란다. 일주일 동안 몇 번 해 봤기에 익숙하게 진행해서 미션을 완료한 후 헬멧과 장갑을 벗었다.
 물론, 이후로도 몇 가지 미션과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곤 해도 전체 플레이 시간은 2시간이 되지 않는 게임이다. 처음엔 나도 신나게 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가물거리거나 참조할 때를 제외하곤 잘하지 않는 편이다.
 난 게임기에서 네모난 팩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진다. 이 게임팩 한 장이 일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용량 정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가상현실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로딩 시간도 길고, 상하좌우로 200도, 240도씩 영상을 보여 주는 정도랄까?
 눈을 감고 상상한다. 거대 도시 전체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공기의 시원함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어떻게 느끼게 할지도. 머릿속은 온통 문제 해결을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어? 상상 속에서 드는 갑작스러운 의문. 왜 나의 뇌는 미국 도시의 정경을 아무런 의심 없이 볼 수 있는 거지? 왜 어제 먹은 불고기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육즙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자, 잠깐! 아라야, 현재의 이 헬멧의 작동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뇌파를 통한 입력과 출력을 담당해요. 한마디로 입력장치와 출력장치의 역할을 하죠. 미국에서 발표한 브레인 맵의 시신경과 관련된 부분을 주로 사용하는데, 시신경에 전달되는 정보는 규격화되어 있어요. 즉, 간단하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평 150도 수직 140도의 화면이죠. 그걸 기준으로 최대한 보여 줄 수 있는 화면은 240도, 200도 정도예요. 또한, 그 화면을 보여 주고 움직이는 정보를 토대로 정보를 처리해요. 계속 새로운 형태의 헤드셋이 나오곤 있지만 현재로선 이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그렇다면 혹시 산이 크다, 작다, 높다, 나무가 있다, 없다는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도 있겠네?”
 “당연히 존재하죠. 하지만 그 부분에는 정보를 줄 순 있어도 정보를 받을 순 없어요. 하나의 산을 보더라도 개개인마다 그 산을 볼 때 느낌은 다 다르니까요.”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듣고 가능한지 판단해 줄래?”
 “좋아요.”
 “화면을 뿌리는 방법 대신에 수치를 정확하게 뇌에 전달하는 거야. 만일 산을 기준으로 해 보자. 산의 높이와 모양 등을 좌표화, 수치화해서 뇌가 알아서 판단하게 만드는 거지. 물론, 산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도 수치화해야겠지만 유저 컴퓨터에서 중간의 메모리 역할을 하는 곳을 만들어 미리 심어 두는 거야. 문제는 그 수치화 과정을 겪을 때 너에게 부담이 되느냐 안 되느냔데······ 어때? 이런 방법은?”
 “좋은 생각이네요. 테스트해 봐야겠어요.”
 난 다시 글래시즈를 썼다. 방금 생각한 것을 프로그래밍화해야 한다.
 해 보는 데까지 해 보고 도저히 힘들다 생각들 땐 패키지 게임이라도 만들 생각이다.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 로직만으로도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3.한 걸음씩
 
 
 2041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리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연인과 서로를 바라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진하도 나가서 즐기다 와요.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그동안 너무 개발에만 몰두했잖아요?”
 “그래 볼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지금쯤 한참 향락에 빠져 있을 녀석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이 모양이군.
 코리였을 때 크리스마스는 오히려 곤혹이었다. 가족도 없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특히나 상가의 문이 닫혀 밥해 먹는 것도 짜증났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호텔에 들어가 야경 구경하는 게 다였다.
 뭐, 지금 모습도 별 다를 게 없지만.
 “고아원과 양로원에 선물 보낸 건 어떻게 됐어?”
 “며칠 전 말했잖아요. 다 됐다고.”
 “그랬었나?”
 날씨가 싸늘해지는 11월 중순부터 불우 이웃 돕기에 동참했다. 전국의 고아원과 양로원, 소년 소녀 가장, 독거 노인들에게 익명으로 돈과 생필품, 선물을 전달했다.
 아라의 은행 잔고가 많이 빠지긴 했어도 중국 상하이 거래소에서 약간의 투기를 묵인했으니 지금쯤 잔고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아라의 눈치에 결국 밖으로 나왔지만 차만 막힐 뿐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춥기만 추웠다.
 마침, 옆에 서 있는 버스에 올랐다. 몸도 녹일 겸 야경이나 구경할 생각이다.
 버스 안의 따뜻함이 반가웠다. 빈자리를 훑어보는데 웬 여학생이 앉아 있는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 앉았다.
 가상현실 게임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돌파구가 생겨났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오늘 오전까지도 새로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수치화시킨 데이터를 어떤 식으로 각인시키느냐? 음······.
 피식 웃음이 나온다. 기껏 쉬려고 나왔는데 이 모양이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꽉 막힌 차선 때문에 바깥의 풍경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 무언가를 나눠 주며 호객 행위를 하는 술집 종업원들, 쇼핑을 하고 왔는지 뭔가를 잔뜩 들고 불법주차한 차로 가는 사람들······.
 문득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에서 point를 사용해서······ 그러면 아까 변수로 지정한 것이······.”
 이제 보니 손에 패드형 컴퓨터를 들고 뭔가를 작성하고 있다. 호기심에 살짝 곁눈질로 살펴보니 뭔가를 프로그래밍하는 중이었는지 영어와 각종 수식으로 이루어진 코드였다.
 머릿속으로 순간 본 코드들이 주르륵 지나간다. 그와 함께 보지도 않은 그 앞의 코드들과 이어질 코드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또, 또 직업병이다. 이럴 때만 천재적으로 돌아가는 머리가 원망스럽다.
 대략적으로 그려 본 코드는 압축된 데이터를 빠르게 어디론가 전달하는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보인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내가 만들어 낸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 로직의 다른 형태다.
 인터넷, 로봇, 쌍방향 디지털TV, 컴퓨터, 심지어 공장 자동화 시설에서조차 이러한 기술의 개발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점과 몇 가지 해결 방법이 떠올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여학생을 보았다.
 근데, 이 학생 씻고는 다니는 건가? 머리가 아주 지저분하다. 떡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먼지 뭉치와 비듬도 군데군데 보인다.
 “뭐죠?”
 머리카락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난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진 눈이 희번덕거린다.
 “저, 그러니까······ 그냥······.”
 “그냥 뭐요?”
 여전히 매섭게 바라보는 여학생의 모습이 문득 귀엽게 느껴진다. 여동생이 삐쳐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볼을 쭈욱 하고 당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성희롱으로 경찰서에 가긴 싫다.
 “음······ 그냥 호기심에 봤어요. 제가 프로그래밍에 좀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전히 말없이 째려본다. 정말이지 볼을 당겨 보고 싶다. 난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녀가 들고 있는 패드형 컴퓨터를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여기 부분에 코드를 이런 식으로 고치면 어떨까요? 물론, 그렇게 하면 위쪽 코드와 아래쪽 코드를 조금씩 바꿔야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나아 보이는데 어때요?”
 잠시 흠칫하던 그녀. 뒷자리에 사내 두 명도 호기심이 이는지 내 쪽으로 몸을 기우는 듯했지만 계속 말을 했다.
 “위쪽은 이런 식으로, 아래쪽은······ 이런 식으로. 어때요?”
 내 쪽으로 당겨 아예 위쪽과 아래쪽 코드도 바꿨다. 그리곤 그녀에게 어떠냐는 식으로 물었다. 매섭던 시선은 어느새 패드에 고정. 움직일 줄 모른다.
 괜스레 무안해진다. 이미 나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잊어 먹었는지 화면을 아래위로 내리며 코드만 본다.
 “그, 그럼. 전······.”
 난 무작정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곤 뒤도 안 보고 걷기 시작했다.
 “휴∼ 괜한 호기심 때문에 이게 뭐람. 으∼ 추워!”
 도망치듯이 걸을 땐 몰랐는데 날씨가 추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설지 않은 곳. 진하의 기억에 있는 장소와 가까웠다. 자연스레 발은 그곳으로 향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팀 되어 보였지만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고급 룸살롱은 조용했다. 정문 쪽을 지나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3년만인가? 이런 곳을 다니다니 진하는 역시 막나가던 녀석이었다.
 “아라야, 여기서부턴 혼자가야겠다.”
 ―오홍! 알았어요.
 검색이 심한 곳이라 절대 전자 장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물론, 폐쇄 시스템만 아니라면 아라는 해킹을 해서 나의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지하 주차장의 한쪽에 있는 창고 같은 문 쪽으로 갔다. 감시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보이자 문이 열린다.
 “여전하군. 비밀번호는 안 바꿨나?”
 엘리베이터 옆의 버튼을 몇 번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타자마자 문이 닫히며 아래로 내려간다.
 “오랜만이네.”
 “이모, 미모는 여전하네요.”
 환한 미소로 반기는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은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모 재벌과 내연 관계다.’라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는 여인.
 “어떻게 지냈어?”
 “잘 아시면서 왜 물어봐요?”
 내가 마약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는 건 이곳에선 비밀도 아니었다. 나와 어울리던 녀석 중 한 명이 벌써 나불거렸을 테니.
 “근데, 집에 무슨 일 있었어? 벌써 몇 번 사람이 와서 널 찾더라.”
 이철호. 그자가 찾았겠지. 아무래도 뒤가 켕길 테니······.
 “오늘 여기 온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당연하지! 나 보러 왔을 리는 없을 테고, 파트너 붙여 줄까?”
 “헐, 이곳에 오래 계시더니 감각이 떨어지셨나 봐요. 저 이모 보러 온 것 맞아요.”
 “어머! 얘가 아부도 할 줄 알고.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 보이더니 성격도 많이 바뀌었네.”
 “이제 정신 차려야죠.”
 “그래, 그래야 파트너 붙여 주는 내 마음도 편하지. 이거 보고 말해 줘. 규칙은 설명 안 해 줘도 되지?”
 여러 사진들 속 아가씨들 중 마음에 드는 이를 찍곤 안내해 주는 방으로 향했다.
 이곳 규칙은 나름 간단하다. 선택한 파트너가 마음에 들어 데리고 나가려면 앞길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가씨들 중 연예인을 원하면 연예인을, 돈을 원하면 돈을 주어야 한다. 계약 기간과 아가씨에게 지원해야 할 내용은 마담과 합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겐 별로 어렵지 않은 내용들이다. 물론, 파트너를 데리고 술만 마셔도 된다. 대신 손은 댈 수 없다.
 세팅된 테이블. 이런 자리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코리였을 때도 틈만 나면 이런 곳을 들락거렸으니까.
 똑똑!
 술을 한 모금 마시는데 이모가 들어왔다. 닫히는 문 너머로 내가 선택한 아가씨가 섹시한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이 얼핏 보이곤 사라진다.
 “간단히 아가씨가 원하는 바를 말해 주러 왔어.”
 “이모, 한 잔 드시면서 해요.”
 “그래, 뭐에 대해 건배할까?”
 “이모와의 짧은 만남을 위해. 하하!”
 “자식, 능글맞긴······. 일단, 데리고 나가려면 간단한 건 알아야겠지?”
 “그냥 술만 먹고 갈 거예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왔을 뿐이에요.”
 “훗! 뭐 그렇다곤 해도 일단 설명이라도 들어 봐. 아가씨가 원하는 바를 얘기해 줄게. 일단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해.”
 역시나 여기에 오는 90% 이상의 아가씨들이 원하는 바이니 이상할 게 없었다.
 “성형 수술은 원하지 않지만 원한다면 한 번쯤은 가능해. 물론, 가슴 성형은 안 돼. 계약 기간은 2년쯤 원하고 규칙에 있는 것처럼 계약 후에는 프리(Free)한 상태를 원해. 물론, 마음이 바뀌게 만드는 건 알아서 해야 하구. 큰 줄거리는 이 정도야. 참, 집은 안 사 줘도 되는데 생활비는 좀 넉넉히 줬으면 좋겠어. 이건 내가 원하는 거니까 들어줄 수 있지? 그리고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다른 아가씨 보여 줄 테니까. 마음에 들면 이번엔 정말 잘해 줘야 해. 지난번처럼 한다면 이번엔 내가 너를 용서 못해. 알았지?”
 이모의 설명을 들으며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그냥 술만 마시고 갈 테니까. 응? 근데, 마지막 말이 이상하다. 뭐지? 뭔가를 잊고 있었나?
 맞다! 그때, 그녀!
 “이, 이모, 지난번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묻기가 미안했다. 연예인이 꿈이라던 그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약을 하던 당시의 일이라 기억마저도 띄엄띄엄하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이곳 규칙은 한 번 누군가의 파트너가 되면 절대 이곳에선 받아 주지 않는다. 아니, 이곳뿐만 아니라 속칭 서울 화류계에서는 완전히 퇴출이다.
 “휴∼ 잘 있어.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번에 파트너 될 애나 신경 써 주렴.”
 ······.
 생각을 못했으면 모를까 신경이 거슬리긴 했다. 물론, 진하가 벌인 일이었지만 내가 한 것처럼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중에 다시 묻기로 하고 지금은 들어오는 아가씨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한유리예요. 나이는 스물이고요.”
 조명을 밝게 해 둔 상태라 모든 것이 잘 보였다. 얼굴, 몸매, 목소리 모든 게 일단 합격선이다.
 “앉아.”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옆으로 다가온다. 화장은 기본만. 향수 냄새도 전혀 없지만 다가온 순간 아찔함이 느껴진다.
 많이 굶긴 굶었나 보다. 하지만 감각을 하체에서 머리로 옮겼다.
 “오늘은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온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어머, 부담은 무슨 부담이에요. 편히 있다 가세요.”
 웃는 모습이 꽤나 예쁘다. 이놈의 몸 아래가 말을 듣지 않는다. 술을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한유리는 올해 스물로 대학 1학년. 가정 형편상 그녀가 택한 곳은 술집 아르바이트. 미모와 몸매, 그리고 한국에서 손꼽히는 여대에 다니는 그녀는 운 좋게도 이모의 눈에 띄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던데 가수? 아님, 연기자?”
 “진하 씬 이상한 걸 다 묻네요. 호호! 일단은 연기자예요. 하지만 TV에 나올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완 다르게 노래와 연기 둘 다 잘하는 편이거든요. 얼마 전에 여기 있던 언니가 TV에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그래도 그 언니 여기서 나이가 좀 많은 편이라 힘들어 했는데 잘돼서 너무 다행이에요.”
 수다쟁이다. 한 가지를 물으면 줄줄이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마치 아라와 같다고 할까? 아무래도 대인 관계가 협소하다 보니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힘들었다. 물론, 아라에게는 예외였지만.
 유리의 스스럼없는 말투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도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너 보기완 다르게 말이 많은 편이구나.”
 “어머! 죄송해요. 큰 언니에게 항상 듣는 소리였는데······ 오······빠가 편해 보여서.”
 금세 시무룩해지기는. 하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내가 잘 안다. 간혹 유리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드물다. 거의 대부분이 과묵하고 순종적인 걸 좋아 한다. 단지 짐승적인 욕구를 풀려는 관계에게 필요 이상 정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난 오히려 말 많은 편이 마음에 드니까. 노래도 잘한다니 한잔하고 한 곡 해 봐. 내가 엄격히 심사해 줄 테니까.”
 웃으면서 얘기하니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노래는 요즘 잘나간다는 가수의 노래였다. 아주는 아니지만 깨끗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짝짝짝짝!
 “잘하네. 조금만 다듬어도 가수 할 만하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쌍꺼풀이 없지만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워 보인다.
 윽! 곤란해. 법적으론 아직 미성년자라고. 감정을 조절하려 술을 마신다.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사태는 악화되어 간다. 결국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른 걸 물었다.
 “이모님 말씀 들으니까 돈이 필요한 것 같던데 이유를 물어봐도 돼? 곤란하면 안 해도 좋아.”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왠지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말하기 어렵네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는데 요즘 많이 힘든 상태세요. 밑에 동생들도 3명 있구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생활비를 보내야 해서요······. 솔직히 말할게요. 전 돈을 많이 벌어야 해요. 스타가 되서 아버지 빚도 갚아야 하구요. 절 선택해 줘요. 짧은 시간이지만 진하 씨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진하가 능력이 되면······.”
 “됐어, 그만해.”
 말투에 습기가 가득해지자 말을 멈추게 했다.
 유리가 이곳에 온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선택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성적이기 보단 감성적이다. 계약 관계를 맺기에도 껄끄러운 상대였으리라. 그녀의 말을 듣자 갑자기 술이 깼다.
 “결국······.”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다. 아까 얘기했듯이 난 여기에 그냥 대화를 하기 위해 왔어. 하지만 너의 문제에 대해선 내가 노력해 볼게.”
 “마,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제가 이런 거 큰 언니껜 말하지 말아 주세요.”
 휴∼ 괜한 걸 물어 유리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내 파트너가 아닌 이상 그녀의 일에 간섭하는 건 사실 이곳의 규칙에 어긋난다. 그녀의 파트너가 나중에라도 생긴다면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야, 우리 친구하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친구가 친구 집을 좀 돕는다고 누가 뭐라겠어? 이모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괜찮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리곤 눈물을 떨군다.
 “고마워요. 치, 친구니까. 친구 앞에서 이렇게 우는 거 괜찮죠? 큰 언니도 이해해 주겠죠?”
 날 껴안고 서럽게 운다. 그녀의 마음을 공감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을 것 같다. 단 몇 프로라도······.
 “바보, 친구끼린 반말하는 거야.”
 한참을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 * *
 
 전기스토브 위의 주전자가 연신 증기를 내뿜는다. 마치 고전 영화의 기차가 달리는 장면 같다.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공기가 싸늘하다.
 손님도 나 혼자여서일까? 벽 쪽에 히트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는 장식품처럼 서 있기 만할 뿐이다.
 “옵빠! 뭐 드실래요?”
 시집간 큰 누님처럼 생기신 분이 날더러 오빠라니. 우아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름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커피? 쌍화차?”
 팔짱까지 끼고 말하는 모습에 난 내가 있는 곳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 장소로 잡은 곳이 이 ‘다방’이었다. 기억 속 어디에도 와 본 적이 없던 곳이니······ 호텔 커피숍으로 생각하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찾으려는데 메뉴판이 없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가 다였다. 난 가격을 보고 히트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커, 커피 주세요.”
 “옵빠, 나도 한 잔 마셔두 돼?”
 “네, 드세요.”
 “언니! 커피, 쌍화차 한 잔씩! 옵빠, 이곳 사람 아니구나. 어디서 왔어?”
 누님, 이러지 마세욧!
 “서, 서울이요.”
 갑자기 옆자리에 앉으며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 온다.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키고 말했다. 난 예의 있는 놈이니까.
 “어머, 무슨 일로?”
 “그냥, 일 때문에······ 헉!”
 이 아줌씨가 어따가 손을. 테이블 밑 허벅지에 어느새 손이 올라가 있고 금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재빨리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지만 오히려 더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흠! 좀 있다 올 걸 그랬나?”
 탁하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젠장,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사내가 능글거리며 서 있었다.
 “어머, 한 사장님 손님이었어요? 잘될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쿨하게 일어서는 아줌마(?).
 한 사장이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하니 휭 하니 가 버린다.
 “댁이 날 만나자고 전화한 사람이오?”
 “그래요, 한만호 씨.”
 “······.”
 한만호의 웃고 있던 얼굴이 순간 굳어진다. 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댁의 말투나 좀 고쳐요. 난 지금 손님으로 온 거란 말이요, 손님!
 “뭐, 어느 댁 자제분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일거리를 준다기에 나왔으니 말이나 들어 봅시다.”
 자리에 앉은 한만호의 눈은 말투완 다르게 조금 불안해 보인다. 당연하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일 테니.
 “저는······.”
 “그런데 한 가지! 무슨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시공 가격을 후려치거나 할 생각이면 그만 돌아가슈.”
 “제가······.”
 “참, 9개월짜리 어음 따윈 사양이오.”
 “에이 정말! 말 좀 합시다, 말 좀! 무슨 일로 왔는지 들어나 보고 그런 말하면 이해라도 하지.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음 때문에 쫓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짜증이 폭발했다. 정말이지 한유리의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한유리와의 일을 아라에게 얘기한 후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미안하오. 내 지금까지 워낙 당하고 살다 보니······ 이해하슈. 이제부터 말 끊지 않고 경청하겠소.”
 미안한 표정을 짓는 한만호를 보니 화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색이 친구 아버진데 계속 막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한 사장님께 말하고 싶은 것은······.”
 “커피 나왔어요.”
 “휴∼”
 이놈이고 저년이고 당최 말을 못하게 만드는군.
 “결론만 말하죠. 일을 의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여기 도면을 확인해 보세요.”
 테이블에 도면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그는 흘낏 보고 시선을 돌린다.
 “후루룩! 거 말을 고맙긴 한데 사람 잘못 찾아왔소.”
 “왜요? 시공 경험이 없는 겁니까?”
 “경험이야 많지. 그런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소. 다른 업체를 찾아보슈.”
 “할 능력이 없는 건 아니고요?”
 자존심을 건드려 보았다.
 “무슨 소릴! 나 한만호요, 한만호.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한때 대형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람이오!”
 “근데, 왜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험, 개인적인······.”
 참, 딸내미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해 부끄럼 따윈 벗어던지고 지내는데······. 참지 못하고 말을 했다.
 “빚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시고요?”
 “아, 알고 있었소? 그걸 알면서도 나에게 맡기려는 저의는 뭐요?”
 “저의 따위는 없습니다. 일단, 총공사 비용의 10%를 먼저 드리죠. 그걸로 빚도 갚으시고 건설 장비에 걸린 차압도 푸세요.”
 커피를 마시던 한만호의 눈이 번뜩인다.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견적서는 받아야겠지만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으면 받아들이죠. 또한, 공사비의 20%로는 일 시작하자마자 일시불로 드리죠. 나머지는 공사 진척도에 따라 바로 현금으로. 이 정도면 만족하시나요?”
 “······!”
 “함정 따윈 없습니다. 단지 두 개의 조건밖에 없습니다. 첫째, 설계도대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어 줄 것. 둘째, 일하는 분들은 꼭 필요한 인력을 제외하곤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우선 채용해 줄 것. 어떻습니까?”
 놀란 표정이 우습다. 커피를 든 채 마치 마네킹처럼 굳어 있다.
 “하하하하하하!”
 그러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다음 하는 말이 걸작이다.
 “혹시, 어떻게 불러야 할지······.”
 “그냥, 이 실장이라 불러 주세요.”
 “하하하! 이 실장. 내 살다 보니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군. 혹 지금 나랑 장난을 치는 거라도 용서해 드리겠소. 하하하하!”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절실해진다.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까요? 이 실장님.”
 또다시 표정이 바뀌어 정색하며 말을 꺼낸다. 카멜레온이신가? 어쭙잖은 동정심에 시작했지만 유리의 아버지인 한만호에 대해 아라는 모든 조사를 했었다.
 아라가 내린 결론은 괜찮은 사람이란 것. 남을 위할 줄 알고 직원들에게 신망이 높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냥 도움만 주려다 아예 일을 떠맡기자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에서 놀랐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고.
 말은 빠르게 진행됐다. 준비했던 가계약서까지 일사 처리되었다.
 “······한 가지 질문에 설명해 줄 수 있소?”
 “제가 이 일을 박 소장님께 맡기는 이유요?”
 “뭐,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런 거죠? 이유가 뭐요?”
 “그냥 돈 많은 철부지의 미친 짓쯤으로 생각해 두시죠. 지금은 그 편이 좋을 듯싶군요.”
 “철부지의 미친짓이라······ 뭐, 어떤 쪽으로 생각하든 나로선 손해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 실장, 내 동생 할 생각 없소?”
 어느새 은근슬쩍 말을 틀 기세다. 당신 같은 형 따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당신 딸과 난 친구라고요.
 “싫은데요.”
 “으하하하! 좋아! 이제부터 내 동생이다. 그런데 동생 이름도 모르는데 어쩌지? 이름이 뭐지?”
 “아, 글쎄 싫다니까요. 나이도 아버지뻘이시면서······.”
 “그래, 그럼 조카 할래? 난 아무래도 동생이 좋은데. 동생 하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안 그런가, 이 실장? 마음만 맞으면 됐지? 동생 생긴 기념으로 술이나 한잔하러 가지.”
 아, 글쎄. 인간이 말을 듣는 거야 마는 거야. 어이, 손 좀 놓죠?
 
 어이, 한만호 씨 손 좀 놓으라고∼∼∼∼∼요!!!
 
 * * *
 
 해를 넘겨 새로운 봄이 왔지만 작년의 봄과 달리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기분 탓이리라. 하지만 지난달에 드디어 성인이 되었다(만 18세 성인으로 설정)는 것과 가상현실 게임의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했다는 점도 분명 영향이 있다.
 아라의 자체 테스트에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의도 크기의 맵에 5,000명의 NPC로 시작해 10만 명을 넘길 때까지 아라의 부하는 10%를 넘지 않았다. 수치만으로 따졌을 땐 서버 컴퓨터 10대면 천만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결론. 물론, 유저의 테스트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전에 해결할 것들도 있었다.
 PC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기 위해선 핸드컴에 연결하는 헤드셋이 꼭 필요한데 현재 나와 있는 헤드셋에는 브레인사의 브레인칩이라는 가상현실을 느끼게 해 주는 칩이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칩으론 70% 정도의 감각밖에 사용할 수 없어서 완성되지 않은 제1연구소의 한편에서 지난달부터 새로운 칩을 개발 중이다.
 뭐, 굳이 개발하지 않아도 브레인 칩에 맞게 프로그램을 손본다면 95%까지 높일 수 있었지만 광범위하게 쓰이는 브레인 칩과 그 연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특허료가 어마어마하다. 그 돈을 뺏길 순 없었으니까.
 “우와, 사람들 정말 많이 지원했네.”
 소파에 앉아 무액정 3D 모니터에 지원자들 현황을 보고 있다.
 “돈도 주고 새로운 게임 테스트도 하고 일거양득이니까요.”
 “벌써 10,000명이 넘어가는데 몇 명쯤 테스트할 생각이야?”
 “1,000명쯤요.”
 “그럼, 멈춰야 하는 거 아냐?”
 “지원자들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그중에서 뽑으면 되니까요. 2주간 리조트를 빌려서 합숙으로 테스트를 진행할 생각이에요.”
 “합숙으로? 오려고 할까? 방학도 끝나서 오기 힘들 텐데?”
 “호호, 모집할 때 이미 공지해 뒀어요. 그런데도 저 정도 인원이 지원했잖아요.”
 “정말?”
 정말이지 청년 실업이 문제긴 문제였다. 아니, 악순환이라고 할까? 청년이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돈을 쓴다.
 그게 또 일반 가게들을 먹여 살리게 되고 기업도 먹여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끊어진 고리는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지금의 사회문제도 대부분 이러한 고리가 끊어져서이다.
 아라의 말에 의하면 특히 지금이 중요하다. 통일전쟁을 겪으며 이른바 전쟁 베이비붐 시대가 있었다. 그 세대들이 몇 년 만 지나면 사회에 쏟아질 것이다. 아니, 지금도 조금씩 쏟아지고 있다. 반드시 이 고리를 이어야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텐데······.
 “아! 설마······?”
 “맞아요. 테스터들 중에서 회사에 필요한 인원을 뽑을 생각이에요. 게임 회사니까 게임을 잘 아는 이들이 필요하잖아요.”
 “천재야, 천재!”
 아라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래 이렇게 천천히 시작하면 되는 거였어!
 
 
 
 4.테스트
 
 
 가상현실 게임과 TSB칩(The Second Brain)의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인원을 감안해 1,100명의 지원자를 뽑았는데 최종적으로 1,056명의 테스터들이 리조트의 대강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테스트의 경우 모든 것이 비밀을 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지신 핸드컴, 기타 촬영과 녹음이 가능한 모든 전자 제품은 각자의 방으로 가신 후 진행 요원에게 맡겨 주시길 바랍니다. 혹시나, 불법적인 촬영과 정보 유출이 발견될 시, 민, 형사상의 법적 조치가 이루어질 것임으로 부디 개인적인 손해를 보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실 때 테스트 과정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보험에 사인하지 않으신 분은 이 자리가 끝난 후 저희 진행 요원에게 반드시 말씀하셔서 불이익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밖에 나가시면 여러분의 이름과 배정된 방 번호가 있을 겁니다. 확인하시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시면 되겠습니다.”
 천여 명의 테스터 진행 요원 중 책임자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강당 밖으로 향한다. 나도 그들에 휩쓸려 밖으로 나왔다. 각자의 방을 확인하기 위해 웅성거리는 사람들. 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라를 원망하고 있다.
 “진하도 테스트에 참석하세요.”
 “왜?”
 “사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게임에 대해서 모르면 어떻게 해요? 미래의 직원들 얼굴도 볼 겸해서 다녀오세요.”
 집에서 할 수 있는 테스트를 왜 굳이 이곳까지 와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따져 봐야 소용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북적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인지 머리가 아프다. 코리였을 때 이러한 곳은 기피의 장소였는데. 그래도 산속에 있는 리조트라 시원한 공기가 나쁘진 않다.
 깊게 숨을 들이키곤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사장으로써 유일하게 혜택을 받은 것이 있다면 가장 전망 좋은 방과 미리 방 번호를 알았다는 것 정도? 아, 한 가지 더는 귀에 아라와 얘기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뿐이다.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7명의 남자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어, 마지막 사람 왔네요. 어서 와요. 앞으로 2주간은 함께 지낼 텐데 통성명이나 해요.”
 30대 초반? 조금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다.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서일까? 모두들 친해지려는 분위기다.
 난 가방을 한쪽에 놓아두고 자리를 내어 주는 곳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재밌게 지내 봐요. 전 올해 서른한 살이구 이름은 김형주, 경기도 수원에 살아요. 잘 지내 봐요.”
 “우와, 형님이시네. 전 올해 스물여섯이구 신종완입니다. 고향은 함경북돈데 지금은 동두천에 살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전 올해 스물다섯이구 최상진입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살고 있습니다.”
 “어? 저도 서대문에 사는데······. 전 스물넷이고 오영수라고 합니다. 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습니다. 형님들, 재밌게 지내요.”
 “지는 올해 스물아홉이고 경상도 산청에 삽니더. 잘 부탁드려예∼ 참, 이름은 나영철이라예.”
 “류인준입니다. 스물여섯이고 평안도에서 왔슴다.”
 소개 때마다 가벼운 박수와 함께 서로 웃는다.
 “전 이진하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입니다.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
 “이야, 막내네. 얼굴도 잘생겼네.”
 소개가 끝이 나자 편안한 자세들로 바꾸며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간다. 말을 트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하는 게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근데, 혹시 이 게임에 대해 뭐 좀 아는 사람 있어요?”
 “말 편히 하이소, 형님.”
 “그럴까?”
 게임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설까? 만난 지 15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 형님, 동생이 아주 자연스럽다.
 “제가 듣기론 완전 새로운 방식의 게임이라고 하던데요.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소리도 있고요.”
 “아, 가상현실 게임이면 완전 망인데······. 얼마 전에 카오스 오브 아틀란타라는 게임도 클베에 참여했었는데 렉 때문에 할 수가 없더라고요. 화면도 실사 수준도 아니고 움직임도 지랄 같았어요.”
 “허긴, 파이라에서도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 중이라는 소문만 있었지 아직도 안 나온 거 보면 가상현실 게임은 아직 멀었죠.”
 “아, 이번 게임은 대박이었음 좋겠네요. 리벤지5 만렙 찍고 할 것도 없는데······.”
 “니도 리벤지 하나? 어느 섭인데?”
 “할리디겐 섭이요. 형님은요?”
 “난 갈리시온 섭이다. 타기온 길드 소속이고.”
 헐, 얘기가 옆으로 새고 있다. 귓속에서 아라가 닦달이다. 여기 온 목적 중 하나를 살며시 꺼냈다.
 “저······ 제가 듣기론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하더라고요.”
 일순 시선이 나를 향한다.
 “어디서 들었는데?”
 “진짜?”
 “제가 아는 누나가 개발팀에 있거든요.”
 “대박이다!”
 “진짜 가상현실 게임이래? 구현 정도는 어떻게 된데?”
 갑자기 유명인이 된 느낌이다. 정신없이 질문이 오간다.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오전엔 간단한 검사하고 오후부터 본격적인 테스트 들어가는데 제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테스터들 중에서 직원을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던진 파문은 운영 요원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고, 점심시간이 지난 후엔 거의 모든 테스터들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역시 발 없는 말이 빠르긴 빨랐다.
 
 * * *
 
 오전은 TSB칩의 정상 작동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는데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오후 테스트를 위해 들어간 강당은 오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최대한 넓게 배치된 의자에 그 사이사이로 파이프 모양의 선들이 놓여 있었고 그 파이프에서 나온 작은 선들이 각 의자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파이프들이 모이는 곳에 냉장고 크기의 컴퓨터가 위치해 있었다.
 게임만 테스트를 하는 거라면 핸드컴이나 다른 종류의 컴퓨터에 연결된 헤드셋만 있으면 되지만 헤드셋과 뇌의 상호 작용에 대한 데이터를 최대한 모으기 위한 장비였다.
 내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친다.
 “밥은 잘 먹었니?”
 “아, 예, 형.”
 “니 말대로······ 잘됐으면 좋겠다.”
 밑도 끝도 없는 얘기였지만 이해가 됐다. 김형주는 흔히 말하는 다크 게이머. 즉, 돈을 벌기 위해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 고등학교 졸업 후, 자그마한 공장에 다니다 공장이 문을 닫자 오갈 때가 없어 선택한 것이 게이머였다고 했다. 소설에서처럼 엄청난 돈은 커녕 겨우겨우 생활할 정도는 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길 원하고 있었다. 결혼을 할 여자가 생겨서라나.
 “잘될 거예요.”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여기 1,000여 명의 사람들 중 1차로 채용할 사람은 200명이 안 된다. 그리고 여기 와 있는 많은 사람들 중 사연 한 가지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 같아선 뽑고 싶지만 유리의 일 이후로는 아라와 같이 의논하기로 결정했기에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어느새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진행 팀장이 단상 위에 올라온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헤드셋에 배정된 선을 연결하신 후 접속을 하시게 될 텐데 혹시 문제점이 있으시면 그 자리에서 손을 들어 주시면 진행 팀에서 해결해 줄 겁니다. 지금부터 2주일 동안 오직 이곳에서만 테스트가 이루어질 것이며 헤드셋은 이곳 강당에서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테스트 시간은 오전 9시부터 12시, 1시부터 5시, 오후 6시부터 9시를 제외한 시간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게임 중 편하게 휴식을 취하실 수 있으시며 혹시 몸이 아프신 분들은 즉시 진행 팀에 알려 의료적인 조치를 받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나자 모두들 헤드셋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나도 착용을 한 후 모니터 역할을 하는 커버를 내렸다.
 평범한 문이 보인다. 총 7개의 문. 나머지 6개의 문은 웃기게도 긴 판자로 X자 모양으로 못질이 되어 있었고 ‘Closed’라는 빨간색 글이 쓰여 있다. 아라의 유머 코드가 이 정도라니······ 실망이다.
 난 열릴 것 같은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끼리릭!
 마치 기름칠이 안 된 문을 여는 것처럼 약간은 뻑뻑한 느낌.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밝은 빛이 눈을 덮는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으로 빛이 사라지는 걸 느끼곤 살며시 눈을 떴다.
 “헉!”
 눈앞에 낯선 여자가 보여 깜짝 놀랐다. 피식 웃는다.
 내 놀란 모습이 우스웠나?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의 도우미 아리예요. 이곳은 게임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테스트를 하는 곳이죠. 저기 보이는 운동 기구가 보이시나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여러 가지 운동기구가 놓여 있다. 아까도 저게 있었던가? 나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아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여기는 여러분들의 순발력, 지구력, 근력, 점프력, 유연성, 민첩성, 평행성 등등 많은 것을 테스트할 예정이에요. 자, 그럼. 턱걸이부터 시작해 보죠.”
 뭐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 철봉이 있는 곳으로 가 철봉을 잡았다.
 “준비∼ 시작!”
 아리의 말과 함께 턱걸이를 시작했다.
 “하나, 두울······.”
 둘부터 벌써 힘들기 시작한다. 망가진 진하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해도 달리기를 제외하곤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종목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눈앞의 아리의 복장이 심상치 않다. 흔히 세련된 오피스 걸의 복장인데 치마의 길이는 짧고 상의 단추가 2개쯤 풀려 있다. 결정적으로 철봉에 올라갔을 때 내려다보이는 아리의 육감적인 가슴골은 없던 힘도 나게 만든다.
 “아∼∼∼∼홉!”
 최대한 아리를 보며 버티려 했지만 더 이상 힘이 없었다. 결국 철봉에서 손을 놓았다.
 “자, 다음은 윗몸일으키기.”
 혹시 그녀가 다리를? 역시 바람일 뿐이었다. 대신 윗몸일으키기 하는 곳의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대략적인 희망을 가져 본다.
 “열하나, 열둘, 열셋······.”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일어서는 중간과 내려가는 중간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녀의 속옷. 살짝 몸을 누르면서 일어나도 역시나 아슬아슬할 뿐이다.
 “쉰다섯!”
 결국 보일 듯 말 듯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아라야, 이게 너의 유머코드라면······
 정말이지 사랑한다.
 
 이후로도 100m 달리기, 1,500m 달리기, 멀리던지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바벨 들기, 아령 들기 등 수많은 기초 테스트를 실시했다. 결국 난 아리에게 이걸 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게임 내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이에요. 힘센 사람이, 운동한 사람이 유리한 게임은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예요. 머리 좋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요. 모든 유저들에게 공평해야죠. 현재 테스트 인원은 1,056명. 이들의 기록을 토대로 기초가 되는 유저의 스텟을 적용시킬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그럼, 다음······.”
 “너, 아라지?”
 움찔했다! 너 딱 걸렸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무리 테스트라지만 도우미가 너무 도발적이다 싶었어.”
 “호호호, 무슨 말씀을······. 전 단지 그 사람이 지닌 최대한의 힘을 끄집어내기 위한 도우미였을 뿐이에요, 그럼.”
 “너, 아라! 두······고오오오······.”
 밝은 빛의 소용돌이로 난 빠져들었다.
 
 * * *
 
 나뭇잎 하나하나가 바람에 흔들린다. 그 위로 숲의 장막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흔들리는 나뭇잎에 수를 놓는다. 흙냄새와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10여 마리의 회색빛 괴물들이 몇 사람들과 뒤엉켜 있다.
 부리부리한 눈은 금방에라도 뭔가를 잡아먹을 듯이 충혈되어 있고 동작마다 근육의 움직임 또한 섬세하게 보인다.
 진정 아라와 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들리는?!
 “이진하! 힐, 힐! 나 죽는다고∼∼∼”
 제길 파티 사냥 중이었지.
 “힐! 힐!”
 게임 용어 중 하나인 죽기 직전. 즉, 딸 피에서 겨우 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난 힐러였다.
 저녁 9시, 게임을 끝내고 간식을 챙겨 가는 도중에도 형주 형은 계속 뭐라 한다.
 어느새 테스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자유롭게 접속을 끊고 쉬면서 테스트에 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속을 하면 서버 종료 카운트다운이 될 때까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시간을 잊고 열중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형들은 게임 TV를 켜둔 채 얘기꽃을 피우는 중이다.
 “내가 볼 때 이 게임 무조건 된다.”
 “참 행님두 당연하지예∼ 그 정도는 저도 알겠심더.”
 “안 그럴 수도 있어요.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해도 컨텐츠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요.”
 “상진아, 컨텐츠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 아는 여자애도 같이 테스터로 왔는데 그 애가 한 일이 뭔지 아냐? 말 타고 이쪽저쪽으로 계속 달리고만 있는데 일주일째 달려도 맵이 끝이 없단다. 대략 큰 도시만 7개 그쳤고, 왕국으로 향하고 있다더라. 현재 우리가 있는 마을을 생각해 봐도 던전이다 뭐다 끝이 없잖아?”
 “아뇨, 형 제 말은 만렙 컨텐츠 말이에요. 막말로 아무리 퀘스트고 뭐고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유저 특성이 광렙이잖아요. 한 번 거쳐 간 마을은 두 번 돌지 않잖아요. 일단 오픈했을 때 만렙이 100렙이면 지금 우리의 렙업 상태를 보면 길어야 세 달, 결국 공성전이나 던전 등 즐길거리가 없음 끝이라구요.”
 참나. 하루 종일 게임하고 또다시 게임 얘기하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갑을논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나에게 화살이 날아온다.
 “진하야, 혹시 뭐 정보 같은 거 없냐?”
 “무슨 정보요?”
 “당연 게임 정보지. 어느 정도 개발했는지, 언제쯤 오픈베타할 건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게······.”
 잠시 뜸을 들였다. 아라가 얼마나 개발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귓속으로 아라의 말이 들려온다.
 “일단 3번 업데이트······ 그러니까, 렙 400정도까지의 컨텐츠는 만들어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유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업데이트할 예정이라던데 정확한 날짜는 저도 모르죠. 그 다음에 만렙을 처음에 어디에 둘지 컨텐츠는 어떤 것들이 좋을지는 새로 뽑힌 직원들의 의견을 모아서 결정한다는데요.”
 “오! 진하야, 난중에 게임 오픈할 때 형이랑 같이 게임하자. 정보만 주면 내가 너 캐릭 책임진다.”
 “형수 행님, 그러지 말고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 있는 동생들이랑 같이하입시더. 길드 맹그러서 성도 묵고. 어때예?”
 “영철이 형 생각 좋은데요. 연락처 아니까 연락해서 첫날부터 달리죠. 혹시 직원 되는 사람 있음 정보도 공유 좀 하구요.”
 “크∼ 좋네요.”
 “내래 좋슴네다.”
 이 형들 큰일 낼 사람들이네. 사장 앞에서 회사 정보를 남에게 전해 주겠다니. 뭐, 간단한 정보야 누굴 통해선 나가겠지. 그것도 광고의 한 방법이니까.
 다음 날부턴 나도,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이 하나 더 열린 것이다. 레이싱 게임. 수십억짜리 세계의 명차를 끌고 하는 레이싱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놀람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됐다. FPS 게임, 카지노 게임, 댄싱 게임 등.
 7개의 문이 열리고 마지막 날, 오후의 음주 후 테스트까지 무사히 마쳤다.
 “모든 과정이 끝났습니다. 각자 방으로 일정량의 알코올이 지급될 것이니 각방 대표자 한 분이 타 가시길 바랍니다. 적당히들 드시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특히, 술 먹고 돌아다니거나 숙녀 분들의 방을 배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하셔서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음주 테스트라 다들 적당히 취한 상태. 기분 좋게 강당 밖으로 나와 식당으로 갔다.
 “우리 술 먹을 때 조인(Join)해서 먹으면 어때요?”
 “조인?”
 “네, 어차피 마지막 날이니 여자들과 같이 먹자고 하는 거예요.”
 영수형의 말에 다들 당기는 눈치다. 물론, 나도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라믄 여자 7반하고 같이 묵자고 해 봐라. 가시나들 억수로 이뿌던데······.”
 “크크! 형님두 은근히 바라고 계셨구나. 좋아요. 그럼, 가위바위보해서 진 사람이 가기 어때요?”
 약간의 술김이라 그런지 모두들 오케이.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앗싸!”
 “윽!”
 희비가 엇갈린다. 다행히 난 희에 속했다.
 식사를 끝내고 영철이 형과 종완이 형이 여자들에게 말을 건네러 갔고, 우리는 술을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형들은 바빴다. 샤워하고 양치질하고. 근데, 평소 발만 씻던 사람들이 이상하다.
 “진하야, 너 양치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냐? 크크크!”
 막 샤워하고 난 온 형주 형이 날 놀린다. 그러고 보니 언제 칫솔질을 하고 있었지? 보통은 자기 전에 하는데······. 역시 본능이 무섭긴 무섭다.
 난 그냥 씨익 웃었고, 형주 형도 다 안다는 듯이 나와 같은 종류의 미소를 짓는다.
 문이 벌컥 열리자 일제히 눈이 문으로 향한다. 기대했던 바와 달리 낭패한 얼굴의 영철이 형이 들어와 외친다.
 “아, 엿됐다. 진행 팀한테 걸리가꼬 우리 방 인원들 다 밖으로 나오란다.”
 “에에∼”
 “어쩌다가 걸렸어요?”
 “가시나들 밥 먹고 나오는 거 기다리다가 종완이랑 시시덕거리는 걸 진행 팀장한테 걸렸다 아이가, 쩝! 언능들 나와라. 형수 형님두 나오이소.”
 기분이 착잡했다. 진행 팀장은 계약할 때 봤던 사람이라 내 얼굴을 잘 안다. 테스트 기간 중에도 얼굴이 마주치며 살짝 눈인사를 하던 사람인데······.
 다들 내 표정과 비슷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종완이 형은 아주 바싹 언 자세로 진행 팀장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남자 1반 여러분! 나왔으면 모두 빠르게 2열 횡대로 서십시오.”
 밀지 마! 아놔 밀지 말라구요! 형들에게 밀려 하필이면 진행 팀장 앞이다. 눈이 마주치자 묘한 표정의 진행 팀장. 쪽팔린다.
 “제가 분명 식사 전에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해, 했습니다.”
 “허, 목소리가 작습니다! 불이익을 당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또다시 이런 일을 벌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얌전히 술 드시고 주무시도록 하겠습니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눈감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 다시 진행 팀에게 걸렸을 시 전원 퇴소시키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저녁들 보내십시오. 해산!”
 모두들 똥 밟은 표정으로 힘없이 돌아섰다.
 “진행 팀은 8시 30분부터 9시까지 전체 회의 시간입니다. 이진하 사장님. 크크크!”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진행 팀장을 보자, 손을 흔들며 들어간다. 앞으로 진행 팀이 필요하면 저 사람을 써야겠다.
 8시 30분. 결국 쪽팔린다고 형주, 종완이 형이 버티는 바람에 내가 총대를 메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 여자 7반의 방에 노크를 했다.
 “무슨 일이죠?”
 문이 빼곰히 열리면서 묻는 아가씨. 영철 형의 말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다.
 “남자 1반에서 왔는데······ 혹시 같이 술 드실래요?”
 “음, 그래요? 잠깐만요, 언니들한테 얘기 좀 해 볼게요.”
 닫힌 문 안쪽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열리는 문. 3명의 머리가 나온다.
 “오홍!”
 좀 들어 보이는 누님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으며 콧소리를 낸다. 이런 어이없는······.
 “그럼, 15분 뒤에 이쪽으로 와요. 기다릴게요.”
 “네∼”
 나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형들에게 달려갔다.
 “15분 뒤에 그쪽 방으로 가기로 했어요.”
 “와우!”
 훗, 저렇게 기뻐하는 얼굴들이라니.
 “근데, 와 15분 후에 오라는 거네?”
 “하하······.”
 형주 형과 눈이 마주쳤다. 우린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15분. 당연 양치질할 시간이겠죠?
 
 * * *
 
 테스트가 끝난 후에도 쉴 틈이 없다. 한만호 씨가 본사를 짓기 전까진 내가 있는 이 건물에서 지내야 했기에 채용될 직원들이 쓸 가구를 구입해야 했고 아라와 1차 합격자들을 뽑기도 했다.
 내가 은근슬쩍 흘린 말들과 테스터들이 흘린 정보들은 인터넷을 떠돌며 연일 화제를 뿌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다음 지원자 들어오시라고 해 주세요.”
 홍명석, 테스트할 때 진행을 맡았던 팀장의 이름이었다.
 홍명석은 지금 아라의 다른 테스트를 돕기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소개한 아가씨들이 최종 면접을 돕고 있었다.
 신숙영, 올해 나이 스물넷. 무액정 모니터로 보이는 이력서는 간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진도 학력도 없었고 이력이라고 해 봐야 봉사 활동과 아르바이트를 어디에서 했다는 게 다였다. 문이 열리고 신숙영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신숙영입니다.”
 “네, 자리에 앉으세요.”
 첫인상은 무척이나 좋아 보인다. 여느 면접자들과 비슷하게 깔끔한 밝은 회색 정장에 흰 브라우스. 긴 머리를 깔끔하게 머리 위로 묶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하긴 테스터들과 함께 이 주일을 보냈더니 면접자들의 대부분이 익숙한 듯 보이긴 하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청소년들의 게임 중독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 해결 방안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
 눈빛이 마주쳤다. 뭔가 당황한 눈빛? 내 질문이 좀 어려웠나?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다른 질문을 드리죠.”
 “아,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게임 중독을 막는 방법은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이슈화되었던 내용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것이 시간제와 심야 시간에 접속 차단입니다. 물론, 시행은 하고 있지만 사실 전혀 실효가 없습니다. 이유는 부모님의 핸드폰을 통해 인증, 회원 가입을 하면 청소년 여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해결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게임사가 보다 강력한 인증 방법을 만든다면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저희 회사도 게임사입니다. 게임사로써 수익 극대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만일 신숙영 씨가 입사를 해서 ‘수익을 늘려라’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러니까 그건······ 이, 일단, 다른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쪽으로······.”
 “다른 방법이라 하면?”
 “시, 시기에 맞게······ 그러니까······ 아이템을 만들어 내놓으면 될 것 같은데요.”
 윽,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이다. 신숙영은 많이 당황한 듯 보였고 살짝 울상이 된다. 이런 자리로 내몬 아라가 밉다.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신숙영 씨가 했다는 봉사 활동은 어떠한 것들이었나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면접은 길었다. 총 225명의 합격자들의 최종 면접은 5일간 계속될 예정이다. 이름과 나이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뽑으려다 보니 시간이 길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신숙영은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봉사 활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말처럼 했다면 참으로 대단한 아가씨임엔 틀림이 없다.
 “잘 들었습니다. 어느 지원자보다 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군요. 이상입니다.”
 신숙영은 자리에 일어서며 다시 인사를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이잖아······요.”
 응? 무슨 말이지? 마지막에 웅얼거리는 말이 왠지 거슬린다.
 “네? 무슨 말을 하셨죠?”
 “그, 그니까 우리 키스한 사이니까 잘 부탁드린다구요.”
 ······!
 부끄러운 듯 그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 버린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여자 7반에 갔을 때 빼꼼히 쳐다보던 그 아가씨.
 역시 여자는 화장 전후가 다르군······이 아니잖아! 날 도와주는 아가씨가 손을 막고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에 울상이 되었다.
 면접 3일째, 하루 44∼45명의 면접은 날 녹초로 만들고 있었다. 한 명당 10분씩만 잡아도 440분. 정말이지 미쳐 버릴 지경이다.
 “다음 지원자 부탁드립니다.”
 말과 함께 모니터의 지원서를 넘겼다.
 김형주, 나이 31세. 게임 경력 26년.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군.
 근데, 게임 경력 26년은 뭐야? 이력에 뭘 이런 걸 다······.
 “안녕하십니까? 김.형.주.입니다.”
 “네, 자리에 앉으세요.”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이미 내가 여기서 면접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가? 하긴 여자 7반과 술 마실 때, 게임 나오면 같이한다고 읏샤읏샤 했었으니까 신숙영에게 들었을 수 있을 것이다.
 “험, 사적으로는 형이지만 공적으로는 면접관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면접을 시작하죠. 만일 입사가 된다면 원하는 부서가 있습니까?”
 “만일 제가 입사를 한다면 게임 운영을 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물론, 어느 부서에 들어가서라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놔, 이 사람이······ 지금 협박하는 거임? 뒷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
 “그러시군요. 게임 운영 팀에 소속이 되든 아님, 다른 팀이든 회사 입장에선 조심스러운 게 많습니다. 특히, 회사 정보의 유출이 걱정이 되죠. 정보 유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짝 눈이 흔들린다. 후후후! 난 의외로 사악하다니까.
 “회사의 기밀이라거나 중요한 정보를 유출하게 된다면 그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광고 효과를 노려 의도적인 유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결혼을 하게 되어 아내에 대한 간단한 단점 등은 술자리에서 재미를 위해 말할 수 있지만, 비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사람과의 약속,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증말! 모르쇠, 모르쇠!
 “의도적인 유출이라······ 꽤나 위험한 발언이군요. 대답 잘 들었습니다. 다른 질문을 드리죠. 게임 경력이 26년이라면 많은 게임을 해 보셨을 텐데 이번 테스트를 하며 우리 회사의 게임에 대한 김형주 씨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게임계에 핵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마디로 얘기를 드리자면 ‘대박’입니다. 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런 훌륭한 게임이 더욱 발전하는데 온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
 어떤 질문을 해도 결혼 얘기가 나온다.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다. 더 이상 질문의 의미가 없다.
 “질문은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 한 가지 해도 되겠습니까?”
 “네, 해 보십시오.”
 “참고로 다음 주 주말쯤 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날 예정입니다. 뵈어야 할까요? 뵙지 말아야 할까요?”
 “사적인 겁니까? 공적인 겁니까?”
 “사적인 겁니다.”
 휴, 정말이지 못 말리는 형이다.
 “제가 잘 아는 분위기 좋은 음식점을 아는데 소개시켜 드릴까요?”
 “예? 고맙······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간다. 나도 절대로 사적인 마음으로 그를 뽑은 것은 아니다. 그의 능력이······ 게임 경력 26년······ 뭐, 조금은 아니, 많이 사적인 건가?
 “다음 지원자 부탁드립니다.”
 
 어이, 거기 누님 웃지 말라니까요!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