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마신백문 [E]

마신백문 1권 (1화)

2017.06.19 조회 616 추천 1


 마신백문 1권 (1화)
 서장 1
 
 
 암흑의 공간.
 끝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가느다란 빛줄기.
 오직 그것만이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난, 나는 울고 있는가.
 어찌하여 저리도 슬프고 서럽게 오열하고 있는가.
 다가가 저 작은 나를 위로해 주고 싶건만, 나의 몸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작은 백문아, 아버지의 죽음이 그리도 고통스럽더냐.
 한때는 저런 모습이었을 자신을 떠올리니, 그 서러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울보.’
 응? 누구지? 누가 말을······.
 ‘사내놈이 눈물을 그리 쉽게 보여서야 쓰나.’
 이 공간에 나 외에 누군가가 있다.
 명백하게 비웃는 듯한 청년의 음성.
 ‘이봐, 이봐. 울지만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누구······ 십니까?’
 작은 백문이 형체 없는 음성을 향해 반응한다.
 ‘그게 중요해? 내 생각에는 별로일 것 같은데.’
 ‘방해하지 마세요. 저 죽을 거니까.’
 ‘스스로 생을 버리는 자는 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교에서 그리 가르치지 않든?’
 신교가 가르치는 교리를 알고 있다, 저 목소리는.
 ‘뭔 상관이래요. 처음부터 신은 없는 것을.’
 ‘호오, 대단한데? 누군가는 여러 생(生)을 살고 또 살아서 간신히 깨친 진리를 고작 열 살에 불과한 네가 터득하다니.’
 ‘······.’
 ‘왜? 칭찬이라도 해 줄까?’
 ‘당신은 누구이기에 제 길에 서 계십니까?’
 순간, 음성의 주인이 작게 웃는 것을 작은 백문은 분명히 느꼈다.
 ‘그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못마땅한 사람이라고 해 두지.’
 ‘그럼 그냥 갈 길 가세요. 저 방해하지 마시고.’
 ‘어쩐다? 나의 길과 네 길이 같은데.’
 순간, 작은 백문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드는 것이 보인다.
 ‘그만 놀리고 가시라니까요. 제 공간에서.’
 ‘여기가 네 공간이라 누가 그랬지? 너를 초대한 것이 나인데.’
 그 말에 작은 백문은 몸을 떨었다.
 흡사 귀신을 본 양 잔뜩 공포에 질린 채.
 ‘아버지의 일은 나도 유감이다.’
 ‘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그분과의 마지막 대화는 내게 큰 기쁨이었단다.’
 ‘흑!’
 작은 백문이 또다시 눈물을 쏟는다.
 ‘정말 못 말리는 울보로군. 천하의 요사제가 이런 약골을 낳았다니.’
 ‘크윽! 무시하지 마세요! 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아들은 아비의 죽음이 슬퍼 스스로 생을 닫으려 하고 있지.’
 작은 백문이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린다.
 그에 아랑곳없이 예의 음성이 이어졌다.
 ‘왜? 무엇이 부족해서 스스로를 죽이려 하지?’
 ‘살아온 것들 모두가 의미가 없으니까요.’
 
 ‘만들어 줄까? 그 의미.’
 
 
 
 서장 2
 
 
 “아이야, 물었지 않느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청년이 늙은 음성에 감았던 눈을 떴다.
 들릴 듯 말 듯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여지없이 귀를 파고드는 음성.
 “너는 누구이기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느냐?”
 청년은 그제야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음성의 주인은 오십대를 살짝 넘겼을 것이라 짐작되는 노인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장포에 황금색 불꽃 문양이 수놓아진 사이로 선명하게 새겨진 일신(一神)이라는 글자.
 전설의 미남자이자 재사였던 송옥(宋玉)이 늙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고우면서도 총기 넘치는 풍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노인의 뒤편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자들은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복색으로 통일해 나름 엄격한 질서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오옴! 천하 백만 교도의 아버지이신 교사(敎師)께서 묻고 계신다!”
 검은 장포의 노인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청년을 향해 호통을 쳤다.
 그에 청년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의 피와 살덩어리들로 범벅이 된 안면.
 드러난 상체는 예리한 병장기에 베이고 단단한 무언가에 맞아 멍든 상처들로 가득했다.
 청년은 슬쩍 오른손을 들어 광대뼈에 붙어 덜렁거리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 바람에 손가락에 말라붙은 머리카락 몇 올이 함께 뽑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퍽!
 검붉은 액체로 가득한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
 청년의 주변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의 바다였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인간의 팔과 다리, 복부가 터져 조금씩 삐져나오는 창자, 뽑혀진 혀를 바라보다 생기를 잃은 눈알,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탓에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끔찍한 얼굴들.
 이미 사람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수십, 수백의 시체가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이곳은······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공간.
 철퍼덕!
 청년이 거칠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 거대한 광장에 펼쳐진 대학살을 본 저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스민 듯, 무리들이 움찔하며 각자의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교사라 불린 노인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자 이내 차분한 자세로 돌아갔다.
 이러한 소란에도 무관심한 듯, 청년은 천천히 노인을 향해 몸을 옮겼다.
 길게 찢어진 등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선혈이 생을 위협함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이미 혈해가 되어 버린 바닥을 철퍽거리며 내딛는 청년의 발 옆으로 보글보글 올라오는 누군가의 마지막 호흡의 흔적이 보였다.
 청년은 피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유영하는 분홍빛 내장을 툭툭 걷어내며 조금씩 노인에게 접근해 갔다.
 어느새 고요히 불던 바람이 사라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척!
 이윽고 청년이 노인의 일 장 앞에 멈춰 섰다.
 노인의 옆에 있던 중년인이 또다시 무례를 탓하며 호통을 치려는 순간,
 “정화(淨化).”
 나직하게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청년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흐릿하게 비쳐 보이는 얇은 자줏빛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노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그녀를 의식한 청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인의 존재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것처럼.
 “아직도 이 늙은이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할 것이더냐?”
 아까와는 달리 거듭 묻는 노인의 음성에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청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노인의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극공(極恭)의 예(禮).
 청년은 고개를 조아린 채 축 늘어져 있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우오오······.”
 중년인이 저도 모르게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청년이 높이 들어 올린 왼손에는 피범벅이 된 모가지가 들려 있었다.
 반쯤 잘라 낸 후 거칠게 잡아 뜯은 듯, 척추에 이어졌을 신경과 근육이 흔들거리고 찢어진 경동맥에서는 여전히 붉은 핏물이 떨어지는 비참한 수급(首級).
 “······의 주인.”
 또다시 울리는 여인의 음성.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 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희고 붉은 무리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묘한 흥분과 감동, 격렬한 전투 본능과 눈앞의 청년에 대한 경외감에 빠진 듯 잘게 몸을 떠는 것이었다.
 “신의 대리자이시며 백만 형제자매의 아버지이신 교사시여. 저는 한동백가의 자손, 백무(白舞)의 아들······.”
 청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노인과 정확히 마주한 시선에는 기이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백문(白文)이라 합니다.”
 “백문······ 백문.”
 누군가가 그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여러 번 되뇌었다.
 “또한······.”
 청년의 이어지는 말에 웅성거리던 모두가 입을 닫았다.
 “신을 섬기고 영생의 구원을 만방에 떨칠 오사제(五司祭)의 일인이자, 어둠의 수호자이며 신의 이면에서 영원한 암흑으로 스스로를 불태울 마(魔)의 계승자.”
 “꿀꺽!”
 “육록(陸綠)을 이어 당대 위(位)로 신의 부름을 받은······.”
 찰나, 시큼한 냄새가 살짝 풍겼다.
 누군가 공간 전체를 침묵하게 하는 전율에 오줌이라도 지린 것일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일이었지만, 그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사제(魔司祭) 백문. 신과 대리자께 깊은 존경을 바치며, 신의 이름으로 배덕의 죄를 지은 반도를 벌하였음을 아뢰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던 때.
 나는 물었다.
 ‘아버지, 신은 어디에 계신가요?’라고.
 잘게 부서진 칼날처럼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을 등지고
 서책을 읽으시던 아버지.
 나의 물음에 잔잔한 웃음만을 머금고
 가까이 오라 손짓하시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슬쩍 드러난 치아를 가리시며
 고개를 돌리던 어머니.
 나는 작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또 물었다.
 ‘저기요?’라고······.
 나를 조용히 안아 무릎에 올려놓은 아버지께서는
 가늘고 주름진 손으로 나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신은 여기에 계신단다.’
 
 
 
 1장. 발견
 
 
 “이여! 우리 문아(文兒), 학당에 가니?”
 “아오, 아(兒) 자는 좀 빼 주세요.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언덕 뒤편의 작게 우거진 숲길을 헐레벌떡 달려가던 백문은 동네 아저씨 장구(張口)의 반가워하는 모습에 같이 웃어 주며 답했다.
 “다 크긴, 이놈아.”
 백문은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장구의 손길에 정다움을 느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거, 백 처사 어른께 어제 일 감사드린다고 말씀 전해 주려무나.”
 “옙!”
 손을 흔드는 장구를 뒤로한 채 작은 다리를 놀려 숲 건너 학당으로 뛰어가는 백문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눈을 찌르는 듯 느껴졌다.
 탁탁탁탁!
 그렇게 한참을 달려갔을까.
 백문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에 순간 당황했다.
 “어, 어라?”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더 높게 떠오른 백문은 이내 기현상의 원인을 깨닫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악(岳) 의숙!”
 정확히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표정한 사내.
 마른 체구에 딱 달라붙는 짙은 회색 무복(武服)이 인상적인 키 큰 남자의 눈은 언뜻 살펴보면 매의 그것을 닮았다.
 중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깔이 아닌, 살짝 노란 빛깔을 뿜어내는 동공.
 이 사내를 잘 모르는 이가 마주한다면 분명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도 남으리라.
 악요(岳曜).
 매의 눈을 한 남자의 이름이다.
 “얼마 만의 방문이십니까?”
 백문이 나름 의젓한 척 격식을 차려 물었다.
 그 말에 한쪽 입술을 살짝 치켜올린 악요가 백문을 양어깨 위에 태우고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스쳐 가는 바람에 묶어 올린 머리가 흔들거리자 백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걸음으로는 최소 이각 이상을 가야 아버지의 학당에 이를 수 있겠지만, 지금 악요의 속도로는 그 절반도 채 안 걸릴 것이다.
 어느덧 숲길의 끝이 보였다.
 신나게 소리 지르던 백문의 입이 꾹 닫혔다.
 사내가 경망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아는 탓에 얌전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화악!
 나뭇잎에 가려졌던 빛살이 순간적으로 눈을 찌르자 코를 찡그리며 눈을 감는 백문.
 오늘따라 정말로 저 태양이 얄밉기만 했다.
 
 학당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겨우 진흙을 이겨 층층이 쌓아올린 후 회칠을 한 두 채의 작은 가옥과 반경이 채 오 장도 되지 않는 공간을 두르고 있는 작은 담장이 전부인 이곳은 아버지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낸 곳이다.
 아(亞) 자 형태로 나무를 대 종이를 바른 작은 방문 안쪽에서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저들도 이 고을을 이끌어 갈 동량(棟梁)으로 거듭날 테지.
 “넌 안 들어가 볼 테냐?”
 묵직한 저음으로 악요가 백문에게 물었다.
 “늦었어요.”
 힘없이 말하는 백문을 보며 악요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문은 최근 단체 수업에 꽤 많이 지각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기 체조에 흠뻑 빠져 있는 탓이었다.
 “뭐든지 적당히 해. 특히 네 나이 때는.”
 “헛, 저번에 아버지와 말씀하시기로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뭘?”
 “결사(決死)의 각오. 의숙께서 말씀하셨으면서.”
 악요의 눈이 빛났다.
 이 어린 아이가 어찌 자신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있을까.
 “경우에 맞지는 않구나.”
 악요는 백문의 등을 툭툭, 치며 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의형(義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눈을 다시 백문에게 돌린 후, 고개를 숙여 작은 귀에 입을 가져다 댄 악요가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때가 오지 않기만을 바란단다. 죽음을 쉬이 입에 올리는 순간도.”
 순간, 오싹하는 무언가가 백문의 등줄기를 쓸고 지나갔다.
 가끔, 아주 가끔 이 표정 없는 의숙은 주변 공기를 차갑게 식히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에게는 무척 잘해 주는 것이 확실하지만, 지금처럼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말할 때면 정말로 오줌보가 간질간질해지곤 했다.
 “됐고, 따라오너라. 보아하니 지금 들어가기는 틀렸고, 수업도 길어질 듯하구나.”
 
 휙!
 학당에서 조금 떨어진 뒷간에 이르자 백문의 귀에 작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굽히는 백문의 뒷머리로 검은 것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고!”
 “쯧.”
 백문의 앓는 소리와 악요의 혀를 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방금 지나간 검은 것은 분명 악요의 주먹.
 백문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누가 굽혀 피하라 했든.”
 “말씀도 안 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악요는 뒤통수를 긁으며 항의하는 백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르고 졸라서 가르쳐 주었더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이로세.”
 “아뇨! 그럴 리가요.”
 백문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악요의 말을 부인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악요가 다시금 오른손을 살살 흔들었다.
 악요의 손을 보며 긴장한 백문이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는 순간,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백문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틱!
 살갗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백문의 오른쪽 뺨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헐! 비겁해요!”
 오른손을 주시하던 백문은 갑작스레 날아든 왼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비겁? 오늘 좀 맞아 볼 테냐.”
 “헙!”
 백문이 펄쩍 뛰어 몸을 뒤로 날리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백문은 알고 있었다, 악요는 절대 자신을 구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와 함께 백문의 머릿속에는 악요와의 첫 대면이 떠올랐다.
 
 * *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이 차가운 남자 악요는 소리 없이 찾아왔다.
 늦은 밤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깬 백문이 몸을 비비며 본 것은 멀리 산등성이에 걸린 찬란한 보름달을 등지고 선, 길고 검은 그림자였다.
 흐린 눈에 비친 그림자를 본 백문은 덜덜 떨리는 작은 입에서 신(神)을 찾았다.
 
 무의식적인 공포.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악몽.
 
 마치 지옥에 떨어진 팔백만 마귀 중 하나의 현신을 본 양 끝없이 떨고 또 떨었다.
 검은 마귀는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없이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얼어붙은 백문의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순간,
 그 몸을 잡아 준 존재는 아버지였다.
 언제 밖으로 나오셨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셨던 것인지······ 백문의 머릿속은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었다.
 “밤이 차구나.”
 다정한 그 음성을 맞이하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동시에 백문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들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보고 느꼈던 것들이 모두 꿈이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백문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차분한 숨을 뱉었다.
 다음 날, 아침 문안을 드리기 위해 아버지의 방을 찾은 백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피에 잔뜩 절은 채 여기저기 찢어진 흑색 무복을 걸친 마귀.
 꿈이라 여기며 안도했던 전날의 공포가 되살아난 듯 입을 벌린 채 꺽꺽대는 백문 앞에서 아버지와 마주 앉은 마귀의 고개가 서서히 자신을 향했다.
 “뭘 그리 놀라나?”
 마귀의 입에서 불길처럼 쏟아지는 중저음의 목소리.
 덜덜거리는 손가락을 뻗어 마귀를 가리킨 백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허허, 아직 담이 작은 아이라네. 문아, 이리 오너라.”
 아버지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백문이 그제야 마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흑의(黑衣)는 먼지와 땀, 피가 한데 엉겨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반쯤 돌린 옆얼굴도 여기저기 상처 난 채 피딱지가 가득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백문을 의식해서일까.
 마귀가 슬쩍 움직였다.
 그에 백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이 꼬여 넘어졌다.
 “담이 작은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보이는군요. 호부(虎父)께서 묘자(猫子)를 두셨습니다그려.”
 백문을 비웃으며 마귀가 시선을 돌렸다.
 “큼.”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며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서둘러 일어나 먼지를 털고 자세를 바로잡는 백문.
 혹여나 마귀의 몸에 닿을까 조심스레 아버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 면전에서 이 무슨 추태더냐. 어서 몸 정갈히 하고 인사 올려라.”
 근엄하게 백문을 꾸짖으며 아버지가 예를 보이라고 명했다.
 백문이 마귀를 살짝 흘기며 절을 올리자 아버지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대송(大宋) 군위(軍衛) 연(淵) 장사시다.”
 “백문(白文)이라 합니다. 군(軍)의 높으신 연 어른께 인사 올립니다.”
 앳된 목소리로 백문이 연 장사에게 예를 보였다.
 “아직 충년(沖年)에도 이르지 못했건만, 배움의 깊이가 보통이 아닌 듯하구나.”
 연 장사의 눈빛도 진중해졌다.
 백문이 어리긴 하지만 문인의 예를 갖추었으니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야 할 터.
 이내 자세를 바로 한 연 장사가 얼굴을 마주해 숙여 보였다.
 “귀생의 예를 받소이다. 본관(本官) 악요(岳曜). 어린 영웅께 인사드리오.”
 악요? 분명 성이 연(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옛 추억으로부터 받은 이름이외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하는 악요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한 듯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여 더 이상의 의문을 잘라 버렸다.
 “저기······.”
 백문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백문을 동시에 바라보는 두 사람.
 “의복의 손상이 매우 심해 보입니다. 따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악요도 자신의 몸을 한 번 살펴본 뒤 백문에게 부탁한다는 뜻을 보냈다.
 백문은 종종 뒷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귀가 아닌 인간임에 깊이 안심하며 아버지의 방에 시선을 던졌다.
 대송의 군위라면 무장이다.
 아직 군에서 정식 편제를 받지 못하고 지휘관을 보좌하는 자리.
 그런 귀한 몸이 어찌 이런 시골에, 그것도 왜 하필 우리 백가에?
 조금씩 드는 의문을 뒤로하고 백문은 서둘러 의복을 모아 놓은 윗방으로 몸을 옮겼다.
 백문과 악요.
 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악요는 자신들과 함께 몇 달을 보냈다.
 악요가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
 그것을 짐작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아버지의 그 아름답던 춤.
 악요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다고 백문은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늘 편안하게 거동하는 아버지와 날렵하지만 어딘가 딱딱한 악요.
 아버지에게 춤을 사사(師事)했다면 저런 부자연스러움은 없을 텐데.
 그런 작은 부분까지 눈에 들어오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련만, 그것보다는 악요를 관찰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어느 날, 악요는 소리 없이 사라진 뒤, 몇 달이 지나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비교해 무언가 거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백문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 보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이 일 년.
 백문은 그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악요는 아버지에게 춤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님을.
 도전.
 악요는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악요는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오로지 순수한 힘으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악요의 모습은 언제나 날카로운 바늘과 같았다.
 그리고 새로이 만날 때마다 더욱 다듬어져 끝이 가늘어지는 느낌을 주었다.
 백문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가 가진 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밤을 보내고 돌아온 악요는 한결같았다.
 피, 그리고 상처.
 영락없는 패배자의 형상.
 그를 통해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춤사위가 자신만의 환상이 아님을 인식하는 백문이었다.
 아버지는 강자(强者)다.
 누구에게도 쉬이 어깨를 허락하지 않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무궁한 기쁨이 백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의문.
 아버지는 저러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왜 이런 외진 곳에서 문(文)에 힘쓰고 계신 걸까.
 자신의 이름, 문(文).
 혹,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이름 그대로 힘을 버리고 문인의 길을 걷고자 하심일까?
 책으로만 보던 무림의 기인이사가 아버지가 아닐까?
 자신만의 작은 비밀을 간직한 아이처럼 백문은 하루하루 아버지와 악요를 보며 이 기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함께한 시간이 길면 그 마음이 피를 나눈 것보다 더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어느새 악요는 아버지와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었고, 종국에는 신(神)을 받아들여 신교의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뻐하고 신난 것은 바로 자신, 백문이었다.
 어머니를 먼저 신께 보내드리고 가족이라고는 아버지와 자신밖에 없던 세월을 지나 이제 든든한 숙부가 생겼으니.
 항상 굳어 있지만 자신을 바라볼 때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백문은 알고 있었다.
 그 후 악요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가문이 종군의 명을 받아 북방에서 거란을 막았다고 한다.
 
 * * *
 
 “힘드냐?”
 엎드려 뻗은 자세로 열심히 팔을 굽혔다 펴고 있는 백문에게 악요가 물었다.
 “끙! 아뇨!”
 “그럼 백 회 더.”
 “컥!”
 백문의 가슴과 배가 턱,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다.
 “아, 의숙! 저 아직 어리다니까요.”
 “내가 네 나이 때는 쉬지도 않고 만 회 정도는 거뜬히 넘겼다. 한데 겨우 여기서 포기하겠다고?”
 은근슬쩍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 내는 백문을 본 악요가 혀를 끌끌거렸다.
 “제가 알기로 무림인들은 내공이란 것을 이용해 신체를 단련한다는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어요?”
 “······.”
 말이 없는 악요의 모습에 백문은 슬슬 불안해진 듯 신나게 놀리던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이 짧았나······.”
 “예?”
 “아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서 버리는 악요.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했음을 짐작한 백문은 그저 땅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학당의 문이 열렸다.
 수업이 끝나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밝기만 했다.
 “자네 왔는가.”
 늘 그대로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수업에 늦어 혼날 것을 떠올린 백문이 허겁지겁 학당 쪽으로 발길을 놀렸다.
 “놈!”
 갑자기 백문을 향해 호통을 치는 아버지.
 대호를 마주한 쥐처럼 백문이 훅 움츠러들었다.
 “형님, 문이가 늦은 건 저 때문입니다.”
 악요가 얼굴을 살짝 돌려 눈을 찡긋했다.
 역시 의숙은 언제나 내 편이라니까······.
 
 “그래, 이번 종군은 편안하셨는가?”
 고아한 서책들의 향이 물씬 풍기는 방에서 악요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오래 있지는 못할 겁니다. 벌써부터 다음 종군에 연 어른을 또 거론하고 있다지요? 이번에는 총지휘관으로 직책을 받을 듯합니다.”
 “고생이 많으이.”
 아버지가 악요를 유심히 관찰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혹, 어떤 상처라도 입었을까 염려하는 듯.
 “그나저나 형님.”
 “말씀하시게.”
 “요즘 관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
 악요가 옆에 앉은 백문을 돌아보았다.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이었다.
 무언의 강요에 불만 섞인 표정을 짓던 백문이 결국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꼭 이럴 때면 두 분이서만 얘기하신다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른들의 세계에 아이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심심해진 백문의 눈에 창고로 쓰는 작은 토옥이 들어온다.
 ‘독서나 해야겠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조금 전 아버지의 방에서 느낀 서향보다 훨씬 강한 책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문인이라면 늘 책을 곁에 두고 성현들의 말씀을 줄줄 암송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아버지다.
 그런 영향으로 백문도 지금처럼 시간이 남을 때는 독서에 빠져드는 습관 아닌 습관이 생겼다.
 백문은 오늘은 어느 분의 말씀을 읽을까 하는 얼굴로 토옥을 가득 채운 책 사이를 누볐다.
 “옳지.”
 백문의 손에 잡힌 책은 대당(大唐)의 학자 손사막(孫思邈)이 집필한 천금방(千金方)이라는 의서(醫書)였다.
 평소 의술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백문이지만 오늘따라 조금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
 ‘뭐, 성현의 말씀은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읽어 봐도 괜찮겠지.’
 백문은 역시나 손이 가지 않아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의서를 입으로 후후 불고 손으로 털었다.
 그리고 천금방을 들고 자신의 개인 공부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러던 중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의서가 있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기분이 묘했다.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 요상한 느낌.
 백문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누렇게 바래 본래의 색을 살피기 힘든 죽간(竹簡) 뭉치 몇 개가 보였다.
 ‘처음 보는 건데······.’
 아무리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곳을 출입한 지 벌써 오 년이 넘었다.
 한데 처음 보는 죽간이라······.
 그 자체도 처음 보거니와, 옛 죽간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 따위는 없을 텐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수가 꽤 많았다.
 의서와 다른 잡서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자리 뒤편으로 대충 보아도 열이 넘었다.
 ‘혹시나 이걸 손대면 아버지께 꾸중을 들을까? 에이, 뭐, 따로 말씀이 없으셨으니.’
 살짝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끌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 기분.
 마치 죽간들이 어서 세상의 빛을 보여 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에라!”
 결심을 굳힌 백문이 먼지를 끌며 죽간 하나를 빼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지만 누가 볼세라 서둘러 품 안으로 죽간을 숨기고, 서둘러 토옥을 빠져나온 백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숨을 돌리며 땀을 훔쳤다.
 “후우······.”
 옆방에서 두 사람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심각한 내용이리라.
 백문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죽간을 묶은 천을 조심스레 풀었다.
 빠직.
 곧게 자른 죽간의 일부가 백문의 작은 힘에 눌려 길게 쪼개졌다.
 “흡.”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백문.
 “젠장.”
 만약에 아버지께 걸리면 단단히 혼날 것이 눈에 선했다.
 이대로 다시 묶어 제자리에 두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고, 또 죽간에 쓰인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 조심해서 죽간을 펼쳤다.
 오래되어 삭아 버린 작은 끈들이 상할까 봐 바닥에 천천히 하나씩 늘어놓았다.
 전서체(篆書體). 그것도 진시황 이전에 쓰였던 대전(大篆)이다.
 하나 전서 정도야 다양한 학문을 갈고닦은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친근감.
 그리고 고대의 감추어진 비밀을 마주했다는 기쁨.
 백문은 눈을 좁혀 아주 작게 쓰인 글자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보관 방법의 문제 때문인지 명확하게 보이는 글자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래서야 어디 읽기라도 하겠어?’
 “비(秘)······ 제(祭)······ 양(梁)······ 백(白)······.”
 중간 중간 희미한 글자들을 넘기고 그나마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글자들만 읽으며 백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고! 못해 먹겠다. 흡!”
 백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치다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작게 들리던 아버지와 악요의 대화가 멈춘 것이다.
 놀란 토끼처럼 얼어붙은 백문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옷을 벗어 펼쳐 놓은 죽간을 덮었다.
 잠시 후, 아버지 거처의 방문이 열렸다.
 후다닥 악요를 배웅하기 위해 방을 나서는 백문.
 그런 백문의 귀로 아버지와 백요가 나누는 인사가 들려왔다.
 “길게 머물다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되었네. 신께서 우리를 늘 안고 계시니 자네가 어디에 있든 모두 한 이불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네.”
 “보중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드린 말씀을 잊지 마시길.”
 아버지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악요는 또 떠나려는가.
 이번 재회는 무척이나 짧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정이 담긴 악요의 음성이 이어졌다.
 “문이는 다음에 볼 때까지 만 회. 그 아래로는 인정 안 한다.”
 “칫, 멋없어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리는 악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마주한 채 긴 그림자를 자신에게 드리우는 저 강인한 거인의 모습에 백문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아.”
 “예, 아버지.”
 “수업을 걸렀으니 합당한 벌을 받자꾸나.”
 벌써부터 종아리가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백 처사(處士)라 칭했다.
 벼슬길에 올랐으나 스스로 낙향하여
 이 작은 고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생의 사명인 양
 당신께서는 부귀를 물리치고 낮은 자리를 택하셨다.
 학당이 없어 멀리 있는 큰 고을까지 나가야 했던 사람들 모두는 그러한 아버지의 선택에 환호를 보내며
 고을에서 제일 좋은 땅에 집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를 키워 세상에 내놓으셨고,
 그들이 또 여러 지역에서,
 때로는 관(官)에서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났다.
 
 
 
 2장. 시작되는 비극
 
 
 쫑긋.
 숨소리가 규칙적인 것을 보니 깊게 잠드셨음이 확실했다.
 만약 지금 불을 밝힌다면 혹여나 눈치를 채실까?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못난 자식이라도 된 양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백문은 작은 초에 불을 놓고 홍색의 종이로 가려 외부로 빛이 새어 나가는 것을 최대한 차단하며 죽간을 펼친 뒤, 낮에 대충 확인했던 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하나하나 짚어 보며 흐린 눈을 끔벅거렸다.
 ‘제(祭) 자 앞에 이거는······ 보자, 가(可)? 아니면 사(司)? 아오!’
 흐릿한 글씨에 제 성질을 못 이겨 분통을 터트리려던 찰나,
 번쩍!
 뇌 전체를 무언가 한 번 훑고 지나가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치밀어 오르는 희열감에 저도 모르게 가슴까지 떨렸다.
 
 사제(司祭).
 
 신의 대리자인 교사(敎師)를 보필하며, 내려 받은 지혜와 무한한 능력으로 신을 찬양한다는 다섯 명의 자녀.
 신교에서는 교사가 신의 부름을 받게 되면 그 자리를 이어 나갈 후계자를 일컬어 사제라 했다.
 ‘왜 사제라는 단어가 이 오래된 죽간에 적혀 있을까? 혹시 우리 신교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 같은 건가?’
 슬슬 죽간들의 정체에 대해 가닥이 잡힌다.
 일종의 역사책.
 따지고 보면 교에 있어서 정말 귀중한 사료가 분명할 것이다.
 이제 죽간은 중원에서 사용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니.
 특히 눈앞의 것처럼 기원이 오래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근거가 있다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한낱 교인에 불과한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었을까?
 새삼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모르는 게 많음을 깨닫는 백문이었다.
 사제라······.
 백문이 알기로 현재 총단에는 흑(黑), 천(天), 홍(紅), 십(十), 이렇게 네 명의 사제가 교사를 보필하고 있다.
 신의 이면(裏面)이라 불리는 마(魔)사제는 오래전 벌어진 모종의 일로 인해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
 끙끙거리며 죽간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백문은 시간이 꽤나 흐르자 생각보다 많은 글자들을 나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
 백문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늘 새로운 학문과 교감할 때는 조급함을 버리고 만 리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지금은 일단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일의 일과를 위해 수면에 들어야 할 때였다.
 백문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주섬주섬 죽간을 접어 방 안에 정돈되어 쌓인 서책들 뒤쪽으로 숨겼다.
 그런 뒤, 잠깐 아버지의 거처 방향을 응시하던 백문이 이내 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네.’
 혼자만의 비밀을 발견한 소년의 두근거림과 함께 고요 속으로 빠져드는 밤이었다.
 
 * * *
 
 꿈일까.
 은은한 묵향이 코를 간질이고 차갑지만 불쾌하지 않은 바람이 잠시 방 안을 채웠다.
 나른한 몸이 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묵을 지키며 작은 소년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무언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갈히 다듬어 주었다.
 그 정다운 손길에 기분이 좋아지는 백문.
 속삭이듯 스며드는 누군가의 음성은 동굴 속 물방울이 떨어져 퍼지는 진동과도 같이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의식을 자극하는 본능은 그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에 저장하고 있다.
 ‘문아, 내 사랑하는 문아.’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어미를 용서해 다오. 세상을 용서해 다오.’
 ‘교(敎)를 용서해 다오.’
 
 ‘신(神)을 용서해 다오······.’
 
 아버지?
 나의 꿈에 어찌 아버지께서······.
 용서라니요. 아버지를, 어머니를, 세상을 용서하라니요.
 신? 이 세상의 주관자시며 유일한 절대적 존재인 신을 어찌 미물에 불과한 제가 용서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아버지이! 어디 가세요!
 저를 버리고, 이 불쌍한 아들을 두시고 어디를 홀로 가십니까?
 
 아버지!
 
 “헉!”
 백문은 눈꺼풀을 찌르는 강한 햇살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통해 방 안으로 쏘아 들어오는 태양의 긴 줄기.
 그 각으로 보아 지금은 중천(中天)이 틀림없다.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늦잠을 자 버렸다.
 매일 아침, 달이 채 사라지기 전에 깨어나 신에게 기도하고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거늘, 백문은 학문을 닦는 신의 자녀로서 큰 실수를 범했다.
 “어제 그렇게 혼났으면서! 아오!”
 우당탕, 백문은 난리법석을 떨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역시나 아버지는 거처에 계시지 않았다.
 이미 학당으로 가셔서 꼬물꼬물한 아이들에게 옛 어른들의 말씀을 강의하시겠지.
 문인 가문의 자손답지 않게 무척이나 경망스럽게 뛰어다니던 백문이 대충 의복을 걸치고 학당이 있는 숲 너머로 후다닥 달려갔다.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줄줄 흘러 달려가는 뒤편으로 낙숫물처럼 흩어져 나갔다.
 “헉! 헉!”
 두어 번 넘어지고 일어나 정신 빠지게 뛰어가던 백문.
 그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장구, 동표(童票),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몇 명의 사내들과 십여 명의 관병들.
 의아한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서 일었지만 지금 그것까지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탁탁탁탁!
 가까이 다가온 무리들 앞에 선 장구와 동표를 향해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지나치려 했다.
 한데 그때, 백문의 귀에 장구의 음성이 들렸다.
 “문아, 잠시만.”
 “예?”
 급해 죽을 지경이건만 어른의 부름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달림을 멈췄다.
 “헥······ 헥······.”
 가슴을 퉁퉁, 치며 숨을 몰아쉬는 백문의 주변으로 관병들이 넓게 퍼졌다.
 그러나 백문은 그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지 말을 건 장구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딜 그리 급하게 뛰어가누? 작은 발에 불나겠다.”
 뭐야? 지금 내 모양새를 보고서도 저런 말이 나오나. 딱 보면 척이지.
 “아아, 장 아저씨. 저 빨리 학당에 가 봐야 해요. 급하신 일 아니면 가 볼게요.”
 “잠깐만. 아직 이 어른께서 볼일을 마치지 못했는데 어린 것이!”
 장구는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생경한 모습에 백문은 일순 당황하여 얼어 버렸다.
 턱!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백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놀라 돌아본 눈에 들어온 이는 동표.
 그는 집안이 어려워 늘 백가에서 쌀을 빌어다 먹고 노동으로 대신 갚아 오던 이였다.
 “동, 동표 형.”
 “시끄럽다, 어린 마귀 놈아!”
 마귀? 뜬금없이 왜?
 “헤헤, 찰장(察將) 어르신. 이 꼬맹이입니다요.”
 장구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지며 비굴한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보냈다.
 벌어진 입에서 꺽꺽 소리만 내던 백문의 시선이 그제야 관병들 앞에 서 있는 평복의 사내에게 닿았다.
 “틀림이 없는가?”
 “그렇습니다요. 요 어린것이 마귀 두목 놈의 아들이 맞습니다요.”
 “잠깐만요! 장구 아저씨, 마귀 두목이라니요?”
 서둘러 소리치는 백문.
 다 크지 않은 머리로는 지금의 사태가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찰장이라 불린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백문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백문과 얼굴을 마주했다.
 “백문(白文). 오래전 황궁위리(皇宮委吏)였던 백무(白舞)의 아들. 맞나?”
 가까이서 본 찰장의 인상은 강인했다.
 위로 솟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빛 앞에서는 다 자란 어른이라도 사실을 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맞는······ 데요.”
 마지못한 백문의 대답에 찰장이 몸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 옆에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양쪽에서 백문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끌고 가.”
 짧은 말을 남긴 채 찰장과 관병의 일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백문은 기가 막혀 말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의 눈에 멀어지는 찰장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헤헤거리는 장구와 동표의 모습이 들어왔다.
 “장구 아저씨! 지금 이거 다 장난치시는 거죠? 에이, 재미없어요.”
 “미친!”
 퍽!
 장구가 침을 뱉으며 백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켁!”
 불시에 충격을 받은 백문은 쓰디쓴 위액을 게워냈다.
 “아직도 순진 떨고 자빠졌네. 이놈아, 다 털렸어.”
 “커윽······ 무, 무슨 말씀이세요?”
 “네놈이랑 애비, 더러운 마종들. 그동안 고을 사람들 몰래 얼마나 못된 짓거리를 했는지 다 들통 났다고.”
 쿵!
 “마종이라뇨?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아버지와 제가 어찌······.”
 스윽.
 백문은 서늘한 무언가가 목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말이 많다. 가자.”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내 중 한 명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의 행동에 장구와 동표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너희 둘은 이곳까지 안내해 준 상을 따로 내릴 터이니 현청에 가서 대기하도록.”
 “아이코, 별말씀을.”
 장구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 생겼다.
 저런 모습, 정말로 처음 보았다.
 정말로 어제까지 자신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이던 그 사람이 맞는가.
 그 옆에서 흐르는 침을 스윽 닦으며 헤헤거리는 동표.
 백문은 알 수 없는 역겨움에 구역질이 절로 났다.
 관병이 쥔 창극에 반사되는 햇빛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포박할까?”
 “뭐, 이 조그만 녀석이 무슨 힘이 있다고.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 그때까지 몸이라도 편하게 두지.”
 ‘죽어? 내가?’
 앞서 가는 두 사내의 대화를 듣던 백문은 저절로 다리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만약 뒤쪽에서 창극을 세운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관병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꼬마 귀신아, 아직도 모르겠냐?”
 “예! 전혀요.”
 말을 걸던 사내의 입이 벌어지며 누런 이가 번들거렸다.
 “마교(魔敎).”
 두근거리던 백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 버렸다.
 “네 아비가 수십 년간 황제 폐하의 백성들을 기만(欺瞞)하여 사술에 물들게 했음을 부인하는 게냐?”
 아주 예전부터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진리가 세속으로부터 배척받아 온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백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몇 십 년도 더 이전의 일.
 대대적인 탄압은 백문이 태어나기 훨씬 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없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교세를 전파하는 것에 늘 조심스러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포교행(布敎行)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이들이 행할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저 귀한 학문을 전해 세상을 밝힐 인재들을 양성한 것이 다였다.
 “백 처사라고 한다지, 네 아비? 그놈이 키워 세상에 뿌려 놓은 수많은 마종들이 황제 폐하의 은혜를 부정하고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자비로우신 황상께서도 더 이상 나라가 사교에 물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셨던 게야.”
 “그런 적 없습니다.”
 차분하게 대꾸하는 백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맞추듯 스산한 바람이 주변을 감돌았다.
 “다시 지껄여 봐라.”
 “그런 적 없다 했습니다.”
 “허!”
 사내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 조그만 귀신이 무얼 믿고 저리 당당할까 하는 표정으로.
 “확! 그냥 여기서 베어 버릴까?”
 “아서라.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려면 내일까지는 살려 둬야 하니.”
 말리는 다른 사내의 눈에도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 아버지는요?”
 그러나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安危)가 궁금한 백문이다.
 “벌써 형옥(刑獄)에 들어간 지 오래다. 숨어 있던 마귀 새끼들 여럿과 함께.”
 으득!
 작은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은 사내가 이맛살을 구겼다.
 “저는 왜 형옥으로 압송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의 말대로라면 저도 마귀 새끼일 텐데요.”
 “넌 다른 고을로 갈 것이야. 아마 그곳에서 처형(處刑)되겠지.”
 
 * * *
 
 죽음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다.
 순교(殉敎)는 신의 축복.
 누구나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신의 부름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떨려옴과 동시에 눈물이 났다.
 짧은 고통 후에 펼쳐질 영원한 은총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웃고 있어야 할 텐데.
 왜 이리도 서글프고 가슴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버지와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서운함 때문인가.
 
 “얼마나 먼 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시려고요?”
 피워 놓은 불의 온기에 몸을 녹이던 관병이 멀뚱하게 백문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잠든 야심한 밤.
 나무에 묶여 있는 백문과 그를 감시하는 병졸 하나만이 별빛을 받으며 깨어 있었다.
 “모른다. 꽤 멀리 가야 할 듯하구나. 너 같은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하여 중원 각지에 있는 큰 도성으로 보내 거기서 처리한다는구나.”
 몰래 교를 믿던 많은 고을 사람과 가족들.
 그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순교하겠지만 백문과 같은 어린아이들은 먼 곳에서 보다 더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몇 살이냐?”
 “올해로 열입니다.”
 “흠, 내 자식보다 어리구나. 쯧쯧······.”
 교대 전의 병졸과는 다르게 이자는 자신에 대해 동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쩌다 그런 사교에 빠져서 이런 꼴을 당하누. 하나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너나 다른 아이들은 단지 못난 부모를 둔 것뿐일 텐데.”
 “전 어떻게 죽습니까?”
 순간, 병졸의 말문이 막혔다.
 이 아이에게 무슨 고통이 올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참수(斬首)인가요, 아니면 요참(腰斬)? 거열(車裂)?”
 “헐, 어린것이 어찌 그런 것들을 알고 있을꼬.”
 그는 한참이나 어두운 표정을 짓다가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형리(刑吏)가 네 입에 마비산(麻沸散)을 넣어 줄 게야. 그럼 고통은 많이 없을 것이고.”
 병졸은 직접적인 부분은 회피했다.
 대체 얼마나 두려운 형벌이 예정되어 있기에······.
 주변을 쭉 둘러보던 백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백문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 어르신.”
 “왜?”
 “대변이 보고 싶습니다.”
 뜻밖의 말에 백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병졸이 이내 입을 열었다.
 “거, 먹은 것도 없는 것이. 쯧쯧.”
 “이 자리에서 실례를 해도 될까요?”
 “아니다.”
 병졸이 일어나 백문을 묶어 놓은 포승을 풀었다.
 혹여나 아파할까 부드럽게 줄을 푸는 그의 손길에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저기 안쪽 숲으로 들어가자. 더 멀리는 못 간다.”
 “예.”
 병졸은 백문을 앞장세우며 다른 이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이동했다.
 “그래, 거기. 거기가 적당하겠다.”
 “조금 더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비록 이런 처지이지만 학문을 닦은 생으로서 다른 분들께 불쾌감을 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차분히 말하는 백문을 보며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병졸이었다.
 저렇게 어리고 예의에 밝은 아이가 마교를 섬긴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니.
 “휴우······ 그러려무나. 그럼 저쪽 나무 뒤로 가거라. 내 여기서 지켜볼 테니.”
 “감사합니다.”
 배를 살살 만져 보인 백문이 웬만한 아이보다 큰 둘레의 나무 뒤로 움직였다.
 바지를 내리고 쭈그려 앉는 백문을 바라보던 병졸은 어떠한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살살 흔들며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끙.”
 힘을 주는 소리.
 그제야 병졸은 더욱더 안심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살살 풍겨 오는 변의 냄새.
 잠시 후, 백문의 말소리가 병졸의 귀에 들려왔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천 조각 하나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그, 변 보러 가는 놈이 그런 것 하나 준비 안 했나.”
 “처지가 처지인지라······.”
 투덜대면서도 병졸은 품속에서 누런 헝겊 조각을 꺼내 백문에게 다가왔다.
 “예 있다.”
 병졸이 코를 막고 다른 손으로 헝겊을 건네려는 순간, 백문의 눈이 빛났다.
 턱!
 “커흡!”
 작게, 그리고 아주 짧게 터진 병졸의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이 천천히 숙여져 자신의 명치를 향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병졸의 명치에는 끝이 뾰족한 돌멩이가 정확히 꽂혀 있었다.
 백문은 죄책감에 연신 중얼거렸다.
 털썩 쓰러지는 병졸.
 죽지는 않을 테지만 한동안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맞았다.
 상대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어리다는 것이 이럴 때는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꽤 오랫동안 신체 단련을 해 오지 않았던가.
 악요의 엄한 교육이 효과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얼핏 듣기로 난적(亂賊)의 죄는 평생을 따라간다고 했다.
 그만큼 나라에서 집요하게 추적을 할 것이라는 뜻.
 언젠가는 잡혀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를 뵈어야 했다.
 신께서는 순교라는 축복 어린 죽음을 주셨지만, 그것을 자신의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에는 인세의 추억이 너무나도 깊은 탓이다.
 고을로 되돌아간다면 누군가 필히 백문을 알아볼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무조건 죽음이다.
 하지만 백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생각은 그저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간절함뿐.
 아버지의 그 인자한 눈동자와 마주한다면 온몸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백문은 그렇게 정신없이 어두운 산길을 달렸다.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헉! 허억!”
 목구멍을 넘어 올라오는 위액이 역하기만 했다.
 자신의 작은 발놀림으로는 훈련받은 관병들의 발걸음을 능히 뿌리치기 힘들 터.
 기절한 병졸이 깨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거리를 벌려 두어야 했다.
 턱!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백문의 발이 튀어나온 돌덩이에 걸렸다.
 그 탓에 달려가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 버렸다.
 이마가 깨지고 옷이 찢어져 속살에서 피가 올라왔다.
 “으으윽!”
 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었다.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넘어진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한 번 넘어진 몸을 쉬이 추스르기 힘들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한숨?
 
 “문아, 모든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음식이요.”
 “그것도 맞지만, 제일의 답은 아니구나.”
 “그럼 자는 건가요?”
 “며칠 숙면하지 못했다 하여 생물의 근간이 위태롭거나 하지는 않다.”
 “모르겠습니다.”
 “호흡이다.”
 “에? 그건······.”
 “너무도 당연하여 미처 인식치 못하고 있었느냐?”
 “예······.”
 “신께서 내리신 만물의 생. 그 기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숨을 들이켬에 있다. 사물을 볼 때 늘 기원(起源)을 살피라 하였거늘.”
 “죄송해요.”
 “그렇다면 생을 가능케 하는 호흡이란 무엇이더냐?”
 
 “생물이 자연과 다르지 않다는 증명이라 하셨죠.”
 백문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했던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인간은 약하고 또 약하지만 신께서 주신 지혜로 만물의 으뜸이 되었고······.”
 백문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그 지혜로 근원과 자연이 소통하는 길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욱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참을 뱉지 않았다.
 그러자 호흡을 통해 들어온 공기가 혈관을 따라 발가락 끝까지 시원하게 몸을 뚫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기 체조를 알려 주실 때 가장 먼저 행하라고 했던 호흡법인 것이다.
 그저 단순히 크게 한숨을 쉬는 것만을 가르쳤을 뿐이나, 반복할 때마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숨의 힘.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만악(萬惡)을 누르는 신의 섭리 중 하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백문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끄응.”
 작은 몸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 번의 깊은 호흡 이후 백문은 한결 나아진 몸을 이끌고 또다시 달렸다.
 백문은 달리던 중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절반 이상을 잘라 먹은 듯 어둡게 세상을 비추고 있는 달.
 기억이 틀림없다면 저 방향으로 가면 이제 고을이 나올 것이다.
 
 * * *
 
 축축한 무언가가 얼굴을 간질였다.
 이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손수 입에 넣어 주시던 달콤한 과일일까?
 입술에 닿는 것을 보니 맞는 듯도 싶었다.
 아그작!
 입을 벌려 급하게 과일을 물어 씹었다.
 살짝 풋내가 나는 것이, 성질 급한 농민이 서둘러 수확한 것인가?
 응?
 그런데 과일이 이처럼 꿈틀거렸던가?
 아직 입술에 묻어 있는 나머지가 요동치듯 몸을 비트는 것이 느껴졌다.
 
 백문이 눈을 떴다.
 그러자 동굴 입구에서 쏟아지는 햇살로 인해 콧잔등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헉!”
 입술을 닦아내던 백문은 자신의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는 것이 작은 지네라는 것을 알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역겨움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끄윽, 켁!”
 몇 번 신물을 쏟아 내던 백문은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주인이 없는 동굴.
 추위에 지치고 잠에 못 이겨 몽롱한 정신을 한 채로 기어 들어온 곳.
 갑자기 등골에서 찌릿한 무언가가 올라와 가슴까지 차갑게 식혔다.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그런 다급한 처지를 잊은 채 이런 위험한 곳에서 잠들어 있었다니.
 이미 수색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관병들이 이곳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동굴을 발견한다면 자신의 목숨도 여기까지일 터.
 백문은 떨리는 발을 간신히 놀려 입구까지 걸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밖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이다. 아무도 없어서.’
 백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체력이 상당히 고갈되기는 했으나 깊은 잠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했다.
 태양이 하늘에 걸린 지금 최대한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하거늘,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할 만큼 백문은 냉정하지 못했다.
 그저 고을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뛰고 또 뛸 뿐.
 푸드득!
 놀란 백문이 달림을 멈췄다.
 정적 속에서 백문은 내쉬는 숨마저 참고 두려운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새들이 저토록 급히 날아올랐다는 것은 분명 인간이 숲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리라.
 백문이 아주 조용한 움직임으로 길옆, 풀이 무성한 나무 뒤편으로 숨었다.
 누군가가 지나가더라도 자신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를 기원하며.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상대도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것을 보니 뭔가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백문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터벅터벅.
 상대의 발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자신이 숨어 있는 나무 근처에서 멈췄다.
 설마, 발견되었나.
 “문아, 나야. 동표 형이야. 거기, 문이 맞지?”
 동표.
 어제 사악한 얼굴로 자신을 붙잡던 인간.
 하지만 저 다정스러운 목소리는 뭘까?
 그리고 왜 저 인간이 이곳에?
 “걱정하지 마. 아무도 없어, 나밖에. 나와도 돼.”
 진실로 백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안타까운 음성이었다.
 “어제는 미안했다. 나도, 장구 아저씨도 어쩔 수 없었어. 연기를 한 거야. 네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동표가 주위를 슥슥 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얼어붙은 백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빨리 나와. 관병들 전부 반대편 산을 뒤지고 있어. 언제 이쪽으로 올지 몰라. 부탁이다. 날 믿어.”
 그런 것이었나?
 순간, 백문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늘 학문을 가르치려 했으나 타고난 성품이 게을러 결국 배움을 포기했던 동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신세를 지기는 했으나 조금씩 갚아 나가며 아버지께 항상 존경의 눈길을 보내던 순박한 사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백문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형.”
 “오! 그래, 문아. 거기 있었구나.”
 살짝 물기가 섞인 동표의 음성을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맺혔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백문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이 왔던 길로 급히 인도하는 동표.
 탁탁탁탁!
 두 사람이 급하게 달리는 소리만이 어둡게 우거진 숲에 가만히 울려 퍼졌다.
 
 “헉헉!”
 한참을 달리다 겨우 숲을 벗어난 후, 두 사람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헉헉······ 형, 어찌 된 일인가요?”
 그제야 백문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누군가 관에 고한 모양이다. 처사 어른께서 사교를 퍼트리고 있다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동표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흉작이 심해 인심이 술렁이고 있었거든. 관에서 이번에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래.”
 어리긴 해도 백문은 총명했다.
 그렇기에 동표의 말을 듣고 그간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왜 저희 집안을요?”
 늘 평화로웠던 고을이다.
 주변 여러 고을들도 쌀을 빌어 갈 정도로 흉년의 영향에서 벗어날 정도였으니.
 “낸들 아나. 어느 쓰레기 같은 놈인지, 네 아버지께 원한을 가진 인간이 틀림없어.”
 숨을 돌리고 호흡이 편안해지자 두 사람은 슬슬 걸음을 옮겼다.
 “형, 형도 알잖아요. 우리가, 아버지가 결코 남에게 해를 주는 분이 아니란 걸.”
 “당연하지. 세상에 처사 어른 같은 분들만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냐.”
 그러고 보니 동표도 예전에 아버지께 신의 사랑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시나 교리를 깨우칠 수 없었고 비밀을 엄수한다는 굳은 약속을 했다.
 고을 사람들의 일부만이 신을 받아들여 신교의 교인이 되었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교인들 외에는 동표가 유일했다.
 “다른 분들도 아버지와 함께 형옥에 수감되셨나요?”
 “응. 정말 걱정이다. 나라의 법이 워낙 엄하다고 하니.”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투가 조금 거슬렸다.
 하늘 정중앙에 떠 내려쬐는 태양의 존재에 백문은 눈이 부신 듯 손을 들어 빛을 막았다.
 요즘 들어 정말로 짜증나는 햇빛.
 길게 난 흙길에 접어들자 귓구멍을 귀찮게 하던 벌레의 울음소리도 완전히 멀어졌다.
 “문아.”
 “예?”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처사 어른이 아니었다면 나와 우리 가족들은 굶어 죽었을지도 몰라.”
 그건 형네 식구들이 다 게을러서 그런 거고요.
 온가족이 일하기 싫어하고 술만 퍼마셨으니.
 “벌써 네 집안에 빚진 쌀이 이 년 치가 다 되어 가네. 에휴.”
 “신경 쓰지 마요.”
 아버지도, 나도 곧 세상에서 지워질 테니까.
 “아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면 그게 사람이냐? 빚은 어떻게든 치워야 되는 거야, 어떻게든.”
 “이제 필요 없다니까요.”
 치워야 된다고?
 무언가 계속 백문을 거슬리게 하는 동표였다.
 “그나저나 어떤 망종이 네 아버지와 마을분들을 관에 고발했을까? 넌 궁금하지 않니?”
 “······.”
 동표가 어딘가를 응시하며 물었다.
 자신에게 묻고 있으나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질적인 모습에 백문은 살짝 한기가 돋았다.
 “어쩌겠어요. 그게 신의 뜻이라면.”
 동표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신을 언급하는 백문.
 그 순간, 동표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아마도 천벌을 받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면 말이야.”
 은혜를 원수로?
 설마 고발한 자가 아버지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근데 문아, 세상에 천벌이란 없어. 다 만들어 낸 허상이야. 그런 것이 있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거지같이 살아갈까?”
 타고난 게으름.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 근시안.
 
 나태(懶怠).
 
 신께서 피하라 경고하신 죄악 중 하나.
 지금 당신들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나태를 모른 채 세상을 탓하고 있는 죄로 인해.
 “아휴, 잠시만 쉬자.”
 백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묵직한 바윗덩어리에 몸을 올려 버리는 동표였다.
 “형, 서둘러야 하지 않아요? 언제 관병들이 절 잡아갈지 모르는데.”
 불안한 음성으로 백문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설마 벌써 여기까지 왔을라구. 내가 네 소식 듣고 오면서 다 봐 뒀어. 안전해.”
 장담하는 동표를 바라보며 백문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형, 앞으로 전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어쩌긴. 멀리 도망쳐서 잘 살아야지.”
 쉽게 말하는 동표가 얄미웠다.
 “제 아버지께서 지닌 힘이라면 형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실 수 있을 텐데······.”
 “건 또 뭔 소리냐? 처사 어른께서 무슨 힘이 있다고.”
 아차, 이들은 아버지의 무공을 알지 못하지.
 이제 겨우 열 살인 백문이 이런 상황에서도 울부짖지 않고 나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아버지의 무공 때문이다.
 그냥 마주치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게 될 무시무시한 악요조차도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으니, 아버지는 어쩌면 벌써 형옥을 뚫고 자신을 찾으러 나오셨을지도 모른다.
 순교?
 믿음만으로 생을 버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아직 백문에게는 없기 때문일까.
 어느새 백문은 아버지와 자신의 감정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문아, 너 이상한 거 못 느꼈냐?”
 “뭘요?”
 “나 말이다.”
 지금 동표는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것참 묘하지 않니?”
 “무슨······.”
 “네 소식이란 거. 우리가 살던 고을이랑 여기랑 상당히 멀거든? 그런데 내가 어찌 알고 떡하니 나타났는지 말이야.”
 백문은 발바닥에서 수억 마리의 개미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듯한 기묘한 공포감을 느꼈다.
 차분하게 웃으며 말하는 동표의 얼굴.
 그것은 방금 전까지 보여 주던 평소 순박했던 동표의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왔어, 뒤에서 몰래.”
 “왜요?”
 분명 자신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했을 텐데······.
 “왜긴. 너랑 백 어른께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 때문이지.”
 이를 드러내는 동표를 보는 백문의 시선이 굳어 갔다.
 “나도 사람이라 잠깐 잠든 사이에 네가 관병을 눕히고 사라졌더구나.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제야 백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돌무더기만 군데군데 자리한 평지.
 동표가 앉아 있는 자리 뒤편으로는 낭떠러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걸어왔던 길만이 이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
 소름이 끼치다 못해 눈물마저 고였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너와 네 아버지는 특별한 사람들이란 걸. 여느 인간들과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음을 말이다.”
 동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문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식하고 게으르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이치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뭐, 간단하잖아? 가진 능력으로 못 오른다면 올라간 사람을 끌어내리는 정도는.”
 저 표정. 어제 그 사악했던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동표에게 속았음을 깨닫는 백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장구, 그 똥 같은 인간은 그저 동전 몇 닢에 히히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나는 달라. 방금 말했지? 너와 네 아버지의 그 특별함.”
 동표가 손을 뻗어 백문의 멱살을 쥐었다.
 강한 힘에 훅 끌려가는 백문.
 “그래서 혹시나 기회를 보았어. 너희의 특별한 무언가로 내게 기회가 오지 않을까. 역시나 너는 무척이나 나를 만족스럽게 해 주더구나.”
 동표의 누런 이가 번들거리며 침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 도망쳐 주었다, 내 출세를 위해서.”
 “끄윽.”
 분하고 원통하여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드디어 볼을 타고 흘렀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동표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도 자신을 찾는 관병들에게 어떤 신호를 주었을 테지.
 
 * * *
 
 관병들이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표에게 꽉 잡힌 백문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표정을 보임과 동시에 분노와 짜증이 골고루 섞인 험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관병들.
 “이 더러운 잡것!”
 쩍! 소리를 내며 백문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동표의 손에 잡혀 있는 탓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강하게 얻어맞은 충격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썅!”
 관병 두 명이 번갈아 가며 백문을 두들겼다.
 고작 열 살 먹은 아이를 폭행하는 저들의 손에는 그 흔한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쯤 해라. 여기서 죽으면 본을 보일 고을 수령께서 섭섭해하신다.”
 쉼 없이 별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백문은 저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찰장이라 불린 부리부리한 인상의 사내.
 자신의 도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꽤 피곤해했음이 틀림없었다.
 주위를 헤치고 찰장이 백문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동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덕분에 윗분들 모르게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네게만은 따로 보상을 내릴 터이니 기대하고 있어라.”
 “아이고, 벌레같이 미천한 놈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하겠습니까요. 그저 이 나라와 찰장님을 위한 충심일 뿐이었습니다요.”
 몸을 굽실거리며 비굴한 웃음을 보이는 동표.
 곁눈으로 바라본 그 얼굴에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불쌍해.”
 백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동표의 몸이 살짝 떨렸다.
 “불쌍하다, 불쌍해.”
 “너! 이!”
 발끈하려다 찰장의 눈치를 본 동표가 인상을 구겼다.
 “성품을 곧게 세우지 못하고 배움을 포기한 것도 모자라 은혜를 잊고 원수가 되기를 자청하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정말 불쌍하다.”
 이제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백문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나 거침은 없었다.
 동표가 내뱉은 ‘사람을 끌어내리는 정도’라는 말.
 관에 사교의 죄를 고발한 이가 바로 자신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두 번의 원수.
 첫 번째는 그 고발이요, 두 번째는 자신을 속여 다시 붙잡히도록 만든 것.
 뜻을 파악한 동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날뛰기 직전의 원숭이처럼 변했다.
 “여러 생목숨을 본인의 혀로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평생을 따라다닐 겁니다.”
 맞아서 터진 입술 끝에서 줄줄 흐르는 피.
 그것을 닦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하는 백문의 얼굴을 본 동표의 안색이 알 수 없는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그만 되었다, 꼬마야.”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찰장이 백문의 말을 잘랐다.
 “네게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나라의 행사이기에 사사로운 정을 따질 수 없구나. 그러니 지금까지 네가 사람 여럿을 고생시킨 것으로 정을 잊자꾸나.”
 말을 마친 찰장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두 사내가 앞으로 나와 백문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이다, 마귀 새끼야.”
 징그럽게 웃는 사내는 어제 자신을 끌고 앞서던 자.
 이마에 돋은 힘줄을 보니 그가 얼마나 백문에게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흐흐, 본래는 형을 집행하는 이가 따로 있지만 너는 내 특별히 직접 살을 발라 주마.”
 오싹할 만한 언사이거늘, 어찌 백문은 눈을 깔은 채 말이 없었다.
 ‘아버지······ 정녕 이대로 순교에 드실 겁니까?’
 문득 원망의 마음이 싹튼다.
 힘이 있음에도 신이 내린 교리에 사로잡혀 당신 스스로와 아들, 믿고 따르던 여러 신도들의 죽음을 수긍하려는 아버지임에야.
 혹여나 아버지가 탈출해 자신을 구하리라는 믿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퉁.
 아주 멀리서 북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퉁. 퉁.
 백문과 동표, 찰장과 두 사내, 그리고 주변에 가득 늘어선 스물의 관병.
 모두가 난데없이 울리는 북소리에 행동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퉁! 퉁!
 북소리가 강해졌다.
 누군가 북을 치며 다가오고 있다면 이 정도의 시간 간격으로는 이르기에 불가능한 거리였다.
 퉁!
 북소리는 거의 바로 앞에서 터진 듯 강하게 모두의 귀를 강타했다.
 휙!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낭떠러지 반대편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백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맨 끝에서 하품을 하며 서 있던 관병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음을.
 휙! 휘익!
 바람이 지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관병이 또 사라졌다.
 관병들이 사라지는 순간, 그 뒤에 잠시 나타났던 칙칙하고 음습한 검은 그림자.
 백문의 눈이 주체할 수 없이 커졌다.
 “으아아아아아!”
 세 사람의 비명이 고루 섞여 오묘한 화음을 만들어 내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까마득히 이어진 낭떠러지 끝에서 멈췄다.
 “뭐?”
 찰장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도 급작스러운 사태에 크게 당황했음이 틀림없다.
 그제야 웅성거리며 없어진 세 사람을 찾는 관병들.
 그들의 눈에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슬슬 올라왔다.
 칭! 치잉!
 찰장과 무복의 두 사내가 검을 뽑자 남은 관병들도 창극을 돌려 잡고 자세를 취했다.
 백문을 중심으로 둥글게 진을 형성한 모습이 평소 꽤 고된 훈련을 받아 왔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듯했다.
 “누구냐!”
 대낮부터 귀신의 소행은 확실히 아닐 터.
 찰장은 고함을 질러 무리들의 두려움을 잠재웠다.
 퉁!
 또다시 터진 북소리.
 그와 함께 강한 흙모래를 동반한 바람이 무리를 휩쓸었다.
 “큭! 퉤!”
 순간적인 사태에 모래를 들이켠 몇몇이 눈을 찌푸리는 사이, 찰장의 얼굴이 어딘가를 향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침착하게 찰장을 바라보고 있던 백문의 시선도.
 그 눈이 이른 곳에는 그가 있었다.
 
 
 
 부모님에게 그것은
 축복이었고 행복이었으며 하늘의 선물이었다.
 늦게 보아 더욱 소중했던 아들.
 부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사랑과 배려,
 그리고 결코 인(仁)에 모자람이 없는 아이로 자라난 나는
 언젠가 이 나라에서 큰일을 할 것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다섯 살 무렵이던가.
 고을 어른들이 나를 향해 칭찬을 할 때
 이상하게도 그늘지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3장. 순교(殉敎) (1)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명암이 갈리는 흑색의 사나이.
 큰 키에 마른 몸이라 일견 위태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림자 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매의 눈.
 대흉(大凶).
 고요히 일렁거리는 하얀 눈빛은 자신의 앞에 선 무리들의 앞날을 말해 주듯 잔인함을 머금고 있었다.
 “······의숙.”
 반가움에 서러움이 더해진 탓에 백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런 백문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내.
 악요였다.
 흉안(凶眼)의 악요.
 난생처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접했음에도 백문은 그저 형용하기 힘든 기쁨만을 느꼈다.
 악요의 굳게 쥔 두 주먹에 공기가 증발하듯 공간이 불규칙하게 일렁거렸다.
 그것을 본 찰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너는 누구이기에 나라의 행사에 훼방을 놓으려 하는가?”
 한층 딱딱해진 찰장의 음성이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신을 믿는 자.”
 차갑게, 아주 차갑게 갈라지는 악요의 말.
 “그럼 너도 마교의 종자란 말이군.”
 그 순간, 찰장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는 모습.
 잠시 후, 찰장의 몸에서 불이 일어나듯 뜨거운 열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근처에 있던 백문이 얼굴을 찌푸리자마자 동표도 작게 신음을 흘렸다.
 “쳐랏!”
 공격 명령이 내려지자 관병들은 거의 기계적으로 창극을 눕힌 채 악요를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
 다섯이 동시에 내뻗는 창이 차지하는 공간은 꽤 넓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
 쉬익, 하며 바람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악요는 다섯의 관병을 통과해 서 있었다.
 표적이 사라졌음에도 그대로 나아가는 다섯.
 찰장 옆의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그들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관병들을 뒤로한 채 악요는 바위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그의 흉맹한 눈을 마주한 관병 몇몇이 꿀꺽 침을 삼켰다.
 푸핫!
 지휘자의 말을 듣지 않고 나아가던 관병들의 맨 왼쪽에서 나타난 붉은 선이 순식간에 오른쪽 끝까지 그어졌다.
 왼쪽 병졸의 상체가 공중으로 솟았다.
 그다음 병졸의 쇄골 부분이 가로로 그어지며 혈압에 밀려 허공으로 치솟았다.
 다음 병졸은 머리가, 그다음은 인중이, 마지막은 관자놀이 부분에서 뚜껑이 열리듯 세찬 피 분수와 함께 시뻘건 덩어리들을 남기며 공중에서 춤을 췄다.
 
 아름답다.
 잘려 나가 허공에 떠오른 인간의 몸.
 그리고 그 단면으로 밀려 나오는 허파와 심장.
 그 속에서 거품을 일으키는 핏빛 기포.
 회전하며 떨어져 내리는 병졸의 모가지와 아직도 제가 살아 있는 줄 아는 양 끔벅거리는 두 눈.
 단면에서 튀는 핏물과 하얀 목뼈.
 그리고 최후의 숨을 뱉어 내는 구멍의 수축.
 뚜껑을 열어 놓은 술독에서 올라오는 연기처럼 피어나는 뜨거운 김.
 흘러나오는 뇌와 왕방울같이 커다란 눈알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하얀 신경 줄기들.
 그 모든 것이 시간을 잡아당겨 수십 배나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보통의 아이라면 바로 구토를 하고도 남으련만, 그 참혹한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듯 백문의 눈이 몽롱해졌다.
 
 “헉!”
 끔찍한 광경에 신음을 삼키던 관병 하나가 어느새 앞에 나타난 악요의 그림자에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쓰걱!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안면이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면이 벗겨지듯 평평하게 변해 버린 단면 밑, 입이라 여겨지는 부분에서 마지막 숨이 핏물과 함께 튀었다.
 그 순간, 악요와 백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백문은 분명히 보았다.
 악요의 무서운 눈에 담긴 뜻 모를 비애를.
 “끄억!”
 다시금 다른 병사 뒤에 나타난 악요가 그의 등을 뚫었다.
 등 아랫부분에서 뻗어진 주먹이 명치를 관통해 세상과 만났다.
 내장을 움켜쥐고 뒤쪽으로 주욱 잡아 빼는 악요.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버린 관병을 걷어차 날려 버리고, 채찍처럼 꿈틀거리는 창자를 다른 관병들에게 내던졌다.
 “히엑!”
 그 순간, 백문은 세고 있었다. 자신의 호흡을.
 악요의 모든 행위들이 딱 세 번 호흡하는 동안 일어났다.
 눈꺼풀이 굳어진 듯 감지 않고 하나하나 그대로 바라보는 백문의 눈에 일렁거리는 열기는 무엇일까.
 스물에 이르던 관병이 그렇게 죽어갔다.
 어떤 자는 창극과 함께 세 조각으로 동강 나 바닥에 퍼졌고, 어떤 자는 두려움에 떨다 머리가 사라졌다.
 개중 정신을 차리고 창을 내지르던 병졸은 뻥 뚫린 자신의 아랫배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내장을 밟고 넘어져 비명을 지르다 숨이 멎었다.
 차악!
 악요가 손을 털어 내자 붉은 액체가 바닥에 쫘악 깔렸다.
 마치 넘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그은 듯.
 그에 백문 옆의 두 사내가 합심하여 악요에게 날아갔다.
 무공을 익힌 그들의 움직임은 들쥐와도 같이 재빨랐다.
 은색으로 빛나는 선이 악요가 있던 자리를 긁었다.
 이어 두 개의 검이 허공을 베고 지나가는 순간,
 퍽!
 악요의 무릎이 한 사내의 척추를 찍었다.
 무자비한 고통에 벌어진 입에서는 침방울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백문은 악요가 주먹을 뒤로 길게 당기는 것을 보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퍼걱!
 동그랗게 뜬 사내의 눈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눈알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에 놀라 고함을 치고자 했으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뒤통수를 뚫고 입으로 튀어 나온 악요의 주먹.
 혀뿌리가 밀려나 목울대까지 내려와 있고, 부러진 치아가 피범벅된 주먹에 붙어 있다가 툭 떨어졌다.
 기회라고 생각했는가.
 나머지 사내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두서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사내의 머리통에 주먹을 꽂아 넣은 채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악요.
 상대의 검이 몸에 닿을 때 즈음에야 그 형체가 살짝 흐려졌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사내의 머리가 잘려 하늘로 떠올랐다.
 검을 휘두른 사내가 크게 당황해 뒷걸음질을 치려는 찰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요가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케엑!”
 순식간에 숨구멍을 잡힌 사내가 격한 신음을 흘렸다.
 우드득!
 이어 목뼈가 조금씩 어긋나는 으스스한 소리가 울렸다.
 입을 벌리고 켁켁거리는 사내는 벌겋게, 다시 퍼렇게, 그리고 하얗게 질려 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악귀처럼 찌그러진 사내의 표정 뒤로 악요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태양을 등져 어둡기만 한 얼굴.
 그 속에서 하얀빛이 조금씩 열렸다.
 끝이 솟아 있어 날카롭기만 한 악요의 눈.
 뚜둑!
 이윽고 사내의 신음이 멎었다.
 아직도 푸들거리는 몸.
 그리고 아랫도리를 누렇게 물들인 오물.
 죽음에 이르면서 대소변을 한꺼번에 쏟아 낸 것이다.
 털썩, 쓰러진 사내의 떨림이 멈추고 곧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는 예정된 죽음을 뜻하는 것.
 적막함 속에서 동표가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당신을 아오.”
 찰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누군지 확실해졌소이다.”
 아까 그 이상한 표정의 의미가 그것이었던가.
 “한데 당신이 어찌 이곳에 있소이까?”
 “나를 본 적이 있나?”
 짧은 시간 동안 스물이 넘는 인명을 바퀴벌레 밟듯 짓눌러 버린 사람치고는 음성이 너무나 편안했다.
 “몇 년 전, 그러니까 이 자리에 오르기 전에 거란과의 접경지로 파견되었던 적이 있소.”
 그 말에 악요가 그답지 않게 씨익 웃어 보였다.
 “딱 한 번 보았소이다, 당신을. 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더구려. 무정낭장(無情郞將) 악요. 아니오?”
 “난 너를 본 기억이 없는데.”
 동표의 흐느낌에 신경이 쓰인 백문이 그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콧물이 더해져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오줌마저 갈긴 채 부들거리는 동표였다.
 “다시 묻소이다. 당신이 어찌 이곳에 있소? 그리고 조정의 무관이 왜 마교의 종자들과 함께하오?”
 “강등되었어. 지금은 낭장이 아닌 그저 군위일 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 적도······ 아군도. 그리고 우린 마교의 종자가 아니다. 섬기는 대상의 차이랄까.”
 찰장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나왔다.
 죽음을 직감했는가.
 그의 표정이 점점 진중해졌다.
 “황상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저버리고 사교에 빠지다니. 대송의 무장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은혜? 은혜라······.”
 악요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저세상에 가서 느껴 봐, 황제의 은혜에 대해.”
 
 자신을 아는 무인에 대한 배려였던가.
 악요는 찰장의 생을 빠르고 간결하게 끝내 주었다.
 뜨거운 기운을 온몸에 두른 채 악요를 향해 날아들던 찰장.
 그는 여덟 방위를 차단하며 공간을 달구었다.
 그러나 그의 검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며 악요를 베어 가는 순간, 이미 그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찰장은 뒷목을 짧게 내려친 악요의 손길에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하해와 같은 황제의 은혜를 느끼고자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터벅터벅.
 힘이 빠져 주저앉아 있는 백문에게 악요가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백문이 악요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려다 주세요.”
 여러 생목숨이 처참하게 끊어지는 광경을 보았음에도 작은 떨림조차 없는 백문의 음성.
 악요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무섭지 않느냐?”
 “전혀요. 원래 강한 분이시잖아요.”
 힘이 세다는 의미보다는 잔인하고 냉혹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백문의 말이었다.
 “그것만큼은 들어주고 싶지 않구나.”
 “아버지를 뵈어야 합니다.”
 악요의 눈이 흔들린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고 싶으냐?”
 고통? 어째서요?
 “뵈어야 합니다.”
 “이미 말했을 텐데.”
 악요의 표정이 엄해졌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백문의 눈에서는 고집이 철철 넘쳤다.
 “마지막을······ 지켜 드려야 해요. 제게는 그것이 신의 뜻입니다.”
 이제 겨울 열 살이다, 백문은.
 이 어린아이가 어찌 이런 의지를 보일 수 있을까.
 “늦었다.”
 악요의 음성이 풀어졌다.
 숨길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백문은 악요의 말이 거짓임을 바로 눈치챘다.
 “악 의숙, 의숙께서 저를 생각하신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 의숙께서도 하나 정도는 있으시잖아요.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백문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흘렀다.
 참았던 서러움이 이제야 터진 것일까.
 백문의 눈물을 본 악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할 거야.”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이대로 아버지를······ 제게는 이 순간 보이지도 않는 신보다 훨씬 더 소중한 분의 마지막을 챙겨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훌쩍이며 말하는 백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악요가 결국 승낙하고야 말았다.
 “가자.”
 작은 백문을 들어 가슴에 안은 악요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정신을 놓아 버린 동표가 입에서 침을 흘리며 멍한 눈으로 헤헤거리고 있었다.
 “이 쓰레기는 어찌할 테냐?”
 미쳐서 정신이 돌아 버린 동표를 슬쩍 본 백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두고 가자는 뜻인 것이다.
 퉁!
 공기가 순간적으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악요와 백문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빠르다.
 아니, 빠르다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예의 그 북치는 소리가 터질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조금 어지럽기에 생각이 흐트러지고는 있으나 백문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악요와 자신은 인간의 걸음으로 행하기 불가능한 축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한 호흡에 얼마나 긴 거리를 이동하는 것일까.
 새삼 악요의 가공할 능력을 깨닫는 백문이었다.
 어느덧 백문의 눈에 잠깐씩 보이는 풍경들이 익숙해졌다.
 지금껏 살아온 고을 주변으로 거의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이제부터는 사람들과 섞여야 한다.”
 마지막 축지를 마친 악요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
 백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후회.
 악요는 자신이 후회할 것이라 말했다.
 앞으로 보게 될 것들, 그것은 분명 참기 힘든 고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을 입구에 이르렀건만 늘 부산하게 움직여야 할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막함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떤 백문이 악요를 바라보았다.
 “의숙?”
 대답 없이 침울한 표정만을 보이는 악요를 향해 백문이 다시 물었다.
 “다들 어디로 간 겁니까? 의숙은 아시죠?”
 악요가 말없이 품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 백문의 얼굴과 상체를 가려 다른 이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라. 그리고 신을 용서해 다오.”
 신을 용서하라뇨. 마치 꿈결처럼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악요가 백문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시장 쪽으로 이끌었다.
 백문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림을 느꼈다.
 정말로 자신이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단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고통받으며 후회의 감정 속에 살 수도 있음을 알지만 어째서 자신은 이런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저 멀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글거리는 검은 머리통들을 세어 보니 대충 고을 전체가 모인 듯했다.
 심장을 때리는 울림이 점점 강해졌다.
 백문은, 자신은 무엇을 보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다시 말한다. 네가 네 부친의 가는 길을 배웅하고자 하는 것은 효(孝). 그 이후에 네게 자리할 고통은 마(魔). 효를 택하면 마를 얻을 것이고, 불효를 택하면 정(淨)을 얻을 것이다.”
 “꿀꺽.”
 백문은 자신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처럼 큰 것이었음을 처음 알았다.
 악요의 말에 답하지 않고 앞만을 바라보는 백문.
 잠시 멈춰 섰다가 백문의 말없는 선택을 확인한 악요가 다시 시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둥! 둥!
 진짜 북 치는 소리가 울렸다.
 웅성거리던 인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두껍게 늘어선 사람들.
 그 끝에서 백문의 손을 잡고 서 있던 악요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피어올랐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냉기를 흘리며 걸어가는 악요와 백문을 피해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콩닥거리던 백문의 심장이 세차게 떨어지는 빗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고동쳤다.
 마침내 맨 앞에 선 이들을 헤집고 나간 자리.
 백문은 충격적인 광경에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꺽!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을 사람들이 넓게 둘러선 시장 한복판에는 수십의 관병들과 허리에 칼을 찬 사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익히 아는 얼굴들이 무릎을 꿇은 채 묶여 있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신을 영접한 이들.
 백문이 처했던 것과 같이 다른 고을들로 보내진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저곳에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피 묻은 옷이 저들에게 가해진 고문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넓게 비워 둔 공간에는 펄펄 끓고 있는 큰 솥이 보였다.
 왜 저런 것이······.
 그 앞으로 뭔가를 덮어 놓은 거적과 옆으로는 말이 끄는 수레 두 개.
 둥!
 그 순간, 웃통을 다 벗어젖힌 형리(刑吏)가 강하게 북을 내려쳤다.
 “다들 빠짐없이 모였다 치고, 지금부터 나라의 본을 세울 것이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자리를 지키시오!”
 길쭉한 관모를 쓴 관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태초에 하늘께서 천하를 굽어보시고 인세의 무도함을 가엽게 여기시어 초인들을 내려 주심으로 만물의 도로 삼으셨고, 우리는 그들을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라 칭했느니라! 삼황오제께서 백성을 풍족케 하시니 그것 또한 하늘의 덕이 아니겠느냐!”
 그럴듯하게 도(道)를 지껄이며 장포를 털어대는 관리의 모습에는 당당함만이 넘쳐 났다.
 “하늘이 주신 도는 대대로 천자(天子)에게 이어져 만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대송(大宋)을 천하의 근본으로 정하신바, 하늘이 내리셨고 땅이 인정하셨도다! 하나 이 어이할꼬. 마땅히 자리에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도를 따라야 할 대송의 백성들이 사도(邪道)에 빠져 하늘의 뜻을 그르치다니! 낳으신 부모와 길러 주신 황상의 은혜가 무색할 지경에 이르렀구나!”
 고을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관리의 말에 수긍했다.
 백문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부정하려 하자 악요가 어깨를 꽉 잡아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관리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아프고 또 아프도다! 사랑하는 자식들이어야 할 백성들이 마의 유혹에 빠져 근본을 잊고 어버이를 슬프게 하였도다!”
 관리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졌다.
 자신의 연설에 취한 듯 무릎을 꿇은 신교도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악기가 가득했다.
 “들으라, 백성들이여! 이 나라, 이 땅은 모두 황상께 속한 피와 살! 썩은 피는 뽑아내고 썩은 살은 도려내야 함이 옳지 않은가?”
 “맞습니다!”
 누군가 관리의 말에 호응해 소리를 질렀다.
 백문의 눈에 들어온 그자는 처음 보는 이였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아프고 슬퍼하시는 분은 바로 황상이시니라! 썩은 살도 그분의 살이요, 썩은 피도 그분의 피니라. 그 고통을 우리 같은 미천한 이들이 어찌 짐작이라도 하겠느냐!”
 주민들의 동요가 심해지며 그들 각각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 틈을 타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인물들의 선동이 시작되었다.
 그에 휘말린 주민들 몇몇은 눈물마저 흘리며 황제의 슬픔에 동조해 버렸다.
 “저들은 하늘을 거역하고 대송을 문란케 한 죄를 받을 것이니라! 그렇게 죄를 사함받고 구천 년 만세를 이어 갈 거름이 될 것인즉, 온 천하의 본보기로서 이 자리를 빛낼 것이니라!”
 “와아아!”
 “죽여! 죽이라고!”
 주민들의 고함이 고을 전체를 진동시켰다.
 짧은 순간, 기묘한 화술에 넘어가 버린 이들의 눈빛은 악귀의 그것에 다름없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