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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권 (1화)

2017.06.19 조회 487 추천 2


 이웃집 영웅 폴 1권 (1화)
 작가서문
 
 
 벌써 두 번째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전작이 너무 어두운 분위기였기에 한번 밝은 분위기,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글로 써 볼까 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웃집 영웅 폴이었습니다.
 폴은 세상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그런 영웅은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한 몸 편히 살아 볼까 하는, 제목 그대로 이웃집 형, 동생처럼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사람도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누구든 발 벗고 나설 수 있습니다. 제 한 목숨 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친 일상 속에서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 이 글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웅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영원한 영웅입니다.
 비록 미흡한 글이지만 이 글을 보며 잠시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태경 배상.
 
 
 
 프롤로그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영웅이 되셨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다. 별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난 어느새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도시마다 내 동상이 세워지고 음유시인은 내 이름을 노래했다.
 하늘이 내린 소명?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한낱 사냥꾼이던 내가 만인의 영웅으로 불리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누군가의 교훈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도 신기해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 하는 것이다. 혹 뭔가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몫일 뿐.
 그럼 지금부터 내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다.
 
 ―만인으로부터 영웅이란 과분한 칭호를 받는
 한낱 평범한 사람, 폴
 
 
 
 1장. 사냥꾼과 학살자
 
 
 작은 풀벌레조차 숨죽인 침묵. 긴장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풀숲에 숨은 채 연신 사위를 살피는 나. 자칫 긴장의 끈이라도 놓치면 큰일이다. 이곳은 이 일대에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 녀석의 영역.
 녀석을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잔혹한 학살자.
 이름을 들어 보면 뭔가 대단한 몬스터라도 하나 있을까 착각하기 쉽지만 녀석은 한낱 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곰 한 마리 때문에 마을은 지금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녀석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곳 바르데인 산맥의 주인은 바로 오크 무리였다.
 단순, 무식, 과격의 대표 주자인 오크. 인간을 잡아먹고 때로는 여인을 납치해 종족 번식에 사용하는, 인간으로서는 씨를 말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치를 떠는 몬스터였지만 이곳의 오크는 그런 일반적인 오크와는 달랐다. 그리고 그중 오크 족장은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웬만한 사람 뺨치게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돌연변이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마을은 평화로웠다. 족장은 무리하게 마을을 공격하려 하지 않고 일정한 식량을 상납 받는 대신 다른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20년 전 갑작스럽게 오크들이 없어지더니 10년 전부터는 그 자리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곰 한 마리가 떡하니 차지해 버린 것이다.
 이전의 오크와는 달리 그야말로 단순, 무식, 과격한 그놈은 닥치는 대로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많은 사냥꾼이 녀석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마찬가지로 사냥꾼이었던 우리 아버지까지 녀석을 잡으려다 돌아가셨다.
 이제는 내가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녀석을 잡으려 한다.
 빠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비록 남들이 말하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기에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핏덩이를 안고 젖동냥까지 다니며 나를 키우셨던 아버지. 언제나 넉넉지 못한 살림에 굶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녀석에게 당하셨을 때, 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난 무모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가죽을 벗기고 그 살을 씹어 먹고 싶었지만 이대로 녀석을 만나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사냥꾼이 되기를 누구보다 싫어했던 나는 자진해서 사냥꾼이 되었다. 아버지의 당부를 잊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냥꾼은 되지 말라고.
 아버지는 늘 후회하셨다. 자신이 사냥꾼이 된 것을 말이다. 언제나 밖에 나가서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냥꾼이란 직업이었다. 비록 그러한 직업 때문에 숲에서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지만, 결국 그러한 직업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여 동안 집을 비워야 할 때가 많았기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땐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고, 나 역시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고 했다. 결혼했을 당시부터 깊은 상처로 인하여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어머니였기에 아버지는 그녀의 약값을 벌기 위해 더더욱 열심히 일을 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술이 들어갈 때면 늘 그때를 회상하셨던 아버지.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다짐했었다. 나는 결코 사냥꾼이 되지 않겠다고.
 훗. 하지만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고, 내 스스로 사냥꾼의 길을 가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이 잘생긴 얼굴을 갖고도 여태 여자 친구 하나 못 만든 것이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던 어머니를 닮아 나 역시 얼굴 하나는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역시 이대로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야 할 팔자인가 보다. 뭐니 뭐니 해도 여자들에게 남자란 얼굴뿐만이 아니라 안정된 직장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정시 출퇴근에 퇴직금, 연금까지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는 신랑감. 하지만 난 그것들 중 속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쓸데없는 미련을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이미 마을이 인정한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냥꾼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활쏘기부터 함정까지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빠른 속도로 익혔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필사적으로 익혔다.
 그리고 1년 전, 나는 녀석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은 등에 남은 네 줄의 긴 흉터뿐. 만일 녀석이 배가 부르지 않았던들 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당시의 난 녀석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녀석은 이미 일반적인 곰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처를 입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마을로 돌아온 지 한 달 후, 계속되는 인명 피해에 어쩔 수 없었는지 이곳의 영주인 밀자크 남작은 기사들을 보내왔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청원에 드디어 답을 보내 준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그것은 영지민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속되는 인구 감소에 세금이 줄어든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돼지 같은 새끼라면 영지민들의 목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을 테지.
 아무튼 그렇게 파견 나온 기사들. 거들먹거리는 꼴이 정말이지 아니꼬웠지만 그래도 기사였기에 우리들은 그들이 녀석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녀석을 잡기는커녕 살아 돌아온 기사는 한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마을은 충격에 휩싸였다. 기사들까지도 당해 낼 수 없다면 이제는 영영 녀석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난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래도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기에 어지간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일반인과 다른 점 역시도 잘 알았다. 기사들의 검은 마나인지 뭔지에 의해 두꺼운 나무도 한칼에 잘라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 그럼에도 기사들은 녀석에게 맥없이 목숨을 잃었다.
 녀석의 가죽이 그런 기사들의 검에도 뚫리지 않을 정도란 말인가.
 그때부터 난 철저한 준비를 했다. 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녀석을 벨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녀석을 죽여야만 했다.
 몇 달을 꼬박 지새우며 나는 숲에다 온갖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녀석을 잡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일부러 녀석의 영역에 내 흔적을 남겼다. 자신의 영역에 그 누구라도 침입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녀석이라면 금방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온 숲이 떠나가라 울리는 녀석의 괴성이 들려왔다.
 쿠오오오오오!
 놀란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이제부터가 진짜다. 여기서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생긴다면 내 목숨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
 쿵! 쿵! 쿵!
 내가 남긴 흔적을 따라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녀석의 움직임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진다. 이 거대한 울림. 과연 잔혹한 학살자라 부를 만큼 엄청나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숨이 가빠 오고 절로 다리가 떨려 왔다. 그만큼 녀석이 주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녀석이 날 보고 날 추격해야만 했다. 영리한 녀석인 만큼 어지간한 함정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미끼가 되지 않고선 함정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찰나가 찰나가 아닌 듯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우지끈!
 크워어어어어!
 눈앞에 있는 내 몸통만 한 나무를 그대로 박살 내며 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5미터가 넘는 몸길이. 내 머리통보다 더 커다란 앞발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발톱이 햇빛을 받으며 날카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보통 곰과는 달리 은빛의 털을 가진 녀석. 바로 저것이 기사들의 검도 막아 내는 그 가죽일 것이다.
 이어진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도착했지만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는 녀석. 녀석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였다. 녀석은 힘만 센 무식한 놈이 아니라 이토록 영리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너는 곰 새끼다!’
 나는 녀석을 보자 괜스레 등에 난 상처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이 상처의 대가는 네놈의 가죽이다!’
 나는 녀석의 모습에 지체하지 않고 활시위에 화살을 메긴 뒤 그대로 녀석의 눈을 향해 발사했다. 아무리 가죽이 두껍고 질기다 해도 눈은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 영리한 놈 역시도 알고 있었나 보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가려진 녀석의 앞발에 맞고 튕겨 나오는 화살. 나는 녀석에게 한 방 먹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내 망설일 것 없이 그대로 뒤돌아 달려 나갔다.
 크워어어!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녀석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
 아무리 내가 날쌔다고는 하지만 사람과 곰의 달리기는 비교할 것이 못 됐다. 보통 곰이 느리다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곰이 전력 질주를 하면 사람을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슬아슬하게 녀석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곳은 드넓은 평지가 아닌 숲 속. 나무가 촘촘히 서 있었기에 녀석은 그런 나무를 일일이 부러뜨리면서 달려와야만 했다.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닐 게다. 하지만 그 박력만큼은 엄청나, 나는 예상했음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달리는 루트는 이미 내가 전부터 함정을 설치해 놓은 곳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쫓기는 도중에도 침착하게 함정을 작동시켰고, 녀석은 화살 세례부터 시작해 올가미, 또는 통나무 등에 수도 없이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결코 녀석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녀석의 화만 더 돋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훗, 멍청한 곰 새끼. 그렇게 화내면 화낼수록 네놈의 죽음도 가까워지는 거다.’
 나는 미친 듯 발광하며 날 잡기 위해 돌진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결국은 곰이다. 한번 꼭지가 돌면 영리함이고 뭐고 필시 어떻게든 날 잡으려 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
 나는 준비해 둔 클라이맥스가 있는 곳으로 녀석을 유인했다.
 그곳은 숲 속에 위치한 작은 공터였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멈춰 선 채로 녀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크르르르르!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녀석 역시 낮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그간 쌓인 분노는 녀석을 더는 신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잠시 날 살피는 듯하더니 그대로 날 향해 달려들었다.
 “······!”
 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며 달려드는 녀석에 맞설 준비를 하는 척했다. 짐짓 의연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사실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날 후려칠 것만 같은 저 무시무시한 앞발을 보니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섣불리 움직여서는 녀석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열심히 거리를 계산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날 덮치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껏 그 자리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쿠르르르르!
 쿠워어어어!
 그와 함께 갑자기 멀쩡했던 땅이 꺼지며 그 속으로 녀석이 사라졌다. 나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 새도 없이 재빨리 녀석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무려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 홀로 삽질을 한 끝에 완성한 함정이었다. 깊이만 7미터가 넘는, 그야말로 내 피와 땀이 스며든 곳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녀석일지라도 이 깊이라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헤헤! 어떠냐, 이 곰 새끼야! 설마 이런 함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어디 빠져나올 수 있으면 해 보시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잠시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살피던 녀석이 그런 내 목소리를 듣더니 갑자기 미친 듯 발광하기 시작했다.
 쾅! 쾅!
 마구 벽을 때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녀석의 앞발에 의해 흙덩어리가 계속해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녀석이 빠져나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준비해 놓은 것을 사용했다.
 공터 옆에 쌓아 둔 오크통으로 간 나는 그중 한 개를 꺼내 마개를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녀석을 향해 붓기 시작했다.
 알싸하면서도 뭔가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액체. 그것은 그동안 모아 온 전 재산을 털어 산 공성용 기름이었다. 군수 물품이라 구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 못 구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한 통을 녀석을 향해 부은 나는 준비해 둔 횃불을 들고 비장하게 소리쳤다.
 “곰 새끼, 그간 네놈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복수다. 그만 뒈져라!”
 그러고는 난 들고 있던 횃불을 망설임 없이 녀석을 향해 던졌다.
 화르르르륵!
 과연 비싼 돈 주고 산 기름답게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 녀석은 그 뜨거움에 곧 자지러지듯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크워어어어어!
 하지만 과연 기사들의 검을 막았던 무적의 가죽이었다. 불은 기름만을 연료로 타오를 뿐, 결코 녀석에게로 옮겨 붙지는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최악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는 이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녀석을 죽이려는 방법은 결코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속에서부터 익히려 했다.
 “네깟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 봐야 결국에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일 뿐이지. 훗.”
 가죽이 아무리 두껍고 질겨 봐야 뼈 속까지 치미는 열기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녀석이 직접 몸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기름은 많다. 통돼지, 아니 통곰새끼 바비큐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익혀 주마.
 
 무려 반나절 동안이었다. 나는 준비해 둔 기름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불이 더 잘 타오르도록 하기 위해 모아 놓은 돼지비계까지 집어넣었다.
 불은 그야말로 활활 타올랐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기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아무리 녀석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 속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비단 치미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내가 저 속에 있었다면 불에 익기도 전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몇 시간 전부터 미친 듯 요동치던 녀석에게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숲 속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요동치는 바람소리뿐.
 “다 익었나?”
 서서히 불꽃이 사그라질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마음으로는 녀석이 죽었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 대단했던 녀석이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열기에 바짝 타 버린 마른땅 위에 조심스럽게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은빛의 거대한 동체가 잔뜩 웅크린 채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조차 없이 녀석은 그대로 죽어 버린 듯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크르르르르르.
 나는 들려오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뭐야!’
 그것은 잔뜩 억눌린 신음 소리와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간 자신을 궁지에 몰아 놓은 누군가를 향한 매서운 분노인지도 몰랐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녀석을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 살아 있다니!”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할 말을 잃어야 했다. 그 질식할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저게 과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은 맞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거대한 동체를 일으키자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흙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너지는 흙더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듯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는 그 가공할 만한 녀석의 앞발을 바라보아야 했다. 녀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천천히 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드드득!
 마치 개의 그것과 같이 온몸을 떨며 묻어 있는 그을음을 털어 버리는 녀석.
 “하?”
 나는 그 모습에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려야 했다. 그을음을 털어 버린 녀석의 모습이 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실패······라는 것일까?
 암담함이 밀려왔다.
 ‘짧았던 20년의 삶. 여기서 마감하는구나, 폴.’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털썩.
 삶을 포기하던 내 귀로 광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금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대단해, 그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니. 하지만 네 녀석이라도 아주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군.”
 이것은 기회였다. 비록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녀석이 많은 데미지를 입은 이때가 어쩌면 녀석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숏소드를 꺼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그 이후는 없어.’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리 녀석이 상처 입고 빌빌거린다고는 하지만 그 앞발에 스치기만 해도 나는 최소 중상이었다. 저번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녀석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녀석의 약점은 눈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눈을 노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녀석 역시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이상 그곳은 필사적으로 방비할 터였다.
 ‘뭔가 다른 곳이 없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도 너무나 아까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눈에 녀석의 어느 한 부분이 마치 클로즈업되듯 들어왔다.
 ‘아차! 과연 그렇군. 그곳이었어!’
 나는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곳이라면 녀석도 별수 없으리라.
 “흐아아아압!”
 나는 그 순간 숏소드를 들고 녀석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단 한 번! 결코 실수란 있을 수 없다!
 크아아아아아아!
 녀석 역시 그간 쌓인 분노를 털어 내듯 엄청난 굉음을 지르며 날 향해 그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과연 영리한 녀석이었기에 남은 한 발로 자신의 얼굴을 방어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네놈은 내가 눈을 노릴 거라 생각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림없다!’
 나는 녀석의 앞발이 짓쳐 드는 순간, 등허리로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치지지지직!
 “크윽!”
 바닥의 자갈들이 등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짜릿한 고통에 나는 절로 신음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는 비로소 목적한 곳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녀석의 다리와 다리 사이!
 나는 지체 없이 녀석의 사타구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아뿔싸!’
 그러나 무엇을 본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없다! 없어!’
 수컷이라면 종을 가리지 않고 응당 있어야 할 그 무언가······ 자식을 낳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두 개의 알주머니가 녀석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녀석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수를!’
 당연히 나는 녀석이 여태껏 수컷이라 생각해 왔다. 그 누구도 녀석이 암컷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포악한 녀석을 누가 암컷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새끼라도 있었다면 눈치 챘을 것을······.
 크르르르.
 마치 ‘너 뭐 하냐?’라는 식으로 날 내려다보는 녀석. 곰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녀석의 얼굴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서운 걸까?
 “하하, 하하하.”
 나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날 향해 곧 녀석의 그 무지막지한 뒷발이 덮쳐 왔다.
 ‘이대로 수박 깨지듯 터져 죽는구나.’
 거의 체념하는 나. 한데 그때였다. 나의 눈은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뭔가를 찾은 듯 빛이 번뜩였다.
 ‘어쩌면?’
 내 시선이 향한 곳. 그곳은 바로 녀석의 앙증맞은 꼬리에 가려진 그 어떤 은밀한 곳이었다. 마치 수줍은 새색시처럼 핑크빛 꽃잎을 살짝 오므리고 있는 그곳. 어떤 생물이든,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먹는 입이 있다면 반드시 필요한 그곳.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그곳을 향해 내 숏소드를 찔러 넣었다.
 푸욱!
 귀가 청아해질 정도로 무척이나 명쾌한 소리와 함께 마치 그곳이 자신의 본래 자리였다는 듯 거침없이 쏙 들어가는 숏소드.
 “······.”
 “······.”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나도, 또한 녀석도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거 너무 쉽게 들어가는 거 아니야?’
 마지막 구명의 동아줄이라 생각했건만 너무나도 쉽게 빨려 들어가 버린 숏소드를 보며 난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잡고 있던 손잡이를 나사못 돌리듯 비틀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녀석이 직접 몸소 표현해 주었다.
 크오오오오오!
 크기가 5미터가 넘는 곰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는가. 나는 곰이 저토록 높이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중력의 법칙에 의해 다시금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녀석을 보며 황급히 자리를 피해야 했다.
 쿠과과과과!
 쿠워! 쿠워어어어!
 녀석은 땅으로 떨어지자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녀석. 앞발톱이 다 닳도록 미친 듯 바닥을 긁어 댔다.
 그 모습에 괜스레 마음 약해지는 나였다.
 “너, 너무 심했나? 하하하.”
 머쓱하게 웃어 보지만 그것으로 녀석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그렇게 한동안 발광을 해 댔다. 숏소드가 녀석의 항문에 박혀도 제대로 박혔는지 그 요란 법석을 떨어도 결코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의 확인 사살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크워어어어.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다는 게 한이 된 것일까? 녀석은 구슬픈 울음을 끝으로 한 줄기 눈물방울과 함께 그 거대한 동체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쿵!
 항문에 숏소드를 꽂은 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던 잔혹한 학살자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를 없앴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버지!’
 그러나 비록 웃고 있으나 내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였기에. 복수를 했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 기쁨. 하지만 후회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나는 한동안 녀석의 시체를 곁에 두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도 참 청승이군. 뭐 하는 짓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한 나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찍 결혼했으면 애 아빠가 될 나인데 이런 곳에 주저앉아 울기나 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무안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을 어떻게 한담?”
 나는 거대한 녀석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걸 옮길 수도 없고. 천생 나 혼자 가죽을 벗겨야 하나?’
 하지만 녀석의 가죽은 기사들의 검에도, 그 뜨거운 열기에도 멀쩡할 정도로 질긴 가죽. 제대로 벗겨질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그 가죽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긴 했지만.
 한데 이게 웬걸? 막상 녀석의 가죽을 벗기려 드니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질기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보다’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번에 녀석을 잡기 전 연습 삼아 오우거 한 마리를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잡은 적이 있었는데 녀석의 가죽은 당연 오우거보다는 훨씬 질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열기 속에서 버틸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죽어서 그런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의구심을 묻어 둔 채 그렇게 몇 시간을 낑낑댄 후에야 가까스로 녀석의 가죽을 다 벗겨 낼 수 있었다. 그러곤 발톱과 이빨을 마저 챙겼다.
 그렇게 하니 해는 지고 달은 벌써 중천에 떠올랐다. 그때서야 밀려든 피로감에 슬슬 눈이 감겨 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흐흐흐흐. 자, 그럼 어디.”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징그러울 것만 같은 웃음을 매단 채 녀석의 훤히 드러난 배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곰을 잡았으면 응당 웅담을 드셔야 하지 않겠는가.
 ‘정력에 좋다는데 마다해선 안 되겠지.’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팔자에 정력에 좋은 것을 먹어 봐야 뭐 하겠냐 싶지만은 혹시 아는가. 나중에 늙어서 과부라도 하나 데리고 살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우울하기는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찌하리.
 ‘아, 괜히 짜증나네. 제길.’
 결혼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이 뭐 같은 현실에 나는 한껏 저주를 퍼부으며 마침내 녀석의 배를 열었다.
 그런데······.
 “뭐, 뭐냐, 이건?”
 드러난 녀석의 배 속을 본 나는 당황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뭔가 생김새부터 능력까지 여타 다른 곰과는 다른 녀석이란 걸까? 녀석의 몸 한가운데, 심장 옆에는 웬 구슬 하나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크기는 내 손바닥 반만 했는데 어찌 이런 게 녀석의 몸속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먹었다면 다시금 밑으로 나오는 게 정상일 텐데 심장 옆이라니. 이건 누가 일부러 집어넣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위치였다.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구슬을 꺼내 보았다. 녀석의 체액과 피로 인해 지저분한 것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자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는 구슬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우와, 이거 돈 좀 되겠는데?’
 구슬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딱 봐도 예사 물건은 아닌 듯했다. 단순히 들고만 있었는데도 오늘 하루 녀석과의 일전으로 인해 피곤했던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뭔가 마법적인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녀석이 잔혹한 학살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이 구슬이 뭔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얻은 구슬을 행여 누가 볼세라 나는 조끼의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귀한 것이라면 팔기도 어렵겠지만 어찌 되었든 팔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다음 나는 비로소 내가 목표로 했던 녀석의 웅담을 발견했다.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
 나는 혹시나 해서 준비해 둔 드래곤 브레스라는 술을 가져왔다. 독하기로 유명한 술이라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웅담이 좀 쓴가. 이거라도 같이 마셔야 그나마 괜찮을 것 같았다.
 우물우물.
 나는 피 묻은 웅담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몇 번 씹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역시나 내장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 쓴물이 올라왔다. 나는 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황급히 술병을 따고 술과 함께 입에 남은 웅담을 배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푸하!”
 정말로 입에서 드래곤 브레스라도 나가는 듯 뜨거운 열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났다.
 “흐미, 독한 거. 에퉤퉤퉤!”
 간신히 속을 진정시킨 뒤에야 나는 집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녀석의 가죽을 말아 배낭에 집어넣고 녀석의 시체를 일별한 뒤 그렇게 길을 떠났다. 이제 녀석이 없어졌으니 마을 사람들도 편히 지낼 수 있겠지.
 하지만 또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에 의해 시작한 사냥꾼의 길. 하지만 복수가 성공한 지금, 갑자기 앞으로의 삶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짓을 해야 되나?’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비틀비틀.
 “왜, 왜 이러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더니 세상이 뒤집어지듯 어지러웠다.
 ‘설마 그 술에 취한 건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말도 안 된다. 내가 술이 얼마나 센데, 아무리 드래곤 브레스가 독해도 그렇지 그 한 모금에 취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아니,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며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드러누워 자고 싶었지만 숲의 위험성을 아는 나였기에 필사의 정신력으로 버텼다.
 ‘다, 다 왔다, 나의 스위트 홈!’
 스위트 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통나무집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천신만고라고 해야 했다. 숲에서 몇 번을 구르고 자빠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
 나는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배낭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 그 순간 나는 뭔가 푸른빛이 내 가슴 언저리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았지만 너무나도 지쳐 있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잠의 나라로 빠져 버렸다.
 
 꿈을 꾸었다. 그것이 꿈인지도 모를 만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나는 또다시 녀석과 마주 선 채였다.
 온몸에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녀석. 그리고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나.
 ‘뭘까, 이것은?’
 이것이 정녕 꿈일까? 녀석의 가죽을 벗기고 웅담까지 먹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모든 것이 환상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마치 이것이 진실인 양.
 “흐아아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녀석에게로 몸을 던지는 나. 앞발이 휘둘러지고, 나는 녀석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졌다. 수컷의 그것이 없었기에 잠시 당황하는 나에게 녀석의 뒷발이 덮쳐 오고, 나는 들고 있던 숏소드를 녀석의 항문을 향해 찔러 넣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은 진행. 하지만 그 이후가 조금 달랐다.
 막 숏소드가 녀석의 항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뿌직.
 어딘지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상큼한 음향과 함께 녀석의 항문을 비집고 짙은 갈색의 뭔가가 내게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나는 채 숏소드를 찔러 보지도 못하고 그 냄새의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쿠르륵. 크르르르.
 마치 ‘네놈은 별수 없다’는 듯 날 향해 비웃음을 날리는 녀석. 그리고 망설임 없이 녀석의 앞발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크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눈을 뜬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탄탄한 가슴에는 그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뭐야? 꾸,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마지막의 그 고통만큼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녀석의 거대한 앞발이 내 가슴을 후벼 팔 때의 끔찍한 느낌. 그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확인 차 이번에는 앞섶을 벌리고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워낙 험하게 살아왔기에 여기저기 잔 상처가 많았지만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
 “휴우,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만큼 꿈속의 고통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별 재수도 없지. 쳇.”
 작게 혀를 찬 나는 그냥 개꿈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보다 사실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냄새에 기억하고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는 꿈 내용은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아우, 땀 냄새. 죽인다.”
 스스로의 냄새였음에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조끼를 벗고 윗옷을 차례대로 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는 벗어 둔 조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웅담을 먹으려고 녀석의 배를 가른 다음 그 뒤에 분명······.
 “······!”
 나는 황급히 조끼를 주워 들곤 그 안주머니를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 없다!”
 없었다. 녀석의 몸속에서 나온 구슬이 어디로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씻어야겠다는 생각도 잊은 채 온 집구석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사실 찾는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집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모양이다.
 “젠장! 역시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돼요!”
 어쩜 이리도 허무한 인생일까. 나는 안타까웠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떨어뜨렸는지도 모를 물건을 찾으러 온 숲을 뒤지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먹고살아야지.
 괜히 기분이 나빠진 나는 구슬을 잊어야겠단 생각에 찬물로 샤워를 하며 미련을 떨쳐 냈다. 그러곤 대충 식사를 때우고는 어제 벗겨 놓은 녀석의 가죽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다.
 “여, 폴이군!”
 마을을 둘러싼 목책 앞. 자경대원 중의 한 명이 날 알아보며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해 왔다.
 “뭐? 폴이라고?”
 “이 자식! 도대체 그동안 뭘 했기에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자경대원들 역시 얼굴을 보이며 알은체를 해 주었다.
 이들은 다들 나와 비슷한 또래로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녀석들이다. 뭐, 속된 말로 불알친구라고 할 수 있지. 거기다 녀석들의 어머니와도 남다른 사연이 있는데, 내 젖동냥을 해 주셨던 분들이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아버지가 학살자에게 돌아가신 뒤 사냥꾼이 되기로 결심한 나를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응원을 보내 주었던 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괜한 목숨 버리려 하는 나를 걱정해 주고 아껴 주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했으니 스스로도 조금 뿌듯했다.
 “말해 봐라. 도대체 뭘 하다 온 거냐?”
 개중 빨간 더벅머리의 미케가 날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행여 내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그것을 살피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다. 난 괜찮다는 듯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설명은 좀 이따 해 줄 테니 일단 마을 사람들부터 불러 모아라.”
 “그건 왜?”
 “어허, 설명은 이따가 해 준다고 했지? 암튼 매우매우 중요하고도 기쁜 소식이니까 빨리 전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운을 띄우자 눈치 빠른 미케가 혹시 하며 되물었다.
 “서, 설마 너?”
 하지만 난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날 잘 알고 있던 미케였기에 이것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히 전해진 듯 그는 영문을 몰라 하던 곁의 친구들에게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냐! 폴의 말 안 들려? 마을 사람들을 불러오라잖냐! 어서 서둘러!”
 “아, 알았어!”
 미케의 행동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낀 듯 녀석들은 곧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말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어른들, 그리고 세 살배기 꼬마 아이들까지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그런 모두의 앞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흠, 흠. 제가 이 바쁜 시간에 여러 어르신들과 마을 분들을 이렇게 모이도록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에, 그러니까.”
 잠시 이렇게 뜸을 들이자 성질 급한 몇몇 아저씨가 소리쳤다.
 “야,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
 “우리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냐? 무슨 일인데 그래?”
 ‘킁. 아무튼 성질 머리 하고는.’
 거칠지만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바로 어제 제가 잔혹한 학살자를 잡았습니다!”
 “······.”
 “······.”
 그런데 어째 영 반응이 시원치가 않군. ‘다들 쟤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듯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참, 사람 말 못 믿네. 나는 결국 증거를 보여 주기로 했다.
 배낭을 연 나는 그곳에서 둘둘 말려 있는 녀석의 가죽을 꺼내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펼쳐 보였다.
 촤르륵!
 머리 위 태양을 가리며 넓게 펼쳐지는 녀석의 거대한 가죽. 그때서야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서 자신들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가죽으로 옮겨졌다.
 시작은 누군가의 한마디.
 “지, 진짜야. 이, 이것은 틀림없이 녀석의 가죽이다!”
 “저, 정말이잖아!”
 놀람은 순식간에 마을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런 놀람은 환희로, 그리고 기쁨으로 분출되어 솟아났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학살자가 죽었다!”
 “폴 만세!”
 기쁨에 만세를 부르는 사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하나만큼은 모두 똑같았다. 그것은 안도감. 이제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마음이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날 밤, 마을엔 때 아닌 축제가 벌어졌다. 학살자가 죽었다는 기쁨에 너도나도 몰려 나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마을의 영웅을 위하여!”
 “위하여!”
 나는 어느새 마을의 영웅으로 둔갑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아가며 술잔을 받아야 했다. 초장부터 워낙에 마셨기 때문에 벌써부터 머리가 핑 하고 울렸지만 이런 공짜 술은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냥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한데 신기한 건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빼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깊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주량이 좀 남다르긴 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녀석을 잡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수상쩍었던 몸 상태도 그렇고, 뭔가 내 신체에 변화가 생긴 듯했다. 어쩌면 이게 녀석의 웅담을 먹고 정력에 세졌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무엇보다 슬슬 마을 처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이때에 괜히 머리 아프게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갖고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마을 청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멜리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나, 폴이 오늘은 왜 이리 멋있게 보일까?”
 “그러게 말이야. 사냥꾼이라고 해서 별 볼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술도 잘 마시고 진짜 멋있다, 얘.”
 “그뿐만이 아니야. 학살자를 잡을 힘이면 분명 밤일도 끝내 줄 거야. 아, 너무 부럽다.”
 마지막 말은 미케의 부인이자 멜리사의 친구인 시멜의 말이었다. 미케, 아무래도 웅담은 너한테 줄걸 그랬나 보다. 미안하다, 친구.
 갑작스러운 마을 처녀들의 태도 돌변에 많은 친구들로부터 시기 어린 눈빛을 받기는 했지만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멋있게 보일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하기도 바빴다. 결국 뭔가를 결심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잠시 여기를 주목해 주십시오.”
 그런 내 목소리에 흥겹게 춤을 추던 사람들,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아졌다.
 평소 때라면 뭔 개가 짓나 하며 듣지도 않았겠지만, 오늘 축제의 주인공이 나였기에 내 한마디 한마디에도 반응은 그 즉시였다. 왠지 정말로 영웅이 된 듯한 짜릿함을 느끼며 나는 마을 광장 중앙에 전시하듯 펼쳐 놓은 녀석의 가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을을 위협하고 많은 목숨을 앗아 갔던 학살자가 오늘 비로소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모르시겠지만 학살자를 죽인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그럼 누가 죽였다는 거야?”
 “맞아. 조금 전까지와 말이 다르잖아?”
 어리둥절한 듯 소리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제가 비록 운이 좋게 녀석의 가죽을 벗겨 이 영광스런 자리에 설 수 있었지만, 저는 그 영광이 있기까지 우리 마을이 흘려야 했던 눈물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제가 학살자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학살자가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그리고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녀석에게 대항하고자 했던 저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신 여러분들의 마음, 그 염원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살자는 결코 저 혼자서 잡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저 역시 결코 녀석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녀석의 가죽 역시 저 혼자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녀석의 가죽은 이곳에 있는 마을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그럴싸한 연설이었다. 과연 내 생각대로 마을은 또다시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갔다.
 “폴, 멋지다!”
 “넌 역시 남자야!”
 이런 마을 청년부터 시작해,
 “까아아아악! 폴, 너무 멋져!”
 “녹아 버릴 것 같아!”
 이런 마을 처녀들의 반응까지.
 겉으로는 당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득의에 찬 미소를 흘리는 나였다.
 ‘아버지, 저 잘하면 올해로 장가갈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흥분에 휩싸인 마을을 정리한 것은 마을 촌장님이셨다. 촌장님은 모두를 진정시킨 뒤 나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정말인 게냐, 폴? 아깝지 않겠느냐?”
 “아니요. 정말 아까워 미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나는 녀석의 가죽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다. 이미 모두에게 밝혔듯 녀석은 결코 나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녀석에 의해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의 염원이 없었다면 나 역시 결코 이렇게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으리라.
 나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촌장님은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시더니 이윽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폴의 결정대로 가죽은 마을 공동의 소유로 하겠네. 마을 회관에 걸어 둘 터이니 그 가죽을 보며 지난날의 아픔은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했으면 좋겠네.”
 지금까지의 삶이 억압받는 삶이었다면 이 앞으로는 밝은 미래만이 있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제는 마음 놓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2장. 사냥꾼이 용병이 된 까닭
 
 
 키루루룩!
 기분 나쁜 목소리와 함께 녹슨 칼이 내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을 간신히 허리를 젖혀 피한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텀블링을 하듯 발차기를 날렸다.
 빠악!
 쿠에에엑!
 듣는 것만으로도 명쾌한 타격음과 함께 예의 그 기분 나쁜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쳐 보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나는 뒤에서 찔러 오는 도끼를 피해 몸을 굴려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어느새 허리춤에 꽂아 놓은 단검을 빼 든 나는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도끼를 휘두른 녀석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콰직!
 크으윽!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억눌린 신음을 끝으로 즉사.
 주춤주춤.
 그렇게 녀석을 없애고 나니 내 발차기에 얻어맞았던 녀석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물러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곧 뒤돌아 열심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흥! 어딜?”
 감히 날 공격하고 살기를 바랐단 말이냐. 어림도 없지.
 나는 그 즉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로 녀석을 조준했다.
 팅!
 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 그간 무던히도 연습했던 궁술 실력을 보여 주듯 화살은 정확히 달려가던 녀석의 등에 명중했다.
 “휴, 드디어 끝났군.”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위로는 10여 구의 시체가 조금 전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 주듯 다양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사람은 아니었다. 녹색의 피부에 내 허리 반밖에 오지 않는 이것들은 바로 고블린이었다.
 몬스터 중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서 10마리나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굉장히 위험했다. 아마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조끼가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서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것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느낌만큼이나 겉모습 역시 형편없었지만 이것이 오늘 내 목숨을 살려 준 일등 공신이었다. 고블린이 쏜 독화살을 이 조끼는 너무나도 쉬이 막아 주었다.
 “그때 이걸 받지 않았더라면, 휘유!”
 나는 바로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간만에 마을에 들른 나에게 촌장님께서는 이 조끼를 내어 놓으셨다. 뭐냐고 묻는 나에게 촌장님은 학살자의 가죽 중에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 이 조끼를 만드셨다고 했다.
 투박한 모습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 녀석의 가죽을 벗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걸 이 정도의 형태로 다듬는 일 역시 쉽진 않았으리라.
 처음에는 이 귀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원한 일이라 꼭 받아 주었으면 한다는 촌장님의 끈질긴 권유에 나는 결국 조끼를 받았다.
 ‘촌장님이 무슨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지.’
 아무튼 덕분에 목숨을 구한 나는 기쁨도 잠시, 곧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기어들어 온 거지?”
 고블린. 흔하다면 흔한 몬스터지만 여태껏 마을 주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놈들이었다. 20년 전에는 오크, 그리고 지금까지는 학살자가 버티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이 부근은 몬스터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바르데인 산맥이 접해 있음에도 굳이 이 벽촌에 마을이 생긴 이유이기도 했다.
 가끔 산맥을 넘어 몬스터가 내려오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자꾸 주위에서 몬스터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학살자를 잡았기 때문일까?’
 만의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묵과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오크를 잡기 위해 오우거를 끌어들인다는 옛말도 있었으니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날 일단 나는 마을에 들러 조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물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미케를 만났다.
 술집에서 술 한 잔을 걸치며 나는 몇 주일 동안 이 주변을 둘러볼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녀석은 주제에 자기가 내 보호자라도 되는 양 생각을 하는 터라 내가 자리를 비우면 꽤나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괜찮겠냐?”
 “뭐, 최대한 조심해 봐야지. 바르데인 산맥이 몬스터가 그리 많은 지역도 아니고, 더구나 이게 있잖냐.”
 나는 내 목숨을 살려 준 일등 공신인 조끼를 한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오늘도 이게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 뭐냐. 아무튼 뭔가 이 주변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내 직감은 뭔가가 있을 거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라도 나서서 그 원인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일이 닥쳐도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내 태도에 미케는 뭔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저 기울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휴우, 나라도 같이 가 주고 싶다만 요새 주변 분위기가 수상해서 쉽게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미안하다.”
 “자식, 미안할 게 뭐 있냐? 조심하면 괜찮아. 내가 누구냐? 이 마을 최고의 사냥꾼 아니겠냐? 걱정 마라. 그보다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 벽촌에 수상한 일이라니? 수상하다고 말할 일이란 것도 있나? 하나 가볍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정말로 심각한 일인 듯 미케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엊그제 하일에서 상인이 왔었거든. 그가 하는 말이······.”
 하일이라면 이곳 하인스 왕국의 수도다. 그곳에서 흘러나왔다면 필시 가볍게 흘려들을 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뭔데 그래?”
 나 역시 심각한 분위기가 전염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미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러더군. 전쟁이 일어났다고.”
 “뭐어?”
 깜짝 놀란 나는 술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이리 소란이야?”
 그런 내 행동 때문에 덩달아 놀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하하. 아,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린 뒤 겨우겨우 사태를 수습하고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미케를 향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이야?”
 “그래.”
 “근데 누구랑 누구랑 전쟁을 한다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우리 하인스 왕국이 그럴 여력이나 되냐?”
 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우리 하인스 왕국은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올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책으로 써 내려가면 족히 10권은 넘을 정도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그 10권 분량의 역사가 전부 침략과 수탈, 오욕의 역사라는 게 문제.
 말하자면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무려 천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대륙을 마탑에서 지배를 하고 있었다. 일명 마도 시대라고도 하는데 그때의 왕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했고 마탑의 눈치를 봐 가면서 지내야 했다.
 계급 구조도 단순하여 마법사, 왕과 귀족, 그리고 일반인으로 나뉘었다. 사실 일반인이라고 좋게 표현은 했지만 실상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마탑의 노예라고 봐도 무방했다.
 차라리 같은 사람은 나은 편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종족들은 그 특이성으로 인하여 마법사들의 노리개나 실험 대상으로써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막강한 마탑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때는 마탑의 제자였다던, 쉐인이라는 희대의 대마법사가 나타나 드래곤들을 수하로 삼고 대륙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어째서 쉐인이라는 마법사가 마탑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쉐인에 의해 대륙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또 다른 대마법사가 나타나니, 그 이름도 위대하신 아론.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지만 아론은 기존의 마법과는 다른 원진 마법을 창시하여 그 힘으로 사분오열되었던 대륙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가까스로 쉐인을 처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바로 대륙 최초의 통일 제국인 하이네스였다. 어지러운 민심을 살피는 데만 10년. 한데 돌연 아론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 중 리오스 알렉시온에게 황위를 물려준 채 그를 도왔던 이종족들과 함께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만다.
 그가 창시한 원진 마법 역시 기록으로만 남았을 뿐 그는 후인조차 남기지 아니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구심점인 아론이 사라지자 제국은 서서히 사분오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힘에 억눌려 왔던 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고, 결국 하이네스 제국은 아론이 떠난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 수십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이 지나 하이네스 제국은 지금의 하인스 왕국으로 남아 대륙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서 그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해 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역대 왕들 중에서 하이네스 제국 시절로의 회귀를 갈망하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접한 로이어 제국과 얀 제국에 의해 언제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튼 그런 내 질문에 미케는 뻔한 걸 뭘 물어보느냐는 투로 말했다.
 “너도 알면서 뭘 물어보냐? 당연히 로이어와 얀이지.”
 그래.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로이어 제국과 얀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틈만 나면 싸웠다. 애들이 심심하면 땅따먹기를 하듯 그 두 제국은 늘 그랬다. 그런데 문제는 그놈들이 싸우면 괜히 아국인 하인스까지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 하인스 왕국은 일단 명목상 로이어 제국과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동맹이지 이건 뭐 속국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래도 하인스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하인스는 동쪽으로는 로이어 제국, 남쪽으로는 얀 제국과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한데 남쪽에는 바르데인 산맥에 가로막혀 비교적 얀 제국의 침공으로부터는 안전하게 방비를 갖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동쪽은 그야말로 허허벌판. 만일 로이어 제국이 침공한다면 그대로 쓸려 버릴 위험성이 다분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로이어 제국과 동맹을 만들어 가야만 했다.
 때문에 그들이 어떤 요구를 걸어 와도 우리로서는 승낙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전쟁 시 늘 우리에게 군량미와 병력을 요구했다. 가뜩이나 나라 살림도 부족한 우리로서는 그럴 때마다 고난의 계절을 보내곤 했다.
 남들은 얀 제국의 대륙 침공 야욕에 맞서는 로이어 제국을 위대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인스에 사는 사람들은 얀이나 로이어나 나쁜 놈들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지, 뭐.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래? 한동안 잠잠하지 않았나?”
 “듣기로는 얼마 전 로이어에서 황태자 문제로 인해 피바람이 불었다더군. 그 잠시 약해진 틈을 놓칠 수 없었던 거겠지. 초반에 상당히 피해를 본 모양이야. 전선이 뒤로 많이 밀렸다고 하더군.”
 “이거 큰일인데? 보아하니 또 병력 파병을 요청할 듯싶은데?”
 “맞아. 며칠 전 사신이 도착해 그런 말을 했다더군. 그런데 문제는 이번 파병에 이곳 밀자크 남작 역시 참전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나는 그게 걱정이다.”
 나는 이곳 밀자크 남작을 떠올렸다. 뒤룩뒤룩 살찐 돼지 같은 인물이었는데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라 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결코 이곳 변방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고 했으니······.
 ‘결국 중앙 진출을 노린 건가?’
 뻔했다. 윗분들한테 잘 보이겠다는 심산이다.
 “병력 규모는 어떻다고 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남작의 사병이라고 해 봐야 100여 명도 채 안 될 터.
 사실 하인스에서 사병이나 기사단의 숫자에 큰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남작들의 형편은 이 정도였다. 늘리고 싶어도 사실 뭐가 있어야 늘리든가 말든가 하지.
 용병을 끌어 모은다고 해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숫자라고 보이는데.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벌써부터 용병들을 모집한다고 그쪽은 꽤나 분주하다는 거지. 휴우.”
 “너도 참 고생이구나.”
 하지만 나나 미케나 이미 최악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설마 아무리 중앙 진출에 욕심이 나도 남의 나라 전쟁에 그따위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귀족에게 있어 권력이라는 게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지라도 꼭 가지고 싶은 달콤한 마약과도 같다는 것을.
 찜찜한 기분을 안은 채 나는 바르데인 산맥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바르데인 산맥은 그다지 험한 지형은 아니었기에 살펴보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시나 갑작스럽게 불어난 몬스터들 때문에 몇 번 큰 고비를 넘기긴 했다.
 “아무래도 산을 넘어 이쪽으로 몰려드는 것 같은데. 도대체 반대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바르데인의 반대편이라면 바로 얀 제국의 영토다. 언제나 얀 제국이라면 먼저 의심부터 하고 보는 나였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지만 한번 가 봐야겠군.”
 자세한 정황을 위해 나는 어려운 결심을 했다.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행여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면 자칫 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장가도 못 가 보고 죽을 수는 없다는 게 내 신조였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못해 보고 정말로 무슨 큰일이 일어나 죽는다면 그만큼 개죽음도 없을 터였다.
 죽어도 무슨 일인지는 알고 죽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 가며 겨우 겨우 산등성이를 지났을까?
 “아, 젠장! 젠장!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사람의 말소리에 다급히 주위의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저벅저벅.
 말소리와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 잠시 뒤 그들이 비로소 몸을 드러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야만 했다.
 “도대체가 말이야, 이런 산 구석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
 “낸들 알겠나. 뭘 찾아야 한다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우리 같은 말단 병사가 위대하신 나라님의 뜻을 어찌 알리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저놈들은?’
 익숙한 복장. 얀 제국 정규 군사의 복장이었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얀 제국의 병사들이 난데없이 바르데인 산맥을 뒤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던 중 그들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뭘 찾아야 한다라······.’
 그것이 물건인지 장소인지 혹은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얀 제국이 일을 벌이는 것을 보아서는 허투루 여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쫓아가 보자. 뭔지 알 수 있겠지.’
 그때부터 나는 은밀히 녀석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산에서만 살아온 사냥꾼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를 더 갔을까?
 “이, 이럴 수가!”
 나는 드러난 광경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을 깎아 평평하게 다진 바닥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군막에 세워져 있었다. 그 위를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노예로 보이는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힘없이 걸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더 이상 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해 보이는, 시뻘건 흙이 그대로 드러난 민둥산.
 그곳에는 누군가가 뚫어 놓은 듯 수없이 많은 굴이 산맥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맹렬하게 돌아갔다.
 중요한 뭔가를 비밀리에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르데인 산맥 안에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대규모 토목 공사로, 자칫 적들의 눈에 발각될 우려가 있다. 그러면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될 테고 비밀로 하고자 하는 얀 제국으로서는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이곳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어차피 철저히 숨기는 것은 무리일 테지. 그렇다면 아예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나?’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 한 가지 단어.
 “전쟁!”
 얀 제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번 전쟁. 설마 그 숨은 목적이 이곳을 숨기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물론 내 억측일 수도 있었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로이어가 비록 잠시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게 얼마 가지는 못할 것이다. 제국은 제국. 얀 제국이 호기를 잡아 선제공격으로 잠시 이득을 얻기는 했으나 그것도 결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두 나라의 힘은 그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때문에 두 나라의 싸움은 대부분 국지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로이어와 얀 제국 국경의 전역에서 동시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로이어도 피해였지만 얀으로서도 피해였다. 그런 피해를 알면서도 굳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
 이곳에서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그런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찾아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란 말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이를 하인스에, 밀자크 남작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 바로 눈 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파병을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서둘러 마을로 돌아갔다.
 그런데······.
 “흑흑흑.”
 “여보오오오.”
 무려 일주일 만에 마을로 돌아온 나는 잠시 바뀐 마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마을에 줄초상이라도 난 듯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케! 미케!”
 나는 당황하여 미케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미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케뿐만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을 비롯해 마을 남자들 모두가 증발이라도 한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케의 집으로 달려간 나는 그곳에서 미케의 부인인 시멜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시멜! 시멜!”
 아무리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던 그녀는 겨우 내 목소리를 들은 듯 그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폴······ 왔구나.”
 얼마나 울었는지 잔뜩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마을이 왜 이래? 미케는?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다······ 죽었어. 아니, 죽을 거야.”
 “죽을 거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자세히 설명 좀 해 봐!”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시멜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은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자세한 정황을 위해 계속해서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노력에 그때서야 시멜은 뭔가가 정리되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엊그제 우리 마을에······ 기사들이 왔었어.”
 “······!”
 뭔가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서, 설마······.’
 그러나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배신했다.
 “그들이 와서 마을 남자들을 다 잡아갔어. 전쟁에 나갈 거래······.”
 “미친 새끼!”
 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우리나라의 전쟁도 아닌 타국의 파병에 이처럼 강제징병이라니. 그야말로 미친 것이 틀림없다. 행여 패배라도 하는 날에는 녀석은 끝장이다.
 하지만 녀석이야 끝장이 나든 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딴 미친 녀석 하나 때문에 희생될 우리 마을 사람들이다.
 당장 마을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얀 제국의 대규모 병력이 있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아국의 침공이 아닌 단순히 뭔가를 찾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그 찾고자 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가까운 이곳까지 위험에 처할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때.’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사사건건 하인스를 괴롭히는 얀 제국이 원망스러웠고 그런 음모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올인하려는 밀자크 남작 역시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일개 사냥꾼에 불과하니까.
 “폴, 이제 어떻게 하지? 응? 우리 미케가, 미케가······. 흐흐흐흐흑.”
 마르지 않는 샘처럼 시멜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솟아 흘렀다. 그녀는 나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몇 시간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분명.”
 나는 그저 이 말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울다 지친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혼절을 한 것인지, 마치 정신을 잃은 듯 잠이 들어 버린 시멜을 침대에 뉘이고 나는 씁쓸히 친구의 집을 나섰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마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나는 숲 근처에 위치한 내 작은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연이어 벌어지는 수습 불가능한 사태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자 나는 잠시나마 쉴 요량에 그대로 다이빙하듯 침대에 몸을 날렸다.
 콰직!
 “큭!”
 하지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절로 신음을 흘려야 했다.
 ‘제길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침대는 쿠션이 없었지.’
 정말 되는 일 하나 없군.
 그렇게 온몸에 퍼져 나가는 짜릿한 고통을 느끼며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후우······.”
 절로 퍼져 나가는 한숨.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만 할까?
 한 가지 답은 있었다. 내가 본 사실을 밀자크 남작에게 알리는 것.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가서 기사 한 명 붙잡고 밀자크 남작을 뵙길 청한다고 하면 ‘아, 그러세요?’ 하면서 순순히 데려가 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내가 이 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 역시 강제로 징집해 버릴 것이다.
 징집되는 게 무서운가?
 나는 홀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니. 나는 그런 게 무서운 것이 아니야. 어차피 친구 녀석들까지 다 잡혀간 마당에 나 혼자 남아 봐야 미안할 뿐이지.’
 그렇다면 죽는 게 무서운가?
 ‘그것도 아니야. 단순히 죽는 게 무서웠다면 감히 학살자와 맞설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 테니까.’
 네가 무서운 건 뭐지?
 ‘내가 무서운 건 바로 개죽음이야. 이대로 전쟁터에 나가면 필시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서 화살받이로 쓰이다 죽겠지. 그런 비참한 죽음이 나는 무서울 뿐이야.’
 하인스 왕국이 위기에 빠져 전쟁터에 끌려갔다면 적어도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에 기꺼이 죽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우리에겐 목적도, 의지도 없었다. 투견처럼 싸우라니까 싸울 뿐.
 나만 쏙 빠지는 게 미안하지만 어쨌든 나까지 징집되어 버리면 곤란하다. 단순히 나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남작을 만나는 건 영영 요원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기사들이란 종자는 평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만나기조차 힘들 뿐만 아니라 얘기를 들어 줄지도 의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용병이 되자.”
 용병이 되어 참전하는 것이다. 용병이 되면 적어도 기사들과 만나는 것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왜냐면 용병은 거칠기도 하거니와 일반 사람들보다 전투 능력이 더 좋기 때문에 기사나 혹은 선임병들이 관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라면 어쩌면 내 말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이것은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잘만 되면 이번 파병이 흐지부지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야말로 스스로 덫에 걸린 꼴이 될 것이다.
 나는 떠나기 전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았다. 돈이면 뭐든지 다 되는 세상. 돈은 필수였다.
 하지만 집에 현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저번에 학살자를 없애기 위해 공성용 기름을 잔뜩 산 터라 난 거의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그간 모아 놓았던 가죽들을 챙겼다. 혹시 모르기에 나는 아버지가 남겨 주신 오우거 가죽까지 챙겼다.
 그리고 그 길로 즉시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주성에 도착해서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성 주변에는 이번 징집 대상이 된 사람들이 천막도 없이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모닥불 근처에 모여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몇몇 마을 사람을 발견한 나는 그들에게 아는 척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이 마을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했기에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성문에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신분 검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행여나 이곳 영지 출신인 자가 발각되면 그 즉시 징병 대상자로 간주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역시······.”
 나는 그 모습에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용병이 되기 위해서는 성안으로 들어가 용병 길드의 정식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조금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먹고 성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것만 20년이다. 여태 비밀 루트 하나 모른다면 말도 안 되지.
 사실 비밀 루트라고 할 것도 없다. 성 주위의 개울을 통해 뚫린 하수구를 통한다면 쉽게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이곳이 수도 근처의 성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벽촌의 성에 뭐 하나 온전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악취를 참아 가며 겨우겨우 성 내부로 들어온 나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가죽을 처분한 뒤 그 즉시 용병 길드로 향했다.
 “호오! 의외로 사람이 많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폐가인지 사람 사는 곳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있으나 마나 한 곳이 바로 이 용병 길드라는 건물이었지만, 여기저기서 파병한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나는 그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 이곳 지부장인 파커슨 아저씨를 찾았다.
 “야, 거기!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이 자식들, 여기가 무슨 술집인 줄 알아!”
 늘 백수 저리 가라 할 만큼 빈둥빈둥 놀기만 하던 파커슨 아저씨는 몰려든 용병들로 인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본인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덥수룩한 턱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용병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그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폴 아니냐!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아하하. 뭐, 운이 좋았지요.”
 아저씨는 반갑다는 듯 내 손을 잡아 왔다.
 파커슨 아저씨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시다. 우리 아버지가 왕년에 이름을 날릴 적에 잠시 용병의 길로 접어든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 아버지가 목숨을 구해 준 인연으로 결국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와 정착한 분이다.
 지금 내 사냥 기술을 비롯한 각종 잡기는 거의 이 아저씨한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하수구의 비밀 루트도 이 아저씨가 알려 주신 거다.
 아무튼 그런 반가움도 잠시, 아저씨는 주위의 눈을 살피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영지의 남자라는 남자는 전부 다 잡혀 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네 녀석 말대로 운이 좋았다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지 않겠느냐?”
 아저씨는 몸을 숨길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사실 저 용병이 되려고 왔어요.”
 “뭐어?”
 난데없는 내 말에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던 아저씨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런 개죽음에 널 끼어들게 할 순 없다. 그냥 어디 얌전히 있어라.”
 “아저씨, 저 못 믿어요? 이것 보세요.”
 나는 그러면서 내가 입고 있던 조끼를 보여 주었다.
 “이게 뭔데 그러냐?”
 전혀 짐작조차 못하시는 아저씨에게 나는 놀랄 만한 말을 전해 주었다.
 “이거 학살자 녀석의 가죽이에요. 물론 제가 잡았죠.”
 “저, 정말이냐?”
 못 믿겠다는 아저씨에게 나는 단검을 꺼내 조끼를 한번 베어 보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저씨는 내 말이 사실임을 알았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학살자를 잡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라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전쟁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너 같은 애송이는 언제 어디서 날아드는 눈먼 칼에 맞아 목이 날아가는 곳이 바로 전쟁터라는 곳이다. 네가 나 몰래 학살자를 잡은 것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니 넘어간다 쳐도 이번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하아.”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위하는 아저씨의 마음에 사실 반발은 예상한 바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 날 생각하기에 이런 거지 만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아저씨, 잠깐만.”
 나는 아저씨를 이끌고 용병 길드 안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 갑작스러운 내 태도에 아저씨는 당황스러워하시면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날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행여 소리가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단단히 문을 틀어막은 후에야 나는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지금부터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함부로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돼요.”
 “뭐, 뭐냐? 갑자기 분위기 잡고?”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는 아저씨였다. 하지만 나는 답을 듣겠다는 듯 계속해서 아저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아저씨를 위해서였다. 아저씨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꺼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자칫 이게 소문이라도 날 경우에 커질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분란을 일으킨 죄로 목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 비로소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가 결코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았는지 아저씨 역시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발설치 않으마.”
 그때부터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학살자가 죽고 몬스터가 갑자기 늘어나 무슨 일인지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부터 조사하면서 발견한 얀 제국의 군대와 그들의 숨겨진 목적까지.
 물론 어디까지나 내 사견을 덧대 놓은 것이긴 했지만 아저씨도 그런 내 말에 크게 공감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흐으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구나. 자칫 그들이 발견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까지 넘보려 할 것이 아니냐.”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제 제가 용병이 되려는 이유를 아셨겠죠? 저 역시 개죽음 따윈 사양이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용병이 되어 남작을 만나야 하는 거라고요. 남작을 만나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면 분명 파병을 취소할 거라고 봐요. 그도 생각이 있다면 이대로 턱 밑에 적을 두고 떠나지는 않겠죠.”
 “후우, 그 말대로만 된다면야 다행일 텐데······.”
 뭔가가 꺼려지는지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거듭한 끝에야 아저씨는 어렵사리 허락을 해 주셨다.
 “좋다. 네 계획을 한번 믿어 보마. 그나저나 용병 등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 것 같으냐?”
 보통 이런 전쟁 시 찾아오는 용병들 대부분은 시험이고 뭐고 C급을 매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너무 평범해서는 곤란하다.
 “B급 정도가 괜찮을 듯싶네요. 어차피 쓸 일도 없을 테니.”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그렇게 해서 나는 B급 용병이란 타이틀을 하나 걸게 되었다.
 아저씨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용병 길드를 나온 나는 그 즉시 용병 모집을 담당하는 곳을 찾아갔다. 영주의 저택 앞에서 기사 차림의 사내가 용병들을 일일이 접수하고 있었는데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앞에 섰다.
 “이름?”
 듣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이 물씬 풍겨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내 딴에는 조금 있어 보이려 잔뜩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폴.”
 “폴이라······. 훗.”
 기사 녀석은 내 목소리에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하나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길, 조금 어색했나?’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등급은?”
 “B급.”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꽤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녀석. 생긴 것답지 않다, 이거지. 보통의 용병이라면 우락부락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겉으로 봐서는 툭 치면 날아갈 듯 호리호리하게 생겼다. 다시 말하지만 얼굴 역시 어디 가서 빠지는 것도 아니고.
 거짓으로 만든 용병패이니만큼 찔리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만큼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녀석에게 작게나마 한 방 먹여 줬다는 생각에 아까의 비웃음은 잊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아쉬운 소리를 할 입장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높으신 분을 만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단 B급 용병이라는 게 흔하지는 않지만 적잖이 있는 것도 사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용병들을 이끌 임시 단장이 되길 원한다는 설정으로 접근하려 했다.
 한마디로 로비를 하겠다는 거지.
 나는 주저하듯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봅시다, 기사 양반.”
 “무슨 일인가.”
 “이번 전쟁에서······ 거, 뭐······ 있잖수? 그래도 용병들끼리 서열을 매겨야 하는데······. 크흠흠.”
 그렇게 말한 나는 가죽을 판 돈의 절반을 슬쩍 건네며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찾아온 거, 높으신 분께 직접 인사를 드리는 게 또 예의지 않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눈앞의 기사가 말 그대로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 중의 기사이거나 아니면 그냥 말귀도 못 알아 처먹는 등신.
 다행히도 녀석은 둘 다 아닌 듯, 이내 내가 건넨 돈을 슬쩍 살펴보는 듯하더니 자연스럽게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내 특별히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보게나. 커험험.”
 그렇게 말하며 이내 어딘가로 사라지는 녀석. 사실 녀석이 아쉬울 것은 없었다. 녀석이야 자리만 마련하면 그걸로 된 거다. 내가 임시 단장이 되건 말건 그건 내 능력 나름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능력은 용병으로서의 그것이 아닌 얼마나 이빨을 잘 까느냐, 뭐 그런 종류의 능력이었다.
 잠시 뒤 기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부로 들어간 나는 한 방문을 앞에 두고 기사 녀석으로부터 신신당부의 말을 들어야 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입단속을 잘해야 할 거다.”
 한마디로 여기저기 까발리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 물론 나도 생각이 있는지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 문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집행관님, 좀 전에 이야기했던 자가 집행관님을 뵙길 청합니다.”
 순간 나는 기사 녀석의 말에 인상을 팍 구겼다.
 ‘집행관이라니. 제길, 남작이 아니었던가.’
 집행관 쿠시오스. 준남작의 신분으로 밀자크 남작의 가신 중 한 명이었다. 영지 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인물인데 그다지 평이 좋지 않은 인물로 유명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는 악독한 심보를 가졌다던데, 하긴 그러니까 이런 로비가 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불안하다. 과연 이자가 내 말을 듣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들라 하라.”
 쿠시오스의 대답이 들려오고, 나는 그런 불길한 마음을 안은 채 녀석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폴이라 합니다.”
 나는 최대한 잘 보일 필요가 있었기에 딴에는 제법 멋들어진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쿠시오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허허.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용병들의 임시 단장 건에 대해서 저를 단장으로 써 주십사 하여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임시 단장이라······. 허허.”
 곤란하다는 듯 몇 가닥 되지도 않는 염소수염을 쓰다듬는 쿠시오스. 눈은 쫙 찢어지고 입은 일전에 내가 쑤셔 놓았던 학살자 녀석의 항문처럼 잔뜩 오므라져 있는 게 딱 쥐의 면상처럼 생겼다. 괜히 밉상인 얼굴이다.
 ‘쥐새끼 같은 놈. 내가 네 속을 모를 리가 있겠냐.’
 나는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다 퍼부으며 배낭에서 보자기로 싼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대번 눈을 빛내는 쿠시오스. 녀석에게 이런 것까지 건네야 하나 짐짓 속이 쓰라려 왔지만 그래도 모두를 위한 길. 나 하나 희생한다면 남는 장사지.
 “작은 성의입니다.”
 나는 보자기를 열고 그것을 녀석에게 가져다주었다. 녀석은 잠시 살펴보는 듯하더니 대번 그것의 정체를 알고는 감탄성을 발했다.
 “호오, 이것은 오우거의 가죽이 아니더냐! 이 귀한 것을 어찌!”
 다행히도 마음에 든 듯 녀석의 입가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한참 동안 그것을 살펴보던 녀석은 잠시 뒤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좋다! 내 너의 성의를 봐서 이번 출정 시 너를 용병단 단장으로 임명해 주도록 하마. 거기에 만일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영주님의 사병이 될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 주마.”
 ‘얼씨구리?’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도 동시였다. 영주의 사병이라니.
 영주의 사병이라면 일정한 급료를 받을 수 있는, 누가 뭐라 해도 명실상부한 최고의 직장이 아닐 수 없었다.
 ‘가죽이 어지간히도 맘에 들었나 보군.’
 하지만 녀석이 알려나 모르겠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조끼가 저 오우거의 것보다 몇 배는 더 비쌀 거라는 사실을.
 아무튼 연막은 여기까지, 지금부터가 진짜다.
 나는 왜 나가지 않고 아직도 거기 죽치고 있냐는 듯 바라보는 쿠시오스를 향해 어딘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집행관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한 거라니? 한번 말해 보거라.”
 “네. 이번 우리 하인스의 출정 말입니다, 혹시 바르데인 산맥을 넘어 얀 제국의 영지로 직접 공격하는 것입니까?”
 “허, 어디서 그런 큰일 날 소리를! 우리는 로이어 제국의 메틴성으로 가 그곳을 돕기로 되어 있다.”
 메틴성이라. 그곳이라면 여기에서 그다지 먼 거리에 있는 성은 아니었다. 바르데인 산맥이 끝나는 곳에 우리 하인스와 로이어 얀 제국의 국경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 국경의 성이 바로 메틴성이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대략 닷새 정도의 거리였다.
 “이상한데?”
 홀로 중얼거리는 것치고는 꽤 큰 목소리에 쿠시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
 “그게 말입니다, 실은 제가 근래에 바르데인 산맥 근처에서 의뢰를 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데 그 주변에 얀 제국의 병사들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까? 로이어와 전쟁을 벌이는 얀 제국의 병사가 하인스에 있는 게 수상스러워서 한번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산맥 너머에 웬 진지가 떡하니 들어서 있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당연히 이번 출정이 그곳을 치러 가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적당히 거짓을 붙여 내가 보았던 사실을 이야기 했다.
 “크흠, 얀 제국의 진지라······. 너는 그 말이 사실이렷다?”
 고심하는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녀석은 확인하듯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그에 물론 볼 것도 없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한참을 말이 없던 쿠시오스는 이윽고 쥐 같은 면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또 누가 알고 있느냐?”
 “저야 당연히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여태 아무에게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파커슨 아저씨가 알고 있었지만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뭐랄까, 사냥꾼의 직감이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경고했다.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 바로 밑에 얀 제국의 대규모 진지가 있다고 분명 이야기를 했음에도 크게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날 바라보는 눈초리가 조금 전의 오우거 가죽을 받고 기뻐하던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내 조치를 취할 것이니 너는 물러가 있어라.”
 좀 더 명확한 대답이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전했기에 그걸로 안위를 삼으며 나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전쟁에 나갈 용병들은 따로 관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용병들과 섞여 지내야만 했다. 나 역시 거칠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용병들만은 못했기 때문에 그 무리에서 나는 대번에 애송이로 낙인찍혀 사사건건 시비를 당해야만 했다.
 물론 시비에 응해 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던 터라 뭐라고 짓든 말든 가만히 있었다.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 와 껄렁거리던 무리들도 더 이상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하긴 무슨 반응이 있어야 재미라도 있지. 나 같아도 벌써 포기했다.
 ‘제발 이번 파병이 취소되어야 할 텐데.’
 그것이 나도 살고 여기 있는 모두가 사는 길이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 여기 주목!”
 이틀 뒤, 용병 모집을 담당했던 기사가 다가와 모여 있던 용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용병들의 이름이 기록된 서류 같은 것을 갖고 있었는데 한참 그것을 뒤적인 후에야 뭔가를 찾았는지 이어 입을 열었다.
 “폴은 앞으로 나오도록.”
 갑자기 호명된 내 이름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나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의문을 풀어 주듯 기사의 말은 이어졌다.
 “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앞으로 너희들을 이끌 임시 단장이다. 명령은 단장을 통해 전달될 터이니 그에 반함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애송이가!”
 기사의 말에 대번 용병들 사이에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아졌다. 하긴 그들에게는 꽤 충격이겠지. 무시했던 애송이가 단장이 되었는데. 사실 나 같아도 가만히 안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기사의 서슬에 그런 불만도 싹 사라졌다.
 “지금 내 결정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나와라. 비록 네 녀석들이 용병이기는 하나 돈으로 고용된 지금은 영주님의 병사나 마찬가지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몸소 체험시켜 주겠다.”
 “······.”
 대번 싸늘해진 분위기가 마음에 든 것인지 그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출정은 내일 아침 9시이니 단장은 인솔에 문제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상.”
 더는 할 말이 없는 듯 돌아서는 기사의 모습에 나는 순간 공황 상태에 빠져야 했다.
 ‘뭐야? 출정이 취소된 게 아니었어?’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걸어가는 기사를 붙잡았다.
 “뭐지?”
 자신을 붙잡은 날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기사였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을 헤아릴 정신이 아니었다.
 “추, 출정이 취소되지 않은 것이오?”
 “무슨 헛소리인가, 출정이 취소되다니.”
 짜증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농담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나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욕설을 속으로 내뱉으며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혹시 이 주변 마을에 대피령이 내려지거나 하지는 않았소?”
 “남의 나라 파병인데 무슨 대피령인가. 그런 명령은 없었다.”
 멍.
 나는 마치 둔기로 머리를 내려친 듯한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맥이 탁 빠졌다.
 쿠시오스를 바라보며 느꼈던 불안감. 그게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기사는 그런 내 모습에 작게 미친놈이라며 혀를 찼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말도 입력되지가 않았다.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토록 모두를 위해 보고자 발버둥을 쳐 봤지만 헛수고였다.
 아니, 이제는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나 자신이 개죽음 당할 판이었다. 그것도 전쟁이라고는 겪어 보지 않은 주제에 용병들의 단장씩이나 되어서 말이지.
 ‘아버지, 전 역시 장가가기는 힘든 팔자인가 봅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놈의 인생이었다.
 
 
 
 3장.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1)
 
 
 “아하하하.”
 나는 그냥 웃었다. 이유? 뭐,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에 대한 분노, 허탈함, 그 모든 것들보다는 웃음이 먼저였다. 어쩌면 이 웃음은 자포자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난 끝났어.’
 도무지 이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에 나가고, 그리고 죽는다. 그게 내 앞에 펼쳐질 미래였다.
 ‘이대로 도망칠까?’
 뭐,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좋든 싫든 용병이 된 몸으로서 의뢰 도중에 이렇게 도망을 친다는 것은 대륙 내 모든 용병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과 똑같았다.
 어디를 가든 그들에게 쫓길 것이며 밥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이다. 그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고통.
 그래서 결정한 거다. 그냥 이대로 죽자고.
 개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면 죽는 게 낫지.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달이 지면 이제 도살장 가는 소처럼 끌려가겠지.’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차!’
 이곳이 어디인지 뒤늦게 깨달은 나는 추한 꼴을 들킬세라 황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아쉽게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여, 애송이! 왜, 막상 전쟁이라고 생각하니 엄마 품이 그립나 보지?”
 나는 내 앞으로 다가와 시비를 거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앉아서 고개를 든 것만으로는 그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서야 자세히 사내를 살핀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뭐냐, 이 덩치는!’
 무슨 놈의 팔뚝이 내 몸통만 했다.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림잡아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했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이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했지만 나는 위축되기는커녕 도리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괜히 나서서 맞지 말고 그냥 가만히 쭈그리고 있어라. 이 형님이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거든?”
 “하아?”
 기가 막힌 듯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녀석의 뒤로 동료로 보이는 용병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우리의 미친 오우거 에르손도 이제 갈 데까지 다 갔군. 크크큭.”
 “그러게 말이야. 저런 애송이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었네. 하하하하하.”
 보아하니 녀석들은 전부터 나에게 시비를 걸던 놈들이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렇듯 기름까지 부어 주니 아주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 다 죽었어.’
 지금까지 내가 저들이 무서워 여태껏 시비를 피했다면 큰 오산이다. 좀 전까지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기에 일부러 무시한 것일 뿐, 본래 내 성격은 걸어오는 시비는 곱으로 갚아 주자는 주의다.
 아, 물론 거기에도 규칙이 하나 존재했는데 상대가 강하다면 굳이 시비에 맞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깨어져 버린 꿈이기는 했지만 죽기 전에 장가 한번 가 보는 게 소원인 나로서는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데다 이 녀석들의 실력까지 염두에 둔 채였다. 덩치가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나머지는 도토리 키 재기였다.
 비록 내가 용병으로서는 애송이였지만 이미 사냥꾼으로서는 베테랑인 실력이다. 그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로 실력을 다졌듯 나 역시 온갖 맹수들 틈에서 갖은 위험을 감수하며 실력을 쌓아 왔다.
 B급 용병패를 거짓으로 받기는 했지만 실은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다.
 “미친 오우거인지 나발인지 저리 좀 비켜 주지? 몸에서 나는 오우거 냄새 때문에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군.”
 나는 정말로 냄새가 난다는 듯 코를 부여잡았다. 순간 그런 내 목소리에 싸늘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그 틈을 비집고 에르손이라는 덩치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애송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간덩이는 크군. 하지만 그 간덩이만큼 실력이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
 “그건 지금 단장인 나와 한판 붙어 보자는 얘기?”
 “단장? 웃기는군. 네 녀석이 저택에서 나왔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
 살짝 단장인 걸 내세워 기를 좀 죽여 보고자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역시 용병이라 정보 하나는 빠르군. 쳇.
 내심 뜨끔한 속을 달래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휘우! 이렇게 마주 서 보니 더욱더 대단하구만.’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내뱉으며 에르손의 덩치에 감탄해야 했다. 이 정도면 오우거까지는 미치지 못해도 트롤 정도는 되겠다.
 “나한테 까분 대가가 어떤 건지는 몸소 체험하도록 해 주지.”
 자신의 어깨 즈음에도 오지 못하는 내 덩치를 깔보는 눈동자. 은근히 살기까지 섞인 목소리에 나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반사.”
 “이 자식!”
 간단한 도발에도 참지 못하고 무식하게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는 에르손.
 부웅!
 바람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지만 대비하고 있던 나는 곧바로 몸을 낮춰 녀석의 주먹을 피한 뒤, 뒤로 물러나기 전 가볍게 녀석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비록 가볍게 날린 것이지만 그야말로 제대로 들어간 클린 샷.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이 한 방에 다리가 풀렸을 테지만 녀석은 덩치에 맞게 꿈쩍도 안 했다.
 “흐으음.”
 그래도 제법이었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 폼이 내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님을 느낀 모양이다.
 ‘이거 생각보다 어렵게 됐는데, 쳇!’
 생긴 건 무식하게 생겼으면서 역시 잔뼈 굵은 용병이라, 이건가. 언제 흥분했냐는 듯 흥분을 가라앉힌 녀석은 금방 진지해진 눈을 하고서는 날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훅! 훅!
 마치 내가 어디로 피할 것인지를 보려는 듯 가볍게 주먹을 날리는 녀석. 비록 녀석에게는 가벼운 것이겠지만 나한테는 그 한 방으로도 골로 갈 수 있는 힘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틈으로 파고들며 한 방을 노리려 했지만 덩치만큼이나 긴 리치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아무리 행동이 굼뜨다고는 해도 이미 내가 다가가려 하면 다른 손이 날아드니 나는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쫓기듯 녀석의 주위를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
 “워! 워! 애송이, 뭐 하는 거냐?”
 “무섭다고 엄마를 찾아봐야 소용없다고! 하하하하!”
 그런 내 모습에 주위에서는 온통 날 향한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저 엄청나게 커다란 주먹에 맞아 금방이라도 나가떨어질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녀석들의 말소리는 모두 무시했다.
 ‘싸움은 지금부터다. 멍청한 녀석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고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거다.’
 맞는 말이다. 그건 사냥꾼으로서 살아오면서 내가 터득한 일종의 진리와도 같았다. 생각해 보라. 내가 학살자를 잡았을 때 나는 결코 녀석을 힘으로 잡지 않았다. 순수한 힘에서 나는 녀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단 학살자뿐만이 아니다. 오크나 오우거 모두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강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녀석들을 사냥했다. 그 말인즉, 힘이라는 부분이 사냥꾼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냥꾼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바로 이 두 가지. 인내와 체력이다.
 한번 정한 목표가 빈틈을 보일 때까지 결코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인내. 또한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더라도 목표를 뒤쫓아 녀석을 지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체력.
 비록 난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인내와 체력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덩치는 내 사냥감. 나는 내 체력을 믿고 참고 또 기다릴 뿐이다.
 녀석이 지칠 때, 그때야 비로소 나의 진정한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삼십여 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덩치는 날 잡기 위해 주먹을 뻗어 왔고, 나는 그것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덩치의 상태였다.
 “훅, 훅······.”
 거칠게 내뿜는 숨결에 맞춰 그 지붕만 한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좀 전부터 녀석은 그저 제자리에 서서 날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친 녀석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생생한 상태였다. 가벼운 비웃음을 매단 채 나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덩치만 크고 힘만 셌지, 이거 원 형편없구만. 그래서야 어디 전쟁에 나가서 제대로 싸우기나 할 수 있겠어?”
 “······.”
 에르손이라 했던가. 덩치는 그런 내 조롱에도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만을 깨물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구구절절 내 말이 옳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모두는 처음 날 조롱하던 얼굴에서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하는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짓이 불쌍해서 내 이쯤에서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흥, 어림없는 소리!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콧김을 뿜어내며 말하는 에르손. 미안하지만 나도 예의상 해 본 말이었다.
 더 싸울 수 있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네 녀석들이 무시했던 애송이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도록.”
 그렇게 선언한 나는 일순간 자세가 흐트러져 있던 에르손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헛!”
 헛바람과 함께 뒤늦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미 나는 녀석의 무릎 관절을 차고 빠진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뭔가 본격적인 것을 기대한 것인지 분노한 표정을 짓는 에르손에게 나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짓이기는, 아마 두고 보면 무슨 짓인지 알게 될 거다.”
 그 뒤부터는 또다시 일방적인 구도가 연출되었다. 빈틈이 보이면 나는 어김없이 달려들어 에르손의 무릎을 찼고, 녀석은 계속해서 그런 내 행동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잠시 뒤,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툭!
 가볍게 발을 가져다 댄 듯 녀석의 무릎을 차고 빠지는 나를 잡기 위해 녀석이 순간 몸을 크게 이동시켰다. 하지만 녀석은 갑자기 급하게 설사라도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옳지! 걸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그때부터는 더욱더 집요하게 녀석의 아픈 부위만을 노렸다. 인내와 끈기, 그리고 내 괴물 같은 체력이 만들어 낸 기회.
 털썩!
 “크윽! 빌어먹을!”
 결국 덩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 세상에! 에르손이 저런 애송이한테 지다니!”
 “마, 말도 안 돼!”
 모두가 원하던 결과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자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했다. 아마 녀석들은 왜 에르손이 졌는지 알지도 못할 게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나는 허탈하게 주저앉아 있는 에르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에르손은 그렇게 다가오는 날 바라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분하지만 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애송이라 한 것을 취소하지.”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생리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말도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할 단장인 나인데 딱 봐도 애송이처럼 보였으니 불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비를 가장하여 내 실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래서야 원, 몇 곱으로 갚아 주겠다는 말도 못하겠군. 쳇.’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취소할 필요는 없어. 사실 네 말이 맞으니까. 용병으로 참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까 애송이 맞지.”
 “애송이치고는 대단한 실력이었는데······?”
 “훗, 그거야 네 녀석이 방심했으니까 그렇지. 사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냥꾼이었다.”
 “사냥꾼? 그렇군. 역시 그런 거였어. 크하하하하하!”
 에르손은 내 말에 비로소 뭔가를 깨달았는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라 지켜보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그렇게 웃었을까? 잠시 뒤, 겨우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에르손은 그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애송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이렇게 날 이겼으면 된 거지. 전쟁, 까짓것 별거 아니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나만 믿으라고.”
 녀석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던 듯 그렇게 내 불안을 달래 주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날 배려해 주는 모습이 잠시 동안이나마 쌓아 왔던 그의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켜 주었다.
 ‘어쩌면 괜찮은 녀석인지도.’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는 내 머리통만 한 녀석의 손을 굳게 움켜잡았다.
 단순한 남자들이란 표현을 써야 할까? 언제 다퉜냐는 듯 금방 친해져서 어울리는 우리들. 죽이네 살리네 할 때는 언제고 금방 말을 트고 친구가 되었다. 비록 에르손이 나보다 8살이나 더 많았지만 녀석은 나이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형님 대접해 줄 생각도 없었기에 나야 아쉬울 것 없이 그렇게 녀석과 친구가 되었다.
 싸움의 열기도 식고 내일의 출발을 위해 용병들은 하나 둘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태평히 잠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태평하다고 할까? 내일이면 기나긴 행군이, 그리고 그 행군 끝에는 아비규환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건만,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뭐 해, 안 자고?”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에르손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나는 잠시 에르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긴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녀석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그래. 전쟁터에 나간다고 하는데도 너무나도 태평하잖아.”
 “아, 그거? 훗.”
 내 물음에 그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 녀석.
 “너는 정말로 저 모습이 태평한 걸로 보이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다시금 물끄러미 녀석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징그럽다. 그만 쳐다봐라. 확 뽀뽀해 버리는 수가 있다.”
 “죽고 싶으면 해 봐.”
 “크흠, 흠. 아무튼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라. 나나 저기 있는 녀석들 모두 태평한 게 아니야. 실제로는 모두 너처럼 걱정되고 불안해.”
 “하지만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당장 네 녀석만 해도 그 눈곱이나 떼고 그런 말을 하시지?”
 황급히 눈곱을 뗀 녀석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태평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해져 있을 뿐이야. 나도 실은 처음 용병을 시작할 땐 너처럼 하루하루를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었는지를 깨달았어. 미리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것을. 차라리 그렇게 걱정할 시간에 잠이라도 한숨 더 자 두는 것이 다음 날을 위해서는 더 현명한 일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쉽게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 내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고민에 찬 내 말에 녀석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너는 용병을 뭐라 생각하는 거냐? 우리는 용병이 되는 순간부터 돈에 목숨을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용병을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겠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게 바로 우리 용병의 삶이야. 죽음과 함께 하는 삶.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지금 이 한순간 한순간이 더 소중하고, 그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고 말이야. 어차피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운명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속 편할지도 모르지.”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간단한 거야. 누군가가 말했잖냐. 죽기를 각오한다면 반드시 살길이 열린다고. 단순히 그런 자세면 되는 거야.”
 ‘죽기를 각오한다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어차피 꼬이고 꼬여서 포기한 인생. 죽을 때 죽더라도 멋있게 싸워 주마.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인 듯한 녀석의 위로와 충고였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교훈이 되었다.
 “고맙다.”
 “뭘, 그냥 선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출정을 위한 준비로 성안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용병들과 밀자크 남작의 사병, 그리고 영지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병력이 처음으로 모두 한곳에 모였다.
 “이거 꽤나 무리하는군.”
 사열식을 위해 모인 병력을 둘러보더니 에르손이 혀를 차며 말했다. 확실히 밀자크 남작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 일일이 세어 보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눈에 띄는 규모만 해도 천여 명은 넘어 보였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미친놈이지.”
 단 한마디로 정리된 내 평가에 에르손은 껄껄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미친놈이지만 덕분에 우리에게 일거리가 돌아왔으니 우리로서는 손해가 아니지.”
 “······.”
 나는 그런 에르손의 말에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긴 이야기가 될 듯하여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에르손과는 관계도 없는 일일뿐더러 어차피 이들은 나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용병이었으니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픈 일이었다.
 “우리 하인스 왕국은 로이어 제국의 제일 동맹국으로서······.”
 대충 대오를 갖추고 서 있으려니 어느새 나타난 밀자크 남작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내용은 잘 듣지 않아 모르겠지만 대충 하는 소리가 ‘옆집이 털렸으니 도와주는 게 이웃으로 당연하다’ 뭐, 그런 말인 듯했다.
 ‘빌어먹을. 이웃도 이웃 나름이어야지, 씁.’
 아마도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슬슬 밀자크 남작의 연설이 길어지고, 가만히 듣고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일 때가 되어서야 밀자크 남작의 연설은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악을 징벌할 평화의 사자로서 이 전쟁에 임하게 될 것이다. 이상.”
 짝짝짝짝.
 그야말로 억지로, 하기 싫다는 투가 물씬 풍겨 나오는 박수 소리를 끝으로 남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타고 선두에 나섰다.
 그 육중한 몸을 말에 실으려니 말이 한차례 휘청거리는 것이 안쓰러웠지만 이내 누구는 말을 타야 하고 누구는 발에 땀나도록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나 역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괜찮겠지?’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밀자크 영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이 걱정이었지만 나는 파커슨 아저씨를 믿었다. 아저씨라면 큰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지켜 줄 것이다.
 ‘그래, 난 나만 걱정하면 되는 거야.’
 지금은 그것 하나에만 집중하자.
 행군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체력을 아끼기 위함인지 누구 하나 농담하는 이도 없이 그저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걸음 소리, 무기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간간이 말의 투레질 소리도 들려오는 게 어지간히 말들도 지겨운 모양이다.
 나야 체력 빼면 남는 게 없긴 했지만 이 행군은 나로서도 고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충 식사를 때우고 걷고, 또 걷고 걸어 점심까지 거르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쉴 수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그렇게까지 피곤한 여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상당했다.
 ‘훗, 너무나도 당연한 건지도.’
 이 험난한 고생의 끝이 안락한 집이라면 더더욱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이 고생이 끝나면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힘이 나려야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모두들 기운 내라. 일차 목적지가 눈앞이다.”
 앞에서 기운을 북돋는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땅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과연 기사의 말대로 일차 목적지인 데론성이 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데론성은 로이어와 얀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성으로, 지금껏 우리가 지나쳐 왔던 몇 개의 성과는 과연 그 규모부터 남달랐다. 밀자크 남작의 그 담벼락 같은 성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탄탄한 성벽에서부터 그 주위를 따라 흐르는 해자까지.
 하지만 성의 이 위압감 넘치는 모습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로이어와 얀 제국의 힘이었다. 과거 로이어와 얀 제국이 생기고 그 두 나라가 황금기를 보낼 때, 우리는 늘 침략을 당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데론성은 늘 그들의 보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되었다. 이곳에서 흘린 피의 양만 갖고도 강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 했으니 하인스의 뼈아픈 역사가 스며든 곳이라 하겠다.
 데론성으로 들어가니 나에게 기사의 지시가 내려왔다.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며 중앙군을 기다릴 것이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그리고 기사는 밀자크 남작을 호위하여 성 안쪽에 마련된 저택으로 향했다. 같이 고생하고 누구는 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는 게 배알이 꼴렸지만 ‘귀족이 다 그렇지’ 하고 체념하며 나는 이 사실을 용병들에게 전했다.
 “아이고, 죽겠네.”
 “삭신이 다 쑤시는군.”
 내 말에 용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고단했던 몸을 추슬렀다. 나 역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들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르손은 그런 날 바라보더니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체력 하나는 남다른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아아, 말도 마라. 내가 바르데인 산맥을 며칠 밤낮으로 뛰어다녀도 봤지만 이건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지겨워서 혼났다.”
 “처음엔 다 그렇지. 그 짓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글쎄. 이건 익숙이고 나발이고 전혀 친해질 것 같지가 않던데? 그러고 보니 너는 멀쩡하네?”
 의외의 모습에 내가 놀라자 에르손은 자신의 가슴을 한차례 두드리더니 말했다.
 “이 미친 오우거 에르손을 너무 물로 보지 말라고. 내가 네 녀석의 무식한 체력에 속절없이 당하기는 했지만 이래 봬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몸이시라, 이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방법이 뭐냐?”
 “방법이랄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나름 요령이라면 자는 거?”
 나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지금 잠꼬대하냐?”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라고 할까? 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까, 일종의 자기최면이라고 할까? 비몽사몽? 흠, 그게 좋겠다. 한마디로 자면서 걷는다는 거지. 완전히 잠에 빠진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이면 하루가 금방 가거든.”
 아무래도 내가 익히기에는 아직 고급 스킬인 듯했다.
 “그런데 용병이 그런 자세로 용케도 잘 살아 있네?”
 약간은 비꼬는 듯한 내 투에 에르손은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짬밥이라고 해 둬라. 몬스터 걱정 없겠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직 우리나라 안인데 괜히 신경 곤두세울 필요까지는 없잖아?”
 녀석의 말을 들으니 괜히 이래저래 고민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데론성 안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영지에서 모여든 병력과 더불어 원래 이곳에 주둔해 있던 병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도시로서 설계된 성이 아닌 오직 방어를 목적으로만 지어진 성이었기에 여관 같은 게 많이 있을 턱이 없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닥치는 대로 길가에다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나로서는 이런 풍경이 익숙지 않았지만 에르손은 많이 경험한 듯 거침없이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다른 용병들과 안면을 익혔다.
 물론 나 역시 임시 단장으로서 그런 에르손을 따라다니며 타 영지 용병들의 단장들과 안면을 익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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